2011년 신묘년 산행 /2011.2.16 도봉산

2011. 2.22 삼각산 도선사 탐방

아베베1 2011. 2. 22. 20:06

 

 

 

 

 

 

 

도선(道詵)의 사실


《여지승람》의 기록이 매우 괴이하다.
《여지승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라(新羅) 사람 최씨(崔氏)의 정원에 길이가 한 자나 넘는 외 하나가 열렸는데, 최씨가 이를 따 먹고 그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정상적인 남녀 관계 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버렸는데,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독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 역시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다. 그 애가 자라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은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唐)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돌아와서 산수(山水)를 답사하였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가 있던 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하였다.

고려 최유청(崔惟淸)이 찬한 도선비명(道詵碑銘)을 상고하면,
“성은 김씨(金氏)로서 영암인(靈巖人)인데, 혹은 태종왕(太宗王)의 서얼손(庶孽孫)으로 그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한다. 15세 때 중이 되어 희양현 백계산(曦陽縣白鷄山) 옥룡고사(玉龍古寺)에 집을 짓고 여생을 마치려 하였더니, 헌강왕(憲康王)이 궁궐로 맞아들였다. 얼마 안되어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가 이인(異人)을 만났다. 그 이인과 남해(南海) 해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과연 남해 해변에서 그 이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래를 쌓아 산천 순역(山川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였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求禮縣)에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사도촌(沙圖村)이라 부른다. 이로부터 더욱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법을 연구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우리 나라 풍수학(風水學)이 모두 도선(道詵)을 높이며, 세상 사람들의 전설이 각각 다르기에 대략 뽑아서 써 둔다.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도선(道詵)


도선은 영암(靈巖) 사람으로서 나이 72세에 광양(光陽)의 옥룡사(玉龍寺)에서 죽었으니, 바로 당(唐) 나라 광화(光化) 원년이요,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2년(898)이다.
지금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영암 최씨원기(崔氏園記)와 광양(光陽) 옥룡사비(玉龍寺碑)에 소상히 실려 있는데,흥덕왕(興德王) 2년(827) 정미로부터 효공왕 2년 무오에 이르기까지 72년이 되므로 왕 건(王建)이 철원군 태수(鐵原郡太守)가 된 지 4년째에 도선이 비로소 입적(入寂)한 것이다.
왕 태조(王太祖)는 〈경명왕(景明王) 2년(918년) 무인에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在位) 26년 수(壽)는 67세로 돌아가니, 때는 후진(後晉) 천복(天福) 8년 계묘이다. 그러므로 당(唐) 나라 건부(乾符) 4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 정유에 태어난 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왕 태조가 태어나기 1년 전에 도선이 찾아와서 글을 바치면서, 장차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이라 하였고, 왕 태조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서는 군사를 출동하고 진(陣)을 배치하는 법과 천시(天時) 지리(地理)의 법을 고(告)하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궁예(弓裔)가 왕건에게 태수(太守)의 벼슬을 주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요, 도선이 찾아와 고한 지 겨우 수년이 지난 뒤였다.
옥룡사비에 “35년 동안을 한가히 앉아 말을 잊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20년 동안 천리 밖에 석장(錫杖)을 날려 두 번이나 송도(松都)에 이르렀으니, 적멸(寂滅)의 가운데에 기미(機微)가 그윽이 움직여서 하나는 쇠잔하고 하나는 흥왕하려 할 적에 창업(創業)을 도와 일으켰으니, 또한 “설(說)함이 없는 설과 법이 없는 법이다.” 한 것과는 다르다.
국사(國師)의 성은 김씨(金氏)요, 혹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서얼손(庶孽孫)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친이 외를 먹고 잉태했다는 설과 꿈에 구슬을 삼키고 잉태했다는 말은 아마도 모두 허황한 말일 것이다.


[주C-001]도선(道詵) : 신라(新羅) 때에 지방 자치 세력의 유력자를 중앙에 뽑아올려 볼모로 잡아두고 그 지방 행정을 자문(諮問)하였으며, 고려 중엽 이후에는 궁중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고역(苦役)에 사역(使役)되었고, 조선(朝鮮)에 와서는 태종(太宗) 때부터 주로 소목(燒木)을 바치는 일을 맡았는데 광해군(光海君) 때에 혁파되었다.
[주D-001]지금 《여지승람(輿地勝覽)》 …… 실려 있는데 : 이 말은 《여지승람》 광양(光陽)옥룡사비(玉龍寺碑)에 보인다.
[주D-002]모친이 외를 …… 잉태했다는 말 : 이 말은 《여지승람》 영암(靈巖) 최씨원기(崔氏園記)에 “신라 사람 최씨의 정원에 열린 외 하나가 길이가 한 자가 넘어 온 집안 식구가 이상히 여겼는데, 최씨의 딸이 몰래 그 외를 따서 먹었더니, 임신이 되어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고 보이는 것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