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연촌공 휘 덕지/연촌공 처가 평양조씨 관련자료

전주최공 연촌공 휘 덕지 선조님의 장인 조안정의 처 김씨는 (열려)였다는 기사

아베베1 2011. 6. 10. 10:24

 

 

 조안정은 평양조씨 숙부인 할머님의 부친 되시고  연촌공 휘 덕지님의 의 장인 이시다 

 조안정님의 처 김씨는 烈女라는 기록이 영암의 신동국동국여지승람에 기사가 보인다   이것으로 보았서는 평양조씨 할머님이 연촌공의 후배(후 취, 후처)라고는 볼수 없는 것으로 추정 되는 부분이다

 

평양조씨(平壤趙氏)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남송(南宋)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상장군(上將軍)이 된 조춘(趙椿)을 시조로 하는 성씨.

 

 

시대: 고려시대   연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영암군(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 【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石花]ㆍ새우[蝦]ㆍ낙지[絡締]ㆍ전복[鰒]ㆍ붕어[鯽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숭어[秀魚]ㆍ게[蟹]ㆍ감태(甘苔)ㆍ김ㆍ우무[牛毛]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가사리(加士里)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표고[香蕈]ㆍ생강.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 봉수(葛頭山烽燧)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부곡(懷義部曲)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부곡(深井部曲)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부곡(貴仁部曲)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부곡(松井部曲)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유광식(柳光植)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
고려 최지몽(崔知夢)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시(郡始)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위와 같다. 서시(西始)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부곡(貴仁部曲)은 남쪽으로 90리이고, 송정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왕대[篁竹]ㆍ화살대[箭竹]ㆍ감ㆍ유자ㆍ옻[漆]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D-001]오정(五丁)이……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D-002]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D-004]양을 잃고……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5]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D-006]저 소림……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D-007]흔들리는……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8]나뭇가지에……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D-009]응당……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

동사강목 제13상
무신년 충렬왕 34년(원(元)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1308)

춘2월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행하여 연등회(燃燈會)를 관람(觀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축수(祝壽)를 올리자 왕이 술잔을 돌리며,
“오늘의 관등(觀燈)이 나의 마지막 관등이니 경등은 사양하지 마오.”
하였다.
○ 원에서 조서를 내려 공자(孔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가봉(加封)하였다.
○ 장주(漳州)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장주는 지금의 연천(漣川)

하4월 왕이 숙창 원비(淑昌院妃)와 봉국사(奉國寺)에 행행하였다.
○ 강양공(江陽公) 자(滋)가 졸하였다.
○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가 졸하였다.
인규는 상원군(祥原郡) 사람인데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전기(傳記)를 섭렵하였다.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이 비록 몽고어(蒙古語)를 배워도 잘 부연하여 주대하는 자가 없어서 우리 사신이 원에 가면 반드시 〈대령총관(大寧摠管)〉 강수형(康守衡)에게 인도하도록 하였는데, 인규가 사신으로 가서는 잘 아뢰고 분명히 변론하여 전대(專對)한 공이 자못 많았다. 우리 풍속을 바꾸지 않고 서북 경계를 다시 우리 것으로 귀속시킨 것도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미천한 출신으로 갑자기 높은 벼슬에 오르고, 사람됨이 겉으로는 단정 엄숙하고 침착 평온하게 보였으므로 굄을 받아 왕의 침실까지 드나들었고, 전민(田民)을 많이 모았다. 국구(國舅)가 되어 권세가 한때를 기울일 만하였으며, 아들이나 사위가 모두 장상(將相)의 열에 들어 감히 견줄 자가 없었다. 병이 들었으나 의원을 부르지 않고 아들 연(璉)에게 이르기를,
“너희 형제 자매가 9인이나 되는데, 서로 다투어서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을 길이 가법(家法)으로 삼으라.”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안】 인규도 역시 폐행(嬖幸)의 신하에 드는데 벼슬을 쓰고 졸(卒)이라 쓴 것은 왜 그런가? 그는 왕실에 마음을 두고 국가에 공이 있어, 이것을 허여(許與)한 때문이다.

5월 원에서 폐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하였다.
원에서 폐왕이 정책(定策)한 공훈이 있다 하여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를 제수하고 승진시켜 심양왕에 봉하였으며,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參議)하게 하고, 금호부(金虎符)ㆍ옥대(玉帶)ㆍ칠보대(七寶帶)ㆍ벽전금대(碧鈿金帶)와 황금 5백 냥, 은 5천 냥을 하사하였다.
○ 심양왕이 관제(官制)를 다시 고쳤다.
심양왕이 이혼(李混)ㆍ최균(崔鈞) 등을 보내와 관제(官制)를 선포하였다. 중찬(中贊)을 정승(政丞)으로, 찬성(贊成)을 중호(中護)로 하였다가 이내 복구하였다. 참리(參理)를 평리(評理)로, 사간(司諫)을 헌납(獻納)으로, 정언(正言)을 사보(司補)로, 이(吏)ㆍ병(兵)ㆍ예(禮)를 아울러 선부(選部)로 하였으며, 이내 병조를 총부(摠府)로 하였다가 다시 군부사(軍簿司)라 칭하였다. 형조를 헌부(讞部)로 하고, 판서(判書)를 전서(典書)로 고쳤다. 시랑(侍郞)을 의랑(議郞)으로, 낭중(郞中)을 직랑(直郞)으로, 원외랑(員外郞)을 산랑(散郞)으로 하고, 지문하(知門下)ㆍ직문하(直門下)의 급사중(給事中)을 폐지하고, 사관(史館)을 문한서(文翰署)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하고, 승지방(承旨房)을 인신사(印信司)라 하는 등 기타 혁파하였거나 병합한 것이 매우 많았다. 비판(批判)ㆍ초자(超資)ㆍ월서(越序)하는 자는 모두 가까이 총애하는 자이거나 권세가였고, 세신(世臣)이나 구관(舊官)은 모두 한직(閑職)으로 물러났다. 이에 앞서 심양왕은 또 전유(傳諭)하기를,
“듣건대, 여러 사(司)의 원리(員吏)가 맡은 직무에 태만하다 하니, 이제부터는 매월 말에 현부(賢否)와 근태(勤怠)를 조사하여 아뢰라.”
하였다.
【안】 아버지가 생존하였으면 아들은 감히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誼)인데, 충선왕(忠宣王)은 원에 의탁하여 부왕(父王)이 없는 것처럼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고 관품(關禀)하지 않았으니, 그가 아버지를 업신여김이 너무 심하였다.

추7월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훙하였다. 유조(遺詔)로 심양왕을 세웠다.
왕은 5월에 병환이 있다가 10일(병인)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예빈윤(禮賓尹) 한련(韓連)을 보내어 전왕에게 아뢰었는데 13일(기사)에 신효사에서 훙하였다. 재위 34년, 수(壽)는 73세였다. 후에 원에서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날 밤 숙비(淑妃) 김씨의 집에 빈전(殯殿)을 모셨다.
유교(遺敎)에,
“내가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 35년이나 되었다. 그 사이에 나라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백성은 생업에 안정을 얻지 못하였다. 사악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함께 나왔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은 스스로 물러가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나의 부덕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마음에 매우 부끄럽다. 우리 나라의 기무(機務)를 일체 심양왕(瀋陽王)에게 부탁한다.”
하였다. 왕은 국가의 전고(典故)와 조종(祖宗)의 법도에 밝게 익숙하였고, 《익재집(益齋集)》에서 보충 성품이 관후하여 즐겁거나 성낸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의 세대에 안으로는 권신(權臣)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밖으로는 강적(强敵)의 침략을 당하니, 온 나라 사람이 학정(虐政)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칼이나 화살에 섬멸당하게 되어 화변(禍變)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하루아침에 권신을 베어 죽이고 상국(上國)에 귀부(歸附)하자 공주를 내려 주어 우리 나라 백성이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때는 진정 왕이 일할 수 있는 때였다. 어찌하여 교만한 마음이 갑자기 일어 놀이와 사냥에 빠져 응방(鷹坊)을 널리 두고 이정(李貞)의 무리에게 주군(州郡)을 침학(侵虐)하게 하고, 연락(宴樂)에 빠져서 궁궐에서 창화(唱和)하였는가? 또 조영(祖英)을 좌우에 두고 친근히 하여, 공주와 세자가 말하여도 듣지 않고 재상과 대성(臺省)이 논하여도 좇지 않았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측근에 있는 자들의 참소(讒訴)를 곧이들어 적자(嫡子)를 폐하고 그의 조카를 세우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전일 세자로 있을 때 비록 전고(典故)를 밝게 익히고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안다고 하였으나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 처음에 잘하지 않는 이는 없으나, 끝을 잘하는 이는 드물다는 말은 충렬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 원에 사신을 보내어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8월 심양왕이 원에서 와서 분상(奔喪)하고 28일(갑인)에 즉위하였다. 이름을 장(璋)이라 고쳤다.
전왕이 분상하려고 원에서 10여 일을 밤낮으로 와 26일(임자)에 도착하였다. 빈전(殯殿)에 들어가 곡하고 전제(奠祭)를 행하니, 모든 관원들은 검은 관(冠)과 소복 차림으로 시립(侍立)하였다. 28일(갑인)에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왕위의 전승을 고하고 드디어 수령궁(壽靈宮)에서 즉위하고,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반열의 순서는 오른쪽을 높였다. 예식이 채 끝나기 전에 하늘에서 큰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갠 뒤에 첨의사(僉議司)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백관이 백마(白馬)를 바쳤다.
【안】 왕위를 이어받는 날에 천변(天變)이 이와 같음은 부왕(父王)을 심히 업신여김을 경계한 것인데 수성(修省)할 줄 물랐으며, 곡읍(哭泣)ㆍ애훼(哀毁)의 절차 대신 향연을 받고 헌폐(獻幣)의 예(禮)를 행하였으니 또한 하늘을 무시함이 심하였다.
○ 이해 조세(租稅)를 면제하였다.

9월 양현고(養賢庫)에 은 50근을 하사하였다.
또 예문관(藝文館)에 명하여 군(郡)ㆍ현(縣)에서 뛰어나게 재주가 있는 자를 불러모으게 하여 직첩(職牒)을 주어 훈도(訓導)로 삼았다. 교서(敎書)하기를,
“사람을 쓰는 데는 오로지 세벌(世閥)의 자제만을 써서는 안 된다. 뛰어난 재주나 큰 덕(德)을 갖추었거나 효렴(孝廉)ㆍ방정(方正)한 선비로 물러나 산야에 묻혀 있는 자가 있으면 그의 소재를 파악하여 관(官)에서 천거(薦擧)하고, 가난하여 행장을 차릴 수 없는 자는 관에서 옷과 식량을 주어 보내라.”
하였다.
○ 왕이 신효사(神孝寺)에 행행하였다가 왕륜사(王輪寺)로 행행하였다.
15일(경오)에 왕이 신효사에 행행하여 황제를 위해 복을 빌었다. 23일(무인)에는 신효사에 행행하였다가 왕륜사까지 행행하였는데, 주지 인조(仁照)가 다과(茶果)를 올리고 고기 반찬까지 드렸다.
○ 여러 궁(宮)과 내료(內僚)의 관명(官名)을 고쳤다.
○ 용화지(龍化池)에 행행하니, 중호(中護) 김심(金深)이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수령궁(壽寧宮)에서 반승(飯僧)하였다.
○ 백관이 왕의 탄일(誕日)을 하례하고 다과를 올렸다.

동10월 낙랑군(樂浪君) 김혼(金琿)이 왕을 맞아 서재(書齋)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재추(宰樞)와 승도들이 매일 음식을 올리는데, 극히 호화스럽고 사치하기를 다투었다.
○ 심양 노인(瀋陽路人)이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오부(五部)에 명하여 호구(戶口)를 점검하게 하였다.
○ 왕이 빈전(殯殿)에 제사드리고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행행하였다.
숙창 원비(淑昌院妃)는 문연의 누이동생으로 이때 문연의 집에 있었는데, 왕이 숙창 원비와 더불어 한참 동안 있으니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 충렬왕을 경릉(慶陵) 지금 개성부 42리에 있다. 에 장사하고 왕이 상복을 벗었다.
9일(갑오)에 왕이 빈전에 제사드리고 대렴(大斂)하고 세 번 진애(盡哀)하였다. 여러 관원은 모두 소복 차림을 하고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11일(병신)에 유사(有司)가 대행왕(大行王)의 시호 올릴 것을 의논하니, 왕이 옳지 않다면서,
“상국(上國)이 있으니 내가 청하겠다. 죽책(竹冊)ㆍ옥책(玉冊)도 예에 합당하다고 하겠는가?”
하고, 이에 호(號)만을 올렸는데,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 하였다.
12일(정유)에 경릉에 장사하였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 왕은 최마질(衰麻絰) 차림으로 손에는 향로를 받들고 걸어서 가다가 대천교(大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탔다. 산릉(山陵)에 이르러 장사를 마치고 크게 울고 곧 돌아왔는데 선세(先世)에는 행하지 않던 것이었다. 서보통(西普通)에 석복도량(釋服道場)을 세우고 화상을 혼전(魂殿)에 봉안하고는 영진전(靈眞殿)이라 불렀다. 이날 바로 상복을 벗고 다음날 13일(무술)에 정사를 보았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8월 26일(임자)에 왕이 분상(奔喪)하고 10월 12일(정유)에 상복을 벗었다. 그 사이 상장(喪葬)에 대한 일은 하나도 쓰지 않고, 고기를 먹었다거나 잔치를 받았다는 극히 사치스런 일만을 특서(特書)하고 재삼 써서 한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옛 성왕(聖王)이 제정한 상례(喪禮)에 어떠하겠는가? 왕은 대행왕(大行王)에 대하여, 살아서는 예로써 섬기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성의를 다하지 못하여 사생간에 모두 아들 된 도리를 잃어버렸으니, 충선왕(忠宣王)은 어찌 책할 가치나 있겠는가?
○ 제도(諸道)의 무농사(務農使)를 불러 보았다.
왕이 제도의 무농사 이후(李厚)ㆍ육희지(陸希贄)ㆍ최백륜(崔伯倫) 등을 불러 유시하였다.
“내가 전농사(典農使)를 둔 것은 한(漢)의 상평창(常平倉)을 본받아 백성과 더불어 조적(糶糴 환곡(還糓)의 출납)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급한 것을 구하려는 것이지 사사로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또 나라에 3년을 대비할 저축이 없다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못한다. 만약 급한 일이 있게 되어 갑자기 백성에게서 색출(索出)한다면,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고 이루려 한들 되겠는가? 무릇 백성으로서 재산 있고 권력 있는 집에 붙어 사는 자는 날로 부유하고 안일해지며, 외롭고 잔약한 백성은 세(稅)와 부역에 곤욕을 겪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명을 받들어 행하는 자가 사(私)만 따르고 공(公)을 버린 까닭이다. 그대들은 각각 나의 뜻을 몸소 실천하여 그 폐단을 깨끗이 개혁하라. 좇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의 범한 바에 따라 처단한 다음 첨의부(僉議府)에 보고하도록 하라.”
○ 고 평양택주(平陽宅主) 허씨(許氏)를 순비(順妃)로 삼았다.
비는 공(珙)의 딸인데 일찍이 종실(宗室) 평양공(平陽公) 현(眩)에게 시집가 3남 4녀를 낳았는데 현이 죽었다. 이때 왕이 그의 동생 허종(許琮)의 집에 행행하였다가 술을 마시고 유숙하고는 비로 삼았다.
○ 왕이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행행하였다가 숙창 원비(淑昌院妃) 김씨를 숙비(淑妃)로 삼았다. 감찰규정(監察糾正) 우탁(禹倬)이 상서하여 직간(直諫)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왕은 문연의 집에 행행하였다가 숙창 원비를 음행하였다.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나 우탁이 흰 옷을 입고 도끼를 메고 거적을 지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여 강력히 간하였다.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높여,
“그대는 근신이 되어서 왕의 그릇됨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아첨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소. 그대는 그 죄를 아시오?”
하니, 좌우 신하는 두려워 몸을 떨고 왕은 부끄러운 빛이었다. 얼마 뒤에 올려서 숙비(淑妃)로 봉하였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충선왕이 숙비에게 불례(不禮)한 점은 인신(人臣)으로서 입에 담을 수도 없다. 우탁의 항소(抗疏)와 감언(敢言)은 반드시 죽겠다고 작정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천 년 후에 생각해도 고충(孤忠)ㆍ준절(峻節)이 탁월해서 미칠 사람이 없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왕을 책봉하였다.
왕을 책봉하여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국왕(征東行中書省右丞相高麗國王)을 삼고 전례대로 심양왕(瀋陽王)에 봉작(封爵)하고 이어 태사(太師)를 제수하였다.

11월 팔관회(八關會)를 정지하였다.
숙비(淑妃)가 밤낮으로 갖은 교태를 부리니 왕이 매혹되어 친히 정사를 처리하지 않더니 드디어는 팔관회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하교(下敎)하여 대사(大赦)하였다.
그 하교는 대략,
“근래 간신이 세력을 잡아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사자(使者)를 뽑아 보내어 백성의 전지를 점수(點數)하고 조세를 균평하게 부과하여 옛날의 법식을 좇으려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나라의 경비를 충분히 준비하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봉록(俸祿)을 넉넉히 주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수령으로 부임하는 처음에는 마땅히 특별한 은택을 베풀어야 된다.”
하고, 또,
“제찰(提察)이란 관리를 규찰하고 백성을 문로(問勞)하는 직임인데 왕왕 수령이 불법으로 탐오(貪汚)하는데도 규찰하여 탄핵하지 않으니, 토색한 물건은 상고해 각각 주인에게 돌려보내 주고, 계속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고, 또,
“권세 있는 집의 간활(奸猾)한 무리들이 문계(文契)를 조작하여 남의 노비와 전정(田丁)을 빼앗는다 하니, 마땅히 관사(官司)에게 속히 처결하여 지체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전에 사신 등을 맞고 보내는 경우에 국신(國贐)과 연례(宴禮)에 있어서 문계를 허급(虛給)하거나 상고(商賈)의 여러 물건을 가져다 쓰고는 그 값을 돌려 주지 않았다 하니, 문계를 검토하고 따져서 숫자대로 돌려 주도록 하라.”
하고, 또,
“외방 백성은 관리들의 과렴(科斂)이 번중(煩重)하여 심지어 아들딸을 팔아 물화(物貸)로 바꾸어 관에 바치는 자도 있다 하니, 속히 그 몸값을 공금(公金)으로 치르고 아들딸을 그의 부모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 밖에 교시가 지극히 많았다. 즉위한 처음에 덕혜(德惠)를 널리 펴고 아름다운 명예를 얻으려고 이날에 비답을 내렸으니 판검교(判檢校)의 직책이 더욱 번다하게 되었다.
종친(宗親)ㆍ양반(兩班)의 동성혼(同姓婚)을 금하였다.
전교에,
“세조(世祖)의 성지(聖旨)에 ‘같은 성끼리 통혼하지 못하는 것은 천하의 통리(通理)다. 하물며 그대 나라는 문자를 알고 부자(夫子)의 도를 행함에랴.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만약 종친으로 동성끼리 혼인하는 자는 위지(違旨)로써 논할 것이니, 마땅히 누대 재상의 딸에게 장가들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실의 딸에게 장가를 가야 한다. 신라(新羅)의 왕손 김혼(金琿)은 사삿집에 있지만 역시 순경 태후(順敬太后)의 오빠의 후손이다. 언양 김씨(彦陽金氏) 1종(宗)ㆍ정안(定安) 임 태후(任太后) 1종ㆍ경원(慶源) 이 태후(李太后)ㆍ안산(安山) 김 태후(金太后)ㆍ철원 최씨(鐵原崔氏)ㆍ해주 최씨(海州崔氏)ㆍ공암 허씨(孔巖許氏)ㆍ평강 채씨(平康蔡氏)ㆍ청주 이씨(淸州李氏)ㆍ당성 홍씨(唐城洪氏)ㆍ황려 민씨(黃驪閔氏)ㆍ횡천 조씨(橫川趙氏)ㆍ파평 윤씨(坡平尹氏)ㆍ평양 조씨(平壤趙氏)는 모두 누대의 공신ㆍ재상의 종친이니, 대대로 혼인할 수 있다. 남자는 종친의 딸에게 장가가면 여자는 종비(宗妃)가 된다. 문무(文武) 양반의 집은 동성끼리 혼인할 수 없다.”
하였다.
○ 왕이 원에 갔다. 제안공(齊安公) 숙(淑)을 권서행성사(權署行省事)로 삼았다.
왕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군소배들의 횡행(橫行)과 백성이 폐해를 받는 이유를 잘 알아서 처음 수선(受禪)하여서는 바로잡음이 자못 많았다. 즉위하여서는 백성에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폐해를 제거하여 무릇 실시한 것이 약간 볼 만하였으나, 변경이 하도 많아 그 번거로움이 말할 수 없었고 별안간 원에 가서는 우물쭈물 귀국하지 않아 온 국민이 공궤(供饋)하느라 지쳤다.
○ 모든 주군(州郡) 가운데 혐명(嫌名 황제나 왕의 이름자를 쓰지 않고 피하던 일)에 저촉되는 것을 고쳤다.

윤11월 외종 형제의 결혼을 금하였다.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도선(道詵)

도선은 영암(靈巖) 사람으로서 나이 72세에 광양(光陽)의 옥룡사(玉龍寺)에서 죽었으니, 바로 당(唐) 나라 광화(光化) 원년이요,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2년(898)이다.
지금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영암 최씨원기(崔氏園記)와 광양(光陽) 옥룡사비(玉龍寺碑)에 소상히 실려 있는데,흥덕왕(興德王) 2년(827) 정미로부터 효공왕 2년 무오에 이르기까지 72년이 되므로 왕 건(王建)이 철원군 태수(鐵原郡太守)가 된 지 4년째에 도선이 비로소 입적(入寂)한 것이다.
왕 태조(王太祖)는 〈경명왕(景明王) 2년(918년) 무인에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在位) 26년 수(壽)는 67세로 돌아가니, 때는 후진(後晉) 천복(天福) 8년 계묘이다. 그러므로 당(唐) 나라 건부(乾符) 4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 정유에 태어난 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왕 태조가 태어나기 1년 전에 도선이 찾아와서 글을 바치면서, 장차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이라 하였고, 왕 태조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서는 군사를 출동하고 진(陣)을 배치하는 법과 천시(天時) 지리(地理)의 법을 고(告)하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궁예(弓裔)가 왕건에게 태수(太守)의 벼슬을 주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요, 도선이 찾아와 고한 지 겨우 수년이 지난 뒤였다.
옥룡사비에 “35년 동안을 한가히 앉아 말을 잊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20년 동안 천리 밖에 석장(錫杖)을 날려 두 번이나 송도(松都)에 이르렀으니, 적멸(寂滅)의 가운데에 기미(機微)가 그윽이 움직여서 하나는 쇠잔하고 하나는 흥왕하려 할 적에 창업(創業)을 도와 일으켰으니, 또한 “설(說)함이 없는 설과 법이 없는 법이다.” 한 것과는 다르다.
국사(國師)의 성은 김씨(金氏)요, 혹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서얼손(庶孽孫)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친이 외를 먹고 잉태했다는 설과 꿈에 구슬을 삼키고 잉태했다는 말은 아마도 모두 허황한 말일 것이다.

[주C-001]도선(道詵) : 신라(新羅) 때에 지방 자치 세력의 유력자를 중앙에 뽑아올려 볼모로 잡아두고 그 지방 행정을 자문(諮問)하였으며, 고려 중엽 이후에는 궁중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고역(苦役)에 사역(使役)되었고, 조선(朝鮮)에 와서는 태종(太宗) 때부터 주로 소목(燒木)을 바치는 일을 맡았는데 광해군(光海君) 때에 혁파되었다.
[주D-001]지금 《여지승람(輿地勝覽)》 …… 실려 있는데 : 이 말은 《여지승람》 광양(光陽)옥룡사비(玉龍寺碑)에 보인다.
[주D-002]모친이 외를 …… 잉태했다는 말 : 이 말은 《여지승람》 영암(靈巖) 최씨원기(崔氏園記)에 “신라 사람 최씨의 정원에 열린 외 하나가 길이가 한 자가 넘어 온 집안 식구가 이상히 여겼는데, 최씨의 딸이 몰래 그 외를 따서 먹었더니, 임신이 되어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고 보이는 것을 이른다.

 

陶谷集卷之十二
 碑銘
白雲山松川寺先覺國師碑銘 幷序 a_181_080a


以虗無寂滅爲宗。凡天地萬物有形有名之類。一切皆歸之幻化。此浮屠氏之道也。夫旣歸之幻化。則便與飛塵空花無異。其遺餘粗跡。復奚用讚頌之費。然而一遭茶毗。咸思建㙮建碣以崇美之。又必借詞人墨客之筆。極意揄揚。俾永垂於悠綿。何其與渠家所奉眞訣相盭若是哉。余嘗訝惑於斯。屢以叩之其徒。181_080b 其徒亦不能對也。我東箕條旣遠。異說交騖。由羅涉麗。唯竺敎是張。以故靑丘一域。伽藍鱗襲。輒享其住社高釋。以風厲緇林。光陽縣白雲山之松川寺。亦其一也。是寺之創。爲祀新羅僧道詵。道詵靈巖人。俗姓金。時君尊之爲國師。其妙道慧業。具著麗朝學士崔惟淸撰玉龍寺碑。可以互見。此不復贅述焉。是寺初名松林。而山名爲白雞。後之改稱。厥有所繇。語荒俚不經。非碑文可載。有欲知之。問諸髡輩可也。大抵師亦一異人也。以其姿稟之高。志力之强。苟能歸依儒術。以求倫常之極致。則融通純粹。顧何所不至。而乃181_080c 以好箇田地。斷送於窅漠之界。自安稊稗之熟。終已而莫之返。豈其習俗之使然歟。重可惜也。寺舊有碑。見毁於壬辰倭難時。今南之鶖子。大懼玄躅之久翳。請更爲文以揭。此亦余前所訝惑之一端也。請之力。終不可拒。遂爲之銘曰。
惟師之道。不可思議。直超法海。高視千禩。靈骨雖蛻。寶光不滅。心心相照。水中之月。

硏經齋全集外集卷六十一
 筆記類○蘭室譚叢
高麗碑 a_278_119d


高麗碑石。雅多可觀。然間多磨滅。不知其處。存者亦剝落不可考。今錄其最著者。陽陵井碑,在開城府南八里。大明洪武三年。帝遣朝天宮道士徐師昊。祭高麗山川。師昊又載石來問都城南楓川何地。乃以是井對。師昊致祭竪碑而去。 妙蓮寺重興碑,基在三峴里。高麗李齊賢撰。 甓寺碑,在驪江東岸。寺有江月軒。懶翁所居。其徒藏舍利于石鍾。仍建眞堂。高麗李穡記。 高達寺碑,在驪州慧目山。卽高麗幹林學士金廷彦所撰僧慧眞塔碑。 智足寺碑,在山陰縣智異山。卽高麗禮部尙書孫夢周所撰慧月及眞觀二碑。 鳳林寺碑,在昌原鳳林山。卽新羅執事侍郞崔仁渷所撰278_120a僧眞鏡碑。 月影臺石字,在昌原會原縣西。崔致遠所遊處。有石刻剝落。 麟角碑,在義興華山洞口。有壁矗立。俗傳麒麟挂角于壁。因名。有高麗侍郞閔漬所撰普覺碑銘。 太子寺碑,在奉化太子山。卽新羅兵部侍郞崔仁渷所撰僧朗空塔銘。釋端月集金生字。摸勒上石。今移置縣廨。又有高麗左諫議大夫金審言所撰僧通眞塔銘。 桐華寺碑,在大丘公山。卽高麗金晅所撰僧弘眞碑銘。 芬皇寺碑,在慶州府東五里。新羅善德王三年建寺。有高麗平章事韓文俊所撰和凈國師碑。碑卽烏金石。 鍪藏寺碑,在慶州府東北三十里暗谷村北。諺傳麗祖統合後。藏鍪此故名。有古碑。 奉德寺鍾銘,新羅惠恭王鑄鐘銅。重十二萬斤。撞之聲聞百餘里。後寺淪於山中。天順四年。移縣靈妙寺後。府尹芮椿年移置南門外。搆屋以懸。凡徵軍擊之。 昌林寺碑,慶州金鰲山麓。有新羅時宮殿遺址。後人卽其地建寺。今廢。古碑亦無字。元學士趙子昂昌林寺碑跋云。右唐新羅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字畫。深有典刑。雖唐人名刻。無以遠過。古語云何地不生才。信然。 278_120b斷俗寺碑,在晉州智異山東洞口。有崔致遠所書廣濟巖門四字刻石。又有致遠讀書堂。後廢爲僧太鑑影堂。又有新羅兵部令金獻貞所撰僧神行碑銘。高麗平章事李之茂所撰僧大鑑碑銘。翰林學士金敦舟西撰眞定大師之碑。 雙溪寺碑,在晉州智異山。崔致遠撰其碑。 般若寺碑,在陜川伽倻山下。寺廢已久。只有古碑。卽高麗樞密院知奏事金富佾所撰无景和尙之碑。 寧國寺碑,在沃川智勒山。卽高麗韓文俊所撰僧圓覺碑。 法作寺碑,在報恩俗離山。新羅僧義信所建。聖德王重修。門前有鑄銅幢㨾甚高。其一面書統和二十四年造。又有高麗密直代言李叔琪所撰僧焦凈碑銘。 普光寺碑,在林川聖住山。卽元危素重建碑。 法泉寺碑,在原州鳴鳳山。卽高麗僧智光塔碑。 興法寺碑,在建登山。高麗太祖所製。仍命崔光胤集唐太宗書上石。 居頓寺碑,在原州玄溪山。卽高麗崔冲所撰僧勝妙碑。 文殊寺碑,在春川淸平山下。元泰定帝后以憎性澄允堅所進佛經。藏之此寺。李齊賢奉王旨撰此碑。 興敎寺碑,278_120c在寧越太華山西。有高麗僧冲曦碑。曦仁宗之子。碑文盡剝落不能讀。唯碑陰誌。曦之門人寶文閣學士崔詵奉宣而撰。 長安寺碑,在淮陽表訓寺下。堂殿佛像。皆華人所造。碑卽李糓所撰也。 表訓寺碑,在淮陽萬瀑洞口。卽皇帝與太皇太后施錢帛文。寺門右又有刻。卽元人梁哉所撰常住分粮記。高麗中權漢功書。 玄化寺碑,在牛峯靈鷲峯下。卽周佇所撰。 廣照寺碑,在海州須彌山。卽高麗撿校尙書左僕射崔彦撝所撰眞澈大師碑。 普賢寺碑,在寧邊妙香山。卽高麗太師金富軾撰。學士文公裕書。 道岬寺碑,在靈巖月巖。道詵所甞住也。碑字缺落。寺古有二石。其一刻國長生三字。其一刻皇長生三字。 佛岬寺碑,在靈光母岳山。碑字缺不可讀。 寶林寺碑,在長興迦智山。卽新羅司馬金穎所撰普照禪師塔銘。 月南寺碑,在康津月出山南。高麗僧眞覺刱寺。李奎報撰此碑焉。 玉龍寺碑在光陽白鷄山。卽崔惟淸所撰道詵碑。又有金廷彦所撰僧理嚴碑。 佛盖寺碑,在興陽智巓山麓。卽高麗李益培所撰僧圓悟碑。 278_120d蘓定方碑,在扶餘縣西二里。定方伐百濟滅之。立石紀功。賀遂良製。權懷素書。 劉仁願碑,亦在扶餘縣。仁願鎭百濟。伐石紀功。 聖住寺碑,在藍浦聖住山。卽崔致遠所撰朗惠和尙塔碑。 天燈山碑,在忠州北四十里。一云開天寺碑。俗傳唐開元間所立。文剝落不可讀。 龍頭寺碑,在忠州未訖山下。卽高麗崔彦撝所撰僧慈燈塔碑。 艸方院碑。在長津黃艸嶺。卽新羅眞興王北廵碑。 如此類者甚多。不能一一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