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19. 삼각산 (산마루)

2011.6.19. 삼각산 (불광중 비봉 사모바위 삼천골 ) 산마루

아베베1 2011. 6. 20. 09:47

                                   삼각산 산행

   금일은 산마루 샘터 산악회 창립 3주년 기념 산악회  삼각산  산행이 있는 날이다

   전일 근무로 인하여 사무실에서 자전거로 집으로 달린다 집에 도착 하여 산행 준비를 하여 방학역으로 달려 갔으나

   차량은 망월사역을 통과 한다는 표지판의 내용이다 

   시간을 09:20분이었다 할수 없이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160번 버스에 승차 하였다  일요일지만 

   차량은 쉽게 달리지 못한다  미아 삼거리 -돈암동 - 창경궁 앞에 내려야 하는데  잠시 조는 사이에  차량은

   벌써 종로 4가 도착하였다 다음이 종로3가 라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물건을 준비하여 종로3가 에서 3호선에 승차하여 연신내역 2번 출구에 내려서 확인한바 시간은 10:20분이었다.

  20분을 초과하였다 전화를 일행하게 한다 일행은 북한산 입구 텃밭 있는 곳을 통과하신단다 

  연서시장을 걸어서 새장골 표석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간단하게 생장골의 내력을 알아본다 

  불광중학교 를 거쳐서 텃밭 있는 곳을 통과하니 일행분이 산행체조를 하신다 간단하게 일행과 눈인사를 하고

 각자의 소개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더운날이었다 후미에 시작하여 중간으로 이동한다  평소길을 잘아는 곳으로  산행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일행은 좋은 길을 가는 것을 옆으로 돌아서 간단하게 릿지를 조금씩 하면서 ...

 술랩지역에 도달한다 일행분들은 벌써 지치기 시작한다 여름철 이고 시간이 11 시가 지났으니 덥고 힐들고 

 지치기 시작한다 중간정도의 경사도 40-50정도 되는 슬랩지역이다 

 간단하게 중간에 올라서 보니 대부분 지치고 땀이 많이 흐른다 모자를 벗어던지고 스카프로 이마에 두르고 

 산행을 시작한다 중간부분에서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준비해간 가메라에 사진을 몇장 담는다     

한고비를 넘는다  다른 회원분이 준비해간 막걸리를 먹자고 하여 시원한 막걸리 반잔정도를 마신다 시원한

얼음 막걸리 한잔에 안주는 오이 안주에 쉽게 넘어 간다 다는 일행분도 도착하여 쉬면서 목을 적신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행인이 넘무 많았다 

능선을 통과하여 향로봉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간단한곳을 릿지로 통과하고 일행과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너무일찍갔는가 일행은 오지 않는다  약10여분을 기다려도 오지않는다 많은분 60여분의 산행이기에 시간지체가

 많이 된다   비봉능선으로 접근한다   비봉으로 접근할려고 하니 산악구조대 직원이 지킨다 안전모를 

준비하였는데 아뿔사 집에서 가져가지 않았다 

 안전모를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더이상 진행이 되지 않는다 포기하고 진행하면서 쉬운곳으로 진입하여 

 비봉능선에 오른다  비봉은 신라 진흥왕 순수비중  (북한산비) 의 한비석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국경과 영역을 표시하는 곳으로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 북한산비)가 설치 되어있으나 

 세월의 풍파에 마모 되어 초기에는 무학대사 비라고 알고 있다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글자를 해독하여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을 국보3호)

 수백년의 세월동안 알지못하여 방치된 금석문 비석을 추사가 해독하여 발견 하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비봉능선이라고 불렀던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비봉정상에서 몇장의 사진을 담는다 품앗이로 두장을 담고 내려와 바위에서 다른분에 부탁을 하여서 

 사모바위로 향한다 일행은 먼저 진행을 하는 중으로 재 빠르게 사모바위에 도착하니 헬기장에서 일행은 식사를 

 하신다 더눈곳에 식사를 하기도 그렇고 하여 점심을 먹지않고 사모바위에 오는다 

 사모 바위는 아마도 사모관대와 비슷하여 사모바위라고 칭하지 않았다 생각 되는 부분이다 

 사모바위 뒷부분에는 물개와 비슷한 바위가 존재한다 자세히 보면 특이하다 여러곳을 배경으로 사진으로 담는다 

 산아래는 삼각산 승가사가 자리 잡는다 승가사는 고려 시대부터 창건한 절로 1000년 고찰이다 

 수많은 역사적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행과 단체 사진을 촬영하는데 동참하지 못하였다 사모바위에서 내려와 삼천골로 하산하는 일행과 만난다 

 능선으로 내려 가는 중에 몇장을 기록으로 남긴다  능선으로 하산하여 

사슴집에서 창립기념 행사에 참석하고 즐거운 식사 족구시합을 하고 집으로 전동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귀가 하여

식사후 휴식에 들어간다 .           

 

 

홍재전서 제6권
 시(詩) 2
고양군(高陽郡)에 행차하여 유신(儒臣)들에게 무예를 시험하였다. 고양군에 사정(射亭)이 있으므로, 어가(御駕)를 수행한 문무(文武) 근신(近臣)들과 함께 곡(鵠)을 쏘았으니, 이는 곧 선조(先朝) 시대 성대한 행적의 일단을 계술한 것이라 기록이 없을 수 없으므로, 후일에 이것을 읊다. 이날 내가 소곡(小鵠)을 쏘아 다섯 번을 맞혔고, 본도의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네 번을 맞혔으며, 병조 판서 이갑(李)이 한 번을 맞혔고, 별운검(別雲劍) 서유린(徐有隣)은 두 번을 맞혔으며, 이문원(李文源)ㆍ박우원(朴祐源)은 한 번을 맞혔고,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는 과녁을 지나쳤다. 금위대장 서유대(徐有大)는 세 번을 맞혔고, 직제학 이병모(李秉模), 검교직각 서정수(徐鼎修)는 과녁을 지나쳤다. 대교 윤행임(尹行恁)은 두 번을 맞혔고, 도승지 심풍지(沈豐之)는 과녁을 지나쳤다. 좌승지 이시수(李時秀)는 한 번을 맞혔고, 별군직(別軍職) 이득제(李得濟)는 과녁을 지나쳤다. 이한풍(李漢豐)은 한 번을 맞혔고, 이윤빈(李潤彬)은 세 번을 맞혔으며, 이유경(李儒敬)은 두 번을 맞혔고, 유효원(柳孝源)은 세 번을 맞혔으며, 한광제(韓光濟)는 한 번을 맞혔고, 박기풍(朴基豐)은 세 번을 맞혔으며, 이석(李晳)은 두 번을 맞혔고, 오의상(吳毅常)ㆍ김희(金爔)ㆍ서영보(徐英輔)는 세 번을 맞혔으며, 정학경(鄭學畊)ㆍ임성열(任聖說)은 두 번을 맞혔고, 승전 선전관(承傳宣傳官) 김익빈(金益彬)은 두 번을 맞혔으며, 양협(梁埉)은 한 번을 맞혔고, 이신경(李身敬)ㆍ이광익(李光益)은 두 번을 맞혔으며, 이형수(李馨秀)는 한 번을 맞혔고, 차사원(差使員)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태영(李泰永)은 네 번을 맞혔으며,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행원(尹行元), 양주 목사(楊州牧使) 홍의영(洪義榮)은 과녁을 지나쳤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인묵(洪仁默)은 한 번을 맞혔고,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관현(李觀賢),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소(李素)는 과녁을 지나쳤다. 제신(諸臣)의 활쏘기를 마치고 나서 완사례(完射禮)를 거행한 것은 또한 고사(故事)이다. 내가 또 활을 쏘아 다섯 번을 맞혔고, 방백(方伯)이 세 번을 맞혔다. 그리고 곡(鵠)은 군사(郡舍)에 쟁여 두었으니, 이 또한 육일각(六一閣)에 후(帿)를 쟁여 두었던 성의(聖意)를 따른 것이다.


어가가 교외 길을 안온하게 돌아와 / 穩旋郊駕路
군재의 동쪽에 임해서 주필하였네 / 臨蹕郡齋東
술동이에는 푸른 거품이 출렁이고 / 樽漾蟻浮綠
과녁판에는 붉은 곡이 걸려 있도다 / 帿懸鵠中紅
일천 민가엔 밥 짓는 기미가 보이고 / 千家烟火氣
여러 진영엔 북 피리 소리 울리누나 / 列壘鼓笳風
한 번 즐김이 어찌 법도가 되었으랴 / 一豫寧爲度
금년에 다행히 풍년을 만났음일세 / 今年幸遇豐


 

[주D-001]한 번 …… 되었으랴 : 옛날에 임금이 봄이면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을 살펴보아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것을 살펴보아서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었으므로, 하언(夏諺)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노닐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휴식을 할 수 있으며, 우리 임금이 즐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오. 임금의 한 번 노닐고 한 번 즐기는 것이 제후의 법도가 되도다.[吾王不遊 吾何以休 吾王不豫 吾何以助 一遊一豫 爲諸侯度]”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완당전집 제1권
 고(攷)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 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口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다. ―모두 29자임―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1자임―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모두 28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모두 23자임― 가장 위의 氺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冫+七)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21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모두 19자임― 가장 위의 阝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16자임― 가장 위의 乀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舍)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액(篆額)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北漢山)의 비 또한 이 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碑文)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癸未)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10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5년에 해당하고, 중국(中國)에서는 진 폐제(陳廢帝) 백종(伯宗)의 광대(光大) 2년, 북제 후주(北齊後主) 위(緯)의 천통(天統) 4년, 후주 무제(後周武帝) 옹(邕)의 천화(天和) 3년, 후량 세종(後梁世宗) 귀(巋)의 천보(天保) 7년에 해당한다.
《북사(北史)》 제후주본기(齊後主本紀)에 의거하면 “천통 4년 6월 초하루(갑자)에 큰 비가 내렸고 갑신일에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였고, 또 주무제본기(周武帝本紀)에는 “천화 3년 6월 갑술일에 패성(孛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남사(南史)》 진폐제본기(陳廢帝本紀)에는 “광대 2년 6월 정해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 6월 초하루가 갑자일이고 24일이 정해일인 것이다. 주무제본기에는 “7월 인일에 양충(楊忠)이 죽었다.”고 하였고, 진폐제본기에는 “7월 무신일에 신라국(新羅國)에서 사신을 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임술일에 영양왕(永陽王)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갑자에서 임술까지가 모두 59일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작은 달이 있었을 것이고 보면 7월 그믐날이 의당 임술일이고 8월 초하루가 의당 계해일이 된다. 또 주무제본기에는 “8월 을축일에 한원라(韓元羅)가 죽었다. 계유일에 제(帝)가 대덕전(大德殿)에 임어했다.” 하였으니, 을축일이란 곧 8월 3일이고 계유일이란 곧 11일인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8월 21일이 의당 계미일이 되니 이 비문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이 된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것이 16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三國史)》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으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왕이 훙한 뒤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도 37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도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 칭하였고, 북한산의 비문에도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법흥(法興)이니 진흥이니 하는 칭호는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가 아니요, 바로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의 조서(詔書)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 東夷校尉)로 삼는다.” 하였고 《수서(隋書)》 개황(開皇) 14년조에는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와서 하례하였다.” 하였으며, 《당서(唐書)》 정관(貞觀) 6년조에는 “진평(眞平)이 졸하고 그의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등의 칭호는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시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서》의 기록에서 김무열(金武烈)이라 칭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칭하였으니,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칭한 것도 역시 생존시에 호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흥부(咸興府)는 옛날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소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예전(濊傳)에 의거하면 “불내예(不耐濊)가 한말(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또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 말한 동옥저와 불내가 곧 지금의 함흥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국조왕(國祖王)조에 의하면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創海)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중원(中元) 원년에 해당한다.
함흥의 땅은 분명히 후한 때부터 이미 고구려에 소속되었는데, 이 비문에서 “관할 지경을 순수한다.[巡狩管境]”고 하였고 보면, 진흥왕 때에는 함흥이 또 신라의 소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비문에는 또 “사방으로 지경을 열어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서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진흥왕 때 이 땅을 새로 얻은 것이고,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바로 고구려이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7년에 비렬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가 29년에는 비렬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비렬홀은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달홀은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비렬홀은 또한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했다’고 칭한 것이다. 이 비석 또한 진흥왕 29년(무자)에 세워졌을 것인데, 그 순수(巡狩)의 일은 필시 사서(史書)에서 빠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세워진 자리는 바로 고구려와의 정계(政界)인 것이다.
지금 안변에서 북쪽으로 함흥까지가 3백 리이고, 함흥에서 북쪽으로 황초령(黃草嶺)까지가 1백 리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군현(郡縣)이 있었을 터이련만, 《삼국사》 지지(地志)에 의하면 신라의 자취가 겨우 비렬홀에 미쳤으니, 사서에서 빠뜨린 것인지, 혹은 함흥이 당시에 비렬홀에 속했었는지 모르겠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신라본기 법흥왕(法興王)조에 의하면 “23년에 비로소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하였고, 진흥왕조에는 “12년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대체로 천자(天子)의 제도를 썼기 때문에 비문에서 짐(朕)이라 칭하였고, 또 제왕이 연호를 세운다[帝王建號]는 말도 있으니, 이 해에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佛敎)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하여 여생을 마치었다.” 하였고, 또 직관지(職官志)에는 이르기를 “국통(國統)이 1인이니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에 혜량법사(惠亮法師)를 사주로 삼았고, 대도유나(大都唯那)가 1인인데 진흥왕이 비로소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으며, 대서성(大書省)이 1인인데 진흥왕이 안장법사(安藏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다.” 하였으니, 이 비문에 기록된 사문도인(沙門道人)이라는 것도 혜량ㆍ안장의 유일 것이다. 비문의 법장(法藏)ㆍ혜인(慧忍)이라는 것은 두 중의 이름인데, 대신(大臣)의 위에 기록한 것은 그들을 높인 때문인가 보다.
대등(大等)이란 신라의 관명(官名)이다. 《삼국사》 법흥왕본기에 “18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니, 상대등이란 관직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그 지위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하였고, 아래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선덕왕(善德王) 때에는 처음에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그 관직에서 죽거나 계승하는 일을 사서에서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또 직관지에 이르기를 “상대등은 혹은 상신(上臣)이라고도 한다.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대등(大等)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색복지(色服志)에는 “진골(眞骨)의 대등은 복두(幞頭)를 임의로 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도 대등이 있으니, 여기에 의거한다면 당시 상대등ㆍ사대등 두 대등 외에 또 그냥 대등이라고만 칭한 관직도 있었던가?
제7행의 거(居) 자 아래에 이지러지고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冫+七)자는 이것이 혹 칠(柒) 자인가 싶다. 상고하건대, 진흥왕 때에 거칠부(居柒夫)가 있었으니 여기에 기록된 것이 혹 사람인가 싶다. 《삼국사》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6년에 대아찬(大阿飡)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서 국사(國史)를 찬수하게 했다.” 하였고,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진흥대왕 6년(을축)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국사를 찬수하고 진찬(珍飡)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니, 그의 벼슬이 대아찬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한 것이다. 또 진흥왕본기에 “12년에 거칠부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해서 승승장구하여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하였는데, 이때는 사관(史官)이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진지왕본기(眞智王本紀)에는 “원년에 이찬(伊飡)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가 이찬 벼슬을 한 것은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등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가 대등 벼슬을 한 것도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직관지에 이르기를,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직위는 급찬(級飡)에서 파진찬(波珍飡)까지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 비석은 29년에 세웠으니 즉 사대등을 설치한 뒤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官制)에 급찬이 파진찬의 밑에 있으니, 거칠부가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면 응당 다시 급찬으로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칠부의 벼슬이 처음에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은 6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 다음 파진찬에서 사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5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그 다음 사대등에서 이찬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9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바로 진지왕 원년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그가 사대등으로 있을 때에 해당하니,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틀림없이 거칠부인 것이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육부(六部) 가운데 양부(梁部)ㆍ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ㆍ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삼국사》 직관지에 의하면 신라의 관호(官號)가 17등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飡)으로 혹은 이벌간(伊罰干), 또는 각간(角干)이라고도 하며, 둘째는 이척찬(伊尺飡)으로 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잡찬(迊飡)으로 혹은 잡판(迊判) 또는 소판(蘇判)이라고도 하며, 넷째는 파진찬(波珍飡)으로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으로 혹은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하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으로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하며, 여덟째는 사찬(沙飡)으로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하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으로 혹은 급벌간(及伐干)이라고도 하며, 열두번째는 대사(大舍), 열세번째는 사지(舍知)로 혹은 소사(小舍)라고도 하며, 열네번째는 길사(吉士)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찬(飡)과 간(干)이 서로 혼용되었다. 또 색복지(色服志)에 이르기를 “이찬(伊飡)과 잡찬(匝飡)은 금관(錦冠)을 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잡(迊)과 잡(匝)은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귀산전(貴山傳)에 이르기를 “부친 무은(武殷)은 아간(阿干)이었다.” 하였으니, 아찬(阿飡)이 바로 아간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에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리굴(武梨屈)ㆍ이리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무은(武殷)ㆍ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막게 하였다.” 하였으니, 급벌간(及伐干)이 바로 이 급간(級干)인 것이다. 또 직관지에 “길사(吉士)는 혹은 계지(稽知), 또는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당서》에서 길주(吉主)라고 칭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소사(小舍) 아래에 길지(吉之)가 있는데, 지(之)와 지(知)는 음이 서로 비슷하니 이는 아마 제14등관인 길사(吉士)인 듯하다.
그렇다면 비문에 있는 잡간(迊干)은 바로 제3등관이고, 그 다음 대아간(大阿干)은 바로 제5등관이고, 그 다음 급간(及干)은 바로 제9등관이고, 그 다음 대사(大舍)는 바로 제12등관이고, 그 다음 소사(小舍)는 바로 제13등관이고, 그 다음 길지(吉之)는 바로 제14등관이니 기록한 것이 모두 차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이 가지런하다.
복동지(服冬知)ㆍ비지부지(比知夫知) 등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가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내마(奈麻) 법지(法知)가 있었으며, 진평왕 때에는 이찬 노지(弩知)가 있었으니, 그 때의 인명은 많이 방언(方言)으로 했던 것이다.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이르기를 “진흥대왕 12년에 왕이 대각찬(大角飡) 거칠부와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태(比台), 잡찬(迊飡)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비차부가 곧 이 비문의 비지부지인 듯하다. 관명(官名)에서 계지(稽知)와 길차(吉次)가 이미 서로 통하고 보면 인명(人名)에서 비지(比知)와 비차(比次)가 어찌 서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흥왕 12년에 비차부의 벼슬이 이미 대아간이었는데, 29년 순수(巡狩)할 당시에도 아직 그 벼슬로 어가(御駕)를 따라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9행의 가장 윗글자는 우방(右傍) 阝만 남았는데 이는 부(部) 자인 듯하다. 셋째번에 있는 것은 혜(兮) 자인데 이는 인명의 하단(下段)이다. 신라 벌휴왕(伐休王) 때에 을길찬(乙吉飡) 구수혜(仇須兮)와 조비왕(助賁王)의 비(妃) 아이혜(阿爾兮)가 있었고, 진평왕 때에는 상사인(上舍人) 실혜(實兮)가 있었으니, 신라 사람은 혜(兮) 자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또한 많다. 그렇다면 기록된 것은 반드시 두 자로 된 이름이다.
또 제11행의 가장 위의 전(典) 자는 바로 관명(官名)이다. 신라의 관직은 전(典) 자로 호칭된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회궁전(會宮典)ㆍ빙고전(氷庫典)ㆍ금전(錦典)ㆍ약전(藥典)ㆍ율령전(律令典) 등의 유가 바로 그것이다.
종인(從人)은 대사(大舍)의 종인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세택(洗宅)은 종사지(從舍知) 2인이 있고, 숭문대(崇文臺)ㆍ악전(嶽典)ㆍ감전(監典) 등의 관서에도 모두 종사지 2인씩이 있는데, 사지(舍知)는 곧 소사(小舍)이다. 소사에게 이미 종인이 있고 보면 대사에게 또한 어찌 종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사간조인(沙干助人)이란 곧 사찬(沙飡)의 조인(助人)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예궁전(穢宮典)에 조사지(助舍知) 4인이 있고, 회궁전(會宮典)에 조사지 4인이 있다. 사지(舍知)에게 이미 조인이 있고 보면 다른 관(官)에도 반드시 조인이 있을 것이니, 사간에게 조인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간은 바로 제팔등관(第八等官)이니, 응당 길사(吉士)의 밑에 기록하지 않겠지만, 사간의 조인은 낮은 것이기 때문에 끝에다 기록한 것이다. 길사의 밑에 또 소사(小舍)만 있고 그 이름은 이지러진 것은 이 또한 소사의 조인인 것이다.
제9행의 ‘(䒑/衆)內’와 제11행의 ‘(䒑/衆)公’에서 두 ‘(䒑/衆)’ 자가 서로 같은데 혹은 회(懷) 자 같기도 하고 혹은 애(哀) 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거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을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비문 또한 애공이니, 두 ‘(䒑/衆)’ 자는 분명히 애(哀) 자인 것이다.
또 제10행의 가장 위의 ‘一’은 아마 사(舍) 자인 듯하다. 제9행에는 대사애내(大舍哀內)가 있고, 제10행에는 또 대사약사(大舍藥師)가 있으니, 그 사이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다 대사일 것이고, 여난(與難) 또한 의당 벼슬이 대사였던 것이다.
제1행 태왕(太王)의 태(太)는 바로 대(大)와 같은 것이요, 명기(銘記) 밑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은 특별한 예(例)이다. 제2행의 ‘●’은 역(亦) 자에서 위의 점이 빠진 것이고, ‘(日/丁)’은 시(是) 자에서 아래 파(波 파임을 이름)가 빠진 것이다. 제3행의 ‘(그/尸)’은 위(違) 자이다. 제4행의 ‘寸耎’은 봉연(封堧) 두 자의 왼쪽이 이지러진 듯하다. 제5행의 ‘十’은 래(來) 자이고, ‘口’은 여(如) 자이다. 제7행의 ‘咅’는 부(部) 자이고, ‘(冫+七)’은 칠(柒) 자인 듯하다. 제9행의 ‘阝’은 ‘부(部)’ 자이고, 10행의 맨 위의 ‘乀’은 사(舍) 자이며, 맨 밑의 ‘’ 또한 사(舍) 자이다. 그 나머지 불완전한 글자들은 모두 알 수가 없다.
대등훼부거칠(大等喙居咅) ―대등은 관명(官名)이고 훼부는 지명(地名)이며, 거칠은 인명(人名)의 상단(上段)이다.― 지(知) ―인명의하단이다.― 잡간훼부복부지(迊干喙部服不知) ―잡간은 관명이고, 복부지는 인명이다.― 대아간비지미지(大阿干比知未知) ―대아간은 관명이고 비지미지는 인명이다.― 급간미지(及干未知) ― 급간은 관명이고 미지는 인명의 상단이다.― 혜((䒑/亅)) ―인명의 하단이다.― 대사사훼부영지(大舍沙喙部另知) ― 대사는 관명이고 영지는 인명이다.― 대사애내(大舍(䒑/衆)內) ―애내는 인명이다.― 종인훼부(從人喙部) ―종인은 대사(大舍)의 종인이고 인명은 이지러지고 없다.― 훼부여난(喙部與難) ―여난은 인명이고 그의 벼슬은 또한 의당 대사(大舍)인 것이다.― 대사약사(大舍藥師) ―약사는 인명이다.― 사훼부□형(沙喙部(䒑/馬)兄) ―’(䒑/亅)兄’ 인명이고 그 벼슬은 역시 의당 대사이다.― 소사(小人) ―관명만 있고 인명은 이지러졌다.― 전훼부분지(典喙部分知) ―전(典)은 관명의 하단이고 분지는 인명이다.― 길지애공흔평(吉之(䒑/衆)公欣平) ―길지는 관명이고 애공흔평은 인명이다.― 소사(小舍) ―관명만 있다.― 훼부비지(喙部非知) ―관명은 이지러졌고, 비지는 인명이다.― 사간조인사훼부윤(沙干助人沙喙部尹) ―사간조인은 관(官)이고 윤은 인명의 상단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진흥왕 순수 정계비(眞興王巡狩定界碑)가 함흥부의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몸가짐을 스스로 삼간다.[朕紹太祖之基 纂承王統 兢身自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방으로 지경을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맹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四方托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자년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한다.[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상고하건대, 초방원은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있는데, 방(坊)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황(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곧 방과 황의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황초령(黃草嶺)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嶺) 밑에는 원(院)이 있는데, 고금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草坊)으로, 혹은 초방(草方)으로, 혹은 초황(草黃)으로, 혹은 황초(黃草)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兪文翼公拓基)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金石錄)》 ―곧 비목(碑目)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三水草坊院眞興王巡狩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草坪院)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草坊)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紹) 자가 있으나, 상단(上段)이 이미 이지러져서 소(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朕紹太祖之基]”고 새기어, 소(紹) 자를 곧바로 짐(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王位)를 왕통(王統)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고 하였다. ―《문헌비고》에서 나온 말이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한 탁본(拓本)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說)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본기를 상고하건대, 진흥왕 16년인 무자년 겨울 10월에 북한산(北漢山)에 순수하여 봉강(封疆)을 개척해서 정하고, 12월에 북한산으로부터 오면서 경유하는 주군(州郡)에 모두 1년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니, 무자년은 과연 진흥왕이 함흥에 순수한 해이다. 그리하여 8월에 봉강을 정하고 10월에 북한산을 왔다가 12월에 환도(還都)한 것인데, 8월의 일만 유독 사서에 빠진 것일 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해 있을 때에 신라의 땅은 비렬홀(比列忽)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비렬홀은 바로 지금의 안변부이다. 그리고 삼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천정(泉井)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천정은 곧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함흥은 안변의 북쪽으로 2백여 리쯤에 있고, 단천(端川)은 함흥의 북쪽으로 3백 60리쯤에 있는데, 이 순수비를 가지고 본다면 단천 이남이 일찍이 신라 영토로 꺾여 들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유독 먼 변방의 편석(片石) 하나가 남아서 천고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하였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진흥왕 원년이 경신년이고 16년이 을해년이고 29년이 무자년이니, 여기에서 16년을 무자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진흥왕이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함흥에 봉강을 정한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사서에서 빠뜨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렇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이다. 지금 안변에서 함흥까지가 3백 10리이고 함흥에서 단천까지가 3백 80리이니, 도리(道里)를 논한 것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상의 것은 곧 구탁본비(舊拓本碑)의 하단이다. 이 탁본은 또한 빗돌이 꺾어져서 두 조각이 된 것이다. 그 흔적은 제1행의 순수(巡狩) 두 글자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제2행의 시이(是以) 두 글자 사이를 통과해서 죽 연하여 왼쪽으로 내려갔다. 또 제3행의 위(違) 자 아래, 우(又) 자 위와 제4행의 부(府) 자 아래, ‘寸’자 위와 제5행의 노(勞) 자 아래, 유(有) 자 위와 제5행의 충(忠) 자와 상대가 되는 제6행의 제14번째 빈칸을 통과하여 제7행의 훼(喙) 자 아래, 거(居) 자 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연결된 흔적이 있으니, 이는 빗돌이 꺾여서 생긴 틈이다.
또 제6행의 고(顧) 자 아래와 7행의 인(忍) 자 아래의 맨 끝까지와 제11, 12행의 맨 꼭대기와 애(哀) 자 아래와 조(助) 자 아래의 이지러진 것은 모두 종이가 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함흥에 있는 순수비의 상단(上段)이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京都)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곁의 비봉(碑峯)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이며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아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方簷)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 방첨이 밑에 떨어져 있다. 전액(篆額)이 없고 음기(陰記)도 없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행마다 몇 자씩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 아래로는 제6행의 상(賞) 자와 제8행의 사(沙) 자가 글자의 끝이 되었고, 위로는 현존한 제1행의 진(眞) 자가 가장 높은데 그 이상은 분별할 수가 없다.
전 비문 가운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沙)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제8행의 급간내대지(及干內大智)는 급간은 곧 관명이고 내대지는 곧 인명이다. 간남천군주사(干南川軍主沙)란 것으로 말하면, 간(干)은 바로 관명의 하단이니 아간(阿干)ㆍ잡간(迊干)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 탁본을 보건대, 간(干) 자의 윗자는 마치 잡(迊) 자인 듯하나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軍主)는 곧 도독(都督)이다. 《삼국사》 직관지에 “도독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 군주(悉直州軍主)로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이를 총관(總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登)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로 했다.” 하였으니, 외관(外官)으로 중대한 관직이다. 사(沙)는 바로 거주하는 부명(部名)의 상단이거나 혹은 인명의 상단일 것이다. 제9행의 대내□지(大奈□智)에서 대내□(大奈□)는 관명이다. 직관지에 대내마(大奈麻)ㆍ내마(奈麻) 두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바로 대내마인 것이다. 지(智)는 곧 인명의 상단이다. 차내(次奈)에서 차(次)는 곧 인명의 하단이요, 내(奈)는 바로 관명의 상단이니 반드시 내마(奈麻)일 것이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주D-001]육부(六部) : 신라 수도인 경주(慶州)의 행정 구역. 신라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육촌(六村)을 신라 유리왕(琉璃王) 때에 육부로 고쳤다고 하는데, 즉 알천 양산촌(閼川梁山村)을 양부(梁部)로,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육부에 각각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裵)ㆍ설(薛)의 육성(六姓)을 주었다고 한다

 

 

 

 

 

다산시문집 제4권
 시(詩)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여름철에 병들어 누워 있으려니 숨통이 꽉 막힌다. 한양에 있는 누각과 정자들, 바람이 소 리내며 문으로 솔솔 들어오던 일들이 그리워 왁하고 소리 지르며 발광을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 옛날을 생각하고 지금의 현실을 슬퍼할 때 옛날 두보(杜甫)가 가을을 흥겨워했던 그 뜻을 잊을 수가 없다 하겠다.
창의문 앞에는 돌길이 뚫려 있고 / 彰義門前石逕通
삼각산 봉우리가 중천에 꽂혀 있지 / 華峯三角揷天中
시냇물 돌아흘러 마음까지 시원하고 / 回溪不斷澄心水
높다란 버드나무 시원한 바람 불었는데 / 高柳長吹拂面風
명사들이 잔치 열어 국가 기상 결정짓고 / 名士開筵關氣象
영왕이 칼 씻은 곳 영웅호걸 따로 없지 / 寧王洗劍想豪雄
지금은 장독 서린 오랑캐 접경에 / 如今瘴熱鰕夷界
낮은 처마 대에 막히고 햇빛만 이글거리네 / 竹壓矬檐海日紅
이는 세검정(洗劍亭)을 읊은 시다. 세검정은 창의문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음.
성을 끼고 길게 뻗은 서교로 가는 길 / 西郊馳道夾城長
한여름에 그 길 따라 시원한 참에 댈라치면 / 朱夏追隨趁晩涼
사통오달 덩그런 집 깊은 골에 열려 있고 / 四達軒楹開僻巷
한 무리 말 탄 손님 꽃못에 비치느니 / 一群鞍馬照芳塘
사대에 날 다스워 잔디싹이 푸르르고 / 射臺日煖莎苗綠
어함에 부는 미풍 연꽃이 향기로워 / 魚檻風微菡萏香
오얏 담그고 외 띄우고 웃으며 즐기다가 / 沈李浮瓜欣笑傲
언제든지 석양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지 / 常時歸影逼斜陽
이는 천연정(天然亭)을 읊은 시다. 천연정은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음.
유하정이 중간에는 근신들에게 귀속되어 / 中歲流霞屬近臣
하얀 담에 화초들이 봄을 서로 시새웠지 / 粉墻花木媚靑春
용산에 비단 돛대 한도 없는 풍류였고 / 龍山錦帆風流遠
봉각의 황금패는 새로운 제도였어 / 鳳閣金牌制度新
묵은 약속 자연히 오징어 먹물 되어버려 / 宿約自然成鰂墨
마음이야 누구인들 농어 순채 생각 없으리 / 本心誰不憶鱸蓴
막다른 골에 유락한 신세 먼지나는 바닷가 / 窮荒落跡塵生海
고국 산천 생각하니 눈물이 수건 적시네 / 故國回頭淚滿巾
이는 유하정(流霞亭)을 읊은 시다. 유하정은 광희문(光熙門)에서 10리 거리인 두모포(豆毛浦) 가에 있는데, 선왕조 때에 그것을 내각(內閣)에 귀속시켜 용산 독서당(龍山讀書堂)으로 쓰게 했던 고사가 있음.
바위도랑 서쪽에 자그마한 서향각 / 書香小閣石渠西
밤마다 동쪽 벽에 별들이 나직하다네 / 東壁星辰夜夜低
언제나 자색 안개 용호 기운 서려 있고 / 紫霧常留龍虎氣
푸른 못은 봉황이 와 놀도록 하였다 / 碧池曾許鳳凰棲
옥섭을 보노라면 님의 얼굴 떠오르고 / 恭瞻玉躞天顔近
특별히 주신 상아 첨대 님이 손수 쓰신 거였지 / 密降牙籤御手題
듣기에 화영전을 새로 또 지었다는데 / 聞道華寧新象設
유대 앞 길가에는 풀빛이 무성하리 / 乳臺前路草萋萋
이는 서향각(書香閣)을 읊은 시다. 서향각은 춘당대(春塘臺) 북쪽에 있는데 내부(內府)의 서적과 어진(御眞)을 모셔둔 곳이고, 화영전은 화성(華城)에 있는데 역시 어진을 모셔둔 곳임.
파릉의 물빛이 검천까지 닿아 있고 / 巴陵水色接黔川
강 위의 붉은 누각 반공중에 솟아 있지 / 江上朱樓落半天
버드나무 밖에는 조군이며 돛대뿐이요 / 漕步帆檣煙柳外
들창 앞에 보이는 것 어촌이요 섬이었다 / 漁村洲嶼綠窓前
은대의 직책으로 난여 따라 가보았고 / 銀臺職從鸞輿日
아버지 교훈 받던 시절 지부관으로 오셨었죠 / 地部官臨鯉對年
님 계신 곳 아득하고 어버이도 아니 계셔 / 弓劍杳然風樹隕
객상에서 읊는 시에 눈물이 왈칵 솟네 / 客牀吟眺重汪然
이는 읍청루(挹淸樓)를 읊은 시다. 읍청루는 숭례문(崇禮門) 밖 10리 거리에 있는 용산(龍山) 위에 있는데, 선인(先人)께서 호부(戶部)에 계실 때 그 누각에 한 번 오르신 일이 있고, 왕조 시절 대가(大駕)가 거기 가실 때는 내가 또 승지(承旨)로서 호종(扈從)했던 일이 있었음.
노량진 작은 토성 강을 띠고 쌓여 있고 / 露梁津堡帶江橫
구불구불 연로가 화성까지 닿아 있지 / 輦路逶迆接華城
물가 언덕 정자 하나 구름 일어 장막 되고 / 水岸亭孤雲幕起
바다에 돛 사라지면 그림다리가 놓여졌지 / 海門帆落畫橋成
님 탄 수레 움직이려면 화살 셋이 날았으며 / 鸞鑣欲動飛三箭
타고가 울리면서 두 곳 영도 풀리었지 / 鼉鼓交鳴解兩營
병조에 있으면서 님의 행차 모셨을 때는 / 憶忝兵曹陪羽衛
내반에서 편미 들고 기둥 앞에 섰었건만 / 內班鞭弭列朱楹
이는 망해정(望海亭)을 읊은 시다. 망해정은 노량진에 있는데, 선왕께서 화성(華城)에 행차했다가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 정자에서 조금 쉬었다가 배에 오르곤 하였음.
서쪽으로 호문 나서면 북영이 거기 있고 / 虎門西出北營深
주합루를 동으로 보면 왕기가 서려 있어 / 宙合東瞻御氣臨
복도 밑을 흐르는 시내 대낮에도 요란하고 / 閣道溪聲喧白日
황단 주위 나무들은 녹음이 짙었었지 / 皇壇樹色暗濃陰
사장을 자주 열어 능피도 옮겨오고 / 數開射埒移綾被
곁에다는 서루 지어 한림으로 삼았었다 / 旁起書樓作翰林
연꽃에 늘 취해서 못가에 가 누웠었는데 / 每醉藕花池上臥
서글프게 동쪽 끝 바닷가에서 읊노라네 / 傷心扶木海邊吟
이는 군자정(君子亭)을 읊은 시다. 군자정은 요금문(耀金門) 밖에 있는데 황단(皇壇)ㆍ주합루(宙合樓)와 마주보고 있으며 거기가 바로 북영(北營)임.
인왕산이 비스듬히 세심대를 끼고 있어 / 仁王斜抱洗心臺
님 수레가 일년 일차 꽃구경을 오셨다네 / 玉輦看花歲一廻
구름이 산을 막아 그대로 막차이고 / 雲擁翠微開幕次
꽃시내를 흐르는 물 술잔 띄우기 알맞아 / 水流芳澖汎觴杯
고요한 이빈의 궁 드문드문 버들이요 / 李嬪宮靜垂疎柳
깊숙한 서씨 정원 매화가 비쳤었지 / 徐氏園深映遠梅
독보라는 휘호를 지척에서 하시면서 / 咫尺揮毫稱獨步
몇 번이고 님께서 이 비재를 인정했는데 / 幾回天語獎菲才
이는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시다. 세심대는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있는데 그 아래 선희궁(宣禧宮)이 있음.


 

[주D-001]명사들이 …… 결정짓고 : 세검(洗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앞두고 김유(金瑬)ㆍ이귀(李貴) 등이 그곳에 모여 거사(擧事)를 모의한 다음 그 물에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기에 한 말임.
[주D-002]영왕 : 하늘의 명을 받아 국가를 안정시킨 왕. 여기서는 인조(仁祖)를 말한 것.
[주D-003]황금패 : 규장각(奎章閣)에서 쓰는 부신(符信). 나무조각에 금물을 도금하여 만든 패. 규장각을 출입할 때 쓰여졌음.
[주D-004]농어 순채 생각 없으리 : 향수(鄕愁)는 사람마다 다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진(晉)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음. 《晉書 張翰傳》
[주D-005]편미 : 말채찍과 꾸미지 아니한 활. 왕의 행차 때 쓰던 도구들임.
[주D-006]능피 : 능견(綾絹)으로 만든 이불. 상서랑(尙書郞)으로서 입직(入直)한 사람에게 푸른색 비단 이불을 제공했다고 함. 《漢官典職儀》

 

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동사(東事)
지승(地乘) 처음에는 지림(誌林)이라 했다가 지승으로 고쳤다. 글의 체재는 대체로 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에 바탕하였으며, 예의와 선속(善俗)을 중시했다.


조선 구역(九域)의 땅은 연(燕)ㆍ제(齊) 밖에 있는데 동ㆍ남ㆍ서는 대해(大海)에 접하였고 북은 말갈(靺鞨)에 연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의 땅 7백 리를 잃어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으니, 남북으로 3천 리이며 동서로 1천 리이다. 풍기(風氣)가 다르고 성음(聲音)ㆍ복식(服食)ㆍ기욕(嗜欲)이 중국의 풍속과 같지 않으니 대개 방외(方外)에 있는 별개의 나라이다.
상고 시대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와 삼한(三韓)ㆍ사군(四郡)ㆍ이부(二府)를 거치면서, 삼국 시대에 이르러 변한(弁韓)ㆍ마한(馬韓)은 백제에 병합되었고, 진번(眞番)에서는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 임둔(臨屯)과 이맥(夷貊)의 땅을 모두 신라에 병합하였으며, 낙랑(樂浪)은 고구려에, 현도는 요동에 각각 병합되었다.
고려가 삼한의 땅을 전부 차지하여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ㆍ강남(江南)ㆍ영남(嶺南)ㆍ영동(嶺東)ㆍ산남(山南)ㆍ해양(海陽)ㆍ삭방(朔方)ㆍ패서(浿西)의 10도(道)로 나누었다. 뒤에 이를 고쳐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교주(交州)ㆍ서해(西海)ㆍ동계(東界)ㆍ북계(北界)라 하였다.
우리 태종(太宗) 13년(1413)에 경기(京畿)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강원(江原)ㆍ함길(咸吉)ㆍ평안(平安)ㆍ황해(黃海)의 8도로 정하니, 주(州)ㆍ군(郡)ㆍ현(縣)도 이에 의하여 달리 바뀌었으며, 산천의 경계를 달리하고 읍(邑)ㆍ리(里)를 구분하여 백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에 가요가 다르게 되었다.
남방에는 조류(鳥類)가 많고 북방에는 짐승이 많은데 이는 풍기 때문이며, 산협(山峽)은 습속이 순박하고, 이득을 노리는 백성들이 약삭빠른 것은 습성이 그러하여서인 것이다. 동방은 기(氣)가 편박(偏薄)하여 조급하고 경솔하니 변치 않는 마음이 없음도 대체가 모두 그러한 풍기 때문이다.
왕성(王城)은 기내(畿內) 땅으로 본래 마한의 지역이다. 동북은 옛 맥(貊) 땅이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華城) 수원(水原) 지방)에서는 경석(磬石)이 나왔고 해변으로는 염분이 많은 땅이며, 토질(土質)은 벼를 심기에 적당하다. 맥서(貊西 강원도 서북 지방)에서는 콩과 조가 3할이나 산출된다. 왕성이 임금의 손으로 세워졌는데 실제 백제 때에는 남평양(南平壤)이었고, 고려 때에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왕이 번갈아 살기를 다섯 번 하면서 백성들이 모여든 곳이다.
백성들의 습속은 꼼꼼하고 인색하며 여자들의 길쌈 솜씨가 훌륭하여 옷ㆍ신발ㆍ관디를 잘 만들었다. 사방에서 몰려와 만융(蠻戎)들이 복종하였다. 나라의 제도로 유술(儒術)과 시서(詩書)를 존중하여 선비를 가르치니, 예악(禮樂)의 풍이 있었다.
개경(開京)은 선비와 여자들이 흰옷을 입었으며 성률(聲律)을 숭상하니, 이는 고국(古國)의 풍이었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호걸(豪傑)과 대족(大族)들을 이사시켰다. 따르지 않아 금고된 자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세공(世工)과 세상(世商)이 있어, 중개인이 교역을 하였다. 예부터 풍속이 부처를 섬겨 성품이 인유(仁柔)하고 살생을 싫어하였다. 오강(烏江) 서쪽 앙암(仰碞 장단(長湍) 부근에 있음)에 고려 왕의 사당이 있다. 덕진(德津)은 신라의 북독(北瀆)이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화산(華山)이라 하고 중악(中嶽)의 제사를 지냈다.

인조(仁祖) 14년(1636) 남한산(南漢山)에 온조(溫祚)의 사당을 세웠다.

패서(浿西 평안도의 옛 이름)는 조선의 고지(古地)로 그 별[星]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분야(分野)이며 그 자리[次]는 석목(析木)이다. 예맥(獩貊)과 고구려와 현도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북쪽의 여연(閭延 평북 구성(龜城))과 우예(虞芮 평북 강계(江界))는 말갈에 연하였다. 산출되는 곡물(穀物)로는 굵은 기장과 잔 기장이 있으며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삼(蔘)ㆍ칠(潻)ㆍ동(銅)ㆍ철(鐵)ㆍ피혁(皮革) 등이 있다. 바닷가에서는 벼를 식량으로 하였고 생선과 소금을 팔았다. 용만(龍灣 평북 의주(義州))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며 물화(物貨)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다.

평양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주(周) 나라 때에 기자를 봉한 곳이다. 기자의 가르침이 예속(禮俗)을 중히 여겨 귀신을 공경하고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종사하는 업에 안락하였다. 고구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여 풍속이 굳세고 날래게 되니, 힘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궁시(弓矢)와 도모(刀矛)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평양에는 단군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이 있고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토산(兔山)에는 기자총이 있으며 강동(江東)에는 단군총이 있다. 패강(浿江 대동강)은 나라의 서독(西瀆)이어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변(寧邊)은 우발수(優渤水) 가의 가섭원(迦葉原)에 있으니, 북부여(北扶餘) 해부루(解夫婁)의 땅이었다. 성천(成川)은 옛 비류(沸流)의 나라로 동부여라고도 하였다. 단군세가에 보인다.

서해(西海 황해도의 옛 이름)는 고조선의 남쪽 경계였다. 지금은 왕기(王畿) 밖의 무(武)를 숭상하는 땅으로, 동쪽은 맥 땅에 연하였고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염(鹽)ㆍ철(鐵)과 해산물이 있고 곡물로는 벼 2종과 숙속(菽粟) 5종이 난다.
우리 세종(世宗) 때 해주(海州)에서 기장[秬黍]이 나왔는데, 한 알의 크기가 1푼(分)이었다. 9촌(寸)이 황종(黃鍾)의 길이여서 3푼씩을 덜고 더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고려 때에는 태사(太師) 최충(崔冲)이 구재(九齋)를 두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는데 그 구재는,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염주(鹽州)ㆍ남지(南池)ㆍ장연(長淵)ㆍ사정(沙汀)ㆍ장산(長山) 등의 고을이 있는데 장산은 나라에 소용되는 목재가 산출되는 곳이다. 도서(島嶼)로는 백령(白翎)ㆍ대청(大靑)ㆍ소청(小靑)이 있다. 유주(儒州)와 아사달(阿斯達 구월산 부근)에서는 환인씨(桓因氏)와 신시(神市)와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 당장경(唐藏京)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사》에 단군씨의 국도라 하였다.

중원(中原 충청도 지방)과 하남(河南)은 마한(馬韓)의 땅으로, 백제 온조(溫祚)에 의해 병합되었는데,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고 동쪽은 높은 산맥에 막혀 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으며, 이 지방 특산물로는 해산물과 임(林)ㆍ칠ㆍ대추ㆍ감ㆍ목면(木綿)ㆍ모시[苧布]ㆍ구리[銅]ㆍ철(鐵) 등이 산출되고, 태원(太原)에서는 유황(琉黃)이, 서주(西州 서천(舒川))와 소태(蘇泰 태안(泰安))에서는 죽전(竹箭)이 산출된다. 풍속은 검색(儉嗇)하며 부인(富人)들이 많았고, 산협의 습속은 화전(火田)을 일구어 조를 심었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바탕이 거개가 좋다.
상당(上黨 청주(淸州))에서는 호걸 준재들이 나왔고, 웅주(熊州) 공주목(公州牧) 에서는 옛 풍속으로 남자는 쟁(箏)과 피리를 연주하고 여자는 노래하며 북을 쳤는데, 백제의 유풍으로 부강하였던 여속(餘俗)들이다. 대체로 강하고 날랜 것을 숭상하여 싸움을 잘하였다.
하남(河南) 위례(慰禮)는 온조의 고도(古都)인데 여기에 온조의 사당이 있다. 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때에 이르러 남평양(南平壤 즉 한산(漢山)을 말함)에서 웅주(熊州)로 천도하였고 명농(明禯 백제 26대 성왕(聖王))이 즉위하여 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웅진(熊津)에는 나라의 남독(南瀆)이 있어,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소태(蘇泰) 지금의 태안군이다. 서쪽에 있는 도서로 상산도(上山島)와 북파도(北波島)가 있으며 그 밖으로 전횡도(田橫島)가 있다.

강남(江南)과 해양(海陽) 강남은 지금의 전주이고, 해양은 지금의 광주이다. 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 서남쪽이 바다에 접하였다. 소금ㆍ철ㆍ해산물ㆍ귤ㆍ유자ㆍ치자ㆍ비자(榧子)ㆍ죽전(竹箭)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해안 습속이 농사에는 힘쓰지 않고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쌓아 두는 법이 없다. 강남에서는 닥나무ㆍ칠(潻)ㆍ매실ㆍ석류(石榴)ㆍ왕골ㆍ모시ㆍ파초ㆍ생강ㆍ짚ㆍ연[荷]ㆍ울금(鬱金) 등이 산출된다.
금마(金馬 익산(益山))에서는 순후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니, 고국(古國)의 유풍이며, 김제(金堤)에는 5개의 거독(渠瀆)이 있어 논 9800결(結)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전주(全州)는 강해(江海)의 도회(都會)이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이해에 밝아 백성들이 순박하지 못하다. 대방(帶方 남원)은 사람들이 날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숭상하였다.
청거(淸渠) 지금의 용담현(龍潭縣)이다. 의 동쪽 지방은 백성들이 질박하여 꾸밈이 적었으며, 도토리와 상수리를 길렀다. 승라(昇羅) 승평(昇平)과 나주(羅州) 는 풍속이 부려(富麗)한 것을 숭상하였고 남자답게 씩씩한 것과 특출나게 기운 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담주(潭州) 담양부(潭陽府) 에는 준재(俊才)가 많다고 한다.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군)에서는 옛 풍속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는데, 거기서 서약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 친구 간에 신용이 없는 자, 나라의 정사를 헐뜯는 자, 관리에게 불손한 자는 모두 내쫓고, 덕업(德業)에 힘쓰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환난(患難)을 구휼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어, 두터운 데로 함께 돌아가자.”
하고는, 모두 재배(再拜)하고 나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술을 마신다. 대체로 금마(金馬) 이남에서는 무당, 광대, 요사스러운 기예[淫技]와 여러 가지 놀이를 좋아하였다.
군산(群山 만경현(萬頃縣)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 주위가 60리 되는 섬이며 후미진 곳이 있다. 변산(卞山)에서는 궁실(宮室)과 주거(舟車)를 만드는 데에 소용되는 목재들이 산출되고, 나주(羅州)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대방(帶方) 남원부(南原府) 에는 남악사(南嶽祠)가 있다. 《상서(尙書)》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祭祀) 지낼 때, 오악(五嶽)은 삼공(三公)에, 사독(四瀆)은 제후(諸侯)에, 그 나머지는 백(伯)ㆍ자(子)ㆍ남(男)에 준하는 예로 한다.”
하였다. 이는 그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변두(籩豆 제기)와 작헌(爵獻)의 수를 말함이다. 제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 안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낸다.
《예기(禮記)》에 “삼왕(三王)이 내[川]에 제사할 때 모두 하(河)에 먼저 하고 뒤에 해(海)에 한다.” 하였다. 그래서 진인(晉人)은 하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호지(惡池)에 먼저 하였으며, 제인(齊人)은 태산(泰山)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배림(配林)에 먼저 하였다. 종사(從祀 덧붙여 지내는 제사)에 먼저 고하는 것은 대신(大神)을 높이고자 해서이다. 산천(山川)에 제사할 때 해악(海嶽)을 가장 높이는데, 지금 사독(四瀆)에는 중사(中祀)를 하면서 해악에는 소사(小祀)를 함은 예를 잃은 처사라 하겠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로 폭이 4백 리인데, 곡식으로는 보리ㆍ기장ㆍ차조가 잘 된다.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가난하며, 사람들은 미련하고 순박하며 습속은 검소하다. 3대 2의 비율로 여자가 많고 대부분 오래 산다. 좋은 말이 나고 감귤(柑橘)ㆍ대모(玳瑁)ㆍ진주[蠙珠]ㆍ치자나무ㆍ박달나무가 산출된다. 신라 때 고후(高厚)라는 자가 내조(來朝)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받았다. 고려 초에 와서 제주(濟州)를 설치하였다.

대령(大嶺 대관령)의 남쪽은 옛 진한(辰韓)의 땅으로 예맥(獩貊) 남쪽에 있는데 신라가 나라를 천 년 동안 이어오면서, 정전법(井田法)을 개시하고 국학(國學)을 세우며 사전(祀典)을 찬수(撰修)하고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의 구결을 지었다. 풍속이 순후하고 예양(禮讓)을 알아, 군자의 나라로 불려졌다. 동남쪽은 바다에 접하였고 서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으며,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생선ㆍ소금ㆍ동ㆍ철ㆍ은ㆍ돌ㆍ닥나무ㆍ칠ㆍ죽전ㆍ매실ㆍ귤ㆍ석류 등이 있다. 장산(萇山 지금의 동래(東萊))에서는 일본과 통상하여 만이(蠻夷)의 여러 가지 물화(物貨)를 사들였다.

낙랑(樂浪 경주의 옛 이름)은 오래된 나라의 옛터다. 토양(土壤)이 기름져 수확이 다른 데에 비하여 배나 되며 부자들이 많다. 검소함을 숭상하며 물자가 많고 풍요하여 상점들이 즐비하게 시장이 섰다. 패서(浿西)의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한 것에 비견하여 낙랑을 동경(東京)이라 칭하였다.
진양(晉陽 진주)은 사치와 부를 숭상하였고 경산(京山 성주)은 여공(女工)이 우수하였으며 영해(寧海)는 명주실과 오동나무가 유명하였으니, 이 모두가 부유하였던 낙랑의 여속(餘俗)이다. 왕왕 현인(賢人)들의 교화(敎化)가 있어 인(仁)과 의(義)를 흠모하며 선속(善俗)을 편히 여기고 나쁜 짓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산협 가까이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힘써 밭갈이하고 절약하여 종자와 식량을 쌓아 두었다. 바닷가 풍속은 거칠며 염치가 적었고 무당의 저주하는 일을 숭상하였다. 북악(北嶽)ㆍ송얼(松孽)ㆍ빙혈(氷穴)ㆍ조천(潮泉)ㆍ합포(合浦)ㆍ월영(月影)이 있는데, 그 거리는 9072만 8천 척 남짓하다. 낙랑에는 혁거세(赫居世)와 사소(娑蘇 혁거세의 모)의 사당이 있으며 섬으로는 염전도(鹽田島)와 절영도(絶影島)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좋은 말이 나왔다. 그 밖으로 대마도(對馬島)가 7백 리 거리에 있다.

교주(交州) 회양부(淮陽府) 의 동쪽 경계는 옛 예맥의 땅인데, 옥저에서 고구려까지이고 남쪽은 모래바다[沙海] 천 리에 접하였으며, 서쪽은 맥 땅인데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나는 곡식은 콩ㆍ보리ㆍ굵은 기장ㆍ잔 기장이며, 평원에서는 벼를 심어 축적하였고, 해변에서는 물고기와 소금을 팔았다. 큰 못이 많아 고둥[螺]과 대합[蛤]을 먹었다. 해안 지방에서는 죽전(竹箭)이 많이 났고 산협(山峽) 가운데에서는 사(絲)ㆍ마(麻)ㆍ임(林)ㆍ칠(漆)ㆍ삼(蔘)ㆍ당귀[歸]와 여러 가지 약재(樂材) 및 자단(紫檀)이 산출되었다. 맥 땅의 풍속은 어리석고 기욕(嗜欲)이 적으며 염치를 알아,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선(旌善)은 효제(孝弟)의 고을이라 불렸고, 명주(溟州)는 예국, 수춘(壽春 춘천)은 맥국의 땅이다. 양양(襄陽)에는 해상(海上)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평원(平原 원주) 치악산(雉嶽山)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동주(東州 철원) 풍천원(楓泉原)은 궁예(弓裔)가 웅거하던 곳으로, 넓은 들이 3백 리에 사방이 막혀 험조가 많고 탁천(濁川)이 있다. 울진(蔚珍)에서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는 울릉(鬱陵)과 우산(于山)이 있다.

삭방(朔方 함경도)은 옥저 땅으로,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 개마(盖馬)에 있는데 동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 북으로 읍루(挹婁)에서 남으로 예맥까지 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나 강건하고 날래며 이해(利害)에 밝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특산물로는 어염(魚鹽)ㆍ사(絲)ㆍ마(麻)ㆍ피혁ㆍ은(銀)ㆍ석(石)ㆍ유황(琉黃)이 있다. 북방에는 좋은 말이 많다. 옥저는 셋이 있는데, 동옥저ㆍ북옥저ㆍ남옥저이다.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의 별칭) 북쪽에 있는 옛 숙신(肅愼)의 땅이다. 땅이 비옥하여 밭곡식이 잘되었으며, 용력(勇力)을 숭상하였다. 추운 지대여서 굴속에서 살았다. 활의 길이가 5척이며 호시(楛矢)와 석촉(石鏃)은 8촌이다. 옥저와 풍속이 같다.
말갈 지역에 있는 삭방(朔方)ㆍ함관(咸關) 이북은 고려 때 동여진(東女眞)이 웅거하던 곳이었는데, 이를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토벌하여 쫓아냈다. 뒤에 화주(和州) 이북이 배반하여 원(元) 나라로 들어가자, 유인우(柳仁雨)가 쳐서 평정하고 다시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예주(預州)ㆍ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의주(宜州)의 8주(州)를 두었다. 또 뒤에 이들은 원 나라에 몰락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경을 정할 때 두만강(豆滿江)으로 경계를 삼아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의 7주를 두었다.


 

[주C-001]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 : 지원은 《관자(管子)》의 편명이고, 화식전은 《사기(史記)》의 편명이다. 모두 인문 및 경제의 지리서이다.
[주D-001]북독(北瀆) : 나라에 4독이 있다. 남독은 웅진(熊津)이니 지금의 공주(公州)이며, 중독은 한강(漢江)이며, 서독은 덕진(德津)이니 장단(長湍)에 있는데 이것이 신라 때의 북독이었다. 《東國輿地勝覽》
[주D-002]중사(中祀) : 풍운뇌우악해독(風雲雷雨岳海瀆) 및 공자(孔子) 사당(祠堂), 역대 시조(歷代始祖) 등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분하여 사전(祀典)에 실어 놓았는데, 대사는 종묘(宗廟)ㆍ영녕전(永寧殿)ㆍ사직(社稷)에 지내는 것이고 소사는 마조(馬祖 천사성(天駟星)의 별칭)ㆍ선목(先牧 처음 말을 먹인 사람)ㆍ마사(馬社 처음으로 말을 탄 사람을 배향한 곳)ㆍ마보(馬步 마신(馬神)의 이름)ㆍ영성(靈星)ㆍ노인성(老人星)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大典會通 禮典》
[주D-003]중악(中嶽) : 나라에 4악이 있었는데, 남악은 지리산, 중악은 삼각산, 서악은 송악산, 북악은 비백산(鼻白山)이다. 《東國輿地勝覽》
[주D-004]황종(黃鍾) : 음률(音律)의 이름으로 12율의 하나이며 육률 육려(六律六呂)의 기본음이다.
[주D-005]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 온조는 백제의 시조이고 문주는 백제의 22대 왕이다. 그 상거가 5백여 년인데 ‘온조의 3대인 문주’라 함은, 원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6]5개의 거독(渠瀆)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5개의 봇도랑으로, 수여(水餘)ㆍ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ㆍ유통(流通)이다. 《東國輿地勝覽》

백사집 제1권
 시(詩)
돌아가는 길에 아차령(峨嵯嶺)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고 슬픈 생각에 이 시를 짓다.


서쪽 하늘 저문 빛은 이미 어둑어둑한데 / 西天暮色已蒼然
눈물 흘리며 고향 산 석양 가에 들어왔네 / 淚入鄕山落日邊
읊조리며 진암에 기대 멀리 눈 놀리어 / 嘯倚震巖遊遠目
삼각산 아래 만 가호의 연기를 기꺼이 보노라 / 欣瞻華下萬家煙


백사집 제1권
 시(詩)
성남(星男)이 역옥(逆獄)에 걸려들어 아비만 혼자 살 리가 없으므로 동문 밖에서 십구 일 동안 명을 기다리다가 일이 풀려서 즉일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슬피 읊조리다 보니, 말이 순서가 없다.


낯을 쳐드니 천지는 크기도 하고 / 仰面乾坤大
가슴을 여니 일월처럼 밝기도 해라 / 披襟日月明
삼각산은 예전대로 푸른데 / 三山碧依舊
가을빛이 주렴에 가득하구나 / 霜色滿簾旌

옛 시렁엔 엉긴 먼지가 고요하고 / 舊架凝塵靜
새 막걸리엔 축하객이 자주 드누나 / 新醪賀客頻
인하여 격양가의 흥취를 찾아서 / 因尋擊壤興
길이 요 임금 축수하는 백성이 되리 / 長作祝堯民
화복을 받는 건 몸이 있기 때문이니 / 禍福緣有身
몸이 없으면 재앙이 어디서 기인하랴 / 無身禍誰因
도잠은 능히 이 이치를 알았기에 / 陶潛能解此
조화를 타고 일찍 진으로 돌아갔네 / 乘化早歸眞


백호전서 제1권
 부(賦)
동정부(東征賦) 임자년


애석하게도 나이 늙고 날로 쇠해가는 나 / 惜余年老而日衰兮
한 해가 저물면 마음 더 안 좋다네 / 歲晼晩而志不平
주공 꿈꾸는 공자도 아닌데 / 非魯叟之夢周兮
무슨 상 나라 자탄하는 기자일 것인가 / 豈箕父之咨商
갑자기 이는 가을소리에 / 秋聲忽以動容兮
하늘은 텅 비고 초목들 빛 누르네 / 天宇廓兮草木黃
바람 불어와 옷깃에 나부낄 때면 / 風飄飄而振袂兮
흰구름 따라 거닐어보기도 했지 / 從白雲而相羊
봉래산 지향하여 가자고 하니 / 指蓬萊而言邁兮
산이 겹겹으로 푸르르기만 하네 / 山萬重兮蒼蒼
검푸른 바위산 따라 발길을 옮기니 / 遵紺岳以前途兮
신패가 휘날리고 있는 듯 느껴지고 / 想神旆之飛揚
반곡에 가 노자 소식 물어보니 / 問老子於盤谷兮
흰털 눈썹에 깡마르고 가벼운 몸매라네 / 厖眉皓兮瘦骨輕
높고 가파른 보개산을 지나 / 過寶蓋之巉巗兮
북관에 올라서 고금 흥망 굽어보고 / 登北觀而吊興亡
짧은 비문을 부여에서 읽고는 / 讀短碣於夫如兮
진도가 목숨 바친 것 슬펐다네 / 哀哉陳陶之致命
마니산에 앉아 장탄식을 하면서 / 坐摩尼而長息兮
험준한 산에 눈여겨보노라니 / 迎岳色之嶒嶒
비천을 박찬 쏜살같은 물이 / 凌飛川以高擧兮
명연에 모여 맴돌고 있네 / 集鳴淵而翺翔
웬 적들은 저리도 많을까 / 何梵宇之怒起兮
임금 덕화가 옛만 못한 탓이겠지 / 嘆帝德之衰降
험한 바윗돌 부여잡고 위로 또 위로 / 攀岧嶢而上出兮
정양산 꼭대기에 올랐더니 / 陟正陽之崇崗
비로봉 높아높아 뭇 향기가 감도는 듯 / 毗盧卓兮衆香蔚
골마다 파인 글들 휑뎅그렁하네그려 / 穴網峻兮永閬谹
대관령까지 싸잡아서 한 덩어리로 되어 있고 / 據關嶺而磅礴兮
동해바다 손에 잡힐듯 휭 둘러 장관이로세 / 挹溟涬而穹聳
어쩌면 이리 보기 좋게 울울창창할까 / 夫何鬱葱而成章兮
온통 붉은 잎에 향기로운 덩굴들 / 紛赩葉與蔓馨
한밤중이면 해맑은 기운 솟고 / 存皥氣於中宵兮
이슬기운 들이마셔 창자를 씻는다네 / 吸沆瀣而嗽腸
천을성 바라보며 휘파람 불고 / 臨天乙而舒嘯兮
동서남북 거침없이 마음을 펼쳐보네 / 撫四極而揚靈
기기묘묘 이 무슨 조화속이런가 / 何造化之逞奇兮
만 가지나 되는 꽃들 형용할 수가 없네 / 噫有萬之難狀
처음에 보고서는 놀라 자빠졌다가 / 始屬目而駭惑兮
지팡이에 기대 서서 하나하나 보았더니 / 徐倚杖而騁望
어떤 놈은 나서서 가는 놈도 있고 / 或出以去兮
어떤 놈은 돌아왔다 가는 놈도 있고 / 或還以往
어떤 놈은 걸터앉아 있기도 하고 / 或蹲以踞兮
어떤 놈은 도망가다 넘어진 놈도 있고 / 或走而僵
어떤 놈은 암컷처럼 엎드려 있고 / 或雌而伏兮
어떤 놈은 수컷같이 꿋꿋하고 / 或雄以彊
어떤 놈은 우뚝 서 있기도 하고 / 或峙以立兮
어떤 놈은 그냥 내닫기도 하고 / 或馳以騁
어떤 놈은 끄떡않고 무게 있어 보이기도 하고 / 或安重以難危兮
어떤 놈은 대들 수 없을 만큼 존엄해 보이기도 하고 / 或尊嚴以難抗
어떤 놈은 깎아지른 듯 혼자 높이 서있기도 하고 / 或戍削而孤高兮
어떤 놈은 우뚝 서서 서슬이 멀큼한 놈도 있고 / 或穹竦而兢稜
어떤 놈은 현무가 되어 도사리고 있기도 하고 / 或爲玄武而蚪蟠兮
어떤 놈은 곰과 표범처럼 사나워 보이기도 하네 / 或爲熊豹而獷獰
굼틀굼틀 굼틀거리는 놈 / 蟉以蜿蜒兮
흘긴 눈으로 내리보고 치보는 놈 / 倪以俯仰
입 오물거리며 물에서 노는 놈 / 喁以游泳兮
쌍쌍으로 날아 공중을 오르내리는 놈 / 翩以頡頏
말이 달 속에서 나와 / 神駒出乎月窟兮
구름을 밟고 마냥 달려가는 듯 / 躡雲氣而長驤
봉이 천 길 높이에서 날다가 / 威鳳翔于千仭兮
덕이 빛나는 곳 발견하고 날아오는 듯 / 覽德輝而來騰
또 어찌 보면 왕의 대가가 나갈 때 / 又若王者之駕出兮
백관들 모두가 뒤따라 가는 듯 / 而百職咸從
대장이 장단에 올라 있고 / 大將登壇兮
삼군이 명령을 듣고 있는 듯 / 而三軍之聽命
문채 찬란하고 경건한 태도인가 하면 / 匪匪翼翼兮
한가로워도 보이고 통실통실한 듯도 해 / 閼閼龐龐
이글이글 곤륜산 집어삼키는 불길 같기도 하고 / 熛熛然如崑崗之烈炎兮
용솟음치는 큰 바다의 성난 파도 같기도 하고 / 洶洶然如巨海之濤浪
덩실하기 당 나라의 공덕비 같은 것도 있고 / 崇崇如唐室之天樞兮
우뚝하기 한 나라 구리기둥 같은 것도 있고 / 矗矗如漢帝之金莖
붉은 구름 자색 무지개가 상제 거실을 호위하고 있는 듯 / 如彤雲紫霓之衛帝居兮
표범꼬리로 장식한 기가 천자 행렬의 의장으로 서 있는 듯 / 如豹尾罕旗之扈天仗
명당에 모여 있는 홀기같이 옹기종기 파기도 하고 / 如明堂之圭笏峩峩兮
궁궐 뜰에 있는 종정같이 쟁글쟁글 소리도 나고 / 如大庭之鍾鼎嶈嶈
태액지 맑은 물에 피오르는 연봉오리 같은 것도 있고 / 如太液淸波之天開菡蓞兮
장양 큰 사냥 때 별처럼 늘어섰던 크고 작은 도끼 같은 것들도 있고 / 如長揚大蒐之星陳戚揚
태고의 눈이 그대로 쌓여있듯이 새하얀 것도 있고 / 皓皓焉如留太古之素雪兮
뭉글뭉글 신선에게서 받은 현상같이 생긴 것도 있네그려 / 積積焉如受寒門之玄霜
또 요순 시절 읍양의 풍속같이 / 又如唐虞之揖讓兮
온화하고 명랑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 穆穆皇皇
탕과 무왕이 정벌할 때같이 / 如湯武之征伐兮
정정당당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 正正堂堂
진 나라ㆍ초 나라가 중원을 두고 다투다가 / 如晉楚之相遇於中原兮
혹자는 패업을 이루고 혹자는 절제를 받는 것 같은 것도 있고 / 或奮而成伯或折而受盟
유방과 항우가 형양에서 싸우기 시작하여 / 如劉項之交爭於滎陽兮
하나는 성했다가 패하고 하나는 넘어졌다가 일어선 것 같은 것도 있고 / 或勃而僨或跌而昌
다 집어삼키기도 하고 한 쪽 차지하기도 하여 / 奰哉如幷呑割據兮
끝까지 양보라고는 없었던 것 같은 것들도 있고 / 而極力不相讓焉
왕도도 패도도 모두 바닥이 나 / 窘哉如王伯道窮兮
결국 칼과 창으로 맞닥뜨린 것 같은 것들도 있으며 / 而至於劍㦸相撞者
또 용사가 갑옷 입고 창 들고 난리에 임하는 자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 又如勇夫之被堅執銳而赴難兮
선비가 붓 들고 책 끼고 다니면서 공명을 세운 자 같은 것도 있으며 / 如章甫之擒翰挾策以立名
헌걸차고 굳세기 맹분 같고 북궁유 같은 그런 유형도 있고 / 赳赳乎洸洸乎如賁如黝兮
문채스럽고 빛나기 자유ㆍ자장 같은 그런 유형도 있고 / 斐如而章如而如游如張
붕거가 큰 기 빼앗아들고 춤추는 것 같은 놈도 있고 / 如鵬擧之奪纛而舞兮
운장이 말을 몰아 달려가는 꼴 같은 것도 있고 / 如雲長之策馬而騁
안연이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위연히 탄식하는 모양 같은 것도 있고 / 如淵之橫經而喟然
증점이 쟁그랑하고 거문고 밀치는 것 같은 것도 있고 / 如點之舍瑟而鏗爾
이윤이 세상에 부러움 없이 유신 들에서 자기 도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것도 있고 / 如摯之囂囂然樂道於莘野兮
제갈량이 담박한 마음으로 융중에 누워 이성을 다스리고 있을 때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亮之淡泊猗理性於隆中
부열이 부암에 살면서 직접 담 쌓는 일에 종사하는 모습같이 생긴 것도 있으며 / 如說之於傅巖身操版築兮
가 녹문산에 숨어 손수 누에 치고 뽕나무 가꾸는 모습같이 생긴 것도 있으며 / 如徽之於鹿門躬服蠶桑
정조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처녀처럼 / 如處子之貞保兮
얌전하고 수줍고 차분하게 생긴 것도 있고 / 窈窕幽靖
수양에 몰두하고 있는 조용한 선비같이 / 如靜士之潛養兮
정숙하고 깔끔하고 의젓해 보이는 것도 있고 / 齋戒矜莊
명상에 들어간 석가여래가 끄떡않고 입다물고 눈감고 있는 것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伽之入定寂默昏冥
세상 영욕에 눈감은 노자가 마음을 다 비우고 현묘한 꿈속에 잠겨 있는 것같이 생긴 것도 있네그려 / 如聃之閉充玄虛冲靜
또 그래서 하늘이 기울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와씨가 하늘을 고인 돌과 지축을 고정시킨 자라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又如女媧補天之石立極之鰲兮以之天傾
복희씨와 우 임금 때 역상을 그리게 만든 하도를 지고 온 말과 낙서 싣고 온 거북 모양으로 생긴 것들도 있고 / 如羲夏負圖之馬載書之龜以畫玄象
구개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진주조개 같은 것도 있고 / 如珠貝之羅陳於九市兮
푸른 하늘에 뒤섞여 있는 기성 두성 같은 모양도 있고 / 如箕斗之錯落於靑冥
우 임금 때 만든 구정의 세 발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姒氏之九鼎三足兮
진시황 때 만든 열두개 금인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嬴皇之十二金人
악기틀 같은 것도 있고 쇠북같이 생긴 것도 있고 / 若鐻若鍾
무안군이 군대훈련 때 기와지붕이 들썩들썩하게 치던 북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武安勒兵之鼓屋瓦盡振兮
낭사에서의 저격으로 진시황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철퇴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浪沙狙擊之椎祖龍魂驚
패공이 천하를 다투던 삼척검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沛翁爭天下三尺之劒兮
당양 장판파에서 장비가 쓰던 장팔사모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當坂衛龍孫丈八之槍
일만 군중이 사력을 다하게 만들었던 이 사도가 흔든 기 모양인 것도 있고 / 如李司徒之颭旗萬衆致死兮
뭇 추장들 이마를 조아리게 한 곽 영공이 벗은 투구 모양인 것도 있고 / 如郭令公之免胄群酋頓顙
피와 살이 들을 메우게 했던 유 부수의 총과 도끼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劉副守之銃斧血肉盈野兮
가슴을 모탕으로 정강이뼈를 쪼갠 악 절도의 칼같이 생긴 것도 있으며 / 如岳節度之札刀椹胷斫脛
조 태위가 창읍에서 오비를 견제하면서 치밀한 계획과 힘을 기르며 대들어도 끄떡 않고 있었던 것 같은 것도 있고 / 又如條太尉之按吳濞於昌邑兮謀深氣壯角之不動
주공근이 조조를 적벽강에서 쳐부술 때 / 如周公瑾之壞曹瞞於中江兮
불이 맹렬하고 바람 세차 상영까지 전소시켰던 것 같은 것도 있고 / 火烈風猛燒及上營
물귀신이 오정을 지휘하여 / 如巨靈之揮五丁兮
산천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놓은 것 같은 것도 있고 / 反山川之紀經
우 임금이 용문산을 뚫고 지주를 부러뜨리고 이궐산을 잘라 / 如神禹之鑿龍門折砥柱闢伊闕兮
천지의 생김새를 도막도막 끊어놓은 것 같은 것도 있으며 / 墜斷天地之性
또 삼천 선비가 공자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 又如三千簪裾兮仰聽孔聖之經誦
맹수 같은 십만 군대가 모두 강태공 지휘 아래 움직이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 十萬豼貅兮咸總尙父之鷹揚
한 나라 황제가 신성에서 거의했을 때 삼군이 소복 차림 했던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 漢皇之擧義於新城兮三軍縞素
진섭이 초택에서 떠들고 일어나자 만백성이 칼을 들고 호응했던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 陳涉之大呼於楚澤兮萬姓荷兵
황제 헌원씨가 흉려산에서 치우를 죽일 때 / 軒轅之戮蚩尤於凶黎兮
동두철액이 부월의 형을 받던 것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 銅頭鐵額之伏斧鉞於大刑
광무 황제가 왕심ㆍ왕읍을 치수에서 쫓을 때 / 光武之走尋邑於滍水兮
맹수들도 다리를 떠는 물 앞에서 바람같이 벼락같이 싸워 이겼던 기상같이 보이는 것도 있었다 / 熊豹犀象之奔股崩戰於烈風迅霆
주위를 돌면서 눈여겨보고 / 周旋而睨之兮
또 내려다보니 눈이 휘둥글했다 / 俯監而瞠之
섬세하고 작은 놈 울쑥불쑥 험상궂은 놈 / 纖微磊
나무와 돌이 한데 모여 있고 / 木石同場
얼그럭 덜그럭 쌓여 있는 놈 올망졸망한 놈 / 磈磈碌碌兮
큰놈 작은놈이 서로 물려 있으며 / 巨細相撑
잡답하게 얽히고 설켜 / 雜遝紛紏兮
추하게 생긴 놈 괴짜로 생긴 놈이 얽혀 있어 / 醜怪繆刑
진 나라 채찍에 몰려온 것 같은 놈이 있는가 하면 / 如秦鞭之驅兮
우 임금 도끼에 찍힌 것 같은 놈도 있고 / 如禹斧之逿
순 임금에 의해 손발이 묶여 있는 이부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貳負之荷桎梏於帝姚兮
우 임금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지기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支祈之被牢鎖於夏王
함양의 저자에서 초 나라 사람 이사의 잘리워진 허리와 목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咸市楚斯之腰領兮
철도끼로 잘라놓은 유소 계집 달기의 목과 정강이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玄鉞蘇妲之脰脛
속임질 잘하다가 쪼개진 전거의 대머리같이 생긴 것도 있고 / 如田巨之矯誣禿首而斮兮
왕위 찬탈했다가 삶음을 당한 유궁후 예의 긴 팔처럼 생긴 것도 있고 / 如夷羿之僭竊長臂而烹
도망갔다가 사지가 찢긴 상앙의 팔다리같이 생긴 놈도 있고 / 如鞅之走而轘兮
왕돈처럼 꿇어앉은 자세로 목이 잘린 것같이 생긴 놈도 있고 / 如敦之跽而斨
불을 놓아 지글지글 끓게 한 동탁의 배꼽처럼 생긴 놈도 있고 / 如卓之殕火燃其臍兮
죽었을 때 칼로 파버린 환온의 귓밥같이 생긴 놈도 있고 / 如溫之斃刃陷其
옥홀에 맞아 부서진 진호의 머릿골처럼 생긴 놈도 있고 / 如晉護之腦碎於玉珽兮
칼날에 떨어져나간 양교의 머리통같이 생긴 놈도 있고 / 如楊釗之頭隕於劍鋩
제부에서 곤장 맞는 진회같이 생긴 놈도 있고 / 如檜卨之受杖帝府兮
머리를 함에 넣어 오랑캐나라로 보냈던 사와 모양 같은 놈도 있으며 / 如師佤之凾首虜庭
또 어찌 보면 육조 시대에 중국인과 오랑캐가 섞여 살던 것 같기도 하고 / 又如六朝之夷夏雜糅兮
오대 적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난잡을 피우던 것 같기도 하고 / 如五代之君臣相攘
필리가 남하를 □□할 때 강 따라 줄을 섰던 횃불 같은 것도 있고 / 如佛狸之□南夏也列炬沿江兮
묵돌이 한 고조를 에워싸고서 기마로 진을 치고 사방을 살피던 것 같은 것도 있고 / 如冒頓之繞漢祖也陳騎按方
부진이 강좌에서 병력을 자랑하면서 말채찍을 던져 강을 막고 기를 들어 태양을 가리울 때 / 如符秦之耀兵於江左投鞭斷流擧旗蔽明兮
처량한 모습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던 꼴 같은 것도 있고 / 而奔走於鶴唳風聲
양 무제가 동태사에서 불교에 몸바쳤을 때 중들이 길을 막고 사찰이 공중으로 치솟았으나 / 如梁武之捨身於同泰緇衣塞路佛刹亘空兮
대성이 함락될 때 우두커니 서만 있었던 것같이 생긴 놈이 있더라 / 而却立於臺城之崩喪
아아, 슬퍼라 / 噫嘻悲乎
그 기울고 몰락된 형세와 깨져 없어진 몰골들이라니 / 其傾陷之勢破歸之象
안개가 짙어 돛대가 부러진 것은 / 霧黑檣摧
육 승상이 남천에서 황제를 등에 업었을 때이고 / 陸丞相之負帝於南天兮
회오리바람에 바다가 뒤집힌 것은 / 風颶海飜
장 추밀이 바다 가운데서 목숨을 불고할 때였다 / 張樞密之捨命於中瀛
송산에서 밤에 무찌를 때는 / 松山夜鏖
날으는 탄환에 비석이 부러졌고 / 碣石摧於飛丸兮
관내가 유린을 당할 때는 / 關內橫蹂
차령에 의해 하늘이 진동하기도 했었지 / 九寰震於借靈
아아, / 嗚呼
물건들을 보면 감회도 많아 / 唉玆觸物之多感兮
이내 마음 슬프기만 하다네 / 余懷之傷矣
그리고 또 어두컴컴한 곳에 살고 있는 도깨비들 하며 / 亦又有魑魅魍魎之宅於幽陰兮
숲 속에 굴 파고 사는 두더지 날다람쥐 여우 너구리들이 / 鼴鼯狐狸之穴於林莽
어두운 곳에서 숨어지내면서 / 潛
낮이 되면 멋대로 날뛰고 / 當晝以
의심을 품은 듯 수줍음을 타는 듯 / 含疑畜羞兮
사람을 보고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 見人以惝怳
그래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내로라 하고 / 猶且據所以視雄兮
세력을 부리면서 제 혼자 잘난 체하고 / 馮勢而自臧
하늘도 부끄러워 않고 사람도 부끄러워 않고 / 不愧以怍兮
두려워하지도 않고 여유 있게 지내는 꼴들이 / 不愓以䍚
어쩌면 꼭 간사한 소인배들 몰골이어서 / 實憸人宵夫之狀類兮
내 그놈의 속들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네 / 吾不欲究其肺腸
그러나 그것들 역시 음양 이치가 하나로 뒤섞이고 / 是蓋一理二氣之磅礴兮
음과 양이 서로 운행하고 움직이면서 / 交運而迭盪
제각기 그 꼴대로 만들어놓은 것들이기에 / 所以體物而化成者
그렇게 변덕 심한 구름과 미쳐 날뛰는 파도와도 같다네 / 若是其雲譎而波狂
다만 만이면 만 개 하나하나 다른 꼴들을 / 惟吹萬之不齊兮
누가 그렇게 맡아서 만들어내는 것일까 / 孰回斡以主張
가보고 싶으나 막혀 있는 남녘 오랑캐땅 / 懷臨睨之阨南夷兮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봤으면 / 憶翩然而下大荒
구경하기에 빠져 돌아갈 줄도 모르고 / 惧躭觀以流連兮
길을 바꿔 다른 곳으로 가노라네 / 遂改路而下降
뭇 꽃들이 살던 곳 어디냐고 물었더니 / 問百華之遺墟兮
어쩌면 다른 말들이 그리도 많을까 / 何異言之幻厖
휑뎅그렁한 대자연 속에 들어가 / 入元化之呀然兮
수많은 폭포들 콸콸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 聽萬瀑之砰訇
붉은 낭떠러지에 푸르른 봉우리하며 / 惟丹崖與翠巘兮
새하얀 돌들 그리고 깊고 넓은 물 / 石皚皚兮流汪汪
신령한 새가 살던 옛집을 보아도 / 瞻靈禽之舊宅兮
소리 안 들린 지가 천년이라네 / 聲不聞兮千齡
새란 놈은 어찌하여 제 자랑만 한다던가 / 云何鳥之自標兮
물건마다 종류 달라 같은 것이 아니라네 / 物有類而非貞
화룡은 설레설레 물 속에 잠겨 있어 / 乃火龍之盤沈兮
벼락 치고 비 쏟아져도 끄떡도 않는다네 / 邈乎雷雨之滿盈
아마도 못을 비우고 떠나버려 / 豈竭澤而去之兮
이름만 남아있지 신령은 없는 게 아닐까 / 恐名存而無靈
아, 수없이 오고 가는 구경꾼들 / 噫游子之來往兮
말도 못하게 몰려드는 성명 뿐이지 / 紛雜遝其名姓
비컨대 용문에 모여드는 고기들이 / 比龍門之鱗集兮
어떤 놈은 실패하고 어떤 놈은 용 되어 하늘로 오른다던가 / 孰點額而化升
그들이 남겨둔 것 후인이 보고서는 / 徒留看與後人兮
향냄새와 악취를 구별해서 말한다네 / 指薰蕕於臭芳
거미 뒤를 따라 어루만지면서 / 步蜘蟵以摩挲兮
붓을 집어들고 정서를 그려본다네 / 聊拈筆以抒情
마하연을 찾아 쉬면서는 / 尋摩訶以憩息兮
이것이 대승이라는 뜻임을 알았고 / 知寓義於大乘
이웃을 끊고 외로이 사는 자 만나서는 / 遌孤宿之斷隣兮
궁벽한 길 찾아 괴상한 짓 하고 있음을 탄식했다네 / 嘆索隱而怪行
노향을 캐 실에 꿰어 허리에 차고 / 採盧香以紉珮兮
계수나무 가지 휘어잡고 맴을 돌고 / 援碧桂而彷徨
삼대 꺾어 지팡이 삼고 / 折疏麻以爲杖兮
지초를 식량 삼아 먹으면 / 餌玄芝以爲粻
마음속이 너무나도 유쾌하고 / 竊快在其中心兮
정신이 맑고 건강하기 시작한다네 / 精醇粹而始壯
운대의 가을빛을 보며 섰노라면 / 倚雲臺之秋色兮
찬바람이 갑자기 내 옷에 불어오고 / 溘泠籟之吹我裳
안문을 넘어 동으로 가거드면 / 踰雁門以東逝兮
산 속의 온갖 풍광 다 접한다네 / 挹萬景之嵐光
운취산에 가 자유자재로 노닐면서 / 投雲翠以偃仰兮
산에 비치는 낙조 따라 즐겨볼까 / 步山映而怡情
현자들 불러 모은 금대도 아니요 / 豈招賢之金臺兮
신령을 접하는 명정도 아니면서 / 非接靈之明廷
역대를 두고 왜 그리들 지었을까 / 何歷代之營搆兮
황제 사는 대궐처럼 휘황찬란하게 / 儼皇居之煒煌
중에게 부드러운 말을 붙여 / 接軟語於禪子兮
백개의 남긴 발자취를 보고 / 覩伯喈之遺蹤
이어 전쟁에 싸워 이기는 방법 듣고서는 / 聞制勝於游方兮
칼을 어루만지며 정신이 그쪽으로 갔다네 / 撫孤劍而神往
구름이 뭉게뭉게 조용히 비가 내려 / 雲祈祈而作雨兮
주룩주룩하는 소리 밤새워 들었더니 / 聽建宵之浪浪
일천 산들 갑자기 모습이 달라져 / 千山忽以改觀兮
비단구름이 가로 펼쳐져 있는 듯하네 / 若雲錦之橫張
마부에게 남으로 갈 길 차리게 하고 / 戒僕夫而南出兮
성사를 넘고 무지개다리를 건너 / 跨星査兮渡虹梁
자천을 따라가다가 돌산에 올라가서 / 沿磁川以陟砠兮
양양한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 望東海之洋洋
노중련의 고고한 모습도 생각나고 / 想仲連之高蹈兮
공자가 타리라던 떼 보고도 탄식했네 / 嘆尼父之攸乘
안기생을 부를 수가 있다던가 / 殆安期之可招兮
진 나라 동남동녀들 어디로 갔단 말가 / 眇秦童之何往
아득한 마음 갈피잡을 수가 없어 / 心超忽以靡屆兮
머리 풀어헤치고 봉황이나 타고싶다네 / 欲披髮而御鳳凰
그리고 바람 박차고 구만리 날으는 큰 붕새랑 / 思搏風之鯤鵬兮
깊은 바다에 누워 있는 큰 자라 고래랑도 생각나고 / 逮偃溟之鰲鯨
백천의 풍광을 구경하기 위해 / 攬風光於百川兮
한가한 날을 잡아 돌아봐야지 / 聊暇日以周章
가마를 내려두고 전송 나온 자에게 하직을 고함이여 / 弛擔輿而謝送者兮
젊고 예쁜 사람 멀리 가기 때문이라네 / 蓋婉孌乎遠將
높고 확트인 바다산에 올라 / 憑海山之高軒兮
험준한 구정산도 돌아봐야지 / 回瞻乎九井之崢嶸
아, 비로봉 그리고 구룡연이 / 噫毗盧與九淵兮
유독 꿈속에 아른거리네 / 獨依依乎夢想
그렇게도 유별나게 고고한 표상 / 惟卓犖之高標兮
그리고 그 속에 깊이 간직된 신비한 것들을 / 與神怪之幽藏
내 샅샅이 다 볼 수 없는 것은 / 余不得攀援而窺闞兮
힘이 벌써 그만큼 달려서라네 / 久矣膂力之無强
변화하는 사물의 형태를 두루 관찰하자면 / 猷物化變態之是遍
온갖 험난과 어려움 갖추 맛을 봐야겠지 / 而亦險阻艱難之備嘗
마치 순임금이 깊은 산에서 살 때 / 而譬重華之處深山也
나무와 돌과 함께 살았듯이 / 木石與居
그리고 우임금이 구년홍수 다스리면서 / 想夏伯之參洪流也
섬이고 물가고 닥친 대로 갔듯이 말이야 / 洲渚與登
포구에서 목란을 기대고 보아도 / 倚木蘭於浦口兮
신선 사는 곳 아득하여 알 길이 없다네 / 杳仙踪兮難詳
감호를 가다가야 그만둘 수가 없지 / 馳鑑湖且焉止息兮
맑은 물결이 일렁일 것 아닌가 / 漪灔澦之淸澂
석감에 숨어 있어도 마음 끄는 것은 / 隱石龕而嬋媛兮
출렁출렁 들리는 파도소리이며 / 聽濤聲之
수레 만 대가 굴러가는 것은 / 車轟輵止萬轂兮
숭산 화산같이 험준한 산들이라네 / 岳嵩華止嶒埈
예쁘장한 유담 영호 다 보아도 / 歷遊潭與永湖之靘媚兮
내 마음에 드는 것들 아니지만 / 非余心之所賞
어쩌면 청산의 눈빛은 / 何星山之雪色兮
고개 돌려 볼 때마다 눈에 그리 차는지 / 每回首而盈眶
저 쌍쌍이 노니는 백조들 / 惟兩兩之白鳥兮
그리고 명사에 붉은 해당화 / 與鳴沙之紅棠
그것이 바다 곁에 사는 풍류이며 / 實傍海之風流兮
나그네 서글픔도 달래준다네 / 解覊懷之悢悢
맑은 시내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 過淸澗而弭節兮
날아갈 듯 잘 지어진 집을 보고서 / 得傑搆之飛甍
그리워지는 옛사람 보지를 못하고 / 懷古人而不見兮
그 마음 노래가락에 실어본다네 / 託餘響於淸商
노닐기 위해 일찍 출발하여 / 乃夙駕而容與兮
죽포에 배 띄우고 사방을 바라보니 / 航竹浦以盱衡
설악에는 구름 드리워 있고 / 雲垂垂於雪岳兮
동해의 물결 호호망망도 하이 / 波浩浩於東溟
낙가산 올라 절간에 들리면 / 登洛伽兮入禪門
산간이 맞아주어 반갑고 / 喜山簡之逢迎
선원 데리고 현학을 울리며 / 携仙源而奏玄鶴兮
나대의 유향을 듣는다네 / 聽羅代之遺響
어쩌면 이 좋은 곳 규모도 이리 굉장할까 / 何寶地之宏規兮
바다도 뭍도 온통 승지로세 / 占海陸之雄勝
금선굴 하며 의상대 하며 / 金仙窟兮義相臺
돋는 해 맞이하는 이화정 하며 / 賓日僚兮梨花亭
먼저 비를 뿌려 먼지 씻게 하고 / 先雨師以淸塵兮
또 바람 시켜 영을 선포하려는지 / 命風伯而宣令
하늘은 어두컴컴 쓸쓸하기만 하고 / 天凄陰以沈寥兮
구름은 꽉 끼었다 금방 벗어지네 / 雲霮䨴而汛晴
끝도 안 보이는 저 넓은 바다 / 極瀛渤之無際兮
정신이 아찔하여 하늘에 오르는가 싶다네 / 神飄飄兮上九紘
하늘에 둥실 떠 해와 어울리는 듯 / 勢浮天而浴日兮
휑뎅그렁하고 어슴푸레하기도 하고 / 氣澒洞而泱漭
아득한 저 별 석목이 아니던가 / 渺析木之疇許兮
부상 저 끝까지 가보고 싶다네 / 直欲窮乎扶桑
진 나라의 천황이라는 것 / 繄秦域之天皇兮
어느 시대 누가 만든 이름이라던가 / 云幾代而何名
두 눈을 하늘 밖으로 돌려 / 寓雙眸於天外兮
떠오르는 붉은 햇빛을 보니 / 窺出日之紅光
용광로 속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 / 火輪熾於鴻爐兮
온 바다가 부글부글 끓고 있네 / 環海涌其爲湯
붉은빛 수레에 자색 일산을 달고 / 紛彤車與紫蓋兮
눈부시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 班陸離其下上
마치 뜬구름이 가리운 듯 침침하여 / 若浮雲之晻曖兮
얼른 뛰어오르지 못하고 있더니 / 又潛躍其難升
주위의 장애물 다 녹여내고 / 旣蒸蒸而銷化兮
불끈 솟아올라 제 길 따라 간다네 / 更騰騰而遵養
뭇 용들이 끼고서 힘차게 날아가니 / 羣龍翼其奮飛兮
상하사방 온 천지가 금방 훤하네 / 六合俄其宣朗
저렇게도 밝기만 한 저 태양의 / 寔大明之隆煕兮
가는 길을 누가 감히 막으랴 / 敢閼遏於長程
하늘을 가로질러 땅을 짜고 가노라면 / 用經天行而緯地勢兮
만물이 다 그 덕에 자란다네 / 凾品彙而亨貞
내 사실 그를 보고 감명을 받아 / 實有震於余衷兮
정과 동의 음양 이치 깨달았다네 / 悟懸陰於飛陽
저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속에 / 彼小大之相乘兮
소장의 이치가 생겨나는 것이라네 / 從有契乎消長
개인 달도 어쩌면 저리 밝을까 / 何霽月之淸輝兮
서로 바라보고 번갈아서 밝혀준다네 / 又代明於相望
천리 멀리 검은 연기 한 점 없고 / 泯纖煙於千里兮
만경창파에 금물결 일렁이다가 / 漾金波之萬頃
해면에 갑자기 장풍이 불어오고 / 長風忽其駕海兮
천둥 벼락이 큰소리를 치게 되면 / 巨雷殷其流轟
크나큰 그 소리 그 빛이 / 聲與色其兩大兮
아마 어둠 속에서 명멸하리 / 想起滅於窈冥
내 그 광경 끝까지 다 구경을 못하고 / 余惟兹覽相觀之不可以極兮
눈을 돌리고 귀도 돌리려고 생각했네 / 思收視而返聽
환하고 넓은 유일한 길을 찾아 / 觀昭曠於一原兮
무변의 광경을 두루 살펴보고 / 瞰無邊之光景
옛 철인들 마음을 다시 생각하니 / 念先哲之襟期兮
광풍이요 제월이요 상서 그것이었네 / 曰光霽與瑞祥
왔던 길로 내 수레 다시 돌려 / 回朕車以復路兮
그 길로 죽 도로 갔다네 / 乃遂焉而還征
하늘도 울어대는 험준한 산을 지나 / 凌天吼之嵽嵲兮
만 길이나 치솟은 묏부리를 바라보고 / 瞻皓峀之萬丈
창해의 유허를 굽어보면서는 / 俯滄海之遺墟兮
한 나라 때 장량을 생각했다네 / 思漢代之張良
용감한 사나이를 만났더라면 / 豈猛士之可求兮
박랑에서 충분히 요절을 냈으련만 / 能奮袖於博浪
아마도 시운이 맞잖은 탓으로 / 恐時運之參差兮
부질없는 장자방 눈물만 흘렸다네 / 空雪涕於子房
춘주에 들려 길을 멈추고 / 入春州而停驂兮
경운의 청평을 물었더니 / 問慶雲之淸平
물은 푸르러 못을 이루었고 / 水靑靑而成淵兮
산은 높아높아 상당이로세 / 山崔崔兮上黨
고고한 열경의 풍도는 / 夫何悅卿之高風兮
산과 함께 높고 물과 함께 푸르르며 / 共山高而水淸
자현의 속세를 초월했던 일들 / 惟資玄之逸躅兮
탐욕자 간신배의 본보기가 아니던가 / 寧不律夫貪侫
긴 흐름을 따라 돌아 돌아가면 / 遵長淮而摎流兮
아득한 서울거리에 닿을 것이고 / 襲天街之蒼莽
동쪽 성곽을 보며 돌아가면 / 瞻東郭而言復兮
높다란 대궐문도 바라보이리 / 望閶門之將將
삼각산 어찌 그리 높고 험준하며 / 何白岳之律律兮
한강수는 어찌 그리 흐름이 세찰까 / 而漢水之湯湯
울창한 남산에 올라가면 / 隮南山之薈蔚兮
서울거리는 어두운 먼지 속에 있고 / 塵九逵之冥冥
오릉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고 / 樹五陵之葱葱兮
사교에는 연기가 자욱한데 / 煙四郊之芒芒
백성들은 밭 갈고 누에 치고 / 民耕桑之雩雩兮
선비들은 거문고 타고 글 외우는 곳 / 士絃誦之洋洋
참으로 아름다운 이 산하 / 誠河山之美哉
이름하여 기자 나라의 남쪽 지대라네 / 曰箕邦之南壤
삼가 단군의 뒤를 이어 / 欽檀君之克讓兮
부사의 유풍을 이 땅에 심고 / 尙父師之遺馨
세월 멀어 팔조지교는 잘 몰라도 / 緬八條之難詳兮
홍범구주는 없어지지 않았다네 / 而九範之匪亡
계찰이 노 나라에서 악 구경하던 일에 비하면 / 比季札之觀樂於虞箾兮
비록 다른 점이 있으나 감히 말은 못하겠네 / 雖有他而不敢請
옛날 중니가 올라가서는 / 昔仲尼之登覽兮
태산에서 천하가 작다고 했고 / 小天下於岱宗
회옹은 낭랑하게 시 읊으며 / 惟晦翁之朗吟兮
축융봉에서 가슴 털어놓았었지 / 乃盪胷於祝融
속세를 초탈한 가의는 / 賈生之鵠擧兮
하늘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이치를 터득했고 / 覩天地之圓方
소요부는 천하를 두루 돌며 / 堯夫之歷覽兮
바람과 번개를 타고 다녔다네 / 駕風霆而旁行
내가 지금 구경다니는 것이야 / 惟今日之遊賞兮
옛 성현들 뒤를 어떻게 따르랴 / 豈追蹤於賢聖
그러나 성인이 위연 탄식을 했던 것은 / 繄元聖之喟然兮
사실 풍영을 길이 허여했던 것 아닌가 / 實深與乎風詠
끝맺음을 하기를 / 亂曰
공자는 인자 지자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면서 / 孔言仁智之樂兮
산은 정하고 물은 동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 由山水之動靜
맹자는 호연지기를 말하면서 / 孟云浩然之氣兮
배양를 잘해야 생긴다고 했지 / 因善養以生
그 교훈에 대한 감회가 많아 / 惟玆感懷之長兮
가을바람에 흥을 돋우고 / 蓋溯秋風以起興
감정을 산과 바다를 통해 풀어보았다네 / 憑海山而抒情
지적한 것도 다르고 서로의 경지도 비록 다르지만 / 雖所指所造之不同兮
천시와 인사와 사물의 이치는 그렇게 서로 변역되어 가는 것이라네 / 天時人事物理之相推而相盪也夫


 

[주D-001]부여(夫如) : 김화(金化)의 옛 이름.
[주D-002]진도(陳陶) : 미상.
[주D-003]붕거(鵬擧) : 송조(宋朝)의 충신 악비(岳飛). 붕거는 그의 자(字)임.
[주D-004]운장(雲長) : 삼국(三國) 시대의 명장 관우(關羽). 운장은 그의 자임.
[주D-005]휘(徽) : 한(漢) 나라 말기의 은자(隱者) 사마휘(司馬徽)를 말하는데, 실지 녹문산(鹿問山)에 숨어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자는 사마휘가 아니고 휘의 친구였던 방덕공(龐德公)이었음.
[주D-006]하늘을 …… 자라 : 상고 시절의 여제(女帝)였던 여와(女媧) 때 그의 제후(諸侯)인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워 싸움에 패하자, 화가 나서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받아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하늘 기둥이 부러지고 지구를 매놓은 끈이 끊겼는데, 이때 여와씨가 오색돌을 녹여 기둥을 만들어서 하늘을 고이고, 큰 자라 등에 얹혀 흔들거리는 지축을 고정시키기 위해 자라의 네 발을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서남북의 위치를 고정시켰다고 함. 《司馬貞 補史記 三皇本紀》
[주D-007]이 사도(李司徒) : 당(唐)의 안록산(安祿山) 난리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광필(李光弼)을 이름. 《唐書 卷116》
[주D-008]곽 영공(郭令公) : 역시 안록산 난리 때 이광필과 함께 큰 공을 세웠던 곽자의(郭子儀)를 이름. 《唐書 卷137》
[주D-009]유 부수(劉副守) : 송(宋)의 명장 유기(劉錡)를 말함. 그가 처음에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를 지냈었음. 《宋史 卷366》
[주D-010]악 절도(岳節度) : 악비(岳飛).
[주D-011]조 태위가 …… 끄덕 않고 : 한 고조(漢高祖)의 조카인 오왕 비(吳王濞)가 반란을 획책하자 천자가 태위(太尉)인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대처하게 했는데, 조후는 회양(淮陽)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주발(周勃)의 옛 문객인 등 도위(鄧都尉) 말을 듣고, 창읍(昌邑) 남쪽에다 벽을 쌓고 들어 앉아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오병(吳兵)의 예봉이 꺾이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출동하여 전승을 거두었음. 《史記 吳王濞傳》
[주D-012]오정(五丁) : 옛 전설의 인물로 힘이 센 다섯 장정. 진 혜왕(秦惠王)이 촉(蜀)을 치려면서 길을 몰라 이 다섯 역사(力士)를 유인하여 길을 내게 하고 그 길로 쳐들어갔다고 함. 《水經 沔水注》
[주D-013]이부(貳負) : 옛날 사람 이름. 제(帝)가 그를 소속(疏屬)의 산에다 묶어두면서 바른쪽 발에다는 차꼬를 채우고 두 손은 뒤로 하여 머리와 함께 나무에 매달아두었다고 함. 《山海經 海內西經》
[주D-014]지기(支祈) : 물귀신 이름.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면서 회와(淮渦)의 물귀신인 지기를 잡아 경진(庚辰)이라는 물귀신에게 인계했는데, 경진이 그를 귀산(龜山)의 발에다가 족쇄를 채워두고 회수가 잘 흐르도록 했다고 함. 《繹史 夏禹紀注》
[주D-015]마하연(摩訶衍) : 불가에서 대승법(大乘法)을 말함. 《智度論 一百》 여기서는 강원도금강산에 있는 유점사의 말사(末寺)를 가리킨다.
[주D-016]백개(伯喈) : 동한(東漢) 시절의 문호 채옹(蔡邕)의 자(字)임. 채옹이 당시 좌중랑장(左中郞將)으로서 재주와 학식이 대단하여 조정의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대문 앞에는 항상 수레와 말이 그득했었는데, 나이 어린 왕찬(王粲)을 한 번 보고서는, 자기는 따라갈 수 없는 재주라고 하면서 언제나 그만 찾아오면 미처 신발도 챙겨신지 못하고 뛰어나가 반가이 맞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필자가 중에게 그러한 환영을 받았다는 뜻으로 쓴 것임.
[주D-017]안기생(安期生) : 진(秦) 나라 때의 은자. 바닷가에서 약을 팔며 살았는데 그후 진 시황(秦始皇)이 나와 놀다가 그를 만나 3일간을 얘기하다가 작별하려면서 금과 비단 수천만을 주었으나 다 놓고 떠났다고 함. 《史記 列仙傳》
[주D-018]박랑(博浪) : 박랑사(博浪沙).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 장량(張良)이 한(韓) 나라 원수를 갚기 위해 철퇴로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했다가 실패한 곳. 《史記 留侯世家》
[주D-019]상당(上黨) : 중국 산서성(山西省) 동남부에 있는 지명. 지대가 높아 옛날에, 하늘과 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라고 함.
[주D-020]자현 : 고려 시대의 문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 문과 급제하여 대악서 승(大樂署丞)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주람하던 중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이르러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선학(禪學)에 심취하였음. 《高麗史節要》
[주D-021]계찰(季札) : 춘추(春秋) 시대 오(吳) 나라 왕자로서 왕위도 마다하고 중원의 각국을 돌며 당대의 어진 자들을 많이 사귀고 노(魯)에 와서 주악(周樂)을 구경하고는 여러 나라의 치란성쇠에 관해 알았다고 함. 《史記 卷31》
[주D-022]풍영(風詠) :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림. 공자가 제자들 취향을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대답했던 것. 《論語 先進》

 

 

사가시집 제22권
 시류(詩類)
홍 남양(洪南陽)의 송경회고(松京懷古) 시에 차운하다 4수


서글퍼라 용손의 천명이 이미 다했기에 / 惆悵龍孫籙已終
압계의 공업이 이내 헛일이 되어 버렸네 / 鴨鷄功業旋成空
황량한 성엔 푸른 풀 어우러져 맘을 상하게 하고 / 荒城草合傷心碧
황폐한 동산엔 붉은 꽃 피어 눈물을 뿌리게 하네 / 廢苑花開濺淚紅
사물 바뀌고 별 옮겨 가는 세월이 슬퍼라 / 物換星移悲歲月
천지가 파괴되어 판도가 몽땅 바뀌었구려 / 天荒地破改提封
백 년 세월의 감개가 등림의 한에 서리는데 / 百年憾慨登臨恨
유수는 무심하고 해는 절로 동에서 뜨누나 / 流水無情日自東

왕씨 신씨 멸망하여 국운이 영영 다했어라 / 王顚辛蹶運長終
지나간 일 아득하여 일소에 부칠 뿐이로다 / 往事悠悠一笑空
시름 깊은 버들잎은 청둥오리 같이 푸르고 / 柳色愁深鴨頭綠
울어 애 끊어진 복사꽃은 성혈처럼 붉은데 / 桃花泣斷猩血紅
고궁의 축 늘어진 기장은 해마다 심었고 / 故宮離黍長年種
이끼 낀 낡은 집은 하루 종일 닫혀 있구려 / 老屋荒苔盡日封
영웅들께 술잔 올리려니 그 어디에 물을꼬 / 欲酹英雄何處問
여러 왕릉의 풀빛만 성 동쪽에 가득구나 / 諸陵草色滿城東

맥수의 시 짓고 노래 아직 마치기도 전에 / 麥秀詩成曲未終
뜬구름 같은 지난 일이 금세 간 곳 없어라 / 浮雲往事轉頭空
한궁의 동타는 울어 넋이 응당 꺾였을 게고 / 漢宮駝泣魂應黯
촉국의 두견은 울어 눈물이 아직도 붉으리 / 蜀國鵑啼淚尙紅
천지는 이미 삼척으로 돌아가 정해졌거니 / 天地已歸三尺定
산하는 뉘에게 한 덩이 진흙을 빌려 봉할꼬 / 山河誰借一丸封
그대에게 당부하노니 전조의 일을 말 마소 / 憑君莫說前朝事
지금은 강한이 모두 동으로 흐르고 있으니 / 江漢如今盡向東

요동 공격다 만난 기화에 회한이 끝없어라 / 攻遼奇禍恨難終
송악산의 왕기가 깜깜하게 텅 비어 버렸네 / 王氣松山黯黯空
땅에 묻힌 영웅들은 뼈가 희어졌을 게고 / 黃壤英雄骨應白
역사 속 장상들은 얼굴이 장 붉으리라 / 靑編將相面長紅
진궁의 사슴을 잃자 천지는 뒤바뀌었고 / 秦宮鹿失乾坤換
오원엔 사슴이 놀아라 잡초가 우거졌네 / 吳苑麋遊草樹封
문물제도와 의관이 지금 그 어디에 있던고 / 文物衣冠今底處
오운이 화산 동쪽으로 머리를 돌렸네그려 / 五雲回首華山東


 

[주D-001]서글퍼라 …… 다했기에 : 용손(龍孫)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가리킨다. 고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인 원덕대왕(元德大王) 보육(寶育)이 일찍이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수도하고 돌아와서 황해도 우봉현(牛峯縣)의 성거산(聖居山) 마하갑(摩訶岬)에 거처하면서 마침내 거사(居士)가 되었다. 그 당시 잠저(潛邸)에 있었던 당 숙종(唐肅宗)이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마침 보육의 집에 들러 기숙(寄宿)하면서 보육의 딸 진의(辰義)와 합방하여 임신이 되었는데,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작제건(作帝建)이었다. 그런데 작제건이 장성하여서는 자기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던 도중에 서해 용왕(龍王)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그 용녀(龍女)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아들 용건(龍建)을 낳았고, 용건이 마침내 태조 왕건을 낳게 되었다.
[주D-002]압계(鴨鷄)의 …… 버렸네 : 압계는 오리와 닭을 가리킨 것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게 될 것을 예언한 데서 온 말이다. 후량(後梁) 말제(末帝) 연간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저잣거리에서 거사 차림을 한 노인으로부터 고경(古鏡) 하나를 샀는데, 거기에 “상제가 아들을 진한 마한의 지경에 내려 보내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이다.〔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닭은 경주(慶州)의 고호인 계림(鷄林)을 가리키고 오리는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키므로, 즉 신라(新羅)를 차지한 다음에 압록강 유역을 정벌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高麗史 太祖世家》
[주D-003]사물 …… 슬퍼라 : 사물이 바뀌고 별자리가 옮겨 갔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뜻한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시(滕王閣詩)에 “한가론 구름과 못 그림자만 날로 아득하여라, 사물 바뀌고 별자리 옮겨 몇 해나 지났는고.〔閑雲潭影日悠悠 物換星移度幾秋〕” 하였다.
[주D-004]왕씨(王氏) …… 다했어라 : 고려(高麗)가 영원히 망했음을 뜻한다. 왕씨는 고려의 본래 왕실을 가리키고, 신씨(辛氏)는 고려 말기의 임금인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자식이라고 배척하는 설에서 온 말이다.
[주D-005]성혈(猩血) : 성성이라는 짐승의 피를 이르는데, 이 짐승의 피가 매우 빨갛기 때문에 아주 빨간 빛깔에 흔히 비유된다.
[주D-006]고궁(故宮)의 …… 심었고 : 《시경》 왕풍(王風) 서리(黍離)에 “저 기장이 축 늘어졌거늘, 저 피는 싹이 돋았도다. 힘없이 가는 길 더디기도 해라, 이 마음을 둘 곳이 없도다.〔彼黍離離 彼稷之苗 行邁靡靡 中心搖搖〕”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시는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한 대부가 행역(行役) 나가는 길에 옛 서주(西周)에 이르러 종묘와 궁실의 옛터를 지나다 보니 그곳이 모두 기장밭이 되었으므로, 주나라가 전복된 것을 민망히 여겨 차마 그곳을 얼른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그 민망한 정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는 망해 버린 옛 고려를 서주에 비유하였다.
[주D-007]맥수(麥秀)의 시 : 은(殷)나라가 망한 뒤,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터를 지나다 보니, 궁실이 다 허물어진 폐허에 벼와 기장 등의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기자가 이것을 보고 매우 상심한 나머지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노래했던 데서 전하여 고국의 멸망을 통한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 대략에 “보리가 패서 까끄라기가 나옴이여, 벼와 기장이 무성하도다. 저 교활한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도다.〔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하였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주D-008]한궁(漢宮)의 …… 게고 : 동타(銅駝)는 한(漢)나라 때 낙양(洛陽)의 궁문 밖에 비치한 동(銅)으로 주조(鑄造)한 낙타(駱駝)를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그 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네가 곧 가시덤불 속에 묻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나라가 망한 것을 뜻한다. 《晉書 卷60 索靖傳》
[주D-009]촉국(蜀國)의 …… 붉으리 : 옛날 촉(蜀)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재상 별령(鼈令)을 시켜 무협(巫峽)을 뚫어 통하게 하는 대규모 치수공사를 하게 했다. 별령이 현장으로 나가자 망제는 그의 처와 간음하였다. 이후 망제는 이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덕이 별령보다 못하다 하여 별령에게 선위하였다. 일설에는 별령에게 나라를 찬탈당하여 두견새〔杜鵑〕로 변화하여 봄철이면 밤낮으로 피눈물이 흐를 때까지 슬피 운다고 한다. 《太平御覽》
[주D-010]천지(天地)는 …… 정해졌거니 : 한 고조(漢高祖)가 이르기를, “나는 포의(布衣)로 삼척검(三尺劍)을 들고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역성 혁명으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11]산하(山河)는 …… 봉할꼬 : 후한(後漢) 초기 외효(隗囂)의 장수 왕원(王元)이 일찍이 외효를 설득하기를, “신이 청컨대 한 덩이 흙으로써 대왕을 위하여 동쪽으로 함곡관을 봉쇄하겠습니다.〔臣請以一丸泥爲大王東封函谷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3 隗囂列傳》
[주D-012]지금은 …… 있으니 : 강한(江漢)은 두 물 이름인데, 모든 물이 동으로 흐르는 것을 모든 일의 필연적인 데에 비유한 것으로, 사필귀정(事必歸正)과 같은 뜻이다. 《순자(荀子)》 유좌(宥坐)에 “물이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은 굳은 의지가 있는 것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 하였다.
[주D-013]요동(遼東) …… 끝없어라 : 기화(奇禍)는 뜻밖의 재앙을 이른다.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이성계(李成桂)가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 하류의 위화도(威化島)까지 이르렀다가,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위화도에서 다시 개성(開城)으로의 회군(回軍)을 감행함으로써 끝내 고려가 멸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주D-014]진궁(秦宮)의 …… 뒤바뀌었고 : 사슴은 제위(帝位)에 비유한 것으로, 천하를 소유했던 사람이 천하를 잃고, 또 다른 사람이 천하를 소유하게 됨을 이른 말이다. 《사기》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진나라가 사슴을 잃으매 천하가 함께 그 사슴을 쫓고 있다.〔秦失其鹿 天下共逐之〕” 하였다.
[주D-015]오원(吳苑)엔 …… 우거졌네 :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일찍이 월(越)나라를 격파하고 나서 미인(美人) 서시(西施)를 얻고는 고소산(姑蘇山) 위에 고소대(姑蘇臺)를 지어 날마다 서시와 함께 그 위에서 유연(游宴)만 즐기다가 끝내는 월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장군 오피(伍被)와 함께 모반(謀反)을 계획할 적에 오피가 회남왕에게 간하기를, “천자께서 대왕을 관대히 용서하셨는데, 왕께서 어떻게 다시 이런 망국(亡國)의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신이 듣건대 오자서(伍子胥)가 일찍이 오왕(吳王)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자 오자서가 말하기를, ‘신이 지금 황무지가 된 고소대에서 미록(麋鹿)이 노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다더니, 지금 신 또한 이 궁중에 가시나무〔荊棘〕가 나고 이슬이 옷을 적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나라가 멸망한 것을 의미한다. 《史記 卷118 淮南衡山列傳》
[주D-016]오운(五雲)이 …… 돌렸네그려 : 오운은 본디 신선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제왕의 처소를 미화하여 이른 말이고, 화산은 삼각산(三角山)의 별칭으로 삼각산 동쪽이란 곧 조선(朝鮮)의 도성을 가리킨 것이다.
사가시집 제50권
 시류(詩類)
충청(忠淸) 김 감사(金監司) 여석(礪石) 의 운에 차하다 5수

깊숙한 구중궁궐에 대궐 문은 높다란데 / 九重深邃敞天門
은대를 드나들며 성상의 은총 입었어라 / 出入銀臺荷聖恩
당일의 재주 명성 제일로 추앙하다마다 / 當日才名推第一
명군 현신이 풍운의 기회를 만났네그려 / 明良遭遇際風雲

가까이 조칙 받들고 대궐문에 배사하고는 / 昵承綸命拜金門
부월 갖고 민풍 살피고 은덕 펴려 나가네 / 杖鉞觀風布德恩
밥 한 끼 먹을 때인들 어찌 대궐을 잊으랴 / 一飯何曾忘魏闕
꿈의 넋이 길이 삼각산 구름 속에 들리라 / 夢魂長入華山雲

성상의 조서가 대궐에서 처음 내렸을 제 / 黃麻初降紫宸門
포양하신 조서가 정녕스레 은총을 보였네 / 褒詔丁寧示寵恩
엎드려 절하고 찬미하며 그지없이 감격해 / 俯伏拜嘉增感激
멀리 붉은 구름 둘러싼 북극을 바라보네 / 遙瞻北極繞紅雲

동자 관자가 줄을 이루어 성문에 서서 / 童冠成行立聖門
임금 은혜에 감격함을 일제히 외쳐대리 / 一時齊唱感君恩
남주 가는 곳마다 환성이 두루 퍼져서 / 南州到處歡聲遍
춘풍 같은 화기가 구름처럼 성대하겠네 / 和氣春風藹似雲

병이 많아서 다년간 문 닫고 들앉았다가 / 多病頻年坐掩門
때때로 사자의 은혜에 유독 고마웠었네 / 時時偏感使華恩
고운에 화답하려도 재주 없어 부끄러워라 / 欲賡高韻慙才拙
늙은 자운의 적막함을 누가 가련해할꼬 / 寂寞誰憐老子雲

[주D-001]명군(明君)……만났네그려 : 풍운(風雲)의 기회란 《주역(周易)》〈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곧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명군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음을 뜻한다.
[주D-002]부월(斧鉞)……나가네 : 부월은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말한 것으로, 본디 옛날 장수가 출정할 때에 임금이 장수에게 이것을 내려 주어 병권(兵權)의 위임을 표시했던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관찰사 또한 한 지방의 정권을 위임받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03]밥……잊으랴 : 송나라의 문인 나벽(羅璧)의 〈지유(識遺)〉에 “두보의 시는 밥 한 끼 먹을 때에도 임금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시사라 칭한 것이다.〔杜詩一飯不忘君 所以詩稱史〕”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은 말하기를 “고금에 시인이 하 많지만, 오직 두자미를 으뜸으로 일컬으니, 이것이 어찌 그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정처 없이 유랑하면서도 밥 한 끼 먹을 때도 임금을 잊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古今詩人多矣 而惟稱杜子美爲首 豈非以其饑寒流落而一飯未嘗忘君也歟〕”라고 하였다.
[주D-004]붉은……북극(北極) : 제왕이 있는 대궐을 가리킨다.
[주D-005]늙은……가련해할꼬 : 자운(子雲)은 한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적막(寂寞)은 양웅이 조용히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하고 있을 때, 혹자가 도가 아직 깊지 못해서 곤궁한 게 아니냐고 조롱하자, 양웅이 해조(解嘲)를 지어 해명한 대략에 “오직 적막함만이 덕을 지키는 집이다.……나는 묵묵히 나의 태현을 홀로 지킬 뿐이다.〔惟寂惟寞 守德之宅……默然獨守吾太玄〕”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가시집 제1권
 부류(賦類)
압구정부(狎鷗亭賦)

이 관람의 광대함을 좋아한 이가 있음이여 / 客有好玆觀覽之博大兮
끝없이 넓은 나의 소원을 품었도다 / 齎予志之瀁瀁
어찌 답답하게 내 이 한구석에 있으리요 / 夫豈鬱鬱予一隅兮
혼돈 상태와 광활한 공간을 뛰어넘어 / 超澒洞與空廣
사방 끝을 다하여라 어찌 끝이 있으랴 / 窮四際兮焉極
고금을 열력하며 함께 오르내리도다 / 閱古今而俯仰
갑자기 하토의 적소를 내려다봄이여 / 忽臨睨夫下土之積蘇兮
그 누가 나의 호탕함을 알겠는가 / 孰知予之浩蕩
한고에서 나의 수레를 멈추고 / 弭予節兮漢皐
압구정에 올라 이리저리 바라보니 / 登狎鷗兮騁目
건곤의 혼돈 상태를 열었음이여 / 開乾坤之混沌
우주의 광대함이 확 트이었도다 / 廓宇宙之盤辟
인간 세계로부터 운우 위에 치솟아 / 軼雲雨於下界
항해를 취하여 하늘에 다다르도다 / 挹沆瀣而上薄
줄줄이 서 있는 사방 산들을 마주하고 / 面四山之立立兮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도다 / 俯江流兮湯湯
아스라이 만 리가 요원 광활함이여 / 渺萬里兮泱莽
광활함 속에 삼라만상을 포함했도다 / 涵衆象於淼茫
동으로 바라보면 산악들이 지극히 높아 / 東望則列岳峻極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 上磨寥廓
겹겹의 등성이와 봉우리들은 / 重岡複嶺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하네 / 龍跳虎躍
금대는 지극히 높고 / 金臺兮嶔岑
화개는 우뚝하도다 / 華蓋兮崒嵂
여섯 자라는 힘을 크게 써서 / 六鼇奰屭
봉래 영주를 머리에 이었도다 / 頭戴蓬瀛

하늘의 별들은 빛을 나눠주고 / 天星分曜
지축은 신령함을 나타내도다 / 地軸效靈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 / 樂天崇兮畫棟
화양정은 우뚝해라 높다란 정자로다 / 華陽屹兮危亭
월악산은 첩첩으로 깊숙하여 / 月岳嶙峋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 有江發源
여강으로 들어서 질펀히 흐르다가 / 納驪水兮汪汪
용진을 삼키어 더욱 광대해지도다 / 呑龍津兮沄沄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逶迤廣津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演漾三渡
세차게 흘러 백 번 꺾여져서 / 奔流百折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益肆以注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오고 / 島楮子兮熹微
새매들의 늪은 빙 둘러 있도다 / 藪鷂兒兮回互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鉅野掌平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箭郊周遭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 / 沙苑盤回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 水草肥饒
검고 누런 준마의 떼가 / 驪黃騄駬
아침놀의 무늬를 이루어 / 雲錦成章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는 듯 / 追風逐電
매우 날래서 날아오를 듯하도다 / 天驕騰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말 치는 곳이 / 畋漁樵牧
번다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고 / 紛紜布濩
짐꾼이며 실어나르는 수레는 / 擔負馱輦
앞뒤로 줄을 이어 달리도다 / 前鶩後續
남으로 바라보면 뭇 산들이 얽혀 있어 / 南望則群山糾紛
푸르른 초목들이 무성하고 / 薈蔚葱蘢
태수가 수시로 왕래할 적엔 / 五馬盤桓
대궐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하네 / 拱挹朝宗
오른쪽으론 관악산 청계산이 험준하고 / 右冠岳淸溪之崚嶒
왼쪽으론 대모산성이 불룩 솟아 있어 / 左大母山城之穹窿
도성의 경내로부터 / 曰自畿甸
사방의 요충으로 나누어졌고 / 區分四衝
관산과 하수가 아득하여라 / 關河綿邈
큰길은 숫돌처럼 평탄하도다 / 周道如砥
지방 고을들은 별처럼 나열하여 / 列郡星羅
경계를 나누어 각각 다스리고 / 界畫疆理
역관은 바둑알처럼 펼쳐 있어 / 驛館碁布
사마의 수레가 나란히 다니고 / 轍駟方軌
여염집은 사방에 가득하여 / 閭閻撲地
비늘처럼 빗살처럼 늘어서 있도다 / 鱗次櫛比
누런 벼논과 푸른 밭둑은 / 黃畦綠塍
시야 가득 구불구불 펼쳐 있고 / 彌望逶迤
심고 매고 거두고 방아 찧어 / 耕耘穫舂
농사일을 서로 다투어 힘쓰고 / 競效農功
누에 치고 실 켜고 명주베 짜서 / 蠶繰紡織
아낙의 일을 다투어 다스리니 / 爭脩女紅
농토와 상전의 천 리 벌판에 / 農桑千里
집집마다 자급자족하도다 / 家給人豐
서쪽으로 바라보면 해문이 탁 트여서 / 西望則海門唅呀
가득한 물이 용솟음쳐 흘러서 / 瀰漫汨潏
작은 물결과 큰 파도가 / 鰌濤鯨浪
밀물 썰물을 삼키고 뱉고 하도다 / 呑吐潮汐
한강은 웅장한 관문이 되어 / 漢江雄關
산천의 요해를 누르고 있는데 / 控扼襟帶
선박들이 줄을 이어 왕래하매 / 舸艦牽聯
돛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도다 / 檣帆掩靄
깎아지른 절벽들은 험준하고 / 絶壁巃嵷
높은 누각들은 우뚝 솟아서 / 傑閣岧嶢
아래로는 물가를 굽어 임하고 / 下臨芳渚
위로는 높은 하늘을 찌르도다 / 上揷層霄
고관 대작 공경 사대부 중에 / 縉紳卿士
장수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 杖鉞分符
혹 전송을 하거나 영접할 때면 / 或餞或迓
높은 수레들이 길에 그득하고 / 冠蓋塞途
수시로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 來商往旅
서로 따라 앞서고 뒤서고 하여 / 攀援後先
분잡하게 서로 줄을 이어서 / 紛紜絲絡
시끄럽게 떠들며 늘어섰도다 / 喧鬧騈闐
초목이 무성한 성단에 접근함이여 / 近星壇之蓊鬱
아득한 데에 노량과도 연접하도다 / 控露梁於澶漫
율도엔 연기가 활짝 걷히고 / 栗島兮煙開
마포엔 물결이 차가운데 / 麻浦兮波寒
용산의 조운선들이 빽빽이 이어지고 / 龍山之漕舶織織
양화도의 바람 돛이 펄펄 나부끼거든 / 楊渡之風帆飛飛
가을 흥취의 호기를 들이마시고 / 吸秋興之灝氣
맑게 내리는 단비를 맞기도 하도다 / 來喜雨之淸霏
북으로 바라보면 도봉산은 험준하고 / 北望則道峯峭截
삼각산은 높고도 뾰족하며 / 三山巑岏
화산은 연꽃이 핀 것 같고 / 華岳蓮開
종남산은 용이 서린 듯하니 / 終南龍蟠
귀신이 아끼고 비장한 곳으로 / 神慳鬼祕
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乾轉坤旋
금성 탕지로 험고함 이루니 / 金城設險
대궐 광채가 하늘에 빛나도다 / 玉闕麗天
상서로운 해는 빛을 거듭하고 / 瑞日兮重光
상서로운 구름은 오색이 찬란하도다 / 祥雲兮五色
왕도는 하 넓고 넓음이여 / 王道兮蕩蕩
사문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四門兮穆穆
장수와 재상 공경들은 / 將相公卿
고요 기 위청 곽거병과 같고 / 皐夔衛霍
문인이며 재사들은 / 文人才士
반고 사마천 유향 순숙과 같아 / 班馬劉荀
뛰어난 영재가 줄을 이어서 / 翹英接武
날개에 붙고 비늘을 부여잡도다 / 附翼攀鱗
천문 만호는 / 千門萬戶
개밋둑 벌집처럼 널려 있어 / 綴蟻點蜂
구준과 춘대를 누리면서 / 衢樽春臺
격양가 부르며 화락하도다 / 擊壤熙雍
공장과 장사꾼 놀이꾼들은 / 工商遊冶
어지러이 서로 달려 왕래하니 / 紛紛駾駾
거수와 마룡은 / 車水馬龍
웅성웅성 많이도 다니어라 / 彭彭藹藹
사방이 모여드는 도회가 되어서 / 爲四方之都會
팔방의 창이 탁 트여 밖이 없으니 / 洞八窓兮無外
이는 바로 시야를 넓혀서 사방을 두루 보아 / 此所以豁雙眸騁四望
높은 데서 조망하여 스스로 유쾌해짐이로다 / 登眺自快者也
봄 경치가 화창함에 이르러서는 / 至如韶光駘蕩
만물을 발육시키는 가운데 / 萬物發毓
바람은 순주처럼 훈훈하고 / 風醇如酒
햇볕은 옥같이 온화한지라 / 日溫如玉
꽃나무는 서로 고운 꽃을 피워 / 花木喧姸
청홍의 채색들이 찬란하고 / 紅碧酣縟
맑은 강물은 새로 벌창하여 / 澄江新漲
포도처럼 푸르게 물들어서 / 葡萄染綠
움킬 만도 하고 마실 만도 하며 / 可掬可啜
거울처럼 맑고 환해지나니 / 宜鑑宜燭
이때엔 난간에 기대 배회하면서 / 當此時憑闌徙倚
술잔을 들어 정서를 즐긴다면 / 擧酒敍暢
난정의 풍류에다 / 有蘭亭風流
무우의 기상을 겸하게 되리로다 / 舞雩氣像者矣
남풍이 재물 풍부케 함에 미쳐서는 / 及其南薰阜財
만물을 기르는 여름날이라 / 恢台長嬴
보릿가을은 언뜻 지나가고 / 麥秋奄逝
초여름 장마가 쾌히 걷히고 / 梅霖快晴
뜨거운 더위가 발산하는지라 / 火傘旣張
무서운 태양이 한창 성하여 / 畏日方赫
산을 태우고 들을 태우며 / 焦山燎原
무쇠와 옥이 녹아 흐르고 / 金流玉鑠
소낙비는 강물을 쏟듯 내려서 / 急雨懸河
급한 여울에 눈발이 튀어오르고 / 驚湍湧雪
어룡들은 까불며 춤을 추고 / 魚龍簸舞
오리들은 물속을 출몰하나니 / 鳧鴨出沒
이때엔 옷깃을 풀고 두건을 벗고 / 當此時披襟露頂
읊조리고 술마시고 한다면 / 俯仰詠觴
무더위를 씻고 청량함을 취할 수 있으리로다 / 可以滌煩暑而賭淸涼者矣
하늘 높고 기후 맑은 때에 미쳐서는 / 迨至天高氣晶
바람은 나무 끝에 불어대고 / 風號樹杪
은하수는 영롱히 반짝거리고 / 明河耿熒
깨끗한 달은 하얗게 빛나며 / 皓月皦皎
난초 꽃의 향기는 농후하고 / 蘭香馥郁
국화의 향기는 그윽한 가운데 / 菊馨窈窕
구름 걸친 산은 푸르디푸르고 / 雲山蒼蒼
가을 기럭은 아득히 날아가며 / 霜鴻渺渺
도랑물은 마르고 못물은 맑아 / 潦盡潭淸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룰 제 / 天水一色
티끌 하나 없는 옥호의 맑은 / 玉壺無塵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하나니 / 淨影沈璧

이때엔 기둥 기대어 먼 데를 바라보면서 / 當此時倚柱遐矚
광막한 속에 정신으로 노닌다면 / 神遊沖漠
또 하필 등림 부하여 요락을 슬퍼할 것 있으랴 / 又何必賦登臨而悲搖落者乎
그리고 짙은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 若乃凝雲潑墨
매서운 바람에 솜이 부러지며 / 嚴風綿折
눈은 내려 우뚝하게 쌓이고 / 積雪嵯峨
얼음은 겹겹으로 꽁꽁 얼며 / 層氷沍結
참새들은 서로 짹짹거리고 / 冷雀査査
까마귀는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 寒鴉矍矍
얼음은 틈새 없이 꽁꽁 얼어 / 凍合無縫
배가 묶여 건너지 못하는지라 / 舟膠不涉
장사꾼들은 오가지도 못한 채 / 商旅踟躕
검은 살결에 소름이 일어나고 / 肌黧膚粟
어부들은 머뭇거리는 가운데 / 漁子逡巡
손이 트고 머리털이 솟구치거든 / 龜手蝟髮
이때엔 영서로 추위를 물리치고 / 當此時靈犀辟寒
술 마시고 갖옷을 껴입나니 / 醉擁貂貉
또한 어찌 나귀 타고 추위를 참거나 / 亦何數夫騎驢忍凍
드러눕고 맨발 벗은 걸 셀 것 있으랴 / 僵臥跣足者乎
이상은 바로 사시가 순환하는 가운데 / 此所以四時循環
즐거이 시절과 함께 자적하는 것이로다 / 樂與時適者也
곁에서 누가 힐난하길 물은 용 때문에 신령하고 / 傍有詰者曰水靈以龍
산은 신선 때문에 신령해지나니
/ 山靈以仙
아무리 뛰어난 경계가 있더라도 / 有地雖勝
사람 없이는 전해지지 않고말고 / 非人不傳
그러기에 무창의 남루는 / 武昌南樓
원규를 인하여 드러났고
/ 以元規而著顯
양양의 현수는 / 襄陽峴首
숙자를 인하여 알려졌거늘 / 以叔子而昭宣

지금 그대는 주인의 덕업을 근본하지 않고 / 今子不本主人之德之業
정자 이름의 소이연도 추구하지 않았으니 / 不究之亭之名之所以然
주렴 모퉁이의 한 굽이만을 보고 / 得非覩簾隅之一曲
당실의 완전한 모양은 빼놓은 격이 아닌가 / 而遺堂室大全者乎
아 그 연원을 상고하건대 / 粤惟□源
성악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星岳孕靈
명문의 선인 음덕을 입어 / 名門食德
대대로 영재가 태어나서 / 世有俊英
고관 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 蟬貂聯奕
종정에 공훈이 새겨졌도다 / 鼎刻鐘銘
그중에 당당한 상당군은 / 堂堂上黨
창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 生膺昌期
잠저 시절의 광묘로부터 / 光廟龍潛
한번 만나서 알아줌을 받았으니 / 一見受知
풍운의 기이한 만남이요 / 風雲奇遇
어수가 서로 만난 것이로다 / 魚水相得
손으로 붉은 태양 붙들어서 / 手扶紅日
구오의 용이 날아오르니 / 龍飛九五

천지가 조용하고 편안해지매 / 乾淸坤寧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萬物咸覩
공은 이때에 / 公於是時
유악 안에 조용히 들앉아서 / 從容帷幄
소조의 논의를 하고 / 蕭曹論議
양평의 계책을 내니 / 良平籌策

태산과 황하로 맹세하여 / 泰山黃河
운대와 기린각에 초상 걸렸네 / 雲臺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오면 재상으로 / 出將入相
문모와 무략을 겸비했으니 / 文謨武略
재차 조정의 우두머리 되어선 / 再長巖廊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렸고 / 燮理黼黻
누차 부월 잡고 지방에 나가선 / 屢杖鐵鉞
온 강역을 진정시켰으니 / 鎭定疆域
공은 그와 같이 클 수 없고 / 功莫與京
덕은 그와 같이 높을 수 없도다 / 德莫與崇
지위가 높을수록 맘은 되레 작아지고 / 位尊而心轉小
은총이 높을수록 몸은 더욱 공손하여 / 寵極而身愈恭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 恒存挹損
늘 만족함을 알려고 경계해 / 每戒知足
묘당에 있으면서도 강호를 생각하고 / 處廟堂而思江湖
고량진미가 넘쳐도 담박함을 즐기도다 / 飫膏粱而嗜淡薄
정자를 여기에 얽어 세우니 / 有亭斯構
넓고도 한적하고 적막하여라 / 寬閑寂寞
위로는 녹야당을 뒤따르고 / 上追綠野
아래로는 독락원을 벗삼아서 / 下友獨樂
이에 아침엔 대궐로 달려가고 / 於是朝趨丹鳳
저녁엔 백구와 가까이하니 / 莫狎白鷗
깊은 맹약 맺어서 저버릴 수 없음이여 / 托深盟兮不可寒
기심을 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도다 / 庶息機而相夷猶也
푸르고 깨끗한 물결 먹을 수는 없지만 / 波綠潔而不可飱兮
백설 같은 깃털을 깨끗이 씻어주도다 / 白雪羽毛之無塵也
때로 왕래하며 서로 가까이하거니 / 時往來而相近兮
누가 아득하여 길들이기 어렵다 했는고 / 孰曰浩蕩而難馴也
아 퇴청하여 먹으며 종용 자득하여라 / 羌退食而逶蛇兮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자유자재하도다 / 聊逍遙以自由也
거북 물고기를 모아서 주인이 됨이여 / 會龜魚而作主兮
나날이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도다 / 日尋壑而經丘也
내 자취 이미 쓸모없는 재목 같음이여 / 跡已同於散木兮
마음 또한 이 때문에 빈 배가 되었으니 / 心亦以之虛舟也
이것이 어찌 세속 밖에 멀리 초월해서 / 此豈非超乎流俗之表
즐거이 조물주와 함께 노는 이가 아니겠는가 / 而樂與造物而同遊者乎
나아가서는 큰 띠 띠고 홀을 꽂고 / 進則垂紳正笏
왕궁을 보호하고 왕의 직무 보충하고 / 保王躬而補袞職
물러와서는 야인 복장의 차림으로 / 退則黃冠野服
물고기와 짝하고 사슴을 벗삼도다 / 侶魚蝦而友麋鹿
사직하고픈 생각은 비록 간절하나 / 掛冠之念雖切
만백성의 기대가 더욱 중해지고 / 而萬姓之望愈重
물러나 쉬려는 뜻 또한 급급했지만 / 退休之志亦勤
임금의 은총은 더욱 깊어만 갔으니 / 而一人之眷益寵
그래서 은하수 빛이 창벽에 도는 건 / 是以雲漢昭回於櫳壁者
하늘 문채가 초목에 입혀지는 것이요
/ 天章之衣被草木也
규벽이 문지방 위에 찬란한 건 / 奎壁燦爛於楣宇者
신조로써 일월의 빛을 그려낸 것이라 / 宸藻之繪畫日月也

산천이 이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 山川以之闔闢
귀신이 이 때문에 멀어졌거니와 / 鬼神以之扃鐍
천조의 큰 솜씨로 화려하게 꾸미고 / 賁飾天朝之大手
한 시대의 큰 문장으로 단장했으니 / 粧點一代之鉅筆
이 때문에 명성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 此所以聲名滿於天地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게 된 것이로다 / 而仰若山斗者也
그러나 압구는 해옹의 한가한 일이거늘 / 然狎鷗者海翁之閑事
이로써 정자를 명명함은 무엇을 취한 건가 / 而獨揭此名亭何取耶
한 위공은 / 猗韓魏公
바로 송 나라 현상으로서 / 是宋賢相
원훈 공신에 현량한 보필 되어 / 元勳碩輔
높은 덕과 큰 아량이 있었는데 / 宿德偉量
그 실명을 압구정이라 했으니 / 名亭狎鷗
고상한 풍류를 넉넉히 보겠도다 / 足見雅尙
아 먼 조상의 아름다운 모범을 / 繄鼻祖之懿範
먼 후손이 본받아야 하고말고 / 宜耳孫之取則
전세의 한공과 후세의 한공은 / 前韓後韓
행적이 아주 서로 똑같아서 / 同符合轍
문덕 무략으로 천하를 다스려 / 文武經緯
천지의 조화 육성을 참찬하여 / 參贊化育
충성은 일월을 꿰뚫을 만하고 / 忠貫日月
공은 사직을 보존하였거니와 / 功存社稷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서 / 佩國家之安危
민심을 산악처럼 진정시켰으니 / 鎭民心如山岳
공과 충헌은 / 公與忠獻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로다 / 二而爲一
급류를 탄 날에 한가함을 구하고 / 求閑於急流之日
한창 강건할 때에 숨어 지내면서 / 佚處於强健之時
산수 속의 한가로운 낙을 다하고 / 盡山水優游之樂
물아간의 시기하는 사심을 없애서 / 無物我忌克之私
시종 한 가지 절조를 굳게 지키어 / 終始堅乎一節
진퇴 거취가 시의에 합당하였으니 / 進退合於時宜
공과 충헌 두 사람 가운데 / 公與忠獻
누가 더 낫고 못하다 할꼬 / 孰仲孰伯
모두 나는 백구를 잊고 백구는 날 잊었으니 / 皆能我忘鷗而鷗忘我
이 때문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걸세 / 是以能相熟而相狎也
나는 객과 함께 농서의 보리를 다 거두고 / 吾將與客窮隴西之麥
강남의 나락을 다 수확해서 / 殫江南之稻
감주를 만들고 술도 만들고 / 爲醴爲酒
동해의 물결에 소금을 치고 / 鹽東海之波
오창의 곡식을 곱게 빻아서 / 屑敖倉之粟
면을 만들고 건량도 만들어 / 爲麵爲糗
천지를 흘겨보아 여관으로 삼고 / 睥睨天地而籧廬
일월을 여닫아서 창문으로 삼고 / 開闔日月爲戶牖
남기를 부여잡고 올라가 / 攀南箕
북두로 술을 떠 마시고 / 酌北斗

공을 따라 이 정자에 노닐면서 / 邁從公于斯亭
공의 백세 향수를 축복드리리 / 祝眉壽而黃耈
그리고는 다시 백구와의 맹약을 찾아 / 然後更與白鷗而尋盟
세한 불변의 굳은 우정을 맺고 / 結歲寒之耐友
푸른 절벽 위에 황견을 새겨서 / 鐫黃絹於蒼崖
만고에 전하도록 하겠다 하누나 / 傳萬古而不朽
이 말에 객은 깜짝 놀라 얼굴 고치고 / 客矍然改容
빗자루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 落筆揮帚
무지개를 뱉어내어 부를 써내리니 / 吐虹霓而作賦
어슴푸레 손에서 벼락을 치는 듯하구나 / 恍若霹靂之在手也

[주D-001]적소(積蘇) : 쌓아 놓은 땔나무를 말한다. 주 목왕(周穆王)이 일찍이 도사(道士)를 따라 천상(天上)에서 노닐 적에 인간세계(人間世界)를 내려다보니, 그 궁사(宮榭)들이 마치 포개 놓은 흙덩이나 쌓아 놓은 땔나무〔累塊積蘇〕처럼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주D-002]한고(漢皐) : 주(周) 나라 때 정교보(鄭交甫)란 사람이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女人)을 만나 구슬 두 개를 얻었다는 고사가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한강(漢江) 가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주D-003]항해(沆瀣) : 선인(仙人)이 마신다는 밤중의 기〔夜半氣〕를 말하는데, 《초사》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 놀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 하였다.
[주D-004]금대(金臺) :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압구정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5]화개(華蓋) : 귀인(貴人)들의 수레 위에 받치는 일산(日傘)을 말한다.
[주D-006]여섯 …… 이었도다 :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표류(漂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제(天帝)의 명에 따라 금색의 자라〔金鼇〕 15마리가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주D-007]검고 …… 이루어 : 당 현종(唐玄宗) 때 감목사(監牧使) 왕모중(王毛仲)이 수만 필의 말을 잘 길러서 각 색깔별로 대열(隊列)을 나누어 놓으니, 바라보기에 마치 아침놀〔雲錦〕 빛과 같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8]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새로운 임금이 등극(登極)하여 천하를 일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9]상서로운 …… 거듭하고 : 일월(日月)같이 밝은 덕을 전왕(前王), 후왕(後王)이 계속해서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옛 임금이신 문왕, 무왕이 빛난 덕을 거듭 베푸시어 백성들이 의지할 바를 정해 주고 가르침을 펴셨다.〔昔君文王武王 宣重光 奠麗陳敎〕” 하였다.
[주D-010]왕도(王道)는 …… 넓음이여 : 《서경》 홍범(洪範)에, “비뚤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넓고 넓으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1]사문(四門)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서경》 순전(舜典)에, “사방의 문으로 손님을 맞이하게 하시니, 사방의 문이 화목하였다.〔賓于四門 四門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고요(皐陶) …… 곽거병(霍去病) : 고요와 기(夔)는 순(舜) 임금의 두 현신(賢臣) 이름이고, 위청(衛靑)과 곽거병은 모두 한대(漢代)의 명장(名將) 이름이다.
[주D-013]반고(班固) …… 순숙(荀淑) : 반고는 《한서(漢書)》의 저자이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저자이며, 유향(劉向)은 전한(前漢) 때의 학자(學者)이고, 순숙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이다.
[주D-014]날개에 …… 부여잡도다 : 봉황(鳳凰)의 날개에 붙고 용(龍)의 비늘을 부여잡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영주(英主)를 섬겨서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주D-015]구준(衢樽)과 춘대(春臺)를 누리면서 : 구준은 큰 길거리에 설치한 술동이를 말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큰 길거리 한가운데에 술동이를 두어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각 적당하게 떠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小不同 各得所宜〕”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에 비유한 것이고, 춘대는 《노자(老子)》 제 12 장에, “세속의 중인들은 화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다스운 봄날 높은 누대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한 듯 즐거워한다.〔衆人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한 데서 온 말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6]격양가(擊壤歌) : 요(堯) 임금 때에 한 노인(老人)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흙덩이를 치면서〔擊壤〕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거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역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7]거수(車水)와 마룡(馬龍) : 이것은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은 헤엄치는 용과 같다.〔車如流水 馬如游龍〕”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거마(車馬)의 왕래가 빈번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後漢書 卷10上 皇后紀 明德馬皇后紀》
[주D-018]무우(舞雩)의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일찍이 자로(子路),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에게 각각 자기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19]남풍(南風)이 …… 함 : 옛날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무서운 태양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7년 조에, “조최는 겨울날의 태양이고, 조돈은 여름날의 태양이다.〔趙衰冬日之日也 趙盾夏日之日也〕” 하였는데, 그 주석에, “겨울날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날의 태양은 무서운 것이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티끌 …… 듯하나니 : 옥호(玉壺)는 밝은 달을 비유한 말이고, 구슬이 잠긴 듯하다는 것은 곧 밝은 달 그림자가 물속에 잠긴 것을 형용한 말이다.
[주D-022]등림(登臨) …… 있으랴 : 요락(搖落)은 초목의 잎이 흔들려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의 기후됨이여. 쓸쓸하여라, 초목은 낙엽이 져서 쇠하였도다. 구슬퍼라, 흡사 타향에 있는 듯하도다. 산에 올라 물을 굽어봄이여, 돌아갈 사람을 보내도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 憭慄兮 若在遠行 登山臨水兮 送將歸〕”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3]영서(靈犀)로 추위를 물리치고 : 영서는 곧 한기(寒氣)를 물리칠 수 있는 서각(犀角)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초기에 교지국(交趾國)에서 황금빛의 서각 하나를 바쳐 왔는데, 그 사자(使者)의 청(請)에 따라 이것을 금반(金盤)에 담아 전중(殿中)에 놓아두자, 다스운 기운이 발산하므로, 상(上)이 그 까닭을 물으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입니다.〔此辟寒犀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4]나귀 …… 참거나 : 나귀를 탄다는 것은,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서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눈 속에 나귀 타고 시 읊던 모습을 일러 “그대는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느라 뫼산 자 어깨 으쓱인 것을.〔君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 한 데서 온 말이고, 추위를 참는다는 것은, 소식의 사인견화(謝人見和) 시에, “서생의 사업은 참으로 가소로워라, 추위 참고 외로이 읊자니 붓끝이 안 나가네.〔書生事業眞堪笑 忍凍孤吟筆退尖〕”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5]드러눕고 …… 걸 : 드러누웠는다는 것은,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친히 민가(民家)를 순행하다 보니,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데서 온 말이고, 맨발을 벗었다는 것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풀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두건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結草以爲裳 科頭跣足〕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6]물은 …… 신령해지나니 :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산은 높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나고, 물은 깊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이 있으면 신령해진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7]무창(武昌)의 …… 드러났고 : 원규(元規)는 진(晉) 나라 재상 유량(庾亮)의 자이다. 유량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에 있을 때, 장강(長江) 가에 누각(樓閣)을 세웠던바 이를 남루(南樓)라 하는데, 어느 가을날 밤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할 적에 유량이 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風流)를 만끽했던 일로 인하여 이 남루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28]양양(襄陽)의 …… 알려졌거늘 : 현수(峴首)는 현산(峴山)의 다른 이름이고, 숙자(叔子)는 진(晉) 나라 명장(名將) 양호(羊祜)의 자이다. 양호가 일찍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관계로 그 지방 백성들이 양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에 비(碑)를 세워서 그를 기렸는데, 이 비를 바라보는 이는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하여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29]성악(星岳)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신백과 여후는 산악에서 내려왔고, 부열은 죽은 뒤에 별이 되었다.〔申呂自嶽降 傅說爲列星〕” 하였는데, 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賢相)으로 일찍이 은(殷) 나라를 중흥시키고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고, 신백(申伯)과 여후(呂侯)는 산신령이 내려와서 탄생했다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두 현상으로,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이 산에서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백을 내셨도다. 보후와 신백 두 사람은, 주 나라의 기둥이라, 사국의 번병이 되어, 사국에 덕을 베풀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 四國于蕃 四國于宣〕” 한 데서 온 말이다. 여후는 보후와 같다.
[주D-030]상당군(上黨君) : 조선 세조(世祖)의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진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
[주D-031]잠저(潛邸) 시절의 광묘(光廟) : 광묘는 능호(陵號)가 광릉(光陵)인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으로, 세조가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을 말한다.
[주D-032]풍운(風雲)의 기이한 만남이요 : 용호(龍虎)가 풍운을 만나서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을 의미한다.
[주D-033]어수(魚水)가 …… 것이로다 : 이 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난 것을 의미한 말로,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이르기를,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4]손으로 …… 날아오르니 : 붉은 태양은 임금을 상징한 말이고, 구오(九五)의 용(龍)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한 데서 온 말로,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D-035]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는지라, 성인이 일어나매 만물이 우러러보도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6]소조(蕭曹)의 …… 내니 : 소조는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합칭한 말이고, 양평(良平)은 한 고조의 모신(謀臣)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합칭한 말이다.
[주D-037]태산(泰山)과 황하(黃河)로 맹세하여 : 한 고조의 공신에 대한 봉작(封爵)의 서사(誓辭)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영원히 편안한 그날까지 복록이 후손에게 미치리라.〔使河如帶 泰山如厲 國以永寧 爰及苗裔〕” 한 데서 온 말로, 공신에 책록(冊錄)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8]운대(雲臺)와 …… 걸렸네 : 운대는 후한(後漢) 때에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었던 곳이고, 기린각(麒麟閣)은 전한(前漢) 때에 공신의 초상을 걸었던 곳으로, 이 역시 공신에 책록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9]녹야당(綠野堂) :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裴度)가 조정에서 은퇴하여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별장 이름이다.
[주D-040]독락원(獨樂園) : 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宰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원명(園名)이다.
[주D-041]누가 …… 했는고 :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백구가 아득한 물결 속에 숨거든, 만 리 밖의 백구를 누가 능히 길들일꼬.〔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2]아 …… 자득하여라 : 《시경》 소남(召南) 고양(羔羊)에, “크고 작은 양의 가죽이여, 흰 실로 다섯 줄을 꿰맸도다. 퇴청하여 집에서 먹으니, 종용하고 자득하도다.〔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남국(南國) 사람들이 문왕(文王)의 정사(政事)에 교화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검소하고 정직하므로, 한 시인(詩人)이 그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주D-043]나날이 …… 지나도다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깊숙하게 들어가 구렁을 찾고, 또한 험한 길을 따라 언덕을 지나도다.〔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4]마음 …… 되었으니 : 《장자》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여 하수를 건널 때에 다른 빈 배가 와서 나의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일지라도 성을 내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한 데서 온 말로, 빈 배란 곧 물욕(物欲)이 전혀 없어서 마음이 아주 넓고 평온한 것을 의미한다.
[주D-045]은하수 …… 것이요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서쪽으로 함지에 노닐고 부상에 다다르니, 초목에까지 은하수 밝은 빛을 입히었도다.〔西游咸池略扶桑 草木衣被昭回光〕” 한 데서 온 말로, 이 묘비의 본뜻은 한유(韓愈)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초목에까지 문(文)과 도(道)의 은택을 입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압구정(狎鷗亭)의 주인 한명회(韓明澮) 또한 한씨(韓氏)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유에 관한 글을 끌어댄 것이다.
[주D-046]규벽(奎壁)이 …… 것이라 : 규와 벽 두 별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데서, 전하여 문원(文苑), 또는 문장(文章)을 의미하고, 신조(宸藻)는 제왕(帝王)의 시문(詩文)을 가리키며, 일월의 빛을 그린다는 것은 한유(韓愈)의 진찬평회서비문표(進撰平淮西碑文表)에, “천지의 얼굴과 일월의 빛은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꺼운 낯으로 뻔뻔스레 글을 지어서 분부에 답하는 바입니다.〔乾坤之容 日月之光 知其不可繪畫 强顔爲之 以塞詔旨〕”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7]천조(天朝)의 …… 꾸미고 :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압구정(狎鷗亭)의 기문(記文)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중국의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시(詩)를 지어서 압구정을 찬미(讚美)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48]한 위공(韓魏公) : 북송(北宋) 시대 현상(賢相)으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그의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그의 실명(室名) 또한 압구정(狎鷗亭)이었다.
[주D-049]급류(急流)를 …… 구하고 : 송(宋) 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가 벼슬이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50]오창(敖倉) : 진(秦) 나라 때의 창고(倉庫) 이름이다.
[주D-051]남기(南箕)를 …… 마시고 : 남기는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을 말하는데, 이 별자리는 마치 키〔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북두성(北斗星) 자리 또한 말〔斗〕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므로, 술을 뜬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주D-052]황견(黃絹)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주D-053]무지개를 뱉어내어 : 시문(詩文) 짓는 재주가 풍부함을 이른 말이다.
[주D-054]손에서 …… 듯하구나 : 재사(才思)나 문장(文章)이 매우 민첩하고 유창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