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19. 삼각산 (산마루)

2011.6.19. 삼각산 산행 (산마루 산악회 창립 4주년 행사) 스크랩

아베베1 2011. 6. 20. 10:57

 

 

 

 

 

 

 

 

 

 

 

 

 

 

 

 

 

 

 

 

 

 

 

 

 

완당전집 제2권
 서독(書牘)
조운석 인영 에게 주다[與趙雲石 寅永]


비바람 몰아치는 가운데 사람을 생각하니 그리운 정을 풀 수가 없습니다. 형(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문을 굳게 닫고 혼자 지내십니까?
그런데 재차 비봉(碑峯)의 고비(古碑)를 가져다가 반복하여 자세히 훑어보니, 제1행 진흥태왕(眞興太王) 아래 두 글자를 처음에는 ‘구년(九年)’으로 보았었는데 ‘구년’이 아니고 바로 ‘순수(巡狩)’ 두 글자였습니다. 또 아래 ‘신(臣)’ 자 같이 생긴 것은 ‘신’ 자가 아니고 바로 ‘관(管)’ 자였습니다. 그리고 ‘관’ 자 밑에 희미하게 보인 것은 바로 ‘경(境)’ 자이니, 이것을 전부 통합해 보면 곧 ‘진흥태왕순수관경(眞興太王巡狩管境)’ 여덟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例)는 이미 함흥(咸興) 초방원(草旁院)의 북순비(北巡碑)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7행의 ‘도인(道人)’ 두 글자는 또 초방원 북순비의 ‘시수가 사문도인(時隨駕沙門道人)’이란 말과 착오 없이 딱 들어맞습니다.
또 제8행에는 ‘남천(南川)’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이 두 글자는 바로 이 비(碑)의 고실(故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으니, 이 비는 의당 진흥왕 29년 이후에 세운 것이지,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주에 순행(巡幸)하여 봉강(封疆)을 척정(拓定)할 때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또 제9행의 ‘부지급간미지(夫智及干未智)’ 여섯 자는 저 초방원의 비에서 수가(隨駕)한 여러 사람들의 관작(官爵)과 성명(姓名)을 기록한 것과 부합되니, ‘부지급간미지’ 이 여섯 자는 바로 관명과 인명인 듯하나, 어느 것이 관명이고 어느 것이 인명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史)의 직관(職官)에 있어서는 예전부터 빠진 글이 많아서 또한 자세히 고증할 수가 없고, 대체로 초방원의 비와 동시에 세운 것만은 확실한데,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라고 보는 경우에 대해서는 감히 확실하게 증거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평왕(眞平王) 26년에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고 보면 이 비가 진평왕 26년 이전에 세워진 것이 또 분명해집니다.
진흥왕 29년에 남천주를 설치함으로부터 이후로 진평왕 26년까지가 모두 38년간인데, 초방원의 비에서 지금 비로소 상고해 보니, 그것이 진지왕(眞智王) 때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진지왕 때에 세운 것임을 아는가 하면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아들입니다. 진지왕 때에는 거칠부(居漆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었는데, 초방원 비문의 수가(隨駕)한 사문도인(沙門道人) 법장(法藏)ㆍ혜인(慧忍) 두 사람 아래에 ‘口

等居

‘ 등의 글자가 있으니 저의 소견으로는 본디 좀벌레로부터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이지러진 글자는 마침내 그것이 없어졌으나 다른 본(本)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大) 자의 왼쪽 삐침 획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이지러진 글자의 상반(上半)은 이것이 원래 이지러진 것으로서 그것이 칠(漆) 자의 윗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거칠부(居漆夫)가 상대등(上大等)이 된 때가 진지왕 원년인데 진지왕은 왕위(王位)를 4년간 누리었고, 진평왕이 이어 즉위한 원년 8월에는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니, 거칠부가 상대등으로 있었던 기간은 곧 진지왕의 재위 4년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초방원의 비 또한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 아니고 바로 진지왕 때에 세운 것으로 진지왕도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巡狩)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고, 역사에 기재된 지리(地理)는 비렬홀(比列忽)에 불과하지만, 초방원의 비를 통해 비렬홀 이북의 2백 리 지역이 또 신라(新羅)의 영토로 꺾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으나, 이 거칠부가 수가(隨駕)한 것으로 말하자면 진지왕이 또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두 비의 문자가 서로 같은 곳이 많은 것으로 보면 두 비를 동시에 세운 것이 확실하고, 그 시기 또한 모두 진지왕 때에 있었던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하필기 제32권
 순일편(旬一編)
승가사(僧伽寺)의 비석에 대한 고찰


북한산(北漢山) 남쪽에 승가사가 있다. 그 위가 비봉(碑峯)인데, 기둥 하나가 사람처럼 우뚝 서 있다. 시속에서는 고려 승 도선(道詵)의 비인데 지금은 글자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운석(雲石) 조공(趙公 조인영(趙寅永))이 추사(秋史)와 함께 답사하여 비석에 남아 있는 글자를 찾아보니 진흥왕비(眞興王碑)였다. 그래서 마침내 공인(工人)에게 탑본하게 하여 자세히 글자를 살펴보니, 완전히 닳아 없어져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자획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글자가 모두 92자였다. ‘진흥왕’이라는 세 자, ‘순수(巡狩)’라는 두 자, ‘남천(南川)’이라는 두 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 사실로 증명되며 사서(史書)의 내용으로 고증을 해 본 것이다. 상고하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진흥왕 16년(555)에 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넓혀 정하였고, 29년(568)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 비는 바로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에 ‘진흥’이라는 두 자가 있는데, 지증왕본기(智證王本紀)에 근거하면 신라의 시법(諡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지증왕 뒤로 법흥왕(法興王)을 거쳐 진흥왕에 이르렀다. 진흥왕 때 미리 시호를 일컫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흥왕 사후에 세운 듯하다. 진평왕(眞平王) 26년(604) 기록에 의거하면 이때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는데, 비문에 ‘남천’이라는 두 자가 있으니 또한 남천주를 폐하기 전인 듯하다. 진흥왕 원년(540)은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6년이고, 진평왕 원년(579)은 진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11년이니, 따져 보면 양(梁)ㆍ진(陳) 사이에 새긴 것이다. 또 상고하건대, 함흥부(咸興府)의 초방령(草芳嶺)에 진흥왕 북순비(北巡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탑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圭齋遺藁卷一 宜寧南秉哲子明
 
蕩春臺。送釋大演之香山。 a_316_554a


316_554b蕩春重到已殘春。尙有桃花照眼新。宋氏之家逢猛雨。是日宿宋氏家。夜大雷雨。 碑峰何處送行人。時演師寓居僧迦寺。寺後有新羅眞興王北狩碑。 松風似作顚顚語。石佛曾參得得因。曾與演師。共禮僧迦石刻佛像。 臨別莫懷怊悵意。雖然如是竟非眞。


완당전집 ( 阮堂全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판심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간종  활자본(鉛活字)
간행년  1934년 간행
권책  10권 5책
행자  12행 27자
규격  19.7×11.8(cm)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D1-A101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01
 저자
성명  김정희(金正喜)
생년  1786년(정조 10)
몰년  1856년(철종 7)
 원춘(元春)
 완당(阮堂), 추사(秋史), 승설도인(勝雪道人),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본관  경주(慶州)
특기사항  박제가(朴齊家)의 문인(門人). 권돈인(權敦仁), 승(僧) 초의(草衣), 청인(淸人)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 등과 교유
 가계도
 金頤柱
 判書
 金魯永
 參判
 南陽洪氏
 洪大顯의 女
 金正喜  
 
 韓山李氏
 李羲民의 女
 金商懋  
 參奉
 任泰懿의 女
 
 閔致元의 女
 
 禮安李氏
 李秉鉉의 女
 側室
 
 金商禹
 
 李樹敏의 女
 
 女
 
 李友秀
 
 金魯成
 判官
 鄭趾煥의 女
 
 金魯明
 
 洪配浩의 女
 
 金魯敬
 判書
 杞溪兪氏
 兪駿柱의 女
 金正喜  
 
 金命喜
 縣令
 宋原淵의 女
 
 兪營柱의 女
 
 金相喜
 
 李羲甲의 女
 
 朴秉益의 女
 
 女
 
 閔相爕
 
 女
 
 洪㝡榮
 

기사전거 : 慶州金氏太師公派大同譜, 韓國系行譜, 本集內容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1 6월 3일, 충청도 禮山에서 태어나다.
정조 21 1797 정사 嘉慶 2 12 부친상을 당하다. ○ 조부상을 당하다.
정조 24 1800 경신 嘉慶 5 15 韓山李氏 李羲民의 딸과 혼인하다.
순조 1 1801 신유 嘉慶 6 16 생모 杞溪兪氏의 상을 당하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20 부인 한산이씨의 상을 당하다.
순조 8 1808 무진 嘉慶 13 23 禮安李氏 李秉鉉의 딸과 혼인하다.
순조 9 1809 기사 嘉慶 14 24 增廣生員試에 장원하다. ○ 12월, 冬至 兼 謝恩副使로 떠나는 생부 金魯敬을 따라 燕京에 가다.
순조 10 1810 경오 嘉慶 15 25 1월, 연경에서 阮元과 翁方綱을 만나 師弟의 의리를 맺다.
순조 13 1813 계유 嘉慶 18 28 2월, 人日製에 〈克明峻德賦〉로 次上 入格하다.
순조 15 1815 을해 嘉慶 20 30 草衣 禪師와 金蘭之交를 맺다.
순조 16 1816 병자 嘉慶 21 31 北漢山 僧伽寺 곁의 碑峯에 있는 비석이 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다.
순조 17 1817 정축 嘉慶 22 32 서자 金商禹가 태어나다. ○ 吉祥室의 편액을 쓰다.
순조 18 1818 무인 嘉慶 23 33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짓다.
순조 19 1819 기묘 嘉慶 24 34 1월, 春到記儒生 시험에서 製述로 수석을 하여 直赴殿試의 자격을 받다. ○ 4월, 月城尉 金漢藎의 奉祀孫으로 文科에 급제하다.
순조 20 1820 경진 嘉慶 25 35 10월, 都堂 會圈에서 6점을 받다. ○ 10월, 翰林召試에 뽑히다.
순조 22 1822 임오 道光 2 37 6월, 검열로서 翰林 會圈을 하다.
순조 23 1823 계미 道光 3 38 3월, 奎章閣待敎 圈點에서 4점을 받다. ○ 8월, 규장각 대교가 되다.
순조 26 1826 병술 道光 6 41 6월, 忠淸右道 暗行御史로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수령들을 勘罪할 것을 書啓하다.
순조 27 1827 정해 道光 7 42 4월, 부교리로서 曺鳳振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 ○ 5월, 의정부 검상이 되다. ○ 6월, 檢校待敎로 閣圈을 하다. ○ 7월, 통정대부에 가자되다.
순조 29 1829 기축 道光 9 44 1월, 검교대교로 각 권을 하다.
순조 30 1830 경인 道光 10 45 8월, 尹商度의 獄事가 일어나다. ○ 10월, 생부 김노경이 古今島로 유배되다.
순조 32 1832 임진 道光 12 47 부친 김노경의 일로 擊錚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다. ○ 「禮堂金石過眼錄」을 짓다.
헌종 2 1836 병신 道光 16 51 4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 5월, 「列聖御製」를 監印한 공으로 加資되다. ○ 7월, 병조 참판이 되다. ○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헌종 4 1838 무술 道光 18 53 생부 김노경의 상을 당하다.
헌종 5 1839 기해 道光 19 54 형조 참판이 되다.
헌종 6 1840 경자 道光 20 55 9월, 尹尙度가 올린 凶疏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濟州 大靜縣에 위리안치되다.
헌종 8 1842 임인 道光 22 57 부인 예안이씨의 상을 당하다.
헌종 10 1844 갑진 道光 24 59 李尙迪에게 歲寒圖를 그려 주다.
헌종 14 1848 무신 道光 28 63 12월, 李穆淵, 趙秉鉉과 함께 濟州 流配에서 풀려나다.
헌종 15 1849 기유 道光 29 64 玉笛山房에서 〈禊帖考〉를 짓다.
철종 2 1851 신해 咸豐 1 66 7월, 眞宗祧遷禮論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北靑에 유배되다.
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67 8월, 북청의 유배에서 풀려나다.
철종 6 1855 을묘 咸豐 5 70 瓜地草堂에서 지내다. 〈白坡律師碑〉를 짓다.
철종 7 1856 병진 咸豐 6 71 奉恩寺에서 지내다. ○ 10월 10일, 졸하다.
고종 4 1867 정묘 同治 6 문인 南秉吉이 「覃揅齋詩藁」를 간행하고, 아울러 「阮堂尺牘」을 간행하다.
고종 5 1868 무진 同治 7 문인 남병길이 「阮堂集」을 간행하다.
1934 갑술 從玄孫 金翊煥이 「阮堂全集」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小傳(閔奎鎬 撰), 墓碑(金承烈 撰), 年譜(鄭炳三, 澗松文華 제30호), 朝鮮王朝實錄,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燕京에 가서 淸人 阮元과 師弟의 의리를 맺고 考證學, 金石學 등의 학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호를 阮堂이라고 한 것도 완원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저자는 조선의 實學과 淸의 학풍을 융화시켜 經學, 金石學, 佛敎學 등에 一家를 이루었으며 역대 서예가들의 장점을 취하여 독창적인 秋史體를 창안하였다.
저자는 著述로 自立하고 싶지 않아서 원고를 두 번이나 불태우기도 하였는데, 門人 南秉吉이 저자의 시를 수집 편차하여 「覃揅齋詩藁」 7권 2책을 全史字로 1867년 겨울에 印行하였다.《初刊本》 이와 아울러 저자의 尺牘을 따로 편차한 「阮堂尺牘」 2권 2책을 「담연재시고」와 함께 전사자로 인행하였다. 「담연재시고」는 저자의 시를 시체별로 편차한 것이며, 권수에 申錫禧의 서문과 남병길의 題辭가 있다. 이 책은 현재 규장각(奎7153),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186) 등에 소장되어 있다. 「완당척독」에는 저자의 편지 20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興宣大院君과 權敦仁, 白波上人, 草衣上人 등 10여 명에게 준 것이고, 말미에 〈牘外餘言〉과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4-다2), 규장각(奎7165),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04B-0005)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듬해에 南相吉(南秉吉의 다른 이름)과 민규호가 전 해에 간행된 「담연재시고」, 「완당척독」을 刪定ㆍ再編하고, 거기에 새로 수집한 저자의 시문을 보충하여 「阮堂集」 5권 5책을 완성하였다. 이것을 1868년에 남상길이 晩香齋에서 全史字로 重刊하였다.《重刊本》 권수에는 남상길의 識와 晩香齋活板이라고 쓴 속표지, 민규호가 쓴 〈阮堂金公小傳〉이 있다. 권1~2는 文, 권3은 尺牘, 권4는 別錄, 권5는 詩이다. 이 책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중간본의 필사본은 규장각(奎4906)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從玄孫 金翊煥이, 曾孫 金沂元과 從玄孫 金承烈이 각각 수집한 저자의 시문을 구하고 이것을 이미 간행된 「覃揅齋詩藁」, 「阮堂尺牘」, 「阮堂集」과 함께 재편차하여 洪命憙의 교정을 거친 후 金寗漢과 鄭寅普의 서문을 받아 「阮堂全集」 10권 5책을 1934년에 서울 新朝鮮社에서 鉛活字로 印行하였다.《三刊本》 이 본은 중간본에 비해 내용이 많이 보충되었는데, 특히 書牘이 중간본의 75板에서 155판으로 늘었고, 詩도 72판에서 78판으로 약간 늘었다. 이 책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01),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282),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03B-0750)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934년 新朝鮮社에서 연활자로 인행된 삼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이 가운데 卷首의 肖像과 遺墨 6板은 韓國文集叢刊의 編輯方針에 따라 收錄對象에서 제외하였다.

기사전거 : 序(金寗漢ㆍ鄭寅普 撰), 跋(金承烈 撰), 覃揅齋詩集序(申錫禧 撰), 覃揅齋詩藁題辭ㆍ阮堂尺牘序ㆍ小識(南秉吉 撰), 小傳(閔奎鎬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서는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總目, 1934년에 지은 金寗漢의 서문과 1933년에 지은 鄭寅普의 序, 1867년에 지은 申錫禧의 覃揅齋詩集序와 南秉吉의 覃揅齋詩藁題辭, 1867년에 지은 南秉吉의 阮堂尺牘序, 南相吉의 小識, 1868년에 지은 閔奎鎬의 小傳이 차례로 실려 있다. 각 권마다 目錄이 첨부되어 있다.
권1에는 攷 8편, 說 7편, 辨 12편이 실려 있다. 攷는 저자의 考證學, 金石學, 書畫에 대한 저자의 안목을 보여 주는 글이다. 〈周易虞義攷〉는 三國 時代 吳나라의 經學者 虞翻의 저서인 「周易虞氏義」에 대해 내용을 고증 논박한 것이다. 〈其子攷〉는 「周易」 明夷卦에 나오는 ‘箕子之明夷’의 箕子를 세속에서 모두 殷 太師인 箕子로 보는 데 대하여, 其子는 초목의 뿌리가 한창 자라나는 뜻의 荄玆의 잘못이라고 고증 논박한 것이다. 〈眞興二碑攷〉는 咸興의 북쪽 黃草嶺 아래에 있던 眞興王巡狩碑와 北漢山 僧伽寺 곁의 碑峯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고증이다. 이 중 〈僧伽眞興王巡狩碑文〉은 1816년에 저자가 金敬淵과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발견한 것으로, 그때까지 無學大師의 비문으로 잘못 전해 오던 것을 史書 등을 근거로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고증한 것이다. 〈禊帖攷〉는 晉나라 명필 王羲之가 쓴 蘭亭敍帖의 眞本에 대한 고증이며, 〈天竺攷〉는 五天竺 즉 古代 印度에 대하여 舊蹟, 佛經의 번역, 釋迦의 生滅 시기 등에 대한 고증으로 저자의 불교에 대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설 가운데 〈漢儒家法說〉은 漢儒의 家法과 經傳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 글인데, 청나라 胡縝의 〈兩漢經師家法攷〉에서 全文을 인용한 것이다. 〈禮堂說〉은 성인의 道는 禮에 근본한다는 것을 「論語」를 인용하여 논증하고 당대의 儒者들이 불교에 치중하는 것을 경계한 글인데, 청나라 凌延堪의 〈雜著〉에서 전문을 인용한 것이다. 〈壹獻禮說〉은 「儀禮」 士冠禮에 나오는 壹獻之禮를 논변한 것이며, 〈實事求是說〉은 학문하는 방도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찾아야 할 뿐, 굳이 訓詁 위주의 漢과 性理 위주의 宋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朱熹의 朱子學과 陸九淵의 陽明學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 글이다. 말미에는 1816년에 쓴 杞園 閔魯行의 後敍가 첨부되어 있다. 변은 저자의 考證과 書畫에 대한 글이 많다. 〈易筮辨〉에서는 「周易」이 한갓 점을 치는 데 이용되는 책이 아니라 허물을 적게 하는 책임을 강조하고, 周公이 爻辭를 지었다는 설에 대해서 후세의 諸儒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억측하지 말고 實證할 근거를 갖고 주장해야 經義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墨法辨〉에서는 書畫에는 墨法과 筆法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묵법과 필법을 구별 없이 혼동하여 다만 필법만 들어 논하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이 가운데 〈太極卽北極辨〉, 〈書派辨〉, 〈格物辨〉은 청나라 阮元의 글에서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저자의 학문에 끼친 완원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권2에는 疏 6편, 書牘 48편이 실려 있다. 소는 규장각 대교, 翰林, 성균관 대사성, 嘉善大夫 등을 사양하는 글이다. 이 중 〈辭職兼陳情疏〉는 從兄 金敎喜를 대신하여 지은 것인데, 김교희의 季父인 金魯敬이 尹商度의 獄事에 연루되어 古今島에 유배된 일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한 내용이다. 서독은 일가친척과 知人들에게 보낸 편지로 안부를 묻는 등 일상적인 내용과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로 나눌 수 있다. 〈與舍仲〉 5편은 仲氏 金命喜에게 보낸 편지로 자신의 濟州 유배 생활과 집안 식구들의 안부, 일가친척의 근황, 가정의 大小事, 그리고 중씨가 질문한 深衣, 曲袷 제도에 대해 언급하였다. 〈與舍季〉 9편은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면서 季弟 金相喜에게 「本草」, 「詩醇」, 「律隨」 등의 서책과 法帖, 草書 千字文, 種繇의 「靈飛經」, 李德懋의 「磊磊落落書」를 보내 달라는 것과 일가친척의 근황을 묻는 내용이다. 이 밖에 從兄 金敎喜, 재종형 金道喜, 從姪 金商一ㆍ金尙默, 再從孫 金始濟 형제, 장인 李羲民에게 보낸 문안 편지가 있다. 〈與石坡興宣大院君〉 7편은 저자와 姻戚 관계에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준 편지로, 蘭畫, 蘭幅 등에 대해 언급하고 안부를 물은 문안 편지이다. 〈與趙雲石〉은 조인영에게 준 편지로 碑峯에 있는 古碑가 眞興王巡狩碑인 것을 고증하여 밝힌 내용이다. 이어 조카 閔台鎬(1), 怡堂 趙冕鎬(4), 石農 李鍾愚(1), 梣溪 尹定鉉(1), 威堂 申觀浩(3)에게 준 편지가 있다.
권3~5는 서독 197편이다. 권3은 彛齋 權敦仁과 주고받은 편지 35편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濟州에 유배된 기간 동안 쓴 편지가 대부분이다. 권돈인(1783~1859)은 영의정까지 지낸 文人이며 書畫家로 저자와 친근히 지낸 인물이다. 편지에는 거의 대부분 저자의 考證學者, 書畫家, 實學者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중 淸人 魏默源의 학문은 實事求是의 학문 태도를 견지하고 軍事를 담론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城守篇〉은 「海國圖志」에 들어 있는 〈籌海論〉과 표리를 이루며 李舜臣 장군이 왜적을 섬멸할 때 쓴 戰法이라는 흥미로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권4에는 丁若鏞(1), 金逌根(3), 南秉哲(5), 金炳學(3), 沈熙淳(27), 張寅植(20), 李尙迪(7), 吳慶錫(4), 金奭準(4), 洪顯普(4), 曺匡振(8) 등 26명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 내용으로는 經傳 註釋의 의문점, 金石의 考證, 韓濩의 石峯帖, 廟制說, 書法의 종류, 印篆의 비법, 鬼神考, 深衣考 등에 대한 것이 실려 있는데, 권3에 비해 학술적 내용은 적은 편이다. 권5에는 月汀 李璋煜(1), 白坡(3), 草衣(38), 或人(1)에게 준 편지가 실려 있다. 〈與李月汀〉은 청나라 학자인 李璋煜에게 茂堂 段玉裁, 端臨 劉台拱, 覃溪 翁方綱, 古農 余蕭客, 伯申 王引之, 芸臺 阮元, 孟慈 汪喜孫 등 당시 청나라 학자들의 學說과 著述에 대해 질의한 내용이다. 〈與白坡〉는 저자가 ‘海東의 達磨’라고 격찬한 禪僧인 亘璇과 高僧, 佛說, 話頭, 佛經, 五宗의 分派 등 불교 전반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은 내용이다. 〈與草衣〉는 大禪師이며 茶道를 정립한 意恂에게 준 편지 38편으로 권5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지의 내용도 자신의 생활과 상대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것과 佛經, 祖師의 語錄, 大雄殿 扁額 등이다. 〈與人〉은 저자가 北靑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書畫의 積墨法, 書道, 元祐의 黨籍碑, 養父母의 服 등에 대한 내용이다.
권6에는 序 3편, 記 3편, 題跋 43편이 실려 있다. 서는 金逌根이 「全唐詩」에 수록된 序만 따로 모아 만든 「全唐詩序」에 쓴 〈全唐詩序序〉, 저자의 堂號에 대한 서문인 〈橘中屋序〉 등이다. 기는 金鎭恒의 거실 편액에 쓴 〈謙謙室記〉, 陶泉이란 샘에 대해 기술하고 司空圖의 詩品을 가지고 贊을 지은 〈硏山瀨記〉, 再從兄을 위해 대신 지은 〈天然亭重修記〉이다. 제발은 金剛經, 書帖, 詩卷, 上樑文, 碑文, 筆訣, 蘭卷, 碑帖, 蘭亭帖, 修禊帖 등에 쓴 것이다. 이 가운데 〈題北狩碑文後〉는 함경도 함흥 黃草嶺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에 대해 쓴 것으로, 함경도 관찰사 權敦仁에게 얻은 이 비문의 탁본을 고증하여 「海東金石錄」과 「文獻備考」의 그릇됨을 시정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書圓嶠筆訣後〉는 圓嶠 李匡師의 書藝 이론서인 「圓嶠筆訣」에 대해 쓴 글로, 偃筆, 濃淡과 滑澁, 結構 등 구체적 실례를 들어 비판한 내용이 실려 있다. 〈題石坡蘭卷〉은 蘭을 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전제하고 중국에서는 鄭所南과 趙孟頫, 조선에서는 석파 興宣大院君을 난을 잘 치는 사람으로 평가한 내용이다.
권7에는 箋 4편, 銘 4편, 頌 3편, 箴 3편, 上樑文 2편, 祭文 4편, 墓表 1편, 雜著 34편이 실려 있다. 전은 大殿의 誕日, 冬至, 正朝에 올린 것이며, 명은 仁政殿, 汲古泉에 대한 것과 〈性銘〉, 〈番琴銘〉이 있다. 송 가운데 〈漢十四經師頌〉은 한나라의 經學 大家 이른바 14博士에 대한 것으로 저자의 글이 아니다. 이들의 源流와 授受 관계는 班固의 「漢書」에 자세히 실려 있고, 이들의 訓詁著錄은 劉歆의 「七略」에 실려 있다. 잠은 妄, 傲, 惰에 대한 것이며, 상량문은 烏石山 華巖寺, 伽倻山 海印寺에 대한 것인데, 화암사는 秋史 故宅 인근의 오석산에 있으며 저자의 증조부이며 英祖의 부마인 月城尉 金漢藎이 중건한 절이다. 제문은 仲母인 金魯成의 妻 淑夫人鄭氏, 南海神, 下壇에 제사한 글이며, 묘표는 朴弘量에 대한 것이다. 잡저에는 論, 書示, 書贈, 書後 등 34편이 실려 있다. 〈論小學書〉에서는 「소학」은 본래 劉淸之가 편찬한 것이고 「綱目」은 趙師淵이 편찬한 것으로 모두 朱子가 저술한 것이 아닌데, 후학들이 주자가 저술했다고 冒稱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書贈洪祐衍〉은 중국의 書法에는 南派와 北派가 있고, 우리나라는 羅麗 이래로 歐碑만을 익혔는데 조선에 와서는 安平大君이 松雪體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여전히 成任과 申檣은 舊法을 고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홍우연에게 써 준 것이다. 이 밖에 僧 白坡, 慧庵, 優曇, 太虛, 香薰衲, 霽月師, 草衣師, 栗師, 蓮潭大師에게 지어 준 글이 있다.
권8은 雜識이다. 天體의 運行, 二十八宿, 日本의 古經, 古今의 詩法, 東人의 騈體, 詩道, 米友仁의 題畫詩, 書法의 流派, 黃毛筆, 隱筆法, 用筆法, 우리나라의 書法, 蘭亭帖, 五印度의 疆域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권9~10은 詩 389제이다. 권9에는 淸人 翁方綱의 사위 梁鉞이 쓴 法式善의 詩卷 뒤에 題한 〈題梁左田……〉 시와 옹방강의 아들 翁樹崑의 小影에 제한 〈題翁星原小影〉 시가 첫머리에 실려 있는데, 이 같은 편차는 저자와 옹방강 부자와의 親交를 염두에 둔 편찬자의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밖에 送詩, 挽詩와 草衣禪師, 雲句上人 등 스님에게 준 시, 豹庵 姜世晃의 손자 姜彛五, 畫員 金良驥 등 화원에게 준 시 등이 실려 있다. 권10에는 丹陽八景인 下仙巖, 中仙巖, 上仙巖, 龜潭峰, 玉筍峰, 島潭三峯, 石門, 舍人巖을 유람하고 지은 紀行詩, 청나라 화가 茶農 張深과 野雲居士 朱鶴年에 대한 시, 연경에 사신 가는 趙秀三과 申緯에게 준 送詩, 金逌根, 洪奭周와의 酬唱詩, 草衣禪師에게 장난으로 지어 준 戱作詩, 「實錄」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고 江華 史庫에 가서 摩尼山 정상에 올라 지은 시, 제자 許維의 指畫, 芭蕉에 題한 시, 仙境에 마음을 놀리며 塵俗을 이탈하는 뜻을 지닌 〈小遊仙詞〉 13수,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담은 〈悼亡〉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는 金承烈의 跋이 있다.

필자 : 김기빈(金圻彬)

 

 

 

목은시고 제4권
 시(詩)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세 봉우리가 태초 때부터 깎여 나왔는데 / 三峯削出太初時
하늘 가리킨 선인장은 천하에 드물구나 / 仙掌指天天下稀
무성한 솔 그림자엔 해 달 빛이 스며들고 / 松影扶疎橫日月
짙고 옅은 바위 빛엔 연기 안개 섞이었네 / 巖姿濃淡雜煙霏
어깨 솟구친 나그네는 나귀 타고 가는데 / 聳肩有客騎驢去
신선 된 어떤 이는 학을 타고 돌아가는고 / 換骨何人駕鶴歸
젊어서부터 이미 참다운 면목을 알거니 / 自少已知眞面目
사람들이 등 뒤엔 옥환이 살쪘다 말하네 / 人言背後玉環肥


 

[주D-001]선인장(仙人掌) : 중국 화산(華山)에 있는 봉우리 이름인데, 삼각산(三角山)을 화산이라고도 부르므로 거기에 빗대어 한 말이다.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에, “무제의 사당 앞엔 구름이 흩어지려 하고, 선인장봉 위에는 비가 처음 개었도다.[武帝祠前雲欲散 仙人掌上雨初晴]” 하였다.
[주D-002]어깨 …… 가는데 : 소식(蘇軾)의 시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에, “또 보지 못했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으며 산처럼 어깨 솟구친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한 데서 온 말이다.

 

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동사(東事)
지승(地乘) 처음에는 지림(誌林)이라 했다가 지승으로 고쳤다. 글의 체재는 대체로 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에 바탕하였으며, 예의와 선속(善俗)을 중시했다.


조선 구역(九域)의 땅은 연(燕)ㆍ제(齊) 밖에 있는데 동ㆍ남ㆍ서는 대해(大海)에 접하였고 북은 말갈(靺鞨)에 연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의 땅 7백 리를 잃어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으니, 남북으로 3천 리이며 동서로 1천 리이다. 풍기(風氣)가 다르고 성음(聲音)ㆍ복식(服食)ㆍ기욕(嗜欲)이 중국의 풍속과 같지 않으니 대개 방외(方外)에 있는 별개의 나라이다.
상고 시대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와 삼한(三韓)ㆍ사군(四郡)ㆍ이부(二府)를 거치면서, 삼국 시대에 이르러 변한(弁韓)ㆍ마한(馬韓)은 백제에 병합되었고, 진번(眞番)에서는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 임둔(臨屯)과 이맥(夷貊)의 땅을 모두 신라에 병합하였으며, 낙랑(樂浪)은 고구려에, 현도는 요동에 각각 병합되었다.
고려가 삼한의 땅을 전부 차지하여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ㆍ강남(江南)ㆍ영남(嶺南)ㆍ영동(嶺東)ㆍ산남(山南)ㆍ해양(海陽)ㆍ삭방(朔方)ㆍ패서(浿西)의 10도(道)로 나누었다. 뒤에 이를 고쳐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교주(交州)ㆍ서해(西海)ㆍ동계(東界)ㆍ북계(北界)라 하였다.
우리 태종(太宗) 13년(1413)에 경기(京畿)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강원(江原)ㆍ함길(咸吉)ㆍ평안(平安)ㆍ황해(黃海)의 8도로 정하니, 주(州)ㆍ군(郡)ㆍ현(縣)도 이에 의하여 달리 바뀌었으며, 산천의 경계를 달리하고 읍(邑)ㆍ리(里)를 구분하여 백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에 가요가 다르게 되었다.
남방에는 조류(鳥類)가 많고 북방에는 짐승이 많은데 이는 풍기 때문이며, 산협(山峽)은 습속이 순박하고, 이득을 노리는 백성들이 약삭빠른 것은 습성이 그러하여서인 것이다. 동방은 기(氣)가 편박(偏薄)하여 조급하고 경솔하니 변치 않는 마음이 없음도 대체가 모두 그러한 풍기 때문이다.
왕성(王城)은 기내(畿內) 땅으로 본래 마한의 지역이다. 동북은 옛 맥(貊) 땅이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華城) 수원(水原) 지방)에서는 경석(磬石)이 나왔고 해변으로는 염분이 많은 땅이며, 토질(土質)은 벼를 심기에 적당하다. 맥서(貊西 강원도 서북 지방)에서는 콩과 조가 3할이나 산출된다. 왕성이 임금의 손으로 세워졌는데 실제 백제 때에는 남평양(南平壤)이었고, 고려 때에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왕이 번갈아 살기를 다섯 번 하면서 백성들이 모여든 곳이다.
백성들의 습속은 꼼꼼하고 인색하며 여자들의 길쌈 솜씨가 훌륭하여 옷ㆍ신발ㆍ관디를 잘 만들었다. 사방에서 몰려와 만융(蠻戎)들이 복종하였다. 나라의 제도로 유술(儒術)과 시서(詩書)를 존중하여 선비를 가르치니, 예악(禮樂)의 풍이 있었다.
개경(開京)은 선비와 여자들이 흰옷을 입었으며 성률(聲律)을 숭상하니, 이는 고국(古國)의 풍이었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호걸(豪傑)과 대족(大族)들을 이사시켰다. 따르지 않아 금고된 자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세공(世工)과 세상(世商)이 있어, 중개인이 교역을 하였다. 예부터 풍속이 부처를 섬겨 성품이 인유(仁柔)하고 살생을 싫어하였다. 오강(烏江) 서쪽 앙암(仰碞 장단(長湍) 부근에 있음)에 고려 왕의 사당이 있다. 덕진(德津)은 신라의 북독(北瀆)이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화산(華山)이라 하고 중악(中嶽)의 제사를 지냈다.

인조(仁祖) 14년(1636) 남한산(南漢山)에 온조(溫祚)의 사당을 세웠다.

패서(浿西 평안도의 옛 이름)는 조선의 고지(古地)로 그 별[星]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분야(分野)이며 그 자리[次]는 석목(析木)이다. 예맥(獩貊)과 고구려와 현도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북쪽의 여연(閭延 평북 구성(龜城))과 우예(虞芮 평북 강계(江界))는 말갈에 연하였다. 산출되는 곡물(穀物)로는 굵은 기장과 잔 기장이 있으며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삼(蔘)ㆍ칠(潻)ㆍ동(銅)ㆍ철(鐵)ㆍ피혁(皮革) 등이 있다. 바닷가에서는 벼를 식량으로 하였고 생선과 소금을 팔았다. 용만(龍灣 평북 의주(義州))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며 물화(物貨)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다.

평양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주(周) 나라 때에 기자를 봉한 곳이다. 기자의 가르침이 예속(禮俗)을 중히 여겨 귀신을 공경하고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종사하는 업에 안락하였다. 고구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여 풍속이 굳세고 날래게 되니, 힘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궁시(弓矢)와 도모(刀矛)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평양에는 단군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이 있고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토산(兔山)에는 기자총이 있으며 강동(江東)에는 단군총이 있다. 패강(浿江 대동강)은 나라의 서독(西瀆)이어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변(寧邊)은 우발수(優渤水) 가의 가섭원(迦葉原)에 있으니, 북부여(北扶餘) 해부루(解夫婁)의 땅이었다. 성천(成川)은 옛 비류(沸流)의 나라로 동부여라고도 하였다. 단군세가에 보인다.

서해(西海 황해도의 옛 이름)는 고조선의 남쪽 경계였다. 지금은 왕기(王畿) 밖의 무(武)를 숭상하는 땅으로, 동쪽은 맥 땅에 연하였고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염(鹽)ㆍ철(鐵)과 해산물이 있고 곡물로는 벼 2종과 숙속(菽粟) 5종이 난다.
우리 세종(世宗) 때 해주(海州)에서 기장[秬黍]이 나왔는데, 한 알의 크기가 1푼(分)이었다. 9촌(寸)이 황종(黃鍾)의 길이여서 3푼씩을 덜고 더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고려 때에는 태사(太師) 최충(崔冲)이 구재(九齋)를 두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는데 그 구재는,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염주(鹽州)ㆍ남지(南池)ㆍ장연(長淵)ㆍ사정(沙汀)ㆍ장산(長山) 등의 고을이 있는데 장산은 나라에 소용되는 목재가 산출되는 곳이다. 도서(島嶼)로는 백령(白翎)ㆍ대청(大靑)ㆍ소청(小靑)이 있다. 유주(儒州)와 아사달(阿斯達 구월산 부근)에서는 환인씨(桓因氏)와 신시(神市)와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 당장경(唐藏京)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사》에 단군씨의 국도라 하였다.

중원(中原 충청도 지방)과 하남(河南)은 마한(馬韓)의 땅으로, 백제 온조(溫祚)에 의해 병합되었는데,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고 동쪽은 높은 산맥에 막혀 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으며, 이 지방 특산물로는 해산물과 임(林)ㆍ칠ㆍ대추ㆍ감ㆍ목면(木綿)ㆍ모시[苧布]ㆍ구리[銅]ㆍ철(鐵) 등이 산출되고, 태원(太原)에서는 유황(琉黃)이, 서주(西州 서천(舒川))와 소태(蘇泰 태안(泰安))에서는 죽전(竹箭)이 산출된다. 풍속은 검색(儉嗇)하며 부인(富人)들이 많았고, 산협의 습속은 화전(火田)을 일구어 조를 심었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바탕이 거개가 좋다.
상당(上黨 청주(淸州))에서는 호걸 준재들이 나왔고, 웅주(熊州) 공주목(公州牧) 에서는 옛 풍속으로 남자는 쟁(箏)과 피리를 연주하고 여자는 노래하며 북을 쳤는데, 백제의 유풍으로 부강하였던 여속(餘俗)들이다. 대체로 강하고 날랜 것을 숭상하여 싸움을 잘하였다.
하남(河南) 위례(慰禮)는 온조의 고도(古都)인데 여기에 온조의 사당이 있다. 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때에 이르러 남평양(南平壤 즉 한산(漢山)을 말함)에서 웅주(熊州)로 천도하였고 명농(明禯 백제 26대 성왕(聖王))이 즉위하여 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웅진(熊津)에는 나라의 남독(南瀆)이 있어,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소태(蘇泰) 지금의 태안군이다. 서쪽에 있는 도서로 상산도(上山島)와 북파도(北波島)가 있으며 그 밖으로 전횡도(田橫島)가 있다.

강남(江南)과 해양(海陽) 강남은 지금의 전주이고, 해양은 지금의 광주이다. 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 서남쪽이 바다에 접하였다. 소금ㆍ철ㆍ해산물ㆍ귤ㆍ유자ㆍ치자ㆍ비자(榧子)ㆍ죽전(竹箭)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해안 습속이 농사에는 힘쓰지 않고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쌓아 두는 법이 없다. 강남에서는 닥나무ㆍ칠(潻)ㆍ매실ㆍ석류(石榴)ㆍ왕골ㆍ모시ㆍ파초ㆍ생강ㆍ짚ㆍ연[荷]ㆍ울금(鬱金) 등이 산출된다.
금마(金馬 익산(益山))에서는 순후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니, 고국(古國)의 유풍이며, 김제(金堤)에는 5개의 거독(渠瀆)이 있어 논 9800결(結)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전주(全州)는 강해(江海)의 도회(都會)이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이해에 밝아 백성들이 순박하지 못하다. 대방(帶方 남원)은 사람들이 날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숭상하였다.
청거(淸渠) 지금의 용담현(龍潭縣)이다. 의 동쪽 지방은 백성들이 질박하여 꾸밈이 적었으며, 도토리와 상수리를 길렀다. 승라(昇羅) 승평(昇平)과 나주(羅州) 는 풍속이 부려(富麗)한 것을 숭상하였고 남자답게 씩씩한 것과 특출나게 기운 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담주(潭州) 담양부(潭陽府) 에는 준재(俊才)가 많다고 한다.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군)에서는 옛 풍속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는데, 거기서 서약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 친구 간에 신용이 없는 자, 나라의 정사를 헐뜯는 자, 관리에게 불손한 자는 모두 내쫓고, 덕업(德業)에 힘쓰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환난(患難)을 구휼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어, 두터운 데로 함께 돌아가자.”
하고는, 모두 재배(再拜)하고 나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술을 마신다. 대체로 금마(金馬) 이남에서는 무당, 광대, 요사스러운 기예[淫技]와 여러 가지 놀이를 좋아하였다.
군산(群山 만경현(萬頃縣)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 주위가 60리 되는 섬이며 후미진 곳이 있다. 변산(卞山)에서는 궁실(宮室)과 주거(舟車)를 만드는 데에 소용되는 목재들이 산출되고, 나주(羅州)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대방(帶方) 남원부(南原府) 에는 남악사(南嶽祠)가 있다. 《상서(尙書)》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祭祀) 지낼 때, 오악(五嶽)은 삼공(三公)에, 사독(四瀆)은 제후(諸侯)에, 그 나머지는 백(伯)ㆍ자(子)ㆍ남(男)에 준하는 예로 한다.”
하였다. 이는 그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변두(籩豆 제기)와 작헌(爵獻)의 수를 말함이다. 제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 안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낸다.
《예기(禮記)》에 “삼왕(三王)이 내[川]에 제사할 때 모두 하(河)에 먼저 하고 뒤에 해(海)에 한다.” 하였다. 그래서 진인(晉人)은 하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호지(惡池)에 먼저 하였으며, 제인(齊人)은 태산(泰山)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배림(配林)에 먼저 하였다. 종사(從祀 덧붙여 지내는 제사)에 먼저 고하는 것은 대신(大神)을 높이고자 해서이다. 산천(山川)에 제사할 때 해악(海嶽)을 가장 높이는데, 지금 사독(四瀆)에는 중사(中祀)를 하면서 해악에는 소사(小祀)를 함은 예를 잃은 처사라 하겠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로 폭이 4백 리인데, 곡식으로는 보리ㆍ기장ㆍ차조가 잘 된다.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가난하며, 사람들은 미련하고 순박하며 습속은 검소하다. 3대 2의 비율로 여자가 많고 대부분 오래 산다. 좋은 말이 나고 감귤(柑橘)ㆍ대모(玳瑁)ㆍ진주[蠙珠]ㆍ치자나무ㆍ박달나무가 산출된다. 신라 때 고후(高厚)라는 자가 내조(來朝)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받았다. 고려 초에 와서 제주(濟州)를 설치하였다.

대령(大嶺 대관령)의 남쪽은 옛 진한(辰韓)의 땅으로 예맥(獩貊) 남쪽에 있는데 신라가 나라를 천 년 동안 이어오면서, 정전법(井田法)을 개시하고 국학(國學)을 세우며 사전(祀典)을 찬수(撰修)하고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의 구결을 지었다. 풍속이 순후하고 예양(禮讓)을 알아, 군자의 나라로 불려졌다. 동남쪽은 바다에 접하였고 서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으며,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생선ㆍ소금ㆍ동ㆍ철ㆍ은ㆍ돌ㆍ닥나무ㆍ칠ㆍ죽전ㆍ매실ㆍ귤ㆍ석류 등이 있다. 장산(萇山 지금의 동래(東萊))에서는 일본과 통상하여 만이(蠻夷)의 여러 가지 물화(物貨)를 사들였다.

낙랑(樂浪 경주의 옛 이름)은 오래된 나라의 옛터다. 토양(土壤)이 기름져 수확이 다른 데에 비하여 배나 되며 부자들이 많다. 검소함을 숭상하며 물자가 많고 풍요하여 상점들이 즐비하게 시장이 섰다. 패서(浿西)의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한 것에 비견하여 낙랑을 동경(東京)이라 칭하였다.
진양(晉陽 진주)은 사치와 부를 숭상하였고 경산(京山 성주)은 여공(女工)이 우수하였으며 영해(寧海)는 명주실과 오동나무가 유명하였으니, 이 모두가 부유하였던 낙랑의 여속(餘俗)이다. 왕왕 현인(賢人)들의 교화(敎化)가 있어 인(仁)과 의(義)를 흠모하며 선속(善俗)을 편히 여기고 나쁜 짓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산협 가까이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힘써 밭갈이하고 절약하여 종자와 식량을 쌓아 두었다. 바닷가 풍속은 거칠며 염치가 적었고 무당의 저주하는 일을 숭상하였다. 북악(北嶽)ㆍ송얼(松孽)ㆍ빙혈(氷穴)ㆍ조천(潮泉)ㆍ합포(合浦)ㆍ월영(月影)이 있는데, 그 거리는 9072만 8천 척 남짓하다. 낙랑에는 혁거세(赫居世)와 사소(娑蘇 혁거세의 모)의 사당이 있으며 섬으로는 염전도(鹽田島)와 절영도(絶影島)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좋은 말이 나왔다. 그 밖으로 대마도(對馬島)가 7백 리 거리에 있다.

교주(交州) 회양부(淮陽府) 의 동쪽 경계는 옛 예맥의 땅인데, 옥저에서 고구려까지이고 남쪽은 모래바다[沙海] 천 리에 접하였으며, 서쪽은 맥 땅인데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나는 곡식은 콩ㆍ보리ㆍ굵은 기장ㆍ잔 기장이며, 평원에서는 벼를 심어 축적하였고, 해변에서는 물고기와 소금을 팔았다. 큰 못이 많아 고둥[螺]과 대합[蛤]을 먹었다. 해안 지방에서는 죽전(竹箭)이 많이 났고 산협(山峽) 가운데에서는 사(絲)ㆍ마(麻)ㆍ임(林)ㆍ칠(漆)ㆍ삼(蔘)ㆍ당귀[歸]와 여러 가지 약재(樂材) 및 자단(紫檀)이 산출되었다. 맥 땅의 풍속은 어리석고 기욕(嗜欲)이 적으며 염치를 알아,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선(旌善)은 효제(孝弟)의 고을이라 불렸고, 명주(溟州)는 예국, 수춘(壽春 춘천)은 맥국의 땅이다. 양양(襄陽)에는 해상(海上)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평원(平原 원주) 치악산(雉嶽山)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동주(東州 철원) 풍천원(楓泉原)은 궁예(弓裔)가 웅거하던 곳으로, 넓은 들이 3백 리에 사방이 막혀 험조가 많고 탁천(濁川)이 있다. 울진(蔚珍)에서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는 울릉(鬱陵)과 우산(于山)이 있다.

삭방(朔方 함경도)은 옥저 땅으로,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 개마(盖馬)에 있는데 동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 북으로 읍루(挹婁)에서 남으로 예맥까지 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나 강건하고 날래며 이해(利害)에 밝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특산물로는 어염(魚鹽)ㆍ사(絲)ㆍ마(麻)ㆍ피혁ㆍ은(銀)ㆍ석(石)ㆍ유황(琉黃)이 있다. 북방에는 좋은 말이 많다. 옥저는 셋이 있는데, 동옥저ㆍ북옥저ㆍ남옥저이다.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의 별칭) 북쪽에 있는 옛 숙신(肅愼)의 땅이다. 땅이 비옥하여 밭곡식이 잘되었으며, 용력(勇力)을 숭상하였다. 추운 지대여서 굴속에서 살았다. 활의 길이가 5척이며 호시(楛矢)와 석촉(石鏃)은 8촌이다. 옥저와 풍속이 같다.
말갈 지역에 있는 삭방(朔方)ㆍ함관(咸關) 이북은 고려 때 동여진(東女眞)이 웅거하던 곳이었는데, 이를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토벌하여 쫓아냈다. 뒤에 화주(和州) 이북이 배반하여 원(元) 나라로 들어가자, 유인우(柳仁雨)가 쳐서 평정하고 다시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예주(預州)ㆍ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의주(宜州)의 8주(州)를 두었다. 또 뒤에 이들은 원 나라에 몰락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경을 정할 때 두만강(豆滿江)으로 경계를 삼아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의 7주를 두었다.


 

[주C-001]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 : 지원은 《관자(管子)》의 편명이고, 화식전은 《사기(史記)》의 편명이다. 모두 인문 및 경제의 지리서이다.
[주D-001]북독(北瀆) : 나라에 4독이 있다. 남독은 웅진(熊津)이니 지금의 공주(公州)이며, 중독은 한강(漢江)이며, 서독은 덕진(德津)이니 장단(長湍)에 있는데 이것이 신라 때의 북독이었다. 《東國輿地勝覽》
[주D-002]중사(中祀) : 풍운뇌우악해독(風雲雷雨岳海瀆) 및 공자(孔子) 사당(祠堂), 역대 시조(歷代始祖) 등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분하여 사전(祀典)에 실어 놓았는데, 대사는 종묘(宗廟)ㆍ영녕전(永寧殿)ㆍ사직(社稷)에 지내는 것이고 소사는 마조(馬祖 천사성(天駟星)의 별칭)ㆍ선목(先牧 처음 말을 먹인 사람)ㆍ마사(馬社 처음으로 말을 탄 사람을 배향한 곳)ㆍ마보(馬步 마신(馬神)의 이름)ㆍ영성(靈星)ㆍ노인성(老人星)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大典會通 禮典》
[주D-003]중악(中嶽) : 나라에 4악이 있었는데, 남악은 지리산, 중악은 삼각산, 서악은 송악산, 북악은 비백산(鼻白山)이다. 《東國輿地勝覽》
[주D-004]황종(黃鍾) : 음률(音律)의 이름으로 12율의 하나이며 육률 육려(六律六呂)의 기본음이다.
[주D-005]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 온조는 백제의 시조이고 문주는 백제의 22대 왕이다. 그 상거가 5백여 년인데 ‘온조의 3대인 문주’라 함은, 원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6]5개의 거독(渠瀆)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5개의 봇도랑으로, 수여(水餘)ㆍ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ㆍ유통(流通)이다. 《東國輿地勝覽》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지리고(地理考) 12
조선(朝鮮)

○ 조선의 강역은 삼면이 바다로 막혔고, 북쪽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는바, 지역이 전 시대보다 훨씬 더 넓다.
《홍서(鴻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은 옛날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 지역이다. 그 뒤쪽은 사막(沙漠)이고 앞쪽은 바다이다. 그 남은 기운이 조선국이 되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여직(女直)과 이웃하였으며,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다. 동서 간의 거리는 2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4000리이다. 국성(國城)에서 경사(京師)까지는 3500리이고, 남경(南京)까지는 4000리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이르기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따르면 조선의 10리는 우리의 1리이다. 일본의 거리로 계산하면 조선국은 동서 간의 거리가 2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가 400리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은 성경(盛京)에서 동쪽으로 18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가 770리이고, 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1300리이고, 서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80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가 750리이고, 북쪽으로는 구련성(九連城)까지가 1115리이다. 조공하는 길은 봉황성(鳳凰城)에서 연경(燕京)까지가 3096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성에서 동쪽으로 강릉부(江陵府)까지가 600리이고, 서쪽으로 풍천부(豐川府)까지가 560리이고,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까지가 1007리이고, 북쪽으로 온성부(穩城府)까지가 2101리이다. 동서 간의 거리는 합하여 1162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합하여 3108리이다.
○ 압록강과 두만강 바깥쪽은 모두 성경(盛京)에서 관할하는 변계(邊界)이다.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나라의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며, 정북쪽은 모련(毛憐)과 해서(海西)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건주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고, 모련과 해서는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盛京)의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희객탑산(希喀塔山)까지가 200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천장군(奉天將軍)이 관할하는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진강성(鎭江城)까지가 54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황성(鳳凰城)의 성수(城守)는, 동쪽으로는 애강(靉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고, 동남쪽으로는 의주강(義州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영고탑은 남쪽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60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오라(烏喇) 성수(城守)는 남쪽으로 장백산(長白山)까지 1300여 리이며, 그 남쪽은 조선과 경계이다. ○ 혼춘(渾春)은 서쪽으로 토문강까지가 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희(康煕) 54년(1715)에 혼춘(渾春)의 고이객제(庫爾喀齊) 등지가 조선과 단지 토문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다가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장수 안도립타(安都立他)로 하여금 목노(木弩), 방옥(房屋), 와포(窩舖)를 즉시 철거하여 영고탑에서 파견한 관병(官兵)의 둔장(屯莊)과 더불어 모두 강에서 조금 먼 곳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이후로는 연강(沿江) 근처에서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는 것을 모두 엄하게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12년(1747)에 조선의 국왕이 봉황성의 성책(城柵)을 설치하는 것과 망우초(莽牛哨)에 군사를 설치하는 것 및 성책 밖에 개간하는 것을 정지해 준 일에 대하여 사은(謝恩)하였다.
○ 경내를 나누어서 팔도(八道)로 만들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으며, 북쪽은 여진과 닿았다. 팔도로 나누었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라 한다. 동쪽을 강원도(江原道)라 하는데, 본디 예(濊), 맥(貊) 지역이다. 서쪽을 황해도(黃海道)라 하는데, 옛 조선(朝鮮), 마한(馬韓)의 옛 지역이다. 남쪽을 전라도(全羅道)라 하는데, 본디 변한(卞韓) 지역이다. 동남쪽을 경상도(慶尙道)라 하는데, 바로 진한(辰韓) 지역이다. 서남쪽을 충청도(忠淸道)라 하는데, 모두 옛 마한(馬韓) 지역이다. 동북쪽을 함경도(咸鏡道)라 하는데,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서북쪽을 평안도(平安道)라 하는데, 본디 조선의 옛 지역이다. 나누어 통치하는 군(郡)이 40개, 부(府)가 36개, 현(縣)이 70개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팔도이며, 나누어 통치하는 군이 41개, 부가 33개, 주가 38개, 현이 70개이다.
○ 가운데는 경기(京畿)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경기의 치소(治所)는 국성(國城)으로, 조선의 도읍지이다.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명(明)나라 초기에 고려 왕이 개주(開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7도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새(四塞)라고 칭한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양근군(楊根郡), 풍덕군(豐德郡), 수성군(水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水原府)의 옛 호칭이다.- 이고, 부가 3개로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장단부(長湍府)이고, 주가 7개로 양주(楊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에는 상주(傷州)로 잘못 되어 있다-, 광주(廣州), 윤주(潤州) -삼가 살펴보건대, 윤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여주(驪州), 과주(果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과천현(果川縣)으로 개칭하였다-, 곡주(谷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곡산부(谷山府)로 황해도에 속한다-, 파주(波州) -삼가 살펴보건대, 파주(坡州)의 오기(誤記)이다.- 이고, 현이 3개로 교하현(交河縣), 삼등현(三登縣), 토산현(土山縣)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土山)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삼등과 상원은 모두 평안도에 속한다.- ○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에는 삼도(三都)가 있는데, 평양(平壤), 한성(漢城), 송악(松嶽)을 이른다.” 하였다. ○ 풍덕성(豐德城)은 국성의 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풍덕군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만력(萬曆) 20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부산(釜山)으로부터 몰래 임진(臨津)을 건넌 다음 군사를 나누어서 풍덕군을 함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무(洪武) 25년(1392, 태조1)에 조선이 지금의 한성부로 천도(遷都)하고서 개성(開城)을 유도(留都)로 삼았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기는 바로 한양성으로, 가운데에 있다. ○ 그 성은 동쪽에는 여강(麗江), 남쪽에는 한강(漢江), 서쪽에는 서강(西江)의 물이 넘실대고 있고, 남산(南山), 북산(北山), 삼각산(三角山) 등의 산이 높이 솟아 있다. 서울은 사방이 40여 리인데 바위를 자르고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으며, 푸른 돌로 사방의 벽을 쌓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는 본디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지역이다. 태종조에 사방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개성 동쪽 지역 및 양광도 소사(素沙) 북쪽 지역을 합하여 경기로 만들었다. 관할하는 부가 1개, 목(牧)이 3개, 도호부가 10개, 군이 9개, 현이 13개이다.
○ 경기의 남쪽은 충청도(忠淸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충청도의 치소는 충주(忠州)로, 국성의 서남쪽에 있다. 본디 마한의 옛 지역이다. 왕경이 팔도의 가운데에 있어서 동쪽으로 막은 것이 조령(鳥嶺)과 충주이고, 서쪽으로 막은 것이 남원(南原)과 전라(全羅)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왕경은 조선의 도회(都會)이다. 함경도와 충청도가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서 아울러 천험이라고 칭해진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4개로 청풍군(淸風郡), 온양군(溫陽郡), 천안군(天安郡), 임천군(臨川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임천(林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이고, 주가 9개로 충주(忠州), 청주(淸州), 금주(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산수고 금강조(山水考錦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정주(靖州)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행주(幸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경기 고양현(高陽縣)에 병합되었다-, 흥주(興州) -삼가 살펴보건대, 대흥현(大興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주(禮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산현(禮山縣)이다-, 홍주(洪州)이고, 현이 7개로 영춘현(永春縣), 보은현(報恩縣), 연산현(連山縣), 부여현(扶餘縣), 석성현(石城縣), 연기현(燕岐縣), 보령현(保寧縣)이다. ○ 공주성(公州城)이 충주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 그 동남쪽은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와 가깝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왜적이 남원에 들어왔는데, 마귀(麻貴)가 군사를 출동시켜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막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청주성(淸州城)이 충주의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은 천안군(天安郡)에 접하였으며, 천안군의 서남쪽은 공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직산(稷山)은 충주의 서쪽에 있으며, 직산감(稷山監)을 두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이 전라도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마귀가 군사를 출동시켜 직산을 지켜 왜적의 예봉을 막았다. 또 청산(靑山)이 있는데, 직산과 서로 가깝다. 지(志)에 이르기를, “직산의 남쪽은 바로 천안군성(天安郡城)으로, 남쪽으로 전주(全州)로 내려가는 요도(要道)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충청도는 고려 초에 양광도(楊廣道)라고 칭하였고, 뒤에 충청도로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따랐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공주(公州)에 있다. 목 4개, 도호부 1개, 군 12개, 현 37개를 관할한다.
○ 경기의 동쪽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원도의 치소는 강릉부(江陵府)로, 국성의 동쪽에 있다. 본디는 예(濊), 맥(貊) 지역이며, 한(漢)나라 때에는 임둔군(臨屯郡)의 경내였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오성군(忤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간성(杆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평해군(平海郡), 통천군(通川郡), 영월군(寧越郡), 송악군(松岳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기 개성부의 옛 호칭이다-, 정선군(旌善郡), 고성군(高城郡)이고, 부가 5개로 강릉부(江陵府), 회양부(淮陽府), 산척부(山陟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삼척(三陟)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삼보(三步)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양양부(襄陽府), 철원부(鐵原府)이고, 주가 4개로 원주(原州), 강주(江州)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괴주(槐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괴산현(槐山縣)으로, 충청도에 속한다-, 명주(冥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명주(溟州)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강릉의 옛 호칭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이고, 현이 10개로 평강현(平康縣), 안창현(安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고성군(高城郡)에 병합되었다-, 기린현(麒麟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기린현(基麟縣)으로, 뒤에 춘천부에 병합되었다-, 주천현(酒泉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원주에 병합되었다-, 단성현(丹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에 속한다-, 인제현(麟蹄縣), 울진현(蔚珍縣), 서화현(瑞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춘천에 병합되었다-, 흡곡현(歙谷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강원도는 고려 때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고,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였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원주에 있다. 대도호부 1개, 목 1개, 도호부 7개, 군 5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 경기의 서쪽은 황해도(黃海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의 치소는 황주(黃州)로, 국성의 서쪽에 있다. 옛 고구려와 마한의 옛 지역이다. 거느리는 군이 2개로 수안군(遂安郡), 평나군(平那郡)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평산부(平山府)는 옛 한나라 때의 평나군(平那郡)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근거가 없는 설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랐다.- 이고, 부가 3개로 평산부(平山府), 서흥부(瑞興府), 승천부(承天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천(昇天)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경기 풍덕부(豐德府)를 승천부(昇天府)라고 칭하였다.- 이고, 주가 5개로 황주(黃州), 백주(白州), 해주(海州), 애주(愛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의주(義州)로, 평안도에 속한다-, 인주(仁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인천부(仁川府)로 개칭하였다. 경기에 속한다.- 이고, 현이 8개로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삼가 살펴보건대, 삼화현 이하의 네 현은 지금은 평안도에 속한다.- 우봉현(牛峯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에 속한다-, 문화현(文化縣), 장연현(長淵縣)이다. ○ 평산성(平山城)은 황주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혹은 옛 이름을 증산부(甑山府)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현(甑山縣)은 평안도에 속하는데, 잘못하여 평산의 옛 호칭이라고 하였다.- 라고도 한다. 서쪽으로는 황주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평양과 연결된다. 이곳과 가까운 곳으로는 경산(瓊山) -삼가 살펴보건대, 경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 있다. 지금은 평산부가 되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는 그 북쪽은 모두 산이며, 그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전목재시집(錢牧齋詩集)》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보면, 토산(兎山)은 황해도에 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삭녕군(朔寧郡)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삭녕군과의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쪽으로는 우봉(牛峯)과의 경계까지 33리이고, 신계(新溪)와의 경계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안협(安峽)과의 경계까지 19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해도는 고려 때에 서해도(西海道)였다. 조선 태조 초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태종조에 개성 서쪽 지역이 와서 속하여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관찰사영은 해주에 있으며, 목 2개, 도호부 5개, 군 7개, 현 9개를 관할한다.
○ 충청도의 남쪽은 전라도(全羅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전라도의 치소는 전주(全州)로, 국성의 남쪽에 있다. 본디 변한(弁韓) 지역으로, 뒤에 백제국이 되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하고서 백제 왕을 사로잡은 다음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를 두었다. 그 뒤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가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조선의 지계(地界)는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조선 바다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왜선(倭船)이 부산에 이르고서도 전라도를 넘어 서해(西海)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팔도 가운데에서 오직 전라도 한 도만이 북쪽에서 볼 때 정남쪽에 있으며, 그 서쪽은 요동(遼東)과 대치하고 있다. 일본이 요계(遼薊) 지방과 동떨어져 있어서 해도(海道)를 통할 수 없는 것은 조선이 있는 데에 힘입어서이며, 조선이 변경을 굳게 지키면서 여러 섬들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전라도가 있는 데 의지해서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전라도 지역은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고, 동쪽으로 경상도에 접해 있어서 조선의 문호가 되는바, 왜적들이 조선을 침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영암군(靈巖郡), 고부군(古阜郡), 진도군(珍島郡)이고, 부가 2개로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이고, 주가 4개로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앙주(昻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주(昇州)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순천부(順天府)를 승주라고 칭하였다.- 이고, 현이 23개로 만경현(萬頃縣), 무장현(茂長縣), 진안현(鎭安縣), 부안현(扶安縣), 전거현(全渠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구(金溝)의 잘못된 표기이다-, 강진현(康津縣), 흥덕현(興德縣), 황성현(黃成縣) -삼가 살펴보건대, 황성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낙안현(樂安縣), 창평현(昌平縣), 제남현(濟南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반남(潘南)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의 현 이름인데, 지금은 나주(羅州)에 병합되었다-, 회령현(會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장흥부(長興府)에 병합되었다-, 대강현(大江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상도 대구(大邱)의 잘못된 표기로,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임파현(臨波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임피(臨陂)의 잘못된 표기이다-, 고고현(古皐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부(古阜)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남양현(南陽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보성군(寶城郡)에 병합되었다. 《무비지》에 남양(南洋)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순현(富順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부령현(扶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부안현(扶安縣)으로 고쳤다-, 마인현(麻仁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庇仁)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은 충청도에 속한다-, 서성현(緖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저성(渚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해남현(海南縣), 신령현(神靈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 신녕현(新寧縣)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이안현(移安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안현(務安縣)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이다. ○ 남원성(南原城)은 전주(全州)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전주와 더불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국성의 요해처가 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하고 마침내 전라도를 침범하여 국성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이여송(李如松)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비옥한 지역인데, 남원이 전라도의 인후(咽喉)에 해당된다.” 하였는데, 바로 이곳을 두고 한 말이다. 남원성과 가까운 곳에 운봉성(雲峯城)이 있는데, 이 역시 요충지이다. ○ 제주성(濟州城)은 남원부의 남쪽 바다 섬 가운데에 있으며, 제주도(濟州島)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의 제주는 중국의 경주(瓊州)와 같다. 혹자는 바로 옛날의 탐라(耽羅)라고도 한다. 지금은 그대로 제주라고 한다.” 하였다. ○ 순천성(順天城)은 경주(慶州)의 서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6년(1598)에 왜추(倭酋)가 이곳에 웅거하고서는 서로(西路)라고 하였다. 《조선기사(朝鮮紀事)》를 보면, “왜추 평행장(平行長)이 율림(栗林)과 예교(曳橋)에 웅거해 있으면서 성채(城寨)를 몇 겹으로 세우고는 순천성에 의지하여 남해영(南海營)과 서로 바라보았는데, 산을 등지고 물을 끼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새지의 성채가 되었다. 대수(大帥) 유정(劉綎)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는 고려 때 전라도라고 칭하였으며,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찰사영은 전주에 있으며, 부 1개, 목 4개, 도호부 6개, 군 10개, 현 34개를 관할한다.
○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慶尙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상도의 치소는 경주로, 국성의 동남쪽에 있다. 본디 진한 지역으로, 뒤에 신라국이 되었다. 바다에 닿아 있어 일본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바, 조선의 병풍이 된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울산군(蔚山郡), 함양군(咸陽郡), 웅천군(熊川郡), 합천군(陜川郡), 영천군(永川郡), 양산군(梁山郡), 청도군(淸道郡)이고, 부가 6개로 김해부(金海府), 선산부(善山府), 영해부(寧海府), 밀양부(密陽府), 안동부(安東府), 창원부(昌原府)이고, 주가 5개로 경주(慶州), 사주(泗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사천현(泗川縣)으로 고쳤다-, 상주(尙州), 진주(晉州), 울주(蔚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하였다.- 이고, 현이 12개로 동래현(東萊縣), 청하현(淸河縣), 의흥현(義興縣), 문경현(聞慶縣), 거제현(巨濟縣), 창녕현(昌寧縣), 삼가현(三嘉縣), 안음현(安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안의현(安義縣)이다-, 의성현(義城縣), 산음현(山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산청현(山淸縣)이다-, 고령현(高靈縣), 수성현(守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수성(壽城)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수성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대구(大邱)에 병합되었다.- 이다. ○ 안동성(安東城)이 경주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안동부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안동부는 마령(馬嶺)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조령(鳥嶺)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경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였다. ○ 의성(義城)은 안동성의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의성현이다. 또한 의성(宜城)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독신(督臣) 형개(邢玠) 등이 왜추(倭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경주(慶州)에서 공격할 적에 군사를 나누어서 의성에 주둔시켜 동쪽으로는 경상도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전라도를 움켜쥐었다고 한다. ○ 진주성(晉州城)은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 만력 26년에 대수(大帥) 동일원(董一元)이 진격하여 진주를 탈취한 다음, 승세를 타고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영춘(永春)과 곤양(昆陽) 두 성채(城寨)를 불태웠다. 그러자 왜적들이 물러나서 사주(泗州)의 노영(老營)을 지켰다. 동일원이 그 성을 빼앗고는 진격해서 새 성채에 바짝 다가갔다. 새 성채는 삼면이 강에 임하여 있고, 한 방면이 육지에 닿아 있는데, 바닷물을 끌어 들여서 호(濠)를 만들었으며, 또 김해(金海)와 고성(固城) 두 성채를 만들어서 좌익과 우익으로 삼았고, 가운데로 해양창(海陽倉)과 통하였다. 동일원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 합천성(陜川城)은 경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합천군(陜川郡)이다. 명나라 만력 22년(1594)에 이여송(李如松)이 왕경(王京)을 수복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서 방어하였다. 또 그 동남쪽에 웅천군(熊川郡)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다. ○ 창녕성(昌寧城)은 진주의 동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둔 곳이다. 남쪽으로 진강(晉江)에 임해 있으며, 진강의 남쪽은 고성현(固城縣)이다. 고성현의 남쪽에는 당포(唐浦)가 있는데, 바닷가 진의 요해처이다. ○ 울산성(蔚山城)은 경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바로 울산군(蔚山郡)이다. 남쪽에 도산(島山)이 있는데,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성이 험고한 산에 의지해 있으며, 가운데에 강이 있어서 부산(釜山)의 성채와 통하고,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경유해서 부산과 통한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에 주둔해 있었는데, 대수(大帥) 마귀(麻貴)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더욱더 성책(城柵)을 높이 쌓고는 이곳에서 웅거하여 지키면서 동로(東路)라고 하였다. 마귀가 마침내 군사를 진격해 다가가서는 험고한 데 의지하여 화곡(禾穀)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거짓으로 퇴각하여 유인하였는데, 마귀가 패하였다. ○ 양산성(梁山城)은 울산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양산군(梁山郡)이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마귀가 울산을 공격하면서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이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부산과 언양에서 구원하러 오는 길을 끊게 하였다. ○ 대강성(大江城)은 남원부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설치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경상도의 진주와 접하였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부산포(釜山浦)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여송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면서 대강(大江)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明史)》에는 대구(大丘)로 되어 있다. 이하도 같다.- 과 충주(忠州)에 주둔하게 해서 왜적들을 억눌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부산에서 서생포(西生浦)로 옮겼다. 유정(劉綎)이 조선에 머물러서 진수(鎭守)할 적에 경상도와 대강에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이곳이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를 보면, 전라도에 대강현(大江縣)이 잘못 예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사》에서 대구라고 칭한 것을 잘못 대강성(大江城)이라고 하였다.- ○ 함양성(咸陽城)은 진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함양현(咸陽縣)이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함양과 진주를 침범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 -또 이르기를, “남양성(南陽城)이 남원부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남양현(南陽縣)이다. 명나라 만력 22년에 이여송이 장수에게 명하여 남원을 지키게 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를 보면 함양(咸陽)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옳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잘못 남양(南陽)이라고 하였다.- ○ 영천군(永川郡)은 양산(梁山)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거제도(巨濟島)는 죽도(竹島)의 동쪽에 있는데, 바닷가이다. 조선에서 거제현(巨濟縣)을 설치하였으며, 겸하여 수군영(水軍營)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험고한 요충지로는 부산 다음간다. ○ 부산은 동래현(東萊縣)에서 남쪽으로 2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북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1400리이다. 큰 바닷가에 있으면서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와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돛을 올리고 달리면 한나절이면 도달할 수 있다. 부산의 동쪽에는 동래(東萊), 기장(機張), 서생(西生), 임랑(林瑯), 옥포(玉浦)가 있어서 좌익이 되고, 서쪽에는 안골(安骨), 안굴(安窟), 가덕(嘉德), 웅천(熊川), 삼포(森浦), 거제(巨濟), 한산(閑山), 덕교(德橋), 김해(金海), 죽도(竹島), 용당(龍堂)이 있어서 우익이 되는데, 서로 연결되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공격할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도당인 평행장(平行長) 등을 파견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진(釜山鎭)으로 쳐들어가서 경상도를 함락하고, 삽시간에 왕경(王京)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는 왕경을 버리고서 부산으로 돌아와 주둔해 있으면서 서생, 기장 등지에 성을 증축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웅거해 지켰는데, 부산을 근본으로 삼았다. 관병(官兵)이 부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왜적들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조선의 부산 지방은 일본 대마도에서의 거리가 겨우 하루 일정이다. 전해 오는 말에, ‘예전에는 이곳이 일본에 속하였는데,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조선에 떼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선에서 곡식 1만곡(斛)을 빌려 왔는데,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부산 지역을 돌려 달라고 말하였는데, 조선의 사신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만력 신묘년(1591)에 일본의 관백(關白) 평수길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미처 왕경에 이르기도 전에 조선의 국왕이 사람을 보내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중신(重臣)들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늘리느라 날마다 백만금을 허비하면서 피차간에 서로 승부를 겨루었다. 왜적들은 모두 부산에 웅거하여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획을 하였다. 그러다가 무술년(1598) 7월에 평수길이 병으로 죽고서야 비로소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왕성에서 부산포까지는 126리이고, 개경(開京)에서 합포(合浦)까지는 140리이고, 부산포에서 일본 대마도 이기(伊崎)까지는 4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는 본디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조선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뒤에 낙동강(洛東江)을 동서쪽으로 나누어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하여 한 도로 하였다. 관찰사영(觀察使營)은 대구(大邱)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2개, 목 3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40개를 관할한다.
○ 강원도의 북쪽은 함경도(咸鏡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경도의 치소는 함흥부(咸興府)로, 국성의 동북쪽에 있다.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단천군(端川郡), 촉막군(蜀莫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려 때의 송악군(松岳郡)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지금의 개성부이며, 경기에 속한다-, 영원군(寧遠郡)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부가 5개로 함흥부, 경성부(鏡城府), 회령부(會寧府), 영흥부(永興府), 안변부(安邊府)이고, 주가 8개로 연주(延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덕주(德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덕천군(德川郡)으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개주(開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이다.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혜주(惠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속주(速州)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소주(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합주(合州) -삼가 살펴보건대, 길주(吉州)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연주(燕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수주(隋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정주(定州)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현이 1개로 이성현(利城縣)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는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안출호수(按出虎水)의 근처에 있다.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에 옛 성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궁전의 터가 있다. 조선의 경내에 또 회령부라는 이름이 있는데, 분명한 근거를 알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회령부는 세종조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바, 금나라의 회령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함경도는 고려 때에는 동계(東界)라고 칭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국경을 개척해서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는 영길도(永吉道)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함길도(咸吉道)로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개칭하였다. 성종조에 영안도(永安道)라고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관찰사영은 함흥부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16개, 군 2개, 현 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말기에 북쪽 경계는 갑산(甲山), 길주(吉州) 등지까지였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이지란(李之蘭)을 파견하여 여진을 불러 위무하고서 비로소 공주(孔州) -지금의 경흥부(慶興府)이다-, 경주(鏡州) 등의 주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경성(鏡城) 북쪽이 여진에게 함락되었다. 태종 10년(1410)에 비로소 부거참(富居站)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다. 세종 10년(1428)에 회가(會家) -지금의 경원부 지역이다.- 로 부를 옮겼고, 13년(1431)에 또 부령부(富寧府) -본디는 경성의 석막성(石幕城)으로, 처음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종성(鍾城) 행영(行營)으로 진을 옮기고 이곳에 부령부를 설치하였다.- 를 설치하였다. 14년(1432)에 올량합(兀良哈)이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회령 지역이다.- 를 공격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였다.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삼아서 경흥(慶興) -처음에는 공주 지역에 설치하였다-, 회령(會寧), 종성(鍾城) -본디 여진의 수주(愁州) 지역이다-, 온성(穩城) -본디는 여진의 다온평(多溫平) 지역이다.- 등 4개의 진(鎭)을 설치하고는 성을 쌓고 백성을 채운 다음 경원과 부령을 합하여 육진(六鎭)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번호(藩胡)로서 강 안쪽에 있던 자들이 그 지역을 떠나기를 싫어하여 강 안쪽에 살면서 영원토록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부득이하여 강변에 장성(長城)을 수축하고는 장성 바깥에 있는 강 안쪽의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는데, 바로 차유령(車踰嶺) 바깥쪽의 지금의 무산(茂山) 지역으로, 이 지역은 오랫동안 번호인 노토마우롱(老吐亇亏籠)의 차지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에 번호가 철수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현종 15년(1674)에 무산진(茂山鎭)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또 살펴보건대, 두만강 바깥쪽 지역은 본디 우리나라의 지역에 속한다. 국초에 영파보(寧波堡), 진지달보(榛遲達堡), 안정보(安定堡) 등의 진(鎭)을 설치하였다가 세종조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
○ 황해도의 서북쪽은 평안도(平安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안도의 치소는 평양부로, 조선의 서쪽 경계이다. 동남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500여 리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고구려 왕이 도읍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안동부를 설치하였고, 뒤에 발해에게 함락되었다. 오대(五代) 시대에는 고려가 다시 취하여 서경으로 삼았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의 주현(州縣) 60여 성을 들어서 와서 복속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다시 조선에 돌려주었다. 관할하는 군이 11개로 가산군(嘉山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가산(加山)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개천군(价川郡), 곽산군(郭山郡), 운흥군(雲興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운산군(雲山郡)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운흥(云興)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희천군(煕川郡), 선천군(宣川郡), 강동군(江東郡), 자산군(慈山郡), 용천군(龍川郡), 순천군(順川郡), 박천군(博川郡)이고, 부가 9개로 평양부(平壤府), 성천부(成川府), 정원부(定遠府)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지금은 구성부(龜城府)로 고쳤다-, 창성부(昌城府), 합란부(合蘭府)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함경도 함흥부를 원나라 때 합란부라고 칭하였는바, 평안도의 부 이름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광리부(廣利府), 견인부(見仁府), -삼가 살펴보건대, 광리부와 견인부 두 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영변부(寧邊府), 강계부(江界府)이고, 주가 16개로 안주(安州), 정주(定州), 평주(平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平山府)로 고쳤으며, 황해도에 속한다-, 의주(義州), 강주(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宣川府)로,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철주(鐵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철산부(鐵山府)로 고쳤다-, 영주(靈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의주에 병합되었다-, 삭주(朔州), 무주(撫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에 병합되었다-, 숙주(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숙주(肅州)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금의 숙천부(肅川府)로, 고려 때에는 숙주(肅州)라고 칭하였다-, 위주(渭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에 병합되었다-, 매주(買州) -삼가 살펴보건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고려 성읍조에도 나온다-, 청주(靑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북청부(北靑府)로 개칭하였으며, 함경도에 속한다-, 승주(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이다. 전라도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상주(常州), 은주(銀州)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고, 현이 6개로 맹산현(孟山縣), 덕천현(德川縣), 양덕현(陽德縣), 강동현(江東縣) -삼가 살펴보건대, 이미 강동군(江東郡)이 실려 있는데 또 강동현을 실었으니, 크게 잘못 대조하였다-, 중화현(中和縣), 태천현(泰川縣)이다. ○ 의주성(義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2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서남쪽은 용천군(龍川郡)이다. 모두 압록강 가에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조선의 왕이 일본 관백(關白)의 침입을 피하여 의주에 와서는 중국에 내속(內屬)하기를 청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안가관(晏家關)이 의주의 서남쪽,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옛날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나루였다. ○ 운산(雲山)은 삭주(朔州)의 서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서는 운산을 산 이름으로 잘못 보아서 본국 산수조(本國山水條)에 실었는데, 잘못된 것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선천군(宣川郡)은 의주의 동쪽에 있다. ○ 곽산군(郭山郡)은 그 성이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리서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황성(鳳凰城)에서 동남쪽으로 120여 리 되는 곳인 조선의 경계에 익주성(益州城)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애주(愛州)라고 잘못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의주를 혹 익주(益州)라고 하고, 또 애주(愛州)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음이 변한 것이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에서 압록강까지가 506리이고, 왕성에서 평양까지가 6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는 고려 때에는 서북계(西北界)라고 칭하였다.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북쪽으로는 강계부(江界府)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 압록강 안쪽 지역을 모두 개척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평안도라고 하였다. 관찰사영은 평양부에 있으며, 부 2개, 대도호부 1개, 목 2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이 이와 같이 잘못된 것은 대개 《무비지》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라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소남(齊召南)의 《수도제강(水道提綱)》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지명은 자못 치밀하고도 상세하나, 역시 착오가 많다. 이것에 대해서는 산수조(山水條)에서 모두 따져 밝혔으므로 이곳에서는 중복해서 말하지 않았다.


[주D-001]여강(麗江) : 여강(驪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02]함종현(咸從縣) : 원문에는 ‘咸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북쪽에서 …… 있으며 : 원문에는 ‘直北至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直北正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기각(掎角) : 원문에는 ‘倚角’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마귀가 …… 거두어들였다 : 원문에는 ‘麻貴後進師逼之據收其禾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에 의거하여 ‘麻貴遂進師 逼之據險 收其禾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예전에는 …… 속하였는데 : 원문에는 ‘舊俗日本’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舊屬日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ㆍ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