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19. 삼각산 (산마루)

2011.6.19. 삼각산행(불광중-슬랩 -비봉- 사모바위 - 삼천계곡 )

아베베1 2011. 6. 20. 10:12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사모바위 삼각산 정상부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의 모습이    

비봉 정상에서 경계석     

  비봉 정상에서 아래로 바라본 조망    

  비봉 정상부에서 진흥왕순수비를 배경으로 품앗이로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사모바위 삼각산 정상부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의 모습이    

  비봉 정상부에서 진흥왕순수비 북한산비의  모습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바위     

  비봉 정상아래에서  바라본 조망을 배경으로     

   비봉 정상아래에서  바라본 조망을 배경으로     

  비봉 정상아래에서 가다가   바라본 사모바위의 모습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비봉 정상부     

  비봉 정상아래에서  바라본 조망을 배경으로     

  사모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비봉 능선     

  사모바위의 모습      

         사모바위의 모습        

문수봉과 보현봉이 멀리보이고    

   의상능선 인수 백운 국망봉이  그리고 노적봉이     

 

 

   사모바위에서 삼천사 계곡 하산길에    사모바위가 아련히     

    사모바위에서 삼천사 계곡 하산길 의상능선 정상부를 배경으로  

   문수봉 과 보현봉이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산마루 샘터 산악회 4주년 창립기념 행사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鬢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慵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鶗鴂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旄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晚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趁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簟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怊悵停雲別後思
자금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邴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旄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黯)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농암집 제2권
 시(詩)
도중에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이별주 거나할 제 해는 벌써 기울어 / 別酒初醺日已傾
안장 짚고 오르려니 말이 자꾸 울어대네 / 扶鞍欲上馬頻鳴
동문에서 전별한 이 모두들 돌아가고 / 東門出祖人皆返
삼각산 봉우리만 아스라이 날 보내네 / 唯有三峯遠送行


 

 농암집 제1권
 시(詩)
중흥사(重興寺)를 찾아가서


깊은 가을 서리 이슬 산숲 씻어 말끔하여 / 高秋霜露洗林丘
하늘 끝에 높이 뜬 삼봉 반겨 바라보네 / 喜見三峯天畔浮
절벽의 싸늘한 놀 비 기운 남아 있고 / 絶壁冷霞餘雨氣
무너진 성 기운 햇살 차가운 개울 비추네 / 壞城斜日映寒流
덩굴 얽힌 옛길이라 갈피 잡기 어려워 / 藤蘿古道深難取
등불 밝힌 절간 방 날 저물어 들어갔네 / 燈火禪房暝始投
아름다운 산수 속에 언제나 은둔하여 / 勝處每懷長往志
계수나무 부여잡고 스님 함께 머물고파 / 會攀叢桂共僧留


 

[주C-001]중흥사(重興寺) : 일명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는 서울의 북한산(北漢山)에 고려 때부터 있었던 149칸의 절로 북한산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성종 22년(1491)에 한 번 화재를 겪었고 연산군 4년(1498)에 다시 세웠으며, 1915년에 폐사(廢寺)되었다.
[주D-001]삼봉(三峯) : 북한산을 이루고 있는 백운대(白雲臺), 국망봉(國望峯), 인수봉(仁壽峯)을 말한다.
[주D-002]계수나무 부여잡고 : 한(漢)나라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 무더기로 자라누나 산골 깊은 곳에, 꼿꼿하고 굽은 가지 서로 얽히었네.[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卷兮枝相繚]” 한 데서 나온 말로, 세속을 피해 산림에 숨은 은사(隱士)를 형용할 때 흔히 인용된다. 《楚辭 卷12》

 

 

농암집 제1권
 시(詩)
봄날 밤에 우연히 풍계(楓溪)에 이르러 사흥(士興) 시걸(時傑) 형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이 시를 지어 그들에게 부치다. 을묘년


산 저물자 푸른빛 희미해지고 / 山暝曖蒼翠
드문 숲 비춘 달빛 어지러운데 / 月華散疎林
숨은 선비 빈 누각 앉아 있을 제 / 幽人坐虛閣
온갖 소리 바야흐로 조용해지고 / 萬籟靜方沈
시냇가의 꽃내음 향기로워라 / 澗芳識幽花
둥지 깃든 새소리 골짝 울린다 / 谷響聞棲禽
기약 없이 우연히 찾아온 이 몸 / 偶至本無期
한가론 밤 깊은 줄 잊어버린 채 / 却忘閒夜深
일어나서 뜨락을 거니노라니 / 起來步庭除
댓잎 잣잎 맑은 그늘 어우러지고 / 竹柏交淸陰
산들바람 솔 가에서 스며들어와 / 微風松際來
날 위해 하얀 옷깃 불어주누나 / 爲我吹素襟
정신 취향 알맞아 기분 흐뭇해 / 怡然適性靈
세속 밖의 마음을 끝내 얻어서 / 遂獲塵外心
떠나려다 또다시 머뭇거리니 / 欲去復遲回
바위틈 샘물소리 미련이 남아 / 巖泉有遺音


[주C-001]봄날 …… 부치다 : 작자의 나이 25세 때인 1675년(숙종1)의 작품이다. 풍계(楓溪)는 청풍계(靑楓溪)의 약칭으로, 작자의 종증조(從曾祖) 김상용(金尙容) 때부터 자리 잡아 살았던 곳이다. 삼각산(三角山) 기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작자는 평소에 그곳에 자주 찾아가 친족 형제들과 담소를 나누고 시를 짓곤 하였다. 이 당시에는 작자의 팔촌 형인 백겸(伯兼) 김성달(金盛達)과 중혜(仲惠) 김성적(金盛迪) 및 족질인 김시걸(金時傑)과 김시보(金時保) 형제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사흥(士興)은 김시걸의 자이다.

다산시문집 제12권
 논(論)
백제론(百濟論)


백제(百濟)는 삼국(三國) 중에서 제일 강성했지만 가장 먼저 망한 나라이다. 어떤 사람은,
“신라(新羅)는 남쪽으로 간사한 왜국(倭國)과 이웃해 있고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동(遼東)과 접해 있으므로 항상 무비(武備)를 철저히 했었다. 백제는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외환(外患)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병력(兵力)이 해이(解弛)하고 약해져서 쉽사리 망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풍속이 교만하고 간사하여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쉽사리 망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백제의 단점일 뿐, 이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국운이 장구히 이어가는 것은 도읍을 정하는 데 달린 경우가 많다. 반드시 요새지(要塞地)에 웅거하여 위력(威力)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을 길러서, 견고하여 요지부동(搖之不動)하게 민심(民心)을 잡아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이 행해져서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백제가 처음에는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했었다. 위례는 지금 한양(漢陽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른바 하남위례(河南慰禮)란 곳은 지금 광주(廣州)의 고읍(古邑)이다. 《동국지리고(東國地理考)》에 상세히 보인다. 북으로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막혀 있고 남으로는 한강(漢江)을 띠고 있다. 그리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뻗쳐 있고 남해(南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천연적인 요새라 할 수 있는 땅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나라를 누린 것이 4백 94년이나 되었다.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을 굴복시켰고 동으로는 예맥(濊貊)을 복종시켰으며, 고구려와 신라 사람도 모두 겁이 나서 숨을 죽였었다. 문주왕(文周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웅천(熊川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겼고 또 이어 부여(扶餘)로 옮겼으나 옮긴 지 겨우 1백 85년 만에 망해버렸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지형적인 공고함만을 믿고서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부여는 넓은 들의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1백 리 안에 의지할 만한 성벽이나 정장(亭障)이 없고 엄폐할 수 있는 울타리가 없는데다가 의자왕(義慈王)은 주색(酒色)에 빠진 임금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노닐면서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창졸간에 적군이 대대적으로 들이닥치자 사방의 군현(郡縣)에서는 관망만 할 뿐 머뭇거리면서 나아와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신라가 배후를 공격할 수가 있었고 도성(都城)이 함락되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는 사람은 지세(地勢)를 잘 살펴 도읍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계속해 옮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침략은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은(殷) 나라는 자주 도읍을 옮김으로써 장구한 국운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옛 이야기다.

다산시문집 제6권
 시(詩) 송파수작(松坡酬酢)
한애원기도(寒厓遠騎圖)


새까만 찬 바위들은 바둑알처럼 박혔는데 / 鐵色寒巖似置棋
북풍은 쌀쌀하고 말은 슬피 울어대라 / 北風凄厲馬鳴悲
정히 어두운 때에 층암 절벽을 당하여 / 正當石櫃天昏處
마치 남관의 눈 막히던 때와 흡사하구려 / 好像藍關雪擁時
의관 갖춘 한 사람은 꼼짝 못하고 서 있는데 / 一點衣冠黏不動
삼각산 봉우리는 바라볼수록 더디기만 하여라 / 三山頭角望猶遲
예전 그대로 뱃속에는 시의 기미를 품어 / 依然腹裏含詩氣
물에 비친 언덕 연기에 은연중 시상이 나네 / 水照墟煙黯有思


[주D-001]남관(藍關)의 …… 때 : 남관은 남전관(藍田關)의 준말임.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서 질손 상에게 보여 준 시[左遷至藍關示姪孫湘詩]〉에 “ …… 구름은 진령을 가로질러라 집은 어디 있는고, 눈은 남관을 가로막아 말이 가지를 못하네. …… [雪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한 데서 온 말이다.《韓昌黎集 卷10》


 

 다산시문집 제4권
 시(詩)
고의(古意) 검남(劍南) 운에 차운하다


한강수 흘러흘러 쉬지 않고 / 洌水流不息
삼각산 높아높아 끝이 없는데 / 三角高無極
산하는 차라리 변할지언정 / 河山有遷變
무리진 못된 것들 깨부실 날이 없네 / 朋淫破無日
한 사람이 중상모략을 하면 / 一夫作射工
뭇 입들이 너도 나도 전파하여 / 衆喙遞傳驛
편파스런 말들이 기승을 부리니 / 詖邪旣得志
정직한 자 어디에 발붙일 것인가 / 正直安所宅
봉황은 원래 깃털이 약해 / 孤鸞羽毛弱
가시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 未堪受枳棘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 聊乘一帆風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리라네 / 杳杳辭京國
방랑이 좋아서는 아니로되 / 放浪非敢慕
더 있어야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야 / 濡滯諒無益
대궐문을 호표가 지키고 있으니 / 虎豹守天閽
무슨 수로 이내 충정 아뢰오리 / 何繇達衷臆
옛 분이 교훈 남기지 않았던가 / 古人有至訓
향원은 덕의 적이라고 / 鄕愿德之賊


[주D-001]향원은 …… 적 : 향원(鄕愿)은 신조와 주견 없이 그때그때 세태에 따라 맞추어서 주위로부터 진실하다는 칭송을 받는 사람을 말함. 그의 사이비한 행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일러, 덕의 적이라고 하였음.《論語 陽貨》

다산시문집 제3권
 시(詩)
송경에서 옛날을 생각하며[松京懷古] 5수


닭 잡고 오리 잡는 그 힘도 세었던지 / 操鷄縛鴨力桓桓
이 나라 판도를 완전 통일하였다네 / 滄海輿圖一統完
당 나라와 맞먹는 유원한 역사이며 / 曆數遠承唐甲子
오랑캐 탈을 벗고 한의 의관 갖추었지 / 夷黎皆襲漢衣冠
관문이 무너지자 동선도 울었으며 / 重關失險銅仙泣
치솟은 삼각산이 철견과도 같았다네 / 三角撐空鐵犬寒
천 년 전통 패기는 물 따라 가 버리고 / 覇氣千年隨逝水
팔릉의 송백에 석양빛만 걸렸어라 / 八陵松柏夕陽殘

임금이 탄 수레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 帝子雲軿落九天
온 나라가 허겁지겁 신선으로 모셨다네 / 八方顚倒奉神仙
번신은 밤이 되면 금산의 돌을 깎고 / 藩臣夜斲金山石
궁녀들은 봄을 만나 금수의 배에 먼저 올라 / 宮女春爭錦水船
북극성 별빛은 말굴레에 나즉하고 / 北極星辰低玉絡
궁전 안의 비바람은 궁녀들을 억눌렀지 / 內園風雨壓靑鈿
지금도 피리 불던 다릿가 그 길에서 / 至今吹笛橋邊路
먼지 날리며 달아났을 연인들 눈에 선하네 / 一驕紅塵憶走燕

궁중 촛불 일천 개나 비치는 곳 불당이요 / 宮燭千枝照佛堂
왕비 후궁 빗발치듯 승방을 출입했지 / 椒塗風雨接僧房
시방의 용상이 왕의 행차 뒤따르고 / 十方龍象隨行輦
칠보 장식 가사가 어상에 올랐었다 / 七寶袈裟上御床
재상은 머나먼 하늘가로 귀양가고 / 相國竄荒天漠漠
간신은 글 태우고 피흘리며 죽었다네 / 諫臣焚藁血滂滂
보라, 위주가 수레에 올라 통곡할 때 / 試看僞主登車哭
한 조각 금린이 해에 비쳐 누렇던 것을
/ 一片金鱗照日黃

문무대신 의관들은 옛 언덕에 첩첩이요 / 文武冠裳疊古丘
선죽교 다릿가엔 충신의 비가 섰네 / 精忠碑碣竹橋頭
업성에 우레 소리 산하가 찢어지고 / 鄴城雷動山河裂
시시의 피비린내 일월이 무색했지 / 柴市風腥日月愁
팔부에 자욱한 연기 새 우는 저녁이요 / 八部蒼煙啼鳥夕
구궁에 단풍든 잎 병든 매미 가을일레 / 九宮黃葉冷蟬秋
산에 올라 흥망 자취 묻지를 말지어다 / 登臨莫問興亡跡
송도를 바라보면 절로 눈물 흐른다네 / 西望松陽涕自流

오백 년 왕업지에 태평한 운세러니 / 五百興王泰運來
북녘 하늘 검은 구름 뭉게뭉게 맴돌았네 / 朔天雲氣鬱徘徊
주선은 상제 뵈러 악해를 건너가고 / 朱船鰐海朝京去
황월이 명분 내세워 용만에서 돌아왔다네 / 黃鉞龍灣仗義回
팔도의 유민들은 흰 머리 풀어 헤치고 / 八板遺民披雪髮
거리마다 우는 여인 붉은 뺨을 가렸다네 / 六街啼女掩紅腮
탁타교 다릿 가에 황혼 달이 떠오르면 / 橐駝橋畔黃昏月
소리소리 호적에 길손도 슬퍼지리 / 羌笛聲聲過客哀


 

[주D-001]금산(金山) : 산 이름. 요녕성(遼寧省) 강평현(康平縣)에 있는데 당(唐)의 설인귀(薛仁貴)가 고려 군대를 그곳에서 격파했다고 함.
[주D-002]금수(錦水) : 촉(蜀)에 있는 금강(錦江).
[주D-003]보라, …… 누렇던 것을 : 고려(高麗) 제32대 우왕(禑王)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강화(江華)로 손위(遜位)할 때의 정상을 말한 것임. 금린(金鱗)은 일광이 수면에 비치면 그 반사 작용으로 일어나는 금물결을 말한 것.
[주D-004]업성(鄴城) :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도읍지. 《북제서(北齊書)》문원전(文苑傳)에, “업경 속에 연기 자욱하고 안개가 집결했다.[鄴京之下煙霏霧集]” 하였음.
[주D-005]시시(柴市) : 북평시(北平市) 교충방(敎忠坊) 서북쪽에 있는 지명. 송(宋)의 승상 문천상(文天祥)이 순국(殉國)한 곳임.《宋史 紀事本末 卷28》
[주D-006]주선은 …… 건너가고 : 우왕(禑王)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왕위를 내놓고 강화(江華)로 쫓겨간 것을 말함. 악해(鰐海)는 악어가 들끓는 무서운 곳이라는 뜻.
[주D-007]황월이 …… 돌아왔다네 : 최영(崔瑩)과 함께 요동(遼東)을 정벌하기 위하여 위화도(威化島)까지 진군했을 때, 당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네 가지 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회군(回軍)했던 사실을 말한 것임. 황월(黃鉞)은 천자가 정벌(征伐)할 때 쓰는 황금으로 장식한 도끼.
[주D-008]탁타교 : 송도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 옛날 거란[契丹]이 고려 태조에게 수호(修好)를 위하여 낙타 50필을 보내 왔었는데, 이때 태조는 반복 무상한 거란족과는 수교할 수 없다 하여 거기서 온 사신 30명을 모두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 50필은 이 다리 아래다 매어두고 모두 굶어 죽게 만든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함.《新增東國輿地勝覽》

다산시문집 제3권
 시(詩)
가을밤 죽란사 모임에서 시 한 수가 지어질 때마다 남고(南皐)가 날 위해 낭송을 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도 애절하여 사람을 눈물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장난삼아 절구(絶句)를 읊어본 것이지 원래 시를 꼭 쓰려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뜻이 거칠고 졸작들이 많다. 원래는 19수였는데 지금 다 지워 버리고 10수만을 남겼다


검양강 북쪽에 갈바람이 일더니만 / 黔陽江北動秋風
망해루 서쪽으로 올 기러기 내려왔네 / 望海樓西來早鴻
돌아가는 배를 타고 동협으로 가지 말라 / 莫上歸舟走東峽
오색구름 짙은 곳에 왕궁이 있느니라 / 五雲深處有王宮

벽오동 가지에 갈바람이 불어오니 / 秋風吹入碧梧枝
서북 하늘에 뜬 구름이 조각조각 옮겨가네 / 西北浮雲片片移
제발이지 진길료를 울며 있게 하지 말라 / 愼莫啼留秦吉了
단산에 늙은 봉이 너무나도 슬프단다 / 丹山老鳳不勝悲

쌍쌍이 날다가는 제각기도 나는 제비 / 雙燕雙飛復各飛
단청해 둔 들보를 가을이면 떠난다네 / 淸秋故與畫梁違
금년에는 분홍실을 발에 매 두지 않았으니 / 今年不用紅絲繫
봄바람에 올지 말지 그 누가 알겠는가 / 誰識春風歸未歸

미음 동쪽 언저리에 강물은 활등 같고 / 渼陰東畔水如彎
수도 없는 청산이요 그리고 또 벽산이지 / 無限靑山與碧山
지금도 생각나네 마당촌 버들 아래서 / 尙憶馬當村柳外
낚싯배에 몸을 싣고 푸른 물결 타던 일이 / 釣舟搖曳綠波間

용문산 북쪽 월계 서쪽에 / 龍門山北粤溪西
두 서너 마지기 척박한 밭이 있고 / 却有石田三兩畦
무궁화 울타리에 초가집도 그대로인데 / 茅屋槿籬閒自在
가을이면 나뭇잎이 바윗길에 가득하다네 / 秋來木葉滿巖蹊

복희 신농 떠난 후로 세속이 야박하여 / 羲農去矣俗云淆
아침이면 돕던 사이가 저녁에 벌써 노발대발 / 朝作魚呴暮虎虓
술독 앞에서 뻔질나게 크게 쓴 글자들이 / 樽前大筆淋漓字
결국은 유생의 절교로 변해 버리지 / 道是劉生廣絶交

삼각산 중봉 이름 백운대인데 / 三角中峯號白雲
하늘의 생황 소리가 달 속에서 들려온다네 / 九天笙樂月中聞
그 옛날 갈바람에 남고와 갔을 때는 / 秋風憶與南皐去
의기가 등등하여 온 세상을 흔들 만했지 / 逸氣凌凌駕入垠

그 옛날 봄바람에 예주에서 배를 타고 / 春風憶上蕊州船
꽃과 버들 속에서 홀로 자기도 했었는데 / 獨宿江花江柳邊
그때는 남고와 짝이 되지 못했기에 / 不與南皐作仙侶
황려성 밖에서 쓸쓸함을 느꼈다네 / 黃驪郭外思凄然

백로와 갈매기는 원래가 단짝이라 / 瘦鷺輕鷗本自雙
창강 찾아가는 것이 십 년 두고 꿈이라네 / 十年歸夢在滄江
무슨 일로 물이 잦고 서리도 내렸건만 / 如何水落霜淸後
성남의 찢어진 창만 지키고 있다던가 / 猶守城南破竹牕

서리 속의 묏부리들 깎아지른 옥이런가 / 霜天華嶽玉嶙峋
말끔한 그 기운이 사백 년 내내라네 / 淑氣澄明四百春
푸른산 깊은 곳을 찾아가지 말지어다 / 休向碧山深處去
한양 사람 이내 된들 무엇이 어떠리 / 何如長作漢陽人


[주D-001]진길료 : 새 이름.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는 새로 일명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주D-002]유생의 절교 : 금방 사귀었다가 금방 절교하는 변덕. 북제(北齊)의 유적(劉逖)이 조정(祖珽)과 교의가 긴밀하고 조정의 딸을 자기 동생 아내로 맞기까지 하였는데, 뒤에 조정이 조언심(趙彦深) 등을 몰아내려 할 때 유적과 동모한 일이 제대로 안 맞자 조정은 그를 오해하여 유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적이 자기 아우를 보내 이혼까지 하는데 이르렀음. 《北齊書 卷45》

 

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
삼가 어제 야등부용정소루부신갑인시령여주중서중인분운구호시를화답하다[奉和聖製夜登芙蓉亭小樓復申甲寅詩令與舟中嶼中人分韻口呼]


태을진인 연잎 배 가볍게 둥둥 떴는데 / 蓮葉輕浮太乙船
선관 모두 거울 속 하늘에 들어 있네 / 仙官摠在鏡中天
거문고줄 노랫가락 봄물 위에 퍼지고 / 珠徽度曲迷春水
줄을 이룬 등불빛 저녁 안개 무색하다 / 銀燭成行透夕煙
일천 나무 꽃가지는 학사 패옥 어울리고 / 千樹花枝承委佩
푸른 일산 삼각산이 꽃다운 자리 굽어보네 / 三山翠蓋壓芳筵
청아한 궁중 술에 취기 또한 도도한데 / 盈盈法醞猶餘醉
대궐 버들 아래로 달빛 타고 돌아온다 / 乘月歸來御柳邊


 

[주D-001]태을진인 연잎 배 : 송 나라 한구(韓駒)가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태일고야도(太一姑射圖)를 보고 지은 시의 “태일진인 저 신선 연잎 배를 탔는데 건 벗어 머리 드러나 찬바람에 날리누나[太一眞人蓮葉舟 脫巾露髮寒颼颼]”에서 나온 말이다. 태을은 태일(太一)과 통용하며 본디 별 이름이다. 《陵陽集 卷1 題王內翰家李伯詩畫太一姑射圖》
[주D-002]선관 : 벼슬을 지닌 신선. 곧 규장각ㆍ예문관ㆍ홍문관 등의 청직(淸職)을 띤 사람을 가리킨다.

 

 

 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
백운대에 올라가[登白雲臺] 삼각산(三角山)의 중봉(中峯)이다


어느 뉘 뾰족하게 깎아 다듬어 / 誰斲觚稜巧
하늘 높이 이 대를 세워 놓았나 / 超然有此臺
흰 구름 바다 위에 깔려 있는데 / 白雲橫海斷
가을빛 온 하늘에 충만하구나 / 秋色滿天來
육합은 어우러져 결함 없건만 / 六合團無缺
한번 지난 세월은 아니 돌아와 / 千年漭不回
바람을 쏘이면서 휘파람 불며 / 臨風忽舒嘯
하늘 땅 둘러보니 유유하기만 / 頫仰一悠哉


[주D-001]육합 : 천지와 동서남북.

 

동각 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사공(司空)은 휘(諱)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10세 손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고, 복야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아간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았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았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고,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았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았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고, 충민이 화(華)를 낳았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았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고, 용부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 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고, 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다.
전주(全州)에서 강릉도(江陵道)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德原)으로 갔는데,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진(鎭)을 설치하여 원 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당시 영흥(永興) 이북은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 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 영흥)에 주둔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자,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1254)이니,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지원(至元) 갑술년(甲戌年 1274) 12월에 목조가 경흥부(慶興府)에서 흉(薨)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 달단동(義興部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행리(行里)를 낳았으니, 이분이 곧 익조(翼祖)다.
적도(赤島)로 피란하였다가, 뒤에 덕원(德原)에 옮겨 살았다. 안변호장(安邊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고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 아들 낳기를 빌었는데, 아들을 낳고서 선래(善來)라 이름지었으니, 이분이 곧 도조(度祖)다. 휘는 춘(椿)인데, 어릴적 이름은 선래요, 몽고(蒙古) 휘로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다. 문하시중 박광(朴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자흥(子興)이요, 다음은 곧 우리 환조(桓祖)이니, 휘는 자춘(子春)이요, 몽고 휘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이 되었고, 집 한 구역을 하사받아서 거기서 머물러 살았다.
문하시중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으로 시호가 정효공(靖孝公)인 최한기(崔閑奇)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원 원년(至元元年), 충숙왕(忠肅王) 4년(을해 1330) 10월 11일 기미에 영흥부(永興府) 사적에서 태조(太祖)를 낳았다. 즉위(卽位)하게 되자, 4대의 존호(尊號)를 추존하되, 고조고(高祖考)를 목왕(穆王), 그 능(陵)을 덕릉(德陵), 비(妣) 이씨(李氏)를 효비(孝妣), 능을 안릉(安陵)이라 하고, 증조고(曾祖考)를 익왕(翼王), 그 능을 지릉(智陵), 비 최씨(崔氏)를 정비(貞妣), 능을 숙릉(淑陵)이라 하고, 조고를 도왕(度王), 능을 의릉(義陵), 비 박씨를 경비(敬妣), 능을 순릉(純陵)이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능을 정릉(定陵), 비 최씨를 의비(懿妣),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여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4대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 신우(辛禑) 때에 태조가 최영(崔塋)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죽일 때에, 태조와 최영이 정방(政房)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을 등용한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모든 사대부(士大夫)가 다 그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이다. 지금은 다만 그 재질이 현명한지 않은지만 물을 일이지, 어찌 지나간 일까지 허물하리오.”
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않았다.
태조가 호발도(胡拔都)를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렀는데,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 뽕나무에 앉아 있었다. 태조가 활로 쏘니 한꺼번에 두 마리가 다 떨어졌다. 길 가에서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 또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탄복하기를,
“도령(都領)의 활쏘는 솜씨가 기묘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내 이미 도령은 지났다.”
하고, 인하여 두 사람에게 가져가 먹게 하니, 두 사람도 조밥을 마련하여 올렸다. 태조가 그들을 위해 음식을 먹자, 두 사람이 마침내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아니하여 뒤에 모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렬에 참여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리기 전에 태조가 살던 마을에,
서경성 밖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백성 구제 소원일세 / 願言救濟黔蒼
라는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돌리는 일이 있었다.
○ 군사를 돌린 후에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면서 《곽광전(霍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었는데, 인옥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론을 극력 진술하므로 태조가 왕씨의 후손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조민수(曺敏修)는 우(禑)의 외삼촌인 이임(李琳)의 척당(戚黨)으로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이색(李穡)에게 문의하여 드디어 의론을 확정하여 창을 세웠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문 앞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윗돌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 글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 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으리라.”
는 등의 말이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영접해 들이게 하였는데, 이미 떠나버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비장된 기록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고, 또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고려가 망할 무렵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또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 맞히는 혜징(惠澄)이란 자가 사사로이 그의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운명을 점친 것이 많으나 이성계(李成桂)만한 이는 없었다.”
하였다. 그 친한 사람이 묻기를,
“타고나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지위가 정승에 이를 뿐이겠지.”
하니, 혜징이 말하기를,
“정승쯤이면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내가 알아 맞힌 것으로는 임금이 될 운명이니, 그가 왕씨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가 도성(都省)과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공정왕(恭靖王 정종 定宗) 및 아우 화(和), 사위 이제(李濟), 휘하(麾下)인 황희석(黃希碩)과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변론하게 하였다. 태종이 숭교리(崇敎里)에 있는 옛 사저의 사랑(斜廊)에 앉아 걱정을 하면서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은
“민생(民生)의 이해(利害)가 이 시점에 결정될 것이요,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
라고 극력 말하였다. 태종이 곧 태조의 집으로 돌아와서 공정왕, 아우 화, 사위 이제와 더불어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몽주를 쳐 죽이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公)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조영규에게 말하니 영규가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영무(趙英茂)와 고여(高呂) 및 이부(李敷) 등이 길에서 몽주를 맞이하여 쳤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몽주가 꾸짖으며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달아났는데, 영규가 뒤쫒아 가서 말 머리를 치니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급히 달아나니 고여가 추격하여 죽였다. 태종이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가 매우 성내어 태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은 본래부터 충효(忠孝)로 이름이 났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은 충신되고 효자되기를 바래서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약이나 먹고 죽어버리고 싶다.”
하였다. 강비(康妃)가 옆에 있다가 안색을 가다듬고 고하기를,
“공께서 매양 대장군으로 자처하셨는데, 어찌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 가을, 7월 17일 병신에 태조가 공민왕비(恭愍王妃) 안씨의 교지를 받들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백관들이 반열을 지어 궁문 서쪽에서 맞이하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전(殿)에 들어가 즉위하되 용상(龍床)을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정유(丁酉 18일)에 비가 왔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가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흐뭇하게 비가 내리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 정사(丁巳)에 명을 내려, 전조(前朝) 태조(太祖)의 신주를 마전군(麻田郡)에 옮겨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조의 혜왕(惠王)ㆍ현왕(顯王)ㆍ충경왕(忠敬王)ㆍ충렬왕(忠烈王)이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었으니, 마전의 태조의 사당에 같이 제사지내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조의 성왕(成王)이 중화(中華)를 높이 사모하여 문물(文物)을 일으키자,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고, 문왕(文王)이 근신하여 선대가 이룩해 놓은 것을 지켜 나아가 세상을 태평하게 하자, 백성들이 그 생활을 편안히 누렸고,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흥복(興復)시켰으며, 상국(上國)을 잘 섬겨서, 온 나라를 편케 하였으니, 모두 동방에 공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태조묘(太祖廟)에 같이 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 공민왕 19년에 태조가 기병(騎兵)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고, 또 7백여 리를 행군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에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것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옮겼다가,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원경(李原景, 李吾魯帖木兒)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얼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도 본시 고려 사람입니다. 항복하여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어 그 괴수 고안위(高安慰)를 쳐서 쫓아냈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 북으로는 동녕부, 서로는 해남(海南),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가 텅 비게 되었다. 황성은 옛날 여진(女眞)의 황제성(皇帝城)이다.
○ 태조는 높은 콧대에다 용(龍)의 상을 하여, 기특하고 웅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릴 적에 함흥과 영흥 사이를 다니며 놀았는데, 북도의 매[鷹]를 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를,
“이모(李某, 성계(成桂)와 같이 정기 있고 기특하게 생긴 사람을 얻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쏘는 법이 신묘(神妙)하였다. 함주(咸州)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므로 여러 사람이 제지하려 하여도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옷을 벗어 던지고, 어떤이는 불을 피워 던졌어도 오히려 금지시키지 못하였는데, 태조가 양손으로 갈라 쥐어 잡으니 소가 싸우지 못하였다.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海州)에 사냥갔는데 좌우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짐승을 잡되, 다 등성이를 맞혀라.”
하였다. 태조가 평소에 짐승을 쏠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鴈翅骨)과 왼쪽 넙적다리 앞 근처를 맞혔는데, 이날에는 사슴 40마리를 모두 그 등성이를 바로 적중시켰다. 또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할 때에 사슴을 쫓아 절벽에 이르렀는데, 높이가 수십 척에 지형이 험하여 사람은 내려갈 수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태조 또한 말을 채찍질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밑바닥에 이르렀는데, 말이 넘어져 일어나기도 전에 곧 사슴을 쏘아 죽였다. 길을 가다가도 엎드린 꿩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날게 하여 두어 길쯤 높이 올라간 다음에 올려다 보고 쏘면 영락없이 맞혔다. 나무 공을 배[梨]만큼 크게 만들어 사람을 시켜 50~60걸음 거리에서 공중에 던지게 하고는 박두(撲頭)로써 쏘아도 번번히 맞혔다. 그러나 항상 겸손함으로 자처하여 남보다 위에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남과 더불어 활쏘기를 비교할 때에는 다만 상대방의 능력과 맞힌 횟수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겨우 상대방과 동등하게 할 뿐이요, 이기고 짐이 없게 하였다. 권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한 번이나 더 맞히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 신우(辛禑) 경신년(6년, 1380)에 우리 태조가 왜적을 운봉(雲峯)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 장수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베고 개선(凱旋)하였는데,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적 소탕하기를 정말 썩은 가지 꺾듯 하였으니, / 掃賊眞將拉朽同
삼한의 기쁜 기색이 여러 장군 것이네 / 三韓喜氣屬諸公
충성이 환히 드러나니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 忠懸白日天收霧
위엄이 청구에 떨치자 바다에 풍파가 없네 / 威振靑邱海不風
개선하는 빛난 자리에는 무훈을 노래하고 / 出牧華筳歌武烈
능연의 높은 누각에는 영웅을 그리리 / 凌煙高閣畵英雄
앓던 끝이라 교외에 환영가지 못하고 / 病餘不得參郊迓
앉아서 새 시나 읊어 위대한 공 칭송하네 / 坐詠新詩頌雋功
하였고, 삼사죄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의 시에는
적의 칼날 꺾기 벼락과 같았으니 / 賊鋒摧挫興雷同
절제가 모두 우리 공에서 나온 것 / 節制無非自我公
충만한 상서 기운 독한 안개 녹이고 / 瑞霧葱葱銷毒霧
차가운 서릿 바람 위풍을 도왔네 / 霜風冽冽助威風
섬 오랑캐 간담 떨어트린 군사의 위용이 강성하고 / 島夷墜膽軍容盛
이웃 나라 심장 서늘케 한 사기가 웅장하네 / 隣境寒心士氣雄
온 나라 의관한 사람이 서로 절하며 하례하니 / 滿國衣冠爭拜賀
삼한 만대의 태평을 이룩한 공이로다 / 三韓萬代太平功
하였으며, 성균제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의 시에는
3천리 사람이 마음과 덕을 다같이 하였으니 / 三千心與德皆同
군사 호령이 지금 다 공에게 달려 있네 / 師律如今盡在公
나라에 바친 충성은 밝기가 해를 관통하였고 / 許國忠誠明貴日
적의 칼날 꺾은 용기는 늠름히 바람나네 / 摧鋒勇烈凜生風
붉은 활이 빛나는데 은혜와 영화가 중하고 / 彤弓赫赫恩榮重
백우가 높고 높아 기세가 웅장하네 / 白羽巍巍氣勢雄
한번 개선하자 나라가 안정되니 / 一自凱旋宗社定
말 위에 기특한 공이 있음을 반드시 알리로다 / 須知馬上有奇功
하였다.
조무(趙武)는 원 나라 장수인데, 원 나라가 쇠약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孔州)에 점거하고 있었다. 이때에 태조가 동북면(東北面)에 있으면서 휘하 장명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결국에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쳤는데, 그의 용맹스럽고 날샘을 이끼어 쇠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로 수십 번이나 맞히니, 조무가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절하며 항복하여 끝내 하인이 되어 종신토록 심부름하였는데,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까지 이르렀다.
○ 고려 말기에 국가에서 병적(兵籍)을 관리하지 않고 모든 장수들이 각기 점유하여 군사를 삼았는데, 이를 패기(牌記)라고 하였다. 대장 중에 최영ㆍ변안렬(邊安烈)ㆍ우인렬(禹仁烈) 등과 같은 사람은 오로지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그 막료(幕僚)와 사졸(士卒)이 뜻에 맞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꾸짖어 못하는 짖이 없다가, 매를 쳐 죽는 자까지 있으므로, 휘하 장병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태조는 유독 진심으로 휘하들을 예(禮)로 접대하여 평소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모든 장수의 휘하들이 다 예속되기를 원하였다.
○ 태조가 전쟁할 때에 탄 준마(駿馬)가 여덟이었다. 「횡운골(橫雲鶻)」이라 이름한 것이 여진산(女眞産)으로, 납씨(納氏)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두개를 맞았으며, 「유린청(遊麟靑)」이라 이름한 것은 함흥산으로, 오라(兀刺)를 잡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승전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세 개를 맞았으며, 31세에 죽었는데,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 주었다. 「추풍오(追風烏)」는 여진산으로 화살 한 개를 맞았고, 「발뢰자(發雷赭)」는 안변산이요, 「용등자(龍騰紫)」는 단천산인데, 해주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한 개를 맞았으며, 「응상백(凝霜白)」은 제주산(濟州産)으로 압록강에서 회군(回軍)할 때에 탔던 것이며, 「사자황(獅子黃)」은 강화매도산(江華煤島産)으로 지리산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며, 「현표(玄豹)」는 함흥산으로, 토아동(兎兒洞)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다.
세종 때에 호군(護軍)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그 팔준마(八駿馬)의 형상을 그리게 하고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찬(贊)을 지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 태조가 본시 경학(經學)을 중히 여겨, 비록 군중에 있을 때에도 매양 창을 놓고 쉬는 틈에는 이름난 선비를 불러다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는데, 더러는 밤중이 되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가문(家門)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태종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하였는데, 태종이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매양 태종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왜 나의 소생이 되지 아니하였을까.”
하였다. 신우(莘禑)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자 태조가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으며, 뒤에 제학(提學)에 제수되자, 태조가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를 두 번 세 번 읽어보게 하였다. 태조가 매양 손님들과 연회할 때에는 태종으로 하여금 시구(詩句)를 짓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손님들과 즐기는 데는 너의 힘이 많다.”
고 하였다.
일찍이 오라를 칠 적에 무너진 담장 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았더니, 한 사람이 옷을 벗고 서서 울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원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한 사람인데, 귀국의 이인복(李仁復)이 나의 동년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장원이란 말을 듣고는 곧 자기 옷을 벗어 입히고 드디어 데리고 오니, 공민왕이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를 제수하고 성명을「한복(韓復)」이라 내려 주었다.
○ 태조는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구족(九族)들에게 화목하였는데, 비록 10촌이 넘더라도 애호하기를 매우 돈독하게 하였다. 서형 원계(元桂)와 서제 화(和)와 더불어 우애가 극진하여 항상 같이 거처하였으며, 화(和)의 어머니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를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나아가 뵐 때에는 항상 계단아래 꿇어 앉았었다. 공민왕이 자주 연석(宴席)을 마련하여 화에게 주어 어머니에게 드리게 하였고, 또 교방(敎坊)의 음악을 하사하여 표창하고 총애함을 표시하므로, 태조가 임금의 하사인 것을 영화롭게 여겨 전두(纏頭)를 많이 주었다.
처음에 환조(桓祖)가 돌아가시자 원계(元桂)는 자기가 장자라 하여 마음으로 태조를 꺼렸었다. 마침 태조의 양민(良民)이 되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자, 원계가 그의 누이동생인 강우(康祐)의 처와 공모하여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일을 내고자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였었다. 태조는 그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전과 같이 대접하였다. 원계가 고려에 벼슬하여 장작판서(將作判書)가 되었다가 살인죄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태조가 구제하려고 하여 두 번 세 번 극력 청하였으나, 되지 않으므로 심히 애통이 여기고, 여러 고아들을 부양하여 혼인시켰다. 강우의 처는 집이 가난하므로 태조가 그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었으며, 개국한 뒤에 원계의 아들들이 모두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다.
○ 고려 공민왕이 돌아간 뒤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부르게 되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는데, 신창(辛昌)이 즉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이, 신창이 감히 가서 조회하고 또 왕관(王官)이 나와서 감국하게 할 목적으로 스스로 원 나라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자, 태조가 칭찬하기를,
“강개(慷慨)하도다. 이 늙은이여.”
하였다. 이색은 태조의 위풍과 덕망이 날로 성해지므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이 날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한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태종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아 주었다. 도중에 한 관원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최영(崔瑩)이 정병 10만 명을 거느렸어도 이성계가 그를 잡으려 하면, 파리잡듯 쉽게 할 것이다.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성계의 망극(罔極)한 덕을 입고 있는데 무엇으로 갚으려는가.”
하였다. 명 나라 천자는 평소에 이색의 이름은 들은 터라, 조용히 말하기를,
“네가 원 나라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다 하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겠구나.”
하였다. 이색이 얼른 한어로써 대답하기를,
“고려 왕이 친히 조회하려 오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므로, 예부(禮部)의 관원이 전하여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한 탓으로, 말이 분명치 못하였던 것이다.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한어가 바로 납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다.
○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한 중이 문 밖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주면서,
“지리산 바위를 속에서 얻었다.”
고 하였는데, 그 글에 「나무 아들이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으리라.(木子乘猪下復正三韓境)」는 구절이 있었다. (태조가 을해년에 탄생하였음)사람을 시켜 영접하려 하자 이미 가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 덕원부(德源府)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었다. 개국하기 1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잎이 피므로,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 하였다. 도참(圖讖) 속에 「조명(早明)」이란 문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가 특별히 개국하는 호칭을 조선이라 명하였다.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니,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삼아 계승하여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다스려 길이 후사(後嗣)를 번성하게 하라.’하였다.”
고 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자 예부에서 글을 보내 왔는데 이르기를,
“성지를 받들어 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 백성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크게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혹 흥하기도 하고, 혹 폐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상의 명령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삼한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미 이씨를 높이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어 사람마다 각기 하늘이 준 낙을 즐기고 있으니, 이것이 곧 상제의 명이다.’하였다.”
고 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들어가 조회하자, 고황제가 편전(便殿)으로 불러 보고, 한참 동안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천하를 얻게 되는 연유를 상세히 말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너희 임금이 나라를 얻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하늘이 주지 아니하고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면, 힘으로써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 경흥부(慶興府)의 남쪽 10리쯤에 있는 적지(赤地) 가운데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35보쯤 되고 둘레가 90보쯤 되며, 사방이 진흙이어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조(穆祖)의 덕릉(德陵)이 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장사지낼 적에, 중국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그 자손이 일어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안릉(安陵)도 덕릉의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두 능을 함흥부(含興府) 음란(吟蘭) 북쪽에 옮겨 합장(合葬)하였다.
○ 홍무(洪武) 갑술년(1394, 태조 3)에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등을 명하여 한양에 도읍터를 보게 하였는데, 전조(前朝) 숙왕(肅王) 때에 경영하였던 궁궐의 옛터가 좁고 협소하므로, 다시 그 남쪽에 터를 잡아 해산(亥山)을 주용(主龍)으로 하여 임좌 병향(壬坐丙向)으로 하였다. 이해 12월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 9월에 태묘(太廟)와 궁전이 낙성(落成)되어 임금께서 법가(法駕)를 갖추어 들어갔으니, 곧 경복궁(景福宮)이다. 병자년(1396, 태조 5)에 도성(都城)을 쌓는데, 정월달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서북 방면 안주(安州) 이남, 인부 18만 9천 명을 징발하여 취역시켰다가 2월 그금에 돌려 보냈고, 가을에는 강원ㆍ경상ㆍ전라 세 도의 인부 7만 9천 명을 징발, 8월에 시작하였다가 9월에 역사를 마쳤는데,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 등이 역사를 감독하였다.
○ 태종이 이색과 더불어 명 나라에서 돌아와 발해에 이르자, 객선(客船)이 동행하였는데 반양산(泮洋山 곧 전횡(專橫)의 식객 5백여 인이 자살한 곳이다.)에서 구풍(颶風)이 크게 일어나 두 객선이 다 침몰되었다. 태종이 탓던 배도 거의 구출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엎어지며 자빠졌으나 태종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하였으며 결국 온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 태조조(太祖朝)에 고황제(高皇帝)가 수조(手詔)를 내려 책하였는데,
“너희 나라에서 사람을 요동까지 보내어 포백(布帛)과 은(銀)을 싸가지고 와서 예(禮)를 행한다 핑계하고 우리 변방 장수를 유혹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달래고 꾀어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는 등의 일이었다. 우리 조정에서 표(表)를 올려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은
“요동에 가서 예를 행한 것으로 말하면, 이 또한 상국(上國)을 우러러 사모한 것입니다. 사자(使者)가 왕래할 즈음에 있어 손님과 주인이 교제하는 의식(儀式)이 있는 것은 예의상 그러한 것이지, 어찌 감히 꾀었겠습니까. 여진(女眞)은 동녕(東寧)에 예속하였으므로, 이미 모두 군(軍)이 되어 차역(差役)에 당하고 있는데, 어찌 사람을 보내어 달래고 꾀었겠습니까. 다만 요동 도사(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갈 적에 그 관하 인민들이 바로 따라가지 아니한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던 곳을 옮기기 어려워 그러한 것이요, 신이 억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받치는 것도 없으며, 각자가 그 전일의 생업(生業)을 그대로 해가고 있습니다.”
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정도전(鄭道傳)의 글이었다. 황제가 우리의 올린 표(表)의 말이 거만하다 하고 더욱 노하여 요동에 명령하여 조선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므로, 사신이 요동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가 모두 다섯 차례나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라고 타이르므로 태조가 태종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만일 묻는 말이 있게 되면 네가 아니면 능히 자세하게 대답할 사람이 없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신이 사직을 위한 큰 계획에 어찌 응당 핑계대고 회피하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태종에게 명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조반(趙胖)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 나라 서울로 가게 하였는데, 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기질이 여위고 약한데 만리 길을 병없이 돌아오겠는냐.”
하였다. 이번 행차를 조정 신하들은 모두 태종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다. 참찬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가 말하기를,
“정안군(靖安君)이 만리 길을 가시는데 우리들이 여기서 편안하게 자서 되겠는가?”
하고, 모시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찬성사(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태종의 행차에 전송하기를,
아들과 신하 알아보는 지감이 밝으시니 / 知子知臣睿鑑明
사대하는 정성도 민생을 위해서로다 / 畏天誠意爲民生
사람들이 이르기를 조선 만세의 경사가 / 皆云萬世朝鮮慶
이 더위 장마속 발섭하는 행차에 달려 있다고들 하네 / 在此炎霧跋涉行
라고 하였다. 상국의 선비들이 태종을 보자, 모두 조선의 세자라 하면서 매우 존경하였다. 남경에 도착하자 황제가 두세 차례 불러 보았는데, 태종이 진술하여 아뢰기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므로 황제가 우대하여 돌려 보내고 그제야 길을 개통하여 주라고 명령하였다.
○ 공양왕 때에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부름을 받고 귀양 살던 곳에서 서울에 돌아와 태조를 사택으로 찾아 뵙자, 태조가 놀라고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드리며 이색에게 마시기를 청하므로 이색이 사양하지 않고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겼다. 후일에 본조(本朝)가 되어서는 이색을 편전에 청하여 볼 때에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여 어휘(御諱)를 고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자(字)를 지어 올리게 하므로, 도전이 교지를 받들어 「군진(君晉)」이라고 지어 받쳤다. 그 자설(字說)에 이르기를,
“일(日)에다가 일(一)을 하였으니,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이다. 진(晉)은 밝은 해가 떠오르는 뜻이니,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그 밝음이 넓게 비치게 되어, 어둡고 가리운 데가 소멸되고, 만상(萬象)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의 첫 정사가 청명하자, 온갖 사특한 것이 제거되고 온갖 법이 모두 새로워진 것이요, 하늘의 해가 이미 떠오르자, 그 밝음이 점차 퍼져가는 것이니, 곧 임금이 즉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천만세에 전하는 것이다.……”
하였다.
○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 및 모든 공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얼큰하자 도전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이렇게 되게 한 것은 경의 힘이로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꼬.’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 거(莒)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마소서.’하자, 환공이 말하기를 ‘원컨대 중보(仲父)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하였습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도 항쇄(項鎖)에 묶이던 때를 잊지 아니하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렇다.”
하고, 사람을 시켜 문덕곡(文德曲)을 부르게 하면서 도전에게 눈짓하기를,
“이것은 경이 지은 것이니 경이 일어나 춤을 추어야 한다.”
하자, 도전이 곧 일어나 춤을 추니 태조가 웃옷을 벗고 춤추게 하고는,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주었고, 밤새도록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다,
○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감찰 황보전(皇甫琠)과 더불어 새로 감찰이 된 김중성(金仲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비록 큰 집은 지었지만 어찌 능히 오래 살게 되리오.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다. 황보건이 이 말을 듣고 주부(注簿) 이양수(李養脩)에게 이야기하자 양수가 성귱악정(成均樂正) 김분(金汾)에게 말하였다. 김분은 조준의 문인이므로 조준에게 고하니, 조준이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조준은 개국(開國)한 원훈으로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데, 김부는 조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가 이것은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말이다.”
하고, 김부를 극형에 처하게 하고, 황보전과 이양수는 곧바로 조정에 고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황보전은 장형(杖刑)을 주고 양수는 태형(笞刑)을 가했으며 김부와 같이 술 마신 열 여덟 사람에게는 감찰의 직을 파면하였다.
○ 봉상시(奉常寺)에서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안양(安煬)ㆍ안황(安荒)ㆍ안혹(安惑) 등으로 의논하여 예조에 보고하므로, 예조에서 문하부(門下府)에 보고하였다. 문하부에서 문서를 갖추어 결재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시호를 정한 봉상박사(奉常博士) 최견(崔蠲)을 불러서 묻기를,
“희계는 원훈인데, 시호를 주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게 하였는가. 또한 다만 그 사람의 허물만 논하고 그 공을 듣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곧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문초하고, 또 봉상소경(奉常少卿) 안성(安省), 시승(侍丞) 김분(金汾), 대축(大祝) 한고(韓皐), 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 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을 가두었다. 이에 형조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 김백영(金佰英)과 이황(李滉) 등을 탄핵하고, 또 예조 의랑(禮曹議郞) 맹사성(孟思誠), 좌랑(佐郞) 조사수(趙士秀)를 탄핵하였으니, 이는 봉상시에서 시호를 잘못 준 데 대해 논박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죄견에게는 곤장 백 대를 쳐서 김해(金海)에 귀양보냈고, 안성은 축산(丑山)에, 김분은 각산(角山)에, 심언은 순천(順川)에, 사징은 강주(康州)에 귀양보냈으며, (축산은 영해부 바다 가운데 있고 각산은 진주 바닷가요 강주는 곧 진주임.) 김백영ㆍ이황ㆍ맹사성ㆍ조사수는 모두 파직시키고, 다시 정희계에게 양경(良景)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 홍무(洪武) 정축년(1397, 태조 6)에 정도전이 사명을 받들고 함경도에 갔을 때에 태조가 글을 보냈는데, 외면에 쓰기를 「삼봉행차개탁(三峯行次開坼)」이라고 썼으며, 내용에 이르기를,
“서로 작별한 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함이 자못 깊어 중추(中樞) 신(辛)을 보내어 행차에 가서 문안하려던 차에, 최긍(崔兢)이 마침 오게 되어 안부를 자세히 알고나니 다소 위안이 되고 마음이 풀리오, 이에 솜옷 한 벌을 이슬 바람을 방지하기 위해 보내니 받아주면 고맙겠소. 참찬관(參贊官) 이(李)나 절제사(節制使) 이(李)에게도 솜옷 각 한 벌씩 부치니, 부디 나의 간절한 생각을 전해주면 고맙겠소. 나머지 말은 중추 신의가 구전(口傳)할 것이오. 봄인데도 날씨가 추우니 철에 따라 몸을 보호하여 변방의 일을 마치시오. 이만 줄이오. 아무 해 달 아무 일에 송헌거사(松軒居士)는 서(書)한다.”
하고, 도장을 찍었다. (참찬과 절제는 부관임)
○ 태조의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공정왕(恭靖王)이 둘째요 태종이 다섯째이며,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과 공주를 낳았는데, 공주는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 세자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극렴 등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嫡長)을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 있는 이를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니, 강씨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었는데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므로, 드디어 파하고 나왔다. 다른 날에 또 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다시는 적장이니 공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과 조준이 물러나와 의논하기를,
“강씨가 반드시 자기의 소생을 세우려고 하는데 방번은 광패(狂悖)하고 그 동생이 조금 낫다.”
하여 드디어 방석을 세자로 할 것을 청하므로 정도전과 남은(南誾) 등이 방석에에 붙으며 여러 왕자를 꺼려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비밀히 임금에게 아뢰되, 모든 황자를 지방의 왕으로 봉하는 중국 예에 의하여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이에 따라 태종에게 이르기를,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모든 형들에게 말하여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점장이 안식(安植)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복형 중에 천명을 받을 이가 한 둘이 아니다.”
하자, 도전이 말하기를,
“곧 제거하면 그만이지 무엇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의안군(義安君) 화(和)가 알고 몰래 태종에게 고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태조가 병이 위독하자 도전 등이 임금의 거처를 옮길 일을 의논하겠다고 핑계대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인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그 도당으로 하여금 안에 있으면서 모의하게 하였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도 그 당이었는데, 모두 그 계획을 몰래 태종에게 누설하였다. 이 무렵에 태종이 여러 형들과 더불어 항상 근정문(勤政門) 밖에 자고 있는데, 원경왕후(元敬王后)가 그 동생 장군 무질(無疾)과 더불어 의논하여 종[奴] 김소근(金小斤)을 보내어 태종을 청하여 모셔오게 하였다. 소근이 말하기를,
“여러 형제분들과 더불어 같이 계시는데 무슨 말로 청해옵니까.”
하니, 후(后)가 말하기를,
“내가 가슴과 배가 갑자기 아프다고 네가 급히 가서 고하면 공이 응당 속히 올 것이다.”
하였다. 소근이 달려가서 고하자 화(和)가 청심환(淸心丸)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기를,
“속히 가서 치료해 드리시오.”
하였다. 태종이 곧 집으로 돌아와 후(后) 및 무질과 더불어 둘러서서 한참 동안 비밀히 말하다가 후(后)가 눈물을 흘리며 태종의 옷을 잡고,
“대궐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어찌 죽음을 겁내어 가지 아니할 수 있으며, 또 여러 형이 모두 대궐에 계시는데 알게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후(后)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조심하시오. 조심하시오.”
하였다. 후가 그 동생 대장군 무구(無咎) 및 무질과 더불어 꾀하여 무기와 말 안장을 모두 몰래 정비하여 변란에 대처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태종이 대궐에 당도하자 낮은 환관이 안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병이 중하여 다른 처소로 가 계시려고 하니, 여러 왕자들은 모두 들어오시오.”
하였다. 전에는 궁문에 모두 등불을 설치하였었는데, 이날 밤에는 등불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태종이 변소에 가는 체하고 생각을 하려 하였는데, 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이 뒤따라서 외치기를,
“정안군 정안군을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왜 소리는 높이느냐?”
하니, 또 손으로 소매를 잡으며,
“계책이 없으니 어찌해야겠는가.”
하고, 방간과 방의, 이백경과 더불어 달아나 연추문(延秋門)으로 나갔다.
태종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광화문 밖에 말을 세우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을 불렀는데, 조준이 바야흐로 점치는 사람을 마주 하고서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연이어 재촉하자 그제서야 왔는데, 갑옷 입은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예빈시(禮賓寺) 앞 돌다리에서 그들을 막게 하고, 다만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태종이 조준에게 이르기를,
“공 등은 이씨의 사직을 걱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조금 후에 조신(朝臣)들이 달려온 자가 많았다. 조준과 김사형이 정부에 들어가려고 하므로 태종이 의논하기를,
“만약 궁중으로부터 군사가 나오게 되어 우리 군사가 조금이라도 후퇴하게 되면 저들이 그쪽 군사 쪽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하고, 이르기를,
“우리 형제가 길에 말을 세우고 있는데 정승이 부중(府中)에 들어가 앉아서는 안 된다.”
하여, 운종가(雲從街)에 앉게 하고 백관을 소집하니, 찬성(贊成) 유만수(柳蔓殊)가 그 아들을 데리고 왔다. 태종이 갑옷을 주어 뒤에 서게 하였다. 이무(李茂)가 말하기를,
“만수는 방석의 당입니다.”
하므로, 태종이 죽이라고 하자, 만수가 말에서 내려 태종의 안장을 붙잡고 말하기를,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하였지만, 김소근이 칼로써 그의 목을 찔렀다. 우러러보며 쓰러지자, 그를 베고, 그의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을 찾으니, 이직(李稷)과 더불어 바야흐로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있었으며,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이숙번(李叔蕃)으로 하여금 일부러 화살을 쏘아 지붕 기왓장 위에 떨어뜨리게 하고 인하여 불을 지르니, 도전이 달아나 그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지르기를,
“배가 불룩한 자가 우리집에 들어왔다.”
하였다. 군인들이 들어가 수색하자 도전이 엉금엉금 칼을 잡고 기어 나오므로 잡아 태종의 앞에 끌고 갔다. 도전이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주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왕씨를 저버렸다. 또다시 이씨를 저버리려 하느냐.”
하며 즉시 그를 베고, 그 아들 유(游)와 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 이직은 하인인 척하여 지붕에 올라가 불을 끄는 모양을 하다가 빠져 나왔다. 궁중에서 불이 일어난 것을 바라보고 크게 떠들며 포(砲)를 놓았다. 방석의 당이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여 군사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성에 올라가 살펴보게 하니,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무장한 기병이 가득 찼으므로, 그들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귀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입직한 모든 군사들에게 말을 전하여 나오게 하니, 서로 따라 궁성을 넘어 나오므로 근정문 남쪽이 텅 비었다. 새벽에 태조가 청량정(淸涼亭)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조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죄를 아뢰고, 또한 다시 세자를 봉하기를 청하니, 태조가 방석에게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하게 되었다.”
하였다. 방석이 절하고 하직하자 현빈(賢嬪)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지만, 방석은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세자는 그만이지만 너는 나간들 무슨 상관 있겠느냐?”
하였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가 옆에 있다가 오히려 칼을 빼어 두리번거리므로 공주가 이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부부가 만약 정안군 집으로 간다면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방번이 서문으로 나가자 태종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였는데, 도당(都堂)에서 추격하여 중도에서 죽였다. 처음에 산기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이 방석에게 붙어 상소하여 모든 왕자의 병권을 빼앗기를 청하여 골육(骨肉)간을 이간시켰는데, 이때에 군중에 잡혀와서 말하기를,
“나도 근일부터 왕자에게 마음을 돌렸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저 입도 고기 덩어리다.”
하고 죽였다. 공정왕(恭靖王)이 이날 기도 드리는 일 때문에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자다가, 사변을 듣고 도보로 성을 넘어 독음(禿音)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다음날 태종이 사람을 시켜 청하므로 돌아오자, 태조가 공정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 무인년(1398, 태조 7) 정사(定社) 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朴苞)는 자기의 공이 많은데 도리어 여러 신하의 밑에 있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무(李茂)는 비록 정사의 반열에 참여는 하였지만, 공(功)이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니,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어 박포를 죽주(竹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소환했으나 박포가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 그가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는데 이날 마침 비가 오므로 포가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로를 손상시키면 군사가 시가에서 교전한다.’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시오.”
하였다. 당시에 하늘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는데, 박포가 또 그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망한 기운이 있으니 마땅히 조심해서 처신하십시오.”
하였다. 방간이 묻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병권을 맡지 말고 출입을 조심하여 의관을 바르게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기를 전조의 모든 왕씨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말하기를,
“다시 그 다음 것을 말하라.”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형만(荊蠻)으로 도망해 가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처럼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말하라.”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군은 군사가 강하고 여러 사람이 따라 붙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으나, 그를 공격하여 제거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믿고 그 말대로 하여 태종을 자기 집에 오라고 청한 다음, 난을 일으키기로 하였었는데, 태종이 가려는데 창졸간에 병이 생겨 가지 못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와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모두 방간의 인척이었다. 방간이 그 두 사람을 보고 자신의 뜻을 말하니, 이래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이 소인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동기간(同氣間)을 해치고자 하니, 차마 그 말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정안군은 왕실에 큰 공로가 있습니다.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하자, 방간이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인부(仁富)는 꿇어 앉아 손을 당기며,
“공은 부디 하지 마십시오.”
하였으며, 이래가 말하기를,
“그와 같이 하면 공이 대역(大逆)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래가 나오는 즉시 태종에게 고하기를,
“회안군이 미쳐 날뜀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방비하소서.”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의안군 화(義安君 和)와 완산군 천우(完山君天祐)가 태종의 집에 가서 침실(寢室)로 곧바로 들어가 변란을 고하고 응전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고 나가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슨 낯으로 외인(外人)을 보겠는가.”
하였다. 천우가 울면서 굳이 청하여도 따르지 아니하고, 즉시 방간에게 사람을 보내어 대의(大義)로써 타이르며 혐의를 풀고 서로 만나자고 청하였으나, 방간이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돌이키랴.”
하였다. 화(和)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방간이 이미 극도로 흉하고 험악하니 어찌 작은 예절을 지키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화가 태종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와 천우는 태종을 안고 화는 갑옷을 입혀서 억지로 말에 태웠다.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대궐문을 굳게 지키게 하여 비상사태를 방비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공신들 중에서 다만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만이 방간을 따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태종을 따랐다. 승선 이숙번은 선봉이 되어 힘껏 싸웠다. 방간의 아들 맹종(孟從)이 평소 활을 잘 쐈는데, 이날은 병으로 활을 쏘지 못하였다. 방간의 군사가 패하자 태종은 방간이 피살될까 염려하여 친히 스스로 계속해서 외치기를,
“우리 형에게 범하지 말라.”
하고 또 사람을 시켜 전갈하여 타일렀다. 태종은 길가에다 말을 멈추고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방간이 말을 달려 바로 성균관 뒷 동리에 이르러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우니 추격하는 군사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방간이 말하기를,
“나를 유혹한 것은 박포다.”
하였다. 당시 태조는 상왕이 되어 공정왕과 더불어 모두 송도에 있다가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그 소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짓을 하였을까. 삼한(三韓)에 세족 대가가 많은데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박포는 처형을 하였고, 방간은 토산현(兎山縣)으로 귀양갔다. 뒤에 태종이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방간을 죽이자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따라주지 아니하였고, 또 속적(屬籍)을 끊지 아니하였다. 뒤에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맹종(孟從)은 세종조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다. 태종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에 중외(中外)가 모두 태조에게 청하여 태종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공정왕으로 세자 삼기를 청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의거(義擧)해서 개국(開國)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모두 정인군의 공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하였으나, 태종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이 하자 공정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에게 마땅히 조처할 도리가 있다.”
하였다. 공정왕이 즉위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마땅히 정안군을 세워 저사(儲嗣)로 삼아야 하니, 이 일은 늦출 수 없다.”
하자, 태종이 듣고 노하여 책하였다. 뒤에 박포의 난을 평정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몽주(夢周)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큰 일이 거의 성공되지 못하였을 것이오. 도전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어찌 또한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지난번의 일로 살펴보더라도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니, 청컨대 빨리 위호(位號)를 정하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나는 곧 아우로서 아들을 삼겠다.”
하고, 드디어 세워 세자로 삼았다. 그제야 들어가 태조를 뵈니 태조가 말하기를,
“하려고 한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이미 저사(儲嗣)가 되었으니 군국(軍國)의 일을 힘써 할 지어다.”
하고, 쓰던 갓을 주고, 하여금 잔을 올리게 하면서 매우 즐기다가 헤어져 나왔다.
○ 태종이 송도추동(松都楸洞)의 잠저(潛邸)에 있던(즉위한 뒤에 중수하여 경덕궁을 만들었음) 기묘년(1399, 정종 1) 가을 9월에 날이 새려고 하여 별이 드문드문 할 때에 흰 용이 침실위에 나타났다. 크기가 서까래만 하였고 비늘이 있었는데, 광채가 찬란하였으며, 꼬리를 꿈틀거리며 머리를 바로 태종이 누운 곳으로 향하였다. 시녀 김씨(金氏, 곧 경령군 배(裶)의 어머니)가 처마 밑에 앉았다가 그것을 보고 달려가 선부(膳夫) 김소근(金小斤) 등에게 말하자, 소근 등이 또한 나와서 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구름과 안개가 가리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 고황제(高皇帝)가 상보사승(尙寶司丞) 우(牛)를 보내어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 태조가 종친들로 하여금 각지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가 거만하여 가는 곳마다 예모(禮貌)가 없다가, 태종의 집에 이르러 태종을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례하여 의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니, 세자 방석의 당이 모두 기뻐하지 아니하여 서로 말하기를,
“천자의 사신이 배신(陪臣)에게 머리를 조아리다니 어찌 이런 예가 있는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여 인하여 태조에게 참소하려 하였지만 하지 못했다.
○ 정도전의 난에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자신이 직접 태종이 서 있는 곳에 달려가 화(禍) 당하는 것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나왔는데, 태종의 부하들이 극력 만류하여 주저하는 동안에 하인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오자, 후(后)가 그제야 돌아갔다. 또 방간의 난에는 군사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태종의 집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 마구[廐]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后)는 태종이 반드시 패한 줄 알고 자신이 싸움터로 달려가 태종과 죽음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가려다가, 시녀(侍女) 김씨 등이 말려서 가지 못하였었는데, 조금 있다가 이웃에 사는 정사파(淨祀婆)라는 늙은 여인이 태종이 승전한 소식을 듣고 와서 고하므로 그제야 돌아갔다.
처음에 태조는 정도전의 무리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 왕자가 관할하고 있는 군사를 해산시켰으며, 태종은 영중(營中)에 있던 군기를 모두 불태워 버렸었다. 무인년(1398, 태조 7)의 변 때 오로지 후(后)가 준비해 두었던 군기에 힘입었고, 여러 군사들도 창졸에 말 한 필과 칼 한 자루도 구할 수 없다가 역시 후가 준비한 무기에 힘입었었다. 뒤에 태종이《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왕건(王建)의 후(后) 유씨(柳氏)의 사적을 보고, 세종(世宗)에게 말하기를,
“정사(定社)하는 날에 너의 모후(母后)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여러 친정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무기를 정돈하여 대비하였으니, 유씨(柳氏)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혀준 데에 비하여 그 공이 더욱 중하다.”
하였다.
○ 공정조(恭靖朝)에 대성(臺省)에서 상소(上疏)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므로 들어 주었는데, 문하부사(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 등이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여 곧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자, 이거이를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폄출(貶黜)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박(趙璞)이 지협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기를,
“거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趙浚)의 말을 믿었던 것이 후회된다.’하기로 ‘무슨 까닭인가’하였더니, 거이의 말이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할 때에 있어 조준이 나에게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데는 강한 군사가 제일이라.’하기로, 내가 그 말을 믿고 즉시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였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
하였다. 뒤에 권진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되자 조박의 말에 다시 더 보태어 헌신(憲臣) 권근(權近), 간신(諫臣) 박은(朴訔) 등과 더불어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과 거이의 죄를 논하였는데, 이때에 조종 신하들은 조준의 평소의 허물을 꺼집어내어 공격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참찬 이서(李舒), 순군만호(巡軍萬戶) 윤저(尹抵)ㆍ이직(李稷)ㆍ김승주(金承霔)가 국문(鞠問)하게 되었다. 권근 등이 그들을 각기 현재 있는 곳에 두고 국문하기를 청하자, 공정왕이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태종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의논하기를 ‘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사람을 따로 보내어 문초함이 옳겠다’고 하니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대답하기를,
“옥(獄)에 관한 일에, 비록 지방에 있는 죄인이라도 반드시 서울로 올라 오는 까닭은 듣는 사람이 많고 분별하기를 명백히 하려는 것인데, 국문할 사람을 따로따로 보낸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므로, 공정왕이 명령하여 이거이와 조박을 잡아서 서울로 오게 하였다. 태종이 윤저(尹抵)를 불러 이르기를,
“상께서 경의 마음씀이 공정하다 하여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임명한 것이니 경은 신중하게 하라.”
하고, 대성(臺省)의 장(狀)을 보이며,
“태상왕(太上王)이 개국한 것과 주상(主上)이 왕위를 이은 것과 내가 불초한 몸으로 세자가 되어 오늘의 경사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인데, 이제 전일의 공을 잊어버리며 허실(虛實)을 분명히 알아보지도 않고 다만 해당 관청의 장(狀)만을 믿는다면, 하늘이 매우 두려워할 것이다. 경이 만약 조준으로 하여금 죄를 받아 죽게 한다면 사람들이 어찌 경을 충신이라고 하겠는가? 조준이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윤저가 두 번 절하고 나와 조박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문초하니, 조박의 말이 대성(臺省)의 소장(疏狀)의 뜻과 같지 아니하였고, 또 권진을 가두고 문초하니 또한 소장의 뜻과 달랐다. 거이를 조박과 더불어 대질시키자 조박이 굴하여 대단히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공정왕이 권근 등을 매우 미워하였고, 조박은 이천(利川)으로 폄직(貶職)시키고 권진은 축산도(丑山島)로 귀양보냈다. 조준이 국문을 당할 때에 넔을 잃고 정신이 없어 빤히 쳐다볼 뿐이요 한마디 말도 못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성립될 뻔하였었는데, 태종이 힘써 구원한 덕택으로 면하게 되었다.
○ 정도전이 잡혀 죽을 때에 방석(芳碩)의 당이 모두 달아나는데, 김계란(金桂蘭)이 홀로 가지 않았고, 남은이 도망할 때에는 시중하던 하인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오직 최운(崔沄)이 남은을 도와 호위하여 피해 숨고 끝내 떠나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불러다 부하에 두고 근시(近侍)의 직책을 맡겼는데, 김계란은 지위가 3품이 되었고 최운은 2품에 이르렀다.
○ 태조조(太祖朝)에 경상 전라 도안무사(都按無使) 박자안(朴子安)이 항복한 왜인(倭人)을 응접하다가 군사의 기밀을 잘못하여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므로 이미 공문을 보내어 죽이게 하였는데, 일이 외국에 관계되어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외인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 아들 실(實)이 듣고 태종의 집에 나아가 집에 나아가 땅을 치며 통곡하여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마음에 불상히 여겨 여러 종친(宗親)들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청하려고 하니, 여러 종친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비밀스러운 일인데 주상(主上)께서 만약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그 책임을 질 것이다.”
하고, 곧 함께 대궐에 들어가 내관(內官) 조순(曺恂)을 시켜 아뢰게 하니, 조순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외인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는가?”
하였다. 조순이 들어가 아뢰니, 태조가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자안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더니, 조금 있다가 중추원에 명령하기를,
“내가 자안의 죄를 감해 주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사람을 불러서 문서를 전달하라.”
하였다. 중추원에서 심귀수(沈龜壽)로써 아뢰자, 곧 명령하기를,
“네가 힘껏 빨리 달려가 자안의 죽음을 구원하게 하라.”
하였다. 귀수가 명령을 받고 빨리 달리다가 중도에 말에서 떨어져 역리(驛吏)로 하여금 대신 보냈다. 문서가 도착되던 날 관아에서 자안의 형벌을 집행하려고 그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까지 이미 준비하였는데, 문득 너른 들판에 한 사람이 달려 오면서 갓을 벗어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고 관아에서 이상히 여겨 형의 집행을 정지하고서 기다려,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이 본래 학문도 없고 또 무예(武藝)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태종이 그가 아비를 살린 것을 장하게 여겨 금군(禁軍)을 맡겨 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
○ 하륜(河崙)이 본래 사람의 상을 잘 보았는데, 민제(閔霽)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람을 상본 것이 많지만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이가 없었소. 내가 보고자 하니 소개를 하여 주시오.”
하였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자네를 보고자 하네.”
하였다. 태종을 보고 하륜은 드디어 마음을 기울어 교분을 맺었으며, 뒤에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 5월 16일은 태종의 탄신일(誕辰日)이다. 각도에서 모두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풍해도 절제사(豐海道節制使) 유은지(柳殷之)는 무일도(無逸圖) 족자(簇子)를 방물과 아울러 바쳤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의 신우조(辛禑朝)에 벼슬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선산善山)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길재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세자가 되자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태종이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하였는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길재의 효행(孝行)을 갖추어 말하자, 태종이 영을 내려 부르니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왔다.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가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아니하고 태종에게 글을 올리기를,
“제가 지난날 저하(邸下)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습니다. 오늘 신을 부르신 것은 옛날의 정의를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조(辛朝)에 과거하여 벼슬하다가, 왕씨가 다시 서게 되자 곧 고향에 돌아갔으며, 장차 그대로 평생을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옛 정의를 기억하여 부르시므로 제가 올라와 뵙고서 즉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니, 벼슬을 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자제가 말한 것은 강상(綱常)으로서 바꾸지 못할 도리이니, 의리는 탈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른 사람은 나요 벼슬을 준 사람은 주상(主上)이시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시 한미(寒微)한 처지로서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鄕里)로 놓아 보내어 신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餘生)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본 고을에 명령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뒤에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사(義士)이다. 들으니 그가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 써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
하고서, 드디어 그 아들 사순(師舜)을 역마(驛馬)로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을 제수하였고, 길재가 죽자 쌀과 콩으로 부의하도록 명하였으며, 또한 장사지낼 역군(役軍)을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증직(贈職)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가 너그럽고 어진 큰 도량으로 절의(節義)를 표창한 미덕(美德)이 바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놓아 보낸 것과 한 나라 광무(光武)가 엄자릉(嚴子陵)을 돌려 보낸 것과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일은 꼭 같으니, 이것은 모두 그 절의를 높이고, 그 뜻을 이어 주어 백세토록 그 고결한 유풍(遺風)을 격려하고 만세(萬世)토록 큰 기강(紀綱)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전 장령(前掌令) 서견(徐甄)이 김진양(金震陽)의 당에 연루되어 물러가 금천(衿川)에 살았는데, 시를 짓기를,
천년의 신성한 도읍이 아득히 먼데 / 千載神都隔渺茫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많아 밝은 임금 보좌하였네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그 공이 지금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功安在
전조의 왕업 영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대간(臺諫)이 그를 죄주자고 하였는데, 태종이 성을 내며,
“서견이 전조의 신하였으므로 시를 지어 생각한 것이니, 이는 백이 숙제의 무리인 것이다. 상을 주어야지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금상조(今上朝 선조조(宣祖朝))에 수찬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아뢰어 표창하여 장려하기를 청하자, 명령하여 그 무덤금천에 있음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 태종이 사인(舍人)을 불러 들여 전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신(1392, 태조 1) 연간에 곤장을 맞다가 죽은 이숭인(李崇仁)과 이종학(李種學) 등과 같은 사람들이 실은 곤장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혹은 목을 매어 죽이고 혹은 부당한 형벌로 죽였다 하니 그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숭인과 종학이 억울한 죄로 죽은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며, 실로 태조의 뜻도 아니다. 정권을 잡은 자가 보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형벌로 죽인 것이니, 당시의 교서사(敎書使)였던 손흥종(孫興宗)과 황거정(黃居正)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임금을 속인 죄를 국문하여 부당하게 중형(重刑)을 내린 형율을 적용하라.”
하니, 개국공신(開國功臣) 등이 아뢰기를,
“정도전과 남은 등이 거정과 흥종을 교사(敎唆)하여 곤장맞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도록 한 것이니, 일은 비록 죄가 있으나 그 실정은 용서할 만합니다. 신 등은 그 사람들의 범한 죄가 사직(社稷)에 관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도전과 거정 및 흥종은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며 남은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서 도전과 흥종을 법대로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영락(永樂) 기축년(1409, 태종 9)에 의정부 및 3공신(功臣 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佐命)) 등이 아뢰기를,
“난신(亂臣) 민무구(閔無咎)ㆍ민무질ㆍ이무(李茂)ㆍ윤목(尹穆)ㆍ유기(柳沂)ㆍ조희민(趙希閔)ㆍ이빈(李彬)ㆍ강사덕(姜思德) 등을 국법에 의해 처형하여 시체를 저자와 조정에 내 놓을 것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구와 무질은 바다 섬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청한 대로 하라.”
하였다. 이듬해에 무구와 무질은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뢴 대로 자진(自殺)하게 하였다. 그 뒤에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가 원경왕후(元敬王后)에게 문병하기 위하여 대궐에 들어갔다가 두 대군(大君)이 안에 들어가고 세자(곧 지(褆)임)만 홀로 있는 틈을 타 무회가 고하기를,
“우리 형 무구와 무질이 어찌 반역을 도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가 우리 집에서 생장하였으니 바라건대 은덕을 내리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너희 가문이 좋지 못하다.”
하였다. 이 말이 전파되어 무휼 등을 국문하였는데, 태종이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가 진실로 크지만 다만 송씨무휼의 어머니가 불안할 것이니 어찌 인정이 없겠는가.”
하고, 무휼과 무회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승정원에서 아뢴 대로 모두 죽음을 내리고, 처자는 먼 지방에 안치하였다.
○ 영락 정해년(1407, 태종 7)에 세자 지(褆)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태종이 양철원평(梁哲院坪)에 나가서 전송하였다.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이무(李茂),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제학(提學) 맹사성(孟思誠), 총제(摠制) 이현(李玄)과 서장관(書狀官)으로 집의(執義) 허조(許稠) 등이 수행하였는데, 일행이 백여 명이었다. 명 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황제가 매우 후하게 대접하여 용상 가까이 오게 하여 손을 잡고서 위로하고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사관에 머무는 동안에 육부(六部)의 상서(尙書)들이 윤번으로 식사를 같이하였다. 돌아올 때에 곡부(曲阜)를 경유하여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 영락 3년(1405, 태조 5)에 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에서는 무릇 13일 동안이나 바닷물이 붉었고, 4년에는 전라도 무장(茂長) 굴포(掘浦)에서 물이 붉은 빛이 되어 강에 넘쳐 흘렀고, 7년에는 낙안군(樂安郡)에서 바닷물이 피처럼 붉었고, 그 고을 땅의 두 곳 샘물 또한 붉기가 피와 같았으며, 21년에는 거제(巨濟)에서 바닷물이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작은 물고기가 죽어 떴고, 선덕(宣德) 3년(1428, 세종 10)에는 경상도 하동현(河東縣)에서 바닷물이 검고 탁하여 팥죽과 같았는데, 무릇 3일 동안, 바다 고기가 많이 죽었으며, 금상(今上) 무자년(1588, 선조 21)에도 한강물이 피처럼 붉었다.
○ 영락 병신년(1416, 태종 9)에 예조에서 아뢴 대로 고려 최후의 임금인 공양군(恭讓君)을 봉하여 공양왕(恭讓王)으로 삼았다.
○ 영락 기축년(1409, 태종 9)에 부사직(副司直) 박화(朴和)가 일본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었는데, 뇌물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서 왜사(倭使)의 돌아가는 편에 글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이듬해에 돌려 보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벼가 패어 열매가 생길 때인데 가뭄이 심하니, 백성들의 생활이 염려됩니다. 청컨대 보사제(報祀祭)는 그만두고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소서.”
하니, 들어주었다.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날씨가 매우 가물어 마음이 글에 있지 못하므로 경연에 나가지 못하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 또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다같이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직책인데, 백성이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길 때에 수령은 처벌하고 감사는 처벌하지 않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하다. 감사 경력(經歷)을 모두 파직시켜 역마를 주지 말고 사마(私馬)로 상경(上京)케 하라.”
하였다.
○ 판의주 목사(判義州牧事) 김을신(金乙辛)이 뇌물을 사용한 죄로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는데, 병을 얻자 보방을 명하고 의원(醫員)을 보내어 약을 주게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예조 판서 허조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황제(皇帝)의 앞에 진퇴할 때에도 절대로 부복(俯伏)하는 예(禮)가 없다지.”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중국의 정치는 천하의 모든 일을 모두 임금에게 결재를 받으므로 사람이 많고 일이 번잡하여 예를 차릴 겨를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원수(元首)가 자질구레하면 신하들이 태만해진다.’하였으니, 이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그렇다. 임금이 친히 온갖 사무를 보게 되면 관원들이 모두 임금의 결정을 기다리느라고 반드시 게으른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였다. 허조가 또 말하기를,
“전일에 태종이 본국 여자의 복장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하므로, 신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명 나라 서울에 갔을 때에 궐리(闕里)를 방문하여 공자(孔子)의 가묘(家墓)를 들어가 보았는데, 여복(女服)한 화상(畵像)이 본국과 다름이 없었고, 다만 수식(首飾)이 달랐습니다.’하였더니,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예법이라고 어찌 다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문종(文宗)이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 몸이 아직 강녕(康寧)하지 못한데도 국사에 대한 걱정과 부지런함이 지나치므로, 어떤 자가
“하루 걸러 정무(政務)를 보아 몸과 마음을 수양하시라.”
고 청하자 문종이 답하기를,
“임금이 향락에 빠진다면 비록 천년을 살아도 부족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비록 1년을 살아도 족할 것이니, 반드시 국사를 걱정하여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이요, 스스로 안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적 임금들이 안으로 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에 빠지거나 술을 즐기고 풍류를 즐기며, 궁궐을 굉장히 화려하게 짓거나 한 이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임금된 사람의 공통된 병통이다. 나는 성질이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능히 좋아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남녀와 음식의 욕망은 가장 사람에게 절실한 것으로서, 부귀한 집 자제들이 허다하게 주색으로 몸을 망치는 것이다. 내가 매양 여러 아우들을 보게 되면 이것으로써 경계하노라.”
하였다.
○ 문종(文宗) 신미년(1451, 문종 2) 무렵에 성절사(聖節使) 박이창(朴以昌)이 돌아오는 길에 신안관(新安館)에 이르러 자다가 밤중에 찼던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찔러 죽어가는 판이었다. 서장관 이익(李翊)이 듣고 즉시 가서보니, 이창 이익에게 이르기를,
“늙은 몸이 본시 오점(汚點)이 없이 장차 충성을 다하려고 하였다. 당초에 양식을 다만 규정에 있는 수량대로만 가지고 가려 하였는데, 통역(通譯)하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이 마침 장마철인데 팔참(八站)에 들어가 수재를 만나 중도에 지체하다가 양식이 다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양식을 더 가지고 가자고 하기에 내가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40두를 싸가지고 갔다. 장차 아뢰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법을 범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성상(聖上)을 뵈며, 또 무슨 낯으로 같은 반열의 대신들을 다시 만나겠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이런 생각을 이미 정하였다. 그러나, 호송(護送)하는 중국인이 상당히 많아 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기에 이르러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죽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창이 반드시 법을 범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찌르게 된 것이니, 내 마음에 애처롭다. 만리 길에 고생하고 오는 사람을 내가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굳이 청하므로 억지로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는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치전(致奠)하여 주고 쌀과 관곽(棺槨)을 주라.”
하였다. 이창은 안신(安身)의 아들이다.
○ 충정공(忠貞公) 허(許)는 휘(諱)가 종(琮)이요, 자는 종경(宗卿)이다. 세조 병자년의 문과(文科)에 3등으로 발탁되어 왕명(王命)을 받아 천문학(天文學)을 익히는데, 마침 일식(日食)의 변이 있었으므로 측후보고서(測候報告書)를 써 올리면서, 그 끝에 임금이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여 경연(經筵)에 나오지 아니하며,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잘못을 모두 논하였다. 임금이 그가 뜻이 있고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 자급(資級)을 승진시켰다. 그 뒤에 겸예문(兼藝文)으로서 글을 강론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전일에 일을 논한 사람인가?”
하자. 공이 전일에 아뢴 뜻을 거듭 논하였다. 세조가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하여 끌어 내려 곤장을 치게 하니,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다리가 떨렸으나, 공은 꿋꿋하게 동요하지 않은 채 행동이 평소와 다름 없이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데, 음성이 우렁차고 분명하였다. 세조가 크게 칭찬해 주고 술잔을 들이게 하니, 공의 거동이 얌전하고 조용하여 볼만하였다. 공은 웅장한 얼굴과 넓은 이마, 아름다운 수염에 키가 11척 2촌으로 풍채가 천만 사람의 위에 뛰어나서, 바라보면 태산 교악(喬嶽)과도 같았다.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국경에 마중나갔다. 두 사신이 거드름을 피워 사람을 내려다 보다가, 공이 들어가 인사하자 깜짝 놀라며 일어서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하였다. 돌아갈 때에 압록강에 이르러 섭섭하여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말하기를,
“바라건대 공이 조속히 사신으로 와 주어 중국 사람들로 하여금 해외(海外)에 이런 인물이 있는 줄을 알게 하시오.”
하였고, 중국에 돌아가서는 사대부들 사이에 누누이 칭찬하기를,
“천상(天上) 일은 모르지마는 인간에는 둘도 없다.”
하였다.
○ 영락 정유년(1417, 태종 17)에 명령하여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참서(讖書)를 소각하게 하고, 인하여 서울과 지방에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던 요망하고 허탄한 글들을 기일을 정하여 자수시켜 관청에 납입하여 불태우게 하되, 위반한 자는 누구나 고발하게 하여 요서조작법(妖書造作法)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는데, 이색(李穡)의 문집 제십오권(第十五卷)도 날짜를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가 일찍이 연회석에서 모셨을 때에 태종이 앞으로 오게 하여 이르기를,
“경은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였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대관(臺官)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쫓겨났다가, 뒤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결원이 되자 태종이 관안(官案)을 열람하다가 허조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적임이다.”
하고, 드디어 임명하였다.
○ 태종조(太宗朝)에 강원도 강릉 대령산(大嶺山)의 대(竹)가 열매를 맺었는데, 그 모양은 기장 이삭 같고 열매는 진맥(眞麥)과 같으며 차지기는 의이(薏苡) 같고 맛은 당서(唐黍) 같은데, 마을 사람들이 따다가 술과 밥을 만들었고, 또 함길도(咸吉道) 화주(和州)에서는 흙이 있는데, 그 모양과 빛깔이 황랍(黃蠟)과 같았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자 맛이 목맥(木麥)과 비슷하여 배고픈 백성들이 가져다가 먹고 배를 채워 주림을 면하였다. 금상(今上) 갑오년(1594, 선조 27)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봉산(鳳山) 지방에서 차지고 미끄러워 진말(眞末)과 같은 흙이 났는데, 흙 7~8분과 쌀가루 2~3분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배를 채울 수 있고 또한 병도 나지 않으므로 배고픈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어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 영락 무술년 6월에 정부의 육조(六曹)와 삼공신(三功臣) 및 문무백관(文武百官) 등이 세자 지(褆)의 과실을 열거하여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폐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윤허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세자를 삼으니, 곧 세종이었다.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지를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 영락 무술년(1418, 태종 18) 8월에 태종이 세자에게 선위하게 하자, 의정부 육조 및 여러 공신들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와 하늘을 울부짖고 통곡하며 명(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자도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옥새를 세자에게 전하고 연지동궁(蓮池洞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자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한 다음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에 봉사(奉謝)하고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모두 상왕에게 아뢰었다. 11월에 상이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에 가서 상왕을 성덕신공(聖德神功)으로, 대비를 후덕존호(厚德尊號)로 봉숭(封崇)하니, 상왕이 시어소(時御所)에 납시어 헌수례(獻壽禮)를 행하였다.
태종이 상왕이 된 뒤에 병조에서 잘못한 바가 있다고 하여 입직한 참판 강상인(姜尙仁)과 좌랑 채지지(蔡知止)를 의금부에서 국문하도록 명하였고, 이어 판서 박습(朴習), 참의 이각(李慤), 정랑 김자온(金自溫)ㆍ이안유(李安柔)ㆍ양여공(梁汝恭), 좌랑 송을개(宋乙開)ㆍ이숙복(李叔福) 등을 모두 추고하여 하옥시키고, 강상인은 찢어 죽이고 박습은 목베어 죽였으며, 이관(李灌)ㆍ심정(沈泟)등 연루된 사람도 목베어 죽이고 그 처자식은 노비로 삼았다.
영의정 심온(沈溫)도 연루되었는데, 의금부 진무(鎭撫) 이양(李楊)에게 명하여 수원(水原)으로 압송하게 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원근의 차등을 두어 부처(付處)시켰다.
○ 심온이 죽음을 당하자, 그의 처자식은 적몰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그 뒤 의정(議政) 이직(李稷) 등이 아뢰기를,
“무술년에 심온이 강상인 등의 옥사에 연루되어 태종께서 사사(賜死)하였으나, 좋은 장지(葬地)를 정하고 관을 주어 장사지내게 하였으니, 비록 의금부의 요청에 따라 그의 처자식을 적몰하였지만 전지를 내려 역사(役事)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공비 전하(恭妃殿下)께서는 바야흐로 국모(國母)이신데, 어미 안씨(安氏)를 천관(賤官)의 신분이 되게 함은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한 나라 소제(昭帝) 상관황후(上官皇后)의 아비 안(安)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아내는 추존하여 경부인(敬夫人)으로 삼아 원읍(園邑)에 안치하였으니, 청컨대, 한 나라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천안(賤案)에서 삭제하시고 관직을 돌려주소서.”
하니, 세종(世宗)이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 등을 불러 면유(面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심온이 죽자, 의금부에서는 심온의 형제를 천관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태종께서 ‘비(妃)의 자식과 형제들을 이로 인해 단죄해서는 안 된다.’하였고, 또 심온의 처자식을 천적(賤籍)에 기록할 것을 청하자, 태종께서 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라고 하자, 박은이 대답하기를, ‘자기의 죄가 아니고, 또 중궁(中宮)의 어미를 적몰하여 천관으로 삼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하였다. 당시에 유정현(柳廷顯)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였는데, 굳이 청하여 마침내 우선 천적에 기록하라고 하였고, 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죄인의 딸을 왕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공비(恭妃)를 동요시켜려는 것입니다.’하니, 태종께서 ‘이 무슨 말인가? 공비를 동요시킬 리 만무하다.’하였다.
태종께서 언젠가 내전(內殿)에 납셨을 때 대비가 곁에서 모셨고, 나도 곁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비의 어미를 천적에 기록하는 것은 매우 안 될 일이니,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길, ‘고쳐야 합니다.’하였는데,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갑자기 부왕께서 승하하셨다. 내가 비록 부왕의 뜻을 알았지만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비의 외조부 안천보(安天保)가 공비의 집을 받들고 공비를 길러주었고, 게다가 연로하여 죽을 날을 기약하다가 어려우므로 지난 갑진년 겨울에 공비께서 집에 가서 잔치를 열어 위로해 주었는데,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기를, ‘모자지간(母子之間)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까?’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높은 왕비의 신분으로 아래에 있는 천한 사람을 대면하는 것은 대의에 통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하므로 내가 다만 조부만을 만나볼 수 있게 하였다. 근자에 말하는 자들이 대부분 ‘모자지간에는 이처럼 소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또 국후(國后)의 어미를 천인으로 삼는 것은 은혜와 의리에 있어서 모두 안 될 말이라고 하니, 지금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천적에서 삭제하고 관작을 돌려주어 그 자녀들을 모두 면하게 하라. 또 모자간에 만나보지 못한 것이 지금 여러 해가 되었으니, 어찌 절박한 심정이 없겠는가. 모일(某日)에 공비가 안씨의 집으로 갈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 좌의정 유정현이 죽자, 세종께서 스스로 오사모와 검은 띠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금오교 밖을 나가 장막에서 거애(擧哀)하였으며,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도 거애하였다.
○ 건국 초기에는 산릉(山陵)에 석곽(石槨)을 사용했는데,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상사에는 태종이 백성들의 힘을 괴롭힌다 하여 온전한 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여 반듯한 바위로 짜서 만들었다. 세종이 효성스러운 마음이 독실하여 온전한 돌을 채취하자 태종이 스스로 역소(役所)에 가서 쳐서 부수어 버렸다.
○ 영락 임인년(1422, 세종 4)에 의금부에서 청산 현감(靑山縣監) 탁지(卓祉)를 조율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상사(喪事)를 아비의 상사보다 가볍게 한 것은 마음이 불충해서이니, 대명율(大明律)의 모반 대역과 능지처참한 죄에 견주라.”
하였는데, 아뢰니, 사형을 감하여 곤장 일백(一白)에 처하고 관노(官奴)의 신분으로 정속(定屬)시켰으며, 가산을 적몰하고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 선덕(宣德) 병오년(1426, 세종 8) 9월에 임금이 살곶이(箭串)에서 크게 열병식을 하였는데, 평명(平明)에 거가(車駕)가 출동하자 백관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모셔 따랐다, 거가가 막사로 들어오자 병조에서 아뢰고 신포(信砲)를 놓았다. 왕세자 이하가 갑옷과 투구로 갖추고 차례로 들어가 단 앞에 나아가 동서로 나누어 북향하여 서고, 오위(五衛)의 모든 군사들은 하루 전에 단(壇)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금 갑옷을 입고 단에 오로자 왕세자 이하가 네 번 절하고 나니, 정이품 이상과 6대언(代言)은 단 위에 오르고, 종이품 이하의 백관들은 모두 단 앞에 늘어섰다. 대각(大角)을 세 번 불자 좌우상(左右廂)과 오위(五衛)에서 각(角)을 불어 응하였다. 이에 포(砲)를 쏘아 두드리며 아우성치고 혹은 진(陣)을 변경하여 도전하여 서로 이기고 지는 형용을 하였는데, 무릇 다섯 번 진을 변경하고 파하였다. 군사의 수효는 6천 6백여 명이었다.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부교리 권채(權採)와 저작랑(箸作郞) 신석견(辛石堅)과 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너희들이 나이 젊고 장래가 유망하니, 지금부터 출사(出仕)하는 일을 면제하여 줄터이니 각기 집에 조용히 있으면서 전심하여 글을 읽어 성취된 효과가 있게 하되, 글 읽는 규범(規範)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으라.”
하였다.
○ 선덕 정미년에 문무과 중시(重試)에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은영연(恩榮宴)을 예조에서 베풀어 주었는데, 부원군 조연(趙涓), 찬성(贊成) 권진(權軫)을 압연관(押宴官)으로 삼고, 병조 판서 황상(黃象)을 부연관(赴宴官)으로 삼고, 좌대언(左代言) 김맹성(金孟性)과 우대언 김자(金赭)를 시켜 선온(宣醞)을 갔다 주었다. 신은(新恩)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 날에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 좌의정 황희가 모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 후임을 내지 아니하였다가 두어 달 지난 뒤에 황희를 기복(起復)시켜 다시 임명하였다. 이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에 조회하러 가게 되었는데 황희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황희가 글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기를 두 번까지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 나라에서 칙서가 오기를,
“세자는 반드시 들어 올 것이 없다.”
하자, 황희가 또한 사양하기를,
“세자가 이미 중국에 가지 아니하게 되었고 또한 나라에 별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세종이
“대신이 기복(起復)하는 것은 조종(祖宗)들의 정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이어 전교하기를,
“옛적에 나이 60이 되면 비록 상중에 있더라도 오히려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황희가 이미 기복하였고 나이 60이 넘었는데 어찌 소식(素食)을 하면서 정무를 보겠는가. 내가 친히 보고 육식을 권하려 하였는데, 마침 기운이 불편하니 정원(政院)에서 불러 육식을 권하라.”
하였다. 황희가 빈청(賓廳)에 나아가자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말을 전하고 고기를 권하니, 황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이 현재 병이 없는데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으나, 흠지(欽之)가 감히 아뢰지 못하겠다고 대답하니, 황희가 그제서야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
○ 선덕 기유년에 명 나라 사신 윤봉(尹鳳)ㆍ창성(昌盛)ㆍ이상(李翔) 등이 황제의 칙명으로 어린 고자 6명과 집찬비(執饌婢) 12명과 창가비(唱歌婢) 8명을 선발하고 가야금ㆍ현금(玄琴)ㆍ향비파(鄕琵琶)ㆍ당비파(唐琵琶)ㆍ저(笛)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 우의정 유관(柳寬)이 글을 올려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 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 때에 사포(賜酺)하던 고사를 인용하여 청하기를,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정하여 대소 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좋은 곳을 가려 놀고 즐기게 하여 태평 시대의 기상(氣像)을 나타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종이 윤허하였다. 유관이 나이가 많다고 핑계하고서 치사(致仕)하자, 종신토록 제사록(第四錄)을 주게 하였다.
○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좌의정 황희가 감목관(監牧官) 태석균(太石均)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하여 대관(臺官) 이심 (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주선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청컨대 황희를 파면시켜 청탁으로 법을 어기는 징조를 막으소서.”
하니, 세종이 답하기를,
“대신을 경솔하게 죄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사헌부의 말대로 윤허하여 황희를 파직시키고 그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이듬해에 다시 임명하였다. 간원(諫院)에서 글을 올렸는데, 대략에,
“황희가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가까운 사람에게 사정을 두어 헌부에 청탁을 하였는데, 다만 그의 직책만 파면되었으니, 이것은 그의 큰 다행입니다. 또한 교하(交河)의 둔전(屯田)을 받기를 청하였으니, 옛날 베를 짜는 아내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 버린 사람과는 거리가 멈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1년도 되지 못하여 어느새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태연스럽게 받아 안안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니, 청컨대 파면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모든 일을 옳고 그르고 간에 숨김없이 다 말하여 주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 가볍게 쉽사리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선덕 신해년 동지하례(冬至賀禮) 때에 영의정 황희가 망궐례(望闕禮)에는 들어와 참여하고, 본조(本朝)의 하레에는 병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사헌부에서 통례문 영사(通禮門令史)를 불러 그 연고를 물으므로 영사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헌부에서 그 영사에게 매를 쳤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을 보내어 아뢰기를,
“통례문 영사는 상관이 없는데도 매를 맞았으며, 또한 의정부는 백관의 우두머리입니다. 당상(堂上)의 진퇴(進退)를 헌부에 고하는 것이 원래 전례가 없는데, 지금 욕을 당하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헌부의 처사가 실로 잘못 되었으니 사간원에 내려 보내어 추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선덕 병오년(1426, 세종 8) 9월에 세종이 서교(西郊)의 연희궁(衍禧宮)에 거쳐를 옮겼다가 다음해 3월에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에 좌의정 이직(李稷), 우의정 황희(黃喜) 등이 세자를 모시고 따르게 되었는데, 세자가 출발하기 전에 먼저 떠났다. 헌부에서 공함(公緘)으로 문비(問備)하였는데, 임금이 불러 직무를 보게 하였다.
○ 양영대군(讓寧大君)의 첩 건리(件里 어리)가 자디비(紫旳轡)를 입었다가 헌부의 금리(禁吏)에게 발각되었는데, 건리가 대사헌 오승(吳陞)의 시중드는 첩에게 내통하여 무사하게 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오승이 금리(禁吏)에게 고발하지 말라고 하였다. 집의(執義) 이하가 오승에게 문비(問備)하고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오승을 파직시켰다.
○ 우의정 치사(致仕) 유관(柳寬)이 아뢰기를,
“매일 상참(常參)하므로 주상께서 수고로이 거둥하시니, 청컨대 하루씩 걸러 상참을 정지하소서.”
하니, 세종이 답하기를,
“아뢴 뜻은 내가 알았소, 경이 늙은 기력으로 억지로 대궐에 들어오니 내가 실로 염려되오. 후일에 만약 아뢸 일이 있거든 사람을 시켜 아뢰고, 경은 몸을 편안히 하여 원기를 길러 노쇄한 몸을 더욱 보호하오.”
하였다.
○ 선덕 임자년 8월에 임금이 친히 양로연(養老宴)을 근정전에서 행하였는데, 2품 이상은 전내, 4품 이상은 월대(月臺), 5품 이하로부터 서인(庶人)까지는 전정(殿庭)에 앉게 하였다. 노인들이 전(殿)에 올라올 때에는 임금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에는 중전(中殿)이 사정전(思政殿)에서 늙은 부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영락 신축년(1421, 세종 3)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송 나라 소희(紹熙) 5년(1194, 고려 명종 24)에 4조전(四祖殿)을 태묘(太廟)의 서쪽에 세워 조주(祧主)인 희(禧)ㆍ순(順)ㆍ익(翊)ㆍ선(宣) 4조(四祖)의 신주를 모시고, 해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목조(穆祖) 대왕이 조천(祧遷)하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이 제도에 의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別廟)를 세우되 ‘영녕전(永寧殿)’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삼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처음에 태조가 건국할 때에 이미 종묘를 세우고 계성전(啓聖殿)도 설치하여 선왕들을 모셨고, 뒤에 태조가 승하하자 혼전(魂殿)을 인소(仁昭)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문소(文昭)라 고쳤고, 태종의 원묘(原廟)는 광효전(廣孝殿)이라 이름하였는데, 각기 도성 안에 있었다. 뒤에 세종이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여 궁성안에 땅을 정하여 침전(寢殿)을 세우고 그대로 문소(文昭)라 이름하였다. 선덕 계축년(1433, 세종 15) 5월에 먼저 양전(兩殿)에 신주(神主)의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드리고, 의물(儀物)을 갖추고 신위(神位)를 받들어 수레에 실었다. 임금이 광화문 밖에서 공경히 영접하여 태조의 위판을 먼저 새 문소전(文昭殿)에 모셨다. 태조 양위(兩位)에 부알(祔謁)하는 예를 마치자, 임금이 친히 안신제(安神祭)를 행하고, 궁에 돌아와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특사(特赦)를 내렸다. 그 교서(敎書)의 대략에
“역대의 제왕들이 이미 종묘를 세워 예가 태고(太古)를 숭상하였으니 신으로 섬긴 것이요, 또 원묘(原廟)를 세워 평소처럼 섬겼으니 친애(親愛)하게 여긴 것이다. 원묘(原廟)의 설립이 역대마다 같지 아니한데, 송 나라에서 제관(諸觀)의 신어(神御)를 합하여 경령궁(景靈宮)에 모신 것이 정리(情理)와 예의 중을 얻은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 태조ㆍ태종의 원묘(原廟)가 각기 다르니, 옛 제도에 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후세의 자손들이 각기 그 사당을 세우게 되면 백세 뒤에는 신묘(神廟)가 너무 많아질 것이기에 이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1대(代)의 규모를 창립하여 만세의 법으로 정한다.”
하였다.
○ 강녕전(康寧殿)을 영선(營繕)할 때에 채석(採石)하던 군사 한 사람이 압사(壓死)하였다. 세종이 전교를 내려 자책하기를 간절하게 하였고, 또한 말하기를,
“만약 조정에서 사신을 대접하는 집이라면 비록 죽는 자가 많더라도 어찌 내가 거처하는 집을 영선하다가 한 사람이라도 죽게 한 참사와 같겠는가.”
하고, 쌀 열섬을 주게 하였다.
○ 세종이 북방에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김종서(金宗瑞)를 관찰사(觀察使)로 삼아 맡겼다가, 임기가 차자 본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전보(轉補)하였다. 종서의 모친이 죽자 임금이 종서를 부르되 빨리 역마를 타고 오게 하고, 또 종이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하였다. 백일이 지난 뒤에는 기복(起復)시켜 환임(還任)하게 하였는데 종서가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육식을 권하여 보내게 하였다.
○ 선덕 기유년에 울진현(蔚珍縣)에 수상한 당선(唐船)이 표착되었다. 잡고보니 모두 열 여섯 사람이었는데, 모두 푸른 옷을 입었다. 머리털을 감아 목에다 매었고 채색 그림이 있는 붉은 무명으로 머리를 쌌으며 바지도 입지 아니하고 푸른색 큰 옷으로 몸 하부를 쌌는데, 역관이 자세히 살펴보니 유구(琉球) 사람이었다. 울진 현령(蔚珍縣令) 수산포(守山浦) 만호(萬戶) 둥이 처음에 적선인가 하여 많이 쏘아 죽이자 임금이 명하여 상을 주게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논계(論棨)하기를,
“분명히 적이 아닌 줄 알면서도 서로 다투어 쏘았으니, 청컨대 상을 주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옛사람이 죽은 말을 사자 산 말이 뒤쫓아 온 일이 있었으니, 내가 마땅히 상을 주어 장래를 권면하리라.”
하였다.
○ 선덕 기유년 8월 1일에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임금이 소복(素服)차림으로 근정전 기둥 밖에 나와 일식을 구(救)하면서 어좌(御座)에 발 없는 평상을 놓고 살선(繖扇)과 의장(儀仗)을 갖추지 아니하였다. 모시는 신하들도 소복으로 대궐 뜰에 나누어 섰는데, 세자는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백관들은 각기 조방(朝房)에 나와 시위(侍衛)하였다.
○ 선덕 임자년에 예조에게 아뢰기를,
“삼가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니, 천자의 배필을 황후라 하고 왕의 배필은 왕후라 하여 역대의 제도에 다시 더 아름다운 칭호를 올린 적이 없었고, 벼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각기 칭호를 달리하여 명칭과 지위를 구별하였는데, 본조의 제도는 왕(王)……, (……이하 결)
○ 계품사(計稟使) 공녕군 인(恭寧君裀)과 부사(副使) 도통제(都統制) 원민생(元閔生)이 금ㆍ은의 공물(貢物) 면제를 청원할 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세종이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인(裀)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아 가지고 왔는데, 금ㆍ은 공납(貢納)을 면제하되, 토산물로써 정성을 표시할 것을 허락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영의정 황희,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 허조를 불러, 시학(視學)할 때에 시취(試取)하는 절차를 의논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시취하기 위하여 시학한다면 옛 제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시학이 경한 것이 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 등의 말이 옳다.”
하였다.
○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 18)에 의정부에 전교하였는데, 그 대략에,
“개국(開國)한 처음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하여 온 나라의 정치를 총리(總理)하였고, 그것을 고쳐 의정부(議政府)로 만든 뒤에는 그 직책이 처음과 같았는데, 갑오년에 대신(大臣)이 직접 소소한 사무를 간섭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여,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 같은 것은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아뢰고, 그 나머지는 육조(六曹)에서 직접 위에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으므로, 그 뒤로는 크고 작은 일이 모두 육조로 돌아가고 의정부를 거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의정부에서 참여하여 아는 일은 오직 사형수를 결정하는 것뿐이니 지난날 정승에게 위임하던 뜻에 배반됩니다. 지금부터 태조께서 만든 법에 의해 육조와 각 관직이 모두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여 가부(可否)를 의논한 뒤에 아뢰어 결재를 받아, 도로 육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하게 하되 오직 이조ㆍ병조의 관원 임명 및 병조의 군사쓰는 것과 형조의 사형수 외의 판결은 그대로 해조에서 바로 아뢰어 시행한 뒤, 곧 의정부에 보고하여 시행하게 하는데, 만약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의정부가 조사하여 반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선종황제(宣宗皇帝)가 일찍이 칙서를 내려 우리 나라에서 농우(農牛) 1만 마리를 요동에 보내되, 비단과 포목으로 무역하게 하였다. 세종이 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의논하게 하니, 혹은 우역(牛疫)으로 소가 부족하여 수량을 채우기 어렵다고 핑계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에게 말하기를,
“이 의논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내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는데, 지금 이 일들 때문에 거짓말로 아뢰어 감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이것은 아홉 길[仞]의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부족하게 하여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숭선(崇善)이 대답하기를,
“천하 고금의 일이 사정(邪正) 두 글자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사도(邪道)로써 상국(上國)을 섬기겠습니까.”
하였다.
○ 선덕 병진년(1436, 세종 18)에 세종이 의정부에 전교하기를, 옛적에 사시(四時)의 사냥이 있어 강무(講武)하여 금수(禽獸)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니, 이것은 선왕(先王)이 정한 제도로서 군국(軍國)의 중한 일이었다. 조정조(祖宗朝)의 옛 제도를 참작(參酌)하여, 봄 가을에 강무(講武)하는 법을 정하여 자손에게 전하였으니, 생각이 주밀하였던 것이다. 신진유생(新進儒生)들이 이것을 임금이 놀이하는 것이라 하여 매양 행사를 정지하기를 청하고, 대신(大臣)도 더러 정지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조종들이 정한 법을 폐하고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에는 강무(講武)할 시기에 당하여 내가 마침 병이 들어 친히 행할 수 없기에 장수를 시켜 대행(代行)하게 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론이 병권(兵權)을 장신(將臣)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하므로 그만두었다. 금년에는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내가 염려되어 추기 강무(秋期講武)를 우선 정지하고, 명년 춘기 강무도 정지하여 백성들의 힘을 쉬게 하려 했는데, 근일에 병조에서 청하기를 ‘큰일을 폐해서는 안 된다.’하였고, 나도 또한 생각하니, 흉년일수록 더욱 군사를 연습하는 것이 비상사태를 방비하는 도리였다. 그러므로 우선 그 요청을 들어주되, 모든 일을 간략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한번 거둥하면 그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세자가 무군(撫軍)하는 직책이 있기에 대행(代行)하게 하려 한다. 이렇게 하면 중요한 일을 폐하지도 아니하고 비용도 반드시 감해져서 둘다 온전해질 것이니, 의론하여 아뢰라.”
하니,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기를,
“병권(兵權)을 세자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금년은 흉년이니, 정지하소서.”
하였는데, 들어 주었다.
○ 세종이 한재를 걱정하여 중외(中外)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고 오랫동안 약술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의정(議政) 이직(李稷)이 들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술 마시는 것을 금하면서 나만 홀로 마시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대사헌 원숙(元肅) 등이 지(禔)의 죄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해년에 지(禔)가 도망하여 숨자, 두 상[兩上 상왕(上王)인 태종(太宗)과 세종(世宗)]께서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다가 내시들을 나누어 보내어 수색하여 찾아내었으며, 태종이 재신(宰臣)들을 불러 만나 보고서 지를 불러 옆에 앉게 하여 면대하여 꾸짖었는데, 대략에, ‘양녕(讓寧)의 행실이 금수(禽獸)와 같다. 그러나 반역(反逆)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으므로 가까운 지방에 있게 하여 보전하게 하였는데, 또다시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으니, 말하자면 부끄럽기만 하다.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오늘부터는 양녕을 의정부와 육조(六曹)에 맡기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다. 만약 또 법을 범하면 의정부에서 잡아오더라도 나는 간여하지 않겠으며, 한결같이 국가의 조치를 따르겠다.’하고, 양녕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네가 도망한 뒤부터 내가 생사를 알지 못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으며, 주상(主上)도 옆에 있으면서 또한 눈물을 흘렸었다. 네가 편안한데 여러 동생이 사고가 있다면 주상(主上)과 같은 우애(友愛)의 정이 있겠느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꾸짖기만 하고 차마 죄를 주지 아니하셨으며, 그 뒤에도 전하께서 모든 것을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완곡하게 들어 주었으며,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태종이 승하하여 빈소에 계실 때에 한 번도 애통해 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돌을 실어들여 집을 수리하면서 소주를 지나치게 먹여 인명(人命)을 상하게 하였으며, 이천 고을 수령 박고(朴翶)가 마을 사람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본시 그의 직책인데, 양녕이 분노하여 글을 올려 박고에게 죄주기를 청하면서 말이 불순하여, ‘만약 청을 들어주지 아니하면 신과 주상(主上)의 사이가 이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하여, 불충(不忠)한 마음이 언사(言辭)에 나타났으니, 청컨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국문하게 하고, 글을 써준 사람도 수사하여 죄를 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사건을 궁중에 두고 정원에 내려보내지 아니하였다.
원숙 등이 여러 날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양녕대군의 아들 개()가 나이 들자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하니, 대간(臺諫) 및 정부(政府)에서 반대하여 관직을 주지 말고 아버지를 따라 밖에 살게 하기를 처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양녕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므로 밖에 추방하였지마는, 그 아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다. 대간이 굳이 반대하자, 그제야 개를 성밖에 거주시키면서 부름을 받은 뒤에야 궁문에 들어오고, 대군을 만나 보려면 왕래할 때에 모두 정부에 고하도록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동교(東郊)에 행차하여 양녕대군 지를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고, 저녁에 환궁(還宮)하자 지는 이천 적소(謫所)로 돌아갔다.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우연히 행차한 줄 알고 지를 부를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에서 그 불가한 것을 논하여 다시는 접견하지 말하기를 청하였고, 또 상참(常參)하는 날에는 극력 논하였다. 이때에 우의정 맹사성(孟思誠)과 형조 판서 신개(申槪)가 입시(入侍)하였으나, 잠자코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법사(法司)에서 사성과 신개에게 대신과 법조당상(法曹堂上)이 양녕을 다시 불러 만나 보지 마시라는 일에 한마디도 아뢰지 아니한 연유를 문비(問備)하니, 사성의 답통(答通)에,
“불러 만나 보지 마시라는 것을 일찍이 아뢰었기 때문에 아뢰지 않은 것이오.”
하였고, 신개의 답통에는,
“본래 풍절(風節)이 없는 사람이니, 지만(遲晩)하시오.”
하였다. 이에 법대로 죄를 따지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것을 궁중에 접어두고, 사성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사성이 아뢰기를,
“정승은 백관(白官)의 우두머리이므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 수 없어야 능히 그 직책을 다였다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였으니, 직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영락 기묘년 10년 초하룻날 사시(巳時)에 머리가 희고 꼬리가 붉으며 형상이 날아가는 따오기와 같은 기운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떨어졌으며, 정통 병진년(1436, 세종 18) 7월 30일 초저녁에 크기는 동해(銅海) 같고, 꼬리는 베 한 필의 길이와 같으며, 빛은 번개 같은 유성(流星)이 하늘 중간에 나타났다가 북극(北極)으로 들어가면서 흩어졌는데, 조금 있다가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 선덕 병오년(1426, 세종 8)에 강화 마리산(摩利山)이 진동하여 울려 큰 쇠복을 치는 것과 같더니, 조금 있다가 참성단(塹城壇) 동쪽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졌다. 주서(注書) 장후(張厚)와 서운관 정(書雲觀正) 박염(朴恬) 등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정간(李貞幹)이 나이 70이 되었고 모친의 나이 90이 넘었으므로, 세종이 특별히 술과 풍류를 내려 주어 위로하였다. 금상(今上 금상은 선조, 뒤에도 이 글에 나오는 금상은 선조를 가리킨 것임)께서 정승 홍섬(洪暹)과 노수신(盧守愼)의 모친이 모두 높은 나이이므로 우대하여 쌀과 콩을 넉넉히 내려 주었다.
○ 의금부 도제조 영의정(義禁府都提調領議政)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헌부가 왕명(王命)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본부(금부)의 진무사(鎭撫使)ㆍ도사(都事) 등을 바로 소유(所由)를 시켜 불러오게 하여 뜰에 들여놓고는 지평 이상이 모두 의자에 앉아 심문하는 것이 왕의 전지에 어긋납니다. 하물며 조옥(詔獄)의 관리를 헌부에서 마음대로 불러 오는 것은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세종이 전교하기를,
“헌부에서 잘못했다.”
하고, 장무장령(掌務掌令) 황보인(皇甫仁)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3품은 영외(楹外), 4품 이하는 뜰 아래 세우고 일을 신문하는 것이 본부(本府)의 전례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만일 어떤 죄가 있다면 말을 갖추어 아뢰어 전지(傳旨)를 받는 것이 옳은데, 임금의 전지를 받는 것도 아니면서 3품, 4품의 조관(朝官)들을 관청 앞에 꿇어 앉히고서, 지평(持平) 이상이 모두 의자에 앉아 일을 신문하였으니, 너희들의 잘못이다. 지금부터는 혹시라도 그와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 우의정 조연(趙涓), 부원군 연사종(延嗣宗),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이 사람들의 서로 소송하는 노비(奴婢)를 받아 몰래 힘을 써 주어 승소판결(勝訴判決)을 받았다.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조연 등을 모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 세종(世宗)이 이어 헌부에 전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세력 없는 사람의 소송하는 노비를 소송 맡은 관리들이 청탁을 받아 받아 원통하고 억울하게 된 일이 더러 있다 하는데, 헌부의 이번 일은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동생 서달(徐達)이 신창현(新昌縣)의 아전 표운평(表芸平)을 죽였는데, 추관(推官)들이 수범(首犯) 종범(從犯)을 나누어 서달의 종을 주범(主犯)으로 삼았고, 또 그 사화(私和)를 들어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세종이 명령하여 전후의 추관(推官) 및 충청도 관찰사를 심문하여 모두 의금부에 가두고 죄를 정하는데 차등을 두게 하였다.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도 관련되어 금부에 갇혔는데, 이튿날 보방을 명하여 다만 파면만 시키고, 후임자를 내지 않았다가 10여 일을 지나 도로 제수하였다.
○ 세종이, 다른 여러 나라는 자기 국어로 된 문자(文字)가 있어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건만 유독 우리 나라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본국의 음운(音韻)이 비록 화어(華語)와 다르나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의 청탁(淸濁)과 고저가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 어제(御製)인 언문(諺文) 자모(子母) 28자를 대궐 안에 국(局)을 설치하여 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시켜 찬정(撰定)케 하였다. 이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가 있었는데, 삼문ㆍ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찬을 보고 음운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기를 13번이나 하였다.
○ 선덕(宣德) 병오년에 황주(黃州)에 감로(甘露)가 내리고, 정통(正統) 병진년에는 정평(定平)ㆍ영흥(永興)에 또 감로가 내렸었는데, 색이 백랍(白蠟)같고 맛이 매우 달았다. 대신들이 하례(賀禮)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하늘이 상서(祥瑞)를 내린 것이 제 때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상서가 아니라 곧 재변이라 여기니 하례하지 말라.”
하였다.
○ 정통 계해년(1443, 세종 25)에 장차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려 하는데, 서장관(書狀官)을 두세 번이나 바꾸어 마침내 신숙주를 추천해 임명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숙주가 오랫동안 병들었다가 새롭게 일어났다. 세종이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병으로 몸이 약해졌다 하니,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나라에 당도하게 되자 시(詩)를 청하는 사람이 떼를 지어 모였다. 숙주가 붓만 들면 곧 써냈는데, 시와 글씨가 다 아름다우니 여러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출발에서 돌아올 때까지 무릇 9개월이었는데, 이전에는 통신사의 행차가 이때와 같이 완전하고 빨리 다녀온 적이 없었다. 상사(上使) 변중문(卞仲文)이 그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그 집에 잔치를 내려 주어 영광스럽게 하여 주었다.
○ 변중문이 돌아올 때에 본국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가 되었던 남녀들을 데려 왔는데, 대마도에서 배를 출발시켜 미처 해안(海岸)에 닿기 전에 구풍(颶風)이 갑자기 크게 일어나 배가 거의 전복될 지경이었다. 데려 오는 포로들 가운데 아리를 밴 한 여인이 있었는데,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신한 여자는 수로(水路)의 금기(禁忌)인 것이니, 물에 던져 넣어 빌어야 합니다.”
하니, 숙주가 굳이 말리기를,
“남을 죽여 내가 살기를 구하는 것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고, 몸으로 그 여인을 가리웠는데, 조금 뒤에 바람이 멎어 배가 가게 되었다. ○ 정통 기사년에 북쪽 오랑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ㆍ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침범하니, 조공(朝貢)길이 어려워져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렸다. 지원(知院) 정척(鄭陟)이 성절사(聖節使)에 차출되었으나 용감하게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직하던 날 세자에게 명령하여 특별히 위로하여 보냈었다. 중도에서, 황제가 오랑캐에게 억류되고 북경이 포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지체하려 하는데, 정척은 전진하여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당도하고 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한 뒤였다. 새 황제에게 알현(謁見)하고 나서는, 북방을 쳐다보며 성절(聖節)의 하례(賀禮)를 예식대로 하였다.
○ 문종(文宗)이 동궁에 있을 때에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에게 처음으로 가례(嘉禮)를 행하여 칭호를 휘빈(徽嬪)이라 하였는데, 여러 해를 요사스런 방술 같은 것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 봉여(奉礪)의 딸을 책봉(冊封)하여 순빈(純嬪)이라 하여 8년이 되었는데 허물이 있어 폐하고, 양제(良娣) 권씨(權氏)를 세워 빈(嬪)으로 삼으니, 곧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노산(魯山 단종)을 낳은 7일 만에 훙(薨)하였다.
○ 직제학 어변갑(魚變甲)이 장차 전시(殿試)를 보려 하는 차에, 대제학(大提學)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짓기를,
세 층계 바람 뇌성 「어변갑」이요 / 三級風雷魚變甲
한 봄 풍경 「마희성」이네 / 一春煙景馬希聲
비록 대구가 원래 서로 꼭 맞는 것이라 하나 / 雖云對偶元相敵
어찌 용문 상객의 이름에야 미치랴 / 那及龍門上客各
하였는데, 변갑이 과연 장원에 뽑혔다.
○ 어변갑이 좌정언(左正言)으로 있다가 충주판관(忠州判官)이 되어나갔다. 이때에 공의 아버지 연(淵)이 전임(前任) 하양감무(河陽監務)로 산반(散班)에 있었는데, 변갑이 상소로 진정(陳情)하여 자기의 관직을 대신 주기를 원하므로 태종이 허락하여 특별히 연(淵)에게 두 계자를 승진시켜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뒤에 변갑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에 동료들이 장차 상소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 윤향(尹向)을 논핵(論劾)하려 하였는데 일이 애매하게 되었다. 공이 서명(署名)하지 않으면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의 처소에 있었다. 이 사람이 반드시 그런 일이 없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감히 거짓을 얽어대어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좌석이 파하였다.
어변갑이 신장(申檣)과 더불어 벗이 되어 매우 친하였다. 서로 언약(言約)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다가 만일 이름을 얻게만 되면, 그 때에는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로 하자.”
하였었는데,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게 되자, 임금의 은혜가 겹겹으로 내려 차마 얼른 서울을 떠날 수 없으므로 항상 부모 봉양하러 돌아감이 늦어지는 것을 한(恨)하여, 매양 탄식하기를,
“임금 섬길 날은 많으나 부모 섬길 날은 적다.”
하였다. 뒤에 허리 밑이 건삽(蹇澁)한 병을 얻자 곧 사표(辭表)를 올려 고향에 가서 온천에 목욕하여 병 치료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끝까지 반드시 써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병을 치료하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냐? 그의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속히 아뢰라.”
하였다. 공이 이에 출발하여 창녕 본가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병을 핑계하고 돌아오매 한 집이 아늑하니 / 謝病歸來一室幽
황량한 풀과 나무 묵은 연못가로세 / 荒涼草樹吉池頭
나 같은 것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랴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자애하신 어버이 위하여 멀리 가지 못함이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신장은 벼슬이 여러 번 참판에 이르렀다. 뒤에 공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더불어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엄밀히 언약하였었는데, 자네 아버지는 능히 뜻을 결단하여 돌아갔으나, 나는 언약을 저버렸으니, 부끄러움이 많네.”
하였다. 찬성(贊成)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벼슬을 그만둔 사람은 다만 두 사람뿐이니, 한성 판윤(漢城判尹) 허주(許周)와 어아무개이다.”
하였다. 공이 이미 사직하고 돌아오자, 부모가 모두 계신데다 여러 아우들도 무고(無故)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달고 맛진 음식을 대접하여 날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 일삼았다. 조정의 의론이 그의 행의(行義)를 애석히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아니하였고, 또 사간(司諫)으로 불렀으나 끝내 취임하지 아니하고 평생을 마쳤다. 이상은 행장임
○ 정통 연간에 어느 풍수설(風水說)을 하는 사람이 건의하기를,
“궁성(宮城) 북쪽 길에 담을 쌓고 문을 만들어 사람들의 내왕을 제한하고, 또 성안에다가 흙을 메워 산을 만들며 명당(明堂)의 물에다 오물을 던지지 말게 하소서.”
하니, 어효첨이 상소하여 극력 그 불가함을 말하니, 세종이 보고 감탄하여 드디어 풍수의 설을 물리쳤다.
서울의 관청에는 으레 작은 집을 하나 따로 설치하여 지전(紙錢)을 총총 걸어 놓고 칭호를 부군(府君)이라 하여 서로 모여 자주 제사지내고, 새로 취임하는 관리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되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비록 사헌부(司憲府)라도 그렇게 하였다. 효첨이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자 하인들이 고사(故事)로써 고하였다. 효첨이 말하기를,
“「부군」이란 무슨 물건이냐?”
하고, 걸어 놓은 지전(紙錢)을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전후로 지나온 관청의 「부군의 사당」은 대부분 다 불태우고 헐어버렸다.
○ 노산(魯山)이 어려서 왕위를 계승하고 세조(世祖)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궁중이 텅 비었고, 또한 후사를 잇는 것이 중하다 하여 권제(權制)를 따라 의론을 정하여 왕비를 맞아들인 것은
“이미 상(喪)을 입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 실지가 없어진 것이니, 상복을 벗는 것이 옳다.”
하였다. 어효첨이 예조 찬의로 있으면서 항의하기를,
“왕비를 맞는 것은 비록 종사의 큰 일이기 때문에 부득이하였지마는, 상복의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무슨 부득이한 일이 있어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까?”
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으나, 끝내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다.
○ 세종이 말년에 병이 많아 능히 정무를 보지 못하므로 동궁에 있는 문종에게 명령하여 모든 정무를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의사당(議事堂)을 설치하고 군신(群臣)들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 문종이 선비들에게 책문(策問)으로 시험보일 때에 친히 문제를 내기를,
“들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현인(賢人)을 구해 들이고 간하는 말을 들어주며, 욕심을 적게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요,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사람은 이와 반대가 된다고 하니,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선대(先代)의 업을 이어 받았기에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깊은 못가에 임한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하여 나의 허물과 실책을 말해 주어 부족한 데를 보충하기를 바란다. 너의 사대부들은 성인(聖人)의 학문에 마음을 쓴 지 오래되었다. 만약 오늘날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혹 내가 들어 알지 못하는 과실이 있거든 마땅히 마음을 다해 진술하여 숨기지 말지어다. 비록 문장이 기특하고 화려하여 서술한 것이 넓으나, 뜻이 도리어 부족하면 나는 한갓 그것을 도리어 배우(俳優)와 같이 볼 것이며, 임금의 덕만 칭찬하여 걸핏하면 요순(堯舜)에 견주나 실지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면, 나는 한갓 그것을 아첨하는 헛수고로 볼 것이니, 오늘의 대책(對策)은 성실하게 하기를 힘쓰라.”
하였다. 이때에 마침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므로 친히 제문을 지어 관원(官員)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치는 순전한 양[純陽]만이 아니라 음(陰)도 있고, 물(物)은 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어, 옴이 있으면 반드시 감이 있고,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것이다. 귀신이란 진실로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리지 않는 것이니, 어찌 여기(癘氣)라고 주(主)가 없으랴? 감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하고, 감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 감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지만, 감정이 있는 것은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물과 불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 수가 있고, 귀신은 사람을 도우는 것이나 혹 때로는 사람을 해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과 불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요, 사람을 해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움과 더움, 비 오고 개는 것, 오미(五味 감(甘)ㆍ신(辛)ㆍ산(酸)ㆍ함(鹹)ㆍ담(淡))의 음식은 천지가 사람을 살리게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 자신이 그 조화(調和)를 잃게 되면 병이 여기에서 근원하여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거룩한 덕은 이치가 온 천지와 동일한 것이니, 지금의 여기(癘氣)는 실로 귀신이 앙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또한 사람들 자신이 허물을 저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침 한 사람이 허물을 저지른 것으로 인하여 전염되어 점차 넓어지고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아니하여 죄없이 횡액을 입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어찌 옛글에 이른바 ‘천리(天吏)로서 지나친 사람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다 죽인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한 나라 신(神)과 인(人)의 주(主)가 되었기에 항상 한 가지 사물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것인가?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몇 군데에 깨끗한 처소를 가려 단(壇)을 만들고, 조정 신하를 나누어 보내어 고기ㆍ술ㆍ밥ㆍ국으로써 제사지내며 거듭 간절한 말로 타일러 너희를 깨우치게 하노니, 너희 귀신들은 이러한 뜻을 잘 계승하고 잘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여, 어긋나게 성낸 기운을 거두고 만물을 낳고 살리는 본래의 덕을 펼지어다.”
하였다. 임금의 문장이 넓고 큼이 이와 같았다. 응교 이개(李愷)가 지어 올렸는데, 문종이 보고,
“내 마음에 합당치 않다.”
하고, 손수 초안하여 내보냈다.
○ 노산(魯山)이 어려서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8대군(大君)이 강성하므로 인심이 불안하게 여겼다. 세조가 혁제(革除)할 뜻이 있었는데, 권람(權擥)이 그의 집에 드나들어 심히 친밀하였다. 매양 들어가 뵐 때면 해가 늦도록 물러가지 아니하여 밥상을 제때에 올리지 못하므로, 그 집 하인들이 권람이 오는 것을 보면,
“국 식히는 서방님이 또 왔군.”
하였다. 즉위한 뒤에 권람을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분이 전일에 국을 식히던 서방님이오.”
하였다.
○ 한명회(韓明澮)가 젊었을 때에 불우(不遇)하였는데, 큰 뜻을 품고 과거(科擧)보기를 애쓰지 아니하여 나이 30이 넘도록 오히려 포의(布衣)로 있으면서 권람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벗이 되었다. 세조가 권람에게 인재를 물으므로, 권람이 명회를 천거하였다. 복건(幅巾)을 쓰고 찾아 뵈었는데, 한번 만나보자 마치 오래전에 만난 듯이 투합하여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을 한(恨)하였다. 매양 찾아 뵈올 적에는 종부시 관원(宗簿寺官員)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의원(醫員)이라 칭하기도 하여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였고, 또한 밤에 찾을 적에는 밖에서 부르기 어려우므로 궁노(宮奴) 임운(林芸)의 팔에다 노끈을 매어 그 끝을 대문 밖에 드리워 놓아, 그것을 당기면 아무리 깊은 밤에도 들어가 고할 수 있었다. 혁제(革除)하는 계책은 대체로 명회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세조가 항상 칭하기를,
“나의 자방(子房 장량의 자)이다.”
하였다. 명회가 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와 당 태종(唐太宗)이 비록 장량(張良)ㆍ진평(陳平)과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의 꾀를 썼지만 한신(韓信)ㆍ팽월(彭越)과 포공(褒公)ㆍ악공(鄂公)이 없었더라면 무력(武力)으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무사(武士) 홍달손(洪達孫)ㆍ양정(楊汀)ㆍ유수(柳洙)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마침내 쓰임을 받았다.
○ 노산(魯山) 계유년에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정분(鄭笨)이 3정승이 되었는데, 종서가 지략(智略)이 많으므로 당시에 큰 호랑이라 칭하였다.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여 친히 무사 양정ㆍ유수ㆍ유서(柳漵) 및 궁노(宮奴)ㆍ임운(林芸) 등을 거느리고 어둠을 틈 타 종서의 집에 가면서, 권람ㆍ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을 지키게 하여 비록 마지막 종소리가 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종서의 집이 돈의문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종서가 수양 대군을 영접하여 이야기를 마치고 전송하러 대문까지 나오다가 뜰 가운데 서서 또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는데, 종서의 아들 승규(承珪)가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사모(紗帽) 뿔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대감의 사모뿔을 빌려 주시오.”
하였다. 종서가 승규를 시켜 안에 들어가 사모뿔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에 양정ㆍ임운 등이 종서를 쳐 땅에 넘어뜨렸다. 승규가 구하러 달려와 종서의 위에 엎드리는 것을 또한 쳐 죽이고서 세조가 달려 돌아왔다. 미리 순군장(巡軍將) 홍달손(洪達孫)과 약속하여 순군을 흩지 말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드디어 그 군사를 거느리고 노산의 시어소(時御所)로 갔다. 이때 노산이 대궐에서 나와 향교통(鄕校洞)에 있는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세조가 대문 틈으로 승정원에 고하기를,
“김종서가 반역(叛逆)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미처 아뢰지도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으니, 직접 그 연유를 아뢰겠습니다.”
하니, 승지 최항(崔恒)이 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세조가 그의 손을 이끌고 함께 들어갔다. 노산이 나이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叔父), 나를 살려 주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臣)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命牌)를 내어 모든 재상(宰相)을 부르고, 금군(禁軍)을 부서(部署)를 나누어 각 곳에 파수(把守)하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韓明澮)로 하여금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殺簿)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종서가 다시 살아나 사람을 시켜 성문(城門)에서 외쳐 정부에 고하게 하되,
“정승이 사람에게 맞아 중상을 입어 병이 중하니, 속히 위에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급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자의 가마를 타고 숭례문(崇禮門)ㆍ돈의문 등을 돌아다녔으나, 문이 닫혀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조도 종서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이튿날 새벽에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이흥상(李興商)을 시켜 살펴보니, 종서가 승규의 방안에 숨어 있었다. 끌어내니, 종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걸어가겠느냐? 내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자, 군사들이 베어 죽였다.
세조가 종서를 죽이던 날 밤에 먼저 훈련주부(訓練主簿) 홍윤성(洪允成)으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여쭙는다고 핑계하고 종서의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종서가 안방에서 베개에 기대고 있는데, 첩 세 사람이 뒤에 있었다. 윤성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들으니, 네가 힘이 세다 하는데, 내게 강한 활이 있으니, 한번 당겨보라.”
하였다. 윤성이 연거푸 두 장을 분지르자, 종서가 말하기를,
“옛날의 번쾌(樊噲)도 이보다 못하겠다.”
하고는, 첩을 시켜 큰 그릇에 술을 부어 주므로, 윤성이 세 사발을 마시고 나왔다.
세조가 이미 김종서 등을 죽이고 나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ㆍ이조 판서ㆍ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또 교서를 지어 그 훈공(勳功)을 표창하게 하였다. 당시에 집현전 관원들이 그 글을 짓기 싫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당직(當直)으로 있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 글을 짖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니, 가족들이 그 연유를 몰랐다. 성삼문(成三問) 등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는 도모에 성원이 참여했었다. 일이 실패하자, 성원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서 막 공무를 보고 있다가, 변(變)을 듣고는 말을 찾아 타고 급하게 돌아와 관대(冠帶)도 벗지 않고 가묘(家廟)로 들어 갔다. 집안 사람들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 보니, 반듯이 누워서 찼던 칼을 빼어 목에 대고 나무쪽으로 쳤는데, 미처 구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나졸(邏卒)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경태 을해년(1455, 단종 3)에 노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 세조를 불러 왕위(王位)를 넘겨 주고 대보(大寶)를 내어주니, 세조가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나 되지 않았다. 이날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 밑 연못에 가서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말리기를,
“주상(主上)께서 상왕이 되어 계시고 우리들이 죽지 않았으니, 아직도 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로 모의(謀議)하여 노산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조금 있다가 팽년이 충청 감사로 나갔는데 올리는 장계(狀啓)에 신자(臣字)를 쓰지 않았고, 녹(祿)을 받아서는 먹지 않고 봉하여 한 창고에 따로 쌓아 두었다.
일이 실패하자, 세조가 힐문하기를,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하고 녹을 받아 먹으면서 다시 배반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놈이다.”
하니, 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이라 칭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도 먹지 않았소.”
하였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들 헌(憲)과 같은 날에 죽었는데, 헌은 생원에 합격하여 당시에 명예가 있었다. 세조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의정부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廟堂) 깊은 곳에 애처로운 음악이 울리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를 지금은 모두 모르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르러 동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훤한데 봄날이 정히 더디고 더디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큰 사업은 금궤(金匱)에서 뽑아내고 / 先王事業抽金匱
성주(聖主)의 큰 은혜로 옥잔을 기울이네 / 城主鴻恩倒玉扈
즐기지 않으리 어이 길이 즐기지 않으리 / 不樂何爲長不樂
실컷 마시고 배부른 태평시대를 노래로 화답하네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는데, 세조가 그 시를 부중(府中)에 현판(懸板)하도록 하였다.
팽년의 후송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賤役)을 하였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천적(賤籍)에서 이름을 제거해 주어 천역을 면하게 해 주었고, 금상(今上) 초기에는 벼슬을 주었다.
인종(仁宗) 때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께서 박팽년 등에게 마음으로는 비록 가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위태롭고 불안할 때이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하였던 것이니, 후세에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여 후세 자손들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하였다.
○ 세조가 전위(傳位)를 받던 날,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玉璽)를 받들어 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세조가 바야흐로 땅에 엎드려 굳이 사양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 및 무인 유응부(兪應孚)와 노산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고 도모하였는데, 김질(金礩)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삼문이 김질에게 이르기를,
“일이 성공되는 날에는 너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영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문 등의 거사 기일이 여러 번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질이 이에 그 음모를 정창손에게 누설시켰는데, 창손이 곧 질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비밀히 아뢰기를,
“질과 삼문 등이……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앉으매, 삼문도 승지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세조가 무사를 시켜 끌어 내려 질이 밀고한 말대로 힐문하니, 삼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모두 사실이오. 상왕이 나이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입니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증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밀고한 것은 오히려 간사한 행위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다만 이렇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쇠 조각을 불에 달구어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타는데, 삼문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쇠 조각이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또한 그의 팔을 끊으니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자리에 있었는데, 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같이 당직할 때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과인(寡人)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하니, 숙주가 몸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삼문이 죽음에 다다라 감형관(監刑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하고, 그 아버지 승(勝) 및 아우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이개(李塏)는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 세종이 온양 온천(溫泉)에 갈 적에 이개가 성삼문 등과 함께 편복(便服)으로 행차를 따라가 고문(顧問)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삼문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몸이 파리하고 약하나 곤장 아래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매우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이개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이때서야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
하였다. 이개가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나갈 때에 시를 짓기를,
우의 솥처럼 중할 때엔 삶도 또한 크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선 죽음 또한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일찍이 일어나 자지 않고 문을 나가니 / 明發未寐出門去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는 선산(善山) 사람이다. 세종 무오년(1437)에 과거하여 장원에 뽑혔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엔 위지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노기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단근질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여 이때에 한창이었는데, 모두 위지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 유응부(兪應孚)는 무인(武人)으로서 날랜 용기가 남보다 뛰어나 능히 담과 집을 뛰어 넘었다. 어머니를 섬김이 효성스러웠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삼문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여, 아무날 명 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할 때를 타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그날 세자(世子)가 임금과 한 자리에 오지 않고, 또 자리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가진 장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삼문 등이 그 계획을 연기하려 하니, 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거사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일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오. 세자가 비록 한 자리에 오지 않았으나 우익(羽翼)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제가 어찌 하겠는가.”
하였으나, 삼문 등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굳이 말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묻기를,
“네가 어찌하려 하였느냐?”
하자, 응부가 대답하기를,
“석 자의 칼을 가지고 당신을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는데, 조무래기 선비들과는 같이 모사(謀事)할 수 없었소,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이 되었겠소. 더 이상 사실을 묻고 싶거던 저 서생(書生)들에게 물으시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오싹하였다. 관(官)에서 그의 집을 몰수하는데 문안에 다만 떨어진 자리만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청백을 탄복하였다. 일찍이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팔을 뽐내며 말하기를,
“한명회ㆍ권람을 죽이는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하였었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었을 적에 시를 짓기를,
날쌘 매 삼백 마리 누각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그 기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세종이 일찍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인(內人)들이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하므로 유생(儒生)들이 무녀(巫女)들을 몰아 내었다. 중사(中使)가 매우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자, 세종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선비를 양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선비들의 기개가 이러한 것을 보니 내가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하였다. 유 판서(柳判書)가 이 말을 명묘(名廟 명종)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사기(士氣)를 배양하기를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정승이고, 김종서가 공조 판서였을 때 하루는 공회석(公會席)에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에서 약간의 주찬(酒饌)을 준비하여 들여오게 하였다. 황희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자, 하리(下吏)가 대답하기를,
“공조 판서가 시간이 오래되어 여러분이 시장하실까 염려하여 잠시 공조에서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황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 옆에 설치한 것은 3정승을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면 마땅히 예빈시에서 준비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공조에서 멋대로 가져 왔는가?”
하며, 입계(入啓)하여 죄를 주게 하려는 것을 여러 재상들이 말리자 그만두고, 종서를 앞에 불러놓고 준절히 책망하였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대신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조정을 통솔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세조는 용모가 기특하고 웅장하며, 활쏘기와 말타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 사냥갔을 때에 하루아침에 사슴ㆍ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 잡았는데,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어졌다. 늙은 무사(武士) 이영기(李永奇) 등이 보고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 태종의 신무(神武)를 보게 될 줄 몰랐다.”
하였다. 처음에 진양 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하였다가, 뒤에 수양(首陽)으로 고쳤는데, 문종이 일찍이 그 활에다 쓰기를,
“활은 철석(鐵石)이요, 화살은 벼락이네. 죄어 있는 것만 보았지, 풀려있는 것 보지 못하였네.”
하였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정확하게 측정(測定)하기 위하여, 세조 및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지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기 그지 없어 안평대군 이하 분들이 눈이 현기(眩氣)가 나고 다리가 떨려 앞으로 가지 못하였으되, 세조는 걸음걸이가 나는 것과 같아 순식간에 오르내리므로 보는 이들이 매우 탄복하여 따라갈 수 없다 여겼다. 항상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므로 궁중에서들 웃었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너와 같이 용맹이 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렇게 넓고 큰 것이 좋다.”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 1)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갈 때에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대장군이라 칭하였고, 황성 궐문(皇城闕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일시에 물러서서 움츠리므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출발할 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갈 만한 사람을 권람에게 묻자 신숙주를 추천하였고, 또한 돌아오기 전에 혹 사태가 변동될까 염려하여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와 황보인의 아들 모(某)를 데리고 함께 갔다.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가 태중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출산되어 사지가 완전하지 못하므로 유모가 솜에 싸서 밀실(密室)에 둔 얼마 후에야 완전한 어린애가 되었다. 이미 장성하자 골격이 기특하였다. 어렸을 때 산중 절에서 글을 읽을 때 한번은 밤에 산골짜기를 지나는데 범이 그의 길을 보호해주어 갈 수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멀리까지 배웅해 주니, 호의에 감사한다.”
하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모양을 하다가, 날아 밝으려 하자 그제야 갔다. 또 언젠가는 영통사(靈通寺)에 놀러갔는데, 밤중에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한 늙은 중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공의 머리 위에 광채가 번쩍번쩍하는데, 이것은 모두 귀하게 될 징조입니다. 명년이 다 가지 않아서 공은 반드시 뜻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경태 병자년(1456, 세조 2) 여름에 성삼문 등이 창덕궁에서 임금과 왕세자가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여, 부서를 나누어 이미 정하였다. 이날 한명회가 우승지로서 들어와 아뢰기를,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한 무더우니, 세자는 올 것도 없고, 운검(雲劍)을 맡은 장수들도 전내(殿內)에 입시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모의가 실패되어 모두 처형되었던 것이다.
○ 성화(成化) 기해년(1479, 성종 10)에 명 나라에서 장차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들을 치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협공(夾功)하여 줄 것을 청하므로, 성종이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는데, 압록강 가까지 가서는 얼음이 녹아 건너기 어렵다 핑계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고, 중국에서도 외국이 아닌 것으로 대우해 주므로 평교(平交) 이하의 것에 있어서도 오히려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자(天子)의 명령을 이미 받아 거행하다가 중도에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조종(祖宗) 이후로 대국을 섬기던 정성이 전하(殿下) 때에 와서 쇠퇴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다시 날랜 군사를 보내어 속히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조정에서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길도 험하고 눈이 쌓여 재차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임금도 의심스럽게 여겼다. 명회가 극력 요청하기를,
“의론하는 자들의 말은 저나 편하자는 꾀요,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큰 체통입니다. 승하거나 패하는 운수에 있어서는 미리 근심할 바가 아니요, 요컨대 천하에 대의(大義)를 드날리자는 것입니다.”
하여, 재삼 극력 청하므로 임금이 들어주어 우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일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는데, 크게 이기게 되자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였고, 중국에서도 칙서(勅書)를 내려 칭찬하였다.
○ 성종조에 한명회가 아뢰기를,
“성균관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인데 읽을 서적이 없으니, 매우 안 된 일입니다. 마땅히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인출(印出)하여 장서각(藏書閣)을 지어 소장해 놓고 모든 유생들로 하여금 뜻대로 빼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회가 장서각 세울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여 조력하였다.이상은 묘지(墓誌)에 있는 것인데, 어세겸(魚世謙)이 지었음.
○ 이시애(李施愛)는 길주(吉州) 사람인데, 벼슬이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냈고, 상(喪)을 만나 집에 있으면서 딴 뜻을 품었다.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그의 아우 시합(施合)과 더불어 반역을 모의하였다.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이 길주에 가자, 시합의 첩의 딸이 고을 기생으로서 효문이 방에서 자는 기회에 문을 열고 군사를 불러 들여 효문을 죽이고, 드디어 성을 차지하여 반역하였다. 이에 앞서 시애가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충청도 병선(兵船)이 경성(鏡城) 후라도(厚羅島)에 왔고, 또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설한령(薛罕嶺)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의아하고 두려워하여 산에 올라가 피해 숨는 사람도 있었다. 시애가 또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리기를,
“각 고을 인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까 의구심을 가져 유언 비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니, 청컨대, 본도 출신으로 수령을 내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세조가 크게 성내어 시애의 글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친히 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물었는데, 그 사람이 끝까지 시애는 국가에 충성하여 본도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요, 반역할 마음이 없는 것이라 역설(力說)하였으니, 아마 그 사람도 역시 시애에게 속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귀성군 준(歸城君浚)을 도총사(都摠使)로, 호조 판서 조석문(曹錫文)을 부총사로 삼고, 허종(許琮)은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켜 본도 절도사로 제수하고, 강순(康純)과 어유소(魚有沼)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시애가 이미 군사를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수령을 죽여 시애에게 호응하였고, 함흥부(咸興府) 사람들도 관찰사 신면(申㴐) 포위하였는데, 신면이 다락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다 되자 스스로 자기의 활을 분지르고 크게 꾸짖으며 죽었다.
단천(端川) 사람 최윤손(崔潤孫)이 조정에 벼슬하여 계자(階資)가 3품이었다. 임금이 그를 보내어 본도 인민에게 역적을 따르지 말도록 타일러 깨우치게 하였는데, 윤손이 시애에게 붙어 도리어 조정의 비밀을 모두 알려 주었다. 종성(鐘城) 사람 차운혁(車云革)이 적진(賊陣) 속에 들어가 동지(同志)들과 약속하여 시합(施合)을 묶어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적당에게 빼앗기고, 운혁 등은 죽음을 당하였다. 강순과 허종 등은 홍원(洪原)에서 크게 싸우고, 또 북청에서 싸웠으며, 또 만령(蔓嶺)에서도 싸웠는데, 적이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화살이 비오듯 하므로 우리 군사가 올라가지 못하였다. 유소(有沼)가 몰래 작은 배에다가 정병(精兵)을 싣되 푸른 옷을 입혀 초목의 색과 구별이 없게 하고, 바다 굽이를 따라 나무를 휘어잡고 절벽을 기어올라 상봉(上峯)으로 넘어 올라가 적진을 내려다 보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적이 크게 놀래었다. 영(嶺) 밑에 있던 군사들이 또한 기세를 타 방패로 몸을 가리고 개미 떼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드디어 무너졌다.
시애가 도로 길주로 도망가 기녀(妓女)와 재화(財貨)를 모두 싣고 오랑캐의 땅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길주 사람 허유례(許由禮)가 적당(賊黨)인 이주(李珠)ㆍ황생(黃生)ㆍ이운로(李雲露) 등을 타일러 시애ㆍ시합을 생포하여 와 항복하므로, 시애ㆍ시합을 진전(陣前)에서 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었다. 처음에 현상모집하기를,
“시애를 베어 오는 사람에게는 백신(白身)이라도 가선(嘉善)의 계자(階資)를 주겠다.”
하였었기에, 임금이 허유례ㆍ이주ㆍ황생 등을 인견(引見)하여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금대(金帶)를 띠게 하여 관직을 주었다. 준(浚) 이하는 공(功)의 등급을 정하여 훈권(勳券)을 주고, 길주(吉州)를 강등하여 길성현(吉城縣)을 만들었다.
○ 이시애의 반란 때에 유언을 퍼뜨리기를,
“한명회ㆍ신숙주ㆍ노사신(盧思愼)ㆍ한계희(韓繼禧) 등이 내통(內通)이 되어 있다.”
하므로, 세조가 그들을 대궐 안 인지당(麟趾堂)에 구금하고, 그 아들과 사위를 모두 의금부에 가두었다. 한 달 남짓하여 유언이 헛말임을 알고서야 석방하였는데, 내전(內殿)으로 불러 볼 때에, 뜰에 내려 가서 영접하여 깊이 후회하고 자책(自責)하였으며, 대면하자 눈물까지 흘렸다. 시애를 생포하였을 때에 묻기를,
“한명회 등을 모함하여 지목한 까닭은 무엇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숙주ㆍ한명회의 무리가 있으면 내 일이 성공하지 못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소.”
하였다.
○ 천순(順天) 경진년(1460, 세조 6)에 육진(六鎭)의 번호(藩胡)가 배반하므로, 세조가 신숙주을 원수(元帥)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길을 나누어 깊이 들어가 쳐부수는데, 오랑캐가 밤을 이용하여 추격하여, 군중(軍中)이 시끄럽게 외치며 떠 들었으나, 숙주는 자리에 누운 채 꼼짝하지 않고 막료(幕僚)를 불러 시 한 수를 읊기를,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추운데 / 虜中霜落塞垣寒
백 리 사이에 철기가 종회하네 / 鐵騎縱橫百里間
야간 전투가 끝나지 않고 날이 새려하는데 / 夜戰未休天欲曉
누워서 보니 별들이 참 빛나네 / 臥看星斗正闌干
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이 그의 안정되고 조용한 것을 보고 힘입어 동요하지 않았다.
○ 경태 계유년(1453, 단종 1)에 세조가 북경에 갈 적에 서거정(徐居正)이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수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娑堡)에서 자는데, 그날 저녁에 거정의 모친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세조가 숨기려고 하였는데, 밤에 거정이 이상한 꿈을 꾸다가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같이 자던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거정이 답하기를,
“꿈에 달이 이상(異常)하였는데, 대저 달이란 어머니의 상징(象徵)이다. 우리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데, 꿈의 징조가 불길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하였다. 이 말을 세조에게 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조가 탄식하기를,
“거정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
하고, 마침내 사실을 알려 주었다.
○ 이시애의 반역한 보고가 오자,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였다. 이때에 충청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상주(喪主)로 집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키고 계자를 뛰어올려 절도사(節度使)로 삼으니, 공이 곧 숙배(肅拜)하고 하직하였다. 친구들이 따라가 전송하며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한창 치열하니, 공이 조금 머뭇거리며 형세를 관찰하여야지, 바로 진격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지금 시세를 보면 마치 타는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아 하루에 천리라도 달리지 못하는 것이 한인데, 어찌 한 시각인들 지체하겠소. 맹세코 이 역적과 함께 살지 않겠소.”
하였다. 중도에서 관찰사 신면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두 배로 재촉하여 가서 영흥(永興)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태조 진전(太祖眞殿)이 계신 곳이니, 만약 차질이 있게 되면 마땅히 여기에서 죽음을 바치겠다.”
하였다. 도총사(都摠使) 귀성군 준(龜城君浚)이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전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서한(書翰)을 보내어 책망하기를,
“군사는 기민하고 빠른 것이 제일이니, 어름거리고 앉아서 기회를 잃을 수 없는 것이오. 이 도의 인민들이 유언비어에 동요되었으니, 인심이 만약 안정되면 시애가 비록 반역한들 무슨 걱정이 있겠소. 경유(經由)하는 모든 고을을 일일이 깨우치고 타일러 인심이 차츰 안정되거든 대군(大軍)을 속히 들어오게 하시오. 한번 기회를 잃으면 비록 뉘우친들 소용없는 것이오. 의심하지 말고 빨리 결정하여 국난(國難)을 풀어 주시오.”
하였다. 또 문천(文川)ㆍ덕원(德源) 등 지방에 당도하여서는 혹은 종사관(從事官), 혹은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鎭駐)하게 하여 서로 호응(呼應)토록 하였고, 또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지금 영흥(永興)에 있는데 도총사(都摠使) 준(浚)이 신을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기 때문에 그래로 있으면서 적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임지에 당도하여 고산역(高山驛)에 있으면서 인신(印信)을 가져오기 위하여 사람을 이시애에게 보냈었고, 또 시애가 처음엔 비록 반역할 마음이 없었으나, 조정의 뜻을 몰라 도리어 놀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안변(安邊)에 있을 때에는 군관(軍官)인 길주 사람 양근생(楊根生)을 시켜 길주에 달려가서 시애를 만나보고 조정의 뜻을 통하게 하였으며, 덕원(德源)에 있으면서는 부령(富寧) 사람 조규(曺糾)를 보내어 몰래 육진(六鎭)에 가서 조정의 소식을 말해 주어 간악한 꾀에 동요되어 감히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 없게 하였고, 문천(文川)에서는 종사관(從事官)인 종성(鐘城) 사람 정휴명(鄭休明)을 보내어 사람을 시켜 시애에게 전하기를,‘지금 신숙주와 한명회를 이미 옥에 가두어 놓고 반드시 자네가 오기를 기다린 뒤에 결정하려 하니, 속히 한 필 말만 타고 서울로 가라. 만약 머뭇거리고 출발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이다.’하였고, 또 몰래 휴명에게 이르기를, ‘시애가 만약 오지도 않고 반역한 사실이 이미 드러나면, 모름지기 여러 사람들을 비밀히 결속(結束)시켜 화(禍)와 복이 되는 길을 설명해 주어 자기들끼리 서로 도모하여 생포하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하였습니다.
단천 이남은 오직 북청이 정병(精兵)이 있는 곳이기에 군관(軍官)인 북청 사람 이효순(李孝純)을 북청으로 달려 보내어 부로(父老)들을 타일러 적과 서로 통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 최적(崔適)은 바로 본도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선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고 천천히 가면서 사태를 보다가 시애가 만약 길주를 떠나거든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점거하여 그 복심(腹心)을 빼앗게 하였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시애가 참으로 반역할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신이 이전에 보낸 사람들을 구류할 것이기에 우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봇짐을 지고 도보(徒步)로 가면서 과객(過客)을 가장하여 가만히 사세를 정탐하게 하였고, 신이 또 생각하기를, 여러 고을의 수령을 살해한 자들이 조정에서 들어와 토벌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죄가 두려워 놀라고 당황하여 시끄럽게 되겠기에 영흥 사람 박포생(朴苞生)으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여러 고을에 달려가, 위협에 이기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따른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는 조정의 뜻을 자세히 타일러 마음을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시애의 마음이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절도사(節度使)가 되려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고을 사람들이 조정의 소식을 모르고 간악한 꾀에 유혹되어 공(功)을 나타내려는 것뿐입니다. 당장의 계책은 인민들로 하여금 조정의 소식을 분명히 알아 그 마음을 진정시키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인심이 만약 진정되면 적은 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적이 반드시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북청에 이르자, 적이 이미 만령(蔓嶺)을 점거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우러러보며 공격하게 되어 사상자(死傷者)가 너무 많았다. 공이 어유소에게 지시하되, 군사를 몰래 행군시켜 꿰미에 꿰인 고기처럼 절벽에 기어 올라가 일만 군사가 일제히 소리치니, 적이 대항하지 못하고 시애가 도망쳐 갔다. 여러 장수가 급히 추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원흉(元兇)들이 세력을 잃으면 그 부하들이 반드시 잡아 오는 것이니, 시애의 머리도 장차 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수일 후에 적당 이주(李珠) 등이 시애를 묶어 진영 앞에 끌고 왔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병이 심하여 사직서를 올렸는데, 성종(成宗)이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 자제들이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였구나, 비록 급이 낮은 조관(朝官)이라도 이와 같이 대우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정승의 병이 위중한 지 9일 만에 내가 비로소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될 일인가.”
하고, 명령하여 사탕(砂糖)ㆍ감귤(柑橘) 등의 물건을 내려주고, 또 어의(御醫) 김흥수(金興守)로 하여금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좌승지 이종호(李宗灝)에게 전교하기를,
“들으니, 우상(右相)이 병이 위중하다 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는가. 네가 가서 들어보아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허종의 집에 가서 전지(傳旨)를 전하였더니, 허종이 두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일은 없고, 다만 끝까지 조심하시기를 즉위하신 처음과 같이 하시기를 원합니다.’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이 졸하자, 임금이 소찬(素饌)을 여러 날 하였다. 승정원에서 육미(肉味)를 들이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린 것이요, 사람이 작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신에게 누구한테는 후하고 누구한테는 박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우상(右相)이 북도 토벌에 수고하다가 한기(寒氣)에 상하여 드디어 병이 되었는데, 그 뒤에 이내 감사(監司)가 되어 추운 지방에 오래 머무르다가 전일의 병이 금번에는 더 발동한 것이니, 내가 심히 슬프고 애석히 여긴다. 내가 비록 감기에 걸렸지만 어찌 며칠 동안 소찬(素饌)을 먹는다고 더하고 덜하겠느냐.”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우리 성묘(成廟)께서 허종(許琮)에게 신임이 지극하셨기에, 그도 나라 일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종의 집이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었고,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묘께서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시고 환궁(還宮)할 때면 들러서 허종이 집에 있나 없나를 물으셨으므로 당시에 듣는 사람들이 감격되어 분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합니다.”
하였다.
○ 찬성 어유소의 원조(遠祖) 중익(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다. 나면서부터 체격과 얼굴이 기이하고, 무릎 아래 3개의 비늘이 있었다. 장성하여 고려 왕 태조(王太祖)에게 벼슬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어중익(魚重翼)은 3개의 비늘이 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를 만나 보고 말하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곧 물고기다.”
하고는 성을 어씨(魚氏)로 내렸다.
○ 남이(南怡)가 날쌔기가 남보다 뛰어나, 이시애를 토벌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에 언제나 선두에 서서 힘껏 싸웠기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자헌(資憲)의 계자(階資)에 올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성화 무자년(1468, 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이시애가 북도에서 반역하였을 때, 어유소가 용기를 분발하여 앞장서서 싸워 1등 공신(功臣)이 되었는데, 첩보(捷報)가 있자마자, 명 나라 황제가 건주 삼위(建州三衛)의 야인(野人)을 협공(挾攻)하자고 요청하므로, 세조가 어유소ㆍ강순ㆍ남이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돌려 달려 가게 하였다. 유소가 좌대장(左大將)이 되어 바로 오랑캐의 소굴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기를 무수히 하였고, 서 있는 나무 한편을 깎아 글을 쓰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조선 대장 어유소가 건주(建州)를 멸하고 돌아간다.”
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뒤에 당도하여 그 글을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칙서(勅書)를 내리고 은 50냥과 비단[緞] 생명주[綃] 각 40필을 주었다. 그가 군사를 돌릴 때에 오랑캐의 날랜 기병(騎兵) 수십 명이 우리 진에 돌진하자 우리 군사들이 분산되고 쓰러졌다. 유소가 눈을 부릅뜨고 나오면서 군사들에게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말을 달리며 쏘아 연달아 맞혀 죽이니, 적이 놀라 무너져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영안도(永安道) 성 밑에 살던 야인(野人)들이 온 부락을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조정에서 다른 사단을 낼까 염려하여 특별히 어유소를 파견하여 위안시키게 하였는데, 그것은 유소가 일찍이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켰기 때문이었다. 유소가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먼저 그 부락에 사람을 보내어 임금이 내린 교서를 전해 보였다. 야인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그 교서를 땅에 던져 버렸는데,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진실로 믿지 않는가? 어 영공(魚令公)이 오셨다.”
하니, 야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며 말하기를,
“어 영공이 과연 오셨는가? 어 영공이 과연 오셨다면 이분은 우리 아버지이다. 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가 그 말을 듣고 오랑캐 부락으로 달려 가니, 오랑캐들이 모두 늘어서서 절하였다. 유소가 성심(誠心)을 보여 어루만지며 타이르자,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드디어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돌아와 먼저 살던 데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상은 행장에 있음.
종묘 배향(宗廟配享).
태조실(太祖室) : 의안대군 화(義安大君和),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청해군(淸海君) 이지란(李之蘭),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정종실(定宗室) : 익안대군 방의(益安大君方毅).
태종실(太宗室) :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우의정 정탁(鄭擢),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세종실(世宗室) : 익성공(翊成公) 황희(黃喜),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병조 판서 이수(李隨).
문종실(文宗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세조실(世祖室) :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
예종실(睿宗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
성종실(成宗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 충정공(忠貞公) 정창손(鄭昌孫),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 완산부원군 이복(李復).
중종실(中宗室) :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 충정공(忠貞公) 성희안(成希顔), 충성공(忠成公) 유순정(柳順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인종실(仁宗室) : 문희공 홍언필(洪彦弼), 문경공 김안국(金安國).
명종실(明宗室) :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에 명령하여 대장경(大藏經) 50부를 찍어내게 하였다. 경판(經板)이 합천 해인사에 있으므로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ㆍ정은(鄭垠)을 보내어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또한 중 신미(信眉)ㆍ죽헌(竹軒) 등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며, 각도의 관찰사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그 비용을 보조하게 하였다. 무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여 4월에 인쇄를 마쳐, 각도의 명산 거찰(名山巨刹)에 나누어 소장하였는데, 무릇 종이가 38만 8천 9백여 첩(貼)이 들었고, 식량이 5천 석이 들었으며, 다른 물건도 이만큼 들었다.
○ 서거정(徐居正)이 전문형(典文衡)으로 있는 22년 동안에 과거 시험을 맡아 선비를 뽑은 것이 23차례였는데, 좋은 인재를 많이 얻었다. 명 나라 학사(學士) 동월(董越)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거정을 보고는 매우 존경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예 학사(倪學士)의 요해편(遼海編)을 보았고, 또 기 호부(祁戶部)의 《황화집(皇華集)》을 보고서 높은 명성을 흠모한 지 오래였더니, 금번에 어찌 다행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성화(成化) 무렵에 서거정이 경상ㆍ충청도 군용 순찰사(慶尙忠淸道軍容巡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병조에서 조정에 청하기를,
“청컨대, 총통주성 방포식(銃筒鑄成放砲式)을 간행(刊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연안(沿岸) 각 관청에 반포해 주어 항상 연습을 시키소서.”
하였다. 거정이 불가하게 여겨 아뢰기를,
“화약(火藥)은 왜국(倭國)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우리 국경이 왜(倭)와 밀접한데다가 더구나 삼포(三浦)의 왜인이 우리 나라 사람과 섞여 살고 있어, 더러 간악한 백성이 몰래 왜인과 통하여 왜적에 흘러 들어갈까 염려되오니, 우리 국가의 깊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깊이 그 폐단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이 말이 매우 당연하다.”
하였다.
○ 문양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판결을 분명하고 민활하게 하여 옥에 갇힌 사람이 없었다. 전부터 옥이 비었다고 아뢰면 상(賞)을 내리는 것이 예이므로, 하관(下官)들이 아뢰고자 하였는데, 희맹이 듣지 않았다. 뒤에 심정(沈貞)이 판서로 있을 때에 또한 어느날 옥이 비었으므로 막 아뢰려 하는데, 마침 우육(牛肉) 금령(禁令)을 범한 사람을 잡아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정이 늙은 아전에게 말하기를,
“사슴 고기도 꼭 소고기와 같으니라.”
하니, 아전이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곧 사슴 고기로 판정하여 석방해 버린 다음 드디어 옥이 비었다고 보고하여 상을 받았다. 당시에 기묘년의 선비(己卯士類 기묘시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말함)들이 혹은 죽임을 당하고, 혹은 귀양간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실은 심정이 그 하수인(下手人)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형벌이 필요 없어서 옥이 비었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하였으니, 그 조작하고 속이기를 기탄(忌憚)없이 함이 심한 것이요, 강희맹과 같은 겸손은 군자의 도량이 있다 하겠다.
○ 정난종(鄭蘭宗)이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있을 때에 일찍이 중한 병을 얻었는데, 부하들이 조정에 아뢰고자 하니, 난종이 말리기를,
“본도가 오랑캐와 접경이어서 만약 조정에서 주장(主將)의 병이 중한 것을 들으면 반드시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니, 당분간 나의 병세를 살펴보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뒤에 아뢰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완쾌되었다.
○ 성종(成宗)이 즉위한 초년에 명령하여 밀부(密符)를 만들어 신숙주ㆍ한명회 등 두셋 중신(重臣)에게 나누어 주어, 궁중에서 부르는 증거로 삼게 하여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였다.
○ 천순 정축년(1457, 세조 3)에 덕종(德宗)이 동궁(東宮)으로 있다가 훙서(薨逝)하였다. 세조가 말씀하기를,
“오래 사는 것이나 단명하는 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그 아들들이 모두 어리니, 그 용모를 그려 두었다가 남겨 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화사(畵師) 최경(崔涇)ㆍ안귀생(安貴生)에게 화상을 그리게 하여 간직하였다. 성종이 즉위하자, 그 화상을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가묘(家廟)에 모시게 하고, 최경과 귀생에게 벼슬을 주자, 대간이 경연에서 그 과람함을 논하였다. 임금이 말씀하기를,
“내가 난 지 겨우 달포 만에 부친을 잃었다. 오늘날 다시 초상(肖像)을 방불하게 뵈오니, 슬피 사모하던 정을 장차 조금이라도 풀 곳이 있게 되었으니, 최경과 안귀생에게 벼슬을 주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임금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성종이 일찍이 정사(政事)하던 날에, 이조ㆍ병조의 당상(堂上)과 6승지와 두 의빈(儀賓 부마駙馬)을 창덕궁(昌德宮) 대문 안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안에서 은병(銀甁) 셋을 받들고 나왔다. 하나는 크고 둘은 작았으며, 병 허리 양쪽에 모두 금으로 임금의 지은 시를 새겨 월산대군에게 준 것이었는데, 향기로운 술이 다 가득차 있었다. 월산대군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시에 화답하기를 요청하고, 이어 술을 부어 돌렸다. 이어 또 내시(內侍)가 명령을 전하기를,
“들으니, 대군이 나의 변변치 않은 시를 여러 재상에게 보였다하니, 내가 심히 부끄럽소. 시는 비록 보잘것없으나 운(韻)은 그래도 있으니, 경들은 의당 화답해 주시오.”
하였다.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밖에는 천금의 글자가 빛나고 / 外耀千金字
안에는 만세의 봄을 간직했네 / 中藏萬歲春
임금의 글이 겨우 새어 나오매 / 奎章纔漏洩
잔을 드니 벌써 사람을 취게 하네 / 斟酌已醺人
하였다. 그 장편(長篇)은 글귀가 많아서 가록하지 못한다.
○ 성화 기해년(1479, 성종 10)에 명 나라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고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여 크게 이겼다. 어세겸(魚世謙)이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적병의 머리와 포로를 북경에 바치려고 요동(遼東)에 도달하였는데, 태감(太監) 및 총병관(摠兵官), 도어사(都御史) 등이 말하기를,
“포로된 사람과 베인 수급(首級)을 하필 모두 북경에 보내야만 하오, 수급(首級)은 변진(邊鎭)에 맡기고 포로된 인구(人口)는 그 친척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겠소. 우리들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겠소.”
하므로 세겸이 말하기를,
“수급(首級)과 포로를 천자(天子)께 바치는 것은 옛적부터의 법이요, 승전(勝戰)하였다는 보고를 하면서 그 실물이 없으면 어찌 증거가 되겠소.”
하여, 말을 주고 받기를 서너 번 하였으나 마침내 굽히지 아니하였다. 세 관원(태감(太監)ㆍ총병관(摠兵官)ㆍ도어사(都御史))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공이 술을 받아 마시면서 읍(揖)만하고 꿇어 앉지 않았다. 어사가 말하기를.
“왜 꿇어앉아 마시지 않소.”
하니, 답하기를,
“내가 우리 전하(殿下)의 명령을 받들고 북경에 조회하러 오는데, 여러분이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 예로써 나를 위로하는 것 아니오. 내가 어찌 꿇어앉아 술을 마시겠소.”
하였다.
○ 성화 임인년(1482, 성종 13)에 성종이 광릉(光陵)에 거동하여 봉선사(奉先寺)에서 세조의 영전(影殿)에 배알(拜謁)할 적에, 어세겸이 대사헌으로서 모시고 따라갔다. 점심에 중들이 백관(百官)에게 밥을 대접하려고 하니, 세겸이 임금에게 간하기를,
“당당하게 임금을 모시고 온 신하들로서 중이 시주하는 밥을 먹는 것이 국가의 체통에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백관이 모두 스스로 밥을 싸가지고 왔으니, 굶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안 먹는 것을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세겸과 모든 대간들이 다 먹지 아니하였다. 이상은 행장에서 나옴.
○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조 23) 문과(文科)에 장원하였고, 또 그해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으니, 한해에 세 번 장원은 과거 생긴 이래 없던 일이다. 그 뒤에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사마시(司馬試)ㆍ전시(殿試)ㆍ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니 한 사람이 세 장원이 된 것은 또한 계승한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은,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참의 정윤희(丁胤禧)가 전시ㆍ중시에서 장원이 되었고, 양성군 이승소(李承召),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사문 윤기(尹箕)가 초시(初試)ㆍ회시(會試)ㆍ전시에 장원이 되었고, 찬성 이이(李珥)가 회시ㆍ전시에 장원이 되고, 또 그해 사마시에 장원이 되었다.
○ 사문 이의무(李宜茂)가 문과(文科)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맏아들 권(菤)은 무과(武科)에 올라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가 되고, 둘째 기(芑)는 영의정이요, 셋째 행(荇)은 좌의정이요, 넷째 영(苓)은 무과 군수(武科郡守)요, 다섯째 환(芄)은 형조 판서였다. 다섯 아들이 문과와 무과에 올랐으므로,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 의무(宜茂)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정극인(丁克仁)은 자는 가택(可宅)이요, 호는 불우헌(不憂軒)인데, 태인현(泰仁縣)에 살았다. 경서(經書)를 전공하여 과거에 올라 70에야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나이 많으므로 물러가 고향에 내러가 살면서 후진(後進)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면서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노래하였다. 성종이 글을 내려 그 청렴 개결함을 표창하여 3품 관원의 옷을 주었고,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생활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 함경도 유생 박윤령(朴允齡)이 글씨를 잘 썼는데, 언젠가 남의 상소를 대신 써 주었다. 성종이,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
고 물으므로, 박윤령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승정원으로 불러 주육(酒肉)을 주게 하고, 전통(箭筒)을 가져다가 그 겉면을 써 들이게 하였으며, 인하여 임금의 친필로 쓴 병풍을 주었다. 비록 작은 재주라도 가상히 여겨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 성종의 필법이 매우 고매하였다. 중종(中宗)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글씨를 잘 감정한다 하여, 궁중에 간직되었던 진서(眞書)와 초서(草書) 몇 장을 내려 보내며,
“궁중에서는 이것이 성종의 글씨인지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니, 분변하여 들이라.”
하였는데, 세창이 분류(分類)하여 아뢰었다.
○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상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편액하였는데, 경치가 좋았다. 한번은 명 나라 사신이 그 정자에 놀러 가려고 하므로, 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미관(美觀)을 돋구자고 청하였는데,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명회가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대간(臺諫)이, 명회가 임금 앞에서 무례하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외지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후에 석방시켜 돌아 왔다.
○ 유호인(兪好仁)이 성종조(成宗朝)에 문장을 잘한다 하여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奉養)하기를 청하므로, 수찬으로 있다가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있다가 의성(義城) 원에 제수되었으며, 최후에는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또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모친을 서울로 태워 오게 하였는데, 병들어 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이조에 내리기를,
“호인(好仁)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고향 이웃인 진주 목사로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목사를 까닭없이 중간에 갈아서 법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고, 그때 마침 결원(缺員)된 합천(陜川)으로 제수하였다. 호인이 비록 외직(外職)에 있었으나, 임금이 그로 하여금 세말(歲末)이면 저술한 시문(詩文)을 써 보내게 하고는, 그 즉시 표창하여 장려하였으며, 그의 모친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었다. 당시 매계(梅溪) 조위(曹偉)도 역시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갔었는데, 호인과 같이 임금의 총애를 입어 보통 사람과 특이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遺達)이 화(禍)를 당하자, 그 아들 언충(彦忠)이 진보현(眞寶縣)에 귀양갔는데, 자기가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으로 알고 옛 사람이 자기의 만사 지은 것을 모방하여 자기의 비문을 짓기를,
“대명천하(大明天下) 해가 먼저 비치는 나라의 대장부인데, 성은 홍이요, 이름은 충이요, 자는 직(直)이다. 반평생을 쓸데없이 글만 공부하다가 세상에 산지 32세 만에 마쳤다. 명은 어찌 그리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 길었던고, 옛 고을의 무림(茂林) 마을에 무덤을 정하니, 청산(靑山)은 위에 있고 여울은 아래 있네, 천추만세(千秋萬歲) 뒤에 누가 이 들판을 지나다가 눈여겨 보며 머뭇거릴 것인가. 반드시 슬프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시야(斯野) 두 자는 기하(其下)로 된 데도 있음.
○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연산 갑자년에 거제(巨濟)에 귀양가 있으면서
친구 중에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들을 생각하여 절운(絶韻) 10수를 짓고 각각 주석을 붙였는데, 시는 아래와 같다.
헐뜯고 추켜줌이 어지럽게 천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건만 / 毁譽紛紛萬口騰
그분의 마음은 어름어름하지 않았네 / 此公心地不模稜
초 나라 강가 어디서 빠뜨린 옥패를 찾을꼬 / 楚江何處尋遺珮
통에 얽은 5색 끈을 부쳐 주려네 / 願寄纏筒五綵繩
정희량 순부(鄭希良淳夫)가 임술년(1502, 연산군 8) 5월 5일에 스스로 강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은 천상에 있는 것이 합당한데 / 斯人合在白雲鄕
인간에 한번 귀양오자 창해가 뽕밭으로 변하였네 / 一謫塵區海變桑
통곡하노라, 광릉산이 이미 끊어져 / 痛哭廣陵今已絶
이 인생이 다시 아양을 들을 수 없구나 / 此生無復聽峩洋
박언 중열(朴誾 仲說)이 갑자년 6월 15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흰 칼날은 무릅쓰고도 능히 홀로 나아갔는데 / 橫衝白刃獨能前
하늘이 요망한 기운으로 태양을 가리우네 / 天遺妖氣翳日邊
밤중에 꿈이 평일과 같아 / 半夜夢魂如夙夕
두 줄기 눈물이 찬 담요에 젖네 / 數行淸淚濕寒氈
권 달수 통지(權達手通之)가 갑자년 겨울에 나와 함께 두차례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하루는 내 손을 잡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해 밑에 흰 기운이 공중으로 뻗쳤는데, 자네도 보았는가?”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보지 못했네.”
하였더니, 통지가 하늘을 쳐다 보다가 한참 만에 말하기를,
“아아, 내가 죽겠지, 저것이 나 때문이로구나.”
하더니, 12월 1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근일 밤에 통지가 평소처럼 연달아 꿈에 보이므로 아울러 짓는다.

맑기가 가을 하늘에 흰 이슬이 흐르는 것 같고 / 澹若秋空白露溥
굳세기는 지주가 거센 물결에 버티듯 하였지 / 剛如砥柱鎭奔瀾
일생의 명성과 행실은 가야가 기록하였으니 / 百年名行伽倻記
의춘(남곤(南袞)을 지칭)을 시켜 흰 비단에 써 놓아야겠네 / 要倩宜春灑素紈
김천령 인로(金千齡仁老)가 계해년 9월에 병으로 죽었는데, 갑자년의 사화에 또한 참여하였다. 중열(仲說)이 일찍이 인로의 명행기(名行記)를 지었는데, 사화(士華 남곤의 자)의 필적(筆跡)을 빌려 후세에 전하려 하였다.

그대 아버지 높은 절개 가을처럼 맑은데 / 乃翁高節倚秋明
경학과 문장이 한(漢) 나라 유경생이네 / 經術文章劉更生
온 집안이 결국 일망타진 되었으니 / 門地終須一網盡
한 아들이 어찌 하늘 개이기를 꺼리랴 / 孼孤寧復忌天晴
이 유령 영지(李幼寧寧之)가 갑자년 4월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부친 주계군(朱溪君)이 일찍이 곧은 말을 하다가 간신에게 밉게 보였었는데, 이해 가을에 또한 죽음을 당하여 온 집안이 남은 이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서남에서 고생살이 세월이 거듭되어 / 憔悴西南歲月重
바람과 서리가 수염을 모두 붉게 만들었네 / 風霜變盡紫髥茸
죽산 노상에서 갑자기 만났는데 / 竹山路上蒼黃面
모진 불길이 마침내 백 길 되는 솔을 꺾어 버렸네 / 烈火終摧百丈松
성중암 계문(成重淹季文)이 무오년에 사초(史草) 사건으로 의주(義州)에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하동(河東)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귀양간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내가 갑자년 6월에 잡혀 서울로 올라올 때에, 죽산 도중에서 계문을 만났는데, 그가 전일 사건 때문에 추가하여 다시 곤장을 맞고, 귀양살이하던 곳으로 돌아가던 길이다. 형체가 여위고 얼굴이 파리하여, 서로 보고도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가 짐짓 말[馬] 꾸짖는 소리를 크게 하므로, 그제야 계문인 줄 알았고, 울며 탄식하면서 작별하였다.

문성공의 후손인 명문으로서 / 文成之後是淸文
시와 예의 전통이 원래 근원이 있네 / 詩禮風流自有源
사나 죽으나 몸 보존한 것은 그대 뿐 / 生死保身知汝獨
4척 되는 외로운 무덤이 한강 남쪽에 있네 / 孤墳四尺漢南村
안처선 선지(安處善善之)는 고려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인데, 갑자년 4월에 병으로 죽었다. 몸과 무덤이 모두 화(禍)를 입지 않았다.

남방이라 서쪽 기러기를 만나기 어려운데 / 南塞難逢西雁來
밤 동안 비바람만 부질없이 재촉하네 / 夜床風雨漫相催
강호에 백발로 그대만이 있는데 / 白頭江湖唯君在
쌓인 회포 다시 풀길이 없네 / 懷抱無因得再開
남곤 사화(南袞士華)가 이때에 양덕(陽德)에 귀양가 있었다.

상산이 멀고 멀어 일천 봉우리 막혔는데 / 商山迢遞隔千岑
낙동강이 출렁거려 만 길도 넘네 / 洛水汪洋過萬尋
공건 못가 한 잔의 술을 / 公建池邊一杯酒
언제나 글 이야기하며 다시 들이킬꼬 / 幾時文字更奭深
권민수 숙달(權敏手 叔達)이 상주(尙州)에 귀양가 있는데, 지난 해 가을에 내가 그와 공건 못가에서 작별하면서 “공건 못가 한 잔 술이여, 가을 바람이 생이별의 슬픈 정을 돕네 公建池邊一杯酒 西風爲助生離悲”하는 시를 지었었다.

가을들자 구름끼고 비와서 갠 날 없으니 / 秋來陰雨不逢晴
울밑 국화가 걱정스럽네 / 愁殺東籬黃菊莖
아홉 번 죽다 살아난 몸 마음이 아직 있으니 / 九死一身心尙在
여생에나 태평시대 보려 하네 / 擬將餘齒看河淸
○ 사문 김명중(斯文金命仲)은 곧 우리 외가 4대조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 29)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통정(通政)에 이르렀는데, 벼슬살이가 청렴하고 깨끗하였다. 일찍이 풍덕 군수(豐德郡守)를 지내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집안 사람들이 관아(官衙)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 가지고 와서 후일에 마루에 깔았는데, 선조(先祖)가 보고 물어 알고는 노하여 책하고, 즉시 걷어 묶어 돌려보내려 하였다. 마침 이웃 친구가 보고 말리기를,
“돌려 보내는 것은 너무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두고 싶지 않으면 그것을 차라리 나를 주게.”
하니, 선조가 웃으며 주었다.
○ 성희안(成希顔)이 성종조 때에 과거하여 옥당에 들어가 가장 임금의 은총(恩寵)을 받았다. 부친의 상중에 있다가 상을 마치자, 불러 위문하고, 이어서 매(鷹)를 주며,
“이것으로 사냥하여 너의 모친을 봉양하라.”
하였다. 연산(燕山)이 왕위에 있을 때에 양화도(楊花渡) 놀이에 따라 갔는데, 연산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희안의 시에,
임금의 마음은 원래 청류를 사랑하지 않네 / 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연산이 노하여 이조 참판에서 부사용(副司勇)으로 강직(降職)시키고, 여러 해 동안 옮겨 주지 않았다. 희안이 연산의 음란과 포학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려는 것을 보고 개탄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으나, 다만 같이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으로서 걸출인데다가 일찍부터 귀하게 되어 무사(武士)들의 추앙을 받았다. 희안이 그와 일을 같이하고 싶었으나 서로 교분(交分)이 없었다. 이웃에 사는 무인(武人) 신윤무(辛允武)라는 사람이 원종과 친밀한 사이이므로 희안이 윤무를 시켜 은근히 뜻을 떠보도록 했었는데, 원종이 벌떡 일어나며,
“이것은 내 평소 간직해 오던 생각이로다.”
하고, 곧 희안과 더불어 의론을 정하였다. 또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시에 명망이 있으므로 알리지 아니할 수 없어 그 뜻을 말하니 순정이 따라 주었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 9월에 연산이 장차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 놀이를 가려하므로 희안 등이 그날을 기하여 성문을 닫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추대하면 일이 쉽게 되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 그 놀이를 정지하였다. 이때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모두 날뛰며 분발하여 저지시킬 수가 없었고, 또 날짜가 오래가면 계획이 누설될까 염려되어 모일(某日) 밤에 훈련원(訓鍊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함께 약속한 사람들과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왔다. 이에 돈화문(敦化門) 동구로 나아가 진을 치고, 역사(力士)들을 나누어 보내어, 연산의 죄악을 조장한 무리 임사홍(任士洪)ㆍ신수근(愼守勤) 등을 쳐죽이자, 궁중의 숙위(宿衛), 승지(承旨) 및 장수와 사졸들이 혹은 수채구멍으로, 혹은 담을 넘어 나와 다투어 진(陣) 앞에 모여 들어 궁중이 텅 비게 되었다. 그제서야 왕대비(王大妃) 윤씨(尹氏)에게 아뢰고, 진성대군을 받들고 들어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고, 융(窿)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현(喬桐縣)으로 추방하였다. 시장(市場) 사람들이 가게를 그대로 보고, 중외(中外)가 아무 일 없이 국가가 다시 안정된 것은 희안 등의 힘이었다.
○ 연산이 이미 폐위(廢位)되자, 대신들이 그를 안치(安置)시킬 절목(節目)을 의론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유배시켰는데 나인(內人) 4명, 내관(內官) 2명, 반감(飯監) 1명이 따라가고,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연산이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은 채 내전(內殿) 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았습니다.”
하고, 드디어 가마를 타고 선인문(宣人門)과 돈의문(敦義門)으로 나가는데, 갓을 숙여 쓰고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첫날은 연희궁(衍禧宮)에서 자고, 이어 김포에서 자고, 통전에서 자고, 강화에서 자고는, 교동현에 당도하였다. 호송한 장수 심순경(沈順經)이 복명(復命)하여 회계(回啓)하기를,
“무사히 모시고 갔는데, 일대(一帶)의 노소(老少)가 모두 달려나와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안치할 곳에 도착하니, 위리(圍籬)가 좁고도 높아 해를 볼 수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위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侍女)들이 모두 울부짖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자,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수고하여 고맙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전왕(前王)의 소식을 듣고 보니, 마음이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겠다. 내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위태로움과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로 여러 사람의 정에 못이겨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왕(前王)과는 한편으로는 군신이고, 한편으로는 형제이다. 지금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의복과 먹을 것을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은 이미 대의(大義)가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둘 수 없는 것이지마는, 전하(殿下)의 말씀은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내줌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전교하기를,
“교동에는 반드시 털옷과 어물이 없을 터이니, 따로 보내려 한다.”
하니, 아뢰기를,
“임금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너무 과하면 온당치 못하오니, 겨우 기한(飢寒)이나 면하게 하면 족합니다.”
하였다. 11월에 이르러 위장(衛將)이, 연산이 역질(疫疾)로 고통스러워 한다고 급히 장계(狀啓)하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려 하였으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그 시녀(侍女)들이 말하기를,
“연산이 마지막에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愼氏)가 보고 싶다’ 하였다.”
고 하였는데, 곧 그 비(妃)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후한 예(禮)로써 장사하고, 또한 조회(朝會)와 시장(市場)을 정지시키며, 묘지기를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대신들이 의계(議啓)하기를,
“장례는 왕자 군(王子君)의 예로 하되,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는 것과 묘지기를 두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러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상사(喪事)를 감독하여 거행하게 하고, 본 고을 원이 화재와 벌채를 금지하게 하라.”
하였다.
○ 공조 참의 겸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에 전왕(前王)이 인심을 크게 잃어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는데, 두서넛 대신이 천명(天命)과 인심에 순응하여 왕대비(王女妃)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고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못이겨 부득이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전왕을 공경히 받드는 정성이 더욱 돈독하시어, 재부(宰夫)를 시켜 음식을 감독하고, 사랑하던 궁녀로 하여금 모셔 따르게 하며, 장사(將士)를 시켜 호위케 하여 이외의 일을 방지하게 하였으며, 물품과 음식을 길에 잇달아 보냈으되, 불행히 역질에 걸려 갑자기 승하(昇遐)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애통하고 상심하시어 수라(水刺)를 폐하고 조회를 철폐하시며, 초상과 장사의 예절을 극진히 하려 하여 대신에게 의론하셨는데, 대신들의 의론이 의리에 합당하지 못한 듯 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일체(一體)이니,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노릇을 못하더라도 자식은 자식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순(舜)이 모든 일을 조심하여 고수(瞽瞍)를 뵈올 때 공경하여 조심조심하므로 고수도 믿고서 따랐다고 합니다. 어찌 고수가 완악(頑惡)하다고 하여 아들이 하여야 할 생전에 섬기는 일과 죽은 뒤에 장사하고 제사지내는 예절을 폐하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무너뜨리고 예를 방종히 하자, 이윤(伊尹)이 동궁(桐宮)에 추방하여 그가 뉘우쳐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만약 혹시 태갑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죽었더라면 초상과 장사의 예절을 어떻게 대처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ㆍ여왕(厲王)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하여 비록 나쁜 시호(諡號)를 주었으나 왕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전왕이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므로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내 줄 수는 없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위한 초상과 장사의 예절은 이와 같아서는 안 되니, 장사는 능(陵)의 의식(儀式)을 쓰고 따로 신주(神主)를 세우며, 중국에 부고(訃告)를 전하는 것이 정(情)과 의리를 지극하게 하는 것입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에게 있어서와 우리 태조(太祖)가 공양왕(恭讓王)에게 있어서 그 초상과 장사, 시호 올린 예(禮)를 또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 사신이 와서 만약 묻게 된다 하더라도 미리 계책을 마련해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 꾸며 대답하는 것은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에게 보이기를 정성으로써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중종이 명령하여 널리 의론하게 하였는데,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고, 유자광이 극력 그 말을 배척하여 법관에게 회부하여 그 본의를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朴元宗) 등은 근시(近侍)하는 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므로, 임금이 명령하여 경연관(經筵官)의 벼슬을 체직(遞職)시켰다. 양사(兩司)에서 그것은 언론의 길을 막는 것이라 하여 체직시키지 말자고 청하여 논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 연산의 비(妃)는 곧 신수근(愼守勤)의 누이 동생이었으며, 수근의 딸은 또 중종의 잠저(潛邸) 시절의 부인이었다. 바야흐로 연산이 방탕하였을 때에 수근이 정승이었고, 강귀손(姜龜孫)도 같이 정승으로 있었는데, 연산을 폐하고 중종을 세울 뜻이 있었다. 마침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조용히 수근에게,
“매부와 사위 중 어느 편이 더 친한가?”
하여, 그 뜻을 탐지해 보았더니, 수근이 얼른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영특하고 분명하니, 오직 그를 믿는다.”
하였다. 귀손이 아무 말도 못하고, 드디어 명 나라로 떠나면서 날마다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다가 돌아오기도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반정하던 날 박원종 등이 역사(力士)를 시켜 수근 및 그 아우 수영(守英)ㆍ수겸(守謙) 등을 쳐죽였다. 중종이 즉위한 이튿 날,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김수동(金壽童) 등이 유자광ㆍ박원종ㆍ유순정ㆍ성희안ㆍ김감(金勘)ㆍ이손(李蓀)ㆍ권균(權鈞)ㆍ한사문(韓斯文)ㆍ송일(宋軼)ㆍ박건(朴楗)ㆍ정미수(鄭眉壽)ㆍ신준(申浚) 및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의거(義擧)할 때에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궁중에서 모시고 있으니, 만약 중전(中殿)이 되게 되면 인심이 불안할 것이요 인심이 불안하게 되면 종사(宗社)에 관계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애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말이 심히 당연하오.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할꼬.”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계(大計)인데, 어찌 하리까? 청컨대, 과감하게 결단하여 지체하지 마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종사(宗社)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찌 사정(私情)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의론을 따르겠소.”
하였다. 그날 저녁에 신씨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나가 거처하였다.
○ 연산 때에 유빈(柳濱)ㆍ 이과(李顆)ㆍ 김준손(金駿孫) 등이 호남(湖南)으로 귀양가 있으면서 연산의 방탕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장차 위태로운 것을 보고, 중종을 추대하기로 계획하여 격문(檄文)을 서울에 전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반정이 되었다. 그 격문의 대략에,
“태조는 건국에 애쓰셨고, 세종은 정치가 아름답고 밝았다. 성종은 한결같이 선왕의 법도를 지켜 재물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이 안정되고 산물이 풍족해져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 뜻밖에도 사왕(嗣王)이 포학하고 무도하여, 부왕(父王)의 후궁을 매를 쳐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유배시켜 처형하며, 바른 말하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베에 죽이며, 대신을 형벌하고 욕보이며, 충성스럽고 어진이를 해치며, 부자 형제를 연좌시키되 진(秦) 나라 법보다 심하며, 남의 무덤을 파헤쳐 해골에까지 화가 미쳤는데, 마디마디 베는 형벌을 하고 뼈를 가루로 만드는 형별을 하니, 이 무슨 형벌인고.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음욕을 자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동산을 넓히며, 선왕의 능이 모두 여우와 토끼의 마당이 되고 선성(先聖)들의 사당이 모두 곰과, 범의 놀이터가 되었다. 거둬들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뿐만 아니라, 종실(宗室)과 형제의 아내와 첩을 협박하여 간통하게 하였다. 삼년상은 누구나 입는 복인데 잔인하게 그 기한을 짧게 하고, 부모의 기일(忌日)도 모두 파하여, 윤기(倫紀)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없어졌다. 기타 토목의 역사, 풍류와 여색의 즐김, 연못과 누대에서의 놀이와 사냥의 오락, 새 짐승과 화초의 탐호, 이루다 들 수 없으니, 한도대로 가득 찬 죄가 걸주(桀紂)보다 더하다. 민생들 일시의 고통은 아직 말할 것조차 없다.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임금의 자리를 노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다면, 역성(易姓)의 화(禍)도 있게 될까 또한 혹시라도 염려된다.
성종께서 26년 동안 경사(卿士)를 대우하고 충의를 배양(培養)한 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때를 위한 것이다. 진성대군(晉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아들이다. 현명하고 덕이 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기대하고 촉망(囑望)하여 칭송이 돌아가고 있다. 이에 모모(某某) 등이 진성대군을 추대하려 하여, 모월 모일에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각도에 격문을 보내어 기약한 날짜에 서울에 모이게 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공경과 백집사(百執事)들도 마땅히 속히 추대하여 종사(宗社)의 위기를 구제할지어다……”
하였다.
○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 2)에 참의 유숭조(柳崇祖), 행호군 심정(沈貞),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 극성(金克成), 상인(喪人) 남곤(南袞) 등이 비밀히 아뢰기를,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孼) 박경(朴耕), 유생 조광보(趙光輔)와 이장길(李長吉) 등이 박원종ㆍ유자광ㆍ노공필(盧公弼)등을 해치려 합니다.”
하므로, 대궐 뜰에서 국문하는데 낙형(烙刑)을 쓰기까지 하여 자백을 받았는데, 대신들을 해치고 조정을 혼란시키려 했다하여 김공저와 박경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초사(招辭)에 관련된 사람들은 등급에 따라 유배(流配)하였다. 조광보는 대궐 뜰에 잡혀와서도 큰 소리로 글을 외웠으며, 유자광을 보고는 크게 외치기를,

“자광은 소인인데, 어찌하여 이 자리에 앉았느냐? 무오년에 어진 사람들을 모함하여 해쳐서 김종직(金宗直)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화를 당하였는데, 지금 또 무슨 일을 하려 하느냐? 청컨대,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간사한 신하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성군(聖君)을 추대하여 어진 정승에게 정치를 맡기면 훌륭한 정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성희안이 묻기를,
“간사한 신하가 누구냐?”
하니, 조광보가 말하기를,
“바로 유자광이오.”
하고는, 박원종에게 말하기를,
“네가 성군(聖君)을 추대하여 반정(反正)하였으니 공이 과연 크다. 그러나 어찌하여 집안에 폐주(廢主)의 내인(內人)을 데리고 사느냐?”
하고, 또 성희안에게 눈짓하여 말하기를,
“전에 한훈(韓訓)이 너를 이름난 선비라 하였다. 지금 어찌하여 유자광과 일을 같이하는가?”
하고, 또 사관(史官) 강홍(姜洪)과 이말(李抹)을 가리키며,
“강홍아, 너의 부친이 죄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너희들이 사관(史官)이니, 마땅히 나의 말을 특별히 사기(史記)에 써야 할 것이다.”
하며, 곤장을 10여 대 맞고는, 다만 통곡할 뿐이었다. 박원종이 말하기를,
“참으로 미치광이이다.”
하고 놓아주었다.
고발한 공(功)을 논하여, 심정ㆍ남곤 ㆍ김극성 등을 가자(加資)하고, 유숭조는 일찍이 그 음모를 알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다가, 심정이 장차 고발한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이 발각될까 겁내어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아뢴 것이라 하여, 곤장을 때려 신문하고 멀리 귀양을 보냈다.
○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庶子)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는데, 용력(勇力)이 있어 갑사(甲士)에 속하였다. 이시애가 반역하였을 때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적 토벌에 나서기를 자청하므로 세조가 기특히 여겨 대궐 뜰로 불러 시험하였는데, 날쌔기가 원숭이와 같았다. 토벌에 종군하다가 돌아오자 심히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병조 정랑(兵曹 正郞)으로 있으면서 문과(文科)의 장원(壯元)에 뽑혔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자, 남이(南怡)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공신(功臣)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청성이 간사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성종이 허심탄회하게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자, 자광이 기회를 노려 이익을 도모하려 하여, 한명회(韓明澮)가 국구(國舅)의 지위를 기화로 외람한 뜻이 있다고 논하였는데, 성종이 그의 간사함을 알고 동래(東萊)로 귀양보냈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군수(成陽郡守)였을 때 자광의 시(詩)가 현판(懸板)으로 걸린 것을 보고, 그것을 뜯어 내어 불살라 버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자이기에 감히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다. 자광이 듣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종직이 임금에게 한창 총애와 신임을 받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고, 그가 죽자 제문(祭文)을 지어 조위하되, 옛날의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연산군 무오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었는데, 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고는, 그것이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이라 하여, 자광과 더불어 상세하게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고발하고,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종직을 대역죄로 처단하고, 그 문도(門徒)인 김일손(金馹孫) 등을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어, 당시의 명사가 모두 없어졌다. 자광이 그 옥사(獄事)를 국문하는데 참여하여 혹독하게 다루어 죄를 만들었으며, 죄를 의논하여 결정할 때에도 임금의 전교가 만약 더 엄중해지면, 자광이 그 전교를 전하는 내시(內侍)의 앞에 엎드려 아첨하는 추태를 가지가지로 부려서 사례하는 뜻을 표시하는 듯이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한 사람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추관(推官) 노사신(盧思愼)이 손을 흔들어 말리며 말하기를,
“무령(武靈)이 어찌 이렇게까지 말을 하시오.”
하자, 자광이 조금 주춤하였다. 전에 대궐 안각전의 액자(額字)를 김종직이 썼었는데, 자광이 모두 그것을 함양(咸陽)의 시 현판(懸板)을 불태운 보복(報復)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연산(燕山)의 비위를 맞추어 죄악을 조장하고 총애를 받으려 하여 또한 못하는 짓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할 때에 의론하기를,
“자광이 일을 많이 겪었고, 꾀가 많으니,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출발할 때에 비로소 사람을 시켜 알리면서, 만약 도망하거나 머뭇거리거든 쳐 죽이라 하였는데, 자광이 말을 듣자마자 곧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오며, 또한 하인에게 유둔(油芚) 비올 때 쓰는 우구(雨具))을 가지고 따르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진중(陣中)에 이르자, 무릇 장수와 사졸들을 지휘하여 보낼 때에 창졸간이라 표신(標信)을 삼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 곧 그 유둔을 잘라 표신을 만들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기지에 감복하였다. 공신(功臣)의 등급을 정하는 날에 자광이 원종에게 간청하기를,
“나는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공신에 참여되었으니, 오늘의 공은 자식 방(房)에게 양여(讓與)하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소.”
하니, 원종 등이 허락하였는데, 자광이 바로 그때 자신이 붓을 들고 공신의 기록을 맡고 있었고, 또한 그를 뺄 수 없으므로 부자(父子)가 드디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원종 등이 자광의 꾀에 떨어졌다 하였다.
중종(中宗) 초기에 공론이 신장(伸張)되자, 양사 및 옥당이 그의 죄악을 탄핵하므로 공훈이 삭탈되고, 서울 밖에 쫓겨나 죽었고, 그 아들 방(房)과 진(軫)도 모두 옳은 죽음을 하지 못하였다.
○ 유자광이 하루는 조정에 들어가서 소매 속에서 부채를 내어 두어 번 휘두르고는 느닷없이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괴상해, 이 부채에 쓰인 글이.”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혀 있는 글을 보여 주었는데, 위태로움과 멸망이 곧 다가온다 [危亡立至]는 넉 자였다. 그가 두세 번 손가락을 퉁기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대궐에 들어갔을 때에 처음 이 부채를 상자 속에서 꺼내어 쥐고 손에서 떠난 적이 없었는데, 누가 이 글을 썼단 말인가? 해괴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옆에서 듣던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었는데 얼마 후 쫓겨나 죽었다.
○ 정덕(正德) 무진년(1508, 중종 3)에 어필(御筆)로 정원(政院)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자기 허물 듣기를 좋아하는 이는 적고, 자기 허물 듣기를 싫어하는 이가 많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맞대고 간하여 바로 인도하는 사람을 곧은 신하라 하고, 그 임금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 아양을 떨며 잘한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아첨하는 신하라 하는 것이다. 옛적에 당 태종(唐太宗)이 밖으로는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는 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으니, 나는 그를 본받지 않는다. 만약 과실이 있으면 조정 밖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다 말 할 수 있은데, 하물며 임금의 말을 밖에 발표하고 밖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승정원임에랴, 지금부터라도 나의 잘잘못을 너희들이 각기 진술하여 숨기지 말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를 주지 않겠노라.”
하고, 이어서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 20개를 승정원과 예문관(藝文館)에 주면서 이르기를,
“지금 붓과 먹을 주노니, 무릇 나의 과실을 바로 쓰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 문종의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당초 안산(安山)에 장사하여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세조 병자년(1456, 세조 2) 성삼문 등의 난리 때에 왕후의 모친 최씨 및 그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극형(極刑)을 당하였으므로 인하여 왕후를 폐위(廢位)시키고 재궁(梓宮)을 물가에 옮겨 묻었는데,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겨우 그 위치만 알 정도였다.
성종조(成宗朝)에 포의(布衣)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여 복위(復位)하기를 청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목하여 미친 사람이라 하였다.
○ 종종 계유년(1513, 중종 8)에 이르러 양사와 옥당이 연합하여 청하기를 얼마 동안 하여 윤허를 얻어 지위와 칭호를 처음과 같이 회복하고, 좋은 날을 가려 현릉(顯陵 문종의 능)에 이장하였는데, 경내는 같으나 봉분이 다르다. 제조(提調) 송질(宋軼)ㆍ김응기(金應箕) 등이 역사를 마친 뒤에 아뢰기를,
“신 등이 당초에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모두 썩어버려 남은 것이 없을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땅을 파 보니 안팎 재궁(梓宮)이 모두 있고 염습(斂襲)이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다만 형체만 있기에 새 재궁, 새 의복으로 바꾸어 모든 일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또한 개렴(改斂)할 때에도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이 따라와 있었지만, 이런 지극히 중대한 일을 직접 살피지 아니할 수 없기에 신 등이 직접 염습(斂襲)을 살폈습니다.”
하였다.
○ 안남국(安南國) 사신 완장(阮莊) 등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왔다가 옥하관(玉河館) 문에 시를 쓰기를,
봉황은 보통 새와 달라 / 鳳凰異衆鳥
오색이 찬란한 옷을 입었네 / 五采耀毛衣
울음도 화하게 천 길이나 날면서 / 噦噦翔千仞
언제나 어진 덕 보기를 바라네 / 常懷覽德輝
우연히 황금 궁궐에 날아 왔다가 / 偶來集金闕
둘러 보더니 슬픈 생각을 하네 / 顧㴐生悽悲
하물며 가을 서리가 차가워 / 況復秋霜肅
온갖 초목이 날로 시드네 / 百卉日俱腓
오동나무 그늘이 이미 엷어졌고 / 梧桐陰已薄
대나무 열매 또한 드무네 / 琅玕實亦稀
지금은 소소(簫韶)를 연주하지 않으니 / 簫韶又不奏
한탄스럽다 어디로 갈거나 / 嘆息何所依
날개를 펼치고 구름 위로 나가 / 振翮凌雲去
다시 남쪽 하늘로 나네 / 更傍南天飛
하였다. 이때가 정덕 계유년(1513, 중종 8)이었다.
○ 정덕 병자년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고, 좌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연산에게 한 제문에는 이르기를,
“내가 조그마한 몸으로 나라 운수가 비색한 때를 당하였소.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에게 부대끼어, 사양해도 되지 않아 이렇게 되었오. 조심스러움과 부끄러움 실로 깊으니 내 마음 어찌 다함 있으리. 끝까지 우애하여 나의 뜻을 펴려 했는데, 한번 병 나자 그만이었으니, 하늘이여! 어찌 이다지도 모지신고. 세월이 흘러 갈수록 추모의 마음 더욱 간절하오. 이에 사람 보내어 제사 드리며, 공경히 나의 정곡을 고합니다. 제수야 지극히 박하지만, 나의 정성을 살펴 주기 바라오.”
하였고, 노산에게 한 제문에는 이르기를,
“내가 신(神)과 사람의 주(主)가 된 지 이제 거의 12년이 되어가오. 덕은 비록 부족하지마는 신(神)과 사람에게 같이하려 하오. 생각해보니, 외로운 무덤이 멀리 동쪽 시골에 있어, 향화(香火)가 적막한 지 거의 60년이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진실로 불쌍하오. 고금의 인사가 어느 것이 천운 아니리오. 황폐한 무덤의 수리도 천운이 있는 것이오. 환히 보시는 조종들이 나의 마음을 묵묵히 이끌어주시기에, 조정 신하와 의논했더니 또한 모두 말이 같았소. 하늘과 사람의 뜻이 맞아, 잃었던 절차를 즉시 거행하여 묘 지키는 사람을 두고 사철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소. 이에 연유를 들어 신하를 보내어 고하노니, 나의 정성을 양해하여 박한 제수나마 흠향(歆享)하오.”
하였다.
○ 정광필(鄭光弼)이 뜻이 크고 후덕하여 도량이 있었는데,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한 번 보고 정승의 그릇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때에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극균이 총재관(摠裁官)이었는데, 광필의 관직이 겨우 학정(學正)인 것을 발탁하여 도청(都廳)의 책임을 맡기고 편찬 임무를 일임하였다. 연산군 때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잡혀오게 되어 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이 울면서 전송하는데 별안간 임금이 폐위되고 새 임금이 들어섰다는 기별을 전하는 사람이 있자, 좌중이 모두 기뻐하여 소리치며 질서를 잃었으나, 광필은 조용히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다.”
하고는, 고기 접시를 물리치고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옛 임금의 생사를 알 수 없구나.”
하니, 보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성희안이 일찍이 말하기를,
“신용개(申用漑)가 백이라도 정광필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
하고, 천거하여 자기의 교대로 정승을 삼았다.
○ 처음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元子)를 낳은 지 수일 만에 세상을 떠나 중전(中殿) 자리가 비어 있었다. 순창 군수 김정(金淨), 담양 부사 박상(朴祥)이 마침 조정에서 직언(直言)을 구하므로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신씨(愼氏)가 죄 없이 폐출(廢黜)을 당한 것은 박원종 등이 공(功)을 믿고 마음대로 하여 전하로 하여금 즉위의 시초에 부부의 도리를 바르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극력 논하고, 또 ‘첩을 처로 만드는 법이 없다’고 진술하여, 신씨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고 곧았다. 이행(李荇)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주창하기를,
“신씨의 가례(嘉禮)가 장경왕후(章敬王后)보다 먼저였으니, 지금 만약 복위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원자(元子)의 지위가 난처해진다.”
하여, 김정ㆍ박상의 의론을 사론(邪論)이라 지목하자, 대사헌 권민수(權敏手) 등이 찬동하여 그들을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신의 옹호로 다만 귀양보내는 데에 그쳤다. 이때에 박빈(朴嬪)이 미(嵋)를 낳아 나이 장성하였고 총애가 후궁중에 으뜸이었으므로, 분수 밖의 왕비 자리를 엿보고 있었으니, 김정 등이 신씨의 복위(復位)를 청한 것은 비단 반정하던 당초의 처지가 잘못된 것을 바루려고 한 것만이 아니라, 대개 박빈(朴嬪)의 간교한 꾀를 미연에 방지하려 한 것이었는데, 이행(李荇) 등의 못된 의견이 이러했던 것이다.
뒤에 조정암(趙靜庵)이 정언 (正言)이었을 때에 맨 먼저 ‘이행 등이 언관(言官)으로서 도리어 바른 말한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여 언론의 길을 막았다’고 논하여 탄핵하였다. 이행이 이로 말미암아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김안로(金安老)는 옥당에 있으면서 양편이 다 옳다는 의론을 주장하다가 경주 부윤으로 나가게 되었다.
○ 중종이 일찍이 경연에서 《예기(禮記)》를 강론하다가 의론이 진여공(秦厲公)의 사실에 미치게 되자, 강관(講官) 김광(金硡)과 기준(奇遵) 등이 은연히 연산(燕山)을 위해 후사를 세워야 하는 뜻을 암시하고, 영의정 정광필 또한 그런 뜻을 넌지시 암시하므로, 임금이 다른 대신에게 자문하여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에게 입후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아울러 의론하게 하고, 또 홍문관과 예조로 하여금 옛 제도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의론의 일치하지 않아 그만 두고, 다만 노산군 부인 송씨와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의 생전에는 관(官)에서 제수를 내려주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뒤에 한산 군수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군과 연산군을 위해 입후할 것을 청하고, 또 미(嵋)가 죽임을 당한 죄상이 명백하지 못한 것을 논하여 뉘우치고 깨우치는 뜻을 표시하기를 청하였는데, 미(嵋)는 곧 왕자 복성군(福城君)이다. 이보다 앞서 김안로가 박빈(朴嬪)이 세자(世子 인종)의 몸에 재앙이 있으라고 방술(方術)을 하였다는 것으로써 옥사를 일으켜 박씨와 미가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등을 불러 이약빙의 상소를 보이며 전교하기를,
“이 세 가지 일은 비록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기휘(忌諱)에 저촉될까 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지극히 귀한 일이다. 권세 있는 간신이 세력을 잡고 겉으로는 동궁(束宮)에 핑계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속으로는 사사로운 독심을 품고 해쳐서, 박(朴)의 죄로 인하여 미(嵋)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위에서 비록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나 어떻게 제지할 수 있겠는가. 미의 죄는 실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 딸자식 하나가 민간에 있는데, 이미 장성하였으나, 사족(士族)들이 혼인하여 줄 사람이 없다. 내 생각으로는 미를 복직시키면 그의 딸이 사족(士族)과 혼인할 수 있을 것이요, 나의 뒤늦게 뉘우치는 뜻을 사람들이 모두 알 것이다. 이약빙의 이 의론은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우는 큰 도리이다.”
하였는데, 윤은보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노산군ㆍ연산군의 일은 다시 의론할 수 없고, 미의 죄명(罪名)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속적(屬籍)에서 끊어졌으니, 경솔하게 의론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유인숙(柳仁淑), 대사간 신거관(愼居寬) 등이 번갈아 글을 올려 논박하기를,
“약빙이 노산군ㆍ연신군을 위해 입후(立後)하게 하려고 이런 부정한 의론을 말하였으니, 지극히 흉악합니다. 미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한 것인데, 약빙이 여태자(戾太子)를 죽였다가 뒤에 후회안 한 무제(漢武帝)의 일을 인용하기까지 하여 전하께서 뉘우치기를 바랬으니, 지극히 도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청컨대,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따랐는데, 홍문관에서 곧은 말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에 말이 부당하다 하여 말한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언로의 길을 막는 것이라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다투므로 약빙이 죄를 면하게 되었다.
노산군ㆍ연산군을 위해 입후하자는 한 가지 일인데도 조정의 앞뒤 의론이 서로 다르기가 이와 같았다.
○ 정덕 무인년에 양사ㆍ옥당ㆍ예문관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소격서(昭格署)를 없앨 것을 청하고, 대신도 아뢰었으나, 여러 날이 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광조(趙光祖)가 면대(面對)를 청하여 극력 논하고, 다음날에 또 관원을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네 번이나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광조가 추연(楸然)한 기색으로 동료에게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어 대간들이 모두 이미 물러 갔는데, 우리들이 비록 죄책을 당하게 되더라도 마땅히 정성을 다해서 간하여 밤새도록 물러가지 말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로 하자.”
하였다. 얼마 후 말씀하시기를,
“이 일은 나도 어찌 생각이 없으리오마는, 다만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내일 대신들을 불러 의론하여 혁파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광조 등이 죄를 당하자,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 20)에 대비(大妃)의 병환으로 인하여 대신을 불러 다시 세울 뜻을 말하므로, 정광필 등이 의론하기를, 이미 혁파한 것이니, 다시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임금이 다시 의론하게 하므로, 광필 등이 두세 번이나 불가하다고 하다가, 최근에는 아뢰기를,
“위에서 그것이 불가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대비(大妃)를 위하여 이와 같이 하교하시니, 신 등이 감히 다시 의론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드디어 다시 세웠다.
○ 을묘년 봄에, 대간이 여악(女樂)을 혁파하기를 계청(啓請)하였는데, 예조에서 의정부와 함께 의론하여 아뢰기를,
“여악을 쓴 것을 삼대(三代) 이상은 알 수 없으나, 옛글을 상고하면 궁중에서 썼습니다. 지금 내전 (內殿)에서 쓰는 여악은 폐할 수 없으니, 청컨대, 지방의 여악만 폐지하고, 경기(京妓)는 폐지하지 마소서.”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서울의 기생까지 아울러 폐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내전(內殿)의 연회 때 대신 쓸 것이 없다 하여, 대신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폐지하지 않고 말았다.
○ 정덕 기묘년 2월 어떤 사람이 무슨 글을 건춘문(建春門)에다가 활로 쏘아 붙여 놓았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익명서(匿名書)는 열어볼 수 없는 것이나, 다만 궐문(闕門)에 쏘아 놓은 것이므로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권벌(權撥)을 불러 입대(入對)시키고 말하기를,
“지난 달 비원(秘苑)에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처음에는 새 잡으려다 오발한 것으로 의심하였다가 가져다 살펴보니, 화살의 허리를 끊었다가 도로 합치고 그 속을 비게 하여 글을 넣었는데, 조정의 일을 말한 것으로서 그 글이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모일(某日)에는 의정부에 화살을 쏘았고, 모일(某日)에는 연추문(延秋門)에 방서(榜書)를 붙였는데도, 떼어 보지 않은 까닭에 또 여기에 쏘아 운운한 것이니, 이것은 필시 모두 한 사람의 짓이다.”
하자, 권벌이 아뢰기를,
“10여 일 전에 과연 글을 매달아 의정부 문에 쏘았었는데, 사인(舍人)이 그것을 익명서라 하여 곧 불태웠으며, 사헌부의 문에도 쏘았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았던 이 글을 대신에게 보이려 하다가 그 꾀에 빠질까 하여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궐문에 쏜 것도 알고만 있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경연에서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의(講義)하게 되어, 강의를 담당할 만한 사람들을 뽑아 미리 강습하게 하였는데, 남곤ㆍ김안국ㆍ이자ㆍ김정ㆍ김세필(金世弼)ㆍ조광조ㆍ신광한ㆍ김정국ㆍ 유운ㆍ김구ㆍ홍언필ㆍ김식ㆍ한충ㆍ박세희ㆍ기준ㆍ정응(鄭譍)ㆍ장옥ㆍ조우(趙佑)ㆍ이희민(李希閔)ㆍ황효헌(黃孝獻)ㆍ권운(權雲)ㆍ이충건(李忠楗) 등이 참여하였으니 모두 22인이었다.
○ 정부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3정승 정광필ㆍ신용개ㆍ안당(安瑭) 등이, 김극성(金克成)은 문무(文武)를 겸하여 중요한 임무를 담당할 만하고, 성운(成雲)과 이기(李芑)는 재기(才氣)가 쓸 만하고, 이기는 또한 국경의 방비에도 합당하며, 이행(李荇)은 쓸 만한 재주가 있는데, 한때 탄핵 당한 것 때문에 아주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 부당하며, 김식ㆍ정완(鄭浣)ㆍ 박훈(朴薰)ㆍ박영(朴英)은 재주와 품행이 있다고 천거하였다.
○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 14)에 의정부와 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역대의 선비를 뽑는 법이 제도가 각기 달라 두루 열거하기는 어려우나, 오직 서한(西漢)의 효렴과(孝廉科) ㆍ현량과(賢良科) 등이 가장 옛 제도에 가깝고, 또 그 선거하는 방법도 《사기(史記)》를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삭(元朔) 원년(기원전128)에 군(郡)ㆍ국(國)과 현관(縣官)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문학을 좋아하고 장상(長上)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엄숙히 여기고 향리(鄕里)에서 순량(順良)하여 사회에 나가서나 가정에 들어서나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지방 관리가 소속 상관에게 보고, 그 상관은 그럴 만한 사람을 잘 살펴 연말 회계보고 문서를 가지고 오는 관리와 함께 보내라.’ 하였고, 건무(建武) 12년(36)에 삼공(三公)ㆍ광록훈(光祿勳)ㆍ감찰어사(監察御史)ㆍ사예(司隸)ㆍ주목(州牧)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해마다 무재(茂才) 사행(四行)에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라.’ 하였는데, 사행(四行)이란 것은 순후(淳厚)ㆍ질박(質樸)ㆍ겸손(謙遜)ㆍ절검(節儉)을 말하는 것입니다. ‘군(郡)ㆍ국(國)의 무재(茂才)가 회계보고 관리와 함께 중앙에 오면 천자가 나와서 친히 책문(策問)을 한다…….’ 하여, 선발하는 조목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모방하여, 재주와 행실이 겸비된 쓸 만한 사람을 서울과 지방에서 그 명성과 실지를 조사하여 널리 천거하게 하되, 서울에서는 사관(四館)에서 전담하여 유생과 조사(朝士)를 물론하고 성균관에 천거하면,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고, 중추부ㆍ육조ㆍ한성부ㆍ홍문관에서도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예조에 이문(移文)하게 하며, 지방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그 고을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시 잘 살펴서 예조에 이문하게 하여, 예조에서 서울과 지방의 천거한 사람을 합쳐 그 성명 행실을 기록하여 정부에 보고하여 위에 아뢰게 하고, 전정(殿庭)에서 책문(策問)으로 시험하는 모든 일은 그 임시에 계품(啓稟)하게 하되, 혹 명성과 실상이 어긋나서 잘못 천거하는 폐단이 있을 것도 염려되니, 추천한 사람의 성명도 아울러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기묘년 4월 10일에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서 친히 책문하였는데, 입시한 사람이 모두 1백 20명이었다. 혹은, 그 중에서 또 58명을 선발했다고 한다. 책문(策問)하기를,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덕이 없고 혼매한 몸으로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 받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오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요순(堯舜) 정치의 재현을 목표로 한 지가 지금 14년이 되었으나, 정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여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민생이 날로 더욱 곤궁해지니, 내가 그윽히 마음 아프게 여기노라. 그 원인을 구명하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겠는가? 백성이 편안해지고 산물이 풍족해지며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여 요순의 정치가 회복되게 하려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오제ㆍ삼왕(五帝三王)의 도(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인지라, 사대부(士大夫) 중에 반드시 그 대체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각각 자신들이 평소 가진 포부(抱負)를 모두 기록해 내라. 내가 장차 친히 보겠노라.”
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신용개(申用漑) 등이 시권(試券)의 등급을 매겨 장령(掌令) 김식(金湜) 등 28인을 선발하여 입계(入啓)하니, 전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그 덕분에 안녕하도다’ 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어진 인재를 널리 구해 들여 조정에 나열해야 한다. 그리고 김식은 어진 사람이니, 이 사람을 뽑아 유생들의 스승되는 관직을 맡기려 하였는데, 혹 선발에 참여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지금 장원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내가 특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였다. 신용개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비단 김식뿐이 아니라, 이름 있는 인재가 많이 참여되어 신들도 매우 기뻐합니다.”
하니, 또 전교하기를,
“지금 뽑힌 사람들이 진실로 모두 선비이지만, 내가 더욱 기뻐하는 것은 김식이 장원된 것이다.”
하였다.
○ 선왕조(先王朝)로부터 무릇 어전(御前)에 입시했던 사람들이 파하고 나올 때에는 아래 앉은 사람부터 먼저 나오는 것이 전례였다. 정덕(正德) 기묘년에 검열(檢閱) 신잠(申潛)이 경연(經筵)에서 사관(史官)이 먼저 나가는 것이 사체(事禮)에 타당치 않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임금이 옳다 하고, 대신에게 의론하여 위에 앉은 사람부터 먼저 나오는 것으로 규정을 삼았다.
○ 정덕 기묘년에 사인(舍人)이 3정승의 뜻으로 아뢰기를,
“조강(朝講) 때, 영사(領事 영경연사領經筵事)의 인원수가 많고 병고가 없다면 번번히 입시(入侍)할 수가 있지만, 근자에는 인원수가 매우 적어 혹 병고가 있게 되면 사세가 번번히 입시하기 어렵겠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예(例)로 보면 영사(領事)가 없어도 조강(朝講)을 하였으니, 지금 이후로는 영사가 비록 사고가 있더라도 역시 조강을 폐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옳다. 조강 때에 영사가 연고가 있으면 의정부의 다른 당상관(堂上官)이 대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명종(明宗) 초년에 대신이 의론하여 영사가 연고가 있으면 지사(知事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대신 들어가게 되었다.
○ 북경에 갔던 사신이 지은 문견록(聞見錄)에,
“정덕 무인년(1518, 중종 13) 5월 15일에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에서 흰 용 한 마리와 검은 용 두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입으로 불길을 토하며, 뒤따라 뇌성 번개가 치고 바람과 구름이 휘말아 일어나므로 부근 민가 3백여 호와 배 수십 척이 공중으로 날아 들어가다가 땅에 떨어져 분쇄(粉碎)되었다…….”
하였다. 그날 우리 나라 서울과 지방에 지진(地震)이 크게 일어나 종묘(宗廟)의 기왓장이 날아가고 대궐 안 담장이 무너졌으며, 민가가 혹 무너진 것도 있어 남녀 노소가 모두 밖으로 나와 눌려 죽는 것을 면하였다. 임금이 삼공(三公)ㆍ육경(六卿)ㆍ양사(兩司)ㆍ옥당(玉堂)ㆍ예문관( 藝文館)을 불러 자문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는데,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고 삼공ㆍ 육경이 파하고 나가면 양사가 잇따라 들어가고, 또 옥상과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이 차례로 입대( 入對)하였다.
기묘년 6월에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가 치계(馳啓)하기를,
“경주에서 올린 보고에 의하면, ‘이달 6일에 해가 막 서쪽으로 지고 달빛이 매우 밝은데, 번개 같으면서도 번개가 아니고, 불 같으면서도 불도 아니며, 혹은 나는 화살이 공중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흐르는 별이 급히 스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붉은 뱀이 날뛰는 것 같고, 혹은 불티가 날리는 것 같으며, 혹은 구부정하여 활맨 것 같고, 혹은 갈래져 비녀 토막 같기도 하여, 갖가지로 변화되는 모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잠깐 나왔다 잠깐 없어지고 이리 몰렸다 저리 쫓아갔다 하며 번갈아 발동하고 차례로 나타나 연속 끊어지지 않았으니, 대개 포(砲)를 쏘는 상황과 같았다. 광채가 대단히 번쩍거려 어두운 방을 환히 비쳤는데, 서쪽에서 시작하여 점차 동북으로 향했으며, 2경(二更)이 다 지나서야 없어졌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경상도 밀양부(密陽府) 저대리(豬代里)에 있는 큰 버드나무가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 에 풍우(風雨)로 인하여 쓰러졌는데, 3년이 지난 무인년 6월 10일에 크게 천둥치고 비가 오자 그 버드나무가 도로 일어났다. 그 나무가 높이는 37척이나 되고 둘레는 두 아름이었다. 금상(今上) 임진년(1592, 선조 25)에 통진현(通津縣)에서도 버드나무가 쓰러졌다가 1년이 지나 도로 일어섰었는데, 현감(縣監) 이수준(李壽俊)이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대사헌 조광조가 아뢰기를,
“장인 이윤형(李允泂)이 영종(永宗) 임소(任所)에서 죽었는데, 장성한 자제가 없으니, 초상 장사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 기묘년 6월에 승지(承旨)로 하여금 직접 들어와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임금이 편복(便服)으로 편전(便殿)에 나와 있으면 승지와 주서(注書) 및 사관(史官) 두 사람이 들어가 아뢰고 물러 나왔으며, 작은 일이면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출납(出納)하게 하였다. 또한 국기일(國忌日)에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임금이 천담복(淺淡服)을 입었으며, 일을 아뢰는 신하들도 천담복으로 입시하였다.
○ 기묘년 7월에 중국을 모방하여 서점을 설치하고, 소격서(昭格署)의 유기(鍮器) 및 헐린 사찰의 유기와 종(鐘) 등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 책을 인출하게 하고, 또 공사(公私)의 흥조( 興造)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였다.
○ 기묘년 7월에 승지 한충(韓忠)을 보내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균관에 가서 관원과 유생들을 대접하고, 또 제술(製述)을 시험보였다. 이튿날 관원들이 유생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동지사(同知事) 조광조와 윤탁(尹倬), 대사성 김식(金湜) 등을 인견(引見)하고, 또 유생 이세명(李世銘)ㆍ박광좌(朴光佐)ㆍ김경란(金景鸞) 등 3인을 지정하여 글을 강론하게 하고, 강론이 끝나자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혹 대답하기도 하고 혹 대답하지 못하기도 하자, 임금이 웃었다.
○ 정덕 기묘년에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원자(元子 곧 인종인데 그때 나이 5세였다)의 글 읽는 것을 보는데, 보양관(輔養官) 남곤(南袞)과 조광조 및 승지ㆍ사관(史官)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원자가 강사직령(絳紗直領)에다가 옥띠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으며 두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책상을 대하는데, 의젓하여 성인(成人)과 같았다. 《소학(小學)》을 줄줄 읽으며 훈고(訓詁)를 분석(分析)하는데, 음성이 인후(仁厚)하였다. 사관이 가만히 임금의 안색을 보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 기묘년 9월에 임금이 문묘(文廟)에 잔 드리기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여, 동지사(同知事) 윤탁, 대사성(大司成) 김식, 사성(司成) 이득전(李得全), 이조 정랑 정옥형(丁玉亨)에게《주역(周易)》〈태괘(泰卦)〉를 강론하게 하고, 첨지(僉知) 신광한(申光漢)과 윤자임(尹自任), 사인(舍人) 민수천(閔壽千), 장령(掌令) 박훈(朴薰)에게 《상서(尙書)》〈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게 하고, 또 생원 이약빙(李若氷)과 이종경(李宗慶)과 최경홍(崔景弘) 등에게 《대학(大學)》을 강하게 하되, 모두 문의(文義)를 논란(論難)하고 더러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많은 선비들이 문에 둘러 서서 보고 들어,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 정덕 기묘년 10월에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죽었다. 임금이 예(禮)에 의하여 거애(擧哀)하려다가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이 어렵고 중대하게 여기므로 행하지 못하였다. 뒤에 조광조가 입대하여 이르기를,
“신용개가 죽었을 때에, 상께서 거애하려다가 도로 중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듣건대,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 세종께서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하였는데, 지금도 듣는 사람이면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일에 하교하신 뜻이 매우 아름다운데, 대신들이 곡할 만한 별전(別殿)이 없다고 하였다. 하니,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순종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함이 심합니다.”
하였다. 세종이 유관ㆍ유정현(柳廷顯)의 초상에, 금천교(金川橋) 밖에 장막을 설치하고 행했으며, 처음부터 별전에서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의 예관(禮官)이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정덕 기묘년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8도의 감사에게 모두 솔권(率眷)하게 하고 3년 만에 체직하였다. 부윤이 있는 곳은 부윤의 직을 겸임하게 하고 없는 곳은 계수관(界首官)을 판목사(判牧使)로 하비(下批)하였다. 그리고 경상도는 좌우도로 나누고, 경기는 예전대로 경영(京營)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뒤에 조광조 등이 무너지자 도로 복구하였다.
○ 기묘년 10월에 대사헌 조광조,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 김인손(金麟孫), 지평(持平 ) 조광임(趙光任)ㆍ이희민(李希閔),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사간 유여림(兪汝霖),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 김익(金釴)과 이부(李阜) 등이 합사(合司)하여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아뢰기를,
“병인년 반정(反正)때에 공신(功臣) 녹훈(錄勳)을 너무 지나치게 하여 등급을 4등까지 나누어, 공도 없으면서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익의 구멍이 한번 열리자 사람마다 이익을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어 후폐(後弊)를 막기 어려우니, 청컨대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들을 삭제하소서.”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김구(金絿). 전한(典翰) 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수찬(修撰) 심달원(沈達源),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김명윤(金明胤)과 권장(勸檣)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고, 대신과 육경(六卿)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여, 양사(兩司)가 사직(辭職)하기까지 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중대하고 어렵다는 뜻으로 타일렀다. 조광조가 그것을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극력 간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에 예조 판서 남곤(南袞)이 영릉 봉향사(英陵奉香使)되기를 자청하여 나갔는데, 1품의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큰일에 당하여 관망(觀望)하여 회피하니, 심히 사특합니다. 재상(宰相)의 마음씀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고,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및 양사의 장관을 불러 의론하여, 정국 공신(靖國功臣) 2등과 3등 중의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 및 4등 전부를 삭제하였다.
뒤에 조광조 등이 죽임을 당하자, 삭제하였던 공신을 도로 환원시켰다.
○ 기묘년 11월 15일 밤 2경(二更)에 비밀 전교를 내려,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여러 재상(宰相)들을 불러 들이면서 승정원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과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검열(檢閱) 이구(李構) 등이 듣고 합문(閤門) 밖으로 달려가 보니,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 공조 판서 김전(金詮), 예조 판서 남곤, 병조 판서 이장곤(李長坤),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화산군(花山君) 심정(沈貞), 병조 참지(兵曹參知) 성운(成雲) 등이 촛불을 밝히고 앉았고, 군사들이 둘러 싸고 서 있었다. 심정과 성운은 직소(直所)에서 와 모였다. 자임(自任)이 묻기를,
“정원(政院)에서 모르는데 들어 온 것은 웬일이오.”
하니, 심정이 답하기를,
“표신(標信)으로 부르시므로 왔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내시(內侍)가 성운(成雲)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성운을 승지에 제수하였으니, 빨리 입대(入對)하랍시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였는데, 성운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자임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미리 알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만 내시의 말만 듣고 감히 들어가려는 것이오?”
하였으나, 성운이 듣지 않고 들어가려 하자, 안정이 말리기를,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관(史官)은 같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성운이 어찌 감히 혼자 들어가려는 것이오. 우선 기다려야 하오.”
하고, 드디어 뒤따라 합문(閤門)에 이르러 그의 띠를 붙들고 같이 들어가려 하는데, 성운이 안정의 팔을 뿌리치고 들어갔다. 내시가 문지기를 꾸짖기를,
“왜 잡인(雜人)들을 금하지 않는고?”
하고는, 드디어 같이 안정을 붙들어 내보냈다. 삼정이 안정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임금께서 매우 화내신 것 같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성운이 나와 소매 속에서 종이 쪽지를 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이것은 어필(御筆)인데, 이 사람들을 곧 의금부에 가두라 하십니다.”
하였는데, 이때 이장곤이 판의금(判義禁)을 겸임하였음. 쪽지에 쓰인 성명은 곧 윤자임ㆍ공서린ㆍ안정ㆍ이구 및 응교 기준,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했던 사람들임.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을 모두 대궐 뜰에 잡아왔다. 어떤 이가
“수상(首相)에게 알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하므로, 그제서야 정광필을 명소(命名)하여 입대시키고 조광조 등의 죄안(罪案)을 보이게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중대한 일이어서 경솔하게 의론할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의 의론을 모아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초하여 하자, 남곤이 앞으로 나가 붓을 잡고 엎드렸다. 이때에 다만 승지 성운과 가주서(假注書) 심사순이 입시하였다. 다 쓰고서 임금 앞에 바치니, 보고 나서 전교하기를,
“죄안(罪案)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광조등 8인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죄인에 이르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자기네에게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네와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을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국론(國論)이 전도(顚倒)되고 정치가 날로 그릇되게 만듦으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며,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등은 광조 등의 무리와 더불어 괴이하고 과격한 풍습을 서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였다.”
고 하였다. 죄인 가운데, 처음에는 ‘임금을 속이고 사심을 부렸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아뢰어 삭제하였으며, 이자의 죄명(罪名)이 김식의 위에 있었는데, 광필이 또한 아뢰어 벗겨 주었다. 이날 밤 이조 판서 남곤, 대사헌 유운(柳雲), 대사간 윤희인(尹希仁), 승지 김근사(金謹思)와 성운은 모두 임금의 특명으로 제수하고, 인하여 옥당ㆍ양사를 모두 체직시키라고 명령하였는데, 광필이 체직시키지 말기를 청하여 두세 번 아뢰니, 임금이 다만 옥당의 관원만 체직시키지 말 것을 허락하였다.
조광조 등이 이미 옥에 갇히자, 공초(供招)를 받아 입계(入啓)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이미 의론을 정하였으니, 형장(刑杖)을 쓰지 말고 조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조율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 네 사람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승지 김근사를 탑전(榻前)으로 불러 판부(判付)를 쓰기를,
“조광조ㆍ김정은 사사(賜死)하고, 김식ㆍ김구는 장 1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먼 곳에 부처(付處)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령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사관(史官)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대한 처분을 다시 의론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다시 의론하여야겠다.”
하였다. 광필 등이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근사가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하니, 이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켜고 있었다. 광필이 전교를 듣고, 촛대를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며 곧 입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이 직책에 있은지 또한 오래되었지만,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기 때문에 사리(事理)를 몰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약간의 중한 죄를 주는 것이라면 신등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광필이 아뢸 때에 눈물이 흰 수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연 중한 일이니,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하겠소.”
하고, 승지 성운을 불러 하교하기를,
“광조 등 4명은 곤장을 쳐서 먼 곳에 안치하고, 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도록 하라.”
하니, 성운이 판부(判付)를 써 가지고 물러났다. 광필이 빈청으로 물러 나와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이미 죽음을 면하였으니, 이것은 천지와 같은 은혜입니다. 다만 모두 병약(病弱)한 자들인데, 만약 곤장을 맞고 멀리 가게 되면 중도에서 죽을지도 알 수 없으니,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되고 죽음을 면해 준 실상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며, 다섯 차려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또 성운에게 하교하기를,
“금부에 가서 광조 등을 뜰에 끌어내어 나의 뜻을 전하되,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던 신하로서, 본시는 임금과 신하가 마을을 같이하여 지치(至治)가 이루어질까 기대하였다.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어질지 않은 것도 아니나, 다만 근래에 와서 모든 일이 잘못되어 정상(正常)으로 되지 아니하여, 조정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은 어찌 편하겠으며, 조정 대신도 어찌 사심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취할 만한 사람들인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그 잘못은 내가 시초에 밝지 못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데에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죄를 만일 율문(律文)대로 처단한다면 어찌 이에 그치고 말겠느냐. 마땅히 중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너희들이 사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나라일을 하기 위하여 그 과격한 허물을 자신이 모른 것이다. 그러므로 감등(減等)하여 죄주는 것이다. 만약 보통 죄수라면, 이렇게 타이를 필요도 없겠지만 너희들은 시종하던 사람으로서 지금 다만 일을 그르쳤을 뿐이므로 이 뜻을 알린다.’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조광조의 무리를 만약 율문대로 한다면 그 죄가 심히 중하지만, 특별히 관대한 법을 써 감등하여 죄를 준다는 내 뜻을 자세히 전하라.”
하였다. 성운이 금부에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한 뒤에 회계(回啓)하기를,
“다른 사람은 하는 말이 없었고, 오직 조광조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이번에 가더라도 임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 등이 과연 과격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이약빙(李若氷) 등이 상소하여 광조 등이 죄없음을 밝히고, 서로 거느리고 대궐 뜰에 들어가 통곡하니,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곡성이 어디서 들려 오느냐?”
하고 묻자, 정원(政院)에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유생들 하는 짓이 심히 해괴하다. 과장(科場)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죄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대궐 뜰을 어찌 함부로 들어와 통곡한단 말이냐. 5~6인을 잡아 가두어 징계하고, 또한 금군(禁軍)을 시켜 몰아내라.”
하였다. 이약빙 및 윤언직(尹彦直)ㆍ박세호(朴世豪)ㆍ김수성(金遂性)ㆍ황계옥(黃季沃) 등 다섯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생원 임붕(林鵬) 등이 또한 상소하여 조광조의 일을 말하고, 또한
“어제 유생들이 옥에 갇혔는데, 신 등이 홀로 편안하게 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백 명이 모두 대궐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3일 만에 임금이 명령하여 약빙 등을 석방하고, 그들의 상소에 답하기를,
“광조 등의 애초의 뜻이 어찌 국사를 그르치려 하였겠느냐. 위에서도 지치(至治)를 보려고 기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이들이 과격한 일이 많으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대신도 조정을 안정시켜려 한 것이지, 참소하는 사특한 사람이 군자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광조 등이 귀양가고 나자, 뭇 소인들이 득세하였다. 황계옥ㆍ윤세정(尹世貞)ㆍ이뇌(李耒) 등 세 사람이 상소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 등 8인을 베자고 하여, 시론(時論)에 영합하였는데, 말이 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황계옥이 처음에 광조를 구원하려다가 옥에 갇혇었는데, 한 달도 되지 못하여 또 반드시 용서없이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심술의 고약함이 이와 같았다.
○ 유운(柳雲)이 조정암(趙靜庵) 대신으로 대사헌에 제수되자, 사헌부의 동료 및 사간원 관원들과 더불어 모두 취임하지 않고 연명(連名)으로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모두 철없고 경솔하기 때문에 다만 성상께서 말마다 들어주고 계책마다 들어 주는 것을 믿었었는데, 하루 아침에 죄를 주니, 신 등이 그 연유를 모르겠으며, 전 대간을 까닭없이 모두 체직시킨 것도 신 등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드시 조 광조 등을 다시 등용한 후에야 신 등이 취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사람을 형벌하는 것도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해야 하고, 속이거나 비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일이 간사한 무리들의 밀계(密啓)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들으니, 위에서 비밀히 홍경주(洪景舟 경주는 순빈(順嬪)의 아버지)에게 명령하시기를, ‘지금 조광조 등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다. 전일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할 때에 내 생각에 매우 좋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것은 당파를 심으려고 한 짓이다. 지금 현량과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나, 다만 경(卿)의 사위 김명윤(金明胤)도 그 가운데 있으므로 하지 못한다.’ 하셨다 하여,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임금의 권력으로 두세명의 서생(書生)을 죄주는 것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어두운 밤에 비밀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셨습니까? 겉으로는 친하고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제거할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위태롭고 망할 징조인 것입니다. 신 등은 통곡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대간(臺諫)이 잘못 들은 말이다. 당초에 홍경주가 남곤ㆍ송철(宋鐵) 김전(金詮) 등의 집에서 무사(武士)들이 결당(結黨)하여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로 인해 같이 의론하기를 ‘이렇게 되면 장차 큰 변이 생기겠다.’ 하여, 조정에서 직접 이와 같이 하였으니, 광조 등에게는 복이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조정의 깊은 생각으로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운이 끝내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다. 유운이 젊었을 때 과거하였는데, 활달하여 기절이 있었다. 물러가 시골에 살면서 시국을 개탄하여 술을 함부로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 정덕 기묘년(1519, 중종 14) 11월 21일에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덕에 밝지 못하여 한갓 정치를 잘 해 보려는 뜻만 간절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있지 못하여, 사람을 쓰고 버릴 때에 크게 잘못됨이 있었으니, 내가 심히 부끄러워 한다.
전에 조광조ㆍ김정ㆍ김구ㆍ김식ㆍ윤자임ㆍ박세희ㆍ박훈 등이 모수 시종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성리학(性理學)을 아침저녁으로 강의하고 권하므로, 내가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보좌하여 성취시킬 만하다 하여, 좋은 벼슬을 가려서 주고 계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 주었으니, 내가 대우하여 준 것이 그들을 저버렸다고 할 수 없거늘, 뜻밖에도 광조 등이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으로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조종(祖宗)들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노성(老成)한 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하며,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이를 의론하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극구(極口) 배척하여 반드시 굴복시켜 자기들을 따르게 하여 국록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그릇되게 만들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탄식하면서도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의 소행을 살피건대, 마침내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이 이미 나타나 용서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다스려 백관(百官)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다만 전일에 시종하던 것을 생각해서 특별히 경감(輕減)하여, 광조 등 이하를 각각 그 죄대로 죄주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랴? 이러한 의론을 정부는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모두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전지(傳旨)는 남곤이 기초한 것이었다.
대사헌 이항(李沆),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합사(合司)하여 대궐에 나아가, 안당(安瑭)ㆍ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김안국(金安國)ㆍ유운(柳雲)ㆍ김정국(金正國)ㆍ조광좌(趙光佐)ㆍ이충건(李忠楗)ㆍ유용근(柳庸謹)ㆍ신광한(申光漢)ㆍ정순붕(鄭順朋)ㆍ한충(韓忠)ㆍ정응(鄭譍) 최산두(崔山斗)ㆍ장옥(張玉)ㆍ이희민(李希閔)ㆍ이청(李淸)ㆍ양팽손(梁彭孫)ㆍ구수복(具壽福)ㆍ정완(鄭浣)ㆍ이연경(李延慶)ㆍ이약빙(李若氷)ㆍ권진(權磌)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ㆍ김광복(金匡復)ㆍ조언경(曹彦卿)ㆍ유인숙(柳仁淑)ㆍ윤광령(尹光齡)ㆍ권장(權檣)ㆍ파릉군 경(巴陵君儆)ㆍ시산정 정숙(詩山正正叔)ㆍ장성수 엄(長城守儼)ㆍ숭선부정 최(嵩善副正)ㆍ강녕부정 기(江寧副正祺) 등 36인을 단자(單子)에 써서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고 또 현량과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중종이 양사 장관(兩司長官)을 인견(引見)하여, 황계옥 등이 조광조를 주벌할 것을 청한 소(疏)를 보이고 하교하기를,
“조정에 만약 공론이 있다면 유생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랴.”
하고, 또 영의정 정광필ㆍ좌의정 김전(金詮) 등을 불러 입대하게 하여, 대간이 올린 단자 및 황계옥 등의 소를 보이며 말하기를,
“근일에 재변(災變)이 거듭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죄주기를 청하는 일을 어떻게 할꼬?”
하자, 광필이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고, 김전도 또한,
“근본되는 사람을 이미 죄주었으니, 그 나머지는 반드시 낱낱이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더니, 이튿날 전교하기를,
“당초에 그 수괴(首魁)를 처단하였더라면 나머지 당(黨)은 비록 다스리지 않더라도 풍습이 절로 발라졌을 것이다. 대신이 국가의 일 보기를 남의 집 일 보듯하여 배회(徘徊)하고 관망하여 잘잘못을 결정하지 못하니, 이것은 사세를 보아 저 사람들의 죄 받음이 경하고 중함으로써 후일 자기 처신의 계책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무를 다루는 데 비유하건대, 근본이 이미 끊어지면 지엽(枝葉)은 절로 마르는 것이다. 대간이 근본 다스리기를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지엽만 다스리려고 하니, 이것은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상과 우상을 빨리 체직시키고, 새로 다른 정승을 내는 것이 옳다.”
하고, 당일에 어필(御筆)로 남곤ㆍ이유청(李惟淸)을 좌상ㆍ우상으로 삼아 바로 불러 비현각(丕顯閣)에 입대하여, 광조 등에게 죄를 더 줄 뜻을 말하고, 또 금부 당상(禁府堂上) 심정(沈貞)ㆍ손주(孫澍) 등을 불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에게는 사사(賜死)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라.”
하였다. 남곤ㆍ유청ㆍ심정 등이 아뢰기를,
“4인 가운데서도 마땅히 분별하여 괴수만 죄주면 족합니다.”
하고, 손주는 아뢰기를,
“4인을 모두 절도 안치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와 같은 은덕을 보여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금부옥(禁府獄)에서 불공한 말을 한 것만으로도 죽을 만하니,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절도 안치하게 하라.”
하고, 또 남곤ㆍ유청으로 하여금 어전(御前)에서 양사(兩司)가 죄주기를 청한 사람들은 경중을 나누어 죄주게 하여, 유용근ㆍ최산두ㆍ정응ㆍ정완 등은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최숙생ㆍ이자ㆍ양팽손ㆍ이약빙ㆍ이희민ㆍ이연경ㆍ윤광령ㆍ이충건ㆍ조광조ㆍ송호지와 호례 등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안당ㆍ김안국ㆍ유운은 파직시켰다.
○ 남곤이 대제학으로 정승에 제수되었으므로 대제학을 사면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누가 후임이 될 만한 사람이오?”
하고 물으니, 남곤이 아뢰기를,
“죄를 받고 있는 사람 중에 적합한 사람이 두어 사람 있는데, 새로 죄를 받은 사람으로 오직 이행(李荇)이 매우 적합하나, 벼슬의 계자가 낮습니다. 그러나 세종조에 신색(申穡)ㆍ신석조(辛碩祖)가 수 대제학(守大提學)이 된 일이 있는데, 이행은 아직 가선(嘉善)의 계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적합한 사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이행의 계자를 가선으로 올려 수 대제학으로 제수하였다.
○ 한충(韓忠)이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에 충청도로 근친(覲親)하러 가는 길에 진위현(振威縣)을 지나다가, 선비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소매속에서 긴 글을 꺼내었는데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나열하였고, 또한 그 언론이 기특하고 잘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길게 읊고 가버렸다. 한충이 매우 혹하여 그를 숨어 있는 어진 인재인 줄 알고 조정에 돌아와 그 글을 아뢰니, 임금이 지방에 유시를 내려 찾아보도록 하였다. 뒤에 들으니 그의 성명이 권탁(權鐸)인데, 전에 연산군이 사랑하는 후궁 장숙원(張淑媛 장녹수)의 집에서 서제(書題)로 있으면서 세력을 끼고 못된 짓을 방자하게 하던 자였으니, 한충이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림(士林)의 화(禍)가 일어나자, 이빈(李蘋)ㆍ유관(柳灌) 등이 한충이 임금을 속였다고 탄핵하여 잡아다 국문하고 장을 때려 거제(巨濟)로 귀양보냈었는데, 신사년(1521, 중종 16)에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귀양간 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공이 뜰 가운데 나와 꿇어 앉아 전지(傳旨)를 듣고 나서 임금의 기체(氣體)가 어떠한가를 물은 다음, 세 정승ㆍ여섯 판서의 성명을 물었으며, 목욕하고 새옷을 입고 자못 태연하였다. 금부도사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기색이 있자, 공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은 조서(詔書)를 안고 전사(傳舍)에 엎드려 우는 이도 있었는데, 어찌 그리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함과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참된 충정을 비추리.”
하고는,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끈으로 목을 졸랐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제주에 귀양간 지 일년 남짓이었을 때에 집의(執義) 김인손(金麟孫), 사간 채소권(蔡紹權) 등이 죄를 더 주기를 청하여 죽음을 내렸다. 죽을 때에 글을 짓기를,
먼 땅에 와 외로운 혼이 되니 / 投絶國兮作孤魂
모친과 떨어져 천륜이 막혔네 / 遺慈母兮隔天倫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이 죽으니 / 遭斯世兮隕余身
구름을 타고 상제의 문턱에 들르며 / 乘雲氣兮歷帝閽
굴원을 따라가 높이 소요하리 / 從屈原兮高逍遙
긴 밤의 어둠이여! 언제 아침이 되려는가 / 長夜晏兮何時朝
빛나는 참된 충심 초야에 묻어버리네 / 耿丹衷兮埋草萊
당당한 장한 뜻이 중도에 꺾어지니 / 堂堂壯志兮中道摧
천추만세에 응당 나를 슬퍼하리 / 千秋萬歲兮應我哀
하였다.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에 귀양갔었는데, 또한 김정과 동시에 죽음을 내렸다.
인종(仁宗)이 왕위에 오르자, 태학생(太學生) 박근(朴謹 어떤 책에는 근(瑾)이라 하였다.) 등이 상소(上疏)하여 조광조의 학술(學術)은 바른데, 선왕(先王)이 뭇 소인에게 속았다는 것을 극력 논하고, 직첩(職帖)을 도로 주어 선비들의 추향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겨 칭찬하였으며, 정신(延臣)들 중에도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신중히 하기 위하여 급하게 시행하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기준 등의 복직(復職)과 현량과(賢良斗)를 복구하는 일을, 나는 그것이 선왕 때의 일이라 하여 천천히 할까 하였는데, 지금 나의 병이 이러하니, 그것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광조 등을 모두 복직시키고, 현량과도 도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명종(明宗) 초년에 이르러 이기(李芑)가 계청(啓淸)하여 도로 그 과거(科擧)를 없앴는데, 금상(今上)이 또 다시 명령하여 현량과를 복구시키고,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 조정암이 이미 죄를 당하자, 조정에서 현량과를 없앨 것을 의론하는데, 집의(執義) 유관( 柳灌)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과거를 처음 뽑을 때에,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자기네와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시취(試取)하는 날에도 예조에서 ‘이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장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여, 서리(書吏)를 시켜 들어오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한심한 일이 있습니까. 비록 그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조정이 없는 사람이 많았고, 시험장에 참여시킨 일이 또한 매우 공정하지 못하였으니, 속히 파직시켜 임금을 속인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였고, 정언 조침(趙琛)이 말하기를,
“당초 계책을 내어 이 과거를 시행하게 한 사람이 안당(安瑭)입니다.”
하였으며, 영상 정광필이 말하기를,
“처음 이 과거를 설치할 때에 보니,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나 능히 말리지 못하였는데, 뽑아 놓고 보니, 과연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개 우리 나라 인심은 중국처럼 순박하지 못하여 후폐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당초 개시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거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신이 듣지 못하였고, 안당이 주장하였다는 것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신용개(申用漑)ㆍ최숙생(崔淑生)이 그 의론을 극력 주장하였고, 안당은 자기 아들이 뽑혔을 때에 현저한 조행이 없다 하여 피혐(避嫌)하였습니다. 어찌 자기 아들을 위하여 그 과거를 설치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뒤에 용개도 후회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나의 처음 계책이 잘못이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한형윤(韓亨允)이 말하기를,
“이 과거는 처음에 널리 인재를 취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임금께서 믿고 허락한 것인데, 마침내는 그 수(數)를 줄여 뽑아, 대개 모두 세력에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건의한 사람들이 모두 기염(氣焰)이 강성하여, 장순손(張順孫)ㆍ조계상(曹繼商)이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모두 쫓겨나는데도,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몸을 아껴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처음에 그릇 건의하였다가, 지금 그 폐단을 알았으니, 마땅히 속히 파하자고 아뢰어야 할 것인데, 파할 수 없다고 말하니, 어찌 이와 같은 통분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처음 설치할 때에 그것이 조종(祖宗)의 법이 아니요, 또 후폐가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미 뽑고 보니 쓸 만한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그 인재를 애석히 여겨 파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의론을 어찌 구차히 남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이항(李沆)이 말하기를,
“김식(金湜) 등은 처음부터 과거를 싫어한 사람이 아닙니다. 재주가 짧고 학문이 부족해서 반드시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소수를 뽑아서 그들을 취한 것입니다. 금번에 이 과거를 파해 버리지 않으면 간당(姦黨)을 심으려는 권신(權臣)이 반드시 이것을 빙자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관이 말하기를,
“김식은 전연 글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승지 김희수(金希壽)가 말하기를,
“어찌 김식이 전연 글을 모른다 합니까? 신이, 그가 고문(古文) 중에서도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곳을 반드시 능히 분석하여 해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이봉(李芃) 뒤에 이름을 미(薇)로 고쳤는데, 기(芑)의 아우다.) 이 말하기를,
“조종(祖宗)들이 몰래 도우시고 전하께서 마음을 깨우치시어,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는 줄 알고 숙청하셨는데도 대신들이 하나도 전하의 자손 만세(萬世)의 계책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일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을 깎아 추리는 것이 본시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개정하기까지 청하더니, 금번 국가의 대계(大計)는 위태로움과 멸망이 관계되는 일이로되 힘껏 하지 않습니다.”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못나 어떻게 하면 국사가 좋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현량과를 파하여야 되겠습니까? 지금 백관을 인솔하고 간하는 일을 신은 능히 알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면 대신으로 하여금 백관을 인솔하고 그 사람에게 죄를 더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까? 태평한 시대에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과거는 파하지 말고 다만 현직(顯職)에만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가, 끝내 파하였다.
○ 경진년(1520, 중종 15) 4월에 이신(李信)이 승정원에 와서 고하기를,
“김식이 선산(善山)의 귀양살이에서 도망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아들 덕순(德純) 및 문객(門客) 김윤종(金胤宗) 등으로 하여금 남곤ㆍ심정ㆍ홍경주 등을 제거하려 합니다.”
하였다. 이신은 본시 낙안(樂安) 고을의 관노(官奴)였는데, 젊었을 때 노역(奴役)을 파하여 중이 되었다가, 김식이 제자를 모아 도학(道學)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문하(門下)에서 공부하기를 청하고 머리를 기르고, 김식의 집 담 밑에 토굴을 파고 거처하고 《대학(大學)》을 배우면서 뜻을 세워 부지런히 공부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특히 여겼다. 김식이 죄를 당한 뒤에도 오히려 따라 다니더니, 서울에 올라와 반역을 고발한 것이었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와 묻고는, 8도에 글을 내려 인상(人相)을 적고 현상(懸賞)하여 잡게 하였는데, 5월 16일에 김식이 거창(居昌) 지경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따라 다니던 사람 우음산(于音山)이 본현(本縣)에 고하므로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고 관찰사가 치계하였다.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김식의 얼굴을 아는 사람과 같이 가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시(檢屍)한 후에 그 처자 등을 석방하였다.
○ 정덕(正德) 경진년(1520, 중종 15) 4월에 왕세자(王世子 곧 인종이니,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다.)를 책봉하였다. 하례(賀禮)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며 백관에게 가자하였다. 그 책봉한 교명문(敎命文)에,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자를 세우는 것은 실로 큰 근본이 되는 것이요, 종묘의 제사를 받드는 일은 마땅히 원량(元良)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너(□인종의 어휘(御諱))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네가 도(道)를 즐기고 스승을 높이며 어진 이를 친애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여, 능히 삼선(三善)의 교훈을 명심하여 온 나라의 아름다운 운수를 오래 가게 하라.”
하였다. 성세창(成世昌)이 지어 바쳤음.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자(嫡子)를 세워 하늘의 떳떳한 법을 따르는 것은 예로부터의 큰 명분(名分)이요, 명호(名號)를 정하여 백성의 마음이 우러러볼 데가 있게 함은 나라를 소유한 이의 공통된 규례(規例)이다. 이에 옛법을 상고하여 귀중한 전례(典禮)를 거행하노라. 아아, 너 원자(元子) 모(某)야, 자질이 온순하고 재주가 있으며, 마음이 깊고 넉넉하다. 효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찍부터 어버이에게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학문은 배우지 아니하여도 성취하는 공이 높을 것이다. 마땅히 동궁(東宮)자리를 차지하여 왕실(王室)의 큰 업(業)에 경사가 많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노니, 아아, 이 명령을 공경하고 명심하며 왕업(王業)의 계승이 어렵다는 것을 길이길이 생각하여, 착한 일을 부지런히 하여 혹 하루라도 게을리 함이 없게 하여, 마음 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선왕에게 누(累)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정사룡(鄭士龍)이 지어 바쳤음. 사룡의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본관은 동래인데, 벼슬이 판중추였다.
○ 참판 김세필(金世弼)이 한번은 경연에 입시하여 강론할 때에 아뢰기를,
“조광조를 항시 신임하고 총애하다가 하루아침에 죽음을 내렸으니, 지극히 참혹합니다.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서 누가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김전, 좌상 남곤, 우산 이유청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들으니, 지난날 경연에서 한 재상(宰相)이 ‘조광조에게 죄를 준 것이 그르다.’ 하였다 합니다.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와 같이 말을 하였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홍숙(洪淑)과 대사간 조방언(趙邦彦) 등이 합사(合司)하여, 의금부에서 추국하기를 청하여 끝내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홍숙은 자가 순부(純夫), 본관은 남양인데, 벼슬이 당상이요,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조방언은 자가 빈지(贇之), 본관은 한양인데, 벼슬이 공조 참판이었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동궁 근처에 쥐를 구워 방술을 한 일이 있었고, 또한 허수아비를 만들어 목패(木牌)를 달되 동궁에 대한 흉한 말을 썼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잡아 국문하자, 박빈(朴嬪)이 한 짓이라고 지목하므로, 박빈 및 복성군(福城君) 미(嵋)에게 죽음을 내리고, 두 옹주는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며,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는 곤장을 맞아 죽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외지로 귀양보냈으며, 좌의정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하였다 하여 또한 사사(賜死)하였다. 이외에도 연루되어 죄를 당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광필이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가 사건이 명백하지 못한 의심이 있고, 또 왕실의 지친(至親)을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구원하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이 일을 주장하여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옥사를 만들어 그 기회에 평일에 자기와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모함한 것이다. 심정은 악행을 쌓아서 죄가 넘치니 천도는 본래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비록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받은 것이나, 이 사건으로 죄를 다하게 된 사람들 중에 불복하는 자가 있었다.
이듬해 계사년에 또 대궐 안 대간청(臺諫廳)에 허수아비를 달고 목패를 걸어 흉한 말을 썼다. 장령 채무택(蔡無擇), 정언 정종호(鄭從濩) 등이 발견하고, 즉시 아뢰기를,
“홍여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있어 또 전일의 계획을 시험해 보아 인하여 전일의 일을 발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삼공ㆍ양사ㆍ금부 당상을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고, 또 노성(老成)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할 수 없다 하여 영부사(領府事) 정광필을 아울러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목패에 쓰인 자획(字畫)과 무릇 한 짓을 보면 전일의 목패와 서로 같으니, 대간(臺諫)이 아뢴 그 여당이 전일의 일을 발명하려 한 것이라는 말이 또한 과히 틀리지 않는 듯하나, 다만 전일에 홍가가 자기가 썼다고 자복하고 죽었는데, 이 필법이 전의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죽은 자가 다시 와서 썼단 말인가. 아마도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자의 소행일 것이다. 지난번 목패에 쓴 것을 국문한 사람들이 또한 모두 보았을 것이니, 각각 말해보오.”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혹은 글씨의 체가 상당히 같다고도 하고, 혹은 서로 같은지 알 수 없다고도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익명서(匿名書)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전일에는 동궁에다 하였기 때문에 놀라 국문하였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에 소각해 버리면 조정이 절로 진정될 것 같소.”
하였다. 광필이 나와서 아뢰기를,
“큰 옥사(獄事)를 자주 일으킬 수 없으니, 태워 버리자는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인심이 이러하고 큰 옥사가 자주 일어나니 근래에 천변(天變)이 매우 많은 것이 이 때문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장순손(張順孫), 좌상 한효원(韓效元), 우상 김근사(金謹思) 등은 모호하게 어물거리며 다만 임금께서 재단하시기만을 청하였다. 예조 판서 김안로가 말하기를,
“지금 글씨체를 보니, 전일의 글씨와 같이 익숙하지 못하여 전일의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沈彦光)이 말하기를,
“위에서 글씨 체가 서로 같다고 의심하시는 것은 매우 안 될 일입니다. 윗사람의 뜻이 이러하시면 아래 사람들은 반드시 추측하여 전일의 사건을 헛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홍여 및 복성군과 두 옹주에게 죄를 정할 때에 모두 전하의 뜻으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어버이와 자식의 사이는 지극한 정이 있어서 동요되기 쉬운 것이므로, 이것은 반드시 박씨 및 두 옹주의 집 사람들이 한 짓으로서, 혼란시켜 전일의 옥사를 의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일 국문할 때에 빠진 사람이 매우 많았고, 당시의 추관(推官)들은 물의(物議)가 지금도 비등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상진(尙震)이 말하기를,
“그 목패를 보면 배치하여 시행한 것이 전일과 꼭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비록 천금을 준들 어찌 차마 쓰겠습니까. 두 옹주가 모두 서울 안에 있으므로 그 하인들이 근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시골로 보내어 하인들이 따라 가게 하면 화가 차츰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무택(無擇)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죄인을 잡아 국법으로 통쾌하게 처단하였는데, 지금 또 이런 짓을 하여 양사가 보는 곳에 걸어 놓았으니, 사실을 혼란시키려는 계책이 분명합니다. 위에서 그것을 전일의 목패에 쓰인 것과 같다고 의심하시나, 신이 자세히 보건대, 전후에 쓴 글씨의 서투르고 익숙함이 전연 같지 아니합니다. 비록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죽는 경우가 있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추궁한 다음 그만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안로와 무택 등이 반드시 같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전일에 이미 자기가 썼다고 자복하여 죽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집의 김희열(金希說), 사간 윤풍형(尹豐亨), 장령 유세린(柳世麟), 지평 안현(安玹)ㆍ김미(金미亹), 헌납(獻納) 임붕(林鵬), 정언 정종호(鄭從濩)ㆍ최보한(崔輔漢) 등이 모두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다만 현상(懸賞)하여 잡게 하며, 김인경의 처는 남편이 귀양사는 곳으로 따라 가게 하고, 홍여의 처는 문밖에 거주하게 하였다. 심언광ㆍ상진의 무리가 합사(合司)하여 두 옹주의 집 하인들을 국문할 것을 다섯 번이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으므로 물러갔다.
부제학 권예(權輗), 직제학 남건(南建), 전한(典翰) 조인규(趙仁奎), 응교 이임(李任), 부응교 허항(許沆), 교리 성윤(成倫)ㆍ하계선(河繼先), 부교리 황기(黃琦), 부수찬 홍춘경(洪春卿), 박사 홍섬(洪暹)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기를,
“정광필이 말하기를 ‘여러 번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천변(天變)이 이 때문에 일어난다.’ 하니, 지극히 이치에 어긋난 말입니다. 광필이 박씨에게 친척이라 핑계하여 결탁함이 매우 친밀하므로, 공론이 비루하게 여겼으며, 권세 부리던 간신(奸臣)이 패하게 되자, 왕래하면서 구호하고, 홍여의 옥사에 있어서도 요리조리 임금의 비위를 맞추더니, 이제와서는 다시 천재(天災)를 끌어다가 전하를 속이니,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 사람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광필의 말이 참으로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체통을 얻은 것인데, 정당한 사람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공공연하게 비방하여 배척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옛말의 이른바, ‘현명한 임금을 속이는 자’들일 것이다. 홍여(洪礪)는 본관이 남양(南陽)인데, 중종의 둘째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인경(仁慶)은 본관이 광산인데, 중종의 첫째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에게 장가들었다. 두 옹주는 모두 경빈(敬嬪) 박씨의 소생이다.


 

[주D-001]잠저(潛邸) : 창업(創業)의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잠룡(潛龍)이라고도 함.
[주D-002]능연의 …… 그리리 : 당 태종(唐太宗)이 능연각에 공신(功臣)의 화상을 그렸다.
[주D-003]태백(泰伯)과 중옹(仲雍) : 주(周)의 태왕(太王)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태백(泰伯)ㆍ중옹(仲雍)ㆍ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은 아들 창(昌=뒤에 문왕)이 있었는데 태왕이 계력에게 전위(傳位)할 생각을 두자 태백과 중옹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형만(荊蠻)으로 도망갔다.
[주D-004]무일도(無逸圖) : 무일(無逸)은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인데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임금은 안일(安逸)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한 글이다. 후세의 신하들이 임금에게 그 글을 그림으로 그려서 바친 것이 있다.
[주D-005]복호(復戶) : 충신, 효자, 절부(節婦)가 난 집의 조세나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주던 일.
[주D-006]사포(賜酺) : 포(酺)를 준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며칠 동안 주식(酒食)을 마음대로 먹고 즐기도록 허가하고 관(官)에서 음식을 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주D-007]옛날 베를 …… 뽑아버린 사람 : 공의휴(公儀休)가 노(魯)의 정승으로 있을 때 집안에 심은 아욱나물을 뽑아 내버리면서 “내 집에서 이것을 심어 먹으면 채소 심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하였다. 또 집에 베를 잘 짜는 부녀가 있었는데, 그는 “내 집에서 베를 짜면 촌여자들은 어찌하겠는가?” 하고 부녀를 내보내었다는 고사.
[주D-008]문비(問備) : 대관(臺官)의 물음에 피문자(被問者)가 그 사정(事情)을 갖추어 진술(陳述)하던 일. 조선조 중기(朝鮮朝中期)에 행하던 제도로 벼슬아치 중에 과오를 범한 자가 있으면 대관(臺官)이 서독(書牘)으로 문난(問難)하였으니 이것을 함사(緘辭)라 하고, 피문자(被問者)는 대관(臺官)의 말이 과연 옳다고 인증될 때에는 역시 서독(書牘)으로 그 사정(事情)를 갖추어 진술하여 굴복하는 뜻을 보이거나, 혹은 스스로 밝혔으니 이것을 함답(緘答)이라 한다. 추고(推考)는 바로 문비(問備)의 유의(遺意)였던 것이다.
[주D-009]옛사람이 ……온 일 : 옛적에 임금이 천리마(千里馬)를 구하려고 연인(燕人)에게 천금(千金)을 주어 보냈는데, 가보니 천리마가 죽었으므로 죽은 천리마의 머리를 5백 금에 사가지고 왔다. 임금이 노하니, 연인이 대답하기를, “죽은 천리마의 머리를 5백 금에 사 왔으니, 앞으로 산(生) 천리마가 올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 말대로 천리마가 세 필이 왔다 한다.
[주D-010]금궤(金匱) : 국가의 비서(秘書)를 간직한 궤이다.
[주D-011]운검(雲劍)을 가진 장수 : 큰 연회 등의 식(式)이 있을 때에 고관(高官) 등 무사(武士)가 칼을 메고 임금의 좌우에서 모셨음.
[주D-012]삼포(三浦) : 이조 세종(世宗) 때 왜인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개항(開港)한 웅천(熊川)의 제포(濟浦),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 이 세 곳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의 교통ㆍ거류(居留)ㆍ교역(交易)의 처소로 삼았음.
[주D-013]초나라 …… 옥패 : 정지보(鄭之甫)가 한수(漢水) 가에서 신녀(神女)를 만나 옥패(玉佩)를 얻었는데, 신녀와 작별하자 옥패가 곧 유실되었다.
[주D-014]통에 얽은 5색 끈 : 굴원(屈原)이 5월 5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자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날에 음식을 만들어 물에 던져 굴원을 제사지냈다. 어떤 사람의 꿈에 굴원이 나타나서 “나에게 던진 음식은 교룡(蛟龍)들이 먹어 버리니, 이후에는 연엽(蓮葉)에 싸서 오색 실로 끈을 얽어 넣어 달라.” 하였다.
[주D-015]광릉산 : 거문고의 곡조. 진(晉) 나라 해강(嵇康)이 형(刑)을 당하여 죽을 때에 거문고를 가져오라 하여 광릉산 한 곡조를 타고는 “내가 이 곡조를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해 주지 않았더니, 이제는 영영 세상에서 없어졌다.” 하였다.
[주D-016]아양 :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음곡을 알아 주는 사람이 종자기(鍾子期)였다. 백아가 고산곡(高山曲)을 타니, 종자기가 듣고 “아, 산이 높구나[山巍巍]”하고, 또 유수곡(流水曲)을 타니, 종자기가 듣고 “아, 물이 출렁거린다[山洋洋]” 하였다.
[주D-017]상방검(尙方劍) : 왕이 쓰는 칼로 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상서(上書)하여, “상방검을 빌려 주시면 영신(佞臣) 장우(張禹)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음.
[주D-018]어진 덕 …… 바라네 : 옛글에 “봉황새가 천 길[丈]높이 날음이여! 덕의 빛[德輝]을 보아 내려 오네.” 하였다.
[주D-019]소소(簫韶) : 옛날 순(舜) 임금이 만든 풍류 이름.
[주D-020]조서(詔書)를 …… 우는 이 : 동한(東漢) 때에 오도(吳道)가 범방(范謗)을 체포하라는 조서(詔書)를 받아 가서는 차마 죄없는 명사(名士)를 체포할 수 없어서 조서를 안고 전사(傳舍) 역정(驛亭)에서 문을 닫고 엎드려 울었다.
[주D-021]굴원 : 전국(戰國) 때 초(楚) 나라 사람.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참소로 강빈(江嬪)에 귀양가게 되자, 어부사(漁父辭) 등 편을 지어 자기 뜻을 보이고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동문선 제21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삼각산(望三角山)


오순(吳洵)

허공에 우뚝 솟은 세 송이 푸른 부용 / 聳空三朶碧芙蓉
아득한 연기와 안개는 몇만 첩인가 / 縹緲煙霞幾萬重
문득 생각하나니 지난 그 때에 다락에 기댔을 때 / 却憶當年倚樓處
소사의 두어 번 종소리에 해가 졌었느니 / 日沈蕭寺數聲鍾


 

[주D-001]소사(蕭寺) : 양무제(梁武帝)가 절을 많이 지었는데, 그의 성이 소씨(蕭氏)이므로 절을 소사(蕭寺)라 하였다.

동문선 제1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벽송정(碧松亭) 삼질놀이[碧松亭禊飮]


권채(權採)

벽송정 아래 삼각산 밑에 / 碧松亭下華山陲
맑은 구름 가벼운 바람 해도 더디게 가네 / 雲淡風輕日正遲
왕희지 계를 닦던 곳과 똑같은 모임 / 宛似羲之脩禊處
증점이 읊고 돌아오던 바로 그때 / 還如點也詠歸時
석양 그림자 속에 술잔 돌리기 급하고 / 斜陽影裏傳觴急
긴 젓대소리에 춤추는 소매가 너울너울 / 長笛聲中舞袖垂
나는 글재주도 없이 자리 끝에 참여하여 / 嗟我不才參席末
선배들 높은 모임에 함께 시를 논하누나 / 斯文高會共論詩


[주C-001]벽송정(碧松亭) : 서울 성균관(成均館) 북쪽에 있었던 정자. 소나무가 울창했다 ] 

 

 

동문선 제8권
 칠언고시(七言古詩)
호야가(呼耶歌)


이석형(李石亨)

남에서도 “어어야” 북에서도 “어어야” / 呼耶呼耶在南北
“어어야” 소리 어느 때나 멎으리 / 呼耶之聲何時息
천 사람이 한 나무를 나르고 / 千人輸一木
만 사람이 한 돌을 굴려 / 萬人轉一石
화산의 돌을 거의 다 뽑아 내고 / 華山之石拔幾盡
백운대의 나무를 거의 다 찍었네 / 白雲之木斫幾禿
돌 다하고 민둥산 되는 것 염려롭기보다 / 石盡山禿寧可虞
구덩이와 골짜기에 묻히고 넘어지는 백성들 / 塡坑仆谷民可惜
백성들 불쌍하나 누가 알리 / 民可惜誰能識
모진 졸놈들 벼락같이 독촉하네 / 惡卒捶督如電擊
아침 굶고 저녁도 굶었는데 / 朝未食夕無飱
가엾어라, 허리엔 빈 자루만 차고 / 可憐腰間空垂橐
그리고도 “어어야” 입에 침이 마르니 / 猶唱呼耶口吻燥
침 마르고 목 쉬어 소리도 안 나오네 / 口燥喉嗄聲難作
소리도 안 나와 기진맥진 엎어지니 / 聲衰力盡一僵仆
먼지 나는 구덩이에 만 사람 발에 피가 뿌려 / 塵飛濺血萬人足

제발 원하노니, 하늘이여, 큰 재복을 내리려든 / 我願天公生大材
산림에 두지 말고 임금님 옆에 두시어 / 不置山林置君側
우리 당당한 큰 집의 기둥과 주초가 되어서 / 作我堂堂大廈之柱石
만민의 수고를 덜고 / 不勞萬民力
만민의 폐를 없이 하여 / 不爲萬姓瘼
“어어야” 소리 산골에 안 들리게 하옵소서 / 莫使呼耶在山谷


 

[주D-001]화산(華山) : 삼각산(三角山)을 이름인데, 진(秦)ㆍ한(漢)의 수도(首都) 장안(長安) 뒷산 근처의 산인 화산에 견준 것이다.

동문선 제78권
 기(記)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寺造成記)


권근(權近)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일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바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씨에서 출발하는 것이요,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으로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어진 왕과 밝은 군왕의 도리는, 조상을 높이고 종친을 공경하여서 그 효도를 넓히며, 널리 베풀고 뭇 사람을 구제하여서 그 인(仁)을 넓히니 여기에 의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일이 넓다고 하겠다. 불씨(佛氏)의 설(說)에는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윤회하여 태어나는데,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어,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물에 빠져 들어감을 건져 주시니, 산 사람이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복리로 인도한다면 죽은 귀신이 주리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윤회의 응보를 면하고, 산 사람도 역시 부유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효자와 자손(慈孫)에서 우매한 부부까지 모두 휩쓸려 다투어 불도(佛道)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믿지 못할까 걱정하여 온 세상이 거침없이 이를 높이고 이를 받드는데 수륙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더욱 그 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 정월 을묘일에, 상이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 신하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옛 절에도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齊會)를 개설하여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은 가서 합당한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의 신하 상충(尙忠)ㆍ양달(陽達)ㆍ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장소를 찾아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峰山)까지 둘러보고 복명하여 말하기를, “여러 절 중에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고 하니, 여기서 상이 명령하여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 등을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진행하게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썼다. 그 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2월 신묘일에 상이 친히 와서 구경하고, 3단(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도 거둥하여 구경하였다. 가을 9월에 이르러서 공사가 끝났다. 3단이 집이 되었는데 모두 3칸이며 중ㆍ하의 두 단은 좌우쪽에 각각 욕실(浴室) 3칸이 있고, 하단 좌우쪽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곡간이 갖추어지고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59칸인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
이 달 24일 계유에 상이 또 친히 구경하시고 명하여 신(臣)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적어 후세에 보이라.”고 하였다. 신 권근이 삼가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도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군왕의 덕도 역시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조종 제사의 예법과 존하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성인의 마음으로는 아직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 제사드리고 황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모시는 데까지 이르니 그 존숭하는 것이 극진하다고 할 것이다.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바탕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에 빛나고 은택은 온갖 물건에 끼쳤는데 선조를 받드는 생각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에 배향하는 제사를 이미 극진히 하고 부처에 귀의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친히 부처의 복을 받고, 묘한 인과(因果)를 증험할 수 있게 하며 주인 없는 귀신까지도 모두 그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에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만물에 미치되 친한 데에서 먼 곳으로, 어둔 곳에서 밝은 곳으로 하여 금일부터 무궁토록 전한다면 그 공덕의 큼과 혜택의 원대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동사강목 제6하
계묘년 목종 6년(송 진종 함평 6, 거란 성종 통화 21, 1003)


춘정월 삼경(三京)ㆍ십도(十道)에 명하여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다.
왕은, 내외 학관(學官)의 교육이 점점 나태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삼경ㆍ십도에 교서를 이렇게 내렸다.
“관내에 재주와 학식을 가진 자가 있으면 해마다 천거하여 일정한 규정을 폐기하지 말고, 문유(文儒)ㆍ의복(醫卜)의 무리와 박사(博士)ㆍ사장(師長)으로서 생도를 권장하여 근로한 공로가 있는 자는 이름을 기록하여 자세히 아뢰라.”

2월 교서를 내려 바른말을 구하였다.
교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지금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많은 관료에 이르기까지는 일찍이 직간하는 말은 없고, 아첨하는 말만 있었다. 아! 말을 해도 쓰이지 않았다면 내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겠지만, 나라가 위태함에도 붙들지 않은 것은 누가 그 허물을 질 것이냐? 경관(京官) 5품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 모두 약석 같은 말을 진술하라.”
○ 김치양(金致陽)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아 삼사(三司)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김치양은 몇 해 안 가서 임금의 총애를 받음이 비할 데 없더니, 갑자기 우복야에 이르렀다. 백관의 관직을 주고 빼앗음이 모두 그의 손에 달렸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세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칸이나 되고, 누각ㆍ정자ㆍ동산ㆍ연못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주야로 태후와 유희(遊戱)하여 아무런 두려움과 꺼리는 바가 없었다. 동주(洞州)지금의 서흥(瑞興) 에 사(祠)를 세우고 이름을 성수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의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도상(圖像)은 기괴하여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 몰래 딴마음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기명(器皿)에도 그 의미를 새겼다. 그 종명(鐘銘)에,
동국에 태어날 때에는 / 當生東國之時
태후와 함께 좋은 종자 만들고 / 同修善種
후세 서방에 가는 날에는 / 後徃西方之日
함께 보리를 깨달으리 / 共證菩提
하였다. 왕은 항시 그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마음을 상울까 염려하여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옛날 문강(文姜)이 노(魯)나라에 죄를 지었는데, 장공(莊公)은 능히 그 모친의 부정을 막지 못하여 자식의 도리를 크게 잃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이 사실을 적어서 폄척(貶斥)하는 뜻을 보였으니, 성인이 대의로 잘라 말함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목종은 한갓 소심하게 모친의 뜻을 순종할 줄만 알고 《춘추》의 대의로 자를 줄은 알지 못하였다.”
○ 태후 황보씨가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처음 순(詢)이 출생하니, 성종은 보모(保姆)를 가려서 그를 기르게 하였다. 순이 두 살 되었을 때 보모는 ‘아버지’라는 말을 가르쳤다. 하루는 성종이 부르자 보모가 그를 안고 들어갔다. 순은 성종을 우러러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종의 무릎에 올라가서 옷을 만지며 또, ‘아버지’ 하고 불렀다.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아이가 매우 아버지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드디어 사수현(泗水縣)에 있는 욱(郁)에게 보냈다. 욱이 죽자 순은 서울로 돌아와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다.
이때 태후와 김치양과의 사이에는 사생자가 있었다. 그 아들로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어서 순을 꺼렸다. 그래서 순을 강제로 삭발하고 출가(出家)하게 하였으니 이때 순의 나이 12였다. 순이 처음에는 숭교사(崇敎寺)에 우거하다가 뒤에는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였는데, 태후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 절에 있는 늙은 중이 방 가운데 지하실을 만들어 순을 숨기고 그 위에 침대를 놓아 불측의 변고를 막았다.
《고려사》 세가에 의하면, 왕이 처음 숭교사에 우거할 때 그 절 중이 꿈을 꾸니,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 용으로 변하였다가 또 사람으로 변하였으니 곧 왕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순을 기이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순이 신혈사에 있을 때 ‘계수(溪水)’를 두고 지은 시는 이러하다.

한 물줄기 백운봉에서 흘러나와 / 一條流出白雲峯
만리의 큰 바다 가는 길 통하였다 / 萬里滄溟去路通
바위 아래에서 졸졸 흐르고 있음을 말하지 마소 / 莫道潺湲巖下在
멀지 않은 날 용궁에 이를걸세 / 不多時日到龍宮

‘소사(小蛇)’를 두고 지은 시는 이러하다.

작고 작은 뱀새끼 둘러 있는데 / 小小蛇兒遶藥欄
몸에 가득한 붉은 비단 알록달록하이 / 滿身紅錦自斑斕
항시 화림 아래에 있을 것이라 말을 마오 / 莫言長在花林下
일조에 용되기 어렵지 않다네 / 一旦成龍也不難

또 꿈에 닭소리와 다듬잇소리를 들었는데, 해몽하는 이는 즉위할 길조라고 하였다 한다.
【안】 《문헌통고》 사예고에,
“함평 6년에 송(誦)이 호부 낭중 이선(李宣)을 보내와서 사은하고, 또 진(晉)이 연(燕)ㆍ계(薊)의 땅을 떼어 거란에 붙이매, 길이 곧장 현도(玄莵)로 통하였으므로 자주 와서 공벌(攻伐)하여 요구하는 것이 그치지 않으니 왕사(王師)가 와서 국경에 주둔해 줄 것을 말하자, 조서를 내려 이에 우답(優答)하였다.”
했는데, 이것이 본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주D-001]문강(文姜) …… 보였으니 : 노(魯) 장공(莊公)의 모친 문 강(文姜)이 제후(齊侯)와 자주 간통하였으나 장공은 그를 막지 못했으므로 《춘추》에 그 간통의 행적이 자주 기록되어 있다. 《左傳 莊公》

동사강목 제7하
기묘년 숙종 4년(송 철종 원부 2, 요 도종 수륭 5, 1099)


춘정월 조선공(朝鮮公) 도(燾)가 졸하였다.

2월 송에서 조서(詔書)로 빈공(賓貢 다른 나라의 공사(貢士))을 허가하였다.
【안】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혹자가 고려의 풍속을 묻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끝내 만이(蠻夷)의 풍(風)을 띠고 있었는데 뒤에 와서는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벽옹(辟雍)에 입학시켜 급제(及第)해서 돌아간 자가 매우 많았다. 일찍이 선인(先人)의 동년소록(同年小錄)을 보니 그 가운데 빈공자(賓貢者)들이 있었는데, 곧 그 나라에서 천거한 선비들이었다. 당시에 조칙(詔勅)으로 폐백(幣帛)을 하사하였고, 또 왕개보(王介甫)의 《신경(新經)》 30본(本)을 내렸다.”
하였다.
○ 《문헌통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원부(元符) 연간에 선비들을 보내어 빈공하였다.”

3월 연덕 궁주(延德宮主) 유씨(柳氏)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
시중(侍中) 홍(洪)의 딸이니, 이가 명의 태후(明懿太后)이다.

하4월 군현(郡縣)에 명하여 각기 둔전(屯田) 5결(結)을 경작하게 하였다. 이것이 관둔전(官屯田)의 시초이다

5월 시중으로 치사(致仕)한 이정공(李靖恭)이 졸하였다.
조위(吊慰)의 교서(敎書)와 뇌서(誄書)를 내리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추9월 왕이 양주(楊州)에 행행하여 도읍으로 정할 땅을 살펴보았다.

동10월 환궁하였다.
이보다 앞서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상서(上書)하여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하기를 청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 땅에 삼경(三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覔壤 지금의 서울을 말한다)이 남경(南京)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西京)이 되는데, 11월에서 2월까지는 중경에 머물고 3월에서 6월까지는 남경에 머물며 7월에서 10월까지는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내조(來朝)할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開國) 후 1백 60여 년에 목멱양에 도읍할 것이다.’ 하였으니, 신(臣)은 지금이 바로 새로운 도읍으로 순행하여 머물 시기라 생각합니다. 지금 국가에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빠져 있으니, 바라옵건대 삼각산(三角山)의 남쪽,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서울 남산(南山))의 북쪽에 도성(都城)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여 머무십시오.”
이때에 일관(日官) 문상(文象) 등이 따라 찬성하였다. 이에 이르러 왕은 재신(宰臣)과 일관에게 의론하도록 명하고, 드디어 왕비와 원자(元子) 및 양부(兩府)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삼각산에 행행하였다가 승가굴(僧伽窟)에 행행하여 재(齋)를 베풀고, 이어 은향완(銀香椀)ㆍ수로(手爐) 각 1좌(座)와 금강자(金剛子)ㆍ수정염주(水精念珠) 각 1관(貫)과 금화과숙번(金花果繡嶓)ㆍ다향(茶香)을 시주하고, 이어 양주(楊州)에 이르러 도읍할 자리를 살펴보았다.
○ 사신을 요(遼)에 보내어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청하였다.

11월 진한후(辰韓侯) 유(愉)가 졸하였다.
○ 아우 부여후(扶餘侯) 수(燧)를 경산부(京山府)에 유배하였다.


 

[주D-001]벽옹(辟雍) : 주대(周代)에 천자(天子)가 세운 태학(太學)을 말하는데, 남을 성균(成均), 북(北)을 동서(東序), 서를 고종(瞽宗), 중앙에 있는 것을 벽옹이라 하였다. 옹(雍)은 택(澤)의 뜻으로 학교의 주위에 물을 빙 둘러 못을 만들었다.
[주D-002]뇌서(誄書) : 시장(諡狀)ㆍ행장(行狀) 혹은 도축(禱祝)의 의미인데, 여기서는 애도문(哀悼文) 즉 만사(輓詞)를 말한다.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재용편 6
 제창(諸倉)
선혜청의 각 창고(宣惠廳各倉庫)


내청고(內廳庫)
선혜청의 창고는 곧 대동미(大同米)ㆍ포(布)ㆍ전(錢)을 출납하는 곳이니, 선조 무신(1608, 선조 41)에 먼저 경기청(京畿廳)을 설치하였다가, 상평청(常平廳)에 합병하고 선혜청(宣惠廳)이라 개칭(改稱)하고, 인조 갑자(1624, 인조 2)에 또 강원청(江原廳)을 설치하고 내청(內廳)을 영건(營建 궁전을 짓는 것)하였다.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으니, 곧 인경궁(仁慶宮)의 구기(舊基)임. 고(庫)가 84문(門).경기(京畿) 8문(八門) ○ 강윈(江原) 8문 ○ 호서(湖西) 11문 ○ 호남(湖南) 36문 ○ 영남(嶺南) 8문 ○ 해서(海西) 3문 ○ 공잉색(公剩色) 3문 ○ 균청(均廳) 7문 ○ 대개 창고의 큰 것은 겉으로는 비록 한 채이나 안에는 간가(間架)가 많으므로 안에 몇 칸[幾間]씩을 막아서 각각 창고를 만들고 그 밖에는 반드시 각 각 문(門)이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 몇 문[幾門]이라는 문[門] 자는 곧 한문이 한 고(庫)가 된다는 것을 이름.
별창고(別倉庫)
현종(顯宗) 신축(1661, 현종 2)에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할 때에 새로 건축하였고, 숙종(肅宗) 신묘(1711, 숙종 37)에 호서창(湖西倉)을 증건(增建)하였으며, 영종(英宗) 계해(1743, 영조 19)에 또 양남(兩南)창(倉)을 호서청(湖西廳)의 서편(西便)에 세우고, 정종(正宗) 을사(1785, 정조 9)에 또 삼남(三南)신대청(新大廳)을 세웠다.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음. 고가 67문. 경기 2문 ○ 호서 21문 ○ 호남 19문 ○ 영남 14문 ○ 해서 1문 ○ 균역청 10문.
남창고(南倉庫)
영종(英宗) 경오(1750, 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처음으로 시행하면서 구(舊) 수어청(守禦廳)에 창고를 설치하였으며, 기묘(1759, 영조 35)에 또 증건(增建)하였다. 주자동(鑄子洞)에 있음. 고가 35문. 호남 8문 ○ 영남 8문 ○ 균역청 19문.
북창고(北倉庫)
숙종 병인(1686, 숙종 12)에 명(命)하여 강창(江倉)을 이건(移建)하였다. 삼청동(三淸洞)에 있으니, 곧 구(舊) 총융청(摠戎廳)임. 고가 11문. 호남 8문, 호서 3문.
강창고(江倉庫)
경기(京畿)와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처음으로 시행할 때에 차차로 건치(建置)하였다. 용산(龍山)에 있음. 고가 22문. 경기 5문 ○ 호남 8문 ○ 호서 9문.
구진창고(舊賑倉庫)
본래 진청(賑廳)의 고사(庫舍)이었던 것을 지금은 양호(兩湖)의 구관(句管)으로 하였다. 용산창(龍山倉) 뒤에 있음. 고(庫)가 10문. 호남 5문. 호서 5문.
신창고(新倉庫)
본래 설진(設賑)하던 곳이었던 것을 지금은 해서(海西)ㆍ호남(湖南)의 구관으로 하고, 혹은 만리창(萬里倉)이라 칭하였다. 만리현(萬里峴)에 있음. 고가 58문. 진청(賑廳) 35문 ○ 해서 3문 ○ 호남 20문.
평창고(平倉庫)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설치한 뒤에 군향(軍餉)에 대비하기 위하여 숙종(肅宗) 계사(1713, 숙종 39)에 탕춘대(蕩春臺)에 창고를 설치하여 탕춘창이라 명칭하였다. 영종(英宗) 무진(1748, 영조 24)에 총융청(摠戎廳)이 출진(出鎭)할 때에 총융청에 이속(移屬)하고 총융청의 평창(平倉)을 본청(本廳)에 소속(所屬)시켰다. 탕춘대에 있음. 고가 14문. 호남 9문 ○ 영남 4문 ○ 호서 1문.
동창고(東倉庫)
처음에는 장용영(壯勇營)으로 설치하였다가 당저(當宁) 임술(1802, 순조 2)에 장용영을 파(罷)한 뒤에 본청(本廳)에 소속시켰다. 이현(梨峴)에 있음. 고가 17문. 영남(嶺南).
사복시의 강창고[司僕寺江倉庫]
영종(英宗) 무오(1738, 영조 14)에 전미(田米)ㆍ콩[太] 호조에서 획송(劃送)한 마료(馬料) 을 저적(儲積)할 곳으로 설치하였다. 현석리(玄石里)에 있음. 고가 5문. 1문에는 숫돌[礪石]이 있음. ○ 4문에는 모두 있는 것이 없음.


 

[주D-001]상평청(常平廳) : 국초(國初)에 창설하였으니 토참(土站)ㆍ공수(貢需) 등을 맡아보는 관아로 인조 4년에 선혜청에 합하였음.
[주D-002]숭례문(崇禮門) : 남대문.
[주D-003]인경궁(仁慶宮) : 인왕산(仁旺山) 밑 사직(社稷)과 도정궁(都正宮) 뒤에 있던 궁. 광해군 8년에 창건되었다가 인조 반정(反正) 뒤에 헐리었음.
[주D-004]공잉색(公剩色) : 잡비(雜費)의 지출을 맡아보던 선혜청의 한 관부(官府).
[주D-005]양남(兩南) : 호남과 영남.
[주D-006]삼남(三南) : 호서ㆍ호남ㆍ영남.
[주D-007]소의문(昭義門) : 서소문(西小門).
[주D-008]균역볍(均役法) : 영조 26년에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만든 법를. 종래의 양포세(良布稅)를 반으로 줄이고 남어지는 어업세(漁業稅)ㆍ염세(鹽稅)ㆍ선박세(船舶稅)ㆍ결작(結作)의 징수 등으로 보충함. 역(役)을 균등하게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양민의 부담을 줄인데 불과하고 종래 특권층의 어염엽(漁鹽業)을 국가에 전속하게 한 것이 의의가 있음.
[주D-009]양호(兩湖) : 호서와 호남.
[주D-010]진청(賑廳) : 진휼청(賑恤廳). ‘진청(賑廳)’이 어느 본에는 ‘賑倉’으로 되어 있음.
[주D-011]설진(設賑) : 진휼(賑恤)을 설시(設施)함.
[주D-012]북한산성(北漢山城) : 삼각산(三角山)에 축조(築造)된 산성.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숙종 4년에 축조하였음. 서쪽에 위치한 서대문을 입구로 하고 다시 중성문(中成門)으로서 성내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음.
[주D-013]탕춘대(蕩春臺)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음.
[주D-014]장용영(壯勇營) : 정조 15년에 창설하였으니, 수원부(水原府)에 베푼 군영으로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올리고 두었는데 후에 총리청(摠理廳)으로 개칭하였음.
[주D-015]이현(梨峴) : 배우개, 종로 4가.
[주D-016]전미(田米) : 육도미(陸稻米).
[주D1-001]문(門). : ‘문(門)이’ 어느 본에는 ‘間’으로 되어 있음. 이하도 같음.
[주D1-002]몇 칸[幾間] : ‘몇 칸[幾間]’이 어느 본에는 ‘畿間’으로 되어 있음.
[주D1-003]몇 문[幾門] : ‘몇 문[幾門]’이 어느 본에는 ‘畿門’으로 되어 있음.

재용편 4
 호조 각장 사례(戶曹各掌事例)
전례방(前例房)


국용(國用) 범백(凡百)을 제처(諸處)에서 거행(擧行)하는 데 있어서 그 항식(恒式)에 의(依)하여 그 정한(定限)을 준용(遵用)하는 것은 전례방에 관유(關由)한다.
공상(供上) ○ 각 전궁(殿宮)에 공상(供上)하는 것. 제빈(諸嬪) 이하 상궁ㆍ시녀 등의 선반(宣飯)미(米)ㆍ콩ㆍ고기[魚]ㆍ젓[醢]ㆍ소선(素膳) 등의 각종은 각 해사(該司)의 보고가 오면 정례(定例)와 삭도(朔圖)를 상고(相考)하여 회감(會減)한다. 공상(供上)하는 각종은 도식(圖式)을 만들어서 대삭(大朔)ㆍ소삭(小朔)을 구별하고 달마다 회감(會減)함으로 ‘삭도(朔圖)’라 함. ○ 제빈 이하 상궁ㆍ시녀ㆍ내관(內官)의 춘추의전(春秋衣纒 : 춘추의 복감)은 상고(廂庫)로부터 보고가 오면 준료도(准料圖)와 먼지 계(啓)한 수본(手本)에 빙준(憑准)하고 정례(定例)에 의하여 마련해서 지급함. ○ 대군(왕의 적자)ㆍ왕자(국왕의 서자)ㆍ공주(왕의 적녀)ㆍ옹주(翁主 : 국왕의 서녀(庶女))ㆍ군주(郡主 : 왕세자의 적녀)ㆍ현주(縣主 : 왕세자의 서녀)가 궐내(闕內)에 있으면 정례에 의하여 공상(供上)하되 출합(出閤)하면 거행하지 않고 다만 유모ㆍ보모(保母)의 선반(宣飯)ㆍ의전(衣纒)과 수사(水賜)ㆍ각씨(閣氏)의 의전을 출급(出給)함.
제향(祭享)종묘(宗廟)사직(社稷)ㆍ능(陵)ㆍ원(園)ㆍ묘(墓)ㆍ교단(郊壇)ㆍ제산(諸山)ㆍ천(川) 남단(南壇)선농단(先農壇)선잠단(先蠶壇)우사단(雩祀壇)기우단(祈雨壇)마조단(馬祖壇)여단(厲壇)사한단(司寒壇)삼각산(三角山)ㆍ목멱산(木覔山)ㆍ한강(漢江)대소 제향(大小祭享)에 사용하는 물종(物種)을 각 해사(該司)의 보고(報告)가 오면 정례(定例)와 제도(祭圖)를 상고(相考)하여 회감(會減)한다. 제향(祭享)에 사용하는 각종(各種)은 도식(圖式)을 만들어서 달마다 회감함으로 ‘제도(祭圖)’라 함. ○ 제산천의 풍물(風物)에 드는 죽기(竹器)ㆍ목기(木器) 등 무역하는 물종이 시민에게 폐단을 줌으로 해마다 값을 50냥으로 정하여 장악원(掌樂院)에 통틀어 지급할 것으로 영종 갑술(1754, 영조 30)에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상한(洪象漢)이 연품(筵禀)하여 정식(定式)하였음. ○ 정종 임자(1792, 정조 16)에 우승지(右承旨) 서영보(徐榮輔)가 진달(陳達)하여 각단(各壇)의 악기ㆍ풍물을 한성부(漢城府)의 수레로써 실어 나르기 때문에 그 정결함을 보존하기 어려우니, 악원(樂院)으로 하여금 호조와 상의(商議)해서 변통(變通)하기를 청(請)하매,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이 연품하여 수레 3냥(輛)을 새로 제조해서 따로 두고 실어 나를 것으로 정식(定式)하였음.
과장(科場)문과(文科)감시(監試)를 보일 때의 응판관(應辦官)은 예조로부터 원정(元定)한 각사(各司)에서 윤번으로 정(定)한다. 호조ㆍ군자감ㆍ광홍창ㆍ사재감(司宰監)ㆍ사복시(司僕寺)ㆍ제용감(濟用監)ㆍ공조ㆍ사도시(司䆃寺)ㆍ장흥고(長興庫)ㆍ양현고(養賢庫). ○ 군자(軍資)ㆍ광흥(廣興)의 두창(倉)은 합동으로 맡고. 양현고에서는 다만 동당(東堂)에서 보일 때에만 거행함. 시소(試所)에서 거행하는 것과 시관(試官) 이하의 조반(早飯)ㆍ주물(晝物)을 전관(專管)하여 책응(策應)하고 조석반(朝夕飯)을 지공(支供)하는 것은 정수(定數) 밥[飯]ㆍ탕(湯)ㆍ적(炙)ㆍ자반(佐飯)ㆍ국[羹]ㆍ젓[醢]ㆍ나물[菜]ㆍ김치[沈菜]ㆍ간장[醬] 에 의하여 원공(元貢)이 있는 각사 제용감(濟用監)ㆍ사도시(司䆃寺)ㆍ장흥고(長興庫)ㆍ사재감(司宰監)ㆍ사복시(司僕寺)ㆍ선공감(繕工監)ㆍ상의원(尙衣院)ㆍ내섬시(內贍寺)ㆍ군기시(軍器寺)ㆍ의영고(義盈庫)ㆍ혜민서(惠民署)ㆍ군자감(軍資監)ㆍ장원서(掌苑署)ㆍ와서(瓦署)ㆍ풍저창(豊儲倉)ㆍ전의감(典醫監)ㆍ광흥창(廣興倉)ㆍ교서관(校書舘)ㆍ내자시(內資寺)ㆍ예빈시(禮賓寺)ㆍ사섬시(司贍寺)ㆍ사포서(司圃署)ㆍ사축서(司畜署)ㆍ조지서(造紙署) 에 분배하되 후박(厚薄)을 참호(參互)하여 평균하게 윤번으로 정(定)한다. 밥[飯]ㆍ탕(湯)ㆍ젓[醢]은 한 그릇 값 쌀 2승, 적(炙)은 한 그릇 값 쌀 7승(升). 자반(佐飯)은 한 그릇 값 쌀 2승 5홉, 국[羹]ㆍ나물[菜]은 한 그릇 값 쌀 1승, 김치[沈菜]는 한 그릇 값 쌀 5홉[五合]을 마련(磨鍊)하여 지급함. 무과(武科)를 보이는 과장(科場)을 설시할 때에 주장(主掌)하는 관(官) 군기시(軍器寺)ㆍ사재감(司宰監)ㆍ장흥고(長興庫)ㆍ사포서(司圃署)ㆍ조지서(造紙署)ㆍ의영고(義盈庫)ㆍ제용감(濟用監)ㆍ내섬시(內贍寺)ㆍ사도시(司䆃寺)ㆍ예빈시(禮賓寺)ㆍ내자시(內資寺)ㆍ장원서(掌苑署)ㆍ와서(瓦署). ○ 군기시(軍器寺)에서는 무(武) 1소(一所)를 독당(獨當)하고 조지서(造紙署)에서는 사포서(司圃署)에 첨부(添付)하고 예빈시ㆍ내자시(內資寺)에서는 아울러 담당함 은 호조로부터 윤번으로 획출(劃出)하여 계하(啓下)하고, 각종 잡물(雜物)을 조관(照管)하여 진배(進排)한다. 문과(文科)무과(武科) 방방(放榜)할 때의 사화(賜花)는 문과에는 내자시(內資寺), 무과에는 예빈시(禮賓寺), 홍패(紅牌)백패(白牌)는 풍저창(豊儲倉). ○ 알성(謁聖)정시(庭試)를 즉일(卽日) 창방(唱榜)할 때에 복두(㡤頭)야대(也帶)는 공조(工曹), 홍포(紅袍)녹포(綠袍)는 제용감(濟用監), 목홀(木笏)자문감(紫門監), 궤주(饋酒)는 내자시(內資寺), 찬물(饌物)은 사재감(司宰監), 초노(抄奴)는 형조, 주배(酒盃)는 사옹원(司饔院), 각사(各司)에서 기일에 앞서 준비하고 관원이 영솔(領率)하여 등대(等待)함. ○ 제주에서 주과(州科)를 보일 때에 유생(儒生)의 시지(試紙)와 붓은 예조(禮曹)가 계하(啓下)한 통첩에 의하여 참량(參量)해서 지급함. ○ 정종 기유(1789, 정조 13)에 금란관(禁亂官)이 가가(假家)를 일체(一切) 방색(防塞)할 것을 특교(特敎)로 엄칙(嚴飭)하였음. ○ 을묘년에 문ㆍ시소(試所)의 가가(假家)를 혁파(革罷)할 것을 특교(特敎)로 정식(定式)하였음.
예장(禮葬) ○ 대군ㆍ왕자ㆍ제빈ㆍ공주ㆍ옹주ㆍ국구(國舅 황후의 아버지)ㆍ부부인(府夫人 왕후의 모와 대군의 장모)ㆍ의빈(儀賓)ㆍ종친(宗親 국왕의 친족) 종2품 이상ㆍ문ㆍ무관 종1품 이상과 공신(功臣)에게는 모두 예장(禮葬) 의빈(儀賓)ㆍ종친(宗親)과 보국(輔國 : 정1품의 문무관의 품계) 이하의 예장은 선조 임진(1592, 선조 25) 후에 임시로 없앴으나 특교(特敎)가 있으면 거행함 이 있어 예조로부터 지위(知委 명령을 내려서 알려 줌)하면 본색(本色) 낭청(郞廳)이 각사(各司) 각공계(各貢契)ㆍ시인(市人)을 영솔하고 즉일(卽日)에 나가서 거행한다. 진배(進排)하는 각종(各種)은 예장도(禮葬圖)에 준(遵)하여 품(品)에 따라서 거행함. ○ 예장도는 3등(三等)으로 나누어 도절전(都折錢)을 하는데, 대군ㆍ공주ㆍ왕비(王妃) 부모에게는 1등 예장으로 하여 도절전(都折錢) 2,500냥 영. 왕자ㆍ옹주에게는 2등 예장으로 하여 도절전 2,240냥 영. 의정(議政) 1등 공신은 3등 예장으로 하여 도절전 1,650냥 영.
별치부(別致賻) ○ 왕자군(王子君) 관ㆍ곽(棺槨) 각 1부(部)의 대(代) 목면(木綿) 각 15필과 목면 20필, 백지(白紙) 20권, 유지(油紙) 1권, 4유둔(四油芚) 1번(番), 6유둔 1번, 석회(石灰) 100석, 공석(空石) 150엽(葉), 쌀 15석, 콩 15석, 밀가루[眞末] 15두, 꿀[淸蜜] 3두, 참기름 3두. 정1품(正一品) 문ㆍ무ㆍ종반(宗班)이 같음. ○ 관ㆍ곽(棺槨) 각 1부의 대(代) 목면(木綿) 각 15필과 목면 10필, 백지 10권, 유지 10장, 4유둔(四油芚) 1번, 6유둔(六油芚) 1번, 석회 50석, 공석(空石) 100엽(葉). 종1품(從一品) 문ㆍ무ㆍ종반이 같음. ○ 관ㆍ곽 각 1부의 대 목면 각 15필과 목면 7필, 백지 10권, 유지 5장, 6유둔 1번, 공석 80엽. ○ 근례(近例)에 음(蔭) 1품에도 또한 여기에 의하여 시행함. 정ㆍ종2품 문(文)ㆍ음(蔭)ㆍ무(武)ㆍ종반(宗班)이 같음. ○ 관 1부의 대[部代] 목면 15필, 종반ㆍ훈신(勳臣)이면 관(棺)ㆍ곽(槨)을 모두 출급(出給)하는데, 목면 5필, 백지 7권, 유지 5장, 6유둔 1번, 공석80엽. 증경 대시(曾經臺侍 일찍이 대관, 시종관을 지낸 사람) 당상(堂上) 이하와 종반(宗班) 당상이 같음. ○ 목면 5필, 백지 5권, 유지 5장, 공석 30엽. 공신의 조고[功臣遭故 보모의 상사를 당한 것] 정훈(正勳) 1ㆍ2등 인 사람의 부(父)ㆍ모(母) 상에는 쌀 3석, 콩 3석, 목면 5필, 백지 5권, 공석 30엽. 3등인 사람의 부ㆍ모상에는 쌀 2석, 콩 2석, 목면 5필, 백지 5권, 공석 30엽. 증경 각직(曾經閣職 일찍이 각신(閣臣)을 지낸 자) 목면 20필, 백지 7권, 유지 5장, 6유둔(六油芚) 1번, 공석 80엽. ○ 원치부(元致賻) 이외는 하교(下敎)를 기다려서 거행함.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조고(遭故) 쌀 1석, 목면 3필. 하교(下敎)를 기다려서 거행함. ○ 이상은 별례방(別例房)에서 맡았음.


 

[주D-001]관유(關由) : 그 관청을 경유(經由)하는 것.
[주D-002]선반(宣飯) : 관아에서 관원에게 끼니 때에 제공하는 식사.
[주D-003]출합(出閤) : 왕자가 장성하여 사궁을 짓고 나가서 사는 것과 왕녀가 하가(下嫁)하는 것을 말함. ‘출합(出閤)’이 어느 본에는 ‘出闕’로, 어느 본에는 ‘出閣’으로 되어 있음.
[주D-004]보모(保母) : 왕세자(王世子)를 보육하고 교도하는 여자.
[주D-005]수사(水賜) : 무수리의 별칭. 나인(內人)에게 세숫물을 드리는 일을 맡은 궁궐 안의 계집 종.
[주D-006]종묘(宗廟) : 국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 큰공이 있는 국왕의 신주를 모신 본전(本殿)과 그 외에 국왕 및 주호(主號)로 추숭(追崇)한 왕세자의 신주를 모신 영녕전(永寧殿)이 있음.
[주D-007]사직(社稷) : 사직단. 국왕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土神)과 곡신에게 제사(祭祀)하는 제단(祭壇).
[주D-008]원(園) : 왕세자ㆍ왕세자빈과 왕의 사친(私親) 등의 묘(墓).
[주D-009]남단(南壇) : 남방토룡단(南方土龍壇). 5방토룡제(五方土龍祭 : 기우제(祈雨祭)를 열한 번 지내어도 비가 오지 아니할 때 열두 번째로 지내는 기우제. 정3품으로 제관(祭官)을 삼고 흙으로 용(龍)을 만들어 동ㆍ서ㆍ남ㆍ북 중앙의 노상(路上)에 놓고 채찍질하여 기우제를 지내었음)를 지내는 제단(祭壇).
[주D-010]선농단(先農壇) : 중국 상고 시대(上古時代)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祭祀)하는 단(壇).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1]선잠단(先蠶壇) :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를 제사하던 단.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2]우사단(雩祀壇) : 비가 오게 하늘에 비는 제단(祭壇).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3]기우단(祈雨壇) : 하지가 지나 모낼 때가 늦어가도록 비가 안 올 때 비를 비는 제사로 나라에서나 각 고을이나 각 마을에서 행하는데 서울에서는 첫 번엔 삼각산ㆍ목멱산(木覓山)ㆍ한강, 둘째 번은 용산강(龍山江)ㆍ저자도(楮子島), 셋째 번은 산천우사단(山川雩祀壇), 넷째 번은 사직(社稷)ㆍ북교(北郊). 다섯 번째는 종묘(宗廟). 여섯 번째은 다시 삼각산(三角山)ㆍ목멱산(木覓山)ㆍ한강. 일곱 번째는 용산강, 지자도, 여덟 번째는 산천우사단. 아홉 번째는 북교, 모화관. 열 번째는 사직 경회루, 열한 번째는 종묘ㆍ춘당대(春塘臺). 열두 번째는 5방토룡제단(五方土龍祭壇)에서 행하였음.
[주D-014]마조단(馬祖壇) : 태조 때에 창설한 방성(房星 : 말을 수호하는 신(神))을 제사하는 단(壇).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5]여단(厲壇) : 무자귀(無子鬼)와 역질(疫疾)에 죽은 자를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던 단.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6]사한단(司寒壇) : 얼음을 뜰 때와 봄에 빙고문(氷庫門)을 열 때에 제사지내던 단.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음.
[주D-017]대소 제향(大小祭享) : 종묘의 4맹삭(四孟朔) 상순(上旬)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 및 사직의 기곡대제(祈糓大祭). 또는 중춘(仲春). 중추(仲秋) 첫 술일(戌日)과 납일에 지내는 대제(大祭)와 그 밖의 제항을 말함.
[주D-018]홍상한(洪象漢) : 1701~1769. 자는 운장(雲章) 본관은 풍산(豊山). 영조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영(判敦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
[주D-019]한성부(漢城府) : 태조 3년에 한양부(漢陽府)를 개칭한 것으로, 서울 인구(人口)ㆍ전방(㕓房)ㆍ가옥(家屋)ㆍ토지(土地)ㆍ주변(周邊)의 산(山)ㆍ도로(道路)ㆍ교량ㆍ차량ㆍ순찰 등 여러 가지를 관할하였으며, 관원으로는 판윤(判尹 : 정2품), 좌ㆍ우판윤(종2품). 서윤(庶尹 : 종4품), 판관(判官 : 정5품). 주부(主簿 : 종6품), 참군(參軍 : 정7품) 등이 있고 그 밖에 서리(書吏) 41명, 서원(書員) 11명, 사령(使令) 31명이 있음.
[주D-020]문과(文科) : 문관을 시험하여 뽑는 것으로 제술(製述)ㆍ경서강론(經書講論) 및 대책 등으로써 시취(試取)하며 초시(初試)ㆍ복시(覆試) 및 전시(殿試)와 그 밖에 증광시(增廣試)ㆍ별시(別試) 등이 있음. 대과(大科)라고도 함.
[주D-021]감시(監試) : 생원(生員)과 진사를 뽑는 과거. 사마시(司馬試). 소과(小科)라고도 함.
[주D-022]무과(武科) : 문과와 같이 초시ㆍ복시ㆍ전시로 나누어 무예와 병서에 통한 사람을 선발하는 과거.
[주D-023]방방(放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증서를 주는 것.
[주D-024]사화(賜花) : 문ㆍ무과의 급제자에게 국왕이 하사하던 꽃. 모화(帽花).
[주D-025]홍패(紅牌) : 문과의 회시(會試)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증서로 붉은 바탕의 종이에 그의 성적 등급 및 성명을 먹으로 적었음.
[주D-026]백패(白牌) : 소과(小科)에 급제한 생원이나 진사(進士)에게 주는 흰 종이의 증서.
[주D-027]알성(謁聖) : 국왕이 문묘(文廟)를 전알할 때에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문ㆍ무과.
[주D-028]정시(庭試) : 왕실의 경사(慶事)가 있을 때에 특별히 전정(殿庭)에서 시행하는 문ㆍ무과. 증광시(增廣試)와 별시(別試)가 있음.
[주D-029]복두(幞頭) : 과거에 급제한 자가 홍패를 받을 때 쓰는 관사모(冠紗帽)같이 2단(二段)으로 되어 있고 뒤쪽의 좌우(左右)에 날개가 달렸음.
[주D-030]야대(也帶) : 문ㆍ무과에 방(榜)이 났을 때 새로 급제한 사람이 띠는 띠. 한 끝이 아래로 느러져 야자(也字) 모양으로 됨.
[주D-031]홍포(紅袍) : 빛이 붉고 모양은 관복(官服)과 같음.
[주D-032]녹포(綠袍) : 빛이 푸르고 모양은 관복과 같음.
[주D-033]목홀(木笏) : 나무로 만든 홀. 홀은 벼슬아치가 조현(朝見)할 때에 조복(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는 것으로 길이 1자[尺] 가량 넓이 3치 가량이며 얄팍하고 길쭉하게 되었고, 그 신분(身分)에 따라 1품부터 3품까지는 상아(象牙), 5품이하는 나무로 만듬.
[주D-034]자문감(紫門監) : 선공감(繕工監)의 한 직소(職所). 궁중의 영선(營繕). 공작(工作)을 맡아보던 관아(官衙).
[주D-035]가가(假家) : 가게의 하나, 그 규모가 방보다는 작고 재가(在家)보다는 크다.
[주D-036]의빈(儀賓) : 국왕의 여서(女婿).
[주D-037]별치부(別致賻) : 정ㆍ종3품 이하의 시종이나 대시(臺侍)가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때 국왕이 따로 돈이나 물건을 내리던 것.
[주D-038]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문관(堂下文官)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講讀), 제술(諸述)의 시험을 보게 하는 사람. 정조 때 시행되었음.
[주D1-001]국용(國用) : ‘국용(國用)’의 ‘用’이 어느 본에는 ‘有’로 되어 있음.
[주D1-002]젓[醢] : ‘젓[醢]’이 어느 본에는 ‘鹽’으로 되어 있음.
[주D1-003]정례(定例) : ‘정례(定例)’ 앞에 어느 본에는 ‘定各’이 있음.
[주D1-004]정례(定例) : ‘정례(定例)’가 어느 본에는 ‘定式’으로 되어 있음.
[주D1-005]상의(商議) : ‘상의(商議)’가 어느 본에는 ‘相議’로 되어 있음.
[주D1-006]청(請) : ‘청(請)’이 어느 본에는 ‘聽’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주물(晝物) : ‘주물(晝物)’이 어느 본에는 ‘畫物’로 되어 있음.
[주D1-008]자반(佐飯) : ‘자반(佐飯)’이 어느 본에는 ‘供飯’으로 되어 있음.
[주D1-009]젓[醢] : ‘젓(醢)’이 어느 본에는 ‘鹽’으로 되어 있음.
[주D1-010]간장[醬] : ‘간장[醬]’이 어느 본에는 ‘漿’으로 되어 있음.
[주D1-011]젓[醢] : ‘젓[醢]’이 어느 본에는 ‘鹽’으로 되어 있음.
[주D1-012]독당(獨當) : ‘독당(獨當)’이 어느 본에는 ‘屬當’으로 되어 있음.
[주D1-013]사재감(司宰監), : ‘사재감(司宰監)’의 ‘宰’가 어느 본에는 ‘資’로 되어 있음.
[주D1-014]주배(酒盃) : ‘주배(酒盃)’의 ‘盃’가 어느 본에는 ‘盞’으로, 어느 본에는 ‘杯’로 되어 있음.
[주D1-015]왕비(王妃) : ‘왕비(王妃)’의 ‘妃’가 어느 본에는 ‘妣’로 되어 있음.
[주D1-016]엽(葉) : ‘엽(葉)’이 어느 본에는 ‘立’으로 되어 있음. 이하 같음.
[주D1-017]50 : ‘50’이 어느 본에는 ‘15’로 되어 있음.
[주D1-018]30 : ‘30’이 어느 본에는 ‘50’으로 되어 있음.

 

목은시고 제14권
 시(詩)
여강(驪江)


여강의 두어 겹겹 산에 돌아갈 꿈 있으니 / 歸夢驪江數疊山
신선의 집이 흰 구름 새로 아득히 보이네 / 仙家縹渺白雲間
다생의 탁기는 절로 다하기 어렵겠지만 / 多生濁氣自難盡
한 조각 고심도 아직 한가롭질 못하누나 / 一片苦心猶未閑
뜬세상에 백발 날리긴 가장 어렵거니와 / 浮世最艱飄素髮
가는 세월에 청춘을 붙잡을 길도 없구려 / 流光無計駐朱顔
어느 때나 저 삼각산 봉우리 앞 길을 / 何時三角峰前路
필마와 일엽편주로 나 홀로 왕래할꼬 / 匹馬孤舟獨往還


 

[주D-001]다생(多生) : 불교 용어로, 중생(衆生)이 선악(善惡)의 업(業)을 지어 윤회(輪廻)의 고통을 받음으로써 생사(生死)가 끊임없이 연속됨을 말한다.
[주D-002]백발 날리긴 : 두보(杜甫)의 〈대력삼년춘백제성방선출구당협구거기부장적강릉표박유(大曆三年春白帝城放船出瞿唐峽久居蘷府將適江陵漂泊有)〉 시에 “바람에 흩날리는 백발을 가지고, 조화의 자연 속에 묻혀 지내야지.[飄蕭將素髮 汩沒聽洪鑪]” 한 데서 온 말이다.
목은시고 제17권
 시(詩)
글 읽던 곳을 노래하다. 병서(幷序)

한산(韓山)의 숭정산(崇井山)은 내가 태어나서 2세 때에 부모(父母)가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8세 이후에 있었던 곳이고, 교동(喬桐)의 화개산(華蓋山)은 14세 때에 있었던 곳이며, 한양(漢陽)의 삼각산(三角山)은 17세 되던 해 봄에 있었던 곳이고, 견주(見州)의 감악산(紺嶽山)은 그해 가을에 있었던 곳이며, 청룡산(靑龍山)은 그해 겨울에 있었던 곳이며, 서주(西州)의 대둔산(大芚山)은 18세 때에 있었던 곳이고, 평주(平州)의 모란산(牡丹山)은 19세 때에 있었던 곳이며, 중국의 국자감(國子監)은 무자년(1348, 충목왕4)부터 시작하여 신묘년(1351, 충정왕3)에 마쳤는바, 그 사이에 어버이를 뵈러 귀국한 적이 있었다. 일곱 산[七山]을 먼저 쓰고 태학(太學)을 나중에 쓴 것은 바로 일곱 산에서의 성공(成功)을 거두어 태학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왜 하는고 하면 자손(子孫)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잠깐잠깐 붙여 있었던 승사(僧舍)도 또한 적지 않으나, 그 승사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잊어서가 아니라, 학업(學業)을 이루고 못 이루는 데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산 승경(名山勝境)이 인물을 배양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고금의 사람들이 칭도(稱道)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내가 그 때문에 이것을 노래하여 장차 악부(樂府)에 올려서 무궁한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니, 당세에 시(詩)를 잘하는 이는 따라서 감탄하는 일이 혹 있으리라.

한산의 숭정산엔 소나무에 구름 걸쳤고 / 韓山崇井松浮雲
교동의 작은 섬엔 속세의 들렘이 없었네 / 喬桐小島無塵喧
삼각산은 하늘에 꽂혀 암학이 우뚝하고 / 三峯揷天聳巖壑
감악산은 높이 솟아 장단을 내려다보네 / 紺嶽高壓長湍村
청룡산 얼음 절벽은 오두막을 썰렁케 하고 / 靑龍氷崖小屋冷
서림의 대둔산은 연기 낀 창이 어둑했지 / 西林大芚煙窓昏
모란산은 옛 전쟁터를 굽어보고 있는데 / 牡丹俯視涿鹿野
외론 구름 지는 해에 천원이 희미했었네 / 孤雲落日迷川原
함께 글 읽던 동료들은 모두가 호걸이라 / 同游儕輩盡豪傑
광대한 학문 세계에 근원을 궁구했는데 / 學海浩瀚窮淵源
서로 보아서 착하게 연마해도 부족하고 / 相觀而善尙不足
높이 날아 봤자 뱁새는 울을 넘을 뿐이었네 / 高飛斥鷃才踰藩
때마침 중국 천자가 학교를 중히 여겨 / 中朝天子重學校
태학의 선비들이 한창 경전을 토론할 제 / 璧水縉紳方討論
동인으로 취학한 이는 매우 적었는지라 / 東人鼓篋亦甚少
조관의 자제는 어찌 그리도 존귀했던고 / 朝官子弟何其尊
나는 선군이 봉훈의 반열에 오른 관계로 / 先君簉跡奉訓列
전례에 따라 태학에 유학할 수 있었는데 / 援例得以游橋門

훌륭한 교화 받은 지 한 해도 안 지나서 / 螟蛉變化不閱歲
글 지으면 이따금 뛰어나단 칭찬 들었네 / 綴文往往稱高騫
고국에 돌아와 선군 상중에 있을 적엔 / 歸來東海居憂中
번쩍번쩍 흐르는 세월 번개처럼 빨랐어라 / 流光飄忽如電奔
현릉의 초과 때엔 마침 복을 마치고서 / 玄陵初科服適闋
응시한 게 우연히도 장원을 차지했는데 / 射策偶耳叨狀元

중서당의 급제자 환영연엘 참여했더니 / 鹿鳴往會中書堂
관복과 한림 제수로 특별한 은총 입었고 / 賜緋玉署承殊恩
뒤이어 초천 발탁으로 삼중까지 이르러 / 因之超擢至三重
한가히 관록 먹으며 자손 행복케 하였네 / 閑居食祿榮子孫
당시 글 읽던 곳에 머리 돌려 회상하노니 / 回頭當日讀書處
지금도 푸른 이끼에 나막신 자국 남았으리 / 蒼苔至今留屐痕
산신령이 앎이 있다면 내 의당 감사하리 / 山靈有知我當謝
천지와 같이 인물을 배양했으니 말일세 / 養出人物同乾坤
후일 명성의 좋고 나쁜 평판은 차치하고 / 流芳遺臭且不問
우선 노래를 불러 후손에게 남겨 주노라 / 歌之直欲貽後昆

[주D-001]서로 …… 연마해도 :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서로 보아서 착해지도록 하는 것을 절차탁마라 한다.[相觀而善之謂摩]”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여러 제자(弟子) 가운데 유능한 이 한 사람을 자문역으로 삼아 혼자서 스승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기타 사람들은 그의 문답(問答)만을 듣고서 각각 해득(解得)할 수 있게 했던 수업 방법을 말한다.
[주D-002]높이 …… 뿐이었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의하면, 붕새는 9만 리나 날아올라 가는데, 뱁새는 날아올라 보았자 고작 두어 길도 더 못 오르고 다시 내려와 쑥대밭에서 뱅뱅 돈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식견이나 안목의 협소함을 의미한다.
[주D-003]나는 …… 있었는데 : 옛날 태학(太學)에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식까지만 유학(遊學)이 허용되었는데, 이때 저자의 부친 이곡(李穀)이 마침 원조(元朝)의 봉훈대부(奉訓大夫) 작위에 있었으므로 한 말이다.
[주D-004]현릉(玄陵)의 …… 차지했는데 : 현릉은 공민왕(恭愍王)의 능호이다. 공민왕 2년인 계사년(1353)에 초과(初科)를 실시했던바, 이때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언박(洪彦博)의 주관하에 저자가 을과 제일인(乙科第一人)으로 급제한 것을 이른 말이다.
목은시고 제19권
 시(詩)
삼각산(三角山) 위의 구름을 바라보다.

삼각산 꼭대기에 날아가는 흰 구름아 / 華山絶頂白雲飛
무심함을 자부하며 그 어디로 가느냐 / 自負無心何處歸
내가 어찌 바위 밑에 잘 줄을 모르랴만 / 我豈不知巖下宿
배움 끊은 도인이 드문 걸 꺼려서란다 / 只嫌絶學道人稀

내 생의 가고 머묾은 여유가 작작하기에 / 我生行止儘悠悠
성쇠 변화 따위는 전혀 걱정치 않는다오 / 消息盈虛摠不憂
또 묻노라 무심한 걸 배울 수만 있다면 / 且問無心如可學
상산사호인들 어찌 찾기가 어려울쏜가 / 商山四皓豈難求

구름과 묻고 대답한 게 다 진정이고말고 / 問雲雲答語皆眞
내 또한 당시에 세속 초월한 사람이거니 / 我亦當時洒落人
내 맘속에 티끌 있다고 이르지 말거라 / 莫道心中有査滓
요즘 그 어딘들 풍진 피할 곳이 있더냐 / 邇來無處避風塵

[주D-001]배움 끊은 도인 : 당(唐)나라 선승(禪僧) 영가 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에 “그대는 못 보았나 배움 끊고 하는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안 없애고 진도 구하지 않는다네. 이름 없는 실성이 그게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이 몸이 바로 법신이라네.[君不見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상산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상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4인의 백발 노인인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
목은시고 제22권
 시(詩)
잡영(雜詠)

남산은 내 창 앞에 당해 있는데 / 南山當我窓
나무들이 그 꼭대기에 자라나서 / 有樹生其顚
아침저녁으로 애교를 부려주고 / 朝昏逞媚嫵
풍일 속에 맑고 고움 간직했기에 / 風日涵淸姸
잎새 사이에 고운 소리를 남기고 / 葉間遺好音
꾀꼬리는 이제 방금 옮겨 가누나 / 黃鳥時方遷
이걸 생각하며 길이 탄식하노니 / 念此坐長嘆
사물 이치는 자연에 말미암거늘 / 物理由自然
어찌하여 출처에 어두울 것 있나 / 奈何昧出處
순리대로 하늘을 섬길 뿐이로다 / 順序當事天

용수산은 우리 이문에 당해 있어 / 龍山當里門
구름이 그 봉우리에서 나오는데 / 有雲出其岫
담담하여 본디 무심한 것이거니 / 澹然本無心
어찌 거취에 헷갈린 적 있으리요 / 何曾迷去就
긴 바람이 어디서 불어만 오면 / 長風何方來
그를 좇아 급히 달리곤 하나니 / 從之乃馳驟
신룡이 천하에 우택을 내릴 적엔 / 神龍澤天下
서로 만남이 우연이 아니고말고 / 所憑非邂逅
음양은 본래 기관을 멎지 않나니 / 陰陽無停機
나는 또 복괘 구괘를 관찰하련다 / 我且觀復姤


동산은 바로 우리 집 뒤에 있어 / 東山在屋上
그 높이가 성문을 압도하는데 / 其高壓城闉
부소산과 천마산은 / 扶蘇與天摩
서로 나란히 어찌 그리 가파른고 / 相次何嶙峋
티 하나 없이 맑고 빼어난 품이 / 淸秀淨無垢
포홀 갖추고 대궐을 향한 듯하네 / 袍笏趨紫宸
그를 마주해 감히 서로 겨룰쏜가 / 對之敢相抗
높은 자리를 배석이나 하였으면 / 庶以陪文茵
정색을 그 누가 감히 더럽히리요 / 正色誰敢褻
엄연히 임금과 신하 사이 같구려 / 儼爾如君臣

가파르고 험준한 삼각산은 / 峨峨三角山
구름 끝에 우뚝 솟아 푸르른데 / 聳翠浮雲端
산골짝을 완연히 서로 마주하니 / 巖壑宛相對
체세가 어찌 그리도 우뚝한고 / 體勢何巑岏
석양이 서쪽 비탈에 쏘아 비치니 / 夕陽射西崖
늘어선 송백은 참으로 가관일세 / 松柏森可觀
그 옛날에 놀던 곳 생각해 보니 / 心懷舊游處
돌 위엔 이끼가 알록달록했었지 / 石上苔花斑
가고파도 끝내 갈 수가 없는지라 / 欲往竟不可
바람 앞에 나의 애만 끊어지누나 / 臨風摧我肝

[주D-001]음양은 …… 관찰하련다 : 《주역(周易)》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 특히 지뢰 복괘(地雷復卦 )는 오음(五陰)의 아래서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상(象)이고, 천풍 구괘(天風姤卦 )는 오양(五陽)의 아래서 일음(一陰)이 처음 생기는 상이므로, 즉 음양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2]포홀(袍笏) : 조복(朝服)과 수판(手版)을 가리킨 말로, 전하여 문관(文官)을 의미한다.
[주D-003]정색(正色) : 자색(紫色) 같은 간색(間色)이 아닌 다섯 가지의 순정색(純正色) 즉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산(山)을 두고 한 말이므로 청색을 의미한다.
목은시고 제22권
 시(詩)
인하여 옛날 삼각산(三角山)에서 놀았던 흥취를 상기시키다.

한양이라 큰 번진이 삼각산을 지고 있으니 / 漢上名藩背華山
세 봉우리가 흰 구름 새에 높이 꽂혔는데 / 三峯高揷白雲間
일찍이 내가 글 읽던 곳이 눈에 선하건만 / 森然當日讀書處
늙어선 얼굴 가득 먼지만 낀 게 가소롭네 / 自笑老來塵滿顔

목은시고 제9권
 시(詩)
삼각산(三角山)을 생각하다가 가행(歌行)을 서술하다.

소나무 아래 흰 모래는 마치 담요 같은데 / 松下白沙如氍毹
숲 떨치는 반종 소리엔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 飯鐘振林面色腴
어른과 젊은이 서로 이끌고 땅에 앉아서는 / 相携地坐略少長
함께 토론을 하다가 곧장 석양에 이르렀네 / 討論直到鴉畢逋
산천의 뛰어난 기운이 천하에 가득하여 / 山川英氣滿天下
미산 사람 부자를 삼소라 칭했거니와 / 眉之父子稱三蘇
그중에 장공은 고금에 으뜸가는 시호로서 / 長公詩豪蓋今古
장편과 절구가 정함과 거침을 포함했는데 / 長篇絶句含精麤
문장 기세 웅장 방종함이 수레 엎는 말 같아 / 詞雄勢逸馬覂駕
풍아를 변역시켜 때로는 긴 노래를 불러서 / 變移風雅時長謳
음란하고 기교한 소리 깨끗이 쓸어 없애고 / 淫哇尖巧掃淨盡
횡설수설하여 스스로 충의와 함께했는지라 / 縱橫自與忠義俱
섶에 불살라 글자 비춰 끝없이 읽다보니 / 爇薪照字讀不輟
지는 달빛 산에 가득코 바람 또한 불어댈 제 / 落月滿山風又呼
하늘땅 깊은 곳에 초연히 크게 한숨지으며 / 悄然大息天地深
높은 재능 쇠퇴한 것을 길이 탄식하였네 / 高才陵替空長吁
새벽이 오매 산승이 손뼉 치며 웃었으니 / 曉來山僧拍手笑
그을음 얼굴 가득해 마른 등걸 같았기 때문일세 / 烟煤滿面如枯株
이제는 늙었는지라 지기에게 감사하노니 / 如今老矣謝知己
글 읽는 데에 어찌 공부가 없을 수 있으랴 / 讀書豈可無功夫
글 읽는 데에 어찌 공부가 없을 수 있으랴 / 讀書豈可無功夫
이 목은을 지금 그 무엇이 붙들어 주던가 / 牧隱至今誰所扶

[주C-001]가행(歌行) : 고대 악부시(樂府詩)의 한 체(體)이다.
[주D-001]반종(飯鐘) : 승사(僧舍)에서 식사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치는 종을 말한다.
[주D-002]미산(眉山) …… 칭했거니와 : 삼소(三蘇)는 송나라 때 사천성(四川省) 미산 출신으로 문장이 뛰어나서 모두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든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삼부자(三父子)를 합칭한 말이다. 개별적으로는 소순을 노소(老蘇), 소식을 대소(大蘇)ㆍ장공(長公), 소철을 소소(小蘇)라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씨 삼부자가 모두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타고났다는 뜻에서, 당시 미산 사람들 사이에는 “미산에 소씨 삼부자가 나니, 촉중에 풀이 또한 시들었다.[眉山生三蘇 蜀中草亦枯]”라는 말도 있었다 한다.

 용재집 제4권
 천마록(天磨錄)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이내 인생이 어이 불행하리요 / 我生豈不幸
그대와 함께 노닐 수 있는 것을 / 得與吾子陪
짚신을 신고 여장 하나 짚고서 / 芒鞋一藜杖
우연히 이 산속에 와 거니누나 / 偶此山中回
우뚝이 치솟은 저 보현봉이 / 突兀普賢峯
푸르름 쌓은 채 반공에 펼쳤기에 / 積翠中天開
오늘 아침 한번 올라 보았더니 / 今晨試一登
뭇 산들은 모두 하인에 불과하군 / 衆岳俱輿儓
산신령이 묘한 말을 남겨 두고서 / 山靈留妙語
천년토록 그대가 오길 기다렸느니 / 千載待君來
맑은 소리는 숲 나무 휘감아 돌고 / 淸音繞林木
구슬 옥은 바위 틈에 아리땁구나 / 珠玉媚巖隈
묽은 빛으로 햇빛이 이상도 하니 / 澹然日色異
옛 나라 터에 그저 슬픔만 일도다 / 故國但生哀
머리를 돌려 옛날 일을 물어보니 / 回首問疇昔
세월은 참으로 나는 먼지 같아라 / 歲月眞飛埃
그렇게 많고 많던 고관대작들이 / 紛紛卿相貴
소낙비요 우레처럼 사라져 갔구나 / 驟雨與迅雷
상전벽해로 세상이 한번 바뀌니 / 陵谷一遷變
흰 유골에 푸른 이끼가 생겨났지 / 白骨生靑苔
봉우리 위에 선 늙은 잣나무는 / 絶頂有老柏
묻노니 그 누가 심은 것인가 / 借問誰所栽
내가 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 我欲上其顚
그리하여 봉래산 바라보고 싶지만 / 因之望蓬萊
지척 사이에도 올라갈 수 없으니 / 咫尺未能致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 人事不可該
바위 틈으로 간신히 발을 디디니 / 側足竝犖确
귓전에 울리느니 우렁찬 물소리 / 殷耳隨砯豗
저녁 무렵에 대흥동으로 들어가선 / 晩入大興洞
한바탕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일 뿐 / 一笑只空罍
이 산의 수석 경치 절로 빼어나니 / 水石自奇絶
고금에 몇 사람이나 배회하였을꼬 / 今古幾徘徊
가슴속 쌓인 회포 씻어야겠는데 / 胸懷政須澆
마담의 물이 마치 잘 익은 술인 듯 / 馬潭如潑醅
서둘러 오솔길 잡아 돌아가노라니 / 卒卒取微徑
저녁 비가 높은 산봉우리 적시더라 / 暮雨濕崔嵬


용재집 제4권
 천마록(天磨錄)
관음굴(觀音窟)에 묵으며


산은 곰과 범처럼 쭈그려 앉았고 / 山爲熊虎蹲
물은 교룡과 뱀의 품세를 짓누나 / 水作蛟蛇勢
머리와 꼬리 서로 서리어 얽혔고 / 首尾互屈盤
위아래로 끝을 찾을 수 없어라 / 上下不可際
내 여기 온 지 열흘도 못 됐지만 / 我來未十日
가슴속 티끌이 후련히 씻기었네 / 胸次豁昏㙪
옷을 벗어서 푸른 등나무에 걸고 / 解衣掛蒼藤
발을 씻으려 맑은 물가에 간다 / 濯足臨淸澨
담담하기가 운수승과도 같나니 / 澹然雲水僧
다만 관과 상투 없애지 않았을 뿐 / 但未去冠髻
깊은 물속은 용이 사는 곳이라 / 深淵龍所托
구름이 늘 자욱이 끼어 둘렀구나 / 雲物常護衛
바위 벼랑 아래의 낡은 사당에 / 古祠石壁下
홍수와 가뭄 때 제수를 올린다지 / 水旱薦香荔
신룡은 본래 하늘을 나는 법이니 / 神龍本天飛
낮은 못 속에 어찌 오래 머물랴 / 下澤豈長滯
어찌하면 이 물줄기를 다 말려서 / 安得涸眞源
밑바닥을 보아서 의심을 없앨꼬 / 不疑見本柢
곧바로 천 길을 떨어지는 폭포 / 直流千丈垂
밝은 대낮에도 안개로 어둑해라 / 白日變霧翳
틀림없이 하늘 위서 쏟아지리니 / 定從九霄瀉
달 속의 계수 그림자 물에 잠기리 / 廣寒蘸仙桂
경치가 절로 천태만상 바뀌나니 / 形勝自千狀
당초에 그 누구가 처음 만들었노 / 厥初誰創制
가야의 길손은 적선의 무리이라 / 伽倻謫仙徒
낭랑한 목청으로 칠언시 읊조리니 / 朗詠七字偈
표일한 음운이 신령한 물소리 짝해 / 逸韻敵靈派
절로 티끌세상 놀라게 할 만해라 / 自足駭塵世
나의 시는 마치 서응과도 같아서 / 吾詩如徐凝
좋은 점이 나쁜 점 가리지 못하지 / 美惡不相蔽
우두커니 앉아 저마다 말 잊었으니 / 兀坐各忘言
사물 하나인들 어찌 시야에 걸리랴 / 一事寧礙睇
건곤은 정녕 뒤바뀜이 있을지라도 / 乾坤有反覆
지극한 낙은 끝내 쇠퇴하지 않느니 / 至樂終不替
행여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 儻能歸去來
부귀영화를 오연히 내려다보련만 / 萬鍾可傲睨


 

[주D-001]서응(徐凝) : 소식(蘇軾)이 “세상에 전해지는 서응의 폭포 시(詩)에, ‘한 가닥 폭포가 청산의 빛을 가른다.[一條界破靑山色]’ 하였는데 지극히 진부하다. 게다가 백낙천(白樂天)의 시를 위작(僞作), 그 시에서 이 구절을 칭찬하여 ‘이를 이기지 못한다.[賽不得]’는 말까지 하였는데, 백낙천의 시어(詩語)가 비록 천이(淺易)한 점이 있지만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리요. 이에 절구 한 수를 짓노라.” 하고, “상제가 은하수 한 가닥 드리웠다는 건, 예로부터 오직 적선의 시구가 있을 뿐. 나는 물줄기 뿌리는 포말 그 얼마이뇨, 서응의 그 나쁜 시를 씻어 주진 않누나.[帝遣銀河一派垂 古來惟有謪仙詞 飛流濺沫知多少 不與徐凝洗惡詩]” 하였다

용재집 제4권
 조천록(朝天錄) 경신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갔다.
고향 생각


고향 생각에 날로 몸은 여위어가고 / 思歸日日瘦稜稜
천애 타국에 찌는 늦더위 못 견디겠어라 / 不耐天涯老暑蒸
억지로 객수를 달래려 백토를 휘두르고 / 疆把羈懷揮白兔
시름겨운 머리털로 청릉 비추기 두렵구나 / 畏將愁鬢照靑菱
먼 곳에 노니는 세월은 시중의 성인이요 / 遠遊歲月時中聖
짧은 꿈 같은 공명은 반쯤 굽힌 팔이어라 / 短夢功名半曲肱
어찌하면 벗들과 만나 대 궤안에 기대어 / 安得親朋凭竹几
밤 창가에서 지난날 고생 이야기할거나 / 夜窓酸苦話吾曾


[주D-001]백토(白兔) : 흰 토끼로, 붓을 뜻한다. 한유(韓愈)가 붓을 의인화하여 지은 소설인 모영전(毛穎傳)에서, 중산(中山)이란 곳에 사는 토끼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데서 유래한다.
[주D-002]청릉(靑菱) : 푸른 마름으로, 마름 무늬를 새긴 거울인 능화경(菱花鏡)을 뜻한다.
[주D-003]시중(時中)의 성인 : 시중이란 때에 따라 중도(中道)에 처하는 것이다. 《중용장구》에 “군자가 중용(中庸)을 하는 것은 군자이면서 시중하기 때문이다.” 하였고, 《맹자》에서는 “공자는 성인으로서 시중하는 분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단순히 먼 곳을 유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때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
[주D-004]반쯤 굽힌 팔 : 공자가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서 베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으니, 불의(不義)하면서 부귀(富貴)한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하였다. 《論語 述而》 여기서는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용재집 제6권
 해도록(海島錄) 정덕(正德) 병인년 봄 2월,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간 이후 지은 시들이다.
홀로 술을 마시며


시름도 잊은 채 한가히 앉아서 / 閑坐不知愁
술을 불러와 홀로 잔을 기울인다 / 喚酒成獨酌
술을 다 마셔도 잠을 못 이루어 / 酌罷未能眠
회포는 더더욱 침울해져 가는구나 / 益使懷抱惡
어찌하면 사해를 술로 만들고 / 安得四瀛尊
삼산을 술잔으로 만들어 가지고 / 三山作杯杓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잔뜩 취하여 / 沈湎日復夜
근심과 즐거움 아랑곳하지 않을꼬 / 莫問憂與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