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좌의정 청음 김상헌

석실(石室) 김선생(金先生) 묘지명 병서(幷序) (좌의정 김상헌 )

아베베1 2011. 8. 3. 15:48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석실(石室) 김선생(金先生) 묘지명 병서(幷序)


석실 선생의 휘(諱)는 상헌(尙憲)이며 자(字)는 숙도(叔度)로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경오년(1570, 선조3) 6월 3일 자시에 출생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을 무훼(誣毁)하므로 선생이 승지(承旨)로서 매우 분명하게 변척(辨斥)하여 사문(斯文)이 실추되지 않게 되었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병인년(1626, 인조4)에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를 이간질하여 우리나라가 장차 천하에 죄를 입게 되었을 때 선생이 경사(京師 명(明) 나라의 서울)에 입조(入朝)하여 정성을 다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므로 우리나라가 이적(夷狄)의 대우를 면하게 되었고,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정축년(1637, 인조15)에 천지가 번복되고, 연이어 범순(犯順)의 싸움이 있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가 여지없이 패상(悖喪)되었을 때 선생이 홀로 대의(大義)를 담당하여 서질(敍秩)과 명토(命討)의 의리를 밝혔고, 마침내 성조(聖祖 효종(孝宗)을 말함)가 즉위하여 큰 계획을 세우자 선생이 또 사류(士流)를 수습하여 성지(聖志)에 보답하다가 임진년(1652, 효종3) 6월 25일, 동교(東郊) 석실재사(石室齋舍)에서 천명(天命)을 마쳤다.
아, 선생의 뜻은 비록 당시에는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그 공(功)만은 직위를 얻지 못했던 옛 성현이 현재와 후세에 미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 선생을 보내시어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시조인 태사(太師) 선평(宣平)으로부터 7백여 년이 된 오늘날까지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고조(高祖)인 영수(永銖)는 장령(掌令)이었으며, 증조 번(璠)은 서윤(庶尹), 조(祖) 생해(生海)는 군수(郡守)였다. 군수의 막내아들 도정공(都正公) 극효(克孝)가 임당(林塘) 상공(相公) 정유길(鄭惟吉)의 딸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고, 백씨(伯氏) 현감공(縣監公) 대효(大孝)가 아들이 없어 선생으로 대를 잇게 하였다. 정부인(鄭夫人)의 임신이 기사년(1569, 선조2) 7월이었는데 선생이 실지로 대기(大期)의 수를 응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비상하게 여겼다. 16세에 월정(月汀) 문경공(文敬公) 윤근수(尹根壽)에게 학문을 배웠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병신년(1596, 선조2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치되었는데, 당시 권간(權奸)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이 곤욕을 치렀다.
마침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議)가 되고, 다시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이조 좌랑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홍문관 교리ㆍ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일찍이 춘추 사전(春秋四傳)을 교정하여 올렸다. 제주(濟州)에 조그마한 변란(變亂)이 있을 때 어사(御史)로 가 안무(安撫)하였고, 외직으로 고산 찰방(高山察訪)을 지내고, 곧이어 경성 판관(鏡城判官)ㆍ개성 경력(開城經歷)을 지냈다. 대체로 정인홍 등이 우계(牛溪) 성 선생을 함정으로 삼아 사류(士類)를 깡그리 내몰음으로 선생이 조정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무신년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고,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기유년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 명(明) 나라 황제가 사신 웅화(熊化)를 파견하여 선조(宣祖)에게 사제(賜祭)할 때 선생이 사신의 인도를 맡았다. 교리(校理)ㆍ응교(應敎) 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고, 때로는 사간원사간 겸 시강원필선(司諫院司諫兼侍講院弼善)과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지냈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는데, 그가 인홍(仁弘)을 논척(論斥)한 계(啓)에,
“우리나라에 인현(仁賢) 이후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시작하니, 몽주의 도통을 이어서 후학의 사범(師範)이 된 이는 실지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등이었는데, 오늘날 이러한 모질(媢嫉)의 말이 있을 것은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題調)를 겸임하고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가 임자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계축년에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무옥(誣獄)으로 죽으니 선생은 당시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는데 그와 인척인 관계로 연좌(連坐)되어 파직되었다. 을묘년에 광해군이 생모를 존봉(尊奉)하고 황조(皇朝 명(明))에 인준(認准)을 청할 때 선생이 사문(謝文)을 지어 올렸는데, 거기에 휘오(諱忤)된 말이 있어 삭관(削官)되었다. 정사년에 폐모의(廢母議)가 있자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대의(大義)를 내세우다가 북쪽으로 귀양 갔는데, 선생이 송별문을 지어 천리(天理)의 정당함을 서술하였다. 무오년ㆍ신유년에는 생가(生家) 부모(父母)의 상(喪)을 연이어 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선생은 모부인 이씨(李氏)의 복(服)을 입고 있으면서 훈재(勳宰)에게 서찰을 보내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그 하나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심하게 대우한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의 일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책망하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상께서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출사(出仕)하는 일)을 명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고, 상(喪)을 마치자 조정에서는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렸으나 사퇴하였다가 다시 제수되었다. 당시의 의논이 오로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고 시비(是非)는 버려두었으므로 벼슬길이 자못 분잡했으나 선생 홀로 뛰어난 식견을 가져 매번 정별(旌別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뜻)의 의론을 주장했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승진되어 팔점(八漸)을 논했는데 말이 매우 간절했다. 이로부터 연이어 이조(吏曹)ㆍ예조(禮曹)ㆍ형조(刑曹)의 참의를 지내다가 명 나라 사신이 오자 도승지(都承旨)에 특배(特拜)되었다. 일찍이 글을 올려, 대신(大臣)을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여 성실과 거짓의 간격이 없게 하고 언관(言官)을 소중히 대우하여 곧은 선비의 의기를 꺾지 말며, 일상적인 규칙에 구애하지 말며, 일의 시기를 잃지 말며, 붕당(朋黨)을 미워하지 말며, 변급(辯給 구변(口辯)이 좋은 사람)을 좋아하지 말며, 숭고(崇高)함을 믿지 말며, 소천(踈賤)을 가벼이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또 재앙을 만났을 때 수성(修省)의 도리를 아뢰니 상께서는 붕당이란 글자에 엄지(嚴旨)를 내렸다.
이윽고 특별히 병조 참판에 승직되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겨졌는데 일을 논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옮겨져서는 일을 말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려 물러나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병인년에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선생이 해부(該部)에 변무(辨誣)하기를,
“황조(皇朝)에서는 소방(小邦)을 자식처럼 보고 소방은 황조를 아버지처럼 섬기는데,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그 자식된 자는 어떻게 처신하여야겠습니까. 소방이 적심(赤心 성심(誠心))으로 사대(事大)함은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과 같은데, 이 말을 듣고부터는 원통하고 억울하여 삶이 즐거움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대부(大部)에서는 낱낱이 아뢰고 환히 분별하여, 천하에서 모두 소방이 노(虜)와 내통한 사실이 없음을 안 다음에야, 삼한(三韓)의 백성이 금수(禽獸)였다가 사람이 되고 이적(夷狄)이었다가 중화(中華)가 되며 반역이었다가 충순(忠順)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차라리 북궐(北闕)의 아래서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천지(天地)의 사이에 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황제의 유지(諭旨)에,
“배신(陪臣)의 변설(辨雪 변명하여 의문점을 씻는 일)을 보니 매우 명석(明晳)하다. 어찌 여러 세대를 공경해 오다가 하루아침에 순(順)을 저버리고 역(逆)을 본받겠느냐. 짐(朕)은 길이 너희 충정(忠貞)을 보아서 너희 나라 회유(懷柔)함을 그치지 않으리라. 배신(陪臣) 김모(金某 김상헌을 가리킴) 등의 정성스러움이 또한 가상하다.”
하였다. 정묘년 3월에 본국이 병화(兵禍)를 입는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해부(該部)에 글을 올려,
“군사를 출동하여 노(虜)의 소굴을 곧장 쳐서 그 배후를 견제(牽制)하기 바랍니다.”
하였고, 또 모장(毛將 모문룡(毛文龍))의 무주(誣奏)를 매우 자상히 분별하니, 해부에서 아뢰기를,
“김모 등의 신부(臣部)에 보내온 글을 읽다가 미처 다 읽지도 않아서 비분(悲憤)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쳤습니다.”
하니, 황제는 무신(撫臣 순무(巡撫))에게 명하기를,
“노의 소굴이 허함을 틈타 예병(銳兵)을 뽑아서 즉시 공격하고 늦추지 말라.”
하여, 무군(撫軍 순무(巡撫)를 가리킴)은 수병(水兵)을 파견하여 압록강에 도착하고, 태감(太監) 4명이 뒤이어 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갔다. 선생이 복명하니 상께서 하교(下敎)하기를,
“해부(該部)의 제본(題本)과 황상(皇上)의 유지(諭旨)를 보건대, 우리나라가 무고(誣告) 입은 일이 시원스럽게 씻겨졌을 뿐 아니라 열 줄의 윤음(綸音)이 글자마다 매우 친절하니, 사신간 신하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케 한 것으로 일이 매우 가상하다.”
하고, 도중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고 가의(嘉義)의 품계에 진급시켰다. 상께서 인견(引見)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노마(虜馬)가 깊이 들어와서, 종사(宗社)가 몽진(蒙塵)하며 성하의 욕됨[城下之辱 적에게 수도(首都)의 성하까지 침공(侵攻)당하고, 항복하는 일]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두 명의 호차(胡差 청(淸)의 사신)가 오게 되므로, 선생은 차자(箚子)를 올려 사절하여 보내기를 청하였고, 그후 또 중국의 물화(物貨)를 노에게 주지 말라고 청하였다.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도승지로 고쳐 제수되었다.
광해군 때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이 노에게 항복하였는데, 이해 봄의 노의 침입은 사실상 강홍립이 인도한 것이다. 화친이 성립되자 노는 홍립을 남겨 두고 돌아갔는데, 홍립이 죽자 조정에서 그를 복관(復官)시켜 주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홍립은 죄가 역적의 선봉에 부합되는데도 국가에 법이 없어 형벌(刑罰)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복관시키고 상(喪)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인신(人臣)의 충을 권장하며 천하의 악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선생의 가족이 안동(安東)에 피란 가 있었으므로 선생은 휴가를 청하여 사당을 배알하였다. 국가에 중대한 의론이 있어 부제학(副提學)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한갓 문서에만 매달리지 말고 힘써 원대한 계획을 넓히며, 한갓 장구(章句)에만 힘쓰지 말고 길이 고명(高明)의 지역에 나아가며, 비록 몸을 굽혀 군신(羣臣)의 계책을 따른다 할지라도 반드시 선(善)을 택하여 중도(中道)를 취할 것이며, 비록 살리기 좋아함을 힘쓰더라도 반드시 악(惡)을 징계하고 간사함을 없애야 합니다.”
하였다.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겨졌다. 무진년에 유효립(柳孝立)이 배반하였으므로, 선생이 사간원(司諫院)의 장(長)으로서 국문(鞫問)에 참여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형조 판서에 승진되었다. 이어 대사헌(大司憲),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역임하고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都承旨兼弘文館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특제(特除)되었다. 질병이 있으므로 특별히 하명하여 의약(醫藥)을 내렸다.

기사년에 다시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중요한 일을 꾀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하며, 국민의 힘을 여유 있게 하고 군병(軍兵)을 양성하소서.”
하였다. 노(虜)의 차사(差使) 중남로노야(仲男虜奴也)를 상이 접견할 때 조정의 의론이 그에게 의자에 앉는 것을 허락하자, 선생이 아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어 차자를 올려 극언(極言)하였고, 대사헌으로서 목성선(睦性善) 등을 탄핵하다가 엄지(嚴旨)를 받고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누차 역초(逆招 반역자의 진술)에 나오자 조정에서는 보전(保全)할 계책을 논의하고 있는 터에 목성선과 유석(柳碩) 등이 투소(投疏)하여 공(珙)을 중상하여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므로, 선생이 일찍이 그 음흉(陰凶)한 정상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급기야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辭)에서 공(珙)을 내세움이 더욱 심하자, 목성선ㆍ유석의 당(黨)이 또 입을 모아 공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다시 성선(性善) 등을 논핵하니, 상이 당론(黨論)으로 의심하므로, 여러 번 관직을 사양하였다가, 다음해인 경오년 겨울에야 비로소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신미년 봄에 영흥(永興)의 진전(眞殿 준원전(濬源殿))을 봉심(奉審)하고, 도승지로서 사친(私親)을 높이 받드는 일은 예가 아니라고 논박하였고, 뒤에 대사헌이 되어 더욱 논박하였으며, 이어 이조 판서 이귀(李貴)를 탄핵하다가 거듭 꾸지람을 듣고는 사직하고 물러가 석실(石室)에 거처하였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자 입궐(入闕)하여 임곡(臨哭)하고 곧 돌아왔다. 계유년에 대신의 추천으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로부터 을해년까지 3년간에 걸쳐 다섯 번 대사헌을 제수하였고, 이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시켰으며 또 부제학(副提學)ㆍ대사성(大司成)의 임명이 있었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거나, 혹은 잠시 나갔다가 곧 돌아오곤 하였다. 상이 일찍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의 굳세고 정직함을 나는 나날이 생각하고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경을 생각함이 이러하거니 경 또한 대궐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언(上言)하기를,
“몸은 쓰여지나 말이 쓰여지지 않음은 옛사람이 부끄러워하던 것입니다. 신이, 나아가서 말의 쓰임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어찌 물러가는 것으로 간(諫)을 삼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이 중년에 병이 많아 모든 방술(方術)을 거의 다 써 보았으나 약의 힘이 오랜 고질(痼疾)을 구하지 못하여 좋은 시절은 쉽게 가 버리고 늙음은 나는 듯이 찾아와서 천금(千金) 같은 몸뚱이가 문득 아침 이슬 같습니다. 당시에 신묘(神妙)한 약제(藥劑)로써 원기(元氣)를 보하여 장수(長壽)하는 비결을 권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지극한 경계를 우언(寓言)으로 일깨운 것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喪)에 선생은 당시 이미 조정에 들어가 있던 터라 청하기를,
“의(衣)ㆍ금(衾)ㆍ교(絞 죽은 사람을 염(殮)할 때 장식하는 띠)ㆍ모(冒 시체를 덮는 베) 같은 상구(喪具)를 상의원(尙衣院)에서 가져다 쓰고, 일체 장사치들의 것을 쓰지 마소서.”
하였다.
병자년에 공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고쳐 제수되고 정헌(正憲)에 올랐다. 이때 노(虜)가 이미 제호(帝號)를 참칭(僭稱)하여 조정에서는 대의에 의거하여 그들의 사신을 배척하였으므로 노가 조만간에 쳐들어오게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태평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으므로 선생이 자신의 죄를 추궁하여 올리니 상이 글을 내려 다시, 진(鎭)을 설치하고 병사를 나누는 것이 편리한 지의 여부를 의논하여 왔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염근(廉謹)으로 특별히 숭정(崇政)이 더해졌으나, 또 사건으로 상의 뜻에 거슬러 관직을 버리고 석실로 돌아왔다. 이해 12월에 청로(淸虜)가 침입하여 상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행하니 선생이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 가서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당연히 먼저 싸우고 화친은 뒤에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세자(世子)를 노진(虜陣)에 보내어 노병(虜兵)을 퇴각(退却)시키려 하므로, 선생이 준절히 책망하기를,
“어찌 신하로서 세자를 적에게 주는 의(義)가 있겠소.”
하니, 사기(辭氣)가 엄준(嚴峻)하여, 대신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곧장 대궐에 나아가 대죄(待罪)하였는데, 이 때문에 세자가 노에게 불모로 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예조판서 겸 비변사당상(禮曹判書兼備邊司堂上)이 되어 입대(入對)하여 한 뜻으로 굳게 지킬 계획을 극력 진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앞으로 무엇을 믿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천도(天道)는 믿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포위가 더욱 급하여지자, 상은 성황사(城隍祠)와 백제 시조묘(百濟始祖墓)에 기도를 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사람이 궁지에 처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병들어 아프거나 슬플 때면 반드시 부모를 부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몸소 개원사(開元寺)에 납시어 원종(元宗)의 진좌(眞座 영정)에 기도하소서.”
하였다. 정축년 1월 16일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한창 화친(和親)하는 글을 초하는데, 선생이 읽다 말고 분격(憤激)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통곡하고 찢어 버리면서,
“제공(諸公)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합니까.”
하고, 이어 청대(請對)하였는데, 분기가 가슴에 가득 차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참 뒤에 이뢰기를,
“오늘날의 의논은 양립(兩立)할 수 없으니,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 주소서.”
하니, 상이 문득 만류하면서,
“경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내 한 몸을 위한 꾀가 아니라, 위로는 종묘사직을 위함이며, 그리고 차마 온 겨레를 멸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신의 말도 바로 생존을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때 두 황제[二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는 노(虜)에게 구축(驅逐)되어 사막(沙漠)의 사이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비록 죽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나, 종묘(宗廟)만은 어떻게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군신 상하가 죽기로써 지키기로 맹세한다면, 전하를 위하여 죽을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천심(天心)이 끝내 재앙을 거두어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 선왕(先王)을 뵈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는, 물러 나와 드디어 자정(自靖 자결)할 계획을 세우고 6일을 굶었으며, 또 목을 매었으나 곁에 있는 사람이 급히 구하였다. 마침 노가 우리에게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다시 음식을 먹고 가기를 자청하였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사람만 보내었다. 선생이 국서(國書)를 찢어 버릴 때 어떤 이가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완성이 말하기를,
“붙들어 내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달 그믐에 상이 성을 나와 서쪽으로 행행하니, 선생은 길가에 나와 부복(俯伏)하여 망배(望拜)하여 통곡하였다. 2월에 남한산성에서 안동 학가산(安東鶴駕山)으로 돌아왔다. 호종(扈從)의 노고로 숭록(崇祿)을 더하니, 글을 올려 사양하고, 또 아뢰기를,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갖옷과 갈포(葛布)를 없앨 수 없는 것이고, 적국(敵國)이 멸망하지 아니하면 전쟁과 수비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복수의 뜻을 잘 가다듬어 요새지를 더욱 수축하며, 일시의 요맹(要盟)을 믿지 말고, 전일의 대덕(大德)을 잊지 말며, 호랑(虎狼)의 인(仁)을 믿지 말고, 부모의 나라를 가벼이 단절하지 마소서. 신은 매양 선왕(先王)의 ‘만번 꺾여도 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주문(奏文)을 생각할 때마다 일찍이 눈물이 옷깃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에는,
“오늘날의 진퇴(進退)가 모두 그 의(義)가 있으니, 다만 후세에 다시 숙도(叔度 김상헌, 곧 자기 자신을 일컬음) 같은 사람이 나서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행여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비록 구원(九原)에 있더라도 오히려 생기가 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가(大駕)가 성(城)을 나가던 날에 만약 성 밖 한 걸음의 땅이라도 밟았다면 이는 순(順)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는 날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에 죽으면 신자(臣子)는 따라 죽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간쟁(諫爭)해야 하고, 간쟁해도 되지 않으면 물러나 자정(自靖)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다. 어떤 이의 말처럼 ‘오직 조종(祖宗)의 유택(遺澤)을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 2백 년 강상(綱常)을 부지하려는 것은 바로 선왕들의 교육의 혜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간흉(奸凶)의 무리가 노(虜)를 끼고 임금을 위협하여 국가를 팔아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 있으니, 매양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거의 멸망하게 된 우리나라를 도와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골짜기에 방황하며 피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밤낮으로 마음에 맹세하는 것은 한 칼로 선우(單于 흉노(匈奴)의 왕(王)의 칭호)의 목을 베고 간신(奸臣)의 심장을 가르는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장령(掌令) 유석(柳碩) 등이 앞으로 사류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획으로, 아울러 시기를 타고 틈을 만들려고 아뢰기를,
“군신의 의(義)는 천지간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사생 영욕(死生榮辱)에 도리상 혼자만 다를 수 없는 것인데, 김모(金某 김상헌을 일컬음)는 몸을 도사려 멀리 달아나 스스로 ‘몸을 청결하게 하고 절개를 온전히 하며 더러운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팔아 명성을 사고 당(黨)을 세워 나라를 그르침은 한낱 지엽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임금도 아랑곳없는 그 부도(不道)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
하였다. 이때 남이공(南以恭)이 인사권(人事權)을 잡고서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대각(臺閣 사헌부ㆍ사간원)에 등용해 놓았으므로, 이계(李烓)ㆍ이도장(李道長)ㆍ박계영(朴啓榮)ㆍ정지호(鄭之虎)ㆍ최계훈(崔繼勳)ㆍ이여익(李汝翊)ㆍ권도(權濤)ㆍ박수문(朴守文)ㆍ박돈복(朴敦復)ㆍ홍진(洪瑱)ㆍ이운재(李雲栽)ㆍ이경상(李慶相)ㆍ임효달(任孝達)ㆍ신유(申濡)ㆍ이주(李裯)ㆍ김수현(金壽賢) 등이 서로 이어 논핵하고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이도장 등이 다시 청하니 파직(罷職)만 명하였고, 이계 등이 다시 강력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관직을 삭탈할 것을 명하였다.
기묘년에 직첩(職牒)을 다시 주고 연이어 서용(敍用)의 명을 내렸다. 선생은 조정에서 군사를 정돈하여 노(虜)를 도우려 한다는 말을 듣고 피눈물을 흘리며 소(疏)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도 없었으니,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역(逆)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재앙이 있다.’고들 하지만, 신은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도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름을 지키면서 하늘의 명(命)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대저 일이 순하면 민심이 기뻐하는 것이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그 도움을 얻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는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논의는 생각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地下)에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소(疏)가 완성되자 받들어 사당(祠堂)에 고(告)하고 상에게 아뢰었으나 회보(回報)가 없었다.
경진년에 노(虜)의 차사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온갖 협박 공갈을 다하며 선생을 잡아 보내라 하였고, 또 승지(承旨) 신득연(申得淵) 역시 잡혀서 문초를 당하고 있었는데 선생을 핑계하여 스스로 벗어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선생을 재촉하여 밤중에 길을 나섰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찰(御札)과 초구(貂裘)를 하사하니, 선생은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도착하니 노의 차사가 묻기를,
“국왕이 항복할 때 유독 ‘청국(淸國)은 섬길 수 없다.’ 하고 항복할 때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무슨 뜻이었소?”
하므로, 선생이,
“내 늙고 병들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소.”
하고 답하니, 또 묻기를,
“근래의 관작은 어째서 받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군사를 원조할 때는 어찌하여 저지하였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우리 임금에게 고(告)한 것이니 타국(他國)에서 알 바 아니오.”
하였다. 노의 차사가,
“두 나라가 이미 한집안이 되었는데, 어째서 타국이라고 하오?”
하니, 선생은,
“두 나라가 제각기 나누어진 땅이 있는데, 어찌 타국이라고 아니할 수 있소?”
하고 답하였다. 이때 호(胡)와 함께 이 광경을 보는 자들은 모두들 끝없이 칭탄(稱歎)하였는데, 마침내 선생을 북(北)으로 데려갔다. 신사년 정월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자. 칸(汗)이 또 따져 물으므로 선생은 전과 같이 답하니, 마침내 구류(拘留)시켰다. 계동(季冬)에 선생의 병이 심하자, 칸(汗)이 의주(義州)로 나가 머물게 하였다. 부인 이씨(李氏)가 안동(安東)에서 세상을 떠나 임오년 정월에 부음(訃音)이 도착하자, 설위(設位)하여 곡(哭)하고 성복(成服)을 예와 같이 하였다. 계미년에 노(虜)는 어떤 사건으로 이계(李烓)를 잡아갔는데, 계는 노에게 조정의 기밀과 선생에 대한 것을 보고하여 스스로 자신의 화를 면하기를 기대함으로써, 노는 다시 선생을 심양으로 데려가 최 완성(崔完城 완성은 최명길(崔鳴吉)의 봉호)과 함께 북관(北館)에 유폐하였다가, 여름에 질관(質館 인질로 잡혀간 세자가 묵고 있는 관사)으로 풀어 보내어 세자를 따르게 하고, 사례의 절을 하게 하니, 최공(崔公)이 선생에게 팔꿈치를 찌르며 함께 절하자고 하였으나 선생이 싫어하므로 노(虜)가 강제로 시키려 하였지만 선생은 끝내 드러누워 버리고 따르지 않았다.
갑신년 3월에 대명(大明)이 망하니 선생은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을유년에 노(虜)가 세자를 귀국시키니, 선생이 수행하였다. 서교(西郊)에 도착하여 소(疏)를 올렸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마침내 석실로 나왔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김모(金某)의, 환난(患難)을 당하여 절벽처럼 굳게 선 한 절개는 천고(千古)에 견줄 이 드무니, 어찌 천하 후세에 큰 광채가 있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직접 위유(慰諭)를 내리시어 가상히 여겨 권장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경(卿)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고, 또 공문(公門)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 역시 나오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함이다. 나는 지금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위유할 수 있겠느냐.”
하므로, 선생이 황공하여 소(疏)를 올렸다. 4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卒)하자, 들어가 임곡(臨哭)하고 곧 물러났다. 병술년에 의정부 좌의정에 제수되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마침 또 역변(逆變)이 있으므로, 마침내 들어가 사례하고 동궁(東宮)을 보익(補益)하는 도리를 진술하고, 또 직언으로 죄를 얻은 이응시(李應蓍)를 너그럽게 놓아줄 수 있는 것이라고 논(論)하였다. 인하여 사직하기를 비는 글을 32번 올려 겨우 사직하고 즉시 돌아왔다. 궁료(宮僚)에 찬선(贊善)ㆍ진선(進善)을 두기 시작한 것은 실지로 선생의 권유로 인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은명(恩命)이 연이어 있었으나 모조리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기축년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하자, 선생이 대행빈궁(大行殯宮 인조의 빈소)에 들어가 임곡하고 물러나 돌아오니, 상은 두 차례나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므로 드디어 성(城)에 들어와 숙사(肅謝)하니, 상은 견여(肩輿)로 궐내(闕內)를 출입하도록 하명하였다. 재이(災異)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의 도리를 진술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귀양 보냈던 신하 이경여(李敬輿) 등 4명도 양이(量移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는데, 글을 올리고 물러났다. 국장(國葬)이 끝난 뒤에 북사(北使)가 성(城)에 들어오자 동교(東郊)에 나와 머물렀는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소환(召還)하고 이어 사대(賜對)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옛말에 ‘모든 일이 시기가 있으니, 시기가 지나면 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여 보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다스리고 싶은 마음이야 없겠는가마는 다만 재주가 부족하고 덕이 박할 뿐이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제갈량(諸葛亮)의 말에 ‘망녕스럽게 스스로 비박(菲薄)하다 하고 비유를 끌어대어 의(義)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이 마음을 더욱 가다듬어 나날이 그 덕(德)을 새롭게 하소서. 요(堯)ㆍ순(舜) 같은 성인(聖人)도 사람을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어렵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능히 인재를 알아서 임용한다면 백성을 편안히 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인재가 없다는 말은 모두 헛말입니다. 예로부터 흥세(興世)에 쓰인 인재는 바로 쇠세(衰世)에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민생의 곤란함은 거의 장리(贓吏 탐관오리) 때문이니, 바라건대 그 법을 엄히 하소서.”
하고, 또 미리 장재(將才)를 모아서 급한 때에 대비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잘못된 점을 논하였다.
당시에 신독재(愼獨齋) 김공 집(金公集)이 조정에서 장차 물러나려 하므로, 선생이 상소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김모(金某)는 숙덕(宿德) 있는 유림(儒林)으로서 노성(老成)하고 단량(端亮)하여 사림(士林)이 향하여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것을 못이긴 체하고 따르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곁에 두고서 새 덕화를 돕게 하소서.”
하니, 상이 마침내 김공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윽고 또 사대(賜對)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상의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여 항상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한다면, 천재(天災)와 민원(民怨)을 모두 막을 수 있습니다. 또 임금은 당연히 양(陽)을 붙잡아 세우고 음(陰)을 억제하는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음과 양이 성하고 쇠함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경인년에 또 글을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정사(政事)와 호령(號令)이 거듭 공의(公議)에 거슬러짐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편안하기 어려운 상태와 두려운 형세가 마치 풀리는 얼음 위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조종(祖宗)의 무거운 부탁을 저버리지 마소서.”
하고, 인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여 마지않으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조정의 선비와 성균관의 학사들이 모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선생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돌릴 수 없었다. 상은 사대(賜對)하여 우악한 예로 전송하였고 선생은 진계(陳戒)함이 매우 많았는데, 대요(大要)는, 군신(群臣)과 백성에게 죄를 짓지 말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착한 일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대행(大行 인조(仁祖))의 연상(練祥 소상과 대상)에 모두 들어와 참례하였고, 소(疏)를 올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를 아뢰었다.
임진년에 상이 선생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유소(遺疏)가 올라오니 상은 정원(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하늘이 억지로 남겨 두지 않아서 우리 원로(元老)를 잃으니, 슬픈 심정을 비길 데 없도다. 이 유소(遺疏)를 보건대 나라 위한 충성이 죽으면서도 더욱 독실하였으니, 깊이 경탄(敬歎)하노라.”
하였다. 유소의 대략에,
“신이 높은 반열에 올랐으나 헛되이 죄(罪)만 쌓았습니다. 병자ㆍ정축년 이후로는 벼슬의 뜻을 끊었으나 성명(聖明)을 만나 과분한 은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구구한 심정은 다만 사류(士流)를 밝게 드러내고 기강(紀綱)을 확립하여 성지(聖志)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우려 하였는데, 불행하게 일과 마음이 서로 맞지 않아서 낭패(狼狽)하고 돌아왔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목숨이 다하였으니, 이 생은 끝났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즉위하던 처음에 세운 뜻을 더욱 격려하여 현인 좋아하는 정성을 변치 말고, 선류(善類)를 등용하여 다스리는 방도를 내고 힘써 실덕을 닦아서 대업(大業)을 넓히소서. 신은 죽음에 임하여 기력이 약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8월 18일에 석실(石室)의 선영에 예장(禮葬)하였다. 선생이 심양관(瀋陽館)에 있으면서 일찍이 스스로 명(銘)하기를,
지성은 금석에 맹세하고 / 至誠矢諸金石
대의는 일월에 달았네 / 大義懸乎日月
하늘과 땅이 굽어 살피시니 / 天地鑑臨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네 / 鬼神可質
고도에 합하기를 바랐더니 / 蘄以合乎古
금세에 도리어 어긋나 버렸네 / 而反盭於今
아 백세 후에는 / 嗟百世之後
남이 내 마음을 알리 / 人知我心
하였는데, 유명으로 이 글만을 묘석(墓石)에 새겼다.
계해년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후 9년 만인 신축년에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니, 대저 국가에서 슬프게 여겨 높이는 은전만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종유(從遊)하던 선비와 그 밖에 소문을 듣고 대의를 사모하던 자들은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와 배곡(拜哭)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먼 곳에서는 모두 서로 모여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으며, 그 유적이 있는 곳은 모두 서원(書院)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선생은 천품(天稟)이 매우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고 평생 수용(受用)함이 이 밖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대요(大要)는 지경(持敬)과 역행(力行)으로 주(主)를 삼아 가정에 있을 때는 그 도리를 곡진히 하여 윤리(倫理)는 반드시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는 반드시 독실하게 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임금 섬기기에 예를 다하여 털끝만큼도 예사로이 넘기지 아니하니, 인조(仁祖)가 일찍이 이르기를,
“김모(金某)가 후사(喉司 승정원을 말함)에 있을 때는 궐(闕) 안이 숙연(肅然)하더니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그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어렵고 쉬운 절차는 하나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유법(遺法)을 따랐다. 대개 그 도(道)는 수신(修身)ㆍ제가(齊家)로부터 미루어 나갔으므로 본말(本末)이 겸비되고 내외(內外)가 다 이루어져서, 말로서는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가 수립한 대절에 있어서는 비록 일월(日月)에 빛나고, 천지에 드높으나 또한 그 조존(操存)이 견고하고 함양(涵養)이 심후하여, 자연히 사생(死生)을 마치 한서(寒暑)의 변역(變易)처럼 보았으니, 하루아침에 습취(襲取)한 것과는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공을 논한다면, 질서와 예의는 사람에게 큰 것이라, 하루라도 폐하여 버린다면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고 중화가 이적(夷狄)으로 변하는 것이다. 명(明)의 말년을 당하여, 선생은 속국 배신(陪臣)으로서, 한 손으로 기둥을 떠받들어, 삼강(三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대저 세상의 치란과 도의 회명(晦明)은 비록 기수(氣數)의 승침(昇沈)에 몰려 언제나 면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나, 하늘은 반드시 그 난을 다스리고 그 어두움을 밝힐 대인(大人)을 낳아 그 뒤에 대비시키는 것이니,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효종의 초기에 서로 만남에 이르러서는 사공(事功)을 기약하니, 하늘의 뜻이 마치 장차 환공(桓公)ㆍ문공(文公)의 일로 맡기려는 것과 같았는데, 선생은 이미 몸이 쇠약해졌다는 탄식을 하였고 태산(泰山)은 이윽고 무너졌다. 그러나 공언(空言)일 뿐 시행된 것은 없었으나, 한유(韓愈)는 맹자(孟子)의 공(功)을 우(禹)의 공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니, 어찌 반드시 구합제후(九合諸侯)ㆍ일광천하(一匡天下)를 한 다음에야 오랑캐 됨을 면한다 하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부인은 판서에 추증된 의로(義老)의 딸인데 아들이 없고, 선생이 중씨(仲氏)인 상관(尙寬)의 아들 광찬(光燦)을 양자로 삼았는데 관직이 동지(同知)에 이르렀다. 손자 수증(壽增)은 지금 부사(府使)가 되었고, 수흥(壽興)은 원임 영상(原任領相)이고, 수항(壽恒)은 좌상(左相)이며, 사위는 목사 이정악(李挺岳)ㆍ현감 홍주천(洪柱天)ㆍ군수 이중휘(李重輝)ㆍ교리(校理) 송규렴(宋奎濂)ㆍ지평(持平) 이광직(李光稷)이고, 서출(庶出)의 아들 수징(壽徵)ㆍ수응(壽應)은 모두 진사(進士)이며, 수칭(壽稱)ㆍ수능(壽能)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다. 증손 창국(昌國)ㆍ창숙(昌肅)ㆍ창직(昌直)은 부사(府使)의 아들이고, 창열(昌說)은 영상(領相)의 아들이며, 창집(昌集)ㆍ창협(昌協)ㆍ창흡(昌翕)ㆍ창업(昌業)은 좌상(左相)의 아들이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또 《남사록(南槎錄)》ㆍ《독례수초(讀禮隨抄)》 등의 책이 있다. 선생이 소시에 스스로 청음(淸陰)이라고 호하였는데, 병자년 이후로는 스스로 석실(石室)이라고 많이 칭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석실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나는 몽루(蒙陋)한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선생의 알아줌을 입어 선생의 문하(門下)에 매우 익숙하였던 터이므로 이제 부사(府使) 등 제공(諸公)이 묘명(墓銘)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얕은 식견과 비졸한 문사(文辭)로서는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없으며, 평소의 기상(氣象) 성음(聲音)을 미루어 생각하면 슬프고 목이 메어 차마 쓸 수 없고, 또한 차마 잊을 수도 없다. 평일의 언행(言行)은 부사(府使) 형제가 기록하여 한 책을 만들었고, 또 내가 외람되게 연보(年譜)를 편찬하면서 자못 상세히 하였으므로, 이제 다만 그 대략을 이상과 같이 엮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태일이 처음 갈라져서 / 太一肇判
음과 양이 있게 되었네 / 厥有陰陽
비록 양이라도 사라짐은 / 雖陽亦消
떳떳한 이치인지라 / 此理之常
사라지기를 그치지 아니하면 / 消而不已
인류도 없어지리라 / 人類斯亡
그러기에 하늘이 성인을 내어 / 故天生德
보상의 권한을 주니 / 畀輔相權
이에 그 쇠미함을 붙들어 / 乃扶其衰
유약함을 단절하고 도로 이끌었네 / 絶柔道牽
운수가 돌아오니 / 洎乎來復
태양이 빛나누나 / 朱光赫然
선생의 세대는 / 先生之世
온 누리가 추위에 떨고 / 九野寒威
더욱이 깊은 연못이라 / 粤維重淵
남은 것 드물었네 / 存者幾希
이치란 끝날 수 없으므로 / 理無可盡
석과가 있었네 / 有此碩果
이미 위에서 음이 다하니 / 旣㞃於上
양은 아래에서 회복되었네 / 其復在下
저들은 그 집을 잃었는데 / 彼剝其廬
나는 이 수레를 얻었네
/ 我斯得輿
때에 마침 관문 닫으니 / 時方閉關
그것이 펴질 조짐이라 / 有漸其舒
일양이 생하고 이양이 생하고 / 一之二之
삼양이 생하면 태가 되는데 / 三則爲泰
만물은 비록 나지 않았으나 / 物雖未生
나는 스스로 커진다네 / 我自爲大
그 조짐을 살펴보면 / 揆厥機緘
작고 먼 데서 근본하였네 / 本乎渺綿
이로부터 자라난 것을 / 由玆以長
진실로 기선이라 하네 / 寔曰幾先
겨울이 조화 없다 / 莫謂玄冬
이르지를 마오 / 無有造化
아 선생은 / 嗚呼先生
훌륭한 역이로다 / 大哉易也
누가 이러함을 알아주리 / 孰其知之
도를 아는 자라네 / 其知道者


 

[주D-001]정인홍(鄭仁弘)이 …… 무훼(誣毁) : 신해년(1611)에 좌찬성(左贊成)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李滉)이 그의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단점을 지적한 것을 분하게 여겨 영남(嶺南)에서 소(疏)를 올려 이언적ㆍ이황을 심하게 헐뜯었다.
[주D-002]모문룡(毛文龍)이 …… 이간질하여 : 모문룡은 명(明) 나라 장수로 요양(遼陽)이 함락되자 의주로 피난하여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요동 탈환을 도모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는 등 갖은 요구를 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명 나라에 우리나라를 모함했었다.
[주D-003]정축년에 …… 번복되고 : 정축년 1월,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한 사실을 말한다. 병자호란.
[주D-004]대의(大義)를 …… 밝혔고 : 정축년 1월 18일에 최명길(崔鳴吉)이 답서(答書)로 강화(講和)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지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그 글을 찢어 버리고 실성통곡하니, 그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꾸짖으며 “그대의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士友) 간에 자자하였는데, 공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명길이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 그러나 이는 곧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야 합니다.” 하고, 청(淸)에 보내는 답서를 다시 주워 모아 붙였다. 서질(叙秩)은 곧 누구나 자기 신분에 맞도록 지켜야 할 질서와 예외를 말한 것이고, 명(命)은 곧 천명이고, 토(討)는 곧 질서를 위반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이다.
[주D-005]대기(大期) : 임신 12개월 만에 낳는 것을 말하는데, 《사기(史記)》 여불위전(呂不韋傳)에 “희(姬)가 임신된 것을 숨기다가 대기(大期)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하였다. 그 주(註)에 “사람은 10개월 만에 낳는데, 두 달을 더 지났으므로 대기라고 한다.” 하였다.
[주D-006]폐모의(廢母議) :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자는 논의를 말하는데, 인목대비는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인조(仁祖)의 계비이며,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영창대군과 김제남이 피살되고, 인목대비도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되었다. 1623년에 광해군이 동생을 죽이고 모후(母后)를 폐출했다는 이유로 서인(西人) 이귀(李貴) 등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지자,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질책하고,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여 즉위시키니, 곧 인조(仁祖)이다.
[주D-007]곽광(霍光)이 …… 고사 : 신하로서 임금을 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죽고 자식이 없어 곽광이 승상(丞相) 양창(楊敞)과 의논하여 창읍왕(昌邑王) 하(賀)를 옹립하였는데, 창읍왕이 음란하고 무도(無道)하여 태후(太后)의 명으로 폐위하고 창읍(昌邑)으로 돌려보내며 탕목읍(湯沐邑) 3천 호(戶)를 주었다. 《漢書 霍光傳》
[주D-008]인성군 공(仁城君珙)이 …… 나오자 : 인성군은 선조의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의 소생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를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인조반정 후 이귀(李貴)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관용으로 무사하였다. 1628년 인조 6년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大北)의 잔당(殘黨)을 규합,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등 역적배들의 주인공으로 몰려 끝내 진도(珍島)로 귀양 보내고 이어 자살하게 하였다.
[주D-009]환공(桓公)ㆍ문공(文公)의 일 :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은 모두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바로잡아 폐업(霸業)을 달성하였는데, 여기서는 바로 효종에게 비유한 말이다.
[주D-010]태일(太一) : 천지창조(天地創造)의 혼돈(混沌)한 원기(元氣)를 말한다.
[주D-011]석과(碩果)가 …… 얻었네 : 이치는 끝없이 다시 계속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큰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잃는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하였고, 정전(程傳)에는 “큰 과일이 먹힘을 당하지 아니함은 장차 다시 생겨나는 이치를 보임이다.[碩大之果 不見食 將見得生之理]” 하였다.
[주D-012]관문 닫으니 : 《주역》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동지일(冬至日)에 관문을 닫아, 상려(商旅)가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안정(安靜)해서 미양(微養)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3]기선(幾先) : 무슨 사단(事端)이 일어나기 전, 즉 일어나려고 하는 바로 직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