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좌의정 청음 김상헌

석실(石室) 김선생(金先生) 묘지명 병서(幷序) 淸음 金尙憲 선생관련자료

아베베1 2012. 8. 21. 11:03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석실(石室) 김선생(金先生) 묘지명 병서(幷序)



석실 선생의 휘(諱)는 상헌(尙憲)이며 자(字)는 숙도(叔度)로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경오년(1570, 선조3) 6월 3일 자시에 출생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을 무훼(誣毁)하므로 선생이 승지(承旨)로서 매우 분명하게 변척(辨斥)하여 사문(斯文)이 실추되지 않게 되었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병인년(1626, 인조4)에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를 이간질하여 우리나라가 장차 천하에 죄를 입게 되었을 때 선생이 경사(京師 명(明) 나라의 서울)에 입조(入朝)하여 정성을 다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므로 우리나라가 이적(夷狄)의 대우를 면하게 되었고,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정축년(1637, 인조15)에 천지가 번복되고, 연이어 범순(犯順)의 싸움이 있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가 여지없이 패상(悖喪)되었을 때 선생이 홀로 대의(大義)를 담당하여 서질(敍秩)과 명토(命討)의 의리를 밝혔고, 마침내 성조(聖祖 효종(孝宗)을 말함)가 즉위하여 큰 계획을 세우자 선생이 또 사류(士流)를 수습하여 성지(聖志)에 보답하다가 임진년(1652, 효종3) 6월 25일, 동교(東郊) 석실재사(石室齋舍)에서 천명(天命)을 마쳤다.
아, 선생의 뜻은 비록 당시에는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그 공(功)만은 직위를 얻지 못했던 옛 성현이 현재와 후세에 미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 선생을 보내시어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시조인 태사(太師) 선평(宣平)으로부터 7백여 년이 된 오늘날까지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고조(高祖)인 영수(永銖)는 장령(掌令)이었으며, 증조 번(璠)은 서윤(庶尹), 조(祖) 생해(生海)는 군수(郡守)였다. 군수의 막내아들 도정공(都正公) 극효(克孝)가 임당(林塘) 상공(相公) 정유길(鄭惟吉)의 딸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고, 백씨(伯氏) 현감공(縣監公) 대효(大孝)가 아들이 없어 선생으로 대를 잇게 하였다. 정부인(鄭夫人)의 임신이 기사년(1569, 선조2) 7월이었는데 선생이 실지로 대기(大期)의 수를 응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비상하게 여겼다. 16세에 월정(月汀) 문경공(文敬公) 윤근수(尹根壽)에게 학문을 배웠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병신년(1596, 선조2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치되었는데, 당시 권간(權奸)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이 곤욕을 치렀다.
마침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議)가 되고, 다시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이조 좌랑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홍문관 교리ㆍ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일찍이 춘추 사전(春秋四傳)을 교정하여 올렸다. 제주(濟州)에 조그마한 변란(變亂)이 있을 때 어사(御史)로 가 안무(安撫)하였고, 외직으로 고산 찰방(高山察訪)을 지내고, 곧이어 경성 판관(鏡城判官)ㆍ개성 경력(開城經歷)을 지냈다. 대체로 정인홍 등이 우계(牛溪) 성 선생을 함정으로 삼아 사류(士類)를 깡그리 내몰음으로 선생이 조정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무신년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고,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기유년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 명(明) 나라 황제가 사신 웅화(熊化)를 파견하여 선조(宣祖)에게 사제(賜祭)할 때 선생이 사신의 인도를 맡았다. 교리(校理)ㆍ응교(應敎) 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고, 때로는 사간원사간 겸 시강원필선(司諫院司諫兼侍講院弼善)과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지냈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는데, 그가 인홍(仁弘)을 논척(論斥)한 계(啓)에,
“우리나라에 인현(仁賢) 이후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시작하니, 몽주의 도통을 이어서 후학의 사범(師範)이 된 이는 실지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등이었는데, 오늘날 이러한 모질(媢嫉)의 말이 있을 것은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題調)를 겸임하고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가 임자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계축년에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무옥(誣獄)으로 죽으니 선생은 당시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는데 그와 인척인 관계로 연좌(連坐)되어 파직되었다. 을묘년에 광해군이 생모를 존봉(尊奉)하고 황조(皇朝 명(明))에 인준(認准)을 청할 때 선생이 사문(謝文)을 지어 올렸는데, 거기에 휘오(諱忤)된 말이 있어 삭관(削官)되었다. 정사년에 폐모의(廢母議)가 있자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대의(大義)를 내세우다가 북쪽으로 귀양 갔는데, 선생이 송별문을 지어 천리(天理)의 정당함을 서술하였다. 무오년ㆍ신유년에는 생가(生家) 부모(父母)의 상(喪)을 연이어 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선생은 모부인 이씨(李氏)의 복(服)을 입고 있으면서 훈재(勳宰)에게 서찰을 보내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그 하나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심하게 대우한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의 일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책망하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상께서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출사(出仕)하는 일)을 명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고, 상(喪)을 마치자 조정에서는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렸으나 사퇴하였다가 다시 제수되었다. 당시의 의논이 오로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고 시비(是非)는 버려두었으므로 벼슬길이 자못 분잡했으나 선생 홀로 뛰어난 식견을 가져 매번 정별(旌別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뜻)의 의론을 주장했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승진되어 팔점(八漸)을 논했는데 말이 매우 간절했다. 이로부터 연이어 이조(吏曹)ㆍ예조(禮曹)ㆍ형조(刑曹)의 참의를 지내다가 명 나라 사신이 오자 도승지(都承旨)에 특배(特拜)되었다. 일찍이 글을 올려, 대신(大臣)을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여 성실과 거짓의 간격이 없게 하고 언관(言官)을 소중히 대우하여 곧은 선비의 의기를 꺾지 말며, 일상적인 규칙에 구애하지 말며, 일의 시기를 잃지 말며, 붕당(朋黨)을 미워하지 말며, 변급(辯給 구변(口辯)이 좋은 사람)을 좋아하지 말며, 숭고(崇高)함을 믿지 말며, 소천(踈賤)을 가벼이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또 재앙을 만났을 때 수성(修省)의 도리를 아뢰니 상께서는 붕당이란 글자에 엄지(嚴旨)를 내렸다.
이윽고 특별히 병조 참판에 승직되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겨졌는데 일을 논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옮겨져서는 일을 말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려 물러나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병인년에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선생이 해부(該部)에 변무(辨誣)하기를,
“황조(皇朝)에서는 소방(小邦)을 자식처럼 보고 소방은 황조를 아버지처럼 섬기는데,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그 자식된 자는 어떻게 처신하여야겠습니까. 소방이 적심(赤心 성심(誠心))으로 사대(事大)함은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과 같은데, 이 말을 듣고부터는 원통하고 억울하여 삶이 즐거움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대부(大部)에서는 낱낱이 아뢰고 환히 분별하여, 천하에서 모두 소방이 노(虜)와 내통한 사실이 없음을 안 다음에야, 삼한(三韓)의 백성이 금수(禽獸)였다가 사람이 되고 이적(夷狄)이었다가 중화(中華)가 되며 반역이었다가 충순(忠順)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차라리 북궐(北闕)의 아래서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천지(天地)의 사이에 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황제의 유지(諭旨)에,
“배신(陪臣)의 변설(辨雪 변명하여 의문점을 씻는 일)을 보니 매우 명석(明晳)하다. 어찌 여러 세대를 공경해 오다가 하루아침에 순(順)을 저버리고 역(逆)을 본받겠느냐. 짐(朕)은 길이 너희 충정(忠貞)을 보아서 너희 나라 회유(懷柔)함을 그치지 않으리라. 배신(陪臣) 김모(金某 김상헌을 가리킴) 등의 정성스러움이 또한 가상하다.”
하였다. 정묘년 3월에 본국이 병화(兵禍)를 입는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해부(該部)에 글을 올려,
“군사를 출동하여 노(虜)의 소굴을 곧장 쳐서 그 배후를 견제(牽制)하기 바랍니다.”
하였고, 또 모장(毛將 모문룡(毛文龍))의 무주(誣奏)를 매우 자상히 분별하니, 해부에서 아뢰기를,
“김모 등의 신부(臣部)에 보내온 글을 읽다가 미처 다 읽지도 않아서 비분(悲憤)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쳤습니다.”
하니, 황제는 무신(撫臣 순무(巡撫))에게 명하기를,
“노의 소굴이 허함을 틈타 예병(銳兵)을 뽑아서 즉시 공격하고 늦추지 말라.”
하여, 무군(撫軍 순무(巡撫)를 가리킴)은 수병(水兵)을 파견하여 압록강에 도착하고, 태감(太監) 4명이 뒤이어 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갔다. 선생이 복명하니 상께서 하교(下敎)하기를,
“해부(該部)의 제본(題本)과 황상(皇上)의 유지(諭旨)를 보건대, 우리나라가 무고(誣告) 입은 일이 시원스럽게 씻겨졌을 뿐 아니라 열 줄의 윤음(綸音)이 글자마다 매우 친절하니, 사신간 신하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케 한 것으로 일이 매우 가상하다.”
하고, 도중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고 가의(嘉義)의 품계에 진급시켰다. 상께서 인견(引見)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노마(虜馬)가 깊이 들어와서, 종사(宗社)가 몽진(蒙塵)하며 성하의 욕됨[城下之辱 적에게 수도(首都)의 성하까지 침공(侵攻)당하고, 항복하는 일]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두 명의 호차(胡差 청(淸)의 사신)가 오게 되므로, 선생은 차자(箚子)를 올려 사절하여 보내기를 청하였고, 그후 또 중국의 물화(物貨)를 노에게 주지 말라고 청하였다.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도승지로 고쳐 제수되었다.
광해군 때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이 노에게 항복하였는데, 이해 봄의 노의 침입은 사실상 강홍립이 인도한 것이다. 화친이 성립되자 노는 홍립을 남겨 두고 돌아갔는데, 홍립이 죽자 조정에서 그를 복관(復官)시켜 주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홍립은 죄가 역적의 선봉에 부합되는데도 국가에 법이 없어 형벌(刑罰)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복관시키고 상(喪)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인신(人臣)의 충을 권장하며 천하의 악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선생의 가족이 안동(安東)에 피란 가 있었으므로 선생은 휴가를 청하여 사당을 배알하였다. 국가에 중대한 의론이 있어 부제학(副提學)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한갓 문서에만 매달리지 말고 힘써 원대한 계획을 넓히며, 한갓 장구(章句)에만 힘쓰지 말고 길이 고명(高明)의 지역에 나아가며, 비록 몸을 굽혀 군신(羣臣)의 계책을 따른다 할지라도 반드시 선(善)을 택하여 중도(中道)를 취할 것이며, 비록 살리기 좋아함을 힘쓰더라도 반드시 악(惡)을 징계하고 간사함을 없애야 합니다.”
하였다.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겨졌다. 무진년에 유효립(柳孝立)이 배반하였으므로, 선생이 사간원(司諫院)의 장(長)으로서 국문(鞫問)에 참여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형조 판서에 승진되었다. 이어 대사헌(大司憲),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역임하고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都承旨兼弘文館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특제(特除)되었다. 질병이 있으므로 특별히 하명하여 의약(醫藥)을 내렸다.

기사년에 다시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중요한 일을 꾀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하며, 국민의 힘을 여유 있게 하고 군병(軍兵)을 양성하소서.”
하였다. 노(虜)의 차사(差使) 중남로노야(仲男虜奴也)를 상이 접견할 때 조정의 의론이 그에게 의자에 앉는 것을 허락하자, 선생이 아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어 차자를 올려 극언(極言)하였고, 대사헌으로서 목성선(睦性善) 등을 탄핵하다가 엄지(嚴旨)를 받고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누차 역초(逆招 반역자의 진술)에 나오자 조정에서는 보전(保全)할 계책을 논의하고 있는 터에 목성선과 유석(柳碩) 등이 투소(投疏)하여 공(珙)을 중상하여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므로, 선생이 일찍이 그 음흉(陰凶)한 정상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급기야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辭)에서 공(珙)을 내세움이 더욱 심하자, 목성선ㆍ유석의 당(黨)이 또 입을 모아 공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다시 성선(性善) 등을 논핵하니, 상이 당론(黨論)으로 의심하므로, 여러 번 관직을 사양하였다가, 다음해인 경오년 겨울에야 비로소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신미년 봄에 영흥(永興)의 진전(眞殿 준원전(濬源殿))을 봉심(奉審)하고, 도승지로서 사친(私親)을 높이 받드는 일은 예가 아니라고 논박하였고, 뒤에 대사헌이 되어 더욱 논박하였으며, 이어 이조 판서 이귀(李貴)를 탄핵하다가 거듭 꾸지람을 듣고는 사직하고 물러가 석실(石室)에 거처하였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자 입궐(入闕)하여 임곡(臨哭)하고 곧 돌아왔다. 계유년에 대신의 추천으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로부터 을해년까지 3년간에 걸쳐 다섯 번 대사헌을 제수하였고, 이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시켰으며 또 부제학(副提學)ㆍ대사성(大司成)의 임명이 있었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거나, 혹은 잠시 나갔다가 곧 돌아오곤 하였다. 상이 일찍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의 굳세고 정직함을 나는 나날이 생각하고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경을 생각함이 이러하거니 경 또한 대궐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언(上言)하기를,
“몸은 쓰여지나 말이 쓰여지지 않음은 옛사람이 부끄러워하던 것입니다. 신이, 나아가서 말의 쓰임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어찌 물러가는 것으로 간(諫)을 삼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이 중년에 병이 많아 모든 방술(方術)을 거의 다 써 보았으나 약의 힘이 오랜 고질(痼疾)을 구하지 못하여 좋은 시절은 쉽게 가 버리고 늙음은 나는 듯이 찾아와서 천금(千金) 같은 몸뚱이가 문득 아침 이슬 같습니다. 당시에 신묘(神妙)한 약제(藥劑)로써 원기(元氣)를 보하여 장수(長壽)하는 비결을 권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지극한 경계를 우언(寓言)으로 일깨운 것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喪)에 선생은 당시 이미 조정에 들어가 있던 터라 청하기를,
“의(衣)ㆍ금(衾)ㆍ교(絞 죽은 사람을 염(殮)할 때 장식하는 띠)ㆍ모(冒 시체를 덮는 베) 같은 상구(喪具)를 상의원(尙衣院)에서 가져다 쓰고, 일체 장사치들의 것을 쓰지 마소서.”
하였다.
병자년에 공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고쳐 제수되고 정헌(正憲)에 올랐다. 이때 노(虜)가 이미 제호(帝號)를 참칭(僭稱)하여 조정에서는 대의에 의거하여 그들의 사신을 배척하였으므로 노가 조만간에 쳐들어오게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태평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으므로 선생이 자신의 죄를 추궁하여 올리니 상이 글을 내려 다시, 진(鎭)을 설치하고 병사를 나누는 것이 편리한 지의 여부를 의논하여 왔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염근(廉謹)으로 특별히 숭정(崇政)이 더해졌으나, 또 사건으로 상의 뜻에 거슬러 관직을 버리고 석실로 돌아왔다. 이해 12월에 청로(淸虜)가 침입하여 상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행하니 선생이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 가서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당연히 먼저 싸우고 화친은 뒤에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세자(世子)를 노진(虜陣)에 보내어 노병(虜兵)을 퇴각(退却)시키려 하므로, 선생이 준절히 책망하기를,
“어찌 신하로서 세자를 적에게 주는 의(義)가 있겠소.”
하니, 사기(辭氣)가 엄준(嚴峻)하여, 대신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곧장 대궐에 나아가 대죄(待罪)하였는데, 이 때문에 세자가 노에게 불모로 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예조판서 겸 비변사당상(禮曹判書兼備邊司堂上)이 되어 입대(入對)하여 한 뜻으로 굳게 지킬 계획을 극력 진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앞으로 무엇을 믿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천도(天道)는 믿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포위가 더욱 급하여지자, 상은 성황사(城隍祠)와 백제 시조묘(百濟始祖墓)에 기도를 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사람이 궁지에 처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병들어 아프거나 슬플 때면 반드시 부모를 부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몸소 개원사(開元寺)에 납시어 원종(元宗)의 진좌(眞座 영정)에 기도하소서.”
하였다. 정축년 1월 16일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한창 화친(和親)하는 글을 초하는데, 선생이 읽다 말고 분격(憤激)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통곡하고 찢어 버리면서,
“제공(諸公)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합니까.”
하고, 이어 청대(請對)하였는데, 분기가 가슴에 가득 차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참 뒤에 이뢰기를,
“오늘날의 의논은 양립(兩立)할 수 없으니,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 주소서.”
하니, 상이 문득 만류하면서,
“경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내 한 몸을 위한 꾀가 아니라, 위로는 종묘사직을 위함이며, 그리고 차마 온 겨레를 멸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신의 말도 바로 생존을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때 두 황제[二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는 노(虜)에게 구축(驅逐)되어 사막(沙漠)의 사이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비록 죽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나, 종묘(宗廟)만은 어떻게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군신 상하가 죽기로써 지키기로 맹세한다면, 전하를 위하여 죽을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천심(天心)이 끝내 재앙을 거두어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 선왕(先王)을 뵈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는, 물러 나와 드디어 자정(自靖 자결)할 계획을 세우고 6일을 굶었으며, 또 목을 매었으나 곁에 있는 사람이 급히 구하였다. 마침 노가 우리에게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다시 음식을 먹고 가기를 자청하였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사람만 보내었다. 선생이 국서(國書)를 찢어 버릴 때 어떤 이가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완성이 말하기를,
“붙들어 내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달 그믐에 상이 성을 나와 서쪽으로 행행하니, 선생은 길가에 나와 부복(俯伏)하여 망배(望拜)하여 통곡하였다. 2월에 남한산성에서 안동 학가산(安東鶴駕山)으로 돌아왔다. 호종(扈從)의 노고로 숭록(崇祿)을 더하니, 글을 올려 사양하고, 또 아뢰기를,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갖옷과 갈포(葛布)를 없앨 수 없는 것이고, 적국(敵國)이 멸망하지 아니하면 전쟁과 수비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복수의 뜻을 잘 가다듬어 요새지를 더욱 수축하며, 일시의 요맹(要盟)을 믿지 말고, 전일의 대덕(大德)을 잊지 말며, 호랑(虎狼)의 인(仁)을 믿지 말고, 부모의 나라를 가벼이 단절하지 마소서. 신은 매양 선왕(先王)의 ‘만번 꺾여도 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주문(奏文)을 생각할 때마다 일찍이 눈물이 옷깃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에는,
“오늘날의 진퇴(進退)가 모두 그 의(義)가 있으니, 다만 후세에 다시 숙도(叔度 김상헌, 곧 자기 자신을 일컬음) 같은 사람이 나서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행여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비록 구원(九原)에 있더라도 오히려 생기가 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가(大駕)가 성(城)을 나가던 날에 만약 성 밖 한 걸음의 땅이라도 밟았다면 이는 순(順)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는 날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에 죽으면 신자(臣子)는 따라 죽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간쟁(諫爭)해야 하고, 간쟁해도 되지 않으면 물러나 자정(自靖)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다. 어떤 이의 말처럼 ‘오직 조종(祖宗)의 유택(遺澤)을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 2백 년 강상(綱常)을 부지하려는 것은 바로 선왕들의 교육의 혜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간흉(奸凶)의 무리가 노(虜)를 끼고 임금을 위협하여 국가를 팔아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 있으니, 매양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거의 멸망하게 된 우리나라를 도와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골짜기에 방황하며 피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밤낮으로 마음에 맹세하는 것은 한 칼로 선우(單于 흉노(匈奴)의 왕(王)의 칭호)의 목을 베고 간신(奸臣)의 심장을 가르는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장령(掌令) 유석(柳碩) 등이 앞으로 사류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획으로, 아울러 시기를 타고 틈을 만들려고 아뢰기를,
“군신의 의(義)는 천지간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사생 영욕(死生榮辱)에 도리상 혼자만 다를 수 없는 것인데, 김모(金某 김상헌을 일컬음)는 몸을 도사려 멀리 달아나 스스로 ‘몸을 청결하게 하고 절개를 온전히 하며 더러운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팔아 명성을 사고 당(黨)을 세워 나라를 그르침은 한낱 지엽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임금도 아랑곳없는 그 부도(不道)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
하였다. 이때 남이공(南以恭)이 인사권(人事權)을 잡고서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대각(臺閣 사헌부ㆍ사간원)에 등용해 놓았으므로, 이계(李烓)ㆍ이도장(李道長)ㆍ박계영(朴啓榮)ㆍ정지호(鄭之虎)ㆍ최계훈(崔繼勳)ㆍ이여익(李汝翊)ㆍ권도(權濤)ㆍ박수문(朴守文)ㆍ박돈복(朴敦復)ㆍ홍진(洪瑱)ㆍ이운재(李雲栽)ㆍ이경상(李慶相)ㆍ임효달(任孝達)ㆍ신유(申濡)ㆍ이주(李裯)ㆍ김수현(金壽賢) 등이 서로 이어 논핵하고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이도장 등이 다시 청하니 파직(罷職)만 명하였고, 이계 등이 다시 강력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관직을 삭탈할 것을 명하였다.
기묘년에 직첩(職牒)을 다시 주고 연이어 서용(敍用)의 명을 내렸다. 선생은 조정에서 군사를 정돈하여 노(虜)를 도우려 한다는 말을 듣고 피눈물을 흘리며 소(疏)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도 없었으니,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역(逆)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재앙이 있다.’고들 하지만, 신은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도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름을 지키면서 하늘의 명(命)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대저 일이 순하면 민심이 기뻐하는 것이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그 도움을 얻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는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논의는 생각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地下)에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소(疏)가 완성되자 받들어 사당(祠堂)에 고(告)하고 상에게 아뢰었으나 회보(回報)가 없었다.
경진년에 노(虜)의 차사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온갖 협박 공갈을 다하며 선생을 잡아 보내라 하였고, 또 승지(承旨) 신득연(申得淵) 역시 잡혀서 문초를 당하고 있었는데 선생을 핑계하여 스스로 벗어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선생을 재촉하여 밤중에 길을 나섰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찰(御札)과 초구(貂裘)를 하사하니, 선생은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도착하니 노의 차사가 묻기를,
“국왕이 항복할 때 유독 ‘청국(淸國)은 섬길 수 없다.’ 하고 항복할 때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무슨 뜻이었소?”
하므로, 선생이,
“내 늙고 병들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소.”
하고 답하니, 또 묻기를,
“근래의 관작은 어째서 받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군사를 원조할 때는 어찌하여 저지하였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우리 임금에게 고(告)한 것이니 타국(他國)에서 알 바 아니오.”
하였다. 노의 차사가,
“두 나라가 이미 한집안이 되었는데, 어째서 타국이라고 하오?”
하니, 선생은,
“두 나라가 제각기 나누어진 땅이 있는데, 어찌 타국이라고 아니할 수 있소?”
하고 답하였다. 이때 호(胡)와 함께 이 광경을 보는 자들은 모두들 끝없이 칭탄(稱歎)하였는데, 마침내 선생을 북(北)으로 데려갔다. 신사년 정월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자. 칸(汗)이 또 따져 물으므로 선생은 전과 같이 답하니, 마침내 구류(拘留)시켰다. 계동(季冬)에 선생의 병이 심하자, 칸(汗)이 의주(義州)로 나가 머물게 하였다. 부인 이씨(李氏)가 안동(安東)에서 세상을 떠나 임오년 정월에 부음(訃音)이 도착하자, 설위(設位)하여 곡(哭)하고 성복(成服)을 예와 같이 하였다. 계미년에 노(虜)는 어떤 사건으로 이계(李烓)를 잡아갔는데, 계는 노에게 조정의 기밀과 선생에 대한 것을 보고하여 스스로 자신의 화를 면하기를 기대함으로써, 노는 다시 선생을 심양으로 데려가 최 완성(崔完城 완성은 최명길(崔鳴吉)의 봉호)과 함께 북관(北館)에 유폐하였다가, 여름에 질관(質館 인질로 잡혀간 세자가 묵고 있는 관사)으로 풀어 보내어 세자를 따르게 하고, 사례의 절을 하게 하니, 최공(崔公)이 선생에게 팔꿈치를 찌르며 함께 절하자고 하였으나 선생이 싫어하므로 노(虜)가 강제로 시키려 하였지만 선생은 끝내 드러누워 버리고 따르지 않았다.
갑신년 3월에 대명(大明)이 망하니 선생은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을유년에 노(虜)가 세자를 귀국시키니, 선생이 수행하였다. 서교(西郊)에 도착하여 소(疏)를 올렸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마침내 석실로 나왔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김모(金某)의, 환난(患難)을 당하여 절벽처럼 굳게 선 한 절개는 천고(千古)에 견줄 이 드무니, 어찌 천하 후세에 큰 광채가 있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직접 위유(慰諭)를 내리시어 가상히 여겨 권장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경(卿)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고, 또 공문(公門)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 역시 나오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함이다. 나는 지금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위유할 수 있겠느냐.”
하므로, 선생이 황공하여 소(疏)를 올렸다. 4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卒)하자, 들어가 임곡(臨哭)하고 곧 물러났다. 병술년에 의정부 좌의정에 제수되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마침 또 역변(逆變)이 있으므로, 마침내 들어가 사례하고 동궁(東宮)을 보익(補益)하는 도리를 진술하고, 또 직언으로 죄를 얻은 이응시(李應蓍)를 너그럽게 놓아줄 수 있는 것이라고 논(論)하였다. 인하여 사직하기를 비는 글을 32번 올려 겨우 사직하고 즉시 돌아왔다. 궁료(宮僚)에 찬선(贊善)ㆍ진선(進善)을 두기 시작한 것은 실지로 선생의 권유로 인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은명(恩命)이 연이어 있었으나 모조리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기축년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하자, 선생이 대행빈궁(大行殯宮 인조의 빈소)에 들어가 임곡하고 물러나 돌아오니, 상은 두 차례나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므로 드디어 성(城)에 들어와 숙사(肅謝)하니, 상은 견여(肩輿)로 궐내(闕內)를 출입하도록 하명하였다. 재이(災異)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의 도리를 진술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귀양 보냈던 신하 이경여(李敬輿) 등 4명도 양이(量移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는데, 글을 올리고 물러났다. 국장(國葬)이 끝난 뒤에 북사(北使)가 성(城)에 들어오자 동교(東郊)에 나와 머물렀는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소환(召還)하고 이어 사대(賜對)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옛말에 ‘모든 일이 시기가 있으니, 시기가 지나면 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여 보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다스리고 싶은 마음이야 없겠는가마는 다만 재주가 부족하고 덕이 박할 뿐이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제갈량(諸葛亮)의 말에 ‘망녕스럽게 스스로 비박(菲薄)하다 하고 비유를 끌어대어 의(義)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이 마음을 더욱 가다듬어 나날이 그 덕(德)을 새롭게 하소서. 요(堯)ㆍ순(舜) 같은 성인(聖人)도 사람을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어렵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능히 인재를 알아서 임용한다면 백성을 편안히 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인재가 없다는 말은 모두 헛말입니다. 예로부터 흥세(興世)에 쓰인 인재는 바로 쇠세(衰世)에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민생의 곤란함은 거의 장리(贓吏 탐관오리) 때문이니, 바라건대 그 법을 엄히 하소서.”
하고, 또 미리 장재(將才)를 모아서 급한 때에 대비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잘못된 점을 논하였다.
당시에 신독재(愼獨齋) 김공 집(金公集)이 조정에서 장차 물러나려 하므로, 선생이 상소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김모(金某)는 숙덕(宿德) 있는 유림(儒林)으로서 노성(老成)하고 단량(端亮)하여 사림(士林)이 향하여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것을 못이긴 체하고 따르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곁에 두고서 새 덕화를 돕게 하소서.”
하니, 상이 마침내 김공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윽고 또 사대(賜對)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상의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여 항상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한다면, 천재(天災)와 민원(民怨)을 모두 막을 수 있습니다. 또 임금은 당연히 양(陽)을 붙잡아 세우고 음(陰)을 억제하는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음과 양이 성하고 쇠함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경인년에 또 글을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정사(政事)와 호령(號令)이 거듭 공의(公議)에 거슬러짐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편안하기 어려운 상태와 두려운 형세가 마치 풀리는 얼음 위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조종(祖宗)의 무거운 부탁을 저버리지 마소서.”
하고, 인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여 마지않으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조정의 선비와 성균관의 학사들이 모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선생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돌릴 수 없었다. 상은 사대(賜對)하여 우악한 예로 전송하였고 선생은 진계(陳戒)함이 매우 많았는데, 대요(大要)는, 군신(群臣)과 백성에게 죄를 짓지 말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착한 일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대행(大行 인조(仁祖))의 연상(練祥 소상과 대상)에 모두 들어와 참례하였고, 소(疏)를 올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를 아뢰었다.
임진년에 상이 선생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유소(遺疏)가 올라오니 상은 정원(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하늘이 억지로 남겨 두지 않아서 우리 원로(元老)를 잃으니, 슬픈 심정을 비길 데 없도다. 이 유소(遺疏)를 보건대 나라 위한 충성이 죽으면서도 더욱 독실하였으니, 깊이 경탄(敬歎)하노라.”
하였다. 유소의 대략에,
“신이 높은 반열에 올랐으나 헛되이 죄(罪)만 쌓았습니다. 병자ㆍ정축년 이후로는 벼슬의 뜻을 끊었으나 성명(聖明)을 만나 과분한 은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구구한 심정은 다만 사류(士流)를 밝게 드러내고 기강(紀綱)을 확립하여 성지(聖志)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우려 하였는데, 불행하게 일과 마음이 서로 맞지 않아서 낭패(狼狽)하고 돌아왔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목숨이 다하였으니, 이 생은 끝났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즉위하던 처음에 세운 뜻을 더욱 격려하여 현인 좋아하는 정성을 변치 말고, 선류(善類)를 등용하여 다스리는 방도를 내고 힘써 실덕을 닦아서 대업(大業)을 넓히소서. 신은 죽음에 임하여 기력이 약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8월 18일에 석실(石室)의 선영에 예장(禮葬)하였다. 선생이 심양관(瀋陽館)에 있으면서 일찍이 스스로 명(銘)하기를,
지성은 금석에 맹세하고 / 至誠矢諸金石
대의는 일월에 달았네 / 大義懸乎日月
하늘과 땅이 굽어 살피시니 / 天地鑑臨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네 / 鬼神可質
고도에 합하기를 바랐더니 / 蘄以合乎古
금세에 도리어 어긋나 버렸네 / 而反盭於今
아 백세 후에는 / 嗟百世之後
남이 내 마음을 알리 / 人知我心
하였는데, 유명으로 이 글만을 묘석(墓石)에 새겼다.
계해년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후 9년 만인 신축년에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니, 대저 국가에서 슬프게 여겨 높이는 은전만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종유(從遊)하던 선비와 그 밖에 소문을 듣고 대의를 사모하던 자들은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와 배곡(拜哭)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먼 곳에서는 모두 서로 모여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으며, 그 유적이 있는 곳은 모두 서원(書院)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선생은 천품(天稟)이 매우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고 평생 수용(受用)함이 이 밖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대요(大要)는 지경(持敬)과 역행(力行)으로 주(主)를 삼아 가정에 있을 때는 그 도리를 곡진히 하여 윤리(倫理)는 반드시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는 반드시 독실하게 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임금 섬기기에 예를 다하여 털끝만큼도 예사로이 넘기지 아니하니, 인조(仁祖)가 일찍이 이르기를,
“김모(金某)가 후사(喉司 승정원을 말함)에 있을 때는 궐(闕) 안이 숙연(肅然)하더니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그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어렵고 쉬운 절차는 하나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유법(遺法)을 따랐다. 대개 그 도(道)는 수신(修身)ㆍ제가(齊家)로부터 미루어 나갔으므로 본말(本末)이 겸비되고 내외(內外)가 다 이루어져서, 말로서는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가 수립한 대절에 있어서는 비록 일월(日月)에 빛나고, 천지에 드높으나 또한 그 조존(操存)이 견고하고 함양(涵養)이 심후하여, 자연히 사생(死生)을 마치 한서(寒暑)의 변역(變易)처럼 보았으니, 하루아침에 습취(襲取)한 것과는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공을 논한다면, 질서와 예의는 사람에게 큰 것이라, 하루라도 폐하여 버린다면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고 중화가 이적(夷狄)으로 변하는 것이다. 명(明)의 말년을 당하여, 선생은 속국 배신(陪臣)으로서, 한 손으로 기둥을 떠받들어, 삼강(三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대저 세상의 치란과 도의 회명(晦明)은 비록 기수(氣數)의 승침(昇沈)에 몰려 언제나 면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나, 하늘은 반드시 그 난을 다스리고 그 어두움을 밝힐 대인(大人)을 낳아 그 뒤에 대비시키는 것이니,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효종의 초기에 서로 만남에 이르러서는 사공(事功)을 기약하니, 하늘의 뜻이 마치 장차 환공(桓公)ㆍ문공(文公)의 일로 맡기려는 것과 같았는데, 선생은 이미 몸이 쇠약해졌다는 탄식을 하였고 태산(泰山)은 이윽고 무너졌다. 그러나 공언(空言)일 뿐 시행된 것은 없었으나, 한유(韓愈)는 맹자(孟子)의 공(功)을 우(禹)의 공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니, 어찌 반드시 구합제후(九合諸侯)ㆍ일광천하(一匡天下)를 한 다음에야 오랑캐 됨을 면한다 하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부인은 판서에 추증된 의로(義老)의 딸인데 아들이 없고, 선생이 중씨(仲氏)인 상관(尙寬)의 아들 광찬(光燦)을 양자로 삼았는데 관직이 동지(同知)에 이르렀다. 손자 수증(壽增)은 지금 부사(府使)가 되었고, 수흥(壽興)은 원임 영상(原任領相)이고, 수항(壽恒)은 좌상(左相)이며, 사위는 목사 이정악(李挺岳)ㆍ현감 홍주천(洪柱天)ㆍ군수 이중휘(李重輝)ㆍ교리(校理) 송규렴(宋奎濂)ㆍ지평(持平) 이광직(李光稷)이고, 서출(庶出)의 아들 수징(壽徵)ㆍ수응(壽應)은 모두 진사(進士)이며, 수칭(壽稱)ㆍ수능(壽能)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다. 증손 창국(昌國)ㆍ창숙(昌肅)ㆍ창직(昌直)은 부사(府使)의 아들이고, 창열(昌說)은 영상(領相)의 아들이며, 창집(昌集)ㆍ창협(昌協)ㆍ창흡(昌翕)ㆍ창업(昌業)은 좌상(左相)의 아들이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또 《남사록(南槎錄)》ㆍ《독례수초(讀禮隨抄)》 등의 책이 있다. 선생이 소시에 스스로 청음(淸陰)이라고 호하였는데, 병자년 이후로는 스스로 석실(石室)이라고 많이 칭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석실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나는 몽루(蒙陋)한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선생의 알아줌을 입어 선생의 문하(門下)에 매우 익숙하였던 터이므로 이제 부사(府使) 등 제공(諸公)이 묘명(墓銘)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얕은 식견과 비졸한 문사(文辭)로서는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없으며, 평소의 기상(氣象) 성음(聲音)을 미루어 생각하면 슬프고 목이 메어 차마 쓸 수 없고, 또한 차마 잊을 수도 없다. 평일의 언행(言行)은 부사(府使) 형제가 기록하여 한 책을 만들었고, 또 내가 외람되게 연보(年譜)를 편찬하면서 자못 상세히 하였으므로, 이제 다만 그 대략을 이상과 같이 엮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태일이 처음 갈라져서 / 太一肇判
음과 양이 있게 되었네 / 厥有陰陽
비록 양이라도 사라짐은 / 雖陽亦消
떳떳한 이치인지라 / 此理之常
사라지기를 그치지 아니하면 / 消而不已
인류도 없어지리라 / 人類斯亡
그러기에 하늘이 성인을 내어 / 故天生德
보상의 권한을 주니 / 畀輔相權
이에 그 쇠미함을 붙들어 / 乃扶其衰
유약함을 단절하고 도로 이끌었네 / 絶柔道牽
운수가 돌아오니 / 洎乎來復
태양이 빛나누나 / 朱光赫然
선생의 세대는 / 先生之世
온 누리가 추위에 떨고 / 九野寒威
더욱이 깊은 연못이라 / 粤維重淵
남은 것 드물었네 / 存者幾希
이치란 끝날 수 없으므로 / 理無可盡
석과가 있었네 / 有此碩果
이미 위에서 음이 다하니 / 旣㞃於上
양은 아래에서 회복되었네 / 其復在下
저들은 그 집을 잃었는데 / 彼剝其廬
나는 이 수레를 얻었네
/ 我斯得輿
때에 마침 관문 닫으니 / 時方閉關
그것이 펴질 조짐이라 / 有漸其舒
일양이 생하고 이양이 생하고 / 一之二之
삼양이 생하면 태가 되는데 / 三則爲泰
만물은 비록 나지 않았으나 / 物雖未生
나는 스스로 커진다네 / 我自爲大
그 조짐을 살펴보면 / 揆厥機緘
작고 먼 데서 근본하였네 / 本乎渺綿
이로부터 자라난 것을 / 由玆以長
진실로 기선이라 하네 / 寔曰幾先
겨울이 조화 없다 / 莫謂玄冬
이르지를 마오 / 無有造化
아 선생은 / 嗚呼先生
훌륭한 역이로다 / 大哉易也
누가 이러함을 알아주리 / 孰其知之
도를 아는 자라네 / 其知道者


 

[주D-001]정인홍(鄭仁弘)이 …… 무훼(誣毁) : 신해년(1611)에 좌찬성(左贊成)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李滉)이 그의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단점을 지적한 것을 분하게 여겨 영남(嶺南)에서 소(疏)를 올려 이언적ㆍ이황을 심하게 헐뜯었다.
[주D-002]모문룡(毛文龍)이 …… 이간질하여 : 모문룡은 명(明) 나라 장수로 요양(遼陽)이 함락되자 의주로 피난하여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요동 탈환을 도모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는 등 갖은 요구를 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명 나라에 우리나라를 모함했었다.
[주D-003]정축년에 …… 번복되고 : 정축년 1월,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한 사실을 말한다. 병자호란.
[주D-004]대의(大義)를 …… 밝혔고 : 정축년 1월 18일에 최명길(崔鳴吉)이 답서(答書)로 강화(講和)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지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그 글을 찢어 버리고 실성통곡하니, 그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꾸짖으며 “그대의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士友) 간에 자자하였는데, 공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명길이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 그러나 이는 곧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야 합니다.” 하고, 청(淸)에 보내는 답서를 다시 주워 모아 붙였다. 서질(叙秩)은 곧 누구나 자기 신분에 맞도록 지켜야 할 질서와 예외를 말한 것이고, 명(命)은 곧 천명이고, 토(討)는 곧 질서를 위반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이다.
[주D-005]대기(大期) : 임신 12개월 만에 낳는 것을 말하는데, 《사기(史記)》 여불위전(呂不韋傳)에 “희(姬)가 임신된 것을 숨기다가 대기(大期)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하였다. 그 주(註)에 “사람은 10개월 만에 낳는데, 두 달을 더 지났으므로 대기라고 한다.” 하였다.
[주D-006]폐모의(廢母議) :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자는 논의를 말하는데, 인목대비는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인조(仁祖)의 계비이며,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영창대군과 김제남이 피살되고, 인목대비도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되었다. 1623년에 광해군이 동생을 죽이고 모후(母后)를 폐출했다는 이유로 서인(西人) 이귀(李貴) 등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지자,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질책하고,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여 즉위시키니, 곧 인조(仁祖)이다.
[주D-007]곽광(霍光)이 …… 고사 : 신하로서 임금을 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죽고 자식이 없어 곽광이 승상(丞相) 양창(楊敞)과 의논하여 창읍왕(昌邑王) 하(賀)를 옹립하였는데, 창읍왕이 음란하고 무도(無道)하여 태후(太后)의 명으로 폐위하고 창읍(昌邑)으로 돌려보내며 탕목읍(湯沐邑) 3천 호(戶)를 주었다. 《漢書 霍光傳》
[주D-008]인성군 공(仁城君珙)이 …… 나오자 : 인성군은 선조의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의 소생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를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인조반정 후 이귀(李貴)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관용으로 무사하였다. 1628년 인조 6년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大北)의 잔당(殘黨)을 규합,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등 역적배들의 주인공으로 몰려 끝내 진도(珍島)로 귀양 보내고 이어 자살하게 하였다.
[주D-009]환공(桓公)ㆍ문공(文公)의 일 :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은 모두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바로잡아 폐업(霸業)을 달성하였는데, 여기서는 바로 효종에게 비유한 말이다.
[주D-010]태일(太一) : 천지창조(天地創造)의 혼돈(混沌)한 원기(元氣)를 말한다.
[주D-011]석과(碩果)가 …… 얻었네 : 이치는 끝없이 다시 계속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큰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잃는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하였고, 정전(程傳)에는 “큰 과일이 먹힘을 당하지 아니함은 장차 다시 생겨나는 이치를 보임이다.[碩大之果 不見食 將見得生之理]” 하였다.
[주D-012]관문 닫으니 : 《주역》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동지일(冬至日)에 관문을 닫아, 상려(商旅)가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안정(安靜)해서 미양(微養)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3]기선(幾先) : 무슨 사단(事端)이 일어나기 전, 즉 일어나려고 하는 바로 직전을 말한다.

 

송자대전 제212권
 어록(語錄)
석실 선생(石室先生) 어록



선생이,
“지난번에 상의 뜻이 매우 정성스러웠는데 공이 끝내 나가지 않으니, 자못 의도를 알 수 없네.”
하므로, 대답하기를,
“출처(出處)의 의리를 감히 알 바는 아니나, 다만 이 무상(無狀)한 미신(微臣)이 특별한 권우(眷遇)를 감당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진퇴(進退)에는 일정한 의리가 없으니, 각기 그때의 사리에 맞게 하는 것이 옳은 걸세.”

선생이,
“영외(嶺外)에 박 참판(朴參判) 이름은 팽년(彭年)이다. 의 후예가 한 사람 있다. 그가 나에게 와서 묻기를 ‘한강 가에 고묘(古墓)가 있어, 박씨 성씨 유씨 이씨의 묘[朴氏成氏柳氏李氏之墓]라는 묘표(墓表)가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노산조(魯山朝) 때 육신(六臣)의 묘(墓)라고 전해 오는데, 그 묘표 역시 마멸되어 겨우 분변할 수 있는 정도이니, 이제 다시 그 묘를 수리하고 석물(石物)을 새로 세워서 사실을 기록하려 합니다……’ 하였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런 일은 만일 십분 징신(徵信)할 수 없으면 의당 전의(傳疑)의 의(義)를 사용하여 그 묘(墓)만을 수리하고 석물(石物)의 내용은 그전 것을 재차 새기는 것이 온편할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그 말이 매우 옳다. 나도 그 말을 해 주었네. 대개 이것이 설사 타인의 묘라고 할지라도 헐어짐을 보고 개수해 주는 것이야 무어 해롭겠는가.”

선생이,
“부탁한 명문(銘文)을 오래전부터 봉부(奉副)하려고 했는데, 몸이 아픈 나머지 정력(精力)이 날로 손상되어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으나, 혹시라도 몸이 회복되면 감히 저버리지 않겠네.”
하므로, 내가,
“이 일은 약간 안정된 이런 때를 타서 빨리 성취(成就)하려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끝내 지어 주소서.”
하니, 선생이,
“내가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히 움직이지 않겠는가. 다만 상께서 새로 나에게 망탁(莽卓, 역적인 왕망(王莽)과 동탁(董卓)) 같은 사람이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내가 비록 무턱대로 명문(銘文)을 짓는다 하더라도 공이 어찌 욕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내가,
“소생(小生)의 뜻이 이렇듯 믿음이 부족했다면 처음부터 어찌 감히 청하였겠습니까. 옛날 위학(僞學)의 당(黨)이 일어나자, 주자가 남의 집에 문자(文字) 지어 주는 일을 매우 많이 사양하였으나 그중에는 혹 사양하지 않고 지어 준 것도 있었으니, 어찌 일찍이 일정한 의(義)가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주자 때의 일은 지금에 당한 일과 같지 않네. 신하로서 반역(叛逆)이란 이름을 받고 무슨 면목으로 천지의 사이에 서서 다시 붓을 쥐고 종이를 펴고서 문자를 지어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찌 아무 꺼림없이 해 낼 일이겠는가.”
하고, 이어 상께서 기찰(譏察)한 일을 열거하면서,
“예부터 거스르는 신하에 대해 임금이 그에게 왕래하는 빈객(賓客)을 살피도록 한 일은 진실로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곧바로 반역(叛逆)의 이름을 강제로 정하여 그 동정(動靜)을 살피는 일은 있지 않았네.”
하였다. 내가,
“뇌정(雷霆 격렬한 천둥, 임금의 노여움에 비유함)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법은 없으니, 3월은 천도(天道)가 조금 변하는 절기이므로 일이 지난 뒤에는 상의 마음도 환히 풀릴 것입니다. 바라건대 수월(數月)을 기다려서 끝내 지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약간 편리할 것이니 감히 서로 돕지 않겠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을 때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 상공(李相公)이 용진(龍津)에 있었으므로 하루는 그를 찾아가 보았더니, 그때는 참으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송강(松江)의 일에 언급하여서는 좋은 점을 매우 칭찬하고, 또 ‘조만간에 기회를 얻으면 내가 스스로 담당하여 그의 억울함을 씻어 주겠다.’ 하였다. 그런데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이르러 이 일을 만나서는 곧 ‘청컨대, 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 등도 같은 경우로 함께 신원(伸冤)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니, 그의 부정한 마음씨가 이와 같았다.”

선생이,
“일찍이 완평(完平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말함) 상공(相公)을 뵈었는데, 상공이 ‘일찍이 영남(嶺南)에 가서 장차 여러 사람과 함께 퇴계(退溪)의 서원(書院)에 모여 이야기를 하려던 차였다. 길 옆에 임정(林亭)이 있어 두어 사람이 그 밑에 모여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조월천(趙月川 조목(趙穆))의 말을 전해 와서 요청하기를 「매우 미안하지만 말[馬]을 잠깐 멈추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답하기를 「우리는 곧 여러 사람과 서원(書院)에 모일 예정인데, 여러분들은 왜 저 서원에 함께 모이지 않습니까?」 하니, 월천(月川)이 말을 전하여 「우리는 퇴계의 서원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임정에 올라가서 대략 서로 안부를 나눈 다음, 월천이 곧 「대감(大監)은 진회(秦檜)를 어떤 사람으로 봅니까?」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진회가 어찌 물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대답하니, 월천이 「사람들이 진회를 대간(大奸)이라고 한 것은 그가 오랑캐와의 화친(和親)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유모(柳某 유성룡(柳成龍)을 말함)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이 어찌 진회보다 덜한 것이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송(宋) 나라 때와 같지 않으며, 또 유(柳 유성룡)의 소견이 밝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어찌 그에게 진회 같은 마음이야 있었겠습니까.」 하자, 월천은 자못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양가(兩家 조목의 집과 유성룡의 집)는 오랫동안 서신도 상통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유상(柳相)에게 충고하기를 「두 분의 사이가 점점 좋지 못하게 되어 가는데, 어째서 먼저 통문(通門)을 하지 않습니까?」 하자, 유상이 즉시 서신을 작성, 해의(海衣)까지 겸하여 보내니, 월천이 답하기를 「영공(令公)께서 해의를 보내시니, 해의가 도리어 해의(解疑 의심이 풀렸다는 뜻)가 되었습니다……」 했다.’ 하였다. 그러나 완평의 이 말도 유상에게 실수가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하고, 선생은 인하여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소(疏)를 들어 말하였다.
“유상과 월천은 동문인(同門人 함께 퇴계 선생을 사사하였음)인데도 월천의 평(評)이 이러하였는데, 더구나 중봉은 충직(忠直)한 사람이니 어찌 너그러운 용서가 있었겠는가.”

영승(嶺僧) 묘은(妙訔)이 시축(詩軸)을 내놓고 시(詩)를 청하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일절을 썼다.

스님 가사(袈裟) 펄럭여라 어드메서 왔느뇨 / 飄然雲衲問何來
병석 갖고 저 멀리 조령에서 왔구만 / 甁錫遙從鳥嶺隈
서글퍼라 모년의 인사가 끝났으니 / 惆悵暮年人事絶
학림이랑 천석을 꿈속에 배회하네 / 鶴林泉石夢中廻

병술년(1646, 인조24) 모춘(暮春)에 77세 노인(老人)은 석실산중(石室山中)에서 쓰다.
또 주석(註釋)하였다.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은 바로 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국초(國初)에 왕씨(王氏)를 모조리 죽인 것은 태조(太祖)의 뜻이 아니었고 대체로 정도전(鄭道傳)의 모략(謀略)에서 나온 것인데, 얼마 안 되어 도전(道傳)이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이 ‘도전이 먼저 그 앙화를 받는다.’고 하였다.”

선생이,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신풍(新豐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를 말함)은 모두 불세출(不世出)의 재주를 지녔으니, 고금에 이와 같은 문장(文章)을 어찌 흔히 얻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두 사람의 문장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합니까?”
하니, 선생이,
“정밀하기로는 목은이 신풍만 못하고, 광대하기로는 신풍이 목은을 따르지 못하네.”
하였다. 내가,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어떻습니까?”
하자, 선생이,
“상촌은 문리(文理)가 통창하여 문자(文字)를 만들어 내면 누구도 감히 흠잡지 못하네.”
하므로, 내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상촌과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분은 참으로 장인(匠人)의 솜씨일세.”
하였다. 선생은 왕개보(王介甫 왕안석(王安石))의,
지사는 어느 때나 성공한 이 적건만 / 志士無時少有成
중재는 세상 따라 공명을 성취하네 / 中才隨世就功名
병분의 제자들은 무엇하는 사람이뇨 / 幷汾諸子何爲者
당 태종(唐太宗)에게 태평성대 만들어 주었구려 / 坐使文皇致太平
한 시(詩)를 들어 말하였다.
“이 말은 이치가 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모든 일을 한 번 정하면 고치지 않으니, 이것이 내 성격의 편벽된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일찍이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이다. 을 뵈었더니, 해평이 ‘매성유(梅聖兪 매요신(梅堯臣))는 매우 좋지 못한 사람일세.’ 하면서 책(册) 한 권을 내보이는데, 청운하(靑雲騢)라고 제(題)하였더군. 대체로 청운하란 바로 서역(西域)에서 공물(貢物)로 바친 말 이름인데, 성유(聖兪)가 청운하에 대한 일을 맨 첫머리에 기록하고 인하여 그 일로 이름하였네. 그 밑에는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를 말함)의 옳지 못한 점을 강력히 말하였으니, 이른바 규방(閨房)의 일에 관한 비방이었네. 또한 성유의 행위로 본다면, 교분(交分)이 그처럼 두터운 사이에 배신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사람됨을 알만하며, 구공(歐公)으로 말하면, 성유의 묘명(墓銘)에서 매우 슬퍼하고 애석해하는 뜻이 있었으니 그의 충후함이 이러하였네.”

선생이,
“일찍이 중봉(重峯)의 의론(議論)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그의 문집(文集)을 보니 참으로 군자(君子)였다. 천백년 사이에 어찌 다시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말하였다.
왜사(倭使)가 맨 처음 가도(假道)를 요청할 때 해원(海原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를 말함)은 조강(朝講)이 열리자, 이 일을 즉시 주문(奏聞)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극언(極言)하였고, 풍원(豐原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을 말함)은 ‘종말(終末)을 헤아리지 않고 대뜸 주문해 놓은 뒤에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일부는 윤두수(尹斗壽)의 말을 주장하고, 일부는 유성룡(柳成龍)의 말을 주장하여 쟁론(爭論)이 해결되지 않은 채 조강을 저녁때에서야 파(罷)하였다. 이처럼 대의(大義)가 분명한 일에도 오히려 사의(私意)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으니, 세상에 어찌 중봉을 아는 자가 있었겠는가. 당시에 만일 중봉의 꾀를 써서 현평(玄平 왜사(倭使)인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을 베죽이고 경사(京師)에 주문하였더라면 적(賊)은 바다를 건너왔을 것이니, 중봉은 반드시 먼저 망언(妄言)으로 일을 그르쳤다는 죄로 죽임을 받았을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양웅(揚雄)은 주자(朱子) 때 이르러 비로소 정의(正義)로 책망당하였는데, 정자(程子)의 경우는 양웅을 그리 배척하지 않고 조그마한 흠이 있는 사람으로만 여겼으니, 자못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선생이,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은 마음이 약하여 사적인 청촉(請囑)을 끊지 못하여 일이 낭패하기에 이르렀으니 애석하다.”
하기에, 내가,
“학곡은 처신(處身)이 선생과는 대단히 같지 않은데도 선생의 교의(交誼)는 끝내 한결같으니 어째서입니까?”
하자, 선생이,
“나는 친구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지나치기 때문에 비록 옳지 못한 점을 보더라도 참으로 대단한 지경에만 이르지 않으면 사랑하는 정의가 조금도 쇠하지 않네. 또 병자년(1636, 인조14)에 학곡이 조경(趙絅)에게 논핵을 받을 때에 나는, 학곡에게 비록 논핵할 만한 일이 있기는 하나 조경의 논핵은 실로 사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고 공심(公心)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조경을 매우 배척하였으니, 이는 학곡을 위한 것이 아니요 조경의 심술을 미워함이었네.”
하고, 또 말하였다.
“내가 학곡에 대하여는 일찍이 서로 규계(規戒)한 일도 없는데, 갑자기 그를 소홀히 대접한다면 이는 나의 도리가 흠결된 것이기 때문에 끝내 잘 대우한 것일세.”

선생이 말하였다.
“신풍(新豐)이 신총(神聰)은 아니었으나 지수(持守)하는 점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남들이 선대감(先大監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를 말함)을 신총이라고 일컫는데, 지국(持國 장유(張維))과 비교하면 누가 나을까요?’ 하고 물으니, 사계가 ‘우리 선인(先人)께서 매우 해박하시기는 하였으나 정밀한 면은 지국만 못하시지.’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신풍이 불(佛)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다만 노장(老莊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道)를 좋아한 사람이니, 그의 자호(自號)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동방(東方)의 역대(歷代)에 걸쳐 오직 아조(我朝)가 가장 문명(文明)한 세대입니다.”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랑캐에게 침탈(侵奪)을 받은 것이 더욱 많으니 어찌하겠는가.”

선생이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 장재(張載))ㆍ주자(朱子)의 격언(格言)과 미사(微辭)를 손수 초록(抄錄)하여 한 책(册)을 만들고 조석(朝夕)으로 펼쳐 보았다. 하루는 이를 하나하나 들어서 상량(商量)한 결과 모두가 옛날 사계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었는데, 때때로 모시고 앉아서 토론(討論)하니 의사(意思)가 매우 좋았다.

선생이,
“내가 젊어서부터 선배(先輩)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논의(論議)를 들은 것이 많은데, 그중에는 사계(沙溪)의 논의가 가장 정확하였네.”
하고, 이어,
“사계는 여익(汝益 오윤겸(吳允謙))ㆍ경숙(敬叔 신흠(申欽))ㆍ사숙(思叔 황신(黃愼))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니, 이 또한 독실한 점일세.”
하기에, 내가,
“사계 선생께서 일찍이 성문준(成文濬) 어른을, 송강(松江)과 절교하여 시의(時議)에 붙으려고 했다면서, ‘어떤 이는 위선자(僞善者)라고 하지만, 밝지 못하다고 한다면 옳거니와 만일 그를 심술(心術) 부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苛酷)한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나도 성문준이 정직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알고 있네. 그가 일찍이 조모(曺某 조차석(曺次石)을 말함)를 길에서 만나, 제일 먼저 정인홍(鄭仁弘)의 이름을 대면서 ‘선생께서 평안하신가?’ 하고, 다음에는 ‘선생께서 언제쯤 올라오실 건가?’라고 물었네. 마치 정인홍을 성심껏 경모(景慕)하는 것같이 말일세. 대체로 조(曺)란 바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로서 정인홍의 문객(門客)이었는데, 어떤 무인(武人)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나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네.”

일찍이 오상(吳相 오윤겸(吳允謙을 말함)을 만나 묻기를,
“지금까지도 송강을 그르다고 여기시오?”
하자, 오상이,
“우리들이 당초에는 송강을 매우 좋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었소. 그런데 한 후생(後生)과 함께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을 가리킴)을 뵙고 송강의 사람됨이 좋지 못함을 말하자, 선생이 성을 내어 꾸짖기를 ‘그대들은 송강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녕되이 헐뜯으니, 나는 매우 미편(未便)하게 여긴다. 비록 그대 같은 위인일지라도 요즘 들으니, 그대의 동료들이 그대를 매우 아낀다 하는데, 하물며 송강은 비록 약간의 논의할 만한 흠은 있다 할지라도 끝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또 송강은 나의 친한 벗이다. 그대들이 나를 스승으로 여긴다면 스승의 친구를 이처럼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있는 곳에서도 그대들이 조금도 사정을 돌아보지 않으니, 아무런 기탄한 바가 없는 듯하다.’ 하므로, 나는 황공하여 땀을 뻘뻘 흘렸으며, 이때부터 이전의 견해를 갑자기 변개시켜 감히 다시는 송강을 논하지 못했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사를 관찰하건대, 아직도 다 고치지 못한 데가 있는 듯하였다.

선생에게,
하자, 선생이,
“일찍이 듣지 못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을 듣고 싶네.”
하기에, 내가 사계 선생에게서 들은 것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오성(鰲城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을 말함)이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에게 운운한 말까지 얘기하였더니 선생이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오성의 말이 아닐 걸세. 오성이 일찍이 근세(近世)의 명상(名相)을 세면서 오직 유상(柳相)을 으뜸으로 쳤네. 어떤 이가 ‘유상의 은미(隱微)한 곳엔 의심할 만한 것이 많다.’ 하자, 오성은 ‘비록 약간의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고 그의 규모(規模)의 성취된 것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 하였으니, 오성이 만일 이 사실을 안다면 논의가 반드시 이러하지 않았을 걸세.”

선생이,
“선배(先輩)들이 흔히, 왕씨(王氏)를 죽인 일은 아조(我朝)의 복(福)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고, 인하여 말하였다.
“송 태조(宋太祖)는 참으로 인의(仁義)가 있는 사람이다. 일찍이 어떤 소설(小說)을 보니,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었다. 송 태조가 비석(碑石) 하나를 사당 가운데 세워서 ‘서비(誓碑)’라 이름하고 누런 보자기로 덮어서 매우 주밀하게 봉해 놓았다. 유명(遺命)을 내리기를 ‘사군(嗣君)이 막 즉위하거든 무식(無識)한 환관(宦官) 한 사람만 데리고 사당에 들어가 친히 열어 보고 다시 예전대로 봉해 놓아라.’ 하였다. 유명대로 열어 보니, 거기에는 새겨 놓은 것이 삼조(三條)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씨(柴氏)는 비록 역모(逆謀)를 꾀했더라도 용서해 줄 것, 또 하나는 간신(諫臣)과 대신(大臣)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대체로 송 나라의 천하는 본디 시씨(柴氏) 집 구물(舊物)이기 때문에 유교(遺敎)가 이러했던 것이니, 매우 충후(忠厚)함이 아니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송 나라가 끝날 때까지 충의(忠義)의 선비가 무리지어 나와 후세(後世)에서 따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비석은 변경(汴京 북송(北宋)의 도읍지)이 함락된 뒤에야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선생이,
“근세(近世)의 역법(曆法)이 어긋난 듯하네. 대체로 요즈음은 3, 4월이 매우 차갑고 10월은 오히려 따사로운 기운이 있네.”
하기에, 대답하기를,
“역가(曆家)에서 세차법(歲差法)을 세워 놓았지만, 일세(一歲) 동안에 어긋난 분수(分數)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대충 70년 만에 일도(一度)를 넘는다고만 여기고 있으니, 어찌 어긋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뜻은 지금 북기(北氣)가 한창 성함은 물론이요, 또 술가(術家)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이 해세(亥世)에 꼭 당했다고 하니, 이 때문에 한기(寒氣)가 항상 가득해서 초목(草木)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선생이,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이른바 ‘모든 풀도 무성해진다.’는 것과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른바 ‘초목이 번성해진다.’는 것은 모두 치세(治世 잘 다스려진 세상)의 징험이니, 오늘날 이와 반대된 것은 당연한 것일세.”
하고, 인하여,
“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로 미루어 본다면, 오늘날이 정작 어느 시기에 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송유(宋儒)가 ‘일세(一歲)를 가지고 말한다면 지금이 5월 5일에 당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오늘날은 송 나라 때와 똑같은 오회(午會)이고 운(運)과 세(世)만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오회라 하더라도 요(堯) 임금이 양(陽)의 중수(中數)를 얻었고 보면 오늘날은 바로 음(陰)이 오중(午中)의 뒤에서 생겨 점점 미(未)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적(夷狄)이 성해지고 음기(陰氣)가 많아지는 것은 아마도 자연의 이치인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예부터 난(亂)은 많고 치(治)는 적으며, 군자(君子)는 적고 불초(不肖)한 사람은 많았는데, 《주역》의 괘형(卦形)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양획(陽畫)은 하나로 되어 있고 음획(陰畫)은 둘로 되어 있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일세. 어찌 오늘날 뿐이겠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남한산(南漢山)의 형세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는 일밖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형세이니, 이를 잘 판단하여 다스리지[辦理] 못하면 다만 오늘날처럼 되어 버릴 뿐이네. 오늘날의 일에 대하여는 다만 일선(一線)의 정론(正論)이나마 부지(扶持)하여 전혀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거의 다시 밝아질 날이 있을 걸세.”

내가 장단(長湍)에 가서 자씨(姊氏)를 뵙고 돌아오니, 선생께 막 의정(議政)의 소명(召命)이 있었다. 선생이 나를 보고,
“형세상 입사(入謝 임금에게 사은함)하고 돌아올까 하네.”
하기에, 대답하기를,
“저의 망녕된 생각에는 꼭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자, 선생이 말하였다.
“다만 은명(恩命)을 사례할 뿐이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세. 또 듣건대, 교지(敎旨) 및 유지(諭旨)에서 피인(彼人 청(淸) 나라를 가리킴)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조정에서 오히려 정축년(1637, 인조15) 이전 사람으로 대하는 걸세. 비록 사은숙배(謝恩肅拜)한 후에라도 문자(文字) 짓는 일은 사면하고, 또한 이 예(例)를 써서 구구한 뜻을 펴 볼까 하네.”

선생이,
“이른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스승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른바 무극(無極)이란 이치의 무성무취(無聲無臭)함을 말한 것이고, 이른바 태극(太極)이란 아무리 성취(聲臭)는 없다 하더라도 실지로 지극(至極)의 묘(妙)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무극이란 노자(老子)가 말한 무극과는 같지 않으니, 노자의 뜻은 무궁(無窮)이라는 것이요 또 태극의 위에 다시 무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송사(宋史)》 염계전(濂溪傳 주돈이(周敦頤))의 말도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국사(國史)를 간정(刊正)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군.’ 하였다. 선생은 또,
“태극이 음양(陰陽)을 낳는다면 태극과 음양을 저절로 두 가지 물건이 된 것일세.”
하기에, 대답하기를,
“태극으로 말하면, 이(理)가 있는 다음에 기(氣)가 있기 때문에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고 한 것이요, 음양으로 말하면, 태극이 음양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음과 양이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이곳에 대해 발명(發明)한 것이 매우 많은데, 그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理自理氣自氣]’고 한 것은 태극과 음양을 나누어서 말한 것이고, 그 ‘기도 도이고 도도 기이다.[器亦道道亦器]’고 한 것은 태극과 음양을 합해서 말한 것이니, 다만 그 소견(所見)이 어떠한가를 관찰할 뿐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이 시원스럽군. 항상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려 하였으나 그리 못했더니, 오늘 일은 매우 다행한 것일세.”
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선생의 성덕(盛德)을 나는 그윽이 앙모(仰慕)한다.

묻기를,
“문산(文山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호원(胡元)에게 장차 황관 야복(黃冠野服)으로 고문(顧問)에 대비하려 하였으니, 그 의리가 어떻습니까?”
하자, 선생이,
“이는 위관(僞官 위조(僞朝)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는 뜻에서 핑계를 대는 말이지, 어찌 참으로 이와 같이 하려고 하였겠는가.”
하기에, 내가,
“기자(箕子)가 자정(自靖)한 말에는 ‘내가 주(周) 나라 신복(臣僕)은 되지 않겠다.’ 하여놓고, 끝내는 무왕(武王)을 위해 홍범(洪範)을 진술(陳述)하였으니, 혹 도리(道理)를 논설(論說)하는 것은 신복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기자가 진술한 것은 곧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의 대체(大體)로서, 하늘이 우(禹) 임금에게 내려 주어 다시 기자에게 전해진 것이요, 기자 자신이 얻어서 사사로 간직할 것이 아닌데, 어찌 무왕을 위해 진술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왕이 기자에게 도(道)를 물었으니, 이는 무왕이 기자를 빈사(賓師)로 대우한 것인데, 어찌 신복이라 하였겠는가. 문산의 경우는 이와 다른 걸세. 호원이 패역(悖逆)으로 중하(中夏)를 어지럽혀 정통(正統)을 없애 버렸으니, 이는 벌써 천인(天人)에 순응(順應)하는 무왕의 거사(擧事)가 아니요, 문산에게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되는 것일세. 그러니 비록 몸에 관위(官位)는 없다 할지라도 만일 그의 좌우(左右)에 있어 고문(顧問)에 대비한다면 이는 불공대천의 원수를 잊어버린 것인데, 문산의 마음이 어찌 여기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문산의 말은 실정(實情)이 아니고, 다만 핑계를 대어 벼슬을 사양하는 계책으로 삼았을 뿐이라고 여기네.”

당시 연지(延之 김수증(金壽增))가 날마다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였다.
“내 손자 중에 수흥(壽興)ㆍ수항(壽恒)이 있지만 모두 제 아비를 따라 갔고, 이 손자만은 내가 이목(耳目)으로 삼기 때문에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못한다네.”


 

[주D-001]전의(傳疑) : 고사(古事)의 의심난 것은 의심난 그대로 다시 후세(後世)에 전한다는 뜻이다.
[주D-002]위학(僞學) : 위학은 바르지 못한 학문(學問)이란 뜻이다. 송 영종(宋寧宗) 때에 한탁주(韓侂胄)가 정권(政權)을 잡고서, 자기와 의견(意見)이 다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도학(道學)을 위학이라고 하여, 도학자인 주희(朱熹)ㆍ채원정(蔡元定)을 삭직(削職) 또는 폄적(貶謫)시키는 등 조정(朝廷)의 정사(正士)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주D-003]병분(幷汾)의 제자(諸子) : 당(唐) 나라 초기에 문장가(文章家)가 문중자(文中子)의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지역이 바로 병주(幷州)와 분주(汾州) 사이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04]왜사(倭使)가 …… 요청할 때 : 임진왜란 이전에 왜(倭)의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豐信秀吉]가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하나 트집거리가 없어, 사신(使臣)을 통해, 장차 중국(中國)에 조공(朝貢)차 들어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핑계하여 우리에게 요청했던 사실을 말한다.
[주D-005]자호(自號)를 …… 있다 : 장유(張維)가 계곡(谿谷)이라고 자호한 것을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수컷처럼 강한 것을 알면서도 암컷처럼 유순한 겸허를 지킨다면 모든 물이 저절로 모여드는 계곡 같이 천하 사람이 모여들 것이고, 결백함을 알면서도 굴욕의 위치를 지킨다면 천하의 물이 고이는 골짜기처럼 천하 사람이 귀의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辱 爲天下谷]’고 했다.” 한 데서 그 계(谿) 자와 곡(谷) 자를 취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06]유상(柳相)이 …… 일 :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몽진하여 정주(定州)에 이르렀을 적에, 명(明) 나라 장수가 수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오자, 혹은 “왜구(倭寇)에 대비한 것이다.” 하고, 혹은 “명 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왜놈들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를 기찰(譏察)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하여, 모두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사람을 시켜 그 사정(事情)을 살핀 다음에 대가(大駕)를 모시고 가서 명 나라 장수를 접견(接見)해야 할 것이다.” 하자, 여러 사람이 누구를 보내야겠느냐고 물으므로, 이항복은 유성룡(柳成龍)이 적합하다고 말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벌써 명 나라 장수를 접견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유성룡을 믿고 안심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선천(宣川)에 이르러서 명 나라 장수를 접견하고 난 후에도 유성룡은 오지 않았다. 오랜 뒤에야 유성룡은 와서 “길을 잃고 천장(天將)과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고 핑계를 댄 것을 말하는데, 김장생(金長生)은 정홍명(鄭弘溟)에게 준 편지에서 “충신(忠臣)이라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조그마한 이해(利害)에 관해서도 이렇게 회피를 하였는데, 대절(大節)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주D-007]세차법(歲差法) :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이 되는 때가 해마다 조금씩 틀리는 것을 말한다.
[주D-008]주자(朱子)가 …… 것입니다 : 《송사(宋史)》의 주돈이전(周敦頤傳)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실려 있는데, 맨 첫머리에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주자가 조정(朝廷)에 주청(奏請)하여 이 자(自) 자와 위(爲) 자를 깎아 버리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
[주D-009]호원(胡元) : 원(元) 나라를 되놈으로 일컫는 말이다.
[주D-010]황관 야복(黃冠野服)으로 …… 대비하려 : 송말(宋末)의 충신(忠臣) 문천상(文天祥)이 원(元)에 억류(抑留)되어 있을 때, 원제(元帝)가 왕적옹(王積翁)을 시켜 유지(諭旨)를 내려서 그를 등용하려 하자, 문천상이 “우리나라가 망하였으니, 나는 한번 죽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혹시라도 너그러운 용서를 받아 황관(黃冠)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훗날에 방외(方外)로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겠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418》





 청음집 제38권 / 기(記) 5수(五首)

군옥소기(羣玉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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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거사(淸陰居士)에게는 인장(印章)이 수십 개가 있다. 옥에 아로새긴 것이 차곡차곡 함 속에 가득하여 찬란한데, 그것들을 여러 겹으로 잘 싸서 금대산(金臺山)에 있는 석실 안에 보관한 다음, 옥들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뜻인 ‘군옥지소(羣玉之所)’라고 이름 붙였다. 거사는 천성이 질박하고 솔직하여 평소 취미를 가지고 수집하는 것이 없지만, 유독 이것만은 아주 좋아하여 바람둥이가 미녀를 좋아하듯 아무리 다른 좋은 것이 있더라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각 인장마다 재질에 따라 형태가 다르고, 형태에 따라 새긴 전서(篆書)의 서체가 다르며, 전서의 서체에 따라 필세(筆勢)가 다르지만, 다른 가운데 다르지 않은 것이 있고, 같은 가운데도 같지 않은 점이 있었다. 방형으로 된 것은 곱자의 제도를 다하였고 원형으로 된 것은 걸음쇠의 제도를 다하였다. 긴 것은 날렵하고 가늘게 하고자 하였고, 큰 것은 장중하고 근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마르면서도 엉성한 잘못이 없게 하고자 하였고, 풍만하면서도 밀집된 잘못이 없게 하고자 하였다. 굽어 있으면서도 곧음과 어긋나지 않게 하고자 하였고, 기이하면서도 바름을 해치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법도에 맞게 하였다.
형태와 모양에 따라 각자 등급을 나누었는데, 흠과 아름다움을 모두 드러내고, 잡티와 색채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항상 맑은 날 처마에 따스한 햇빛이 비추면 자리를 쓸고 책상의 먼지를 턴 다음 그것들을 좌우에 진열하여 놓고 요리조리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는데, 참으로 예원(藝苑)의 청완(淸玩)이요 문방(文房)의 비보(秘寶)들이었다.
‘김상헌인(金尙憲印)’이라고 새긴 것은 거사의 성명을 새긴 것이다. 그 형태는 방형이고 그 전서는 착(錯)이며 그 획은 양각이다. 네 글자 가운데 세 글자는 크고 한 글자는 작다. 그러나 형상의 미묘함은 지도(地道)가 변화해 가득 차서 겸(謙)으로 흐르는 상이 있다.
‘숙도(叔度)’라고 새긴 것은 거사의 자(字)를 새긴 것이다. 그 형태는 위와 같이 방형이고 그 서체는 대전(大篆)이며, 그 획은 음각이다.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하지 않아 마치 동 강도(董江都)의 학문이 순정(純正)하면서도 정채(精彩)로움이 적은 것과 비슷하다.
‘청음(淸陰)’이라고 새긴 것은 거사의 호를 새긴 것이다. 방형이며, 옥저(玉筯)이며, 양획(陽劃)이다. 그 형상은 마치 두 어린아이가 짝을 지어 옥척(玉戚)을 세워 두고 주상(周庠)에서 작(勺)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그 앳된 모습이 볼만한 것과 비슷하다.
‘양조경연근신(兩朝經筵近臣)’이라고 새긴 것은 그 형태는 방형이며, 길이는 위의 것과 같다. 전서(篆書)이며 양각이다. 바탕과 모양이 단정하여 마치 곽자맹(郭子孟)이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일정함이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없는 것과 비슷하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고 새긴 것은 변형된 도해법(倒薤法)이며, 방형이고 양각이다. 은은한 자태에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이 마치 교녀(鮫女)가 이별의 눈물을 흘릴 때 눈물방울이 알알이 진주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만경피수(萬頃陂水)’라고 새긴 것은 과두체(蝌蚪體)이며, 착이며, 방형이며, 양각이다. 시작과 끝이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 마치 황하(黃河)가 곤륜산(崑崙山)에서 나와 중원(中原)을 관통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태백산인(太白山人)’이라고 새긴 것은 형태는 방형이고 전서는 상방(上方)이며, 획은 음각이다. 음각한 글자의 모양이 풍만하여 아주 살지고, 양각의 계선(界線)은 희미하여서 겨우 분간할 수가 있다. 부드러우면서 꾸밈이 없는 것이 마치 양자운(楊子雲)이 문을 닫아걸고 《태현경(太玄經)》을 쓰다가 마침내 그대로 백색으로 돌아간 것과 비슷하다.
‘주세도인(住世道人)’이라고 새긴 것은 변형된 소전체(小篆體)이며, 양각이다. 형태는 위의 것과 같다. 시원스럽고 상쾌하며 바르고 곧은 것이 마치 꼿꼿하고 굳센 선비가 애매모호하여 둥글둥글한 것을 싫어하고 반듯하여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거유미(閑居有味)’라고 새긴 것은 대전이고, 양각이며, 형태는 위의 것과 같다. 글자의 체는 풍만하고 색깔은 윤이 나 아름다운 것이 마치 도덕과 화순함이 가득 차서 아름다운 빛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
‘정좌간서(正坐看書)’라고 새긴 것은 양각의 극치이며, 가늘어서 벽락전(碧落篆)을 새겨 놓은 것이다. 한결같이 옛 법도를 따르고 새롭거나 기이한 것을 뒤섞지 않아 마치 맹자(孟子)가 왕도(王道)를 논함에 세속에서 오활하여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취정(翠庭)’이라고 새긴 것은 조적체(鳥跡體)이며 양각이다. 가냘프고 맵시가 있어 아름다우면서도 획의 끝이 날카로워 서늘한 것이 마치 손 부인(孫婦人)이 장막 아래에서 진홍색 치마를 입고서 눈처럼 하얀 칼날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송백당(松栢堂)’이라고 새긴 것은 중양(重陽)으로 획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각부(刻符)라고 하는 것이다. 그 바깥쪽은 가득 차 있고 그 중앙 부분은 비어 있어, 마치 노씨(老氏)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조주(一釣舟)’라고 새긴 것은 양의체(兩儀體)로 새긴 것이다. 음이 변하여 양이 되려 하고, 양이 변하여 음이 되려 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함이 마치 뇌음(雷音)이 공(空)한 듯하나 공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백구사(白?沙)’라고 새긴 것은 잡체(雜體)로 새겼으며, 양각이다. 기괴하고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 마치 증점(曾點)의 기상이 천길 허공 위에서 봉황이 날개 짓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강산지조(江山之助)’라고 새긴 것은 양각으로 새겼으며, 크기가 작은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호방하고 시원스러워, 마치 이 공봉(李供奉)이 키는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은하수를 건너 우주를 벗어나는 기상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일진부도처(一塵不到處)’라고 새긴 것은 형태가 위의 여섯 개 인장과 같다. 방형이면서 대자(大字)가 소자(少字) 사이에 끼어 있으며, 착이고 양각이다. 바깥쪽의 네 글자는 아주 세밀하며, 가운데 있는 한 글자는 기굴(奇崛)함이 유별나다. 이에 마치 ‘바다 상인〔海賈〕’의 철망 안에 담겨 있는 일곱 자 크기의 산호수(珊瑚樹)와 비슷하다.
‘무속헌죽영금서(無俗軒竹映琴書)’라고 새긴 것은 형태는 하나의 원형이고 글자는 일곱 개의 양각이다. 원형은 하늘의 상이며, 일곱 글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숫자이다. 이에 마치 북두칠성이 허공에 매달려 있으면서 원기를 따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악북도인운학리(岳北道人雲壑裡)’라고 새긴 것은 형태는 바깥쪽은 하늘처럼 둥글고 안쪽은 땅처럼 모가 났다. 글자의 체는 양이 음을 감싸고 있는 특이한 파체(破體)이다. 이에 마치 사유여(謝幼輿)가 뜻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일반적인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 것과 같다.
‘청풍만실좌우죽림(淸風滿室左右竹林)’이라고 새긴 것은 글자가 모두 동일한 서체이며, 모두 착이다. 형태는 방형이면서 길다. 존귀한 양(陽)이 비천한 음(陰)을 희롱하고 있다. 이에 마치 사 태부(謝太傅)가 양쪽에 아름다운 기녀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청아한 풍도와 아취 있는 지조를 지니고 있어 풍류를 혐의쩍어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재명이문사가동호(再鳴以文賜暇東湖)’라고 새긴 것은 하나의 인장을 형태를 나누어서 위는 양이고 아래는 음으로 만든 것으로, 긴 쪽에 속한다. 하늘이 땅보다 앞서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받드는 것이 마치 자도(子都)와 소군(少君)이 함께 한 대의 녹거(鹿車)를 타고 다닐 때 맑고 매서운 절개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용모를 가지고 있어 바라보는 이들이 기뻐하고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이외에 ‘유항재(有恒齋)’니 ‘풍아유음(風雅遺音)’이니, ‘자시일왕법(自是一王法)’이니, ‘격천리공명월(隔千里共明月)’이니 하는 등의 글자를 새긴 것이 모두 여덟아홉 개인데, 글자가 모두 수척하고 형태가 모두 길쭉하여 마치 전 추밀(錢樞密)이 조정에서 간쟁하면서 홀로 서서 물러나지 않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또 하나의 고기(古器)가 있는데, 무어라고 이름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는 박산(博山)을 안치하였으며, 산 아래에는 떠받치고 있는 대(臺)가 있으며, 대에는 두 개의 기둥이 드리워 있고 사람이 서 있다. 관지(款識)에는 ‘분향묵좌(焚香默坐)’라고 새겨져 있다. 반우(盤盂)에 있는 명(銘)에 비해 글씨가 더 촘촘하고 획이 더 세밀한 것이 마치 위 무공(衛武公)이 자신의 몸을 수양하기를 옥이나 뿔을 자르고 쪼아 잘 다듬듯이 하여 이미 정밀한데도 더욱 그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은 보관되어 있는 것들 가운데에서 언급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것들이며, 이 밖에 몇몇 것들도 하나하나 정밀하고 좋아, 마치 왕씨(王氏)와 사씨(謝氏)의 집에 들어가면 정원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아닌 것이 없는 것과 비슷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아, 도서(圖書)의 오묘함을 남김없이 아는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이에 대해서 더불어 함께 논할 수가 있겠는가. 애오라지 이를 기록하여 동호인들과 함께 하는 바이다.
삽화 새창열기
[주-D001] 청완(淸玩) : 
청아한 아취를 가진 노리개란 뜻으로, 서화(書畵)나 금석(金石), 고기(古器) 등 완상할 만한 사물을 가리킨다.
[주-D002] 김상헌인(金尙憲印)이라고……있다 : 
착(錯)은 전각을 새기는 장법(章法) 가운데 하나로, 반착(盤錯)이라고 한다. 착은 교차한다는 의미로서 인문(印文)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나타나도록 필획을 구부리거나 서로 교차시켜 생동감을 불어넣는 기법을 말한다. 위의〈그림1〉 참조. 양각(陽刻)은 글자가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지도(地道)는 땅의 도로서,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彖)〉에,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謙巽)한 것을 더해 주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손한 데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준다.〔天道 虧盈而益謙 地道 變盈而流謙 鬼神 害盈而福謙〕” 하였다.
[주-D003] 숙도(叔度)라고……비슷하다 : 
숙도는 청음의 자이다. 대전(大篆)은 서체의 하나로,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사주(史籒)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2〉 참조. 동 강도(董江都)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 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여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는데, 동중서는 현량으로 뽑혔다.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요지로 대책을 올리면서 육예(六藝)의 과(科)와 공자(孔子)의 학술을 배우지 않은 자는 등용하지 말라고 건의하자, 무제가 동중서를 강도 상으로 임명하였다.
[주-D004] 청음(淸陰)이라고……비슷하다 : 
옥저(玉筯)는 소전체(小篆體)의 하나로, 옥저(玉箸)라고도 한다. 글자의 형태가 대칭성이 강하며, 양쪽으로 내리는 필획을 길게 하기 때문에 마치 나란히 놓인 젓가락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3〉〈그림4〉 참조. 옥척(玉戚)은 옥으로 만든 도끼를 말한다. 작(勺)은 주공(周公)이 만들었다고 하는 악곡(樂曲)의 이름이다.
[주-D005] 양조경연근신(兩朝經筵近臣)이라고……비슷하다 : 
양조경연근신은 두 조정의 경연에서 모신 근신이라는 뜻이다. 곽자맹(霍子孟)은 한(漢)나라 때 곽광(霍光)으로, 자맹은 그의 자(字)이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곽광이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맞이해 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유하는 몹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였다. 이에 창읍왕을 즉위시킨 지 27일 만에 폐위시키고서 다시 무제의 증손인 유순(劉詢)을 맞이해 와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선제(宣帝)이다. 곽광은 정권을 쥐고서 금위(禁闈)에 20여 년 동안 출입하였는데, 한 번도 법도를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주-D006]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고……비슷하다 : 
명철보신은 지혜가 뛰어나고 이치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 몸을 온전하게 보전한다는 뜻이다. 도해법(倒薤法)은 전서체(篆書體)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5〉〈그림6〉 참조. 교녀(鮫女)는 바다에 사는 여인을 말하는데, 이별하면서 울면 그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한다.
[주-D007] 만경피수(萬頃陂水)라고……비슷하다 : 
만경피수는 만 이랑의 드넓은 물이란 뜻이며, 과두문(蝌蚪文)은 황제(黃帝) 때 창힐(倉頡)이 지었다고 하는 고대 문자로, 글자의 모양이 마치 올챙이와 같이 생겨 획의 머리 부분은 굵고 끝 부분은 가는 글씨를 말한다. 〈그림7〉 참조.
[주-D008] 태백산인(太白山人)이라고……비슷하다 : 
계(界)는 글자와 글자 사이를 가르는 선으로, 계격(界格)이라고도 한다. 양자운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인 양웅(揚雄)으로, 자운(子雲)은 그의 자이며, 성도(成都)에 살았다. 사람됨이 소탈하였고,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양자법언(揚子法言)》, 《태현경(太玄經)》 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글 뜻이 아주 심오하였다. 양웅이 애제(哀帝) 때 승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태현경》을 지으면서 담박한 생활을 즐기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는데 당신은 겨우 급사황문(給事黃門)으로 있다. 그리고는 흑색을 물들이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루지 못해 백색 그대로이다.” 하면서 조롱하였다.
[주-D009] 정좌간서(靜坐看書)라고……비슷하다 : 
정좌간서는 조용히 앉아서 서책을 본다는 뜻이다. 벽락전(碧落篆)은 전서체의 일종이다. 〈그림8〉 참조.
[주-D010] 취정(翠庭)이라고……비슷하다 : 
조적체(鳥跡體)는 중국 고대에 창힐(倉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문자나 또는 서체이다. 〈그림9〉 참조. 손 부인(孫夫人)은 손권(孫權)의 누이동생으로, 유비(劉備)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 아내로 삼은 사람인데, 사람됨이 재주가 있고 사내다워 시비들까지도 모두 칼을 차고 시립하게 하여 불시의 변에 대비하였다.
[주-D011] 송백당(松栢堂)이라고……비슷하다 : 
각부(刻符)는 진서(秦書)의 팔체(八體) 가운데 하나로, 부절(符節) 위에다 새기는 글자체이다. 〈그림10〉 참조. 노씨(老氏)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말하기를,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게 하고 배를 채우게 한다.” 하였다. 《道德經 第3章》
[주-D012] 일조주(一釣舟)라고……비슷하다 : 
양의체(兩儀體)는 음각과 양각이 함께 있는 것이며, 뇌음(雷音)은 불교에서 쓰는 말로, 부처가 설법하는 소리가 마치 뇌성이 치는 소리와 같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3] 백구사(白?沙)라고……비슷하다 : 
잡체는 두 가지 이상의 서체를 섞어서 새긴 것이다. 〈그림11〉 참조. 증점(曾點)의 기상은,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이 타던 비파를 놓고 일어서 “늦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면 대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감탄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주-D014] 강산지조(江山之助)라고……비슷하다 : 
강산지조는 강산의 경치를 돕는다는 뜻이다. 이 공봉(李供奉)은 당나라의 시인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이백이 일찍이 하지장(賀知章) 등의 추천을 받아 한림 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된 적이 있다.
[주-D015] 사유여(謝幼輿)가……것 : 
사유여는 진(晉)나라 죽림 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사곤(謝鯤)으로, 유여는 그의 자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과 《주역》을 특히 좋아하였으며, 노래에 능하고 금슬을 잘 탔다. 일찍이 이웃집 여인을 꾀어내려고 하다가 여인이 베틀의 북을 던지는 바람에 앞니가 부러졌는데, 당시 사람들이 “제멋대로 놀다가 유여의 앞니가 부러졌다.” 하였다. 벼슬길에 나오라고 하자, 병들었다고 핑계 대고는 나가지 않은 채 탁필(卓畢)이나 완방(阮放) 등과 어울려 술에 취해 노닐었다. 《晉書 卷49 謝鯤列傳》
[주-D016] 청풍만실좌우죽림(淸風滿室左右竹林)이라고……비슷하다 : 
청풍만실좌우죽림은 맑은 바람은 방 안에 가득하고 좌우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는 뜻이다. 사 태부(謝太傅)는 진(晉)나라 때 태부 벼슬을 지낸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사안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 서남(西南)에 있는 동산(東山)에 거주하면서 기녀를 데리고 놀았다고 한다.
[주-D017] 재명이문사가동호(再鳴以文賜暇東湖)라고……비슷하다 : 
재명이문사가동호는 재차 문으로써 이름을 드날려서 동호에서 사가독서하였다는 뜻이다. 자도(子都)는 한(漢)나라의 명사였던 포선(鮑宣)의 자이고, 소군(少君)은 그의 아내인 환씨(桓氏)의 자이다. 녹거(鹿車)는 좁고 작은 수레이다. 포선이 스승의 딸인 소군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소군의 집은 본디 부유하여 가지고 오는 물품이 아주 성대하였다. 이에 포선이 자신의 집은 본디 부유하지 못해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자, 소군이 종과 물품을 모두 버려두고 짧은 베로 만든 치마 하나만을 입은 채 함께 녹거를 끌고 포선의 집으로 가서 시어머니를 뵙고 난 뒤 곧바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갔으며, 그 뒤에 부덕을 잘 닦으니, 향당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4 列女傳 鮑宣妻》
[주-D018] 이 이외에……비슷하다 : 
자시일왕법(自是一王法)은 저절로 이는 똑같은 왕법이라는 뜻이고, 격천리공명월(隔千里共明月)은 천리를 격해 있으면서도 밝은 달을 같이 본다는 뜻이다. 전 추밀(錢樞密)은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전약수(錢若水)를 말한다.
[주-D019] 또 하나의……비슷하다 : 
박산(博山)은 옛날의 향로인 박산로(博山爐)로, 화로의 덮개 위에 전설상의 산인 박산의 모양을 조형(造形)한 것을 말한다. 관지(款識)는 종정(鍾鼎)이나 금석(金石)에 새긴 명문(銘文)을 말하는데, 음각(陰刻)으로 새긴 것을 관(款)이라 하고, 양각(陽刻)으로 새긴 것을 지(識)라고 한다. 분향묵좌(焚香默坐)는 향을 피우고 묵묵히 앉아 있다는 뜻이다. 반우(盤盂)는 둥글거나 네모진 그릇으로, 옛날 사람들은 여기에다가 공을 기록하거나 좌우명(座右銘)을 새겨 두고서 항시 이를 보면서 자신을 가다듬었다. 위 무공(衛武公)은 95세의 나이가 되어서도 억계시(抑戒詩)를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잘 수양하였다.
[주-D020] 이 밖에 몇몇 것들 : 
청음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전해지는 인장은 이상에서 말한 것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림12-1〉 ~ 〈그림12-13〉 참조.
[주-D021] 왕씨(王氏)와……것 : 
하나같이 모두 다 뛰어나다는 뜻이다. 왕씨는 육조(六朝) 시대의 망족(望族)으로, 후대에는 고문세족(高門世族)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유우석(劉禹錫)의 〈오의항(烏衣巷)〉 시에, “옛날에 왕씨 사씨 집 앞 살던 제비가, 날아와서 심상한 백성 집에 들어가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하였다. 사씨 집안은 진(晉)나라 때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을 말하는데, 이 집안에는 자질이 우수한 자제들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