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포저(浦渚) 조공(趙公) 신도비명

포저(浦渚) 조공(趙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1. 8. 13. 16:04

송자대전 제16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포저(浦渚) 조공(趙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본조(本朝)의 문치(文治)는 삼고(三古 중국 고대(古代)를 셋으로 나눈 상고ㆍ중고ㆍ하고) 시대의 도(道)를 높이 숭상하여, 퇴계(退溪)ㆍ율곡(栗谷) 이후로 선비들이 더욱 이치와 사물(事物)을 일치(一致)시켜 효도를 충성으로 옮기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설(說)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포저 선생(浦渚先生) 조공(趙公)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경훈(經訓)을 독실하게 믿어, 어릴 때부터 늙은이가 되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경건하여 죽고야 말기로 기약하였으니, 성현(聖賢)의 ‘시인(詩人)의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와 ‘늙어서 학문(學問)을 좋아함이 더욱 사랑스럽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익(翼), 자는 비경(飛卿)이다. 공의 아버지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영중(瑩中)은 진실하고 순수하며 성실하여 천진(天眞)을 잃지 않았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기묘년(1579, 선조12) 4월 7일에 공을 낳았다. 이에 앞서 흑룡(黑龍)이 가인(家人)의 꿈에 방으로 날아들어 왔었다.
공은 3세 때에 장난으로 바둑알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데 《주역(周易)》의 괘상(卦象)이 있으므로, 보는 사람이 그를 이상하게 여겼고, 8세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이웃의 한 노인(老人)이 옷을 벗어 놓고 공에게 지키게 하고서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와 보매 반걸음도 옮겨 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니, 그 신실(信實)하고 정성스러움이 벌써 이와 같았다. 8세 때에는 소(疏)를 초(草)하여 사정(邪正)을 변론해 놓았는데, 여러 장로(長老)들이 경탄(驚歎)하기를,
“그 누가 이 글을 어린아이가 지었다고 하겠는가.”
하면서, 남에게는 보이지 말도록 금하였으니, 이는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이 문성(李文成 문성은 이이(李珥)의 연호)ㆍ성 문간(成文簡 문간은 성혼(成渾)의 시호) 두 선생을 구(救)하려다가 죄를 입은 때이기 때문이었다.
15세에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의 주설(註說)을 모두 깨달아 환히 알았고 또 홍범(洪範)을 모방하여 논설(論說)을 지어 ‘이범(彝範)’이라 이름하였으며, 마침내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매양 공의 작품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진(秦)ㆍ한(漢) 시대의 글 짓는 수법이다.”
하였다. 이윽고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여 ‘《대학(大學)》은 곧 성현(聖賢) 심법(心法)의 체용(體用)이 구비된 것이요, 《중용(中庸)》의 계구(戒懼)ㆍ신독(愼獨)은 곧 한 편(篇)의 체요(體要)이니, 가장 진력(盡力)해야 할 곳이다.’ 하고, 이에 지경도(持敬圖) 등 제설(諸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조고(祖考)의 명(命)으로 마지못해 과거(科擧)에 응시하였는데, 고시관(考試官)이 공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나이 24세로 임인년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으나, 권행신(權幸臣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7년 동안이나 승진되지 못하다가 겨우 전적(典籍)에 올랐고, 감찰(監察)을 거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서는 기민(飢民) 구제의 책임을 받고 힘을 다해서 백성을 구제하였다. 기유년에는 옥당(玉堂)에 참록(參錄)되어 사서(司書)와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의 과작(課作 과제로 지은 글)을 보고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이러한 견식(見識)과 문장(文章)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신해년에 비로소 옥당에 들어가 수찬(修撰)ㆍ지제교(知製敎)가 되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이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의 시호)ㆍ문순(文純 이황(李滉)의 시호)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수 없다고 헐뜯으므로,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변론했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이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공에게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계축년에는 시사(時事)가 더욱 크게 변하여 폐모론(廢母論)이 막 일어나자, 공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접반사(接伴使)가 황제의 조사(詔使)를 맞이하려 할 때 공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차출하였고, 도원수(都元帥)가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자신이 있는 곳이 서울과 가까워서 불편하다 하여, 광주(廣州)에서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으로 옮겨 들어가 도고산(道高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면서 경사(經史)를 연구하여 스스로 즐겼고,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ㆍ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함께 끊임없이 강론(講論)했다.
계해년에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조의(朝議)가 ‘임금이 처음으로 집정(執政)한 때인 만큼, 전관(銓官)은 의당 1등 인물을 써야 한다.’고 하므로 공이 으뜸으로,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어 공평(公平)한 도리를 다하니, 여론(輿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공이 일찍이 윤대(輪對)에서 진언(進言)하기를,
“한(漢)ㆍ당(唐)의 모든 임금들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임금에 미치지 못한 것은 학문(學問)의 공력(功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매우 귀담아 들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의 무함을 받아 관직이 추삭(追削)되므로, 공이 극력 신구(伸救)하여 변론하였다. 폐세자(廢世子) 지(祬)가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도망친 사건이 있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ㆍ창석(蒼石) 이준(李埈)ㆍ팔송(八松) 윤황(尹煌)이 폐세자를 용서하여 죽이지 말자고 청하자, 공이 그 의논에 동조하였다.
재성낭청(裁省郞廳)을 겸하였는데, 공이 오랫동안 민간(民間)에 있으면서 민간의 병폐를 익히 보았던 터라, 그 재처구획(裁處區畫)한 바가 일마다 시의(時宜)에 적합하였으나, 서리(胥吏)가 헛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요동시키므로 공이 소(疏)를 올려 극론하고, 이어 아뢰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이 있는 뒤에야 《주관(周官 《주례(周禮)》를 말함)》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 하였는데, 신(臣)이 그윽이 보건대, 성지(聖志)가 혹 서지 못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을 스스로 기대하지 못하고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에 거의 고식적이고 구차스러운 점이 많으니, 이러고서는 치화(治化 바른 정치로 백성을 교화함)를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욕(利欲)과 선악(善惡)의 기미를 깊이 살피시어 어진 이를 가까이하셔서 학문에 힘쓰고, 날마다 유정(惟精)ㆍ유일(惟一)ㆍ극기(克己)ㆍ복례(復禮)ㆍ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 공부에 종사하소서.”
하였다.
갑자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반란이 평정된 후,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을 거쳐 응교(應敎)ㆍ전한(典翰)을 역임하고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진언하기를,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는 실로 만세토록 학문을 하는 대법(大法)입니다. 그 심오한 의리(義理)를 궁구하여 심신(心身)의 일상적인 행사에서 증험하여 그대로 실천해 나간다면, 은현(隱見 은밀한 것과 드러난 것)과 표리(表裏)가 명백하고 순수해지며, 그 정령(政令)과 처사(處事)가 마치 천지(天地)의 운화(運化)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박승종(朴承宗)을 추장(追奬)하자고 청하자, 헌부(憲府)가 망언(妄言)을 했다고 탄핵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만일 그의 말이 망녕되다 해서 벌(罰)하신다면, 아마도 망녕되지 않은 말이 상께 진언되기 어려워질까 염려됩니다.”
하자, 이로 인하여 체직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서용되고, 이어 승지(承旨)에 승진되어 선혜청(宣惠廳)의 일을 겸관(兼管)하면서 진설(進說)하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분명하게 조지(詔旨)를 내려서 각 주(州)ㆍ현(縣)으로 하여금 각기 징수한 금곡(金穀 돈과 곡식)을 크게 균절(均節)시키게 하여 각 주ㆍ현의 빈부(貧富)의 차가 서로 동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백성의 참서(慘舒 혹정(酷政)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과 선정으로 인한 백성의 안일)도 크게 서로 동떨어진 데 이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였는데, 지금의 양민(養民) 정책도 이 방법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였다. 때에 오리(梧里) 이공(李公)이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이의(異議)가 벌 떼처럼 일어나므로, 공이 개연히 다시 쟁론하기를,
“만일 뭇사람의 말에 동요된다면 이는 마치 길가에다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결국 작은 일도 성취할 수 없는데, 더구나 국가의 정치를 성취하겠습니까.”
하니, 이공이 탄식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조모(趙某 조익(趙翼)을 가리킴)의 죄인이다.”
하였다. 이윽고 또 승지로서 교지(敎旨)에 응하여 진언(進言)하였는데 대의(大意)는, 격물(格物)의 학문에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고 관용(寬容)하는 도량을 넓히지 않아서는 안 되므로, 반드시 명선(明善)하고 성신(誠身)하는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의 어머니인 원종(元宗)의 비(妃) 구씨(具氏))의 상(喪)에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이 대궐에 들어가 위문하고 곧 돌아가자, 공이 상에게 힘껏 만류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지금의 숙덕(宿德 덕행이 있는 사람)으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으니, 비록 산림(山林)에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불러들여야 할 터인데 그가 지금 올라왔는데도 왔는지 갔는지를 몰라서야 어찌 될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윽고 도승지(都承旨)를 사퇴하니, 비답하기를,
“청검(淸儉)ㆍ재학(才學)이 진실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
하였다. 공이 승도(僧徒)를 환속(還俗)시켜 연한(年限)을 정해서 역(役)을 정한다면 기꺼이 따를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라고 청하고, 서변(西邊)의 모병(募兵)과 둔전(屯田)에 대한 좋은 방침을 논하였다. 또 피란(避亂)해 온 요민(遼民)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켜서 황상(皇上)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청하고, 노(虜)에 대한 대비책을 올렸는데, 조정이 써 주지 않으므로 재차 소를 올려 논하였다. 그러나 역시 시행되지 않자, 부모 봉양을 위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서 개성 유수(開成留守)로 나갔다.
정묘년에 노(虜)가 침구(侵寇)하자, 공이 주선(舟船)들을 수집하여 사녀(士女)들을 모두 싣고 해도(海島)에 들어가 있다가, 노가 떠난 뒤 행조(行朝)에 달려가서 위문하고 소를 올려 서변(西邊)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논하였다.
들어와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어떤 이름 있는 재신(宰臣)이 외람되이 훈적(勳籍)에 기록되었으므로 그를 삭제할 것을 논하였다. 이에 앞서 조의(朝議)가 사친복제(私親服制)를 놓고 논의가 엇갈렸었는데, 천부(遷祔 신주를 종묘에 옮겨서 합사(合祀)하는 것)할 때를 당해서 별도로 예묘(禰廟 아버지를 모신 사당)를 세우라고 청하는 자가 있자, 공이 변론하기를,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비록 형(兄)이 아우를 계승했다 할지라도 부자(父子)라고 이르는 법인데, 하물며 손자가 할아버지를 계승한 데에 부자의 의(義)가 없단 말입니까. 예위(禰位 아버지의 위패(位牌))가 빠진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바로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를 계승한 경우가 그렇습니다.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중흥(中興)은 실로 창업(創業)과 같은 것이지만, 위로 원제(元帝)를 계승하고 별도로 사친묘(四親廟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부(祖父)ㆍ부(父)를 모신 사당)를 세웠는데, 주자(朱子)는 ‘백승(伯升 후한 광무제의 장형(長兄)인 유연(劉縯))의 아들을 세워서 사묘(私廟)를 받들게 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일은 나라의 큰 전례(典禮)인데, 어찌 근거 없는 한두 사람의 말만을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여, 마침내 능원군 보(綾原君俌 인조의 아우인 원종의 아들)를 주(主)로 삼았는데, 그 부제(祔祭 합제) 행사를 상이 스스로 주관하려 하므로, 공이 또 쟁론하였다.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기사년에 사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장(長)을 역임하였다.
연평(延平) 이귀(李貴)가 붕당(朋黨)을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 송(宋) 나라 사람으로 좌승상(左丞相)을 지내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에게 준 편지를 인용(引用)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도 폐단이 없지는 않다.”
하므로, 공이 부제학(副提學)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선현(先賢 주자를 말함)의 말뜻의 소재(所在)를 깊이 궁구하지도 않고 문득 폐단이 있다고 단정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데에 소략(踈略)할 뿐만 아니라, 성현을 경홀시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고, 또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면세(免稅)해 주는 옳지 못함을 논하여 아뢰기를,
“그윽이 살피건대, 전하께서 사(私)를 극복하는 일에 혹 깊이 유의(留意)하지 못하신가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죄(罪)도 아닌 것으로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귀양 보내고 또 장공 유(張公維)를 외직(外職)으로 좌천시키므로, 공이 간쟁(諫爭)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벼슬을 사퇴하였다.
대사성(大司成)이 되어서는 글로써 관학(館學)의 제생(諸生)들을 일깨워 먼저 《근사록(近思錄)》을 읽어서 문로(門路)를 바르게 하도록 하고, 이어 학제(學制)를 논하니, 상이 명하여 모두 시행하게 하였다.
경오년 봄에는 교지에 응하여 진언(進言)해서, 고통 속에 허덕이는 민생(民生)의 상황을 자세히 논하고, 이어 풍정(豊呈)과 묘향(廟享)에 관한 일을 논하니, 상이 많이 채납(採納)하였다. 윤공 황(尹公煌)의 언사(言事)가 상의 뜻을 거슬렀는데 공의 상소는 궁금(宮禁)에 관한 일로서 사람마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감히 말하였으니, 진정 그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장악원(掌樂院)에서 여악(女樂)을 익힐 것을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진 소왕(秦昭王)은 ‘초(楚) 나라는 무기가 정돈되어 잘 싸울 수 있고 창우(倡優)가 졸렬하여 거기에 고혹되지 않는다.’면서 초 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걱정했는데, 하물며 지금은 백성이 곤고하고 하늘이 경계를 보임에리까. 또 듣건대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되어 계엄(戒嚴)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오늘날의 일은 모두 통곡할 일입니다.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오직 밥 먹을 겨를도 없이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인데, 어찌 기악(妓樂)을 모아 놓고 떠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여름에 가도(椵島)의 비장(裨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을 죽이므로 상이, 왕인(王人 황제의 나라 사람이란 뜻)이 우리나라에서 피살되었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였는데, 곧 듣건대 유흥치가 황제에게 주품(奏禀)해서 한 일이요 제멋대로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므로, 공이 파병(罷兵)할 것을 청하였다.
헌부(憲府)가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꾸짖으므로 공이 간하기를,
“전하께서는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고, 용납해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하시니, 다스리는 효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였다. 때에 한 궁노(宮奴)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궁중에 들어왔으므로 공이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는 몸가짐이 엄(嚴)하시어 진실로 마음이 미혹될 염려는 없습니다. 그러나 군자(君子)는 기미를 알아서 마땅히 그 조짐을 걱정해야 하고 인신(人臣)은 임금을 사랑하는 데 마땅히 그 은미한 것을 방지해야 하는데, 사를 극복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고 걱정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는 겁(怯)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듣건대 화공(畵工)이 대궐에 들어와서 수월(數月) 동안을 나가지 않고 있다 하니, 또 어찌 전하의 마음이 미혹된 한 단서가 아니겠습니까. 신등(臣等)이 전하께 바라는 것은 첫째 성인(聖人)을 법(法)으로 삼아, 마음에 누(累)가 되는 모든 편벽된 기호(嗜好)를 일체 물리치시고, 청명(淸明)ㆍ순수(純粹)한 본심(本心)에 털끝만큼이라도 물욕의 가림이 없게 하여 온갖 치화(治化)가 여기에서 흘러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모든 일이 노여움으로 인해서 발단된 것은 반드시 바름을 잃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빈어(嬪御)를 두지 않으신 것은 곧 제왕(帝王)의 훌륭한 절행(節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자에 의하면, 갑자기 빈어를 간택하라는 명이 계셨다 하니, 이는 노여움의 충동을 면치 못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때에 공이 병으로 인해 직명(職名)을 여러 번 사양하였다.
신미년에 내간(內艱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가 삼년상을 마치고는 구직(舊職)에 복직되어, 천변(天變)을 계기로 더욱 간절히 진계(進戒)하니, 상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려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경은 재(才)와 덕(德)이 모두 뛰어나니, 직사(職事)에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황조(皇朝 명 나라를 가리킴)의 반장(叛將)이 노(虜)에 투항(投降)하여 사기(事機)가 걱정스럽게 되자, 공이 은밀히 계책을 진언하였고, 또 과거법(科擧法)을 고칠 것과 사유(師儒)를 가려서 인재를 양성할 것을 청하였다. 때에 삼사(三司)가 사친부묘(私親祔廟)에 관해 쟁론(爭論)하다가 모두 먼 데로 귀양 갔으므로, 공이 대사헌으로서 그들을 극력 구제하려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체직되었다.
전조(銓曹)가, 부제학(副提學)은 공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하여 전례를 깨고 제수할 것을 청함으로써 다시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되어 전결(田結)의 조세(租稅)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으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시키자, 사한(詞翰)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므로 상이 사마광(司馬光)의, 자신은 사륙문(四六文)에 능하지 못하므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제수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끝내 제수받고 말았던 고사를 인증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을해년에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이 문성공(李文成公), 성 문간공(成文簡公)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인(正人)을 헐뜯는 무리들이 또 소(疏)를 올려 문성공ㆍ문간공을 무함하였다. 때에 공이 학직(學職)으로 있으면서 깊이 세도(世道)를 걱정한 나머지, 소를 올려 이를 자세히 논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학직을 사퇴하였다. 마침 횡의(橫議 멋대로 논의함)가 한창 일어나서 걷잡을 수 없으므로, 공이 재차 소를 올리고 또 경연(經筵)에 들어가 매우 자상하게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이(李珥)는 진정 현인(賢人)이다. 내가 그의 도덕(道德)이 부족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바로 중전(重典)이기 때문에 선뜻 윤허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병자년 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는데, 때에 노(虜)와 전쟁의 발단이 열렸으므로 공이 조목(條目)을 작성하여 대중의 마음을 격려할 것, 민심을 통할 것, 널리 선비를 취할 것, 장재(將才)를 선택할 것, 토병(土兵)을 징용할 것,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 활의 제도를 고칠 것, 백성을 교도할 것 등 8가지 계책을 올렸으나 조정에서 써 주지 않자, 공이 정승 윤방(尹昉)에게 말하기를,
“지금 화(禍)가 어느 날 닥쳐올지 모르는 판에 사람들의 모책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가만히 앉아서 위욕(危辱)을 당하고 말 것이오.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가서 스스로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만 못하오.”
하므로, 윤 정승이 이를 옳게 여겨 상에게 아뢰었으나, 또 시의(時議)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가을에 또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황조(皇朝)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서(詔書)를 받들어 이르자, 공이 성신(誠信)으로 접대하여 속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노(虜)가 대거 침입하여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行幸)하려 하였으나, 노기(虜騎)가 벌써 강도에 핍박하였으므로, 급히 어가(御駕)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공이 마침 첨추공(僉樞公 조익의 아버지)의 소재(所在)를 잃고는 호곡(號哭)하며 찾아다니다가 끝내 첨추공을 찾아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려 하였는데, 노가 이미 사방에 그득하였다. 이에 공이 통곡하고 물러 나와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ㆍ참의(參議) 심지원(沈之源)ㆍ승지(承旨) 김상(金尙)ㆍ봉상시 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ㆍ교리(校理) 윤명은(尹鳴殷)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것을 꾀하고 직접 대장(大將)이 되었는데, 윤계가 갑자기 노에게 죽임을 당하여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므로, 곧 강도로 들어갔다.
정축년 1월에 노가 강을 건너오자, 공이 강 언덕에 앉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두 아들을 안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 조그마한 배에 태우고 떠나 버렸다. 이는 공이 행재소에 즉시 달려가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뒤로부터는 주야로 통곡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다.
난(亂)이 평정된 후 공을 탄핵한 소장(疏章)이 있어 대질 심문한 결과, 상이 그 전말(顚末)을 살펴보고는 그 직책만을 파면시켰다. 뒤에 대간(臺諫)의 논의가 다시 일어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역시 글 읽은 사람이 아니던가. 나는 본디 그가 어진 것을 안다.”
하였다.
계미년에 재차 상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조정에 들어가 재차 사양하자, 비로소 귀양(歸養)을 윤허하였다. 을유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자, 또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해 가을에 세자(世子)를 책립(冊立)하게 되자, 상소하여 세자를 도유(導誘)하는 방법을 자세히 논하고 이어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학문에 힘쓰고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병술년에 또 앞에 했던 말을 거듭 올리니, 상이 구마(廐馬)를 포사(褒賜)하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자, 참찬(參贊)에 제수하므로 들어가서 사례하고, 이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수가 있으므로 공이 마지못해 공직(供職)하면서 때로 격언(格言)을 올렸다.
기축년에 인조가 승하하자, 초상(初喪)의 의절(儀節)을 공이 많이 결정하였는데, 공은 장릉(長陵 인조의 능)을 버리고 다른 길지(吉地)를 선택하려 하였으나, 조론(朝論)이 엇갈려 저지되었다.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옮겨져서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장례(葬禮)를 마치고 나서 차자를 올려, 전학(典學)ㆍ치치(致治)ㆍ존현(尊賢)ㆍ교사(敎士)의 도를 논하고, 이어 10여 인(人)을 천거할 것을 논하였다. 때에 효종(孝宗)이 한창 예의(銳意)하게 좋은 정치를 하려 하므로, 공도 정성을 다해 보좌하여 전후로 진언(進言)한 것이 모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일해야 한다.[危微精一]’는 것으로 성학(聖學)의 요점을 삼고,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어진 정사를 치치(致治)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전부(田賦)와 병제(兵制)도 매우 자세히 연구하여 본말(本末)이 갖추어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은 공의 말이 쓰이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공이, 불량배가 은밀히 청국(淸國)가 내통하여 화단(禍端)이 벌써 싹튼 것을 알고는 사변이 있기 전에 주도하게 방비할 것을 청하였다. 경인년에 노사(虜使) 6, 7명이 이르고 또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우리 국경을 억압하므로 온 나라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공이 지성으로 주선하여 일이 잘 해결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모부인(母夫人)을 천장(遷葬)하니, 상이 특별히 은례(恩例)를 베풀었다.
학사(學士) 심대부(沈大孚)ㆍ유계(兪棨)가 인묘(仁廟)의 시호(諡號)를 논하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므로 공이 그들을 위해 논하자, 상이 더욱 노하여 두 사람을 귀양 보내라 명하므로 공이 대죄(待罪)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의 충실(忠實)함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안심하라.”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ㆍ부제학 조석윤(趙錫胤)도 심대부ㆍ유계에 대해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므로, 공이 물러나기를 계속 청하여 마침내 심대부ㆍ유계가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물러나기를 더욱 강력히 청했다.
인조의 소상(小祥) 때는 연복(練服)의 제도를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상이 사직(社稷)에 도우(禱雨 비를 빔)하려면서 음악을 사용해도 되는지의 여부를 의논하도록 하자, 공이 월불(越紼)의 행사를 인용하여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또 진언하기를,
“명선(明善)ㆍ성신(誠身)ㆍ구인(求仁)ㆍ진덕(進德)의 공부는 사서(四書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반복(反復) 완미(玩味)해서 일생 공부로 삼으면 의리(義理)의 무궁함을 볼 수 있고, 날로 집희(緝煕 계속ㆍ광명(光明)의 뜻)의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성인(聖人)이 되기를 구하실 뜻이 있다면, 글을 읽는데 반드시 그 뜻을 구하고, 실천을 하는데 반드시 그 법칙을 따르며, 천리(天理)는 반드시 완전히 다 회복하고 사(私)는 반드시 다 씻어 버려야만 생민(生民)들이 저절로 모두 제자리를 얻게 되어 만세에 성인이라 일컬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하자, 공이 가장 중요한 것을 뽑아 조목별로 나열해서 시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조신(朝臣)들의 붕당(朋黨)을 의심하므로, 공이 마음을 침착하게 갖고 이치를 살필 것을 청했다. 또 영아(嬰兒)를 정역(定役 새로 노비(奴婢)가 된 사람에게 매기던 구실)하는 데 있어 양녀(良女)가 낳은 아이를 사노(私奴)로 만드는 잘못된 점을 논하였다. 또한 집에 정역자(定役者)가 3인일 경우 나머지는 다시 정하지 말 것, 중[僧]이 된 자에게는 쌀 3석(石)을 바치도록 할 것, 위로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 역(役)이 없는 서얼(庶孽)에 이르기까지 모두 베[布] 1필(匹)씩을 내게 해서 군대를 양성하는 자본으로 삼을 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모두 시의(時宜)를 헤아려서 그대로 시행하려 했던 것이다.
관학(館學)에서 또 양현(兩賢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자, 이상진(李象震)ㆍ유직(柳㮨) 등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말이 매우 추하고 어긋났는데, 관학의 유생들은 상이 자신의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가 여겨 모두 학당(學堂)을 비우고 나가 버리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이(李珥)는 천품의 고매함과 학문의 바름과 식견의 뛰어남과 덕행의 순수함이 진정 백세의 사표라 이를 만하며, 성혼(成渾)은 인품이 단엄(端嚴) 장중(莊重)하고 출처(出處)와 행사(行事)에 있어 모두 고현(古賢)의 법도를 준행하였으니, 진실로 유자(儒者)의 뛰어난 행적이므로 이 두 신하의 문묘 종사는 실로 바꿀 수 없는 논의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현(聖賢)이 태어날 때는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氣)를 부여받는 법입니다. 공맹(孔孟) 이후로는 천 수백 년을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ㆍ주자(朱子)가 났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본조(本朝)에 이르러서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이 성현을 학문으로 삼아 혹은 나가서 큰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물러나서 심신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뒤를 이은 사람은 실로 이이와 성혼입니다. 지금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온 나라가 다 같은데, 다만 선정(先正)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의 당류(黨類)의 자손이 나와서 헐뜯고 있습니다. 그중에도 유직(柳㮨)의 상소는 속임이 심합니다. 이황이 이이를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고, 권장하여 허여(許與)하였음은 그의 문집(文集)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데도, 유직은 매우 미워했다고 하였고, 이이의 학문이 육씨(陸氏 육구연(陸九淵)을 가리킴)와는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데 유직은 육씨에게서 나온 학문이라 하였으며, 이황이 학문을 논하면서 이이의 설(說)을 많이 따랐던 것은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중용(中庸) 소주(小註)》에서 볼 수 있는데, 유직은 털끝만큼도 계합(契合)된 것이 없었다 하였고,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혼자서 이황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었는데도 유직은 이이가 이황을 여지없이 공척(攻斥)했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의 소(疏)에는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으뜸가는 요점으로 삼았는데도, 유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였고, 성혼이 신심(身心)을 수습하고 정신(精神)을 보석(保惜)한다는 주자(朱子)의 설을 인용한 데 대해서는, 유직이 도가류(道家流)라 하였으며, 또 이이가 논한 사단(四端)ㆍ칠정(七情)이 이황과 다르다고 헐뜯었습니다. 대저 맹자(孟子)가 말한 사단은 특별히 정(情)의 선(善)한 일변(一邊)만을 든 것이요, 《예기(禮記)》에서 말한 칠정은 바로 선악(善惡)의 총칭입니다. 이황의 사칠 상대론(四七相對論)이 비록 권근(權近)의 구설(舊說 《입학도설(入學圖說)》을 가리킴)에 인한 것이긴 하나, 조감(照勘)에 실수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이이가 일찍이 ‘대저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公)이므로 만일 의심점을 쌓아 두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치가 끝내 어두워서 밝지 못할 것이다.’고 변론했습니다. 정자(程子)가 《역전(易傳 《주역》의 전(傳))》에다 일생의 정력을 기울였는데도, 주자가 그 착오된 곳을 지적한 것이 매우 많으므로, 요로(饒魯)ㆍ진력(陳櫟)은 심지어 ‘주자의 뛰어난 재주를 원치 않는다.’고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臣)은 보건대, 이이의 식견의 초매(超邁)함과 언론의 정당(精當)함은 백세 이후에도 의혹됨이 없으리라고 여깁니다.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었다.[理通氣局]’는 구절의 경우는 선현(先賢)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이이가 발명한 것인데, 유직은 곧 그의 학문은 이(理)와 기(氣)를 일물(一物)로 여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언(誣言)이 아니겠습니까. 사설(邪說)이 제멋대로 횡행(橫行)하면 그 화가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관학의 유생들이 학당을 비우고 나갈 경우에는 열성(列聖)들이 반드시 그들을 선유(宣諭)하여 돌아오도록 하였으니,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도 이렇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들의 망언(妄言)을 노하여 선유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우답(優答)하였다. 함경도(咸鏡道) 유생이 양현(兩賢)을 위해 상소(上疏)하여 엄지(嚴旨)가 있었는데, 유직(柳㮨)이 벌(罰)을 받은 데 대해 영남(嶺南) 유생이 불만을 품고 과장(科場)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므로, 공이 아뢰기를,
“북쪽 땅은 비록 궁벽한 고을이지만, 인간의 본성(本性)이 사람마다 골고루 품부받은 바이기에, 지금 양신(兩臣 이이와 성혼)의 도덕(道德)을 사모하여 서로 이끌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영남 유생은 유직이 진정 정당한 도리로써 벌을 받았다고 여긴다면 제 스스로 과장(科場)에 나오지 않는 것이 옳거니와 지금 떼를 지어 과장에 몰려와서 공공연히 난동을 부려 정도를 어지럽혔으니, 이른바 ‘요군(要君 세력을 믿고 임금에게 범하여 제 욕망을 요구함)하는 자는 군상(君上)을 모멸하는 짓이다.’는 것입니다.”
하니, 언짢아하는 어비(御批)가 있었다. 공이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더욱 강력히 청하자, 마침내 체직을 명하였다. 상이 공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재차 사관(史官)을 보내어 힘써 만류하였으나, 공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고, 또 어떤 일로 중추부(中樞府)의 산직(散職)이 삭직되었으나 상은 공을 생각하는 마음 그지없었다.
계사년에 공의 아들 복양(復陽)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를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공의 기거(起居)를 묻고 이어 교지를 내려 공을 유고(諭告)하게 하니, 공이 유고를 받고 상소하여 사례하였다. 갑오년에 도성(都城)에 큰물이 졌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기를,
“송(宋) 나라 선화(宣和 휘종(徽宗)의 연호) 연간에 변경(汴京)에 큰물이 지자, 이강(李綱)이 ‘이적(夷狄)과의 전쟁이 있을 상(象)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정강(靖康)의 변(變 송 흠종(宋欽宗)이 금 태종(金太宗)에게 잡혀간 변)이 있었고, 요즘 병자년에 본조(本朝) 또한 그러했는데 지금 이 수재(水災)는 병자년보다 심하니, 만일 다시 지난날과 같은 환(患)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맹자(孟子)가 등문공(滕文公)에게 ‘군(君)께서 저 강한 제(齊) 나라를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선(善)을 할 뿐입니다.’고 했습니다. 그 힘쓰는 방법은, 무릇 이제(二帝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의 군신(君臣)이 논한 것과 공맹(孔孟)의 말이 모두 방책(方冊)에 실려 있으니, 오직 성심껏 믿고 따라 힘써 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우악(優渥)하게 보답하였다. 그후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을 시켜 나의 뜻을 조상(趙相 조익을 가리킴)에게 유고(諭告)하도록 하였는데도 조상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다시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공은 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을미년 2월에 병이 들자, 상이 재차 의원(醫員)과 약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했다. 병이 아직 위독해지기 전에 공이 억지로 일어나 관디를 차리고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고 3월 10일에 별세하니, 나이가 77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고 조회(朝會)를 파하였으며, 조위(吊慰)와 부의(賻儀)를 의식대로 하였고, 왕세자(王世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해 6월 계해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손좌(巽坐)에 장사 지냈다.
공은 총명이 뛰어났고 덕성(德性)이 천연 그대로 순수하고 혼후(渾厚)하였으며, 마음이 안한하고 통철(洞徹)하여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ㆍ서일(瑞日)과 같았다.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길 때는 성경(誠敬)을 다하였는데, 첨추공(僉樞公)이 편찮았을 때는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앉거나 눕거나 변(便)을 볼 때도 모두 친히 붙들어 모시었다. 상(喪)을 당했을 때는 공의 나이 70세였는데도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최질(衰絰 상복(喪服)과 수질(首絰)ㆍ요질(腰絰))을 벗지 않고 하루같이 밤낮 호곡(號哭)하였으므로, 침석(枕席)이 모두 젖었다. 삼년상을 마친 후에도 외침(外寢)에서 거처하였고, 선부인(先夫人)을 천장(遷葬)할 때도 애통해함이 상(喪)을 당한 때와 다름이 없었다.
공은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으나, 어버이의 경계로 인하여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고, 부모가 즐기던 음식은 종신토록 차마 먹지 않았으며, 혹 거기에 언급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곤 하였고, 매년 생일(生日)이나 상여(喪餘 상을 당하던 날을 가리킴)를 만날 때마다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제사 때는 아무리 추운 계절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는데, 연로(年老)해서도 그러하였다.
친구의 상에도 수일 동안 소식(素食)하였고, 심지어 천한 복례(僕隷)가 죽었을 때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항상 정자(程子)의 ‘생명을 잊고 욕심을 따른다.[忘生徇欲]’는 말을 지극한 경계로 삼아, 아무리 화려한 주악(酒樂)의 자리가 있다 할지라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다. 의복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고, 밥은 좋은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들지 않았다. 벼슬한 지 50년 동안에 전택(田宅)을 조금도 보탠 것이 없었고, 흉년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평소의 음식보다 더 소박하게 들었으며, 혹은 죽(粥)을 들기도 하면서 말하기를,
“사람마다 굶주리는 때에 내가 무슨 마음으로 좋은 음식을 들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공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至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공이 수재(秀才)에 뽑히면서부터 이미 경제(經濟)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군사를 기르고, 과거법(科擧法)을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았으며, 옛 제도를 고증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상에게 극론(極論)하는 데 간절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인조대왕이 공의 학술(學術)과 충성을 알고서 깊이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으나, 당국(當國)의 제신(諸臣)들에게 원대한 계책이 없었던 탓으로 공의 모든 건의(建議)가 대부분 저지되었고, 효종 초기에 이르러서도 미처 시행될 겨를이 없었다. 공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오직 경(經)을 통하고 이치를 궁구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이 제일이요, 그 다음은 어진 이를 임용(任用)함이요, 그 다음은 법도를 닦을 뿐이다.”
하였다.
공은 종족(宗族)을 매우 아끼어, 거두어 구휼하는 데 빠짐없었고,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는 매우 엄격하여 과실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는 일이 없었으며, 대인(待人) 관계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화평스러웠으므로, 사람마다 심취(心醉)되어 복종하였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엄중한 말로 단호히 배척하였고,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사도(斯道)를 호위하여 꿋꿋이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득실(得失)과 영욕(榮辱)에 대하여는 조금도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 진퇴(進退)와 출처(出處)의 정당함은 누구도 지적하여 비난할 이가 없었다.
공이 젊었을 적에 장공 유(張公維)ㆍ최공 명길(崔公鳴吉)ㆍ이공 시백(李公時白)과 가장 좋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사우(四友)라 일컬었고, 정분은 서로 매우 두터웠으나 언론과 심사(心事)에 있어서는 반드시 다 같지만은 않았다. 또 청음(淸陰) 김공(金公)과는 서로 매우 지극히 경애(敬愛)하였으나, 매양 일을 논할 때는 구차하게 뜻을 맞추지 않았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과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韓公 한준겸(韓浚謙))은 나이가 비록 공보다 매우 높았으나, 특별히 서로 친애(親愛)하며 지기(知己)라 하였다. 완평이 항상 말하기를,
“조모(趙某)는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성현(聖賢)을 배우려면 사서(四書)가 아니고는 될 수 없다.”
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 이후로 군유(羣儒)를 집대성한 이는 주자(朱子)이니, 그 공(功)이 맹자(孟子)보다 많다.”
하였다. 매양 지경(持敬 공경을 가지는 것)과 존심(存心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일생의 근본 공부로 삼고서 항상 말하기를,
“공경을 지니는 데는, 마음을 거두어 꼭 붙잡아 보존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고 정신이 침착하여 안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효험으로 삼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다만 사욕을 모두 버리고 천리(天理)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를 요하며, 다만 광명(光明)하고 쇄락(灑落)하여 천지 귀신(天地鬼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요하며, 다만 천하의 일을 담당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을 참찬(參贊)하는 사람이 되기를 요하는데, 그 근본은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 보존될 때는 신명(神明)이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치가 혼연히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때는 비록 성현의 마음이라도 이와 같을 뿐인데, 다만 성현은 이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지만, 배우는 이들은 그리 못한 것뿐이다.”
하였다. 공은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한 다음, 서실(書室)에 물러 나와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다. 매양 진대(進對)가 있을 때는 미리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결백하게 하고 공경히 하였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을 때는 명을 받들어 기도하면 반드시 당장에 응험이 있었다.
문장(文章)을 하는 데는 사리(辭理)가 통달함을 취할 뿐이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는데,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도 의미가 도도하여 무궁하였다.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매양 말하기를,
“그의 의리(義理)에 관한 문(文)은 우리들이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문집(文集) 15권이 있고, 그 나머지 저술 수십 책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혹은 간행(刊行)한 것도 있다. 공이 일찍이 애써서 체득한 《서경천설(書經淺說)》 수편(數篇)을 상소할 때마다 상에게 올리곤 하여, 양조(兩朝 인조와 효종)에서 모두 총장(寵奬)을 내렸다.
조씨(趙氏)는 처음 풍양(豊壤)에서 나왔는데, 휘(諱) 맹(孟)은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도와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록, 평장사(平章事)가 되었고 그후로도 사대부(士大夫)가 끊이지 않았다. 증조(曾祖)는 절도사(節度使) 휘 안국(安國)이요, 조(祖)는 도사(都事) 휘 간(侃)인데, 첨추공(僉樞公)까지 3세(世)는 공의 귀(貴)로 모두 대관(大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윤씨(尹氏)로 현감(縣監) 춘수(春壽)의 딸이요, 공의 배(配)는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부덕을 잘 갖추었는데, 참판(參判)에 추증된 덕량(德良)의 딸이요, 고려의 명신(名臣)인 덕수(德秀)의 후손으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가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몽양(夢陽)은 현감(縣監), 진양(進陽)은 군수(郡守), 복양(復陽)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生員)에 장원하였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胄)에게 시집갔다.
몽양의 아들 지강(持剛)은 현령(縣令)이고, 진양의 아들은 지한(持韓)이다. 복양의 아들은 지형(持衡)ㆍ지성(持成)ㆍ지겸(持謙)ㆍ지원(持元)인데 지겸은 일찍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내양의 아들 지헌(持憲)은 정랑(正郞)이고 현양의 아들 지항(持恒)은 부사(府使), 지정(持正)은 군수이다.
내가 그윽이 생각건대, 옛날에 이른바 도학(道學)은 반드시 마음에 얻은 것을 몸소 실천하여 정사(政事)에 미루어 나갔기 때문에 천하가 분열되지 않고 정치가 한군데서 나왔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쇠미해지자, 이치와 사물이 둘로 나누어지고 본말(本末)이 서로 어긋나서 이른바 도(道)가 항상 천하의 무용지물로 되었으니, 진정 경계할 일이다. 오직 공은 본실(本實)을 힘쓰고 허원(虛遠)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그로 인해 뿌리가 무성하여 열매가 영글고 광택이 났으므로, 집에 있을 때나 나라에 있을 때 모두가 스승으로 본받을 만하였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늦게야 공의 문하에 들어가 마음으로 좋아하고 진정으로 복종하여 항상 공을 매우 칭송하였다. 세상에서 혹 공의 저술(著述)이 주자(朱子)와 다름이 있지 않는가 의심한 이가 있자, 동춘이 공의 말을 외면서 말하기를,
“‘주자는 바로 공자 이후의 일인자이다.’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성의(誠意)를 논한 것으로 말하자면, 비록 《대학》의 장구(章句)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나, 실상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설을 사용하였으니, 역시 주자의 뜻이다.”
하였다. 아, 공의 학술을 알려면 어찌 여기에서 보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옛 현인들은 / 相古先民
학문으로 몸을 닦아 / 學以爲己
스스로 넉넉한 나머지 / 自足之餘
그를 세상에 운용했는데 / 惟用之致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서 / 後世不然
장구와 문사만 숭상하여 / 章句文辭
끝내 쓸모가 없어 / 終於無用
속인의 비웃음만 되었건만 / 俗人攸嗤
아 오직 포로만은 / 嗟惟浦老
스스로 스승을 얻었으니 / 能自得師
그 스승이 누구인가 / 其師惟何
성현의 글이었네 / 聖賢之書
깊이 생각하고 애써 연구하되 / 潛思力究
치밀하지도 소략하지도 않아 / 不密不踈
그 진실됨을 이행하고 / 乃踐其實
그 몸을 성실히 하였네 / 乃誠其身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으니 / 事親克孝
증자와 민자건의 이웃이요 / 曾閔之隣
효도를 임금에게 옮기어 / 移以事君
어려운 일 책망하는 것으로 길을 삼았네 / 責難爲程
제나 왕은 / 曰帝曰王
오직 임금이 행할 바이고 / 惟君所行
경륜의 계책은 / 經綸之策
한 아니면 당으로써 / 非漢唐規
성심껏 백성을 보호하여 / 誠心保民
지치의 터전 이루었네 / 至治之基
사람들은 오활하다 하나 / 人以爲迂
실상은 더없이 요긴한 것이었고 / 實莫與要
상담이요 사법이라 하나 / 常談死法
진정 생기 있고 절묘하였네 / 寔活寔妙
비록 이것이 먼 옛날의 / 雖是邃古
전이요 모일지라도 / 雖典雖謨
진실로 그 도를 구하자면 / 苟求其道
이를 두고 어디서 구하랴 / 捨此何求
그러므로 맹자(孟子)의 말도 / 故鄒聖言
이로써 방법을 삼았는데 / 以斯爲猷
공의 학문이 / 惟公所學
오직 여기에 전일하여 / 惟一於是
삼공(三公) 지위에 있으면서 / 旣處三事
거의 다 시험하였네 / 庶幾其試
마침 사문이 / 適値斯文
사설에 압박당한 때를 만나 / 戹於邪說
이리 막고 저리 거절하여 / 是閑是距
끝내 사설을 넘어뜨렸네 / 終以顚蹶
그의 진퇴는 / 其進與退
도와 함께 소식하여 / 與道消息
내 호수 맑고 / 我湖空明
내 농사 풍성하니 / 我稼豊殖
한가로이 노닐세 / 優哉游哉
호연히 부끄럼 없고 / 浩然無怍
그 도가 더욱 빛나 / 其道愈光
태산북두와 같았다가 / 如斗如嶽
끝내 명을 마치니 / 卒以殉身
그 누가 천명이 아니라 할까 / 孰云非天
임금이 애도하고 / 宸情惻愴
사람들이 눈물 흘렸네 / 士林洏漣
오직 이 한 구묘(丘墓)에 / 惟玆一丘
백세토록 경례(敬禮)할 바라 / 百世攸軾
내가 이 비석에 명하여 / 我銘斯碑
무궁한 만세에 보이노라 / 以示無極


 

[주D-001]폐세자(廢世子) …… 사건 : 폐세자는 곧 광해군(光海君)의 아들로, 광해군 2년(1610)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인조 1년(1623)에 폐위되었다. 그를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켜 놓았는데, 몰래 땅굴을 파고 도망쳤다가 잡혔다.
[주D-002]관저(關雎)와 …… 뜻 : 관저ㆍ인지는 모두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관저는 문왕(文王)과 그 후비(后妃)의 성덕(盛德)을 읊은 시이므로, 금슬 좋은 임금의 덕이 아랫사람에게 미침을 말한 것이고, 인지 역시 문왕의 후비의 덕이 자손 종족(子孫宗族)까지 선화(善化)한 것을 칭송한 시이므로, 왕후의 덕을 기리는 말이다.
[주D-003]월불(越紼)의 행사 : 옛날 왕실(王室)에서, 천지 사직(天地社稷)은 그 품계가 산천(山川)보다 높기 때문에 왕(王)이나 후(后)의 상(喪)이 끝나기 이전이라도 상례를 넘어서, 여기에 제사 지낼 수 있다는 뜻. 《禮記 王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