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포저(浦渚) 조공(趙公) 신도비명

포저 조익 선생은 풍양현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2. 28. 21:33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남록에는 풍향조씨 묘역이 있다
 포조조익 선생은 조선조 영의정이신  명곡공과  친분이 있으신 분이다









포저집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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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기(陰記) 2수(二首)
시조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대한 묘비(墓碑)의 음기



동방에 있는 조씨(趙氏) 중에서는 오직 우리 풍양(豐壤)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른 곳의 조씨들은 모두 뒤에 나왔으며, 자손이 번성한 것 역시 풍양만 한 곳이 없다.
생각건대 우리 시조는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평정함으로써 벽상개국(壁上開國)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고 작위는 삼중대광에 이르렀으며 지위는 재상(宰相)에 올랐으니, 우리 동방에 큰 훈덕(勳德)을 끼쳤다고 하겠다. 대개 시조가 처음에 전원(田園)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 마치 여상(呂尙)이 주 문왕(周文王)을 만난 고사와 같았다고 말하는데, 세대의 거리가 멀고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그 사적(事蹟)이 널리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추의 유감이라고 할 것이다.
보첩(譜牒) 역시 빠진 곳이 있어서 불완전하다. 지금 전하는 보첩은 바로 분실하고 난 나머지를 거두어 모은 것이다. 여기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시조 뒤에 바로 천화사 전직(天和寺殿直) 휘(諱) 지란(之藺)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해설을 보면 23대손이라고 하고 혹은 13대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직이 고려 어느 왕의 시대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조와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그 이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도시 알 길이 없다.
석간(石磵)이 지은 자신의 묘지(墓誌)를 보면 고려 태조의 신(臣) 평장사(平章事) 모(某)의 30대손이라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보첩이 있어서 대수(代數)를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석간의 휘는 운흘(云仡)인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그는 고려 말의 혼란한 세상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칭송하며 흠모하는 분이다.
고려 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관(朝官)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지금 조정에 있는 이들이 비록 많지 않다고는 하나 다른 곳의 조씨들과 비교하면 실로 몇 배나 되며, 산직(散職)에 있거나 외방(外方)에 나가 있는 자들이 또 매우 많다. 그리고 외손들의 경우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알고 있는 자들만 하더라도 거의 반은 조신(朝紳)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현달한 자들이 또 많은데 간신(姦臣)이나 난신(亂臣)의 이름을 얻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조선(祖先)의 순후(醇厚)한 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우리 선조가 성인(聖人)을 협찬(協贊)하여 난세(亂世)를 구제하고 태평 시대를 열어 준 그 공덕이 만세토록 이어질 것이니, 그 자손이 끝없이 번성할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과거 선묘(宣廟)의 조정 때에 공빈(恭嬪) 김씨(金氏)를 선조의 묘소 뒤에 장례 지냈는데, 김씨는 실로 선조의 외손이었다. 그리고 선묘 역시 조맹(趙孟)은 나에게 외조가 된다고 말하고는 선조의 묘소를 봉분(封墳)한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김씨를 위해서 산지(山地)를 고를 적에 그 지역에 사는 후손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응당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그날 과연 징험이 되었다고 한다.
광해(光海) 때에 이르러 공빈을 추존(追尊)하여 그 묘소를 능(陵)으로 승격시키면서 시조 묘소의 봉분이 헐려서 평평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 그 능호(陵號)가 없어졌으므로 제손(諸孫)이 서로 더불어 위에 글을 올려 그 봉분을 원상대로 회복시키고는 비석을 세워서 그 시말(始末)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먼 후손들로서 우리 시조보다 거의 천 년 뒤에 태어나 마침 구묘(丘墓)가 헐리는 재액을 당하였으나, 힘을 모아 노력한 결과 앞으로 영원히 전해질 수 있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명단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기에, 마침내 비문(碑文)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비문의 뒷면에 새기는 한편, 후손 약간 명의 이름을 말미에 기록하였으며, 외손 중에서도 분묘 공사 때에 힘을 보탠 약간 명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게 되었다.

[주D-001]여상(呂尙)이 …… 고사 : 여상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태공망(太公望) 혹은 강 태공(姜太公)이라고도 한다. 위수(渭水) 가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포저 선생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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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도
포저 선생 세계도(浦渚先生世系之圖)

포저 선생 세계도

시조(始祖) 맹(孟) - 조씨(趙氏)의 세계(世系)는 한양(漢陽)의 풍양현(豐壤縣)에서 비롯된다. 공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통합삼한 벽상 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으며, 관직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묘소는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다. 광해(光海)가 성릉(成陵)을 추봉(追封)할 적에 분묘가 평평하게 되었다가 능호(陵號)가 취소되면서 원상 복구되었다. 외족(外族)의 후손인 장공 유(張公維)가 묘비(墓碑)의 글을 지었고, 선생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1세(世) 신혁(臣赫) -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상호군(上護軍)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〇 공의 위로 누대(累代)의 보첩(譜牒)을 잃어서 세계와 명자(名字)를 모두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으므로 세수(世數)를 공으로부터 시작한다.
2세 천옥(天玉) - 봉상대부(奉常大夫)로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에 이르렀다. 〇 홍무(洪武) 10년(1377, 우왕〈禑王〉 3)에 원수 부사(元帥副使)의 신분으로 서해(西海)에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
3세 우(玗) - 아조(我朝)에 들어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 되었다. 〇 부인은 양성 이씨(陽城李氏)이니, 공주 목사(公州牧使) 조(操)의 딸이다.
4세 계팽(季砰) - 세종조(世宗朝) 선덕(宣德) 10년 을묘년(1435, 세종 17)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세조조(世祖朝)에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다. 묘소는 남양부(南陽府) 수작리(壽作里)에 있다. 〇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이니, 감찰(監察) 극복(克福)의 딸이다.
5세 지진(之縝) -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남양에 있다. 〇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니, 호조 판서 이한(而漢)의 딸이다.
6세 현범(賢範)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廣州) 북방리(北坊里) 직동(直洞)에 있다. 〇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니, 파성군(坡城君) 찬(贊)의 딸이요, 좌참찬(左參贊)으로 좌의정에 추증된 공간공(恭簡公) 형(炯)의 손녀이다.
7세 안국(安國) -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다. 승지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쳤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에 있는데 위치는 위와 같다. 〇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첨사(僉使) 집(輯)의 딸이요,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세임(世任)의 딸이다.
8세 간(侃) -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에 있는데 위치는 위와 같다. 〇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감(縣監) 규(奎)의 딸이요, 상주 김씨(尙州金氏)는 사평(司評) 발(潑)의 딸이다.
동지공(同知公) 이하 3세에는 선생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9세 영중(瑩中) - 자는 군수(君粹)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대흥군(大興郡) 백석촌(白石村)에 있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 김상헌〈金尙憲〉)이 묘갈(墓碣)을 지었다. 〇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받았는데, 현감으로 좌참찬에 추증된 춘수(春壽)의 딸이요, 해징부원군(海澄府院君)에 추증된 변(忭)의 손녀이다.
10세 익(翼) - 바로 선생이니, 선생에 대한 내용은 연보와 행장에 상세히 보인다.
11세 몽양(夢陽) - 자는 헌길(獻吉)이요, 관직은 현감이다.
11세 진양(進陽) - 자는 여명(汝明)이요, 관직은 군수(郡守)이다.
11세 복양(復陽) - 자는 중초(仲初)요, 호는 송곡(松谷)이다.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11세 내양(來陽) - 자는 장길(長吉)이다. 진사(進士)로 일찍 죽었다. 선생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다.
11세 현양(顯陽) - 자는 경명(景明)이다.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선생이 지은 묘지가 있다.
12세 지강(持綱) - 관직은 현령(縣令)이다.
12세 지한(持韓)
12세 지형(持衡)
12세 지성(持成)
12세 지겸(持謙) - 부제학(副提學)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였다.
12세 지원(持元)
12세 지헌(持憲) - 관직은 정랑(正郞)이다.
12세 지항(持恒) - 관직은 목사(牧使)이다.
12세 지정(持正) - 관직은 목사이다.
13세 명우(命祐)
13세 명적(命迪) - 진사(進士)이다.
13세 명덕(命德)
13세 명흥(命興) - 관직은 군수이다.
13세 명정(命禎) - 관직은 군수이다.
13세 명인(命仁) 
13세 명형(命亨) 
13세 명정(命禎) - 지겸(持謙)의 후사로 나갔다.
13세 명재(命才)
13세 명휘(命徽) - 관직은 현감이다.
13세 명원(命遠) - 지정(持正)의 후사(後嗣)로 나갔다.
13세 명원(命遠)
14세 한종(漢宗)
14세 한규(漢規)
14세 한사(漢師) - 생원이다.
14세 한모(漢模)
14세 한유(漢儒) - 명흥(命興)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정(漢鼎)
14세 한좌(漢佐)
14세 한보(漢輔) - 전임 판관(判官)이다.
14세 한유(漢儒)
14세 한보(漢輔) - 명덕(命德)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필(漢弼) - 지금 직장(直長)이다.
14세 한위(漢緯) - 대사간(大司諫)이다.
14세 한숙(漢淑) - 생원이다.
14세 한숙(漢淑) - 명형(命亨)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철(漢哲) - 생원이다.
14세 한덕(漢德)
14세 한일(漢逸)
14세 한길(漢吉)
14세 한종(漢宗) - 명우(命祐)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명(漢明)
14세 한장(漢章)
14세 한경(漢慶) 

[주C-001]포저 선생 세계도 : 본 세계도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도표화하고 원문의 소주(小註)는 별도로 번역하여 뒤에 첨부하였다. 단 출계한 사실은 도표에도 반영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D-001]광해(光海)가 …… 복구되었다 :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金氏)가 1577년(선조 10)에 죽자 조맹(趙孟)의 무덤 뒤로 30보쯤 되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 뒤 1610년(광해군 2)에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고 그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칭하면서 조맹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에 그 휘호(徽號)가 취소되면서 원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내용은 《포저집(浦渚集)》 권3 ‘시조의 분묘를 복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 소〔請復始祖墳疏〕’에 자세히 나온다.

 
포저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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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송별(送別) 25수


봄이 다한 시절에 남쪽으로 돌아가던 날 정평(定平)의 부백(府伯)과 작별하며 남긴 시
하늘 끝에서 두 번째 본 정주의 봄빛 / 天涯再見定州春
영각과 우헌으로 우연히 이웃이 되었소 / 鈴閣郵軒偶是鄰
한 동이 술로 떠나고 남고 헤어지는 오늘 / 今日去留樽酒別
낙화도 인간의 이별을 애석하게 여기는 듯 / 落花還似惜離人

덕원(德源)의 윤 명부(尹明府)와 작별하며 남긴 시
청산은 저물려 하고 강물은 동으로 흐르고 / 靑山欲暮水東流
남쪽 객 돌아갈 생각하니 앞길이 유유해라 / 南客懷歸道路悠
온종일 이별의 술자리 그래도 헤어지기 싫어 / 盡日離筵猶惜別
다시 머물러 앉았나니 산부용꽃 그늘 아래 / 刺桐花下更淹留

함흥(咸興)에서 조인보(趙仁甫) 정호(廷虎) 와 작별하고 돌아오다가 초원(草原)에 도착해서 짓다.
산하에 봄빛이 다해서 나그네 심정 쫓기는데 / 關河春盡客情催
게다가 이별을 하려니 바다 모퉁이 더 느꺼워 / 又別心知碧海隈
말들도 갈기 나부끼며 각자 남쪽 북쪽으로 / 征馬翩翩各南北
옛 성으로 해 저물녘에 혼자 돌아왔다오 / 古城殘日獨歸來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가는 승려 성은(聖隱)을 보내며
맑은 가을 병도 많아 사립문도 닫은 채 / 淸秋多病掩柴扉
세상일 마음 아파 혼자 눈물 흘리는 몸 / 世事傷心涕獨揮
부러워라 매인 바 없는 우리 산승이여 / 却羨山僧無所累
남쪽 북쪽 어디고 훌쩍 잘도 오고 가네 / 飄然南北好來歸

서장관(書狀官) 윤장경(尹張卿) 홍국(弘國) 을 전송한 시 2수
봄에도 추운 강마을에 눈발이 막 그친 때 / 春寒水國雪初晴
들었나니 서쪽으로 그대가 옥경에 가신다고 / 聞子西征向玉京
요동 그리고 연경까지 천리 만리 길 / 遼塞燕山千萬里
가련타 병 많은 몸 어떻게 가시려나 / 可憐多病若爲行

그대와 헤어진 뒤로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 悠悠離別閱年華
더구나 그대의 이번 걸음 만리나 멀고 머니 / 况是君行萬里賖
봉서를 보며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 이 한밤 / 中夜封書愁不寐
눈보라 치는 창문가에 불똥만 자꾸 떨어지오 / 一窓風雪落燈花

김생 거원(金生巨源)을 전송하며
한밤의 술자리 얼근해라 몇 순배나 돌았는고 / 夜酌醺醺度幾巡
만났다 바로 이별이라니 우리 모두의 슬픔일세 / 乍逢旋別共悲辛
가련하도다 내일이면 남포의 길에 / 明日可憐南浦路
산 넘고 물 건너 돌아가는 한 사람 / 千山萬水一歸人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강 판교(姜判校) 홍중(弘重) 를 전송하며
훼복이 바야흐로 왕에게 귀의했고 보면 / 卉服方來王
동인을 오랑캐에게도 적용해 줘야 할 터 / 同仁及遠夷
교린 정책은 옛 법도를 따라야 하겠지만 / 交鄰遵古道
사명을 받든 신하는 현안을 중시해야겠지 / 奉使重當時
나그네 가는 길은 저 멀리 해 뜨는 곳 / 客路扶桑逈
이별하는 정자에는 슬프게 지는 낙엽 / 離亭落木悲
채찍 휘둘러 떠나면서 돌아보지도 않으니 / 揮鞭去不顧
알겠도다 그대야말로 사내대장부라는 것을 / 知子是男兒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 지평(辛持平) 계영(啓榮) 을 전송하며
탄핵문 작성하는 일을 잠시 멈추시고 / 暫輟彈文草
왕명을 받든 사신의 배에 오르셨도다 / 還乘奉使船
나그네 가는 길은 오로지 해 뜨는 방향으로 / 客程唯指日
검푸른 파도는 넘실넘실 저 멀리 하늘까지 / 溟漲遠浮天
충성과 신의로 고래 등 파도를 굴복시키고 / 忠信鯨波伏
뛰어난 재명을 섬 오랑캐에게 전하시리라 / 才華卉服傳
이제는 알겠도다 역사책의 기록 속에 / 從知史氏記
장건만 그 명성을 독점하지 않을 줄을 / 不獨美張騫

임천(林川)에 부임하는 이자시(李子時) 민구(敏求) 를 전송하며
사원에 일찍이 동시에 선발됐고 / 詞苑曾同選
중서성에서 숙직도 함께한 사이 / 中書共直廬
함께 노니는 즐거움이 싫지 않았으니 / 並遊懽不厭
이별을 한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리요 / 恨別意何如
바다 위엔 저녁나절 차가운 구름이요 / 海上寒雲夕
강변의 성읍엔 낙엽이 처음 지는 때 / 江城落葉初
아득히 하늘 끝에서 서로 생각하리니 / 相思渺天末
전하는 소식도 응당 뜸하지 않으리라 / 音信未應踈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하러 나가는 이자시를 전송하며
삼십 세에 신라 땅 칠십 고을의 안찰사 / 三十才名七十州
지금의 방백은 옛날의 제후가 아니겠소 / 卽今方伯古諸侯
청명한 계책 독점하며 사대부 압도하시더니 / 淸猷早擅簪紳右
이젠 산하의 구석까지 혜택을 멀리 펴시누나 / 惠澤遙宣嶺海陬
한수 북쪽 연화 속에 송별 자리 열렸소만 / 漢北煙花開祖席
낙수 동쪽 운수에선 감사님 영접을 나오리다 / 洛東雲樹引鳴騶
남쪽 백성 기갈 들린 듯 기대하고 있을 테니 / 南人想望如飢渴
어서 깃발 나부끼며 조금도 멈추지 마오시라 / 征旆翩翩莫少留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임 첨지(任僉知) 광(絖) 를 전송하며
아득하여라 아침 해가 뜨는 구역 / 杳杳扶桑域
망망하여라 바다 건너 후미진 곳 / 茫茫積水隈
무기를 쓰던 것은 지난날의 일이요 / 干戈往歲事
문치의 덕을 펼칠 때가 이제 왔도다 / 文德此時來
부절을 세우면 풍파가 잠잠하고 / 建節風波靜
돛배를 띄우면 장무가 개이리라 / 揚帆瘴霧開
남금이 자연히 따라올 줄 알겠노니 / 南金知自至
전대를 잘하는 현재를 얻었으니까 / 專對得賢才


조사(詔使)의 연위사(延慰使)로 나가는 해숭위(海嵩尉)를 전송하며
자봉이 조서 물고 동해의 끝에 날아왔으니 / 紫鳳啣書到海陬
성초가 먼 길 위로하며 영접해야 마땅한 일 / 星軺迎勞道途脩

공주의 저택 동산의 흥취를 잠깐 옮겨서 / 暫移主第林間趣
청천의 성 누대를 멀리 향하게 되었구려 / 遙指淸川城上樓
가는 곳마다 연화가 모두 빼어난 풍경이요 / 隨處煙花皆勝賞
한 강물 섬에선 우수를 씻을 수 있으시리 / 一江島嶼可消憂
서경에서는 연지의 모임을 또 가지시리니 / 西京又作連枝會
빛나는 영광을 지금 누가 더불어 짝하리요 / 榮耀當年孰與儔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민 참판(閔參判)을 전송하며
젊은 나이에 방백으로 명성과 공적 드러내며 / 少年聲績著方州
천리 강산에 은혜의 정사 넉넉하게 펼치신 분 / 千里湖山惠政優
중국에 새로운 황제의 큰 운세가 열린지라 / 中國聖神開泰運
소방이 조하 올리려고 명사를 선발하였도다 / 小邦朝賀簡名流
천위 가까이 은혜 받을 일만 생각날 것이니 / 啣恩但覺天威近
국경 밖 바닷길이 먼 것을 어찌 아랑곳하랴 / 出境寧知海路悠
예부터 우리 동방은 황제의 편애를 받았으니 / 從古吾東偏帝眷
조서가 응당 우리 임금님 대궐에 내려오리라 / 紫泥應降鳳凰樓

관동(關東)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 관찰(李觀察)을 전송하며
예로부터 선경으로 일컬어지는 관동 지방 / 關東自昔號仙區
바닷가에 줄지어 선 옥돌 깎아 세운 산들 / 玉立峯巒列海陬
아 내가 평생토록 꿈속에서 그리던 땅에 / 嘆我平生夢想地
기뻐라 그대가 오늘 깃발 날리며 부임하니 / 喜君今日旆旌遊
시의 소재 제공해 줄 금강산의 가을빛이요 / 金剛秋色供詩料
조각배 띄우기 좋은 경포대의 봄 물결이라 / 鏡浦春波泛小舟
병든 이 몸이 혹시라도 그대의 후임자가 되면 / 瘦病倘從瓜後代
멋진 자취 찾으면서 번뇌를 씻을 수 있으련만 / 會尋遐躅滌煩愁

호서(湖西) 지방을 안찰(按察)하러 가는 윤중소(尹仲素) 이지(履之) 를 전송하며
승상으로 국가를 경륜하는 날이라면 / 丞相經邦日
감사로서 백성의 풍속을 묻는 해로다 / 監司問俗年

충성심과 근실함은 대대로 이은 가풍 / 忠勤家世續
나라 위한 공적은 사신이 전하는 바라 / 事蹟史臣傳
금강의 물결이 누대 앞에 희게 빛나고 / 錦水樓前白
계룡의 산맥이 성곽 밖에 이어지는 곳 / 鷄山郭外連
지친 백성들 멈춰 서서 새 은택 고대하며 / 勞人佇新澤
가는 곳마다 감사님 깃발을 쳐다보리라 / 到處望旌旃

관동(關東) 지방을 안찰하러 가는 윤중소를 전송하며
나는 병들어 철을 넘기며 누웠는데 / 一病經時臥
쌍정은 오늘이 부임하시는 날 / 雙旌此日行
떠나는 길에 나가 전송하지도 못한 채 / 未成臨路送
한갓 석별의 정만 시 한 수로 엮다니요 / 徒結惜離情
농사일도 가을 들어 수월해진 이때 / 民事秋來簡
시내와 산이 해내에 그 이름 자자하니 / 溪山海內名
신선의 구역을 두루 찾아보노라면 / 仙區應遍到
마음과 뼈가 저절로 시원해지리이다 / 心骨自能淸

정원(政院)에서 관서(關西) 지방으로 군대를 사열하러 떠나는 승지 이천장(李天章)을 전송하며
헤어지는 시간이 오래되지는 않겠지만 / 分離雖不久
그래도 작별하려니 절로 가슴이 아프오 / 臨別自傷情
비바람이 남은 더위 거두기는 하였소만 / 風雨收殘暑
산 넘고 물을 건너 또 몇 리나 가실는지 / 關河問幾程
옥새에 임해 나부끼는 대장의 깃발이요 / 吾知繫以纓
금성탕지로 모여들 맹수 같은 장사로다 / 從此胡奴頸
지금부터는 북쪽 변방 오랑캐의 목덜미에 / 貅虎集金城
긴 밧줄을 묶어서 잡아 올 줄을 알겠도다 / 旌旗臨玉塞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동년(同年) 송 참의(宋參議) 극인(克訒) 를 전송하며
생각나네 옛날 금방에 함께 올랐을 때 / 憶昔同金榜
멋진 풍류로 서울 거리를 뒤흔든 일을 / 風流動洛城
어찌하다가 몸이 늙어 쇠한 오늘날에 / 如何衰暮日
황제의 도성으로 떠나보내게 되었는고 / 送此帝京行
구름 사이에 아득히 바라다보일 쌍궐이요 / 雙闕雲間逈
바다 위를 경쾌하게 지나갈 배 한 척이라 / 孤帆海上輕
알고말고 그대가 응대를 훌륭하게 하여 / 知君善應對
우리나라에 기필코 영광을 안겨 줄 것을 / 定作小邦榮

해서(海西) 지방으로 부임하는 권 안사(權按使) 첩(怗) 를 전송하며
생각하면 헤어진 뒤로 해를 넘겼는데 / 念子經年別
나는 지금도 딱하게 병석에 누웠다오 / 嗟吾臥病時
가시는 길에 나가서 전송도 하지 못한 채 / 未能躬祖餞
그저 이렇게 석별의 정만 아쉬워하다니요 / 徒此惜分離
나그네 가는 길은 뜨거운 구름 속에 / 客路炎雲裏
황량한 성곽은 장기 서린 바닷가에 / 荒城瘴海湄
묻고 묻는 나랏일이 급하기만 하니 / 咨詢王事急
달리고 달리는 일을 꺼리지 않으시리 / 應不憚驅馳


이 순천(李順天) 덕수(德洙) 이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하룻밤 향기로운 한 동이 술을 앞에 하고 / 一夜芳樽酒
몇 년 동안 도성 떠나는 심정을 위로하네 / 經年去國心
어버이 영광되게 하는 계책은 이뤘어도 / 榮親計已遂
친구를 이별하는 한은 얼마나 깊으리요 / 別友恨何深
비가 뜸하니 바람이 섬돌에 일어나고 / 雨歇風生砌
밤이 많이 지나니 달이 숲에 숨는구나 / 更多月隱林
서로들 바라보며 이야기가 싫지 않아 / 相看語不厭
성 위에 새벽 구름이 어느새 잠겼어라 / 城上曉雲沈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권 부사(權副使) 계(啓) 를 전송하며
왕의 교화로 지금 천하가 한집안인데 / 王化今無外
오랑캐 먼지가 요동 관문을 가로막았네 / 胡塵阻薊門
의관이 북쪽 황궁에 가서 조회하는 때 / 衣冠朝北闕
옥백이 동쪽 번방에서 나가게 되었도다 / 玉帛出東藩
사신의 길은 검푸른 발해를 건너가고 / 客路通溟渤
고향 생각은 변방 요새를 넘어오리라 / 鄕心度塞垣
은혜로운 조서 받들고 귀국하실 적에 / 佇看恩詔返
봄빛이 평원에 가득함을 보게 되리라 / 春意滿平原

의사(義士) 차군 중철(車君仲轍)이 평양(平壤)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한 시 병서(幷序)
차군 중철은 평양 사람이다. 갑진(甲津)이 무너질 적에 우리 부자(父子)를 적의 칼날 아래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었으니, 나에게는 실로 죽음에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가 있다고 하겠다.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면, 충직하고 성실하며 질박하고 솔직하여 기교를 부리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 독실하였고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켰으며,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이익은 가볍게 여기면서, 남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면 자신의 생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떨쳐 일어나곤 하였는데, 여기에 또 용기와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 넘었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인사라고 하겠다. 그런데 서로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홀연히 천리 밖에서 내방(來訪)을 하였으니, 이 역시 옛사람의 풍도를 지닌 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시에 대해서는 평소에 깊이 공부해 보지 않았고 또 시를 짓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의리에 특별히 감격한 나머지 한 편을 지어서 증정하게 되었는데, 시인들이 이 작품을 보면 비웃을 것이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나 나는 단지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나 자신의 뜻을 읊어 보려고 한 것일 따름이니, 표현하는 솜씨가 좋고 나쁜 것이야 굳이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생각하면 예전에 강도에 있던 날에 / 憶昨江都日
오랑캐 비린내가 갑진에 휘감기자 / 腥羶迷甲津
창졸간에 잔약한 군사를 출동시켜서 / 倉卒出殘兵
강변에다 어수룩하게 늘어놓았고 / 聵聵羅江濱
누선이 위아래를 메우고 있었건만 / 樓船塞上下
고래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 突兀如鯨鱗
연계와 같아서 전진을 하지도 못한 채 / 連鷄不得前
깃발들만 어지럽게 우왕좌왕하였는데 / 旌旆徒紛繽

겨우 사발 크기만 한 적의 작은 배들이 / 小船僅類盤
무인지경을 치달리듯 날쌔게 건너오자 / 飛渡如無人
삽시간에 언덕의 수비가 텅 빈 가운데 / 須臾岸上空
바람과 먼지 따라 와해되고 말았어라 / 瓦解隨風塵
내가 이때 전쟁의 현장을 구경하면서 / 我時觀戰場
민산과 같은 기상으로 홀로 우뚝 서서는 / 獨立氣如岷
장차 뒤꿈치를 돌리지 않겠다 결정하니 / 計將不返踵
기러기 터럭보다 이 몸이 가벼워졌는데 / 鴻毛輕此身

나의 옆에 서 있던 두 아이놈은 / 兩兒在我傍
나의 간곡한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였고 / 悶我語諄諄
그대도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 君亦不忍去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서성거리다가 / 與之同逡巡
급기야 적이 밀어닥쳐 형세가 급해지자 / 奔突勢相逼
나를 잡아끌고서 강변 쪽으로 향했어라 / 牽我趨江漘
흉악한 적들이 제멋대로 치달리는 속에 / 豺虎恣縱橫
시내가 또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아서 / 有溪阻邅屯
막다른 골에 몰려 어디로 갈 지 모른 채 / 途窮無所往
마치 새장 속의 메추리 신세가 되었을 때 / 有若籠中鶉
그대가 물속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와서는 / 游泳挐舟來
이 몸을 싣고 진수를 건너는 듯하였나니 / 載我如涉溱
적에게 쫓길 걱정도 이제는 모두 사라져서 / 追者已不及
문득 멈춰 서고 보니 서쪽 언덕에 있더이다 / 却立止西垠
그 당시에 그대가 만약 없었더라면 / 當時若微君
우리 부자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 父子俱沈淪
만번 죽을 고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 得出萬死中
그때 목숨을 하늘에 기댈 수나 있었으리 / 命豈係蒼旻
장강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에선 / 長江波洶湧
하늘의 힘도 실로 한계가 있었으리이다 / 天實限界畛
대장의 임무를 하중의 인물에 내맡겼으니 / 任用得下中
백만 군사가 있다 한들 어떻게 의지하랴 / 百萬將何因
하루아침에 험한 요새를 제대로 못 지켜서 / 一朝失其險
쌓인 백골이 성벽과 가지런하게 되었는데 / 白骨齊城闉
나에게 일 여의 병력도 있지 않은 상황에서 / 我無一旅衆
의분에 떠는 충성심을 어떻게 펼 수나 있었으랴 / 忠憤何由伸
종사가 함락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며 / 眼看宗社陷
눈물로 공연히 수건만 적실 따름이었어라 / 涕淚空盈巾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요기가 물러가고 / 和成氛氣收
다행히 온 누리에 새로운 광명이 비쳤는데 / 幸見寰宇新
참소하는 입들이 검고 흰 것을 뒤바꿔서 / 讒舌變白黑
자친이 놀라 베틀에서 내려오게 하였도다 / 下機驚慈親

충성을 바친 것이 거꾸로 죄가 되는 세상 / 忠誠反爲罪
상심한 채 돌아가 농민 속에 뒤섞여서 / 摧藏偶農民
몸소 밭을 갈아도 굶주림을 면치 못해 / 躬耕不救餒
생활이 갈수록 빈궁하고 군색해지는 속에 / 生事日窘貧
어버이 계신 곳 찾아뵈러 길을 떠났나니 / 君去訪庭闈
그대의 집이 있는 고향은 바로 관서 지방 / 家鄕在西秦
신성에서 평양 하늘 바라다보노라면 / 新城望箕城
구름 낀 산만 저 멀리 삐죽삐죽 보일 따름 / 雲山緬嶙峋
하늘 끝에 떨어져서 그대의 모습 떠올릴 뿐 / 相思隔天涯
한번 찾아가려면 열흘도 넘는 길이라서 / 程期餘一旬
소식이 감감해도 알아볼 길이 없이 / 音書杳莫憑
계절만 바뀌어 겨울과 봄이 지났는데 / 歲序逾冬春
기뻐라 산자락에서 까치들이 우짖으며 / 山樊喜鵲喧
멀리서 손님이 홀연히 찾아오셨도다 / 遠客忽來臻
깜짝 놀라 대문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 驚愕走至門
대청 마루로 영접하며 안내는 하였으나 / 延之坐堂茵
천만뜻밖에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라 / 事出萬不意
생시가 아니고 꿈인가 의심까지 하면서 / 還疑夢非眞
정말 미칠 것처럼 너무도 기쁜 마음에 / 喜極至欲狂
정신없이 안부도 두루 묻지를 못했다오 / 茫然失所詢
지금 춘삼월이 저물어 가오마는 / 于時三月暮
천기는 그래도 꽃다운 시절이라 / 天氣屬芳辰
들꽃은 모두 공중에 날리려 하고 / 山花欲飛盡
녹음이 솔과 대에 슬슬 생기는 때 / 綠陰生松筠
문밖으로 나서면 시냇물 소리 굴러 가고 / 門外澗水轉
뜰 안에는 운율에 맞는 새들의 노랫소리 / 園中鳥音勻
도대체 이 몸이 어떤 사람이기에 / 顧我是何人
천리 먼 곳에서 귀빈을 맞게 되었는고 / 能致千里賓
막걸리로 마음을 서로 위로하면서 / 薄酒相慰勉
정답고 흥겹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 款款窮昏晨
산중이라 특별한 음식 있을 리 없고 / 山中無異味
농어와 순채도 없으니 부끄러울 뿐 / 愧乏鱸與蓴
생각건대 그대는 관서의 수재로서 / 惟君關西秀
웅장한 지략이 상식을 뛰어넘고 / 壯略超常倫
충심으로 효성과 우애가 독실한 데다 / 深衷篤孝愛
의리를 중시하며 금은을 가볍게 여기는 분 / 貴義輕金銀
버들잎 뚫고서 궁전 뜰에 올라 / 穿楊登殿前
기문의 호신으로 발탁될 분이건만 / 期門爲虎臣
국가의 간성을 초야에 내버리다니 / 干城棄草萊
인재의 선발이 왜 이토록 어긋났는가 / 是何乖選掄
그대의 의기는 산악보다도 무겁고 / 意氣重山岳
그대의 성신은 귀신도 감동시킬 터 / 誠信感鬼神
생각이 나자 곧바로 찾아 나서면서 / 思來卽命駕
천리 먼 길을 이웃 동네로 알았나니 / 視遠如比鄰

지기에게 보답하려는 마음만 있었을 뿐 / 只爲謝相知
산 넘고 물 건너는 어려움은 잊었어라 / 跋涉忘勤辛
이런 의리는 옛날에도 보기 드물었으니 / 此義古所罕
말세에 어찌 자주 들을 수 있는 일이리요 / 叔世聞豈頻
그런데 지금 나는 내 눈으로 보았으니 / 於今親見之
이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요 / 感激難俱陳
즐겁게 보낸 날이 열흘도 채 못 되어 / 懽欣未十日
이별하려니 수심이 이마에 가득한데 / 恨別愁眉嚬
떠나시는 길에는 음산한 구름이 저 멀리 / 去路雲陰遠
이별하는 정자에는 푸른 풀빛이 가지런 / 離亭草色均
우리가 무슨 말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까 / 相贈欲何言
노력하여 부디 몸을 아껴 보전하시기를 / 努力須自珍
옛날의 정전에다 깊이 밭도 갈아 보고 / 深耕古井地
대동강에 낚싯줄도 한가이 드리우겠지만 / 閑垂浿江綸
그대와 같은 충의지사가 세상을 멀리 떠나 / 如君忠義士
어찌 끝내 노루 사슴과 지낼 수 있으리요 / 豈終群麋麕
시기가 도래하면 곧장 떨쳐 일어나서 / 時來焂奮迅
걸출한 명성을 임금님도 듣게 되시리니 / 聲譽達紫宸
조만간 변방의 요기를 말끔히 소탕하고 / 早晩淸塞垣
기린각에 그 공명을 길이 전하시리이다 / 功名畫麒麟

우상(右相) 이공(李公) 시백(時白) 이 북경(北京)으로 떠날 날짜가 박두하였기에, 강변에 나아가서 손을 잡고 송별하려고 감히 생각을 하였는데, 큰비가 계속 쏟아져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기에, 사람 편에 절구(絶句) 두 수를 부쳐서 이 감회를 전하였다.

노년에는 서로들 이별이 없어야 할 터인데 / 衰年非是別離時
강 다리에서 전송할 계획도 차질이 났구려 / 相送河橋計又差
손꼽아 헤어 보니 세모에 귀국하실 텐데 / 却算歸程應歲暮
요동 관문 눈보라 조심해 말을 달리시길 / 薊門風雪愼驅馳
물은 내에 가득한데 비는 계속 주룩주룩 / 水滿川原雨不休
술병 들고 전송할 길도 없어서 한스럽소 / 一壺相送恨無由
남아의 봉시야말로 평생의 뜻이거니 / 男兒蓬矢平生志
북경 만리 길 멀다고 어찌 꺼리리요 / 豈憚燕山萬里脩

[주D-001]정주(定州) : 평안도 정주가 아니라, 함경도 정평(定平)의 옛 이름이다.
[주D-002]영각(鈴閣)과 우헌(郵軒) : 영각은 지방 장관의 별칭으로 부백을 가리키고, 우헌은 역마(驛馬)로 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포저 자신을 가리킨다. 광해군 3년(1611)에 포저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적에,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수 없다고 헐뜯자, 동료들과 함께 이를 반박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함경도의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주D-003]초원(草原) : 정평(定平)의 속역(屬驛)이다.
[주D-004]훼복(卉服) : 섬 오랑캐가 입는 갈포(葛布)의 복장이라는 뜻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섬 오랑캐는 훼복을 공물로 바친다.〔島夷卉服〕”는 말이 나온다.
[주D-005]동인(同仁) :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준말로, 모두를 평등하게 여겨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원인(原人)에 “성인은 일시동인한다.〔聖人一視而同仁〕”는 말이 나온다.
[주D-006]교린(交鄰) …… 하겠지만 : 교린 정책은 이웃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는 정책을 말하는데,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주D-007]장건(張騫)만 …… 줄을 : 어렵고 힘든 사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신하로 보통 장건을 꼽곤 하는데, 이제는 신계영도 그에 못지 않은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박망후(博望侯) 장건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고사가 있고, 또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을 적에 장건이 배를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그를 선사객(仙槎客)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의 사행(使行)에 장건을 결부시켜 인용한 것이다. 《漢書 卷61 張騫傳》 《天中記 卷2》
[주D-008]남금(南金)이 …… 얻었으니까 : 일본에 가서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하고는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전대(專對)는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외교 현안을 바람직하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남금은 남방에서 생산되는 황금으로, 옛날 회이(淮夷)가 노 희공(魯僖公)에게 남금을 조공(朝貢)으로 바친 고사가 있다.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은혜를 깨달은 오랑캐들이 남방의 좋은 황금을 많이 조공으로 바쳤다.〔大賂南金〕”는 말이 나온다.
[주D-009]해숭위(海嵩尉) :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의 봉호이다.
[주D-010]자봉(紫鳳)이 …… 일 : 중국의 사신이 왔으니 조정에서도 연위사를 보내 맞이하는 것이 예법상 합당하다는 말이다. 자봉은 황제의 조서(詔書)를 자고(紫誥)라고 하기 때문에 조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성초는 급히 떠나는 연위사의 수레를 뜻한다. 고대의 천문학에서 사신은 하늘의 성신(星辰)과 응한다고 믿었다.
[주D-011]서경(西京)에서는 …… 가지시리니 : 형님인 윤이지(尹履之)가 마침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재직중이니, 형제의 우애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또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연지(連枝)는 같은 뿌리에서 벋어 나온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보통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12]승상(丞相)으로 …… 해로다 : 부친인 윤방(尹昉)이 좌의정(左議政)으로 있는 때에 아들인 윤이지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D-013]쌍정(雙旌) : 관찰사를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절도사(節度使)에게 쌍절(雙節)과 쌍정을 하사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4]이천장(李天章) : 천장(天章)은 이명한(李明漢)의 자(字)이다.
[주D-015]옥새(玉塞) :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관서(關西) 즉 평안도 지방의 요새(要塞)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16]금성탕지(金城湯池) : 쇠로 만든 성곽과 펄펄 끓는 물로 채워진 해자(垓字)라는 뜻으로, 견고한 요새지를 말한다.
[주D-017]지금부터는 …… 알겠도다 : 한(漢)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나가기를 자청(自請)하면서, 긴 밧줄 하나만 주면 남월 왕을 묶어서 궐하(闕下)에 바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 終軍傳》
[주D-018]금방(金榜) : 대과(大科) 급제자 명단을 발표한 게시판이다.
[주D-019]쌍궐(雙闕) : 궁전 앞 양쪽에 높이 세운 누관(樓觀)으로, 중국의 도성을 뜻한다. 참고로 포조(鮑照)의 악부시(樂府詩)에 “잔잔한 물처럼 잘 닦인 장안 거리, 높은 궁궐이 구름 속에 떠 있는 듯.〔九衢平若水 雙闕似雲浮〕”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文選 卷28 結客少年場行》
[주D-020]묻고 …… 않으시리 : 방백(方伯)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달리고 또 달리며 두루 묻고 또 묻네.〔載馳載驅 周爰咨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왕명을 받든 신하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방문하고 자문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21]갑진(甲津) : 갑곶진(甲串津)의 준말로, 강화부(江華府)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주D-022]시라는 …… 따름이니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시는 자신의 뜻을 읊은 것이요, 노래는 읊은 그 말을 길고 짧게 조절하며 늘인 것이다.〔詩言志 歌永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누선(樓船)이 …… 우왕좌왕하였는데 : 장신(張紳)이 거느린 전선(戰船)들이 전투는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는데, 《포저집》 25권 병정기사(丙丁記事)에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연계는 끈에 묶인 닭들이라는 뜻으로, 전국 시대에 진 효공(秦孝公)이 행동 통일을 기하지 못하는 제후들을 비유하면서, ‘끈에 묶인 닭들이 동시에 횃대에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猶連鷄之不能俱上於棲〕’고 표현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아 군사 작전이 일사분란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다. 《戰國策 卷3 秦策1》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연계와 같아서 전진을 하지도 못한 채, 말에게 물만 먹이며 공연히 머뭇거리누나.〔連鷄不得進 飮馬空夷猶〕”라는 시구가 전한다. 《李太白集 卷10 經亂離後 天恩流夜郞云云》
[주D-024]민산(岷山)과 …… 서서는 : 오랑캐를 평정하여 국토를 수복하고 싶은 강개한 마음이 솟구쳤다는 말이다. 이백(李白)이 제갈량(諸葛亮)의 전기를 읽고 지은 시에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촉 땅의 민산에 우뚝 서서는, 장안(長安)을 집어 삼킬 장한 뜻을 품었도다.〔武侯立岷蜀 壯志呑咸京〕”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8 讀諸葛武侯傳 云云》 포저는 어려서부터 제갈량을 흠모하였는데, 본 시집의 맨 첫 번째에 나오는 우음(偶吟) 시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주D-025]장차 …… 가벼워졌는데 : 차라리 적군과 싸우다 죽을지언정 비굴하게 도망가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자, 육신에 대한 애착도 없어지면서 홀가분해졌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유파촉격(喩巴蜀檄)’에 “칼날을 맞부딪치고 날아다니는 화살을 맞을지언정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뒤꿈치를 돌리지 않겠다고 각오하면서 사람들마다 분노하며 자기 원수를 갚는 것처럼 하였다.〔觸白刃 冒流矢 義不反顧 計不旋踵 人懷怒心 如報私仇〕”는 말이 나온다.
[주D-026]이 몸을 …… 듯하였나니 : 마치 자기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끔찍히 아껴 주었다는 말이다. 《시경》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치맛자락을 걷어잡고 진수(溱水)를 건너가겠다.〔褰裳涉溱〕”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하중(下中)의 인물 : 하중은 하등(下等) 중의 중등(中等)이라는 뜻으로, 인물을 9품(品)으로 나눌 때 제일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8등급에 해당되는 용렬한 사람을 말하는데, 보통 능력과 자격이 없으면서도 거꾸로 중용(重用)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사기(史記)》 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 전한(前漢)의 이채(李蔡)는 사람됨이 하중에나 속하는 인물이라서, 명성이 종형(從兄)인 이광(李廣)보다 훨씬 아래였는데도, 이광은 작읍(爵邑)도 얻지 못하고 관직도 구경(九卿)에 불과했던 반면에, 이채는 열후(列侯)가 되고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다는 소위 ‘이채위인재하중(李蔡爲人在下中)’이라는 고사가 나온다.
[주D-028]일 여(旅)의 병력 : 중흥(中興)을 도모할 만한 최소한의 병력을 말한다. 500명을 1여(旅)라 하고, 사방 10리 되는 땅을 1성(成)이라 하는데, 하(夏) 나라 소강(少康)이 보잘것없는 이 병력과 이 땅을 가지고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주D-029]참소(讒訴)하는 …… 하였도다 : 자친이 믿을 정도로 교묘하게 꾸며대면서 잇따라 참소를 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증삼(曾參)의 모친이 증삼의 살인 소식을 전해 듣고서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계속해서 세 사람이 그 이야기를 전하자 사실로 믿고는 놀란 나머지 베틀에서 내려와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戰國策 卷4 秦策2》
[주D-030]버들잎 …… 올라 : 활쏘기 등 뛰어난 무예 솜씨로 무과(武科)에 당당히 급제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공왕(楚共王)의 장군인 양유기(養由基)가 일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 周本紀》
[주D-031]기문(期門)의 …… 분이건만 : 왕을 호종(扈從)하는 무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미행(微行)할 때면 기사(騎射)에 능한 무사들과 궁전 문 앞에서 몰래 만나기로 약속하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기문이라고 불렀다. 그 뒤 한 평제(漢平帝) 때에 관명(官名)을 호분랑(虎賁郞)으로 고쳤는데, 이들 중에서 명장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漢書 卷28 地理志 下》
[주D-032]생각이 …… 알았나니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여안(呂安)과 혜강(嵇康)이 벗으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상대방이 그리워질 때마다 서로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방문했다.〔每一相思 輒千里命駕〕’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簡傲》
[주D-033]옛날의 …… 보고 : 기자(箕子)가 조선 땅에 온 뒤에 평양(平壤)에서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주D-034]기린각(麒麟閣)에 …… 전하시리이다 : 공신(功臣)의 봉호(封號)를 받고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가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기린각에 걸어 놓게 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附 蘇武傳》
[주D-035]남아(男兒)의 …… 뜻이거니 :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 여섯 개를 만들어 천지 사방에 대고 한 대씩 쏘면서 사방을 경영하는 큰 인물이 되라고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상호봉시(桑弧蓬矢)라고 하였다. 《禮記 內則》


 
포저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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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만사(挽詞) 63수


선종대왕(宣宗大王)의 천릉(遷陵)에 즈음한 만사
역복을 선성에게 이어받고서 / 曆服承先聖
총명으로 백왕의 으뜸이 되셨나니 / 聰明冠百王
마음가짐은 순 임금과 우왕을 스승 삼고 / 存心師舜禹
뛰어난 덕은 요 임금과 탕왕을 이었도다 / 駿德繼堯湯
낭묘에 원로들을 초치하여 등용하고 / 廊廟登耆舊
주항에 준재들을 이끌어 들였으며 / 周行引俊良
보필하는 신하들을 예법으로 대하였고 / 臣鄰待以禮
백성들을 다친 사람 보는 듯하셨도다 / 民物視如傷
은일의 선비들을 산림에서 찾아내고 / 逸士搜巖穴
유능한 인재들을 상서에서 길렀나니 / 人才育序庠
은혜가 흡족한 시대를 장차 보게 되고 / 行看恩薄洽
덕치의 교화가 점점 향기롭게 되었도다 / 馴致德馨香
그런데 국운이 웬 일로 중도에 막혀 / 天步何中否
왜적이 그만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 倭夷乃陸梁
초분이 험악해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 蒼黃楚氛惡
멀리 촉산으로 순수를 하시게 되었도다 / 巡狩蜀山長
다난해도 하늘의 도수가 원래 있는지라 / 多難元天數
다시 회복해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여 / 重恢復日光
강토를 보전하고 안정되게끔 하였으니 / 已全寰宇謐
거룩한 대왕의 공이 더욱 드러났도다 / 益見聖功彰
정수에 안개와 구름 암담하게 뒤덮이고 / 鼎水煙雲暗
오산에 풀과 나무 황량하게 우거졌나니 / 梧山草樹荒

슬퍼라 틈새를 지나는 일백 년 인생이여 / 百年悲過隙
만백성 애끊는 듯 비통 속에 잠겼어라 / 萬姓痛摧腸
전장과 법도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고 / 典則今猶在
안 계셔도 그 현친을 못 잊어 하는 가운데 / 賢親沒不忘
이괘의 밝음이 이미 둘이나 일어났으니 / 离明旣兩作
국가의 대업이 자연히 거듭 창성하리로다 / 大業自重昌
뜻을 잘 계승하고 모훈을 준수하며 / 善繼遵謨訓
순수하고 참되게 약상을 받들던 중에 / 純誠奉禴嘗
물이 주 나라 계묘에 침입한다는 말이 있어 / 水侵周季墓
사람들이 송 나라 황당을 의논하였어라 / 人議宋皇堂

추모하는 효손의 심정이 끝이 없어서 / 追孝思無極
혼령을 혹시 놀라게 할까 두려워하며 / 安靈恐有妨
시초와 거북점을 쳐서 길조를 얻은 뒤에 / 蓍龜得吉兆
옛 능과 가까운 등성이로 옮기게 되었어라 / 松柏近先岡
상설을 하며 신읍을 경영함은 물론이요 / 象設營新邑
옛 능묘의 의관도 모두 새로 바꾸면서 / 衣冠改舊藏
임금님 마음에 후회가 없도록 하였나니 / 宸情期勿悔
복된 땅이 상서를 두루 갖추게 되었도다 / 福地協諸祥
이제 국운이 천년 만년 끝없이 이어지고 / 寶祚綿千祀
뭇 생령이 안락을 길이 누리게 되었는데 / 羣生獲永康
미천한 신하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 微臣思昔日
우러러 절하노라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 瞻拜涕盈眶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만사
만물에 으뜸으로 나오신 총명함과 / 聰明出庶物
삼왕을 이은 성대한 덕을 지니시고 / 懋德繼三王
어렵고 큰 선왕의 기업을 계승하여 / 艱大嗣先業
인자한 은덕을 온 누리에 펼치셨도다 / 仁恩覃八方
인륜이 일찍이 무너지고 타락하여 / 彛倫曾斁廢
종사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 宗社阽危亡
백성들은 모진 피해를 당한 반면에 / 萬姓罹凶害
간신들은 못할 짓 없이 날뛰었도다 / 羣奸恣陸梁
하느님이 성상의 덕을 돌아보시자 / 天心眷聖德
그림자가 따르듯 충신들이 모여들어 / 影附聚忠良
하루도 못 되어 요기가 활짝 걷히고 / 不日妖氛豁
하루아침에 대의가 널리 펼쳐졌도다 / 崇朝大義張
비렴은 처형하여 저자에 진열하고 / 飛廉就顯戮
창읍은 황량한 변방에 유배하였으며 / 昌邑放遐荒
성모는 궁전으로 다시 모셔 오고 / 聖母迎宮壺
현신을 다시 조정에 나오게 하였도다 / 賢臣進廟堂
걱정하고 애쓰면서 병폐를 제거하여 / 憂勞除弊瘼
정치가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였나니 / 治化復平康
덕정에 감화됨이 포로처럼 신속하고 / 德被蒲蘆速
은택이 빗줄기처럼 내려지는 가운데 / 恩行霔雨霶
조정은 엄숙하게 기강이 확립되고 / 朝紳見肅穆
서민은 즐겁게 농사짓게 되었도다 / 民庶樂田疆
비와 태는 원래 서로 순환하는 것이라서 / 否泰元相代
병란과 흉년으로 몇 차례 재앙도 당했다만 / 兵荒屢作殃
세상의 운세가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 艱難屬世運
경계하고 격려하며 국가의 기강을 떨쳤도다 / 惕勵振王綱
하늘의 경고를 요탕도 받지 않았던가 / 天警堯湯遇
완악한 삼묘를 순우도 당하지 않았던가 / 苗頑舜禹當
조화의 공에 끼일 만한 지극한 정성으로 / 至誠參造化
긍휼히 여겨 만신창이를 일으켜 세웠기에 / 勤恤起痍瘡
민심이 흡족하여 길이 받들기 원하면서 / 願戴群情洽
임금님 오래 사시기를 모두 기원하였는데 / 咸祈聖筭長
정호에 용의 그림자 멀리 사라지고 / 鼎湖龍影遠
몽사에 태양이 떨어져 깊이 잠겨서 / 濛汜日光藏
우위는 빈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가고 / 羽衛移空谷
운소만 아스라이 제향 위에 감도누나 / 雲韶杳帝鄕

예전에 이 몸이 초야에 묻혀 있다가 / 昔臣從草野
창성한 시대를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 何幸際時昌
지위는 외람되게 경재에까지 올라갔고 / 致位叨卿宰
청반도 모두 역임하며 의기양양하였어라 / 淸班盡歷揚
그동안 보살펴 주시는 은총을 받았는데 / 從來蒙眷寵
털끝만큼도 보답해 드릴 길이 없었으니 / 無路報毫芒
통곡을 하며 옛날 일을 떠올리는 지금 / 慟哭思前日
오장이 찢기는 슬픔을 어떻게 참으리요 / 那堪裂肺腸

권 좌랑(權佐郞) 득이(得已) 의 죽음을 애도하며
풍도와 절조 드높이 공경들을 내려다보며 / 高風峻節傲公卿
그동안 혼탁한 세상에서 독야청청하였도다 / 世混由來見獨淸
영예를 사양해 상자의 뒤를 따른 것만도 기뻤는데 / 已喜辭榮追向子
바다에 들어가 봉맹을 본받았다는 말을 바로 들었지 / 旋聞入海效逢萌
옛 시대 인물을 본 것 같아 항상 찬탄하였는데 / 同時每嘆如殊代
병에 걸려 이승 저승 나뉠 줄 어떻게 알았으랴 / 一疾那知隔此生
멀리 생각건대 이 세상의 선류들 중에 / 遙想寰中諸善類
몇 사람이나 나처럼 슬프게 애도할는지 / 幾人嗟悼似吾情

계운궁(啓運宮)의 만장(挽章)
멀리 고려 시대부터 경사가 이어진 가문 / 流慶垂休遠自麗
왕실에 출가하여 덕성이 모두 걸맞았네 / 于歸王室德咸宜
현성을 독생하여 혼란한 세상을 극복하고 / 篤生賢聖傾時否
요순의 뜻을 세워 태평을 이루게 하였다오 / 邁志唐虞致世熙
나라를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를 받는 때에 / 大孝方隆一國養
병마가 느닷없이 백 년의 수명을 재촉했네 / 沈痾遽促百年期

온 나라가 다투어 앙망하며 극진히 애도하니 / 邦人爭仰情文盡
풍초처럼 풍속이 절로 감화된 것을 알리로다 / 風草應知俗自移

정수몽(鄭守夢) 엽(曄)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군이 출현하신 천재일우의 기회에 / 聖作千年會
이팔의 재능 지니고 조정에 올랐어라 / 朝登二八才
학궁에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하고 / 弦歌興泮璧
어사대에선 기강을 엄숙하게 하였어라 / 綱紀振霜臺

앞으로 달려갈 길이 아직 멀고 멀건만 / 未極長途騁
큰 건물의 서까래가 느닷없이 부러졌네 / 俄摧大廈材
일찍이 소문의 소망 이룬 바도 있었기에 / 掃門曾遂願
이렇게 만사 지어 슬픔을 토로하나이다 / 薤露寫悲哀

성 영동(成永同) 문준(文濬) 에 대한 만사
동방에 오래 전에 전래된 우리 도가 / 吾道東來久
파산에서 양대에 걸쳐 다시 전해졌네 / 坡山兩世傳
학문의 연원은 집안에서 유래했고 / 淵源自家學
어진 명성은 제현에 울려 퍼졌어라 / 德譽動諸賢
요순 시대의 뜻을 시험해 보지 못한 채 / 未試唐虞志
기애의 연세에 끝내 세상을 마쳤구려 / 終摧耆艾年
이 몸을 알아줌이 일찍이 얕지 않았기에 / 遇知曾不淺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끝없이 흐릅니다 / 薤露涕漣漣

원 우윤(元右尹) 황(鎤) 의 죽음을 애도하며
곧은 절조가 실로 화살 같아서 / 直節良如矢
빈궁과 영달에 끝내 변치 않았네 / 窮通竟不移
천하의 선비와 벗할 줄을 알았거니 / 乃知天下士
세상 아이들에게 눈길이나 줬으리요 / 豈效世間兒
선인을 돕는다는 말은 참으로 허언이라 / 與善眞虛語
외로운 충성심 안고 그만 세상 떠났구려 / 孤忠遽止斯
내가 왜 헤일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냐고요 / 吾何泣無數
지금부터는 나의 종기를 잃었으니까요 / 從此失鍾期

오 지사(吳知事)에 대한 만사
전장에 임했던 날 얼마나 씩씩하였던가 / 仡仡臨戎日
용맹스러운 노장의 명성 한껏 날렸어라 / 桓桓老將名
높은 연세는 일흔을 훌쩍 뛰어넘었고 / 尊年踰七秩
추부에서는 고경의 반열에 오르셨다오 / 樞府列孤卿
시작한 일을 손자에게 물려주고서 / 緖業歸孫子
문장 실력으로 서울을 진동시켰지요 / 文章動洛京
이 세상에서 무슨 유감이 있으리이까 / 世間奚所憾
영원한 안식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시라 / 暝目就佳城

성 무주(成茂朱) 협(浹)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선생은 이 세상 속의 기인으로서 / 夫子世中奇
마음가짐이 혜와 이를 합쳤다 할까 / 持心惠且夷
이른 나이에 세속을 비루하게 여기고서 / 早歲鄙流俗
옛것을 좋아하며 엿보지 않음이 없었어라 / 好古無不窺
끊어졌던 학문이 송에서 이어져 내려오며 / 絶學繼自宋
그 학설이 하도 넓어 끝이 보이지를 않자 / 其言浩無涯

흐름 속으로 빠져 들어 깊이 몸을 담그고서 / 沈潛涉其流
정밀한 의리의 귀취를 끝까지 구명하였어라 / 精義窮所歸
통달한 그 식견으로 세상을 초월하였으니 / 達識旣高世
명예와 이끗의 길을 어찌 좇으려 하였으랴 / 肯從名利歧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은 끝내 어긋나는 법 / 枘鑿竟不合
흰머리 되도록 진흙탕 길을 감수하였어라 / 皓首甘塗泥
평소 사람 구제하려는 경세제민의 뜻을 / 平生濟人志
의술로 방향을 전환하여 널리 베풀면서 / 反托醫方施
살려낸 사람이 무려 몇 천 명에 달했으니 / 所活幾千人
범로가 생각했던 것과 실로 일치하였는데 / 范老誠一規
선생의 도가 높은 것을 그 누가 알았으리 / 道尊人莫知
의술이 심오한 것만 짐작하였을 뿐이었네 / 但知深於醫
후학인 나도 나름대로 작은 뜻 지니고서 / 末學抱微尙
세상과 서로 등 돌리고 치달리는 동안 / 與世相背馳
쓸쓸하게도 동행할 사람 찾지 못한 채 / 涼涼誰與偶
강습에 도움 받을 곳도 보이지 않았는데 / 講習無所資
유독 어르신께서 돌보아 주신 그 덕분에 / 獨蒙長者顧
다행히도 가르침 받고 인도를 받았었지 / 幸煩誨且提
생각하면 예전에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 念昔初承顔
연세가 실로 나보다 갑절이나 많았는데 / 尊年實倍之
한번 눈을 마주치자 그 속에 도가 있어 / 目擊道斯存
서로들 진심을 숨김없이 터놓게 되었지요 / 肝膽相爲披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예로부터 흔하던가 / 知音古來少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마침내 잊게 되었는데 / 遂忘年差池
부끄럽게 정장과 같은 어진 덕도 없는 터에 / 慚非鄭莊賢
현달로부터 추중을 외람되게도 받았다오 / 猥被賢達推
그동안 흐른 세월 어찌 많지 않으리요 / 日月豈不久
지금 어느덧 스무 해가 되려 하는데 / 于今卄載垂
그중에도 생각하면 지난 십 년 동안은 / 憶昔十年間
서로 모여 서울에서 함께 어울렸지요 / 相聚在洛師
벗으로 지내시던 한두 분 선생 역시 / 有友一二生
모두 월등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라서 / 俱是超人姿
저녁 늦게까지 담론을 벌이기도 하고 / 談論或竟夕
말을 타고 빈번하게 뒤따라 다니면서 / 鞍馬頻追隨
근원을 탐색하여 천인의 관계를 규명하고 / 探源極天人
의리를 분석하여 추호도 빠뜨림 없었지요 / 析義分銖錙
소득이 있으면 함께 토론도 벌이고 / 有得共論討
의심이 있으면 공동으로 사유하면서 / 有疑同思惟
난초 향기처럼 그 마음이 같았나니 / 同心臭如蘭
이런 낙을 이 세상에서 쉽게 얻으리요 / 此樂世間稀
좋은 일은 원래 오래갈 수 없다던가 / 盛事不可久
새벽 별빛처럼 홀연히 서로 흩어져서 / 星散忽分離
각각 다른 곳으로 이별하게 되었는데 / 分離各異地
그중에서 영남 길은 더욱 요원하였어라 / 嶺路尤阻脩
연로한 어르신이 천리 멀리 계시건만 / 几杖隔千里
누구를 통해 소식을 전할 수나 있었으리 / 音信傳憑誰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사리상 당연하다 해도 / 速貧理固宜
궁벽한 산골에서 얼마나 기한을 참으셨을까 / 窮山忍寒饑
한번 찾아뵈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 未諧命駕志
부질없이 경수의 생각만 쌓여 갔는데 / 徒積瓊樹思
어찌 알았으리요 부음이 전해질 줄을 / 寧知訃書至
밥상을 대하고서도 놀라 탄식하였어라 / 當食驚且咨
봉함을 뜯어 돌아가신 날짜를 보고서는 / 發封見月日
목놓아 슬피 울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 長呼涕漣洏
신위를 만들어 놓고 절에서 곡을 하노라니 / 爲位哭僧廬
아득히 남쪽 하늘가에 비바람이 치더이다 / 風雨杳南陲
예전에 뵐 때는 기운이 아직 정정하셨고 / 曾見氣貌壯
수염과 머리가 조금도 쇠하지를 않았는데 / 髭髮不少衰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었나요 / 如何奄至此
사람의 수명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구려 / 壽者誠難知
어쩌면 헤어진 뒤 칠팔 년의 세월 동안 / 別來七八年
예전과 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니리까 / 無乃異前時
일찍이 삶과 죽음의 이치를 얘기하면서 / 嘗言死生理
취산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 聚散非吾私
이번에 죽음의 변화를 맞이했을 적에도 / 於今已觀化
생각건대 헌신짝 버리듯 태연하셨으리라 / 想應恬如遺
생각하면 예전에 도성 서쪽 초당에서 / 憶昔城西廬
발 포개고 이불 함께 덮으며 지냈는데 / 交跖同衾帷
한번 이별하고 나서 이승 저승 갈렸으니 / 一別遂今古
그런 즐거움을 다시는 누리지 못하겠네 / 玆遊已莫追
혜자의 무덤 지나면서 장생도 슬퍼했고 / 莊生哀惠子
종기가 죽자 백아도 거문고를 버렸나니 / 伯牙悲鍾期
마음 알아주는 이를 어찌 다시 얻으리요 / 知心復何得
이렇게 통곡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리까 / 此慟寧不宜
나는 평소에 시문을 잘 짓는 솜씨가 없고 / 平生乏詞藻
붓과 벼루도 내버려 둔 지 이미 오래인데 / 筆硯久廢委
지금 선생의 죽음을 통곡하는 이 마당에 / 今爲哭夫子
어설픈 글로나마 애도를 하지 않으리요 / 可無抽蕪辭
이렇게라도 나의 정을 쏟지 않을 수 없었으니 / 聊爾寫吾情
이것이 어찌 시를 잘 지을 줄 알아서리이까 / 豈是能爲詩

민중경(閔重卿)에 대한 만사
옛날에 내가 산림과 계곡 찾아가서 / 昔我蹈林壑
그대와 마을을 함께하며 지낼 적에 / 與子同里社
그대의 농장은 반곡 안에 자리했고 / 仙莊盤谷中
나의 오두막은 도봉 아래 있었지요 / 敝廬道峯下
그 당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막혀 / 是時天地閉
수레도 버리고서 자취를 끊었는데 / 絶迹車已舍

다행히도 마음이 같은 한 분이 계셔서 / 唯幸同心人
형체를 잊고 전야에서 함께 노닐었다오 / 忘形在田野
술이 있으면 항상 둘이서 기울였나니 / 有酒常共傾
여름 겨울 상관없이 초청하고 찾아가며 / 招尋無冬夏
눈 속에서 술 항아리를 열기도 했고 / 或開雪中缸
꽃 사이에서 술잔을 들기도 했지요 / 或把花間斝
그대의 아들은 또 재질이 출중해서 / 賢子才出群
참으로 보기 드물게 총명하였는데 / 穎悟誠爲寡
나에게 뭔가 배우려고 기대하면서 / 從吾冀有聞
유아한 인물이 되겠다고 다짐하기에 / 立心期儒雅
오도를 강론하며 수사까지 올라가고 / 講道泝洙泗
글을 평론하며 반마도 언급하였지요 / 論文及班馬
그대 집안의 부자 사이에 노닌 그 덕분에 / 君家父子間
흐뭇하게 지냈으니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 情好寧外假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낸 십여 년 동안 / 相從十數年
우리 둘 다 즐거워서 떨어지지 못했지요 / 懽然兩不捨
용이 날아올라 온 세상이 맑아져서 / 龍飛寰宇淸
초야에서 현인들이 떨쳐 일어날 적에 / 草澤群賢起
이 몸도 띠풀처럼 함께 뽑혀 나왔는데 / 我從茅茹征
그대는 사슴과 벗하며 그대로 머물렀지요 / 君隨麋鹿止
한번 헤어지고 나서 어느새 몇 년 세월 / 一別幾寒暑
구름 낀 산속과 떨어진 복잡한 도성에서 / 雲山隔城市
나랏일로 날마다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 王事日鞅掌
언제고 그칠 사이 없이 노심초사하는 동안 / 勞悴何時已
얼굴이며 머리카락 풍진에 모두 바뀌면서 / 風塵顔髮改
인생의 석양이 점점 다가오는 걸 느꼈다오 / 頹暮覺漸邇
예전에 노닐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건대 / 回思昔日遊
고상한 흥치 즐기면서 환희에 찼었는데 / 高興眞可喜
이젠 다시 얻지 못할 까마득한 추억이라 / 邈然難復得
헛된 이름 탓하면서 혼자 탄식만 하였는데 / 自嘆浮名累
반가운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던 차에 / 好音久未聞
부음이 전해지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요 / 訃書胡乃至
이제 그대를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으니 / 嗟哉不可見
바람 앞에 비통한 눈물 흩뿌릴 수밖에요 / 臨風洒哀淚
벗님들도 하나 둘 날이 갈수록 떠나가니 / 朋知日凋喪
우리 인생은 여인숙의 길손과 같소그려 / 此生還如寄
아 그대의 성품은 평화롭고 담박해서 / 嗟君冲淡性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도 없이 / 與物無崖異
평생토록 하나의 동산을 지키고 살면서 / 平生守一丘
몸 밖의 공명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고 / 不向身外冀
그대의 자제 역시 스스로 설 줄 알아 / 有子能自立
뜻과 행동이 옛사람과 견줄 만하였지요 / 志行古人比
사람의 삶이란 것은 실로 하루살이요 / 人生眞蜉蝣
세상만사도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 / 萬事皆一致
장수와 요절도 오히려 같다고 할 것인데 / 壽夭尙可齊
곤궁과 영달 따위야 더구나 관심을 둘까 / 窮達况致意
시시한 세상 속에서 또 무엇을 하기보단 / 悠悠更何爲
솔 아래 땅에서 길이 쉬는 것이 나으리라 / 永歸松下地
길도 멀지만 관직에 몸이 또 묶였으니 / 路遠官又係
어떻게 찾아가서 영결을 할 수 있으리요 / 何由得歸視
애오라지 이렇게 애도하는 글을 엮어 / 聊此綴哀詞
끝없는 내 생각을 토로하는 바이외다 / 寫我無限思

구 주부(具主簿)에 대한 만사
사람이 태어나 장수하기 바라지만 / 人生願爲壽
칠십까지 살기도 예로부터 드문 법 / 七十稀於古
비록 미천하고 빈궁했다 말하지만 / 雖云賤且貧
그래도 장흥고 주부의 신분이시오 / 猶主長興簿
비록 아들은 두지 못했다 하지만 / 雖無一男子
외손이 무려 다섯이나 되지 않소 / 外孫多至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사이에 / 悠悠天地間
하나의 기운이 흩어지고 모이면서 / 一氣紛散聚
온갖 종류의 현상들이 생겨났나니 / 賦物有萬類
모두 우연일 뿐 누가 주재하였겠소 / 偶爾誰是主
귀하고 천하든 장수하고 요절하든 / 貴賤與壽夭
기뻐하고 성낼 것이 뭐가 있으리요 / 奚足爲喜怒
그대 정도만 되어도 자족해야 하리니 / 如君亦自足
그대보다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라오 / 不如者何數
달인은 어떤 상황에도 편히 거하다가 / 達人安所遇
자연의 변화 따라 땅으로 돌아가외다 / 隨化歸於土
두 집안이 인척 관계를 맺은 이래로 / 自從婚媾來
여러 차례나 얼굴을 접하곤 하였는데 / 屢幸接眉宇
근년에 새벽별처럼 각자 흩어지고 나서 / 邇年各星散
남포와 멀리 떨어져 소식이 끊긴 중에 / 音塵隔南浦
다정하게 지내던 우리 민 사의로부터 / 慇懃閔司議
옥수가 꺾였다는 말을 홀연히 전해 듣고 / 忽傳摧玉樹
깜짝 놀라 슬퍼하며 탄식을 하노라니 / 怛然驚且悲
남쪽 하늘에 비바람이 암담하더이다 / 南天暗風雨
지금 갑자기 이승 저승 나뉘었으니 / 幽明倏已分
한평생 그 모습을 어떻게 다시 보리 / 一生那復覩
그저 이렇게 만사를 지어 부치오마는 / 聊爾寄哀詞
마음속의 감회야 어떻게 다 토하리요 / 此懷寧盡吐

어떤 이에 대한 만사
기린각의 훈명이 백미에 속하였고 / 麟閣勳名屬白眉
반룡의 사적이 동료 중에 월등했네 / 攀龍事蹟出倫夷
가정에서 영웅의 솜씨를 길러 내어 / 家庭養出英雄手
억만 년 사직의 기틀을 조성하였도다 / 社稷扶成億萬基
우도를 잡고 소읍을 지금 재단하는 중에 / 方見牛刀裁小邑
어찌하여 계몽을 꾸고 명을 재촉하였는가 / 柰何鷄夢促脩期
태의가 약을 보내고 중관이 조문하였으니 / 太醫送藥中官弔
앞뒤로 받은 은혜와 영광 누가 비슷하리요 / 前後恩榮孰似之

유회보(柳晦甫) 찬(燦)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생각나네 옛적에 이 상국에게 수학할 때 / 億昔受學李相國
그대와 내가 한동네에서 살았던 일이 / 君居乃與同井里
그 당시는 우리 모두 소년 시절이었는데 / 是時與子俱少年
말쑥한 얼굴에 가사인 것을 금방 알았다오 / 粉面一見知佳士
어울려 노닐며 담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 相從晤語時未幾
구름과 물 저 너머로 멀리 헤어졌는데 / 相別悠悠隔雲水
흰머리 되어 지난날을 지금 추억하며 / 如今皓首思曩日
손꼽아 보니 벌써 삼십육 년 전이로세 / 屈指倏忽經三紀
그동안 천지가 온통 어둠 속에 파묻혀서 / 向來天地屬晦暝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끊어진 채 / 綱常淪亡絶人理
흉도가 포학하게 구는 참혹한 때를 맞아 / 羣凶逞虐酷周來
사람을 잡아 죽이기를 풀을 베듯 하였지 / 殘滅人生類草薙
그대의 부옹은 장자의 칭호를 받으면서 / 君家婦翁稱長者
수양의 어른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었는데 / 作尹首陽施政美
근거 없는 죄를 얽고 투망질을 하듯 하여 / 無端羅織如網加
화가 계속 퍼진 끝에 그대까지 당했지 / 其禍連延及之子

지분 옥쇄한 이 일을 끝내 어디에 호소하랴 / 芝焚玉碎竟何訴
밝은 태양도 빛을 잃고 참담하기만 하였는데 / 白日慘慘無光晷
나는 그때 종적을 감추고 강호에 거하면서 / 我時埋蹤在江湖
아무 말 못한 채 초야에서 마음만 아팠다오 / 嘿嘿傷心草莽裏
원래 예덕은 하늘이 싫어하는 바라 / 由來穢德天所厭
하늘과 땅을 세척하고 성인이 일어나서 / 洗滌乾坤聖人起
간악한 흉적을 처형하여 세상을 맑게 하고 / 姦兇伏罪寰宇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내렸도다 / 悼悶無辜紛贈祀
지하에 숭반의 은총이 영광스럽게 가해지고 / 崇班泉下耀恩榮
자제도 수록되어 벼슬길 빛나게 올랐으니 / 收錄遺孤登顯仕
천도는 막막해 못 믿겠다 그 누가 말했는고 / 誰言天道漠難憑
천리를 믿을 수 있는 것을 여기에서 알겠도다 / 到此方知理可恃
당시 초상을 치를 적에 너무도 창황해서 / 當時窀穸事蒼黃
좌씨가 말한 대로 장례가 미흡했는지라 / 葬故有闕徵左氏
지관이 터를 잡아 새로운 묘역을 얻었는데 / 靑烏載卜得新阡
산과 물이 감싸고 돌아 복 받을 명당 자리 / 山川鬱紆宜祥祉
지금부터는 이곳에서 길이 안식을 취하리니 / 眞宅從玆萬世安
가련토다 자식의 도리를 이제야 마쳤구나 / 可憐子道其畢矣
그대와 나의 옛 교분을 자제가 알고서는 / 孤子知吾實有舊
한 폭의 애도하는 글을 은근히 청하기에 / 一幅慇懃求作誄
아스라이 옛날 일을 추억하여 지으면서 / 茫然追記昔年事
시종 슬프고 기쁜 소회를 모두 토로했소이다 / 備寫始終悲且喜

인열왕후(仁烈王后)에 대한 만사 2수
국가 중흥의 성대한 운세를 만나 / 運値中興盛
십란의 재질로 치세를 이뤘도다 / 治因十亂才

규방의 예의범절이 이미 정대했는지라 / 閨闈儀已正
바람 앞의 풀처럼 풍속이 변화되었도다 / 風草俗能回
대춘의 장수를 모두 축원하던 차에 / 共祝長椿壽
소내의 재변을 만나 경악하였도다 / 翻驚素柰災
어진 은혜가 백성들 마음에 사무쳤으니 / 恩仁入人遠
산골 벽촌에서도 모두들 슬퍼하리로다 / 窮谷盡銜哀

서원의 경사가 멀리 뻗쳐서 / 西原餘慶遠
왕실의 휘음을 이으셨도다 / 王室嗣音徽

곤극이 한창 경사를 펼치는 때에 / 坤極方流慶
헌성이 홀연히 빛을 감추었도다 / 軒星忽隱輝

바른 몸가짐은 여훈에 드리워지고 / 儀刑垂女訓
검소한 덕은 남긴 옷에 드러났도다 / 儉德見遺衣
남국에서 관저를 노래한 것처럼 / 南國關雎詠
천추토록 후비를 찬양하리로다 / 千秋美后妃

고(故) 하 사부(河師傅) 낙(洛)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한 사람의 몸에 장원과 제이명(第二名) / 壯元第二一人身
천백 년 이래로 어찌 흔한 일이리요 / 千百年來見豈頻
대궐에 상소 올려 바른 의논 신장했고 / 抗疏紫宸伸正議
칼날 앞에 몸을 던져 인륜을 세웠도다 / 捐軀白刃植彛倫

삼엄한 사기는 역사책 속에 기록되고 / 森嚴辭氣傳方冊
충효의 가성은 사방을 진동시켰도다 / 忠孝家聲聳四鄰
이제 고향 땅에서 편히 쉬게 되었나니 / 窀穸故山今有日
죽어서도 그 명성 영원토록 전하리라 / 名稱沒世永無垠

홍생(洪生)에 대한 만사
나와 홍 양재의 교분으로 말하면 / 我與洪良宰
아동 시절 이웃으로 노닐던 사이 / 兒時實接鄰
아들을 두었으니 참으로 한혈마요 / 有男眞汗血
뛰어난 가락은 양춘곡에 견줬어라 / 絶調比陽春
계림의 나뭇가지 꺾지 못한 채 / 未折林中桂
자리 위의 보배가 문득 깨졌구나 / 飜摧席上珍

왔다가 가는 인생 일장춘몽이거니 / 去來還一夢
어찌 꼭 눈물로 수건을 적시리요 / 何必涕沾巾

이 병판(李兵判) 부인에 대한 만사
삼한에서 으뜸으로 명망 있는 집안에서 / 望族三韓甲
덕을 쌓은 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네 / 于歸積德門
존귀한 봉호가 교서 위에 빛나는 데다 / 崇封光紫誥
방백을 역임해서 영광을 또 누렸다오 / 榮享歷雄藩
진수에 걸릴 줄을 어찌 생각했으리요 / 何意嬰晉竪
초혼을 복하다니 다시 깜짝 놀랐어라 / 飜驚復楚魂
슬프고 처량하다 호리로 가는 길이여 / 悲涼蒿里路
환한 대낮에 황량한 언덕에 묻히다니 / 白日閉荒原

청음(淸陰) 김 판서(金判書)의 숙모에 대한 만사
사대에 삼공을 배출한 벌족이라면 / 四世三公族
문벌이 휘황하게 빛나는 가문이라 / 門闌赫赫輝
임금의 은혜가 군읍에 누차 내리고 / 王恩屢郡邑
부덕은 시부모님에게 흡족하였도다 / 婦德洽庭闈
석인에 대한 한은 있었다 하더라도 / 縱有碩人恨
택상을 의지하고 기댈 수 있었어라 / 猶從宅相依

고금에 누가 구십의 수명을 누렸던가 / 古今誰九十
칠순의 나이도 드물다고들 말하는걸 / 七秩亦云稀

목 참의(睦參議)의 부인에 대한 만사
전통을 자랑하는 삼한의 벌족 / 閥閱三韓舊
도요의 지자가 화락케 하였도다 / 桃夭之子宜
낭군은 일찌감치 조정에 진출하여 / 郞君曳裾早
진신 사이에서 문장으로 이름난 분 / 詞藻搢紳推
금슬의 즐거움이 한창 무르녹는 때에 / 琴瑟歡方恊
봉황의 그림자 하나 홀연히 사라졌네 / 鸞凰影忽離
동쪽 성곽 길에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東郭路
석양빛 속의 백양나무 서글프도다 / 殘日白楊悲

강 좌윤(姜左尹) 인(絪) 에 대한 만사
자취는 뒤섞여서 티끌 세상 따랐지만 / 混迹隨塵世
마음은 보존하여 옛 성현을 사모했네 / 存心慕古賢
경서를 연구하여 깊은 도리 깨우치고 / 窮經玄理遂
고을에 베푼 선정 길이 전해지는도다 / 爲郡政聲傳
재신의 반열에서 원로 뒤를 따르다가 / 宰列趨黃髮
번화한 거리에선 주선을 또 압도했지 / 康衢倒酒仙
통달한 사람에게 불가할 것이 있으리요 / 達人無不可
실로 유유자적하게 왔다가 그냥 갈 뿐 / 來去信悠然

오 승지(吳承旨) 숙(䎘) 에 대한 만사
애석하도다 우리 오 승지여 / 可惜吳承旨
문장으로 사해에 이름을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세 차례나 관찰사로 공명을 수립했고 / 功名三按節
두 번이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지 / 使事再朝天
바야흐로 탄탄대로 달리리라 여겼는데 / 方見長途騁
강사의 나이에 그만 꺾이고 말았는가 / 飜摧强仕年
슬픈 만사 지어서 멀리 부치려고 하니 / 哀詞寫寄遠
남쪽 묘역에 비바람 소리 아득하오그려 / 風雨杳南阡

이지봉(李芝峯) 수광(睟光) 에 대한 만사
천황의 물결에 산악의 영기를 받으신 분 / 派出天潢岳降神
시풍은 성당이요 인품은 옥과 같았어라 / 盛唐詩調玉其人
맑고 고결한 명망으로 상의 은총 듬뿍 받고 / 淸脩標望傾宸眷
집안을 이은 문장으로 진신을 진동시켰다오 / 家世文章動搢紳
정사를 행할 당시 조감으로 일컬어졌는데 / 秉軸當時稱藻鑑
유혼이 어찌 느닷없이 별자리로 화했는가 / 游魂何遽化星辰
일찍이 말석에서 의범을 가까이 뵈었기에 / 曾陪席末親儀範
애사를 쓰노라니 눈물이 수건을 적십니다 / 手寫哀詞淚滿巾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韓公) 준겸(浚謙) 에 대한 만사
강과 바다처럼 아량이 넓고도 깊었던 분 / 雅量恢恢河海深
지고한 그 신념을 부귀가 흔들 수 있었으랴 / 巍然富貴豈能
그동안 경사와 복을 하늘이 거듭 내렸는데 / 由來慶福天申佑
갑자기 부음이 들리다니 명을 어찌 믿겠는가 / 一夕凶音命可諶
세상에 뛰어난 영기는 별자리로 돌아갔어도 / 間氣英靈還列宿
인후한 덕과 명성은 사람들 마음에 남았어라 / 仁聲厚德在人心
나를 알아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었거니 / 自惟知顧誠非偶
통곡하며 이제부턴 거문고 부수고 싶어라 / 慟哭從玆欲破琴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 원익(元翼) 에 대한 만사
일찍이 상림 일으켜서 사방에 은택을 입혔으니 / 曾作商霖澤四方
아동이 군실을 외우는 일을 잊을 수 있으리요 / 兒童君實誦何忘

두 조정을 섬기면서 삼존을 한 몸에 갖추시고 / 兩朝事業三尊備
십 년 세월을 고향 동산 일묘궁에서 보냈도다 / 十載丘園一畝荒

뛰어난 영기가 홀연히 우주로 되돌아갔으니 / 間氣倏驚歸宇宙
태산과 들보의 비통함을 백성이 어찌 견디리요 / 邦人無奈痛山樑
이 몸도 문생의 말석에 끼이는 행운을 얻었기에 / 愚蒙幸忝門生後
오늘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옷을 적십니다 / 此日題詞淚滿裳

김 지사(金知事) 선생 계도(繼燾)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 책을 끼고 문인으로 끼었는데 / 童年挾冊忝門人
손꼽아 헤어 보니 사십 년도 더 넘었네 / 屈指今餘四十春
회고해 보면 내 허명도 도시 가르쳐 주신 덕분 / 環顧虛名都是敎
그동안 조정의 높은 자리 어찌 까닭이 없으리요 / 從來窃位豈無因
당시에 배우던 이들도 대부분 황천객 되었는데 / 當時學子多重壤
선생께서는 장수를 누려 구순을 훌쩍 넘기셨네 / 高世遐齡過九旬
들보가 부러지고 태산이 무너진 이 아픔이여 / 梁木泰山嗟已矣
망연히 천지간에 서서 홀로 상심하노이다 / 茫然天地獨傷神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공(李公) 호민(好閔) 에 대한 만사
문장을 일찍 독점하며 독보의 명성 드날리다 / 早擅騷壇獨步名
영도에 추대되어 문단의 맹주로 오르신 분 / 推先瀛島主文盟
행조의 교서를 지어내자 군민이 눈물 흘렸고 / 行朝敎草軍民泣
빈관의 시를 읊조리자 사개가 깜짝 놀랐지요 / 儐館詩成使价驚
팔순이 넘는 연세는 예로부터 드문 일이요 / 八秩高年古來少
숭반의 높은 작위 역시 이 세상의 영광된 일 / 崇班峻級世間榮
문하에서 외람되게 기대를 해 주신 몸이기에 / 憶曾門下叨期許
오늘 애가를 부르려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此日哀歌倍愴情

정 판부사(鄭判府事) 광적(光績) 에 대한 만사
청년 시절 촉망 받으며 동방에 이름 날렸는데 / 靑春雅望聞吾東
벼슬길 들어선 이래로는 운수가 궁박하였어라 / 釋褐年來甲子窮
연치와 관작 둘 다 높아 조야에서 우러렀고 / 齒爵兩尊朝野仰
맑은 조행 한 절조는 시종 변함이 없었어라 / 淸脩一節始終同
전란의 와중에 배 타고서 멀리 피난 가시다가 / 孤舟遠避風塵際
떠도는 도중에 원대한 생각이 함께 꺾였구려 / 遐筭仍摧旅泊中
일찍이 부하 관원으로 어진 모습을 뵈었기에 / 曾忝下僚親德範
애사를 지어 부치려니 눈물이 하염없나이다 / 哀辭題寄涕無從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 에 대한 만사
도산의 자취 이어받고 고정의 마음 찾으면서 / 陶山遺躅考亭心
몇 년이나 산림 속에서 깊이 연구를 하던 중에 / 幾歲林泉玩索深
성군을 보좌하러 나와 보불을 빛나게 하고 / 出佐聖君光黼黻
문교를 오래 담당하며 청금을 교화시켰어라 / 久專文敎化靑衿

삽상한 기운이 아연히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고 / 俄然爽氣歸天地
새 저술만 홀로 남아 고금을 비추게 되었나니 / 獨有新篇照古今
남쪽 구름 슬피 보며 공연히 흘리는 눈물이여 / 悵望南雲空洒淚
이생에서 휘음을 다시는 들을 길이 없겠네요 / 此生無復聽徽音

월사(月沙) 이 상국(李相國) 정귀(廷龜) 에 대한 만사 2수
멀리 대당에서 유래한 가문의 출신으로 / 仙源遠自大唐來
어려서 온 누리에 문장의 이름 날리신 분 / 早歲文章播九垓
선조 때에 이미 일월의 빛을 의지했는데 / 已在先朝依日月
만년에 또 성군을 만나 염매가 되셨다오 / 晩逢明聖作鹽梅

사업이 빛나고 빛나서 아동들도 외우고 / 昭昭事業兒童誦
집안의 자제도 하나하나 한혈의 재질이라 / 一一門闌汗血才
영기가 홀연히 티끌 세상 버리고 떠나시니 / 爽氣忽遺塵世去
인간 세상에 통곡 소리만 천둥처럼 울리누나 / 人間謾有哭如雷

생각하면 옛날에 문하에서 배우던 날 / 憶昔摳衣日
지금 꼽아 보니 어언 사십 년 전이라 / 如今四十春
외람되게 뛰어올라 벼슬살이하는 동안 / 僣踰官序進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귀밑머리 희끗희끗 / 倏忽鬢毛新
보살펴 주신 은혜를 어찌 끝내 잊으리요 / 恩顧終何忘
이제는 휘음을 다시 들을 수도 없겠구나 / 徽音更莫親
강물 너머 길 따라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江外路
눈물을 흩뿌리며 한없이 통곡하나이다 / 洒涕慟無垠

신 진사(申進士) 광추(光樞)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상종하며 지냈던 몇 년 세월 / 與子相從歲幾遷
인친과 붕우의 의리 모두 완전하였어라 / 姻親朋友義俱全
거침없는 문장 솜씨는 사람들을 압도했고 / 文辭暢達超羣士
단정한 뜻과 행동은 옛 현인을 사모했지 / 志行端方慕古賢
뛰어난 재질이 언젠가는 쓰이리라 여겼는데 / 常謂美才當有用
운수가 기박해서 오래 못 사시니 어떡하오 / 奈何奇蹇竟無年
출세와 수명은 모두가 운명인 줄을 아오마는 / 窮通脩短知皆命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구려 / 到此那堪涕自漣

김 별좌(金別坐)에 대한 만사
그대와 이웃하며 십 년을 넘게 사는 동안 / 與子鄰居餘十載
머리칼은 눈처럼 희고 아이들도 다 자랐소 / 鬢毛如雪長兒童
근심 슬픔 이별 만남에 서로 보살펴 주었나니 / 憂哀離合情相恤
가난 질병 소외 오활은 우리 모두가 같았다오 / 貧病踈迂事亦同
열흘을 못 보다가 병석에 누웠다 들었는데 / 不見僅旬聞臥疾
무상한 세상 갑자기 떠나실 줄이야 알았겠소 / 那知浮世遽長終
가련토다 강남의 길로 돌아가는 만장이여 / 可憐歸旐江南路
침상에 엎드려 부질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 涕淚空流伏枕中

정 감사(鄭監司) 백창(百昌) 에 대한 만사
민첩하고 미묘한 겸인의 재질 발휘하여 / 敏妙兼人質
온 누리에 문장 솜씨 두루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드높은 그 재주 참으로 아까웠나니 / 高才誠所愛
불우할 때 서로들 또한 동정했었지 / 蹇劣亦相憐
꿈속의 일처럼 망망한 티끌 세상이요 / 塵世茫如夢
냇물이 흘러가듯 허망한 우리 인생이라 / 浮生逝若川
옛날 함께 지내던 일 돌이켜 생각하니 / 追思平昔意
애달픈 눈물만 줄지어 저절로 흐르누나 / 哀淚自漣漣

우 좌랑(禹佐郞)의 부인인 종숙모(從叔母)에 대한 만사
왕년에 공주에서 밥을 얻어 먹을 적에 / 昔歲公山就食辰
종숙모님이 나를 아낀다 매번 생각했지요 / 每思吾母愛諸親
작별한 뒤로 두 번 다시 뵙지를 못했는데 / 分散一生難再覿
놀랍게 부음을 들으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驚聞下世倍悲辛

박 철원(朴鐵原) 선()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친당의 인연 맺고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 生爲親黨且同年
동문으로 또 공부할 적에 사랑을 실로 독점했지 / 學又同門愛實專
먼 친척들까지도 화목한 의리를 모두 칭송하고 / 瓜葛共稱敦睦義
동향에도 은혜를 베푼 명성이 전해지고 있다오 / 桐鄕更說惠聲傳
어떡하다 만년에 들어 우리 서로 헤어졌는지 / 如何暮景飜相失
쇠잔한 내 육신 돌아보며 홀로 쓸쓸하였다오 / 顧我殘骸獨自憐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 한없이 통곡을 하면서 / 長慟從玆那復見
만사 한 편을 지으려니 눈물이 샘처럼 솟아나오 / 一篇哀挽涕如泉

이 김화(李金化) 진행(震行) 에 대한 만사
아 그대는 나보다 나이가 팔 년인가 아래로서 / 嗟君少我八年間
어려서부터 어울리며 자주도 왕래를 하였지요 / 幼長相隨幾往還
우리 모두 모친상 당해 간장이 끊어졌는데 / 二母終天腸已絶
아이였던 우리도 지금은 반백이 되었다오 / 兩兒於世鬢皆斑
풍진 속에 모진 고생 겪어 온 미관말직 / 風塵末宦多酸苦
독기 자욱한 남방에서 어려움도 많았지 / 瘴癘蠻鄕備險艱
애석해라 무상한 인생 여기에서 그치다니 / 可惜浮生其止此
눈 속에 장례를 보노라니 눈물만 흐릅니다 / 雪中看葬涕潸潸

이 판서(李判書) 천장(天章) 명한(明漢) 에 대한 만사
재상의 가문에서 난초 싹을 일찍이 보았나니 / 相門曾見茁蘭芽
소싯적부터 집안에 걸맞게 명성이 뛰어났지 / 少小英聲稱乃家

부자간에 대제학은 전에 듣지 못했던 일 / 兩世文衡前未有
당시의 총재로 그 누가 더할 수 있었으랴 / 當時冢宰孰能加
평생의 정의가 천륜에 비할 만도 하였건만 / 平生情義天倫比
만년엔 멀리 떨어져 서로 소식이 뜸했지 / 晩歲音塵地角遐
쌍벽의 부음을 갑자기 듣게 될 줄 알았으랴 / 何意遽聞雙璧隕
강해에 망연자실한 채 홀로 비탄에 잠기노라 / 茫然江海獨傷嗟

이 참판(李參判) 도장(道章) 소한(昭漢) 에 대한 만사
이 몸이 승상의 옛 문생으로 수업하며 / 吾爲丞相舊門生
기재가 일찌감치 꽃피는 걸 보았지 / 曾識奇才自夙成
가업인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고 / 家業文章名海宇
형제간에 조정의 공경 반열에 올랐다오 / 弟兄班序列公卿
하루아침에 아가위 꽃이 질 줄 알았으랴 / 一朝何意棠華盡
허망한 세상 참으로 목근의 영화와 같구나 / 浮世眞如木槿榮
백발이 다 된 고인이 멀리 떨어진 산야에서 / 白首故人山野遠
모질게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마음 부치노라 / 忍題薤露寄哀情

김 감찰(金監察) 도(濤) 에 대한 만사
옛날 이 몸이 구도할 적에 사람들 모두 비웃었지만 / 昔吾求道衆皆嗤
오직 그대만은 종유하면서 나를 가장 믿어 주었지 / 唯子從遊最信之
심오하고 미묘한 뜻 토론하며 희열에 잠기고 / 談討杳微看悅懌
속마음 털어놓으며 얼마나 어울려 다녔던가 / 洞開肝膽幾追隨
헤어진 십 년 세월 동안 공연히 생각만 하였는데 / 十年濶別空相憶
천리 밖에서 흉한 소식을 들을 줄 어찌 알았으랴 / 千里凶音豈所期
애석하여라 우리 선인을 어떻게 다시 또 볼거나 / 可惜善人那復見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끝없는 비통함 전하노라 / 臨風洒涕痛無涯

이 동지(李同知) 원득(元得)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장인의 항렬에서 뵈었는데 / 兒時曾見丈人行
인친 관계 맺고 나서는 연치도 잊었지요 / 逮結姻親齒亦忘
이른 나이로 학궁에 성대히 떨친 명성이요 / 早歲盛名傳泮璧
지금까지도 동향에선 은혜를 못 잊어 한다오 / 至今遺愛在桐鄕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조리 토로하였고 / 逢來每寫心肝盡
안부 묻고는 체력이 강해서 항상 기뻤지요 / 問及常欣體力强
오래 사시는 데에 장애가 있을 줄 알았으랴 / 何意高年還有限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홀로 슬픔에 젖나이다 / 臨風洒泣獨悲傷

황 참봉(黃參奉) 종해(宗海) 에 대한 만사
명성이 자자하였건만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 早謝科場藉甚名
산림 속에서 은거하며 한평생을 보내셨네 / 棲遲林壑度平生
경서의 뜻을 음미하며 즐긴 단표의 낙 / 遺經有味簞瓢樂
천작이 존귀하니 녹위는 가벼웠고말고 / 天爵爲尊祿位輕
세상을 벗어나 고사전에 길이 기록될 분 / 世外長留高士傳
구름 사이에 홀연히 소미의 빛이 가려졌네 / 雲間忽晦少微精
한번 뵙지도 못했으니 탄식한들 어이하리 / 終孤一見嗟何及
그저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심정을 부칩니다 / 謾寫哀詞寄此情

윤 참의(尹參議) 황(煌) 의 부인에 대한 만사
우뚝하여라 대를 이은 종유의 집안이요 / 卓卓宗儒世
성대하여라 올곧은 선비의 명성이었네 / 振振直士名
한 가문이 한 나라의 기대를 받는 가운데 / 門庭望一國
평생이 기록될 만한 부녀의 모범을 보였네 / 壼範記平生
자제들에게 시서의 업을 닦게 하면서 / 諸子詩書業
삼종의 도덕과 의리를 밝히셨다오 / 三從德義明
연세도 높으시어 여든에 이르렀으니 / 高年又八秩
이만하면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으리라 / 斯可沒而寧

박 풍덕(朴豐德) 대화(大華) 의 모부인(母夫人)에 대한 만사
당 나라에서 건너온 명문 집안의 후예로서 / 仙系唐家苗裔延
가정의 법도가 모범이라 모두 칭찬하였다오 / 閨門懿範共稱賢
영원의 지위와 명망은 중국에서도 흠모했고 / 鴒原位望華夷慕
오조의 은혜와 영광은 군읍으로 이어졌어라 / 烏鳥恩榮郡邑連
연세도 구순이신지라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 壽考九旬尊旣達
손자도 십여 명인지라 경사가 끊이지 않으리라 / 孫曾十數慶將綿
하늘의 수명을 다 누렸으니 무슨 유감 있으리요 / 天年歸盡終何憾
세상만사 모두 잊고 영원히 안식을 취하시라 / 深閉松楸萬事捐

김 평창(金平昌) 정립(正立)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같은 동네 게다가 동갑이라 / 兒時同井又同庚
죽마고우로 형제처럼 어울려서 노닐었지 / 葱竹交遊若弟兄
오랜 이별 부평초 신세를 매양 한탄하면서 / 每恨萍蹤長作別
쇠잔한 인생 흰머리를 함께 동정하였어라 / 共憐霜髮已殘生
지난달에 편지 보내 안부를 삼가 물었는데 / 前月書來勤問訊
일조에 유명을 달리해 부음을 듣게 되다니 / 一朝音至間幽明
낙산 동쪽 옛 친구들 거의 세상 떠난 지금 / 駱東舊友今殆盡
통곡하노라 도성 가득 눈 덮인 차디찬 언덕 / 慟哭寒原雪滿城

남 정승(南政丞) 이웅(以雄) 에 대한 만사
애석하여라 우리 남 승상이여 / 可惜南丞相
훤칠하게 장자의 풍모를 갖추신 분 / 頎然長者風
일생을 거나한 술기운 속에 숨기고서 / 一生逃酒域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곤 하였어라 / 萬事付天公
지금 다행히도 성군의 시대를 만났는데 / 方幸明時遇
이것이 웬일이요 수명이 그만 다하다니 / 俄驚大限窮
이제부턴 서로들 만나 볼 수 없겠기에 / 今來不相見
가을 하늘 바라보며 눈물을 뿌립니다 / 洒淚向秋空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주상께서 반정하고 즉위하시던 그날에 / 昔在龍飛日
원로의 반열에서 함께 어울렸던 사이 / 翶翔鵷鷺行
관아의 동료로 근무한 것이 몇 해였던가 / 幾年同一署
만년에는 타향에 서로 떨어지게 되었어라 / 晩歲隔他鄕
만나고 헤어짐을 어떻게 예정을 하겠소만 / 離合何能定
이렇게 빨리 바쁘게도 유명을 달리하다니요 / 幽明倏爾忙
지금 와서 장례식 소식을 전해 듣고서 / 今來聞大葬
서쪽 하늘 바라보며 홀로 슬퍼하오이다 / 西望獨悲傷

조 지사(趙知事) 위한(緯韓) 에 대한 만사
견수하는 영광을 얻은 그 뒤로 / 自獲肩隨後
지금 헤어 보니 어언 사십 년 / 如今四十年
청담을 나눴던 옛 추억만 생각하며 / 淸談思宿昔
산천에 막힌 채 오래 이별하였어라 / 離濶隔山川
이제 상유에 저녁 햇빛이 비치는 때 / 及此桑楡暮
안개 이슬보다 앞설 줄 어찌 알았으랴
 / 何知霧露先
슬프다 어떻게 또 뵐 수나 있으리요 / 可嗟那復見
부질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 徒爾涕漣漣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그대와 종유한 뒤로 해가 몇 번 바뀌었던가 / 與子遊從歲幾遷
반생에 걸친 우리 우정 어찌 우연이었으리 / 半生情好豈徒然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고 / 相逢每倒心肝吐
오래 헤어졌어도 자주 편지를 전했지요 / 久別頻勞手字傳
지난겨울 병문안하며 얼굴도 보지 못하고서 / 問疾前冬顔莫接
오늘 영구를 대하려니 눈물만 공연히 흐르누나 / 臨柩此日涕空漣
해마다 잇따라 친구들의 죽음을 곡하다니 / 年年連哭親朋逝
백발의 이 인생 홀로 남아 가엾기만 해라 / 白首人間獨自憐

청음(淸陰) 김 상국(金相國)에 대한 만사
옥 같은 바탕 온유해라 바라보면 신선인 듯 / 玉質溫溫望若仙
한 시대의 청론을 누가 앞설 수 있었으랴 / 一時淸論孰能前
중화와 오랑캐 모두 목격한 당당한 절의요 / 堂堂節義華夷見
온 누리에 두루 전해진 광명정대한 문장이라 / 炳炳文章海宇傳
재상의 지위 높은 연세 우러름을 받은 위에 / 極位遐齡人所仰
고명과 덕행으로 아름다움을 독점하신 분 / 高名懿行美尤專
음성과 용모를 이제는 영원히 접할 수 없겠기에 / 音容自此長相隔
추천에 통곡을 하노라니 눈물이 샘처럼 흐릅니다 / 慟哭秋天涕似泉

송 첨정(宋僉正) 자심(子深)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와 어울려 노닌 오십 년 세월 / 與子交遊五十秋
둘 다 어느새 흰 눈이 머리에 가득 / 居然俱至雪盈頭
몸은 시와 술 속에 잠겨 시일을 보내고 / 身潛詩酒遣時日
뜻은 청고를 숭상하여 속류를 벗어났네 / 志尙淸高遠俗流
금세에 누가 나처럼 마음을 알아주었으랴 / 今世知心誰似我
이생에 나도 기쁜 벗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 / 此生懽遇更無由
북쪽을 보며 통곡하는 기막힌 이 심정이여 / 北望慟哭情何極
비바람 소리만 쓸쓸하게 바닷가를 채우누나 / 風雨蕭蕭滿海陬

이 참판(李參判) 경헌(景憲) 에 대한 만사
공의 형제와는 예전부터 친했나니 / 與公兄弟舊相親
집안끼리 혼인을 일찍 맺었음이라 / 爲是門闌早托姻
멀리 떨어져 소식을 몰라 걱정하던 중에 / 離濶每愁音信斷
만나고 보니 둘 다 늘어난 하얀 머리카락 / 逢來俱是鬢毛新
옛날 아껴 준 은근한 정을 추억하였는데 / 慇懃眷厚思前日
오늘 갑자기 이승 저승 이별을 하다니요 / 倏忽幽明隔此辰
붉은 만장 나부끼며 떠나가는 광릉의 길 / 丹旐翩翩廣陵道
만사 써서 부치면서 홀로 수건을 적십니다 / 哀詞書寄獨沾巾

정 판서(鄭判書) 광성(廣成) 에 대한 만사
선을 쌓은 어진 명성 대대로 전하면서 / 積善仁聲世共傳
오공 사대의 경사를 계속 이어 왔어라 / 五公四代慶連延

중년에 속세 벗어나 운해에서 머물다가 / 中年高蹈棲雲海
만년에 특은을 받고 일변으로 돌아왔네 / 晩歲殊恩返日邊

세 아들 대과에 급제한 일도 드물다 할 것인데 / 三子大科聞亦少
수태의 봉양을 또 받은 것은 전에 없었던 일 / 首台榮養見無前

여든의 장수 누리고서 자연의 변화를 따랐으니 / 遐齡八十聊乘化
이 같은 복록을 이 세상에서 그 누가 견주리요 / 福祿人間孰比肩

황 서윤(黃庶尹) 위(暐) 에 대한 만사
진양성에서 떨친 정충의 대절이여 / 精忠大節晉陽城
해내에 만고토록 그 명성 드리우리 / 海內長垂萬古名
경사가 남아 후손이 출중한 재질 발휘하여 / 餘慶後孫才出類
사과에서 장원하여 마침내 이름을 치달렸네 / 詞科第一遂馳聲
이제 선조의 뜻을 따라 진충보국하려는 차에 / 方期盡瘁追先志
중년에 세상을 마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으랴 / 何意中身隕此生
하늘의 도가 이런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볼까 / 天道如斯誰可問
공연히 슬픈 만사 지어 나의 심정을 부치노라 / 空將哀挽寄吾情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에 대한 만사
모교와 의가 양쪽 모두 재상의 가문 / 姆敎宜家摠相門
당시의 명문으로 누가 이보다 높았으랴 / 當時名閥更誰尊
성녀를 독생하여 휘음을 멀리 전했나니 / 篤生聖女徽音遠
곤궁에서 정덕하여 세상을 교화시켰도다 / 正德坤宮俗化敦

모두들 인덕이 심후하여 장수하리라 여겼는데 / 共謂深仁遐壽享
물처럼 빨리도 흘러가는 인간 세상을 어찌하랴 / 奈何人世逝川奔
오늘 나의 비통함이 어째서 끝이 없냐 하면 / 胡爲此日悲無已
명공과 일찍이 의형제를 맺었던 사이니까 / 曾與明公義弟昆

경 세마(慶洗馬) 대후(大後)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 혼인하던 청춘의 모습 생각나는데 / 憶君姻好在靑春
벌써 육순 가까운 쇠한 얼굴로 변하다니 / 已見衰顔近六旬
일생을 믿고 따르면서 속마음 토로하였나니 / 信向一生惟照膽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 離違兩地幾勞神
반갑게 만나 담소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 相逢懽笑纔經月
흉한 소식이 오늘 갑자기 전해질 줄 알았으랴 / 豈意凶音遽此辰
하늘이 어째서 이와 같이 선인에게 보답하나 / 天與善人何若是
평소의 일을 추억하며 홀로 수건을 적시노라 / 却思平日獨沾巾

정 참판(鄭參判) 홍명(弘溟) 에 대한 만사
나도 문장 잘하는 선비를 알아보고서 / 我識文章士
왕년에 어울려 노닌 적이 있었더랬는데 / 交遊在昔年
장공은 벌써 길고 긴 어둠 속으로 / 張公已窀穸
이자 역시 차가운 땅 깊은 곳으로 / 李子亦寒阡

지금 홀로 기옹 노인이 남아 계셔서 / 獨有畸翁老
산골과 해변에서 서로 그리워하였는데 / 相思嶺海邊
흉한 소식이 지금 또 나에게 전해지다니요 / 凶音今又至
남쪽 하늘 바라보며 샘처럼 눈물 흘립니다 / 南望淚如泉

김 청주(金淸州) 효성(孝誠) 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친척이라 / 落地爲親戚
우리 서로 따르면서 진심을 나눴는데 / 相從共赤心
어찌된 일인가 쇠하고 병든 이날에 / 如何衰病日
영원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다니 / 聞此永歸音
상소하여 직언한 명성 멀리 전해지고 / 抗疏聲名遠
분우하여 펼친 혜택이 깊기만 한데 / 分憂惠澤深
뜬구름처럼 모든 일이 끝나버렸기에 / 浮雲萬事已
통곡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노라 / 慟哭涕沾襟

현생 위(玄生偉)에 대한 만사
옛날 내가 장가들려고 신부 고을에 들어갈 때 / 昔吾迎婦入新鄕
어린아이 자네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었지 / 見子髫年立在傍
왕년의 번화했던 곳도 모두 적막하게 되고 / 往歲繁華皆寂寞
당시의 친척들 역시 지금은 전부 영락했네 / 當時親戚盡凋亡
살 비비며 지내던 옛 추억 아련히 떠오르는데 / 磨肌遠記平生舊
나를 버리고 바쁘게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 棄我何期一夕忙
인간 세상 백발노인 끝없이 흘리는 눈물이여 / 白首人間無限淚
북풍이 몰아치는 날에 앞 언덕 어리어 비치누나 / 北風吹日照前岡

정생 종(鄭生琮)에 대한 만사
세상에 나온 것도 똑같은 해요 / 生世旣同年
옛날에 살던 집도 똑같은 동네 / 舊廬又一里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적에도 / 徙居雖異鄕
바라보이는 거리라서 역시 가까워 / 相望亦自邇
때때로 서로들 왔다 갔다 방문하며 / 有時來相訪
못 잊어 하는 우정이 그지없었어라 / 眷眷情無已
지금에 와선 똑같이 백발이 되었지만 / 於今共白首
근력이 나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라서 / 筋力非我比
백 살쯤은 너끈히 살 것이라고 여겼는데 / 謂當至期頤
한번 병에 걸리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네 / 一疾奄不起
지란이 눈앞에 가득한 속에 / 芝蘭滿眼前
두 자제가 등제하여 현달하였고 / 二郞登顯仕
자손들도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요 / 兒孫至難卞
향리에선 연치로 존경을 받았지 / 鄕黨尊其齒
광휘가 마을을 환히 비치는 가운데 / 光輝照閭巷
고당에서 많은 복을 향유하였나니 / 高堂享多祉
분분히 태어나서 죽어 가는 그 사이에 / 紛然生及死
몇 사람이나 이런 행운을 누렸겠는가 / 幾人能若是
생각건대 그대는 아무런 유감없이 / 想君無所憾
기꺼운 마음으로 황천으로 가겠지만 / 怡然泉壤裏
친척과 벗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소 / 唯是親與舊
통곡하며 비애를 금하지 못한다오 / 戚戚悲不止
나이가 같은 사람이 홀연히 가셨으니 / 同甲去倏爾
이 몸도 얼마나 더 이승에 머물겠소 / 我亦豈久此
지금 상여가 떠난다는 소식 듣고 / 今聞柳車行
만사 지어 이 심정을 표하나이다 / 此情書作誄

이생 격(李生格)에 대한 만사
정암의 의리 정신 우리 동방에 우뚝하니 / 靜庵行義表吾東
그 후예가 범인들과 다른 것도 당연한 일 / 後裔於人自不同
고상한 생각 담담하여 세상길 멀리 벗어났고 / 澹澹高懷知遠俗
인자한 마음 따뜻해서 위급한 사람을 도와줬네 / 溫溫惠意喜周窮
생각나면 찾아와서 정다운 눈빛 보여 주며 / 有時命駕開靑眼
몇 번이나 술잔 들고 진심을 토로하였던가 / 幾度含盃話赤衷
애석하도다 이제는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 可惜自今那復見
만사 지어 부치려니 눈물만 끝없이 흐르네 / 哀辭題寄涕無從

배생 종도(裵生宗度)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늘이 낸 뛰어난 재질 이 세상에 드문 터에 / 天生美質世間稀
부자가 서로 이었으니 더더욱 희한하다 하리 / 父子相仍益見奇
백리 길 짊어진 정성이 지극했음은 물론이요 / 百里勤勞誠旣竭
물 마시고 쌀독이 비어도 낯빛이 화락하였다오 / 一瓢空匱色常怡
잠깐 한때만 헤어져도 일각이 삼추 같았는데 / 乍離時月如三歲
갑자기 유명 달리하여 영결할 줄이야 알았으랴 / 何意幽明遽永辭
끝났도다 이제 현탑을 다시 내릴 수 있겠는가 / 已矣更無懸榻下
바람 앞에 눈물 뿌리며 애사를 지어 부치노라 / 臨風洒涕寄哀詞

종제(從弟) 학(翯)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날엔 한집에서 함께 웃고 즐겼는데 / 去日同堂懽笑人
어찌하여 오늘 밤엔 볼 수가 없단말가 / 何爲今夕見無因
나의 인생도 어느덧 서산에 해가 지는 나이 / 吾生已迫西山暮
세상에서 마음 아픈 일 얼마나 또 남았으랴 / 在世傷懷亦幾辰

[주D-001]역복(曆服) : 구원(久遠)한 사업이라는 뜻으로 왕위(王位)를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끝없이 큰 역복을 이어받았다.〔嗣無疆大歷服〕”고 한 성왕(成王)의 말에 대해서, 보통 역(歷)은 구(久)요 복(服)은 사(事)로 풀이하는데, 채침(蔡沈)은 역은 역수(歷數)요 복은 오복(五福)이라고 해설하였다. 역(歷)은 역(曆)으로 쓰기도 한다.
[주D-002]주항(周行) : 원래는 주 나라 조정 신하들의 자리를 뜻했는데, 뒤에 조정의 반열(班列)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3]백성들을 …… 듯하셨도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보기를 다친 사람 보는 것처럼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었다.〔文王 視民如傷〕”는 말이 나온다.
[주D-004]상서(庠序) : 국가의 교육 기관을 말한다. 하(夏) 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고, 은(殷) 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하였고, 주(周) 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05]초분(楚氛) : 남쪽으로 침입한 왜적의 진영에서 발산되는 요기(妖氣)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7년에 “남쪽에 있는 초 나라 진영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니, 장차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楚氛甚惡 懼難〕”는 말이 나온다.
[주D-006]멀리 …… 되었도다 : 선조(宣祖)가 의주(義州) 방면으로 피난길을 떠난 것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당하여 검각(劒閣)을 넘어서 촉(蜀) 땅으로 피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7]정수(鼎水)에 …… 우거졌나니 : 선조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상고 시대에 황제(黃帝)가 정호(鼎湖)에서 솥을 만들어 연단(鍊丹)을 하다가 그 일이 완성되자 신하들과 함께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고,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산(蒼梧山) 밑에서 붕어(崩御)하여 그곳에 장사 지낸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08]슬퍼라 …… 인생이여 : 《장자》 지북유(知北游)에 “천지간의 인생이란 마치 하얀 망아지가 담장의 틈새를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전장(典章)과 …… 있고 : 선조가 남긴 훌륭한 제도와 법률이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밝고 밝으신 우리 선조는 만방의 임금이시니, 전장과 법도를 마련하시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셨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는 말이 나온다.
[주D-010]안 계셔도 …… 가운데 : 선조가 세상을 떠났어도 백성들이 그 덕을 잊지 못하고 사모한다는 말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아 예전의 임금님을 잊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시가 있는데, 치자(治者)는 그 임금님이 어질게 대해 준 것을 어질게 여기고 친하게 대해 준 것을 친하게 여기며, 피치자(被治者)는 그 임금님이 즐기게 해 준 것을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해 준 것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셨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戱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이괘(離卦)의 …… 일어났으니 : 밝고 밝은 임금이 출현했다는 뜻으로,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을 가리킨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밝음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이 이괘의 상이다. 대인은 이로써 밝은 것을 이어서 사방에 비춘다.〔明兩作 離 大人 以 繼明 照于四方〕”는 말이 나온다.
[주D-012]뜻을 …… 준수하며 : 인조가 선조의 효손(孝孫)으로서 선조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효라고 하는 것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모훈은 《서경》에 나오는 요전(堯典) · 대우모(大禹謨) · 이훈(伊訓) · 탕고(湯誥) 등의 글을 병칭한 전모훈고(典謨訓誥)의 준말로, 보통 성현의 말씀이나 경전의 글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선왕의 법도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13]약상(禴嘗) : 약사증상(禴祠蒸嘗)의 준말로, 종묘에 지내는 사계절의 제사 이름이다.
[주D-014]물이 …… 의논하였어라 : 인조(仁祖) 8년(1630)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에 물 기운이 있다는 이유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의논이 조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목릉이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원주 목사(原州牧使)인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여 “목릉은 땅이 풍수지리상 길하지 못하고 게다가 물 기운이 있다.”고 하자, 마침내 건원릉의 두 번째 산등성이로 천릉(遷陵)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과적으로는 능의 봉분 안이 건조하여 조금도 습기가 없었으므로 비평을 면치 못했던 사실이 있다. 주 나라 계묘(季墓)는 주 문왕(周文王)의 부친인 왕계(王季)의 무덤을 가리킨다. 왕계를 와수(渦水) 서쪽에 안장했는데, 난수(欒水)가 무덤을 침입하여 관곽이 밖으로 드러나자, 문왕이 “선군(先君)께서 아마도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하고는, 사흘 뒤에 다시 장례를 치른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水囓王季墓》 송 나라 황당(皇堂)은 송 인종(宋仁宗)의 능을 가리킨다. 황제의 능을 황당이라고 한다. 인종을 영소릉(永昭陵)에 안장하기 며칠 전에 황당의 기둥이 파손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숨기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하고 반박하면서 시일을 어기더라도 다시 보수하여 장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皇堂棟損》
[주D-015]상설(象設) : 생전의 거처를 본떠서 건물을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능소(陵所)의 침전(寢殿)을 가리킨다.
[주D-016]임금님 …… 하였나니 : 장례를 행할 적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신실하게 하여 결코 후회됨이 없도록 하라〔必誠必信 勿之有悔焉耳矣〕’고 자사(子思)가 거듭해서 당부한 말이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보인다.
[주D-017]만물에 …… 총명함과 :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제왕의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건도(乾道) 즉 제왕의 도를 논하면서 “만물에 으뜸으로 나옴에 만국이 모두 편안하도다.〔首出庶物 萬國咸寧〕”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D-018]삼왕(三王) :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을 말한다.
[주D-019]어렵고 …… 계승하여 : 《서경》 대고(大誥)에, “내가 하는 일은 하늘이 시키신 것이다. 하늘이 내 몸에 크고 어려운 일을 물려주고 던져 주셨다.〔予造天役 遺大投艱于朕身〕”고 한 주 성왕(周成王)의 말이 나온다.
[주D-020]비렴(飛廉) : 은(殷) 나라의 폭군 주(紂)에게 아첨을 하여 총애를 받은 신하의 이름으로, 광해조(光海朝) 때의 권신(權臣)들을 가리킨다.
[주D-021]창읍(昌邑)은 …… 유배하였으며 : 광해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했다가 다시 제주도(濟州道)로 이배(移配)한 것을 말한다. 창읍은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劉賀)를 말한다.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곽광(霍光)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행동이 음란하기 그지없어 즉위 27일 만에 태후(太后)의 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주D-022]성모(聖母) :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말한다.
[주D-023]덕정(德政)에 …… 신속하고 : 《중용장구》에 “정치의 효과는 빨리 자라는 갈대처럼 신속하게 나타난다.〔夫政也者 蒲盧也〕”는 말이 있다.
[주D-024]비(否)와 …… 것이라서 : 세상일의 성쇠(盛衰)와 운명의 순역(順逆)이 극에 이르면 서로 뒤바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비괘(否卦)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태괘(泰卦)는 그 반대로 만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주D-025]하늘의 …… 않았던가 : 요(堯) 임금 때의 9년 홍수와 탕왕(湯王) 때의 7년 가뭄을 말한다.
[주D-026]완악한 …… 않았던가 : 순(舜) 임금과 우왕(禹王)이 삼묘(三苗)를 정벌한 일과 귀순시킨 일 등이 《서경》 순전(舜典) · 대우모(大禹謨) · 익직(益稷) 등에 나온다.
[주D-027]정호(鼎湖)에 …… 감도누나 : 인조의 죽음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정호는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호수 이름이고, 몽사(濛汜)는 해가 지는 곳을 말한다. 우위(羽衛)는 왕의 의장(儀仗)을 가리키고, 운소(雲韶)는 황제(黃帝)의 음악인 운문(雲門)과 순 임금의 음악인 대소(大韶)를 병칭한 것이다. 제향(帝鄕)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보통 제왕의 서울을 말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황제의 만사에 “정호의 용은 점점 멀리 사라지고, 몽사에는 태양이 지금 막 잠겼어라. 오직 운소의 음악만이 뒤에 남아서, 치세의 정음을 길이 전해 주누나.〔鼎湖龍漸遠 濛汜日初沈 唯有雲韶樂 長留治世音〕”라는 구절이 보인다. 《白樂天詩集 卷16 開成大行皇帝挽歌詞 三》
[주D-028]상자(向子) : 후한(後漢) 상장(向長)의 존칭으로, 자(字)는 자평(子平)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낸 뒤에 오악(五岳)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생을 마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向長列傳》
[주D-029]봉맹(逢萌)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이다. 왕망의 시대에 인륜이 끊어졌다고 탄식하면서 관(冠)을 벗어서 동도문(東都門)에다 걸어 놓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요동(遼東)에 정착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 즉위 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수양을 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後漢書 卷83 逢萌列傳》
[주D-030]계운궁(啓運宮) :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부인으로 인조(仁祖)의 생모이다. 인조 4년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에 정원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될 적에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존호가 가해졌다. 좌찬성(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주D-031]나라를 …… 재촉했네 : 왕의 모친으로서 오래도록 효도를 받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효자의 일 가운데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어버이를 높이는 일 가운데에는 천하를 받들어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런데 천자의 부친이 되었으니 최고로 높임을 받은 것이요, 천하를 받들어 봉양을 하였으니 최고로 봉양을 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백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수명이니, 자손들은 최대한으로 어버이를 봉양해야 마땅하다.〔百年曰期 頤〕”는 말이 나온다.
[주D-032]풍초(風草)처럼 …… 알리로다 : 계운궁이 모범을 보이자 아랫사람들이 이를 본받아서 모두 교화되었다는 말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윗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람과 같고, 아랫사람이 이를 본받는 것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3]이팔(二八)의 …… 올랐어라 : 팔원(八元) · 팔개(八愷)와 같은 뛰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조정에 진출했다는 말이다. 팔원은 상고 시대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8인을 말하고, 팔개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8인을 말하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그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주D-034]학궁(學宮)에선 …… 하였어라 : 정엽이 대사성(大司成)으로서 학제(學制)를 개정하는 등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고, 대사헌(大司憲)을 다섯 차례나 맡으면서 관원의 기강을 엄하게 확립한 것을 말한다.
[주D-035]일찍이 …… 있었기에 : 포저가 언젠가 정엽이 주선해 준 덕으로 원하던 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전한(前漢)의 위발(魏勃)이 제상(齊相)으로 있던 조참(曹參)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조참의 사인(舍人)의 대문 앞을 청소해 준 인연으로 조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내사(內史)에 임명된 이른바 ‘소문(掃門)’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2 齊悼惠王世家》
[주D-036]파산(坡山)에서 …… 전해졌네 :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의 학덕을 기린 말인데, 모두 파주(坡州)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문준은 성혼의 아들이다.
[주D-037]기애(耆艾)의 연세 : 60대의 나이를 말한다. 나이 60을 기(耆)라 하고, 50을 애(艾)라 한다.
[주D-038]곧은 …… 같아서 : 공자가 위(衛) 나라 대부(大夫) 사어(史魚)에 대해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다.〔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라고 칭찬한 말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39]천하의 …… 알았거니 : “천하의 뛰어난 선비만이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벗할 수 있는 법이다.〔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라는 말이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
[주D-040]선인(善人)을 …… 허언(虛言)이라 :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의 도에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지만, 항상 선인과 함께하며 도와준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혹자(或者)의 말을 소개한 뒤에, 이와 어긋나는 여러 가지 예를 거론하면서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질문했던 내용이 《사기(史記)》 백이 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주D-041]종기(鍾期) : 종자기(鍾子期)의 준말로, 지기(知己)를 뜻한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042]고경(孤卿) :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관직으로, 보통 고관(高官)을 뜻한다.
[주D-043]마음가짐이 …… 할까 : 자기 자신은 깨끗하면서도 주위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며 조화되는 성격이었다는 말이다. 혜와 이는 화성(和聖)으로 일컬어지는 유하혜(柳下惠)와 청성(淸聖)으로 일컬어지는 백이(伯夷)를 가리키는데, 백이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자도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도 뜻을 세우게 되며, 유하혜의 풍도를 들은 자는 각박한 자도 돈후해지고 비루한 자도 관대해진다는 말이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주D-044]끊어졌던 …… 않자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 송유(宋儒)들에 의해서 재해석된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의 깊고 넓은 학문 세계를 말한다.
[주D-045]모난 …… 법 : 군자와 소인은 속성상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구멍은 둥근데 자루는 모가 나니, 서로 어긋나 들어가지 못할 것을 내 진정 알겠도다.〔圜鑿而方枘兮 吾固知其鉏鋙而難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범로(范老)가 …… 일치하였는데 : 범로는 소범 노자(小范老子)의 준말로,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陝西經略使)로 나가서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적에, 강족(羌族)이 그를 존경하여 용도 노자(龍圖老子) 혹은 소범 노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흉중에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두려워하며 감히 침범을 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또 범중엄이 소싯적에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훌륭한 정승이 될 수 없다면, 반드시 훌륭한 의원이 될 것이니, 의술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구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吾不能爲良相 必爲良醫 以醫可以救人也〕”라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광사유부(廣事類賦)》에 나온다.
[주D-047]한번 …… 있어 :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그런 사람들은 언뜻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 속에 도가 들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若夫人者 目擊而道存〕”는 말이 나오는데,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여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지기(知己)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48]정장(鄭莊) : 전한(前漢)의 정당시(鄭當時)를 말한다. 장(莊)은 그의 자(字)이다. 양(梁)과 초(楚) 사이에서 임협(任俠)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람들을 사귀기를 좋아하여 장안(長安)의 사방 교외에다 역마(驛馬)를 비치하고는 귀천을 막론하고 손님들을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는데, 그와 교제하는 사람들 모두가 천하의 명사(名士)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0 鄭當時列傳》
[주D-049]난초 …… 같았나니 : 마음을 같이하는 벗이라는 뜻이다.《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이 나온다.
[주D-050]빨리 …… 해도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빨리 가난해지려고 하는 것이 낫고, 사람이 죽으면 빨리 썩게 하는 것이 낫다.〔喪欲速貧 死欲速朽〕”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51]경수(瓊樹) : 옥 나무라는 뜻으로, 인품이 고결하여 항상 사모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태위(太尉) 왕연(王衍)의 자태에 대해서 ‘요림 경수(瑤林瓊樹)’라는 표현을 쓰면서 비롯되었다. 《晉書 卷43 王戎傳》
[주D-052]밥상을 …… 탄식하였어라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남의 초상을 당해서는 “밥상을 대하고 먹을 적에 탄식을 하지 않는 법이다.〔當食不歎〕”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53]취산(聚散) :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는 현상을 말한다.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라는 말처럼 생사(生死)와 같은 뜻으로 곧잘 쓰인다.
[주D-054]혜자(惠子)의 …… 슬퍼했고 : 장자(莊子)가 친구인 혜시(惠施)의 묘소를 지나가다가 종자(從者)에게 운근성풍(運斤成風)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비감에 젖었던 고사가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온다. 그 이야기는, 초(楚) 나라 장석(匠石)이 자기 짝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살짝 발라 놓고는 자귀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서 흙만 떼어 내고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곤 했는데, 자기 짝이 죽고 나서는 그 솜씨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D-055]종기(鍾期)가 …… 버렸나니 : 종기(鍾期)는 종자기(鍾子期)의 준말로, 지기(知己)를 뜻한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056]도봉(道峯) : 충청도 아산군(牙山郡) 신창현(新昌縣)의 도고산(道高山)을 말한다.
[주D-057]그 당시 …… 끊었는데 : 《주역》의 비괘(否卦)와 같은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환멸을 느끼고서 세상을 떠나 혼자 절의(節義)를 지키며 숨어 살기로 다짐했다는 말이다. 비괘의 상사(象辭)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힌 것을 비라고 한다.〔天地不交 否〕”는 말이 나온다. 또 비괘(賁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에 “자기의 발걸음을 아름답게 함이니, 수레를 버리고서 발로 걸어간다.〔賁其趾 舍車而徒〕”고 하였고, 그 상(象)에 “수레를 버리고 걸어가는 것은 의리상 수레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舍車而徒 義弗乘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차라리 벼슬을 그만두고 빈궁하게 살지언정 의리를 굳게 지키는 군자의 길을 제시한 말이다.
[주D-058]오도(吾道)를 …… 올라가고 :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그 근원이라 할 공맹(孔孟)의 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유학을 한번 정리해 보았다는 말이다.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두 강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에서 그가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곧잘 유가(儒家)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59]반마(班馬) :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의 병칭이다.
[주D-060]이 몸도 …… 나왔는데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그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내던 인재들이 조정에 나올 적에 포저도 함께 진출했다는 말이다. 《주역》 태괘(泰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에 “서로 엉켜 있는 띠풀의 뿌리가 뽑혀 올라오듯, 어진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나아가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 征吉〕”는 말이 나온다.
[주D-061]사람의 …… 하루살이요 : 소식(蘇軾)의 ‘전 적벽부(前赤壁賦)’에 “하루살이 목숨으로 천지 사이에 붙어 있는 인생, 망망한 바다 속 조그마한 좁쌀 한 알이로다.〔寄蜉蝣於天地 渺蒼海之一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세상만사도 …… 것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세상의 일을 보면,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이 다르고,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데 생각은 가지각색이다.〔天下 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라는 말이 있다.
[주D-063]장수(長壽)와 …… 것인데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상자보다 장수한 자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팽조도 요절했다고 할 수도 있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는 말이 나오는데, 상자는 19세 이하의 어린 나이로 죽은 자를 가리키고, 팽조는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으로 800세의 장수를 누렸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주D-064]솔 아래 땅 : 땅속의 무덤을 가리킨다. 묘지에 소나무를 많이 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옛날에는 술을 꽤나 좋아하시더니, 지금은 솔 아래 진토가 되셨구려.〔昔好盃中物 今爲松下塵〕”라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2 對酒憶賀監》
[주D-065]옥수(玉樹)가 …… 듣고 : 부음(訃音)을 접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죽었을 때, 하충(何充)이 “옥 나무가 땅속에 묻히는구나.”라면서 탄식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傷逝》
[주D-066]기린각(麒麟閣)의 …… 속하였고 : 그가 형제 중에서도 특히 걸출하여 공신(功臣)의 봉호(封號)를 받고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기린각에 걸어 놓게 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附 蘇武傳》 또 삼국 시대 촉(蜀) 나라 마량(馬良)이 다섯 형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있었으므로 백미(白眉)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蜀志 馬良傳》
[주D-067]반룡(攀龍)의 …… 월등했네 :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을 세웠다는 말이다. 반룡은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을 따라 공을 수립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의 “용의 비늘을 그러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68]우도(牛刀)를 …… 중에 :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어 불우하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鷄焉用牛刀〕”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論語 陽貨》
[주D-069]어찌하여 …… 재촉하였는가 : 오래 살지 못하고 병이 들어서 갑자기 죽은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일찍이 환온(桓溫)의 수레를 타고 16리를 가다가 흰색의 닭을 보고 멈추는 꿈을 꾸었으나 그때는 해몽(解夢)을 하지 못하다가, 환온이 죽은 뒤에 그의 재상 직위를 물려받고 16년이 되었을 때 병에 걸리자, “꿈속에서 환온의 수레를 탄 것은 그의 재상 지위를 이어받은 것이고, 16리는 재상으로 있은 지 16년째라는 말이고, 흰 닭은 유(酉)를 뜻하는데 금년이 유년(酉年)이니, 내가 아마도 낫지 않고 죽을 모양이다.” 하고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9 謝安傳》
[주D-070]사람을 …… 하였지 : 광해군 때에 별의별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는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 소종(唐昭宗) 천복(天復) 3년 조에 “선악을 살피지도 않고 시비를 가리지도 않은 채 풀을 베듯 하고 금수를 사냥하듯 사람들을 마구 죽이니, 어찌 난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不察臧否 不擇是非 欲草薙而禽獮之 能無亂乎〕”라고 논한 사마광(司馬光)의 비평이 보인다.
[주D-071]그대의 …… 당했었지 : 광해군 8년(1616)에 유찬(柳燦)의 장인인 최기(崔沂)가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무고하게 옥사를 일으켜 최기가 고문을 받다 죽었고 유찬 역시 여기에 연루되어 함께 옥중에서 죽었다. 수양(首陽)은 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주D-072]지분(芝焚) 옥쇄(玉碎) : 인품이 고결한 벗이 의리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은 것을 슬퍼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망우(亡友)를 애도하며 지은 ‘탄서부(嘆逝賦)’에 “아, 지초가 불탔으니 혜초가 탄식할 수밖에.〔嗟芝焚而蕙嘆〕”라는 말과,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의 ‘조모공문(弔某公文)’에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요, 옥돌이 부서지듯 하고 얼음이 깨지듯 하였으니.〔如何不弔 玉碎氷摧〕”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옥사에서 허균(許筠)이 유찬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 말대로만 따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였으나, 유찬이 오히려 그 편지를 공개하면서 간인(奸人)들의 정상을 낱낱이 폭로한 끝에 모진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내용이 《계곡집(谿谷集)》 14권 ‘증 이조참판 유공 묘지명(贈吏曹參判柳公墓誌銘)’에 나온다.
[주D-073]예덕(穢德) : 더럽고 음란한 행위라는 뜻으로 폭군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광해군을 가리킨다. 《서경》 태서 중(泰誓中)에 “죄 없는 백성들이 원망하며 하늘에 호소하자, 폭군 주(紂)의 더러운 행위가 뚜렷이 드러났다.〔無辜龥天 穢德彰聞〕”는 말이 나온다.
[주D-074]지하(地下)에 …… 가해지고 : 인조반정 뒤에 유찬이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고, 또 아들 유시영(柳時英)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에 따라 다시 이조 참판에 증직된 것을 말한다.
[주D-075]천도(天道)는 …… 말했는고 :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의 도에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지만, 항상 선인과 함께하며 도와준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혹자(或者)의 말을 소개한 뒤에, 이와 어긋나는 여러 가지 예를 거론하면서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질문했던 내용이 《사기(史記)》 백이 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주D-076]좌씨(左氏)가 …… 미흡했는지라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에 “혜공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송 나라와 전투를 벌인 데다가, 또 태자가 어려서 장례식의 일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개장을 한 것이다.〔惠公之薨也 有宋師 太子少 葬故有闕 是以改葬〕”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7]국가 …… 이뤘도다 : 인열왕후가 인조(仁祖)를 잘 내조하였다는 말이다. 십란(十亂)은 주공 단(周公旦) · 소공 석(召公奭) 등 주 무왕(周武王)을 도와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태평 시대를 이루었던 10인의 훌륭한 신하를 말하는데, 이 중에 문모(文母) 즉 무왕의 왕비인 읍강(邑姜)이 끼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書經 泰誓中》
[주D-078]바람 …… 변화되었도다 : 인열왕후를 본받아서 나라 안의 부녀자들이 모두 교화되었다는 말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윗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람과 같고, 아랫사람이 이를 본받는 것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79]대춘(大椿) : 봄과 가을이 각각 8000년이나 된다는 전설상의 나무 이름이다.《莊子 逍遙遊》
[주D-080]소내(素柰) : 흰 능금나무 꽃으로, 왕후의 죽음을 의미한다. 삼오(三吳)의 여자들이 멀리서 보면 능금 꽃처럼 보이는 흰 꽃을 머리에 꽂고는 직녀(織女)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진 성제(晉成帝)의 두 황후(杜皇后)가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后妃傳下 成帝杜皇后》
[주D-081]서원(西原)의 …… 이으셨도다 : 청주 한씨(淸州韓氏)인 한준겸(韓浚謙)의 딸이 인조의 왕후가 된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태사가 왕실의 아름다운 명성을 이었다.〔太姒嗣徽音〕”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주 문왕(周文王)의 왕비인 태사가 문왕의 모친인 태임(太任)을 이어서 왕실의 여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주D-082]곤극(坤極)이 …… 감추었도다 : 인열왕후가 42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곤극은 음덕(陰德)의 극이라는 뜻으로 왕후를 가리키고, 헌성은 왕후를 상징하는 헌원성(軒轅星)의 준말이다.
[주D-083]남국(南國)에서 …… 것처럼 : 관저(關雎)는 《시경》 주남(周南)의 맨 처음에 나오는 편명으로, 태사(太姒)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남국은 주 나라의 교화를 입은 남방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다. 자하(子夏)의 ‘모시 서(毛詩序)’에 “관저는 후비(后妃)의 덕을 드러낸 것으로서 국풍(國風)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 주남과 소남(召南)이야말로 ‘왕도를 처음부터 단정하게 펴는 길〔正始之道〕’이요 ‘왕자의 교화의 기초〔王化之基〕’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관저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45》
[주D-084]대궐에 …… 세웠도다 : 선조(宣祖) 때 왕자의 사부(師傅)였던 하락(河洛)이 반대파로부터 탄핵을 당하는 이이(李珥)를 변호하기 위해 장문의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반박했던 일과, 왜적이 침입하여 온 집안이 참화를 당할 적에 몸으로 맞서서 어버이를 구하려 했던 일을 말한다.
[주D-085]한혈마(汗血馬) : 흘리는 땀방울이 마치 피처럼 붉은 말이라는 뜻으로, 대완(大宛)의 준마를 가리키는데, 보통 똑똑한 남의 아들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주D-086]양춘곡(陽春曲) : 전국 시대 초(楚) 나라에서 백설곡(白雪曲)과 함께 가장 고아(高雅)한 가곡으로 꼽히던 노래로, 뛰어난 시문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초 나라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양춘곡과 백설곡은 얼마나 고상한지 온 나라를 통틀어도 이 노래를 이어서 창화(唱和)할 자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 不過數十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7]계림(桂林)의 …… 깨졌구나 :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시험해서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한 채 그만 죽고 말았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극선(郤詵)이 현량(賢良) 대책(對策)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뒤에 “계림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산(昆山)의 옥돌 조각을 손에 쥐었다.〔桂林之一枝 昆山之片玉〕”고 자신을 지칭한 월궁 절계(月宮折桂)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2 郤詵傳》 또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자신의 자리 위에 진귀한 보배라 할 학식을 쌓아 놓고서 초빙해 주기를 기다리는 법이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88]진수(晉竪)에 …… 생각했으리요 : 난치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진수는 병마(病魔)를 뜻한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의 꿈에 병마가 ‘더벅머리 두 아이〔二竪〕’로 변해서 고황(膏肓)으로 들어갔는데, 결국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十年》
[주D-089]초혼(楚魂)을 …… 놀랐어라 : 부음(訃音)을 갑자기 전해 듣게 되었다는 말이다.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혼령이여 돌아오라 옛날 살던 곳으로〔魂兮歸來 反故居些〕”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초 회왕(楚懷王)을 애도해서 지었다는 설도 있고, 송옥(宋玉)이 그의 스승인 굴원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
[주D-090]호리(蒿里) :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의 이름인데, 사람이 죽으면 여기에 묻었던 고사에서 유래하여, 후세에 묘지(墓地)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91]석인(碩人)에 …… 있었어라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숙모가 남편과는 불행하게 사별(死別)했어도, 외손(外孫)이 귀하게 되어 만년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석인은 덕이 있는 어진 사람으로 여기서는 남편을 가리킨다.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산골 시냇가에 움막이 있나니, 현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라는 말이 나온다. 택상(宅相)은 외손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외가(外家)인 영씨(寧氏)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집의 풍수를 보는 자가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다.〔當出貴甥〕”라고 예언한 대로, 위서가 사도(司徒)의 관직에까지 올라 현달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41 魏舒傳》
[주D-092]도요(桃夭)의 …… 하였도다 : 부인이 시집을 와서 온 집안을 화락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시경》 주남(周南) 도요(桃夭)에 “싱싱한 복숭아나무에 화사하게 꽃 피었네. 우리 아가씨 시집가서 온 집안 화락케 하리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3]석양빛 …… 서글프도다 : 인생무상을 읊은 고시(古詩)에 “수레 달려 위쪽 동문을 빠져나가, 북망산의 묘지를 멀리 바라보니, 백양나무는 바람 속에 소소히 울어 대고, 넓은 길 양편에는 송백이 가득하더라.〔驅車上東門 遙望郭北墓 白楊何蕭蕭 松柏夾廣路〕”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여,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백양(白楊)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文選 卷29 古詩19首 第13》
[주D-094]강사(强仕)의 …… 말았는가 : 인조 12년(1634)에 오숙이 명 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감군(監軍)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송도(松都)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40에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 강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때부터는 벼슬길에 나가도 좋다.〔四十曰强而仕〕”는 말이 나온다.
[주D-095]천황(天潢)의 …… 분 : 이수광이 제왕의 후예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서,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품부받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글에 “물결은 하늘의 못에서 나눠 받았고, 가지는 태양의 나무에서 갈려 나왔다.〔派別天潢 支分若木〕”는 표현이 있다. 《庾子山集 卷15 周大將軍義興公蕭太墓誌銘》 또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 보내,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태어나게 하였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6]시풍(詩風)은 …… 같았어라 : 당대(唐代)의 시풍을 시기별로 흔히 초당(初唐) · 성당(盛唐) · 만당(晩唐)의 셋으로 분류하는데, 성당은 개원(開元)에서 대력(大曆) 연간에 이르는 기간에 이백(李白) · 두보(杜甫) · 왕유(王維) · 맹호연(孟浩然) 등이 활동한 당시(唐詩)의 전성 시기를 말한다. 또 《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는 현인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싱싱한 꼴 한 다발을 망아지에게 먹이노니, 그 주인님은 옥처럼 고결한 분이로세.〔生芻一束 其人如玉〕”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7]유혼(遊魂)이 …… 화했는가 : 뛰어난 인물의 죽음을 뜻한다. 은 고종(殷高宗)의 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기미성(箕尾星)을 타고앉아 부열성(傅說星)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大宗師》
[주D-098]그동안 …… 내렸는데 : 한준겸의 딸이 인조(仁祖)의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시경》 대아(大雅) 가락(假樂)에 “하늘이 군자를 보호하고 도우시며 거듭 복을 내려 주신다.〔保佑命之 自天申之〕”는 말이 나온다.
[주D-099]갑자기 …… 믿겠는가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아, 믿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요, 무상한 것은 명이로다.〔嗚呼 天難諶 命靡常〕”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0]통곡하며 …… 싶어라 : 지기(知己)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101]일찍이 …… 있으리요 : 이원익이 정승으로 국가를 경륜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안겨 주었으므로, 온 나라에서 그를 우러러보며 사모하였다는 말이다. 상(商) 나라 임금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나서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書經 說命上》 또 송(宋) 나라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인덕을 칭송한 소식(蘇軾)의 시에 “아이들도 선생의 자인 군실을 모두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인 사마를 다 안다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司馬君實獨樂園》
[주D-102]두 …… 보냈도다 : 선조와 인조의 조정에서 활동하는 동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높이 떠받들어야 할 삼달존(三達尊)의 영예를 누렸으며,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에는 사직을 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의 이유로 전원에서 살면서 청빈한 생활을 고수하였다는 말이다. 삼달존은 작위(爵位)와 고령(高齡)과 덕행(德行)을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일묘궁(一畝宮)은 지극히 빈한한 선비의 누추한 거처를 뜻하는데, 《예기》 유행(儒行)의 “유자는 일묘의 담장을 두른 집에서 산다.〔儒有一畝之宮〕”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3]태산(泰山)과 들보의 비통함 : 모두가 존경하는 걸출한 위인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말인데, 공자(孔子)가 죽음에 임박하여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이 쓰러지려는가.〔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주D-104]영도(瀛島)에 …… 분 : 오봉(五峯) 이호민이 문형(文衡) 즉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 되었다는 말이다. 영도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瀛洲)를 말하는데, 홍문관을 영각(瀛閣)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D-105]빈관(儐館)의 …… 놀랐지요 : 이호민이 접빈사(接賓使)로 나가서 중국의 조사(詔使)를 맞을 때 지은 시를 보고 조사들이 경탄했다는 말이다. 선조(宣祖) 35년(1602)에 명(明) 나라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고천준(顧天埈)과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최정건(崔廷健)이 황태자의 책립(冊立)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서 조선에 왔다.
[주D-106]도산(陶山)의 …… 교화시켰어라 : 정경세는 학문의 연원을 고정(考亭) 즉 주자(朱子)에 두고서 도산(陶山) 즉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조정에서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광해군 8년(1616)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중에, 인조 원년(1623)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다시 진출하여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며 인재를 양성한 것을 말한다.
[주D-107]새 저술 : 《주문작해(朱文酌海)》 · 《상례참고(喪禮參考)》 · 《양정편(養正篇)》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주문작해》는 이황의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함께 주자학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주D-108]멀리 …… 출신으로 : 이정귀가 명문인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후예라는 말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인데, 그가 당 고종(唐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주D-109]어려서 …… 분 : 유년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8세 때에 벌써 한유(韓愈)의 장편시인 ‘남산시(南山詩)’에 차운하여 경탄을 자아냈고,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壯元)한 것 등을 말한다.
[주D-110]선조(先朝) …… 되셨다오 : 일찍이 선조(宣祖)의 지우(知遇)를 받고 깍듯한 예우를 받았는데, 다시 인조(仁祖)의 조정에서 재상으로서 국가를 경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최융(崔融)의 ‘위종감청정정사표(爲宗監請停政事表)’에 “이처럼 귀하게 된 것은 모두 풍운의 시대를 만나서 일월의 빛을 의지한 덕분이다.〔斯皆應風雲之會 依日月之光〕”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서경》 상서(商書) 열명 하(說命下)에,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내가 술이나 단술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그대가 누룩이 되어 주고, 내가 국을 끓이려 할 때에는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酒醴 爾惟麴蘖 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부탁한 내용이 나온다.
[주D-111]사업이 …… 외우고 : 이정귀가 뛰어난 일을 많이 해서 아이들까지도 그의 자(字)를 외울 만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송(宋) 나라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인덕을 칭송한 소식(蘇軾)의 시에 “아이들도 선생의 자인 군실을 모두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인 사마를 다 안다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司馬君實獨樂園》
[주D-112]집안의 …… 재질이라 : 이정귀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과 이소한(李昭漢) 등도 모두 땀방울이 피처럼 붉은 대완(大宛)의 한혈마(汗血馬)처럼 뛰어난 재질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특히 이명한의 경우는 부친을 이어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또 그의 아들인 이일상(李一相)이 대제학을 지냈는데, 이처럼 3대에 걸쳐서 문형(文衡)을 지낸 것은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로 일컬어진다.
[주D-113]동향(桐鄕)에도 …… 있다오 : 지방관(地方官)으로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일찍이 동향의 관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과연 그 뒤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주D-114]재상의 …… 뛰어났지 : 이명한이 이정귀(李廷龜)의 아들로서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다는 말이다. 난초 싹은 준수(俊秀)한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가 58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고서 지은 시에 “가을 달 아래 늦게 나온 붉은 계수의 열매요, 봄바람에 새로 자란 보랏빛 난초의 싹이로다.〔秋月晩生丹桂實 春風新長紫蘭芽〕”라는 표현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0 予與微之 老而無子云云》
[주D-115]쌍벽(雙璧)의 …… 알았으랴 : 이명한과 그의 동생 이소한(李昭漢)이 같은 해에 똑같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주D-116]하루아침에 …… 알았으랴 : 이소한이 형 이명한이 죽은 지 10여 일 뒤에 죽은 것을 말한다. 아가위 꽃은 우애 깊은 형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사람 중에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17]허망한 …… 같구나 : 사람의 삶이란 것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처럼 허무하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목근(木槿) 즉 무궁화 꽃이 약 100일 동안 계속해서 피긴 하지만, 반드시 이른 새벽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면서 날마다 새 꽃을 보여 주기 때문에, 조영모락(朝榮暮落)의 뜻으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주D-118]지금까지도 …… 한다오 :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서 그 고을 백성들이 지금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일찍이 동향(桐鄕)의 관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과연 그 뒤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주D-119]경서(經書)의 …… 낙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기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는 말이다. 단표(簞瓢)는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의 준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120]천작(天爵)이 …… 가벼웠고말고 :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덕성을 닦으면서 살아가려고 하였을 뿐, 벼슬을 해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천작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인데, 《맹자》 고자 상에 “인의 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구름 …… 가려졌네 : 처사(處士)의 죽음을 말한다. 소미(少微)는 처사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주D-122]우뚝하여라 …… 집안이요 :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가 당대의 유종(儒宗)인 성수침(成守琛)의 손녀요 성혼(成渾)의 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123]성대하여라 …… 명성이었네 :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자(主和論者)들을 처벌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던 윤황의 사람됨을 표현한 말이다.
[주D-124]자제들에게 …… 하면서 : 부인의 소생으로 윤순거(尹舜擧)와 윤문거(尹文擧) 등의 걸출한 아들이 있다.
[주D-125]삼종(三從) : 옛날에 여자로 태어나서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랐던 부녀자의 도리를 말한다. 《儀禮 喪服傳》
[주D-126]당(唐) 나라에서 …… 후예로서 : 풍덕 부사 박대화의 모친이 연안 이씨(延安李氏)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인데, 그가 당 고종(唐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주D-127]영원(鴒原)의 …… 흠모했고 : 그의 모친이 중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렸던 이정귀(李廷龜)의 누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韓國文集叢刊 114 宋子大全 卷177 豐德府使朴公墓碣銘》 영원은 척령재원(鶺鴒在原)의 준말로,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하는데,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할미새가 언덕에서 호들갑 떨듯, 어려움이 있을 때는 형제가 돕는 법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128]오조(烏鳥)의 …… 이어졌어라 : 박대화가 효렴(孝廉)으로 천거를 받고서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거친 것을 말한다. 오조는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로, 효성스러운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129]연세도 …… 받고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이 세상에 누구나 존경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관작과 연치와 덕이 그것이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라는 말이 나온다.
[주D-130]원로(鵷鷺) : 원추새와 백로인데, 이 두 새는 모습이 한아(閑雅)하고 질서가 있다 하여 조정 반열에 늘어선 백관을 비유하는 말로 곧잘 쓰인다.
[주D-131]견수(肩隨) : 나이 많은 사람과 길을 갈 적에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가면서도 약간 뒤로 물러서서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禮記 曲禮上》 조위한은 포저보다 12년 선배이다.
[주D-132]이제 …… 알았으랴 : 아침 안개나 이슬이 스러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만년에 접어들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상유(桑楡)는 노년을 뜻하는 말로, 서쪽으로 지는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桑楡〕’ 가지 끝에 비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33]선을 …… 왔어라 : 후한(後漢) 양진(楊震)과 그의 아들 양병(楊秉), 그의 손자 양사(楊賜), 그의 증손 양표(楊彪)와 양기(楊奇) 등이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사대 오공(四代五公)’의 고사가 전하는데, 정광성의 집안도 이에 못지않게 선행을 대대로 쌓아 온 결과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치는 영광을 누렸다는 말이다. 참고로 정광성의 고조 정광필(鄭光弼)은 영의정이었고, 증조 정복겸(鄭福謙)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이었고, 부친 정창연(鄭昌衍)도 좌의정이었다. 또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덕행을 쌓은 집안은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이 나온다.
[주D-134]중년에 …… 돌아왔네 : 정광성이 병자호란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에 형조 판서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복귀한 것을 말한다. 일변(日邊)은 도성의 별칭으로, 동진(東晉)의 명제(明帝)가 어렸을 적에 부왕인 원제(元帝)에게 장안(長安)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답변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世說新語 夙惠》
[주D-135]세 아들 …… 일 : 세 아들은 정태화(鄭太和)와 정치화(鄭致和)와 정만화(鄭萬和)를 가리키는데, 당시에 태화는 영의정이었고 치화는 경기도 관찰사였으며 만화는 사간원 정언이었다.
[주D-136]여든의 …… 따랐으니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맨 마지막에 “자연의 변화 따라 죽을 때 되면 가면 그뿐, 주어진 천명 즐기면 되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137]진양성(晉陽城)에서 …… 대절(大節)이여 : 황위의 조부 황진(黃進)이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하여 9일 동안이나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말한다. 참고로 송 고종(宋高宗)이 충신 악비(岳飛)에게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깃발에 새기게 한 고사가 있다.
[주D-138]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모친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봉호이다.
[주D-139]모교(姆敎)와 …… 가문 : 친가(親家)와 시가(媤家)가 모두 재상의 집안이라는 말인데, 부인이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요, 우의정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의 부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 내칙(內則)에 “여자 아이는 열 살이 되면 규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며, 여자 교사로부터 상냥한 말씨와 유순한 태도와 어른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침 받는다.〔女子十年不出 姆敎婉娩聽從〕”는 말이 나오고, 《시경》 주남(周南) 도요(桃夭)에 “우리 아가씨 시집을 가심이여, 시가를 의당 화목하게 하리로다.〔之子于歸 宜其室家〕”라는 말이 나온다.
[주D-140]성녀(聖女)를 …… 교화시켰도다 : 후비(后妃)로서의 완전한 덕을 갖춘 인선왕후를 낳아 나라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성녀는 장차 후비가 될 여자를 가리키고, 휘음(徽音)은 후비의 아름다운 덕을 뜻하고, 곤궁(坤宮)은 곤녕궁(坤寧宮)의 준말로 왕후의 거처를 의미한다. 정덕(正德)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삼사(三事)의 하나로, 윗사람이 자신의 덕을 먼저 바로잡아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주D-141]명공(明公) : 장유(張維)를 말한다. 포저가 젊었을 적에 장유 · 최명길(崔鳴吉) · 이시백(李時白)과 가장 친하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이들을 사우(四友)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송자대전(宋子大全)》 162권 ‘포저 조공 신도비명(浦渚趙公神道碑銘)’에 나온다.
[주D-142]그대 …… 생각나는데 : 《포저집》 30권 ‘제경세마대후문(祭慶洗馬大後文)’에 “그대가 한미한 우리 가문에 장가 든 것이 지금 40여년이 지났고, 또 나에게 문자를 물은 것이 30여년이 지났다.”는 말이 나온다.
[주D-143]하늘이 …… 보답하나 : 선인(善人)에게 복을 주고 악인(惡人)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하늘의 뜻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 백이 열전(伯夷列傳)에서 ‘백이 숙제(叔齊)와 안연(顔淵)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살다가 죽고,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천하를 횡행하며 오래 살다가 죽었으니, 그러고 보면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준 것이 어떻다고 하겠느냐.〔天之報施善人 其如何哉〕’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과연 천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儻所謂天道 是耶非耶〕’라고 통렬하게 물음을 던지는 대목이 나온다.
[주D-144]장공(張公)은 …… 곳으로 : 조선 중기 사대 문장가로 꼽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와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주D-145]기옹(畸翁) : 정홍명의 호이다.
[주D-146]이 땅에 …… 친척이라 : 도잠(陶潛)의 잡시(雜詩) 12수(首) 중 첫 수에 “땅에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형제, 어찌 꼭 골육의 친척들만 있겠는가.〔落地爲兄弟 何必骨肉親〕”라는 표현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4》
[주D-147]영원히 …… 되다니 : 부음(訃音)이 전해졌다는 말인데, 역시 도잠의 ‘자제문(自祭文)’에 “이제 내가 여인숙과 같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본래의 내 집으로 영원히 돌아가려 한다.〔陶子將辭逆旅之館 永歸於本宅〕”는 말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8》
[주D-148]분우(分憂)하여 …… 한데 :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깊이 사모한다는 말이다. 분우는 임금의 걱정을 나눠 갖는다는 뜻으로 지방 장관을 가리킨다.
[주D-149]옛날 …… 때 : 포저의 부인은 성주 현씨(星州玄氏)이다.
[주D-150]살 …… 떠오르는데 : 옛날에 정답게 지내면서 가까이 지낸 사이를 추억한 것이다.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살갗을 비비고 뼈를 서로 부딪치며 가깝게 지냈다.〔磨肌戛骨〕”는 표현이 나온다.
[주D-151]지란(芝蘭) :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상대방의 뛰어난 자제들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게 하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傳》
[주D-152]향리에선 …… 받았지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세상에서 누구나 존경해야 할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작위와 연치와 덕성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 한 것이 없고, 향리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鄕黨莫如齒〕, 세상을 돕고 백성의 어른 노릇을 하는 데에는 덕성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D-153]정암(靜庵) : 조광조(趙光祖)의 호이다.
[주D-154]생각나면 …… 주며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여안(呂安)과 혜강(嵇康)이 친하게 지내면서 상대방이 그리워지면 서로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방문했던〔每一相思 輒千里命駕〕 고사와, 같은 시대에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흰 눈〔白眼〕을 치켜 뜨다가 반가운 인사를 만나면 푸른 눈〔靑眼〕 즉 검은 눈동자를 보였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주D-155]부자(父子)가 …… 하리 : 《포저집》 권30 ‘제배생종도문(題裵生宗度文)’에 “돌아가신 그대의 부친은 지극한 품행이 우뚝 뛰어났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학문을 통해 선각(先覺)의 뜻을 실천하려 하면서 나라에 충성을 바쳐 한 몸을 잊고 환란 속에 뛰어들었으므로, 주상이 그 정성을 환히 살피시고 마을에 정표(旌表)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주D-156]백리 길 …… 물론이요 :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자신은 나물을 뜯어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리 밖까지 나가서 쌀을 구한 다음에 먼 길을 짊어지고 와서〔爲親負米百里之外〕’ 쌀밥을 해 드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卷2 致思》
[주D-157]물 …… 화락하였다오 : 빈궁한 속에서도 도를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나오고, 또 선진(先進)에 안회는 쌀독이 자주 비는데도 태연하였다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158]끝났도다 …… 있겠는가 : 그를 어진 선비로 깍듯이 예우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가 찾아오는 일도 영영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다른 손님은 일절 접대를 하지 않다가, 현인 서치(徐穉)가 오기만 하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내려 놓고 환담을 하고 나서는 그가 가면 다시 올려 놓았다는 현탑(懸榻)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徐穉列傳》


 
 포저집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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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3수(三首)
선부군(先府君) 행장

선부군의 휘(諱)는 영중(瑩中)이요, 자(字)는 군수(君粹)요, 성은 조씨(趙氏)이다. 그 선조는 풍양(豊壤)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의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휘 맹(孟)이 그 시조이다. 풍양을 본관으로 한 것은 대개 시조가 풍양에서 일어나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왕업(王業)을 이루고 훈작(勳爵)을 받았으며, 그 묘소가 풍양 적성동(赤城洞)에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는 700여 년 동안 벼슬을 한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 세상의 성족(盛族)이 되었다.
시조의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나와서 관직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평장의 아들인 휘 천옥(天玉)은 관직이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이었고, 소윤의 아들인 휘 우(玗)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홍무(洪武) 10년(1377, 우왕 3)에 소윤이 원수 부사(元帥副使)의 신분으로 서해(西海)에서 왜적을 토벌하며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니, 이는 바로 고려 말의 일이다. 그리고 첨정은 바로 아조(我朝)의 초기에 해당한다.
첨정의 아들인 휘 계팽(季砰)은 세종(世宗)조의 문과(文科)에서 제 2 인(第二人)으로 급제하여 관작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부사의 아들인 휘 지진(之縝)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참판의 아들인 휘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부군(府君)의 증조(曾祖)이다.
조부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고 한풍군(漢豊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고(考)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계부(季父) 휘 경(儆)은 왜란 때에 행주(幸州) 전투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어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니, 3대(代)를 이어 계속해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재신(宰臣)의 직질(職秩)에 올랐다. 비(妣)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개국 공신(開國功臣) 시(諡)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예로, 부친은 지평 현감(砥平縣監) 휘 규(奎)이다. 계비(繼妣)는 상주 김씨(尙州金氏)이다.
부군(府君)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 7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어났다. 나이 12세에 비(妣) 남씨가 세상을 떠났다. 소싯적부터 글을 읽으며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39세에 처음으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에 보임(補任)되었으며, 그 뒤에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도감(都監)의 낭청(郞廳)으로 근무한 공을 인정받아 6품의 자급(資級)으로 승진하여 가설 군자감 주부(加設軍資監主簿)가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反正) 뒤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1625) 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이 되고, 기사년(1629) 여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신미년(1631) 겨울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갑술년(1634) 여름에 다시 선공감 첨정이 되었다.
병자년(1636) 병란 때에 상이 강화(江華)로 피신하기로 의논을 정하고는 늙고 병든 사람을 먼저 보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먼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조 판서의 신분으로 대궐에 있다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길을 나섰고 그 뒤를 이어 대가(大駕)가 출발하였는데, 대가가 남대문(南大門)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의 기병을 만났으므로 다시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내가 부군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동분서주하며 찾아다니다가 남양(南陽)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남한산성이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군병을 모집해서 오랑캐의 군대에 뛰어들어 함께 죽을 계책을 세웠는데, 적이 남양에 침입하여 부사(府使)를 죽이자 대중이 흩어지고 말았으므로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부군을 모시고 대부도(大阜島)에 들어갔다가 강화로 들어갔는데, 강화가 함락될 적에 다행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 강화에서 목숨을 구한 신하들이 원손(元孫)을 모시고 호서(湖西)로 내려갔으므로 부군을 모시고 함께 따라가서 당진(唐津)에 정박한 뒤에 나는 말을 구해서 조정으로 들어가고 부군은 신창(新昌)으로 귀향하였다.
그때 나는 참언(讒言)을 입고 하옥되었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이로부터는 부군을 모시고 신창에서 거하게 되었다. 무인년(1638) 봄에 부군의 연세가 80이 되었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나도 무함과 비방을 당한 것이 일단 해명되면서 복관(復官)이 되어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부군의 연세가 86세나 되었으므로 그 뒤에도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부군을 끝까지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난리 뒤에 구원(丘園)에 칩거하면서 부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봉(侍奉)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드리지 못했으니 한없이 비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부군은 병자호란 때에 연세가 79세였는데 정력이 여전히 강건해서 보고 듣는 것이나 걷고 말 타는 것이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며, 85세에 이르렀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강건하였다. 그러다가 계미년(1643) 가을 무렵부터 점차 쇠한 정도가 심해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달라지더니, 을유년(1645) 여름에 이르러서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 음식과 기거(起居) 등의 일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하였다. 병술년(1646) 5월 19일에 미질(微疾)로 세상을 마치시니 향년 89세였다.
나의 처는 지난해 겨울부터 병을 앓았는데 봄에 이르러 더욱 위중해진 나머지 몇 달 동안 누워 지내게 된 관계로 봉양을 비복(婢僕)에게 맡기고 있다가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동안 집안의 운세가 지극히 험해서 4, 5년 동안에 죽는 일이 잇따라 사망한 아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가 모두 합쳐서 8인이나 되었는데, 끝내는 가모(家母)와 노친(老親)의 상(喪)이 두 달 사이에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신명(神明)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겠는가.
나의 관직에 따라 관례대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다시 내가 정사(靖社)와 진무(振武)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1등으로 참여한 것을 적용하여 추가로 추증한 결과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이르렀고,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추증되었다. 남원 부사로부터 그 이하의 묘소가 모두 남양(南陽)과 광주(廣州)에 있어서 더 이상 장례를 지낼 땅이 없기 때문에 장지(葬地)를 바꿔 대흥현(大興縣) 지역의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모월 모일에 장례를 지내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광주의 선조 묘역 뒤에 앞서 장례 지낸 부인도 이곳으로 옮겨서 부장(附葬)할 예정이다.
부군은 평생토록 질직(質直)하여 교묘하게 꾸미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할 때에도 모두 성실하고 신의 있게 하였다. 천품이 담박하여 외물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재리(財利)를 도모하며 경영한 적이 전혀 없었다. 또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었으며, 고을을 다스릴 적에도 백성들에게 취한 것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집에 가진 것 하나 없이 생계가 막연하였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죽은 아우의 자식들을 매우 지극하게 보살펴 주고 사랑하였다. 관직에 거할 때에는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공회(公會)가 있을 때면 반드시 먼저 참석하곤 하였다. 내가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직한 자세를 지키면서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나, 아이들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이고 아첨하는 짓까지는 하지 않게 된 것 역시 사실은 근본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행히 각자 자식을 두었고, 사망한 자가 비록 많아도 살아 있는 자가 희소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서 앞으로 후손이 번창할 가망이 있게 된 것 역시 부군이 지닌 순덕(純德)의 소치(所致) 아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부인(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추증받은 춘수(春壽)의 딸이다. 덕성이 인후(仁厚)하여 친척과 동복(僮僕)과 인리(隣里)가 모두 감복하였는데, 이미 안장(安葬)하여 묘지(墓誌)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재하지 않는다. 자녀 6인을 낳았는데, 지금은 1남 1녀만 남아 있다. 아들 익(翼)은 영천 군수(永川郡守) 현덕량(玄德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고, 딸은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다.
손자 몽양(夢陽)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고, 진양(進陽)은 청양 현감(靑陽縣監)이고, 복양(復陽)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고,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몽양은 부사(府使) 박승조(朴承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지강(持綱)은 생원 김곤원(金坤遠)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2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진양은 사인(士人) 안대항(安大恒)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복양은 관찰사(觀察使) 이경용(李景容)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지형(持衡)은 현령(縣令) 심억(沈檍)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장녀는 유학(幼學) 홍종경(洪宗慶)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내양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시백(李時白)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현양은 관찰사 윤명은(尹鳴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처(夫妻)가 모두 일찍 죽었다. 외손(外孫) 명담(命聃)은 남녀 각 1인을 낳았다. 지강은 2녀를 낳았다. 홍종경은 1녀를 낳았다.
아, 선비(先妣)가 작고한 뒤로 편친(偏親)을 16년 동안이나 모실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계책이 졸렬한 나머지 맛있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해 드릴 것들을 항상 마련하지 못했으니, 불효를 범한 이 죄는 어떻게 갚을 길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지극히 혹독한 벌을 내려 갑자기 버리고 떠나셨으니, 이제는 천지간에 어버이를 잃고 다시는 의지할 곳 없게 되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어서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애간장이 끊어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남산열렬(南山烈烈)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심정일 뿐이다.
삼가 이와 같이 세계(世系), 관자(官資), 졸장(卒葬), 증직(贈職), 자성(子姓)을 차례로 서술하였는데, 장차 당세의 문장과 명덕(名德)을 소유한 분 중에 부군이 일찍이 지우(知遇)를 받은 대인(大人)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길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묘석(墓石)에 한 글자를 새겨 달라고 청하려고 한다.
병술년(1646, 인조 24) 8월 24일 불효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 익(翼)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행장을 쓰다.

[주D-001]남산열렬(南山烈烈) 생불여사(生不如死)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의 “남산은 높이 솟고, 표풍은 빠르도다.〔南山烈烈 飄風發發〕”라는 말과, “작은 병이 텅 빔이여, 큰 항아리의 수치로다. 빈궁한 인간의 삶이여, 죽느니만 못한 것이 오래되었도다.〔甁之罄矣 維罍之恥 鮮民之生 不如死之久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작은 병은 자식을 가리키고 큰 항아리는 부모를 가리키는데, 자식이 변변치 못해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애달픈 심정을 토로한 노래이다.


  포저 선생이 지으신 최 처사의 묘지명은  전주최공 문성공 휘 10세손
 휘  득수 선조님 저의 14대조고 이신 안동 판광공 휘 휘수 조고님의 동생(弟) 되시는 분이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가문은 전국으로 훝어지고  지금 전국적으로
 영암,진주 충북제천, 선청 부산 의령 서울 경북상주, 충남서천 경기도 양주등으로 아쉬운 현실이다 ..
 14세손  방손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묘지는 종인의 불찰로 타인에게 종산이 넘어가고 ..
 조고의 저의 15대조고  이신 휘 언청은 저의 상계와 동일하다 ..     
 



포저집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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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銘) 10수(十首)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 의동(義洞)에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도성 안의 동쪽 변두리였다. 같은 동네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가문의 집들이 서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자손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연배끼리 서로 어울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항상 함께 지냈으니, 그 친한 관계가 마치 골육과 같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두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집들이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뒤에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네에 우거(寓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 만나게 되면 마치 멀리 사는 친척을 본 것처럼 반갑게 대하며 기뻐하곤 하였다.
처사(處士)는 나의 조고(祖考) 항렬에 해당되는 분이었다. 처사의 아들 3인 중에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는 나의 제부(諸父) 항렬이었지만, 막내인 응형(應亨)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적었으므로 나와 함께 어린 시절 벗으로 지냈다.
처사가 임진왜란 때에 80여 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노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임시로 산속에 초빈(草殯)을 하고는 밤낮으로 호곡(號哭)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적이 그곳에 이르자 처사가 혼백(魂帛) 상자를 등에 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는데, 적이 그를 찾아내어 붙잡은 뒤에 그 상자를 보고는 기보(奇寶)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처사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열어 보자 바로 혼백이 들어 있었으므로 적도 감동한 나머지 처사에게 활로(活路)를 알려 주고 떠나갔다. 그 이듬해 가을에 금천(衿川)의 선산에 반장(返葬)한 뒤에 묘소 옆에서 여묘(廬墓)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만 마시면서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병화(兵禍)를 당한 뒤끝이라서 백성들이 기아(飢餓)에 시달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기전(畿甸)이 그중에서도 특히 심하였다. 그런데도 처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산속에서 여묘를 하며 떠나지 않았는데, 처사가 애처롭게 곡읍(哭泣)하고 애훼(哀毁)하여 몸이 삭정이처럼 여위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처사의 중자(仲子)인 응선(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등에 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얼마 안 되는 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미음이라도 계속 먹을 수가 있었다.
아, 사람의 자식이라면 그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제대로 효도를 하는 자는 지극히 드물기만 하다. 이때에 처사에게도 아우가 있고 여러 조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선인(善人)이었지만 유독 처사만이 그렇게 하였다. 이를 통해서 처사의 효행이야말로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난리가 일어난 혼란한 와중에 생사를 기필할 수 없었는데도 바로 이처럼 독실하게 행하였던 것이니, 평소의 효성과 우애야 처사에게는 일상적인 행동으로서 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 와서 살자 호남(湖南)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정장(呈狀)을 하니 상이 듣고서 상으로 관직을 내리라고 명하였고, 그 뒤에 양주(楊州)에 와서 살자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정장을 하니 상이 듣고서 복호(復戶)를 명하였으며, 그 뒤에 용산(龍山)에 와서 살자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정장을 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끝내는 예조에 의해서 폐각(廢閣)되고 말았다.
처사의 휘(諱)는 득수(得壽)요 자(字)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에서 세상을 떠나, 그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묻히니 향년 72세였다.
고(考)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이고, 조부 휘 호문(浩文)은 모관(某官)이고, 증조 휘 지성(智成)은 현감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덕지(德之)는 세조(世祖) 때에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조비(祖妣)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일두(一蠹) 선생 여창(汝昌)의 딸이다. 그러고 보면 처사의 선행도 실로 그 근본이 있다고 하겠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장남은 응성(應聖)이고, 다음 응선(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다음 응형(應亨)은 현재 소촌 찰방(召村察訪)이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임진년 당시에 두 집안이 동시에 도성을 빠져나온 뒤에 우리 집안의 동문 밖 저택에서 묵고 나서 그다음 날 통곡하며 이별을 하였다. 그때 내가 동자(童子)의 몸으로 당(堂) 옆에 서서 울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서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그 뒤 다행히 각자 죽지 않고 살아서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처사를 용산에서 뵐 수 있었는데, 이때 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처사는 평생토록 성신(誠信)으로 일관하였고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순선(純善)의 소유자로서 털끝만큼도 사념(邪念)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사가 작고한 지 지금 20여 년이 되는 때에 응성(應聖) 장(丈)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기에 내가 삼가 응낙하고 글을 짓게 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의 소유자는 / 自古至行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법 / 於世絶儔
참으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니 / 誠所不已
어찌 대가를 구하는 것이 있어서랴 / 豈有所求
이것이 자기네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 是何與己
사람들이 자연히 공경하고 흠모하나니 / 人自敬慕
이 역시 어찌 밖에서 빌려 온 것이리오 / 亦豈外假
천성적으로 똑같이 품부받았기 때문이라 / 性惟同賦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 何今之人
유독 이와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 而獨反此
임금님이 정표(旌表)하라 명하셨건만 / 王命旌異
예조가 그만 소홀히 취급한 나머지 / 忽焉而已
우리 처사처럼 선한 분으로 하여금 / 乃使善人
끝내 초야에서 생을 마치게 하였도다 / 終死草野
공에게야 무슨 한스러움이 있으랴만 / 於公何恨
세상일이 참으로 개탄할 만하도다 / 可嗟世也
오직 하늘의 도는 이와 같지 않아서 / 唯天不然
보답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으리니 / 施報無虛
어디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을까 / 其所可期
바로 공의 후손들에게 있으리로다 / 其在後歟

 
포저집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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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3수(三首)
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 병조 참판 부군(贈兵曹參判府君)의 묘표

우리 고조고(高祖考)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증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 부군과, 고조비(高祖妣)인 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합장(合葬)한 묘소는 광주(廣州) 하도(下道) 북방리(北坊里)의 산에 있으니 직동(直洞)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 이전 양세(兩世)의 묘소는 남양(南陽)에 있는데, 부군 때에 와서 비로소 이곳에 장례 지냈다.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 증 좌찬성 부군은 그 아들이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증 좌찬성 부군은 그 손자인데,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으며 산기슭만 달리하고 있다.
부군은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 33) 정월 2일에 작고하여 이곳에 장례 지냈는데, 그로부터 지금 1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증손은 현재 생존자가 없으며, 불초(不肖) 익(翼) 나는 현손(玄孫)이다. 사람의 대수(代數)가 이렇게 쉽게도 지나가다니 참으로 비감이 든다. 나도 금년에 나이가 벌써 73세이니 내가 죽고 나면 향화(香火)를 올리는 일도 장차 끊어질 것이기에, 모름지기 내가 아직 죽기 전에 묘도(墓道)에 기술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고 하는 바이다.
삼가 선세(先世)의 선조들 및 역임한 관직과 그 자손들을 차례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씨의 선조는 본래 풍양인(豐壤人)이었다. 시조 휘(諱)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동방을 통일하는 공을 세워서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고 관작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문하시중평장사였는데, 평장이 봉상 소윤(奉常少尹) 휘 천옥(天玉)을 낳았고, 소윤이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휘 우(玗)를 낳았다. 첨정이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된 휘 계팽(季砰)을 낳았는데, 대언(代言)을 거쳐서 남원으로 나갔다고 한다. 부사는 5남을 두었다. 그중에 셋째 아들인 휘 지진(之縝)이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을 추증받았는데, 부군(府君)은 바로 그분의 아들이다. 평장 이전의 보첩(譜牒)은 분실하였으므로 시조로부터 몇 대 후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부사 이전의 분묘(墳墓)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부군의 휘는 현범(賢範)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의 주부(主薄)와 판관(判官), 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와 경력(經歷), 훈련원의 부정(副正)과 정(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임(外任)으로는 의주 판관(義州判官), 평안 우후(平安虞候), 함경남도 우후 등을 거쳤다.
정축년(1517, 중종 12)에 통정대부에 올라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 여주 목사(驪州牧使), 연안 부사(延安府使), 함경북도 우후와 온성 부사(穩城府使), 전라도의 좌수사(左水使) 및 우수사(右水使)를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겸사복(兼司僕)과 우림위(羽林衛)와 오위(五衛) 등의 대장(大將)으로 숙위(宿衛)를 하기도 하고, 혹은 첨지중추(僉知中樞)로 겸임하기도 하였다.
갑오년(1534)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었고, 병신년(1536)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정유년(1537)에 성절사(聖節使)로 상국(上國)에 조회(朝會)하였다. 이상이 역임한 관직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부인은 파성군(坡城君) 휘 찬(贊)의 딸이다. 아들 2인을 두었다. 장남 언국(彦國)은 은율 현감(殷栗縣監)이고, 다음 안국(安國)은 바로 함경남도 절도사로 증 좌찬성 부군이다. 인국(仁國)이라는 서자(庶子)가 있다. 언국은 아들을 두지 못했다. 외손이 지금 수십 인에 이르는데, 우의정 장유(張維)도 그분의 외손이다. 찬성 부군의 자손에 대해서는 찬성의 묘지문(墓誌文)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인국의 자손도 10여 인에 이르는데 기전(畿甸)과 해서(海西)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익(翼)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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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3수(三首)
증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 증 좌찬성 부군(贈左贊成府君)의 묘표

우리 증조고(曾祖考)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 부군은 휘(諱)가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니,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 참판 휘 현범(賢範)의 차자(次子)이다. 그 묘소는 참판의 묘소와 같은 동(洞)이면서 언덕을 달리하고 있으니, 그곳은 바로 동쪽 언덕이다.
조씨(趙氏)가 처음 나오게 된 유래와 그 뒤의 세차(世次)는 이미 참판의 묘문(墓文)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부군(府君)의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 휘 계팽(季砰)이요, 조부는 장사랑(將仕郞) 증 공조 참판 휘 지진(之縝)이다.
부군은 나이 24세에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 19)의 무과에 급제하여 바로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외방에 나가 강동 현감(江東縣監)이 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된 뒤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 공조 좌랑(工曹佐郞), 겸내승(兼內乘),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상이 친림(親臨)하여 기예를 시험할 적에 격모구(擊毛毬)에서 1등을 차지하자 통정대부로 올리도록 명하였으니, 그때의 나이가 28세였다.
희천 현감(熙川縣監)으로 나가 임기가 만료된 뒤에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선부군(先府君)도 회령 부사(會寧府使)였다. 이처럼 부자가 나란히 육진(六鎭)의 부사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성대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승선(承宣)은 문신에게도 청선(淸選)에 해당되었으니, 무신의 경우는 극선(極選)이라고 할 것이요 또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고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임기를 끝내고 체차(遞差)되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임명되어서는, 이때에 대도(大盜) 팔룡(八龍)이 난리를 일으켰으나 관군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부군이 방략(方略)을 세워서 그를 체포하였다. 이에 상이 가자(加資)를 명하였으나 대론(臺論)으로 개정되어 임소에서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그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때에도 대도 미이(米伊) 형제가 난리를 일으켰는데, 부군이 또 모두 체포하였다. 팔룡과 미이는 모두 날래고 용맹하기로 유명하였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도 많아서 대적하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는데, 급기야 부군이 부임하자마자 모두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상의 명으로 가자되었으니, 이것이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의 일이었다.
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을묘년(1555)에 왜적이 남해안에 침입하자 국내가 온통 경악하며 장수를 뽑아서 왜적을 막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군이 전라병사 겸 방어사(全羅兵使兼防禦使)가 되었는데, 순변사(巡邊使)인 남치근(南致勤)과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에는 그의 무함을 받은 나머지 녹도(鹿島)에 2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남치근은 살육을 많이 하여 포악하고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소문이 난 반면에, 부군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양가(兩家) 자손의 성쇠를 점쳤는데, 결국 남치근의 집안은 후사(後嗣)가 없었고 부군의 자손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뒤에 함경남도 병사에 임명되고 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경성에서는 관례에 따라 군직(軍職)에 거하였는데, 영흥에서 돌아온 뒤로는 항상 포도대장(捕盜大將)과 오위장(五衛將)과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7월 14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73세였다.
전부인(前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일찍 죽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휘 세임(世任)의 딸인데,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던 중 양주(楊州) 산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가 82세였다.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다. 장남 휘 엄(儼)은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다음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딸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 문정공(尹文貞公) 휘 근수(根壽)에게 출가하였다. 막내아들 휘 경(儆)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부군과 선부군(先府君) 양세(兩世)가 증직을 받은 것은 풍양군의 훈작(勳爵) 덕분이다.
찬성(贊成)은 아들 3인을 두었다. 장남 휘 영중(瑩中)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아들 익(翼)은 선세(先世)의 유덕(遺德)으로 외람되게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찬성의 자손에 대해서는 원래 그 묘문(墓文)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문정공은 아들 6인을 두었다. 장남 환(晥)과 다음 질(晊)은 모두 첨지중추부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으며,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수십 인에 이른다. 풍양군은 아들 5인을 두었다. 장남 한중(閑中)은 통정대부로 군수이고, 막내 시중(時中)은 현감이며, 그 사이의 세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역시 수십 인에 이른다.
모년 모월 모일에 증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익(翼)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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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3수(三首)
조고(祖考)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증 좌찬성 부군(贈左贊成府君)의 묘표

아, 조고인 의빈부 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 부군이 작고하신 지 지금 49년이 되었는데도 묘도(墓道)의 글을 아직도 기술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비록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서 그랬다고는 하더라도 이 일을 지체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돌이켜 보건대 부끄럽고 한스러운 심정을 가눌 수가 없다. 그런데 불초 손자 익(翼)이 지금 나이가 73세나 되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이 일이 끝내는 잘못되고 말 것이다. 이에 삼가 이전 3세의 관봉(官封)과 역임한 관직과 평생의 인덕(仁德) 중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 왔던 것들을 서술하여 이를 묘비로 세움으로써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 그리고 고조와 증조 2대의 묘문도 이번 기회에 함께 서술하기로 하였다.
부군의 휘(諱)는 간(侃)이요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증조 휘 지진(之縝)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을 추증받았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조부 휘 현범(賢範)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을 추증받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고(考)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받았으며,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조씨의 선세(先世)의 일은 참판 부군의 묘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군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태어났다. 갑자년(1564, 명종 19)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송라 찰방(松羅察訪)에 보임되었다가 기사년에 와서 별좌(瓦署別坐)로 바뀌었으며, 경오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겨졌다가 임신년(1572)에 또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573)에 찬성 부군의 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친 뒤에 또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으로 승진하였으며, 기묘년(1579)에 중부 주부(中部主簿)로 다시 승진한 뒤에 사헌부 감찰로 옮겨졌다.
임오년(1582)에 음성 현감(陰城縣監)에 임명되었고, 신묘년(1591)에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임명되었는데 임진년(1592) 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왜란이 일어나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피난길에 나섰는데, 대부인이 양주(楊州) 산골의 촌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왜적이 물러간 뒤에 광주(廣州) 찬성 부군의 묘소 아래에 반장(返葬)하였다.
조고(祖考)는 천성이 인애(仁愛)하였다. 남의 위급한 사정을 보면 반드시 구해 주려고 하면서 간절히 잊지 못하였으며, 비록 미세한 물건이라도 항상 사람들에게 주기를 좋아하였다. 집안의 생활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서 사람이 오기만 하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 모든 일은 속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비록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왜병이 경성에 육박하자 도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웃에 황 감역(黃監役)의 집이 있었는데, 그가 먼 시골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가 통곡하고 있었다. 조고가 이를 듣고서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사람을 보내 고하게 하기를 “우리 집과 함께 피난하자.”고 하였는데, 마침 황 감역이 와서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이를 통해서도 남의 위급한 사정을 구해 주려 했던 조고의 인애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조고의 매부(妹夫)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 문정공(尹文貞公 윤근수(尹根壽))이 제문(祭文)을 지어 말하기를 “공은 평생토록 인애한 마음을 바탕으로 남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자기 일보다도 더 급하게 여겼으며, 사람들을 온화하게 대하면서 다친 사람 보듯 하였으니, 집안이나 향리에 덕을 베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문정공은 조고와 소싯적부터 인척으로 그지없이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조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상(故相)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에 몸가짐의 요체에 대해서 자네 조고에게 문의했더니, ‘그대는 더 많은 선(善)을 다시 구하려고 할 것이 없다. 지금의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이상(李相)의 마음가짐이 선함이 소싯적부터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이상이 우리 조고에 대해서 심복(心服)했다는 것과 우리 조고가 당시 사우(士友)들에게 중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내가 다행히 조고가 살아 계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조고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육경(六卿)의 지위에 오르면서 조고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외람되게 재상이 되자 또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비(祖妣)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상주 김씨(尙州金氏)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생각건대 나처럼 불초한 몸이 태어나면서부터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는 가운데 외람되게 이런 지위까지 올라 지하에까지 그 영광이 미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세(先世)에 쌓은 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부군은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다. 장자는 선군(先君) 휘 영중(瑩中)이니 첨지중추부사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딸은 사인(士人) 고상고(高尙古)에게 출가하였으며, 차자 휘 성중(省中)은 진사이다. 이들은 모두 남씨(南氏) 소생이다. 말자(末子) 휘 위중(韙中)은 김씨(金氏) 소생이다.
선군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익(翼)이고, 딸은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였다. 고상고는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진사는 1녀를 두었는데 자식이 없다. 말자는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휘(翬)이고, 다음 학(翯)은 순천 군수(順川郡守)이다. 손자 익(翼)은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몽양(夢陽)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고, 다음 진양(進陽)은 덕산 현감(德山縣監)이고, 다음 복양(復陽)은 홍문관 교리이고, 다음 내양(來陽)은 진사이고, 다음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으며,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는데, 몽양과 내양과 현양은 모두 죽었고 딸 부처(夫妻)도 죽고 자식이 없다. 휘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성양(成陽)과 수양(壽陽)이요, 학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원양(元陽)이다. 현손(玄孫) 10여 인이 있으나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에는 또 기대할 만한 자가 있는 듯도 하니, 후손에게 남긴 경사(慶事)가 아직도 다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신묘년(1651, 효종 2) 2월 28일 손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익(翼)은 짓다.
 
포저집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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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3수(三首)
선부군(先府君) 행장

선부군의 휘(諱)는 영중(瑩中)이요, 자(字)는 군수(君粹)요, 성은 조씨(趙氏)이다. 그 선조는 풍양(豊壤)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의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휘 맹(孟)이 그 시조이다. 풍양을 본관으로 한 것은 대개 시조가 풍양에서 일어나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왕업(王業)을 이루고 훈작(勳爵)을 받았으며, 그 묘소가 풍양 적성동(赤城洞)에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는 700여 년 동안 벼슬을 한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 세상의 성족(盛族)이 되었다.
시조의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나와서 관직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평장의 아들인 휘 천옥(天玉)은 관직이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이었고, 소윤의 아들인 휘 우(玗)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홍무(洪武) 10년(1377, 우왕 3)에 소윤이 원수 부사(元帥副使)의 신분으로 서해(西海)에서 왜적을 토벌하며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니, 이는 바로 고려 말의 일이다. 그리고 첨정은 바로 아조(我朝)의 초기에 해당한다.
첨정의 아들인 휘 계팽(季砰)은 세종(世宗)조의 문과(文科)에서 제 2 인(第二人)으로 급제하여 관작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부사의 아들인 휘 지진(之縝)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참판의 아들인 휘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부군(府君)의 증조(曾祖)이다.
조부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고 한풍군(漢豊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고(考)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계부(季父) 휘 경(儆)은 왜란 때에 행주(幸州) 전투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어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니, 3대(代)를 이어 계속해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재신(宰臣)의 직질(職秩)에 올랐다. 비(妣)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개국 공신(開國功臣) 시(諡)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예로, 부친은 지평 현감(砥平縣監) 휘 규(奎)이다. 계비(繼妣)는 상주 김씨(尙州金氏)이다.
부군(府君)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 7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어났다. 나이 12세에 비(妣) 남씨가 세상을 떠났다. 소싯적부터 글을 읽으며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39세에 처음으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에 보임(補任)되었으며, 그 뒤에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도감(都監)의 낭청(郞廳)으로 근무한 공을 인정받아 6품의 자급(資級)으로 승진하여 가설 군자감 주부(加設軍資監主簿)가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反正) 뒤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1625) 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이 되고, 기사년(1629) 여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신미년(1631) 겨울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갑술년(1634) 여름에 다시 선공감 첨정이 되었다.
병자년(1636) 병란 때에 상이 강화(江華)로 피신하기로 의논을 정하고는 늙고 병든 사람을 먼저 보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먼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조 판서의 신분으로 대궐에 있다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길을 나섰고 그 뒤를 이어 대가(大駕)가 출발하였는데, 대가가 남대문(南大門)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의 기병을 만났으므로 다시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내가 부군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동분서주하며 찾아다니다가 남양(南陽)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남한산성이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군병을 모집해서 오랑캐의 군대에 뛰어들어 함께 죽을 계책을 세웠는데, 적이 남양에 침입하여 부사(府使)를 죽이자 대중이 흩어지고 말았으므로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부군을 모시고 대부도(大阜島)에 들어갔다가 강화로 들어갔는데, 강화가 함락될 적에 다행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 강화에서 목숨을 구한 신하들이 원손(元孫)을 모시고 호서(湖西)로 내려갔으므로 부군을 모시고 함께 따라가서 당진(唐津)에 정박한 뒤에 나는 말을 구해서 조정으로 들어가고 부군은 신창(新昌)으로 귀향하였다.
그때 나는 참언(讒言)을 입고 하옥되었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이로부터는 부군을 모시고 신창에서 거하게 되었다. 무인년(1638) 봄에 부군의 연세가 80이 되었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나도 무함과 비방을 당한 것이 일단 해명되면서 복관(復官)이 되어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부군의 연세가 86세나 되었으므로 그 뒤에도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부군을 끝까지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난리 뒤에 구원(丘園)에 칩거하면서 부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봉(侍奉)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드리지 못했으니 한없이 비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부군은 병자호란 때에 연세가 79세였는데 정력이 여전히 강건해서 보고 듣는 것이나 걷고 말 타는 것이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며, 85세에 이르렀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강건하였다. 그러다가 계미년(1643) 가을 무렵부터 점차 쇠한 정도가 심해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달라지더니, 을유년(1645) 여름에 이르러서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 음식과 기거(起居) 등의 일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하였다. 병술년(1646) 5월 19일에 미질(微疾)로 세상을 마치시니 향년 89세였다.
나의 처는 지난해 겨울부터 병을 앓았는데 봄에 이르러 더욱 위중해진 나머지 몇 달 동안 누워 지내게 된 관계로 봉양을 비복(婢僕)에게 맡기고 있다가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동안 집안의 운세가 지극히 험해서 4, 5년 동안에 죽는 일이 잇따라 사망한 아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가 모두 합쳐서 8인이나 되었는데, 끝내는 가모(家母)와 노친(老親)의 상(喪)이 두 달 사이에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신명(神明)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겠는가.
나의 관직에 따라 관례대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다시 내가 정사(靖社)와 진무(振武)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1등으로 참여한 것을 적용하여 추가로 추증한 결과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이르렀고,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추증되었다. 남원 부사로부터 그 이하의 묘소가 모두 남양(南陽)과 광주(廣州)에 있어서 더 이상 장례를 지낼 땅이 없기 때문에 장지(葬地)를 바꿔 대흥현(大興縣) 지역의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모월 모일에 장례를 지내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광주의 선조 묘역 뒤에 앞서 장례 지낸 부인도 이곳으로 옮겨서 부장(附葬)할 예정이다.
부군은 평생토록 질직(質直)하여 교묘하게 꾸미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할 때에도 모두 성실하고 신의 있게 하였다. 천품이 담박하여 외물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재리(財利)를 도모하며 경영한 적이 전혀 없었다. 또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었으며, 고을을 다스릴 적에도 백성들에게 취한 것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집에 가진 것 하나 없이 생계가 막연하였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죽은 아우의 자식들을 매우 지극하게 보살펴 주고 사랑하였다. 관직에 거할 때에는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공회(公會)가 있을 때면 반드시 먼저 참석하곤 하였다. 내가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직한 자세를 지키면서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나, 아이들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이고 아첨하는 짓까지는 하지 않게 된 것 역시 사실은 근본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행히 각자 자식을 두었고, 사망한 자가 비록 많아도 살아 있는 자가 희소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서 앞으로 후손이 번창할 가망이 있게 된 것 역시 부군이 지닌 순덕(純德)의 소치(所致) 아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부인(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추증받은 춘수(春壽)의 딸이다. 덕성이 인후(仁厚)하여 친척과 동복(僮僕)과 인리(隣里)가 모두 감복하였는데, 이미 안장(安葬)하여 묘지(墓誌)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재하지 않는다. 자녀 6인을 낳았는데, 지금은 1남 1녀만 남아 있다. 아들 익(翼)은 영천 군수(永川郡守) 현덕량(玄德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고, 딸은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다.
손자 몽양(夢陽)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고, 진양(進陽)은 청양 현감(靑陽縣監)이고, 복양(復陽)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고,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몽양은 부사(府使) 박승조(朴承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지강(持綱)은 생원 김곤원(金坤遠)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2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진양은 사인(士人) 안대항(安大恒)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복양은 관찰사(觀察使) 이경용(李景容)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지형(持衡)은 현령(縣令) 심억(沈檍)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장녀는 유학(幼學) 홍종경(洪宗慶)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내양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시백(李時白)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현양은 관찰사 윤명은(尹鳴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처(夫妻)가 모두 일찍 죽었다. 외손(外孫) 명담(命聃)은 남녀 각 1인을 낳았다. 지강은 2녀를 낳았다. 홍종경은 1녀를 낳았다.
아, 선비(先妣)가 작고한 뒤로 편친(偏親)을 16년 동안이나 모실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계책이 졸렬한 나머지 맛있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해 드릴 것들을 항상 마련하지 못했으니, 불효를 범한 이 죄는 어떻게 갚을 길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지극히 혹독한 벌을 내려 갑자기 버리고 떠나셨으니, 이제는 천지간에 어버이를 잃고 다시는 의지할 곳 없게 되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어서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애간장이 끊어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남산열렬(南山烈烈)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심정일 뿐이다.
삼가 이와 같이 세계(世系), 관자(官資), 졸장(卒葬), 증직(贈職), 자성(子姓)을 차례로 서술하였는데, 장차 당세의 문장과 명덕(名德)을 소유한 분 중에 부군이 일찍이 지우(知遇)를 받은 대인(大人)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길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묘석(墓石)에 한 글자를 새겨 달라고 청하려고 한다.
병술년(1646, 인조 24) 8월 24일 불효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 익(翼)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행장을 쓰다.

[주D-001]남산열렬(南山烈烈) 생불여사(生不如死)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의 “남산은 높이 솟고, 표풍은 빠르도다.〔南山烈烈 飄風發發〕”라는 말과, “작은 병이 텅 빔이여, 큰 항아리의 수치로다. 빈궁한 인간의 삶이여, 죽느니만 못한 것이 오래되었도다.〔甁之罄矣 維罍之恥 鮮民之生 不如死之久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작은 병은 자식을 가리키고 큰 항아리는 부모를 가리키는데, 자식이 변변치 못해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애달픈 심정을 토로한 노래이다.


 
 포저 연보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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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황명(皇明)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7년 본조(本朝)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 12년 기묘(1579)
〇 4월 7일 임오일(壬午日) - 인시(寅時) - 에 선생이 한경(漢京) 창선방(昌善坊) 자택에서 태어났다. - 선생을 임신하고 있을 때에 모부인(母夫人)은 꿈을 꾸면 언제나 선도(仙都)의 별계(別界), 즉 꽃이 만발했다는 뜻의 화란개(花爛開)라는 이름의 지역에서 노닐었으며, 또 가인(家人)이 흑룡(黑龍)이 방 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서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8년 경진(1580) 선생 2세


9년 신사(1581) 선생 3세
〇 말을 하기도 전에 문자를 알아서 문자를 물어보면 손가락으로 그 문자를 가리켰으며, 항상 바둑알을 배열하여 건괘(乾卦)의 모양을 만들었다. 백구(伯舅)인 정랑(正郞) 윤호(尹皞)가 이 광경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년 임오(1582) 선생 4세


11년 계미(1583) 선생 5세
〇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왕고(王考)인 찬성공(贊成公)이 일찍이 길을 떠날 적에 선생이 시구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〇 이웃집 노인이 옷을 벗어서 공터에 놔두고는 선생에게 지켜보라고 하였는데, 저물녘에 돌아와 보니 선생이 종일토록 지키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이 크게 경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12년 갑신(1584) 선생 6세
〇 글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으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도 모두가 기이하였으므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3년 을유(1585) 선생 7세


14년 병술(1586) 선생 8세
〇 조중봉(趙重峯 :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시배(時輩 : 동인〈東人〉)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다가 배척당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는 분개해 마지않으며 소초(疏草)를 작성하여, 소인(小人)이 국정을 담당하여 직신(直臣)이 죄를 얻고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된 정상을 극언하였다. 여러 장자(長者)들이 이 글을 보고는 매우 기이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당시의 금기(禁忌)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 소초를 빼앗아 감추면서 말하기를 “누가 이 글을 소아(小兒)가 지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5년 정해(1587) 선생 9세
〇 지사(知事) 김계도(金繼燾)가 문장에 능하고 잘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는 선생이 찾아가서 배웠다.

16년 무자(1588) 선생 10세


17년 기축(1589) 선생 11세


18년 경인(1590) 선생 12세


19년 신묘(1591) 선생 13세


20년 임진(1592) 선생 14세
〇 왜란(倭亂)을 당하여 가인(家人)을 따라서 양주(楊州)와 연천(漣川)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가을에 광주(廣州)의 시골 농장으로 돌아왔다.

21년 계사(1593) 선생 15세
〇 공주(公州)에 가서 거주하면서 《서경(書經)》을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설(註說)을 모두 막힘없이 통달하자 노유(老儒)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또 《서경》의 홍범(洪範)을 모방해 글을 지어서 인륜(人倫)을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광주(廣州)로 돌아왔을 때에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수원(水原)에서 거상(居喪) 중이었으므로 선생이 찾아가서 배웠는데, 월사가 극구 칭찬하였다.

22년 갑오(1594) 선생 16세
〇 부인 현씨(玄氏)를 배필로 맞았다. - 군수 휘(諱) 덕량(德良)의 딸이다.

23년 을미(1595) 선생 17세
〇 선생의 외종조(外從祖)인 월정(月汀) 윤공 근수(尹公根壽)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선생이 공에게 가서 배운 뒤로 문사(文辭)가 대성(大成)하여 곧장 양한(兩漢) 이전의 문법(文法)을 본받았다. 이에 월정이 탄복하여 마지않으면서 자기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매번 말하였다. 이때 심 유격(沈遊擊)이 일본의 장수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상정해서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보는 이마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24년 병신(1596) 선생 18세
〇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입격(入格)하였다. - 선생은 천부적으로 재질이 월등하였다. 언젠가 금보(琴譜)를 보고는 하루 만에 음률(音律)을 익혔다. 그 밖에 상수(象數)나 복서(卜筮) 같은 글도 한 번 보면 모두 해득하였고 한 번도 고심한 적이 없었다. 글에 대해서는 박람(博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또 선가(禪家)의 글을 보고는 좋아하여 오랫동안 널리 섭렵하였다. 당시에 왜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강개(慷慨)한 마음을 품고는 항상 제갈 무후(諸葛武侯 : 제갈량〈諸葛亮〉)의 사람됨을 사모하면서 병법(兵法)을 강구하고 책략(策略)을 논설하였다. 일찍이 곽재우(郭再祐)와 병사(兵事)를 논하였는데, 그가 크게 경복(驚服)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동방에 영웅이 없더니 지금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25년 정유(1597) 선생 19세


26년 무술(1598) 선생 20세
〇 지경도(持敬圖)를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이 학문에 대해서 고인(古人)이 논한 곳을 보다가 마음에 계합(契合)되는 바가 있었다. 이에 사서(四書)를 취하여 읽다 보니 활연(豁然)히 깨달아지는 점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좋아하는 다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밤낮으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면서 오직 옛 성현을 법도로 삼았다. 선생이 문장의 학업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 월정(月汀)이 매우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어찌하여 앞으로 몇 년 동안만이라도 먼저 문장가가 되는 공부에 종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세간에 없는 문자를 볼 수 있게 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누차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따르지 않았다. 지경도는 경(敬)을 강(綱)으로 삼고, 일내(一內) 제외(齊外)와 정양(靜養) 동찰(動察)을 목(目)으로 삼은 뒤에 경(敬)에 대해서 언급한 경전의 말들을 간추려 그 아래에 배열한 것인데, 아울러 이에 대한 설을 지어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또 성의설(誠意說)과 고설(苦說)과 안자호학론(顔子好學論) 등을 지었는데, 모두 문집에 보인다.

27년 기해(1599) 선생 21세


28년 경자(1600) 선생 22세


29년 신축(1601) 선생 23세


30년 임인(1602) 선생 24세
〇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 선생은 학문에만 전념하였을 뿐 과거 급제에 필요한 글은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조부인 찬성공(贊成公)이 과거에 응시하라고 극력 권하여 부득이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서책(書冊)은 지니지 않고 단지 지필(紙筆)만 손에 쥐고서 단번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초시(初試)에서 제 2 명의 성적을 거두고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이때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고관(考官)으로 있다가 칭탄(稱嘆)하기를 “참으로 세상을 경륜할 글이다.”라고 하였다.
〇 11월에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

31년 계묘(1603) 선생 25세
〇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〇 심학종방도(心學宗方圖)를 찬술하였다. - 선생이 애초에 《중용(中庸)》의 수장(首章)과 《논어(論語)》의 사물장(四勿章)을 용공(用功)의 요체로 생각하여 도표로 작성하고 적어 넣은 다음에 이것을 ‘성문심법지결(聖門心法旨訣)’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도표를 작성하면서 심(心)을 강(綱)으로 삼고, 미발(未發) · 이발(已發)과 안에서 발동하여 정(情) · 의(意) · 사(思)가 되는 것과 밖으로 드러나 시(視) · 청(聽) · 언(言) · 동(動)이 되는 것을 목(目)으로 삼아 ‘심학종방도’라고 명명하고는 이에 대해서 찬(贊)을 붙였는데, 문집에 보인다.
〇 왕고(王考)인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이 마치 어버이 상을 당한 사람과 같이 복을 입었으며, 기신(忌辰) 때에도 종신토록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32년 갑진(1604) 선생 26세
〇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 이때에 어떤 상신(相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며 매우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분관(分館)할 즈음에 그 일을 주관하던 승문원(承文院)의 동료가 극구 말하기를 “수상(首相)의 아들이 괴원(槐院)의 선발에 끼이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응하지 않고 끝내 권점(圈點)을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크게 성내면서 공갈(恐喝)을 많이 해댔으나 선생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33년 을사(1605) 선생 27세


34년 병오(1606) 선생 28세
〇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재상으로 있을 적에 일찍이 선생이 공적(公的)인 일로 찾아갔는데, 한음이 다정하게 대하면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성명(盛名)을 들었으면서도 서로 만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부터는 계속해서 상종(相從)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한음의 신분이 재상이라는 이유로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성망(聲望)이 날이 갈수록 성대해졌지만, 담박한 자세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교유(交遊)하는 일을 단절하였다. 또 당시에 당로자(當路者)가 모두 권행(權倖)의 당(黨)이었기 때문에 선생은 참하(參下)의 관직에 몇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기만 할 뿐, 추천을 통해서 청환(淸宦)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론(時論)이 억울하다고 칭하였다.

35년 정미(1607) 선생 29세
〇 겨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나서 바로 사헌부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

36년 무신(1608) 선생 30세
〇 2월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에 임명되었다. - 이때 서로(西路)에 기근(饑饉)이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강변(江邊)이 더욱 심하였다. 감사(監司)가 선생에게 진휼(賑恤)하는 임무를 맡기자, 선생이 급히 달려가서 성의를 다해 구제하였다. 백성들이 그 덕분에 살아났으므로 모두 비를 세워서 선생의 덕을 칭송하였다.

37년 광해군(光海君)원년 기유(1609) 선생 31세
〇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 이때 이유홍(李惟弘)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추탄(楸灘) 오공 윤겸(吳公允謙)에게 묻기를 “본관(本館)이 홍문록을 새로 작성하려고 하는데, 국외자(局外者) 중에서 첫째가는 사람을 얻어서 참여시키려고 한다. 누가 좋겠는가?”라고 하자, 오공이 선생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유홍이 그 말대로 쓰지를 못하다가 도당(都堂)에서 작성할 때에 와서야 선생이 등록되었다.
〇 10월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〇 11월에 추천을 통해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 과제(課製)로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그 글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견식(見識)과 문장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선생을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공이 바야흐로 재상의 지위에 있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에 연평(延平) 이공 귀(李公貴)가 말하기를 “어찌 두 현인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끝내 만나 볼 수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백사는 뒤에 선생을 만나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허여(許與)했다고 한다.

38년 경술(1610) 선생 32세


39년 신해(1611) 선생 33세
〇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릴 때마다 선생의 지위가 가장 낮았는데도 차자를 작성하는 사본(寫本)을 모두 선생에게 위임하였는데, 여러 동료들이 탄복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처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장차 선생을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으로 천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당시에 이이첨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선생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며 극진하게 성의를 보였지만, 선생은 그가 간인(奸人)이라는 것을 알고는 끝내 응대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 이황〈李滉〉) 양현(兩賢)을 공격하자, 선생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서 정인홍의 사특함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이 장관(長官)의 신분으로 이견(異見)을 제기하며 혼자 차자를 올려서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당시에 이이첨과 정인홍 두 간인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폄직(貶職)되고 말았다.
〇 8월에 경시관(京試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 삼화현(三和縣)의 기녀(妓女) 중에 재모(才貌)로 이름을 드날리는 자가 있었다. 그녀가 방기(房妓)가 되어 10여 일 동안이나 선생의 방에 있었는데, 선생은 끝내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고는 돌아갈 즈음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경복(敬服)하여 종신토록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〇 10월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 고산은 북관(北關)의 대로(大路)에 위치하였는데, 선생이 법대로 집행하면서 폐단을 제거하자 역로(驛路)가 크게 소생하였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 준겸(韓公浚謙)이 이때 감사(監司)로 재직 중이었는데, 선생을 특별히 대우하며 관심을 기울여 마침내 지기(知己)가 되었다. 참의(參議) 이윤우(李潤雨)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의 신분으로 선생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면서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번 여행에서 조모(趙某)를 만나 보지 못했다면 취생몽사(醉生夢死)할 뻔했다.”라고 말했다 한다.

40년 임자(1612) 선생 34세
〇 선생에게는 《탁마록(琢磨錄)》이라는 하나의 소책자(小冊子)가 있었다. 이것은 월(月)과 일(日)을 배열하여 적어 놓고는 날마다 읽고 외운 글과 행한 일들을 기록해 둔 것이다. 예를 들면 위풍(魏風)을 몇 번 읽었다든가 《근사록(近思錄)》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몇 번 읽었다는 식으로 매일 날짜별로 기록한 것인데, 그 사이에 공무(公務)를 행하고 접응(接應)하는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이 책자는 선생이 초원(草原)에 있을 때 작성한 것이다. 당시에 선생은 도학(道學)이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연치(年齒)도 이미 장년에 들어섰으며 게다가 역마(驛馬)를 관리하는 정사를 행하고 있었는데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며 공부에 매진함에 흡사 어려서 배우는 사람들이 일과(日課)를 정해 놓고 독서하는 것과 같았다. 이 밖에 《공서일록(攻書日錄)》과 같은 차기(箚記)를 보더라도 모두 날짜별로 일과를 정해서 기록해 두고 있다. 선생은 매우 노쇠해진 뒤라 할지라도 종일토록 열심히 연구하며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리니, 또한 이런 종류의 책자가 많았을 것이다.

41년 계축(1613) 선생 35세
〇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으로 돌아왔다. - 이때 광해의 혼란한 정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구(國舅)와 대군(大君)을 무함하여 죽이고 잇따라 폐모론(廢母論)을 꺼냈으므로, 선생이 마침내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버렸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선생에게 처신(處身)의 도리를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선비가 어떻게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에서 뜻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공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공부를 그만두겠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이어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경성(京城)에 있는 집도 팔아 버리고 남겨 두지 않았다.

42년 갑인(1614) 선생 36세


43년 을묘(1615) 선생 37세
〇 월정(月汀) 윤공(尹公)의 상을 당해 조문하였다. - 월정을 조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경성에 한 번 들어갔다.

44년 병진(1616) 선생 38세
〇 병조 좌랑과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5년 정사(1617) 선생 39세
〇 또 잇따라 홍문관 수찬과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6년 무오(1618) 선생 40세
〇 평안 도사(平安都事)와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〇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 선생이 집안이 너무도 가난한 처지에 기전(圻甸)에서는 의탁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성과 거리가 가까운 것을 싫어한 나머지 가속(家屬)을 신창으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어버이 곁에 머물면서 왕래하며 우거하였다. 신창에서 선생은 희암(希庵) 현덕승(玄德升) 및 감사(監司) 유영순(柳永詢)과 서로 왕래하였다. 희암은 문장을 잘하고 높은 절조를 지니고 있어서 선생이 소싯적부터 애모하며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유공 역시 장자(長者)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처음에는 서로 면식(面識)이 없었는데, 유공이 항상 선생을 흠모해 오다가 어느 날 저녁에 술을 가지고 내방하여 유숙(留宿)하면서 담화를 나누고 시를 읊고 돌아간 뒤부터 함께 왕래하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
〇 박잠야(朴潛冶) - 지계(知誡) - 및 권만회(權晩悔) - 득기(得己) - 와 글을 주고받으며 격물(格物)에 대한 설을 논하였다. - 박공과 권공이 격물에 대한 뜻을 강론하면서 양자 모두 선생에게 글을 보내 질문하자, 선생이 매우 상세하게 시비를 가려 변론하였는데 그 글이 문집에 보인다. 박공은 뜻이 독실하고 실천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소싯적부터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권공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고 고난 속에서도 절조를 굳게 지키면서 당시에 벼슬하지 않고 남양(南陽)에 물러나 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 서로 만나 보지는 못하였으나 바로 벗으로 허여하고 정신적인 우정을 나누었는데, 뒤에 권공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선생이 그 상(喪)을 길에서 접하고는 글을 지어 제사 지냈다.

47년 기미(1619) 선생 41세


48년 경신(1620) 선생 42세
〇 도원수(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유천(柳川) 한공 준겸(韓公浚謙)이 원수가 된 뒤에 계청(啓請)하여 선생을 종사관으로 삼고는 선생에게 비장(裨將)을 파견하여 글을 전하면서 강력하게 요청하고, 또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3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선생을 다그치며 재촉하였으나, 선생은 세 차례에 걸쳐 글을 보내 극력 사양하면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이 보낸 글 가운데에 “옛날 구양공(歐陽公)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요청을 사양하면서 ‘함께 물러날 수는 있어도 함께 나아갈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명공(明公)과 함께 동시에 물러나 초야에서 10년을 지냈고 보면 함께 물러났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함께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한공이 탄식하면서 “조촐하고 깨끗한 몸을 혼탁한 이 시대에 더럽히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적신(賊臣)이 잇따라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죄를 억지로 조작하여 처형하였으므로, 친척과 지구(知舊)들이 모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선생에게 한번 출사(出仕)하도록 많이 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익으로 꼬드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선생은 끝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희종황제(熹宗皇帝) 천계(天啓) 원년 신유(1621) 선생 43세
〇 조사(詔使)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선생은 기미년(1619, 광해군 11) 이후로 해마다 옥당(玉堂)과 병조 정랑의 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또 제술관으로 급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 명류(名流)로서 출사하지 않은 이가 5인이었으므로 이들을 일컬어 5열사(烈士)라고 하였다. 그런데 관직을 제수하며 부르는 일이 빈번하고 급했는데도 끝내 응하지 않은 이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2년 임술(1622) 선생 44세
〇 《대학곤득(大學困得)》 등 제서(諸書)를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이 학문에 전심(專心)하였다. 사서(四書)를 읽으며 터득한 것이 있을 때마다 적어서 모은 기록이 차츰 쌓여 한 책씩 이루어졌는데, 이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학곤득》과 《중용곤득(中庸困得)》과 《논어천설(論語淺說)》과 《맹자천설(孟子淺說)》 등의 글이 모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 서설(序說)이 붙어 있는데,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자신의 절조를 지키면서, 남들은 견딜 수 없는 기한(飢寒)과 곤고(困苦)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걱정 없이 담박하게 지냈다. 그리고는 경전의 뜻을 깊이 탐색하여 그 의리를 드러내 밝혔는데, 세간의 어떤 일도 이러한 즐거움을 바꾸거나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봉하는 가운데 온 세상 사람들이 마치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그러니 당시의 비록 혼란한 조정에서도 그래도 선생을 경모(敬慕)할 줄을 알았는데, 수상(首相) 박승종(朴承宗)이 올린 차자(箚子)에도 “현재 초야에 있는 현인 가운데 모(某)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할 뿐 일어나지 않고 있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 거의(擧義)한 제공(諸公)들 대부분이 선생의 지구(知舊)들이었으므로 모두 선생에게 통고하려고 하였으나, 연양(延陽)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초연히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에게 위험한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다.”라고 말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3년 인조대왕(仁祖大王) 원년 계해(1623) 선생 45세
〇 3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3일에 인조대왕이 즉위하였고, 14일에 전랑(銓郞)을 임명하였다. 거의한 제공이 초정(初政)을 행하기에 앞서 “전조(銓曹)에는 당세의 첫째가는 자를 등용해야 한다.”라고 의논하고는 맨 먼저 선생을 그 자리에 배치하니, 19일에 입경(入京)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이때 유신(維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공도(公道)를 크게 열어 혼조(昏朝)의 더러운 무리를 모조리 축출하고 이름과 행실이 있는 자들을 발탁하였으며 한 가지 선(善)이나 기예만 있어도 모두 거두어 녹용(錄用)하였는데, 그러한 일들 대부분이 선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〇 반정(反正)하던 날에 광해(光海)에게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으므로 거사가 하마터면 위태로워질 뻔하였다. 이에 반정한 뒤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걸(桀)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어댄 격이니, 죽이면 안 된다.”라고 하니 그 자가 이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〇 또 윤대(輪對)하던 날에 상에게 아뢰기를 “전하의 성스러운 지혜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만,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는 반면에 학문의 유익함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한당(漢唐) 이하의 임금 가운데에는 자질이 아름다워서 치적을 이룬 자도 있습니다만, 삼대(三代)의 정치에 미칠 수 없었던 것은 제왕(帝王)의 학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삼대 이상의 정치로 자신의 목표를 삼으소서. 미천한 신 역시 감히 삼대 이하의 정치를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지우(知遇)를 받은 초기에 맨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터득한 것을 바탕으로 상에게 큰 뜻을 품도록 권면하였는데, 상도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〇 송강(松江) 정공 철(鄭公澈)이 오래도록 죄적(罪籍)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종명(宗溟) 등이 신원(伸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며 상의 뜻을 동요시키는 자가 있었다. 이에 선생이 그 억울함을 극력 진달하여 마침내 관작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였다. 〇 폐세자(廢世子)가 위리(圍籬)를 뚫고 도망친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에서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이에 영상(領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장령(掌令) 윤공 황(尹公煌)과 교리(校理) 이공 준(李公埈)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자 대간(臺諫)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공격하면 안 된다고 극력 말한 결과 마침내 그 논의가 중지되었다.
〇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의 도청(都廳)을 겸하였다. - 이때 폐정(弊政)을 경장(更張)할 것을 의논하여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의 4개 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설행하기로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상 원익(李相元翼)이 이 일을 주도하면서 상에게 아뢰어 선생이 도청을 겸하여 그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이 밤낮으로 강구하며 정성을 다하여 계획을 세운 결과 법제(法制)가 이루어져서 바야흐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납(防納)을 하는 호강(豪强)하고 교활한 무리가 서로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동요시켰고, 당로자(當路者) 중에도 이 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근거 없는 의논을 빌미로 삼아 극력 저지하였다. 선생은 이 대동법이야말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을 부유하게 하는 대정(大政)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입대(入對)하여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며, 또 상소하여 극언을 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이 법도를 제정한 것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왕도 정치(王道政治)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일 따름이니, 이른바 10분의 1의 세금을 걷는다는 것도 모두 곡물(穀物)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재(理財)에 법도가 없어서 전세(田稅)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무거운데도 곡물은 조금 징수하고 잡물(雜物)을 부과(賦課)하니, 그 때문에 온갖 병폐가 발생하여 상하(上下)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오직 그 법제(法制)를 바꾸어 상하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야 할 것인데, 지금 이 선혜청의 법제야말로 옛 제도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서 거두는 것을 모두 미포(米布)로 하고, 중외(中外)의 수용(需用)도 이것을 가지고 분배해 주며, 또 남는 것은 저축해서 흉년이나 재해(災害)에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징수하는 수량은 10분의 1의 세금보다도 가벼우니, 이는 실로 맹자가 말한 선왕(先王)의 정치와 은연중에 합치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 말미에 또 “법제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저절로 행해질 수는 없는 일이요, 천덕(天德)을 소유해야만 왕도(王道)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는 도리와, 세도(世道)의 치란(治亂)에 관한 기미(幾微)를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열심히 하도록 더욱 노력하면서, 날마다 유정유일(惟精惟一) · 극기복례(克己復禮) · 격물치지(格物致知) ·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에 매진하시어 그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옛날 제왕의 성대한 치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해관계를 상세히 설명하여 나의 의혹을 풀어 주었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동법이 마침내 폐지되지 않게 되었다.
〇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는 인원에 선발되었다. - 이때 중국 장관(將官)의 자게(咨揭)가 몰려들자, 승문원(承文院)이 선생과 최공 명길(崔公鳴吉)과 장공 유(張公維)를 제술관(製述官)으로 삼아 문서를 전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〇 9월에 승진하여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며,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와 혜민서 의학교수(惠民署醫學敎授)를 겸하였다. - 또 훈련도감 도청(訓鍊都監都廳)도 겸하였다.
〇 겨울에 왕명을 받들고 양호(兩湖) 지방에 내려갔다. -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관한 일로 내려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부로(父老)들을 초치(招致)하여 대동법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물어보며 이 법의 뜻을 선포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복명(復命)을 하고는 다시 상소하여 대동법 시행의 편리한 점을 극력 진달하였다.

4년 갑자(1624) 선생 46세
〇 2월에 공주(公州)로 호가(扈駕)하였다. - 이괄(李适)이 군대를 동원하여 관서(關西)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도성을 나와 공주로 몽진(蒙塵)할 적에 선생이 호종(扈從)하였다. 한강(漢江)을 건널 때에 선생이 상신(相臣)에게 고하기를 “집이 길옆에 있으니 노친(老親)을 뵙고 가고 싶다.” 하고는, 마침내 집에 이르러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때 아들 복양(復陽)이 아직 어렸는데, 그가 읽고 있는 책에 제목을 써 주면서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게 되면 나는 응당 죽을 것이다. 인생에서 학문보다 귀한 것은 없으니, 비록 상란(喪亂)과 전패(顚沛) 중이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너는 부디 힘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적이 패하자 호가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〇 3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고, 다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상(李相)이 천거한 것이다. 완평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 사인(趙舍人)은 지금의 세상 사람이 아닌데, 옛사람들 중에서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 경륜(經綸)의 인재는 조정에서 단지 이 한 사람밖에 없다.”라고 했다 한다.
〇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임명되었다. - 얼마 뒤에 사인(舍人)으로 복귀하였다. 
〇 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다.
〇 6월에 응교(應敎)에 임명되고 나서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 경연(經筵)에서 《논어》를 진강(進講)할 적에 선생이 저술한 《대학곤득》과 《논어천설》을 바치면서 소를 올려,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대법(大法)을 논하였다. 그리고는 아뢰기를 “전하께서 참으로 성현의 학문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그 규모(規模)와 문로(門路)와 방법과 순서가 모두 두 책에 구비되어 있으니, 온축(蘊蓄)된 그 의리를 연구하여 나의 지식을 개발하고, 신심(身心)과 일용(日用) 사이에 살펴서 강론한 그 이치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은현(隱見)과 표리(表裏) 모두가 명백하고 순수해져서 정령(政令)으로 시행하고 사업으로 드러내는 사이에 천지(天地)의 조화(造化)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〇 체차(遞差)되어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었다. -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박승종(朴承宗)이 광해(光海)를 위해서 죽은 만큼 적몰(籍沒)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자, 양사(兩司)가 번갈아 그의 죄를 논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차(上箚)하여 홍호의 발언이 비록 망녕되더라도 언자(言者)에게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헌부(憲府)가 이를 논하여 체차된 것이다.
〇 9월에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〇 10월에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
〇 12월에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 인조조(仁祖朝)에 이 직책을 맡은 이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〇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5년 을축(1625) 선생 47세
〇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轉職)되었으며, 선혜청 부제조(宣惠廳副提調)를 겸하였다. -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적에 당초 전지(田地) 1결(結)당 미곡 16두(斗)씩 거두기로 정하였고, 경중(京中)과 외방(外方)의 수용(需用)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단지 10두만 거두어 경중의 공물(貢物)의 비용으로 삼고, 외방의 수용은 우선 예전의 규례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공물의 방납(防納)에 따른 폐단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탐관오리들이 불균등하게 처리하는 폐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선생이 진계(陳啓)하여, 미곡 5두를 별도로 더 거두어 외방의 수용으로 삼도록 제도화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 제안을 의논하도록 내려 보냈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그만 폐기되고 행해지지 못하였다. 〇 대동법의 설행은 당초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李公)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미 경기 지방에 시행되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매우 편하게 여겼다. 선생이 오랫동안 향곡(鄕曲)에 있으면서 민간의 폐막(弊瘼)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폐막을 개혁하고 민생을 구제할 방법으로는 이 법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을 전담하게 되자 마음을 쏟아 헤아리고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면서 지극히 상세하게 갖추어 놓았으므로 시행한 지 1년 만에 벌써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상신(相臣) 중에 이 대동법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극력 저지하며 동요시키자, 완평도 당초의 의견을 견지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폐지할 것을 상주(上奏)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쟁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완평이 선생의 소를 보고 탄식하기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조 승지(趙承旨)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〇 2월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〇 4월에 다시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유지(有旨)에 응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다. - 상이 재이(災異) 때문에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자 선생이 봉사를 올렸다. 맨 처음에 학문에 힘쓰고 선을 따라야 하는 도리를 말하고, 그 다음에 인재를 얻어서 정치를 행하는 방법을 말하고, 마지막에 폐막을 개혁하고 민생을 구제하는 방도를 말하였는데, 모두 수천 언에 이르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정원(政院)에 있으면서 역시 소를 갖추어 올리려고 하다가 선생의 이 소를 보고는 말하기를 “이 소야말로 진정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글이요,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의논이다. 우리들의 소는 올릴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호패법(號牌法)을 설행하여 민간이 크게 동요하였으므로 선생이 소의 말미에 시행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뒤에 결국 폐지되었다. 〇 선생이 입시(入侍)할 때마다 반드시 성인의 학문과 선왕(先王)의 정사를 가지고 상에게 권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조정이 화합하겠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구차하게 동의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의 일 처리가 한결같이 공도(公道)에서 나오게 되면 굳이 화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히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6월에 우승지로 승진하고, 또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10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가 체직되고, 12월에 다시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오래도록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일마다 바르게 진언하였고, 교명(敎命)에 불가한 점이 있으면 번번이 봉환(封還)하였다. 백성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있으면 매번 선생의 말 머리 앞에서 호소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생이 자세히 살펴보고는 상에게 아뢰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일이 많았다. 법률상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죄인에게 특별히 사율(死律)을 적용하자, 선생이 법을 고수하며 논주(論奏)하고는 형을 집행할 무렵에 뒤쫓아 달려가 막으니, 도성 사람들이 차탄(嗟歎)하였다.

6년 병인(1626) 선생 48세
〇 6월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으로 볼 때 참으로 이 직임에 합당하니 사직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때에 국중(國中)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승려들의 환속(還俗)을 허락하고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 건의를 조정에 내려 보냈으나 기각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〇 7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승진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이때에 서쪽 변방에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사의(事宜)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재해를 입은 해변의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요, 둘째는 요동(遼東)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요, 셋째는 강변의 변란을 대비하는 계책이었다. 상이 이 건의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려 보내 의논하게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선생이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쪽 변방에 대한 일을 진달드렸으나 채납(採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물론 매사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감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요동의 백성들을 이주(移住)시키는 하나의 계책만큼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기에 감히 이렇게 다시 논하게 되었습니다. 임진년의 왜란 때에 중국 조정이 큰 은혜를 베푼 덕택에 국가가 재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 사람들이 생육(生育)하며 장양(長養)하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각자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구제해 준 덕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고 할 것인데, 지금 장차 죽게 된 십만 명의 이 요동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동 백성들로서도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으며, 천하에서 이 소문을 들으면 의롭게 여김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이 계책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지(內地)가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나 지난 임진년에 중국 조정에서 십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수십만의 양식을 운송하여 만 리 멀리 정벌을 행하였으니, 당시에 그 피해가 어찌 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요동 백성들을 열읍(列邑)에 나누어 이주시키는 데 따른 피해를 따진다면 과연 얼마나 된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조그마한 피해를 꺼려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 일을 다시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계책은 즉시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요동 백성들은 그 사이에 이미 선생이 요량했던 대로 내지로 많이 유입(流入)하여 생업을 영위하였다.
〇 8월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 선생이 집안이 빈한했기 때문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서 외방으로 나가기를 구한 것이다. 정사를 행함에 대체(大體)를 견지(堅持)하면서 오로지 인서(仁恕)를 위주로 하자 사람들이 스스로 감화되었다. 정세(征稅) 중에 과중한 것은 견감(蠲減)해 주고, 옥송(獄訟) 중에 억울하게 지체된 것은 소결(疏決)해 주고, 간사하고 교활하게 피해를 끼치는 자는 조금도 용서 없이 치죄(治罪)하고, 청탁을 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7년 정묘(1627) 선생 49세
〇 정월에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그들이 물러가자 강도(江都)로 들어가서 문후(問候)하였다. - 적병이 양서(兩西) 지방을 유린하고 평산(平山)에 이르자 선생이 주선(舟船)을 수습하여 사녀(士女)들을 모두 해도(海島)로 옮겨 주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그리고는 선생이 척후(斥候)를 널리 설치하여 적의 원근(遠近)과 허실(虛實)을 정탐하였으므로 체찰사(體察使) 장공 만(張公晩)이 그 정보를 얻어 활용할 수 있었다.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에 주재(駐在)하였으므로 적병이 물러간 뒤에 들어가 문후하고 돌아왔다.
〇 평산산성(平山山城)을 수축해서 경도(京都)의 울타리로 삼자고 상소하여 청하였다. - 선생이 아뢰기를 “적병이 물러갔다고 하더라도 화호(和好)를 믿기 어려우니, 비어(備禦)할 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산산성은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要衝)이요 또 형세로 볼 때 지킬 수가 있으니, 신에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고, 수비할 방략(方略)을 강구하여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계책을 활용하지 못하였다.
〇 12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의종황제(毅宗皇帝) 숭정(崇禎) 원년 무진(1628) 선생 50세
〇 정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 - 이때 이인거(李仁居)와 유효립(柳孝立)이 서로 잇따라 모반(謀反)을 하다가 복주(伏誅)되었으므로 이들을 체포하고 고발한 자들의 공을 논하였다. 그런데 소무(昭武)와 영사(寧社)의 두 공신(功臣)을 책훈(策勳)할 적에 허위로 외람되게 하여 공정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대간(臺諫)이 논하여 녹훈(錄勳)을 감정(勘定)한 것을 개정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니, 상이 이미 감정했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당시에 이름 있는 재상으로서 허위로 원훈(元勳)이 된 자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곧장 배척하며 극력 쟁집(爭執)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감정한 것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이 일을 옳게 여겼다.
〇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워서 예제(禰祭)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차자를 올려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원종(元宗)의 왕후를 계운궁(啓運宮)이라고 칭하였다. 그 상을 당했을 적에 선생이 이에 합당한 복의(服議)를 지어서 말하기를 “《의례(儀禮)》의 전(傳)에 나오는 ‘대종(大宗)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小宗)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한다.〔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조문(條文)을 따라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차자를 올려 그 복의를 바치면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종묘의 대통(大統)을 이을 경우에는 본친(本親)에 대해서 존봉(尊奉)하는 도리를 감히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과도하게 높여서 받들 경우에는 종묘에 대해서 전념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게 되고, 본친에 대해서도 예법을 위배하는 잘못이 있게 되어 양쪽 모두에 효성을 바치는 도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여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워서 예제(禰祭)를 받들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할 경우에는 대종과 소종 그리고 소후(所後)와 본생(本生) 모두에 대해서 후사(後嗣)가 되는 셈이니, 이는 예경(禮經)을 위배하고 예법을 그르치는 것으로서 윤리를 크게 해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공이 또 상소하여 쟁론하니, 선생이 다시 수천 언의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다.
〇 3월에 차자를 올려 계운궁의 부제(祔祭)에 대해서 논하였다. - 초상(初喪) 때부터 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 보(俌)를 상주(喪主)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虞) · 졸곡(卒哭) · 상(祥) · 담(禫)의 제사를 모두 능원군이 주관하였는데, 부제를 올릴 때에 와서는 상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동료와 함께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간쟁하였다.
〇 이조 참판에 임명되고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 판서가 유고(有故) 중이었으므로 선생이 항상 독자적으로 정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재의 임용을 모두 지극히 공정하게 하였으며, 특히 수령(守令)을 신중하게 가리려고 힘썼다. 비변사가 계청(啓請)하여 선생을 당상으로 삼고 유사(有司)의 임무를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항상 이 직무를 겸대(兼帶)하게 되었다.

2년 기사(1629) 선생 51세
〇 4월에 사직하여 체차(遞差)된 뒤에 호군(護軍)이 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다.
〇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다.
〇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또 질병으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〇 5월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 병조 판서 이공 귀(李公貴)가 차자를 올려 붕당(朋黨)에 대해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상이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현이 말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탐구하지도 않으신 채 무턱대고 단안을 내려 폐단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것이 소략할 뿐만이 아니라 성현을 경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아울러 주자가 그렇게 말한 본의를 매우 자세히 드러내 밝히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교리 나공 만갑(羅公萬甲)이 일찍이 사람들과 함께 용사(用事)하는 자의 잘못을 논하자, 우상(右相)인 김류(金瑬)가 노하여 상에게 아뢰면서 나만갑이 부박(浮薄)하니 제재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나만갑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니,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언어 때문에 죄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대제학(大提學)인 장공 유(張公維)도 상소하여 나만갑을 신구(伸救)하였다. 상이 노하여 장유를 좌천시켜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으니, 선생이 상소하여 선인(善人)을 배척하여 물리치는 것과 언로(言路)가 막혀 끊어지게 하는 것은 결코 국가의 복이 못 된다고 아뢰었으나 아무 회답이 없었다. 이에 선생이 사체(辭遞)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8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〇 9월에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특명으로 대사성도 아울러 겸하였다. - 대사성은 바로 실직(實職)으로서 겸대(兼帶)하는 예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온유한 말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생이 항상 대사성의 직책을 겸대하게 되었다. 선생이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유생들을 효유(曉諭)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저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얻어서 사람이 되었으니, 그 본성이 선한 점에서는 요순(堯舜)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요행히 서민(庶民)이 되지 않고 사대부(士大夫)의 족속이 되었으며, 또 다행히 다른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이 글을 읽는 유사(儒士)가 되었다. 따라서 진정으로 희성(希聖)하고 희현(希賢)하는 뜻을 지닐 수만 있다면 모두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선비가 된 자들이 처음 서책을 손에 쥘 때부터 단지 과거에 급제하여 귀한 신분의 현달(顯達)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만 품고 있을 뿐 성현의 학술이 있는 것은 다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한 형편이다. 이것이 바로 학문을 제대로 닦고 도덕을 제대로 행하는 선비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사풍(士風)이 날이 갈수록 퇴폐해지고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더욱 오염되는 이유이다.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는 세상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자료로 삼아 온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지금 모두 과거 공부를 하는 서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송(宋)나라 선현(先賢)들의 글만이 과거 공부와 상관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근사록》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말하면 그 이치가 광대하게 모두 구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이 명백하면서도 절실하고, 또 그 글이 간략해서 과정을 마치기가 용이하다. 따라서 이 하나의 책에 대해서 숙독하고 깊이 생각한다면 성현의 심사(心事)와 학문의 문로(門路)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서 사서(四書)와 시서(詩書) 등의 서책을 가져다 읽으면, 그 어의(語意)가 모두 마음속으로 자연히 이해가 되어 마치 부형(父兄)이 집안일을 일러 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에 대해서 그 의미를 터득하게 되면 세간의 다른 사업이나 득실(得失) · 영욕(榮辱) 따위는 모두 마음에 담아 둘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대개 성현이 이른 지위야말로 우리 인간이 일생에 걸쳐 수행해야 할 사업인데,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근사록》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상께서 나의 불초함을 알지 못하시고 이 임무를 맡기셨다. 내가 일단 이 직위에 있게 된 이상 어떻게 감히 성현의 사업을 가지고 제생(諸生)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제생과 함께 이 《근사록》 한 책을 공부해 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근사록》을 가지고 제생을 교수(敎授)하니, 그 풍도를 듣고 학문의 길로 들어서서 선(善)을 향해 흥기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학정(學政)을 논하고, 이와 함께 가르침을 베푸는 절목(節目)을 하나하나 진달하여 올렸다.
〇 도승지로 옮겼다. - 이때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선생이 그를 머물러 있게 하기를 주청(奏請)하며 아뢰기를 “오늘날 숙덕(宿德)으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응당 불러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미 올라왔는데 그의 거류(去留)를 방임하여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야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〇 11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3년 경오(1630) 선생 52세
〇 2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상이 종묘 원내(垣內)의 수목에 벼락이 떨어지자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중외(中外) 민생의 곤고(困苦)하고 수원(愁怨)한 정상을 극력 진달하면서, 포탈(逋脫)한 세금의 징수와 군병의 징집을 정지할 것과, 각 아문(衙門)에서 장사를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백성을 침해하는 일을 일절 금단(禁斷)할 것과, 경중(京中)의 상인이 바치는 물건도 모두 값을 따져서 가격대로 계산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풍정(豐呈)의 큰 잔치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과, 능침(陵寢)에 반복해서 다섯 차례나 제향(祭享)을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아뢰었다. 이에 상이 가납(嘉納)하고 대부분 그렇게 시행하였으나, 풍정만은 그대로 설행하였다. 사간(司諫) 윤공 황(尹公煌)이 풍정 때에 외간의 부녀자가 함부로 궁에 들어와서 난잡해진다고 논하면서 궁중의 금법(禁法)을 엄히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노하여 그를 체직시켰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궁중과 관련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이니, 언로(言路)가 마침내 막히고 아첨하는 풍조가 이루어질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풍정을 마치고 제도(諸道)의 기녀(妓女)를 해산하여 돌려보낼 즈음에 장악원(掌樂院)이 그들을 머물러 두어 풍악을 익히게 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중국을 어지럽히는 변란이 일어나서 황성(皇城)이 포위되기까지 하였으므로 아직도 계엄(戒嚴)이 해제되지 않고 있으니, 지금은 군신(君臣)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날을 보내야 할 때입니다. 안으로 경내(境內)의 일을 살펴보거나 밖으로 중국의 형세를 살펴보면 모두 통곡할 만한 일들뿐이요 즐거워할 만한 일은 볼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무는 여악(女樂)을 교습하는 데에 있지 않을 듯싶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해산하여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〇 4월에 피도(皮島)의 항장(降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였다. 그 보고가 이르자 상이 묘당(廟堂)의 제신(諸臣)과 의논하여 토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뒤에 듣건대 유흥치가 명(明)나라 조정에 진주(陳奏)하여 사기(事機)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으므로 제신 대부분이 출병(出兵)을 철회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출병을 철회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지만 군대는 결국 출동하지 않았다. 〇 헌부(憲府)가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질책하면서 이들을 불러들인 자의 성명을 지적해서 말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민간인들끼리 노비를 쟁탈하는 것도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내수사로 말하면 임금님 개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인데 만약 투속하는 노비들을 용인하여 받아들인 일이 있다고 한다면, 제사(諸司)에서 투속시키는 일을 어떻게 금지시킬 것이며, 서민들이 서로 쟁탈하는 일을 어떻게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불러들인 사람들로 말하면 그 신분이 미천한 데다가 그 일을 극비로 진행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알아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만, 가령 원한을 품은 자들로 말하면 어디를 막론하고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만 힐문하면서 꺾어 버리셨으니,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중의 일이나 내수사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나라 사람들에게 전하의 사심(私心)을 보여 주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〇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상소하여, 김두남(金斗男)과 조기(趙琦) 등의 서녀(庶女)가 궁중에 들어온 일을 말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궁중에서 사족(士族) 집안의 여자들을 들였습니다. 간택하라는 왕명이 아직 조정에 내려지지 않았으니, 그들이 사적(私的)인 길을 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궁중에 스스로 들어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군자는 기미를 미리 살펴서 점차 확대되지 않도록 걱정을 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신하 역시 임금을 사랑하면서 그 기미가 보일 때 미리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인을 총애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는 말과 성인이라도 광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상기하여 두렵게 여기시고, 머지않아서 되돌아오는 것을 법도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사욕(私欲)을 극복하고 바른길로 되돌아오는 전하의 공이 옛날의 제왕에게 비교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화공(畫工)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몇 달이 지나도록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회화(繪畫)에 관한 일이 어찌 본래의 뜻을 잃게 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모든 기호(嗜好)를 일절 끊어 버리시어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해져 털끝만큼이라도 가리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이 이공(李公)의 소와 관련하여 회계(回啓)하면서 여인들이 궁중에 들어오도록 주선한 자의 죄를 지적하여 아뢰자, 상이 노하여 언근(言根)을 캐내라고 명하고 또 빈어(嬪御)를 간택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어떤 일이든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입니다. 지금 언근을 캐내라고 분부하신 것이 어찌 그 바름을 얻은 것이겠습니까. 그동안 전하께서 빈어를 두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전하의 거룩하신 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이런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 또한 노여움에 촉발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월사(月沙) 이공(李公 : 이정귀)이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를 읽을 때마다 탄식하기를 “참으로 선유(先儒)의 격언이다.”라고 하였고, 상 역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〇 12월에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이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 선생이 무진년 가을부터 병환을 앓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난 이때까지 병세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덜했다가 더했다가 하였다. 그래서 임명을 받을 때마다 번번이 병을 이유로 고사(固辭)하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4년 신미(1631) 선생 53세
〇 3월에 모친인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이 죽을 마시면서 소상(小祥)을 치르는 바람에 병이 심해지자 의정공(議政公)이 간절히 권하여 비로소 소식(疏食)을 들었으나 채소는 먹지 않았다. 담제(禫祭) 뒤에도 해를 마치도록 외침(外寢)에서 거하였다.

5년 임신(1632) 선생 54세


6년 계유(1633) 선생 55세
〇 5월에 상을 마쳤다.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체(辭遞)하였다. - 다시 임명되었으나 또 사체하였다. 
〇 7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이때 명정전(明政殿)의 기둥과 창호(窓戶)에 벼락이 떨어지자, 상이 제신(諸臣)을 불러 구언(求言)하며 과오를 물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고는 아울러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을 기울일 것을 진달하였다. 그리고 다시 차자를 올려 거듭 논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욱 절실하기 그지없었다. 상이 후하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〇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 선생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재능과 덕망이 모두 넉넉하고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발탁하여 이 직임을 제수하였으니 의당 사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차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〇 명(明)나라의 반장(反將) 경중명(耿仲明)이 수군(水軍) 수천 명을 이끌고 심양(瀋陽 :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피도(皮島)를 침입할 계획을 꾸몄다. 선생이 비밀 계책을 진달하며 아뢰기를 “원수(元帥)로 하여금 피도의 명나라 장수와 은밀히 상의하여 서둘러 방비하게 함으로써 피도가 함락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조정이 그 계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〇 차자를 올려 과거에서 강경(講經)하는 제도를 변경하기를 청하였는데, 배강(背講)의 폐단을 극언하며 아뢰기를 “본래의 목적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함인데 거꾸로 인재가 없어지게 하고, 본래의 목적은 경술(經術)을 닦게 하기 위함인데 거꾸로 경술이 막히게 하고 있으니, 대소(大小)의 과거에 모두 강경을 하게 하되 모두 임강(臨講)을 하여 오로지 문의(文義)를 위주로 하게 하소서.”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후세의 글 중에서는 오직 《근사록》이 가장 순수하고 바르니, 경서 이외에 이 글을 또 시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조종(祖宗)의 법제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그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〇 호남(湖南) 사람 이희웅(李喜熊)이 소싯적부터 지절(志節)을 지니고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현감으로 그쳤다. 그가 연로하여 집에 거하면서 상소하여 인재를 교육시키는 방도에 대해 논하였는데, 상이 그 일을 예조에 내렸다. 이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희웅의 의논을 보니 매우 식견이 있습니다. 그 뜻이 가상하니 표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희웅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희웅의 건의대로 교양관(敎養官)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주하여 아뢰기를 “희웅이 진달한 것은 정자(程子)가 교육에 대해서 논한 말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절실한 것부터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마땅한 법입니다. 만약 직임(職任)만 설치해 놓고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임명한다면 어떻게 실효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응당 경학에 밝고 절행(節行)이 있어서 사람들이 외경(畏敬)하는 자를 가려 뽑아 태학(太學)의 사유(師儒)로 삼은 뒤에, 날마다 제생(諸生)과 함께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면서 많은 세월 동안 공을 쌓게 한다면, 선비가 된 사람들이 점점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될 것이요, 풍속도 점차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외방(外方)의 산과 들 사이에도 반드시 옛사람을 사모하며 글을 읽고 집안에서 효도와 우애를 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각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찾아보고서 계문(啓聞)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송(宋)나라 때에 서원(書院)에서 교육을 주관한 자에게 베풀었던 고사대로 그에게 산장(山長)의 칭호를 수여한 뒤에 그 지역의 후생들을 가르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초야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수록(收錄)되는 은혜를 받고서 부질없이 늙어 가지 않게 될 것이요, 후생(後生)의 소자(小子)들도 모두 학문과 품행이 사모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니, 선비의 풍조와 향토의 풍속이 점차로 변하면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육의 도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따금씩 제생을 권면하며 독려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과거 시험에 필요한 글공부일 뿐입니다. 이번에 시행하는 일은 그야말로 옛날의 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의논해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〇 이때 별과(別科)를 거행하면서 장차 경사(京師)에 모이게 하여 시험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경사와 외방으로 나누어 각각 300명씩 뽑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제릉(諸陵)을 수개(修改)하는 공사를 벌이게 되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무릇 분묘(墳墓)에는 풀이 빽빽이 자라나서 비가 내려도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니, 사초(莎草)나 잡초(雜草)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매번 능침(陵寢)을 경동(驚動)시키는 것도 미안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는 마침내 정제(定制)로 삼았다. 〇 이에 앞서 진주(晉州)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순절(殉節)한 신하인 김천일(金千鎰)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 등 3인만을 사당에서 제사 지냈다. 당시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이 성이 함락될 때에 역전(力戰)하다가 싸울 무기도 모두 없어지자 두 왜적을 겨드랑이에 끼고 강으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인 득화(得華)가 부친의 충절(忠節)에 대해서 상언(上言)하였다. 이에 선생이 그 사실을 찾아보다가 안공 방준(安公邦俊)이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얻고는 이를 위에 바치면서 아뢰기를 “이종인의 일은 장렬함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또 고종후(高從厚)의 한 가문은 의리에 목숨을 바쳐 충효를 모두 온전히 하였습니다. 그러니 수양(睢陽)의 쌍묘(雙廟)에 남제운(南霽雲)을 함께 향사(享祀)하게 한 고사에 의거해서 이종인과 고종후 두 사람을 진주의 사당에 함께 향사하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관서(關西) 지방 출신인 한우신(韓禹臣)이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서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몸을 닦고 글을 읽으면서 집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이 본도(本道) 인사의 소에 의거하여 그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표창하여 증직(贈職)을 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년 갑술(1634) 선생 56세
〇 8월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고, 또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〇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원종대왕(元宗大王)을 추존(追尊)하는 일로 명(明)나라 조정에 주청하였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고는 책명(冊命)하고 봉증(封贈)하였다. 상이 원종대왕의 신위(神位)를 종묘로 들이는 의례를 의논하도록 명하니,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이 쟁집(爭執)하며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대사헌 강석기(姜碩期)와 대사간 조정호(趙廷虎)와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을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간절하게 논집(論執)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이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10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부제학은 종 2 품 이하를 의망(擬望)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때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이조가 계청하여 선생을 그 자리에 있게 하였다.
〇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〇 11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충청 · 전라 · 경상 3개 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양전을 행하는 목적은 토지의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기 위함이니, 왕정(王政)에서 응당 먼저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국가에 일이 많아 민역(民役)이 지극히 무거우니, 일단 양전을 실시한 뒤에는 반드시 공부(貢賦)를 상정(詳定)해서, 가령 전결(田結)의 수가 예전보다 갑절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공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전보다 많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양전을 실시한 국가의 본의(本意)가 균역(均役)에 있는 것이지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백성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이 체직되었다.
〇 12월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였다. - 선생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 차례나 상소하여 극력 사직하니,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조가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직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고, 또 사장학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장으로 선생과 견줄 만한 사람이 실로 드물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이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〇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다.

8년 을해(1635) 선생 57세
〇 4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〇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〇 5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6월에 체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임명되고, 8월에 체직되었다가 9월에 다시 임명되었다.
〇 차자를 올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신하의 도덕과 학문을 진달하였다. - 이때 관학(館學) 유생인 송시형(宋時瑩) 등이 상소하여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선생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반대편 사람들이 상소하여 양현(兩賢)을 무함하고 헐뜯으면서 상이 오해하도록 현혹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양현의 덕행의 실상을 극력 진달하였다. 회보하지 않자 선생이 마침내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다시 질병을 이유로 사체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상소하여 동지성균관사의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관학(館學) 유생들이 양현의 종사를 청할 적에 수창(首倡)하며 이론을 제기한 자의 처벌을 논하니, 그 무리가 구축(驅逐)당했다고 칭하면서 동학(東學)으로 걸어가서는 무함하고 헐뜯는 소를 올리자, 관유가 또 동학에서 주도한 자를 삭적(削籍)하였다. 사관(四館)에서도 정거(停擧)하는 벌을 시행하니, 사관에서 이론을 주도한 자 역시 사관의 유생을 정거하였다. 이처럼 관유(館儒)가 상호 분란을 일으켜 태학(太學)이 마침내 텅 비게 되자, 지관사(知館事)인 최명길(崔鳴吉)이 사관의 유생을 모두 모이게 한 뒤에 시비를 분별하여 정거시키기도 하고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론을 제기한 자들에 대해서도 경중을 나누어 반성하게 한 뒤에 함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동학에서 수창한 채진후(蔡振後) 등 몇 사람이 처벌에서 풀려나지 못하자 그 무리인 권적(權蹟) 등이 다시 소를 올려 고자질하며 양현을 극구 비난하였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은밀히 그 논을 주도하면서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최명길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상이 최명길의 체직을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최명길이 올린 본관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시비를 분별하고 나서 또 관용을 베풀었으니 온당하게 처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세(治世)의 도리로 볼 때 어찌 선악과 시비를 도시 분별하지 않고서 모두 나아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준엄한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선생이 마침내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〇 선생이 예전에 앓던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체한 경우가 많았다.

9년 병자(1636) 선생 58세
〇 2월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〇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이때 선생의 부친인 의정공(議政公)이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임명되었는데, 공조에 속한 하급 관청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〇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 이때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을 당하여 경조(京兆)에 일이 많은 탓으로 방시(坊市)의 정부(丁夫)에게 부과되는 부역이 매우 중하였다. 이에 선생이 균등하게 분획(分劃)하고 법도 있게 조발(調發)하여 일을 안정시켰으므로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〇 4월에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〇 5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6월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〇 봉사(封事)를 올려 변방의 수비를 공고히 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할 방도를 진달하였다. - 이때 후금(後金)의 한(汗)이 명호(名號)를 참칭(僭稱)하였으므로 조정이 화친을 단절할 것을 의논하니, 상이 하교하여 크게 진작시킬 방도를 구하였다. 이에 선생이 봉사를 올려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명호를 참람되게 일컫고 있고 보면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로써 서로 대하였으니, 이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크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나라를 신하에 속하는 나라로 대할 것이니, 이는 비록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우호 관계가 자연히 끊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들이 침략해 올 것이 분명한데, 침략해 왔을 때에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니, 그들을 막아 낼 대비책을 어찌 서둘러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이와 관련해서 온당한 계책을 여덟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는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이고, 넷째는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 지방의 원주민을 등용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이고, 여덟째는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개혁 방안과 관련하여 오늘날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민생이 곤궁한 것과 군병이 쇠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면한 급무(急務) 중에서 어찌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하여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세도(世道) 중에서도 더욱 우려되는 점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논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공평하게 함으로써 민생을 구제하고, 징포(徵布)의 법을 변통하여 후하게 공급함으로써 군병을 기르고, 과거에서 강경(講經)하는 규정을 변경함으로써 경술(經術)이 막히지 않게 하고 인재가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이 안정되고 군병이 강해지고 사습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가 올라오자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모두 채용되지 않았다. 선생이 전후에 걸쳐 간절하게 올린 소의 내용이 모두 국가를 견고히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도 아닌 것이 없었건만, 두세 명의 대신(大臣) 모두가 국가를 경륜하는 원대한 계책이 없이 그저 머뭇거리며 세월만 허비할 뿐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이 비록 지위가 높고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건의하는 계책이 행해지지 않는 데다가 질병이 또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물러가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국가의 형세가 위급해진 것을 보고는 더욱 간절히 진달하며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〇 서쪽 변방의 직로(直路)에 위치한 중진(重鎭)을 수축하여 적이 돌진해 오지 못하게 막자고 청하였다. - 이때 화란(禍亂)이 장차 닥치려 하는데도 집정(執政)한 신하와 병사(兵事)를 주관하는 신하는 단지 미봉(彌縫)하면서 시간만 허비할 뿐 비어(備禦)의 계책을 세워 조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오직 정묘년에 의주(義州)와 안주(安州)가 함락된 것을 징계하여 산성만을 많이 수축할 뿐이요, 요로(要路)에 위치한 여러 진(鎭)들은 모두 버려두고 지키지 않았다. 평양(平壤)의 사민(士民)들이 평양을 사수(死守)하기를 원하면서 누차 감사(監司)와 여러 사신들에게 정소(呈訴)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경연(經筵)에서 진언하기를 “적을 방어할 계책으로는 성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의주와 안주와 평양과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은 모두 직로에 위치한 중요한 진입니다. 사민을 단결시켜 밤낮으로 수선(修繕)해 두었다가 만약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청야(淸野)하고 성에 들어가서 한편으로는 적이 돌진해 오는 것을 막고 한편으로는 사민의 목숨을 보전해 살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책이니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백마(白馬)와 자모(慈母)와 정방(正方) 등의 산성은 비록 험하고 견고하다 하더라도 대로(大路)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창졸간에 백성들을 거두어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진의 백성들이 먼저 어육(魚肉)을 당하여 직로가 텅 빈 상태가 된다면, 승승장구하는 적의 기세를 막아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해처(要害處)의 큰 진들을 모두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계책이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정예 보병(步兵)을 뽑아 거듭 훈련시키며 정비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아뢰니, 상이 체부(體府)에 말하게 하였다. 체부가 회계(回啓)하면서 불가하다고 아뢰니, 선생이 또 입대(入對)하여 여러 대진(大鎭)을 지키지 않는 잘못을 극력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는 스스로 자기의 울타리를 철거하고 문을 열어 두어 적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체상(體相)인 김류(金瑬)가 좋아하지 않으면서 심지어는 기롱(譏弄)하는 말까지 하였는데, 결국 적이 침입하던 날에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모두가 선생의 말처럼 되고 말았다.
〇 8월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명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칙(詔勅)을 받들고 왔다. 접반사(接伴使) 이민구(李敏求)가 평안도에서 규례(規例)에 따라 조사(詔使)에게 주는 금침(衾枕)을 국왕이 특별히 보낸 것이라고 칭하고는 황해도에서는 규례에 따라 주는 금침을 주지 않은 뒤에 폐단을 없앴다고 스스로 자랑하면서 치계(馳啓)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일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성신(誠信)을 위주로 해야 마땅한 법입니다. 범인에 대해서도 속이면 안 될 텐데, 하물며 왕인(王人)을 대하는 도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근년에 왕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대부분 탐욕스럽게 요구하곤 하였는데, 그들이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야 도리에 입각해서 거절해도 되겠지만, 예로부터 규례에 따라 응당 행해야 할 일이라면 삼가 준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관서(關西)에서 준비한 것은 규례에 따른 것이지 특별히 보낸 것이 아닌데 접반하는 신하가 말을 잘못한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이요, 해서(海西)에서 준비한 것도 그에게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감군도 전하께서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관학(館學)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양현(兩賢)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입대하여 존경할 만한 양현의 도덕에 대해서 극력 진달한 뒤에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이 말이 편당(偏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신이 평생토록 사당(私黨)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온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음속으로 깨닫고는 이르기를 “내가 그들의 도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종사하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만큼 감히 가볍게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〇 완성(完城) 최명길(崔鳴吉)에게 글을 보내 화의(和議)의 잘못을 논하였다. - 완성이 차자를 올려 화의를 단절하는 잘못에 대해서 극언하고는 그 차자의 초본을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선생이 그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차자의 내용 중에 경연광(景延廣)의 일을 인용하면서 운운(云云)하였고, 호씨(胡氏 : 호안국〈胡安國〉)의 말을 인용하면서 운운하였습니다. 경연광의 천박한 꾀가 화란(禍亂)이 일어나도록 도발하였으니 석진(石晉)이 멸망을 당한 것이 이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은 것 때문에 그의 작위를 삭제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상유한(桑維翰)은 오랑캐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청한 사람인데 주자가 그의 작위도 삭제하였으니, 주자의 뜻이 어찌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호씨의 전후에 걸친 논을 보아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장승업(張承業)에 대해서 운운하였습니다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唐)나라를 위하였으니 그 지절(志節)이야말로 백대토록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할 것입니다. 주자가 그를 아름답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니, 어찌 그가 유수광(劉守光)을 축하하게 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호씨 부자(父子)와 주자는 평생토록 오랑캐와의 주화론(主和論)을 마음속으로 비통하게 여겼는데, 그 언론을 지금도 읽어 보노라면 늠름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런 식으로 논설을 한다면, 선현 역시 지하에서 마음이 편치 못할 듯합니다. 내가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손권(孫權)이 작안(斫案)했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고, 서쪽 변방의 장리(將吏)들이 즉묵(卽墨)에 있던 전단(田單)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삼는다면, 반드시 막아 내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어(備禦)할 계책이 착실하게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참으로 크게 걱정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12월에 적이 침입하였다. 미처 호가(扈駕)하지 못하고, 남양(南陽)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13일에 변방의 경보(警報)가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도(江都)로 들어갈 계책을 정하였다. 선생이 참판인 여공 이징(呂公爾徵)에게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가게 하고, 선생 자신은 호가하기로 하였다. 얼마 뒤에 들으니 신주를 미처 다 모시지 못했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여공이 있는 곳까지 뒤쫓아 가서 직접 확인하였다. 그때 아들 진양(進陽)이 부친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가다가 길에서 서로 헤어진 것을 홀연히 보게 되었는데, 대가(大駕)가 남문(南門)까지 갔다가 계획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당시에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급박하게 피난길을 떠나는 상황에서 노친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호읍(號泣)하며 밤새도록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노친의 소재를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오랑캐의 기마병이 이미 그득해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 상태였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초에 묘사의 신주를 모시는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고, 참판이 이미 안전한 지역으로 신주를 모시고 들어갔으니, 신주를 뒤따라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남양(南陽)에 이르러서 부사(府使) 윤계(尹棨)와 조사(朝士)로서 미처 호종(扈從)하지 못한 참의 심지원(沈之源)과 승지 김상(金尙)과 이정 시직(李正時稷)과 교리 윤명은(尹鳴殷) 등을 만나 의병을 불러 모을 것을 상의하고는 제도(諸道)에 격문을 보내 적진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는데, 분개하여 비통하게 흐느끼면서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옆에서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0년 정축(1637) 선생 59세
〇 정월에 남양(南陽)에서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 선생은 남양의 홍법사(洪法寺)에 있었고, 부사(府使) 윤계(尹棨)는 부에 머물러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적병이 졸지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윤계가 그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어떻게 일을 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이 호서(湖西) 지방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들리는 말에 호서 지방도 이미 혼란스럽게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강도에 들어갔는데, 얼마 뒤에 강도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〇 강도가 함락될 적에 선생이 갑곶진(甲串津)의 파수(把守)하는 곳에 나가 있었다. 적병의 선박이 이미 강을 건너 적병이 장차 이를 즈음에도 선생은 언덕 위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자제들이 피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아들 몽양(夢陽)과 진양(進陽)이 선생을 부둥켜안고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이때 마침 수행하던 무사(武士) 중에 여력(膂力)이 뛰어난 자가 작은 포구로 헤엄쳐 건너가서 언덕에 매어 있던 소주(小舟) 한 척을 끌고 와서는 선생을 겨드랑이에 끼고 배에 태웠다. 선생이 예복을 착용한 것을 적병이 바라보고는 귀인(貴人)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 무기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왔으나, 급히 키를 돌려 해안을 떠나 탈출할 수 있었으니 대개 하늘이 도와준 행운이 있는 듯하였다. 〇 선생이 어려운 처지에서 빠져나온 뒤에 마침내 배를 타고 내려와 덕포(德浦)에 와서 큰 배를 구하였다. 이때 사녀(士女)들이 호곡(號哭)하며 우는 소리가 해안을 가득 메웠는데, 선생이 선인(船人)에게 배를 모두 동원하여 재량껏 태우도록 명하였으므로 그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700여 인이나 되었다. 강도가 함락된 뒤에 나라의 일이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므로, 선생이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
〇 2월에 법리(法吏)에게 넘겨져 대질 신문을 마치고 파직되어 신창(新昌)으로 돌아왔다. - 상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대관(臺官)이 호종(扈從)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논하면서 법리에게 넘기도록 청하였다. 선생이 대질 신문에서 그 당시 일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단지 파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선생이 즉시 물러 나와 신창의 전사(田舍)로 돌아왔다.

11년 무인(1638) 선생 60세
〇 대관(臺官)이 선생을 무함하며 탄핵하였다. - 유석(柳碩)과 이계(李烓) 등이 대관이 되어 청음(淸陰) 김공 상헌(金公尙憲)과 선생을 논하였는데, 심지어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것〔忘君負國〕’으로 죄목을 삼기까지 하면서 모두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문인이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제지하였다. 영상(領相)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모(某)는 어려서부터 독서하여 경술(經術)과 행의(行誼) 면에서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병자년에 급박하게 취한 행동은 당시의 불행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논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은 또한 심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고,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도 상소하여 선생의 충효(忠孝)의 절조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였다. 상도 본래 선생의 충성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석 등이 한 달 넘게 논하며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선생이 강도(江都)에 있을 때 죽을 작정을 했던 정상에 대해서 연신(筵臣)이 자세히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이 아니냐. 나는 본래 그가 현인(賢人)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〇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이 선생의 누명을 해명하기 위해 올린 소가 부록(附錄)에 보인다.
〇 《서경천설(書經淺說)》 등 여러 책을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이 전야(田野)에 물러나 거하며 노친을 모시고서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냈다. 인사(人事)는 사절하고 오로지 경전(經傳)에 정력을 기울이면서 찬집(撰輯)하고 토론하는 일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때 초야의 사람들이 조정을 비난하는 의논을 하자, 선생이 듣고는 근심하며 탄식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군신(君臣)이 그 책임을 똑같이 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라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두 신하들의 죄이니, 어찌 군부(君父)에게 허물을 돌려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전모(典謨)를 담은 이 《서경》 한 책이야말로 만세토록 인주(人主)가 정치를 행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에 걸쳐 내가 상 앞에서 진달하였으나, 지금 보니 역시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을 느끼겠다.”라고 하고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더불어 계고(戒告)하고 논설한 《서경》의 말들을 깊이 탐구하고 음미하여 이에 대한 설을 지었으니, 이것이 《서경천설》이다. 또 《주역(周易)》을 읽고서 괘상(卦象)을 총론하고는 그 이름을 《역상개략(易象槪略)》이라고 하였다. 또 《개혹천어(開惑淺語)》를 지어 사람이 선(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리를 밝히는 한편, 학문을 하는 방도에 대해서 반복하여 깨우침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논어》를 읽고서 말하기를 “이른바 ‘수사선도(守死善道)’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더욱 오늘날에 힘써야 할 일이다.”라고 하고는 거처하는 서재에 독론재(讀論齋)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다. 또 거실명(居室銘)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양심을 지녔다고 말했고 보면 누구에겐들 이런 도리가 없겠는가. 이에 삼가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선현처럼 되겠다고 뜻을 세웠다. 마음속에는 천고의 심법(心法)이요, 거실 안에는 유가(儒家)의 서책이라. 이를 앙모하고 연찬하면서, 밥을 먹거나 다급할 때에도 행하리라. 오직 하늘을 받들어 섬길지니,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어찌 의혹을 품으리오.〔時無古今 地無遐邇 旣曰秉彛 誰欠此理 乃竊不量 先民是企 方寸千古 一室洙泗 是仰是鑽 終食造次 惟天是事 夭壽何貳〕”라고 하였다. 대개 선생이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12년 기묘(1639) 선생 61세


13년 경진(1640) 선생 62세


14년 신사(1641) 선생 63세


15년 임오(1642) 선생 64세


16년 계미(1643) 선생 65세
〇 8월에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다. 유지(有旨)를 내려 불렀으나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이때 원손이 8세가 되었으므로 취학(就學)해야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보양관을 내도록 청하니, 이에 선생과 대제학 이식(李植)과 부제학 김육(金堉)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임명하였다. 유지를 내려 부르니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에게 가해진 죄명(罪名)으로 말하면 바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신하가 이런 죄명을 지니고 있다면 어느 곳에선들 용납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에 종묘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나가게 되었던 것은 직책이 종축(宗祝)이었기 때문인데, 대가(大駕)가 떠나실 때의 시간과는 앞뒤로 한두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남문(南門)에서 그만 대가를 돌리시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중도에서 노부(老父)와 길이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므로 다급한 심정으로 찾아 나서다 보니, 하루 사이에 행재(行在)와 떨어져서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호종(扈從)하며 호위할 길이 없어졌으므로 신이 가슴 아프게 한탄하고 애를 태우기만 할 뿐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임금을 사랑했던 신의 정성이 거꾸로 임금을 저버렸다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신이 이런 죄명을 일단 지니게 된 처지에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부친의 나이가 지금 86세입니다. 신이 독자(獨子)라서 부친과 한 방에서 침식(寢食)을 같이하고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음식과 기거를 모두 신이 보살펴 드리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그 곁을 떠나게 되면 노인의 마음이 몹시 상할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절박한 심정을 성상께서는 가련하게 여겨 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재차 부르자 선생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원손이 청(淸)나라 심양(瀋陽)으로 떠나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즉시 상경(上京)한 뒤에 다시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은 감정을 억누르고 함께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간절하게 속마음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고는 귤과 약물(藥物) 등을 하사하며 돌아가게 하였다.

17년 갑신(1644) 이해에 명(明)나라가 망하였다. 선생 66세
〇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체(辭遞)하였다.

18년 을유(1645) 이 뒤에도 그대로 숭정(崇禎)의 기년(紀年)을 적용한다. 선생 67세
〇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나아가지 않았다.
〇 가을에 상소하여 세자의 전학(典學)의 도에 대해서 진달하였다. - 이때 효묘(孝廟)가 새로 책명(冊命)을 받고 세자가 되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세자가 이미 왕이 될 후계자의 지위에 오른 이상에는 옛날 성현의 학문을 강론해야 마땅할 것이니, 성현이 뜻을 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삼고 성현이 행한 공부로 자신의 일을 삼아서 마음속의 뜻과 행하는 일이 한결같이 옛날의 제왕과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유(先儒)가 말한 바 제일등(第一等)이 되는 길이라고 할 것이니, 절대로 제이등(第二等)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고 제이등의 일로 자신의 일을 삼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세자의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데다 고명(高明)하고 활달(豁達)해서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타국에서도 심복을 받았다 하니, 이는 참으로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현이 남겨 주신 가르침이 모두 방책(方冊) 안에 들어 있으니, 오직 그 안의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해야만 할 것인데, 그 차제(次第)를 말한다면 사서(四書)를 먼저 읽고 그다음에 오경(五經)을 읽어야 합니다. 세자는 총명한 자질이 뭇사람들보다 뛰어난 데다 춘추도 이미 성년(盛年)이 되었으니 천하의 서적에 대해서 필시 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만, 바라건대 우선 이들 서적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노력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곧장 성현의 바른길에 몸을 두고서 제이등의 인물로 떨어지지 않게 되어, 우리 동방에 뒷날 요순(堯舜)의 치세(治世)를 펼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춘방(春坊)의 관원을 엄선하되 직질(職秩)의 고하(高下)나 초야의 인사에 구애받지 말고 세자와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강구하고 연마하게 한다면 필시 보탬이 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덕으로 나아가는 공부를 동궁(東宮)에게만 권면할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이 공부에 더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재위(在位)하신 날이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용안(龍顔)도 벌써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중년(中年)이 된 뒤에 스스로 분발하고 쇠약해진 중에 떨쳐 일어나는 것을 상식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매우 어려운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덕성은 닦지 않을 수가 없고 사업은 떨쳐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고 백성은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한다면, 걱정되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이런 일을 하는 데에 어렵게 여길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름다운 말과 지극한 논에 대해서 내가 어찌 감히 마음에 새기고서 시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원소(原疏)를 안에 두었다가 한 달여가 지나서야 내려 보냈는데 상소한 종이가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였으니, 이는 대개 상이 빈번하게 펼쳐 보았기 때문이다.

19년 병술(1646) 선생 68세
〇 상소하며 《대학곤득(大學困得)》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신이 전에 왕세자의 강학(講學)에 관한 의견을 진달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글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대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서경》의 전(典)과 모(謨), 《시경(詩經)》의 아(雅)와 송(頌)을 제외하고는 사서(四書)만 한 것이 없으니, 이 사서야말로 만세토록 성인을 배우는 자들의 필수 과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 사서를 가지고 가르쳤으며, 또 그중에서도 그들 모두가 《대학(大學)》을 우선하였습니다. 이 글은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을 아울러 갖추었고, 공정(工程)과 절차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서 성현의 사업을 노력하여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모두 환히 볼 수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세자도 제일 먼저 이 《대학》부터 공부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지난 갑자년 무렵에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위에 바쳤는데, 잘못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 뒤 10여 년 동안 궁벽한 산속에 숨어 지내면서 예전부터 해 오던 공부에 마음을 기울여 연구하며 다시 정리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경전의 취지에 그다지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돈후하게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포상(褒賞)하였다.
〇 4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 극력 사양하며 어버이를 끝까지 봉양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〇 부인 현씨(玄氏)의 상을 당하였다.
〇 5월에 부친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였다. - 장례 전에는 오직 콩가루로 죽을 쑤어 마시고, 장례 후에는 오래도록 물에 만 밥을 들다가 자제들이 울며 간청하자 비로소 그쳤다.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보내면서 노쇠했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20년 정해(1647) 선생 69세


21년 무자(1648) 선생 70세
〇 7월에 상복(喪服)을 벗었다.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다. - 특명을 내려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에 들어와 사은(謝恩)하고는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지금은 위급한 날이니 치사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다시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한 달 남짓 뒤에 또 거듭 소를 올려 간절히 진달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〇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사체하였다.
〇 10월에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〇 11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간원(諫院)이 차자를 올려 숭정(崇禎)의 망국(亡國)을 예로 들며 경계할 것을 진달하니 상이 그 내용을 고치도록 하였는데, 헌부(憲府)가 논계하여 고칠 수 없다고 아뢰자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숭선군(崇善君)의 혼례(婚禮) 때에 상이 승지를 시켜 선온(宣醞)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군(大君)의 혼례 때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므로 예조가 감히 봉행(奉行)하지 못하고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처음에는 역시 불가하다고 했다가, 상이 노하여 질책하자 곧바로 잘못을 자인하며 대죄(待罪)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간원의 차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이는 결코 충경(忠敬)의 도리가 못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그 내용을 고치도록 분부하신 것은 실로 옛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헌부가 논계한 것을 보니 상량(商量)하는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때문에 죄를 준다면, 포용해야 하는 전하의 도리를 상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크고 작은 거조를 취할 때의 절목(節目)은 모두 규례(規例)가 있으니, 관원이 된 자로서는 예전부터 행해 온 규례를 지키면서 감히 실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군의 길례(吉禮) 때에 그동안 행해 오지 않던 일을 지금 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원(政院)과 예관(禮官)과 대신이 모두 전례(前例)가 없다고 답변드렸으니 이것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신하들의 뜻을 여지없이 꺾어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시고 대신도 자기의 의견을 고수하지 못한 채 느닷없이 곧바로 잘못을 자인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헌체(獻替)하는 도리가 못 될 듯싶습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체직되어 좌참찬으로 복귀하였다.

22년 기축(1649) 선생 71세
〇 2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〇 3월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하였다. 상소하며 《논어천설(論語淺說)》과 《맹자천설(孟子淺說)》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공자와 맹자의 말과 일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는 오직 《논어》와 《맹자(孟子)》 두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사람들 가운데 최고인 분이요, 이 두 책은 책들 가운데 최고이니,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한다면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두 책을 읽고 사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할 때마다 한결같이 이 책의 내용을 법도로 삼아서 하는 일 모두가 성현이 제시한 준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게 한다면, 바로 선인이 되고 성현이 될 것입니다. 세자의 서연(書筵)에서 바야흐로 이 책을 진강(進講)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 책에 대해서 모두 그 의미를 탐구하여 환히 밝혀서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한다면 식견이 밝아지고 덕행이 진보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포답(褒答)을 하며 아다개(阿多介 : 표범 가죽으로 만든 요)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〇 4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척리(戚里)의 신하가 법관(法官)이 되어 왕자(王子) 집안의 청탁을 받고 어떤 사람을 무함하여 죄에 빠뜨렸다. 그 사람이 장차 죽게 될 운명에 처했을 때 선생이 즉시 석방을 명하였다. 〇 이에 앞서 어떤 궁가(宮家)가 한강 가에 강정(江亭)을 세우면서 동호(東湖)에서 계체석(階砌石)을 대대적으로 캐냈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동호는 국도(國都)의 문호(門戶)입니다. 그래서 도성을 세운 이래로 그곳의 돌을 가져다 쓴 적이 없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돌을 캐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엄하게 금단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 예조의 일을 겸관(兼管)하였다. - 선생이 여러 대신(大臣)들과 와내(臥內)로 들어가니, 응당 고명(顧命)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대신이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라에 이미 세자가 계시고 상이 이미 승하하셨는데, 어떻게 소급하여 고명의 절차를 밟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이때 결원이 된 예조 판서의 후임자를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신이 선생을 겸직시키도록 청하였다. 상례(喪禮) 때에 초상(初喪)의 의절(儀節) 가운데 대부분은 선생이 의정(議定)한 것이었다. 선생이 동료와 계청하여, 대신과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으로 하여금 염빈(殮殯)할 때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니 따랐다.
〇 영부사(領府事) 김상헌(金尙憲)을 도성에 머물러 있게 하라고 계청하였다. - 이때 김공(金公)이 양주(楊州)에서 도성에 들어와 곡림(哭臨)하고는 장차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김상헌은 바로 오늘날 세상의 대로(大老)인데, 오랫동안 교외에 있다가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서 급히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성상께서 즉위하신 때를 당하여 숙덕(宿德)을 지닌 노성(老成)한 신하가 조정에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특별히 간곡하게 그를 머물도록 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보이소서.” 하니 따랐다.
〇 상소하여 산릉(山陵)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인열왕후(仁烈王后)를 장릉(長陵)에 장례 지낼 적에 술인(術人) 이간(李衎)이 주도하여 장지(葬地)를 정했는데, 그때에 장지가 좋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현궁(玄宮 : 제왕의 분묘)을 가리면서 같은 묘역으로 정하려고 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술사(術士)들을 널리 불러 모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혹시라도 길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장지를 바꿔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장례를 정중히 행하는 신자(臣子)의 도리에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은 마음속으로 항상 그 자리를 의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의관(衣冠)을 모시면서 또 그 자리를 쓰려고 하니, 위태롭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말씀을 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위로 군부(君父)를 기만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체백(體魄)의 안부(安否)야말로 국가의 무궁한 이해와 직결되는 일인데도 모른 체하고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큰 불충(不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꼭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일 따름이니, 이렇게 해야만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가 들어가자 상이 예조에 내려 다시 살펴보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떤 대신이 풍수지리는 허탄(虛誕)한 것이라고 크게 말하면서 강력히 배척하였고, 평소에 선생을 좋아하지 않던 자들이 또 떼로 일어나 비방하였으므로 선생이 재소(再疏)하여 사체(辭遞)하였다.
〇 6월에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
〇 7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는 한편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〇 8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선생이 상소하여 간절히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卿)의 재학(才學)과 덕행(德行)이 진실로 보필(輔弼)하는 직책에 합당하니, 속히 나와 도를 논함으로써 오늘날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으므로 나와서 정사를 보았다.
〇 9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가 되었다. - 대행대왕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발인하여 장릉(長陵)에 도착해서 그대로 머무르며 장례에 대한 일을 총호(摠護)하였다. 여러 관원들을 단속하고 격려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도록 힘쓰게 함으로써 민폐(民弊)를 제거하고는 마침내 등록(謄錄)을 만들어 길이 정해진 제도로 삼게 하였는데, 예전에 비해 비용을 절반이나 줄였는데도 일은 미진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〇 졸곡(卒哭) 뒤에 차자를 올려 치도(治道)에 대해서 논하였다. - 차자의 말미에 아뢰기를 “이제 졸곡도 이미 지났으니, 정무(政務)에 마음을 두고 치도에 정신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도에 대한 믿음이 혹 깊지 못하고, 뜻을 세운 것이 혹 굳건하지 못하여 혹시라도 성인의 정치를 목표로 삼지 않으실까 삼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모두 바쳐 이처럼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〇 경연(經筵)에서 바야흐로 《중용》을 진강(進講)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소하여 《중용곤득》과 《대학곤득》을 올렸는데, 그 소의 말미에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성의(誠意)에 대한 공부를 평생토록 종사할 중요한 일로 여기시고, 근본을 먼저 바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행하는 방도로 삼으시는 동시에, 이 공부를 통해서 신하들의 선악(善惡)과 사정(邪正)을 분별하실 수 있도록 하소서. 군신(君臣) 상하가 성신(誠信)으로 일관하게 되면 속이고 기만하는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어 삼대(三代)의 바른 정치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고 구마(廐馬)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〇 이때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산림(山林)의 인사 몇 사람이 모두 소명(召命)을 받고 이르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그들을 후하게 예우하고, 추위를 막을 물자도 내리소서.”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차자를 올려 인재를 교육하는 방도를 진달하고, 신민일(申敏一)과 조극선(趙克善) 등을 천거하였다. - 선생이 아뢰기를 “선비가 된 사람들이 과거 공부를 우선시한 나머지 경전을 공부하더라도 그 의의는 찾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니 그중에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는 인재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교육하는 방도가 이처럼 지리멸렬하기만 합니다. 지금 새롭게 교화를 펼치는 때에 온갖 폐단을 개혁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인재를 교육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더더욱 소홀히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전임 부사(府使) 신민일은 소싯적부터 경학에 종사하며 힘을 기울여 온 지 이미 오래되었고 견해가 또 매우 정밀하니, 지금 조정 안에서 경학으로는 그에게 미칠 자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대사성(大司成)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이 사람을 그 직책에 제수하여 효과를 거두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또 온양 군수(溫陽郡守) 조극선은 경학에 밝으니 그도 사업(司業)에 임명해서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게 하고 학업에 대해 물어보게 하면 잘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이익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선(善)을 지향하는 이름난 인사 10여 인을 천거하니, 상이 답하기를 “현재(賢才)를 이처럼 많이 추천하니, 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하다. 그들을 모두 수용하게 해서 오직 선(善)을 보배로 삼아야 한다는 경의 뜻에 부응하겠다.”라고 하였다. 전임 장령(掌令) 이응시(李應蓍)가 인조조(仁祖朝)에 언사(言事) 때문에 북쪽 변방으로 유배당했는데,선생이 그는 직절(直節)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방환(放還)하여 수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〇 차자를 올려 뜻을 세우고 방법을 택하는 도리에 대해서 논하였다. - 이때 상이 바야흐로 사류(士類)를 예우하여 맞아들이고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해 정신을 기울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한 도리로는 두 가지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뜻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고, 하나는 자세히 살펴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 그 근본을 제대로 세우고, 일을 제어하고 법도를 세워서 백성을 제대로 보호하되, 뜻을 세울 때에 지극히 바르게 하고 방법을 택할 때에 지극히 자세하게 살필 수 있으면, 그 덕은 바로 삼대(三代) 제왕의 덕이 되고, 그 정치는 바로 삼대 제왕의 정치가 될 것입니다. 삼대와 같은 태평시대를 어찌 후세 사람이 이룰 수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만 하면 또한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선조(先朝) 때에 상소하고 차자를 올려 논한 심학(心學)과 대동법(大同法)과 병제(兵制)와 과거(科擧)의 강경(講經) 제도 등 네 가지 일을 한데 모아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아뢴 내용 중에서 한 가지는 임금이 진학(進學)하는 방도와 수덕(修德)하는 요체에 관한 것이고, 세 가지는 전역(田役)의 폐단과 군역(軍役)의 고통과 과거 제도 배강(背講)의 폐해에 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바로 신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해 생각하고 헤아려서 변통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일들을 제대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동안 나라에 쌓여 왔던 폐단이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폐단이 제거되면 지극한 정치가 펼쳐질 것이니, 이는 마치 병이 없어지면 몸이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제신(諸臣)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일이 마침내 폐기되었으므로, 선생이 또 입대(入對)하여 극언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그 뒤에 대동법이 호서(湖西)에 시행되자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겼고 전역(田役)이 매우 가벼워졌으며, 토지 가격은 뛰어올랐으나 국가 재정은 또한 조금 여유가 있게 되었다. 〇 사비(私婢)가 궁가(宮家)에 투속(投屬)하고 궁노(宮奴)가 옛 주인을 도모하여 시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법부(法府)가 체포하여 치죄(治罪)하는 한편 궁노와 동모(同謀)한 자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궁가에서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臺諫)이 그 감노(監奴)의 치죄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으므로 대간이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궁가에서 그 노비를 내주려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고, 또 즉위 초기의 정사에서 외척(外戚)인 신하에게 은총을 내려 직질(職秩)을 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아우를 잘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흥일에 대한 일도 뒤이어 개정하였다.
〇 12월에 말미를 청해 선비(先妣)를 천장(遷葬)하였다. - 윤 부인(尹夫人)을 공주(公州) 땅으로 천장하였는데, 본도(本道)에서 호상(護喪)하도록 하고 제전(祭奠)에 관한 물자를 지급하게 하였다. 〇 이에 앞서 수상(首相)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민호(民戶)를 열 집 혹은 다섯 집씩 편성하여 통(統)을 만드는 법을 행하자고 의논을 올렸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오래도록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갑자기 단속하기는 어려우니, 필시 소요 사태를 빚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승려에게 포목을 거두는 영을 내려 이미 승려가 된 자에게는 세포(細布) 5필(疋)을 징수하고, 처음 승려가 되는 자에게는 25필을 납부해야만 도첩(度牒)을 주도록 하였으며, 마을이나 시장에 도첩이 없는 자는 모두 출입을 금지하는 등 사목(事目)이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승려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선생이 길을 가던 도중에 이 말을 듣고는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치계(馳啓)하니, 그 영을 취소하라고 명하였다. 또 수상이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고 징속(徵贖)을 수괄(搜括)하여 군기(軍器)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으므로 그렇게 하라는 영이 이미 하달되었는데, 선생이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그 말을 듣고 불가하다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이때 상이 좋은 정치를 펼치려고 단단히 마음을 잡고 있었는데, 수상이 정치를 행함은 단지 조종(祖宗)의 법전(法典)대로 거행해야 마땅하다고 하여 마침내 《대전(大典)》에 나오는 옛 법을 가려내어 차례로 거행하려고 하였으니, 예컨대 민호를 통(統)으로 편성하는 것과 승려에게 포목을 거두는 것과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고 포목을 징수하는 것 등은 모두 《대전》에 나오는 옛 법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생각은 일에는 시의(時宜)가 있고 또 점진적으로 행해야 마땅하니, 비록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꾸로 민폐를 끼친다면 졸지에 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선생과 수상의 의논이 상당히 합치되지 않았다.

23년 효종대왕(孝宗大王)원년 경인(1650) 선생 72세
〇 5월에 차자를 올려 간원(諫院)이 추고(推考)를 청한 일을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조정이 자문(咨文)을 갖추어 상주(上奏)하면서, 일본의 정세가 우려할 만하니 성지(城池)와 군비(軍備)를 닦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사은사(謝恩使)인 이시방(李時昉)의 일행 편에 부쳐 보냈는데, 그 일을 수상(首相)이 실제로 주도하면서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동료 관원들도 이 일에 참여하여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겨울에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적에 수상이 접대하는 찬품(饌品)이 너무 풍성하다고 염려하면서 이를 줄여 폐단을 없앨 목적으로 평안 감사 허적(許積)과 상의하니, 허적이 찬품을 모조리 줄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이 화를 내면서 도성에 들어왔는데, 또 관중(館中)에 투서(投書)하여 우리나라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자가 있어 청나라 내부에서 이미 우리나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성지 수축을 청하는 국서(國書)를 보고는 그만 크게 의심한 나머지 우리나라 사신을 힐문하며 갖가지로 고통과 시달림을 받게 하더니, 사신을 다섯 번이나 파견하여 성지에 대한 일을 추궁하게 하였다. 당초에 국서는 경상 감사 이만(李曼)과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恊)이 일본의 사정을 아뢴 장계(狀啓)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급기야 청나라 사신이 이만과 노협을 힐문했을 때는 답변하는 말 가운데에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수상이 마침내 청나라 사람들의 문책을 받게 되자, 간원이 “공경(公卿)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있었는데 수상 혼자 책임지게 하였으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추고하소서.”라고 논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지에 대한 일은 신이 실제로 참여하여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만약 당초에 참여하여 그 의논을 함께 했다면, 죽고 사는 일이라 할지라도 함께 의논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서 자신만 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참여하여 함께 의논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의논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이것은 사리에 지나친 일로서 바른 의리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사람들이 성지를 수축하고 군대를 훈련시켜서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를 의심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함께 의논했다고 말한다면, 그 의심을 더욱 부추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의논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간원이 지금 여러 신하들을 추고하기를 청하고 있으니, 신이 또 어떻게 혼자서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간원도 아뢰기를 “신들이 당초에 참여하여 듣지 못했던 대신까지 포함해서 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〇 청나라 사신이 힐문할 적에 수상을 이만 및 노협과 대질(對質)하게 하면서 매우 큰소리를 쳤으므로 좌중(座中)이 모두 겁에 질려 안색이 변하였다. 그러나 선생만은 의연히 논변(論辯)하면서 목소리나 기색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좌중이 모두 경외(敬畏)하였다.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이때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으로 들어와 참석하였는데, 매번 그때의 일을 말하면서 경복(敬服)해 마지않았다.
〇 차자를 올려 유계(兪棨)와 조석윤(趙錫胤) 등을 처벌하면 안 된다고 논하였다. 네 차례에 걸쳐 소를 올리고 치사(致仕)하여 쉬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유공 계(兪公棨)가 교리의 신분으로 일찍이 논하기를 “선왕(先王)의 시호(諡號)를 인(仁) 자로 하는 것은 인종(仁宗)의 묘호(廟號)와 같으니, 거듭 사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였고,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는 논하기를 “조(祖)라고 칭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여, 모두 상의 뜻을 거슬렀다. 선생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유계는 재능과 학문이 쓸 만하니, 버려두는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선왕을 기롱하고 비방하였는데, 오래도록 처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 보내게 하고, 심대부는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선왕의 인자하고 거룩한 덕에 대해서 인신(人臣)이 어떻게 감히 기롱하고 폄하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계가 논한 것은 단지 인(仁) 자를 거듭 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 사람은 선(善)을 지향하며 학문에 힘쓰고 있고 또 그 재능이 실로 아깝기만 한데, 신이 망언(妄言)한 탓으로 이런 거조(擧措)를 취하시게끔 하였으니, 중한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충성스럽고 신실한 정성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번의 조치도 경의 말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니, 경은 안심하라.”라고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 등이 유계 등을 귀양 보내면 안 된다고 논하니 상이 준엄하게 비답을 내렸고, 또 그들이 피혐(避嫌)하는 계사(啓辭)를 올리자 그들이 청한 대로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차자를 올려 거듭 논하였는데, 상이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선생이 인혐(引嫌)하고 정고(呈告)하며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재차 사관(史官)과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상께서 비록 유계 등이 처벌받은 것은 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고 분부하셨지만 신이 진언(進言)한 탓으로 이런 거조를 취하셨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그들이 선왕을 기롱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이 없었다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해명하니, 상이 유공(兪公)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면서도 조석윤과 남선 등은 아직 풀어 주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남선 등은 유계에 대한 일을 논한 죄로 삭직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계 등의 죄를 이미 사면해 주셨고 보면, 유계 등의 일을 논한 자의 죄를 어떻게 유계 등보다 중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석윤은 단량(端良)하고 염정(恬靖)한 데다 문학의 재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그와 같은 자를 얻기가 실로 어려우니, 보통 신하로 그를 대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초에 어리석은 신이 망언한 탓으로 전하께서 이토록 노여워하시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신이 바야흐로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처지에서 다시 이 일을 말씀드린다는 것이 온당한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신이 대신(大臣)의 신분으로 책임이 막대하기만 하니 어찌 한갓 형적(形跡)의 혐의만 생각한 채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용납받으려고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남선과 조석윤 등도 마침내 다시 서용(敍用)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선생이 상의 노여움이 일단 가시자 억지로 출사(出仕)하긴 하였으나, 건의를 해도 대부분 시행되지 않는 데다가 노쇠한 몸에 병이 겹치자 잇따라 네 차례나 상소하여 간절히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〇 이때 오래도록 가뭄이 들었으므로 상이 몸소 사직(社稷)에서 기우제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예조가 음악을 써야 할지 여부에 대해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과 영상(領相)인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원임(原任) 대신인 김공 상헌(金公尙憲)과 김공 육(金公堉)은 쓰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외신(外神)을 섬기는 것과 종묘의 신령을 섬기는 예법은 사체(事體)가 같지 않다.”라고 말하니, 상이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선생의 의견을 따랐다.
〇 차자를 올려 경연(經筵)에서 강학(講學)하는 요령에 대해 논하였다. - 상이 바야흐로 《서경》을 강독하고 있었는데, 무더위 속에서도 폐하지 않고 어떤 때는 하루에 세 번 강독을 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학문의 도에 대해서 거듭 논한 다음에 또 아뢰기를 “옛날의 성인이 지극히 존귀한 자리에 올라서서 지극한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행하였으니,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글이 완전히 구비되어 만세토록 학문의 대법(大法)이 되고 있으니, 만약 이것을 읽고 연구하여 정일(精一)의 법과 경계(儆戒)의 엄함과 지인(知人)의 밝음과 애민(愛民)의 자애로움 등에 대해서 모두 하나라도 본받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그 덕이 어찌 옛날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 정치가 어찌 옛날을 따라가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열심히 공력을 들인다 하더라도 그 요점을 얻지 못하면 공을 거두기가 어려우니, 절실한 공부를 해 보려고 한다면 사서(四書)만큼 긴요한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전후에 걸쳐 강독하신 것이 모두 성인의 글입니다마는, 만약 성인이 되겠다고 추구하는 뜻이 없을 경우에는 경연에서 진강(進講)하는 것도 관례적으로 일정한 숫자만 채우는 공허한 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성인이 되겠다고 노력하지 않으신다면 필시 보통 수준의 임금 정도로 자처하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천리(天理)를 반드시 회복하지 못하고 사욕(私欲)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한 가운데 도덕은 날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고 말 것이니, 나라를 다시 떨쳐 일으킬 희망이 없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덕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정치가 오염되고 융성해지는 것은 오직 뜻을 세움이 높으냐 낮으냐에서 결판이 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후하게 비답을 내리며 가납(嘉納)하였다.
〇 7월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〇 8월에 병을 이유로 정고(呈告)하니, 돈유(敦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 이때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우상(右相)에 임명되었다. 선생과 이공은 사돈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법규로 볼 때 상피(相避)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직위가 아래인 사람을 체직(遞職)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선생이 재차 차자를 올려 고사(固辭)하며 아뢰기를 “우상을 이제 막 임명하였으니 곧바로 체직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은 오래도록 직위에 있었고 이미 심하게 노쇠하고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구구하게 바라는 것은 오직 물러나서 쉬는 것뿐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상도 상피해야 하는 법규를 제시하며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상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〇 우상이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장차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시백(李時白)은 충신(忠信)하고 관후(寬厚)하며 청렴하고 신중하며 의리를 좋아하고 일을 주도면밀하게 생각하여 처리하니, 신하들 중에 그와 같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상께서 제대로 살피시어 그를 재상으로 뽑아 임명하셨으니, 그 누가 사람을 알아보는 성상의 밝은 안목을 우러러 경복하지 않겠으며, 재상에 적임자를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평생토록 정성을 다 바쳐 관직을 수행한 데다가 또 여러 차례 어렵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 정신과 육체를 너무도 심하게 소모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쇠하고 늙은 몸에 질병이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만 리나 되는 여행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신처럼 늙고 병든 사람은 당연히 한가한 곳으로 물러나 쉬게 하고, 나이가 젊어서 먼 여행길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다시 뽑아 이시백 대신 가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〇 차자를 갖추어 붕당(朋黨)에 대해서 논하고, 장응일(張應一)의 잘못된 상소 내용을 반박하였다. - 상이 조정 신하들이 편당(偏黨)을 짓는다고 의심하면서 누차 사색(辭色)에 드러내자, 마음이 비뚤어진 음흉한 무리가 그 틈을 엿보고는 붕당에 관한 말을 많이 하여 상을 현혹시키려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장령(掌令) 장응일이 투소(投疏)한 내용이 더욱 어긋났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갖추어 한(漢) · 당(唐) · 송(宋) 이래로 이미 과거에 겪었던 자취를 극론(極論)하는 한편, 장응일의 잘못을 반박하여 아뢰기를 “그가 올린 말을 보면, ‘전하의 뜻이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굳게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을 살피거나 일에 응할 때에 항상 애매모호하게 하는 잘못이 있으니 어떻게 현사(賢邪)와 시비(是非)를 분별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전하의 결단력이 부족해서 일마다 시들시들해지고 흐리멍덩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말뜻을 탐색해 보면 이는 바로 자기의 당을 어질고 옳은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조정 신하들은 간사하고 그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며, 전하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말은 바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 그런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천하의 대로(大老)도 붕비(朋比)의 논의를 주도하고, 산림의 고사(高士)도 색목(色目) 속에 걸려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대로와 고사도 모두 간사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란 말입니까. 유약하고 겁이 많다면서 임금을 격동시키고, 업신여김을 당한다면서 임금을 격노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일이라면서 임금을 두렵게 하고 있으니, 그 교묘한 술책이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가 장차 어떻게 하려고 이런 꾀를 내고 있단 말입니까. 조정의 신하들이 붕당으로 나뉘는 것은 임금의 입장에서는 물론 매우 싫어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은 그들의 기질이 서로 같기 때문인데, 그들이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역시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로 볼 때에는 그들이 붕당을 짓는다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살펴서 진출시키거나 물러가게 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신은 예전부터 항상 소속된 당이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에게 당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편저편을 따지지 않고 오직 선한 쪽을 편들겠다는 의미이지, 선악을 따지지 않고 모두 편들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이 평소에 뜻을 세운 것은 항상 지공(至公)한 마음가짐을 지니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옳고 그른 것을 가리려는 마음을 상실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옳고 그른 것을 가려야 할 때마다 분별하는 일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말한다면 신도 장응일이 말한 바 색목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장응일의 계책이 행해진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장차 일거에 텅 비게 될 것이니, 그 화란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군자가 붕당에 대해서 논한 설과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사정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혹시 깊이 살피지 못하신 점이 있지 않은가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너무도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기에 그에 대한 개요를 진달드리게 되었으니,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〇 선생이 또 차자를 갖추어 군역(軍役)을 변통하는 도리에 대해서 아뢰기를 “무릇 폐단을 구제하는 도리로 말하면 마치 의자(醫者)가 병을 치료할 때에 반드시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찾아서 먼저 병마가 침노한 근본을 치료한 뒤에야 병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군역이 고통스러워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된 이유는 군인의 숫자가 원래 적기 때문이니,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양인(良人)의 숫자가 불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을 보면 양인과 천인(賤人)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모두 천인이 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천인은 날로 불어나는 반면에 양인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민간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일체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버지가 비록 천인이라 할지라도 그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양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한집안에서 군역에 종사하는 자가 3인이 있을 경우에는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려가 된 자들도 진심으로 불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군역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미곡(米穀)을 바치고 환속하는 것을 허락해 주면서 그들에게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하면, 그들 모두가 분명히 기꺼이 이를 따를 것입니다. 그들에게 군역을 정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연히 농민이 될 것이니, 곡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자연히 증가할 것이요, 또 민간의 곡식을 소모하는 폐해도 자연히 감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음으로써 인구가 자연히 불어날 것이니, 이것 역시 양인을 많이 길러 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에서 군사들을 길러 주는 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사들에게 마구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사들에게 포목을 징수하게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 법제상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속오군(束伍軍)의 법제는 양인과 천인을 뒤섞어 뽑아서 군대를 편성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양인의 경우는 본역(本役)만으로도 이미 매우 고달픈 형편이고 천인의 경우는 자기 주인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어서 모두 한 몸에 두 개의 부담을 지고 있는데, 여기에 또 군복(軍服)과 군기(軍器)까지도 모두 스스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변란에 대처하고 환란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이 군사들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저 침해하는 고통만 안겨 주고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은혜는 조금도 베풀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윗사람을 가깝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하게 어루만져 주어 그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킴으로써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군인에게서 징수하는 것을 감해 주고 나면 여러 군영(軍營)과 진보(鎭堡)에서 쓰는 비용이 반드시 부족해질 것이니 어디에선가 보충해서 지급해야 할 것이요, 속오군을 후하게 보살펴 주는 것도 모두 재정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할 것인데, 이에 대한 재원(財源)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별도로 재원을 마련할 계책을 강구해야만 그 수요에 충당할 수가 있을 것인데, 당(唐)나라 때의 조용조(租庸調)의 법제를 참고할 만합니다. 그 법제는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게 한 것이니, 이는 육신을 지닌 자는 모두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삼공(三公) 이하로부터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외방(外方)의 각 읍(邑)에 있는 품관(品官)의 서얼(庶孼)로서 부담을 지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 모두에게 포목 1필(匹)씩을 징수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징수하는 액수가 반드시 많아져서 충분히 수요에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경상(卿相)에게까지 포목을 내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역》에도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 주는 의리가 나와 있고,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할 적에도 공족(公族)과 귀경(貴卿) 이하에게 모두 곡식을 내놓게 하였습니다. 민인(民人)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다면 경상 이하가 모두 구원해 주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안 된단 말입니까. 군제(軍制)를 변통해 보려고 한다면 이상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선생이 두 개의 차자를 갖추어 모두 상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때 직위를 떠났기 때문에 올리지 못하였다.
〇 차자를 올려 유직(柳㮨)이 무함한 상소 내용을 반박하였다. - 관학(館學)의 유생이 상소하여 양현(兩賢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자 영남(嶺南)의 유생인 유직 등이 투소(投疏)하여 양현을 무함하고 헐뜯으니, 태학생(太學生)이 유직 등에게 부황(付黃)의 처벌을 가하고는 상소하여 그 일을 해명하였다. 상이 그 소를 물리치고 꾸짖자 제생(諸生)이 권당(捲堂)하고 물러가니, 상이 선생에게 제생이 다시 들어오도록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동료 재상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양현을 종사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유직이 무함한 상소를 반박하며 아뢰기를 “신이 양현의 문하에 나아가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마음속 깊이 경복(敬服)하고 있음은 직접 교육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인데, 지금 간사한 자가 이렇게까지 극심하게 모욕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삼가 통분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생각건대 사설(邪說)이 멋대로 횡행하게 그냥 놔둘 경우에는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고 오도(誤導)한 결과 장차 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이를 것이니, 왕자(王者)의 정치에서는 반드시 엄금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두 신하의 도덕(道德)에 대해 빠짐없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유직이 기망(欺罔)한 말 때문에 두 신하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지니신다면, 이것이 어찌 전하께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비방하고 헐뜯은 자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두 신하가 부족하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둘 다 포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그러하시다면 이는 신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천하의 사리에는 원래 옳고 그른 구별이 있는 만큼, 오직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만 사리가 타당하게 될 것이요 마음이 정대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한다.〔正心以正朝廷〕’는 것입니다. 만약 분별하는 일이 없이 그저 양쪽 다 포용하려고 힘쓰기만 한다면, 이는 의도가 있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 되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이 어지럽게 뒤섞이게 된 나머지 결국에는 굽은 자들이 왕성해지고 곧은 자들이 무시되고 말 것이니, 이는 바로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경상 감사 민응협(閔應協)이 공도회(公都會)를 설치하여 인재를 시취(試取)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경상도의 유생들이 유직이 처벌받은 일 때문에 공도회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계문(啓聞)하였다. 이에 영상(領相)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관유(館儒)를 타일러서 유직에 대한 황첨(黃籤)의 처벌을 풀어 주게 함으로써 피차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경과(慶科 : 국가의 경사 때 보이는 임시 과거)에 다 같이 응시하게 하자고 청하려 하였고, 선생은 계사(啓辭)에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파촉(巴蜀)의 부로(父老)들을 깨우쳤던 고사를 인용하면서 영남 사자(士子)들의 부형(父兄)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자제들이 응시하도록 가르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교(待敎) 신혼(申混)이 상소하여 이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한편 상은 강무(剛武)한 점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서리가 내렸는데도 풀이 시들지 않았다.〔隕霜不殺草〕’라는 《춘추(春秋)》의 말을 인용하면서 죽이지 않는 것을 상의 정치의 잘못이라고까지 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소하여 그 망언을 반박하였다. 관유가 유직에 대한 황첨의 벌을 풀어 주지 않자 상이 준엄하게 분부하며 배척하니, 제생(諸生)이 며칠 동안 공관(空館)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공관을 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반드시 근시(近侍)를 보내 잘 타일러서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이 일이 이미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규례(規例)처럼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망언(妄言)이라고 노여워하면서 하유(下諭)할 뜻이 없으시고, 유생들 역시 이 때문에 공관을 하는 사태가 오래도록 이어지게 된다면, 이는 너무나도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제생에게 유시하여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유생이 올린 소에 대해서 상이 준엄하게 유지(有旨)를 내리면서 어떤 사람이 사주하여 유치(誘致)한 것이라고 하교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상의 분부가 타당하지 않다고 아뢰었다. 〇 양현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관학 유생들의 청은 을해년(1635, 인조 13)에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청하자 제도(諸道)의 유생들이 잇따라 소장을 올렸는데, 반대편 쪽에서도 다시 소란스럽게 이론(異論)을 제기하였다. 이에 상이 편파적인 의논이라고 귀결시키자, 선생이 잇따라 소차(疏箚)를 올려 그 시비를 분별하였는데 이 때문에 상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〇 11월에 사체(辭遞)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 경상도 유생이 증광(增廣) 감시(監試)에서 유직에 대한 벌이 해제되지 않았으니 응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미 과거 시험장에 들어왔다가 시관(試官)에게 말하고는 시험을 포기하고 나갔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유직 등이 선현(先賢)을 무함하고 군부(君父)를 기망하였으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통분하면서 미워할 일입니다. 그런데 유생 등이 그만 스스로 과거를 포기하고는 마치 절개를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이 어찌 크나큰 변고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과거 시험장에 떼 지어 몰려와서는 공공연히 시관에게 말을 하고 나갔고 보면, 그들이 벌인 일이야말로 집단으로 임금의 명령에 거역하려 한 것이요, 그들이 꾀한 계책이야말로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려고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이른바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남의 사자(士子)들이 과거 시험을 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본심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필시 위협하며 견제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감사 민응협은 이처럼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를 당하여 오래도록 폐지된 공도회를 설행(設行)할 것을 유독 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또 유생들이 공도회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였으니, 그가 당초에 공도회의 설행을 청한 것도 본디 이러한 계책을 꾸미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응시자 명단과 시험장에 들어온 자들의 숫자를 계문(啓聞)하는 규정도 처음부터 없었고 보면, 이렇게 계문한 것 역시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한 도를 다스리는 방백의 의향이 이와 같았으니, 유생들이 어떻게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계책으로는 우선 민응협을 파직한 뒤에 공정하고 의리를 아는 자로 바꿔 보내어 제생을 타이르게 함으로써 그 의혹을 해소시키고, 이와 함께 유직이 기망(欺罔)하고 오도(誤導)한 죄를 다스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유생들도 스스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일도(一道)가 아무 일도 없이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보니 병통으로 지적받을 곳이 많다.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에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유생들이 과거를 거부했다는 이 일이야말로 그보다 더 심한 기망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과거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무슨 이유로 양식을 싸들고 답안지 종이를 준비해 와서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왔겠습니까. 이는 필시 이 모의를 주도한 사람이 일도의 유생들을 강제로 억압하여 모두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해 놓고는, 제생이 일제히 분개하여 과거를 거부했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려 위로 전하를 기만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란을 일으킨 약간의 무리가 그 사주를 받고는 선동하면서 답안지 작성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일 따름인데, 이런 식으로 일을 꾸며 놓고는 허풍을 침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일도의 인심이 이탈했다고 두렵게 여기시도록 하였으니, 계략을 꾸민 것이 너무도 흉악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항상 당파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이런 기망을 당하고 말았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상황에서는 신이 하나의 당파에 치우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신의 입장에서는 예전에 당파가 없었을 때나 오늘날 어느 당파라고 할 때나 그 공심(公心)만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정(調停)하려는 뜻을 보이고 계시는데, 신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치우친 것처럼 되고 말았으니 더 이상 쓰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체면(遞免)을 명하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마침내 인혐(引嫌)하며 네 차례 소를 올려 물러가겠다고 정사(呈辭)하였는데, 여덟 번째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직되었다.
〇 도성을 나와 광주(廣州) 구포(九浦)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 선생이 재상의 직책에서 체면된 뒤에 향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서 소를 작성해 두었으나 아직 출발하지는 않았는데,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관(史官)을 보내 머물러 있으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유직의 당인(黨人)을 사주하여 투소(投疏)해서 선생을 비난하게 하였는데, 상이 그 소에 답한 내용 중에 “한쪽에 치우쳐 정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偏係不正 予已洞鑑〕”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날로 즉시 도성을 나갔다. 우의정인 이공 시백(李公時白)을 비롯해서 원평군(原平君) 원두표(元斗杓)와 대사간 남노성(南老星)이 일제히 탑전(榻前)에서 진달하며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정(不正)이라는 글자는 불공(不公)이라는 글자의 잘못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사관을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사관이 선생을 뒤쫓아 가서 도성 교외에 이르니, 선생이 회주(回奏)하기를 “원하옵건대 향리로 물러가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의 본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영남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구구한 이 몸의 거류(去留)는 또한 염치와 관계된 바입니다. 그리하여 이미 길을 떠난 이상에는 성상의 유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한강(漢江)을 건너 돌아갔으니, 이날이 11월 16일이었다.
〇 누차 소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선생이 돌아온 뒤에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인신(人臣)이 도성을 떠날 적에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간혹 있었는데, 이는 대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신이 일단 향리에 있게 된 이상에는 사리상 관직을 결코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가 없으니, 본직(本職)과 겸대(兼帶)한 종묘서(宗廟署) · 장악원(掌樂院) · 군자감(軍資監) 등 세 곳의 제조(提調)를 모두 면직시켜 주소서.”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치사를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생은 녹봉(祿俸)과 제사(諸司)에서 으레 바치는 것들을 모두 받지 않았다. 〇 선생이 양현(兩賢)의 도를 깊이 존숭하여 편파적이고 간사한 설을 배격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후에 걸쳐 진달하여 변론하면서 정성을 다해 모두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일단 뜻이 합치되지 않자 서슴없이 몸을 이끌고 물러났으니, 진퇴(進退)와 출처(出處)를 바르게 한 것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선생이 향리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글을 보내고 짚신을 선물로 증정하였다.

24년 신묘(1651) 선생 73세
〇 3월에 삭관(削官)의 명이 내렸다. - 이에 앞서 선생이 정부(政府)에 있을 적에 고상(故相)인 해창(海昌) 윤방(尹昉)의 집에서 선생에게 시장(諡狀)을 청하였다. 이는 대개 작고한 태학사(太學士) 이식(李植)이 과거에 지은 시장이 있긴 하였지만 시호(諡號)를 청하는 글에는 이미 죽은 사람의 성명을 기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선생이 공무(公務)로 바빠서 틈을 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 글을 그대로 쓰도록 하면서 지은이로 선생의 이름을 기입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장의 내용 중에 강 서인(姜庶人)을 빈궁(嬪宮)으로 칭한 곳이 있었는데, 옥당(玉堂)과 태상(太常)과 이조와 예조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모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상이 이를 보고는 매우 노하자, 선생이 소장을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실상을 진달하였다. 그러나 상이 살펴보려 하지 않고 금부(禁府)에 조율(照律)하라고 명하니, 대간(臺諫)이 조율을 대신에게 시행할 수는 없다고 아뢰었다. 장령 심광수(沈光洙)라는 자가 또 투소(投疏)하여 선생이 사서(四書)를 주해(註解)한 것을 트집 잡아 선생을 비난하면서 상의 뜻에 영합(迎合)하였다. 이에 대사헌 조공 석윤(趙公錫胤)이 상소하여 심광수를 논척(論斥)하였으나, 상이 끝내 선생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명하니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며 탄식하였다.
〇 8월에 서용(敍用)되어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12월에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국청(鞫廳)이 하유하여 선생을 부르도록 청하였다. 상이 즉시 올라오지 않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자 선생이 부득이 상경하여 상소하고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는 뜻으로 하유하고는 국옥(鞫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옥사가 마무리됨에 선생이 재차 소를 올려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25년 임진(1652) 선생 74세
〇 여러 차례 상소하여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이때 상서(上書)하는 자들이 학덕이 높은 원로(元老)를 황야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이 말하였으므로 상이 선생을 누차 불렀지만 모두 극력 사양하였다. 〇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쓸쓸히 퇴락한 집에서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그리고는 오직 좌우에 경서(經書)만을 쌓아 두고 날마다 그 속에 침잠(沈潛)하여 깊은 뜻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낙으로 삼았다. 또 거하는 곳에 호수와 산의 승경(勝景)이 있었으므로 남여(藍輿)를 타기도 하고 거룻배를 띄우기도 하면서 임야(林野)의 늙은이들과 소요하곤 하였는데, 만나는 자마다 선생이 정승을 지낸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를 지어서
라고 읊기도 하였다. 이처럼 적막하게 세상을 초월하여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세도(世道)와 생민(生民)에 대한 걱정은 하루도 가슴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과오나 시정(時政)의 잘못을 들을 때마다 근심하는 기색을 띠면서 며칠 동안이나 침식(寢食)을 편히 하지 못하였다.

26년 계사(1653) 선생 75세
〇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그리고 누차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선생의 중자(仲子) 복양(復陽)이 수찬(修撰)의 신분으로 시강(侍講)할 적에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선생의 기거(起居)와 안부를 물으면서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향곡(鄕曲)에 물러가 있으니 내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다. 서울에 올라와서 비록 늙고 병들어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집에 누워서 또한 나랏일에 보탬을 줄 수 있을 것이니, 그대는 모쪼록 이러한 뜻으로 가서 유시(諭示)하고 기필코 모셔 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복양이 돌아가서 상의 뜻을 고하니, 선생이 상소하여 사례하고 사양하였다. 그 뒤에 상이 또 특명으로 부르는 한편 다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별도로 유지(諭旨)를 지어 급히 부르게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였다. 그리고는 누차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조정에 잘못된 일이 있을 때마다 백강(白江 :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번번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조상(趙相)이 국도(國都)를 떠난 뒤로 상에게 충간(忠諫)하는 말을 다시 들을 수 없으니, 나랏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27년 갑오(1654) 선생 76세
〇 선(善)을 행하여 재이(災異)에 잘 대응하는 도리를 상소하여 진달하고, 또 소명을 사양하였다. - 7월에 도성에 큰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송(宋)나라 선화(宣和) 연간의 큰 수재와 과거 병자년의 큰 수재를 인용하여 말하는 한편,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참된 마음으로 힘껏 실행하여 붙들어 유지하고 떨쳐 일어나는 방도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아뢰기를 “선을 행해야 한다는 설이야말로 경전에 나오는 진부(陳腐)한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태롭고 두려운 때를 당하여 이런 보통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절실하지 못한 오활한 의견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위로 천심(天心)에 응하고 아래로 인심(人心)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 말보다 절실한 것은 없으니, 전하께서 반복해서 깊이 살펴보신다면 오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아울러 현재(賢才)를 등용하는 방도에 대해서 진달하니, 상이 후하게 분부하며 답하였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고, 또 이어서 하유하며 선생을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하였는데, 그 뒤로는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28년 을미(1655) 선생 77세
〇 정월에 상소하여 《서경천설》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우(虞) · 하(夏) · 은(殷) · 주(周) 등 사대(四代)의 성인이 덕을 논하고 정치를 논한 말씀이야말로 순수하게 의리를 밝힌 것으로서 만세(萬世)의 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이 침잠(沈潛)하여 연구를 하는 동안 혹 미흡하나마 하나의 소견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면 그때마다 감히 그 소견을 기록해서 책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비록 참람하기 그지없다 할지라도 정치를 행하는 법도에 꼭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위로 보답해 드릴 길이 없기에 감히 이것을 가지고 봉헌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천재(天災)가 거듭 발생하여 상이 마음속으로 바야흐로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개발(開發)하여 비보(裨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이 책을 바쳤는데, 상이 포답(褒答)하며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〇 3월 10일에 거하던 저택의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 선생이 2월 25일에 병을 앓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을 하였으며 근시(近侍)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호조와 예조의 낭관(郞官)이 와서 상례에 관한 물품을 지급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致祭)하였다. 〇 선생이 소싯적에는 기운이 매우 허약했으나 만년에 와서는 점점 기운이 왕성해지면서 완전해졌다. 일찍이 이천(伊川) 선생이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吾恥忘生徇慾〕”라고 한 말을 지언(至言)으로 여겼는데, 나이 일흔이 넘은 뒤에도 여전히 기운이 강하였으니 이는 이천의 고사처럼 행한 것이었다. 만년에는 거의 20여 년의 세월을 홀로 지냈는데 총명이 줄어들지 않아 등잔불 밑에서도 책을 볼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선생은 백세(百歲)의 수명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병에 한번 걸려 역책(易簀)하고 말았다. 이에 중외(中外)의 사림(士林)이 모두 애도함은 물론이요 아래로 부녀자와 시정(市井)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놀라 슬퍼하면서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비통해하였다.
〇 6월 계해일(癸亥日)에 충청도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손좌(巽坐) 건향(乾向)의 언덕에 장례 지냈다. - 관의 주도 하에 발인하고 예장(禮葬)하는 일을 의례(儀禮)에 맞게 하였다. 묘소는 선인(先人)인 의정공(議政公) 묘역의 북쪽 언덕이다. 현 부인(玄夫人)은 이전에 다른 곳에 장례 지냈다가 이때에 와서 이곳에 이부(移祔)하였다.

33년 경자(1660) 현종대왕(顯宗大王) 원년
〇 문효(文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 태상(太常)이 시호를 의논하면서 문충(文忠)과 문효(文孝)와 문경(文敬)의 세 시호를 가지고 의망(擬望)하니, 문효로 하비(下批)하였다. 시법(諡法)에 도덕(道德) · 박문(博聞)을 문(文)이라고 하고, 자혜(慈惠) · 애친(愛親)을 효(孝)라고 한다.

34년 신축(1661)
〇 광주(廣州)의 제생(諸生)이 구포(九浦) 북쪽에 서원(書院)을 세웠다. - 10월 1일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그 뒤에 광주 등 몇 고을의 유생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의 명호(名號)를 청하였다. 그리고 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송공(宋公)도 연석(筵席)에서 선생의 도덕과 학문이 향사(享祀)를 받기에 실로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기유년(1669, 현종 10)에 이르러 명고(明皐)의 사액(賜額)을 명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〇 그 뒤에 호서(湖西)의 유생이 또 신창(新昌)의 옛 우거(寓居) 옆에 서원을 세웠고, 송도(松都)의 유생이 또 숭양서원(崧陽書院)에 배향(配享)하였으며, 함경도 유생이 망덕서원(望德書院)에 배향하였다.

39년 병오(1666)
〇 현묘(顯廟)가 온천으로 행행(行幸)하다가 선생의 분묘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45년 임자(1672)
〇 신창 도고산(道高山) 동쪽 기슭으로 이장(移葬)하였다.

63년 경오(1690, 숙종 16)

〇 2월에 또 대흥(大興) 고향 산의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 의정공(議政公)의 묘도 함께 옮겨 같은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선생의 묘가 뒤편에 있다.

[주D-001]광주(廣州)의 시골 농장 : 현재의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매송면(梅松面) 야목리(野牧里)에 있었다.
[주D-002]심 유격(沈遊擊)이 …… 지었는데 : 심 유격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주선하면서 명(明)나라의 사신 역할을 한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을 말한다. 《포저집》 권15에 의심유격여일본제장서(擬沈遊擊與日本諸將書)가 수록되어 있다.
[주D-003]초원(草原) : 함경도 정평(定平)의 속역(屬驛)이다.
[주D-004]걸(桀)의 …… 격이니 : 한(漢)나라의 추양(鄒陽)이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누구든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폭군 걸왕의 개로 하여금 성군인 요 임금을 향해 짖게 할 수도 있고, 도척의 식객으로 하여금 허유를 칼로 찌르게 할 수도 있다.〔桀之犬可使吠堯 跖之客可使刺由〕”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漢書 卷51 鄒陽傳》
[주D-005]10분의 …… 것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는 50묘에 공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十一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6]소무(昭武)와 영사(寧社) : 1627년(인조 5)과 1628년에 각각 발생한 이인거(李仁居)와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뒤에 내린 공신의 칭호이다.
[주D-007]대종(大宗)의 …… 한다 : 《의례(儀禮)》 상복(喪服) 부장기조(不杖朞條)에 “인후가 된 사람은 그 부모를 위해서 기년복(朞年服)으로 보답한다.〔爲人後者 爲其父母 報〕”라는 경문(經文)이 나오는데, 이를 해설한 전문(傳文)에 “대종(大宗)의 후계자가 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 부친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부친에 대한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두 번 입을 수 없는 것인가? 대종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何以期也 不貳斬也 何以不貳斬也 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주자(朱子)가 …… 글 : 주희(朱熹)가 사대부의 붕당을 걱정한 승상 유정(留正)에게 글을 보내어 군자의 당을 적극 옹호한 내용을 말하는데, 《국역포저집》 2집 134쪽 주 23)에 상세히 나온다.
[주D-009]희성(希聖)하고 희현(希賢)하는 뜻 :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지학(志學)에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희구(希求)하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희구하고, 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희구한다.〔士希賢 賢希聖 聖希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여인을 …… 말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숙향(叔向)의 모친이 “미모가 뛰어난 여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니, 참으로 덕을 쌓고 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재앙을 받게 마련이다.〔夫有尤物 足以移人 苟非德義 則必有禍〕”라고 아들을 충고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주D-011]성인이라도 …… 말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될 수 있고, 광인이라도 제대로 생각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머지않아서 …… 것 : 《주역(周易)》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머지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교양관(敎養官) : 지방에서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주D-014]산장(山長) : 송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서원에서 강학(講學)하며 업무를 총괄하게 한 관직 이름이다.
[주D-015]수양(睢陽)의 …… 고사 : 쌍묘(雙廟)는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수양을 사수(死守)하며 충의를 지켜 후세에 명성을 드리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남제운(南霽雲)은 장순과 함께 외롭게 수양을 지키면서 누차 출전하여 반군을 격퇴하다가, 양식이 고갈되자 포위망을 뚫고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수양으로 돌아와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장순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주D-016]동학(東學)으로 걸어가서는 : 《인조실록(仁祖實錄)》 13년 6월 6일 갑신(甲申) 조에 “그리고 성균관에서 동학으로 가는 직로가 원래 있는데도 그 길을 놔두고는 건복 차림으로 걸어서 궐문 밖으로 뚫고 지나감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선비의 행실로서 비루하여 수치스럽기가 이보다 더 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且從泮宮到東學 自有直路 捨之不由 巾服步行 穿過闕門之外 駭人瞻聽 士行之卑汚可羞 無甚於此者〕”라는 최명길(崔鳴吉)의 상소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17]완성(完城) …… 논하였다 : 《포저집》 권16의 ‘최 완성 명길에게 올린 글〔答崔完城鳴吉書〕’ 참조.
[주D-018]손권(孫權)이 작안(斫案)했던 마음 : 작안은 탁자를 칼로 내리쳐서 둘로 쪼갠다는 말로, 확고하게 중대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오(吳)나라 손권이 조조(曹操)와의 결전을 앞두고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칼을 빼어 작안하면서 “감히 또다시 조조를 맞아들이자고 말하는 장리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諸將吏敢復有言當迎曹者 如此案同〕”라고 말하고는, 유비(劉備)와 연합해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47 吳主傳》
[주D-019]즉묵(卽墨)에 …… 마음 : 전단(田單)은 전국 시대 제 민왕(齊湣王) 때의 왕족이다. 연(燕)나라의 명장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침입하여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을 때, 즉묵에서 농성하여 결사항전하면서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파면시키고, 1천여 마리의 소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등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둔 뒤에 제나라 70여 성을 수복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20]수사선도(守死善道) : 《논어》 태백(泰伯)에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할 줄 알아야 하고,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도를 잘 행할 줄 알아야 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선유(先儒)가 …… 길 : 《근사록(近思錄)》 2권 위학류(爲學類)에 “제일등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제이등이나 되겠다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인에 거하지 않고 의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와는 그 차이가 같지 않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학문으로 말한다면 곧 도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요, 사람으로 말한다면 곧 성인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다.〔莫說道將第一等 讓與別人 且做第二等 才如此說 便是自棄 雖與不能居仁由義者差等不同 其自小一也 言學便以道爲志 言人便以聖爲志〕”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나온다.
[주D-022]헌체(獻替) :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과감하게 건의하고 행하면 안 될 일은 그만두도록 간하는 대신의 도리를 말한다.
[주D-023]고명(顧命) : 임금이 죽기 전에 후사(後嗣) 등 국가의 대사를 대신에게 부탁하는 유언을 말한다.
[주D-024]대행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칭호로, 여기서는 인조를 가리킨다.
[주D-025]이응시(李應蓍)가 …… 유배당했는데 : 이응시는 1646년(인조 24)에 강빈(姜嬪)의 옥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경여(李敬輿) · 홍무적(洪茂績) · 심노(沈)를 석방할 것을 요청했다가 강빈을 두호하는 무리를 구원하려 했다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7》
[주D-026]외신(外神) : 천지와 산천의 신령을 말한다. 반면에 종묘 등에 모신 일가(一家)의 신령은 내신(內神)이라고 한다.
[주D-027]위를 …… 의리 : 《주역》 익괘(益卦) 단(彖)에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 주니 백성들의 기쁨이 끝이 없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주니 그 도가 크게 빛나도다.〔損上益下 民說無疆 自上下下 其道大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8]부황(付黃) : 성균관 유생들이 비행(非行)의 사실이 있는 자의 성명을 황지(黃紙)에 써서 북에 붙이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그 비행을 알리던 것을 말하는데, 성균관에 비치된 유적(儒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삭적(削籍)과 합칭하여 황부묵삭(黃付墨削)이라고도 하고 또 간단히 황묵(黃墨)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D-029]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빠져나와 동맹 휴학을 하던 일을 말하는데,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주D-030]마음을 …… 한다 :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 즉위 초에 올린 현량(賢良)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임금이 된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로잡아 만백성을 바르게 하고, 만백성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방이 바르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 모두가 감히 한결같이 바른길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사특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爲人君者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 遠近莫敢不壹於正 而亡有邪氣奸其間者〕”라는 내용이 나온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D-031]공도회(公都會) : 각 도(道)의 감사(監司) 및 개성(開城) · 강화(江華)의 유수(留守) 등이 관내의 유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소과(小科) 초시(初試)인데, 여기에 합격한 자에게는 다음 해의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주D-032]황첨(黃籤) : 황색의 부전지(附箋紙)라는 뜻으로, 부황(付黃)의 처벌을 가리킨다. 성균관 유생들이 비행(非行)의 사실이 있는 자의 성명을 황지(黃紙)에 써서 북에 붙이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그 비행을 알리던 것을 말하는데, 성균관에 비치된 유적(儒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삭적(削籍)과 합칭하여 황부묵삭(黃付墨削)이라고도 하고 또 간단히 황묵(黃墨)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D-033]사마상여(司馬相如)가 …… 고사 : 《근사록》 권9 치법류(治法類)에, 정이(程頤)가 종법(宗法)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옛날에는 자제가 부형을 따랐는데 지금은 부형이 자제를 따르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근본을 모르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 고조가 패 땅을 항복시키고자 하였을 때, 단지 백서(帛書)를 패 땅의 부로들에게 주어서 그 부형들로 하여금 자제들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또 사마상여가 파촉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글을 보내 그 부로들을 꾸짖었는데, 그런 뒤에야 자제들이 모두 부로의 명을 듣고서 따르게 되었다.〔古者子弟從父兄 今父兄從子弟 由不知本也 且如漢高祖欲下沛時 只是以帛書與沛父老 其父兄便能率子弟從之 又如相如使蜀 亦移書責父老 然後子弟皆聽其命而從之〕”라고 한 말이 나온다. 사마상여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이다.
[주D-034]서리가 …… 않았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33년 조에 “서리가 내렸는데도 풀이 시들지 않고, 오얏과 매실이 열렸다.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괴이한 변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괴이한가? 시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隕霜不殺草 李梅實 何以書 記異也 何異爾 不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 : 자기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임금에게 강요하면서 임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효경(孝經)》 제 11 장 오형(五刑)에 “임금을 위협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요,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요, 효행을 비난하는 것은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부르는 길이다.〔要君者無上 非聖人者無法 非孝者無親 此大亂之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원량(元亮)과 …… 하겠는가 : 《포저집》 권1에 나오는 ‘야목정사에 제하다〔題野牧亭舍〕’라는 시이다. 원량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그리고 송(宋)나라 대복고(戴復古)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엄자릉(嚴子陵)의 고사를 소재로 읊은 시 조대(釣臺)에 “어떤 일에도 욕심 없이 오직 하나의 낚싯대뿐, 삼공의 자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고말고. 평소 광무제를 잘못 알고 지낸 탓에, 세상 가득 허명을 야기했을 뿐이라오.〔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叔 惹起虛名滿世間〕”라는 내용이 나온다. 《石屛詩集 卷6》
[주D-037]단지 …… 말 : 등 문공(滕文公)이 맹자에게 “제(齊)나라 사람이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한다. 내가 매우 두렵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대답한 말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38]나는 …… 부끄러워한다 : 정이(程頤)가 태어날 때에는 몸이 약했는데 72세가 된 지금에 와서 근력을 비교해 보면 젊었을 때보다 줄어든 것이 없다고 하자, 제자인 사숙(思叔) 장역(張繹)이 양생(養生)을 잘해서 그런 것이냐고 물어보니, 정이가 말없이 있다가 위와 같이 대답한 내용이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나온다.


 
 포저 연보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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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지음

국조(國朝)는 문교(文敎) 위주로 백성을 다스리면서 고대의 법도를 존중하고 숭상하였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이 나온 이후로는 선비가 된 자들이 이(理)와 사(事)는 일치하는 것이고 효(孝)는 충(忠)으로 옮길 수 있는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그 설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포저(浦渚) 선생 조공(趙公)은 스승에게 전해 받는 길을 통하지 않고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신봉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가는 어린 나이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게으름을 부리는 일 없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며 목숨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야말로 성현(聖賢)이 “시(詩)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라고 말한 경우와 또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라고 말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諱)는 익(翼)이요, 자(字)는 비경(飛卿)이다. 고(考) 첨추공(僉樞公) 영중(瑩中)은 진실하고 순수하였으며 천진(天眞)함을 잃지 않았다. 비(妣) 윤씨(尹氏)는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 12) 4월 7일에 공을 낳았다. 이에 앞서 흑룡(黑龍)이 가인(家人)의 꿈에 나타나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한다.
공이 3세에 바둑알을 배열하며 놀았는데 역(易)의 괘상(卦象)을 만들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이웃에 사는 노인이 옷을 벗어 놓고는 공에게 지키라고 하였는데, 저물녘에 돌아와 보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공의 신실하고 순수함이 그때부터 이와 같았다. 8세에 상소문을 작성하여 사정(邪正)을 논변하였는데, 장로(長老)들이 놀라며 말하기를 “누가 이 글을 어린아이가 지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남에게 보여 주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과 성 문간(成文簡 성혼(成渾)) 두 선생을 구원하려다가 죄를 입은 때였기 때문이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주설(註說) 같은 것도 모두 환히 깨달았다. 또 홍범(洪範 상서의 편명)을 모방하여 인륜에 대한 설을 짓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공이 지은 글을 볼 때마다 “이것은 진(秦) · 한(漢) 사이의 글 짓는 수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리(性理)의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서 “《대학》은 성현의 심법(心法)으로서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중용》의 계구(戒懼) 신독(愼獨)이야말로 한 편의 체요(體要)이니, 가장 힘을 쏟아야 할 곳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지경도(持敬圖) 등 제설(諸說)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조고(祖考)의 명(命)을 받들어 마지못해 과거 시험장에 나아갔는데, 고관(考官)이 그 글을 보고는 감탄하였다. 나이 24세에 임인년(1602, 선조 35)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補任)되었으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권신(權臣)에게 미움을 받은 나머지 7년 동안이나 조용(調用)되지 못하다가 전적(典籍)에 올랐다. 감찰(監察)을 거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서는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는 임무를 맡아 구제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으며, 사서(司書)와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이 과제(課題)로 지은 글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식견과 문장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신해년(1611)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이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생을 추악하게 헐뜯자,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변론했다가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이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공을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시사(時事)가 더욱 크게 변하면서 폐모(廢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공이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와서 1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빈사(儐使)가 조사(詔使)를 영접할 때 공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차출하였고, 도원수(都元帥 한준겸)가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거주하는 곳이 경성과 가까운 만큼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여 광주(廣州)에서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도고산(道高山) 아래에다 띳집을 얽어 만든 뒤에 경사(經史)에 침잠하며 스스로 즐기는 한편,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및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함께 끊임없이 학문을 강론하였다.
계해년(1623)에 인묘(仁廟)가 즉위하였다. 조의(朝議)가 “이제 새로 정사를 펼치게 된 때에 전조(銓曹)에는 일등(一等)의 인물을 등용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으뜸으로 꼽혀 좌랑(佐郞)이 되고 나서 공평하고 합당하게 모든 일을 극진하게 처리하니, 물론(物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공이 일찍이 윤대(輪對)할 적에 진언(進言)하기를 “한(漢) · 당(唐)의 임금들이 삼대(三代 하(夏) · 은(殷) · 주(周))의 임금에게 미치지 못한 까닭은 학문의 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귀담아 들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의 무함을 받아 관직을 추삭(追削)당한 일에 대해서 공이 극력 신설(伸雪)하며 변론하였다. 폐세자(廢世子) 지(侄)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상태에서 도망쳐 나온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죽음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그 의논에 동조하였다.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 낭청(郞廳)을 겸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재처(裁處)하고 구획(區畫)하는 것 모두가 시의(時宜)에 합당하였는데, 이서(吏胥)들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동요시켰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극론(極論)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정자(程子)의 말에 의하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을 지닌 뒤에야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우려하는 것은 전하의 뜻이 혹시라도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아서 고대의 제왕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못하실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심술(心術)의 은미(隱微)한 사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일이 대부분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하게 된다면, 성대한 정치와 교화가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는 기틀을 깊이 살펴서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날마다 정일(精一) · 극복(克復) · 격치(格致) · 성정(誠正)의 공부에 힘쓰소서.”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거쳐 응교(應敎)와 전한(典翰)을 역임한 뒤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진언하기를 “《대학(大學)》과 《논어(論語)》야말로 만세토록 학문을 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속에 온축된 그 의리를 끝까지 연구하여 몸과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사이에 징험하면서 실천해 나간다면, 은현(隱見)과 표리가 명백하고 순수해져서 정령(政令)을 베풀고 사업을 행하는 것 모두가 천지의 화육(化育)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박승종(朴承宗)을 추장(追獎)할 것을 청하자 헌부(憲府)가 망언을 했다고 탄핵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만약 그의 말이 망녕되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망녕되지 않은 말까지 나오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체직(遞職)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들어와 승지(承旨)로 승진하면서 선혜청(宣惠廳)의 일을 겸관(兼管)하였다. 이때 진언하며 건의하였는데, 그중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분명하게 조칙(詔勅)을 내려서 각 주(州)와 현(縣)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는 돈과 곡식의 총계를 빠짐없이 작성하게 한 뒤에 이를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하도록 함으로써 각 주와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백성을 기르는 정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 오리(梧里)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대동법(大同法)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다시 쟁론하여 아뢰기를 “만약 뭇사람들의 말에 동요된다면, 이는 작사도방(作舍道傍)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안정된 정치를 이루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공이 탄식하기를 “우리와 같은 사람은 참으로 조모(趙某)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또 승지의 신분으로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였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궁리(窮理)하고 격물(格物)하는 학문을 힘쓰지 않으면 안 되고 관대하게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반드시 명선(明善) · 성신(誠身)하는 공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에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대궐에 들어가 위문하고 곧바로 돌아가려 하자, 공이 극력 만류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오늘날의 숙덕(宿德)으로 그보다 나은 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응당 불러들여야 할 것인데, 지금 이미 올라온 터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야 어찌 될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도승지를 사직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공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이야말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공이 승도(僧徒)를 환속시키되 연한을 정하여 군역(軍役)을 부담 지우지 않으면 기꺼이 따를 자가 분명히 많을 것이라고 청하였고, 또 서쪽 변방의 모병(募兵)과 둔전(屯田)에 대한 바람직한 계책을 논하였으며, 난리를 피해서 우리나라에 온 요동(遼東)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켜 중국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청하는 동시에 오랑캐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이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소를 올려 논하였으나 또 시행되지 않았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이 선박을 거두어 모아 사녀(士女)를 모두 싣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오랑캐가 물러가자 행조(行朝)에 달려가 위문하고는 소를 올려 서쪽 변방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어떤 이름 있는 재신(宰臣)이 훈적(勳籍)에 외람되게 참록(參錄)되었으므로 이를 논하여 삭제시켰다.
이에 앞서 조의(朝議)가 사친(私親)에 대한 복제(服制) 문제로 의논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다가 천부(遷祔)할 때를 당하여 별도로 예묘(禰廟 부친의 사당)를 세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자, 공이 변론하기를 “제왕의 가문에서는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뒤를 계승했을지라도 부자(父子)라고 이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손자의 신분으로 조부의 뒤를 계승한 경우에만 유독 부자의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예위(禰位)가 없게 되는 것은 의심할 일이 아니니,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은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한 것은 실로 창업(創業)한 것과 같은데도 위로 원제(元帝)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별도로 사친(四親)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朱子)는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서 사묘(私廟)를 받들게 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큰 전례(典禮)에 대해서 어찌 황당무계한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행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능원군(綾原君 인조의 아우) 보(俌)가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부제(祔祭)를 행할 적에 상이 직접 주재하려고 하자 공이 또 쟁집(爭執)하였다.
얼마 뒤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기사년(1629, 인조 7)에 사체(辭遞)된 뒤에 국자(國子)와 삼사(三司)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연평(延平) 이귀(李貴)가 붕당(朋黨)을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을 인용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니, 공이 부제학(副提學)의 신분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현이 그렇게 말한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궁구해 보지도 않고서 무작정 폐단이 있다고 단정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것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성현을 경시한 잘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세금을 면제해 주면 안 된다고 논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는 일에 깊이 유의하지 못하시는 일이 혹 있지 않나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일찍이 죄가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유배 보내고 또 장공 유(張公維)를 외직(外職)으로 좌천시켰으므로 공이 간쟁하였으나 상이 무시하였다. 사체(辭遞)하여 대사성이 된 뒤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에게 글로 타이르면서, 먼저 《근사록》을 읽어 문로(門路)를 바르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학제(學制)에 대해서 논계(論啓)하니 상이 모두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경오년(1630) 봄에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면서 민생의 고통스러운 정상을 극론(極論)하고는 그 기회에 풍정(豐呈)과 묘향(廟享)에 관한 일을 논하니, 상이 많이 채납(採納)하였다. 윤공 황(尹公煌)이 어떤 일을 말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자, 공이 아뢰기를 “궁금(宮禁)에 관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인데 감히 말하였으니,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이 여악(女樂)을 교습시킬 것을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초(楚)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는 말을 듣고서 진왕(秦王)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민생이 곤고한 데다 하늘이 경고하고 있는 때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되어 계엄(戒嚴)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오늘날의 일을 보면 모두가 통곡해야 할 일들뿐입니다. 따라서 군신(君臣) 상하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오직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기악(妓樂)을 한데 모아 놓고 시끄럽게 떠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름에 가도(椵島)의 비장(裨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상이 우리나라 경내에서 왕인(王人 중국 조정이 파견한 사람)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듣건대 유흥치가 중국 조정에 주품(奏稟)해서 한 일이지 제멋대로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파병(罷兵)할 것을 청하였다.
헌부(憲府)가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문책하니, 공이 간하기를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고, 용인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합니다. 정치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실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궁중에 외간의 여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온 일이 있자, 공이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는 자기 몸을 엄하게 단속하고 계시니 여색에 빠져서 미혹될 걱정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군자가 기미를 살펴서 점차 확대되지 않도록 미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신하 역시 임금을 사랑하면서 그 기미가 보일 때에 예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고, 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겁을 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화공(畫工)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몇 달 동안이나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어찌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한결같이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편파적인 기호(嗜好)를 일체 끊어 버리시고, 그리하여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하게 되어 티끌만큼이라도 가려지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떤 일이든지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빈어(嬪御)를 두지 않으신 것은 바로 제왕의 훌륭한 절행(節行)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신하가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간택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는 노여움으로 인한 충동을 면치 못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이 병 때문에 누차 직명(職名)을 사양하곤 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치고 다시 옛 관직으로 복귀한 뒤에 천변(天變)을 인하여 더욱 절실하게 경계하는 말씀을 올렸다. 상이 예조 판서로 승진시키면서 이르기를 “경은 재질과 덕망이 모두 우수하니 직무에 마음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명(明)나라의 반장(叛將)이 오랑캐에 투항하여 사기(事機)가 걱정스럽게 되자 공이 은밀히 계책을 진달하였으며, 또 과거(科擧) 제도를 변통할 것과 사유(師儒)를 잘 가려서 인재를 양성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삼사(三司)가 사친(私親)을 부묘(祔廟)하는 일과 관련하여 쟁론하다가 모두 멀리 유배당하자, 공이 대사헌의 신분으로 극력 변호하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서 체직되었다. 전조(銓曹)가 부제학(副提學)은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관례(慣例)를 무시하고 제수할 것을 청한 결과 다시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된 뒤에 전결(田結)과 조세(租稅)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게 하자 공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못했다고 사양하니,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양했어도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상이 인용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인(正人)을 헐뜯는 한 패의 무리가 또 투소(投疏)하여 무함하였다. 공이 당시에 학직(學職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으로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깊이 걱정한 나머지 상소하여 극론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자 학직을 사체(辭遞)하였다. 이때 제멋대로 주장하는 일이 마구 발생하여 사태를 안정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공이 재차 상소하는 한편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매우 자세히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이는 말할 것도 없이 현인이다. 내가 그의 도덕을 부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중한 전례(典禮)이기 때문에 감히 섣불리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봄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된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오랑캐와 이미 틈이 벌어졌으므로 공이 조목별로 여덟 가지의 계책을 올렸는데, 그것은 즉 첫째,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과 둘째,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과 셋째,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과 넷째,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과 다섯째, 토병(土兵)을 쓰는 것과 여섯째,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과 일곱째,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과 여덟째,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 계책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공이 윤상 방(尹相昉)에게 극언하기를 “지금 화란(禍亂)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의 계책이 이와 같을 뿐이니, 반드시 가만히 앉아서 위욕(危辱)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도(江都)에 먼저 들어가서 스스로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상이 이 말에 동의하여 상에게 아뢰었으나, 또 시의(時議)에 저지되고 말았다. 가을에 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명(明)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을 때에 공이 성신(誠信)으로 대하고 속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였다. 상이 강도로 행행(行幸)하려 하였으나,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도성에 육박하였으므로 어찌할 겨를 없이 방향을 바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이때 공은 첨추공(僉樞公 포저의 부친)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호곡(號哭)하며 동분서주하다가 일단 소재를 파악하고 나서 행재(行在)로 급히 달려가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오랑캐가 사방에 그득한 상태였다. 이에 공이 통곡하며 물러 나와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와 참의(參議) 심지원(沈之源)과 승지 김상(金尙)과 태상(太常) 이시직(李時稷)과 교리(校理) 윤명은(尹鳴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계획을 세우고는 공이 대장이 되었는데, 윤계가 갑자기 오랑캐에게 살해되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강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로 들어왔는데도 공이 강기슭에 앉아서 떠나려 하지 않자, 두 아들이 공을 부둥켜안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뒤에 조그마한 배에 공을 끌어올리고 출발하였다. 대개 공은 행재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뒤로는 밤낮으로 통곡만 할 뿐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공을 탄핵한 자가 있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상이 그 전말을 살펴보고는 단지 파직만을 명하였다. 뒤에 대론(臺論)이 다시 일어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이 아닌가. 나는 원래 그가 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재차 상소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조정에 들어가서 다시 두 번이나 사양하니, 비로소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허락하였다. 을유년(1645)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또 간절히 사양하였다. 가을에 세자를 책립(冊立)하자, 상소하여 세자를 교도하는 방도에 대해서 극론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이와 함께 전하께서도 학문에 힘쓰고 덕을 발전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에 또 전에 했던 말을 거듭 아뢰니, 상이 표창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참찬(參贊)의 임명을 받자 조정에 들어가서 사은(謝恩)하고는 나이가 많다고 인혐(引嫌)하며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잇따라 관직을 제수하자 공이 마지못해 직무를 수행하면서 때때로 격언(格言)을 진달하였다.
기축년(1649)에 인묘(仁廟)가 승하(昇遐)하였다. 이때 초상(初喪)에 관한 의절(儀節) 중에는 공이 정한 것이 많았다. 또 공이 장릉(長陵) 대신 다른 길지(吉地)를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엇갈려서 저지되었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다시 좌의정으로 옮겨진 뒤에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장례를 마쳤다. 그리고는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며 좋은 정치를 이루는 방도와 현인을 존중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 10여 인의 인물을 논하며 천거하였다.
이때 효묘(孝廟)가 바야흐로 뜻을 가다듬고 좋은 정치를 행하려고 하였으므로 공도 정성을 다해서 보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전후로 진언한 것을 보면 모두 《서경》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 한다〔危微精一〕’는 것으로 성학(聖學)의 요체를 삼고, 《맹자(孟子)》의 ‘사람에게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어진 정사〔不忍人之政〕’로 정치의 근본을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부(田賦)와 병제(兵制)에 이르기까지 모두 철저히 대책을 강구하여 본말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건의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 것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불량한 무리가 몰래 청국(淸國)과 내통하여 화단(禍端)이 이미 싹튼 것을 공이 간파하고는 사변(事變)이 발생하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방비할 것을 청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 1)에 오랑캐의 사자 6, 7명이 우리나라에 오고 또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을 위협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경악하였는데, 공이 지성으로 주선한 결과 사태가 역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말미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모부인(母夫人)을 천장(遷葬)하니, 상이 특별히 은례(恩例)를 베풀었다.
학사(學士)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가 인묘(仁廟)의 시호를 논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자 공이 그들을 변호하는 말을 하니, 상이 더욱 노여워하여 두 사람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대죄(待罪)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충실(忠實)한 것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과 부제학(副提學) 조석윤(趙錫胤)이 또 심대부와 유계의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니, 공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여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심대부와 유계가 마침내 풀려났으나, 공은 떠나게 해 줄 것을 더욱 강력히 청하였다.
인묘의 소상(小祥) 때에 공이 연복(練服)의 제도에 대해서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상이 사직(社稷)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적에 음악의 사용 여부를 의논하게 하니, 공이 월불(越紼)의 일을 예로 들며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또 진언하기를 “선(善)을 분명히 알아서 자기 몸을 참되게 하고 인(仁)을 추구하면서 덕(德)을 발전시키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사서(四書)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모쪼록 반복해서 깊이 음미하며 일생의 공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의리(義理)가 무궁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덕이 성대하게 발전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성인(聖人)이 되려고 추구하는 뜻이 있으시다면, 글을 읽을 적에 반드시 그 의미를 찾고 행동으로 옮길 적에 반드시 그 법도를 따르려고 해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천리(天理)를 반드시 완전히 회복하고 자기의 사욕을 반드시 말끔히 제거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민(生民)들이 자연히 모두 제자리를 얻게 되어 만세토록 성인이라고 일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긴요한 것을 뽑아내어 조목별로 나열한 뒤에 그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조신(朝臣)의 붕당(朋黨)을 의심하자, 공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치를 살필 것을 청하였다. 또 영아(嬰兒)에게 군역(軍役)을 배정하는 것과 양녀(良女)가 낳은 자식을 사노(私奴)가 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였다. 또 한 집안에 군역을 배정받은 자가 3인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은 다시 배정하지 못하게 할 것과, 승려가 된 자에게는 미곡 3석을 납부하게 할 것과,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군역이 없는 자들 모두를 대상으로 포목 1필(匹)씩 내게 하여 군병을 양성하는 자본으로 삼을 것을 아뢰었다. 이 모두는 공이 시의(時宜)를 헤아려 판단해서 시행하려고 했던 것들이다.
관학(館學) 유생들이 또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자, 이상진(李象震)과 유직(柳㮨) 등이 서로 잇따라 투소(投疏)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나도 추악하고 패려(悖戾)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상이 이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좌지우지한다고 여기고는 권당(捲堂)을 하고 나가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이(李珥)는 천품이 고매하고 학문이 정대한 데다 식견이 탁월하고 덕행이 순전(純全)하니,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은 단장(端莊)하고 엄중(嚴重)하여 출처(出處)와 행사(行事) 모두 옛 성현의 법도를 따랐으니, 참으로 유자(儒者) 중의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실로 시대가 변하여도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성현은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품부받고 태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1천 수백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왔습니다. 우리 동방의 경우는 본조(本朝)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이 성현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서 혹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를 하기도 하고 혹은 초야에 물러나 자기 몸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이이와 성혼입니다. 그래서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유독 양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당류(黨類)의 자손들이 나와서 배척하며 헐뜯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직이 상소한 것을 보면 너무도 무함하며 기망(欺罔)하고 있습니다. 이황이 이이를 애지중지하며 권장하고 허여한 것은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데, 유직은 이황이 이이를 매우 미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이 육씨(陸氏)와는 결코 근사하지도 않은데, 유직은 육가(陸家)에게서 나온 학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학문을 논하면서 이이의 설을 많이 따른 사실은 《성학십도(聖學十圖)》나 《중용(中庸)》 소주(小註) 같은 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유직은 털끝만큼도 계오(契悟)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홀로 그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유직은 이이가 이황을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했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의 소를 보면 맨 먼저 강학(講學)과 궁리(窮理)를 요체로 삼았는데 유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고, 성혼이 ‘마음과 몸을 수습하고 정신을 아껴 보존한다〔收拾身心 保惜精神〕’는 주자(朱子)의 설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 유직은 도가(道家)의 학설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유직은 또 이이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서 논한 것은 이황과 다르다고 헐뜯었습니다. 대저 《맹자》에서 사단을 말한 것은 단지 정(情) 중에서 선(善)한 한쪽만을 거론하여 말한 것이고, 《예기(禮記)》에서 칠정을 말한 것은 선하고 악한 감정을 모두 거론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상대(相對)해서 논한 것이 비록 권근(權近)의 구설(舊說 입학도설(入學圖說))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이가 일찍이 이에 대해 변론하여 말하기를 ‘대저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유물이다. 만약 의심만 쌓아 두고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 의리는 끝내 어두워진 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지은 《주역(周易)》의 전(傳)으로 말하면 일생의 정력을 모두 바친 역작이라고 할 것인데, 주자가 잘못된 곳을 지적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주자의 말에 대해서도 요로(饒魯)가 잘못을 지적한 곳이 많았고, 진력(陳櫟)은 ‘주자에게 아첨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이의 학문으로 말하면, 식견이 월등하게 고매할 뿐더러 언론이 정밀하고 타당하여 백세(百世) 뒤에까지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통기국(理通氣局)과 같은 하나의 구(句)로 말하면 선현(先賢)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그만 그 학문이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여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설(邪說)이 횡행하게 되면 그 화는 홍수나 맹수의 해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신은 삼가 이 점을 걱정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권당(捲堂)할 경우에는 열성(列聖)이 반드시 선유(宣諭)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들이 망녕된 말을 했다고 하여 노하신 나머지 선유하지 않는다면,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가 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함경도의 유생들이 양현(兩賢)을 위해 상소하니, 상이 엄한 유지(有旨)를 내렸다. 또 영남의 유생들이 유직이 처벌받았다는 이유로 과장(科場)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관북(關北) 지방이 비록 궁벽(窮僻)한 곳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본성을 그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게 품부받았으므로 지금 두 신하의 도덕을 흠모한 나머지 서로들 자발적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 유생들이 과연 유직이 바른 도리를 행하다가 처벌받았다고 여긴다면,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과거 시험장에 떼로 몰려와서 공공연히 멋대로 난동을 부렸으니, 이는 바로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의 죄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의 비답 중에 언짢게 여기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공이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공이 더욱 강력히 청하자 마침내 체직(遞職)을 명하였다. 공이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말을 상이 듣고는 재차 사관(史官)을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공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또 어떤 일로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의 산직(散職)이 삭직(削職)되었다. 그러나 상이 공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계사년(1653, 효종 4)에 공의 아들 복양(復陽)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공의 기거(起居)를 물어보고는 유지(有旨)를 내려 복양으로 하여금 공에게 가서 유고(諭告)하게 하니, 공이 상소하여 감사의 뜻을 진달하였다.
갑오년(1654)에 도성(都城)에 큰물이 졌다는 말을 듣고는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변경(汴京)에 큰물이 지자 이강(李綱)이 이적(夷狄)의 침입으로 병란(兵亂)을 당할 조짐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정강(靖康)의 화(禍)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병자년에 본조(本朝)의 경우도 그러하였는데, 이번의 수재(水災)는 병자년보다 더 심하다고 합니다. 만약 전일과 같은 환란이 다시 있게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옛날에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힘을 쓰는 방도로 말하면, 방책(方冊)에 실려 있는 이제(二帝 요(堯)와 순(舜))와 삼왕(三王 하우(夏禹)와 상탕(商湯)과 주(周) 문왕(文王) · 무왕(武王))의 군신(君臣)이 논한 것 및 공자(孔子)와 맹자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으니, 오직 이를 성심껏 믿고 따르면서 힘써 행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조상이 오지 않고 있다.”라고 하고는 다시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공이 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을미년(1655, 효종 6) 2월에 병이 들자, 상이 재차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약물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힘을 내어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다가 3월 10일에 이르러 고종(考終)하니, 춘추 77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며 철조(輟朝)하고 조문과 부의(賻儀)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 드렸다. 그해 6월 계해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건향(乾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난 데다 덕성이 천연적으로 갖추어져서 순수(純粹) · 혼후(渾厚)하고 화락(和樂) · 통철(洞徹)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이요 서일(瑞日)과 같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첨추공(僉樞公)이 기거(起居)를 잘 하지 못하자 공이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앉고 눕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모두 직접 시중들었다. 그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나이가 70에 가까웠는데도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삼년 동안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서 밤낮으로 하루같이 호곡(號哭)하였으므로 침석(枕席)이 모두 젖었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도 그대로 외침(外寢)에 거하였다. 그 뒤에 선부인(先夫人)을 천장(遷葬)할 때에도 그지없이 애통해하는 것이 초상(初喪)을 당했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공은 술을 좋아하였으나 뒤에 어버이의 경계를 듣고 나서는 다시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즐기던 음식은 종신토록 차마 먹지 못하였으며, 그 일에 말이 미치면 언제나 눈물을 보이곤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생신이나 기신(忌辰)이 돌아올 때면 자신을 가누지 못한 채 슬피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제사를 올릴 때에는 엄동설한에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는데, 매우 노쇠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친척이나 고구(故舊)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며칠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고, 복례(僕隷)와 같은 미천한 아랫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공은 항상 정자(程子)의 ‘망생순욕(忘生徇欲)’이라는 말을 더없이 경계해야 할 격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비록 성려(盛麗)와 함께 방 안에 있을지라도 가까이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의복은 몸을 가리면 되었고, 식사는 두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여 년 동안 전택(田宅)을 늘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평소의 음식을 줄이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무슨 마음으로 나만 잘 먹겠는가.”라고 말하곤 하였다.
대개 공의 충군(忠君)하고 우국(憂國)하는 정신은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공은 과거에 급제했을 때부터 이미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예컨대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려고 한 것과,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군병을 양성하려고 한 것과, 과거 제도를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 등은 모두 옛 제도를 고증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한 것으로서, 공이 있는 힘을 다해 주장하며 시행하기를 요청해 마지않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인조대왕은 공의 학술과 충성심을 알고서 매우 공경하며 존중하였으나, 국정(國政)을 담당한 신하들은 실제로 원대한 계책이 없었으므로 공이 주장하며 건의한 것들이 대부분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 효묘(孝廟)가 즉위한 초기에 이르러서도 미처 시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치도(治道)는 오직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이치를 궁구한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치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이 첫째요, 그다음은 현인을 임용하는 것이요, 그다음은 법도대로 수치(修治)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공은 종족(宗族)을 어루만져 아끼면서 빠짐없이 거두어 구휼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잘못을 저지르기만 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온화하였으므로 누구나 심취(心醉)하여 진정으로 열복(悅服)하였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였다. 사설(邪說)을 배격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일에 의연(毅然)히 몸을 바쳐 따르면서, 득실(得失)이나 영욕(榮辱) 따위에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이 진퇴(進退)와 출처(出處)가 정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비난할 수가 없었다.
공은 소싯적에 장공 유(張公維) · 최공 명길(崔公鳴吉) ·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을 정도로 정분이 매우 두터웠으나, 언론(言論)과 심사(心事) 면에서는 모두 꼭 같지는 않았다. 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에 대해서는 경애(敬愛)함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일을 논할 때면 또한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이공(李公)과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한공(韓公)으로 말하면 공과 비교해서 연배가 매우 현격하였으나 공을 특별히 친애하면서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는데, 완평은 항상 “조모(趙某)는 지금의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려 한다면 사서(四書)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 이후로 제유(諸儒)를 집대성한 이는 주자(朱子)이다. 그의 공은 맹자보다도 크다.”라고 하였다. 공은 언제나 지경(持敬)과 존심(存心)을 일생에 걸쳐 행해야 할 근본 공부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경은 수렴(收斂)과 조존(操存)을 요체로 삼는데, 정신이 담연(湛然)히 그 속에 있으면 그 공부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목적은 단지 사욕을 모조리 없애고 천리(天理)가 순전(純全)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광명하고 쇄락하여 천지와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천하의 일을 담당하면서 천지의 일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인데, 그 근본은 단지 마음을 보존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을 보존하고 있을 때에는 신명(神明)이 어둡지 않아 만 가지 이치가 온전히 갖춰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성현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다만 성현은 이런 마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데에 반해 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참배한 뒤에 서실(書室)로 물러나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곤 하였다. 진대(進對)할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재계(齋戒)하여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공경히 하였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해서 명을 받들고 제사를 지낼 때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단지 사리(事理)가 통하게만 하였을 뿐이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는데, 붓 가는 대로 내맡긴 채 자유자재로 써 내려가면서도 그 의미가 막힘없이 도도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매양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관한 글은 우리들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문집 15권이 있고, 그 밖에 수십 책(冊)의 저술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더러 간행되기도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서(經書)의 해설서인 각종 《곤득(困得)》과 《천설(淺說)》 등 몇 편을 상소하면서 함께 올렸는데, 그때마다 양조(兩朝)에서 모두 총장(寵獎)하는 은혜를 내렸다.
조씨(趙氏)는 당초에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시조인 휘(諱) 맹(孟)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뒤로 사대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공의 증조는 절도사(節度使) 휘 안국(安國)이고, 조부는 도사(都事) 휘 간(侃)인데, 첨추공(僉樞公)까지 3세(世)에 걸쳐 공이 귀하게 된 덕분에 모두 대관(大官)을 추증받았다. 비(妣)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춘수(春壽)의 딸이다. 공의 배위(配位)인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는데, 참판에 추증된 덕량(德良)의 딸이요 고려의 명신(名臣)인 덕수(德秀)의 후예로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가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5남 1녀를 두었다. 몽양(夢陽)은 현감이고, 진양(進陽)은 군수이고, 복양(復陽)은 이조 판서이고,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다. 몽양의 아들 지강(持剛)은 현령이고, 진양의 아들은 지한(持韓)이다. 복양의 아들은 지형(持衡)과 지성(持成)과 지겸(持謙)과 지원(持元)인데, 지겸은 일찍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내양의 아들 지헌(持憲)은 정랑(正郞)이다. 현양의 아들 지항(持恒)은 부사(府使)이고 지정(持正)은 군수이다.
내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의 이른바 도학(道學)은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였고 그것을 다시 정사(政事)에 확대해서 적용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학술들에 의해 분열됨이 없이 정치가 그 도학 하나에서 나오게 된 것〔不爲天下裂而治出於一〕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쇠미해지면서 이(理)와 사(事)가 둘로 나뉘고 본(本)과 말(末)이 어긋나게 된 결과, “도를 항상 세상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使道常無用於天下〕”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직 우리 공은 근본과 실질에 힘쓰고 허탄하게 큰소리만 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는 마치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根茂而實遂 膏沃而光曄〕’과 같다고 할 것이니, 집에서나 나라에서나 모두 스승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늦게야 공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열복(悅服)하며 항상 칭송해 마지않았다. 세상에서는 혹 공의 저술 가운데 주자(朱子)와 다른 점이 간혹 있기도 하다고 의심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동춘이 일찍이 공의 말을 외워서 나에게 들려 준 바가 있다. 그것은 즉 “주자는 공자 이후의 제일인자(第一人者)이다. 가령 내가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논한 부분 중에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설을 채용한 것이니, 이 역시 주자의 뜻이다.”라는 것이다. 아, 공의 학술을 알려고 한다면 이 점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예로부터 현인(賢人)들은 / 自古先民
위기기학(爲己之學)을 하여 / 學以爲己
스스로 넉넉하게 된 뒤에 / 自足之餘
세상에 경륜을 펼쳤는데 / 惟用之致
후세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 / 後世不然
장구와 문사만 일삼은 나머지 / 章句文辭
끝내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 終於無用
세인의 조소만 받게 되었어라 / 俗人攸嗤
아 생각건대 포저 노선생은 / 嗟惟浦老
혼자서 스승을 제대로 얻었나니 / 能自得師
그 스승이 과연 누구였던가 / 其師維何
그것은 바로 성현이 남기신 글 / 聖賢之書
깊이 사색하고 극력 궁구하여 / 潛思力究
배지도 않고 뜨지도 않게 하며 / 不密不疏
현실에 그대로 응용을 하고 / 乃踐其實
몸을 참되게 보존하였다오 / 乃誠其身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한 것은 / 事親克孝
증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는데 / 曾閔之隣
그 효성을 미루어 국가에 충성하여 / 移以事君
책난하는 일을 법도로 삼았나니 / 責難爲程
삼대(三代)의 제왕이 걸었던 길을 / 曰帝曰王
임금이 그대로 따르게 하였으며 / 惟君所行
세상을 경륜한 그 계책 역시 / 經綸之策
한당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네
 / 匪漢唐規
성심을 바탕으로 백성을 보호하며 / 誠心保民
지극한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였나니 / 至治之基
사람들은 오활하다고 생각하였지만 / 人以爲迂
실로 그보다 긴요한 것은 없었고 / 實莫與要
상투적인 말이요 죽은 법이라 하였지만 / 常談死法
진정 살아 있는 절묘한 것이었다오 / 寔活寔妙
시대가 비록 머나먼 고대라 할지라도 / 雖是邃古
내용이 비록 전이요 모라고 할지라도 / 雖典雖謨
진정 바른 도를 구하고자 할진대 / 苟究其道
이를 놔두고 어디에서 구하리오 / 捨此何求
그래서 추성의 말을 살펴보아도 / 故鄒聖言
이것을 계책으로 삼았었는데
 / 以斯爲猷
공이 종사한 학문을 보더라도 / 惟公所學
오직 이것으로 일관했더라오 / 惟一於是
그 뒤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라 / 旣處三事
한번 시험해 볼 희망을 가졌는데 / 庶幾其試
그때 마침 사문이 불행하게도 / 適値斯文
사설의 재앙을 당하게 되자 / 戹於邪說
이를 저지하고 배격하다가 / 是閑是距
끝내는 그 일로 낭패를 당했지요 / 終以顚蹶
공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 其進與退
도와 성쇠(盛衰)를 함께할 따름 / 與道消息
내 고향 호수가 맑게 비치고 / 我湖空明
내 고향 곡식이 풍성한 그곳 / 我稼豊殖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면서 / 優哉悠哉
부끄러움 없는 호연한 기상이여 / 浩然無怍
그 도가 갈수록 더욱 빛나서 / 其道愈光
북두(北斗)요 태산(泰山)과 같았는데 / 如斗如嶽
끝내는 도를 위해 몸을 바쳤으니 / 卒以殉身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랴 / 孰云非天
임금은 애도하며 비탄에 잠기고 / 宸情惻愴
사림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어라 / 士林洏漣
생각하면 이 하나의 분묘야말로 / 惟玆一丘
백세토록 공경해야 할 곳이기에 / 百世攸軾
내가 이 빗돌에 명을 새겨서 / 我銘斯碑
후세에 무궁히 보이려 하노라 / 以示無極

[주D-001]시(詩)에서 …… 같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는 말에 대해서, 공자(孔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온다.
[주D-002]늙어서도 …… 사랑스럽다 : “여진백은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숙이 말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원래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의지와 근력이 쇠해지게 마련인 데다 배워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고 배울 햇수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얼마 배우지 못하고 햇수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呂進伯老而好學 理會直是到底 正叔謂老喜學者尤可愛 人少壯則自當勉 至於老矣 志力須倦 又慮學之不能及 又年數之不多 不曰朝聞道夕死可矣乎 學不多 年數之不足 不猶愈於終不聞乎〕”라는 말이 주희(朱熹)가 편찬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0 낙양의론(洛陽議論)에 나온다. 정숙(正叔)은 정이(程頤)의 자(字)이다.
[주D-003]정자(程子)의 …… 하였습니다 : 《근사록(近思錄)》 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관저(關睢)는 주 문왕(周文王)과 후비(后妃)의 덕을 찬양한 것이고, 인지(麟趾)는 후손에게까지 그 덕이 미친 것을 칭송한 것인데, 임금이 수신(修身)을 한 뒤에 먼저 문왕처럼 궁중 내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행해야만 《주관(周官)》 즉 《주례(周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도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D-004]정일(精一) :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면서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압축한 것이다.
[주D-005]극복(克復) :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준말로, 자신의 사욕을 이기고 천하의 공도(公道)인 예(禮)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안회(顔回)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를 하는 것이 인이라고 일러 준 내용이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주D-006]격치(格致) · 성정(誠正) : 《대학》의 8조목에 속하는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주D-007]주자(朱子)가 …… 것이다 : 주희(朱熹)가 친구인 장식(張栻)에게 보낸 서한의 말을 줄여서 소개한 것인데, 《어찬주자전서(御纂朱子全書)》 권64 치도(治道)2 재부(財賦)에 답장경부(答張敬夫)의 글로 인용되어 나온다. 장남헌(張南軒)은 주희의 친구인 장식(張栻)을 가리킨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선생이라고 불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다. 이 내용은 《어찬주자전서(御纂朱子全書)》 권64 치도(治道) 2 재부(財賦)에 ‘답장경부(答張敬夫)’의 글로 인용되어 나오는데, 포저가 중간 부분을 많이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참고로 본문과 관련된 부분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국가 경비 예산의 명목을 재정(裁定)해서 끝내는 실속 있게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분명하게 조칙을 내려서 백성의 힘이 쇠잔해진 것을 애달프게 여기고 그들에게 은택을 내릴 방안을 강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각 주(州)와 각 현(縣)마다 백성의 전지(田地)에 1묘(畝)당 한 해의 수입이 얼마이며, 세금으로 납부하는 액수는 얼마이며, 부과한 액수 이외에 별도로 납부하는 것은 또 얼마이며, 각 주와 각 현에서 한 해에 거두어들이는 금과 곡물의 총계는 얼마이며, 각종 지출하는 비용의 총계는 얼마이며, 남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고 부족한 것은 어디에서 취하는지를 각자 구비해서 작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 자료가 모두 모이기를 기다린 다음에 충후하고 재능과 식견이 출중한 인사 몇 사람을 뽑아, 종류별로 모아 상고하고 연구해서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남는 곳에서 취하고 부족한 곳에 주도록 하여, 각 주와 각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게 힘써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민생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옛사람이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해서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려고 했던 뜻을 곧장 회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쯤은 역시 방불하게 될 것인데, 이렇게 한 뒤에야 차마 백성을 모질게 대하지 못했던 선왕의 정치를 그런대로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愚意 莫若因制國用之名而遂修其實 明降詔旨 哀憫民力之凋悴 而思所以膏澤之者 令逐州逐縣 各具民田一畝歲入幾何 輸稅幾何 非汎科率又幾何 州縣一歲所收金穀總計幾何 諸色支費總計幾何 有餘者歸之何許 不足者何所取之 俟其畢集 然後選忠厚通練之士數人 類會考究 而大均節之 有餘者取 不足者與 務使州縣貧富不至甚相懸 則民力之慘舒亦不至大相絶矣 是則雖未能遽復古人井地之法 而於制民之産之意 亦彷佛其萬一 如此然後先王不忍人之政 庶乎其可施也〕”
[주D-008]작사도방(作舍道傍) : 길가에 집을 지으면서 행인들에게 물어보면 의견이 각기 달라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처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적에도 다른 주장들이 많아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집을 지으면서 행인에게 묻는 것과 같은지라, 이 때문에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도다.〔如彼築室于道謀 是用不潰于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명선(明善) · 성신(誠身) :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자기 몸을 참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20 장에 “몸을 참되게 하는 길이 있으니, 선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몸을 참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천부(遷祔) : 신주를 옮겨 종묘에 합사(合祀)하는 것이다.
[주D-011]한 선제(漢宣帝)가 …… 경우 : 선제는 무제(武帝)의 아들인 여 태자(戾太子) 거(據)의 손자로서, 무제의 소자(少子)인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다. 선제의 생부는 사황손(史皇孫)이다.
[주D-012]후한(後漢) …… 하였습니다 : 광무제가 왕실의 먼 후예로 기반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한 것은 창업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자기의 선조를 왕으로 추존하고 제사를 올린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었을 텐데, 광무제는 원제(元帝)의 뒤를 이었다고 자처하고는 본친(本親)에 대해서는 위호(位號)도 가하지 않은 채 단지 사묘(四廟)만 세웠다. 이 일에 대해서 부친을 무시했다는 후대의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주희(朱熹)는 오히려 광무제의 처사를 미흡하게 여기면서 “백승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사묘를 받들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였다.〔立伯升之子以奉私廟 此最得之〕”라고 평한 내용이 《회암집(晦庵集)》 권47 답하숙경(答何叔京)에 나온다. 사묘(四廟)는 고조 · 증조 · 조부 · 부친의 사당이고, 백승은 광무제의 맏형인 유연(劉縯)의 자(字)이다.
[주D-013]주자(朱子)가 …… 서한 : 주희(朱熹)가 사대부의 붕당을 걱정하는 승상 유정(留正)에게 글을 보내 군자의 당을 적극 옹호하면서, “군자가 당을 이루는 것을 미워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요, 자기 자신이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임금까지도 이끌어서 그 당이 되게 하는 일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不惟不疾君子之爲黨 而不憚以身爲之黨 不惟不憚以身爲之黨 是又將引其君以爲黨而不憚也〕”라고 한 내용 등을 말한다.
[주D-014]초(楚)나라는 …… 띠었습니다 : 전국 시대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범수(范睢)에게 “내가 듣건대 초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고 하였다. 쇠칼이 날카롭다면 군사들이 용맹스러운 것이요, 광대의 솜씨가 졸렬하다면 생각이 원대한 것이니, 초나라가 원대한 생각과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 진나라를 도모할까 나는 두렵다.〔吾聞楚之鐵劍利而倡優拙 夫鐵劍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而御勇士 吾恐楚之圖秦也〕”라고 말한 내용이 《사기(史記)》 권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에 나온다.
[주D-015]완물상지(玩物喪志) : 《서경》 여오(旅獒)에 나오는 말로,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주D-016]명(明)나라의 반장(叛將) :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 등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가도(椵島)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의 심복이었는데, 모문룡이 명나라의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에게 처형당한 뒤에 부하들을 이끌고 등주(登州)로 들어가서 후금(後金)과 밀통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명나라 군대에게 쫓긴 나머지 후금에 투항하였다.
[주D-017]월불(越紼) : 임금이 상기(喪期)에 구애받지 않고서 천지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 왕제(王制)에 “부모의 상을 당해서 3년 동안은 직접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천지와 사직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만은 예외로서, 이때에는 영구차에 매어 놓은 줄을 넘어가서라도 일을 거행할 수 있다.〔喪三年不祭 唯祭天地社稷 爲越紼而行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8]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빠져나와 동맹 휴학을 하던 일을 말하는데,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주D-019]육가(陸家) : 송(宋)나라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과 그의 학술을 계승 발전시킨 명(明)나라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의 이른바 육왕학파(陸王學派)를 말한다.
[주D-020]마음과 …… 보존한다 : 임금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하면서 항상 천하의 일을 염두에 두라고 부탁한 말인데, 《회암집(晦庵集)》 권29 여조상서서(與趙尙書書)에 나온다.
[주D-021]사단칠정(四端七情) :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주D-022]맹자에서 …… 것이고 : 사람에게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말한 것으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23]예기(禮記)에서 …… 것입니다 : 《예기》 예운(禮運)에 나온다.
[주D-024]주자의 …… 하였습니다 : 원문은 “饒魯陳櫟至曰不願爲朱子佞臣”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송시열이 간략하게 정리하려다가 너무 생략해서 빚은 실수로서, 원래의 뜻을 독자들이 오해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포저집》 권6 ‘유직이 기망한 것을 변론한 소〔卞柳稷欺罔疏〕’에 의하여 바로잡아 국역하였다. 요로는 주희의 제자 황간(黃幹)의 문인이고, 진력은 정우선생(定宇先生)으로 일컬어진 원(元)나라 학자로, 모두 주희의 학설을 선양하였다.
[주D-025]이통기국(理通氣局) : 이이의 독창적인 이기론으로,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부정하고 정주학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체계화한 것이다. 기(氣)는 유형(有形) · 유한(有限)하여 개체에 국한되지만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은 이(理)가 통하기 때문이요, 이는 무형 · 무한하여 만물에 내재하지만 만 가지로 나뉘는 것은 기가 국한하기 때문이라는 뜻인데, 이이가 성혼에게 준 시 가운데 “물은 같지만 모나고 둥근 그릇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공기는 같지만 크고 작은 병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水逐方圓器 空隨大小甁〕”라는 구절 속에 이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주D-026]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 : 자기 의견을 임금에게 강요하며 임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효경(孝經)》 제 11 장 오형(五刑)에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요,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요, 효행을 비난하는 것은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초래하는 길이다.〔要君者無上 非聖人者無法 非孝子無親 此大亂之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정강(靖康)의 화(禍) : 송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군대가 휘종(徽宗) ·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태후 · 황후 · 황태자 · 종실 등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데리고 간 사건을 말하는데, 이로 인해 북송(北宋)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주D-028]맹자가 …… 하였습니다 : 등 문공(滕文公)이 맹자에게 “제(齊)나라 사람이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한다. 내가 매우 두렵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이렇게 대답한 내용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29]정자(程子)의 …… 말 : 정이(程頤)가 72세의 나이에도 건강한 이유를 제자가 묻자,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吾恥忘生徇慾〕”라고 대답한 말이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나온다.
[주D-030]성려(盛麗) : 미인을 비유한 말이다. 남녀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노래한 송옥(宋玉)의 신녀부(神女賦)에서 그 미녀의 용모를 형용하며 “성의(盛矣) 여의(麗矣)”라고 표현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증(尹拯)이 지은 포저의 연보(年譜)에, 포저가 33세 되던 1611년(광해군 3) 8월에 경시관(京試官)으로 관서(關西)에 갔을 때 삼화현(三和縣)의 이름난 기녀(妓女)가 포저의 방기(房妓)가 되어 10여 일 동안이나 선생의 방에 함께 있었는데, 포저가 끝내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고는 돌아갈 즈음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자, 그녀가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경복(敬服)하여 종신토록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D-031]세상의 …… 것 : 《장자(莊子)》 천하(天下) 서론 말미에 “완전한 도술이 장차 세상의 부분적인 방술(方術)들에 의해서 분열될 위기에 놓여 있다.〔道術將爲天下裂〕”라는 명구(名句)가 나온다.
[주D-032]도(道)를 …… 만들었다 : 《회암집(晦庵集)》 권70 독양진간의유묵(讀兩陳諫議遺墨)에 “내가 일찍이 한 시대에 출현한 제현의 논을 차례로 고찰하며 지극히 타당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오직 구산 양씨가 ‘내와 외를 분리시키고 심과 적을 나눔으로써 도를 항상 세상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경세의 일 모두를 사지로 천착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라고 지적한 것이 가장 근사하게 여겨졌다.〔嘗歷考一時諸賢之論 以求至當 則唯龜山楊氏指其離內外判心迹 使道常無用於天下 而經世之務皆私智之鑿者 最爲近之〕”라는 주희(朱熹)의 말이 나온다. 양씨(楊氏)는 정자(程子) 형제의 제자로, 구산선생(龜山先生)이라고 일컬어졌던 양시(楊時)를 말하는데, 사양좌(謝良佐) · 여대림(呂大臨) · 유작(游酢)과 함께 정문 사선생(程文四先生)으로 칭해진다.
[주D-033]뿌리가 …… 것 : 한유(韓愈)의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그대가 장차 옛 작가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요, 권세와 이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될 것이다. 우선 그 뿌리를 길러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기름을 부어서 광채가 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니,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이다.〔將蘄至於古之立言者 則無望其速成 無誘於勢利 養其根而竢其實 加其膏而希其光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반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증민(曾閔) : 효자로 일컬어진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병칭이다.
[주D-036]책난(責難) :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을 성군(聖君)의 길로 적극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자기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여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게 하는 것을 공손하다고 하고,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의 사심(邪心)을 막는 것을 공경스럽다고 하고, 우리 임금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해친다고 하는 것이다.〔責難於君謂之恭 陳善閉邪謂之敬 吾君不能謂之賊〕”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삼대(三代)의 …… 아니었네 : 《포저집》 권14 ‘윤대할 적에 구두로 진달한 계사〔輪對口陳啓辭〕’에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는 반면에 학문의 유익함은 끝이 없는 법입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시대 이래로 임금의 자질이 아름다워서 일시적으로 정치의 안정을 이룬 때도 있었습니다마는 삼대(三代)의 경지에 미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삼대의 제왕이 닦았던 학문을 닦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삼대 이전의 제왕을 스스로 목표로 정하소서. 미천한 신 역시 감히 삼대 이하의 임금으로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38]내용이 …… 할지라도 : 《서경》의 요전(堯典) · 순전(舜典)을 이전(二典)이라 하고, 대우모(大禹謨) · 고요모(皐陶謨) · 익직(益稷)을 삼모(三謨)라 한다. 이를 합쳐서 전모(典謨)라고 하는데, 보통 요순과 같은 고대 성군의 훌륭한 정치를 말할 때 인용된다.
[주D-039]추성(鄒聖)의 …… 삼았었는데 : 맹자가 삼대(三代)의 제왕, 그중에서도 요순(堯舜)을 이상 정치의 전형으로 거론하면서 현실에 대한 처방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면서 그때마다 요순을 일컬었다.〔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라는 말도 있지만, 《맹자》 전편을 통해 요순을 언급한 곳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추성은 맹자를 가리킨다.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40]사설(邪說)의 재앙 : 관학(館學)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자, 영남의 유생인 유직(柳㮨) 등이 반대 상소를 올리며 저훼(詆毁)한 사건을 말한다.
[주D-041]도를 …… 바쳤으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그 바른 도에 입각하여 내 몸을 바치고, 도가 없는 세상에서는 도를 위해 바른 내 몸을 바친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