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양정제공 휘 방언/휘 방언 미백 묘표2

구봉 선생의 가례주설은 先君子追得於崔同知邦彦氏所

아베베1 2011. 8. 20. 17:05

 

 

 

                         이미지사진은 도봉계곡의 명수대 주변의 모습이다  

 

 미백 선생은 저의 12대조 이시다

龜峯集識

 龜峯集識
龜峯集識 a_042_568a


龜峯集有詩一卷雜著一卷書一卷。刊行於世者。其詩則光海壬戌。先生門人沈竹西宗直。宰鴻山時所刊。而鄭守夢, 申象村曁我文元公先祖所敍跋者也。雜著, 書則尤翁使宋公時杰, 任公埅及我從曾祖知事公。分刊於茂朱, 山陰, 臨陂而未卒者也。始先生見子就大所收拾辨論書尺及私稿雜錄。合而成帙曰。汝安用此爲。往托於連山金某可也。愼獨齋晩年。以傳於尤翁。使爲不朽之圖。所以有雜著, 書之始刊。而刪定未卒。因有事故而止。及至戊辰冬。時事將大變。尤翁又以授我祖考韞齋府君曰。不可使此集無傳。君042_568b其圖之。祖考羅州時。亟欲鋟梓。屬芝村與遂庵商訂較讐。芝村以爲玄繩編。旣經先生所自編。而載於碣文中。且尤翁所刪定。未及其半。今可一從本草收入。而仍其名以存其舊。遂庵則以爲尤翁旣始刪定。今當用其例而刪定之。未卽歸一。而祖考已解職。未果入刊。以至于今。則斯文長老不在。無可任其事者。而世遂無龜峯全集矣。相聖適得嶺邑之事力。永念先志。敢以爲功。取其全帙而摠括之。竹西所刊詩集。蒐輯而成之。故有拾遺。而今以本草編次而無所存刪。則去其拾遺之名。只分爲二卷。而五七古律絶。用其042_568c例而類分之。雜著。竝收刊本所遺者三篇而爲一卷。玄繩編之栗, 牛二先生書。其非往復者殆將半焉。若幷編入則便三賢簡牘而非龜峯集。尤翁之刪定者。蓋以此也。而仍其名存其舊之說。亦不可廢也。妄以己意折衷之。其非往復之書。則用尤翁例而刪之。長牘汗漫之中。雖只一二語。其有相往復者。則皆以全文收入。以存其舊而仍其名。分爲二卷。禮問答。以問者類聚爲一卷。家禮註說先君子追得於崔同知邦彦氏所。難於別行而編入者。今校其傳寫之誤。分爲三卷。又收碑狀等文字爲附錄卷。雲谷稿一卷042_568d者。卽先生弟翰弼季鷹所著也。尤翁始集時。雲谷外裔白海明稟請而許其附刊。今不可違。故亦附于末。合爲龜峯先生集十一卷。以付剞劂氏。嗚呼艱哉。文集之行。其亦有數耶。以先生道學文章之盛。無所施爲於當世。終身奔竄流離。窮阨以歿。而其垂後之緖言亦湮沒。數百載不得傳。今乃以相聖急於了債。未暇梳洗而牽率苟成之。文集之行。其亦有數也夫。其亦有數也夫。仍記其始終於卷末。以見諸老先生曁先輩長老之眷眷於斯集如此云爾。歲壬午暮春之日。後學光山金相聖。謹識。


芝村先生文集卷之二十
 題跋
龜峯集跋 a_170_421b


右龜峯先生宋公文集凡七卷。詩並拾遺二卷。雜著一卷。禮問答一卷。玄繩編二卷。家禮註說一卷。附錄一卷。始先生門人沈公宗直。以光海壬戌。刻詩集於鴻山縣。先生子就大。又以文稿。納於愼齋金文敬公。文敬公又授之尤庵宋先生。宋先生使季氏府使公170_421c 時杰門人任君埅,金君萬增。鋟板於茂朱,山陰,臨陂三邑。而皆有故。只刻數三卷而止。及至戊辰冬。宋先生見世道將大變。特呼金君姪鎭玉而屬之曰。斯集之刊。决不可遂已。爾其圖之。鎭玉旣奉敎未幾。宋先生果被慘禍以卒。於是鎭玉尤不敢須臾忘。今牧羅州。思欲訖工。要余更加緖正且題一言。余不獲辭。謹按集中所載先生與栗谷,牛溪兩先生論辨書尺。以玄繩編名。且見錄於宋先生所撰墓文中。宜存其名。先生又甞著家禮註說。亦難於別行。先生之弟雲谷公遺稿。宋先生曾因其外裔白海明稟請。許其附刊。170_421d 今不當有違。故敢並編入。仍略識顚末焉。噫。先生有通天貫古之識。抱經世濟物之志。顧乃局於門地。坐其先累。一不得展布當世。末又爲黨人所仇疾。擠陷不測。備極憯毒。其所僇辱至于今未已。抑何其窮哉。雖然。其生也。與栗牛兩先生爲道義交。切磋講磨。互相推重。旣沒。因沙溪金文元先生,守夢鄭文肅公訟辨。快蒙伸雪。公議大定。固已無所憾矣。况文元公始學於先生。終至道成德尊。承繼栗谷。腏享文廟。則先生於此。亦可謂與有幸矣。斯豈非天意也耶。鎭玉卽文元公之後孫也。其必刊是集。以圖不朽者。盖不惟170_422a 不忘宋先生之敎。亦所以仰體文元,文敬兩先生之遺意也。嗚呼。其可尙也已。雲谷名翰弼。亦有文學。爲一時諸賢所稱許云。時崇禎紀元後九十年丁酉五月日。後學延安李喜朝。謹書。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기사년(1689) 4월 2일


여기에 온 뒤로는 일체 아무 일이 없어 약간의 서책을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였네. 그리하여 외람스레 스스로 겸손치 못하고 마음속으로, 우연하지 않은 그 무엇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였으나 지금은 화의 기미가 이처럼 절박하여 머리 또한 목 위에 붙어 있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이 뜻도 그만이네. 원래 시작하지 않은 것이야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시작하고서 끝내지 못한 것이 약간 있다네. 손자 아이들이 앞으로 그대에게 받들어 드릴 것이니 유의하여 일을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는 모두 주자가 끼친 교훈이며 스승이 남겨 주신 뜻이었던 까닭에 감히 금방 죽음이 있다고 하여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네. 모름지기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와 협력하고, 또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등 여러 벗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또한 힘이 될 걸세. 그중에서도 《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를 합하여 편차하는 일은 일거리가 크고 복잡하여 마무리 짓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염려가 되네.


별지
《역전(易傳)》은 부주(涪州)에서 힘을 얻었음이 미제(未濟) 괘의 주(注)에서 증험되네. 이는 대체로 조물주의 뜻이 없지 않은 것인데, 오늘날은 화의 기미가 이미 절박하여 아마 잠깐의 여유도 없을 듯하네. 여기에 온 뒤에 《논맹혹문》의 수정을 끝냈네. 이는 《논맹정의》의 주를 나누어 《혹문》의 해당 조목 아래에 편입하여 《혹문》을 읽는 사람에게 주 선생의 변론(辯論)과 취사(取捨)의 가늠을 알게 하였네. 나는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이러한 뜻을 가지고 《논맹정의》를 애써 구하였으나 헛수고만 거듭하다가 지난해 참판 이택지(李擇之 이선(李選))가 연경(燕京)에서 사 들여 왔기에 서둘러 편차를 시작하였으나 곁에서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이럭저럭 오늘에 이르렀네. 여기 오고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 이를 보내니 다시 살피고 바로잡아 잘못이 없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흑수(黑水 윤휴)의 도(道)가 다시 성해져서 회옹(晦翁)이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한 뜻이 막히고 어두워지며 사라지고 있네. 죽기 전에 나머지 것을 손질하여 동지들에게 잘 전하여 그것을 강론하고 밝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끝나고 말았네. 자네는 지금 내가 저번 날 부탁한 여러 책들까지 모두 힘써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상의 일이란 비록 급하거나 갑작스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또한 머뭇거리는 것도 꺼리는 것이네. 자네에게는 이 시기가 참으로 귀중한 때이네. 이 사건이 퍼져 가는 것을 보니 자네도 면치 못할 듯하니 만일 성도은자(成都隱者)를 만날 수 있다면 퍽 다행이겠네.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한 뒤로 선비들이 무슨 마음으로 과거를 보려하겠는가. 모름지기 현제(賢弟 권상하의 아우 권상유(權尙游))와 재윤(才胤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을 다른 일은 버려두고서 오로지 이 일만을 돕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이겠네.
요즈음 선비들이 《퇴계집(退溪集)》을 보는 사람이 많으나 그중에는 생각할 부분도 없지 않으니 이 점은 몰라서는 안 될 것이네. 내가 일찍이 그러한 부분을 적어 모아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네. 이번에 새로 손질한 두어 건의 문자를 손자가 물어볼 것이니 모름지기 다른 일은 그만두고 감정(勘定)하는 일에만 전념하여 후인에게 은혜를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찍이 《실기(實紀)》에 실린 한 조목을 보니, 주 선생께서 선비의 풍습이 밖으로 치닫는 것을 보시고서 늘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우선 《맹자》의 도성선(道性善)과 구방심(求放心) 두 장(章)을 보아 마음을 수렴하고 응정(凝定)하기를 힘써서 극기구인(克己求仁)의 공을 이루어라.”
하였네. 대체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록(朱子語錄)》에 이러한 뜻이 여러 번 서로 대화하는 사이에 나타났으나 그것을 긴요하게 간추리고 명백히 나타내어 밝힌 것으론 이 조목 만한 곳이 없네. 이것은 우리들이 오늘날에 의당 가슴에 새겨야 할 점이네. 혹은 이 조목에 치지 공부(致知工夫)가 없다고 의심할 것이나 이는 극기구인(克己求仁)이 치지(致知)를 버리고서는 불가함을 알지 못해서이네. 자하(子夏)가,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히 하고, 간절히 묻되 생각을 가까이하면 인(仁)은 그 속에 있다.”
하였으며, 또 독서를 전일하게 함이 한층 방심(放心)을 구하는 하나의 큰 방법이네. 우연히 《실기》를 보다가 마음에 깨우쳐지는 점이 참으로 깊었기 때문에 애오라지 받들어 알리는 것일세.
젊은 무리들이 나를 견지하는 말들은 하나가 아니나 그중에서 가장 큰일은, 내가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에게 일찍이 아무 말도 없었다가 그 아들[윤증]이 나를 헐뜯고 욕을 한 뒤에 내가 비로소 길보의 옳지 못함을 말하였다는 것이네. 이 말은 너무도 괴이한 말일세. 길보가 윤휴와 서로 사귄 시기가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휴가 권수부(權秀夫 권준(權儁))의 매부가 된 때부터 서로 친해졌을 것이니 권수부는 길보의 매부이네. 내가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 을해년(1635, 인조13) 가을에 휴를 과거장에서 만나,
“장가갈 때 혼례를 고례(古禮)로 행하였습니까?”
고 묻자, 대답하기를,
“처음에 세속의 풍습대로 행하려고 오 상공(吳相公 오윤겸(吳允謙))에게 위요(圍繞 지금의 후행(後行)이나 상객(上客))를 부탁하자 오 상공이 ‘내가 갈 수는 있네. 그러나 위요는 세속의 풍습인데, 왜 고례로 행하려 하지 않는가.’ 하기에 그 말을 따랐습니다.”
하였네. 이에 의거하여 보면 윤휴가 권수부의 집에 장가든 때가 당연히 갑술년(1634, 인조12)에서 을해년(1635, 인조13) 사이였을 것이며, 길보와 윤휴와의 사귐도 어쩌면 이때에 있었을 것이네. 내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한 것은 정축년(1637, 인조15)으로 난리(병자호란) 뒤였고, 길보를 난적의 한 무리라며 배척한 것은 또 그 뒤의 일이었으며, 증(拯)이 내 집에 드나든 것은 또 그 뒤였네.
그때에 동춘(同春)이 지금 우리 집안의 어른인 송 고창(宋高敞 고창 군수를 지낸 송국귀(宋國龜))에게,
“윤증의 일은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우암이 항상 그의 아버지를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는데 지금 그가 머리를 숙이고 글을 배우니 저들 사제(師弟) 사이가 끝내 무사하게 보전되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본다면 내가 휴를 배척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있었네. 어떻게 그 아들을 노여워하여 그 아버지를 배척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도(江都)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일찍이 많이 용서하였네. 그가 병자년(1636, 인조14) 청참로사소(請斬虜使疏)로 의롭다는 이름을 크게 떨쳤고, 또 강도의 일이 있은 뒤에 스스로 몸을 파묻어 버리고 유현(儒賢 김집(金集))을 따라 받들 때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실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그 아들에 이르러, 그때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도리에 십분 옳다고 하였고, 권(權 권순장(權順長))과 김(金 김익겸(金益兼))을 배척하여 반드시 죽었어야할 의리가 없다 하였으며, 또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죽을죄를 진 신(臣)’이라고 말했던 것은 강도에서 죽지 못한 연유에서가 아니고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아니한 허물 때문이었다고 하였으며, 또 그 아버지가 스스로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은 옛날 일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니며 시세(時勢)와 사람들을 헤아려 보고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였네. 이렇게 되고 보니 옛날 그에게서 취하여 추장하였던 일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속임을 당한 것이 한이 되게 하였네. 또 강도 당시에 선복(宣卜)이라 이름을 고쳤다는 일이 드러났네. 이는 아마 상소한 때의 성명이 오랑캐에게 발각될까 두려워서 이러한 해괴하고 가소로운 짓을 한 것이니 추하기 짝이 없네. 그렇다면 비록 감싸 주고 싶더라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애석해 함과 오늘날 배척하는 것은 그의 일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 것이네. 무엇이 의심될 일이겠는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통곡과 베어지는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온 나라가 시들었다’라는 통곡도 어찌 단지 곽유도(郭有道)에게만 한정되겠는가. 증의 무리가 항상 이 어른을 원수처럼 보더니 오늘날 손을 빌려 살해하였으니, 그 마음에는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림(士林)들에게는 이제부터 더욱 모시고 받들 분이 사라져 버렸네. 그러나 그는 양현(兩賢)과 육욕(戮辱)을 함께 당하였으니 옛날에 호굉(胡紘)과 심당(沈鏜) 무리가 주자를 죽이자고 청한 때가 공자 사당에 모셨던 공자 소상(塑像)의 허리가 잘려지던 때였고 보면 왜 그토록 세대는 달라졌는데도 사건은 서로 부합될까. 이는 아마 운수가 자연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사건이 은연중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네. 이 연평(李延平 이귀(李貴))이 일찍이 기자헌(奇自獻)을 찾아가 사례하기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남곤(南袞)ㆍ심정(沈貞)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까닭에 사림(士林)이 참으로 비통하게 여기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자 하는 데에 이르렀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승(이이와 성혼)의 도덕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아마 앞으로 영공(令公 기자헌)과 같은 분들로 말미암을 것이며, 따라서 정암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네. 이 말이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또한 그러할 만한 이치는 있네.
다만 지금은 선비의 기세가 참벌(斬伐)을 당한 뒤라서 더욱 세도(世道)가 쇠잔하여진 데다가 절개를 바꾸는 것이 마치 순욱(荀彧)이 조조(曹操)에게 가고 진군(陳群)이 한(漢) 나라를 잊어버린 때와 같으며,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저들이 더욱 창궐하며 한 세상을 농락하니 매우 곤란한 일일세. 어찌하면 좋겠는가.


 

[주D-001]우연하지 …… 있구나 : 옛사람들이 귀양 가거나 큰 고난을 겪고서 큰 업적을 이루었음을 자신에게 빗대어 한 말.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 《역단(易彖)》을 지었고,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하고서 《사기(史記)》를 엮었고, 정이천(程伊川)이 부주(涪州)에 귀양 가서 《역전(易傳)》을 지었는데 송시열 자신도 제주도에 귀양 왔으니 여기서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D-002]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 : 《논맹혹문》은 《논어혹문》과 《맹자혹문》을 합하여 이른 말이며, 《논맹정의》도 마찬가지로 모두 4종의 책인데 주자가 선현들의 주설을 모아 편찬하였다. 《논맹혹문》에 《정의(精義)》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가 누구의 설은 좋고 누구의 설은 그르다는 평만을 싣고 그 사람의 말은 싣지 않아 송시열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정의》의 책을 구하기 40년 만에 얻어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를 완성하였다. 《宋子大全附錄 年譜 卷11》
[주D-003]역전(易傳)은 …… 증험되네 : 《역전》은 정이(程頤)의 저서다. 부주(涪州)에 귀양 가 이 책을 저술하던 중 잡괘(雜卦)에서 ‘미제는 남자의 궁함이다[未濟 男之窮也]’라는 말을 잘 깨닫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바로 성도은자(成都隱者))이 와서 그 대목의 뜻을 물었다. 정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그 사람이 “세 양효(陽爻)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여서이다.”라고 하였다. 곧 미제괘는 이상 감하(離上坎下)로 되어 있어 세 양효가 모두 1ㆍ3ㆍ5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2ㆍ4ㆍ6의 자리에 있으며, 양효는 남자를 상징하기에 이르는 말이다. 《周易 未濟卦 傳》
[주D-004]양현(兩賢)을 출향(黜享) : 양현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말함. 숙종 8년(168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가 숙종 15년(1689)에 율곡에게는 불교에 들어간 잘못과 우계에게는 최영경(崔永慶)의 옥사와 임진왜란에 주화설(主和說)을 주장한 것들이 화근이 되어 출향되었다. 그후 숙종 20년(1694)에 다시 배향되었다.
[주D-005]《실기(實紀)》 : 《실기》는 대선(戴銑)이 주자 연보(朱子年譜)를 가지고 시호가 내린 전말 등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여 만든 책으로 모두 12권임.
[주D-006]그의 …… 것 :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서 윤선거가 효종에게 올린 소로 그가 강도에서 죽지 않았음을 들어 죄인으로 자처한 것을 말한다.
[주D-007]온 나라가 …… 한정되겠는가 : 유도는 후한(後漢) 곽태(郭太)의 자.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가 환관들에 의해 피해를 당하자, 들에 나가 통곡하며 “사람이 죽으니 온 나라가 시들었다[人之云亡邦國殄瘁]”라고 하여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傳》
[주D-008]천자를 …… 호령 : 주희(朱熹)가 정순(程洵)에게 한 편지 속에 있는 말로서, 권신(權臣)이 왕의 힘을 빌어 조정 신하들을 제재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취하는 것은 왕을 진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41》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치도(致道)를 결별(訣別)함 - 기사년(1689) 5월 14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성인의 명철하신 가르침인데 80여 살의 나이에도 끝내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그 소중한 천부(天賦)의 성(性)을 저버리게 된 점이 마음에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일생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으면서, 그중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하였고, 또 알기 어려운 곳도 있었네. 그리하여 그 부분을 초록(抄錄)하여 대략 해설을 붙이고 이것을 동지들과도 상량하고, 또 뒷세상 사람들에게도 보여줄까 하였는데 아깝게도 끝내지 못하였네.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 뿐이네. 모름지기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이나 그 밖에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과 협동하여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주 선생이 일찍이 절실하고 요긴한 한마디 말로 문인을 가르치기를,
“다만 《맹자(孟子)》의 도성선(道性善)과 구방심(求放心) 두 장(章)으로 노력하는 바탕으로 삼으라.”
하였고, 또 돌아가실 때 문인들에게 직(直)이란 한 글자를 주시며,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직(直)일 뿐이다.”
하였네, 대체로 공자는 ‘사람의 생리(生理)는 직이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다.’ 하셨고, 맹자가 앞 세상의 성인이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낸 것은 호연장(浩然章) 한 장인데 역시 이 ‘직(直)’ 한 글자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요점을 삼았으며, 주자 또한 큰 영웅이었으면서도 반드시 극히 조심하고 삼가는 면으로부터 실천(實踐)하여 왔으니 성인의 전수하는 심법(心法)을 쉽게 알 수 있을 걸세. 내가 지난날에 이를 난숙하게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행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하여 평범한 사람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뉘우친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충분히 경계가 될 것 같아서 감히 말해 주는 것이네. 중화 앞으로도 가까스로 위로의 편지를 마련하였으나 나머지 일들은 차마 언급하지 못하였네. 만나는 기회에 조용히 그에게 말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끝으로 천만 노력하길 바라며 서로 만나 영결하지 못하는 한이야 자네와 내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너무도 피곤하여 내가 손수 쓰지 못하고 대략 이렇게 입으로 불러 적게 하였네.


별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정서분류(程書分類)》 외에도 또 적어 놓은 약간의 책들이 있네. 모름지기 손자 아이들로부터 찾아다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런 등속의 일들을 꼭 화애(和哀 김창협)와 함께하였으면 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을 뵙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주(注)를 가져와 지체를 낮추시어 나와 같은 사람과 상량해 보시고 또 시(詩)를 지어 주시어, ‘무원의 정맥을 좇는다……[婺源追正脈……]’ 하셨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대감께서도 《차의》에 기울이신 뜻이 적지 않았었네. 그리하여 계술(繼述)하는 책임이 바로 오늘날의 그에게 있기 때문에 이처럼 부탁하는 것이네.
현종(顯宗) 때 호서(湖西) 천안(天安)인 듯함 의 한 선비가 상소하여 만력황제(萬曆皇帝 만력은 명 신종(明神宗))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자 그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핑계하는 말은 ‘높으신 천자를 외진 나라에서 제사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제사의 의식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네. 내가 그때 그 의견이 끝내 행해 지지 못할 줄 알고 다만 ‘이러한 말을 이러한 시국에 꺼냈으니 그 사람이 가상하다. 이 사람을 표창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만 말하였으나 이 또한 주위에서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하여 마지않았네. 그 뒤에 화양동(華陽洞) 바위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의종(明毅宗))의 어필(御筆)을 새기고 또 조각돌에 새겨서 환장암(煥章菴)에도 보관하였고, 또 문곡(文谷)이 지은 애사(哀詞)가 있는데 이것이 이 일의 동기가 되었네.
늘 마음속으로, 한 칸 사우(祠宇)를 환장암의 뒤 왼쪽에 건립하고 조그만 위판(位板)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 쓰고서 봄가을로 무이신(武夷神)의 예(禮)에 의거하여 마른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술은 서실(書室)의 기전(基田)에서 나온 쌀로 빚되 아무쪼록 정결하게 하고 오직 축사(祝辭)만은 불가불 성대하게 칭송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네. 이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마음에 경영하여 온 지는 오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무슨 한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높은 천자를 외진 나라에 제사 드릴 수 없다는 이 말은 실상 무식한 말이네. 한퇴지(韓退之 한유(韓愈)) 때 초(楚) 나라 소왕(昭王)의 사당이 전하여져 유민(遺民)이 자기네끼리 받들어 제사 드렸던 까닭에 퇴지의 시(詩)에,
그래도 백성이 있어 옛 덕을 기리며 / 猶有國人懷舊德
한 칸 초가집에서 소왕을 제사 모시네 / 一間茅屋祭昭王
하였네. 남헌(南軒 송 나라 장식(張栻))도 일찍이 계림군(桂林郡)의 지주사(知州使)를 지내면서 우제사(虞帝祠)를 세우고 제사를 드리자, 주 선생이 표장(表章)하는 글이 있었네. 이것이 어찌 근거할 만한 법이 아니겠는가. 문곡의 시도 또한 차운(次韻)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여 연이어 크게 편철(編綴)하여 암자 속에 보관하는 것도 하나의 일일걸세.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받들어 온 것이고 조각돌에 새긴 것은 이택지(李擇之 이선(李選))가 본을 뜬 것이네. 이 일은 마땅히 김(金)ㆍ민(閔)ㆍ이(李) 집안사람들과 의논하여 성사시키면 좋을 걸세. 이 일은 극히 간단하니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걸세. 비록 그르다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주자와 남헌의 고사가 기왕에 있으니 무엇 때문에 스스로 그만두겠는가. 다만 서실의 기전은 서실을 지키는 종의 말을 들으면 후영정(後穎亭 이휘(李徽)의 별장)의 종이 내가 거제(巨濟)로 귀양 간 틈을 타서 그 상전의 물건이라면서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네. 만일 그렇다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네. 만일 본전을 준비하여 암자의 중에게 주는 것도 그에 대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는지. 모름지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잘 생각하게. 만일 세 집안과 의논한다면 반드시 좋은 꾀가 있을걸세.
처음에는 효종을 배향할까도 생각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는 비단 일 자체가 미안할 뿐 아니라 시속의 사람들이 반드시 큰 죄라고 생각할 것이어서 감히 생각하지 못하였네. 해마다 제관(祭官)은, 충현 송공(忠顯宋公 충현은 송시영(宋時榮).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자결하였음) 자손이 본 고을에 살고 있으니, 이를 맡길 만하고, 그 나머지로는 홍(洪)ㆍ변(卞) 제군(諸君)도 합당하네. 일찍이 《이정서(二程書)》의 사역(寫役)을 꾀하였을 때 자네가 모 감사(監司)에게 그 책임을 일임하였는데 그것은 치밀한 생각이었네. 이 일은 더욱 치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이네.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축문(祝文) 내용은 위의와 덕에 치중하되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 백성이 받은 은혜의 뜻을 덧붙이고, 의종황제(毅宗皇帝)에게는 나라가 망하자 임금이 따라 죽은 정의에 치중하도록 하게.
주자가 일찍이 장자(莊子)가 정도(正道)를 해친 설을 논하시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깝게 하지 말라’고 한 구절을 매우 이치를 거스리는 말이라고 하였네. 일찍이 혼자 생각하여 보니 장자의 그 설은 후세의 이익을 좋아하고 편리를 취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가장 알맞은 말로서 그 해는 홍수나 맹수의 재앙보다 심한 것이니 이는 사설(邪說)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네. 근세에 어떤 사람 이성(尼城)의 윤선거 의 처세술은 대중의 의사를 따라 몸을 보전하며 모든 이해에 관계되는 설은 바로 장자의 말과 같았으니 주자가 그 말을 집어내어 통렬하게 배척하신 그 뜻이 깊다 하겠네.
그러면서도 《대학(大學)》을 논하실 때에는 장자가 도체(道體)를 보았다고 극구 칭찬하고, 또 ‘도(道)를 설명하면서 그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語道而非其序則非道也]’라는 한 구절을 드러내면서 말씀하기를,
“이는 공자 문파의 원류를 이은 것이니, 증점(曾點) 등이 바로 이와 같다. 사람들이 모름지기 그 말을 이해하여 자신이 그 근본 의미를 관통하게 되면 이런 등속의 의견에 대하여 저절로 그 높낮음이 분명하게 깨우쳐질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좋은 점은 모두 장자에게서 나왔다. 다만 식견이 깊지 못하여 세밀한 공부가 없으니 이른바 ‘현자(賢者)는 너무 지나치다’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에서 주자는 세밀이란 말을 장자에게 돌린 것이네.
대체로 주자가 《대학》에서 이를 논한 것은 아마 《대학》의 공부하는 단계가 극히 엄밀하여 털끝만큼도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일 것이니 공자 문파의 가르침을 세운 뜻은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네. 후세의 학자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여 육씨(陸氏 육상산(陸象山)) 같은 사람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공부를 내 던져 버리고 오로지 성의(誠意) 정심(正心) 공부에만 열중하였고, 또 먼저 수기(修己)도 하지 않고 갑자기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들은 끝내 성취가 있을 수 없음을 몰라서였네. 그런 까닭에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참으로 단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있다면 왜 존경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그것은 결코 이러할 이치가 없음을 말하신 것이네.
이처럼 장자가 말한 ‘도(道)를 설명하면서 그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라는 한 구절이 참으로 《대학》의 뜻과 부합됨을 아시고서는 칭찬하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학자를 깨우치는 뜻이 깊네. 대체로 주자는 장자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을 조금도 남김없이 보았던 까닭에 그 이치를 해치는 말을 통렬하게 변박하시면서도 성인의 도(道)와 합치되는 곳에서는 극구 칭찬하였던 것이니 지극히 식견이 높고 마음이 공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주D-001]중화(仲和) …… 편지 : 중화는 김창협(金昌協)의 자. 그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소식을 이해(1689) 4월에 듣고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함.
[주D-002]호서(湖西) …… 선비 :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9에 천안(天安)에 사는 이중명(李重明)이라고 하였다.
[주D-003]문곡(文谷)이 지은 애사(哀詞) : 김수항이 현종 14년(1673)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중 요동(遼東)에서 숭정황제의 글씨 두 폭을 구입한 다음, 숭정황제가 명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사실을 회상하며 애사를 지었다. 《文谷集 卷26 崇禎皇帝御筆二障購得始末記》
[주D-004]무이신(武夷神)의 …… 드리고 : 무이신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의 남쪽에 위치한 무이산의 신인(神人)인데 한(漢) 나라 때부터 사당을 세워 마른 고기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05]문곡의 시 : 김수항이, 송시열이 숭정황제 어필을 화양 계곡 암벽에 새기고 그것을 환장암에 기거하는 중들에게 수호하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우제를 위하여 환장암에 제한다.[爲尤齋寄題煥章菴]”라는 장편시를 지어 보냈다. 《文谷集 卷4》
[주D-006]주자가 …… 하였네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선을 행하되 명예에 가깝게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깝게 하지 말며[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하였는데, 주희가 양생주설(養生主說)을 지어서 그 말을 통박하였다. 《朱子大全 卷67 養生主說》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갑자년(1684) 6월 1일


여러 번의 애서(哀書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삼가 상중에 그런대로 견디어 감을 알게 되어 자못 위로가 되네. 다만 병중에 인편이 없어 오랫동안 답장이 지체되어 늘 미안하던 차에 오늘 인편에 또다시 지난달 16일에 부친 편지를 받으니 말뜻이 정중하여 부끄러움이 더욱 깊었네.
윤(尹 윤증을 가리킴)의 일은 모두가 약석(藥石)이니 스스로를 깨우치는 계책으로 삼을 따름이네. 주자를 탄핵하는 소장에 더럽고 추한 것이 낭자하였음에도 주자는 오히려 하나하나 예를 들어 시인하며 옳은 말이라 하였고, 모두 그 핵심을 고증하며 거짓이라고 아니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모두 참으로 있는 일이 아닌가.
선명(先銘)은 오랫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틈을 타 초고를 완성하여 적당한 인편에 보내겠네.
정서(程書)의 분편(分編) 작업은 최우(崔友 최방언(崔邦彦)을 가리킴)가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잊히지 않네. 이 벗에게서도 편지가 있었으나 병으로 답장을 마련치 못하였으니 보거든 말이나 전해 주기를 바라네.
날씨가 매우 덥네. 슬픔을 절제하고 상례(喪禮)대로 따라서 멀리서 걱정하는 이 정성을 위로해 주게.


별지
별지의 내용은 잘 알았네.
대체로 경계해 주거나 규찰하여 주던 도리가 쇠한 지 오래되어 붕우(朋友)란 이름만 헛되이 남았고 허물이 있어도 그르단 말을 듣지 못하니 아름답지 못한 세태가 더욱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상중에 있는 그대에게서 옛사람의 도리를 보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네. ‘너무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渾然)함이 없다.’고 지적한 말은 참으로 그러함이 있네. 그러나 ‘박절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아마 말하는 바가 박절하여 쉽게 드러난다는 뜻이니 그렇다면 바로 ‘깊고 두텁다.’는 말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네. 따라서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나네. 대저 이번 일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네. 이제 대략 말해 보겠네.
대체로 윤휴가 주자를 공격하여 배척하여도 세상에서는 괴이하게 생각지 않았는데, 나는 내 힘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망녕되이 배척하였네. 저 주자의 도는 마치 중천의 해와 같으니 휴 같은 무리가 백 명 천 명인들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마는 온 세상이 풍미하여 주자보다 낫다라는 지경에 이르러선 그 해로움은 홍수나 맹수의 피해보다 심한 것이었네. 나머지 사람들은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저 대윤(大尹 윤선거를 가리킴)은 파산(坡山 성혼(成渾)을 가리킴)의 여파요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어진 아들로서, 도리어 윤휴를 돌봐 주고 무리짓기에 매우 힘을 기울였네. 내가 근심과 탄식을 이기지 못하여 만나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 말은 다하였네.
“왕통(王通)의 학문이 여러 선비들이 따를 수 없이 훌륭하였으나 그가 《춘추》에 비겨 책을 지어 여러 나라를 포폄(褒貶)한 점에 이르러서는 주자는 제왕을 참칭하는 죄라고 배척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휴가 감히 주자의 주설(註說)을 쓸어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책을 만들어 천하를 바꾸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네. 《춘추》의 법에서는 모든 난적은 반드시 먼저 그와 무리지은 사람부터 다스렸으니 이제 공이 당연히 휴에 앞서 법에 복주될 것이다.”
나의 말이 아프고 간절함이 이 같았는데도, 그는 끝내 머리를 돌리지 않았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휴의 전의(奠儀 초상난 집에 보내는 돈이나 물건)를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사귄 도리가 끝까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네.
언제나 세도(世道)를 위해서 깊은 근심과 긴 탄식은 자주 말로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격하게 입에서 튀어나와 나도 모른 사이에 너무 심한 말이 되었네. 그리하였으니 그 집안 후생들이 성을 내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네. 이제 그 집안 후생들도 나의 심술과 언행을 배척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네.
내가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를 따라 공부하면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에 반드시 그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삼가하란 말을 귀에 익게 들었으면서도 행실에 힘쓰지 못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극기(克己)를 하지 못하였네.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때문에 혹 인욕을 천리라고 여겼으며 극기를 하지 못한 때문에 인욕을 따라 행동한 것도 많았네. 저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내게는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이니 이제 당연히 깊이 반성하여 빨리 고쳐야 할 따름이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그의 아버지의 덕(德)을 내세워 협박하려는 꾀를 삼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이네. 그런데도 그들 무리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분하는 데에는 더욱 가소롭기만 하네.
지금의 논자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편벽한 행위를 막고 음탕한 말을 내치는 것으로 자임하려 든단 말인가.’ 한다면, 내 당연히 말만 나오면 죄에 자복할 것이네. 그러나 맹자가 ‘능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자고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고 하였는데, 주자는 주석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옳으니 도를 모른다 하더라도 성인의 무리이다.’고 말씀하셨으니, 마구간이나 치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고 한 말은 다름이 아니라, 주자가 일찍이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가 이단을 공격하지 않는 것을 ‘깊고 두터운 뜻이다.’ 하면서도 그 해가 적지 않을 것을 병통으로 여기셨네. 이제 자네가 참으로 동래(東萊)처럼 깊고 두터웁기를 나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뜻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깊고 두텁다는 것이 내 몸을 도모하기에는 편한 것이나 세도(世道)에는 편한 것이 아니네. 만일 내가 과연 몸이나 편히 하려는 꾀를 하려 하였다면 당초 휴의 주장이 나올 무렵에 당연히 흐릿한 말을 내놓아 스스로 저번의 큰 화를 모면하였을 것이네. 큰 화를 겪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뉘우칠 줄 모르니, 한번 타고난 기질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이 같음을 알 수 있네. 이제 우러러 선철(先哲)을 생각하여 느끼는 바가 있으니 만일 주자 역량의 만에 하나라도 가졌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시끄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어떤 사람은 ‘남의 자제들을 대하여 그 부형의 잘못을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말하나 나는 또 생각건대 주자가 동래(東萊)에게 한 편지에 여 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의 봉호) 가학(家學)의 잘못을 극언하면서도 혐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래도 성내지 않았었네. 때문에 당초 이 일이 발단되면서 저들과 조용히 헤아려 보려고 공손한 말로 편지를 써 그 실마리를 열어 보려 하였으나 저들은 화를 잔뜩 내 꾸짖는 말이 더욱 더하여졌고 이내 끝없는 갈등이 빚어졌네. 이는 내가 일을 살피는 것이 분명치 못한 소치이니 후회하여도 소용없는 일이네.
이러한 여러 말은 참으로 그대의 규찰하여 주는 성심에 감동되어 감히 그 전말을 털어놓은 것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말게.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풍병이 들어 정신을 잃었다고 하여 또 말썽만 더 일어날 것이네. 절대 깊이 간직하게.


 

[주D-001]선명(先銘) : 이기홍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연거푸 잃고 연 6년 상을 입으니 이해는 할아버지 상중이었으며, 이 선명은 아버지의 묘지명을 말한 듯함.
[주D-002]박절하게 …… 없다 : 이는 이기홍이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시열이 윤증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가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함이 없는 듯하다.’면서 대군자의 말하는 절도에 잘못이 아니겠느냐고 한 것을 말한다. 《直齋集 卷5》
[주D-003]동래(東萊)에게 …… 잘못 : 주자가 동래에게 “여 형공은 불로(佛老)에 젖었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 형공은 정자(程子)의 제자이다.

 

 

한수재선생문집 제5권
 서(書)
이여구(李汝九) 기홍(箕洪) 에게 보냄 - 경오년 1월


하늘 끝 먼 곳에서 그리워해도 소식이 감감하던 차, 지난해 9월 22일 보내신 편지가 뜻밖에 백응(伯凝 신명정(申命鼎))의 처소로부터 전달되어 뜯어보니 흐믓하기가 마치 천리의 얼굴을 대하는 듯하여 산하가 멀리 막힌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보내신 뒤로 병중에 계신 몸이 좀 어떠하십니까? 괴롭고 쓰라린 형편은 사실 그러실 줄 짐작합니다. 이제 형께서는 이미 힘을 얻는 좋은 법을 터득하셨습니다. 이대로 꾸준히 나가신다면 장차 무슨 경우를 당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니, 주 선생(朱先生)의 이른바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섰다.”는 것이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더욱 스스로 몸을 소중히 돌보고 노력하여 원대한 사업을 펴 나가십시오. 저는 쓸쓸히 산속에 엎드려 지내면서 어느새 새봄을 만나 작년의 일을 회상하니 심장이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어찌하면 우리 동지들끼리 만나 가슴에 가득 찬 이 울분을 터뜨릴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들어 고대하며 한탄만 더할 뿐입니다.
종이 위쪽에 써서 보이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 당시 분명히 기록해 둔 간단한 문자가 있었는데 순우(淳友 중순(仲淳) 정호(鄭澔)를 가리킴)가 그것을 어디에서 얻어 잘못 베껴 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밖에도 들은 사실들이 없지 않은데 형에게 고하지 않고 어디에다 입을 열겠습니까마는, 인편이 여러 번 바뀌며 멀리 가는 편지라서 유실될까 염려스러우니, 우선 잠자코 있다가 후일 서로 만나는 때를 기다리는 것도 그다지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문(遺文 송시열의 유고(遺稿))을 감정(勘定)하는 등의 일은 형과 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彥))ㆍ중화(仲和 김창협)ㆍ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 제현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이 또한 형께서 알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긴 하나 또한 어찌 이 종이에다 여러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무언중에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데 형께서도 응당 그러실 줄 압니다. 뜻은 한이 없으나 말을 길게 할 수 없어 이만 그칩니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주C-001]이여구에게 보냄 : 한수재 50세 때인 1690년(숙종16)에 함경도 회령(會領)에서 귀양살이하던 이기홍이 보내온 서신에 대한 답장이다. 이기홍의 처음 이름은 기주(箕疇)이고 호는 직재(直齋)로 송시열의 문인인데, 1689년(숙종15)에 스승이 제주로 귀양 가게 되자 동문 40여명과 함께 그 억울함을 변론한 일로 회령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한수재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 “이곳의 괴롭고 쓰라린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주 선생(朱先生)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의미 깊은 가르침에 의하면 ‘옛사람이 겪은 극히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반드시 이 상황보다 몇 갑절 더 심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오늘날 힘을 얻는 좋은 법입니다.” 하였으므로 한수재가 본 답장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直齋集 卷6 答致道》

한수재선생문집 제5권
 서(書)
이동보(李同甫)에게 보냄 - 경오년 5월


해와 달이 빠르게 달려 늦여름이 다가오는데 지난해를 회상할 때 심장과 쓸개가 불에 타는 듯 쓰라리니, 아마도 우리 동문인의 심사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네. 오늘날 우리들이 힘을 다해야 할 것은 오직 선생의 유서(遺書)를 교정하는 한 가지 일로서 참으로 태만히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나는 큰 병을 치른 뒤로는 정신이 없어지고 기력이 꺾여 글을 몇 줄만 보고 나면 영락없이 파김치가 되고 마네. 가사 죽기를 무릅쓰고 계속 보아간다 하더라도 또다시 금방 잊어버리니, 이와 같은 상황으로 어찌 무슨 일을 해 낼 수 있겠는가. 노선생께서 살아생전에 나를 사랑하고 권장하신 뜻이 너무도 지극했는데 이제까지 한 가지 일도 보답해 드린 것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부끄럽고 송구스럽네.
듣건대 화애(和哀 상중에 있는 중화(仲和) 곧 김창협을 말함)는 슬픔에 싸여 있는 중에서도 독서하는 일을 폐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제 보내오신 말씀에 또 독서에 뜻을 두어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볼 수 있었으니, 참으로 흠모와 감탄을 금치 못하였네. 현재 이 일을 함께 논할 사람은 화애와 그대뿐이므로 오직 거리의 원근을 따질 것 없이 자주 서로 모여 더 많은 가르침을 받들어야 할 일이나, 나의 병이 낫지 않고 질질 끌어 그 소원을 한 번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만 있으니, 그 한스러움이 어떻겠는가. 병세가 아무리 이렇더라도 이달 그믐이나 다음달 초에 몸을 부축하고 회덕으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올 계획이므로 그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내오신 서신을 볼 때 또 어긋날 듯하니, 섭섭함을 금할 수 없네. 천신의 도움을 받아 혹시 병이 완쾌되면 조만간에 반드시 영협(永峽 단양의 영춘(永春)을 가리킴)으로 가서 그대에게 세 사람이 함께 모이자고 청할 생각이지만 아직은 감히 예기치 못하겠네. 영협의 계획이 혹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강(驪江)에서 한번 모이자는 말은 진정 반가운 말씀이네.
《차의(箚疑)》는 조만간에 작업이 끝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즉시 그 전의 것 한 질을 보내 드리겠네. 두 가지 뜻으로 말한 부분에 관한 일은 화애도 그 점을 나에게 말하였으니, 마땅히 본문을 살펴 고칠 생각이네. 이와 같은 경우가 어찌 한두 군데뿐이겠는가. 눈에 보이는 대로 지금 낱낱이 찌를 붙여 표시하고 있다 하니, 서로 토의하여 옳고 그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네. 이곳에서도 마땅히 의논하고 물어볼 곳이 있는데 나중에 직접 만나 물어보고 결정할 생각이네.
《어류분편(語類分編)》은 초본이 몇 건인지 알 수 없는데 그중 한 건은 지난해 돌아올 때 짐이 무거워서 수송하기 어려워 회덕의 어느 사우(士友) 집에 간직해 두고 미처 가져오지 못했는데, 지난번 서우(敍友 서구(敍九) 송주석)가 그대의 뜻으로 그것을 찾기에 이미 놓아둔 곳을 가리켜 주고 그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하였네. 《정서분류(程書分類)》는 한 본을 호남(湖南)에서 정사(淨寫)하여 지금 이곳에 두고 있는데 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彥))에게 보내 줄 생각이네. 《율곡별집(栗谷別集)》은 이미 전동(磚洞)에서 가져오긴 했으나 지면 머리에 찌를 붙인 것 이외에도 바로 본문의 줄과 글자에다가 고친 곳이 있어서 처음 보는 자로서는 쉽게 베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분량의 많기가 한 권의 작은 책자가 될 정도여서 내가 아직 이 일에 손을 댈 만한 여력이 없으니, 이 또한 좀 더 기다려 주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현옹(玄翁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말함)은 이미 이 일을 언급해 주시기로 허락하셨는가? 그의 대답은 어떠하였는가? 나머지 수많은 사연은 멀리 가는 지면에 어찌 일일이 다 쓸 수 있겠는가.

한수재선생문집 제5권
 서(書)
이동보(李同甫)에게 답함 - 계사년 5월


선생께서 내리신 서신 속의 이른바 “이미 시작은 해 놓고서 작업을 끝내지 못한 것이 약간 있다.”는 것은 《문의통고(問義通攷)》를 가리키며 ‘수정한 약간의 문자’란 말은 《정서분류(程書分類)》와 《주서차의(朱書箚疑)》 등을 가리킨 것이네. 《퇴계집차의(退溪集箚疑)》는 선생께서 여강(驪江)에 계실 때 처음으로 몇 장을 기초하셨는데. 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彥))이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를 가지고 오고 집사께서 또 뒤따라 당도하였으므로 우선 《퇴계집》을 놓아두고 《분류》의 작업을 계속 진행했던 것이네. 그 뒤에 더 이상 《퇴계집》에 작업을 착수할 여가가 없어 중단하였으며 조금 작업을 한 작은 책자가 현재 이곳의 상자 속에 있네.
“《대전(大全)》과 《어류(語類)》를 뽑아 기록하여 해설한다.”고 한 것은 《어류》 속에 있는 말이 《대전》의 말과 크게 다른 경우가 많이 있으므로 선생께서 이와 같은 부분을 뽑아 기록하여 그 말씀의 초년과 만년을 상고해 정론(定論)을 제시하려 하셨던 것인데 작업이 커 미처 착수하지 못했으니, 앞서의 서신에 이른바 ‘본디 착수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거론할 것이 없다.’ 한 것이 그것이네.
선생께서는 우리들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와 같은 분부를 하셨으나 나처럼 얕고 고루한 식견으로 어찌 감히 감당할 것인가. 간절하신 분부를 저버렸으니 부끄럽고 한스럽네.

태극도해(太極圖解) 처음 1절(節)의 두 줄로 된 소주(小註)에 “이 이상은 태극설을 인용하여 그림의 개황을 해석한 것이고 이 이하는 그림을 근거로 하여 태극설의 뜻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하였는데, 농암(農巖 김창협)은 “이 두 구절은 처음에 금방 보면 서로 어긋난 것 같다.” 하였고 일찍이 우옹(尤翁)께서도 그 위치를 마땅히 바꾸어야 할 것으로 의심하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자세히 추리해 보니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명께서 그 위에 찌를 붙이시길 “내가 일찍이 이 글을 여러 번 강독하였으나 이와 같은 가르침은 듣지 못했다. 혹시 망우(亡友)가 그 말씀을 직접 들었는지, 아니면 후문을 논하는 문자 속에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셨습니다.
이제 선생의 문집을 살펴보니 잡저의 한 단락에서 과연 이 문제를 논하셨는데, 거기에 “베껴 쓰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 같다. 위아래의 글을 가지고 따져 보면 마땅히 ‘이 이상은 그림을 근거로 하여 태극설을 부연 설명한 것이고 이 이하는 태극설을 인용하여 그림의 개황을 해석한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하였고, 그 주에 “이상은 치도(致道)와 중화(仲和)의 문목(問目)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은 무진ㆍ기사년간에 있었던 일인 듯한데 혹시 그때 집사께서는 그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다시 문집을 상고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생의 그 논의대로라면 저의 얕은 소견이라도 선생께서 의심을 가지신 것이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대체로 “여기에서 이른바 극이 없는 가운데 태극이 있다는 것은”이라고 한 것은 곧 그림의 태극권(太極圈)으로서 그 문장에서 치중을 한 것이 그림에 있기 때문에 “태극설을 인용하여 그림의 개황을 해석한 것이다.” 하였고, “오직 사람은 음양오행의 우수한 기운을 얻어 그 마음이 가장 신통하니 이른바 인극(人極)이 곧 이 마음에 존재한다.”라고 한 것은 치중을 한 것이 태극설에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근거로 하여 태극설의 뜻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베껴 쓸 때의 오류가 아닌 듯한데 선생께 삼가 질의하여 가르침을 청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태극도해에 대해 선생께서 논하신 것은 그 당시에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고 나중에 잡저 속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혹시 선생께서 나에게 보여 주려 하시다가 미처 그렇게 못하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나의 얕은 소견도 대체로 보내오신 말씀과 다름이 없는데 삼가 선생께 질의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네.


 한수재선생문집 제6권
 서(書)
정경유(鄭景由)에게 답함 - 계미년


그립던 중 뜻밖에 서찰을 받고 삼가 관직에 있는 몸의 근황이 안녕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흐뭇하기 그지없네.
누박(樓朴 박세당(朴世堂)을 말함)의 일은 참으로 세도(世道)의 큰 변고인데 이하성(李廈成 이경석의 손자)의 소장은 사실을 꾸며 대고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더욱 심하니, 통탄스럽기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다만 다행히도 성상의 처분이 엄정하고 통쾌하였으므로 경하해 마지않네. 문생들의 변무소(辨誣疏)는 이미 올렸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한탄스럽네. 보내 주신 소장의 초본은 마땅히 못난 소견을 제시해야 할 일이지만 그 속에 혐의쩍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할 문제가 있으므로 사람을 멀리 보내 애써 물으신 뜻을 끝내 저버렸으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네. 나의 뜻을 소지(小紙)에 대략 기록했으니, 살펴 주기 바라네.


별지(別紙)
문생의 소장에 대해서는 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가 어제 이미 서울로 떠났으니, 부디 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彥)) 등 여러 벗과 잘 상의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면 고맙겠네.
아무 능력이 없는 내가 조정의 대우를 지나치게 받았으니, 이는 모두가 헛된 이름을 도적질한 소치이므로 항상 황공하고 부끄러워 죽고 싶을 정도이네. 소장의 초본에 이(尼 윤증을 가리킴)를 말한 곳에서도 나의 성명을 들먹여 놀랍기 그지없네. 이 글은 백겸(伯謙)의 솜씨에서 나왔는데 백겸이 나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네. 이 글이 세상에 한번 나가면 그것을 본 자는 반드시 서로 명예와 총애를 다툰다고 인식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또한 매우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이에 감히 그 글에 간여하여 가부를 가릴 수 없으니, 헤아려 주시기 바라네.
소장의 대본은 내가 감히 간여하여 가부를 가리지 못하는 입장이고 보면 감히 그 사이에 뭐라고 입을 열 일이 아니지만, 거론한 춘당 선생의 일만은 극히 마음에 편치 못하네. 이 문제에 대한 변론은 달태(達台 달보 김진규)의 소장 내용이 타당한 듯하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이 받들어 순종하였습니다[擧世承順]’ 하고, 그 아래에 또 ‘모가 놀랍게 여기고 한탄한 것은 모를 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某之駭歎 干某何事]’ 하였으니, 혹시 춘당이 받들어 순종한 속으로 섞여 들어갈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호씨(胡氏)와 양씨(楊氏)의 일을 끌어댄 것도 매우 걸맞지 않네. 이처럼 동춘을 깎아서 말한 부분은 감히 간여할 수가 없네.


[주C-001]정경유에게 답함 : 한수재 63세 때인 1703년(숙종29)에 쓴 서찰임.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고쳐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고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송시열을 비난한 내용을 썼는데, 이로 인해 숙종 29년 4월 17일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계적(洪啓迪) 등 180명이 상소하여, 박세당을 맹렬히 비난하고 아울러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을 때 청 태종(淸太宗)을 지나치게 찬양한 것을 송시열이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하여 비난한 일은 옳은 처사였다는 등의 뜻을 개진하였다. 그후 5월 21일에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이 상소하여, 자기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은 종사와 백성을 살리려는 인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아울러 송시열이 처음에는 자기 조부를 높이 받들다가 나중에 세력이 커지자 시기하고 미워하였다는 등, 홍계적 등의 상소에 대해 조목별로 따져 반박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고, 송시열의 문인들이 이하성의 소장에 대한 반박 소장을 올렸는데, 그 소장의 초안을 소장파의 중심 인물인 신유(申愈)가 작성하였고 신유의 장인인 정찬휘(鄭纘輝)가 그 초안을 한수재에게 보내, 내용을 검토하고 그대로 사용해도 좋은지 여부를 가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한수재는 그 내용 속에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스승 송준길을 폄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간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수재가 문제로 삼은 부분은 본 서신의 별지에 대략 언급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온 세상 사람이 이경석을 받들어 순종하는데 송시열이 홀로 배척하였으니, 그 말들이 시끄러울 것은 이상할 게 없고 송준길이 놀랍게 여기고 한탄한 것은 송시열을 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擧世承順服習 時烈獨斥之 則無怪基譁然 而宋浚吉駭歎 干時烈何事哉]”라는 것으로서 한수재의 의견은 ‘而’ 자와 ‘宋’ 자 사이에 ‘且夫至於’라는 네 자를 끼워 넣어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 하였다. 송준길이 놀랍게 여기고 한탄하였다는 말은, 1669년(현종10) 3월 현종이 온양(溫陽) 행궁에 내려왔을 때 유도상(留都相)으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송시열을 의중에 두고 “임금이 가까이 계시는데도 입조(入朝)하는 자가 없으니, 신자의 분의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송시열이 죄를 청하는 소장을 올리면서, 금(金)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송 흠종(宋欽宗)의 시종신(侍從臣) 손적(孫覿)이 금의 요구에 의해 제문(祭文)을 지으면서 그들을 찬양하는 내용을 써 아첨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여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이경석을 지척하였다. 이경석은 이에 크게 노하여 송시열의 상소문을 송준길에게 내보이자 놀랍게 여기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한수재가 정찬휘에게 본 서신을 보낸 뒤에 한수재의 둘째 손자 권정성(權定性)이 그의 장인이자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익(宋炳翼)에게 그 소장의 초본을 보인 일이 화근이 되어 송시열과 송준길 자손들 사이에 싸움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肅宗實錄 卷38 4月, 5月條》 《宋子大全附錄 年譜 卷6》 《寒水齋集附錄 黃江問答》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제발(題跋)
《정서분류(程書分類)》에 발함


우리 우암 선생이 일찍이, 경전(經傳)의 뜻은 이미 정자ㆍ주자의 감정을 거쳐서 더 이상 미진함이 없으니, 후학들이 그 훈사(訓辭)를 인하여 부지런히 힘써 삼가 행한다면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데에 이 밖의 다른 방도가 없는데, 만일 이것을 외면하고 저술이나 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군더더기요 망녕된 짓이라고 여기었다. 이 때문에 매양 정자ㆍ주자의 글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연구하여 세밀히 분석하였는바,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는 《주자대전》의 알기 어려운 곳을 구절마다 해석하여 이를 《차의(箚疑)》라 이름하였다. 또 두 정자의 문집은 책만 펴면 일목요연하나, 이른바 유서(遺書)와 외서(外書)는 모두 문하인들이 스승의 문답한 말을 기술한 것으로, 사람마다 각기 편록(編錄)하여 같은 말이 산만하게 여기저기 섞여 나오는데, 그중에 혹은 처음에는 《논어》ㆍ《맹자》를 논하다가 다른 경서로 끝을 맺은 것도 있고, 혹은 처음에는 천도(天道)를 말하다가 말을 돌려서 인사(人事)를 언급한 것도 있으므로, 반드시 전질(全帙)을 다 열람한 다음에야 고검(考檢)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왔다. 이에 마침내 단락마다 척출해서 부문별로 나누어 편입하되, 사서와 육경을 논한 글의 경우는 본장(本章) 아래에 수록하고, 그 나머지는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의거하여 문목(門目)을 분류해서 편록해 놓으니, 차례가 정연하여 고열(考閱)하기에 편리하게 되었다. 글이 모두 16편(編)으로 되었다.
경신년에 선생이 유배가 풀려 돌아와서는 이것을 나누어 주어 다시 정돈하도록 하니, 최방언 미백(崔邦彦美伯)ㆍ이희조 동보(李喜朝同甫)가 실로 사서에 관한 일을 도왔다. 뒤늦게는 또 나를 명해서 필연(筆硯)의 일을 대신 집행하게 하였는데, 초본(草本)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성만징 달경(成晩徵達卿) 및 나의 죽은 자식 욱(煜)이 전후로 교정하였다. 정유년에 이교악 백첨(李喬岳伯瞻)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이 일을 주선하여 판각해서 일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뜻밖에 체직되자, 이미 갖추어진 것을 삼재(三宰) 민진후 정능(閔鎭厚靜能)에게 부탁하였다. 정능이 정력을 다 쏟아서 다시 수정을 가하고 또 재력(財力)을 보태어, 두 부자(夫子)의 본집(本集)과 합해서 간행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이에 노선생이 후학들에게 좋은 선물을 내리신 뜻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그 다행스러움이 어떻겠는가. 이에 대하여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책 끝에 대략 이렇게 두어 줄을 쓰노라.


한수재선생문집 연보
 [연보(年譜)]
기사년(1689) 선생의 나이 49세


1월 20일(무자) 흥농(興農)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차의(箚疑)를 품정(稟定)하였다.
이때 효묘(孝廟)의 어찰을 봉진(封進)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우암 선생이 마침 병이 심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대신 어찰을 봉진하면서 함께 올리는 상소문을 기초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원자(元子)의 위호(位號)에 대한 일로 입시했던 여러 신하가 다 죄를 입자 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여러 신하들이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잇따라 삭출(削黜) 원찬(遠竄)의 명이 내렸다. 그러므로 소를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2월 9일(정미) 우암 선생을 제주(濟州)에 천극하라는 명이 내리니 선생이 모시고 흥농을 출발하였다.
11일(기유)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차의의 서문(序文)을 엮어 선생에게 주며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차의를 그대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가 헤아려 수정하여 고쳐라.”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의심나는 곳은 마땅히 문목(問目)을 올려 여쭙겠습니다.” 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나의 노쇠함이 심하여 비록 스스로 처리한 것도 매양 잘못 교감되었음을 걱정하였다. 그대 두 사람이 직접 상의하여 소세(梳洗)하면 무슨 의난처(疑難處)가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작은 곳은 삼가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마는 관계가 중대하여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감히 갖추어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중화와 편안히 지내며 강론(講論)하는 것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가 꽤나 자상하고 세밀하니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3일(신해) 금구(金溝)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묻기를 “윤휴의 죄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주자를 깔보고 업신여긴 것이 가장 크다고 할까요?” 하자,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렇다. 사람이 진실로 성현을 업신여긴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고서, 또 선생에게 이르기를 “여러 벗들은 흩어져 돌아가더라도 그대는 나와 함께 며칠 더 가야 하겠다. 내가 그대에게 조용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였다.
14일(임자) 태인(泰仁)에서 유숙하였다.
하루를 머물렀다. 닭이 울자 일어났는데,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 선생의 수적(手蹟)이 매우 많고 석담일기(石潭日記) 같은 유 또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과 율곡의 비문을 산정할 때 왕복한 글 및 행장의 초본을 신재(愼齋 김집(金集))가 모아서 깊이 간직하였다가 말년에 나에게 전수한 것도 있는데, 이것을 모두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치도는 이것을 힘써 지켜, 설혹 율곡 자손이 가져가겠다고 해도 이것은 여느 물건과는 다르니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초에는 박화숙(朴和叔)과 함께 이것을 지키려고 했었지만 지금 화숙이 저 모양이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 소생(小生)인들 어찌 무사히 집에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경우 장차 이 물건을 어느 곳에 맡겨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그대의 윤자(胤子)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고, 또 그대의 집이 궁벽한 곳에 있으니 보존하는 데 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후일에 주손(疇孫 우암의 손자 주석(疇錫))이 살아서 돌아오거든 그와 더불어 함께 지키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분류에 대해 그대와 범례를 의정하려고 정본(淨本)을 화양(華陽)에 가져다 두었으니 돌아갈 때에 가지고 가서 수정하라. 그리고 《근사록(近思錄)》 및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려 있는 것은 주자설(朱子說)과 섭씨주(葉氏註)를 아울러 채집(採集)하여 본조(本條) 밑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니 잘 헤아려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를 소절(小節)로 분류한 것이 흥계(興溪)의 서가(書架) 위에 있으니 역시 가지고 가서 검교(檢校)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퇴계서(退溪書)》의 차의(箚疑)를 시작하여 겨우 1권을 끝냈으니 치도가 그 일을 마쳐 나의 뜻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선생이 사양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부디 힘써 하라.”
하였다.
16일(갑인) 우암 선생과 작별하였다.
우암 선생은 정읍(井邑)으로 떠나고, 선생은 회정(回程)하여 전주(全州)에서 유숙하였다.
17일(을묘)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문곡(文谷) 김 상공 수항(金相公壽恒)의 적행(謫行 귀양 가는 행차)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머물러 기다렸다. 18일(정사)에 김공을 만나 담화를 나누고 작별하였다.
28일(병인) 집으로 돌아왔다.

4월 25일(신묘) 우암 선생을 나국(拿鞠)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를 무릅쓰고 해상(海上)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들 욱(煜)이 수행하였다.

5월 7일(임인) 여산 문수사(文殊寺)에 머물렀다.
서울 소식을 탐지하기 위하여 머물렀다.
18일(계축) 이사안(李師顔)이 와서 우암 선생이 도중(島中)에서 보내신 고결서(告訣書)를 전하였다.
고결서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 성인의 밝은 교훈인데, 나는 80여 세가 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어 하늘이 부여한 막중한 임무를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네. 나는 한평생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었네. 그런데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곳도 있으므로 초록해서 대략의 해설을 붙여 동지들과 상의하여 역시 후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성취하지 못하였네. 돌아보건대 이 세상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와 중화(仲和)뿐이니, 모름지기 동보(同甫)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및 기타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과 협동해서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주 선생(朱先生)께서 일찍이 절실하고 긴요한 한 말씀으로 문인들을 가르쳐 말하기를 ‘다만 《맹자》의 도성선(道性善)ㆍ구방심(求放心) 두 장만을 취하여 힘쓰는 곳으로 삼으라.’고 하였고, 또 임종할 때 문인들에게 ‘직(直)’ 한 자를 전수하며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다.’ 하였네. 이는 대개 공자께서 ‘사람이 생존하는 것은 직인데 직하지 못하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면하는 것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하셨고, 맹자가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호연장(浩然章)에도 역시 ‘직’ 한 자로 양기(養氣)의 요체(要體)를 삼았기 때문일 것이네. 주자가 또 큰 영웅도 반드시 전긍 이림(戰兢履臨)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결단코 알 수 있네. 전일에도 깊이 강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써 행하지 못하여 상인(常人)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참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족히 경계가 될 만하기에 감히 고하는 바이네. 이 밖의 일들도 천만번 노력하기 바라네. 서로 만나 결별하지 못하는 한이 그대나 내가 어찌 다르겠는가. 피곤함이 심하여 스스로 글을 쓸 수가 없어 대략 이와 같이 입으로 불렀네.”
또 다음과 같은 별지(別紙)가 있었다.
“현묘조 때 호서의 한 선비가 상소하여 만력황제(萬曆皇帝 명 나라 신종(神宗))의 사당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이론하는 자들이 ‘존귀하신 천자를 편방(偏邦)에서 제사 지낼 수 없고, 또 그 제사 의식도 정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핑계하였네. 나 역시 그때 그 건의가 끝내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서 다만 ‘이때에 이런 말이 나오니 그 사람의 뜻이 가상하다. 가상히 여기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히 여겨 왔네. 그 뒤 화양동의 석탑(石塔)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나라 의종(毅宗))의 어필을 새기고 나서 또 조각돌에 새겨 환장암(煥章菴)에 간직해 두었는데, 또 문곡(文谷)의 애사(哀詞)가 있었으므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항상 환장암 뒤편 왼쪽에 한 채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고 써서 봄가을로 무이신례(武夷神禮)에 따라 건어(乾魚)로써 제사를 올리는 동시에 술은 서실(書室) 텃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결하게 빚고 오직 축사만은 성대하게 칭송하고자 하였네. 이 일을 마음속으로 경영한 지 오래였는데 이루지도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큰 한이 어디 있겠는가.
존귀한 천자를 편방에서 제사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실로 무식한 말이네. 당 나라 때 초소왕(楚昭王)의 사당에 유민(遺民)들이 사사로이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그래도 국민들 옛 덕을 사모해서 한 칸 띳집에서 소왕을 제사하네.[猶有國人戀舊德 一間茅屋祭昭王]’ 하였고,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일찍이 태수로 있는 주에 우제(虞帝)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낸 것을 주자가 글에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의거할 만한 전거가 아니겠는가. 문곡(文谷)의 시 역시 화운(和韻)할 사람이 화운해 짓게 하여 종이를 잇대어 붙여 큰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환장암 안에 간직해 두는 것도 한 가지 일일 것이네.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가지고 온 것이고 돌조각에 새긴 것은 이택지(李擇之)가 모각(摹刻)한 것이네. 이 일을 김(金)ㆍ민(閔)ㆍ이(李)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성사했으면 좋겠네. 이 일은 공력이 크게 드는 것이 아니어서 성사하기가 어렵지 않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 해도 이미 주자와 남헌(南軒)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저상(沮喪)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처음에는 효묘(孝廟)를 배향(配享)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사체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반드시 대죄(大罪)로 여길 것이므로 감히 마음도 먹지 못하였네. 해마다 제관(祭官)은 충현 송공(忠顯宋公)의 자손이 본주(本州)에 살고 있으니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그 밖에 홍(洪)ㆍ변(卞) 제군도 좋네. 일찍이 《이정전서(二程全書)》를 베끼는 일을 계획할 적에 그대가 아무 안사(按使)를 단치(斷置)했던 것은 의리가 매우 정밀하였는데, 이 일을 더욱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네. 신종황제를 기리는 데는 위덕(威德)을 주로 삼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사람이 은덕을 입은 것을 보태고, 의종황제는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정도(正道)를 주로 삼아야 하네.”

6월 2일(정묘) 우암 선생이 돌아오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남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삼례(參禮)에서 유숙하였다.
6일(신미) 장성(長城) 읍내에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압송해 온 금부랑(禁府郞)의 방금(防禁)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어두워진 뒤에 비로소 들어가서 배알하고 닭이 울자 나왔다.
7일(임신) 우암 선생을 모시고 출발하여 천원역(川原驛)에 도착해서 후명(後命 유배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이 내린 것을 들었다.
서쪽에서 오는 금부랑의 노문(路文 지방 출장 관원의 공문서)을 접하고 후명이 내렸다는 것을 알고는 밤에 비를 무릅쓰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우암 선생이 정읍에서 명을 받았다. 선생이 유명에 따라 치상(治喪)하였다.
이날은 방금(防禁)이 조금 풀렸으므로 선생과 김만준(金萬埈)이 함께 들어가서 배알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여 경각을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떠 선생을 보고서는 손을 잡고 분부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이 80이 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이 바로 나의 한이네. 이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네. 이후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겠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후사(後事)에는 무슨 예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르게나. 그러나 대체는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가례》에 미비된 곳은 《상례비요》를 참작해 쓰게나.”
하였다. 또 묻기를,
“선생님의 지금 처지가 평소와 다른데 공복(公服)을 사용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간혹 조정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다른 사람의 공복을 빌려 입었고 일찍이 스스로 공복을 만든 일이 없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심의(深衣)를 쓰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에는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주자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계실 때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을 입으셨네. 그러므로 나도 이 제도를 모방하여 옷을 만들어 두었으니 집안사람에게 물어 찾아 쓰게나.”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은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난삼(幱衫)이네. 이것은 황명(皇明) 태조(太祖) 때에 숭상하던 옷이니 이것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의 학을 주로 삼고, 사업은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신 뜻을 주로 삼아야 하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비록 큰일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寃迫不得已)’라는 여덟 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傳守)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그 시종을 관통하는 것은 경(敬)이네.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 행장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 맹자 이후로 서로 전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의 직자뿐이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하기에 앞서 어째서 정릉(貞陵)의 복위를 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조정에 들어가서 한 일이 오직 정릉을 복위시킨 한 가지 일뿐이었네만, 이로 인해 거의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네.”
하였다. 이어 권이진(權以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말을 들으니 몽조(夢兆)가 참으로 이상하네.”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 꿈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정릉 추복(追復)의 의논이 일어났을 때 정릉 곁에 사는 늙은이의 꿈에 한 부인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한 대인(大人)의 신구(伸救)에 힘입어 장차 태묘(太廟)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나는 그 사람의 화를 구제해 줄 수 없으니 통한스럽다.” 했다 한다. 우암 선생이 또 말하기를,
“만약 정상적인 때라면 내가 어찌 태조의 추시(追諡)를 우선으로 삼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에 대해 마음을 다했던 것이네. 박화숙(朴和叔)의 생각이 나와 다르기는 하였지만 이는 참으로 얻기 쉬운 벗이 아니네. 우연히 이 일에 있어서만 이러했을 뿐이네.”
하였다.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금부의 관리들이 들어왔으므로 선생이 물러 나왔다. 이날 우암 선생께서 명을 받으니, 선생이 한결같이 유명(遺命)에 따라 상을 치루었다.
11일(병자) 성복(成服)하고 가마기제(加麻期制)를 행하였다.
김공 만준(金公萬埈)이 입을 복(服)에 대해 의심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전에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상에 동춘 선생이 우암 선생에게 입을 복에 대해 의논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사계 선생께서 평소 우리들을 보신 것이 어찌 중문(仲文)보다 지나쳤겠습니까. 중문이 이미 기복(期服)을 입었으니 우리의 복도 마땅히 중문과 같아야 합니다.’고 하였으니, 오늘 우리의 복제(服制)도 이 예(例)를 준용(準用)하여 서구(叙九)와 같이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중문은 바로 사계 선생의 손자 창주공(滄洲公) 익희(益煕)의 자(字)이고, 서구는 바로 우암 선생의 손자 교리공(校理公) 주석(疇錫)의 자이다.
12일(정축) 상례 행차를 따라 정읍을 출발하였다.
15일(경진) 흥농(興農) 옛집에 도착하였다. 성빈(成殯)하는 것을 살폈다.
28일(계사) 집으로 돌아왔다.

7월 7일(신축) 회덕(懷德)을 향해 출발하였다.
역로(歷路)에 글을 지어 가지고 동춘 선생 묘소(墓所)에 고하였다.
10일(갑진) 흥농에 도착하여 우암 선생 영연(靈筵)에 곡하였다.
14일(무신) 수원(水原) 만의(萬義)로 가서 임시로 장사 지낼 곳을 살펴보았다.
17일(신해) 제문(祭文)을 지어 곡하며 전(奠)을 올렸다.
18일(임자) 회장(會葬)하였다.
계공(季公) 및 욱(煜)도 모두 따라갔다.
19일(계축) 흥농으로 반우(返虞)하였다. 영연에 하직하고 돌아왔다.
역로에 갈천(葛川)에 들러 누이 박씨 부(朴氏婦)의 무덤에 성묘하였다.
20일(갑인) 궁촌(宮村)에 도착하였다.
선생의 손아래 처남 이 상국 유(李相國濡)가 이때 궁촌에 있었다.
21일(을묘) 평구(平丘)로 가서 귀양 가는 노봉(老峯) 민 상공 정중(閔相公鼎重)과 작별하였다. 곡운(谷雲) 김공 수증(金公壽增)을 방문하고, 청음(淸陰) 김 선생(金先生)의 묘소에 참배하고 또 문곡(文谷) 김 상공(金相公)의 영연에 곡하였다.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와서 만났다.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22일(병진) 해천(蠏川) 외가(外家)의 선산(先山)에 참배하였다.
25일(기미)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연풍(延豐)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였다.


[주D-001]남헌(南軒)이 …… 밝혔으니 : 장식(張栻)이 계림군(桂林郡)의 태수(太守)가 되어 우제묘(虞帝廟)를 세우자, 주자가 정강부우제묘비(靜江府虞帝廟碑)를 쓰고, 또 영신(迎神)ㆍ송신(送神)의 악사(樂詞)를 지어 주었다. 《朱子大全 卷1 詞, 卷88 碑》
[주D-002]충현 송공(忠顯宋公) :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江華)로 갔다가 이듬해 성이 포위되자 벗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한 송시영(宋時榮)이다. 충현은 그의 시호이며 송시열의 종형임.
[주D-003]가마기제(加麻期制) : 문인이 스승의 상에 심상을 입는 표시로 삼베 헝겊을 겉에 붙이고 기년 동안 심상을 입는 제도.
[주D-004]반우(返虞) : 장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뽕나무로 신주를 만들어 놓고서 안신제(安神祭)를 지내는 것.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六十九
 題跋
題煙村遺蹟後 癸亥閏六月八日 a_140_401d


完山崔邦彥美伯以大人察訪公之命。請跋先祖煙村生遺蹟。世采謹卒業曰。夫士有至德範世。而民或知其賢。不知其所以爲賢。苟推其極而言之。如我夫子論泰伯事亦其一也。先生仕至直提學。乃於文宗二年乞退而歸。未幾國家多故。人皆橫罹。而先生已去。所築存養樓本在場圃中。其詩只道當時居閒祝聖之趣而已。未嘗及於命名正義。將使百世之下聞其風者。想像咨嗟。不知其心胸面目爲何許人。眞所謂知其賢不知其所以賢者矣。然而尙論140_402a之士往往以高節正學歸之於先生。久而不已者。必有其故也。蓋竊思之。國家禮樂人文。莫盛於英顯之際。先生年未七十。乃懇請致仕。程朱之學。猶不大顯於時。而先生輒得以存養揭號。則其後所値雖或否泰相乘。酬酢萬變。而先生素履固浩而自在也。然則爲此說者。固已有聞於聖人微顯闡幽之意。而摠其歸趣。雖謂之至德範世亦可矣。不識美伯以爲何如也。察訪公名世榮。是爲跋。
南溪先生朴文純公文續集卷第二十二
 墓表
內資主簿鄭公墓表 十月四日 a_142_502b


142_502c古玉先生鄭公遺墓在楊州治東六十里許。余嘗過其下拜焉。感歎高風不能去。久之公外曾孫崔邦彥,成至善二君謂余粗知慕公。屬以石表。辭謝不敢當。顧惟今去公世漸遠。前輩無在者。余亦衰甚。遂不敢辭。公諱碏字君敬。其先溫陽人。高麗尙書普天之後。曾大父忠基校理。大父鐸獻納。父順朋嘗任右議政。母李氏鳳陽守終南之女。以嘉靖二十二年六月二十一日生公。天姿恬澹寡欲。常有超然出塵之趣。然其平生倫彝言行。自不違於道理。人皆敬之。少從伯氏北窓先生磏及朴守菴枝華入楓岳洞天。讀道家142_502d書。試金丹修鍊之法。中歲喪耦不再娶。斷欲四十年。人益高之。然公素善聲詩工草隷。間中進士試。旁通醫方風鑑諸術。往往多奇驗。朝廷聞之。選督童蒙敎兼惠民署敎授。陞主內資寺簿。壬丁亂後。監海州牧場。人又謂有不卑小官之風焉。公交游頗廣。未嘗論人過失。最與牛溪成先生,李峒隱義健慕好特篤。晩而喜飮酒。專事麴糱。醉後或放歌。音調淸越。終不爲酒困。蓋有託而逃之者云。萬曆三十一年癸卯七月二十日。在海寓無疾而逝。壽七十有一。人又異之。嗚呼賢哉。有詩稿一冊行于世。配李氏龍川君壽閑之142_503a女。亦國姓也。無子。生一女。適宣敎郞蔡忠益。生四男三女。男則亨後郡守,榮後縣監,鄭後進士,弘後。其曰鄭後者。蓋公所名。仍托以蒸嘗焉。繇此公葬在金門里蔡氏族山傍。李氏墓在掛蘿里先壟爲別葬。公之外裔總若干人。崔,成二君旣與通力。圖所以樹石。又將買田爲歲祭之資。俱可尙也已。是爲古玉先生鄭公墓記。
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題跋
程書分類跋 a_150_413b


150_413c我尤菴先生嘗以爲經傳旨義。旣經程朱勘定。更無未盡之蘊。後學因其訓辭。孜孜謹行。則爲聖爲賢。靡有別法。若欲外此而著述。贅也妄也。是故每於程朱之書。極意硏窮。縷析毫分。其在長鬐栫棘中。取朱子大全難曉處。句句解釋。名曰箚疑。又以二程文集開卷瞭然。而所謂遺書外書。皆門下諸人記述師門問答之語。人各編錄。散漫雜出。或有始論語孟而終以他經者。或有初言天道而轉及人事者。必盡閱全帙而後可以考檢。故學者病之。遂段段剔出。分門編入。如論四書六經者。錄於本章之下。其餘依性理大全150_413d門目。分類而編錄。井井不紊。以便考閱。書凡十六編。庚申先生宥還。分授門人。使更整頓。崔邦彥美伯,李喜朝同甫實相四書之工。晩又命尙夏代執筆硯之役。草本旣成。成晩徵達卿曁亡子煜。先後讎校。歲丁酉。李喬岳伯瞻爲海伯。經紀鋟梓。事力已備。而不意見遞。遂以所已備者。屬於閔三宰鎭厚靜能。靜能費盡精力。更加修正。又添財力。幷與二夫子本集而合印。其誠至矣。於是老先生嘉惠後學之意。得不墜地。其幸何如也。斯不可無記。略書數行於卷末。

定齋後集卷之五
 己巳愍節錄[上]
縉紳䟽 重出 a_168_359a


伏以臣等。竊惟人君之有后妃。所以共承祖宗之統。幷臨衆庶之上。治化之所本。王敎之所基。古之聖王重妃匹之際者。良以此也。惟我母后之主中壼而臨一國者。今已九年于玆。先后之所親選。以托我殿下。而殿下之所與共經先后之喪者也。中外之過言不聞。臣民之仰戴方切。伏見昨者下賓廳168_359b 之批。辭旨極嚴。有非臣子所敢忍聞者。王言一播。觀聽震駴。豈意聖明之世。乃有此傷恩害義之擧耶。噫。宮闈之事。有非外人所知。臣等未知所謂假托矯誣者。果是何事。而設令內殿。微有過差。夢想所記。不過言語之失。而未著於行事。則此胡大過。而遽加摘發暴揚。不少假借。被之以罔極之名。震之以不測之威者。何哉。况元子誕降。實是宗社無疆之慶。深山竆谷。莫不懽抃。則內殿之心。甯有不悅者乎。頃年命選嬪御之擧。出於內殿之勸導。則其悶儲嗣之不廣而忘有我之私心。盖可見矣。及今168_359c 元良載誕之後。反懷不平之心。加以慍懟之色。揆以常情。必知其無此理矣。婦人性褊。鮮不妬忌。自非任姒之聖哲。前世后妃。誰能免此。閭巷匹士之有一妻一妾者。亦必須愼名分略苛細。以防閨門不靖之端。諺曰。不癡不聾。不可以作家長。信夫苟或不然。釁生於相軋。嫌起於相逼。惎間愛惡之說。交亂於其間。而浸潤稔熟。不復究察。則其禍之所流。可勝言哉。殿下每以爲宗社慮患爲敎。臣等尤有所未曉也。元子旣已進號。上係於嫡。則卽爲中宮之所子也。烏有傾中宮而後方安元子之理哉。異時元168_359d 子漸長。聞知今日之擧。則豈不衋然而傷痛乎。傳曰。父母之所愛亦愛之。又曰。子不宜其妻。父母曰善事我。則子行夫婦之禮。沒身不衰。設令內殿處事。有未當於聖心。若念及於我先后當日撫愛之篤。則以殿下維則之思。豈忍以廢絶之意。加之而無所難哉。易曰。衆允悔亡。釋之者曰。謀從衆則合天心。自有此事以來。凡爲殿下臣子者。上自大臣卿宰。下至三司庶官。或登對而極諫。或在廷而籲呼。何責譴罰相隨而不知止。至於韋布之士。亦皆相率抗章。婦孺之賤。莫不奔走涕洟。凡若是者。豈有他哉。良以168_360a 天地氣乖。萬物不遂。父母不和。衆子不甯故也。人心所在。天意可知。殿下縱欲徇一己之私。而顓行不顧。獨不念人心天意之不可强拂也歟。傳曰。人孰無過。改之爲貴。誠願殿下。深惟大義之所在。俯察羣情之所同。收還威怒。亟寢成命。俾天地日月。復見合德而齊曜。以慰東方億兆憂遑顒望之情。不勝幸甚。臣等俱以世臣。立殿下之朝。食殿下之祿。仰戴兩宮。蒙恩罔極。今者適在散班外列。不得廁於庭僚之末。以自伸其區區痛迫之忱。玆敢相率疾籲於黈纊之下。惟殿下之留神裁省焉。臣等無任168_360b 痛泣祈懇之至。謹昧死以聞。
前判書臣吳斗寅。前監司臣李世華。前行司直臣兪櫶。前承旨臣金載顯。前郡守臣崔渲。牧使臣李墪。前承旨臣徐文裕。及第臣趙聖輔。前府使臣徐宗泰。前牧使臣李光夏。前應敎臣朴泰輔。前府使臣沈思泓。前經歷臣申汝晳。前府使臣李行夏。前郡守臣沈楫。前郡守臣李志䧺。前郡守臣柳命才。前郡守臣尹塼。前郡守臣尹坪。前郡守臣權相夏。前正郞臣洪受瀗。判官臣李東馣。府使臣李宜昌。前參議臣沈壽亮。縣監臣朴泰淳。168_360c 前都事臣金演。前察訪臣徐宗憲。前典籍臣金斗南。前正郞臣金洪福。前正郞臣金夢臣。都事臣兪命弘。前縣監臣李彦紀。前司果臣李三碩。前判官臣洪萬選。前判官臣柳成運。前縣令臣安重。前縣監臣吳斗宬。前縣監臣李鼎基。前縣監臣朴龍見。前縣監臣金梓。前主簿臣金世楨。前別提臣韓德亮。前博士臣李震栻。前別檢臣李箕疇。前察訪臣任元聖。前待敎臣李寅燁。前正字臣趙大壽。前郡守臣李懏。前縣監臣尹以徵。前僉正臣柳時蕃。前郡守臣李寅爀。前縣令臣李寅熽。前奉168_360d 事臣李寅熺。前縣監臣鄭正陽。前縣監臣李世瑗。前司果臣金德基。前奉事臣李世瑜。前奉事臣邦彦。前判官臣洪受漸。前奉事臣李廈成。前奉事臣李萬亨。參奉臣鄭維漸。參奉臣李德齡。參奉臣南磐。參奉臣朴世集。前參奉臣李齊夏。前參奉臣柳命䧺。前參奉臣金龜瑞。前參奉臣李世敬。及第臣金世翊。前參奉臣閔光益。前縣監臣姜錫範。前縣監臣李萬徵。前縣監臣李行迪。前府使臣趙泰來。前監察臣徐文淑。前縣監臣金夏錫。前縣監臣郭昌徵。前都事臣吳遂大。前縣令臣李敬秀。
168_361a大槩臣等。目見君父無前罔極之擧。而適在散班外列。不得與於庭僚之末。無以自伸其區區痛迫之忱。玆敢相率籲呼。以冀聖明之翻然改圖。亟收前後批旨。以幸宗社事。
時備忘下後。事機漸迫。而䟽本自崔公錫鼎。李公塾處。各有草來者。時日已暮。議未歸一。將迤至明日。公言此事必及今夕。又有以無寫手爲難者。公乃自寫。臨紙裁截。諸作未暇細檢。故文有未醇備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