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9.16. 삼각산 산행

2011.9.16. 삼각산(쪽두리봉 비봉 사모바위 문수봉 구기동)

아베베1 2011. 9. 17. 17:25

 

 

 

 

 

 

 

 

 

 

 

 

 

 

 

 

 

 

동문선 제64권
 기(記)
삼각산 중수 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


이예(李預)

대개 들으니 항성(恒星)의 숨은 빛은 허공에 이상한 징조를 나타내며, 둥근 달의 단아한 얼굴은 아름다운 광채를 현세(現世)에 비친다. 힘써 마귀의 무리를 배제하고 홀로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었다. 인간으로의 몸이 장차 사라진 뒤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것이 없어질 것을 민망하게 여기었다. 그러므로 금으로 만든 불상은 한(漢)나라 황제의 꿈에 날아와서 들어와 고하였고, 패엽(具葉 조개조각)에 기록한 불경의 말씀은 인도(印度)에서 전하여 거듭 번역되었다. 이러한 모든 법에 의하여 저 여러 중생을 인도 하였으니, 우레소리를 듣고 귀가 트이고 뜨거운 것을 잡았다가 물에 손을 넣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찰이 서로 솟아 있어 세계의 방방곡곡에 크게 널려 있으며, 거룩한 중이 종종 나타나서 차츰 지도하는 방법을 넓혔다. 이를테면 강회(康會)는 오왕(吳王)의 궁정에 들어갔고, 도안(道安)은 진제(晉帝)의 수레에 올랐다. 석씨(石氏)의 조(趙)나라에서는 도증(圖澄)이 있었고, 요씨(姚氏)의 진(秦)나라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승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양대(梁代)의 보지명공(寶誌明公)은 모두 감화시킨 행적이 기이한 것이 많고, 또한 명성(名聲)도 매우 위대하였다. 그러나 생전과 죽은 뒤에 모든 사람을 제도함이 다름이 없고, 이 땅이나 다른 지방에서 귀의(歸依)하는 정성을 바침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곧 이씨(李氏)의 당대(唐代)의 승가대사(僧伽大師) 한 분일 것이다. 대사가 세속에서 쓰던 성은 하씨(何氏)인데 서역(西城)의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이 30에 지팡이를 휘두르고 동쪽으로 당(唐)나라에서 놀았다. 이 때 용삭(龍朔) 초년에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고 있다가, 후에 사주 임회현 신의방(泗州臨淮縣信義坊)에 토지를 구하여 표를 세웠다. 그 표의 밑에다 절을 지으려 했는데 그 곳을 파다가 옛날 향적사명기(香積寺銘記)와 금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불상 위에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경룡(景龍) 2년에 중종(中宗) 황제가 사절을 보내어, 대사를 대궐 안에 있는 도량(道場)으로 맞아들여 높여서 국사(國師)로 삼고, 황제와 백관이 제자로서의 예절을 행하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얼마 후에 천복사(薦福寺)에 나가서 거처하였다. 항상 방 하나에 혼자서 거처하는데 그 정수리 위에 구멍이 있어서 솜으로 막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솜을 빼버렸다. 그러면 그 정수리 구멍에서 향기가 나와서 연기가 방에 가득하여 특이한 향내를 풍기었다. 새벽에 향기가 다시 정수리 속으로 들어가면 또 솜으로 이를 막아 두었다.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이 그 물을 받아 마시면 고질병이라도 모두 나았다. 중종이 하루는 내전(內殿)에서 대사에게 말하기를, “서울에 비가 오지 아니한 것이 수 개월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대사는 자비를 베풀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오.” 하였다. 대사가 곧 병에 들어 있는 물을 가지고 널리 뿌렸더니,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단비가 많이 왔다. 중종이 크게 기뻐하여 명을 내리어 수리한 절의 이름을 임회사(臨淮寺)라 하였더니, 대사는 ‘보조왕사(普照王寺)’라고 이름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자기가 얻은 불상 위에 있는 글자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경륭(景龍) 4년 3월 2일에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죽었는데,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향년(享年) 83세로 서역에서 30년, 중국에 들어와서 52년이었다. 중종은 곧 천복사에 탑을 세우고 시체에 옻칠을 하여 공양하려 하였더니, 별안간 큰바람이 일어나고 냄새가 장안에 가득히 퍼졌다. 중종이 묻기를, “이것이 무슨 좋은 징조냐.” 하니, 측근의 신하가 아뢰기를, “승가대사는 교화를 실시한 인연이 임회(臨淮)에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여 이러한 변을 나타낸 듯합니다.” 하였다. 중종은 잠자코 마음속으로 그렇게 해야겠다 승낙하였더니, 그 냄새가 갑자기 없어지고 잠깐 사이 기이한 향기가 두루 퍼졌다. 곧 그 해 5월에 임회로 보내어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으니, 현재 있는 탑이 그것이다. 중종은 때로 명을 내리어 제자인 혜안(慧岸)ㆍ헤엄(慧儼)ㆍ목의(木义) 세 사람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각기 가사[衣]와 바리때[鉢]를 주어 그의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뒤에 만회(萬回)대사에게 묻기를, “승가대사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만회는 말하기를, “이는 관음보살의 화신입니다《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마땅히 비구(比丘)의 몸으로 제도하는 사람은 곧 모두 그대로 나타내어 설법(說法)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송대(宋代)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지기(蔣之奇)와 비서(秘書) 저작랑(著作郞) 유신(柳紳)과 천수사(天壽寺) 대사(大師) 찬녕(贊寧)이 각기 대사의 전기를 썼고, 중조산 거사(中條山居士) 신숭(辛崇)이 편집한 대사의 행장(行狀)이 36개 항목인데, 모두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이 있었다. 모두 세상에 간행되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최치원(崔致遠) 공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에서 낙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 나라에 비치었다. 국가에 천지의 재변이 있을 때나 수재나 한재 등 모든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를 올려 이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절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3일씩 재(齋)를 베풀고, 연말에는 아울러 임금의 옷을 바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로 삼았다.” 하였으니, 성인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밝으시며 또 인자함을 모두들 감탄하도다. 자식 없는 여자가 절하며 기원하면 곧 훌륭한 아들을 낳으며, 말을 잃은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고하면 바로 잃었던 말을 찾는다. 병든 사람이 애절히 간구하면 병상에서 신음하던 소리가 곧 그치며,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조정에서 막혔던 벼슬길이 바로 트인다. 소금을 구하면 바닷가의 사람이 구워 가지고 오기도 하며, 갓을 원하면 서울의 여자가 만들어 바친다. 그 밖의 신기한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신 뒤에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친히 여기에 와서 예(禮)를 올리셨다. 저 당나라의 아홉 황제가 청량산(淸涼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귀의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대안(大安) 6년 선종(宣宗)께서 행차하시어, 굴에 나아가서 재를 올리고 보물을 희사하시어 공경을 극진히 하셨다. 눈을 돌리어 10리를 돌아보니 들보의 채색과 벽의 그림은 먼지가 결어서 시커멓게 되었고, 기왓장의 이음새와 처마의 추녀는 피해를 입어 반쯤 무너졌다. 특별히 귀산사(龜山寺)의 주지(住持)인 선사(禪師) 영현(領賢)에게 명하여, 임시로 신혈사(神穴寺)에 거주하면서 다시 수리할 사무를 맡게 하셨다. 영현공은 목수는 옛날 반이(般爾)와 같은 우수한 사람을 선택하고, 재목은 예장(豫章)과 같은 좋은 나무로만 골랐다. 곧 연장을 잡고 날마다 공사를 힘써 시켰다. 석상(石像)은 잘 받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모신 굴은 단장을 베풀어 화려함이 증가되었다. 부처님이 계시던 녹원(鹿園)과 영취산(靈鷲山)과도 비슷한 듯하였다. 인하여 신에게 명하여 중수(重修)한 데 대한 기(記)를 지으라 하고 미처 나라에 아뢰지 못했었는데, 수창(壽昌) 5년 가을에 우리 임금께서 사무 담당관에게 명하여 거가(車駕)를 준비하시고 왕비(王妃)ㆍ태자(太子) 및 우세승통(祐世僧統)과 양부(兩府)의 여러 관료를 데리고 천여 명의 수행자, 만 필의 기마(騎馬)가 구름이 모인 듯, 안개가 어울리듯 땅에 가득하여 산이 채웠다. 행차가 굴에 도착하여 재(齋)를 베풀고 인하여 백은으로 만든 향그릇과 손에 드는 향로 한 벌 씩과 금강석,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한 벌씩과 순금제인 띠 한 벌을 금화과(金花果)ㆍ수번(繡幡)ㆍ차[茶]ㆍ향ㆍ의복ㆍ비단 등과 함께 바치시어 귀의(歸依)하시며 공경을 드리는 예절을 나타내시었다. 인하여 선사(禪師) 영현(領賢)을 보내어 공사 전체를 감독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하셨다. 영현 선사는 바로 신라 시대에 이 굴의 주지였던 선사(禪師) 여철(如哲)이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처음 조사(祖師)이며, 왕사(王師)인 자응(子膺)의 법윤(法胤 불가에서 법통을 계승하는 아들)이다. 훌륭하도다. 진리를 숭상하는 조정에서 여기에 복을 심는 터전을 경영하셨으니, 성스러운 태양은 오래도록 빛날 것이며, 인자한 바람은 영원히 퍼지게 되리로다. 가벼운 옷이 돌로 변할지라도 자비스러운 집은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며, 푸른 바다에 먼지가 날릴지라도 공덕의 수풀은 오히려 무성하리로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보살의 신통한 조화와 절을 수리한 내력을 마땅히 돌에 새기어 멀리 후세에 전하여 나의 불민(不敏)한 솜씨로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라.” 하시었다. 내가 재주가 부족하나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였고, 다행히 좋은 시대를 만나서 외람되이 문장을 맡은 관료에 뽑혀, 명을 회피할 길이 없어 곧 불가 사찰의 훌륭한 업적을 찬양하였다. 때는 건통(乾統) 6년 병술(丙戌) 10월 일(日) 삼가 기(記)를 적는다.


 

 

 

 

 

 

 

 

 

 

 

 

 

 

 

 

 

 

 

 

 

 

 

 

 

 

 

 

 

 

 

 

 

 

 

 

 

 

다산 선생님의 애절한고시 한구절을 옮겨보았다

 다산시문집 제3권
 시(詩)
가을밤 죽란사 모임에서 시 한 수가 지어질 때마다 남고(南皐)가 날 위해 낭송을 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도 애절하여 사람을 눈물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장난삼아 절구(絶句)를 읊어본 것이지 원래 시를 꼭 쓰려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뜻이 거칠고 졸작들이 많다. 원래는 19수였는데 지금 다 지워 버리고 10수만을 남겼다


검양강 북쪽에 갈바람이 일더니만 / 黔陽江北動秋風
망해루 서쪽으로 올 기러기 내려왔네 / 望海樓西來早鴻
돌아가는 배를 타고 동협으로 가지 말라 / 莫上歸舟走東峽
오색구름 짙은 곳에 왕궁이 있느니라 / 五雲深處有王宮

벽오동 가지에 갈바람이 불어오니 / 秋風吹入碧梧枝
서북 하늘에 뜬 구름이 조각조각 옮겨가네 / 西北浮雲片片移
제발이지 진길료를 울며 있게 하지 말라 / 愼莫啼留秦吉了
단산에 늙은 봉이 너무나도 슬프단다 / 丹山老鳳不勝悲

쌍쌍이 날다가는 제각기도 나는 제비 / 雙燕雙飛復各飛
단청해 둔 들보를 가을이면 떠난다네 / 淸秋故與畫梁違
금년에는 분홍실을 발에 매 두지 않았으니 / 今年不用紅絲繫
봄바람에 올지 말지 그 누가 알겠는가 / 誰識春風歸未歸

미음 동쪽 언저리에 강물은 활등 같고 / 渼陰東畔水如彎
수도 없는 청산이요 그리고 또 벽산이지 / 無限靑山與碧山
지금도 생각나네 마당촌 버들 아래서 / 尙憶馬當村柳外
낚싯배에 몸을 싣고 푸른 물결 타던 일이 / 釣舟搖曳綠波間

용문산 북쪽 월계 서쪽에 / 龍門山北粤溪西
두 서너 마지기 척박한 밭이 있고 / 却有石田三兩畦
무궁화 울타리에 초가집도 그대로인데 / 茅屋槿籬閒自在
가을이면 나뭇잎이 바윗길에 가득하다네 / 秋來木葉滿巖蹊

복희 신농 떠난 후로 세속이 야박하여 / 羲農去矣俗云淆
아침이면 돕던 사이가 저녁에 벌써 노발대발 / 朝作魚呴暮虎虓
술독 앞에서 뻔질나게 크게 쓴 글자들이 / 樽前大筆淋漓字
결국은 유생의 절교로 변해 버리지 / 道是劉生廣絶交

삼각산 중봉 이름 백운대인데 / 三角中峯號白雲
하늘의 생황 소리가 달 속에서 들려온다네 / 九天笙樂月中聞
그 옛날 갈바람에 남고와 갔을 때는 / 秋風憶與南皐去
의기가 등등하여 온 세상을 흔들 만했지 / 逸氣凌凌駕入垠

그 옛날 봄바람에 예주에서 배를 타고 / 春風憶上蕊州船
꽃과 버들 속에서 홀로 자기도 했었는데 / 獨宿江花江柳邊
그때는 남고와 짝이 되지 못했기에 / 不與南皐作仙侶
황려성 밖에서 쓸쓸함을 느꼈다네 / 黃驪郭外思凄然

백로와 갈매기는 원래가 단짝이라 / 瘦鷺輕鷗本自雙
창강 찾아가는 것이 십 년 두고 꿈이라네 / 十年歸夢在滄江
무슨 일로 물이 잦고 서리도 내렸건만 / 如何水落霜淸後
성남의 찢어진 창만 지키고 있다던가 / 猶守城南破竹牕

서리 속의 묏부리들 깎아지른 옥이런가 / 霜天華嶽玉嶙峋
말끔한 그 기운이 사백 년 내내라네 / 淑氣澄明四百春
푸른산 깊은 곳을 찾아가지 말지어다 / 休向碧山深處去
한양 사람 이내 된들 무엇이 어떠리 / 何如長作漢陽人


 

[주D-001]진길료 : 새 이름.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는 새로 일명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주D-002]유생의 절교 : 금방 사귀었다가 금방 절교하는 변덕. 북제(北齊)의 유적(劉逖)이 조정(祖珽)과 교의가 긴밀하고 조정의 딸을 자기 동생 아내로 맞기까지 하였는데, 뒤에 조정이 조언심(趙彦深) 등을 몰아내려 할 때 유적과 동모한 일이 제대로 안 맞자 조정은 그를 오해하여 유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적이 자기 아우를 보내 이혼까지 하는데 이르렀음. 《北齊書 卷45》

다산시문집 제4권
 시(詩)
고의(古意) 검남(劍南) 운에 차운하다


한강수 흘러흘러 쉬지 않고 / 洌水流不息
삼각산 높아높아 끝이 없는데 / 三角高無極
산하는 차라리 변할지언정 / 河山有遷變
무리진 못된 것들 깨부실 날이 없네 / 朋淫破無日
한 사람이 중상모략을 하면 / 一夫作射工
뭇 입들이 너도 나도 전파하여 / 衆喙遞傳驛
편파스런 말들이 기승을 부리니 / 詖邪旣得志
정직한 자 어디에 발붙일 것인가 / 正直安所宅
봉황은 원래 깃털이 약해 / 孤鸞羽毛弱
가시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 未堪受枳棘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 聊乘一帆風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리라네 / 杳杳辭京國
방랑이 좋아서는 아니로되 / 放浪非敢慕
더 있어야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야 / 濡滯諒無益
대궐문을 호표가 지키고 있으니 / 虎豹守天閽
무슨 수로 이내 충정 아뢰오리 / 何繇達衷臆
옛 분이 교훈 남기지 않았던가 / 古人有至訓
향원은 덕의 적이라고 / 鄕愿德之賊


 

[주D-001]향원은 …… 적 : 향원(鄕愿)은 신조와 주견 없이 그때그때 세태에 따라 맞추어서 주위로부터 진실하다는 칭송을 받는 사람을 말함. 그의 사이비한 행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일러, 덕의 적이라고 하였음.《論語 陽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