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산당 선생 문집 휘 충성

호남]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11) 최충성 (스크랩)

아베베1 2011. 9. 26. 10:46

 

 

 

 

 

 

 

전주최공 문성공  7세손  (연촌공의 손자 되시는 분)으로 녹동서원배향 되시는 분입니다 .  

 

 [호남]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11) 최충성

평생 '마음공부'에 매진한 호남의 선비

15세기 말 훈구문신의 학문권력이 흔들리고 신진사림이 정치 학술적으로 부상할 즈음, '일언흥방론(一言興邦論)'이란 논설이 쓰였다. '나라를 일으키는 한마디'는 중용, 만물을 살리고 민생을 보듬는 공정한 마음이었다. 그러자면 자신부터 어질고 참되어야 한다.'속원인(續原人)'에 '인(仁)은 인(人)이다'란 명제를 풀었다.

지은이는 전라도 영암 출신 최충성(崔忠成, 1458~1491), 연촌 최덕지의 손자였다. 일찍이 네 살 연상 김굉필을 스승 삼았었는데 지리산에서 만난 남효온이 감탄하였다. "왕성한 재주와 독실한 행실은 스승에 버금간다."

당신의 스승은 사람이 아니라 도(道)였다. "스승 삼음은 그 사람을 스승 삼는다는 말이 아니다. 성인의 도가 나의 스승이므로,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도란 진리일진대, 그렇다면 스승은 진리를 향해 앞선 선달(先達)이며, 제자(문하)는 선달을 뒤따르는 후진(後進)이었다. 군림과 복종의 관계일 수 없었다.

성종 18년(1487) 전라감사 김종직에게도 밝혔다. "서로 도를 같이 하면 같은 사람이다." 스승과 제자는 진리의 동반자라는 것이다. 사제관계의 수직적 속성을 해체한 수평적 사우론(師友論)이었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사이의 문빗장을 열어젖뜨리는 의의가 있었다.

한편 정치 명분을 저버린 신하, 관료에 대한 비판은 매서웠다. "군자의 임금 섬김은 의리에 맞아야 한다. 어찌 임금을 따르려는 욕심으로 명분을 그르치며 신하 자리에 앉을 수 있겠는가!" 공자 이래 정명정치론(正名政治論)을 새삼 들춘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는 명분 바룸에서 비롯한다고 설파했었다. 그리고 맹자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 임금은 섬기지 말고 떠나라! 주자가 덧붙였다. "군주와 신하는 의리가 맞아야 하는데, 맞지 않으면 신하가 떠난다."

흡사 '군신의리계약설'과 같았다. 물론 세습군주에게 달갑지 않는 '왕권제한론'만은 아니었다. 신하에게도 그 이상의 진심과 충성의 의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리출처론(義理出處論)'이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입신출세와 수기처신을 자결한다는 자주인격론이었다. 입신출세와 관료우위를 상대하는 '사존관비론(士尊官卑論)'에 이바지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평생 자아 세우기의 수기철학에 매진하였다. 과거급제가 쉬울 수 없는 처사학인의 길이었다. '산당서객(山堂書客)'을 자처하였다. 삼각산(서울)·천마산(개성)·지리산 천왕봉 등에서 공부하고, 영암 월출산·광주 무등산·옥과 설산(雪山)을 돌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건사하지 못하고 해수병에 걸리고 풍증을 맞았다.

'증실(蒸室)'을 만들어 치료하였다. 창포와 쑥을 구들에 올려놓고 훈김을 쐬는 한증막이었다. 그러면서도 상수리와 밤 껍질을 얼버무린 각판을 태우며 점토 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근심을 떨쳐낸다는 '경려분각(警慮焚刻)'으로 일종의 자명종이었다. 그러나 끝이었다. 성종 22년(1491), 향년 3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