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산당 선생 문집 휘 충성

전주최공 문성공 7세손 산당공 휘 충성 묘표

아베베1 2021. 1. 28. 01:36

山堂崔公墓表

羅州治東四十里細花面佳芝洞之負甲雙墓山堂崔公忠成弼卿之葬而配全義李氏祔左者北距其考司勇諱之墓爲幾步焉公十代孫達謙賷公遺集一冊並以世系來示余曰吾先祖墓舊有表而見失今將改豎石已治矣吾宗僉意願得一言以識其陰而世旣遠遺蹟散逸可考徵者只此而已余固非闡發幽潛者而病且無文亦安忍孤其遠來之勤意哉崔氏系出全州著自高麗侍中文成公歷中郞將諱龍鳳同正諱乙仁至諱入我朝爲戶曹參議是生諱德之文宗朝以藝文直提學年未至而告老一時如朴醉琴諸賢莫不高仰之爭爲詩若序以送其歸澤堂李公爲作後序而言其有淳德高節正學司勇公之考而世所稱煙村先生者也司勇公密陽朴氏某官某女擧四男公爲其季生于天順戊寅沒于弘治辛亥得年三十四公胚胎前光才氣志尙有過人者早已學爲文章汪洋滂沛而並治公車業遊於寒暄堂金文敬公聞爲己之要則復根究乎性理之蘊俯讀仰思晝夜不懈而尤致意於明倫闢異喜淡泊絶浮華不以毁譽而動其中不以飢寒而變其守其所自期者實不尋常而天不假年竟不得充其量惜哉豈氣淸者數局而然耶南秋江師友錄》,殿以公名而曰茂才篤行如其師性潭宋文敬公序公遺文而稱其出於正見明識嗚呼百世之下可以知公者其在斯矣李氏考參議若水一男演文萬戶萬戶一男彦潾進士女適生員尹衖進士三男福男僉知祉男奉事吉男主簿一女適縣監文後素至今後裔居于靈巖靈巖煙村休退之鄕也士林立祠俎豆之而追配公肅廟辛酉宣額鹿洞書院曰山堂者非所以名其室也公喜讀書山堂遂以自號云

 

 

 

 

 

 

산당 최공 묘표山堂崔公墓表

 

나주 읍 동쪽 40리 세화면(細花面) 가지동(佳芝洞) 갑좌(甲坐) 언덕의 쌍분(雙墳)에는 산당 최공 휘() 충성(忠成) () 필경(弼卿)이 안장되어 있고,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좌측에 부장(祔葬)하였다. 북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이 부친 사용(司勇) 휘 별()의 묘이다.

공의 10대손 달겸(達謙)이 유집(遺集) 1책과 아울러 세게(世系)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 묘에는 오래 전에는 표석이 있었으나 사라졌다. 지금 다시 세우려고 돌을 이미 다듬어 놓았다. 우리 친족 모든 사람이 한마디 말을 얻어 음기(陰記)를 짓고자 바라는데 세대가 너무 멀고 유적(遺蹟)이 산일 되어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는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참으로 숨어 있는 덕행을 드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며 병들고 글재주도 없지만 어찌 차마 멀리서 찾아온 간곡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최씨는 선계가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고려 시대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휘 아() 때부터 저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중랑장(中郞將) 휘 용봉(龍鳳),

동정(同正) 휘 을인(乙仁)을 거쳐서

휘 담()이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아들 휘 덕지(德之)는 문종조에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나이가 많지도 않았는데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당시 박취금(朴醉琴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현자가 높이 우러러보고 다투어 시()와 서()를 지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 후에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李植))이 후서(後序)를 지어 순수한 덕행, 고상한 절개, 바른 학문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분이

사용공(司勇公)의 부친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연촌(煙村) 선생이라는 분이다.

사용공은 밀양 박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모관(某官) ()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이 막내이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세조4)에 태어나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22)에 작고하였는데 나이 34세였다. 공은 조상의 빛나는 전통을 받고 태어나 재주와 이상(理想)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찌감치 학문을 하였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힘찼다. 과거 공부도 겸해서 하였는데 한훤당(寒暄堂) 김문경공(金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듣고 성리학의 깊은 의미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언제나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인륜을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담백한 것을 즐기고 사치한 것을 끊었다. 주위의 비방과 칭찬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고,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기약한 것이 실로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 수명을 더해 주지 않아 끝내 자신의 기량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어쩌면 기질이 맑은 자는 명줄이 짧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저술하였는데 공의 이름을 뒷부분에 올리고서 뛰어난 재주와 독실한 행동은 그의 스승과 같다.”라고 하였다. 성담(性潭) 송문경공(宋文敬公 송환기(宋煥箕))은 공의 문집에 서문을 짓기를 정확한 견해와 분명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 백대 이후에 공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인 이씨(李氏)의 아버지는 참의 약수(若水)이다. 외아들 연문(演文)은 만호(萬戶)이다. 만호의 외아들 언린(彦潾)은 진사이며, 딸은 생원 윤항(尹衖)에게 시집갔다. 진사는 31녀를 두었는데 장남 복남(福男)은 첨지, 차남 지남(祉男)은 봉사(奉事), 삼남 길남(吉男)은 주부(主簿)이며, 딸은 현감 문후소(文後素)에게 시집갔다. 지금도 후손이 영암(靈巖)에 살고 있는데, 영암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 나와 산 고을이다.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연촌을 제사 지냈으며 공을 나중에 배향하였다. 숙종 신유년(1681, 숙종7)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산당(山堂)’은 자신의 집을 부른 것이 아니라 공이 산속 집에서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마침내 자호(自號)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