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堂崔公墓表
羅州治東四十里,細花面佳芝洞之負甲雙墓,山堂崔公諱忠成,字弼卿之葬,而配全義李氏祔左者,北距其考司勇諱潎之墓爲幾步焉。公十代孫達謙,賷公遺集一冊,並以世系來示余曰:“吾先祖墓,舊有表而見失。今將改豎,石已治矣。吾宗僉意,願得一言以識其陰,而世旣遠,遺蹟散逸,可考徵者,只此而已。” 余固非闡發幽潛者,而病且無文,亦安忍孤其遠來之勤意哉?按崔氏,系出全州。著自高麗侍中文成公諱阿,歷中郞將諱龍鳳,同正諱乙仁,至諱霮,入我朝爲戶曹參議,是生諱德之,文宗朝以藝文直提學,年未至而告老,一時如朴醉琴諸賢,莫不高仰之,爭爲詩若序以送其歸。後澤堂李公爲作後序,而言其有淳德高節正學,卽司勇公之考,而世所稱煙村先生者也。司勇公娶密陽朴氏,某官某女,擧四男,公爲其季,生于天順戊寅,沒于弘治辛亥,得年三十四。公胚胎前光,才氣志尙,有過人者。早已學,爲文章,汪洋滂沛,而並治公車業,遊於寒暄堂金文敬公門。聞爲己之要,則復根究乎性理之蘊。俯讀仰思,晝夜不懈,而尤致意於明倫闢異。喜淡泊,絶浮華,不以毁譽而動其中,不以飢寒而變其守。其所自期者,實不尋常,而天不假年,竟不得充其量,惜哉!豈氣淸者數局而然耶?南秋江著《師友錄》,殿以公名,而曰:“茂才篤行如其師。” 性潭宋文敬公序公遺文,而稱其出於正見明識。嗚呼!百世之下,可以知公者,其在斯矣。李氏考參議若水,一男演文萬戶。萬戶一男彦潾進士,女適生員尹衖。進士三男福男僉知、祉男奉事、吉男主簿,一女適縣監文後素。至今後裔居于靈巖,靈巖,煙村休退之鄕也。士林立祠俎豆之而追配公,肅廟辛酉宣額鹿洞書院。曰山堂者,非所以名其室也,公喜讀書山堂,遂以自號云。
산당 최공 묘표〔山堂崔公墓表〕
나주 읍 동쪽 40리 세화면(細花面) 가지동(佳芝洞) 갑좌(甲坐) 언덕의 쌍분(雙墳)에는 산당 최공 휘(諱) 충성(忠成) 자(字) 필경(弼卿)이 안장되어 있고,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좌측에 부장(祔葬)하였다. 북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이 부친 사용(司勇) 휘 별(潎)의 묘이다.
공의 10대손 달겸(達謙)이 유집(遺集) 1책과 아울러 세게(世系)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 묘에는 오래 전에는 표석이 있었으나 사라졌다. 지금 다시 세우려고 돌을 이미 다듬어 놓았다. 우리 친족 모든 사람이 한마디 말을 얻어 음기(陰記)를 짓고자 바라는데 세대가 너무 멀고 유적(遺蹟)이 산일 되어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는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참으로 숨어 있는 덕행을 드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며 병들고 글재주도 없지만 어찌 차마 멀리서 찾아온 간곡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최씨는 선계가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고려 시대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 때부터 저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중랑장(中郞將) 휘 용봉(龍鳳),
동정(同正) 휘 을인(乙仁)을 거쳐서
휘 담(霮)이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아들 휘 덕지(德之)는 문종조에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나이가 많지도 않았는데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당시 박취금(朴醉琴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현자가 높이 우러러보고 다투어 시(詩)와 서(序)를 지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 후에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李植))이 후서(後序)를 지어 순수한 덕행, 고상한 절개, 바른 학문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분이
사용공(司勇公)의 부친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연촌(煙村) 선생이라는 분이다.
사용공은 밀양 박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모관(某官) 모(某)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이 막내이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세조4)에 태어나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22)에 작고하였는데 나이 34세였다. 공은 조상의 빛나는 전통을 받고 태어나 재주와 이상(理想)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찌감치 학문을 하였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힘찼다. 과거 공부도 겸해서 하였는데 한훤당(寒暄堂) 김문경공(金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듣고 성리학의 깊은 의미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언제나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인륜을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담백한 것을 즐기고 사치한 것을 끊었다. 주위의 비방과 칭찬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고,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기약한 것이 실로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 수명을 더해 주지 않아 끝내 자신의 기량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어쩌면 기질이 맑은 자는 명줄이 짧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저술하였는데 공의 이름을 뒷부분에 올리고서 “뛰어난 재주와 독실한 행동은 그의 스승과 같다.”라고 하였다. 성담(性潭) 송문경공(宋文敬公 송환기(宋煥箕))은 공의 문집에 서문을 짓기를 “정확한 견해와 분명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아, 백대 이후에 공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인 이씨(李氏)의 아버지는 참의 약수(若水)이다. 외아들 연문(演文)은 만호(萬戶)이다. 만호의 외아들 언린(彦潾)은 진사이며, 딸은 생원 윤항(尹衖)에게 시집갔다. 진사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복남(福男)은 첨지, 차남 지남(祉男)은 봉사(奉事), 삼남 길남(吉男)은 주부(主簿)이며, 딸은 현감 문후소(文後素)에게 시집갔다. 지금도 후손이 영암(靈巖)에 살고 있는데, 영암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 나와 산 고을이다.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연촌을 제사 지냈으며 공을 나중에 배향하였다. 숙종 신유년(1681, 숙종7)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산당(山堂)’은 자신의 집을 부른 것이 아니라 공이 산속 집에서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마침내 자호(自號)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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