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1.22. 도봉산 역사 탐방

2011.11.22. 도봉산 역사탐방

아베베1 2011. 11. 22. 14:16

 

 

高麗史節要 卷之三
 顯宗元文大王
[庚戌元年 宋 大中祥符三年,契丹 統和二十八年]

春閏二月,復燃燈會,國俗,自王宮國都,以及鄕邑,以正月望,燃燈二夜,自成宗以來,廢而不擧,至是,復之。○夏四月,親祀大廟○賜徐崧等八人,明經三人,及第,知貢擧孫夢周,奏試詩賦,不試時務策。○五月,流尙書左司郞中河拱辰,和州防禦郞中柳宗于遠島,先是,拱辰,嘗從事東西兩界,擅發兵,入東女眞部落,見敗,柳宗聞之,深怨女眞,會,女眞九十五人來朝,至和州館,宗盡殺之,故皆流之,女眞,亦訴于契丹,契丹主,謂群臣曰,高麗康兆,弑君誦而立詢,大逆也,宜發兵問罪。○秋七月契丹,遣給事中梁炳大,將軍耶律允,來,問前王之故。○城德州。○八月,遣內史侍郞陳頔,尙書右丞尹餘,如契丹。○禁僧尼釀酒。○九月,遣左司員外郞金延保,如契丹,秋季問候,左司郞中王佐暹,將作丞白日昇,如契丹東京,修好。○冬十月丙午朔,以吏部尙書,參知政事康兆,爲行營都統使,吏部侍郞李鉉雲,兵部侍郞張延祐,副之,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御史中丞盧頲,副之,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率兵三十萬,軍于通州,以備契丹○癸丑,契丹遣給事中高正,閤門引進使韓杞,來告興師,參知政事李禮鈞,右僕射王同穎,如契丹請和。○十一月,遣起居郞姜周載,如契丹,賀冬至。○契丹主遣將軍蕭凝,來告親征。○復八關會,王,御威鳳樓,觀樂,初,成宗,以雜技不經,且煩擾,悉罷之,但於其日,幸法王寺,行香,還御毬庭,受文武朝賀而已,廢之幾三十年,至是,政堂文學崔沆,請復之。○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壬辰,崔士威等,分軍出龜州北,恧頓,湯井,曙星,三道,與契丹戰,敗績。○契丹主獲通州城外收禾男女,各賜錦衣,授紙封一箭,以兵三百餘人,送興化鎭諭降,其箭封有書,曰朕,以前王誦,服事朝廷,其來久矣,今逆臣康兆,弑君立幼,故親率精兵,已臨國境,汝等,擒康兆,送駕前,便卽回兵,不然,直入開京,殺汝妻孥,癸巳,又以勑書繫矢,揷城門曰,勑興化鎭城主,幷軍人百姓,朕,以前王誦,紹其祖服,爲我藩臣,捍禦封陲,忽被姦兇所害,朕,將精銳,來討罪人,其餘脅從,皆與原免,況汝等,受前王撫綏之惠,知歷代逆順之由,當體朕懷,無貽後悔,是日,李守和等,上表曰,戴天履地者,合去姦兇,資父事君者,須堅節操,若違此理,必受其殃,伏乞俯循民情,用回睿略,大開天網,何求鳥雀之先投,載轄兵車,可獲貔貅之率服,甲午,契丹主,以錦衣銀器等物,賜鎭將有差,仍勑曰,省所上表奏,具悉,朕纂承五聖,臨御萬邦,忠良則必示旌褒,兇逆則須行誅伐,以康兆,弑其故主,挾彼幼君,轉恣姦豪,大示威福,故親行誅伐,特正刑名,方擁全師,以臨近境,比,特頒於綸旨,蓋式示於招懷,遽覽封章,未聞歸款,陳瀝,靡由於誠實,詞華,徒見於敬恭,況汝等,早列簪裾,必知逆順,豈可助謀於逆黨,不思雪憤於前王,宜顧安危,預分禍福,乙未,李守和,又回表云,臣等昨奉詔泥,輒陳心石,望賜泣辜之惠,切祈解網之仁,陵霜耐雪,加安百姓之心,灰骨粉身,永奉千年之聖,契丹主,見表,知其不降,丁酉,解圍,更傳勑旨曰,汝等慰安百姓而待之,以二十萬兵,屯于麟州南無老代,以二十萬兵,進至通州,契丹主,移軍銅山下○己亥,康兆引兵,出通州城南,分軍爲三,隔水而陣,一,營于州西,據三水之會,兆,居其中,一,營于近州之山,一,附城而營,兆,以劍車排陣,契丹兵入,則劍車合攻之,無不摧靡,丹兵,屢退,兆,遂有輕敵之心,與人彈碁,契丹先鋒耶律盆奴,率詳穩耶律敵魯,擊破三水砦,鎭主,告丹兵至,兆,不信曰,如口中之食,少則不可,宜使多入,再告急曰,丹兵,已多入,兆,驚起曰,信乎,怳惚,若見穆宗,立于其後,叱之曰,汝奴休矣,天伐詎可逃耶,兆,卽脫鍪,長跪曰,死罪死罪,言未訖,丹兵,已至,縛兆矣,李鉉雲,都官員外郞盧戩,監察御史盧顗,楊景,李成佐等,皆被執,盧頲,司宰丞徐崧,注簿盧濟,皆死,丹人,以氈裹兆,載之以去,我軍,大亂,丹兵,乘勝,追奔數千里,斬首三萬餘級,所棄糧餉鎧仗,不可勝計,契丹主,解兆縛,問曰,汝爲我臣乎,對曰,我,是高麗人,何更爲汝臣乎,再問,對如初,又剮而問,對亦如初,問鉉雲,對曰,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兆怒,蹴鉉雲曰,汝是高麗人,何有此言,於是,丹兵,長驅而前,左右奇軍將軍金訓,金繼夫,李元,申寧漢,伏兵于緩項嶺,皆執短兵,突出敗之,丹兵,小却○契丹,詐爲康兆書,送興化鎭諭降,楊規,曰,我,受王命而來,非受兆命,不降,又使盧戩,及其閤門使馬壽,持檄至通州,諭降,城中皆懼,中郞將崔質,洪淑,投袂而起,執戩及壽,乃與防禦使李元龜,副使崔卓,大將軍蔡溫謙,判官柴巨雲,閉門固守,衆心,乃一。○十二月庚戌,丹兵,入郭州,防禦使,戶部員外郞趙成裕,夜遁,右拾遺乘里仁,大將軍大懷德,申寧漢,工部郞中李用之,禮部郞中簡英彥,皆死,城遂陷,契丹,留兵六千餘人,守之,壬子,丹兵,至淸水江,安北都護府使,工部侍郞朴暹,棄城遁,州民皆潰。○初王,聞丹兵至,遣中郞將智蔡文,將兵鎭和州,以備東北,及兆敗,命蔡文,移兵援西京,蔡文,卽與軍容使侍御史崔昌,進次剛德鎭。○癸丑,丹兵至西京,焚中興寺塔。○甲寅,肅州潰,是日,盧顗爲鄕導,與丹人劉經,賫檄至西京諭降,副留守元宗奭,與僚佐崔緯,咸質,楊澤,文晏等,已修降表,蔡文等,聞之,引兵至西京,城門閉,崔昌,呼分臺御史曹子奇曰,吾等,奉王命,倍道而來,不納,何也,子奇,具告顗,經諭降事,遂開門,蔡文,入屯故宮南廊,昌,諷宗奭,拘留顗等固守,宗奭,不從,昌,密與蔡文謀,遣兵城北,候顗等還,掩殺之,取其表焚之,時城中,疑貳,蔡文出屯城南,從之者,獨大將軍鄭忠節耳,俄而,東北界都巡檢使卓思政,率兵而至,遂與合軍,復入城,王,以三軍敗衄,州郡,陷沒,上表請朝,契丹主,許之,遂禁俘掠,以馬保佑,爲開城留守,王八,副之,遣乙凜,將騎兵一千,送保佑等,乙卯,丹主,又使韓杞,以突騎二百,至西京城北門,呼曰,皇帝昨遣劉經盧顗等,賫詔曉諭,奈何至今了無消息,若不拒命,留守官僚,來聽我指諭,思政,聞杞語,謀諸蔡文,使麾下鄭仁等,將驍騎突出,擊斬杞等百餘人,餘悉擒之,無一人還者,思政,以蔡文爲先鋒,出與乙凜戰,乙凜保佑敗走,於是,城中人心,稍安,思政還入城,蔡文與李元,出屯慈惠寺,丹主,復遣乙凜擊之,邏卒報敵兵來屯安定驛,其勢甚盛,蔡文,馳告思政,丙辰,遂與思政,僧法言,率兵九千,迎擊于林原驛南,斬首三千餘級,法言,死之,翌日,蔡文復出戰,丹兵敗走,於是,城中將士,登城以望,競出逐之,至馬灘,丹兵,回軍擊敗之,遂圍城,丹主,次于城西佛寺,思政懼,紿將軍大道秀曰,君自東門,吾自西門出,前後夾攻,蔑不勝矣,遂以麾下兵夜遁,道秀,出大東門,始知見紿,又力不可敵,遂率所部,降于契丹,諸將皆潰,城中恟懼,己未,統軍錄事趙元,隘守鎭將姜民瞻,郞將洪叶,方休,莫知所措,乃共禱神祠,筮得吉兆,於是,衆推趙元,爲兵馬使,收散卒,閉城固守。○庚申,楊規,自興化鎭,率兵七百餘人,至通州,收兵一千人,辛酉,入郭州,擊契丹所留兵,悉斬之,徙城中男女,七千餘人于通州,是日,契丹主,攻西京不拔,解圍而東。○癸亥,西京神祠,旋風,忽起,契丹軍馬,皆僨。○召還河拱辰,柳宗,復其爵。○辛未,智蔡文奔還于京,壬申,奏西京敗軍狀,群臣,議降,姜邯贊,獨曰,今日之事,罪在康兆,非所恤也,但衆寡不敵,當避其鋒,徐圖興復耳,遂勸王南行,蔡文,請曰,臣雖駑怯,願在左右,庶效犬馬之勞,王曰,昨李元崔昌奔還,自請扈從,今不復見,爲臣之義,果如是乎,今卿旣勞于外,又欲捍衛,深嘉乃忠,仍賜酒食,及銀粧鞍轡,是夜,王,與后妃,及吏部侍郞蔡忠順等,禁軍五十餘人,出京城,癸酉,至積城縣丹棗驛,武卒堅英,與驛人,張弓矢,將犯行宮,蔡文馳射之,賊徒奔潰,復自西南山,突出遮道,蔡文又射却之,晡時,王,至昌化縣,有吏告曰,王,識吾名面乎,王,陽不聞,吏怒,將構亂,使人,呼曰,河拱辰,將兵來矣,蔡文曰,何故來耶,吏曰,欲擒蔡忠順,金應仁耳,應仁,及侍郞李正忠,郞將國近等,皆遁,夜賊,又至,侍從臣僚,宦官嬪御,皆亡匿,唯玄德大明兩王后,侍女二人,承旨良叶,忠弼等侍,蔡文或出或入,隨機應變,賊不敢近,及曉,蔡文請二后,先自北門脫去,手鞚御馬,間行入道峯寺,賊,不之知,忠順,繼至,蔡文奏曰,去夜賊,疑非拱辰,臣,請往跡之,王,恐其亡,不許,蔡文奏曰,臣,若背君,言與事違,天必誅之,王乃許,卽往昌化縣,道逢國近,國近曰,吾之衣裝,盡被賊奪,蔡文曰,汝爲臣不忠,獲保首領足矣,適拱辰,柳宗,赴行在,蔡文,遇諸道,具言賊變,且詰之,果非拱辰所爲也,拱辰,道見中軍判官高英起,敗軍南走,與之俱來,時拱辰所領卒二十餘人,蔡文,遂以其卒,圍昌化縣,搜得賊所盜,馬十五匹,鞍十部,將還,蔡文,謂拱辰等曰,吾,與諸君偕進,王必驚動,請諸君少後,遂獨行,忠弼,在寺門,望之,入奏智將軍來矣,王,喜,出門迎之,蔡文,奏曰,臣,尋得賊取贓,實非拱辰所爲,且偕拱辰來,王,引見拱辰,柳宗,勞之。○甲戌,王,次楊州,河拱辰,奏曰,契丹,本以討賊爲名,今已得康兆,若遣使請和,彼必班師,王,筮得吉卦,遂遣拱辰,及高英起,奉表狀,往丹營,行至昌化縣,以表狀,授郞將張旻別將丁悅,先往軍前,告曰,國王,固願來覲,第懼兵威,又因內難,出避江南,差遣陪臣拱辰等,陳告事由,拱辰等,亦惶懼,不敢前來,請速收兵,旻等,未至,丹兵先鋒,已至昌化,拱辰等,具陳前意,丹兵,問國王安在,答曰,今向江南,不知所在,又問遠近,答曰,江南太遠,不知幾萬里,追兵乃還。


 東文選卷之一百十八
 碑銘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奉宣述 [李奎報]

夫道本自如。孰抑揚是。要之世與人而已矣。盖人能弘道。非道弘人。人固難得。而閱千百世。儻一値焉。則世與人二者。相須而後道行焉。况道之最者曰禪。非若膠於文句者。而直見自家所有一靈印耳。降及叔世。妄執鉗固。不知佛是吾物。捨而之外。認賊爲子者。多矣。道不終否。世將復古。於是乎有眞人出焉。與道吻合。得正法眼藏。陶鑄生靈者。繄我國師是已。國師姓田氏。諱志謙字讓之。系出靈光郡。太祖功臣。雲騎將軍。諱宗會。而光廟朝擢第龍頭。官至樞密院使。諱拱之之六代孫也。皇曾祖諱漑。檢校太子詹事。皇祖諱德普。大倉署令。皇考諱毅。檢校太子詹事。皇妣南宮氏。良醞令榮之女也。母夢梵僧至家請寄宿。因而有娠。及生骨相峻爽。機神英邁。弱不好弄。常若有思念者。忽遇異僧曰。此子塵中無着處。師自是斷葷腥。年甫九歲。懇求出家。十一就禪師嗣忠祝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師天資警悟。淹貫外典。以此潤色。故凡於問對詞辯。捷疾如機發箭激。不可遏已。一時公卿名儒韻士。想望風彩。願與之交焉。自少已有宿望如此。明廟卽祚元年。始擧禪選。時內侍鄭仲壺堂選。夢神人告曰。明日得王者師。是日師中焉。舊諱學敦。是年遊三角山。宿道峯寺。夢山神告曰。和尙名志謙何用今名。遂改焉。大定己酉。始住登高寺。明昌四年。批除三重大師。七年加禪師。泰和四年。又加大禪師。師旣名聞四方。凡內外有開禪會。輒請師主盟。師亦以荷擔宗乘。傳法度人爲己任。承安四年。移住郁錦寺。是年進禮郡設禪會。請指南者。上命師赴焉。是會也。縣令李中敏。夢天人告曰。浄佛國土。何囹圄不空耶。及覺遍體流汗。躬至獄門。罪無輕重。皆原之。聞者莫不驚嘆。泰和戊辰旱甚。上迎入內道塲說法。至五日不雨。師憤之。乃禱佛曰。佛法不自行。須憑國主。今若不雨。靈應何存。無幾何甘澍霶霈。時號和尙雨。師至孝。凡得檀施。苟有異饌。先送孀母。然後敢自食。一日聞母亡。遂於帝釋前禱曰。母若筭窮。願以子壽代之。未幾家僮馳報夫人已起。時以爲孝感所致。泰安辛未。移住國淸寺。崇慶二年。康王卽祚。循祖宗舊例。欲得釋門重望爲師。時晉康公當國。爲上遴選。凡於兩宗五敎。求可以承當大任者。無出師右。遂以師薦焉。上遣重臣。請行摳衣之禮。師上表固讓。上復遣使敦諭至再三。師不獲已受請。上特遣上將軍盧元崇等兩使。就所寓普濟寺。備禮封崇。受冊訖。遂入大內。親受師禮。上以廣明寺近帝闕請住焉。申以居頓寺爲本寺。充香火之費。秋八月上不豫。師亦發背疽。門人等請禱。師厲色曰。上體不安而予幸有疾。切欲移之身。汝將禱耶。上升遐。今上嗣位。以寧考師。復崇師禮。恩遇益縟。晉康公亦割捨愛子。剃度爲門人。其餘士大夫亦爾。門弟之盛。近古未之有也。貞祐五年。忽謂門人曰。吾起寒門。至爲王者師。於分足矣。豈可貪冒恩寵。久留輦轂耶。遂上書乞退甚篤。上不得已允之。以花藏寺境地淸勝。薪水贍足。請下安於此。將行也。晉康公邀餞。公出拜親扶腋上階。及上道。贈寶馬。又遣門客等衛行。師雖在千里。上之眷意不已。屢遣近臣問安。其贐餉亦無虛月矣。下寺之十三年己丑六月十五日。震雷暴作。大石崩落。是日師示微疾。七月二日。晨起盥洗。召門人玄源。裁書三道。囑國王。及今相國晉陽公高僧松廣社主。告以長邁。寫訖良久曰。今日行未便。迨後日迺別。遂就寢。至八日忽起告衆曰。定光寂寂。慧日明明。法界塵寰。臍輪頓現。有僧問故人云。後夜月初明。吾將獨自行。두001麽生是和尙獨行處。答曰。蒼海白雲閑。莫將毫髮着其間。言訖叉手當胷。翛然坐逝。顔如傅粉。脣色丹潤。遠近無不奔赴瞻禮。上聞訃震悼。命近臣將作少監趙光就。及日官等。監護喪事。遂茶毗于寺之西岡。拾靈骨葬于登禪山之麓。仍降制贈謚靜覺國師。享年八十五。僧臘七十五。國師爲人。略無緣飾。因性循理而已。雖歷住大伽藍。每至齋時。先衆而出。手擎鉢立待。麤食淡羹。與衆均味。而未會別開饌食。其精勤佛事。雖盛寒酷熱。略無欹傾倦怠之色。此皆老境所難而能行之。嗚呼。眞化身菩薩歟。其感應靈異之事。則雖或多焉。皆道境之細。而又恐後人以爲恠誕。故於此不載。門人大禪師廓雲等聞于上曰。師沒久碑猶未立。是臣等所深疚。請爲文者。鑱諸石以永其傳。上命小臣文之。仍賜額曰某碑。臣未敢辭避。謹再拜銘之曰。
達磨傳心兮。靈光東曜。後學倒見兮。背鏡求照。焯焯國師兮。揭日以行。一廓煙氛兮。昏矇皆▣。法王出世兮。祖月重暉。覺路司南兮。學者知歸。門弟林林兮。親哺以乳。又翼其鷇兮。放之使飛。種福滋久兮。流潤罔極。天子屈尊兮。北面請益。生爲帝範兮。卒作國師。龜鑑斯亡兮。安所取則。上命小臣兮。期以不晦。臣拜刻銘兮。與山作配。來者去者兮。騎行卽下。寧不拜佛兮。惟碑是拜。


 

 

 

 

 

 

 

 

 

 

 

 

 

 

 

 

 

 

 

 

 

 

 

 

 

 

   염계는 주돈이(周敦頤)를 지칭하고, 풍월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약칭이다. 광풍제월은 비 갠 뒤에 부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인데,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 말로, 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데 거리끼지 않고 쾌활하며 쇄락한 인품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용릉은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지명으로 북송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다. ‘밝은 달〔霽月〕’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약칭으로 주돈이의 사람됨을 형용한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이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주돈이의 높은 인품과 탁 트인 흉금을 묘사하여 “흉금이 시원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에 달이 씻긴 듯하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봉의 인품과 흉금이 주돈이의 그것과 같다는 뜻이다.

염계는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 것으로,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깨끗해서 마치 온화한 바람과 맑은 달빛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 한 데서 온 말이다. 무숙(茂叔)은 주돈이의 자(字)이다.

목은시고 제34권
 시(詩)
비가 그치고 날이 맑게 개자 다시 연꽃을 감상하고 싶은 흥취가 일어나기에


묻노라 누가 말 머리 나란히 연못으로 향했던고 / 問誰聯騎向蓮池
풍채가 의연히 한 시대를 뒤덮는 사람들이라오 / 風采依然蓋一時
하늘이 어쩌면 빗소리를 당장 그치게 했을지도 / 卷去雨聲天或使
태양도 알렷다 연꽃 향기 흠뻑 빚어내는 일을 / 釀成荷氣日應知
냉상 감밀이라 하여 문장의 대가도 좋아했고 / 冷霜甘蜜文章伯
맑은 바람 갠 달인 도덕의 스승도 사랑했지 / 霽月光風道德師
곧장 훨훨 날아올라 옛날의 발자취 찾고 싶어 / 徑欲翶翔尋往轍
누대에 올라 남쪽을 보며 혼자서 시를 읊노매라 / 上樓南望獨吟詩


 

[주D-001]냉상(冷霜) …… 좋아했고 : 한유(韓愈)도 연꽃을 좋아하여 즐겨 시를 지었다는 말이다. 그가 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 있다는 연꽃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연근(蓮根)을 표현한 구절 중에 “차기는 눈과 서리 같고 달기는 꿀과 같다 할까, 한 조각만 입에 넣어도 고질병이 낫는다네.[冷比雪霜甘比蜜 一片入口沈痾痊]”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古意》
[주D-002]맑은 …… 사랑했지 :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도 연꽃을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짓기까지 하였다는 말이다.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이요 갠 달과 같았다.[胸中灑落如光風霽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염계는 주돈이의 호이고, 무숙은 그의 자(字)이다.

목은시고 제15권
 시(詩)
즉사(卽事)


새벽이 추워 창문을 더디 열고자 하여 / 曉寒窓戶欲開遲
해가 기울어 가도록 꿇어앉노라니 / 日已高舂坐更危
다행히도 내 흥취 무너뜨릴 사람 없어 / 幸是無人敗吾興
옛 시를 고치고 또 새로운 시를 짓노라 / 舊詩改了又新詩

생각건대 당년엔 사리 판단이 늦었더니 / 自念當年見事遲
백발엔 나라의 안위도 관섭할 뜻이 없네 / 白頭無意管安危
수시로 전조의 한이 치밀어 오를 때면 / 時時惹起前朝恨
붓끝에 뿌려지는 것 바로 이 시뿐일세 / 灑向毫端卽是詩

자로는 나루 묻고 번지는 수레 몰아라 / 問津子路御樊遲
제후국 주류할 제 위방엔 안 들어갔네 / 歷騁侯邦不入危

누가 알랴 성인의 마음 하늘이 아는 걸 / 誰識聖心天在上
병든 나는 오늘 괜히 시나 읊을 뿐이네 / 病夫今日謾吟詩

조용히 앉아 깊이 생각해 천천히 쓰면서 / 靜坐沈思下筆遲
정일에 의거하여 미위를 변별할 뿐이니 / 只憑精一辨微危
집중의 비결을 그 누가 전해 주었던고 / 執中祕訣誰傳授

중천에 달 이르니 시 짓기가 하도 좋네 / 月到天心恰得詩


 

[주D-001]자로(子路)는 …… 안 들어갔네 : 공자(孔子)가 천하(天下)를 주류(周流)할 적에 일찍이 초(楚)나라에서는 자로를 시켜 장저(長沮), 걸닉(桀溺)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였고, 또 번지(樊遲)는 늘 공자의 수레를 몰았으며, 또 공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몸을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爲政, 泰伯, 微子》
[주D-002]정일(精一)에 …… 주었던고 :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선위(禪位)할 때에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其中]” 하였고,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선위할 때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야 진실로 그중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한 것을 이른 말이다. 《書經 大禹謨》
[주D-003]중천에 달 이르니 : 소옹(邵雍)의 〈청야음(淸夜吟)〉에 “달은 하늘 한가운데 이르고, 바람은 물 위에 살살 부누나. 이러한 맑고 깨끗한 의미를, 아마도 아는 사람이 적으리.[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물과 달이 서로 비치는 맑은 정경을 서술한 것으로,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가슴속이 깨끗하여 조금의 사욕(私欲)도 없이 조용하게 도(道)에 합치되는 경지를 부친 것이다.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초당(草堂)


초당이 작은 못 둑을 굽어보고 자리했으니 / 草堂俯壓小塘開
나날이 여기서 그 몇 번이나 읊조리는고 / 日日吟哦得幾回
꽃 그림자는 교묘히 발 그림자 따라 옮기고 / 花影巧隨簾影轉
솔바람 소리는 멀리 대 소리를 화답해 오네 / 松聲遙答竹聲來
산봉우리는 집을 둘러 서로 아는 것 같고 / 峯巒繞屋如相識
새들은 뜰에 길들어 전혀 의심하지 않누나 / 鳥雀馴庭絶不猜
이 한 가지 청신한 맛을 그 누가 알겠는가 / 誰識一般淸意味
광풍제월이 내 마음에 환히 비치는구려 / 光風霽月照靈臺


 

[주D-001]광풍제월(光風霽月) :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깨끗해서 마치 비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깨끗한 달빛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흉금이 탁 트인 고결한 인품을 의미한다. 무숙(茂叔)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자이다.

 

성호사설 제29권
 시문문(詩文門)
광풍(光風)


주 문공(朱文公)ㆍ주염계(周濂溪)는 다 황산곡(黃山谷)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용어를 썼는데, 광풍(光風)이란 용어는 《초사(楚詞)》에,


라고 한 데서 나왔다. 이에 대한 왕일(王逸)의 주(註)에, ‘광풍이란 뜻은 해가 떠오르자 바람이 불어서 풀과 나무들이 광색(光色)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고, 또 《문선(文選)》에 보이는 사현휘(謝玄暉)의 시에,


하였는데, 이주한(李周翰)의 주에, ‘바람은 본시 빛이 없고 풀 위에서만 광색(光色)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움직이니 마치 바람이 빛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주 문공의 난간(蘭澗)에 대한 절구에,

광풍이 푸른 시내 위에 떠가니 / 光風浮碧澗
난초와 방두는 나날이 성하도다 / 蘭杜日猗猗

하였으니, 역시 위와 같은 뜻이다.


 

[주D-001]주염계(周濂溪) : 염계는 송(宋) 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주D-002]광풍제월(光風霽月) :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평한 말로, 천성(天性)이 고명하고 흉중(胸中)이 맑아서 비가 갠 뒤의 풍월(風月)처럼 맑고 시원함을 이름. 《宋史 周敦頤傳》
[주D-003]광풍은 혜초를 흔들고 숭란을 움직인다 : 이 구절은 송옥(宋玉)의 초혼(招魂)에 보임.
[주D-004]풍광은 풀잎을 스쳐 떠간다 : 이 구절은 화서 도조(和徐都曹)의, “日華川上動”의 대구임.
[주D-005]방두(芳杜) : 팥배나무.

 

 

 

 

 

고봉별집 부록 제1권
 제문(祭文)
십구



모년 모월 모일에 문인 생원(生員) 이호민은 감히 맑은 술과 때에 맞는 제물로 삼가 고봉 선생의 영전에 제사 드립니다.

아 선생께서는 / 嗚呼先生
뛰어난 정기 받아서 / 誕膺間氣
타고난 자질 청명하고 / 稟質淸明
본디의 바탕 빼어났지 / 天資英毅
어릴 때부터 옛 도 높여 / 少小尙古
오직 도를 따랐으며 / 惟道是師
위기지학 학문 닦아 / 學以爲己
재목 기반 넓고 깊었네 / 廣深杞基
고정 도학 침잠하고 / 沉潛考亭
염락 근원 계승하여 / 泝洄濂洛
본원을 탐구도 하고 / 推本探原
주역 이치 궁리했네 / 究極羲易
빠른 성취 원치 않으니 / 初不欲速
어찌 첩경을 힘쓰리오 / 豈務徑約
선현 언행 많이 알아 / 多識前往
그 덕을 축적했네
/ 以蓄其德
깊고 넓은 학문에다 / 學問淵博
활짝 트인 국량이요 / 局量宏廓
문장은 혼후하여 / 文章渾厚
드넓은 강과 바다였네 / 川停海納
재주 당대에 높아도 / 才高一世
명예롭다 아니하고 / 不自爲名
사방에 명망 중해도 / 聲重四方
영광으로 아니 여겼네 / 不自爲榮
가난한 생활 만족하고 / 安於處貧
선을 행하길 즐겼으며 / 樂於行善
입엔 이끗 올림 없고 / 口絶談利
손엔 서책 아니 놓아 / 手不釋卷
성현을 염두에 두고 / 心存聖賢
금석처럼 뜻을 굳혀 / 志堅金石
평소에 덕성 함양하여 / 充養有素
경과 의를 함께 세웠네 / 敬義偕立
흉금은 맑디맑아 / 襟懷灑然
가을밤 밝은 달이요 / 秋宵明月
온후한 낯빛에다 / 溫厚之色
엄중한 모습이라 / 嚴重之容
쳐다보면 고산이며 / 仰之高山
나아가면 화풍인데 / 卽之和風
스스로 깨달은 이치는 / 自得之餘
묘한 생각 깊고 중해 / 妙思深重
성정 드러내 밝히고 / 發明性情
체용 환히 가려냈네 / 昭析體用
퇴계 아니 계셨던들 / 不有退溪
누가 귀함 알았을까 / 孰識其貴
글월 닦아 논변할 때 / 修辭論辨
퇴계 감탄 몇 번일런고 / 幾相興喟
일상생활 세운 말씀 / 日用立言
모두가 도를 보위함이요 / 莫非衛道
생각이며 언행까지 / 思慮云爲
고인 법도 따랐어라 / 動遵前古
감히 태만함 없었으니 / 罔敢少懈
어찌 만족함 있었으리 / 寧或滿足
겸겸군자의 그 덕은 / 謙謙之德
오랠수록 도타웠네 / 愈久愈篤
조정에 우뚝 서매 / 鵠立朝著
언행일랑 한결같아 / 言行猶一
지모는 심원하고 / 智計深遠
몸가짐은 신중했네 / 守之若訥
일마다 바른 논의 / 遇事正議
충성심이 간곡한데 / 忠誠懇惻
연약한 저자들은 / 彼婉孌者
실로 정직 꺼려서 / 實憚正直
비난이 시끄러워도 / 有舌紛紛
소신 굽힌 일 없네 / 無所撓屈
격랑의 지주처럼 / 砥柱奔流
국가만을 알았으니 / 但知有國
그 경륜 크게 베풀어 / 謂將大施
이 백성에 혜택 주며 / 斯民是庇
반드시 장수하고 / 必得其壽
지위 얻을 줄 믿었는데 / 必有其位
못 믿을사 하늘이여 / 天乎難諶
병이 계속 침범하여 / 疾病交侵
대궐 떠나 강 건널 제 / 拜闕渡江
태양 이미 빛 잃었고 / 白日已陰
귀신 재앙 아니 뉘우쳐 / 鬼神莫悔
도중에서 운명하니 / 遽殞中程
산하가 슬퍼하고 / 山哀浦思
짐승들도 놀랐어라 / 鳥飛獸驚
나라엔 사표 없고 / 國無蓍龜
사류는 종장 잃었네 / 士失宗匠
아 몽매한 나 자신은 / 咨余愚蒙
강석에서 모셨는데 / 幸承函丈
재주 따라 가르쳐 / 隨才授訓
나갈 방향 알게 하니 / 使知趍向
가야 할 곳 다름 아닌 / 靡他其適
효제로써 권면했네 / 畀勸孝悌
절실하게 당부하여 / 見勵深切
성취 멀리 바랐는데 / 遠期造詣
끝내 아니 드러남은 / 厥終罔顯
내 정성이 없음일세 / 由我不誠
앞으로는 잘하리라 / 方來之善
우리 선생 믿었는데 / 恃我先生
비통할사 오늘날에 / 那知今日
기둥 홀연 부러지니 / 樑木忽摧
울부짖어 봐도 소용 없어 / 攀號莫及
원통하기 그지없네 / 慟怨難裁
모습 영원히 멀어져 / 儀刑永隔
가르침 청할 기약 없으니 / 就正無期
애통해라 이 소자는 / 哀哀小子
문을 나서 어디로 갈꼬 / 出門何歸
이 세상엔 뜻이 없으매 / 無意此世
황천 속에 따르려오 / 誓隨泉裏
쇠퇴해진 이 사문은 / 斯文之衰
그 뉘 떨쳐 일으키며 / 其孰振起
정학이라 이 종통은 / 正學之宗
누구에게 있을 건고 / 將誰在矣
공도 위한 통곡이요 / 爲公道哭
나 때문만은 아니네 / 非獨吾私
아 애통하오이다 / 嗚呼哀哉
하늘 뜻은 모를레라 / 天意難知
주신 수명 길잖으니 / 降年不永
과연 무슨 이유일까 / 果何爲斯
기수의 변고일랑 / 氣數之變
예로부터 있어 온 일 / 自古有之
몸 닦아 명 기다리니 / 修身以俟
사람 하늘에 부끄럼 없네 / 何愧何怍
명성 도덕 함께 거룩하니 / 名與道隆
만년토록 영원하리 / 萬古不滅


 

[주D-001]이호민(李好閔) : 1553~16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인조반정 후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고, 죽은 뒤 청백리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임진왜란 때 왕명으로 각종 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오봉집》이 있다.
[주D-002]고정(考亭) : 주자학(朱子學)을 말한다. 고정은 주자가 평생 거처했던 곳으로, 1192년(고려 명종22) 이곳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짓고 학문을 강론했다. 이 때문에 주자학파를 고정학파라고도 한다. 《宋元學案》
[주D-003]염락(濂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문을 말한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봉이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
[주D-004]빠른……않으니 : 자하(子夏)가 거보(莒父)의 읍재(邑宰)가 되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빨리 이루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말라. 빨리 이루려 하면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연연하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선현……축적했네 : 앞 시대 성현의 말씀과 행적을 많이 알아서 그것을 본받아 자신의 덕성을 쌓는다는 말이다. 《주역》〈대축(大畜) 상전(象傳)〉에 “천이 산 속에 있는 형상이 대축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지난 시대의 말씀과 앞 시대의 행적을 많이 알아서 자신의 덕을 축적한다.〔天在山中 大畜 君子以 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라고 하였다.
[주D-006]쳐다보면 고산(高山)이며 : 《시경》〈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 우러르고 큰길을 가는도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고 한 것과 《논어》〈자한(子罕)〉에서 안연(顔淵)이 공자를 묘사하여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다.〔仰之彌高〕”라고 한 것을 원용하여 고봉의 덕을 기린 말이다. 애도의 대상인 기대승의 호가 고봉이므로 고산을 끌어온 것이다.
[주D-007]나아가면 화풍(和風)인데 : 스승 고봉의 인품이 온화했다는 말이다. 화풍은 온화한 봄바람으로 스승의 따뜻한 가르침을 뜻한다. 북송의 학자 주광정(朱光庭 : 1037~1094)이 명도(明道)에게 배웠는데, 여(汝) 땅에서 명도를 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광정이 한 달 동안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주D-008]겸겸군자(謙謙君子) : 겸양의 덕을 갖춘 군자를 말한다. 《주역》〈겸괘(謙卦) 초륙(初六) 상전(象傳)〉에 “겸손하고 사양하는 군자는 겸손한 덕행으로 자신을 다스린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 하였다.

 동문선 제8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취중가(醉中歌)


이색(李穡)

선생 손은 월굴을 더듬고 / 先生有手探月窟
선생의 발은 천궐(천자의 궁궐)엘 갔었네 / 先生有足趨天闕
선생은 워낙 천제의 아이라 / 先生自是天帝子
의태가 범부와는 아주 다르네 / 意態乃與塵凡絶
멀리 묘한 도를 닦아 희황 위로 나가고 / 遠尋妙道出羲皇
넓디넓은 상서며 엄숙한 주서에 눈을 돌렸네 / 瞠手灝灝并噩噩
또한 《자사》, 《맹자》에도 정통하여서 / 旁求精義竝思軻
《중용》 한 편을 참으로 즐겼다 / 中庸一篇眞足樂
때로는 말을 달려 혼자 뛰어가매 / 有時覂駕獨超群
장소반마가 모두 모기떼인 듯 / 莊騷班馬如飛蚊
선생은 혼자 웃어 이가 시리다 / 先生獨笑齒久冷
공문의 제자들은 구름떼 같네 / 孔門諸子屯如雲
누항에 참다운 낙이 있으나 / 雖然陋巷有眞樂
그 맑은 향기를 온 세상에 누가 따르리 / 擧世誰復希淸芬
내 지금 늙었으나 아직도 정정해 / 吾今老矣尙矍鑠
높은 산 우러름을 더 말할 것 있나 / 高山仰止奚云云
선생은 취중 노래만 자꾸 부르네 / 先生且歌醉中歌
천지가 호탕하여 편파 없는데 / 天地浩蕩無偏頗
머리 위 저 해와 달은 나는 북처럼 오가는구나 / 頭上日月如飛梭


 

[주D-001]월굴(月窟) : 소강절(邵康節)의 시(詩)에, “건괘(乾卦)가 손괘(巽卦)를 만나면 월굴(月窟)이요, 곤괘(坤卦)가 진괘(震卦)를 만나면 천근(天根)이다.”하였고, 주자(朱子) 〈소강절찬(邵康節贊)〉에, “손으로 월굴을 더듬고 발은 천근을 밟았도다.[手探月窟 足躡天根]”하였는데, 그것은 주역(周易)의 이치를 알았다는 뜻이다.
[주D-002]희황(羲皇) :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 그가 팔괘(八卦)를 지었다 하니 《역(易)》의 시조이다.
[주D-003]넓디넓은 …… 돌렸네 : “상서는 호호하며 주서는 악악하니라[商書灝灝甬 周書噩噩甬].”《法言》호호(灝灝)는 넓고 휑한 모양, 악악(噩噩)은 엄숙한 모양을 말한다.
[주D-004]장소(莊騷) : 《장자(莊子)》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주D-005]반마(班馬) : 《한서》의 작자 반고(班固)와 《사기》의 작자 사마천(司馬遷)은 명문 사가들이다.
[주D-006]이가 시리다 : 웃어서 입을 벌리고 있으므로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주D-007]누항(陋巷) : 공자의 높은 제자 안회(顔回)가 밥 한 대그릇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마을[陋巷 자기가 사는 동네 겸칭]에 살아도 그 즐거움은 그치지 않았다.
[주D-008]높은 산 우러름 : 높은 덕을 앙모함인데 《시경》에, “높은 산을랑 우러러볼지요, 환한 길을랑 가리로다[高山仰止 景行行止].” 하였다.

 

[주D-001]높은 …… 마음 : 높은 산은 스승의 훌륭한 도를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이에 대하여 평하기를 “시인의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구나. 도를 행하여 가다가 중도에 쓰러지더라도 자신의 늙음을 잊고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하였다. 《禮記 表記》 강한(江漢)은 중국의 양자강과 한수(漢水)로 큰 물을 이르는데, 바꾸어 스승을 그리워하는 말로 쓰인다. 공자가 별세하자, 제자들은 동문(同門)인 유약(有若)이 공자와 비슷하다 하여 스승을 섬기던 예(禮)로써 그를 섬기고자 하였으나 증자(曾子)는 “불가하다. 부자(夫子)의 덕(德)은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수 없다.” 하고 반대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晚翠文集卷之五
 上樑文
道峯祠宇上樑文 a_059_152b


059_152c道德之歸。遠近咸仰。耳目所逮。觀感尤深。旣切矜式之誠。可廢瞻依之所。恭惟靜菴先生。受天間氣。爲世宗儒。雖聖賢之樂蘊於心。不假外物。然仁智之好隨所適。足頤吾神。得異處天作之區。若神物陰來以相。洞曰寧國。允矣攸寧。山名道峯。依然見道。爲一時栖息之處。作百年景慕之資。爰創構於舊基。實祭社之遺意。明宮齋室。次第而成。白鹿武夷。彷彿於是。遭兵火者幾載。喜榛蕪之重開。講堂猶虛。雖嫌制度之未備。廟宇如故。幸見神明之有憑。續十六年旣廢之祠。興千萬人同然之感。矧今文風寂莫之久。莫急道學059_152d尊崇之方。闢義路塞利源。微先生則誰識。淑人心變士習。在後學尤有功。欲報德兮如天。寧寓敬之無地。許草堂之規畫。于今有光。南太守之經營。自玆可繼。作新根抵。風化權輿。人謂斯何。物固有待。天其或者道之將行。敢因匠氏之訖功。式效兒郞之贊偉。拋梁東。水落雲開初日紅。願把餘輝照長夜。大明吾道豁群蒙。拋梁西。天外三峯入眼低。要識十分深造處。白雲臺上更無梯。拋梁南。洞裏壺天萬象涵。誰道風流吹去盡。靑山如畫水如藍。拋梁北。絶壁去天無咫尺。不遇先生不得名。道峯自此生顔色。拋梁上。奎璧精059_153a鍾金玉相。若道不窮濂洛源。儒林那得長瞻仰。拋梁下。春秋香火誠非假。吾東只說竹溪祠。未必竹溪專敎化。伏願上樑之後。俗尙貴德。人知嚮方。道義藏修。爭慕程朱之學。靈仙窟宅。永爲鄒魯之鄕。

寄翁集卷之三
 絶句
續題儒賢錄後 我朝文廟從享八賢 b_058_503d


小學書中悟昨非。聖言窮格到精微。平生流涕張廵傳。一死從容視似歸。右金文敬
緇帷講道托師門。魯論深探性理源。處世鞱光明哲在。楚湘吟鵩尙含寃。右鄭文獻
鳳生麟出歎非時。丹悃無由聖后知。堯舜君民當日志。後人空泣道峰祠右趙文正
一部中庸衍九經。忠言剴切動天聽。東方復見西山學。衮奬昭昭若日星。右李文元
考亭千載托心期。闢破陽明釋理疑。若使先生逢魯058_504a世。定無夫子陋東夷。右李文純
金聲玉色有文成。涑水經綸本一誠。明主願爲君子黨。元豐僞籍倍光榮。右李文成
詩禮承家德以將。兼資師友闇然章。行藏不必尤臧氏。正學終須入聖堂。右成文簡
功專三禮學純深。師統終歸魯也參。配食聖宮公議定。孰沮輿頌逞詖淫。右金文元



 

 

 

 

 

 

 

 

 

 

 

 

 

 

송자대전 제96권
 서(書)
이동보(李同甫)에게 답함 - 무진년(1688) 6월 5일


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이 몸이 죽을 날이 매우 가까이 왔는데, 어찌 오늘 천리 밖 고인(故人)의 편지를 받아 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묵묵히 아무 말도 못하였네.
서문(序文) 2첨(籤)은 잘 보았네. 상첨(上籤)은 비록 겸허한 편이나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 직절(直截)한 듯하기에 삼가 하첨(下籤)을 취하겠네. 다만 영본(嶺本)이 이미 전포(傳布)되었다 하니, 일이 이미 끝난 뒤라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구황(救荒)에 대한 조례(條例)는 회옹(晦翁)의 유법(遺法)을 사용했으리라 생각되네. 그러니 회옹의 덕택이 이곳 해우(海隅)의 창생(蒼生)에게까지 미쳤다 하겠네.
회옹은 당시에 자신이 지나간 강산(江山)을 미처 구경할 겨를이 없었는데, 동보(同甫)는 빠짐없이 탐방하고 있으니, 혹 오늘날의 형편이 순희(淳煕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때와 달라서인지, 아니면 백성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는 마음이 회옹에게 미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한번 웃음직한 일일세. 다만 상상하건대, 활달한 기분으로 산에 올랐다가, 낭랑하게 읊조리며 날아서 내려오는 일은 의상(意象)에 있어서는 비록 넓고 좁으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그 엄격히 묵계(默契)되는 의취(意趣)야말로 속사(俗士)가 엿볼 바가 아닌데, 그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유감일세. 그러나 자네가 구경한 데가 구룡연(九龍淵) 최하의 한 폭포에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내가 약간 낫다고 여기네. 그 폭포는 박연(朴淵)에 비하여 높이가 갑절이나 되고 그 기세의 웅장함이 천하에 둘도 없을 듯하네. 내뿜는 물줄기가 마치 쏟는 듯하여 도저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네.
일찍이 도봉(道峯) 산길에 남긴 나의 필적(筆跡)이 제현(諸賢)들의 배려에 의하여 새겨졌으나, 뒤에 윤휴와 허적의 무리가 나를 미워하여 이를 파 버렸다 하는데, 이번에 만폭동(萬瀑洞)에 새겨진 주자의 시(詩)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혹 오늘날 군자(君子)의 지론(持論)이 전날보다 약간 완화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 횡거(橫渠 송 나라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을 늘 외워 왔건만, 실없는 농담이 가끔 나오곤 하니, 혹 구습(舊習)이 없어지지 못한 때문이 아닌지, 우스운 일일세.
오미자(五味子)는 일찍이 가제(家弟)를 위하여 부탁한 것인데, 참으로 기쁘기 이를 데 없네. 이 밖의 세 가지 약재(藥材)에 대해서도 아울러 감사드리네.


별지
일전에 왕복(往復)한 서신이 누설되어, 혹 무슨 곡절이 생겼을까 염려일세. 그때 내시(來示)를 보고 나서 나의 뜻이 시원하던 참에, 평소 자네를 의심해 오던 절친한 사람을 만났기에 내가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 의혹을 풀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그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서신을 보자고 매우 간절히 청하므로 잠시 꺼내 보였다네. 혹 이것으로 인하여 전파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이외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자네가 구설(口舌)의 시끄러움을 면하고 싶은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찌 그럴 리야 있겠는가마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경원(慶元) 당화(黨禍) 때의 일을 잘 간파하지 못한 듯하네.
또 새로운 비방이 적지 않다고 하니, 이 또한 우스운 일일세. 들으니 자네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아무[某 송시열을 가리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 요즈음 대윤의 연보(年譜)를 보았지만, 주자가 만약 이를 보았다면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아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고 하므로, 저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나의 뒤를 이어 자네를 탄핵하려 한다고 하기에 내가 듣고 웃으며, 이는 저들의 탄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온 사류(士類)가 탄핵을 가해야 옳을 일이라고 하였네. 왜냐하면, 주 선생(朱先生)의 각하(脚下)에 어찌 감히 급불급(及不及)이란 어휘를 쓸 수 있느냐는 말일세.
그러나 주자가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느냐는 말은 진실로 확론일세. 왜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과 임율(林栗)을 배척한 일을 보지 못하였던가. 임율은 다만 역서명(易西銘)을 논하다가 그 본의를 상실하고 거기에 미혹되어 돌아서지 못하였을 뿐인데, 주자의 박정(駁正)이 극히 준엄하여, 탄핵까지 받기에 이르렀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대윤의 반복 휼광(反覆譎誑)하여 음사(淫辭)를 방조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 배척이 어찌 무부무군(無父無君)과 솔수식인(率獸食人) 정도로만 그치겠는가. 지금 그 유독(流毒)은 이미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옛날에 왕 상서(汪尙書 송 나라 왕응신(汪應辰))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소씨(蘇氏)의 시를 쓴 선비 두 사람을 선발하자, 주자의 배척이 엄절(嚴切)하였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 대윤의 무리가 지공거가 되어 장주(莊周)가 성인을 업신여기는 말을 글제로 내어 선비를 선발하였으니, 세도(世道)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는 윤휴의 작용(作俑 좋지 않은 일의 발단을 만드는 것)과 대윤의 당조(黨助)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두려운 일일세.
저들이 나더러 우옹(牛翁 성혼을 말함)을 비방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가리킨 말인지 알 수 없네.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당황스럽게 하네. 그러나 주자가 일찍이 선배를 경시(輕視)하는 일을 들어 배우는 이들을 경계하는 한편, 선배를 너무 존외(尊畏)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고 좌우로 눈치를 살피며 뜻을 굽혀 주선(周旋)할 뿐, 의리(義理)의 시비와 문의(文意)의 당부(當否)를 알지 못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내가 망녕되이 의리와 문의를 논하는 것을 들어 우옹을 비방했다고 한다면, 이는 주자의 대훈(大訓)을 알지 못한 탓일세. 대저 주자의 이 전후(前後) 두 말씀에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이는 이를 반드시 알아야 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번 서신에, 탄사(灘祠) 운운한 말은 과연 저쪽의 서당(書堂)을 가리킨 것일세. 전일 용담(龍潭) 홍석(洪錫)이 지명(地名)으로 인하여 협곡(峽谷) 중에 정(程)ㆍ주(朱)의 사우(祠宇)를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적극 만류하기를, 어찌 이 다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았네. 그 뒤에 수호(守護)하는 사람이 없는가 하면, 후임자(後任者)가 이를 그르다고 배척하여 수직(守直)하는 전복(典僕)까지 빼앗고 마을 사람들이 마구 더럽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그가 개탄하기를, 송모(宋某)는 참으로 성인이라고 하였네. 이는 부유(婦孺)라도 다 짐작할 바인데, 그 사람만이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의 망발을 깨닫지 못하고 몹시 후회하게 되었던 것일세. 또 저번에 철원재(鐵原宰)가 사계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역시 적극 만류하여 그만두었으니, 오늘날 저쪽에서 사우(祠宇) 건립을 중단한 것은 잘한 일일세.
작은 사우에 고청(孤靑 서기(徐起))을 모시겠다는 계획은 조금은 경우가 다르네. 고청이 천한 신분으로서 굴기(崛起)하여 훌륭히 다사(多士)의 사장(師長)이 되었으니, 그 조예의 여하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죄과(罪過)가 있는 사람은 아니네. 그러나 지금 그런 분을 봉사(奉祀)하는 일은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네.
이상 외람된 말은 모두 가르침을 청하고 미혹을 깨우치자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 다음 인편에 회시(回示)해 주기 바라네.


 

[주D-001]동보(同甫)는 …… 탐방 : 이희조가 숙종 14년(1688) 4월에 강원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있을 때 금강산 구경을 간 일을 말함. 《芝村集 卷5 答尤菴先生》
[주D-002]만폭동(萬瀑洞)에 …… 시(詩) : 현종 3년(1662) 3월에 송시열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만폭동 반석(盤石)에 주희(朱熹)의 ‘맑은 시내 흰 돌과 취향을 함께하고, 갠 달 맑은 바람 특별히 전하리[淸溪白石要同趣 霽月光風更別傳]’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새겨둔 것을 말한다. 《宋子大全附錄 卷4 年譜》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3]경원(慶元) 당화(黨禍) : 경원은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주희가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侂胄)를 탄핵하자, 그 원한을 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배척하여 주희의 관작(官爵)을 삭탈함과 동시에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축출하고 도학자의 등용을 금한 일을 말한다.

 

한수재선생문집 제17권
 서(書)
안경소(安景召) 태석(太奭) 에게 답함 - 경인년 11월


주신 편지의 뜻 잘 알겠네. 곽 승지(郭承旨)의 사실(事實)은 노선생(老先生)께서 지으신 묘문(墓文)을 보건대 지극히 찬양(贊揚)하셨고, 또 듣건대 선생께서 평소 곽공(郭公)의 조두(俎豆 향사(享祀))가 늦어지는 것을 탄식하셨다 하네. 이미 선사(先師)의 정론(定論)이 계시니 지금 많은 선비들의 의논에 대해 무엇 때문에 감히 이론(異論)을 제기하겠는가.
주자가 백록사(白鹿祠)에 염계(濂溪)를 모시고서 또 따로 사당을 세워 위공(威公) 도간(陶侃) 조손(祖孫)과 서간(西澗) 유응지(劉凝之) 부자(父子) 등 제현(諸賢)을 배향(配享)하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네.
청운 백석은 취향이 같으나 / 靑雲白石聊同趣
제월광풍은 전한 것이 다르네
/ 霽月光風更別傳

이것을 오늘날의 전거로 삼아도 무방하겠기에 대략 이런 내용으로 답장을 써서 보낸 바 있네. 그런데 지금 귀향(貴鄕)의 모든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여긴다면 당초 내가 수작(酬酢)한 바가 있으나 어찌 감히 나의 의견이 옳다고 하겠으며 또 어찌 감히 그대의 물음에 간여하겠는가. 오직 그대들 여러 사람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네.
그러나 우(右)를 상(上)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네. 주자가 죽림사(竹林祠)에 염계를 좌에 모시고 명도(明道)를 우에 모신 이것은 좌소우목(左昭右穆)의 뜻이니 오늘날 사당의 제도와는 전혀 같지 않네. 또 《남헌집(南軒集)》에 삼 선생사기(三先生祠記)를 상고해 보건대 염계와 이정(二程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을 마주 대하여 모셨는데 염계가 동서(東序)에 있고 이정이 서서(西序)에 있으니, 이 또한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네. 그리고 또 일찍이 사석(師席 우암을 가리킴)께 강문(講問)한 적도 있네. 그런데 지금 신도(神道)는 우를 상으로 삼는다는 설로써 책망한다면 옥천(沃川) 유생(儒生)들이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주D-001]청운(靑雲) …… 다르네 : 청운은 출세를 뜻하고 백석은 은거를 뜻하며, 제월광풍은 고매한 인품과 도통(道統)을 뜻한다. 서간(西澗)이 벼슬을 버리고 여산(廬山)에 은거한 것은 염계와 약간 유사하지만 도통을 전승(傳承)한 것은 매우 다르다는 뜻이다. 이 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권7 백록강회차복장운(白鹿講會次卜丈韻)에 보인다.

옥담사집
병자년(1636) 난리 후에 집으로 돌아와 피난 중에 있었던 일들을 추술하여 조여벽에게 부쳐주다 40운 [丙子亂後還家追述避亂中事寄贈趙汝璧 四十韻]


자연 속에 가돈하여 몇 해나 지났던가 / 嘉遯林泉歲幾周
작은 시냇가에다 초가집을 지었었지 / 茅齋寄在小溪頭
형문에서 홀로 즐거이 사니 세상사 고요하고 / 衡門獨樂塵機靜
화사에서 유람하니 한가한 흥취가 많아라 / 花社從遊逸興稠
중울의 문 앞에는 잡초 속에 길을 열었고 / 仲蔚門前開草逕
도잠의 거리 밖에는 방초 우거진 물가일세 / 陶潜巷外挹芳洲
땅이 외져 반곡은 휘감아 돌고 굽었으며 / 地偏盤谷繚而曲
마을이 후미져 도원은 단절되어 더욱 그윽해라 / 村僻桃源絶更幽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내 뜻이 아니요 / 拖紫紆靑非我志
부귀영화 누리는 것도 뜬구름과 같아라 / 乘軺建節若雲浮
삼천 길 백발 빗질해 보니 듬성해졌고 / 三千丈髮梳來少
일만 섬 시름은 늙을수록 하염없구나 / 萬斛閑愁老更悠
홀로 티끌 세상에 서매 좋은 벗 없지만 / 獨立塵寰無好伴
속세 밖에 어진 이 있을 줄 어이 알았으랴 / 寧知物表有賢流
우뚝 뛰어난 재주는 장경보다 낫고 / 奇才卓犖長卿右
펼쳐진 아름다운 문장은 자건의 짝이어라 / 麗藻聯翩子建儔
반평생 동안 전원에서 재능을 숨긴 채 살았고 / 半世丘園藏羽翼
바둑에만 마음을 쏟으며 즐거이 노닐었네 / 專心碁局樂遨游
날마다 서책을 탐독하니 마음에 속됨 없고 / 圖書日嗜心無俗
늘 술동이 그득하니 술을 사지 않아도 되었지 / 樽杓長盈酒不謀
금란의 우정은 평소에 쌓아온 지 알겠거니 / 托契金蘭知有素
교칠과 같이 서로 사귄 지 그 몇 해이런고 / 相從膠漆幾經秋
때로 와력을 가지고 맑은 서안(書案)을 더럽히고 / 時將瓦礫塵淸案
매양 경거를 가지고 늙은 눈을 부비게 하였지 / 每把瓊琚刮老眸
좋은 밤엔 다정히 누워서 보내던 그 날을 그리워하고 / 良夜相思同臥榻
꽃 피는 시절엔 함께 누각에 오르던 때를 생각한다오 / 花辰日憶共登樓
용순은 반드시 은자가 잡기를 기다리고 / 龍脣必待幽人挈
작설차는 늘 좋은 손님과 함께 마신다 / 雀舌恒從美客酬
세로에 지음으로 오직 그대가 있으니 / 世路知音君獨在
인간세상 만남과 이별엔 근심이 없어라 / 人間離合庶無憂
먼지가 옥새에 이니 삼정이 어두워지고 / 塵驚玉塞三精暗
말이 금하를 건너니 팔도가 짓밟히었네 / 馬渡金河八路蹂
달무리 진 외로운 성에는 새벽 딱따기 소리 울리고 / 月暈孤城晨擊柝
구름처럼 모인 용맹한 병사들 밤에도 북채 안고 잔다 / 雲屯猛士夜援枹
백성들 붙잡혀 가니 들판마다 곡하는 소리 / 燕民繫累千原哭
재물을 쓸어가느라 촌락마다 다 뒤지누나 / 秦貨擔歸萬落搜
학가는 서쪽으로 먼 요동 변새를 순시하고 / 鶴駕西巡遼塞遠
용안은 삭풍이 몰아치는 북쪽을 바라보셨어라 / 龍顔北望朔風颼
수레와 시종(侍從) 이어져 길에는 먼지 자욱하고 / 車從絡繹黃塵合
피난하는 행차 어지러워 밝은 해도 시름겹다 / 冠蓋繽紛白日愁
조정에서는 기미의 계책 쓰느라 세월만 보내고 / 廟算羈縻淹歲月
정벌의 계획은 고식적이라 창칼은 녹이 스누나 / 征謀姑息老戈矛
많은 식구 거느리고 남쪽 고을 수령 의지해 / 提携百口依南宰
갖은 신고 다 겪으며 바닷가에서 피난했네 / 備歷千辛賴海陬
객지에서 뜻밖의 상봉은 참으로 드문 일이니 / 逆旅相逢眞有數
진창길에서 이렇게 만나는 일 어찌 쉬우리오 / 泥途會面亦安偸
남은 술 식은 고깃점에 나그네 회포가 같고 / 殘盃冷炙同羇抱
필마에 여윈 아이종 데리고 객지를 떠돌았지 / 匹馬羸僮共旅遊
칡이 모구에 굵으니 세월이 오래 흘렀고 / 葛誕旄丘時已晩
외가 기협에 생기니 한 해가 지나갔어라 / 瓜生夔峽歲將遒
멀리 고향을 바라보며 유린당한 강토를 슬퍼하고 / 遙瞻故國悲秦衂
모임을 신정에서 마치매 초나라 죄수처럼 울었지 / 會罷新亭泣楚囚
다행히도 하늘이 내렸던 재앙을 거두시고 / 賴得皇天能悔禍
마침내 성상으로 하여금 이 나라 안정케 하셨네 / 終敎睿算定神州
타향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내 땅이 아니라 / 他鄕信美非吾土
여장을 꾸려 서로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니 / 行李相將返故丘
죽은 사람 산 사람 안부 물으매 슬픔은 끝없고 / 弔死問生哀不盡
홀아비 과부 위로하며 곡소리 그치지 않았어라 / 悲鰥慰寡哭無休
여염집들은 죄다 불타서 잿더미만 담았고 / 閭閻蕩爇餘灰燼
텅 빈 마을에는 간간이 해골만 널려 있는데 / 村巷空虛間髑髏
집안에 두었던 주현은 어디로 갔는지 뵈지 않고 / 屋裏朱絃亡不見
상자 속의 서책은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네 / 籠中黃卷散無收
백성들은 스스로 삼생의 괴로움 탄식하고 / 齊民自歎三生苦
임금은 깊이 국가 재생의 계책을 도모하셨지 / 聖主深圖再造猷
자극에서는 한밤중에 측루를 생각하고 / 紫極中宵思側陋
단루에서는 전석하여 방구를 물었어라 / 丹樓前席問旁求
외로운 백성 불쌍히 여겨서 정치에 애를 쓰고 / 哀傷煢獨勞王政
피폐한 민생 보살피느라 내수에 힘을 다하누나 / 存恤瘡痍盡內修
혼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림 생각하는 때가 됐나니 / 亂極思治時已在
성공을 거둠이 패배로 말미암는 이치는 당연한 것 / 功成因敗理應優
변방에 난리가 안 일어나 조두 소리 그치고 / 邊聲不起停刁斗
봉화 연기 일어나지 않아 군대 깃발 누웠어라 / 烽火無烟偃旆斿
군사들은 이 때 응당 철마를 쉴 테고 / 壯士時當休鐵馬
장군이 투구를 벗는 것을 장차 보게 되며 / 將軍佇見脫兜䥐
시인들은 황하 맑음을 칭송하는 시를 짓고 / 詞人擬作河淸頌
은사들은 바다로 들어가는 노래를 그치리 / 隱士休歌入海謳
태평을 즐거워하는 것이 참으로 즐거운 일 / 相樂太平眞所樂
함께 왕의 교화를 도울 길이 어찌 없으리오 / 共添王化豈無由
남은 생애 지금은 다 같이 일 없이 한가해 / 餘生此日同無事
나란히 물가에 앉아서 낚싯대나 드리우세 / 並坐苔磯引釣鉤

차운 조완. 호는 삼산이다 [次韻 趙完 三山]
길가엔 푸른 솔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우고 / 挾巷靑松蔭道周
한가함 달래는 서책만 책상에 놓여 있어라 / 消閑黃卷靜床頭
사립문 정갈하여 속세의 인연 드물고 / 柴扉蕭洒塵緣少
초가집은 그윽하여 시골 정취 많구나 / 茅屋幽深野趣稠
붉은 여뀌 우거진 기슭 가랑비 속에 낚시 드리우고 / 細雨垂竿紅蓼岸
흰 마름꽃 핀 물가에 저물녘 바람 불 제 젓대를 분다 / 晩風橫篴白蘋洲
한 마리 소로 농사짓는 언덕에서 방공은 늙고 / 一犂壟上龎公老
백 가지 화초 우거진 정원에서 사마는 한가로워라 / 百卉園中司馬幽
적막한 연하 속에 은거해 서로 만나기 어렵고 / 寥落烟霞成契闊
아득한 천지에서 속세에 부침하는 일 떠났어라 / 蒼茫天地謝沈浮
젊어서부터 술과 바둑 즐기며 세상 명리 멀리했고 / 少從碁酒名場遠
늙어서는 낚시 땔나무나 하며 한가로운 흥취 유유하네 / 老作漁樵逸興悠
정갈한 거처는 무엇보다 속세의 속박 없는 게 좋고 / 淨界最憐無世累
한가로이 살매 도리어 시벗을 만남이 반가워라 / 端居還喜得詩流
안영처럼 오래 공경함을 나는 늘 흠모하노니 / 晏嬰久敬吾常慕
관중의 마음 통하는 벗에 그대 비길 만하도다 / 管仲神交子可儔
산 속 집에서 바람과 안개 속에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 山館風烟開謔浪
들판 정자에서 꽃과 버들 속에 한가로이 맘껏 노닐었네 / 野亭花柳任優游
서로 운자(韻字)를 부르며 시를 자주 썼나니 / 相呼玉韻詩頻寫
함께 금귀를 잡고 술을 몇 번이나 마셨던고 / 共把金龜酒幾謀
백년 평생 세월은 임하에 저물고 / 百載光陰林下晩
우리 두 늙은이 머리털 거울 속에 세었어라 / 兩翁蓬鬢鏡中秋
산골 늙은이는 북쪽으로 바라보며 고개 돌리고 / 山翁北望應回首
물가 늙은이는 남쪽을 보며 눈길만 보낼 테지 / 潭老南瞻謾騁眸
늙고 병든 몸 늘 침석에 엎드려 있으니 / 衰病纏身常伏枕
이별의 회포에 몇 번이나 누각에 기댔던고 / 別離傷抱幾憑樓
짚신에 죽장 차림으로 찾아가지는 않으나 / 芒鞋竹杖休尋訪
술병 놓고 지은 글 품평하며 술잔 주고받는다 / 樽酒論文間作酬
한 번 조정에서 계책을 잘못 세운 뒤로는 / 一自廟堂謬算策
구중궁궐 임금께서 국사에 근심 많았네 / 九重宵旰軫虞憂
전란의 먼지 천지 가득한데 금고 소리 울리고 / 塵昏宇宙金鼙動
불길 훑는 산하를 적군의 철마가 짓밟고 갔지 / 火獵山河鐵馬蹂
그 누가 조생이 형수 건너던 노 두드릴꼬 / 誰擊祖生荊水楫
전장(田將)은 적성의 북채를 아직 잡지 않았네 / 未援田將狄城枹
곳곳마다 백성들은 마구 살육을 당하고 / 人民處處紛誅戮
집집마다 재물을 죄다 수탈해 갔으니 / 玉帛家家恣括搜
사해가 혼란해 임금은 시름이 가득하고 / 四海奔波顔慽慽
벼슬아치들은 허겁지겁 피난을 갔어라 / 千官顚倒鬢颼颼
닭이 울어도 용루의 침소에 문안하지 않으니 / 鷄鳴休問龍樓寢
변방에는 응당 학가의 시름을 보태리 / 燕塞應添鶴駕愁
노신들은 흐르는 눈물 주체할 수 있으랴 / 晉老可堪垂涕淚
군사들은 더 이상 창칼을 쓰지 않는구나 / 魏師無復試戈矛
군신들이 멀리 음산 저편에 가 있으니 / 君臣地隔陰山外
소식이 하늘 저편 외진 한해 쪽에 있어라
/ 消息天分瀚海陬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의리 알거니 / 主辱固知臣死義
국가가 수치를 당했거늘 도리어 내 살 길을 도모하리오 / 國羞還苟我生偸
타향이라 새해를 맞는 감회가 곱절로 더하고 / 他鄕倍感逢新歲
나그네 길에 예전 노닐던 곳 만나면 몹시 놀란다 / 逆旅偏驚値舊遊
덧없이 떠도는 신세 강호에 오래 머무노니 / 身世飄零湖外滯
세월은 빨리 흘러 나그네 곁을 지나가누나 / 年光倏忽客邊遒
백성들 도탄에 빠지니 간장은 끊어질 듯하고 / 生靈塗炭腸堪斷
국사에 대해 말이 없으니 혀는 감옥에 갇힌 듯 / 國事無言舌似囚
회포는 그야말로 향수에 젖은 것과 같은데 / 懷抱正同思故土
객지생활 다행히 함께 당주에 있었어라 / 橐囊幸共賴唐州
꿈속에서 아스라이 멀리 선영을 찾아가 / 迢迢客夢尋先壟
시름에 잠긴 나그네 혼 옛 동산 맴돌았네 / 黯黯羇魂繞某丘
옛 집터에 돌아오매 슬픔을 견디지 못해 / 迹返故墟悲不耐
황량한 주춧돌 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지 / 眼隨荒砌淚無休
동쪽 이웃집 버려진 우물엔 이끼만 자욱하고 / 東隣癈井封苔蘚
북쪽 거리엔 시체가 가득 해골만 널려 있어라 / 北巷塡屍亂髑髏
벽에 남은 책들을 잿더미 속에서 거두고 / 壁上餘書灰裏拾
풀 속에 뒹구는 깨진 기왓장을 빗속에 주워모은다 / 草間壞瓦雨中收
종묘사직 회복하도록 신명이 도와주시니 / 重恢宗社神明佑
이 나라 새로 일으킨 건 성상의 계책일세 / 再造寰區聖主猷
종들은 흩어지고 없으니 반가이 모일 수 있으랴 / 僮僕散亡焉得歎
자손들을 보전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 子孫全保復何求
산 사람 위문하고 죽은 사람 조문하매 성은이 넉넉하고 / 問生弔死燕恩浹
과부 보살피고 홀아비 돌보아 훌륭한 정치 폈어라 / 恤寡哀鰥漢政修
유해가 된 군사 측은히 여겨 보상금을 넉넉히 주고 / 師惻遺骸酬帛歛
전쟁 겪은 땅 불쌍히 여겨 조세 많이 감면해 주었지 / 地矜經戰免租優
훗날 우리 동국이 장차 소생할 것이니 / 他年東國將蘇息
지금 관서 지방에 군사 깃발이 거두어졌네 / 今日西關卷旆斿
수자리 서는 군졸들은 창칼 갈무리한 채 구름을 갈고 / 戍卒耕雲藏劍戟
건장한 남아들은 투구 벗고서 한가로이 휴식하리라 / 健兒休養解兜䥐
강산은 아득한데 변방에는 경보를 알려오는 사람 없고 / 江山漠漠邊無使
들판의 보리는 푸릇푸릇 거리에는 아이들 동요 소리 / 野麥靑靑巷有謳
나라 걱정에 이내 작은 충정이 속절없이 격할 뿐 / 憂國寸誠空自激
적을 무찌를 삼략을 얻을 길이 실로 없구나 / 殲戎三略實無由
강호에 사는 이 늙은이 끝내 어디에 쓰리오 / 江湖老叟終何用
세상 밖에서 남은 생애 낚시질로 보내리라 / 物外餘生寄釣鉤

차운 오상. 계유년(1633, 29세) 진사시에 두양과 동방 급제하였다 [次韻 吳尙 癸酉進士斗揚同榜]
안연의 표주박 한 즐거움에 도가 이미 넉넉해 / 一樂顔瓢道旣周
세간은 명리 따위에는 고개 돌리지 않으시네 / 世間名利不回頭
초가집 처마에 해는 긴데 금서가 고요하고 / 茅簷日永琴書靜
집 앞 거리엔 사람 드물고 초목만 우거졌어라 / 門巷人稀草木稠
마음은 청풍에다 제월과 같이 맑고 / 心似淸風兼霽月
정신은 용포와 인주에 한가로이 노니네 / 神遊龍圃與麟洲
산수에 평소부터 살아온 터라 그 속에서 늙어가나니 / 溪山有素身將老
물고기와 새에 기심을 잊으매 흥취 더욱 그윽하여라 / 魚鳥忘機興轉幽
구름 가에 옥을 심으매 아침 해가 저물고 / 種玉雲邊朝日晩
숲 속에서 차 달이니 저녁 연기 피어오른다 / 煮茶林下夕烟浮
자취를 감추려니 매양 세상이 좁은 게 한스럽고 / 藏蹤每恨塵寰窄
옛날을 생각하며 속절없이 성인의 길이 멂을 슬퍼한다 / 思古空悲聖路悠
젊은 날 뛰어난 재주로 좋은 정치 이루길 기약했는데 / 少日才華期致澤
만년에는 시 읊고 술 마시며 풍류나 즐기시네 / 暮年詩酒屬風流
반계에서 어찌 주왕이 사냥 나오길 바라리오 / 磻溪詎望周王獵
율리에서는 진사의 짝이 되기에 충분하여라 / 栗里堪爲晉士儔
마치 공자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공부하니 / 如在孔門承訓誨
곧 문학이 상유를 능가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 卽看文學邁商游
뛰어난 문학의 재능 집안 대대로 이었으며 / 升堂翰墨傳家美
술상을 차려 놓고서 손님들을 불러들이네 / 斗酒盃盤見客謀
한 쌍의 나막신으로 매양 눈 덮인 남악 지나가고 / 雙屐每穿南嶽雪
하나의 낚싯대 때로 가을 옥담에 던지누나 / 一竿時擲玉潭秋
일곱 개 보배 구슬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따르고 / 七枚寶璧隨祥雲
한 쌍의 금빛 연꽃은 사람들 눈 부비고 본다 / 雙朶金蓮拭衆眸
대숲에다 집을 지었는데 색동옷 나란하고 / 家作竹林聯彩服
하늘을 도는 북두성이 동쪽 누각에 모였어라 / 天回北斗聚東樓
조숙한 덕이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내 아노니 / 吾知夙德由天性
신명이 고문을 돌보아 복록으로 보답하리라 / 神眷高門以福酬
무릎을 안고서 속절없이 제갈량처럼 노래하고 / 抱膝空勞諸葛嘯
시국에 상심하여 늘 범중엄처럼 몹시 근심하네 / 傷時恒切仲淹憂
병자년 난리 때의 고난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 追思丙子艱虞事
금구가 오랑캐에게 짓밟힌 사실 어이 차마 말하랴 / 忍說金甌羯狗蹂
한 모퉁이 외로운 성이 적의 공격 받을 제 / 一隅孤城方受箭
오경에도 차가운 성가퀴에는 북소리 그치지 않았지 / 五更寒堞不停枹
곰과 범 같은 장졸들 부르짖는 소리에 산이 찢어질 듯 / 熊咆虎吼山將裂
멧돼지 고래처럼 돌격해 오니 바다도 시름에 여윌 듯 / 豕突鯨奔海亦瘦
밝던 해도 빛을 잃어 하늘은 흐릿한데 / 白日無光天漠漠
슬픈 바람 피비린내 풍겨오고 비는 부슬부슬 / 悲風吹血雨颼颼
산천은 죄다 병사 주둔하는 곳이 되어 버리니 / 林泉盡入屯兵地
원숭이와 학은 속절없이 임금 연모하는 정 많아라 / 猿鶴空多戀主愁
한 달 동안이나 피난하며 쇄미한 신세 슬퍼하니 / 跋涉三旬悲瑣尾
전란의 먼지 자욱한 천 리에 창칼이 뒤덮었어라 / 烟塵千里蔽干矛
고향은 아득히 멀어 산은 첩첩 천 겹인데 / 鄕關杳杳山千疊
외로운 섬 망망한 바다 한 귀퉁이에 있었네 / 孤島茫茫海一陬
그곳에서 일백 식구 무사한 게 참으로 다행 / 百口無殤眞所幸
호공이 가졌던 비결을 홀로 훔칠 수 있었던 게지 / 壺公有訣獨能偸
고향 두곡은 잡초만 무성해 황폐해졌으니 / 蓬深杜谷成塵迹
학이 요양에 돌아오매 옛일에 감회가 일어라 / 鶴返遼陽感舊遊
하늘의 뜻 은연중 사람의 일에 호응하고 / 天意暗隨人事應
순박한 풍속은 날로 세월 따라 사라져 가네 / 淳風日逐歲華遒
진나라 관문에서 그 누가 닭 울음 흉내를 낼까 / 秦關孰效鷄鳴術
연옥에는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갇혔어라 / 燕獄猶多漢節囚
꿈속에서도 슬픔이 일어 세도를 보노니 / 夢裏興哀看世道
도성에 계신 임금님 소식 알 수 없어라 / 日邊消息阻皇州
천추에 이어온 예악 문물 어디로 사라졌나 / 千秋禮樂歸何地
당대의 영걸들 중년 나이에 땅 속에 묻혔네 / 一代勳英半世丘
남쪽은 두렵고 북쪽은 걱정돼 갈 곳이 없나니 / 畏南憂北無處適
군사 검점하고 군량 실어나르는 일 언제나 그칠꼬 / 點軍輸粟幾時休
오직 변방의 노인처럼 그저 운명에 맡기고 / 唯從塞老安時命
다시금 장공이 해골을 베고 누운 것 배우노라 / 更學莊翁枕髑髏
천 섬의 한가한 시름을 잔의 술로 씻을 수 있고 / 千斛閑愁盃可滌
만 숲의 경치는 붓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어라 / 萬林雲物筆能收
도사와 함께 도 닦는 비결을 얘기하고 싶을 뿐 / 思携羽客談眞籙
금문에서 큰 문장을 지어 올리길 원치 않는다 / 不願金門獻壯猷
다행히도 내가 공의 마을 근처에 사는 터라 / 幸我卜居仁里近
의기투합하는 사귐을 일찍이 이정에서 찾았지 / 神交早向鯉庭求
아양곡 속에서 마음을 서로 허여했고 / 峩洋曲裏心相許
난옥이 모인 속에서 학문이 이미 닦였어라 / 蘭玉叢中學已修
일산 기울이매 매양 친밀한 정에 기쁘고 / 傾蓋每欣情意密
침상 아래 절하고 넉넉한 예우를 받았었지 / 拜床仍荷禮容優
종횡하는 문장은 창칼을 가득 벌여놓은 듯 / 縱橫筆陣森戈戟
문단에 우뚝하여 깃발을 높이 세웠으니 / 崷崪詞壇建旆斿
만 마리 말이 발굽 모으매 마구(馬具)가 삼엄하고 / 萬馬攢蹄嚴韅靷
일천 군인 무기 잡으니 갑주(甲冑)가 정연하여라 / 千軍執銳整兜䥐
훗날 악부에서 새 시편들 고를 때 / 他年樂府調新律
응당 이소와 함께 초나라 노래에 들리라
/ 應共離騷入楚謳
주신 시편에 답하지 못해 도리어 부끄러운데 / 辱贈未酬還自愧
새로 지은 시편을 보고 싶은들 무슨 수로 보리오 / 新篇欲覩更何由
남쪽 교외 달 밝은 밤에 자주 머리를 들고 / 南郊月夜頻擡首
창 밖에 성근 발을 드리우지 않고 달빛을 본다오
/ 窓外疎簾不下鉤


 

[주D-001]가돈(嘉遯) : 〈돈괘(遯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아름다운 은둔이니, 바르므로 길하다.[嘉遯 貞吉]” 하였다. 이는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중정(中正)한 도리에 맞게 하여 은둔하는 것으로 매우 좋은 은둔이 된다.
[주D-002]형문(衡門) : 원래 나무를 가로로 걸쳐서 만든 소박한 문인데 후세에는 은사(隱士)의 집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여! 편안히 살 만하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하였다.
[주D-003]화사(花社) : 우화사(雨花社)의 준말로 절의 이칭이다. 석가(釋迦)가 설법을 하니 하늘에서 천신(天神)이 꽃비를 내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중울(仲蔚) : 한(漢)나라 때 사람인 장중울(張仲蔚)을 가리킨다. 그는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거처하는 곳에 쑥대가 우거져 사람이 파묻힐 정도였다 한다. 《三輔決錄》 자신을 장중울에 비긴 것이다.
[주D-005]도잠(陶潛)의 거리 : 자신이 사는 곳을 은자가 사는 거리에 비겼다. 도잠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다. 그의 〈잡시(雜詩)〉에 “사람이 사는 지역에 집을 지었건만,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 없어라.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와 머니 지역이 절로 외지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한 것을 차용하였다.
[주D-006]반곡(盤曲)은 …… 굽었으며 : 반곡은 골짜기 이름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작자 자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태항산(太行山) 남쪽의 반곡으로 돌아가는 벗 이원(李愿)을 전별하는 뜻에서 지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란 글에서 그곳의 낙토(樂土)임을 누누히 말하고 그곳의 지형을 말하면서 “휘감아 돌고 굽었으니 갔다가 돌아오는 것 같다.[繚而曲 如往而復]”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D-007]도원(桃源)은 …… 그윽해라 : 마을을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긴 것이다. 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떤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사꽃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만났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즉 마을이 깊은 산골이라 찾아가는 길이 바깥 세상과 끊어져 더욱 고요함을 형용한 것이다.
[주D-008]삼천 길 백발 : 이백(李白)의 시 〈추포가(秋浦歌)〉에 “백발이 삼천 길이나 되니, 시름 때문에 길어진 듯하여라. 알지 못하겠네 밝은 거울 속, 어디서 가을 서리를 얻었는고.[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하였다.
[주D-009]일만 섬 시름 : 인생의 많은 근심을 형용하였다. 유신(庾信)의 〈수부(愁賦)〉에 “일촌 크기 마음을 가지고, 만곡의 많은 시름을 담는다.[且將一寸心 容此萬斛愁]” 하였다.
[주D-010]장경(長卿) : 전한(前漢)의 문장가로 대표적인 부(賦)의 작자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이다.
[주D-011]자건(子建) :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 식(植)의 자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이 높아,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천하의 재주는 모두 한 섬인데 조자건(曹子建)이 혼자서 여덟 말을 가지고 내가 한 말을 가지고 천하 모든 사람들이 한 말을 나누어 가졌다.” 하였다. 《釋常談 八斗之才》
[주D-012]금란(金蘭) :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하여 매우 두터운 우정을 뜻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3]교칠(膠漆) : 교칠은 아교와 옻인데, 이 둘을 합하면 매우 견고하게 붙는다. 후한(後漢) 때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우정이 매우 두터우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阿膠)와 옻[漆]을 섞으면 굳게 붙는다지만, 그래도 뇌의와 진중 두 사람의 우정만큼 굳지는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 하였다.
[주D-014]때로 …… 더럽히고 : 와력(瓦礫)은 깨진 기왓장과 자갈, 즉 매우 보잘것없는 물건을 뜻한다. 여기서는 자신이 지은 시(詩)를 가리킨다. 즉 자신이 상대방에게 시를 보내는 것을 겸사로 말한 것이다.
[주D-015]매양 …… 하였지 : 상대방이 좋은 시를 보내주었음을 말한다. 경거(瓊琚)는 보배로운 구슬로 좋은 시문을 뜻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주D-016]용순(龍脣) : 거문고를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순숙(荀淑)은 자가 계화(季和)인데, 용순이란 거문고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던 날 잃어버렸다. 3년 뒤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던 날 흑룡(黑龍)이 날아서 이응(李膺)의 방에 들어왔다. 이응이 자세히 보고는 “순계화(荀季和)의 구물(舊物)이다.” 하고 순숙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순숙이 다시는 날아가지 못하게 등에 금으로 글씨를 새겨 “유루(劉累)로써 누른다.”하고 비룡(飛龍)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說郛》 유루는 고대에 용을 잘 길들이는 사람이다.
[주D-017]먼지가 …… 어두워지고 : 변방에서 난리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즉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옥새(玉塞)는 한대(漢代)에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던 옥문관새(玉門關塞)의 약칭으로, 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삼정(三精)은 해, 달, 별이다. 《문선(文選)》 〈후한서광무기찬(後漢書光武紀贊)〉에 “구현에 회오리바람이 일고 삼정은 안개가 끼어 깜깜하였다.[九縣飆廻 三精霧塞]” 하였는데, 천하가 매우 혼란함을 뜻한다.
[주D-018]말이 금하(金河)를 건너니 : 청(淸)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음을 뜻한다. 금하(金河)는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는 강으로, 현재의 이름은 대흑하(大黑河)이다. 북방 교통의 중심지였다.
[주D-019]학가(鶴駕) :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왕세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20]기미(羈縻)의 계책 : 적국과 적당히 친선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외환을 막는 방책이다.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난촉부로(難蜀父老)〉에 “대개 천자가 이적을 다루는 것은 그 이치가 기미의 방책을 써서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일 뿐이다.[蓋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而已]” 하였다. 청나라에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을 볼모로 보낸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원수인 청나라와 적당히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주D-021]남은 …… 고깃점 : 객지의 처량한 신세를 뜻한다. 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나귀 타고 삼십 년 동안, 장안의 봄을 나그네 신세로 살아 왔네. 아침이면 부잣집 문을 찾아가고, 저녁이면 살진 말의 뒤를 따랐어라. 남은 술과 식은 고깃점, 가는 곳마다 남몰래 몹시 서러웠네.[騎驢三十載 旅食京華春 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盃與冷炙 到處潛悲辛]”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2]칡이 모구(旄丘)에 굵으니 : 모구는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이다. 《시경》 〈모구편(旄丘篇)〉에 “모구의 칡은 어쩌면 이리도 마디가 굵어졌는가.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시일이 걸리는가?[旄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也]” 하였다. 이는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음을 원망한 것이다. 여기서는 타향에서 오래 피난했음을 뜻한다.
[주D-023]외가 기협(夔峽)에 생기니 : 기협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삼협(三峽)의 이칭이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안사(安史)의 난 때 피난하여 이 지역에 살았다. 당시에 지은 해민(解悶) 12수 중 셋째 수에 “한 번 고향을 떠나 십년이 지나니 매양 가을 외를 보면 고향을 그리워한다.[一辭故國十經秋 每見秋瓜憶故丘]” 하였다. 역시 고향을 떠나 피난하고 있는 신세를 비유하였다.
[주D-024]모임을 …… 울었지 :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나라 죄수[楚囚]는 본디 춘추시대 초(楚)나라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정인(鄭人)에 의해 진(晉)나라에 잡혀가서 갇혀 있을 때 진 혜공(晉惠公)이 그를 불러다가 여러 가지 일을 물어보고 그에게 거문고를 주었더니,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고향인 초나라의 음악을 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5年》 신정(新亭)은 정자 이름이다. 진(晉)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천도(遷都)했을 때에 당시 인사들이 한가한 날이면 신정에 나와서 술을 마셨다. 주의(周顗)가 그 가운데 앉았다가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보매 산하가 다르구나.”라고 탄식하니, 모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왕도(王導)가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응당 함께 왕실과 협력하여 중원을 회복해야 할 것이지, 어찌 초수처럼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하였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주D-025]타향은 …… 아니라 : 중국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있을 때 성루(城樓) 위에 올라가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나의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 하였다.
[주D-026]주현(朱絃) : 붉은 현(絃)으로 거문고 줄을 뜻한다. 여기서는 거문고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청묘의 슬은 붉은 현으로 되어 있고 소리가 느릿하여,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여 여음(餘音)이 있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嘆 有遺音者矣]” 하였다.
[주D-027]자극(紫極)에서는 …… 생각하고 : 임금이 숨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고심함을 뜻한다. 자극은 황제의 궁궐이다. 천제(天帝)는 자색(紫色)의 궁궐에 거처한다 하여 궁궐을 자미궁(紫微宮), 자궁(紫宮), 자달(紫闥) 등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측루(側陋)는 요(堯)임금이 사악(四岳)의 신하에게 인재를 구하기를 당부하면서 “이미 지위에 있는 사람도 드러내 밝히고 미천한 사람도 들어서 쓰도록 하라.[明揚側陋]” 한 데서 온 말로, 숨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書經 堯典》
[주D-028]단루(丹樓)에서는 …… 물었어라 : 역시 임금이 신하들에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뜻한다. 단루는 붉은 칠을 한 누각으로 궁궐을 가리킨다. 전석(前席)은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신하 가의(賈誼)와 얘기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을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방구(旁求)는 《서경(書經)》 〈태갑 상(太甲上)〉에 “두루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후인을 깨우쳐 인도하셨다.[旁求俊彦 啓迪後人]” 한 데서 온 말로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을 뜻한다.
[주D-029]조두(刁斗) 소리 : 변방의 경보(警報)를 뜻한다. 옛날 군중에서 야경을 돌 때 쓰던 바라로 낮에는 이로써 밥을 짓고 밤에는 이로써 야경(夜警)의 딱따기로 사용하였다.
[주D-030]철마(鐵馬) : 철갑(鐵甲)을 입힌 전마(戰馬)이다.
[주D-031]황하 맑음 : 어진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뜻한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나온다.[黃河淸而聖人生]”고 하였고, 그 주(註)에 “황하는 천 년 만에 한 번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그때에 나온다.[黃河千年一淸 淸則聖人生於時也]” 하였다.
[주D-032]바다로 들어가는 노래 : 바다에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옛날에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는 사람들이 신선을 찾아 바다로 갔던 것이다. 즉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러 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주D-033]한 …… 늙고 : 방공(龐公)은 후한(後漢) 말엽 양양(襄陽)의 고사(高士)인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였다. 벼슬길에 나오라는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청을 거절하고 훗날 처자식을 거느린 채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小學 善行》
[주D-034]백 …… 한가로워라 : 사마(司馬)는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사는 집을 독락원(獨樂園)이라 하고 화초를 가꾸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古文眞寶 後集 獨樂園記》
[주D-035]안영(晏嬰)처럼 오래 공경함 : 벗과 오래 사귀면 친압(親狎)하기 쉬운데 늘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영은 춘추시대 때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차례로 섬긴 제(齊)나라의 명상(名相)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도다. 오래되어도 공경하는구나.[子曰 晏平仲 善與人交 久而敬之]”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36]관중(管仲)의 …… 벗 : 춘추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어려서부터 서로 친구 사이였다. 포숙은 관중의 어짊을 잘 알아주었지만, 관중은 워낙 빈곤(貧困)하여 포숙을 항상 속이곤 했다. 그러나 포숙은 끝까지 관중을 믿어주어, 뒤에 관중이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하였다. 여기서 관포지교(管鮑之交)란 고사가 생겼다. 《列子 九命》 즉 옥담을 포숙과 같은 좋은 벗이라 말한 것이다.
[주D-037]금귀(金龜) : 벼슬아치가 차는 거북 모양으로 된 인장이다.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이 이백(李白)을 만나 서로 뜻이 맞으니 금귀를 잡혀서 술을 마셨다 한다. 이백이 고인이 된 벗 하지장을 생각하며 지은 시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에 “금귀로 술을 바꾸어 먹던 곳에서, 벗을 생각하며 눈물로 수건을 적시네.[金龜換酒處 却憶淚沾巾]” 하였다.
[주D-038]조생(祖生)이 …… 노[楫] : 적을 소탕하리라는 결심을 뜻한다. 조생은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을 가리킨다. 조적이 예주 태수(豫州太守)로 있으면서 석륵(石勒)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자강을 건너다가 노를 치면서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강을 건널 때는 이 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자강 이남의 지역을 확보하였다. 《晉書 卷62 祖逖傳》
[주D-039]전장(田將)은 …… 않았네 : 잃은 강토를 회복할 장수가 없음을 뜻한다. 전장은 전씨(田氏) 장수, 즉 진(秦)나라 말엽 적성령(狄城令)으로 있던 전담(田儋)을 가리킨다. 그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종실(宗室)로 진나라가 혼란할 때 적성령으로 있다가 다시 제나라를 세웠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40]닭이 …… 않으니 : 용루(龍樓)는 한(漢)나라 때 태자가 거처하던 궁(宮)의 문 이름이다. 난리 중이라 경황이 없어 문안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D-041]학가(鶴駕) : 왕세자(王世子)의 행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왕세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42]군신들이 …… 있어라 : 한해(瀚海)는 사막(沙漠), 또는 북해(北海)를 이르는 말로 북방을 가리킨다. 음산(陰山)은 흉노족의 땅에 있던 산으로, 사철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한다. 현재 내몽고(內蒙古)의 자치구(自治區) 남쪽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내흥안령(內興安嶺)까지 뻗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신하들이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간 것을 가리킨다.
[주D-043]당주(唐州) : 진주(晉州)의 이칭이다.
[주D-044]구름을 갈고 : 송(宋)나라 관사복(管師復)이 숭산(崇山)에 은거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느냐?”고 묻자 “언덕에 덮인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못에 가득한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네.[滿塢白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는 은자(隱者)의 고답적인 생활을 형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변방에 전투가 없어 군사들이 한가로이 농사나 짓고 있음을 형용하였다.
[주D-045]삼략(三略) :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는 고대의 병서(兵書)이다.
[주D-046]안연(顔淵)의 표주박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 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여기서는 옥담(玉潭)의 삶을 형용하였다.
[주D-047]금서(琴書) : 거문고와 책으로 옛날 선비의 필수품을 뜻한다.
[주D-048]청풍에다 제월(霽月) : 성어(成語)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 하여 비가 온 뒤의 맑은 바람이 불고 달이 뜬 깨끗한 풍광을 뜻한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맑은 인품을 형용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9]용포(龍圃)와 인주(麟洲) : 모두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용포는 환룡포(豢龍圃)의 준말로 《습유기(拾遺記)》에 나오는 지명인데 하늘에서 향기로운 이슬이 내려 못을 이룬 것이라 한다. 인주는 봉린주(鳳麟洲)의 준말로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 나오는 지명인데 서해(西海)에 있다고 한다.
[주D-050]물고기와 …… 잊으매 : 자연 속에서 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형용하였다. 기심(機心)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교사(巧詐)한 마음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와 놀았는데 갈매기들이 그를 의심하지 않고 함께 놀았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갈매기 한 마리를 잡아 오라고 하여 바닷가에 나갔더니 갈매기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에게 기심(機心)이 생겼기 때문에 갈매기가 멀리한 것이다. 《列子 黃帝》 소식(蘇軾)의 시 〈강교(江郊)〉에 “낚시만 생각하고 고기는 잊고서, 이 낚싯대와 줄만 즐기노라.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며 사물의 변화를 완상한다.[意釣忘魚 樂此竿綫 優哉悠哉 玩物之變]” 하였다.
[주D-051]옥을 심으매 : 한(漢)나라 때의 효자인 양백옹(楊伯雍)은 낙양(洛陽) 사람으로 무종산(無終山), 즉 옥전(玉田)에 살면서 3년 동안 목마른 행인들에게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돌 한 되를 주면서 땅에 심게 하였다. 몇 년 뒤에 서씨(徐氏) 집에 딸이 있어서 옹백이 장가들고자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백옥 한 쌍을 폐백으로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옹백이 돌을 심었던 밭에 가서 다섯 쌍의 백옥 구슬을 캐서 바치니 서공이 딸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구름 속에서 용이 내려와 이들 부부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그 후손들이 밭 가운데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搜神記》
[주D-052]반계(磻溪)에서 …… 바라리오 : 반계는 강태공(姜太公)이 낚시질하던 곳이다. 주왕(周王)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강태공이 위수(渭水) 가의 반계에서 낚시질하다가 사냥을 나온 문왕을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다. 여기서는 옥담을 강태공에 비겼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세상에 뜻을 펴지 못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53]율리(栗里)에서는 …… 충분하여라 : 율리는 유명한 은사인 진나라 도연명이 살던 고향 마을 이름이다. 즉 옥담이 고향에 은거하여 한가로이 살아가는 모습을 진나라 은사 도연명에 비유한 것이다.
[주D-054]상유(商游) : 공자의 제자로 문학에 뛰어났던 자하(子夏)와 자유(子游)의 병칭이다. 자하의 이름이 상(商)이다. 공자가 제자들의 특장을 말하면서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이다.” 하였다. 《論語 先進》
[주D-055]일곱 …… 구슬 : 일곱 아들을 비유하였다.
[주D-056]한 …… 연꽃 : 두 딸을 비유하였다.
[주D-057]색동옷 나란하고 : 아들들이 부모를 잘 봉양함을 뜻한다. 춘추시대 초(楚)나라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은사(隱士)가 있었는데, 어버이를 모시는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稽古》
[주D-058]하늘을 …… 모였어라 : 별이 모인다는 것은 덕망과 재주를 갖춘 선비들의 모임을 뜻한다. 진식(陳寔)이 두 아들인 원방(元方)ㆍ계방(季方)과 손자 장문(長文)을 데리고 순숙(荀淑)의 집에 가자 하늘에 덕성(德星)이 모이는 상서(祥瑞)가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이것을 보고 “하늘에 덕성(德星)이 모였으니 500리 안에 현인(賢人)들이 회합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여기서는 옥담의 일곱 아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59]무릎을 …… 노래하고 : 큰 뜻을 펴지 못하는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양보음(梁甫吟)이란 노래를 지어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채 길게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포슬음(抱膝吟)〉이라고도 한다.
[주D-060]시국에 …… 근심하네 : 북송(北宋)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에 높이 있을 때는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멀리 있을 때는 임금을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 즐거운가. 반드시 천하가 근심하기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後集 岳陽樓記》
[주D-061]금구(金甌) : 금으로 만든 사발로 흠이 없고 견고하다 하여 강토(疆土)에 비유된다. 양무제(梁武帝)가 일찍 일어나 무덕각(武德閣)에 이르러 혼자 말로 “나의 국토는 금구와 같아 하나의 상처도 흠도 없다.” 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南史 卷62 朱异傳》
[주D-062]한 …… 성(城) : 인조(仁祖)가 농성하다가 청(淸)나라에 항복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주D-063]쇄미(瑣眉)한 신세 : 전란으로 유리(遊離)하는 신세를 뜻한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모구(旄丘)〉에 “자잘하고 자잘한 이 유리하는 사람이로다.[瑣兮尾兮 遊離之子]”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64]호공(壺公)이 가졌던 비결 : 후한(後漢) 때 호공(壺公)이라는 선인(仙人)이 시장에서 매일 약을 팔다가 석양이 되면 점포 머리[肆頭]에 달아놓은 병 속으로 뛰어들어가곤 하였다. 그것을 본 비장방(費長房)이 한번은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하나의 별천지(別天地)가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72下 費長房列傳》 여기서는 옥담이 두곡이란 곳에서 은거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65]학이 …… 일어라 : 옥담이 피난갔다가 고향에 돌아왔음을 뜻한다. 요양(遼陽)은 요동(遼東)이다. 한(漢)나라 때 요동에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영허산(靈虛山)에 가서 도술을 배운 뒤에 학(鶴)으로 변신하여 요동에 돌아와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떤 소년이 활로 자기를 쏘려고 하자, 학이 높이 날아올라 말하기를 “두루미로 변한 정령위가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구나. 어이하여 신선이 되는 법 배우지 않아서 죽어 묻힌 무덤이 여기저기 쌓였는고.” 하고 한탄하면서 하늘 높이 사라졌다고 한다. 《搜神後記》
[주D-066]진(秦)나라 …… 낼까 : 포로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을 구출할 사람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었다가 속임수를 써서 도망쳐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다. 그러나 함곡관은 닭이 울기 전에는 관문(關門)을 열어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한편 맹상군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진나라 소왕(昭王)은 사람을 시켜서 급히 맹상군을 쫓게 하였다. 닭이 울 시간은 멀었고 추격대는 바짝 뒤쫓아 오고 있는 터라, 상황이 몹시 다급하였다. 이 때 맹상군의 일행 중에서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내자 인근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 댐으로써, 마침내 관문을 열어 주어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주D-067]연옥(燕獄) : 조선의 충신들이 청(淸)나라 감옥에 많이 갇혔음을 뜻한다. 남송(南宋) 때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원(元)나라가 침입해 오자 가산(家産)을 털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고, 그 후 원(元)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수감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68]변방의 노인 :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쳐서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였는데, 그 노인은 태연하게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몇 달 뒤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 여러 마리를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였는데,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그의 아들이 말 타기를 좋아하여 그 말들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1년 뒤에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하자 장정들이 모두 나가 싸워 변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만은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 부자가 모두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 하였다.
[주D-069]장공(莊公)이 …… 배우노라 : 무상한 인생에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장공은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장자가 초(楚)나라로 가다가 해골을 만나서 말채찍으로 그 해골을 때리면서 묻기를 “자네는 삶을 탐하다가 도리를 잃어서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라를 망친 일 때문에 처형을 당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쁜 일을 하여 부모와 처자를 욕되게 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그 해골을 베고 누워 잤다. 밤중에 해골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자네의 말은 변사(辯士)와 같네. 그러나 자네가 말한 여러 가지는 살아 있는 사람의 허물일 뿐이요, 나처럼 죽은 사람은 그런 걱정이 없다네.” 했다고 한다. 《莊子 至樂》
[주D-070]금문(金門) :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대문인 금마문(金馬門)이다. 국가의 조칙(詔勅)을 작성하는 문학의 선비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
[주D-071]이정(鯉庭) : 자식이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는 곳을 뜻한다. 공자(孔子)의 아들 이(鯉)가 뜰에서 공자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가 공자로부터 시례에 대하여 배웠느냐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일에서 유래한다. 《論語 季氏》 여기서는 이 시의 작자 오상(吳尙)이 옥담의 아들과 벗이기 때문에 옥담의 가정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주D-072]아양곡(峨洋曲) : 벗끼리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을 뜻한다. 춘추시대 백아(伯牙)가 금(琴)을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 하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73]난옥(蘭玉) :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의 준말로, 남의 자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주D-074]일산(日傘) 기울이매 :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나 수레의 휘장을 기울이고 그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로, 잠깐 동안 이야기해 보고서도 마음이 통함을 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에 “공자가 담(郯)에 가다가 길에서 정본(程本)을 만나고는 경개(傾蓋)하고 종일토록 이야기하며 몹시 친밀해졌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75]침상 아래 절하고 : 존경하는 어른을 배알함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 제갈량(諸葛亮)이 방덕공(龐德公)을 찾아가면 반드시 방덕공이 앉은 침상 아래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생긴 말이다. 《資治通鑑》
[주D-076]악부(樂府)에서 …… 들리라 : 악부는 한(漢)나라 때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민간의 노래를 채집하기도 하였다. 〈이소(離騷)〉는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대시인 굴원(屈原)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즉 옥담의 시를 이소에 비겨 칭찬한 것이다.
[주D-077]주신 …… 본다오 : 옥담이 보내준 시편에 대해 화답하는 시편을 아직 보내지 못하다가 이제 시편을 보내지만 답하는 시편을 볼 길이 없으니, 멀리서 달빛을 보며 옥담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권5 잡록
육선생 화상 찬[六先生畵像贊] 주희(朱熹)



염계선생(濂溪先生)
도가 없어진 지 천 년에 / 道喪千載
성인이 멀어지고 그 말씀도 사라졌을 때 / 聖遠言堙
선각자가 있지 않았다면 / 不有先覺
누가 우리를 열어 주었겠는가 / 孰開我人
글로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 書不盡言
그림도 그 뜻을 다 하지 못하였네 / 圖不盡意
맑은 바람 밝은 달 끝없는 경계 / 風月無邊
뜰의 풀은 서로 어울려 푸르도다 / 庭草交翠

명도선생(明道先生)
태양처럼 온화하고 산처럼 우뚝하며 / 揚休山立
옥 같은 얼굴에 금(金) 같은 목소리 / 玉色金聲
원기가 응집하여 / 元氣之會
온전함 타고났네 / 渾然天成
상서로운 해와 구름 같고 / 瑞日祥雲
온화한 바람과 단비 같았네 / 和風甘雨
용덕(龍德)이 바른 자리에 있어 / 龍德正中
그 혜택 널리 베풀어졌도다 / 厥施斯普

이천선생(伊川先生)
규구(規矩)처럼 원만하고 방정하고 / 規員矩方
먹줄처럼 곧고 준(準)처럼 공평하였네 / 繩直準平
참으로 군자다운 분 / 允矣君子
실로 대성(大成)하셨도다 / 展也大成
포백(布帛)과 같은 문장 / 布帛之文
숙속(菽粟)과 같은 맛이로다
/ 菽粟之味
덕을 아는 이 드무니 / 知德者希
누가 그 귀함을 알겠는가 / 孰識其貴

강절선생(康節先生)
하늘이 인걸을 내놓아 / 天挺人豪
뛰어난 자질 세상을 뒤덮었네 / 英邁蓋世
바람을 타고 우레를 채찍질하여 / 駕風鞭霆
끝없이 두루 살폈네 / 歷覽無際
손으로 월굴(月窟)을 만지고 / 手深月窟
발로 천근(天根)을 밟았도다
/ 足躡天根
고요함 속에 고금을 넘나들고 / 閑中今古
취한 중에 건곤을 보았도다 / 醉裏乾坤

횡거선생(橫渠先生)
젊어서는 손자(孫子)와 오기(吳起)를 좋아하다가 / 早悅孫吳
만년에는 노불(老佛)에서 도망하였네 / 晩逃佛老
과감히 사석을 거두고 / 勇撤皐比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렀네 / 一變至道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 精思力踐
오묘한 비결 글로 썼네 / 妙契疾書
완고함을 바로잡은 가르침 / 訂頑之訓
나에게 광거(廣居)를 보여주었네 / 示我廣居

속수선생(涑水先生)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천하여 / 篤學力行
절개 맑고 높았네 / 淸脩苦節
덕 있고 말씀도 남겼으며 / 有德有言
공적이 있고 의열도 남아 있네 / 有功有烈
심의(深衣)를 입고 큰 대를 차고 / 深衣大帶
공손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가네 / 張拱徐趨
유상의 기풍 늠름하여 / 遺象凜然
경박한 사람 숙연하게 하네 / 可肅薄夫


 

[주C-001]육선생 화상 찬 : 《朱子大全》 卷85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1]맑은 …… 경계 : 송(宋)나라 황산곡(黃山谷)이 주렴계(周濂溪)의 인품을 칭찬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 하였다.
[주D-002]뜰의 …… 푸르도다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뜰의 풀을 뽑지 않고 “나의 의사와 일반이다.[與自家意思一般]” 하였다. 즉 뜰의 풀도 천지(天地)의 생생(生生)의 기운을 받은 것으로서 사람의 뜻과 같다 하여 깎지 않았다는 것이다. 《性理大全 卷39 ; 周子》
[주D-003]용덕(龍德)이 …… 있어 :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육효(六爻)를 변화가 신묘불측하다 하여 모두 용으로 상징하였는 바, 용덕은 훌륭한 덕으로 천자나 군자의 덕을 상징한다. 건괘 문언(文言)에서 “용의 덕을 가지고 중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龍德而正中者也]” 하였다.
[주D-004]준(準) : 수평을 재는 기구.
[주D-005]포백(布帛)과 …… 맛이로다 : 평범하면서도 절실한 것을 이르는 말.
[주D-006]월굴(月窟)을 …… 밟았도다 : 소강절이 음양을 궁구한 것을 통틀어 일컬은 말. 《주역(周易)》에서 하지(夏至)에 아래에서 한 음(陰)이 처음 생긴 것이 구괘(姤卦)로서 이를 ‘월굴(月窟)’이라 하고, 동지(冬至)에 한 양(陽)이 아래에서 처음 생긴 것이 복괘(復卦)로서 이를 ‘천근(天根)’이라 한다.
[주D-007]광거(廣居) : 마음을 인(仁)에 두는 것. 맹자가 “천하의 넓은 집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 하였다. 《孟子 膝文公 下》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四
 [記]
道峯書院李珥 a_022_095d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022_096a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仰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022_096b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槁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022_096c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022_096d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022_097a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022_097b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四
 [記]
道峯書院李珥 a_022_095d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022_096a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仰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022_096b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槁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022_096c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022_096d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022_097a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022_097b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年譜
[靜菴先生年譜] a_022_106a


皇明憲宗成化十八年 本朝康靖大王十三年 壬寅  八月丁亥。 十日▣時 先生生于漢城府▣▣洞之第。 而氣質淸粹。容貌端潔。人皆異之。十九年癸卯 先生二歲

 

二十年甲辰 先生三歲
二十一年乙巳 先生四歲
二十二年丙午 先生五歲
022_106b遊戲擧止。已有成人儀度。尤好習禮。稍見有非違者。雖在長上。必諷止之。乃已。
二十三年丁未 先生六歲
孝宗弘治元年戊申 先生七歲
二年己酉 先生八歲
三年庚戌 先生九歲
四年辛亥 先生十歲
五年壬子 先生十一歲
六年癸丑 先生十二歲
七年甲寅 先生十三歲
022_106c八年 燕山君元年 乙卯 先生十四歲
九年丙辰 先生十五歲
十年丁巳 先生十六歲
十一年戊午 先生十七歲
始從學于寒暄堂金先生之門
先生旣長。慷慨有大志。博學力行。時史禍大作。金先生宏弼。以佔畢齋門徒謫煕川。而參判公方爲魚川察訪。先生亦從行。素聞金先生學有淵源。遂稟命。往受業焉。金先生甚愛重之。先生自是。一以聖賢之學022_106d爲己任。○其在師門也。厲志定業。堅苦篤信。不違課式。晝講必切問。夜退必近思。鄙倍惰慢之容。未嘗暫設於身。以至記誦詞章之習。亦不少經於心。人或勸治擧子業。則輒以不嫺屬文辭。○金先生嘗得一雉。爲乾之。將送大夫人所。適被貓兒偸食。金先生盛責守婢。辭氣太過。先生進曰。奉養之誠雖切。君子辭氣。不可不省察也。小子竊有疑於心。故敢請。金先生起前握手曰。吾方自悔。而汝言又如此。吾不覺愧服也。022_107a且汝乃吾師。吾非汝師也。自後益加敬重。
十二年己未 先生十八歲
娶夫人韓山李氏 僉使允泂之女○未知何歲姑附于此
十三年庚申 先生十九歲
是歲。丁參判公憂。
凡哭泣衰絰之制。飮食起居之節。一遵朱文公家禮。自初喪。至終制。不敢少違。旣廬墓側。必對墓而坐。饋奠之暇。亦必循繞展省。冽寒暑雨不廢。雖有請見者。不與笑語。未嘗以他事出外。其於謹禮致哀。篤至如022_107b此。
十四年辛酉 先生二十歲
十五年壬戌 先生二十一歲
服闋。築室於龍仁先壟下。
先生旣除喪。哀痛不盡。乃卜於壟下。搆草堂數間。爲永慕之所。又開塘築階。種蓮柏二物。以資遊息焉。○奉養慈闈。執甘旨。謹溫凊。力行之餘。不輟讀書。以小學,近思錄,四書爲主。次及於諸經,性理群書,通鑑綱目。每鷄鳴。盥櫛。肅然危坐。平心易氣。俯讀022_107c仰思。思之未得。雖竟日終夜。期於有得。絶無自畫之念。眞積力久。德器成就。然猶以母自欺。謹其獨爲勉。蓋是時。史禍方逞。人見先生之爲。或稱狂者。或稱禍胎。親舊往往相絶。先生不屑也。
十六年癸亥 先生二十二歲
十七年甲子 先生二十三歲
十月。聞金先生凶訃。時寒暄堂已移配於順天。至是。因士禍再起。遂不免焉。
022_107d十八年乙丑 先生二十四歲
武宗正德元年恭僖大王元年 丙寅 先生二十五歲
自是。從學者甚衆。
是歲。中廟反正。盡革燕山虐政。士氣益厲。先生始以其學敎授諸生。遠近聞風。來學者甚衆。陶成振作之功。於斯爲盛。○有和終南副守昌壽詩。
二年丁卯 先生二十六歲
三年戊辰 先生二十七歲
四年己巳 先生二十八歲
022_108a五年庚午 先生二十九歲
春。中進士會試壯元。
以春賦送李存吾貶長沙監務詩占魁。考官驚賞不已。
夏。讀書于松都諸山。
五月。先生往遊天磨,聖居兩山。或遇奇絶處。輒徜徉行吟。蕭然有出塵之趣。擇其淸幽蓮社。入處靜讀。沈潛理義之奧。探賾經傳之旨。凝神端坐。兀若塑人。淡餐攻苦。與緇流共之。雖精進闍梨。皆以爲難及。凡對022_108b食如廁外。絶無閒刻。唯三更後五更前。爲脫衣就寢時也。平生用力於學。及此愈篤焉。至秋乃還。○時奇公遵往從之。先生謂曰。措大如是刻苦。不亦勞乎。蓋相長之言也。○先生嘗棲山寺。讀孟子浩然章。一月。乃得通解。
六年辛未 先生三十歲
是歲。丁母閔夫人憂。
致哀謹禮。一視前喪。
七年壬申 先生三十一歲
022_108c八年癸酉 先生三十二歲
九年甲戌 先生三十三歲
贈叔父 元紀 詩序
時文節公。方赴慶源。先生以詩贈之。勉厲甚至。
十年乙亥 先生三十四歲
春。讀書于砥平龍門寺。
先生携二三友人。結榻相討。晝夜忘倦。諸公皆自以爲不及。
夏六月。被成均館薦。
022_108d時先生名行表著。朝廷將大用。成均館有議薦之擧。文節公還書戒之。略曰。直之被薦。喜與憂騈。盛名之下。其實難副。有譽則有毀。此古今通患也。操履之愼於前。尤難。若色言狂驕。害己敗身之戒。則吾於孝直。不當警也。惟吾之所憂。則不在是也。凡人群居天地中。不可以高飛遠走。則必須小同於俗。庶免爲衆所嫉。昔杜祁公。嘗戒門人曰。切當韜晦。毀方瓦合。無露圭角。不然。無益於事。而祇足取禍爾。今吾之識。不022_109a及於杜之涯涘。而汝之知。有裕於杜之門人。則宜不以此警於汝也。然今之時與杜之時。又加邈矣。世路險巇。又加萬倍。吾之所戒。豈無所見而然耶。去秋四館之議。亦其一驗也。當時。不有一二君子沮而抑之。其能無窘於貶者之鋒耶。今聞被薦。而求免於選用。汝之心必以爲一繫名韁。恐不專所業而然也。然吾家自先祖。以廉謹自守。計不求足。而兄又早逝。汝之兄弟三人。俱業儒未成。仕不爲貧。而有時爲貧。爲貧022_109b之仕。豈非今也其時乎。以家貧親老。比不能專業。則爲有間矣。況前聖。以爵祿之辭。至比於蹈刃。凡人好事者。安知不以此爲矯情之誚耶。此吾所憂也。然則是擧。非喜也。乃所以憂之也。唯無咎無譽。眞所謂保身之道也。
銓曹啓請陞宣務郞準職
判書安瑭啓曰。趙光祖。明經術。有行義。爲成均首薦。若拘資格。不足以勸勵士林。請陞宣務郞。準主簿職。以觀其才行。從022_109c之。
除造紙署司紙
先生歎曰。吾本不以利達爲心。不料遭此意外事。必不得已。當由科擧。以通行道之階。若其用虛譽。的然於世。吾甚恥之也。
秋。中謁聖試第二名。
對孔子過化存神策
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
十一月。拜司諫院左正言。請罷李荇等職。從之。
022_109d先是。靖國之初。成希顏,朴元宗等。議廢王后愼氏。更立章敬王后尹氏。是年二月。誕元子薨。坤儀久闕。朝野疑懼。七月。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等上疏。請復愼氏。大司諫李荇等。指爲邪論。大司憲權敏手和之。請拿問。事將不測。左議政鄭光弼議啓曰。祥等。言雖不中。不可罪之。以妨言路。得止徒配。至是。先生拜正言。啓曰。言路之通塞。最關於國家。通則治安。塞則亂亡。朴祥等。當求言而進言。其言雖022_110a若過當。不用而已。何復罪之。臺諫乃復請罪。自毀言路。大失其職。臣今爲正言。豈敢與失職臺諫同事乎。不可相容。請罷荇等。復開言路。屢啓不已。上命盡遞兩司。獨出先生。直提學金安老等。更爲兩是之論。至謂光祖爲言路扶植。荇等爲宗社請罪。自是。廷議角立。互相攻斥。終爲士禍根本。
是歲。子定生。
十一年丙子 先生三十五歲
022_110b春。除戶曹佐郞。○遷禮曹佐郞,工曹佐郞。選拜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先生旣被擢用。銳意格君。遂以堯舜君民。興起斯文。爲己任。每當入講前夕。預加齊戒。將所講書。端坐熟讀。至曉。易服而進。及至上前。一心肅慮。如對神明。反復陳辨。冀必感動於聖聽。乃自天人性情之分。王霸義利之辨。以及修身致治之道。靡不罄竭極論。或至日昃。上亦虛心傾聽。朝022_110c野想望。以爲太平可致矣。
拜修撰。兼如故。
冬。製進戒心箴。
時上命弘文館。製進戒心箴。先生箴序曰。人於天地。稟剛柔以形。受健順以性。氣卽四時。而心乃四德也。故氣之大。浩然無所不包。心之靈。妙然無所不通。況人君一心。體天之大。天地之氣。萬物之理。皆包在吾心運用之中。一日之候。一物之性。其可不順吾度。使之乖戾邪枉耶。然人心有欲。022_110d所謂靈妙者沈焉。梏於情私。不能流通。天理晦冥。氣亦否屯。彝倫斁。而萬物不遂。況人君。聲色臭味之誘。日奏於前。而勢之高亢。又易驕歟。聖上是念是懼。命臣述戒。嗚呼至哉。遂居首。賜毛褥一坐。
十二年丁丑 先生三十六歲
正月。論弭災應天之道。
當筵。啓曰。天之示警有二義。危亡將至。迷而不悟。則天降災異。以譴告之。時事有可治之幾。而上下猶且遲疑。則亦出災異。022_111a使之警省加勉。當此之時。上下若不交修加勉。則天心無常。終必敗亡。可不懼哉。又進曰。君臣上下。須以至誠相孚。通暢無間。然後可以爲治。待大臣臺諫。當用是道也。且君相。常以保護山林爲心。使爲善者有所恃。而知其爲善。則表而用之。不使賢愚混淆。可見至治矣。
請召大臣侍從。商論祖宗舊典。
啓曰。祖宗舊章。雖不可猝改。然若有不合於今者。亦可變而通之。望於燕閒之022_111b中。不拘常例。召對大臣或侍從。論議其可否。可爲之事。則斷而行之。可也。又進曰。君子小人之辨。後世尤難。古者。人君接群臣。不啻如子弟之於父兄。故可以見事聞言。而知其人矣。今則進見有時。禮貌有規。雖不賢之人。入侍之時。修飾善言以啓。故辨之難矣。人君當更體念於此。心地旣明。則邪正不能遁其情矣。但人心操舍無常。若又以正事至言。爲拂逆而拒之。則衆君子皆引退矣。其後。雖欲正之。群邪已滿於022_111c左右。無所及焉。昔宋神宗。賢君也。以堯舜之治爲心。而擯斥司馬光。信任王安石。以致小人幷進。其後。欲斥安石而不可得。臣言實有深遠之慮矣。
二月。拜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當筵。啓曰。人主以唐虞三代爲期。未必卽致唐虞三代之治。然立志如此。而用功於格致誠正。則漸至於堯舜之治矣。若徒騖高遠。而不下實功。則日趨浮虛之地而022_111d已。又曰。人君之德。莫大於敬。內有實踐而後。下人觀感而興起焉。制事應物。如鑑空衡平。可也。人君容色端嚴。則宦官宮妾。亦將不得而近矣。
賜暇讀書於東湖
七月。陞應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勘。
八月。陳啓。請贈金宏弼爵諡。從祀文廟。不許。
先是。啓曰。今之學術甚壞。館中諸生。立022_112a志甚卑。未見人才之傑特者。士習頹靡。莫大之患也。變化之道。豈無其力。如金宏弼,鄭汝昌者。極加褒奬。則可矣。至是。館學儒生上疏。請鄭夢周,金宏弼從祀文廟。先生亦與副提學金淨等啓曰。金宏弼。性度溫毅。才識明敏。少有大志。力學聖賢。忠信篤敬。動遵禮義。學問精深。道德成立。奮乎絶學。爲世儒宗。其有功於斯文。大矣。請隆爵尊諡。從祀文廟。以明士趨。
請褒贈成三問,朴彭年及深源。
022_112b當筵。啓曰。金宏弼,鄭汝昌事。已議於大臣。成三問,朴彭年等。亦當幷議。此大公至正之意也。且朱溪副正深源。年二十餘歲。深知姑夫任士洪奸狀。乃請面陳於成宗曰。此他日敗國亡家之人。不可苟容於朝。仍痛泣流涕。厥後。成宗不能遠斥。幾致敗國之禍。其忠言直節。斷可知矣。又曰。三問等。當時。已許身於魯山。故不失其志操如此。若委質於世祖。則亦當爲其忠臣。忠臣義士。已定君臣之分。則更不他022_112c適故耳。斯人忠義。自當萬古不泯。臣等敢請褒揚於今日者。欲勵人臣之志操也。
論鄭夢周從祀
時朝廷始許鄭夢周從祀。大臣引他說以難之。先生啓曰。辛禑之爲王氏與否。當時之人。亦不明知。夢周。本非求功名富貴於辛禑者也。況冊立恭讓之後。乃爲死節。其賢。蓋可想已。昔者。狄仁傑事武后。而終復唐室。安知夢周不以狄公之心爲心乎。高麗五百年宗社。在於一人之身。其身022_112d亡。而宗社卽亡。今何可輕議此人乎。
陞典翰。兼如故。陳啓辭。且請外補。不許。
啓曰。小臣有志於學問。而不能實用其力。職任漸重。心自內愧。私語同僚曰。聖學高明。方有意治理。而如我濫廁侍從。豈可自安乎。當退而力學。學問成就。然後來仕。則必有絲毫之補矣。臣意又謂。乞補僻郡五六年。治民之暇。致意於學術。則治民治學。庶乎兩全。而小臣有意。未敢仰達。又爲典翰。人器不合。與前立志。大不同矣。不次022_113a之恩。豈可冒處乎。
十三年戊寅 先生三十七歲
正月。論經筵坐講。
啓曰。我國。君臣之分隔絶。邇來。屢敎講官平氣以坐。而群臣不知上意之誠否。故未能猝變舊習。以此觀之。習俗之難變。固矣。貞熹王后臨朝時。群臣莫敢仰視。循成此習。若成廟朝。則豈有如此事乎。廢朝。沈順門。以仰視被罪。積威之極。群臣震懾。今之俯伏。亦廢朝之餘習也。
022_113b請不時召對群臣
啓曰。學問。當及時勉勵。苟至於志氣衰暮。則無益也。今値可御經筵之日。亦云。有故而不御。未知內間別有何事乎。雖不御經筵。而不時召對。亦可也。今之接對群臣。只有經筵而已。如臣等。雖無知識。思所以竭誠裨補聖學。則豈無少益乎。殿下卽位已久。不見治效。而災變荐作。士習日頹。朝廷之上。亦無可稱之事。今若不定此習。則人心何時而可變。至治何時而022_113c得見乎。古云。靡不有初。鮮克有終。有始有終。人主之所當勉力者也。天下之勢。不進則退。若遲疑則天變人心。恐不可測也。
超拜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以病辭。不許。
先生會墜馬。病甚。移告。上命遣醫問疾。藥餌交道。未幾獲瘳。
進講大學誠意章。因論修己治人之道。
先生因文。啓曰。古云。至誠感神。又曰。不誠。無物。君之遇臣。臣之事君。皆以誠實。則022_113d治化。可期其成也。我國。地方褊小。人君發一言。則入道之人。一朝皆得聞知。惟當於大臣則敬之。於群臣則體之。百工則來之。庶民則子之。患吾之所以遇臣愛民者有未誠耳。不患其難化也。近來。士氣稍稍振起。民之趨向。亦漸好矣。惟願自上。日加愼獨。誠實工夫。終始不渝。則治化可臻矣。所謂三代之治。今可復致者。雖不可易言。豈全無致之之道乎。自上。先養己德。推之行事。則人皆誠服。不期化而自化矣。若022_114a吾德不修。而修飾於事爲之間。則亦何益乎。須敦厚其德。使萬化自明德中流出。則下民自然觀瞻欣感。有不能已者矣。又非但拱手以守其德而已。必以禮樂刑政。提撕警覺。布置設施。如有可爲之事。當振奮而力行也。
二月。論東漢黨錮事。因請培養士氣。
啓曰。自古。正直之流。盛行於世。則必有大禍隨其後。是故。深於自謀。周於涉世者。不敢抗志直言。以召怨怒。而低回俯仰。周旋022_114b彼此。保其身。全其妻子者。蓋多。此非委質憂國之人也。夫不顧其身。惟國是謀。當事敢爲。不計禍患者。正士之用心也。今之侍從臺諫。豈眞如古之人乎。雖有爲善之人。或慮其終被禍患。而閭閻之間。亦皆以爲大禍必生於朝夕。蓋其懲於前者。深也。今之培養。豈可少忽乎。大臣與小臣。在上前。小臣言之而非者。大臣可以折之。退而在外。言之而非者。大臣亦可以開喩也。但無私心而已。大小之臣。相和如一家。則天022_114c地交泰。而萬物生遂矣。
論義利之辨
啓曰。人主於義利公私之辨。不可不明審也。苟能知義利公私之辨。而不惑焉。則內外修而心地淸。是非好惡。皆得其正。而至於處事接物。無不當矣。
論貢物之弊
啓曰。殿下卽位十餘年。士習漸化。今則庶人。亦有以禮居喪者。士習正。則民生得遂矣。我國田稅。三十之一。而貢物則過多。022_114d以此。民生日困。經費之用。量宜裁減。然後庶可安民矣。國之法制。雖不可輕改。然學問高明。洞照事理。則與大臣同心協力。可損者。損之。可益者。益之。期致於隆平而後已。此正遵守祖宗之成憲者也。又曰。守令賢。則民受一分之惠。然不改規模。而徒責其事爲之末。則治不效矣。今觀各邑之貢。土產不均。又皆防納。一升之納。徵以一斗。一匹之納。徵以三匹。因循積弊。至於此極。朝廷豈不爲生民計也。若於民事有合。022_115a則亦可因其祖宗之法。而改其規模。如此而勵精求治。則可見治道之美矣。
論擇初入仕官
啓曰。擇士。當於入仕之初。若擇之於旣用之後。則吁亦晩矣。庶僚雖多。而無可用之才者。正坐於此弊。若於其初。審取舍。辨賢否。則仕路自趨於正矣。
請謹特旨除官
啓曰。特旨除官。固善。然好惡之發見處。幸有不合於朝議。則未可也。
022_115b請嚴賄賂之禁
啓曰。成宗朝。尙寬厚之政。至如奸贓之罪。或多寬之。賄賂之行。蓋始於是時也。在世宗朝。如萬戶等官。亦皆以廉潔相尙。士習之邪正。治道之汚隆。因此可見也。今世。此弊雖未至甚。必須隨事痛治之。少有所犯。使不得立朝。則人知可畏。而各自砥礪矣。
五月。移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022_115c當筵。啓曰。學者。雖處靜中。用功亦難。況人主。深居九重。萬機浩繁。安能如學者處靜中。與朋友討論之功乎。今於經筵。雖得進講。君臣之間。名威隔絶。上有所言。未能盡諭於下。下有所懷。未能盡達於上。如是遷延。歲月易過。幾不可失。若聖學高明。則不必但以講問爲主。幸於思慮之間。或有未穩之事。有時召侍從之臣。論難可否。則情意可通也。但好善之心。不出於誠篤。而徒爲文具。則間亦有垂隙而窺測者022_115d矣。○右承旨金淨啓曰。趙光祖在經幄。輔益弘大。物議咸以爲稱職。承旨。喉舌之地。固當擇任。亦可入侍論難矣。然不若專主其任也。臣得同任。固幸矣。但計其輕重而啓之耳。居數日。移長玉堂。
復拜弘文館副提學。兼如故。
乞暇。省墓于龍仁。
是月十六日。上親政。忽地震三度。殿宇搖撼。先生方在鄕。驚曰。今日。沈貞必判秋曹矣。果然。時安瑭亦陞右相。上以災異。延022_116a訪宰執。禮曹參判曺繼商啓曰。此輩。不有人禍。必有天刑。蓋指右相一隊也。臺諫遂論繼商之罪。先生還朝。亦極言繼商罪。貞則已被論遞矣。
七月。上疏。請罷昭格署。從之。
時臺諫請罷昭格署。累月不允。弘文館亦逐日論啓。先生遂上疏。極陳道治一純之致。繼陳昭格訓邪之失。且曰。殿下寅畏天命。祇懼丕基。孜孜學問。虞夏皇王之道。探究體認。凡所以抑詭類。拔正道者。022_116b靡不用極。而獨此一事。唯蔽聖明。將除而復信。欲革而還疑。大失乾剛精粹之德。臣等猶恐殿下之心。其於精一之功。或有所未至也。一則直方。而守義理之正。精則粹白。而卞邪正之分。用之於身而道明。施之於事而政善。惟左惟右。罔有不一之功。苟或未盡。邪念潛藏。引類暗長。以至衆僞朋興。而側媚邪佞之徒。又因緣交締。則將來之禍。有不可勝言。臣等正爲此懼焉。因進曰。近日。官中降香外方等事。皆上022_116c所不知也。夫以格致誠正之功。推而至於治國平天下。宮中之事如此。則聖明格致誠正之功。可謂未盡矣。一心邪正。因事而著焉。如昭格署之是非昭然者。猶不分明處之。抑恐邪念潛藏。而有時或發也。一日。率同僚詣政院。謂之曰。日已暮矣。言官雖退。我輩當竭誠論列。以回天爲期。仍留不出。終夜論啓。至鷄鳴不止。上始允之。○先生於闢異端尤力。又嘗曰。奉先,奉恩二刹。緇釋之根柢。先斷其本。則其餘。可不022_116d勞而治矣。
請勿潛襲野人。從之。
時會寧府野人速古乃。潛與深處野人通謀。入甲山府界。多掠人畜。至是。因南道兵使祕啓。先諭密旨于本道。遣李之芳。往伺隙掩捕。上御宣政殿。臨遣。將相環侍。先生自外來。請對。進曰。王者之待夷狄。當實邊鄙。緩民力。使不生事。而彼若先擾我邊。不得已而應之。然當審度兵力事勢。不可輕動。況無名之擧乎。臣聞。昔成宗朝。022_117a滿浦僉使許混。擒遊獵之虜。因此數年。邊患不息。成宗誅混。以懲後人。今者。朝廷遣大將。邀虜於草莽之間。以行盜賊之謀。於事何如。臣恐重傷事體也。上卽命更議。左右爭言。兵家有奇正。詢謀已同。不可以一人之言遽改。上猶却衆議。罷遣。
八月。進講論語。
講畢。啓曰。着力於此書。則治化當自此出。若悠悠泛泛。則歲月易往。難得者時。易失者機。且不緊公事。紛紜出入。聖學恐022_117b不專一。須於深宮燕閒之時。潛心體道。然後德化出矣。
九月。論主敬工夫。
啓曰。整齊嚴肅。則自然主一無適。而應物精當。言動中禮矣。常人之不能若此者。皆不能整肅故也。此是聖學之始終。而形容之極難。必於心地惺惺。無昏雜懈弛之時。可見矣。故先儒以主一無適爲言。夫整齊嚴肅。正衣冠尊瞻視者。乃不昏惰之工夫也。因進曰。人主學問。非止澄明一心而已。022_117c當見諸施爲之際。今者。聖學已至高明。若失此機。後不可圖。須與一二大臣。參酌古今。行之以果。若徒於經筵論難。而不措諸事業。近於釋氏之學。若以措諸事業爲先。而不務自修。亦恐不可。須敬以直內。義以方外。內外交相養也。
十月。進講近思錄。因論輔養元子之道。
上御不時經筵。先生進講近思錄。講訖。上曰。此書言。操則存。舍則亡。書曰。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操存省察之功。豈022_117d不難乎。先生曰。上敎聖狂之說。甚爲要切。心是活物。若有感而動。則事爲之主。有似不亂。未接物時。常人之心。尤爲散亂。若欲着於一處。則是以敬直內。非操存之道也。所謂操存者。非必每存善念也。但矜持虛靜。敬以直內。雖非應事接物之時。而常惺惺之謂也。上曰。七情。人所共有。而發之中節。爲難也。先生曰。堯舜桀紂。俱有七情。而善惡懸殊者。以其情之發。有中有不中也。雖善人。爲氣所激。則喜怒或過中焉。022_118a今日。在座之人。孰不欲爲善哉。但能克去己私。則可學聖人矣。古人曰。希顏亦顏。要在用心剛。願上克念古昔帝王之所爲而勉力焉。上曰。欲爲善。而或有過失。改之不吝。可也。若故爲惡。而乃曰。後當改之云爾。則非也。先生曰。雖顏子。亦不能無過。但知非之後。痛自刻責。可也。若有過失。不自反求。而更爲文飾。則何事得其當乎。又曰。元子年歲稍長。知識異常。近來。未聞講學之如何。憂慮實深。雖待正位東宮。乃設022_118b僚屬。但擇賢宰相。加定輔養官。而或令承旨。或史官。或本館年少之官。時時進見。觀其遊戲而敎導之。可也。程子請以士大夫幼子侍太子。當使早歲。有親賢士大夫之心也。但不可急迫而已。
十一月。特陞嘉善大夫兼同知成均館事。○移拜司憲府大司憲。
先生每膺寵擢。惕然不自容。至是。憂懼益甚。屢形於色。○時有與先生爲同年進士者。不協於室家。意欲出之。使人來稟。先022_118c生正色。答曰。夫婦。人倫之始。萬福之原。所關至重。婦人之性。陰暗無知。雖有所失。爲君子者。當率以正。使之感化。其成家道。此是厚德也。或未盡於表率之道。而遽欲去之。不近於薄乎。聞者歎服。
兼元子輔養官
請設賢良科。從之。
時政府與禮曹合啓。請依西漢孝廉賢良科例。令京外各薦所知。以爲臨軒親試之地。上意未決。先生進曰。以上之志022_118d于治。久未見成效者。由不得人材也。若行此法。人材不患不得。遂準請。
論顏子好學。因請揭四箴於座右。
先生嘗侍經筵。論孟子好學之功曰。顏子克去己私。理不爲氣所動。故能不遷怒。不貳過。因論理氣之分曰。理爲主而氣爲所使。則可矣。顏子義理昭晳。私氣消沮。故能如此。大抵耳目口鼻。聲色臭味之欲。無非以氣而出也。使之合理則善也。因論男女之慾曰。男女。人道之大倫。而過則爲害。022_119a上自公卿。下至百僚。常失於此。終至喪其本心者。有之。若顏子之四勿。是工夫下手處也。程子四勿箴。當揭于左右。以備省覽焉。
請澄汰成均館儒生。及以未出身人。爲大司成。
啓曰。近日。學校之事。有名無實。志學之士。皆不欲居館。其寄齋者。皆非俊秀。申光漢爲大司成時。欲澄汰而未果。臣意亦然。但如臣者。不能敎誨而在其職。其可乎。祖022_119b宗朝。姜碩德。非由科擧以進。而亦得爲大司成。自上敎以非由科目者。亦兼帶學官之職者。甚當矣。
是歲。子容生。
十四年己卯 先生三十八歲
遞拜同知中樞府事。因政府啓。仍任。
時有金友曾者。以毀誣士林事庭訊。先生以臺長參鞫。不欲窮治。兩司論遞付西樞。右相安瑭啓言。臺諫請鞫。囚於殿庭。是不能引君當道也。請勿遞光祖。上從022_119c之。
二月。被抄進講性理大全諸員。
四月。復拜副提學。兼如故。
啓曰。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苟欲有爲。宜得大賢之人。可以上安宗社。下庇生民者。置之左右。每以堯舜之道。陳于經幄。可也。臣無學術。逢此之會。反顧內愧。豈有極乎。漆雕開之言曰。吾斯之未能信。古人雖有學問之功。以一毫未盡。而不欲出仕。況如臣者耶。臣怠惰成習。公退之暇。雖欲勤022_119d學。而力未及焉。每欲退居爲學。學成然後復仕。而不敢瀆達。此非私計。亦是爲國家計也。○先生晩好羲經。手未嘗釋。
六月。還拜大司憲。
先生在憲府。執法平允。敎導兼至。習俗爲之一變。市井小民。事其父母。生養以誠。死葬以哀。衰麻三年。軍卒賤隷。亦爲居廬。祭用木主。墓必立石。遠近風動。每出。市人羅拜馬前曰。吾上典來矣。○時儒生方遭變者。人稱其罪。以父子相奸。遂具由呈憲府。022_120a先生進而敎之曰。此事之辨。在汝而已。今日之後。汝若飭躬自修。以善人聞。則今雖未辨。人必曰。前言誣耳。汝若行事。以不善人聞。則今雖得辨。人必曰。前言不虛耳。其辨與不辨。直在於汝。汝其勉之。某甲遂叩頭而出。其後。一鄕果不以相奸爲疑。論者以爲先生於此處疑之道。勸人之善。兩得之矣。
請因私服往還於濟物。許之。
先生妻父李公允泂。爲濟物萬戶。卒於任022_120b所。無長成子弟。先生啓請斂殯而來。上許焉。
論文昭殿陵寢諸祭
當筵。啓曰。今之弊習。多矣。原廟三時之奠。陵寢朔望之祭。皆非正道。而創自世宗朝。以此觀之。世宗才氣英斷。而恐於學問有所未盡也。此非敬先之道。反爲煩瀆矣。但非自下論執之事。須自上。晝思夜度。斷自聖衷。則事神之道。得矣。欲得如伊,呂之佐。與之圖治。則必先去此022_120c等事而後。可也。
論大臣臺諫相濟之義
啓曰。小臣冒忝憲長。欲與大臣相和。乃本意也。每欲相議曰。大臣所爲。無乃不可乎。臺諫所論。無乃不合乎。如是論難。乃可相濟。而若不相規。則豈相和之道乎。元祐,紹聖之時。有邪正兩存之說。由是。邪正雜進。此苟且之論也。若朝廷有是非混淆之事。則大臣當辨決而處之。若人君與大臣。徒務包容而不辨。則爲害多矣。大抵朝廷有022_120d邪議者。大臣之過也。宋時。韓琦,司馬光,呂公著。與士林皆是一心。後世大臣則不然。不能主張公論。而歸之臺諫。大臣過於包容。臺諫過於峻絶。因此有相異之弊矣。
論親行宗社大祭
啓曰。宗廟社稷之祭。所當親行。以細故不行。甚不可也。今之士大夫家。或以婦女妖說。或以世俗禁忌。不行祭者。滔滔皆是。聖學高明。必不拘此例。臣不疑焉。但深宮之中。所當益愼也。
022_121a七月。以病陳啓再辭。不許。
蓋因與一時論議不協而發。時士類雖得志。而敗症已見。識者甚憂之。先生乃與李公耔,申公鏛,權公橃等。謀欲調適其間。不至敗闕。而如權磌者。反以先生爲依違苟且。亟欲劾去之。故先生自處。不得不然也。○時奇公遵。致簡先生曰。欲棄官綬。斂身山林。無復世路之念。先生曰。亦當如是。益見其雅志所在矣。○一日。夜對。玉堂僚員啓曰。方今欲致太平。須擢相當代第一022_121b人。李延慶進曰。是謂趙光祖。光祖誠賢。然用人。必踐歷多。人望洽。然後可授以大任。先生聞之。馳見泣謝焉。
請勿出養元子於閭家。因陳預防士禍之道。
時元子避寓于閭家。先生啓曰。我國。因循俗習。王子出養于閭閻。甚不可也。須養闕內。親敎善事。且擇宰相中賢德者。使之親近薰炙。以成德性。可也。至於君子小人之進退。吉凶安危之消長。義理善022_121c惡之幾微。反復常說。則雖不能盡解。聞見習熟。自然與智俱長。隱然之中。所益甚大。且於經筵。使在座側。與聞朝廷是非。生民休戚。使自少親接朝臣。可也。乃曰。近來。祭魯山及復昭陵等事。皆前日。志士欲行而未得者。而至於聖世。侍從之臣。建白行之。且愼氏復立之議。朴祥,金淨至於上疏。亦是正論。而其時議者。欲置之大罪。此皆小人所藉口者也。士林之禍根。潛伏於此。聖上不可不知。而亦不可不言於022_121d元子也。臣每於中夜思之。感歎之餘。不無恐懼之念矣。先是。先生進曰。成宗朝。培養士氣。可謂至矣。然至於廢朝。朝臣苟容。氣節掃地。特立不撓之士。世不易得也。今國家修擧之事。皆先朝所未遑。他日。小人若假紹述之說而中之。則善類殆矣。又曰。大抵我朝。自開國以來。士林之禍不絶。若有君子。力於國事。庶幾有成。則無不敗之時。甚可懼也。小臣目覩廢朝之禍。頓無仕宦之念。第以士生斯世。不可恝然。故022_122a不得已從仕立朝矣。但其恐懼之心。人皆有之。自古邦國。雖得鞏固於一時。鮮不傾殆於後嗣。當此幾會。須振作士氣。固定邦本。預防後日之患。可矣。古人云。人之云亡。邦國殄瘁。善人之於國家。所繫豈不大耶。至是。尤致勤懇焉。
論責勉大臣之道
啓曰。政化。當自政府而出。近來。臺諫多建白政令。雖出於不得已。非其任也。政府當與六曹。論議國事。振奮修擧。大事啓稟。小022_122b事自決。臺諫則糾察闕失而已。自上勵精圖治者。不爲不至。而尙無其效者。恐綱領節目。有所未盡也。隨宜斟酌而運用之。全在政府。今者。三公贊成。皆入侍矣。豈可不勉力乎。政府統率百司。猶人之元氣也。爲三公者。以一國之事。皆置于胸懷。密勿圖之。可矣。若政府委靡。則猶無元氣也。人君雖欲有爲。其能獨運乎。
八月。率成均館儒生。詣闕講書。
入對思政殿。見元子。講小學。
022_122c先生以輔養官入侍。啓曰。今聞元子聲音。甚仁厚。臣不勝喜悅之至。今之敎養。不可過於急迫。當從容訓誨。使之浸漸成就。可也。輔養之人。須責老成厚德之人。如臣者。爲臺諫。尙不能盡職。況且大任乎。若不加輔養之名。而常使往來從遊。則臣亦有欲侍之情。豈敢辭乎。觀其德器。有若已成。誠國家之福也。
論王伯之辨
啓曰。百姓安業。則庶幾無憂矣。古人云。如022_122d保赤子。愛民誠能如愛赤子。則民之視上。亦必如父母。何患治化之不成乎。自古。人君多好伯功。鮮行王道。尙伯者。雖易致國富兵強之效。豈復有仁義之道乎。行王道。雖未見朝夕之效。終必悠久而大成矣。故孟子歷聘齊,梁。丁寧告戒者。只是勸行王道而已。
九月。請於拜陵時。從官用公服。從之。
舊例用戎服。故先生啓之。
十月。論不哭申用漑喪。
022_123a時左相申用漑卒。上欲依例擧哀。大臣禮官等議持難。不果行。先生啓曰。用漑之卒。上欲擧哀而還寢。何也。臣聞。柳寬之卒。世宗哭聲徹於外。至今聞者。莫不竦動。前日。下敎之意甚美。而大臣乃謂無別殿可爲。其不能將順。甚矣。○野言別集云。承旨親啓。此祖宗朝舊例。在中宗己卯年間。趙先生等遵而用之。先生被禍後。遂不行。○東閣雜記云。己卯。上議于大臣。八道監司。幷率眷。再朞以遞。有府022_123b尹處則兼府尹。慶尙分爲左右道。趙先生等敗。旋復舊。 右二事。雖非先生所建白。而其實相關。故幷附焉。
請改正靖國功臣
先是。戊寅冬。先生啓曰。靖國時。朝臣識見不高。功臣官爵。猥濫太甚。小臣近作臺官。欲爲國事。而利源一開。莫知所救。念及於此。至欲忘身而極言之。不革此弊。則社稷將不能支持矣。至是。與兩司諸官。伏閤論啓曰。靖國功臣。已久之事也。其初。大臣若有遠慮。臺諫若持公論。則豈022_123c不改正乎。成希顏雖有大功而無學識。朴元宗亦不學者。希顏與柳子光相知。故乃以磨勘大事。委諸奸人。其後。雖有奮不顧身。欲正國事者。而猶不敢請改。恐聖學未臻高明。以爲重難故耳。利源開張。爲國家膏肓之疾。人心壹鬱。急欲論改。而事有漸次。故今始重發。今若不能痛塞。則必有不忍說之事矣。屢啓不已。
論南衮避事之罪
啓曰。禮曹判書南衮。請差英陵香使出022_123d歸。以一品之人。逢此廷議。觀望圖避。甚爲邪慝。宰相用心。豈可若是乎。
率臺諫辭職。始準改正之請。
啓曰。意與事乖。將失大機。固欲翩然引去。不復區區往來。惜時之念。愛君之誠。猶有所不忍。而累日徘徊。不卽便決。事君之道。深有愧於古人。又曰。禍在顯著者。易見。而禍在隱微者。尤可畏也。此事非如一政之失。人人但知有利。而不知有仁義。以此成俗。將無所不至。慮至於此。豈不動念乎。屢022_124a啓不止。上竟允之。蓋先生大意。只欲上格君心。下與大臣。同議國事。以正士習。變弊法。庶幾少伸其堯舜君民之志而已。若其古制美法之可行者。猶在其次。故於童丱,鄕約,齒坐之議。每示持難。至於闢異端。塞利源。實衛道圖治之大要。非此。無以爲國者。故乃因臺諫所爭。而極言之如此。
十一月乙巳。因南衮,沈貞,洪景舟等密告。下獄。安置綾城。
時諸賢被上寵擢。布列朝廷。知無不言。022_124b言無不行。而年少新進。勇於改絃。不度時宜。持議益峻。人皆側目。及侍筵中。進講文義。縱橫出入。辭語太蔓。以至朝講日晏乃罷。聖體有時疲倦。欠伸或徙坐。戛然有聲。而諸賢不覺也。南衮,沈貞,洪景舟等。曾爲士類所駁斥。及他舊臣之在散者。鼓吻旁伺。思欲甘心者。久矣。至是。揣知上意有厭諸賢色。乃使景舟。敎其女煕嬪。因小民稱道先生之說。以一國人心。盡歸趙氏。且以甘汁。寫走肖爲王四字於禁苑木葉。022_124c及被山蟲剝食。仍以上聞。有若符讖者然。又白武士等怨嫉彼輩。謀欲殺害。若朝廷不先處置。則必生大亂也。適會改正功臣。大小人情俱怒。乃於是月十五日二更。衮,貞,景舟。與金詮,高荊山,金克愊,成雲等。密開神武門以入。俄逮先生及刑曹判書金淨,承旨尹自任,朴世熹,朴薰,副提學金絿,大司成金湜,應敎奇遵等。致于闕庭。將殺之。乃傳曰。趙光祖,金淨,金湜,金絿等。交相朋比。附己者。進之。異己者。斥之。聲勢022_124d相倚。盤據權要。引誘後進。詭激成習。使國論顚倒。朝政日非。在朝之臣。畏其勢焰。莫敢開口。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等。和附光祖等詭激之論。幷下義禁府。先生獨痛哭。諸公相與勉之。先生曰。從容就義。吾豈不知。但不得復見吾君耳。若見吾君。豈至如是乎。○十六日。先生供曰。士生斯世。所恃者。君心而已。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故欲新國脈於無窮而已。頓無他意。命光祖,淨,湜,絿四人賜死。其餘安置。先生022_125a聞之。始乃裕如也。領議政鄭光弼請入對。涕泣極諫。且請召左相安瑭議。又會參議以上多官。議之。遂命先生等四人。決杖遠方安置。餘有差。門人成守琮,洪奉世等。解衣賂杖者。得輕。十七日夜三鼓。出獄還家。十八日早朝。出東小門外人家。上命還聚諸公於禁府。使成雲傳聖旨曰。汝等。俱以侍從之臣。本欲君臣同心。佇觀至治。汝等人物。亦不爲不良。但近來。凡事過誤。使不平常。朝廷日非。故不得已罪之。然022_125b予心何安。朝廷大臣。亦何有私意哉。汝等之事至此者。皆予不明。不能先防其微也。若罪以律。則必不止此。特爾等。非有私心。但爲國事。不自知其過激之過也。故末減罪之。汝等知之而去。回啓曰。他人則無所言。惟趙光祖曰。臣雖此去。君心豈不知乎。臣等所爲。果有過激矣。是夕。還宿東小門外。赴謫。聞者莫不咨嗟涕泣。往往不覺失聲痛哭焉。先生至謫所。乃撤墻北隅。坐必向闕。以紓戀主之懷。每言。臣罪當死。022_125c上恩至重。其愛君憂國之念。形於色。發於言。寢食不敢弛也。
太學生李若氷,副提學李思匀,大司憲柳雲,典翰鄭譍,校理梁彭孫。俱上疏伸救。
時太學生聞先生被逮。爭先詣闕。幾千餘人。李若氷,申命仁,朴光佑等。相繼上疏。明先生無罪。爲門者所拒。發憤闌入。闕庭號哭。哭聲徹大內。上聞之。命下獄。生員林鵬等數百餘人又上疏。伸救先生。請與若氷就獄。坊里鄕約諸人亦上疏。不知其022_125d數。先是。李公思匀,柳公雲。內有志槩。而外無拘檢。爲諸賢所斥。至是。俱長臺閣論思。乃極力伸救先生。鄭公譍上疏亦切。皆不納。
十二月乙亥。命自盡。
儒生黃李沃。初與李若氷上疏。伸救先生。至是。又上疏請斬。繼而大司憲李沆,大司諫李蘋等合辭。請加罪。竟依允。賜死于謫所。都事柳渰將命至。先生謂都事曰。主上賜臣死。合有罪名。請恭聽而死。都事022_126a無應。先生就庭下。北面再拜。跪受敎旨。問上體若何。次問三公,六卿,臺諫,侍從姓名後。修家書。無一字差誤。遺命歸葬先兆。都事有迫促之意。先生歎曰。古之人有抱詔書。伏哭傳舍者。何其異耶。遂沐浴更衣。正席就座。書所懷曰。愛君如愛父。憂國若憂家。又曰。白日臨下土。昭昭照丹衷。遂仰藥。猶不絶。府卒欲就縊之。先生曰。聖上欲保微臣首領。汝何敢如此。益飮毒酒而臥。血出七竅而終。故事。凡賜死大臣。不022_126b用御寶文字。只用王旨施行。及都事宣旨。先生以爲國家待大臣。不可若是草草。其弊將使奸人。得以擅殺所惡者。欲疏陳一言。而竟不果。○先生賜死命下。弟崇祖奔往於路傍。有老嫗自山中哀哭而來。問曰。郞君。何事而哭也。答曰。吾喪兄故哭。嫗則何哭也。曰。聞國家殺趙光祖。賢人死矣。民必不得生。故哭之。
校理梁公彭孫。殮殯先生。
時校理梁公。亦罷斥家居。遂與先生。日夕022_126c相守。每以處困不失亨交勉。先生曰。吾儕此禍。實繫時運。吾則有死而已。又曰。吾兩人從遊於此。殆不偶爾。相與切偲。以遂初志。庶無大過。梁公曰。今人情椓喪。吾儕竄逐。而天使我團聚于茲。竟究平日未卒之業。此天意亦能勝人者耶。及先生賜死之命遽至。梁公執手相訣。皆無一言。但曰。各自靖獻吾王而已。吾輩幾何不相從耶。是日。雪深尺餘。風悽日慘。人不堪其寒。梁公獨於謫廬外。終日哭泣。躬自殮殯焉。
022_126d十五年庚辰
春。返葬于先壟深谷里之原。
以牛車返櫬于龍仁。葬訖。白虹繞日。東西三匝。南北各一匝。而南北繞外。各有二條虹如垂紳者竟天。又於申未方。別有一條虹長丈餘。皆移時乃滅。成守琮與洪奉世,李忠楗等赴葬。李延慶亦來會。有祝獻以奠。相携長慟而返。
參判金世弼。因入對伸救。
時金公以賀至赴京。及還。入對。伸救先生。022_127a遂被鞫配。自是。無敢爲先生伸辨者。
夏。建祠于綾州中條山下。
學圃梁公。常語及先生事。輒慨然流涕。返柩之後。建祠于雙峯中條山下。每逢先生受命之日。必齋沐痛哭。使門人子弟。春秋享祀。
世宗嘉靖元年壬午
二十年辛丑
左贊成金安國因入對。請還給職牒。不許。
時有旱災。金公因延訪。請給職牒。明示士022_127b林。上命三公議。竟不行。
二十四年乙巳榮靖大王元年
六月。命復官爵。
時太學生朴謹等上疏。極論先生學行及被誣之由。且曰。趙光祖自少。有求道之志。受業於金宏弼。宏弼學於金宗直。宗直之學。傳於其父叔滋。叔滋之學。傳於吉再。吉再之學。得於鄭夢周之門。夢周實爲東方理學之祖。此光祖學問之淵源也。請還職牒。以正士趨。三疏。批曰。汝等居首善之地。022_127c好古而論時。疏章三上。辭懇意直。所學之正。何以如此。我先王敎育之澤。亦可想矣。然言之不從。有意存焉。太學。雖曰公論所在。是非之定。自有朝廷。汝等言是非。則得矣。期於定是非。非諸生事也。姑退而更思之。及上疾大漸。傳曰。趙光祖等復職事。予未嘗忘于懷。第以事在先朝。不敢輕改。今予疾如此。不可不爲。光祖等。其幷復職。
二十五年丙午恭憲大王元年
022_127d三十六年丁巳
十二月二十四日。遷葬于同山西偏。
是年。夫人卒。乃改卜墓西數百步許。遷窆。以夫人祔焉。
穆宗隆慶元年丁卯
二年戊辰昭敬大王元年
四月。命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三月。太學生洪仁憲等上疏。請以先生從022_128a祀文廟。副提學朴大立等。因請贈以高官美諡。大司諫白仁傑等。請仍列文廟從祀。領議政李浚慶等。亦相繼力請。遂贈爵。○九月。上於經筵。問判中樞李滉曰。朝議欲追贈趙光祖。其人學問行事如何。對曰。光祖。天稟秀出。早有志於性理之學。居家孝友。中廟求治如渴。將興三代之治。光祖亦以爲不世之遇。與金淨,金湜,奇遵,韓忠等。相與協力同心。設立法條。以小學爲敎人之方。且欲擧行呂氏鄕約。四方風022_128b動。若久不廢。治道不難行也。但當時年少輩。不無欲速之弊。舊臣之見擯者。失職怏怏。搆成罔極之讒。一時士類。或竄或死。餘禍蔓延至今也。又曰。己卯之禍。正由南衮之奸。而終爲中廟之累。可謂罪通於天矣。今若褒贈光祖而罪衮。則是非分明也。
三年己巳
贈諡文正公
道德博聞曰文。以正服人曰正。 諡議見附錄
022_128c四年庚午
建竹樹書院於綾州
卽先生結纓之地。而因朝令。移奉中條山祠版建之文。因沙溪金先生議。配梁公學圃。○萬曆癸丑。重修書院。靈巖郡守趙纘韓著記。○院之西麓。舊有臺。庚戌。監司朴承宗。名以天日。仍著記。
神宗萬曆元年癸酉
道峯書院於楊州
卽道峯山寧國寺舊基。先生少時。愛其泉022_128d石。往來棲息。立朝之後。亦乘公退。命駕遊焉。至是。牧使南彥經創始之。
二年甲戌
典籍趙憲上疏。請先生及金宏弼,李彥迪,李滉四賢。從祀文廟。 疏見附錄
四年丙子
夏。建兩賢祠於煕川。
卽寒暄金先生編配時。先生受學之所也。監司金公繼輝。倡諸生營立。祀以兩先生焉。
022_129a九年辛巳
戶曹判書李珥。因筵對。啓請先生及李滉二賢。從祀文廟。 啓見附錄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三十八年庚戌 光海君二年
八月。遣禮官。賜祭家廟。 文見附錄 九月。從祀文廟。 文見附錄
熹宗天啓元年辛酉
三年癸亥仁祖大王元年
022_129b毅宗崇禎元年戊辰
二十三年庚寅孝宗大王元年
二十九年丙申
建迷源書院於楊根
先生嘗與金公湜。遊迷源。愛其山水。約與同居。有手植檜焉。至是。多士議建書院。以祀先生及金公。○此外京鄕書院之建。厥數甚繁。如海州之紹賢。羅州之景賢。礪山之竹林。永興之興賢。其最著者也。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一
 致祭文
正廟壬子道峯書院致祭文 a_022_154b


是歲壬子之重陽翌朝。爲謁光陵。路出先正文正公趙光祖,宋時烈祠前。還途。遣近侍。侑祭兩賢。其文曰。
022_154c壁立之峯。如覿靜尤。志在堯舜。意炳陽秋。地與人遭。雨賢一院。曠世之想。殽觴是蕆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四
 
道峯書院崔岦 a_022_174d


022_175a榮辱新規與舊基。道峯終覺設名奇。巖巖秀色當空聳。活活寒泉不暫衰。揭妥前賢森陟降。藏修後學謹微危。幔亭異跡輸精舍。今見吾東一武夷。


上樑文
道峯書院上樑文 吳億齡 a_022_175d


道德之歸。遠近咸仰。耳目所逮。觀感尤深。旣切矜式之誠。可廢瞻依之所。恭惟靜菴先生。受天間氣。爲世宗儒。雖聖德之樂蘊於心。不假外物。022_176a然仁智之好隨所適。足頤吾神。得異處天作之區。若神物陰來以相。洞曰寧國。允矣攸寧。山名道峯。依然見道。爲一時棲息之處。作百年景慕之資。爰創搆於舊基。實祭祀之遺意。明宮齋室。次第而成。白鹿武夷。彷彿於是。遭兵火者幾載。喜榛蕪之重開。講堂猶虛。雖嫌制度之未備。廟宇如故。幸見神明之有憑。續十六年旣廢之祠。興千萬人同然之感。矧今文風寂寞之久。莫急道學尊崇之方。闢義路塞利源。微先生則誰識。淑人心變士習。在後學尤有功。欲報德兮如天。022_176b寧寓敬之無地。許草堂之規畫。于今有光。南太守之經營。自茲可繼。作新根柢。風化權輿。人謂斯何。物固有待。天其或者。道之將行。敢因匠氏之訖功。式效兒郞之贊偉。抛樑東。水落雲開初日紅。願把餘輝照長夜。大明吾道豁群蒙。抛樑西。天外三峯入眼低。要識十分深造處。白雲臺上更無梯。抛樑南。洞裏壺天萬象涵。誰道風流吹去盡。靑山如畫水如藍。抛樑北。絶壁去天無咫尺。不遇先生不得名。道峯自此生顏色。抛樑上。奎璧精鍾金玉相。若道不窮濂洛源。儒林那022_176c得長瞻仰。抛樑下。春秋香火誠非假。吾東只說竹溪祠。未必竹溪專敎化。伏願上樑之後。俗尙貴德。人知嚮方。道義藏修。爭慕程朱之學。靈仙窟宅。永爲鄒魯之鄕。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四
 
題道峯書院宋時烈 a_022_175a


蒼崖削立洞門開。澗水潺湲幾曲回。堯舜君民當世志。廟前空有後人來。

栗谷先生全書卷之十三
 
道峯書院己卯 a_044_276c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044_276d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閒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彦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作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役粗完。凡百044_277a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槀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輳者有年數矣。惟珥未克一觀。自恨嬰疾。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閒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044_277b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拄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044_277c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祿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其亦克念哉。院中規令。則044_277d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表表異衆云。


白沙先生集卷之一
 [詩]
宿道峯書院三絶 a_062_176c


道峯霜色隱寒林。深磵響空生薄陰。石老苔荒人去遠。峩洋誰和絶絃琴。
朝廷未肯用虛名。野外無田可耦耕。進退卽今062_176d難着脚。乞爲留院老書生。
山中一夜笑聲和。山外紛紛誶語多。今日吾儕幸無事。枕流堂裏一長歌。聖徽同宿。夜半。使子歌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