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1.22. 도봉산 역사 탐방

2011.11.22. 도봉산 역사탐방 3

아베베1 2011. 11. 22. 14:23

 

 

 

 

옥담사집
병자년(1636) 난리 후에 집으로 돌아와 피난 중에 있었던 일들을 추술하여 조여벽에게 부쳐주다 40운 [丙子亂後還家追述避亂中事寄贈趙汝璧 四十韻]


자연 속에 가돈하여 몇 해나 지났던가 / 嘉遯林泉歲幾周
작은 시냇가에다 초가집을 지었었지 / 茅齋寄在小溪頭
형문에서 홀로 즐거이 사니 세상사 고요하고 / 衡門獨樂塵機靜
화사에서 유람하니 한가한 흥취가 많아라 / 花社從遊逸興稠
중울의 문 앞에는 잡초 속에 길을 열었고 / 仲蔚門前開草逕
도잠의 거리 밖에는 방초 우거진 물가일세 / 陶潜巷外挹芳洲
땅이 외져 반곡은 휘감아 돌고 굽었으며 / 地偏盤谷繚而曲
마을이 후미져 도원은 단절되어 더욱 그윽해라 / 村僻桃源絶更幽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내 뜻이 아니요 / 拖紫紆靑非我志
부귀영화 누리는 것도 뜬구름과 같아라 / 乘軺建節若雲浮
삼천 길 백발 빗질해 보니 듬성해졌고 / 三千丈髮梳來少
일만 섬 시름은 늙을수록 하염없구나 / 萬斛閑愁老更悠
홀로 티끌 세상에 서매 좋은 벗 없지만 / 獨立塵寰無好伴
속세 밖에 어진 이 있을 줄 어이 알았으랴 / 寧知物表有賢流
우뚝 뛰어난 재주는 장경보다 낫고 / 奇才卓犖長卿右
펼쳐진 아름다운 문장은 자건의 짝이어라 / 麗藻聯翩子建儔
반평생 동안 전원에서 재능을 숨긴 채 살았고 / 半世丘園藏羽翼
바둑에만 마음을 쏟으며 즐거이 노닐었네 / 專心碁局樂遨游
날마다 서책을 탐독하니 마음에 속됨 없고 / 圖書日嗜心無俗
늘 술동이 그득하니 술을 사지 않아도 되었지 / 樽杓長盈酒不謀
금란의 우정은 평소에 쌓아온 지 알겠거니 / 托契金蘭知有素
교칠과 같이 서로 사귄 지 그 몇 해이런고 / 相從膠漆幾經秋
때로 와력을 가지고 맑은 서안(書案)을 더럽히고 / 時將瓦礫塵淸案
매양 경거를 가지고 늙은 눈을 부비게 하였지 / 每把瓊琚刮老眸
좋은 밤엔 다정히 누워서 보내던 그 날을 그리워하고 / 良夜相思同臥榻
꽃 피는 시절엔 함께 누각에 오르던 때를 생각한다오 / 花辰日憶共登樓
용순은 반드시 은자가 잡기를 기다리고 / 龍脣必待幽人挈
작설차는 늘 좋은 손님과 함께 마신다 / 雀舌恒從美客酬
세로에 지음으로 오직 그대가 있으니 / 世路知音君獨在
인간세상 만남과 이별엔 근심이 없어라 / 人間離合庶無憂
먼지가 옥새에 이니 삼정이 어두워지고 / 塵驚玉塞三精暗
말이 금하를 건너니 팔도가 짓밟히었네 / 馬渡金河八路蹂
달무리 진 외로운 성에는 새벽 딱따기 소리 울리고 / 月暈孤城晨擊柝
구름처럼 모인 용맹한 병사들 밤에도 북채 안고 잔다 / 雲屯猛士夜援枹
백성들 붙잡혀 가니 들판마다 곡하는 소리 / 燕民繫累千原哭
재물을 쓸어가느라 촌락마다 다 뒤지누나 / 秦貨擔歸萬落搜
학가는 서쪽으로 먼 요동 변새를 순시하고 / 鶴駕西巡遼塞遠
용안은 삭풍이 몰아치는 북쪽을 바라보셨어라 / 龍顔北望朔風颼
수레와 시종(侍從) 이어져 길에는 먼지 자욱하고 / 車從絡繹黃塵合
피난하는 행차 어지러워 밝은 해도 시름겹다 / 冠蓋繽紛白日愁
조정에서는 기미의 계책 쓰느라 세월만 보내고 / 廟算羈縻淹歲月
정벌의 계획은 고식적이라 창칼은 녹이 스누나 / 征謀姑息老戈矛
많은 식구 거느리고 남쪽 고을 수령 의지해 / 提携百口依南宰
갖은 신고 다 겪으며 바닷가에서 피난했네 / 備歷千辛賴海陬
객지에서 뜻밖의 상봉은 참으로 드문 일이니 / 逆旅相逢眞有數
진창길에서 이렇게 만나는 일 어찌 쉬우리오 / 泥途會面亦安偸
남은 술 식은 고깃점에 나그네 회포가 같고 / 殘盃冷炙同羇抱
필마에 여윈 아이종 데리고 객지를 떠돌았지 / 匹馬羸僮共旅遊
칡이 모구에 굵으니 세월이 오래 흘렀고 / 葛誕旄丘時已晩
외가 기협에 생기니 한 해가 지나갔어라 / 瓜生夔峽歲將遒
멀리 고향을 바라보며 유린당한 강토를 슬퍼하고 / 遙瞻故國悲秦衂
모임을 신정에서 마치매 초나라 죄수처럼 울었지 / 會罷新亭泣楚囚
다행히도 하늘이 내렸던 재앙을 거두시고 / 賴得皇天能悔禍
마침내 성상으로 하여금 이 나라 안정케 하셨네 / 終敎睿算定神州
타향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내 땅이 아니라 / 他鄕信美非吾土
여장을 꾸려 서로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니 / 行李相將返故丘
죽은 사람 산 사람 안부 물으매 슬픔은 끝없고 / 弔死問生哀不盡
홀아비 과부 위로하며 곡소리 그치지 않았어라 / 悲鰥慰寡哭無休
여염집들은 죄다 불타서 잿더미만 담았고 / 閭閻蕩爇餘灰燼
텅 빈 마을에는 간간이 해골만 널려 있는데 / 村巷空虛間髑髏
집안에 두었던 주현은 어디로 갔는지 뵈지 않고 / 屋裏朱絃亡不見
상자 속의 서책은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네 / 籠中黃卷散無收
백성들은 스스로 삼생의 괴로움 탄식하고 / 齊民自歎三生苦
임금은 깊이 국가 재생의 계책을 도모하셨지 / 聖主深圖再造猷
자극에서는 한밤중에 측루를 생각하고 / 紫極中宵思側陋
단루에서는 전석하여 방구를 물었어라 / 丹樓前席問旁求
외로운 백성 불쌍히 여겨서 정치에 애를 쓰고 / 哀傷煢獨勞王政
피폐한 민생 보살피느라 내수에 힘을 다하누나 / 存恤瘡痍盡內修
혼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림 생각하는 때가 됐나니 / 亂極思治時已在
성공을 거둠이 패배로 말미암는 이치는 당연한 것 / 功成因敗理應優
변방에 난리가 안 일어나 조두 소리 그치고 / 邊聲不起停刁斗
봉화 연기 일어나지 않아 군대 깃발 누웠어라 / 烽火無烟偃旆斿
군사들은 이 때 응당 철마를 쉴 테고 / 壯士時當休鐵馬
장군이 투구를 벗는 것을 장차 보게 되며 / 將軍佇見脫兜䥐
시인들은 황하 맑음을 칭송하는 시를 짓고 / 詞人擬作河淸頌
은사들은 바다로 들어가는 노래를 그치리 / 隱士休歌入海謳
태평을 즐거워하는 것이 참으로 즐거운 일 / 相樂太平眞所樂
함께 왕의 교화를 도울 길이 어찌 없으리오 / 共添王化豈無由
남은 생애 지금은 다 같이 일 없이 한가해 / 餘生此日同無事
나란히 물가에 앉아서 낚싯대나 드리우세 / 並坐苔磯引釣鉤

차운 조완. 호는 삼산이다 [次韻 趙完 三山]
길가엔 푸른 솔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우고 / 挾巷靑松蔭道周
한가함 달래는 서책만 책상에 놓여 있어라 / 消閑黃卷靜床頭
사립문 정갈하여 속세의 인연 드물고 / 柴扉蕭洒塵緣少
초가집은 그윽하여 시골 정취 많구나 / 茅屋幽深野趣稠
붉은 여뀌 우거진 기슭 가랑비 속에 낚시 드리우고 / 細雨垂竿紅蓼岸
흰 마름꽃 핀 물가에 저물녘 바람 불 제 젓대를 분다 / 晩風橫篴白蘋洲
한 마리 소로 농사짓는 언덕에서 방공은 늙고 / 一犂壟上龎公老
백 가지 화초 우거진 정원에서 사마는 한가로워라 / 百卉園中司馬幽
적막한 연하 속에 은거해 서로 만나기 어렵고 / 寥落烟霞成契闊
아득한 천지에서 속세에 부침하는 일 떠났어라 / 蒼茫天地謝沈浮
젊어서부터 술과 바둑 즐기며 세상 명리 멀리했고 / 少從碁酒名場遠
늙어서는 낚시 땔나무나 하며 한가로운 흥취 유유하네 / 老作漁樵逸興悠
정갈한 거처는 무엇보다 속세의 속박 없는 게 좋고 / 淨界最憐無世累
한가로이 살매 도리어 시벗을 만남이 반가워라 / 端居還喜得詩流
안영처럼 오래 공경함을 나는 늘 흠모하노니 / 晏嬰久敬吾常慕
관중의 마음 통하는 벗에 그대 비길 만하도다 / 管仲神交子可儔
산 속 집에서 바람과 안개 속에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 山館風烟開謔浪
들판 정자에서 꽃과 버들 속에 한가로이 맘껏 노닐었네 / 野亭花柳任優游
서로 운자(韻字)를 부르며 시를 자주 썼나니 / 相呼玉韻詩頻寫
함께 금귀를 잡고 술을 몇 번이나 마셨던고 / 共把金龜酒幾謀
백년 평생 세월은 임하에 저물고 / 百載光陰林下晩
우리 두 늙은이 머리털 거울 속에 세었어라 / 兩翁蓬鬢鏡中秋
산골 늙은이는 북쪽으로 바라보며 고개 돌리고 / 山翁北望應回首
물가 늙은이는 남쪽을 보며 눈길만 보낼 테지 / 潭老南瞻謾騁眸
늙고 병든 몸 늘 침석에 엎드려 있으니 / 衰病纏身常伏枕
이별의 회포에 몇 번이나 누각에 기댔던고 / 別離傷抱幾憑樓
짚신에 죽장 차림으로 찾아가지는 않으나 / 芒鞋竹杖休尋訪
술병 놓고 지은 글 품평하며 술잔 주고받는다 / 樽酒論文間作酬
한 번 조정에서 계책을 잘못 세운 뒤로는 / 一自廟堂謬算策
구중궁궐 임금께서 국사에 근심 많았네 / 九重宵旰軫虞憂
전란의 먼지 천지 가득한데 금고 소리 울리고 / 塵昏宇宙金鼙動
불길 훑는 산하를 적군의 철마가 짓밟고 갔지 / 火獵山河鐵馬蹂
그 누가 조생이 형수 건너던 노 두드릴꼬 / 誰擊祖生荊水楫
전장(田將)은 적성의 북채를 아직 잡지 않았네 / 未援田將狄城枹
곳곳마다 백성들은 마구 살육을 당하고 / 人民處處紛誅戮
집집마다 재물을 죄다 수탈해 갔으니 / 玉帛家家恣括搜
사해가 혼란해 임금은 시름이 가득하고 / 四海奔波顔慽慽
벼슬아치들은 허겁지겁 피난을 갔어라 / 千官顚倒鬢颼颼
닭이 울어도 용루의 침소에 문안하지 않으니 / 鷄鳴休問龍樓寢
변방에는 응당 학가의 시름을 보태리 / 燕塞應添鶴駕愁
노신들은 흐르는 눈물 주체할 수 있으랴 / 晉老可堪垂涕淚
군사들은 더 이상 창칼을 쓰지 않는구나 / 魏師無復試戈矛
군신들이 멀리 음산 저편에 가 있으니 / 君臣地隔陰山外
소식이 하늘 저편 외진 한해 쪽에 있어라
/ 消息天分瀚海陬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의리 알거니 / 主辱固知臣死義
국가가 수치를 당했거늘 도리어 내 살 길을 도모하리오 / 國羞還苟我生偸
타향이라 새해를 맞는 감회가 곱절로 더하고 / 他鄕倍感逢新歲
나그네 길에 예전 노닐던 곳 만나면 몹시 놀란다 / 逆旅偏驚値舊遊
덧없이 떠도는 신세 강호에 오래 머무노니 / 身世飄零湖外滯
세월은 빨리 흘러 나그네 곁을 지나가누나 / 年光倏忽客邊遒
백성들 도탄에 빠지니 간장은 끊어질 듯하고 / 生靈塗炭腸堪斷
국사에 대해 말이 없으니 혀는 감옥에 갇힌 듯 / 國事無言舌似囚
회포는 그야말로 향수에 젖은 것과 같은데 / 懷抱正同思故土
객지생활 다행히 함께 당주에 있었어라 / 橐囊幸共賴唐州
꿈속에서 아스라이 멀리 선영을 찾아가 / 迢迢客夢尋先壟
시름에 잠긴 나그네 혼 옛 동산 맴돌았네 / 黯黯羇魂繞某丘
옛 집터에 돌아오매 슬픔을 견디지 못해 / 迹返故墟悲不耐
황량한 주춧돌 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지 / 眼隨荒砌淚無休
동쪽 이웃집 버려진 우물엔 이끼만 자욱하고 / 東隣癈井封苔蘚
북쪽 거리엔 시체가 가득 해골만 널려 있어라 / 北巷塡屍亂髑髏
벽에 남은 책들을 잿더미 속에서 거두고 / 壁上餘書灰裏拾
풀 속에 뒹구는 깨진 기왓장을 빗속에 주워모은다 / 草間壞瓦雨中收
종묘사직 회복하도록 신명이 도와주시니 / 重恢宗社神明佑
이 나라 새로 일으킨 건 성상의 계책일세 / 再造寰區聖主猷
종들은 흩어지고 없으니 반가이 모일 수 있으랴 / 僮僕散亡焉得歎
자손들을 보전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 子孫全保復何求
산 사람 위문하고 죽은 사람 조문하매 성은이 넉넉하고 / 問生弔死燕恩浹
과부 보살피고 홀아비 돌보아 훌륭한 정치 폈어라 / 恤寡哀鰥漢政修
유해가 된 군사 측은히 여겨 보상금을 넉넉히 주고 / 師惻遺骸酬帛歛
전쟁 겪은 땅 불쌍히 여겨 조세 많이 감면해 주었지 / 地矜經戰免租優
훗날 우리 동국이 장차 소생할 것이니 / 他年東國將蘇息
지금 관서 지방에 군사 깃발이 거두어졌네 / 今日西關卷旆斿
수자리 서는 군졸들은 창칼 갈무리한 채 구름을 갈고 / 戍卒耕雲藏劍戟
건장한 남아들은 투구 벗고서 한가로이 휴식하리라 / 健兒休養解兜䥐
강산은 아득한데 변방에는 경보를 알려오는 사람 없고 / 江山漠漠邊無使
들판의 보리는 푸릇푸릇 거리에는 아이들 동요 소리 / 野麥靑靑巷有謳
나라 걱정에 이내 작은 충정이 속절없이 격할 뿐 / 憂國寸誠空自激
적을 무찌를 삼략을 얻을 길이 실로 없구나 / 殲戎三略實無由
강호에 사는 이 늙은이 끝내 어디에 쓰리오 / 江湖老叟終何用
세상 밖에서 남은 생애 낚시질로 보내리라 / 物外餘生寄釣鉤

차운 오상. 계유년(1633, 29세) 진사시에 두양과 동방 급제하였다 [次韻 吳尙 癸酉進士斗揚同榜]
안연의 표주박 한 즐거움에 도가 이미 넉넉해 / 一樂顔瓢道旣周
세간은 명리 따위에는 고개 돌리지 않으시네 / 世間名利不回頭
초가집 처마에 해는 긴데 금서가 고요하고 / 茅簷日永琴書靜
집 앞 거리엔 사람 드물고 초목만 우거졌어라 / 門巷人稀草木稠
마음은 청풍에다 제월과 같이 맑고 / 心似淸風兼霽月
정신은 용포와 인주에 한가로이 노니네 / 神遊龍圃與麟洲
산수에 평소부터 살아온 터라 그 속에서 늙어가나니 / 溪山有素身將老
물고기와 새에 기심을 잊으매 흥취 더욱 그윽하여라 / 魚鳥忘機興轉幽
구름 가에 옥을 심으매 아침 해가 저물고 / 種玉雲邊朝日晩
숲 속에서 차 달이니 저녁 연기 피어오른다 / 煮茶林下夕烟浮
자취를 감추려니 매양 세상이 좁은 게 한스럽고 / 藏蹤每恨塵寰窄
옛날을 생각하며 속절없이 성인의 길이 멂을 슬퍼한다 / 思古空悲聖路悠
젊은 날 뛰어난 재주로 좋은 정치 이루길 기약했는데 / 少日才華期致澤
만년에는 시 읊고 술 마시며 풍류나 즐기시네 / 暮年詩酒屬風流
반계에서 어찌 주왕이 사냥 나오길 바라리오 / 磻溪詎望周王獵
율리에서는 진사의 짝이 되기에 충분하여라 / 栗里堪爲晉士儔
마치 공자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공부하니 / 如在孔門承訓誨
곧 문학이 상유를 능가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 卽看文學邁商游
뛰어난 문학의 재능 집안 대대로 이었으며 / 升堂翰墨傳家美
술상을 차려 놓고서 손님들을 불러들이네 / 斗酒盃盤見客謀
한 쌍의 나막신으로 매양 눈 덮인 남악 지나가고 / 雙屐每穿南嶽雪
하나의 낚싯대 때로 가을 옥담에 던지누나 / 一竿時擲玉潭秋
일곱 개 보배 구슬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따르고 / 七枚寶璧隨祥雲
한 쌍의 금빛 연꽃은 사람들 눈 부비고 본다 / 雙朶金蓮拭衆眸
대숲에다 집을 지었는데 색동옷 나란하고 / 家作竹林聯彩服
하늘을 도는 북두성이 동쪽 누각에 모였어라 / 天回北斗聚東樓
조숙한 덕이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내 아노니 / 吾知夙德由天性
신명이 고문을 돌보아 복록으로 보답하리라 / 神眷高門以福酬
무릎을 안고서 속절없이 제갈량처럼 노래하고 / 抱膝空勞諸葛嘯
시국에 상심하여 늘 범중엄처럼 몹시 근심하네 / 傷時恒切仲淹憂
병자년 난리 때의 고난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 追思丙子艱虞事
금구가 오랑캐에게 짓밟힌 사실 어이 차마 말하랴 / 忍說金甌羯狗蹂
한 모퉁이 외로운 성이 적의 공격 받을 제 / 一隅孤城方受箭
오경에도 차가운 성가퀴에는 북소리 그치지 않았지 / 五更寒堞不停枹
곰과 범 같은 장졸들 부르짖는 소리에 산이 찢어질 듯 / 熊咆虎吼山將裂
멧돼지 고래처럼 돌격해 오니 바다도 시름에 여윌 듯 / 豕突鯨奔海亦瘦
밝던 해도 빛을 잃어 하늘은 흐릿한데 / 白日無光天漠漠
슬픈 바람 피비린내 풍겨오고 비는 부슬부슬 / 悲風吹血雨颼颼
산천은 죄다 병사 주둔하는 곳이 되어 버리니 / 林泉盡入屯兵地
원숭이와 학은 속절없이 임금 연모하는 정 많아라 / 猿鶴空多戀主愁
한 달 동안이나 피난하며 쇄미한 신세 슬퍼하니 / 跋涉三旬悲瑣尾
전란의 먼지 자욱한 천 리에 창칼이 뒤덮었어라 / 烟塵千里蔽干矛
고향은 아득히 멀어 산은 첩첩 천 겹인데 / 鄕關杳杳山千疊
외로운 섬 망망한 바다 한 귀퉁이에 있었네 / 孤島茫茫海一陬
그곳에서 일백 식구 무사한 게 참으로 다행 / 百口無殤眞所幸
호공이 가졌던 비결을 홀로 훔칠 수 있었던 게지 / 壺公有訣獨能偸
고향 두곡은 잡초만 무성해 황폐해졌으니 / 蓬深杜谷成塵迹
학이 요양에 돌아오매 옛일에 감회가 일어라 / 鶴返遼陽感舊遊
하늘의 뜻 은연중 사람의 일에 호응하고 / 天意暗隨人事應
순박한 풍속은 날로 세월 따라 사라져 가네 / 淳風日逐歲華遒
진나라 관문에서 그 누가 닭 울음 흉내를 낼까 / 秦關孰效鷄鳴術
연옥에는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갇혔어라 / 燕獄猶多漢節囚
꿈속에서도 슬픔이 일어 세도를 보노니 / 夢裏興哀看世道
도성에 계신 임금님 소식 알 수 없어라 / 日邊消息阻皇州
천추에 이어온 예악 문물 어디로 사라졌나 / 千秋禮樂歸何地
당대의 영걸들 중년 나이에 땅 속에 묻혔네 / 一代勳英半世丘
남쪽은 두렵고 북쪽은 걱정돼 갈 곳이 없나니 / 畏南憂北無處適
군사 검점하고 군량 실어나르는 일 언제나 그칠꼬 / 點軍輸粟幾時休
오직 변방의 노인처럼 그저 운명에 맡기고 / 唯從塞老安時命
다시금 장공이 해골을 베고 누운 것 배우노라 / 更學莊翁枕髑髏
천 섬의 한가한 시름을 잔의 술로 씻을 수 있고 / 千斛閑愁盃可滌
만 숲의 경치는 붓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어라 / 萬林雲物筆能收
도사와 함께 도 닦는 비결을 얘기하고 싶을 뿐 / 思携羽客談眞籙
금문에서 큰 문장을 지어 올리길 원치 않는다 / 不願金門獻壯猷
다행히도 내가 공의 마을 근처에 사는 터라 / 幸我卜居仁里近
의기투합하는 사귐을 일찍이 이정에서 찾았지 / 神交早向鯉庭求
아양곡 속에서 마음을 서로 허여했고 / 峩洋曲裏心相許
난옥이 모인 속에서 학문이 이미 닦였어라 / 蘭玉叢中學已修
일산 기울이매 매양 친밀한 정에 기쁘고 / 傾蓋每欣情意密
침상 아래 절하고 넉넉한 예우를 받았었지 / 拜床仍荷禮容優
종횡하는 문장은 창칼을 가득 벌여놓은 듯 / 縱橫筆陣森戈戟
문단에 우뚝하여 깃발을 높이 세웠으니 / 崷崪詞壇建旆斿
만 마리 말이 발굽 모으매 마구(馬具)가 삼엄하고 / 萬馬攢蹄嚴韅靷
일천 군인 무기 잡으니 갑주(甲冑)가 정연하여라 / 千軍執銳整兜䥐
훗날 악부에서 새 시편들 고를 때 / 他年樂府調新律
응당 이소와 함께 초나라 노래에 들리라
/ 應共離騷入楚謳
주신 시편에 답하지 못해 도리어 부끄러운데 / 辱贈未酬還自愧
새로 지은 시편을 보고 싶은들 무슨 수로 보리오 / 新篇欲覩更何由
남쪽 교외 달 밝은 밤에 자주 머리를 들고 / 南郊月夜頻擡首
창 밖에 성근 발을 드리우지 않고 달빛을 본다오
/ 窓外疎簾不下鉤


 

[주D-001]가돈(嘉遯) : 〈돈괘(遯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아름다운 은둔이니, 바르므로 길하다.[嘉遯 貞吉]” 하였다. 이는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중정(中正)한 도리에 맞게 하여 은둔하는 것으로 매우 좋은 은둔이 된다.
[주D-002]형문(衡門) : 원래 나무를 가로로 걸쳐서 만든 소박한 문인데 후세에는 은사(隱士)의 집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여! 편안히 살 만하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하였다.
[주D-003]화사(花社) : 우화사(雨花社)의 준말로 절의 이칭이다. 석가(釋迦)가 설법을 하니 하늘에서 천신(天神)이 꽃비를 내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중울(仲蔚) : 한(漢)나라 때 사람인 장중울(張仲蔚)을 가리킨다. 그는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거처하는 곳에 쑥대가 우거져 사람이 파묻힐 정도였다 한다. 《三輔決錄》 자신을 장중울에 비긴 것이다.
[주D-005]도잠(陶潛)의 거리 : 자신이 사는 곳을 은자가 사는 거리에 비겼다. 도잠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다. 그의 〈잡시(雜詩)〉에 “사람이 사는 지역에 집을 지었건만,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 없어라.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와 머니 지역이 절로 외지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한 것을 차용하였다.
[주D-006]반곡(盤曲)은 …… 굽었으며 : 반곡은 골짜기 이름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작자 자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태항산(太行山) 남쪽의 반곡으로 돌아가는 벗 이원(李愿)을 전별하는 뜻에서 지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란 글에서 그곳의 낙토(樂土)임을 누누히 말하고 그곳의 지형을 말하면서 “휘감아 돌고 굽었으니 갔다가 돌아오는 것 같다.[繚而曲 如往而復]”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D-007]도원(桃源)은 …… 그윽해라 : 마을을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긴 것이다. 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떤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사꽃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만났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즉 마을이 깊은 산골이라 찾아가는 길이 바깥 세상과 끊어져 더욱 고요함을 형용한 것이다.
[주D-008]삼천 길 백발 : 이백(李白)의 시 〈추포가(秋浦歌)〉에 “백발이 삼천 길이나 되니, 시름 때문에 길어진 듯하여라. 알지 못하겠네 밝은 거울 속, 어디서 가을 서리를 얻었는고.[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하였다.
[주D-009]일만 섬 시름 : 인생의 많은 근심을 형용하였다. 유신(庾信)의 〈수부(愁賦)〉에 “일촌 크기 마음을 가지고, 만곡의 많은 시름을 담는다.[且將一寸心 容此萬斛愁]” 하였다.
[주D-010]장경(長卿) : 전한(前漢)의 문장가로 대표적인 부(賦)의 작자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이다.
[주D-011]자건(子建) :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 식(植)의 자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이 높아,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천하의 재주는 모두 한 섬인데 조자건(曹子建)이 혼자서 여덟 말을 가지고 내가 한 말을 가지고 천하 모든 사람들이 한 말을 나누어 가졌다.” 하였다. 《釋常談 八斗之才》
[주D-012]금란(金蘭) :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하여 매우 두터운 우정을 뜻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3]교칠(膠漆) : 교칠은 아교와 옻인데, 이 둘을 합하면 매우 견고하게 붙는다. 후한(後漢) 때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우정이 매우 두터우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阿膠)와 옻[漆]을 섞으면 굳게 붙는다지만, 그래도 뇌의와 진중 두 사람의 우정만큼 굳지는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 하였다.
[주D-014]때로 …… 더럽히고 : 와력(瓦礫)은 깨진 기왓장과 자갈, 즉 매우 보잘것없는 물건을 뜻한다. 여기서는 자신이 지은 시(詩)를 가리킨다. 즉 자신이 상대방에게 시를 보내는 것을 겸사로 말한 것이다.
[주D-015]매양 …… 하였지 : 상대방이 좋은 시를 보내주었음을 말한다. 경거(瓊琚)는 보배로운 구슬로 좋은 시문을 뜻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주D-016]용순(龍脣) : 거문고를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순숙(荀淑)은 자가 계화(季和)인데, 용순이란 거문고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던 날 잃어버렸다. 3년 뒤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던 날 흑룡(黑龍)이 날아서 이응(李膺)의 방에 들어왔다. 이응이 자세히 보고는 “순계화(荀季和)의 구물(舊物)이다.” 하고 순숙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순숙이 다시는 날아가지 못하게 등에 금으로 글씨를 새겨 “유루(劉累)로써 누른다.”하고 비룡(飛龍)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說郛》 유루는 고대에 용을 잘 길들이는 사람이다.
[주D-017]먼지가 …… 어두워지고 : 변방에서 난리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즉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옥새(玉塞)는 한대(漢代)에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던 옥문관새(玉門關塞)의 약칭으로, 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삼정(三精)은 해, 달, 별이다. 《문선(文選)》 〈후한서광무기찬(後漢書光武紀贊)〉에 “구현에 회오리바람이 일고 삼정은 안개가 끼어 깜깜하였다.[九縣飆廻 三精霧塞]” 하였는데, 천하가 매우 혼란함을 뜻한다.
[주D-018]말이 금하(金河)를 건너니 : 청(淸)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음을 뜻한다. 금하(金河)는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는 강으로, 현재의 이름은 대흑하(大黑河)이다. 북방 교통의 중심지였다.
[주D-019]학가(鶴駕) :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왕세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20]기미(羈縻)의 계책 : 적국과 적당히 친선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외환을 막는 방책이다.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난촉부로(難蜀父老)〉에 “대개 천자가 이적을 다루는 것은 그 이치가 기미의 방책을 써서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일 뿐이다.[蓋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而已]” 하였다. 청나라에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을 볼모로 보낸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원수인 청나라와 적당히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주D-021]남은 …… 고깃점 : 객지의 처량한 신세를 뜻한다. 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나귀 타고 삼십 년 동안, 장안의 봄을 나그네 신세로 살아 왔네. 아침이면 부잣집 문을 찾아가고, 저녁이면 살진 말의 뒤를 따랐어라. 남은 술과 식은 고깃점, 가는 곳마다 남몰래 몹시 서러웠네.[騎驢三十載 旅食京華春 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盃與冷炙 到處潛悲辛]”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2]칡이 모구(旄丘)에 굵으니 : 모구는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이다. 《시경》 〈모구편(旄丘篇)〉에 “모구의 칡은 어쩌면 이리도 마디가 굵어졌는가.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시일이 걸리는가?[旄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也]” 하였다. 이는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음을 원망한 것이다. 여기서는 타향에서 오래 피난했음을 뜻한다.
[주D-023]외가 기협(夔峽)에 생기니 : 기협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삼협(三峽)의 이칭이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안사(安史)의 난 때 피난하여 이 지역에 살았다. 당시에 지은 해민(解悶) 12수 중 셋째 수에 “한 번 고향을 떠나 십년이 지나니 매양 가을 외를 보면 고향을 그리워한다.[一辭故國十經秋 每見秋瓜憶故丘]” 하였다. 역시 고향을 떠나 피난하고 있는 신세를 비유하였다.
[주D-024]모임을 …… 울었지 :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나라 죄수[楚囚]는 본디 춘추시대 초(楚)나라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정인(鄭人)에 의해 진(晉)나라에 잡혀가서 갇혀 있을 때 진 혜공(晉惠公)이 그를 불러다가 여러 가지 일을 물어보고 그에게 거문고를 주었더니,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고향인 초나라의 음악을 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5年》 신정(新亭)은 정자 이름이다. 진(晉)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천도(遷都)했을 때에 당시 인사들이 한가한 날이면 신정에 나와서 술을 마셨다. 주의(周顗)가 그 가운데 앉았다가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보매 산하가 다르구나.”라고 탄식하니, 모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왕도(王導)가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응당 함께 왕실과 협력하여 중원을 회복해야 할 것이지, 어찌 초수처럼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하였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주D-025]타향은 …… 아니라 : 중국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있을 때 성루(城樓) 위에 올라가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나의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 하였다.
[주D-026]주현(朱絃) : 붉은 현(絃)으로 거문고 줄을 뜻한다. 여기서는 거문고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청묘의 슬은 붉은 현으로 되어 있고 소리가 느릿하여,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여 여음(餘音)이 있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嘆 有遺音者矣]” 하였다.
[주D-027]자극(紫極)에서는 …… 생각하고 : 임금이 숨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고심함을 뜻한다. 자극은 황제의 궁궐이다. 천제(天帝)는 자색(紫色)의 궁궐에 거처한다 하여 궁궐을 자미궁(紫微宮), 자궁(紫宮), 자달(紫闥) 등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측루(側陋)는 요(堯)임금이 사악(四岳)의 신하에게 인재를 구하기를 당부하면서 “이미 지위에 있는 사람도 드러내 밝히고 미천한 사람도 들어서 쓰도록 하라.[明揚側陋]” 한 데서 온 말로, 숨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書經 堯典》
[주D-028]단루(丹樓)에서는 …… 물었어라 : 역시 임금이 신하들에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뜻한다. 단루는 붉은 칠을 한 누각으로 궁궐을 가리킨다. 전석(前席)은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신하 가의(賈誼)와 얘기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을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방구(旁求)는 《서경(書經)》 〈태갑 상(太甲上)〉에 “두루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후인을 깨우쳐 인도하셨다.[旁求俊彦 啓迪後人]” 한 데서 온 말로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을 뜻한다.
[주D-029]조두(刁斗) 소리 : 변방의 경보(警報)를 뜻한다. 옛날 군중에서 야경을 돌 때 쓰던 바라로 낮에는 이로써 밥을 짓고 밤에는 이로써 야경(夜警)의 딱따기로 사용하였다.
[주D-030]철마(鐵馬) : 철갑(鐵甲)을 입힌 전마(戰馬)이다.
[주D-031]황하 맑음 : 어진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뜻한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나온다.[黃河淸而聖人生]”고 하였고, 그 주(註)에 “황하는 천 년 만에 한 번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그때에 나온다.[黃河千年一淸 淸則聖人生於時也]” 하였다.
[주D-032]바다로 들어가는 노래 : 바다에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옛날에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는 사람들이 신선을 찾아 바다로 갔던 것이다. 즉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러 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주D-033]한 …… 늙고 : 방공(龐公)은 후한(後漢) 말엽 양양(襄陽)의 고사(高士)인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였다. 벼슬길에 나오라는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청을 거절하고 훗날 처자식을 거느린 채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小學 善行》
[주D-034]백 …… 한가로워라 : 사마(司馬)는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사는 집을 독락원(獨樂園)이라 하고 화초를 가꾸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古文眞寶 後集 獨樂園記》
[주D-035]안영(晏嬰)처럼 오래 공경함 : 벗과 오래 사귀면 친압(親狎)하기 쉬운데 늘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영은 춘추시대 때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차례로 섬긴 제(齊)나라의 명상(名相)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도다. 오래되어도 공경하는구나.[子曰 晏平仲 善與人交 久而敬之]”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36]관중(管仲)의 …… 벗 : 춘추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어려서부터 서로 친구 사이였다. 포숙은 관중의 어짊을 잘 알아주었지만, 관중은 워낙 빈곤(貧困)하여 포숙을 항상 속이곤 했다. 그러나 포숙은 끝까지 관중을 믿어주어, 뒤에 관중이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하였다. 여기서 관포지교(管鮑之交)란 고사가 생겼다. 《列子 九命》 즉 옥담을 포숙과 같은 좋은 벗이라 말한 것이다.
[주D-037]금귀(金龜) : 벼슬아치가 차는 거북 모양으로 된 인장이다.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이 이백(李白)을 만나 서로 뜻이 맞으니 금귀를 잡혀서 술을 마셨다 한다. 이백이 고인이 된 벗 하지장을 생각하며 지은 시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에 “금귀로 술을 바꾸어 먹던 곳에서, 벗을 생각하며 눈물로 수건을 적시네.[金龜換酒處 却憶淚沾巾]” 하였다.
[주D-038]조생(祖生)이 …… 노[楫] : 적을 소탕하리라는 결심을 뜻한다. 조생은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을 가리킨다. 조적이 예주 태수(豫州太守)로 있으면서 석륵(石勒)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자강을 건너다가 노를 치면서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강을 건널 때는 이 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자강 이남의 지역을 확보하였다. 《晉書 卷62 祖逖傳》
[주D-039]전장(田將)은 …… 않았네 : 잃은 강토를 회복할 장수가 없음을 뜻한다. 전장은 전씨(田氏) 장수, 즉 진(秦)나라 말엽 적성령(狄城令)으로 있던 전담(田儋)을 가리킨다. 그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종실(宗室)로 진나라가 혼란할 때 적성령으로 있다가 다시 제나라를 세웠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40]닭이 …… 않으니 : 용루(龍樓)는 한(漢)나라 때 태자가 거처하던 궁(宮)의 문 이름이다. 난리 중이라 경황이 없어 문안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D-041]학가(鶴駕) : 왕세자(王世子)의 행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왕세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42]군신들이 …… 있어라 : 한해(瀚海)는 사막(沙漠), 또는 북해(北海)를 이르는 말로 북방을 가리킨다. 음산(陰山)은 흉노족의 땅에 있던 산으로, 사철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한다. 현재 내몽고(內蒙古)의 자치구(自治區) 남쪽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내흥안령(內興安嶺)까지 뻗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신하들이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간 것을 가리킨다.
[주D-043]당주(唐州) : 진주(晉州)의 이칭이다.
[주D-044]구름을 갈고 : 송(宋)나라 관사복(管師復)이 숭산(崇山)에 은거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느냐?”고 묻자 “언덕에 덮인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못에 가득한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네.[滿塢白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는 은자(隱者)의 고답적인 생활을 형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변방에 전투가 없어 군사들이 한가로이 농사나 짓고 있음을 형용하였다.
[주D-045]삼략(三略) :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는 고대의 병서(兵書)이다.
[주D-046]안연(顔淵)의 표주박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 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여기서는 옥담(玉潭)의 삶을 형용하였다.
[주D-047]금서(琴書) : 거문고와 책으로 옛날 선비의 필수품을 뜻한다.
[주D-048]청풍에다 제월(霽月) : 성어(成語)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 하여 비가 온 뒤의 맑은 바람이 불고 달이 뜬 깨끗한 풍광을 뜻한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맑은 인품을 형용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9]용포(龍圃)와 인주(麟洲) : 모두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용포는 환룡포(豢龍圃)의 준말로 《습유기(拾遺記)》에 나오는 지명인데 하늘에서 향기로운 이슬이 내려 못을 이룬 것이라 한다. 인주는 봉린주(鳳麟洲)의 준말로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 나오는 지명인데 서해(西海)에 있다고 한다.
[주D-050]물고기와 …… 잊으매 : 자연 속에서 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형용하였다. 기심(機心)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교사(巧詐)한 마음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와 놀았는데 갈매기들이 그를 의심하지 않고 함께 놀았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갈매기 한 마리를 잡아 오라고 하여 바닷가에 나갔더니 갈매기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에게 기심(機心)이 생겼기 때문에 갈매기가 멀리한 것이다. 《列子 黃帝》 소식(蘇軾)의 시 〈강교(江郊)〉에 “낚시만 생각하고 고기는 잊고서, 이 낚싯대와 줄만 즐기노라.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며 사물의 변화를 완상한다.[意釣忘魚 樂此竿綫 優哉悠哉 玩物之變]” 하였다.
[주D-051]옥을 심으매 : 한(漢)나라 때의 효자인 양백옹(楊伯雍)은 낙양(洛陽) 사람으로 무종산(無終山), 즉 옥전(玉田)에 살면서 3년 동안 목마른 행인들에게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돌 한 되를 주면서 땅에 심게 하였다. 몇 년 뒤에 서씨(徐氏) 집에 딸이 있어서 옹백이 장가들고자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백옥 한 쌍을 폐백으로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옹백이 돌을 심었던 밭에 가서 다섯 쌍의 백옥 구슬을 캐서 바치니 서공이 딸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구름 속에서 용이 내려와 이들 부부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그 후손들이 밭 가운데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搜神記》
[주D-052]반계(磻溪)에서 …… 바라리오 : 반계는 강태공(姜太公)이 낚시질하던 곳이다. 주왕(周王)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강태공이 위수(渭水) 가의 반계에서 낚시질하다가 사냥을 나온 문왕을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다. 여기서는 옥담을 강태공에 비겼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세상에 뜻을 펴지 못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53]율리(栗里)에서는 …… 충분하여라 : 율리는 유명한 은사인 진나라 도연명이 살던 고향 마을 이름이다. 즉 옥담이 고향에 은거하여 한가로이 살아가는 모습을 진나라 은사 도연명에 비유한 것이다.
[주D-054]상유(商游) : 공자의 제자로 문학에 뛰어났던 자하(子夏)와 자유(子游)의 병칭이다. 자하의 이름이 상(商)이다. 공자가 제자들의 특장을 말하면서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이다.” 하였다. 《論語 先進》
[주D-055]일곱 …… 구슬 : 일곱 아들을 비유하였다.
[주D-056]한 …… 연꽃 : 두 딸을 비유하였다.
[주D-057]색동옷 나란하고 : 아들들이 부모를 잘 봉양함을 뜻한다. 춘추시대 초(楚)나라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은사(隱士)가 있었는데, 어버이를 모시는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稽古》
[주D-058]하늘을 …… 모였어라 : 별이 모인다는 것은 덕망과 재주를 갖춘 선비들의 모임을 뜻한다. 진식(陳寔)이 두 아들인 원방(元方)ㆍ계방(季方)과 손자 장문(長文)을 데리고 순숙(荀淑)의 집에 가자 하늘에 덕성(德星)이 모이는 상서(祥瑞)가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이것을 보고 “하늘에 덕성(德星)이 모였으니 500리 안에 현인(賢人)들이 회합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여기서는 옥담의 일곱 아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59]무릎을 …… 노래하고 : 큰 뜻을 펴지 못하는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양보음(梁甫吟)이란 노래를 지어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채 길게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포슬음(抱膝吟)〉이라고도 한다.
[주D-060]시국에 …… 근심하네 : 북송(北宋)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에 높이 있을 때는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멀리 있을 때는 임금을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 즐거운가. 반드시 천하가 근심하기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後集 岳陽樓記》
[주D-061]금구(金甌) : 금으로 만든 사발로 흠이 없고 견고하다 하여 강토(疆土)에 비유된다. 양무제(梁武帝)가 일찍 일어나 무덕각(武德閣)에 이르러 혼자 말로 “나의 국토는 금구와 같아 하나의 상처도 흠도 없다.” 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南史 卷62 朱异傳》
[주D-062]한 …… 성(城) : 인조(仁祖)가 농성하다가 청(淸)나라에 항복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주D-063]쇄미(瑣眉)한 신세 : 전란으로 유리(遊離)하는 신세를 뜻한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모구(旄丘)〉에 “자잘하고 자잘한 이 유리하는 사람이로다.[瑣兮尾兮 遊離之子]”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64]호공(壺公)이 가졌던 비결 : 후한(後漢) 때 호공(壺公)이라는 선인(仙人)이 시장에서 매일 약을 팔다가 석양이 되면 점포 머리[肆頭]에 달아놓은 병 속으로 뛰어들어가곤 하였다. 그것을 본 비장방(費長房)이 한번은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하나의 별천지(別天地)가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72下 費長房列傳》 여기서는 옥담이 두곡이란 곳에서 은거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65]학이 …… 일어라 : 옥담이 피난갔다가 고향에 돌아왔음을 뜻한다. 요양(遼陽)은 요동(遼東)이다. 한(漢)나라 때 요동에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영허산(靈虛山)에 가서 도술을 배운 뒤에 학(鶴)으로 변신하여 요동에 돌아와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떤 소년이 활로 자기를 쏘려고 하자, 학이 높이 날아올라 말하기를 “두루미로 변한 정령위가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구나. 어이하여 신선이 되는 법 배우지 않아서 죽어 묻힌 무덤이 여기저기 쌓였는고.” 하고 한탄하면서 하늘 높이 사라졌다고 한다. 《搜神後記》
[주D-066]진(秦)나라 …… 낼까 : 포로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을 구출할 사람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었다가 속임수를 써서 도망쳐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다. 그러나 함곡관은 닭이 울기 전에는 관문(關門)을 열어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한편 맹상군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진나라 소왕(昭王)은 사람을 시켜서 급히 맹상군을 쫓게 하였다. 닭이 울 시간은 멀었고 추격대는 바짝 뒤쫓아 오고 있는 터라, 상황이 몹시 다급하였다. 이 때 맹상군의 일행 중에서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내자 인근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 댐으로써, 마침내 관문을 열어 주어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주D-067]연옥(燕獄) : 조선의 충신들이 청(淸)나라 감옥에 많이 갇혔음을 뜻한다. 남송(南宋) 때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원(元)나라가 침입해 오자 가산(家産)을 털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고, 그 후 원(元)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수감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68]변방의 노인 :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쳐서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였는데, 그 노인은 태연하게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몇 달 뒤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 여러 마리를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였는데,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그의 아들이 말 타기를 좋아하여 그 말들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1년 뒤에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하자 장정들이 모두 나가 싸워 변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만은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 부자가 모두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 하였다.
[주D-069]장공(莊公)이 …… 배우노라 : 무상한 인생에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장공은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장자가 초(楚)나라로 가다가 해골을 만나서 말채찍으로 그 해골을 때리면서 묻기를 “자네는 삶을 탐하다가 도리를 잃어서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라를 망친 일 때문에 처형을 당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쁜 일을 하여 부모와 처자를 욕되게 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그 해골을 베고 누워 잤다. 밤중에 해골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자네의 말은 변사(辯士)와 같네. 그러나 자네가 말한 여러 가지는 살아 있는 사람의 허물일 뿐이요, 나처럼 죽은 사람은 그런 걱정이 없다네.” 했다고 한다. 《莊子 至樂》
[주D-070]금문(金門) :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대문인 금마문(金馬門)이다. 국가의 조칙(詔勅)을 작성하는 문학의 선비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
[주D-071]이정(鯉庭) : 자식이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는 곳을 뜻한다. 공자(孔子)의 아들 이(鯉)가 뜰에서 공자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가 공자로부터 시례에 대하여 배웠느냐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일에서 유래한다. 《論語 季氏》 여기서는 이 시의 작자 오상(吳尙)이 옥담의 아들과 벗이기 때문에 옥담의 가정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주D-072]아양곡(峨洋曲) : 벗끼리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을 뜻한다. 춘추시대 백아(伯牙)가 금(琴)을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 하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73]난옥(蘭玉) :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의 준말로, 남의 자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주D-074]일산(日傘) 기울이매 :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나 수레의 휘장을 기울이고 그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로, 잠깐 동안 이야기해 보고서도 마음이 통함을 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에 “공자가 담(郯)에 가다가 길에서 정본(程本)을 만나고는 경개(傾蓋)하고 종일토록 이야기하며 몹시 친밀해졌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75]침상 아래 절하고 : 존경하는 어른을 배알함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 제갈량(諸葛亮)이 방덕공(龐德公)을 찾아가면 반드시 방덕공이 앉은 침상 아래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생긴 말이다. 《資治通鑑》
[주D-076]악부(樂府)에서 …… 들리라 : 악부는 한(漢)나라 때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민간의 노래를 채집하기도 하였다. 〈이소(離騷)〉는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대시인 굴원(屈原)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즉 옥담의 시를 이소에 비겨 칭찬한 것이다.
[주D-077]주신 …… 본다오 : 옥담이 보내준 시편에 대해 화답하는 시편을 아직 보내지 못하다가 이제 시편을 보내지만 답하는 시편을 볼 길이 없으니, 멀리서 달빛을 보며 옥담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농암집 제1권
 시(詩)
다음날 자익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오다.


묘봉암 높다랗게 솟아 있다면 / 迢迢妙峯菴
도봉사 정갈하여 엄숙도 하다 / 肅肅道峯祠
산행길은 저마다 길이 달라서 / 山行各異路
골짝서 서로 만날 기약했었지 / 中谷會有期
어제는야 후두둑 내리는 비에 / 冥冥昨日雨
동서를 분간 못할 구름과 안개 / 雲霧東西迷
산길이 서로간에 막히고 끊겨 / 山蹊兩阻絶
오는지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 去來不可知
지는 해를 서글피 바라보면서 / 悵望日向夕
서성대며 그대들 생각했었지 / 徙倚空相思

두 번째
그대들을 그리다 아침 해 뜨니 / 相思達明發
기대는 끊겼어도 배회하던 차 / 望絶猶徘徊
그 어찌 뜻했으랴 우리 그대들 / 何意二三子
고맙게도 이처럼 다시 올 줄을 / 惠然能復來
얼굴 펴며 봄옷을 걷어 잡고는 / 開顔攬春服
무우대에 모두 다 나란히 앉아 / 並坐舞雩臺
지나온 길 돌아보며 가리키는데 / 還顧指所歷
하늘 닿은 길이라 정말 험난해 / 天路何艱哉
험난한 길 힘들지 않았겠나만 / 躋攀能無疲
그래도 이내 마음 흐뭇하여라 / 且慰我心懷

세 번째
침울하던 마음이 트이고 나니 / 心懷旣已開
산수 풍경 더한층 맑고 새롭다 / 山水復淸新
구름 위로 높은 뫼 솟아 있고요 / 脩岑竦雲表
산안개에 붉은 기운 일어나누나 / 絳氣興氳氤
바위샘 해맑아라 거울 같아서 / 巖潭皎若鏡
가던 길 주저앉아 물고기 구경 / 行坐見游鱗
푸른 부들 저마다 하늘거리고 / 靑蒲相披拂
하얀 자갈 어찌나 반짝이는지 / 素石何磷磷
유별난 즐길 거리 마음 다 맞아 / 殊賞俱造適
흥미롭지 않은 건 하나도 없어 / 何物不宜人
평소에도 이따금 유람했지만 / 平生數游歷
이와 같은 흥취는 지금뿐일레 / 會興惟今辰


 

 

농암집 제4권
 시(詩)
제생과 숭아(崇兒)를 데리고 원화벽(元化壁) 아래에서 함께 놀다가 나물을 뜯어 밥을 짓다.


아이며 관 쓴 사람 크고 작은 예닐곱이 / 童冠參差六七人
봄놀이 나온 모습 무우대(舞雩臺) 고사 같네 / 羣游頗似舞雩春
푸른 시내 앉았자니 실바람 지나가고 / 靑溪坐久微風度
산꽃이 제멋대로 복건 위에 떨어지네 / 隨意巖花墜幅巾

두 번째
안개 짙은 봄 산에 오솔길 그윽하고 / 漠漠春山一路深
높은 솔 해를 가려 푸른 시내 그늘졌네 / 高松翳日綠溪陰
새소리며 낙화에 돌아갈 줄 모르는 맘 / 鳥啼花落忘歸去
한없이 뻗어나간 등넝쿨 그와 같네 / 無限雲蘿獨此心

세 번째
여기저기 푸른 바위 푸른 물에 비치는데 / 幾曲蒼巖映碧漪
명상에 잠겼다간 낭랑하게 읊조리곤
/ 凝思朗詠獨多時
부드러운 약초나물 당귀는 캐었으나 / 藥苗採得當歸嫩
철쭉꽃 아직 일러 찾아보기 어렵고녀 / 花蕊窺尋躑躅遲

네 번째
푸른 숲 천지 원기 태곳적 그대론데 / 積翠鴻濛太始來
구름에 덮인 산이 허공에 솟아 있네 / 雲屛直到半天開
드높은 저 산세를 한없이 쳐다보다 / 仰看不盡崢嶸勢
시내 동쪽 백척 대 다시금 오른다네 / 更就溪東百尺臺

다섯 번째
한낮이라 솔 아래 불 지펴 밥을 짓고 / 午煙松下颺新炊
산나물 손수 캐니 흥 절로 일어난다 / 手擷山蔬興自知
참깨가 신선의 밥 부질없는 낭설이요 / 枉說胡麻是仙飯
지초도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네 / 何曾芝草療人飢


[주D-001]무우대(舞雩臺) 고사 : 무우대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지대가 높고 숲이 있는 대(臺)이다.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의 낙을 즐기는 것을 뜻한다. 공자가 증점(曾點)을 위시한 몇몇 문인에게 각자의 뜻과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증점은 세상에 나가 훌륭한 정치를 펴보고 싶다는 이들과 달리,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갓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한 뒤에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고 말함으로써 공자의 동의를 얻었다. 《論語 先進》
[주D-002]여기저기 …… 읊조리곤 : 진(晉)나라 손작(孫綽)이 지은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호젓한 바위 위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긴 냇가에 임하여 낭랑하게 읊조리네.[凝思幽巖 朗詠長川]”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文選 卷11 遊覽》

 

송자대전 부록 제19권
 기술잡록(記述雜錄)
권상하(權尙夏)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높인 말)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높인 말)ㆍ장자(張子 장재(張載)를 높인 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折衷)하여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해서 만세의 보전(寶典)으로 만들었으니, 이른바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회옹 부자가 죽고 나서는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서 괴이한 논설(論說)들이 시끄럽게 나와 사도(斯道 성인의 도)가 묻혀 버리고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참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되어 유학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리(性理)의 호리(毫釐)를 분석하였으니, 그 이학(理學)을 밝힌 공이야말로 저 염락(濂洛)이 융성했던 시대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밝혀 놓은 이학을 더욱 확대시키고 천명(闡明)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가 살던 지명으로, 곧 주희를 가리킴)의 정통(正統)을 연접하고 가깝게는 제유(諸儒)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거룩하게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그의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회옹은 공자(孔子) 이후의 일인자(一人者)요, 우암은 회옹 이후의 일인자이다.

선생은 훌륭한 덕과 크나큰 업적으로 백세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의 한마디 말과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모두 무궁토록 후세에 전할 만하다.

선생의 문집(文集) 가운데는 어떤 글을 막론하고 취할 것은 그 전문(全文)을 다 취해서 넣어야지, 산삭(刪削)하는 일은 큰 안목(眼目)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경의(經義)와 예의(禮疑)는 모두 본집(本集)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며, 시집(詩集)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예(例)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매우 온당하나, 다만 연월(年月)의 선후를 상고하기가 용이치 못한 점이 있다.

도봉산(道峯山) 무우대(舞雩臺)의 남쪽에 푸른 절벽이 높다랗게 깎아질렀는데, 그 아래는 큰 바위가 시내를 가로질러 있다. 이 바위에다 선생이 친히 써 놓은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새겨 놓았는데,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힘차서 만 길이나 되는 산봉우리와 서로 겨룰 만하였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때부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도(風度)를 익히 들었던 터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다음으로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비문(碑文)ㆍ행장(行狀) 등의 문자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선생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특별히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임 장군에 대한 표장(表奬)이 곡진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말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올린 소(疏) 가운데, 대비(大妃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등의 말이 있고 이어서 그러나 결코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 사실이 있는데, 춘당(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정한강의 이 소(疏)를 보고서 하루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에게,
“정공(鄭公)의 이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묻자, 미촌이,
“광해군(光海君)을 달래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네.”
하고 대답하니, 춘당 선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우암 선생이 뒤에 그 말을 듣고는,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의 말은 매양 이해(利害)를 주장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尼 윤증(尹拯)이 이산(尼山)에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킴)는 탄곡(炭谷 권시(權諰))이 장인(丈人)이고 권유(權惟)ㆍ권기(權愭)가 처남(妻男)이었으므로, 젊었을 때부터 다년간 한방에서 지냈고, 그의 아우(윤증의 아우인 윤추(尹推)를 말함)는 이유(李)가 장인이고 이삼달(李三達)이 처남이었으므로 정분(情分)이 천륜(天倫)에 가까운 사이이니, 서로 돈독히 믿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남인(南人)들은 ‘허견(許堅)과 이남(李枏 왕족(王族)인 복선군(福宣君))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역적(逆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역적이란 군상(君上)을 모해(謀害)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허견과 이남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랐으니,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봉호)이 강압적으로 옥사(獄事)를 일으켜 대신(大臣)들을 마구 살해하였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크나큰 화(禍)였다.’ 하였다.
윤증은 마음속으로, 선생이 거제(巨濟)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 훈척(勳戚)들을 내쫓고 윤휴(尹鑴)ㆍ허적(許積) 등의 무리에게 신원을 해 주어야만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의 뜻은 왕실(王室)을 반석(盤石)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일이요 죄를 짓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이 크게 경악하여 권이정(權以鋌 권시(權諰)의 손자요, 송시열의 외손자며, 윤증의 처질(妻姪)이다)에게,
“너의 외조(外祖 송시열을 가리킴)가 장차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주견(主見)이 이러했기 때문에, 뒷날에라도 혹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 윤증 자신 역시 선생의 고제(高弟)이기에 화(禍)를 면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선생과 파당(派黨)을 약간 달리하여 호신(護身)의 계책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같은 서인(西人) 중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다.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기(記)
소광정기(昭曠亭記)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봉만(峯巒)이 빼어나고 수석(水石)이 깨끗하여 본디부터 기내(畿內) 제일의 명구(名區)로 일컬어졌다. 만력(萬曆 명 신종) 계유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쪽으로 백 보를 다 못 가서 시내 위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무우(舞雩)라 이름하고, 대의 동쪽으로 문(門)을 내어 이를 영귀(詠歸)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증점(曾點)이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의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는 동춘 선생(同春先生)이 쓴 여덟 대자(大字)가 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 뻗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 선생(尤齋先生)이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한데 써서 모아 놓은 것이 있는바 그 필세(筆勢)가 매우 힘차서 만장봉(萬丈峯)과 기세가 서로 등등하다. 그런데 계사년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산을 삼켜버림으로 인하여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 떠내려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었고 두 선생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되었으니, 참으로 고금에 없던 변고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대(大)가 물러가고 소(小)가 옴으로써 소인들의 중상(中傷)이 두 선생의 묘향(廟享)에까지 미칠 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의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먼저 그 조짐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친구 파평(坡平) 윤봉구 서응(尹鳳九瑞膺)이 바야흐로 원사(院事)를 주관하여 이에 침류당(枕流堂)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편편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지었다. 이는 대체로 구기(舊基)가 이미 파여서 못 쓰게 됨으로써 부득불 겁수(劫水)에도 안전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는가.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5, 60인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와 영귀의 뜻이 본래 기수에 목욕한다는[浴沂]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필적의 진본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중신(重新)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 좌우에는 그 위를 그늘지어 줄 소나무나 노송나무가 없으므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그러자 서응(瑞膺)이 등나무와 풀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 남쪽 비탈의 층암(層巖)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 하나를 찾아내어 이곳의 잡초 등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니, 사방의 넓이가 기둥 4개를 세울 만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저 돌아드는 물과 깔려 있는 암석은 바로 눈 밑에 있고, 무우대와 두 석각(石刻)과 튼튼한 장옥(墻屋)과 우뚝우뚝 솟은 봉만(峯巒)들이 모두 조망(眺望) 가운데 죽 배열되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그윽한 속에 이토록 밝게 탁 트인 지경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혹 조화옹(造化翁)이 짐짓 이곳을 비장(秘藏)해 두었다가 호사자(好事者)를 기다려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모정(茅亭) 한 칸을 지어 소나무와 노송나무의 그늘을 대신하니, 그 제도가 정밀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서 산중의 한 가지 진기한 완상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응의 성근한 뜻이 아니면 그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서응이 하루는 나에게 와서 이 모정의 이름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지에 이르면 고인(古人)이 이를 일러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경유하고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서로 같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소광정(昭曠亭)이란 세 글자로 제명(題名)하고 아울러 그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여 문지방 사이에 걸도록 하노니, 후일 이 원(院)에 노닐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은 이 명칭을 돌아보아서 더욱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주D-001]증점(曾點)이 …… 뜻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으로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주D-002]대(大)가 …… 옴으로써 : 대는 양(陽)으로서 군자의 도를 뜻하고, 소(小)는 음(陰)으로서 소인의 도를 뜻한다. 《周易 否卦》
[주D-003]겁수(劫水) : 불가(佛家)의 말로,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수재(水災)를 말한다.

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昭曠亭記 a_150_400a


道峯是舊寧國寺遺址也。峯巒秀拔。水石朗潔。素稱150_400b畿內第一名區。祠屋之刱。在萬曆癸酉。遂作國東郊大儒院。其事面亞於泮宮。洛中章甫常輻輳於斯。講堂之西不百步。臨溪築小臺。名舞雩。臺之東有門名詠歸。蓋取曾點風詠之意也。臺南越溪。蒼崖屹立。刻同春先生筆八大字。其下大石橫亘溪面。刻尤齋先生所書集晦翁詩二句。筆勢雄健。與萬丈峯相埒。癸巳夏雨。大水懷山。崖坼石奔。臺與門拔其基。兩先生筆蹟顚倒漂移。誠古今所無之變也。居數年。大往小來。蜮弩幾及於廟享。豈天憫念斯文之變作。先示妖孼也耶。吾友坡平尹鳳九瑞膺。方執耳院事。乃就150_400c枕流堂南畔隙地。立詠歸之門。少下有壁陡起溪岸。展其頂築舞雩臺。蓋緣舊基已成齹齖。不得不移占。斯區之得全於劫水。不亦奇哉。臺下有數仞懸瀑。瀑底石坳開函。水滙爲潭。潭之南。白石盤陀。可坐五六十人。淸致勝似前築。潭北壁刻沂水二字。以其舞雩詠歸之意。本出於浴沂也。遂摹出兩先生舊筆眞本刻于石。又刻舞雩臺三字於其傍。於是乎門臺筆蹟。一復其舊。人不知其重新。然新築之左右。無松檜蔭其上。登臨者病焉。瑞膺披藤蘿草樹之中。得一小臺於南崖層巖上。除其穢剗其蕪。廣袤可容四礎。彼水150_400d之滙者石之盤者。卽其眼底。而舞雩之築二石之刻。墻屋之持持。峯巒之矗矗。幷排列望中。孰謂幽隱之中。有此爽塏之丘也。抑化翁故祕之。以待好事者而發耶。遂構一間茅亭。以代松檜之蔭。其制精而不侈。足備山中之一奇玩。非瑞膺之意之勤。其孰能辦此。瑞膺一日來問名。余以爲學者窮探力索。至於豁然貫通。則古人謂得觀昭曠之原。今入此洞者。經丘尋壑。旣登乎此則襟懷爽豁矣。其氣像與之相侔。遂題昭曠亭三字。幷書其前後事實。俾揭于楣間。後之遊斯院而陟斯亭者。庶幾顧是名而勉之。

간이집 제7권
 송도록(松都錄)
화담(花潭)에서 오산의 시에 차운하다. 2수(二首)


세상 걱정 하나 없는 오래된 연못이여 / 古潭空世慮
그 옛날 공의 얼굴 거울처럼 비췄으리 / 當日鏡公顔
고학과 함께 눈 속에다 둥지를 틀었으니 / 孤鶴同巢雪
만우가 온들 산에서 일으킬 수 있었겠나 / 萬牛不起山

여기는 선인께서 학업을 닦았던 곳이라서 / 先人曾有受
나 역시 오래전부터 격의가 없었다오 / 小子久無間
선생이 남겨 주신 역리(易理)를 찾아도 보았소만 / 易上尋餘論
비유하면 하나의 관반이라고 해야 할지 / 其如一管斑

선군(先君)이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적이 있었다.

선생의 시대에 태어나서 직접 뵙지 못한 채 / 不及先生世
공자가 안자를 가르쳤단 말만 그저 들었을 뿐 / 徒聞孔鑄顔
끊임없이 퐁퐁 솟아 흘러내리는 샘물이요 / 源頭來活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높은 멧봉우리로세 / 仰止有高山
홀연히 지금 선생의 강석(講席)에 나아온 듯 / 忽若函丈下
가슴속에 나도 몰래 희열(喜悅)이 느껴지네 / 怡然方寸間
다시 기약하노니 꽃들이 활짝 피는 그날 / 更期花發日
성대하게 발동하는 생의를 확인하리로다 / 生意見斑斑


[주D-001]고학(孤鶴)과 …… 있었겠나 : 화담 서경덕(徐敬德)이 산림의 처사(處士)로서 고고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벼슬에도 응하지 않고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고학은 고산(孤山)의 학으로, 송(宋)나라 임포(林逋)가 고산에서 은거하며 매화를 사랑하고 학을 기르면서 평생을 보냈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일컬어졌던 고사가 있다. 《夢溪筆談 人事2》 만우(萬牛)는 일만 마리의 소처럼 힘이 엄청나게 센 것을 표현하는 말인데, 소식(蘇軾)의 시에 “만우가 땀을 흘리며 힘을 써도 끌어낼 수가 없다.[萬牛喘汗力莫牽]”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9 咏怪石》
[주D-002]선생이 …… 할지 : 간이 자신도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지만, 화담의 역학(易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관반(管斑)은 대롱[管] 구멍을 통해서 표범의 반점(斑點) 하나를 엿본다는 뜻으로, 식견이 얕아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주D-003]공자가 …… 들었을 뿐 : 화담의 문하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표현한 말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공자가 제자인 안연을 도야(陶冶)하여 그릇을 만들었다.[孔子鑄顔淵]”는 말이 나온다.
[주D-004]우러러볼 …… 멧봉우리로세 :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車舝)에 “저 높은 산봉우리 우러러보며, 큰길을 향해 나아가노라.[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생의(生意) :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기상을 말한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류(道體類)에 “천지가 만물을 내놓는 기상을 관찰한다.[觀天地生物氣象]”는 정명도(程明道)의 말이 실려 있는데, 그 주(註)에 “주염계(周濂溪)가 창 앞의 풀이 무성해도 베지 않으면서[窓前草不除去], 저 풀 역시 내 속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이병적(李秉迪)]


문인 이병적(李秉迪)

아, 슬프도다 / 嗚呼哀哉
나라는 시초와 거북을 잃고 / 國亡蓍龜
사림은 영수를 잃었도다 / 士失領袖
누구에게 의심을 물으며 / 孰稽其疑
누가 우리 후학을 깨우치랴 / 誰開我後
지주가 거센 물결에 맞서다가 / 砥柱頹波
부러지니 물결이 사나워지고 / 柱折波悍
해와 별이 긴 밤을 비추다가 / 日星長夜
해가 지자 밤만 계속되네 / 日沈夜漫
아, 공은 태어나면서 / 繄公之生
빼어난 기운 받았으며 / 鍾秀稟精
자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 姿質溫粹
지기가 맑고 밝았네 / 志氣淸明
학문은 정도를 추종하고 / 學趍正路
문장은 희성을 떨쳤네 / 文振希聲
그 밖에 제자백가 찾고 / 旁搜百家
육경을 깊이 탐구했네 / 深究六經
독실히 행하고 힘써 실천하여 / 篤行力踐
근원이 두터워졌고 / 其源旣厚
오묘하고 참된 깨달음은 / 玅契眞知
스승의 도움 받지 않았다네 / 不資師友
일찍부터 조정에서 이름 날려 / 早揚王庭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두었고 / 志在兼善
선비들의 기대 높았기에 / 士望藹鬱
큰 길이 활짝 열렸다네 / 晉塗大闡
중년에 뜻하지 않은 화를 만나 / 中際奇禍
이 세상에 마음을 버리고 / 絶意當世
어버이 생각에 눈물 흘리며 / 泣柏丘山
호숫가에 가서 살았다네 / 寄棲湖㵝
밭에서 거친 밥 먹고 물 마셔도 / 一畝簞瓢
즐거울 뿐 아무런 근심 없었네 / 樂且無憂
마음 가라앉혀 이치를 완미하면서 / 潛心玩味
그저 여유롭게 지내었지 / 聊以優游
도가 높고 덕이 높았으나 / 道尊德卲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 曾不自足
정미한 의리 더욱 연구하여 / 益究精微
정자와 주자에게 소급하였네 / 沿泝濂洛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 不出戶庭
아름다운 향기 멀리 풍겨 / 馨香遠聞
모두들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 高山仰止
문하에 다투어 나아갔네 / 望門爭進
조리 있게 강론하고 / 講議有端
또 애써 인도하여 / 誘掖且勤
오묘한 이치 다 보여 주며 / 竭斯奧妙
어리석은 이들 깨우쳤네 / 發其蔽昏
내가 문하에 들어간 지도 / 小子摳衣
벌써 여러 해가 지났으니 / 亦有年所
처음에 뵈었을 적에는 / 初拜床下
한계를 알 수 없었는데 / 莫窺涯渚
온화하게 질문에 대답하여 / 雍容扣應
구름을 걷고 해를 바라보는 듯 / 披雲覩日
어리석은 나를 불쌍히 여겨 / 憐我蔑裂
나에게 학문을 권하였네 / 勉我以學
대학과 맹자를 / 曾傳鄒書
차례대로 가르쳐 주니 / 次第以授
덕과 의로 향하는 길이 / 德門義路
마치 가까이 있는 듯하였네 / 如在左右
허나 작은 것 좋아하고 어려움 싫어하여 / 悅小畏難
격려를 저버리고는 / 孤負嘉獎
장차 선생께 몸을 맡겨 / 擬將委身
길이 가까이서 모시고 / 長侍函丈
삼가 가르침 받들어 / 承奉謦欬
어리석음 고칠까 하였는데 / 庶化頑鈍
세상사가 꼬이는 바람에 / 世故相乘
숙원을 이루지 못했네 / 未卒宿願
올봄에 잠시 찾아뵙고 / 今春暫省
가을에 만나기로 약속하여 / 指秋留期
손가락 꼽으며 헤아렸는데 / 屈指以算
어찌 이리될 줄 알았으랴 / 寤言念玆
돌아간 지 며칠 만에 / 言歸幾日
갑자기 부고가 닥치니 / 凶音遽至
목이 메어 통곡하고 / 失聲長號
눈물이 줄줄 흐르네 / 有淚交墜
어찌 알았으랴 이 이치가 / 倘知此理
이다지도 어긋날 줄을 / 爽盭若斯
비록 병에 걸렸다 하나 / 身雖疾冗
어찌 차마 가신단 말인가 / 豈忍辭歸
선생이 가버렸으니 / 先生之去
우리 도의 액운이로다 / 吾道之厄
한탄스럽구나 후학들은 / 嗟嗟後學
헤매이며 어디로 가리오 / 倀倀何適
사문을 위해 슬퍼하고 / 爲斯文慟
또 나의 사정으로 통곡하네 / 又哭吾私
그 모습 길이 감추어지니 / 風儀永閟
영원토록 하직하게 되었구나 / 萬古長辭
영구 앞으로 나아가 / 匍匐柩前
삼가 제물을 바치나니 / 奉奠以贄
영령이 남아 있거든 / 不亡者存
이 성의를 살펴 주소서 / 鑑此誠意


[주D-001]희성(希聲) : 《노자(老子)》에 “지극히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 한 데서 온 말이다.

 

성호사설 제20권
 경사문(經史門)
고산앙지(高山仰止)


시(詩)를 읽는데 경솔히 할 수 없다. 후유(後儒)들의 해석은 모두 상스러운 말이 많고 고상한 뜻이 없으므로, 간혹 옛사람이 말한 본래의 뜻에 따라서 읽어야만 깊은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솔개가 난다” “물고기가 뛴다.”라는 말 같은 것은 진실로 중용(中庸)에서 해설한 한 대문이 아니면 후세 사람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높은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한다.” “큰 길로 걸어가는 것처럼 한다”라는 말 같은 것도 잠깐 보면 거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잘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성인(聖人)은 칭찬하기를 “시인(詩人)으로서 인(仁)을 좋아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도(道)를 따라서 행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몸이 늙는 줄을 모르고 날로 힘쓰다가 몸이 마친 후에 그만두는[已] 사람도 있다.” 하였다.
이로 본다면 그 긴요한 뜻은 지(止) 자에 있다는 것인데 이 지(止)와 이(已) 두 글자는 서로 같은 뜻이다. 지(止)는 《대학(大學)》 “지선에 그친다[止於至善].”는 주에, ‘반드시 여기에 그쳐서 옮기지 않는 뜻이다[必至於是而不遷之意].’ 하였으니, 역시 잘 발휘한 말이다. 대개 큰 길로 걸어가는 군자(君子)는 남들이 반드시 우러러 바라보지 않으며, 어떤 이는 웃으면서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높은 산이 앞에 있으면 어리석은 자거나 불초한 자거나 모두 쳐다보지 않는 이가 없으니, 비록 낮게 보려고 한들 되겠는가? 어질고 지혜 있는 자는 큰 길로 걸어가는 군자(君子)에게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오직 우러러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행하려고 해서 반드시 지키는 이 큰 도(道)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높은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한다는 것뿐이고 큰 길로 걸어가는 것처럼 한다는 것뿐이다. 이 큰 길로 가다가 중간에서 그만두는 자도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헤아려서 그만 걷어치운다는 뜻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무릇 시(詩)에 지(止)자를 쓴 것은 모두 이런 뜻이다.
만약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이 작자의 뜻과 서로 반대된 셈이라고 한다면 아마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요, 다만 후인들이 투철한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 밝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친다.”라는 따위 같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주C-001]고산앙지(高山仰止) : 높은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함. 《시경》 소아(小雅)와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옴. 《類選》 卷六上 經史篇 經書門.
[주D-001]시(詩) : 《시경》을 가리킴.
[주D-002]솔개가 난다 물고기가 뛴다[鳶飛魚躍]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鳶飛戾天 魚躍于淵 豈弟君子 遐不作人”이라고 보임.
[주D-003]중용(中庸) : 《예기(禮記)》 중의 한 편명.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음.
[주D-004]고산앙지(高山仰止) :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高山仰止 景行行止 四牡騑騑 六轡如琴 覯爾新昏 以慰我心”이라 보이는데, 이는 대부가 주유왕(周幽王)을 나무란 시.
[주D-005]계속 밝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친다.[於緝熙敬止]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假哉天命 有商孫子 商之孫子 其麗不億 上帝旣命 侯于周服” 이라고 보임.
송자대전 부록 제6권
 연보(年譜) 5
숭정(崇禎) 45년 임자. 선생 66세

1월 초하루는 무신(戊申) 18일(을축)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직명 및 녹봉을 사직하였다.
이때에 적신(賊臣) 허적(許積)이 선생의 앞서 소에서 논한 바 ‘윤계(尹堦)ㆍ윤가적(尹嘉績)이 어물어물 하였다.’ 한 것은 실로 자기를 지척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사직하고, 윤경교(尹敬敎)가 또 상소하여 허적을 탄핵하니, 상이 윤경교를 ‘흉교(凶狡)ㆍ금수(禽獸)’로 지척하고, 또 ‘다른 사람의 뜻과 부합한다.’ 하였다. 선생이 이 때문에 허물을 자인(自引)하여 아뢰기를,
“전일에 아뢴 바는 망녕된 생각에 ‘대간이 매양 전하께서는 대신을 신임하고 대신은 자임(自任)을 중히 하는 것으로써 말하니, 이는 성현(聖賢)의 훈계를 강구하지 않고 세속의 소견에만 끌릴 뿐이다.’ 하고 여겼으므로 신이 그 잘못됨을 바로 말한 것이며, 그 아래의 ‘대신을 바꾸어 버리라……’ 한 것은 곧 가설로 말한 것이요, 대신이 결정코 적합한 사람이 아니어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또,
“윤경교의 소가 별안간 나와서 공격하고 지척함이 못할 바가 없이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이 아는 바가 아닌데, 성명(聖明)께서는 또 ‘그의 말이 신의 의견과 부합된다.’ 하시고 또 그것이 ‘입에 부레풀과 옻을 머금었다.’는 풍자에 격동된 것이라 여기시니, 그렇다면 죄가 윤경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가 성교(聖敎)를 인연하여 비방이 성대하게 일어나서, 신을 근본이라 하고 윤경교를 지류(枝流)라 하니, 그 형적을 구명해 보면 진실로 그렇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윤경교의 흉교(凶狡)는 곧 신의 흉교요, 윤경교의 간상(姦狀)은 곧 신의 간상이요, 윤경교의 금수(禽獸)는 곧 신의 금수가 되는 소이입니다. 이제 신을 꾸짖는 자가 있어서 심지어 ‘신이 몰래 서울 근처에 가서 윤경교와 함께 이와 같이 서로 약속하였다.’ 하니, 이렇다면 신이 윤경교와 귀신이 되고 물귀신이 되는 정상은 실로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이는 금수 중에도 심한 것이요, 흉교라든가 간상이라 하는 것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제목입니다.”
하고, 또,
“신이 말한 바가 과연 어리석고 망녕되이 도움이 될 것이 없고 곧 난을 일으키기에 알맞다면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불가함을 보여서 일이 나기 전에 방지하는 것이 옳으신데, 곧 도리어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장(褒奬)하여 총애하시어 참으로 그 말이 착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하시니, 대성인(大聖人)이 성심으로 대하는 도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고, 이어서 직명 및 녹봉을 사직하였다. 그런데 3월에 가서야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소의 사연을 보니 내 마음이 놀랍다. 내가 경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것은 없고 난을 일으키기에 알맞음이 있다면 어찌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장(褒奬)하며 총애하여, 성심으로 고하지 않고 윤경교로 하여금 이런 무상(無狀)한 짓이 있게 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렇지 않는 것인데, 경이 어찌 헤아리지 않고서 성의로 하지 않는다고 의심함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부합한다.’ 한 것은 조금도 경을 의심한 적은 없는데, ‘곧 신을 이른다.’는 등의 말로 깊은 혐의를 가지니, 이것이 어찌 내가 평일에 경에게 바라는 바이겠는가. 마음에 참으로 부끄러워서 이를 수 없도다. 아, 이야말로 어떤 때이기에, 경이 정승에 임명된 지 이제 1년이 가까운데 한결같이 사피하여 정승의 자리를 오래 비게 하고 경은 마음에 척연(惕然)하여 생민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며 속히 마음을 고쳐 올라오라. 녹봉에 이르러서도 곧 받아야 할 일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
하였다.
○ 25일(임신) 탄곡(炭谷)에 가서 권사성(權思誠 권시(權諰))을 조곡(弔哭)하였다.
위에 제문(祭文)이 있다.
○ 29일(병자) 다섯째 손자의 관례(冠禮)를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 이름은 송시묵(宋時默))의 집에서 거행하였다.
동춘(同春)을 초청하여 빈(賓)으로 삼았다. 이름을 회석(晦錫), 자를 희문(希文)이라 하였다.

3월 초하루는 정미(丁未) 21일(경오) 삼산(三山)에 들어갔다.
영동(永東) 옥계폭포(玉溪瀑布)를 두루 구경하고 냉천(冷泉)을 거쳐서 노곡(老谷)에 이르렀다.
○ 상소하여 직명 및 녹봉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초하루는 병자(丙子) 2일(정축)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갔다.
옥천 군수(沃川郡守) 윤공 형성(尹公衡聖), 보은 현감(報恩縣監) 이석관(李碩寬)이 따랐다.
○ 10일(을유) 상이 별유(別諭)로 소명을 내렸으나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5월 초하루는 병오(丙午) 27일(임신) 좌의정에 제배한 명과 소지(召旨)를 받고 상소하여 사양하고 대죄하였다.
이때에 동춘(同春)이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논하되 노기(盧杞)에 비교하니, 상은 당이 다른 사람을 배격한다고 지척하고, 허적은 교외(郊外)에 물러 나갔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소를 올려 허적을 신구(伸救)하는 데 흉악하고 간사한 어구(語句)가 많았다. 대간이 논핵(論劾)하여 죄주기를 청하고, 이윽고 집의(執義) 이공 상(李公翔)이 왕지(王旨)에 응하여 소를 올려 허적의 간상(奸狀)을 극도로 말하니, 왕이 크게 진노(震怒)하여 특명으로 삭출(削黜)하도록 하매, 대사헌 장선징(張善澂)ㆍ장령 정재희(鄭載禧)ㆍ지평 유상운(柳尙運)이 2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자, 상은 더욱 노하여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일은 윤경교에게서 근본 되었다.’ 하고 특명으로 윤경교를 극변(極邊)으로 안치(安置)하매, 조정이 몹시 놀랐다. 허적도 정승의 직에서 갈려 나고 김공 수항(金公壽恒)이 대신 영의정이 되고, 선생이 또 차례로 승진하였다. 상이 관례에 의하여 사관(史官)을 보내고 이어서 소명이 있었다. 선생이 소를 올려 허물을 자인(自引)하여 아뢰기를,
“임금은 자기 몸을 닦는 이외에 정승을 논하는 것이 큰일인데, 이제 신을 구차스럽게 이 자리에 채웠습니다. 만약, 신이 지극히 못나고 비루하여 자신의 일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반드시 오게 하려고 한다면, 정승을 둔 도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성덕(聖德)을 ‘사욕을 이기고 예에 돌아간다.[克復]’는 경지에 진취하는 것이 아니요, 만약 신의 범한 죄가 끝내 용서할 수 없어서 반드시 속히 오게 하여 죄주려 한다면 이는 성신(誠信)의 도가 아니니, 어찌 전하께서 이와 같으시겠습니까.”
하고, 또 선유(先儒)가 곽공(郭公)이 망한 것을 논하되 ‘선(善)을 좋게 여기면서 쓰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버리지 못하였다.’ 한 말을 인용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윤경교를 근래의 일의 근본이 되었다 하여 안치(安置)의 율(律)을 가하시니, 신은 근본의 근본이니 그 죄가 안치에 그칠 뿐이 아닌데, 전하께서 치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곧 좌의정의 신명(新命)이 있으니, 이 어찌 전하께서 악을 미워하는 도가 이처럼 전도(顚倒)되고 몸소 곽공(郭公)의 망한 전철(前轍)을 밟습니까.”
하고 또, 허적(許積)의 소에서 이른바 ‘같이 성고(聖考 효종(孝宗)을 말한다)에게 명을 받았다.’는 설을 따라서, 허적이 절의(節義)를 헐뜯어 배격하고 윤기(倫紀)를 무너뜨린 것을 극도로 말하고, 그의 언론과 심술이 장차 국가의 화를 빚어내고 사류(士類)를 해쳐서 성고(聖考)의 사람을 아는 밝음에 손상이 되게 한다 하였다. 허적이 보고 펄펄 뛰며 말하기를,
“이 소가 나를 만고의 소인으로 빠뜨린다.”
하고, 선생을 원망하는 것이 도리어 동춘보다 더 심하였다. 7월에 상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정승에 임명된 지 이미 한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초야에 물러나 있으니, 내가 마땅히 예를 다하여 수용(收用)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마음에 진실로 부끄러우나, 경도 끝내 국사를 생각하지 않음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소에서 말한 바 ‘동료 정승’의 일은, 내가 어찌 경이 같이 일하는 사람을 위한 뜻이 이에 이르러 깊고도 간절함을 알겠는가. ‘반드시 오게 하여 치죄하려 한다.’는 말은, 보고 나니 매우 놀랍다. 가을철이 이미 닥쳤고 묵은 병도 나았을 것이니, 온다는 소장을 빨리 결정하고 속히 올라와서 도를 논하여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초하루는 을해(乙亥) 5일(기묘) 연산(連山) 이동(梨洞)에 가서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유고(遺稿)를 교정하였다.
이초려(李草廬)도 와서 함께하였다.

7월 초하루는 갑진(甲辰) 5일(무신)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의 상을 당하였다.
이동(梨洞)에 있다가 군수공이 병이 들었음을 듣고 급히 돌아와서 살펴보았는데, 이때 와서 상을 당하자 성복(成服)하고 화양(華陽)에 돌아왔다.
○ 21일(기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소의 대략에,
“신의 앞서 소에서 말한 바는 망발 아닌 것이 없으나,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더욱 심하여, ‘놀랍다.’는 성교(聖敎)를 내리게 하였으니, 신이 여기서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만약 이로 인하여 스스로 반성하기를 ‘신하가 내 마음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혹 내가 신하의 마음을 알지 못함도 이와 같지나 않은가.’ 하여, 무릇 진언(進言)하는 사람이 있거든 반드시 서서히 연구하여 근원을 찾아보는 도리를 가하면 임금의 도가 아래에 통하고 신하의 도가 위에 행해져서 태평의 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8월 초하루는 계묘(癸卯) 9일(신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28일(경오) 중씨(仲氏)를 공산(公山) 신오(新塢)에 장사 지냈다.
○ 30일(임신)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일렀다.

9월 초하루는 계유(癸酉) 2일(갑술) 소를 올려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이때 상이 허적의 일 때문에 위노(威怒)가 크게 떨치어, 조신(朝臣) 중에 조금이라도 노여움을 격발하면 견벌(譴罰)이 내려졌다. 선생이 끝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여러 번 소를 올려 해면을 빌었더니, 10월 17일(무오)에 상이 비로소 비답을 내려 체직을 허락하고 별유(別諭)로 소명을 내렸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경의 고사(固辭)가 갈수록 더욱 굳으니, 성의가 믿음을 받지 못함이 매우 한탄된다. 옛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바는 마음 아는 데에 있었다. 경을 조정에 오게 하려는 것은 진실로 직임의 유무(有無)에만 있지 않다. 지금 경의 말을 들어주기는 하나 경이 마음을 고쳐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은 갈수록 더욱 급하여,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 이상이니 오히려 형언할 수 있으랴. 말도 다하고 뜻도 궁하다.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속히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보니 경은 알지어다.”
○ 22일(갑오) 이태지(李泰之 이유태(李惟泰))와 신오(新塢)에 모여 교서(校書)하였다.

10월 초하루는 임인(壬寅) 10일(신해) 고조고(高祖考)ㆍ증조고(曾祖考) 고비(考妣)의 조주(祧主 체천(遞遷)한 신주)를 사당에 모셨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최장방(最長房)의 예는 오로지 제사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라면 차장방(次長房)의 집에 옮겨 모시는 것은 반드시 최장방의 상을 마치기를 기다릴 것이 없다.”
하고, 일찍이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윤공(尹公)에게 말하였더니, 석호가 따랐다. 이때에 와서 다시 동춘(同春)에게 의논하고 말하기를,
“최장방(最長房)이 조주(祧主)를 모시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종가(宗家)와는 다른데, 이제 3년 동안 제사(祭祀)를 폐(廢)하는 것이 미안한 바가 있다.”
하고, 드디어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의 장사 뒤에 곧 옮겨 모셨더니, 식견 있고 예를 좋아하는 집안이 흔히 따랐다.
○ 19일(경신) 마암(馬巖)을 경유하여 화양동(華陽洞)으로 들어갔다.
○ 30일(신미) 석호(石湖) 윤여망(尹汝望 윤문거(尹文擧))을 조곡(弔哭)하였다.
선생이 윤공(尹公)과 교도(交道)가 시종 변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여망은 착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다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가 여망(汝望)보다 낫다고 하나, 나는 여망의 인품이 길보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여긴다.”
하였다. 이때 와서 그의 상을 듣고 자리를 베풀어 놓고서 곡하였다. 뒤에 또 제문을 가지고 가서 곡하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11월 초하루는 임신(壬申) 3일(갑술)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였다.
이날은 동짓날이다.
선생이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고 계고(誡誥)를 대강 진달하여 상에게, 덕을 닦고 사욕을 버리어 천심(天心)에 보답하기를 청하였더니, 이듬해 1월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는데 이러하다.
“경이 과인(寡人)을 훈계하는 뜻이 간략하면서도 지극하다 하겠다. 내가 민첩하지 못하나 띠에 써서 명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의정의 소임을 체직하게 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나, 경이 병을 끌어대어 굳이 사양하고, 또 마음을 고쳐 나설 뜻이 없으니, 내가 섭섭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으랴. 말이 다하고 뜻이 궁하니 경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봄날 화창할 때에 속히 올라와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 24일(을미) 동춘(同春)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돌아가 보았다.
선생이 이때에 화양에 있다가 동춘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곧 떠나서, 26일(병신) 아침에 동춘당(同春堂)에 이르니, 동춘이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형의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소요부(邵堯夫)처럼 희학(戲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동춘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그런 역량(力量)이 없다.”
하였다.
동춘이 일찍이 병중에서 손자 병원(炳遠)에게 명하여 ‘고산앙지(高山仰止)’ 4자를 써서 벽에 걸게 하고 말하기를,
“우암(尤菴)이 이를 당할 수 있다.”
하고, 또 ‘일조청빙(一條淸氷)’ 4자를 써서 걸게 하고 말하기를,
“이는 선배(先輩)들이 하서(河西)ㆍ율곡(栗谷)을 흠모하고 숭상한 말인데 지금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때 와서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쓴 글씨를 가리키며 선생에게 이르기를,
“이 4자는 공에게 해당한다.”
하니, 선생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일조청빙(一條淸氷)’ 4자는 형에게 해당합니다.”
하니, 동춘은,
“어찌 감히 하겠으며,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동춘이 죽자 선생은 3개월 동안 복(服)을 입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대개 선생은 동춘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웠으며, 서로 장대(長大)한 뒤에 정분이 매우 깊었다. 비록 조정에 벼슬하면서 논의할 때에 더러 엇갈리는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대체는 다 마찬가지로 돌아갔었다. 동춘이 죽은 뒤부터 더욱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항상 외로운 탄식이 있었다. 장사 때가 되자 제문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광중(壙中)에 가서 영결(永訣)하였다. 뒤에 묘지문(墓誌文) 및 유사(遺事)를 지었다.
○ 이해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었다.
서원(書院)은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으니, 실로 율곡 선생(栗谷先生)을 제향(祭享)하는 곳인데, 곧 율곡 선생의 무덤 아래이다. 묘도(墓道)에 옛날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그 글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므로 사류(士類)의 제공(諸公)이 선생에게 고쳐 짓기를 힘껏 청하였다. 선생이 여러 번 사양하여도 되지 못하였다. 제공(諸公)이 또 예전 비를 없애 버리고 세우려 하므로 선생이 힘껏 그 불가함을 말하고 또,
“만약 회암사당비(晦菴祠堂碑)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율곡(栗谷) 화석정(花石亭)이나 서원(書院)에 세우면 일이 근거가 있고 신구(新舊)에 서로 구애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원(書院)의 묘정(廟廷)에 세웠다.

[주D-001]노기(盧杞) :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 재상이 되어 권력을 독차지하고 충량(忠良)한 신하를 해치고 시기하였다. 《唐書 卷223下 姦臣傳下 盧杞》
[주D-002]소요부(邵堯夫)처럼 희학(戱謔) : 소요부(邵堯夫)는 송(宋)의 학자 소옹(邵雍). 자가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소옹이 병이 위독하자 장재(張載)에게 말하기를 “함께 한번 죽어 보세.” 하니, 장재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은 자기가 볼 수 있거니와, 자기가 또 어찌 자기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였다. 《性理大全 卷39 諸儒1 邵子》
[주D-003]회암사당비(晦菴祠堂碑)의 고사(故事) : 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사당(祠堂)에 비를 세운 고사를 가리키는데, 자세하지 않다.
청음집 제1권
 오언절구(五言絶句) 78수(七十八首)
강으로 가다 10수

석양빛은 모래 언덕 비추이는데 / 夕照平沙岸
인가들은 여기저기 숲 곁에 있네 / 人家亂樹邊
외로운 배 어느 곳의 나그네인데 / 孤舟何處客
저녁 안개 낀 강가에 홀로 묵는가 / 獨宿暮江烟

사람들 말 풀밭 속서 들려오는데 / 人語草田中
풀숲 깊어 사람 모습 아니 보이네 / 草深人不見
강바람은 선들선들 불어서 오고 / 江風吹徐徐
해가 높이 떠도 이슬 되레 빛나네 / 日高露猶泫

비 묻어와 강가 나무 모습 흐리고 / 雨色迷江樹
서늘 기운 옷 속으로 스미어 드네 / 新凉入熟衣
일엽편주 타고 고향 향해 가나니 / 扁舟故鄕去
바라던 바 어긋났다 말하지 마소 / 莫道願相違

푸른 절벽 강물 속에 곧장 꽂히어 / 蒼壁揷江心
검은 무쇠 같은 천고 색을 띠었네 / 積鐵千古色
뱃사람은 겁나 감히 말 못하는 건 / 舟人不敢語
물 아래에 교룡 사는 굴 있어서네 / 下有蛟龍宅

강 거슬러 오를 때엔 밧줄로 끌고 / 上灘百丈牽
여울 타고 내려갈 땐 노가 춤추네 / 下灘雙楫舞
갈 때에는 갈대숲을 따라서 가고 / 行緣蘆葦叢
멈출 때엔 수양버들 숲에 배 대네 / 止泊楊柳樹

어두운 숲 침침하여 고요도 한데 / 暝樹沈沈靜
모래 언덕 무너져서 기울어 있네 / 崩沙仄仄斜
반딧불이 잇달아서 나는 저편에 / 連飛度螢火
언뜻언뜻 인가 모습 보이는구나 / 隱隱見人家

이호 아래 배를 대어 정박을 하매 / 泊舟梨湖下
현인 생각 그리워서 견딜 수 없네 / 懷賢思不禁
높은 산을 바라보고 큰길 따르며 / 高山與景行
평생 동안 우러르는 마음 지녔네 / 緬仰百年心
이상은 모재(慕齋)가 살던 옛집을 읊은 것이다

전쟁이야 전조 시대 일이거니와 / 戰伐前朝事
그 옛날의 파사성이 남아 있다네 / 婆娑有古城
성가퀴는 가을 풀에 파묻히었고 / 女墻秋草沒
오늘날엔 태평 시절 이어진다네 / 今日屬昇平
이상은 파사성(婆娑城)을 읊은 것이다.

만고토록 남아 있을 교산의 무덤 / 萬古喬山宅
성인 의관 고이 묻혀 있는 곳이네 / 衣冠葬聖人
그 몇 년의 비바람을 거치었는가 / 春秋幾風雨
돌 기린엔 푸른 이끼 잔뜩 끼었네 / 苔蘚石麒麟
이상은 영릉(英陵)을 읊은 것이다.

문 앞에는 수양버들 늘어서 있고 / 楊柳門前逕
절 뒤에는 부용봉이 솟아나 있네 / 芙蓉寺後峰
동암 바위 밝은 달빛 속에 있는데 / 東巖月明裡
중 모습은 그림 속에 그려져 있네 / 僧在畵圖中
이상은 벽사(甓寺)를 읊은 것이다.

[주D-001]이호(梨湖) : 여주(驪州) 근처의 남한강에 있는 나루 이름이다.
[주D-002]현인(賢人) : 여기서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인 김안국(金安國)을 가리킨다. 김안국은 자가 국경(國卿)이고 호가 모재(慕齋)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서재를 지어 놓고는 은일(恩逸)이라는 편액을 내건 다음, 그곳에서 날마다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주D-003]높은 …… 따르며 : 옛사람 중에 높은 덕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사모하고, 밝은 행실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모범으로 삼아 행한다는 뜻이다. 산은 덕, 길은 행실의 비유로 쓰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거견(車牽)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 하였다.
[주D-004]파사성(婆娑城) : 여주(驪州)에서 서북쪽으로 40리 되는 강가에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 때 승장 의엄(義嚴)이 수축했다.
[주D-005]교산(喬山)의 무덤 : 옛날에 황제(黃帝)를 장사 지낸 곳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지역에 있다. 여기서는 세종(世宗)의 무덤인 영릉(英陵)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06]벽사(甓寺) :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이다. 절 안에 벽돌로 쌓은 탑이 있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포저집 제32권
 묘갈명(墓碣銘) 9수(九首)
장수 현감(長水縣監) 용문(龍門) 선생 조공(趙公)의 묘갈명 병서(幷序)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은 편방(偏邦)의 학술이 아직 밝아지지 않은 때에 태어나 옛 성현의 학문을 가지고 우뚝하게 자신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사문(斯文)을 흥기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므로, 온 세상이 숭앙하면서 삼대(三代 하(夏) · 은(殷) · 주(周))의 정치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참소하고 모함하는 일이 은밀히 이루어져서 마침내 기막힌 화를 당하고 말았으므로 사림(士林)이 그지없이 비통하게 여겼다. 정암이 바야흐로 정학(正學)을 창도하며 밝힐 때에 그를 따라서 배운 자가 많았다. 그리고 그 도를 종신토록 지키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또 몇 사람 있었는데, 용문 선생 조공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였다. 아동 때에 수업을 받으면 한두 번 읽자마자 바로 암송을 하였고, 구어(句語)를 지으면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이 10여 세 때에 재명(才名)이 벌써 널리 퍼졌고, 성동(成童 15세)이 되기 전에 효우(孝友)로 소문이 나면서 이웃 마을에서까지 효아(孝兒)라고 칭찬하였다.
나이 19세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두 시험에 입격(入格)하였으므로 원근에서 듣고는 그 재능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공명(功名)만을 일삼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구도(求道)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암(趙靜庵)과 대사성 김식(金湜)이 고인(古人)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들을 따라 배우면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의 취지를 듣게 되었다. 이에 자기의 거처에 우암(愚庵)이라고 편액(扁額)을 걸고는 날마다 침잠하여 연구하면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으므로, 정암이 일찍이 “제자(諸子) 중에서 구도의 뜻이 독실하기로는 조모(趙某)만 한 이가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 14) 봄에 용인(龍仁)에 있는 정암의 별서(別墅)에서 글을 읽다가 하루는 꿈에 주자(朱子)를 보고는 깨어나서 두 편의 절구(絶句)를 지어 그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초본(草本)을 작성해 놓고는 아직 올리지 못했을 때에, 문생(門生)이라는 죄목으로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때에 가령 그 상소를 올렸더라면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었을 텐데, 공은 미처 상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은거할 계책을 세우고는 과거에 응시할 뜻을 완전히 끊어버린 채, 형인 양심당(養心堂)과 삭녕(朔寧)의 옛 동산에 집을 짓고 함께 거처하며 강마(講磨)하면서 형제 스스로 사우(師友)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이정(二程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에 견주기도 하였다. 양심당의 휘(諱)는 성(晟)으로, 그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 문견(聞見)이 많았으므로 선생과 함께 중한 명성을 얻었다. 공은 《중용대역도(中庸大易圖)》를 짓고 나서는 자기의 호를 바꿔서 보진(葆眞)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시론(時論)을 보면 정사(正士)를 원수처럼 보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때였는데, 공은 항상 그들이 지목하는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대부인(大夫人)이 이 점을 깊이 근심하면서 공에게 과거에 응시하도록 극력 권하자, 공이 마지못해 한 번 응시하여 제 2 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정대(庭對)할 때에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의 도에 입각하여 말을 하자, 고관(考官)이 기묘명현(己卯名賢)의 당인(黨人)이라고 생각하고는 공을 축출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공이 대부인에게 간곡하게 설명을 드린 뒤에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에 당금(黨禁)이 조금 풀리면서 조정의 천거로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노친을 위해서 이 직책에 나아갔다. 1년이 지나고 나서 순릉 참봉(順陵參奉)으로 바뀌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으며, 그 뒤에 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뒤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대부인이 작고하자 마침내 용문산(龍門山) 속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으므로 세상에서 공을 용문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 뒤로 학자들이 많이 귀의하자 날마다 그들과 함께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밤이 깊어서 등불이 모두 꺼지면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리하여 의심나는 뜻에 대해서 자득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문인과 자제들을 불러 경전 중에서 뽑아내어 이를 증명하곤 하였는데, 그런 일이 하룻밤 사이에 두세 차례나 될 때도 있었으며, 어떤 날은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기도 하였으니, 공이 마음을 다하여 경전을 궁구(窮究)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다가 명묘(明廟)가 현인을 구하는 분부를 내리자, 조정에서 성공 수침(成公守琛), 조공 식(曺公植)과 이공 희안(李公希顔), 성공 제원(成公悌元)과 더불어 공을 천거하며 덕행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공을 선무랑(宣務郞)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에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명묘가 즉위하여 좋은 정치에 온 정신을 쏟던 초기에 세상에 보기 드문 지우(知遇)를 받았으므로 공이 사양하지 않고 취임하였다. 그 뒤에 외방으로 나가 장수현(長水縣)을 맡아서 다스릴 때에는 백성을 새롭게 만들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일에 힘쓰면서, 가혹한 정사를 없애고 대체(大體)를 보존하여 조용히 지내면서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관리들이 순종하고 백성들이 안정을 찾았다. 이와 함께 사자(士子) 가운데 우수한 자를 뽑아서 이들을 한데 모아 가르치자 마침내 학문을 하는 방도를 알기 시작하였는데, 이웃 고을의 선비들까지도 이러한 소문을 듣고서 많이 찾아오곤 하였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왜구(倭寇)가 졸지에 쳐들어와서 거진(巨鎭)을 함락하였는데, 주수(主帥)가 너무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오직 살육하는 일로 위엄을 세우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이에 공이 홀로 도리에 입각하여 설득을 하니 주수가 비로소 깨닫고서 살육하는 행위를 중지하고는 왜구를 막는 방책을 조금 실행하게 되었다. 왜적이 물러가자 공이 그 즉시로 인수(印綬)를 바치고 용문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 버린 채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공은 정사년(1557) 12월 경인일에 경성(京城) 청파리(靑坡里)의 자택에서 병으로 작고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 병신일에 지평(砥平) 용문산 남쪽 기슭의 축좌미향(丑坐未向)의 언덕에 안장되었으니, 이곳은 바로 공이 예전에 거처했던 곳의 뒤편이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이 매우 많았으나 그중에서 세상에 전할 만한 것들만을 뽑아서 10권으로 만들었고, 또 공의 모범적인 언행을 문인이 기록해서 1권으로 만들었는데, 미처 간행하기 전에 임진년의 병화(兵火)로 소실되는 바람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절구(絶句) 몇 수에 불과하다. 공이 지은 시문은 당시에 회자(膾炙)되었고, 필획(筆畫)의 묘한 솜씨도 독보적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공에게는 모두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았다.
공은 천성적으로 산수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매번 필마(匹馬)로 명산을 유람하면서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았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천석(泉石) 사이에서 노닐며 생을 마쳤으니, 아상(雅尙)하고 고결한 그 풍도는 완전히 진속(塵俗)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공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오직 일찍부터 스스로 스승을 찾아서 의리지학(義理之學)에 투신한 뒤에 화난(禍難)에 임해서도 꺾이지 않고 궁곤(窮困)에 처해서도 변함이 없이, 부지런히 일생 동안 종사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바르게 지키고 깊이 터득하고 후하게 기른 이 점이야말로 세상에 지극히 드문 일로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고 하겠다.
공이 사귄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당세의 현사(賢士)들이었으니,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퇴계(退溪 이황(李滉)),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이 모두 공의 집우(執友)였다. 제현(諸賢)이 공을 일컬은 말을 보면, “도학(道學)에 독실하게 뜻을 두어 성인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라고 하였고, “공부하는 길을 제대로 알아서 계속 전진하며 멈추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유가(儒家)의 공정(工程)을 제대로 안 사람은 오직 공뿐이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붕우들 사이에서 공이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를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공의 휘(諱)는 욱(昱)이요 자(字)는 경양(景陽)이며, 그 선조는 평양인(平壤人)이다. 9세조 인규(仁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도와 공을 세워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인데, 그의 자손들 역시 대대로 대관(大官)을 지냈다. 증조 휘(諱) 득인(得仁)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이고, 비(妣)는 모읍 안씨(某邑安氏)이다. 조부 휘 양문(楊門)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고, 비(妣)는 모읍 최씨(某邑崔氏)이다. 고(考) 휘 수함(守諴)은 판관이고, 비(妣)는 종실(宗室) 이씨(李氏)인데 그 고(考)는 춘양군(春陽君) 이내(李徠)이다.
공의 배(配)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청성군(靑城君) 순경(順經)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원빈(元賓) · 공빈(孔賓) · 인빈(仁賓) · 홍빈(鴻賓) 중에서 원빈과 홍빈은 모두 일찍 죽었고, 공빈은 현감(縣監)이고, 인빈은 봉사(奉事)이다. 딸은 모인(某人)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공빈은 3남 1녀를 두었고, 인빈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지금은 모두 죽었고 증손 약간 명이 있다.
공의 증손인 문형(門衡)이 나에게 찾아와서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용문 선생이 도를 배우며 은거한 군자라는 말을 내가 일찍 듣긴 하였으나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 그의 문인이 작성한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삼가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깊어진다. 이에 삼가 그의 학문과 행의(行義)의 대략적인 내용과 세차(世次) 및 자손들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주어 이를 묘갈명으로 삼아 모쪼록 영원히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기운을 받고 태어날 적에 / 人生受氣
맑고 흐린 정도가 각기 다른데 / 淸濁萬殊
맑고 흐린 그 정도에 따라서 / 由其淸濁
현우의 차이가 있게 되나니 / 而有賢愚
아 우리 선생이야말로 / 於惟先生
품부받은 그 기운이 원래 맑았도다 / 稟賦自美
청년 시절에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여 / 靑年泮璧
그 명예가 뭇 선비들을 진동시켰건만 / 譽動群士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 不自爲足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사모하였도다 / 學慕爲己
정암 선생이 세상에 우뚝 서서 / 眞儒挺世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창도하며 밝히자 / 倡明義理
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서 / 歸依函丈
날마다 경전의 요지를 들었나니 / 日聞要旨
바야흐로 훌륭한 지도를 받으면서 / 方冀善誘
재질을 다 발휘하려고 생각하였는데 / 思竭其才
참소하는 자가 못 하는 짓이 없어서 / 讒人罔極
마침내 기막힌 화를 당하고 말았도다 / 遂成禍胎
뭇 현인들이 그 그물에 걸려들어 / 群賢罹網
옥이 부서지고 난초가 꺾였나니 / 玉碎蘭摧
통분하고 비통한 그 심정이여 / 憤惋悲悼
말을 하려니 너무도 애통해라 / 其辭孔哀
표표히 떨치고 멀리 떠나가서 / 飄飄遠逝
삭녕 들판 구석에 은거하였도다 / 朔野之隈
음기가 양기를 마구 짓눌러서 / 群陰剝陽
천지의 기운이 꽉 막힌 때에 / 天地其否
현인이 몸을 숨기는 것은 / 賢人之隱
그런 상황에선 원래 당연한 일 / 時固然爾
세간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 絶跡世間
산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나니 / 入山愈深
산골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 洋洋汝水
나무숲이 구름처럼 우거진 그곳 / 蒼蒼雲林
원망하는 일도 번민하는 일도 없이 / 不怨不悶
곤궁한 생활을 달게 여기면서 / 窮困是甘
오직 성현의 글을 벗 삼아 / 惟事簡編
뜻을 집중하여 침잠하였도다 / 一意沈潛
멀리로는 공자의 도를 희구하고 / 遠希洙泗
가깝게는 송대 성리학을 추구하며 / 近慕洛濂
늙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하여 / 孜孜忘老
점차 발전하여 노년에 이르러서는 / 老至駸駸
높은 산을 우러러 쳐다보듯 / 高山仰止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 學者雲集
부지런히 이들을 교육시켜서 / 勤勤敎育
제 양껏 물을 마시고 배를 채우게 하였도다 / 群飮充腹
일찍부터 효도가 극진했음은 물론이요 / 早親有道
스승을 독신하며 지성으로 받들었고 / 篤信誠服
곤궁해도 뜻을 바꾸지 않음은 물론이요 / 窮不能移
화를 당해도 지조를 뺏기지 않으면서 / 禍不能奪
몸을 깨끗이 하여 속세를 멀리 벗어나 / 潔身高蹈
죽을 때까지 도를 온전히 지켰나니 / 守道俟死
백세 뒤에라도 공의 풍도를 듣게 되면 / 百世之下
탐욕스럽고 나약한 자들이 태도를 고치리라
/ 貪廉懦起
용문산 아래 기슭 / 龍門之山
봉우리들 뾰족이 치솟은 이곳 / 嵂崒巒岡
살아서는 여기에서 은거하였고 / 生於是隱
죽어서는 여기에서 안식을 취했나니 / 死於是藏
여기 빗돌에다 글을 새겨서 / 刻石于玆
천년토록 공을 알 수 있게 하노라 / 可識千霜

[주D-001]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높은 …… 쳐다보듯 : 그지없이 존경하며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 쳐다보고, 큰길을 향해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백세 …… 고치리라 :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으면, 완악한 자들도 방정해지고 나약한 자들도 지조를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참고로 한(漢)나라 시대의 판본에는 ‘완부(頑夫)’가 ‘탐부(貪夫)’로 되어 있다.
한수재선생문집 제7권
 서(書)
조자직(趙子直) 상우(相愚) 에게 보냄

옛날 우리 동춘 선생께서 병중에 우암 선생께 말씀하기를 “저 고산앙지(高山仰止)를 벽에 걸어 놓은 것은 내심으로 사실 공을 비한 것이오.”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진실한 말씀이네. 오늘날 여러 사람이 우옹을 저렇게까지 짓밟고 있는데 형께서 만약 스승의 뜻을 생각한다면 어찌 한마디 말로 후배들을 일깨워 주지 않는단 말인가. 지나간 갑자년(1684, 숙종10)에 형께서 나에게 보낸 서신에 말씀하기를 “이윤(尼尹)의 일은 참으로 사문의 액이다.” 하였는데, 지금도 앞서의 그 견해를 바꾸지 않았는가? 양진(楊津)에서 베개를 나란히 베고 자던 날 밤에 형께서 나에게 말씀하기를 “나는 염려할 것이 없으나 숙범(叔範 홍득우(洪得禹))은 믿기 어려우니 자네가 잘 인도하기 바란다.” 하였는데, 이 말도 기억하고 있는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수없이 변해도 늙은 신선은 죽지를 않고 손으로 금적(金狄 진 시황 때 만든 동상(銅像))을 어루만지며 앉아서 전생의 일을 이야기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우습구려.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잡저(雜著)]
황강문답(黃江問答) [한홍조(韓弘祚)] 영숙(永叔)은 바로 한홍조인데 예산(禮山)에 살았다.

영숙(永叔)이 이산(尼山)의 일에 관한 시말(始末)을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는 이산(尼山)의 일이 아니라 곧 국사이다. 그 시초를 파헤쳐 말하겠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제복(諸福) 복창군 정(福昌君楨) 복선군 남(福善君柟) 등이 본래 교만하고 거세었으며, 금상은 숙묘(肅廟) 초년에 병환이 잦았다. 이에 제복이 속으로 불측한 마음을 품고 감히 바라지 못할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는 때라서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드디어 남인에게 투합(投合)하여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스승으로 삼고 서인을 몰아낼 계책을 세우고 있었으나 틈을 탈 방법이 없었다. 이에 서로 모여 은밀히 모의하기를 ‘송모(宋某)야말로 서인의 영수(領袖)이니 만약 송모를 몰아내면 모든 서인들이 필시 함께 들고 일어나 송모를 비호할 것이다. 이때 두호하는 사람마다 차례로 몰아내면 서인을 모두 쫓아낼 수 있다. 그런데 송모를 쫓아낼 죄목을 만들 때 무슨 일로 꼬투리를 잡아야 하겠는가?’ 하고, 또 모의하기를 ‘기해년에 있었던 예론(禮論)이 끝내는 인정에 거슬렸으니, 이것으로 죄목을 만들면 송모를 제거하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듯 쉬울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안팎으로 참소하고 이간하여 갑인년의 화를 부추겼다. 당시 허적이 영상으로 있었는데, 제복이 은밀히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에게 부탁하기를 ‘금상이 만약 불행하게 되면 너의 아비가 나를 후계자로 삼게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병판(兵判)으로 삼겠다.’ 하니, 허견이 몹시 즐거워하여 드디어 하늘에 기도하며 맹세하였다.
이때 청성(淸城 김석주(金錫胄))이 은밀히 그 기미를 알고 마침내 세밀히 밝혀내어 경신년의 옥사를 이루었다. 대개 남인들은 생각하기를 ‘이 옥사는 오로지 제복과 허견이 바라지 못할 자리를 넘본 소치이니 필시 그들 당사자만 죄를 받으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해를 범한 역적과는 다르다.’ 하였는데, 흑수배(黑水輩 여강(麗江)에 살던 윤휴의 일파)는 윤휴가 사화를 입었다 하여 청성을 보기를 마치 남곤(南袞)ㆍ심정(沈貞)처럼 하였다. 이것이 남인들이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원통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윤증은 권시(權諰)의 사위이고 윤증의 아우 추(推)는 이유(李)의 사위인데, 권시와 이유는 남인의 거두(巨頭)이며, 권시의 아들 기(愭)와 이유의 아들 삼달(三達)은 또 남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윤증과 윤추는 자연 권기ㆍ이삼달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대체로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진심을 토로하는 경우는 처남 매부 간이 제일인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신년의 옥사에 대해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을 통해서였으며, 청성의 사실을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이었다. 그런데 윤증은 원래 허약한 사람이라서 드디어 그 말을 누설하여 청성이 훗날 큰 화의 원흉이 되게끔 만들었다. 윤증은 또 생각하기를 ‘우암이 거제(巨濟)에서 돌아와 만약 청성의 사실을 듣게 되면 필시 청성과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였는데, 급기야 우암이 올라와 옥사를 듣고는 말하기를 ‘청성은 사직을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크게 놀라 낙담하면서 말하기를 ‘이 어른의 소견이 어찌 이와 같을까. 만약 이 어른을 따르다가는 끝내 함정에 빠져 마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버티고 대립할 생각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급기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을 얻은 후에 비로소 배반의 뜻을 보였는데, 현석을 얻는데도 곡절이 있었다.
과거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내가 당로(當路)하게 되면 반드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율곡(栗谷 이이(李珥)) 두 선생께서 시행하지 못한 사업을 이룩할 것이다.’ 하였는데,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치른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영상(領相)이 되고, 노봉(老峯)이 좌상이 되고, 청성(淸城)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노봉은 평소 청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또 외척(外戚)들끼리 어울려 일을 같이한다는 비난도 듣기 싫어하였다. 이때 마침 청성이 사은사가 되어 청 나라로 떠나자, 노봉은 드디어 자신의 뜻을 시행하고자 하여 문곡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문곡이 머리를 저으면서 그 불가함을 말하기를 ‘지금 대옥을 막 치른 상황인데 임금이 어리고 백성들이 의심하여 잘 따르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오직 조용히 진압하여 국맥을 유지해야 할 것이요, 분란을 일으켜 전복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노봉이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류가 말하기를 ‘민상(閔相)이 전일에 한 말은 모두가 헛된 과장이었다. 지금 당로(當路)했는데, 왜 한 가지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서 공격과 비난을 집중하였다.
이에 노봉이 몹시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는 문곡이다. 산림(山林) 출신이 조정에 있게만 되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고, 드디어 문곡을 탄핵하여 제거하고 우암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 우암을 불렀으나, 우암은 오지 않았다. 또 현석을 부르자,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산림 출신이라서 주인이 없으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다.’ 하니, 노봉이 말하기를 ‘내가 주인이 되겠다.’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산림 출신이 척신(戚臣)에 의지하여 제대로 국사를 다스린 자가 어디 있는가.’ 하니, 노봉이 더욱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을 여기에 있게 하면 들어오겠는가?’ 하자, 현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이에 노봉이 상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면서 우암에게 글을 보내기를 ‘당로(當路)하고 싶지 않더라도 잠시 상경하여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내 비록 혐의 때문에 현직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으나, 나를 화숙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내가 어찌 나가지 않겠는가. 또 내가 태묘(太廟)의 휘호(徽號)를 주청할 일이 있는데, 화숙이 후원자가 되어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여주(驪州)로부터 부름에 달려왔다. 경강(京江)에 이르러 현석을 맞아 함께 입경할 뜻으로 권유하자, 현석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현석이 드디어 입경하여 날마다 우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제자의 도리를 행하며 몹시 공손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윤자인(尹子仁 윤증)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자인이 오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소자와 함께 여기에 있는데 그가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번 불러 보라.’ 하였다. 현석이 즉시 상에게 아뢰고 윤증을 불렀다.
이에 윤증이 상경하다가 과천(果川) 나양좌(羅良佐)의 집에 머물러 사직하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만나 보고 그와 함께 입경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윤증을 만나 보았다. 이에 윤증이 그를 머물게 하고 함께 유숙하면서 현석에게 말하기를 ‘추가로 녹훈(錄勳)한 것을 삭제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을텐데, 형이 녹훈을 삭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외척의 흉악한 무리를 물리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외척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오늘날 행태를 보건대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비호한다. 이 풍조를 제거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이 풍습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대개 추가로 녹훈되었다고 한 것은 김익훈(金益勳)ㆍ이사명(李師命)의 무리를 가리킨 것이고, 외척은 청성ㆍ광성(光城 김익훈)ㆍ노봉을 가리킨 것이고, 오늘날의 행태라고 한 것은 우암을 가리킨 것이었다. 윤증이 말하기를 ‘이 세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 한 내가 들어갈 길은 없다.’ 하고, 현석을 3일 동안 머물게 하면서 권기(權愭)와 이삼달(李三達)에게 들은 말을 다 말해준 뒤 말하기를 ‘만약 우암을 따르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하였다. 현석이 드디어 크게 놀라 풀이 죽어 돌아오자, 우암은 이미 윤증에게 당한 줄 알았다. 현석은 우암에게 고하지 않고 바로 어전에 들어가 우암이 건의한 휘호(徽號)의 의논을 극력 반대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가 버렸다. 우암은 일이 와해됨을 보고 고양(高陽)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가 화양동(華陽洞)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서울의 연소배가 현석을 따르게 되었는데, 현석이 윤증과 가까이 지내게 되어 윤증의 무리가 점차 성대해졌다. 이에 곧 그 아비의 묘문(墓文) 및 이른바 목천(木川)의 사건으로 인해 마침내 우암을 배반하였는데, 실상은 윤증이 본래 서인 출신으로서 남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 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문의 일은 단지 우암과 대립하기 위한 제목일 뿐이었다. 이 사실의 곡절에 대해서는 맥락을 간추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영숙(永叔)이 광남(光南) 김익훈(金益勳)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니 그대는 후인에게 전하라. 신유년 감시(監試) 때 빈 피봉의 시권(試卷) 한 장이 있었는데, 고관(考官)이 보니 바로 고변한 것으로서 내용은 오인(午人 남인을 달리 부르는 말) 13대가(大家)에 관한 것이었다. 고관이 말하기를 ‘익명서를 여는 것은 법률에 저촉되니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하니, 한 고관이 말하기를 ‘태워 버려야 할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의 경우이다. 이것이 만약 허언이 아니라면 국가의 화란을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드디어 단단히 봉함하여 남몰래 들였다. 상이 즉시 청성(淸城)을 몰래 불러 이 일을 위임하여 은밀히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고발한 여러 사람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청성이 은밀히 부탁을 받았으나 살필 길이 없었다.
이때 김환(金煥)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서인으로서 무예를 닦다가 오인(午人)의 손에 등과(登科)한 사람이었다. 청성이 남몰래 김환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라에 대변이 생겼는데 이를 알아낼 길이 없다. 네가 은밀히 잘 살펴 알리도록 하라.’ 하니, 김환은 불가능하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청성이 위협하기를 ‘만약 명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참(斬)할 것이다.’ 하니, 김환이 ‘지시하는 대로 하겠으나 은밀히 살필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청성이 이르기를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이 지금 용산(龍山)에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한다고 핑계하고 그 이웃집에 가서 깊이 사귄 후에 그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도록 하라 그러다가 그들을 이길 때에 네가 넌지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들의 기색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만약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그대로 함께 유숙하면서 은밀히 함께 모반할 것을 의논하라. 그렇게 하면 그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환이 말하기를 ‘그가 그런 뜻이 없이 도리어 나를 모반한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하였다. 이에 청성이 이르기를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김환에게 은전(銀錢)을 주어 교제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김환이 한결같이 그 말대로 실행한 결과 허새와 허영이 과연 호응해 왔다.
김환이 이를 청성에게 고하자, 청성은 또 유명견(柳命堅)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유명견에게는 김환이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명견의 친척인 전익대(全翊戴)와 사귀면서 명견의 동정을 탐지했는데, 미처 자세히 탐지하기도 전에 청성이 부득이한 일로 청 나라에 사신을 가게 되어 김환에게 시킨 일을 광남(光南)에게 맡겼다. 이에 광남이 김환으로 하여금 속히 명견의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김환은 늘 남몰래 익대에게 묻곤 하였다. 익대는 단지 수상한 일을 갑옷과 활을 만드는 등의 일이었다 알릴 뿐, 실제로 확실한 제보는 없었다.
또 고변한 내용 중에 이덕주(李德周)가 바로 괴수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세밀히 살피게 하였는데, 미처 살피기도 전에 갑자기 물의가 일어 말들을 하기를 ‘김환이 은밀히 살피는 체하면서 실은 반역을 꾀한다.’ 하며, 내외가 떠들썩했다. 광남이 즉시 김환을 불러 그런 사실을 알리고 시급히 고변하게 하니, 김환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뢰(軍牢 죄인을 호송하는 병졸)를 청하며 이르기를 ‘익대를 잡아 같이 고변했으면 한다.’ 하자, 광남이 즉시 군뢰 1쌍(雙)을 주었다. 김환이 밤을 틈타 익대의 집에 가서 급히 익대를 불러내 군뢰를 시켜 잡아 집으로 돌아온 뒤 내실에 감금하고 협박하기를 ‘네가 나와 함께 급히 고변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하니, 익대가 말하기를 ‘유(柳)가 본래 모반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무고하겠는가.’ 하고, 굳이 거절하며 듣지 않았다. 김환이 곧 광남에게 고하여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이어 광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장 들어가 고변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게 한 뒤에는 즉시 익대를 불러 그 사실을 문초할 것이니, 단단히 가두고 기다리라.’ 하니, 광남이 드디어 가두었다.
이에 김환이 고변하니 즉시 국청이 설치되어, 허새와 허영을 잡아들였는데, 이들은 한 차례 장(杖)을 내리기도 전에 모두 자복(自服)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환이 바로 훈신(勳臣)이 되어 중계(中階)에 올라앉게 되었다. 김환은 익대가 어지러이 말하여 진실성이 없게 될 경우 자신의 일에 방해될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끝내 익대를 잡아들이지 않았다.
광남은 익대를 잡아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몹시 걱정되고 난처하여 직접 국청에 나아가 사실을 고하였다. 이때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위관(委官)이었는데,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招辭)가 아니면 감히 거론하지 못한다고 하자, 광남이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마침 청성이 청 나라에서 귀국하여 함께 위관(委官)이 되었는데, 광남에게 이르기를 ‘아방(兒房 대궐 안 장신들이 기숙하는 곳)에 나아가 밀계(密啓)하라. 사건을 국청에 회부한 후에야 조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광남이 문장을 구사할 줄 몰라 계사를 초할 수 없다고 하자, 청성이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대략 계사를 초잡아 준 뒤 아뢰게 함으로써 사건이 국청에 회부되었다. 이에 즉시 익대를 불러 문초하였는데, 익대는 김환이 이미 훈신(勳臣)이 되어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고변하면 저와 같이 될 것이라고 여겨, 곧 유명견의 모반을 무고하였다. 이에 즉시 유명견을 잡아들여 익대와 대질시켰지만 끝내 혐의를 찾지 못하자 익대를 참하였다. 이것이 곧 광남의 일의 전말이다.
대개 처음에 고시관이 시권(試卷)을 밀계한 것과 상이 은밀히 그 일을 청성에게 부탁한 사실, 그리고 청성이 또다시 광남에게 위임한 일이 모두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져 당시 연소배들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연소배들은 광남이 김환에게 자금을 주어 허새와 허영을 유인하게 하고는 끝내 역모로 몰아 죽게 했다는 말만을 듣고는 마침내 광남을 몹시 옳지 못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익훈(益勳)이 남을 반역으로 유도한 것은 그 마음씨가 자신이 직접 반역을 꾀한 것보다 심하다…….’ 하며 장차 처벌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우암이 여강(驪江)에 있었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함께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조지겸(趙持謙)이 여러 날 동안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이 역모를 유도한 그 형편없는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이 말을 듣고는 역시 형편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비록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연소배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어른의 소견도 자기네의 뜻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우암이 입경하자, 문곡(文谷)ㆍ노봉(老峯)ㆍ청성(淸城)이 그 사건의 본말을 다 알리고, 또 광성(光城 김익훈(金益勳))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하였다. 이에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말하기를 ‘일이 과연 이러하다면 익훈은 죄가 없다.’ 하였는데, 연소배들이 몹시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장자(長者)도 편애하여 그 초지를 달리하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지겸(趙持謙)ㆍ한태동(韓泰東)이 마침내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수없이 많았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효종 당시의 군신이 복수를 꾀하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오활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일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오활하지 않기가 효종과 우암만한 이가 없다고 본다. 효종께서 청 나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남쪽에서 싸울 때나 북쪽에서 싸울 때 모두 수행하였기 때문에, 오랑캐의 무기와 전술 그리고 장수들의 능력 여부를 모두 체험하여 익히 알고 있었다. 오직 용골대(龍骨大)ㆍ마부대(馬夫大)ㆍ팔왕(八王)ㆍ구왕(九王) 이 네 장수만이 당해 낼 수 없는 영웅이었는데, 효종께서 그곳에 있을 당시 용골대ㆍ마부대ㆍ팔왕은 이미 모두 죽었고 구왕만이 남아 있었다. 대개 효종께서 즉위한 지 10년이 가깝도록 북벌(北伐)의 계획을 감행하지 않았던 것은 대적하기 어려운 구왕을 꺼려해서였다. 그런데 병신년(1656, 효종7)에 구왕마저 죽었기 때문에 효종께서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무술년에 우암과 더불어 은밀히 계획했던 것인데, 1년도 채 못 되어 효종께서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이것이 천운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대개 효종의 생각 역시 중과부적으로 장구(長驅)하지 못할 줄 알아 군사를 기르고 군비를 비축하며 관문을 닫고 관계를 끊으려고 생각하였으며, 만약 이것도 불가능하면 안으로는 내정(內政)을 닦으며 외적을 물리칠 계책을 세우고 밖으로는 기미책(羈縻策)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저들의 결점을 노리고 있다가 큰 정벌을 감행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지(聖旨)가 분명한데, 어찌 오활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숙(永叔)이 강빈(姜嬪)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궁중에 관계된 일이니 어찌 자세히 알겠는가. 다만 우암이 등대(登對)했을 때 조용히 이 일을 아뢰자, 효종이 답하기를 ‘이는 우리 집 일이라서 내가 자세히 안다. 경은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단지 김홍욱(金弘郁)의 자손을 등용할 것을 아뢰었는데, 효종이 그 말을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처음 인묘(仁廟)가 강빈(姜嬪)을 죄주려 할 때 그 죄목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 조경(趙絅)이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아뢰기를 ‘신하가 난역(亂逆)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난역을 일으키면 주벌(誅罰)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일은 애매합니다…….’ 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조경을 축출하고 그 상소문 중에서 난역을 일으키려 한 유장(有將) 두 글자를 취하여 강빈의 죄목을 삼았는데, 우암이 이 일로 일찍이 조경을 그르게 여겼다고 한다. 조경은 그래도 약과다. 윤휴와 홍우원(洪于遠)이야말로 이첨(爾瞻)의 무리이다. 그 당시 조관(照管 감시하여 단속함)이란 어맥(語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윤휴에게서 나온 줄만 알고 홍우원에게서 나온 줄은 모르는데, 그 곡절을 말해 주겠다.
대개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제복(諸福 복창군 정(福昌君楨)ㆍ복선군 남(福善君柟)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및 여러 남인(南人)들과 날이 갈수록 깊이 사귀면서 남몰래 궁녀를 간음하기까지 하는 등 장차 이롭지 못하게 될 조짐이 보였다. 이런 사실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알고 있었으나 청풍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 허정(許珽)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인조 잠저 때의 친구 허계(許啓)의 아들로서 장안의 대협객이었다. 하루는 느닷없이 청풍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겉은 남인이지만 속은 서인이고, 공은 겉은 서인이지만 속은 남인이다. 오늘날 내가 공과 더불어 편론(偏論)을 해보려 하는데 좋은가?’ 하였다. 이에 청풍이 어찌 편론이라고 하는지 묻자, 허정이 말하기를 ‘인조께선 우리 아버지와 자별한 교우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고 보면 인조의 자손과 우리 아버지의 자손은 곧 세교(世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세교 집 자손이 이처럼 미약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하니, 내가 이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청풍이 그 말을 듣고 홀연히 생각하기를 ‘성상이 유약한 데다 질병이 많고 또 형제와 친자식도 없으며 보호해 줄 만한 친숙한 대신도 없는데, 저들 제복과 남인들이 갈수록 서로 결탁하고 있다.’ 하면서, 크게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에 입궐하여 정(楨)과 남(柟)이 궁중과 교통(交通)한 정상을 아뢴 다음, 이어 정과 남을 가두고 궁녀를 곤장치니, 궁녀가 마침내 각각 자백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은 청풍이 궁녀를 거짓 자백하게 하여 왕손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청풍에게 죄를 전가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허적(許積)이 영상의 신분으로 들어가 제복(諸福)의 애매함과 청풍의 무함을 고하였다. 이때 명성왕후가 장막 뒤에 있다가 대성통곡하면서 허적을 질책하기를 ‘그대가 여러 조정을 섬겨온 구신(舊臣)으로서 국은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큰데,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감히 내가 목격한 일을 애매하다고 하는가.’ 하니, 허적이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며 바로 제복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나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윤휴와 홍우원이 아뢰기를 ‘자전(慈殿)을 관속(管束)하여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관속(管束)이란 두 글자가 흉참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세간에 나온 문자는 조관동정(照管動靜 동정을 살피고 단속함)으로 고쳤다. 이것이야말로 이첨과 같은 무리의 심술이 아니겠는가. 적신(賊臣) 조사기(趙嗣基)는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는데, 가령 이들 무리가 시간을 좀 더 얻었더라면 어찌 유폐하는 일을 자행하지 않았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영숙(永叔)이 묻기를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갑인년 이후에 행한 데 대한 일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합니다. 그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들은 대로 말해 주겠다. 갑인년에 영릉(寧陵)을 옮겨 모신 후 우암(尤菴)이 초려(草廬)와 함께 화양동(華陽洞)에서 《사계집(沙溪集)》을 편찬하려 하여 여강(驪江)에서 함께 배를 타고 충주(忠州)에 이르러 내렸다. 우암이 도중에서 초려에게 말하기를 ‘형은 어찌하여 자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듣게 하는가?” 하니, 초려가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되받아 우암에게 말하기를 ‘형의 자손은 어떠한가?’ 하였다. - 대개 도정(都正) 송기태(宋基泰)의 부인은 바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증손녀이다. 부인의 친모가 말하기를 “우리 집이 부유하긴 하나 이는 모두 대원(大院)의 제전(祭田)이므로 나눌 수가 없다.” 하고 은(銀) 2백 냥을 주었는데, 부인이 받아서 간직해 두었다. 부인이 죽은 후 도정 집의 서족(庶族)인 송가(宋哥)란 자가 어느 날 찾아와 여산(礪山)에 있는 자기 전답을 팔고자 한다고 말하자, 도정의 아들들이 그 모부인이 간직해 둔 은으로 사들였는데, 이것이 드디어 비난거리가 되었으므로 초려가 이를 지적한 것이다. - 이에 우암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그후 우암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친구의 도리로 그 자제들이 남들로부터 비난받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충고하여 그로 하여금 선도하게 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의 도리로서는 의당 놀라운 마음으로 감수하면서 과연 그런 일이 있다면 의당 경계시켜야 하겠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나에게 일러 형의 자손 역시 남의 비난을 받으니 경계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찌 상선(相善)하는 방법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노기를 띠고 내 말을 들으면서 마치 서로 대립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상선의 도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인일(仁一 송순석(宋純錫))의 형제와 초려의 아들들이 서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또 계축년(1673, 현종14)에 우암은 만의(萬義)에 있고 초려는 궁촌(宮村)에 있었는데, 하루는 한 장의 서찰을 우암에게 보내 이르기를 ‘서울 사람들이 매양 찾아와 기해년의 예설을 묻는데 이를 응수할 겨를이 없다. 이 글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검토하고 고쳐서 보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한 글자 한 글자 보아가며 글자와 말에 병통이 있는 곳을 가려 손수 수정을 가하였는데, 그 하단에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이 제후로 천자가 되었으니, 제후로 대접해야 하는가?’고 말한 대목이 있었다. 우암이 이에 대해 답서를 보내기를 ‘오늘날 세상에 처하여 자꾸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킨 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 예설을 돌려보냈다.
그 뒤 갑인년에 우암은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려(草廬)는 영변(寧邊)으로 귀양 갔다. 이때 김지(金潪)가 이순악(季舜岳)의 집에 갔는데 이옹(李顒)의 아들도 와서 자리를 같이 하였다. 대개 김지는 이순악의 사위이고 순악과 이옹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의 사위이다. 이런 연유로 마침 한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잠시 후에 순악의 매부 이하진(李夏鎭)도 와서 참석했다. 김지와 이옹의 아들은 재신(宰臣 이하진)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해 밖에 나가 들었는데, 하진이 순악에게 이르기를 ‘요즘 보니 이유태(李惟泰)가 가장 착한 사람이다.’ 하였다. 순악이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니, 하진이 말하기를 ‘그의 새로운 예설(禮說)을 보지 않았는가? 그 예설을 보니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대개 군자의 도란 허물을 고치는 것이 미덕인데 지금 유태가 능히 이렇게 하니, 내가 위에 아뢰어 석방시켜 등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른바 예설이란 곧 계축년에 우암에게 보내온 예설을 말하고, 이른바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탕 임금ㆍ무왕 운운한 한 조목을 가리킨 것이었다. 김지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에게 고하니, 우암은 초려의 저번 예설이 양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히 새로운 예설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윤증이 마침 장기로 왔다. 우암이 윤증에게 묻기를 ‘요즘 들으니 초려가 새로운 예설을 냈다고 하는데 그대가 들었는가?’ 하니, 윤증은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윤증이 떠나올 때 서구(敍九 송주석(宋疇錫))에게 초려의 예설이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서구는 송자신(宋子愼)이 가져갔다고 말하였다. 윤증이 자신을 찾아가 그 예설을 가져다 보고 서신으로 초려를 책망하였다. 이에 초려가 곧 우암이 수정한 예설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고 우암과 상의하여 한 것이다. 그런데 우암이 본래 음험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모르는 척하고 나의 비방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였다. 윤증이 그 예설을 가져다가 수정한 곳을 보니 과연 우암의 필적이었다. 이에 윤증 또한 우암이 과연 초려가 말한 것과 같다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초려가 적소(謫所)에서 말하기를 ‘내가 한번 입을 열면 우암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를 초려의 생질 김모가 듣고 윤휴의 아들 의제(義齊)에게 말하자, 의제가 다시 권유(權惟)에게 말하였다. 권유는 곧 권시(權諰)의 아들이며 우암의 사위이다. 권유가 이를 우암에게 알리자, 우암 집 자제가 초려에게 상당히 언짢은 말을 하였다. 초려 또한 이 말을 듣고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가 과연 헛된 말을 우암에게 하였느냐?’ 하자, 권유는 말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우암이 이 말을 듣고 또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는 지난날 어찌하여 어른의 말을 허투로 하였느냐?’ 하니, 권유가 대답하기를 ‘초려 어른의 말씀은 틀림없는 초려 어른의 말씀이나, 그 어른께서 말이 밖으로 나간 것을 몹시 민망히 여겼기 때문에 소자는 자연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초려가 귀양 가는 길에 이담(李橝)이 거리에 나가 전별하였는데, 이때 초려는 앞뒤로 일관성이 없는 망언을 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마침내 이 말을 서울에 전파하여 그 소문이 퍼지자 모두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전에는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하더니 뒤에 와서는 어찌 그리도 겁을 내는가.’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우암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형의 문도들이 나를 공격하며 조롱한다고 하는데, 금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우암이 그 위인을 비열하게 여기어 다만 답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떠드는 말은 웃어 넘기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초려는 끝내 우암 역시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상국(相國) 이숙(李䎘)이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을 보고 말하기를 ‘앞서 초려의 편지를 보니, 우암 편에서는 인조(仁祖)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고 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때 송자신(宋子愼)이 말하기를 ‘대체로 복제(服制)에 있어 장자(長子)에 대해 3년으로 하는 것은 적자와 적자가 계승하여 3대를 이은 연후에야 가하다.’ 하였는데, 이는 본래 자신이 상복의 제도를 통론(通論)한 말이었다. 그런데 초려는 곧 이 말을 부회(傅會)하여 생각하기를 ‘인조 역시 지손(支孫)으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우암 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고, 이른바 인조의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냈던 것이다. 이에 송 장성 시도(宋長城時燾 장성은 택호)가 듣고 크게 노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남인도 하지 않은 말인데 초려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집에 멸족의 화가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또 서신을 보내 극구 해명하였다. 얼마 후에 초려가 석방되어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상소하기를 ‘신의 소견은 전과 다름이 없으니 석방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광성(光城)이 승지에게 말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그후 경신년(1680, 숙종6)에 초려가 또 상소하기를 ‘효종을 적자(嫡子)로 간주하는 것은 신의 견해일 뿐 아니라 송모(宋某)의 견해 역시 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송모 또한 죄가 없다.’ 하고, 드디어 우암을 석방하여 청풍(淸風)에 부처(付處)하였다. 이에 우암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전과 변함이 없는데 상께서 그릇 남의 말을 들으시고 뜻밖에 감형을 해 주시니, 의리상 편안치 못합니다.’ 하고, 그대로 장기에 머물며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금오랑(金吾郞)이 말하기를 ‘상께서 이미 중도부처하였으니 마음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므로, 부득이 길을 떠났는데, 조령(烏嶺)에 이르기 전에 또 방면(放免)되어 화양(華陽)으로 돌아갔다. 대저 우암이 끝내 초려의 일을 말하여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이 일이 자기에게만 관계될 뿐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일처럼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영숙(永叔)에게 말해 주었다.
“대개 현석이 휘호(徽號)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운 이후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얻어 보고는 마음속으로 자못 편치 못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옥천(沃川) 유생이 상소하기를 ‘박모(朴某)가 본조의 신자(臣子)로서 어찌 감히 휘호에 대해 이론을 제기한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현석에게 말하기를 ‘이 상소는 그들 자신의 뜻이 아니라, 곧 송주석(宋疇錫)이 은밀히 사주하여 영공(令公)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현석은 몹시 놀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오랫동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내가 서구(敍九)와 함께 우암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문득 한 통의 봉서(封書)를 전하는 자가 있기에 살펴보니 곧 현석의 서간이었다. 그 서간에 말하기를 ‘혹자들의 말이 이러이러한데 사실이 그렇습니까? 이 말을 듣고는 즉시 편지를 써 놓고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지금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날짜를 상고해 보니 정월에 써 놓았다가 6월에 비로소 부친 것이었다. 우암이 몹시 놀라고 서구 또한 안색을 변하면서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우암이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중간에서 이루어진 말들일 것이다. 어떻게 답서를 하면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의 의혹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송강(松江)이 율곡(栗谷)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뜻밖에 모두 숙헌(叔獻 이이(李珥))의 손에 죽게 되었다.’고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는 사화를 입고 죽는데 불과하지만, 나는 사림을 해친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삼아 회답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이 말로 답하고 그 하단에 또 말하기를 ‘내가 전에 화숙과 함께 선조(先祖)가 금주위(錦州衛)에서 조병(助兵)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휘호의 논쟁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현석이 답서를 보고 마침내 감동을 받고는 우암의 말을 경청하면서 점차 연소배가 희재(希載) 등과 결탁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다.
또 그때 최신(崔愼)이 현석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문곡(文谷)과 노봉(老峯)이 말려서 소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송인일(宋仁一 송순석(宋純錫))이 마침 서울에 있다가 서신으로 그 일을 우암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우암이 즉시 최신에게 책망하는 서간을 보내 이르기를 ‘현석은 나와 도의로 사귀는 친구이다. 네가 나를 사문(師門)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나의 도의의 교우(交友)를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와 같이 하려거든 다시는 나를 보지 말라.’ 하고는, 그 편지를 봉함하지 않고 인일(仁一)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읽어보고 최신에게 전하게 하였다. 인일이 그 서신을 볼 때 이 운촌 동보(李芸村同甫)가 한 자리에 있다가 옆에서 그 서간을 보고는 나가서 현석에게 보였다. 현석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 자손 또한 모두 감격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의 본의가 실로 이와 같은데, 지난날 망녕되이 비난했으니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후부터 현석과 우암의 집안은 전과 같이 화평하게 지냈다. 대개 현석이 윤증의 유혹을 받긴 하였으나 실은 연로배들이 척신(戚臣)에게 빌붙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 화합하려 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물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 자기를 따르는 연소배들이 점차 희재(希載)의 무리와 서로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크게 깨닫고는, 자신이 우암과 불화하게 된 것은 본래 자인(子仁 윤증)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윤증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윤증 자신은 생각하기를 ‘갑자년 이후로는 우암이 실로 고립되어 서인들도 따르는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급기야 기사년에 우암이 배소(配所)로 떠날 때 경향의 선비들이 모두 구제하는 소를 올리고 또 그 배소로 수행한 자가 무려 수백 명이며 자기와 사이가 좋던 자들도 모두 분주하게 주선한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의심하여 말하기를 ‘어찌 인심의 경향이 이와 같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다가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 현석이 복(服)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인심이 이렇게 기울어진 것은 화숙의 소행 때문이다.’ 하고는, 서신으로 현석을 책망하기를 ‘이미 스승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왜 복을 입었는가?’ 하니, 현석이 답하기를 ‘율곡이 퇴계에 대하여 석 달 복을 입었기에 나 역시 이를 본받아 복을 입었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또 우암을 퇴계에 비교하는 것이 의심스러워 서신으로 묻기를 ‘형은 율곡이 아니고 송모는 퇴계가 아닌데 어째서 꼭 복을 입는 것인가?’ 하자, 현석이 이로 인해 더욱 불쾌하게 여겼는데, 윤증이 남인들에게 추대되어 우암을 그토록 배척하는 것을 보고는 윤증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그때 남인들이 현석을 귀양 보내려 하면서 정유악(鄭維岳)으로 하여금 윤증에게 그 가부를 묻게 하니, 윤증이 대답하기를 ‘조정의 일을 내가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는데, 현석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면서 그 심술을 통탄하였다. 이것이 현석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곡절이다.
이에 앞서 우암이 언젠가 이르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화숙을 공격하지만 화숙은 끝내 나를 잡을 사람이 아니다. 다만 견해가 서로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때로 나를 의심하지만 그의 심술이 잘못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두려운 자는 윤증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현석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자인(子仁)이야말로 자제와 같은 사람입니다. 선생께 유고가 있다 하더라도 자인이 어찌 감히 배반하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이르기를 ‘그대가 자인을 아는 것이 나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 우암의 말이 부절(符節)을 합한 듯 꼭 맞았으니, 우암이야말로 성인(聖人)이시라 하겠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최신(崔愼)이 우암에게 올린 제문에 ‘사람들 모두가 윤증이 우리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는데, 그 자취는 비록 미세하나 그 일은 몹시 뚜렷하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신이 무슨 일을 지적하여 말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말할 만한 것이 있다. 송이석(宋彝錫)의 생질은 곧 윤충교(尹忠敎)의 처질(妻姪)이다. 이석의 생질이 그 고모에게 문안드리기 위해 이산(尼山)으로 갔던 때가 대개 무진년(1688, 숙종14)이었는데, 윤증의 집안이 마침 한 자리에 모여 술자리를 벌였으므로 이석의 생질이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조금 있다가 윤증이 말하기를 ‘김익훈(金益勳)의 운명이 여기에서 끝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송모(宋某)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좌중에 있던 한 윤가가 팔로 윤증을 말리면서 가만히 말하기를 ‘좌중에 낮선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하자, 윤증이 돌아보고 말을 돌려 말하기를 ‘남인의 세력이 크게 떨치고 있으니 우암께서도 사화(士禍)를 면치 못할 것 같아 염려된다.’ 하였다. 이석의 생질이 즉시 돌아와 우암에게 고하자, 우암이 이르기를 ‘다시는 믿지 못할 망언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후 김 군평 만준(金君平萬峻)이 또 이산(尼山)에서 찌푸린 얼굴로 우암에게 와 고하기를 ‘윤증이 소생의 집과 선생의 집을 모두 죽이려 합니다.’ 하니, 우암이 또 책망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내가 들은 하나의 묘맥(苗脈)이다. 또 박태회(朴泰晦)에게 들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이원정(李元楨)의 아들 담명(聃命)이 기사년 초에 대사간으로 올라와 그들에게 말하기를 ‘김수항(金壽恒)은 곧 우리의 원수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송모는 석주(錫胄)가 경신년(1680, 숙종6) 사화를 일으킬 때 거제(巨濟)에 있었으니, 수항이나 석주배와 서로 모의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 두 사람은 송모를 영수로 삼고 있으니 지금 만약 율을 가하면 반드시 사화라고 이를 것인데, 이것 또한 고민이다. 따라서 그곳에 그대로 안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자, 한 남인이 말하기를 ‘서로 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담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탐지해내는가.’ 하니, 한 남인이 ‘만약 권기(權愭)를 시켜 윤증에게 묻게 하면 윤증은 필시 숨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기로 하여금 윤증에게 물어보게 하니, 윤증이 말하기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당시 석주와 두 차례 서신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이 마침내 두 차례의 서신이 필시 모의한 것이라고 여겨 기사사화(己巳士禍)를 빚어냈다.’ 하였다.
이것이 태회가 전한 말인데, 태회는 본래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 이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두 차례 서신을 했다는 것은 또한 묘맥(苗脈)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태회가 알 수 있는 일이 못 되니 이것으로 말하면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영숙이 어째서 묘맥이라고 말하느냐고 묻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우암이 거제에 있을 때 조병(爪病)이 있어 그 병록(病錄)을 윤 체원 이건(尹體元以建)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약을 물어 내려 보내게 했다. 체원이 정유악(鄭維岳)에게 물으니, 유악이 말하기를 ‘이는 중병이니 혼자 판단할 수 없다.’ 하고, 청성(淸城)에게 가서 의논하였다. 청성이 약 30첩을 지어 서신과 함께 황윤(黃允)의 집으로 보내 체원에게 전하여 우암에게 보내게 하였는데, 우암이 그 약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다. 이에 우암이 사례하는 편지를 써서 체원에게 보내 청성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청성이 그 사례의 서신을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또 청성이 큰일을 처리하려 했으나 사림이 불쾌하게 생각할까 염려되어 곧 서신을 써 납촉(臘燭)과 함께 우암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들으니, 대감이 배소에서 밤마다 글을 본다고 하는데, 어유(魚油)가 안질(眼疾)을 일으킬까 염려되기에 감히 납촉으로 어유를 대신케 해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또 답서를 보냈으니, 이것이 소위 두 차례의 서신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태회가 필시 얻어 들은 것일 것이다. 대개 나는 처음에 윤증이 너무도 유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후 그 아비의 기유의서(己酉擬書)를 가보(家譜)에 실어 우암에게 바친 것을 보면 참으로 혼암한 사람이다. 또 그후에 이와 같은 일을 들으니 참으로 아첨하는 소인의 정상이었다. 사람을 쉽게 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이산(尼山) 윤증의 서간에 ‘동춘(同春)이 도시기관(都是機關)이라고 하였다.’고 한 것도 묘맥(苗脈)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가소로운 일이다. 옛날 기유년에 동춘의 손자 병원(炳遠)과 노봉(老峯)의 아들이 같은 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노봉이 동춘에게 말하기를 ‘선생 댁에서 희연(喜宴)을 베풀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선생이 신은(新恩 새로 과거에 오른 사람)을 데리고 저희 집에 오셔서 한바탕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동춘이 허락하였다. 노봉이 또 우암을 초대하였는데, 이때 우암은 관직을 갖고 서울에 있었으나 산림(山林)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떠날 날짜를 미리 정하면 위로는 주상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필시 모두 만류하여 몹시 불편할 것 같으므로 날짜를 예정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떠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동춘이 은밀히 그 뜻을 알고 취중에 연석에서 농담으로 우암에게 말하기를 ‘어느 날 행장을 재촉하겠는가?’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행장을 재촉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동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시기관(都是機關)이로군.’ 하니, 우암 역시 웃어버렸다. 이것은 연석에서 있었던 하나의 희담(戱談)이었는데, 윤증이 이 말을 끌어다가 우암을 공격하는 단서로 삼았으니, 이 어찌 너무도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우암ㆍ동춘 두 선생의 묘의(廟議)에 관한 일을 들었느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옛날에 위원성(韋元成)은 이르기를 ‘묘제(廟制)는 2소(二昭)ㆍ2목(二穆)에 태조(太祖)와 문세실(文世室)ㆍ무세실(武世室)을 합쳐 7묘(七廟)가 되니, 주(周) 나라의 이른바 「7세(七世) 사당에서 덕의를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고, 유흠(劉欽)은 이르기를 ‘3소ㆍ3목에 태조를 합쳐 7묘가 된다. 세실은(世室)은 이 수에 들지 않는데, 오직 공덕이 있는 자는 대수(代數)에 관계없이 모두 세실이다.’ 하였는데, 그후 주자는 유흠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래서 영종(寧宗)에게 묘의(廟議)를 드리기를 ‘우리 송 나라의 기업이 백 년 동안 공덕을 쌓아 오다가 태조 때에 나타났고 보면, 우리 송 나라의 희조(僖祖)야말로 주(周) 나라의 후직(后稷)입니다. 그리고 태조ㆍ태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을 받은 것은 또한 마치 주 나라가 문왕ㆍ무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 나라가 이미 후직으로 태조를 삼아 백세토록 불천(不遷)하고 문왕ㆍ무왕으로 세실(世室)을 삼은 이상, 우리 송 나라 역시 희조로 태조를 삼아 백세토록 불천하고 태조ㆍ태종으로 세실을 삼아야 한다…….’ 하였다.
옛날에 우리나라 인조ㆍ명종 두 묘위(廟位)를 체천할 때 우암은 또한 주자의 논을 위주하여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목조(穆祖)는 또한 송 나라의 희조(僖祖)와 같고, 아조의 태조와 태종은 또한 송 나라의 태조ㆍ태종과 같다. 그렇다면 아조의 목조는 마땅히 태조가 되어 백세토록 불천하고 태조와 태종은 세실을 삼아야 한다. 또 아조의 영녕전(永寧殷)은 옛 법이 아니다. 묘제(廟制)로 논하건대 세실을 두지 않고 태조만을 둔다면 조주(祧主 체천된 신주)를 모두 태조의 협실(夾室)에 보관해야 한다. 지금 강헌(康獻 태조(太祖)의 휘호)으로 세실을 삼지 않고 목조(穆祖)를 조주로 삼는다면 그 조주를 강헌의 협실로 내려 보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상의 신주를 자손의 협실에 보관하는 것은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이것이 주자가 반드시 희조를 태조(太祖)로 삼으려 했던 이유이니, 아조도 이를 준행해야 마땅하다.’ 하고, 동춘은 말하기를 ‘주자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를 의논하면서 또한 제후는 2종(二宗)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본묘(本廟)는 2소ㆍ2목 외에 오직 태조를 포함하여 5묘가 될 뿐이니, 세실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단 세실을 세우지 않고 태조 1묘만 세웠고 보면, 역시 강헌을 태조로 삼고 목조는 체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제후의 임금은 처음 봉해진 임금으로 시조를 삼는 예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말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주자가 2종이 없다고 말한 것이 경(經)에는 보이지 않는데,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른바 처음 봉해진 임금을 시조로 삼는 것이 예라고 한 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주공(周公)으로 말하면, 주공 이상은 모두 천자이므로 노(魯) 나라가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노 나라에서 주공을 시조로 삼은 것은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제(齊) 나라에 봉해진 태공(太公)의 경우, 태공이 어찌 그 조상의 5묘를 세우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미 5묘를 세웠다면 또한 그중 가장 높은 이를 태묘(太廟)로 삼지 않았겠는가.’ 하였는데, 두 선생의 의견이 끝내 합치되지 않았다. 우암이 동춘의 묘지에 이르기를 ‘억지로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의 고매한 점이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의논은 실로 우리나라의 대 거조이며 두 선생의 대 주장이니, 후세의 학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송강(松江)이 세자를 세우기를 청한 곡절을 아는가? 기축역옥(己丑逆獄)을 치른 후 우계(牛溪)ㆍ송강ㆍ사계(沙溪) 및 이희삼(李希三)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희삼은 곧 스스로 서인ㆍ남인 사이에서 중립을 취한다는 자로서 이상 세 분 현인과 친한 사이였다. 송강이 말하기를 ‘여립(汝立)의 무리를 황해도와 김제(金堤)에서 많이 잡았으니, 그 당시 여립을 황해 도사(黃海都事)와 김제 현감에 추천한 자도 죄가 없을 수 없다.’ 하니, 사계(沙溪)가 말하기를 ‘여립이 본래 세상을 기만하고 이름을 도둑질하였으니, 그 당시 이조에서 의망한 것도 예사였을 것이다. 어찌 저 흉도가 역적이 될 줄 미리 알았겠는가. 꼭 처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자, 우계가 말하기를 ‘여립이 집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황해도와 김제 사람으로 하여금 이처럼 많이 향응하도록 하였는데, 만약 과연 도사가 되고 현감이 되어 그 형세를 힘입었다면 종사의 환란이 또한 어떠하였겠는가. 그 당시 전조(銓曹)는 분명 죄가 없지 않다.’ 하였다.
그러고 각각 헤어져 돌아갔는데, 희삼이 곧바로 산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고하였다. 산해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던 차에 마침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르렀다. 산해가 구봉에게 고하기를 ‘어른께서 나를 죽이려 하니 나는 분명 죽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산해는 여립을 추천한 전장(銓長)이었고 어른이란 우계를 가리킨 것이다. 이로부터 산해는 우계와 송강에게 앙심을 품고 항상 중상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산해가 영상이 되고 서애(西涯)가 우상이 되고 송강이 좌상이 되었다.
이때 선조(宣祖)에게 적사(適嗣)는 없었으나 왕자(王子)는 많았다. 조신(朝臣)들의 생각은 일찍부터 김 숙의(金淑儀)의 소생 광해군에게 있었고 선조의 뜻은 곧 김 인빈(金仁嬪)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에게 있었다. 산해가 유(柳)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정승이 된 지 오래인데도 건의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좌상이 새로 정승의 자리에 들어왔으니, 필시 건의할 만한 급선무가 있을 것이다. 우상이 그와 함께 계책을 물어 함께 아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상(柳相)이 드디어 송강을 보고 산해의 의도를 고하였다. 이에 송강이 말하기를 ‘성상의 연세가 이미 지긋한데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세자를 세우는 한 가지 일이야 말로 오늘날의 급선무일 듯하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유상이 대단히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산해도 드디어 두 정승과 함께 들어가 계청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이틀 전에 산해가 은밀히 인빈(仁嬪)의 남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새 정승이 광해군을 세워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려 하는데, 인빈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편하므로 인빈을 제거하려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인빈이 해를 입으면 화가 반드시 그대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였는데, 공량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즉시 인빈에게 들어가 고하였다. 인빈이 울면서 상에게 호소하기를 ‘소인의 집에 돌아가 죽기를 원합니다.’ 하자, 상이 괴이하게 여겨 사실을 물었다. 인빈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새 정승이 광해를 세워 세자를 삼으면서 소인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말을 들었는가? 그런 일은 만무하다.’ 하였다.
이튿날 산해가 복통을 핑계로 오지 않자 송강이 유상과만 어전에 입시하였다. 송강이 먼저 건저(建儲)가 시급한 일임을 아뢰니, 상은 이미 인빈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고 있던 차라, 이를 듣고 몹시 노하며 이르기를 ‘아직 내가 있는데 건저를 청해서 무엇하려는가.’ 하며 노발대발하였다. 이에 송강이 그만 물러 나와 대죄하였는데, 유상은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산해가 송강을 제거하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는데, 유상은 실로 산해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이용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때 서인 측에서 공량의 소행이라는 것을 은밀히 알아채고 궁중을 선동한 그 행동에 노하여 양사(兩司)가 합계(合啓)로 청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이 말하기를 ‘공량 때문에 합계하려 하다니, 어찌 그리도 피폐해졌는가. 내가 지금 서전(西銓)에 있으니, 공량을 부하로 삼아 죄로 얽어 죽여도 늦지 않다.’ 하고, 즉시 공량을 막하로 삼았다. 산해가 그런 의논을 알고 공량에게 말하니, 공량이 두려워하여 인빈에게 고하자, 인빈이 즉시 상에게 호소하였다. 상이 노하였으나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손자 윤신지(尹新之)를 부마(駙馬)로 간택하여 인빈의 사위를 삼음으로써 그 아우로 하여금 차마 공량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산해가 간사한 술책을 부린 정상인데, 또한 선조가 서인을 미워하게 된 곡절이다.
그런데 산해가 송강에 대해 유감을 품은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이때 연회가 있어 온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산해만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詩)를 지어 보내면서 연월 밑에 이름은 쓰지 않고 아옹(鵝翁 산해)이라고만 썼다. 송강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대감이 오늘 참으로 자기의 소리를 낸다.’ 하였는데, 산해가 듣고 몹시 언짢아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급기야 광해가 즉위하여 산해를 몹시 싫어하자 산해 또한 크게 두려워 하여 그만 인홍(仁弘)ㆍ이첨(爾瞻)의 무리와 결탁하였는데, 폐모(廢母)에 관한 모든 일은 실제로 산해가 앞에서 음모하고 인홍이 뒤에서 그 흉억을 행한 것이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 청양(沈靑陽 심의겸(沈義謙))의 일은 또 사람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대개 선조가 처음 즉위할 때 나이가 16세였다. 청양이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의겸의 누이동생)에게 아뢰기를 ‘성상께서 아직 어려 사려가 깊지 못하니, 완호(玩好)와 기욕(嗜欲)을 억제하여 종묘사직과 민생의 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본래 엄격하고 법도가 있던 인순왕후가 이에 더욱 금지시켰으므로 선조가 완호 등의 일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울면서 꾸짖기를 ‘내가 하성(河城 잠저(潛邸) 때의 봉호)의 녹을 먹던 때가 그래도 부귀했다. 어찌 이토록까지 초야의 늙은이에게 제약을 받게 되었는가.’ 하였는데, 이는 곧 청양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조가 청양을 몹시 미워하였는데, 동인(東人)들이 은밀히 상의 뜻을 탐지하고 드디어 청양을 물리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오직 정송강과 김황강(金黃岡 이름은 계휘(繼輝)ㆍ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부)만이 그 기미를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동인을 소인이라고 공격하였는데, 율곡 선생이 그 일을 알지 못하고 동ㆍ서의 분당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편론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 서인이 과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숙이, 송강과 황강이 왜 그 까닭을 율곡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강과 송강이 율곡에게 고할 줄 모른 것이 아니다. 단지 율곡은 공리(功利)를 꾀하지 않는 분이라서 만약 그 말을 들을 경우 필시 들어가 직간(直諫)하여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끝내 고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라고 한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윤임(尹任)이 무죄라 하고, 퇴계 선생은 사직(社稷)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 선생의 소견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율곡이 처음 삭훈(削勳)을 의논할 때 기고봉(奇高峯)이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가 이에 탄핵하는 의논을 하자 고봉은 부제학(副提學)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종기병으로 죽었는데, 혹은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명언(明彦 고봉의 자(字))이 죽었다.’ 한 데 반하여 율곡은 말하기를 ‘사문이 다행하여 명언이 죽었다.’ 하였다.
대개 퇴계는 항상 산림에 있었고 고봉은 벼슬하여 서울에 있었는데, 퇴계가 들은 것은 모두가 고봉의 말이었다. 그런데 고봉이 이미 삭훈(削勳)을 불가하게 여겼고 보면, 퇴계가 윤임에 대해 사직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대개 윤임은 무부(武夫)로 유악(帷幄)에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생각하기를 ‘그가 본래 무지한 사람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그 마음가짐이 단정한 선비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게 된 것이고, 율곡은 생각하기를 ‘윤임이 무부이긴 하나 드러난 죄가 없고 당시의 제현(諸賢)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원로(尹元老)는 본래 불측한 소인이고,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인종(仁宗)의 죽음 또한 후세의 의혹이 없지 않다. 따라서 단연코 윤임이 죄가 있다고 한다면 제현도 죄가 있는 것이 되고, 제현이 죄가 없다면 윤임 역시 죄가 없다. 이미 죄가 없다고 한다면 윤원형의 녹훈을 깎지 않고 어찌하랴.’ 한 것이니, 이것이 율곡 선생이 극력 삭훈을 주장하게 된 이유로서 후세의 큰 공안(公案)이 된 것이다.”

영숙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충신은 될지언정 유자(儒者)의 기상은 없다고 하였고, 우암 선생은 신도비(神道碑)를 지으면서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때의 역사가 많이 궐실되었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물으니, 퇴계는 「허물이 있는 중에서도 허물이 없음을 구해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음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지론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곡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 포은(圃隱)과 우리 태조는 각각 분당되어 있었다. 포은 편에서는 포은이 영수가 되어 태조의 당을 소인이라 하고, 태조 편에서는 태조가 영수가 되어 포은의 당을 소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태조의 당이 점점 성대해지자 포은도 태조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태조의 우익인 정도전(鄭道傳)의 무리를 제거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역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신우(辛禑)가 죽자 조신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목은이 의당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는 포은과 목은은 우왕과 창왕이 신씨(辛氏)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후에 권근(權近)이 중국에 봉명사신으로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는 고려조가 혼란하여 왕씨(王氏)를 신씨(辛氏)로 변경하였음을 듣고 권근을 보고는 그 사실을 힐책하며 책망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권근이 그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감히 내보일 수가 없었다. 이때 창왕도 명 나라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원한을 품었는데, 이에 최영(崔瑩)과 함께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여 태조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태조가 요동(遼東)으로 행군하던 도중에 돌이켜 생각하기를 ‘고려는 본래 왕씨의 나라요 신창(辛昌)의 나라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왕씨를 세워야 한다는 선언을 하고 회군(回軍)하여 돌아왔다. 돌아오는 즉시 최영을 죽이고 신창을 폐위한 다음 공양왕(恭讓王)을 영입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드디어 녹훈(錄勳)하였는데 포은도 그 녹훈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포은이 일단 신창을 왕창(王昌)으로 여겨 몸소 그를 섬겼고 보면 어찌하여 왕창을 부지하지 못하고 폐립(廢立)의 공훈에 참여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포은이 만일 태조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창을 신창으로 여기었다면 어찌하며 애당초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겼단 말인가.”

영숙이 묻기를,
“퇴계(退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포은과 우ㆍ창의 관계는 왕도(王導)와 진 원제(晉元帝)의 관계와 같다. 원제가 사마씨(司馬氏)는 아니나 사마씨의 종사가 그래도 존속되었고, 우ㆍ창이 왕씨는 아니나 왕씨의 종사가 그래도 존속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이는 목은이 이른바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인데, 포은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개 포은의 뜻은 단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창을 신창으로 여겼거나, 또 창을 폐위할 때 항쟁할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태조가 회군한 후에 민심이 두려워하며 모두 태조의 위엄에 굴복하였다. 포은이 만약 척수 고장(隻手孤掌)으로 창의 폐위론에 항쟁하였다면 태조는 필시 이르기를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신창이라 하는데 그대만 왕창이라 하는가. 신을 왕이라 하면 이는 왕씨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포은은 변명할 여지가 없고 당장 호흡간에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포은이 죽임을 당하는 날이 곧 고려가 망하는 날이다. 포은은 필시 이런 것을 헤아리고 우선 녹훈에 참여하여 종사를 보호하다가 기회를 보아 태조의 당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태조가 세자를 맞기 위하여 황주(黃州)로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포은이 그 기회를 틈타 공양왕에게 아뢰어 정도전 등을 내쫓고 이어 태조의 가문도 함께 제거하려 하였다. 태종(太宗)이 그 기미를 알고 급히 평산(平山)으로 달려가 태조를 모시고 돌아와 공양왕에게 아뢰고 도전 등을 석방하게 하였다. 포은은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고 태종의 집에 가서 그 동태를 살피려 하다가 선죽교(善竹橋)의 변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일의 곡절이다. 대개 율곡은 생각하기를 ‘나라는 언제고 망하는 법이나 자신의 행동은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포은의 죽음은 의당 창왕을 폐위할 때 있었어야 하고, 공양왕을 세운 공훈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충의만을 허여하고 그 유자의 기상은 허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암(尤菴)의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
하니, 영숙이 말하기를,
“8척을 펴기 위해 1척이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고 한 맹자(孟子)의 경계야말로 법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과연 그렇다고 하며 말하기를,
“그럴까, 그럴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묻기를,
“퇴계 선생이 떠나간 뒤에 다시 봉성군(鳳城君) 찬축(竄逐)의 계(啓)에 참여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어찌 감히 알랴마는, 권석주(權石洲)의 시에,
지난 무오 기사년에 낙담하였는데 / 從來戊己可傷魂
을사년간에 일이 다시 어려워졌네 / 乙巳年間事更屯
천추에 이름 남긴 이는 두 학사이고 / 千古留名兩學士
구천에서 통분하는 이는 한 왕손일세 / 九泉含痛一王孫
시비는 계속되어 끝내 진정시키기 어렵고 / 是非滾滾終難定
훼예는 분분하여 논하기 쉽지 않네 / 毁譽紛紛未易論
어떻게 세찬 바람 얻어 음산한 구름을 걷어버리고 / 安得長風掃陰翳
해 달을 높이 드러내 천지를 밝힐까 / 高懸日月照乾坤
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두 학사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 선생이다. 지난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석주(石洲)의 별집(別集)을 초(抄)할 때 이 시를 별집 중에 실었는데, 우암이 그 위에 찌를 붙여 이르기를 ‘이 시의 지적한 것이 이러이러한 것인데 공이 아는가?’ 하자, 문곡이 깜짝 놀라 즉시 그 시를 별집의 판(板)에서 뽑아버렸다고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계(沙溪)가 율곡에게 묻기를 ‘회재와 퇴계 두 선생께서 모두 기생첩을 둔 일이 있었는데, 선생은 두 선생 보기를 달리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퇴계는 학문을 하기 전의 일이고 회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달리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이 사계의 어록(語錄)에 있다.”
하였다.

영숙이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우암이 일찍이 말하기를 ‘병자년의 일은 그의 큰 죄가 될 수 없으나, 원종(元宗)을 추숭한 일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비방한 일은 나쁘다. 그러나 영안위(永安尉 선조(宣祖)의 부마(駙馬) 홍주원(洪柱元)의 봉호)를 구제한 그 한 가지 일이 족히 추숭을 도모한 죄를 속죄할 수 있고 독보(獨步 조선 중기의 승려ㆍ초명은 중헐(中歇))를 보낸 그 한 가지 일이 또한 청음을 비방한 것을 속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였다. 영숙이 추숭의 일은 무엇을 말하느냐고 묻자, 선생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하여 그 당시 사계(沙溪) 일파에서는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상(崔相 최명길)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남몰래 사신으로 하여금 은밀히 예부 상서(禮部尙書)에게 품하여 그의 허락을 받게 한 뒤에, 사사로이 밀계(密啓)하여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은 중국에 품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제신들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仁祖)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그 말대로 하여 원종을 추숭하였으니, 이는 공명정대하지 못한 소인의 행태였다.”
하였다. 영숙이 영안위를 구제한 일은 무엇인지 물었더니, 선생이 이러저러하다고 하였다. 영숙이 독보를 보낸 일은 무엇인지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최상이 장군 임경업과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내면서 주문(奏文)을 지어 병자년의 만부득이한 사정을 호소하고 본조 군신(君臣)의 심적(心迹)을 극구 변명하자 황제가 비로소 우리나라의 무죄함을 알게 되었고, 또 도독(都督) 주종예(朱宗藝)로 하여금 자문을 보내 그 미덕을 극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최상의 심적이 근본적으로 금(金) 나라를 위하여 송(宋) 나라를 꾀어 금 나라와 화친하도록 한 진회(秦檜 송(宋) 나라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의 간신)의 본심과 다른 점이다.
또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사실이 청 나라에 발각되자 청 나라가 우리를 책망하며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신하를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부득이 임 장군(林將軍)을 잡아 보냈는데, 임 장군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도망쳤다. 일이 장차 난처하게 되자 최상이 곧 말하기를, ‘당시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일은 임모(林某)와 신이 실제로 그 묘책을 주장하였으니 신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상에게 아뢰고는 그 아들 후량(後亮)과 함께 스스로 청 나라에 갔다. 대개 이 걸음이 생사에 관계된 연유로 해서 최상의 집에서는 초종(初終)의 모든 기구를 갖추어 가지고 떠났으며 여러 관리와 친우들도 전송하면서 은자(銀子) 수천 냥을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 청음도 청 나라로 잡혀가 최상과 한 집에 갇혔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후량이 은자를 써서 그 아비를 구출하려 하였으나 청음이 혹시라도 그 일을 알까 염려되었다. 이에 청음을 찾아가 산의생(散宜生 주(紂)에게 뇌물을 주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힌 주 문왕(周文王)을 구했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청음이 옛날의 현인(賢人)이라고 대답하였다. 후량이 또 그렇다면 산의생의 한 일이 부당한 것이 없느냐고 묻자, 청음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후량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드디어 그 은자를 정명수(鄭命壽)에게 주어 그 화를 늦추게 하였다.
또 최상은 처음에 청음이 진심으로 춘추대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구하려는 심산이 있었다고 의심하였는데, 급기야 함께 청 나라에 갇혀 사생이 박두하되 꿋꿋이 변함없는 마음을 보고서야 그 의기심을 믿고 감복하였다. 그러고 청음도 처음에는 최상이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여기었는데, 급기야 청 나라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오랑캐에게 굴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그 본심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함께 벽을 사이에 두고 갇혀 있는 상황에서 서로 시(詩)를 지어 화답하였는데, 그중 청음의 시에 ‘끝내 두 대(代)의 우호를 닦으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네.[終修兩世好 頓釋百年疑]’라 하고, 최상의 시에 ‘그대의 마음 돌이 아니니 끝내 굴리기 어려우나 나의 도는 고리와 같아 이르는 곳마다 자유롭네.[君心非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라 하였다. 이것이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한 가지 일이다.
그후 최상 집 자손들은 청음이 자기의 조상과 서로 조그마한 원한도 없다고 생각하여 정의(情誼)가 몹시 두터웠는데, 청음 집 자손은 별로 대단히 좋게 여기지 않고 그저 서로의 안부나 끊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청음의 연보(年譜)를 작성할 때 이 사실 전부를 빼 버렸는데, 우암이 이를 보고 문곡에게 서신으로 이르기를 ‘본말을 갖추어 기록하는 것이 연보의 체재이다. 하물며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일은 본래 선생의 성대한 덕에 손색이 없는 것이니 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였으나, 문곡은 끝내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 우암이 일찍이 이르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명길이 강화(講和)한 일은 책망하면서 감히 후인이 척화하지 않은 것은 비난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명길이 강화를 주장한 것은 사세가 위급하여 만부득해서였으니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의 명류(名流)들은 평안한 때에 한 사람도 척화의 계책을 낸 사람이 없이 오랑캐들에게 굽히기를 달갑게 여기기만 했으니 이런 자들이야말로 죄를 받아야 한다. 위급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만 유독 죄가 있고 평안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는 또 죄가 없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명길을 마음속으로부터 복종시키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삼신전(三臣傳)》을 우암이 개정한 곡절을 들은 적이 있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崔相 최명길(崔鳴吉))의 아들 후량(後亮)이 《삼신전》을 얻어 보고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병자년 강화(講和)의 일에 대한 후인의 논단(論斷)이 망극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어찌 감히 원망을 하고 미워하겠는가. 그러나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일을 조처하지 않았다면 실제로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삼신전》을 보건대,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 두 사람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낼 즈음에 우리 아버지가 윤ㆍ오와 함께 양파(陽坡)로 가면서 윤ㆍ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내 말대로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ㆍ오가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리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만약 과거의 척화신(斥和臣)을 끌어대면 저들 오랑캐 또한 다 죽일 수 없을 것이니 그대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ㆍ오가 이르기를 「불가하다.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삶을 도모하여 다른 사람들을 모두 불측한 곳으로 빠뜨리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무근한 일이니,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당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서자(庶子) 기남(箕男)이 체찰사(體察使)의 막하(幕下)로서 그 일을 목도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체찰사의 품의하는 일로 어전에 있을 때, 최 판서(崔判書)가 두 신하를 인솔하고 함께 오랑캐의 진중으로 가려 하였다. 이에 상이, 식후에 두 신하를 인견하고 보내겠다고 하니, 최 판서가, 오랑캐의 독촉이 몹시 급하니, 만약 인견한 후에 보내려면 자신이 먼저 가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를 허락하자 최 판서가 드디어 식전에 오랑캐의 진중으로 갔는데, 두 신하는 식후에 과연 인견하고 군관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양파로 함께 갔다는 것이 어찌 그릇된 기록이 아니겠는가.’ 하니, 우암이 듣고 말하기를 ‘이는 내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대개 삼신(三臣)의 본가의 기록에 있기 때문에 실었던 것이다. 과연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산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기남에게 물으니, 그의 대답이 한결같았으므로 이에 양파(陽坡)의 한 대목을 산삭하였다. 당시 후량은 청풍(淸風)에 있었고 우암은 여주(驪州)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내가 서신으로 그 사실을 청풍에게 통지하니, 청풍이 듣고 몹시 기뻐하며 드디어 배를 타고 우암을 찾아와 뵙고 사례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한 대목의 개정을 또 청하였는데, 이는 ‘최상이 두 신하의 손을 뒤로 묶고 오랑캐의 진영에 이르자, 오랑캐가 크게 좋아하면서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 죄인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하며 최상에게 큰 상을 내리니, 최상이 이를 받았다.’고 한 것이었다. 우암이 말하기를 ‘이 사실 또한 양파와 같은 증거가 있다면 고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히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이 밖에 또 한 대목을 청하였는데, 이는 최상이 잡혀 오랑캐 땅으로 갈 때에 지은 절구시(絶句詩) 한 수로,
내 비록 삼학사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 我雖不殺三學士
한밤중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네 / 中夜思之心自驚
천도는 본래 순환하는 것이런가 / 天道由來好回還
흰머리로 오늘날 또다시 서쪽으로 가네 / 白頭今日又西行
라고 한 내용이었다.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시는 선상공(先相公)의 작품이 아니란 말인가?’ 하니, 후량이 말하기를 ‘시는 과연 선인의 시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은 그렇다면 감히 고칠 수 없다고 하고 끝내 그가 청한 대목을 고치지 않았다. 후량은 자기의 요청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에 말하기를 ‘저희 집이 대감에게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저희 집 자손이 어찌 감히 문하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는데, 그후에 자손이 마침내 그와 같이 하였다.”

영숙이 대규모(大規模)와 엄심법(嚴心法)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천지를 소유한 듯이 널리 마음을 가져 만세의 태평을 연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대규모가 아니겠는가.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한 듯이 하여 은밀한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엄심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영숙이 묻기를,
“정자(程子)가 ‘국량은 배워서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이 타고난 좁은 도량을 배워서 넓힐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에 무슨 일인들 배워서 능치 못하겠는가. 사람의 국량도 더욱 배워서 넓힐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처음에는 과거를 보는데 골몰하여 다른 일을 돌보지 못하는데, 이는 그 국량이 과거의 밖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현의 글을 보고 사우(師友)의 말을 듣게 되면 과거 밖에 또다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아 여기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는 국량이 이미 과거의 밖을 벗어난 것이다. 또 예컨대, 사람들이 칭찬을 들으면 기뻐하고 비방을 들으면 노하는데, 이는 그 국량이 칭찬과 비방의 안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칭찬과 비방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방해도 노하지 않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니, 이는 그 국량이 비방과 칭찬 속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무한한 도량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시험해 본 일이다.”
하였다. 영숙이 또 묻기를,
“정자(程子)가 한 위공(韓魏公)의 도량은 간기(間氣 여러 세대 만에 있는 기량)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간기란 무엇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우암을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우암을 흠잡는데, 그들은 우암의 어떤 점을 지적하여 말한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하였다. 영숙이 대답하기를,
“너무 과격하고 너무 고집스런 것을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다. 대개 우암을 배우기 어렵고 또 마땅히 배워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너무 과격하고 너무 고집스럽다고 하는 데에 있다. 대개 남의 잘못을 보고도 바르게 말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온 세상의 풍조인데, 이는 남을 거스르기만 하면서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암은 그렇지 않다. 혹 약간이라도 심술에 잘못됨을 보이거나 속임수의 작태를 보여 의리를 해치는 것이 있으면, 평소 대단히 존경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자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부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으니, 이윤(尼尹 이산(尼山)에 사는 윤증(尹拯)의 집안)에 대한 일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대개 우암은 윤씨 집에 대하여 팔송공(八松公 미촌(美村)의 부(父) 황(惶))때부터 교분이 그처럼 두터울 수 없었고,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등도 외우(畏友)로 섬겼으며, 윤증(尹拯) 또한 우암에 대해 당세의 망사(望士)로 극진히 섬겼다. 따라서 우암의 입장에서는 옳지 못한 곳이 보이더라도 묵묵히 참고 칭찬이나 하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랬다면 당후(唐後 지명. 곧 윤증 가문)를 추복(趍服)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암을 섬겼을 것이며, 또 훗날 대화(大禍)의 조짐도 없었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우암이 이를 모른 것은 아니었다. 오직 효종(孝宗)으로부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중책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천리에 관계되거나 사설(邪說)에 관련되는 일이 있으면 화복과 이해를 일체 돌아보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성내어 극언하기를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당후(唐後)의 일에 대하여 내가 서구(叙九 송주석(宋疇錫))와 함께 여러 차례 너무 과격하여 뒷날의 화를 부르게 될까 염려됨을 말씀드렸고, 회석(晦錫 우암의 손자)은 때로 울면서 간하기를 ‘어찌 자손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였으나, 우암은 다만 미소를 지으면서 서서히 말하기를 ‘나로 말미암아 천리와 인심은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손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과, 남을 따라 오염되어 사행(邪行)에 휩쓸려 자손을 보전하게 되는 것을 후세로 하여금 평가하도록 하였을 때, 그 어느 것이 낫겠는가.’ 하였다. 이것이 우암의 도량으로서 화복과 이해에 집착하지 않고 존경과 친밀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소위 간기의 도량으로서 바로 배우기 어려운 점이다. 위공의 도량 또한 화복과 이해에 일체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자가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우암의 이 일에 대하여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배워야 할 줄은 절실히 알아 마음속에 간직하였으나 끝내 배우기 어려웠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암의 위대한 곳을 후학이 끝내 배울 수 없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다만 내가 능히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암을 배운다고 하면서 이러한 점을 배우지 못하면 이는 우암을 배운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숙이 우암의 도에 대한 경지를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다 알 수 있으며 또 어찌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겠는가. 대개 그 세밀한 곳은 빠뜨림없이 모두 세밀의 극치를 이루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활대(闊大)한 곳에 이르러서는 빠뜨림없이 모두 그 활대의 극치를 이루었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하늘 같이 높고 바다 같이 넓으며 명주실 같이 은미하고 쇠털 같이 섬세한 도학의 경지를 우암이 당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른바 명주실과 쇠털 같은 경지는 주자와 더불어 결국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높고 넓은 경지에 이르러서는 감히 그 누가 우열이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내가 일찍이 노선생의 화상찬(畫像贊)을 지었는데, 그중에 ‘군유(群儒)를 합쳐 대성(大成)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김중화(金仲和 중화는 김창협(金昌協)의 자(字))가 이 귀절을 보고 말하기를 ‘대성 두 글자는, 본래 백이(伯夷)의 청(淸)과 유하혜(柳下惠)의 화(和)가 모두 한 쪽에 치우쳤기 때문에 오직 부자(夫子 공자(孔子))만이 합쳐서 대성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런데 부자의 제목을 우암에게 쓴다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 말이 어떠한가?”
하기에, 영숙이 대답하기를,
“글쎄요.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주자가 일찍이 공자(孔子)를 일컬을 때 군성(群聖)을 합쳐 대성하였다고 하였고, 주자 문하가 주자를 일컬을 때 군현(群賢)을 합쳐 대성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뜻은 이제(二帝) 삼왕(三王)의 시서예악(詩書禮樂)이 공자의 절충을 말미암아 대성하였음을 이름이며, 주정장소(周程張邵)의 학설이 또한 주자의 절충을 말미암아 대성하였음을 이름입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군유(群儒)를 합쳐 대성하였다는 것이야말로 노선생의 제목으로 미안한 점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실로 그렇다. 내 뜻 역시 그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그 구절을 고치지 않았다.”
고 하였다. 영숙이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가 우암을 아는 것이 어느 정도냐고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일찍이 그와 더불어 조용히 강론해 보지 못해서 어떠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암에 대한 제문에 ‘임금이 알아보고 함께 대인(大人)이 되었다.’는 말로 보면 우암의 경지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밀한 곳에 이르러서는 간혹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앞서 여상(驪相 이여(李畬))이 나에게 ‘중화(仲和)를 급히 보고 강론을 귀일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삼주 어른이 왜 지금까지 우암의 행장을 쓰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서구(叙九)가 있을 때 지문(誌文)은 여상(驪相)에게, 묘표(墓表)는 나에게, 행장(行狀)은 중화에게 부탁하였는데, 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 뒤에 사람들이 서구의 부탁을 어길 수 없을 것 같아 중화로 하여금 그 행장을 쓰게 하였는데 중화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또 가장(家狀)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그로 하여금 지으라고 강권할 수도 없었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가장은 왜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곡절이 있다. 서구가 가장을 절반 이상 써 놓고 세상을 떴기 때문에 내가 백순(伯純 송일원(宋一源))으로 하여금 속히 가장을 마치게 하여 행장을 받으려 하자, 백순은 문장력이 부족하다고 사양하며 신백겸(申伯謙 신유(申愈))과 함께 써서 완성할 것을 청해 왔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러면 서로 의논해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는데, 그후에 보니 백겸에게 전담시켰고 또 그 글의 문장이 가장의 문체에 크게 위배되어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뜻으로 백겸에게 말하니 백겸 역시 인정하고 손을 보아 보내 주겠다고 하였는데, 백겸이 갑자기 불행하게 되어 아직까지 보내오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선생이 또 백겸에게 말하기를 “글이 그대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의당 본가의 자손 이름으로 대술(代述)해야 할 것이다.” 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의당 백순(伯純)의 이름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한 소식이 없었다.
영숙이 백겸(伯謙)의 앞서 있었던 일의 전말을 물으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야기를 하자면 몹시 장황하나, 다 말해 주겠다. 앞서 헌상(軒相 백헌(伯軒) 이경석(李景奭)) 경석(景奭)이 삼전비문(三田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이른 말이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러운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청백했고 을유년의 일이 칭찬할 만하였기 때문에 당시 청음(淸陰) 같은 제현들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 그후 기유년에 현종(顯宗)이 온천(溫泉)으로 거둥할 때 헌상이 유도상(留都相)이 되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또한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으로 서울에 있었다. 이때 우암(尤菴)은 마침 피혐할 일이 있어 감히 행재(行在 임금이 임시 머무는 곳)에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전의(全義)에 나아가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헌상이 문득 상소하기를 ‘원근의 제신들로서 달려와 문안하는 자가 없다.’ 하고 또 무례한 말을 하였으므로, 우암이 듣고 즉시 대죄소(待罪疏)를 올렸는데, 그 끝에 손 종신(孫從臣) 금인(金人)을 위해 제문(祭文)을 지은 송(宋) 나라 손적(孫覿) 운운한 말이 있었다. 헌상이 처음에는 손신(孫臣)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허적(許積)이 곧 마비(麻碑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찬한 것으로 손적(孫覿)의 일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 헌상에게 알리니, 헌상이 몹시 노하여 우암의 상소문을 동춘에게 내보이자 동춘이 해탄(駭歎)하였다고 한다. 그후에 판서 송규염(宋奎濂)이 서신으로 우암에게 물으니, 우암은 춘형(春兄 동춘)도 해탄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타인이야 어찌 기대할 수 있느냐고 답하였다 한다.
급기야 지난해 이하성(李廈成)이 그 조부를 위해 자칭 변무소(卞誣疏)를 올리면서, 동춘의 해탄을 인용하여 우암을 공격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러므로 문인들의 변무의(辨誣議)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정경유(鄭慶由) 곧 병() 그 소본(疏本)을 나에게 보내 가부를 가리게 하였다. 내가 이때가 마침 병이 있어 손자 아이를 시켜 읽히고 그 내용을 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문세를 듣고 나서야 백겸(伯謙)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중간에 동춘의 사실에 이르러 말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받들어 순종하는데 모(某)만이 유독 배척하니 그 화연(譁然)할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송모(宋某)가 모(某)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 옛날에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은…….’이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모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한 말은 위의 화연(譁然)의 말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하였기 때문에, 경유(慶由)에게 답하기를 ‘모(某)는 한결같이 두 선생을 섬겼는데 폄의(貶議)하는 것 같아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백겸의 말을 들으니, 그 본의가, 화연이라고 한 것은 다만 온 세상 사람만을 말한 것이고, 모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단지 명도 운운의 말머리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백겸의 본의야 과연 이와 같았다 할지라도 송모의 해탄 구절 뒤에 차부지어(且夫至於) 등의 문자를 붙이지 않고 바로 화연의 밑에 접속시켰고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처음 본 의사와 같을 것이 괴이하지 않다. 이것이 백겸이 글자를 제대로 안배해 쓰지 못한 곳이다.
또 두 가문이 서로 시끄럽게 된 원인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 당시 내 손자가 그 소본의 이 대목을 등서하여 그 장인 송병익(宋炳翼 동춘의 손자)에게 보냈더니, 병익이 백순(伯純)에게 보였다. 백순은 처음부터 또한 백겸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회중(懐中 송씨(宋氏)의 세거지 회덕(懷德))의 박정채(朴廷采)ㆍ송하적(宋夏績) 등이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백겸을 비난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까지 하고, 또 세제(世濟)의 무함이 조상에까지 미쳤으니 자손된 백겸이 그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는가. 대개 하적이란 자는 본래 백겸의 집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화로 그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씨가 형편없다 하겠다. 이로부터 백순 또한 격노하여 말하기를 ‘우암을 변무한 사람이 난적이 된다면 이는 우암으로 난적을 삼는 것이다.’ 하니, 회중의 무리가 그 말을 듣고 백순 또한 백겸과 함께 동춘을 무함한다고 하면서 백순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집의 자손이 서로 패를 갈라 버티게 되었다. 얼마 후에 회중 사람 7, 8명이 연명하여 나에게 백겸을 징벌할 일을 물어 왔기에, 내가 답하기를 ‘신모(申某)의 일은 실로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남의 문장력을 흠잡아 징벌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그후 내가 화양동(華陽洞)으로 가니 백순ㆍ백겸도 와서 함께 모였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망(謬妄)’ 두 자를 풀어 말하며 백겸을 책망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이는 말을 다하기 전에 승복할 일이다.’ 하였다. 내가 이어 백겸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이번 일이 또한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닌데, 지금 만약 한 번 사과하면 허다한 분란이 모두 없는 일로 될 것이다. 어찌 이처럼 고집하는가?’ 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저들이 소생을 무고할 뿐 아니라 선조까지 무함하니, 사과하고 싶어도 어떻게 사과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과하는 글을 대략 몇 구절 만들어 나에게 서신을 보내라. 그러면 내가 회중 사람들에게 보여 일이 없도록 하겠다.’ 하니, 백겸은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는데 끝내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또 을유년 4월에 백겸이 여기에 왔을 때 9일 동안 상대하면서 사과할 것을 역설하자, 그때도 돌아가면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으나, 역시 실행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인데 고집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이 백겸의 병통인 것이다.
두 집 자손에게 내가 항상 이르기를 ‘우암과 동춘 두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계(沙溪)의 문하에 함께 노닐며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그리고 춘당(春堂)이 임종할 때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와 일조청빙(一條淸氷)으로 서로 인정하였고, 세인들 또한 매양 사문(沙門)의 양송(兩宋)으로 일컫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두 집 자손이 서로 불화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그 흐름의 폐단은 끝내 동춘 자손이 우암을 헐뜯게 되고 우암 자손이 동춘을 헐뜯는 일까지도 있을지 모른다. 삼분오열(三分五裂)된 이때를 당하여 어찌 사소한 일로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가? 왜 급급히 서로 사과하여 구의(舊誼)를 되찾지 않는가?’ 하였는데, 송병익은 말하기를 ‘일원(一源)이 사과하면 내가 유감을 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원이 사과하지 않으니, 내가 차마 먼저 굽힐 수는 없다.’ 하고, 송백순은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내가 춘당(春堂)을 모욕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먼저 사과하면 나는 과연 춘당을 모욕한 사람이 된다. 내가 이미 모욕한 일이 없는데 내가 먼저 사과할 의리가 없다.’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버티며 세월이 갈수록 격렬해져 내 말을 듣기를 진월(秦越)같이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순은 나를 책망하여 왜 사정(邪正)을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하고, 병익은 나를 책망하여 왜 백순과 백겸을 배척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이 무슨 의리이며 무슨 처사인가. 이것이 근래 일의 줄거리이다.”

선생이 《의례(儀禮)》에 구고(舅姑)의 복(服)을 기년(期年)으로 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기에, 영숙이 예의 뜻을 감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개 인륜(人倫)으로는 삼강(三綱)보다 더 중한 것이 없으니,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 되고, 아비는 아들의 근본이 되고,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 대개 신하ㆍ아들ㆍ아내의 중히 여기는 바가 아비ㆍ임금ㆍ남편보다 더 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들은 아비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고, 신하는 임금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고, 아내는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제정한 예로서 반드시 삼강을 근본으로 하여 만세의 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위인포(魏仁浦 송(宋) 나라 학자)가 성인의 본의를 모르고 망녕되이 후하게 하여 후세에 바꾸지 못할 전례를 만들었다.”

[주D-001]이산(尼山)의 일 : 이산은 노성(魯城)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논산군(論山郡) 노성면(魯城面)임. 노성에서 대대로 살아 온 윤증(尹拯)이 그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함으로써 소위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립된 사건을 말함.
[주D-002]기해년에 …… 예론(禮論) : 효종(孝宗)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期年說)과 남인 윤휴 등의 3년설(三年說)이 대립되었던 예론을 말함.
[주D-003]갑인년의 화 : 숙종 즉위년 효종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期年)으로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삭탈관직하고 그 일파를 추죄(推罪)한 사건을 가리킴.
[주D-004]경신년의 옥사 : 숙종 6년에 있었던 소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말함. 허적ㆍ윤휴 등 남인이 대거 실각하고 송시열 등이 다시 등용됨으로써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주D-005]점필재(佔畢齋) …… 것이다 :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史草) 문제로 점필재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을 때, 그의 제자였던 한훤당까지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일을 말함.
[주D-006]태묘(太廟)의 …… 일 : 태조의 휘호인 “太祖康憲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세조의 휘호인 “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나 선조의 휘호인 “宣祖昭敬正倫立極成德洪烈至誠大義格天煕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보다도 적다는 이유로 태조의 존호를 추가할 것을 주청하려 한 일. 숙종 9년 송시열이 이를 건의했으나, 박세채(朴世采)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07]그 아비의 묘문(墓文) :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탁한 윤선거(尹宣擧)의 묘문임. 송시열이 부탁을 받고는 앞서 윤선거가 윤휴를 천거한 점을 불쾌하게 여기어 “행장(行狀 박세채(朴世采)가 씀)에 이미 다 말하였다.”고 기피하면서 일축하였는데, 이것이 절교를 하게 된 명분이 되었다.
[주D-008]목천(木川)의 사건 : 목천 사람 허황(許璜)이란 자가 윤선거를 강도 부노(江都浮奴)라고 하더라는 말을 송시열이 전파하였다 하여 윤증이 송시열을 의심하게 된 사건이다. 뒤에 허언(虛言)임이 밝혀졌다.
[주D-009]강빈(姜嬪)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으로 병자호란 때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했다. 뒤에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후,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었다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무고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숙종 44년(1718)에 신원(伸冤)되었다.
[주D-010]김홍욱(金弘郁) : 효종 5년(1654)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빈(姜嬪)의 사사(賜死)가 억울하다고 상소한 죄로 친국(親鞫)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는데, 뒤에 신원되었다.
[주D-011]현석이 …… 의견 : 태조(太祖)의 휘호가 후대 임금보다 적을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의 휘호를 추가할 것을 송시열이 건의한 데 대해 박세채가 반대한 것을 말함.
[주D-012]향동문답(香洞問答) : 송주석(宋疇錫)의 편서로, 송시열이 박세채ㆍ이단하(李端夏) 등과 문답한 시사(時事)를 기록한 책.
[주D-013]선조(先祖)가 …… 일 : 효종이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 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뒤 청 나라의 정서(征西) 전투에 참여한 일을 가리킴.
[주D-014]왕도(王導)와 진 원제(晉元帝)의 관계 : 원제는 원래 공왕(恭王)의 비(妃) 하후씨(夏侯氏)가 소리(小吏)인 우씨(牛氏)와 간통해 낳아 진의 중흥주가 되었으므로 우계마후(牛繼馬後)란 말이 전한다. 그런데 왕도는 원제의 기량을 알고 세자 때부터 보좌하다가 원제가 즉위하자 승상(丞相)이 되었다. 《晉書 帝記6 元帝》
[주D-015]봉성군(鳳城君) 찬축(竄逐) : 봉성군은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尹元衡) 일파로부터 계림군(桂林君)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입고 찬축되고 사사(賜死)되었다.
[주D-016]삼신전(三臣傳) : 삼학사(三學士), 즉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전기(傳記)를 말한다.
[주D-017]을유년의 일 : 이경석(李景奭)이 인조 23년(1645)에 이조 판서가 되어 인사의 행정을 쇄신하고 숨은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당시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이유태(李惟泰) 등이 요직에 오르게 된 일.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비명(碑銘)]
[황강서원(黃江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並序) [공조 판서 송환기(宋煥箕)]

한수재(寒水齋) 권 선생(權先生)이 황강(黃江) 가에 거처를 정하고서 자그마한 서재(書齋)를 낙성하니, 우리 선조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께서 편액(扁額)을 써 주시고, 이어 소설(小說)을 지어 심법(心法)을 전수할 뜻을 보여 주셨는데, 선생은 마침내 의서(衣書)의 고탁(顧託)을 받아 사도(斯道)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선생이 별세하시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 미처 뒤에 문인 후생(後生)들이 선생의 명결(明潔)한 덕을 그리워 하는 생각을 붙일 곳이 없으므로 강상(江上)의 구거(舊居) 곁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였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덕스러운 용모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고서 학자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우러러 보고 흥기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 주자(朱子)가 죽은 뒤로 오도(吾道)가 우리나라로 와서 군유(群儒)가 성하게 일어나 심오한 의리를 개발하였으나, 문정공(文正公)의 바른 학문과 성대한 사업만이 실로 옛 성현의 뒤를 이어 내세(來世)의 도를 열어 주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선생은 정전(正傳)을 이어받아 정밀하고 심오한 이치를 더욱 연구하고, 성법(成法)을 지켜 척도(尺度)를 잃지 않았으며, 순수한 학으로 연원(淵源)의 적전(嫡傳)이 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문정공이 선생에 대해서 평소 의중(倚重 의뢰하여 중시함)하여 부탁하신 것이 주자가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 한 것 같을 뿐이 아니었는데, 문정공이 후명(後命)을 받을 때에 임하여 주자의 학문 방법과 위대한 효묘(孝廟)의 사업으로써 고해 주시고, 또 “이후로는 오직 치도(致道)만을 믿을 뿐이다.” 하였으니, 선생의 짐이 이에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므로 학문과 교육을 함에 있어 한결같이 고정(考亭 주자)을 근본으로 삼아 직(直) 자를 전수한 뜻과 경(敬)이 시종을 관통한다는 훈계와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친 의리를 종신토록 가슴에 담아 독실히 실천해 마지않았다.
덕이 높고 지위가 높아짐에 미쳐서는 세상의 방패가 되고 국가의 시귀(蓍龜 의지처)가 되었으나, 스스로 임천(林泉)에 있는 몸이라 하여 조의(朝議)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이면 상소해 밝게 분변하여 척사 위도(斥邪衛道)하였다. 온양(溫陽) 행궁(行宮)에서 등대(登對)했을 적에는 곧 학문과 심법(心法)의 요체를 진술하고, 또 이어 성조(聖祖 효종)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할 것으로 권면하면서 남김없이 간곡히 주달하였다. 선생의 출처(出處)와 은현(隱顯)이 비록 문정공과 같지 않은 듯하지만 그 도(道)는 같았다. 일찍이 갑신년에 한결같이 문정공께서 유탁(遺託)하신 뜻에 따라 화양동(華陽洞) 가운데에 황묘(皇廟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또 대보단(大報壇)의 축조(築造)를 한마디 말로 찬성한 것이 지극하였다. 이 몇 가지는 모두 만세에 대고 할 말이 있을 만한 것이니 어찌 세교(世敎)를 부식한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규모(規模)와 기상이 혼후(渾厚)하고 장중(莊重)하여 한계(限界)를 헤아릴 수 없었고, 경(經)을 논하고 예(禮)를 해설함에는 이르는 곳마다 분명하였으며,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에 이르러서는 은미하고 오묘한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 마치 영롱한 구슬을 꿴 것 같아 간혹 전인(前人)들이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바가 있었으니, 선생이 사도(斯道)를 돕고 후학(後學)을 깨우쳐 인도한 바가 크다 하겠다. 사람들이 선생의 조예(造詣)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어찌 이에 있지 않겠는가.
아, 문정공께서 기사년에 화를 당한 뒤로 선생이 직(直) 자의 요결(要訣)을 지키고 세도(世道)의 책임을 담당하여 우뚝하게 퇴폐해진 세파(世波)의 지주(砥柱)가 되지 않았다면 정학(正學)과 대의(大義)가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거의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오히려 정주(程朱)의 학과 춘추(春秋)의 의리를 아는 사람이 없지 않게 된 것이 누구의 공이겠는가.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享祀)하는 것은 우리 무리가 숭배해 받드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진실로 장수 유식(藏修遊息)하는 군자들이 선생의 도의(道義)를 준수해서 그 바른 문로(門路)를 얻어 혹시라도 수사(洙泗)의 은은(齗齗)이 없게 된다면 사학(斯學)에 거의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 나름대로는 또 한탄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즉 후학의 존모(尊慕)를 받는 선생의 성덕으로 말하자면 선생의 고향이나 선생이 우거하였던 곳만이 아니라 선생이 계셨던 곳마다 다투어 사우를 세워야 마땅한데, 우암(尤菴)을 모신 곳에도 아직까지 배향(配享)하지 못한 곳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연전에 선생을 고암서원(考巖書院)에 배향한 것은 우리 성상의 세상에 드문 감모(感慕)에서 나온 것일 뿐더러 친히 제문을 지어 지극히 높이고 추켜세웠으니 선생의 도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드러난 것이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선생의 휘(諱)는 상하(尙夏), 자는 치도(致道),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호는 수암(遂菴)이니 이 또한 우암이 지어주신 것이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에 서원을 설립하였는데, 황강(黃江)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그 뒤 71년만에 비로소 묘정(廟庭) 한 구석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비문(碑文)을 새겼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 돌보시어 / 天眷我東
많은 현인 내리시니 / 篤生群賢
전통이 찬란하여 / 統緖彬彬
적실한 전승 있었네 / 有的其傳
우옹의 계개 / 尤翁繼開
실로 집대성하시어 / 允矣集成
춘추의 의리 지키고 / 義秉春秋
주자의 학 높이셨네 / 學宗考亭
아, 우리 선생께 / 斯道有託
사도를 기탁하여 / 繄我先生
직자 진결 수수할 때 / 直字眞訣
간곡하고 자상했네 / 授受丁寧
천재의 연원 / 千載淵原
추월 한수
이므로 / 秋月寒水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 眞知實踐
공경으로 시종하셨네 / 敬以終始
태산 북두같은 덕망으로 / 山斗望隆
근엄한 스승되시어 / 有儼皐比
성학을 호위하고 중화를 높여 / 閑聖尊王
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셨네 / 道不壞墮

은거하는 선생 옥백으로 초빙했으나 / 玉帛丘園
뜻을 지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 確平不抜
후학 위해 공덕 끼쳐 / 功存嘉惠
이기 제설 지으셨네 / 理氣諸說
황묘를 창건하고 / 皇廟之建
온궁에 진대해서 / 溫宮之對
대의를 천명한 것은 / 大義斯闡
백대에 대고 할 말이 있으리 / 有辭百代
성한 덕과 깊은 학을 / 盛德邃學
뉘라서 여관할 수 있으리 / 誰能蠡管
고결하신 선생의 도덕 / 景行高山
만인이 우러러보리 / 秋陽江漢
사당은 물가에 임했는데 / 遺祠臨渚
그 물 넓고도 깊네 / 其水奫淪
넓은 학과 도의 근원 / 學海道源
이 물과 함께 끝 없으리 / 與之無垠
모든 군자들 / 凡百君子
영원히 우러러 의지하리 / 永言瞻依
도가 여기에 있으니 / 文在於斯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랴 / 捨此曷歸

숭정(崇禎) 후 삼정사(三丁巳) 모월 모일 공조 판서 송환기(宋煥箕)는 삼가 찬한다.

[주D-001]소설(小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8에 보이는 서한수재편액후(書寒水齋扁額後)를 말함.
[주D-002]의서(衣書)의 고탁(顧託) : 우암이 주자(朱子)가 황간(黃榦)에게 의서를 전한 고사에 따라 수암에게 사문(師門)의 서적(書蹟)인 율곡(栗谷)의 수서(手書)와 《율곡집(栗谷集)》 편찬에 관해 김장생(金長生)과 이항복(李恒福)이 서로 왕복했던 편지를 전하고 잘 간수하도록 부탁한 일. 고탁은 후사를 부탁함. 이는 곧 전도(傳道)의 뜻을 표시한 것임.
[주D-003]수사(洙泗)의 은은(齗齗) : 노(魯) 나라의 수수(洙水)와 사수를 건너는 자들이 과거에는 장유(長幼)의 예절이 있었는데, 도가 쇠해지자 장유의 질서가 무너져 서로 다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도가 쇠퇴(衰頹)된다는 의미로 썼다. 《史記 魯周公世家》
[주D-004]계개(繼開) : 계왕성 개래학(繼往聖開來學)의 준말. 성현의 도를 계승하여 후학에게 전하는 것.
[주D-005]천재(千載)의 …… 한수(寒水) : 천 년 동안 전해 오는 도통(道統)의 연원이 마치 맑은 물에 비친 가을 달처럼 분명하다는 뜻.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 재거감흥(齋居感興)에 “공유천재심(恐惟千載心)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에서 인용한 것임.
[주D-006]여관(蠡管) : 소라 껍질로 바닷물을 측량하고 대통 구멍으로 표범의 무늬를 살핀다는 말로 옅은 식견으로 광대(廣大) 정심(精深)한 학문을 엿보면 겨우 한쪽만 볼 수 있다는 뜻.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비명(碑銘)]
황강서원(黃江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幷舒) [종자(從子) 권섭(權燮)]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한수재(寒水齋) 권 선생(權先生)의 휘(諱)는 상하(尙夏)이고 자는 치도(致道)이다. 경묘(景廟) 신축년(1721, 경종1) 8월 29일에 평소에 거처하시던 재중(齋中)에서 81세를 일기로 고종명(考終命)하니 가마(加麻)한 문생(門生) 및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고, 관학 유생(館學儒生)들도 설위(設位)하고서 곡하였다. 그해 10월 16일에 충주(忠州) 대림산(大林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는데, 회장(會葬)한 자가 또 4백여 명이었으며, 제문을 지어 가지고 와서 곡한 자도 1백여 명이었다. 금상(今上) 원년 을사년 봄에 특명으로 문순공(文純公)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영시(迎諡)하던 날 경향(京鄕)에서 모인 자가 또 2천여 명이었다.
을사년에 또 상이 청풍(淸風) 구거(舊居)에 서원을 세우도록 윤허하고 황강서원(黃江書院)이라 사액(賜額)하니 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다 함께 일제히 힘을 써서 단시일에 낙성하였는데, 법도와 모양이 볼 만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계획이 세심하지 못하여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20년 뒤인 을축년에 약간 우측으로 옮겨 공소(孔昭)의 언덕에 세웠다. 다른 서원의 제도를 모방하여 지세에 따라 원우(院宇)를 배치하였는데, 사당의 모양은 엄숙하여 위엄이 있고 단청(丹靑)은 현란하며, 지경(地境)은 그윽하고 경치는 산뜻하니, 보는 이들이 새로이 보고 모두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길일(吉日)을 골라 위판(位版)을 중당(中堂)에 봉안(奉安)하고 일곱 분[七分]의 초상화(肖像畫)를 그 옆에 거니, 마치 평소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금포(衿袍 청금(靑衿) 도포(道袍))를 입은 많은 선비들이 제사를 올리고서 모두 기쁜 마음으로 노래 부르며 물러나 강서당(講書堂)에 모여 앉아 낙성(落成)을 축하하며 감격해 하였다. 그중에 일을 맡은 여러 사람이 나 소자(小子) 섭(燮)에게 말하기를,
“서원이 이미 낙성되었으므로 묘정비(廟庭碑)를 세우려 하니 그대가 비문을 지으라.”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주자(朱子)의 행장을 면재(勉齋 황간(黃榦))이고서야 지었다. 문하에 제자들이 찬란한데,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연보(年譜)ㆍ묘지(墓誌)ㆍ행장(行狀)을 이미 나누어 기술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공(大公)의 도는 친혐(親嫌)이 없다는 것을 우옹(尤翁)의 신항삼려기(莘巷三閭記)와 농암(農巖)의 남문비기(南門碑記) 등에서 증거를 취할 수 있으니 그대 또한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아,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시어 상모(狀貌)가 뛰어나고 기상이 엄중(嚴重)하며, 도량이 굉대하고 덕성(德性)이 혼후(渾厚)하며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그 행동에는 맺고 끊은 듯이 모가 나지 않았으나 방한(防限)을 어기지 않았고, 언의(言議)에는 과격 준엄함이 없었으나 의리를 판변(判辨)함에는 반드시 확실하였다. 그 의리를 강론함에는 모두 포괄하고 빠뜨림이 없었기 때문에 지려가 두루 통하였고, 경술(經術)로써 성취하여 음양오행도해(陰陽五行圖解), 현석(玄石 박세채)에게 준 태극도론(太極圖論), 이기호발변(理氣互發辨), 음양승강변(陰陽升降辨), 박세당(朴世堂)의 훼경무현(毁經誣賢)에 대한 변소(辨疏), 농암(農巖)의 지각설(知覺說)에 대한 변론(辨論) 등이 있고, 또 지지변(知智辨)과 미발시선악변(未發時善惡辨)을 지어 경(鏡)과 장(醬)으로 비유하였으며, 조성기(趙聖期)의 이기설(理氣說)을 변론하여 율곡(栗谷)의 오행칠정(五行七情) 및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의 설을 변론하여 주자(朱子)의 뜻을 밝혔다. 그 《정서분류(程書分類)》, 《문의통고(問義通考)》, 《주서차의(朱書箚疑)》는 모두 우옹(尤翁)의 부탁을 받아 완성한 것이다. 대개 선생은 젊어서는 시남(市南)과 동춘(同春)을 사사(師事)하다가 만년에 우옹의 적전(嫡傳)이 되었는데, 그 ‘수암(遂菴)’이란 편액(扁額)은 설 문청(薛文淸)의 학문을 권면한 말을 취한 것이고, ‘한수(寒水)’라는 편액은 주자 감흥시(感興詩)의 말을 인용하여 중임(重任)을 부탁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율옹(栗翁)의 학문은 주자의 학을 끝까지 궁구하여 우암에게 전해졌다.”
하였는데, 선생은 정전(正傳)을 이어받아 더욱 그 심오한 의리를 궁구하고 성궤(成軌 성법(成法))를 지켜 절로 절도에 맞았다. 그 처신한 바는 우옹과 약간 달랐지만 그 도(道)는 같았다. 그러므로 우옹과 함께 윤휴의 당(黨)이 물어 뜯는 화를 참혹하게 입었다. 화를 당한 일에는 경중이 있지만,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이 선생을 힘입어 더욱 중하게 된 것은 우옹과 대략 같았다. 그 출처(出處)의 의리로 말할 것 같으면, 선생이 매양 스스로 이르기를,
“침랑(寢朗 능 참봉(陵參奉))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약간의 사혐(私嫌)이 있기 때문이었고, 지평 이후로는 또 낮은 벼슬을 사양하고 높은 관직에 있고 싶어한 뜻이 있지 않았다.”
하고, 또 매양 이르기를,
“우옹이 효묘(孝廟)를 만나지 못했다면 끝내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이윤(尼尹 윤증(尹拯))의 당이 난적(亂賊) 윤휴를 떠받들고 장희재(張希載)와 표리(表裡)가 되어 의리가 멸절(滅絶)되고 세상이 긴 밤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굳게 절개를 지켰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은미(隱微)한 뜻을 볼 수 있다.
숙종(肅宗)이 말년에 온천에 행차하니 선생은 새로 찬성에 제수하는 명을 받으신 때라서 부득이 행조(行朝)로 가서 융복(戎服)으로 입대(入對)하여 현사(賢師 우암)가 임종할 때 일러준 지결(旨訣)을 외어 간절히 주달하기를,
“한 직(直) 자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요법(要法)으로 삼고, 춘추(春秋)의 의리로써 계지 술사(繼志述事)로 삼으소서.”
하고, 또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로써 권면하였다. 뒤에 숙묘의 어제(御製)를 간행함에 미처 ‘찬선을 생각한다.[思贊善]’는 한 편의 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성심(聖心)의 권주(眷注)가 진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에 대한 삼조(三朝 숙종ㆍ경종ㆍ영조)의 돈독한 예우가 보통에서 크게 벗어나 지평 때부터 자주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궤문(饋問 음식물을 보내 주고 문안함)하고, 또 선생이 살고 있는 황강(黃江) 일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여 보기까지 하였다.
《가례원류(家禮原流)》의 서문(序文)이 나옴에 미처 유봉휘(柳鳳輝)ㆍ정식(鄭栻) 등의 무함(誣陷)으로 파직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숙종이 의서(擬書)ㆍ묘문(墓文)을 들이게 하여 보고나서는 크게 깨닫고서 선생의 수서(收敍 거두어 서용(敍用)함)를 특별히 명하고, 또 따로 문자(文字)를 만들어 공안(公案)으로 삼아 후왕(後王)들로 하여금 변통하지 말게 하였다. 그런데 경묘(景廟) 초년에 흉당(凶黨)이 다시 권세를 잡아 숙묘의 처분(處分)을 모두 뒤집고 역가(逆家)의 손자 신치운(申致雲)을 시켜 선생을 무함하게 하여 그 직명을 삭탈하였다. 그런데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즉시 복관(復官)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선생은 지위가 삼사(三事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나,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지켜 한 번도 조의(朝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종(端宗) 복위(復位)의 타당성과 신비(愼妃) 복위의 부당성과 단 의빈(端懿嬪 경종의 세자빈 심씨(沈氏). 경종 즉위 후 왕후로 추책(追冊)됨)의 상(喪)에 가복(加服)하는 예제(禮制)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헌의하였다.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운 것은 실로 우옹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들의 말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존주(尊周)의 대의(大義)를 편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단(大報壇)을 쌓는 데에도 높은 성지(聖志)를 힘껏 도왔다. 바다에 표류한 사람을 연산(燕山 청 나라)으로 잡아 보내지 말라는 소(疏)와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附)하기를 청한 소는 선생의 소년 때의 일이다. 선생의 도학(道學) 지업(志業)은 여러 문인들이 지은 연보(年譜)ㆍ묘지(墓誌)ㆍ행장(行狀)에 자세하고 또 신도비(神道碑)의 명사(銘辭)에서 고신(考信)할 수 있으니, 나 소자가 무엇을 더 기술하겠는가.
나 소자가 거실(居室) 가운데 선생의 영정(影幀)을 걸어 놓고 사사로이 한 찬(贊)을 지어, 선생의 기상(氣像)에 대해 쓰기를,
“멀리서 바라보면 단엄(端嚴)하기가 마치 태산이 후질(厚質 대지(大地))을 진압하고 있는 것과 같고, 가까이 나아가 보면 온화하기가 마치 양춘(陽春)이 만물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같다.”
하고, 선생의 학문과 공부(工夫)에 대해 쓰기를,
“진퇴 응대(進退應對)와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가르침은 소대(小大)가 각자 만족하게 섭취하였고, 정일 확충(精一擴充)과 수제 위육(修齊位育)의 공부는 전후(前後 전현(前賢) 후현(後賢))가 동일한 규칙(揆則)이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공효(功效)를 말한 것이고, 또 쓰기를,
“만동사(萬東祠)를 한 쪽의 대명(大明)의 천지에 세우고, 한 직(直) 자를 천 년 뒤 한수(寒水)의 추월(秋月)에 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업(事業)과 도통(道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말미(末尾)에 대현사(大賢師)의 집성(集成)을 이어 운운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찬(贊)을 절약하여 묘정비(廟庭碑)의 뒤에 명각(銘刻)할까 하였으나, 또 깊이 살피지 않고서 사의(私意)로 지은 것이라 너무 지나치거나 참람함이 있을까 두려워 따로 하나의 명을 지어 이 서원의 비(碑)에 명(銘)하기로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암산 유수 그윽하고 / 巖流窈窕
경계가 맑기도 한데 / 地界淸深
우뚝 솟은 사당에 / 有廟崇崇
맑은 기운 서리었네 / 爽氣森森
많은 유생들 / 春秋祼將
춘추로 제사함은 / 濟濟靑衿
화양 석담의 / 華陽石潭
천고 심법 전함일세 / 千古傳心
고택을 우러러보니 / 瞻依故宅
솔 그늘 연했는데 / 松翠連陰
삼구의 명망 가지런하니 / 三區匹名
지나는 이 모두 공경하리 / 過者齊欽
비석에 새긴 글 / 穹碑有鐫
강물에 비치니 / 照映江潯
선생의 덕 / 先生之德
영원히 노래하리 / 有永歌吟

숭정(崇禎) 후 재을축(再乙丑) 모월 모일 선생의 종자(從子) 섭(燮)은 삼가 쓴다.

[주D-001]친혐(親嫌) : 자제로서 부형을 찬양하는 문자를 짓는 것이 혐의쩍다는 말.
[주D-002]신항삼려기(莘巷三閭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5에 보이는 삼현려기(三賢閭記)를 가리킨다. 삼현은 우암의 백증조(伯曾祖) 귀수(龜壽), 증조 인수(麟壽), 귀수의 사위인 성제원(成悌元)임.
[주D-003]남문비기(南門碑記) : 《농암집(農巖集)》 권24에 보이는 강화부 남문 선원 선생 순의비기(江華府南門仙源先生殉義碑記)를 가리킴.
[주D-004]삼구의 …… 가지런하니 : 삼구(三區)는 율곡의 석담(石潭), 우암의 화양(華陽), 수암의 황강(黃江)을 말하는데, 곧 수암의 명망이 율곡ㆍ우암과 가지런한 것을 뜻함.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행장(行狀)
한수재(寒水齋) 권 선생 행장 [문인 한원진(韓元震)]


본관(本貫) 경상도 안동부(慶尙道安東府)
고조(高祖) 휘(諱) 대성(大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비(妣) 청주 한씨(淸州韓氏) 숙인(淑人)
비 양천 허씨(陽川許氏) 숙인
증조 휘 주(霔) 오수 찰방(獒樹察訪)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비 풍산 심씨(豐山沈氏) 숙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조 휘 성원(聖源) 선산 부사(善山府使)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비 진주 강씨(晉州姜氏) 숙인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고(考) 휘 격(格) 사헌부 집의 증 의정부 영의정
비 함평 이씨(咸平李氏) 숙인 증 정경부인
선생의 휘는 상하(尙夏)이고, 자는 치도(致道)이니 그 선조는 안동(安東)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행(幸)이 고려 태조를 섬겨 태사(太師)가 되어 권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이로부터 대대로 현달한 사람이 있어 드디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감(瑊)이 벼슬이 좌찬성에 오르고 두 번씩이나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지고 양평공(襄平公)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이분이 선생의 7대조이다. 판서공(判書公)과 찬성공(贊成公)은 모두 척사위도(斥邪衛道)로써 선조조와 인조조의 유명한 진사(進士)가 되었고, 의정공(議政公)은 오랫동안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깨끗한 명예와 곧은 도로써 당세의 추앙을 받았다. 3대의 행적이 찬성공과 의정공의 묘비(墓碑)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는데, 이 비문은 모두 우암 송 선생이 지은 것이다.
이 부인(李夫人)은 목사 초로(楚老)의 딸이고 구원공(九畹公) 춘원(春元)의 손녀로서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대의를 통하였으므로 의정공이 항상 도움을 주는 쟁우(爭友 잘못을 충고하는 벗)로 여겼다.
선생은 인조대왕 19년 신사(1641) 5월 8일 갑오 해시(亥時)에 서울 구리재[銅峴] 자택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식자가 모두 덕기(德器)가 될 줄을 알았다. 찬성공이 매우 사랑하여 밤이면 항상 품속에 품고서 《시경》 3백 편을 구전(口傳)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는 줄줄 외었다. 이로부터 문리를 절로 통하여 가르침이나 감독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이 진보되었다. 선생이 9세 때 찬성공의 임소에 따라갔는데, 그 군(郡 여산(礪山))에 의송(疑訟)이 있어 수령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판결이 나지 않았다. 선생이 곁에서 그 소송 문안을 한번 보고는 문득 ‘이 사건은 분변하기 쉽다.’고 하였다. 찬성공이 선생의 말대로 힐문하자 거짓으로 꾸민 자가 과연 승복하니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약간 자라서는 지기(志氣)가 범상하지 않아 개연히 공업(功業)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였다. 효종이 큰일을 할 뜻을 품고서 천하의 일을 맡길 만한 문무를 겸비한 완전한 인재를 구할 때에 선생의 나이 18세였는데, 시를 짓기를,
큰소리로 태공법을 읽고 / 大讀太公法
길게 양보음을 읆었네 / 長吟梁甫吟
내 나이 아직 팔십이 못 되었으니 / 吾年未八十
무엇 때문에 눈물로 옷깃 적시리 / 何事淚沾襟
하여 스스로의 뜻을 나타내었다.
현종대왕 2년 신축에 진사가 되어 반궁(泮宮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하였는데, 명성과 인망이 대단하여 반중(泮中)의 의논이 반드시 선생의 자문을 거쳐 결정되었다. 3년 계묘에 이 부인(李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복을 벗은 뒤에 가서 동춘 선생(同春先生)을 알현하고서 이어 제자가 되었는데, 동춘 선생이 크게 칭찬하였다. 8년 정미에 중국인 진득(陳得)ㆍ증승(曾勝) 등 1백여 인이 제주(濟州)로 표류해 와서 스스로 대명(大明) 사람이라고 하면서 “영력황제(永曆皇帝)가 바야흐로 한 모퉁이를 보유하고서 숭정(崇禎)의 대통(大統)을 잇고 있다.”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장차 이들을 잡아다가 청 나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홀로 분개하여 “이는 대의에 관계된 바이다.” 하고서 드디어 이위장(李緯長) 등 몇 사람과 더불어 밀소(密疏)를 올려 불가함을 극론하였다. 의정공(議政公)도 상소하여 강력히 간쟁하였으나 묘당(廟堂)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진득 등을 끝내 청 나라로 압송하였다. 민 문정공(閔文貞公) 유중(維重)이 선생의 손을 잡고서 깊이 경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12년 신해에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이에 앞서 의정공이 세상이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었다. 돌아감에 미쳐 선생이 유지(遺志)를 따라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청풍(淸風) 선산에 장사 지내고는 이때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글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더욱 《중용》을 좋아하여 수 년을 하루같이 날마다 꼭 한 번씩을 읽었다. 복(服)을 벗은 뒤에 우암 선생(尤菴先生)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배우기를 청하고, 강론과 질의(質疑)에서 발명(發明)한 바가 많으니, 우암 선생이 자주 칭찬해 허여하고서 우리 도를 위해 사람을 얻었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15년 갑인에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에 숙종대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뭇 소인이 요로(要路)에 있으면서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다음해 을묘에 우암 선생이 덕원(德源)으로 귀양 가자 선생은 우암을 전송하고는 가족을 이끌고 청풍으로 돌아와서 의정공의 묘소 밑에 살면서 다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우암 선생이 선생의 거처하는 집을 이름하여 수암(遂菴)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설 문청(薛文淸)의 “뜻이 있으면 하늘이 이루어 준다.[有志天遂]”는 말을 취한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집 한 채를 지으니, 우암 선생이 또 한수재(寒水齋)라 명명하고 소설(小說)을 지어 명명한 뜻을 서술하였으니, 대개 서로 그 심법(心法)을 전하는 뜻을 이미 이 한수재라는 이름에 붙인 것이다.
숙종대왕 6년 경신에 경화(更化)가 되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고, 8년 임술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9년 계해에 대신의 천거로 상의원 주부에 초수(超授)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2년 병인에 지평에 제수되고, 14년 무진에 잇따라 지평,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15년 기사에 흉당(凶黨)이 다시 뜻을 얻어 중전(中殿)을 폐출하고 사화(士禍)를 크게 일으켜 우암 선생을 제주(濟州)에 유배하였다. 우암 선생이 제주로 떠날 때 선생이 태인(泰仁)까지 수행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 줄을 알고서 드디어 사문(師門)에 전수해 오는 서적(書蹟)을 선생에게 전수하였다 그리고 섬 속으로 들어간 뒤에도 또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명(明) 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의 사당을 세울 일과, 《주자서차의(朱子書箚疑)》를 이어 완성할 일로 부탁하였다.
얼마 뒤 우암 선생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는 다시 바닷가를 향해 출발해 가다가 장성(長城)에서 올라오는 우암 선생을 맞이하여 배알하고서 함께 정읍(井邑)에 당도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다시 주자의 학문의 방도와 효종의 위대한 사업 및 치상(治喪 초상을 치름)의 절차를 고해 주고, 또 “앞으로 오직 치도(致道)만을 믿을 뿐이네.” 하였다. 이날에 우암 선생은 후명(後命 귀양 간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림)을 받자, 선생이 우암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우암 선생이 살던 회덕(懷德) 옛집에 빈(殯)하였다. 초상에서부터 장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이 그 예를 주관하였는데, 비록 화변(禍變)을 만나 경황 중이었으나 정문(情文)이 잘 갖추어져 조금도 유감스러움이 없었다. 20년 갑술에 중전이 복위되고 우암 선생도 억울한 죄명을 벗고 복작(復爵)되었으며, 다시 선생을 장령과 사업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계속 제배의 명이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대개 약관 때부터 이미 천하의 대의를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또 일찍이 우암 선생께 효종의 지사(志事)를 잊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주자의 이른바 “고통과 원한을 참고 견디며 어쩔 수 없어서 천하의 대방(大防 예와 의리)을 보존한다.”는 말로써 자신을 다스리는 의리로 삼았다. 대개 그 출처(出處)와 은현(隱顯)은 비록 우암 선생과 같지 않은 것 같지만, 그 도는 같았으니, 이른바 우(禹)ㆍ직(稷)과 안자(顔子)가 처지가 바뀌었다면 모두 그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때에 기사 흉당(已巳凶黨)은 비록 축출되었으나 윤증(尹拯)의 무리가 조정에 늘어서 있어 은밀히 후일을 계획하며 사류(士類)와 서로 대항하여, 무릇 명분을 바루고 죄를 성토하며 현인을 높이고 도를 보호하는 일에 대해 번번이 방해하여 점점 괴리되고 격렬해졌으므로 세도(世道)의 근심스러움이 날로 더욱 깊어갔다. 그러므로 선생은 더욱 당세에 뜻이 없었다.
21년 을해에 진선(進善)에 제수되고, 22년 병자에 종부시 정과 집의에 제수되고, 24년 무인에 특지로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에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노산군(魯山君)과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니, 상이 그 상소문을 정부로 내려 백관으로 하여금 헌의하게 하고, 또 외부에 있는 유신에게 물었으므로 선생이 헌의하기를,
“정난(靖難) 때에 노산군이 덕 있는 분에게 사양하여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노산군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삼았으니 애당초 추방했거나 폐위시킨 임금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처치도 실로 세조대왕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조대왕께서 비록 마지못해 육신(六臣 사육신(死六臣))에게 죄를 주기는 하였지만 ‘당세의 난신(亂臣)이고 후세의 충신이다.’는 말씀으로 찬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인종조 때에 연신(筵臣) 한주(韓澍)가 세조의 이 말씀을 가지고 경연에서 진술하기를 ‘세조대왕께서는 그들의 충절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없어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은미한 말씀을 하시어 후세 자손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뒤 중종조 때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군을 위해 입후(立後)할 것을 청하자, 중종은 ‘이러한 말은 지극히 귀한 말이다.’고 하셨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열성(列聖)의 은미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황조(皇朝 명조(明朝))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신종조(神宗朝) 때 국자 사업(國子司業) 왕조적(王祖嫡)이 건문 연호(建文年號)의 회복을 청하였습니다. 건문이 성조(成祖)에게 당초 제위(帝位)를 선양한 임금이 아니었는데도 조적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이것을 오늘날 논의하는 일의 방증으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만약 세조께서 노산을 높여 받든 전례(典禮)를 따라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여 당시에 선양하고 받은 본뜻을 밝힌다면 귀신이나 사람에게 모두 한 되는 바가 없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신비(愼妃)는 중종대왕의 잠저 때의 원비(元妃)로서 아무 죄도 없이 폐출되었으니, 당시 김정(金淨)ㆍ박상(朴祥) 등의 소가 실로 정당한 논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폐척하고 봉전(封典)을 거행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는 선왕의 폐비일 뿐인데, 자손이나 신하의 도리상 폐비를 태묘(太廟)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아마도 자사(子思)의 훈계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의 헌의가 상주되자 드디어 노릉(魯陵)의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신비는 복위하지 않았다.
26년 경진에 이조참의 겸 찬선(贊善) 좨주(祭酒)에 제수되었다. 28년 임오에 관학 유생 어유귀(魚有龜) 등이 상소하여 선생을 초치(招致)하기를 청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세 번이나 보내어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29년 계미에 상소하여 우암 선생에 대한 무고를 변명하고, 경(經)을 훼손하고 현인을 무함한 박세당(朴世堂)의 죄를 배척하였다. 이때 박세당이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을 지어 주자(朱子)의 설을 다 배척하였고, 또 고상(故相) 이경석(孝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우암 선생을 헐뜯었으므로 관학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이 상소하여 세당과 경석이 명분과 의리에 죄를 얻은 일을 논하여 배척하였다. 그러자 경석의 손자 하성(廈成)이 선조(先祖)를 위하여 송원(訟寃)한다고 칭하면서 상소하여 우암 선생을 무함하고 헐뜯음이 지극히 교활하고 끔찍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산림(山林)에 있는 몸이라 하여 일찍이 조정의 의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 일은 실로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된 변고로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겨 드디어 상소하여 변명하고 이어 세당의 일을 배척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비답이 내리는 날에 선생을 호조 참판에 특별 제수하였다.
30년 갑신에 상이 명 나라 멸망 2주기가 되었으므로 명조(明朝)를 생각하고 옛 덕을 회상하여 사당을 세워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고자 하여 상신(相臣) 이공 여(李公畬)를 시켜 선생에게 묻게 하니,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탁월하신 예지(睿志)가 백왕(百王) 중에 우뚝하신데 만약 찬성(贊成)하지 않는다면 존주(尊周)하시는 우리 성상의 의리를 천하 후세에 드러내 밝힐 수 없어서 모든 신하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청 나라의 힐책을 염려한다면, 우리나라가 명 나라의 은덕을 입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니, 옛 덕을 추념(追念)하여 간략하게 보답하는 사전(祀典)을 거행하는 것은 인정과 천리에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저들에게 무엇이 해로워서 힐책하겠습니까. 만약 하국(下國)에서 천자를 제사하는 것이 참람하다고 한다면 기(杞)와 송(宋)이 하(夏)와 은(殷)을 제사한 것을 가지고 참람하다는 기롱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기와 송은 하와 은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군신 부자는 한가지이니 지금 자손이 없는 옛 임금을 위해 옛 신하가 제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이공이 이 말로써 상주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그러나 뒤에 조정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과연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단을 쌓아 제향(祭享)을 올렸다. 이해에 대사헌에 제배되고, 31년 을유에 이조 참판에 제배되었으며, 38년 임진에 특지로 한성부 판윤에 제배되었다가 이내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사체(辭遞)한 뒤 다시 대사헌에 제배되었다. 상이 경연 중에 선생의 아우 부제학 상유(尙游)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이르기를,
“대사헌을 전후에 간절히 부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조정으로 나올 기약이 없으니, 서운한 생각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오늘날 국사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유현(儒賢)이 조정에 나와서 경연에 출입한다면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러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대사헌에게 전하여 꼭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상의 권주(眷注)가 날로 융숭하여 징소(徵召)하기를 빈번히 하였을 뿐더러 상례(常例)를 깨고 경연 중에서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여 반드시 선생을 초치하려 하였다. 선생의 집우(執友) 중에도 편지를 보내어 나아가기를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선생은 확고하게 초지(初志)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39년 계사에 상이 군상(君喪)에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는 제도를 추복(追復)하여 백대의 고루한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여 사관을 보내어 선생에게 물으니, 선생이 추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헌의하였는데, 그 헌의가 마침내 시행되었다. 41년 을미 11월에 부제학 정공 호(鄭公澔)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파직되니, 선생이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 윤증(尹拯)이 전후에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진술하였다. 선생이 처음에는 윤증과 동문으로서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윤증은, 우암 선생이 일찍이 그의 아비 선거(宣擧)가 적 휴(賊鑴)에게 붙은 것을 배척하여 묘문(墓文)을 지은 것이 제 뜻에 차지 않는다 하여 깊은 원한을 품었고, 또 우암 선생을 흉당이 원수로 여기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사문(師門)에 두 마음을 품었다. 이에 선생은 윤증의 일이 윤상(倫常)에 관계가 되니 다시 친구 간의 교분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서 드디어 윤증과 절교하였다.
윤증이 또 일찍이 시남 선생(市南先生) 유계(兪棨)를 사사하였는데, 유 선생이 《가례원류》를 편찬할 적에 선거도 그 일에 참여해 도운 적이 있었다. 유 선생이 뒤에 그 책을 윤증에게 부탁하여 윤색을 가하게 하였는데, 유 선생이 죽은 뒤에 윤증은 그 책을 제 아비의 책으로 만들고자 하여 오래도록 윤색을 가한 그 책을 내놓지 않았다. 유 선생의 손자 상기(相基)가 그의 속셈을 헤아려 알고서 그 책의 간행을 누차 요청하였으나, 윤증은 이 핑계 저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상신(相臣) 이이명(李頤命)이 상에게 진달하여 호남 도신(湖南道臣)으로 하여금 그 책을 간행하게 하였으나, 윤증은 또 단단히 움켜쥐고 내놓지 않았다. 상기가 누차 편지를 보내어 다투었으나 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서로 절교하고서 드디어 집에 간직하고 있던 초본으로 판각하였다 그리고서 선생께 서문을 청하니 선생이 서문을 쓰고 나서 또 서문의 뒤에 글을 써서 윤증의 반복(反覆 배반), 낭패(狼狽)한 죄상을 지척(指斥)하였다. 정공(鄭公)도 또 발문(跋文)을 지어 깊이 윤증을 지척하였다.
상기가 그 책을 간행하여 상께 올리니, 상이 그 발문을 보고서 정공을 파직하라고 특명하였다. 그러자 윤증의 무리 유규(柳奎) 등이 때를 타서 상소하여 선생이 지은 《가례원류》의 서문 뒤의 글과 우암 선생의 묘표(墓表) 속에 있는 말을 들어 선생이 현인을 무함했다고 헐뜯으니, 선생에게 자못 미안(未安)한 뜻을 보이는 내용의 비지(批旨)를 내렸다. 그러자 태학생 윤지술(尹志述) 등과 팔도 유생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하여 무함임을 변명하였으나, 모두 엄한 비답을 받았다. 선생은 드디어 상소하여 죄를 청하고, 또 《가례원류》의 곡절과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전말을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어릴 때부터 고(故)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가례원류》에 대해 자세히 들었는데, 이 책은 유계가 임천(林川)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편집한 것입니다. 유계가 방면된 뒤에 금산(錦山)으로 거처를 옮겨 윤선거와 문을 마주 대하고 살았는데, 실로 이때 중본(中本)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으로 지금 생존해 있는 분이 없으니 선거가 얼마만큼 참여해 도왔는지를 후생들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뒤에 유계가 성은(聖恩)을 입고 조정으로 들어와서는 공무로 바빠서 윤색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문인 윤증에게 부탁해서 윤색하는 일을 마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전후의 글이 모두 유계의 문집에 실려 있으니, 상고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른바 중본(中本)이 오랫동안 윤증의 집에 있었으니 선거가 다시 윤색하는 일을 도운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선거가 고 참판 이정기(李廷夔)에게 준 두 통의 편지에 모두 유씨(兪氏)를 주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거가 지은 유계의 행장에 유계가 처음으로 편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니, 오늘에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이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윤증이 유상기(兪相基)에게 보낸 편지에 ‘이른바 부탁을 받았다는 말은 끝내 기억할 수 없다.’고 한 사실입니다. 저 윤증이 아무리 늙어 정신이 혼미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잊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옛말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살아 있는 자가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는데, 가령 유계가 다시 살아난다면 윤증의 마음이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강목》ㆍ《소학》을 편찬할 때 문인들에게 편집하게 한 것이 매우 많았고, 《근사록》에 이르러서는 실로 여조겸(呂祖謙)이 그 일을 도왔으되, 지금까지 그 책을 말하는 자들이 주자의 책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윤증이 어찌 이런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말이 저와 같으니, 진실로 이것이 무슨 심보입니까.
윤증이 유계를 제사한 제문(祭文)에 ‘선생은 나를 자질(子姪)처럼 보셨고, 나는 선생을 부형처럼 섬겼다.’ 하였으니 은의가 돈독하였음을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받은 부탁을 사후에 배신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신이 이른바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의 수단이란 것입니다. 윤증이 40년 동안 아비처럼 섬긴 스승을 무함해 헐뜯고 배척해 절교하여 원수처럼 보더니 지금 유계에서도 또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천리와 인정에 차마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형칠(邢七)의 낭패(狼狽)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 군신과 사생(師生)은 의리로 결합된 것이지만, 예경(禮經)에 살아서 섬기고 죽어서 장사 지내는 예를 논하면서 천륜의 부자와 일례(一例)로 병칭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군ㆍ사ㆍ부가 사람의 대륜(大倫)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폐하면 사람으로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윤증의 행위를 생각해 보건대 첫째도 배사(背師)이고 둘째도 배사인데, 세상의 인심이 어둡고 막혀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스승을 아비와 한가지로 섬기는 의리가 거의 없어졌으므로 신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서(序)의 끝 부분에 대략 논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호(鄭澔)가 유현(儒賢)을 침범해 모욕했다는 이유로 먼저 죄를 입었습니다. 신은 윤증의 친구로서 그의 옳지 못함을 보고서 절교한 지 이미 오래인 데다가 지금 변론해 윤증을 배척한 이 말이 침범해 모욕한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죄범(罪犯)으로 논하면 신이 실로 정호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규(柳奎)라는 자가 한 장의 소를 올려 신의 스승의 묘문(墓文)까지 언급하면서 신을 침범해 모욕하는 데 있는 힘을 다 들였다 하니, 신은 또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개 신의 스승이 화를 입은 것이 이미 윤휴의 무리가 다시 기용된 데에서 연유하였는데, 윤증의 건등(騫騰 뛰어오름)이 또 이때에 있었으니 지금 묘문을 지으면서 어찌 이에 의거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상께서 이미 유규(柳奎)가 선정(先正 윤증)을 위해 신변(伸辨)했다고 여기시어 그의 말을 가납하셨으니, 유현을 침범해 배척한 신의 죄가 또 더욱 깊습니다.”
하였는데, 다음해 1월에야 비로소 선생의 상소문 내용이 지나치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러자 윤증의 무리가 상이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뜻을 보고는 기회를 타서 헐뜯고 무함함이 끝이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의 소가 더욱 심히 패악스러웠으며, 또 경연 중에서까지 없는 사실을 꾸며 헐뜯음이 더욱 심하니, 상이 그 말에 깊이 빠져 들어 서(序)의 끝 부분을 궁내에서 불태워 없애라는 전교를 내렸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윤득화(尹得和) 등과, 태학생 김순행(金純行) 등이 계속해 상소하여 변명하였으나, 비답이 더욱 엄하였다. 이에 봉휘(鳳輝)ㆍ정식(鄭栻)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선생을 파직하도록 청하니,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윤증의 문도인 최석문(崔錫文) 등 수십 인이 스승을 위해 변무(辨誣)한다 하면서 윤증이 신유년에 우암 선생에게 올리려고 썼다가 올리지 않은 편지를 들어 상소하여 우암 선생을 헐뜯고 선생까지 언급하니, 상이 또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그러자 판부사(判府事) 이공 여(李公畬)가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태학생 이시정(李蓍定) 등이 상소하여 극력 변론하였으나 또 엄한 비답을 받았다.
7월에 상이 정원에 명하여 윤증의 신유의서(辛酉擬書)와 우암 선생이 지은 윤선거의 묘문을 베껴 올리라 하였다. 상은 의서와 묘문을 보고 나서 드디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지금 의서를 자세히 살펴보건대 글 속에 과연 과격한 말들이 많으니 전에 올렸던 이 판부사(李判府事)의 차자의 변론이 옳다. 윤증을 전혀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많은 선비들의 원한을 풀기 위한 변론이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서, 또 특명으로 선생을 서용하여 대사헌 겸 찬선(贊善) 좨주(祭酒)에 예전처럼 제배하고, 다시 서(序)의 끝 부분을 종전대로 인쇄해 넣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 오명윤(吳命尹) 등이 상소하여 윤증을 신구(伸救)하니, 전교하기를,
“전년에 내린 전교는 의서와 묘문을 보기 전에 있던 것이고, 오늘의 처분은 의서와 묘문을 보고 난 뒤에 있은 것이다. 내 마음에 의심이 풀려 시비가 분명해졌으니 비록 후세에 대고 할 말이 있다고 해도 가할 것이다. 아비와 스승이 누가 더 중하고 경하냐 하는 말은 지금 다시 제기할 것이 못 된다. 서(序)와 발(跋)을 도로 인쇄하는 것은 또한 그 순서의 일일 뿐이다.”
하였다. 당시에 오명윤 등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정인(正人)을 해치는 말들을 주워 모아 한 장의 소를 올려 선정(先正 우암)을 모욕하는 데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고, 유현(수암)을 헐뜯는 데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심지어 서의 끝 부분을 다시 불태워 없애라고 청하였으니, 멀리 귀양 보내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일단 가장 가벼운 벌에 붙여 소두(疏頭)인 오명윤을 우선 정거(停擧)하였다. 또 옥당의 차자와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석문(錫文)ㆍ봉휘(鳳輝)ㆍ정식(鄭栻)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고, 그 밖에 정인을 해치던 무리도 모두 삭출하였다. 그리고 또 특별히 유지를 내려 선생을 부르기를,
“지난번 《가례원류》를 간행하여 올리던 날에 내가 곡절을 자세히 모르고 있던 차에 갑자기 서문을 보고는 경을 의심하여 처분을 너무 서둘러서 소홀하게 대했던 것이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러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지난 잘못을 이미 깨닫고서 경의 관작을 처음의 상태로 회복하였으니 불평으로 끓어오르던 사림의 답답한 심정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하는 바이니, 경은 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마음을 바꿔 길을 떠나오라.”
하였다. 대개 상이 전일에 윤증의 정상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매양 윤증의 배사(背師)가 그 아비가 모욕을 입은 데서 나온 것이니 별달리 잘못한 바가 없다고 여겨 드디어 아비가 스승보다 중하다는 설로 시비를 확정한 것이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묘문과 의서를 봄에 미쳐서는 묘문에는 원래 윤선거를 헐뜯어 묘욕한 말로 절교할 만한 꼬투리가 없는데, 의서에는 터무니없는 날조가 끝이 없어 실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에 상이 비로소 윤증의 심보가 매우 악독하고 처신한 도리가 무례하였음을 깨닫고, 전일에 내렸던 처분을 깊이 후회하고서 즉시 선생을 서용하여 복직시키고 다시 서문을 간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그리고 또 윤증의 관작을 추삭(追削)하고서 승지를 보내어 우암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에 치제하게 하고, 친히 서원의 편액을 써서 내렸다. 또 비망기를 내려 존현(尊賢) 척사(斥邪)의 뜻을 보이니, 30년 동안 정해지지 않았던 사문의 시비가 이때에서야 크게 정해졌다. 윤증을 논척한 전후의 소장이 승정원에 쌓여 있었으나, 모두 상이 살펴보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갑자기 밝게 깨달아 다시 여한이 없게 된 것은, 대개 선생의 한 말씀으로 인하여 개발(開發)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론이 신장되고 성덕이 광명해져서 사문과 세도(世道)가 의뢰할 바가 있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달에 특지로 좌찬성에 제수하였다. 43년(정유) 3월에 대가(大駕)가 온천에 거둥하려 하니 옥당이 차자를 올리고 사학 유생이 상소하여 모두 선생을 초치하여 함께 데리고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온양(溫陽) 행궁(行宮)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서 선생은 어가가 가까이에 거둥해 계시니 의리로 보아 달려가서 문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 드디어 행궁을 향해 출발하였다. 병 때문에 괴산(槐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상소하여 대죄하니, 사관을 세 차례나 보내어 부르고 이어 사관과 함께 오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이 상소하여 직명을 해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또 사관을 보내어 본직의 체직을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선생이 온양 금곡(金谷)에 도착하여 또 상소해 겸대(兼帶)하고 있는 찬선ㆍ좨주 등의 직명도 해면해 주기를 청하니, 상은 함께 온 사관에게 명하여 다 체직을 윤허하니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이 행궁으로 가서 마침내 입대(入對)하니 상이 정성스러운 말로 위로하고 또 함께 서울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이어 학문과 심법(心法)의 요결(要訣) 및 춘추(春秋)의 의리와 계술(繼述)의 효도를 진술하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 만사가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합니다.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성지(聖志)가 탁월하시어 장차 큰일을 하려 하셨으므로 더욱 이 성의 정심의 학을 주로 삼으셨고, 신의 스승 송준길ㆍ송시열이 가장 오래 시강(侍講)하였는데, 성조(聖祖)께서도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을 경들에게 바란다고 전교하셨으니, 군신 사이에 강명(講明)하셨던 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의 정심의 학은 바로 전하의 가법(家法)이니, 후왕(後王)이 마땅히 계술할 바가 어찌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임종하기 3일 전에 문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오직 직(直)일 뿐이다.’고 하였는데,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에도 역시 이로써 문인들을 가르친 것은, 대개 직(直) 자의 설이 오랜 내력이 있고 포함하고 있는 뜻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사람의 생리는 곧다.[人之生也直]’ 하셨고, 맹자는 ‘곧음으로 길러 해침이 없으면[以直養而無害]’이라고 하였는데, 《대학》의 성의 정심과, 《중용》의 정일(精一)이 모두 이 뜻이니 한 직 자가 실로 천고 성인들께서 서로 전한 심법의 요결입니다. 그런데 성조(聖祖)께서 이미 이것으로써 위에서 법을 세우셨고, 신의 스승도 아래에서 정성껏 인도하였으니, 지금 전하께서 근본을 단정히 하고 훌륭한 정치를 내는 도를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하겠습니까. 오직 이것을 깊이 체득하여 힘써 행하신다면 천하의 일을 손바닥을 움직이듯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공자께서 하신 일 중에 《춘추(春秋)》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춘추》의 의리는 존왕(尊王)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 의리가 밝지 못하면 사람이 사람이 되지 못하고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해 천하에 오랑캐의 비린내가 가득한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만이 예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성조의 힘이 아님이 없습니다. 대개 천지가 뒤집히는 호란(胡亂)을 겪은 뒤로,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하여 국치(國恥)를 설욕하는 일을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신 바는 아니나, 《춘추》의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는 바로 천경(天經)ㆍ지의(地義)ㆍ민이(民彛)여서 하루도 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조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10년 동안 항상 와신상담의 뜻을 간절히 하시어 하루도 이 의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셨고, 신의 스승도 매양 이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였으니, 대개 신의 스승은 평생 동안 이 의리를 지켜 은밀히 대계(大計 효종의 북벌계획(北伐計劃))를 도와 순국(殉國)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신이 한마음 한뜻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도 즉위하신 뒤로 성조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시어 심지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보답하는 제사를 올리셨으니, 마치 해가 중천에 뜬 것처럼 이 의리가 크게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세도가 날로 낮아지고 인심이 점점 타락하여 심지어 대의를 비난해 헐뜯기까지 하여 신의 스승이 당시에 지성으로 도왔던 것을 거짓으로 돌리는데도 온 세상이 괴이하게 여길 줄을 모르니, 신은 이렇게 가다가는 대의가 날로 어두워져서 인심과 세도가 오랑캐나 짐승으로 빠져 들게 될까 두렵습니다. 현재의 시세로 보아 복수하여 설욕하는 일을 비록 창졸간에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조께서 뜻하고 일삼으시던 것을 깊이 추종하여 일마다 잊지 않고 하루같이 지켜 가신다면 계지(繼志) 술사(述事)하는 효도가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위 무공(衛武公)은 90의 나이에도 오히려 억계(抑戒)를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춘추가 비록 높으시나 위 무공에 비하면 차이가 있으시니 만약 큰 뜻을 분발하시어 그치지 않고 부지런히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고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말이 모두 지론이니 내가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위 무공에 대한 말은 더욱 감탄할 만하니 더욱 스스로 힘쓰겠다.”
하고, 또 사문(斯文)의 시비가 정해진 것을 말씀하였다. 그리고 다시 선생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선생의 손을 잡고서 하교하기를,
“나와 같이 서울로 가서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기를 원한다.”
하며,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다. 이날의 융숭한 은례(恩禮)와 소융(昭融)한 계합(契合)은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좌우에서 보는 자들도 모두 안색을 변하고서 서로 경하하였다. 선생도 은우(恩遇)에 감격하였지만, 스스로 늙어서 다시 힘을 펴서 벼슬에 나아갈 가망이 없다고 여겨 명을 받들지 않고서 물러났으니, 군신의 만남이 늦었던 것이 실로 천추의 한이었다. 선생이 물러 나온 뒤에 아들 욱(煜)의 병이 위독하다는 것을 듣고는 상소문을 남겨 놓고서 급히 돌아왔다.
4월에 대가가 환도해서는 선생에게 사관을 보내어 인재(人才)에 대해 묻고, 5월에는 선생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켜 제배하였다. 상이 선생을 깊이 사모해 마지않아 친히 시를 지어 뜻을 나타냈는데, 대상(大喪 숙종의 사망) 뒤에 선생이 비로소 이 시를 보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화답하는 시를 지어 임금을 잃은 슬픈 뜻을 붙였다. 8월에 동궁(東宮)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자 선생이 상서해 사직하고, 이어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을 진술하였다. 이때 동궁의 대리청정을 태묘에 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드디어 대신에게 수의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상직(相職)에 제배됨으로부터 감히 대신으로 자처하지 않아 대신에게 묻는 모든 의논에 다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홍만우(洪萬遇)가 상소하여 산인(山人 수암)을 이처럼 비호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로 선생을 헐뜯었는데, 그 뜻이 매우 흉악하고 음험하였으므로 선생이 상소하여 대죄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홍만우의 소로 인하여 이런 상소를 올렸으나, 이 일을 분변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에 비록 미안한 전교가 있었으나 경이 먼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내 특지를 내려 처분이 크게 정해졌다는 것을 즉시 들어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경이 다시 지난 일을 거론하지 않고 곧장 동궁에게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만을 한 것이며, 경이 본직(本職)에 대해 지나치게 겸양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고묘(告廟)에 대한 순문(詢問)에 헌의하지 않았던 것이니, 이 두 가지가 모두 각각 마땅한 바여서 원래 조금도 미진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만우가 이간질하고자 온갖 방법으로 으르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현인을 무함하고 정인을 해친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므로 이미 삭출의 형벌을 시행하였다.”
하였다. 옥당 및 관학 유생도 교대로 상소하여 홍만우의 무함을 변명하니, 상이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9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45년 기해에 누차 질병을 앓으니 상이 세 차례나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하게 하였다. 46년 경자 2월에 좌의정에서 체직되어 판중추부사에 제배되었다. 4월에 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기 위해 출발하여 충주(忠州)까지 가서는 병으로 갈 수 없어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6월에 숙종대왕이 승하하니 선생이 주정(州庭)에 들어가서 거애(擧哀)하고서, 병 때문에 서울로 달려가 곡할 수 없으므로 상서하여 대죄하였다. 47년 신축 8월에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이달 29일 정해 술시(戌時)에 한수재(寒水齋)에서 고종명(考終命)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은 철조시(撤朝市)를 명하고 예관을 보내어 전례에 따라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관학 유생들도 자리를 베풀고서 거애하였다. 문인들은, 황면재(黃勉齋 황간(黃榦))가 회암(晦菴 주자)의 복(服)을 입은 의례(儀禮)에 따라, 백포건(白布巾)에 삼베 조각을 붙인 수질(首絰)과 백대(白帶) 차림으로 복을 입었다. 10월 16일 계유에 충주 속곡(束谷) 계좌(癸坐)의 언덕, 부인(夫人)의 우측에 합장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시사가 크게 변하여 전고의 사적(史籍)에 유례가 없는 참혹한 사화가 일어나서 경종(景宗) 3년 계묘에 선생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지평 신치운(申致雲)은 신면(申冕)의 손자로서 평소부터 산인(山人)을 원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생의 관작 추탈 문제를 단독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그러자 유생 홍우저(洪寓著) 등 80여 인이 상소하여 신변(伸辨)하였으나, 상은 그들을 먼 변방에 귀양 보냈다. 문인 이시성(李蓍聖) 등 40여 인이 상소하고 대궐 앞에 엎드려 있었으나, 승정원이 끝내 그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상(今上 영조) 3년 기사에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여 치제(致祭)케 하고, 문순공(文純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가정에 있을 때부터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라 사문(師門)에 종사함에 미쳐서는 더욱 성현의 학에 뜻을 다졌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절로 도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질을 바로 잡는 데 심히 힘을 쓰지 않았으나 잔재가 쉽게 융화되었으므로 속과 겉이 탁 틔어 해맑아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예의를 삼가 몸을 지키거나 외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용모를 볼 수 없었으나, 기거와 동작에 정해진 법도가 있었으며, 평소에 모나거나 맺고 끊는 듯한 행동이 없었으나 덕이 높고 의가 깊어 사람들이 스스로 미칠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사람을 대하는 데 일찍이 격렬하거나 준엄한 언론을 낸 적이 없었으나 의리를 분변함에 이르러서는 일도양단하듯 분명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과 도리를 지키는 힘이 늙어서도 게을러지지 않아 80세의 나이에도 병을 앓을 때를 빼고는 늦게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서 밤낮으로 밀려드는 빈객과 서소(書疏)를 응대함에 여유가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문득 책을 펴 놓고 의리에 잠겼으니, 비록 선생의 타고난 기질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또한 선생이 일찍이 공부를 중단한 적이 없었던 것은 습관이 자연처럼 되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겸허하게 사양하여 남의 말을 다 받아들였다. 비록 부녀자나 어린이의 무리와 하찮은 기예를 가진 초학(初學)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가 가지고 있는 바를 고문(叩問)하여 각각 다 말하도록 하여 그 말이 타당하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조금도 자신을 고집하는 뜻이 없었다. 그러므로 뭇 선이 다 선생에게로 모여 마치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른 경지가 이미 높았으되 날로 더욱 높아졌고 보존한 바가 이미 심밀(深密)하였으되 날로 더욱 심밀해졌다. 문하의 제자들이 한번 갔다가 다시 돌아올 적마다 듣는 내용이 반드시 더욱 뛰어나 미언(微言)과 정의(精義)를 만년(晩年)에 변경해 개정한 것이 많았으니, 이는 대개 선생의 날마다 새로워지고 진보하는 묘각(妙覺)이 이미 늙었다 하여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모와 기상이 혼후(渾厚)하고 광대하여 모가 나지 않고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선생의 적은 곳을 본 자는 선생의 큰 곳을 보지 못하였고 선생의 겉을 안 자는 반드시 선생의 속을 알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선생을 안 자는 드물었다.
선생은 모습이 장대하고 기위(奇偉)하였으며, 풍채가 엄정하고 심원(深遠)하였다. 눈은 새벽별처럼 빛나고 음성은 종소리처럼 컸으며 앉고 설 때는 그 자세가 마치 산악과 같고 걸음걸이는 마치 봉황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의젓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고 가까이 나아가면 따뜻하고 인자하여 친애하는 마음이 들었으며 그 말을 들어 보면 확고하여 사리를 변별하였으니, 이것은 선생의 성덕(盛德)이 용모와 언어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이 밖에 평소 훌륭했던 선생의 언행이 또 이루 기록할 수 없이 많거니와, 우선 그 큰 것만을 간추려 말할까 한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의 뜻을 조금도 잃은 적이 없었고, 상중에는 슬픔으로 인해 몸이 여윈 것이 지성에서 나와 한창의 나이에 눈이 어둡고 수염이 세어 거의 몸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선생이 어려서 조부모의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보답해 섬기는 정성에 심력(心力)을 다하였고, 조부모의 상에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거친 음식을 먹고 사랑방에 거처하여 심제(心制)의 뜻을 붙였다. 동생과 누이에 대한 우애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는데, 높은 재주와 원대한 뜻을 가졌던 중공(仲公) 상명(尙明)이 일찍 죽자, 선생은 아우를 생각해 애통 애석해하면서 스스로 묘문을 지어 그의 지행(志行)을 드러내고, 그의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길러 모두 성립(成立)시켰으며, 자식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계조모(季祖母) 박씨(朴氏)가 원인 모를 이상한 병을 얻어 여러 해 동안 기운을 차리지 못하자 아침저녁으로 가서 병을 살피고 정성을 다해 구호하였고, 돌아가자 예로써 상을 치루고 길지를 골라 장사 지내 다시 여한이 없게 하였다.
선생이 우암 선생을 섬길 때는 좌우복근(左右服勤)에 정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애모의 마음을 풀지 않았으며, 우암의 기일(忌日)에는 재계 소사(素食)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우암 선생에게서 부탁 받은 일들을 모두 마음을 다해 처리하여 우암 선생의 뜻을 이루었다. 원근의 사우(士友)들과 힘을 합하여 명 나라 두 황제의 사당 건립을 경영하였는데, 마침 명 나라가 망한 갑신년 3월의 주기가 다시 돌아오자, 그 시기에 맞추어 화양동(華陽洞)에 두 황제의 사당을 창건하고서 스스로 제문을 지어 제향하고, 또 제문을 지어 우암 선생의 진상(眞像)에 사당의 낙성을 고하였다. 그리고 뒤에 다시 우암 선생의 사당을 황제의 사당 옆으로 옮겨 세우고서 매년 같은 날에 제향하여 일체군신제사동(一體君臣祭祀同)의 뜻을 붙였다.
《주서차의(朱書箚疑)》를 부탁 받을 때에 우암 선생이 농암(農巖) 김공 창협(金公昌協)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부탁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수교(修校 수정 교감)를 주관하면서도 김공이 문목(問目)으로 질문해 오면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려 온당하게 되기를 힘썼고, 김공이 별세한 뒤에는 선생 혼자서 그 일을 책임졌다. 수교가 끝난 뒤에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해 예문관에서 간행하였다. 《정서분류(程書分類)》ㆍ《문의통고(問義通攷)》 역시 우암 선생이 엮다가 미처 마치지 못한 것인데, 선생이 또 모두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벗과 교제할 때에는 반드시 성의(誠意)를 앞세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으나, 선을 권면하고 허물을 경계하는 때에는 준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후진을 인접함에는 온화한 기상으로 반복해 인도해 주되 개도(開導)하는 데 방법이 있었으니, 구의(摳衣)의 선비들이 가까이는 호남ㆍ영남에서부터 멀리는 해서ㆍ관북에서까지 찾아와서 문밖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나 응접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문하생들이 각자의 재주에 따라 각각 얻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시문(詩文)을 짓는 부화한 풍습은 일찍이 말한 적이 없었다.
선생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 마음은 지성에서 나와 비록 초야에 묻혀 살며 세상과 서로 맞지 않았으나 일찍이 뜻을 임금과 백성에게 두지 않은 적이 없어 만약 임금의 병환이나 정사의 잘못이나 백성의 곤고(困苦)가 있다는 것을 들으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침식도 편히 하지 못하였다. 경묘(景廟) 때에는 매양 국본(國本 세자(世子))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저사(儲嗣)를 책립했다는 것을 듣고는, 바로 선생의 병환이 위중한 때였는데도, 시자(侍者)가 서울 소식을 고하자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넘쳐 마치 일어나 서고자 하는 것 같았다. 좌우에서 이를 지켜본 자들도 모두 감동하였으니, 이는 대개 선생이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오히려 종국(宗國)을 잊지 못하는 생각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의리를 강명함에 있어 본말을 끝까지 연구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깊어 초연히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 간혹 전인들이 미처 구명(究明)하지 못한 바를 구명한 것이 많았다. 선생이 《중용》 서문의 ‘형기(形氣)’ 두 자에 대해 논하기를,
“이른바 형기에서 생긴다는 것은 이 이목 구체(耳目口體)라는 형기의 사(私)가 있기 때문에 식색(食色)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생긴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른바 성명(性命)에서 근원한다는 것은 이 인의예지라는 성명의 정(正)이 있기 때문에 도의의 마음이 이에서 근원해 발한다는 것을 이른 것뿐이고, 마음이 발하는 곳에 이가 발하고[理發] 기가 발하는 것[氣發]이 있어서 기에서 발한 것이 인심(人心)이 되고 이에서 발한 것이 도심(道心)이 된다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다. 대개 이 형기라는 글자는 본디 이목 구체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 마음의 발용(發用)하는 기까지 아울러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전부터 독자들은 모두 이 형기의 ‘기’를 기발(氣發)의 ‘기’로 여겼기 때문에 이기가 서로 발한다[理氣互發]느니 심과 성이 두 갈래이다[心性二岐]느니 하여 이론이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만약 이 형기라는 글자가 다만 이목 구체에만 속하고 마음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두 갈래로 여기는 의혹이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하였고, 성선(性善)을 논하기를,
“성선의 설이 맹자로부터 비롯하였으나, 맹자가 말한 성선도 역시 그 정(情)이 선한 것으로 인하여 성이 선하다는 것을 밝힌 데 불과하니, 대개 성이 선하기 때문에 정도 선하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고, 일찍이 기(氣)의 청탁(淸濁)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후대의 현자들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설로 인하여 정의 선악은 기의 부림을 받아서라는 설을 주창하자, 학자들이 이 말을 너무 지나치게 미루어 드디어 정의 선악을 일체 기의 청탁으로만 돌리고 이(理)의 주재(主宰)를 인정하지 않으니 맹자의 본지(本旨)와는 거리가 멀다.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느낀 바가 혹 정당하여 아직 인욕이 그 사이에 싹트기 전이라면 잠시 동안이나마 천리가 발현하니 도척(盜跖)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할 때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도척에게도 선한 정이 있는 것은, 이(理)가 스스로 발현,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에는 아무리 탁한 자일지라도 기(氣)가 천리의 감동한 큰 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가 엄폐되지 않고 드러나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선이 필연임을 알 수 있다.”
하였고, 지각(知覺)을 논하기를,
“지각이 지(智)의 용(用)이 되는 것이 마치 애(愛)가 인(仁)의 용이 되는 것과 같다. 애는 정(情)이고 정은 본디 기(氣)인데, 오히려 애를 인의 용이라 하는 것은 애의 기를 인의 용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인의 이(理)가 애에 유행(流行)하는 것을 인의 용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이 지의 용이 된다는 것도 지각의 기를 지의 용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의 이(理)가 지각에 발현하는 것을 지의 용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기를 성(性)의 용으로 삼는 것이겠는가. 또 수(水)가 정정(貞靜)한 덕으로 오행(五行)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지(智)가 성중(性中)에서 역시 오성(五性)을 포괄하고서 일심(一心)의 지각을 전담하고 이어 오성의 지까지 포괄하는 것이니 어찌 편(偏)ㆍ전(全)이 서로 맞지 않는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고, 오상(五常)의 성(性)은 인(人)과 물(物)이 다르다는 것을 논하기를,
“인과 물의 성(性)이 이(理)로써 말하면 모두 같지만, 받은 바의 형기(形氣)로써 말하면 모두 같을 수 없다. 인의예지는 바로 성지자성(成之者性)이기 때문에 그 오행에 있어서 이미 같을 수가 없고 각기 그 하나만을 오로지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인과 물이 받은 바가 같지 않음을 따라서 알 수 있다.”
하였고, 미발(未發) 전에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유무를 논하기를,
“인ㆍ물이 나올 때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되는 것이니, 오로지 부여된 이(理)만 지적해 말하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형(形)을 이룬 기까지 겸해서 지적해 말하면 그것을 기질지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출생한 처음부터 이미 기질지성이 있으니 때에 따라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고, 또 일찍이 근세(近世) 이학(異學)의 폐해를 논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정포은(鄭圃隱) 이래로 학문한 사대부들이 모두 주자의 학을 종주(宗主)로 삼았기 때문에 학술이 가장 정당하였다. 그런데 난적(亂賊) 윤휴가 비로소 사설(邪說)을 주창함으로부터 주자를 업신여기고 경의(經義)를 훼손하였다. 그러나 윤휴가 마침내 역모(逆謀)로 패망하고 또 우암 선생의 엄한 사벽(辭闢 변론해 물리침)을 거쳤기 때문에 거의 후인들이 경계할 바를 알아서 감히 다시는 그런 무리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윤휴의 뒤를 이어 일어난 자가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니 세도(世道)의 근심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주자의 학문은 이미 지극한 곳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그 이상 더할 수가 없다. 후세에 출생한 자가 만약 성자(聖者)이거나 현자(賢者)라면 반드시 주자의 학을 가지고 마음으로 통하고 정신으로 이회(理會)하여 은연중 서로 부합하여 천 년의 세월이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지만, 진실로 성자나 현자도 아니며 또 주자의 경지에 가까이 미쳐 가지도 못했으면서 이론을 세워 주자에 대항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망녕되고 용렬한 무리이다. 이것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경을 훼파하고 성현을 모독한 윤휴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보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줄을 모를 뿐더러, 심지어 힘을 내어 그를 보호하여 정론을 배척하면서 오직 그가 상할까 두려워하기까지 하니, 어찌 세도가 날로 강하(降下)하고 인심이 쉽게 어두워져서 화란이 장차 일어나려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허형(許衡)의 출처(出處)에 대해 논하기를,
“허형은 중국 사람으로서 맨 먼저 이적(夷狄 원(元) 나라)에 귀부(歸附)하여 천하 사람들의 창도(倡導)가 되어 드디어 중국의 형세를 날로 미약하게 하고 오랑캐의 형세를 날로 펼치게 하였으니, 그 신주(神州 중국)를 망하게 한 죄는 왕이보(王夷甫)보다 앞서 복주(伏誅)해야 마땅한데, 세상에는 간혹 허형을 성문(聖門)의 대유(大儒)로 여겨 존경하여 낙건(洛建 정자와 주자) 이후 이 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니, 이는 춘추의 의리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공자께서 ‘우리가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하셨는데, 허형은 사람들을 오랑캐가 되는 데서 면하게 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또 관중의 죄인이 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대방(大防)이니 분변하기를 엄격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애매한 경(經)의 뜻을 분변하여 밝히고 어지러운 뭇 설(說)을 절충하여 학자들이 추향(追向)할 바를 바르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후세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바꾸지 못할 정론(定論)이라 할 것이다.
선생은 경륜(經綸)의 재주를 천품으로 타고나신 데다가 그것을 학문의 힘으로 확충하였기 때문에 식견과 사려가 통철(洞徹)하시어 논설의 횡수(橫竪 시간 공간)가 위로는 천고 이전으로부터이고 멀리로는 만리 밖에 있었으며, 그 국가 흥망의 근원과 현사(賢邪) 진퇴(進退)의 기미와 산천 풍속의 다름과 인물(人物) 요속(謠俗)의 변천을 다 관통하지 않음이 없어 고금의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당세의 급무(急務)를 규획하신 것이 또 모두 조리 정연하게 기의(機宜)에 맞았다. 그러나 그 대요(大要)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반드시 회복해야 하나 삼대의 자취는 반드시 다 답습할 것이 아니니, 요는 선왕의 본의를 잃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다.” 하고, 그 총회(總會)의 극치에 대해서는 또 “반드시 임금의 심술(心術)에 근본하는 것이니 본말이 구비되어야 거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종신토록 세상을 피해 살았으므로 조금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게끔 행동해야 한다는 훈계를 지켜 일찍이 장소(章疏) 사이에 정치 문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나, 다만 학자들을 위해 말할 때는 부지런히 하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학자들이 비록 각기 들은 바를 기록하였으나 또한 그 뜻을 깊이 알고서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의 시무(時務)를 알고 치도(治道)를 논한 큰 규모와 자세한 절목을 후세에서 볼 수 없으니 애석하다. 선생이 학자들과 경의(經義)ㆍ예의(禮疑)를 문답한 것과 시문(詩文)ㆍ잡록(雜錄) 약간 권을 선생의 손자 정성(定性)이 모아서 간행하여 세상에 펴고자 한다.
선생의 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군수 증 영의정 중휘(重輝)의 딸이고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후손으로 사람됨이 정숙(貞淑)하고 유가(柔嘉)하여 부덕(婦德)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일찍부터 몸에 질병이 있었으므로 선생을 권하여 첩을 얻게 하고서 그 첩을 은혜로 대우하였다. 선생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독자(獨子) 욱(煜)은 상상(上庠 성균관)에 올라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욱은 총명하고 인품과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여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니 선생이 매양 부자간의 지기(知己)라고 칭하였는데, 선생보다 4년 앞서 죽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청ㆍ장년기의 언행으로서 기술할 만한 것과 만년의 덕업(德業)의 이른 경지를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 측실의 아들 도(燾)와 찬(燦)은 다 요사하였고, 딸은 신지(申智)의 아내가 되었다. 욱(煜)은 현감 김진수(金震粹)의 딸에게 장가가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양성(養性)은 군수를 지내고 정성(定性)은 현감을 지냈으며, 사위는 사인(士人) 이사휘(李思徽)와 응교(應敎) 황재(黃梓)이다. 측실의 아들은 순성(順性)과 오성(五性)인데, 순성이 첨사(僉使)를 지냈다. 양성의 독자는 제응(濟應)이고, 정성의 독자는 진응(震應)이다.
선생이 별세한 지 여러 해가 되어 은미한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날이 갈수록 잊혀 가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사실을 기록하는 저작이 없었다. 그러므로 양성과 정성 등이 나 원진(元震)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가장 오래였다 하여 행장 짓는 일을 부탁하여 편지로 당부하기를,
“겸양이 선생의 뜻이었으니 부디 그 문사(文辭)를 너무 지나치게 하여 선생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나는 지식이 천박하고 문사가 졸렬하니 비록 심지(心知)를 다하고 필력을 다하여 선생의 만분의 일이나마 모방하기를 구하여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문사를 지나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도 선생의 뜻을 알고 있는데 또 어떻게 감히 지나치게 하겠는가. 삼가 평소에 듣고 본 한두 가지를 기술하여 이상과 같이 행장을 갖추었다. 이와 함께 나름대로의 소견을 아래에 덧붙일까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성리(性理)의 깊은 이치에는 강령이 있고 조리가 있는데, 그 근원은 대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나온 것이다.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었으나 설명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제순(帝舜)이 심(心)을 설명하고 성탕(成湯)이 성(性)을 설명함으로부터 강령의 설이 점차 갖추어져서 공자에 이르러 완비되었으며, 자사(子思)가 중화(中和)를 설명하고 맹자가 사단(四端)을 설명함으로부터 조리의 설이 점차 갖추어져서 주자에 이르러 완비되었으니 성리의 설이 이때에 이르러 극진해졌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또 주자의 설로 인하여 더욱 그 정밀함을 구하여 분석하기를 너무 심히 하였다. 그러므로 그 설이 더욱 번다할수록 더욱 도체(道體)의 온전함을 해쳤다. 이때에 율곡 선생이 나와 제가(諸家)의 설을 일소하고 단안을 내리기를,
“무형(無形) 무위(無爲)이되 유형(有形) 유위(有爲)의 주재(主宰)가 되는 것은 이(理)이고, 유형 유위이되 무형 무위의 기(器)가 되는 것은 기(氣)이다. 이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기 때문에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는 것[理通氣局]이며, 기는 유위이고 이는 무위이기 때문에 기는 발하고 이는 승하는 것[氣發理乘]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니, 기가 아니면 발하지 못하고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씀이 한번 나오자 이기론(二岐論)이 폐해져서 도체의 온전함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기의 설이 염낙관민(濂洛關閩 주돈이(周敦頤)ㆍ정자(程子)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의 설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으나, 혹은 이(理)는 동정(動靜)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이는 동정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이와 기에 선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이와 기에는 선후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여 그 말한 것이 같지 많아 마치 서로 어긋나는 것 같았으므로 학자들이 매양 회통(會通)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우암 선생이 나와 총괄하여 단안을 내리기를,
“이와 기는 다만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말한 것도 있고, 기로부터 말한 것도 있으며, 원두(源頭)로부터 말한 것도 있고 유행(流行)으로부터 말한 것도 있었다. 이는 대체로 이와 기가 한 덩어리로 융합(融合)하여 구별할 수 없으나, 이는 이로 자존(自存)하고 기는 기로 자존하여 또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동정이 있다.’고 한 것은 이가 기를 주재(主宰)하는 것으로부터 말한 것이고, ‘이는 동정이 없다.’고 한 것은 기가 이를 운행하는 것으로부터 말한 것이며, ‘선후가 있다.’고 한 것은 이와 기의 원두로부터 말한 것이고, ‘선후가 없다.’고 말한 것은 이와 기의 유행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 말씀이 한번 나오자 중설(衆說)의 같지 않은 것이 같아져서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선비들이 비로소 제 길을 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 선생이 사도(斯道)에 크게 공이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중용》 서문에 나오는 형기(形氣)를 심(心)과 구별하지 않아 심성이기론(心性二岐論)의 의논을 다 종식시키지 않고, 정(情)의 선악(善惡)이 오로지 기(氣)에서 연유한다 하여 성선(性善)의 뜻을 다 드러내지 않은 이것은 두 선생이 후인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중용》 서문의 형기가 심(心)이 아님을 변론하여 한결같이 이기(理氣)의 발이라 하였고, 도척(盜跖)ㆍ장교(莊蹻)도 선정(善情)이 성(性)에서 발한다는 것을 가리켜 성선(性善)의 필연을 밝혔으니, 이것이 선생이 두 선생에게 공이 있는 것이다.
대개 천리(天理)가 주재하는 오묘한 이치를 밝히면 그 말이 작용(作用)에 관계되기 쉽고, 도(道)와 기(器)가 간격이 없는 오묘한 이치를 밝히면 그 말이 혹 주재에 소략하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말은 이와 기가 간격이 없는 속에서 이(理)가 주재하는 것을 잃지 않았으니, 선생의 조예의 극치를 알고자 하는 자는 이에서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개 주자가 돌아간 뒤에 오도가 우리나라로 왔으나, 그 전도(傳道)의 책임을 진 분으로는 오직 율곡ㆍ우암 두 선생만이 가장 드러났다. 율곡 선생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되 도체(道體)를 밝게 보셨으니, 자질이 생지(生知)에 가까웠고 학문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우암 선생은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종주(宗主)로 삼고 의리는 춘추의 의리를 지켜 선성(先聖 공자)의 도를 보호하고 이단의 설을 막아 천지를 위하여 도를 세웠으니 사업의 성대함을 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다. 그리고 우암의 뒤를 이어 일어나서 정전(正傳)을 이어 더욱 그 정심(精深)한 이치를 연구하고 성법(成法)을 지켜 그 척도(尺度)를 잃지 않아 우뚝하게 퇴파(頹波)의 지주(砥柱)가 되어 두 선생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분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다. 아, 그러나 이것은 선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일러줄 수 없으므로 삼가 기록하여 선생의 덕을 아는 이가 상고하기를 기다린다.
숭정 기원 후(崇禎紀元後) 두 번째 되는 병진년 1월 일에 문인 선무랑(宣務郞) 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한원진은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두 번씩이나 …… 참여하여 : 예종 즉위년(1468)에 남이(南怡)의 역모(逆謀)를 제거한 공로로 익대 공신(翊戴功臣) 3등에 봉해지고, 성종 2년(1471)에 임금을 잘 보좌한 공으로 좌리 공신(佐理功臣) 1등에 봉해진 것을 말함.
[주D-002]경화(更化) : 세상이 바뀌어 새롭게 된다는 뜻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가리킴.
[주D-003]기사 흉당(己巳凶黨) : 숙종(肅宗) 15년(1689)에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소생인 윤(昀 경종(景宗))을 원자(元子)로 정하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는 서인을 공격해 실각시킨 이현기(李玄紀)ㆍ남치훈(南致薰) 등 남인 일파를 가리킨다. 이때 우암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많은 서인 중신들이 유배되었다.
[주D-004]건문 연호(建文年號)의 회복 : 명 공민황제(明恭閔皇帝)의 연호인 건문을 회복하자는 주장. 명 태조는 태자 의문(懿文)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윤문(允炆)을 황태손(皇太孫)으로 봉했다. 태조가 죽자 황태손이 즉위하여 건문(建文)이라 개원(改元)하였는데, 당시 강력한 병력을 갖고 있던 태조의 제4자 연왕(燕王 뒤의 성조(成祖))이 반란을 일으켜 쳐들어와서 궁성에 불을 질러 공민황제를 태워 죽이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서는 공민황제 재위 기간을 홍무(洪武)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역사의 정통성(正統性)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바로 태조의 뒤를 이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무종(武宗)과 신종(神宗) 때에 많은 신하들이 공민황제의 복위를 주청하였다.
[주D-005]자사(子思)의 훈계 : 자사가 출모(出母)는 어미가 아니므로 상복(喪服)을 입어 줄 수 없다고 여겨 자기의 아들 자상(子上)에게 출모의 상복을 입지 못하게 했던 내용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주D-006]좌우복근(左右服勤) : 좌우는 좌우취양(左右就養), 복근은 복근지사(服勤至死)를 말하는데, 곧 스승을 섬김에 있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까이 나아가 봉양하고, 수고로운 일을 봉행하여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하는 것임. 《禮記 檀弓上》
[주D-007]구의(摳衣) : 나아와서 알현한다는 뜻. 어른 앞에서 걸을 때에 옷자락을 밟아 넘어지는 실례를 피하기 위하여 옷자락을 두 손으로 약간 들어 올리는 것.
[주D-008]윤휴가 …… 패망하고 :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의 서자 견(堅)의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 일을 가리킴.


花潭先生文集序
 [序]
花潭先生文集序[元仁孫] a_024_285a


戊子。不佞守松京。謁花潭徐先生書院。登逝斯亭。想像先生考槃樂道。亭亭物表之趣。灑然太息。有山高水長之思。其上蓋有先生塚云。松京自勝國時。偉人鉅公亦非不多。而若其淸通英粹。玲瓏灑落。直悟天人之學。圃隱以後。惟先生一人炳靈於茲地而已。嗚呼。當我宣靖兩陵之世。眞儒輩出。實中朝成弘之際。亦天下文明之會也。成化壬寅。靜庵生。弘治己酉。先生生。弘治辛亥。晦齋生。弘治辛酉。退溪生。其後四十餘年。嘉靖丙申。栗谷生。自圃隱之歿。不過百數024_285b十年之內。五先生竝膺聚奎之運。是豈偶然也哉。然世之論靜,晦,退,栗四先生。歸之以洛閩正源。而至於花潭。則必以數學目之。此固紫陽六先生贊。竝列邵子之意歟。諡先生者曰。道德博聞曰文。淵源流通曰康。其必曰康者。抑有所符合於邵子歟。先生當己卯薦科而不赴。已而。以厚陵參奉召而不起。卒後不多年。而贈右議政。朝廷士林之論。一辭稱尊可知也。先生之學。專在格致。年纔髫齔。家貧。親使之往採野蔬。歸不盈筐。問其何爲。答曰。有鳥自地至天。窮其理而終日忘其採。蓋其透徹妙悟。窮格到底。已自幼024_285c時。不待理氣太虛等說而如此也。栗谷嘗以退溪之依樣。勝於花潭之自得。有所軒輊。而此亦責賢者備也。旣曰自得。則天機之棖觸。人工之頓悟。孔門與點。鳳翔千仞之氣像。非先生而誰。松京人士。將重刻先生遺集。來索序於不佞。不佞曰。花潭山水。淸麗特絶。先生之神情興會。無間存歿。鳶魚活潑。水石動蕩。於斯求之。可得其妙。今此所刻。零星脫落。非先生之至者。而第不可以違也。略爲小敍。以附其下。詩曰。高山仰止。景行行止。嗚呼遠哉。
崇禎紀元後三庚寅季夏。原城後人元仁孫。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