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양정제공 휘 방언/휘 방언(미백) 관련기사

12 조고 휘 방언 (미백) 관련기사 양정당 방언(崔邦彦)

아베베1 2012. 1. 2. 15:28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불광 뒤 능선의 모습이다     

 

저의 12대 조고 휘 방언 관련 자료 

 

최방언(崔邦彦)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D5CBC29C5B8B1634X0
미백(美伯)
양정당(養正堂)
생몰년 1634(인조 12) ~ 1724(경종 4)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문학 > 문인
 
최세영(崔世榮)
 

[상세내용]

최방언(崔邦彦)에 대하여
1634년(인조 12)∼1724년(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미백(美伯), 호는 양정당(養正堂). 현감 최세영(崔世榮)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이다. 학행(學行)으로 민정중(閔鼎重)·김수흥(金壽興) 등의 천거를 받아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남인의 주장으로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스승 송시열이 세자 책봉문제로 사사(賜死)되자 동지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 양주로 돌아갔다.

뒤에 서인이 집권하면서 1701년 광릉참봉(光陵參奉)으로 다시 기용되고, 세자익위사시직(侍直)·부수(副率),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80세 때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厚齋集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崔邦彦


崔邦彦德之後孫字美伯養正堂宋時烈 門人時烈器重之蔭仕止僉正壽陞同中樞李箕洪辨師誣被罪邦彦請與同罪嘗
受業於尹宣擧故斥甚嚴而前後儒䟽語及宣擧戒子孫不参曰吾若忘舊誼亦一



기사메타 
宣舉宋時烈時烈李箕洪僉正崔邦彦

 

구봉 송일필 선생의 문집의 내용에 포함 가례주설은  미백 선조님의 집에있던 것을 후학이 발췌 하여 만들었다는 기사

 

구봉집 ( 龜峯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祠堂 a_042_499c


祠堂
042_499d朱子曰。天子統攝天地。負荷天地間事。諸侯不當祭天地。祭封內山川人家子孫。負荷祖宗許多基業。此心便與祖考之心相通。
太子小註下六條同
王制註。太子。以大於天下之子也。
文潞公
名彦博。封潞國公。

士虞禮註。鬼神所在曰廟。經傳註。前曰廟。後曰寢。042_500a廟是接神。尊故在前。寢是衣冠所藏。卑故在後。○通典。前制廟。後制寢。以象人君之居。前有朝後有寢。廟以藏主。以四時祭。寢有衣冠几杖象生之具。以薦新物。○左傳。淸廟茅屋。昭其儉也。○春秋。莊公丹桓宮楹。刻桓公桶。穀梁子曰。天子諸侯黝堊。大夫蒼。士黈。丹楹。非禮也。黝。黑色。堊。白色。黈。黃色。天子之桶。斲之礱之。加密石焉。諸侯之桶。斲之礱之。大夫斲之。士斲本。刻桶。非正也。○經傳。右社稷左宗廟。
廟面東
(按)語類。亦曰廟面。未詳。面字恐誤。
龕堂
042_500b補註。堂字皆作室字。蓋古者。南爲室北爲堂。張子曰。祭堂後作一室。藏位板。○韻會。室實也。貯物充室也。
社佑
唐書。佑嗜學。撰通典二百篇。

爾雅。室有東西廂曰廟。無東西廂。有室曰寢。
先立祠堂於正寢之東。
曲禮曰。君子將營宮室。宗廟爲先。廏庫爲次。居室042_500c爲後。○朱子曰。家廟要就人住居。神依人。不可離外做廟。○問家廟在東。莫是親親之意否。曰。此人子不死其親之義。○士昏禮註。廟無事則閉。以鬼神尙幽闇也。○朱子曰。古之家廟甚闊。所謂寢不踰廟。是也。(按)今宜立祠堂。結搆精備於所居。以嚴事神之道。
遺書衣物大註下二條同
經傳註。遺衣服。大斂之餘也。祭祀尸服。卒者之上服。以象生也。

042_500d上聲。纏也。
廳事
小學註。廳所以治事。故曰廳事。
神主
問。有其誠則有其神。無其誠則無其神否。朱子曰。鬼神之理。卽此心之理。○上蔡謝氏曰。人以爲神則神。以爲不神則不神矣。(按)神主之神不神。在人。敢不盡心。○鬼神有三。天地之日月風雨晝夜寒暑。鬼神之常有者也。祭祀之來格。鬼神之感而後有者也。嘯于梁觸于形。鬼神之邪暗不正。有無無042_501a定者不可不辨。○朱子曰。不是如今泥塑底神之類。只是氣。祭祀。聚精神以感之。○問。不交感時。常在否。曰。若不感而常有。則是有餒鬼矣。○又曰。非有一物積于空虛之中。以待子孫之求也。盡其誠敬之時。此氣寓此也。問鬼神恐有兩樣。天地之間。二氣氤氳。無非鬼神。祭祀交感。是以有感有。人死爲鬼。祭祀交感。是以有感無。朱子曰。是所以道天神人鬼。神便是氣之伸。此是常有底。鬼便是氣之屈。然以精神去合。他又合得在。
神主皆藏於櫝中大註下同
042_501b書儀云。府君夫人共爲一匣。○問。生時男女異席。祭祀夫婦同席。如何。朱子曰。夫婦同牢而食。○記曰。鋪筵設同几。爲依神也。註曰。人生則形體異。故夫婦之倫。在於有別。死則精氣無間。共設一几。故祝辭曰。以某妃配。○儀禮經傳曰。鬼神之祭單席。疏曰。神道異人。不假多重。自溫故單席。○藍田呂氏曰。主祭者出仕。告于廟。以櫝載位版以行。於官所權立祭堂以祭之。
見喪禮及前圖。
丘氏濬曰。圖與本書多不合。通禮云。立祠堂圖。以042_501c爲家廟。一也。深衣緇冠梁包武。而圖則安梁於武之上。二也。黑屨圖用白。三也。喪禮襲用深衣。不用質殺。圖乃陳之。四也。大斂無布絞之數。而圖有之。五也。無棺中結絞之文。而圖結于棺中。六也。祠堂章下。有主式見喪禮及前圖八字。南癰家禮舊本。只云主式見喪禮。治葬章。無見前圖三字。不知近本何據。改治葬章三字。爲見前圖也。圖爲後人贅入。昭然。
宗子法小註下七條同
程子曰。凡言宗者。以祭祀爲主。言人宗於此而祭042_501d祀也。朱子曰。今祭孔子。必於學。其氣類亦可想。(按)祭聖必於學。祭先必於宗。其義如是。而今世大家世族。亦不免題紙榜。行祭於諸子之家。甚不可也。況接續常祭。處其鬼神乎。○朱子曰。子孫是祖先之氣。他氣雖散。他根却在這裏。盡其誠敬。則亦能呼召得他氣聚在此。如水波樣。後水非前水。後波非前波。然却通只是一水波。子孫之氣與祖考之氣亦如此。○又曰。大抵人之氣。傳於子孫。猶木之氣傳於實也。此實之傳不泯。則其生木雖枯毁無餘。而氣之在此者。猶自若也。
陸農師
042_502a宋鑑。陸佃。字農師。居貧苦學。受經王安石。不以新法爲是。
顧成廟
漢文自爲廟。制度卑狹。若顧望而成。猶靈臺不日成之。故曰顧成。
別子爲祖
儀禮經傳。經曰諸侯不敢祖天子。大夫不敢祖諸侯。○朱子曰。別子爲祖。是諸侯之庶子與他國之人。在此邦居者。○禮記喪服小記註。別子有三。一042_502b是諸侯適子之弟。別於正適。二是公子來自他國。別於本國不來者。三是庶姓之起於是邦。爲卿大夫。而別於不仕者。皆稱別子也。
大宗小宗
(按)儀禮經傳。大宗有一。小宗有四。是爲五宗。有百世不遷者。卽大宗也。有五世則遷者。小宗也。小宗。祖遷於上。宗易於下。疏曰。小宗。至五世不復宗。四從族人。各自隨近爲宗。是宗易於下。○朱子曰。如魯之三家。季友。季氏之太祖也。慶父。孟氏之太祖也。公子叔牙。叔孫氏之太祖也。然則單擧季氏者。季嫡也。
玄孫
042_502c爾雅。玄言親屬微昧也。
滕文之昭
滕。文王少子也。文王爲穆。故滕爲昭也。○顔師古曰。父爲昭子爲穆。孫復爲昭。昭明也穆美也。朱子曰。左昭右穆。以次而南。○朱子曰。太祖居北。
有大宗而無小宗
朱子日。謂如人君有三子。一嫡而二庶。則庶宗其嫡。是謂有大宗而無小宗。皆庶則宗其庶長。是謂042_502d有小宗而無大宗。只有一人則無人宗之。已亦無所宗焉。是謂無宗。亦莫之宗也。○(按)儀禮經傳及註疏。公子不得宗其君。故君命一人爲宗。以領公子。而諸公子宗之。適子爲宗。則宗之以大宗之禮。庶子爲宗。則宗之以小宗之禮。皆公子中禮也。他族則無之。
以其班祔
朱子曰。儀禮所謂以其班祔。檀弓所謂祔于祖父者也。○曲禮云。君子抱孫不抱子。此言孫可以爲王父尸。子不可以爲父尸。鄭氏云。以孫與祖。昭穆042_503a同也
姪之父大註下同
(按)姪之父。兄弟行也。姪無後。當祔祖而祖尙存。不得祔。故就祔于宗家祖位。及其祖死而其父立祠堂。則乃遷從親祖也。蓋此云姪之父從兄弟及再從兄弟也。若親兄弟則自家已立祠堂。宜祔其姪。何遷之有。

經傳傳曰。孔子曰。宗子爲殤而死。庶子不爲後也。註疏。殤無爲人父之道。代爲宗子主其禮。其祭之042_503b就其祖而已。
嫂妻婦小註下二條同
(按)兄嫂, 己妻, 弟婦也。
就裏爲大
(按)就裏爲大之大。尊也。語出左傳新鬼大之大。蓋僖公。閔公之兄。故以僖公之鬼爲大。

程子曰凡物。知母而不知父。走獸是也。知母而不知祖。飛鳥是也。惟人則能知祖。若不嚴於祭祀。殆與鳥獸無異矣。
墓下子孫之田大註下同
042_503c(按)非田在墓下。乃其墓子孫之田也。

主也。
晨謁
(按)出入告。諸子婦旣同主人主婦。則諸子之與長子同居者。恐不可獨廢晨謁。隨宗子晨謁。合禮。
俠拜大註
少牢饋食禮。主婦無俠拜。註云。士妻宜簡耳。(按)少牢大夫禮。特牲。士禮也。
盞托大註下四條同
042_503d韻會作拓。手承物也。音托。
盥巾
(按)男女不同柂枷。則盥巾必異。而今不然。恐闕文。○坊記曰。禮非祭。男女不交爵。註。交爵相獻酢。疏。主婦獻尸。尸酢主婦也。○又曰。大饗。廢夫人之禮。註。大饗。饗諸侯來朝也。(按)婦人交爵。惟祭而已。禮其嚴乎。
盛服
朱子曰。與叔祭以古玄服。乃作大袖皀衿。亦怪。不042_504a如着公服。○問士祭服。朱子曰。應擧者。用幱衫幞頭。不應擧者。用皀衫幞頭。帽子亦可。(按)幞頭。非當時有官者服也。家禮之用幞頭。亦此意也。
茶筅
調茶之物。蘚典切。
正至朔望
(按)若値高祖忌。則忌祭畢。行參禮。曾祖以下。則參禮畢。行忌祭。乃先祭始祖之義也。

(按)俗作攔。衣與裳連曰幱。出韻會。音闌。
除夕前三四日行事小註
042_504b(按)此所謂有故使人。何得前其日行事。恐不可從。
俗節則獻以時食
程子曰。嘗新必薦。享後方可。薦數則瀆。必因告朔而薦。(按)物有不可久者。如不可留待朔望俗節之獻。則依几筵薦新之禮。薦亦合宜。但小小不關新物。則不須爾。○少儀曰。未嘗不食新。註。嘗謂薦新於寢廟。
中元大註下四條同
七月十五日也。
告于故某親
042_504c丘氏濬曰。家禮舊本。俱加皇字。今本改故字。故字近俗。不如用顯字。蓋皇與顯。皆明也。
某之某某
(按)上某。主人。次某。行第。次某。名。
元孫
丘氏曰。宋諱玄。凡經傳。玄皆改元。故家禮稱元孫。今悉改從玄。
非宗子不言孝
經傳傳。孔子曰。宗子死。稱名不稱孝。身沒而已。註042_504d云。但言子某薦其常事。疏曰。不言介者。宗子旣死。不得稱介也。(按)宗子死無後。則庶子主宗者。宜倣此禮。而宗子喪畢。當以庶子奉祀。改題主傍。不必用此禮也。
焚黃小註下同
丘氏濬曰。先日命善書者。以黃紙錄制書一道。以盤盛置香案上。宣制辭並祝文焚之。
張魏公
名浚。不主和議。爲秦檜所惡。封魏國公。
水火先救祠堂
042_505a檀弓曰。有焚其先人之室。則三日哭。○春秋成公三年。新宮災。三日哭。穀粱子曰禮也。
諸位大注下同
(按)諸位。祖先位也。主宗者迭掌之。
高祖親盡
補註。高祖親盡。請出就伯叔之親未盡者祭之。親盡則埋。


  형태서지
권수제  龜峯先生集
판심제  龜峯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62年刊
권책  10권 합 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15.4(㎝)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7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42
 저자
성명  송익필(宋翼弼)
생년  1534년(중종 29)
몰년  1599년(선조 32)
 雲長
 龜峯, 玄繩
본관  礪山
시호  文敬
특기사항  李珥, 成渾과 교유. 八文章의 한 사람. 金長生, 鄭曄의 스승
 가계도
 宋璘
 直長
 宋祀連
 庶子
 延日鄭氏
 鄭麟年의 庶女
 宋仁弼
 
 宋富弼
 
 宋翼弼
 
 昌寧成氏
 
 宋就方
 
 水原崔氏
 
 側室
 
 宋就大
 
 宋就實
 
 宋翰弼
 雲谷
 女
 

기사전거 : 行狀(李選 撰) 및 世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29 1534 갑오 嘉靖 13 1 2월 10일, 태어나다.
~ ~ ~ ~ ~ ~ ~ 7~8세 때에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아우 宋翰弼과 함께 鄕試에 합격하였으나 蘖孫이라는 이유로 李海壽가 禁錮시키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性理學과 禮學에 몰두하다.李山海ㆍ崔慶昌ㆍ白光弘ㆍ崔岦ㆍ李純仁ㆍ尹卓然ㆍ河應臨과 함께 ‘八文章’으로 일컬어지다.高陽의 龜峯山 아래에 遯居하고 이곳에서 學者들을 가르쳐서 학자들이 龜峯先生이라고 부르다. ○ 金長生, 徐渻, 鄭曄, 鄭弘溟 등이 찾아와 師事하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51 율곡 李珥가 죽은 뒤에 黨禍가 더욱 심해지자 西人의 배후로 지적받아 東人의 미움을 받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53 安塘의 후손들이 송사를 일으켜 安處謙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자 일가가 모두 安氏 집안의 노비로 환속되다. 형제들과 함께 종적을 감춰 원수를 피하다. 趙憲이 상소하여 자주 공의 억울함을 논하다. ○ 李山海, 鄭澈 등이 피신처를 제공해 몸을 숨기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56 기축옥사로 李潑 등 東人이 제거되자 신분이 회복되었으나 정철이 귀양가게 되자 다시 도피 생활을 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58 官에 나와 자수하여 형조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다. 南海에 유배되었다가 熙川으로 이배되고, 동생 宋翰弼은 利城에 유배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59 1월, 熙川 謫所에 도착하다. ○ 7월, 왜적을 피해 熙川의 明文山에 들어가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60 9월, 석방되다. ○ 熙川에 있는 金宏弼과 趙光祖의 사당에 제사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61 仲兄 默庵公 宋富弼을 哭하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63 沔川의 馬羊村에 있는 金進礪의 庄舍에서 지내다. 이때부터 마양촌에서 몇 년 동안 살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65 부인 昌寧成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66 〈玄繩編序〉를 짓다. ○ 8월 8일, 병으로 汚川 寓舍에서 졸하다. ○ 문인들이 唐津縣 北面 元堂洞에 장사 지내다.
광해군 14 1622 임술 天啓 2 - 門人인 현감 沈宗直이 시를 수집, 선정하여 鴻山에서 목판으로 「批選龜峯先生詩集」을 간행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 金集과 鄭曄 및 同門이 상소하여 공의 賤籍을 씻다.
영조 26 1750 경오 乾隆 15 - 충청 감사 洪啓禧가 증직을 청하는 장계를 올리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 지평에 증직되다.
영조 38 1762 임오 乾隆 27 - 현감 金相聖이 저자의 아우 宋翰弼의 「雲谷稿」를 附集하여 義城에서 목판으로 문집을 重刊하다.
순종 4 1910 경술 宣統 2 - 후손 宋鍾弼이 活字本으로 문집을 三刊하다.

기사전거 : 行狀(李選 撰), 墓碣文(宋時烈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門人인 竹西 沈宗直이 1622년 鴻山 縣監으로 재직시 詩만을 수집 선정하여 「批選龜峯先生詩集」이란 이름으로 5권 1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이 초간본에는 같은 문인이었던 鄭曄의 後序와 金長生, 申欽의 跋文이 실려 있다. 구성은 권1~4까지는 대략 220여 수의 시를 뽑아 오칠언 고시, 절구, 율시, 배율시 등 類別로 편차하였으며 권5는 外錄이라 하여 47수를 補遺로 실었다. 또 詩句 중간에 간간이 짧은 詩評을 小註의 형태로 붙였는데 評者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간본의 편차는 卷首題 하에 沈宗直 簒集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沈宗直이 직접 편차와 간행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 詩集은 현재 규장각(奎3572), 국립중앙도서관(古3644-1), 고려대학교 도서관(D1-A364) 등에 소장되어 있다.
詩集 이외에 文은 아들 宋就大가 저자 생전에 成渾, 李珥와의 辯論書尺 및 私稿, 雜錄 등을 수습하여 한 帙로 만들어 門人 金集에게 간행을 부탁하였는데, 金集은 만년에 宋時烈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宋時烈은 저자의 墓碣文을 쓰고 辯論書尺인 玄繩編을 刪定하여 기타 雜著와 함께 宋時烈, 任埅, 金鎭玉에게 나누어 주고 각각 茂朱, 山陰, 臨陂에서 나누어 雜著 1권, 書 1권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時事로 인해 板刻 작업이 중단되고 1688년 宋時烈이 귀양을 가게 되자 原稿를 다시 韞齋 金鎭玉에게 맡기어 반드시 간행할 것을 부탁하였다. 송시열의 사후 金鎭玉이 羅州 牧使로 있을 때 다시 간행을 계획하여 李喜朝, 權尙夏에게 편차와 교정을 맡겼으나 玄繩編의 편집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가 엇갈렸고, 또 김진옥이 곧 체직되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당시 李喜朝는 본편의 제목과 체제 등은 저자의 自編이니만큼 原稿 그대로 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權尙夏는 尤庵의 刪定 원칙을 따라 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金鎭玉의 孫인 金相聖이 義城縣으로 부임하자 저자의 저서 全帙을 총괄해서 재편차하고, 동생 宋翰弼의 雲谷稿를 附集하여 1762년 11권 5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4076),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92),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11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의 편차는 金相聖이 직접 맡았다. 詩의 경우 초간본이 아닌 草本을 저본으로 하여 取捨하는 바가 없이 모두 실었으므로 外錄을 없애고 다같이 詩體別로 분류하였다. 雜著는 宋時烈이 간행시 빠뜨린 작품까지 모두 취하였고, 玄繩編은 李喜朝, 權尙夏 두 사람의 견해를 절충하여 牛溪와 栗谷의 편지 중 왕복서가 아닌 것은 尤庵의 원칙대로 刪節하고 문답 편지만을 뽑아 본래의 체제를 살려 편차하였다. 家禮註說은 후에 金鎭玉이 崔邦彥의 집에서 발견한 것인데 轉寫의 오류를 校訂하여 본집 내에 편입시켰으며, 그 외에 行狀과 碑文 등의 문자를 附錄으로 실었다. 雲谷稿는 본래 宋翰弼의 외손인 白海明이 宋時烈에게 청하여 附集으로 간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므로 尤庵의 뜻을 이어 1권으로 만들어서 말미에 붙였다. 이 중간본에는 편차와 간행 경위를 자세하게 기술한 金相聖의 識가 있으며 부록에 初刊 詩集의 序跋도 함께 실려 있다.
이후 族後孫 宋鍾弼이 全帙인 중간본이 간행된 지 오래되어 널리 유포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俞在煥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1910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삼간본》 이 삼간본은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말미에 世譜를 추가한 것 외에는 내용의 증감이 없으며, 1909년에 지은 宋炳華의 序, 田愚와 宋鍾弼의 발문이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古3428-506), 澗松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2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부집인 雲谷稿는 본 총간의 편집 방침에 따라 수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기사전거 : 詩集序跋(鄭曄, 金長生, 申欽 撰), 識(金相聖 撰), 重刊跋(宋鍾弼, 田愚 撰), 重刊序(宋炳華)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권수의 총목과 함께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0은 附錄이다.
권1~2는 詩이다. 賦 1편과 450여 수의 시가 오칠언고시, 오칠언절구, 오칠언율시, 배율시의 순서로 詩體別로 수록되어 있는데 初刊 詩集보다 약 200수 가량 분량이 늘었으며 체제도 약간 달리하였다. 즉, 詩集에 실려 있던 詩評은 거의 삭제되고 저자의 自註인 듯한 小註만이 실려 있는데 이는 초간본에 실려 있지 않던 내용이어서 본집이 초간본이 아닌 다른 原稿를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권1의 〈雲谷哀辭〉는 도피 생활로 가족이 遊離되어 살던 중 동생의 訃音을 듣고 비통한 심정을 읊은 것인데, 초간본에는 詩句 곳곳에 “情至意篤” “宛轉極悲” 등의 평이 실려 있으나 본집에서는 詩 끝에 결국 헛소문으로 밝혀졌다는 저자의 註만 달려 있다. 그러나 때로는 〈秋夜蓮堂四首〉처럼 각 시마다 붙어 있던 설명을 모두 모아 끝에 한꺼번에 싣기도 하였다. 李珥, 成渾, 특히 鄭澈과 주고받은 시가 많아 저자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계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권3은 雜著로 〈太極問〉, 說, 傳과 祭文, 哀辭 등이 실려 있다. 〈太極問〉은 屈原의 〈天問〉을 본따 太極에 대한 의문점을 문답형식으로 풀이한 글로 모두 81개의 항목인데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朱子의 견해임을 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또 〈答人說〉은 1586년 還賤된 이후 국법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글이고, 〈銀娥傳〉은 成渾이 지은 글을 보충하여 새로 지은 글인데, 宗室의 妾으로 貞節을 지키다 죽은 銀娥를 기린 글이다. 祭文은 門人 金長生의 부친인 金繼輝, 李珥, 仲兄인 宋富弼에 대한 제문이며, 1593년 寒岡과 靜庵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제문도 있다.
권4~5는 玄繩編으로 1599년 지은 自序가 있다. 저자의 아들 宋就大가 壬辰倭亂 후 牛溪, 栗谷의 書尺과 저자가 답한 私稿 및 雜錄을 수습하였기에 편차하여 일가에 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권4에는 成渾, 李珥, 鄭澈, 許雨, 閔純, 金長生 등과 주고받은 편지 29편이 있고, 권5에는 成渾, 李珥 외에 李山甫, 趙憲 등과 왕복한 편지 등 32편이 실려 있다. 내용은 禮說과 性理學的 論題부터 서로의 저작에 대한 비평과 단순한 근황, 時事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권6은 禮問答으로 李珥, 成渾, 鄭澈 등의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을 모은 것이다. 鄭澈은 주로 자신이 치르는 喪禮의 구체적인 문제를 질문하고 저자는 「朱子家禮」에 의거하여 답하였으며, 李珥와는 庶母의 올바른 대우에 대해, 그리고 「擊蒙要訣」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논하였다. 저자는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도 禮學에 밝아 金長生에게 禮論을 전수하는 등 禮學의 泰斗로 평가받고 있다.
권7~9는 家禮註說이다. 이는 「朱子家禮」에 대한 저자의 용어해설을 註解로 붙인 것인데, 권7은 祠堂, 深衣, 居家雜儀, 冠禮, 婚禮이고, 권8은 喪禮, 권9는 祭禮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10은 附錄이다. 1625년에 金長生, 徐渻, 鄭曄 등이 올린 伸寃疏를 비롯해서 李選이 찬한 行狀과 宋時烈이 지은 墓碣文, 祭文과 〈請褒贈狀〉, 초간본의 詩集序跋 3편이 실려 있다. 또 張維가 玄繩編에 나타난 저자의 성리학적 논의 중 불합리한 것을 지적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書宋龜峯玄繩編後〉가 있다. 끝으로 본집을 편찬 간행한 金相聖이 쓴 識가 있다.


필자 : 金圻彬

 

 

기사전거 : 行狀(李選 撰), 墓碣文(宋時烈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門人인 竹西 沈宗直이 1622년 鴻山 縣監으로 재직시 詩만을 수집 선정하여 「批選龜峯先生詩集」이란 이름으로 5권 1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이 초간본에는 같은 문인이었던 鄭曄의 後序와 金長生, 申欽의 跋文이 실려 있다. 구성은 권1~4까지는 대략 220여 수의 시를 뽑아 오칠언 고시, 절구, 율시, 배율시 등 類別로 편차하였으며 권5는 外錄이라 하여 47수를 補遺로 실었다. 또 詩句 중간에 간간이 짧은 詩評을 小註의 형태로 붙였는데 評者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간본의 편차는 卷首題 하에 沈宗直 簒集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沈宗直이 직접 편차와 간행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 詩集은 현재 규장각(奎3572), 국립중앙도서관(古3644-1), 고려대학교 도서관(D1-A364) 등에 소장되어 있다.
詩集 이외에 文은 아들 宋就大가 저자 생전에 成渾, 李珥와의 辯論書尺 및 私稿, 雜錄 등을 수습하여 한 帙로 만들어 門人 金集에게 간행을 부탁하였는데, 金集은 만년에 宋時烈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宋時烈은 저자의 墓碣文을 쓰고 辯論書尺인 玄繩編을 刪定하여 기타 雜著와 함께 宋時烈, 任埅, 金鎭玉에게 나누어 주고 각각 茂朱, 山陰, 臨陂에서 나누어 雜著 1권, 書 1권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時事로 인해 板刻 작업이 중단되고 1688년 宋時烈이 귀양을 가게 되자 原稿를 다시 韞齋 金鎭玉에게 맡기어 반드시 간행할 것을 부탁하였다. 송시열의 사후 金鎭玉이 羅州 牧使로 있을 때 다시 간행을 계획하여 李喜朝, 權尙夏에게 편차와 교정을 맡겼으나 玄繩編의 편집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가 엇갈렸고, 또 김진옥이 곧 체직되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당시 李喜朝는 본편의 제목과 체제 등은 저자의 自編이니만큼 原稿 그대로 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權尙夏는 尤庵의 刪定 원칙을 따라 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金鎭玉의 孫인 金相聖이 義城縣으로 부임하자 저자의 저서 全帙을 총괄해서 재편차하고, 동생 宋翰弼의 雲谷稿를 附集하여 1762년 11권 5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4076),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92),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11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의 편차는 金相聖이 직접 맡았다. 詩의 경우 초간본이 아닌 草本을 저본으로 하여 取捨하는 바가 없이 모두 실었으므로 外錄을 없애고 다같이 詩體別로 분류하였다. 雜著는 宋時烈이 간행시 빠뜨린 작품까지 모두 취하였고, 玄繩編은 李喜朝, 權尙夏 두 사람의 견해를 절충하여 牛溪와 栗谷의 편지 중 왕복서가 아닌 것은 尤庵의 원칙대로 刪節하고 문답 편지만을 뽑아 본래의 체제를 살려 편차하였다. 家禮註說은 후에 金鎭玉이 崔邦彥의 집에서 발견한 것인데 轉寫의 오류를 校訂하여 본집 내에 편입시켰으며, 그 외에 行狀과 碑文 등의 문자를 附錄으로 실었다. 雲谷稿는 본래 宋翰弼의 외손인 白海明이 宋時烈에게 청하여 附集으로 간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므로 尤庵의 뜻을 이어 1권으로 만들어서 말미에 붙였다. 이 중간본에는 편차와 간행 경위를 자세하게 기술한 金相聖의 識가 있으며 부록에 初刊 詩集의 序跋도 함께 실려 있다.
이후 族後孫 宋鍾弼이 全帙인 중간본이 간행된 지 오래되어 널리 유포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俞在煥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1910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삼간본》 이 삼간본은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말미에 世譜를 추가한 것 외에는 내용의 증감이 없으며, 1909년에 지은 宋炳華의 序, 田愚와 宋鍾弼의 발문이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古3428-506), 澗松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2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부집인 雲谷稿는 본 총간의 편집 방침에 따라 수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기사전거 : 詩集序跋(鄭曄, 金長生, 申欽 撰), 識(金相聖 撰), 重刊跋(宋鍾弼, 田愚 撰), 重刊序(宋炳華)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권수의 총목과 함께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0은 附錄이다.
권1~2는 詩이다. 賦 1편과 450여 수의 시가 오칠언고시, 오칠언절구, 오칠언율시, 배율시의 순서로 詩體別로 수록되어 있는데 初刊 詩集보다 약 200수 가량 분량이 늘었으며 체제도 약간 달리하였다. 즉, 詩集에 실려 있던 詩評은 거의 삭제되고 저자의 自註인 듯한 小註만이 실려 있는데 이는 초간본에 실려 있지 않던 내용이어서 본집이 초간본이 아닌 다른 原稿를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권1의 〈雲谷哀辭〉는 도피 생활로 가족이 遊離되어 살던 중 동생의 訃音을 듣고 비통한 심정을 읊은 것인데, 초간본에는 詩句 곳곳에 “情至意篤” “宛轉極悲” 등의 평이 실려 있으나 본집에서는 詩 끝에 결국 헛소문으로 밝혀졌다는 저자의 註만 달려 있다. 그러나 때로는 〈秋夜蓮堂四首〉처럼 각 시마다 붙어 있던 설명을 모두 모아 끝에 한꺼번에 싣기도 하였다. 李珥, 成渾, 특히 鄭澈과 주고받은 시가 많아 저자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계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권3은 雜著로 〈太極問〉, 說, 傳과 祭文, 哀辭 등이 실려 있다. 〈太極問〉은 屈原의 〈天問〉을 본따 太極에 대한 의문점을 문답형식으로 풀이한 글로 모두 81개의 항목인데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朱子의 견해임을 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또 〈答人說〉은 1586년 還賤된 이후 국법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글이고, 〈銀娥傳〉은 成渾이 지은 글을 보충하여 새로 지은 글인데, 宗室의 妾으로 貞節을 지키다 죽은 銀娥를 기린 글이다. 祭文은 門人 金長生의 부친인 金繼輝, 李珥, 仲兄인 宋富弼에 대한 제문이며, 1593년 寒岡과 靜庵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제문도 있다.
권4~5는 玄繩編으로 1599년 지은 自序가 있다. 저자의 아들 宋就大가 壬辰倭亂 후 牛溪, 栗谷의 書尺과 저자가 답한 私稿 및 雜錄을 수습하였기에 편차하여 일가에 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권4에는 成渾, 李珥, 鄭澈, 許雨, 閔純, 金長生 등과 주고받은 편지 29편이 있고, 권5에는 成渾, 李珥 외에 李山甫, 趙憲 등과 왕복한 편지 등 32편이 실려 있다. 내용은 禮說과 性理學的 論題부터 서로의 저작에 대한 비평과 단순한 근황, 時事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권6은 禮問答으로 李珥, 成渾, 鄭澈 등의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을 모은 것이다. 鄭澈은 주로 자신이 치르는 喪禮의 구체적인 문제를 질문하고 저자는 「朱子家禮」에 의거하여 답하였으며, 李珥와는 庶母의 올바른 대우에 대해, 그리고 「擊蒙要訣」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논하였다. 저자는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도 禮學에 밝아 金長生에게 禮論을 전수하는 등 禮學의 泰斗로 평가받고 있다.
권7~9는 家禮註說이다. 이는 「朱子家禮」에 대한 저자의 용어해설을 註解로 붙인 것인데, 권7은 祠堂, 深衣, 居家雜儀, 冠禮, 婚禮이고, 권8은 喪禮, 권9는 祭禮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10은 附錄이다. 1625년에 金長生, 徐渻, 鄭曄 등이 올린 伸寃疏를 비롯해서 李選이 찬한 行狀과 宋時烈이 지은 墓碣文, 祭文과 〈請褒贈狀〉, 초간본의 詩集序跋 3편이 실려 있다. 또 張維가 玄繩編에 나타난 저자의 성리학적 논의 중 불합리한 것을 지적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書宋龜峯玄繩編後〉가 있다. 끝으로 본집을 편찬 간행한 金相聖이 쓴 識가 있다.

필자 : 金圻彬

 

 

 

 

구봉 송일필 선생의  가례주설 내용

 

龜峯先生集卷之七

 家禮註說一
序 a_042_498a


 

家禮
黃氏榦曰。聞諸先師曰。禮者。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也。蓋自天高地下。萬物散殊。而禮之制已存乎其中矣。於五行則爲火。於四序則爲夏。於四德則爲亨。莫非天理之自然而不可易。人稟五常之性以生。禮之體。雖具於有生之初。形而爲恭敬辭遜。著而爲威儀度數。則又皆人事之當然而不可042_498b容已也。隆古習俗醇厚。亦安於是理之中。出降俗末。人心邪僻。天理堙晦。始以爲强世之具矣。先生更爲家禮。以惠後學。蓋以天理不可一日而不存。則是禮亦不可一日而間缺也。○丘氏濬曰。成周以禮持世。王朝士庶。莫不有禮。秦火之厄。所餘無幾。漢魏以來。民庶之禮。蕩然無餘。士夫之好禮者。唐有孟詵。宋有韓琦。或有著述。駁而不純。文公一書。實萬世通行之典也。○朱子曰。禮時爲大。有聖人者作。必將因今之禮。裁酌其中。必不復取古人繁縟之禮也。孔子從先進。恐已有此意。
先進
042_498c程子曰。先進於禮樂。文質得宜。後進於禮樂。文過其質。
謹終追遠。
朱子曰。愼終者。喪盡其禮。追遠者。祭盡其誠。
楊氏復小註下十一條同
字志仁。受業文公。與黃直卿相友善。
先生
朱子曰。先生。父兄也。○曲禮註。先生。父兄之稱。可爲人師者。猶父兄。故學者自比於弟子。
服母喪
042_498d李氏方子曰。乾道五年九月。先生丁母祝令人憂。
童行
童行。童穉之行也。
先生易簀
檀弓。曾子寢疾病。樂正子春坐於床下。曾元曾申坐於足。童子隅坐而執燭。童子曰。華而睆。大夫之簀與。子春曰止。曾子聞之。瞿然曰然。斯季孫之賜也。我未之易也。元起易簀。曾元曰。夫子之病革矣。不可以變。幸而至於朝。請敬易之。曾子曰。爾之愛042_499a我也不如彼。君子之愛人也以德。細人之愛人也以姑息。吾何求哉。吾得正而斃焉。斯已矣。擧扶而易之。反席未安而沒。○朱子曰。易簀結纓。但看古人謹於禮法。又曰。季孫之賜。曾子之受。皆爲非禮。或者因仍習俗。未能正耳。病革之革。音亟
其書始出
陳氏淳曰。先生季子云。亡於僧寺。有士人錄得。會先生葬日携來。因得之。
儀禮爲經
士冠禮疏。周禮。取別夏, 殷。故言周。儀禮不言周者。042_499b欲見兼有異代之法。同是周公攝政六年所制。
司馬氏
名光。字君實。贈溫國公。諡文正。
高氏
名開。字抑崇。
遺命治喪
慶元六年庚申三月甲子午初刻。文公終于正寢。享年七十一。三月己未夜。爲諸生說太極圖。庚申夜。說西銘甚詳。辛酉。改大學誠意章。甲子命移寢于中堂。黎明。諸生入問疾。因請曰。萬一不諱。當用042_499c書儀乎。朱子搖首。然則當用儀禮乎。亦搖首。然則以儀禮書儀參用之乎。乃頷之。就枕誤觸巾。目門人使正之。揮婦女無近。諸生揖而退。良久。恬然而逝。
韓魏公
名琦。封魏國公。
存羊
事見論語。(按)以寓存羊之意者。當時宗法不行。長子死則適孫不得奉宗。而次子主祀。朱子猶且存宗法故云。


深衣 a_042_505a


深衣
禮記註曰。朝服祭服喪服。皆衣與裳殊。惟深衣不042_505b殊。被於體也。深邃故名深衣。又方氏曰。以其義之深故名。○純之以采曰深衣。純之以素曰長衣。純之以布曰麻衣。着在朝服祭服之內曰中衣。喪服亦有中衣。練衣黃裳縓緣是也。○玉藻曰。長中繼揜尺。註云。長中者。長衣中衣也。繼揜尺者。幅廣二尺二寸。以半幅繼續袂口。而掩覆一尺也。○記曰。以帛裏布。非禮也。註。外服是布。不可用帛。爲中衣以裏之。按欲其純一之德也。○深衣集註。十有二月者。天數。袂圜應規。而圜者。天之體。曲袷如矩。而方者。地之象也。負繩應直。齊如權衡者。直與平。人042_505c之道也。蓋天之大數。不過十二月。至十二月而成歲功。必十二幅而後。可以爲衣之良也。○又袂在前以動而致用。圜者動故也。袷在中以靜而成體。方者靜故也。○記註。十二幅應十二月者。仰觀於天也。直其政方其義者。俯察於地也。格音各袖與衣接處也之高下。可以運肘者。近取諸身也。應規矩繩權衡者。遠取諸物也。其制度固已深矣。○記曰。制十有二幅。以應十有二月。按此通言一衣幅數。非指裳也。先儒亦互言之。幅數莫之爲定。以愚見言之。衣前後四幅。袂左右二幅。裳六幅。爲十二幅。恐或如042_505d是也。家禮亦曰。衣四幅。袂二幅。裳六幅。○記曰。可以爲文。可以爲武。完且不費。蓋衣之次也。朝祭。服之次也。○記註。深衣之用。上下不嫌同名。吉凶不嫌同制。男女不嫌同服。諸侯朝朝服夕深衣。大夫士朝玄端。夕深衣。庶人吉服深衣而已。此上下同也。有虞氏深衣而養老。將軍文子除喪受弔。練冠深衣。親迎女在道。而壻之父母死。深衣縞總。以趨喪。此吉凶男女之同也。簡便之服。非朝祭。皆可服也。
指尺
042_506a(按)用指尺。各自與身相稱矣。
長過脇
(按)衣長當以過脇爲準。以定尺數。而其長卽二尺二寸。與幅廣正方。蓋用八尺八寸。而四疊之也。今縫法。除負繩二寸。接袖前後四寸。前襟左右各一寸。反屈爲邊者兩腋之餘。前後左右各二寸。合殺一尺六寸。而要圍七尺二寸也。蓋布幅二尺二寸。而二寸以削幅不用。正用二尺也。衣圍八尺。而八寸又外連袂故也。○記曰。衣四幅。除負繩之縫。領旁之屈積各寸。卽前襟反屈一寸也兩腋之餘。前後各三寸042_506b云。此亦合殺一尺六寸也。要縫七尺二寸也。○(按)古註。兩腋之餘前後各三寸者。通削幅一而爲言也。
圓袂
玉藻曰。深衣。三袪。縫齊倍要。衽當傍。袂可以回肘。○註。袪。袖口也。尺二寸。圍之爲二尺四寸。要之廣。三其二尺四寸。則七尺二寸也。故云三袪。縫齊倍要者。謂縫下畔之廣。一丈四尺四寸。是倍要之七尺二寸也。衽。衣裳交接處也。在身之兩旁。故云衽當旁。袂。袖之連衣也。上下之廣。二尺二寸。故可以042_506c回肘。(按)裁衣時。衣長二尺三寸。而一寸。爲連裳時縫自可回肘。
小註下同
音劫。交領也。○玉藻曰。袷二寸。緣廣寸半。(按)家禮則無袷。只以黑緣二寸廣袷而用之。蓋儉約也。朱子大全亦然。定非闕文也。○玉藻註。袷。曲領也。又方氏曰。以交而合故謂之袷。按丘氏欲擬玉藻袷二寸緣寸半。俾領少露也。合古而違朱子也。

音根。足踵也。○記曰。短毋見膚。長毋被土。註。短無042_506d音現膚。雖約而不失於儉。長毋被土。雖隆而不過於奢。
黑緣緣去聲
大帶
記曰。帶下無厭於甲反髀。上無厭脅。當無骨者。此衣帶上下之中也。○大全曰。以黑繒。緣紳之兩旁及下表裏各半寸。
緇冠
大全曰。前後三寸。左右四寸。上爲五梁。辟積左縫。下着於武外。反屈其兩端各半寸內向。黑漆之。
大註
042_507a禮記註。文者上之道。武者下之道。足在體之下者曰武。卷在冠之下者曰武。
幅巾
大全曰。當中作㡇。又曰。以額㡇當頭前。向後圍裹而繫其帶。○補註。衰裳㡇與幅巾橫㡇少異。幅巾橫㡇。屈其兩邊。相輳在裏。衰裳㡇。屈其兩邊。相輳在上。


家禮註說一
居家雜儀 a_042_507a


凡爲家長
042_507b此節。言家長御羣子及家衆之事。
凡諸卑幼
此節。言卑幼事家長之道。
不敢私假
此下九節。猶小學言父子之親。
誶語小註下五條同
誶。責讓也。
鄭康成
後漢書云。鄭玄字康成。
不率卑幼之禮
042_507c率。循也。
飮至
左傳。歸而飮至。至而飮酒于廟也。
晉武惑馮紞之讒
晉書泰始中。帝及齊王攸侍疾。太后謂帝曰。汝與攸至親。吾沒後善遇之。言訖崩。後爲馮紞所構。憤怨嘔血而死。
唐高宗溺武氏之寵
唐書貞觀末。帝疾篤。詔長孫無忌等入臥內。謂太子曰。無忌盡忠。勿令讒人間之。有頃帝崩。高宗欲042_507d立武昭儀爲后。無忌切諫。命引出。尋殺之。
凡爲宮室
此下一節。猶小學言夫婦之別。
不共浴堂
男所浴室。女所浴室。異。
凡卑幼於尊長
此節。猶小學言長幼之序。
凡受女壻及外甥拜
此一節。言接女壻外甥外孫之拜。
五福
042_508a一曰壽。二曰富。三曰康寧。四曰攸好德。五曰考終命。
凡節序及非時
此節。言家宴上壽之儀。
凡子始生
此節。敎男女之道。
凡內外僕妾
此節。僕妾事主父母之道。
凡女僕同輩
此下三節。言主父母御僕妾之道。


家禮註說一
冠禮 a_042_508b


冠禮
042_508b鄭玄曰。於五禮。冠昏屬嘉。○朱子曰。冠禮昏禮。不知起於何時。○冠義疏曰。冠禮起早晩書。傳無正文。世本云。黃帝造旃冕。起於黃帝也。黃帝以前。以羽皮爲冠。以後乃用布帛。其冠之年。天子諸侯皆十二。○朱子曰。惟冠禮最易行。自家屋裏事。昏禮。須兩家皆好。禮方得行。○士冠禮傳曰。夫禮。始於冠。本於昏。重於喪祭。尊於朝聘。和於射御。此禮之大體也。右儀禮經傳○丘氏濬曰。今人未必習禮。請習042_508c禮者一人。爲禮生導唱。○經傳曰。五十而爵。何大夫冠禮之有。無冠禮。有昏禮。出後記。○又儀禮行事之法。賤者爲先。故士冠爲先。諸侯冠次之。天子冠又次之。(按)制禮皆自士而始。故儀禮昏禮皆然。
男子年十五至二十
冠義經曰。男子陽也。二十陰之數。二十而冠者。以陰而成乎陽。女陰也。十五陽之數。十五而筓者。以陽而成乎陰也。
必父母無期以上喪
雜記曰。大功之末。可以冠子。可以嫁子。父小功之042_508d末。可以冠子。可以嫁子。可以取婦。已雖小功。旣卒哭。可以冠取妻。下殤之小功則不可。○(按)家禮。雖曰大功。旣葬冠昏。情有所不可者。義理無窮。記此說。使行禮者臨時折中。但記說。似有錯簡。
前期三日
士冠禮前期三日。空二日也。
筮日大註下二條同
士冠禮曰。筮者。以蓍問日吉凶於易也。○記曰。喪事先遠日。吉事先近日。喪謂葬與二祥。吉謂祭祀冠昏之屬。喪。奪哀之義也。非孝子所欲。卜先遠日。
042_509a若某之某親之子某。
(按)若下某。宗子。親上某。冠者之父。子下某。冠者。
介子
介。副介之義。
戒賓
戒。警也告也。出儀禮士冠禮。註。戒賓。古者有吉事。則樂與賢者歡成之。有凶事則欲與賢者哀戚之。○冠義註。筮日求天之吉。筮賓擇人之賢。筮而不卜。何哉。古者。大事用卜。小事用筮。天下之事。始爲小。終爲大。冠用筮。喪祭用卜。聖王重其始。非大事042_509b也。○左傳曰。筮短龜長。(按)龜曰卜。蓍曰筮。
所戒者大註下同
(按)所戒者賓。戒者主人也。
以病吾子
士冠禮。病猶辱也。
宿賓
補註。宿賓。隔宿戒之。○宿賓。又作肅戒。見士冠禮。
將莅之大註下二條同
士冠禮。莅。臨也。
帟幕
042_509c古今韻會。在上曰帟。音亦。

韻會。白善土也。音惡。
設洗直於東榮。南北以堂深。小註下二條同
按洗。承盥洗者棄水器也。盥。洗手洗爵也。出士冠禮○鄕飮酒義曰。洗當東榮。主人之所以自潔而事賓也。○又曰。水在洗。祖天地之左海也。註云。海。水之委也。天地之間。海居于東。東則左也。祖。祖而法之也。註云。水盛之罍。滌之於洗。○士冠禮云。直。吉値反。深。申鴆反。凡度深淺曰深。○鄕飮酒禮云。榮。屋翼。南北以042_509d堂深。堂深謂從堂廉北至房屋之壁。堂下洗。北去堂遠近深淺。取於堂上深淺。假令堂深三丈。洗亦去堂三丈。以此爲度。屋翼。若鳥之有翼。
罍洗
(按)古今韻會罍畫爲雲雷之象取其雷震之威以起敬也
敬冠事
冠義曰。敬冠。所以重禮。重禮。所以爲國本也。
櫛★掠大註下二條同
丘氏濬曰。櫛。梳子。★。卽總。裂練繒以束髮也。掠。喪042_510a禮解免字。謂裂布廣寸。自項向前交於額上。却繞䯻後如掠頭。則其制可推矣。今以網巾代之。
皆卓子
(按)皆。下。恐有以字。
東領北上
士冠禮疏喪禮。或西領或南領。此東領者。嘉禮異於凶禮故也。北上。便也。
冠了又不常著小註
(按)丘氏濬曰。緇布冠。亦當時不用之服。似是存古之意。宜從之。不必泥程子此說也。又曰。孟懿子曰。042_510b始冠。必加緇布之冠。何也。孔子曰。示不忘古。冠而弊之。註云。此冠不復用。初冠暫用之。不忘古也。則今亦冠畢。藏之可也。
親戚大註下七條同
父黨曰親。母黨曰戚。
雙紒
丘氏濬曰。紒卽䯻子。疑是作兩圓圈子。書儀註。童子䯻似刀鐶。
四䙆衫
(按)不知其制。此服非深衣之比。不用可也。
勒帛
042_510c(按)用以裹足者也。
釆屐
(按)屐。木履。今云采屐。疑是以采帛代木爲之。勒帛采屐。以帛裹足。納履中也。今隨童子常服者代之。似亦無害。
出房南面
士冠禮。將冠者南面。立房外之西。待賓命也。
祝曰吉月
問。冠昏三加之時。出門之戒。若只以古語告之。彼042_510d將謂何。朱子曰。只以今之俗語告之。使之易曉乃佳。○集註。祝辭。賓或不能誦。紅紙書之看誦。
南向立良久
士冠禮曰。冠者出房南向立。疏。童子着成人之服。使衆觀知也。(按)良久者。爲此也。
再加帽子
丘氏濬曰。帽子皀衫。其制不可考。此亦非古服。擬代以時制。
卽席跪大註下同
(按)冠者卽席跪下。當添入賓降主人亦降。賓盥主042_511a人揖。升復位。
享受遐福
(按)享受遐福之下。當添入贊者徹冠巾。執事者受冠巾入房。亦當添入。
三加幞頭
丘氏濬曰。幞頭在宋上下通服也。今唯有官者得用襴衫。專爲生員之服。且世未有旣官而冠者。公服笏不可用。擬代以時制。
嘉薦令芳大註下二條同
丘氏濬曰。禮辭曰。甘醴唯厚。嘉薦令芳。註。嘉薦。謂042_511b脯醢。溫公改醴爲酒。以不可虛僞也。況嘉薦令芳一句。今旣擧之。薦脯醢一節補入。
就席末
鄕飮禮疏。席末。席之尾。於席末言。是席之正。非專爲飮食也。此貴禮而賤財也。○曲禮曰。席南鄕北鄕。以西方爲上。東鄕西鄕。以南方爲上。
啐酒
啐。七內反。嘗入口也。○禮記註。酒入口爲啐。至齒爲嚌。
加有成也小註
042_511c郊特牲曰。適子冠於阼。以著代也。醮於客位。加有成也。三加彌尊。喩其志也。冠而字之。敬其名也。註。著代。顯其爲主人之次。酌而無酬酢曰醮。客位。在戶牖之間。加有成。加禮於有成之人也。三加彌尊。服彌尊則志之宜彌大。故曰喩其志也。
字冠者
補註。子生三月。父名之。旣冠。賓字之。(按)劉屛山字朱子。吳草廬字虞采虞集。皆有辭。今宜爲式。又朱子劉瑾槐恪二字。說皆可爲式。
伯某父大註下二條同
042_511d白虎通義曰。伯仲叔季。法四時。適長稱伯。伯禽是也。庶長稱孟。魯孟氏是也。○曲禮曰。男女異長。註。各爲伯仲。示不相干。○士冠禮註。伯仲叔季。長幼之稱。甫是丈夫之美稱。或作父。○檀弓曰。幼名冠字。五十以伯仲。死諡。周道也。註。此皆周道也。殷以上。有生號。仍爲死後之稱。堯舜禹湯是也。○朱子曰。儀禮疏。少時稱伯某甫。五十乃去某甫。專稱伯仲。此說爲是。如今人於尊長。不敢字之。而曰幾丈之類。○(按)若孔子始冠。但字尼甫。至年五十。乃稱仲尼。亦此禮也。○曲禮曰。國君不名卿老世婦。大042_512a夫不名世臣姪娣。士不名家相長妾。
宜之于嘏
儀禮作假。古雅反叶。音古。大也。○禮記作假。與嘏通用。○朱子曰。假與嘏同。福也。註說非是。
敢不夙夜★奉
丘氏濬曰。下文。見于鄕先生有誨。且拜。況賓祝之以辭乎。今補入再拜。
出就次
士冠禮。次。門外更衣處也。
諸叔父兄在東序大註
042_512b爾雅曰。東西墻謂之序。註。所以序別內外。
母拜之小註
冠義註。母之拜子。先儒疑焉。石梁王氏云。記者不知此禮爲適長子代父承重者。與祖爲正體。故禮之異於衆子也。○儀禮經傳。母拜受子拜。註。婦人雖其子。俠拜。○又朱子冠禮。雖見母。母亦俠拜。○儀禮註經傳冠義疏曰。母拜其酒脯。非拜子也。朱子曰。疏說。非本文正意。恐不然也。○儀禮。子奠廟酒脯。持以見母。○(按)母拜兄拜成人而與爲禮也云。則石梁王氏及疏說。恐皆不然也。
乃禮賓
042_512c士冠禮註。飮賓客。而從之以財貨曰酬。○孔子曰。其禮也無樂。註曰。冠者。成人代父。不可以樂。取婦之家。不擧樂。思嗣親也。○左氏傳曰。君冠。必以金石之樂節之。(按)孔子之謂無樂。亦諸侯之冠也。雖國君冠。亦不用樂。左氏說。未詳何指。○士冠禮註。贊者衆賓也。皆與亦飮酒。朱子曰。贊者。主人之贊者。衆賓恐誤。○朱子曰。主人酌賓曰獻。賓飮主人曰酢。主人又自飮而復飮賓曰酬。
冠變禮
042_512d曾子問曰。將冠子。冠者至。揖讓而入。聞齊衰大功之喪。如之何。孔子曰。內喪則廢。外喪則冠而不醴。徹饌而埽。卽位而哭。如冠者未至則廢。註。冠者賓贊也。不醴徹饌。醴及饌今悉徹去。又掃除冠之位。乃哭也。○又曰。如將冠子而未及期日。而有齊衰大功小功之喪。則因喪服而冠。註。因喪冠俱成人之服。○雜記。以喪冠者。雖三年之喪。可也。旣冠於次。入哭踊三者三乃出。註。當冠而遭五服之喪。則因成喪服而冠。雖三年之喪。可也。三者三。凡三次三踊也。疏曰。假令正月遭喪。則二月不得因喪而042_513a冠之。○孔子曰。武王崩。成王年十三而嗣立。明年夏六月。旣葬。冠而朝于祖。按此亦因變而冠也。○司馬溫公曰。因喪而冠。恐於今難行。○丘氏濬曰。今世俗有行之者。

音鷄。其端刻鷄形。記註。筓所以卷髮。出韻會○曲禮曰。女子許嫁。筓而字。註。許嫁十五而筓。未許嫁則二十而筓。○士婚禮註。許嫁。已受納徵禮也。○儀禮經傳曰。燕則鬈首。鬈音權疏曰。未許嫁。雖已筓。猶以少處之。故燕居則去筓。而分髮爲鬌紒也。○朱042_513b子曰。未許嫁而筓。則不戒女賓。自以家之諸婦。行筓禮也。○補註。婦人不冠。以簪固䯻而已○丘濬曰。主人以筓者見于祠堂。又見于尊長。


龜峯先生集卷之七
 家禮註說一
昏禮 a_042_513b


昏禮
白虎通義曰。不娶同姓。恥與禽獸同。外屬小功已上。亦不得娶也。按外屬。國有禁制。何但小功已上。○曾子問孔子曰。宗子雖七十。無無主婦。非宗子。雖無主婦。可也。註。此大宗之無子或子幼者。若有子有婦。可不再娶矣。○朱子曰。天子諸侯。不再娶。042_513c只以一娶十二女九女推上。魯齊破了此法再娶大夫娶三士二。却再娶。因論今之士大夫多死於慾曰。古人老則一齊老。都無許多患。以不再娶故也○經傳。古者婦先嫁三月。祖廟未毁。敎于公宮。祖廟旣毁。敎于宗室。敎以婦德婦言婦容婦功。註。謂天子諸侯。同姓者也。(按)必就尊者敎成之。爲內和理而後。家可長久也。今人閉女深室。不敎不遵。任情驕妬。甚不可也。○白虎通義曰。與君緦麻之親。敎于公宮三月。無親者。各敎於宗婦之室。學一時。足以成矣。○家語。魯哀公問於孔子曰。禮。三十而有室。二十而有042_513d夫。豈不晩哉。孔子曰夫禮。言其極也。不是過也。二十冠。有爲人父之端。十五許嫁。有適人之道。○士昏禮。行事必用昏昕。註。用昕使者。用昏壻也。鄭玄曰。以昏者。陽往而陰來。日入三商而爲昏。商。刻漏之名。昕。詩所謂旭。始旦也。又曰。以昏爲期。因以名焉。○經傳曰。婦人事夫有五。平旦纚筓而朝。則有君臣之嚴。沃盥饋食。則有父子之敬。報反而行。則有兄弟之道。受期必誠。有朋友之信。寢席之交。而有夫婦之別。
宗子自昏大註
042_514a(按)孤子冠。自稱主人。而獨於昏禮。不稱主人。爲養廉遠恥也。○士昏禮疏。不稱母。婦人。無外事也。○士昏禮曰。支子則稱其宗。弟則稱其兄。
媒氏
媒。謀也。謀合二姓也。
婚姻大註下同
白虎通義曰。昏時成禮。故曰昏。婦人因人。故曰姻。
察其壻與婦之性行
伊川曰。世人謹於擇壻。忽於擇婦。其實壻易見。婦難知。所繫甚重。豈可忽哉。○(按)禮。王者嫁女。必使042_514b同姓諸侯主之。欲使女不以天子乘諸侯也。古人之禮。謹於始如此。亦可爲求婦富貴者戒也。○虞詡與弟書曰。長子容當爲求婦。遠求小姓。足使生子。天福其人。不在貴族。芝草無根。醴泉無源。著爲家法。○王氏達曰貴家大族。爲富不仁。福已泯而禍已至。與之締姻。鮮有不爲其所及者也。
納采
士昏禮疏曰。以其始相采擇。恐女家不許。故言納。
吾子有惠貺室某也大註下二條同
士昏禮註。吾子。女之父母。貺。賜也。室。猶妻也。某。壻042_514c名也。
失容反
使者避不答拜
士昏禮註。不答拜者。不敢當其盛禮。○丘氏濬曰。此拜。乃謝書。
使者復命壻氏。主人復以告于祠堂。
丘氏濬曰。女氏受書。旣再拜。壻家受書。亦可再拜。○丘氏濬曰。以盤盛所復書。置香案上。
納幣
士昏禮。納徵玄纁。束帛儷皮。註。徵。成也。納幣以成042_514d昏禮。玄纁。象陰陽備也。束帛。十端也。儀禮經傳曰。皮帛可制。疏曰。可制爲衣。此亦敎婦誠信之義。○昏儀註。古之聘士聘女。皆以幣交。女非禮不行。士非招不往。○(按)程伊川聘定啓。朱子回啓。可爲書式。
釵釧大註下同
釧。韻會。臂環。音穿。去聲。
順先典
典。法也。
納采問名小註
042_515a補註云。納采者。納采擇之禮於女氏也。問名。問女氏之名。將歸而卜其吉凶也。納吉者。歸卜於廟。得吉兆。復使使者往告。昏姻之事。於是乎定也。納徵者。徵。成也。納幣以成昏禮。請期者。請成昏之期也。親迎者。親往迎歸。至家成禮也。士昏禮疏。問名。問主人女爲誰氏者。恐非主人之女。收養之女也。○孔子曰。嫁女之家。三夜不息燭。思相離也。註。不息燭。不寢也。○又曰。取婦之家。三日不擧樂。思嗣親也。
親迎
042_515b經傳曰。男子親迎。男先於女。天先於地。君先乎臣。其義一也。
大註下四條同
音辱。藉也。
某物若干
干字。從一從十。若干。數之未定者也。
駔儈
史記貨殖傳。駔儈。二家交易者。駔子郞切。儈音檜。
酒壺在東位之後
士昏禮。尊于室中。北牖下有禁。註疏。尊。甒也。禁。所042_515c以庪甒者。酒器也。庪。承也。禁者。因爲酒戒。故以禁言之。
花勝
荊楚歲時記。人日剪彩爲花勝而以相遺。後人因而帖首以爲飾。○韻府。群玉勝去聲婦人首飾。
攝盛小註下二條同
攝。假也。
左傳曰圍布
(按)左傳。圍。楚公子名。後爲靈王。莊共。楚莊王, 共王也。
先配後祖
042_515d鄭公子忽。如陳逆婦嬀。先配而後祖。陳子曰。是不爲父母。誣其祖矣。非禮也。何以能育。
主人告于祠堂
白虎通義曰。遣女於禰廟者。重先人之遺體。不敢自專也。
姆相之大註下二條同
士昏禮註。婦人年五十無子。出而不復嫁。能以婦道敎人者。
父起命之
042_516a補註。穀梁傳曰。禮。送女父不下堂。母不出門。○經傳註。父醴之而南面。重昏禮也。○白虎通義曰。去不辭誡不諾者。蓋恥之重去也。○(按)三月以前。不敢反馬。則此所以去不敢辭故也。
斂帔
帔被同。朱子曰首飾也。韓愈氏曰着冠帔。
壻入奠雁
士昏禮疏。昏禮有六。五禮用雁。唯納徵不用雁。有幣帛可執故也。(按)家禮。只用雁於親迎。從簡也。○補註。生色繒生。恐五字之誤。○士昏禮。贄不用死。042_516b疏。恐用死雁故云。○丘氏濬曰。刻木近死。無則代以皀鵝。○李涪云。雁非時。莫能致。故以鵝替之。爾雅云。舒雁鵝。鵝亦雁之屬也。○曲禮曰。執禽者左首。註云。首尊主人在左。故橫捧以首授主人。○儀禮經傳傳曰。贄。質也。質己之誠也。子見父無贄何。至親也。臣之事君。以義合也。有贄。○(按)以義合者。必有贄。親迎及婦見舅姑。皆有贄。○士相見禮。贄者。致也。所以致其志也。
主人不答拜大註
經傳疏。不拜。明壻拜爲授女。不爲主人。
姆奉女出登車
042_516c(按)儀禮。壻婦皆乘車。而此只云女登車。士昏禮婦。○車亦如之有裧昌占反註。亦如之者。車同。裧。車裳幃。
主人不降大註
士昏禮。主人不降送。註。主人不降送。禮不參。釋曰。賓主宜各一人。今婦旣從。主人不降送。○(按)壻擧轎簾。乃古禮壻親授綏者也。故經傳昏義曰。壻親授綏。親之也。敬而親之。先王之所以得天下也。
壻乘馬先婦車
042_516d經傳曰。壻出門而先。男帥女。女從男。夫婦之義。由此始也。
二燭前導大註下同
經傳註。持炬火炤道。程子曰。今用燭四或二。
婦下車揖之
(按)女出。壻揖之。女下車。壻揖之之揖。非揖拜之揖也。昏義曰。揖婦以入。註。卑抑以延之。不敢慢也。
壻婦交拜
朱子曰。婦人與男子爲禮。皆俠拜。婦先二拜。夫答一拜。婦又二拜。夫又答一拜。
042_517a不祭無殽大註下同
士昏禮。主人婦皆祭。贊以肝從。再酳無從。三酳亦如之。○(按)家禮。初酳之外。皆無殽者。本此義也。
壻從者餕婦之餘
韻會。從。去聲。隨行也。○士昏禮曰。媵餕主人之餘。御餕婦餘。疏。亦陰陽交接之義。
古者同牢之禮小註下二條同
經傳曰。共牢而食。同尊卑也。故婦人無爵。從夫之爵。坐以夫之齒。○王制註。牢者。圈也。以能有所畜。故所畜之牲。皆曰牢也。○疏。共牢。不異牲也。

042_517b古今韻會。短頸大腹曰匏。○莊子剖之以爲瓢。半匏也。○經傳曰。器用陶匏。尙禮然也。註。此太古之禮器也。用太古之器。重夫婦之始也。
共牢而食。合巹而酳。
士昏禮註。酳所以潔口演。安其所食。疏。旣食而又飮之。所以樂之。○(按)酳。士田反漱口也。以酒曰酳。以水曰漱。
復入脫服
士昏禮。主人入。親脫婦之纓。註。婦人許嫁着纓。○042_517c經傳。媵侍于戶外。呼則聞。疏。不使御侍于戶外者。以女爲主也。○經傳。夫也者。以知音智帥人者也。○韻府續篇。今世昏禮。取夫與婦髮。合而結之。○士昏禮曰。御衽于奧。媵衽良席在東。皆有枕北止。御當爲訝。壻從者也。媵。送也。女從者也。夫曰良。止作趾。夫席在東。婦席在西。同牢席。夫在西婦在東。爲陰陽交會。今夫東婦西。取陽往就陰。故男女各於其方也。
女賓大註
補註。賓。卽從者。
婦見于舅姑。
042_517d經傳。婦沐浴以俟見。
奠贄幣大註
春秋經。大夫宗婦覿用幣。左傳御孫曰。男贄玉帛禽鳥。女贄榛栗棗脩。今男女同贄。無別也。由夫人亂之。無乃不可。○曲禮曰。婦人之贄。椇榛脯脩棗栗。椇音矩。一名石李。○士昏禮。婦執笲音煩棗栗。拜奠。舅坐撫之。○受笲腶脩音丁亂反脩拜奠。姑擧以授人。疏。棗栗。取其早自謹敬。腶脩。取其斷斷自脩。笲竹器○(按)古禮。無贄幣。家禮。用幣。未詳。古語云。贄不稱042_518a德。不足爲義。此玉帛禽鳥榛栗棗脩之用。所以不一也。
舅姑禮之
經傳士昏禮註。禮婦者。以其婦新成親。厚之。○又曰。席于戶牖間。註曰。室戶牖東南面位。疏曰。禮子禮婦。賓客皆於此。尊之故也。
小姑大註
爾雅。夫之庶母爲小姑。○李白詩。夫之妹也回頭語。小姑莫嫁如兄夫。
饋于舅姑
042_518b補註。饋者。婦道旣成。成以孝養也。
合升側載小註
儀禮經傳註。合升。合左右胖。升於鼎。○士昏禮註。載胖故側載。○少牢饋食禮。右胖固所貴也。○經傳註。在鼎曰升。在俎曰載。
舅姑饗之
經傳昏義曰。舅姑降自西階。婦降自阼階。授之室也。○又經傳曰。以著代也。○士昏禮註。以酒食勞人曰饗。
三月而廟見大註
042_518c經傳曰。舅姑旣沒。則三月乃奠菜。註。祭菜也。○(按)生死異禮。舅姑生存則。明日敢見。而沒則延三月。其禮嚴矣。○朱子曰。三月方見可以爲婦及不可爲婦。此後方反馬馬是婦初歸時所乘。至此方送還母家。○又儀禮疏曰。三月。一時。天氣變。婦道可成也。○朱子曰。古人是從下做上。其初行夫婦之禮。次日方見舅姑。及三月不得罪於舅姑。方得奉祭祀。○朱子曰。昏義。廟見舅姑之亡者。不及祖。今只共廟。如何只見禰而不見祖。此當以義起。亦見祖可也。
壻往。見婦之父母。
042_518d丘氏濬曰。壻見婦黨諸親。而無廟見之義。於死者。漠然不相干。況有已孤而嫁者乎。補廟見。
皆有幣大註
士相見禮。贄冬用雉雉用死夏用腒。腒乾雉○(按)不必用幣也。雉用死。不可生服也。○士昏禮曰。東面奠贄。註。贄雉也。
婦家禮壻。如常儀。
丘氏濬曰。有尊壻太過者。有卑壻太甚者。酌中以爲儀。
昏變禮
042_519a曾子問曰。昏禮旣納幣。有吉日。女之父母死則如之何。孔子曰。使人弔。如壻之父母死。則女之家。亦使人弔。父喪稱父。母喪稱母。父母不在。則稱伯父世母。壻已葬。壻之伯父致命曰。某之子有父母之喪。不得嗣爲兄弟。使某致命。女氏許諾而不敢嫁。禮也。壻免喪。女之父母使人請。壻不取。而后嫁之。禮也。女之父母死。壻亦如之。註。父喪稱父。母喪稱母。禮宜各以其敵者也。未成兄弟。以夫婦有兄弟之義故云。致命。致還其許昏之命也。不敢嫁。女氏雖許諾。而不敢以女嫁於他人。禮也。○世母。爾雅042_519b世有爲嫡者。嗣世統故也。○爾雅又曰。父之昆弟。先生爲世父。後生爲叔父。○曾子問曰。親迎。女在塗。而壻之父母死。如之何。孔子曰。女改服布深衣縞總以趨喪。註。婦人始喪未成服之服。縞。白絹也。總。束髮也。女在塗而女之父母死則女反。註。旣在塗。服父母皆期。而用奔喪禮。亦布深衣縞總也。如壻親迎。女未至而有齊衰大功之喪。則如之何。孔子曰。男不入。改服於外次。女入。改服於內次。然後卽位而哭。註。不問小功緦者。小功輕。不廢昏禮。待禮畢乃哭也。○齊衰大功之喪。女不反歸。改服卽042_519c位。與男親同。○若婦已揖遜入門。聞齊衰大功。內喪則廢。外喪則行昏禮。○曾子問曰。除喪則不復昏禮乎。孔子曰。祭。過時不祭。禮也。又何反於初。註。祭重而昏輕。重者過時尙廢。輕者不復。可知。○開元禮。除喪之後。束帶相見。不行初昏之禮。朱子曰。男居外次。女居內次。目不相見。除喪而始入御。開元之制。必有所據矣。○曾子問曰。女未廟見而死。則如之何。孔子曰。不遷於祖。不祔於皇姑。壻不杖不菲不次。歸葬于女氏之黨。示未成婦也。註不遷不遷柩朝壻之祖廟也疏菲草屨也不次。不別處哀042_519d次也。○曾子問曰。取女。有吉日而女死。則如之何。孔子曰。壻齊衰而弔。旣葬而除之。夫死。亦如之。註。女以斬衰往弔。旣葬而除也。○問有吉日夫死。用斬衰恐難行。朱子曰。未見難行處。但人自不肯行耳。○孝述問先兄几筵未撤。老母乃齊衰三年之服。復有妨礙。然主昏却是叔父。凡百從殺。衣服皆從淡素。不知可否。朱子曰。若叔父主婚。卽可娶。但母在而叔父主昏。恐亦未安。可更詳考也。○孝述問謹按禮。壻將親迎。父醮而命之。今孝述父兄俱沒。上惟母在旁。尊在叔父。不知往迎之時。當受母042_520a命耶。受叔父之命耶。朱子曰。當受於母。然母旣有服。又似難行。記得春秋公羊傳。有母命其諸父兄。而諸父兄以命使者。可檢看爲叔父稱母之命以命之。更詳之。○儀禮士昏禮。宗子無父。母命之。親皆沒。己躬命之。註。宗子無父。是有有父者。七十老而傳。八十齊衰之事不及。若是者。子代其父爲宗子。其取也。父命之。(母命之)在春秋紀裂繻來逆女是也。疏公羊傳曰。裂繻。紀大夫也。不稱主人。爲養廉遠恥也。不稱母。婦人無外事。但得命諸父兄師友。稱父兄師友以行耳。(躬命之)宋公使公孫壽來042_520b納幣。是也。疏其稱主人。何無母也。有母。母當命諸父兄。無母。莫使命之。辭窮故自命之則不得不稱使。○白虎通義曰。人君及宗子。無父母。自定娶者。卑不主尊。賤不主貴也。○(按)家禮。宗子自昏。以族人之長爲主。與此義不同。
龜峯先生集卷之七


龜峯先生集卷之七
 家禮註說一
昏禮 a_042_513b


昏禮
白虎通義曰。不娶同姓。恥與禽獸同。外屬小功已上。亦不得娶也。按外屬。國有禁制。何但小功已上。○曾子問孔子曰。宗子雖七十。無無主婦。非宗子。雖無主婦。可也。註。此大宗之無子或子幼者。若有子有婦。可不再娶矣。○朱子曰。天子諸侯。不再娶。042_513c只以一娶十二女九女推上。魯齊破了此法再娶大夫娶三士二。却再娶。因論今之士大夫多死於慾曰。古人老則一齊老。都無許多患。以不再娶故也○經傳。古者婦先嫁三月。祖廟未毁。敎于公宮。祖廟旣毁。敎于宗室。敎以婦德婦言婦容婦功。註。謂天子諸侯。同姓者也。(按)必就尊者敎成之。爲內和理而後。家可長久也。今人閉女深室。不敎不遵。任情驕妬。甚不可也。○白虎通義曰。與君緦麻之親。敎于公宮三月。無親者。各敎於宗婦之室。學一時。足以成矣。○家語。魯哀公問於孔子曰。禮。三十而有室。二十而有042_513d夫。豈不晩哉。孔子曰夫禮。言其極也。不是過也。二十冠。有爲人父之端。十五許嫁。有適人之道。○士昏禮。行事必用昏昕。註。用昕使者。用昏壻也。鄭玄曰。以昏者。陽往而陰來。日入三商而爲昏。商。刻漏之名。昕。詩所謂旭。始旦也。又曰。以昏爲期。因以名焉。○經傳曰。婦人事夫有五。平旦纚筓而朝。則有君臣之嚴。沃盥饋食。則有父子之敬。報反而行。則有兄弟之道。受期必誠。有朋友之信。寢席之交。而有夫婦之別。
宗子自昏大註
042_514a(按)孤子冠。自稱主人。而獨於昏禮。不稱主人。爲養廉遠恥也。○士昏禮疏。不稱母。婦人。無外事也。○士昏禮曰。支子則稱其宗。弟則稱其兄。
媒氏
媒。謀也。謀合二姓也。
婚姻大註下同
白虎通義曰。昏時成禮。故曰昏。婦人因人。故曰姻。
察其壻與婦之性行
伊川曰。世人謹於擇壻。忽於擇婦。其實壻易見。婦難知。所繫甚重。豈可忽哉。○(按)禮。王者嫁女。必使042_514b同姓諸侯主之。欲使女不以天子乘諸侯也。古人之禮。謹於始如此。亦可爲求婦富貴者戒也。○虞詡與弟書曰。長子容當爲求婦。遠求小姓。足使生子。天福其人。不在貴族。芝草無根。醴泉無源。著爲家法。○王氏達曰貴家大族。爲富不仁。福已泯而禍已至。與之締姻。鮮有不爲其所及者也。
納采
士昏禮疏曰。以其始相采擇。恐女家不許。故言納。
吾子有惠貺室某也大註下二條同
士昏禮註。吾子。女之父母。貺。賜也。室。猶妻也。某。壻042_514c名也。
失容反
使者避不答拜
士昏禮註。不答拜者。不敢當其盛禮。○丘氏濬曰。此拜。乃謝書。
使者復命壻氏。主人復以告于祠堂。
丘氏濬曰。女氏受書。旣再拜。壻家受書。亦可再拜。○丘氏濬曰。以盤盛所復書。置香案上。
納幣
士昏禮。納徵玄纁。束帛儷皮。註。徵。成也。納幣以成042_514d昏禮。玄纁。象陰陽備也。束帛。十端也。儀禮經傳曰。皮帛可制。疏曰。可制爲衣。此亦敎婦誠信之義。○昏儀註。古之聘士聘女。皆以幣交。女非禮不行。士非招不往。○(按)程伊川聘定啓。朱子回啓。可爲書式。
釵釧大註下同
釧。韻會。臂環。音穿。去聲。
順先典
典。法也。
納采問名小註
042_515a補註云。納采者。納采擇之禮於女氏也。問名。問女氏之名。將歸而卜其吉凶也。納吉者。歸卜於廟。得吉兆。復使使者往告。昏姻之事。於是乎定也。納徵者。徵。成也。納幣以成昏禮。請期者。請成昏之期也。親迎者。親往迎歸。至家成禮也。士昏禮疏。問名。問主人女爲誰氏者。恐非主人之女。收養之女也。○孔子曰。嫁女之家。三夜不息燭。思相離也。註。不息燭。不寢也。○又曰。取婦之家。三日不擧樂。思嗣親也。
親迎
042_515b經傳曰。男子親迎。男先於女。天先於地。君先乎臣。其義一也。
大註下四條同
音辱。藉也。
某物若干
干字。從一從十。若干。數之未定者也。
駔儈
史記貨殖傳。駔儈。二家交易者。駔子郞切。儈音檜。
酒壺在東位之後
士昏禮。尊于室中。北牖下有禁。註疏。尊。甒也。禁。所042_515c以庪甒者。酒器也。庪。承也。禁者。因爲酒戒。故以禁言之。
花勝
荊楚歲時記。人日剪彩爲花勝而以相遺。後人因而帖首以爲飾。○韻府。群玉勝去聲婦人首飾。
攝盛小註下二條同
攝。假也。
左傳曰圍布
(按)左傳。圍。楚公子名。後爲靈王。莊共。楚莊王, 共王也。
先配後祖
042_515d鄭公子忽。如陳逆婦嬀。先配而後祖。陳子曰。是不爲父母。誣其祖矣。非禮也。何以能育。
主人告于祠堂
白虎通義曰。遣女於禰廟者。重先人之遺體。不敢自專也。
姆相之大註下二條同
士昏禮註。婦人年五十無子。出而不復嫁。能以婦道敎人者。
父起命之
042_516a補註。穀梁傳曰。禮。送女父不下堂。母不出門。○經傳註。父醴之而南面。重昏禮也。○白虎通義曰。去不辭誡不諾者。蓋恥之重去也。○(按)三月以前。不敢反馬。則此所以去不敢辭故也。
斂帔
帔被同。朱子曰首飾也。韓愈氏曰着冠帔。
壻入奠雁
士昏禮疏。昏禮有六。五禮用雁。唯納徵不用雁。有幣帛可執故也。(按)家禮。只用雁於親迎。從簡也。○補註。生色繒生。恐五字之誤。○士昏禮。贄不用死。042_516b疏。恐用死雁故云。○丘氏濬曰。刻木近死。無則代以皀鵝。○李涪云。雁非時。莫能致。故以鵝替之。爾雅云。舒雁鵝。鵝亦雁之屬也。○曲禮曰。執禽者左首。註云。首尊主人在左。故橫捧以首授主人。○儀禮經傳傳曰。贄。質也。質己之誠也。子見父無贄何。至親也。臣之事君。以義合也。有贄。○(按)以義合者。必有贄。親迎及婦見舅姑。皆有贄。○士相見禮。贄者。致也。所以致其志也。
主人不答拜大註
經傳疏。不拜。明壻拜爲授女。不爲主人。
姆奉女出登車
042_516c(按)儀禮。壻婦皆乘車。而此只云女登車。士昏禮婦。○車亦如之有裧昌占反註。亦如之者。車同。裧。車裳幃。
主人不降大註
士昏禮。主人不降送。註。主人不降送。禮不參。釋曰。賓主宜各一人。今婦旣從。主人不降送。○(按)壻擧轎簾。乃古禮壻親授綏者也。故經傳昏義曰。壻親授綏。親之也。敬而親之。先王之所以得天下也。
壻乘馬先婦車
042_516d經傳曰。壻出門而先。男帥女。女從男。夫婦之義。由此始也。
二燭前導大註下同
經傳註。持炬火炤道。程子曰。今用燭四或二。
婦下車揖之
(按)女出。壻揖之。女下車。壻揖之之揖。非揖拜之揖也。昏義曰。揖婦以入。註。卑抑以延之。不敢慢也。
壻婦交拜
朱子曰。婦人與男子爲禮。皆俠拜。婦先二拜。夫答一拜。婦又二拜。夫又答一拜。
042_517a不祭無殽大註下同
士昏禮。主人婦皆祭。贊以肝從。再酳無從。三酳亦如之。○(按)家禮。初酳之外。皆無殽者。本此義也。
壻從者餕婦之餘
韻會。從。去聲。隨行也。○士昏禮曰。媵餕主人之餘。御餕婦餘。疏。亦陰陽交接之義。
古者同牢之禮小註下二條同
經傳曰。共牢而食。同尊卑也。故婦人無爵。從夫之爵。坐以夫之齒。○王制註。牢者。圈也。以能有所畜。故所畜之牲。皆曰牢也。○疏。共牢。不異牲也。

042_517b古今韻會。短頸大腹曰匏。○莊子剖之以爲瓢。半匏也。○經傳曰。器用陶匏。尙禮然也。註。此太古之禮器也。用太古之器。重夫婦之始也。
共牢而食。合巹而酳。
士昏禮註。酳所以潔口演。安其所食。疏。旣食而又飮之。所以樂之。○(按)酳。士田反漱口也。以酒曰酳。以水曰漱。
復入脫服
士昏禮。主人入。親脫婦之纓。註。婦人許嫁着纓。○042_517c經傳。媵侍于戶外。呼則聞。疏。不使御侍于戶外者。以女爲主也。○經傳。夫也者。以知音智帥人者也。○韻府續篇。今世昏禮。取夫與婦髮。合而結之。○士昏禮曰。御衽于奧。媵衽良席在東。皆有枕北止。御當爲訝。壻從者也。媵。送也。女從者也。夫曰良。止作趾。夫席在東。婦席在西。同牢席。夫在西婦在東。爲陰陽交會。今夫東婦西。取陽往就陰。故男女各於其方也。
女賓大註
補註。賓。卽從者。
婦見于舅姑。
042_517d經傳。婦沐浴以俟見。
奠贄幣大註
春秋經。大夫宗婦覿用幣。左傳御孫曰。男贄玉帛禽鳥。女贄榛栗棗脩。今男女同贄。無別也。由夫人亂之。無乃不可。○曲禮曰。婦人之贄。椇榛脯脩棗栗。椇音矩。一名石李。○士昏禮。婦執笲音煩棗栗。拜奠。舅坐撫之。○受笲腶脩音丁亂反脩拜奠。姑擧以授人。疏。棗栗。取其早自謹敬。腶脩。取其斷斷自脩。笲竹器○(按)古禮。無贄幣。家禮。用幣。未詳。古語云。贄不稱042_518a德。不足爲義。此玉帛禽鳥榛栗棗脩之用。所以不一也。
舅姑禮之
經傳士昏禮註。禮婦者。以其婦新成親。厚之。○又曰。席于戶牖間。註曰。室戶牖東南面位。疏曰。禮子禮婦。賓客皆於此。尊之故也。
小姑大註
爾雅。夫之庶母爲小姑。○李白詩。夫之妹也回頭語。小姑莫嫁如兄夫。
饋于舅姑
042_518b補註。饋者。婦道旣成。成以孝養也。
合升側載小註
儀禮經傳註。合升。合左右胖。升於鼎。○士昏禮註。載胖故側載。○少牢饋食禮。右胖固所貴也。○經傳註。在鼎曰升。在俎曰載。
舅姑饗之
經傳昏義曰。舅姑降自西階。婦降自阼階。授之室也。○又經傳曰。以著代也。○士昏禮註。以酒食勞人曰饗。
三月而廟見大註
042_518c經傳曰。舅姑旣沒。則三月乃奠菜。註。祭菜也。○(按)生死異禮。舅姑生存則。明日敢見。而沒則延三月。其禮嚴矣。○朱子曰。三月方見可以爲婦及不可爲婦。此後方反馬馬是婦初歸時所乘。至此方送還母家。○又儀禮疏曰。三月。一時。天氣變。婦道可成也。○朱子曰。古人是從下做上。其初行夫婦之禮。次日方見舅姑。及三月不得罪於舅姑。方得奉祭祀。○朱子曰。昏義。廟見舅姑之亡者。不及祖。今只共廟。如何只見禰而不見祖。此當以義起。亦見祖可也。
壻往。見婦之父母。
042_518d丘氏濬曰。壻見婦黨諸親。而無廟見之義。於死者。漠然不相干。況有已孤而嫁者乎。補廟見。
皆有幣大註
士相見禮。贄冬用雉雉用死夏用腒。腒乾雉○(按)不必用幣也。雉用死。不可生服也。○士昏禮曰。東面奠贄。註。贄雉也。
婦家禮壻。如常儀。
丘氏濬曰。有尊壻太過者。有卑壻太甚者。酌中以爲儀。
昏變禮
042_519a曾子問曰。昏禮旣納幣。有吉日。女之父母死則如之何。孔子曰。使人弔。如壻之父母死。則女之家。亦使人弔。父喪稱父。母喪稱母。父母不在。則稱伯父世母。壻已葬。壻之伯父致命曰。某之子有父母之喪。不得嗣爲兄弟。使某致命。女氏許諾而不敢嫁。禮也。壻免喪。女之父母使人請。壻不取。而后嫁之。禮也。女之父母死。壻亦如之。註。父喪稱父。母喪稱母。禮宜各以其敵者也。未成兄弟。以夫婦有兄弟之義故云。致命。致還其許昏之命也。不敢嫁。女氏雖許諾。而不敢以女嫁於他人。禮也。○世母。爾雅042_519b世有爲嫡者。嗣世統故也。○爾雅又曰。父之昆弟。先生爲世父。後生爲叔父。○曾子問曰。親迎。女在塗。而壻之父母死。如之何。孔子曰。女改服布深衣縞總以趨喪。註。婦人始喪未成服之服。縞。白絹也。總。束髮也。女在塗而女之父母死則女反。註。旣在塗。服父母皆期。而用奔喪禮。亦布深衣縞總也。如壻親迎。女未至而有齊衰大功之喪。則如之何。孔子曰。男不入。改服於外次。女入。改服於內次。然後卽位而哭。註。不問小功緦者。小功輕。不廢昏禮。待禮畢乃哭也。○齊衰大功之喪。女不反歸。改服卽042_519c位。與男親同。○若婦已揖遜入門。聞齊衰大功。內喪則廢。外喪則行昏禮。○曾子問曰。除喪則不復昏禮乎。孔子曰。祭。過時不祭。禮也。又何反於初。註。祭重而昏輕。重者過時尙廢。輕者不復。可知。○開元禮。除喪之後。束帶相見。不行初昏之禮。朱子曰。男居外次。女居內次。目不相見。除喪而始入御。開元之制。必有所據矣。○曾子問曰。女未廟見而死。則如之何。孔子曰。不遷於祖。不祔於皇姑。壻不杖不菲不次。歸葬于女氏之黨。示未成婦也。註不遷不遷柩朝壻之祖廟也疏菲草屨也不次。不別處哀042_519d次也。○曾子問曰。取女。有吉日而女死。則如之何。孔子曰。壻齊衰而弔。旣葬而除之。夫死。亦如之。註。女以斬衰往弔。旣葬而除也。○問有吉日夫死。用斬衰恐難行。朱子曰。未見難行處。但人自不肯行耳。○孝述問先兄几筵未撤。老母乃齊衰三年之服。復有妨礙。然主昏却是叔父。凡百從殺。衣服皆從淡素。不知可否。朱子曰。若叔父主婚。卽可娶。但母在而叔父主昏。恐亦未安。可更詳考也。○孝述問謹按禮。壻將親迎。父醮而命之。今孝述父兄俱沒。上惟母在旁。尊在叔父。不知往迎之時。當受母042_520a命耶。受叔父之命耶。朱子曰。當受於母。然母旣有服。又似難行。記得春秋公羊傳。有母命其諸父兄。而諸父兄以命使者。可檢看爲叔父稱母之命以命之。更詳之。○儀禮士昏禮。宗子無父。母命之。親皆沒。己躬命之。註。宗子無父。是有有父者。七十老而傳。八十齊衰之事不及。若是者。子代其父爲宗子。其取也。父命之。(母命之)在春秋紀裂繻來逆女是也。疏公羊傳曰。裂繻。紀大夫也。不稱主人。爲養廉遠恥也。不稱母。婦人無外事。但得命諸父兄師友。稱父兄師友以行耳。(躬命之)宋公使公孫壽來042_520b納幣。是也。疏其稱主人。何無母也。有母。母當命諸父兄。無母。莫使命之。辭窮故自命之則不得不稱使。○白虎通義曰。人君及宗子。無父母。自定娶者。卑不主尊。賤不主貴也。○(按)家禮。宗子自昏。以族人之長爲主。與此義不同。
龜峯先生集卷之七


喪禮 a_042_521a


疾病。遷居正寢。
補註。古之堂屋。三間五梁。中架以南三間。通爲堂。以北三間。用板隔斷。東西二間爲房。中間爲室。卽正寢也。○遷居正寢。惟家主爲然。○(按)經傳及喪大記。(士處適寢東首。)適寢。齋室也。東首。向生氣也。(疾者齊。)正情性也。(撤琴瑟。)以病者齊也。非爲子也。(內外皆掃撤褻衣。加新衣。)終於正也。(御者持體。體042_521b一人。)四人坐持手足四體。(禱于五祀。)盡孝子之情也。○喪大記。妻皆死于寢。○經傳。喪不忍言死而言喪。喪者。棄亡之辭。○春秋經。公薨于小寢。左氏曰卽安也。胡氏曰。小寢。燕息之地也。
孫宣公小註
宋鑑。孫奭幼師王徹。徹死。門人數百。皆從奭問經。諡曰宣。

喪大記。惟哭先復。○復而後行死事。○復衣。不以衣尸。不以斂。○士喪禮。復衣初以覆尸。浴則去之。042_521c○(按)復衣。不用襲斂也。○註。復。各以死者之祭服。以其求於神故也。○喪大記。婦人不以嫁時盛服。以非事鬼神之衣。○禮。復而不生。尸復登床。○朱子曰。人死。雖是魂魄各自飛散。要之魄又較定。須是招魂。來復這魄。要他相合。復不獨是要他活。是要聚他魂魄。不敎散了。聖人敎人子孫常常祭祀。也是要去聚得他。
自前榮升屋中霤三呼大註
註。榮。屋翼也。中霤。室中也。○喪大記。升自東榮。中屋履危。北面三號。疏。中屋。當屋之中也。履危。立屋042_521d之脊也。北面。求諸幽陰也。三號。冀魂自天來。自地來。自四方來也。○喪大記。在野則乘其乘車之左轂而復。○檀弓。邾婁復之以矢。蓋戰死。志在勝敵。矢是心之所好。冀其復返也。(補)楔齒。用角柶柱也。○綴足。經傳用燕几。綴。拘也。
立喪主
(按)不主妾喪。○雜記註。不攝女君之妾。則君不主其喪。○喪大記。爲後者不在。竟內則俟。竟外則殯葬。可也。不在。在外也。俟之。俟其還殯葬也竟與境同
徒跣大註下同
042_522a跣。上聲蘇典切足親地也
扱上衽
喪大記註。扱衽。扱深衣前襟於帶也。○(按)之字。恐誤於字也。
治棺
喪大記。君蓋用漆。大夫蓋用漆。士蓋不用漆。蓋。棺之蓋板也。漆以漆合縫也。○士二衽二束。每束處。必用衽君。棺。三重。大棺。屬椑。○大夫棺。上大夫八寸。下大夫六寸。士六寸。○君裏棺朱綠。朱繒貼四方。綠繒貼四角。大夫用玄綠。四面玄四角綠。士不042_522b綠。悉用玄。○檀弓衽註。兩端大中小。連合棺與蓋之際。故名衣之縫合處曰衽。衽形如今之銀則子。○易繫辭。古之葬者。厚衣以薪葬之。○檀弓。有虞氏瓦棺。夏禹氏墍周。火熟曰墍殷人棺槨。周人墻置翣。周人棺槨。葬長殤。墍周。葬中殤下殤。瓦棺。葬無服之殤。○家語。孔子爲中都宰。制送死之節。爲四寸之棺。五寸之槨。
秫米灰大註下同
秫米。本草云。能殺瘡疥。似黍米而粒小者。○丘氏云。糯米。○一說云。今大都呼粟糯爲秫稻。秫爲糯042_522c矣。又粟秫。非秫也。又黍秫也。
千年爲茯苓
(按)溶瀉則旣爲死物。同歸朽爛。恐不然也。

喪大記。君沐粱。大夫沐稷。士沐梁。沐。沐髮也。君與士同。不嫌僭上也。浙粱稷之汁。以沐髮也。
設幃
經傳帷堂註。鬼神尙幽暗故也。
遷尸
禮記註。尸陳也。在地氣絶。復陳列在床也。柩。久也。042_522d無使土親膚。欲其久也。○經傳註在床曰尸在棺曰柩○儀禮死于適室幠用斂衾○(按)始死及襲皆幠用斂衾家禮從簡幠覆也斂衾疑爲斂之衾也
陳襲衣
喪大記。凡陳衣不絀。註。舒而不卷也。○又非列采不入。疏。列采。謂五方正氣之采。非列采。謂雜色也。○又絺絡不用。註。當暑亦用袍。○(按)不用間色與絺絡也。
西領大註
042_523a冠禮疏。冠禮東領。喪禮西領。吉凶之異也。
褖衣小註下六條同
褖他亂反。黑衣裳赤緣之謂褖。褖。緣也。

儀禮註。今文爲橐。
綴旁
質與殺相接之處。使相連也。
緇冒䞔殺
䞔。赤色。具貞反。○(按)本經緇冒䞔殺。冒當作質。
握手
042_523b儀禮曰。握手。用玄纁裏。長尺二寸。廣五寸。牢中旁寸。著組繫。牢音樓註。牢讀作摟。摟爲削約。握之中央。以安手也。今文摟爲纋。旁爲方。疏。名此衣爲握。以其在手。故言握手。不謂以手握之爲握手云。經云廣五寸牢中方寸者。則中央廣三寸。廣三寸中央。又容四指而已。四指指一寸則四寸。四寸之外。仍有八寸。皆廣五寸也。讀從摟者。義取摟歛挾小之意云。削約者。謂削之使約少也。○儀禮曰。設決設握乃連掔。註。設握者。以綦擊鉤中指。由手表與決帶之餘。連結之。此謂右手也。(按)上文握手長尺二042_523c寸裹手。一端繞於手表必重。宜於上掩者。屬一繫於下角。乃以繫繞手一帀。當手表中指向上鉤中指。又反而上繞。取繫鄕下。與決之帶餘連結之云。此謂右手也者。以其右手有決。今言與決同結。明是右手也。下記所云設握者。此謂左手。鄭云左手無決也。○儀禮曰。設握裏親膚。繫鉤中指。結于掔。註。掔。掌後節中也。手無決者。以握繫一端繞掔。還從上自貫。反與其一端結之。疏。左手無決者。以其經己云右手有決者。不言左手無決者。故記之云以握繫一端繞掔。還從上自貫。反與其一端結之042_523d者。(按)上文。握手用玄纁裏。長尺二寸。今裏親膚據從手內置之。長尺二寸。中掩之手。纔相對也。兩端各有繫。先以一端繞掔一帀。還從上自貫。又以一端鄕上鉤中指。反與繞掔者。結於掌後節中旣夕○按儀禮。右手握一繫。左手握二繫。家禮無決。皆當有兩繫連結之握。繫在上掩之下角。今宜左右握。各有兩繫。今世欲用握繫一。不可。
繞掔
掔作椀。烏亂反。掔。手後節中也。經註。擥。一稱掌後節。一稱手後節中。
幎目
042_524a儀禮幎目註。著。充之以絮也。組繫。爲可結也。
陳于堂大註下三條同
論語。升堂矣。末入於室。按室外皆稱堂。
實于盌
盌。鄔管切。小也。與椀同。
(補)儀禮。士有氷用夷槃。可也。疏云。先納氷槃中。設床上。夷槃。承尸之槃也。謂夏月。
撮爲䯻
撮。麤括切。挽也取也。
剪爪
042_524b儀禮。爪揃如他日。註。斷瓜揃髮。如平日。
(補)經紀。御者四人。抗衾而浴。
徙尸床
(按)尸旣移襲床。沐浴床及尸床二。當各徙也。
洗盞斟酒大註
儀禮註。用吉器。器未變也。○曾子曰。始死之奠。其餘閣也。與閣。架也。不容改新。仍用閣上養老病之餘。
開元禮小註
042_524c通鑑唐玄宗紀。開元十九年。開元禮成。初命張說刊定。說薨。蕭崇繼之。
主人以下爲位而哭
(按)經。坐位。有室中戶外堂下之分。喪大記。但有東西。家禮從記略之。○經傳經曰。以喪服之麤爲序。以次主人。主喪者。雖有父兄。猶不得序齒。必位於主人之下。註。又曰。衰麤者在前。精者在後。○經疏云。喪大記婦人無立法。士喪。主人父兄子姓皆坐。惟大夫之喪。尊者坐。卑者立。尊卑。以爵言。
飯含
042_524d喪大記。士飯三貝。○儀禮。貝三實于笲笲音煩竹器。○檀弓云。不忍其口之虛。用此美物而實之。
大註
或作冪。覆也。幎音覓。
卒襲
本經紀。旣襲。宵爲燎于中庭。宵。夜也。
古有襚禮小註下同
經註。襚。遺也。衣服曰襚。○穀梁傳曰。乘馬曰賵。衣衾曰襚。貝玉曰含。錢財曰賻。
古人遺衣
042_525a(按)自古人至廟中。一本作註。
設魂帛
朱子曰。自弔魂復魄。立重設主。便是常要接續他些子精神在這裏。
鑿木爲重大註下同
補註。或曰重。或曰主。始死有柩而又設中。所以爲重也。旣有廟矣。廟必有主。是爲主也。○儀禮註。懸物焉曰重。疏。以木有物懸下。相重累。故得名。○檀弓。重。平聲主道也。註。始死未作主。以重主其神。旣虞埋之。乃復作主。
乘輜輧
042_525b輜音菑。車前後皆蔽。輧音缾。婦人車。以有屛蔽故曰輧。
遺衣裳。必置於靈座。小註
補註。倚上置衣服置魂魄。設於帷外。此謂靈座。
立銘旌
(按)儀禮。作重置銘。家禮。設魂魄置銘旌。卽其禮也。立於跗。在殯後。○(按)儀禮。始死作銘。置于西階。作重之後。置于重。殯後。置于以二反。埋棺之坎也。疏曰。銘。所以表柩故也。當立於殯後。故疏亦言殯前不用之042_525c義。立銘之立字。恐誤。
五品以下大註下同
(按)下字。當作上字。
某公之柩
儀禮註曰。在棺爲柩。
司馬溫公曰銘旌小註
(按)溫公此語。宜在殯後。恐引時誤入。
不作佛事
問親意欲用之。當如何。朱子曰。以委曲開釋爲先。如不可回。則又不可咈親意也。
出拜靈座大註下同
042_525d補註。出帷拜靈座也。
主人以哭對
喪大記。子幼則以衰抱之人。爲之拜。
小斂
王制。絞紟衾冒。死而後制。絞紟衾冒。一日二日可爲。(按)不用舊衾。可知。
衾用複者大註
喪大記。用複衣複衾。註。複有綿纊者。
設奠
042_526a儀禮經傳。奠以素器。註。後凡奠通用。
莊華反
(補按)童子不免。劉氏問喪註。喪必着免。嫌於不冠也。童子未冠。喪亦不免。童子當室則免。當成人之禮也。
左衽不紐大註下二條同
喪大記。小斂大斂。皆結衽結絞不紐。註。衽。衣襟也。生向右。解便也。死向左。示不復解也。生時帶爲紐。使易解。死無復解義故。結之不爲紐也。(按)不紐。示不復解之義也。凡帶及絞。皆結之不紐也。今稱左042_526b衽不紐。乃擧送死之禮也。
夫於妻執之
本文。妻於夫拘之。君於臣撫之。拘微引其衣。喪大記。嫂不撫叔。叔不撫嫂。君不撫僕妾。註。君撫大夫及命婦。大夫撫室老及姪娣。僕賤於室老者。妾賤於姪娣者。恩不及之。
舅於婦
(按)考喪大記。舅字下。落姑字。
至第四日小註
(按)第。他本作家。
乃奠
042_526c(按)襲奠在尸東。斂奠在靈座前。
乃代哭
經傳註。禮防其以死傷生。使之更哭。
大斂
喪大記註。士猶用複衣複衾。○(按)大斂。君用褶衣褶衾。褶。衣衾之裌者。君衣多故用裌。○按家禮。大小斂衾。皆用有綿者。○記子思曰。喪三日而殯。凡附於身者。必誠必信。勿悔焉耳矣。三月而葬。凡附於棺者。必誠必信。勿悔焉耳矣。註。附身。衣衾之具。042_526d附棺。明器用器之屬。必誠。於死者無所欺。必信。於生者無所疑。
擧棺入置于堂中少西
檀弓曰。飯於牖下。小斂於戶內。大斂於阼。殯於客位。祖於庭。葬於墓。所以卽遠也。註。一節遠於一節。飯。飯含也。○(按)小西。卽殯於客位之義。
承以兩㽅大註下三條同
㽅。或作橙。牀屬。丁鄧切。去聲
又揣其空缺
揣。上聲。楚委切。度高下曰揣。
纍塹塗之
042_527a禮註。塗之爲火備。○旣殯。主人脫髦。尊卑同三日也。三日不生。亦不生矣。○塹音擊。未燒磚也。○(按)雜記。妾殯斂不於正室。練祥皆使其子主之。註。攝女君之妾同。惟祔君自主。
中門之外擇朴陋之室
本經記居倚疏。中門外倚東壁爲廬。一頭至地。旣虞之後。拄剪屛。○非喪事不言。
成服
性理大全。陳氏曰。大宗始祖。合族皆服齊衰三月。042_527b不以親屬近遠論。是爲百世不遷之宗。小宗。是親盡則絶。繼禰者。親兄弟宗之。爲之服朞。繼祖者。從兄弟宗之。爲之服大功。繼曾祖者。再從兄弟宗之。爲之服小功。繼高祖者。三從兄弟宗之。爲之服緦麻。是爲五世則遷之宗。○易繫辭。上古。喪朞無數。○儀禮註。黃帝以前。心喪終身不變也。唐虞之日。心喪三年。亦未有服也。唐虞以上。吉凶同服。三王用白布冠白布衣。因爲喪服矣。
生與來日。死與往日。小註
曲禮。與。猶數也。生數來日。除死日。三日成服。死數042_527c往日。三日而殯矣。

經疏。斬。取痛甚之意。
大註下十五條同
平聲。物不精也。
作三㡇
補註。㡇音輒。褶也。裳㡇。與幅巾橫㡇小異。幅巾橫㡇。是屈其兩邊。相揍在裏。衰裳㡇。是屈其兩邊。相揍在上也。

042_527d株衛切。去聲。連綴也。
相杳
沓。達合切。合也。

記。喪冠不緌。註。垂其餘謂之緌。不緌。去餙也。
首絰。以有子麻爲之。
經疏。象緇布冠之缺頂。○儀禮註。絰。實也。明孝子有忠實之心也。○補註。首絰用有子麻帶黑色者。爲單股繩也。
腰絰
042_528a經疏。象大帶。
絞帶。用有子麻。
(按)喪服傳。絰與帶去五分之一以爲殺。
苴杖
補註。苴子餘切。平聲。苴。麻之有子者。喪服小記註。心如斬斫。貌若蒼苴。所以縗絰杖。俱備苴色。

上聲。麤也。
大袖
補註。用極麤生麻布爲之。長至膝。袖長一尺二寸。042_528b其邊皆縫向外。不緝邊。準男子衰衣之制。
長裙
補註。用極麤生麻布六幅爲之。六幅共栽爲十二破。聯以爲裙。其長拖地。縫向內。不緝邊。準男子衰裳之制。
蓋頭
補註。用稍細麻布爲之。凡三幅。長與身齊。不緝邊。
布頭★
補註。用稍細布一條爲之。長八寸。用以束髮根。垂其餘於後。儀禮布總。是也。
竹釵
042_528c補註。削竹爲之。長五六寸。
麻屨
補註。婦人屨。周禮散屨。註云散屨。去餙。
庶子不得爲長子三年。小註下六條同
(補)宋皇祐中。石祖仁之祖父中立亡。叔從簡成服而繼亡。祖仁自請已乃適孫。乞下禮院定奪承祖父重服云。則雖有適孫。而庶子得爲父後。宗法之廢可知。程太中之喪。明道亡。明道有子。而歸伊川。亦恐遵宋朝此法。而大中之遺命也。
042_528d
疊也。入聲。
領必有袷
袷音劫。交領也。○袷音夾。或作俠。夾衣也。
箭筓長尺
記。南宮縚之妻之姑之喪。夫子誨之髽曰。爾無從從爾。爾無扈扈爾。榛以爲筓長尺而總八寸。註。縚妻。夫子兄女也。從從。高也。扈扈。廣也。言髽不可太高。又不可太廣。又敎筓總之法。齊衰用榛筓。
外其餙向外編之
042_529a疏曰。收其餘末向外。取醜惡也。
祖父卒而後爲祖母後者
(按)儀禮。爲人後者。於祖母及母。如所生子也。皆服齊衰三年於父祖旣卒之後。○(按)家禮。無父在爲母期一條。而楊氏以祖父卒而後爲祖母後者。齊衰三年云。不知祖雖在而亦三年也。
爲所後者之妻若子也
(按)所後者之母。如生母也。
大功
補註。言布之用功。粗大也
小功
042_529b補註。言布之用功。細小也。
姑爲適婦不爲舅後者小註
經傳註。適婦不爲舅後者。謂夫有廢疾。若他故。若死而無子。不受重者。小功。
緦麻
補註。緦麻。絲也。治其縷細如絲也。
漢戴德小註下二條同
西漢儒林傳。戴德與姪聖。同受禮於后蒼。德刪禮記。號大戴禮。宣帝時人也。
徐邈
042_529c晉書。徐邈下帷讀書。不遊城邑。學者宗之。
今人吉服不古而凶服古
問吉服旣用今制。獨喪服用古制。恐徒駭俗。朱子曰。駭俗些小事。
女適人者降服未滿被出大註
(補)宋朝宗法廢。嫡孫不得爲後。而少子亦得爲父後。故石祖仁祖父中立死未葬。其叔從簡爲父後而又亡。祖仁請追服。博士宋敏求議曰。服可再制明矣。已葬未葬。用再制服。折衷情禮云。則嫡子凡042_529d追服祖父者。父亡在期內。已服未除。則因變服之節。未葬之成服。旣葬之卒哭。期之練。宜成斬衰。以盡餘月。若期已除而吉服。則宜用女適人被出。已除本宗降服。不得追服之義。不得追服。明矣。
今之墨縗小註下二條同
左傳。墨以葬文公。○(按)晉文未葬。晉襄從戎。墨染其衰。喪服之變。於是始矣。
唐前上元元年
通鑑唐高宗上元初。詔行之。
申心喪三年
042_530a(補)程子曰。師不立服。不可立也。如顔, 閔之於孔子。雖斬衰三年。可也。其次。各有淺深。豈可一槪制服。○丘氏曰。宋儒黃榦喪其師朱子。弔服加麻。制如深衣。用冠絰。王栢喪其師何基。服深衣加絰帶。栢卒。其弟子金★祥加絰于白巾。絰如緦麻而小。帶用細苧。黃王金三子。皆朱門之適傳。非無稽也。後世欲服師之恩義者。宜準之以爲法。○檀弓註。心喪。身無衰麻之服。而心有哀戚之情。所謂若喪父而無服也。○孔子之喪。門人疑所服。子貢曰。昔者。夫子之喪顔淵。若喪子而無服。喪子路亦然。請喪042_530b夫子。若喪父而無服。○孔子之喪。二三子皆絰而出。羣居則絰。出則否。註。羣者。諸弟子相爲朋友之服也。出外而不免絰。所以隆師也。朋友爲服緦之絰帶。出則免之。弔服加麻者。出則變之。今出而不免絰。隆師也。無服。謂弔服加麻。疏云。疑衰麻。謂環絰也。五服絰皆兩股。惟環絰一股。
朝夕哭奠
儀禮。朝夕哭。婦人卽位于堂南上。(按)初喪。東向南上位次也。○丈夫卽位于門外。西面北上。(按)男子位于階下北上。尊殯也。初喪。堂上南上之位。亦尊042_530c尸也。以尸首向南也。○儀禮。辟。開也。廟門無事則閉。尙幽暗也。朝夕哭及奠辟。有事則開。○雜記。不帷。孝子欲見殯。思念其親。乃蹇殯帷。哭竟帷之。○儀禮經傳。撤大斂宿奠。○檀弓。朝奠日出。夕奠逮日。陰陽之交。庶幾遇之。○今(按)儀禮經傳。先朝哭次撤奠。次朝奠撤奠。次大斂奠。○補註。奉帛出。入靈床捧出也。
小註
都敎反。去聲。竹籠也。
入就靈座。大註
042_530d補註云。本註靈座。當作靈床。
哭無時
(按)儀禮疏。哭有三無時。未殯不絶聲。一無時也。卒哭以前。廬中思憶則哭。二無時也。旣練之後廬中。或十日或五日思憶則哭。三無時也。
不用金銀錢餙小註
錢。河西疑當作鏤

經。君使人弔。徹帷。主人不哭北面。弔者致命哭。○禮記。主人出迎送。衆主人不出而在尸東之位。初喪042_531a○曲禮曰。知生者弔。知死者傷。知生而不知死。弔而不傷。知死而不知生。傷而不弔。註曰。弔者。禮之恤乎外。傷者。情之痛於中。○經傳曰。族人之相爲也。宜弔不弔。宜免不免。有司罰之。註。弔。謂六世以往。免。謂五世。○經傳曰。魯人不弔同姓曰。吾以其疏遠也。子思曰。無恩之甚也。昔夫子曰。繼之以姓。義無絶也。右同姓必弔○檀弓曰。有殯。雖緦必往。(按)父母在殯。往弔緦喪。古禮如此。情所不能。恐難行也。右骨肉必弔○曾子問孔子曰。三年之喪。弔哭不亦虛乎。註。哭爲彼則不專於親。爲親則是妄弔。右三年之喪不042_531b○檀弓。子張死。曾子有母之喪。往哭之。或曰。齊衰不以弔。曾子曰。我弔也與哉。註。痛甚而往哭。非若凡弔右有母喪弔友○孔子兄子孔篾。與宓子賤偕仕。子問孔篾曰。何得何亡。對曰。未有所得而所亡者三。公事多急。不得弔死問疾。是朋友之道闕也。子賤對曰。雖有公事。無廢弔死問疾。是朋友篤也。子喟然曰。君子哉若人。右有公事不廢弔○檀弓。宋陽門之介夫死。司城子罕入而哭之哀。晉人覘宋者報於晉曰。介夫死而哭之哀。殆不可伐也。孔子聞之曰。善哉。覘國乎。詩云。凡民有喪。抉服救之。介夫。甲士042_531c也。右哭賤○左傳。襄仲哭公孫敖。不以怨廢親也。右哭怨○子晢攻殺伯有。子産枕之股而哭之。子晢欲攻子産。子皮曰。殺有禮。禍莫大焉。乃止。右哭不避難○記。死而不弔者三。畏壓溺。註。戰陣無勇。非孝也。其有畏而死者乎。君子不立乎巖墻之下。其有壓而死者乎。孝子舟而不游。其有溺而死者乎。三者非正命。故不弔。一說見理不明。畏愼而不知所出。自經溝瀆。此眞死於畏。似難專指戰陣無勇也。○左傳。琴張聞宗魯死。將往弔之。仲尼曰。齊豹之盜。孟縶之賊。女何弔爲。註。宗魯雖死。不避亂。齊豹之所042_531d以爲盜。孟縶之所以見賊。皆由宗魯也。○經傳傳曰。公族之刑者。不弔不爲服。哭于異姓之廟。爲忝祖。遠之也。素服居外。不聽樂。私喪之也。骨肉之親無絶。(按)不但公族私喪。亦可倣而行之也。右死非義不弔○檀弓。魯哀公使人弔蕢尙。遇諸道。畫宮而受弔。曾子曰。蕢尙。不如杞梁之妻之知禮也。杞梁妻迎柩於路。齊莊公使弔之。對曰。有先人之弊廬在。君無所辱命。右路不受弔○檀弓。弔於人。是日不樂。○行弔之日。不飮酒。不食肉。○左傳。弔生不及哀。非禮也。謂緩弔也。○曲禮曰。哭日不歌。○少儀。尊丈於042_532a已踰等。俟事不犆弔。事。謂待朝夕哭時。不犆弔。謂不獨弔。犆作恃○檀弓。齊者不弔。註。哀則動。

曲禮曰。弔喪不能賻。不問其所費。問疾不能遺。不問其所欲。註曰。徒問爲可愧也。○旣夕。知死者贈。知生者賻。疏。贈是玩好。施於死。賻。是補不足。施於生。○左傳。魯有齊怨。孝公薨。不廢喪紀。禮也。弔贈之數。不有廢。○又贈死不及尸。非禮也。
主人哭出。西向稽顙再拜。大註
先稽顙後再拜。○記。孔子曰。拜而稽顙。頹乎其順042_532b也。稽顙而後拜。頎乎其至也。三年之喪。吾從其至者。頎音懇註。拜以禮賓。稽顙以自致順者。先加敬於賓。頎者。惻隱之發也。至者。以其哀常在親。極其自盡之道也。
聞喪
(補)記。伯高死於衛。赴於孔子。孔子曰。吾惡乎哭諸。兄弟。吾哭諸廟。父之友。吾哭諸廟門之外。師。吾哭諸寢門之外。所知。吾哭諸野。於野則已疏。於寢門則已重。夫由賜也見我。吾哭諸賜氏。遂命子貢爲之主曰。爲爾哭也來者。拜之。知伯高而來者。勿拜042_532c也。(按)兄弟。內所親者。哭之廟。父友。聯於父而外所親者。哭之廟門外。師。其親視父。哭諸寢。友。其親視兄弟。哭諸寢門之外。所知。從交者。孔子哭伯高以野爲太疏。哭於子貢之家。君子行禮。詳審於哭位之次如此。弔生傷死。或拜或不拜。以稱其情如此。○記。孔子哭子路於中庭。有人弔者。夫子拜之。旣哭。進使者而問故。註。哭之中庭。師友之禮也。
三月而葬
王制。士三日而殯。三月而葬。○記。太公封於營丘。比及五世。皆反葬於周。君子曰樂其所自生。禮不042_532d忘其本。古之人有言曰。狐死正首丘。仁也。註。太公雖封於齊。留周爲太師。死葬於周。子孫不敢忘本。自齊反葬。五世親盡而後止也。○周公封魯。子孫不反葬於周者。次子在周。世承其采地。春秋周公。是也。右葬必先兆
廉范千里負喪大註下二條同
漢書。廉范年十五。往迎父柩。船沈俱溺。以救得免。明帝時擧茂才。治蜀。民歌其政。
郭平自賣營墓
漢書。郭平家貧力學。親死。賣身營墓。
葬日皆決於卜筮
042_533a曲禮。喪事先遠日。吉事先近日。
祠后土
問后土之祭。朱子曰。極而言之。似僭。然此卽古人中霤之祭。只以小者言之。非如天子所祭皇天后土之大者也。○丘氏濬曰。文公大全。有祀土地祭文。今擬改后土氏。爲土地之神云。○(按)與語類所載朱子前說不同。前說論祭之當否。此說稱號。恐不相背也。
大註下同
042_533b小記。祔葬者不筮宅。宅葬地也。前葬旣筮之。○王制。大司徒以本俗六。安萬民。二曰。族墳墓。同宗者。生相近死相迫。
攛柩
攛音竄。擲也。
(補)主人拜工匠。爲槨有功。主人拜之。
興化漳泉小註下五條同
一統志。漳泉。二州名。興化。郡名。
槨內實以和沙石灰
(按)槨內。用灰未穩。槨朽而灰孤立。旣不得外與炭042_533c隔爲一。又槨之底板腐陷。則灰不能安其基。似不可。
抱朴子
晉書。葛洪家貧力學。尤好神仙導養之術。求爲句漏令曰。非欲爲榮。以有丹耳。入羅浮山。著內外百餘篇。號抱朴子。尸解而去。
俟滿加蓋。復布沙灰。
(按)棺上面灰。恐無安頓處。棺朽終亦陷落。恐不可用。棺上之灰。灰旣厚。又與外物同心。可無崩陷。
籍溪先生
042_533d宋鑑。胡憲。安國從子。一意下學。力田奉親。朱子師事最久。世號籍溪先生。
不敢用全石
先生葬長子。其壙用石上蓋。厚一尺許。五六段橫湊之。兩傍及底五寸許。內外石灰炭末細沙黃泥築之。語類
母氏某封大註
母字下。恐落某字。
明器
檀弓曰。之死而致死之。不仁而不可爲也。之死而042_534a致生之。不知而不可爲也。是故。竹不成用。瓦不成味。音沫木不成斲。琴瑟張而不平。竽笙備而不和。其曰明器。神明之也。

補註。古稱苞苴。是也。曲禮註。苞者。苞裹魚肉之屬。苴者。以草藉器而貯物也。

論語註。筲。竹器。容斗二升。
五穀大註
稻黍稷麥菽也。出孟子朱子註。
音小註藥大註下五條同
042_534b馨夷切。平聲。酸也。
圓鑿圓枘
鑿音漕窄。孔也。枘音稅。刻木端入鑿者也。
音札流蘇
考索倦游錄。五綵錯爲之。同心而下垂者曰流蘇。

胡卦切。碍也。
帷㡛小註
042_534c㡛。謨郞切。上聲。在上曰㡛。所以衣柳也。

喪大記註。在路障車。入槨障柩。
五寸五分約小註
約。他本作弱。
致柩於其上北首大註
朝廟時北首。順死者之孝心。
遂匠小註下三條同
本註。遂人匠人也。遂人。主引徒役。匠人。主載柩窆。042_534d職相左右也。疏。周禮。遂人匠人。主其葬事。
夷床
旣夕禮。夷之言。尸也。
遷于祖
遷。他本作朝。
不設柩東
本疏。小斂奠設于尸東者。以其始死。未忍異於生。大斂以後奠。皆設于堂中。亦不統於柩。
遂遷于廳事
補註。遷柩在廳事正中。所以倣古啓殯之意也。
設祖奠
042_535a旣夕註。將行而飮酒曰祖。
置席上北首大註
(按)記曰。死者北首。生者南鄕。今始北首。是用死道也。禮運註。死者仆故言首。生者興故言鄕。
乃窆
窆。下棺也。陂險切。去聲。○張子曰。安穴之次。設如尊穴。南鄕北首。陪葬者前爲兩列。亦須北首。各於其穴安。
玄纁大註
042_535b書禹貢註。玄。亦黑色幣也。纁。絳色幣也。
加灰隔內外蓋
(按)灰隔。隔灰之薄板也。狀如外棺。內外蓋。乃隔灰薄板之內外蓋也。內蓋。在柩上隔瀝靑。外蓋。在瀝靑上隔灰沙。
府君神主大註下同
朱子曰。無爵曰府君。官謂之明府。父謂之家府。
形歸窀穸
左傳襄十三年註。窀。張綸切。厚也。穸音夕。夜也。厚夜。猶長夜。謂葬埋也。

042_535c記。孔子旣得合葬於防曰。古也墓而不墳。今丘也。東西南北之人也。不可以不識也。封之崇四尺。註。孔子生三歲而叔梁紇死也。○記。防墓崩。孔子泫然流涕曰。吾聞之。古不修墓。註。敬謹之至。無事於修也。
隋文帝小註下同
隋書。文帝名堅。簒周平陳。混一天下。
嗚呼。有吳延陵季子之墓。
一統志。季札墓在常州江陰縣。孔子題碑。歲久湮042_535d沒。宋守朱彦明。復取孔子所書十字。刻碑表識。
反哭
問喪曰。入門而不見也。上堂又不見也。入室又不見也亡矣。不可復見矣。故辟踊盡哀。
詣靈座前。焚香再拜。大註
(按)降神禮。焚香再拜。酹酒再拜。與祠堂章降神禮同。時祭無一再拜。恐落。
進饌
(按)旣再曰如朝奠而具饌。進饌。皆無飯羹。今於祝文。有粢盛。粢盛祭飯也似不可曉。丘濬儀節。有飯羹。恐042_536a無害也。然侑食。又無扱匙飯中之節。家禮則無飯丁寧矣。又卒哭。始云主人奉羹。主婦奉飯。虞之無飯羹。亦明矣。
柔日
曲禮。外事以剛日。內事以柔日。註。外事。治兵巡狩朝聘盟會。內事。祭冠昏。(按)與此少異。

補註。祔之爲言。祔也。告祖父當遷。告新死者當入也。
非宗子則大註下同
042_536b(按)喪人非繼曾祖之宗子。不得主祔祭。
宗子不拜
(按)此詣亡者前不拜。
大祥
記。孔子旣祥五日。彈琴而不成聲。十日而成笙歌。(按)古今異禮。(補)朱子曰。親喪。兄弟先滿者先除服。後滿者後除服。以在外聞喪。有先後者。○問。妻喪。未葬已葬。未除服。當祭否。祭宜何服。朱子曰。恐不當祭。某家廢四時正祭。朱子喪妻故云猶存節祀。深衣涼衫之屬。亦以042_536c義起。無正禮可考。忌者。喪之餘。祭似無嫌。然正寢已設几筵。無祭處。恐可暫停
如布服小注
朱子大全。布作弔。

記。孟獻子禫懸而不樂。比御而不入。夫子曰。獻子加於人一等矣。(按)與喪大記異。
下旬卜日
曲禮。凡卜筮日。旬之外曰遠某日。旬之內曰近某日。喪事先遠日。吉事先近日。註。喪事。葬與二祥。示042_536d不急。伸孝心也。


居喪雜儀 a_042_536d


如有窮
疏曰。事盡理屈爲窮。孝子匍匐而哭之。心形充屈。如急行道。極窮急之容也。
瞿瞿
眼目速瞻之貌。如有所失。求覓之不得然也。
皇皇
猶棲棲也。親歸草土。孝心無所依托。如有望彼來。而彼不至也。
練而慨然
042_537a至小祥。但慨嘆日月若馳之速也。
祥而廓然
至大祥。情意寥廓不樂而已。
顔丁
魯人
小連大連
雜記註。東夷之人。不學而知禮者也。

補註。口所習也。
高柴
042_537b字子皐。孔子弟子。衛人。孔子稱其愚。
身有瘍
瘍。余章切。瘍癰也。又病也。
(補)曲禮曰。居喪之禮。毁瘠不形。視聽不衰。註。居喪許羸瘦。不許骨露見。又毁不滅性。○曲禮。升降不由阼階。出入不當門隧。註。執人子之禮。未忍廢也。○又不勝喪。乃比於不慈不孝。○曲禮。五十不致毁。六十不毁。七十唯衰麻在身。飮酒食肉。處於內。
强加餰粥042_537c
餰。同饘。諸延切。厚曰饘。稀曰粥。
龜峯先生集卷之八


家禮註說三
祭禮 a_042_538a


祭禮
記曰。祭者。所以追養繼孝也。註曰。追其不及之養。而繼其未盡之孝也。○朱子曰。古人誠實。直是見得幽明一致。如在其上下左右。非心知其不然。姑爲是言。以設敎也。○朱子曰。自弔魂復魄。立重設主。便是常要接續他些子精神在這裡。○又曰。聖人敎人子孫常常祭祀。也要聚得他。○問。旣■往042_538b爲鬼。何故謂祖考來格。朱子曰。所謂來格。亦■有神底意思。以我之精神。感彼之精神。蓋謂此也。○孔子曰。使天下之人。齊明盛服。以承祭祀。洋洋乎如在其上。如在其左右。問。洋洋如在。朱子曰。亦須自家有以感之。始得。○記曰。孝子之祭也。進退必敬。如親聽命。註曰。進退之間。如親聆父母之命。若有使之者。○問鬼神之義。來敎云。只思上蔡祖考精神。便是自家精神一句。則可見其苗脈矣。某嘗讀太極圖義。有云人物之始。以氣化而生者也。氣聚成形。則形交氣感。遂以形化。人物生生。變化無042_538c窮。是知人物在天地間。其生生不窮者固理也。其聚而生。散而死者則氣也。有是理則有是氣。氣聚於此。則其理亦命於此。今所謂氣者。旣已化而無有矣。則所謂理者。抑於何而寓耶。然吾之此身。卽祖考之遺體。祖考之所具以爲祖考者。皆具於我而未嘗亡也。是其魂陞魄降。雖已化而無有。然理之根於彼者。旣無止息。氣之具於我者。無復間斷。吾能致精竭誠以求之。此氣旣純一而無所雜。則此理自昭著而不可掩。此其苗脈之較然可覩者也。上蔡云。三日齋七日戒。求諸陰陽上下。只是要042_538d集自家精神。蓋我之精神。卽祖考之精神。在我者旣身。卽是祖考之來格也。朱子曰。所喩鬼神之說。甚精密。○子思曰。夫微之顯。誠之不可掩如此夫。延平李氏曰。於承祭祀時。鬼神之理。昭然易見。○問。旁親及子是一氣。至於祭妻及外親。其精神。非親之精神矣。豈於此但以心感之而不以氣乎。朱子曰。蓋本從一源中流出。初無間隔。雖天地山川鬼神。亦然也。○記曰。治人之道。莫急於禮。禮有五經。莫重於祭。註。五禮。吉凶軍賓嘉。○記曰。祭者。敎之本也。○又曰。祭有十倫焉。見事鬼神之道焉。見042_539a君臣之義焉。見父子之倫焉。見貴賤之等焉。見親疏之殺焉。見爵賞之施焉。見夫婦之別焉。見政事之均焉。見長幼之序焉。見上下之際焉。此之謂十倫。○記曰。祭不欲數。數則煩。煩則不敬。祭不欲疏。疏則怠。怠則忘。○尙書大傳。祭之爲言。察也。察者。至也。人事至祭。○孔子曰。衆生必死。死必歸土。此之謂鬼。骨肉斃于下。陰去聲爲野土。其氣發揚于上。爲昭明焄蒿悽愴。此百物之精神之著也。朱子曰。鬼神之露光景。是昭明。其氣蒸上。感觸人者。是焄蒿。使人精神凜然竦然。是悽愴。○問。天地山042_539b川有箇物事。其神可致。人死氣散。如何致之。朱子曰。只是一氣。子孫有箇氣在此。畢竟是因何有此。其所自來。蓋自厥初生民。氣化之祖相傳到此。只是此氣。○朱子曰。自天地言之。只是一箇氣。自一身言之。我之氣卽祖先之氣。亦只是一箇氣。所以纔感必應。○曲禮。祭事不言凶。註。祭。吉事也。吉凶不相干。○易之萃曰。王假吏白切有廟。朱子曰。廟所以聚祖考之精神。人必能聚己之精神。可以至于廟而承祖考也。○程子曰。天下萃合人心。總攝衆志之道。莫過於宗廟祭祀之報本於人心。聖人制042_539c禮。以成其德耳。○又易曰。萃不以正。其能享乎。○曲禮曰。非其所祭而祭之。名曰淫祀。○北溪陳氏曰。今人於祭自己祖宗。却都鹵莽。外面祀他鬼神。必極誠敬。不知他鬼神於己。何相干涉。若是正神。不歆非類。若是淫邪。竊食而已。必無降福之理。○問。祖先非士人。而子孫欲變其家風。以禮祭之。祖先不曉。却如何。朱子曰。公曉得。祖先便曉得。○記曰。惟聖人爲能饗帝。孝子爲能饗親。饗者。鄕也。鄕之然後爲能饗焉。註曰。志之所鄕然後能饗。○朱子曰。祭祀之感格。非有一物積于空虛之中。以待042_539d子孫之求也。盡其誠敬感格之時。此氣固寓此也。○程子曰。凡事死之理。當厚於奉生者。朱子曰。但以誠敬爲主。其他儀則。隨家豐約。如一羹一飯。皆可自盡其誠。(按)家家事神。宜厚於奉生。亦不必拘此品數也。○曾子問曰。宗子爲士。庶子爲大夫。其祭如之何。孔子曰。以上牲祭於宗子之家。祝曰孝子某。爲介子薦其常事。○記曰。夫祭者。非物自外至者也。自中出生於心者也。註。盡其心者。祭之本。盡其物者。祭之末也。○孔子曰。父爲大夫。子爲士。葬以大夫。祭以士。父爲士。子爲大夫。葬以士。祭以042_540a大夫。朱子曰。祭用生者之祿。(按)以士之祿大夫之祿。旣得豐殺于祭。則貧富亦然。不必拘一例也。○易之損曰。曷之用二簋。可用享。程子曰。損者。損浮末而就本實也。享祀之禮。誠敬爲本。餙過其誠則爲僞矣。故云二簋之約。可用享祭。享祭。誠爲本也。○記曰。外則盡物。內則盡志。(按)物與誠交盡。然後可以爲祭。○記曰。孝子將祭。慮事不可以不預。比時具物。不可以不備。虛中以治之。註曰。比時。及時也。虛中。心無雜念也。○易曰。東隣殺牛。不如西隣之禴祭。實受其福。註。殺牛。盛祭也。禴祭。薄祭也。○042_540b經傳曰。庶子富則具二牲。獻其賢者於宗子。終事而後敢私祭。賢猶善也疏曰。大宗小宗皆然。○王制曰。喪祭。用不足曰暴。有餘曰浩。祭豐年不奢。凶年不儉。註。暴。言不齊整也。浩。泛濫之義。(按)禮有定制。亦不可加損也。
四時祭
孔子曰。春秋祭祀。以時思之。○記曰。祭則觀其敬而時也。註曰。禮時爲大。○公羊子曰。士不及玆四者。則冬不裘夏不葛。註。四者。四時之祭也。
何休小註下三條同
042_540c漢書。何休字卻公。硏精六經。
特豚
士婚禮註。特猶一也。
春薦韭以雁
王制本註。韭之性溫。則陽類也。故以配邜。陰物故也。麥與黍。皆南方之穀。亦陽類也。故配以魚與豚。皆陰類也。稻爲西方之穀。則陰類也。故配以雁。雁陽物故也。植物之陽者。配以動物之陰。植物之陰者。配以動物之陽。亦使陽不勝陰。陰不勝陽而已。
庶羞不踰牲
042_540d王制曰。庶羞不踰牲。燕衣不踰祭服。寢不踰廟。註。此三者。皆言薄於奉己。厚於事神也。(按)今看本文。與高氏所引。義稍異。
諏此歲事大註下二條同
諏。聚謀也。
適其祖考
適意所必從曰適。皆出韻會
來月某日事于祖考
(按)禰祭。稱改祖考妣爲考妣。則今於考下落妣字。
孟詵小註下同
042_541a孟詵。唐鑑。登進士致仕。所在春秋給羊酒。
二至二分
問。時祭用淸明之類。或是忌日。則如之何。朱子曰。却不思量到此。古人所以貴於卜日也。(按)朱子之言。又如此。二分二至。定不可爲式也。
齋戒
記曰。齋之爲言。齊也。齊不齊。以致齋者也。○記曰。將齊也。防其邪物。訖其耆欲。耳不聽樂。又曰。心不苟慮。必依於道。手足不苟動。必依於禮。○又曰。散齋七日以定之。致齋三日以齊之。定之之謂齊。齊042_541b者。精明之至也。然後可以交於神明。○記曰。致齋於內。散齋於外。○記曰。齊者。不樂不弔。註曰。樂則散。哀則動。皆有害於齊也。
不得茹葷大註
葷。荀子註。蔥薤也。○爾雅翼云。大蒜小蒜興渠慈蔥茖蔥爲五葷。
齋之日。思其居處。小註下六條同
程子曰。思其居處。思其笑語。此孝子平日思親之心。非齊也。齊不用有思。有思則非齊。齊三日。必見其所爲齊者。此非聖人之語。齊者。湛然純一。方能042_541c與鬼神接。然能事鬼神。已是上一等人(按)程子之說高。而無下手處。恐或未穩。
雖七廟五廟。亦止於高祖。
王制。天子七廟。三昭三穆。與太祖之廟。諸侯五廟。二昭二穆。與太祖之廟。大夫三廟。一昭一穆。與太祖之廟。士一廟。庶人祭於寢。(按)皆降殺以兩。○朱子曰。祖有功而宗有德。是爲百世不遷之廟。○朱子曰。天子太祖。百世不遷。一昭一穆爲宗。亦百世不遷。二昭二穆。爲四親廟。親盡則遞遷。諸侯則無二宗。大夫又無二廟。其遷毁之次。則與天子同。○042_541d祭法。大夫三廟。無高祖廟。○祭法。王立七廟。諸侯立五廟。王及諸侯月祭之大夫立三廟。享嘗乃止儀禮經傳傳曰。周日祭。註。日祭於祖考。謂上食也。漢亦然。○朱子曰。太祖太宗仁宗。功德茂盛。宜準周之文武。百世不遷。號爲世室。宗亦曰世室(按)朱子欲以僖祖爲始祖。百世不遷。故以太祖太宗爲世室。無常數。苟有功德則宗之。不可預爲設數。殷有三宗。周公擧之。以勸成王。由是言宗無數也。語意出朱子大全○朱子又以高宗中興故。亦欲爲世室而不遷之。○朱子曰。周制。后稷始封。文武受命而王。故三廟不毁。與親042_542a廟四而七者。諸儒之說也。謂三昭三穆與太祖之廟而七。文武爲宗。不在數中者。劉歆之說也。其數不同。劉歆說較是。
月祭享嘗之別
經傳經曰先王日祭月享時類歲祀諸侯舍日卿大夫舍月庶人舍時註三日祭於祖考月享於曾祖時類及二祧歲祀於壇墠出國語
大夫有事。省於其君。干祫。
大傳。大夫士有大事。省於其君。干祫。及其高祖。註。大事。謂祫祭也。不敢私自擧行。省於其君。而君賜042_542b之。乃得行焉。而其祫也上及高祖。干者。自下干上之義。以卑者而行尊者之禮。故謂之干祫。
二主
(按)乃下文影與祀板也。
支子所得自主之祭
(按)支子自主之祭。乃繼禰繼祖等小宗也。卽祠堂章所謂祭之次日。却令次位子孫自祭者也。
或以物助之
程子曰。支子雖不祭。齋戒致誠。與主祭者不異。可與則以身執事。不可與則以物助。
省牲
042_542c儀禮經傳曰。牲孕。祭帝不用。(按)不但祭帝。凡祭皆宜不用。
具饌
(按)四時具饌。泛言魚肉。而雖無用生明文。朱子曰。大抵鬼神。用生物。祭者。皆是假生氣爲靈。古人釁鐘釁龜。皆此意也。司馬公祭儀。亦用生。家禮。始祖亦用生。宜用生無疑矣。
饅頭大註下二條同
韻會。饅頭。餠也。

042_542d或作餻。周禮。籩人。糗餌粉餈。註。方言餌。謂之餻餈。記註。稻。餠也。炊米搗之。粉餈。以豆爲粉。出內則
一串
韓詩。如以肉貫串。串。初限切韻會。作丳。
膾軒小註下同
內則。腥食。細切爲膾。大切爲軒。
隨鄕土所有。
禮器云。天不生。地不養。君子不以爲禮。鬼神不饗也。居山以魚鼈爲禮。居澤以鹿豕爲禮。君子謂之042_543a不知禮。註。天不生。謂非時之物也。地不養。如山之魚鼈。澤之鹿豕。
玄酒大註下同
禮運註。太古無酒。用水行禮。後王重古。名爲玄酒。祭則設於室而近北也。○丘氏亦曰。實水以點茶。
熾炭于爐
丘氏濬曰。熾炭炙肝肉。(按)亦用煖酒。
質明
檀弓曰。夏后氏大事用昏。商人大事用日中。周人大事用日出。夏尙黑用昏。故祭其闇。商尙白用日042_543b中。故祭其陽。周尙赤用日出。故祭以朝及闇。(按)子路祭於季氏。質明而行事。晏朝而退。孔子取之。此周禮也。然禮與其失於晏也。寧早。
奉主就位
曲禮曰。凡奉者當心。提者當帶。○朱子曰。神主之位東向。尸在神主之北。又曰。夏立尸。商坐尸。周旅酬。先王衣服。藏之廟中。臨祭衣尸。○子曰。古者男爲男尸。女爲女尸。自周以來。女無可以爲尸者。故無女尸。後世遂無尸。能爲尸者。亦非尋常人。○朱子曰。儀禮。周公祭泰山。召公爲尸。○(愚按)無可尸042_543c而尸禮旣廢。無可祭而祭禮將廢。尸禮廢而有主可祭。祭禮廢而誰可爲祭。主祭者可不動念。
盛服大註下同
(補)曲禮。有田祿者。先爲祭服。祭服獘則焚之。祭器獘則埋之。牲死則埋之。註。人所用則焚之。陽也。鬼神所用則埋之。陰也。
主婦西階下
(按)告日之儀。無西階位次。故今又別錄。皆同朔望儀。
灌用鬱小註
042_543d郊特牲註。周人尙氣臭。先求諸陰。故牲之未殺。先酌鬯酒。灌地以求神。以鬯之有芳氣也。又搗鬱金香草。和合鬯酒。使香氣滋甚。以臭而求諸陰。其臭下達於淵泉矣。蕭。香蒿也。取蒿及牲之脂膋。合黍稷而燒。使旁達於墻屋之間。是以臭而求諸陽也。此天子諸侯之禮。丘氏濬曰。鬯用秬黍爲酒也。膋音僚腸間脂也
焚香大註下同
(按)祠堂章。降神。焚香再拜。酹酒再拜。所以求諸陽再拜。求諸陰再拜也。今闕焚香再拜。不可不添入。042_544a○語類云。溫公書儀。以香代爇蕭。揚子直不用。以爲香只是佛家用之。○丘濬曰。按古無今世之香。漢以前。只是焚蘭芷蕭艾之類。後百越入中國。始有之。雖無古禮。然通用已久。鬼神亦安之矣。
俛伏興再拜
(按)祠堂章。酹酒。伏興少退而再拜。今闕宜添入。
以茅縮酌小註
周禮天官。祭祀供蕭茅。註。蕭讀爲縮。束茅立之。沃酒其上。酒滲下去。若神飮之。故謂之縮。○又左傳。齊桓伐楚曰。爾貢包茅不入。無以縮酒。
進饌
042_544b曲禮。進食之禮。食居人之左。羹居人之右。疏曰。燥居左濕居右。
主人陞。主婦從之。大註下四條同
(按)記曰。祭也者。必夫婦親之。所以備內外之官也。自漢以來。后無入廟之事。相循至今。古者。宗廟九獻。王及后各四臣一之禮遂廢。
祭之茅上
語曰。君祭先飯。○胡廣曰。古者。賓得主人饌。則老者一人。擧酒以祭地。故凡官名祭酒。皆一位之長。042_544c○(按)準以古禮。則宜高祖考獨祭。而每位皆祭。似未可知也。然朱子渾祭各位。必有所見。今不可改。
炙肝于爐
(按)炙有二音。肉之方燔入聲。已燔去聲。
粢盛
粢。廣韻。祭飯。盛。古今韻會。在器曰盛。又曲禮註。祭祀之飯。謂之粢盛。
柔毛剛鬣
曲禮。天子以犧牛。諸侯以肥牛。大夫以索牛。士以羊豕。(按)註。色純曰犧。養於滌者曰肥。求而用之曰042_544d索。○凡祭牛曰一元大武。註。元。頭也。武。足迹。牛肥則迹大。○豕曰剛鬣。豕肥則鬣剛。○豚曰腯。音突肥腯者。充滿之貌。○羊曰柔毛。羊肥則毛細而柔。○鷄曰翰音。翰。長也。鷄肥則聲長。○犬曰羹獻。犬肥則可爲羹以獻。○雉曰疏趾。雉肥則兩足開張。故曰疏趾。○兔曰明視。兔肥則視明。○脯曰尹祭。尹。正也。脯欲剸割方正。○槀魚曰商祭。槀。乾也。商。度也。度其燥濕之宜。○鮮魚曰脡祭。脡。直也。魚之鮮者直。○水曰淸滌。玄酒也。可濯故曰淸滌。○酒曰淸酌。古之酒醴。有淸有糟。未泲者爲糟。旣泲者爲042_545a淸。
初獻
(補)虞祭獻盞。執事爲之。時祭則主人爲之。○(按)虞祭。初用祭禮。喪人哭泣之餘。未堪自奠。何得與時祭同。不但虞祭。神位惟一。故異而已。
少牢饋食○士虞特牲○鄕射大射小註下同
幷儀禮篇名。
獲者獻侯
註。獲者。以候爲功。是以獻爲獲中也。鄕射。東方謂之右箇。註。候以鄕堂爲西。疏。左右箇。不辨東西。故042_545b記人明之。
扱匙飯中大註下同
扱。古今韻會。通作插。○(按)匙插飯中而西柄。筋留楪上而正之矣。
此所謂厭也
韻會。厭與饜同。去聲。飽也。○禮記註。厭有陰厭陽厭。不知神之所在。於彼於此。皆庶幾其享之而厭飫也。出曾子問
一食九飯之頃小註
曲禮。三飯。疏。三飯謂三飯而告飽。勸乃更食。故三042_545c飯竟。主人乃道客食胾也。此乃賓主之禮。○天子十五飯。諸侯十三飯。九飯。士禮也。三飯又三飯又三飯。出小牢饋食禮疏○小牢饋食禮註。食大名小數曰飯。○特牲饋食禮註。三飯。禮一成也。又三飯又三飯。禮三成也。
受胙
胙音阼。祭餘也。
啐酒大註下八條同
禮記註曰。入口爲啐。酒至齒爲嚌。啐七內切。

042_545d禮運註。嘏。爲尸致福主人之辭也。古雅反○禮運註。祭禮祝於始。嘏於終禮之成也。

詩楚茨註。善其事曰工。

詩楚茨註。承。傳也。
致多福于
記曰。賢者之祭也。必受其福。非世所謂福也。福者備也。備者。百順之名也。○記曰。明薦之而已矣。不求其爲。註曰。不求其爲。無求福之心。所謂祭祀不042_546a祈也。
來汝
詩楚茨註。來讀曰釐賜也。
勿替引之
詩楚茨註。引。長也。
實于左袂
少牢饋食禮註。實於左袂。便右手也。季。猶小也。
告利成
儀禮。特牲饋食。註云。利。猶養也。供養之禮成。不言禮畢。有遣尸之嫌。○(按)朱子旣後韓魏公。而著受042_546b胙禮於此。宜從朱子行之無疑。
辭神
問。祖考精神旣散。必須三日齋七日戒。求諸陽求諸陰。方得他聚。然其聚也倏忽到得。禱祠旣畢。誠敬旣散。則又倏然而散。朱子曰然。

祭儀曰。及祭之後。陶陶遂遂。如將復入然。不欲遽去。愛敬之無已也。○詩曰。被之祁祁。薄言還歸。朱子曰。祁祁。舒遲貌。去事有儀也。記曰。祭之日。樂與哀半。饗之必樂。已至必哀。註。必樂。迎其來也。禮畢042_546c往矣。故哀也。

記曰。餕者。祭之末也。古人有言曰。善終者如是。餕其是已。註曰。謹夫餕之禮者。愼終如始也。○記曰。祭者。澤之大者也。上有大澤。則惠必及下。故曰可以觀政。註。由餕見惠。故曰可以觀政。○經傳經曰。燕私者。何也。祭已而與族人飮。不醉而出。是不親也。醉而不出。是渫宗也。出不止。是不忠也。親而甚敬。忠而不倦。若是則兄弟之道備。
諸婦女獻男尊壽大註下同
042_546d坊記子云。禮非祭。男女不交爵。註。先儒謂同姓則親獻。異姓則使人攝。
其日皆盡
語云。祭肉不出三日。朱子曰。過三日則肉必敗。是褻神之餘也。
無算爵小註
有司徹。註。唯己所欲。無有次第之數也。○(補)記曰。文王之祭禮也。明發不寐。饗而致之。又從而思之。註曰。祭之明日。猶且如此。況祭之正日乎。○行五祀。曾子問天子未殯。五祀之祭不行。士喪禮。禱于042_547a五祀。○記註。自天子至士。皆祭五祀。五祀。春祭戶。夏祭竈。季夏祭中霤。秋祭門。冬祭行。○(按)今世。五祀旣廢。時祭罷。倣朱子行祭。恐不得不爲也。○記。曾子問孔子曰。過時不祭。禮也。註。如春祭時。或以事故阻廢。至夏則惟行夏之祭。不復追補春祭矣。此止謂四時常祭。禘祫不然。
初祖
喪服傳。諸侯及其太祖。天子及其始祖之所自出。註。太祖。始封之君。始祖者。感神靈而生。若稷契也。自。由也。始祖之所由出。謂祭天也。(按)初祖始祖。異042_547b名而同一祖也。○朱子曰。祫祭。止於太祖。禘又祭祖之所自出。○韓愈氏曰。祫者。合也。毁廟之主。皆合食於太祖之廟。○趙伯循曰。禘者。王者之大祭也。又推始祖之所自出。祀於始祖之廟。以始祖配之也。
祠堂大註下七條同
(按)祠堂。未知何處。補註云。設於墓所。卽祠堂章所謂始祖親盡。則藏主於墓所處也。楊氏復所云必有祠堂。以奉遷主者也。然今所云祠堂未知定指此處也。
束茅之下
042_547c(按)之字。他本作以。
杆六
杆音干。旣夕禮註。盛湯漿。又食器。
毛血爲一盤
祭儀。袒而毛牛尙耳。註。袒。示有事也。將殺牲。先取耳旁毛以薦神。毛以告全。耳以主聽。欲神聽之也。以耳毛爲上。故云尙耳。
首心肝肺爲一盤
郊特牲。血祭。盛氣也。祭肺肝心。貴氣主也。註。有血042_547d有氣。乃爲生物。肺肝心。皆氣之所舍。故云氣主。周祭肺。殷祭肝。夏祭心。首亦陽體。魂歸天爲陽。此以陽物。報陽靈也。○儀禮經傳曰。有虞氏祭首。
左胖不用
旣夕禮。升羊左胖。註。反吉祭也。吉祭。升右胖。用左胖。反吉祭也。○少牢饋食禮。升羊右胖。脾不升。註。升。猶上也。上右胖。周所貴也。脾不升。近竅賤也。胖音判。
去近竅一節不用。凡十二體。
(按)後足近竅一節不用。則凡十一體也。二字恐誤。042_548a祭先祖。歷言支體。而後足亦用二端。則二字。乃一字之誤無疑也。
毛血腥盤
禮記曰。禮之近人情者。非其至者也。註。近者爲褻。遠者爲敬。郊祀皆有腥血。註。全乎天者莫如血。故郊特牲曰。至敬不饗味而貴氣臭也。
匾盂小註
匾音扁。上聲。器之簿又不圓貌。盂音于。飯器。
鉶羹大羹大註下三條同
鉶音刑。盛和羹器。○(按)大羹。卽肉湆不和者。鉶羹。042_548b卽肉湆以菜者。大羹。太古之羹也。肉汁無鹽梅之和。亦尙玄酒之意。鉶羹。鉶鼎所實者。具五味也。湆音急。去急反。煮肉汁也。今文湆皆作汁。
炙肝加鹽
特牲饋食禮註。肝宜鹽也。○按祭無加鹽者。以庶羞等饌。各調鹽梅故也。此禮則多用古禮。反本復古。所以交於神者。非食味之道也。左傳曰。大羹不致。記曰。大羹不和。貴其質也。然則加鹽何義。此亦古禮也。鹽在肝右。詳在小牢饋食禮。
盤盞各二
042_548c(按)盞一位用二。未詳其義。或者先祖通稱高祖以上。而只設一位。故設二盞耶。
瘞毛血
(按)丘氏濬禮。以瘞字作進字。○禮祭畢。瘞毛血。今於進饌言瘞。未詳。

集說。考曰禰。禰。近也。禰。乃禮反。父廟曰禰。
受胙
(按)嘏辭。應改祖考曰考。
忌日
042_548d禮記註。忌日。親之死日也。○記曰。忌日不用。非不祥也。言夫日。志有所至。而不敢盡其私也。疏。非謂此日不善。此心極於念親。不敢盡其私情而營他事也。○朱子曰古無忌祭近日諸先生方考及此○(按)忌祭。朱子只設一位。程子配考妣。祭一位。禮之正也。○(按)朱子未祭之前。不見客。又母夫人忌日問服色。然則齊之不見客。可知。忌日祭後見人。亦可知矣。○記曰。文王之祭也。忌日必哀。○曲禮。卒哭乃諱。鄭玄曰。敬鬼神之名也。諱。避也。生不相避。○左傳。周人以諱事神。○問。忌日當哭不。朱子042_549a曰。哀來時自當哭。○問。在旅遇忌。於所舍設卓炷香可否。朱子曰。這般細微處。古人不曾說。若無大礙義理。行亦無害。○朱子曰。凡値遠諱。一家固自蔬食。其祭祀食物。以待賓客。○橫渠理窟云。忌日變服。爲曾祖祖考考妣。布冠帶麻衣履各有差。爲伯叔父母與兄。素衣帶有差。父則冠亦素。爲第姪。易褐不肉。爲庶母及嫂。一不肉。
主婦特䯻去餙大註
記原云。燧人始爲䯻。舜首餙。文王又加翠翹。○二儀實錄曰。䯻。繼也。言女子有繼于人也。但以髮相042_549b纏而無物繫縳也。
奉神主。出就正寢。
朱子曰。忌日。諸位不可獨享。故迎出。雖尊者之忌。亦迎出。雖無古制。可以意推。
墓祭
程子曰。葬只是藏體魄。而神則歸於廟。古人惟專精祭祀於廟。今亦用拜掃之禮。但簡於四時之祭也。○(按)今世正朝寒食端午秋夕。無異四時祭。寒食一節。用依三月上旬禮。讀祝行祭。餘用奠禮以殺之。似合古宜今。行之旣久。旣不可廢。而亦不可042_549c行也。○南軒曰。墓祭。非古也。○補註。周禮。有冢人之官。凡祭於墓爲尸。則成周盛時。亦有祭於其墓者。○(補)(按)無進饌一節。墓祭從簡也。○(按)禮攝主不厭墓。無侑食。亦從簡也。○進茶一節。恐不可闕也。
楮錢小註
(按)朱子語類。先生家祭享。不用紙錢云。家禮。亦無此禮。不可用也。
祭變禮
記。曾子問曰。大夫之祭。鼎俎旣陳。籩豆旣設。不得042_549d成禮。廢者幾。孔子曰九請問之。曰天子崩。后之喪。君薨。夫人之喪。君之太廟火。日食。三年之喪。齊衰。大功皆廢。士之所以異者。緦不祭。所祭於死者無服則祭。註。士卑於大夫。雖緦不祭。○無服。謂如妻之父母。母之兄弟姊妹。已雖有服。而所祭者無服則可祭。○位尊則以事廢者少。位卑則以事廢者多。○春秋經曰。有事于武宮。籥入。叔弓卒。去樂卒事。胡氏傳曰。禮莫重於當祭。大夫有變。變謂死喪祭而聞不可。內得盡其誠敬之心於宗廟。外全隱恤之意於大臣也。然則有事於宗廟。大臣涖事。籥042_550a入而卒於其所。去樂卒事其可也。緣先祖之心見大臣之卒。必聞樂不樂。緣孝子之心視已設之饌。必不忍輕徹。故去樂卒事其可也。細書大書。皆胡氏說。○記曰。君子之祭也。身親莅之。有故則使人可也。孔子曰。吾不與祭。如不祭。○堯卿問荊婦有所生母在家間。養百歲後。只歸祔於外氏之塋。如何。朱子曰亦可。又問神主歸於婦家。則婦家凌替。欲祀於家之別室。如何。曰不便。北人風俗如此。○二程全書。侯夫人病革。命伊川曰。今日百五。爲我祀父母。明年復不祀矣。朱子曰。是祀其外家也。然042_550b無禮經。○朱子曰。夫祭妻。亦當拜。○曲禮曰。祭服弊則焚之。祭器弊則埋之。龜筴弊則埋之。牲死則埋之。註。皆不欲人之褻之也。
尺圖
(按)家禮圖本。非朱子之作。不可爲則。又只圖其形而非圖長短者也。板各不同。又丘公儀節則太長。亦難取信。我國今作神主。周尺傳來雖久。常以爲疑。今考徐居正筆苑雜記。世宗時許稠得陳友諒子陳理家廟神主尺式。又得議郞姜天霔家尺本。乃其父判三司事姜碩弟有元院使金剛所藏042_550c象牙尺所傳也。面書云神主尺定式。以今官尺去二寸五分。用七寸五分。則與家禮附註潘時華所云周尺當今省尺七寸五分弱之語同。二本相較不差。於是始定尺制。凡神主與天文漏器。據此以爲定式。後赴京人買得新造神主來。寸分相合。今我國所用周尺。與中國同無疑矣云。今姑遵世宗朝所定用今尺。似合道理。
042_550d龜峯先生集卷之九


龜峯先生集卷之十
 附錄
行狀 a_042_551c


042_551d先生姓宋。諱翼弼。字雲長。礪山人。高麗貞烈公松禮之後。高祖根。曾祖小鐵。祖璘。直長。娶順興安氏某官某之女。生僉樞君。是爲先生之考。娶延日鄭氏。生四子一女。長諱仁弼。次諱富弼。次卽先生。而雲谷居士翰弼季鷹。其季也。先生以嘉靖甲午二月初十日卯時生。年七八歲。已下筆語輒驚人。及長。與弟雲谷俱發解高等。旣已不樂於京都朋儕間。遯居于高陽之龜峯山下。自甲申李栗谷旣歿。黨禍益深。壬人之仇嫉牛, 栗兩賢者。移怒於先生。丙戌歲禍遂作。乃與兄弟藏蹤避仇。重峯趙文烈公上章。亟訟其冤。且言其042_552a賢。請納其資級。以贖其身。以爲鳴谷山長。丁亥戊子。重峯連疏論之。而戊子則又言宋某徐起等俱有將帥之才。己丑冬。上有嚴命詣官自首。卽先生所云庚寅春。坐趙汝式上章救我。自作楚囚于帶方者也。賦詩有千里狂章那困我。聖心無滯若衡平之句。自注曰時聞趙汝式之救已。甚於張方平之疏云辛卯春。將有士林之禍。又適湖南。前此己丑夏。重峯已被謫。至是松江又遠竄。先生皆有詩以傷之。是歲聞黨禁。自作楚囚于鴻山。時重峯又上章。白衣挾砧斧。伏闕請死。先生聞而筆記曰。與汝式不相見近十載。以章中每稱鄙人。故有此042_552b按。及壬辰正月。到熙川謫所。松江時於江界圍置中。與人書云。近又龜公來泊不遠處。未知將來又作何等災怪也。七月。避賊入明文山。卽熙川地也。癸巳九月。蒙恩放還。郡有寒暄, 靜庵兩賢祠。蓋寒暄被謫時。靜庵負笈於此也。先生感慨昔賢遺跡。操文以祭而歸。甲午秋冬。寓身於楮塞之山中。哭仲兄默庵公。其後又哭弟雲谷。年月未詳丙申。又居沔川之馬羊村金僉樞進礪莊舍。牛溪寄書曰。備知寄居金家。主人仁賢。後生向風來學者衆。晩暮漂泊得此人。可謂幸矣。先生自是棲遲馬羊村凡數年。至己亥八月初八日。042_552c以疾卒于寓舍。壽六十六。葬于唐津北面元堂洞。與配昌寧成氏同原。成氏以嘉靖癸卯生。前一年戊戌卒。先生有一子。曰就方。側室有二子。曰就大。曰就實。一女適某。先生所著有太極問一卷禮問答一卷與牛栗辨論書尺一卷。藏于家。詩藁一卷。則門人竹西沈宗直。刊行於世。一時及門之士。指不勝屈。而沙溪金文元公, 愼獨齋金文敬公。以道學名。守夢鄭公曄, 藥峯徐公渻, 畸翁鄭大學士弘溟, 姜觀察燦, 許處士雨曁吾外王父參判金公諱某。或以文學。或以宦業。俱顯於世。噫。先生之世。今已遠矣。其平生本末。無所042_552d尋逐。間嘗見前輩所記。其言曰。己丑十二月。宣祖大王傳于刑曹曰。私奴宋某兄弟。蓄怨朝廷。期必生事。趙憲陳疏。無非此人指嗾云。此極痛惋者。況以奴叛主。逃躱不現。尤爲駭愕。捉囚窮推。宋某。祀連之子也。祀連以安瑭孼屬。告安處謙謀變成獄。得賞僉知。其諸子皆有才藝。翼弼初有詩名。與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岦,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等。號八文章。與弟翰弼。俱發解高等。交遊甚盛。史官李海壽等。以爲祀連旣爲罪人。禠其賞職。其子乃孼孫也。不當冒法赴擧。與同僚議停擧以錮之。山海等求釋不得。某復042_553a從李珥, 成渾。講論道學。識見通透。論議英發。開門授徒。學者日盛。號稱龜峯某。高自標置。與名卿士大夫抗禮序齒。不悅者亦多。當三司之攻李珥也。成渾欲上疏伸珥。而恐激怒反傷。且自以山野賤士。以退爲義。忽極論時事。未知如何。以書問于某。某答曰。尊兄受聖君知遇。旣陟朝端。則何不歷論時事。使前後殊命。不歸於虛文耶。雖欲以不出自處。今旣出矣。宜有所施爲。見其不可。然後可以歸來也。渾從之。自是重爲朝論所嫉。安氏子孫。從而起訟。決還賤籍。方欲殺而報讐。某等皆逃。李山海, 鄭澈等。互相藏匿。得不死。042_553b至是有飛語聞于上。故有是命某詣官自首。與翰弼俱竄極邊。由此。鄭仁弘等以交遊匪類。咎成, 李矣。於此可見其得禍源委也。後仁祖乙丑。文元公與守夢及諸同門陳疏。請滌賤籍。章下該曹。而事竟寢。後遂無再言者。謹按先輩之公評。則曰天稟甚高。文章亦高云者。象村申文貞公之言也。曰天資透悟。剖析精微。人所不及云者。澤堂李公之言也。而象村之又其論詩。則以爲材取盛唐。故其響淸。義取擊壤。故其辭理。和平寬博之旨。不失於羈窮流竄之際。優遊涵泳之樂。自適於風花雪月之間。其庶乎安時處順。哀042_553c樂不能入者矣。又曰。如柳深煙欲滴。池淨鷺忘飛之句。度越諸人。非徒淸葩可貴。理亦自到。至若當時名賢如李土亭。則其所贈詩篇曰。曩遇雲長初。實爲芸所幸。有意於汲古。從君借修綆。玄黃方寸間。鄒魯亶非迥。鑢鐋我須執。沙石子須磨。私情如或起。在邇還在遐。重峯則稱之曰。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牛, 栗皆作畏友。常如諸葛之於法正。且其敎誨之際。善發人意思。感奮自立。徐孤靑則語其學者曰。爾輩欲知諸葛之何狀。須見宋龜峯也。非但龜峯似諸葛。卽諸葛似龜峯也。其大爲諸老所重如此。蓋嘗聞之。042_553d先生風儀俊整。言論灑落。人之一接其面而聽其言者。莫不心醉起敬。北渚金相少負氣。不下於人。遇先生於山寺。爲撤業聽其言。閱旬不去。及其身都將相。語人曰。吾之得至今日者。繄當日親炙於龜峯是賴也。洪參議慶臣。初諫其兄寧原君可臣曰。吾兄何可與宋某友乎。吾見宋某。必辱之。寧原笑曰。爾能辱宋某乎。必不能也。後慶臣遇先生於寧原宅。不覺降階以迎。將禮甚敬。其言論風儀之有足動人者乃如此云。噫。以先生精博之學。通透之識。華國之文。經濟之才。限於門地。阨於黨禍。流離竄謫。不能少行其志。而042_554a終於窮悴以歿世。豈非斯文之厄而志士之所可慨耶。惟當世立言之君子。儻有以論撰著述。使其道學之實。昭揭於今與後。以爲不朽圖。則亦庶幾焉。重峯丙戌丁亥兩疏一段及甲子伸冤疏。幷附之於左。以備參攷云爾。歲甲寅季秋。後學李選。謹述。


丙戌疏

乃若宋翼弼。雖是祀連之子。而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足蓋父愆。珥, 渾皆作畏友。常如諸葛之於法正。且其敎誨之際。善發人意思。感奮自立。爲生進者亦克有徒。如金長生, 許雨。行義著于京042_554b外。姜燦, 鄭曄。俱有英發之才。以祖典言之。訓人有成。例有賞職。以華制言之。立賢無方。亘古以達今。珥之力通庶類。其意只在求賢以補闕。不是私一翼弼。而人多歸咎於珥。山海則謂翼弼曰。應南之爲濟牧。人言由君之囑也。君若自珥之死。卽與絶交。則可無此患。潑, 洁, 惟讓。又憎其兄弟與澈素厚。疑議已短。陰囑該官。盡廢四朝良籍。而枉法還賤。至使幾斃杖下。而幷子孫七十餘口。咸畏安氏報仇。破家奔竄。無所於歸。或云散丐京外。或云船飄海島。散丐則七十餘口。擧將爲溝中骨矣。船飄則042_554c七十餘口。擧將爲水賊之殲矣。嗚呼。聖恩如天。無物不春。至如大辟者。亦皆三覆。刑之少有疑端。必使廣收公議。以求生道。至有禽犢哀鳴。亦軫聖慮。至減酡酪之進。區中草木。皆有生意。而獨此七十餘口。迫之死域。而無一人愛惜也。臣之所管公州有孔巖精舍。舒川有鳴谷精舍。孔巖則有良人徐起者。曾學於李仲虎。學博而行全。傍人就學者或中生進。多有易敎之士。而鳴谷則別無主張之師。頃歲臣嘗一過。多見其開爽可敎者。而今此遍講。一無大進益者。臣意以爲宋翼弼及其不死於溝042_554d壑水賊。納臣資級。以與安氏。贖其身貰其罪。使道人漁子。遍招于邦域。儻其至也。則以爲鳴谷山長。因其才而善導之。則厥有成效。必勝於愚臣之十年提督矣。

丁亥疏
必使如宋賀之爲珥所棄者。俾治宋獄。骪法枉典。決使其百口飄亡。然後快於其意。嗚呼。珥之平生。惟以憂國憂民爲志。何負於此輩。而今之朝野。是珥者無老無少。無不中禍。非珥者無愚無不肖。無不超揚云云。
042_555a甲子伸冤疏在上。


龜峯先生集卷之十
 附錄
墓碣文宋時烈撰 a_042_555a


曩。同春宋公浚吉謂余曰。文元公金先生。師事栗谷李先生。以至道成德尊。然考其抽關啓鍵。導迪於一簣之初。則自龜峯先生。不可誣也。然其門下名賢巨公。不爲不多。而歿世七十餘年。墓道無刻。豈有待於吾儕耶。余諾其文而欲考其源委。則其子孫僅有存者。而亦不足徵也。旣而同春又歿。則無與成其事者矣。今刑曹參議李選擇之。卽金先生外曾孫也。嘗爲史官。遍考朝野載籍。仍得以悉其事之本末及諸公042_555b議論之詳。遂爲狀文一通以示余。昔洪景盧。爲作前人所未作者。以明道術源流。則朱先生以爲作史者。於此爲有功矣。擇之抑其人乎。諸老先生所未遑者。將有成乎。謹按先生姓宋。諱翼弼。字雲長。家在高陽龜峯山下。敎授學者。故學者稱以龜峯先生。其知舊亦以龜峯稱焉。其先出自礪山。其顯者。高麗貞烈公松禮也。其後微弊不振。祖璘。始爲雜職直長。父祀連。受通政階。事載栗谷先生所撰安貞愍墓碑。娶延日鄭氏女。生四子。先生其第三也。年七八歲。詩思淸越。有山家茅屋月參差之句。稍長。與弟翰弼。俱發解高042_555c等。自是聲名著聞。首與友善而推許者。李山海, 崔慶昌, 白光勳, 崔岦,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也。時人號爲八文章。然先生知科擧之外。有用心處。遂取性理諸書。日夕講討。不由師承。刃解氷釋。其文主於左馬氏。詩主於李白。至其論說理致。則通透灑落。無所礙滯。學者帖帖於前者。終日不絶。而酬酢不倦。其中虛往實歸者甚多。栗谷李先生, 牛溪成先生。知其有學術。投分相交。論辨義理。切磨甚篤。李先生嘗入場屋。對天道策。謂擧子來問者曰。宋雲長高明博洽。宜就而問之。於是擧場奔波。先生左酬右應。愈扣而愈無窮。042_555d擧子轉相傳錄。不但爲取應之具也。先生以古道自處。雖公卿貴人。旣與之友。則皆與抗禮。字而不官。人多竊罵。而亦不以爲意也。嘉靖癸未。栗谷先生慍于羣小。其所搆誣。甚於紹聖之世矣。成先生適被召至京。欲上章以明淑慝之辨。而又慮山野之人。常以退爲義。忽於此時。極論時事。無乃非語默之道耶。先生以書勸之曰。尊兄受聖主知遇。旣陟朝端。則不可以不出自處矣。何不於陰陽消長之際。明言善議。使公議得伸耶。成先生從其言。上益知讒邪媢嫉之狀。明示好惡之典。於是成先生大被詆毁。而於042_556a先生愈甚。遂謀所以報之者。會李先生遽棄後學。延平李公貴。欲爲李先生訟冤。先生爲草疏本。於是羣憾益怒。爭欲甘心於先生。而無言可執。遂嗾安貞愍子孫。謂先生祖母本安氏家婢。欲還其賤籍而滅其家。蓋貞愍公叔父監司寬厚有婢。侍貞愍考司藝公敦厚而生女。是爲先生祖母。生祀連而屬天文學。安氏子孫。謂祀連之母非司藝女。卽前夫所生而未良者也。李山海謂先生曰。君知今日之禍乎。祟在栗谷。若隨衆訾謗則免矣。先生曰。雖死何忍。安氏旣起訟。先生知禍且不測。遂與兄弟避仇。山海與鄭松江澈042_556b諸公。互相保納。時山海附於時輩。又結奧援以固寵。先生嘗作詩以譏之。詩中有荔枝連理等語。大忤山海。又重峯趙文烈公憲上疏。力辨栗谷, 牛溪之誣。而譏斥時輩。山海益銜之。遂有飛語入內。一日。上下于刑曹曰。私奴宋某兄弟。畜怨朝廷。期必生事。趙憲陳疏。無非此人指嗾。此極痛惋。捉囚窮推。先生遂自就理。與其弟翰弼。俱竄極邊。蓋翰弼亦能詩好議論。多怨於人也。壬辰倭變。先生自熙川謫所。避賊明文山中。癸巳蒙宥。郡有寒暄, 靜庵兩先生祠。先生感慨當日遭罹。爲文以祭。以見其志而歸。自是先生擧家042_556c失所。又時輩慫㥚安氏不已。先生雖蒙上意覺察冤狀。猶畏約懾處。知舊門人。爭相館待。學徒坌集。嘗寓沔川金僉樞進礪家。成先生寄書曰。主人仁賢。後生向風。晩暮漂泊。得此於人。可謂幸矣萬曆己亥八月八日。卒于沔川寓舍。壽六十六。門人會葬于唐津治北元堂洞。其配昌寧成氏。前卒而同原。子就方。側出就大, 就實。先生以高才邃學。始拘於門地。中被世累。終爲成, 李兩賢之株連。流離戹窮。以歿其世。可勝惜哉。惟其講明理致。以修其身。且以傳之來世。今金先生之學。爲世所宗。則先生之於斯文。亦可謂與042_556d有功焉。其餘開導成就者。如金文敬公集, 守夢鄭公曄,藥峯徐公渻, 畸翁鄭公弘溟, 監司姜公燦, 許處士雨, 參判金公槃。或以道學。或以宦業。傳道後生。輔毗王家。同春之先考郡守爾昌。亦受學於先生。以斅同春。卒爲名儒。則先生之身。雖困於世。而其道則不可謂不有光矣。若考於諸公論述。則重峯以爲到老劬書。學邃經明。行方言直。足蓋父愆。故成, 李兩賢。皆作畏友。且其敎誨。善於開發。使人感奮有立云。而至願納其官級。以雪其冤。李土亭之菡。則曰玄黃方寸間。鄒魯亶非迥。象村申公欽則曰。天稟甚高。文章亦妙。042_557a澤堂李公植則曰。天資透悟。剖析精微。徐孤靑起謂其學者曰。爾輩欲知諸葛孔明乎。惟見宋龜峯。可也。仍曰吾以爲諸葛似龜峯也。洪參議慶臣。每諫其兄寧原君可臣曰。兄何爲與宋某友乎。吾見宋某。必辱之。寧原笑曰。爾果辱宋某乎。必不能也。其後見先生至。不覺降階迎拜曰。非我拜也。膝自屈也。昇平金相公瑬。少自負不肯下人。一日邂逅先生於山寺。爲撤其業。日聽其言議。久不能去。及其成大勳業。身都將相。謂曰。吾之得至今日。繄當日親炙於龜峯之力也。一時稱道。不可勝記。而於此數者。足以知其大略也。042_557b惟是抱負旣大。自任甚重。頗有志於世道。金先生蓋嘗微諷曰。恐爲厲階。先生不以爲然。天啓甲子。金先生與鄭守夢上疏。略曰。臣等少從宋翼弼受學。翼弼文章學識。超絶一世。與李珥, 成渾爲講磨之交。李珥旣歿。李潑, 惟讓輩。仇嫉珥, 渾。延及翼弼。必欲置之死地而後已。可謂怒甲移乙之甚者也。翼弼之父祀連。乃故相安瑭孼妹之子也。祀連之母。旣已從良。祀連又雜科出身。連二代良役。且過年限者。不得還賤。昭載法典。而潑等以祀連上變。爲安家子孫之大讐。乘機指嗾。蔑法還賤。其時訟官。或爲守法之論。則潑042_557c等輒駁遞之。至再至三而後。始得行其志。祀連雖得罪善類。翼弼雖犯衆怒。豈可以一時之私憤而屈祖宗金石之典。以快其心哉。肆我宣祖大王復發開釋之端。而翼弼尋亦淪亡。至于今日。日月重明。幽枉畢伸。而獨此亡師之冤。尙不瞑目於泉下。噫。亡師生未爲聖主之知。死不免賤隸之名。此豈但臣等隱痛於心。國法一壞。末流難防。此亦識者之深慮永歎者也。先生有文集若干。刊行於世。象村嘗評之曰。材取盛唐。故其響淸。義取擊壤。故其辭理。和平寬博之旨。不失於羈窮流竄之際。優游涵泳之樂。自適於風042_557d花雪月之間。其庶乎安時處順。哀樂不能入者矣。又有玄繩集一編。所與李, 成二先生往復書也。谿谷張公維嘗論之曰。栗谷之言。眞率坦夷。牛溪之言。溫恭懇到。而龜峯則意象峻潔。自待甚重。其言辨矣。其學博矣。又曰。觀此議論。此老胸中。殊不草草。此不但可知其詩文。而亦可以知其爲人矣。余與同春。久在老先生門下。得聞先生言行熟矣。其以先生爲無一疵可指者。固失於稱停。而若乃吹毛索瘢。以助潑讓之誣者。亦非平心之論也。成先生平日。固不無不滿之意。而此則春秋責賢者備之義也。益見先生之高且042_558a大也。蓋嘗以老先生所言而論之。則志大宇宙。勇邁今古者。實先生之所心。而其於細密隱微。不能無疏脫者。豈先生才高識博。鍊達世務。謂此足以入得聖賢門庭。做得皇王事業。而或少涵養本源之功耶。以是權度。則其於先生。或庶幾焉。

後識
此固碣文也。文元公玄孫金公鎭玉。官隋城。有意刻樹。力綿未就。先立小表。欲以此姑作幽誌。尙書閔公鎭遠。同春先生外孫也。樂聞而成之。嗚呼。陵谷變遷。必有見此而還掩者。二公眞不忘其先志云爾。尤菴文正公曾孫宋婺源。謹記。


 산당집 ( 山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山堂集
판심제  山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66年刊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4.7(㎝)
어미  上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4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
 저자
성명  최충성(崔忠成)
생년  1458년(세조 4)
몰년  1491년(성종 22)
 弼卿
 山堂
본관  全州
특기사항  金宏弼의 문인. 南孝溫 등과 교유
 가계도
 崔德之
 直提學
 崔
 司勇

 

 密陽朴氏
 
 崔大成
 
 崔忠成
 
 全義李氏
 參議 李若水의 女
 崔演文
 萬戶
 女
 
 薛俊
 忠順衛

기사전거 : 家狀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1 羅州에서 태어나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8 형을 따라 漢陽을 여행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26 月出山을 유람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27 長湍의 湧巖山을 유람하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28 한양의 三角山ㆍ白嶽山, 송도의 天磨山ㆍ聖居山을 유람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9 瑞石山을 유람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30 頭流山을 유람하다. 도중에 金鍵과 함께 南孝溫을 방문하여 「小學」ㆍ「近思錄」을 講論하다. ○ 점필재 金宗直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글을 올려 佛巫의 폐단을 물리칠 것을 청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1 봄, 方丈山을 유람하다. ○ 金宏弼의 부친상을 조문하러 嶺南에 가다. ○ 여름, 完山ㆍ玉川 등지를 유람하다. ○ 가을, 雪山을 유람하다. ○ 8월, 昌平監試에 응시하다. ○ 9월, 金堤文場에 응시하다. ○ 겨울, 金鍵 등과 더불어 月出山 精廬에서 講學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32 겨울, 鳳城에서 中風으로 병석에 눕다. 〈蒸室記〉, 〈警慮焚刻記〉를 짓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33 전라도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약을 구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34 3월 24일, 졸하다. 羅州 可芝洞 선산에 묻히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 2월, 士林이 祖 崔烟村이 享祀되어 있는 存養祠에 배향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후손 崔秀華가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朴世采에게 校勘을 받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存養祠에 제관을 보내 致祭하고 ‘鹿洞書院’으로 賜額하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 9대손 崔爀이 2권 1책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순조 28 1828 무자 道光 8 - 후손 崔鍾翼이 家狀을 짓다.
고종 1 1864 갑자 同治 3 - 宋來熙가 行狀을 짓다.
고종 3 1866 병인 同治 5 - 후손 崔秉潤 등이 문집을 增補하여 간행하다.

기사전거 : 家狀ㆍ行狀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후손 崔邦彥이 소장하고 있던 草稿를 朴世采에게 校勘하여 1685년 원집 2권 1책으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간행되지 못하고 稿本으로 남아 있던 것을 1805년에 9대손 崔爀이 宋煥箕의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 후 후손 崔秉潤 등이 그의 부친이 轉寫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에 부록을 덧붙여 別集ㆍ附錄 합 3권 1책을 편차하고 1866년 원집과 함께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6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2권ㆍ別集 1권ㆍ附錄 2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雜著는 〈續原人〉ㆍ〈讀小學文〉 외에 「小學」에 관한 글 3편, 〈讀進學解〉ㆍ〈正名論〉ㆍ〈天堂地獄辨〉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小學」에 관한 글이 많은 것은 저자가 金宏弼의 제자로 「小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正名論〉은 군신과 부자의 名分을 바르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는 것이 중요함을 논하였으며, 〈藥戒〉는 병자가 藥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中心으로 국가 다스리는 것을 身體를 調理하는 데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권2의 書는 〈上佔畢齋先生書〉와 〈上湖南方伯求藥書〉로, 전자는 1487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점필재에게 佛巫의 폐해를 물리칠 것을 청하는 상서이며, 후자는 1490년 中風을 앓을 때 전라도 관찰사에게 약을 구하기 위해 올린 글이다. 記는 〈蒸室記〉와 〈警慮焚刻記〉로 中風을 치유하려고 힘쓰던 때의 기록이다. 傳은 〈山堂書客傳〉으로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에 지은 自傳的인 글이다. 그 밖에 〈擬送張舍人歸江東序〉ㆍ〈擬齊王田橫墓誌〉ㆍ〈擬褚遂良諫立武氏爲后疏〉는 모두 擬作으로 義理ㆍ三綱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권미에는 1491년 盧伯玉이 쓴 〈上山堂書〉가 부록되어 있고, 1685년에 쓴 朴世采의 識가 있다.
권3은 別集으로 招宦遊子文, 雜說, 慶會樓記, 送韓侍郞謫湖州序, 題明道先生墓碑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招宦遊子文은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뒤에 지은 것으로 富貴에 집착하지 않고 江湖에서 自適하는 생활을 권하는 내용이다. 雜說은 두 편인데, 하나는 養材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仁을 통한 成材에 관한 글로 그 긴요함을 잘 나타낸 글이다.
권4는 附錄으로 家狀(후손 崔鍾翼 撰), 行狀(宋來熙 撰), 墓表(宋穉圭 撰)와 저자가 享祀된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 등을 모은 것이다. 그중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은 配享通文, 祝文, 金昌協과 宋相琦 등의 請賜額疏, 1713년 延額時 賜祭文과 후손 崔鍾翼이 이 事蹟 뒤에 썼던 글 등을 모은 것인데, 金昌協 등의 請賜額疏와 墓表 등은 편집상태 및 版型으로 보아 1866년 重刊시에 追刻한 것으로 보인다.
권5는 附錄으로 擅勝樓題詠과 저자의 손자 崔彥潾의 詩, 증손 崔福男의 行狀 2편(崔尙重ㆍ尹濟弘 撰)ㆍ墓表(李肇源 撰)를 모은 것이다. 그중 擅勝樓題詠은 저자의 아들인 崔演文의 別墅에 대해 읊은 金麟厚와 林億齡의 詩를 收錄한 것이다. 끝에 1866년에 쓴 후손 崔秉潤의 附錄後識가 있다.

필자 : 鄭弼溶

 

 송자대전 ( 宋子大全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宋子大全
판심제  宋子大全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87年刊
권책  卷首, 目錄 2권, 原集 215권, 附錄 19권 합 10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5×17.8(㎝)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3542
총간집수  
권수제  宋書拾遺
판심제  宋書拾遺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7年刊
권책  9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5×17.6(㎝)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429
총간집수  
권수제  宋書續拾遺
판심제  宋書續拾遺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9年刊
권책  續拾遺 1권, 附錄 2권 합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8×17.6(㎝)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92-4
총간집수  
권수제  宋子大全隨箚
판심제  宋子大全隨箚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01年刊
권책  13권 6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1×18.2(㎝)
어미  無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569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08~116
 저자
성명  송시열(宋時烈)
생년  1607년(선조 40)
몰년  1689년(숙종 15)
아명  聖賚
 英甫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본관  恩津
시호  文正
특기사항  金長生, 金集의 門人. 老論의 영수
 가계도
 宋應期
 都事
 宋欽祚
 
 宋承祚
 
 宋天祚
 
 宋邦祚
 
 宋時瑩
 
 宋基泰  
 
 宋甲祚
 奉事, 睡翁
 善山郭氏
 郭自防의 女
 宋時熹
 
 金聲振의 女
 
 宋時默
 縣監
 李蓍生의 女
 
 宋時烈
 
 韓山李氏
 李德泗의 女
 宋基泰  
 都正
 李挺漢의 女
 
 女
 
 權惟
 縣監
 女
 
 尹摶
 
 側室
 
 女
 
 閔周鏡
 
 宋時燾
 縣監
 李復益의 女
 
 宋時杰
 監役
 權의 女
 
 女
 
 尹爓
 郡守
 女
 
 李憬
 監役
 女
 
 朴慶深
 
 女
 

기사전거 : 墓表(權尙夏 撰), 宋甲祚墓誌(宋時烈 撰), 宋應期墓碣銘(崔岦 撰, 簡易集 卷2)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1 11월 21일, 戌時에 沃川 九龍村에서 태어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8 宋爾昌에게 나아가 그 아들 宋浚吉과 함께 수학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11 부친 睡翁公이 진사시 합격 후 홀로 西宮에 배알하여 禁錮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19 2월, 韓山李氏와 혼인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21 丁卯胡亂 때 학업에 힘쓰라는 부친의 서신을 받다. ○ 3월, 백형 宋時熹가 殉死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22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9월, 沃川 赤登江 가에 장사 지내고 형제들과 시묘살이를 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24 服을 마치고 沙溪 金長生을 찾아가 「近思錄」, 「心經」, 「家禮」 등을 배우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25 8월, 沙溪 金長生의 상을 당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26 懷德 宋村으로 이사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27 9월, 생원시에 장원하다. ○ 敬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보름 만에 사직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28 4월, 宋浚吉과 嶺外를 유람하고 仁同에 가 張顯光을 방문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29 11월, 大君 師傅에 제수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30 겨울,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仁祖를 호가하여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32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정축년 이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黃澗에 우거하며 학문에 힘쓰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33 3월, 李惟泰, 尹宣擧와 함께 珍山에 모여 重峯 趙憲의 遺事를 의논하다. ○ 9월, 龍潭 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35 金克亨과 편지로 性情의 體用說을 논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36 尹鑴와 理氣說을 변론하다. ○ 처음에는 윤휴의 영특함을 인정하여 교유하였으나 후에 그가 朱子學을 벗어나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자 斯文亂賊으로 공격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38 6월, 明 崇禎皇帝가 殉國했다는 소식을 듣고 擧哀하다. ○ 11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39 5월, 楊州 石室村으로 金尙憲을 방문하여 부친 睡翁公의 묘갈명을 받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40 6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 모여 講하다. ○ 12월, 兪棨와 함께 愼天翊, 安邦俊을 방문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41 진선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8월, 飛來庵에서 제생과 학문을 講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43 5월, 仁祖가 승하하자 擧哀하다. ○ 6월, 孝宗의 소명이 있자 입대하여 〈己丑封事〉를 올리다. ○ 10월, 장령이 되다. ○ 12월, 집의가 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44 스승 金集이 金堉과의 불화로 내려가자 의리상 홀로 남기 어렵다는 이유로 귀향하다. ○ 4월, 沙溪 金長生의 行狀을 짓다. ○ 11월, 宋浚吉과 함께 栗谷年譜를 교정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46 金尙憲을 哭하다. ○ 11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서 만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47 忠州 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4월, 懷德 宋村에서 鄕飮酒禮를 행하다. ○ 5월, 金慶餘의 喪에 조문하다. ○ 윤7월, 兪棨, 尹宣擧와 黃山書院에 모이다. 尹宣擧에게 尹鑴와 절교할 것을 종용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48 2월, 집의가 되었다가 체직된 뒤 副護軍이 되다. ○ 尹宣擧, 李惟泰와 〈疑禮問解〉를 교정하다. ○ 4월, 특지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兪棨, 尹宣擧 등을 皐蘭寺에서 만나 虎巖에서 뱃놀이하고 「心經」을 강론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49 2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모친상을 당하다. ○ 沃川 月伊洞에 장사 지내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50 부모의 묘소를 懷德 板橋里로 移葬하다. ○ 윤5월, 金集의 訃告를 듣고 석달복을 입다. ○ 滄洲 金益熙의 부고를 듣다. 후에 神道碑文을 짓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51 5월, 服을 마치고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상이 「朱子語類」, 「擊壤集」을 하사하다. ○ 8월, 사직소를 올리며 克復과 修攘에 대한 대책인 〈丁酉封事〉를 지어 密封해 올리다. ○ 10월, 상이 密諭를 내리자 마침내 경영에 뜻을 두고 兪棨와 함께 계책을 의논하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52 2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곧이어 특지로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5월, 滄洲書院(表忠祠〉에 金集을 추향하다. ○ 찬선이 되다. ○ 再從兄의 아들 宋基泰를 후사로 삼다. ○ 특지로 이조 판서가 되다. 연일 召對에 입시하여 治道를 논하고 경연에서 「心經」을 강하다. ○ 尹鑴의 등용문제로 尹宣擧와 편지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53 3월, 熙政堂에서 獨對하여 修攘의 일을 논하니, 효종이 은밀히 手札을 내리다. ○ 孝宗이 승하하자 慈懿大妃의 服制를 의논할 때 朞年服으로 정하였는데 尹鑴가 이에 반대하여 삼년복의 宗統說을 주장하다. ○ 孝宗의 誌文을 짓다. ○ 洪汝河의 상소로 인해 사직하여 체차되다. ○ 판중추부사가 되어 宋浚吉과 함께 山陵의 일을 의논하다. ○ 좌참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나 懷德 蘇堤로 돌아오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54 李厚源의 訃告를 듣다. ○ 3월,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이른바 1차 禮訟이 일어나자 練服의 변경 및 許穆의 喪服圖에 반박하는 의논을 올리다. ○ 尹善道가 상소하여 慈懿大妃 服制와 山陵의 일로 공격하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55 祧廟의 禮에 대해 헌의하다. ○ 5월, 興政堂에 입대하여 禮訟의 전말을 진달하다. ○ 趙絅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변호하자 곧 도성을 떠나다. ○ 12월, 公州 遠基로 거처를 옮기다.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56 1월, 興農書堂에서 族譜를 교감하다. ○ 3월, 金剛山을 유람하다. ○ 明의 멸망을 듣고 애통해 하다. ○ 10월, 礪山 黃山으로 이사하다. ○ 尹宣擧와 栗谷 年譜를 교감하다. 尹鑴의 문제로 尹宣擧를 계속 規戒하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57 1월, 宋浚吉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陳戒하다. ○ 4월, 延平從祀議를 올리고, 李端相과 永寧殿의 廟制를 의논하다. ○ 8월, 俗離山을 유람하고 竹林書院에서 大享禮를 거행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58 兪棨의 상을 당하다. ○ 趙憲과 숙부 宋邦祚의 묘표를 쓰다. ○ 11월, 俗離山에 들어가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59 3월, 鄭澈의 遷葬에 참여하다. ○ 顯宗이 온천에 행차하여 부르니 行宮에 입대하다. ○ 元子의 탄생을 하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許穆의 공격을 받다. ○ 9월, 東鶴寺에서 李惟泰, 尹宣擧와 만나 「沙溪遺稿」를 교정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60 淸州 枕流亭에 우거하다. ○ 상이 史官을 보내 계속 부르자 行在所에 나가 대죄하다. ○ 俗離山 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월, 同春과 함께 「小學諺解」를 개찬하여 올리다. ○ 12월, 世子貳師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현종 8 1667 정미 康熙 6 61 2월, 李䎘이 許積, 鄭太和를 논하다가 귀양가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6월, 成文濬의 墓碣銘을 지으면서 鄭仁弘에게 붙었던 일을 언급하여 마침내 成氏, 尹氏 일가와 불화가 생기다. ○ 靜庵 趙光祖의 謫廬遺墟碑文을 짓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62 李端相, 朴世采와 편지로 退溪의 物格說을 논하다. ○ 2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溫泉에 행차하여 부르자 行宮에 입조하다. ○ 11월, 상소를 올려 하직하고 廣州로 물러나니 상이 閔鼎重을 보내 머물기를 권하다. ○ 체차된 뒤에 還朝하여 차자로 경계를 아뢰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63 1월, 貞陵을 복구하기를 청하다. 이후 經筵과 書筵에 입시하다. ○ 2월, 차자를 올리고 都城을 떠나다. ○ 판부사 李景奭의 차자로 인해 상소하여 대죄하다. ○ 4월, 茂朱 赤裳山을 유람하고, 부친의 사당에 焚黃禮를 행하다. ○ 8월, 尹宣擧를 弔哭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64 權諰와 甲川에서 만나다. ○ 9월, 李世直의 변이 생기자 京畿에 나가 대죄하다.
현종 12 1671 신해 康熙 10 65 5월,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고 특별히 世子師傅를 겸하다. ○ 7월, 〈三學士傳〉을 짓다. ○ 상소하여 사직하고 救荒策을 진달한 책자를 올리다.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66 1월, 炭谷에 가서 權諰를 弔哭하다. ○ 3월, 三山을 유람하고 永同, 冷泉을 거쳐 돌아오다. ○ 5월, 좌의정에 제수되다. ○ 7월, 仲兄 宋時默의 상을 당하다. ○ 9월, 許積의 일로 상소하여 사직하다. ○ 10월, 石湖 尹文擧를 곡하다. ○ 11월, 同春 宋浚吉을 곡하다. ○ 紫雲書院의 비문을 짓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67 6월, 〈陵誌文追刻議〉를 올리다. 寧陵(孝宗陵)의 遷陵都監 誌文製述官이 되어 천릉시의 服制議를 올리다. ○ 寧陵의 表石 문제로 金佑明의 공박을 받고, 또 당시 閔愼 일가의 喪服 문제로 尹鑴의 공격을 받자 陵役이 끝난 뒤 서울을 떠나다. ○ 尹宣擧의 墓文을 짓다. 아들 尹拯이 朴世采의 행장과 己酉擬書를 가지고 와 묘문을 부탁하였는데, 이로 인해 懷尼是非가 일어 결국 老論과 少論의 분쟁이 일어나다. ○ 12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68 遷陵의 일로 상소하여 대죄하다. ○ 3월, 仁宣王后의 喪으로 상경하였다가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하면서 이른바 2차 禮訟이 다시 일어나자 돌아오다. ○ 6월, 李惟泰와 「沙溪遺稿」를 교정하여 마치다. ○ 7월, 都愼徵의 상소가 나오자 水原 萬義에 나가 대죄하다. ○ 8월, 顯宗이 승하하자 도성에 들어갔다가 郭世楗의 상소가 올라오자 萬義로 돌아가다. ○ 12월, 兩司의 논핵을 받아 파직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69 削奪官職, 遠竄의 명이 내리다. ○ 3월, 金尙憲의 墓誌를 짓다. ○ 6월, 長鬐에 圍籬安置되다. 유배지에서도 문인들과 강학을 그치지 않다. ○ 9월, 尹拯의 편지에 답하여 尹鑴와 일찍 절교하지 않은 것을 꾸짖다. ○ 鄭夢周의 神道碑를 짓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70 2월, 尹拯이 長鬐로 찾아오다. ○ 李惟泰가 甲寅禮說을 지어 종래의 禮論을 바꾸었다는 소문이 퍼져 자제들이 분개하고 있었는데, 尹拯이 李惟泰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고 〈蓬山語錄〉을 지어 離間하다. ○ 7월, 李惟泰의 편지를 받다. 이후로 양측 자제간의 불화가 더욱 심해지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71 3월 22일, 夫人 李氏의 상을 당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72 「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다. 또 「二程全書」를 보기 쉽게 類別로 편차한 「程書分類」를 편하고, 退溪의 「經書質疑」와 「記善錄」을 證訂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73 4월, 巨濟島로 이배되다. ○ 「朱子語類小分」을 완성하다. 또 朱子의 年譜와 實紀를 합쳐 「文公先生紀譜通編」을 편차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74 5월, 淸風으로 이배되다. ○ 6월, 陜川에 도착했을 때 庚申換局으로 西人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어 懷德으로 돌아오다. ○ 10월,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상경하여 입대하다. 당시 仁敬王后가 승하하여 慈懿殿의 服制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다. ○ 12월, 仁敬王后의 誌文을 짓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75 1월, 召對에 입시하여 「心經」을 강하다. ○ 2월, 상소하고 華陽洞으로 돌아오다. ○ 9월, 「心經釋義」를 교정하다. ○ 12월, 상소하여 文廟從祀를 논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76 3월, 珍山에서 李惟泰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다. ○ 別諭가 내리자 朴世采와 함께 상경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77 晝講에 입시하고 袖箚를 올려 국사를 논하다. ○ 3월, 상차하여 致仕하고 奉朝賀가 되다. 함께 소명을 받은 朴世采가 尹拯과 논의를 같이하자 다시 板橋로 돌아오다. ○ 6월, 「朱子大全封事奏箚箚疑」를 올리다. ○ 10월, 다시 上京하여 李端夏, 朴世采와 만나다. 이후 朴氏 門下와의 불화가 깊어지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78 明聖王后의 誌文을 짓다. ○ 5월, 尹拯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후 尹拯과 絶交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79 1월, 權尙夏가 찾아와 수학하다. ○ 9월, 상소하여 栗谷, 沙溪 선생과 權順長 등을 伸辨하고 尹宣擧의 毁節과 尹鑴를 편든 죄를 들어 배척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80 權尙夏, 李喜朝, 閔泰重과 「朱書箚疑」를 교감하고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朱子大全箚疑」를 간행하라는 명을 받다. ○ 10월, 南澗精舍를 짓다. ○ 金萬基에게 편지를 보내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別集」을 다시 교정하기를 청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81 1월, 상소하여 陳情하고 겸하여 尹拯 父子의 일을 말하다. ○ 3월, 金萬基의 訃告를 듣다. ○ 9월, 長陵 移葬에 관한 의논을 올리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82 1월, 상소하여 羅良佐의 석방을 청하다. ○ 2월, 李端夏에게 답서를 보내 尹宣擧와의 전말을 서술하다. ○ 4월, 權尙夏, 金昌協 등과 屛川을 유람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83 1월, 元子의 책봉이 너무 빠르다고 상소하였다가 濟州로 귀양가다. 己巳換局으로 南人과 少論이 대거 등용되다. ○ 윤3월, 「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수하다. ○ 4월, 文谷 金壽恒의 訃告를 듣고 墓誌文을 짓다. ○ 拿鞫의 명이 내려 상경하다가 6월 8일, 井邑에서 賜死되다. ○ 7월, 水原 萬義 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내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 甲戌換局으로 老論이 득세하자 관작이 회복되다. ○ 水原 萬義에 梅谷書院, 井邑에 考巖書院, 忠州에 樓巖書院을 세워 祭享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 특명으로 諡狀없이 ‘文正’으로 諡號를 내리다. ○ 德源의 龍津書院, 湖西의 華陽書院을 세워 제향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 趙靜庵의 祭享書院인 道峯書院에 병향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 門人 權尙夏가 遺命에 따라 萬東廟를 세우다.
숙종 43 1717 정유 康熙 56 - 왕명으로 芸閣에서 「尤庵集」과 別集을 간행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 道峯書院에서 位牌가 黜享되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 道峯書院에 다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다.
영조 6 1730 경술 雍正 8 - 曾孫 宋婺源과 門人들이 「經禮問答」 24권을 활자로 간행하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 附錄과 年譜 5책을 활자로 인행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 文廟에 배향하고 領議政에 추증하다.
영조 33 1757 정축 乾隆 22 - 淸州 靑山으로 移葬되다. 尹鳳九가 墓誌文을 짓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正祖 즉위 후 孝宗 廟庭에 배향하다.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 驪江 大老祠에 賜額을 내리고 致祭하다.
정조 11 1787 정미 乾隆 52 - 9월, 平壤 監營에서 李命植이 「宋子大全」 10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고종 38 1901 신축 光武 5 - 宋秉璿이 「宋子大全隨箚」 13권 6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李世淵의 序, 宋秉璿의 跋)
- - 1927 정묘 - - - 南澗精舍에서 「宋書拾遺」와 함께 「宋子大全」을 重刊하다. (宋曾憲의 拾遺跋)

기사전거 : 年譜, 墓表(權尙夏 撰) 및 朝鮮王朝實錄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유고에 대한 수습과 정리는 저자가 楚山(井邑)에서 賜死된 이후 곧 適傳弟子인 權尙夏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權尙夏가 쓴 墓表(1710년 11월)에 의하면 “「朱子大全箚疑」, 「二程全書分類」는 長鬐에 유배되었을 때 저술한 것이고, 「語類小分」은 巨濟에 있을 때 편차한 것이며, 「問義通攷」는 濟州에서 완성한 것이고, 「心經釋疑」는 退溪講錄을 위해 왕명을 받아 添削한 것이다. 또 文集 백여 책이 장차 간행될 것이다.”라고 하여 朱子學 관계서적 외에 백여 책의 문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權尙夏는, 1690년부터 崔邦彥, 李喜朝, 李箕洪, 金昌協, 尤庵의 손자인 宋疇錫과 함께 저서의 교정과 유고의 수습에 착수하였으며, 1691년 1월에 李箕洪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箚疑는 和哀(金昌協)에게 부탁해 교정을 보고 있는 중이고, 遺稿는 이미 완성된 草本이 40여 책인데 수합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걱정스럽습니다. 年譜는 敍九(宋疇錫)가 맡았으나 초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答李箕洪別紙, 寒水齋集 卷5) 그리하여 1692년 5월 경에는 이미 서찰 15책을 포함해 75책의 유문이 수습되었고, 宋疇錫이 年譜 5책을 정리하였으며, 續集ㆍ後集ㆍ別集으로 나누어 편차하려는 계획이 세워지는 등 작업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答李喜朝, 同上) 1695년에는 이미 전체의 규모가 잡혀 權尙夏가 정리한 초고본 외에 李喜朝에 의해 仁川에서 1질, 전라관찰사 李秀彥에 의해 湖南에서 1질이 등사되어 모두 3질의 草本이 만들어졌고, 1711년에는 문집의 中草本이 110여 책에 이르렀다.
이렇게 權尙夏가 정리한 문집 草本 40책이 현재 「尤庵遺稿」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도서관(貴425, 한46-가886)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黃江本이라고 한다.《黃江本》 이 寫本은 卷次의 구별없이 각 책마다 塗抹한 곳이 많고 문장을 보충할 곳에 附箋을 붙여 표시해 놓는 등 아직 편차 중에 있는 미완성의 稿本으로 보이는데, 1~2책은 詩, 3~20책은 書, 21~25책은 疏箚, 26책은 雜著, 27책은 記, 28~32책은 序跋, 33~35책은 祭文과 祝文, 36~40책은 行狀과 碑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黃江에 머물던 權尙夏와 서울의 李喜朝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문집 정리는, 일이 진행되면서 내용을 刪節하여 일부만이라도 조속히 간행하자는 서울 門人의 주장과 全稿를 정밀하게 교정하여 신중하게 간행해야 한다는 權尙夏로 의견이 갈리었다. 당시는 비록 甲戌換局(1694)으로 尹鑴를 비롯한 南人 정국이 실추하여 저자의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저자를 奉享하는 書院이 설립되어 賜額을 받는 등 상황이 좋아졌지만, 尹拯으로 대표되는 少論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권상하는 새로운 흔단을 야기할 가능성 때문에 문집의 간행을 미루기를 원하였고, 서울에서 老論을 이끌고 있던 李喜朝, 閔鎭厚 등은 빠른 간행으로 노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수집한 글이 비록 여러 권이 되었지만 아직 교정을 보지 못한 것도 많고 이미 교정을 본 것도 정밀하지가 않으니, 몇 달 사이에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간행한다면 어찌 경솔하지 않겠습니까. 「沙溪集」 같은 경우는 6책뿐이었고, 자손과 문하에 長者가 많았으니 校讎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 그 간에 時事가 근심할 만한 점이 또한 많았지만 老先生(尤庵)께서는 급급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교하면서 늦는 것이 졸렬하지만 속히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이처럼 의견이 다릅니다.”(答金昌協 1698년, 寒水齋集 卷5)
“孝廟朝에는 기휘할 문자를 극히 비밀히 하여 세자로 하여금 직접 소매에 넣고 선생의 직소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朱子가 「南軒集」을 修整할 때 疏章을 초록하지 않았으니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沙溪集」에 忌諱할 것이 오늘날의 문자(尤庵集)에 비할 바가 아니며, 門下와 子孫이 매우 많아서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돌아가신 뒤 55년이 지난 을축년(1685)에 상의 명으로 인하여 비로소 간행하였습니다.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別集 1책은 本家에 간직해두고 간행하지 않았었습니다.”(答閔鎭厚 1717년, 同上 卷7)
위에서 볼 수 있듯이 權尙夏가 문집의 조속한 간행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 편차와 교정에 신중을 기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너무 서두른다는 것, 둘째, 孝宗朝의 北伐과 관계된 忌諱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셋째, 尹鑴, 尹拯 등 時事와 관계된 글이 많아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점이다. 더구나 「家禮源流」의 편찬주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老少論간의 분쟁 속에서, 간행된 지 얼마 안 된 尹宣擧의 문집이 毁板火書의 처분(丙申處分 1716년)을 받는 것을 목격한 그로써는 여전히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간행하려고 한다면 尤庵先生疏箚로 제목을 붙여 중요한 疏箚와 啓辭 등만을 뽑아 批答과 함께 활자로 간행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答李喜朝 1717년 5월, 同上 卷6)
결국 1717년 7월 4일 閔鎭厚의 건의로 肅宗이 芸閣에서 活字로 간행하도록 명함으로써 문집의 조속한 간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權尙夏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신중론자였다. “서울의 여러 공들이 간행을 주장하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어찌 감히 한 사람의 의견으로 중론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 간행할 바에는 疏章 뿐만 아니라 序記와 詩文 등 기휘할 필요가 없는 글들도 아울러 간행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대가 연석에서 아뢰어 芸閣으로 하여금 인출하게 하였다 하니, 여러 군자들이 신중하게 精選하여 40~50권으로 만들어서 全集이라 명하고, 기휘해야 할 것들은 別集 또는 續集으로 호칭해서 추후에 인출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答閔鎭厚, 同上 卷7)
이에 저자의 曾孫인 宋婺源과 李喜朝 등이 주축이 되어 교정과 편차를 맡아, 3년 만인 1719년(숙종 45) 原集 158권과 別集 9권 도합 167권 63책의 「尤庵先生文集」을 校書館에서 鐵活字로 인행하였다.《尤庵集初刊本, 芸閣本》 이후 1730년(영조 6)에는 제자들과 편지로 經禮에 대해 문답한 「經禮問答」(經禮義疑라고도 함) 24권 10책이 역시 활자로 간행되었는데, 原集의 권158에 이어서 권159로 시작해 182권까지 卷次가 매겨져 있다. 이는 經禮問答을 일종의 續集으로 간주한 것으로 原集과 經禮問答, 別集 총 191권이 하나의 세트로 여겨져 후에 간행되는 「宋子大全」과 구별하여 모두 ‘舊本’이라고 부른다. 2년 후인 1732년에는 宋疇錫이 편차했던 年譜 5책을 宋婺源이 다시 정리해 역시 활자로 인행하여 구색을 갖추었다. 「尤庵集」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069, 6515), 장서각(4-633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57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원집과 별집, 경례문답, 연보까지 모두 완비된 본이다.
「尤庵集」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原集 권1~4는 賦와 詩가 詩體別로 편차되어 있고, 권5~20은 疏箚가, 권21~25는 書啓와 獻議, 권26~85는 書, 권86~89는 雜著, 권90~96은 序跋과 記文이, 권97은 銘ㆍ箴ㆍ贊ㆍ上樑文 등이 실려 있고, 권98~100은 祝文과 祭文이, 권101~116은 碑文, 권117~125는 墓碣, 권126은 陵誌, 권127~133은 墓誌, 권134~145는 墓表, 권146~148은 諡狀, 권149~154는 行狀, 권155는 遺事와 語錄이, 권156~158은 傳이 실려 있다. 전체적인 편차의 원칙은 權尙夏의 의견대로 「南軒集」을 전범으로 삼았으며, 기휘할 만한 내용은 別集으로 따로 편차하였다. 別集 권1은 詩 4題, 권2는 〈己丑封事〉와 〈丁酉封事〉, 권3은 疏箚 7편으로 내용은 대부분 孝宗과 관계된 大義, 尹拯과 관계된 黨論, 그리고 죽기 전에 올린 己巳遺疏이다. 권4는 書 16편으로 역시 孝宗과 北伐을 의논한 일, 尹鑴와 尹拯에 대한 비난, 淸의 年號를 쓰는 문제 등 時事와 관련되어 忌諱할 만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5는 〈燕居雜錄〉, 〈自敍文〉 등 雜著 5편과 序跋, 祭文, 告文이고, 권6~7은 碑文 10편, 권8은 寧陵誌文, 권9는 金尙憲과 李浣, 黃璡의 墓誌이다. 그러나 別集의 경우 忌諱하는 내용을 뽑아 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原集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워낙 많으며 또 別集을 같은 시기에 함께 인행하여 배포하였다는 면에서 볼 때 숨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尤庵의 사상적 특징, 즉 大義(北伐)를 떨치고 異端(尹鑴)을 배척하였다는 면을 부각시켜 강조한 듯한 인상을 준다.
「尤庵集」의 간행 이후 본집에 수록되지 못한 저자의 유문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제자들에 의해 곧 後集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는 현재 몇 종의 寫本으로 남아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의 「逸書」 40권 20책(貴423-한46-가1424), 규장각의 「大老逸稿」 40권 40책(奎4855), 미국버클리대학소장의 「宋子大全續」 40권 20책(아사미문고본) 등으로 表題는 모두 다르지만 卷首題는 모두 「尤庵先生後集」으로 되어 있다. 冊數에 관계없이 내용은 거의 비슷하여 권1~2는 詩와 疏箚, 書啓, 書이고, 권3~28은 書, 권29~36은 雜著, 序, 記, 跋, 祝文, 祭文 등이며, 권37~40은 墓表와 行狀, 諡狀 등이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刊本 「尤庵集」과 중복된 부분에 붉은 줄을 그어 표시하고, 異本과 대교한 附箋이 붙어 있으며 字句의 오류를 교정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규장각본은 罫印寫本으로 비교적 정리된 상태이고, ‘弘齋’, ‘春宮’ 등 正祖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어 두 본의 先後를 짐작할 수 있다. 필사 시기는 대략 「尤庵集」이 간행된 肅宗末부터 英祖朝 사이로 추정된다.《尤庵後集》
正祖는 즉위 직후부터 저자와 老論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李明徽에 대해 鞫問과 유배라는 단호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老論의 정치적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이어 宋時烈을 孝廟에 추향하도록 명하고(1776년 5월), 萬東廟에 御筆額子를 하사(1776년 8월)하는 등 저자에 대한 추숭 사업도 잇달아 거행하였다. 아울러 後孫의 錄用을 명하고 자신이 지은 〈兩賢傳心錄〉과 〈尤庵集御製序文〉을 보여 주면서 누락된 유문과 年譜를 포함해 全書를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承政院日記 1776年 6月 3日條) 이해 9월부터 5대손 宋煥箕를 중심으로 유문의 수집과 편차가 시작되었는데 林川 郡守 宋宅圭, 宋煥德, 李顯民, 李敏輔, 金熹 등이 참가하여 1780년경 편차 기준을 마련하고 대강 正本의 편성을 완료하였다.
편차 기준을 정할 때 經禮問答과 別集, 附錄을 모두 합편한다는 원칙에는 다같이 일치하였으나 金元行은 일반적인 문집의 원칙대로 精選해서 「尤庵集」과 全書가 함께 행해지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答李士謙, 漢湖集 卷5) 그리고 宋煥箕가 만든 修正凡例에서도 缺句가 있는 詩는 제외하고, 의례적인 사직소와 사적인 내용의 편지는 산절하며, 잡저와 산문은 事實ㆍ義理ㆍ文章 중 어느 한 가지 기준에 충족되면 채택한다고 하여 어느 정도 刪節을 위주로 하였지만, 결국은 저자의 작품은 片言隻字라도 다 실어야 한다는 분위기에 따라 全文의 收錄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편차된 「宋子大全」은 1787년 9월 평안 감사 李命植의 주선으로 총 236권 102책이라는 거질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宋子大全初刊本, 箕營本》 이는 평양 감영에서 간행되었기에 箕營本이라 하며 「尤庵集」 舊本과 구별해 ‘新本’이라고도 한다. 간행은 1786년 평안 감사 趙璥이 자신의 봉록 萬緡을 내놓아 시작하였는데 그가 체직되자 李命植이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102책 전부가 平壤에서 간행된 것은 아니고 卷首와 目錄 2책, 年譜 및 附錄 19권 9책은 서울의 校正所에서 간행한 것이다. 箕營本의 표지에는 「宋子大全」이라는 表題와 함께 “崇禎參丁未箕營開刊”이란 刊記가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완본은 규장각(奎3542),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08),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는 零本이 소장되어 있다.
大全本은 舊本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이는데, 첫째는 「宋子大全」이라는 명칭의 특이성이다. 우리나라에서 姓에 ‘子’를 붙여 호칭한 것도 栗谷과 退溪 외에는 없는 이례적인 일인데, 문집에 大全이란 호칭을 붙인 것은 본집이 유일한 예이다. 「宋子大全」이란 題名에 대해 正祖가 賜名하고 판각을 지시한 것처럼 되어 있기도 하나(宋子大全隨箚序) 이는 사실과 다르다. 正祖는 오히려 大全이란 이름이 관례에 맞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저자에게 욕을 끼칠까 우려하였다.(弘齋全書 162권 日得錄) 사실 ‘宋子大全’이란 명칭은 이미「宋子大全續」(아사미문고본)에서 보이듯이 後集의 편차시부터 쓰여 왔으며, 저자를 東方의 朱子로 숭앙하는 老論界에서는 정론화되어 왔던 이름이다. 따라서 凡例에서도 “선배들이 이미 정한 論이자 士林이 동의한 의논”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이 題名은 “朱子는 聖學의 集大成이고, 저자는 朱子의 集大成”이라는 당시 尤庵에 대한 숭앙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는 舊本이 「南軒集」을 전범으로 삼은데 반해 新本은 「朱子大全」을 편차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에 「朱子大全」의 양식대로 詩賦가 書札의 제목을 손질하고, 아울러 別集과 附錄, 經禮問答 등을 모두 원집에 합편하였으며, 印本에서 누락되었던 後集의 시문까지 모두 첨가하여 양이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詩 부분은 연도를 상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編年으로 되어 있는 「朱子大全」을 따르지 않고 舊本을 따라 詩體別로 편차하였으며, 편지의 경우도 내용분류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舊本에 따라 인물별로 편차하였다. 셋째는 상세한 교감을 거쳐서 黃江本과 芸閣本을 대교한 결과를 「退溪集」처럼 頭註로 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舊本에서는 본문 내에 分註의 형태로 기재하였다. 또 年譜는 1732년 간행되었던 舊本의 연보를 바탕으로 宋煥箕가 添削하여 정리하고 英正祖 年間의 사실을 追錄한 것인데, 舊本은 綱은 大字로 細目은 小字雙行로 처리하였으나 新本은 모두 같은 크기의 글자를 써서 單行으로 하였다.
이 箕營本 板木은 후에 華陽洞書院의 大全藏板閣에 옮겨 보관되었다. 그러나 1907년 丁未七條約에 대한 反日義兵 봉기때 藏板閣이 있던 煥章寺가 방화되는 바람에 冊版이 소실되었다. 그 후 1927년 儒林과 후손의 노력으로 大田 興農의 南澗精舍에서 다시 목판으로 중간하였다.《大全重刊本》 중간본은 箕營本을 그대로 覆刻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과 구성이 같으며 초간의 간기와 함께 “後百四拾年丙寅(1927) 杞菊亭重刊”이란 刊記가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古819.53-So58s-v.1-102), 장서각(4-6201), 국립중앙도서관(무구재古3648-文39-65),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736) 등에 소장되어 있다.
처음 大全 箕營本의 편찬시 많은 詩文이 추가로 수록되어 卷帙이 너무 많아졌고 또 이미 睿覽을 거쳤다는 이유로 이후에 수집된 유문에 대해서는 더 첨가하지 않고 續集의 간행을 기약하였다. 따라서 유문에 대한 수집과 편찬이 계속 이어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저자의 글에 대한 註解書와 抄錄, 학문과 행적에 대한 글이 끊임없이 편찬 간행되었다.
저자의 9대손인 淵齋 宋秉璿은 1872년에 黃江本 중 大全에서 누락된 詩文과 기타 전적에서 수집한 글을 모아서 朱書拾遺의 예에 따라 宋書拾遺를 편차해 두었는데, 1927년 南澗精舍에서 9권 4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宋書拾遺》 여기에는 10대손 宋曾憲의 跋文이 있어 간행의 경위와 南澗精舍 옆에 있는 藏板閣에 大全冊板과 함께 판목이 보관되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2년 뒤인 1929년에는 續拾遺가 附錄과 함께 3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宋書續拾遺》이는 「宋子大全」의 중간 때 각처에서 보내온 尤庵의 유문과 관계 기록을 9대손 宋秉夔가 편차한 것인데 역시 1929년에 南澗精舍에서 간행하였다. 拾遺는 현재 규장각(古3428-429),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407),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續拾遺는 국립중앙도서관(한92-4)에 소장되어 있다.
隨箚는 「宋子大全」의 註解書이다. 본래 저자의 傍曾孫인 潭谷 宋周相이 「尤庵集」을 대상으로 문집의 내용 중 난해한 구절이나 故事를 인용한 부분에 대해 板別로 註를 내어 「宋書節要集解」를 撰하였는데, 이것은 退溪 李滉이 지은 「朱子書節要記疑」를 모방한 것으로 이를 潭谷隨箚라고 부른다. 그러나 「宋子大全」의 간행 이후 板次가 맞지 않게 되자 8대손인 宋近洙가 「朱子大全箚疑」를 모방하여 전면적으로 재편집하는 동시에 潭谷隨箚의 오류를 수정하고, 時事出處에 관한 주석을 보충하였으며, 권말에 大全에 자주 나오는 인물 중 약 200여 명의 人名錄을 작성하여 붙였다. 총 13권 6책으로 편찬되어 1867년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이것을 宋秉璿이 다시 교정하고 정리하여 1901년 華陽洞書院에서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권말에 “辛丑開刊華陽藏板”이라는 刊記가 실려 있다.《宋子大全隨箚》 隨箚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古1360-6), 장서각(4-620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17),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09) 등에 있으며, 목판본인 중간본은 규장각(奎15693), 국립중앙도서관(무구재古3648-문39-6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87년 간행된 箕營本 「宋子大全」에, 1901년 重刊된 「宋子大全隨箚」, 1927년 간행된 「宋書拾遺」, 1929년 간행된 「宋書續拾遺」를 합부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인 續拾遺를 제외하고 모두 규장각장본이다.
단 본 영인저본 중 「宋子大全」 권4의 제2판, 권29의 제23판, 권62의 제27판, 권87의 제8판, 권95의 제22판은 落張이고, 권203의 제39판은 상태가 좋지 않아 동일본인 규장각장본(奎3543)에서 보완 대체하였으며, 권204의 제2판과 4판은 落張이므로 동일본인 규장각장본(奎3949)에서 보완하였다. 또 「宋子大全隨箚」 권3의 제19판, 제24판은 落張이고, 제25판은 중복되었으므로 동일본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812.98-송시열 송-수-판)에서 보완하였다.

기사전거 : 權尙夏年譜(寒水齋集), 宋時烈年譜(宋子大全), 宋煥箕年譜(性潭集), 宋婺源墓誌(李縡 撰, 陶菴集 卷43), 宋時烈墓誌(尹鳳九 撰), 先祖年譜後跋(宋煥箕 撰, 性潭集), 宋子大全解題(辛承云, 國譯宋子大全), 尤庵 宋時烈과 그의 저술(宋俊浩, 尤庵思想硏究論叢)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일단 규모면에서 당시까지 발간되었던 개인 문집 중 가장 巨帙에 속한다. 別著類를 제외한 저자의 모든 詩文을 한곳에 모아 집대성하려는 노력은 저자의 위치가 학계와 정계에서 공고해질수록 더욱 커져 「宋子大全」의 간행 이후에도 宋書拾遺, 宋書續拾遺, 宋子大全隨箚 등 끊임없는 증보를 가져왔다. 전체적인 구성을 일별해 보면, 目錄 2권, 宋子大全 原集 215권, 附錄 19권, 宋書拾遺 9권, 宋書續拾遺 3권, 宋子大全隨箚 13권으로 도합 261권 130책 10258판이다.
먼저 송자대전을 살펴보면, 大全의 편차 원칙을 설명한 〈凡例〉가 있고, 215권의 詩文 제목과 편수를 기록한 總目錄이 上一二, 下一二 2책으로 나뉘어 실려 있다. 이어서 卷首에는 正祖가 저자의 祭享祠宇인 大老祠, 華陽書院, 考巖書院 등에 지은 御製碑銘과 祭文 8편이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卷首가 附錄의 기타 賜祭文과 따로 편차된 것은 본서가 正祖의 命刊이라는 형식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내용별로 구성은, 권1~4는 詩賦, 권5~26은 疏箚, 書啓, 獻議 등의 公車文이고, 권27~129는 書簡文이고, 권130~153은 雜著와 記, 序, 跋, 祭文 등의 散文이다. 권154~215는 碑文과 墓碣文, 行狀 등의 傳記文이고, 다음 19권은 附錄이다.
권1~4는 詩賦로 620題 856수가 詩體別로 분류되어 있다. 「朱子大全」의 경우는 詩賦가 연도별로 편차되어 있는 데 반해 여기서 詩體別로 수록된 이유는 원고의 수집 정리 때부터 이미 저작 연도를 구명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舊本의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따라서 본서도 「尤庵集」과 같이 권1은 賦와 五七言古詩, 권2는 五七言絶句, 권3은 五言律詩, 권4는 七言律詩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같은 詩體 內에서는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저자의 유일한 賦인 〈次感春賦〉는 朱子의 〈感春賦〉에 차운해 지은 것으로 孝宗이 승하한 뒤 자신의 道를 이룰 수 없는 슬픔과 주자에 대한 敬慕를 읊은 것인데, 저자는 감히 朱子의 시에 次韻하는 것을 참람되게 여겼으나 尹鑴의 권유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권2의 〈次贈某人〉의 某人은 바로 尹鑴인데 이 시를 지은 1652년까지만 해도 교분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賊鑴로 호칭이 바뀌어 나타난다. 詩를 주고받은 사람은 朴世采, 尹宣擧, 金壽恒, 金壽增, 李喜朝, 李惟泰 등인데 특히 손자인 宋疇錫에게 준 시가 많아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의 특징적인 점은 〈登鐵嶺吟〉처럼 孝宗과 朱子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읊은 시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詩 곳곳에 朱子의 말과 故事를 인용하거나 그의 행적을 따르는 내용이 많아 주자에 대한 저자의 흠모가 종교에 가까웠던 듯하다. 권4의 〈次康節首尾吟韻〉은 134수나 되는 거작인데 이와 같이 邵雍의 시에 차운한 작품도 꽤 있다. 그러나 다른 저작에 비해 시가 점하는 비중이 그리 많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挽詩가 많은 편수를 차지하고 있다. 시의 배경을 설명한 詩序와 같은 글이 많으며 저자의 自註와 편자의 註가 고루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편리하다. 頭註는 舊本인 「尤庵集」과의 對校 결과를 적어 놓은 것이다.
권5~26은 封事, 疏箚, 書啓, 獻議 등의 공거문이다. 저자가 老論의 영수로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당시 쟁점이 되었던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빠짐없이 글을 올렸다.
권5는 저자의 정치사상의 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 〈己丑封事〉와 〈丁酉封事〉이다. 〈己丑封事〉는 孝宗 즉위년(1649)에 장령으로 제수되어 처음 올린 것이다. 聖德을 닦고 학문에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인데 이 중 9개조는 朱子의 〈己酉封事〉의 條目을 채택한 것으로 자세한 주와 설명이 곁들어져 있다. 〈丁酉封事〉는 효종 8년(1657), 克服과 修攘의 대책을 논하며 北伐을 나라의 義理로 천명한 것인데 朱子의 故事에 따라 책자로 올려 淸 나라에 누설되지 않게 하였다.
권6~21은 疏箚와 啓辭이다. 334편의 소차와 8편의 계사가 각기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는데 유배되어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해마다 실려 있다. 권6은 1645년 鳳林大君의 보양관에 임명되자 사직한 〈辭輔導東宮之命疏〉부터 1650년 2월 올린 〈辭職疏〉까지 모두 22편이 실려 있다. 당시 大同法 실시를 둘러싼 金堉과의 불화로 스승인 金集이 귀향해버렸으며, 또 金自點 餘黨의 참소로 淸의 査問이 나와 저자가 조정에 있기 힘든 상황이었다. 권7은 1650년 7월~1657년 1월까지 12편의 소차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이 사직소와 하사한 食物을 사양하는 소이다. 권8은 1657년 5월~1659년 4월까지 37편으로 저자가 효종의 知遇를 받아 가장 활발하게 국정에 참여한 기간이다. 이 중 〈辭贊善疏〉의 〈三疏〉는 바로 〈丁酉封事〉로 내용이 권5에 실려 있어 이곳에는 제목만 있다. 〈辭貂帽箚〉와 〈辭貂裘箚〉 등은 저자가 하사품을 거듭 사양하자 孝宗이 遼東 벌판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의미심장한 하교와 함께 내린 것인데 저자의 편지나 시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권9는 1659년 5월 효종의 승하 이후 올린 41편인데 대부분 사직소이다. 〈洪汝河疏後乞免疏〉는 李厚源, 宋浚吉 등과 함께 洪汝河의 공격을 받자 사직한 소이며, 〈以山陵事引罪…〉는 寧陵(孝宗陵)을 水原에 쓰는 것을 반대하고 健元陵에 쓸 것을 주장한 소이다. 〈誌文封進箚〉는 李景奭 등이 誌文에서 崇明排淸 등의 내용을 수정하기를 청하자 誌文을 인출하여 발표하지 말 것을 청하고 아울러 湖南의 大同法 실시 반대를 청한 것이다. 권10은 1660년~1661년 3월까지 올린 12편이다. 1660년은 己亥禮訟에 이은 南人들의 반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로 許穆과 尹善道의 상소가 잇달았는데 이에 대한 상소가 〈尹善道疏後待罪疏〉이다. 권11은 1661년 4월~1665년에 올린 22편이 실려 있다. 〈趙絅疏後待罪疏〉는 趙絅이 尹善道를 변호하자 다시 대죄소를 올린 것으로 禮論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顯宗 기간 동안은 저자가 직접 정계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내용의 대부분이 辭職疏와 乞退疏이다. 권12는 1666년~1668년 11월의 35편이다. 〈陳情待罪疏〉는 李䎘 등이 許積을 논하다가 유배되자 구원한 내용이고, 〈黃壖疏後待罪疏〉는 黃壖이 저자가 山林에서 국정을 조정한다고 비난하자 대죄한 소이다. 권13은 1668년~1670년의 29편이다. 〈留都大臣李景奭…〉은 李景奭이 三田渡碑文을 지었던 일을 가지고 孫覿에 비기어 비난한 것인데 尊周(尊明)의 義理에 위배되는 것은 단호히 배척한다는 저자의 원리주의를 드러낸 글로 당시 논란을 일으킨 상소이다. 이 외에 神德王后의 祔廟를 청한 차자도 저자가 주요한 義理를 세웠다고 자부한 차자이다. 권14는 1671년~1672년의 13편인데 〈陞拜左議政…〉은 南人 재상인 許積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宋浚吉을 구원한 내용이다. 권15는 1673년~1674년 3월의 14편이 실려 있다. 외척인 金佑明과의 대립으로 寧陵 遷葬의 表石 문제, 閔愼의 喪服 문제가 드러난 〈辭寧陵遷葬誌文撰進疏〉와 〈因國舅論斥待罪疏〉가 실려 있다. 권16은 1674년~1681년 2월의 28편이다. 1674년 2차 禮訟이 일어나자 자신의 禮說을 기록하여 진달하려다 郭世楗의 상소로 그만 둔 〈擬疏〉 이후에는 甲寅換局으로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올린 소차가 없다. 庚申換局으로 다시 복귀한 1680년 이후의 소차가 많은데 〈進修堂奏箚〉는 肅宗에게 효종이 세웠던 뜻과 당시의 정책을 계승하도록 아뢴 것이다. 권17은 1681년~1683년 3월까지의 27편이다. 이 기간의 주요 상소로는 스승인 金長生의 문묘종사를 청한 〈論文廟從祀疏〉, 수령의 선발과 水車의 실시 등 13조목을 주달한 〈條陳時政箚〉, 金益勳에 대한 용서를 청하여 少論과의 分黨을 가져온 〈引咎仍乞致仕箚〉 등이 있다. 권18은 1683년~1684년 1월까지의 17편으로 그중에는 저자의 필생의 노력이 깃든 朱子封事와 奏箚에 대한 箚疑를 올린 箚子가 있다. 이는 「朱子大全箚疑」로 확대되어 저자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과 교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제자인 金昌協, 權尙夏에 의해 완성되었다. 〈朴泰維疏後待罪疏〉는 저자가 주장하던 太祖 廟號의 追尊을 少論이 반대하자 올린 소이다. 권19는 1684년~1687년 16편인데, 〈進文元公遺稿…〉와 〈論… 陳尹拯事疏〉는 尹宣擧, 尹拯 父子와의 불화의 전말, 그리고 尹鑴의 異端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매우 주목할만하다. 권20은 모두 1689년에 올린 6편이다. 이 중 〈辨訿毁牛溪…〉는 牛溪와 栗谷 門下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尹宣擧와 成文濬 등을 비난한 내용이고, 이하는 己巳換局으로 유배되기 직전에 孝宗의 手札을 올리려고 했던 疏와 濟州道와 井邑에서 올린 遺疏이다.
권21은 太學生 때 지은 〈擬兩賢辨誣疏〉 등 3편의 疏와 啓辭 8편이다. 권22~25는 書啓이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출사한 1659년부터 1687년 동안에 올린 195편이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다. 승지, 사관, 예판 등을 보내 끊임없이 전유하고 하교한 것에 대한 짤막한 답이다.
권26은 獻議로 1659년~1687년 사이에 올린 36편이다. 〈慈懿殿服制議〉에서 〈練服變改及許穆圖說辨破議〉까지는 孝宗의 喪에 대한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한 것으로 許穆 등 南人측에서 三年說을 주장하고 나서자 經典을 인용하여 朞年服을 주장한 내용이다. 이 외에 宗廟와 山陵의 문제, 文廟에 대한 獻議 등이 실려 있다.
권27~129는 書이다. 大全에 실려 있는 서간은 모두 5500여 편으로 저자의 저작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저자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 당시의 상황과 교유 관계 등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일일이 살펴보기 힘들다. 편지를 주고받은 대상은 약 550명에 달한다. 尤庵이 활동한 기간이 길었고 또 그가 점하고 있던 사회적, 학문적 위치를 반영하듯이 老少論을 막론하고 당시의 명사들은 대부분 다 포함되어 있다. 編次는 수신자별로 모으고 다시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애초 주제별로 모은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全稿를 수록하는 쪽으로 편찬 방향이 기울면서 내용에 따라 구별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대체로 西人의 정치적 대선배인 金尙憲(18), 安邦俊(6)과 스승인 金集(6) 등 비중있는 대상이 권27을 차지하고 있고, 교유가 잦았던 인물인 李厚源(174), 宋浚吉(213), 兪棨(144), 洪命夏(41), 鄭瀁(34), 尹文擧와 尹宣擧(165), 權諰(36), 李惟泰(197) 등이 권28~41에 실려 있다. 권42~111에는 문인 및 후배들로 李廷夔(29), 李翔(80), 李端夏(177), 金壽增(46), 金壽興(115), 金壽恒(126), 閔鼎重(224), 閔維重(238), 朴世采(156), 宋奎濂(74), 李端相(24), 李之濂(26), 金萬均(25), 李選(107), 金萬基(93), 金益廉(38), 趙根(62), 申啓澄(44), 金萬增(102), 金萬埈(81), 尹以健(40), 權尙夏(89), 李箕洪(48), 金昌協(43), 李喜朝(76), 黃世楨(63), 尹拯(50) 등이 실려 있으며, 기타 인물 및 書院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권112 이후에 편차되어 있다. 가족 중에는 아우인 宋時燾(82)와 宋時杰(51), 아들인 宋基泰(79), 손자인 宋殷錫(64)과 宋疇錫(63)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편지의 내용 중에 朱子 등 宋代 유학자의 故事를 인용한 부분과 당시의 政勢나 특별한 사안과 관련되어 알기 힘든 부분은 「宋子大全隨箚」를 이용하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권130~136은 雜著로 모두 89편이다. 經書에 대한 의론과 禮設, 字說, 時事에 대한 글, 자손에게 전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栗谷別集訂誤〉는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別集 중 수정해야 할 내용을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인데, 尤庵은 이 별집의 판본을 부수어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하였다. 〈朱子言論同異攷〉는 「朱子大全」과 「語類」에서 보이는 주자의 상반된 견해들을 뽑은 것인데 1689년 유배지에서 쓴 글로 말년까지 주자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看書雜錄〉과 〈雜錄〉도 朱子의 의리와 출처에 대해 논하고 栗谷의 장점과 退溪 학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기록한 것이다. 인물에 대한 논평에서는 朱子를 얼마나 배우고 인정했는가 하는 점이 그 기준이 되고 있다. 예컨대 浦渚 趙翼의 경우 朱子學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孔子 이후의 第一人으로 추존했다는 점을 들어 인정해주고, 尹鑴는 주자를 배척하였으므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斯文辭賊이며, 尹宣擧는 이런 辭賊과 교유를 끊지 않고 세상을 속였으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저자는 이러한 異端이 횡행하는 것은 朱子學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자신이 「朱子大全箚疑」를 저술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尹鑴와 尹宣擧, 尹拯에 대한 저자의 비난은 이 밖에도 〈燕居雜錄〉, 〈偶記〉, 〈瑣錄〉, 〈雜記〉, 〈蓬山雜記〉, 〈示諸子孫姪孫等〉 등 곳곳에 보이고 있다. 대체로 雜著에는 중복된 내용이 종종 보이는데, 退溪의 「論語」 末則是本說에 대한 저자의 異見도 〈看書雜錄〉과 〈退溪四書質疑疑義〉, 〈論語末則是本說〉에 모두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권132의 〈華陽洞客位咨目〉은 「朱子大全」의 〈休致後客次咨目〉을 모방해 지은 것으로 세상의 시비에서 벗어나고픈 저자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 외에 許穆과 尹鑴의 禮論을 반박한 禮說, 그리고 字說과 堂亭 등 건물에 대한 說, 呈文과 策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37~150은 序, 記, 跋, 銘, 箴 등이다. 권137~139에 실려 있는 序는 모두 104편으로 詩文集 등 간행 서적에 대한 序, 族譜序가 60여 편이고 30여 편이 送序이며, 나머지는 圖序와 모임에 대한 序 및 詩序이다. 저자는 학계와 정계를 대표하는 인물인데다 長壽한 관계로 당대에 간행되는 문집에 대한 序跋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또 당시는 사회적으로 丁卯, 丙子亂 이후 많은 典籍이 소실되어 남은 문헌에 대한 간행이 주를 이루었고, 또 宣祖 이후 이른바 ‘穆陵盛世’ 시대 문인 학자들의 文集이 간행되는 시기였으므로 특히 주요한 문집들이 많았다. 「睡隱集」, 「圃隱集」, 「西坰集」, 「葛川集」, 「守夢集」, 「靜觀集」, 「澤堂集」, 「市南集」, 「孤竹集」, 「畸庵集」, 「沙溪遺稿」, 「河西集」, 「泛翁集」, 「月沙集」 등의 序가 실려 있다. 권140~145는 188편의 記文으로 樓亭, 客舍, 祠宇, 書院 등 건물에 대한 기문 및 事實記와 遊記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146~149는 시문집과 저서, 書畫와 詩卷, 筆跡에 대한 跋인데, 특히 白沙 李恒福과 관련된 〈白沙眞蹟跋〉, 〈白沙遺事跋〉, 〈白沙帖跋〉, 〈書白沙文忠公錄卷後〉, 〈書白沙鐵嶺歌後〉, 〈書白沙… 上批後〉 등의 글이 많다. 권148에 있는 〈書宋子愼剖擊許穆儀禮說後〉의 宋子愼은 宋尙敏으로 저자의 門人이다. 1679년 許穆의 의례설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가 許積의 탄핵을 받고 杖死하였는데 그해 10월에 그를 기리며 쓴 것이다. 권150에는 金壽興, 金壽恒 형제의 知止窩와 坎亨窩에 대한 銘을 비롯한 12편의 銘, 〈主一齋箴〉 1편, 畫像贊 4편, 손자인 宋殷錫, 宋疇錫, 宋晦錫, 宋圭錫의 혼례에 쓴 婚書 7편, 上樑文 5편이 실려 있다.
권151~153은 祝文과 祭文, 哀辭이다. 祝文으로는 金宏弼, 趙光祖, 李珥, 金長生, 金集 등을 書院과 祠宇에 봉안하는 축문과 부형, 사우, 친지의 사당이나 묘소에 고하는 告由祝文 등 7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告沙溪先生墓文〉은 1689년 2월 濟州로 귀양가는 길에 스승의 묘에 들러 전후의 사정을 고하고 朝聞道夕死可矣의 각오를 피력한 글이고, 〈告皇考睡翁…墓文〉은 제주에서 다시 돌아오던 중 죽음을 예감하고 지은 것으로 평생 부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과 의리를 수호했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다. 당시 저자의 부친인 睡翁 宋甲祚가 光海君朝에 廢母論 疏에 가담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원통함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권152~153은 114편의 祭文과 金壽恒의 딸에 대한 哀辭 1편이다. 沙溪先生에 대한 祭文을 비롯하여 宋浚吉, 權諰, 鄭澈, 兪棨, 李惟泰 등과 門人, 친지, 亡子와 亡室에 대한 글인데, 尹宣擧의 제문에서는 역시 尹鑴에 대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祝文의 경우는 내용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어 있지만 祭文은 대체로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권154~171은 神道碑 96편, 遺墟碑와 廟庭碑, 旌閭碑 등 25편이 실려 있다. 神道碑는 법제상 2품 이상의 관직에 대해서만 허용되는 것인데 96명의 신도비문을 지었다는 것은 저자의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짐작케 한다. 尹倬, 白仁傑, 鄭澈, 金集처럼 墓誌나 墓表에서 중복되는 인물도 상당수 있다. 권154~155는 鄭夢周를 비롯하여 睡翁府君까지 중요 인물 순으로 수록되어 있고, 이 뒤로는 대개 저작순으로 실은 듯하다. 이 밖에 紫雲書院, 竹林書院, 滄洲書院 등 서원의 廟庭碑와 趙光祖, 朴彭年, 成三問의 유허비, 효자ㆍ열녀의 旌閭碑가 실려 있다.
권172~180은 成守琛, 成運, 丁熿, 權韠 등의 墓碣文 10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成文濬의 묘갈문에서는 光海朝 大北과의 관계를 언급하여 牛溪 집안과 불화를 빚게 되었고, 尹拯의 부탁으로 지은 尹宣擧의 묘갈명은 懷尼是非(저자는 懷德에, 尹拯은 尼山에 거주하였음)를 야기시켜 결국 사제지간이 老少論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181은 陵誌 3편이다. 孝宗의 寧陵誌文과 遷陵時 지은 識가 부기되어 있다. 尤庵과 孝宗은 魚水之契로 비유되어 효종은 大業을 이루려는 큰 뜻을 지니었고 우암도 이로써 大義로 삼아 자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志業을 지문에 명시하였는데 相臣 李景奭이 淸의 눈치를 보아 삭제할 것을 청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顯宗妃인 明聖王后와 肅宗妃인 仁敬王后의 誌文이다. 특히 명성왕후는 金佑明의 딸로 老論의 입지를 위해 힘썼으며 숙종 초 甲寅換局 때 尤庵을 보호하는 데 공이 있었다. 仁敬王后 또한 노론인 金萬基의 딸로 성격이 엄숙하여 인경왕후 생존시에는 숙종이 후궁을 가까이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권182~188은 墓誌 73편이다. 金尙憲, 金集, 金壽恒 등의 묘지가 실려 있는데, 특히 文谷 金壽恒의 묘지는 尤庵이 죽기 5일 전인 1689년 6월 3일에 지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정치적 역정을 걸어온 金壽恒에 대한 애도와 時勢에 대한 울분 등이 나타나 있다. 권187은 貞明公主를 비롯해 여자들의 墓誌만 모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府夫人(정1품 종친), 貞敬夫人(1품), 貞夫人(2품), 淑夫人(3품 堂上官), 淑人(3품), 恭人(5품), 宜人(6품), 孺人(9품) 등은 婦人 官爵의 명칭이다. 권188은 저자의 부친 宋甲祚를 비롯해 宋希命, 宋國澤 등 친척의 墓誌를 모아 놓았다.
권189~201은 墓表 246편이다. 金尙憲, 羅萬甲, 李浣 등으로, 위의 묘갈, 묘지와 중복되는 인물이 많으며, 역시 인물의 중요도순으로 수록하였다. 권200은 부인 등 여자들의 묘표를 수록하였으며, 권201도 墓誌와 마찬가지로 조상과 친척들의 묘표를 실었다.
권202~205는 諡狀 13편으로 宋麟壽, 黃進. 宋象賢, 尹暹, 兪絳, 李廷立 등이며, 권203은 1권 전체가 澤堂 李植의 시장이다. 권206~211은 行狀으로 모두 27편이 실려 있다. 권206은 朴紹, 梁山甫, 辛應時, 李後白 등 선배들이고, 권207은 重峯 趙憲, 권208은 沙溪先生을 비롯해 부친 睡翁公과 尹宣擧의 부친 尹煌, 李時稷의 행장이며, 권211에는 李忔의 妻 全州崔氏, 尹飛卿의 妻 韓山李氏, 鄭元俊의 妻의 行狀이 포함되어 있다.
권212는 遺事와 語錄이다. 遺事는 同春 宋浚吉의 言行에 관한 글이다. 宋浚吉은 저자와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며 평생을 학문적, 정치적 동지로 지내온 사이면서도 관후한 성격으로 南人이나 少論에 대해 온건적이었다. 따라서 鄭介淸의 祠宇 毁撤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語錄은 沙溪 金長生, 愼獨齋 金集, 石室 金尙憲의 어록이다. 聯珠集附錄은 저자가 序跋을 지었던 延安李氏 집안의 문집에 대한 부록으로 李一相, 李殷相, 李有相, 李端相과의 교유를 기록한 것이다.
권213~215는 傳으로 모두 18편이 실려 있다. 권213은 丙子胡亂時 斥和臣으로 지목되어 淸에 끌려가 죽은 洪翼漢, 尹集, 吳達濟 이른바 〈三學士〉를 비롯하여 明에 망명하여 청을 공격한 林慶業 장군, 1683년 淸軍과 함께 명 토벌군으로 가서도 父母之國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여 참수당한 砲手 李士龍 등 崇明排淸의 인물에 대한 傳이다. 권214는 임진왜란 때 晉州城전투에서 전사한 張潤, 丁酉再亂 때 모친을 구하려다 죽은 金聲遠, 효자 李榮仁, 부모의 원수를 갚고 자수한 金成一 형제 등, 孝子와 烈士에 대한 傳이며, 권215의 〈恩津宋氏家傳〉은 宋明誼, 宋汝諧, 宋龜壽, 宋應期, 習靜公 宋邦祚 등 저자의 집안 친척에 대한 傳이다.
大全의 附錄은 모두 19권이다. 권1은 敎書와 賜祭文이고, 권2~12는 年譜이다. 年譜는 저자의 손자인 宋疇錫이 5책으로 편차한 뒤 宋婺源이 다시 정리해 활자로 간행한 것을 大全 간행시 宋煥箕가 이후의 기사를 보충하여 체제를 다시 정리하였다. 사후 伸寃과 復爵, 書院의 享祀와 賜額에 대한 기록까지 자세하게 실려 있으며, 正祖 11년(1787) 9월 大全의 간행 기사와 11월 12일 大老祠에 致祭를 명하여 大老祠碑의 글씨와 碑文을 지어준 일이 마지막 기사이다.
권13은 權尙夏가 쓴 墓表와 權尙夏, 鄭澔, 金昌協이 지은 尤庵의 畫像贊이 수록되어 있다.
권14~18은 문인들이 기록한 尤庵의 語錄이다. 기록자는 權尙夏, 鄭澔, 李選, 李箕洪, 金昌協, 李喜朝, 金榦, 李橝, 鄭纘輝, 金鎭玉, 黃世楨, 朴光一, 崔愼, 李敬秀 등이다. 저자의 인품, 학문, 정치적 견해와 일상 생활 등을 제자들의 시각에서 기록한 것이다.
권19는 記述雜錄이다. 문인과 再傳弟子들이 저자에 대한 기록을 여러 자료에서 뽑아 기록자별로 정리한 글이다. 權尙夏, 李端夏, 韓元震, 尹鳳九 등 23명이 참여하였다.
宋書拾遺는 9권 4책으로 모두 大全에서 누락된 저자의 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目錄이 있고, 권말에 10대손 宋曾憲의 발문이 실려 있다. 내용 중에는 역시 書簡文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편차 기준은 大全과 비슷하다.
拾遺 권1~6은 詩와 書啓, 書이다. 詩는 鄭普衍, 宋徵彥, 尹文擧의 外姑李氏, 或人에 대한 挽詩와 七言絶句와 律詩 등 총 13편이다. 書啓는 李選을 보내 傳諭한 것에 대한 서계 등 3편이다. 書는 〈上寧陵〉으로 孝宗에게 보내는 편지와 沙溪 金長生, 愼獨齋 金集 등에게 올린 問目를 비롯해 李厚源, 宋浚吉, 兪棨, 尹宣擧 형제, 李翔, 李端夏, 金壽增 형제와 閔鼎重 형제, 朴世采, 李選, 金萬基 등 130명에게 보내는 편지 44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권5의 〈答或人〉은 尹宣擧는 이미 毁節하였으니 嘉言善行이 있은들 娼家에서 禮書를 읽고 백정이 禮佛하는 격이라고 비난한 내용이다. 권6은 모두 가족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편차와 배열 방식은 原集과 같으며 수신자도 원집과 대부분 중복된다.
습유 권7~8은 雜著와 序, 跋, 祝文 등이다. 잡저의 〈時敏堂夜對圖說〉은 孝宗 시에 저자가 宋浚吉, 趙龜錫 등과 夜對에 입시하였던 故事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붙여 1663년 顯宗에게 올린 것이고, 〈高山九曲歌翻文〉은 한글로 되어 있던 李珥의 〈高山九曲〉을 한문으로 번역한 글인데 「栗谷全書」에도 송시열의 번역문이 실려 있다. 黃赫의 「獨石集」 序文과 〈書明聖大妃誌文後〉, 〈書杞溪兪氏家狀後〉 등이 있으며, 紫雲書院, 坡山書院, 象賢書院, 德山書院, 月峯書院, 百源書院, 筆巖書院의 축문과 고문, 郭文漢, 金光老, 宋炳文에 대한 제문, 趙翼, 李郁, 李晫, 金呂重, 宋世勛 妻의 墓表가 실려 있다. 迂齋 李厚源의 遺事는 저자가 듣고 본 일화를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습유 권9는 經筵講義이다. 孝宗 연간, 顯宗(1668~1669), 肅宗 초기(1680~1683)의 경연석상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권말에 “丁卯(1927)開刊南澗藏板”이란 刊記와 昭和 2년 인쇄 반포로 기록된 印記가 붙어 있다.
宋書續拾遺는 3권 2책으로 拾遺 이후에 다시 남은 저자의 유문과 부록문자를 모아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遺文은 詩 7편과 書 56편, 三憂堂 文益漸의 遺事 1편, 具譓의 묘갈명 1편으로 1권 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閔光晨 형제, 朴惟棟, 吳得天, 朴尙眞, 宋錫奎, 梁禹及 등 大全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인물이다. 내용도 대부분 안부를 묻는 짤막한 편지이며 묘갈문 등 부탁한 문자에 대해 의논한 것이다. 그중 〈答德川院儒崔絅〉은 曺植의 「南冥集」을 재편차할 때 鄭仁弘이 지은 序와 行狀 등을 모두 빼버리고 또 문집 중 鄭仁弘과 관계된 기사를 모두 삭제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或人으로 바꾸도록 하여 정인홍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도록 한 내용인데, 이 修正指針에 따라 나온 것이 「南冥集」 庚戌本이다.
나머지 2권은 부록으로 권1은 英祖(1726년)에서 高宗(1874년)까지의 賜祭文이고, 권2는 楚山日記와 尹鳳九가 지은 墓誌, 宋婺源ㆍ宋煥箕의 墓表後記이다. 楚山은 井邑의 이칭으로 尤庵이 사약을 받은 곳이다. 井邑에 이르러 後命을 받던 상황부터 權尙夏, 黃世楨 등 高弟들이 執事가 되어 遺命에 따라 喪禮를 치르고 水原에 장사를 지내기까지의 기록인데 喪柩가 지나는 각처에서 조문한 사람들과 부주한 물품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閔鎭綱, 朴光一, 金道器가 각각 기록하였는데 閔鎭綱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宋一源, 宋煥世 등의 追記가 붙어 있고, 권말에는 宋秉夔가 쓴 발문과 昭和 4년(1929)이라고 되어 있는 印記가 붙어 있다.
宋子大全隨箚는 모두 13권 6책으로 송자대전에 대한 註解書이다. 본래 「尤庵集」을 대상으로 했던 宋周相의 「潭谷隨箚」를 宋近洙가 大全本에 맞게 증보, 재편한 것인데, 후에 宋秉璿이 다시 교정하고 정리하였다. 권두에 李世淵의 서(1864)와 凡例, 그리고 宋近洙의 識(1866)가 실려 있다.
체제는 大全의 卷次에 따라 나누고 또 板次를 黑圈으로 표시하여 참조하기 쉽게 구성하였다. 詩와 封事 같은 경우는 故事의 해설을 위주로 하고, 疏箚와 書는 당시의 상황과 인물, 사건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밖에 글자의 音과 訓, 출처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 난해한 저자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권13은 目錄으로 大全에 자주 나오는 인물에 대한 인명록이다. 字號와 本貫, 생몰년, 관력과 출처, 저자와의 관계 등을 위주로 간략하게 서술하였는데 대략 200여 명이 실려 있으며 수록 순서는 서간의 배열순과 비슷한 인물의 중요도 순이다. 권말에는 9대손 宋秉璿의 識와 “辛丑(1901)開刊華陽藏板”이란 刊記가 실려 있다.

필자 : 金成愛
직재집 ( 直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直齋集
판심제  直齋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87年刊
권책  10권 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7×16.3(㎝)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33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49
 저자
성명  이기홍(李箕洪)
생년  1641년(인조 19)
몰년  1708년(숙종 34)
초명  箕疇
 汝九
 直齋
본관  全州
특기사항  宋時烈의 門人. 權尙夏, 李喜朝 등과 교유
 가계도
 李炯信
 
 李塾
 副司果
 礪山宋氏
 宋鉉의 女
 李箕洪
 
 潘南朴氏
 朴世塤의 女
 李蓍顯
 縣監
 李蓍先
 
 李蓍定
 奉事
 李蓍聖
 
 女
 
 金有慶
 監司
 女
 
 鄭泰河
 
 李箕範
 
 具涉의 女
 
 韓必發의 女
 
 李箕仁
 
 具文彬의 女
 
 李箕傅
 
 金國獻의 女
 
 女
 夭
 李耋
 都事
 韓休의 女
 
 李墪
 正郞
 尹泰基의 女
 
 安應會의 女
 
 李壄
 
 南宮燮의 女
 
 李堂
 
 李稹의 女
 
 金重亨의 女
 
 李
 
 韓聖瑞의 女
 
 女
 
 尹尙冕
 
 女
 
 徐宗翰
 
 女
 
 金斗瑞
 
 女
 
 柳綰
 

기사전거 : 行狀(李喜朝 撰), 李炯信行狀ㆍ李塾家狀(李箕洪 撰), 李箕洪妻墓誌銘(鄭澔 撰, 丈巖集 卷12)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1 12월 4일, 태어나다.
~ ~ ~ ~ ~ ~ ~ 恥菴 李之濂에게 「小學」, 「近思錄」 등을 배우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18 潘南 朴世塤의 딸과 혼인하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25 懷德에 가서 同春 宋浚吉을 배알하다. ○ 이어서 尤庵 宋時烈을 배알하고 가르침을 청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26 朴世采에게 편지하여 浦渚 趙翼의 〈持敬圖說〉의 의문점을 묻다.
~ ~ ~ ~ ~ ~ ~ 부친의 命으로 科擧에 응시하여 司馬 初試에 합격하고 覆試에서 한 儒生이 公의 試紙를 먹물로 더럽히자 試場을 나오다. 이후 과거에 뜻을 끊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30 모친상을 당하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33 宋時烈에게 올리는 〈上尤齋先生請敎序〉를 짓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34 宋時烈이 2차 禮訟으로 疏斥을 받자 여러 同門들과 상소하여 억울함을 말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35 1월, 송시열에게 德原 유배의 명이 내리자 상소하여 변호하다. 이후 嘉平으로 退居하다. ○ 6월, 長鬐로 유배가는 송시열을 平邱에서 배알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36 송시열의 죄를 告廟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자 상소를 지어 변론하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37 지난해 지은 상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告廟의 논의가 수그러들어 疏章을 올리지 않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40 송시열이 사면되어 懷川으로 돌아오자 안부 편지를 올리고, 이어 陽村의 入學圖說과 「家禮」에 대해 묻다. ○ 겨울, 부친상을 당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42 겨울, 祖父(李炯信)喪을 당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44 복을 마치다. ○ 이해에 「爲學方續」을 엮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45 金壽興이 누차 經明行修로 천거하다. 편지하여 감사와 사양의 뜻을 전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47 孝陵 參奉이 되어 부임하다. ○ 2월, 송시열이 尹宣擧를 疏斥한 일로 羅良佐 등이 다시 抗疏하자 송시열을 위해 논변하는 상소를 지었으나 올리지 않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차되다. ○ 겨울, 興農書室에 가서 송시열을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49 司圃署 別檢에 제수되다. ○ 5월, 송시열이 濟州로 유배되고 그의 국문을 청하는 계청이 윤허되자, 同門 40여 명과 함께 상소하여 송시열을 辨誣하다. ○ 이 상소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會寧에 유배되다. ○ 유배지로 향하던 중 鏡城에 이르렀을 때에 송시열이 賜死되었다는 소식을 듣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50 유배지 회령에 書齋를 짓고 ‘直齋’라 편액하고 自號로 삼다.
숙종 17 1691 신미 康熙 30 51 疏決에서 徒三年으로 減等되다.
숙종 19 1693 계유 康熙 32 53 사면되어 돌아오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54 송시열의 관작이 회복되고, 송시열을 변무하다가 유배된 사람들을 서용하라는 명이 내리다. ○ 8월, 우참찬 朴泰尙의 천거를 받다. ○ 12월, 朴世采의 천거로 시강원 諮議가 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55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나 사은하고 즉시 사직하여 체차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56 6월, 이조의 抄啓로 書筵官이 되다. ○ 10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 通川 縣監이 되다. ○ 郡守로 승급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57 죄인 洪箕疇가 凶死하였으므로 이름이 같은 것을 혐의하여 李箕洪으로 改名하다. ○ 겨울, 方伯과 親嫌이 있어 사직하고 체차되어 돌아오다.
숙종 24 1698 무인 康熙 37 58 8월, 장령이 되다. 누차 사직소를 올려 체차되다.
숙종 26 1700 경진 康熙 39 60 2월, 장령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 淸風 府使가 되다.
숙종 28 1702 임오 康熙 41 62 7월, 장령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同門 李萬亨이 수령으로 있는 延豐 文山에 가서 우거하다. 가까운 黃江, 丈巖에 거처하던 權尙夏, 鄭澔 등과 교유하다. ○ 華陽書院에 가서 尤庵의 遺像을 배알하다. ○ 8월, 8조목의 상소를 올리다. ○ 10월, 夫人 朴氏의 상을 당하다.
숙종 29 1703 계미 康熙 42 63 7월, 집의가 되다. 李厦成이 송시열을 무함하자, 상소하여 변무하다. 체차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64 2월, 楊州 先山에서 지내다. 집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 3월과 6월, 집의가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장악원 정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65 1월과 5월, 집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숙종 32 1706 병술 康熙 45 66 집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67 1월, 집의가 되다. ○ 2월, 洪萬朝가 송시열을 무함하자, 상소하여 辨誣하다. 체차되다.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68 4월, 집의가 되다. 蔡明胤이 牛溪와 栗谷을 侵辱하자 상소하여 논변하다. 사직하여 체차되다. ○ 12월 3일, 졸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 2월, 楊州에 장사 지내다.
영조 41 1765 을유 乾隆 30 - 中州로 移葬하다.
순조 32 1832 임진 道光 12 - 5대손 李周冕이 墓誌의 後識를 짓다.
고종 24 1887 정해 光緖 13 - 7대손 李承根이 宋近洙의 刪定을 거쳐 문집을 간행하다.(宋近洙의 跋)

기사전거 : 行狀(李喜朝 撰), 墓誌銘(鄭澔 撰), 墓碣銘(權尙夏 撰),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宋時烈의 門人 가운데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으로 다른 문인들에 비해 일찍 졸하였으나 문집의 편찬, 간행에 있어 同門들의 도움은 크게 받지 못하였던 듯하다. 당시 權尙夏, 李喜朝 등이 송시열의 문집 편찬, 간행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손의 零替로 인하여 더욱이 문집 간행을 주도할 사람이 없었던 듯하다.
저자의 시문은 5代孫 李周冕이 처음으로 수습하여 繕寫하고 부록문자를 덧붙여 印行하려고 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였다. 李周冕은 1832년경에 墓誌의 後識를 지었으니, 시문 인행을 시도한 시기는 대략 이때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가 졸한 직후에 여러 아들들의 부탁을 받고 李喜朝와 鄭澔에 의해 쓰여진 行狀과 墓誌에는 “저술한 文稿 약간 권과 「自省編」, 「爲學方續」 등의 책들이 家藏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草稿들이 1832년경까지 家藏되어 왔을 것이며, 李周冕은 이 초고를 바탕으로 시문을 수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李周冕의 아들 李敏鉉이 遺志를 받들어 士友들의 도움으로 印行을 하려 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였고, 이어 李敏鉉의 長姪이자 저자의 7代孫인 李承根이 1887년에 송시열의 8대손인 宋近洙의 校正과 刪定을 거쳐 10권 5책을 활자로 인행하였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4339, 古3428-15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35)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4-6526)에는 宋近洙의 교정본으로 짐작되는 5권 4책의 校正 原稿本이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87년에 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跋(宋近洙 撰), 行狀(李喜朝 撰), 墓誌銘(鄭澔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10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없으며, 각 권별로 권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賦 1수, 詩 175수이다. 賦는 1661년에 朱子의 작품을 次韻해서 지은 〈感春賦…〉 1편이다. 詩는 詩體 구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1661년에 恥菴 李之濂에게 지어 올린 〈向善吟…〉, 1675년 2월에 李喜朝가 찾아왔을 때 지은 〈感時吟〉, 같은 해 5월에 꿈에 우암 송시열을 뵙고 깬 뒤 지은 〈記夢〉, 嘉陵 泉谷에서 지낼 때에 지은 〈泉谷八景〉, 尤庵 宋時烈에게 올린 詩, 鍾城 謫所에 있는 李惟泰에게 부친 시, 謫所에 있는 南龍翼에게 올린 시, 鰲山(會寧)에 귀양갔다가 1693년에 사면되어 돌아올 때에 지은 시, 珍山으로 부임하는 尹以健을 전송한 시, 1700년에 淸風 郡守로 부임할 때에 지은 시, 1702년에 叔父를 따라 淸平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 權尙夏와 함께 龜潭을 찾아갔을 때에 지은 시, 同春 宋浚吉, 同異翁 李惕然 등을 哭한 詩, 尹以健, 許卨, 李仁夏, 韓明遇, 金昌協 등에 대한 挽詩, 宋疇錫, 李端夏, 兪命賚, 李喬岳 등과의 차운시 등이 실려 있다.
권2~3은 疏 20편이다. 1676년(숙종 2)에 宋時烈의 伸寃을 청한 疏, 1687년(숙종 13)에 羅良佐 등의 疏斥을 받은 송시열을 辨誣하는 疏, 1689년(숙종 15)에 송시열의 伸寃을 청한 疏, 萬義書院의 건립을 청한 疏, 諮議ㆍ持平ㆍ掌令ㆍ執義를 사직한 疏 등이 실려 있다.
권4~7은 書이다. 尤庵 宋時烈(36), 同春 宋浚吉(4), 恥菴 李之濂(5), 草廬 李惟泰(1), 退憂堂 金壽興(2), 姜栢年(1), 李翔(1), 朴世采(12), 李端夏(2), 權尙夏(23), 李喜朝(6), 崔邦彥(9), 李挺英(9) 등에게 보낸 편지 도합 151편이 인물별, 연대별로 편차되어 있다. 宋時烈에게는 1665년에 처음 배알한 때부터 안부를 묻고 政勢에 따른 염려를 적어 보냈고, 金壽興에게는 천거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사양의 뜻을 말하였으며, 權尙夏에게는 1685년 이후 안부편지와 함께 喪葬禮, 太極圖說, 萬東廟 문제 등을 묻고 의논하는 편지, 송시열의 묘도문자 작성 문제 등을 의논하는 편지들을 보냈다.
권8은 序 5편, 記 5편, 跋 5편, 銘 1편, 雜著 5편이다. 序는 1673년에 宋時烈에게 가르침을 청한 序, 1685년에 鎭川에 부임하는 李喜朝, 1687년에 珍山에 부임하는 尹以健 등을 전송한 送序, 북방에 귀양가 있을 때에 저술한 「自省編」에 대해 1689년에 지은 敍 등이며, 記는 砥平 三星洞에 있는 李留(澤堂 李植의 손자)의 三省齋에 대해 1673년에 지어준 〈三省齋記〉, 華陽의 泉谷에 泉谷精舍를 짓고 1676년에 쓴 〈泉谷精舍記〉, 會寧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에 지은 書齋인 直齋에 대해 쓴 〈鰲山齋舍記〉, 1704년에 延城의 觀德亭에 대해 지은 것 등이다. 跋은 休菴 白仁傑의 年譜, 牛溪 成渾의 「爲學方」에 대한 속편으로 1684년에 엮은 「爲學方續」 등에 대한 것이며, 銘은 〈直齋銘〉으로 회령 유배지에 있을 때에 지은 것이다. 雜著는 四七理氣에 대한 退溪, 高峯, 栗谷, 守夢 등의 학설에서 栗谷의 학설이 옳음을 논변한 것, 宋時烈을 모시고 있을 때 들은 말을 기록한 語錄, 季子 李蓍聖의 婚書文, 瑣言 등이다.
권9는 祭文 18편, 墓誌, 墓碣, 墓表 각 1편, 行狀 6편이다. 祭文은 宋浚吉, 宋時烈, 李聖碩, 李端夏, 李之濂, 南龍翼, 朴世采 등에 대한 것이며, 墓文은 外王考 宋鉉의 墓誌, 具邦俊의 墓碣, 李萬春의 墓表이다. 行狀은 從叔父 李垕, 具徽, 朴炯, 祖考 李炯信, 先妣, 先考에 대한 것이다.
권10은 附錄이다. 1709년경에 李喜朝가 지은 行狀, 같은 해에 鄭澔가 지은 墓誌銘이 있고, 權尙夏가 지은 墓碣銘 및 기타 畫像贊, 源泉祠祝文 등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887년(고종 24)에 宋近洙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필자 : 朴憲淳
지촌집 ( 芝村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芝村先生文集
판심제  芝村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54年刊
권책  32권 1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6×15.6(㎝)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11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70
 저자
성명  이희조(李喜朝)
생년  1655년(효종 6)
몰년  1724년(경종 4)
 同甫
 芝村, 艮菴, 志事齋
본관  延安
시호  文簡
특기사항  李廷龜의 曾孫. 宋時烈의 門人
 가계도
 李明漢
 白洲
 백주집(白洲集)
 李一相
 大提學
 李聖求의 女
 
 柳仁聲의 女
 
 李嘉相
 修撰
 羅萬甲의 女
 
 李萬相
 進士
 吳竣의 女
 
 李端相
 靜觀齋
 정관재집(靜觀齋集)
 全義李氏
 右議政 李行遠의 女
 李喜朝
 
 安東金氏
 領議政 金壽興의 女
 李亮臣
 大司諫
 申鐔의 女
 
 女
 
 金鎭岳
 
 女
 
 黃慶河
 
 女
 
 金東鉉
 
 李賀朝
 
 金昌國의 女
 
 女
 
 李涬
 
 女
 
 金昌協
 농암집(農巖集)
 女
 
 閔鎭厚
 
 女
 
 宋徵五
 
 女
 
 鄭厚一
 
 女
 
 徐文尙
 

기사전거 : 行狀(朴弼周 撰, 黎湖集 卷29), 李明漢墓誌銘(李敬輿 撰, 白江集 卷14), 李端相諡狀(李宜顯 撰, 陶谷集 卷22), 李亮臣墓誌銘(南有容 撰, 雷淵集 卷20)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1 태어나다.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7 부친 靜觀公을 따라 淸風 任所에 가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14 三加禮를 행할 때 同春 宋浚吉이 賓으로 참석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15 부친상을 당하다. ○ 부친의 행적을 찬술하여 同春에게 墓表를 청하다.
~ ~ ~ ~ ~ ~ ~ 靜觀公의 뜻을 계술한다는 의미로 ‘志事’를 號로 삼다. ○ 科擧業과 詞章을 폐하고 聖賢의 학문에 힘쓰다. ○ 尤庵 宋時烈을 뵙고 師弟의 禮를 정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20 宋時烈이 유배되자 芝洞으로 거처를 옮기고 〈大歸說〉을 지어 뜻을 보이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26 換局 이후 閔維重이 學文之士로 천거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27 健元陵 參奉이 되었으나 肅謝 후 곧 체직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29 薦擧科에서 申晸이 천거하여 전설사 별검이 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30 묘당의 계청으로 陞六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31 금부 도사에 제수되다. ○ 金剛山을 유람하다. ○ 공조 좌랑이 되다. ○ 鎭川 縣監으로 부임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32 方伯의 親嫌으로 체직되다. ○ 겨울, 平康 縣監이 되다. 읍내의 靑龍山에 三淸書堂을 짓고, 기우제를 지낼 臥龍亭을 세우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33 懷尼是非로 羅良佐, 成至善 등이 宋時烈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尤庵에게 長文의 편지를 보내 이를 변석하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34 南九萬이 明經行修로 추천하다. ○ 정묘년의 편지로 반대편의 심한 공격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35 尤庵이 賜死되자 加麻服을 입다. ○ 가족을 이끌고 嶺東 歙谷으로 들어가 은거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41 공조 좌랑이 되었다가 곧 仁川 縣監이 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42 서연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상소 사직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43 가을, 天安 郡守가 되다.
숙종 25 1699 기묘 康熙 38 45 상의원 첨정, 장악원 정이 되다. ○ 海州 牧使가 되다. ○ 栗谷의 유적지인 石潭 九曲을 찾아 架空庵을 중건하고 瑤琴亭을 창설하다. 夷齊祠의 扁額을 尤庵의 친필인 淸聖廟로 바꾸다.
숙종 26 1700 경진 康熙 39 46 아우 李賀朝의 喪을 당하여 사직하다. ○ 겨울, 楊州 牧使가 되다.
숙종 27 1701 신사 康熙 40 47 7월, 모친상을 당하다.
숙종 29 1703 계미 康熙 42 49 淸風 府使가 되다. 경내에 사는 權尙夏와 함께 尤庵의 遺文을 수정하고 年譜를 편차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53 2월, 장령이 되다. 尊號를 올리는 일로 宋時烈이 비난을 받자 師弟의 의리를 내세워 사직하다. ○ 11월, 집의가 되다. ○ 12월, 楊州 獨井里에 있는 아우 李賀朝의 葬地를 놓고 洪禹錫이 山訟을 내었는데 李世德이 상소하여 탄핵하다.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54 1월, 李世德이 다시 상소하여 부친 靜觀公의 葬地가 驛村을 점유하였다며 고발하니, 잡혀가 조사받다. 放送된 뒤에 告身을 빼앗기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55 三陟 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숙종 36 1710 경인 康熙 49 56 장악원 정,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山訟의 일로 인피하여 상소 사직하다. ○ 부친의 묘를 龍仁 文秀山으로 移葬하다.
숙종 38 1712 임진 康熙 51 58 李世德이 정묘년(1687)의 長書를 끌어다 成渾을 무함한 내용이 있다고 상소하니, 상소하여 변석하다. ○ 동부승지,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59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오지 않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62 유생 申球의 상소로 尹宣擧의 문집을 훼판하는 丙申處分이 내려지자 공이 그 배후로 지목받다. ○ 10월, 漢城 左尹이 되다. ○ 11월, 공조 참판이 되다.
숙종 43 1717 정유 康熙 56 63 대사헌이 되다. ○ 7월, 縣道로 상소하여 왕세자의 聽政에 반대하다. ○ 李世德이 상소하여 尤庵을 헐뜯자 尤庵의 글 중에서 尹鑴, 尹宣擧와 관련된 글, 孝宗과의 獨對說話, 瑣錄 등을 뽑아 「宋文正文抄」 2책을 上疏와 함께 올리다. ○ 10월, 찬선이 되다. ○ 12월, 이조 참판이 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64 2월, 嬪宮 喪의 服制에 대해 의논하다. ○ 5월, 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李明誼의 논척을 받고 상소하여 변석하다. ○ 12월, 成均館 祭酒가 되다.
숙종 45 1719 기해 康熙 58 65 대사헌이 되다. ○ 「東賢奏議」와 「續經筵故事」를 올리다. ○ 11월, 이조 참판이 되다.
숙종 46 1720 경자 康熙 59 66 肅宗이 승하한 뒤 君臣服制義를 논한 일로 지평 徐宗燮의 소척을 받자 상소, 대죄하다. ○ 10월, 부호군이 되다.
경종 1 1721 신축 康熙 60 67 8월, 世弟의 시강원 찬선이 되다. ○ 대사헌이 되다. ○ 睦虎龍의 고변으로 老論四大臣이 주살되자 이들과 결탁했다는 죄로 문외출송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69 1월, 靈巖으로 정배되다. ○ 11월, 鐵山으로 이배되다.
경종 4 1724 갑진 雍正 2 70 1월 20일, 배소로 가던 도중 定州 客舍에서 병으로 졸하다. ○ 3월, 龍仁 文秀山에 장사 지내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 좌찬성을 追贈하고 ‘文簡’으로 시호를 내리다. ○ 仁川 鶴山書院에 배향되다.
영조 10 1734 갑인 雍正 12 - 왕명으로 全羅 監營에서 「東賢奏議」와 「續經筵故事」를 간행하게 하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 李台重이 平安道에서 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다.(李台重의 跋)

기사전거 : 行狀(朴弼周 撰, 黎湖集 卷29),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月沙 李廷龜와 白洲 李明漢, 靜觀齋 李端相 등 文名을 드날린 집안의 후예로서 자신의 저술도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 節要나 편찬서이다. 朴弼周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尤庵의 賜死 이후 權尙夏와 함께 유명을 받아 「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고 「尤庵集」을 편차 간행하였으며, 1717년에는 李世德의 상소로 말미암아 尤庵의 疏箚와 書牘, 雜文, 瑣錄 중 尹宣擧의 일과 관련된 것을 뽑아 「宋文正文抄」 2책을 만들어 올렸다. 또 1719년에는 文廟에 從祀된 九賢의 奏議에 자신의 按說을 덧붙여 「東賢奏議」 8책으로 편차해 올렸으며, 朴世采가 「程朱經筵故事」를 올렸던 것을 모방하여 趙光祖, 李滉, 李珥, 成渾, 金長生 五賢의 筵奏를 정리하여 「續經筵故事」 2책을 편차해 올렸고, 유배 중에는 「海東儒先錄」을 지어 東方 道學의 연원을 밝혔다. 이 외에 「朱陸同異輯覽」 1권, 「宋元明書節要」 3권, 「五先生書節要」 8권 등이 文集 수십 권과 함께 家藏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東賢奏議」와 「續經筵故事」는 1734년 왕명으로 全羅 監營에서 간행되어 문집보다 빨리 간행되었다.
저자의 시문을 처음 수습하여 정리한 사람은 저자의 아들인 李亮臣과 門人들이다. 본집의 발문에 의하면 “芝村先生 문집 32권은 嗣子인 李亮臣이 門下들과 함께 교정해 바로잡아 편차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申暻이 李亮臣에게 보낸 편지(與李元亮, 直菴集 卷5)를 보면 상중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芝村이 靜觀齋의 遺集을 상중에 수습 편차했던 일을 본받아 속히 문집의 정리에 착수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자신이 朴弼周와 함께 유고의 校訂과 抄刪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선생이 저술하신 文字를 제가 안 본 것이 거의 없습니다만 全帙을 빌려주면 한번 읽어보고 去就와 商確에 대한 저의 소견을 대략 말씀드리겠으니 그런 연후에 형이 최종적으로 折衷하여 修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생이 평소 玄翁(朴世采)에 대한 존경이 실로 尤翁(宋時烈)과 다를 바 없었으니 文集 및 行狀 등에서도 마땅히 이러한 뜻을 취하여 처결해주기를 바랍니다. 朴兄(朴弼周)과 李子三(李台重) 형제도 이 뜻을 알고 동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초기의 정리와 刪節은 朴弼周, 申暻 등이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朴世采의 문인이자 후손이기도 하였으므로 저자의 문집 내용 중 朴世采와 宋時烈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 상당한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이미 간행되었던 「南溪集」과 「尤庵集」이 南溪와 尤庵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비해 본집의 雜記나 尤庵語錄에서는 尤庵이 朴世采를 인정해준 면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본집의 간행이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英祖 초기는 蕩平策의 실시로 표면상으로나마 老論의 지나친 대두를 막는 분위기였고 또 저자의 아들 李亮臣이 1729년 疏下五賊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고 1739년에 죽은 것도 한 요인인 듯하다. 이후 문집의 간행은 저자의 孫 李敏輔와 문인 李台重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태중이 1753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간행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또 1754년 南有容이 李台重에게 보낸 편지에 “芝村集을 병중이라 자세히 보지 못하여 왕왕 誤字가 있을 것이니 다시 교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與李子三, 雷淵集 卷16)라는 내용이 있어 南有容도 문집의 교정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이 李亮臣, 申暻 등이 수집, 편차하고 李敏輔, 南有容 등이 교정한 문집을 1754년 평안도 관찰사 李台重이 平安道 監營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초간본》 본집에는 1754년에 쓴 李台重의 발문이 실려 있으며, 「鏤板考」에 關西監營所藏이라고 되어 있으니 간행 후에도 계속 關西에 책판이 보관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119), 장서각(4-652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637),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757),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異本은 찾을 수 없다.
본서의 저본은 1754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다만 영인저본 중 권28의 제17판과 18판이 잘못 결책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기사전거 : 跋(李台重 撰), 行狀(朴弼周 撰, 黎湖集 卷29), 直菴集(申暻), 雷淵集(南有容)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32권 15책이 모두 저자의 詩文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부록문자는 없다. 권말에 본집을 간행한 李台重의 跋文(1754)이 있고, 각 권마다 첫머리에 目錄이 첨부되어 있다. 권1은 詩이고, 권2~4는 疏, 권5~16은 書, 권17~21은 각 체의 文, 권22~27은 墓道文字, 권28~32는 別集같은 성격으로 雜著, 箚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은 각 체의 詩가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모두 120여 題이다. 詩作이 많은 편은 아니나 長文의 詩序가 달려 있는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시보다는 편지와 논설에 뛰어났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본집에 실려 있는 시들도 서정적인 흥취를 읊은 것보다는 交遊와 時事에서 나온 것이 많다. 스승인 宋時烈을 비롯하여 金壽恒, 金昌協, 閔鎭遠, 朴世采 등 당시 西人의 名門들과 인척 및 師承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큼 시의 수창 대상도 대부분 老論系가 많으며, 특히 林泳(德涵), 壺谷 南龍翼 등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첫번째 시는 저자가 19세(1673)에 尤庵을 뵙고 師弟의 예를 정했던 때에 지은 〈華陽洞錄上尤庵先生〉으로서 이후에도 尤庵에게 올리는 시에서는 극진한 경모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대체로 1690년대까지의 시가 많으며 〈肅宗大王挽〉(1720)이 마지막으로 실려 있다. 간간이 俗離山과 金剛山을 유람한 紀行詩, 嶺東 歙谷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 등이 눈에 띈다.
권2~4는 上疏와 書啓로 각기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持平을 사직하는 1697년의 상소부터 1721년 〈辭大司諫兼贊善祭酒仍陳所懷疏〉까지 모두 45편이 실려 있다. 내용은 대부분 사직소이며, 주로 1710년 이후의 상소가 많다. 또 師門의 변무에 관한 것이 많아 저자가 尤庵의 변호에 앞장서왔으며 이로 인해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조정에 재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上東宮辭大司憲仍陳戒書〉와 이어지는 辨誣書는 대리청정을 하던 景宗에게 修德과 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또 李世德의 상소에 반박한 내용이다. 본 上書에서는 宋時烈이 尹鑴와 尹宣擧를 배척하게 된 동기로 己亥禮論과 己酉擬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자신이 초록한 「宋文正文抄」 2책을 올렸는데, 당시 저자가 상서와 책자를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少論측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뒤에 나오는 일련의 〈吏曹參判辭職書〉가 이에 대한 것이다. 이 중 〈七書〉에서는 李明誼의 疏斥에 대해 변론하였고, 1719년에 올린 〈上大朝進東賢奏議…〉와 〈上東宮辭職…〉은 저자가 편차한 「東賢奏議」와 「續經筵故事」를 올리면서 進講에 참고하도록 청한 것이다. 「東賢奏議」는 文廟에 從祀된 9현(鄭夢周,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彥迪, 李滉, 李珥, 成渾, 金長生)의 奏議 중 君德에 유익한 것과 內修外攘의 방도에 관한 글을 뽑아 편집한 것이며, 「續經筵故事」는 위의 인물 중 5현의 筵中陳戒說話를 뽑아 편찬한 것이다. 書啓 2편은 각기 1720년, 1721년에 작성한 것으로 禮書를 證訂하라는 명과 進講할 책자를 추천하라는 명에 답하지 않고 올린 글이다.
권5~16은 편지로, 본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편집 양식대로 대상별 격에 따라 분류하여 권5~6은 스승인 宋時烈과 朴世采에게 올린 것이고, 권7~12는 선배 및 同門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권13 이하는 門人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로 차등을 두었다. 모두 80여 명을 대상으로 320여 편이 실려 있다. 尤庵에게 올린 편지는 모두 22편으로 1674년부터 1687년까지 연도순으로 실려 있는데 주요 내용은 크게 經學ㆍ性理學 등 학문에 관한 問目, 尹宣擧ㆍ尹拯 등 少論과의 갈등을 밝힌 時事에 대한 내용, 문집편차 및 교정 등 서적의 발간과 관계된 것 및 일상적인 안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권6 〈上尤庵先生〉의 別紙는 일명 丁卯書라고 불리는데, 尹宣擧의 毁節, 尹拯의 背師, 尹鑴의 異端에 대해 작은 사건까지 자세하게 전말을 소개하고 있어 尤庵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당시 尹拯에게 동정적이었던 士林의 여론을 바꾸기 위해 작성한 듯하며, 실제 이 편지가 널리 전파된 이후 老論과 少論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는 「大學」, 「孟子」, 家廟圖, 「近思錄」 등에 대한 問目과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年譜」에서 栗谷의 入山事에 대한 기술문제, 太宗의 尊號追上에 대해 玄石이 尤庵과 의견을 달리하는 데 대한 저자의 입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은 金壽恒, 閔維重, 李端夏 등에게 보낸 편지와 동문인 權尙夏와 주고받은 편지이다. 특히 權尙夏와 왕래한 서신은 17편이나 되는데 「中庸」, 太極圖說, 「孟子」 등에 대한 질의와 喪祭禮에 관한 문의, 「尤庵集」의 편차 간행에 대한 의논 등이 주 내용이다. 권8은 金昌協(6)과 李世弼(13)에게 보낸 편지로 모두 性理學과 禮說에 대한 것이다. 특히 李世弼과는 退溪의 ‘四七說’ 등 「大學」과 「心經」에 대해 조목조목 논하였는데 뒤에 雜著에서도 李世弼과의 논의를 주제로 쓴 글이 있다. 권9는 崔邦彥, 李箕洪, 林泳, 金昌翕, 金榦, 李畬, 鄭澔, 宋疇錫, 朴光一, 宋一源 등에게 보낸 글 30여 편인데, 喪禮와 服制에 관한 것이 많으며, 宋一源의 편지는 尤庵의 年譜를 의논한 것이다. 권10은 金昌集(7), 李頤命(19), 閔鎭厚(15), 李晚成에게 보낸 글로 대체로 서로의 안부와 時事에 대한 것이 많으며, 閔鎭厚에게 보낸 글에는 新法에 반대하는 내용이 있다. 권11은 趙相愚(6), 權尙游(4), 사돈인 申鐔, 金楺(7)에게, 권12는 閔鎭遠, 李徵明, 林淨, 趙正萬, 宋徵殷 등에게 보낸 것으로 별 내용은 없고 다만 金楺에게 보낸 편지에 戶布, 結布, 大同法 등 신법의 폐단을 논하며 반대한 것이 있는데 권12의 閔鎭遠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내용으로 저자의 經世觀을 살펴볼 수 있다. 권13 이하는 門人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대부분 喪祭禮 등 禮說과 性理學의 學說에 대해 응답한 것으로 栗谷, 沙溪, 尤庵의 학설을 默守하는 경향이 보인다. 洪萬選, 金鎭華, 宋茂錫, 趙榮福, 朴弼周, 魚有鳳, 金時佐, 尹鳳九, 李緬, 羅碩佐, 成至善, 李潗, 宋必煥, 金天澤, 趙榮祏, 申暻, 閔翼洙, 申思建, 趙明翼, 趙攸, 李台重, 鄭彥煥, 李聖範 등이 그 대상이다. 권16은 從弟와 從姪, 조카 아들 등에게 보낸 것이며, 〈答或人〉은 모두 喪禮에 관한 것이다.
권17~18은 祝文(4), 祭文(20), 哀辭(5)이다. 축문은 저자가 거주하던 靈芝山의 신령에게 고한 축문이 있고 이 외에는 沙溪와 尤庵을 제향하는 書院의 축문이다. 제문은 저자의 친척과 知友들에 대한 것으로 同春 宋浚吉, 從祖인 李有相, 金壽興, 金壽恒, 金壽增, 金昌集, 金昌協, 李端夏, 林泳, 李箕洪 등과 동생 李賀朝, 閔鎭厚 등을 조문한 글이 실려 있다. 哀辭는 宋普明과 洪萬迪 등에 대한 것이다.
권19~20은 序(5), 記(10), 題跋(18)이다. 서문은 李殷相의 年譜를 찬하고 지은 서문, 동생과 金剛山을 유람하고 수창한 詩錄의 序文 등이 있으며, 送序 3편이 실려 있다. 기문은 대부분 堂亭의 기문이고, 〈先府君神道碑銘後記〉와 〈先府君墓誌銘後記〉는 1701년에 移葬한 사실과 자손들의 변경 사항을 추록한 것이다. 〈石潭瑤琴亭記〉는 저자가 海州 牧使 재임 시 李珥의 유적을 찾아 瑤琴亭을 세운 내력을 적은 것이며, 〈書栗谷行狀後〉, 〈書栗谷柳枝詞草本後〉 등 율곡의 행적을 발굴해 정리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부친의 문집인 「靜觀齋別集」, 장인 金壽興의 문집인 「退憂堂集」, 사위인 金鎭岳의 「蘭谷稿」, 宋翼弼의 「龜峯集」 발문이 실려 있다.
권21은 告諭文으로 저자가 지방관으로 재직했던 鎭川, 仁川, 海州의 士民들에게 유시한 글로써 내용은 訟事와 風俗에 대한 것, 학문의 연마, 學校의 흥성, 栗谷의 문집을 읽고 연구할 것 등이다.
권22~24는 墓誌銘(18), 墓碣(4), 碑記(4), 墓表(10)와 遺事(1)이다. 조모인 李明漢 妻 尹氏와 李海朝의 妻 南原尹氏, 부친 李端相, 종숙부 李翊相, 백부 李一相, 숙부 李萬相, 李有相의 묘지와 사촌인 李海朝, 李潤朝, 선조 李石亨의 묘표가 있으며 이 외에 金震標, 朴元開 부부, 朴尙玄 등의 묘도문자가 있다. 비기로는 淸陰 金尙憲의 木石居遺墟碑, 宋繼商 妻의 旌閭碑 등이 있으며, 遺事는 부친에 대한 것이다.
권25는 충신, 효자의 전기로 柳義臣, 張翮, 李廓, 효자 金濡에 대한 傳 4편이 실려 있다.
권26~27은 行狀(5)이다. 권26은 전체가 장인인 金壽興의 행장이고, 권27은 동생 李賀朝의 行錄, 장모 尹氏의 행장, 李箕洪의 행장이다.
권28~29는 雜記이다. 性理學的 개념에 대한 이해와 「周易」과 曆法의 관계, 朱子書 중의 주요 구절 등 저자가 공부하면서 정리한 글을 체계없이 기록한 것이다. 또 尤庵, 草廬 李惟泰 등을 모시면서 보고들은 일화와 당대 인물에 대한 평, 저자의 讀書錄, 肅宗代 禮論을 둘러싼 南人들과의 갈등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각 조항 말미에 ‘丙辰日錄(1676)’, ‘庚申所錄(1680)’ 등 출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해마다 정리해두었던 기록에서 추출한 듯하다. 上권은 1683년까지의 기록이고, 下권은 1714년까지의 기록이며, 권말에는 年條 未詳의 기사가 있는데 모두 尹宣擧에 관한 내용이다.
권30은 尤庵先生語錄으로 이 중 일부분은 「宋子大全」에 실려 있다. 1673년 저자가 처음 尤庵을 뵈었던 때부터의 질문과 尤庵의 답변을 날짜별로 수록하였는데 尤庵의 德行과 學問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李惟泰, 尹拯, 宋浚吉 등 人物評이 많아 당시 老論系의 정론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권31은 箚記이다. 「家禮」, 「小學」, 「詩傳」, 栗谷理氣書 등 저자가 학문을 하는 동안 품었던 의문 사항 등을 책별로 기록한 것이다. 이 箚記나 雜記, 雜著 등에서 보이는 저자의 학문적 경향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朱子, 栗谷과 尤庵의 설을 부연, 천명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는 畿湖學派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본집의 跋에서도 “講學과 論辨에 있어서 법칙을 삼가 지키며 기이한 학설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여 저자가 尤庵의 학설을 추존하였고 새로운 立論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권32는 雜著 9편이다. 〈中庸說〉은 中庸이란 編名의 의미에 대해 先賢의 설을 인용해 밝힌 것이고, 〈讀詩猗嗟章〉은 齊 襄夫人과 莊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尹鑴가 明聖王后에 대해 照管하라고 요구했던 것을 悖倫滅常의 죄로 논한 글이다. 〈書尹善道疏後〉 3편은 1658년 尹善道가 올린 〈國是疏〉의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으로 주로 鄭介淸에 대한 것이다.

필자 : 金成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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