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최씨 관련 삼국유사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삼국사기에기록된 최씨 관련 자료

아베베1 2012. 2. 23. 21:51

 

 

 

 

  •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儒理 尼師今
    •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32년 3월 미상 음력)
九年春攺六部之名仍賜姓 楊山 部為梁部姓李髙墟部為沙梁部姓 大樹部爲漸梁部 一云牟梁 姓孫于 [校勘 001] 珍部為夲彼部姓鄭加利部為漢祇 [校勘 002] 部姓裴明活部為習比部姓薛又設官有十七䓁一伊伐飡二伊尺飡三迊飡四波珍飡五大阿飡六阿飡七一吉飡八沙飡九級伐飡十大奈麻十一奈麻十二大舎十三小舎十四吉士十五大鳥十六小烏十七造位王旣定六部中分為二使王女二人各率部内女子分朋造黨自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신출자績麻乙夜而罷至八月十五日考其功之多小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戱 [校勘 003] 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子起舞嘆曰㑹蘇㑹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㑹蘇曲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于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干를 따랐다.
정덕본에는 祇로 되어 있고,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祗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祇를 따랐다. 을해목활자본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戱로 되어 있다. 戱는 戲의 속자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戲를 따랐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   정치>행정>관서>지방관서  경제>수공업>생산>생산정책  문화>문학>문학형식>가송·향가

  

색인어 <지명> 楊山

 

 

 

 

 

 

 

 

 

 

 

 

 

 

 

 

 

 

 

 

 

 

 

 

 

 

 

 

 

 

 

 

 

 

 

 

 

 

 

 

 

 

 

 

 

 

 

 

 

 

 

 

 

 

 

 

 

 

 

 

 

 

 

 

 

 

 

 

 

 

 

 

 

 

 

 

 

 

 

 

 

 

 

 

 

 

 

 

 

 

 

 

 

 

 

 

 

 

 

 

 

 

  •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시조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기원전 57년 4월 15일 음력)
시조.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 (赫居世) [註 001] 이다. 전한 (前漢) 효선제 (孝宣帝) [譯註 001]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譯註 002] 4월 병진(丙辰) [譯註 003] 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 에 왕위에 오르니 [註 002] , 이를거서간(居西干) [譯註 004] 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 (徐那伐) [註 003] 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 [註 004] 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 [註 005] 을 이루었다. [註 006] 첫째는 알천 (閼川) 양산촌 (楊山村) [註 007] , 둘째는 돌산 (突山) 고허촌 (高墟村) [註 008] , 셋째는 취산 (觜山) 진지촌 (珍支村) [註 009] 간진촌 (干珍村)이라 한다. 넷째는 무산 (茂山) 대수촌 (大樹村) [註 010] , 다섯째는 금산 (金山) 가리촌 (加利村) [譯註 005] , 여섯째는 명활산 (明活山) 고야촌 (高耶村) [註 011] 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辰韓) 육부(六部) [註 012] 가 되었다. 고허촌 장(高墟村長) 소벌공 (蘇伐公) [註 013]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譯註 006] 나정 (蘿井) [譯註 007]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註 014]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譯註 008]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譯註 009]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譯註 010]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인(辰人)은 박[호(瓠)]을 박(朴)이라 했고 처음에 [혁거세가 태어났던] 큰 알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註 015] 거서간은 (辰)[한(韓)] 사람들의 말로 왕을 가리킨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신라의 건국 시조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57~서기 4년이다. ≪삼국유사≫권1, 기이(紀異)2, 신라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 불구내왕(弗矩內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라고도 했으며, 이는 밝게 세상을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혁거세’ 호칭에 대해서 ‘혁(赫)’은 ‘광명(光明)’·‘명철(明哲)’·‘현명(賢明)’의 말인 ‘’의 차훈(借訓)이고, ‘거세(居世)’는 왕호 ‘거서간(居西干)’의 ‘거서’와 동음의(同音義)의 말이라고 한 견해가 있다( 이병도,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8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7쪽).
五鳳은 서기전 57부터 서기전 54년까지 4년간 사용된 漢 宣帝代의 연호이다. 五鳳 원년 즉 서기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즉위함으로써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하여,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있어 왔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논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운데 4세기 이전의 기사 내용을 不信한다는 전제 위에서 특히 서기전 57년의 干支가 甲子年이고 혁거세를 이은 南解次次雄이 즉위한 연대 역시 甲子年(서기 4)인 점을 들어, 이를 참위설의 甲子革命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허구적인 紀年이라 하였다(今西龍,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東京, 1933, 8∼10쪽 | 末松保和, ≪舊三國史と三國史記≫, ≪靑丘史草≫ 2, 1966, 8∼9쪽 |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上), 書房, 東京, 1975, 444쪽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고대편), 일조각, 1982, 141쪽). 한편 긍정론자들은 古朝鮮 遺民의 이동시기와 최근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혁거세가 사로국을 건국한 시기를 늦어도 서기전 1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신라 건국 연대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김원룡,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 ≪동아연구≫ 7, 1967 | ≪사로6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4∼13쪽 |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6쪽).
신라 초기의 국호이다. 신라의 국호는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야벌(徐耶伐)·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계림(鷄林)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그중 계림은 탈해이사금대 김알지(金閼智) 한국학중앙연구원 를 발견한 것을 기념해서 붙여졌고, 신라는 기림이사금 10년(307)에 붙여졌다가 지증왕 4년(503)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되었다. 신라 국호에 대해 ‘사로’ 또는 ‘사라’는 오늘날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범위의 정치 세력을 의미하는 대내적인 용도로, 신라는 사로를 포함하여 그에 예속된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주로 대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주보돈, 「신라 국호의 확정과 민의식의 성장」,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신서원, 199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여기서의 조선은 이른바 古朝鮮을 가리킨다. 고조선 유민의 南下는 위만정권의 수립과 漢 武帝의 고조선 침입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해서도 입증된다고 한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6쪽 | 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일조각, 1982, 53∼70쪽). 한편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사로 6촌을 형성한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위만세력에 밀려난 소위 기자조선의 유이민일 수도 있고, 혹은 한나라 세력에 쫓긴 위만조선의 유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른바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소위 기자조선에 대하여서는 특별히 강조하였고, 또 혁거세가 대두한 서기전 1세기경에 이르러서야 慶州지역에 위만조선계의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 등으로 보아(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1982, 73∼74쪽), 여기서 말하는 조선유민은 구체적으로 소위 기자조선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개의 촌락. ≪삼국사기≫(권1) 및 ≪삼국유사≫(권1)에 의하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현재의 경북 경주지역 혹은 경주를 포함한 慶尙道 일대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6촌이 있었다고 한다. 6촌의 위치에 관하여, 1) 경주분지 일대로 한정하는 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599∼603쪽 | 김원룡, ≪사로6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5∼12쪽 | 이기동, ≪신라 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2) 慶尙道 일대의 12촌이 2부체제로 편성되어 6개의 촌이 되었다는 설(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上·下), ≪역사학보≫ 1·2 합집, 1952), 3) 경주분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재의 경주시 安康邑과 陽南·陽北面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으로 보는 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22∼23쪽) 등이 있다. 그리고 6촌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서는, 1)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氏族社會로 보는 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0쪽), 2) 계급(Rank)을 가진 혈연집단으로서의 氏族(Clan) 社會인 酋長社會(Chiefdom)로 보는 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7∼47쪽)이 있다.
조선은 평양 부근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 이병도,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8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7쪽). 육촌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최근 이를 연(燕)의 동방 경략 이후 비파형동검과 이형 청동기를 지닌 고조선 유민의 남하로부터 세형동검과 주조철부를 지닌 준왕(準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집단의 남하 시기 사이에 경주 일대에 정착한 고조선 유민들로 파악한 연구가 있다( 김병곤, ≪사로 6촌의 출자와 촌장의 사회적 성격≫,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200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6촌의 위치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해 지금의 경주시와 월성군 내로 비정하는 견해와(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602~604쪽 |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2~24쪽), 경북 일대로까지 확장해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김철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알천은 북천(北川) 혹은 동천(東川)이라고도 하며 부(府;조선시대 경주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 한국고전번역원 ). 양산은 이하의 기록에 따르면, 혁거세가 태어난 나정(蘿井)의 소재지가 분명한데, 부의 남쪽 7리에 있다고 했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부 고적 한국고전번역원 ) 지금의 남산(南山)일 것이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알천 양산촌의 촌장은 알평(謁平) 한국학중앙연구원 으로 하늘에서 표암봉(瓢峯)에 내려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또한 알천 양산촌은 유리왕 9년(32)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 5년(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고쳤으며,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형산(兄山)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이곳이 고려시대의 남산부(南山部)로서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사량부의 위치에 대해 일부의 이름이 남아 있는 사정리(沙正里)를 포함한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궁성(宮城) 이서, 북천(北川) 이남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602쪽). 한편 ‘고허(高墟)’와 ‘소벌(蘇伐)’을 ‘솟은 벌’로 해석하여 경북 상주의 사벌(沙伐)과 관련짓기도 했는데( 김철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40쪽 | 노종국, ≪계림국고≫, ≪역사교육논집≫13-14, 199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80~181쪽), 자료의 분위기상 지금의 경주시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1, 제사(祭祀) 한국학중앙연구원 에 따르면, 고허 [사량]는 소사(小祀)에 편제되어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취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智伯虎)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화산(花山)에 내려와 본피부(本彼部) 최씨( 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통선부(通仙部)로서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처음에 반월성 내지 금성을 포함하여 사량 동쪽에 있다가 일부가 왕성 소재지가 되면서 지역이 축소되어 대체로 오늘날의 인왕동 일대라고 비정한 연구가 있다(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602쪽).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촌장 구례마(俱禮馬)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이산(伊山)<또는 개비산(皆比山)>에 내려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 장복부(長福部)로서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서천의 지류인 모량천 유역, 곧 지금의 효현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602쪽).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부, 산천 한국고전번역원 에 따르면, 명활산은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천문동과 보문동 일대에 해당한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촌장 호진(虎珍)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임천부(臨川部)로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혹은 갈곡(葛谷)> 등 동북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 문화재청 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 1992, 41~49쪽 참조.
진한은 삼국시대 이전 韓半島 동남부에 있었던 三韓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6개, 나중에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을 비롯한 ≪後漢書≫ 권85 東夷傳 등에는 진한의 母胎를 秦의 유망민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권1)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辰韓條에 인용된 致遠의 말에 의하면, 진한은 본래 燕나라 사람이 도망해와서 이룩한 것이라 하였다. 辰韓이란 명칭의 유래에 관하여, 1) 秦나라 사람들이 苦役을 피하여 韓에 망명하여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기록(≪後漢書≫ 권85 東夷傳 辰韓條), 2) 조선왕 準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辰國의 동북지역에 거주한 이래로 북방 유이민 社會를 ‘韓’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낙랑의 漢人들이 辰韓이라 불렀다고 하는 설(이병도, ≪삼한문제의 연구≫, ≪한국고대사연구≫, 1976, 238∼299쪽), 3) 眞番에서 유래했다는 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146∼154쪽) 등이 있다. 진한의 위치는 낙동강 동쪽의 慶尙道 지방으로 비정되지만, 漢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禮成江 이남의 경기도 일원과 春川 서쪽의 江原道 일부지역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한’명칭의 확대와 삼한의 구별≫, ≪한국고대사연구≫, 1976, 256∼259쪽). 진한의 사회조직은 마한·변한과 유사하였는데, 각 소국의 우두머리를 臣智, 險側, 邑借 등이라 불렀으며 원시적인 통치조직과 그에 따른 관료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한 사회는 정치와 제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진한은 사로국의 성장에 따라 사로국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었다. 한편 6부는 혈연으로 결합된 씨족적 취락인 6촌을 유리왕대에 개명한 것으로 행정구역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조직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는 종종 6村과 6部를 혼용하였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有一白馬 拜之狀≫라 하여,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의 降臨을 알리는 使者 즉 天馬의 관념과도 통한다. 특히 白馬는 신령스럽고 祥瑞로운 동물로서 고대 동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혁거세의 출생에 말이 관련되는 점에서 박씨족을 기마술에 익숙한 北方 유이민 계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김철준, ≪신라 상고세계와 그 기년≫,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72∼73쪽).
신라에서의 실제 성씨 사용은 565년을 下限으로 김씨 성이 처음이었고, 박씨와 석씨는 김씨에 뒤이어 6세기 중엽 혹은 6세기 후반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이순근,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한국사론≫ 6, 서울대 국사학과, 1980, 11∼21쪽). 이 학설에 따른다면, 본문에서 혁거세가 박씨 성을 일컬었다는 것은 후대의 계보관념으로 소급하여 추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한(前漢)의 제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74~ 서기전 49년이다.
오봉은 한 선제가 사용했던 연호(年號)로서 서기전 57년부터 서기전 54년까지 4년 동안 사용하였다.
≪三正綜覽≫에 의하면, 五鳳 원년 4월 초하루는 己丑이었으므로 丙辰은 이 달 28일에 해당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호이다. 박혁거세만이 사용하였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 거슬한(居瑟邯)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뜻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나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금산은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이다. 촌장 지타(祗沱)<또는 지타(只他)>가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와 한기부(漢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가덕부(加德部)로서 상·하서지(上·下西知), 내아(乃兒) 등 동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前漢 地節 원년(서기전 69년) 3월 1일에 6부의 시조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閼川 가에 모여 임금을 찾아 나라를 세우자 의논하고 높은 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의 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는 달리 6촌장 모두가 혁거세의 강림을 맞이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부, 산천 한국고전번역원 에 따르면, 나정은 부의 남쪽 7리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경주시 탑동에 해당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인데, 실제로 2002년부터 발굴되고 있는 이곳에서 신라 초기로 추정되는 우물과 8각 건물지 유적의 면모가 드러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소지왕 9년(487)에 시조가 태어난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했으므로, 나정과 신궁의 관련성도 향후 주목해볼 만하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자줏빛 알[紫卵]’ 혹은 ‘푸른색의 큰 알[靑大卵]’이라 하였다. 건국설화 중에서 알[卵]을 모티브로 한 것을 卵生說話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東明王說話, 脫解說話, 赫居世說話, 首露說話 등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알이 신성한 건국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알이 생명의 원천 혹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 혁거세가 양산 기슭에 내려온 큰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는 달리 西述聖母가 그를 낳았다는 설화도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편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 및 같은 책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條). 이는 山神信仰과 건국설화가 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前漢地節원년(元年)壬子<古本云 建虎원년(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라고 했다. 곧 혁거세가 발견된 시점은 서기전 69년이고, 발견 주체도 6부의 조상이 모두 개입되어 있으며, 세부적인 내용에서도≪삼국사기≫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이 부분의 기록이 보다 자세하다. 즉 "그 알을 깨어보니 모양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驚異하게 여겨 그 아이를 東川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天地가 振動하고 해와 달이 淸明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색인어
<이름> 혁거세, 효선제, 소벌공 <지명>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간진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고허촌, 양산, 나정 <국명> 전한, 서나벌, 진한, 진, 진

 

  •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32년 3월 미상 음력)
9년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하사했다. [註 001] 양산부 (楊山部)는 양부(梁部) [譯註 001] 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 [譯註 002] 가 되었으니 성은 최( ) [譯註 003] 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 [譯註 004] 모량(牟梁)이라고도 한다. 가 되었으니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 [譯註 005] 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 [譯註 006] 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 [譯註 007] 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 [註 002]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 [譯註 008] [譯註 009] , 둘째는 이척찬(伊尺湌) [譯註 010] , 셋째는 잡찬(迊湌) [譯註 011] , 넷째는 파진찬(波珍湌) [譯註 012] ,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 [譯註 013] , 여섯째는 아찬(阿湌) [譯註 014] ,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 [譯註 015] , 여덟째는 사찬(沙湌) [譯註 016] ,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 [譯註 017] , 열째는 대나마(大奈麻) [譯註 018] , 열한째는 나마(奈麻) [譯註 019] , 열두째는 대사(大舍) [譯註 020] , 열셋째는 소사(小舍) [譯註 021] , 열네째는 길사(吉士) [譯註 022] , 열다섯째는 대오(大烏) [譯註 023] , 열여섯째는 소오(小烏) [譯註 024] , 열일곱째는 조위(造位) [譯註 025] 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 [譯註 026] 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회소(會蘇) 회소”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했다.
6부(部)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하다. 먼저 유리이사금대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 연구자가 있다(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22~225쪽). 일반적으로는 후대의 사실이 부회된 것으로 보는데 그것도 이사금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 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7~37쪽) 마립간 시기로 보는 설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599~602쪽 | 선석렬, ≪신라 골품제의 성립기반과 그 구조≫, ≪부대사학≫11, 198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주보돈,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2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주보돈, 「신라 상고기의 통치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한국고대사학회, 서경, 200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45~247쪽), 또한 성씨의 사용도 중고기 이후의 것을 상고기에 부회하여 생긴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0~27쪽). 전덕재,「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참조.
6촌에서 6부로의 개편과정과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 국사편찬위원회 에 자세하다. 신라 6부의 위치와 그 시대별 변동에 대해서는 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牟梁部 혹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岑喙部로도 표기되었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칭되었다.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이찬(伊湌)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잡판(迊判), 소판(蘇判)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살찬(薩湌),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9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급찬(級湌), 급복간(及伏干)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0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대나말(大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9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나말(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7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한사(韓舍)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사지(舍知)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계지(稽知), 길차(吉次)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대오지(大烏지)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소오지(小烏知)라고도 했다.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국사편찬위원회 에 따르면, 선저지(先沮知)라고도 했다.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을 한가위라고 부른다.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
정치>행정>관서>지방관서
경제>수공업>생산>생산정책
문화>문학>문학형식>가송·향가
색인어
<지명> 양산부

 

  •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智證 麻立干
    • 논하여 말하다
論曰新羅王稱居西干者一次次雄者一尼師今者十六麻立干者四羅末名儒 致遠 帝王年代曆 皆稱某王不言居西干等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曰 中國史書也猶存 語穀於菟 [校勘 001] 語撑犁孤塗等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
정덕본에는 凶, 을해목활자본에는 匈으로 되어 있다. 을해목활자본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이름> 致遠 <서명> 帝王年代曆, 左, 漢 <국명> 楚, 凶 [校勘 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