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최씨 관련 삼국유사

최씨관련 삼국유사 자료

아베베1 2014. 4. 2. 20:31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32년 미상 음력)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신라 시조 혁거세왕 (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 [註 001] 이 있었다. 
1은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 [註 002] 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 (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 (瓢嵓峰) [譯註 001] 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 (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의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 (突山 高墟村)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 (蘇伐都利)라 하여 처음에 형산 (兄山) [註 003] 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양을 도로 읽고 혹은 탁으로 쓰니 음은 역시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 (南山部)라 하니 구량벌 (仇良伐) [註 004] · 마등오 (麻等烏) [註 005] · 도북 (道北)· 회덕 (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일러서라고 말한 것은태조가 설치함을 말함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3은 무산 대수촌 (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俱) 구를 仇로도 쓴다. 례마 (禮馬)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 (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 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漸梁) 양(梁)을 탁(?)으로도 쓴다. 부 (部) 또는 모량부 (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 (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는 취산진지촌 (觜山珍支村) 賓之 또는 賓子·氷之라고도 한다. 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 (智伯虎)라 하여 처음 화산 (花山)에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 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니 시파 (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 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皇龍寺) [註 006]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註 007]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侯) [譯註 002] 의 옛 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 가리촌 (金山 加里村) 지금의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 [註 008] 북쪽 산이다. 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 (祗沱) 只他라고도 쓴다. 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 (明活山) [譯註 003] 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 (上下西知) · 내아 (乃兒) 등 동촌 (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 고야촌 (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 (虎珍)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 [譯註 004] 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니 물이촌 (勿伊村)· 잉구미촌 (仍仇彌村)· 궐곡 (闕谷)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註 001 사로국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을 이른다. 본 기사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따르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육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육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上·下) ≪역사학보≫1·2, 1952)와 경주시와 월성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 1982, 22~23), 그리고 경주 내지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1976, 599~603| 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70, 1976, 5~12쪽|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김정배,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322~329) 등이 있다.註 0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6쪽  ).註 00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주부 산천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였고 중사(中祀)를 지냈던 곳으로 안강현 동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上, 塙書房, 1975, 420~421쪽).註 004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해당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쪽).註 005 경주 남산의 남쪽에 있는 고위산 기슭의 천룡사(天龍寺)와 접한 땅이었던 듯하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쪽).註 006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  ).註 007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서쪽에 있던 사찰이다. 현재 3층석탑을 복원한 사지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29쪽  )註 008 경상북도 경주 동천리에 있는 절로, 528년(법흥왕 15)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817년(헌덕왕 9)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1377년(고려 우왕 3) 서루(西樓)를 중건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재건한 것이며 이 절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국보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손성우 편저, ≪한국지명사전≫, 경인문화사, 1973).譯註 001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이 탄강한 곳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譯註 002 최치원을 말한다.譯註 003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譯註 004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주제분류사회>사회조직>신분>촌락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색인어<이름> 혁거세왕, 알평, 소벌도리, 례마, 지백호, 최치원, 금산 가리촌, 지타, 호진 <지명> 알천, 양산촌, 표암봉, 급량부, 돌산 고허촌, 형산, 사량부, 남산부,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무산 대수촌, 이산, 점량(漸梁) 양(梁)을 탁(?)으로도 쓴다. 부, 모량부, 박곡촌, 취산진지촌, 화산, 시파, 명활산, 상·하서지, 내아, 동촌, 명활산, 고야촌, 금강산,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 <국명> 진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확장검색 > 디렉토리검색 > 형태별 > 도서 > 삼국유사 >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삼국유사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y_001r_0020_0190_0010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32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신라 시조 혁거세왕 (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 [註 001] 이 있었다. 
1은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 [註 002] 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 (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 (瓢嵓峰) [譯註 001] 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 (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의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 (突山 高墟村)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 (蘇伐都利)라 하여 처음에 형산 (兄山) [註 003] 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양을 도로 읽고 혹은 탁으로 쓰니 음은 역시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 (南山部)라 하니 구량벌 (仇良伐) [註 004] · 마등오 (麻等烏) [註 005] · 도북 (道北)· 회덕 (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일러서라고 말한 것은태조가 설치함을 말함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3은 무산 대수촌 (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俱) 구를 仇로도 쓴다. 례마 (禮馬)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 (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 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漸梁) 양(梁)을 탁(?)으로도 쓴다. 부 (部) 또는 모량부 (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 (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는 취산진지촌 (觜山珍支村) 賓之 또는 賓子·氷之라고도 한다. 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 (智伯虎)라 하여 처음 화산 (花山)에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 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니 시파 (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 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皇龍寺) [註 006]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註 007]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侯) [譯註 002] 의 옛 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 가리촌 (金山 加里村) 지금의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 [註 008] 북쪽 산이다. 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 (祗沱) 只他라고도 쓴다. 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 (明活山) [譯註 003] 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 (上下西知) · 내아 (乃兒) 등 동촌 (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 고야촌 (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 (虎珍)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 [譯註 004] 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니 물이촌 (勿伊村)· 잉구미촌 (仍仇彌村)· 궐곡 (闕谷)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註 001 사로국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을 이른다. 본 기사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따르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육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육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上·下) ≪역사학보≫1·2, 1952)와 경주시와 월성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 1982, 22~23), 그리고 경주 내지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 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1976, 599~603| 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70, 1976, 5~12쪽|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김정배,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322~329) 등이 있다.註 0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6쪽  ).註 00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주부 산천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였고 중사(中祀)를 지냈던 곳으로 안강현 동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上, 塙書房, 1975, 420~421쪽).註 004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해당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쪽).註 005 경주 남산의 남쪽에 있는 고위산 기슭의 천룡사(天龍寺)와 접한 땅이었던 듯하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쪽).註 006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  ).註 007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서쪽에 있던 사찰이다. 현재 3층석탑을 복원한 사지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1, 이회문화사, 229쪽  )註 008 경상북도 경주 동천리에 있는 절로, 528년(법흥왕 15)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817년(헌덕왕 9)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1377년(고려 우왕 3) 서루(西樓)를 중건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재건한 것이며 이 절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국보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손성우 편저, ≪한국지명사전≫, 경인문화사, 1973).譯註 001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이 탄강한 곳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譯註 002 최치원을 말한다.譯註 003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譯註 004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주제분류사회>사회조직>신분>촌락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색인어<이름> 혁거세왕, 알평, 소벌도리, 례마, 지백호, 최치원, 금산 가리촌, 지타, 호진 <지명> 알천, 양산촌, 표암봉, 급량부, 돌산 고허촌, 형산, 사량부, 남산부,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무산 대수촌, 이산, 점량(漸梁) 양(梁)을 탁(?)으로도 쓴다. 부, 모량부, 박곡촌, 취산진지촌, 화산, 시파, 명활산, 상·하서지, 내아, 동촌, 명활산, 고야촌, 금강산,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 <국명> 진한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개인정보보호정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확장검색 > 디렉토리검색 > 형태별 > 도서 > 삼국유사 > 卷 第一 > 紀異第一 > 新羅 始祖 赫居世王 >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삼국유사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고서보기 국역보기 국역팝업 HOI : NIKH.DB-sy_001_0020_0190_0010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32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新羅始祖 赫居 世王
辰 韓之地古有六村一曰 閼川 楊山 村南今曇嚴寺長曰 謁平 初降于 瓢嵓峯 是為及 梁 部李氏祖 奴 [校勘 001] 礼王九年置名及 梁 部夲朝太 [校勘 002] 祖天福五年庚子改名中興部 波潛 [校勘 003] 東山 彼上 東村 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 蘇伐都利 初降于 兄山 是為 沙梁 部 梁 讀云道或作涿亦音道 鄭氏祖今曰 南山 部 仇良伐 麻等烏 道北 迴徳 等南村属焉 称今曰者 太祖 所置也下例知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 一作仇 禮馬 初降于 伊山 一作 皆比山 是為漸 梁 一作涿 部又 牟梁部 孫氏之祖今云長福 [校勘 004] 部 朴谷村 等西村屬焉四曰 觜山珎支村 一作 賔之 又 賔子 又氷 [校勘 005] 之 長曰 智伯虎 初降于 花山 是爲夲彼部 崔氏 祖今曰通仙部 柴巴 等東南村屬焉 致逺 乃夲彼部人也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殆明矣五曰 金山加里村 今 金剛山 栢栗寺之北山也 長曰 祗沱 一作 只他 初降于 明活山 是爲 漢 歧部又作韓歧部裴氏祖今云加徳部 上下 西知 乃兒 等 東村 屬焉六曰 明佸山 髙耶村 長曰 虎珎 初降于 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今臨川部 勿伊村 仍仇旀村 闕谷 一作 葛谷 等東北村屬焉
校勘 001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와 기이(紀異) 낙랑군(樂浪郡)조에는 弩로 되어 있다. 校勘 002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校勘 003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에는 替로 되어 있다.  校勘 00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德으로 되어 있다. 校勘 005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에는 水로 되어 있다.  주제분류사회>사회조직>신분>촌락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색인어<이름> 赫居, 謁平, 蘇伐都利, 太祖, 禮馬, 智伯虎, 致逺, 祗沱, 只他, 虎珎 <지명> 閼川, 楊山, 瓢嵓峯, 波潛, 東山, 彼上, 東村, 突山高墟村, 兄山, 沙梁, 南山, 仇良伐, 麻等烏, 道北, 迴徳, 茂山大樹村, 伊山, 皆比山, 牟梁部, 朴谷村, 觜山珎支村, 賔之, 賔子, 花山, 柴巴, 金山加里村, 金剛山, 明活山, 上下, 西知, 乃兒, 東村, 明佸山, 髙耶村, 金剛山, 勿伊村, 仍仇旀村, 闕谷, 葛谷 <국명> 辰, 梁, 梁, 梁, 梁, 漢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개인정보보호정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