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慶州崔氏)
[요약정보]
본관명 |
경주(慶州) |
성씨명 |
최씨(崔氏) |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
본관이칭 |
월성최씨(月城崔氏) |
시조명 |
원조 최소벌도리공(崔蘇伐都利公) / 시조 최치원(崔致遠) |
[상세내용]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기원전 57년 경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할 때 수도가 되었고 명칭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다.
성씨의 역사
삼한시대 진한 사로 6촌 중 돌산고허촌장 원조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왕으로 추대한 천강인으로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서기 32년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사량부(沙梁部)로 개편되며 최씨(崔氏) 성을 받았고 516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으며, 658년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 경주 양산재에서 매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로 봉행된다. 삼한, 신라 기원 최씨들은 최소벌도리공과 24대손인 “한문학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상하대로 세계를 이어 왔다. 신라 대표지성 최치원은 당에 유학하여 18세에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최승우도 890년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렸고, 최언위는 885년 급제 후 집사성 시랑을 지내고, 고려 개국 시 삼한벽상공신으로 태자사부, 문한, 평장사를 역임했다. 중국 과거에 급제한 3천재를 “신라3최”라 불렀고 최씨가문은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최치원은 등과 후 율수현위가 되었고, “황소의 난”을 토벌할 때 《토황소격》을 지어 명성을 떨쳤으며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을 역임하고 당 황제에게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귀국하여 시독겸 한림학사, 수부시랑 지서서감, 국사(國師) 등에 제수되었다. 신라말의 혼란을 걱정하며 《시무십조》를 올렸고 한시문집인《계원필경》등 많은 명저와 시문을 남겼다. 1020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고 태인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영평 고운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신라10현” “신라3문장”인 최치원은 공자와 같이 문묘에 모셔져 추앙받는 해동 최초 성현군자로 설총[신라2군자]과 함께 국자감, 조선 성균관과 234여개 향교에 “동방18賢”으로 모셔지며, 중국 양주의 "최치원기념관"에서 한.중선린외교의 효시로 추모되고 있다. 만년에 해인사에서 모형(母兄)인 대승려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 희랑(希朗)과 함께 학문과 득도에 전념했다. 고려 때는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 광종 때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지낸 최량, 성종 때 대를 이어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현종 때 검교태부수문하시랑 최항(崔沆), 충숙왕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최해(崔瀣),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최여해(崔汝諧)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에 와서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한말의 거유(巨儒)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익현(崔益鉉),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상이자 선행으로 잘 알려진 "10대 진사, 12대 만석, 400년 보시"의 “경주 최부자” 최준(崔浚), 일제 강점기 겨레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인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등과 같은 많은 학자, 명신, 지도자를 배출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이자, 삼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분적종 및 분파
한국의 삼한 신라 기원 최씨들은 원조 최소벌도리공과 24대손 시조 최치원을 중심으로 상하대에서 분적, 분파되었는데, 통일신라 때 한반도 전체로 번창하여 고려말경 문헌상 386여본까지 확대되었다가 다시 통폐합되어 현재 시조가 확인되는 본관은 45여개이다. 한국최씨의 대종가 경주최씨는 26파로 나뉘는데,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를 주축으로, 2,100여년간 세계를 이어 오는 삼한시대 기원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80여세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이조리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일원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 일원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양조리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수산리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 신덕리 평안남도 평원군 용호면 용강리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헌면 용응동 평안북도 의주군 함원면 서하리 함경남도 함주군 천서면 고양리 함경남도 서천군 복귀면 복평리 함경북도 경원군 용덕면 용신리 함경북도 무산국 영북면 양영동 등 한반도에 155여곳 세거지[한국인의 족보(일신각)]
[참고문헌]
舊唐書, 新唐書,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史節要,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文獻備考 성씨의 고향(중앙일보),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韓國人의 族譜(일신각), 韓國人의 姓譜(민중서관), 韓國人의 姓氏(창조사)
[집필자]
오윤정
경주최씨(慶州崔氏)
[요약정보]
본관명 |
경주(慶州) |
성씨명 |
최씨(崔氏) |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
본관이칭 |
월성최씨(月城崔氏) |
시조명 |
원조 최소벌도리공(崔蘇伐都利公) / 시조 최치원(崔致遠) |
[상세내용]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기원전 57년 경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할 때 수도가 되었고 명칭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다.
성씨의 역사
삼한시대 진한 사로 6촌 중 돌산고허촌장 원조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왕으로 추대한 천강인으로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서기 32년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사량부(沙梁部)로 개편되며 최씨(崔氏) 성을 받았고 516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으며, 658년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 경주 양산재에서 매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로 봉행된다. 삼한, 신라 기원 최씨들은 최소벌도리공과 24대손인 “한문학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상하대로 세계를 이어 왔다. 신라 대표지성 최치원은 당에 유학하여 18세에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최승우도 890년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렸고, 최언위는 885년 급제 후 집사성 시랑을 지내고, 고려 개국 시 삼한벽상공신으로 태자사부, 문한, 평장사를 역임했다. 중국 과거에 급제한 3천재를 “신라3최”라 불렀고 최씨가문은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최치원은 등과 후 율수현위가 되었고, “황소의 난”을 토벌할 때 《토황소격》을 지어 명성을 떨쳤으며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을 역임하고 당 황제에게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귀국하여 시독겸 한림학사, 수부시랑 지서서감, 국사(國師) 등에 제수되었다. 신라말의 혼란을 걱정하며 《시무십조》를 올렸고 한시문집인《계원필경》등 많은 명저와 시문을 남겼다. 1020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고 태인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영평 고운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신라10현” “신라3문장”인 최치원은 공자와 같이 문묘에 모셔져 추앙받는 해동 최초 성현군자로 설총[신라2군자]과 함께 국자감, 조선 성균관과 234여개 향교에 “동방18賢”으로 모셔지며, 중국 양주의 "최치원기념관"에서 한.중선린외교의 효시로 추모되고 있다. 만년에 해인사에서 모형(母兄)인 대승려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 희랑(希朗)과 함께 학문과 득도에 전념했다. 고려 때는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 광종 때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지낸 최량, 성종 때 대를 이어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현종 때 검교태부수문하시랑 최항(崔沆), 충숙왕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최해(崔瀣),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최여해(崔汝諧)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에 와서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한말의 거유(巨儒)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익현(崔益鉉),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상이자 선행으로 잘 알려진 "10대 진사, 12대 만석, 400년 보시"의 “경주 최부자” 최준(崔浚), 일제 강점기 겨레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인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등과 같은 많은 학자, 명신, 지도자를 배출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이자, 삼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분적종 및 분파
한국의 삼한 신라 기원 최씨들은 원조 최소벌도리공과 24대손 시조 최치원을 중심으로 상하대에서 분적, 분파되었는데, 통일신라 때 한반도 전체로 번창하여 고려말경 문헌상 386여본까지 확대되었다가 다시 통폐합되어 현재 시조가 확인되는 본관은 45여개이다. 한국최씨의 대종가 경주최씨는 26파로 나뉘는데,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를 주축으로, 2,100여년간 세계를 이어 오는 삼한시대 기원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80여세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이조리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일원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 일원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양조리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수산리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 신덕리 평안남도 평원군 용호면 용강리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헌면 용응동 평안북도 의주군 함원면 서하리 함경남도 함주군 천서면 고양리 함경남도 서천군 복귀면 복평리 함경북도 경원군 용덕면 용신리 함경북도 무산국 영북면 양영동 등 한반도에 155여곳 세거지[한국인의 족보(일신각)]
[참고문헌]
舊唐書, 新唐書,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史節要,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文獻備考 성씨의 고향(중앙일보),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韓國人의 族譜(일신각), 韓國人의 姓譜(민중서관), 韓國人의 姓氏(창조사)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인물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고려사마
무과
문과
생원시
역과
율과
음관
음양과
의과
진사시
취재
|
간성최씨(杆城崔氏)
[요약정보]
본관명 |
간성(杆城) |
성씨명 |
최씨(崔氏) |
본관소재지 |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 |
본관이칭 |
|
시조명 |
최무동(崔茂東)‧최지순(崔之洵) |
[상세내용]
본관 연혁
간성(杆城)은 강원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수성군(䢘城郡) 또는 가라홀(加羅忽)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수성현(守城縣)이라 했고, 1389년(고려 공양왕 1) 간성군(杆城郡)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강릉부(江陵府)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고성군(高城郡)이 간성군에 병합되었으나 1919년 간성군을 폐지하고 고성군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고성군의 일부로 간성면이 되었다가 1979년 간성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간성최씨(杆城崔氏)는 최무동(崔茂東)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최지순(崔之洵)을 시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다. 최무동은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경(大卿)을 지내고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되어 강릉최씨의 시조가 된 최흔봉(崔欣奉)의 20세손이며 최지순은 또 다른 강릉최씨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의 15세손이라고 한다. 최지순은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浩軍),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문헌이 전하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분적종 및 분파
간성최씨는 강릉최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최지순의 현손인 최준량이 함경남도 이원(利原) 지방에 정착하여 이원파조(利原派祖)가 되었다.
주요 세거지
함경남도 이원군 서면 대하전리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동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향당동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장덕동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풍교동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풍인동
[집필자]
오윤정
간성최씨(杆城崔氏)의 인물들]
[간성최씨(杆城崔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
강릉최씨(江陵崔氏)
[요약정보]
본관명 |
강릉(江陵) |
성씨명 |
최씨(崔氏) |
본관소재지 |
강원도(江原道) 강릉시(江陵市) |
본관이칭 |
|
시조명 |
최필달(崔必達)‧최흔봉(崔欣奉)‧최문한(崔文漢) |
[상세내용]
본관 연혁
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렸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
성씨의 역사
강릉최씨(江陵崔氏)는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경주계(慶州系), 대경(大卿)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全州系), 부마공(駙馬公)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江華系) 세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특히 최필달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훈되었고 삼중대광영첨의좌정승(三重大匡領僉議左政丞)에 올랐고,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로 삼중대광판군기시사(三重大匡判軍器寺事)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분적종 및 분파
최필달계로 낭장공파(郎將公派), 사성봉파(四姓奉派), 양근파(楊根派), 비인공파(庇仁公派), 학산파(鶴山派), 용연동파(龍淵洞派), 행정파(杏亭派), 안동파(安東派) 등이 있고, 최흔봉계로 희경공파(僖景公派), 대사간공파(大司諫公派), 예성군공파(芮城君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수헌공파(睡軒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매창공파(梅窓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사간공파(司諫公派) 등 많은 지파가 있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소야리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충청남도 보령군 태천면 소횡리 평안북도 의주군 옥당면 하경동 함경남도 문천군 도초면 주교리 함경북도 명천군 동면 삼호동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운산리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강릉최씨(江陵崔氏)
[요약정보]
본관명 |
강릉(江陵) |
성씨명 |
최씨(崔氏) |
본관소재지 |
강원도(江原道) 강릉시(江陵市) |
본관이칭 |
|
시조명 |
최필달(崔必達)‧최흔봉(崔欣奉)‧최문한(崔文漢) |
[상세내용]
본관 연혁
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렸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
성씨의 역사
강릉최씨(江陵崔氏)는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경주계(慶州系), 대경(大卿)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全州系), 부마공(駙馬公)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江華系) 세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특히 최필달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훈되었고 삼중대광영첨의좌정승(三重大匡領僉議左政丞)에 올랐고,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로 삼중대광판군기시사(三重大匡判軍器寺事)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분적종 및 분파
최필달계로 낭장공파(郎將公派), 사성봉파(四姓奉派), 양근파(楊根派), 비인공파(庇仁公派), 학산파(鶴山派), 용연동파(龍淵洞派), 행정파(杏亭派), 안동파(安東派) 등이 있고, 최흔봉계로 희경공파(僖景公派), 대사간공파(大司諫公派), 예성군공파(芮城君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수헌공파(睡軒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매창공파(梅窓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사간공파(司諫公派) 등 많은 지파가 있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소야리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충청남도 보령군 태천면 소횡리 평안북도 의주군 옥당면 하경동 함경남도 문천군 도초면 주교리 함경북도 명천군 동면 삼호동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운산리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인물들]
[강릉최씨(江陵崔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무과
문과
생원시
역과
율과
음관
음양과
의과
진사시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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