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3. 24. 삼각산 산행

2012.3.24. 춘설이 내린 삼각산의 모습

아베베1 2012. 3. 25. 09:12

 

  춘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움  삼각의 춘설이 아름다웠다 춘분을 지난 계절이지만 심하게 불어오는 폭풍 한설이 모습이었다 ..

 

 

 

 

 

 

 

 

 

 

 

 

 

 

 

 

 

 

 

 

 

 

 

 

 

 

 

 

 

 

 

 

 

 

 

 

 

 

 

목은시고 제13권
 시(詩)
3수(三首)


근년엔 겨울이 오히려 다숩고 / 近歲冬猶暖
새봄에는 눈이 또 내리누나 / 新春雪又來
옥루는 자리를 따라 우뚝하고 / 玉樓從座聳
흰 띠는 수레를 좇아 돌아오네 / 縞帶逐車回
고각은 멀리 바라보기 어려우나 / 高閣難遙望
빈 처마는 홀로 짝하기 좋구려 / 虛簷好獨陪
나귀 등의 흥취는 가련도 해라 / 可憐驢背興
편히 앉아서 깊은 술잔 기울이네 / 穩坐倒深杯

은자가 문 닫고 들어앉았는데 / 幽人閉戶坐
함박눈이 하늘 가득 내리누나 / 密雪滿空來
다숩던 겨울을 깨끗이 쓸어가고 / 淨掃冬溫去
응당 따뜻한 봄을 재촉하겠지 / 應催春暖回
매화 떨어 진 건 세속이 좋아하지만 / 落梅知俗好
부러지는 대는 누가 받쳐줄쏜가 / 折竹有誰陪
공연히 날리는 버들개지에 비겼더니 / 謾擬因風絮
되레 바다에 나간 편주와 같구려 / 還如就海杯

누추한 시골에 봄이 오려 하는데 / 陋巷春將至
새해에는 손이 일찍 찾아왔네 / 新年客早來
흰옷 입은 선녀는 한만하게 노닐고 / 素娥游汗漫
흰 학은 빙빙 돌아 나는구나 / 白鶴弄低回
밤이 되면 홀로 듣기에 알맞으나 / 入夜偏宜聽
갠 날의 감상은 누구와 짝할꼬 / 賞晴誰與陪
평생을 두고 고심하여 읊는 곳에 / 平生苦吟處
어찌 다시 은잔을 셀 것 있으랴 / 肯復數銀杯


 

[주D-001]옥루(玉樓) : 눈 덮인 누대(樓臺)를 이른다. 송(宋)나라 유사도(劉師道)의 〈설(雪)〉 시에, “삼천 세계는 은으로 빛을 이루었고, 십이 누대는 옥으로 층을 만들었구나.[三千世界銀成色 十二樓臺玉作層]” 하였다.
[주D-002]흰 띠는 …… 돌아오네 : 한유(韓愈)의 〈영설증장적(詠雪贈張籍)〉 시에, “수레를 따라서는 흰 띠가 나부끼고, 말을 좇아서는 은잔이 흩어지네.[隨車翻縞帶 逐馬散銀杯]” 한 데서 온 말인데, 흰 띠는 곧 눈 쌓인 도로의 수레바퀴 자국을 비유한 말이고, 은잔은 역시 눈 쌓인 도로의 말발굽 자국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3]나귀 등의 흥취 : 눈 내리는 날 나귀 등에 앉아서 시 읊는 흥취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수재(贈寫眞何秀才)〉 시에서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詩人) 맹호연(孟浩然)의 시 짓는 모습을 일러, “그대는 또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으며 산 같은 어깨 으쓱댄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 하였고, 당 소종(唐昭宗) 때의 재상 정계(鄭綮) 또한 시를 잘 지었는데, 혹자가 정계에게, “상국(相國)은 근래에 새로운 시를 지었는가?”라고 물으니, 정계가 대답하기를, “시사(詩思)가 파교(灞橋)의 풍설(風雪) 속 나귀 등 위에 있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시를 얻겠는가.”고 하였다.
[주D-004]매화(梅花) 떨어진 건 : 눈이 내리는 모양을 하얀 매화 꽃잎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목은시고 제13권
 시(詩)
이튿날에 또 짓다.


광암사에 머리 돌리니 아득하기만 하여라 / 回首光巖轉渺茫
황교 위에 달리는 기마는 석양빛 띠었네 / 黃橋歸騎帶斜陽
덧없는 인생 한 번 취하기란 진정 어려워 / 浮生一醉眞難得
늙도록 외로이 읊으며 마음만 상할 뿐이네 / 垂老孤吟祗自傷
산색은 티끌 떨추어라 봄눈이 다 녹았고 / 山色落塵春雪
달빛은 물과 같아 새벽하늘 하도 멀구나 / 月華如水曉天長
피곤한 몸 실컷 자니 청신한 맛 넘치어라 / 身疲睡足多淸味
이게 다 임금 은혠데 감히 행여 잊을쏜가 / 摠是君恩敢或忘

적적한 광암사에 또 한 봄은 찾아왔건만 / 寂寂光巖又一春
되돌아오매 하루 종일 만나는 이 적어라 / 歸來盡日少逢人
골짝에 흐르는 물은 동해를 따라 내려가고 / 洞中流水趨東海
현릉 아래 주위 산들은 북극성을 옹위하네 / 陵下回峯拱北辰
조정 가득한 고관들은 환암을 다 알거니와 / 靑紫滿朝知幻叟
요나라 사신은 은주를 부처에게 바치누나 / 銀朱獻佛有遼賓
빈사와 선탑은 거듭된 윤회 속의 일이거니 / 鬢絲禪榻多生事
어찌 전신과 후신을 물을 것이 있겠는가 / 豈問前身與後身
이날 요사(遼使)가 은주(銀朱)를 보시하였다.

세인들은 모두 분분하게 급히 달리건만 / 世上紛紛疾走多
나 홀로 천천히 걸으니 참으로 한가롭네 / 獨行緩步儘婆娑
누가 알랴 풍월 실어 노래 부르는 곳이 / 誰知風月謳歌處
여기가 바로 천지간의 안락한 집인 줄을 / 自是乾坤安樂窩
도를 행해온 연래에는 냇물을 탄식하고 / 體道年來嘆川水
늙어 가매 기쁜 낯은 뜰 나무에 부치었네 / 怡顔老去寄庭柯
나쁜 평판은 개미에 불과할 뿐이거니 / 譏評不過蚍蜉耳
견백동이의 궤변이 나를 어찌할쏜가 / 堅白異同如我何

나의 여생을 흰 구름에 부치려 하는데 / 欲把殘生寄白雲
물거품 같은 세계에 또 석양이 되었네 / 浮漚世界又斜曛
목옹은 아직 동서를 분주하고 있거니와 / 牧翁尙作東西走
환옹이야 어찌 안과 밖을 구분하리오 / 幻老寧敎內外分
조용히 앉으면 심향이 천지에 가득 차고 / 靜坐心香滿天地
높이 읊으면 시격이 속진을 벗어난지라 / 高吟句格出塵氛
두 길의 고요함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 兩途寂寂如流水
서로 마주하니 절로 무리에 초월하누나 / 相對悠然自離群


 

[주D-001]은주(銀朱) : 주사(朱砂)의 일종이다.
[주D-002]빈사(鬢絲)와 선탑(禪榻) : 빈사는 흰 귀밑머리를 말하고, 선탑은 선승(禪僧)의 좌선(坐禪)하는 걸상을 말하는데, 두목(杜牧)이 늘그막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쓴 〈제선원(題禪院)〉 시에, “큰 술잔 한 번 저어 가득한 잔 텅 비웠더니, 십 년 청춘이 공도를 저버리지 않는구려. 오늘은 흰 귀밑털이 선탑 가에 이르니, 차 연기가 낙화 바람에 가벼이 날리는 듯하구나.[觥船一棹百分空 十歲靑春不負公 今日鬢絲禪榻畔 茶煙輕颺落花風]” 한 데서 온 말로, 즉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한 것이다.
[주D-003]도(道)를 …… 탄식하고 : 공자가 일찍이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이르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한 데서 온 말인데, 잠시도 쉬지 않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이 바로 도체(道體)의 본연(本然)이기 때문에, 이른 말이었다. 《論語 子罕》
[주D-004]늙어 가매 …… 부치었네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술병과 잔 가져다 스스로 따라 마시고,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얼굴을 펴노라.[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나쁜 …… 뿐이거니 : 한유(韓愈)의 〈조장적(調張籍)〉 시에,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니, 자기 역량 모르는 게 가소롭구나.[蚍蜉撼大樹 可笑不自量]”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심향(心香) : 불교 용어로, 마음의 정성을 공불(供佛)하는 분향(焚香)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서계집 제4권
 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한퇴지의 시 〈춘설간조매〉에 차운하다[次韓退之春雪間早梅]


매화가 첫봄에 피니 / 花魁第一春
등륙이 부러 위에 앉노라 / 縢六故相因
나무 끝에 분분히 내리고 / 樹際紛紛落
가지 사이에 반짝반짝 새롭네 / 枝間皪皪新
영롱하게 쌓인 눈과 어울리고 / 玲瓏交積素
정결하게 작은 티끌 끊었어라 / 皎潔絶微塵
그림자는 어지럽게 저녁달을 침범하고 / 影亂侵昏月
빛은 나누어져 독서하는 사람 비추네 / 光分照字人
창문은 일찍부터 새벽빛 맞이하고 / 窓迎曙色早
바람은 자주 그윽한 향기 보내네 / 風送暗香頻
규벽과 마찬가지로 흠이 없으니 / 珪璧同無玷
무엇이 진짜 진주인지 뉘 분별할까 / 珠沙孰辨眞
처음 내릴 땐 냉담함이 싫더니 / 初來嫌冷淡
오래 대함에 정신이 듦을 알겠네 / 久對覺精神
어여삐 감상하노라니 정을 붙일 만하고 / 愛翫情堪托
즐거워 듣노라니 마음이 절로 친근하네 / 耽觀意自親
초하루로 옮겨 갈 것 무에 있나 / 何須移上日
또다시 풍년을 점치겠는걸 / 且復占豐辰
홍매 자매는 모두 하인배이니 / 紅紫皆廝役
화려함이 무에 진귀할 것 있나 / 芬華豈足珍


 

[주D-001]등륙(縢六) : 눈을 관장하는 신 이름이다. 눈의 모양이 육각형이기 때문에 붙인 말인데, 흔히 눈을 가리킨다.
[주D-002]초하루로 …… 있나 : 상일(上日)은 정월 초하루이다. 농가의 속설에 납전(臘前)에 세 번 큰 눈이 오면 이듬해 대풍이 든다고 한다. 즉 지금 눈이 많이 오고 있으므로 정월 초하루까지 눈이 오지 않아도 충분히 풍년이 들겠다는 의미이다.

패관잡기 제2권
패관잡기 2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 13)에 길주(吉州) 사람 전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꾀하여 그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등을 죽이고 그 부하를 보내어 글을 가지고 와 주달(奏達)하였으므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을 도총사(都摠使)로 삼고 우찬성 조석문(曹錫文)을 부사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다. 나의 할아버지 양숙공(襄肅公)의 휘는 어세공(魚世恭)인데, 그때 좌승지로서 계급을 건너뛰어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고, 신면(申㴐)을 대신하여 함길도(咸吉道) 관찰사가 되었다. 공이 가는 도중에 함흥 백성들이 또 난을 일으켜 전 관찰사 신면 등을 죽였는데, 그것도 이시애가 꾀한 일이었다. 공이 안변부(安邊府)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도망쳐 흩어진 지가 열에 아홉이었고, 함흥부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나가서 야외를 순시하니 민가는 모두 비었고, 가끔 만나는 사람은 모두 달아나 풀 속에 숨었다. 곧 불러서 일깨워 주기를, “조정에서는 반역을 한 역적 이시애를 치려고 생각할 따름이니, 너희들 백성과는 관계가 없다. 제각기 전과 같이 생업에 종사하라.” 하고, 이어 양식을 주어 서로 깨우쳐 주게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이르기를, “자객(刺客)이 두려우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겠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만약 그런 방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이 더욱 의심할 것이다.” 하고는, 다만 아전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적의 무리 한숭지(韓崇智)를 사로잡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조정에 품의(稟議)하려 하니, 공이 항의하기를, “군대 안의 일은 주장(主將)이 맡아 할 것이고, 또 함흥 사람 가운데 한숭지와 같은 자가 하나뿐이 아닐 것이니, 빨리 목 베어서 그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며 사람들의 의심을 끊어버리는 것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대문 밖에 내어다가 목 베었더니, 함흥의 군사나 백성이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다투어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의 성명을 써서 도총사에게 투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모두 다 죽여서는 안 된다.” 하고, 그 문서를 군중(軍中)에서 불태웠더니 모반한 자들이 안정되었다. 관군이 홍원현(洪原縣)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밤중에 적이 습격해 왔다. 도총사가 진을 옮겨 피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지금 적진에 들어와 인심이 불안하고 의심이 많은데, 주장이 만일 움직임다면 적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모두 정예(精銳)들이니 어찌 먼저 피하여 약함을 보이리오.” 하여, 그만 두었다. 이튿날 도총사가 또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함관령(咸關嶺)으로 퇴진(退陣)하려 하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대군이 적의 뒤에 있으니 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고, 설사 온다 하더라도 피차가 협공을 하면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에 만약 밤에 떠나게 되면 적이 반드시 와서 우리 군사의 중간을 끊을 것이니 반드시 지고 말 것입니다.” 하여,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튿날 재를 넘었더니 적이 과연 복병(伏兵)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 군사의 보급하는 짐바리를 끊으려 하다가 관군이 뒤를 쫓으니 도망해 버렸다. 그 위험한 고비에 임하여 일 처리하기를 이와 같이 하자 적이 평정되었다. 함길도를 남북 두 도로 나누어 공은 북도의 관찰사가 되어 드디어 북방을 평안하게 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에, 그의 무리들을 시켜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말을 퍼뜨리기를, “아래 지방 삼도(三道)의 군사가 바다와 물 양쪽으로 나란히 쳐들어오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가 설헌령(雪巘嶺)을 넘어 쳐들어와서 본도의 백성을 모두 다 죽이려 한다.” 하고, 또 해적(海賊)이 나타났다는 말을 지어냈는데, 관찰사 오응(吳凝)도 그것을 믿고 공문을 돌려 각 관원들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여 백성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 후 반란을 일으키자 선전하기를, “본도의 절도사가 모든 진(鎭)의 장수들과 공모하여 반역을 꾀했다.” 하고, 드디어 절도사 등 관원을 죽였다. 패군(敗軍)하여 길주(吉州)로 달아날 때에도 그 휘하(麾下)의 군사들은 여전히 이시애의 반란을 모르고 있었다. 길주 별시위(別侍衛) 허유례(許由禮)가 서울에서 관군을 따라 와서 길주로 몰래 들어가 적의 무리의 여수(旅首 군사의 우두머리) 이주(李珠)를 설득하여 적중에 들어가 이시애의 반역 상황을 들어 부하들을 타이르게 하고, 드디어 갑사(甲士) 이운로(李雲露)ㆍ황생(黃生) 등과 함께 이시애를 잡아 결박하여 관군에게 보냈다. 이때에는 이시애가 이미 궁지에 빠져 있기는 했으나, 그를 사로잡은 공은 실로 허유례와 이주 두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다.
주본(奏本)과 제본(題本)의 격식이 《구정록(求政錄)》에 실려 있기는 하나 아직 그것의 차이점을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주자(株子)라는 말은 더욱 알 수가 없다. 요즈음 섭성(葉盛)이 지은 《수동일기(水東日記)》를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국조(國朝)의 제도에 신민(臣民)이 아뢰는 일을 주본이라 일컫는데, 긴 종이를 쓰고 글자의 획은 반드시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따라야 한다. 그 후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고쳐서 제본(題本)을 쓰는데, 제본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제본은 내아문(內衙門) 공사(公事)에 쓰고, 만일 밖에 있으면서 자신의 일까지 진술할 경우에는 그대로 주본을 썼는데, 선황(宣皇)은 매양 그것을 주자(株子)라고 부른다.” 하였다.
족자(簇子)의 위쪽 가장자리에 두 줄의 흰 종이나 흰 생사를 붙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 뜻을 모른다. 처음에는 위쪽 끝에만 붙여 펄럭이게 하여 연니(燕泥)를 막게 한 것으로, 그것을 비연(飛燕)이라 부른다. 뒤에 족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래쪽 끝에도 붙였으므로 그것이 고사(故事)가 되었다. 내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가서 《비설록(霏屑錄)》을 보니, 그렇게 써 있었다.
태사(太史) 당고(唐皐)가 압록강에서 연경의 여러 군자들을 그리워한 시의 한 연(聯)에 이르기를,
아침에는 목밀에 깃발이 날리고 / 朝飛木蜜斾
밤에도 한강에 뗏목이 떠 있도다 / 夜泛漢江槎
하고, 발문(跋文)에, “목밀은 나무의 이름으로, 곧 이른바 남산의 기(杞)나무라는 것이다.” 하였으나, 산에 이 나무 이름이 있는지 그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목멱(木覓)이라고 써도 시구(詩句)에 있어서는 구애될 것이 없으나, 산이 나 때문에 그 이름을 받아 주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대개 한음(漢音)에서 밀(蜜)과 멱(覓)은 그 음이 비슷하므로 태사(太史)가 의심한 것인 듯하다.
문묘의 제도에 중국에서는 소상(塑像)을 모시고, 우리나라는 위판(位版)을 사용한다. 다만 개성부(開城府)와 평양부(平壤府) 두 문묘에만 소상을 봉안하였는데, 역시 원 나라 때에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가정(嘉靖) 병술년 무렵에 황제가 천하에 영을 내려 공자와 배향(配享)한 여러 선현(先賢)의 소상을 철거하고 밤나무로 위판을 만들게 하였다. 또 공자는 대성(大聖)인데, 왕위가 없었는데 왕의 칭호로 높이는 것은 참람 으로 반드시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대성문선왕(大成文宣王)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위판에 ‘지성선사 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썼다. 이보다 앞서 황제가 문묘에 가서 제사를 지낼 때에 단상에 서서 만약 배례를 하려고 하면 홍려관(鴻臚官)이 외치기를, “공자는 노(魯) 나라의 배신(陪臣)이오.” 하여 드디어 중지하고 절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미 선사(先師)로 높였으니, 비록 천자라도 스승에게는 마땅히 절을 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배례를 행하였다. 다만 소상을 철거하라는 조서(詔書)가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았으므로 개성과 평양의 문묘에는 옛 소상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임금의 만력(萬曆) 무렵에 소상을 철거하고 위판을 쓰게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많이 걷어 들였으므로, 매양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다.” 하였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있거나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면 광대들이 이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하였더니, 임금이 명을 내려 그 세포를 면제하게 하였으니, 광대도 백성에게 유익하다 하겠다. 지금의 광대들도 아직 그 놀이를 전하므로 그것이 고사(故事)가 되었다. 중종 때에 정평 부사(定平府使) 구세장(具世璋)이 토색질하여 만족함이 없었는데, 안장을 팔려는 사람을 부(府)의 뜰로 끌고 들어와서 친히 흥정을 하여 며칠 동안 그 값을 따지다가 끝내 관청의 돈으로 샀다. 광대가 설에 그 상황을 놀이로 상연하였더니 임금이 묻는 데에 대답하기를. “정평 부사가 안장을 사는 장면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명을 내려 정평 부사를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 마침내 장물죄로 처벌하였으니, 광대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貪官汚吏)를 규탄(叫彈)하고 공박(攻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그 성명을 잊어버렸으나 정사(政事)가 자못 탐혹(貪酷)하였다. 마침 병으로 죽어 관(棺)을 내어 발인하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관머리에 시를 써 붙이기를,
저승의 다섯 귀신이 뭇 백성을 학대하니 / 冥間五鬼虐烝民
염라대왕이 천라를 시켜 악독한 몸을 죽였구나 / 帝使天羅殺毒身
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시름과 원한이 끊겼으니 / 從此閭閻愁怨絶
요순시대의 태평한 봄 이로다 / 堯天舜日太平春
하였다. 관찰사가 그 말을 듣고, “현령이 참으로 나쁘다. 그러나 읍인(邑人)도 잘못하였다.” 하고, 그 시를 지은 자를 찾아서 잡으라고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 시를 살펴보건대, 비록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중종 초에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괴이하다. 그 끝에 이르기를, “설공찬이 남의 몸을 빌려 몇 달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일들을 아주 자세히 말하고, 또 말하고 쓴 것을 그대로 써 보게 하여 한 자도 틀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전하여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관(言官)이 그것을 보고 논박하기를, “채 아무개가 허황되고 거짓된 책을 지어서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있으니,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파직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성종 때에 유생(儒生) 아무개는 시책(試策)에서 절을 세워서 재난(災難)과 변이(變異)를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시험관이 아뢰어 대신(大臣)들과 의논하니 모두 불문(不問)에 붙이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이르기를, “유생으로서 이런 이단(異端)을 주장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 하고, 명을 내려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목계(木溪) 강혼(姜渾)이 일찍이 영남에 가서 성산(星山)의 기생 은대선(銀臺仙)을 사랑하였는데, 돌아오게 되어 짐바리가 부상역(扶桑驛)에 이르니 앞선 일행이 침구를 가지고 이미 지나가 버렸다. 공이 기생과 역사(驛舍)에서 자면서 시를 지어 주기를,
부상 역관에서 하룻밤을 즐기는데 / 扶桑館裏一場懽
나그네 이불은 없고 촛불만 타다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십이무산이 새벽꿈에 어려 / 十二巫山迷曉夢
역루의 봄밤은 추운 줄을 모르겠네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또,
고야산 선녀의 옥같이 흰 살결이여 / 姑射仙人玉雪肌
새벽 창가 금 거울에 아미(아름다운 눈썹) 그리네 / 曉窓金鏡畵峨眉
아침 술에 반쯤 취하여 취기가 낯에 오르고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이 하늘하늘 푸른 머리 날리네 / 東風吹髩綠參差
하였고, 또 짓기를,
헝클어진 머리 다 빗고 다락에 기대어 / 雲鬟梳罷倚高樓
피리 부는 그 손가락 옥같이 부드럽네 / 鐵笛橫吹玉指柔
만리타향 외로운 달에 / 萬里關山一輪月
두어 줄기 눈물이 이주에 떨어지네 / 數行淸淚落伊州
하였다.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별하고 공이 새재[鳥嶺]를 넘어 잠깐 쉴 때에,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呂)씨라는 성을 가진 성산의 서생(書生)을 만나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면서 글을 지어 기생에게 부치기를, “나와 낭자는 본래 모르는 사이지만 신(神)의 도움으로 천리 밖에서 사귀었으니, 어쩌면 오래된 인연이 있다고 하겠구나. 상산(商山)에서 이별한 뒤에 땅거미 질 무렵에 그윽한 골짜기에 다다르니, 빈 집은 고요하고 쓸쓸하며 낙숫물은 영롱한데 등잔을 돋우고 꼼짝 않고 앉아 외로운 그림자가 배회하는 이때의 심정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에 재를 넘는데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산새들은 지저귀니 마음은 스산하고 뼈는 시려 마음을 가늘 수가 없었다. 낭자의 피리 소리 듣고 싶건만 들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기생이 공의 시와 편지 글로 병풍을 만들었는데, 공은 본래 글씨를 잘 썼으므로 취중에 쓴 글씨의 기세가 마치 용이 서로 얽힌 것 같다. 선비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이 고을을 지나는 사람은 그것을 구하여 보지 않는 이가 없고 물건을 보내 주었으므로 기생이 이 병풍에 의뢰하여 잘 살게 되었다 한다.
영의정 김전(金詮)이 그 아들을 제사하면서 제문에 이르기를, “지난해에는 네가 아들을 잃고 올해에는 내가 너를 잃었으니, 부자간의 정을 네가 먼저 알 것이다. 상향(尙饗 제문 끝에 쓰는 말로, 제사를 받기를 바란다는 뜻).” 이라고 하여. 두어 마디를 썼을 뿐이나 정을 나타내는 말이 구비되어 있어 읽으면 슬퍼진다.
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니 / 徘徊樓上月徘徊
나그네 배회함 또한 유쾌하도다 / 客子徘徊亦快哉
옥토끼는 몇 해나 선약을 찧고 / 玉兎幾年仙藥搗
소아(달의 딴 이름)는 어디에서 거울갑을 여는고 / 素娥何處鏡奩開
흔들리는 물결이 백 갈래로 흩어지는 동파수에 / 搖波散百東坡水
비친 그림자 셋이 되어 이태백의 잔이로다 / 對影成三太白杯
바로 밤중이 되니 하늘이 씻은 듯하고 / 直到夜深天似洗
바람이 불어 보내니 계향이 오도다 / 好風吹送桂香來
하였는데, 그 당시 가작(佳作)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파백태백삼(東坡百太白三)의 문구는 본래 이 문순공(李文順公)의 말이고, 또 안침의 창녕(昌寧)의 〈추월헌시(秋月軒詩)〉가 있는데, 그 한 연에,
흔들리는 물결은 흩어져 동파의 백 갈래가 되고 / 搖波散作東坡百
비친 그림자는 참으로 태백의 삼을 이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
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
독서당(讀書堂)에 전에 임금이 내려주신 수정잔(水精盞)이 있었는데, 탁영(濯纓) 김공(金公 김일손)이 그 잔반(盞盤)에 명(銘)을 짓고, 그 뒤에 또 서문을 지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잔이 처음에는 반(盤)이 없어서 장인(匠人)을 시켜 만들었는데, 구리 바탕에 황금으로 도금(鍍金)을 하였다.” 하였다. 반의 표면 네 둘레에는 임희재(任熙載)의 팔분체(八分體) 글자로 볼록하게 새기고, 반의 한가운데에는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의 다섯 글자를 오목하게 새겼는데, 강사호(姜士浩)의 전자(篆字)로 된 명에 이르기를,
맑아서 흐려지지 않고 비어서 능히 받아 들인다 / 淸不涅虛能受
그 물건 주심을 감사히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 德其物思勿負
하였다. 드디어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완상하게 되었는데, 어느 해인지 모르나 그것을 맡아서 지키던 자에게 도둑을 맞아 호사자(好事者)들이 늘 한탄하였다. 그러던 중 가정(嘉淸) 연간에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통역관 홍겸(洪謙)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구하여 사들이게 하여 고사(故事)를 보충하였다.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백악(白嶽) 기슭에 집을 지었는데, 그 북쪽 동산에 산수의 경치가 좋았다. 취헌(翠軒) 박은(朴誾)이 매양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함께 술을 가지고 가서 놀았으나, 지정은 승지로서 새벽에 대궐에 들어갔다가 밤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한 번도 함께 놀지 못하였다. 취헌이 농담으로 그 바위를 대은(大隱)이라 하고, 그 여울을 만리(萬里)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바위가 주인의 아는 바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대은이라 하였고, 여울은 만 리나 되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찍이 크게 취하여 바윗돌에 시를 지어 쓰기를,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 主人官高勢薰灼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들이 많도다 / 門前車馬多伺候
3년에 하루도 동산을 돌보지 않으니 / 三年一日不窺園
만약에 산신령이 있다면 응당 허물을 받으리라 / 倘有山靈應受詬
하였고, 또,
주인이 재물이 많으니 / 主人有金玉
세간인들 어찌 함부로 두겠는가 / 什襲豈輕授
단단히 잠가 놓고 밤중에 지켜도 / 緘縢固鐍守夜半
내와 산을 대낮에 옮겨 가지 않을까 의심 스럽도다 / 未信溪山移白晝
하였다. 또 용재와 함께 자정의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지어 주기를,
어제 만리뢰를 지나다가 / 昨過萬里瀨
우연히 봄눈을 뒤에 만났도다 / 偶逢春雪
늙은 병정은 잃어도 좋으나 / 老兵失亦可
내 벗을 얻으니 그래도 다행이로다 / 猶幸得吾友
시내와 산은 저절로 청안 이요 / 溪山自靑眼
새들은 서로서로 화답하는 듯하다 / 禽鳥如相和
잔 들고 좋은 시 지어 나가니 / 擧杯聯好詩
날이 이미 저물었음을 깨닫지 못하도다 / 未覺日己酉
소나무 사이에서 갈도 소리 들리니 / 松間聞喝道
그윽한 흥취가 문득 깨어져 버리네 / 幽趣忽鹵莽
다구 치면 이러할 뿐이니 / 迫則斯可耳
어찌 담을 넘어 달아나겠는가 / 寧使踰墻走
서로 붙들고 돌아와 한껏 마시니 / 相持還劇飮
몽롱하여 누구임을 분간하지 못하고 / 蒙未辨誰某
앉아서 취한 얼굴 마주 보는데 / 坐見玉山摧
곁의 사람은 다투어 손뼉을 치네 / 旁人爭拍手
하였다.
송계(松溪) 신용개(申用漑)가 대제학으로 있을 때에 지정(止亭)을 방문했더니 남공이 술을 대접하였는데, 송계가 술잔을 들고 운(韻)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능히 이 시를 지으면 대제학의 자리를 물려주리라.” 하였더니, 지정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기를,
버드나무 그늘지고 낮닭이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갑자기 가난한 골목에 들이닥친 수레에 놀랐네 / 忽驚窮巷隘輪蹄
다투어 풍채를 보느라고 이웃집들은 비었고 / 爭瞻風裁空隣舍
술상을 못 차려 늙은 아내 군색하네 / 未具盤筵窘老妻
흥이 나서 다만 술을 기울일 줄만 알고 / 乘興但知傾藥玉
지체 다름을 생각지 않고 가죽 띠 잡고 만족 하네 / 忘形不省挽鞓犀
흥얼거리며 고헌과 를 지으려 하나 / 沈吟欲賦高軒過
거친 글이라 감히 짓지를 못하네 / 鄭重荒詩未敢題
하였더니, 송계가 한참동안 감탄하고 칭찬하다가 말하기를, “의발(衣鉢 여기에서는 대제학의 후임)이 돌아갈 곳이 있도다.” 하였다. 뒤에 지정이 과연 그를 대신하여 문형(文衡)을 맡았다.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볼만한 것도 못 된다. 오직 박위겸(朴撝謙)이 젊어서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막하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10만 정병이 수루를 호위하고 / 十萬貔貅擁戍樓
변방의 깊은 달밤에 여우 갖옷 싸늘한데 / 夜深邊月冷狐裘
한 가닥 긴 피리 소리 어디메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만리의 시름을 불어서 다하는구나 / 吹盡征夫萬里愁
하였다. 뒤에 흥덕현(興德縣) 배풍헌(培風軒)에서 시를 지었는데,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정정한데 / 屹立亭亭萬仞峯
봉우리에 선 높은 누각 멀리 바람 속에 있도다 / 峯頭高閣逈臨風
땅은 봉래섬과 삼청의 경계에 이어 있고 / 地連蓬島三淸界
사람은 소상팔경 중에 있도다 / 人在瀟湘八景中
구름은 산허리에 아득하고 / 雲帶山腰橫縹緲
물은 하늘가에 닿아 뿌옇도다 / 水㴠天影接空濛
문득 먼 포구에 돌아오는 배를 보니 / 忽看遠浦歸帆疾
물길이 멀리 한수(한강)와 통하는구나 / 水道遙連漢水通
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안동(安東)과 김해(金海) 두 부(府)의 풍속에 매년 정월 16일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서 좌우로 나뉘어 돌팔매질하는 놀이를 하여 승부를 겨루었는데, 정덕(正德) 경오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 등이 두 부의 돌팔매질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선봉을 삼아 드디어 적을 크게 격파하여 섬멸하였다.
청풍군(淸風郡) 사람들이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인형(人形)을 얻어 그것을 귀신으로 삼고, 매년 5ㆍ6월 간에 공관(公館)에 모셔 놓고 제사를 크게 지내니 그 고장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첨지 김연수(金延壽)가 원이 되어 남녀 무당과 그 일에 앞장선 자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그 나무 인형을 불태워 버렸더니, 그 요사스러운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판서 송천희(宋千喜)는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일찍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 어떤 무당이 자칭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나는 능히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린다.” 하니, 온 도내(道內)가 그 도술(道術)을 믿고 다들 전하기를, “손님 중에는 그 무당의 요구를 충당하려다가 파산을 하고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까지 있다.” 하니, 공이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그가 감히 내 고장에서 멋대로 요술을 부리다니.” 하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였더니 온 도내가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뒤에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에, 부(府)에 사는 사람들 중에 소를 도살(屠殺)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관청에서도 금하지를 못하였다. 공이 이 일을 보고 먼저 규약(規約)을 만들고 범하는 자는 언제나 용서하지 않았더니, 그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형조(刑曹)의 장(長 참판)이 되어서 소를 도살하는 죄를 범한 자는 경중(輕重)을 가리지 않고 역시 모두 문초하여 죽였더니, 사람들이 그 잘못을 바로잡음이 너무 지나치다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신라(新羅) 성덕여왕(聖德女王)의 시가 《당시품휘(唐詩品彙) 》에 실려 있고, 고려 사람의 〈인삼찬(人蔘賛)〉이 《본초강목(本草綱目) 》에 실려 있는데, “인삼과 잣이 양(陽)에는 안 맞고 음(陰)에는 맞는다.” [三椏五葉背陽向陰]는 말을 당(唐) 나라 이후로 시인들이 많이 썼다. 이규보(李奎報)ㆍ김극기(金克己)ㆍ김구(金坵)ㆍ이제현(李齊賢)ㆍ박인범(朴仁範)ㆍ이곡(李穀) 부자와 우리나라의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文)ㆍ서거정(徐居正)의 시가 모두 중국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 또 전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중국 서울에 간 사람이 동파(東坡)의 시를 사려고 하니,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당신 나라의 이상국(李相國)의 시를 읽지 않는가.’ 하였다.” 한다. 또 전하기를, “중국이 《향시록(鄕試錄)》에 김일손(金馹孫)의 〈중흥대책(中興對策)〉 전편이 실려 있는데 그것은 시험장에서 몰래 베껴서 관원을 속였던 것이다.”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우리나라의 인재가 반드시 중국에 못 지는 않다.
예부터 이르기를 앵무새(鸚鵡)는 말을 한다고 한다. 영락(永樂) 정해(丁亥)년에 흠차내사(欽差內使) 김수(金壽) 등이 왔을 때에, 황제가 앵무새 장 여섯 개를 주었는데, 모두 말을 못했다. 성화(成化) 무렵에 유구국(琉球國) 왕이 사신을 보내면서 앵무새 한 마리를 바쳤는데, 역시 말을 못하였다. 점필재(佔畢齋)가 동도(東都)에서 앵무새를 만나 시를 짓기를,
진귀한 새 한 마리 동국에 와서 / 珍禽隻影到東陲
밤낮으로 얼씬거리는 담장의 까마귀와 몇 번이나 짝지었던고 / 幾伴墻烏日夜馳
다만 울음으로 대함은 고향이 아니기 때문이요 / 鳴咽只應非故土
어리둥절 도리어 바보를 배우려네 이 새가 말을 못함을 이름이다. / 媕娿還欲學癡姬
푸른 깃은 마름꽃과 겨루기를 꺼리고 / 翠衿自惜菱花照
남빛 발가락은 옥 사슬 면하기 어렵구나 / 紺趾難辭玉鏁縻
아홉 가지 특징이 있는 단혈산의 봉황새 닮으면 / 爭似九苞丹穴鳳
말하지 않아도 오히려 태평시를 기리리라 / 不言猶瑞太平時
하였다.
노두(老杜)의 유한실탄오(遺恨失呑吳)의 구절은 동파의 꿈으로 인해서 그것이 탄오(呑吳)의 잘못이 유한이 됨을 알았고, 강호다백조(江湖多白鳥)의 구절은 아전들의 속담에 의해서 백조(白鳥)가 도롱룡[蛟]임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어찌 한두 가지에 그치겠는가. 황산곡(黃山谷)의 잡시(雜詩)에,
고풍이 쓸쓸하여 말하지 않고 돌아가니 / 古風蕭索不言歸
빈천할 때 사귄 정 부귀로써 그르쳤네 / 貧賤交情富貴非
세조가 본래 천하를 포용할 역량이 없어서이지 / 世祖本無天下量
자릉이 어찌 고기 낚던 기슭을 그리워 하리오 / 子陵何慕釣魚磯
하였는데, 사용(史容)의 주(註)에, “엄자릉이 뜻이 높고 굽신 거리지 않았음은 세조의 도량이 포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조가 빈부에 따라 사귀는 정에 다름이 있었다면 엄광(嚴光 자릉)이 어찌 그를 그리워하였겠는가.” 하였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가 않다. 광무(光武)가 엄자릉을 대함에 있어 포의(布衣) 의 맹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나이로써 존경하고 덕으로써 받든 사람이다. 세조가 하루아침에 천자의 귀한 몸이 되어 사우(師友)로써 예우(禮遇)하지 못하고 관직(官職)으로써 굴하게 하였으므로 엄자릉이 세조가 본래 천하 량이 없음을 혐오(嫌惡)하여 고개를 저으면서 가 버린 것이지, 진심으로 고기 낚기를 그리워한 것은 아니다. 시의 뜻이 이러하니 참으로 사씨가 말한 바와 같다면 마땅히 “만약 천하 량이 없었다면.[若無天下量]이라 할 것이지, 어찌 본무(本無)라는 글자를 썼겠는가. 안식(眼識)을 갖춘 사람은 반드시 이를 분변하리라.
유빈객(劉賓客)이 한퇴지(韓退之)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두사직(竇司直)과 이별하는 시에 화답하는 시에서 관진척리족 안도후가자(觀津戚里族 按道侯家子)의 구절을 남에게 여러 번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말하기를, “관진(觀津)은 물을 본다는 말이고 안도(按道)는 한 도를 안찰(按察)한다는 말이니 이것은 척리지족(戚里之族) 후가지자(侯家之子)가 혹은 물을 보거나 혹은 한 도를 안찰하려고 와서 좌상(座上)에 있다는 뜻이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그르다. 《한서(漢書)》를 살펴보면, 두영(竇嬰)은 관진 사람으로 두태후(竇太后) 의 사촌오빠이다. 그러므로 척리족(戚里族)이라고 한 것이고, 한왕신(韓王信)의 손자 열(說)은 안도후(按道侯)에 봉해졌으므로 후가자(侯家子)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두상(竇庠)과 한유(韓愈 퇴지(退之))가 함께 누각 위에 있으니 두상과 한유 두 사람을 끌어다가 견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시인의 솜씨이다. 세상 사람들의 억지 해석은 참으로 한 번 껄걸 웃어댈 만한 일이다.
문정공(文貞公) 어세겸(魚世謙)이 신래(新來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로서 승문원에 있으면서 빠른 글씨로 〈김자정선생찬(金自貞先生賛)〉을 희롱으로 지어 장서각(藏書閣)의 아래 대들보 위에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저작(승문원의 한 벼슬) 김 공 / 著作金公
이름은 자정인데 / 名曰自貞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 身雖在此
마음은 서경에 가 있다 / 心則西京
서경에는 / 西京謂何
이름난 기생이 있어 / 有妓擅名
자나 깨나 그를 생각하지만 / 寤寐思之
소원 못 이루었네 / 誓願未成
그 소원 어이 이루리 / 焉遂其慾
오직 말 타고 가려고 글씨를 쓰는데 / 惟點馬行
쓴 글자 획을 보니 / 顧其字畫
졸하고도 서투르구나 / 旣拙且生
쓰고 적어서 / 爰書膽錄
정교하기 힘쓰는데 / 以求其精
삼복 무더위에 / 三伏極暑
땀 흘러 내가 되네 / 流汗川橫
쉬지 않고 부지런히 쓰며 / 勤書不掇
20장을 한정하고 / 卄紙爲程
종일토록 쓰면서도 / 窮日矻矻
지칠 줄을 모르네 / 不知疲癭
벗들이 위로하기를 / 友朋共弔
얼마나 힘드냐하고 / 曰何勞形
가탁하여 말하기를 제조가 / 托云提調
고찰함이 매우 자세하므로 / 考察甚明
부득이 / 不得已耳
감히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 非敢營營
글쓰기 스스로 괴로워도 / 書之自苦
부지런히 하라 하였네 / 勤劬丁寧
아, 김 공이 / 嗚呼金公
병이 나려 하는데도 / 病孼將萌
오히려 멈추지를 않으니 / 猶未悔止
또한 어리석지 않느냐 / 不亦愚冥
사람의 몸이란 / 人之有身
역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 / 亦不可輕
모든 일을 할 때에는 / 庶節其勞
쉬기도 하고 편안히 있기도 할 것이니 / 載逸載寧
자문도 익히지 말고 / 莫習咨文
기성(평양)도 생각지 말며 / 莫思箕城
분수를 지키고 연분을 따라서 / 守分隨緣
나이를 보전하라 / 以保其齡
기성의 아리따운 기녀 / 洛城佳妓
얼굴이 순영(무궁화)같고 / 顔如舜英
서울 길 긴 뚝에 / 紫陌長堤
왕도는 평평하니 / 王道平平
말 몰고 달려 / 載驅載馳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라 / 以慰君情
하였는데, 그 뒤부터는 새로 분관(分館)에 급제하면 공의 이 찬(賛)을 한 번 지나가며 읽게 하여 곧 외게 하고, 만약 외우지 못하면 벌을 가하였으므로 몰래 베껴다가 외었다. 이것이 드디어 원중(院中)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양성재(楊誠齋)의 시의,
강매는 정히 먼저 교할 하는 것이 마땅하다 / 汪梅端合先交割
봄빛은 어찌하여 탐지하지 못 하는가 / 春色如何未探支
와 당 나라 태사(太史)의 시의,
금소로 일찍 농촉을 통하게 하였던가 / 曾否金牛通隴蜀
풍학은 부진(적진)을 놀라게 함이 있었더냐 / 有無風鶴駭苻秦
의 교할(交割)ㆍ탐지ㆍ증부ㆍ유무는 모두 이문(吏文) 중에 있는 말로, 이른바 속된 것으로 아담함을 삼는다는 것이다.
모든 원이 된 자는 으레 민가의 과일나무를 일일이 적어두고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데, 가혹하게 하는 자는 그해의 흉년든 것도 상관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반드시 그 수효를 채웠으므로 백성들이 그것을 괴롭게 여겨 그 나무를 베어버리는 자도 생기기까지 하였다. 어잠부(魚潜夫)가 김해(金海)에 살 때에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는 사람을 보고 부(賦)를 짓기를,
세상에 향기 풍기는 군자가 없고 / 世乏馨香之君子
시대는 사호(뱀과 범) 같은 가혹한 법을 일삼는구나 / 時務蛇虎之苛法
참혹하기가 이미 어미닭을 잡아가기에 이르렀고 / 慘己到於伏雌
다스림이 또한 어린 양에 혹독하도다 / 政又酷於童羖
백성이 한 그릇의 밥을 먹으면 / 民飽一盂飯
벼슬아치가 침 흘리며 달려들고 / 官饞涎而齎怒
백성이 한 벌의 갖옷을 입으면 / 民暖一裘衣
벼슬아치가 팔을 걷고 벗겨 가네 / 吏攘臂而剝肉
설사 내가 들에서 굶어 죽은 넋을 제사지내고 / 使余香掩野殍之魂
유민의 뼈에 꽃을 덮어 주어도 / 花點流民之骨
마음 아프기 이러하니 / 傷心至此
어찌 초췌함을 논하리오 / 寧論悴憔
어찌 할까, 농부가 무지하여 / 奈何田夫無知
형벌의 욕을 보고 / 見辱斧斤
바람에 시달리고 달에 고생하니 / 風酸月苦
누가 이 끊어진 혼을 부르겠는가 / 誰招斷魂
하고, 또,
황금 같은 열매가 많이 달리니 / 黃金子蘩
벼슬아치가 토색질을 멋대로 하여 / 吏肆其饗
수량을 늘려 갑절로 거두어 들이고 / 增顆倍徵
걸핏하면 매질하니 / 動遭鞭捶
아낙은 원망하면서 낮에 지키고 / 妻怨晝護
어린 것은 울면서 밤에 지킨다 / 兒啼夜守
이것이 다 매화 탓이니 / 玆皆梅崇
매화가 근심거리가 되었구나 / 是爲尤物
앞산에는 가죽나무 있고 / 南山有樗
뒷산에는 상수리나무 있으나 / 北山有櫟
관청에서는 상관하지 않고 / 官不之管
아전도 모질게 하지 않는다 / 吏不之虐
매화는 도리어 그만도 못하니 / 梅反不如
어찌 베어 버림을 면할 수 있겠는가 / 豈辭剪伐
하였다. 김해 원이 그것을 읽어 보고 크게 성을 내어 잡아다가 그 죄를 다스리려 하자 잠부가 다른 고을로 도망하여 절도사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에게 가서 의탁하려 했으나, 병들어 역사(驛舍)에서 죽었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에 서반(西班) 이시정(李時貞)이 하지사(賀至使) 첨지 김섬(金銛)에게 말하기를, “유구(琉球)와 안남(安南) 두 나라는 그 관복(冠服)의 제도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당신네 나라의 관복만은 중국과 다르므로, 근일(近日) 조천궁(朝天宮)에서의 연례(演禮)와 회동관(會同館)에서 임금이 연회를 베풀 때에 어사(御史) 및 예부(禮部)의 여러 관원들이 모두 조선(朝鮮)이 유구와 안남 두 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소.” 하기에, 내가 극력 변명하기를, “유구와 안남은 예의를 모르오. 유구의 풍속에는 바지가 없어 개돼지 같으므로 내조(來朝)하는 날 두 나라 사람들은 모두 중국옷을 빌려 입은 것이고, 조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있어 천문ㆍ지리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 점)ㆍ산율(算律 셈법과 법률) 등의 글이 한결같이 중국과 같고, 의복에는 조복(朝服)ㆍ공복(公服)ㆍ사모(紗帽)ㆍ단령(團領)이 있는데, 다만 예의 제도가 조금 다를 뿐이고, 또 복장(服章)에 차등(差等)이 있어 당상관(堂上官)만이 비단옷을 입고, 일반 선비와 평민들은 모두 그것을 입을 수 없소. 그러니 두 나라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하였더니, 이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면서 “우리 여러 관원들이 처음에 두 나라를 가리켜 낫다고 한 것은 다만 관복(冠服)이 중국과 같기 때문이었소. 공 등이 환국하여 모름지기 대신(大臣)에게 고하여 관복의 체제를 고치면 매우 다행이겠소.” 하였다.
남지정(南止亭)이 지은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의 묘갈(墓碣)에, “교동주(喬桐主 연산주(燕山主)) 즉위 10년 갑자년에, 윤비(尹妣) 추존(追尊)의 일을 거행하려고 백관들과 의논할 때에 연산주가 술주정이 한창 심하여 그의 뜻에 거스르는 자는 곧 해를 입혀 시체가 거리에 쌓이고 온 대궐 안이 벌벌 떨고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는데, 교리 그대는 분격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아껴 임금을 악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이 의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했더니, 같이 있던 선비들과 어사와 간관(諫官) 등이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하여 모두 그대의 의논과 같으므로 연산주가 모두 쫓아내었다. 그대는 반 년 만에 붙잡혔는데, 전에 의논을 한 사람은 모두 형벌을 주려고 할 때에, 그대가 말하기를, ‘그 의논을 주창한 사람은 나요. 다른 사람들은 관계가 없소.’ 하여, 그대만이 저자에서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안전할 수가 있었다. 그대가 잡히자 부인 정씨는 함창(咸昌)에 살고 있었는데, 한 알의 쌀도 입에 넣지 않고 괴로우면 물을 마실 뿐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그와 함께 한 무덤에 묻히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고, 드디어 오래도록 슬퍼하여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 아, 그대 같은 사람이 어찌 옛날의 열사(烈士)가 아니겠으며, 부인도 그대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절개와 의리가 한 쌍을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가 성종 때에 감찰(監察)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갔다. 역관(譯官)이 물건을 너무 많이 가지고 오느라고 여정이 떠들썩하였는데, 그것을 부탁한 집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과 대부분 연관되어 있었다. 공이 그것을 모두 다 찾아내어 임금에게 아뢰니, 한 필의 베[布]를 부탁한 사람도 모두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정언(正言)으로 승진되었는데 대간들을 움직여 임사홍(任士洪)을 내쫓기를 청했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곧았다. 임사홍이 저녁에 공의 집에 가서는 그 일을 모르는 척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 의논을 냈느냐.” 하니, 공이 곧장 대답하기를, “오직 나만이 감히 할 수 있을 뿐이오.” 하였다. 임사홍이 가가 꺾여 다시는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그가 홍문관에 있을 때 논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으나 여염집에 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더니, 임금(성종)이 크게 노하여 속으로 세자에게 붙어서 뒷날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를 옥에 가두고서 꾸짖고 따지기를 다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진심을 털어놓고 역대 임금의 폐비를 대우한 사례(事例)를 인용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여움을 풀고 다만 그 벼슬만 파면시켰다.
홍치(弘治)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연산주가 죄도 없는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이의(異議)를 말하지 못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이, “우리들이 간관을 맡고 있으면서 어찌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고, 헌납(獻納)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 없이 죽는 사람을 보고 설사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데에는 어찌하리오.” 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이, “헌납의 말이 옳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다.” 하니, 김극성과 성세순이 태연히 담소(談笑)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기 그 뜻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고 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 죄 없는 연유를 아뢰니, 연산주가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또한 그들을 벌주지도 않았다.
박희문(朴希文)이 병든 어머니를 위하여 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집이 가난하여 늘 쌀을 구걸 해다가 제사를 지냈는데, 불을 지피고 땔감을 나르는 일을 모두 몸소 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사람됨이 진솔하고 꾸밈이 적어서 남이 그 일을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하고, 살을 베어 낸 흔적을 보자고 하면 내어 보여 주었다. 이에 그를 비방하는 소문이 시끄럽게 퍼져서 그 넓적다리의 살을 벤 일을 과장해서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슬프다. 넓적다리의 살을 벤 것이 어찌 거짓에서 나왔겠는가. 그 착한 행위를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명예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 하니, 이른바 남의 미덕을 도와서 이루어 준다는 것이 아니다.
정문(旌門)으로 효자와 열녀를 표창하여 권장하는 것은 옛날부터의 제도다. 다만 중국은 효자에게 있어서는 백성 벼슬이 있으면 그 벼슬을 일컫고 벼슬이 없으면 민인(民人)이라고 하였다. 모의 효행지문[民人某孝行之門]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효자모지문(孝子某之門)이라 하였다. 중국에서 절부(節婦)에 대해서는 고 백성 모의 처모씨 정절지문[故民某妻某氏貞節之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하므로 그 남편의 관작과 성명을 든 것이다. 이른바 정절(貞節)이라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 여인을 말하는 것이고, 열부(烈婦)의 특이(特異)한 행실에 이르러서는 고 민모의 처모씨 정렬지문[故民某之妻某氏貞烈之門]이라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열녀모씨지문(烈女某氏之門)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을 했으므로 반드시 특이한 행실이 있은 뒤에라야 정문을 세웠으니, 절부ㆍ열부ㆍ정절ㆍ정렬(貞烈)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그 정문의 문구는 마땅히 중국을 본떠서 고쳐야 할 것이다.
죄를 짓고 온 가족을 이끌고 변방(邊方)으로 이주하는 자를 입거(入居)라고 하는데, 죽으면 장사를 치르자마자 백정이나 관가의 종으로 아내 없는 자가 관청에 고하여 그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하면 수령이 위협하여 시집가게 하니, 비록 양가(良家)의 자녀라도 면하지 못하였다. 과부로 하여금 비록 절의(節義)를 지키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그 뜻을 빼앗고 시집을 가게 한단 말인가. 퇴폐한 풍속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이다. 수령이 그 그릇됨을 모르고 방백(方伯)도 금하여 없앨 줄을 모르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사약(司鑰 액정서(掖庭署) 정6품 잡직의 하나) 조어정(趙於玎)이 그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자 슬프게 곡하고 아침저녁으로 정결하게 제사지냈으며, 탈상 후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 일을 중종이 듣고 그의 집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뒤에 김안로(金安老)를 극진히 섬겨 언제나 그의 말을 들어주었는데 죄에 걸린 자가 조어정에게 뇌물을 주면 반드시 놓아 주었다. 김안로가 패하고 조어정은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용서를 받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으나 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죽었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백리를 가는 자는 90리를 반으로 잡으라.” 하였는데, 이는 그 말로(末路)의 어려움을 말한 것으로 거울삼을 만한 일이다.
당 나라 여공(呂恭)이 관내에 아비 무덤에 여막(盧幕)을 치고 있던 사람이 얻은 석서(石書)를 임금에게 아뢰려 하매, 유종원(柳宗元)이 편지를 보내어 말리기를, “심은 소나무를 새가 뽑은 변괴가 있어 그 땅을 팠더니 돌을 얻었다는 말은 상도(常道)에 어긋나 믿기 어렵다. 대저 거짓 효도를 하여 간교한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을 참으로 어진 자가 차마 그 잘못을 들추지 못하는 것은 교(敎)를 손상시킬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나 거짓을 하도록 하여 이익을 탐하게 하면 교가 더욱 무너지는 것이니, 그 받아둔 글은 내지 않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다. 가정(嘉靖) 초년에 사천(私賤) 이양동(李良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효도로써 마을에 소문이 났다. 이양동이 관령사(管領使) 길남부(吉南部)에게 뇌물을 주고, 또 부관(部官)에게 뇌물을 주어 예조(禮曹)에 통첩을 올려 달라고 했으나 부관이 미워서 듣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난 뒤에 마침내 예조에 통첩을 올려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해주려고 장차 통첩을 올리려 할 때에 이양동이 기뻐하여 첩지(牒紙)를 집에 가지고 가서 그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그 뜻이 반드시 효자라는 명예를 사모한 것이 아니라 실지의 잇속은 복호에 있었던 것이다. 뒤에 그 부의 서원(書員)으로 고용되어 권력으로 백성의 재물을 몰수하곤 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죽었다. 아, 효자의 표창도 뇌물로 얻으니, 돈귀신[錢神]의 이야기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로구나.
가정 신사(辛巳)년에 무인(武人) 하정(河挺)의 첩 강씨(姜氏)가 수절하고 개가하지 않기로 손가락을 잘라 스스로 맹세하였다. 뒤에 그 어머니가 몰래 사람을 시켜 강제로 데려가게 하였더니, 신혼의 사랑이 전보다도 더 두터워져서 늘 규방 안에 함께 거처하면서 마치 목을 서로 기대고 있는 원앙새보다도 사이가 더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이 〈강절부행(姜節婦行)〉을 지었는데,
의춘현 무등촌에 / 宜春之縣無等村
강씨라는 여인이 있어 아름답다고 일컬어졌네 / 有女姓姜稱淑美
문벌이 비록 외가는 보잘 것 없었으나 / 門譜雖然無外家
아비는 조상 때부터 좋은 벼슬자리에 올라 / 郞罷夙世躋膴仕
정수 북쪽에 크게 자리 잡고 살면서 / 田園雄據鼎水北
천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었다네 / 家人千指被羅綺
강 아가씨 성품이 난초처럼 아름답고 / 姜娥天賦蕙蘭質
검은 머리 붉은 뺨에 하얀 이 / 綠鬂丹臉仍皓齒
소랑의 수놓는 솜씨 모두 배웠고 / 蘇娘錦字工宛轉
설도 의 아름다운 편지 사연도 많네 / 薛濤華牋賦辭理
땋은 머리 가만히 받들어 그 어미 지키고 / 阿鬟密奉阿母護
문밖에 일찍이 신발 소리 들은 적 없네 / 閾外不曾聞繡履
중신할미 헛되어 청조사 되어 / 媒媾浪費靑鳥使
깊은 규방에서 짝 가리기 몇 해던고 / 幾年擇對深閨裏
악목이 다투어 접근해도 고개 끄덕이지 않더니 / 岳牧爭調不點頭
스스로 마음 주어 하씨 아들께로 갔었네 / 自許竟歸河氏子
하생이 비록 무계로써 나아갔으나 / 河生縱由武階進
사귀는 이 모두 명사들이라 / 納交盡是知名士
고관대작을 겨자 줍듯 한다고 자랑하면서 / 自謂高官若拾芥
사랑방에 객을 치고 서사를 탐독했는데 / 郡齋養客耽書史
어찌 알았으랴. 주포화 에 연좌되어 / 郍知竟坐主逋禍
패가하고 몸은 죽어 세루 되었네 / 家破身戮爲世累
강씨는 피눈물로 천지에 맹세하여 / 姜娥泣血誓天地
절개를 빼앗기면 죽기로 결심하고 / 有如奪志期一死
몸소 지아비의 뼈를 가져다가 산아에 모시니 / 親携夫骼妥山阿
외로운 몸 의지할 곳 없이 되었구나 / 孑然被經無所倚
어미가 재가를 권하고 친척들이 가엾다 하면 / 玆母勸止親黨憫
듣기도 전에 소스라쳐 펄쩍 뛰는구나 / 語不及耳輒驚起
어떤 갑부가 재물로써 꾀었더니 / 有甲利財挾勢誘
은장도로 가냘픈 손가락을 잘라 / 忍取銀刀落纎指
적삼에 피가 흥건하고 땅위에 낭자 하구나 / 羅衫殷血紛滴地
붓을 들어 피로 종이에 가득히 쓰고 / 承以栗尾書滿紙
묘 앞에 하소연하는 곡소리 하늘에 사무치니 / 陳詞墓前哭撤天
듣는 이 모두 다 놀라는구나 / 聞者怖愕來雲委
백성들은 감탄하고 현관은 칭찬하여 / 氓庶咨嗟縣官嘉
여자들로 하여금 강씨같이 되라 하였고 / 令女共姜擬可企
젊은 홀어미 개가하려다가도 / 有娣亦寡欲再適
감화되어 가문의 부끄러움 사지 않았네 / 感起不作家聲耻
어찌 어미가 딸 팔기를 좋아하리요마는 / 何知母性喜售女
몰래 불량배들과 짜고 속임수를 써서 / 陰結惡少逞奇詭
황혼에 뒷방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 黃昏屛息後閤子
강씨의 잠자리 엿보고 달려들게 하였다 / 侗女就房令逼邇
늙은 할미 자랑하기를 “몇 사람을 섬기다가 / 揚言老媼事幾人
너의 아범 만나 이 집으로 온 나다 / 乃遭汝翁來家此
눈앞에 분분히 너희들 있으니 / 紛然眼前烈女曹
영광을 누리기 나 만한 이 없구나 / 享有光榮莫我似
사람의 한 세상 풀에 붙은 티끌인데 / 人生一世塵寄草
너는 수절하여 누구를 기쁘게 하려느냐 / 汝縱立節誰復喜
강씨가 이 소리 듣고 홀연히 마음이 돌아서 / 女聞斯言心忽回
어제의 잘못을 지금에 깨달은 듯 / 昨非方知悟今是
끌어안는 힘에 못 이기는 척하고 / 甘心似爲力所扼
밤새도록 꿈에 맺은 원앙 이불 안에서 / 通宵夢結鴛鴦被
생각을 돌이켜 옛 님 에게 정성을 보내려 하나 / 翻思舊主欲輸忱
엎지러진 물이 되었으니 다시 담기 어렵구나 / 傾甁已作難收水
동서(형제의 아내가 서로 부르는 말)들 사이에 오래 웃음거리 되고 / 長遭咥笑妯娌間
추문은 퍼져 더럽다 침뱉았으나 / 醜言播耳忽唾鄙
신혼이 도리어 죽자사자하는 사이가 되어 / 新婚反供嚙臂盟
하루만 떨어져도 그리움을 어이하리 / 一日睽異情難已
절행이 온통 음행으로 변했으니 / 節行居然變淫行
죽은 하정의 넋이 있다면 부끄러워하리라 / 河間有靈羞與擬
남은 몸 따라 죽자던 첫 마음 어디 두고 / 殘肢效死始何心
한 마디에 절개 꺾음은 무슨 일인고 / 片言毁節終奚事
회가 몸 바쳐 강포한 오랑캐와 싸워 / 會之挺身鬪強虜
목숨 바쳐 조 나라 제사를 보존했으나 / 辨命碎腦存趙祀
마침내는 조 나라 꺾고 오랑캐에게로 갔으니 / 終然折趙欲歸虜
만약 주심을 얻었다면 개 돼지 같도다 / 若得誅心同犬豕
성인이 끝맺음을 귀히 여기는 까닭은 / 聖人所以貴終功
아홉 길의 공도 마지막 한 삼태기에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九仞虛簣宜審始
느낀 바 있어 절부행을 지어 / 感歎聊爲節婦行
보는 이로 하여금 거울삼게 하노라 / 庶使觀者爲鑑砥
하였다.
가정(嘉靖) 계미년에 하정사(賀正使) 판서 신제(申濟)와 관압사(管押使) 첨지 공세린(孔世麟) 등이 중국 조정에 떠나는 인사를 하는 날, 서장관(書狀官) 김기(金紀) 이하 13명이 모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예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통사(通事) 김산해(金山海)가 이미 국왕의 파견을 받았은즉 스스로 예법을 지키고 여러 사람들은 깨우쳐 조참(朝參)을 부지런히 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법을 가볍게 여기고 한때의 편안함만을 추구하여 미리 깨우쳐 주지 않아 여러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어 떠나는 인사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으니, 일이 법에 어긋나므로 법으로 볼 때 가볍게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하였고, 또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왔으므로, 중종이 크게 노하여 일행을 심문하고 다스리려 모두 파직시켰다. 연경에 가는 사신으로서 조알(朝謁)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알아서 경계할 일이다.
약재(藥材)중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많으므로 사신이 중국에 갈 때마다 의관(醫官) 두 사람을 보내어 사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거간꾼이 속여 팔아 이익을 챙겼다. 소합유(蘇合油)ㆍ곽향(藿香)ㆍ독활(獨活)ㆍ유향(乳香)ㆍ사향(射香) 같은 것은 진짜가 아닌 것이 가장 많았다. 가정 병오년에 중종이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해당 관원과 합의 계약을 맺고 사기를 청하였더니, 상서(尙書) 하언(夏言) 등이 아뢰어 태의원(太醫院)으로 하여금 약품을 잘 시험하게 하기 위하여 의생(醫生) 한 명을 해당 관원으로 삼아 변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의생이라는 자가 저 상인들과 한 통속이 되어 끝내 진짜를 팔지 않았다.
요동(遼東) 사람으로 북방 민족 달자(達子)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많이 우리나라 국경을 향해 나왔는데, 곧 도사(都司)에게 놓아 보내면 도사는 다시 광녕(廣寧)의 도어사(都御史)에게 보냈다. 도어사가 연말에 여러 번 중국 조정에 아뢰니 지금의 황제가 다시 칙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갑오년 무렵부터 함경도 육진(六鎭) 성 밑의 야인(野人)들이 사로잡힌 한인(漢人)들을 깊은 곳에 사는 달자에게서 사서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 바쳐 임금의 상이 내리기를 구하였다. 조정에서는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드디어 그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잡힌 사람들을 요동으로 놓아 보냈더니, 그 뒤로는 야인들이 그 상을 받으려고 포로들을 사 오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그 상으로 내리는 물건으로 역로(驛路)의 붐빔이 매우 심했으므로, 이에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 명하여 포로를 바치는 것을 물리치게 하였더니, 그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요동의 동쪽 30리 되는 곳에 도독첨사(都督僉事) 왕상(王鏛)의 무덤이 있는데, 그 비갈(碑碣)과 양마석(羊馬石)의 체제(體制)가 썩 잘 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신이 으레 가보게 되니 묘지기가 대가를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내가 한 사상(使相)에게 말하기를, “왕상은 한낱 장관(將官)이고, 신도(神道 묘소로 가는 길)의 시설도 장관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지금 사자(使者) 고관(高官)들이 그의 무덤 아래에 연이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수치를 크게 끼치게 되는 것이니 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사상이 웃으면서, “너는 참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로다. 어째서 이것을 수치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중종 초에 통역관이 말하기를, “요동의 도사가 우리나라의 자문(咨文)을 보고, ‘너희 나라의 이문(吏文)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문자(文字 한자)로 자문을 지어 오지 않느냐.’ 하더라.” 하였다. 뒤의 통역관들도 연이어 이런 말들을 하였고, 크고 작은 자문은 반드시 이문으로 쓸 필요는 없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우리 조정의 문서를 살펴보건대, 글이 매우 분명하고, 그 가운데 쓰인 글자가 때때로 한둘 예식(禮式)에 맞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하나, 알 수 없을 까닭이야 있겠는가. 그때 통역관 배사신(陪使臣)이 도사에 서서 갑자기 대인(大人)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번역하는 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잘못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지만 이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조 때에, 명나라 영종(英宗) 황제가 칙서로 타이르기를, “왕의 나라(조선)의 시서(詩書)와 예의(禮儀)의 가르침이 전하고 익힘에 전통이 있어 표정(表箋)ㆍ장주(章奏)와 보내오는 이문이 모두 예식에 맞다…….” 하였다. 또 가정 13년에 상서 하언(夏言)이 아뢰기를, “조선 나라의 문자가 명백 합니다…….” 하였는데, 어째서 통역관의 말과 같지 않음이 이와 같으냐 말이다. 내가 직사(職事)로 연경에 가기를 전후 일곱 번이나 하였는데, 요동 및 예부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글을 보고 이해하기 힘든 기색을 보인 일은 일찍이 없었다. 가정 정미년에 주문사(奏聞使) 동지(同知) 송순(宋純)이 문금(門禁)의 일 로 예부에 자문을 올리기 하루 전에 제독관(提督官)이 가져다 보고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 글을 보고 벌써 그 전체를 알았다.” 하였다. 또 차부(車夫)가 통역관 이순종(李順宗)의 짐을 훔친 일에 대하여 나로 하여금 글을 지어 제독(提督)에게 올리게 하였는데, 이당(李棠)이 그것을 읽고 나서 연달아, “참으로 좋다.”고 몇 번을 칭찬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 글은 이 곳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냐.” 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내 눈으로 본 사실이니, 이른바, “너희 나라의 이문은 알 수가 없다.” 한 것은 더욱 믿을 것이 못 된다.
성화(成化) 정미년에 교리(校理) 최부(崔溥)가 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으로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오다가 바람을 만나 바다에 표류하여 태주(台州)에 닿으니, 비왜지휘(備倭指揮) 등의 관원이 다시 항주(杭州)로 보냈다. 보낸 관원이 함께 데리고 연경에 이르니 예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고 놓아 보냈다. 그 뒤 제주의 백성들이 표류하여 영파부(寧波府)에 이르렀다가 다시 풀려 나와 모인 자가 6,7기(起 차(次))에 이르렀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곧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가정 정미년에 내가 주문사(奏聞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적에 제주 사람 김만현(金萬賢) 등 64명이 사관(使舘)에 이르렀는데, 역시 표류하여 영파부에 닿은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바람을 만나 두 번째 온 사람도 5,6명 있었는데, 데리고 온 지휘(指揮) 양수(楊受)가 말하기를, “항주에서 연경까지 수로로 1만여 리인데, 연도의 역사(驛舍)가 많이 황폐해졌다. 내가 지체 낮은 관원으로 64명을 데리고 배와 식량을 한결같이 조달할 수가 없어 혹은 하루 이틀 묵었는데, 김만현 등이 떼를 지어 몽둥이를 휘둘러 통역관을 욕하고 때리니, 역에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쳐 버렸다. 내가 말렸으나 종내 듣지 않고, 전후 두 달 이상을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렇게 하였으니, 예의의 나라의 백성으로 난폭함이 이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지휘 양수의 말을 처음 들을 때는 모두 믿지 못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연도에서 하는 짓을 보니 과연 양수의 말과 같았다. 저 제주는 먼 바다 남쪽에 있으니 표류하여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근대와 같이 잦은 적은 없었다. 이것은 목사(牧使)된 사람이 쉽사리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으므로, 배를 탄 사람이 표류하여 중국에 가 닿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구태여 순풍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것이 표류하는 사람이 옛날보다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항주 일대는 이미 표류민의 폐해를 입고 있었으니, 어찌 변장(邊將)이 왜적으로 지목하여 목을 베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 또 어찌 쫓아내어 바닷길을 따라 돌아가게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 김만현 등이 말하기를, “만약 15말의 쌀과 몇 항아리의 물만 있다면 비록 폭풍을 만나더라도 불과 며칠 사이에 곧 영파부에 닿을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바다에 표류하는 폐단이 장차 그치지 않으리라.” 하였다.
가사(歌詞)의 체(體)는 율시(律詩)와는 같지 않다. 율시는 상하(上下)ㆍ평성(平聲)으로 평성을 삼고, 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으로 측성(仄聲)을 삼는데, 가사는 사성(四聲)이 각기 제 구실이 있어 측성이 서로 통하여 쓰이지 않는다. 가(歌)는 말을 길게 늘이는 것이니 소리의 청탁(淸濁)ㆍ고하(高下)가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섞여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섞이면 비록 면구(綿駒)를 시켜 부르게 하여도 역시 음(音)을 이루지 못한다. 익재(益齋 이제현)가 오래 중국에 가 있었으므로 그 체에 아주 밝고 작품도 많으나, 과연 중국과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의 작자는 모두 그저 그렇고 그렇다. 성화(成化) 무렵에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기랑중(祈郞中)의 가사에 화답하였는데 기랑중이 역사(譯士)에게 말하기를, “이 가사가 성절(聲節)과 맞지 않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매우 다르니 어찌 그 성절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기랑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 병오년에 공운강(龔雲岡)과 오용율(吳龍律)이 짧은 가사 몇 곡을 짓고서는 원영사(遠迎使) 정호음(鄭湖陰)에게, “어째서 화운(和韻)이 없느냐.” 물으니, 호음이 답하기를, “가사는 율시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성운(聲韻)은 아주 다르니 만약 억지로 본뜬다면 그 체계를 이루지 못하므로 감히 짓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나, 공운강은 끝내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그것을 지어서 욕을 먹는 것보다는 짓지 않아 참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물며 성음이 통하지 않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급사(給事) 오희맹(吳希孟)이 임진(臨津)을 지나면서 쌍운 종어가(雙韻縱魚歌)를 지었는데, 운이 억지스럽고 말이 매우 서툴렀다. 정호음이 생각나는 대로 써서 차운(次韻)하기를,
형강의 적벽이 우리 동국에 있으니 / 荊江赤璧在吾東
와서 노니는 조사는 소선(소동파) 같도다 / 來遊詔使蘇仙同
봄 물결 처음 일어 배를 띄우니 / 桃浪初生容泛
그물에 들어오는 송강의 농어와 위의 동어로다 / 入綱松鱸與衛鮦
요리사가 좋은 것을 얻어 □하지 않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 厨人得雋活不□
싱싱한 채로 꼬챙이에 꿰어 화로에 굽네 / 活剝串炙洪鑪中
소반에 오르자 손가락 움직여 다 먹어버리니 / 登盤指動共呑嚨
누가 너를 출렁이는 물결 속에 놓아줄 것인가 / 誰肯放爾溟波浺
용진의 장인을 우연히 만나 / 龍津丈人偶然逢
생각하니 만물이 모두 자연의 조화로다 / 推念萬物天同功
고기와 새는 깊고 높은 곳에 숨어 사는데 / 魚鳥潜棲在深崇
천기가 자재하여 통발이나 새장에 살기 어렵도다 / 天機自在難罶籠
어찌 먹이를 탐하여 보금자리를 뜨랴마는 / 胡爲貪餌辭舊葒
아가미 거품 뿜으며 어항에서 노네 / 穿腮煦沫盆水容
도마 위에 지느러미 붉음을 누가 어여삐 여기리오 / 刀几誰憐尾鬣紅
맹공의 넓은 아량 크기도 하여라 / 孟公博雅心期沖
어찌 상주충에만 놓아 주리오 / 放生奚獨常州漴
여기에도 물 있어 맑고도 넓은데 / 此間有水淸而洪
너를 숨기 좋은 마름떨기에 놓아 주노니 / 縱汝好隱藻荇叢
나가거든 삼가 어부의 떨기를 범하지 말라 / 愼出莫犯漁人藂
용문에 못 오르고 멀리 날아가 버리면 / 龍門點額棄風翀
천지는 아득하고 하늘은 넓은데 / 天地浩渺層霄空
선생이 칼 있어 공동(전설상의 산)에 거니 / 先生有釰掛崆峒
솟구치는 기운이 충융을 넘네 / 超揖元氣凌沖瀜
남은 힘 이에 모두 금잉어로구나 / 餘力控此赤鯶公
교룡을 베어 피묻은 창 씩씩도 하여라 / 斬蛟血染霜鋒雄
천하에 영을 내려 경봉을 업신여기고 / 遂令四域無驚烽
두루 내리는 큰 비 창공에 돌도다 / 晉注霖雨回蒼穹
은혜 입어 바다 밖에도 풍년 드니 / 澤被海外作時豐
어찌 이 고기의 은혜를 사사로이 하리오 / 豈徒此魚恩私融
마침내 기약하는 도움 천룡에 있으니 / 終期賛翊在天龍
공 거두기 같이 하면 백성은 슬픔 없으리 / 收功咸若民無恫
하였다. 오희맹(吳希孟)과 공운강(龔雲岡)이 읽어 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높은 재주로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리다. 가정 병오년에 행인(行人) 왕학(王鶴)이 한강에서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
푸른 술통이 물결에 잠겼으니 춘의(술 구더기)가 뜨고 / 綠尊隱浪浮春蟻
긴 피리 바람에 부니 저녁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로다 / 長笛吹風嘯暮猿
하였다. 대제학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이에 화답하기를,
한수에서 지금 채봉을 만났으니 / 漢水卽今逢彩鳳
초운 어느 곳에서 원숭이 울음을 들을꼬 / 楚雲何處聽啼猿
하였는데, 이것은 을사년 여름에 행인 장승헌(張承憲)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왔을 때 낙봉이 강가에서 송영(送迎)하면서, 초(楚) 나라에서 사신으로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제원(啼猿)으로 운을 달았는데, 기교의 흔적이 없어 가장 뛰어난 시가 되었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일찍이 연경에 가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 여시거(黎時擧)와 시를 지어 주고받기를 수십여 편이나 하였는데, 여시거의 시 한 수에 이르기를,
듣노니, 삼한 풍경이 유다르다 하니 / 三韓見說景偏殊
압록강 맑고 맑아 물빛이 가을이로다 / 鴨綠澄澄水色秋
이 강산 시 생각하기 좋다 하며 / 知是江山詩思好
도리어 구법을 소주를 본떴네 / 還將句法效蘇州
하였다. 적암(適庵)이 차운(次韻)하기를,
좋아하는 물고기와 웅장이 그 맛이 무엇이 다르랴 / 嗜魚熊掌味何殊
나는 그대 시의 맑기가 가을 같음을 사랑하노라 / 我愛君詩淡似秋
온(비경)과 이(태백)는 오직 부염하기를 자랑하려 하니 / 溫李只要誇富艶
공평하게 소주(위응물) 배움이 합당하리라 / 平平端合學蘇州
하였다. 여시거의 시가 소주(蘇州)로 운을 달아 창운(唱韻)을 어겨 화시체(和詩體)가 아니므로 글을 보내 나무랐더니, 또 한 수를 건넸는데,
삼한의 끼친 풍속 옛사람과 다르니 / 馬辰遺俗古人殊
세대가 바뀌기 몇 해던고 / 世代相移幾度秋
누살 명관이 무슨 뜻인고 / 耨薩名官何意義
그대는 예의 제도가 중국과 다름을 아는가 / 知君禮制異中州
하였으므로, 적암이 글로써 대답하기를, “앓고 난 뒤라, 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좋은 생각이 숨어 버리고 무기인 제충(梯衝)이 앞에서 춤추지만 처녀는 스스로를 지키노라. 그대는 회음(淮陰)의 물 위의 군사 달아남을 보고 조(趙) 나라 사람의 웃음을 유발시키지 말라. 훗날 몸이 건강해지기를 기다려서 서로 시단(詩壇)에서 장단을 겨루어 보기로 하자. 늙은이 말 위에 앉아서 사면을 돌아본 것을 보고 장막 안의 산가지를 아끼지 말라. 누살은 본래 방언(方言)으로 옛날의 운조(雲鳥)인데 벼슬을 이름 함은 무슨 뜻인가. 교지(交趾)가 어찌 변무(駢拇)의 뜻인가.” 하였더니, 여시거가 회답하기를, “그대는 회음(淮陰)으로 자처하고 조 나라 사람으로 나를 대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 회음의 배수(背水)의 진은 바로 용병법(用兵法) 중의 기율(紀律)로 이긴 것이다. 지금 그대가 시를 읊을 적에 바로 쓰는 운을 답습한 것은 병법으로 비긴다면, 그대는 대오를 잃고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심한 것이니, 장차 무기를 버리고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게 될 것이니, 어느 겨를에 말 위에 올라 앉아 사면을 돌아보겠는가. 대장부는 호탕하여 먹으로 갑옷을 삼고 붓으로 칼날을 삼아 대군(大軍)을 소탕할 것이니, 어찌 막사 안의 계책을 쓰겠는가. 훗날 그대의 건강이 회복되어 한 번 찾아주시면 삼가 단부(壇夫)에게 명하여 엄숙히 기고(旗皷)를 마련하고 즉 재주를 겨룰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겠노라. 교지(交趾)는 본래는 한 군(郡)이다. 군의 북쪽에 남교관(南交關)과 천지산(天阯山)이 있으므로 군의 이름을 교지(交阯)라 하였는데, 뒤에 지(阯)를 지(趾)로 잘못 쓰게 되었으니, 그대가 잘못된 것을 그대로 쓰게 된 것도 괴이쩍을 것이 없다.”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地勢)가 물의 근원과 나무의 줄기처럼 생긴 땅입니다. 검은 것으로 부모를 삼고 푸른 것으로 몸을 삼았으니, 토(土)의 이치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토의 이치를 거스르면 재앙이 생깁니다. 이제부터 문무백관은 검은 옷 푸른 갓을 쓰고, 중은 검은 두건에 큰 관(冠)을 쓰고, 여자의 옷은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입을 것이고, 또 모든 산에는 소나무를 빽빽이 심고, 그릇으로는 놋쇠와 구리와 토기(土器)를 써서 풍토에 순응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왕이 이를 따랐다. 지금의 승복(僧服)과 여자 옷의 제도나 소나무를 심고 그릇을 쓰는 것이 모두 그 옛것을 답습한 것이다. 다만 백관(百官)의 푸른 갓은 어느 해부터 고쳐졌는지 알 수 없다.
중국 사람들은 옷 길이와 소매 넓이가 모두 규정이 있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자세히 실려 있다. 가정 병신년(중종 31년)에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대명회전에 의거해서 옷의 길이와 소매넓이를 바로잡고 그 조문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으며, 계묘년에 이르러서 그것을 《대명회전후속록(大明會典後續錄)》에 실었는데, 그 글에, “모든 사람들은 문무 관직을 막론하고 겉옷 앞자락은 땅에서 세 치 떨어지고 뒷자락은 땅에 두 치 떨어지게 하며,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서 다시 걷어 올려 팔꿈치에 이르며, 수장(袖丈)은 한 자, 소맷부리는 7치로 한다. 서민(庶民)의 겉옷은 앞자락은 땅에서 4치, 뒷자락은 땅에서 3치, 소매길이는 손을 지나 6치, 수장(袖丈)은 8치, 소맷부리는 5치이며, 속옷은 역시 이것에 따라서 점차로 감한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마음이 옛것을 좋아하고 새것을 꺼리며 또 조사하여 단속하는 자도 없으니, 오직 재상(宰相)과 조관(朝官)만이 대략 새 규례에 따를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전대로 하였다.
가정 을유년(1525, 중종 20)에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중종께 아뢰어 이문학관(吏文學官)을 두었는데, 그 제도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중의 세 책을 강론하고, 시(詩)ㆍ부(賦)ㆍ논(論) 각각 1편을 시험 보이는데, 정원(定員)은 6명으로 하였다. 신축년에 김모재(金慕齋 김안국)가 건의하여 한리학관(漢吏學官)으로 고치고 정원을 7명으로 하고 실관(實官)이라고 불렀으며, 또 예비로 3명을 뽑아 두었다. 그것이 처음 설치될 때에 나도 재주 없는 몸으로 그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몇 해 뒤에는 모든 동료들이 모두 인재(人材)들이 되어서 주서(奏書)ㆍ자문(咨文) 등을 지을 때에 즉석에서 맨손으로 내리썼으니, 역시 국록(國祿)을 헛되이 먹지는 않았다고 할 만하다.
동지(同知) 최세진(崔世珍)은 중국말에 정통하고 이문(吏文)까지도 통달하였으므로, 여러 번 연경에 가서 질문하고 익혀 모든 중국의 제도와 물명(物名)을 통달하여 알지 못함이 없었다. 일찍이 《사성통해(四聲通解)》ㆍ《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어 바쳤고, 또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등의 책을 언해(諺解)하여 지금의 통역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이 쉽고 편리하게 하여 스승을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이 없게 하였다. 중종 중기부터 사대문서(事大文書)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가정 병술년에 이문(吏文)으로 정시(庭試)에 1등으로 급제하여 당상(堂上)으로 특별 승진되었고, 기해년에 또 1등으로 급제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남지정이 임금께 아뢰어 이문학관을 설치하고 공에게 수업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동료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고 학문이 얕았는데, 잘못이 있어도 공이 너그럽게 보아 주고 매양 권면하여 마지않았으므로, 수십 년 동안 체제와 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꾸지람을 듣지 않은 것은 실로 공이 가르치고 깨우쳐 준 데 힘입은 것이다.
가정 계미년에 중종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정시(庭試)를 베풀었는데, 정번(鄭蕃)이 2등으로 합격하여 이미 청포(靑袍)를 입히고 홍패(紅牌)를 내리려 하는데, 대사간 서후(徐厚)가 그의 문벌이 매우 낮음을 논하여 드디어 청포를 벗기고 내쫓았다. 정번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니, 그 사건이 예조로 내려졌으나 끝내 억울함을 풀지 못하였다. 그 후 남지정이 아뢰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보직(補職)시켰다. 신묘년에 중종이 사알(司謁) 벼슬을 주었는데, 출근할 때마다 술을 내려 취하게 하거나, 옷감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하루는 귤 한 쟁반을 내려 주면서. “듣건대, 너는 어버이가 있다 하니, 그것을 가져다주라.” 하였다. 일찍이 어제(御題)를 내어 논(論)ㆍ부(賦)ㆍ배율(排律)ㆍ단률(短律) 10여 편을 하룻 동안에 지어 바치게 했다. 또 왜인(倭人)이 바친 작은 그림 10폭을 보여주고 그림마다 지으라 하여 지어 바쳤다. 얼마 되지 않아 간관이 아뢰기를, “정 아무개는 이문(吏文)은 잘 익혀 이미 인재가 되었으니 사알은 그에 합당한 직책이 아닙니다.” 하여, 드디어 학관(學官)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는데, 마침내는 패관(稗官)으로 좌천되어 백수(白首 센 머리)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민개(珉介) 이숙(李叔)은 스스로 호를 천량자(天諒子)라 하고, 중종이 즉위하기 전에 맹자(孟子)를 진강(進講)하였다. 중종이 즉위해서 특별히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을 하사하였다. 가정 경인년 무렵에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에 제수하였는데, 그때는 천량(天諒)이 이미 늙었다. 임금이 그 아들과 사위의 수를 묻고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내려 주었으며, 그 후 어제를 내어 율시(律詩)를 지으라고 하여 지어 바쳤다. 불시에 술을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또한 크다고 하겠다. 천량은 여러 책들을 널리 많이 읽었는데, 늙어서도 게으름이 없었다. 일찍이 나에게 시를 지어 보내 왔는데,
문에서 시정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 門麾市井之間子
상ㆍ주 이상의 글을 힘써 연구하노라 / 方討商周以上書
하였다. 또 계사년에 내가 연경으로 갈 때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 끝 구절에
한번 금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물어보라 / 試向金臺勤問訊
중국에도 사람들을 금고시킴이 있는지 / 中朝亦有錮人無
하였다. 나와 천량은 서로 처지가 같은 사이라, 그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가정 경자년 여름에, 모재(慕齋) 김 공이 임금께 아뢰어 찬집국(纂集局)을 설치하고 《이문제서집람(吏文諸書輯覽)》을 편찬했는데, 동지 최세진(崔世珍), 참의 윤개(尹漑), 첨지 윤계(尹溪)를 당상(堂上)으로 삼고,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이문(吏文)과 속이문(續吏文)은 정군진(鄭君陳)ㆍ유대용(柳大容)ㆍ이경성(李景成) 및 나의 형제 등 5명이 함께 그 일을 보았는데, 공에게 아뢰어 의논하는 일은 유대용이 주로 하고, 원고를 고치고 가리고 의논하는 일은 내가 주로 맡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윤참의는 충청도 안찰사로 나가고, 윤첨지는 연안(延安) 군수로 나가 최동지 혼자서 도맡아 관리하였다. 이듬해 신축년 봄에 책이 완성되어 서국(書局)에 명하여 출판하게 하였는데, 모든 이어(吏語) 및 중국의 대소(大小) 관제(官制)로 각 서적에 보이는 것은 매우 자세히 주석했으므로 이 책을 펴 보면 분명하니, 이른바 객(客)은 돌아가기 마련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다만 간혹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 한두 군데 있고, 또 자세하지 못한 것이 몇 조목 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중국에 가서 질정한 바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찬집(纂集)이 오늘날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
《경제육전(經濟六典)》에 한리과(漢吏科)가 있는데. 그 제도는 궁전 뜰에서 방(榜)을 불러 홍패(紅牌)를 내리고 유가(遊街)하게 하는 것인데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에 그 조목을 빼어 버렸다. 가정 신축년에 김모재(金慕齋)가 건의하여 다시 한리과를 설치하였는데, 초시(初試)는 2장(場)으로 나누어 초장에서는 부(賦)ㆍ시(詩) 각 1편을 시험보이고, 종장에서는 이문 1편과 계상서(啓上書) 중의 1편을 시험 보였다. 회시(會試)는 3장으로 나누어 초장에서는 이문 중의 2서, 사서(四書) 중의 1서, 삼경(三經) 중의 1서, 중국어 중의 1서를 강론하고, 경서(經書)는 모두 제비를 뽑은 대목을 책을 보지 않고 외게 하며, 중장에서는 표문(表文)과 전문(箋文) 중에서 1편, 기(記)와 송(頌) 중에서 1편을 시험보이고, 종장에서는 배율(排律) 1편, 이문 1편을 시험 보이는데, 정원은 오직 3명뿐이다. 그 시관(試官) 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등록관(謄錄官)ㆍ봉미관(封彌官) ㆍ입문관(入門官 시험장에 들어감)ㆍ수협관(搜挾官 책을 가진 사람이 없는가 조사함) 등의 벼슬아치 및 시험장에 울타리를 치는 제도 등은 모두 문과(文科)와 똑같다. 임인년 가을에 초시를 실시하였는데 나와 동료들이 모두 합격하였다. 마침 모재(慕齋)가 사망하고,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각년(各年)에 내린 교지(敎旨)를 교정하여 《후속록(後續錄)》을 편찬하였는데, 그 한리과(漢吏科) 한 조목을 빼어 버리고 싣지 않았다고 한다.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산수화에는 별좌(別坐)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學生) 안찬(安瓉)이 있고, 영모(翎毛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를 그린 잡화(雜畵)에는 종실(宗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墨竹 먹으로 그린 대)에는 현감 신잠(申潜)이 있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著名)한 사람들이다.
이상좌(李上佐)는 사인(士人) 아무개의 종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 산수화와 인물화는 당시에 가장 뛰어났다. 중종이 특명으로 그를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도화서(圖畵署)에 근무하게 하였다. 중종이 승하(升遐)하자 임금의 초상을 그렸으며, 가정 병오년에는 또 공신(功臣)의 초상을 그려서 드디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였다. 이상좌 같은 사람은 역시 기이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 만하다. 그의 아들 이흥효(李興孝)도 그림을 잘 그려 명종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군직(軍職)에 붙였는데, 필법은 김식(金湜)을 본떴다고 한다.
연산조에 한 선비 집 종이 임금에게 총애 받는 여인 장녹수(張綠綉)의 집에 의탁하여 그 주인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반정(反正)이 되자, 그 주인이 땅을 두어 길이나 파고 종을 묶어 두덩이 속에 세우고 흙을 채워 넣으니 종이 슬프게 호소하며 소리 내어 울다가 흙이 허리에까지 올라오니 놓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많은 욕지거리를 하다가 흙이 다 덮이자 마침내 그쳤다. 한평군(漢平君) 이성언(李誠彥)의 종이 장인(匠人)으로서 궁중에서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고소장을 가지고 중관(中官 내시)에게 호소하니, 중관이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주인을 큰 죄에 빠뜨리는 일을 네가 차마 할 수 있느냐.” 하고, 몰래 고소장을 공(公 이성언)에게 보냈다. 얼마 안 가서 연산이 폐위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서 상하가 더욱 어지러워졌다. 종들의 나쁨을 어찌 책망할 수 있으랴. 다만 나와는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다시 나의 종노릇을 할 수는 없다.”고 마침내 종을 그 처남에게 주었다. 주인을 배반한 종은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이지만, 도량이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현감 안중손(安仲孫)은 청빈(淸貧)함으로 지조를 지켜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영남(嶺南)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어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도사(都事) 유예신(柳禮臣)이 그 집을 찾아 가는데, 뒤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도 안중손은 밭에 있다가 삿갓에 잠방이 차림으로 호미를 들고 돌아와서 문 앞에서 자리를 깔지 않고 앉아 막걸리를 가져오라고 하여 권하였다. 그의 진솔(眞率)함이 이러하였다.
진사(進士) 이별(李鱉)의 자는 낭선(浪仙)인데, 연산주 무오년에 모형(母兄) 이원(李黿)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문인으로 나주(羅州)로 귀양 갈 때, 서로 울면서 교외에서 이별하였다. 그 뒤로는 과거를 다시는 보지 않고, 황해도 평산(平山)에 살면서 그가 거처하는 당의 이름을 장륙당(藏六堂)이라고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도 하고 사냥도 하였으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마실 때마다 취하고 취하면 노래를 부르거나 울면서 슬퍼하기도 하였는데, 아내와 첩, 종들도 그 까닭을 괴이쩍게 여겼다.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하기를, “명당자리를 찾지 말라.” 하였으므로 앞 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일찍이 방언시(放言詩)를 지었는데,
내가 우는 닭을 잡으려 하나 / 我欲殺鳴鷄
순(舜) 같은 성인이 있을까 염려 된다 / 恐有舜之聖
비록 잡지 않으려고 하나 / 雖不欲殺之
역시 도척(盜跖)처럼 횡포한 자
가 있구나 / 亦有跖之橫
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도 울어 그치지를 않으니 / 風雨鳴不已
순과 도척이 함께 듣게 되는구나 / 舜跖同一聽
선과 악을 제각기 힘쓰니 / 善惡各孜孜
울지 않음은 닭의 천성이 아니다 / 不鳴非鷄性
하였다. 그의 시집 몇 권과 지은 가사(歌詞) 6장이 세상에 전한다.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에 전에는 강경(講經)의 제도가 없어서 비록 식년시(式年試)라 하더라도 양장(兩場)의 제술(製述)로써 33명을 뽑을 뿐이었는데, 그 후에는 식년시마다 임시로 강경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나, 강경을 할 때가 많았다. 성종 초부터 비로소 식년시에 강경 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나, 별시(別試)에는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 강경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며, 강서(講書)할 때에도 경서 가운데 두 가지 책만을 강론하여 약(略 강론 성적의 둘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고, 조(粗 강론 성적의 셋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가정 신사년에 별시에 강서를 정지할 것을 명하고 조세영(趙世瑛) 등 약간 명을 뽑았다. 이때 하색장(下色掌)의 후보 명단에는 유학(幼學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이 많았고 또 나이가 어렸으므로 집의(執義) 어득강(魚得江)이 아뢰기를, “사람을 뽑는 방법으로는 경술(經術)이 우선인데, 이번 별시의 합격자는 모두 나이 어린 사람들이니, 앞으로는 비록 별시의 경우라 하더라도 으레 강경을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6ㆍ7년이 지난 뒤에는 그때 합격한 사람 중에 재주와 인망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 공이 강경을 고집한 것은 역시 좁은 소견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이 글로써 일을 서술(叙述)한 것을 기(記)라 하는데, 송(宋) 나라 주회암(朱晦庵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유형악록(遊衡嶽錄)〉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점필재(佔畢齋)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이 있으며, 청파(靑坡) 이육(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과 나재(懶齋) 채수(蔡壽), 반계(潘溪) 유호인(兪好仁)에게 모두 〈유송도록(遊松都錄)〉이 있으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속두유록(續頭遊錄)〉이 있고, 철성(鐵城) 이주(李冑)의 〈금골산록(金骨山錄)〉이 있어 드디어 문장의 한 체(體)가 되었다.
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주(義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공이 취승정(聚勝亭)에서 휘자(暉字) 운으로 시를 지으려고 한참 동안을 고심하다가 말하기를, “여러 분의 시에 ‘낙휘(落暉)ㆍ석휘(夕暉)ㆍ사휘(斜暉)ㆍ모휘(暮暉)ㆍ조휘(朝暉)로 운을 단 것이 많은데, 중첩되고 정교(精巧)하지 못하다. 이제 한 구를 얻었는데,
맑은 강이 비단과 같으니 사현휘네 / 澄江如練謝玄暉
하였으니 옛 압운(押韻)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대구(對句)가 어렵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황산곡(黃山谷)의 시에
서릿달이 금사를 끌어당긴다 / 霜月掣金蛇
는 구가 있는데, 만약
서릿달이 뱀을 끌어당김은 황태사로다 / 霜月掣蛇黃太史
라고 한다면 쓸 만 하지만, 황산곡의 구가 맑은 강이 비단과 같다는 것이 천고에 회자(膾炙)되는 것만은 못합니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초생달이 갈아 놓은 낫 같다 / 新月似磨鎌
하였으니, 이것으로 저것과 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됐다.” 하고, 드디어 읊기를,
초생달이 낫과 같음은 한리부로다 / 新月似鎌韓吏部
하고, 이어 전편(全篇)을 지었다. 그때는 마침 보름을 지난 뒤라 초생달이 아님을 꺼려 뒤에 초승이 되기를 기다려 써서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소공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
병신년에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퇴휴당 소(蘇) 정승을 모시고 밤에 앉아서 《당고황화집(唐皐皇華集)》을 보다가, 내가 말하기를,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한강시(漢江詩)〉에
아득한 세 산은 엎은 솥인 듯 / 査紗三山看覆鼎
굽이굽이 한 때는 투금에 닿았도다 / 逶迤一帶接投金
라는 연(聯)이 매우 좋습니다.” 하였더니, 공이 웃으면서, “너는 참으로 시를 보는 안식(眼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용재가 때마침 분주하여 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다.” 하였다. 엎은 솥과 투금(投金)의 대(對)가 과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비록 형공(荊公)이 다시 살아나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 용재가 지은 것인데, 소세양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니 부끄러움을 모르기가 심하도다.” 하였다.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
말굽 같은 서해가 막다른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 馬蹄西海到窮陲
백척 높은 정자 자미(북두의 북쪽 별)에 닿을 듯 / 百尺危亭近紫微
난간에 기대어 좋은 경치 바라보며 / 且倚雕欄看勝景
구슬발이 밝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하네 / 不敎珠箔障晴暉
가로지른 압록강이 하늘에 닿아 있고 / 江橫鴨綠兼天暉
버들개지 노랗게 비 맞아 살쪘구나 / 柳暗鵝黃着雨肥
문득 옥당을 생각하니 이 몸 만리 밖에 있는데 / 忽憶玉堂身萬里
봉래산 어느 곳에 오색 구름 나는고 / 蓬萊何處五雲飛
하였는데, 퇴휴당 소정승이 나에게 현판의 시를 읽게 하고 이 한 편에 이르러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늙은이의 시는 시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웅번 예부터 변방에 건장한데 / 雄藩自古壯邊陲
새로 지은 정자 산허리에 마주 섰네 / 新搆華亭對翠微
절역(멀리 떨어져 있는 땅)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 絶域雲煙來醉眼
성 마루에 핀 꽃버들은 봄빛을 자랑하네 / 層城花柳媚春凈
산을 두른 넓은 들 그림같이 푸르고 / 山圍廣野靑如畫
비 지난 긴 강은 푸르기가 더하네 / 雨過長江綠漸肥
참지 못하여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 叵耐登臨還望遠
고향 생각 밤낮 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네 / 歸心日夜正南飛
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구전경험방(舊傳經驗方)》 1권이 있었다. 그 속에 모란의 변종법[變牡丹法] 한 대목이 있는데, “쇠똥을 흰 모란 뿌리 밑에 묻어주면 변하여 살색으로 되고, 또 살색 모란 뿌리 밑에 묻어 주면 자줏빛으로 변한다. 작약(芍藥)도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다만 그 글을 읽어보기만 했을 뿐, 아직 시험해 보지는 못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일찍이 살색 작약을 담장 밑에 심어 두었는데, 그 땅이 메마르다 하여 하루는 그 뿌리의 사방을 한 자쯤 파고 말똥으로 메웠더니, 이듬해에 흰 꽃이 피었다. 그 뿌리를 캐어 그늘에 말려 껍질을 벗겼더니 하얗기가 비길 데 없어 약재로 쓸 만하였다. 그러나 《경험방》에는 살색이 자줏빛으로 변한다고 했는데, 지금 변한 것은 흰색 빛이다. 쇠똥과 말똥의 효험(效驗)이 각각 달라서가 아닐까. 자줏빛과 흰색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본래의 색깔이 변한 것만은 확실하니, 그 방법이 역시 징험(徵驗)이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았더니, 거기에, “사람이 뱀의 발을 보면 좋지 않다고 하는데, 뽕나무 장작으로 뱀을 불사르면 발이 나온다.” 하였는데, 괴이할 것이 없다. 내가 젊었을 적에 절에 있으면서 우연히 머리를 감으려고 뽕나무 장작을 뜰에서 때며 마침 벽 위를 보니 뱀이 기어가고 있었다. 잡아서 뜰에 내던졌더니 굴러서 뽕나무를 피운 화로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꿈틀거리더니 드디어 네 발이 나오는 것이 도마뱀의 형상과 같은데 다만 붉은 살갗에 비늘이 없었다. 아, 방서(方書 의약에 관한 책)가 과연 징험이 있음이 이와 같구나.
가정 을미년에 이과좌급사중(吏科左給事中) 진간(陳侃)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명을 받들고 유구국(琉球國)에 가서 왕을 봉하고 돌아올 때, 밤에 폭풍을 만나 큰 돛대가 바람에 부러지려 하면서 삽시간에 키도 부서지니, 뱃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고 큰 소리로 신명(神明)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신들도 머리를 조아려 마지않고 있는데 홀연 호롱불 같은 붉은 빛이 하늘에서 배로 내려오니 뱃사람들이 놀라 보고하기를, ‘신(神)이 이미 내려왔으니 우리들은 살 수 있습니다.’ 하더니, 배는 과연 무사하였습니다. 이튿날 나비 한 마리가 배 위를 빙빙 날아 돌아다니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비는 매우 작아서 채소밭에서나 사는 것으로 백보(百步) 밖을 날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멀리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마 나비가 아니라 신일 것이다. 아마 앞으로 변괴가 있으리라.’ 하므로, 속히 뱃사람들에게 대비시켰습니다. 다시 또 참새 한 마리가 돛대 위에 와 앉았는데, 참새도 나비와 비슷한 것입니다. 과연 이날 밤 폭풍이 불어 흰 물결이 하늘에까지 치솟고 바람 소리가 우레 소리와도 같았는데 물소리가 또 그것에 곁들여졌습니다. 신 등은 의관(衣冠)을 갖추고 빌기를, ‘이런 풍랑을 만나고서도 능히 우리 수백 명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의 일로 마땅히 비석을 세워 주어야 할 것이니,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겠습니다.’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 바람이 조금 누그러져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가 날이 샐 무렵에는 이미 민(閩)의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은 이미 3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초제(醮祭 별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다만, 전하께 아뢴다는 말이 이미 입에서 나왔으므로, 삼가 전말(顚末)을 적어 위로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부(禮部)가 복주(覆奏)하기를, “우리나라는 악진(嶽鎭)과 해독(海瀆)에 모두 제사를 지냅니다. 제법(祭法)에 이르기를, ‘큰 환난을 막으면 제사를 지낸다.’ 하였사오니, 전례(典禮)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진간(陳侃) 등이 사신으로 해외에 나가 여러 번 풍랑의 위험을 만나고도 끝내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또한 환난을 막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제사를 지내서 신(神)의 공덕에 보답하게 하소서.’ 하였다.
가정 임오년 봄 감시(監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의 방(榜)을 내걸려 할 때에 점장이 김효명(金孝明)이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금년 생원(生員) 장원에는 초두성(草頭姓)을 가진 사람이 되고, 진사(進士) 장원에는 목성(木姓)을 가진 사람이 되리라.” 했는데, 채무일(蔡無逸)이 과연 생원의 장원이 되고, 이거(李璖)가 진사의 장원이 되었다.
중은 자비(慈悲)를 베풀어 살생(殺生)을 하지 않음을 도(道)로 삼는다. 서해(西海)의 한 동냥중이 멧돼지를 쫓고 있는 사냥꾼을 만났는데, 멧돼지가 성이 나서 달아나니 중이 앞에 가서, “가엾도다, 가엾도다.” 하며,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빨리 남쪽으로 가라.” 하니, 멧돼지는 이빨로 물어 중이 드디어 죽었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은 예종(睿宗)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한 말과 같다. 또 여자의 음문(陰門)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랐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사인(士人) 신원(申遠)의 집이 제안의 집과 담이 이어져 있었는데, 신원이 말하기를, “일찍이 제안이 여자를 5ㆍ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안이 몸을 구부리고 엿보고서 말하기를,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 하였는데, 그것은 음모(陰毛)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상의원(尙衣院)에서 무소가죽으로 만든 띠를 바치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았다. 제안이 대궐 안에서 만나 드디어 허리에 차고 차비문(差備門) 밖에 가서 아뢰어 청하기를,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 하니, 중종이 웃으며 그것을 주었다. 혹자는, “제안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만약 종실의 맏아들로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늘 스스로 감춘 것이다.” 하기도 하는데, 남녀 사이의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인데, 평생토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몽와(夢窩) 유희령(柳希齡)이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가려 뽑아 《대동시림(大東詩林)》이라 이름 짓고, 그 서문에 우리나라의 시를 가려 뽑는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비난하고, 또 “시는 짓기도 쉽지 않고 가려 뽑기도 쉽지 않다.” 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뽑은 것이 흠이 없다는 것을 대체로 인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대동시림》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매우 많다. 우선 대강을 여기에 들어 본다면, 김시습(金時習)은 근세의 기이한 남자로, 비록 거짓 미친 체하고 중이 되었으나 마음은 중에 있지 않았다. 하물며 이미 환속(還俗)하였으니, 어찌 그 옛날을 가지고 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잘못의 첫째요, 어무적(魚無跡)의 시는 근대에 드문 것인데 그 문벌을 꺼려 뽑지 않았고, 유수재(柳睡齋)의 작품은 맹랑하고 재미가 없는데, 그의 선친이라 하여 지나치게 많이 뽑았으니 그 잘못의 둘째이다. 일본 중들이 그 나라 명을 받들고 한 번 서울에 온 것을 귀화(歸化)하였다고 지목하여 그들의 시를 수록한 것이 그 잘못의 셋째요, 여류(女流)의 시는 시가 되지 않은 것까지도 일체 취하였으니 그 잘못의 넷째이다. 시를 모은 것이 70여 권이나 되는데도 이문순(李文順)의 3수 운(韻) 배율(排律)과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제잠두록(題蚕頭錄)〉 후장편(後長篇)을 모두 뽑지 않았음은 그 잘못의 다섯째이다. 이것은 그 중에서 큰 것들이고, 그 밖에 버리고 뽑은 잘못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참으로 시는 뽑기가 쉽지 않구나.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시에,
날이 저물어 온 산이 어두운데 / 日夕衆山暗
멀리 낙생에 와 머물도다 / 遠來投樂生
나귀는 남은 풀을 씹고 / 征驢吃殘草
늙은 종은 좋은 밥을 먹네 / 老僕飯香粳
베개를 찾아 등잔을 등지고 자며 / 索枕背燈睡
잔을 잡고 술을 따라 마시네 / 把杯斟酒傾
때때로 장로를 불러 / 時時呼長老
손꼽아 앞길을 묻노라 / 屈指問前程
하였는데, 나귀가 남은 풀을 씹는다는 것은 이미 여행길이 고달픈데, 어찌 늙은 종이 좋은 밥을 먹겠으며, 이미 등잔을 등지고 자는데, 또 무슨 잔을 잡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파(把)ㆍ짐(斟)ㆍ경(傾) 자는 모두 비슷한 뜻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낙생역에서 단 하루만 묵었는데, ‘때때로 장로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驛)의 하인들이 불도를 닦는 중과 비길 바가 아닌데, 그들을 가리켜 장로라 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굴지(屈指)라는 말은 본래 《한서(漢書)》 진탕전(陳湯傳)에, “손꼽아 그날을 세면서 말하기를, 며칠 가지 않아서 응당 길한 말이 들릴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앞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가 그의 할아버지 문희공(文僖公)의 시고(試稿)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집안 문집(文集)이 출판할만하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글로써 이름이 나기는 했으나, 그 원고 가운데 실려 있는 것이 전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간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남추강(南秋江)이 그것을 효도가 된다고 하였다. 또 점필재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하였는데, 선대부(先大夫)의 시에서는 오직 절구(絶句) 한 편만을 실었으니,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 들 만한 것을 취하여 그 이름을 전하는데 그친 것이다. 근래 몽와 유희령이 《대동시림》을 편찬했는데, 그의 선친 수재의 시를 7ㆍ80편, 아우 인첨(仁瞻)의 시도 수십 편을 실었으니, 아, 많기도 하구나. 점필재가 보게 되면 반드시 그 많음을 싫어할 것이고, 남추강이 보면 또한 그것이 효도가 된다고 할지 모르겠다.
가정 기축년(1529, 중종 24)에 동지(同知) 유부(柳溥)가 하절사(賀節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이르러 달자(達子)의 소문을 듣고 도사(都司)에게 고하여 군대를 내어 호송(護送)하여 주기를 청하였더니, 도사가 지휘(指揮)한 사람을 시켜 군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탕참(湯站)에 이르러 역사(譯士)를 시켜 지휘에게 말하기를, “여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겨우 80리 밖에 안 되므로 군사가 호송할 필요가 없다.” 하였더니, 지휘가 말하기를, “나는 도사의 명을 받고 너의 재상을 호송하는 것이니 국경까지 호송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무명 등의 물건을 군사들에게까지 주고, 또 삼베도 주었다. 그 뒤로는 탕참에 사신이 돌아올 때에는 으레 군사 1백 명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호송(護送)이라고 불렀으며, 늘 잔치를 베풀고 무명을 주는 폐단을 남기게 되었다.
가정 을미년에 하지사(賀至使) 아무개가 역사(譯士) 이응성(李應星)을 봉황성(鳳凰城)에 보냈다. 길가 인가(人家)에서 쉬는데 문에 널[柩]이 놓여 있음을 보고 놀라 달아나려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그대는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느냐. 일찍이 당신 나라 사람이 길에서 병사(病死)한 사람을 옮기기 편리하게 하느라고 그 시체를 둘로 잘라서 말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서운 일이다.” 하였다. 이응성이 데리고 간 의주 사람에게,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 물으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는데 확실히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였다. 시체를 자른 일이 비록 무뢰(無賴)한 군사의 소행이긴 하겠지만, 그때 사신된 사람으로서 이 소리를 듣고도 죄주지 않았으니, 어찌 사신의 직무를 잘 이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공운강(龔雲岡)이 동파(東坡)에 이르러 역사 아무개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 서울에 도착하는 날 화란판아(華欄板兒)를 많이 만들어 시를 쓰려고 한다.” 하였는데, 역사가 그 말을 잘못 알고, 원영사(遠迎使)에게 고하기를, “조사(詔使)가 빈 족자[空簇子]를 많이 만들어 두라고 합니다…….” 하니, 드디어 이 일을 급히 임금께 아뢰었다. 공운강이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빈 족자 각 10폭을 두 사신에게 바치니, 자기들의 필적(筆跡)을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쁘게 각각 기행시(紀行詩)를 쓰고 돌아갔다. 중국으로 떠나 다시 동파관(東坡舘)에 이르러 내가 역사 홍겸(洪謙)과 같이 묵게 되어 등잔을 가져오라 하여 일기(日記)를 쓰는데, 홍겸이 빈 족자를 많이 만들었다는 말을 보고 나에게 말하기를, “그때 나도 참석하여 들었는데, 그것은 현판(縣板)이지 빈 족자가 아니었다.” 하였다. 다음 날 가만히 공운강에게 물어 보았더니 역시 그러하였다.
가정 계미년에 일본의 내대전(內大殿) 사신의 배가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닿았는데, 뒤에 온 왜선(倭船)과 저희들끼리 서로 살해(殺害)하므로 그곳 비왜관(備倭官)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니, 왜인들이 항거하여 지휘(指揮) 한 사람을 죽여 바다에 띄우고 달아났다. 성명이 등원중림(藤原中林)이라는 자가 우리나라 황해도 풍천부(豐川府)에서 잡혔고, 또 전라도에서 왜적 망고다라(望古多羅)를 잡았는데, 역시 영파부에서 도망쳐 온 자였다. 조정에서는 관원을 보내 사로잡은 왜놈을 중국 서울에 바쳤다. 그 뒤 일본국은 돌아오는 사신이 올 때마다 등원중림을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하였으니 그 나라로 돌아간 그 일당이 중림이 우리나라에서 잡혔다고 확실히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에 바쳤다고 글월로 알렸는데도 그 요구가 더욱 잦고, 그 사연이 갈수록 간절하였다. 기해년에 김모재(金慕齋) 판춘부(判春部)가 중림 등의 전후 죄를 진술한 말들을 적당한 말로 써서 일본으로 보내고, 또 “우리 나라는 성심으로 중국을 섬기니, 잡은 이런 도적을 의리상 중국에 바쳐야 하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망고다라(望古多羅)는 우리나라 변경을 지키는 병사를 죽여서 그 죄가 더욱 크니, 그대의 나라에서도 마땅히 우리나라를 위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물며 변장(邊將)에게 잡힌 것을 어떻게 하랴.” 하였더니, 이로부터 일본이 다시는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비록 섬나라 오랑캐지만 이 말이 도리(道理)가 있음을 보고 옳게 여긴 것이리라.
종기(腫氣)를 잘 고치는 의사로서 김순몽(金順蒙)이 있었다. 성종 말년부터 그의 침과 약으로 효험을 본 사람이 몇 천 명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중종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려 주었다. 그 후에 녹사(綠事) 이맹형(李孟亨)이라는 사람이 또한 종기 잘 고치기로 서울 안에 이름이 높았으므로 군직(軍職)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의술은 김순몽만 훨씬 못하였다. 근래 김상곤(金尙昆)이라는 사람이 방서(方書)도 모르고 종기를 보면 곪았는지 곪지 않았는지를 따지지 않고 번번이 손침으로 침을 놓았다. 일찍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면서 병든 중에게 침을 매우 많이 놓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거지반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혜민서(惠民署)에 소속시켜 봉록(俸綠)을 주었다. 중종이 일찍이 풍종(風腫)에 걸리자 모든 명의들이 다 들어와 모신 자리에서 김상곤으로 하여금 침 자리를 잡게 하고 박세거(朴世擧)에게 침을 놓게 하였으니, 이는 김상곤의 경솔하고 망녕 됨을 염려해서이다.
서피장(黍皮匠)은 그 방법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니, 이는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자 해서이다. 가정 계사년에 금박장인(金箔匠人) 김아동(金阿童)이 사신을 따라 연경에 가서 가짜 금[假金]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은박(銀箔)을 연기에 그슬리면 진짜 금같이 된다.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고 혹은 종이에 발라서 쓰는데 노랗기가 비길 데 없다. 다만 마른 풀을 써서 연기를 내는데 그것이 무슨 풀인지를 모른다. 상고해 보건대, 지정(至正) 조격(條格)에 안서로(安西路) 풍직(馮直) 등이 은박으로 그슬려 만든 가짜 금으로 바느질을 하고 천을 짠다고 하였으니, 그런 일은 이미 오래된 듯하다. 뒤에 김아동이 다시 연경에 가서 그슬리는 풀을 많이 사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만든 금박(金箔)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법부(法部)에서 그 기술을 널리 퍼뜨리려고 그를 불러다가 물었으나, 사실대로 고하지 않아 여러 번 고문을 받고 심문을 당하다가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그것은 돈피장(獤皮匠)처럼 이익을 독점하려다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니, 어찌 매우 어리석고 완고함이 아니겠느냐. 근래 별시위 김수량(金遂良)이라는 사람이 나력(瘰癧 연주창)을 잘 고치는데, 가벼운 것은 약을 붙여서 없어지게 하고, 심한 것은 그 둘레에 뜸을 뜨고 독(毒)을 약에 섞어 바르면 며칠 안 가서 살갗이 짓무르는데 쇠로 그 상처를 2,3일 간격으로 한 번씩 째서 한 쪽이 다 비게 되면 수술이 끝난다. 거기에 고약을 바르면 새살이 나와서 드디어 건강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늘 그 의술을 비밀히 하고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도 돈피장이와 훈금(熏金)장이와 같은 부류(部類)인가.
세상에서는 김수량(金遂良)이 나력((瘰癧)이나 연주(聯珠) 등의 부스럼을 잘 고친다고 하나, 나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젊었을 때 목에 멍울이 생겨 두세 개가 되었는데, 의원이 보고 말하기를,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뒤에는 고칠 수 없다.” 하기에 나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늘 크고 작은 멍울을 만져 보곤 하였다. 생연(生鉛)과 십향고(十香膏)를 6ㆍ7년이나 발랐으나, 해마다 더 커지고 또 작은 멍울 하나가 더 생겼다. 하루는 문득 생각하기를, “죽고 삶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약에만 집착(執着)하여 내 마음을 괴롭힐 것인가.” 하고, 드디어 약을 끊고 치료하지 않았는데 1년이 지나자 그 멍울이 저절로 없어졌다. 지금까지 30여 년이 되는데, 오직 한 개만이 남아 있어 겨우 그 형상을 알아볼 정도이다. 일찍 김수량에게 보였더라면 반드시 시술(施術)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윤인동(尹仁同)이라는 성명을 가진 사람이 목 의 멍울을 수량에게 보였더니 수량이 그 의술로 치료하면서 수술을 할 때 그 맥로(脈路)를 잘라 피가 멎지 않아 많을 때에는 4ㆍ5되에 이르러 혹은 매일 혹은 며칠 간격으로 계속 흘러 이러기를 해를 넘겼으므로 몸이 야위고 얼굴빛이 누렇게 되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령 김수량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부스럼이 독하기로서니 어찌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었으랴. 하물며 그 부스럼이 반드시 독한 것은 아님에랴. 내 생각에 김수량의 의술은 아마도 우(禹)가 자연스럽게 한 방법과는 다른 것인 듯하다.
사인(士人) 홍수기(洪守紀)의 여자 종이 대하증(帶下症)을 앓기 1년이 넘었는데, 발작될 때마다 두어 동이의 피를 흘렸고 배가 나오기는 임신부와 같았다. 하루는 핏덩어리를 쏟았는데 크기가 술통만이나 하였고, 또 둥그런 줄기가 음문(陰門) 안에 있어 딱딱하기가 돌과 같아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조금 당기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 아마 오장(五臟)에 닿아 있는 모양이다. 의원들에게 널리 물었으나 모두들 그것이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였다. 김순몽(金順蒙)이 말하기를, “그것은 아마 냉기(冷氣)가 엉겨서 덩어리가 된 것일 것이니, 침으로 그 줄기를 찌르면 침 기운이 오장으로 들어갈 것이니, 거미줄 같은 것으로 그 줄기를 얽어매어 저절로 끊어지게 할 것이다.” 하므로, 그의 말대로 해보았더니 며칠 지나 줄기가 끊어지자 곧 죽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마마귀신을 중히 여겨 제사(祭祀)ㆍ초상집 출입[犯染]ㆍ잔치ㆍ성교[房事]ㆍ외인(外人) 및 기름과 꿀 냄새ㆍ비린내와 노린내ㆍ더러운 냄새 등을 대체적으로 금기(禁忌)하였는데, 이것은 의방(醫方)에 실려 있다. 이는 마마가 누에와 같이 물건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매우 신중히 지키며, 그 밖의 꺼리는 일들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쩌다가 범하면 죽고 또 위태롭게 되는 자가 열에 6ㆍ7은 된다. 만약 목욕하고 빌면 거의 죽어가다가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더욱 그것을 믿고 지성으로 높이고 받든다. 심지어는 출입할 때에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고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 고하기까지 한다. 앓고 난 뒤 1ㆍ2년이 되어도 여전히 제사지내기를 꺼려 비록 사인(士人)이라도 그 풍속에 구애되어 제사를 폐지해 버리는 사람까지 있다. 마마귀신에 대한 금기(禁忌)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근년에 와서 더욱 심해졌으니, 만약 또 4ㆍ50년이 지나면 마침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송도(松都) 송악산(松岳山)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는데, 세속에서는 영검이 있다고 하여 서울의 부자 상인들이 가산을 털어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길에 줄을 지었다. 한 번 제사 지낼 때마다 무명 수천 필이 들며, 거기에 드는 술과 음식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한 해에 한 번 제사지내는 집도 있고 두 번 지내는 집도 있는데, 만일 병이나 옥송(獄訟) 이 있게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때 제사의 반찬 그릇이 불결했으므로 그때 몸이 더러움을 탄 것이니 다시 정성을 들여서 사당에 제사지내라.” 하였다. 또 병이 낫거나 옥송이 끝나거나 하면 “과연 신의 힘이다.” 하였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면, “아버지가 죽고서 아들이 계속하지 않으면 신이 반드시 노한다.” 하여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게 되니 이어서 세업(世業)이 되고 만다. 또 재산이 조금 밖에 없는 사람은 재물을 바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파산하게 되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심하구나, 요사스런 무당이 사람을 미혹(迷惑)시킴이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재물을 없애는 것도 염려스러운 일인데, 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요사스러운 이야기를 고무(鼓舞)하니, 어찌 작은 일이겠느냐.
예전에는 나쁜 무명을 통용(通用)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중간에 와서 금지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다가, 근년에 와서는 전적으로 금지하지 않아서 날로 더욱 나빠져 갔다. 한 필의 무명이 겨우 10자 남짓해지고, 심지어는 반폭(半幅)을 잘라 한 필로 만든 것도 있으니, 물가를 뛰어오르게 함이 얼마나 괴이하냐. 화폐를 함부로 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다. 가정 정미년 무렵에 한성부(漢城府)가 의논하여 그것을 금지하려 했으나, 때마침 기근(饑饉)이 들어 상계(商界)에 폐를 끼칠까 두려워 잠깐 그 통용을 허락하였다. 그랬더니 민간에서 무명의 실을 풀어 조금 가는 무명으로 다시 짜서 팔아 이익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쁜 무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안 되었다. 만약 이 기회에 반년 동안의 기한을 두고 법을 세워 엄격히 금지한다면 뒷날 무명을 짜는 자는 반드시 예전의 나쁜 무명 짜기를 본받지 않을 것이니, 그 폐단을 거의 고치게 될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역청(瀝靑)을 만들어 쓰는 방법을 몰랐다. 중종 때에 일찍이 칠장이[漆匠]를 중국에 보내어 배워 오게 했으나, 끝내 그 방법을 전해 받지 못하였다. 진사 조성(趙晟)이 당본 역청방(唐本瀝靑方)을 얻어 그대로 시험해 보았더니 옻칠과 차이가 없었다. 그 뒤에 또 복건(福建)에서 표류해 온 사람에게 물어 보고 해서 그 기능자가 점차 중외(中外)에 퍼졌다.
전 우의정(右議政) 성(成) 공이 일찍이 《식물찬요(食物纂要)》를 편찬했다. 가정 병오년에 내가 연경에 가서 《식물본초(食物本草)》 1부를 얻었는데, 명나라 노화(盧和)가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이 매우 넓고도 간결하고 적절하여 《식물찬요》같은 것은 거의 폐기(廢棄)할 정도다.
서얼(庶孼) 자손에게 과거와 벼슬을 못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옛 법이 아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피건대, 영락(永樂) 13년에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 등이 진언하여 서얼 자손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서 그것으로 적서(嫡庶)를 구별하자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영락 13년 이전에는 높은 벼슬도 주었는데, 그 이후로는 과거를 정반(正班)에게만 허가하였고, 《경국대전》을 편찬한 뒤부터 비로소 금고(禁錮 벼슬길을 막음)를 하였으니, 지금까지 백 년이 채 못 된다. 세상 천지에 땅에 자리 잡고 나라라고 이름 한 것이 어찌 일백 정도일 뿐 이겠는가마는, 벼슬길을 막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향리(鄕吏)ㆍ수군(水軍) 따위의 천인이 아직도 과거보러 가서 그 부모의 세계(世系)를 말하면 애당초 근거로 삼을 만한 본관(本貫)도 없을 것이고, 혹은 유민(流民)에게 시집가고 혹은 도망한 사람에게 장가들곤 하였으니, 누가 능히 그 양민과 천인을 가릴 수 있겠는가. 경대분(卿大夫)의 아들로 오직 외가가 하찮아서 대대로 벼슬길이 막혀 비록 뛰어난 재주와 쓸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창 밑에서 죽어 일찍이 향리나 수군만도 못하니 불쌍하도다.
예전에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중국의 관제를 가져다가 우리나라의 종정도(從政圖) 에 의거하여 그 품금(品級)을 나누어 올라가게 하고 중국종정도(中國從政圖)라 불렀는데, 오직 관품(官品)의 높낮이에 의거했을 뿐, 중국의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이부시랑(吏部侍朗)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옮기고, 좌도독(左都督)을 종인령(宗人令)으로 옮기는 등 이런 따위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가정 계사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가서 여지도(礪志圖) 한 벌을 얻었는데, 문무(文武)가 각각 그 반열이 다르니, 모든 벼슬을 올리고 내리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한결같이 중국에서 행하여지는 제도에 의거하였다. 표제(標題)에 쓰기를, “가정 무인년에 한림(翰林)이 구본(舊本)을 지었고, 가정 임진년에 행촌(杏村)이 신도(新圖)를 교열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첨온(詹溫)이 지은 것을 찬송한 것이다. 또 설명하기를, “전배(前輩)가 이 여지도(礪志圖)를 만들고 황량(黃粱) 이라고 불렀는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도 쉽게 이룰 수가 있어 마치 꿈과 같으니, 이것은 장난에 가깝다. 비록 장난에 가깝기는 하나, 사실은 상벌(賞罰)이 뚜렷이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 정덕 무인년에 한림이 고쳐 만든 것을 합비(合肥) 한상사(韓上舍)의 집에서 얻었다. 당시에는 더욱 정해진 명칭이 없이 그저 강남(江南)에 전해졌는데, 명공거경(名公巨卿)의 재주 있는 자제들이 매일 서로 즐겁게 가지고 놀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사람의 뜻을 장려할 만하다. 한 등급을 올림으로써 현능(賢能)의 등급을 올리고, 한 등급을 내림으로써 재주 없는 사람을 경계한다. 만약 문과로 급제한 생원(生員) 선비들이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아간다면 사람을 격려하여 독서를 하게 할만하고, 무과에 급제한 군사가 모두 싸움터에서 공을 세우면 사람을 격려하여 용맹을 떨치게 할 만하다. 만약 음양(陰陽)이나 의도(醫道)로 뽑힌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직업에 부지런히 하여 공명을 취하게 된다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는 것은 비록 우연에서 나온 것이라도 역시 조종(祖宗)의 공덕으로 쌓아 올린 바인데, 하물며 그 사이 문무 관원이 공사를 처리하는 데에는 다 상벌이 있으니, 사람으로서 향상하고 앞길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구본은 교방(敎坊)에 한 번 던지면 모두 극품(極品)에 이르니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으므로, 내가 그것을 고쳤다. 비록 인주(印朱)는 얻었더라도 원년통록(元年通錄)의 승강(陞降)에는 통하지 못하게 하니 갑자기 문계(文階)로 옮겨 서로 우열을 다투기를 허용할 것인가.
나는 재주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여지도(礪志圖)로 이름을 고쳤으니, 옳고 그름은 알지 못하겠고, 우선 간행하여 통달한 군자(君子)의 재교(再校)를 기다린다.” 하였다.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
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
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
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
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
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
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
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
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
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
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여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 등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와서 행례(行禮)를 하는 날, 철문 밖의 왼쪽 산대(山臺)가 무너져 구경하던 사람들이 많이 깔려 죽었다. 서민들이 왁자하게 퍼뜨리기를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넉 달도 못 가서 인종이 돌아가셨다.
가정 을사년에 서울의 한 천한 계집이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어미와 아기가 잇달아 모두 죽었다. 또 정미년에 한 말이 길가에서 사람을 낳았는데 얼굴 모습만 말과 비슷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죽었다. 말 주인이 그것을 버리고 갔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관청에서 주인이 말과 교접하여 잉태한 것이므로 심문을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으나, 그 사실은 알 수 없다.


 

[주D-001]청안 : 친한 사람을 대할 때의 눈매를 말한다. 진(晉) 나라의 완적(玩籍)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은 청안(靑眼)으로 맞이하고, 거만한 사람은 백안(白眼)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주D-002]갈도 : 길을 인도하는 하인이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일.
[주D-003]고헌과 : 높은 수레가 지나간다는 뜻으로, 당 나라 때의 이장길(李長吉)이 어릴 적에 재주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므로 한유(韓愈)가 보러 가서 시를 짓게 하였더니, 이런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주D-004]삼청 : 신선이 사는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이다.
[주D-005]당시품휘(唐詩品彙) : 명나라의 고병(高棅)이 당대(唐代)의 시를 품별(品別)로 모아 수록한 책으로 90권, 습유(拾遺) 1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06]본초강목(本草綱目) :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동물ㆍ식물ㆍ광물 천 8백 92종을 7항목으로 해설한 책으로 52권으로 되어 있다. 약재(藥材)의 참고로 소중히 여긴다.
[주D-007]포의(布衣) : 옛날에 서민(庶民)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므로, 포의는 벼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니, 벼슬이 없거나 가난할 때의 사귐, 또는 이욕(利慾)을 떠난 사귐을 포의지교(布衣之交)라 한다.
[주D-008]두태후(竇太后) :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황후로 황제가 죽은 뒤에 영제(靈帝)를 받들어 권세를 휘둘렀다.
[주D-009]분관(分館) :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ㆍ성균관(成均館)ㆍ교서관(校書館)에 배정하여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로 세 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승문원에, 2등급은 성균관에, 3등급은 교서관에 배정되었다.
[주D-010]설도 : 당 나라 때의 여류 시인으로 양반집 딸이었으나 기생이 되어 백거이(白居易) 등과 교류하였다. 특히 원진(元稹)과 친하였는데, 그가 좌천된 뒤에는 촉(蜀)의 완화계(浣花溪)에서 여생을 보냈다.
[주D-011]청조사 : 서왕모(西王母)의 사자(使者)로 세 발 가진 파랑새[靑鳥]가 한 나라의 궁전에 왔다고 한다.
[주D-012]악목 : 4악(岳)과 12목(牧)으로 후세의 공경(公卿) 제후(諸侯)와 같은 것이니, 지체 높은 도령을 뜻한다.
[주D-013]주포화 : 하정(河挺)이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좌천되었을 때, 기묘 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대사성 김식(金湜)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도망 다니는 것을 감추어 주었다. 뒤에 그도 도망하였다가 잡혔다.
[주D-014]문금(門禁)의 일 : 명나라에 간 우리나라 사신들의 자유 출입을 금지한 일.
[주D-015]봉미관(封彌官) : 과거 시험지의 오른편 끝에 자기의 성명ㆍ생년월일ㆍ주소 따위를 쓰고 봉하여 붙이는 일
[주D-016]순(舜) 같은…… 횡포한 자 : 맹자의 말에,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착한 일만 하는 것은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도척(盜跖 춘추 시대의 악인)의 무리이다.” 하였다.
[주D-017]서피장(黍皮匠) : 보통 돈피장(獤皮匠)이라고 하며 돈피를 만드는 기능자를 이른다. 돈피는 담비 종류의 모피로, 품질에 세 가지 등급이 있다. 검은담비의 모피인 잘이 상등이고, 노랑 가슴담비의 모피인 초서피(貂鼠皮)와 노랑담비의 모피인 돈피가 중등이고, 흰 담비의 모피인 백초피(白貂皮)가 하등이다.
[주D-018]옥송(獄訟) : 옥(獄)은 형사 소송이고 송(訟)은 민사 소송이다. 《주례(周禮)》에, “죄의 다툼을 옥이라 하고, 재물의 다툼을 송이라 한다[爭罪曰獄 爭財曰訟].” 하였다.
[주D-019]종정도(從政圖) : 종경도(從卿圖)ㆍ승경도(陞卿圖)라고도 하는데, 옛날 실내 오락의 한 가지이다. 넓고 큰 종이에 옛 벼슬의 이름을 품계(品階)와 종류를 써 놓고, 알 또는 주사위를 굴려 소정의 규정대로 올라가서 먼저 영의정까지 간 사람이 이기게 된다. 종경도를 그려 놓은 큰 종이를 종경도판이라 하고, 굴려서 수(1~5까지 있다)를 보는 길쭉하게 깎은 다섯 모진 나무를 종경도 알이라고 한다.
[주D-020]황량(黃粱) : 황량몽(黃粱夢)으로 사람의 일생의 부귀라는 것은 꿈같이 헛되고 덧없음을 말한다. 당 나라의 노생(盧生)이 조(趙) 나라의 서울 한단(邯鄲) 주막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에게서 베개를 얻어 베고 잠이 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80까지 잘 산 꿈을 꾸었는데, 깨어 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좁쌀 밥이 채 익지 않았더라고 한다. 한단지몽(邯鄲之夢)ㆍ일취지몽(一炊之夢)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