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3. 24. 삼각산 산행

2012.3.2.4. 하얀눈이 삼각산을 멋있게

아베베1 2012. 3. 25. 09:22

 

 

 

 

 

 

 

 

 

 

 

 

 

 

 

 

 

 

 

 

 

 

 

 

 

 

 

 

 

 

 

 

 

 

 

 

 

 

고운집 제2권
 비(碑)비(碑)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무염 화상 비명 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無染和尙碑銘 竝序 奉教撰 下同


제당(帝唐)이 무공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문덕(文德)으로 개원(改元)한 해의 창월(暢月),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 해가 함지(咸池)에 몸을 담그는 석양에, 해동(海東) 양조(兩朝)의 국사(國師) 선화상(禪和尙)이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 채 시적(示寂)하였다.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좌우의 눈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니, 하물며 문하의 제자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었겠는가.
아, 동방의 땅에 몸을 나툰 것이 89년이요, 서방의 불교 계율을 행한 것이 65년이다.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승좌(繩座)에 기댄 그 모습은 엄연(儼然)히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문인 순예(詢乂) 등이 호곡(號哭)하며 유체를 받들어 선실(禪室) 안에 임시로 모셨다. 상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역마(驛馬)로 글을 보내 조문하고 곡식을 부의하였으니, 이는 정결한 공양을 돕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2년이 지난 뒤에 돌을 다듬어 사리탑(舍利塔)을 쌓고 봉안하였는데, 그 소문이 서울에까지 파다하게 전해졌다.
보살계 제자(菩薩戒弟子)인 무주 도독(武州都督) 소판(蘇判) 김일(金鎰),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관유(金寬柔), 패강 도호(浿江都護) 김함웅(金咸雄), 전주 별가(全州別駕) 김영웅(金英雄)은 모두 왕족 출신이다. 그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임금의 덕을 보좌하면서 험난한 세상길에서 스승의 은혜에 힘입었다. 어찌 꼭 출가를 해야만 스승의 인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마침내 화상의 문인인 소현 대덕(昭玄大德) 석통현(釋通玄)과 사천왕사(四天王寺) 상좌(上座) 석신부(釋愼符)와 의논하기를,
“스승이 돌아가시자 임금님도 비통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들이 차마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만들고 혀를 묶어 놓은 채 재삼(在三)의 의리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재가 제자와 출가 제자들이 서로 호응하여 시호와 탑명(塔銘)을 허락해 줄 것을 위에 청하였다. 이에 상이 하교하여 인가하고, 곧바로 왕손인 하관(夏官 병부(兵部))의 이경(二卿 시랑(侍郞)) 우계(禹珪)에게 명하여, 계원(桂苑)의 행인(行人)인 시어사(侍御史) 최치원(崔致遠)을 불러서 봉래궁(蓬萊宮)에 오게 하였다. 최치원이 이 소명(召命)에 따라 기수(琪樹)와 나란히 요지(瑤墀)를 오른 뒤에 주박(珠箔) 밖에서 무릎을 꿇고 명을 기다리니, 상이 이르기를,
“고(故) 성주 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한 분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옛날 문고(文考)와 강왕(康王) 모두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국가를 복되게 한 세월이 오래되었다. 나도 처음에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였으나, 하늘이 아껴서 남겨 두지 않았으므로〔憖遺〕 내가 더욱 마음속으로 슬퍼하는 바이다. 나는 큰 행적을 남긴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리려 한다.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길에 올라 실을 물들이고〔絲染〕 금의환향하였다. 돌아보건대 문고는 그대를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으로 선발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고, 강왕은 그대를 국사(國士)로 간주하여 예우하였다. 그러니 그대 역시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치원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황공합니다. 전하께서 벼 곡식에 쭉정이가 많이 섞여 있음을 용서하시고, 계수(桂樹)에 향기가 많이 남아 있는 줄로 생각하시어, 글을 지어서 은덕에 보답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내린 행운으로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대사(大師)는 유위(有爲)의 요박(澆薄)한 세상에서 무위(無爲)의 신비한 종지를 펼친 분인데, 소신이 보잘것없는 유한한 재주를 가지고 무한히 큰 행적을 기록한다는 것은 연약한 수레 위에 무거운 짐을 싣는 것과 같고,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긷는 것〔短綆汲深〕과 같습니다. 혹 돌이 이상한 말을 하는 일이 있거나, 거북이가 잘 돌아보는 일이 없다면, 결코 산을 빛내고 내를 아름답게 하지는〔山輝川媚〕 못한 채, 도리어 나무숲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시냇물이 수치로 여기게만〔林慙澗愧〕 할 것이니, 붓 잡는 일을 사양할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개 우리나라의 풍속으로서 좋기는 좋은 일이다마는 참으로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하였다. 그러고는 거연(遽然)히 서까래만 한 크기의 글 1편(編)을 내어 중연(中涓 시종관(侍從官))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문인(門人) 제자가 바친 대사의 행장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건대, 중국에 들어가서 공부한 것은 피차 똑같다고 할 것인데, 스승으로 예우를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이고 그를 위해 부림을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쩌면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높아지는 것이고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수고로운 것인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가 공부하는 것을 신중히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건대,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덕을 세우고〔立德〕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말을 세우는〔立言〕 법인데, 저 덕이란 것도 혹 말을 의지해야만 일컬어질 수가 있고, 이 말이란 것도 혹 덕을 의지해야만 썩지 않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덕이 일컬어질 수 있게 되면 그 마음으로 공부한 것이 멀리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고, 말이 썩지 않게 되면 그 입으로 공부한 것 역시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일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는 것〔爲可爲於可爲之時〕이니, 또 어떻게 감히 전각(篆刻)을 굳이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서까래만 한 행장을 처음 펼쳐 보건대, 대사가 중국에 갔다가 동방에 돌아온 해,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선(禪)의 깨달음을 얻게 된 인연, 공경(公卿) 및 수재(守宰)들이 귀의하여 우러러본 사실, 상전(像殿)과 영당(影堂)을 개창(開創)한 일 등이 고(故) 한림랑(翰林郞) 김입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聖住寺) 비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고, 부처를 위하고 후손을 위한 덕화와 임금을 위하고 스승을 위한 성가(聲價)와 세속을 진압하고 마군(魔軍)을 항복받은 위력과 붕(鵬)처럼 드러내고 학(鶴)처럼 돌아온 행적 등이 증(贈) 태부(太傅)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친히 지은 심묘사(深妙寺) 비문에 갖추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부유(腐儒)인 내가 지금 글을 짓는다면 그저 대사가 반열반(般涅槃)의 경지에 든 일과 우리 임금이 솔도파(窣覩波)의 명호를 높인 일이나 드러내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여겨졌다.
나의 입과 나의 손이 합작하여 장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 보려고〔自適其適〕 하는 차에 대사의 상족(上足)인 필추(苾蒭)가 와서 제구(虀臼)를 재촉하기에 내가 이러한 뜻을 언급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김입지의 비가 오래전에 세워지긴 하였으나 수십 년 동안 남긴 스승의 미행(美行)이 그래도 빠져 있고, 태부 왕이 신필(神筆)로 기록한 것은 대개 특별한 지우(知遇)만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입으로 옛 성현의 글을 저작(詛嚼)하였고 면전에서 금상(今上)의 명령을 받들었으며 귀로 국사(國師)의 행적을 실컷 들었고 눈으로 문생(門生)의 행장(行狀)을 취하도록 보았다. 그러니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자세히 말하여〔廣記而備言之〕 기필코 가외(可畏)에게 물려줌으로써 처음을 탐색하고 종말을 궁구하게〔原始要終〕 해야 마땅할 것이다. 혹시라도 서소(西笑)하는 이가 소매 속에 넣었다가 서쪽 중국인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 내가 감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대는 귀찮다고 꺼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내가 광노(狂奴)의 고태(故態)가 남아서 심드렁하게 응하며 말하기를,
“나는 새끼를 꼬듯 짧게 줄이려고 하는데, 스님은 채소를 사듯〔買菜〕 많이 늘리려고 하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원심(猿心)을 붙잡아 매고서 억지로 모필(毛筆)을 움직이려다가 《한서(漢書)》 〈유후전(留侯傳)〉의 말미에 나오는 말을 기억하였다. 그것은 즉 장량(張良)이 상과 조용히 천하의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매우 많지만 천하의 존망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었다. 그렇다면 대사의 시순(時順) 간의 사적(事蹟) 중에도 뚜렷이 드러난 것이 별처럼 많지만 후학을 일깨우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역시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반사(班史)에서 일반(一斑)을 엿본 것임을 자인하는 바이다. 이렇게 해서 다음과 같이 관견(管見)을 서술하게 되었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 누리를 환히 비춰 주는 질료로는 아침 해보다 균등한 것이 없고, 기운이 화창하고 융성하여 만물을 길러 주는 공효(功效)로는 봄바람보다 드넓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바람과 이 빛나는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늘이 이 두 가지 넉넉한 경사를 모으고 산악이 하나의 영성(靈性)을 내린 결과, 군자의 나라에 탄생하고 범왕(梵王)의 집안에 우뚝 서게 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분이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이니 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 손이 되고, 속성(俗性)은 김씨(金氏)이니 무열대왕(武烈大王)이 8대조가 된다. 대부(大父) 주천(周川)은 골품(骨品)이 진골(眞骨)이고 지위는 한찬(韓粲)이다. 고조와 증조는 모두 출장입상(出將入相)한 분들로서 집집마다 그들을 알고 있는데, 부친 범청(範淸) 때에 일족의 신분이 진골에서 한 등급 내려와 득난(得難)이 되었다. 범청은 만년에 조 문왕(趙文王)의 옛일을 추종하였다.
모친 화씨(華氏)가 꿈속에서 긴 팔의 천왕(天王)이 연꽃을 드리워 주는 것을 보고는 임신하였으며, 거의 한 시절을 넘겼을 무렵에 다시 꿈속에서 자칭 법장(法藏)이라고 하는 서역(西域)의 도인이 십호(十護)를 주어 태교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1년을 넘겨서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아해(阿孩) 때에 걷거나 앉을 때에는 반드시 합장하고 가부좌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심지어 아이들과 놀면서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를 쌓을 때에도 반드시 불상(佛像)을 그리고 불탑 모양을 만들곤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차마 하루도 부모 슬하를 떠나지 못하였다. 9세에 비로소 학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입으로 반드시 외웠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세성(歲星)이 끝까지 한 번 도는 때〔一星終〕를 넘기면서 대사가 구류(九流)를 좁게 여기고는, 입도(入道)할 생각으로 먼저 모친에게 아뢰었더니 모친은 예전의 꿈을 생각하고 울면서 “의(䚷)”라고 하였고, 그다음에 부친을 뵈었더니 부친은 늦게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면서 흔쾌히 좋다고 승낙하였다.
마침내 설산(雪山)의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입은 불경의 약 맛을 보는 데에 정통하였고, 힘은 터진 하늘을 기울〔補天〕 만큼 왕성하였다. 법성 선사(法性禪師)는 일찍이 중국에서 선종(禪宗)인 능가종(楞伽宗)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는데, 대사가 몇 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면서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이 모두 탐색하였다. 이에 법성이 탄식하면서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다〔迅足駸駸 後發前至〕는 말을 내가 그대에게서 확인하였으니, 나는 흡족하기만 하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팔 남은 용기〔餘勇可賈〕가 없으니, 그대와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을 하니, 대사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밤중의 노끈〔夜繩〕은 착각하기 쉽고, 공중의 실은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緣木〕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토끼는 그루터기를 지키면서〔守株〕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자기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구슬과 불을 얻게 되었다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도에 뜻을 둔 자라면 어찌 스승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윽고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 대덕(釋澄大德)에게 가서 표하건나(驃訶健拏 화엄(華嚴))를 물었는데, 하루에 30명의 몫을 감당할 정도〔日敵三十夫〕의 실력이라서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 이에 요배(坳杯)의 비유를 떠올리면서 말하기를,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바라보기만 하면 서쪽 담장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저 언덕〔彼岸〕이 멀지 않은데, 어찌 꼭 이 땅만을 생각할 것인가.”
하였다.
거연(遽然)히 산에서 나와 바닷가에 머물면서 서쪽으로 배 타고 건너 갈 방도를 강구하였다. 마침 국사(國使)가 서절(瑞節)을 지니고 황궁에 가자 이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향하였다. 대양 가운데 이르러 풍랑이 갑자기 사납게 일면서 큰 배가 전복되자 사람들이 다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심우(心友)인 도량(道亮)과 함께 널빤지 하나에 의지하고서 업식(業識)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 밤낮으로 반달 남짓 표류한 끝에 검산도(劍山島)에 이르러 물가에 기어 올라가서는 한참 동안 창연(悵然)히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갈 위기에서 다행히 빠져나왔으니,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손에 넣을 희망이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은 돌멩이가 아닌데〔我心非石〕 뒤로 물러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조정사(朝正使)인 왕자(王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으므로 함께 타고 가게 해 달라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한 뒤에 앞의 항해는 어려웠다가 뒤의 항해는 쉬웠던 것을 회고하면서 바다귀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몸 성히 잘 있거라 고래 물결이여, 바람의 악마와 잘 싸워 이겼다.”
하였다.
그곳을 떠나 대흥성(大興城) 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렀을 때 잡화(雜花 화엄(華嚴))를 설하는 사람을 만나서 부석산(浮石山)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그때 얼굴이 검은 기년(耆年)의 노인 하나가 그를 붙잡고서〔言提之〕 말하기를,
멀리 사물에서 취하려 하는 것〔遠欲取諸物〕보다는 그대 안의 부처를 인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사가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
이로부터 필묵을 버리고 유력하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江西)의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으로서 향산(香山)의 상서(尙書) 백낙천(白樂天)과 공문(空門)의 벗이 된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응대하다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지만, 이 신라 젊은이와 같은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뒷날 중국에서 선(禪)이 쇠하면 동이(東夷)를 찾아가서 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곳을 떠나 마곡 보철 화상(麻谷寶徹和尙)을 참알(參謁)하였다.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이 성실하게 일하면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자기는 반드시 쉽게 행하곤 하였으므로, 대중이 대사를 지목하여 선문(禪門)의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이행(異行)이라고 하였다. 철공(徹公)이 대사의 고절(苦節)을 가상하게 여기더니, 언젠가 하루는 대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나의 스승 마 화상(馬和尙 마조도일(馬祖道一))께서 나에게 유언하기를 ‘봄에는 꽃이 번성하였는데 가을에는 열매가 적으니, 이는 도수(道樹)를 반연(攀緣)하는 자가 슬퍼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노니, 뒷날 문도들 중에 기공(奇功)을 세워서 봉(封)할 만한 자가 있거든 봉해 주고 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刓〕 하지는 말라.’라고 하시고, 또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설은 대개 예언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저 해 뜨는 동방에 있는 선남자(善男子)의 근기(根機)가 지금쯤은 거의 익었을 것이니, 그대가 동방 사람 중에 눈빛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발견하거든 잘 이끌어서 지혜의 물결이 동해의 모퉁이까지 흘러넘치게 하라. 그 공덕이 결코 얕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스승의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나는 그대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지금 그대에게 심인을 전해 주어 동토(東土)에서 선후(禪侯)의 으뜸이 되게 하노니, 가서 공경히 행할지어다. 그러면 내가 당년에는 강서(江西)의 대아(大兒)요 후세에는 해동(海東)의 대부(大父)로서 선사(先師)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는 말하기를,
“뗏목도 이미 버렸는데, 배에 어찌 매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표연(飄然)히 유랑의 길에 올랐으니 그 형세는 막을 수가 없었고 그 뜻은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분수(汾水)를 지나고 곽산(崞山)에 올랐으며 고적(古跡)은 반드시 찾고 진승(眞僧)은 반드시 만났다. 언제나 그가 머무는 곳을 보면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대요(大要)는 위험한 것을 편히 여기고 괴로운 것을 달갑게 여기는 데에 있었으며, 사체(四體)를 노예처럼 부리고 일심(一心)을 군주처럼 받드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곤고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을 보살피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혹독하게 춥고 덥거나 번열증(煩熱症)에 시달리거나 손발에 동상이 들었을 때에도 한번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대사의 명성을 귀로 듣고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멀리서 예배를 드렸으며, 동방의 대보살(大菩薩)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30여 년에 걸친 대사의 행적이 이와 같았다.
회창(會昌) 5년(845, 문성왕7)에 귀국하였으니, 이는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국인(國人)이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연성벽(連城璧)이 다시 돌아왔다. 이는 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으로서 이 땅에 행운을 내려 준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벼와 삼대가 빽빽이 들어찬 것과 같았다. 왕성에 들어가서 모친을 찾아뵈니, 모친이 크게 환희하며 말하기를,
“돌이켜 보건대, 내가 옛날에 꿈을 꾼 것은 바로 우담(優曇)이 한번 꽃을 피운 것이 아니겠느냐. 내세에 제도되기를 바라노니, 내가 다시는 의문(倚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련다.”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길을 떠나 여생을 마칠 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고르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왕자(王子) 흔(昕)이 벼슬을 그만두고서 산중재상(山中宰相)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대사를 만나고 싶은 평소의 소원을 풀고는〔邂逅適願〕 말하기를,
“대사와 나는 모두 용수(龍樹) 을찬(乙粲 이찬(伊飡))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사는 내외(內外)로 용수(龍樹)의 후예가 되는 셈이니, 참으로 휘황해서 따라갈 수 없는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창해(滄海) 밖에서 소상(瀟湘) 지역을 함께 답사한 추억이 있으니, 친구로서의 인연 역시 결코 얕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웅천주(熊川州 공주(公州)) 서남쪽 모퉁이에 사찰 하나가 있는데, 이곳은 우리 선조인 임해공(臨海公)이 봉지(封地)로 받은 곳입니다. 중간에 병란의 재해를 당한 나머지 금전(金田)이 반쯤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는데, 자애롭고 명철한 분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없어진 것을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다시 이을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라도 못난 나를 위해서 그곳에 주지(住持)해 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으니 머물러야 하겠지요.〔有緣則住〕”
하였다.
대중(大中) 초에 비로소 나아가 거주하면서 우선 정비하고 단장하였는데, 이윽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지면서 사원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 멀리에서 배움을 구하는 자들이 천리 길을 반걸음처럼 여기면서 엄청나게 몰려들어 문도가 실로 번성하였다. 이에 대사가 종을 두드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고, 거울이 피곤함을 잊은 것처럼 하면서, 찾아오는 자들마다 혜소(慧炤)로 그들의 눈길을 유도하고 법희(法喜)로 그들의 배를 즐겁게 해 주었으며, 정신없이 오가는 발걸음을 바른 길로 이끌고, 무지몽매한 습속을 변화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이 대사가 운용하는 일을 듣고는 왕화(王化)를 비보(裨補)하는 것 아님이 없다고 여겨 이를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삼았다. 그러고는 수교(手敎)를 날려 우악하게 위로하는 한편, 대사가 산상(山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을 대단하게 여겨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이와 함께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켜 등록하게 하였다. 이에 대사가 사자(使者)에게 응답하기를,
“사원을 성주(聖住)라고 일컬은 것은 초제(招提 사원의 별칭)로서는 물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마는, 용렬한 소승을 그지없이 총애하시어 외람되게 피리 부는 자리에 높이 끼이게 한 것은 실로 바람을 피한 새에 견줄 일로서 무우(霧雨) 속에 숨은 표범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이때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즉위하기 전에 단월(檀越 불교 신도)인 계(季) 서발한(舒發韓) 위흔(魏昕 김양(金陽))과 함께 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 멀리서 제자의 예(禮)를 행하여 차와 향을 예물로 바치며 매달 거르는 때가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명성이 동국(東國)에 모두 퍼지게 되었으므로, 사류(士流)로서 대사의 산문(山門)을 모르면 한세상의 수치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대사의 발에 경의를 표한 사람들은 물러 나와 반드시 탄성을 올리며 말하기를,
“직접 얼굴을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나 낫다. 입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벌써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하였다. 그리고 사실은 원숭이요 호랑이와 같으면서도 겉으로만 사람의 관을 쓰고 있는 자들도 대사를 접한 뒤에는 각기 조급함을 버리고 포악함을 바꾸고서 다투어 선한 길로 치달렸다.
그러다가 헌안대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 글을 내려 대사의 한마디 말을 청하니, 대사가 답하기를,
주풍(周豐)이 노공(魯公)에게 대답한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자리 곁에 새겨 두소서.”
하였다. 그 뒤에 증(贈) 태사(太師)인 선대왕(先大王 경문왕(景文王))이 즉위해서도 역시 흠앙하며 존중하기를 선조(先朝)의 뜻과 같이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후하게 예우하였으며, 어떤 일을 시행하더라도 반드시 대사에게 말을 달려 묻게 한 뒤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871, 경문왕11) 가을에 왕이 교서(敎書)를 날려 역전(驛傳)으로 대사를 부르면서 이르기를,
“산림(山林)은 어찌 그렇게 가까이하시면서 성시(城市)는 어찌 그렇게 멀리하십니까.”
하였다. 이에 대사가 생도(生徒)에게 이르기를,
“느닷없이 백종(伯宗)에게 내린 명을 받고 보니, 원공(遠公)에게 매우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도가 장차 행해지게 하려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가야만 할 것이다.”
하였다.
홀연히 도성에 이르러 서로 만나니,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대사에게 절하며 국사(國師)로 삼았다. 군부인(君夫人)과 세자를 비롯해서 태제(太弟)인 상국(相國)과 여러 공자 및 공손들이 대사를 에워싸고 한결같이 우러러보았는데, 그 광경이 흡사 옛 가람(伽藍)의 벽화 중에 서방(西方) 제국(諸國)의 군장(君長)들이 불타(佛陀)를 모시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과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제자가 재주는 없습니다마는 소싯적에 글짓기를 좋아해서 일찍이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有)만 집착하거나 무(無)만 고수하면 단지 한쪽 면으로 치우쳐서 이해하기 십상이다. 진원(眞源)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경계가 끊어진 반야〔般若之絶境〕의 경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경계가 끊어진 경지에 대해서 혹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경계가 이미 끊어졌으면 언설(言說)의 도리도 끊어진 것입니다. 이는 심인(心印)의 경지이니, 묵묵히 행할 따름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인은 모르겠으니 조금 더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무리 가운데 쟁쟁(錚錚)한 자들로 하여금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질문마다 차근차근 답변하여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답답한 것을 풀어 주면서, 마치 가을바람이 음산한 안개를 흩어 버리듯 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기뻐하며 대사를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대궐을 나온 뒤에는 경상(卿相)들이 다투어 영접해서 함께 논의할 겨를도 없었고, 사서인(士庶人)이 추종해서 떠나려 해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의주(衣珠)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웃집 노인이 무옥(廡玉)을 엿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장 속의 새처럼 괴롭게 여긴 나머지 곧장 도망치듯 떠나갔다. 상이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는 친히 글을 내려,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서울과 멀지 않으니 선정(禪定)을 닦는 별관(別館)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대사가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그곳에 가서 거하였다. 대사는 어디에서든 하루를 머물더라도 반드시 수리하여 엄연히 사원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건부(乾符) 3년(876, 헌강왕2) 봄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환후(患候)가 좋지 못하자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얼른 모셔 오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대사가 이르기를,
“산승(山僧)의 발길이 왕문(王門)에 이르는 것은 단 한번이라도 많다고 할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住)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無住〕고 하겠지만, 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무염(無染)이 오염되었다〔有染〕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우리 임금과는 향화(香火)의 인연이 있고, 또 도리천(忉利天)으로 떠나실 날짜가 잡혀 있으니, 어찌 한번 가서 영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도보로 왕궁에 이르러서 약물(藥物)에 해당하는 말을 베풀고 침석(鍼石)에 해당하는 계(戒)를 행하니 불각(不覺) 중에 병이 차도를 보였으므로 온 나라가 기이하게 여겼다. 이윽고 달을 넘겨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翼室)에 거하여 울면서 왕손(王孫)인 훈영(勛榮)에게 명하여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내가 어려서 부상(父喪)을 당하여 정치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임금을 받들고 부처를 신봉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것과 자기 한 몸만 선하게 하려는 것은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대사께서는 멀리 가지 마시고 거하실 곳을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옛날의 스승으로는 육적(六籍 육경(六經))이 있고 오늘의 보필(輔弼)로는 삼경(三卿)이 있습니다. 늙은 산승이 무엇 하는 자이기에 그냥 앉아서 계옥(桂玉)을 축낸단 말입니까. 다만 떠나는 사람이 선물로 남겨 드릴 만한 세 마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즉 제대로 사람을 임용하는 것〔能官人〕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 산으로 떠날 여장을 꾸려서 새처럼 날아갔다. 이로부터 소식을 전하는 역마(驛馬)의 그림자가 바위와 시내 사이에 계속 이어졌는데, 역졸(驛卒)들도 목적지가 성주사(聖住寺)라는 것을 알면 환희작약하며 두 손을 모아 고삐를 고쳐 잡고는 왕명을 받드는 길이 지체될까 걱정하면서 마치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내달리듯 하였다. 이 때문에 기상시(騎常侍)의 무리들이 아무리 급한 임무를 부여받아도 손쉽게 거행할 수가 있었다.
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에 국내에서 혀끝으로 말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없애는〔興利除害〕 계책을 올리게 하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대사에게는 만전(蠻牋)을 써서 서한을 보내며 하늘의 은총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는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방책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이에 대사가 옛날 하상지(何尙之)가 송 문제(宋文帝)에게 바친 심성(心聲)을 인용하여 대답하니, 태부(太傅) 왕(王)이 이를 살펴보고 개제(介弟 태제(太弟))인 남궁상(南宮相)에게 일러 말하기를,
삼외(三畏)는 삼귀(三歸)에 비견되고 오상(五常)은 오계(五戒)와 같으니 왕도(王道)를 제대로 실천하면 불심(佛心)에 부합된다는 대사의 이 말씀이 지극하다. 나와 그대는 모름지기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서수(西狩)하던 해인 중화(中和)의 가을에 상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하니, 근시가 대답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때때로 세상에 나오게 해서 만호(萬戶)의 눈을 일깨우고 사린(四隣)의 마음을 취(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마니(摩尼)라는 빼어난 보배가 있는데, 지금 빛을 감추고 숭암산(崇巖山)에 숨어 있다. 만약 비장(秘藏)된 궤를 열어 나오게 한다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환히 비출 것이니, 수레 12채를 비추는 구슬 따위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의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간절히 영접하시자 일찍이 두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옛날 찬후(酇侯)는 한왕(漢王)이 대장(大將)을 임명할 때에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한다고 기롱한 적이 있었다. 한왕이 상산(商山)의 네 노인을 초치(招致)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금 듣건대 천자가 몽진(蒙塵)했다 하니, 얼른 달려가서 관수(官守)에게 문안을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왕(勤王)을 더 두텁게 하려면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니, 장차 대사를 영접해야만 반드시 외의(外議)를 흡족하게 할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인 지위 하나를 가지고서 연치와 덕성의 둘을 지닌 분에게 거만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사신을 정중하게 보내면서 겸손한 말씨로 대사를 초빙하였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하고, 마침내 와서 상을 만났다.
이때 선조(先朝)의 예(禮)와 같이 대접한 것 이외에 특별히 더 예우한 것으로 분명하게 손꼽을 만한 것들이 있다. 임금이 대사를 마주하고 공양을 올린 것이 첫 번째 일이요, 손수 향을 전한 것이 두 번째 일이요,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예배를 세 차례 올린 것이 세 번째 일이요,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생생세세(生生世世)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네 번째 일이요, 광종(廣宗)이라는 법호(法號)를 가한 것이 다섯 번째 일이요, 이튿날 조관(朝官)들에게 명하여 대사의 거처로 찾아가서 기러기처럼 줄을 지어 하례하게 한 것이 여섯 번째 일이요, 국중(國中)에서 육의(六義)를 연마하는 자들로 하여금 대사를 전송하는 시편을 짓게 하여, 재가 제자로서 왕손(王孫)인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수창한 뒤 지은 시들을 한데 모아 시축(詩軸)을 만들게 하고, 시독(侍讀)이며 한림(翰林)의 재자(才子)인 박옹(朴邕)이 인(引)을 지어 작별 선물로 증정하게 한 것이 일곱 번째 일이요, 거듭 장차(掌次)에게 명하여 정실(淨室)을 마련하게 하고 송별의 의식을 행한 것이 여덟 번째 일이다.
고별에 임하여 상이 묘결(妙訣)을 구하자, 대사가 종자(從者)에게 암시를 주어 진요(眞要)를 들려 드리도록 하였다. 순예(詢乂)와 원장(圓藏)과 허원(虛源)과 현영(玄影) 같은 자는 사선(四禪) 중에서 청정(淸淨)의 경지를 얻은 자였다. 그들이 실을 뽑듯 지혜를 풀어내고 종지(宗旨)를 세밀히 드러내면서 뜻을 기울임에 태만하지 않고 임금의 마음을 흠뻑 적셔 주니, 상이 매우 희열하면서 두 손을 모아 경배하며 이르기를,
예전에 문고(文考)는 비파를 내려놓은〔捨瑟〕 현인이었고, 지금 과인은 외람되게 자리를 피해 일어난〔避席〕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공동(崆峒)의 가르침을 청하여 얻었으며,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서 혼돈의 근원을 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비교하면 저 위수(渭水) 물가의 노옹(老翁)은 참으로 이름이나 낚은 사람이요, 흙다리〔圯橋〕 가의 유자(孺子) 또한 대개는 노옹의 자취를 밟은 사람이니,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세 치의 혀를 희롱했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승께서 비밀히 전하는 한 조각의 마음을 말씀해 주신 것에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받들어 주선(周旋)하며 감히 실추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부(太傅) 왕(王)은 평소에 화언(華言)을 잘했기 때문에 금옥(金玉)의 소리가 여러 사람이 굳이 떠들어 댈 필요도 없이 입에서 술술 나왔으며, 변려체(騈儷體)의 대구를 이루는 것도 마치 예전에 구상해 둔 것만 같았다.
대사가 그곳에서 물러 나와 다시 왕손인 소판(蘇判) 김일(金鎰)의 청에 응해 가서 함께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였다.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서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사절하였다. 이에 상이 사신을 보내어 방생장(放生場)의 경계를 표시하게 하니 조수(鳥獸)가 희열하였고, 은구(銀鉤)의 실력을 발휘하여 성주사(聖住寺)의 제액(題額)을 쓰니 용사(龍蛇)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성대했던 일이 끝나고 창성했던 기한이 홀연히 다하여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즉위하여 양조(兩朝)에서 대사에게 은총을 내린 전례에 따라 그대로 행하면서 승속(僧俗)의 사람들을 거듭 사신으로 보내 영접하게 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태위(太尉) 왕(王)이 해외에서 은혜를 베풀면서 대사의 덕을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며 즉위한 지 구순(九旬)이 지나는 동안에 말을 달려 안부를 물은 것이 열 차례나 되었다. 이윽고 요통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는 거연(遽然)히 국의(國醫)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 이르러 증상을 물어보았으나 대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노병(老病)일 뿐이니 번거롭게 치료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러고는 하루에 두 번 먹는 미음과 밥을 반드시 종소리가 들린 뒤에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문도가 대사의 식력(食力)이 떨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종을 치는 자에게 몰래 당부하여 거짓으로 자주 치게 하니, 대사가 이에 눈치를 채고는 상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장차 세상을 떠나려고 할 무렵에 옆의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유훈(遺訓)을 대중에게 알리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이미 중수(中壽)를 넘었으니, 죽음의 시기를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불법(佛法)에 잘 안주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을 그은 것처럼 분명히 할 것이요〔顜若畫一〕, 이를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守而勿失〕 옛날의 관리들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오늘날의 선승(禪僧)들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영결을 고하자마자 의연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대사는 성품이 공근(恭謹)하였고 언어는 화기를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 《예기(禮記)》의 이른바 “몸가짐은 겸손하였고 말은 낮고 느렸다.〔中退然 言吶吶然〕”라는 평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대사는 학승들을 반드시 선사(禪師)로 대우하였으며, 빈객을 접할 때에도 신분의 존비를 나누어 경의를 표하는 정도를 달리한 적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에 자비가 가득 넘쳤으므로 대중이 기뻐하며 따랐다. 그리고 5일을 주기로 하여 찾아와서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질의할 기회를 주었다. 대사는 문도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몸 역시 마음의 스승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하지 않아서 걱정이지, 도라는 것이 어찌 너희들과 멀리 떨어져 있겠느냐. 설사 농부라고 할지라도 속진(俗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치달리는 것은 내 마음이 치달리기 때문이다. 도사(導師)와 교부(敎父)에 어찌 종자(種子)가 따로 있겠느냐.”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다고 해서 나의 갈증을 풀어 주지 못하며, 저 사람이 먹는다고 해서 나의 굶주림을 구해 주지 못한다. 어찌하여 자기가 직접 마시며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떤 이는 교(敎)와 선(禪)이 같지 않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근본 취지를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본래 말들이 많으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대개 대사는 자기와 같아도 편들지 않고 자기와 달라도 비난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앉아서 기심(機心)을 쉬었으니, 그야말로 누더기 옷을 입은 성자와 비슷했다고 할 것이다. 대사의 말은 분명하면서도 순탄하였으며, 그 뜻은 심오하면서도 신실하였다. 그래서 상(相)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상을 떨쳐 버리게 할 수 있었으며, 도(道)를 들은 자들이 부지런히 그것을 실천하여〔勤而行之〕 갈림길 속의 갈림길〔歧中之歧〕에서 헤매지 않게 하였다.
대사는 장년(壯年)에서부터 노쇠할 때까지 자신을 낮추는 일을 기본으로 하였다. 먹는 것도 양식이 특별히 다르지 않았고 입는 것도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입었다. 어떤 공사를 하든지 간에 대중보다 먼저 일을 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매번 말하기를,
조사(祖師)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발로 이기셨는데〔踏泥〕, 내가 어떻게 잠시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런가 하면 물을 긷거나 나무를 지는 일까지도 몸소 친히 하면서 말하기를,
“산이 나 때문에 속진(俗塵)에 물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몸을 편히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대사는 어려서 유가의 서적을 읽어서 그 여운(餘韻)이 입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응수할 때에 운어(韻語)를 많이 사용하였다.
문제자(門弟子)로서 그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자가 거의 2천 인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무리와 떨어져 거하면서 도량에 앉아 지낸다〔坐道場〕고 일컬을 만한 자로는 승량(僧亮)과 보신(普愼)과 순예(詢乂)와 심광(心光) 등이 있다. 이 밖에 여러 법손(法孫)이 즐비하여 그 무리가 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실로 마조(馬祖)가 용자(龍子)를 길러서 동방의 대해(大海)가 서방의 강하(江河)를 압도했다고 말할 만하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인사(麟史)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공후였던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그의 시조의 지위로 복귀할 것이다.〔公侯之子孫必復其始〕”라고. 옛날 무열대왕(武烈大王)이 을찬(乙粲)으로 있을 적에, 예맥(穢貊 고구려)의 정벌에 필요한 원군을 청할 계책을 가지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명을 받들어 소릉황제(昭陵皇帝 당 태종(唐太宗))를 섬돌 아래에서 알현하였다. 그때 정삭(正朔)을 받들고 복장(服章)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면대하여 진달하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 윤허하고는 조정에서 중화의 복식을 내리는 한편 특진(特進)의 지위를 수여하였다.
어느 날 황제가 제번(諸蕃)의 왕자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크게 술자리를 베풀고 보화를 쌓아 둔 뒤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하게 하였다. 이에 무열왕이 술을 마시는 일은 예법에 입각하여 어지럽게 되지 않도록 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획득하였다. 무열왕이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자, 문황(文皇 당 태종)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전송하면서 국기(國器)라고 찬탄하였다.
급기야 귀국할 무렵에 황제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온양(溫陽)과 진사(晉祠)의 두 비문(碑文) 및 친히 저술한 《진서(晉書)》 1부(部)를 하사하였다. 이때 봉각(蓬閣)에서 이 글을 베껴 겨우 2본(本)을 바쳐 올렸는데, 하나는 저군(儲君 태자)에게 주고 하나는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화자관(華資官)에게 명하여 동문(東門) 밖에서 송별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하였으니, 그 우악한 은총과 두터운 예우야말로 설령 지혜에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목을 놀라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땅이 한번 변화하여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로부터 8세(世) 뒤에 대사가 서방에서 배워 동방을 교화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변화하여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리라〔莫之與京〕고 한 말이 우리 대사가 아니면 그 누구를 두고 한 말이겠는가.
위대하도다. 선조(先祖)는 두 적국을 평정하여 사람들의 외면의 복식을 바꾸게 하였고, 대사는 여섯 마적(魔賊)을 항복받아 사람들의 내면의 덕성을 닦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승(千乘) 제후국의 임금이 양조(兩朝)에 걸쳐서 경배하게 하였고, 사방의 백성들이 만리 길을 달려오게 하였으며, 움직이면 반드시 사람들을 쉽게 따르게 하였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속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없게 하였다. 이 어찌 반천(半千)의 시운에 응하여 대천(大千)에 몸을 나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복기시(復其始)의 설을 거론한다고 하더라도 겸연쩍게 여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저 문성후(文成侯 장량(張良))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師父)가 되어 만호(萬戶)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면서 한(韓)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鶴)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성덕(盛德)을 아름답게 형용할 때에 옛날부터 송(頌)의 문체를 애용하였는데, 송은 게(偈)와 같은 종류이다. 적막의 문을 두드려 명(銘)을 짓노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도가 상도가 된다고 함은 / 可道爲常道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과 같고 / 如穿草上露
즉불이 진불이 된다고 함은 / 卽佛爲眞佛
물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은데 / 如攬水中月
상도요 진불을 얻은 것은 / 道常得佛眞
해동의 김 상인이시로다 / 海東金上人
본래 가지는 성골이 뿌리로서 / 本枝根聖骨
상서로운 연꽃의 태몽을 받았나니 / 瑞蓮資報身
오백년 운세에 맞춰 이 땅에 태어나서 / 五百年擇地
십삼 세에 속세 떠나 출가한 뒤에 / 十三歲離塵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 雜花引鵬路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 / 窽木浮鯨津
요 임금의 태양 아래 관광하고서 / 觀光堯日下
큰 뗏목을 모두 버릴 수 있었나니
/ 巨筏悉能捨
선배들 모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先達皆嘆云
고행으로 따라갈 자가 없다 했다네 / 苦行無及者
불교를 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 沙之復汰之
동방으로 귀국하니 하늘의 복이라 / 東流是天假
마음의 구슬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비추었고 / 心珠瑩麻谷
눈의 거울은 도야를 밝혔다오 / 目鏡燭桃野
봉황이 날아와서 자태를 드러냄에 / 旣得鳳來儀
뭇 새들이 다투어 뒤를 따랐는데 / 衆翼爭追隨
천변만화하는 용을 한번 보시게나 / 試觀龍變化
범상한 생각으로 어찌 헤아리겠는가 / 凡情那測知
인방에서 방편을 드러내 보이면서 / 仁方示方便
성주사에 억지로 주지하였는데 / 聖住強住持
송문에 석장을 머물 때마다 / 松門遍掛錫
산길은 송곳 세우기도 어려웠다오 / 巖徑難容錐
대사는 삼고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 我非待三顧
칠보로 영접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 我非迎七步
나가야 할 때에는 잠깐 나갔나니 / 時行則且行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 때문이었네 / 爲緣付囑故
두 임금이 아래에서 절을 하였고 / 二王拜下風
한 나라가 감로에 흠뻑 젖었건만 / 一國滋甘露
동천의 가을날에 학처럼 나왔다가 / 鶴出洞天秋
해산의 저물녘에 구름처럼 돌아갔다오 / 雲歸海山暮
나오는 것은 섭룡보다 귀하였고 / 來貴乎葉龍
떠나는 것은 명홍보다 높았나니 / 去高乎冥鴻
물 건너면서는 소보를 좁게 여기다가 / 渡水陿巢父
골에 들면 낭공보다도 뛰어났어라 / 入谷超朗公
한번 도외에서 돌아온 뒤로 / 一從歸島外
세 번 호중에서 노닐었나니 / 三返遊壺中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비를 논하지만 / 群迷漫臧否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다 하리오 / 至極何異同
이 도는 담박해서 맛이 없으나 / 是道澹無味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 然須強飮食
남이 마신 술은 나를 취하게 못하고 / 他酌不吾醉
남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못한다네 / 他飧不吾飽
대중에게 훈계하여 사심을 버리게 하되 / 誡衆黜心何
명예와 이익을 겨와 쭉정이로 여기라 하고 / 糠名復粃利
세속에 권면하여 몸을 단속하게 하되 / 勸俗飾身何
인과 의를 갑옷과 투구로 여기라 했네 / 甲仁復胄義
계도하며 버리는 일이 없었나니 / 汲引無棄遺
그야말로 천인사라 칭할 분이라 / 其實天人師
옛날 세간에 계실 때에는 / 昔在世間時
온 나라가 유리처럼 환하였는데 / 擧國成琉璃
적멸하여 돌아가신 뒤로는 / 自寂滅歸後
밟는 곳마다 가시풀이 돋는구나 / 觸地生蒺莉
어찌 그리 일찌감치 열반에 드셨는고 / 泥洹一何早
고금에 걸쳐 누구나 슬퍼할 일이로다 / 今古所共悲
사리탑을 쌓고 다시 비석에 새겨 / 甃石復刊石
유골을 보관하고 자취를 드러냈나니 / 藏形且顯跡
고니 같은 흰 탑은 청산에 점을 찍었고 / 鵠塔點靑山
거북 등의 비석은 취벽을 버티고 섰도다 / 龜碑撑翠壁
이것이 어찌 본래의 마음이리오 / 是豈向來心
문자만 살피는 것은 헛수고일 뿐 / 徒勞文字覛
그저 후세에 지금을 알게 하려 함이니 / 欲使後知今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이로다
/ 猶如今視昔
천년토록 스며들 임금의 은혜요 / 君恩千載深
만대토록 흠앙할 스승의 교화로다 / 師化萬代欽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잡을 것이며 / 誰持有柯斧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탈 것인가 / 誰倚無絃琴
선의 경지를 지킬 사람이 없다 해도 / 禪境雖沒守
객진이 어찌 침노하게야 놔두리오 / 客塵寧許侵
계봉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 雞峯待彌勒
길이 동쪽 계림에 건재하리라
/ 長在東雞林


 

[주C-001]무염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성주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山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제당(帝唐)이 …… 창월(暢月) : 당 소종(唐昭宗) 즉위년(888) 11월을 뜻한다. 문덕(文德)은 희종(僖宗)의 연호이지만, 희종은 그해 2월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와서 다음 달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소종이 즉위하였다. 창월(暢月)은 11월의 별칭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중동지월(仲冬之月)을 창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02]보살계 제자(菩薩戒弟子) : 보살계는 대승 보살(大乘菩薩)이 수지하는 계율로, 소승 성문(小乘聲門)의 계율과 상대되는 말이다. 《범망경(梵網經)》의 계본(戒本)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계본이 있는데, 보통 전자의 십중금계(十重禁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가리킨다. 남조(南朝)의 양 무제(梁武帝)와 진 무제(陳武帝), 수(隋)나라 문제(文帝)와 양제(煬帝) 등이 모두 보살계를 받아 보살계 제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보살계를 받는 풍조가 한때 성행하였다.
[주D-003]소판(蘇判) : 신라 17등 관계(官階) 중의 셋째 등급으로, 소판니(蘇判尼)라고도 하고, 잡찬(迊飡) 혹은 잡판(迊判)이라고도 한다.
[주D-004]재삼(在三)의 의리 : 부(父)ㆍ사(師)ㆍ군(君)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는 뜻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의 “사람은 세 분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기 때문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5]한 분의 …… 것이다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온다.
[주D-006]문고(文考)와 강왕(康王) : 문고는 선친이라는 뜻으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부친인 경문왕(景文王)을 가리키고, 강왕은 경문왕의 태자요 진성여왕의 오빠인 헌강왕(憲康王)을 가리킨다. 문고는 《서경》 〈강고(康誥)〉의 “지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친인 문왕(文王)의 언행을 공경히 따라야 한다.〔今民將在祗遹乃文考〕”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7]하늘이 …… 않았으므로 : 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고 일찍 데려갔다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08]실을 물들이고 : 흰 실이 다양하게 물이 드는 것처럼 본래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각자 속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고운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입신출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묵자(墨子)가 염색할 실을 보고서 “푸른 물에 염색하면 푸르게 되고 누런 물에 염색하면 누렇게 되니,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색이 함께 변하는구나.〔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있다. 《墨子 所染》
[주D-009]국사(國士) : 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가장 우수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자객 예양(豫讓)이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음을 당할 적에, “내가 예전에 섬겼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는 나를 중인(衆人)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중인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지백은 나를 국사로 예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국사로서 보답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주D-010]벼 …… 용서하시고 : 고운이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사실은 실력이 별로 없는데도 관대히 용납해 주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벼 싹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고, 벼 곡식에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若苗之有莠 若粟之有秕〕”라는 말을 전용한 것이다.
[주D-011]계수(桂樹)에 …… 생각하시어 : 고운이 옛날 당나라 과거에 급제했던 실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뜻의 겸사이다. 계수는 과거 급제와 관련된 비유로 많이 쓰이는데, 진 무제(晉武帝) 때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壯元)을 한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12]짧은 …… 것 : 재능이나 식견이 부족해서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장자》 〈지락(至樂)〉의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가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가 없다.〔褚小者不可以懷大 綆短者不可以汲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3]돌이 …… 일 : 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온다.
[주D-014]거북이가 …… 일 : 진(晉)나라 공유(孔愉)가 거북이를 돈 주고 사서 방생(放生)을 하자, 그 거북이가 고맙다는 뜻으로 물속에서 몇 차례나 왼쪽을 돌아보고 사라졌는데〔龜中流左顧者數四〕, 공유가 나중에 여부정후(餘不亭侯)에 봉해져서 인장(印章)을 주조할 적에 그 인장의 거북이가 세 번이나 왼쪽을 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晉書 卷78 孔愉列傳》
[주D-015]산을 …… 하지는 :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文賦)〉의 “돌이 옥을 감추고 있으면 그 때문에 산이 빛나고, 물이 진주를 품고 있으면 내가 그 때문에 아름답게 된다.〔石韞玉而山輝 水懷珠而川媚〕”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文選 卷17》
[주D-016]나무숲이 …… 여기게만 : 남조 제(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의 “나무숲은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시냇물은 한없이 수치스러워한다.〔林慙無盡 澗愧不歇〕”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17]마음으로 …… 법인데 :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에 “덕행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업을 이루는 것이 그다음이요,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 그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는 노(魯)나라 숙손표(叔孫豹)의 말이 나온다.
[주D-018]이 …… 것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한다면 좋겠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한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19]전각(篆刻) :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주D-020]붕(鵬)처럼 …… 행적 : 중국에 갔다가 신라에 돌아온 행적이라는 말이다. 대붕(大鵬)이 9만 리 창공 위로 올라가 남명(南冥)에서 북명(北冥)으로 날아간 이야기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또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술을 닦은 뒤 천년 만에 한 마리 학이 되어 고향을 찾은 이야기가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나온다.
[주D-021]반열반(般涅槃) : 고승의 죽음을 가리킨다. 범어 parinirvāṇa의 음역으로, 반열반나(般涅槃那) 혹은 줄여서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반(般), 즉 pari는 완전(完全)하다는 뜻으로, 완전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멸도(滅度),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된다.
[주D-022]솔도파(窣覩波) : 탑(塔)을 말한다. 범어(梵語) stūpa의 음역으로, 솔도파(率都婆), 솔도파(窣堵波), 수두파(藪斗婆)라고도 하며, 줄여서 탑파(塔婆) 혹은 탑이라고 한다.
[주D-023]장차 …… 차에 : 남이야 뭐라고 하든 간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글을 작성해 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騈拇)〉에 “남이 좋아하는 것만 덩달아 좋아하고,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지 못하는 자〔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가 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필추(苾蒭) : 비구(比丘) 즉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승려를 말한다. 범어(梵語) bhikṣu의 음역으로, 필추(苾芻), 비추(備芻)라고도 하며, 걸사(乞士)로 의역된다.
[주D-025]제구(虀臼) : 사(辭), 즉 글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절묘 호사(絶妙好辭)라는 뜻으로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有智無智較三十里〕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참고로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의 약자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026]광범위하게 …… 것이다 :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의 〈서문〉에서 저자인 좌구명(左丘明)의 글에 대해서 “일마다 반드시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자세히 말하였다. 그 글은 유창하고 그 뜻은 심원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건의 처음을 탐색하고 종말을 궁구하게 하며, 사건과 관련된 미세한 일을 찾고 궁극적인 것을 구명하게 해 준다.〔必廣記而備言之 其文緩 其旨遠 將令學者原始要終 尋其枝葉 究其所窮〕”라고 극찬한 내용이 나온다. 가외(可畏)는 후생(後生)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의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27]서소(西笑)하는 이 : 원래는 서쪽의 장안(長安)을 향해 웃음 짓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관동(關東) 즉 중원(中原)의 사람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서쪽 즉 중국을 사모하여 건너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後漢) 환담(桓譚)의 《신론(新論)》 〈거폐(祛蔽)〉에 “사람들이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서면서 서쪽을 향해 웃음 짓고, 고기 맛이 좋은 것을 알면 푸줏간을 대하고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 知肉味美 則對屠門而大嚼〕”라는 관동의 속담을 소개하는 말이 나온다.
[주D-028]광노(狂奴)의 고태(故態)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에게 사도(司徒) 후패(侯覇)가 후자도(侯子道)를 보내 초청하였는데, 엄광이 후패를 매도하면서 입으로 간단히 대답하자 후자도가 보고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을 혐의하여 몇 마디만 더 해 달라고 요청하니, 엄광이 “채소를 사면서 더 달라고 떼쓰는 격이다.〔買菜乎 求益也〕”라고 핀잔을 주었다. 후패가 이 사연을 적어서 광무제(光武帝)에게 보고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미친 작자의 옛날 하던 버릇 그대로이다.〔狂奴故態也〕”라고 했다는 고사가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나온다. 엄광은 광무제의 어릴 때 친구이다.
[주D-029]원심(猿心) :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조급하게 동요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대일경(大日經)》 〈주심품(住心品)〉에서 설명하는 60종(種)의 심상(心相) 중에 원후심(猿猴心)이 나온다. 그리고 심신이 산란하여 제어하기 어려울 때, 심원의마(心猿意馬)라는 비유를 쓰기도 한다.
[주D-030]시순(時順) :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사람의 일생을 말한다. 《장자》 〈양생주(養生主)〉의 “마침 그때에 태어난 것은 선생이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요, 마침 이때에 세상을 떠난 것은 선생이 갈 때가 된 것이니 도리상 순응해야 할 일이다. 자기에게 닥친 시운을 편안히 여기고서 그 도리를 이해하여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슬픔과 기쁨 따위의 감정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1]내가 …… 바이다 : 고운이 《한서(漢書)》의 기술 방식에서 한 수 배웠다는 말이다. 반사(班史)는 반고(班固)가 지은 사서(史書)인 《한서》를 가리키고, 일반(一斑)은 표범 무늬 중의 하나의 반점(斑點)이라는 말이다.
[주D-032]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손이 되고 : 원각은 중국 선종(禪宗) 초조(初祖)인 달마(達磨)에게 당 대종(唐代宗)이 내린 시호인데, 달마로부터 혜가(慧可), 승찬(僧瓚), 도신(道信), 홍인(弘忍)을 거쳐 6조(祖) 혜능(慧能)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남악 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거쳐 무염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33]득난(得難)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나라에 5품이 있으니, 성이ㆍ진골ㆍ득난이 있다. 득난은 얻기 어려운 귀한 성이라는 말인데, 〈문부〉에 ‘혹 쉽게 구해 어려운 것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육두품을 지칭하는데, 숫자가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일명에서 구명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다음 5품에 사두품과 오두품이 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다.〔國有五品 曰聖而 曰眞骨 曰得難 言貴姓之難得 文賦云 或求易而得難 從言六頭品 數多爲貴 猶一命至九 其四五品不足言〕”라고 하였다. 〈문부(文賦)〉는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작품이다. 주관(周官)에서는 일명(一命)의 관직이 가장 낮고, 구명(九命)이 가장 높다.
[주D-034]조 문왕(趙文王)의 옛일 : 검술을 좋아했던 일을 말한다. 《장자》 〈설검(說劒)〉에 “옛날 조 문왕이 검술을 좋아하였으므로 문하에 모여 식객 노릇을 하는 검사가 3천 명이 넘었다.〔昔趙文王喜劍 劍士夾門而客三千餘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법장(法藏) :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성불하기 전에 인지(因地)에서 비구(比丘)로 수행할 때의 이름이다.
[주D-036]아해(阿孩) : 탑본의 원주(原註)에 “방언에 아라고 하니 중국말과 다를 것이 없다.〔方言謂兒 與華無異〕”라고 하였다.
[주D-037]세성(歲星)이 …… 때 : 12세를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9년의 “나이가 12세라면 이것을 일종이라고 이르니, 세성 즉 목성(木星)이 끝까지 한 번 천체(天體)를 돈다는 것이다.〔十二年矣 是謂一終 一星終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구류(九流) : 선진(先秦) 시대의 9개 학술의 유파로,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의 학파를 말한다.
[주D-039]의(䚷) : 탑본의 원주에 “방언으로 허락하는 말이다.〔方言許諾〕”라고 하였다.
[주D-040]힘은 …… 왕성하였다 : 말세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補天〕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041]빠른 …… 도착하였다 : 나이는 비록 어려도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어떤 어른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뜻으로 극찬한 말이다. 서진(西晉)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 장수(張收)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서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이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 글을 위에 아뢰니, 세조(世祖)가 사신을 보내 그 글을 돌에 새기게 했던 고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梁)나라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명잠(銘箴)〉에 “오직 장재의 〈검각명〉을 보건대, 그 재능이 탁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으니, 민한 지역에 그 명이 새겨진 것도 온당한 일이었다고 하겠다.〔惟張載劍閣 其才淸采 迅足駸駸 後發前至 勒銘岷漢 得其宜矣〕”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42]나는 …… 없으니 :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交戰)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043]밤중의 …… 쉽고 : 유식(唯識) 계통의 불교 종파에서 말하는 삼성(三性) 중의 하나인 망집(妄執)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설명할 때 흔히 거론하는 사례의 하나로,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인식하면서 집착하는 오류를 가리킨다.
[주D-044]공중의 …… 어렵다 : 길쌈을 하여 실을 매우 가늘게 만들었는데도 ‘거칠다〔麤〕’고 항의하는 광인(狂人)에게 허공을 가리키면서 “이 실은 너무도 가는 실이라서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자, 광인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대승(大乘)에서 주장하는 공(空) 사상을 허공의 실에 비유한 것으로, 《고승전(高僧傳)》 권2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 그의 스승 반두달다(盤頭達多)의 말로 나온다.
[주D-045]물고기는 …… 아니요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당신의 그런 행동 방식으로 그런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토끼는 …… 아니다 :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주D-047]하루에 …… 잃었다 : 재능이 워낙 출중해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한 달에 걸쳐 외울 분량을 각현(覺賢)이 하루에 모두 외워 버리자, 그의 스승인 구바리(鳩婆利)가 “하루에 30명의 몫을 감당했다.〔一日敵三十夫也〕”라고 찬탄한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2 〈불타발타라전(佛陀跋陀羅傳)〉에 보인다.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는 말은, 쪽〔藍〕과 꼭두서니〔茜〕에서 나온 청색과 홍색이 쪽과 꼭두서니보다 더 진하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비유로 쓴 말이다.
[주D-048]요배(坳杯)의 비유 : 요배는 움푹 패인 마루에 담긴 한 잔의 물이라는 뜻으로, 신라와 같은 좁은 땅에서는 포부를 펼 수 없으니, 더 넓은 중국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물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기에 역부족이다. 한 잔의 물을 움푹 패인 마루 위에 부어 놓으면, 지푸라기야 배처럼 뜨겠지만 잔을 놓으면 달라붙을 것이다. 이는 물이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49]용의 …… 되었다 : 중국에 가서 불법(佛法)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0]내 …… 아닌데 : 《시경》 〈백주(柏舟)〉의 “내 마음은 돌멩이가 아니라서 굴려 볼 수도 없고, 내 마음은 돗자리가 아니라서 돌돌 말 수도 없네.〔我心非石 不可轉也 我心非席 不可卷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1]장경(長慶) :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년까지이다.
[주D-052]기년(耆年)의 노인 : 60세 정도의 노인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60이 되면 기라고 하며, 이때에는 남에게 지시하며 일을 시킨다.〔六十曰耆 指使〕”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그를 붙잡고서 말하기를 : 참고로 《시경》 〈억(抑)〉에 “손으로 잡아 줄 뿐만이 아니라 일로 보여 주며, 대면하여 가르쳐 줄 뿐만이 아니라 그 귀를 붙잡고 말해 주노라.〔匪手攜之 言示之事 匪面命之 言提其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4]멀리 …… 것 : 상고 시대에 복희씨가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상(象)을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만들었다.〔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 始作八卦〕”라는 말이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주D-055]강서(江西) : 중국 선종(禪宗) 남종(南宗)의 제7조(祖) 남악 회양(南嶽懷讓)의 제자로, 강서 지방에서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을 떨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가리킨다.
[주D-056]향산(香山)의 …… 사이였다 : 당 무종(唐武宗) 때에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있다가 치사(致仕)한 뒤에 향산으로 들어가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자호하고는 승려 여만(如滿) 등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만년을 보냈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주D-057]유검루(庾黔婁) : 남조 양(梁)의 효자이다. 부친이 병들자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겠다고 기도했는가 하면, 병의 증세를 살피기 위해 부친의 대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또 부친이 죽자 예법을 초과하여 여묘살이를 하며 극진히 거상(居喪)하였다.
[주D-058]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 : 한신(韓信)이 항우(項羽)의 사람됨에 대해서 유방(劉邦)에게 “항왕은 사람을 만나면 공경하고 자애로운 태도로 대하면서 말 역시 인정이 넘치게 하며, 누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 부하가 공을 세워서 작위를 내려 봉해 주어야 할 경우에는 그 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 손에 쥐고서 차마 주지를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부인의 인이라고 하는 것이다.〔項王見人恭敬慈愛 言語嘔嘔 人有疾病 涕泣分食飮 至使人有功當封爵者 印刓敝 忍不能與 此所謂婦人之仁也〕”라고 평한 고사가 있다. 대본의 ‘완(刓)’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59]황제의 명령 : 불교를 혁파하라는 당 무종(唐武宗)의 명령을 말한다. 이때 수만 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십만의 승려가 환속되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폐불이 단행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이를 회창(會昌)의 법난(法難)이라고 한다.
[주D-060]연성벽(連城璧) :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15성과 바꾸자고 청한 화씨벽(和氏璧)으로, 나라의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 조나라 인상여(藺相如)가 이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다가 성을 주겠다는 진나라의 약속이 미덥지 못하자, 다시 화씨벽을 온전히 보전해서 조나라로 돌아가게 했던 ‘완벽귀조(完璧歸趙)’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주D-061]우담(優曇) : 우담발라(優曇跋羅)의 준말이다. 불교 전설에 의하면, 이 꽃은 3천 년에 한 번 피는데, 그때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한다고 한다.
[주D-062]의문(倚門)의 바람 :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안부를 걱정하는 어버이의 간절한 심정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6》
[주D-063]산중재상(山中宰相) : 남조 제(齊)의 고사(高士) 도홍경(陶弘景)을 가리킨다. 그가 고제(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내다가 관복을 벗어서 신무문(神武門)에 걸어 놓고 사직소를 남긴 뒤에 구용(句容)의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여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므로 산중재상이라고 일컬어졌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주D-064]대사를 …… 풀고는 : 《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해후하여 서로 만났으니, 이제 나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65]대사는 …… 셈이니 : 가문(家門)으로는 무열왕(武烈王)의 부친인 용수(龍樹)의 후손이 되고, 불문(佛門)으로는 대승(大乘)의 공관(空觀)을 확립한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법손(法孫)이 된다는 말이다. 용수보살은 선종(禪宗)에서 초조(初祖)인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후 제13조로 추앙되었다.
[주D-066]이곳은 …… 곳입니다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선조의 휘는 인문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공을 인정하여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祖諱仁問 唐酬伐穢貊 封爲臨海郡公也〕”라고 하였다.
[주D-067]금전(金田)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인도(印度)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說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68]대중(大中) : 당 선종(唐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59년까지이다.
[주D-069]종을 …… 하고 :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에 잘 대응하는 자는 종을 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려 주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 준다.〔善待問者如撞鍾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거울이 …… 하면서 :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가 《효경》을 강독하려고 하자, 사안(謝安)과 사석(謝石)이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강습하였다. 이때 차윤(車胤)이 사씨(謝氏)에게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면서 원교(袁喬)에게 “묻지 않으면 덕음(德音)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 것이고, 많이 물으면 두 분 사씨를 귀찮게 할 것이다.”라고 하니, 원교가 “필시 그런 혐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차윤이 “그런 줄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하니, 원교가 “밝은 거울이 자주 비춰 준다고 피곤해 한 적이 언제 있었으며, 맑은 강물이 온화한 바람을 마다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何嘗見明鏡疲於屢照 淸流憚於惠風〕”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주D-071]산상(山相)에게 …… 말 : 산중재상(山中宰相) 즉 김흔(金昕)에게 대답한 “인연이 있으니 머물러야 하겠지요.〔有緣則住〕”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D-072]외람되게 …… 것 : 자격도 없는 사람이 허명만 지니고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연주를 좋아하여 항상 300인을 모아 합주하게 하자,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 피리 부는 흉내만 내면서 국록을 타 먹곤 하였는데,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한 뒤에 한 사람씩 연주하게 하자 본색이 드러날까 겁낸 나머지 도망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주D-073]바람을 피한 새 : 자신의 생리에 맞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비유한 말이다. 원거(鶢鶋)라는 해조(海鳥)가 바람을 피해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宗廟)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고기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주D-074]무우(霧雨) …… 표범 :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그 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뿐, 게걸스러운 멧돼지와는 달리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털 무늬를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가 전한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주D-075]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각각 남상과 북상의 관직에 거하였으니, 좌상과 우상이라는 말과 같다.〔各居其官 猶左右相〕”라고 하였다.
[주D-076]주풍(周豐)이 …… 말 : 노 애공(魯哀公)이 은사 주풍에게 유우씨(有虞氏)와 하후씨(夏后氏)가 백성에게 신임과 공경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묻자, 주풍이 “잡초 우거진 무덤 사이에서는 백성들에게 슬퍼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슬퍼하고, 사직과 종묘 근처에서는 백성들에게 공경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공경한다. 은나라 사람이 맹서하는 글을 짓자 백성들이 배반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사람이 회합하는 일을 행하자 백성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예의와 충신과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이 없이 백성의 위에 군림한다면, 비록 굳게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墟墓之間 未施哀於民而民哀 社稷宗廟之中 未施敬於民而民敬 殷人作誓 而民始畔 周人作會 而民始疑 苟無禮義忠信誠慤之心以涖之 雖固結之 民其不解乎〕”라고 대답한 기록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주D-077]백종(伯宗)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로 진 경공(晉景公)을 섬겼다. 경공 14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지는 변고가 발생했을 때, 백종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현상이라고 위무하면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고사가 전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5년에 “양산이 무너지자 진나라 군주가 역마를 보내 백종을 급히 부르게 하였다.〔梁山崩 晉侯以傳召伯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8]원공(遠公) : 진(晉)나라의 고승 혜원(慧遠)을 가리킨다.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면서 한번도 산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며, 환현(桓玄)이 칭제(稱帝)하며 조서를 내려 승려들에게 속인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을 때에도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주D-079]태제(太弟) : 탑본의 원주(原註)에 “추후에 혜성대왕의 시호를 봉하여 높였다.〔追封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혜성대왕은 경문왕의 아우 위홍(魏弘)의 시호이다.
[주D-080]유(有)만 …… 것이다 : 《문심조룡(文心雕龍)》 〈논설(論說)〉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주D-081]몸을 …… 있는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로, 원래는 공자가 순(舜) 임금을 찬양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그저 임금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뜻의 겸사로 쓰였다.
[주D-082]남종(南宗) : 중국 선종(禪宗) 가운데 6조(祖) 혜능(慧能) 계열의 돈오(頓悟)를 위주로 하는 종파를 가리킨다. 북종(北宗)은 점수(漸修)를 위주로 하는 신수(神秀) 계열의 종파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모두 남종 계열이다.
[주D-083]순(舜) 임금은 …… 말인가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안연(顔淵)의 말인데, 임금 자신도 노력하면 대사와 같은 훌륭한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공경하고 부러워하며 자신을 경책한 말이다.
[주D-084]나라 …… 되었다 : 사람들이 자기 내부의 불성(佛性)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사람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의주(衣珠)는 옷 속의 보주(寶珠)라는 말로, 불성을 뜻하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속옷 속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不覺內衣裏 有無價寶珠〕”라는 말이 나온다. 무옥(廡玉)은 처마 아래에 놓인 옥돌이라는 말로, 타인의 보배를 뜻하는 말이다. 직경이 1자나 되는 옥돌을 얻은 농부가 불길한 괴석이라고 속이는 이웃집 사람의 말을 듣고 처마〔廡〕 아래에 놔두었다가 다시 발광하는 현상에 놀라 들판에 버린 것을 이웃집 사람이 몰래 왕에게 바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고금사문유취속집(古今事文類聚續集)》 권26 〈득옥능변(得玉能辨)〉에 나온다.
[주D-085]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翼室)에 거하여 : 헌강왕이 부왕(父王)인 경문왕의 상을 당하여 정전(正殿) 대신 익실에 거하면서 상복을 입었다는 말이다. 익실은 정전 옆의 좌우에 있는 방이다.
[주D-086]계옥(桂玉) : 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 가서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귀하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귀하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주D-087]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 : 건부황제 즉 당 희종(唐僖宗)이 헌강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조서(詔書)를 내린 해라는 뜻으로, 헌강왕 4년(878)에 해당한다.
[주D-088]만전(蠻牋) : 당나라 때 품질 좋은 신라의 종이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보통 만전(蠻箋)이라고 한다.
[주D-089]하상지(何尙之)가 …… 심성(心聲) : 남조 송 문제(宋文帝)가 불경(佛經)을 지남(指南)으로 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고 싶다면서 그 대책을 묻자, 시중(侍中) 하상지가 혜원 법사(慧遠法師)의 말을 인용한 뒤에 사람들에게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행하도록 하고 이를 나라의 정치에 확대 적용하면 감옥의 죄수가 없어지고 아송(雅頌)의 정치가 흥기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대답한 말이 양나라 승우(僧祐)가 지은 《홍명집(弘明集)》 권11에 수록된 하상지의 〈답송문황제찬양불교사(答宋文皇帝讚揚佛敎事)〉에 나온다. 심성은 말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의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따라서 소리와 그림으로 나타난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가 있다.〔言心聲也 書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90]삼외(三畏)는 …… 같으니 : 유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삼외는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 일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이다. 삼귀(三歸)는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오상(五常)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다. 오계(五戒)는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음주(不飮酒)를 말한다.
[주D-091]황제가 …… 가을 : 당 희종(唐僖宗)이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중화(中和) 1년(881)의 가을로, 헌강왕 7년에 해당한다.
[주D-092]나라에 …… 옳겠는가 :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궤 속에 넣어서 그냥 보관해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고 묻자, 공자가 “팔아야지, 팔아야 되고말고. 나 역시 제값을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93]마니(摩尼) : 범어(梵語) maṇi의 음역으로, 말니(末尼)라고도 하며, 보주(寶珠)로 의역된다. cintāmaṇi는 진타마니(眞陀摩尼)로 음역되는데, 이것은 여의주(如意珠)라는 뜻이다.
[주D-094]수레 …… 구슬 :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자신의 야광주를 자랑하며 “전후로 각각 12채의 수레를 비출 수 있는 구슬이 10개나 된다.〔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고 자랑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주D-095]옛날 …… 있었다 :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유방(劉邦)에게 “왕께서는 평소에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계시는데, 지금 대장을 임명하면서도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고 있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떠나간 것이다.〔王素慢無禮 今拜大將如呼小兒耳 此乃信所以去也〕”라고 충고하여 다시 예우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찬후(酇侯)는 소하의 봉호(封號)이다.
[주D-096]한왕이 …… 때문이었다 : 상산(商山)의 네 노인은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상산에 들어가서 은거했던 4인의 백발노인, 즉 동원공(東園公)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가리킨다. 이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초빙할 때에는 전혀 응하지 않다가 나중에 장량(張良)의 권유를 받고 나와서 태자로 있던 혜제(惠帝)를 보필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97]내가 …… 되겠는가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세상에서 누구나 존경해야 할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작위와 연치와 덕성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 한 것이 없고, 향리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의 어른 노릇을 하는 데에는 덕성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중 작위 하나를 가지고서 연치와 덕성의 둘을 지닌 사람에게 거만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惡得有其一以慢二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8]외로운 …… 있어서이겠는가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아무 생각 없이 봉우리 위에서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안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9]대왕(大王)의 바람 : 전국 시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할 목적으로 〈풍부(風賦)〉라는 글을 지으면서,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였는데, 후대에는 보통 제왕의 뜻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주D-100]집착함이 없는 것 : 《논어》 〈자한(子罕)〉의 “공자는 네 가지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에게는 사적인 뜻과 기필(期必)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과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101]상사(上士) :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하는 보살(菩薩)을 가리킨다. 《석씨요람(釋氏要覽)》 권상에 “자리와 이타의 행이 없는 자를 하사라 하고, 자리는 있고 이타는 없는 자를 중사라 하고, 자리와 이타의 행이 있는 자를 상사라 한다.〔無自利利他行者 名下士 有自利無利他者 名中士 有二利 名上士〕”라는 《유가론(瑜伽論)》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주D-102]육의(六義) : 《시경》에 나타나는 문학의 창작 정신 및 원칙을 말하는데, 시의 작법상 세 가지의 체제라 할 풍(風)ㆍ아(雅)ㆍ송(頌)과 세 가지의 표현 방법이라 할 부(賦)ㆍ비(比)ㆍ흥(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주D-103]사선(四禪) …… 자였다 : 사선은 불교 용어로 사선정(四禪定) 혹은 사정려(四靜慮)라고 한다. 초선(初禪)과 제이선(第二禪)과 제삼선(第三禪)과 제사선(第四禪)의 과정이 있는데, 제사선에는 사청정(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ㆍ심일경성(心一境性) 등 사지(四支)의 경지가 있다. 제삼선의 묘락(妙樂)을 여의었기 때문에 사청정(捨淸淨)이라고 칭하고, 오직 수양하는 공덕만 생각하기 때문에 염청정(念淸淨)이라고 칭한다고 한다.
[주D-104]예전에 …… 되었습니다 : 증점(曾點)과 증삼(曾參) 부자(父子)가 모두 공자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선왕(先王)인 경문왕과 헌강왕 자신 또한 똑같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먼저 자신의 포부에 대해 답변을 올리자 공자가 마지막으로 증점의 생각을 물었는데, 이에 증점이 조용히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가 크게 한바탕 튕기고서 내려놓은 뒤에 일어나서는〔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자신의 뜻을 말하여 공자의 허여를 받은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先進》 또 증점의 아들인 증삼 즉 증자(曾子)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을 적에 공자가 이르기를 “선왕(先王)들은 지덕(至德)과 요도(要道)가 있어서 천하를 순하게 다스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화목하여 상하가 서로 원망함이 없었다. 네가 그것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증자가 자리를 피해 일어나면서〔避席〕 “삼(參)이 불민하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孝經 開宗明義章》
[주D-105]공동(崆峒)의 가르침 : 지인(至人)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대사의 교시를 뜻한다. 고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 은거하였는데, 황제(黃帝)가 재위(在位) 19년 만에 그를 찾아가 도를 묻고 수도 끝에 지도(至道)의 정수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장자》 〈재유(在宥)〉에 나온다. 공동산은 공동산(空同山)이라고도 한다.
[주D-106]위수(渭水) 물가의 노옹(老翁) :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가 위수 물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주D-107]흙다리 가의 유자(孺子) :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그가 한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圯橋〕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108]옛날 …… 있었는데 :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육체는 좋은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109]인신(人臣) …… 갖추었으니 : 진(晉)나라 승상 왕도(王導)가 우비(虞)에게 “공유는 공재는 있어도 공망이 없고, 정담은 공망은 있어도 공재가 없다. 공재도 있고 공망도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이다.〔孔愉有公才而無公望 丁潭有公望而無公才 兼之者 其在卿乎〕”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76 虞列傳》 공재는 삼공(三公)이 될 만한 재능을 말하고, 공망은 그 인망을 말한다.
[주D-110]은구(銀鉤) : 아름다운 필체의 글씨를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서법(書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돈 것이 흡사 은 갈고리와 같다.〔婉若銀鉤〕”라고 초서(草書)를 평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주D-111]중수(中壽) : 80세를 가리킨다. 《장자》 〈도척(盜跖)〉에 “인생은 상수(上壽)가 100세요 중수(中壽)가 80세요 하수(下壽)가 60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온갖 걱정과 우환을 제외하고 진정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중에서 4, 5일에 불과할 따름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2]옛날의 관리들 : 한(漢)나라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가리킨다. 상국(相國)인 소하가 죽자 조참이 그 직책을 계승하여 소하의 법도를 그대로 준행하다가 3년 뒤에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찬양하여 “소하의 법도는 분명하기가 선을 그은 것 같았네. 조참이 그 뒤를 이어 이를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였네. 청정한 정사를 행한 그 덕분에,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네.〔蕭何爲法 顜若畫一 曹參代之 守而勿失 載其淸淨 民以寧一〕”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주D-113]몸가짐은 …… 느렸다 : 진(晉)나라의 현인(賢人)인 조문자(趙文子)에 대해서 “몸가짐이 겸손하여 마치 옷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며, 말은 낮고 느려서 마치 입으로 말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其中退然 如不勝衣 其言吶吶然 如不出諸其口〕”라고 칭찬한 말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주D-114]누더기 …… 성자 : 《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5]도(道)를 …… 실천하여 : 《노자》 41장에 “상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한다. 중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게 반응한다. 하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6]갈림길 속의 갈림길 :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가 전한다. 《列子 說符》
[주D-117]조사(祖師)께서도 …… 이기셨는데 : 불교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지는 가섭(迦葉)이 어느 날 진흙을 발로 이기고 있자〔踏泥〕, 한 사미(沙彌)가 보고는 왜 손수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서 해 주겠느냐.〔我若不爲 誰爲我爲〕”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五燈會元 卷1 一祖摩訶迦葉尊者》
[주D-118]도량에 앉아 지낸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세상에 쓸모없는 노쇠한 이 몸이야, 그저 소요하며 도량에 앉아 지냄이 적격이리.〔世間無用殘年處 祗合逍遙坐道場〕”라는 말이 나온다. 《白樂天詩後集 卷17 道場獨坐》
[주D-119]인사(麟史) : 《춘추》의 별칭이다. 《춘추》가 애공(哀公) 14년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경(麟經)이라고도 한다.
[주D-120]공후(公侯)였던 …… 것이다 : 《춘추좌씨전》 민공(閔公) 원년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주D-121]우리의 …… 이르렀다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122]더불어 …… 없으리라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의중(懿仲)이 자기 딸을 진경중(陳敬仲)에게 출가시키려 할 때 점을 쳐서 얻은 괘(卦) 중에 “8세 뒤의 후손에 이르러서는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리라.〔八世之後 莫之與京〕”라는 말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莊公22年》
[주D-123]여섯 마적(魔賊) : 인식 주체인 인간의 육근(六根)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경(六境)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육경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주D-124]이 …… 아니겠는가 : 왕자(王者)와 같은 위인이 나올 500년의 시운(時運)에 맞추어서 대사가 이 세계에 출현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500년마다 왕자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라는 말이 나오고, 〈진심 하(盡心下)〉에 요순(堯舜)과 탕(湯)과 문왕(文王)과 공자(孔子) 사이의 세월이 각각 500여 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천(大千)은 불교 용어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준말이다.
[주D-125]복기시(復其始)의 설 : “공후였던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그의 시조(始祖)의 지위로 복귀할 것이다.〔公侯之子孫必復其始〕”라는 《춘추좌씨전》의 설을 말한다.
[주D-126]가도(可道)가 …… 함은 : 《노자(老子)》 1장에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7]즉불(卽佛)이 …… 함은 : 어떤 승려가 마조 선사(馬祖禪師)에게 “화상은 어찌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설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爲止小兒啼〕”라고 하였고,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오등전서(五燈全書)》 권5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에 나온다.
[주D-128]요 임금의 …… 있었나니 : 중국에 건너가 고승들을 역방(歷訪)하며 불법을 구한 끝에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 나서는 그동안에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뗏목은 물을 건너기 위한 것인 만큼 일단 건너고 나면 필요없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방편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관광(觀光)은 《주역》 〈관괘(觀卦) 육사(六四)〉의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진 문물을 접하여 견식을 넓힌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주D-129]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치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30]인방(仁方) : 동방(東方)을 뜻한다. 인(仁)은 오행(五行) 중 목(木)에 소속되는데, 방위로 볼 때 동쪽에 해당한다.
[주D-131]삼고(三顧) : 후한(後漢) 말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 융중(隆中) 땅에서 초옥(草屋)을 짓고 농사지으며 은거하고 있다가, 세 번이나 그곳을 찾아온 유비(劉備)의 정성에 감동되어 세상에 나왔던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주D-132]칠보(七步)로 …… 않았지만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가 승조(僧稠)를 만나러 왔을 때 영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승조가 “옛날 빈두로 존자가 아육왕(阿育王)을 영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걸음을 걸은 탓으로 7년 동안 나라가 잘못되게 하였다.〔昔賓頭盧迎王七步 致七年失國〕”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續高僧傳 卷16 僧稠傳》
[주D-133]나오는 …… 귀하였고 : 대사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무척 드물었다는 말이다. 섭룡(葉龍)은 섭공(葉公)에게 나타난 용이라는 뜻이다. 섭공자고(葉公子高)라는 사람이 너무도 용을 좋아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 장식해 놓자 진짜 용이 내려와서 머리를 내밀고 꼬리를 서렸는데, 섭공이 이를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달아났다는 섭공호룡(葉公好龍)의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 나온다.
[주D-134]떠나는 …… 높았나니 : 대사가 세속에 잠깐 머물다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훌훌 떨치고 미련 없이 떠나갔다는 말이다. 명홍(冥鴻)은 까마득히 하늘 위로 치솟아 사라지는 기러기라는 뜻이다.
[주D-135]물 …… 여기다가 : 세상에 나와야 할 때에는 편협하게 은거만을 고수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와서 행동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하면서 호계(虎溪)라는 시냇물을 결코 건너지 않았는데,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물을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또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기산(箕山) 영수(潁水)에 숨어 살았는데, 요(堯)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귀를 씻었고, 이 말을 들은 소보는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주D-136]골에 …… 뛰어났어라 : 일단 산중에 들어가서는 철저하게 사원의 청규(淸規)를 지키며 엄격하게 수행했다는 말이다. 전진(前秦) 때의 고승 승랑(僧朗)이 금여곡(金輿谷)에서 수도하면서 승단(僧團)을 엄격하게 이끌었으므로, 그곳을 낭공곡(朗公谷)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5 僧朗傳》
[주D-137]도외(島外) : 동해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섬의 밖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을 가리킨다.
[주D-138]호중(壺中) : 호리병 속의 선경(仙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궁중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인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에 들어가서 선경의 낙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
[주D-139]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불(佛)의 10호(號) 중의 하나이다.
[주D-140]그저 …… 것이로다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에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픈 일이다.〔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라는 말이 나온다.
[주D-141]계봉(雞峯)에 …… 건재하리라 : 미래불(未來佛)인 미륵(彌勒)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이 비석은 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계봉은 계족산(雞足山)으로 곧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부처의 수제자인 가섭(迦葉)이 여래(如來)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는 이를 부처의 부촉에 따라 미륵에게 전하기 위해 계족산에 가서 선정에 든 뒤에 가부좌하고 입멸하자 계족산 세 봉우리가 하나의 산으로 합쳐졌는데, 장차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 산이 다시 열리면서 가섭이 선정에서 깨어나 의발을 전하게 된다는 불교 설화가 전해 온다. 《佛祖統記 卷5 始祖摩訶迦葉尊者》

 

 

간이집 제7권
 갑오행록(甲午行錄)갑오행록(甲午行錄)선조 27년(1594)에 중국 군대의 파병과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러 중국에 갔을 때의 시를 모은 것이다. 이때 주청사(奏請使)는 윤근수(尹根壽), 주청 부사는 간이(簡易) 최립(崔岦), 서장관(書狀官)은 신흠(申欽)이었다.
곡일(穀日)에 큰 눈이 내렸으므로 다시 동파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 아래의 시와 함께 모두 네 수를 짓다. 세 번째


봄도 대소 만물을 갑자기 단장해 줄 순 없어 / 春工未遽飾洪纖
상설의 위엄 먼저 빌려 우선 깨끗이 씻기누나 / 湔祓猶資霜雪嚴
한제가 솜옷 입히라고 천하에 조칙을 반포한 듯 / 漢帝自頒天下絮
오왕이 바닷가 소금을 내키는 대로 흩뿌린 듯 / 吳王能擅海濱鹽
바람이 불자 또 생기는 은가루 쌓인 언덕이요 / 風吹更作銀堆地
해가 비치자 모두 매달린 옥 새끼줄 처마로세 / 日射都成玉索簷
이만하면 시의 소재 풍부하다고 하련마는 / 也覺詩家情境富
쇠한 늙은이 송곳 끝을 새로 내놓지 못하겠네 / 衰翁不是露新尖

옥룡은 떨어지자마자 수염과 어금니 박살나고 / 玉龍纔墮碎鬚牙
몇 수레나 뿌렸을까 고래뼈 부서진 은빛 가루 / 旋粉銀鯨骨幾車
산 가득 옥은 허리에 차기 어렵단 말을 들었는데 / 見說滿山難刻珮
나무숲 뚫고 날리는 꽃잎 지금 다시 보게 됐네 / 翻看穿樹作飛花
굴뚝이 검어질 틈도 없이 서울 떠난 삼 년 세월 / 三年去國未黔突
누가 또 방문을 해 주리요 저녁에 책이나 볼 수밖에 / 一夕取書誰到家
구절마다 썰렁하다는 글자가 많을까 무서워서 / 句裏怕多淸冷字
손가락 꽁꽁 얼게 하여 깍지도 못 끼게 만드는군 / 令人指凍不成叉


[주C-001]곡일(穀日) : 1월 8일의 별칭이다.
[주C-002]동파의 시 : 〈눈이 내린 뒤에 북대의 벽에 쓴 두 수[雪後書北臺壁二首]〉를 말하는데, 《소동파집(蘇東坡集)》 권12에 나온다.
[주D-001]한제(漢帝)가 …… 반포한 듯 : 한 문제(漢文帝)가 백성들에게 지극한 인덕(仁德)을 베풀면서, 노인들에게 솜과 비단과 고기를 달마다 내려 주도록 조칙을 반포한 고사가 있는데, 눈을 흔히 솜과 소금으로 비유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漢書 卷4 文帝紀 2年 3月》
[주D-002]오왕(吳王)이 …… 흩뿌린 듯 : 오(吳)나라 땅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가장 희고 깨끗하였으므로 최상품의 소금을 오염(吳鹽)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백(李白)의 시에 “오나라 소금이 꽃처럼 쌓였는데 백설보다도 더 깨끗하다.[吳鹽如花皎白雪]”라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6 梁園吟》
[주D-003]해가 …… 처마로세 : 햇빛에 눈이 녹아서 처마 끝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을 형용한 말이다.
[주D-004]쇠한 …… 못하겠네 : 새로 멋진 시를 지어내지 못하겠다는 뜻의 겸사이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인 모수(毛遂)가 “일찌감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면 자신의 뾰족한 송곳이 벌써 밖으로 비어져 나와 보였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재질을 자랑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D-005]옥룡(玉龍) : 하늘 위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눈을 형용한 것이다.

 

가정집 제18권
 율시(律詩)
청명 뒤에 성 남쪽으로 나가서 서산(西山)의 눈을 바라보다


오늘 아침 우연히 제삼교 위에 올라가니 / 今朝偶上第三橋
봄날이 지는데도 서산엔 눈이 안 녹았네 / 春晩西山雪未消
괴이한 것은 봄바람이 힘차게 불어오지 못해 / 怪底東風吹不力
산 가까운 기름진 땅에 보리가 봄싹 그대론걸 / 近山麰麥有春苗

높은 곳은 고기의 숲 깊은 곳은 술의 못 / 肉林高處酒池深
봄눈의 위세도 그런 곳은 감히 침범을 못하나 봐 / 春雪餘威不敢侵
하늘은 본래 사람에게 차별을 두지 않는데 / 天本於人無厚薄
백성이 지금 서로 잡아먹으니 이 무슨 마음인고 / 民今相食是何心


 


[주D-006]고래뼈 …… 가루 : 진(晉)나라 목화(木華)의 해부(海賦)에 “고래가 해변가 염전에 올라와 죽자……그 해골이 언덕을 이루었다.[陸死鹽田……顱骨成嶽]”는 말이 나오는데, 한유(韓愈)가 이를 눈에 비유하여 “땅에 올라와 죽은 고래의 뼈요, 화염에 재가 된 옥석의 가루로다.[鯨鯢陸死骨 玉石火炎灰]”라고 읊으면서부터, 고래의 뼈가 땅에 쌓인 눈의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2》 《韓昌黎集 卷9 詠雪贈張籍》
[주D-007]산 …… 들었는데 : 산에 가득 쌓인 눈을 허리에 찰 수 있는 백옥으로 형용한 말이다. 《설부(說郛)》 권119 하(下) 군공대설(群公對雪)에 “여러 공들이 눈을 대하고 있을 적에, 오영소(吳永素)가 ‘옥이 천산에 가득 쌓였건만, 이를 조각해서 허리에 차기가 어렵도다.[玉滿天山 難刻珮環]’라고 하자, 좌중이 모두 그 청운(淸韻)에 감탄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8]나무숲 …… 꽃잎 : 한유의 〈춘설(春雪)〉 시에 “봄이 늦게 오는 것을 백설도 오히려 싫어하여, 일부러 정원의 나무숲 뚫고 꽃잎을 날려 주는구나.[白雪却嫌春色晩 故穿庭樹作飛花]”라는 구절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9》
[주D-009]굴뚝이 …… 없이 :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었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질 틈이 없었다.[孔席不暖 墨突不黔]”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10]깍지도 …… 만드는군 : 추운 날씨가 멋진 시를 짓지 못하게 한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당(唐)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이 시를 민첩하게 잘 지었는데, 그가 손으로 깍지를 여덟 번 끼는 동안 여덟 수의 시를 지었으므로, 그를 온팔차(溫八叉)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北夢瑣言 卷4》

 

 

속동문선 제5권
 칠언고시(七言古詩)
남당에 가서 이 교수(李敎授) 계종(季宗)과 같이 논 제자(諸子)들에게 희증(戲贈)함[南堂行戱贈李敎授 季宗 兼同遊諸子]


조위(曺偉)

용만(의주) 학사 남성 구석에 / 龍灣學舍南城隅
함장 선생이 맑고 또 여윈 얼굴 / 函丈先生淸且臞
뱃속엔 차곡차곡 오경을 간직했고 / 纚纚腹有五經笥
입으론 구슬 꿰듯 시서를 외네 / 口誦詩書如貫珠
이따금 이 잡으며 진탑에 누웠느라면 / 捫虱時時臥塵榻
도둑이 농 헤치고 주머니도 뒤지네 / 發篋探囊逢惡客
명년의 과거는 따고 난 당상 / 明年科第如摘髭
글 짓는 마당에는 용맹을 과시 / 賈勇文場奮鼓角
놀이의 여사론 바둑 잘 두어 / 優游餘事精奕棋
범의 굴에 새끼 잡으니 사람들 탄복 / 虎穴得子人稱奇
언도의 호로(투전ㆍ골패 따위) 어찌 대수로우리 / 彦道呼盧那可數
‘적신’의 묘술을 누가 알 것인가 / 積薪妙術誰得知
복양공자는 키가 아홉 자 / 濮陽公子長九尺
수염 뻗치고 대드니 제 또한 강적 / 奮髯大叫亦勁敵
첫싸움에 흑모란을 이기었으나 / 一戰雖捷黑牧丹
둘째 쌈에 못 부지해 날개 꺾였네 / 再戰不支摧兩翼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니 무승부로군 / 一勝一負眞乘除
내기 턱은 금방 내얄 수밖에 / 責辦一席在須臾
제생들이 분분히 칼ㆍ수저 들고 / 諸生貿貿執刀匕
시동들이 오순도순 술병 차리네 / 侍兒婉婉羅酒壺
남당이 헌칠하여 조망이 좋고 / 南堂閑敞宜望遠
동풍이 설렁설렁 버들가지를 부는데 / 習習東風吹柳線
화전의 봄눈이 아직 다 안 녹았고 / 燒痕春雪未全融
바닷가의 운산이 눈 아래 구불구불 / 眼底雲山繞海甸
만좌의 고담이 모두 다 초수 / 滿座高談皆楚囚
좋아하고 떠들며 근심을 잊네 / 一歡傾倒消百憂
그 중엔 홍련객(막부(幕府)의 서기)이 한 분 있어서 / 就中更有紅蓮客
한 번 웃고 과녁 맞춰 귀주를 항복케 하니 / 一笑破的降龜州
귀주가 술잔 들며 연속 졌다 하다가 / 龜州擧觶屢稱屈
집중되는 벌주에 그만 줄행랑 / 罰籌如蝟潛走逸
돌아오니 거리의 북 소리가 땅땅 / 歸來街鼓已逢逢
성 머리에 해가 지는 것도 몰랐네 / 不覺城頭鴉尾畢
인생은 도처에 부평초와 같거니 / 人生到處如萍蓬
천애에 오늘이 있을 줄을 알았으리 / 豈料天涯有今日
남당의 모임을 잊을 수 없으나 / 南堂之會不可忘
내게 서까래만한 붓이 없으니 어쩌리 / 恨我苦乏如椽筆
복양(濮陽)은 오귀성(吳龜城) 자영(自瑩)을 가리킴이요, 홍련객(紅蓮客)은 평사(評事) 윤세림(尹世霖)이다.

 매천집 제2권
 시(詩)○무술고무술고(戊戌稿)1898년(광무2), 매천의 나이 44세 때 지은 시고이다.(戊戌稿)
춘설春雪


바람 자고 산 다습고 눈이 한창 오는 때라 / 風定山暄正雪時
문창이 희고 훤하여 사람 얼굴을 비추누나 / 紙窓虛白照人眉
괴이해라 골짝 가득 찬 기운은 약하거니와 / 怪來滿壑寒光淺
공중의 큰 눈송이는 더디 내리거나 말거나 / 任是翻空大片遲
석양의 처마 모퉁이엔 새소리가 이어지고 / 日斜簷角鳴相續
봄이 깃든 화초 뿌리는 젖은 줄을 모르겠네 / 春入花根濕不知
어느 곳의 명홍이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나 / 何處冥鴻留爪去
강호의 한적한 생각만 기발함을 더하누나 / 江湖幽想謾添奇


[주D-001]어느 …… 떠났나 : 명홍(冥鴻)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를 말한 것으로, 흔히 은사(隱士)를 비유한다. 기러기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곧 일이 지난 뒤에 남은 흔적을 비유하는데, 또 눈이 녹으면 바로 사라지듯이, 모든 사물이 그와 같이 덧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 시에 “인생이 가는 곳마다 그 무엇과 같을꼬, 응당 눈 위에 발자국 남긴 기러기 같으리. 눈 진창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겼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를 알리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3》

 매천집 제4권
 시(詩)○병오고병오고(丙午稿)1906년(광무10), 매천이 52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丙午稿)
상원의 잡영〔上元雜咏〕


상원 전후로 날씨가 몹시 추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날을 보내자니 세시(歲時)의 감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향촌의 옛 풍습을 엮어서 장가(長歌) 10편을 얻었다. 이는 또한 범석호(范石湖)의 〈전원악부(田園樂府)〉의 유의(遺意)라고 할 것이다. 까마귀에게 제사하는 것은 위로 동경(東京)의 풍속에서 유래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느 시기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까마귀 제사〔祭烏〕

까옥까옥 까마귀 우는 소리 / 烏啼啞啞復角角
쫓아도 다시 와 담장 머리를 쪼네 / 驅之復來墻頭啄
애들아 부탁하노니, 함부로 쫒지 말거라 / 寄語兒童莫浪驅
이 새는 평범한 까치 따위가 아니니라 / 此鳥不是凡鴉鵲
신라의 궁중에 편지를 물고 와서 / 新羅宮中啣書來
군왕을 위해서 큰 재앙을 막았었지
/ 能爲君王捍大灾
찰밥 짓는 풍속이 천년토록 이어지니 / 糯飯成俗過千年
승려들 재 올리듯 집집마다 밥을 주네 / 家家施食如僧齋
세상이 온통 귀먹고 눈멀어서 / 擧世聾瞶無眞聰
그 울음 들으면 흉하다고 욕질하네 / 聞烏輒嗔烏鳴凶
까마귀가 말을 알면 원통함을 호소할 터 / 烏如解語應叫寃
불길하게 보는 것이 올빼미와 한가지네 / 不祥幾與梟䲭同
새만도 못한 사람 세상에 많으니 / 人不如鳥世多有
나라를 훔친 자 제후 봉인이 말만 하네 / 竊國者侯印如斗
거문고 끌어다 〈오야제〉를 타려다가 / 援琴欲彈烏夜啼
북쪽 장안 바라보매 눈물이 다하도록 우네 / 北望長安淚眼枯

소 먹이기〔飼牛〕

세 자짜리 헌 키에다 차진 겨를 듬뿍 담아 / 敗箕三尺粘糠厚
어린 종이 들고서 소마구로 향하네 / 小婢提向牛欄口
한쪽에는 흰밥이고 한쪽에는 나물인데 / 一頭白飯一頭菜
한 움큼 뿌린 목화씨는 미숫가루 같네 / 棉子一掬如粉糗
늙은 소가 머리 들어 밥 냄새를 맡고는 / 老牛擧首聞飯香
혀로 코를 핥으면서 벌떡 딛고 일어서네 / 出舌舐鼻跑起忙
끈끈한 침 흘리며 한참을 주시하곤 / 頑涎如膠注睛久
이리저리 맡아 볼 뿐 선뜻 먹지 않더니 / 然疑四嗅未遽嘗
순식간에 혀를 뻗어 비로 쓸듯 먹고는 / 須臾張舌如帚掃
입술로 한바탕 문질러 키를 엎어 버리네 / 揮吻一磨推箕倒
어린 여종 소를 향해 깔깔대고 웃나니 / 小婢嚇嚇向牛笑
소의 본성 아닌지라 좋다 나쁘다 안 따지네 / 不是牛性無歹好
올해는 전에 없이 풍년이 들것이니 / 今歲定應豐無比
목화는 눈처럼, 벼는 구름처럼 쌓이리라 / 木綿雪積禾雲委
넓은 들 배추 값은 쑥보다 못하고 / 千畦菘葉賤於蒿
사발 가득 우거지 국에, 상로는 아름다우리 / 羹芼溢椀霜鱸美
다음 해 이날에 콩으로 죽을 쒀서 / 明年此日炊豆飯
소의 영험함에 보답해도 늦지 않으리 / 報賽牛靈應不晩

귀 밝히기〔治聾〕민간에서는 귀밝이술이라 부른다.

도소주가 이르러 사람 뒤에 있고 / 屠蘇酒至居人後
치롱주가 이르러 사람 앞에 있네 / 治聾酒至居人前
늙지 않으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으니 / 縱不欲老無那老
술잔 잡고 백발 신세 한바탕 웃어 보네 / 把盞一笑成華顚
나 또한 젊을 때는 귀 밝다 자부해서 / 我亦少年誇耳聰
귀지 파지 않더라도 항상 잘 들렸었네 / 不施鞱挑常洞然
이상하게 점점 침상 아래서 소싸움 소리 들리고 / 漸怪床下聞牛鬪
갯버들은 허약하여 지레 가을에 놀라네 / 蒲柳脆薄驚秋先
베개 옆엔 바스락대며 게가 기어가고 / 傍枕勃窣郭索行
두건 위로 웅웅앵앵 쉬파리가 울어대네 / 拂幘嚘嚶蒼蠅鳴
때때로 명산 자락 찾아가 보지만 / 有時飛舃名山趾
양쪽 귀는 어두워 벽 너머로 듣는 듯하네 / 兩竅夢夢隔壁聽
비로소 동쪽 이웃 백발노인이 가련하나니 / 始憐東隣黃髮叟
동문서답 참으로 사람 꼴이 아니로세 / 妄問妄對誠非情
누가 상원주를 처음 만들어 냈나 / 何人刱出上元酒
마신 자들 모두가 효과를 보았는가 / 飮者一一能效否
너도나도 풍속을 따르는 게 좋다고 하니 / 人云我云徇俗好
일단은 사양 않고 술잔을 받아 드네 / 聊且不辭盃到手
집을 두른 맑은 시내 옥 구르듯 졸졸대고 / 繞舍淸溪玉淙淙
동풍은 문 앞 버들에 고운 빛을 띠게 하네 / 東風泛艶門前柳
봄이 와도 황조 소리 듣지 못하니 / 春來不聞黃鳥聲
두강 너 아흔아홉 잔이나 마셔 보려네 / 板汝杜康九十九

더위팔기〔賣暑〕

골목 가득 아이들 봄추위도 잊은 채 / 塡街小兒無春寒
무 씹듯이 고드름을 깨물어 먹네 / 嚼冰如破蕪菁根
이쪽저쪽 이웃집 바라보며 불러 대니 / 西舍東隣相望呼
들썩들썩 떼를 지어 동네마다 시끄럽네 / 刁聒合杳連村喧
입술과 혀 부르트도록 불러도 대답 없으니 / 唇焦舌倦呼不應
답하는 자 있으면 은 한 덩어리 주리라 / 如有應者銀一錠
깜빡 잘 잊는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 驀地偶逢善忘人
내 더위, 내 더위 하며 이긴 듯이 좋아하네 / 我暑我暑如獲勝
황관의 늙은이 갓끈이 끊어져라 웃나니 / 黃冠老子絶纓笑
파는 것 잠시 멈추고 이 내 말 좀 들어 보렴 / 且住汝賣勤吾聽
하늘 남쪽 유월에 불 우산이 펼쳐지면 / 天南六月火傘張
끓는 물에 덴 듯이 도랑의 물고기 죽어 가리 / 溝魚自死如探湯
쌍쌍이 김맬 적에 땀이 흙에 떨어지면 / 千耦徂鋤汗滴土
풍년의 경사 있어 벼와 기장을 노래하리 / 豐年有慶歌稻粱
실컷 사 먹어서 배부르길 바라노니 / 恣吾買喫幸吾飽
천한 이 몸 원래 더위 먹는 체질 아니니라 / 賤軀元非病暑腸

풍간 세우기〔植風竿〕

작년 섣달 지나도록 눈을 보지 못했더니 / 去年過臘不見雪
금년엔 봄 되어도 눈이 끊이지 않네 / 今年入春雪不絶
봄눈은 보리에 안 좋을 뿐 아니라 / 人言春雪不宜麥
해충을 배양하여 벼에도 해롭다지 / 又釀蝗蟲作禾孼
늙은 농부는 익숙하게 방재술을 행하지만 / 田翁慣行禳禬術
손놀림만 보여 줄 뿐 구결은 없네 / 但有手法無口訣
스님 삿갓 모양으로 짚단 엮어 집 만들고 / 編藁作窠學僧笠
긴 장대에 걸어서 처마에 기대 세우네 / 承以長竿倚簷立
빈 들판 평지 마을엔 바람 계속 불어 / 野曠村平風不定
치미에 달린 술이 나부끼다 감기네 / 鴟尾旖旎流蘇掣
우리 노적 높다랗게 백 척이나 쌓여서 / 嶢嶢百尺高我倉
집집마다 격양가가 끊이지 않게 되길 / 家家擊壤歌無節
이월이라 초길 때가 되길 기다려 / 待到二月初吉天
짚단 풀어 땔감 삼아 불을 붙여 태우면 / 解藁作薪吹火爇
도기 솥엔 타닥타닥 황두가 볶아지고 / 瓦銚腷膊熬黃豆
기이한 증험 있는지라 해충도 따라서 제거되지 / 奇驗證在蝗隨滅
보지 못하였는가, 운곡노인석름을 노래한 것을 / 君不見雲谷老人歌石廩
세상에선 오직 풍년들기만 좋아하네 / 世惟好年快活

점교 놓기〔苫橋〕

성곽 북쪽 늙은 무당이 쌀로 괘를 짚다가 / 北郭老巫米布卦
신이 하강한다면서 공중 향해 절을 하니 / 自言神降向空拜
촌 노파들 조아리며 신년 운수 기원하고 / 村媼稽首筭新年
부지런히 아들들 위해 푸닥거리를 하네 / 勤爲諸男作醮禬
집집마다 빈 가마니를 자루로 삼아 / 家家空苫把爲囊
모래자갈 담아서 서너 더미 쌓아 두었다가 / 築盛沙礫三四塊
찬 시내에 잠긴 달빛 일렁일 즈음 / 寒溪水陷月粼粼
사내 아낙 함께 나와 이고 져서 나르네 / 男婦相携負且戴
죽 늘어세운 것이 말뚝 박아 놓은 듯한데 / 總總擺列如植樁
여분은 무너진 다리 밖에 쌓아 놓았네 / 餘剩屬之崩橋外
이것을 구구하게 액막이라 이름 하니 / 卽此區區名度厄
막는지 못 막는지 그 누가 알겠냐만 / 度與不度誰能解
나무꾼들 맨발로 물 건널 일 없게 되니 / 樵採從今免徒涉
무당 할미 사람 속여 돈 뜯은 것만은 아니로세 / 巫姑未嘗誑人賄

밭둑 태우기〔燒田〕

마른 대나무 긴 장대 쪼개서 횃불 만든 뒤 / 白竹長竿碎作炬
아이는 불 살리며 문밖으로 나가네 / 兒童噀火出門去
대담함은 오늘 밤 불놀이를 위해서니 / 放膽今夕爲火戱
할아비는 온화할 뿐 나무라진 않네 / 家翁肫肫不嗔汝
시내 남쪽 둑들 기운 승복 같은데 / 溪南坡隴如衲紩
낮은 논에서 시작해 냇가를 따라가네 / 先從低田斜遵渚
마른 풀 잔잔한 바람에 계속해서 번지는데 / 草枯風細燃不休
엉뚱하게 불똥 날려 버들솜을 덮어쓴 듯하네 / 分外熛颯如着絮
아이들은 눈이 매워 숨바꼭질하듯 한데 / 羣兒眼薰類迷藏
연기 자욱한 곳으로 도로 달려가네 / 冒烟還走烟深處
시내 건너에서 불러 대도 듣지 못하지만 / 隔溪呼喚不相聞
불똥이 거름 더미에 떨어지지 않게 해라 / 莫遣流星墮糞所
남은 병충 종자야 잡을 수 있겠지만 / 遺蝗種育尙可捕
거름 더미 타 버리면 벼를 기를 수 없단다 / 糞燒無從長我黍

달맞이〔候月〕

남쪽에 가까우면 물난리, 반대면 가뭄이라 / 近南則水近北旱
누런 색, 가득 찬 모양을 귀하게 여긴다네 / 色貴黃潤輪厚滿
일찍 뜨면 올벼에, 늦게 뜨면 늦벼에 좋으니 / 早出宜秈晩宜粳
농가에선 달 가지고 점을 쳐서 판단하네 / 田家以月爲占斷
항아는 옛날부터 옥처럼 둥글었거늘 / 嫦娥從古玉團團
공연히 옮겨 내어 배교반을 만들었네 / 空然推出环珓槃
그래도 여전히 단정하여 손색이 없으니 / 尙復端嚴不羞澁
흔쾌히 만인과 함께 보고 또 보네 / 快與萬人看又看
옛날 떠오르던 동산의 그곳 분명하거늘 / 分明東山舊上處
보는 자마다 뜬 곳을 제 맘대로 가리키네 / 觀者自私迷定所
풍년, 흉년 판단이 사람마다 다른데 / 豐歉未判人人殊
이마에 손 얹은 채 늙은이는 말이 없네 / 老翁額手悄無語
구름 살짝 걷히자 어둠은 다 사라졌는데 / 晡曛斂盡雲乍開
묻노니, 그 단정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 問君端從何處來
장담할 길 없는지라 슬프게 바라보는데 / 無由取必成悵望
예부터 달 꾸짖던 이들 참으로 웅재로세 / 千秋喝月眞雄才
풍년 점치는 법일랑 일단 그만두고 / 且須閣置占年法
나의 황금 술잔이나 밤새도록 비춰 주소 / 通宵照我黃金罍

줄다리기〔繂曳〕

줄다리기 장소는 반처럼 백 보가 평평한데 / 繂場如槃百步平
사람마다 취한 기운 십 보 안에서 생기네 / 人人醉薰十步生
북소리 멎기도 전에 함성 소리 터지니 / 鼓聲未絶呼聲動
이때부턴 북을 쳐도 들리지 않네 / 從此擊鼓無鼓聲
발꿈치 굳게 디딘 채 일제히 목을 뒤젖히는데 / 千趾錯植項齊彎
얼굴을 들어도 밝은 달은 눈에 안 들어오네 / 仰面不見天月明
검은 먼지 진하게 코밑에서 나오고 / 黑塵蓊勃出鼻底
평평했던 언 땅엔 구덩이가 생기네 / 剗平凍地翻成坑
당사자는 마치 생사를 결판 짓는 듯하니 / 當下若將決生死
구경꾼들 미처 승부를 논할 겨를 없네 / 傍觀未暇論輸贏
홀연히 산이 무너지듯 웃음소리 터지면 / 忽如崩山笑不休
줄과 깃발 늘어뜨린 채 패잔병을 끌고 가네 / 轍亂旗靡曳殘兵
밤이 깊어 가니 땀 젖은 옷 서늘한데 / 汗袍凄凜夜向闌
휘장 안엔 거센 바람 휘몰아치네 / 抹帕飄拂風怒鳴
시골 용수에선 거칠게 묽은 탁주를 쏟아 내니 / 村篘麤瀉薄薄醪
승부에 상관없이 큰 잔을 돌리네 / 無揀勝負輪深觥
태평세월 살아온 지 어언 백여 년이니 / 生老太平今百年
민속놀이 이리 즐김은 모두 인지상정이리 / 此等俗戱皆人情
아아, 너희들의 안목이 부족함이여 / 嗟哉汝曹眼力短
동해의 탐욕스런 고래를 한번 보게 / 試向東海看饞鯨

뒤풀이굿〔罷儺〕

북소리 둥둥, 징소리 쾅쾅 / 皷淵淵鉦洸洸
장구는 동당동당, 뿔피리는 삘리리삘리리 / 缶坎坎角嘈嘈
깃발은 펄럭펄럭, 춤은 사뿐사뿐 / 旗獵獵舞躚躚
짐승 얼굴 사납고 호랑이 모자 드높네 / 獸面獰獰虎冠嶢
원장의 정조에 우렛소리가 땅을 울리니 / 園場井竈雷殷地
나아갔다 물러났다 조수처럼 분주하네 / 捲進擁退奔驚潮
문호의 신령께 새로 치성을 더하니 / 門靈戶神增新敬
숲과 시내 도깨비들 도망가기 바쁘네 / 林魈澗倛忙遁逃
종규가 눈동자를 움켜쥐고 서서 먹고 / 鍾馗手攫立啖睛
피를 뿜어 불 만들어 온몸을 태우네 / 噴血作火全身燒
귀신도 간 있다면 떨어지고 말았을 터 / 鬼也有膽亦應破
살려 달라 애걸하며 머리를 조아리다 / 剡剡乞命高其尻
후다닥 정신없이 문밖으로 도망쳤나 / 急急嚴嚴驅出門
천지가 말끔하고 달과 별이 찬란하네 / 天地遼廓月星昭
징을 치고 손 흔들어 자른 듯이 그치니 / 鳴金一揮截然止
장사들은 진을 깨고 노래도 멈추었네 / 壯士破陣歌收鐃
그제야 부엌 구석에선 삽살개가 짖어대고 / 廚深始出狵吠聲
사람 떠난 빈 울에는 적막함이 더하네 / 曠然籬落增寥寥
우스워라, 오궁은 보내지 못했으니 / 却笑五窮送不得
퇴지는 헛되이 문중의 호걸 되었구나 / 退之枉作文中豪


[주D-001]범석호(范石湖) : 석호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호이다. 자는 치능(致能)이다. 29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지방관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금(金)나라에 사절로 갔을 때 부당한 요구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관철하였다. 남송의 시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청신(淸新)한 시풍으로 전원의 풍경을 읊은 시가 유명하다. 저서에 《석호거사시집》 등이 있다. 《宋史 巻386 范成大列傳》
[주D-002]동경(東京) : 경주(慶州)의 이칭으로, 고려 때 서경(西京)인 평양(平壤), 남경(南京)인 한양(漢陽)과 함께 3경으로 불렸다.
[주D-003]신라의 …… 막았었지 : 신라 소지왕(炤知王) 10년(488) 1월 15일에 왕이 경주(慶州)의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을 때, 까마귀가 쥐와 더불어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날아가므로 뒤쫓게 하니, 갑자기 까마귀는 사라지고 한 노인이 못〔池〕 속에서 나와 봉투를 전하였는데, 그 속에 “빨리 거문고 갑(匣)을 쏘라.”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곧 입궁(入宮)하여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그 속에는 왕비와 간통하면서 그날 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승려가 숨어 있었다. 이에 감동한 백성이 1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못은 글이 나온 못이라고 하여 ‘서출지(書出池)’라 불렀다고 한다. 《三國遺事 卷1 紀異 射琴匣》
[주D-004]오야제(烏夜啼) :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왕의경(王義慶)이 지은 가사이다. 대장군인 팽성(彭城)의 왕의강(王義康)이 좌천되어 예장군(豫章郡)으로 옮겨지게 되자, 강주(江州)의 수령으로 있던 왕의경이 찾아가 서로 곡을 하였다. 문제(文帝)가 그 소식을 듣고서 괴이하게 여겨 소환하자, 왕의경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기첩(妓妾)이 까마귀가 밤에 우는 것을 듣고 재각(齋閣)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내일 응당 사면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과연 사면되고, 그해에 남연주 자사(南兖州刺史)로 옮겨갔으므로 왕의경이 이 노래를 지었다. 《舊唐書 卷29 音樂志 淸樂》
[주D-005]소 먹이기 :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지고, 목화씨를 먼저 먹으면 목화 농사가 잘된다는 말이 있었다.
[주D-006]도소주(屠蘇酒) : 설날에 마시는 약주의 한 가지로, 이 술을 마시면 사기(邪氣)와 질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주D-007]치롱주(治聾酒) : 귀가 먹는 것을 막아 준다는 술로, 정월 대보름 아침에 온 가족이 마신다. 이명주(耳明酒), 명이주(明耳酒), 총이주(聰耳酒)라고도 한다.
[주D-008]침상 …… 들리고 : 귓병 때문에 예민해져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 은사(殷師)가 일찍이 귓병을 앓았는데, 누워 있을 때 침상 아래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도 소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紕漏》
[주D-009]갯버들은 …… 놀라네 : 버들은 가을이 되면 시드는 나무로, 체질이 허약하거나 나이도 많이 먹지 않았는데 미리 늙어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포류의 자질은 가을을 바라보기만 해도 떨어지고, 송백의 자질은 서리를 겪을수록 더욱 무성해진다.〔蒲柳之姿 望秋而落 松栢之質 經霜彌茂〕” 한 것에서 나왔다.
[주D-010]두강(杜康) : 중국의 황제(黃帝) 때의 재인(宰人)으로, 맨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술의 이칭으로 쓰였다.
[주D-011]운곡노인(雲谷老人) : 송(宋)나라의 대학자로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킨다. 자는 원회(元晦) 혹은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또는 운곡산인(雲谷山人)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이통(李侗)의 제자이다. 성리철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유학 경전에 대한 주석은 후세 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남강군(南康軍)의 지사(知事)로 있을 때 고을의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정비하고 학규(學規)를 제정하였으며, 무이정사(武夷精舍)와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워 강학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정치적으로는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侂胄)의 간사함을 탄핵하면서 맞서다가 위학(僞學)을 하는 무리로 몰려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는 박해를 받았으며, 사후에야 회복이 되었다. 주요 저서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시집전(詩集傳)》, 《사서집주(四書集註)》, 《근사록(近思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높여서 주자(朱子), 주 부자(朱夫子), 자양 부자(紫陽夫子)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주D-012]석름을 노래한 것 : 〈석름봉차경부운(石廩峰次敬夫韻)〉이라는 시에, “일흔두 봉우리 모두 하늘을 찌를 듯한데, 한 봉우리는 석름이라는 옛 이름이 전하네. 집집마다 이렇게 높은 창고 있으니, 인간 세상 풍년이 든 것 너무 좋아라.〔七十二峰都挿天 一峰石廩舊名傳 家家有廪髙如許 大好人間快活年〕”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5 石廩峰次敬夫韻》
[주D-013] : 대본에는 ‘聞’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14]공연히 …… 만들었네 : 공연히 달을 점을 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으로, 배교(环珓)는 윷처럼 던져서 그 결과에 따라 점을 치는 도구이다.
[주D-015]이마에 …… 채 : 존경이나 경사를 표하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송사(宋史)》 권336 〈사마광열전(司馬光列傳)〉에, “황제가 붕어하자 대궐에 나아가 임하였는데, 위사(衞士)들이 바라보고는 모두들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기를, ‘저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D-016]종규(鍾馗) : 표범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철면(鐵面)에 고슴도치 같은 털 등의 무서운 형상을 지닌 귀신으로, 민간신앙에서 악귀를 쫒기 위해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붙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종규는 당(唐)나라 고조(高祖) 때 문무를 겸비하고 강직했던 인물로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분격하여 전각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는데, 훗날 현종(玄宗)이 병이 났을 때 꿈에 나타나 귀신을 때려잡아 그 병을 낫게 해 주었으므로 현종이 화가인 오도자(吳道子)를 시켜 그 광경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6 夢鍾馗》
[주D-017]오궁(五窮) : 당(唐)의 한유(韓愈)가 자신을 궁하게 만드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몰아내기 위해 지은 〈송궁문(送窮文)〉을 말한다. 《昌黎先生集 卷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