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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2. 6. 25. 16:11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1 - 인사류 2
씨성(氏姓)
씨성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3)


하늘이 사람을 낸 지 이미 오래다. 만일 사람에게 성(姓)과 씨(氏)가 없다면 그 족(族)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으레 성과 씨를 정하여 그 족을 분별하였으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무릇 성은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음)에서 생기고 《춘추(春秋)》에 22성(姓)이 보이는데, 전국 시대 이후로는 성을 그냥 씨로 삼고 오제 이래로 생겼던 성은 없어졌다. 무릇 주소가(注疏家)들이 인용한 성ㆍ씨는 거의《세본(世本)》에서 나왔는데, 지금에는《세본》이 없어졌으므로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씨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 《예기(禮記)》대전 정의(大傳正義)에 “제후가 경대부(卿大夫)에게 씨를 준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제후의 출생한 지명을 따라서 성을 주고 수봉(受封)된 지명을 따라서 씨를 명하였으니,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 천자는 덕(德) 있는 이를 제후로 삼은 뒤에 그 제후의 연고지 지명을 따라 성을 주고 수봉된 지명을 따라 씨를 명하며, 제후는 신하의 왕부(王父)의 자(字)를 따라 씨를 명하고 시(諡)를 따라 족(族)을 삼도록 한다.
천자는 성과 씨를 줄 수 있고 제후는 씨는 줄 수 있으나 성은 줄 수 없으므로, 성은 천자가 아니면 주지 못하고 씨는 제후가 아니면 명하지 못한다. 또한 성을 씨로 호칭할 수 없고 씨를 성으로 호칭할 수 없으며, 성은 혼인(婚姻)의 관계를 분별하고 씨는 귀천(貴賤)의 등위(等位)를 분별한다.
그러므로 성ㆍ씨에 대해 잘못된 관례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씨(氏)ㆍ족(族)을 호칭하였는데, 한(漢) 나라 때 사람들은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였다. 예를 들면, 백우(伯禹)의 성을 사(姒), 씨를 유하(有夏)라 하고 백이(伯夷)의 성을 강(姜), 씨를 유려(有呂)라 하였다.
순(舜)이 규예(嬀汭) 가에 거주하였으므로 규(嬀)로 사성(賜姓)되었고, 순의 후손이 진(陳)에 수봉(受封)되었으므로 이내 성을 규, 씨를 진이라 하였다. 고염무(顧炎武)가 씨ㆍ족의 잘못된 관례에 대해 ‘주자(朱子)가《논어》ㆍ《맹자》를 주석하면서, 태공(太公)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한 데는 성과 씨가 매우 분명히 구별된 것이요, 자하(子夏)의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금(子禽)의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문(子文)의 성은 투(鬪), 이름은 누오도(穀於菟)라 한 유는 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요, 제선왕(齊宣王)의 성은 전씨(田氏), 이름은 벽강(辟彊)이라 한 데는 성과 씨를 하나로 삼은 것이니, 이는 혹 옛사람들의 착오를 그대로 인습하여 미처 시정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지금 성과 씨를 합쳐서 하나로 삼고 있으니, 그 잘못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족(族)에서 구별, 성이 되고 성에서 구별, 망(望) 망은 곧 씨의 명칭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이성(李姓)의 망이 농서(隴西)이면 농서를 망으로 삼고, 우리나라에서는 망을 본(本)이라 하는데, 이성(李姓)의 본이 전주(全州)이면 전주를 본으로 삼는다. 본은 혹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곧 향관(鄕貫)이란 것으로, 세속에서는 성향(姓鄕), 또는 적(籍)이라 한다. 이 되고 망에서 구별, 방(房) 방은 곧 파(派)의 명칭인데, 장적(長嫡)을 장방(長房), 차적(次謫)을 차방(次房), 삼적(三嫡)을 삼방(三房)이라 하여 그 서차를 따라 일컫는다. 이 된다. 그러므로 성이 번다(煩多)하면 그 족이 그릇되기 쉽고, 망이 번다하면 그 성이 그릇되기 쉽고, 방이 번다하면 그 망이 그릇되기 쉬우니, 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대저 성은 황제(黃帝)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모두가 다 그 후예인 셈이다. 그 근본을 상고하자면 모든 성ㆍ씨를 말하는 이들이 다《세본(世本)》 유향(劉向)의 찬(撰)으로 2권이라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고, 송충(宋衷)이 찬(撰)한《세본》은 4권이다.ㆍ《공자보(公子譜)》 저자는 전하지 않는다. 두 책을 근거로 삼았고, 두 책은 모두《좌씨전(左氏傳)》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거슬러올라가 보면 팔원(八元 고양씨(高陽氏)의 8재자(才子)인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연(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ㆍ팔개(八愷 고신씨(高辛氏)의 8재자인 백분(伯奮)ㆍ중감(仲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仲)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가 고양씨(高陽氏)와 고신씨(高辛氏)를 근본으로 하여 16족(族)이라 일컫고, 요전(堯典《서경(書經)》편명(篇名))에는 ‘구족(九族 고조(高祖)에서 현손(玄孫)까지)을 친(親)했다.’ 하였으니, 분합(分合)의 조짐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周)의 성세(盛世)에 이르러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정하여 종법(宗法)이 매우 밝았고 또 소사(小史 주대(周代)에 춘관(春官)에 속한 벼슬이름)를 두어서 세계(世系)를 분별, 소목(昭穆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시조를 중앙에, 2ㆍ4ㆍ6세(世)를 좌편 소[左昭]에, 3ㆍ7ㆍ9세를 우목(右穆)에 모시는 것)을 정하게 하였고, 소종백(小宗伯 주대에 춘관에 속한 벼슬 이름)을 두어서 삼족(三族 여기서는 부(父)ㆍ자(子)ㆍ손(孫)을 말함)에 관한 구분을 맡아 그 친소(親疏)를 분별하게 하였고, 대전(大傳《예기(禮記)》편명(篇名))에는,
“위로는 조녜(祖禰)를, 옆으로는 형제를, 아래로는 자손을 바르게 한다 …… 친(親)한 이를 친하기 때문에 조상을 놓이게 되고,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종(宗)을 공경하게 되고, 종을 공경하기 때문에 족(族)을 통합하게 되고, 족을 통합하기 때문에 종묘(宗廟)가 엄격하게 된다.”
하였는데, 무도한 진대(秦代)에 와서는 종법이 크게 무너져 버렸다.
수(隋)ㆍ당(唐) 이전에는, 관서(官署)에는 부장(簿狀)이, 사가(私家)에는 보계(譜系)가 있었다 …… 역대에 모두 도보국(圖譜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관장하게 하고 박식(博識)한 선비를 시켜 보(譜)를 편찬하되, 백관(百官)들 가운데 족성(族姓)에 관한 가장(家狀)이 있는 자는 관서(官署)에 제출하도록 하여 사실을 고정(考定)한 뒤에 비각(祕閣)에 간직하고 그 부본(副本)은 좌호(左戶 나라의 계장(計帳)ㆍ호적 등의 사무를 맡은 벼슬 이름)가 비치해 두게 하였다 …… 한(漢) 나라 등씨(鄧氏)에게《관보(官譜)》가, 응소(應劭)에게《씨족편(氏族篇)》이, 영천 태수(潁川太守) 요씨(聊氏)에게《만성보(萬姓譜)》가 있고, 진(晉) 나라 가필(賈弼)ㆍ왕홍(王弘)과 남제(南齊) 왕검(王儉)과 양(梁) 나라 왕승유(王僧孺) 등에게 각기《백가보(百家譜)》가, 서면(徐勉)에게《백관보(百官譜)》가 있고, 남조(南朝) 송(宋) 나라 하승천(何承天)은《성원(姓苑)》을, 당 태종(唐太宗)은 여러 선비에게 명하여《씨족지(氏族志)》1백 권을, 유충(柳冲)은《대당성계록(大唐姓系錄)》2백 권을 찬(撰)하였고, 노경순(路敬淳)에게《의관보(衣冠譜)》가, 위술(韋述)에게《개원보(開元譜)》가, 유방(柳芳)에게《운략(韻略)》이, 장구령(張九齡)에게《운보(韻譜)》가, 임보(林寶)에게《성찬(姓纂)》이, 소사(邵思)에게《성해(姓解)》가, 정초(鄭樵)에게《씨족지(氏族志)》57권이 있고, 또《씨족원(氏族源)》ㆍ《족운(族韻)》등 70권이 있다. 당(唐) 나라 때에는 사람의 성(姓)을 소중히 여겨 8대성(大姓) 이하 1백 50성이 소개되었고, 송 나라 가우(嘉祐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에《천성편(千姓編)》이 나왔고, 안문(雁門) 사람 소사(邵思)의《성해(姓解)》에는 1백 70문(門)으로 분류, 2천 5백 68씨(氏)나 소개되었고, 또《만성통보(萬姓統譜)》ㆍ《만성통보(萬姓通譜)》등과《기성통(奇姓通)》이 있다. 기타 성씨에 관한 보서(譜書)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고 후일을 기다린다.
성씨를 다룬 글에 소개되지 않은 기성(奇姓)도 많으므로 대충 언급하려 한다.《난매유필(暖妹由筆)》에,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연간에 진사(進士) 茂에게 陝이란 성을 하사하였는데, 섬()은 섬(陝)자와 같이 발음한다.”
하였고《지북우담(池北偶談)》에,
“내가 의조(儀曹 관명(官名))로 있을 때 완평(宛平) 사람 아무개가 있었는데, 관리가 잘못 벽(碧)으로 발음하자, 그 사람이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은 번(樊)자와 같이 발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밀(高密)에 있는 자 성은 축(閦)으로, 禚자 성은 탁(卓)으로, 제성(諸城)에 있는 자 성은 지(支)로 발음하고, 수광(壽光)에는 鱉자 성이, 하남(河南)에는 驢자 성이, 제남(濟南)에는 俳자 성이 있고, 임자년 전시(典試)에는 부방(副榜)에 든 사천(四川) 사람 度 아무개가 있었는데, 탁(拓)으로 발음한다.”
하였고, 우리나라에 있는 㫆자 성은 며로, 자 성은 왁으로, 遇자 성은 황으로 발음하고 㔛자 성은 발음이 자세하지 못하고 乁자 성은 비로, 鴌자 성은 궉으로, 㸴자 성은 소로, ●자 성은 퉁으로, 乜자 성은 로 발음하고, 복성(複性)으로 된 牆籬은 담울로 발음한다.
족보(族譜)에 대하여는 진(晉) 나라 지우(摯虞)가 맨 처음으로《족성소목기(族姓昭穆記)》를 지었고,《수서(隋書)》경적지 보계편(經籍志譜系篇)에, 익주(益州)와 기주(冀州) 등 여덟 고을의 성보(姓譜)가 소개되었으며, 송 나라 구양씨(歐陽氏 구양수(歐陽脩))와 소씨(蘇氏 소순(蘇洵))가 비로소 옛날의 소종법(小宗法)을 근거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는데, 후세에 보학(譜學)을 다루는 이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주례(周禮)》의 소사법(小史法 소사가 맡은 소목(昭穆)을 정하는 법)이 군공(君公)에게만 적용되다가 진(晉) 나라 이후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점차 보첩(譜牒)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씨의 분합(分合)에 대하여 한(漢)ㆍ위(魏) 이전에는 그 세차(世次)가 모호하고 서책(書策)이 미비하여 낱낱이 상고하려 하나, 먼 데를 보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모습을 보았으면 하고 먼 데를 들으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문충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시호)이,
“성씨가 생겨난 유래는 매우 오래다. 그러므로 상고(上古)의 것은 거의 없어져 알 수 없으니, 보도(譜圖)를 다루는 법은 알 수 있는 세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변동할 수 없는 의론이다.
춘추 시대에는 족성(族姓)을 가장 중하게 여기고 당 나라 사람들은 보첩을 매우 귀하게 여겼는바, 담자(郯子)는 그 조상을 설명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았고 적담(籍談)은 그 선대(先代)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웃음을 받았으니, 사람으로서 계보(系譜)에 익숙한 이야말로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화목시키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통보(通譜)하는 폐습을 들어 말하자면, 옛날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윤상(倫常)을 패란(敗亂)시키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바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런 폐습은 진정 종법(宗法)이 엄격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두정륜(杜正倫)이 성(城) 남쪽의 두씨(杜氏)들에게 끼이기를 청하자 군자가 부끄러이 여기고, 곽숭도(郭崇鞱)가 곽자의(郭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하자 식자(識者)가 부끄러이 여겼으며, 고산(孤山)이란 이름을 내세우자 아들로 되어 온 자가 끊임이 없었고, 조군(趙郡) 출신이라 자칭하자 족의(族誼)를 맺은 자가 한량 없었으니 《구당서(舊唐書)》이의부전(李義府傳)에 “의부가 귀(貴)하게 된 뒤에 조군(趙郡)의 이성(李姓)이라고까지 자칭하고 드디어 다른 이성들과 소목(昭穆)의 항렬을 가림으로써 무뢰배들이 그에게 구합(苟合)하여 그의 권세를 빙자하는 한편, 그를 형(兄)이나 숙(叔)으로 받드는 자가 매우 많았다.” 하였으니, 이는 명문(名門)으로서 의부와 같은 소인에게 아부한 예이다. 소위 보첩이란 것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희문(希文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자)은 어려서 주씨(朱氏)에게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주씨로 행세, 주학구(朱學究)라고까지 칭하였다가 이미 장성한 뒤에는 자신이 세가(世家)의 출신임을 알고 흐느끼면서 범씨(范氏)로 되돌아왔으니, 외가(外家)의 손성(孫姓)을 따라 손씨가 되어버린 등공(滕公)의 자손에 비하면 그 소견이 동떨어지고, 무양공(武襄公 송 나라 적청(狄靑)의 시호)의 조상이 바로 적양공(狄梁公 양공은 당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봉호)이라는 데 대해 고증할 만한 고신(告身 직첩(職牒))까지 있었으나, 무양공은 한때 영귀(榮貴)한 것을 빙자하여 감히 양공(梁公)을 모독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자의(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를 드렸던 곽숭도에 비하면 그 소득이 많다.
장주(長洲) 사람 여종옥(呂種玉)의《언청(言鯖)》에,
“명 태조(明太祖)가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옥첩(玉牒 임금의 보첩)의 편수를 의논하면서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송 나라 주희(朱熹)의 시호)을 시조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휘주(徽州) 출신 주(朱) 아무개가 전사(典史)로 있는 것을 보고, 문공의 후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조가 ‘한낱 전사로도 경솔히 주자(朱子)를 시조로 삼지 않는데, 우리 국가가 어찌 주자를 시조로 삼겠는가.’고 깨닫고는 이전의 의논들을 모두 퇴각시켰다.”
하였으니, 통보(通譜)하는 폐습으로 자신의 부조(父祖)를 바꾸는 자가 이를 본다면 어찌 부끄러움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하여 본국의 토성(土姓)으로는 삼한(三韓)과 삼국시대 왕공(王公)들의 후예가 많고 그 나머지는 혹 하사된 성(姓)이거나 혹 중국에서 나온 성들인데, 제 각기 보계(譜系)가 있어서, 중국의 성씨처럼 혼란스러워 상고하기 어려운 예와는 다르다. 고증할 만한 보첩을 아래에 대충 열거하려 한다.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2권은 정시술(丁時述)이,《성원총록(姓苑叢錄)》은 임경창(任慶昌)이, 《술선록(述先錄)》에 “임경창ㆍ정시술ㆍ정서천(鄭西川)은 보학(譜學)의 대가이다.”하였다. 《씨족보(氏族譜)》53권은 박사정(朴思正)이, …… 원문 1자 빠짐 …… , 산현(□山縣) 사람 《백가보(百家譜)》10권은 허함(許涵)이,《씨족원류(氏族源流)》는 이경렬(李景說)이,《씨족원류》7권은 조종운(趙從耘)이 지었고,《벌열통고(閥閱通攷)》4권은 우리 왕고(王考)의 윤문 수보(潤文修補)를 위시하여 불초손(不肖孫)인 나도 수보하였고,《팔팔첩(八八帖)》은 벽진(碧珍) 이모(李某)가,《만성총보(萬姓叢譜)》는 유언선(兪彦䥧)이 지었고,《동교록(東喬錄)》28권은 저자(著者)가 전해지지 않는다. 진신(搢紳)들의 세보(世譜)로는 8대(代), 혹은 10대의 것을 모아 만든 것으로《문보(文譜)》ㆍ《무보(武譜)》ㆍ《음보(蔭譜)》ㆍ《사마보(司馬譜)》등이 있고,《명위보(明衛譜)》는 고려 시대 사람의 편저(編著)로 송경(松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며,《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양성지(梁誠之)가 지었고,《백가보략(百家譜略)》은 저자가 전하지 않는다. 성씨에 관한 책은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성(姓)의 유래는 오제(五帝)에서 시작되고 오제의 성을 얻은 것은 오행(五行 금ㆍ목ㆍ수ㆍ화ㆍ토)에서 시작되었다.
오행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상배(相配)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다.《좌전(左傳)》에 “유규(有嬀)의 후예는 장차 강(姜)에서 발족될 것이다.” 하였고, 또《좌전》선공(宣公) 3년 조에 “길성(姞姓)이 희성(姬姓)의 배우가 되면 그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후세에 사람의 성을 오음(五音)에 배속시켜서 〈금성(金姓)이니, 목성(木姓)이니 하는〉설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성(姓)자에는 생(生)자의 뜻이 들어 있다.
여(女) 자와 생(生) 자가 합하여 성(姓) 자가 되므로 성(姓)에는 여(女) 자가 붙은 글자가 많다. 이를테면, 규(嬀)ㆍ희(姬)ㆍ사(姒)ㆍ길(姞)ㆍ운(妘)ㆍ주(婤)ㆍ흡(姶)ㆍ비(㚰)ㆍ구(嫪)ㆍ강(姜)ㆍ영(嬴)과 같은 유이다. 은(殷)나라는 양덕(陽德)을 받았으므로 남자를 표시할 때 자(子)자로 사용하고 주(周)나라는 음덕(陰德)을 받았으므로 여자를 표시할 때 희(姬)자로 사용하였다. 성(姓)자는 여(女)자에 의해 생겼으므로 부인(婦人)의 칭호로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백희(伯姬)ㆍ계희(季姬)ㆍ맹강(孟姜)ㆍ숙강(叔姜)과 같은 유이다.
《시경(詩經)》인지지(麟之趾)에,
“인후(仁厚)한 공손(公孫)들이다.”
하였는데,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은 혼자로는 생생(生生)하지 못하고 둘이 있어야만 생생하게 되므로 〈《좌전》희공(僖公) 23년〉에 숙첨(叔詹 정(鄭)의 어진 대부(大夫))이,
“남녀가 동성(同姓)끼리 혼인하면 그 생육(生育)이 번식하지 못한다.”
하였고, 〈《국어(國語)》정어(鄭語)에〉 사백(史伯 주(周)의 태사(太史))이 정 환공(鄭桓公)에게,
“선왕(先王)이 후비(后妃)를 이성(異姓)에게 맞이하는 것은 그 화동(和同)을 힘쓰기 위함입니다. 즉 단조(單調)로 된 음악은 들을 것이 없고 단일(單一)로 된 물건은 문채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니,《예기》의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혐의를 피하려는 것뿐 아니라 임석(衽席 부부의 동침을 말함) 사이를 경계하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혜강(嵇康)의 논(論)에 “오행(五行)에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으므로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다.
씨가 같고 성이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있고, 성이 같고 씨가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없다.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에는 성ㆍ씨를 주는 데 있어, 그 거주한 지명(地名), 수봉(受封)된 지명, 시(諡)ㆍ관(官)ㆍ읍(邑)을 따른 5종류였는데, 후세에는 성ㆍ씨를 받은 데 32종류나 된다. 즉 정초(鄭樵)의 씨족서(氏族序)에,
“1. 국(國)으로 씨(氏)를, 2. 읍(邑)으로 씨를, 3. 향(鄕)으로 씨를, 4. 정(亭)으로 씨를, 5. 지(地)로 씨를, 6. 성(姓)으로 씨를, 7. 자(字)로 씨를, 8. 명(名)으로 씨를, 9. 차(次)로 씨를, 10. 족(族)으로 씨를, 11. 관(官)으로 씨를, 12. 작(爵)으로 씨를, 13. 흉덕(凶德)으로 씨를, 14. 길덕(吉德)으로 씨를, 15. 기(技)로 씨를, 16. 사건으로 씨를, 17. 시(諡)로 씨를 18. 작계(爵系)로 씨를, 19. 국계(國系)로 씨를, 20. 족계(族系)로 씨를, 21. 명씨(名氏)로 씨를, 22. 국작(國爵)으로 씨를, 23. 읍계(邑系)로 씨를, 24. 관명(官名)으로 씨를, 25. 읍시(邑諡)로 씨를, 26. 시씨(諡氏)로 씨를, 27. 작시(爵諡)로 씨를 삼았고, 28. 대북(代北)의 복성(複姓), 29. 관서(關西)의 복성, 30. 모든 지방의 복성, 31. 대북(代北)의 삼자성(三字姓), 32. 대북의 사자성(四字姓)이다.”
하였다.
백제 때에는 8족(族)의 대성(大姓)이 있었다.《북사(北史)》에는 백제의 대성인 8족이 사(沙)ㆍ연(燕)ㆍ예(刕)ㆍ진(眞)ㆍ해(解)ㆍ국(國)ㆍ목(木)ㆍ묘(苗)로 되어 있다. 백제의 8성(姓) 중에 그 하나를 든다면, 진한(眞漢)ㆍ진우(眞祐)는 태위(太尉)ㆍ장사(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고, 진현도(眞玄菟)는 산법(算法)에 능하였다.
신라 때에는 육부(六部)에 사성(賜姓)하였다.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사성하였다. 즉,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崔姓)을,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하여 손성(孫姓)을, 우진촌(于珍村)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鄭姓)을,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하여 배성(裵姓)을,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로 하여 설성(薛姓)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 6성(姓)은 신라 시대의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고려 때에 와서는 성ㆍ씨가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한 성으로서 1백여 가지의 씨망(氏望)이나 되므로 쉽게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13년(1789)에 경조장적(京兆帳籍)에 기입된 성(姓)이 4백 7가지이고,《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79성과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 기재된 13성은 정조 13년 경조 장적에 누락된 것으로 도합 92성이 된다. 기타 기벽성(奇僻姓)도 이루 다 기재되지 못하였으니, 성이란 다 상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인(古人)들이 성(姓)을 기록해 놓은 것 중에는 너무도 황당(荒唐)하고 맹랑한 것이 있다. 하늘이나 해와 달에도 성이 있고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에게도 성이 있다 하였으니, 그 허황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즉《수서(隋書)》에,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 이름은 정신(靜信)이다.”
하였고,《노자역중경(老子歷中經)》에,
“해의 성은 장(張), 이름은 표(表), 자는 장사(長史)로 하늘의 사도(司徒)이고, 달의 성은 문(文), 이름은 신(申), 자는 자광(子光)으로 하늘의 사공(司空)이다.”
하였고,《통서정종(通書正宗)》에,
“해의 성은 손(孫), 이름은 개(開), 자는 자진(子眞)이고, 달의 성은 당(唐), 이름은 말(末), 자는 천현(天賢)이다.”
하였고,《광박물지(廣博物志)》에,
“천황씨의 성은 망(望), 이름은 획(獲), 자는 자윤(子潤)이고 지황씨의 성은 악(岳), 이름은 갱(鏗), 자는 자원(子元)이고, 인황씨의 성은 개(愷), 이름은 호조(胡絩), 자는 문생(文生)이다.”
하였다.
무릇 성씨에 관한 책을 편저(編著)하는 데 있어, 글자로 논한 이는 글자의 편방(偏旁 글자의 왼편 획과 오른편 획)을 주장하고, 성(聲)으로 논한 이는 글자의 사성(四聲 글자가 갖는 고저 장단(高低長短) 네 종류의 음(音))을 범례로, 지망(地望)으로 논한 이는 출신의 귀천(貴賤)을 격식으로 삼았다. 이것이 마치 다른 책들의 분문 유휘(分門類彙)한 체제와 같은데, 보학가(譜學家)는 반드시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주D-001]귀천(貴賤)의 …… 분별 : 사람의 씨(氏)는, 그 벼슬이나 혹은 그 행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즉 공덕(功德)에 의한 씨는 귀하게 여기고 기력(伎力)에 의한 씨는 천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그 씨를 보면 그 귀천을 알 수 있다. 《白虎通 姓名》
[주D-002]대종(大宗)과 소종(小宗) : 별자(別子 : 제후(諸侯)의 적자(適子)의 아우)의 세장자(世長子)가 별자를 계승, 그 일족(一族)의 종손(宗孫)이 되어 백세가 지나도록 체천(遞遷 : 봉사손(奉祀孫)의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옮겨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최장방이 죽었을 때에는 그 다음의 최장방의 집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데, 대수가 다한 뒤에는 땅에 매안(埋安)하는 것이 보통임)하지 않는 것을 대종이라 하고, 아버지의 적자(適子)가 위로 예묘(禰廟 : 아버지의 사당)를 계승, 그 일가(一家)의 종손이 되었다가 5세(世)를 지나서 체천하는 것을 소종이라 한다.
[주D-003]담자(剡子)는 …… 받았고 : 담자는 춘추(春秋) 시대 담국(剡國)의 임금. 그가 노 소공(魯昭公) 17년에 노(魯)에 조회하러 왔을 때 숙손소자(叔孫昭子)가 “옛날 소호씨(少昊氏)가 새 이름[鳥名]으로 벼슬 이름[官名]을 지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고 묻자, 그가 “그분은 바로 나의 조상이다 …… ”고 대답하므로 공자(孔子)가 듣고 그를 칭찬하였다. 《左氏傳》
[주D-004]적담(籍談)은 …… 받았으니 : 적담은 춘추 시대 진(晉)의 대부(大夫). 그가 노 소공(魯昭公) 15년에 주(周) 나라에 갔을 때 경왕(景王)이 “ …… 너는 사전(司典 : 나라의 전적(典籍) 관명(官名)인데, 여기서는 담적의 9세조 손백염(孫伯黶)을 말함)의 후예인데, 왜 그것을 잊었느냐?”고 하였으나, 그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左氏傳》
[주D-005]두정륜(杜正倫) : 당(唐) 나라 사람. 그가 미천하였을 때 성남(城南) 두고(杜固 : 지명(地名))의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에게 동보(同譜)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내심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가 집정(執政)한 뒤에 두고를 파서 수로(水路)를 개통시키자, 냇물이 10일 동안 핏빛으로 변하였는데, 그 뒤부터 두고의 두씨들이 점차 미약해졌다. 《唐書 杜正倫傳》
[주D-006]곽숭도(郭崇鞱) :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 사람. 그가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용사(用事)할 때 재상(宰相) 두로혁(豆盧革) 등이 다 그에게 아부하였다. 하루는 그에게 “분양왕(汾陽王 :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은 본시 태원(太原) 출신으로 화음(華陰)에 이주(移住)하였고, 공(公)은 대대로 안문(雁門)에 살았는데, 어떻게 분양왕의 지파(枝派)가 되는가?”고 묻자, 그는 “난리를 만나 보첩(譜牒)을 유실하였다. 선인(先人)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분양왕의 4대손이 된다.”고 하였다. 《舊五代史 卷57》
[주D-007]외가(外家)의 …… 등공(滕公)의 자손 : 등공은 한(漢) 나라 하후영(夏侯嬰)을 말한다. 그의 증손(曾孫) 파(頗)가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공주(公主)가 그 외가의 손성(孫姓)을 따라 손공주라 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이 손성으로 행세하였다. 《漢書 滕公傳》
[주D-008]고신(告身)까지 …… 없다 : 송(宋)의 적청(狄靑)이 추밀사(樞密使)로 있을 때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후예 한 사람이 적인걸의 화상(畫像)과 고신 10여 통을 가지고 와서 적인걸이 그의 원조(遠祖)가 된다고 하자, 그는 “내가 어찌 한때 영귀(榮貴)한 것을 빙자하여 감히 그분의 후예라고 하겠는가.” 하고는, 그 사람을 후히 대접해서 보낼 뿐이었다. 《筆談》
[주D-009]유규(有嬀)의 …… 것이다 : 춘추 시대 노 장공(魯莊公) 22년에 진 대부(陳大夫) 의씨(懿氏)가 진경중(陳敬仲)을 사위로 맞이할 때 얻은 점사(占辭)의 한 부분인데, 그 뒤 진경중의 5세손 환자(桓子)를 이어 8세손 성자(成子)가 제(齊)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점사에 보이는 유규(有嬀)는 진(陳)의 성(姓)을, 후예는 진경중을, 강(姜)은 제(齊)의 성(姓)으로 제 나라를 말한다.
[주D-010]시(諡)ㆍ관(官)ㆍ읍(邑) : 시호를 따른 것으로는 장(莊)씨가 초 장왕(楚莊王), 강(康)씨가 위 강숙(衛康叔)에게서 생긴 유이고, 관직을 따른 것으로는 태사(太史)ㆍ사마(司馬)ㆍ사공(司空)ㆍ유(庾)ㆍ적(籍)ㆍ전(錢)씨의 유이며, 읍명(邑名)을 따른 것으로는 최(崔)ㆍ노(魯)ㆍ포(鮑)ㆍ안(晏)ㆍ장(臧)ㆍ비(費)씨의 유이다.
[주D-011]국(國)으로 씨(氏)를 : 이는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ㆍ노(魯)ㆍ위(衛)ㆍ제(齊)ㆍ송(宋)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2]향(鄕)으로 씨를 : 이는 본시 향후(鄕侯)에 수봉(受封)되었다가 향(鄕)의 이름을 씨(氏)로 삼은 배(裵)ㆍ육(陸)ㆍ방(龐)ㆍ염(閻)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3]정(亭)으로 씨를 : 이는 본시 정후(亭侯)에 수봉되었다가 정(亭)의 이름을 씨로 삼은 미(麋)ㆍ채(采)ㆍ구양(歐陽)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4]지(地)로 씨를 : 이는 수봉된 땅이 있는 자는 그 지명(地名)을, 그렇지 않은 자는 주거(住居)한 지명을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부암(傅巖)에서 주거한 자는 부(傅)를, 혜산(嵇山)에 이주(移住)한 자는 혜(嵇)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5]성(姓)으로 씨를 : 이는 성이 씨로 된 예나 지(地)가 씨로 된 예가 그 처음에는 다 같이 주거한 지명을 따라 주어진 것을 말하는데, 주어진 자는 성으로, 주어지지 않은 자는 지명 그대로 행세하였다. 즉 요허(姚墟)에 주거한 자에게는 요(姚)가, 희수(姬水)에 주거한 자에게는 희(姬)가 성으로 주어진 유이다.
[주D-016]자(字)로 씨를 : 이는 제후(諸侯)의 아들은 공자(公子), 공자의 아들은 공손(公孫)이라 칭할 수 있으나, 그 아들은 다시 공손이라 칭할 수 없으므로, 그 왕부(王父)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정 목공(鄭穆公)의 아들 공자 비(公子騑)의 자가 자사(子駟)이므로, 그 손자 걸(乞)이 사(駟)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7]명(名)으로 씨를 : 이는 왕부(王父)의 자(字)가 없을 경우에는 그 이름을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노 효공(魯孝公)의 아들이 공자 전(公子展)이므로, 그 손자가 전(展)을 씨로 삼은 유이다. 아버지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은, 공자 수(公子遂)의 아들 공손 귀보(公孫歸父)의 자가 자가(子家)이므로 그 후예가 자가를 씨로 삼은 유이고, 아버지의 이름을 씨로 삼은 것은 공자 아(公子牙)의 아들 공손 자(公孫玆)의 자가 대백(戴伯)이므로, 그 후예가 자(玆)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8]차(次)로 씨를 : 이는 장유(長幼)의 서차, 즉 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의 유를 말한다. 노(魯)의 삼가(三家 :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씨(季孫氏))가 다 서차로써 씨를 삼았는데, 이를 자(字)로 삼기도 하였다.
[주D-019]족(族)으로 씨를 : 이는 맹(孟)씨ㆍ중(仲)씨는 형제(兄弟)로써, 백(伯)씨ㆍ숙(叔)씨는 소장(少長)으로써, 정(丁)씨ㆍ계(癸)씨는 선후(先後)로써, 조(祖)씨ㆍ예(禰)씨는 상하(上下)로서, 제오(第五)씨ㆍ제팔(第八)씨는 동거(同居)로써, 남공(南公)씨ㆍ남백(南伯)씨는 동칭(同稱)으로써, 공(孔)씨ㆍ자공(子孔)씨ㆍ기(旗)씨ㆍ자기(子旗)씨는 자(字)로써, 헌(軒)씨ㆍ헌원(軒轅)씨ㆍ 웅(熊)씨ㆍ웅상(熊相)씨는 이름[名]으로써, 계(季)씨 중의 계손(季孫)씨와 중(仲)씨 중의 중손(仲孫)씨와 숙(叔)씨 중의 숙손(叔孫)씨는 적서(嫡庶)로써, 한(韓)씨 중의 한여(韓餘)씨와 부(傅)씨 중의 부여(傅餘)씨와 양(梁)씨 중의 양여(梁餘)씨는 여자(餘子 : 장자(長子) 이외의 아들)로써, 수인(遂人)의 족(族)이 넷으로 되고, 상인(商人)의 족이 일곱으로 된 것은 지분(枝分)으로써, 제(齊)의 오왕(五王)이 하나로 합하여 오왕씨가 되고 초(楚)의 열종이 하나로 합하여 열종(列宗)씨가 된 것은 동조(同條)로써 분류된 유를 말한다.
[주D-020]작(爵)으로씨를 : 이는 황왕(皇王)ㆍ공후(公侯)ㆍ공승(公乘)ㆍ공사(公士)ㆍ부경(不更)ㆍ서장(庶長)씨의 유를 말한다.
[주D-021]흉덕(凶德)으로 씨를 : 이는 한(漢)의 영포(英布)가 경형(黥刑 : 피부에 먹물로 자자(刺字)하는 형)을 당한 때문에 그 후예가 경(黥)을 씨로 삼고, 남제 무제(南齊武帝)가 제 4자(子)인 파동왕(巴東王) 소자향(蕭子響)과 동성(同姓)이 된 것을 싫어하여 소(蕭)를 소(蛸)로 고쳐 준 유를 말한다.
[주D-022]길덕(吉德)으로 씨를 : 이는 춘추 시대 진(晉)의 조쇠(趙衰)가 사람들로부터, 겨울의 햇빛[冬日]과 같다는 경애(敬愛)를 받은 때문에 그 후예가 동일(冬日)로써 씨를 삼고, 옛날에 한 현인(賢人)이 사람들로부터, 노성자(老成子)라는 호칭을 받은 때문에 그 후예가 노성(老成)을 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3]기(技)로 씨를 : 이는 무자(巫者)의 후예가 무(巫)씨로, 도자(屠者)의 후예가 도(屠)씨로, 복자(卜者)의 후예가 복(卜)씨로, 장인(匠人)의 후예가 장(匠)씨로 된 유를 말한다.
[주D-024]사건으로 씨를 : 이는 하대(夏代)에 예(羿 : 유궁국(有窮國) 임금의 이름)가 반란을 일으켜 제상(帝相)을 시해하자, 제상의 후(后) 민(緡 : 유잉씨(有仍氏)의 딸)이 개구멍으로 도망쳐 나왔다가 유복자 소강(少康)을 낳았으므로 그 지손(支孫)이 두(竇)를 씨로 삼고, 한 무제(漢武帝) 때 승상(丞相) 전천추(田千秋)의 나이가 많다 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소차(小車)를 타고 성중(省中)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한바, 사람들이 그를 차승상(車丞相)이라 호칭한 때문에 그 후예가 차(車)를 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5]작계(爵系)로 씨를 : 이는 왕숙(王叔)씨ㆍ왕손(王孫)씨ㆍ공자(公子)씨ㆍ공손(公孫)씨의 유를 말한다. 즉 복성(複姓)은 공족(公族)이란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한 글자로는 한쪽은 밝힐 수 있으나 다른 한쪽은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한 글자를 더해야만 그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주D-026]국계(國系)로 씨를 : 이는 당(唐)씨가 비록 요(堯) 임금에게서 나왔으나 당손(唐孫)씨는 다시 요 임금의 별족(別族)이 되고, 등(滕)씨가 비록 숙수(叔繡)에게서 나왔으나 등숙(滕叔)씨는 다시 숙수의 별족이 되는 유를 말한다.
[주D-027]족계(族系)로 씨를 : 이는 계우(季友)의 후예로서 전가(傳家 : 가사(家事)를 자손에게 전수하는 것)한 일파는 계손(季孫), 그렇지 못한 일파는 그냥 계(季)씨라 칭하고, 숙아(叔牙)의 후예(後裔)로서 전가한 일파는 숙손(叔孫), 그렇지 못한 일파는 그냥 숙(叔)씨라 칭한 유를 말한다.
[주D-028]명씨(名氏)로 씨를 : 사계(士季)는 사람의 자(字)인데, 그 후예에 사(士)씨가 있고 또 그 별출(別出)로 사계(士季)씨가 있으며, 오참(伍參)은 사람의 이름인데, 그 후예에 오(伍)씨가 있고 또 그 별출로 오참(伍參)씨가 있으며, 한영(韓嬰)은 본시 한(韓) 나라 출신인데, 국명(國名)을 이름에 더하여 한영씨로 삼았고, 장회(臧會)는 본시 장읍(臧邑) 출신인데, 읍명(邑名)을 이름에 더하여 장회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9]국작(國爵)으로 씨를 : 이는 우(禹) 임금의 후예가 하(夏)씨로 되었는데, 기간공(杞簡公)의 아우 타(佗)가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씨가 생기게 되고, 진(陳) 나라의 후예가 식(息)씨로 되었는데, 식 공자(息公子) 변(邊)이 대부(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므로 다시 식부(息夫)씨가 생기게 된 유를 말한다.
[주D-030]읍계(邑系)로 씨를 : 이는 원(原)은 주읍(周邑)으로써, 신(申)은 초읍(楚邑)으로써 얻어진 씨인데, 원(原)에 백(伯) 자를 더하여 원백(原伯)씨가 되고 신(申)에 숙(叔) 자를 더하여 신숙(申叔)씨가 되어 원씨와 백씨를 분류한 유를 말한다.
[주D-031]관명(官名)으로 씨를 : 이는 사(師)씨가 본시 태사(太師)씨, 사(史)씨가 본시 태사(太史)씨인 것과, 사연(師延)의 후예가 사연(師延)씨로, 사조(史晁)의 후예가 사조(史晁)씨로 된 것은 벼슬과 이름을 씨로 삼은 유이고, 진상(秦相) 여불위(呂不韋)의 후예가 여상(呂相)씨로, 역이기(酈食其)의 자손이 이기(食其)를 씨로 삼았다가 그 증손(曾孫) 무(武)가 시중(侍中)이 되면서 시기(侍其)로 고친 것은 벼슬과 씨로 씨를 삼은 유임을 말한다.
[주D-032]읍시(邑諡)로 씨를 : 이는 읍명(邑名)에 시(諡)를 더한 것은 고 성자(苦成子)의 후예가 고성(苦成)씨로, 장 문중(臧文仲)의 후예가 장문(臧文)씨로 된 유이고, 씨에 시를 더한 것은 초 이자(楚釐子)의 후예가 이자(釐子)씨로, 정 공숙(鄭共叔)의 후예가 공숙(共叔)씨로 된 유이고, 작명(爵名)에 시를 더한 것은 위 성공(衛成公)의 후예가 성공(成公)씨로, 초 성왕(楚成王)의 후예가 성왕(成王)씨로 된 유를 말한다. 주 10)~32)는 《통지략 씨족 서(通志略氏族序)》에 의거하였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1 - 인사류 2
씨성(氏姓)
이성(李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7)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이성(李姓)은 농서(隴西)가 근본으로 치음성(徵音姓 치음은 오음(五音)중에 화음(火音)에 해당함)에 속하는데, 《자서(字書)》에 “오얏나무[李]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이다.” 하였고 자음(字音)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별이 있다. 즉 중국음은 ‘레’ 우리나라 음은 ‘리’ 속음(俗音)은 ‘니’이다. 전욱(顓頊)의 증손(曾孫)인 고요(咎繇) 곧 고요(皐陶)이다.《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도(挑)이니, 오지그릇을 말한다.” 하였다. 또 고도(皐陶)는 북통[鼓匡]으로도 보인다. 즉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운인(韠人)이 북통을 만든다.” 하였는데 운(韠)자는 본래 도()자이다. 또《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요(遙)이다.” 하였다. 고요는 순(舜)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다른 데는 고요(咎繇)로 되어 있다. 가 요 임금때 이관(理官 옥송(獄訟)을 맡은 관원)이 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관직(官職)을 따서 이(理)로써 씨(氏)를 삼았고, 은(殷) 나라 말기에 그 후손 이이정(理利貞)이 난리를 피하여 이후(伊侯)의 옛집터로 가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다가 이(李)로써 성(姓)을 바꾸었다. 그 뒤 11대손은 곧 노군(老君 노자(老子))인데 노군의 자손 중에 일파(一派)는 조군(趙郡)에 살았고 일파는 농서(隴西)에 살면서 광(廣 한(漢) 나라 때 전장군(前將軍))을 낳았고 광의 후손은 연(淵 당 고조(唐高祖))을 낳았다.”
하였는데, 당 현종(唐玄綜) 천보(天寶) 2년(743)에 고요(皐陶)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追尊)하였다.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시집 주(詩集注)에,
“천보 원년에 황제가 친히 신묘(新廟)에 임(臨)하여 현원황제에게 제향(祭享)하고 나서,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를 통현지인(通玄眞人)으로,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으로, 경상자(庚桑子 주대(周代) 사람으로 이름은 초(楚))를 통허진인(洞虛眞人)으로 추존 배향(追尊配享)하게 했다.”
하였고, 또,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준공된자, 공인(工人)을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내어 백석(白石)을 채취,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南向)으로 모시고,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시립(侍立)하게 했다.”
하였다.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씨족(氏族)에 관한 글에서, 씨족은 진(秦)ㆍ한(漢)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즉《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 상(宗室世系上)에 이씨(李氏)에 대해 서술하기를 ‘주왕(紂王) 시대에 이징(理徵)의 자는 덕령(德靈)으로 익예중오백(翼隸中吳伯)이 되었다.’ 본시 이연수(李延壽)의《북사 서전(北史序傳)》에 있는 말. 고 하였으나,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에는 이같은 명자(名字)도 관작(官爵)도 없었다.”
하였고, 또 왕세정(王世貞)의《완위여편(宛委餘編)》에 보면,
“이씨는 본시 영성(嬴姓)에서 나왔다. 전욱(顓頊)의 후손 백예(柏翳 백익(柏益))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시보(詩譜)》에, 고요(皐陶)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그는 우(禹) 임금을 도와서 물과 토지[水土]를 잘 다스린 공로로 영성(嬴姓)을 받았고, 그의 19세손 비자(非子)는 나라의 말[馬]을 잘 기른 공로로 주 효왕(周孝王) 갑자년에 진(秦)으로부터 수봉(受封), 부용국(附庸國) 따로 독립되지 못한 나라)이 되어 진영(秦嬴)으로 불렸다.《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에는 ‘전욱의 후손 여수(女脩 여자임)가 대업(大業)을 낳았고, 대업이 대비(大費)를 낳았으니, 이가 곧 백익(伯益)이다. 그 뒤 백익의 10세손 비렴(蜚廉)이 악래(惡來)를 낳았는데, 이들 부자(父子)가 뛰어난 재주와 힘으로 주왕(紂王)을 섬겼고 악래의 5세손은 비자(非子)이다.’ 했다.”
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 그의 출생지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자집에 고용살이하면서 나이 70이 넘도록 아내가 없었고, 그 어머니 역시 시골의 어리석은 여자로 나이 40이 넘도록 남편이 없다가 어느 날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서 만나 야합(野合)한바, 천지(天地)의 영기(靈氣)을 받아 그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어도 출산하지 않았다. 이에 주인이 상서롭지 않게 여기고 집에서 내쫓으므로 하는 수 없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밑을 헤매다가 미발(眉髮)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광(廣)의 성(姓)이 무엇임을 알지 못하므로 오얏나무를 가리켜 그의 성을 삼고, 그의 귀[耳]가 크다 하여 이름을 이(耳)라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하얀 것을 보고 노자라 불렀다.
그는 장성하여 주 천자(周天子)의 장서각(藏書閣)을 맡아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례(古禮)와 고사(古事)를 많이 알았으므로 공자가 그에게 예제(禮制)와 관명(官名)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그 뒤 연로(年老)하여서는 주(周) 나라의 왕실(王室)이 장차 어려워질 것을 보고 청우(靑牛)을 몰아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다가 관(關)을 지키는 윤희(尹喜)를 만나 그 스승이 되어《도덕경(道德經)》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사망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무덤이 있다.”
하였다.
이상은 중국 이씨의 득성(得姓)하게 된 사적인데, 그 설(說)들이 여러 가지여서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군망(郡望)에 대하여는, 조군(趙郡)ㆍ택저(澤底)ㆍ농서(隴西)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철령(鐵嶺)의 이성(李姓) 이성량(李成樑)의 조상은 본시 조선(朝鮮) 이산(理山) 사람인데, 영(英)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었다. 과 고려(高麗)의 이성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이회옥이 평로절도사(平虜節度使)로 보인다. 외에도 몇 개의 군망(郡望)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씨의 관향(貫鄕)이 거의 1백 개나 되어서, 그 근본을 상고하기 어렵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초기에 6부(部)의 성(姓)이 주어졌는데, 성을 받은 조상들, 즉 6부의 우두머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각기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위에 모여 회의하다가 ……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 양산촌 장(楊山村長) 이(李)씨는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峯)으로, 고허촌 장(高墟村長) 정(鄭)씨는 형산(兄山)으로, 대수촌 장(大樹村長) 손(孫)씨는 이산(伊山)으로, 진지촌 장(珍支村長) 일본(一本)에는, 우진촌(于珍村)으로 되어 있다. 최(崔)씨는 화산(花山)으로 가리촌 장(加利村長) 배(裵)씨는 명활산(明活山)으로, 고야촌 장(高耶村長) 설(薛)씨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내려왔다.”
하였고, 또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 임진에 6부(部)의 명칭을 설정하고 성(姓)을 주었다. 즉 양산촌을 양부(梁部) 일본(一本)에는 급량부(及梁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을, 대수촌을 점량부(漸粱部) 일본에는 모량부(牟粱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손성을, 우진촌(于珍村) 일본에는 진지촌(珍支村)으로 되어 있다. 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을,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 일본에는 한기부(漢岐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배성을, 명활촌 일본에는 고야촌(高耶村)으로 되어 있다. 을 습비부(習比部) 일본에는 습화부(習化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설성을 주었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보면, 일본(日本)의 이장행(李長行)은 본시 신라 사람으로 차아 위황(嵯峨僞皇 위황은 소위 ‘천황(天皇)’을 폄(貶)해서 지칭한 말)시대에 왜국(倭國)에 들어가 거위[鵝]와 양[羊]을 기증하였었고,《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이문진(李文眞)은 고려 영양왕(嬰陽王) 때의 박사(博士)로, 고사(古史)를 간추려서《신집(新集》5권을 만들었고,《발해고(渤海攷)》에 보면, 이광록(李匡祿)은 흥료현(興遼縣) 사람으로 영주 자사(郢州刺史)였는데, 고려 현종(顯宗) 21년(1030) 9월 병진에 발해국(渤海國) 대연림(大延琳)이 이광록을 고려로 급파시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거란(契丹)이 뒤를 이어 천우장(千牛將) 나한노(羅漢奴)를 고려로 보내어 보고하기를, 대연림이 거란 군사에게 포위되었다가 투항(投降)했다 하므로, 이광록이 본국의 멸망을 듣고 드디어 고려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이상 세 이씨는 그 관향(貫鄕)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자손이 과연 유전되어 온다면 그 관향은 지금 어떻게 되는지, 한 가지 궁금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허다한 이성(李姓)들은 혹 기자(箕子)를 따라왔거나 위만(衛滿)을 따라왔거나, 사군(四郡) 시대에 흘러들어왔거나, 혹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공벌(攻伐)할 때 따라들어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혹 농서(隴西)의 유파(流波)나, 6부(部)의 사성(賜姓)이 아닌지. 고가 대족(古家大族)을 제외한 평민으로서 이성(李姓)을 가진 자는 참으로 그 선계(先系)를 상고하기 어렵다. 이성도 이와 같은 실정이니, 다른 성은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고(王考 죽은 조부(祖父)로 이덕무(李德懋)를 말함)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소개된 이성의 씨망(氏望)이 60여 가지나 되는데, 다른 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내가 보건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족망(族望)이 수십여 관향(貫鄕)이나 되는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다 경주에서 나왔다. 김성(金姓) 또한 한 근원에서 이처럼 분파(分派)되었으니, 본시 하나의 성(姓)으로 많은 관향(貫鄕)이 분파된 성들은 그 원류(源流)를 구별하기 어렵다. 더욱이 사대부(士大夫)나 잠영 세족(簪纓世族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겨레붙이)에게는 보첩(譜牒)이 갖춰져 있지만, 서민들의 성관(姓貫) 분파에 대하여는 신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떻게 그 근원을 소급해서 알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경우는 그만 논하는 것이 옳다.

임하필기 제32권
순일편(旬一編)
옛날의 보학(譜學)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에는 보계(譜系)가 모두 6종 170부였는데,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러서는 남아 있는 것이 몇 가문에 불과하다. 대개 오대(五代) 이후로는 문벌을 숭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학이 마침내 더 강명(講明)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하여 각 왕조가 숭상한 것이 같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담강(曇剛)의 《유례(類例)》에서는 대대로 드러난 가문을 우성(右姓)이라 하였고, 주건덕(周建德)의 《씨족(氏族)》에서는 온 세상에 명망이 있는 가문을 우성이라 하였다. 수(隋)나라는 높은 품계의 많은 성씨를 우성이라 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반행(頒行)한 《씨족지(氏族志)》에서는 일등공신을 우성이라 하였고, 노씨(路氏)의 《저성략(著姓略)》에서는 성대한 가문을 우성이라 하였고, 유충(柳沖)의 《성족계록(姓族系錄)》에서는 세상에 명망이 있는 성씨를 우성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갑족(甲族), 망족(望族), 우족(右族)의 칭호가 다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순암선생문집 제13권
잡저(雜著)
상헌수필 하(橡軒隨筆下) 호유잡록(戶牖雜錄)을 함께 덧붙임


[우리 나라 역대의 사책] 고려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편찬하였다. 본기(本記)·잡지(雜志)·연표(年表)·열전(列傳)으로 되어 있는데, 소략하고 오류가 많아 사체(史體)를 이루지 못하였다.
본조(本朝)의 정인지(鄭麟趾)가 하교를 받들어 《고려사(高麗史)》 139권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세가(世家)·지(志)·열전(列傳)으로 되어 있는데, 세가는 쓸데없는 내용이 많고, 지는 빠진 것이 많고, 열전은 소홀하다. 김씨의 것보다는 다소 단아하고 충실하지만 후인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본조의 서거정(徐居正)과 최부(崔溥)가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편찬하였는데, 편년체(編年體)이다. 본조의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揔) 등이 하교를 받들어 《고려사》를 편찬하였는데, 역시 편년체로서 모두 37권이다. 열조(列朝)의 《실록(實錄)》과 민지(閔漬)의 《강목(綱目)》,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및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에서 취하여 찬집(撰輯)한 뒤에 다시 유관(柳寬)·윤유(尹維) 등에게 명하여 교정하여 바로잡았다. 또 이극감(李克堪)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참고한 책들은 지금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본조의 유계(兪棨)가 《여사제강(麗史提綱)》 23권을 편찬하였고, 본조의 임상덕(林象悳)이 《동사회강(東史會綱)》 24권을 편찬하였는데, 이들 두 책은 다소 간결하고 정돈되어 있으나 오류가 없지 않다.
고려의 중 무극(無亟)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전적으로 승려들의 사적(事迹)을 다룬 것이지만 왕력편(王曆篇)에는 국사(國事)에 대해서도 말한 것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허황된 이야기들이고, 또 《통감(通鑑)》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여기에서 많이 취하여 실었으나 사실은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본조의 권근(權近)·이첨(李詹)·하륜(河崙) 등이 하교를 받들어 《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하였고, 이우(李禺)가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었으며, 본조의 오운(吳澐)이 《동사찬요(東史纂要)》 12권을 편찬하였다.

[사실(事實) 기록의 어려움]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일기(日記)에는 옛 사람이 사실 인용을 잘못한 곳에 대해 논박한 것이 매우 많은데,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파적록(破寂錄)》을 보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태조가 개국(開國)하고 조반(趙胖)이 주문사(奏聞使)로 가자 황제가 ‘조선(朝鮮)’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내었다고 하였으며, 하곡(荷谷) 허봉(許篈)이 이를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옮겨 썼다. 그러나 조반은 원래 주문사로 간 일이 없으며,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한상질(韓尙質)이 경사(京師)에 가서 성지(聖旨)를 받들고 온 것이다.”
하여 성현과 허봉 두 사람이 사실 기록에 어두웠음을 비난하였다. 이것은 실로 그렇다. 그러나 조반이 주문사로 간 사실이 없다고 한 것은 하담 또한 자세히 고찰하지 못한 것이다.
권양촌(權陽村)이 지은 건원릉 비문(健元陵碑文)을 보면,
“태조가 즉위하여 지중추원사 조반을 보내어 주문(奏聞)하였고, 다시 한상질을 보내어 국명(國名)을 청하였다.”
하였으니, 조반이 주문사로 갔다고 한 용재(慵齋)의 말은 허황된 것이 아니다.
선배들의 기록에 소루(疎漏)한 곳이 있으면 후인들에 의하여 간파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실 기록의 오류만 지적할 일이지 섣불리 이를 비판하거나 공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은 모두 상헌수필임

양촌(陽村)이 지은 목은(牧隱)의 행장(行狀)을 보면, 신우(辛禑) 때에 그의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신우라고 말하지도 않고 왕(王)이라고 칭하지도 아니하여 모두를 생략하고 있다. 왕이라고 칭하자니 시휘(時諱)를 범하게 되고 신우라고 말하기에는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호유잡록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의 연보(年譜)] 퇴계 연보를 보면,
“가정(嘉靖) 계미년(1523, 중종 18)에 선생이 태학(太學)에 들어갔는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헤어질 때 시를 지어 주기를, ‘선생은 영남의 수재(秀才)로서, 이백(李白)·두보(杜甫)의 문장에다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孟頫)의 필법을 갖추셨다오.’ 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상고해 보면, 하서는 경오생(庚午生 1510,중종5)으로서 이때 나이가 14세였으니, 비록 숙성(夙成)했다 하더라도 성균관에 들어가서 서로 종유(從遊)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하여 하담 김시양이 분별하여 밝히기를,
“선생이 계사년(1533, 중종 28)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갔으니 하서가 헤어지면서 시를 준 것은 필시 이때일 것이다. 연보가 서애(西厓)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세밀하게 상고하지 않은 것은 아닐텐데도 이런 착오가 있단 말인가. 찬술(纂述)하는 일이란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내가 남명의 연보를 보니,
“가정 기축년(1529, 중종 24) 6월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위(升位)하였고 같은 달 그믐날에 입궁(入宮)하였는데, 7월 1일에 큰눈이 내렸다. 양윤(兩尹)이 서로 반목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사진(仕進)할 뜻을 단념하게 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국사(國史)와 《선원록(璿源錄)》을 보면 문정왕후의 입궁이 정축년(1517, 중종 12)에 있었으니, 이 조항이 사실과 틀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을사년(1545, 인종 1) 조 아래의 주에는,
“이해에 이포(李苞) 등이 직필(直筆)하는 사신(史臣) 안명세(安名世)를 죽였다.”
하였으나, 조사해본 결과 명세가 죽은 해는 무신년(1548, 명종 3)이었으니, 또한 잘못 인용한 것이다. 또 정묘년(1567, 명종 22) 조에는,
“8월에 선생이 동주(東洲) 성 선생(成先生)과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났다.”
하였고, 그 아래의 주에는,
“지난해에 선생이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돌아와 속리산에 들어가서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을 방문하였다. 이때 동주가 고을 수령으로서 자리에 와 있었는데, 선생은 초면이면서도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작별에 임해서는 명년 8월 15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조사해보니, 동주는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 1) 생으로서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 14) 5월에 죽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정묘년은 동주가 죽은 해로부터 이미 오랜 후이다. 다시 조사해보니, 임자년(1552, 명종 7)에 동주가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었다가 을묘년(1555, 명종 10)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는데, 고을에 있을 때 동주가 대곡을 찾아뵈었으며, 이때 마침 남명도 왔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지은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에 나오는 것이다. 이에 의거하면 가야산의 만남은 을묘년이나 병진년에 있었을 것이다. 남명의 연보가 무민(无悶) 박인(朴絪)과 겸재(謙齋) 하홍도(河弘道) 및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의 손에서 이루어졌는데, 세 사람은 모두 영남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로서 사적(事蹟)이 현저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 기록이 이처럼 사실과 틀리니, 과연 찬술(纂述)은 어려운 것이라고 하겠다.

[보첩(譜牒)의 기록에 오류가 많음] 보첩이란 파계(波系)를 밝히고 소목(昭穆)을 분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진실되어 거짓이 없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일 사실과 틀리는 곳이 있다면 이는 곧 선조(先祖)를 욕보이고 속이는 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보첩처럼 엄격하고 막중한 것이 없다 하겠다.
근래에 집집마다 보첩을 만드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는데 그에 따르는 폐단도 또한 여러 가지이다. 무식한 무리들은 먼 시골 구석의 한미(寒微)한 집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는 그 내력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곧장 선대 중에서 이름만 있고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붙여서 그 자손이라고 하면서 군역(軍役)을 면제받도록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영악스러운 자는 성(姓)과 이름이 같은 사람의 돈을 받고는 사사로이 보첩을 발간하여 그 속에다 이름을 끼워넣어 주는데, 그것도 기어코 현조(顯祖)에게 붙이고야 만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대왕(大王)의 자손과 공신(功臣)의 자손에게 군역(軍役)을 부과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을 기화(奇貨)로 하여 보계(譜系)를 위조해서 종실(宗室)의 후예니 공신의 후예니 하면서 종친부와 충훈부에 뇌물을 바치면, 실무를 맡은 하리(下吏)는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당상관의 수압(手押)을 받은 후에 이를 발급한다. 이와 같은 간악한 버릇들을 통렬히 응징해야만 명분이 확립되고 군정(軍丁)의 형편도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또 하나 허무맹랑한 일이 있다. 더러 시조 이상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조작하여 자기 조상이 어느 명산(名山)의 바위굴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려 들면, 무식한 자들은 정말 그런 줄 알고 믿기도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법령을 엄격히 세워서 옛날의 씨족지(氏族志)의 예에 따라 대처해야 할 것이다.

[선배들의 저술(著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재질이 거칠고 둔해서, 비록 글을 읽었다 하더라도 선배들의 저술이 큰 공력을 들인 것인 줄을 모르고 대부분 인몰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후인들이 저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는 참의 유숭조(柳崇祖)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이 일기(日記)에서 말하고 있다. 대개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문의(文義)와 훈해(訓解)를 반드시 우리말로 풀어야만 이를 가르칠 수 있다. 그래서 퇴계(退溪) 선생의 《경서석의(經書釋義)》는 제가(諸家)의 훈의(訓義)를 잡다하게 인용하여 절충하였으니, 김계조(金繼趙)·이극인(李克仁)·손경(孫暻)·이득전(李得全)·이충작(李忠綽)·신낙봉(申駱峯)·이복고(李復古)의 여러 설들이 그것이다.
선조(宣祖) 을유년(1585, 선조 18) 이후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술(經術)에 밝은 선비들을 모아서 언문 토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는데, 여러 해 만에 완성을 보았다. 이로부터 제가(諸家)의 훈해가 모두 폐지되었던 것이다.
지금 성균관의 사서 삼경(四書三經) 판본(板本)을 선본(善本)이라고 한다. 정랑 홍기(洪)는 자가 언명(彦明)으로 남파 상서(南坡尙書 남파는 숙종 때 예조 판서를 지낸 홍우원(洪宇遠)의 호)의 종질이다. 그가 당시의 어떤 재상과 친하였는데, 그 재상은 홍 정랑의 명성이 자기를 능가하는 것을 시기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지금 통행되는 경서(經書)의 인본(印本)에는 오류가 많습니다. 문신 중에서 경서에 통달하고 글을 잘 하는 자로는 홍기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그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에 홍기가 명을 받들어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한 덕분에 잘못된 어구나 글자들이 모두 바로잡히게 되었으며, 자획(字劃)의 편방(偏傍)까지도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없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홍기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본 일이 있는데,
천록(天祿)의 역사(役事)가 사람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하였으니, 그가 기울인 노력이 또한 매우 대단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건강을 잃어서 미처 승천(陞遷)도 하기 전에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을 지금까지 사람들이 읽으면서도 아무도 그것이 홍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소미통감(少微通鑑)》이 우리 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의 일이다. 난리 후에 서적들이 깡그리 없어졌으므로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이 안동 부사로 있던 때에 이를 간행하였는데, 매 권마다 권외(卷外)에 별도로 주해(註解) 몇 쪽씩을 덧붙여서 부록으로 만든 것도 모당이 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다들 이를 알지 못하므로 특별히 이를 드러내어 밝히는 바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저술한 책] 우리 나라 풍속은 어린이 교육의 첫 과정으로 《천자문(千字文)》을 먼저 가르치는데, 이것은 소량(蕭梁)의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이다. 그리고 간혹 《유합(類合)》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선조(宣祖) 때 미암 유희춘이 지은 것이며, 더러는 《거정(居正)》을 가르치는데, 바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것이다.
다음에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가르치는데, 중종(中宗) 때 참판을 지낸 함양(咸陽)의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것이며, 그 다음에는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가르치는데, 명(明) 나라 초에 증선지(曾先之)와 여진(余進)이 편찬한 것으로, 그 주해(註解)는 선조 때 유신(儒臣) 김수(金晬) 등에게 명하여 찬집(撰輯)한 것이다.
또 《전등신화(剪燈新話)》 2권이 있는데 명 나라 초에 존재(存齋) 구종길(瞿宗吉)이 지은 소설이다. 명종(明宗) 때 판서 윤춘년(尹春年)과 이문학관(吏文學官) 임기(林芑)가 주를 달았다. 이른바 창주(滄洲)란 곧 윤춘년이며, 임기는 턱 밑에 늘어진 살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호를 수호자(垂胡子)라 하였으니, 곧 병자년(1456, 세조 2)의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인 이개(李塏)의 외손으로서 드러내놓고 벼슬할 수가 없었으므로 학관(學官)을 했다고 한다.

[《가례(家禮)》의 언해(諺解)] 종실인 덕신정(德信正)이 예(禮)를 좋아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 중에서 초종(初終)부터 성복(成服)까지의 네 조목을 취하여 언문으로 풀이해서 몽매한 선비나 부녀자들이 그에 따라 초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김사계(金沙溪)가 보고 매우 칭찬하였으며,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은 이를 확충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까지 아울러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 유행하는 판본은 용졸재(用拙齋) 신식(申湜)이 편찬한 것이다. 덕신정은 세조(世祖)의 왕자인 덕원군 서(德源君曙)의 증손으로, 이름은 난수(鸞壽)이고 자는 문수(文叟)이며 호는 서곡(西谷)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문장과 학문을 좋아하였다. 박주(朴洲)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박주가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그 자손들이 지금 목천(木川)에 살고 있다.

[총명(聰明)과 강기(强記)] 송(宋) 나라의 치당(致堂) 호인(胡寅)은 남해(南海)로 귀양갈 때 한 권의 책도 가지고 가지 않았으나 《독사관견(讀史管見)》 30권을 지었으며, 우리 나라의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은 종성(鍾城)에 귀양갔을 때에 한 권의 책도 없었으나 《속몽구(續蒙求)》를 지었다. 책을 지은 것이 모두 귀양살이할 때의 일이었으니, 총명함과 뛰어난 기억력은 모두 천고에 다시 없는 재주라 하겠다.

[우리 나라의 서원(書院)] 우리 나라에는 본래 서원이 없었다. 그런데 중종(中宗) 신축년(1541, 중종 36)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백운동(白雲洞)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건하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를 제향(祭享)하였으며, 뒤에 또 해주(海州)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서원을 세웠는바, 모두 살았던 고장을 택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지명이 서로 비슷한 경우에도 따라서 서원을 세웠는바, 강릉(江陵)에 구산역(丘山驛)이 있으므로 공자(孔子)의 서원을 세웠으며, 해주(海州)에 수양산(首陽山)이 있으므로 이제묘(夷齊廟)를 세웠으며, 남양(南陽)의 지명이 제갈량(諸葛亮)이 살던 곳과 같으므로 무후묘(武候廟)를 세웠으며, 영유(永柔)에 와룡암(臥龍巖)이 있으므로 또 제갈사(諸葛祠)를 세웠으며, 성주(星州)에 이천(伊川)이니 운곡(雲谷)이니 하는 지명이 있으므로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워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제사지냈으며, 무주(茂州)의 별호가 주계(朱溪)이므로 참판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이 부사로 있으면서 주자(朱子)의 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이처럼 억지로 끌어다 붙인 뜻이 과연 예(禮)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형식에만 치우친 폐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하겠다.

[독서(讀書)] 글이란 옛 성현(聖賢)들의 정신과 심술(心術)의 운용이다. 옛 성현들이 영구히 살면서 가르침을 베풀 수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글을 지어서 후세에 남겨 후인들로 하여금 그 글 속의 말을 통하여 성현의 자취를 찾고 그 자취를 통하여 성현의 이치를 터득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이 때문에 후세의 선비들이 한결같이 글을 읽어서 성현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널리 보지 않으면 그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책 일만 권을 읽으면 붓끝에 신기가 어린 듯하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글을 일천 번을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묵은 글을 싫증내지 않고 일백 번을 읽는다.[舊書不厭百回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일만 권의 책을 가지고 있으면 일백 개의 성을 가진 것보다 낫다.[擁書萬卷 勝於南面百城]”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책 오천 권을 읽지 않은 자는 내 방에 들어 오지 말라.[有不讀五千卷者 不入吾室]” 하였으니, 옛사람이 독서함에 있어서 그 양이 많고 그 폭이 넓었음을 알겠다.
내가 보건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말에,
“일찍이, ‘글을 읽으려면 반드시 일만 번을 읽어야 신명한 경지에 통할 수 있다.’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말을 듣고 즉시 《두율(杜律)》을 가져다 1만 3천 번을 읽었다.”
하였는데, 드디어 그는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던 것이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일찍이 역질(疫疾)을 피하여 촌가(村家)에 가 있었는데, 《중용(中庸)》 한 권만 가지고 가서 일만 번을 넘게 읽어서 문리(文理)가 통달하여 붓만 잡으면 글이 이루어졌다. 판서 임유후(任有後)도 젊었을 때 역질을 피하여 나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책이 없었고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한 편만 있었다. 그래서 역시 일만 번을 넘게 읽었는데, 이후부터 붓만 잡으면 변려문(騈儷文)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이미 있었던 분명한 증거들이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명(明) 나라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 있고 근세에 한 사람이 있다. 명 나라 양천상(楊天祥)은 자가 휴징(休徵)이고 혜주(惠州) 사람이다. 자란 뒤 열심히 글을 읽느라고 낮에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 밤에도 자리에 눕지 않았으며, 겨울 밤에 얼음물로 발을 적시다가 동상이 걸려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의 글 읽는 방법은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귀로 그 소리를 들었으며, 입으로 외우려고 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 장마다 백 번씩 읽는 것으로 규정을 정해 놓고, 글을 읽을 때는 설사 일이 생기거나 누가 찾아와도 일절 모른 체하였고, 침식마저 모두 폐하였으며 읽는 횟수를 채운 뒤에야 응대하였다. 글을 지을 때는 붓을 잡으면 천언만어(千言萬語)가 쏟아져 나왔으며, 평생을 무료하게 보내는 날이 없었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 12)에 진사(進士)가 되어 친구와 형제들에게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내가 약관(弱冠) 때부터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었는데 이제 13년이 되었다. 1년 중에 명절과 집안의 경삿날 및 병을 앓은 날이 60일에 지나지 않으니, 300일은 모두 글을 읽은 날이다. 매일 3장 이하를 읽은 날이 없으니, 1년이면 900장을 밑돌지 않고, 15년이면 1만 5천 장을 밑돌지 않는다. 옛사람의 1만 권에 비하면 겨우 10분의 1, 2정도이지만, 근세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그래도 내가 많을 것이다.
옛날에 상자평(尙子平)이 가사(家事)을 일절 끊어버리고 오악(五嶽)을 두루 유람하였다고 하나, 그것을 어떻게 소매 속에 담아와서 남들에게 알려 줄 수 있었겠는가. 자기 혼자 알고 말았을 것이다. 오악을 유람하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며 가족과 헤어진 쓸쓸함을 곱씹어야 한다. 이처럼 심신을 괴롭히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비로소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경(五經)은 천지 만물의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오악에 비하여 어느 것이 더 위대하겠는가. 그 위에 또 제자(諸子)와 역대의 사서(史書)와 백가(百家)의 언론을 보탠다면 바로 이 세상의 동천(洞天)이며 복지(福地)인 것이다. 내가 이들을 읽음에 있어서 책 한 권을 마칠 때마다 마음이 트이고 정신이 유쾌해졌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새로워졌었다. 지금 문밖을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에 이를 두루 섭렵하였으니, 비록 남에게 알려 주기에는 부족하지만 또한 혼자 알기에는 충분하다.”
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곧 상사(上舍) 신후담(愼後聃)으로, 자는 이로(耳老)이고 호는 돈와(遯窩)인데,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의 문인이며 나와는 동문(同門)이다. 젊었을 때 언젠가 나와 한 번 만나서 독서의 방법에 대해 토론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성현의 글은 만 번쯤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비근한 일을 들어 비유하자면, 백 아름되는 나무를 베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큰 도끼로 찍어야만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의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 의리의 심오함이 어찌 큰 나무에 비교할 정도이겠는가. 반드시 많이 읽은 다음이라야 대강이나마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즈음 사람들은 글을 읽는 괴로움을 감내하지 못하고 한두 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니, 뜻을 터득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것이야말로 자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껍질이나 조금 벗기는 데에 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기뻐했었는데, 그가 죽은 뒤 그가 손자에게 보여준 글 한 편을 얻어보니, 거기에 말하기를,
“하빈노인(河濱老人)이 5, 6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이제 60이 되어 병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에 읽은 글의 횟수를 기록해서 어린 손자에게 보인다.
나는 《중용(中庸)》을 가장 많이 읽었는데, 만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세지 않았으나 아마 수천 번을 밑돌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大學)》은 5천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세지 않았으나 만 번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은 각각 수천 번을 읽었고, 《시경(詩經)》·《논어(論語)》·《맹자(孟子)》는 각각 천여 번을 읽었고, 《소학(小學)》은 백여 번을 읽었고, 《예기(禮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각각 오십 번을 읽었고, 삼전(三傳)은 그 반, 《주례(周禮)》·《의례(儀禮)》·《효경(孝經)》은 각각 수십 번을 읽었다. 《이정전서(二程全書)》·《주자대전(朱子大全)》·《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性理大全)》은 종신토록 읽었는데, 그 중에서 백 번 혹은 오십 번씩 초독(抄讀)한 것이 있다. 심씨(沈氏)가 편찬한 《백가유찬(百家類纂)》은 수십 번을 읽었는데, 그 중 《도덕경(道德經)》·《음부경(陰符經)》·《남화경(南華經)》·《참동계(參同契)》는 수백 번까지 읽었으며, 《한위총서(漢魏叢書)》 중에서 《대대례(大戴禮)》·《왕씨역례(王氏易例)》·초씨(焦氏)와 경씨(京氏)의 《역문(易文)》·《신공시설(申公詩說)》 같은 종류는 각각 수십 번 읽었으며,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와 한문공(韓文公)의 《창려집(昌黎集)》은 백 번 혹은 수십 번을 초독(抄讀)했다. 그 밖에 읽은 횟수가 수십 번에 못 미치는 것은 기록하지 않으며, 많이 읽었더라도 단편(單篇)과 소문(小文)인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억지로 써서 너에게 주니, 너는 부디 이 유업(遺業)을 잘 잇기 바란다.”
하였다. 내가 얻은 이 두 글을 기록하여 가숙(家塾)의 자제들에게 보인다.
또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있으니 자가 자공(子公)인데,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무릇 고문은 만 번이 되지 않으면 중지하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그의 소재(小齋)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효종(孝宗)이 일찍이,
낙엽진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 / 古木寒煙裏
쓸쓸한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 / 秋山白雨邊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 / 暮江風浪起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 / 漁子急回船
라고 한 그의 시 용호음(龍湖吟) 한 절구를 보고 이르기를,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판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그의 묘갈(墓碣)에 명(銘)하기를,
무회씨와 갈천씨의 순박한 백성이며 / 無懷葛天之民
맹교와 가도처럼 뛰어난 시일러라 / 孟郊賈島之詩
80년 마음 가짐 하루와 같았으니 / 行心八十年兮如一日
억만 번 글 읽음이 기이하고 기이터라 / 讀書億萬數兮奇又奇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진실된 기록이다 하였다.
또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성품이 진솔하고 구애됨이 없었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거의 일만 번이나 읽었으며, 인조·효종 연간의 문장으로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태학사(太學士) 하계(霞溪) 권유(權愈)에게 글을 배웠는데, 권공이 일찍이 정공의 사람됨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웃으면서 우리 할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정공이 사마천의 《사기》에 밝다는 말을 듣고 책을 끼고 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정공이 글을 읽으라고 하기에 읽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러 질문을 하였더니, 정공이 말하기를,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러이러한 말 같습니다.’ 하였더니 정공은 ‘좋다.’ 하였다. 그리고 매번 질문할 때마다 좋다는 말로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를 숙인 채 글을 읽다가 마지막 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정공은 방 윗목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하기를, ‘좋고도 좋구나. 글 뜻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그저 많이 읽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
하고, 인하여 웃고 말하기를,
“글이란 다독(多讀)하여 문장에 능하게 되는 데 있음을 나는 이 노인을 통해서 보았다. 그러니 그대들은 오로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하였다고 한다.
지금 두 노인의 독서 방법을 보면 실로 대추를 맛도 보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그런데도 능히 다독(多讀)을 통해서 문장을 이루었다. 더구나 성현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이 두 노인이 한 것처럼 공력을 들인다면 그 진취함이 어찌 문장에서만 그치겠는가. 이상은 모두 수필임

독서는 다만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추구할 따름이며, 지레 이를 요약하여 다른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너절하게 부연하여 다른 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글을 읽는 일은 조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음란한 소설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유탕(流蕩)한 생각이 일고, 산수(山水)의 청담(淸談)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연하(烟霞)의 자연이 그리워지고, 병진(兵陣)에 관한 설들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맹(武猛)한 기운이 솟구치지만,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읽으면 지기(志氣)가 화평해져서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이 뭉클 인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언제나 잡서(雜書)를 경계한 것이다. 이상은 모두 잡록임

[글짓기와 글씨 쓰기] 남추강(南秋江)이 김괴애(金乖崖)를 찾아뵈었을 때 괴애가 말하기를,
“글을 지으려면 먼저 기운을 넓혀야 하며, 글씨를 쓰자면 먼저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하였다. 수필임
글씨를 씀에 있어 그 자체(字體)를 육의(六義)로써 추구한다면 글씨의 기본 원리에 대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다. 잡록임

[수령의 구임(久任)] 나라의 근본은 백성에게 달려 있고 백성의 슬픔과 기쁨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수령이란 직임은 잘 가려서 뽑아야 한다. 그럼에도 근래에 수령을 자주 갈아서 영송(迎送)에 따른 경비의 소모가 매우 많은가 하면 간사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서 불쌍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으니, 그 폐단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 그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고 하겠다. 6년이 차기 전에는 상(喪)을 당한 경우 이외에는 절대로 바꾸지 말 것이며,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경우, 잘못이 큰 자는 죄를 주고 작은 자는 녹봉(祿俸)을 빼앗는 등 사안의 경중에 따라 조처하여, 그 맡은 바 직임을 오랫동안 맡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능력이 있는 자는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능력이 없는 자는 뉘우치고 분발할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령으로 있는 자가 염피(厭避)하여 체직되기를 도모하기도 하고 병을 칭탁하여 체직되기를 도모하기도 하고 하찮은 혐의를 들어서 체직되기를 도모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뜻만 곡진히 따라주면서 백성들의 폐해는 돌아보지 않으니, 매우 옳지 않다.

[수재(守宰)의 서간(書簡)] 대개 세상 사람들이 수령에 임명되면 반드시 “전임자의 정사가 퇴폐해서 창고가 비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이를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것은 어느 사람이건 매일반이다. 그래서 설사 진짜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모두 으레 하는 핑계로 여기고 믿지를 않는다.
송(宋) 나라 홍매(洪邁)는 부임지에 도착하여 집정(執政)에게 사례하는 편지를 올리기를,
“고을이 비록 작으나 일이 적고, 창고의 돈이나 곡식도 그런대로 꾸려갈만합니다. 도원(道院)에 앉아서 휘파람을 불 수 있겠으니 참으로 지극한 다행입니다.”
하였는데, 주익공(周益公)이 답장하기를,
“지금까지 외군(外郡)의 태수로 나간 사람의 편지를 받아보면 군색하고 번잡하다고 호소하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지금 보내주신 것과 같은 편지는 정말 처음 봅니다.”
하였으니, 송 나라 때 세속의 실태가 지금과 같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가 일찍이 목천 현감(木川縣監)이 되었을 때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풍속은 퇴폐하고 아전들이 교활하나, 이를 개혁하여 백성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녹봉(祿俸)이 비록 박하나 부녀자가 조석의 끼닛거리 걱정을 면하고 밥상에는 반드시 고기가 오르니, 어찌 집에 있을 때의 모습에 비하겠습니까.”
하였으니, 바로 홍매의 편지와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인다.

[빙정(氷政)] 병신년(1776, 영조 52)에 내가 목천(木川) 고을을 맡아서 나갔다. 그 고을에서 빙정(氷政)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때 날씨가 몹시 추웠다. 구례(舊例)에, 본읍(本邑)의 8개 면(面) 가운데 동쪽과 서쪽에 각각 4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금년에 서쪽 4개 면이 맡아서 하면 내년에는 동쪽 4개 면이 맡아서 하여 한 해씩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이해는 동쪽 4개 면 차례였는데, 도로의 거리는 계산해보니 4, 50리나 되었다. 동사자(凍死者)가 많이 생길 것이 염려되어 마침내 고을의 놀고 있는 민정(民丁) 80여 명을 고용해서 술과 음식을 후하게 먹이고 얼음을 뜨도록 시켰다. 그랬더니 해도 채 지지 않아서 일이 끝났다.
이로 인하여 생각해보니, 4개 면의 민정이 1천 명이 넘으니 면임(面任)이나 해당 아전들이 받는 뇌물들이 필시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법을 정하여 이후로는 1개 면이 1년씩 맡아서 하여 8년에 한 번씩 돌아오도록 했더니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그 뒤 《홍남파집(洪南坡集)》을 보니, 그가 지은 감사 정언황(丁彦璜)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이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있을 때 관문(官門)에서 거리가 상당히 먼 3개 면이 있었는데, 해마다 얼음을 뜰 때면 얼음 뜨는 일을 면제해 주는 대신 가미(價米)를 받았으므로 3개 면의 백성들이 특히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래서 공이 고을 전체가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도록 하여 10년에 한 번씩 돌아오게 하고 쌀의 수량도 감하여 주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하였으니, 옛사람 중에도 실천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 빙정이 또한 하나의 민폐가 되어 있으며, 더러 수령들이 탐욕을 부린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뒤에 다시 감사에게 논보(論報)하고 이어서 이를 파하였음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수재(守宰)를 경계한 시] 신 문충공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진주 목사(晋州牧使) 윤동년(尹同年)에게 준 시가 있는데, 고을을 맡아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써 경계한 것이다. 그 대략에,
한서·사기의 순리·양리의 전기들을 / 漢史循良傳
그대는 하나하나 잘 알겠지 / 一一君自知
사나이 대장부가 뜻이 있다면 / 丈夫苟有志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랴 / 何事不可爲
청렴과 결백으로 자신을 지키고 / 自守以淸白
사랑과 위엄으로 아래를 거느리고 / 御下以仁威
공손과 검소로써 손님을 맞고 / 接客以恭儉
공변된 마음으로 공사를 처리하고 / 處事以無私
근면하고 신중하게 실천하면서 / 行之以勤謹
선을 긋고 절대로 넘지 말기를 / 劃一無所移
공수·황패그들은 별사람이며 / 龔黃彼何人
옛날과 오늘이 어찌 다르리 / 古今寧異時
임금께서 백성을 걱정하시니 / 聖主憂赤子
수령된 자 이 점을 생각해야지 / 分憂當念玆
하였으며, 또 시가 있는데 그 대략에,
멋진 수염의 잘생긴 사나이 / 蒼髥美丈夫
함부로 오두는 되지 말게나 / 莫浪作遨頭
어려서 배움은 자라서 행하려는 것 / 幼學卽壯行
명성이 아름답기를 생각해야지 / 要思聲名休
선비가 이미 임금의 녹 먹었으면 / 士旣食君祿
임금의 근심도 함께 근심해야지 / 亦當憂君憂
벼슬아치 되어서 다스림을 내려면 / 臨官欲出治
후대의 모범이 되어야 하리라 / 宜圖百世規
정성을 다해 자식처럼 보호하면 / 推誠保赤子
어리석은 백성들도 고마움을 안다네 / 至愚還得知
백성들이 고마워하고 원망하는 건 / 民懷與民怨
오로지 나 하기에 달린 일일세 / 特在我所爲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적절히 쓰고 / 寬猛固相濟
은혜를 베풀되 위엄도 지녀야지 / 有惠須有威
하늘에도 위엄과 관대함이 있으니 / 天道亦慘舒
조이고 늦춤은 나의 재량 아니라네 / 張弛非我私
사나이가 참으로 뜻을 세웠다면 / 男兒苟立志
이 마음을 영원히 바꿔서는 안 되리라 / 此心終不移
하였다. 이 두 편의 시를 읽어보면 선배들이 서로 경계한 뜻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한 시대를 훌륭히 다스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령 노릇하는 도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벽에 걸어두고 스스로를 경계하겠다.

[안응창(安應昌)의 정치 업적] 안공(安公)의 자는 흥숙(興叔)이고 호는 우졸재(愚拙齋)이며 만력 계사년(1593, 선조 26)에 태어났다. 인조(仁祖) 때의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의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천거로 대군(大君)의 사부(師傳)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군읍(郡邑)을 맡아 다스렸다. 내가 공이 지은 《청교묵담(靑郊墨談)》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나의 성품이 소루하고 오활하여 그간 장리(長吏)를 지냈으나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또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백성을 이롭게 하고 안정시키는 도리에만 힘썼다. 낭천(狼川)과 김화(金化)를 다스릴 때는 얻은 미포(米布)를 모아 민역(民役)에 보태어 썼으며, 의성(義城)을 다스릴 때는 크게 보민청(保民廳)을 설치하고 단 얼마라도 소득이 있으면 여기에 저축하여 1천 5백 석의 곡식을 사들이고 또 40동(同)의 면포(綿布)를 마련해서, 매년의 쇄마(刷馬) 및 대동청(大同廳)에 응역(應役)하는 대소(大小) 인리(人吏)의 지공(支供)과 잡역(雜役)에 썼다. 예천(醴泉)을 맡아 다스릴 때는 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며, 또 익하고(益下庫)를 설치하여 공사(公私)간의 수응(酬應)에 드는 경비를 민간에 부담시키지 않았다. 이리하여 관(官)에 있을 때는 비록 찬양하는 소리가 없었지만, 떠나온 뒤에 더러 사실보다 과장된 기림이 많았다.
그리고 고을에 나가 있을 때에 반드시 먼저 충효(忠孝)와 정렬(貞烈)과 유선(儒先)의 묘에 제사하였으며,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서 이루어 주었고,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에게 식물(食物)을 지급했으며, 향약(鄕約)의 법을 세우고 매년 기로연(耆老宴)을 열어서 즐겁게 해 주었다…….”
하였다.

[해주의 최 목사(崔牧使)] 해주목(海州牧)의 홍석기(洪錫箕)가 지은 최 목사의 비문에 이르기를,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공이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있었다. 적이 더욱 급박하게 포위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았으므로 성이 함락되었다. 공이 탈출하여 나와서 휴암(鵂巖)에 이르러서는 인수(印綬)를 풀어서 바위 아래의 못에 던지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바위 위에 글자를 써서 그 장소를 표한 다음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니, 곧 지정(至正) 신묘년(1351, 충정왕 3) 2월 23일의 일이었다. 이때 공을 따른 자는 단지 공생(貢生) 한 사람뿐이었으며, 공이 기르던 개가 공의 시체 옆에서 공을 따라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을 바위 북쪽 1리쯤 되는 곳에 장사지내고, 따라 죽은 사람과 개를 모두 그 옆에 묻어 주었으며, 그 못의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네 철과 기일(忌日)에 관리들이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이 비문을 보건대, 최 목사의 절의는 숭상할 만하거니와 공생이 따라 죽은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개의 이야기는 육씨(陸氏)를 따라 바다에 빠져 죽은 백한(白鷴)새 이야기와 다름이 없으니, 누가 짐승은 앎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국서(河國瑞)] 역관(譯官)인 만포(滿浦) 사람 하국서, 온성(穩城) 사람 황연의(黃連義), 의주(義州) 사람 정태기(丁太奇)가 동시에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데, 마음은 항상 본국(本國)에 있었다. 노추(奴酋)가 요광(遼廣)을 함락하고 장차 입관(入關)하려 하자, 국서 등이 거짓으로 고하기를 “우리 나라가 군사를 내어 다시 쳐들어와서 요동을 구하려 하오.” 하니 노추가 즉시 회군하였다. 이윽고 속은 줄 알고는 직접 이들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서 죽였는데, 태기는 코만 베었다. 이 덕분에 중국 조정이 관내(關內)를 거두어 보전할 수 있었으니, 그 충성은 지난날 오랑캐에게 항복한 죄를 갚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인몰되어 전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의 잡록(雜錄)에 보이므로, 이를 표출하는 것이다.

[장사(將士)의 순절(殉節)] 예로부터 전횡(田橫)의 5백 의사(義士)를 일컬어왔다. 위(魏) 나라에서는 제갈탄(諸葛誕)의 휘하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한 사람은 베이고 한 사람이 항복하였으나 나머지는 끝내 굴하지 않고 모두 팔짱을 낀 채 줄지어 나아가 죽임을 당하면서도 변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나라 광해군 기미년(1619)에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강홍립(姜弘立)의 군관(軍官)인 평산(平山)의 무인(武人) 감찰 최승렬(崔承烈)이 도망와서 군사(軍事)에 관하여 알렸다. 그가 말하기를,
“경상도의 군인 3천 명이 홍립의 항복을 보고 모두들 분개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시체가 쌓여 물길을 가로막았으며, 항복한 왜인 4백 인도 홍립을 따라갔다가 다들 강개(慷慨)하여 칼을 뽑아 적장(敵將)을 베려 하였으나, 홍립이 적추(賊酋)에게 몰래 알려 이들이 남김없이 유린당했다.”
하였으니, 이 영남 군사와 항복한 왜인이 어찌 이른바 열장부(烈丈夫)가 아니겠는가.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에 격동되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것은 실로 전횡이나 제갈탄의 부하들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3천 명이 한마음이 된 것은 더욱 특이한 일이다.

[이백사(李白沙)] 진(晋) 나라 임금 여공(厲公)이 무도(無道)하였기 때문에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이 여공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사개(士匃)를 불렀으나 사개가 사양하였고, 한궐(韓厥)을 불렀으나 한궐도 사양하였다. 두 사람이 결국 여공을 죽였지만 감히 사개와 한궐을 죄주지 못했으니, 그 충직함을 공경한 것이었다. 진왕(秦王)이 건성(建成) 등을 죽이려 하면서 이정(李靖)에게 물었으나 이정이 사양하였고, 이적(李勣)에게 물었으나 이적도 사양하였으니, 진왕이 이 때문에 두 사람을 존중했던 것이다.
대저 임금이란 하늘이다. 그러니 임금이 비록 무도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찬탈하거나 폐위시킬 수 있겠는가.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이 한 일을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위의 진 나라와 당 나라의 네 사람은 그 식견이 대략 같았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큰 분의(分義)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광해군(光海君)을 폐위한 것은 백사(白沙)가 계책을 세워서 김류(金瑬) 등에게 경계를 남겨서 된 일이었다. 그래서 고사(高士)인 창해(滄海) 허격(許格)이 일찍이 백사를 지탄하여 이름을 불렀는데, 남들이 나무라자 대답하기를,
“그는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도 모르는 자인데 어떻게 존경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 의리가 실로 옳다. 그러나 백사같이 현명한 분이 어찌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김류와 이귀(李貴) 등이 중망(重望)이 있는 사람을 의탁하고자 하여 이런 말을 지어낸 것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는데, 그 말이 그럴 듯하다.

[백사(白沙)를 제사하는 글] 광해군 무오년(1618)에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의 적소(謫所)에서 죽어서 포천현(抱川縣)에 반장(返葬)하였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은 제문에서,
“모년 월 일에 지상(地上)의 연안(延安) 이모(李某)는 아들 경엄(景嚴)을 보내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으로 제사를 올립니다. 아아, 상공이 이렇게 되었단 말입니까. 말은 금하니 다할 수 없고, 몸은 늙어서 달려갈 수 없습니다. 먼저 죽은 자는 거경(巨卿)이 오기를 기다리는데아직 죽지 못한 자는 조자룡(趙子龍)처럼 몸을 빼어 달려가지 못합니다. 한 잔 술을 따라 올리면서 영원히 작별을 고합니다. 아아, 애통합니다. 부디 흠향하십시오.”
라고만 하였다. 이때 조정이 혼란하여 두 분이 모두 죄인의 몸이 되어 있었으니, 그 말을 다 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송(宋) 나라 고조(高祖)때에 홍호(洪皓)가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이때에 아직 진회(秦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장자소(張子韶)가 찾아와서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문에,
“모년 월 일에 아무개 벼슬의 모(某)는 맑은 술을 따라 아무개 벼슬을 지낸 혼령께 고합니다. 아아, 애통합니다. 부디 이 술을 흠향하소서.”
라고만 하였으니, 그 슬프디 슬픈 정이 오히려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하였다. 이 두 분의 일은 시대는 다르지만 경우는 동일한 것이다.

[조용주(趙龍洲)] 인조조(仁祖朝) 계미년(1643)에 용주 조경(趙絅)이 전한(典翰)으로서 일본 통신 부사(通信副使)에 차출되어 갔었는데, 돌아올 때에 일본에서 주는 선물들을 한 가지도 받지 않아 짐꾸러미가 보잘것 없었으며, 칼 한 자루만을 받아서 차고 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군관(軍官) 홍우량(洪宇亮)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번 사행(使行)에서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겠다.”
하니, 우량이 대답하기를,
“저는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공께서 차신 칼은 추호(秋毫)보다 훨씬 큽니다.”
하였다. 그러자 용주가 웃고는 칼을 풀어서 바다에 던지고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과연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우량이 그렇다고 하였다. 우량은 곧 숭정 처사(崇禎處士)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동생이며 판서 남파(南坡) 홍우원(洪宇遠)의 형인데,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제주 목사와 수사(水使)에 이르렀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단 한 개의 왜물(倭物)도 가져오지 않았다. 숙종 을해년(1695)에 조공(趙公)과 함께 청백리(淸白吏)로 선발되었다.

[임성정(任城正)의 근면함과 독실함] 세종조(世宗朝)의 종실(宗室) 임성정은 예업(藝業)에 뜻을 두어서 거문고를 잘 탔다. 상이 말하기를,
“임성(任城)의 거문고는 본래부터 남들과는 다른 정조(情調)가 있으니, 타인들의 미칠 바 아니다.”
하였다. 집이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는데, 매일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문지방에 걸터앉아 양쪽 손을 번갈아가며 무릎 장단을 치기를 3년이나 하였으므로 남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장구치는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입 옆에 손을 대고 손가락을 놀리기를 밤낮없이 하였고, 누가 찾아오면 보고도 못 본 체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또 3년이었으니, 대개 피리부는 연습을 했던 것이다. 깡마르고 연약하여 활쏘기나 말타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서, 아침마다 활과 화살을 갖고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과녁을 쏘기를 또 3년이나 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술이 숙달되어서 활 잘 쏘는 자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이것은 이륙(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개 사람들이 예업(藝業)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비가 만일 임성정처럼 전념하여 독실하게 공부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글로 써서 권면한다.

[교관(敎官) 박손경(朴孫慶)] 호는 남야(南野)이고, 숙종 계사년(1713)에 태어났으며, 예천(醴泉)에 살았다. 문장과 학문이 있어서 천거를 받아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의 나이가 겨우 한 살 밖에 많지 않았으나 봉양함에 있어서 뜻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집이 몹시 가난했고, 손수 어머니 방에 불을 땠는데 춥고 더운 계절에 따라 땔나무의 양을 조절하여 차고 더운 온도가 알맞게 하였다.
그의 나이 70이던 임인년에 용궁(龍宮)에 사는 진사 이중장(李仲章)이 그를 찾아갔는데, 그는 촌사(村舍)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 달밤에 찾아뵈었으나 만나지 못하였으니, 수수 밑둥을 캐어 다음날 어머니 방에 불을 때려고 밭에 나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밭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으니, 이는 과연 행실이 독실하고 효성스럽고 청렴했던 동한(東漢)의 선비라 하겠다.
교관의 동생은 박민경(朴民慶)이다. 영조조(英祖朝)의 친공신(親功臣) 아무개가 아들이 없자 위세를 이용하여 강제로 민경을 뺏어다가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뒤에 아무개가 역모로 처형되었으나, 상이 특별히 민경을 풀어주고 연좌(連坐)시키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 비록 친척이라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아내와 함께 산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아내는 길쌈을 하고 남편은 신을 삼고 자리를 짰으며,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한 해에 쓰고 남은 것이 수백 금(金)이나 되었는데 이것으로 가난한 형을 도와주었으며, 제사와 부모의 봉양 등 모든 의절(儀節)을 자신이 몸소 맡아하였다. 형이 신는 미투리를 매달 대어주었으므로 이를 안스럽게 여긴 형이 “미투리는 딱딱하여 짚신처럼 편하지 않다.” 하고는 늘 짚신을 신자, 민경이 드디어 짚신을 삼아서 대어주었다.
요즈음 인륜과 풍속이 퇴패(頹敗)한 때에 이 두 사람은 이처럼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행실이 독실하였으니, 나같이 병들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살아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 형은 사우(士友) 사이에서 자주 그 문학과 행실에 대하여 얻어 들었으나, 그 동생에 대해서는 지금 이중장(李仲章)을 통하여 듣고서, 이를 기록하여 본보기로 삼는다.

[진사 이광란(李光蘭)] 진사 이광란은 자가 성의(聖猗)인데, 판관 석인(錫仁)의 아들이며 한음(漢陰) 문익공(文翼公)의 후예로, 나에게는 부집(父執)이 된다. 지조가 청렴 결백하고 가난을 달갑게 여겨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며, 성품이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데 성의를 다하였다. 마을의 친구인 천여(天與) 정석몽(鄭錫夢)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남을 조문(弔問)하러 갔던 적이 많다. 그러나 얼마 전 이 진사를 조문하러 갔을 때 보니, 애통해하고 곡하며 우는 모습이 실로 차마 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때 이미 소상을 지냈고, 나이 또한 60이 가까웠는데도 애통해하고 사모하는 정이 초상 때와 전혀 다름이 없었으니, 대개 하늘이 낳은 효자이다. 평생에 한 가지 물건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집이 헌릉(獻陵) 옆에 있었는데, 이때 안씨(安氏) 성을 가진 자가 침랑(寢郞)으로 있었다. 그 자가 판목(板木)을 몰래 베고는 남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흔히 나무로 부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이 진사에게도 한 그루를 보낸 것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일이 발각되어 안(安)은 귀양가고 뇌물을 받은 자는 환납(還納)하라는 관의 명령을 받았으나, 그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홀로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에 탄복하였다. 만년에는 가난과 병이 더욱 심하여 전지(田地)를 다 없앴고, 가문을 이어갈 자식도 하나 없었다. 일찍이 병이 있어서 책을 팔아 약값에 충당하였는데, 시를 짓기를,
내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며 / 吾生軀殼受父母
선대의 서적은 자손에게 물려줄 유산 / 先代書籍遺子孫
오늘날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으니 / 今日此身生死際
두 가지 다 지키기는 아무래도 어렵겠네 / 細分輕重不兩存
사람의 생사란 이미 정해진 것이니 / 人生生死有前定
약을 쓴다고 죽을 사람 살리겠나 / 藥餌焉能起死人
괜스레 세전지물(世傳之物)만 없애버리고 / 徒使靑氈無全物
살아 생전 좀벌레 같은 몸이 되었네 / 生前謾作蠹蟲身
하였다. 끝내는 가난 속에서 죽고 말았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하였다.

[효자 김귀찬(金貴賛)] 귀찬은 평강(平康) 사람인데, 나이 아홉 살에 아버지를 따라 평양(平壤)의 저자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병이 나서 길에 쓰러져 몸이 뻣뻣이 굳고 눈이 감기어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귀찬은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길 옆에 있는 최씨(崔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 처마밑을 찾아들었는데, 이때 날씨가 춥고 비가 쏟아졌다. 귀찬이 시체에 짚거적을 깔아주고 자신의 몸으로 시체를 덮어서 껴안고 함께 누웠자니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사람의 소리라곤 들리지 않았다. 최씨가 그 애쓰는 마음을 가련히 여겨 타이르기를,
“너의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명을 달리하였는데, 너 또한 나이가 어리니 죽을 것이 틀림없다. 잠깐이라도 방으로 들어오너라.”
하였으나, 귀찬은 울면서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이틀 낮밤이 지난 후에 뻣뻣하던 시체가 갑자기 움직이면서 감겼던 눈이 다시 떠졌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이니 다시 살아났다. 당시 어사였던 김상적(金尙迪)이 포장(褒奬)할 것을 계문(啓聞)하여 정려(旌閭)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文廟)에 종사(從事)한 것이 참람(僭濫)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선유(先儒)의 논의가 있었다. 설총은 원효(元曉)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훈독(訓讀)하여 후생(後生)을 훈도하였으니, 이는 얼룩소[犂牛]의 새끼이지만 색깔이 붉고 뿔이 아름다운 경우라 하겠다. 그러니 어찌 그 아버지를 논하겠는가.
그러나 최치원은 이교(異敎)를 숭상하던 신라 때에 태어나서 오로지 불교에 아첨하였으며, 또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조(麗祖)가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글을 올려 뜻을 전하였는데, “계림에는 누렇게 낙엽이 지는데, 곡령에는 송백(松柏)이 푸르디 푸르구나[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현종(顯宗)이 조업(祖業)을 은밀히 도운 공이 있다 하여 시호를 내려 포장하였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숨어 지내며 물외(物外)의 경지에 노닐었으니, 만절(晩節)은 조금 볼 만하다 하겠다. 문장이 고상하고 화려하여 그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였으며, 당(唐) 나라의 고운(顧雲)과는 과거(科擧)의 동년(同年)이다. 고운의 송별시에,
바다 위에 세 마리의 금오가 있다는데 / 我聞海上三金鰲
금오는 머리에 높은 산을 이었다네 / 金鰲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진주로 만든 궁궐이 찬란하고 / 山之上兮珠宮貝闕
산 아래엔 끝없는 파도가 넘실댄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곁에 한 점의 계림이 새파란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이 잉태하여 빼어난 인재 낳았어라 / 鰲山孕秀生奇特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네 / 文章感動中華國
열여덟에 사원을 누비며 싸움을 벌여 / 十八橫行戰詞苑
한 화살로 금문의 대책(對策)을 쏘아서 맞혔더라 /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
일찍이 고변(高駢)의 서기(書記)가 되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었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현륙(顯戮)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도 또한 음주(陰誅)를 의논한다.”
는 말이 있었다. 황소가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평상(平床)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만년에,
인간 세상 벼슬길엔 마음이 가지 않고 / 人間之要路通津眼無開處
물외의 산과 물을 꿈마다 찾아가네 / 物外之靑山綠水夢有歸時
라는 구절을 남겼으니, 대저 문장이 기고(奇高)한 인물일 뿐이요, 유자(儒者)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당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성묘(聖廟)에 배향하는 것은 참람하지 않겠는가.

[석지형(石之珩)] 개성(開城) 사람으로 호가 수현(壽峴)인데,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문집에 실린 휴세유(休世遊) 한 편은 자구(字句)가 까다로워 읽을 수가 없어서 비록 문장에 노숙(老熟)한 자라도 거의 읽어내려가지를 못하니, 필시 사람들을 속이는 작품일 것이다. 아무리 읽기 어려운 《서경(書經)》의 반경(盤庚)·소고(召誥)·낙고(洛誥) 등 편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렇기야 하겠는가.
그의 시 가운데 구 중랑(具中郞) 부인의 만사(挽詞)에서,
부인의 덕이란 알아내기 어렵지만 / 婦德人難識
아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네 / 徵之別有方
손님이 오거든 술상이나 밥상 보고 / 客來看酒食
남편이 외출하면 옷차림을 보면 되리 / 郞出見衣裳
아직 전신(全身)의 열기를 점치기도 전에 / 未卜全身熱
먼저 극월(隙月)의 빛에 잠기었구려 / 先潛隙月光
붉은 깃발 따르던 부인의 넋이 / 魂隨丹去
새삼 두 아이 곁을 맴도는구나 / 却繞兩兒傍
하였는데, 이른바 ‘미복전신열(未卜全身熱)’이란 옛날 역인(逆人)의 처의 꿈이야기로서 《강목(綱目)》에 보이는바, 이 말을 인용한 것은 도무지 온당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남용익(南龍翼)이 《기아(箕雅)》에 이 시를 뽑아 넣었으니, 더욱 웃을 일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시(古詩)를 뒤섞어 인용함]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득의시(得意詩)가 있는데,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요 / 久旱逢甘雨
타향에서 만나는 옛 친구라 / 他鄕見故知
꽃촛불이 고즈넉한 첫날밤이요 / 洞房花燭夜
금방에 내걸린 빛나는 이름이라 / 金榜掛名時
하였고, 또 실의시(失意詩)에,
홀어미가 아이 안고 흐느껴 울고 / 寡婦携兒泣
장수가 적에게 사로잡혔네 / 將軍被敵擒
사랑을 잃은 궁녀의 얼굴이요 / 失恩宮女面
낙방하고 돌아오는 사나이 마음이라 / 下第擧人心
하였는데, 명(明) 나라 초기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였으나 이미 《용재수필(容齋隨筆)》에 보인다.
또 말하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절명사(絶命辭)에,
북을 쳐서 목숨을 재촉하는데 / 擧鼓催人命
돌아보니 뉘엿뉘엿 해가 기우네 / 回首日欲斜
저승에는 여관이 하나도 없다하니 / 黃泉無一店
오늘 밤은 누구네 집에서 잘까 / 今夜宿誰家
하였다.”고 했으나, 이것은 곧 명 나라 송렴(宋濂)의 고제(高弟)인 손궤(孫蕢)가 처형될 때 지은 것과 약간 다를 뿐이다. 그 시에,
북소리 바야흐로 촉급한데 / 鼉鼓聲正急
서산의 해도 기울어가네 / 西山日又斜
저승에는 여관이 없다하니 / 黃泉無客店
오늘 밤엔 누구네 집에서 잘까 / 今夜宿誰家
하였다.
또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는 우리 나라 아무개의 시라고 하면서,
봄 산의 길이 험해 나무꾼에게 물으니 / 春山路僻問歸樵
앞 봉우리 아스라한 돌길을 가리키네 / 爲指前峯石逕遙
스님은 구름과 함께 골짜기로 돌아가고 / 僧與白雲還暝壑
달은 밀물을 따라 바다 위로 떠 오른다 / 月隨滄海上寒潮
늙어감에 세상 물정은 믿을 수 없고 / 世情老去渾無賴
해 지나도 유람의 흥췬 사라지지 않는구나 / 遊興年來獨未消
돌아보면 외로운 돛이 또한 티끌 자취인데 / 回首孤帆又塵迹
강 건너 종소리에 밤만 깊어 가노라 / 疏鍾隔渚夜迢迢
하였는데, 이것은 곧 왕양명(王陽明)의 차두목운(次杜牧韻)인바, 이를 동인(東人)의 시 속에 한데 넣었으니 너무나 치밀하지 못하다.

[《남명시집(南冥詩集)》] 《남명시집》에는 산정(刪定)할 곳이 많다. 그 중 무제일절(無題一絶)에,
약을 먹어 장수하려 함은 / 服藥求長年
고죽군의 아들만 못하다네 / 不如孤竹子
한 번 서산의 고사리를 캐먹고는 / 一食西山薇
만고의 세월 동안 죽지 않았네 / 萬古猶不死
하였는데, 이것은 원(元) 나라 사람 노처도(盧處道)의 이제채미시(夷齊採薇詩)로서 호응린(胡應麟)이 지은 《시수(詩藪)》에 나오며, 위의 불(不) 자가 숙(孰)으로 되어 있다. 또 만성일절(謾成一絶)에는,
취하고 버리는 인정을 탓할 것이 못 되니 / 取舍人情不足誅
구름마저 아첨 떨 줄 어떻게 알았으랴 / 寧知雲亦獻深諛
갠 날엔 앞다투어 남쪽으로 내려가다 / 先乘霽日爭南下
흐려지면 너도나도 북쪽으로 몰린다네 / 却向陰時競北趨
하였는데, 이청강(李淸江)의 《후청록(鯸鯖錄)》에는 이것을 모재(茅齋)의 관운시(觀雲詩)라고 하였으며, 선(先) 자가 선(旋)으로 되어 있다.

[역대 임금의 어제(御製)] 선조(宣祖)의 시에 실제(失題) 두 절구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사냥개처럼 달려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니 / 來如獵狗去如風
조선 땅을 훑어감에 남은 것이 없구나 / 收拾朝鮮一罄空
남은 것은 옮길 수 없는 푸른 산뿐인데 / 只有靑山移不得
앞으로 그림 속에 그려 넣고 말리라 / 將來描入畫圖中
하였는데, 필시 가리키는 바가 있을 것이나 어떤 일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일찍이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보니, 선조 신축년(1601) 겨울에 명 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도 끝도 없이 탐욕을 부려서 일로(一路)가 소연(蕭然)하였으므로 주사(主事)가 시를 읊어서 이를 풍자하였다고 했는바, 그 내용이 어제(御製)와 같다. 조경남은 당시 사람이니 착오가 없을 듯한데 이것이 어제 속에 들어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그리고 그 사기(詞氣)가 너무 박절하여 훌륭한 임금이 지은 것 같지는 않으며, 또한 선조는 지성으로 중국을 섬겼으니 사신으로 온 자가 혹시 지나친 행동을 했더라도 의당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시를 지어서 풍자하기까지 했겠는가. 설사 조경남의 기록이 잘못이고 실제로 어제라고 하더라도 이 시는 당연히 품정(稟定)하여 삭제했어야 할 것이다.
또 선조의 희부유생시(戱賦儒生詩)를 실었는데,
갈건으로 배 불리고 한정에서 돌아와서 / 葛巾剩飽漢亭旋
초가집서 하룻밤이 한 해라네 / 蓬篳呻吟夜敵年
썩은 책 속의 진부한 글 되씹으며 / 咀嚼敗篇陳腐味
가련케도 목을 빼고 급제할 날만 기다리네 / 可憐矯首桂花天
하였으니, 이런 시는 사실 한 때의 붓장난으로 읊은 것이지, 책에 싣기에는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도 일을 맡은 신하가 이를 품재(稟裁)하여 삭제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서사(書辭)의 과당한 칭찬] 요즈음 사람들은 칭찬함이 지나쳐서, 문장은 반드시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같다.”고 하며, 시사(詩詞)는 반드시 “《문선(文選)》의 시와 성당(盛唐)의 시 같다.”고 하며, 학문은 반드시 “박문(博文)과 약례(約禮)를 겸비하였고, 본성을 극진히 하여 천명(天命)을 안다.”고 하며, 훈업(勳業)은 반드시 “이윤(伊尹)·부열(傅說)·주공(周公)·소공(召公) 같다.”고 한다. 그러니, 칭찬을 하는 자의 아첨이야 말할 것도 못 되지만, 이런 칭찬을 받아들이는 자의 참람함은 또 어떻다 하겠는가.
유자후(柳子厚)가 두온부(杜溫夫)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가 나한테 보낸 편지에 반드시 주공(周公)이니 공자(孔子)니 했는데, 주공과 공자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남을 말할 때는 반드시 수준에 맞게 해야 한다. 그대가 유주(柳州)에 와서 일개 자사(刺使)를 보고 주공이니 공자니 한다면, 지금 연주(連州)를 거쳐서 조주(潮州)를 찾아뵌다면 또 두 사람의 주공·공자를 얻을 것이며, 서울에 간다면 또 당연히 백 명, 천 명의 주공·공자를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가슴 속에는 어찌 그리도 야단스럽게 주공과 공자가 많은 것인가.”
하였으니, 이때 유우석(劉禹錫)이 연주에 있었고 한퇴지(韓退之)가 조주에 있었기 때문에 “연주를 거쳐서 조주를 찾아 뵌다.[道連謁潮]”는 말을 한 것이다. 이 편지를 읽는다면 말이나 글이 실제와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의 문집을 보면, 봉교(奉敎)나 비답(批答)하는 글에서 권흉(權凶)이나 용렬한 무리까지도 걸핏하면 이윤이니 주공이니 하고 칭송하면서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어찌된 일인가.

[과장(科場)에서의 거짓 조작] 이 세상에 있는 서적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사부(四部)의 서고(書庫)나 이유(二酉)의 서각(書閣)에 비장된 책들은 박식하다고 이름난 자라 하더라도 다 독파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후세에 과장에 나온 선비 가운데는 거짓으로 고사(故事)를 만들어서 고관(考官)을 속이는 자들이 더러 있다.
세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응시하여 사서의(四書疑)에 대한 대책문(對策文)을 짓는데, 선유(先儒)의 성씨(姓氏)를 만들어대려 하여도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돌담 틈서리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가짜 선유를 하나 만들어 내어 ‘석간 사씨(石間蛇氏)가 운운하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과부(科賦)를 전공하여 변려문의 대구(對句)에 정교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가 일찍이,
송옥이 가을을 슬퍼하는 것과 같고 / 同宋玉之悲秋
라는 한 구절을 얻었으나 대구(對句)를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자 마침내 가짜로 고사를 만들어서 대(對)를 맞추기를,
월금이 춘정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 類越金之懷春
하였는데, 세상에 많이 전해져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근래에는 이런 폐단이 더욱 심하다. 정모(鄭某)라는 자가 반시(泮試)를 치르는데, 왕이 중용(中庸)에 대해서 책문(策門)하니, 대책문에 쓰기를,
“광평 유씨(廣平游氏)가 말하기를, ‘중용은 하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하고, 그 이하로는 이런 취지로 부연설명해 나가 마침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는 왕이 그 출처를 묻자, “유서(類書)에 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임금을 속이고 현자(賢者)를 우롱한 죄가 크다 하겠다. 처음 벼슬길에 나가면서 이렇게까지 거짓된 짓을 하니, 세도(世道)와 사습(士習)이 참으로 한심하다.
일찍이 소설(小說)을 보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명 나라 때 어떤 선비가 조용한 방을 하나 빌려서 글을 읽었는데, 방 옆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두 그루 오동나무가 있었으며, 한 줄기 물이 문 앞을 흐르고 있었다. 성화(成化) 연간에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는데, 이때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문장공(文莊公) 구준(丘濬)이었다. 그 선비는 여러 번 낙방한 것이 한탄스러워서 논미(論尾)에 쓰기를,
“두 그루 오동나무가 우물을 끼고 있고 한 줄기 물이 문 앞을 흐르니, 말한들 무엇하리오, 말한들 무엇하리오.”
하였다. 공(公)은 이 자가 박학한 선비라 생각하고 그를 뽑았다. 그 뒤 회연(會宴) 때에 그 선비를 불러서 그 출처를 물으니 선비가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건 진짜 고사(故事)로구나.” 하였으니, 실로 한 번 웃을 만한 일이다. 이 선비는 원래 속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으나 구공(丘公)이 자기 스스로 속았던 것이다.
소동파(蘇東坡)가 ‘형(刑)과 상(賞)을 충후(忠厚)하게 함이 지극함을 논한다’는 시험에서 대답하기를,
“요(堯) 임금 때에 고요(皐陶)가 사사(士師)를 맡고 있었는데, 장차 사람을 죽이려 하면, 고요는 ‘죽여야 합니다’는 말을 세 번이나 하였고 요 임금은 ‘살려 주라’는 말을 세 번 하였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고요의 법 집행이 엄격함을 두려워하면서도 요 임금의 용형(用刑)이 관대함을 기뻐하였다.”
하였는데, 고관(考官)이 읽어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 뒤 그 출처에 대하여 묻자, 소동파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는데, 이 일이 마침내 미담(美談)으로 전해졌다. 동파가 지어낸 이야기가 비록 실제로는 없는 일이지만, 이와 같이 글을 짓는 것은 불가하지 않으니, 오늘날 세상에서 만들어내는 거짓 고사(故事)와는 같지 않다.

[방책(方策)] 판목(板木) 중에서 큰 것을 책(策)이라 하고 작은 것을 방(方)이라 한다. 《사기(史記)》의 귀책열전(龜策列傳)에, “조심하여 그 일을 좌방(左方)에 연결하였다.” 하였으며, 일자열전(日者列傳)에 “하방(下方)에 편집하였다.” 하였는데, 근세의 문서에서 ‘좌방’이나 ‘하방’에 쓰는 것이 여기에서 연원한다.

[반한(反汗)] 지금 사람들이 명령을 내렸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을 ‘반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유향전(劉向傳)에서 나왔다. 명령을 내는 것은 땀을 내는 것과 같은데, 땀은 나오면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명령을 발하였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니 이것이 반한(反汗)인 것이다.

[악석(樂石)] 경로(景魯) 목조수(睦祖洙)가 일찍이 묻기를,
“제가(諸家)의 문집(文集)의 비지(碑誌)를 보면 ‘악석(樂石)’이란 글자를 많이 썼는데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했는데, 내가 대답을 못했었다. 그 뒤 《사기(史記)》의 시황본기(始皇本記)에 보니, 갈석비(碣石碑)를 새긴 비문에 말하기를,
“신하들이 공렬을 칭송하면서 ‘이 돌’에 새기기를 청하였다.[君臣誦烈 請刻此石]”
하였는데, 그 주에서 승암(升菴) 양신(楊愼)이 말하기를,
“‘청각차석(請刻此石)’을 지금의 비문에서는 ‘각차악석(刻此樂石)’이라고 하는데, 후인들이 악석(樂石)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망녕되이 고친 것이다.”
하였고, 당(唐) 나라 봉연(封演)의 《견문기(見聞記)》에 이르기를,
“악석(樂石)은 사수(泗水) 가의 부경석(浮磬石)으로 만든 비석을 말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樂’ 자는 그 음이 음악(音樂)의 ‘악’인 것이다.

[생강(生薑)이 나무 위에서 나다] 소백온(邵伯溫)이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병이 심하자 이천(伊川)이, ‘선생께서 이렇게 되었으니 원컨대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듣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선군이 대답하기를, ‘평생 동안 도를 배웠지만,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네.’ 하였다. 그래도 이천이 묻고 논란하기를 그치지 않자 선군이 농담을 던지기를, ‘정숙(正叔)은 생강이 나무 위에서 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으니, 그렇다면 필시 생강이 나무 위에서 죽겠군.’ 하였다.”
하였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가 남명학기(南冥學記)를 보니,
“옛날에 어떤 사람 둘이 처음으로 생강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필시 나무 위에서 날 것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흙에서 날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무 위에서 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흙에서 난다면 나귀 한 마리를 주겠다.’ 하므로 마침내 고로(故老)를 찾아가서 물었다. 고로가 ‘생강은 흙에서 나는 물건이다.’고 하자 즉시 약속대로 나귀를 주고는, 또 말하기를, ‘나귀는 비록 뺏겼지만 아무래도 생강은 나무 위에서 나는 물건일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속어(俗語)로서, 이천이 남의 말을 믿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 것을 소강절(邵康節)이 놀린 것이다. 이상은 모두 수필임

진(秦) 나라 이후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의리가 더욱 심해져서 당계(堂階)의 사이가 점점 막혀 아랫사람들의 생각이 위에 통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융성하던 시절에는 조정 신하를 접어(接御)하는 것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명(明) 나라 조정이 비록 엄중함과 각박함을 숭상했지만, 그래도 인종(仁宗)·선종(宣宗) 두 임금 때는 시신(侍臣)들과 함께 앉아서 의논하였으며, 말하는 중에도 흔히 선생이라고 부르는 등 예대(禮待)하는 뜻이 깊고 두터웠었다.
우리 나라도 국초(國初)에는 그러했었다. 문종(文宗)이 동궁(東宮)으로 있던 때는 날마다 궁료(宮僚)들과 접하였으며, 간혹 밤에 촛불을 켜 들고 직숙(直宿)하는 방을 찾아가서 자(字)를 부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정의(情意)가 서로 통해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은의(恩義)가 충만했던 것이다.
연산군이 즉위해서는 하는 일이 대개 법도에 맞지 않았으므로 남들이 자기를 보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사인 심순문(沈順門)은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한 이후로도 이를 고치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러하다.

한(漢) 나라 때는 신민(臣民)을 적몰(籍沒)할 경우 그 아내와 딸을 몰수하여 궁비(宮婢)로 삼았으니, 이른바 귀신(鬼薪)이니 백찬(白粲)이니 하는 부류로서 제사(諸司)와 관부(官府)에 있으면서 물건 만드는 일에 충당되었던 것이며, 궁녀로 삼은 것이 아니다.
당(唐) 나라 이후로는 액정(掖庭)으로 몰수하여 넣고 재색(才色)이 있는 경우 왕왕 임금을 모시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무척 무도한 일이다. 명(明) 나라 때는 반역한 가문의 남자를 공신에게 주어서 노예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을사년(1545, 인종 1)의 사화 때에 윤임(尹任) 집안의 부녀자가 모두 정순붕(鄭順朋)의 집에서 복역(服役)하였으니, 청명(淸明)한 조정에서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다.

경수창(耿壽昌)이 창시한 상평창(常平倉)은 좋은 법이다. 원(元) 나라 때 서울에 쌀이 귀해지자 매년 쌀 수십만 석을 풀어서 싼값으로 민간에 팔았고, 세조(世祖) 이후로는 매년 한 차례씩 거행하였는데, 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백성이 많았다.
올 신미년(1751, 영조 27)에 서울의 쌀값이 심하게 뛰어서 100문(文)으로 1두(斗) 7승(升) 밖에 사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태창(太倉)이나 각종 군창(軍倉)에는 뜨고 썩어가는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으니, 만약 1만여 석을 내어서 값을 낮추어 팔았다가 가을에 곡식을 사서 채웠더라면 백성과 나라가 모두 편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상이란 자들이 이런 계책은 낼 줄을 모르고 그저 수만의 서울 백성들을 거의 굶어죽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내가 의영고(義盈庫)의 봉사(奉事)가 되어서 공상(供上)을 맡아 매일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궐(詣闕)하였는데, 그때 노상에 거지 아이들이 모여 서서 추위를 하소연하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뜬 뒤에 보면 간간이 뻣뻣한 시체가 되어 길에 누워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를 본다면 어찌 측은해 하지 않겠는가. 만약에 오부(五部)에 명하여 매 계(契)마다 토실(土室) 하나씩을 지어서 볏짚을 많이 깔아주어, 낮에는 동냥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몸을 부칠 수 있게 해 준다면 결코 얼어 죽는 폐단은 없을 것이다. 이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전혀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간혹 이런 부류는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말하기까지 하니,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세금을 걷는 아전들이 매일같이 문앞에 와서 매우 급하게 독책(督責)을 해대고 있다. 법으로 정해진 정당한 공부(貢賦)를 어찌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을까마는, 올해는 크게 흉년이 들어서 집집마다 쌀독이 비었으니 보기에 매우 딱하다. 듣건대 나라에서 급재(給災)의 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백성들은 한 줌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송(宋) 나라의 왕홍(王鴻) 자가 익도(翼道)이며 《광여기(廣輿記)》에 나옴 이 일찍이 미균명(米囷銘)을 짓기를,
“사람의 음식을 훔쳐 먹느라고 부산하여 편치 못한 놈은 쥐이고 하늘이 낳은 생명을 학대하여 제멋대로 잡아먹고서도 부족하게 여기는 놈은 범이다. 나는 학대하려 해도 차마 범이 될 수는 없으며, 도둑질하려 해도 차마 쥐가 될 수는 없으니, 차라리 이 창고를 지켜서 나의 처신을 편안히 하겠다.”
하였으니, 당시의 목민자(牧民者)로 하여금 이를 외우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 정한 관청과 관원이 매우 많지만 지금은 용관(冗官)을 모두 태거(汰去)하였다. 그런데도 경용(經用)은 날이 갈수록 부족하니, 이것을 보면 재물의 소비가 용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어 나가는 구멍에 있는 것이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부터 참람된 칭호를 훔쳐 차지한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진서(晋書)》에 나오는 요적(妖賊) 왕시(王始)는 무리를 모아서 태평황제(太平皇帝)라고 자칭하고, 아비를 태상황(太上皇), 형을 정동장군(征東將軍), 동생을 정서장군(征西將軍)이라 불렀다. 연(燕)의 모용진(慕容鎭)이 쳐서 사로잡아 도성의 저자에서 처형했는데, 처형에 임하여 어떤 이가 그 아비와 형제의 소재를 물으니, 왕시가 대답하기를,
“태상황은 외부로 몽진하셨고 정동장군과 정서장군은 모두 난병(亂兵)에게 해를 당하여, 짐(朕) 한 몸만 살아 있다.”
하였다. 그 처가 화가 나서 말하기를,
“입 좀 닥치시오. 그 입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또 그 따위 말을 하는 것이오.”
하니, 왕시가 말하기를,
“황후여, 자고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겠소.”
하였다. 행형(行刑)을 맡은 자가 칼자루의 고리로 그를 툭 치니, 쳐다보고 말하기를,
“붕(崩)하면 붕하는 것이지.”
하면서 끝내 제호(帝號)를 바꾸지 않았다 한다. 사마광(司馬光)이 《통감(通鑑)》에 이 이야기를 수록하였는데, 마치 골계(滑稽) 같아서 항상 불만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는 곧 한 시대의 세변(世變)을 기록하면서 제호(帝號)의 가치가 천박해진 것을 슬퍼한 것이었다.
요즈음의 속설(俗說)에 또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관상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한 선비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관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필시 황제가 될 것이다.”
하였다. 선비가 이 말을 들은 뒤부터는 행실과 학업을 일절 닦지 않고 절도없이 허랑하게 놀면서 머지않아 황제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굶어서 죽게 되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그의 처에게 이르기를,
“짐이 장차 붕어(崩御)하게 되었으니 황후는 태자를 불러서 유조(遺詔)를 듣도록 하시오.”
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배를 잡고 웃을 이야기이지만, 또한 세상 사람들의 경계가 될 만한 것이다.

조사(朝士)에게 곤장을 명하는 법이 당(唐) 나라 무후(武后) 때부터 더욱 심해져서 공경(公卿)에게 매질하는 것을 노예와 같이 하였다. 개원(開元) 연간에 자사 양준(楊濬)이 장죄(贓罪)에 연루되었는데, 상이 장형(杖刑)을 명하자, 승상 배요경(裵耀卿)이 상소하기를,
“곤장을 쳐서 죽음을 속죄하여 주는 것은 그 은혜가 매우 큰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풀고 매를 맞는 것은 무척 욕된 일이니, 노예에게나 베풀 일이지 사인(士人)에게 미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요경의 말 한 마디로 인하여 드디어 이 법이 정지되었다.
송(宋) 나라에 와서는 일찍이 조사(朝士)에게 태형이 미친 적이 없었으니, 예(禮)에 맞다고 하겠다.
명(明) 나라는 법을 씀이 각박하고 촉급(促急)하여, 의견을 아뢰었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신하를 대정(大庭)에서 곤장을 치도록 명한 적이 왕왕 있었으며, 더러는 금의위(錦衣衛)에 내려서 태형을 가한 다음 가두어 두기도 하였다.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에 할 만한 일이겠는가.
우리 나라도 근세에 이러한 거조가 많이 있었으니, 위에 있는 자는 의당 잘 헤아려서 조처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모두 잡록임

[노비법(奴婢法)]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서 제일 억울한 법이다. 어떻게 대대로 계속 천민이 되어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고려사》의 이행검전(李行儉傳)에 이르기를,
“행검이 전법랑(典法郞)이 되었는데, 임금의 사랑을 받는 정화원비(貞和院妃)가 어느 백성을 자신의 노예로 여겼으므로 이 백성이 전법사(典法司)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왕이 정화원비의 노예로 결단하여 그에게 주도록 하라는 유지(有旨)를 내려 독촉하자 판서 김서(金㥠)가 동료와 더불어 노예로 결단하려 하였으나 행검은 죽을 각오를 하고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행검이 병이 나서 말미를 얻어 집에 있게 되자 김서 등이 그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즉시 결단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칼이 내려와서 전법사의 관리들을 베어 자르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김서는 등창이 나서 죽었고 그 동료들도 연이어서 죽었으나 행검만 혼자 면하였다.”
하였고, 안축전(安軸傳)에 이르기를,
“공이 언젠가 말하기를, ‘내 평생에 일컬을 만한 일이 없지만, 네 차례 사사(士師)가 되어서 억울하게 종이 된 백성이 있으면 반드시 밝혀서 속량(贖良)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아조(我朝)의 의원군(義原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손자이다. 일찍이 해서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소인의 조모는 자갸[自家] 우리 나라 사람이 종실의 귀한 자를 ‘자갸’라고 부른다. 의 계집종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도망하였는데,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자손이 매우 많습니다. 숨어 살면서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죄가 더없이 큽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나아와 고하는 것이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하였다. 의원군은 본래 이런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를 물리쳤지만 그 자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간청하였고, 또 화명기(花名記) 노비를 호적에 편성함을 화명(花名)이라 한다. 를 올렸는데 인구가 수백여 명이었다. 공이 불태울 것을 명하고 이르기를, “너의 말은 망녕된 것이다.” 하니, 그 자는 할 수 없이 돌아갔다. 공이 서울로 돌아오려는 때에 그 자가 찾아와서 배행(陪行)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이 또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자는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고 후미(後尾)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공의 일행이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렀을 때, 어떤 양반 집에서 애절한 곡성(哭聲)이 들려나왔다. 사공에게 물어보니, 그 집은 며칠 전에 역질에 전염되어 온 가족이 몽땅 죽고 젊은 부인 한 사람만 남았으므로 염습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이 듣고 비통해하고 있는데 잠시 후 그의 무리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공이 불러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미 우리 집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만약 면천(免賤)하고 싶다면 초상이 난 저 집에 가서 너희가 염장(斂葬)할 수 있겠느냐?”
하니, 그 자들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자기들 행장 속의 돈 5백 쾌를 내어서 4구의 시체를 모두 즉시 염습한 다음 남은 돈은 몽땅 그 집에 주어서 장례와 제사에 쓰게 하였다. 이튿날 날이 저물어서 공이 여관에 들었는데, 꿈에 인조대왕이 와서 이르기를,
“네가 음덕(陰德)을 쌓았으니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공은 아들이 없었고 부인이 단산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공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부인도 역시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과연 임신이 되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벙어리 귀머거리에 바보였다. 공이 부인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겨우 아들이라고 하나 낳았는데 이처럼 병신으로 태어났으니 꿈에 귀인(貴人)이라고 한 것은 과연 빈 말이었구나.”
하였다. 그 뒤에 인평대군의 적손(適孫)이 모두 주륙(誅戮)을 당하고 이 아들이 적통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곧 지금의 안흥군(安興君)이다.
이런 몇 가지 일로 미루어 보면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일찍이 보건대, 종을 추심한 집안이 비록 수백 수천 금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필경에는 귀속할 곳이 없어지고, 더러는 자손이 끊어지거나 가난하여 구걸하다가 죽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것이 의롭지 못한 재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무릇 재화(財貨)란 재화(災禍)인 것이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서 능히 그 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자손들은 의당 이런 일들을 거울삼아 한결같이 종량(從良)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 추핵(推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을 누리고 후손을 넉넉하게 해주는 도리일 것이다. 조심하고 조심하여라. 수필임

담배[南草]는 일본에서 나온 것으로 2백 년 전에는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비로소 생겼는데 얼마 안 되어 온 세상에 두루 퍼졌다. 그 풀은 경전(經傳)에도 안 보이고 탕액(湯液)과 관련된 서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하나의 요망한 풀이다. 민간에서 다투어 심어서 모리(牟利)를 꾀하는 것이 마치 당송(唐宋) 시절의 차(茶)와 같으나 그 해독은 더 깊다. 차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공효가 있지만, 이 풀은 성질이 뜨겁고 맛은 매우며 독하다. 독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피우면 어지럽고, 화기(火氣)를 마시는 것이므로 담화(痰火)가 있는 자는 당연히 해를 입게 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는, 길 가는 사람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은 친소(親疏)의 구별이 없는 것이며, 부녀자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혐의쩍어하지 않으니 이것은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것이며, 종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은 존비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위의(威儀)가 손상되고 무람없는 버릇이 생긴다. 작게는 베개와 이불과 옷가지를 태우고, 크게는 궁실과 마을을 태운다. 또한 곡식을 생산해야 할 토지에 먹을 수 있는 곡물을 심지 않고 이런 쓸모없는 풀을 심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잡록임

[바다 속의 큰 섬]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섬들이 많으니, 도적(圖籍)에 올라 있지 않은 것도 필시 많을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만났던 삼척(三陟) 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뱃사람이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나흘만에 일본의 서쪽에 닿았다가 대마도로 보내져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보니 바다 속에 큰 섬이 있었는데, 하루 반 동안 섬을 빙 돌아 거의 배를 댈 뻔 했으나 역풍(逆風)이 쳐서 끝내 배를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수(里數)를 계산해보면 크기가 우리 나라의 한 지방과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올 임인년(1782, 정조 6)에 도척면(都尺面)에 사는 상한(常漢)을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를,
“영동(嶺東)의 양양(襄陽)에 가서 뱃사람을 따라 바다에 들어갔는데,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며칠 만에 어떤 섬에 닿았습니다. 그 섬은 갈대밭이 질펀하고 수목이 울창하였습니다. 뱃사람 8명이 모두 뭍에 내려서 사방으로 달려가보니 1, 2백 리 되는 곳에 인적이라곤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바람이 잠잠해져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이는 필시 삼척 사는 사람이 보았던 섬일 것이다.
근간에 사부(師傅) 안응창(安應昌)의 《잡록(雜錄)》을 보니,
“인조조(仁祖朝)에 황익(黃瀷)이 통제사로 있던 때에 어떤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남방국에 사는 사람인데, 그 나라는 일본의 서남쪽 2천여 리에 있으며, 밀물과 썰물이 없다.’ 하고는, 또 ‘그 나라는 본래 신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신라가 망하게 되자 태자가 종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려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나 골짜기는 좁고 사람은 많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민서(民庶) 20여 만 호와 함께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어떤 섬에 이르러서 살았는데, 나라 이름을 남방국(南方國)이라 하고는 25개 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백성들은 모두 신라의 후예들이며 지금도 건재한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 혹시 영동의 뱃사람이 만났던 섬이 아닐까. 밀물과 썰물이 없다고 한 것은, 우리 나라 영동의 바다 중에서 일본의 서해와 서로 접하는 곳은 하나의 큰 못을 이루어 본래 밀물과 썰물이 없으니, 말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 기이하다. 애오라지 이문(異聞)을 기록하여 이를 남겨두는 바이다.

[일본의 학자들] 내가 일찍이 왜인(倭人)의 동자문시(童子問詩)를 보았는데,
바다는 넓고 하늘이 틔었는데 초가 삼간 있으니 / 天空海濶小茅堂
계절이 흘러흘러 봄기운이 푸근하구나 / 四序悠悠春意長
우스워라 도연명은 이런 경지 모르고 / 却笑淵明無卓識
북창 아래 누워서 희황 시절만 즐기더라 / 北窓高臥傲羲皇
라는 시가 있었다. 그 뒤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선곡잡기(蟬谷雜記)》를 보니,
“일본인인 낙양(洛陽)이등유정(伊藤維楨)원좌(原佐)가 《동자문(童子問)》을 지었는데, 모두 180여 조목이며 3책으로 되어 있다. 호는 고학 선생(古學先生)이다. 맏아들 장윤(長允)이 발간하고 문인 임경범 문진(林景范文進)이 발(跋)을 지었다. 유정이 말하기를, ‘유가(儒家)의 학문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장 꺼린다. 도(道)를 논하고 경(經)을 풀이함에 있어서는 마치 대낮에 도시의 네 거리에 서 있는 것과 같이 명백 정확하여야 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속일 수 없어야만 비로소 절당(切當)한 것이다. 부회(附會)하거나 가차(假借)해서 적당히 영합(迎合)해서는 안 되고, 특히 잘못을 변명하여 단점을 가리우는 것을 꺼리며, 또 치장하여 그럴 듯하게 보이려는 것을 경계한다. 그런데 종전의 선비들은 걸핏하면 이런 여러 병들을 범하였으니, 도리를 논하고 경전을 해석하는 데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의 심술(心術)을 크게 파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매우 좋은 말이다. 이 외에도 격언(格言)이 매우 많은데, 바다 가운데 있는 섬 속의 오랑캐 나라에도 이와 같이 학문을 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내가 나름대로 《동자문》 3책에서 논한 바를 보니, 대체로 맹자(孟子)를 받들어 높이면서 때때로 이천(伊川)을 비판한 것이었다.
영종(英宗) 무진년(1748)에 통신사(通信使)로 갔을 때이다. 서기(書記) 중에서 유씨(柳氏) 성을 가진 자가 호를 난릉(蘭陵)이라고 하는 화천(和泉) 사람을 만났는데, 그 자가 문학(文學)이 있기에 이등씨(伊藤氏)의 학문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 자가 대답하기를,
“이등은 참으로 저희 나라의 호걸(豪傑)한 선비입니다. 그러나 오도(吾道)가 아니므로 자세한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한다. 이는 대개 이등의 학문이 정주(程朱)를 배척한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등명원(藤明遠)이란 자는 이등유정의 무리였는데, 제술관(製述官)과 서기에게 글을 보내어 《중용》이 자사(子思)의 저서가 아니라고 장황히 주장하였으나, 말이 논리에 맞지 않고 문리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그 학문의 수준을 알 만하다.
인조 계미년(1643)에 조용주(趙龍洲)가 통신사로 갔을 때이다. 이때 임도춘(林道春)이란 자가 있었는데, 호가 나산(羅山)·석안항(夕顔巷)이며, 유학으로 칭송을 받았고 관위(官位) 또한 높아서 민부경(民部卿)을 하고 있었다. 용주와 더불어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문사(文詞)와 식견은 비록 칭찬할 만한 것이 없으나, 문학으로 한 나라에 명성을 날려 국중(國中)의 문한(文翰)이 모두 그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무진년(1748, 영조 24)의 통신사 때는 국자좨주(國子祭酒)를 하는 임신충(林信充)이란 자가 있었는데, 곧 임도춘의 증손이다. 대대로 문형(文衡)을 쥐어 국서(國書)와 사한(詞翰)이 모두 그들의 손에서 나왔으니, 도춘의 아들 서(恕)와 정(靖)이 모두 문임(文任)을 관장하였으며, 서(恕)의 아들 신독(信篤)이 홍문원 학사(弘文院學士)의 벼슬을 지냈는데, 신충은 신독의 아들이다.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옴] 한 문공(韓文公)의 불골표(佛骨表)에 이르기를,
“불법(佛法)은 후한(後漢) 때부터 중국에 흘러 들어왔다.”
하였으며, 또 시(詩)를 짓기를,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지 / 佛法入中國
이미 6백 년이 되었다네 / 爾來六百年
하였다. 살펴보면,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명제(明帝) 때에 중국에 들어왔다.” 하였지만, 소량(蕭梁)의 유효표(劉孝標)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주를 달면서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의 서문을 인용하기를,
“백가(百家)의 글을 훑어보면서 서로 검험(檢驗)하여 보니 신선이 된 자가 146인인데, 그 중의 74인은 이미 불경(佛經)에 나와 있다.”
하였으니, 이 말대로라면 한(漢) 나라의 성제(成帝)·애제(哀帝) 연간에 이미 불경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한무고사(漢武故事)》에 이르기를,
곤야왕(昆邪王)이 휴도왕(休屠王)을죽이고 항복해 왔다. 그에게서 금인(金人)으로 된 신(神)을 얻었는데, 상이 이를 감천궁(甘泉宮)에 두었다. 금인은 키가 모두 한 길 남짓하였으며, 제사에는 우양(牛羊)을 쓰지 않고 향을 피우고 예배만 할 뿐이었다. 상이 그들 나라의 풍속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하였으니, 대개 한 무제(漢武帝) 때는 그 경(經)이 아직 중국에 유행하지 않았으며, 다만 신명(神明)으로서 제사만 지냈던 것이다.
《열자(列子)》를 보면, 주 목왕(周穆王) 때에 서역(西域)의 화인(化人)이 왔다고 했는데, 중들은 환술(幻術)에 능하고 온갖 재주를 부리니, 이 또한 불교 계통의 사람일 것이다.
또 《개황역대삼보실기(開皇歷代三輔實記)》에 이르기를,
“평제(平帝) 때에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내가 전적(典籍)을 보고 있다.’ 하므로 가서 보니 불경(佛經)이 있었다.”
하였으니, 주(周) 나라 때에 오랫동안 불경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진(秦) 나라가 비록 서적을 불태웠으나 한(漢) 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또 한 무제가 곤명지(昆明池)를 파다가 겁회(劫灰)가 나왔는데, 동방삭(東方朔)이 말하기를, “서역의 도인(道人)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서역의 도인이란 불도(佛徒)를 말하는 것이다.
또 《진고(眞誥)》에 이르기를,
“배진인(裵眞人)에게 34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18명은 불도를 배우고 나머지는 선도(仙道)를 배웠다.”
하였는데, 도홍경(陶弘景)이 말하기를,
장안(長安) 시절에 이미 불교가 있었던 듯하니, 배군(裵君)이 곧 그런 일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한퇴지가 말한 것은 정사(正史)에 의거한 것이다. 또 어떤 책을 상고해보면,
“한 명제(漢明帝)가, 머리에 광채를 띤 한 길이 넘는 금인(金人)이 전정(殿庭)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부의(傅毅)가 말하기를, ‘서방(西方)에 신(神)이 있는데 이름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 형체는 길이가 1장(丈) 6척이며 황금색을 띠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낭중(郞中) 채음(蔡愔)과 진경(秦景)을 천축(天竺)에 사신으로 보내어 이를 구하게 했는데, 불경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및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을 얻어서, 사문(沙門) 섭마등(攝摩騰)·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돌아왔다. 백마(白馬)가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해서 낙성(洛城)의 옹문(雍門) 서쪽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우고 이들을 거처하게 했으며, 불경은 난대석실(蘭臺石室)에 깊이 보관하였다. 그리고 청원대(淸源臺)와 현절릉(顯節陵)에 불상(佛像)을 그렸다. 이로부터 비로소 중국에 불교가 전하여졌다.”
하였다.

[패사문(稗沙門)] 불경에서 수행이 없는 중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비유하자면 보리밭에 난 깜부기[稗麥]와 같아서 구별할 수가 없다. 농부는 이 깜부기가 모두 좋은 보리인 줄 알다가 나중에 이삭이 패는 것을 보고서야 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사문이 대중(大衆) 속에 있으면 흡사 지계(持戒)하는 것 같으므로 시주(施主)가 볼 때는 모두가 사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 치인(癡人)은 사실은 사문이 아니니, 이를 이름하여 패사문(稗沙門)이라 한다.”
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선비[儒]라고 일컬어지는 자 가운데 패사문을 면할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불씨(佛氏)가 이처럼 비유를 잘 하였으니, 경계할 줄을 안다 하겠다. 이상은 모두 수필임

육조(六朝)의 사문(沙門)은 흔히 임금을 뵐 때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며, 당(唐) 나라 초기에는 승려들이 부모나 존자(尊者)의 예배를 받았다. 그래서 고종(高宗)이 조칙(詔勅)을 내려 그 예(禮)를 혁파하도록 하자 그제서야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원(元) 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사(國師)니 법왕(法王)이니 하면서 인주(人主)와 항례(抗禮)하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는 고려에서 불교를 존상(尊尙)하여 임금은 반드시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두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에 이를 때까지도 그러하였다. 그러다가 중엽부터 유교가 크게 행해지자 이단(異端)으로 배척하여 용납할 바가 없게 하였고, 치류(緇流)들이 길에서 사족(士族)을 만나면 반드시 몸을 굽히고 꿇어앉아서 절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풍습이 되었으니,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일이라 하겠다.

정묘년(1747, 영조 23) 10월 17일 밤 꿈에 윤창희(尹昌喜)와 함께 귀신 문제에 대해 논하기를,
“귀신은 총명하고 정직하면서도 전일(專一)한 것이다. 전일이란 참된 것이니, 참되면 성실하게 된다. 성실함이 없으면 귀신이 감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용(中庸)》의 귀신장(鬼神章)에서 성실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깨어서 생각해보니 그 말이 타당성이 있기에 글로 기록해 둔다.

여역(癘疫)은, 천지(天地) 사이에서 부정(不正)한 기운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옥(刑獄)이 번거롭고 무겁거나 병혁(兵革)이 거듭되거나 농사가 흉년이 들 경우에 모두 여역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 기운의 성질은 널리 분포되어 있다가 흘러들어가는 것이므로, 이것을 만나는 자는 반드시 병을 앓는다. 그런데 그 기운의 대소에 따라 전염되는 숫자도 많거나 적어져서 경우에 따라 한 나라, 한 지방, 한 마을, 한 집안, 한 사람 등과 같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다.
전염은 대부분 열이 물러간 뒤에 있게 되는데, 대개 악기(惡氣)가 병자의 몸에 엉겨붙어 있다가 날수가 차서 통증이 끝난 후에 열이 물러가면서 아직 흩어지지 않은 기운이 다시 사람에게 침입하여 병이 전염되는 것이요, 귀신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반드시 기운으로 막아야 한다. 약을 태우고 삽주뿌리를 태워서 역질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삼는 것은 그 기운이 강렬한 향을 지녀서 악기를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함께 날 경우, 한 집의 연기는 동쪽으로 나가고 한 집의 연기는 서쪽으로 나가다가 중간에서 서로 합쳐지게 되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가지 않고 위로 솟아올라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니, 그 기운이 서로 버티면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일찍이 술서(術書)를 보니, 군중(軍中)에 역질이 돌 경우 죽은 사람의 시체를 모아서 불태우면 곧 역질이 그친다고 하였다. 또 이민명(李民冥)의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을 보니, 호인(胡人)들은 역질이 돌면 반드시 그 마을을 빙 둘러서 나무를 쌓아놓고 불태운다고 하였다. 역기(疫氣)는 불기운을 따라 흩어지는 것이니, 이 말이 참으로 이치에 닿는다. 그 뒤 서사(西士)의 《직방외기(職方外記)》를 보니,
“가아도국(哥阿島國) 사람들이 모두 역질을 앓고 있었는데, 어떤 유명한 의원이 나라 안팎에 두루 불을 크게 놓아 하루 밤낮을 태우게 하였다. 그랬더니 불이 꺼지면서 역질도 나았다.
대개 병이란 삿된 기운이 침입해서 생긴 것이다. 불기운이 맹렬하면 모든 사기(邪氣)를 씻어낼 수 있으니 사기가 없어지면 병이 낫는 것은 또한 지당한 이치이다.”
하였다. 이것은 내 평소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다.
마을에 역질이 들면 세속에서는 제사지내는 것을 기피하면서, “부정(不淨)한 기운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하고, 또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리면 귀신을 불러들이게 된다.” 하는데, 이것은 시골 구석의 비천한 말이지 군자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설사 역질의 귀신이 진짜로 있다고 하더라도, 귀신은 동류(同類)가 아닌 것은 흠향하지 않는 법이니 자신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일에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더구나 역질에는 귀신이 없음에랴. 또 향을 피우면 귀신을 끌어들이게 된다고 하는데, 이 또한 매우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역질을 물리치려고 태우는 약들이 모두 향기를 내는 것들이니, 대개 그 맑고 매운 기운이 능히 역질의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제사에서 태우는 향만 유독 역귀를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제사의 예(禮)에서는 향을 피워 강신(降神)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는데, 이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堯) 임금은 갑진년(B.C. 2357)이 원년(元年)이며, 21년이 되는 갑자년(B.C. 2337)에 오회(午會)의 초정(初正)에 들어서 양명(陽明)의 중심에 해당하였으므로, 문물(文物)의 융성함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의 건륭(乾隆) 을축년(1745, 영조 21)까지는 4,082년이 지났으므로, 점차 음침(陰侵)하는 운세(運世)로 들어가고 있는데, 이 때문에 세도(世道)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천도(先天圖)를 보면, 자반(子半)에서 오반(午半)까지를 양이라 하고, 오반에서 다시 자반까지를 음이라 했으니, 한 오회(午會)의 기간이 10,800년이므로, 5,400년이 양회(陽會)가 되고 5,400년이 음회(陰會)가 된다. 이제 이번의 오회가 남은 기간이 1,318년뿐이니, 어찌 침음(侵陰)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다시 양(陽)이 일어나는 세상이 없겠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옛날의 세상은 양기(陽氣)가 순후(淳厚)해서 사람이 부여받은 기운 역시 독실(篤實)했었다. 그러므로 음유(陰柔)함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여 악을 제거하고 선을 따르는 데 많은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풍기(風氣)가 날로 떨어져서 음기(陰氣)가 점차 많아지자, 비록 선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언제나 음유(陰柔)한 기운의 방해를 받아 그의 양명(陽明)한 선을 제대로 배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강(陽剛)한 군자가 아니고서는 음(陰)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가 드물다.

풍기(風氣)는 때에 따라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공공(共工)과 구려(九黎)의 난리가 양운(陽運)이 휴명(休明)하던 시절에 있었으니, 그것은 밝은 대낮에도 어두워지는 일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비록 음으로 향하는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해가 질 때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따뜻한 햇살이 빛나는 것과 같은 세상이 어찌 없겠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포말(泡沫)이나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다. 요순(堯舜)은 상고(上古) 시대의 성인이지만 그 햇수를 세어보면 겨우 4천년 전 사람에 불과하다. 한 단위의 원(元)을 129,6000년으로 계산한다면 요순이전에도 몇 천, 몇 만 년이 흘러갔는지 모를 일인데, 허다한 성인들의 이름이 인몰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요순의 이후로도 또 몇 천, 몇 만 년의 세월이 흘러갈지 모를 일이지만, 장래에 이름을 남길 자는 필시 요순·공맹(孔孟)·정주(程朱) 같은 사람 정도에 불과할 것이며, 그 이외는 모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등우(鄧禹)의 이른바 “업적과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는 말은 어쩌면 그리도 비루(卑陋)한 것인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모님께 온전하게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간다.”
하였다. 선비된 자는 응당 자기 분수 않의 일을 잃지 않아서 헛되이 일생을 보내지 않도록 힘써야 할 뿐인 것이다. 명성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상은 모두 잡록임


[주D-001]천록(天祿)의 역사(役事) : 나라의 도서관에서 서적을 고교(考校)하는 일. 천록각(天祿閣)은 한(漢) 나라 때의 장서각(藏書閣)인데, 유향(劉向)·유흠(劉歆)·양웅(揚雄) 등이 여기에서 경서를 교열하였음.
[주D-002]상자평(尙子平) : 후한(後漢) 때의 상장(尙長)으로 자평은 그의 자.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킨 후에 오악(五嶽)과 명산을 유람하였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後漢書 卷八十三》
[주D-003]공수·황패 : 공수는 한 나라 선제(宣帝) 때 발해(勃海)의 태수로 나갔는데, 발해에 도둑이 많자 백성들로 하여금 무기를 팔아서 농기를 사게 하는 등 방법으로 농상(農桑)을 권하였다. 황패도 한 나라 선제 때의 순리(循吏)로서 치행(治行)이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漢書 卷八十九》
[주D-004]오두 : 봄놀이 나온 태수(太守)를 일컫는 말. 송(宋) 나라 때에 성도(成都) 태수가 새해 초부터 4월 19일까지 봄놀이를 즐겼는데, 이때 태수가 놀러 나오면 경내의 사녀(士女)들이 죽 나와서 구경하였으며, 그 태수를 오두라 불렀다 한다.
[주D-005]진왕(秦王) : 당(唐) 나라 태종(太宗). 진왕으로 있으면서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태자 건성을 죽이고 제위(帝位)에 올랐다.
[주D-006]거경(巨卿)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 거경은 동한(東漢) 사람 범식(范式)의 자. 젊어서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때 장소(張劭)와 친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장소가 나타나 자기가 죽은 날짜와 장례일을 알려주었다. 날짜를 꼽아보니 장례일이 이미 지나 있었다. 그래서 소거(素車)와 백마(白馬)로 달려갔는데, 이때 장소의 관을 하관(下棺)하려는 참이었으나 장소의 상여가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엿줄을 잡고 끌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八十一》
[주D-007]고조(高祖) : 남송(南宋) 고종(高宗, 재위 1127~1162)의 착오임. 《宋史 卷三百七十三》
[주D-008]우량은 곧……형인데, : 우량은 우원의 형이 아니고 아우임. 5형제 중에 맏이가 우정, 셋째가 우원, 넷째가 우량임.
[주D-009]얼룩소[犂牛]의……아름다운 경우 : 부모가 변변치 않더라도 자식이 훌륭하면 훌륭한 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중궁(仲弓)을 두고 평하기를,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또 뿔이 바르게 났으면, 비록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해도 산천(山川)의 신령이 그를 버리겠느냐?” 하였다.
[주D-010]주사(主事) : 조선조 때 평안도 및 함경도 지방의 토관직(土官職)의 하나.
[주D-011]귀신(鬼薪) : 옛날 형벌의 일종. 죄인의 가족 중 남자를 몰수하여 궁중이나 관부의 잡역·수공업적 생산의 노역 등을 시켰는데, 당초에 종묘의 땔나무를 공급하게 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주D-012]백찬(白粲) : 옛날 형벌의 일종. 죄인, 특히 고급 관원이었던 죄인의 가족인 여자나 명부(命婦) 등을 몰수하여 제사에 쓸 쌀을 잘 찧어 정백미(精白米)를 만드는 작업을 맡겼던 데서 생긴 이름이다.
[주D-013]액정(掖庭) : 원래 궁중의 정전(正殿)과 초방(椒房) 이외의 비빈과 궁녀들이 거처하던 곳을 말하는데, 이들 후궁(后宮)·귀인(貴人)·채녀(采女)들을 관장하는 관청을 이르기도 한다
[주D-014]모용진(慕容鎭) : 《진서》에는 남연(南燕)의 헌무제(獻武帝) 모용덕(慕容德)으로 되어 있으며, 모용진은 보이지 않는다.
[주D-015]낙양(洛陽) : 여기서는 일본의 경도(京都)를 지칭함.
[주D-016]이등유정(伊藤維楨) : 일본의 학자이며 교육자. 자는 원좌(原佐)이고 호는 인재(仁齋)이며 시호는 고학(古學)이다. 《동자문》을 지었다.
[주D-017]장윤(長允) : 이등유정의 맏아들인 이등장윤(伊藤長允). 자는 원장(原藏)이며 호는 동애(東涯). 원문의 ‘其長允鋟子梓’는 ‘其子長允鋟梓’의 착오인 것 같다.
[주D-018]곤야왕(昆邪王)이 휴도왕(休屠王)을 : 곤야와 휴도는 모두 한 나라 때 흉노 부족의 추장 이름이다.
[주D-019]화인(化人) : 환술(幻術)을 부리는 사람. 마술사. 한편 불교에서는 부처를, 도교에서는 신선을 화인이라 함.
[주D-020]겁회(劫灰) : 세상이 멸망할 때 일어난다는 불의 재. 불교에서 쓰는 말.
[주D-021]장안(長安) 시절 : 장안에 도읍하던 서한(西漢) 시절을 말함. 동한(東漢)은 낙양에 도읍하였음.
[주D-022]서사(西士) : 서교(西敎)를 전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신부(神父)를 일컫던 말.
[주D-023]오회(午會) : 유가(儒家)의 우주적 시간 단위에서의 한낮[正午]. 소옹(邵雍)은 이른바 원회운세(元會運世)라 하면 30년을 1세(世), 360년을 1운(運), 10,800년을 1회(會), 129,600년을 1원(元)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나누었는데, 이 한 단위를 하루의 밤낮에 비유하여, 1회(會)의 10,800년이 시작되는 때를 하루의 밤중인 자정(子正)에 비하고 그 반인 5,400년이 지나 5,401년이 막 시작되는 때를 한낮인 오정(午正)에 비하여 1회(會)의 한낮 곧 오회(午會)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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