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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천백

아베베1 2012. 6. 25. 23:01

한국고전번역원
분류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초록 최채기(崔彩基)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1. 머리말이 책은 고려 후기의 문인 졸옹(拙翁) 최해(崔瀣:1287〜1340)의 문집을 국역한 것이다. 국역 대본은 1354년 진주(晉州)에서 간행한 목판본을 저본으로 표점한 한국문집총간본(韓國文集叢刊本)이며 대본의 분량은 2권 2책이다. 이 책의 원 저본은 현재 일본의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내에는 1931년에 일본에서 이를 복제한 영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2. 최해의 가계와 생애최해의 삶을 기록한 자료로는 단편적인 몇 편의 글, 즉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열전(列傳),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이 쓴 묘지명(墓誌銘),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의 ≪동현사략(東賢事略)≫ 및 최해 자신의 자서전인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등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 자료는 내용이 소략하고 서로 중복되어 최해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최해의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이고, 호는 졸옹(拙翁), 졸재(拙齋), 예산농은(猊山農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최해의 조상은 대대로 지방의 향리 직을 지냈다. 부친 최백륜(崔伯倫)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는 중현대부(中顯大夫) 민부 의랑(民部議郞)에 올랐고 원나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를 제수받는 등 신진사대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모친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 임씨(任氏)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한 임수(任綏)의 따님이다.최해는 충렬왕 13년(1287)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9세 때에 이미 시를 잘 지었다. 1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7세 때인 1303년에 안축(安軸)과 함께 김태현(金台鉉)이 주관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20세가 되던 해에 성균학유(成均學諭)의 자리를 놓고 최해와 이수(李守)가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부친인 최백륜이 이수를 추천한 당시 재상인 최유엄(崔有渰)을 강하게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최백륜은 고란도(孤蘭島)로 유배를 당하고 최해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최백륜이 유배에서 풀려나고 최해 또한 관직에 복귀하여 예문춘추관 검열(藝文春秋館檢閱)에 제수되었으나 23세 때인 1309년(충선왕1)에 상관과의 마찰로 외직인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최해는 이곳에서 3년 이상 근무를 한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28세 때인 1314년에 예문춘추관 주부(藝文春秋館主簿)에 제수되어 1320년 장흥고사(長興庫使)가 되기까지 예문춘추관에서 봉직하였다. 장흥고사로 있으면서 최해는 원나라 제과(制科)의 예비시험인 정동성향시(征東省鄕試)에 합격하여 그해 10월에 단양부 주부(丹陽府主簿) 안축, 사헌 규정(司憲糾正) 이연종(李衍宗)과 함께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 3월에 제과에 응시하여 급제자 41명 가운데 21등으로 합격하고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에 제수되었다. 개주는 고려에서 원나라로 양식을 운반하는 수로(水路) 상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이 특별히 필요한 자리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변방의 힘든 직책이어서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고려에서는 나라의 자존심을 세운 그를 위해 예문관, 성균관, 전교시(典校寺)의 관원들이 모두 영빈관(迎賓館)으로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성균관승 예문응교 지제교(成均館丞藝文應敎知製敎)에 임명되어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았다가 전교 부령(典校副令)과 전의 부령(典儀副令)을 거쳐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을 지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으로 보인다.이상에서 보듯이 최해는 문학적인 재주를 인정받아 문한의 직책을 자주 맡았으나, 타고난 성격 탓에 남들로부터 자주 배척을 받아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에서 이렇게 말했다.조금 더 장성해서는 개연히 공명(功名)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성격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는 데다 또 술을 좋아하여 몇 잔만 마시면 남의 장단점을 들먹이기 좋아하며, 귀로 들은 말을 입속에 묻어 둘 줄 몰랐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아낌과 존중을 받지 못하여 관직에 등용이 되었다가도 곧바로 배척을 받아 쫓겨나곤 하였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히 여겨 그의 성격을 고쳐 주려고 권유해 보기도 하고 책망해 보기도 하였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줄 몰랐다.결국 그는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절친한 친구인 이제현(李齊賢)이나 민사평(閔思平)처럼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중년 이후로는 그나마도 관직에서 물러나 지내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말년에 와서 도성 남쪽 사자산(獅子山:예산의 별칭) 아래에다 절의 토지를 빌려 취족원(取足園)이라는 농원을 만들어 놓고 농사로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집이 워낙 가난하여 그가 죽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정도였다고 한다.3. 편찬 및 간행(1) 편찬자신의 글을 스스로 편집하는 경우에는 주로 나이를 기준으로 50세, 60세, 70세에 맞추어 정리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관례이다. 최해 역시도 나이 50을 넘기면서 자신의 글들을 정리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1337년(51세)까지 지은 산문들을 모아 저작 시기에 따라 1차적으로 정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차 정리에서 누락된 글 3편, 즉 1325년에 지은 “국왕이 중서성에 유민의 쇄환(刷還)을 청하는 편지〔國王與中書省請刷流民書〕”와 “행성을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又謝不立行省書〕” 및 1326년에 지은 “한림원에 태위왕을 위해 시호를 청하는 편지〔又與翰林院爲太尉王請諡書〕” 등이 발견되어 1차 정리본의 말미에 추록(追錄)하였다. 이 3편의 편지는 모두 최해가 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재직할 때 지은 글로서, 1차 편집 때 누락된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왕을 대신하여 직무상 중국에 보내는 편지인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지어진 표전문(表箋文)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가 사륙문을 편집할 때 발견되어 천백(千百) 속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정리본이 만들어진 1337년부터 졸한 해인 1340년까지의 작품 역시 시기순으로 수록되었는데, 이것이 저자 자신에 의해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후인들이 편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상은 본 국역 대본인 ≪졸고천백(拙藁千百)≫이 편찬된 경위를 추론한 것이며, ≪졸고오칠≫이나 ≪졸고사륙≫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졸고천백≫에는 ≪동인지문(東人之文)≫의 총서(總序)에 해당하는 동인지문서(東人之文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동인지문≫을 편집하게 된 경위와 시문을 오칠, 천백, 사륙 등으로 독자적인 이름을 붙여 편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모든 시문의 편집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 동인지문서가 지어진 얼마 뒤에 사륙문의 편집을 끝내고 사륙문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을 밝혀 놓은 동인사륙서(東人四六序)를 지었는데, 전자는 최해가 50세인 1336년 2월에서 7월 사이에 지어졌고 후자는 52세인 1338년 여름에 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1336년에 편집이 완료된 것은 오칠과 천백이었을 것이고 사륙문은 2년 후인 1338년에 완료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칠과 천백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고, 사륙문은 국왕을 대신하여 중국 황제에게 올린 표전문이란 점을 감안하면, 오칠과 천백이 함께 편집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때 사륙문이 아니면서 국왕을 대신하여 지었다는 이유로 사륙문 속에 포함되어 있던 세 편의 편지가 발견되어 이미 편집된 천백의 말미에 추록되었을 것이다.여기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졸고천백≫이 1차 정리된 것은 51세인 1337년이고, ≪동인지문≫ 오칠과 천백은 50세인 1336년, ≪동인지문≫ 사륙은 52세인 1338년, 자신의 인생 전반을 정리한 자서전 성격의 탁전(托傳)인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쓴 것은 ≪동인지문≫ 사륙의 편집을 끝낸 직후인 1338년이다. 그리고 예문 응교 때 지은 편지 세 편이 1337년에 지은 작품과 1338년에 지은 작품 사이에 추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고사륙≫도 이즈음에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인지문≫과 마찬가지로 ≪졸고≫ 역시 오칠과 천백이 함께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오칠과 천백의 경우 ≪동인지문≫을 먼저 편집하고 ≪졸고≫를 편집하였다면 사륙 또한 같은 순서로 편집되었을 것이다. 즉 ≪동인지문≫의 편집이 끝나는 대로 ≪졸고≫도 뒤이어 편집된 것이다. 이를 순서대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동인지문≫ 오칠과 천백(1336) → ≪졸고≫ 오칠과 천백(1337) → ≪동인지문≫ 사륙(1338) → ≪졸고≫ 사륙(1338) → 예산은자전(1338)동인지문서에 의하면, 최해는 1321년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면서 원나라 문인들과 접촉하는 사이에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문을 모은 책이 없다는 점을 부끄러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시문을 분류하여 편찬하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에 관직 생활로 인해 미루어오다 10년이 지난 뒤에야 시문의 편집에 착수하였는데 몇 년 뒤 1336년에 오칠과 천백의 편집을 마쳤다. 마침 그때 최해의 나이가 50이 되던 해였으므로 자신의 시문에 대해서도 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낀 듯하다. 그래서 ≪동인지문≫ 오칠과 천백이 끝나는 대로 자신의 시문도 오칠과 천백으로 편집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륙문 또한 ≪동인지문≫의 편집을 마치는 대로 곧바로 ≪졸고≫의 편집을 끝마쳤다. 이로써 최해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자신의 책무를 다하게 되었다. 즉 ≪동인지문≫의 편찬을 통해 당대 최고 문인의 안목으로 역대 인물의 명문장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졸고≫의 편집으로 자신의 시문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이 두 가지 큰일을 마친 그는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이 사자산 자락에서 농사나 지으며 죽음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340년 6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2) 간행최해의 저작으로는 그가 지은 시문인 ≪졸고≫와 신라 최치원으로부터 충렬왕 때까지 전현(前賢)들의 시문을 모아 편집한 ≪동인지문≫이 있는데, 기록상으로는 최해의 사후에 세 차례, 즉 1350년, 1354년, 1355년에 간행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 2종의 문헌은 편찬뿐만 아니라 간행에 있어서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따라서 ≪동인지문≫에 대해서도 아울러 고찰해 보겠다.현재 남아 있는 ≪졸고천백≫은 그가 졸한 지 14년 뒤인 1354년 공민왕 3년에 진주(晉州)에서 간행한 목판본이다. ≪졸고천백≫ 말미에 부기된 간기(刊記)에 의하면 안렴사(按廉使) 곽충수(郭忠守), 목사 최용생(崔龍生), 판관 이신걸(李臣傑) 등이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지정(至正) 14년 갑오년(1354) 8월 진주목(晉州牧)에서 개판(開板)하였다고 하였다. 간기에는 또한 각수(刻手)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판심(板心) 속에도 각수의 이름이 각자의 첫 글자로 새겨져 있다. 즉 각수 행명(行明)은 ‘行’ 자로, 정련(正連)은 ‘正’ 자로, 고청렬(高淸烈)은 ‘高’ 자로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 밖에도 사원(思遠)이란 각수도 포함되어 있는데, 고청렬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사찰의 승려로 보인다. 당시에는 판각의 기술을 사찰에서 주로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사찰의 협조를 받아 판각하였던 것이다. 이때 ≪졸고천백≫과 함께 ≪동인지문사륙≫ 권7〜9(고려대 소장본, 보물 710-5호)도 판각되었는데, 권7의 말미에 “진주목개판(晉州牧開板)”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고 판식이 ≪졸고천백≫과 거의 동일하며 판각에 참여한 각수의 이름도 중복되어 있다.또 이듬해인 1355년에 안렴사 안종원(安宗源)과 목사 최재(崔宰)에 의해 복주(福州), 즉 안동(安東)에서도 ≪동인지문사륙≫이 간행되었다. 안종원은 최해의 친구 안축(安軸)의 아들이며, 최재는 최득평(崔得枰)의 아들로 진주본의 판각을 주도한 최용생에게는 당숙(堂叔)이 된다. 또한 최재의 며느리는 민사평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이들 최씨는 최해와는 본관이 다른 전주 최씨(全州崔氏) 집안으로서 민사평과 인척인 관계로 이 간역을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물 710호와 710-2호로 지정된 2종의 고려대학교 소장본에는 권1〜6(책1〜2)과 권10〜15(책4〜5)가 수록되어 있는데, 권12(책4) 말미의 간기에는 지정 15년 을미년(1355) 1월에 복주에서 개판하였고 간행 주체는 안종원, 최재, 김군제(金君濟)라고 적혀 있으며, 한편 권15(책5) 말미에는 지정 15년 을미년 8월에 개판하였고 간행 주체는 정광도(鄭光道), 최재, 송유충(宋有忠), 김성부(金成富)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보물 710-3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710-4호 아단문고 소장본에도 권12와 권15의 말미에 위와 똑같은 간기가 있다. 만약 권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판각되었다면 간기가 없는 권1〜6(책1〜2)의 경우 이보다 앞서 판각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정국경(鄭國俓)을 전송하며 지은 시〔送金海府使鄭尙書國俓得時字〕가 있는데, 그 시의 주석에서, 정국경이 예전에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급암 민사평이 최해의 ≪동인지문≫과 ≪졸고≫를 건네주었고 정국경이 이를 ‘모두’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시는 ≪익재난고≫의 편집 순으로 볼 때 지정 18년인 1358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때에 민사평이 정국경에게 지어 준 시〔送鄭諫議之官金海得見字〕에는 최해의 글이 사후 10년 동안 간행되지 못하고 상자 속에 있던 것을 정국경이 판각하여 서울로 보내와 선성전(先聖殿)에 보관했다고 칭송하고는, 지금 김해에 내려가 지방관으로서의 정사를 펴서 백성들이 편해지면 그 여가에 이웃 고을을 순시하다가 합천(陜川)의 수령을 만나 그곳에 보관된 판목도 모두 수송해 줄 것을 청하라고 했다.이 두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최해의 졸년이 1340년임을 감안하면 전라도에서 간행한 것은 1350년 전후가 될 듯하다. 즉 최해의 사후 10년을 즈음하여 친구 민사평을 중심으로 ≪동인지문≫과 ≪졸고≫의 간행 사업이 추진되었고, 마침 전라도 안렴사로 가게 된 정국경에게 간행을 부탁하여 정국경이 이를 판각하였고 그 판목을 다시 서울로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8년이 지난 1358년에 정국경이 경상도 김해 부사로 가게 되자 이제현이 송별연을 열어 그의 업적을 칭찬하고 그 자리에 함께한 민사평이 다시 정국경에게 합천에 있는 판목도 서울로 수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판목은 아마도 1354년 진주에서 판각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합천의 수령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판목이 진주에서 가까운 가야산 해인사로 이송되어 보관된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해인사에는 불경 이외에도 잡판고(雜板庫)에 개인 문집의 판목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졸고천백≫보다 100년 앞서 1249년에 판각한 현존 최고(最古)의 문집 판목인 백비화(白賁華:1180〜1224)의 ≪남양시집(南陽詩集)≫(국보 206호)이 해인사의 잡판고에 보관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왜 보관 조건이 좋은 해인사를 두고 서울로 이송하려고 하였을까? 그것은 전라도에서 서울에 올라온 판목이 이미 선성전(先聖殿), 즉 국자감(國子監)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동인지문≫의 판각 목적이 판목의 장기적인 보관보다는 중국 사절에 대한 증여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소지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이 사실은 1568년(선조1)에 을해자(乙亥字)로 인행(印行)된 ≪고사촬요(攷事撮要)≫의 팔도정도(八道程途) 합천(陜川)조에 ≪졸고≫의 책판(冊板)이 수록되어 있고 예천(醴泉)조에는 ≪동인지문≫ 책판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1568년 현재 진주의 판목은 합천에, 복주의 팔목은 인근 예천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상의 사실로 본다면 ≪졸고≫와 ≪동인지문≫은 1350년경에서 1355년까지 5년 사이에 세 차례나 간행된 것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문집의 간행이 보편적이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렇게 짧은 시기에 연거푸 세 차례나 간행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간행의 주역들이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모두 최해와 민사평의 주변 인물로서 민사평의 인척인 전주 최씨(全州崔氏) 집안과 최해의 행장을 쓴 바 있는 정국경이라는 점이며, 셋째는 이들 세 판목을 민사평이 한곳에 모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각자 다른 곳에서 동일 문집을 별도로 간행한다는 것은 전혀 상식 밖의 일로서 문집의 간행이 성행했던 조선 후기에도 이렇게 중복되어 간행한 예는 거의 없었다.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현존하는 최해의 저작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최해의 저작은 ≪동인지문사륙≫ 15권(권1〜권15)과 ≪동인지문오칠≫ 3권(권7〜9), ≪졸고천백≫ 2권(권1〜2)이 있다. 이로 볼 때 최해의 저작은 최소한 ≪동인지문사륙≫ 15권, ≪동인지문오칠≫ 9권과 함께 ≪졸고천백≫ 2권은 확실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해와 동시대 인물이자 제과(制科) 후배인 이곡이 쓴 묘지명에 의하면 최해가 편집한 ≪동인지문≫의 분량이 총 25권으로 되어 있고 권근의 ≪동현사략≫이나 ≪고려사≫에는 ≪동인지문≫ 25권과 함께 ≪졸고≫ 2권이 있다고 하여 현존하는 분량과 1권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1권의 내용이 천백(千百)인지 아니면 총목(總目)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내용과 관계없이 조선 초기에도 이미 현존하는 형태와 비슷하게 최해의 저작들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다음으로 국내외에 현존하는 최해의 저작들을 모두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1. 졸고천백:권1〜2(진주 간행). 일본 존경각 소장. 2.동인지문사륙(보물 710호):권1〜6(간행지 미상), 권10〜15(복주 간행). 고려대 소장.3. 동인지문사륙(보물 710-2호):권1〜6(간행지 미상). 고려대 소장.4. 동인지문사륙(보물 710-3호):권10〜12(복주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5. 동인지문사륙(보물 710-4호):권13〜15(복주 간행). 아단문고 소장.6. 동인지문사륙(보물 710-5호):권7〜9(진주 간행). 고려대 소장.7. 동인지문사륙(보물 710-6호):권7〜9(진주 간행). 계명대 소장.8.동인지문오칠(보물1089호):권7〜9(복주간행).삼성출판박물관 소장.위에서 열거한 8종의 판본을 볼 때 특이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각 권마다 간행지가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졸고천백≫ 권1〜2는 진주, ≪동인지문사륙≫의 권1〜6은 미상이며 권7〜9는 진주, 권10〜15는 복주, ≪동인지문오칠≫의 권7〜9는 복주에서 간행된 것이다.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동인지문≫과 ≪졸고≫의 간행지는 진주, 복주, 전라도 등 세 곳이나 되지만 실제 간행한 내용은 ≪동인지문≫과 ≪졸고≫ 각 1질을 가지고 지역을 나누어 분간(分刊)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전라도에서 정국경이 간행한 것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간행지를 밝혀 놓지 않은 ≪동인지문사륙≫의 권1~6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1~6은 판식이 진주본이나 복주본과는 달리 판심의 하단에 흑구(黑口)가 있으며, 다른 책에는 적어도 1회 이상 권말(卷末)에 간기(刊記)가 수록되어 있는 것에 비해 권1~6은 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350년 전라도에서 처음 판각이 이루어질 때는 그곳에서 완간할 것을 염두에 두고 판각에 임하였기 때문에 권말이나 책말에 간기를 넣을 필요가 없이 마지막 책에 한 번만 넣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라도에서 간역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4년 뒤에 민사평과 인척 관계에 있는 최용생이 진주 목사로 부임하자 간역이 재개되어 ≪졸고천백≫과 ≪동인지문사륙≫ 권7~9 등 몇 책이 판각되고 간역은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55년에 최용생의 당숙인 최재가 복주 목사로 부임함에 따라 ≪동인지문사륙≫ 나머지 내용의 판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 진주본과 복주본은 이전에 판각된 전라도본과는 달리 간행지와 간행 시기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각 책마다 간기를 기록해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복주본과 자체(字體)와 판형(板型)이 흡사한 ≪동인지문오칠≫ 권7~9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인지문오칠≫도 이때 모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간단히 말해 1350년에 전라도에서 정국경이 1차 판각하고, 그 나머지를 1354년에 진주에서 2차로 판각하고, 이듬해인 1355년에 복주에서 마지막으로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최해의 절친한 친구 민사평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정국경, 최재, 최용생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이제현과 안축의 측면 지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1912년에 전라도 보성(寶城)에서 후손 최영숙(崔映淑)에 의해 2권 1책으로 된 ≪농은집(農隱集)≫이라는 이름의 목활자본이 간행되었다. 서명은 최해의 호인 예산농은(猊山農隱)에서 비롯한 것으로,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최해의 문집으로 ≪농은집≫ 1질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목활자본은 최해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동문선≫과 다른 사람의 문집에서 최해의 작품과 관련 기술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으로서, 최해가 자편(自編)한 ≪졸고천백≫과 계통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4. 판본상의 특징본 ≪졸고천백≫의 국역 대본으로 사용된 것은 1354년 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으로서 국내에는 전해지지 않고 일본의 후작(侯爵)인 마에다 도시나리(前田利爲)의 가장문고(家藏文庫)인 존경각(尊經閣)에 보관되어 오던 것을 1931년에 일본의 덕육재단(德育財團)에서 영인(影印)한 것이다. 이 책은 후작의 11대조인 마에다 쓰나노리(前田綱紀:1643〜1724)가 수장하고 있던 것으로서, 그는 가가 번(加賀藩)의 제5대 번주(藩主)로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기도 하고 도서를 편찬하고 동서 고전을 수집하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1대 번주인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1539〜1599)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인물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이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이 판본은 무신정권 때 최우(崔瑀)의 지시로 1241년에 간행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1249년에 간행되어 현재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그 판목이 전해지고 있는 백비화(白賁華)의 ≪남양시집(南陽詩集)≫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 가운데 하나이다. 분량은 2권 2책으로 총 76판이며, 반엽은 9행에 각 행당 19〜23자로 불규칙하다. 반곽의 크기는 세로 27.8cm, 가로 17.2cm이며, 판심은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다. 판심제는 ≪천백(千百)≫으로 되어 있으며 판심 안에 각수의 이름을 나타내는 ‘정(正)’, ‘행(行)’, ‘고(高)’ 등의 글자가 곳곳에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권말에는 간행에 관련된 간기(刊記)가 수록되어 있다.본문에서는 고려 왕과 원나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해당 글자 앞에 한 칸을 띄었으며, 특히 원나라 황제에 대해서는 행(行)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존경을 표하였다. 역대 왕의 휘자 가운데 일부는 피휘하기도 하였는데, 태조의 휘인 건(建), 혜종의 휘인 무(武), 충숙왕의 휘인 도(燾)는 글자의 획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피휘하였고, 성종의 휘인 치(治)는 같은 뜻의 리(理)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의 이름을 모두 피휘한 것은 아니며, 피휘한 왕의 이름 안에서도 모두 다 획일적으로 피휘하지도 않았다. 초기 고려 왕의 이름은 앞에서 제시된 것 외에도 요(堯:정종), 소(昭:광종), 송(誦:목종) 등 피휘하기 어려운 평범한 글자를 쓰는 경우가 많아 이를 일일이 피휘한다는 것은 문자 생활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달리 생각하면 이는 고려 시대 초기에 피휘의 개념이 없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만약에 피휘를 철저히 하였다면 조선 시대처럼 왕의 이름부터 그에 맞게 벽자(僻字)로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5. 구성과 내용≪졸고천백≫은 저자가 자신의 글을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한 자편본(自編本)이다. 저자 초년의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고 주로 30대 중반부터 졸할 때까지의 산문만을 담고 있는데, 전체 분량이 43편밖에 되지 않아 자편본으로는 아주 소수의 작품만 전하고 있다. 따라서 본 해제에서는 수록된 작품 전체에 대하여 각각의 저작 시기, 작품 내용, 작품 관련자와 저자와의 관계, 및 조선 시대 서거정에 의해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었는지의 여부 등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권1>1) 안 양주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安梁州序〕연우(延祐) 연간(1314〜1320)에 부친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지음. 경상도 양주의 수령으로 가는 안목(安牧)을 떠나보내면서 양주 고을의 자연적 특징과 백성들의 습성을 알려 주며 선정(善政)을 베풀 것을 당부하는 글이다. 안목은 최해와 친구이며 안향(安珦)의 손자이다. ≪동문선(東文選)≫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다.2) 해동후기로회 서문〔海東後耆老會序〕1320년(충숙왕7년, 34세) 3월 16일에 지음. 충숙왕 때 최유엄(崔有渰)이 국가 원로들과 함께 중국 낙양(洛陽)에서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와 송나라 문언박(文彦博)이 주도한 두 개의 기로회 고사와 고려 중기 최당(崔讜)이 주도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의 고사를 본떠 기로회를 만들었는데, 이제현(李齊賢)의 부친 이진(李瑱)의 지시로 그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이제현은 최해와 같은 나이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 두타산 간장암 중영기〔頭陀山看藏庵重營記〕1323년(충숙왕10년, 37세) 가을에 지음.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가 관직에서 물러나 불경을 연구하던 삼척(三陟) 두타산의 간장암을 중창(重創)하게 된 경위를 그의 아들 이연종(李衍宗)의 부탁으로 지은 글이다. 이연종은 최해와 1303년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 함께 응시한 인물이다. ≪동문선≫과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수록되어 있다.4) 이익재의 ≪후서정록≫ 서문〔李益齋後西征錄序〕1323년경에 지음. 이제현이 토번(吐蕃)으로 유배 간 충선왕(忠宣王)을 맞이하러 가는 길에 지은 시의 서문이다. 충선왕은 원나라 영종(英宗)에 의해 토번으로 유배되었다가 1323년 이제현의 청에 따라 토번에서 타사마(朶思麻)라는 곳으로 양이(量移)되었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5) 반룡 여 대사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盤龍如大師序〕1324년(충숙왕11년, 38세)에 지음. 반룡정사(盤龍精舍)의 주법(主法)이 되어 떠나는 여(如) 대사를 송별하면서 지은 글이다. 여 대사는 이제현의 둘째 형으로 불도(佛道)와 유도(儒道)를 함께 갖춘 승려로 묘사되고 있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6) 유원 고려국 고 중대광 첨의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로 치사한 충순 민공의 묘지〔有元高麗國故重大匡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諡忠順閔公墓誌〕1324년 5월경에 지음. 최해의 절친한 친구 민사평(閔思平)의 부친 민적(閔頔)의 부탁으로 그 조부 민종유(閔宗儒)를 위해 지은 묘지이다.7) 황원 고려 고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 최공의 묘지명〔皇元高麗故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崔公墓誌銘〕1325년(충숙왕12년, 39세) 8월경에 지음. 최해의 이모부인 최운(崔雲)의 묘지명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8) 과거 공부를 하는 유생들에게 묻는 책문〔問擧業諸生策〕1326년(충숙왕13년, 40세)에 지음. 과거 준비를 하는 성균관의 유생들을 위해 만든 모의 과거 시험문제이다. 최해는 이 당시 검교 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재직한 것으로 추정된다.9) 경씨시권 후제〔慶氏詩卷後題〕저작 시기 미상. 당대의 명인들이 경씨(慶氏)의 어린 아들을 위해 지은 시권(詩卷)의 말미에 쓴 글이다. 경씨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며, 그 내용으로 보아 최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10) 고 사헌지평 김군 묘지명〔故司憲持平金君墓誌銘〕1327년(충숙왕14, 41세) 3월에 지음. 최해의 문인 김섬(金銛)의 부친인 김개물(金開物)의 묘지명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11) 선서 발문〔跋先書〕1327년 8월 27일에 지음. 최해의 부친 최백륜(崔伯倫)이 상주목(尙州牧)에 사는 주공재(周公梓)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그 아들 주신열(周臣烈)의 부탁으로 쓴 발문이다. 주공재는 최백륜이 상주 통판(尙州通判)을 지낼 때 왕래하던 인물이다.12) 선원사 재승기〔禪源寺齋僧記〕1328년(충숙왕15, 42세) 7월 1일에 지음. 최성지(崔誠之)가 강화도(江華島) 선원사에서 죽은 부인과 아들의 기일(忌日)에 재(齋)를 올려 그들의 명복을 빌고, 자신의 생일에는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여 복을 비는 행사를 한 후 이에 대한 기문을 부탁하여 지은 글이다. 최성지는 친구 최문도(崔文度)의 부친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13) 금강산으로 가는 승려 선지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僧禪智遊金剛山序〕1329년(충숙왕16, 43세) 3월 갑신일에 지음.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선지에게 써 준 송서(送序)로서, 이 글을 통해 금강산 각 절에 있는 승려들이 국가와 민간에 끼치는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문선≫과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다.14) 대원 고 정동도진무 고려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원공 묘지명〔大元故征東都鎭撫高麗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元公墓誌銘〕1330년(충혜왕즉위년, 44세) 9월경에 지음. 원선지(元善之)의 묘지명으로서, 그의 부인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15) 김 문정공 묘지〔金文正公墓誌〕1330년 11월경에 지음. 최해를 벼슬에 입문시킨 김태현(金台鉉)의 묘지로서, 그의 유명(遺命)에 따라 지은 것이다. 최해의 문장 가운데 가장 긴 장문(長文)으로 상세한 행력과 함께 스승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찬사가 담겨 있다.16) 고 재상 안죽옥 화상찬〔故相安竹屋像贊〕저작 시기 미상. 안우기(安于器)의 화상을 보고 쓴 글로서, 그의 아들 안목(安牧)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17) 안당지의 ≪관동록≫ 후제〔安當之關東錄後題〕1331년(충혜왕1, 45세) 10월에 지음. 최해의 절친한 친구 안축(安軸)이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나가 지은 시문을 모은 ≪관동록(關東錄)≫의 발문이다. 안축은 이연종(李衍宗)과 마찬가지로 최해와 1303년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 함께 응시한 인물이다.18) 영가군부인 권씨 묘지명〔永嘉郡夫人權氏墓誌銘〕1332년(충숙왕복위1, 46세) 4월에 지음. 권보(權溥)의 딸이자 친구 이제현의 부인인 권씨(權氏)의 묘지명으로 이제현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19) 춘헌호기〔春軒壺記〕1333년(충숙왕복위2, 47세) 5월 경신일에 지음. 춘헌 최문도(崔文度)가 집안 자제들을 가르치는 여가에 투호를 설치하여 공부의 피로를 풀어 주게 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최문도는 최성지(崔誠之)의 아들로서, 이 투호에 대해 이제현의 명(銘)과 안축의 시(詩)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친구 사이로 보이며, 제자 정포(鄭誧)의 장인이기도 하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0) 군부사 중신청사기〔軍簿司重新廳事記〕1334(충숙왕복위3, 48세) 3월 갑자일에 지음. 1230년 응양군 상장군(鷹揚軍上將軍) 김취기(金就起)의 지시로 좌랑 김완(金琓)이 주도하여 군부사의 청사를 중창(重創)하고, 김완이 이에 대한 기문을 부탁하여 중창의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1) 서방으로 돌아가는 노 교수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盧敎授西歸序〕1334년 2월 신미일에 지음. 왕경(王京)의 학관(學官)으로 고려에 온 중국인 노흠(盧欽)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이를 전별하며 지어 준 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권2>22) 서장관으로 가는 정중부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鄭仲孚書狀官序〕1334년 3월 16일에 지음.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는 그의 문인 정포를 전별하면서 중국의 문물과 인물을 보고 많이 배워 올 것을 당부한 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3) 평원군부인 원씨 묘지〔平原郡夫人元氏墓誌〕1335년(충숙왕복위4, 49세) 2월경에 지음. 박거실(朴居實)의 처 평원군부인 원씨의 묘지명으로 사위인 홍의손(洪義孫)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홍의손은 최해의 동년우(同年友)이다.24)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奉使李中父還朝序〕1335년 3월 1일에 지음.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하던 이곡(李穀)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다가 돌아갈 때 이를 전별한 글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이자 최해의 원나라 제과(制科) 후배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5) 수령옹주 김씨 묘지〔壽寧翁主金氏墓誌〕1335년 9월에 지음. 회안부원군(淮安府院君) 왕순(王珣)의 모친 수령옹주의 묘지이다. 최해는 이전에 왕순의 문객(門客)으로 있었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6) 고 밀직재상 민공 행장〔故密直宰相閔公行狀〕1336년(충숙왕복위5, 50세) 2월 1일에 지음. 최해의 친구 민사평(閔思平)의 부친이자 최해 부친 최백륜(崔伯倫)의 친구인 민적(閔頔)의 행장이다.27) ≪동인지문≫ 서문〔東人之文序〕저작 시기 미상. 신라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 명가(名家)들의 작품을 모아 시(詩), 문(文), 변려문(騈儷文)으로 분류하고 이를 합쳐 제명(題名)한 ≪동인지문≫의 서문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8) 당성군부인 홍씨 묘지〔唐城郡夫人洪氏墓誌〕1336년 7월에서 11월 사이에 지음. 박원(朴遠)의 처 당성군부인 홍씨의 묘지로 그의 아들 문보(文珤)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박원은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의 아들로 최해의 친구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29) 고 기성군 윤공 묘지〔故杞城君尹公墓誌〕1337년(충숙왕복위6, 51세) 2월에서 3월 사이에 지음. 윤신걸(尹莘傑: 1266〜1337)의 묘지로 최해의 친구인 처조카 주휘(朱暉)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0) 유원 고 무덕장군 서경등처수수군만호 겸 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 고려재상 원공 묘지〔有元故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高麗宰相元公墓誌〕1337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지음. 최해와 같은 마을에 사는 원충(元忠:1290〜1337)의 묘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1) 밀직부사로 치사한 고 박공의 묘지〔故密直副使致仕朴公墓誌〕1337년경에 지음. 최해와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박인지(朴仁祉)의 부친 박화(朴華:1252〜1336)의 묘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2) 국왕이 중서성에 유민의 쇄환을 청하는 편지〔國王與中書省請刷流民書〕1325년(충숙왕12, 39세)에 지음. 1259년 이후 원나라에 잡혀가거나 도망간 고려인을 돌려보내 줄 것을 중서성에 청한 편지로서, 당시 예문 응교(藝文應敎)인 최해가 충숙왕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3) 또 행성을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又謝不立行省書〕1325년에 지음.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의 모략에 따라 발의된 행성(行省)의 설치 문제를 황제가 금지시킨 것에 대하여 중서성에 감사를 드리는 편지로서, 역시 예문 응교 때에 충숙왕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4) 또 태위왕을 위해 시호를 청해 달라고 한림원에 부탁하는 편지〔又與翰林院爲太尉王請諡書〕1326년(충숙왕13, 40세)에 지음. 1325년에 훙서(薨逝)한 충선왕(忠宣王)에 대하여 시호를 지어 줄 것을 한림원에 청하는 편지로서, 역시 예문 응교 때에 충숙왕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5) 권일재를 대신하여 지은 어머니에게 드리는 제문〔代權一齋祭母文〕저작 시기 미상. 이제현과 함께 원나라의 만권당(萬卷堂)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권한공(權漢功)의 모친인 영가군대부인(永嘉郡大夫人)에게 올리는 제문으로서, 권한공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6) 서방으로 돌아가는 장운룡 국침을 떠나보내며 주는 글〔送張雲龍國琛西歸序〕저작 시기 미상. 개경에 여행 왔다 서방으로 돌아가는 중국 학자 장국침(張國琛)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면서 지어 준 송서(送序)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7) ≪동인사륙≫ 서문〔東人四六序〕1338년(충숙왕복위7, 52세) 여름에 지음.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인 장표(章表)들을 모아 편집한 ≪동인사륙≫의 서문으로서, 황제와 동일한 칭호를 쓰던 과거의 장표들과 ≪동인사륙≫의 편집 시기인 원나라에 복속된 후에 사용하던 용어가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하여 볼 것을 말한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8)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1338년에 지음. 최해가 만년에 사자산(獅子山), 즉 예산(猊山) 아래에서 절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이때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지은 자서전 성격의 탁전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39) 고 정당문학 이공 묘지〔故政堂文學李公墓誌〕1338년에 지음. 충선왕의 요속(僚屬)을 지낸 이언충(李彦沖)의 묘지이다. 최해가 이언충의 문객을 지낸 적이 있었으므로 지어 준 것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40) 전백헌 묘지〔全柏軒墓誌〕1339년(충숙왕복위8, 53세) 8월경에 지음. 백이정(白頤正), 이제현, 최해와 함께 학문적 교유를 한 백헌(柏軒) 전신(全信:1276〜1339)의 묘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41) 영주 이지 은소를 현으로 승격시킨 사실을 기록한 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1339년경에 지음. 영주의 이지현이 은소로 강등된 일과 이 지역 출신 환관에 의해 다시 현으로 승격된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권한공(權漢功)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42) 최 어사가 부친의 80세 장수를 경하드리기 위해 연 잔치에서 지은 시의 서문〔崔御史爲大人慶八十序〕1339년 12월에 지음. 원나라에서 벼슬하다 잠시 고려에 들러 부친의 80세 수연(壽宴)을 연 감찰어사 최대중(崔大中)을 위해 잔치 때 축수한 시첩의 서문을 지은 것이다. 최대중은 최해와 한집안 사람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43) 최태감 묘지〔崔太監墓誌〕1340년(충혜왕복위1, 54세) 5월경에 지음. 원나라에서 태부감 태감(太府監太監)을 지낸 최안도(崔安道:1294〜1340)의 묘지이다.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이상에서 볼 때 최해의 작품은 주로 그와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을 위해 지어 준 것이 대부분이고 그 교유 폭도 매우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43편의 글 가운데 32편이라는 다수의 작품이 서거정에 의해 ≪동문선≫에 수록된 점으로 짐작건대, 그의 문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크게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6. 국역상의 문제점고려 시대에 팔만대장경이 간행되고 활자가 발명되는 등 출판문화가 발달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출판은 소수 지배층의 전유물로서 일반에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판각의 상태가 정교하지 못하고 문자의 교정도 정밀하지 못하여 오자(誤字)나 결자(缺字), 연자(衍字)가 다수 나타난다. 이는 각수(刻手)의 단순 실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판하본(板下本)을 쓴 필사가의 부주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러한 판본상의 문제가 번역을 어렵게 하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는데, ≪졸고천백≫ 역시 동일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문선≫이나 ≪동국여지승람≫ 또는 현존하는 금석문(金石文) 등 관련 자료들을 이용한 교감이 필요했고, 이러한 교감을 통해 상당수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번역을 진행하였다.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려 국왕에 대한 피휘자(避諱字)가 종종 나오는데, 이 또한 번역을 할 때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다. 예를 들어 해동후기로회(海東後耆老會) 서문에서 송나라 ‘장도(張燾)’는 ‘장수(張壽)’로 판각되어 있다. 이는 충숙왕의 이름이 ‘도(燾)’이므로 피휘하기 위해 ‘도(燾)’ 자 아래의 ‘연화발(灬)’을 결획(缺劃)시킨 것이다. 만약에 피휘자를 고려하지 않고 그 대상이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면 ‘장수(張壽)’로 번역할 위험이 있다.마지막으로 고려 시대 문집의 경우 관직명의 표기가 매우 복잡다단하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에 복속됨에 따라 충렬왕 이래로 여러 차례의 관제개편(官制改編)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관직들이 복잡하게 바뀌어 관청명과 관직명의 구분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허다하다. 또한 관청과 관직의 정확한 완칭을 찾기도 어려우며, 여러 개의 관직이 나열되어 있는 경우 재직 기간이 겹쳐 있는 겸관(兼官)의 나열인지 아니면 재직 기간이 다른 별개 관직의 나열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관직들이 나오면 특별히 구분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동시에 맡은 겸관으로 처리하였다. 관직 제도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빨리 나와 더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를 기대한다.7. 맺음말최해는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고 완전히 복속한 충렬왕 때에 태어나 복속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충선왕과 충숙왕 때에 관직 생활을 하였다. 또한 안향, 백이정 등을 통해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입됨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학문을 기반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대부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록 그의 친구인 이제현, 안축, 민사평처럼 정치적으로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문학에 있어서만은 당대 최고로 평가되었다.최해의 작품은 그의 문집이 간행된 지 65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현재 그 일부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동문선≫을 통해 누락된 시문을 일부 복원해 볼 수 있기도 하지만 사륙문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시 또한 몇 수 되지 않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문집을 통해 그의 문학의 일단을 살펴봄과 아울러 귀족과 사대부 지식인 사이의 알력과, 불교와 유학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가는 고려 후기의 사회 속에서 그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저명한 한 문인의 문집이 수백 년 동안 국내에는 한 권도 전해지지 않고 뜻밖에도 바다 건너 일본의 한 봉건 영주에 의해 수장(收藏)되어 그곳에서 대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2006년 10월 일참고 문헌今西龍, <尊經閣叢刊拙藁千百に就きて>, ≪拙藁千百≫, 德育財團, 1931.辛承云, <東人之文五七(殘本) 解題>, ≪계간서지학보≫ 제16호, 한국서지학회, 1995.尹炳泰, <崔瀣와 그의 東人之文四六>, ≪東洋文化硏究≫ 5, 경북대학교, 1976.趙東一 外, ≪高麗名賢 崔瀣 硏究≫, 국학자료원, 2002.千惠鳳, <東人之文四六解題>, ≪高麗名賢集≫ 第5輯, 1980.

 

 

 

 

 

 

 

 

 

 

 

 

 

 

 

 

 

 

 

 

 

 

 

 

 

 

 

 

 

 

 

 

 

 

 

 

 

 

 

 

 

 

 

 

 

 

 

 

 

 

 

 

 

 

 

 

 

 

 

 

 

 

 

 

 

 

 

 

 

 

 

 

 

 

 

 

 

 

 

 

 

 

 

 

 

 

 

 

 

 

 

 

 

 

 

 

 

 

 

 

 

 

 

 

 

 

 

 

 

 

 

 

 

 

 

 

 

 

 

 

 

 

 

 

 

 

 

 

 

 

 

 

 

 

 

 

 

 

 

 

 

 

 

 

 

 

 

 

 

 

 

 

 

 

 

 

 

 

 

 

 

 

 

 

 

 

 

 

 

 

 

 

 

 

 

 

 

 

 

 

 

 

 

 

 

 

 

 

 

 

 

 

 

 

 

 

 

 

 

 

 

 

 

 

 

 

 

 

 

 

 

 

 

 

 

 

 

 

 

 

 

 

 

 

 

 

 

 

 

 

 

 

 

 

 

 

 

 

 

 

 

 

 

 

 

 

 

 

 

 

 

 

 

 

 

 

 

 

 

 

 

 

 

 

 

 

 

 

 

 

 

 

 

 

 

 

 

 

 

 

 

 

 

 

 

 

 

 

 

 

 

 

 

 

 

 

 

 

 

 

 

 

 

 

 

 

 

 

 

 

 

 

 

 

 

 

 

 

 

 

 

 

 

 

 

 

 

 

 

 

 

 

 

 

 

 

 

 

 

 

 

 

 

 

 

 

 

 

 

 

 

 

 

 

 

 

 

 

 

 

 

 

 

 

 

 

 

 

 

 

 

 

 

 

 

 

 

 

 

 

 

 

 

 

 

 

 

 

 

 

 

 

 

 

 

 

 

 

 

 

 

 

 

 

 

 

 

 

 

 

 

 

 

 

 

 

 

 

 

 

 

 

 

 

 

 

 

 

 

 

 

 

 

 

 

 

 

 

 

 

 

 

 

 

 

 

 

 

 

 

 

 

 

 

 

 

 

 

 

 

 

 

 

 

 

 

 

 

 

 

 

 

 

 

 

 

 

 

 

 

 

 

 

 

 

 

 

 

 

 

 

 

 

 

 

 

 

 

졸고천백 간기

간기(刊記)


지정(至正) 14년 갑오년(1354, 공민왕 3) 8월 일 진주에서 개판(開板)함.

색(色) 호장(戶長) 정조(正朝) 정길(鄭吉)
각수(刻手) 정련(正連)
     행명(行明)
     사원(思遠)
     고청렬(高淸烈)
사록참군사 겸 장서기(司錄參軍事兼掌書記) 통사랑(通仕郞) 전교시 교감(典校寺校勘) 김을진(金乙珍)
판관(判官) 통직랑(通直郞) 판도정랑 겸 권농사(版圖正郞兼勸農使) 이신걸(李臣傑)
목사(牧使)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교령 겸 관내권농사(典校令兼管內勸農使) 최용생(崔龍生)
안렴사(按廉使) 봉선대부(奉善大夫) 내서사인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內書舍人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곽충수(郭忠守)


 

[주D-001]색(色) : 이 책의 간행을 담당한 책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2]정조(正朝) : 고려 시대 정 7 품의 향직(鄕職)이다.

 

 

졸고천백 제1권
안 양주(安梁州)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양주(梁州)고을은 계림(雞林)의 우리 고향과는 100여 리 떨어져 있다. 금년 여름에 내가 상복(喪服)을 벗고 고향에서 돌아오다가, 마침 죽옥(竹屋) 상공(相公)이 외직으로 나와 합포(合浦)의 진(鎭)을 맡았다기에 공을 뵈러 찾아갔다. 이때 헌양(巘陽)을 지나 양주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날씨가 매우 더운 데다 비까지 내렸다. 길 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늘 밤 내내 비가 내리면 양하(梁河)의 물이 불어나 며칠 동안은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정해진 휴가 기한이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걸음을 늦출 수가 없어서 양주로 들어가 묵지 못하고 곧바로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멀리 바라보니 관사(官舍)와 민가(民家)가 우거진 대숲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키며 양주 고을이라 하기에 그곳의 풍속에 대하여 물어서 그들로부터 한두 가지나마 듣게 되었다.
양주는 그 지역이 협소하고 백성들은 경박하여 제멋대로이다. 농토가 모두 저습한 지대에 있어서 날씨가 가물면 벼농사가 잘되지만 비가 오면 수해를 입어 풍년과 흉년이 다른 고을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대체로 해마다 가물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하늘이 어찌 양주 고을 백성들만을 위하여 항상 비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풍년이 드는 해는 아주 적고 흉년은 해마다 이어지니, 지형이 그러해서이다.
집집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대나무를 가지고 용구를 만들어 다른 물건과 바꾸어 살아가므로 의식과 조세를 오로지 대나무에 의지한다. 게다가 이를 취급하는 큰 상인이나 부유한 백성들이 없다 보니 사신의 행차가 왕래할 적에 객관(客館)의 대접 또한 초라하며, 그나마도 제공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 모두들 놀란 노루나 사슴처럼 대숲 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린다. 따라서 동남(東南) 지역의 여러 고을 가운데 이 고을이 가장 가난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져 왔다.
이 원윤(李元尹)이 좌천되어 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공은 그러한 폐단을 파악하고는 먼저 토지를 살펴 도랑을 깊게 파도록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묵은 땅을 몇 이랑씩 개간하게 한 다음 힘을 다해서 방안을 마련하여 이를 보상해 주었다. 또 양주의 옛 습속이 농사를 짓는 데 익숙지 못하여 모두 늦게 나왔다 일찍 끝마치고 돌아갔으므로 지역별로 사람을 보내어 책임을 다하도록 권면하였는데, 백성들을 10명씩 묶어서 보(保)를 만들고, 보마다 대쪽을 1개씩 만든 다음 밭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를 받았다가 다음에 온 사람에게 주고, 이렇게 차례차례 전해주게 하였다. 그러면 가장 나중에 온 자는 줄 사람이 없어 대쪽을 차고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일이 끝나면 대쪽을 차고 있는 사람을 나오게 하여 나중에 온 죄를 벌하였다. 그 당시 날이 새기도 전에 공은 이미 개간할 땅에 나와 있었다. 이렇게 한 지 열흘 만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나와서 양주의 묵은 땅이 거의 다 개간이 되었고 대쪽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반년이 되지 않아 공이 부름을 받아 돌아가게 되니, 이때는 공이 베푼 혜택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 데다 백성들이 옛 습관에 안주하여 그동안 갈아놓은 땅에다 파종도 하지 않았고 파종해 놓은 것도 가꾸지 않았다. 내가 양주를 지나던 때는 이공(李公)이 떠난 지 겨우 한 달 남짓 된 무렵이었다. 나는 여기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는 작은 벼슬도 낮게 여기지 않고 백성들의 일에 솔선함을 보게 되었으며, 양주의 백성이 가난한 것은 비단 양주 백성의 잘못만이 아니라 위정자의 태만함에도 그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죽옥 상공의 아들 익지(益之)가 양주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다 해서 내가 양주에서 들은 내용을 기록하여 그에게 고해주면서 또 당부하기를,
“그대가 이공의 정사를 채택하고 양주 고을을 작다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양주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할까 걱정할 게 있겠으며, 가난한 양주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지 못할까 걱정할 게 있겠는가.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대가 이미 유학(儒學)을 배웠으니, 어찌 내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대가 젊어서 글을 읽은 효과를 양주 백성들이 교화되는 것에서 보기를 기대하네.”
하였다.


 

[주D-001]양주(梁州) : 경상도 양산(梁山)의 옛 지명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땅을 떼어서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양주(良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다시 양주(梁州)로 고쳤다. 그 뒤 조선 태종(太宗) 때에 양산으로 개칭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慶尙道 梁山郡》
[주D-002]계림(雞林) : 경상도 경주(慶州)의 옛 지명이다.
[주D-003]죽옥(竹屋) 상공(相公) : 죽옥은 안우기(安于器 : ? 〜 1329)의 호이다. 안우기는 안향(安珦)의 아들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국학좨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1314년(충숙왕 1)에 지밀직(知密直)으로 있으면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 800권을 검열하였다. 1316년 밀직부사 겸 대사헌으로 있다 파직되었고, 1329년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로 있다가 죽었다. 《고려사(高麗史)》 안우기열전(安于器列傳)에 그가 합포에 나가 청렴(淸廉)과 재간(才幹)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주D-004]합포(合浦) : 경상도 창원(昌原)의 옛 지명이다. 창원은 본래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을 합쳐 조선 태종(太宗) 때에 지어진 이름이며, 회원현은 충렬왕(忠烈王)이 군사적인 이유로 합포를 승격시켜서 붙인 지명이다. 합포는 당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1274년(원종 15)에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합포에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원나라의 홀돈(忽敦), 홍다구(洪茶丘)와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몽고군 2만 5000과 고려군 8000, 전함 900척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으나 비바람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1281년(충렬왕 7)에 또다시 합포에서 연합군 4만을 출정시켜 일본을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합포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초 기지로 삼은 중요한 군사 지역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2 慶尙道 昌原都護府》
[주D-005]헌양(巘陽) : 경상도 언양(彦陽)의 옛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헌양헌(巘陽縣)으로 고쳐 양주(良州)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때 울주(蔚州)에 예속되었다가 인종(仁宗)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3 慶尙道 彦陽縣》
[주D-006]양하(梁河) : 양주의 서쪽 곁에 흐르는 낙동강(洛東江)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주D-007]이 원윤(李元尹) : 원윤은 고려 때의 관직 이름이며, 이름은 미상이다.
[주D-008]보(保) : 역대 호적의 편제 단위로서 시대에 따라 그 규모가 각기 다르다.
[주D-009]익지(益之) : 안목(安牧 : ? 〜 1360)의 자(字)이다. 안목은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고,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했으며, 그 후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48년(충목왕 4)에 경사도감 제조(經史都監提調), 1352년(공민왕 1)에 서연관(書筵官)을 역임하였다.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졸고천백 제1권
해동후기로회(海東後耆老會) 서문


당(唐)나라 회창(會昌) 연간에 백낙천(白樂天 백거이(白居易))이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치사(致仕)한 후 낙양(洛陽)에 거처할 때에 어질면서도 장수한 여섯 사람과 이도리(履道里)의 집에서 함께 연회를 열어 ‘연장자를 높이 받드는 모임〔尙齒之會〕’을 가졌다. 그때 참여한 사람을 보면, 호고(胡杲)는 전(前) 회주 사마(懷州司馬)로 춘추 89세였고, 길민(吉旼)은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하였는데 춘추 86세였고, 정거(鄭據)는 전 용호군장사(龍虎軍長史)로 춘추 84세였고, 전 자주 자사(慈州刺史)인 유정(劉貞)과 전 시어사(侍御史)인 노진(盧眞)은 춘추가 모두 82세였고, 장혼(張渾)은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백낙천과 함께 춘추 74세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謨)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70세가 안 되어 모임에 참여는 하였으나 그 대열에는 끼이지 못하였다. 백낙천이 시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전하여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그리고 송(宋)나라 원풍(元豐) 연간에 문 노공(文潞公)이 낙양 유수(洛陽留守)가 되어 또한 그곳의 기영(耆英)들과 약속하여 진솔회(眞率會)를 만들고 참여자의 형상을 묘각사(妙覺寺) 건물에다 그려놓았는데, 모두 13명이었다. 한공(韓公) 부필(富弼)은 79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과 낭중(郞中) 석여언(席汝言)은 77세, 조의대부(朝議大夫)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太常) 조병(趙丙)과 비감(秘監) 유궤(劉几)와 방어(防禦) 풍행기(馮行己) 등 3명은 75세, 대제(待制) 초건중(楚建中)은 73세, 조의대부(朝議大夫)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宣徽) 왕공신(王拱辰)은 71세, 태중(太中) 장문(張問)과 용학(龍學)장도(張燾)는 70세였고,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만 당시 64세였는데, 노정과 적겸모의 예에 따라 참여시키고 온공이 그 서문을 썼다.
해동에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이룬 지 400년이 되어 이제는 인물과 풍류가 중화(中華)에 대등할 정도가 되었다. 신왕(神王 신종(神宗)) 무오년(1198, 신종 1)에 최 정안공(崔靖安公)이 비로소 관직을 그만두고 영창리(靈昌里)에다 쌍명재(雙明齋)를 지었는데, 계해년(1203)에 사대부 가운데 늙어서 유유자적하는 이들을 여기에 모아 날마다 시주(詩酒)와 거문고, 바둑으로 함께 즐겁게 지냈다. 호사가(好事家)들이 이를 그림으로 전하여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라 하고, 조통(趙通) 역락(亦樂)이 이 일을 기록하였다. 병인년(1206, 희종 2)에 정안공의 아우 문의공(文懿公)이 칠순(七旬)에 접어들게 되자 소장을 올려 사직을 하고 그 역시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그림 속에다 그의 초상을 첨가해 넣었고 소경(少卿) 박인석(朴仁碩)이 이 일을 기록하였다.
참여한 사람을 보면, 첫째는 태복경 보문각직학사(太僕卿寶文閣直學士)로 치사(致仕)한 장자목(張自牧)으로 78세였고, 둘째는 태위 평장 집현전태학사(太尉平章集賢殿太學士)로 치사한 최당(崔讜)으로 77세였고, 셋째는 사공 좌복야(司空左僕射)로 치사한 이준창(李俊昌)으로 태위와 같은 나이였고, 넷째는 판비성 한림학사(判秘省翰林學士)로 치사한 백광신(白光臣)으로 74세였고, 다섯째는 예빈경 춘궁시독학사(禮賓卿春宮侍讀學士)로 치사한 고형중(高瑩中)으로 백광신과 같은 나이였고, 여섯째는 사공 좌복야 보문각학사(司空左僕射寶文閣學士)로 치사한 이세장(李世長)으로 71세였고, 일곱째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치사한 현덕수(玄德秀)로 사공과 같은 나이였고, 여덟째는 태사 평장 수문전태학사(太師平章修文殿太學士)로 치사한 최선(崔詵)으로 69세였고, 아홉째는 군기감(軍器監) 조통(趙通)으로 64세였다. 이렇게 모두 아홉 사람이다. 당시에 한림(翰林) 이미수(李眉叟)가 노정ㆍ적겸모ㆍ사마온공의 고사에 따라 일찍이 여러 원로들 사이를 따라다니며 시문(詩文) 100여 수를 지어 한바탕 성대한 정경을 상세히 형용해 놓았는데, 그 내용은 그의 문집인 《쌍명재집(雙明齋集)》에 수록되어 사림(士林)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원나라가 지인성덕(至仁盛德)으로 천하를 길러 주고 있고, 우리나라는 제일 먼저 귀부(歸附)한 관계로 대대로 원나라의 공주(公主)와 혼인을 맺는 영광을 누려왔다. 그리고 제후(諸侯)의 도리를 준수하여 상하간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변경 지역에 조그마한 분쟁도 없었으며 해마다 풍년이 이어졌으니, 실로 태평성대(太平聖代)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대라 할 만하다.
이에 주상(主上 충숙왕(忠肅王))이 바야흐로 온 정성을 기울여 학문을 추구하여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행하기를 즐겼으며, 대령군(大寧君) 이하 대신들은 국가의 원귀(元龜)로서 모두 연세가 백 살 가까이 되어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다 함께 안락을 누리고 있으니, 비록 우연히 모여 담소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일대의 품격과 무관치 않다. 그분들이 평생 지켜온 훌륭한 절개와 명성이 어찌 우리나라 사람들만 경모하게 할 뿐이겠는가.
하루는 동암(東菴) 노선생(老先生)이 신진(新進)인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근래 모임에 나온 원로들이 낙사(洛社)와 쌍명재(雙明齋)의 고사(故事)를 구현해 보고자 하는데, 자네가 원로들을 위해 서문을 짓도록 하게.”
하셨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낮아 상공(相公)들의 뜻을 받들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미수(眉叟)가 쌍명재에 모인 원로분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어찌 나이나 지위를 따져서 그리 된 것이겠는가. 자네는 사양하지 말게나.”
하셨다. 내가 허락을 받지 못한 채로 물러나 생각하기를,
“아, 상공들의 성대한 공덕은 사직(社稷)에 남아 있고 공론(公論)에 퍼져 있으니, 나처럼 학식이 부족한 사람이 감히 이를 드러내어 선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금에 있었던 기로회(耆老會)의 전말(顚末)에 대해서만은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이에 삼가 그 전말에 대하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연우(延祐) 경신년(1320, 충숙왕 7) 3월 기망(旣望)에 예문춘추관 주부(藝文春秋館注簿) 최모(崔某)는 서(序)하노라.


 

[주D-001]회창(會昌) : 당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 841년 〜 846년이다.
[주D-002]원풍(元豐) :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로, 1078년 〜 1085년이다.
[주D-003]낭중(郞中) : 정확한 관직명은 사봉낭중(司封郞中)이다. 이하 주 20)번까지는 사마광(司馬光)의 낙중기영회(洛中耆英會) 서문의 말미에 첨부된 참여자 명단에 의거하여 관직명을 밝혔다.
[주D-004]태상(太常) : 정확한 관직명은 태상소경(太常少卿)이다.
[주D-005]비감(秘監) : 비서감(秘書監)의 약칭이다.
[주D-006]방어(防禦) : 정확한 관직명은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이다.
[주D-007]대제(待制) : 정확한 관직명은 천장각 대제(天章閣待制)이다.
[주D-008]왕신언(王愼言) : 국역 대본에는 ‘王塡言’으로 되어 있으나 사마광(司馬光)의 낙중기영회(洛中耆英會) 서문에 의거하여 ‘王愼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선휘(宣徽) : 정확한 관직명은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이다.
[주D-010]태중(太中) : 정확한 관직명은 태중대부(太中大夫)이다.
[주D-011]용학(龍學) : 정확한 관직명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이다.
[주D-012]장도(張燾) : 국역 대본에는 ‘張壽’로 되어 있으나 낙중기영회 서문에 의거하여 ‘張燾’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燾’ 자는 충숙왕의 휘자(諱字)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결획(缺劃)한 것이다. 장도는 1013년에 태어나 1082년에 사망한 인물로 자는 경원(景元)이다.
[주D-013]최 정안공(崔靖安公) : 최당(崔讜 : 1135 〜 1211)의 시호이다.
[주D-014]문의공(文懿公) : 최선(崔詵 : ? 〜 1209)의 시호이다.
[주D-015]박인석(朴仁碩) : 1143 〜 1212. 자는 수산(壽山), 호는 회곡(檜谷),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당시에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지냈다.
[주D-016]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 국역 대본에는 ‘寶文閤學士’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閤’ 자가 ‘閣’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閣’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이곳을 포함하여 총 다섯 곳의 보문각(寶文閣) 가운데 네 곳의 ‘閣’ 자가 ‘閤’ 자로 잘못 판각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보문각은 1116년(예종 11)에 궁중의 청연각(淸讌閣)에서 출발하여 얼마 후 보문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275년(충렬왕 원년)에는 보문서(寶文署)로 고쳤으며,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에 의해 동문원(同文院)에 병합되었다가 1314년(충숙왕 원년)에 보문각으로 환원되었다.
[주D-017]이미수(李眉叟) : 미수는 이인로(李仁老 : 1152 〜 1220)의 자이다. 이인로의 호 역시 쌍명재(雙明齋)이다. 저서로는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이 있다.
[주D-018]쌍명재집(雙明齋集) : 이 문집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 9 권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조에 《은대집(銀臺集)》, 《파한집(破閑集)》과 함께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잃어버려 현재는 책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예문고(藝文考)에는 《쌍명재일고(雙明齋逸稿)》 3권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예문고의 내용이 당시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도서를 저록(著錄)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주D-019]대령군(大寧君) : 최유엄(崔有渰 : 1239 〜 1331)의 봉호이다. 최유엄은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의 아들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충렬왕 말기에 왕이 당시 세자인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후사(後嗣)로 세우려 하자 이를 저지했으며, 그 공로로 충선왕 즉위 후 수첨의정승 감춘추관사(守僉議政丞監春秋館事) 대령군(大寧君)이 되고 수충순의보리 공신(輸忠順義輔理功臣)에 책봉되었다. 충숙왕 때에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당인 오잠(吳潛), 조적(曺頔) 등이 원나라에서 충숙왕의 폐위를 책동하다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로 편입시키도록 책동하자, 85세의 노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연경(燕京)으로 가서 이들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고 행성(行省)의 설치를 중지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최유엄은 93세까지 살았으며 이 글을 지을 당시에는 82세였다.
[주D-020]원귀(元龜) : 고대에 점을 칠 때 사용하는 큰 거북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원로를 지칭한다.
[주D-021]동암(東菴) 노선생(老先生) : 동암은 이제현(李齊賢)의 아버지 이진(李瑱 : 1244 〜 1321)의 호이다. 이진의 자는 온길(溫吉), 초명은 방연(芳衍)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이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03년(충렬왕 29)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되었으며,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저자 최해는 그의 아들 이제현과 같은 나이로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주D-022]나이도 어리고 : 이 당시 최해의 나이는 34세이다.
[주D-023]기망(旣望) : 보름이 지난 다음 날, 즉 16일을 이른다.

 

졸고천백 제1권
두타산(頭陀山) 간장암(看藏庵) 중영기(重營記)


지치(至治) 3년(1323, 충숙왕 10) 가을에 이군 덕유(李君德孺)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의 선친 동안(動安 이승휴(李承休)) 선생께서는 지원(至元) 연간에 충렬왕을 섬겨 간관(諫官)이 되었는데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말았네. 평소 외가(外家)가 있는 삼척현(三陟縣)의 풍광을 좋아하시더니 마침내 두타산(頭陀山) 아래로 가서 터를 잡고 사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지.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학문에 대해서는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네. 그러나 천성적으로 불교를 좋아한 데다 만년에는 더욱 독실히 신봉하여 이곳에다 별서(別墅)를 짓고 용안당(容安堂)이라 이름을 붙인 뒤 거기서 거처하시면서 산중의 삼화사(三和寺)에 가서 불교 경전을 빌려다가 날마다 열람하여 10년 만에 불경을 독파하셨네. 나중에 이 별서를 스님에게 시주하고 편액(扁額)을 간장암(看藏庵)으로 바꾸셨고, 이어 근처의 토지 몇 마지기를 희사하여 암자의 상주(常住) 밑천으로 삼게 하셨지.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24년이 되었는데, 내가 보잘것없는 관직 생활로 고향을 떠나 왕경(王京)에 살고는 있지만 선친의 발자취에 대한 생각을 자나 깨나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의 중형이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갔다가 암자가 지은 지 오래되어 썩고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친께서 뜻이 있어 지으신 것이다. 내가 다행히 중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장형(長兄)에게 중건할 것을 건의한 다음 제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몸소 작업을 하였네. 그리고 예문(藝文) 신천(辛蕆) 공은 평소 일을 잘 벌이기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마침 관동(關東)을 진무(鎭撫)하던 중에 공역(工役)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본현(本縣)에다 지시를 내려 부족한 것을 도와주게 하였으므로 1년도 채 안 돼 공사를 마치게 되었네.
처음에 선생께서는 돈후하고 소박함을 지향하여 무슨 일이든 꾸미려 들지 않았으므로 그 집을 지을 때도 비바람이나 대충 막을 정도로만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용슬이안(容膝易安)의 뜻을 취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이름을 붙였었네. 그러나 이때에 두 형이 상의하기를, ‘선친께서 비록 검소함으로 자처하셨지만 지금은 이미 절이 되었으니 어찌 증축해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서로 힘을 모아 규모를 확장하여 대청과 난간을 넓히고 단청을 영롱하게 칠하여 예전에 비해 호화롭게 되었다네. 낙성(落成)하던 날에 두 형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암자가 새롭게 단장되었으니 기문(記文)을 써서 걸어야겠다.’ 하고, 편지로 나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멀리 나가 있느라 우리 두 사람과 함께 이 일을 하지 못했으니, 너는 당대의 문장가를 찾아가도록 하여라. 만약 글 한 편을 얻어 선친께서 이 집을 지으신 뜻과 우리들이 이를 이어받은 뜻을 드러내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게 해준다면, 이는 네가 부형(父兄)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니, 이 일을 네가 한번 해보아라.’ 하였네. 선친이 하신 일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형이 명령한 일이기도 하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와 교유하여 선친이 하신 일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한번 써 주게나.”
하였다.
내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배나 수레가 닿는 곳이면 어디나 사찰이 줄지어 들어서 있으며, 그 무리들이 모두 권력에 빌붙어 부(富)를 독차지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대부들을 종처럼 깔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유자들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불교의 잘못이겠는가. 무릇 불교는 선행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악행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게다가 ‘마음을 맑게 하여 잃어버린 본성을 깨닫는다〔明心見性〕’는 설을 보면 우리 유가의 학설을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지식인이나 군자가 그 도(道)에 맛을 들여 이를 즐기면서 버리지 못하는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건대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집안에 이를 기록해 놓은 전기가 있고 나라에 이를 기록해 놓은 역사책이 있으며 또 사람들의 입에 퍼져 있으니, 선생의 출처(出處)의 대체가 이미 자세히 알려진 상태이다. 선생께서는 산속에 은거할 때에는 잠시도 임금을 잊지 않았고, 조정에 불려 들어가서는 잠시도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추구하는 것이 의리(義理)와 관계된 것이라면 누구도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나아갔으며, 보는 것이 이익(利益)에 관계된 것이라면 마치 무능력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났다. 독실하게 실천하여 시종 변하지 않은 점은 거짓으로 꾸며서 자신을 추켜세운다거나 명예를 구하여 남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에게서는 더더욱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 공이 만약 제대로 기용되었다면 우리 백성들이 피해를 제거하고 복(福)을 불러들일 수 있게 하였을 것이고, 기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의 유풍(流風)과 여운(餘韻)이 오히려 경박한 사람을 돈후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에 충분하리니, 명교(名敎 유교(儒敎))에 공을 세움이 어찌 얕다고 하겠는가.
이를 통해 말하자면, 이번의 공역은 단지 한가할 때 하는 일시적인 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단하다 할 것은 못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군자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가을 서리와 봄 이슬을 밟으면서도 슬픈 심정이 일어나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오랫동안 거처하며 편안하게 여기시던 곳을 수리도 하지 않고 허물어지게 내버려 둔단 말인가. 두 아들이 고쳐 짓느라 수고를 하고 그 아우가 또 부지런히 찾아와 글을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만은 기록할 만하다.
선생의 휘는 승휴(承休)요, 자는 휴휴(休休)이며, 동안(動安)은 호이다. 대덕(大德) 초에 왕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였으나 산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청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하였다.
맏아들은 임종(林宗)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였으며,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하고 재능 있기로 칭송을 받았다. 관직이 언부 산랑(讞部散郞)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친을 모시고 살고 있다. 둘째는 출가하여 법명을 담욱(曇昱)이라 하였는데, 조계종(曹溪宗)에서 시행하는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고 마침내 선문(禪門)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덕유(德孺)는 막내아들로 이름은 연종(衍宗)이다. 일찍이 나와 계묘년(1303, 충렬왕 29)의 과거에 함께 합격하여 지금 좌사보 지제교(左思補知製敎)로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가학(家學)에 탄복한다고 한다.
유선후인(儒仙後人) 최모(崔某)는 기(記)하노라.


 

[주D-001]지원(至元) :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264년 〜 1294년이다.
[주D-002]자나 깨나 …… 있겠는가 : 국역 대본에는 ‘寤寐豈志’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志’ 자가 ‘忘’으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忘’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신천(辛蕆) : ? 〜 1339.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호는 덕재(德齋),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스승인 안향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응청(凝淸)이다.
[주D-004]용슬이안(容膝易安)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쪽 창에 기대어 의기양양해하니, 무릎 겨우 들일 만한 곳이 편안하기 쉬운 곳임을 알겠네.〔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 하였다.
[주D-005]대덕(大德) …… 치사하였다 : 대덕은 원나라 성종(成宗)의 연호로, 1297년 〜 1307년이다. 1298년(충렬왕 24) 2월에 사림시독 좌간의대부(詞林侍讀左諫議大夫)에 제수되어 불려 왔으나 사직을 청하여 8월에 밀직부사 감찰대부(密直副使監察大夫)로 치사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승휴(李承休)는 2년 뒤인 1300년에 77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주D-006]언부 산랑(讞部散郞) : 국역 대본에는 ‘讞’ 자가 ‘獻’ 자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언부는 1308년(충선왕 즉위년) 관제 개편 때 형조(刑曹)를 개칭하여 부른 이름이다.
[주D-007]담욱(曇昱) :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수록된 간장암 중창기(看藏庵重創記)에는 ‘담욱(旵煜)’으로 되어 있다. 최해가 지은 동일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韓國文集叢刊 第2輯 391쪽》
[주D-008]유선후인(儒仙後人) : 유선은 최치원(崔致遠)을 가리킨다. 최치원은 12살 때 중국에 유학하여 단번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이 도통순관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까지 올랐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자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던 고운(顧雲)이란 사람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주었는데 그 가사의 일부에 “열두 살 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十二乘船過海來 文章感動中華國〕”라고 하였다. 《東國李相國集 卷22 唐不立崔致遠列傳議》 최해는 같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최치원의 후예임을 자처하였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최해를 위해 후유선가(後儒仙歌)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益齋亂藁 卷4 後儒仙歌爲崔拙翁作示及菴》

졸고천백 제1권
춘헌호기(春軒壺記)


내가 젊어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투호(投壺)의 예(禮)가 군자들이 빈주(賓主) 사이의 즐거운 흥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 제도에 대해서는 탐구해보지 못하였다. 그 후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 사마광(司馬光))의 투호도서(投壺圖序)를 보고 나서 그 대략은 알게 되었으나 또 사우(師友) 가운데 물어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매번 내가 변방 한구석에서 생장한 탓에 중원(中原)의 사대부들과 서로 만나 화살을 안고 배움을 청하여 투호를 몸소 익힐 수 없는 현실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 봄에 내가 외람되이 회시(會試)를 보러 연경에 가서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입대(入對)한 후 칙지(勅旨)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요양(遼陽)에서 온 홍중의(洪仲宜)의 무리와 문명전(文明殿)의 동저(東邸)에서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할 만한 일이 없기에 홍중의의 족부(族父) 집에서 호시(壺矢)를 빌려와 시험 삼아 해 보았는데, 마음이 매우 즐거워졌다. 그러나 칙지를 받고 동쪽으로 돌아와 개모(盖牟)에 부임하여 분주히 지내다 보니 투호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나는 병으로 물러나 집에서 지낸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천성적으로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음악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라 책을 보는 여가에 가만히 다른 기예를 익혀 보았으나 흥미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었는데, 오직 이 투호만은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어른거렸다. 이는 투호가 마음을 다스리고 덕행을 관찰하기 위한 기예에 가까워 그만둘 수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집안에 투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사대부들 가운데도 이를 가지고 있는 이가 없어서, 내가 아무리 좋아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춘헌(春軒) 최후(崔侯)는 옛것을 배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사람이다. 자제들이 스승도 없이 대충 배워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정주(程朱)의 저술들을 널리 수집하여 그들과 함께 강습하였다. 또 그들이 긴장만 하고 이완을 하지 않아 쉬지도 못하고 공부만 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투호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를 멀리서 사다가 놓고는 때때로 배우기를 원하면서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을 불러다가 그림을 보아가며 가르치니, 뜰 안 가득히 봄바람 부는 기수(沂水) 가의 기상(氣像)이 물씬 풍겨났다. 만약에 최후가 투호를 독실히 좋아하고 부지런히 탐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훗날 우리나라의 후진(後進)들 가운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기어 날마다 자신이 익히지 않은 것을 익혀서 대단하게 변하는 자가 나온다면, 우리 최후로 말미암아 교화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임을 알겠으니, 아, 그를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재(益齋) 이상(李相 이제현(李齊賢))과 근재(謹齋) 안군(安君 안축(安軸))이 이미 여기에 명(銘)을 달고 시(詩)를 지었으니 내가 다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내가 투호를 좋아하는 뜻과 최후가 투호를 가져다 두게 된 연유나 서술하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지순(至順)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5월 경신일에 쓰다.


 

[주D-001]회시(會試)를 …… 가서 : 1321년 3월에 안축(安軸)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02]개모(盖牟)에 부임하여 : 최해의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에 의하면, 최해는 1321년(지치 원년)에 원나라 과거에 합격자 43명 중 21등으로 합격하여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고,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주D-003]춘헌(春軒) 최후(崔侯) : 춘헌은 최문도(崔文度 : ? 〜 1345)의 호이다. 자는 희민(羲民)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찬성사(贊成事)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고려사(高麗史)》 최문도열전(崔文度列傳)에 의하면, 성리서(性理書)를 즐겨 보아 부모에게 효도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다고 한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주D-004]봄바람 ……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하루는 제자들에게 평소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나타나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차례대로 각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曾點)은 “저는 앞의 세 사람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날에 봄옷을 입고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탄식을 하며 증점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論語 先進》 이곡(李穀)은 춘헌기(春軒記)에서 최문도(崔文度)가 춘헌(春軒)을 지은 진정한 뜻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하며 돌아오는 풍류〔浴沂風詠之流〕’에 있음을 말했다. 《稼亭集 卷2 春軒記, 韓國文集叢刊 第3輯 113쪽》 따라서 최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최문도가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투호를 가르치는 장소가 춘헌(春軒)임을 나타내고 있다.
[주D-005]학교에 …… 즐기어 : 국역 대본에는 ‘莊修游息’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莊’ 자가 ‘藏’으로 되어 있고, 또 이 말의 전거(典據)인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篇)에도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游焉〕”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莊’ 자는 ‘藏’의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명(銘) : 이 명은 《국역 익재집》 권9에 ‘최춘헌(崔春軒)의 호시명(壺矢銘)’이란 제목으로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은 그 속이 비었고 화살은 곧고 바르거니 곧은 것이 아니고 빈 것이 아니면 병도 아니고 화살도 아니다. 반드시 신중히 하고 반드시 넣되 사냥꾼이 시위를 당기듯이 하라. 속여서 많은 점수를 내더라도 그렇게 이김은 기롱을 듣게 되거니, 세게 던지다가 떨어뜨리지 말고 돌려 넣으려다 비뚤어지게 말지어다. 군자의 유희이며 군자의 규모로다.〔壺虛其心 矢直其理 匪直匪虛 匪壺匪矢 必愼必中 若虞張機 詭遇獲十 勝不償譏 勿激而墜 勿旋而倚 君子之嬉 君子之規〕”
[주D-007]시(詩) : 안축의 시문은 후대에 《근재집(謹齋集)》으로 편찬되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관동와주(關東瓦注)》, 즉 1330년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나가서 지은 시문이고 나머지는 습유(拾遺) 작품 몇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안축이 지었다고 하는 투호시(投壺詩) 역시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졸고천백 제1권
이익재(李益齋)의 《후서정록(後西征錄)》 서문


익재 선생이 연우(延祐) 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아미산(蛾眉山)에 가서 분향(焚香)을 하고는 《서정록(西征錄)》을 지었는데, 초승(楚僧)인 가모옥(可茅屋)이 그 서문을 썼다. 그리고 지치(至治) 말에 또 태위왕(太尉王)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 임조(臨洮)를 지나 하주(河州)까지 갔다가 와서 《후서정록(後西征錄)》을 지었는데, 이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며 서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만 리 먼 땅을 가 보지 못하고 만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면 두보(杜甫)의 시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의 얕은 식견으로 이렇게 훌륭한 시편을 본다는 것조차도 오히려 참람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판국에 서문을 써 달라고 하는 부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번 읽어보니 사의(詞義)가 차분하면서도 노련하였는데, 이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忠義)가 사물을 만나 감발(感發)한 것으로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경박한 말은 한 구절도 없고, 옛일을 회상하고 일에 대한 느낌을 읊은 것은 그 의미가 더욱 정묘(精妙)하여 전배(前輩)들이 가려워하던 부분을 긁어준 것이 많았다.
회암 부자(晦菴夫子 주희(朱熹))가 일찍이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시 한 연(聯)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시로 말해도 제 1 등의 시요, 의논(議論)으로 말하더라도 제 1 등의 의논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에 또한 느낀 바가 있어 우선 이렇게 써서 그의 부탁에 답하는 바이다.


[주D-001]익재 선생이 …… 하고는 : 연우(延祐)는 원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314년 〜 1320년이다.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30세 되던 1316년(충숙왕 3)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사명을 띠고 아미산(峨眉山)에 제사 지내기 위해 촉(蜀)의 땅 성도(成都)로 간 일을 말한 것이다.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후집(後集)에 “연우 병진년에 내가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아미산으로 제사 지내러 갔었는데, 조(趙)ㆍ위(魏)ㆍ주(周)ㆍ진(秦)의 옛 지역을 거쳐 기산(岐山) 남쪽에 이르렀으며, 다시 대산관(大散關)을 넘고 포성역(褒城驛)을 지나서 잔도(棧道)를 건너 검문(劍門)으로 들어가 성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또 뱃길로 7일을 가서야 비로소 이른바 아미산에 도착하였다.” 하였다.
[주D-002]지치(至治) …… 맞이하러 : 지치(至治)는 원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321년 〜 1323년이며, 태위왕(太尉王)은 고려의 제 26 대 충선왕(忠宣王)을 말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충숙왕 3년(1316) 조에 “3월 상왕이 심왕(瀋王)의 위(位)를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하였다.” 하였는데, 그 아래에 “충선왕이 자신의 이복형인 강양공(江陽公) 자(滋)가 장자(長子)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는 그의 둘째 아들인 고(暠)를 극진히 돌보았다. 그리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심왕의 자리를 고에게 물려주고 스스로를 태위왕이라 칭하였는데, 그때 충선왕이 원의 태위(太尉)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 영종이 즉위한 1320년에 토번(吐蕃)에 유배되었는데, 익재 선생 연보(益齋先生年譜)에 의하면, 지치 3년 계해년(1323)에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 조정에 충선왕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여 그 요청이 일부 받아들여져 죄를 감등하여 타사마(朶思麻)라는 곳으로 옮겨 주었고, 이에 익재가 충선왕을 맞이하러 토번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익재난고》 제 2 권에 《후서정록(後西征錄)》의 첫 작품으로 보이는 ‘지치 계해년 4월 20일에 경사를 출발하다. 〔至治癸亥四月二十日發京師〕’라는 제목의 시가 있고, 그 주(註)에 “상왕이 이때 서번(西蕃)에 계셨으므로 뵈러 가려 한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지치 말이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1323년 4월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D-003]전배(前輩)들이 …… 많았다 : 앞서 다른 문인들이 표현하고자 하면서도 문장력이 짧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정확히 묘사한 부분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D-004]시로 …… 의논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9에, “구공(歐公)의 문장은 붓끝이 날카롭고 문장이 좋으며 의논 또한 좋다. 일찍이 그가 지은 시에, ‘옥 같은 미모는 예부터 몸의 누가 됐거니와, 고기 먹는 어떤 이와 나라를 꾀하리오.〔玉顔自昔爲身累 食肉何人與國謀〕’라는 구절이 있는데, 시로 말하자면 제 1 등의 시요, 의논으로 말하더라도 제 1 등의 의논이다.” 하였다. 이 시구는 위구르로 시집가게 된 당나라 숭휘공주의 울분을 담은 수흔비(手痕碑)를 보고서 지은 ‘당숭휘공주수흔화한내한(唐崇徽公主手痕和韓內翰)’이라는 시 속에 나오며, 그 전문은 구양수(歐陽脩)의 《문충집(文忠集)》 권13에 수록되어 있다.

졸고천백 제1권
반룡(盤龍) 여 대사(如大師)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반룡정사(盤龍精舍)를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어려서 이미수(李眉叟 이인로(李仁老))의 시를 열람해 보니 시 속에 대숙(大叔) 사리(闍梨)와 주고받은 작품들이 권마다 나왔는데,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두어 훌륭하게 성장시켜 준 점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사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승려의 몸으로서 행한 독실한 행동이 사대부도 미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을 기특하게 여겼을 뿐이었는데, 나중에 이씨(李氏)의 종인(宗人)을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이분이 바로 반룡사(盤龍社)를 연 승통(僧統) 일(一) 스님이며, 사(社)는 불도(佛道)를 배우는 자들이 쉽게 자포자기하는 것을 걱정하여 그들을 채찍질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하여, 불교에 힘을 쓴 것이 적지 않았음을 또 알 수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대로 그 법을 지켜 실추시키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큰 도량(道場)이 되었다.
태정(泰定) 초에 원나라에서 화엄 교학을 배워 온 대사문(大沙門)강주(講主)들이 원로들을 통해서 청하면서 모두들 사(社)에 주법(主法)이 없다 하여, 법수사(法水寺)당두(堂頭) 각해(覺海) 여(如) 스님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게 건의하니 도첨의사사 또한 허락을 하였다. 이에 대사가 사양하지 못하고 장차 날을 잡아 떠나려 하였으므로 내가 찾아가서 작별을 하였는데, 손님들 가운데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를 지어서 증정하려는 이들이 나에게 그 서문부터 먼저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유도(儒道)만 알고 불교를 모르면 부처가 되는데 지장이 없지만, 불교만 알고 유도를 알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세상에서 불교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부처가 되려면 먼저 친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려야 한다.”고들 한다. 무릇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친족을 사랑하는 친친(親親)에서 근원하는데, 친족 관계를 끊어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 누가 부처가 된단 말인가. 이런 방법으로 부처가 되기를 구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예컨대 일(一) 스님이 고아가 된 조카를 길러 마침내 그 가문을 크게 일으킨 것이 그가 과연 친애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겠는가.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마음은 모든 행동의 시발점이니, 이를 미루어 행하면 유도든 불교든 또한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일 스님이 사(社)를 조직하고 무리를 취합하여 불교의 참된 교리를 밝게 드러내어 밝힘으로써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번창하게 만든 것은 모두 이를 말미암은 것이다.
여(如) 스님은 묘령의 나이에 머리를 깎아 출중한 실력으로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태위상왕(太尉上王 충선왕)의 인정을 받아 높은 승직(僧職)을 받고 이름난 사찰의 직책을 제수받았으나,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차마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하고 탕약을 올릴 때에도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형제간에 더욱 우애하였다. 이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천성에서 우러난 것으로, 비록 불법을 배웠다 하지만 일에 대한 취사선택에 있어서는 유도에서 강조하는 선후(先後)의 차례가 있음을 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一) 스님의 도량(道場)에 다시 향화(香火)를 새롭게 피우고 불법(佛法)을 크게 떨칠 사람으로 대사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중론(衆論)이 대사를 추대하면서 어떠한 군말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말한 불교도 알고 유도(儒道)도 아는 사람으로는 위의 두 대사가 거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내 뜻을 기록하여 서문을 삼는다. 여기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은 제공(諸公)의 작품 속에 들어 있다.
대사(大師)는 동암(東菴) 이 문정공(李文定公 이진(李瑱)) 의 둘째 아들이며, 지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국상(國相) 익재공(益齋公)의 형이다. 당대의 명사들과 잘 사귀어 회안군(淮安君)과 그 아우 창원공(昌原公) 같은 귀공자들이 모두 대사를 경애하고 있다.


 

[주D-001]대숙(大叔) 사리(闍梨) : 대숙(大叔)은 ‘큰 숙부’, 즉 아버지 형제 가운데 백부(伯父) 다음의 두 번째를 뜻하며, 사리는 아사리(阿闍梨)를 말하는 것으로 법사(法師)라는 뜻의 범어(梵語) ācārya의 음역(音譯)이다. 인천 이씨 세계도에 의하면, 이인로의 조부 이언림(李彦林)에게 광진(光縉), 요일, 백선(伯仙) 등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인로는 백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인로는 무신난 때에 잠시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열전(崔忠獻列傳)에, 흥왕사의 불상(佛像)이 완성되어 그 축하연에 최충헌이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흥왕사의 승통 요일과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杜景升)이 최충헌을 모해하려고 한다는 익명서를 던졌다는 내용이 실린 것으로 보아 요일은 무신 정권에 비판적인 승려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D-002]이씨(李氏)의 종인(宗人) : 이인로의 후손인 인천 이씨(仁川李氏) 종친을 이른다.
[주D-003]승통(僧統) : 고려 시대 교종(敎宗)의 법계(法階)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높은 등급인 왕사(王師)의 아래이고 수좌(首座)의 위이다.
[주D-004]일(一) 스님 : 법명을 한 글자로 표기할 경우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법명 가운데 두 번째 글자로 표기한다. 여기에서 일(一) 스님은 이인로(李仁老)의 큰아버지로서 승려가 된 요일(寥一) 스님을 가리키는데, 요일 스님은 이인로가 고아가 되었을 때 그를 거두어 성장시킨 인물로 흥왕사(興王寺)의 승통을 지내기도 하였다. 인천 이씨 세계도에 의하면, 이인로의 조부 이언림(李彦林)에게 광진(光縉), 요일, 백선(伯仙) 등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인로는 백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인로는 무신난 때에 잠시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열전(崔忠獻列傳)에, 흥왕사의 불상(佛像)이 완성되어 그 축하연에 최충헌이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흥왕사의 승통 요일과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杜景升)이 최충헌을 모해하려고 한다는 익명서를 던졌다는 내용이 실린 것으로 보아 요일은 무신 정권에 비판적인 승려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D-005]사(社) : 결사(結社)를 이른다.
[주D-006]태정(泰定) : 원나라 진종(晉宗)의 연호로, 1324년 〜 1327년이다.
[주D-007]대사문(大沙門) : 사문(沙門)은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승려를 말하며, 대사문은 그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인물인 부처나 큰스님을 일컫는다.
[주D-008]강주(講主) : 불교 경전과 교학(敎學)을 강의하는 승려로서 강사(講師), 강승(講僧), 강사(講士), 강장(講匠)으로도 불린다.
[주D-009]법수사(法水寺)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조에 법수사는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는 절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곳이 바로 이 절을 지칭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주D-010]당두(堂頭) : 절의 주지(住持)에 해당한다.
[주D-011]회안군(淮安君) : 왕족인 왕온(王昷)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순(珣)이다.
[주D-012]창원공(昌原公) : 왕온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우(瑀)이다.

 

졸고천백 제1권
유원(有元) 고려국(高麗國) 고(故)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로 치사(致仕)한 충순(忠順) 민공(閔公)의 묘지(墓誌)


우리 고려는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나 비로소 동방에 자리를 잡고 인(仁)과 덕(德)을 쌓아 대대로 빛을 더하여 왔는데, 지금까지 400여 년이 되도록 사대부들이 모두 세록(世祿)을 받으며 예(禮)를 서로 숭상하였다.
그 가운데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일찍부터 그 명망이 알려져 명신(名臣)의 집안이라 불리었다. 휘 영모(令謨)는 명왕(明王)을 도와 태사(太師)와 평장(平章)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인데,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공규(公珪)는 고(故) 태보 평장(太保平章)이며 시호는 정의(定懿)이다. 조부 휘 인균(仁鈞)은 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부친 휘 황(滉)은 고 호부 시랑(戶部侍郞)이다. 호부공이 창원 최씨(昌原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은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고 평장(平章) 문경공(文景公) 인(璘)의 따님으로, 공의 모친이 된다.
공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을사년(1245, 고종 32)에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외조부가 애지중지하면서 항상 훌륭한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겨우 열한 살에 학문에 나아가 대의를 깨달았으며, 문음(門蔭)으로 왕자시양부 학우(王子始陽府學友)로 선발되었다. 19세에 청도군 감무(淸道郡監務)에 조용(調用)되었는데, 이는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 계해년으로 황원(皇元) 중통(中統) 4년(1263, 원종 4)에 해당한다. 청도는 고을에 대성(大姓)의 집안이 많은 반면 감무(監務)는 품계가 낮은 벼슬이어서 모두 대등한 예(禮)로 대하였기 때문에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게다가 공은 나이가 어려 경험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처음에는 만만하게 보았다. 그러나 공이 부임한 뒤로 어떠한 청탁도 받지 않고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여 바로잡자 감히 저항하는 사람이 없어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다.
감무의 임기가 차서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에 보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부(內侍府)로 적(籍)을 옮겨 도염서 승(都染署丞)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무관직으로 자리를 바꾸어 흥위위 별장(興威衛別將)으로서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에 차임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의 딸인 제국공주(齊國公主)와 혼인하여 특별히 응선부(膺善府)를 세우자 을해년(1275, 충렬왕 1)에 응선부 견룡행수(膺善府牽龍行首)로 자리를 옮겼으며, 좌우위 낭장(左右衛郞將)에 제수되었다가 우지유(右指諭)로 옮기고, 얼마 후 흥위위 장군(興威衛將軍)을 잠시 맡았다.
계미년(1283, 충렬왕 9)에 다시 문관직으로 돌아와 조현대부(朝顯大夫)가 되어 소부윤(少府尹)을 맡았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외직으로 나가 부충주목(副忠州牧)이 되었다.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전법총랑 지통례문사(典法摠郞知通禮門事)로서 동계 안집사(東界安集使)가 되었다가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축년(1289, 충렬왕 15)에 충청도 안렴사(忠淸道按廉使)가 되었다가 태부태복윤(太府太僕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진년(1292, 충렬왕 18)에 또다시 외직으로 나가 부동경유수(副東京留守)가 되었으며, 얼마 후 예빈윤(禮賓尹)으로 불리다가 삼사우윤 겸 세자궁문령(三司右尹兼世子宮門令)으로 옮겼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판통례문 선군별감사(判通禮門選軍別監使)가 되었다. 품계가 다섯 번 바뀌어 정헌대부(正獻大夫)에 오르고 밀직지신사 지전리감찰사사(密直知申事知典理監察司事)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298, 충렬왕 24)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에 세상에 영합하지 않은 탓에 면직되었다. 정미년(1307, 충렬왕 33)에 다시 나와 판밀직사(判密直司)에 제수되었다가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자리를 옮기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품계가 올라 멀리로부터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되었다.
태위왕(太尉王 충선왕) 원년(1309)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가 금왕(今王 충숙왕) 기미년(1319, 충숙왕 6)에 중대광(重大匡)에 제수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다.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왕씨(王氏)가 아니면서 군(君)에 봉해진 사람의 봉호를 거둘 때 규례에 따라 복흥군의 작위를 반납하고 다시 첨의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로 치사하였다. 태정(泰定)으로 개원(改元)한 갑자년(1324, 충숙왕 11) 5월 5일 기축일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 80세이다.
공의 휘는 종유(宗儒)이다. 공은 자질이 장중하고 풍도(風度)가 아름다우며, 예문(禮文)을 밝게 알고 관리로서의 재간이 뛰어났다. 안으로는 형조(刑曹)와 헌부(憲府)에서 일하고 밖으로는 수령을 안찰하고 백성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능력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빈찬(賓贊)을 주관하고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았을 때에는 읍양(揖讓)하고 응대(應對)하는 절차가 대부분 임금의 뜻에 맞아 당시 사람들이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공은 이미 명문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최 문경공(崔文景公)의 양육을 받은 데다 자라서는 유 문도공(兪文度公)과 혼인을 맺어 훈도를 받은 바가 많았으므로 무슨 일을 당하여도 마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듯 여유가 있었다. 전후로 이부(二府)에 있은 기간이 비록 오래지는 않았지만 끝내 군(君)의 반열에 올라 명성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장수를 누려 생애를 아름답게 마감하였으니, 만약 공으로 하여금 정사를 오래도록 전담하게 했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였겠는가.
공은 평소 사람들과 함부로 교제하지 않고 종족들과 돈독히 지냈으며,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도 두루 은혜를 베풀었다. 처음 벼슬할 때부터 재상에 오르기까지 공무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 아첨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집안을 정결하게 관리해 늘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여 먼지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천성이 말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어이 그 말을 구입하여 갖다 놓고는 매일 대청 아래에다 매어놓고 조석으로 아끼고 감상하며 싫증 낼 줄을 몰랐다. 만년에는 특히 음악을 좋아하여 거처하는 곳에 각종 꽃나무를 심어놓고 그 속에서 날마다 악기를 연주하며 자신이 늙어가는 줄도 모른 채 즐겁게 지냈는데, 칠팔십의 고령이 되어서도 몸이 여전히 건강하였으며 정신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지치(至治) 연간에 왕이 원나라에 조회를 갔다가 오랫동안 억류되자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들이 패거리를 모아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내용을 담아 강제로 서명을 하게 하였는데, 공경과 사대부들이 그 위세에 겁을 먹고 남에게 뒤질세라 이에 영합하였다. 간혹 핑계를 대며 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지만 감히 그것이 옳지 않다고 직접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때에 어떤 이가 서명받을 종이를 가지고 공의 집 문에 이르러 넌지시 서명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공이 그를 보고 꾸짖기를, “임금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가 그 잘못을 숨겨주어야 충직한 신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없는 말을 꾸며서 임금을 무고하는 짓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늘그막에 너희에게 이름을 팔지 않겠다.” 하고는 종이를 물리치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은 늙을수록 더욱 강직해진 분이라 이를 만하다.
우리나라에는 단옷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공이 이 날을 맞아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예전과 다름없이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자 피곤한 듯 설핏 잠이 들었는데,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기에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았더니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부인은 장사군부인(長沙郡夫人) 유씨(兪氏)로 고(故) 태위 평장(太尉平章) 문도공(文度公) 유천우(兪千遇)의 따님이다. 예전에 문도공이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을 때 공이 녹사(錄事)로 있었는데, 문도공이 공을 보고는 그릇으로 여겨 마침내 부인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적(頔)은 지원(至元) 을유년(1285, 충렬왕 11)의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통헌대부(通憲大夫)의 품계에 있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낸 바 있다. 둘째 서(舒)는 검교 신호위낭장(檢校神虎衛郞將)이다. 딸은 승봉랑(承奉郞)인 전 전교서승(典校署丞) 국담(鞠譚)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5남을 두었는데 서(舒)의 소생 1남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통헌공(通憲公) 소생이다. 손자 평(平)은 전 흥위위 별장(興威衛別將)으로 연우(延祐) 을묘년(1315, 충숙왕 2) 과거에 급제하였고, 나머지는 곡출독(曲出篤)ㆍ금강(金剛)ㆍ망기독(忙奇篤)이며, 서(舒)의 소생은 어려서 아직 이름이 없다.
공이 돌아가신 지 5일째 되던 날 내가 통헌공에게 조문을 갔더니, 통헌공이 조문을 받은 후에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문장이 비루하여 돌아가신 분의 덕행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이 한창 상중의 슬픔으로 몸이 상해 있는데 다시 공에게 상심(傷心)을 끼치기가 어려워 그저 형식적으로 대답하고 물러 나왔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공이 아들 평(平)을 시켜 역임한 관직의 전말을 기록하여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선친이 일찍이 통헌공과 교유하였고 나 또한 평(平)과 절친한 사이라 의리상 저버릴 수 없어 삼가 절하고 이를 받아 묘지명을 짓게 되었다.
장례는 이해 6월 6일 경신일이고, 묘는 모산(某山)의 언덕으로 서울과는 얼마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유사(有司)가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충순(忠順)이란 시호를 올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관작은 군(君)이요 나이는 팔순이니 / 爵列諸君齒八旬
노년에 은퇴하여 즐거이 생 마쳤네 / 壯仕老退樂終身
행실은 남에게 부끄러울 게 없었고 / 考之行實不媿人
새 무덤 터 잡으니 그 언덕 높구나 / 卜得新兆崇其阜
공은 길이 묻히셔도 후대에 복 남길 터 / 公藏百世慶流後
묘지명을 새겨 넣어 영원히 전하리라 / 鐫石納窆詔永久


 

[주D-001]명왕(明王) : 고려 명종(明宗)을 충렬왕 이후에 왕으로 격하시켜 부른 이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종(高宗)은 충헌왕(忠憲王)으로, 원종(元宗)은 충경왕(忠敬王)으로 불리었다.
[주D-002]태사(太師)와 평장(平章)을 지냈으며 : 민영모(閔令謨 : 1112 ~ 1194)는 인종(仁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총애를 받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판병부사(判兵部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했다.
[주D-003]왕자시양부 학우(王子始陽府學友) : 왕자시양부는 원종(元宗)의 둘째 아들인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를 위해 만든 관부(官府)이다.
[주D-004]감무(監務) : 고려 시대에 중앙의 관원을 파견하지 못한 지방의 작은 현(縣)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었던 지방관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D-005]멀리로부터 …… 제수되었다 : 당시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민종유(閔宗儒)를 찬성사에 제수한 것으로 보인다.
[주D-006]복흥군(復興君) : 《고려사(高麗史)》 민종유열전(閔宗儒列傳)에는 복흥군(福興君)으로 되어 있다.
[주D-007]최 문경공(崔文景公) : 문경공은 민종유의 외조부 최린(崔璘 : ? ~ 1256)의 시호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강종(康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간(臺諫)을 거쳐 1237년(고종 24)에 나주 부사(羅州府使)가 되어 지휘사(指揮使)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1241년(고종 28)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몽고에 볼모로 가는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수행하였고, 1254년(고종 41)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주둔한 합주(陜州) 단계현(丹溪縣)에 가서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청하고 사신으로 몽고에 가서 화친에 힘썼으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주D-008]유 문도공(兪文度公) : 문도공은 민종유의 장인 유천우(兪千遇 : 1209 ~ 1276)의 시호로, 장사현(長沙縣) 사람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상서(尙書) 김창(金敞)에 의해 최이(崔怡)에게 추천되어 정방(政房)에 들어갔다. 이로써 최이의 문객이 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었으며, 1260년(원종 1)에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과 지주사(知奏事)를 겸하여 전선(銓選)을 장악하였고,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1273년(원종 14)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이듬해 충렬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참문학사 판판도사사(參文學事判版圖司事)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죽었다.
[주D-009]이부(二府) : 첨의부(僉議府)와 밀직사(密直司)를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주D-010]지치(至治) …… 영합하였다 : 원나라에서 영종이 즉위하자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작위를 물려받은 왕고(王暠)는 고려의 왕위마저 찬탈하기 위해 충숙왕을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1321년에 원나라에서는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연경(燕京)으로 소환하였다. 그 후 1325년까지 5년간 충숙왕은 연경에 억류를 당했는데, 그동안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왕고파들은 물론 유청신(柳淸臣)ㆍ오잠(吳潛) 등 충숙왕을 시종하던 신하들까지 심양왕에게 붙어서 충숙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1322년 8월에 전 찬성사(贊成事) 권한공(權漢功)은 심양왕을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자운사(慈雲寺)에 백관들을 모아놓고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일부 신하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폐위 직전까지 몰렸을 때 충숙왕을 소환하였던 영종이 죽고 1323년 태정제(泰定帝) 진종(晉宗)이 즉위함에 따라 상황이 급반전되어 1325년에 충숙왕은 고려로 귀환하였다.
[주D-011]손자 평(平)은 …… 망기독(忙奇篤)이며 : 본 묘지명은 1324년에 지은 것으로, 1336년에 역시 최해가 지은 민적(閔頔 : 1270 ~ 1336)의 행장(行狀)과는 손자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행장에는 민적이 전처 김씨(金氏)에게서 아들 자이(子夷)를 낳았고, 후처 원씨(元氏)에게서 3남 3녀, 즉 유(愉)ㆍ변(抃)ㆍ환(渙)의 세 아들과 박인룡(朴仁龍)ㆍ윤계종(尹繼宗)ㆍ유윤길(劉允吉)에게 각각 시집간 세 딸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장손 평(平)은 후대에 민사평(閔思平 : 1295 ~ 1359)으로 불리며, 최해와는 아주 절친한 관계에 있던 인물로 1354년 진주(晉州)에서 《졸고천백》을 간행할 때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황원(皇元) 고려(高麗) 고(故) 통헌대부(通憲大夫)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 최공(崔公)의 묘지명(墓誌銘)


공의 휘는 운(雲)이요 자는 몽수(蒙叟)이며 그 선대는 동주(東州) 창원현(昌原縣) 사람이다. 10세조 휘(諱) 준옹(俊邕)은 국초(國初)에 벼슬하여 공을 세워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으며, 증손 휘 석(奭)에 이르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니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예숙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휘 유청(惟淸)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문숙이 문하평장(門下平章) 휘 선(詵)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문의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휘 종재(宗梓)를 낳았고, 복야는 중서평장(中書平章) 휘 온(昷)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신(文信)이다. 문신이 봉익대부(奉翊大夫) 휘 문립(文立)을 낳았으며, 봉익공이 추밀부사(樞密副使) 홍공(洪公) 휘 진(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이렇듯 대대로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름이 났으며 관직이 끊임없이 이어져 가문의 명망이 매우 성대하였다.
공은 나이 열다섯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이때가 지원(至元) 기축년(1289, 충렬왕 15)이다. 원정(元貞) 병신년(1296, 충렬왕 22)에 도재고 판관(都齋庫判官)에 보임되어 내시부(內侍府)에 소속되었으며, 대덕(大德) 기해년(1299, 충렬왕 25)에는 무관직으로 바뀌어 신호위 별장(神虎衛別將)으로서 특별히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차임되었다가 경자년(1300, 충렬왕 26)에 좌우위 장군(左右衛將軍)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302, 충렬왕 28)에 다시 문관직에 복귀하여 조현대부(朝顯大夫) 군부총랑(軍簿摠郞)에 제수되어 금자(金紫)를 하사받았으며, 얼마 후 전리총랑 판사영서사(典理摠郞判司盈署事)로 자리를 옮겼다. 지대(至大) 무신년(1308, 충렬왕 34)에 또다시 무관직으로 바뀌어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에 제수되었으며 기유년(1309, 충선왕 1)에는 외직(外職)으로 나가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가 황경(皇慶) 임자년(1312, 충선왕 4)에 지철원부(知鐵原府)로 옮겼으며,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는 지공주(知公州)로 옮겼다가 가을에 다시 지철원부가 되었으나 얼마 후 면직되었다. 병진년(1316, 충숙왕 3)에 관직에 복귀하여 정윤(正尹)에 제수되었다가 원윤(元尹)으로 승직하였는데,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불필요한 관직을 줄일 때 규례에 따라 파직되었다. 태정(泰定) 을축년(1325, 충숙왕 12) 4월에 다시 기용되어 통헌대부(通憲大夫)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에 제수되었다가, 7월 경오일에 질병으로 졸하니 춘추 51세였다.
공은 풍채가 매우 좋았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성실하였다. 평소 불교를 신봉하여 삼가 불경(佛經)과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외었으며, 날마다 일정한 양을 정해두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라도 이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 엄숙한 태도로 임하여 아무도 감히 공에게 범접하지 못하였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도 마치 집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대덕(大德) 계묘년(1303, 충렬왕 29)에 세가(世家)의 자제로서 왕전(王琠)을 따라 원나라 궁성을 숙위(宿衛)하였는데 이를 뚤루게〔都魯花〕라고 하였다. 왕전이 태위왕(太尉王)이 오래도록 참소를 당하고 부왕인 충렬왕과 틈이 벌어진 것으로 인하여 왕위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정미년(1307, 충렬왕 33) 봄에 일이 발각되어 왕전과 그의 당여(黨與)들이 모두 주살되거나 귀양을 갔다. 그러나 공만은 그에게 붙지 않았다 하여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되었다.
지치(至治) 연간에 화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우리나라를 뒤흔들려 할 때 공경과 사대부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바람 앞에 풀잎처럼 쏠리고 말았으나 공은 이번에도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제수한다는 명이 내려오자 사람들이 모두들 적임자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제수된 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고(故) 첨의 재상(僉議宰相) 송공(宋公) 휘 분(玢)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그분은 일찍 졸하였고, 후에 대호군(大護軍) 임공(任公) 휘 수(綬)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에 봉해졌다.
이해 8월 갑신일에 도성 동쪽 대덕산(大德山)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공에게는 아들이 없다. 임 부인이 나에게 이모가 되는 까닭에 일찍이 은혜를 입어왔는데, 장례에 글이 없으면 안 되겠기에 마침내 그 공적을 모아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행이 쌓인 집은 복록이 후하고 / 善積福厚
근원이 깊은 물은 멀리까지 흐르는 법 / 源深流長
우뚝하니 훤칠한 공의 모습이여 / 魁然而偉
그 아름다움 후세에 전할 만하였네 / 克傳芳兮
어찌하여 제수된 지 오래지 않아 / 何任不久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 厥施未光
어찌하여 선대의 덕 계승 못해 / 何德不紹
복록이 창성하지 않은 것인가 / 祚不昌兮
누가 이 일을 주관했는가 / 孰尸此責
저 아득한 창천이로다 / 悠悠上蒼
가시는 길에 한 줄 적으려니 / 漬筆臨窆
눈물이 펑펑 솟누나 / 涕滂滂兮


 

[주D-001]창원현(昌原縣) : 강원도 철원(鐵原)의 옛 지명이다.
[주D-002]왕전(王琠) : ? 〜 1307. 원종(元宗)의 둘째 아들인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의 아들로서 서흥후(瑞興侯) 봉해졌다.
[주D-003]뚤루게〔都魯花〕 : 고려 후기에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로서 몽고에 볼모로 보내져 황성의 숙위 일을 맡아보던 자를 일컫는 몽고말이다. 일반적으로 ‘禿魯花’로 표기된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처음으로, 고종 28년(1241) 4월에 왕의 족자(族子)인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왕자라 칭하여 양반가의 자제 10명을 거느리고 몽고로 들어가 뚤루게〔禿魯花〕가 되게 하였는데, 추밀원사 최린(崔璘)과 장군 김보정(金寶鼎), 좌사간 김겸(金謙)이 같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D-004]참소를 당하고 :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에게 왕위를 다시 선위하고 원나라로 돌아간 뒤, 왕유소(王惟紹)와 송린(宋璘) 등이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를 이간질하는 한편 충선왕을 폐하여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충선왕의 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개가(改嫁)시키고 왕위도 계승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충렬왕도 이에 동조하여 1305년 원나라 조정에 그의 폐위를 건의함으로써 부자간의 반목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307년 원나라 성종(成宗)이 마침 후계자 없이 죽고 황위 쟁탈전이 일어났을 때 충선왕이 무종(武宗)을 도와 그가 즉위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면서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입지가 강해지게 되었다. 이에 충선왕은 무종이 즉위한 다음 달인 1307년 4월에 왕유소 일당을 처형하고 본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주D-005]지치(至治) …… 말았으나 : 원나라에서 영종이 즉위하자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작위를 물려받은 왕고(王暠)는 고려의 왕위마저 찬탈하기 위해 충숙왕을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1321년에 원나라에서는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연경(燕京)으로 소환하였다. 그 후 1325년까지 5년간 충숙왕은 연경에 억류를 당했는데, 그동안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왕고파들은 물론 유청신(柳淸臣)ㆍ오잠(吳潛) 등 충숙왕을 시종하던 신하들까지 심양왕에게 붙어서 충숙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1322년 8월에 전 찬성사(贊成事) 권한공(權漢功)은 심양왕을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자운사(慈雲寺)에 백관들을 모아놓고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일부 신하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폐위 직전까지 몰렸을 때 충숙왕을 소환하였던 영종이 죽고 1323년 태정제(泰定帝) 진종(晉宗)이 즉위함에 따라 상황이 급반전되어 1325년에 충숙왕은 고려로 귀환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과거 공부를 하는 유생들에게 묻는 책문(策問) 2도(道) 태정(泰定) 병인년(1326, 충숙왕 13)


묻노라. 하늘이 백성을 낳으니 백성에게는 변치 않는 상도(常道)가 있다. 따라서 천하의 이치는 하나일 뿐인데 다른 길로 도를 구하고 있다면, 이를 이단(異端)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동방에서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 “유도(儒道)는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문이니 어찌 모두 그것을 버리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이 한번 나오자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서, 그들의 문도(門徒)들만 붙좇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 유자(儒者)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를 좇아 현혹되고 있다.
옛날 진(秦)나라가 모든 일을 법에 맡겨 우민화 정책을 펼 때에 가장 먼저 유생(儒生)들을 제거하였고, 자신이 추종하는 도를 진정한 도로 여기는 자들도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적인 학문을 배우게 된다면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고 천하에 백성이 남아나지 않게 될 것이다. 한자(韓子)의 말에 의하면, 군자의 몸가짐은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안으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자신이 신봉하는 도를 스스로 비방하고 바르지 못한 도를 추종할 수 있단 말인가? 붙좇아 신봉하는 그의 문도들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를 좇아 현혹되는 유자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에서 그런 짓을 하는가? 식견이 한자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도를 신봉하는 것이 돈독하지 못하고 견문이 작아서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다.
제군들은 책을 읽어 강명(講明)한 것이 많을 것이니, 훗날 주상께서 이 일에 대하여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 대답을 묻노라.

묻노라.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집안에서 출발하여 국가로 확대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학문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는데, 장차 다스림의 효과를 보려면 먼저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군들은 모두 과거 공부를 하여 앞으로 대과(大科)에 응시할 터이니, 또한 그 배운 바를 실행하고자 하고 천하와 국가에 뜻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어찌 한때의 명성을 훔쳐서 자기 한 몸의 영화만 도모하는 데에 그칠 수 있겠는가.
본국(本國)은 원나라가 천명(天命)에 응하여 나라를 세운 뒤로 가장 먼저 왕사(王師)를 맞이하여 요적(遼賊)들을 평정하고 이로 인해 우호의 맹약을 맺어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쳐온 것이 지금까지 100여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 여러 대의 황제로부터 포장(褒獎)을 받아 원나라 공주와 혼인한 국왕이 또한 3대나 되며, 국왕이 관료를 직접 임명하는 것이 허용되어 나라 안의 풍속이 일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뀌지 않았다. 천하의 많은 나라들 가운데 백성과 사직을 그대로 유지한 곳은 오직 삼한(三韓)뿐이었다. 게다가 사방의 변경이 조용하여 백성들이 전쟁 없이 편히 살고 있으니, 넓고 큰 황제의 덕을 하늘과 땅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토지가 다 개척되어 나라에 추가 수입이 없고, 인구는 점점 불어나는데 백성들에게 정해진 거처가 없으며, 관부에 재정이 고갈되어 관리들에게 봉록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비들 중에는 예의염치를 차리는 이가 드물고 가문들은 토지의 겸병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풍속은 선악과 시비가 뒤죽박죽이 되어 사람들이 원망을 품은 채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이 있어도 풀 곳이 없다. 이러한 폐단은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아무리 능력 있는 이가 힘써 노력한다 하더라도 조만간에는 바로잡을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러한 폐단을 끝내 구제할 수 없단 말인가? 구제하는 데에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만약 지금 갑자기 일어나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고관대작을 얕본다는 혐의를 받게 될 것이요, 편안히 앉아 지켜보기만 한다면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손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고지식함과 똑같을 것이니, 또한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다.
제군들은 지금 한창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터인데 이상의 두 가지 가운데 어떤 태도로 대처하겠는가? 그대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보기를 원하노라.


 

[주C-001]도(道) : 제목이나 문서 등을 세는 단위이다.
[주D-001]한자(韓子)의 …… 하였으니 : 한자는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이 말은 한유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나오는 말이다. 《韓昌黎文集 卷18》
[주D-002]어려서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본국(本國)은 …… 맺어 : 왕사는 원나라 군대를 가리키고, 요적은 거란의 군대를 가리킨다. 1206년 몽고가 건국하여 중원(中原)을 향해 세력을 확장하자 몽고와 금(金)나라 사이에 살고 있던 거란의 유민(遺民)들이 동쪽으로 밀려나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원주(原州)까지 내려올 정도로 수세에 몰린 고려는 몽고, 금(金), 동진(東眞) 등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1219년(고종 6) 1월에 마침내 거란의 근거지인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켜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몽고의 장수인 합진(哈眞)과 찰라(札刺)는 고려에 강화를 요청하여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을 맺고 돌아갔다. 《高麗史》
[주D-004]3대 :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을 가리킨다. 충렬왕은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충선왕은 진왕(晉王)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충숙왕은 영왕(營王)의 딸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그리고 위왕(魏王)의 딸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혼인하였다.
[주D-005]형수가 …… 고지식함 : 이 비유는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서 나온 말이다. 제(齊)나라의 변사(辯士)인 순우곤(淳于髡)이 맹자에게 “남녀간에 주고받기를 직접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형수가 물에 빠졌다면 손으로 끌어올려야 하겠지요?” 하고 순우곤이 넌지시 반문하자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승냥이나 다름없다. 남녀간에 주고받기를 직접하지 않는 것은 예에 해당되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권도(權道)에 해당된다.”라고 대답했다.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손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원칙적인 예만을 고집하며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국역 대본에는 ‘傁溺不援之固’로 되어 있는데, 《맹자(孟子)》에 의거하여 ‘嫂’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경씨시권(慶氏詩卷) 후제(後題)

위 시권은 우리 동방의 당대 명인들이 경씨의 아들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경씨의 문중이 이미 성대한 데에다 그 아들이 아직 성동(成童)이 되기도 전에 글을 읽을 줄 아니, 훗날 훌륭한 덕과 기량을 갖춘 인물이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공(諸公)이 칭찬하고 허여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니, 그 칭찬을 받는 것을 또한 어찌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사람에게는 장유(長幼)의 구분이 있고 학문에는 선후(先後)의 차례가 있다는 것만은 꼭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그 아들이 이미 명성이 난 데다 제공이 모두들 성인(成人)을 대하듯 대우하고 있으니, 앞으로 그 아들이 장성하게 되면 더 이상 보탤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아, 옛사람들은 명성이 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너무 일찍 명성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누군들 시작이 없겠냐마는 그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그 아들은 앞으로 새벽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노력하여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청하여 배우고 아직 익히지 않은 것을 익혀서, 행해야 할 바에 대해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만 바야흐로 그 아들이 제공의 칭찬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것이다. 높은 관직과 넉넉한 재산으로 말하자면 그대 집안에 대대로 물려온 것이 있으니 염려할 것이 못 된다. 이러한 생각을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사(辭)를 지어 면려하는 바이다.

나무가 잘 자람은 심는 데에 달려 있고 / 木榮在植
싹이 커야 많은 수확 기대할 수 있듯이 / 苗碩望收
사람이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 人不幼學
자라서 행실을 닦을 길 없어라 / 長無以修
거룩하고 지혜로운 분들 멀리 살피시어 / 聖智燭遠
너무 빨리 이루는 것 경계하신 바 있으니 / 嘗戒速成
내실을 다지는 것 귀히 여길 뿐이지 / 但貴有實
이름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리오 / 何患無名
아아 경씨의 아들은 / 猗歟慶子
아직까지 입에서 젖냄새가 나는데 / 口尙乳臭
먹고 노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 不飽以嬉
오로지 배움에 힘쓴다네 / 惟學之懋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 聲價四馳
재주가 날로 더욱 뻗을 터이니 / 才華日茂
내가 일러 주건대 소학 한 책을 / 吾語小學
너는 의당 반복해서 읽도록 하라 / 爾宜反復
학문은 자신 위해 하는 것이 중요하고 / 學在爲己
놓치기 쉬운 것이 배움의 때이니 / 易失者時
익히고 또 익혀서 / 習而又習
한밤중까지 생각하라 / 中夜以思
천작이 서고 나면 / 天爵旣立
인작이 뒤따를 것이니
/ 人爵隨之
아아 경씨의 아들이여 / 於虖慶子
이 말을 명심할지어다 / 念玆在玆

[주D-001]성동(成童) : 조금 자란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로, 8세 이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15세 이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전자로 보인다.
[주D-002]명성이 …… 두려워하였으며 : 송(宋)나라 육유(陸游)가 지은 발조백곡자서(跋晁百谷字叙)에 나오는 말이다. 《渭南文集 卷27》
[주D-003]누군들 …… 드물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 편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을 믿을 수 없도다.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그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도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 하였다.
[주D-004]학문은 …… 중요하고 :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자신의 인격 수양이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주D-005]천작이 …… 것이니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의 말에 의하면, 인의충신(仁義忠信)은 하늘이 내린 작위인 천작이요,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인간 세상의 작위인 인작이라고 하였다. 또한 옛사람들은 천작을 닦음으로써 인작이 저절로 따라온 데에 반해, 지금 사람들은 천작을 닦아 인작을 구하고 인작을 얻고 나서는 천작을 내팽개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고(故) 사헌지평(司憲持平) 김군(金君) 묘지명

우리 동방 사람들은 천성이 대부분 태만한 데다 학문으로 원기(元氣)를 배양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 그래서 세태에 따라 입신(立身)하여 처자를 잘 먹이고 잘 입힐 궁리를 하기도 하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이럴 수 있겠지만 군자가 주장하는 바와는 어긋난 점이 있다. 그리고 의(義)와 이(利)를 잘 밝히고 출처(出處)를 잘 살펴서 다른 사람들의 시비(是非) 여부를 기준으로 자신의 영욕(榮辱)을 삼지 않는 자로 말하자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말세를 만나 선비들 사이에 정해진 의논이 부재하여 복(福)이 되는 것은 따르고 화(禍)가 되는 것은 회피하며 자신의 주장만 옳다 하고 남의 주장은 그르다고 매도하는 때에, 암울한 세상 속에서도 홀로 올바른 도를 지켜 굳건히 처신한다면 지조 있는 선비라 하지 않겠는가. 우계(愚溪) 김군 같은 이가 아마도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군은 근래의 이름난 학사인 둔촌공(鈍村公)의 막내아들이다. 이전에 태위왕(太尉王)이 세자로 있을 때 둔촌공이 부(傅)가 되어 두 아들을 함께 알현시켰는데, 왕이 특별히 군을 사랑하여 각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자 군을 감찰사(監察史)로 발탁하였고, 얼마 뒤 전부시 승(典符寺丞)으로 옮겼다. 그때 군이 왕의 구신(舊臣)인 데다 어질었기 때문에 모두들 크게 등용되리라 기대하였으나, 마침 어떤 일로 교활한 내시의 눈에 거슬려 섬으로 유배되었다. 해마다 곤경에 빠져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공은 태연히 달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귀양에서 돌아오자 집안에 숨어 지내면서 때때로 손님이 오면 술과 음악을 차려 놓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기면서 더 이상 명예와 벼슬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지낸 것이 거의 15년이나 되었다.
태정(泰定) 을축년(1325, 충숙왕 12)에 이르러 금왕(今王)이 황도(皇都)에서 돌아와 의분(義憤)을 느껴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품고 군에게 통직랑(通直郞) 사헌지평(司憲持平)을 제수하여 억지로 나오게 하니, 공이 일을 보게 된 지 두어 달 만에 사림들이 조정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해 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염객(炎客)이 그 속에서 권세를 쥐고 흔들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깔보아 심지어는 제멋대로 사헌부가 구금한 죄수를 풀어 주기까지 하였다. 이에 군이 대궐 문에서 마주보고 따져 들었는데 그 말이 매우 격렬하여 도리어 그에게 맞기까지 했다. 결국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예전처럼 집안에 칩거하게 되자 굴욕을 당한 자들이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하게 되었고, 군자들은 군이 떠나가는 것을 몰래 탄식하였다. 지난가을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가 약을 쓰지도 않고 나았는데, 지난달에 다시 발병하여 하루 만에 돌아가시니, 아, 슬프도다.
군은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강직하였으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데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다. 사람들과 사귈 때에도 한결같이 신의를 지켜 교유가 오래될수록 더욱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군의 품은 뜻이 너무 높아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속인들이 제 수준대로 말한 것이지 군에 대해 말할 일은 아니다. 무릇 선비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때를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에 때를 만나면 그 도가 시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되지만, 반대로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남으로써 스스로 얻은 도를 온전히 지켜간다. 그렇다면 공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곧 남들에게 있어 다행과 불행이 되는 것이지, 어찌 공에게 손해나 이익이 되는 것이겠는가.
군의 자는 원귀(元龜)요 휘는 서정(瑞庭)인데 나중에 개물(開物)로 개명하였다.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우계(愚溪)라 하였다. 그 선대는 복주(福州) 의성현(義城縣) 사람이다. 조부 휘 굉(閎)은 관직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으며, 부친 둔촌공(鈍村公) 휘 훤(晅)은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모친 이씨는 어사(御史) 휘 방순(方㫬)의 따님이다. 군은 두 번 장가들어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섬(銛)은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이며, 딸은 모관(某官) 모(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모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둘은 어려서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군은 지원(至元) 계유년(1273, 원종 14) 10월 경술일에 태어나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 14) 2월 무술일에 졸하였으며, 이해 3월 임인일에 장사 지냈는데 모산(某山)의 언덕에 묘소를 잡았다.
군은 나를 저속한 선비로 대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을 나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가 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것은 학문과 행실이요 / 可能者學也行也
불가능한 것은 관직과 수명이로다 / 不可能者位也年也
군자만이 가능한 것을 취하여 힘써 행하며 / 惟君子然後取可能者而力爲之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고 하늘에 맡기나니 / 舍不可能者而付之天也
아아 우계여 / 嗚呼愚溪
오히려 무엇을 부족하게 여기리오 / 尙何慊焉

[주D-001]둔촌공(鈍村公) : 둔촌은 김훤(金晅 : 1234 〜 1305)의 호이다.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자는 용회(用晦),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260년에 문과에 급제, 1269년 성절사(聖節使)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국내에서 권신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와 있던 세자 심(諶)을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연 일당을 토벌하려 했다. 이에 김훤은 쿠빌라이에게 만일 세자가 공(公)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 쿠빌라이의 계획을 중지하게 했다. 그 뒤 경상도에서 방보(方甫)의 난을 평정하고 삼별초(三別抄)의 잔적을 진압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하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나, 참소를 당하고 환국한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예서(隸書)에 능했다. 《高麗史 卷106 金開物傳》
[주D-002]교활한 …… 유배되었다 : 김개물이 전부시 승(典符寺丞)으로 있을 때 내부 영(內府令) 강융(姜融)이 김개물에게 청탁을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구타하였다. 이에 김개물이 강융에게 “너는 본래 노예인데 감히 사족(士族)을 욕하느냐.” 하자 강융이 그를 참소하여 송가도(松加島)에 유배를 보냈다. 《高麗史 卷106 金開物傳》
[주D-003]해마다 …… 형편이었으나 : 《고려사》 김개물전에 의하면, 김개물이 유배에서 돌아온 뒤 다시 합주(陜州)에 제수하였는데, 김개물이 사양하고 가지 않으므로 또 자연도(紫燕島)에 유배하였다고 한다. 해마다 곤경에 빠졌다는 것은 연이어 귀양을 가게 된 일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주D-004]염객(炎客)이 …… 하였다 : 염객은 만인(蠻人) 왕삼석(王三錫)을 가리킨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충숙왕 12년 조에, “만인 왕삼석이 잡술로 왕에게 총애를 받아 사부(師傅)라 칭했는데, 뇌물을 받고서 관직을 팔고 옥사(獄事)를 처리해 주곤 하였다. 그의 처형(妻兄)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았으므로 헌부(憲府)가 추궁하여 다스리니, 장세가 김개물의 집에 와서 칼을 뽑아 자신을 찌르며 고함을 질렀다. 헌사가 장세를 옥에 가두고 대궐에 나아가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삼석이 중간에서 왕에게 아뢰지 않고 김개물에게 매를 때리고 제 마음대로 장세를 석방하였다. 김개물과 장령(掌令) 김원식(金元軾), 지평 김영후(金永煦) 등이 예궐하여 장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왕삼석의 말을 먼저 받아들여 일을 아뢴 자를 때렸다. 그래서 헌사가 문을 닫고 일을 보지 않자 왕은 근시(近侍)를 보내어 일을 보라고 유시하면서, ‘상왕을 장사 지낸 뒤에 삼석의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그 후로 김개물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가 관직을 떠남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얼마 후에 졸하였다.” 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선서(先書) 발문


이 편지 세 장은 선대부(先大夫) 선생께서 주 소감(周少監)과 주고받은 것이다. 원정(元貞), 대덕(大德) 연간에 선생이 상주목(尙州牧)의 통판(通判)으로 계셨는데, 고을 사람들 가운데에 서로 인정해 주며 어울리는 사람이 적었다. 이때 내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주씨(周氏)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왕래를 하였고 선생께서는 특별히 공경하는 안색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소감은 바로 이분이다.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 14) 8월에 여행길에 상산(商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감의 아들 신열(臣烈)이 이 편지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기에 내가 읽어보았더니, 선생이 이곳을 떠난 후에 쓴 편지였다. 그중에 하나는 11월 23일로 되어 있으니 대덕(大德) 무술년(1298, 충렬왕 24) 겨울이요, 또 하나는 2월 13일로 되어 있으니 이듬해인 기해년(1299, 충렬왕 25) 봄이요, 나머지 하나는 8월 27일로 되어 있으니 대덕 5년 신축년(1301, 충렬왕 27) 가을이다. 세대가 오래 지남에 따라 두 집안 자제들이 모두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이에 삼가 기록하고 신열에게 보내어 보관하게 하는 바이다.
소감의 휘는 공재(公梓)이며,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신열은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아버지의 풍도(風度)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이달 27일에 장남 모(某)는 숙소인 불로정(不勞亭)에서 쓰다.


[주C-001]선서(先書) : 돌아가신 아버지가 쓴 편지를 이른다.
[주D-001]선대부(先大夫) 선생 : 최해의 부친 최백륜(崔伯倫)을 가리킨다.
[주D-002]주 소감(周少監) : 소감은 고려 시대 감(監) 다음의 벼슬로서, 군기감(軍器監), 비서성(秘書省), 사재감(司宰監), 전중성(殿中省), 태의감(太醫監) 등에 두었으며 품계는 4품에서 5품까지이다.
[주D-003]원정(元貞) : 원나라 성종(成宗)의 연호로서, 1295년 〜 1296년이다.
[주D-004]대덕(大德) : 원나라 성종의 연호로서, 1297년 〜 1307년이다.
[주D-005]상산(商山) : 상주(尙州)의 옛 지명이다.

 

졸고천백 제1권
선원사(禪源寺) 재승기(齋僧記)


하늘과 땅으로부터 생명을 타고나서 혈기(血氣)를 지닌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다. 이는 성현(聖賢)이라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먹을 것은 본디 농사에서 나오는데, 농사를 짓지 않고 먹는 사람은 또 각자 나름의 육체적ㆍ정신적 수고를 해야 하니, 이는 서로 길러 주는 관계이지 서로 괴롭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부처의 법이 중국(中國)에 행해진 지 이미 1264년이 되었다. 그 승려의 수가 사민(四民)의 배나 되는데도 그들이 가는 곳이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서로 보시(布施)하려 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든다. 그런 까닭에 무리 지어 살면서 한가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니, 천하에 음덕(陰德)을 크게 베풀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선원사(禪源寺)는 우리나라 제2의 총림(叢林)으로서 그 식구가 언제나 수천 수만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근래에 송파(松坡) 상군(相君)이 쌀 150섬(苫)을 희사하여 아주 절의 상주물(常住物)로 보충해주고, 해마다 그 이자를 불려서 이를 셋으로 나누어, 매년 죽은 부인 변한부인(卞韓夫人) 김씨(金氏)의 기일(忌日)인 7월 3일과 죽은 아들 언부의랑(讞部議郞) 문진(文進)의 기일인 정월 1일에 각각 재(齋)를 올려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공의 생일인 정월 19일에는 스님들에게 크게 음식을 대접하여 자신의 복을 빌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이에 대한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하여 그것을 후대에 남겨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내 생각에 부처의 가르침은 모호하고도 불확실하여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정성스런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즐기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좋은 보답을 받게 될 것은 이치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송파(松坡)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중대광(重大匡) 광양군(光陽君)의 자호(自號)이며, 이름은 성지(誠之), 성은 최씨(崔氏)이다. 공은 또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천화선사(天和禪寺)를 수리하여 큰 도량으로 만들었으니,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보답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를 불교의 말로 보자면 이른바 “재관신(宰官身)으로 현신(現身)하여 보살도(菩薩道)를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치화(致和) 기원(紀元 1328, 충숙왕 15) 7월 초하루 아침에 쓰다.


 

[주C-001]선원사(禪源寺) :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1245년(고종 32)에 강화도(江華島)에 세운 절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판목(板木)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 판목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졌고, 이 터에는 장원서(掌苑署)의 과원(果苑)이 들어섰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292년(충렬왕 18)에 고려의 선대 실록(實錄)을 이곳에 옮겨다 놓기도 하였다.
[주C-002]재승(齋僧) : 재(齋)를 지내고 그 절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을 이른다. 승재(僧齋), 시승(施僧), 반승(飯僧)이라고도 하며, 간단히 줄여서 재(齋)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양받는 승려의 수에 따라 오백승재(五百僧齋), 천승재(千僧齋), 만승재(萬僧齋) 등으로 불린다.
[주D-001]부처의 …… 되었다 :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인 기원후 65년에 채음(蔡愔) 등을 인도(印度)에 보내 경전을 수입해 오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실제 수입은 2년 후인 기원후 67년에 이루어진다.
[주D-002]사민(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 즉 노예를 제외한 귀족과 평민을 이른다.
[주D-003]총림(叢林) :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고대 인도(印度)에서는 도성 교외의 한적한 숲 속을 택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수행하였으므로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을 총림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주D-004]재(齋)를 올려 : 국역 대본에는 ‘輒修一齊’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齊’자가 ‘齋’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齋’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재관신(宰官身)으로 …… 행한다 : 재관신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하여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33가지의 화신(化身) 가운데 13번째 화신으로서, 문자 그대로 관직을 가진 몸으로 화신한다는 것이다. 보살도는 보살의 수행, 즉 위로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길을 이른다. 《법화경(法華經)》에 의하면,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보살도를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금강산(金剛山)으로 가는 승려 선지(禪智)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인적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골에는 본디 기이한 인물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장도릉(張道陵)의 학문을 배우는 자들이 아무 산(山)은 제 몇 동천(洞天)으로서 이곳은 아무 진군(眞君)이 다스리는 곳이라고 하니, 이에 도(道)를 사모하고 세상에 염증을 느껴 곡식을 끊고 수련하는 자들이 왕왕 그 속에서 되나오는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내가 비록 그들의 행동이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은 것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나와 저들의 도가 서로 다른 만큼 또한 심하게 따지려 들지 않는다.
하늘 끝 동쪽 바닷가에 산이 하나 있다. 세속에서는 이를 풍악산(楓岳山)이라 부르는데, 승려들은 금강산(金剛山)이라 부른다. 그 설은 《화엄경(華嚴經)》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그 책에 “해동(海東)에 보살(菩薩)이 살던 곳의 이름을 금강산이라 한다.〔海東菩薩住處 名金剛山〕”는 문장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것이 과연 이 산인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근래 어떤 사람이 보덕암(普德菴)의 승려가 지은 금강산기(金剛山記)를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기에 읽어보았더니, 모두 아무 근거도 없는 황당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런 말도 있다. 즉, “금으로 만든 불상(佛像) 53구(軀)가 서역(西域)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한(漢)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기원후 4)에 이 산에 들어와 이로 인해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불법(佛法)이 인도(印度)로부터 동쪽의 중국으로 유입된 것은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년(기원후 65)에 시작된 일이며,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것은 또 양 무제(梁武帝)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527, 법흥왕 14)부터이니, 을축년으로부터는 401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이다. 만약 그 설을 믿는다면, 이는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기 62년 전 부처가 있는 줄도 모르던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부처를 위해 절을 세운 것이 되니, 그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내용이다. 나머지도 이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옛날에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산 속에 들어와서 부지런히 뜻과 행실을 갈고닦아 그 도를 깨닫는 사람이 자주 나왔다고 한다. 대개 처음에는 이 산이 사람들이 사는 곳과 거리가 수백 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데다 바위산들이 벽처럼 우뚝 서 있어 가는 곳마다 모두 천 길 만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벼랑과 험준한 골짜기뿐이요, 몸을 가릴 만한 암자도 없고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여 먹을 만한 한 뙈기의 땅조차도 없었다. 따라서 그곳에 살려면 굴속에 들어가 지내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틀거나 하여 새나 짐승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굶주린 배를 채우지 않으면 단 하루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불가의 법에 부처의 도를 닦게 하려면 반드시 육체적인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수행을 거쳐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스승 석가(釋迦)도 설산(雪山)에서 6년이나 고행(苦行)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의 법을 배워 그 도를 부지런히 닦으려는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산에 들어가 수행하지 않고서는 또한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아서 산중에 암자가 해마다 늘어나 거의 백 개나 되어간다. 그 가운데 큰 절만 해도 보덕사(報德寺), 표훈사(表訓寺), 장안사(長安寺) 등이 있다. 이들 절은 모두 관청의 지원으로 짓고 수리하여 전각(殿閣)이 하늘처럼 높고 암자가 산골짜기를 가득 채우며 울긋불긋한 단청이 휘황찬란하여 사람들의 눈을 어질어질하게 만든다. 상주 경비(常住經費)는 재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별도로 두어 충당하였고 보화를 담당하는 직임을 별도로 두었으며,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주군(州郡) 여기저기에 퍼져 있다. 게다가 강릉도(江陵道)와 회양도(淮陽道)의 한 해 조세를 곧장 관(官)으로 들여가 이를 모두 산으로 수송하는데 흉년이 들더라도 감면하는 일이 없다. 매년 사자를 보내 한 해에 필요한 의복, 양식, 기름, 소금 등의 물품에 빠진 것이 없는지를 반드시 살핀다. 그곳의 승려들은 대체로 어디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탓에 요역(徭役)을 피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곳에는 요역을 피하여 온 백성들이 항상 수천 명 수만 명이나 되어 그저 편히 앉아서 먹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한 사람도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처럼 부지런히 수행하여 도를 깨우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으니,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여 “이 산을 한 번 보면 죽어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유혹한다. 그래서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처자를 거느리고 다투어 가서 예배를 하는데, 겨울철 눈으로 땅이 얼어붙었거나 여름철 장마로 물이 넘쳐 길이 막힐 때를 제외하고는 금강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길 위에 줄지어 서 있다. 개중에는 과부나 처녀가 따라가는 경우도 있는데, 산속에 며칠씩 유숙하다 보니 추한 소문이 수시로 들리건만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더러는 근시(近侍)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역말을 달려 사시사철 끊임없이 금강산에 향(香)을 전하는데, 관리들은 위세를 두려워하여 명을 받들기에만 분주하다 보니, 거기에 드는 비용이 걸핏하면 수만 냥에 이르곤 한다. 금강산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 이들을 접대하느라 시달린 나머지 화가 치밀어 “이 놈의 산이 어찌하여 다른 고을에 있지 않은가.”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한다.
아, 사람들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요, 보살을 공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내리는 복은 이미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중들이 이 산을 팔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금강산을 유람하러 가는 사대부들을 보면 비록 힘껏 말리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비루하게 여긴다.
이번에 불자(佛者) 선지 대사(禪智大師)가 이 산으로 가게 되었기에 내가 평소 가슴속에 담아두고 토로하지 못한 말들을 써서 주는 바이다. 대사는 이전에 벌써 승려가 되었는데 금강산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나를 대신하여 말을 전해 주길 바란다. 반드시 내 말에 수긍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천력(天曆) 기사년(1329, 충숙왕 16) 3월 갑신일에 쓰다.


 

[주D-001]장도릉(張道陵) : ? 〜 156. 원래 이름은 장릉(張陵)이며 후한(後漢) 패국(沛國)의 풍(豐) 출신이다. 본래 태학생(太學生)으로 오경(五經)에 널리 통하였으나 유학이 생명의 연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여 유학을 버리고 도교(道敎)에 입문하였다. 순제(順帝) 때에 촉(蜀) 지방의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득도(得道)를 한 후 도서(道書)를 짓고 부적과 물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며 세력을 확장, 도교의 한 교파를 형성하였다. 그 도에 입문하려면 다섯 말의 쌀을 내야 하므로 이를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부르기도 한다.
[주D-002]아무 산(山)은 …… 하니 : 동천은 도교에서 신선(神仙)을 지칭하는 말로, 골짜기〔洞〕 안에 별도의 천지(天地)가 있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며, 진군은 도교에서 신선을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도교에서는 크게 36개의 동천을 들고 있으나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는 10개의 동천, 즉 왕옥산동(王屋山洞), 위우산동(委羽山洞), 서성산동(西城山洞), 서현산동(西玄山洞), 청성산동(靑城山洞), 적성산동(赤城山洞), 나부산동(羅浮山洞), 구곡산동(句曲山洞), 임옥산동(林屋山洞), 괄창산동(括蒼山洞) 등이 있다. 《운급칠첨(云笈七籤)》에 의하면, 10대 동천은 대지(大地)의 명산(名山) 속에 위치해 있으며 상천(上天)이 신선들을 내려 보내 다스리는 곳이라고 한다.
[주D-003]보살(菩薩) : 《신화엄경(新華嚴經)》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법기보살(法起菩薩)이 금강산에 살았다고 되어 있다. 법기는 범어(梵語) Dharmodgata를 의역(意譯)한 것으로서, 법희보살(法喜菩薩), 법기보살(法基菩薩), 보기보살(寶基菩薩), 법상보살(法尙菩薩), 법용보살(法勇菩薩)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살았다는 설은 당(唐)나라 이래로 성행하였으며,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금강산이 바로 그 금강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주D-004]정미년부터이니 : 최해는 신라(新羅)의 수도 경주(慶州) 출신으로서 불교의 전파 시기를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公認)한 해인 527년(법흥왕 14)으로 보았다.
[주D-005]401년 : 실제로 계산해 보면 당해년을 포함하여 463년이 된다. 간지(干支) 계산상의 착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명제가 불교 경전을 수입하기 위해 채음(蔡愔) 등을 인도에 파견한 것은 기원후 65년이나 실제 수입해 들어온 것은 2년 뒤인 67년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그 사이는 461년이 된다. 그렇다면 401년이라는 수치는 간지 계산을 하는 과정에서 한 갑자(甲子)가 누락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D-006]전각(殿閣) : 국역 대본에는 ‘殿閤’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산천(山川) 조에 수록된 최해의 동일 작품에는 ‘閤’ 자가 ‘閣’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閣’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재물을 …… 충당하였고 : 국역 대본에는 ‘與財有庫’로 되어 있는데 상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최해의 동일 작품에는 ‘與’ 자가 ‘典’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典’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곧장 관(官)으로 들여가 : 국역 대본에는 ‘入直于官’으로 되어 있는데 상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최해의 작품에는 ‘入直’이 ‘直入’으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直入’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악도(惡道) :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에 떨어지게 되는 고통의 세계로서,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을 이른다.
[주D-010]금강산 …… 백성들이 : 국역 대본에는 ‘□山居民’으로 한 자가 빠져 있는데 《동문선(東文選)》의 동일 작품에는 ‘並’ 자로 채워져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傍’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라 ‘傍’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졸고천백 제1권
대원(大元) 고(故)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고려(高麗)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 원공(元公) 묘지명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 즉위년) 윤7월 병술일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원 소신(元昭信)이 나이 50에 병으로 졸하여 9월 갑신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는데, 장례에 묘지가 없을 수 없으므로 아들과 사위들이 부인의 명을 받아 계림(雞林) 최모(崔某)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아,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에 지위가 이부(二府)에 오른 자는 장례 때 모두 명(銘)을 쓸 수 있다. 하물며 공의 경우는 행실이 단아하고 방정하여 평소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왔으니, 내가 어찌 감히 망자(亡者)에게 아첨하는 글이라는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씨는 옛날 북원(北原)의 명문거족으로, 휘 극유(克猷)가 신성왕(神聖王)을 도와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공신(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품계가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이르렀다. 그 후로 더욱 번창하여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드날렸다. 정의대부는 좌복야(左僕射) 휘 징연(徵演)을 낳고, 좌복야는 병부 상서(兵部尙書) 휘 영(穎)을 낳고, 병부 상서는 합문 지후(閤門祗候) 휘 우경(禹卿)을 낳고, 합문 지후는 검교소보(檢校少保) 휘 덕(德)을 낳고, 검교소보는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심부(深夫)를 낳고, 감찰어사는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예(禮)를 낳고, 상의봉어는 좌사간(左司諫) 휘 승윤(承㣧)을 낳고, 좌사간은 증(贈) 좌복야(左僕射) 휘 진(瑨)을 낳고, 증 좌복야는 첨의중찬(僉議中贊) 휘 부(傅)를 낳고, 첨의중찬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휘 경(卿)을 낳았다. 경에 이르러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무략장군(武略將軍) 정동행중서성 도진무(征東行中書省都鎭撫)가 되었다. 무략공이 지첨의부(知僉議府) 홍공(洪公) 녹준(祿遵)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이분은 개령군부인(開寧郡夫人)에 봉해졌다. 이 두 분이 공의 부모이다.
공의 휘는 선지(善之)이다. 7세에 부임(父任)으로 서면도감판관(西面都監判官)이 되었고, 17세에 무직(武職)으로 바뀌어 산원(散員)이 되었다. 27세에 낭장(郞將)에 제수되고, 28세에 섭좌우위호군(攝左右衛護軍)이 되어 봉선대부(奉善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덕릉(德陵 충선왕)의 부름으로 대도(大都 연경(燕京))에 가서 왕으로부터 큰 지우(知遇)를 입어 중현대부(中顯大夫) 밀직사우부대언 사복정 지삼사사(密直司右副代言司僕正知三司事)로 뛰어올랐고, 또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아 선수(宣授) 소신교위 정동도진무(昭信校尉征東都鎭撫)에 제수되었다.
이때 덕릉이 원나라 조정에 입시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본국으로 돌아갈 뜻을 전혀 보이지 않자 나라 사람들이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황경(皇慶) 계축년(1313, 충선왕 5)에 공이 지금 정승으로 있는 화평군(化平君)과 함께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덕릉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덕릉의 뜻을 거슬러 화평군은 임조(臨洮 감숙성(甘肅省))로 유배를 떠나고 공은 파직되어 돌아왔다.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좌천되어 통직랑(通直郞)으로서 외직인 지면주(知沔州)로 나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지치(至治) 신유년(1321)에 다시 기용되어 판선공시(判繕工寺)가 되어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대사헌(大司憲)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판전의시(判典儀寺)로 옮겼다. 이해에 덕릉이 서쪽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가고 상왕(上王)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가 억류를 당하게 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지어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졌는데, 공이 정도(正道)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자 선비들의 여론이 공을 옳게 여겼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에 밀직사(密直司)로 들어와 부사(副使)가 되었고 다시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옮겼으나, 겨우 1년 만에 그만두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평리 상호군(檢校僉議評理上護軍)으로서 현직에서 물러난 지 6년 만에 졸하였다.
공은 다양한 재능을 갖추고 일 처리가 차분하고 섬세하여 무슨 일이든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거문고와 바둑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 일찍이 의술(醫術)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여겨 널리 좋은 약재를 구하고 법에 따라 조제를 하였는데, 약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날마다 문에 줄을 섰으나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그들을 대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부인은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로 고(故) 국상(國相) 문신공(文愼公) 휘 변(賆)의 따님이다. 자식으로 장남 귀수(龜壽)는 복두점 녹사(幞頭店錄事)이고, 다음 송수(松壽)는 아직 어리며 장녀는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 유보발(柳寶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제위보 판관(濟危寶判官) 안정(安靖)에게 시집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주C-001]광정대부(匡靖大夫) : 국역 대본에는 ‘匡請大夫’로 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묘지명 원석(유물 번호 : 新5866, 원제 : 大元故征東都鎭撫高麗國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兼判內府寺事元公墓誌)에는 ‘請’ 자가 ‘靖’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靖’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1]이부(二府) : 첨의부(僉議府)와 밀직사(密直司)를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주D-002]북원(北原) : 강원도 원주(原州)의 옛 지명이다.
[주D-003]신성왕(神聖王) :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이른다.
[주D-004]부임(父任) : 아버지의 음덕으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을 말한다.
[주D-005]화평군(化平君) : 김심(金深)의 봉호이다. 김심은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김주정(金周鼎)의 아들로, 충렬왕 때에 뚤루게〔禿魯花〕로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낭장(郞將)이 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에 딸이 원나라 인종(仁宗)의 편비(偏妃)가 됨에 따라 원제(元帝)에 의해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에 오른 뒤 이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밀직사(密直使)가 되고 화평군에 봉해졌다. 당시 원나라에 간 충선왕이 귀국하지 않는 것이 권한공(權漢功), 최성지(崔誠之), 박경량(朴景亮) 등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이사온(李思溫)과 함께 3인의 죄상을 원나라 황태후(皇太后)에게 탄원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황실에 뇌물을 써서 곧 석방되었고, 충선왕의 분노를 산 김심 등은 충선왕의 건의로 임조(臨洮)에 유배되고 말았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주D-006]상왕(上王) : 이 묘지명은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지어진 것이므로 상왕은 충숙왕을 가리킨다.
[주D-007]명(銘)은 다음과 같다 : 국역 대본에는 명(銘)을 시작할 때 사용되는 투식어의 하나인 ‘계왈(系曰)’로 끝이 나고 그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묘지명 원석에 의거하여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아, 착한 일을 하는 자는 복을 받고 어진 자는 장수를 누려야 하거늘, 어찌하여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받지 못하고 장수해야 할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는가?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나의 뜻을 저버린단 말인가. 앞에서 굽혔으면 뒤에서 펴지는 법, 하늘이 끝내 인색하지 않고 사람이 함부로 받는 일은 없으리니, 그대 자손에게 고하여 선인의 사업을 지키도록 하노라.〔嗚呼 爲善者福而仁者壽 孰以宜福而不厚 宜壽而不久耶 彼蒼者天 此其何負吾意 屈於前者伸其後 天不終靳 人無妄受 告而子孫 惟先人之業是守〕”

 

졸고천백 제1권
김 문정공(金文正公) 묘지


공의 휘는 □□, 자는 불기(不器)이다. 김씨는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부터 벼슬을 하여 대대로 인물이 끊이지 않았다. 증조부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휘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고, 조부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 휘 경(鏡)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고, 부친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수(須)는 누차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을묘년(1255, 고종 42)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는데, 체격이 크고 용모가 수려하며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벼슬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능력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지원(至元) 기사년(1269, 원종 10)에 어사(御史)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지영광군(知靈光郡)이 되었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에 있던 사람과 물자를 겁략하여 배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탐라(耽羅)를 먼저 점거하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이에 본국에서는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게 하는 한편, 전라도에 첩문(牒文)을 내려보내 정관(正官) 가운데 평소 백성들이 신뢰하고 복종하던 사람을 선정하여 군대를 이끌고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시중이 거기에 선발되자 지체 없이 가서 군사를 뽑아 곧장 탐라에서 고여림을 만났는데, 역적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진도(珍島)를 지키며 탐라에는 건너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밤낮으로 보루를 쌓고 무기를 설치하여 공격로를 차단하여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관이 머뭇거리고 관망하며 힘을 쏟지 않는 바람에 적들이 다른 길로 공격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 대의(大義)로서 군사들을 격려하였으므로 군사들이 이에 감격하여 용기백배하여 고함을 치며 다투어 올라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살육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토착민들이 적을 도와줌에 따라 중과부적의 상태가 되어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싸움터에서 죽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 때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고(故) 예빈경(禮賓卿) 고공(高公) 휘 정(挺)의 따님인데, 영광(靈光)에서 아비 잃은 자식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따라 교육하였다. 이에 공이 평소의 생각을 바꾸어 글읽기에 전념하였다. 겨우 14세에 숙부인 고상(故相) 문숙공(文肅公) 밑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공이 지은 사부(詞賦)를 보더니 기특하게 여겨 “우리 집안을 크게 만들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우리 형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도다.”라고 감탄하였다. 15세 때 단번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으며, 이듬해에 또 예위(禮闈)에 나아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정축년(1277, 충렬왕 3)에 녹원사(錄苑事)가 된 뒤에 직강음목감(直江陰牧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녹첨사부사(錄詹事府事)가 되었다.
경진년(1280) 여름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겸(兼) 직문한서(直文翰署)에 제수되었으며, 이로부터 7년 동안 세 차례 바뀌어 관품이 7품에 올랐다.
무자년(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으며 얼마 후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여 은비(銀緋)를 입었고,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옮겨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자리를 옮기고 품계가 조현대부(朝顯大夫)에 올랐다.
대덕(大德) 무술년(1298, 충렬왕 24) 봄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공과(公過)로 면직되었다가, 가을에 덕릉이 원나라 조정에 불려 들어가고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어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었다가 전중윤(殿中尹)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차 자리를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시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判司宰寺文翰侍讀史館修撰知制誥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대부(朝奉大夫)와 중열대부(中列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경자년(1300, 충렬왕 26)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겸(兼)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고, 신축년(1301)에 왕명을 받들고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 일행이 상도(上都 연경(燕京))에 도착해 보니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朔方)에 행차하고, 유수성(留守省)이 칙명을 받들어 각지의 사신들을 군사적으로 긴급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일체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이에 공이 유수성에 나아가 말하기를, “하국(下國)이 대국(大國)을 섬긴 이래로 성절(聖節)을 축하 드리는 사절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여기에 머물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여, 마침내 북쪽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상도를 떠나 11개의 역참(驛站)을 지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여 성절을 맞이하니, 공이 관복과 홀(笏)을 갖추고 의식에 따라 하례를 드렸다. 황제의 장막 안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황제가 멀리서 왔다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하사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이때 마침 황제의 군대가 친히 정벌을 하여 적을 물리쳤으므로 공이 이 기쁜 소식을 남보다 앞서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로 자리를 옮겨 문한승지(文翰承旨)를 겸대하였고, 또 황제의 명으로 승무랑(承務郞)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제수되었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자리를 옮겨 대보문(大寶文)을 겸대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랐다.
을사년(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와 지사사(知司事)가 되었으며, 병오년(1306)에 또다시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충렬왕이 연경(燕京)에 가 있었는데, 무술년(1298, 충렬왕 24)에 복위한 후로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지어 부자간의 정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공이 두 왕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한결같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1307, 충렬왕 33) 봄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받들어 내란을 평정하여 그 공이 천하에 드날리게 되자 본국의 신하들 가운데 왕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위로는 이부(二府)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에 이르기까지 주벌되거나 유배를 당해 거의 모두가 갈렸는데, 공만 홀로 남아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가 되었다가 여름에 밀직사가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무신년(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였는데, 대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민호(民戶)를 점검하고 호적을 정리하고자 할 때 공을 양광수길도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 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첩보를 올려 지침을 요구하자,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지침이 없어 회답 공문을 보낼 때마다 “양광수길도가 하는 것에 따라 체례(體例)를 정하여 시행하라.”고 하였으므로 모두들 관리들을 파견하여 본을 삼았다.
기유년(1309, 충선왕 1)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고 2년 동안 있다가 삼사(三司)를 혁파하자 대광(大匡)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1311)에 또 상의(商議)를 없애자 관직도 규례에 따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관직을 떠나 한가하게 지냈다.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다시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얼마 후 판삼사(判三司)가 되었으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연우(延祐) 말기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떠나고 지치(至治) 초에 상왕(上王)이 입조(入朝)했다가 억류를 당하게 되자 본국에서 당론(黨論)이 갈리었다. 당시에 총재(冢宰)는 왕을 따라 수행 중이었고 공이 이부(二府)의 수장으로 있었는데, 아랫사람들이 도리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한마음으로 합치되지 않았으므로 매사에 마찰이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나라를 그르치지 않은 것은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에 상왕(上王)이 다시 정사에 복귀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바꾸고 공을 파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이 원로는 시종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파직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자들 가운데 왕의 말에 찬동하는 자가 없어 끝내 파직되고 말았다. 이듬해 왕이 귀국하자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해에 대부인(大夫人)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국가에서 한 해에 30석(碩)씩 곡식을 하사하였다.
정묘년(1327)에 관호(官號)가 다시 바뀌어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僉議中贊修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判典理司事)가 되었고 이어 치사하였다. 이때에 대부인이 졸하니 나이가 102세였다. 국가에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1330, 충숙왕 17) 봄에 국왕(國王 충혜왕)이 왕위를 계승하라는 명을 받자 원나라 조정에서 객성사(客省使) 칠십견(七十堅)을 파견하여 금인(金印)을 가져가고 공으로 하여금 행성(行省)의 일을 임시로 맡게 하니, 공이 그 명을 어기기 어려워 잠시 다시 나와 서리(署理)하였다. 조사(朝使)가 2월 2일에 돌아가자 29일에 당시 재상들이 순군소(巡軍所)에 모여 전왕(前王 충숙왕)의 명으로 공을 불렀다. 이에 공이 도착하자 성부(省府)에서 승상인(丞相印)을 압수하고 공을 축출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수개월 동안 달리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에 유람을 떠났는데, 이는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에 왕(王 충혜왕)이 보낸 사신이 연경에서 도착하여 당시 재상들이 승상인을 마음대로 압수한 일을 질책하고 좌우사(左右司)의 관원을 파직하여 모두 월봉(月俸)의 지급을 정지시킨 후, 사신 한 사람을 금강산으로 보내어 왕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역말을 타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다시 정동행성의 일을 서리하였으니, 이는 공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7월에 감기에 걸려 약을 써 보았으나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외모가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말과 행동이 모두 예법을 따랐다.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사람인 듯이 여기지만 일단 가까이에서 접해보면 따뜻하고 온화하여 내면에 지닌 인품과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공은 대부인(大夫人)을 효도로써 섬겼고, 부인에게는 예의를 갖추어 대하였으며, 자손을 가르칠 때는 법도 있게 하였고, 친척들과 화목을 유지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합하였다. 남들과는 함부로 사귀지도 않았고 원한을 맺지도 않았으므로 이부(二府)의 수장으로 있을 때나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낼 때나 빈객(賓客)의 왕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평소에 아무 일이 없더라도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드러눕지 않았고, 덥다고 옷을 벗지도 않았으며, 문 앞에 발이 쳐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엄숙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감창시(監倉寺)의 관직을 받았는데, 업무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잘 처리하자 경험이 많은 관리들까지도 자신들이 도저히 공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간(臺諫)이 되어서는 진달하는 말이 모두 원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安集使)가 되어서는 송사(訟事)가 공평하였고, 이로운 일을 만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기를 좋아서 하는 일처럼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이미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인물로 기대하였다.
공은 세 분의 임금을 차례로 섬기면서 예법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 일찍이 조금의 실수도 한 적이 없었다. 역대의 전고(典故)에 대해서 말할 때는 마치 어제 일을 말하듯 입에서 줄줄 나왔으므로, 나라에서 미심쩍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중대사가 생길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잡곤 하였다.
공의 저술은 교훈적인 내용이 요체를 얻었고, 시는 청수(淸秀)하고 미려(美麗)하여 애송할 만했다. 또 우리나라 문인들의 문장을 손수 수집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이름을 붙임으로써 중국의 《문선(文選)》과 《문수(文粹)》에 견주려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쾌헌(快軒)이란 호(號)를 지어 불렀고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불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蒨) 등 70명을 선발하였고, 예위(禮闈)를 주관하여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선발하니,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대부분 그 대상에 들었다.
공은 좌우위 낭장(左右衛郞將) 김의(金儀)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또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에 봉해졌으며, 어질고 집안을 잘 다스려 경제적인 문제로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아들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나라로부터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의 자제로는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는데, 선부인(先夫人)이 아들 하나를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後夫人)의 소생이다. 광식(光軾)은 갑오년(1294, 충렬왕 20)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총부 의랑(摠部議郞)에 올랐으나 먼저 죽어서 자식이 없고, 광철(光轍)은 을사년(1305, 충렬왕 31)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進賢直提學)으로 있다. 광재(光載)는 계축년(1313, 충선왕 5)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있으며, 광로(光輅)는 정사년(1317, 충숙왕 4)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장가도 들지 못한 채 요절하였고 관직은 가안부 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딸은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그 다음은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둘이 있는데, 장손 모(某)는 직책이 별장(別將)이며 그 다음은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
국왕(國王 충혜왕)이 어릴 때부터 평소 공의 큰 명성을 들었으므로 처음 왕에 봉해지자마자 곧바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직임을 임시로 맡긴 것이니, 이는 다시 정승으로 복귀시키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나 본국에 돌아왔을 때는 공이 이미 병이 난 상태였다. 공이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픔에 잠겨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11월 8일 갑신에 옛 덕수현(德水縣)의 읍치(邑治) 동쪽 풀이 많은 언덕에 장례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두 아들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문인(門人)인 최모(崔某)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여 왔다. 나는 근 30년 동안 공을 섬기면서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이번에 공의 덕을 찬술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을 마땅히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나, 공께서 내리신 치명(治命)이라 사양할 수가 없어 삼가 백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문정공이여 / 嗚呼文正
실로 나라의 원귀로다 / 實國元龜
이제 갑자기 돌아가시니 / 今而忽喪
의심나는 일 어디에다 여쭐까 / 于何質疑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지고 / 山頹梁毁
철인께서 시들었으니 / 哲人其萎
공자를 잃은 자공보다 / 匪獨賜也
더 슬퍼하오이다
/ 有感宣尼


[주D-001]공의 휘 : 국역 대본에는 글자가 빠져 있으나, 《광산김씨문간공파세보(光山金氏文簡公派世譜)》에는 ‘台鉉’으로 되어 있다. 김태현이 최해를 과거에 합격시킨 좌주(座主)인 관계로 그를 높여 이름을 바로 드러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하 《세보(世譜)》라 칭하며, 그 내용은 김용선(金龍善) 편,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地銘集成)》에 수록된 조판본을 기준으로 하였다.
[주D-002]정관(正官) : 정식 규정에 따라 임명된 벼슬아치를 이른다.
[주D-003]문숙공(文肅公) : 김주정(金周鼎 : ? 〜 1290)을 가리킨다. 김주정은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의 부친이다. 1264년(원종 5)에 과거에 급제한 뒤 이부 시랑(吏部侍郞) 등을 역임하고, 여몽 연합군(麗蒙聯合軍)의 일본 정벌에 참전한 뒤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냈다.
[주D-004]예위(禮闈) : 과거(科擧)의 회시(會試) 또는 그 회시를 보이는 장소를 지칭하며, 예조(禮曹)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위(禮圍)’라고도 한다.
[주D-005]천수성절(天壽聖節) :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천자(天子)의 생일(生日)을 높여서 부른 이름이다.
[주D-006]삭방(朔方) : 《고려사》 김태현열전에는 ‘감숙(甘肅)’으로 되어 있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성종이 대덕 4년(1300) 12월에 서남 지역, 즉 현재 태국(泰國)의 북부 지역에 있는 팔백식부국(八百媳婦國)의 정벌에 나서 대덕 6년까지 전쟁을 치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물자와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주변 지역의 이족(彛族), 묘족(苗族)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사천(四川), 섬서(陝西), 운남(雲南) 등지로부터 군대를 징발하는 등 전쟁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성종은 전쟁로의 초입에 해당하는 감숙 지역에 황제의 지휘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주D-007]유수성(留守省) : 《고려사》 김태현열전을 참고해 볼 때 유수성은 중서성(中書省)에 해당한다.
[주D-008]11개의 역참(驛站)을 지나 : 국역 대본의 원문은 ‘過一十(?)一站’으로 세 번째 글자가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는다. 《세보》에는 ‘過一年一站’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11개의 역참을 지나 행재소에 도착했다는 말은 연경과 감숙성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우선 그대로 번역해 둔다.
[주D-009]행재소(行在所) : 황제가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을 이른다.
[주D-010]민호(民戶) : 국역 대본에는 ‘民居’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 김태현열전에 ‘民戶’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11]상왕(上王) : 이 묘지가 지어진 시기가 충혜왕 즉위년인 1330년이므로 상왕은 충숙왕을 가리킨다.
[주D-012]석(碩) : 《세보》에는 ‘석(石)’으로 되어 있다.
[주D-013]원나라 …… 하니 : 금인(金印)은 고려 국왕의 옥새를 가리키며, 객성(客省)은 중국에서 외교를 담당한 관청을 이른다. 《고려사》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17년 2월 조에 “초하루에 원나라가 세자 정(禎)을 왕으로 책봉하고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파견하여 국새(國璽)를 가져갔다.” 하였다. 국새를 가지고 간 것은 아마도 당시 충혜왕이 원나라에 체류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대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좌승상(左丞相)을 맡아왔으므로 이 직책을 충혜왕이 귀국하기 전까지 김태현(金台鉉)에게 임시로 맡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신하들과의 알력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 임명을 받은 관직을 사신이 돌아간 뒤에 박탈당하였다.
[주D-014]공을 축출하였다 : 국역 대본에는 ‘出令’으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出公’으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15]좌우사(左右司) : 정동행성의 좌승상 바로 밑에서 좌승상을 보좌하는 관원을 이른다.
[주D-016]말을 …… 화합하였다 : 국역 대본에는 ‘不言而化’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不言而和’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17]교훈적인 …… 얻었고 : 국역 대본에는 ‘詞敎得體’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訓敎得體’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18]《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 하였다 : 《문선》은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진한(秦漢) 시대 이후의 문(文)을 정선(精選)하여 편찬한 책이고, 《문수》는 송(宋)나라 요현(姚鉉)이 당(唐)나라 300년간의 문을 정선하여 편찬한 것으로 《당문수(唐文粹)》라고도 한다. 여조겸(呂祖謙)은 송나라 때의 문을 정선하여 《문감(文鑑)》을 편찬하였는데 이를 《송문감(宋文鑑)》이라고도 한다. 《동국문감》은 이 《문감》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문선》의 이름을 따서 서거정(徐居正)이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고, 《문수》의 이름을 따서 김종직(金宗直)이 《동문수(東文粹)》를 편찬한 바 있다. 또한 《동국문감》의 뒤를 이어 고려 말에 김태현의 문인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 및 김구용(金九容)의 《선수집(選粹集)》,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이 뒤를 이어 편찬되었다.
[주D-019]성균시(成均試)를 …… 선발하였고 : 《고려사》 권74 선거지(選擧志) 국자시(國子試) 조에 의하면, 1299년(충렬왕 25) 9월에 김태현(金台鉉)이 이천(李蒨) 등 70여 인을 시취(試取)하였다고 한다.
[주D-020]예위(禮闈)를 …… 선발하니 : 《고려사》 권73 선거지(選擧志) 선장(選場) 조에 의하면, 1303년(충렬왕 29) 6월에 김태현(金台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선발하였는데 박리(朴理) 등 33인을 급제시켰다고 한다.
[주D-021]11월 8일 갑신 : 국역 대본에는 ‘10월 8일 갑신〔十月八日甲申〕’으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十月’이 ‘十一月’로 되어 있다. 국역 대본대로라면 졸한 날과 장례일의 간격이 2일밖에 되지 않아 너무 짧고 간지(干支)도 서로 맞지 않는다. 판각상의 결자(缺字)로 판단되어 ‘一’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22]문인(門人)인 최모(崔某) : 최해는 1303년(충렬왕 29)에 김태현이 지공거(知貢擧)로 주관한 과거에 박리(朴理) 등과 함께 급제하여 김태현과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에 있으므로 문인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23]치명(治命) : ‘이명(理命)’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이른다. 반대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난명(亂命)’이라 한다.
[주D-024]원귀(元龜) : 고대에 점을 칠 때 사용하던 큰 거북을 이른다. 국가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 김태현에게 물어서 결정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25]산이 …… 슬퍼하오이다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어느 날 일찍 일어나 손을 등 뒤로 지고 지팡이를 끌면서 문 앞을 거닐며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도 쓰러지는구나. 철인도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 하며 노래를 부른 후 방으로 들어갔다.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볼 것이며, 대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병이 나실 모양이다.〔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 夫子殆將病也〕” 하였다. 공자는 그 후 7일 동안 병들어 누웠다가 돌아가셨다 한다.

 

졸고천백 제1권
고(故) 재상(宰相) 안죽옥(安竹屋) 화상찬(畵像贊) 그 아들 익지(益之)를 위하여 지음


의관은 정숙(整肅)하고 모습은 단정하고 엄숙하다. 몸가짐은 차라리 검소할지언정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일에 임해서는 부지런하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관직에 나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는 삼한(三韓)을 복되게 하기에 충분했고, 물러나 한적한 시골에서 쉴 때에도 한 세상을 고고하게 살았다. 황예장(黃豫章)은 속세를 떠났으면서도 머리를 길렀고 사강락(謝康樂)은 성불(成佛)하였으면서도 집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공의 풍도(風度)가 부친을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공의 풍도를 말하면서 그 아들을 보노라.


[주C-001]안죽옥(安竹屋) : 죽옥은 안우기(安于器 : ? 〜 1329)의 호이다. 안우기는 안향(安珦)의 아들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국학좨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1314년(충숙왕1)에 지밀직(知密直)으로 있으면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 800권을 검열하였다. 1316년 밀직부사 겸 대사헌으로 있다 파직되었고, 1329년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로 있다가 죽었다. 《고려사(高麗史)》 안우기열전(安于器列傳)에 그가 합포에 나가 청렴(淸廉)과 재간(才幹)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주C-002]익지(益之) : 안목(安牧 : ? 〜 1360)의 자(字)이다. 안목은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고, 1330년(충혜왕즉위년)에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했으며, 그 후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48년(충목왕4)에 경사도감 제조(經史都監提調), 1352년(공민왕1)에 서연관(書筵官)을 역임하였다.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주D-001]황예장(黃豫章)은 …… 길렀고 : 황예장은 송(宋)나라 때의 문인 황정견(黃庭堅 : 1045 〜 1105)을 가리킨다. 황정견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사진자찬(寫眞自贊)에 “중 같으면서도 머리를 길렀고 속인 같으면서도 티끌이 묻어 있지 않다.〔似僧有髮 似俗無塵〕”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2]사강락(謝康樂)은 …… 살았다 : 강락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문인 사영운(謝靈運 : 385 〜 433)의 봉호(封號)이다. 사영운이 회계 태수(會稽太守) 맹의(孟顗)가 정성을 다해 부처를 섬기는 것을 보고는 이를 경시하여, “득도(得道)를 하려면 모름지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이 있고 문자와 전생에 좋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 그대는 생천(生天)은 나보다 앞서겠지만 성불(成佛)은 반드시 나보다 뒤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비꼬았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宋書 卷67 謝靈運傳》
[주D-003]부친 : 안향(安珦)을 이른다.

 

 

졸고천백 제1권
안당지(安當之)의 《관동록(關東錄)》 후제(後題)


근래에 《김무적집(金無迹集)》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문집 속에 관동(關東)을 기행한 내용이 많았다. 그때 나는 산에 오른 시부(詩賦)가 그 속에 더 이상 남김이 없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당지(當之)의 이 《관동록(關東錄)》을 보니 사의(詞意)가 정묘(精妙)하여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모두가 무적(無迹)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이 책을 또다시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감탄해 마지않았다.
지순(至順) 신미년(1331, 충혜왕 1) 초겨울에 졸옹(拙翁)은 제(題)하노라.


 

[주C-001]안당지(安當之)의 관동록(關東錄) : 당지는 안축(安軸 : 1287 〜 1348)의 자이다. 안축의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이 되고 1321년에 최해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최해만 급제하였고, 3년 뒤인 1324년에 다시 원나라로 가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1330년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나가 재임 기간인 1330년 5월부터 1331년 9월까지 지은 시문을 모아 《관동록》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안축이 사망한 후 사위 정양생(鄭良生)에 의해 《관동와주(關東瓦注)》란 이름으로 청주(淸州)에서 간행되었다.

 

 

졸고천백 제1권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권씨(權氏) 묘지명(墓誌銘)


지순(至順) 3년(1332, 충숙왕 복위 1) 3월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공 제현(李公齊賢)의 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권씨(權氏)가 병에 걸려 이달 28일 정유일에 양제방(楊堤坊)의 집에서 졸하였는데, 장례 지낼 것을 상의하여 4월 기미일로 길일(吉日)을 잡았고, 장지는 옛 임진현(臨津縣) 장화사(章和寺) 남쪽 언덕이 또 길하다고 하였다. 이에 이공이 눈물을 흘리며 같은 고을 사람인 최모(崔某)를 찾아와서, “아, 내가 불행히도 갑작스레 아내를 잃고 말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영혼을 위로할 길이 없네. 자네가 나와 가장 오랫동안 사귀었고 또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해 묘지명을 지어주지 않겠나.”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물러나 부인에 대한 사실을 모아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부인은 지원(至元)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태어나 올해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까지 살았으니 나이 45세가 된다. 증조부 휘 위(韙)는 고(故)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조부 휘 단(㫜)은 고(故)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시호가 문청공(文淸公)이며, 부친 부(溥)는 지금 삼중대광(三重大匡)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있다. 영가부원군이 시령 유씨(始寧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에 봉해졌으며 고(故) 지첨의(知僉議) 휘 승(陞)의 따님이다. 이분이 부인을 낳았다. 권씨는 실로 영가(永嘉)의 망족(望族)으로 친인척 여러 사람들이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부인은 시집가기 전에 온순하고 총명하여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5세에 남편을 택하여 이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이공(李公 이제현)은 연우(延祐) 연간 초부터 연경에 있는 태위선왕(太尉先王 충선왕)을 수종(隨從)하기 위해 원나라를 오가느라 집에 있지 않은 기간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부인은 남편의 집안을 섬기면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시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들의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 드렸다. 부인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다루는 일과 살림살이와 손님 접대하는 일을 반드시 신중하게 처리하여 모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평소에 까닭 없이 바깥채에 나가지 않았고, 안방에 있을 때에는 하루도 길쌈을 손에서 놓고 노는 적이 없었다. 친족들을 대할 때에도 화기애애하게 지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간에 허물없이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규문(閨門)에서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것을 본디 배웠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공이 젊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한 이후로 정부의 관리에 오르기까지 집안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나라의 명신이 된 것은 부인의 내조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다. 아,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 반드시 화가 미치는 것도 아니니, 하늘이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하늘에게 책임이 있다. 부인의 아름다운 행실로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그치고 말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자식으로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 서종(瑞種)은 통직랑(通直郞) 전(前)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이고, 다음 달존(達尊)은 승봉랑(承奉郞) 봉거서 영(奉車署令)이고, 막내는 돌도 되기 전에 부인이 병이 나는 바람에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열흘 만에 죽었다. 딸 넷을 낳았는데, 맏딸은 좌우위 호군(左右衛護軍) 임덕수(任德秀)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셋은 아직 어려서 시집가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난 가문에 시집와서 / 生盛族配名家
대대로 내려온 덕을 쌓고 규문을 잘 다스리며 / 積世德董閨門
예법을 지키고 여자의 도리를 따랐다네 / 有禮法順女則
아, 부인 같은 분이 홀로 일찍 돌아가시니 / 嗟若夫人兮獨靳年
하소연할 곳 없어 막막하기만 하여라 / 討之無所兮惟漠然


 

[주D-001]이공 제현(李公齊賢) : 1287 〜 1367.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실재(實齋)ㆍ역옹(櫟翁),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최해와는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최해의 본관 역시 경주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자 백이정(白頤正)의 문인으로 1301년(충렬왕 27)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고,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頫)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충숙왕 6)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고하여 1323년(충숙왕 10)에 풀려 나오게 했으며, 1325년(충숙왕 12)에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56년(공민왕 5)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주D-002]영가(永嘉) : 안동(安東)의 옛 지명이다.
[주D-003]연우(延祐) : 원나라 인종의 연호로 1314년 〜 1320년이다.

 

졸고천백 제1권
춘헌호기(春軒壺記)


내가 젊어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투호(投壺)의 예(禮)가 군자들이 빈주(賓主) 사이의 즐거운 흥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 제도에 대해서는 탐구해보지 못하였다. 그 후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 사마광(司馬光))의 투호도서(投壺圖序)를 보고 나서 그 대략은 알게 되었으나 또 사우(師友) 가운데 물어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매번 내가 변방 한구석에서 생장한 탓에 중원(中原)의 사대부들과 서로 만나 화살을 안고 배움을 청하여 투호를 몸소 익힐 수 없는 현실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 봄에 내가 외람되이 회시(會試)를 보러 연경에 가서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입대(入對)한 후 칙지(勅旨)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요양(遼陽)에서 온 홍중의(洪仲宜)의 무리와 문명전(文明殿)의 동저(東邸)에서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할 만한 일이 없기에 홍중의의 족부(族父) 집에서 호시(壺矢)를 빌려와 시험 삼아 해 보았는데, 마음이 매우 즐거워졌다. 그러나 칙지를 받고 동쪽으로 돌아와 개모(盖牟)에 부임하여 분주히 지내다 보니 투호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나는 병으로 물러나 집에서 지낸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천성적으로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음악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라 책을 보는 여가에 가만히 다른 기예를 익혀 보았으나 흥미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었는데, 오직 이 투호만은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어른거렸다. 이는 투호가 마음을 다스리고 덕행을 관찰하기 위한 기예에 가까워 그만둘 수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집안에 투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사대부들 가운데도 이를 가지고 있는 이가 없어서, 내가 아무리 좋아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춘헌(春軒) 최후(崔侯)는 옛것을 배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사람이다. 자제들이 스승도 없이 대충 배워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정주(程朱)의 저술들을 널리 수집하여 그들과 함께 강습하였다. 또 그들이 긴장만 하고 이완을 하지 않아 쉬지도 못하고 공부만 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투호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를 멀리서 사다가 놓고는 때때로 배우기를 원하면서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을 불러다가 그림을 보아가며 가르치니, 뜰 안 가득히 봄바람 부는 기수(沂水) 가의 기상(氣像)이 물씬 풍겨났다. 만약에 최후가 투호를 독실히 좋아하고 부지런히 탐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훗날 우리나라의 후진(後進)들 가운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기어 날마다 자신이 익히지 않은 것을 익혀서 대단하게 변하는 자가 나온다면, 우리 최후로 말미암아 교화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임을 알겠으니, 아, 그를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재(益齋) 이상(李相 이제현(李齊賢))과 근재(謹齋) 안군(安君 안축(安軸))이 이미 여기에 명(銘)을 달고 시(詩)를 지었으니 내가 다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내가 투호를 좋아하는 뜻과 최후가 투호를 가져다 두게 된 연유나 서술하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지순(至順)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5월 경신일에 쓰다.


[주D-001]회시(會試)를 …… 가서 : 1321년 3월에 안축(安軸)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02]개모(盖牟)에 부임하여 : 최해의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에 의하면, 최해는 1321년(지치 원년)에 원나라 과거에 합격자 43명 중 21등으로 합격하여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고,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주D-003]춘헌(春軒) 최후(崔侯) : 춘헌은 최문도(崔文度 : ? 〜 1345)의 호이다. 자는 희민(羲民)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찬성사(贊成事)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고려사(高麗史)》 최문도열전(崔文度列傳)에 의하면, 성리서(性理書)를 즐겨 보아 부모에게 효도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다고 한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주D-004]봄바람 ……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하루는 제자들에게 평소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나타나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차례대로 각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曾點)은 “저는 앞의 세 사람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날에 봄옷을 입고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탄식을 하며 증점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論語 先進》 이곡(李穀)은 춘헌기(春軒記)에서 최문도(崔文度)가 춘헌(春軒)을 지은 진정한 뜻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하며 돌아오는 풍류〔浴沂風詠之流〕’에 있음을 말했다. 《稼亭集 卷2 春軒記, 韓國文集叢刊 第3輯 113쪽》 따라서 최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최문도가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투호를 가르치는 장소가 춘헌(春軒)임을 나타내고 있다.
[주D-005]학교에 …… 즐기어 : 국역 대본에는 ‘莊修游息’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莊’ 자가 ‘藏’으로 되어 있고, 또 이 말의 전거(典據)인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篇)에도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游焉〕”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莊’ 자는 ‘藏’의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명(銘) : 이 명은 《국역 익재집》 권9에 ‘최춘헌(崔春軒)의 호시명(壺矢銘)’이란 제목으로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은 그 속이 비었고 화살은 곧고 바르거니 곧은 것이 아니고 빈 것이 아니면 병도 아니고 화살도 아니다. 반드시 신중히 하고 반드시 넣되 사냥꾼이 시위를 당기듯이 하라. 속여서 많은 점수를 내더라도 그렇게 이김은 기롱을 듣게 되거니, 세게 던지다가 떨어뜨리지 말고 돌려 넣으려다 비뚤어지게 말지어다. 군자의 유희이며 군자의 규모로다.〔壺虛其心 矢直其理 匪直匪虛 匪壺匪矢 必愼必中 若虞張機 詭遇獲十 勝不償譏 勿激而墜 勿旋而倚 君子之嬉 君子之規〕”
[주D-007]시(詩) : 안축의 시문은 후대에 《근재집(謹齋集)》으로 편찬되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관동와주(關東瓦注)》, 즉 1330년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나가서 지은 시문이고 나머지는 습유(拾遺) 작품 몇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안축이 지었다고 하는 투호시(投壺詩) 역시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졸고천백 제1권
군부사(軍簿司) 중신청사기(重新廳事記)

본국(本國)이 예로부터 중국(中國)을 높여 왔으나 관부(官府)의 명칭에 있어서만은 대부분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사용하였으며 이에 대해 일찍이 아무런 거리낌도 가지지 않았다. 지금의 군부사(軍簿司)는 이전의 상서병부(尙書兵部)가 바뀐 것이며, 주(周)나라 제도로 보면 대사마(大司馬)가 관장하는 직임이니, 이 또한 중국을 모방하여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천명(天命)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나와 신하국(臣下國)이 되어 지원(至元) 12년(1275, 충렬왕 1)에 처음으로 중국 조정의 제도를 피해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지대(至大) 2년(1309, 충선왕 1)에는 총부(摠部)로 개칭되었다가 태정(泰定) 3년(1326, 충숙왕 13)에 다시 군부사로 되돌아갔다. 이른바 판서(判書), 총랑(摠郞),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의 관직은 또한 상서(尙書), 시랑(侍郞), 낭중(郞中), 원외랑(員外郞)이 바뀐 명칭이다. 예전에는 국상(國相)이 육조(六曹)를 나누어 맡아 태재(太宰)는 동조(東曹 문관직)를 주관하고 아상(亞相)은 서조(西曹 무관직)를 주관하였다. 서조는 무관(武官)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으며, 무인(武人)을 중용(重用)하게 된 뒤로는 반드시 무인의 수장(首長)을 서조의 아관(亞官)으로 삼아 통솔하게 하였다. 그 규정이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것은 대개 그 권한을 막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군교(軍校)의 명부(名簿)와 군수 장비(軍需裝備) 및 장수(將帥)의 임명과 군사(軍士)의 출동 등의 일이 모두 이곳에 귀속되었고, 3군(軍)과 6위(衛), 42도부(都府)가 날마다 달려와 여기에서 명령을 받드니, 그 관아가 웅장하지 않으면 위압감을 가지게 할 수가 없다.
옛날에는 관청의 건물이 왕궁 동쪽에 있었는데, 권신(權臣)이 임금을 옹위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간 후로 궁실(宮室)과 관사(官舍)가 다 함께 자갈과 풀더미로 폐허가 된 것이 39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원(至元) 경오년(1270, 원종 11)에 황명(皇命)을 받들어 옛 서울인 개경(開京)으로 돌아오게 됨에 따라 당시 군부(軍部)의 아관으로 있던 기공(奇公) 홍석(洪碩)이 관사의 옛 터를 닦아 중건을 하였다. 이때부터 천력(天曆) 기사년(1329, 충숙왕 16)까지 또 60년이나 지났는데, 그동안에 이를 이어 한 번도 제대로 수리를 한 자가 없었으니, 기둥과 처마가 어찌 썩어 부러져 날이 갈수록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응양군 상장군(鷹揚軍上將軍)인 김후 취기(金侯就起)가 마침 군부사의 아관이 되어 처음 부임하는 날에 낭서(郞署)의 관리(官吏)군위(軍衛)의 장사(將士)들이 차례로 축하를 올리고 물러나자, 김후가 그들을 다시 나오게 하여 청사(廳事)를 한번 둘러보고는 탄식을 하며 낭서의 관리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곳에 온 지 각기 몇 년이 되었으며, 관사(官舍)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가 맡고 있느냐?”
하고 추궁을 한 후, 또 군위의 장사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너희들이 날마다 모여서 군령(軍令)을 여쭙는 곳이 아니냐? 이 정도로 무너졌는데도 너희들은 부끄럽지도 않더냐?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철거하고 다시 지어보도록 하자.”
하니, 낭관들과 장사들이 모두 얼굴이 새빨개져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기를,
“후(侯)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청사를 신축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어 좌랑 김군 완(金君玩)에게 위임하여 그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김군이 이에 관아의 창고에서 남는 재물을 인출하여 먼저 목재와 기와를 사들이고 그 밖의 모든 계획들을 정성을 다해 추진하자 군졸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공역에 참가하여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처리하였다. 공역은 이듬해 경오년(1330, 충숙왕 17)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마쳤는데, 당우(堂宇)가 예전에 비해 훨씬 넓어졌으며 건물의 높낮이가 모두 제도에 맞아 오래도록 보존할 만했다.
김군이 이 일을 기록에 남기려고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으나 내가 게을러 곧바로 허락하지 못하고 미적미적하는 사이에 김군이 이윽고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가 버렸다. 그 후 2년이 지나 김군이 다시 군부사로 들어와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지난번의 일에 글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쉬워 또다시 두 번이나 와서 요청하였으므로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허명(虛名)을 기르는 데에 안주하여 맡은 관직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경대부(卿大夫)들이 모두 그러하며 이전 군부사 한 관청의 책임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후와 김군은 앞에서 선도하고 뒤에서 화답함으로써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일으켜 청사를 이처럼 거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니, 유능한 관리라 하겠다. 그러나 관청의 일 가운데에는 내팽겨진 채로 폐기되어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김군은 이미 일으킨 일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니, 앞으로 또 차례차례 할 만한 일을 생각해 내어 무너지는 대로 고치기를 또한 관사를 고친 것처럼 한다면 사람들이 어찌 직무를 방치한다고 기롱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해 준 다음 글을 보내주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감을 삼게 하는 바이다. 공사 비용의 다소에 대해서는 관청에 반드시 장부가 있을 터이므로 여기에서는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
원통(元統) 2년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 2월 갑자일에 쓰다.

[주D-001]군부사(軍簿司) :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왕의 호칭이 격하됨과 함께 관청의 이름도 격하되었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병조(兵曹) 조에 의하면, 병조는 918년(태조 원년)에 병부(兵部)로 불리다 얼마 후 병관(兵官)으로 고쳤으며 995년(성종 14)에 와서는 상서병부(尙書兵部)로 개칭되어 판사(判事), 상서(尙書), 지부사(知部事) 등의 겸관(兼官)과 시랑(侍郞), 낭중(郞中), 원외랑(員外郞) 등 실무진으로 운영되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에는 대대적인 관제 개편이 이루어져 병부는 군부사(軍簿司)로 이름이 격하되고, 관직의 이름도 상서는 판서(判書)로, 시랑은 총랑(摠郞)으로, 낭중은 정랑(正郞)으로, 원외랑은 좌랑(佐郞)으로 고쳤다.
[주D-002]대사마(大司馬) : 주나라 관직 제도에 대해 기술한 《주례(周禮)》에 의하면 대사마는 하관(夏官)에 소속한 최고의 관직이다. 하관은 후대 병조(兵曹)에 해당한다.
[주D-003]수장(首長) : 상장군(上將軍)에 해당한다.
[주D-004]아관(亞官) : 병부상서(兵部尙書) 또는 군부판서(軍簿判書)에 해당한다.
[주D-005]3군(軍)과 6위(衛) : 당시 중앙군(中央軍)의 편제는 주로 2군 6위의 체제로 유지되었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이고, 6위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尉),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이다. 본 기문(記文)에서는 ‘3군(軍)’이라 하였는데,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응양군 1령(領)과 용호군 2령, 즉 3령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3군이라 말한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군(軍)이 따로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주D-006]42도부(都府) : 고려 때에 군사 1천 명을 단위로 하여 편성한 군대를 이른다.
[주D-007]권신(權臣)이 …… 후로 : 최씨(崔氏) 무신정권이 몽고와의 항전을 위해 1232년(고종 19)에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것을 이른다.
[주D-008]낭서(郞署)의 관리(官吏) : 군부사의 실무 관원으로서 낭관(郞官), 즉 총랑(摠郞),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을 가리킨다.
[주D-009]군위(軍衛)의 장사(將士) : 3군 6위의 장수, 즉 상장군(上將軍) 이하 대장군(大將軍),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등을 가리킨다.

졸고천백 제1권
서방(西方)으로 돌아가는 노 교수(盧敎授) 흠(欽) 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천자께서는 우리나라가 제일 먼저 원나라에 귀화했다 하여 대대로 공주(公主)와 혼인을 허락하고, 왕권(王權)과 행성(行省)의 권한을 위임하여 그 막료들을 모두 직접 뽑아 쓰게 하고 원나라 조정에서 제수하지 않았다. 그러니 중원(中原)의 자제(子弟)를 이곳에 오게 할 수도 없었으니, 더 나아가 평소 자연 속에 은둔하여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데려다가 묶어둘 수 있겠는가. 무릇 이곳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무리로서, 처음에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다가 나중에는 배불리 먹고 날아가 버리면서 도리어 그 주인을 증오하는 매와 같은 자들이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나라에서 온 객관(客官)을 보면 겉으로는 상대에게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속마음도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령(大寧) 노백경(盧伯敬 노흠(盧欽))이 왕경(王京 개경(開京))의 학관(學官)으로 처음 왔을 때, 나는 병으로 은퇴한 뒤로는 같은 마을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 연락을 하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백경이 왔다는 소식도 오래 지난 뒤에야 듣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한번 가서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백경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었기에 내가 깜짝 놀라 황급히 그를 맞아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더니, 말씨와 안색이 온화하고 마음속이 평온하여 자임이 무거우면서도 구차스럽지 않은 자라 이를 만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그 집안의 가계(家系)에 대해 물었더니 현(現) 심양 절추(瀋陽節推) 달재군(達齋君)의 아들이자 고(故) 하동산서염방지사(河東山西廉訪知事) 동암공(東菴公)의 손자였다. 내가 듣기로 노동암(盧東菴)은 북방의 학자들이 종사(宗師)로 받드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백경이 선생의 생전에 가르침을 받았으니, 학문에 있어 그가 터득한 것은 내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학정(學政)이 해이해져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다행히 백경이 오게 되었으니 틀림없이 학생들을 이끌고 격려하여 진작시켜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백경이 관직을 옮길 시기가 임박하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하니, 학생들이 끝내는 자포자기하는 것을 편안히 여겨 도에 나아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학생들만 이렇게 되고 말 뿐이 아니다. 백경이 이곳에 와 있은 지 1년도 채 안 되어 그들의 학문이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경이 참된 스승이요 유학자임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하는 것은 진실로 군자(君子)의 기미(幾微)로서 백경이 스스로 살펴서 판단할 일이니, 백경 자신에 있어서야 무슨 손익(損益)이 있겠는가. 다만 아쉬운 것은 옛날에 자사(子思)를 편히 머무르게 하였듯이 옆에서 잘 모시어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이미 만류할 수 없게 된 이상 사문(斯文)의 정리상 묵묵히 있을 수 없어 서로 아는 사람들에게 청하여 각자 시(詩)를 지어서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백경에 대해 잘 모르는 자가 그저 객관(客官) 정도로 대접할까 염려가 되었으므로 먼저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어 백경은 우리와 같은 유학자요,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저들과 같은 무리가 아님을 알게 한 것이다.
원통(元統)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 2월 신미일에 쓰다.


 

[주D-001]배불리 …… 매 : 진등(陳登)이 조조(曹操)에게 여포(呂布)에 대해 말하기를, “여포를 다루는 것은 호랑이를 키우는 것과 같아서 고기를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사람을 물어뜯습니다.” 하자, 조조가 이 말에 반대하여 “여포를 다루는 것은 매를 키우는 것과 같아서 굶겨 놓으면 사람의 말을 듣지만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린다.〔譬如養鷹 飢卽爲用 飽則颺去〕” 하였다. 《後漢書 卷105 呂布列傳》
[주D-002]객관(客官) : 다른 나라 출신의 관리를 이른다.
[주D-003]자임이 …… 자 : 주자(朱子)의 장주교수청벽기(漳州敎授廳壁記)에, “교수의 직임은 가히 어렵다 할 만하다. 오직 자임함이 무거우면서도 구차스럽지 않은 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敎授之爲職 其可謂難矣 惟自任重而不苟者知之〕” 하였다. 《晦庵集 卷77》
[주D-004]심양 절추(瀋陽節推) : 절추(節推)는 절도추관(節度推官)의 약칭이다. 절도사(節度使)의 속관(屬官)으로 형옥(刑獄)의 심문(審問)을 담당하는 관리이다.
[주D-005]자사(子思)를 …… 하였듯이 :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을 때 제나라 왕을 위해 맹자를 만류하러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맹자는 처음에 무관심하게 냉대를 하였는데 그가 이를 따져들자, “옛날에 노(魯) 나라 목공(繆公)은 자사(子思)의 곁에 사람이 없으면 자사를 편히 머무르게 할 수 없었다. 그대가 장자(長者)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 자사 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해명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졸고천백 제2권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정중부(鄭仲孚)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삼한(三韓)이 예로부터 중국(中國)과 국교를 맺어 문물제도가 일찍이 서로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조빙(朝聘)이 세시(歲時)에만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가 다른 오랑캐들보다 후했으니, 이는 먼 지역 사람들을 귀순해 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매번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반드시 그 관속(官屬)들을 신중하게 가려 뽑았고, 그 일행이 혹 300에서 500명이 되기도 하고 적을 때라 하더라도 100명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사신 일행이 처음 중국 땅에 도착하면 중국에서는 조관(朝官)을 보내어 국경에서 맞이하였고, 지나는 고을마다 천자(天子)의 명으로 예물을 보내왔으며, 교정(郊亭)에 이르면 또 영접하여 위로하였고 객관(客館)에 도착하면 다시 안부를 물었다. 날마다 제공되는 풍성한 물품 외에도 천자를 참알(參謁)할 때부터 배사(拜辭)할 때까지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음식을 마련하여 국빈(國賓)으로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찰(御札)을 특별히 내려 다향(茶香), 주과(酒果), 의복(衣服), 기완(器玩), 안마(鞍馬) 등 예물을 끊임없이 넉넉히 내려주었는데, 그때마다 표(表)나 장(狀)을 지어 배신(陪臣)을 칭하며 사은(謝恩)하였다. 또 사적으로 중국의 재상들을 만나게 될 때에도 계(啓)나 차(箚)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기(書記)의 직임은 학식이 달통한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고 일컬어져왔다. 중고(中古)에 국상(國相)을 지낸 박인량(朴寅亮)과 김부식(金富軾) 등은 모두 일찍이 이 직임을 거치면서 중국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원나라에 귀의한 이후로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어 한집안처럼 지내게 되었으므로 양국 간의 일은 정실(情實)을 돈독히 하고 예(禮)는 형식적인 것을 생략하게 되었다. 원나라에 품달(稟達)할 일이 있으면 한 사람이 역말을 타고 곧장 황제가 계신 곳에 가서 전달하여 한 해 동안 빠지는 달이 없을 정도로 왕래가 잦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사신으로 갈 사람을 가려 뽑지 않게 되었으니, 지극히 두터운 은혜를 입은 것이다. 오직 연절(年節)에 있어서만은 의례적으로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를 드리고 또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므로 국경(國卿)으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충원하여 대충이나마 옛 관례를 따른다. 서기(書記)의 명칭 역시 겨우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문장을 짓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근년에는 요행만을 바라는 염치없는 자들이 왕왕 이익을 탐내어 앞 다투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였으므로 행인(行人)과 장교(將校)들조차도 이를 청망(淸望)의 자리로 대우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 서기의 직임이 비록 지금 쓸모없는 자리가 되었다 하나 그 이름만은 아직 남아 있는데, 어찌 저와 같이 염치없는 자들이 망녕되이 차지할 수 있으며 저 따위 무리들이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금년 4월 17일은 천수성절(天壽聖節)로서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하례를 드려야 하기에 국왕이 친히 관료들 가운데 선발하여 채 밀직(蔡密直)에게 사신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또 근래에 서기를 맡았던 자들이 적임자가 아니었다 하여 밀직에게 스스로 천거하게 하였는데, 전의시 직장(典儀寺直長) 정포(鄭誧) 중부(仲孚)가 여기에 선발되었다. 중부가 이에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려 하면서 노우(老友)라 하여 나를 방문해 주고 또 이별을 고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남자가 태어나면 호시(弧矢)를 사용하여 큰 뜻을 보여야 하는 법이며,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은 또 군자가 지닐 뜻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천하가 한집안이 되어 사해(四海)의 안팎에서 험준한 곳은 사다리를 타고 넘고 바다로 막힌 곳은 배를 타고 건너서 황성(皇城)으로 몰려드는 판국인데, 국왕의 명을 받들고 황제의 조정에서 성대한 예식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선비로서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옛날에 소영빈(蘇潁濱)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다 읽고도 자신의 지기(志氣)를 격발시키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이를 던져버리고 경사(京師)로 여행을 떠나, 궁궐(宮闕)ㆍ창름(倉廩)ㆍ부고(府庫)ㆍ성지(城池)ㆍ원유(苑囿)의 장대함을 보고, 구양공(歐陽公)을 만나 웅대한 의논(議論)을 들었으며, 또 한 태위(韓太尉)를 만나 현인의 빛나는 풍모를 접해봄으로써 천하의 장관을 유감없이 다 보고자 한다고 하였다.
중부(仲孚)가 이미 경사의 궁궐로 조회(朝會)를 가기로 한 이상 크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것이 의당 소영빈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호걸과 위인들로서 구양공이나 한 태위와 같은 인물을 만나 지기(志氣)를 격발하여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훗날 돌아오면 반드시 오늘 보는 모습과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니, ‘선비가 사흘을 헤어져 있으면 눈을 비비고 서로 쳐다보게 된다.〔士別三日 刮目相待〕’는 말이 어찌 허튼 말이겠는가.
서기의 책임은 옛날과 같지 않으므로 또 중부에게 말할 거리가 못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부가 아니면 나 또한 이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니, 중부는 소홀히 여기지 말지어다.”
원통(元統) 2년(1334, 충숙왕 복위 3) 3월 기망(旣望)에 쓰다.


 

[주D-001]주과(酒果) : 국역 대본에는 ‘酒杲’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杲’ 자가 ‘果’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果’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장인과 사위의 관계 : 충렬왕 이후로 원나라에서 고려 국왕을 원나라 공주와 결혼시켜 부마국(駙馬國)으로 삼고 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므로 원나라 황제와 고려 국왕은 장인과 사위, 또는 외숙과 생질의 관계가 된다. 대표적인 예로 충선왕(忠宣王)을 들 수 있는데,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며,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주D-003]연절(年節) : 정월 초하루를 이른다.
[주D-004]서기(書記)의 …… 않는다 : 국역 대본에는 ‘書記之名亦苟存 其而翰墨無所責也’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其而’가 ‘而其’로 도치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而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천수성절(天壽聖節) :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천자(天子)의 생일(生日)을 높여서 부른 이름이다.
[주D-006]채 밀직(蔡密直) : 이름은 미상이다. 혹 이 글을 짓기 2년 전인 1332년에 밀직사(密直使)로 임명된 채하중(蔡河中 : ? 〜 1358)이 아닐까 생각된다. 채하중은 그 뒤 1335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주D-007]정포(鄭誧) : 1309 〜 1345. 정포의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최해의 문인으로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뛰어났으며, 그의 문집은 아들 정추(鄭樞)에 의해 《설곡집(雪谷集)》으로 간행되었다.
[주D-008]노우(老友) : 채원정(蔡元定)이 주자(朱子)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는데, 주자가 그의 학문을 점검해 보고는 크게 놀라 “이 사람은 나의 노우(老友)이지 제자(弟子)의 반열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宋史 卷434 儒林傳》 여기에서는 스승인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이다.
[주D-009]호시(弧矢) :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 즉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이다. 옛날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을 향해 여섯 개의 화살을 쏘아 남자가 사방에 뜻을 두어야 함을 표시하였다. 《禮記 內則》
[주D-010]뒤웅박처럼 …… 것 : 공자가 중모(中牟)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필힐(佛肹)의 초빙을 받아 그곳으로 가려고 하자 자로가 반대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아무리 갈아도 갈리지 않으니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내 어찌 뒤웅박처럼 넝쿨에 매달린 채 먹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하였다. 《論語 陽貨》
[주D-011]소영빈(蘇潁濱) : 영빈은 송(宋)나라의 문장가 소철(蘇轍 : 1039 〜 1112)의 호이다. 소철은 자가 자유(子由) 또는 동숙(同叔)이며, 소순(蘇洵)의 아들이자 소식(蘇軾)의 아우로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주D-012]구양공(歐陽公) : 구양수(歐陽脩 : 1007 〜 1072)를 가리킨다. 구양수는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영종(英宗) 초에 영종의 생부인 복왕(濮王)을 황제로 추존하자는 복의(濮議)의 논쟁을 일으켰으며, 신종(神宗)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였다. 역사에도 해박하여 송기(宋祁) 등과 함께 《신당서(新唐書)》를 편수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주D-013]한 태위(韓太尉) : 한기(韓琦 : 1008 〜 1075)를 가리킨다. 한기의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이다. 인종(仁宗) 때에 추밀부사(樞密副使)로 불려와 범중엄(范仲淹), 부필(富弼) 등과 함께 등용되었고,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주D-014]옛날에 …… 하였다 : 소철(蘇轍)이 한기(韓琦)에게 보낸 편지인 상추밀한태위서(上樞密韓太尉書)에 의하면, 소철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19세에 고향을 떠나 진한(秦漢)의 고도(古都)와 산으로는 종남산(終南山)ㆍ숭산(嵩山)ㆍ화산(華山)을, 강으로는 황하(黃河)를 구경하고 경사(京師)에 와서 천자(天子)가 사는 궁궐의 장대함과 창름ㆍ부고ㆍ성지ㆍ원유의 풍부하고도 장대함을 보았고, 그곳에서 당시 한림(翰林)으로 있던 구양수(歐陽脩)를 만나 그의 웅대한 의논(議論)을 듣고 수려한 용모를 보았다고 하며, 또 추밀(樞密)로 있던 한기를 만나 뛰어난 재략을 지닌 그에게서 조정에서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풍모를 보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의 풍모를 보고자 한다고 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卷149》
[주D-015]선비가 …… 된다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그의 장수 여몽(呂蒙)이 무술에는 능하나 학문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을 나무라자, 여몽은 이때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 후에 노숙(魯肅)이 찾아가 전과 달라진 그의 높은 식견에 놀라워하자, 여몽은 “선비가 사흘을 헤어져 있으면 눈을 비비고 서로 쳐다볼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三國志 卷9 吳書 呂蒙傳 注》

졸고천백 제2권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 묘지(墓誌)


고려의 대신(大臣) 가운데 휘가 항(恒)인 분이 있어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의 재상을 지냈으니, 성은 박씨(朴氏)요 지위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아들 광정(光挺)이 처음으로 본국의 자제로 선발되어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고, 천자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소신교위(昭信校尉) 고려서경등처수수군부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졸하였다. 그 아들 정윤(正尹) 거실(居實)과 손자 독만(禿滿)이 능히 그 직책을 세습하여 품계가 모두 소신교위가 되었으니, 고(故)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는 바로 정윤공(正尹公)의 아내이자 독만에게는 어머니가 된다. 11대조 휘 극유(克猷)는 개국 초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으며, 이후로 훌륭한 자손이 계속 이어져 세월이 갈수록 더욱 현달하고 번성하였다. 조부 휘 부(傅)는 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부친 휘 관(瓘)은 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모친 김씨(金氏)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의 따님이다.
자식으로는 아들 2명과 딸 5명을 두었다. 맏아들은 독만(禿滿)이고 다음은 장명(長命)인데 장명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딸은 중정원 장사(中政院長史) 심양(瀋陽) 홍의손(洪義孫)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흥위위 낭장(興威尉郞將) 김지경(金之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대광(重大匡)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에게 시집가서 나라의 종친(宗親)이 되었고, 다음은 선수(宣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훌륭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부드러우면서도 지혜로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나이 열세 살 때 남편을 택하여 박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 들어와서는 시부모 봉양하기를 마치 친정 부모를 사랑하듯이 하면서도 예는 그보다 더 극진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광정공(匡靖公)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정씨(鄭氏)만 살아 계셨는데, 정윤공(正尹公)이 부친을 대신하여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러 연경(燕京)에 가 있었으나 부인이 정씨의 좌우에서 수발을 들며 한 치도 어김없이 봉양하여 잘 모시는 가운데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었다. 그 후 정윤공이 또 세상을 떠나고 아들딸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자식이 다섯 명 있었는데, 부인이 집안을 주관한 지 9년도 되지 않아 모두 짝을 찾아 혼인을 시켰다. 원씨(元氏) 집안의 동생들이 모두 부귀 현달하고 태부인(太夫人)도 아직 무고하며 집안 친척들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는데, 부인이 일찍 홀몸이 되어 그 사이에서 처신하면서도 시댁 식구들을 받들고 대우함에 공손함을 다하고 예법으로 자신을 지켰으므로 온 집안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집안에 본디 재물이 풍족하였으나, 정윤공은 이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부인이 법도에 맞게 처리하였다. 거느리는 비복(婢僕)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거역하거나 원망하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원통(元統) 2년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 12월 갑술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47세이다. 아, 부인께서는 어질면서도 오래 살지 못한 분이로다. 아들과 사위가 상을 치르면서 이듬해인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2월 기미일로 날을 잡아 아무 곳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기로 정하고는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맏사위 홍 장사(洪長史)와는 동년(同年)의 벗이고 또 막내 사위 이 광정(李匡靖)과도 매우 잘 아는 사이이니, 명(銘)을 써달라는 부탁을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딸로서는 부모를 잘 받들고 / 女承而親
아내로서는 자신을 잘 지켰으며 / 婦信而身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사랑했으니 / 母慈而子
때에 맞고 고르도다 / 維時維均
어질면서 오래 살지 못하니 / 賢不克壽
슬프도다 부인이여 / 嗟嗟夫人


 

[주D-001]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 :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1308년에 충렬왕이 죽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충선왕을 책봉하여 정동행중서성 우승상(征東行中書省右丞相)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삼고 전례대로 심양왕(瀋陽王)에 봉작(封爵)하고 이어 태사(太師)를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충렬왕에게도 태사의 직책이 내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졸고천백 제2권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李中父)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사(進士)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唐)나라 때 성행하여,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천우(天祐) 말년까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58명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 또 32명이 있는데, 발해(渤海) 출신 1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 고려에 와서도 일찍이 송(宋)나라에 선비를 보내어,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하는 시험에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합격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하는 시험에 김성적(金成績)이 합격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하는 시험에 강무민(康撫民)이 합격하였고, 정화(政和) 연간에 또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에게 특별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내렸으니,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 대대로 인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정식 과거시험 때에 매번 별도로 시험을 치러 방목(榜目) 끄트머리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서 정식 과거의 급제자들과는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받는 관직도 대부분 낮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직들이고, 더러는 곧바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元)나라에 와서 온 천하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에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중원(中原)의 수재(秀才)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금방(金牓)에 이름이 오른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는 비록 이들보다 뒤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과거에서 높은 등급으로 발탁되어 황궁(皇宮)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그 은택이 양친(兩親)에게 미쳐 모두 은명(恩命)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모친(母親)을 고당(高堂)에서 알현하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를 안겼으니, 뜻을 성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옴이 장경(長卿)과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출세를 과시했던 정도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문창공(文昌公)은 나이 12세에 서쪽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함통(咸通) 15년의 과거에 등제하였고,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하에서 보좌하여 관직이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28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귀국하니, 고향 사람들 사이에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살이하는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였으나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도 하지 못하였다. 평생을 논해볼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영화는 그다지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찌 우리 중보(中父)가 좋은 세상을 만나 화근직(華近職)에 오르고 게다가 한창 강장(强壯)한 나이에 뜻까지 더욱 겸손하여 그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니 가문과 국가를 드러내 영광되게 하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부귀로 몸을 감싸고 공명을 천하 가득 떨치고 주금당(晝錦堂)을 우리나라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후대 사람들이 중보를 우리나라의 옛 인물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평가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기억하건대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 8)에 나 또한 외람되이 원나라에서 시행되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해에 응시자가 정원을 채우지 못해 좌방(左牓)에 오른 자가 겨우 43명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요행히 제 21 명에 들어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여 고향 마을로 물러나 살아온 지 이제 13년이 되었다. 그동안 젊을 때의 웅장한 포부도 날이 갈수록 사그라져 더 이상 날고 뛰는 기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근래에 중보를 보고 나서는 내가 끝내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을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중부는 부디 노력하여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서 아홉 길의 높은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하게나. 나는 중보와 절친한 사이인지라 먼저 그의 행실을 칭찬하고 또 과거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바이다.
원통(元統)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3월 초길(初吉)에 쓰다.


 

[주C-001]이중보(李中父) : 중보는 이곡(李穀 : 1298 〜 1351)의 자이다. 이곡의 초명은 운백(雲白), 호는 가정(稼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 되었고,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제 1 등으로 합격한 뒤 이듬해인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하였다.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고, 1335년에 흥학(興學)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고려에 환국하였다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하였다. 고려에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3대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 글은 1335년 이곡(李穀)이 흥학(興學)의 조서를 가지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돌아갈 때 지어준 것이다.
[주D-001]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821년 〜 824년이다.
[주D-002]빈공(賓貢) : 외국에서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한 선비를 이른다.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 “선비를 바치는 것〔貢士〕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바친 선비를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 바친 선비를 향공(鄕貢)이라 하고, 타국(他國)에서 바친 선비를 빈공(賓貢)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3]천우(天祐) :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로, 904년 〜 907년이다.
[주D-004]빈공과(賓貢科) : 《동사강목(東史綱目)》 당(唐)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889, 진성여주〈眞聖女主〉 3년) 조에,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외국인을 위하여 보이는 별시(別試)로서 과거의 방(榜) 끝에 그 이름을 붙인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霙),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승우(崔承祐), 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명성을 날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최치원, 최신지, 최승우가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 원걸(元傑), 왕거인(王巨仁), 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史書)에 빠져 있어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05]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990년 〜 994년이다.
[주D-006]왕빈(王彬)과 최한(崔罕) :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성종(成宗) 5년(986)에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11년(992)에 최한과 왕림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비서랑(秘書郞)에 제수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는 “순화 3년에 상(上)이 각 도의 공거인(貢擧人)들을 친히 시험하여 고려(高麗)의 빈공(賓貢)인 진사(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를 주고 관직을 제수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왕빈(王彬)의 경우 그 이름이 《고려사》에는 왕림(王琳)으로 되어 있고 《송사》에는 왕빈(王彬)으로 되어 있다.
[주D-007]함평(咸平)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로, 998년 〜 1003년이다.
[주D-008]김성적(金成績)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목종(穆宗) 원년(998)에 김성적(金成績)이 송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주D-009]경우(景祐)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034년 〜 1037년이다.
[주D-010]정화(政和)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로, 1111년 〜 1117년이다.
[주D-011]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예종(睿宗) 10년(1115) 7월에 김단(金端), 견유저(甄惟底), 조석(趙奭), 강취정(康就正), 권적(權迪)을 송나라 태학(太學)에 보내었고, 12년(1117)에 권적, 조석, 김단이 상사급제(上舍及第)로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고려사》에는 권적(權適)이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으며, 급제자 수는 4명이 아니라 3명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12년 5월 조에는 “황제가 처음으로 권적(權適) 등을 집영전(集英殿)에서 몸소 시험을 보여 권적 등 4인에게 상사급제를 하사하고 권적에게는 특별히 화요직(華要職)을 제수하였다.”라 하여 본문과 일치한다.
[주D-012]금방(金牓) :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써서 걸어두는 방문(榜文)으로 금방(金榜)이라고도 한다.
[주D-013]여섯 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의하면, 충숙왕 5년(1318)에 안진(安震)이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8년(1321)에는 최해(崔瀣)가, 11년(1324)에는 안축(安軸)이 각각 합격하였다. 나머지 세 명은 미상이다. 이곡은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합격하였다.
[주D-014]높은 등급 : 이곡이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주D-015]황궁(皇宮)의 관직 : 이곡이 제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주D-016]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사령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일을 말한다.
[주D-017]장경(長卿)과 …… 정도 : 장경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고향인 촉(蜀)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면서,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다가 다리 기둥에 쓰기를, “높은 수레와 사마(駟馬)를 타지 않고는 이 다리 밑을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汝下〕” 하였다. 그 뒤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은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등용하여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한 후 촉 땅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태수(太守) 이하 관원들과 그동안 자신을 박대하던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輿地廣記 卷29》《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옹자(翁子)는 주매신(朱買臣)의 자(字)이다. 주매신은 한 무제 때 엄조(嚴助)의 천거를 받아 고향인 오월(吳越)의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는데, 부임하는 길에 수년 전 가난하게 지낼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아내가 개가(改嫁)한 새 남편과 함께 부역에 나가 길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 부부를 뒷수레에 싣고 가서 마소를 먹이는 심부름을 시켰다. 또 주매신은 예전에 회계군(會稽郡)의 수저승(守邸丞)에게 기식(寄食)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회계 태수가 된 뒤 일부러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인끈을 품속에 감추고서 도보로 군저(郡邸)에 부임하여 관아의 아전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漢書 卷64 朱買臣傳》
[주D-018]문창공(文昌公) :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을 이른다.
[주D-019]함통(咸通) 15년 : 이규경(李圭景)의 ‘최문창(崔文昌) 사적(事蹟)에 대한 변증설〔崔文昌事蹟辨證說〕’에 의하면, 최치원이 배찬(裵瓚)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한 것은 18세이며,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원년(874)으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함통 14년(873) 7월에 의종(懿宗)이 죽고 이듬해에도 함통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다가 11월에 가서야 건부로 개원(改元)을 했기 때문에 함통 15년과 건부 원년은 실제 같은 해를 가리킨다.
[주D-020]고 시중(高侍中) : 당나라 장수 고변(高騈)을 가리킨다. 황소(黃巢)의 난 때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난을 진압하다 최치원이 떠나고 3년 뒤인 887년에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했다.
[주D-021]헌질(憲秩) : 어사(御史)의 직위를 가리킨다.
[주D-022]화근직(華近職) :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화려한 직임을 이른다. 이 역시 이곡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주D-023]주금당(晝錦堂) : 위국공(魏國公) 한기(韓琦)가 출세를 한 후 고향인 상주(相州)에 세운 건물로서, 동시대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한기를 위해 지은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6》 주금(晝錦)은 의금주행(衣錦晝行)의 준말로서 반대어인 의금야행(衣錦夜行)에서 나온 말이다. 즉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입성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을 도륙할 때, 어떤 이가 항우에게 관중에 그대로 머물 것을 권유하였는데, 진나라 궁궐이 이미 파괴된 것을 본 항우는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부귀를 얻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에서 연유하여 후대에 부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금주행(衣錦晝行), 줄여서 주금(晝錦)이라 한 것이다. 《漢書 卷31 項籍傳》
[주D-024]다시 기억하건대 : 국역 대본에는 ‘復記’로 되어 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잡록(雜錄)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復’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 第3輯 232쪽》
[주D-025]나 또한 …… 있었는데 :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충숙왕 7년(1320) 10월에 안축(安軸), 최해(崔瀣), 이연종(李衍宗)을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8년(1321)에 최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요양개주판관(遼陽盖州判官)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주D-026]좌방(左牓) :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원나라 때에 과거 합격자의 방을 게시하면서 좌우로 두 개의 방을 붙였는데, 지배층인 몽고인(蒙古人)과 터키ㆍ이란ㆍ유럽 등의 색목인(色目人)을 우대하여 우방(右牓)에 게시하고 금(金)나라 유민인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남송(南宋)의 유민인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은 좌방(左牓)에 게시하였다. 고려인이 좌방에 게시된 것으로 보아,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우대를 받는다는 최해의 형식적인 표현과 달리 실제로는 중하등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용방(龍牓)’으로 되어 있다.
[주D-027]한 삼태기의 …… 못하는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모든 일에 부지런하소서. 사소한 일이라 하여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쌓으면서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夙夜 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
[주D-028]초길(初吉) : 초하루를 이른다

 

졸고천백 제2권
수령옹주(壽寧翁主) 김씨(金氏) 묘지


김씨(金氏)가 귀족이 된 것은 대개 신라 초기부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금궤(金樻)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姓)을 삼았다고도 하고,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라 하여 이로써 씨(氏)를 삼았다고도 한다. 자손들이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리다가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 때에 이르러 우리 신성왕(神聖王)이 크게 일어날 때를 만나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알고는 땅을 바치고 스스로 귀부(歸附)하였다. 이때 그 종족들도 많이 도성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은혜를 입고 관직을 받아 대대로 충성과 근면으로 이름이 나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번성하였다.
근래에 정승 휘 봉모(鳳毛)라는 이가 있었는데 관직은 문하평장(門下平章)을 지냈다. 그가 문하평장 휘 태서(台瑞)를 낳았고, 문하평장이 추밀부사(樞密副使) 휘 경손(慶孫)을 낳았고, 추밀부사가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을 낳았다. 밀직승지는 판태부감(判太府監) 윤번(尹璠)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돌아가신 수령옹주는 그 막내 따님이다.
14세에 명문가의 따님으로서 현숙한 성품을 갖추고 왕씨(王氏) 휘 온(昷)에게 시집을 가니, 이분은 돌아가신 예성부원대군(蕊城府院大君)으로서 현종(顯宗)의 넷째 아들이자 문종(文宗)의 동모제(同母弟)인 평양공(平壤公) 휘 기(基)의 10세손이다. 대대로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공후(公侯)의 작위를 세습하였으며, 백부(伯父) 대방공(帶方公) 휘 징(澂)은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나라의 자제들을 이끌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성을 숙위하였는데 천자가 그 노고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물건이 해마다 수백에 달하였다.
옹주는 나이 30이 되기도 전에 벌써 과부가 되었고 세 아들과 딸 하나가 모두 어렸는데, 이미 모두 가르쳐서 성장시켰고 손주들까지 안아보게 되었다. 장남 순(珣)은 회안부원군(淮安府院君)이 되었고, 그 다음 우(瑀)는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이 되었고, 그 다음 수(琇)는 낙랑군(樂浪君)이 되었다. 손자는 여덟을 두었는데, 보령군(保寧君) 증(証), 정윤(正尹) 당(讜), 서(諝), 그리고 동(詷), 정(頲)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연우(延祐)ㆍ지치(至治) 연간에 왕씨(王氏)의 딸을 찾는다는 황제의 칙지가 있어 그 딸이 선정되었는데, 지금 하남등처행중서성 좌승(河南等處行中書省左丞) 실열문(室烈問)에게 시집을 가서 정안옹주(靖安翁主)에 봉해져 있다. 그 당시 사랑하는 딸을 멀리 보내게 되자 근심과 번민으로 병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부터 병이 수시로 나았다 발작했다 하더니 원통(元統) 3년(1335, 충숙왕 복위 4)에 병이 위독해져 아무 약도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9월 을유일에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의 아들딸들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강제로 잡혀서 서쪽 원나라로 끌려갔는데, 왕실의 친척과 같이 존귀한 집안조차도 자식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부모 자식이 한번 이별하면 아득하여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게 되고 마니, 그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이 때문에 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천자께서 어사(御史)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금지하셨기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어질고 총명한 천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저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옹주만이 이 혜택을 입지 못하고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이달 갑진일에 대덕산(大德山)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대군(大君)의 곁에 부장(祔葬)한 것이다. 장사 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관청에서 돌봐주게 하였는데, 회안부원군과 창원부원대군이 예법대로 상을 치렀고, 막내아들은 황도(皇都)에 있어 미처 오지 못하였다. 두 부원군은 글을 좋아하고 문객을 아껴서 태평시대 귀공자의 풍모가 있었다. 게다가 집안과 국가의 예문(禮文)과 전고(典故)를 익히 알고 있어 왕씨들 가운데 왕실의 예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들에게 모여들었으니, 어찌 어머니의 올바른 훈도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황경(皇慶) 2년(1313, 충숙왕 즉위년) 왕이 처음으로 봉작(封爵)을 받아 즉위하는 날에 회안군이 곁에서 모시면서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왕의 보답이 어버이에게까지 미쳐 이에 수령(壽寧)이라는 휘호(徽號)를 하사하고, 이어 매달 공급하는 물자를 장옹주(長翁主)와 맞먹게 하도록 명하였으니, 이 또한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선비들 사이에 오가는 의논이, “김씨가 대군(大君)의 짝이 된 이상 그 칭호를 종실(宗室)의 딸과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반드시 이를 따지는 이가 나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맏아드님의 문객 노릇을 오랫동안 한 데다 성품마저 노둔하여 묘지명을 요청함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씨족(氏族)의 전말(顚末)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선비들의 의논에 대하여도 아무런 숨김없이 서술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산은 그 터전이 웅장하고 / 山壯其址
물은 그 물줄기가 아름답도다 / 水美其濆
참 좋은 자리에다 / 有吉者兆
산소를 편히 모시니 / 有安者墳
누가 묻히고 누가 곁에 누웠는가 / 孰藏孰祔
옹주와 대군이라네 / 維主維君
천 년이 지난 뒤에도 / 千載之下
이 글을 살펴보리라 / 尙考斯文


 

[주D-001]금궤(金樻)가 …… 하고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주D-002]스스로 …… 한다 : 소호금천씨는 중국의 전설 시대 제왕으로서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이름은 지(摯)이다. 금덕(金德)으로 왕이 되었다 하여 금천씨(金天氏)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소호씨(少昊氏)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3]신성왕(神聖王) :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이른다.
[주D-004]연우(延祐)ㆍ지치(至治) : 연우는 원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314년 〜 1320년이고, 지치는 영종(英宗)의 연호로 1321년 〜 1323년이다.

졸고천백 제2권
고(故) 밀직재상(密直宰相) 민공(閔公) 행장(行狀)


증조 인균(仁鈞)은 고(故) 정의대부(正議大夫) 한림학사 사관수찬 지제고(翰林學士史館修撰知制誥)이고, 증조모 □씨는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으며, 조부 황(滉)은 고 조산대부(朝散大夫) 호부 시랑(戶部侍郞)이고, 조모 최씨(崔氏)는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에 봉해졌으며, 부친 종유(宗儒)는 고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僉議贊成事上護軍)으로 치사(致仕)했고, 모친 유씨(兪氏)는 장사군부인(長沙郡夫人)에 봉해졌다.
공의 휘는 적(頔)이요, 자는 낙전(樂全), 성은 민씨(閔氏)이다. 그 선대는 충주(忠州) 황려군(黃驪郡) 사람이다. 대체로 국초에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였는데, 9대조 이상의 조상은 집안에 보첩(譜牒)이 분실되어 상고할 수가 없다. 8대조 휘 칭도(稱道)는 벼슬이 상의봉어(尙衣奉御)에 올랐다. 상의봉어는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세형(世衡)을 낳았고, 감찰어사는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 휘 경(憼)을 낳았고, 호부 원외랑은 태사 문하평장 감수국사(太師門下平章監修國史) 휘 영모(令謨)를 낳았는데, 이분이 실제로 명왕(明王 명종(明宗))을 도와 중흥을 이룩하고 나이 80에 졸하니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였다. 문경공이 또 태보 평장 대집현(太保平章大集賢)으로 시호가 정의(定懿)인 휘 공규(公珪)를 낳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대대로 문재(文才)로서 고관에 올라 우리나라 세족(世族)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공은 지원(至元) 7년 경오년(1270, 원종 11)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관상이 범상하지 않았다. 외조부는 휘가 천우(千遇)로, 지위가 재상에까지 오르고 시호가 문도(文度)이며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이름이 났는데, 공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훗날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모부인 고(故) 재상 김공 군(金公頵)이 그 말을 듣고서 공을 기르겠다고 간곡히 청하였으므로 그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옛 풍속에 남자가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 구두(句讀)를 익혔는데, 얼굴이 예쁜 남자가 있으면 절에서나 세속에서나 모두 그를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부르며 그를 따라 모여드는 무리들이 더러는 수백 수천이 되기도 하니, 그러한 풍속은 신라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공은 10세에 절에 가서 학문을 배웠는데 천성이 영민하여 배우기만 하면 곧바로 그 뜻을 깨달았다. 눈썹이 그림과 같고 외모가 준수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사랑하였으니, 공이 말을 타고 나타나면 공을 보러 모인 사람들로 수레 덮개가 하늘을 덮을 지경이었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는 공을 궁중으로 불러다 보고는 국선(國仙)이라 불렀는데, 이는 또한 일국의 호걸을 국사(國士)라 부르는 것과 같았다.
지원(至元) 22년(1285, 충렬왕 11)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 당시에 태위왕(太尉王)이 세자로 있었는데 공을 뽑아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얼마 후 비서교서(祕書校書)를 임시로 맡았다가 보문각 교감(寶文閣校勘)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첨의주서(僉議注書)가 되었으며, 예빈승(禮賓丞)으로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임시로 맡았다가 비서랑(祕書郞)으로 옮겼다.
대덕(大德) 원년에 군부 정랑(軍簿正郞)에 제수되어 은비(銀緋)를 하사받았으며, 얼마 안 있어 판도사(版圖司)로 자리를 옮겨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郞)을 겸하고 또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대덕 2년(1298, 충렬왕 24)에 태위왕이 원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소윤 지제고(秘書少尹知制誥)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왕이 원나라 조정으로 불려 들어가게 되자 규례에 따라 면직되었다. 이듬해 연경에 가서 왕의 관저에 머물면서 숙위하다가 4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5년 동안 관직을 떠나 한가롭게 지냈다.
대덕 11년 정미년(1307)에 다시 기용되어 나주목(羅州牧)을 맡았다. 지대(至大) 원년(1308) 충렬왕이 돌아가시자 태위왕(太尉王)이 또다시 왕위를 세습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공을 불렀다가 선부의랑 지제교(選部議郞知製敎)로 자리를 바꾸었다. 이듬해에 봉순대부(奉順大夫) 밀직우승지 전의령 겸 사헌집의 지선부사(密直右承旨典儀令兼司憲執義知選部事)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고 통헌대부(通憲大夫) 검교대사헌(檢校大司憲)으로 집안에서 한가하게 지낸 것이 또 4년이다.
금왕(今王 충숙왕)이 새로 왕위를 계승하자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언부 전서(讞部典書)로 자리를 옮겼는데, 모두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의 직임을 겸대(兼帶)하였다. 언부는 옛날 정위(廷尉)의 직책에 해당되는 곳으로 송사(訟事)가 복잡하였으나, 사람들이 공의 공평한 처리를 칭송하였다.
연우(延祐) 3년(1316, 충숙왕 3)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 부사(副使)가 되었으며, 자리를 옮겨 민부 전서(民部典書)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모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겸하였다. 연우 5년(1318, 충숙왕 5)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신년을 축하하러 갔는데 황제가 계신 곳에서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때 태위왕(太尉王)이 황도(皇都)에 있었는데, 공이 자신의 옛 요속(僚屬)이라 하여 다른 사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후하게 대우하였다.
지치(至治) 원년(1321)에 파직되었다가 태정(泰定) 4년(1327)에 이르러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지니, 품계가 중대광(重大匡)이었다.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 1)에 자리를 바꾸어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司使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제수되었고, 임신년(1332)에 다시 파직되었다. 원통(元統) 원년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갑자기 중풍이 걸려 질환이 갈수록 악화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일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나, 1년이 지나 병이 가라앉자 두려워하던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후지원(後至元) 을해년(1335) 겨울에 다른 질병에 또다시 걸려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 1월 22일 기사일에 졸하니, 향년 67세이다.
공은 장가를 두 번 들었다. 선부인(先夫人) 김씨(金氏)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고(故) 선수(宣授) 진국상장군관고려군만호(鎭國上將軍管高麗軍萬戶) 본국(本國) 중대광(重大匡) 상락군(上洛君) 휘 흔(昕)의 따님이다. 1남 자이(子夷)를 낳았는데, 을묘년(1315, 충숙왕 2) 과거에 등과하여 지금 봉선대부(奉善大夫)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少尹知製敎)로 있다. 후부인(後夫人) 원씨(元氏)는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고(故)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휘 관(瓘)의 따님이다. 3남 3녀를 낳았는데, 유(愉)는 좌우위 별장(左右衛別將)이고, 변(抃)과 유(愉)는 신미년(1331, 충혜왕 1) 과거에 동시에 등과하였고, 환(渙)은 사온령 동정(司醞令同正)으로 있다. 장녀는 통직랑(通直郞) 판도정랑(版圖正郞) 박인룡(朴仁龍)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전(前) 비순위 대호군(備巡衛大護軍) 윤계종(尹繼宗)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영동정(令同正) 유윤길(劉允吉)에게 시집갔다. 손자 2명은 모두 어리다.
공은 자질과 외모가 모두 아름다워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인(神人)과도 같았으며, 일상적인 언동(言動)이 어느 것 하나 볼 만하고 들을 만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타고난 자질이 바르고 완전하여 순수한 기운이 내부에서 충만하여 밖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미 감복하였다. 그리고 공의 학문은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것을 토대로 해서 연마한 것이며, 또 어릴 때부터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노숙한 사람들이라 그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감화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일찌감치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좋은 부서의 관직에 올랐으며 군(君)의 작위까지 받았으니, 실로 한 나라의 현대부(賢大夫)라 이를 만하다. 한스러운 점은 지위가 가장 높은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수를 한껏 누리지 못한 채 갑자기 여기에서 그치고 만 것이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왕경(王京 개경(開京))의 손방(巽方 동남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는데, 원림(園林)이 깊고도 조용하여 사랑할 만하였으므로 집의 이름을 운재(芸齋)라 지었다. 공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또한 진정에서 우러나왔고, 한미한 선비나 후배 선비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정례(情禮)를 갖추어 대하였는데, 꽃이 피면 언제나 그들을 불러다가 술상을 차려놓고 시구(詩句)를 주고받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나는 공의 아들 자이(子夷)와 친한 사이이고 나의 선친은 공과 친구 관계이며, 공은 나이 차도 잊고서 나를 대해주었으므로 공의 평소 행적에 대하여 매우 잘 안다. 지금 장례일을 잡았다기에 감히 집안의 계보와 관직의 역임 및 행적의 대략을 기술하여 당대의 붓을 잡은 이들에게 고함으로써 무덤길을 빛나게 하고자 나의 온 힘을 다해 삼가 행장을 짓는 바이다.
지원 2년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 2월 무인일 초하루에 쓰다.


 

[주D-001]보문각 교감(寶文閣校勘) : 국역 대본에는 ‘寶文閤校勘’으로 되어 있는데, ‘閣’ 자가 ‘閤’ 자로 잘못 판각된 것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가을에 …… 되자 : 1397년 충선왕의 생모인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충렬왕과의 불화 속에 죽게 되자 당시 세자로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은 급히 귀국하여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궁인 무비(無比)와 충렬왕의 측근 4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등 대거 숙청을 가한 후 원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여기에 원나라 왕실이 세자를 지지하게 되자 충렬왕이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글을 원나라에 보냄으로써 1398년 1월에 충선왕이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곧바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자주성 회복을 위한 정치를 시도하던 중 왕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의 불화로 인해 그해 가을 8월에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고 원나라로 압송되고 만다.
[주D-003]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 국역 대본에는 ‘寶文閤提學’으로 되어 있는데, ‘閣’ 자가 ‘閤’ 자로 잘못 판각된 것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정위(廷尉) : 진(秦)나라 때부터 형벌을 맡아보던 벼슬로 구경(九卿)의 하나이다.
[주D-005]공은 …… 대해주었으므로 : 국역 대본의 원문은 ‘蒙許□年之契’로 되어 있어 한 글자의 판독이 불가능한데, 문맥상 ‘忘’ 자로 보아 번역하였다. 참고로 민적(閔頔)은 1270년생으로 1287년생인 최해보다 17세 연상이며, 아들 자이(子夷), 즉 민사평(閔思平)은 1295년생으로 최해보다 7세 연하이다. 그리고 최해의 부친 최백륜(崔伯倫)은 생년이 미상이다.

졸고천백 제2권
동인지문(東人之文) 서문


우리나라는 먼 옛날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의해 처음으로 조선(朝鮮) 땅에 봉해진 뒤부터 사람들이 중국(中國)이라는 존귀한 나라가 있음을 알았다. 예전 신라(新羅)의 전성기에는 항상 당(唐)나라에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고 숙위원(宿衛院)을 두어 그곳에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나라 진사시(進士試)의 빈공과(賓貢科) 방문(榜文)에 그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신성왕(神聖王 태조(太祖))이 나라를 건국하여 삼한(三韓)이 통일되고 나서도 의관(衣冠)과 전례(典禮)는 신라의 옛 제도를 답습하였으며, 열예닐곱 대 왕에 전해지도록 대대로 인의(仁義)의 정치를 닦고 중국의 문화를 더욱더 사모하였다.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회하고 북쪽으로 요(遼)나라와 금(金)나라를 섬겨 그 문화에 흠뻑 젖어들었고 인재가 날로 번성하여 그들이 지은 찬란한 문장(文章)이 모두 볼 만하였다.
그러나 풍속이 순후(純厚)하여 집안에 소장된 문집(文集) 가운데 손으로 필사(筆寫)한 것이 대부분이고 판본(板本)으로 간행한 것이 적었다. 그런 까닭에 세월이 지나면서 유실되어 널리 전해지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중엽에 무인(武人)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소홀한 틈을 타고 변란이 일어나 곤륜산(昆侖山)의 옥석(玉石)이 갑자기 함께 다 타버리는 화를 겪고 말았다. 그 후 3, 4대를 지나 비록 중흥(中興)을 이룩했다고 말은 하지만 예법과 문물이 인습(因襲)하기에 부족했고, 이어 권신(權臣)이 국정을 휘어잡아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을 속이다가 도성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쳐 숨느라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국가의 서적들이 진흙탕 속에 내팽겨진 채로 수습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이후로 학자들은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을 잃게 되었고 또 중국과도 전혀 통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보고 듣는 것이 부족하여 경망한 풍조로 흐르게 되었다. 당시에 어찌 문필가가 없었다고 하리오마는 태평 시대의 작자(作者)들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같지 않다.
다행히 하늘이 황원(皇元)의 시대를 여시어 훌륭한 황제들이 연이어 출현하여 천하에 문명의 시대를 열었고,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인재를 선발한 것이 벌써 일곱 차례나 된다. 덕화가 크게 미치고 천하를 차별 없이 대우하여 나처럼 천박한 재능으로도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금방(金牓)에 이름을 내걸고 중원(中原)의 뛰어난 선비들과도 서로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간혹 우리나라 사람의 문장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단지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고만 대답을 하고는 물러나와 부끄러워하였다. 이때에 처음으로 나는 시문을 분류하여 책으로 편찬하려는 뜻을 두게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되도록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 집에 소장된 문집에서 찾아내고 집에 없는 것은 널리 남들에게 빌려와 시문을 죄다 모아다 놓고 각각의 차이를 교감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충렬왕 때까지 명가(名家)들의 작품들 가운데 시(詩) 약간 수(首)를 얻어 ‘오칠(五七)’이라 제목을 달고, 문(文) 약간 수를 얻어 ‘천백(千百)’이라 제목을 달고, 변려문(騈儷文) 약간 수를 얻어 ‘사륙(四六)’이라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총칭하여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아, 이 책은 본디 병란으로 타다 남은 것과 좀먹은 간책(簡冊)에서 초록(抄錄)한 것으로서 우리나라 시문을 집대성(集大成)한 책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우리 동방의 글 짓는 체제를 보려고 한다면 이 책 말고 다른 데서는 구할 길이 없다. 나는 일찍이
“언어(言語)는 입에서 나와 문장(文章)을 이룬다. 중국 사람들의 학문은 그들이 본디 가지고 있는 언어를 통해 접근하기 때문에 정신(精神)을 많이 소비하지 않고도 특출한 인재가 쉽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는 언어가 이미 중국과 다르니, 천부적으로 총명한 자질에다 천 배 백 배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의 학문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심(一心)의 오묘함이란 천지 사방을 통틀어 조금의 차이도 없으니, 득의(得意)한 문장에 있어서야 어찌 스스로 굴복하여 저들에게 많이 양보하겠는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보는 사람은 먼저 이런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D-001]학업을 익히게 : 국역 대본에는 ‘隷業’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隷’ 자가 ‘肄’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肄’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곤륜산(昆侖山)의 …… 화 :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을 태워버리면 그 속에 있던 옥과 돌도 함께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 玉石俱焚〕”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훌륭한 문장과 조잡한 문장이 무인의 난으로 모두 화를 당한 것을 말한다.
[주D-003]권신(權臣)이 …… 숨느라 : 몽고의 침입으로 최씨(崔氏) 무신 정권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4]시문을 …… 편찬하려는 : 국역 대본에는 ‘撰類書集’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集’ 자가 빠지고 ‘撰類書’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책으로 편찬하여 종류별로 모은다〔撰書類集〕’는 뜻으로, 글자를 뒤바꾸어 쓴 것이다.
[주D-005]널리 남들에게 빌려와 : 국역 대본에는 ‘偏從人借’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偏’ 자가 ‘徧’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徧’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졸고천백 제2권
당성군부인(唐城郡夫人) 홍씨(洪氏) 묘지


돌아가신 연흥군(延興君) 행산(杏山) 노선생(老先生)에게 문보(文珤)라는 이름의 손자가 있었는데, 그의 문객인 서원(西原) 정포(鄭誧)가 지은 선부인(先夫人)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일찍이 저의 부친 및 저의 외숙과 모두 친분이 있으십니다. 저의 어머니 산소에 명(銘)이 없을 수 없으니, 선생이 아니고 누구를 찾아가 청하겠습니까.”
하기에 이 말을 듣고 나는,
“아, 그런가? 보잘것없는 나의 글을 아낄 게 뭐 있겠는가.”
하였다.
살펴보건대 당성 홍씨(唐城洪氏)는 우리나라의 망족(望族)으로서, 조부 휘 자번(子蕃)은 충렬왕을 도와 15년 동안 나라의 태재(太宰)로 있었으며 지위가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부친 휘 경(敬)은 선친의 공적을 이어받아 관직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부인은 나이 열셋에 박씨 집안에 시집와서 행산 선생의 맏며느리가 되었는데, 바로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원(遠)의 처로서 당성군부인(唐城郡夫人)에 봉해진 분이다. 장자 인룡(仁龍)은 고(故) 판도정랑(版圖正郞)이고, 차자(次子)는 문보(文珤)로 전의시 승(典儀寺丞)이고, 그 다음 덕룡(德龍)은 동부 부령(東部副令)이고, 그 다음 수룡(壽龍)은 천우위 별장(千牛衛別將)이고, 그 다음 천룡(天龍)은 수릉 직(綏陵直)이다. 딸은 왕련(王璉)에게 시집가 익흥군부인(益興君夫人)이 되었고, 그 다음은 사족(士族)에게 시집을 가서 산원(散員) 허령(許齡)의 처가 되었다.
부인은 지원(至元)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태어나 후지원(後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 49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7월 신유일에 졸하였다. 11월 갑술일에 장사를 지냈는데 장지는 모산(某山)의 언덕이다. 인룡(仁龍)은 이미 졸하였고 정당공(政堂公)은 황도(皇都)에 가 있어 미처 오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뿌리 깊은 저 홍씨 문중이여 / 奧若洪宗
귀한 명성 하늘 동쪽에 퍼졌어라 / 貴擅天東
선을 두터이 쌓지 않았다면 / 匪積匪厚
어찌 그리 번창하고 풍성하겠는가 / 曷殷而豐
문관과 무관으로 / 維文維武
덕도 쌓고 공도 세워 / 有德有功
나랏일 힘껏 도우면서 / 力贊靑社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지 / 世濟以忠
태재의 손녀로 / 太宰之孫
아름다운 부인이 태어나 / 有夫人美
어려서 부모 모실 적에 / 幼奉迺親
형제 중에 사랑을 독차지했지 / 愛鍾衆子
이에 남편을 택하여 / 爰擇所從
박씨 집에 시집가니 / 適于朴氏
시댁 문에 들어가면서부터 / 自其入門
시부모님 기뻐하셨지 / 舅姑以喜
아녀자의 규범에 힘쓸 뿐 아니라 / 旣敦女範
지어미의 도리도 다하여 / 又婉婦儀
남편을 받들어 섬기되 / 承事夫子
바른말로 조언하였고 / 以箴以規
가정을 감독해 다스리되 / 董治家政
무엇 하나 흠잡을 곳 없었네 / 有備無虧
자식복도 많아서 / 亦克多慶
딸 둘에 다섯 아들이라 / 二女五兒
사람들은 부인더러 / 謂言夫人
복록이 그치지 않으리라 했는데 / 享祿未艾
어찌하여 현철한 몸만큼이나 / 胡哲其身
수명이 따라주지 못했는고 / 年則不逮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데 / 夫子出游
돌아와도 기다려주는 이 없으니
/ 歸也無待
아득한 황천길에 / 泉路幽幽
천년토록 한을 남기리 / 留恨千載
오호 애재라 / 嗚嘑哀哉


 

[주D-001]행산(杏山) 노선생(老先生) : 고려 말의 문신인 박전지(朴全之 : 1250 〜 1325)를 가리킨다. 박전지의 호는 행산, 본관은 죽주(竹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과 한림원(翰林院)의 벼슬을 역임하고, 1279년(충렬왕 5)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고려 양반들의 자제를 뽑아 입시시킬 때 선발되어 원나라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정동성 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와 병부의 시랑(侍郞)에 임명되었으나, 나이에 비해 높은 벼슬이라 하여 사양하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왕에게 재주가 인정되어 전중윤 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발탁, 세자인 충선왕(忠宣王)의 시강(侍講)을 맡았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중경 유수(中京留守)가 되고, 이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한 후 복직되어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다.
[주D-002]서원(西原) :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주D-003]정포(鄭誧) : 1309 〜 1345.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326년 18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예문 수찬(藝文修撰)이 되어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충숙왕(忠肅王)을 배알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그 길로 왕을 따라 귀국하여 좌사간(左司諫)에 발탁되었다. 충혜왕(忠惠王) 때 전리 총랑(典理摠郞)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악정(惡政)을 상소했다가 면직된 뒤 무고(誣告)로 울주(蔚州)에 유배되었다. 그 후 석방되자 원나라에서 벼슬할 계획으로 연경에 가서 그곳 승상(丞相)에 의해 황제에게 추천되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설곡집(雪谷集)》이 전한다.
[주D-004]첨의중찬(僉議中贊) : 고려 시대 첨의부(僉議府)에 속한 종 1 품 벼슬이다. 충렬왕 1년(1275)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고친 것으로, 좌우에 첨의좌중찬과 첨의우중찬이 있었다.
[주D-005]지원(至元) :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264년 〜 1294년이다.
[주D-006]후지원(後至元) : 원나라 순제(順帝)의 연호로, 1335년 〜 1340년이다.
[주D-007]모산(某山) : 1982년에 간행된 《죽산박씨대사헌공파보(竹山朴氏大司憲公派譜)》에는 ‘삼랑산(三郞山)’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歷史學報 第117輯, 金龍善, 新資料 高麗 墓地銘 17點》
[주D-008]남편이 …… 없으니 : 남편 박원(朴遠)이 이때 원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박원은 초명은 원(瑗)으로 문과에 급제했으며, 충숙왕을 원나라에서 시종한 공으로 1327년에 2등 공신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부인이 졸한 지 5년 후인 1341년에 졸하였다.

 

졸고천백 제2권
고(故) 기성군(杞城君) 윤공(尹公) 묘지

공의 휘는 신걸(莘傑)이요 자는 이지(伊之)이다. 이전에 문학(文學)으로 강릉부(江陵府)에서 을 보도(輔導)하였는데, 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갑자기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다. 왕의 구신(舊臣)이요 나이 72세가 되던 후지원(後至元) 정축년(1337) 2월 24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부인 주씨(朱氏)가 내가 일찍이 그 조카 휘(暉)와 친구로 지냈던 것을 알고 휘를 보내 청하기를,
“내가 남편을 섬겨온 지가 54년인데 이번에 돌아가셨습니다. 불행히 아들이 없지만 장례만은 늦출 수가 없어 3월 13일로 날을 잡아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글을 새겨 무덤 속에 넣어서 길이 전하고자 그대에게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내가 휘와는 정이 두터운 사이이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의 선대는 계림(鷄林) 기계현(杞溪縣) 사람인데, 대개 향시(鄕試)를 통하여 올라와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다. 증조 양비(良庇)는 고(故) 검교첨사(檢校詹事)이고, 조부 유정(維楨)은 고 합문지후(閤門祗候)이고, 부친 후(珝)는 고 감찰사(監察史)이다. 조부와 부친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전배(前輩)들이 그 문장을 칭송하였다. 감찰공이 수성 빈씨(壽城賓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낳으니, 공이 그 가운데 맏이였다.
공은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으며, 25세에 예위(禮圍)에 나아가 을과(乙科)에 발탁되었다. 지원(至元) 31년(1294, 충렬왕 20)에 남경유수사록(南京留守司錄)에 임명되었다가 그만두고 국학 학유(國學學諭)가 되었으며, 다시 사문대학박사(四門大學博士)로 옮겼다가 숭경부 승(崇慶府丞)으로 옮겼다. 대덕(大德) 11년(1307)에 좌정언(左正言), 좌사간(左司諫), 좌사랑(左史郞)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지대(至大) 원년(1308, 충선왕 즉위년)에 관제가 개편되자 우헌납 강릉부익선 성균악정(右獻納江陵府翊善成均樂正)이 되었으며, 품계는 봉선대부(奉善大夫)에 올랐다. 황경(皇慶) 원년(1312, 충선왕 4)에 전의부령 선부의랑 지제교(典儀副令選部議郞知製敎)로 옮겼으며 품계는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올랐다. 연우(延祐) 원년(1314, 충숙왕 1) 여러 차례 승천하여 봉순대부(奉順大夫) 밀직사우대언 예문제학 지제교 동지춘추관사(密直司右代言藝文提學知製敎同知春秋館事)에 올랐으며, 3년(1316)에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 겸 선부전서(密直副使兼選部典書)에 제수되었다가 동지밀직(同知密直), 지밀직(知密直), 밀직사(密直使)로 옮겼으며, 예문대제학 지춘추관(藝文大提學知春秋館)으로 승천하고 품계는 광정(匡靖)에 올랐으며, 또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태정(泰定) 원년(1324)에 대광(大匡) 삼사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三司使進賢館大提學上護軍)에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기성군(杞城君)에 봉해지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엄중(嚴重)하고 말수가 적어서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것 같아 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대덕(大德) 연간에 학관(學官)으로 있었는데 당시 집정자(執政者)가, 박사를 선발할 때 단지 하나의 경전만을 시험하기 때문에 적임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하면서,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그 선발을 엄격히 하되 반드시 육경(六經)에 통달한 자에게만 제수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결과 공만이 여러 경전에 밝아 박사(博士)에 보임되어 당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로 인해 태위 선왕(太尉先王 충선왕)이 공을 등용하여 왕(王 충숙왕)의 사부로 삼으니, 부자 두 왕을 잘 섬겼다. 오랫동안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인재를 평가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문을 닫고 손님을 거절한 채 항상 외로이 홀로 거처하며 바깥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이렇게 지내다가 세상을 마치시니, 아, 공은 독실하고 신중한 군자(君子)라 하겠다.
부인 주씨(朱氏)의 부친은 휘가 열(悅)이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충렬왕 때의 이름난 대부이다. 공의 상례를 주씨가 공의 조카 형(衡), 희보(希甫) 두 사람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하고 또 자신의 조카 휘(暉)로 하여금 돕게 하였으니, 그것은 모두 공의 이명(理命)을 따른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천하의 이치에 대하여 / 予於天下之理
감히 다 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 未敢自謂其窮
이러하다는 것쯤은 대충 아는데 / 蓋亦粗知其如是而已
사람에게 아들이 있고 없는 것만은 / 獨於人之有子與無
이치로 미루어 알 수가 없다오 / 其不可理推而知矣
현자는 후손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도리어 없고 / 當謂賢者有後而却無
어찌하여 불초한 자는 후손이 끊어져야 하는데도 번성하는가 / 何不肖者宜絶而寔蕃乎
이것이 바로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 此予所以反覆三思
이해할 수 없는 점이라오 / 而未得其辭者也
지금 윤씨의 초상에 / 今夫尹氏之喪
나도 모르게 또다시 이 말이 나온다오 / 予又不覺有言
오호라 공에게 조카 두 명이 있으니 / 嗚呼公有猶子二人焉
어찌 공의 제사가 끊어진다 말하랴 / 亦豈云公祀之不存

[주D-001]문학(文學) : 고려 시대에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정 6 품 벼슬이다.
[주D-002] :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 1294 〜 1339)을 가리킨다. 충숙왕의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자는 의효(宜孝)이며, 충선왕(忠宣王)의 둘째 아들이다. 1299년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후에 강릉대군(江陵大君)이 되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를 전위받고 돌아와서 즉위했다. 강릉부는 충숙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있던 관부(官府)이다.
[주D-003]관제가 개편되자 : 원래 고려에서는 국왕의 명(命)과 영(令)을 성지(聖旨), 조(詔), 칙(勅), 제(制)라 하였으며, 신민이 국왕에 대하여는 폐하(陛下)라 하고, 국왕이 신민에 대하여 자신을 짐(朕)이라 하였다. 그리고 원자(元子)를 태자(太子)라 하고, 국왕 및 태자의 생일에도 대마다 절일(節日)의 명호(名號)를 개칭하였으며, 기타 복식(服飾)ㆍ의장(儀仗)에 있어서도 중국 황제의 제도를 많이 준용하였다. 관직 제도 또한 대체적으로 당(唐)나라 제도를 바탕으로 하였다.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되자 원나라에서는 고려 왕이 사용하는 칭호와 관직의 명칭을 바꿀 것, 즉 강등(降等)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충렬왕 원년(1275)과 19년(1293), 두 번에 걸쳐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1309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렬왕 개편 때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다시 관제를 개편하였다. 이때 바뀐 것 가운데 하나가 국자감(國子監)인데, 성균감(成均監)으로 명칭이 고쳐졌다.
[주D-004]이명(理命) : ‘치명(治命)’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이른다. 반대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난명(亂命)’이라 한다.
[주D-005]이치로 …… 없다오 : 국역 대본에 ‘其不可理推而知知矣’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其不可理推而知矣’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졸고천백 제2권
유원(有元) 고(故) 무덕장군 서경등처수수군만호 겸 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고려(高麗) 재상(宰相) 원공(元公) 묘지


왕경(王京 개성(開城))의 남쪽으로 도성과 30리 떨어진 곳에 산이 하나 있는데, 구불구불한 형세가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뒤를 돌아보는 듯도 하고 멈추어 서 있는 듯도 하다. 물은 간방(艮方 북동쪽)에서 졸졸 스며 흐르다가 곤방(坤方 남서쪽)에 이르러 시냇물을 이루고 다시 큰 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여 묏자리가 적합한 형세를 이루었으니 덕을 쌓을 만한 자리라 하지 않겠는가. 이곳은 고(故) 정동만호(征東萬戶) 재상 원공(元公)이 묻힌 곳이며, 산소를 쓴 것은 후지원(後至元) 정축년(1337, 충숙왕 복위 6) 6월 정유일이다. 한마을에 살아온 내가 아들들의 방문을 받고 감히 거절할 수가 없어 공에 대해 그대로 서술하고 또 명시(銘詩)를 지어 그 아들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바이다.
먼저 공에 대해 서술해 보자면, 공의 휘는 충(忠), 자는 정보(正甫)이며, 선대(先代)는 신라 북원(北原) 사람이다. 11대조 극유(克猷)가 처음으로 본국(本國)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고, 조부 휘 부(傅)는 충렬왕을 도와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냈는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부친 휘 관(瓘)은 고(故)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대부인(大夫人) 김씨(金氏)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에 봉해졌는데 고 승지 휘 신(信)의 따님이다.
공은 지원 27년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태어났다. 8세에 음보(蔭補)로 동면도감 판관(東面都監判官)에 보임되었고, 18세에 처음으로 원나라로 불려 들어가 경사(京師)의 관저에서 태위 선왕(太尉先王)을 섬겨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에 발탁되었고, 날로 총애를 받아 왕씨(王氏)의 성을 하사받았으며 이름을 ‘주(鑄)’로 고쳤다. 중문부사(中門副使)로 자리를 옮기고 전부령(典符令), 사복정(司僕正), 농화우사윤(穠華右司尹)으로 옮겼으며, 품계가 봉상대부(奉常大夫)를 거쳐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왕은 더욱 각별히 대우하고자 하여 특별히 밀직대언(密直代言)에 제수하니, 공이 사양하기를,
“신이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갑자기 3품에 올라 비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후설(喉舌)의 직임은 깨끗한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니 부디 다른 사람을 택하소서.”
하였다. 이로 인해 왕의 뜻을 거슬러 다시 예전의 성명을 쓰도록 명하고 직책을 지철주(知鐵州)로 강등시켜 임지로 떠날 것을 재촉하니, 이때가 지대(至大) 3년(1310, 충선왕 2) 8월이다. 철주를 다스린 4년 동안 정사가 간략하여 백성들이 편히 여겼다.
황경(皇慶) 2년(1313, 충숙왕 즉위년)에 왕(王 충선왕)과 금왕(今王 충숙왕)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공이 압록강 가에까지 나가 영접하였는데, 공에 대한 대우가 예전과 같아져 함께 왕경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전의령 겸 중문부사 밀직대언 세자우사윤 지총부사(典儀令兼中門副使密直代言世子右司尹知摠部事)에 제수하였다.
연우(延祐) 3년(1316)에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 좌상시 상호군(密直副使左常侍上護軍)에 제수되고, 7년에 밀직사(密直使)로 승진되어 품계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랐다. 얼마 뒤 나가서 상의평리(商議評理)가 되었다.
지치(至治) 원년(1321)에 왕을 따라 천자가 계신 곳에 조회를 갔다. 당시에 태위왕(太尉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떠나고 왕이 또 경사(京師)에 억류되자 나라를 뒤엎으려는 무리들이 종사(宗社)의 전복을 도모하니, 수종했던 대신들 또한 모두 안면을 바꾸고 말았다. 그리하여 형세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나, 공만은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며 시종 다른 마음을 갖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식자들이 칭송하였다.
태정(泰定) 원년(1324)에 이르러 태위왕이 서쪽에서 돌아오고 왕이 작위를 회복하자, 공에게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판민부사 상호군(僉議贊成事判民部事上護軍)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듬해에 왕이 귀국을 하게 되자 부왕이 이별에 앞서 왕에게 당부하기를,
“원충(元忠)은 대대로 나라에 벼슬한 가문이요 또 외척 관계에 있기도 한다. 근래에는 또 나라를 바로잡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으니, 다른 신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의당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하고는, 그 다음으로 공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지금의 네 마음을 영원토록 유지하여 왕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뒤로 참소의 말이 들어가 소외를 당해 5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다가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 즉위년)에 전왕(前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공을 예전의 직책에 임용하고, 판군부감찰사사(判軍簿監察司事)로 승진시켰다. 금왕(今王)이 입조(入朝)하게 되자 겨울에 신년을 축하하는 표문을 받들고 황도로 갔다.
지순 3년(1332, 충숙왕 복위 1)에 이르러 왕이 또다시 복위하고 전왕이 입조하자 이로 인해 관직이 체차되어 황도에 체류하였다. 원통(元統) 2년(1334)에 황제의 명을 받아 호부(虎符)를 차고 무덕장군(武德將軍) 서경등처 수수군만호 겸 제조정동도진무사사(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都鎭撫司事)가 되었으며, 후지원(後至元) 2년(1336)에 휘정원 차사(徽政院差使)의 임무를 받들고 역말을 타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 이후로는 나랏일이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을 알고는 전원에다 토지를 구해 집이나 짓고 사는 데에 뜻을 두고 지냈다. 이듬해에 병이 들어 의원을 불러도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한 채 5월 기유일에 이르러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그때 춘추 48세였다.
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진실하여 가슴속에 감추어 두는 일이 없으며, 돌발적인 일을 대처하는 것이 마치 미리 배워둔 것이 있는 듯하였다. 처음에 밀직대언(密直代言)을 사양한 것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꺼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지치(至治) 연간에 임금을 받들고 또 변치 않는 절개를 지킨 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니, 또한 모두 높이 숭상할 만하다 하겠다. 한 시대 사람들이 모두 공을 어진 재상이라 칭송하였는데, 한창 혈기가 왕성할 나이에 갑자기 가시니, 아, 그것이 명(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인 홍씨(洪氏)는 남양군부인(南陽郡夫人)에 봉해졌으며 부친은 고(故)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규(奎)이니, 지금 왕비인 덕비(德妃)에게 언니가 된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호(顥)는 전(前) 흥위위 호군(興威衛護軍)이고, 후(詡)는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이고, 의(顗)는 아직 벼슬하지 못하였다. 딸 다섯을 두었는데, 장녀는 친어군 별장(親禦軍別將) 김광리(金光利)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전 좌우위 호군(左右衛護軍) 홍유(洪瑜)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관고려군 만호(管高麗軍萬戶) 나영걸(羅英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윤(正尹) 왕서(王諝)에게 시집가서 종친(宗親)이 되었으며, 막내는 아직 어려 출가하지 않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어 / 吁其道無偏
사람마다 온전하게 갖추기는 어렵다네 / 物難以兩全
지위도 얻고 장수도 누리는 일 / 得位又得壽
하늘에 어찌 많이 요구할 수 있으랴 / 豈可多責天
공은 이미 부귀를 얻었으니 / 公旣貴富矣
부족한 건 수명이로세 / 所未究在年
어찌하면 천명을 아는 이를 만나 / 安得知命者
더불어 자연의 이치를 논할 수 있을까 / 與之論自然


 

[주D-001]묏자리가 …… 이루었으니 : 국역 대본에는 ‘宅得其執’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執’ 자가 ‘勢’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勢’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18세에 …… 섬겨 : 국역 대본에는 ‘十八始召入事太尉先於京師之邸’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先’ 자 다음에 ‘王’ 자가 빠진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갑자기 3품에 올라 : 정 3 품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오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봉상대부(奉常大夫)와 봉순대부 사이에는 종 3 품인 중현대부(中顯大夫)와 중정대부(中正大夫)가 있는데, 윤충(尹忠)은 이 두 품계를 건너뛰어 봉순대부에 올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4]후설(喉舌)의 직임 : 왕명을 출납하는 밀직사의 직임을 이른다.
[주D-005]지철주(知鐵州) : 철주는 평안도 철산(鐵山)의 옛 이름이다.
[주D-006]태위왕(太尉王)이 …… 도모하니 : 태위왕, 즉 충선왕이 1320년에 고려로 귀환하라는 원나라 영종(英宗)의 명을 듣지 않다가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고,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작위를 물려받은 왕고(王暠)가 고려의 왕위마저 찬탈하기 위해 충숙왕을 무고하자, 1321년에 원나라에서는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연경(燕京)으로 소환하였다. 그리하여 1325년까지 5년간 충숙왕이 연경에 억류를 당했는데, 그동안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왕고파들은 물론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 충숙왕을 시종하던 신하들까지 심양왕에게 붙어서 충숙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 본국과 같이 직접 고려를 통치해 줄 것을 황제에게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폐위 직전까지 몰렸을 때 충선왕을 귀양 보내고 충숙왕을 소환하였던 영종이 죽고 1323년 태정제(泰定帝) 진종(晉宗)이 즉위함에 따라 상황이 급반전되어 충선왕이 먼저 풀려나고 충숙왕도 1325년에 고려로 귀환하였다.
[주D-007]전왕(前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 전왕은 충혜왕(忠惠王)을 가리킨다.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으로 1315년에 태어났다. 1328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에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16세의 나이로 고려 제 28 대 왕에 올랐다. 그러나 성격이 포악하고 주색과 사냥을 일삼는 등 정사를 폐하였으며,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史官)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폐정이 2년 동안 지속되자 원나라에서는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고 부왕인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1336년 12월에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에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이 다시 복위하였다. 본 원충의 묘지명이 충숙왕의 복위 연간인 1337년에 지어졌으므로 전왕(前王)은 아들인 충혜왕이 되고 금왕(今王)은 부왕인 충숙왕이 된다.
[주D-008]금왕(今王)이 입조(入朝)하게 되자 : 충숙왕이 1330년 2월에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7월에 원나라로 들어가 머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9]규(奎) : 1939년에 간행된 《남양홍씨족보(南陽洪氏族譜)》에 수록되고 131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홍규(洪奎)의 묘지명에 의하면, 홍규는 김련(金鍊)의 딸인 광주군대부인(光州郡大夫人) 김씨(金氏)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융(戎)은 대광(大匡) 삼사사 상호군(三司使上護軍)이고, 장녀는 중국의 좌승상(左丞相) 아고알(阿高歹)에게 시집갔고, 2녀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瑎)에게 시집갔고, 3녀는 충선왕비인 순화원비(順和院妃)이고, 4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원충(元忠)에게 시집갔으며, 5녀는 충숙왕비인 덕비(德妃)라고 한다. 덕비는 왕자 둘을 낳았는데, 첫째가 28대 충혜왕이고 둘째가 31대 공민왕이며, 1380년(우왕 6) 83세를 일기로 졸하였는데 후대에 명덕태후(明德太后)로 불린다.

 

졸고천백 제2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한 고(故) 박공(朴公)의 묘지


공의 휘는 화(華)요, 성은 박씨(朴氏)인데 선대는 밀성군(密城郡)에 적(籍)을 두었다. 증조부 기보(奇輔)는 일찍이 중군녹사(中軍錄事)로서 나랏일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관직이 대관전직(大觀殿直)에 이르렀고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조부 홍승(洪升)은 고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인데 위위승(衛尉丞)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함(諴)은 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데 예빈윤(禮賓尹)에 추증되었다. 예빈 부군이 나중에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진 음죽 안씨(陰竹安氏)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공을 낳으니, 이때가 원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 2년 임자년(1252, 고종 39)이다.
공은 지원(至元) 15년(1278, 충렬왕 4)에 전리사 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전주(全州)의 임피현위(臨陂縣尉)에 임명되었다. 임기를 마치자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몇 년 간 봉직한 후 판적요직공역(板積窯直供驛), 사온서 영(司醞署令), 자운방 판관(紫雲坊判官)을 역임하였다. 지대(至大) 3년(1310, 충선왕 2)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제수되었으며,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나가 각 주(州)에 보관된 문서를 조사하여 비리를 숨김없이 적발해 내었는데, 탄핵을 받은 자들이 미워하는 바람에 도리어 그들의 공격을 받아 면직되었다.
연우(延祐) 3년(1316, 충숙왕 3)에 맏아들 인간(仁幹)이 태위 심왕(太尉瀋王)의 관저에 불려간 것으로 인해 공이 기용되어 선부 산랑(選部散郞)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지경원부(知慶原府)가 되었다가 얼마 후 치사하였다. 태정(泰定) 원년(1324)에 인간이 태위왕을 따라 토번(吐蕃)에서 돌아오자 이에 다시 기용되어 광주목(廣州牧)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후지원(後至元) 2년(1336, 충숙왕 복위 5) 정월 12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85세이다. 3월 8일 왕경(王京)의 동쪽 대덕산(大德山) 감은사(感恩寺)의 북쪽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부인 조씨(趙氏)는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에 봉해졌는데 작고한 정승 문량공(文良公) 휘 간(簡)의 누님이다. 공보다 4년 먼저 졸하였으며, 자식으로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인간(仁幹)은 경자년(1300, 충렬왕 26) 과거에 등과하였고 또 을묘년(1315, 충숙왕 2) 응거시(應擧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으며 현재 한양 부윤(漢陽府尹)으로 있다. 인지(仁祉)는 신미년(1331, 충혜왕 1) 과거에 급제하여 사설서 영(司設署令)으로 있고, 인기(仁杞)는 좌우위 산원(左右衛散員)이며, 인익(仁翊)은 군부 좌랑(軍簿佐郞)이며, 인우(仁宇)는 을묘년(1315, 충숙왕 2) 과거에 급제하여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있다. 딸들은 중문지후(中門祗候) 유소(柳韶)와 판도좌랑(版圖佐郞) 서평(徐玶)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주로는 손자 여섯과 손녀 둘이 있다.
공은 성품이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일에 임하여 신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고 재물을 취하는 데에 조심성이 있었다. 집안에서 어린 자식들을 가르칠 때는 대체로 자상한 태도로 반드시 학문에 힘쓰도록 권하면서 “사람이 학문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설 수가 없다.”라고 하였지만, 허물이 있으면 또 엄하게 질책을 가하였기 때문에 다섯 아들이 가르침을 받들며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모두들 어질고 재능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 가운데 맏아들은 머나먼 이역 땅까지 선왕(先王 충선왕)을 수종(隨從)하여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오로지 임금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잊다가 마침내 공명을 이루었으니, 이는 일찍부터 자식을 올바른 도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은 젊어서 벼슬길에 나온 이래로 관직이 비록 현달하지 못하고 낮은 자리로 맴돌기는 하였으나, 만년에 아들이 존귀해짐에 따라 높은 자급과 후한 녹봉의 봉양을 받게 되었고 나이 90이 다 되어 세상을 마쳤으니, 아,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내가 듣기로 나랏일을 위해 죽는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크게 된다고 하였으니, 또한 그 선대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 어긋나지는 않은 듯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공의 차자 인지가 / 嗚呼公之次子仁祉
대덕 육년에 / 在大德六禩
나와 함께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니 / 嘗與予同擧司馬試爲進士
지금으로부터 삼십사 년 전의 일이로다 / 距今三十有四年矣
내가 이미 그 아들과 벗이 되었으니 / 予旣與其子而爲友
공을 아버지뻘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도다 / 則不得不拜公猶諸父
그리하여 그의 맏형은 나를 동생으로 아껴주고 / 故其長公弟畜我
나도 그 아우들을 대함에 / 我視其弟
또 형으로 자처하였으니 / 又自處以兄
이를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 其誰曰不可
그러므로 공의 집안 부자형제들과 더불어 / 是以公之一門父子弟昆
돌아가신 분이건 살아 있는 사람이건 / 於歿於存
의리가 친밀하고 정분이 도타웠다네 / 義密情惇
지금 흙으로 돌아감에 묘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 玆其歸土宜有銘
내가 붓을 드는 것이 / 我秉其筆
그래도 유명에 욕되지 않으리라 / 尙無媿于幽明


 

[주D-001]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 : 국역 대본에는 ‘金提郡’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提’ 자가 ‘堤’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堤’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응거시(應擧試) : 1315년(충숙왕 2)에 동당감시(東堂監試)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 이름이다. 동당감시에 합격한 사람은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충숙왕 2년 정월에 심왕(瀋王)이 동당(東堂)을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하였다.
[주D-003]대덕 6년 : 1302년(충렬왕 28)이다.

 

졸고천백 제2권
국왕이 중서성(中書省)에 유민(流民)의 쇄환(刷還)을 청하는 편지 태정(泰定) 을축년(1325, 충숙왕 12)


삼가 생각건대 본국은 태조(太祖)께서 흥기하여 천하를 세우실 때부터 복속하여 왔습니다. 당시에 거란(契丹)의 유민(遺民)들이 옛 거란 왕의 후손인 금산(金山)을 받들어 거짓으로 관리를 두고 스스로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칭한 다음, 백성들을 몰아내고 물자를 약탈하면서 동쪽 우리나라로 넘어와서는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제멋대로 날뛰며 명령을 어기고 거듭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장수 합신(合臣)과 찰납(扎臘) 등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고조(高祖) 태사(太師)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이 성대하게 대접하고 그들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해마다 빠뜨리는 일 없이 삼가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 뒤 세조(世祖)께서 남쪽을 정벌하고 돌아와 황제의 보위에 오르시기 직전에 우리 증조(曾祖) 태사(太師)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세자(世子)로서 입조(入朝)하여 양초(梁楚) 지방에서 황제를 맞이하여 배알하였는데, 그 보답으로 성은(聖恩)을 입어 기미년(1259, 고종 46) 2월 이후에 도망가거나 포로가 된 백성들을 본래대로 귀환시켜줄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부(祖父)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은 황제의 고모이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여 우리 부친 태위 심왕(太尉瀋王)을 낳았습니다. 누차 조정에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요양성(遼陽省)과 정동성(征東省)의 위관(委官)들과 더불어 쇄환을 시도하였으나 매번 그 지역 토관(土官)들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 제대로 쇄환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 8)에 본인이 연경(燕京)에 입조(入朝)한 이후로 5년 동안 나라 사람들이 국경의 방비를 허술히 하여 요동(遼東), 심양(瀋陽), 개원(開元) 등지로 도망해 들어간 사람들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번에 삼가 표문(表文)을 지어 사신을 보내 아뢰오니, 부디 위로 역대 조정에서 소국(小國)을 사랑하신 본뜻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소국이 황제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노고를 살피시어 황제께서 윤허를 내리도록 인도하여 흩어진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바다 한 구석의 작은 나라가 길이 하늘과 같은 화육(化育)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태조(太祖) : 몽고국(蒙古國)을 건국한 칭기즈칸(成吉思汗 : 1162 〜 1227)을 가리킨다. 칭기즈칸의 이름은 테무친(鐵木眞)이며, 세조(世祖) 쿠빌라이에 의해 원(元)나라 왕조가 세워진 후 태조로 추존(追尊)되었다.
[주D-002]당시에 …… 일으켰습니다 : 1206년 몽고의 건국으로 인해 금(金)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은 다시 동쪽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거란의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자칭하고, 천성(天成)이라 건원(建元)한 후 몽고에 대항하였으나 버티지 못하고 1216년(고종 3)에 마침내 수만의 군대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였다. 고려에서는 노원순(盧元純), 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대항해 보았지만 결국은 패퇴하여 원주(原州)까지 밀려 내려왔다. 이에 몽고, 금(金), 동진(東眞) 등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1219년(고종 6) 1월에 거란의 근거지인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킴으로써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高麗史》
[주D-003]조정(朝廷) : 몽고 조정을 이른다.
[주D-004]합신(合臣)과 찰랍(扎臘) : 연합군에 참여한 몽고군의 장수 이름이다. 합신은 문헌에 따라 합진(哈眞), 하칭(何稱), 합지길(哈只吉), 합적길(哈赤吉), 호심(浩心), 합제제(哈齊濟) 등으로 불리며, 찰랍은 찰라(札刺), 찰라(紮刺), 찰라(察刺), 답라(剳刺) 등으로 불린다. 이들은 강동성에서 거란군의 항복을 받은 후 고려에 대해 강화(講和)를 요청하여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고 돌아갔다.
[주D-005]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몽고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어 그들에게 복종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06]양초(梁楚) …… 배알하였는데 : 1259년 원종(元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원나라로 조회를 가게 되었는데, 마침 원나라 헌종(憲宗)이 둘째 아우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南宋)을 정벌하던 중 죽고 말았다. 이에 원나라 수도인 화림(和林)을 지키고 있던 헌종의 막내아우 아리패가(阿里孛哥)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자 호북(湖北)의 악주(鄂州)에서 남송과 전투 중이던 쿠빌라이는 남송과 강화를 맺고 북쪽으로 급히 귀환 길에 올랐다. 누가 황제가 될지 모두들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원종은 가까이 있는 아리패가를 놓아두고 황제의 자격을 갖춘 쿠빌라이를 향해 멀리 찾아가 양초(梁楚)의 땅에서 쿠빌라이를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쿠빌라이는 기쁜 나머지 “고려는 만 리 밖의 나라로서 당 태종(唐太宗)도 친히 정벌에 나섰으나 정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면서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원종 역시 고려의 왕권 다툼에서 쿠빌라이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양초(梁楚)에서 양(梁)은 하남(河南) 지방이고 초(楚)는 호북(湖北) 지방에 해당된다.
[주D-007]지치(至治) …… 이후 : 충숙왕이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무고로 연경에 소환되어 1321년부터 1325년까지 억류된 것을 말한다.
[주D-008]개원(開元) : 《동문선》에는 개원(開原)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이름을 휘한 것이다.

졸고천백 제2권
또 행성(行省)을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 같은 해


삼가 생각건대 소국(小國)이 역대 조정의 함육(涵育)을 받아 나라 안에 임금과 신하의 직분이 모두 예전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근년에 화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들이 그 사이에서 일어나 조정에서 행성(行省)을 세우자는 논의가 일어나도록 하였으니,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근자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아보니 이러한 논의를 일절 금지한다 하였으므로 온 나라 백성 모두가 실로 다시 태어난 듯이 기뻐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으로 사례를 드리오니, 부디 잘 아뢰어 주시어 소국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길이 보여주신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근년에 …… 하였으니 : 1323년(충숙왕 10) 1월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행성(行省)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이와 함께 국호(國號)를 파하여 원나라 내지(內地)와 같게 해 주기를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高麗史 世家35》

 

졸고천백 제2권
또 태위왕(太尉王)을 위해 시호(諡號)를 청해 달라고 한림원에 부탁하는 편지 병인년(1326, 충숙왕 13)

삼가 아룁니다. 성조(聖朝)의 공신(功臣)과 세가(世家)는 으레 시호(諡號)를 추증받는데, 돌아가신 태위 심왕(太尉瀋王)이 훙서(薨逝)하고 해를 넘겼는데도 아직도 시호의 추증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표문(表文)을 갖추어 중서성(中書省)에 아뢰어 황제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 밖에도 생각건대 선왕은 여섯 조정을 대대로 섬기어 실로 많은 공적을 세웠고, 황제로부터 여러 차례 포장(褒獎)을 받았음은 원로 신하들과 황실의 친척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평생의 행적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보일 수 있다면, 선왕은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되어 생전과 사후에 그 영화가 무엇보다 크다 하겠으니, 부디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이 세 편의 편지는 모두 예문응교(藝文應敎)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나중에 추록(追錄)한 것이다.
졸고천백 제2권
권일재(權一齋)를 대신하여 지은 어머니에게 드리는 제문

모월 모일에 고자(孤子) 아무개는 돌아가신 어머니 고(故) 영가군대부인(永嘉郡大夫人)의 영령께 감히 고하나이다. 아, 사람이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니 이치상으로 볼 때 어찌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요절하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행히 오래 사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간혹 질병에 걸려 병상에서 신음하면서 목숨을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께서는 아흔다섯 해를 사셨는데, 일평생을 논해보면 이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10여 세에 우리 집안에 시집을 와서 22년 동안 나를 키웠고 50년 동안 부친과 함께 사셨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건대 선친께서는 공정(公正)하고 근검(勤儉)하신 분으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75세까지 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이때 어머니의 연세가 또한 72세였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셔왔으니, 그 아들이 74세가 되고 또 요행히 상상(上相)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권한을 손에 쥐어 더없는 부귀를 누릴 때까지 어머니께서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사시다가 이번에 생을 마치게 되실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 슬프도다. 이는 실로 어머니께서 일찍이 음덕(陰德)을 모았기 때문에 큰 복을 받아 오늘에 이른 것으로, 이른바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듯이 여긴다.〔視死如歸〕’는 말에 해당될 터이니, 어찌 마음속에 유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나는 형제자매가 없는 홀몸으로 젊어서는 처가살이와 벼슬살이에 매달리고 만년에는 공명심에 빠져 집과 나라를 떠나 30여 년 동안 부질없이 높은 관직에만 의지해 살아왔으니, 이것은 부모의 뜻을 받드는 양지(養志)에는 해당되겠지만 철에 맞추어 어머님의 거처를 살피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일에 있어서는 실로 마음을 저버리고 만 것이니, 돌아가신 지금에 와서 말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삶과 죽음의 이치는 마치 조석(朝夕)의 변화와 같고, 백발의 나이에 부모상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흔치 않는 일이며, 죽음 때문에 삶을 해치지 말라고 하신 성현의 분명한 가르침도 있다.”는 말로 위로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모자(母子)간의 정이 늙어갈수록 돈독해져서 노쇠했다고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임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이번에 돌아가신 지 백일째 되는 날을 맞아 용천사(龍泉寺)에서 재(齋)를 올려 복을 빌고 삼가 다과(茶果)와 시수(時羞)를 마련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영연(靈筵)에 고합니다. 아, 슬프도다. 흠향하소서.

영혼사(迎魂辭)


물결은 휘감으며 동쪽으로 흘러가고 / 波沄沄而東注
햇빛은 어둑어둑 서쪽으로 저무는데 / 景翳翳以西沈
혼령이시여 어디에서 오셨나이까 / 魂歸來兮何所
눈물이 속눈썹을 타고 옷깃을 적십니다 / 淚承睫以霑襟

송혼사(送魂辭)


마치 만난 듯한데도 보지를 못하여 / 若有遇而不睹
서글피 혼령의 소리나마 듣고 싶습니다 / 慨欲聞其無音
홀연히 문을 나서 망연자실 바라보지만 / 忽出門而自失
마침내 어디에서 찾아뵌단 말입니까 / 竟安究而安尋

[주C-001]권일재(權一齋) : 일재는 권한공(權漢功 : ? 〜 1349)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충렬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이 즉위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하였다.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인사권을 장악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일로 인해 이사온(李思溫), 김심(金深) 등으로부터 탄핵을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충선왕이 양위한 후에는 원나라에 가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만권당(萬卷堂)에서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하였다.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된 후 충숙왕에 의해 구금되어 장류(杖流)되었으나,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풀려나온 뒤 그에 대한 복수로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마지막 관직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랐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탄(文坦)이다. 《고려사》에서는 그의 열전을 간신전(姦臣傳)에 수록하고 있다.
[주D-001]고자(孤子) : 부모상을 당한 사람이 자신을 지칭한 때 부르는 이름이다. 후대에 와서는 부친상을 당한 경우에는 그대로 고자(孤子)라 하고, 모친상을 당한 경우에는 애자(哀子)라고 하였다.
[주D-002]22년 …… 키웠고 : 국역 대본의 원문은 ‘至其劬勞二十有二載’인데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외아들인 권한공이 22세에 결혼할 때까지 키워주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전처 소생인 자신을 22년 동안 키워주었다는 말인지 불확실하다.
[주D-003]한편으로는 …… 모셔왔으니 :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몰라서는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朱子)가 주석을 붙이기를, “늘 부모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으면 부모가 장수한 것에 대해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노쇠한 것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여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 효성을 다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노력하게 된다.” 하였다.
[주D-004]상상(上相) : 재상(宰相) 가운데 가장 높은 재상으로, 권한공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것을 가리킨다.
[주D-005]처가살이와 벼슬살이 : 국역 대본에는 ‘婚官’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官’ 자가 ‘宦’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宦’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당시에 결혼을 하면 처가에서 생활하는 풍속이 있었으므로 결혼과 관직 생활로 집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6]죽음 …… 가르침 : 《예기(禮記)》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의하면, 아버지나 임금이 돌아가실 경우 사흘이 지나면 밥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목욕을 하고 1년이 지나면 연복(練服)을 입는데, 애훼(哀毁)하면서도 목숨을 잃는 정도에 이르지 않는 것은 죽음 때문에 삶을 해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D-007]시수(時羞) : 해당 계절에 나는 음식을 이른다
 
 
 
 

졸고천백 제2권
서방(西方)으로 돌아가는 장운룡 국침(張雲龍國琛)을 떠나보내며 주는 글


내가 젊은 날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천하의 광대함을 알고는 사방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자 그만 직무에 얽매여 계단 하나도 뛰어넘지 못하는 탄식을 하며 지냈다. 지치(至治) 연간에 외람되이 빈흥(賓興)에 응하여 천자의 궁정(宮庭)을 보았으므로 일부는 소원대로 된 것을 기뻐하였으나, 과거 성적이 낮은 탓에 지방 고을의 수령 자리를 얻어 자잘한 일에 분주하다 보니 천성이 이를 견디지 못해 병을 핑계로 관직을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은 새가 큰 나무 위에서 내려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살듯이 시골 마을에 은거하며 중국의 사대부들과 서로 소식을 전하지 않은 지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아, 선비가 한 세상에 태어나 품은 뜻을 성취하지 못한 채 나이 들어 몸이 날로 쇠약해져서 군자에게는 버림받고 소인들만 좋아하니 답답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가끔 중원(中原)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때마다 찾아가서 만나 그로부터 광대한 의논(議論)을 들어봄으로써 평소의 회포를 풀어버리려고 하였는데, 모두들 큰 도량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위한 계책도 잘 세우고 있었지만 가슴이 확 트여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예장(豫章) 장국침(張國琛)이 금년 7월에 와서 왕경(王京)의 일람루(一覽樓)에 거처한 지가 수개월이 되었다. 내가 그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국침은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지낼 사람인 듯 보이다가도 일을 가지고 와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일일이 설명을 해주곤 하는데, 그의 학문은 우리 유학(儒學)에 뿌리를 두었고 아울러 몽고(蒙古)의 문자와 언어에도 달통하였으며 곁가지로 술수(術數)의 학문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한 말에 의하면, 일찍이 강서(江西) 지방의 거자(擧子)가 되어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조정 귀인의 천거를 받아 관리로 임명된 것이 두 번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유람한 것은 천하를 거의 다 돌았을 정도인데, 황도(皇都)에서 시작하여 남으로는 유령(庾嶺), 서로는 화봉(華峯), 북으로는 화림(和林)에까지 여행하였으며, 각 지방의 서로 다른 풍속을 모두 채집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명산과 절경을 다 올라가 보았으며, 작년부터 동쪽으로 여행하여 요양(遼陽)을 거처 왕경(王京)에 이르렀다가 이번에 또다시 서방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는 올 때에도 아무런 구함이 없었고 갈 때에도 그 무엇에 연연해하는 것이 없다. 봇짐을 쌓다 풀었다 하기를 자유자재로 하고, 여행 중에 거처를 정할 때에는 그에 맞는 적절한 장소를 잡았다. 요컨대 그는 연못에 키우는 물고기나 조롱 속에 가두어 키우는 새와 같은 인물이 아니다.
내가 사방을 향해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보니, 사방을 여행한 선비를 만나 그와 교유하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내가 그를 아무리 사랑해도 좇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 사(辭)에다 나의 정을 표현하는 바이다.
사는 다음과 같다.

서쪽에서 오신 아름다운 분이시여 / 有美斯人兮來從西
사뿐히 걸어서 구름 계단 내려와 / 翩然散步兮下雲階
별과 달로 패옥 삼고 무지개로 띠를 했네 / 星月爲佩兮帶虹霓

서쪽에서 오신 아름다운 분이시여 / 有美斯人兮從西來
송산을 사랑하여 잠시 동안 거닐다가 / 愛此松山兮乍徘徊
홀연히 날아서 떠나가니 모실 길 없어라 / 忽然輕擧兮不可陪

내 나이 한창때에 사방에 뜻을 두어 / 我齒方壯兮志四方
구주를 맘껏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렸더니 / 縱觀九州兮歸故鄕
이제는 몸이 늙어 그 소원도 허사로다 / 而今身老兮願未償

아깝다 이 미인을 내 붙잡고자 하였거늘 / 惜此美人兮我欲留
붙잡아도 머물지 않고 고개만 흔들기에 / 留不肯住兮却掉頭
길가에 홀로 서서 두 줄기 눈물 흘리노라 / 獨立道周兮雙淚流


 

[주C-001]서방(西方)으로 돌아가는 : 국역 대본에는 ‘而歸’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而’ 자가 ‘西’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西’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1]계단 …… 탄식 : 왕포(王褒)의 사자강덕론(四子講德論)에 “모기는 하루 종일 팔딱거려도 계단 하나 뛰어넘지 못하지만, 천리마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갈 수 있고 기러기 날개에 달라붙으면 사해를 날 수 있다.〔夫蚊蝱終日經營 不能越階序 附驥尾 則涉千里 攀鴻翮 則翔四海〕” 하였다. 즉 능력이 부족하여 사방에 널리 뜻을 펼치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文選 卷51》
[주D-002]빈흥(賓興) : 주(周)나라 때 지방 학교에서 능력 있는 이를 추천하여 중앙의 국학(國學)에 입학시키는 것을 빈흥이라 하였으며,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鄕試)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최해가 1321년(지치 1)에 원나라 연경에 가서 응시한 과거를 가리킨다.
[주D-003]과거 …… 말았다 : 최해의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에 의하면, 최해는 지치 원년(1321)에 원나라 과거에 합격자 43명 중 21등으로 합격하여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고,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개주 판관(盖州判官)에 제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4]새가 …… 살듯이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 말로서, 맹자가 자신의 본래 학문을 버리고 허행(許行)을 추종하게 된 진상(陳相)이란 사람을 보고서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큰 나무 위로 날아간다는 말은 들었어도 큰 나무 위에서 내려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吾聞出於幽谷 遷于喬木者 未聞下喬木而入於幽谷者〕”고 비판한 말이나, 여기서는 관직을 마다하고 시골로 은거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5]술수(術數) : 자연 현상을 가지고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각종 방법, 즉 점성술(占星術), 점복술(占卜術), 관상술(觀相術) 등을 이른다.
[주D-006]유령(庾嶺) : 일반적으로 대유령(大庾嶺)이라 하며, 중국 오령(五嶺)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유씨(庾氏) 성을 가진 장수가 이곳에다 성(城)을 쌓았다 하여 대유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 위에 매화를 많이 심어 놓아 매령(梅嶺)이라고도 한다. 현재 강서성(江西省)과 광동성(廣東省)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며, 과거에는 대유령을 포함하여 월성령(越城嶺), 기전령(騎田嶺), 맹저령(萌渚嶺), 도방령(都龐嶺) 등 오령을 경계로 그 이남을 영남(嶺南)이라 하였다.
[주D-007]화봉(華峯) : 중국 오악(五岳) 중의 하나인 화산(華山)을 가리킨다. 서악(西岳) 또는 태화산(太華山)이라고도 하며, 현재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한다.
[주D-008]화림(和林) : 몽고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현 수도인 울란바토르 왼쪽에 위치해 있다.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章)이 1368년에 중원을 차지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아들 소종(昭宗)이 이곳 화림으로 도망가서 북원(北元)을 세웠다.
[주D-009]송산(松山) : 개경(開京)의 송악산(松嶽山)을 가리킨다.

 

 

졸고천백 제2권
동인사륙(東人四六) 서문


후지원(後至元)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 여름에 나는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의 편집을 끝마쳤다. 살펴보건대 국조(國祖)께서 중국 조정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후로 대대로 계승하여 모든 왕이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국(大國)을 섬겨 충성과 공손의 예를 다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장표(章表)도 나라의 위상에 걸맞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배신(陪臣)이 사적으로는 왕을 일컬어 성상(聖上)이라 부르기도 하고 황상(皇上)이라 부르기도 하며, 위로는 요순(堯舜) 시대를 끌어와 빗대고 아래로는 한당(漢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왕(國王)은 더러 자신을 일컬어 짐(朕) 또는 여일인(予一人)이라 부르고 명령(命令)을 조(詔) 또는 제(制)라 부르며, 나라 안의 죄수를 사면하면서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다〔大赦天下〕’라고 하며, 부서의 설치와 관원의 명칭 모두 중국 조정을 모방하였다. 이와 같은 것들은 크게 참람(僭濫)한 일로서 실로 귀와 눈을 놀라게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본디부터 이를 개의치 않았으니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황원(皇元)에 귀부(歸附)한 후로는 두 나라를 일가(一家)로 보아서 성(省), 원(院), 대(臺), 부(部) 등의 호칭을 일찌감치 없애버렸으나 세상 사람들이 구습에 젖어 있어 이러한 병폐가 여전히 존재하였는데, 대덕(大德) 연간에 원나라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를 파견하여 바로잡은 뒤에야 확실하게 고쳐져 감히 이를 답습하는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편집된 것은 대부분 원나라에 신복(臣服)하기 이전의 작품 중에서 취한 것이라 아마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의아스러운 점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첫머리에 이 말을 달아 서문을 쓰는 바이다.
졸옹(拙翁)은 쓰노라.


 

[주D-001]국조(國祖) :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증조부에게 추증해 올린 묘호(廟號)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 2년(919) 조에, “조상 3대를 추시(追諡)하여 증조고(曾祖考)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국조(國祖)라 했으며, 증조비(曾祖妃)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조고(祖考)는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의조(懿祖)라 했으며, 조비(祖妃)는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다. 고(考)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세조(世祖)라 했으며, 비(妃)는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D-002]장표(章表) :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가리킨다. 《문심조룡(文心彫龍)》 장표(章表) 조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로는 장(章)ㆍ주(奏)ㆍ표(表)ㆍ의(議) 네 가지가 있는데, 장은 사은(謝恩)하는 글이요, 주는 안핵(按劾)하는 글이요, 표는 진청(陳請)하는 글이요, 의는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執異〕 글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장표는 이 네 가지를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3]크게 …… 일로서 : 국역 대본에는 ‘大涉譖踰’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譖’ 자가 ‘僭’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僭’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譖’ 자와 ‘僭’ 자는 일부 통용되기는 하지만 ‘참람하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僭’ 자로 써야 한다.
[주D-004]성(省) …… 없애버렸으나 :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충렬왕(忠烈王)의 혼인을 통하여 일가(一家)의 의(誼)를 맺게 된 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요구로 관제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대부분의 관청이 한 단계 격하된 이름으로 바뀌거나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칭하였고, 중추원(中樞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는 통합되어 전리사(典理司)로 개칭되었다.
[주D-005]대덕(大德) : 원나라 성종(成宗)의 연호로, 1297년 〜 1307년이다.
[주D-006]평장사(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를 파견하여 : 《고려사》에 의하면, 1299년(충렬왕 25)에 10월에 원나라에서 활리길사를 정동행 중서성 평장사(征東行中書省平章事)로, 야율희일(耶律希逸)을 좌승(左丞)으로 삼아 고려에 보내 왕을 보좌하게 하였다. 그러나 활리길사는 고려의 노예법을 개혁하려다 고려 군신의 반대에 부딪쳐 이듬해 11월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졸고천백 제2권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은자(隱者)의 이름은 하계(夏届) 또는 하체(下逮)이며, 성씨는 창괴(蒼槐)이다. 대대로 용백국(龍伯國)의 백성으로 살았다. 본래는 복성(覆姓)이 아니었는데 은자에 이르러서 우리나라의 음이 느리기 때문에 그 이름과 함께 바뀐 것이다.
은자는 아이 적에 이미 하늘의 이치를 아는 듯하였으며, 학문을 하게 되어서는 한 방면에 얽매이지 않고 그 요지를 얻기만 하면 거기에서 중지하여 끝까지 마친 것이 없었으니, 이는 넓게만 공부하고 깊게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장성해서는 개연히 공명(功名)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성격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는 데다 또 술을 좋아하여 몇 잔만 마시면 남의 장단점을 들먹이기 좋아하며, 귀로 들은 말을 입속에 묻어 둘 줄 몰랐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아낌과 존중을 받지 못하여 관직에 등용이 되었다가도 곧바로 배척을 받아 쫓겨나곤 했던 것이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히 여겨 그의 성격을 고쳐주려고 권유해보기도 하고 책망해보기도 하였지만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중년에는 자못 후회를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미 그를 얽매어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다시 등용하지 않았고, 은자 역시도 더 이상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전에 왕래했던 사람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여러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으려 해도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점은 그의 단점이자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중에게 토지를 빌려 경작을 하였는데, 농원(農園)을 만들어 이를 취족원(取足園)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호를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좌우명을 지었다.

너의 땅과 너의 농원은 / 爾田爾園
삼보의 무거운 은혜로다 / 三寶重恩
취족이 어디에서 왔는지 / 取足奚自
삼가 잊지 말지어다 / 愼勿可諼

은자가 평소 승려를 좋아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그의 소작인 신세가 되었으므로 평소에 품은 뜻이 어긋난 것을 드러내어 자신을 희롱한 것이다.


 

[주D-001]용백국(龍伯國) : 전설상의 거인국(巨人國) 이름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여(岱輿)ㆍ원교(圓嶠)ㆍ방호(方壺)ㆍ영주(瀛洲)ㆍ봉래(蓬萊)의 다섯 선산(仙山)이 있었는데, 용백국의 거인이 와서 이 산들을 떠받치고 있던 자라 가운데 여섯 마리를 낚시로 낚아 가버리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주D-002]본래는 …… 것이다 :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최해가 자신의 일생을 서술한 자서전(自敍傳)에 해당되며 《고려사》 최해열전(崔瀣列傳)에도 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다. 역자의 막연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최해의 이름인 ‘해(瀣)’ 자는 하계(夏届)를 반절(反切)로 합친 음인 ‘혜’, 하체(下逮)의 합친 음인 ‘헤’와 비슷하며, 성씨 ‘최(崔)’ 자는 창괴(蒼槐)의 합친 음인 ‘최’와 일치한다. 또한 본관(本貫)은 다르지만 같은 최씨인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의 또 다른 호가 창괴자(蒼槐子)인 점도 이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주D-003]사자갑사(獅子岬寺) : 최해가 만년에 은거한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절이다. 국역 대본에는 ‘師子岬寺’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최해열전에는 ‘師’ 자가 ‘獅’ 자로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다른 문헌에도 ‘獅’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獅’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예산농은(猊山農隱) : 예산(猊山)의 예(猊) 자는 사자(獅子)와 같은 뜻이다. 자신의 농원인 취족원이 사자산(獅子山) 자락에 있었으므로 ‘예산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한다’는 뜻의 ‘예산농은’으로 자신의 호를 지은 것이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최해의 호를 졸옹(拙翁)과 함께 예산(猊山) 또는 농은(農隱)으로 불렀으며, 그의 문집(文集)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권8에는 《농은집(農隱集)》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의 호를 짓는 방식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 1318 ~ 1375),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 ~ 139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 ~ 1392),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1347 ~ 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 1353 ~ 1419)로 이어진다.
[주D-005]삼보(三寶) : 불교에서 존경해 받드는 세 가지, 즉 깨달음을 얻은 부처〔佛〕, 이를 기록한 불교의 경전〔法〕, 불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승려〔僧〕를 이른다.

 

졸고천백 제2권
고(故)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공(李公) 묘지


사람은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게 되는데, 살아 있을 때는 기(氣)가 모인 것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그 사이에 궁박함과 현달함, 뜻하는 것을 얻음과 잃음, 수명의 길고 짧음, 더디 죽고 빨리 죽음은 또한 각자 타고난 바를 따르는 것이라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에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 이상 수양을 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초목과 똑같이 썩어 없어져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사라지고 말 것이니, 또 이른바 천지 사이에 참여하고 만물 가운데 가장 신묘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예로부터 몸이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덕(德)이 아니면 공(功)이라 하겠다. 예컨대 태산(泰山)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구름이 조금씩 일어나서 비가 오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두루 미치는 것을 사람들이 아니, 이것을 덕이라 한다. 일의 중요한 기회를 만나서 우레와 바람처럼 세차게 일어나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제하여 사직(社稷)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공이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그 몸은 죽더라도 그 도(道)는 더욱 드러날 것이요, 그 일은 까마득히 멀어져가도 그 이름은 더욱 빛을 발하여 천 년 뒤에라도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게 될 것이니, 어찌 평소 출처(出處)의 쉽고 어려움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나이가 들었으므로 그동안 본 것이 많다. 바야흐로 권세가 등등하여 부럽기도 두렵기도 한 것을 보다가도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쇠잔해 없어져 버려 미처 그가 행한 업적을 물어볼 겨를이 없으니, 모두 슬픈 일이다.
삼한(三韓)의 재상인 이공은 평소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오던 분이며 내가 또 일찍이 공의 문객(門客)이었으니,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공의 아들이 나를 찾아와 무덤길에 묻을 글을 청하였으니 어찌 감히 자중하여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이 처음 벼슬을 한 것은 충렬왕 때였는데, 태위왕(太尉王 충선왕)이 이미 공을 끌어다가 요속(僚屬)으로 삼았고 이어서 오랫동안 수행하는 일을 맡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금왕(今王 충숙왕)의 지우(知遇)를 입으면서는 특별히 정부(政府)에 두어 문학(文學)의 관직으로 대우하고 공과 더불어 통치의 도를 논하였다. 왕위가 바뀌어 전왕(前王 충혜왕)을 만났으나 이전의 직임을 다시 그대로 맡았다. 모두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전날과 다름이 없이 매번 총애를 받았으니, 문장과 풍류가 임금을 감동시킬 정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언충(彦冲), 자는 입지(立之)이며, 선대는 청주(淸州)의 전의현(全義縣) 사람으로서, 국가 근세의 명재상인 문장공(文莊公) 휘 혼(混)의 조카이다. 고(故)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휘 천(仟)과 고 직문한서(直文翰署) 증(贈) 대사성(大司成) 휘 자원(子蒝)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며,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해진 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따님은 공의 모친이다.
공은 임진년(1292, 충렬왕 18)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고 또 갑오년(1294, 충렬왕 20) 과거에 급제하였다.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가 된 이래 누차 자리를 옮겨 군부 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正憲大夫) 대사성 진현관제학 지제교(大司成進賢館提學知製敎), 통헌대부(通憲大夫) 검교선부전서 행전의령(檢校選部典書行典儀令), 평양도존무사 행평양윤(平壤道存撫使行平壤尹), 경상도진변사 행김해목(慶尙道鎭邊使行金海牧)을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와 개성 부윤(開城府尹)이 되었다가 좌상시 판선공시 밀직부사 상호군(左常侍判繕工寺密直副使上護軍),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대제학 지춘추관사(政堂文學僉議評理藝文大提學知春秋館事)가 되었다. 이상은 공이 평생 동안 역임한 관직이다.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에 봉해진 김씨(金氏)는 고(故) 첨의평리(僉議評理) 휘 희(禧)의 따님이고, 강녕군부인(江寧郡夫人)에 봉해진 홍씨(洪氏)는 지금 왕경등처순군만호(王京等處巡軍萬戶) 수(綏)의 따님인데, 이들은 공의 두 부인으로 김씨가 전처이고 홍씨가 후처이다.
전(前)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기(光起), 전 □□위 낭장(衛郞將) 광익(光翊), 전 전의시주부(典儀寺主簿) 사걸(俟傑), 이제 성동(成童)이 된 상원(上元), 겨우 10세 된 삼보(三寶)는 공의 아들들이다. 현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이을년(李乙年), 전(前)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詡),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는 공의 사위들이다. 또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세 딸이 있다.
계유년(1273, 원종 14) 월일에 태어나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 계해월 경술일에 졸하였고, 이해 을축월 정유일에 장사를 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 見君子之未亡
신령스런 기운이 양양하여 / 有神氣兮揚揚
복록이 오래 창성할 줄 알았는데 / 謂言福祿久彌昌
안타깝게도 군자가 돌아가셨네 / 恨君子之已亡
하늘의 이치 알아보려 해도 아득할 뿐이니 / 討大空兮芒芒
정말이지 인생은 무상하도다 / 信乎人生不可常


[주D-001]몸이 …… 하겠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4년 조에 “덕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요, 말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다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2]태산(泰山)은 …… 것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31년 조에,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나와 조금씩 모여들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천하에 두루 비를 내리는 것은 오직 태산뿐이다.〔觸石而出 膚寸而合 不崇朝而徧雨乎天下者 惟泰山爾〕”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언충 묘지명(유물 번호 : 本13869, 원제 : 大元高麗國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李公墓誌)에는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으로 되어 있다.
[주D-004]□□위 낭장(衛郞將)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기 묘지명에는 ‘흥위위 낭장(興威衛郞將)’으로 되어 있다.
[주D-005]성동(成童) : 나이 15세 된 사내아이를 이른다.
[주D-006]월일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기 묘지명에는 ‘정사월 을묘일〔月丁巳日乙卯〕’로 되어 있다.

졸고천백 제2권
전백헌(全柏軒) 묘지


지원(至元)과 대덕(大德) 연간에 위로는 밝으신 천자가 있어 천하가 잘 다스려졌고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이 대대로 이어온 공훈과 황실의 인척이라는 막중한 권위로 우리 동방을 35년간 다스렸다. 그 당시에는 선비의 습속이 충후(忠厚)하여 권면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을 닦았으니, 중국 조정에 올라가 벼슬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래로 우리나라에서 벼슬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신중하게 행동하여 경박하고 간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최근 2, 3십 년 이래로 풍속이 날로 무너져서 더 이상 막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간간이 당시의 일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루하다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남아 있는 원로 중에 세상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근래에는 이들마저도 줄줄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러한 기풍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노릇이다.
고(故) 회의 재상(會議宰相) 전공(全公)은 선왕을 섬긴 분이다. 공은 근후(謹厚)한 군자로서, 휘는 신(信)이요 자는 이립(而立)인데, 선대는 천안부(天安府)에 적(籍)을 두었다. 태복소경(太僕少卿) 휘 세주(世柱), 합문지후(閤門祗候) 증(贈) 좌복야(左僕射) 휘 인량(仁亮), 밀직사 대보문(密直使大寶文) 휘 승(昇)은 공의 3대 조상이며, 선부인(先夫人) 최씨(崔氏)는 태재(太宰) 문청공(文淸公) 최자(崔滋)의 손녀로 제안군부인(齊安郡夫人)에 봉해졌다.
공이 처음 벼슬한 것은 부임(父任)을 통해서였으나, 대덕(大德) 신축년(1301, 충렬왕 27)에 내시내의직장(內侍內衣直長)으로서 예위(禮闈)에 응시하여 등과(登科)하였다. 그 이듬해에 숭경부 승(崇慶府丞)에 제수되고, 이어 정방(政房)의 관원이 되었다가 관직이 재차 바뀌어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갑진년(1304)에 국학 직강(國學直講)에 제수되어 금자(金紫)를 하사받았으며, 정미년(1307)에는 외직으로 나가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이 되었다. 지대(至大) 기유년(1309, 충선왕 1)에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부름을 받아 봉상대부(奉常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세 차례 관직을 옮겨 총부 의랑(摠部議郞)이 되었다. 신해년(1311)에 외직으로 나가 지김해부(知金海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성안부(成安府)로 옮겼고 또 두 해가 지나 수원부(水原府)로 옮겼다.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부름을 받았고, 자리를 옮겨 언부(讞部)와 선부(選部)의 의랑(議郞)을 지냈다. 정사년(1317)에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 되었고, 봉순대부(奉順大夫) 판내부시 숙녕부우사윤 지제교 지민부 제거유비창 겸 선군별감사(判內府寺肅寧府右司尹知製敎知民部提擧有備倉兼選軍別監使)를 지냈다. 기미년(1319)에 외직으로 나가 계림 부윤(雞林府尹)이 되었으며, 신유년(1321)에는 자리를 옮겨 복주 목사(福州牧使)가 되었다가 태정(泰定) 갑자년(1324)에 면직되었다.
지순(至順)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년)에 기용되어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에 제수되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에 감찰의 직책에서 파직되고 동지밀직사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에 또다시 파직되어 8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때는 후지원(後至元)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 7월 7일이고 춘추 64세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에 봉해졌으며 판도총랑(版圖摠郞) 휘 창우(昌祐)의 따님으로서 공보다 먼저 졸하였다. 다시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에 봉해졌으며 신호위 대호군(神虎衛大護軍) 휘 효진(孝進)의 따님이다. 맏아들 성안(成安)은 사의서 승(司儀署丞)이 되었고, 다음은 출가(出家)하였는데 법명이 희찬(希璨)으로 조계종(曹溪宗)의 승려가 되었다. 그 다음 불노(佛奴)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사위는 전(前) 종부령(宗簿令) 한대순(韓大淳)이고, 그 다음은 행 중서성지인(行中書省知印) 이충인(李冲仁)이고, 그 다음 딸은 어리다. 손자가 한 명 있는데 그 또한 어리다.
공의 선친인 밀직부사는 선왕(先王 충선왕) 때에 근밀(近密)한 직책에 있으면서 인물을 품평하는 일을 맡았는데 사람들이 공의 공평함을 칭송하였다. 그 뒤 공이 부친을 이어 그 자리에 들어가자 또 부친을 닮았다고 하여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친정(親政)을 게을리 하자 공은 외직으로 나가 지방 고을을 맡았다. 뒤에 몇 차례 관직이 바뀌어 비록 높은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공의 정치적 업적이 대부분 지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 더욱 그리워하였다.
최후에 헌부(憲府)를 주관하면서 뇌물을 받아먹은 늙은 관리 몇 명을 적발해냈고, 노비들 가운데 권세를 멋대로 휘둘러 원역(元役)의 서류를 불태움으로써 자신의 원역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들을 억제하여 무너져가는 기강을 조금 진작시키기는 하였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파직되었다.
공은 일에 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데 힘쓰고 엄중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청탁이 먹혀들지 않았으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경제적인 일에는 또한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오호라, 이것이 바로 공을 군자(君子)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만년에 백헌(柏軒)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송백(松柏)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는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 죽헌(竹軒 김륜(金倫)),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 세 분의 선생과 교유하며 매우 즐겁게 지냈는데, 서로 모일 때마다 나를 거칠다거나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고 데려다 함께 노닐었으므로 그분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성안(成安) 등이 8월 28일로 날을 잡아 관을 운구하여 서울 동쪽 선흥사(禪興寺) 뒤 골짜기에 장사 지내려 하는데, 부인 이씨의 묘와 남쪽으로 몇 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묘지명을 부탁받고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아, 나의 글을 / 噫予之文
어찌 스스로 감추고 아끼리오 / 奚以自祕
때로는 남을 위해 / 亦或爲人
무덤길에 명을 짓기도 하지만 / 刻銘于隧
거절하기 어려워서 쓰는 것이니 / 意在重違
말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리오 / 詞豈無媿
공의 평생 더듬어 생각하면 / 追惟公生
불의를 행하는 것 수치로 여겼으니 / 恥蹈非義
다만 재주 없는 이내 몸이 / 第短於才
제대로 쓰지 못할 것만이 두렵다네 / 書懼未備
황천길 멀고 아득하지만 / 泉臺冥冥
예전과 다름없이 보고 계시리라 / 尙視不異


[주D-001]지원(至元)과 대덕(大德) : 지원은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264년 〜 1294년이며, 대덕은 성종(成宗)의 연호로 1297년 〜 1307년이다. 고려 왕조로 보면 대체로 충렬왕의 통치 시기에 해당한다.
[주D-002]경박하고 …… 여겼다 : 국역 대본에는 ‘恥爲浮薄雅僻之行’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雅’ 자가 ‘邪’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邪’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최자(崔滋) : 1188 〜 1260. 초명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강종(康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규보(李奎報)의 추천으로 문한(文翰)에 발탁되었고 당시의 집정자인 최우(崔瑀)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를 역임한 후 치사(致仕)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보한집(補閑集)》이 전한다.
[주D-004]부임(父任) : 아버지의 음덕으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을 뜻한다. 전신(全信)의 아버지 전승(全昇)은 충선왕이 잠시 집권한 1298년에 숭문관학사 병조상서(崇文館學士兵曹尙書)와 우부승지 판비서시사 보문각직학사(右副承旨判秘書寺事寶文閣直學士)를 지냈으며, 1300년에는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주D-005]총부 의랑(摠部議郞) : 국역 대본에는 ‘摠郞議郞’으로 되어 있으나, ‘部’ 자가 ‘郞’ 자로 잘못 판각된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 국역 대본에는 ‘寶文閤提學’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閤’ 자가 ‘閣’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閣’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날씨가 …… 안다 :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말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졸고천백 제2권
영주(永州) 이지 은소(利旨銀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킨 사실을 기록한 비(碑) 권일재(權一齋)를 대신하여 지음


후지원(後至元) 원년(1335, 충숙왕 복위 4)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경사(京師)에 조회를 갔다가 돌아와 천후(天后 원나라 황후(皇后))의 명으로 부마(駙馬)이신 선왕(先王)에게 복명(復命)하여 말하기를,
“영주의 이지 은소는 옛날에 현(縣)이었는데, 중간에 고을 사람이 나라의 명을 어겼다 하여 현을 폐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백금(白金 은(銀))을 세금으로 부과하여 은소(銀所)로 불린 지 오래되었다. 지금 그 지역 출신인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금중(禁中)에서 환관(宦官)으로 있으면서 심부름하는 노고를 많이 하였으니, 그 공에 보답하는 뜻에서 그의 고향을 승격시켜 다시 현으로 만들라.”
하였다. 이에 국왕이 유사(有司)를 시켜 황후의 칙지(勅旨)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 나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와 고향을 방문하였는데, 옛터가 비좁다 하여 좋은 땅을 골라 고을의 서쪽으로 현을 옮겼다. 그곳은 옛터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이며,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모두 예전과 같이 두었다.
또 5년이 지나 이번에는 야선불화가 황명을 받들고 뒤를 이어 고려에 왔다. 그는 본 고을이 부흥하여 옛 읍호(邑號)를 회복하고 관청을 옮기게 된 전말에 대해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사왕(嗣王)을 배알하여 비문(碑文)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나는 늙었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렇게 비명을 지어서 보는 사람들을 경각시키는 바이다.
나수의 관직은 봉의대부(奉議大夫) 견용태감(甄用太監)이고 야선불화의 관직은 중의대부(中議大夫) 중서사 승(中瑞司丞)이며, 성은 둘 다 이씨(李氏)이다. 본국에서 또 나수를 신안군(信安君)에 봉하고 야선불화를 영리군(永利君)에 봉한 다음 그들의 3대 조상까지 모두 추봉(追封)하였다. 아들이 귀해짐에 따라 마땅히 천조(天朝)로부터도 다시 추증을 받았을 터이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옛 임금께서 / 若國先君
동쪽 끝에 나라를 세우실 제 / 誕奠東表
산과 내의 줄기를 따르고 / 隨厥山川
형세의 대소를 살피셨네 / 相勢大小
현을 세우고 주를 두시고는 / 立縣置州
밝게 훈계하여 깨우치시길 / 明訓以曉
증감하지 말라 하셨지만 / 曰毋減增
천명을 스스로 끊기도 하였다네 / 命或自剿
그리하여 이지현이 / 維縣利旨
영주에 예속되었으니 / 隸永之州
예전에 고을 사람 가운데 / 傳昔邑子
수양이 덜 된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네 / 有不自修
온 고을을 온통 뒤집어 놓은 탓으로 / 擧縣顚覆
죄를 짓고 치욕을 당하여 / 帶累承羞
현이 은소로 강등되어 / 廢爲銀所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네 / 世載悠悠
빼어난 자 나타나지 않는다면 / 不有挺然
이 수치 누가 씻어주리오 / 昭雪者孰
여우도 죽을 땐 굴 향해 머리 두는 법 / 狐正首丘
이 의리 독실히 지켰어라 / 斯義允篤
황후의 명령 융숭하고 / 后命旣優
나라의 은혜 크게 내리니 / 國恩孔縟
아아 나는 알았도다 / 噫嘻我知
이치에는 진실로 굴곡이 있음을 / 理固盈縮
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 一夫不慧
몇 사람이 이 굴욕을 당했는가 / 受屈幾人
오랜 뒤에야 회복한 것은 / 久而能復
이 두 군의 덕분이로세 / 賴此二君
사람이 어떠하냐에 따라 / 惟人善否
혁파되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하니 / 惟革惟因
변화의 이치를 잘 보려면 / 善觀變者
여기에 새긴 글을 보라 / 視此刻文


[주C-001]영주(永州) : 경상도 영천(永川)의 옛 지명이다.
[주C-002]이지 은소(利旨銀所) : 이지(利旨)는 경상도 하양(河陽)의 옛 지명으로 당시 영주(永州)에 속해 있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고려사(高麗史)》에는 ‘이지(梨旨)’로 되어 있다. 소(所)는 고려 시대 말단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실이나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ㆍ광업ㆍ수산업 부문의 공물을 생산하는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곽소(藿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 다소(茶所), 밀소(蜜所) 등이 있었다.
[주D-001]부마(駙馬)이신 선왕(先王) : 선왕은 충숙왕을 가리킨다.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위왕(魏王)의 딸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혼인하였으므로 부마라 한 것이다.
[주D-002]이에 …… 하였다 : 국역 대본에는 ‘於是 王敎有司行之如中中旨’로 되어 있는데, ‘中中旨’에서 앞의 ‘中’ 자는 공란(空欄)으로 처리되어야 의미가 통한다. 황후의 칙지이기 때문에 한 글자를 비운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과 신녕현(新寧縣) 조에 수록된 동일 비문(碑文)에서도 두 곳 다 ‘中’ 자 하나는 빠져 있다. 이는 판각상의 실수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주D-003]현사(縣司)와 장리(長吏) : 현사는 현의 관아(官衙)를 뜻하며, 장리는 관원(官員)을 뜻한다.
[주D-004]사왕(嗣王) : 충혜왕(忠惠王)을 가리킨다. 이 작품을 충숙왕(忠肅王)이 죽고 그 아들 충혜왕이 다시 복위한 즉위년인 1339년에 썼으므로 사왕이라 한 것이다.
[주D-005]현이 은소로 강등되어 : 국역 대본에는 ‘廢爲銀戶’로 되어 있으나 ‘戶’ 자는 문맥상 ‘所’ 자의 오자로 판단되어 이를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졸고천백 제2권
최 어사(崔御史)가 부친의 80세 장수를 경하드리기 위해 연 잔치에서 지은 시의 서문


지금 동방 출신으로 천자의 조정에 벼슬하여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고 청렴함과 신중함으로 몸가짐을 지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최고로 칭송받는 인물로는 감찰어사(監察御史) 최대중(崔大中) 공이 있다. 공의 부친은 일찍이 고려에 벼슬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아들이 존귀해짐에 따라 다시 동릉군후(東陵郡侯)에 봉해졌으며 춘추 80이 되었다. 공이 요양(遼陽)으로 사신을 오는 차에 고려에 들러 부친을 배알하고는 이달 17일에 술잔을 들고 축수를 올려 경하드리는 잔치를 열자 친인척들이 모두 참석하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면서 모두들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나라 안에 유관(儒冠)을 쓴 자들은 모두 시를 지어 올렸는데, 내가 공의 집안과 같은 성씨의 친분이 있다 하여 제사(題辭)를 써줄 것을 부탁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때를 만나 높은 벼슬을 하고 봉록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현재는 집을 떠나 멀리 사방 만 리를 떠도느라 부모는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고 소식조차 서로 전하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혹 미관말직을 받아본다 한들 평생 저버린 바를 어찌 보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숙수지락(菽水之樂)에 비한다면 대등하게 놓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과시하며 스스로 이를 영예로 여기니, 아, 도대체 마음속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종가(宗家)는 그렇지 않다. 군후(郡侯)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공은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이요 나머지 네 아들 또한 본국(本國)에서 벼슬하여 관질(官秩)이 모두 대부(大夫)에 올라 금자(金紫)를 입었다. 공은 이미 형제들이 부모님 곁에 있어 좌우에서 모시는 데 어김이 없었고, 처음에 벼슬에 나아간 것도 부모님의 명에 따라 한 것이지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경사(京師 연경(燕京))에 나가 있은 지가 비록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역로(驛路)를 통해 집에 편지를 한 달에 두 번씩은 보내고, 간간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와서 누차 영화로운 근친(覲親)을 하였으니, 집안에 들어앉아 단지 계절에 따라 기거를 살피는 것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옛사람들은 부모를 섬길 때 뜻을 봉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공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만하다. 게다가 군후(郡侯)의 건강이 장년(壯年) 때나 다름없어 식사량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하늘이 화락(和樂)하고 강녕(康寧)한 복을 내리신 것이다. 지금 이후로 공의 벼슬이 갈수록 높아지고 지위가 갈수록 막중해져서 또다시 귀국하여 구순(九旬)을 경하하고 백세(百歲)를 경하하는 잔치를 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끝이 없는 복이로다. 우리 문중이 선대(先代)에 인재를 배양한 것이 필시 두텁고 오래되어서 이 두 분의 부자(父子)로 하여금 이러한 영화를 누리게 한 것이니, 세상에서 일부러 객지를 싫증이 나도록 떠돌아다니면서 요행으로 부모를 현달하게 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어떻다 하겠는가. 여러분들이 칭송하고 노래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맞다.”
하기에, 마침내 이렇게 쓰는 바이다.
후지원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 12월 모일에 지치 진사(至治進士) 전(前) 요양로 개모별가(遼陽路盖牟別駕) 계림(雞林) 최모(崔某)는 서(序)하노라.


[주C-001]최 어사(崔御史)가 …… 서문 : 원문은 ‘崔御史爲大人慶八十序’인데, 《동문선》에는 ‘崔御史爲大人慶八十詩序’로 되어 있다. ‘詩’ 자가 빠진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1]최대중(崔大中) :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중이 자인지 이름인지도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02]숙수지락(菽水之樂) : 숙수는 콩죽과 물을 가리키며 가난한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자로(子路)가 가난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함을 한탄하자, 공자(孔子)가 이 말을 듣고 “콩죽을 마시고 물을 마셔도 그 즐거움을 다하면 이를 효라고 한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가난 속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을 이른다.
[주D-003]관질(官秩)이 …… 올라 : 국역 대본에는 ‘帙皆大夫’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帙’ 자가 ‘秩’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秩’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뜻을 봉양하는 것 : 부모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의하면, 증자(曾子)가 그의 아버지 증점(曾點)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리고는 식사를 마치면 상을 치우기에 앞서 반드시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물었고, 남은 것이 있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다. 증자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남에게 음식을 베풀려는 부친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봉양을 맹자는 뜻을 봉양하는 것, 즉 양지(養志)라 하였으며, 부모 섬기기를 증자와 같이 해야 한다고 칭송하였다.
[주D-005]지치 진사(至治進士) 전(前) 요양로 개모별가(遼陽路盖牟別駕) : 중국에서는 과거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부른다. 최해가 1321년(지치 1)에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모별가에 제수되었으므로 자신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졸고천백 제2권
최태감(崔太監) 묘지


나는 성품이 게으르고 남과 싸우는 데에 겁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10년 전에 마침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한 내시로부터 무고를 당한 적이 있어 게으른 나였지만 부득불 그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 모두 객석에 앉아 있었고 그 문 앞은 마치 시장과 같이 붐볐다. 조금 뒤 내시가 나오자 객들이 행여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맞이하여 절을 하고 무릎을 굽혔다. 나는 선비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예에 따라 그를 보려고 하였으나, 내시는 거만하게 바라보더니 마침내 말을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나는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한스럽기도 하여 물러나와서,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더라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문에 최 밀직(崔密直)이 매일 왕을 접견하여 그분의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없어서 당대 명성이 자자하다고들 하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분을 만나 뵙고 특별히 말해보라고 권유하기에 그 말을 좇아 문 옆에서 기다렸다. 밀직이 여러 사람들 속에 있는 나를 멀찌감치서 바라보고는 특별히 자리로 내려와 먼저 예의를 표한 후 찾아온 뜻을 묻기에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당시는 내시의 권세가 한창 치솟던 때라 그를 억제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일이 바르게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밀직이 남의 소개를 받지 않고서도 선비를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점에서 옛날 의협(義俠)의 기풍이 있음에 감동하였다. 이때부터 매번 찾아갈 때마다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
밀직은 고려에서 지낸 관직이고, 천자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3품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세상을 등지니 나라고 어찌 생각이 없겠는가. 의당 그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공의 행실을 기술하는 글을 지어 나의 슬픈 심사를 담아야 할 것이다.
공의 휘는 안도(安道), 성은 최씨(崔氏)이며, 소자(小字)는 나해(那海)이다. 선대는 해주(海州) 사람이었다가 나중에 용주(龍州)로 이주하여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윗대 조상들에 대해서는 멀리까지 상고할 수는 없으나, 증조 휘 광(光)은 주(州)의 부호장(副戶長)이었고, 조부 휘 대부(大富)는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 되었다. 부친 휘 현(玄)은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평리 상호군(檢校僉議評理上護軍)이었는데, 공의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조정에서 조청대부(朝請大夫) 대도로 동지효기위(大都路同知驍騎尉)의 관직을 추증하고 대흥현남(大興縣男)에 추봉하였으며, 모친 김씨(金氏)는 대흥현군부인(大興縣君夫人)에 추봉되었다.
지대(至大) 원년(1308, 충선왕 즉위년), 공의 나이 열다섯에 산원(散員)으로서 낭장(郞將)에 발탁되었으며,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 4)에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품계는 봉상대부(奉常大夫)에 올라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大護軍), 상호군(上護軍)에 올랐으며, 품계는 세 번 바뀌어 정순대부(正順大夫)가 되었다.
태정(泰定) 4년(1327)에 응양군(鷹揚軍)의 주장(主將)이 되었고 군부판서(軍簿判書)를 맡았다.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 즉위년)에 부밀직사(副密直司)에 올랐으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가 되었다. 얼마 후 감찰대부 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同知密直司事)로 자리를 바꾸었으며 협모동덕공신(協謀同德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또 원나라 조정의 칙명을 받아 정동행성 좌우사 원외랑(征東行省左右司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지순 2년(1331, 충혜왕 1)에 칙지를 받들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성을 숙위(宿衛)하였고,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특별히 중상감 승(中尙監丞)에 제수되고 관품은 봉의대부(奉議大夫)에 올랐으며, 지원(至元) 2년(1336)에 태부감 소감(太府監少監)으로 자리를 옮기고 관품은 조청대부(朝請大夫)에 올랐다. 지원 6년(1340, 충혜왕 복위 1)에 또다시 자리를 옮겨 태부감의 태감(太監)이 되었고 관품은 중의대부(中議大夫)에 올랐다. 이렇듯 원나라 경사(京師)에서 벼슬을 한 9년 동안 관직이 세 번 바뀌었으며, 두 번이나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본국의 영광이 되었는데, 먼저는 지순 3년(1332)이요, 나중은 지원 5년(1339)이다. 그 이듬해 봄에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병에 걸려 7일 만에 졸하니, 향년 47세이며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3월 27일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친 조청공(朝請公)을 따라가 태위 심왕(太尉瀋王 충선왕)을 연경(燕京)의 관저에서 섬기면서 마침내 3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선왕(先王)의 관속으로 서용되어 오랫동안 섬긴 공로를 인정받아 토지 100결(結) 우리나라의 풍속에 500묘(畝)에서 100궁(弓)을 뺀 것을 결(結)이라 하고 유(斞 : 16말)에서 1말〔斗〕을 뺀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문창후(文昌侯)가 말했다.과 노비 10구(口)를 하사받았다.
지치(至治) 연간에 선왕(先王)이 역신(逆臣)들의 모함을 받아 경사(京師)에 억류되었으나 공은 선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종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므로 토지 200결과 노비 20구를 하사받았다. 태정(泰定) 초에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 왕실을 배신한 자들의 말을 듣고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중국 천하와 똑같이 다스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이 작고한 재상 김이(金怡) 등과 함께 극력 변론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그 공을 인정받아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받았다.
사왕(嗣王 충혜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관직이 급등하여 밀직(密直)에 제수되었으니, 왕의 신임이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또 지순(至順) 연간에 금상(今上 충혜왕)이 바닷가에 있을 때 왕이 사용하는 물품들을 사재에서 털어 바친 것이 많았으므로 뒤에 다시 왕위에 복위하게 되자 공에게 하사한 물품이 매우 많았으며, 옥새를 찍은 글을 내려 모든 토지와 재산에 대해서 아무도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된 것도 실은 여기에서 기반한 것이다. 오호라, 이상으로 보아 공의 사람됨을 대략 알 수 있으니, 다른 것은 논할 필요도 없다.
아내 구씨(具氏)는 고(故) 봉익대부(奉翊大夫) 휘 예(藝)의 따님으로, 이분 또한 공의 관직이 높아짐에 따라 박릉군군부인(博陵郡君夫人)에 봉해졌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유(濡)는 지금 상호군(上護軍)으로 있고, 그 다음 원(源)은 지금 호군(護軍)이고, 그 다음 숙신(淑臣)과 그 다음 문구(文丘)는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장녀는 전(前) 호군 인당(印璫)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전 낭장(郞將) 김유온(金有溫)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전 별장(別將) 임희재(林熙載)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이해 5월에 모지(某地)의 언덕에 공을 장사 지냈는데, 예법에 따른 것이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고려에 벼슬할 때는 / 仕王國
고려의 신하가 되고 / 爲王之臣
천자의 조정에 벼슬할 때는 / 仕天子之朝
천자의 신하가 되는 법 / 爲天子之臣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 / 彼輕此重
내 몸에 어찌 따진 것이 있겠는가 / 曾何足計乎吾身
옛말에 이르기를 한 나라의 선비감도 있고 / 古語云有一國之士
천하의 선비감도 있다 했으니 / 有天下之士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아니라면 / 才非有兼人
그 누가 이럴 수 있겠는가 / 其孰能如此
아쉽게도 사려는 매우 긴데 수명은 짧았으니 / 惜也慮甚長而年則不長
믿을 수 없는 것은 / 所未可恃者
저 푸른 하늘이 아니겠는가 / 其曰不在於蒼蒼
저 푸른 하늘이 아니겠는가 / 其曰不在於蒼蒼


[주D-001]소자(小字) : 어릴 때의 이름을 이른다.
[주D-002]산원(散員)으로서 낭장(郞將)에 발탁되었으며 : 산원은 정 8 품 무관 벼슬이며 낭장은 정 6 품 무관 벼슬로서, 어린 나이에 급속도로 승진했음을 보인 것이다.
[주D-003]지순(至順) 원년 : 국역 대본에는 ‘至順九年’으로 되어 있는데 ‘九’ 자는 ‘元’ 자의 오자이다. 《졸고천백》에서 ‘九’와 ‘元’은 글자 모양이 아주 흡사한 탓에 문집을 판각할 때 각수(刻手)의 실수로 ‘元’ 자가 ‘九’ 자로 잘못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지순’은 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로서 1330년부터 1332년까지 3년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9년’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으며, 《고려사》에 의하면 최안도가 감찰대부에 임명된 것은 지순 2년인 충혜왕 1년 2월의 일이다.
[주D-004]지원(至元) 2년 : 국역 대본에는 ‘至大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大’ 자는 ‘元’ 자의 오자이다. 지대(至大)는 원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서 그 기간이 1308년 〜 1311년이다.
[주D-005]선왕(先王) : 본 묘지명이 쓰인 시기는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한 원년인 1340년이므로 여기에서 선왕은 충숙왕을 가리킨다.
[주D-006]우리나라의 …… 말했다 : 국역 대본에는 ‘五畝’로 되어 있는데, ‘五’ 자 뒤에 ‘百’ 자가 빠진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문창후(文昌侯)는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의 봉호(封號)이다. 정약용의 전결변(田結辨)에 의하면, “최치원의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이르기를, ‘전답 200결을 더해주었다〔益丘壟餘二百結〕’ 하고, 자주(自注)에 ‘서른 팔〔肘〕이 100궁(弓)이 된다.’ 하였는데, 한 팔은 본래 2척(尺)이니, 500묘에서 60척, 즉 100궁을 뺀 것이 1결이다.”라고 하였다. 《與猶堂全書 第1集 卷12》 그리고 《경세유표(經世遺表)》 방전의(邦田議)에 역시 숭복사비의 ‘전답 200결을 더해주고 곡식 2000섬을 보내주었다.〔益丘壟餘二百結 酬稻穀合二千苫〕’는 내용을 다시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풍속에 500묘에서 100궁(弓)을 뺀 것을 결(結)이라 하고 유(斞)에서 1말〔斗〕을 뺀 것을 섬(苫)이라 한다.” 하였다. 《與猶堂全書 第5集 卷6》 이상에서 볼 때 국역 대본의 ‘五畝’는 ‘五百畝’의 오기(誤記)이다. 숭복사비는 최치원의 《고운집(孤雲集)》 권2에 대숭복사비명(大嵩福寺碑銘)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 第1輯 180쪽》
[주D-007]지치(至治) …… 억류되었으나 : 충숙왕이 1321년(지치1)에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와 그 지지파들의 무고로 원나라에 소환되어 1325년(태정2)까지 연경에 억류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태위왕, 즉 충선왕이 1320년에 고려로 귀환하라는 원나라 영종(英宗)의 명을 듣지 않다가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고,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작위를 물려받은 왕고(王暠)가 고려의 왕위마저 찬탈하기 위해 충숙왕을 무고하자, 1321년에 원나라에서는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연경(燕京)으로 소환하였다. 그리하여 1325년까지 5년간 충숙왕이 연경에 억류를 당했는데, 그동안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왕고파들은 물론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 충숙왕을 시종하던 신하들까지 심양왕에게 붙어서 충숙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 본국과 같이 직접 고려를 통치해 줄 것을 황제에게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폐위 직전까지 몰렸을 때 충선왕을 귀양 보내고 충숙왕을 소환하였던 영종이 죽고 1323년 태정제(泰定帝) 진종(晉宗)이 즉위함에 따라 상황이 급반전되어 충선왕이 먼저 풀려나고 충숙왕도 1325년에 고려로 귀환하였다.
[주D-008]태정(泰定) : 진종(晉宗)의 연호로 1324년 〜 1327년이다.
[주D-009]고려 …… 말 : 진종의 즉위년인 1323년(충숙왕 10) 1월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행성(行省)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파하여 원나라 내지(內地)와 같게 해주기를 요청한 것을 이른다. 《高麗史 世家35》
[주D-010]금상(今上)이 …… 때 : 1330년에 충혜왕이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초부터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이러한 폐정이 2년 동안 지속되자 원나라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 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바닷가에 있을 때란 충숙왕이 연경에 소환된 때를 두고 한 말이다.

 

최재묘지명(崔宰墓誌銘)
최재묘지명(崔宰墓誌銘)
 
 
시대
고려
연대
1378년(우왕4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미상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색(李穡) /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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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묘지명(崔宰墓誌
최재묘지명(崔宰墓誌銘)
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幷 序 (李 穡)

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衞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衞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歷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冗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廼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敭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敭之於後吾實耻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摠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怗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議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盖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政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衞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盖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甞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慤別將女適禮儀摠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
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强公退則決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출전 : 『牧隱文藁』 권15〕
銘)
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幷 序 (李 穡)

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衞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衞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歷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冗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廼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敭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敭之於後吾實耻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摠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怗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議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盖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政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衞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盖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甞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慤別將女適禮儀摠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
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强公退則決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출전 : 『牧隱文藁』 권15〕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문진 최공묘지명(高麗國 大匡 完山君 諡文眞 崔公墓誌銘) 및 서문

완산(完山 : 지금의 전주) 최씨의 계보에서 고찰해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분이 있다. 벼슬은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이었다. 그는 중랑장(中郞將)인 숭(崇)을 낳았다. 중랑장은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 左右衛大將軍 知工部事)였다. 공부(工部)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인 전(佺)을 낳았다. 낭장은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인 정신(正臣)을 낳았다.
중랑장은 득평(得枰)을 낳았다. (득평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通憲大夫 選部典書 上護君)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득평은)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충렬·충선·충숙왕의 세 임금을 섬겼다. 그 중에도 충선왕은 더욱 그를 나라의 인재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으로부터 나온 것이 많았다. 선부(選部 : 득평)가 대직(臺職 : 어사대)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다.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모습을 두려워하였고, 토지를 조사할 때 재상 채홍철(蔡洪哲)을 도와 전라도 각 주현의 토지를 나누어 처리하면서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다.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選部)는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奉翊大夫 知密直司事 監察大夫 文翰學士承旨 世子元賓)인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충렬왕 29, 1303) 4월 계유일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재(宰),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충숙왕 8, 1321)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에 임명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내시로 들어갔고, 4년(충숙왕 14, 1327)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별장(別將)으로 옮겼다. 천력(天歷) 경오년(충숙왕 17, 충혜왕 즉위, 1330)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와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이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다. 6년이 지난 뒤 단양부주부(丹陽府主簿)로 임명되었다. 4년 후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임명되어 승봉랑(承奉郞)의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 : 지금의 충남 서산)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복제(服制)를 마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충숙왕이 불필요한 관원을 없앨 때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은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사람을 가볍게 쓸 수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하였다. 공은 사양하지 못해 벼슬에 나갔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씨(高氏)의 난이 일어나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고자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았다. 공은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상부(相府)에서 독촉하고 또 위협도 하였다. 공은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 판사(判事)인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임금의 악한 일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좌우에 있는 자들이 아첨하여 악을 맞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뒤에서는 다시 그 일을 들추어내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합니다” 하였다.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여 처음 정사를 펼치면서 공에게 전법정랑(典法正郞)에 임명하였다. 그 해 겨울 흥주(興州 :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수령으로 나가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토지대장이 오래되고 헤어져 있어, 공이 이를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 : 원래 소장된 것)과 서로 대질하여 바로잡았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 : 印承旦)이 정권을 잡자 평소에 공을 꺼려 관직을 바꾸어 버렸다. 정해년(충목왕 3, 1347)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訟事)를 정리하게 되자,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오자, 두 정승은 “장흥부(長興府 : 지금의 전남 장흥군)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이 난 곳입니다. 최모(崔某)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면서,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때, 두 정승이 말하기를 “최모(崔某)가 지난번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머물게 하여 재임시키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 때 마침 공의 외가 사람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청의 대부(大夫)로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으로 옮겼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부령 자섬사사(典客副令 資贍司事)가 되어 각종 명목의 경비 지출을 맡았으며, 남은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어 전에 있던 폐해가 근절되었다.
기축년(충정왕 1, 1349) 양주(襄州 : 지금의 강원도 양양)의 수령이 되었다. 내려준 향을 받들고 오는 사자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자, 공은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감찰장령(監察掌令)에 임명하자, 대간(臺官)의 기강이 다시 떨쳤다. 그러나 1년 만에 파직되었다. 신묘년(1351)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공민왕 3, 1354) 다시 불러서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해 가을에 복주목사(福州牧使 : 지금의 경북 안동시)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규약을 지켰다.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였다. 공이 만들어 실시한 일들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공민왕 4, 1355) 가을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 監察執議 直寶文閣)의 관직으로 소환되었다. 토지로써 군사를 선발한 것은 오래된 법이었다. 공에게 그곳의 도감사(都監使)로 명하였다. 한 사람이 토지를 받아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다. 토지를 받은 자는 죄가 있어야만 회수되었다. 이 까닭에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여 번잡한 사건이 생겼다. 공은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마땅히 받아야 할 한 사람에게만 주는데 그치도록 하자, 송사도 점차 간편하게 되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 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정유년(공민왕 6, 1357)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 判大府寺事)에 승진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다.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성실하여 한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현릉(공민왕)은 “판대부로서 그 직책을 다한 자는 최모(崔某)뿐이다” 라고 하였다. 기해년(공민왕 8, 1359) 공주목사로 나갔다. (그 치적은) 복주목사일 때와 같았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상주목사로 나갔다. 그해 겨울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갔다. 이듬해 봄 임금이 상주로 거동하자, 공은 모든 수요와 공급의 마련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 典法判書)로 본경(本京)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자, 현릉(공민왕)은 공을 불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監察大夫 進賢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그해 겨울 중대광(重大匡 完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공민왕 14, 1365)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기고, 그 이듬해 개성윤(開城尹)으로 옮겼다.
기유년(공민왕 18, 1369) 새로운 관제가 시행되어,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계(官階)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안동 지방관에 결원이 생기자, 현릉은 “안동 수령은 내가 이미 적합한 사람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를 내리고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다. 공이 혹시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갑인년(공민왕 24, 1374) 봄 나이가 많아 사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이 죽자 공은 나아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 : 우왕)이 공에게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자,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관계를 대광(大匡)으로 올렸다. 이듬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에 있는 밀직 최안소(密直 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다. 이는 대개 이 세상과 영원한 결별을 하기 위해서였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기자, 여러 아들에게 “내가 일찍이 꿈을 꾸니 이인(異人)이 나에게 ‘오년(午年)에 죽는다’ 고 하더니, 금년이 무오년(우왕 4, 1378)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공이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동북쪽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이는 평소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달관한 분이라고 할 만하다.
공은 두번 결혼하였다.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씨(辛氏)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奉翊大夫 判密直司事 藝文館提學)으로 벼슬에서 은퇴한 장(蕆)의 딸이다.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는 군부정랑(軍簿正郞) 윤유(尹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 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 三司左尹)이다.
박씨(朴氏)는 자녀 3명을 낳았다.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 宗簿令 知典法司事)이다.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 匡靖大夫 門下評理 上護軍)인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 繕工寺丞)인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로 남녀 약간명이 있다.
판서(判書)의 자녀가 5명이다.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 지금 전라도 안렴사다. 다음은 원(愿)은 중랑장이다. 그 다음 각(慤)은 별장이다. 딸은 예의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다.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다.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宗簿令)은 자녀 3명을 낳았다.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다.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두었다.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展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또 공은 맑았다.
공은 오직 덕이 있으며 오직 공은 이름이 높았다.
그 이름과 그 덕은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어찌 크게 쓰이지 못하여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묘당을 주선하였고
나이 76세에 아직도 건강하였건만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아! 최공이여 온 세상이 다 그대의 모습을 흠모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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