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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2. 6. 27. 00:26


인재집 ( 訒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訒齋先生文集
판심제 訒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78年刊
권책 原集 13卷, 別集 2卷, 拾遺, 年譜, 附錄 합 9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2×16.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原集ㆍ別集 : 서울대학교 규장각, 年譜ㆍ附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규장각 : 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 : 한46-가114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7
 저자
성명 최현(崔晛)
생년 1563년(명종 18)
몰년 1640년(인조 18)
 季昇
 訒齋
본관 全州
시호 定簡
특기사항 金誠一, 鄭逑의 門人. 李潤雨, 盧景任과 교유
 가계도
 崔致雲
 參奉
 崔深
 
 東萊鄭氏
 鄭熙佐의 女
 德陽奇氏
 敎導 奇遇의 女
 星山李氏
 秉節校尉 李智源의 女
 崔昕
 
 崔晛
 
 義城金氏
 府使 金復一의 女
 崔山輝
 府使
 朱應邦의 女
 
 昌寧曺氏
 
 載寧李氏
 
 女
 
 李景祿
 忠義衛




기사전거 : 行狀(李象靖 撰), 崔深墓碣銘(張顯光 撰, 旅軒集 卷12), 崔深言行錄(崔晛 撰)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명종181563계해嘉靖4216월 10일, 善山府 海平縣 松山 私第에서 태어나다.
선조31570경오隆慶48杜谷 高應陟에게 수업하다.
선조41571신미隆慶59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81575을해萬曆313金烏書院에서 공부하다.
선조141581신사萬曆919봄, 臨河에서 鶴峯 金誠一을 뵙고 수업을 청하다. ○ 7월, 義城金氏와 혼인하다.
선조201587정해萬曆15252월, 부인 金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211588무자萬曆16263월, 生員試에 합격하다. ○ 昌寧曺氏와 혼인하다.
선조221589기축萬曆17276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251592임진萬曆2030봄, 金吾郞에 추천되다. ○ 여름, 왜란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盧景任을 義兵將으로 삼고 자신은 掌書가 되다. ○ 8월, 義城으로 피난하다. ○ 9월, 右巡察 鶴峯先生에게 편지를 올려 방어책을 논하다. ○ 12월, 부인 曺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261593계사萬曆21311월, 金谷에서 지내다. ○ 載寧李氏와 혼인하다. ○ 鶴峯先生을 곡하다.
선조271594갑오萬曆22321월, 巡察 韓孝純에게 글을 올려 善山에 屯田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 〈琴生異聞錄〉이 완성되다.
선조281595을미萬曆2333〈友愛箴〉을 짓다.
선조291596병신萬曆24341월, 體察使 李元翼에게 편지를 올려 三綱九目을 진달하다.
선조301597정유萬曆25351월, 體府 從事官 金涌에게 편지를 보내 山城에 木柵을 설치할 계책을 논하다. ○ 健齋 朴遂一을 哭하고 先妣 李氏를 上林에 改葬하다.
선조311598무술萬曆26362월, 健元陵 參奉이 되다. ○ 王子師傅에 擬望되다. ○ 南還하여 九條疏를 올리다. ○ 9월, 典牲署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331600경자萬曆28381월, 郭再祐에게 편지하여 방어책을 논하다.
선조361603계묘萬曆31414월, 朝命으로 「亂中雜錄」을 撰輯하다.
선조371604갑진萬曆3242李彥迪을 伸辨하는 疏를 올리다.
선조391606병오萬曆34449월,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401607정미萬曆35453월, 薦擧로 藝文館 檢閱에 제수되다. ○ 7월,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 10월, 「杜谷先生遺集」을 찬수하다.
선조411608무신萬曆36462월, 待敎가 되다. ○ 3월, 說書가 되다. ○ 5월, 정언이 되다. ○ 〈九知銘〉을 짓다. ○ 8월,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광해군11609기유萬曆37475월, 張顯光을 찾아 뵙고 「周易」과 「太極圖說」을 강하다. ○ 10월,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길에서 呈狀하여 체차되다. ○ 12월, 不知巖에서 泗水로 가서 寒岡先生을 뵙고 書院入享事와 喪禮諸條를 논하다.
광해군21610경술萬曆38482월, 지평이 되다. ○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4월, 弘文錄에 들다. ○ 5월,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다. ○ 10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12월, 舟師勾管司 從事官에 차임되다.
광해군31611신해萬曆39492월, 辭朝하고 南下하다. ○ 洗兵館에서 統制使 李慶濬과 兵事를 논하다. ○ 6월, 玉山에 이르러 晦齋先生 사당을 배알하다. ○ 11월, 鏡城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광해군41612임자萬曆40502월,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3월, 舟師 從事官으로서 兩南 巡撫御史를 겸하다. ○ 10월, 수찬이 되다. ○ 11월, 鳥嶺 主屹山城 巡審御史가 되어 聞慶에 내려가 山城의 형세를 살피다. ○ 부교리가 되다. 비변사의 鳥銃廳 都廳을 겸하다.
광해군51613계축萬曆41513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4월, 정언이 되다. ○ 5월, 피혐하고 그날로 富平에 우거하다. ○ 7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2월, 金溪에 있으면서 「鶴峯先生言行錄」을 찬집하다.
광해군61614갑인萬曆42521월, 金溪에 머물면서 「鶴峯先生遺集」을 校讎하다. ○ 11월, 「冶隱先生行錄」 및 「杜谷先生遺集」을 校讎하다.
광해군71615을묘萬曆43539월, 부인 李氏의 상을 당하다.
광해군81616병진萬曆44541월, 尋源에 가서 머물다. ○ 9월, 還鄕하다.
광해군101618무오萬曆4656〈一善誌〉를 완성하다.
광해군111619기미萬曆47574월, 寒岡을 뵙고 鶴峯 行狀을 考訂하다. ○ 7월, 靑松 椒井에서 無語坪으로 돌아오다.
광해군121620경신泰昌1581월, 寒岡을 哭하다.
인조11623계해天啓3613월, 反正이 일어난 뒤 수찬이 되다. ○ 8월, 응교가 되다. 이후 司藝, 사도시 정, 사인, 집의, 응교, 사성, 보덕을 역임하다.
인조21624갑자天啓4621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이 되다. ○ 사인이 되다. ○ 督戰御史가 되다. ○ 7월, 병조 참지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다. ○ 10월, 대사간이 되다. ○ 11월, 병조 참지가 되다. ○ 12월, 呈辭하고 還鄕하다.
인조31625을축天啓563봄, 형조 참의를 거쳐 예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이 되다. 八務箚를 條陳하다. ○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인조41626병인天啓6642월,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다. ○ 延慰使가 되어 定州에 가다. ○ 8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51627정묘天啓765오랑캐가 平山에 들어오자 漢江을 防守하고 道內에 檄文을 띄워 義兵을 일으키다. ○ 龍骨山城의 義兵將 鄭鳳壽에게 軍需를 보내어 돕다.
인조61628무진崇禎166會寧에 유배되었다가 특명으로 放還되다.
인조81630경오崇禎368겨울, 무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으나, 곧 특명으로 석방되다.
인조101632임신崇禎570「東國通鑑」을 저술하다.
인조141636병자崇禎97412월, 淸兵이 쳐들어오자 고향에서 義兵을 일으키다.
인조151637정축崇禎10751월, 軍旅를 정돈하여 聞慶 杜谷에 진을 치다. ○ 3월, 아들 崔山輝를 哭하다. 張顯光을 곡하다.
인조181640경진崇禎13786월 4일, 金山 鳳溪의 別墅에서 卒하다. ○ 8월, 예조 판서에 贈職되다. ○ 9월, 善山 默語坪으로 返葬되다.
숙종331707정해康熙46-4월, 鄕人이 松山에 社를 세워 位版을 봉안하다.
영조521776병신乾隆41-9월, 松山社를 昌林洞으로 移建하다. ○ 李象靖이 行狀을 짓다.
정조21778무술乾隆43-6대손 崔光璧이 三治堂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崔光璧의 後識)
정조91785을사乾隆50-6대손 崔光璧이 續集을 간행하다. (李獻慶의 續集序)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이 편찬, 간행된 경위는 6대손 崔光璧이 적은 後識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유고는 家禍로 散佚되고 또 몇 권의 手稿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族孫 崔象乾ㆍ崔斗南이 代를 이어 遺稿를 모았으나 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후 5대손 崔壽頤 등이 여러 일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고를 모아 비로소 草稿를 만들어 成編하고, 權斗寅과 權斗經의 校正을 받았다. 이어 권두인에게 墓碣銘을, 권두경에게 跋文을 받았으나 서문이 없어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 시기는 權斗經의 跋文이 지어진 1718년(숙종 44)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6代孫 崔光璧을 비롯한 族人들이 재차 간행을 도모하여 財源을 마련하고, 이미 만들어진 定稿本을 바탕으로 淨寫하여 李象靖, 蔡濟恭, 丁範祖에게 질정을 받는가 하면 李象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神道碑銘과 序文을, 丁範祖에게 墓誌銘과 序文을 부탁하여 받았다. 또한 여러 族人의 집안에서 찾아낸 手本日記 등을 바탕으로 經筵講義 및 年譜를 만들고, 關西錄 1권, 逸稿 2권과 함께 李象靖과 朴孫慶에게 질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편차를 마쳐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1권, 年譜 1권, 附錄 1권 합 18권으로 만들어 1778년(정조 2)에 三治堂에서 목판으로 開刊하고 고을 士林들의 도움을 받아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초간본》 「鏤板考」에 의하면 본집의 판목이 善山의 松山書院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문집 간행이 저자의 세거지인 善山의 族人들에 의해 완료된 뒤 저자가 배향된 松山書院에 판목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49)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장본에는 年譜와 附錄이 빠져 있다.
7년 뒤인 1785년(정조 9)에는 또 崔光璧에 의해 續集이 간행되었는데, 朝天錄과 初刊에 누락되었던 詩文을 모아 7권 3책으로 만들어졌고 李獻慶이 序文을 썼다. 《속집》 권1~5는 朝天錄이고, 권6은 朝天 때의 呈文, 狀啓, 中原禁物, 書冊禁物, 中原物價, 所經路呈이며, 권7은 拾遺로 詩, 書, 序, 雜著, 祭文과 附錄이다. 이 속집은 현재 誠庵古書博物館(4-898),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오811. 08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8년 간행된 초간본으로, 원집과 별집은 규장각장본이고 연보와 부록은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丁範祖, 蔡濟恭 撰), 跋(權斗經 撰), 後識(崔光璧 撰), 續集序(李獻慶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年譜,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原集은 권수에 1775년에 쓴 丁範祖의 序와 1778년에 쓴 蔡濟恭의 序가 실려 있고, 이어 目錄이 있다.권1은 詩 128題와 敎文 4편이다. 詩는 크게 오언시(28), 칠언시(52), 만시(48)의 차례로 편차되어 있고, 각기 절구, 율시, 고시의 순으로 실려 있다. 여러 곳에 자세한 自序가 실려 있고, 編者註도 달려 있다. 맨 앞에 晦齋先生의 遺宅을 지나며 지은 〈澄心臺〉(1594)와 不知巖에 들러 旅軒先生을 만나 지은 〈次張旅軒韻〉(1617)을 실어 尊師의 의미를 두었다. 1608년 冬至使 書狀官 때 지은 〈過首陽山有感〉과 〈山海亭詠懷〉, 1611년 舟師 從事官으로 全州를 지나며 지은 〈威鳳寺有感〉, 1620년 西厓先生의 꿈을 꾸고 지은 〈記夢見西厓先生〉 등이 있고, 輓詩는 鄭宗溟, 鄭經世, 張顯光, 鄭逑 등에 대한 것이다. 敎文은 1610년 知製敎, 1623년 舍人, 1624년 兵曹 參知로서 지어 올린 교문들이다.권2~5는 疏, 箚子, 啓, 書啓, 狀啓이다. 疏는 1598년 고향에 물러나 있으면서 올린 〈陳時務九條疏〉 이하 15편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맨 끝에 1624년에 逆賊의 供招에서 이름이 나왔다 하여 올린 〈兵曹參知時原情疏〉가 있다. 箚子는 交河 遷都를 반대하며 올린 4편의 玉堂箚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玉堂과 司諫院 시절 올린 차가 5편이 있다. 啓는 1613년 正言 시절 올린 避嫌啓부터 1626년 承旨로서 올린 계사까지 8편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書啓는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갔을 때 別單으로 올린 1편이다. 狀啓는 1627년 江原 監司 시절 丁卯胡亂을 당하여 올린 4편이다.권6~7 앞부분은 講義이다. 1608년(선조 41) 4월부터 5월 사이에 행한 書筵講義와 1623년(인조 1) 4월, 5월, 6월, 10월과 162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행한 經筵講義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이는 후손 崔光璧이 手本日記 등을 찾아 정리한 부분이다.권7~9 앞부분은 書 28편이다. 대표적인 서찰로 1592년 9월에 右巡察使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와 1600년 兵使 郭再祐에게 보낸 편지가 맨 앞쪽에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다시 왜란 기간 중 金誠一, 朴晉, 韓孝純, 李元翼 등에게 보낸 편지와 1596년 이후 曺友仁, 鄭仁弘, 尹文擧, 朴惺, 金長生, 鄭經世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권9~13은 雜著(18), 序(4), 記(7), 跋(5), 箴(1), 銘(1), 箋(2), 祝文(2), 祭文(26), 墓碣(4), 墓誌(6), 行錄(4)이다. 雜著는 앞쪽에 1603년 亂後 事蹟을 찬집할 때 道內에 通文한 글과 1604년 善山의 月巖書院 건립을 위해 一鄕에 통문한 글, 왜란 때 開寧의 義兵을 일으키며 지은 통문이 실려 있고, 檄文, 書, 論, 呈文, 遺書 등 다양한 글이 있다. 跋은 「寒岡集」, 「杜谷集」에 대한 跋 등이며, 祭文은 丹山과 月巖書院 奉安文과 金誠一, 鄭逑, 高應陟 등에 대한 제문이다. 行錄은 先考, 杜谷 高應陟, 鶴峯 金誠一의 言行錄 등이다.別集은 2권으로, 앞에 目錄이 있다.권1은 關西錄이다. 1610년(광해군 2) 平安道 暗行御史 시절 지은 狀啓, 書啓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권2는 書啓와 狀啓이다. 원집에서 누락되었던 3편을 실어 놓았는데, 1612년 巡審御史로서 赤裳山城을 살피고 나서 올린 書啓,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갔을 때와 1624년 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올린 狀啓이다.拾遺는 원집과 별집에 빠진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인데, 앞에 目錄이 달려 있고 詩 3수, 書 2편, 事蹟이 실려 있다. 〈嘲鄭仁弘〉 詩와 〈答鄭仁弘書〉 등 鄭仁弘을 배척하였음을 나타내는 글과 〈三仁事蹟〉으로 籠巖 金澍, 丹溪 河緯地, 耕隱 李孟專 등 月巖書院에 봉안된 세 선생의 事蹟이다.끝에 1718년 權斗經이 지은 跋과 1778년 崔光璧이 初刊 때 지은 後識가 있다.그 뒤에 年譜와 附錄으로 李象靖이 지은 行狀(1776), 權斗寅이 지은 墓碣銘(1716), 蔡濟恭이 지은 神道碑銘(1778), 丁範祖가 지은 墓誌銘(1775), 기타 仁祖의 賜祭文, 祭文, 挽詞가 실려 있다.

필자 : 金圻彬

정조8년 갑진(1784,건륭 49)
10월13일(을미)
  경상도의 진사(進士) 김몽채(金夢彩) 등이 상소하여 증(贈) 판서 최현(崔晛)에게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입게 해 달라고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증 판서 최현은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을 사사(師事)하고 또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으며, 만년에는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도학(道學)을 강마(講磨)하고 서로 도와 가며 학문을 닦았으니, 사문(師門)에서 얻은 것은 본래 연원(淵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의 업적으로 드러난 것도 모두가 체험을 통해서 실천한 것입니다.
선묘(宣廟) 말년으로부터 시작해서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에 이르기까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에는 문학(文學)의 공이 찬란하였고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다하였습니다.계축년(1613, 광해군5)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는 온 조정이 감히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하였으나, 최현이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함께 힘껏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그 늠름한 기상을 범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당(凶黨)이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공격하였으므로 삭직(削職)을 당하고 시골에 물러나 살게 되었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시자 맨 먼저 수찬(修撰)으로서 부름에 응하여 경연(經筵)에 출입하며 임금을 성심껏 인도한 공이 크고 많았습니다. 날마다 상소를 올릴 때면 번번이 수용이 되었고, 역적 이괄(李适)의 난리 때에는 명을 받고 독전(督戰)하여 공적이 현저하였습니다. 강원 감사가 되었을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만났는데 다방면으로 책응(策應)하여 도내 전체가 편안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업적의 일부분이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현이 졸하자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곧은 소나무와 꿋꿋한 대나무가 엄동설한을 버티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임금과 신하의 지우(知遇)를 알 수가 있습니다. 최현의 학문은 순수하고 심오하였으며 명절(名節)은 특출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지체하고 있으니, 어찌 사림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태상(太常)에 시호를 의정(議定)하라고 명하여 표장(表章)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청한 일은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주D-001]계축년의 무옥(誣獄) :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獄事)를 가리킨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王位)의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립하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는 이유로 소북파의 영수(領袖)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비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가 이듬해에 살해하였다.
松江別集卷之三
 附錄
年譜下 a_046_293a


丙戌十四年公五十一歲
十月。趙重峯憲上疏。伸辨栗谷, 牛溪, 思菴及公。
重峯上疏。極論栗谷, 牛溪學術之正。忠國之誠。朴思菴及公淸名直節。聳動汚世。又斥時人誤國之狀。凡萬餘言。略曰。某之剛直。只以一唾潑面之故。臣竊聞某之與潑父仲虎。爲玉堂同僚也。仲虎常以近思錄質問於某。乃始進講。潑洁於某。宜執弟046_293b子禮。及潑之顯。乃始凌某。某有長髥。潑也乘醉戲拔。某卽有詩曰。數箇長髥君拉去。老夫風采便蕭條。厥後對飮之際。潑有悖慢之語。某卽不飮。而唾潑之面而乃起。潑非婁師德。其能待乾乎。其畜怒固已久矣。而積成見鬼之車。張弧不脫。俾餓于中野。人或謂某嫉惡已甚。固宜取敗。而臣獨目見其惜潑兄弟。多般規責。冀以回惑。而潑也不悔。展轉椓害。丁謂懷慙。必逐寇準。漢無汲直。孰制淮南逆謀。臣恐若此不已。則將爲李樑, 尹元衡復讐者。轉變爲莽, 操。而人莫敢抗議也。其謂某崇酒嗜色。珥046_293c不當薦引云者。人謂頗中某病。而實不知其心事。某有一兄。殞於杖下。姊夫桂林。削髮猶誅。沈冥之托。實出於阮籍之計。而其按節湖南。有兄嫂居于順天。某有小妾。隨嫂以居留順天。三日日往省嫂。還宿于官舍。是其愼獨之功。人不可及者也。其遇父母忌日。一月斷飮。其均民役。三旬止酒。其所設酌。惟待賓養老享士之禮。而一老不擧。則不敢先飮。四州之妓。未嘗一近。是故。神氣淸明。能管庶事。數月之內。畢均五十官之徭。窮閻箕頭之斂。比舊半減。賞罰嚴明。雖在當路親戚。不貸其罪也。氷壺046_293d自潔。赤心奉公。人不敢干以私。及長憲府。市人皆謂李珥, 鄭某二大夫之臨。獨無各司橫斂也。是其外有崇嗜之名。而內無戕伐之實。幹當大事。又有適用之才云云。疏入。七日不下。攻之者以爲聽人借手。重峯又上疏。極言朝臣朋比。汝立兇悖之狀。上答曰。因求言陳疏之意。良用嘉焉。李潑上疏自辨。上曰。我自爲善。人何與焉。
丁亥十五年公五十二歲
三月。生員李貴等上疏。洞辨李潑等誣兩賢及公之狀。
046_294a略曰。某之爲人。孝友淸介。立朝二十餘年。一朝失祿。流落荒野。其貧至於炭易米盤無醬。則其淸高一節。足以範世厲俗。此李珥之所以終身愛重。而信非流俗之所可及也。或有謂某與柳成龍等。其人才器局。眞可伯仲。而珥每以某不可不用爲言。未嘗極力推引成龍。是非私於某者乎。此亦不然。蓋彼時成龍等。方爲東人領袖。初不假珥之延譽。而出入淸要。展布才力。而某則橫加黨惡之名。一向擯斥。珥之但以某爲言。不亦宜乎。若使西人持論一徧。只用鄭某。而擯斥成龍等。則珥必伸救。伸046_294b救成龍等之心。卽伸救鄭某之心也。是以。至於金孝元之爲人。其才望不及於成龍等。而惜其不用。終始惓惓。則況於成龍輩乎。然則珥之欲用鄭某。實出於愛惜人才。共爲國事之心。豈有他哉。蓋自東西分黨以後。交搆射利。生事兩間。如尹起莘, 李純仁, 鄭汝立之徒。反面造言。浸惑潑輩之心。故潑輩自前日往復之論。乃以珥通用西邊士類。爲罪目。爲邪黨。奉承傳旨。書名天府。朝廷之上。惟以排擯珥, 渾爲事。而國家治亂。生民休戚。置之相忘之域。此所以公論共憤。志士扼腕。而起趙憲之論046_294c也云云。李潑陳啓自辨。上曰。大抵人臣。不可有反復之態也云。蓋潑汝立始皆尊師兩賢。而後反攻之。故上敎如此云。
戊子十六年公五十三歲
重峯又上疏伸公
重峯聞有倭釁。復上疏。略曰。宋有臘寇。有人言今無他策。只有召劉元城, 陳了翁作相。則寇自平矣。宋帝不省。惟章蔡之徒是崇。故臘寇大熾。金虜繼至。今大盜橫行。南北之憂。有大於金虜。而廟謨一無陳劉之策。請亟召朴淳, 成渾, 鄭某等。使其表正046_294d百僚。強幹固本。則猶有扶持之望矣。上斥以人妖而焚其疏。後重峯復上疏。言公之在朝。專欲尊主庇民。慷慨直言。故百僚嚴憚。如猛虎在山。藜藿不採。今若收用。則庶幾積弊一祛。朝野淸寧矣。三司交章。竄配北塞。而世無敢復爲公言者。○公與李希參好古書曰。世道日險。人心益薄。昔之所謂石友心朋。今爲行路。此實氣數使然。傷哉傷哉。南方非樂士。非久又非我有。切擬搬家早避。而其於湯湯曷歸之歎何。觀此則倭寇之必至。公已明知矣。
046_295a己丑十七年公五十四歲
七月。哭思菴。
公聞思菴訃。以詩哭之。曰伯淳無福故。天下也無福。命矣奈如何。西風一痛哭。又曰。我似失羣鴻。依依何處托。參商蘆葦間。影與寒雲落。
八月。哭長子起溟。爲制三年服。
公於序爲季。而伯仲無後。公傳重。故爲服三年。
爲葬子來高陽
十月。鄭汝立謀叛事覺。公聞變赴朝。上以忠節奬之。
046_295b十月初二日。黃海監司韓準馳啓密狀。是夜。命招三公及六承旨入對。復命入直都摠管及玉堂上下番皆入侍。獨檢閱李震吉命勿入侍。榻前以黃海道祕狀下示諸臣。乃安岳郡守李軸, 載寧郡守朴忠侃, 信川郡守韓應寅等上變事也。大槪全州居前修撰鄭汝立謀叛。爲魁首。其同黨安岳人趙球密告云。分遣金吾郞。逮捕于海西, 湖南等道。命下李震吉于禁府。○公聞變將入。金沙溪適往見之。公問曰。吾欲赴闕。何如。沙溪曰。自上命招則可也。此時徑入。形跡不便。公曰。逆賊046_295c謀害君父。重臣近在國門外。觀變不入。於義可乎。君言乃避嫌也。遂赴朝。蓋公於進退之際。未嘗不講於師友間。丁丑仁聖大妃之喪也。公問去就於牛溪及宋龜峯。牛溪以爲不當入。宋則以爲當入。公從宋說。竟赴闕下。國恤與逆變。無輕重之差。則今答沙溪之言。卽昔從宋說之義也。○時李山海, 鄭彦信等秉勻。李潑, 白惟讓等主論。營護汝立。以上變爲栗谷門人所爲。彦信於榻前。仰天笑曰。鄭汝立豈爲逆賊乎。又於鞫廳。大言鄭大甫汝立寧有爲逆之理。必斬告者。可也。至欲鞫問。又046_295d以監司率爾馳啓爲非。欲請推考。洪聖民等力爭乃止。惟讓子振民。且欲擧館疏。以救汝立。大小噂沓。中外騷動矣。○初七日。金吾郞柳湛馳啓。受命馳到全州。發兵圍捕。則汝立已知機逃躱矣。上特送宣傳官李用濬內官金良輔。搜捕汝立。○初八日。海西賊朴延齡, 李箕, 李光秀, 朴杙, 朴文長, 金世謙等。拿來闕庭鞫之。皆承服伏誅。○十七日宣傳官李用濬, 內官金良輔等馳到湖南。則汝立與其子玉男及其同黨安岳校生邊汜, 朴延齡之子春龍。走匿于鎭安。縣監閔仁伯領軍跟尋圍住。046_296a見汝立諸賊環坐巖谷間。仁伯欲生擒。諭以王命。戒官軍勿逼。汝立先以劍斫邊氾卽死。次斫玉男及春龍。不死仆地。仍以劍柄植地。自就刃割頸。聲如牛吼。官軍急進。獲汝立, 氾尸及玉男, 春龍以來。又取汝立家文書以進。○二十日。上親鞫玉男, 春龍。玉男時年十七。上親問曰。汝雖年少。猶知人姓名。何人等往來汝家乎。玉男供曰。謀主。吉三峰也。往來者。本道則右阜韓憬, 泰仁宋侃, 南原趙惟直, 辛汝成等。常常出入。黃海道人金世謙, 朴延齡, 李箕, 李光秀, 朴杙, 朴文長, 邊崇福等十餘人。046_296b時時來訪。池涵斗及僧義衍。不知其所來。而涵斗常在家間。衍僧日夜同處。且欲探城中消息。使延齡入京。仍往海西云矣。池涵斗義衍。亦承服伏誅。韓憬, 宋侃, 趙惟直, 辛汝成等。不服而死。○磔汝立等尸于市。命百官序立以觀。○時汝立逃斃。諸賊就服。而時輩猶欲掩覆。緩縱彌月。恣睢無忌。至於李洁。以汝立之逃躱。比之張儉之亡命。於是。物論憤激。十一月初四日。湖南儒生梁千會上疏。請治鄭彦信, 李潑, 白惟讓等交親逆賊。盤問不實之罪。彦信陳疏自辨。上下敎曰。自變作之日。右相046_296c所爲。多有未安者。然在大臣之位。予何暴擧。而形於辭色。自初推鞫疏漏。予固已疑訝。千會之抗章。嗚呼晩矣。而今反上疏以辨。辭說亦多未穩。至曰不通書札。其謂予無目耶。今下封書十九張。未知此某人書札。至曰。悠悠時事。欲陳支離。又有可笑等語。如是而尙可謂之不爲親厚。不通書札。修飾許多辭說耶。彼小官事。何足言。身爲大臣。乃敢面瞞如此。予不勝痛憤。予非不知早發此等書。而念慮多也。豈計有所不及而不爲哉。蓋意有所在也。今日。雖欲無言。其可得乎。二十年待大臣之節。因046_296d此而喪盡。尤爲痛甚。政院見之。謄書後還入。蓋變初。宣傳官李用濬往探逆家文書之時。彦信密令滅去其書。而李以武夫。不曉文字。只除去直書彦信之書。而所謂宗老, 信族, 老信等之書札。則不知其爲彦信。而不去之故也。○初七日。府啓鄭彦智, 金宇顒, 白惟讓。或以族屬。或以交友。或以連姻。與逆賊俱有相厚之分不可仍在朝列。鄭彦信曾與逆賊有親戚相厚之分。通書問訊。非止一再。而身居台鼎之列。不思以直事君之義。天日之下。乃敢以不相通信。飾辭自辨。其欺罔君父。掩護己罪046_297a之狀。昭不可蔽。決不可一日冒居。請命罷斥。○院啓鄭彦智與逆賊。有同宗相厚之分。人所共知。而久居銓衡重地。物情莫不駭憤。白惟讓以有識文士。連婚賊臣之親。與之相厚。金宇顒亦以士類。而擇交不正。與逆賊相親爲友。李潑, 李洁等。以逆賊盜名欺世。而妄加推奬。引置臺閣。此實由於知人不明。而其相從交厚之罪。自不可免。如此等人。不可仍在朝列。鄭彦信以年老位尊之人。托交於新進疏屬。問訊相續。許爲知己。苟且猥鄙之狀。已爲可駭。及聞逆賊之變。則所當具由自首。席藁待046_297b罪之不暇。而反生掩護之計。肆爲欺罔之言。天日在上。略不畏憚。是可忍也。孰不可忍也。荐蒙寵擢。驟陞具瞻之位。聖上之待彦信。果如何哉。而彦信之負聖上。至於此極。論以王法。自有其律。而臣等之請罷。亦從末減。豈可諉以大臣。而不治其罪乎。竝命罷斥答兩司曰。依啓。右相事。大臣罷職。豈不知體面重難。但事繫非輕。玆依所論。惟切自歎而已。潑等五臟盡露。此甚可慮。言官之道。論之宜詳以直。可乎。無乃潑, 洁者。或有之乎。二人被論。或有哂之者乎。氣息奄奄。無乃澌盡乎。046_297c○汝立詆斥栗谷時。柳成龍推汝立於上前。稱以山野朴直之士。及是。公語人曰。而見成龍字山野朴直之士。今何如也。成龍甚爲愧恨。
十一月初八日。特拜議政府右議政。上疏辭。不許。遂出謝。仍察委官之任。
上答辭疏曰。卿今不可辭。主辱臣死。豈宜累日退在。設或有病。義當輿疾討賊。速出仕。○時牛溪在坡山。亦貽書勸起曰。變生搢紳。將未免蔓延之患。若使他人主治此獄。則其不能以公心處於嫌疑也明矣。國事甚重。奚顧後慮云。○公出仕之日。鄭046_297d彦信在獄。兩手攢祝曰。右相出仕。吾屬生矣。
十二日。上親御鞫廳。公參鞫。請稱停鄭彦信鄭彦智, 李潑, 李洁, 白惟讓, 洪宗祿等。
上親鞫。公及左相李山海入侍。汝立姪鄭緝招。引鄭彦信, 鄭彦智李潑, 洁, 白惟讓, 洪宗祿等同參逆謀。將爲內應云。且與汝立往來書札。狼藉現出。上命鞫彦信以下。彦智供辭誤罔。上盛怒。大憲崔滉啓曰。臣是法官。只知奉法。彦智不可饒貸。公進啓曰。朝臣之交親逆賊。不過好而不知其惡也。天下寧有兩汝立乎。今以書札間事。遽加刑戮。恐046_298a非聖世美事。且彦智素無知識。老妄失對。不足深責。上怒稍霽。乃竝命除刑遠竄。彦信中道付處。兩司啓曰。彦信當變作之初。榻前面對時。已有營護逆賊之意。及推鞫之時。亦有終始眩亂之跡。至以推治元告爲言。欲使獄事稽緩。請命遠竄。從之。○潑定配北道。遇安敏學於路。謂曰。歸語季涵。吾之負季涵多矣。季涵不負吾。他日地下。何面目相對。失聲慟哭云云。
以書勸起牛溪先生
時牛溪以吏曹參判承召。不來。公與書曰。兄不046_298b可不來者有三。年少輩論議日激。吾力將不能止。一也。衍僧及鄭約等四人之口。連累許多搢紳如頃日鄭緝者。兩鄭以下。皆將就誅。吾力甚單。難以動天。二也。鄙病大作。數日後將入。此後無人任此事。救此輩之死。三也。此時一向退在。不來謝可乎。
十二月十二日。上命拿還李潑, 李洁, 白惟讓等嚴鞫之。公又覆啓。
時賊徒樂安宣弘福招。又引李潑, 洁, 白惟讓等。又云。李震吉得讖書于柳德粹處云。故德粹杖斃。潑, 046_298c洁再被拿鞫。且惟讓與逆賊書中。多有犯上不道之言。自上抹去其甚者。下于鞫廳。其書有曰。此人猜忌狼愎。此人少無人君之量等語。竝命嚴鞫。惟讓, 潑先斃杖下。洁未及加刑。公謂李山海, 柳成龍曰。潑已矣。洁亦未可救之活耶。成龍不答。山海起出。公獨啓。上震怒曰。此乃鄭某所爲。山海等必不知是。卽命加刑。洁亦死於杖下。其後上下備忘于鞫廳曰。潑, 洁等出於逆口非一。前後事狀難掩。欲以逆律追斷。何如。公議啓曰。潑洁等與逆賊親厚。則果不誣矣。至於經幄間出兩汝046_298d立。天下古今之所未有。臣等區區之意。不敢以潑, 洁等必爲與聞逆謀也云。上盛怒。乃下專輒之敎。以此至遞委官。而公終不悔也。○其後辛卯五月。潑之老母穉子。竝加嚴訊。至於壓膝而死。其時委官。卽柳相成龍也。壬辰。公在定州。謂柳曰。李潑老母穉子。何以殺之。柳曰。令公則可以救乎。公曰。何忍不救也。
庚寅十八年公五十五歲
二月初四日。陞拜左議政。十八日。上命治領府事盧守愼曾薦汝立等之罪。公獻議請寢。
046_299a備忘記曰。領府事盧守愼。前在政府。於甲申冬。承命薦進賢士。而乃以金宇顒, 李潑, 白惟讓, 鄭汝立薦進。人君欲得賢士。訪問大臣。而所薦者無非奸賊之輩。自古安有如此大臣乎。幸而予適偶燭其狀。此輩疏而不用。不幸深信其薦。謂之賢士。崇奬登庸。置諸公卿宰輔之地。則逆賊之作亂。豈待於庚寅正月哉。變起肘腋。誰得以善處之。思之至此。心膽盡墮。披閱其薦。不覺髮豎。金宇顒。乃奸臣中最爲奸黠者。而敢爲首薦。幾爲所誤。尤爲痛心。大臣以人事君。其職惟在論人。古人論管仲之功。必046_299b以鮑叔爲首。顧可以奸賊薦進耶。逆賊之廣植黨與。肆爲凶逆者。莫非如此名卿鉅公許而薦進。故遂得鴟張形勢。無復顧忌。以至於此耳。及其變生之後。未見汲汲待罪。以謝萬世。爲臺諫者。亦宜彈章直斥。而寥寥數月。未聞有一言。夫守今犯憲。乃坐擧主。邦有常刑。此何等事。而爲臺諫者。裒如充耳。無公論。無紀網也。予優待盧相。而興亡所繫。大義至嚴。雖欲掩覆。不可得也。雖然。此不過知人不明。或爲匪人所誤而已。亦不可不警後世懲後人也。此意說與大臣。令朝廷從公論處之。公與右相046_299c沈守慶回啓曰。伏覩聖敎盧守愼之事。不勝驚悚。守愼蒙不世之遇。被無前之寵。所當盡心王室。爲國薦賢。而其所薦者。率多逆賊流輩。其罪固難逃矣。然不過知人不明。爲一國氣勢所壓而然也。況守愼以四朝舊臣。老病已甚。方以腫脹。命脈如縷。自上待舊臣。不可不存終始之義。宜示以寬容云。大司憲洪聖民,大司諫李山甫等啓曰。盧守愼承聖上薦賢之命。乃以金宇顒, 李潑, 白惟讓, 鄭汝立爲薦。此四人者在當時。情跡雖未盡露。而其兇猾險邪之狀。士夫間猶或有的046_299d知者。至以爲此輩他日。必將貽禍於國家。及今汝立則以叛逆誅。潑, 惟讓爲賊所援而斃。宇顒以奸黠而竄。守愼之所薦者。果何如也。請命削奪官爵。答曰。自古。大臣有薦進奸賊四魁者乎。四啓。答曰。但可貶罷。榜示四方。以明勸懲而已。
三月。上命斷曹大中以逆律。時公再爲委官。獻議覆逆。竝請勿訊大中妻妾。
先是。全羅都事曺大中。爲逆賊涕泣之說傳播。臺論拿獄受刑。大中以一詩呈于省坐。有地下若從比干去。孤魂含笑不須悲之句。判義禁崔滉欲進046_300a達。沈守慶曰。臨死亂言。何可上達。後滉以其詩達于筵中。上震怒。命罷守慶。盡拿大中妻妾子弟。仍下備忘記曰。大中護賊之狀。自有其詩。而其流涕行素發說等事。旣以自服。別無更議。庇護逆賊。自有其律。按律施行。公獻議曰。大中本以陰邪險妄之人。奴事李潑,白惟讓輩。附會邪說。恒言李珥成渾可殺。以挽時譽。遂得注書薦。又與逆賊交結甚密。逆賊自斃之後。涕泣行素之說。發於公論。今觀其詩。怨懟君父。蓄怨朝廷之狀。所難形言。然比諸伏誅逆賊。不無有間。若斷以次律。可以046_300b得中矣。答曰。曺大中渠之所爲。他不須擧論。亦非予之所知也。但以逆黨推按。而自以爲是。親自書之。則是亦渠已自實不諱矣。只據此一語。斷之可也。事理甚明。不待他說。當待推鞫各人處之。仍命嚴鞫大中妻妾。公又獻議曰。大中兇惡情狀。已盡露於言語詩句。其護賊之罪。自有其律。但其妻妾壓膝一事。於臣等之愚見。有所未安。雖叛逆大罪。於本身伏誅之後。只施緣坐定屬之法。意有所在。況逆賊與護賊。罪有輕重。今以護賊。議大中之罪。而竝鞫其妻妾。似若身與逆謀者然。於國家刑046_300c政大體。恐有所未盡。臣等愚意。只以護賊之罪。罪大中。其餘稍寬之。得中處置。似無不可。臣等於大中。有何一毫顧惜。然以刑政不中。恐或有妨於盛治。敢此陳稟。答曰。大中護賊之狀。則已著無可疑。但其所以護賊者。乃同參逆謀故也。不與之同參。而乃與之庇護乎。夫逆賊者。人人所得而誅之者。春秋之法。先發而後聞之。大中護賊。旣已自服。予知其此賊與之同參也。公復獻議曰。臣等伏見聖敎。大義至嚴。難容他議。第以臣等愚見言之。護賊者未必不參逆謀。而亦或有不參之理。此046_300d所以參謀與護賊之律。有輕重之殊也。大中之於逆賊。交結庇護之罪。則已無可疑矣。而同謀則未有現著。必謂之同參。加以壓膝。恐或過中。伏乞聖慈更加商量。答曰。參謀與否。未鞫前難以臆斷。必須訊鞫可知。然當依啓。女人則勿爲訊之。
請勿治存問逆賊之人
傳曰。曺大中文書中。有所謂稱念之書。今世之人。廉恥都喪。只是爲循私耳。宜乎時事誤矣。又於逆賊處稱念云者。交厚阿附可知。極爲痛駭。竝下禁府推鞫。以正其罪。於是。許筬等以存問逆賊之故。046_301a竝逮獄。公獻議曰。伏覩封下曺大中家稱念文書。細瑣鄙陋之事。尙不可言。至於逆賊稱念。多是淸班臺侍之人。臣等不勝驚愕。王府之鞫。實出於懲討之意。但稱念一事。習俗已久。一一詔獄。恐涉騷擾。直加譴罰。以懲其罪。未知如何。傳曰。大義至嚴。不可貸也。其情亦不可不問也。
七月。策輸忠翼謨, 光國推忠, 奮義協策平難功。封寅城府院君。上箚辭。不允。
箚逸不錄。答曰。省卿箚辭。具悉至懇。所陳兩款。功有均焉。一且不可辭。況辭其二。被誣宗系。賴046_301b卿指授而昭雪。反國大憝。因卿讞奏而討平。竭忠於前。積勞於後。報功之典。自是常事。毋庸固執。速膺新命。
八月。命治鄭彦信欲斬告者之罪。公待罪乞罷。
十九日備忘記曰。鄭彦信欲斬告者之說。推官旣已親聞。則更無可言者矣。彦信公然發說於廳中。若無所忌。其心可見。事之駭愕。莫甚於此。而朝廷無一言。今因梁詗疏。始得以聞之。是亦可怪之事也。夫彦信身爲大臣。敢肆欺罔。其兄彦智卽效之。此二人者。心已無君矣。他何足說哉。不勝痛駭之046_301c至。鞫廳回啓曰。彦信此說。傳播已久。遲延不以上聞。臣等之罪大矣。彦信之說。旣已發現。今不可置而不問。卽招他大臣議罪何如。傳曰。依啓。公啓曰。小臣於上年十一月初八日。蒙被異恩。十二日謝恩。因參親鞫入侍之列。其時彦信已在鞫囚之中矣。彦信當初欲斬告者之說。臣未及親聽。而至於傳播已久。聞之亦熟。而因循含默。終未上聞者。誠以此事。臣子常情所未到。疑信遲延。以至今日。草野進疏。聖上始知之。朝廷無言之罪。臣實首犯。乞罷臣職。答曰。可愕之甚。故依啓矣。046_301d勿辭。○上命招推鞫大臣及禁府堂上。問彦信斬告者與否。金貴榮以爲左耳偏聾。不能聞之。李準以爲坐處稍遠。不得聞之。李山海以爲日久不能記。而黃海監司狀啓回啓時。彦信之說。似發於此時矣。兪泓, 洪聖民。皆以爲聞之云。○大司憲洪聖民啓曰。昏愚小臣。曾參推官之列。當時之事。可愕可痛者非一二。切欲披瀝肝膽。以瀆天聽。而勢有所難。跡有可嫌。趦趄未果。時月屢更。論臣之罪。萬死無惜。而臣情則可慼矣。逆賊之變。出於搢紳積年盤據之餘。故推鞫之初。持兩端者居多。如微046_302a臣者。雖爲推官。曾爲時輩之斥。雖或出言於其間。人或反目以視。臣每與兪泓相顧而語。咄咄以歎矣。及其彦信情跡。敗露於聖鑑之下。已被海島之竄。則朝廷間一種議論。以爲朝紳壞敗。人心危懼。不可無鎭定之道。亦不須爲己甚之擧。愚臣妄見。亦在於是。而形跡之嫌。不可不避。故含忍而不發矣。至於草野抗章。自上有問。則雖以微臣之一塊肉。投於鼎鑊之中。臣安敢計較於生死。而有一毫欺謾之語也。但於其時。日暮事遽。猶有未陳其曲折者。蓋當初發言之時。臣實抗之。李山海亦046_302b言其不可。小臣時爲漢城判尹山。海顧語小臣曰。吾見。與判尹之意同矣。彦信再三唱說。則山海稍屈曰。更思之。以直截之事言之。則右相之言是矣。俄而彦信欲推黃海監司。小臣果言其不可推之意。座中亦有言之者。其事遂寢。山海之啓有曰。不能分明記憶者。此必山海大病之餘。昏忘而致此也。然不能無怪焉。天日在上。鬼神在傍。欺罔君父。何以生爲。臣有此懷。竟不能達於逆賊推鞫之時。又不能陳於彦信論罪之時。臣與彦信。厥罪惟均。敢詣闕下。伏俟司寇之刑。上以親見不卽言。046_302c遞差。○正言黃愼啓曰。推鞫之時。邪議橫生。苟非洪聖民, 兪泓抗言力排。則未知國事終何如也。當時參鞫之人。旣已親聞彦信悖逆之言。不能卽達天聽。其驚駭痛憤之心。固當無一息之暫忘。而前者下問之時。或以爲不得聞。或以爲不能省記。含糊顧望。莫肯明言。此果人臣事君之道乎。李山海之言。雖與稱耳聾者有間。而亦未免模稜之失。此聖民之所以不能無怪也。當初不卽言之失。則聖民亦有不得辭者。而觀其避嫌之辭。據事摭實。明白直截。雖使山海聞之。亦將愧服之不暇。假046_302d曰。聖民之言。微有過當。不猶愈於諸人之首鼠兩端者乎。今譴責之嚴。不加於彼。而反加於此。臣恐依阿顧望者。因是得志。而忠直之言。無路上聞也。上特出愼爲高山縣監。○李山海初度呈辭。答曰。百計圖卿之態。予已知之悉矣。雖萬人攻之。不可去也。吁。卿去則他相不能自全矣。是豈美事。卿勿復爲呈辭。速出行公。則多有好事。不然則必有悔之者矣。聖敎所謂他相及悔之云者。皆指公也。初。山海與公。同推栗谷, 牛溪。甲申以後。專附時論。爲公所鄙。釁隙深矣。當逆變之初。山海欲046_303a納款。致書於公曰。昏夜除驅在臨。切仰云。公鄙之不應。而其書自播。山海大慙恚。必欲問公。因緣行讒。故洪, 黃皆以語觸山海忤旨。而上又疑洪, 黃之論。希公意。故批辭如此。
命拿鞫彦信。仍下賜死之命。公再啓力請。減死移配。
彦信賜死命下。公啓曰。宋朝未嘗戮一大臣。以爲忠厚家法。我朝二百年來。除叛逆外。未嘗殺一大臣。仁厚之風。無異趙宋。今宜遵之。上曰。宋朝亦有如此無狀大臣乎。公欲再啓力救。李山海, 柳046_303b成龍皆不答。公與洪聖民商議。而獨啓之。乃得減死移配。
上峻責臺諫之論彦信不嚴。公陳啓自劾。
大司憲崔滉等請更鞫彦信。而措語歇後。上有未安之敎。兩司全數避嫌啓曰。臣等濫忝耳目之寄。當此討賊之日。目見極惡大憝如彦信者。則所當明目張膽。極論抗議。以洩朝野之憤。而誠意淺薄。不能上格天心。辭不直截。徒歸塞責之地。請亟賜罷斥。答曰。不敢知卿等之論不獲已耶。欲已而不能已耶。以數字爲塞責之計。奄奄如046_303c屬纊之氣者。果何故耶。以爲彦信無可殺之罪耶。或慮其不能活耶。已與大臣。議斷其罪。卿等勿憂其或罪也。噫。古之諍臣。其舌如霜雪。今之諍臣。何如是萎薾耶。昔者張禹欺君。朱雲願借馬劍。秦檜講和。胡銓請竿藁街。此二賊者。未嘗不是大臣。而兩人者。初非有言責之任者也。特出於不堪其憤激。欲伸大義於天下耳。今彦信得罪宗社。背國之賊也。論以王法。合懸北闕。第貸其死者。只緣大臣之志。不可不慰。大臣之懇。不可不副。非以彦信爲可恕也。爲臺諫者。是宜相率而抗章。極言而竭046_303d論。使傍觀者髮皆上指。凜凜然鋒不可當。然後人主優假。示以寬典。方爲得體。亦可以折後日奸臣之心也。今卿等章疏。恐爲隣國所印。予實恥之。不但書傳於四方。沒無以見雲銓。深恐老奸偃臥獄中。鼓腹而竊笑也。予非欲加彦信之罪而有此說也。爲士氣而惜也。爲後世而惜也。公與僚相啓曰。鄭彦信罪惡輕重。王法所難撓改。臣等承推官之命。徒知區區於姑息之一端。妄有陳稟。而不覺其失人臣執法之義。不能奉行天討。以正國典。伏見昨日下臺諫之敎。斯實罪在臣等。惶046_304a恐隕越待罪云云。答曰。是不然。大臣與臺諫。其體各異。卿等之所爲。則深得大臣之體。予雖不淑。豈有不諒之理。實喜有大臣也。惟臺諫之體。則似不當如彼其無氣也。觀其措語。甚爲可哀。不得不發言以警後人而已。非有一毫加罪彦信之意。亦非敢以大臣之意爲不是也。宜勿待罪。
崔永慶辭連就鞫。將坐欺罔之律。公覆啓得釋。
初。永慶遊南溟曺植門。孝友有氣節。爲牛, 栗兩賢所許。後爲奸黨所染。與潑汝立, 仁弘等。反詆兩賢。至謂朴淳, 鄭某可梟首云。其言論之頗僻。有甚於046_304b潑等矣。及汝立作逆。憲府啓前司畜崔永慶與逆賊交契甚厚。越境相從。互相推許。主張時論。此乃國人之所共知。而鄭彦信通書中所謂崔孝元者。亦指此人。則其參尋相厚。據此可知。而獨免罪責。物議憤激。請命削奪官爵。答曰。逆賊在搢紳。人之相知。勢似難免。不須一一追論。恐人心之致疑不安也。如永慶者何關。置之可也。三啓依允。○變初。汝立子玉男招曰。謀主。吉三峯也。諸賊招。皆言吉三峯爲上將。鄭八龍, 鄭汝立爲次將。海西賊徒等招。言三峯年貌居住各異。而朴文長招曰。046_304c三峰非吉姓。是崔三峰。乃晉州私奴云。朴延齡招曰。吉三峰乃崔三峰。居在智異山下。與逆賊開山逕往來。常坐汝立之上云。及問三峰容體。則曰。面瘦。黑髥長至腹。語輒喘急云云。以此外議紛然。遠近喧傳。遂指永慶爲三峰。上下敎于鞫廳曰。所謂三峰者。必有其人。如邊涘變幻名號。在安岳則曰崇福。在全州則曰邊涘。在東萊則曰白日昇。三峰之事。何以異此。其令物色大索。又敎曰。予偶閱地圖。居昌縣號曰三峰。而有全八及八顧兄弟通書于逆魁者。實居居昌。竝拿來鞫問云云。至是。046_304d金溝人金克寬言于濟原察訪趙應祺曰。吉三峯乃崔永慶也。應祺言于監司洪汝諄。汝諄一邊馳啓。一邊移文于慶尙兵使梁士瑩。士瑩先以監司金晬, 都事許听所傳之言。已逮永慶。晬, 昕所傳之言。乃逆賊委訪永慶留連等語也。蓋昕聞於晬。晬聞於密陽敎授康景禧。景禧聞於晉州判官洪廷瑞。廷瑞聞於晉州人鄭弘祚也。於是。遂命拿鞫。公啓曰。永慶以三峯爲號與否。請令兩南監司。覈實以啓。然後隨爲盤問。及永慶就獄。供曰。曾與逆賊暫相識。通書問。自某年以來。不復相通云。上046_305a乃下某年以後汝立與永慶書曰。永慶篋中有此書。何欺罔耶。永慶曰。老昏不省有此。臣則無便。不能作答矣。公啓曰。老人容或忘之。逆賊文書中。無永慶答書。則可知其不妄矣。上又下四韻詩于鞫廳曰。永慶文書中有此詩。必是渠之所作也。此何等語也。極爲兇慘。爲先窮問。蓋其詩末句曰。牛溪一夜風生虎。仙李根搖有髮僧。永慶不知所對。但曰。臣素不能詩。此似是臣友李魯之所書也。公啓曰。此乃甲申年間匿名詩。傳於都下者也。臣亦曾聞之。決非永慶之所作也。傳曰。分明是永慶046_305b所作。然姑停刑推。上問永慶之獄何如。公於榻前進啓曰。永慶事。了無端緖。且聞渠有孝友之名。嶺南士論。亦多推許云。恐無逆謀同參之理。臣與永慶。素昧平生。臣不敢有私。特以所聞如是。故敢達云云。上曰。觀渠與弟書。則果似友愛者矣。乃命赦。仍傳曰。永慶身居林下。自以爲處士。而連通權貴。遙執朝綱。以其弟目不知書者。至爲臨民之官。求見朝報。如恐不及。處士果如是乎。天網恢恢。渠固難逃云。蓋永慶弟餘慶。以諺簡論朝廷是非。且覓送朝報之跡。見搜於其兄文書中。故046_305c上惡之。傅旨及之。餘慶亦斃於杖下。○初。牛溪聞永慶被逮。與公書曰。崔永慶孝友淸修。豈有預聞逆謀之理乎。須力救解云。故公於榻前。以孝友之名。嶺南士論推許等語。救之。○永慶之就鞫也。公乘醉。以手畫頸曰。彼公曾欲如此斫吾云。柳成龍曰。此非戲地也。惡公者。遂以此爲陷崔之證。而殊不知此眞救崔之公案也。公若實有陷崔之心。則寧有顯發戲言於公座之理乎。或者以此比之周伯仁之事。信然矣。
九月。再逮崔永慶。公具箚平反。未及上。
046_305d永慶蒙放。諫院請再鞫。憲府請遠竄。上依院啓。公與李公恒福相議欲救之。先搆箚草。適永慶病死獄中。故不果上。箚見本集。○時李公恒福爲問事郞。爲言救崔之意。公出示所搆箚草曰。一朝刑推命下。則我當與柳相聯名救之。恒福又言于柳成龍。成龍曰。如我者何敢救解云。○時辭連獄事。如金宇顒, 鄭介淸柳夢井, 李黃鍾, 尹起莘, 申湜, 韓百謙, 金憑等。其情犯輕重。各在當人。操縱刑宥。莫非睿斷。公何嘗有容私於其間哉。上敎所謂服罪輸情者。雖重必釋。遊辭飾巧者。雖輕必戮046_306a者。乃實事也。且當時一種邪說。譸張不已。反以汝立爲非逆賊。逆獄爲士禍。告變爲栗谷門人所搆。故臺閣之上。論議日激。不可鎭定。公亦無可奈何。然而上之所治。臺諫所論。特擧其甚者耳。蓋汝立心術未著之前。見欺相厚。固無傷也。甲申以後。情狀盡露。而奸黨悅其誣兩賢。崇信奬許。有同骨肉。及其作逆之後。猶敢有營護之計。則其流放禁錮。次第科斷。諒非過重之典也。然則謂公治獄深刻者。無非煽惑之辭也。數十年來。奸黨竊柄。恣意讒賊。無所不至。實如崇寧羣奸。反治元符大臣者046_306b然矣。且於兵燹之後。推案不存。故敢肆矯誣。虛實交亂。而莫之能正。如惟讓不道之書。已經睿覽。而謂之匿名書。李潑母子之死。明在他手。而謂公所爲。則其他可以類推。豈非可笑之甚哉。玆取當時事實之一二。附見如左。○備忘記。金宇顒與逆賊汝立。結爲心腹。觀其書札。朝廷之事。無不盡謀相議。其於經筵自上無心答說之事。亦皆伺聽。輒臆度君心。潛通汝立。相與密議。觀其情狀。有同鼠子。此人予明知其反覆小人。而不料其情狀至於此極。不勝痛心。六鎭定配。○全羅監司洪汝諄046_306c狀啓。以鄭介淸與逆賊遊山之說。傳播道內之故。盤問羅州一鄕。則座首柳潑, 鄕校堂長辛彭年等。皆報以的實云。臺論拿鞫。介淸供曰。臣前爲校正郞廳時。與逆賊數日同座相見而已。前後絶無相通之分云。自上下介淸與逆賊書曰。見道高明。當世惟尊兄一人而已。所謂道者。何道也。前後絶無相通之說。無乃欺罔乎。刑問一次。定配北道。又命詞臣。將介淸所著排節義論。逐條攻辨。榜示列邑鄕校。以正士習。其後賊僧性熙文, 書中。有密記與逆賊所藏一般。自上問曰。此記汝從何得046_306d之。性熙供曰。謄書於汝立家。因以藏置耳。上曰。此記謄書時。汝立獨在耶。座有他客耶。性熙供曰。與二客同坐。其一。前谷城縣監鄭介淸云。介淸以此還被拿命。未及就拿。而死於配所。○傳曰。吳希吉之書。謂汝立以柳夢井有可觀之實。反以愚言爲無實。爲之曲護云。必是前此希吉。竝斥夢井。而逆賊爲之曲護矣。夢井爲逆賊所深許。則其締結之狀。昭不可掩。其爲痛憤失刑。莫此爲甚。不如速遣金吾郞。拿夢井。窮訊其與賊締結之狀。否則直加流放之典。以示人臣交結奸賊者。在王法必046_307a不可赦之意。禁府回啓曰。夢井締結逆賊之狀。在人耳目。不待吳希吉書而可知也。不問其罪。而直加流放。竊恐事體不嚴。請拿來鞫問。夢井推案入啓。傅曰。昔諸葛亮治國。服罪輸情者。雖重必釋。遊辭飾巧者。雖輕必誅。今此獄事。自鄭彦信以大臣欺罔。終免顯戮。自是人多欺罔。今夢井與賊締結之狀。聾者亦知。況其事狀。昭著於簡札之中如此。而乃敢以萬無納招。肆行欺罔。侮弄朝廷。極爲痛心。其可貸乎。○永慶文書中。有李黃鍾書。以逆獄爲士林之禍云。上命拿鞫杖斃。○諫院啓前046_307b參奉尹起莘險詖詭譎。權勢必附。周流兩南。交結逆賊及所厚之人。爲詿誤一世之計。負罪如此。而偃然都城之內。物情摹不憤駭。請削黜。答曰。起莘締結逆賊。極爲綢繆。公論適發。不可只令削黜。當按問其情處之。下禁府以待。○申湜名在汝立門生錄。被逮。供曰。曾與逆賊一不通書云。上下一張書名湜者。湜曰。南中有鄭湜者云。上又下其問喪禮具書姓名者一張。湜不能對。乃刑一次。公時坐鞫廳。見湜對。微哂曰。名士亦如是欺君乎。○韓百謙。坐收李震吉屍。刑訊一次。○金憑。坐046_307c汝立磔屍時流涕。受刑一次而死。○備忘記曰。李潑等初出於鄭緝之招。又出於朴杙之招。又出於宣弘福之招。又出於回伊之招。同參事狀。不一而足。況其平日與賊締結綢繆。合爲一體之狀。尺童所知。而況春秋討賊之義。身無存沒。時無古今。潑等之事狀昭著。證據已悉。依律處斷。又敎曰。大明律。有奸臣籍沒之條。潑,洁締洁逆魁之罪。甚於奸臣。籍沒財産。○當時逆賊文書中。有祭天文七張。列數君上。語極凶慘。且諸賊招辭。多納指斥君上之語。鞫廳不忍上達。只以不忍見不忍聞046_307d爲啓。自上震怒。凡平日之崇奬汝立者。皆坐之。○又備忘記曰。高敝居忠義衛吳希吉。當丁亥年間。奸黨充斥。邪說肆行。李珥, 成渾爲其所擠。朝廷之上。無一人救珥, 渾而斥汝立者。希吉乃能於此時。貽書逆魁。推尊珥, 渾。斥其逆魁心術詭慝之狀。其論平正的確。良爲可嘉。不可不褒。相當職除授。
辛卯十九年公五十六歲
二月。登對。請建儲。上不答。遂退而呈辭。至三度許遞。拜領敦寧府事。
先是。柳相成龍初拜相。往見公曰。吾輩受國重任。046_308a當任大事。公曰。何事。柳相曰。後宮多王子。國本未定。建儲之責。在於廟堂。吾輩不可不力請。公曰。領相從之乎。柳相曰。吾兩人爲之。則領相何可不從乎。公曰。諾。乃相議。通于領相李山海。約日齊會于闕下。及期。山海不至。再約又不至。其實外順朝議。而內行讒間故也。蓋金嬪有寵。生信城君。上奇愛之。山海交結金嬪兄公諒。揣知上意所在。至是約與公諒飮。使其子慶全。先往公諒家。俄而。山海家奴急報慶全曰。大監將欲赴會。忽有所聞。而杜門涕泣。莫知其由云。慶全佯驚起去。旣已046_308b還語公諒曰。父親聞鄭相將請建儲。仍滅信城母子。故罔知所爲。求死不得云。公諒卽通大內。金嬪泣訴於上前曰。聞鄭相欲殺吾母子。上訝曰。鄭澈何故殺汝母子耶。金嬪曰。聞先請建儲。然後殺吾子云。上始疑之。以御札往復山海。且使人密探公之賓客往來者。又使信城外舅捕盜大將申砬。率軍官直守信城家。以戒不虞。而公不知也。一日。公與山海及柳相。率諸公同對。公首發建儲之請。上不答。領右相皆無言。副提學李誠中, 大司諫李海壽進曰。此非獨鄭某之言。046_308c乃臣等之所共議者也。於是。上震怒。下嚴敎。特補誠中爲忠淸監司。海壽爲驪州牧使。公遂退出。呈告得遞。○登對前數日。誠中爲請建儲。具箚草。大殿別監金喜壽嘗習於誠中。忽來求見。誠中辭以有事。喜壽曰。有不得已事。必欲面陳。誠中乃出見則曰。聞玉堂將以建儲上箚云。然乎。自上震怒。吾持御札。往還領相家。今六度矣。此時切不可上箚。仍自袖中出御札示之矣。
三月。安德仁等上疏。詆公以誤國。卽出龍山村舍待命。
046_308d李山海, 李弘老等。敎儒生安德仁, 尹宕等上疏斥公。目以誤國。上卽引見德仁等。嘉奬之。親問曰。鄭澈誤國何事。德仁等對曰。爲大臣。沈于酒色。其誤國事固矣。上曰。酒色豈至誤國乎。命退去。蓋引見出於意外。故弘老等未及指授其所對也。公遂出寓江上待命。○先時。公於路上。醉呼柳相曰。而見。吾欲見君本源。柳相翌朝見牛溪爲言曰。朋友之間。病痛切磋則有之。而至疑其本心。則無復可望矣。牛溪卽要公謂曰。公昨者。妄發於而見。何也。公默然不應。終無謝意。柳相殊以爲恨。○046_309a後己亥年。兪大楨謂申象村欽曰。吾與李弘老相厚。庚寅吾爲翰林時。弘老要與相見。見之則曰。我欲攻鄭相。余曰。何故欲攻之。曰。吾爲大同察訪時。金公諒納一馬于驛。吾以十二同木給之。上卽以銀帶賜我矣。指壁上所掛者曰。此帶是也。又有不得不攻者。御札在此匣中矣。將開匣出示。余揮手曰。勿出勿出。他人雖或爲之。君則勿爲也。弘老曰。鵝溪密附信城。將請建儲。國事吾輩爲之。他人不欲與之云。不久。弘老果誘安德仁等上疏。余乃驚駭。以爲不絶此奴。大禍必及。遂與絶交云。046_309b鵝溪。乃李山海也。○沙溪先生曰。金晬嘗謂余。昔年。李山海數致言于余曰。鄭某欲殺吾與君。余疑鄭某何故。至欲殺我。往見鄭相。察其辭色。且觀其所爲。全無是事。蓋山海之意。欲與我共陷松江云。
閏三月。被兩司論啓。罷職。
大司憲黃琳, 執義金玏等啓曰。臣等欲論吏曹正郞柳拱辰, 檢閱李春英等。僚議不一。勢難苟同云云。持平金權啓曰。同僚以柳拱辰, 李春英等論劾事簡通。而臣意以爲朝著不靖。人心疑懼。遽爾論列。益啓騷擾之端。所見不同。同僚引避云云。諫院046_309c啓曰。黃琳等之論。實出公議。而金權敢沮已發之論。請金權遞差。黃琳以下出仕。○府啓柳拱辰人物麤庸。日以趨附爲事。李春英自儒生時。出入宰相之門。竝請罷職。傳曰。趨附何事。宰相爲誰。回啓曰。柳拱辰趨附於鄭某。初授本職。用人惟其所親。使仕路混濁宰相則鄭某也。答曰。知道。依啓。於是。兩司全避啓曰。鄭某擅弄朝政。恣行胸臆。其招權負國之罪大矣。爲耳目之任者。所當擧事直論。而不卽擧論。至於下問之後。亦且淹延累日。噤無一言。不直之罪。在所難逭。答曰。勿辭。○府046_309d啓。領敦寧鄭某性褊多疑。好同惡異。汲引所厚。廣植私黨。羣聚其門。日夜如市。擅弄朝綱。恣行胸臆。威制一世。莫敢誰何。至於闕中爲政。私招銓郞。指揮注擬。欲任外任之同志者。則陰嗾言官。故以微罪彈論。且與宋翰弼兄弟。結爲心腹。反主逃躱之後。常接置于鄕家。及其下敎捕捉。飾辭待罪。猶且匿置其家。與之譸張論議。自上判斷之訟。劫制訟官。必欲改決。丁巖壽等拿來之時。巧生救解之計。密令淹留。使臺諫論執。韋布上章。必期於蒙允。是可忍也。孰不可忍也。加以縱酒荒色。蕩毁046_310a名檢。國人醜之。罔念羞恥。外加謔浪。實肆媢嫉。及其肝肺已露。無所自容。而猶不畏戢。日與浮薄之徒。鼓動邪議。使人人疑懼。凡此之類。難以枚擧。不可不薄示譴罰。以懲其罪。舍人白惟咸締結鄭某。爲其腹心。請竝命罷職。○諫院啓曰。領敦寧鄭某。性本剛愎。且無行檢。及居相位。猶不戒愼。惟以招權植黨爲事。日聚浮薄之徒。謀議朝政。趨附其門者。汲汲引進。少有異己。則輒斥去之。政廳乃是至嚴之地。佐政郞官。公然招去。指揮注擬。兩銓長官。有窠則三公各薦其人。參用擬望。自成規例。而046_310b同僚所薦。皆却不用。同列大臣。視如仇敵。外若親厚。而內實媢嫉。其所以經營搆陷者。終始不已。至於宋翰弼。自上特命治罪還賤。而乃敢匿諸其家。結爲腹心。捕捉命下。飾辭待罪。終不黜送。劫制該官。使更接狀。判下已決之訟。迫令改分揀。其他擅弄之狀。不可枚擧。惟幸聖明洞燭情狀。已收台鼎之任。而不自知艾。益肆忿怨。陰聚私黨。鼓動邪議。使人心疑懼。將啓士林無窮之禍。舍人白惟咸趨附鄭某。結爲腹心。且與李春英等造言生事。請竝命罷職。答府院曰。相職已免。何必046_310c罷也。白惟咸事。依啓。○傳于憲府曰。啓辭。有私招銓郞。指揮注擬。又曰。欲除外任。則以微罪彈論。這箇的話。指某某人的。俱著顚末以啓。回啓曰。盧稷爲吏曹郞官時。私自招去外任閔定命崔洙, 金澥矣○三啓依允。
命列公罪。榜示朝堂。
備忘記曰。古者罷黜大臣。榜示朝堂。布諭天下。所以昭示罪狀於國人之耳目。而懲後人也。今此鄭澈罷職。承傳依古事。榜示朝堂。○按。是後五月。柳相成龍爲委官。栲殺李潑母尹氏及其穉子。而一046_310d邊人以此歸之於公。其誣甚矣。詳在政院日記及承旨李廷馣日記。
六月。命囚吏曹正郞尹暾。兩司引嫌斥公。
白惟咸, 柳拱辰坐公見罷。後吏曹竝擬學官。上下備忘記曰。白惟咸, 柳拱辰, 李春英。以奸兇之黨。擅弄自恣。濁亂朝政。爲公論所劾。薄示譴罰。於身幸矣。而大非懲奸去邪之道。纔罷其職。時未有敍命。乃敢隱然擬諸學官之望。試予淺深。侮弄朝廷。學官雖微。乃是儒師。其欲以此輩。冒居函丈。導迪多士。俾皆學其巧險之術耶。文官之罷散。不爲不046_311a多。而必以此輩爲之擬者。果何意耶。其不有君命。不畏公論。黨邪無忌憚之狀。極爲痛憤。色郞廳詔獄推考。色正郞尹暾。原情判付內。此必有指嗾之人。聽某人之言而爲之。天日之下。從實直招。詐不以實。則當刑推。更爲推問以啓。○大司諫洪汝諄, 司諫權文海, 獻納金敏善, 正言李廷臣, 尹曄等啓曰。鄭某之招權植黨。誣上行私。亂政誤國之罪及白惟咸, 柳拱辰, 李春英等朋奸黨邪。擅弄濁亂之狀。論以常憲。自有其律。而當初臣等之只請罷職者。非但臣等之過慮騷擾。蓋以黨與布列。餘威未046_311b殄。翻覆之機。人皆疑懼。無恥嗜利之徒。固不足說。而稍知彼輩之奸狀者。亦怵於後日之禍福。徘徊觀望。中立營庇。物情之憤鬱。於斯益甚。銓曹豈不聞公論之所在。抑非不知聖明之所燭。而乃敢以惟咸輩。擬諸師長之任。試探聖意之淺深者。無非臣等疲軟不能振肅朝綱之致。請斥罷臣等之職。○大司憲李元翼掌令趙仁得, 尹覃茂, 持平李尙毅, 鄭光績等啓曰。鄭某性本險艱。專擅權勢。而白惟咸, 柳拱辰等。爲其鷹犬。威福由己。至於主勢日孤。朝政濁亂。臣等當初論罷。亦知罪重罰046_311c輕。而恐涉騷擾。只請罷職。至於榜示之後。罪惡彰露。而略無忌憚。出入自如。積威所劫。莫敢誰何。奸兇餘黨。且擬師儒之長。責由臣等之疲軟。不可仍冒。請遞臣等之職。答府院曰。鄭某之他餘罪惡。姑置勿論。惟其陰嗾湖南之儒。盡掃一代名卿士大夫之異己者。悉驅之逆賊之黨。期必屠戮盡殲而後已。及其奸謀未售。譎腑將露。自知其勢窮事迫。又嗾臺諫。脅制君父。終得以遂其志。惟此一事。求之古奸。鮮有其儷。其心之慘毒。鏌鎁爲下。念之令人氣塞。惜乎爲人君者。惟知藉此而討賊。自以046_311d爲足制其奸。彼無奈何。予何不能斥之於早也。是誰之過也。蓋於己丑。湖南儒生丁巖壽等應旨上疏。論斥李山海, 柳成龍等。上震怒。引見李, 柳慰諭。命拿巖壽等十人。大憲崔滉等累啓伸救。不聽。館學儒生崔起南等上疏伸救。則答曰。予二十年忝位。待儒生。未嘗以惡言一加之。況欲致之王府。戮辱於桁楊之下。使章甫之士。與獄吏相對。此豈予意哉。其有不得已者存乎其中。爾等豈能盡測。今觀此疏。予過矣。當爲爾等從之。至是。以嗾儒生嗾臺諫之目。以示聖意。故汝諄等得以046_312a藉口。以爲陷公之一大題目。終至於梁千頃, 姜海事而極矣。
兩司合啓請竄。初配明川。命移晉州。
大司憲李元翼掌令趙仁得, 尹覃茂, 持平李尙毅, 鄭光績, 大司諫洪汝諄, 司諫權文海獻納金敏善, 正言李廷臣, 尹曄等。合啓鄭某凶悖不道之狀。臣等非不詳達。自上非不洞燭。而特以曾忝大臣之列。不卽削竄。臣等不勝閔鬱焉。鄭某本以剛復之性。常懷怨懟之心。乘國家不幸之時。竊居台鼎匪據之任。謀擅國柄。廣植私黨。日聚浮薄之徒。締046_312b結陰險。至於政廳郞官。公然招去。使殿下不得爲政。專擅已極。同列大臣。視如仇敵。外若親厚。內實媢嫉。入侍天威之下。與李山海有若同寅協恭者然。恣行欺罔。左右之人。莫不駭愕。且於稠廣之中。呼柳成龍姓名。顯加侮弄。黃愼將赴北道評事。而急於進用。托以望輕論遞。旋卽歷通淸班。金澥閔定命霍洙方爲守令。乃以微失。成罪劾歸。其誣上行私。至於此極。高敬命凶奸餘孼。廢棄多年。而善於推卜。相與親密。擢置頂玉之列。洪仁傑之居官。別無聲績。而以婚姻之親。過實褒奬。致陞堂046_312c上。宋翰弼兄弟。實是叛主之奴。而某或匿諸京家。至於妻妾混處。凡百兇謀祕計。無不謀議。啓下已決之訟。迫令該官改決。丁巖壽等陳疏。實非多士所爲。某門二三客。承其指嗾。以成其謀。誑聚若干人。以充名載疏中。而實未知其疏意之如何。幸賴聖明洞燭其奸狀。命遞相職。以示眨薄之意。爲某者所當杜門省愆之不暇。而日聚私黨。晝夜謀議。公辦酒肉。官馱妓工。往來遊宴於江湖。此果獲罪君上。退伏惕慮之意乎。至於劾罷其職。榜示其罪之後。猶不知戒。橫行閭里。出沒諸處。怨天046_312d尤人。無所不至。或以削罷勳籍。欺撓功臣。其他極兇極悖。耳不可聞。口不可道之說。爭相鼓動。將啓國家無窮之禍。罔極之罪。可勝言哉。當初請罪之時。玉堂不顧公論所在。而徘徊觀望。默默無一言。政院以出納惟允爲職。榜示之命。廢閣累日。不卽擧行。某之積威。使人疑懼。至於此極。自古安有爲人臣負罪如此。而保有官爵。偃臥戶牖者乎。請勿留難。亟命削職遠竄。以爲植黨專權。脅君擅國者之戒。白惟咸, 柳拱辰, 李春英等交亂朋比。濁亂朝廷。請竝遠竄。依允。公配明川。上以某爲大046_313a臣。命移配改晉州。○時洪汝諄主張臺論。與山海相爲表裏。蓋在己丑冬。獻納白惟咸駁汝諄陰險貪婪。人之視之有同豺虎。其包藏忮害之狀。實是朝間一賊云。至是。汝諄必欲甘心於公等。上意實以公欲滅信城母子之讒惡公。而汝諄等不可據此爲案。故執他事。湊成罪目。而李公元翼等靡然從之。元翼始爲謹元所誤。今爲汝諄所誤。徒急於順旨擠人。而不知其搆虛害物之爲可恥。餘人不足責。李公亦忍爲此哉。○府院啓秉銓之官。敢以惟咸輩。擬諸師儒之望。其擅弄之罪大矣。被046_313b鞫郞廳。終有其罪。而堂上及同參郞廳。亦竝命罷職。○院啓近來權奸擅國。朝綱掃如。白惟咸等定配時。或西或南。擇其便近之地。以爲投畀之所。迸四裔禦魑魅之意。乃如是乎。自上下敎之後。亦不改配於邊。請禁府堂上前後色郞廳。竝先罷後推。於是。白惟咸改慶興。柳拱辰改慶源。李春英改三水。
兩司合啓。竝治尹根壽, 洪聖民, 李海壽, 張雲翼等。
啓辭略曰。鄭澈之罪惡。靡有紀極。而苟非黨與爲之助張聲勢。則某無所售其奸。右贊成尹根壽性046_313c本輕佻。加以憸邪云云。益城君洪聖民外飾儒名。內實陰兇云云。驪州牧使李海壽賦性邪毒。常懷怨懟云云。襄陽府使張雲翼本以浮妄之人。性且陰險云云。此四人等爲其羽翼。巨奸雖已屛黜。四人猶未服罪。竝請命削奪官爵。依啓。
公移配江界
兩司合啓。鄭澈之罪大惡極。國人之所共知。合置窮荒。以禦魑魅。禁府之定配明川。已爲可駭。而自上乃以大臣之故。改命南方便近之地。是豈投畀之意乎。且其本家去配所。纔數日程。與窟穴私046_313d黨。交相往來。謀議生事。有不可測。請亟命改配兩界邊遠。依啓乃配江界。○禍作日。公出江上。曉起曰。吾夢爲江界府使。謫所其必在此。及聞配晉州曰。吾平生夢無不驗。今不相符。我殆將死矣。發向晉州三日。聞江界之命。○公發配之日。有士人洪仁侃者隨行。時議益急。人謂必有後命。無不懍慄。仁侃則至於夜不能寐。而公安寢達朝。無異平日。仁侃問公何以若是不動。公曰。自古安有相臣被竄。而終得免死者乎。吾心已定。故還爲安妥矣。
046_314a牛溪先生出別于臨津
七月。黃廷彧, 黃赫, 尹斗壽, 柳根, 李山甫, 李洽, 任鉉, 金權, 黃愼, 具◉等。竝坐公被劾。洪聖民, 李海壽, 張雲翼等。竝加罪遠竄。
兩司合啓。權奸勢焰旣盛之時。朝臣之無恥者。充滿布列。聖明在上。公論稍振。數三奸兇。雖已斥去。而黨與之太甚者。豈可任其糾結盤據。脅持淸論。而不爲之甄別。以基他日國家之禍乎。兵曹判書黃廷彧賦性猜險。行已麤鄙云云。右承旨黃赫狂悖詖險。至曰。吾父子尙在。山海,成龍。早晩可圖046_314b云云。戶曹判書尹斗壽外若寬緩。內實陰險云云。左承旨柳根性本奸邪。行檢掃地云云。黃海監司李山甫爲人愚庸。加以險詖云云。司成李洽性本陰邪。素無名檢云云。兵曹正郞任鉉爲人陰險。行已無恥云云。禮曹正郞金權爲人陰譎。朋比奸兇云云。高山縣監黃愼賦性邪毒。有同虺蝎云云。司果具★陰兇險譎。加有悖行云云。請竝命罷職。洪聖民, 李海壽, 張雲翼等。請竝命加罪遠竄。答曰。依啓。兵判與黃赫。豈如是乎。尹斗壽。寬厚有才智。柳根。文藝之士。予甚惜之。此四人不可從矣。046_314c張雲翼以下事亦依啓。再啓。答巨慝已祛。餘黨已黜。自餘諸人。蕩滌而收用。務令鎭定。
兩司劾罷伸救丁巖壽時臺諫
啓曰。鄭澈陰囑湖南私黨。極肆網打之術。而其時兩司之官。多出某門。故曲循指揮。敢爲營救之計。張皇辭說。必售其志。使殿下孤立。無所下手。其黨權奸䝱君父之罪大矣。豈可諉諸已往。而不之追論乎。請其時參論臺官。竝命罷職。答曰。此事極爲痛憤。終使奸臣竊笑。不可不懲以警後世。依啓應罷者。崔滉, 成泳, 沈喜壽, 尹暹, 申磼, 禹俊046_314d民, 李增吳億齡, 白惟咸, 兪大進, 姜燦, 李洽。○領相李山海, 左相柳成龍啓曰。一時臺諫。不免雷同者。亦時勢之使然。其心豈皆以此事爲穩而從之乎。況宣慰使方以護送客使至浦所。今雖姑命勿罷。渠必以行公爲難。客使亦必疑訝。聖念所及。實非偶然。而臣等之慮。亦在於此。言官旣已蒙允後。敢爲煩瀆。極知未安。而公論已發。聖批快從。今雖有斟酌權道。而亦不可謂公論之不行。大抵臺諫之責。在於直截。大臣之慮。亦在於周詳。兩不相妨。故冒昧敢稟云。宣慰使。沈喜壽也。答曰。彼046_315a乃日夜狺然於卿二人。而今反來救其救賊者。眞可謂大臣之道矣。鄭澈睚眦必報。君子小人之度量。相去遠矣。宰臣侍從多罷之。未安。客使宣慰事。勢之妨碍。予已算得。第雖優容假借。彼魚頭鐵冠之臺諫。必不肯捨。予非以其時臺諫盡爲其黨。只緣罰不可不施。後不可不警。沈喜壽別無罷職之命。渠安敢以私意。棄君命而不行乎。兩司避嫌啓曰。權奸陰囑私黨。假名儒疏。謀爲網打之計。及下拿鞫之命。指嗾臺諫。使之營救。爲臺諫者。一循其指嗾。累日相持。其脅制君父之罪。人莫不痛046_315b憤。臣等敢有所論列。欲以少示懲罪之意。今見大臣之啓。竊有所大不安者云云。答曰。賊疏之網打。其意實在於二公。今日方治其罪。故二公無乃有所未安於心耶。此亦古大臣之遺風也。
朴漸禹性傳以黨公。削奪官爵。李誠中罷職。尹斗壽加罪遠竄。黃赫削黜。
兩司合啓。上護軍朴漸黨附鄭某。汲引憸邪。布滿要津。請削奪官爵。忠淸監司李誠中往來鄭澈門下。預聞謀議。舍人禹性傳好詭異之議。脅持公論。黨護鄭澈。請竝罷職。尹斗壽, 黃赫。請加罪遠竄。046_315c答曰。依啓。尹斗壽, 黃赫。不須遠竄。禹性傳素多人言。出於賊札賊招者非一。此人近十餘年徘徊於外。頃者一再入侍。爲人甚陰險。且黨護鄭澈云。不可只罷其職。削奪官爵。○連啓黃赫削黜。尹斗壽遠竄。○兩司請竄公之時。洪汝諄往議于禹性傳。性傳諱而不見。又見金晬。晬曰。大臣黜外。已爲過重。何必加罪。汝諄卽爲內通。故性傳削官。金晬亦出爲慶尙監司。誠中曾參建儲之議。故兩司揣知忤旨。而竝論之也。
拿鞫押公都事。仍下圍籬之命。
046_315d禁府都事李台壽押公行到順安。馳啓鄭某病重。不得趲程押去。傳曰。李台壽不畏朝廷。押去奸賊不嚴。任意自行。徘徊遲留。拿鞫。遣他都事押去。鄭澈賦性狡猾奸毒。旣到配所。交通雜人。未知作何等罪狀。嚴加圍籬。時江界府使洪世恭。希山海, 汝諄等旨。壯固圍籬。使不見天曰。雖雀鼠亦不得通。公處之怡然。日誦朱子書及大學, 近思錄等書。有疑晦處。則於圍籬長木。白而書之。時時省玩。○時鄭彦智亦在配所。彦信送子協于其兄處。使詣公圍籬外。泣謝公再生之恩。後協和附罪公之議。046_316a黃愼謂協曰。君之今日議論。與泣謝江界時異矣。協愧謝曰。諸友之論。不敢獨異。故然矣。○徐公渻。與鄭協會飮于李惟侃家。協怨公及洪聖民。徐責之曰。鄭洪兩公於君家。有大恩德。何敢乃爾。君家所爲是乎。君弟慄何以至於自死乎。協卽脫笠起拜曰。無所歸咎而然也。蓋己丑。彦信抵諱。不以實對。至於陳疏張皇自辨。皆慄之謀也。彦信賜死命下。慄自以罪由於己而自死。故徐言如是云。
八月。汝諄以梁千頃, 姜海等受公指嗾。以崔永慶爲三峯拿鞫。千頃等誣服而死。
046_316b前月十七日。傳曰。奸臣鄭澈所搆陷排斥者。如有其人。竝收敍擢用。蓋上之惡公。在於建儲。而難於聲罪。故以此微諷臺諫矣。至是。汝諄等執永慶事論啓。以爲吉三峰爲崔永慶之說。必是鄭某嗾梁千頃, 姜海等做出也。請拿問千頃等。依啓。於是。千頃, 姜海等嚴加刑訊。千頃等不勝栲掠。遂誣服而死。○初。永慶爲三峰之說。因洪汝諄狀啓。鞫廳令汝諄覈實以啓。則以爲濟原察訪趙應祺之所告。而應祺聞於金克寬。克寬聞於千頃, 姜海等云。於是千頃就監司。而仍上疏陳其曲折。至是。046_316c汝諄欲自脫前日密啓之事。啓論崔三峯爲永慶之說。必有指嗾者。請鞫千頃海等。嚴加刑訊。千頃等引任禮臣等十餘人。以爲言根。獄官不復問禮臣等。而酷訊千頃。以輸情爲限。上曰。千頃等竝受嚴刑。未知其由云云。金誠一謂千頃妻從兄奇孝曾曰。殺人之律。當分首從。若引鄭某則免死矣。孝曾言于千頃等。千頃等遂引公。上乃下決杖定配之命。而竝死於決杖。姜海將死。上疏曰。誣服臣姜海伏以。二年重病。僅存性命。嚴訊折脛。不自支忍。誣爲承服。萬死無惜。崔永慶爲三峯之說。046_316d臣於洛下。偶然傳聞而已。金克寬家過行。時偶然傳說而已。克寬傳說趙應祺進告。本非臣之所使。而就招於監司。招後上疏。本非臣之所欲。特以淸問下及。道臣窮推。不得已歷擧傳疑。仰達天聰矣。若以傳說之罪定律。則臣亦無辭。若以誣陷之罪行法。則冤枉罔極云云。觀此則可知當時曲折矣。○時洪汝諄爲大憲。欲加罪公。一會于中學。大司諫李德馨曰。今日欲啓何事。汝諄曰。圍籬之人將加罪也。德馨曰。罪名云何。凡殺大臣。必罪名明白。人無異辭。然後可。不然則不足以服人之心046_317a矣。執義盧稷曰。小官之意。與大諫同。汝諄遂不果售其計。○初。德馨辭大諫啓曰。近日言官。方請奸黨之罪。而小臣妻父李山海之名。連出於彈文措語之中。隨參論列。亦有所礙云。誠使德馨不知山海內通釀禍之事則已。旣或知之。而反謂公等爲奸黨。則是自欺欺君。無足觀矣。豈所謂入鮑肆久不聞其臭者耶。然於汝諄害公之論。猶不忍從。則此出於公理之不泯者云。
壬辰二十年公五十七歲
三月。平安監司因公罷推。
046_317b時朝廷頒赦。平安監司於放未放秩。書公以前領敦寧府事。上震怒。下敎曰。姦賊得保其職。何人復其職乎。監司遂被罷推。
四月。倭奴入寇。
五月。蒙放。仍下召命。奬以忠孝大節。卽發向行在。
時倭寇逼京。凡竄謫者皆放釋。而公獨不蒙赦。五月。大駕播遷。駐松京。臺諫論李山海交結宮禁。濁亂朝政。柳成龍主和誤國之罪。皆蒙允。上御南城門。慰勞軍民。令各陳所懷。咸請釋公用之。046_317c上赦之。仍下敎召公曰。知卿素有忠孝大節。可急赴平壤。與兪泓, 李恒福同護王子。時朝報及諸宰之書。皆到謫所。而江界府使猶不開圍籬。必待監司分付。當時黨禍懾於人者如此。公聞報痛哭。發向行在。○前月。公夜夢作詩曰。昭代收遺直。天墀曉鐸鳴。至是果驗云。
中道受召旨。迎駕於平壤。
上引見慰諭○一日。公與諸宰共會。卒患霍亂。趨就別處。洪汝諄追至。傾藥囊以請曰。大監疾甚。小生適有淸心元。願進之。公笑而却之。
046_317d六月。扈駕自平壤。至博川。
十四日壬寅。上定渡遼之計。遣宣傳官迎中宮於德川。命領議政崔興源參判尹日新等奉廟社主。陪世子往保江界。公與諸大臣力諫。不從。○至博川。聞平壤陷。上命世子分朝。使之收召四方。以圖興復。領相崔興源以命從世子。右相兪泓自請隨世子。公獨扈駕至嘉山。時大雨。夜已五鼓矣。
扈駕至義州
時從官只數十人
046_318a七月。受體察兩湖之命。大臣請留。依允。
九月。遂奉命南下。
先是。車駕次定州。時公與諸公會坐。具思孟具宬亦在座。思孟乃元宗外舅。而元宗卽金嬪所誕也。自內送酒饌。蓋爲具也。公以手推其饌于具曰。此非相臣所食也。卽起避之。座中莫不吐舌。雖平日不悅公者。亦歎其難及矣。候隙者遂以爲譖。未久。有體察兩湖之命。大臣請姑停行。上許之。至是。遂奉命南下。上御義州行宮東軒。引見公。送之曰。卿好去成功。則國家之幸也。公曰。046_318b伏願渡江之言。非但勿出於口。而亦永絶於心也。上顧尹斗壽曰。此言何如。斗壽曰。一渡江則恢復之望永絶矣。上曰。卿好去。國家恢復。專恃於卿矣。從事官及軍官。卿其任意爲之。但此處無人。故不得發送矣。公曰。駑劣如臣。恐不能措置。○過麟山驛。有詩曰。傍一作佳人莫問淸江事。欲說淸江淚自潸。中夜戀君千里夢。北歸難度萬重山。蓋癸未春。李淸江濟臣。以金燧等不卽行刑。減死定配於義州麟山驛以卒。臨終口吟出師未捷身先死之句云。至是。公奉體察之命。行次麟山。有是吟。
046_318c行到江華。上箚請移蹕定州。以圖興復。又移書牛溪先生論事。仍向湖右。
箚辭略曰。大駕遠狩西方。而兩湖猶爲國固守。此殆天意。伏望大駕還駐定州。以待天兵。東宮亦來駐湖南。觀勢進退。儻天兵不出。大駕亦謀浮海而南。以答兩湖怨思之心。則乘舟雖危。不猶愈於棄疆土而渡遼乎云云。○時牛溪以檢察使在松京。公以書議事。牛溪答書略曰。來諭極是矣。高宗之世。猶以力戰爲義理之當。今日之事。宗社爲重。何敢顧王子而不戰乎。又曰。今日046_318d惟當選擇能將。愛養撫恤。與同甘苦。日加訓鍊。明軍律。修器械。遠斥候。一心進戰。死生以之而已。又曰。近日義兵團結。處處皆然。惟此一事。可望恢復也。
爲文哭趙重峯
先是。公聞重峯起義兵。貽書曰。生還忍見今日事。朝衣抆淚淚盡血。繼聞公倡義起兵。爲之向風歆歎。第未知住在何處。用武利鈍如何。僕受命將前赴貴道。凡屬大小軍機。切欲急速面議。何以得之。幸須量示。又曰。諸京列邑。爲賊窟穴。兵力單弱。046_319a掃蕩無期。奈何奈何。貴道受兵幾邑。完全幾邑。淸州之賊。盛衰如何。竝示之云云。及重峯戰亡於錦山。公爲文哭之曰。吾友汝式。學孔, 顔而慕誼原。欲死於直。終死於節。吁嗟乎汝式。
癸巳二十一年公五十八歲
正月。聞嚴旨屢下。遂北歸。
前冬。全羅監司權慄狀啓。以爲體察使使臣防湖南之賊。勤王則別定他將云。而今臣乃自將。至于水原。軍情皆喜體察之言。軍士逃去者千餘人云。上震怒。下其事于備局。備局回啓曰。鄭某不046_319b念國家大計。甚爲無謂云云。於是。同知柳永吉進啓曰。體察使鄭某留連酗酒。迷罔機務。而主勢孤弱。公論不行云。仍又斥左相尹斗壽非擔當恢復之人云云。時金晬自南路還到行朝。上引見金晬問曰。都體察使不肯盡力。因爲留連云。然耶。必有所聞。不可諱也。晬對曰。其留江華者。欲圖京城賊也。禹性傳亦要住耳。今留洪州。分送從事官於湖南。而十一月內。不離湖西矣。會全羅, 忠淸兩方伯於德山。面議便宜。要圖京城矣。上曰。卿不與相遇乎。晬曰。小臣見大臣。則如見朝廷。切欲046_319c相見。而船行巧違。只以簡通。東宮所住。自此處定奪云云。大司諫李海壽獻納金庭睦啓曰。同知柳永吉。妄斥大臣未著之失。臣等之請罷。實出於公論。而永吉於本院通書。顯有不平之意。以公論爲非。此由臣等見輕於人。以致脅制言官。爲後日無窮之弊。不可靦然在職。請命罷斥。答曰。此時豈可紛紜辭避乎。勿辭。大司憲李德馨, 執義李好閔, 掌令李時彦, 持平柳夢寅啓曰。大賊未討。國勢危急。在廷諸臣。惟當各自勉勵。日夜以恢復爲念。而同知柳永吉。妄斥大臣。使不得自安。當及機規046_319d畫之時。沮立事建功之心。而傷朝廷體貌。莫此爲甚。臣等之請罷。實是公論之不得已者。今見諫院避嫌之辭。永吉通書本院。以公論爲非云。一體之地。見輕無異。請命遞斥臣等之職。答曰。勿辭。○初。上去邠駐開城府。時議皆咎領相李山海濁亂朝政。首倡去邠之失。人心憤激。不可止息。大司憲金瓚執義權愜掌令鄭姬藩李有中持平李慶祺, 大司諫李憲國, 司諫李★, 獻納李廷臣等入對。始論山海交通宮掖。誤國去邠之罪。憲國曰。山海常乘驢往來金公諒家云云。副提學洪麟祥後改046_320a履祥又極言公諒干政作弊之狀。瓚◉等又言。頃者貼榜於鍾樓。畫李山海俯八公諒袴下爲仰吮之狀云。乃合啓請遠竄山海。上只命削職。兩司又合啓曰。及第李山海本以諛佞之人。平生行己。專以媚上取悅爲事。位極之後。保身患失之念益甚。締結賤豎。使君父失國顚沛。廟社陷於賊藪。二百年休養生靈。盡爲魚肉。忘君負國。階亂速禍之罪極矣。請依律定罪。累啓允之。竄于平海。臺諫又請梟示金公諒。上曰。倭變亦豈此人所致。國可亡。無罪之人。不可殺也。至是。大司諫李046_320b海壽等又上箚。極論喪職闕失。近習交通之狀。請竄洪汝諄, 李弘老, 宋言愼等。上曰。此人等之罪。予所未知也。但此人等頗劾鄭某之奸矣。再啓。答曰。昔攻李珥者。以因緣攀附等語。屢形疏箚。予未嘗一言斥之。今以此人等爲如是者。無乃設一機而陷人乎。諺曰。鯨戰鰕死。此之謂也。然所論如此。不可不從。依允。又下備妄記曰。予心氣傷。昨日又飮酒。答兩司之語。意與言異。此人等頗劾鄭某以爲奸云。蓋海壽等所論。上雖勉從。而實疑其出於公故也。公聞之。惶恐北歸。
046_320c二月。復命于行朝。
五月。差謝恩使朝京。臨發。上箚論保民, 賑飢還都華制等事。
箚見本集
中道。又上箚。請急遺專价。告急辨誣。
箚略曰。夫奏請之擧。有萬可爲。而無一可已。恐不可以經略一言。竝與其奏咨而廢之。蓋李提督旣主界碑之說。而石尙書又不能無惑。危機之急。間不容髮。雖有經略揭帖。痛闢其議。深陳利害。明白切至。而本國反無一言以自辨。則將何以解尙046_320d書之惑。而回撤兵之議耶。況聞賊兵已陷咸安。將犯湖南。其間要害。只有一帶晉陽。設若天兵不及猗角。則將來禍機。有難勝言。未知朝廷何以善其後耶。臣愚過計。以爲專遣使臣。哀鳴懇告爲第一策也。爲經略所沮。不能自由。則成一文書。星夜追赴。付此臣行。第二策也。於斯二者。皆已蹉過。只令臣等草草呈文。則事體不重。殊非告急辨誣之意。玆固落在第三策也。伏願聖明相度事機。咨詢廟堂。就臣所陳三者。而從長擧行。俾無後日之悔。不勝幸甚云云。
046_321a十一月。回自京師。復命于漢陽。因臺論辭遞。
時天朝以爲倭奴已退。無意出師。臺諫謂賊退之說。出於公行。論啓請推。公上疏乞免。退居于江華松亭村。其疏曰。石尙書題本所謂今無餘倭者。疑若出於臣等之口者。臣茫然皇惑。莫究其故。九月初十日。臣以界碑事進兵部。石尙書問曰。你來時賊在何處。答曰。尙在釜山等處。又問你何時起身。答曰。五月。曰。然則你國九月消息。必不得知。吾當說與。近接海上將官印信塘報。說稱賊盡渡海。只有平行長一陣。留在西生浦云。西生浦原你國046_321b土疆乎。臣等備陳西生浦所在及賊謀叵測之狀。又問曰。今欲留兵五千。與你國協同防守。未知何如。答曰。賊盡歸巢之後。則一萬兵猶可也。倭奴變詐萬端。非一萬六千則不可也。試擧臣兵部呈文一二條言之。有曰。下歸之賊。屯聚於釜山, 東萊之間。益造房屋。安下營寨。又曰。賊旣以釜山東萊一帶。爲伊土地。又要侵奪全羅等道。許多辭說。無非兇賊屯據恣肆之狀。則賊退之說。何暇出諸口乎。且尙書旣據經理所報。謂爲賊退。繫是九月以後之事。則臣在萬里已久。安知賊尙未退。而敢以尙046_321c書之言爲不的乎。及其路遇許晉。始聞晉州已陷。賊尙據海上。雖欲碎首泣血於天庭。已無及矣。○與牛溪書曰。柳台方大言僕中朝失對誤事之罪。而渠反以倭去狀啓。不爲啓稟。輕示天使。近來少寢罪我之論。而曲爲巧說。遮掩己過。識者怪之。○公與李希參書曰。僕在北京。患疸濱危。入京復命已數日。而以賊退之說。發於吾行。聞於中朝。天威震動。物議頗洶。朝夕將陷罪網。天也奈何。毫髮不近。夢寐不到。而爲此狼狽。此吾厄運。只合順受而已云云。○又書曰。僕遁于江華。四046_321d顧無糊口之地。兄須略助如何。平日。未敢受列邑饋遺。今將破戒。在得之年。鹵莽如此。殊愧素心。然親切如吾兄。略則心安。多則不敢受耳。公於辭受一節。防閑甚嚴。嘗手書以遺諸子曰。鞭鞾不已。至於玉帛。玉帛不已。至於裘馬。其戒後嗣之意至矣。○柳相成龍爲弘老爾瞻所駁。有曰。田園遍一國。柳相語人曰。向來一隊雖嫉季涵。猶不敢以此說加之。我之不如季涵。可知云。
十二月十八日。捐館于江華寓舍。
時子宗溟在側。疾劇。宗溟刺指出血以進。公目已046_322a瞑。覺之曰。此兒誤矣。已而遂逝。
上遣官致祭
祭文曰。惟靈天鍾英才。世仰風標。剛直忠淸。厥德克肖。早捷魁科。簡自先朝。履歷聲績。冠于百僚。予命爰立。人爭手額。遭國多難。久勞討逆。盟指山河。庶同休戚。如何不弔。去邠禍迫。西關相遇。德則增益。體察兩湖。非卿莫可。罔極皇恩。賴卿以謝。水涉陸走。榮衛多傷。一疾不起。盡瘁而亡。永閟論議。徒想典刑。賻不如儀。禮未盡情。聊致一祭。冀享予誠。禮官禹廷琛行。
046_322b甲午二十二年
二月。葬于高陽新院。
子宗溟求行狀於牛溪先生。先生復書曰。先大人狀事。後死者當任其責。未嘗一日忘于懷。而每見古人身在罪纍。不敢撰次碑碣文字。蓋以有罪之人。不敢以立言垂世自任也。況如某者。犯觸憲綱。方以秦檜通天之罪。自加於身者乎。然竊觀前輩凋謝已盡。賢邪之辨。是非之分。一向雜糅。將使千載之下。天理有未明。私欲有未祛。深自慨歎。不揆自家之昧陋。思欲記錄一二。而罪負適當于此時。046_322c病衰又甚於今年。如栗谷與李夢應狀事。皆令鄙人爲之。而不敢把筆。徒自悲歎而已。如天假我一二齡。使罪纍結末。而神思稍安。則此等文字。乃我所自願爲者也。又曰。哀諭時論一變。誠可於邑。然百年論定。愛憎泯而是非明。當此之時。許多勢利。皆已冷耳。只有正理昭著于人心。眞是眞非。皆不假人爲。而自行於公論之上矣云。○牛溪竟未得撰。其後愼獨齋金文敬公集撰行狀。
六月。權愉金宇顒等相繼誣詆。追奪官爵。
五月。前縣監權愉曾爲井邑宰。多不法。公體察時罷黜。故愉含憾矣。上疏046_322d曰。林下之士。見陷於鄭某。終致其死云。上問林下之士爲誰。政院啓請招問權愉。愉對以崔永慶在京時。鄭某願一見永慶。終不見之。以此某銜之。永慶。南歸後。東西之說起。嶺南皆不與某。某以爲此實永慶倡之。心欲陷之。適逆獄起。做出無形之事。加以不道之名。捉致繫獄。聖鑑孔昭。終以曖昧放出。某復爲搆啓。終死獄中。豈非冤痛者乎。傳曰。追贈事。言于該曹。於是。公子宗溟上疏伸冤。傳于承旨李德悅曰。崔三峯之言。其時賊招則有之矣。鄭緝則予親鞫之。疑無此言矣。永慶已令046_323a追贈。而何無黑白耶。聞永慶妻子飢餓。命該曹給料矣。未知給料存活乎。至六月。大司憲金宇顒又請褒贈永慶。仍追論公以陽爲救解。陰實擠陷云云。遂追奪官爵。○時牛溪方被讒。上怒甚盛。又以追贈永慶。給料其妻子之命。先示其意。故宇顒等乘時。旣斥牛溪。而竝及公。蓋其積憾。乘間而發也。其時三司鄭曄, 尹昉, 申欽, 李慶涵, 李時發, 辛慶晉, 朴東說, 李晬光等。皆不從宇顒之論。○謂崔命龍曰。嶺南人皆謂鄭某若言崔永慶有孝行。則可救其死。而隱諱不達。極爲奸邪云云。吾046_323b曾爲史官。披閱其時史草。則鄭某力引永慶孝行。累次陳達矣。嶺南人論議偏頗。至於陳達之言。亦隱之。反以爲非。甚不公也云。○沙溪先生宰安城時。金宇顒過去言。昔與牛溪相見於義州。言言庇護季涵。甚不是矣。沙溪曰。公之非季涵者何事。宇顒曰。公不知季涵之殺李潑, 崔永慶之事乎。沙溪曰。李潑初出賊招。松江伸救定配。其後屢出賊招而死。松江何與哉。永慶則終是救之。何謂殺也。宇顒曰。吾其時在星州。仍配北道。鄭某救潑之事。未之知也。沙溪曰。公之友何以殺李潑母子乎。宇顒046_323c曰。公所云者。指柳而見也。吾亦以而見爲是乎。然季涵與而見。何可比而同之。沙溪曰。柳則公之親友。故不以爲非。鄭則所嫉。故深攻之耳。蓋宇顒等之意。不專在於永慶也。所重則在於潑等。而未敢顯言也。潑等之死。無與於公者。宇顒等非不知之。而必謂之搆陷云者。是欲做公爲小人。而自爲士類也。○丁酉。崔喜男, 尹宖等上疏言李潑, 白惟讓之死。皆鄭某搆陷。而其時大臣。不能伸救。無異於鄭某云云。是時。山海, 弘老, 爾瞻等謀陷柳成龍。又以潑等之死。歸罪於成龍也。觀此則潑等之死。實046_323d爲陷人之一奇貨也。方山海宇顒等之陷公也。成龍親知鞫獄顚末。而不爲一言以正其誣。至是爲山海等所中。互還之理。亦不可誣也。時金瞻謂沙溪先生曰。今之治柳相者。亦祟於建儲。蓋與陷松江。同一機關云。宖初名宕。與安德仁等上疏斥公者也。○自甲午以至丙申。其救公者。朴東說, 申欽, 鄭曄, 李慶, 涵,趙守翼, 辛慶晉,朴東善等也。其陷公者。權愉, 李墍, 李尙毅, 崔瓘, 金宇顒, 奇自獻, 柳永洵, 李鐵, 鄭經世, 金玏, 朴承宗, 金應南, 鄭琢, 金晬, 鄭光績, 申渫等也。其所以搆虛成罪者。以李潑, 崔永046_324a慶之不能伸救也。而此亦有不然者。潑之就鞫也。賴公伸救之力。幸得定配。其後杖死。由於屢出賊招。則公亦無如之何矣。至於老母穉子之死於獄中。在於辛卯五月。則此是公被劾罷相之後。而柳相成龍。代爲委官。其年月昭昭難掩。至若崔永慶之被逮也。公於筵中。以永慶孝行屢次陳達之事。旣載於其時史草。而嶺南人反以爲鄭某不救其死云者。已極無謂。而且公聞永慶將就鞫。陳疏伸救。其疏本載在集中。焉可誣也。而權愉所謂永慶將放出。而某復爲搆啓。終至瘦死云者。萬萬虛046_324b罔。如權愉輩之爲人鷹犬者。顧何足責。而嶺人輩則全不識其時事實之如何。而徒聞一邊毁公之言。隨衆和應。殆同風吹草動。亦不足多卞。但金宇顒則平日雖不悅於公。而及與沙溪酬酢也。聞李潑, 崔永慶之死不由於公。則乃曰。吾在北道配所。未之知也。且曰。吾亦於而見爲是乎云。則宜於言下卽覺悟。而其後攻斥公。終始不已。蓋其執拗之性。又痼於黨論而然也。可勝歎哉。上嘗曰。今日之論。何以紛紜。不卽歸一也。宇顒, 經世等對曰。有一重臣陰主伸救之論。故如此。蓋指牛溪先生也。
046_324c辛丑二十九年
十二月。鄭仁弘追誣。欲禍泉壤。不果。
初。仁弘嫉公。而未售其兇。且與其妻弟梁弘澍。搆怨相圖。以弘澍出入牛溪門下。意牛溪習聞其惡。由是又嫉牛溪。壬辰。大駕西過臨津。李弘老指近岸村舍曰。此是成渾家也。上曰。然則何不來見我乎。弘老曰。此時渠豈肯來乎。及牛溪赴世子召。弘老曰。成渾負一國重望。而已歸於世子。事無可爲者。牛溪入行朝。弘老又曰。成渾此來。爲世子圖內禪也。上甚疑怒。牛溪又上疏。請046_324d上痛自責躬。下敎罪己。削去尊號。罪誤國之臣。嚴宮闈之防。上益不悅。敎牛溪曰。卿今還世子所否。後又下批曰。當初變出蒼黃。車駕過卿廬舍之前。而卿不來問。自知罪重。將欲死而不得。今卿來詣。不勝感激流涕之至。卿雖病重。討平兇賊。轉危爲安。則死當結草而報之云云。仁弘旣知上意。必欲竝陷公。至是。使其徒朴惺, 文景虎等。相繼投疏。以爲崔永慶之死。構捏者鄭某。指嗾者成某。大司憲黃愼等。洞陳永慶獄事初由於兩南監兵使之啓。仍擧當時天網難逃之敎。以明再鞫046_325a之由。上盛怒敎曰。永慶已鞫之後。君上旣命放之。而兩司論之。必有其由。終爲其所殺。則人之稱冤。不亦宜乎。近來銓曹敢擬毒種於守宰之任。肆然無忌。朝廷是非何在。又下備忘記曰。近來。銓曹不畏公論。而引奸兇之子。不有承傳。而擬未敘之人云云。因是堂上遞差。郞廳罷職。於是。大憲奇自獻等覰知上意。進啓以爲殺士之事。欲令君父當之云。兩司追論永慶再鞫時臺諫。上答曰。卿等始論殺人奸黨於十年之後。一線公論。如穉陽初動。絶脈纔屬。夫天下之事。有本有末。捨其046_325b本而治其末。則徒勤而愈不治。先其本而後其末。則不勞而事皆得其正矣。崔永慶斥鄭澈爲索性小人。澈之磨牙鼓吻。狺然傍伺者。蓋未嘗一日而忘于懷。及逆獄起。某及抵掌雀躍。始焉使其黨告之。終焉使其黨論之。必殺之以快其意。永慶之死日。某必置酒高會矣。其間陰謀兇計。必有所不忍言者矣。此其設心。慘於鏌鎁。眞千古之奸兇也。然澈之所以恣行至此而無所忌者。以其成渾爲之主也。渾之爲某腹心。與某一體。在下者論之。在上者知之。今憲府之言曰。爲澈親友。論議無不預知。046_325c是憲府而知之。諫院之言曰。與澈最相親密。澈之心計。渾無不知。是諫院知之。然則渾者。及澈之分身也。一澈雖已伏辜。其無一澈乎。彼其時爲臺諫者。不過承望風旨。依阿淟涊。趨附邪佞之輩。此何足數乎。今乃擧討惡之典。欲振一時之風節。以定萬世之是非。而正捨其魁渾。僅論其枝葉。此所謂網漏呑舟。緦功是察。公論何時而得行。奸人何時而畏懼。被論者。亦恐不服而反哂之矣。夫鬼神之所知。十目之所視。如渾者。尙不能正色直斥。設使巨奸當朝。其能借斬馬之劍。擡擊蛇之笏乎。予爲046_325d是懼。未審自古黨於奸兇。爲其腹心者。其時稍有公論。則得免天討否。若其殺人之慝。人所難測。予非以渾爲可加以殺永慶者。予雖欲無言。豈可得乎。兩司又請削成渾官爵。上答曰。成渾之罪。不在多言。只黨結奸兇四字。在所必討。而至於殺人之慝。不須竝論。不以搆殺論云者是矣。毒澈搆殺永慶之後。則稍有知識者。皆羞與澈竝生於鴨江之東。而渾也不爲絶交。其所以不爲絶交者何也。無乃其心足可知乎。雖然。今日朝廷公論得行。如已授之官爵。不須追削。屢啓。答曰。公論如此。依046_326a啓。但以已著黨奸遺君之罪。罪之可矣。善山儒生金翬上疏。斥仁弘誣渾之狀。上答曰。崔永慶之枉死。天下之至冤也。鄭澈之邪毒。千古之奸兇也。成渾爲澈之腹心。澈之心。卽渾之心。二而一者也。此則天地鬼神。昭布森列。髮未燥之兒。亦已知之。雖借辭於子貢。學字於楊雄。儀, 秦弄其舌。賁, 育騁其勇。亦不能逃也。渾之殺人。言者非一。豈無其由乎。夫以閭巷間至微賤之人。人不敢加以情外殺人之名。今多士以永慶之死。歸於渾。得非滄浪之自取者耶。汝敢指斥鄭仁弘爲搆陷之計。仁弘之046_326b爲人。鳥獸草木。皆知其名。汝無乃又效澈黨之搆殺崔永慶之舊手段乎。兩司又論黃愼, 李成祥等。以殺士之名。歸之君父之罪。上曰。其時傳敎天網難逃之言。乃指其與鄭賊相知之事而言。以其書札在故也。非指其元情也。未久。仁弘拜大憲赴召。上以卿今上來蒼生福等語慰諭之。仁弘卽論黃愼以下。或竄或削無遺。至以牛溪比秀吉。公比淸正。上皆嘉納之。又請贈永慶爵。遂欲逞兇於公墓。若子光之於佔齋。適仁弘被遞。而不果售。仁弘之徒。以道路所傳詩上變曰。鳥獸草木046_326c皆知名。卿今上來蒼生福。入京三日兩司空。不福蒼生福朽骨。自是天怒益震。○大抵聖旨日月之明。終始爲山海, 仁弘, 弘老, 汝諄等所螮蝀。收司之律。延及師友。至於此時。雷霆震疊。火色極天。多小綸音。無非臣子所不忍聞者。是知愛憎之變。慈母不可恃也。觀乎此。則可想讒諂之蔽明。方正之不容。忠信之見疏也。人之擬公者。乃譬於屈左徒云。
己酉三十七年光海元年
子宗溟上疏訟冤
046_326d光海答曰。觀爾疏辭。父子間情理。安得不如是乎。但事在先朝。國有公議。予不敢知于玆。兩司以捧入上疏。請罷承旨。答曰。子訟父冤。情理切迫。捧入何傷。
癸亥熹宗皇帝天啓三年仁祖元年
沙溪金先生被徵。入對伸冤。
三月。上反正。仁弘等皆伏誅。八月。沙溪先生被召。入對曰。鄭澈忠淸孝友之人。以己丑獄事。歸罪於某。某無過誤之事。而特以見忤於時輩故也。上卽位之後。尙未昭雪。豈非朝廷闕典乎。答046_327a曰。從容爲之。○浦渚趙公翼入輪對時啓曰。伏聞頃日筵中。有鄭澈復職之議。經筵官尹知敬曰。此事若行。則當有決去就者。此言非也。臣前年八月。在新昌。尹知敬外三寸柳永詢。往在牙山農莊。臣往見永詢於牙山。與之同宿。吐出心肝。永詢謂臣曰。李潑老母弱子受刑之時。吾爲問事郞廳。其時松江已敗矣。松江卽鄭澈別號也。李潑與逆賊書札。吾皆親見之。筵中所言。無不通之。宣廟以此極怒。世之謂鄭某搆殺者。眞虛語也。又稱鄭某爲人淸潔。忠誠貫日云。臣嘗入玉堂。謂知敬曰。046_327b曾聞柳江陵永詢曾爲江陵府使所言如是。應敎知敬時爲應敎在一家。亦嘗聞之乎。知敬曰。此言。吾則常常聞之矣。今若伸冤。誰復異議云。今筵中所達乃如是。廢朝時天地閉塞。人理滅絶。尙不決去就。今欲以鄭澈復官之事。決去就。豈非過也云云。
甲子四年
五月二十二日。子宗溟等復上疏訟冤。上命議大臣。復官爵。
疏入。上命議大臣。領相李元翼議曰。前日筵中。自上以鄭某事下問于臣。臣以辛卯年忝憲046_327c長。論啓曲折。仰達而已。至於今日伸理之議。非有防遏之意也。其時被罪白惟讓等。請竝命査出稟處。左相尹昉議。好惡雖在於一時。論議常伸於後日。事若可爲。則豈可以事在先朝而不爲乎。成渾被罪。亦在先朝。而反正之初。快賜伸雪。大慰士林之望。某之心跡。亦惟在聖鑑洞燭而已。至於其時被罪人等。如有橫罹者。則亦令査出稟處。右相申欽議。鄭澈之姓名。爲世所諱。今三十年矣。聖明臨御。無冤不釋。其子之所訟。臣亦備聞之矣。實非讆言也。特以某剛偏多忤。與時之當046_327d事者矛盾。得罪至於此耳。李潑等初以某之啓辭。止於定配。而復出於宣弘福之招。再被拿鞫。則其終末之事。某亦無如之何。崔永慶一事。臣曾聞於故相李恒福者。實如宗溟輩所陳。聖明之下。豈敢有一毫欺負。只以數十年間。朝著携貳。以澈爲穽。新進小生不見澈面目者。少有一言及澈。則輒目以某黨擠去之。株連抑塞者。奚獨澈一人而已哉。此臣之所嘗爲世道慨然者也。今若蕩滌伸理。許復官爵。則豈不有關於同寅協恭之治道哉。李潑諸人被罪時。至於籍沒等事。亦涉過重。令査出046_328a稟處。上乃命復官爵。李潑亦令復爵。而不許惟讓。承旨趙誠立。乃任意混錄於伸冤傳旨中。上特罷誠立。○癸亥。諸公但知東西偏論之嫌。而不知儒俗邪正之辨。如潑等之論以逆律。雖曰冤枉。而其推奬汝立。以禍宗國之罪。烏得免乎。故宣廟以締結逆魁。甚於奸臣爲敎。此實潑等之斷案也。況乙酉誣賢之啓。尤足以得罪千載。則烏得與公。竝復官爵哉。尊賢誣賢者。同伸其冤。誅奸黨奸者。偕復其爵。政刑如此。是非何由定乎。李相元翼於惟讓不道之書。非不聞知。而猶且請伸。又生046_328b製其碑。而反以公與潑兩伸爲論。可謂誤矣。○淸陰金先生嘗謂。曾訪李相德馨於龍津。爲言公冤之當伸。則李曰。早晩。吾當任其責矣。癸亥。李相元翼。雖請伸公冤。而曰。請與李潑等一體伸冤云。其使機關如此。偏黨之害。乃至於此哉。鄭愚伏經世亦嘗論公甚峻。癸亥八月。進士李景魯等爲訟公冤。發文齊會。昔時攻公人子孫。亦多來詣。鄭愚伏經世遣其子杺。景曾爲疏頭。杺爲色掌。疏將上。而鄭守夢曄諸公。以爲似嫌乘時。稍待日後爲可。故不果上。若使反正諸人。表章兩賢之道。而攻破邪046_328c黨之說。則公之賢否是非。不待辨而定矣。○沙溪先生曰。大凡人品。君子好之。小人惡之。則乃吉人也。君子惡之。小人好之。則乃凶人也。如松江之爲人。河西, 土亭, 栗谷, 牛溪, 思菴, 高峰, 重峰及先君子辛白麓, 李鳴谷山甫, 洪益城聖民, 尹月汀根壽,李藥圃海壽諸君子好之。如鄭汝立, 鄭仁弘, 李潑,李山海, 李爾瞻, 李弘老, 洪汝諄, 許篈, 宋應漑, 朴謹元, 宋言愼, 任奕, 尹宕輩惡之。松江之爲君子。不問可知矣。其趨時附託。圖爲發身者。雖千萬人毁之。於松江何損焉。
046_328d乙巳崇禎後三十八年顯宗六年以下續錄
三月。自高陽新院。遷葬于鎭川地藏山酉坐之原。
夫人墓同遷合窆。○有表石, 神道碑, 誌銘。尤菴宋文正公時烈竝撰。
丁巳崇禎後五十年肅宗三年
夏。湖南人楊夢擧等上疏詆公。請追削。不售。
是時。許積, 許穆, 尹鑴等用事。陰嗾羅積, 安敏孺, 吳相玉等。相繼投疏。請伸鄭介淸之冤。歸咎於公。許穆主其事。白上重建介淸廟。至是。楊夢擧等承望鑴穆之風旨。投進凶疏。論救己丑逆獄。隱然爲046_329a反案之計。誣衊公罔有紀極。仍請追削。時同副承旨趙師錫啓曰。卽者全羅道儒生楊夢擧等。以故相臣鄭澈追削官爵事陳疏到院。觀其措語。恣意搆誣。其醜詆之狀。誠不忍正視。猶且不滿。反以仁祖朝已定之論。謂若出於不當伸而伸者然。噫嘻亦太甚矣。其時故相臣李元翼以下名臣碩輔。布列朝廷。而旣無異議。同辭請伸。則此豈皆蔽先王之明。而曲爲鄭澈地哉。夢擧等奸情慝態。必難逃於聖鑑之下云云。上答夢擧疏曰。事之是非。姑捨勿論。曾在仁廟朝。參酌議定之事。到046_329b今年歲已久之後。不可更爲撓改云。夢擧等再疏。答曰。事之當否。已悉於前批。但曾在仁廟朝議定之事。孝廟先王兩朝。何往不辨。而到今五十餘年之後。何如是煩擾乎。予甚駭異也。蓋是時天鑑孔昭。批辭洞快。故奸黨終不得售其計。
庚申五十三年
八月。全羅道生員柳景瑞等上疏訟公。請治楊夢擧, 羅積, 安敏孺, 吳相玉等誣罔之罪。上下廟堂議之。廟堂回啓。竄配夢擧等有差。
三月。許積, 尹鑴等皆以兇逆伏法。穆亦被黜。凶黨046_329c次第屛退。士類登進。公論復張。於是。湖南儒生柳景瑞等數百餘人。上疏訟公。指陳夢擧等承望鑴, 穆之風旨。伸救己丑逆獄之狀。仍請毁撤介淸祠宇。且治夢擧等誣罔之罪。公之四代孫澍等又上疏。備陳己丑治獄首末。上令廟堂議處。領相金壽恒, 左相閔鼎重等回啓曰。澈之遭讒受誣。初出於山海, 仁弘之所媒蘖。而追罪之禍。至及於泉壤。及至仁廟反正之初。博採公議。雪冤復爵。某之子姓。皆被顯用。則是非大定。有不敢復容他議者。夢擧等乃敢祖述羣邪之緖論。肆然投章。眩亂046_329d祖宗之是非。此雖鄕曲無賴輩。爲時論所驅使之致。而其譸張邪說。熒惑天聽之罪。誠極痛惋。夢擧等請令攸司及本道。竝爲科罪。上允之。介淸祠宇。亦命毁撤。
甲子五十七年
賜諡曰文淸
玉堂趙持謙等。議公諡以文介。文谷金相公壽恒以介字義欠包該。不足以盡公之平生。且士論多有不愜之意。遂白于上。命玉堂改議。乃以文淸受點。公議始允。
046_330a辛未六十四年
追奪官爵
自己巳以來。朝議一變。閔黯金德遠等用事。遠自己丑。近至庚申。前後逆獄。一切反案。湖南凶人鄭武瑞承望時議。投疏追詆公狼藉。李玄逸, 李日井, 許穎等相繼搆揑。上從其議。竟下追奪之命。
甲戌六十七年
夏四月。上特命追復官爵。
時上悟羣兇濁亂。誅竄其黨。特下備忘記曰。鄭澈追奪於百年之後。殊涉已甚。追復官爵事下該046_330b曹。後全羅道進士朴碖等數百餘人。疏卞武瑞, 玄逸輩之誣。上優批答之。
冬十一月。上遣禮官致祭。
上幸行長陵。路過新院。敎曰。故相臣鄭澈之墓。聞在此處。特爲賜祭。承旨嚴緝啓曰。鄭某之墓。已遷他處矣。事途寢。還駕後玉堂金鎭圭等達于榻前曰。前日陵行時。有賜祭鄭澈墓之敎。士林莫不欽仰。其時雖以遷墓之故。姑寢不行。而旣有成命。則仍爲賜祭於所遷之墓。似合事宜矣。上允之。遣禮官致祭於鎭川新山。
046_330c甲申七十七年肅宗三十年
三月。全羅道儒生進士金鼎三等上疏。請宣額于昌平縣新建書院。上許之。
先是。遠近章甫。刱建書院于昌平維谷。至是疏請。蒙允。翌年乙酉。宣額賜祭。
癸丑一百六十六年。正宗十八年賜祭于家廟。
是年夏。因嗣孫寅煥以壽襲封勳爵。遣承旨致祭。
癸未二百五十六年。今上二十年賜祭于家廟。
是年春。因嗣孫文源以壽襲封勲爵。遣地方官046_330d致祭。
松江別集卷之三

訒齋先生文集附錄
 [神道碑銘]
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神道碑銘[蔡濟恭]。 a_067_521c


067_521d公諱晛。字季昇。自號訒齋。崔本全州人。鼻祖諱阿。在麗官侍中。五傳至縣監諱水智。始居善山之海平。子孫家焉。諱以淮。主簿。贈左通禮。諱致雲。參奉。贈左承旨。諱深。贈左參贊。寔公之曾大父大父父也。以公故貤贈三代。妣贈貞夫人星山李氏。智源女也。公弱冠。游學鶴峯金先生門。聞爲學大方。萬曆戊子。中生員。丙午。登第。自翰苑以後。雖間値昏朝。偃蹇鄕里。及仁祖067_522a龍興。知遇昭融。歷揚三司。位躋觀察使。官序非不顯也。才諝非不試也。後之人論及公平生。或有絫欷長嘆不能已者。此其故何也。公天資超詣。才智通敏。師友所講。發之爲經綸大業。方壬辰之亂。以布衣陳書體察幕府。皆經國撥亂之謀。李公元翼爲之感嘆。除健元陵參奉。旣肅命。疏陳萬言。其條有九。而所以行之者一也。所言皆中時弊。已而謝病歸。及登第。薦授翰林。光海戊申。遷說書。拜正言。作九知銘以自省。以賀節書狀朝京師。律己馭下。象胥皆肅然。及還。連除正言,持平,實錄郞廳,體府從事官。選玉署奉暗行命。察關西沿江防067_522b守。旣復命。大臣李公德馨,李公恒福辟爲備局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公疏陳舟師利害。遂巡遍兩南。施設中窾。俄除鏡城判官。大臣難其代。屢白上仍之。拜弘文館修撰。時光海入術士言。議遷國都。公上箚力爭。議遂寢。又除校理。移文學。光海方追崇奉慈殿。議奏請誥命。公上箚言家無二尊。禮無二嫡。魯隱之於仲子。僖公之於成風。春秋深以爲非。而未聞二君追請册命於天王。豈非守禮畏義而不敢爲也。移正言。賊臣爾瞻誣大妃父擁永昌大君謀變。獄旣成。臺閣議按律大君。公度爭之無益。引例嫌辭遞。賊黨怒。劾之削公職。公夷然臥067_522c田里者十有一年。仁祖反正。拜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疏言方群兇之誣殺大君。臣官以諫爲名。噤不得一言。其不爲鄭蘊之罪人乎。自是歷應敎,舍人,執義,司成,輔德,體府從事官。及陞通政。累除承旨。遷大司諫,禮兵刑三曹參議,大司成,副提學,承文副提調。廟堂薦廷臣才堪將帥者十人。公與焉。皆極選也。當仁廟初卽位。勳貴張甚。擧措多不厭淸議。建虜日耽耽西北。有朝夕憂。公旣起廢。感激殊遇。事有關朝廷得失。知無不言。言無不盡。而於二者懃懃懇懇。累致意而不知止焉。其以玉堂進講。力言治獄不可太濫。朋黨不可不臨之067_522d以至正大公。使偏私自底丕變。論禦敵之策則曰。虜若長驅。不可與爭鋒其勢。避之而已。而今諱言避寇。臨急避亦不易。雖不可以預言避。以怠人心。然堅壁淸野。不可不爲之所也。其赴元帥幕。上賜以酒曰。往懋哉。馳往黃州。閱海西兵馬。亡何逆适叛。上命公爲督戰御史。授之劍曰。戰不力者。副元帥以下劍斬之。元帥張晩與賊遇猪灘。戰不利。乃馳啓歸咎公督戰。公亦馳啓罪狀晩。及鞍峴大捷。朝廷論功未決。公詣行在。盛言晩指授方略。由是策晚爲元勳。其爲承旨也。大妃宮隷有僞署橫畿甸者。憲府繩以法。上飭曰。隷。慈067_523a殿屬。愼毋刑。公繳還。上切責之。宮隷後又如之。憲府捕治急。上又命放遣。公繳還如前。仍啓曰。臣寧得罪於殿下。不欲使殿下得罪於丘民也。以大司諫上箚極言曰。近日旄頭動曜。天狼生芒。藏雷暴發於昴,畢之分。應在燕胡。虎視方張之賊。蓄謀待時。而老成狃於媕婀。名流昧於遠圖。仍又反復言勳臣之募聚軍官。宿衛私室。有難言之弊。嗚呼。公之心君耳國耳。一字三歎。爲時事累致意者在此。不在他也。而穽石隨集。使公終不得展布支體者。亦未始不在於他。嗚呼欷矣。時諸勳貴大慍怒。白上曰。某之言欲杜絕譏察。俾逆徒得067_523b逞其計也。會有賊金愿誣引公。贊成金瑬至以公爲知逆謀而不告。上責之以情外。特原公勿問。以副提學箚陳八務。又陳修明弊政箚。曰官制也。曰田制也。曰兵制也。援古適今。皆得損益之宜。未幾拜江原道觀察使。明年丁卯。虜跳入。公亟選精銳。聲援海西陳。自以卒千餘人屯漢津。都元帥及關北軍之頓江原界者。給饋餉不絕。草檄文以風勵義士。士爭爲用。及虜退。公慷慨復陳萬言疏。其要先之以立志。次以立紀綱省宂官養軍兵蓄財用設保障爲五急務。而末乃言江都,南漢。非萬全地。惟赤裳城。據湖嶺饒物力。閑山諸島。統營舟師。互067_523c爲聲援。今之保障。恐無踰於此矣。上嘉納之。亟命議處。廟堂竟不用。時橫城賊李仁居謀叛。原州守洪靌執以獻諸朝。前此公已疑仁居有叛謀。密令靌伺察而嚮之。不悅公者反謂公縱賊。逮繫詔獄。上曰。崔晛嘗於夜對。直陳宮闈過失。予甚苦之。徐以思。眞愛我深也。曾謂伊人乃與賊相關耶。特放之。以言者爭執竄會寧。尋宥還。後有無賴賊楊天植誣及公被逮。上又以前所敎者敎之。又放之。嗚呼。此固仁廟明聖不忘公讜直之言。而亦可見公之孤忠直道。有以結主之深也。以庚辰六月四日卒。壽七十八。葬于善山默坪向坤067_523d之原。上遣禮官弔祭。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如例。以子山輝參勳倦也。公早登師門。又從寒岡,旅軒諸先生遊。象緯堪輿。兵法籌數。靡不旁通。而百世之後所可見者。獨章疏在爾。公未沒。已有南漢下城之役。公之先事所言。不幸皆中。擯斥公不用其言者。于國事何如也。公言之不見用。非公之不幸。實世運之使然也。後之讀公書者。其有不絫欷長歎矣乎。公元配義城金氏府使復一女。生一男山輝。策寧社勳。通政府使。後配昌寧曺氏,載寧李氏。皆贈貞夫人。山輝三男一女。爾博,爾厚,爾遠。壻縣監朴愰。爾博二男一067_524a女。應乾,體乾。壻呂景和。爾厚三男一女。大乾,象乾,峻乾。壻進士李萬英。爾遠無子。玄孫司馬者一。斗元。五世孫司馬者二。壽頤,壽仁。登第者一。憼。六世孫司馬者七。萬柱,廷柱,光玉,光岳,光翊,光稷,光迪。登第者一。光璧。卽請銘者。七世孫司馬者三。綽,溟羽,陽羽。內外雲仍。多不盡錄。銘曰。
君子之學。所貴淵源。韙哉崔公。有光師門。公奮自躬。仁廟知臣。何以寵之。玉署薇垣。憂治危明。公膽輪囷。內有勳貴。家兵如雲。外有強胡。磨牙虎蹲。公有琅函。瀝血天閽。王曰旨哉。嘉乃攸言。柄臣憤詈。口正沫出。乘機067_524b下石。禍積身孑。王曰予知。汝惟忠直。命開圓戶。天日之白。公廢在家。奈何南漢。勿謂無人。公實先見。仁廟明聖。匪曰棄公。公躓不騫。實維彼穹。默坪之阡。有鬱其楸。我銘昭眎。志士之吁。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原任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孫左賓客,奎章閣提學蔡濟恭撰。
訒齋先生文集附錄
 [行狀]
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行狀[李象靖]。 a_067_510a


公諱晛。字季昇。姓崔氏。其先全州人。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實爲鼻祖。五世至諱水智。比安縣監。贈都承旨。始卜居于善山之海平縣。子孫仍家焉。曾祖諱以淮。司僕主簿。贈通禮院左通禮。祖諱致雲。參奉。067_510b贈承政院左承旨。考諱深。贈議政府左參贊。三世皆以公貴也。參贊公隱德不仕。旅軒張先生實銘其墓。妣東萊鄭氏。煕佐之女。德陽奇氏。敎導遇之女。星山李氏。秉節校尉智源之女。正言耕隱先生孟專之曾孫。俱贈貞夫人。嘉靖癸亥六月十日。公生。幼穎秀異凡兒。八歲。受學於杜谷高公應陟。厲志尙學。屬對輒驚人。九歲。貞夫人卒。執禮如成人。十三。方伯策士於金烏書院。公製居魁。人莫不驚歎。弱冠游鶴峯金先生之門。得聞爲學之方。自是問學日進。同列皆推服。萬曆戊子。登生員第二名。己丑。丁參贊公憂。式禮罔愆。壬辰。島夷發難。公067_510c避居于眞城,寧海之間。甲午。還故居。丙申。體察使李公元翼開府于嶺南。公上書陳三綱九目。皆經國撥亂之謨。李公復書感歎。戊戌。宰臣薦公才行。除健元陵參奉。旣肅命。疏陳九條。曰。人才戕鑠。朋比之習壞之也。曰。綱紀不振。以將相之無權也。曰。人心解弛。以賞罰之不明也。曰。士氣偸靡。以奬勵之未至也。曰。賢俊未集。以誠信之未孚也。曰。庶官不職。以委任之不專也。曰。軍容失振。以御將之無方也。曰。民生日困。以守令之不擇也。曰。國計日蹙。以制置之失宜也。其條有九。而所以行之者一也。一者何也。卽所謂誠也。時新經大亂。百度叢067_510d脞。所言皆切中時務。遂謝病歸。後除參奉。不赴。丙午。登第。丁未。薦授藝文館檢閱。時相有濁亂朝政。公直書不諱。時輩將攻擊。公呈由南還。光海戊申。陞待敎。遷侍講院說書。俄除司諫院正言。作九知銘以自省曰。持身不可不重。處事不可不審。發言不可不謹。趨舍不可不明。學識不可不廣。威儀不可不飭。交道不可不愼。應接不可不誠。吏事不可不習。八月。兼司憲府監察。充賀節使書狀。翌年三月。復命。公律己簡約。馭下嚴明。驛隷畏服。以未及改正勑書中權署二字。三使俱被拿推。旣出。遂還鄕。在途拜正言。呈辭遞。庚戌正月。赴宣廟再期。067_511a除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注官,實錄廳郞廳兼體府從事官。旣而錄玉堂。以暗行御史下關西。有規畫沿江防守便宜。復命。還郞廳從事官。大臣李公德馨,李公恒福啓請公爲備局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整飭海防諸務。時公在鄕。令道臣給馬上送。辛亥。詣闕。疏陳舟師利害。請停不急之役。省浮費專防守。遂巡歷兩南。設施得宜。未竣。移除鏡城判官。備局啓曰。崔某下去兩南。分防磨鍊。稍有頭緖。若以他人代管。事歸渙散。請改遞判官。使仍管舟師之務。再啓得請。未幾還朝復命。復授實錄廳郞廳,春秋記注。管舟師之務兼兩南巡撫御史。海067_511b防諸務。次第就緖。拜弘文館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記事官。還朝拜命。廢主聽術士言。欲遷都交河。命大臣率觀象提調獻言地官。往相形便。大臣臺諫極言不便。公聯箚力爭。言甚剴切。議遂寢。以御史巡審聞慶,御留山城形勢。陞弘文副校理兼經筵侍讀官。又以備郞。兼鳥銃廳都廳。癸丑。除侍講院文學。陳疏請博選山林賢士。輔導東宮。廢主追崇奉慈殿。欲奏請誥命。公上箚言。旣膺顯號。享以別殿。尊奉之典。極其隆盛。今以誥命之請。欲上聞於天子。臣聞家無二尊。禮無二嫡。大經大法。至嚴至明。故魯隱之於仲子。僖公之於成風。春秋深067_511c以爲非。而未聞二君追請册命於天王。豈非守禮畏義而不敢爲也。今位號已定。尊稱國中。無一毫未盡。雖或請于天朝。無所增加。況請之而未蒙準許。反取上國之譏議。不亦有慊於顯揚之道乎。移拜正言。時賊臣爾瞻陰嗾其黨。以府院君金悌男欲推戴永昌大君。羅織成獄。按律大君之啓。朝夕且發。公度不可爭。引例嫌辭遞。廢主不悅。鄭造,尹訒啓曰。崔某引小嫌規避大議。請削奪。廢主從之。自是斂跡丘園。以圖史自娛。凡十有一年。癸亥。仁廟改玉。拜弘文館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陳疏乞遞。略曰。壬子春。有推戴大君之說。飛語城中。067_511d播傳宮禁。人心汹汹。朝夕待發。臣時拜正言五日矣。烈焰迫眉。欲言不得。遂引身苟避。竟遭削黜之罪。傳曰。臣下不匡。其刑墨。況臣責在言地。職當碎首。而坐見群兇誣殺幼稚大君。而噤無一言。狼狽而退。終未免惜一死負先王。爲鄭蘊之罪人。寧獨不愧於直士之風乎。自是杜門絕跡。自分終身於窮谷。無望登仕籍而入國門也。幸今獲際龍飛。得列彙征。而顧省前罪。忸怩于中。何敢不有物議。冒恥靦面。重以負罪之身。玷辱淸朝之名器乎。上優批。仍使察職。時鞫獄未畢。囚繫滿獄。公進曰。天下自有一定不易之法。非執法者所可低昂。如067_512a有罪犯綱常。謀廢國母。投疏之首唱儒生。論啓之臺官。必殺無赦。請殺大君者。當寘次律。附托元兇。陷害忠良者次之。陰主其謀。名漏疏箚。而久秉銓衡。廣植徒黨者次之。其或本心不然。而怵禍隨波。參於庭請啓辭及儒生之被愶參疏者。宜從脅從罔治之律。等級分明。以次科罪。則一有司之事。自上亦勿留難。斷以公議。則何有紛擾淹滯之患乎。上是之。拜校理。日侍講筵。因文進戒。有曰。君子小人。所爲不同。而亦相近似。小人之陷君子也。亦以朋黨目之。漢之黨錮。我朝己卯之禍。可以見矣。人君衡鑑未精。不察其公私之分。則其禍067_512b大矣。小人之黨。易知而易去。君子之不相和協。尤爲不幸。宋之洛朔。我國之東西是也。上以至正大公之道。行之以誠。悠久持循。則偏私之習。自然丕變矣。又曰。古今帝王。孰不欲明德新民。而以堯舜不可幾及。安於自畫。而無進進之工。所以日向昏蔽而不能明也。願殿下勿以大堯之克明峻德爲高遠難行。而顧諟明命。加自明之功。如衣服飮食之不可一日廢。則是亦堯而已。若乍作乍輟。則旣明而還蔽也。爲學最難於終始如一。而人君尤難。近日殿下監覆轍爲戒。與民更始。若因此克終其德。無少間斷。則親九族和萬邦。不難致矣。又067_512c曰。聖人無私欲間斷。而自無不誠。衆人則思慮方萌。善惡幾頭。最是難處。必勉爲誠實。無自欺之蔽。是學聖工夫。其實一也。又曰。禦敵之策。曰戰曰守。不能戰守則避之。今毛將孤棲海島。僅圖自保。我雖竭一國之力。虜若長驅。則不可與爭鋒。一敗塗地。根本蕩竭。雖欲固守。亦不可得。其勢必至於避之而已。稍緩之日。諱言避寇。而臨急則避亦不易。今雖不可以預言避。以怠人心。宜思堅壁淸野之戒。尹昉曰。崔某自少留心兵務。曉達軍事。頃往關西。圖畫山川。規畫守禦之策云。今爲人佐幕。不足以有爲。可使當一面之任。公曰。臣質弱性緩。不合兵067_512d陣間。但生長干戈。徒有慷慨坐談而已。況今年衰多病。元帥之辟爲從事。惟知臣盛壯時也。旣爲幕官。明當拜辭。扶病下去矣。上曰。往懋哉。命進圖畫山川一册。宣醞賜弓矢。到黃州。査點列邑軍兵。未幾拜弘文應敎。元帥以病啓遞從事官。卽還朝陳病免。遷成均館司藝,司䆃寺正。上命備局薦儒紳有將才者。凡薦十人。極一時之選。公與焉。歷議政府舍人,司憲府執義,弘文館應敎,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甲子。拜體府從事官。尋移拜舍人。賊适擧兵叛。上命公爲督戰御史。授以劍曰。有不力戰者。副元帥以下聽自斷。公星夜西067_513a馳督諸帥。勉以忠義。時元帥張晩擁兵持重不卽戰。公移文責之。晩怒。至猪灘始交鋒。官軍見敗。晩馳啓歸咎公督戰。公上啓曰。猪灘之戰。我軍物故僅六百人。賊兵逃散者殆累千人。前此果能屢次交戰。則賊兵自底散亡。而養寇貽患。以致鴟張。元帥烏得免其罪。及鞍峴大捷。行朝論功。副元帥李守一爲首。奪張晩職。白衣從軍。公詣行在。上問曰。今日元勳當爲誰。公對曰。指授方略。皆出於張晩。而李守一特先啓捷報耳。宜有首從之分。上從之。又問李興立之罪。公曰。興立迎賊之狀。昭然難掩。尙保首領。臣竊怪之。卽命處斬。067_513b上之倚重於公。言聽計從如此。旣還都。特陞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公謝恩訖。陳疏自劾。辭陞秩。未幾拜兵曹參知。俄拜承政院同副承旨。時明禮宮掌務僞印圖署。作挐畿邑。憲司摘發推治。上下敎曰。上殿所屬。事體自別。而無端刑訊。震驚慈殿。有欠尊敬之道。今後十分愼戒事。言于憲府。公啓曰。法府之任。綱紀庶政。作奸犯科之人。無論宮府。所當糾治。明禮宮掌務敢做圖書文字。侵擾民間。法府之摘發刑訊。乃其職也。使中外曉然皆知中間奸細輩所爲。而不使民怨上及於慈殿。揆以事理。豈有未安哉。今若以十分愼戒067_513c之意。下于憲府。則竊恐臺官沮喪。下輩增氣。曩時橫恣之弊。將復見於今日。臣等待罪喉舌。不敢以此敎傳于憲府。謹以還入。惟聖明三思焉。上曰。近來政院不識事體。凡下敎。任意還入。極爲駭惡。承旨推考。兩司啓請還收。不允。後筵臣相繼苦諫。遂寢推考之命。本宮掌務猶踵前習。圖出印文。撓害外方。隱避不現。憲府又極論其前後姦橫之罪。上答曰。累啓不允之事。如是任意囚治。今日臺官。可謂慢蔑君命者矣。速爲放送。公啓曰。作弊下人。法府以糾摘推治爲己任。而殿下以本宮所屬。非他下人比。嚴敎至於再三。067_513d司寇之職。以詰姦禁暴。爲尊主庇民之義。雖以天子之父殺人。猶且按法不饒。況本宮下人在法當治者乎。若以請罪爲任意。按法爲慢蔑。則不亦未安之甚乎。臣前以封還下敎。負罪已大。而今又冒死煩瀆。臣等寧重得罪於殿下。不欲使殿下得罪於丘民也。伏願亟加三思此公事。付標允下。以示優容臺閣之道。公隨事覆逆。出納惟允。人以爲古道復行於今日。遞拜護軍。俄拜司諫院大司諫。上箚極言時弊。其略曰。臣伏見天災時變。莫甚於今日。兩曜失明。五緯亂行。流星犯於明堂。木宿凌乎執法。旄頭動耀。天狼生芒。又於四日之067_514a夜。藏雷暴發於昴,畢之分。應在燕胡。臣等終宵憂悸。累日靡定。丙枕之中。所以惕慮憂懼者。寧有其極耶。殿下以勤勵不息之誠。孜孜於上。而耆舊之臣。賢能之士。各循其職。百弊俱除。求諸人事。似無致災之由。變異之生。或出於適然者。然竊觀近日所爲。皆襲秦故。了無整頓之實。殿下雖有求賢之誠。而少延攬交孚之道。雖有圖新之志。而失先後本末之序。雖有節儉之德。而無汰宂省費之實。群臣雖有夙夜之勤。而百職之廢隳猶古。雖有甄拔之稱。而循私之獘習猶古。雖有裁省之令。而姦吏之操縱猶古。綱紀日紊。人心日撓。軍政日壞。國計067_514b日蹙。虎視方張之賊。畜謀待時。懷怨樂禍之徒。扇動俟隙。當今之勢。可謂岌岌。而猶益張虛文。修飾外貌。老成狃於媕婀而莫肯擔當。名流昧於遠圖而惟事浮議。設或外有猝發之寇。內有不虞之患。則其孰能爲國家出一計。止此波蕩之勢乎。反正之初。巨姦大慝。旣伏其辜。則罪犯倫紀之外。枝葉緣坐之類。在所勿治。而竄配太多。樹怨益衆。似非王者廣大之治。勳臣軍官。稱以扈衛。宜若有賴於緩急。而謀避遠戍之輩。爭相投附。千百爲群。宿衛私室。雖爲一時姑息之計。而實非久遠常行之規。弊源一開。末流難防。欲善於後。宜審於早。號牌067_514c之法。非不美矣。而根本未定。紀綱不立。法不徒行。旋立旋廢。只爲騷屑之端。終無整理之期矣。凡所猷爲。必有其幾。及今不改。則必至危亡。此天心之不豫而警動之。欲使殿下惕然而改紀也。伏願殿下。勿以天道之幽遠而弛其寅畏之心。思得忠實無華辦局宏博之人。委以股肱之任。朝夕延訪。不使浮議間之。而得以展布其四體。又得才略勇敢計慮長遠之人。委以閫帥之責。節制區畫。惟其所爲。不以道謀亂之。而得以自盡其才智。旣得二三忠藎之臣。則文武百職。隨器以使。旣分其職。勿爲遷動。使庶官老於其職。帥臣死於邊城。不效則067_514d責其怠慢之罪。置諸誅殛之典。其誰敢不盡力於今日之爲哉。若其急務之當先者。汰不急之官。罷別設之局。以省浮費。赦緣坐之人。業無賴之徒。以鎭人心。擺脫文具。專效實務。居弱以制強。處簡以制煩。力行不怠。以次修擧。則人心旣悅。天意可回。危亡之禍可捄。而中興之績可致矣。答曰。爾等之言。正中時病。爾等可謂識時務者也。挽回世道。振肅頹綱。責在君上。今日老成狃於媕婀。年少者之惟事浮薄。豈非寡昧無德之致也。天災如是。習俗又如是。予極慙懼。罔知攸濟。爾等職在言責。隨事極言。毋或少隱。箚辭當體念焉。勳臣以疏中有軍067_515a官投附宿衛私室之語。衆怒朋興。公論啓引嫌。上意欲調劑。特命遞差。未幾拜兵曹參知。會有賊金愿伏法。一時名流多誣引。而公名亦在其中。上命勿問。公陳疏自劾。略曰。臣姓名出於賊招。而天日燭幽。旣下勿問之旨。又以勿待罪察職爲敎。感激之至。黽勉供仕。竊聞重臣登對之日。以臣請去軍官。欲杜譏察之路。使兇逆之徒得逞其計。又以臣知逆謀而不告。夫知而不告者。與之同罪。是豈人臣之忍爲乎。臣雖無狀。粗知君臣之分義。兇賊之所知也。彼雖兇頑。豈以不軌之言。聞於臣耳。而臣亦忍聞此言。默然而已乎。重臣067_515b之言。旣發於筵席。臣不敢自以爲無罪而強顏世間。伏願下臣于吏。究其情僞。以治臣罪。左贊成金瑬箚論公甚峻。上下批曰。崔晛陳疏自明。猥濫甚矣。然其本心則質直而已。豈有知逆謀而不告之理乎。卿言亦過。勿以情外之說論人之罪可也。公旣忤勳貴。旋被賊誣。群憾交搆。乘機詆斥。而幸賴聖明下燭。直許勿問。倘非孤忠直道蚤結於人主。幾乎不免矣。乙丑。拜刑曹參議。轉禮曹,大司成,副提學。箚陳八務。曰。明心學以爲出治之本。曰。謹辭令以順群下之情。曰。嚴宮掖以絕街巷之議。曰。重相臣以責治平之效。曰。器使人以盡一代之才。曰。067_515c戒數遷以存敦樸之風。曰。植公議以銷朋黨之弊。曰。崇儒學以培風化之原。又因進講。陳修明弊政箚。其略曰。今之尤甚頹廢者有三。曰。官制田制兵制也。三者之中。官制尤急。今備局專主國政而政府爲一閑局。政院只管出納而承旨爲一該吏。別設都監而本司反歸剩官。數遞官員而省寺有同郵舍。不管文書而吏胥得以弄法。職多兼帶而無專責之實。事歸曹司而無分職之意。課責不明而瘝曠成習。俸祿太薄而廉恥易喪。此皆官制之弊也。我朝自廢署事之法。三公無論政之所。於是。別設備局。以宰臣之知軍務者爲堂上。以武班之識067_515d字者爲郞廳。其制略似宋朝之樞密院。而朝家政令。幷歸備局。自此贊成,參贊爲養病之地。舍人,檢詳爲妓樂之司。機衡之重。反付無物望之宰相略識字之武夫。如是而望治道之成。不已左乎。宜遵祖宗之法。復設署事之規。然後政令出一而紀綱立矣。今之承旨。卽古之侍中,尙書令。而中朝之內閣也。國之大小文書。莫不關由於此。凡政令之利病。君德之得失。大臣臺諫無由得聞。獨承旨知之。其位之重爲如何。而今之物望。反在三司之下。只得奉行文書而已。臣謂宜極擇時望。以充其選。頻賜顧問。以重其權。使之隨事封駁。密贊王067_516a猷。與政府相爲表裏可也。今日政事之頻煩。皆由於臺諫之數遞。亦由於小嫌之皆避。臣聞祖宗朝臺諫。雖有推考。亦不避遞。使兩司互相發緘。可知避嫌本非祖宗之制也。且或偶感微疾。略有難便。爭相引告。如或不及。尤爲未安。且古之言官。各自論事。故人人得盡其所見。今之啓辭。下吏持簡通奔走各員之家。必待歸一。然後啓之。以此動被拘礙。不敢盡言。一有違誤。鬧端紛起。今宜悉倣舊制。勿爲避嫌。勿爲呈告。凡有所懷。各自陳啓。惟大段擧措。朝議僉同者。方爲合啓。則讜言日聞。而且無紛擾之患矣。至如朝臣之有經學者。067_516b置之經幄。專責輔導君德。有華藻者。置之詞掖。專責代贊王言。其他隨其才地。置六曹及各寺。專責一任。勿爲兼官。勿爲遷動。其有異績者。各於其司。得以陞遷。且諸司之不緊者。合而一之。員額之太多者。汰而去之。又別設散局。多其員數。而少其祿俸。凡積仕年老。無田可歸者。實有疾病者。一以爲錄用之階。或有奉使差祭等事。皆以此塡差。則在職者無曠闕之患。失官者無落魄之歎矣。外方則監,兵,水使皆許帶一州。令各食其地之入。而置文臣判官。察其細務。防其縱恣。則有久任責成之效。而無侵奪列邑之弊矣。若乃軍政則揀精壯而編067_516c束伍。除老殘而收價布。寬其役而返逋逃。敎技藝而致精鍊。田制則改量田而收漏結。復大同而均民役。禁立案而抑兼幷。除免稅而廣賦入。此大略也。大抵今世之人。以淸曠爲高致。以勤幹爲陋俗。以循私爲厚風。以奉法爲薄德。以數遷爲榮華。以久任爲苟且。以關節爲法典。以浮議爲公論。此等風俗。若不丕變。則爲江左之偸安。宋朝之委靡。良法美政。亦無所用之矣。又拜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疏辭不允。丙寅。拜右副承旨。例遷左副。時有白虹貫日之變。陳啓弭災格天之道。皇子誕生。頒詔使渡海。公以延慰使下關西。病未將事。067_516d上命他使臣代行。還朝病遞。遂下鄕。在途拜左副承旨。陳疏乞遞。辭意甚懇。上允之。賜藥物。未幾。拜江原道觀察使。田結虛位。糴穀逋欠。爲一道痼弊。公卽陳疏。令列邑爲虛實兩册。蠲虛位而出賦實結。査逃故。以蕩條逋欠。一道均沾實惠。丁卯。北虜東搶。大駕播越。公選精兵送海西副元帥陳下。糾合老弱千餘。防守漢江。都元帥及關北軍兵來住境內。公竭誠拮據。以毋乏其饋餉。爲檄文通諭一路曰。嗚呼。大賊猖獗。國步蒼黃。廟謨顚倒。未有定計。方岳守宰。惟奔走策應之不暇。而無一人張弮冒刃。北首而爭死者。數百年培養之067_517a元氣。靡然如烈風之枯草。言念及此。可堪痛哭。諸君子生長禮義之邦。不習軍旅。値此顚沛之日。救死不贍。而猶懷主辱臣死之義。共奮與國同仇之意。倡起義旅。鳩聚義糧。誠有古烈士之風。而于國家有光矣。似聞列邑或有非笑義士。不從其令。甚者至有陰排顯斥。必欲沮撓而後已者。聞來不覺怒髮衝冠。拔劍而斫案也。當職白首腐儒。按節一路。心勞才拙。縱無可觀之績。尙義癉惡。出自所性之天。誠有爲國效忠。願爲擁帚而趨迎。如或害義壞事。必欲按治而抵法。當令列邑守令一一摘發。斷不饒貸。唐之悍卒。尙泣興元之詔。凡有血氣067_517b者。獨不念十行哀痛之敎乎。凡百君子。益勵爲國之丹忠。勿爲小人之所動。或聚糧餉。或募義士。助戰王師。期於盡節。又置善惡籍。其有不惜財力。樂赴義兵者。置之善籍。或有厭聞大義。譏詆排斥者。置之惡籍。終當轉聞。顯施賞罰。亦或有初迷後悟。改過從善者。恕其前罪。共濟大事。幸甚。檄到。人爭奮勵。及大駕還都。公疏陳時務近萬言。大要以立志爲本。而立紀綱省宂官養軍兵蓄財用設保障五者爲急務。其末有曰。所陳五事。皆是末節。固非儒者進君之辭。而火燃眉上。不待規行。伏願殿下。折衷裁擇。如或可採。則斷然行之。067_517c以爲綢繆之一助焉。上答曰。嘉卿愛君憂國之誠。所陳之事。當議處焉。公前後箚疏。皆切中時弊。而至是尤加切焉。其辰猷石畫。眞爲治之良法。救弊之要務。而竟未能施行。識者恨之。公聞關西義將鄭鳳壽入龍骨山城。有奮義却賊之功。而兵匱食盡。遂以木綿弓矢丸藥馬匹。送助軍須。以不待朝令。私助他境。啓聞自劾。關西伯啓曰。鄭鳳壽守龍骨易。崔某救龍骨難云。九月。巡到橫城。縣人李仁居請見。自言欲起兵討賊。方治疏西上。公嚴辭揮斥。密戒原,橫二守。另加譏伺。而行到洪川。又再三申飭。使隨機急通。及聞其盜竊橫城軍器。067_517d大驚卽馳啓言狀。而急遣人遺書仁居。諭以逆順。整飭諸邑官軍。使左右進勦。原守洪寶發兵捕獲。直獻子朝。而始報于公。公聞卽馳報。而朝廷以緩於譏捕。逮繫累月。事將不測。上曰。頃年夜對。適有處置未盡事。此人力爭不已。予頗苦之。厥後思量。眞愛我者也。今雖被罪。必不負初心。其令放送。言者猶爭執不已。竄會寧。尋宥還。庚午。無賴賊楊天植謀逆發覺。辭連被逮。上又引前言下敎曰。如此忠諒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特命放釋。公感激天恩。書傳敎以戒子孫。丁丑。哭子山輝。慘悴不樂居家。移寓金陵別墅。庚067_518a辰六月四日卒。享年七十有八。十二月某日。葬于默坪向坤之原。訃聞。遣禮官弔祭。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蓋以山輝參勳故也。公娶義城金氏府使復一之女。生一男。卽山輝。通政府使。策寧社勳。再娶昌寧曺氏。後娶載寧李氏。俱贈貞夫人。府使三男一女。男長爾博。副司果。次爾厚,爾遠。女適朴愰。縣監。爾博二男。應乾。副護軍。體乾。副司果。爾厚三男。大乾。象乾出后。峻乾。應乾四男。斗瞻,斗望,斗紀,斗昂。體乾一男斗樞。大乾二男。斗極,斗齡。象乾四男。斗興,067_518b斗元生員。斗寅,斗南。峻乾二男。斗光,斗徵。雲仍以下僅數百人。多不盡載。其登科第者。五世孫壽頤生員。憼文科典籍。壽仁生員。六世孫萬柱,廷柱生員。光玉進士。光岳俱中生員,進士。光璧文科前持平。光翊進士。光稷生員。七世孫綽,陽羽生員。公天資超邁。氣度寬毅。忠信以宅心。廉謹以持己。聰悟絕人。博聞強記。尤用力於經傳。有深造自得之功。至天文地誌兵陣籌數之法。亦皆精曉。爲文章取理順辭達。不爲險棘語。見人之善。稱之如不及。聞人過惡。未嘗出諸口。與人言誠意懇惻。至臨事辨是非。則毅然有不可奪者。公自少留心經濟之務。平067_518c居激昂慷慨。論古今成敗得失。爬梳糾錯。貫穿肯綮。要以見諸施措運用而非空言也。釋褐未久。遭値昏亂。炳幾謝事。杜門自靖。及際會淸明。眷遇昭融。則感激言事。長疏短箚。極言竭論。不避忌諱。其指切事情。披露悃愊。殆無讓於陸贄奉天之奏。賈傅痛哭之策。上皆虛心開納。悉其忠諒。許之以識時務。嘉之以愛君憂國。君臣之間。抑不可謂不遇也。不幸遭罹厄會。再被逮繫。雖天日照燭。卽蒙雷雨之澤。而勳貴交憾。乘機構毀。自是公之跡。浩然於烏山洛水。而不復起矣。抱負經奇。際遇明時。而不能展其萬一。豈非百載志士之憾067_518d哉。雖然。今其書具在世。有主父偃者。讀而薦之於朝。得見採焉。是亦公之言行也。不恨其不見用於當時也。公早遊師門。旣又從寒岡,旅軒諸先生。往復論辨。薰陶資益爲多。而務爲韜晦。不自著述。故無以攷其學問造詣之詳。然賴有講義一篇。其剖析經訓。陳說義理。皆合乎聖賢之旨。而敷對明晳。因事規戒。又深得告君之體。若公之學。豈非所謂因理以制事。明體而適用者與。今有詩文雜著,經筵講義,鶴峯言行錄,一善志,關西錄若干卷。光璧奉家牒屬象靖曰。先祖事行。具有本末。而遭世多故。狀行之文。尙未有所託。敢以煩吾子。自惟晩生067_519a末學。何敢紀德撰事。以犯不韙之罪。敢辭。持憲君泫然曰。今去先祖之世。且百有餘年矣。今而不圖。益翳然而莫之徵。吾子旣慕庸之深。烏得無情於此事。敢固以請。象靖不敢終辭。謹因家牒。第錄如右。以竢秉筆者攷焉。謹狀。歲丙申仲春上浣。韓山李象靖狀。


訒齋先生文集附錄
 [墓誌銘]
有明朝鮮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墓誌銘[丁範祖]。 a_067_524b


067_524c故觀察使訒齋先生崔公之卒。今百有餘年。而公之六世孫光璧以公狀來屬不佞範祖曰。私家連世不延。我先祖幽堂之文。尙不克屬筆於當世君子。敢屬之子。不佞旣辭不獲。則謹按公立朝事行而竊慨然歎息。以爲漢之賈太傅。豈不遇文帝哉。而獨不能媚勳臣絳灌等。卒擯不用。以公通才達識。遭遇仁廟之明聖。而其臲卼於當時。不得展布其素學。與賈太傅異世而同調。然其先事慮患綢繆之策。雖歸於空言無補。而猶可爲後067_524d世法。故不佞敍公之始終。而特於癸亥丁卯之際致詳焉。公姓崔氏。諱晛。字季昇。蚤自力學。十三歲。魁道伯所試性理策。華譽藉甚。宣祖戊子。中司馬。久之用宰臣薦。除健元陵參奉。上萬餘言。極論時政。卽棄歸。後屢除參奉。不就。丙午。登文科。凡仕歷大略。藝文館檢閱至待敎。侍講院說書至輔德,議政府舍人。成均館司藝至大司成。選兼承文院副提調。司諫院正言至大司諫。司憲府持平至執義。弘文館修撰至應敎,副提學。爲承政院承旨,兵曹參知,禮刑曹參議。江原道觀察使。公爲檢閱。直書首相柳永慶擅政事。忤當塗。告由歸。亡何相067_525a國李公德馨,李公恒福啓請公爲備邊司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董飭海防諸務。設施兩南得宜。尋除鏡城通判。諸公又啓海防非崔某不可管得遞。時李爾瞻嗾誣大妃父金悌男推戴永昌大君。搆大獄。大君按律之議將發。公適在言地。度不可爭。引例嫌遞職。爾瞻之黨劾公規避削職。癸亥。仁廟靖亂。首拜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自立朝。慷慨論事不諱。博學通時務。以經濟自任。旣際會昌辰。益感激知無不言。思報答殊遇。因進講陳謀害大妃。罪有輕重。宜科次施律。毋久滯囚。君子小人。自爲一朋。宜公明辨別。毋使混淆。時建州067_525b虜張甚。有侵軼之虞。陳國家竭兵食以輸西邊。而畢竟莫遏彊虜長驅之勢。則寧豫爲保守之策。仍進西路山川城池圖。將赴元帥幕。陛辭。上賜弓矢。公査閱黃州軍實。選丁壯赴西。還朝。上令備邊司薦儒臣有將才者。公被選。相國李公元翼以都體察使。啓公爲體府從事官。甲子。平安兵使适擧兵叛。上拜公督戰御史。賜劍曰。副元帥以下不力戰者。皆斬之。公馳下。激勵諸將。書責元帥張晩擁兵逗遛。督令進戰。詣行在陳鞍峴之捷。晩宜居首功及李興立迎賊當斬狀。上皆從之。車駕自公州還。特陞通政。俄拜同副承旨。大067_525c妃宮隷僞章作奸閭里。憲府按治。而上敎曰。慈殿所屬。不可刑訊事。飭憲府。公繳還下敎。啓曰。明正奸細之罪。不使怨歸慈殿。法府職也。上屢下嚴敎。而公爭不已。人皆難之。以大司諫因災異陳箚。略曰。雷電旣藏。而暴發於酉日。酉是昴畢之分。應在燕胡。有動胡之象。而綱紀日紊。人心日搖。軍政日壞。國計日蹙。當今之勢。可謂岌岌。誠得忠實宏博之士。委以股肱。才略勇敢之人。畀以閫臬。專任責成。則誰敢不盡心力哉。又曰。遠近武士投附勳臣。宿衛私室。謀避西赴之役。宜一切禁之。時勳臣稱以詗察非常。募聚武士。私使推奴婢067_525d土田。戚里慕效。侵擾閭巷。怨謗載路。故公陳其弊。上下批嘉奬。而勳臣皆憤怒。飛語煽謗。必欲中傷之。以副提學陳箚。請明心學爲出治之本。謹辭令順群下之情。嚴宮掖絕街巷之議。重相臣責治平之效。器使人盡一代之才。戒數遷存敦樸之風。植公論消朋黨之弊。崇儒學培風化之源。又陳箚請修明官田兵三制。皆斟酌古今。井井有條理。尋拜江原道觀察使。釐蠲虛稅逋糴。惠均一道。嚴考績務持風裁。丁卯。建虜侵我。車駕幸江都。公調發精銳赴海西。又募兵守漢津。三路諸軍之來駐道內者。給饋餉不絕。檄諭士庶。使倡義擊賊。人爭奮067_526a勵。虜旣退。上疏論禦敵洒恥之策。其大要以爲人主當先立其志。以正綱紀。分兵於農。選丁壯隷行伍。厚資蠲徭。日加操鍊。守令各領其兵。使自爲戰。而時仕之外。亡論貴賤。身出米布。以贍軍需。南漢,江都。非萬全之地。茂朱赤裳山城。據湖嶺饒物力。閑山諸島。統營舟師。互爲聲援。保障之地。無踰於此。宜預爲設施。凡數千言。皆切中當時之務。然朝廷竟不能施用。丙子之難。江都陷南漢圍。至有城下之辱。壹如公言。初公旣大忤勳貴。而會有賊金愿誣引搢紳名流及公。金瑬持公甚急。至謂知逆謀不告。上曰。予知崔晛素質直。勿以情外論人。067_526b特原之。至是橫城賊李仁居謀叛伏誅。公先已疑其情跡。密戒原,橫守使譏伺。未及摘發而仁居叛。言者謂公緩治逆賊。逮繫請刑。禍將不測。上曰。此人嘗論宮闈事甚切直。眞愛我者也。命全釋。而以言者爭執竄會寧。尋蒙宥公家居。十三年庚辰六月四日卒。距其生癸亥壽七十有八。葬善山默坪山坤向之原。訃聞。上遣禮官弔祭。以子山輝勳功。贈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公忠信謹厚樂善。諱言人過失。至辨是非。大節毅然不可奪。世方黨同伐異。而獨視人善惡爲取舍。蓋嘗師事鶴峯金先生。又從寒岡鄭先生,旅軒張067_526c先生游。學問講習。助發其德性之美爲多。旁通於藝。天文地理兵陳籌數。靡不涉獵其大略。爲文章贍博。辭理俱美。其積于躬而可以需當世者如此。而阨於時以沒。豈非命耶。公全州人。自始祖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傳五世至文科比安縣監贈承政院都承旨諱水智。承旨生司僕寺正贈通禮院左通禮諱以淮。通禮生將仕郞順陵參奉贈左承旨諱致雲。是爲公高曾祖。考諱深。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皆以公貴。參贊公蘊德不仕。旅軒先生實銘其墓。妣贈貞夫人星山李氏。正言孟專曾孫。秉節校尉智源女。公元配067_526d義城金氏府使復一女。生一男山輝。策寧杜勳。官通政府使。後配昌寧曺氏,載寧李氏。皆無后。贈貞夫人。山輝娶盈德朱氏奉事應邦女。生三男一女。男長爾博。蔭授副司果。次爾厚。次爾遠。女適密陽朴愰。縣監。爾博娶晉州柳氏縣監時亨女。生二男一女。男長應乾。副護軍。次體乾。副司果。女適呂景和。爾厚娶豐山金氏都事昌祖女。生三男一女。男長大乾。次象乾。次峻乾。女適李萬英。進士。爾遠無子。朴愰生四男三女。男長漢老。次台老。次文老。次聃老。女長適李在雅。敎官。次適曺時虎。次適李元禮。凡玄孫中司馬者一人。斗元。五世孫中司馬者067_527a二人。壽頤,壽仁。大科者一人。憼。六世孫中司馬者六人。萬,柱,廷柱,光玉,光岳,光翊,光稷。大科者一人。光璧。七世孫中司馬者二人。綽,陽羽。餘不盡錄。銘曰。
公淑儒訓。博學多聞。處昏以哲。逢明而騫。輸忠所事。瀉其血肝。慮遠若迂。言直若愚。卒蹈于坎。復張以弧。身躓心亨。名因謗榮。尙冀來世。視此幽銘。通政大夫前行承政院同副承旨錦城丁範祖撰。

사계전서 제9권
 행장(行狀)
송강(松江) 정 문청공(鄭文淸公) 철(澈) 행록(行錄)

공은 영특하고 빼어나며 숙성하여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10세 이전에 문장의 뜻을 모두 통달하였다. 공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을사사화를 겪어 가족이 모두 쑥대밭이 되어 부형들이 가르치는 데 뜻이 없었다. 이로 인해 학문을 하지 못해 성현의 경전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장성하고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였다.

공은 조금 장성하여서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배워 나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다. 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항상 그 인품을 사모하고 대절(大節)을 칭송하여 “출처(出處)의 올바름은 근세의 유학자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를 기쁨으로 대하였으며 초상과 장례와 제사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였다. 이는 남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몸소 보고서 감탄하여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공은 항상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 반드시 절하고 곡하면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몹시 극진하여 노년에 이르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공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깐깐하여 수령이 주는 이바지일지라도 평소 모르는 사람이면 부채 한 자루라도 받지 않았고, 설령 평소 아는 사람일지라도 많으면 또한 받지 않았다.

공은 마음이 밝고 명쾌하며 말이 호방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때가 많았으나, 대신으로서 너그럽게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없었으며 또한 때로 주색(酒色)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흠이었다.

공은 평소 질시하고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아서 조금도 감춰 주지 않고 반드시 드러내어 말한 까닭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은 강원도와 전라도 양도(兩道)의 방백(方伯)이 되었을 적에 도내의 공안(貢案)과 요역(徭役)을 모두 수합해서 균일(均一)하게 심사하여 결정하니, 백성들이 이를 아주 편하게 여겼는데, 얼마 안 되어서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공의 누님이 인묘(仁廟)의 숙의(淑儀)였던 까닭에 공은 10세 이전에 동궁(東宮)을 출입하였다. 명묘(明廟)가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놀고 장난쳤기 때문에 정이 매우 깊었다. 공이 급제하자 명묘는 방목(榜目)을 보고서 매우 기뻐한 나머지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가 급제하였다.” 하고서 곧바로 술과 안주를 하사하여 잔치를 도왔다. 또한 방(榜)을 낼 적에 서대문 밖을 경유하여 가도록 한 것은 성 위에서 방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사헌부의 관원이 되었을 때, 명묘의 종형(從兄)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고자 아내의 서모에게서 난 동생을 불러다가 몰래 죽이고서 그 자취를 없애 버렸다. 피살자의 친척이 송사를 일으켜 옥사가 이루어졌을 적에 경양군 부자(父子)의 죄는 죽음에 해당되었다. 공이 법을 집행함에 흔들림이 없자, 명묘는 사사로이 공에게 이르기를, “우리 형이 장차 죽게 되었으니, 공은 너그러이 용서하기를 바란다.” 하였으나, 공은 끝내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경양군 부자는 결국 옥중에서 죽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명묘의 뜻에 거슬려 한직(閒職)에 버려진 지 2, 3년 동안 청반(淸班)에 오르지 못하였다.
기사년(1569, 선조2) 여름, 공이 지평(持平)이 되어 경연에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판서 김개(金鎧)가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입시를 자청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젊은 선비들이 당(黨)을 만들어 대신들을 경멸하여 이미 기묘년의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하였는데, 그 의도는 선비들을 배척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은 그 잘못을 강력히 말하기를, “기묘년의 조광조(趙光祖) 등은 모두 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김개가 남곤(南袞), 심정(沈貞)의 여론(餘論)을 이어받아 임금의 귀를 어지럽혀 화(禍)를 사림(士林)에 전가(轉嫁)시키려 하니 성상께서는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김개를 사대문 밖으로 내치도록 논핵하였으니, 이는 김개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뜻을 받들어서 장차 박순(朴淳), 박응남(朴應男), 기대승(奇大升) 등 17인을 처벌하고, 이어서 퇴계(退溪)에게까지 미치고자 한 것이다. 퇴계가 기고봉(奇高峯 기대승)에게 보낸 서신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실로 나랏일을 마구 바꾸고 정법(政法)을 어지럽혀 가며 장차 옛사람들을 쫓아내어 자기의 뜻을 이루고 당파를 심으려는 자들처럼 한 일이 없는데도, 저들이 이에 근거 없는 억지로써 죄를 삼아 옛날에 무고했던 일을 원용하여 오늘날을 배척하는 증빙 자료로 삼아 반드시 함정에 빠뜨리고야 말려고 한다.”라고 운운하였다. 이에 앞서 을사사화의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인묘는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는 이유로 문소전(文昭殿)에 모시지 못하고 연은전(延恩殿)에 부(祔)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주를 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명묘를 장차 문소전에 모시려고 했을 때, 퇴계 및 선비들은 모두 “인묘가 일세(一世)에 군림하였고 명묘는 그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그 후사(後嗣)가 되어 그의 자식이 되었으니 문소전에 배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준경은 “명묘는 인묘에게 있어서 아우로서 형을 계승하였기에 부자(父子)와는 다르므로 문소전에 배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삼사(三司)가 “이준경이 이기의 여론(餘論)을 따른다.”고 논계(論啓)하여 매우 다그치자, 이준경은 자기의 뜻을 굽혀 따랐으나 속으로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의논은 날로 두 갈래가 되었다. 퇴계가 지은 문소전주의(文昭殿奏議)는 이준경의 뜻을 불가하다고 여긴 까닭에 올려지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조짐이 되었다.

남명(南冥)과 퇴계……중략(中略)……동서 분당의 근원이었다. -권2에 보인다.

선묘(宣廟) 무진년(1568, 선조1)……중략……그 본심이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권2에 보인다.

위의 두 조목은 신용석(辛用錫 신경진(辛慶晉))과 이옥여(李玉汝 이귀(李貴))의 물음에 옛일을 기억하여 대답한 것이었는데, 지금 모두 동서 분당에 관한 부분의 아래에 기록하였다.

상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론하다가 문제(文帝)가 박소(薄昭)를 죽이는 대목에 이르러, 강관(講官)들이 어떤 사람은 정자(程子)의 의논이 옳다 하고 어떤 사람은 이덕유(李德裕)의 의논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문제가 박소를 등용한 것이 잘못된 일이다. 외척을 등용하여 여기에 이른 것은 바로 문제의 잘못이다.” 하였다. 젊은 선비들이 상의 뜻을 미루어 알고서 모두 동인(東人)을 주로 하여 서인(西人)을 공격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 동서 분당설이 성행하였을 때 공은 당시의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벼슬할 뜻이 없어서 직제학(直提學)을 그만두고 호남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듣고서 사사로이 공에게 이르기를, “떠나지 말라. 내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한다.” 하였으나, 공은 끝내 머물지 않았다.

무인년(1578, 선조11)에 율곡이 양화도(楊花渡)에서 한양으로 오자, 공이 찾아가 만났다. 율곡에게 말하기를, “형은 이발(李潑)을 추대하고 있으나 결국은 반드시 그에게 모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은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고, 나 역시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었는데, 공은 “후일 반드시 나의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공의 말대로 과연 증험할 수 있었다. 나는 공의 선견지명에 깊이 탄복하여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무인년 이후로 동인들의 행위가 지극히 편협되고 사악하였다. 율곡 선생이 상소하기를, “심의겸(沈義謙) 때문에 수사(收司)의 율(律)이 선량한 선비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정철(鄭澈)은 충성과 청렴과 강직과 절개를 가지고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비록 도량(度量)이 좁고 식견이 편협하여 고집스러운 병폐가 있긴 하지만 그 기개와 충절로 논하면 실로 한 마리의 독수리[一鶚]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리어 당인(黨人)으로서 사악(邪惡)하다는 이름을 더하여 조정의 반열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 일은 논할 게 없고 그 사람이 물러간 것은 이미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다.
애당초 율곡은 동서 분당을 조정의 큰 불행으로 생각하여 이를 화합시키려는 계책으로 상소문에 항상 양쪽 모두 선비라고 말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발(李潑)과 정인홍(鄭仁弘)은 자빠뜨리고 깔아뭉개려고 생각하여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니 선비라고 지목할 수 없다. 숙헌(叔獻 이이(李珥))의 의논은 지극히 구차하니, 나는 그와 더불어 서로 화합할 수 없다.” 하였다. 율곡이 장편의 편지를 써서 반복하여 논변하자, 공은 끝까지 따르지 않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그대 뜻은 산과 같아 끝내 움직이지 않고 내 마음은 물과 같아 몇 차례나 돌아왔던가. 물 같고 산 같은 게 모두 운명인 터 갈바람 부는 강 언덕에 홀로 거니노라.[君意似山終不動 我心如水幾時廻 如水似山皆是命 秋風江上獨徘徊]” -공의 문집(文集)에는 마지막 구가 “가을날 흰머리로 생각을 추스르기 어려워라.[白頭秋日思難裁]”라고 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당시 율곡의 의논만 이와 같았을 뿐 아니라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우리들 또한 공의 말이 과격하다고 생각했었다. 이후로 동인들의 행위가 지극히 흉악해져서 계미년(1583, 선조16)에 이르러 그들의 마음이 모두 드러나게 되니, 서로 화합시키려는 율곡의 계책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의 말은 하나하나 들어맞았다. 그러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5) 인목왕후(仁穆王后)의 폐위(廢位)에 대한 논의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의 밝은 식견을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갑신년(1584, 선조17) 가을, 서집(徐諿)이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나를 초청하였다. 당시 교관(敎官) 박형(朴泂) -첫 이름은 수(受)였다가 형(泂)으로 고치고, 후일 또다시 주(洲)로 이름을 바꾸었다.- 을 상객(上客)으로 하여 그 문생(門生) 15, 6인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에 박형이 그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요즘 사람들이 모두 정철을 소인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알 수 없다.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강개(慷慨)한 사람을 어떻게 소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윤삼빙(尹三聘)에게 “그대는 선생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라.”고 말하였으나, 윤삼빙이 묵묵히 말 한마디가 없자, 제생들이 다 그를 다그쳤다. 윤삼빙이 자기 당인(黨人)들에게 말하기를, “처음에는 선생께서 시비를 말씀하지 않다가 오늘 처음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하였다. 그 문도 가운데 오직 심경(沈憬)과 윤삼빙만 시론(時論)에 붙어서 그들의 논의가 지극히 편협되고 사악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심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22) 10월에 공이 전 이상(貳相)으로서 고양(高陽) 신원(新院)에 있을 무렵 장자(長子) 기명(起溟)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역모가 일어나자, 공은 편지를 보내어 나를 불렀다. 이른 아침에 찾아가 뵈니 공이 말하기를,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가게 될 것이다.”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중의 모든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공의 아들 종명(宗溟)과 윤효원(尹孝元)만 남아 있었는데, 공이 “내가 숙배(肅拜)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께서 명하여 부르신다면 괜찮지만 이러한 때 숙배한다면 기회를 편승했다는 혐의가 있으니, 아주 안 될 일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역적이 임금을 해치려고 하는데 내가 중신(重臣)으로서 지방에서 역변(逆變)을 관망하면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신하의 의리상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대가 말한 것은 바로 혐의를 피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때 숙배한다면 공은 반드시 추관(推官)이 될 것입니다. 이발, 백유양(白惟讓) 등의 죽음을 공의 힘으로 늦출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큰 옥사에 잘못 걸려든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인데, 공은 하나하나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발과 백유양이 나 때문에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덕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대의 말은 시종 혐의를 피하려는 것이다. 신하의 분수와 의리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다.” 하였다.
그 후에 우계(牛溪)와 제공(諸公)들이 모두 공에게 숙배하기를 권하였으며 3, 4일 후에 대궐에 나아가 단자(單子)를 올리니, 정원(政院)과 옥당(玉堂)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공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공이 재상으로 들어가 국청(鞫廳)을 왕래할 때, 반드시 우계의 집을 찾아갔으며 우계 역시 공을 찾아가 모든 일을 상의하여 처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추관(推官)이 되었을 때, 내가 말할 일이 있어서 공이 있는 곳을 찾아갔더니 공이 창덕궁(昌德宮) 문밖 사가(私家)에 묵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조(吏曹)에서 일찍이 정여립을 황해 도사(黃海都事)와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의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전관(銓官)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이조에서 어떻게 미리 그가 흉역(凶逆)한 일을 꾸미리라고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공죄(公罪)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죄를 가지고 사람을 죽을 곳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공죄로써 간혹 파직당하거나 고신(告身)을 빼앗긴 자들이 빈번하게 있다. 역적 정여립이 만일 병사를 거느리는 직책을 얻었더라면 나라의 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공죄라 할지라도 논계(論啓)를 올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근래에 논계한 사람들은 반드시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만약 상이 다시 진노하시어 하옥시켜 무겁게 처벌한다면 대간(臺諫)들이 그를 다시 논하여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여 재삼 논변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우계가 주장한 것이다.” 하기에, 나는 “우계의 말일지라도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 당시 전관(銓官)은 바로 이산해(李山海)였다. 얼마 안 되어 정언(正言) 황신(黃愼)이 마침내 이 일을 논하였고 얼마 후 도헌(都憲) 홍성민(洪聖民)이 또한 배척하자, 상이 진노하여 모두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공이 좌상(左相)이었을 때 유성룡(柳成龍)이 우상(右相)이었는데 내가 때마침 공을 찾아가자, 공이 말하기를, “어제 이현(而見 유성룡)이 왔었다.” 하기에, 내가 묻기를, “유공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하니, 공이 답하기를, “유성룡이 ‘공과 더불어 함께 국가의 중임(重任)을 맡았으니 국가를 위해서 중대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기에, 내가 ‘오늘날 중대한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유성룡이 ‘바야흐로 오늘날 중대한 일은 태자를 세우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그렇습니다. 태자를 세우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중대한 일이니 마땅히 힘을 합하여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영상(領相) -이산해- 이 따르겠습니까?’라고 말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한다면 영상이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여 서로 약속하고 떠나갔다. 이 일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중대하니,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서 곧바로 알고 지내는 여러 재상들에게 통지하여 다시 우상과 함께 상의하고서 이를 영상 이산해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궐에서 만날 날짜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영상은 오지 않았다. 또다시 날짜를 약속하였으나 영상은 또다시 오지 않았다.
그후 심사눌(沈士訥) -종민(宗敏)- 을 통하여 들으니, “영상이 좌상과 우상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곧 상에게 올리고, 이를 계기로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헐뜯어 상의 귀를 현혹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지만 공과 유성룡은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입대(入對)하였을 적에 영상이 끝까지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자 공이 이에 아뢰었으나 상은 대답이 없었고 우상 또한 말이 없었다. 부제학 이성중(李誠中), 대사간 이해수(李海壽)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는 대신의 뜻이 아닙니다. 실은 신 등과 함께 의논한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은 또한 대답이 없었다. 이는 이산해가 참소한 말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성중 또한 태자를 세우기 위해 장차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집에 있으면서 차자의 초안(草案)을 잡고 있었는데, 알고 지내는 별감(別監 김희수(金希壽)를 지칭함)이 이성중을 찾아와 만나 보고자 하자, 이성중은 일이 있다 사양하고 훗날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정말 부득이한 일이 있습니다.” 하자, 이성중이 바로 나가보니, 별감이 말하기를, “듣자니, 부제학이 태자 세우는 일로 차자를 올리려 한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상께서 바야흐로 진노하여 제가 성상의 편지를 가지고서 영상의 집을 오간 지 벌써 여섯 차례입니다. 이런 때에 차자를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어서 소맷자락 속에서 성상의 편지를 내보여 주었는데, 그 크기가 서까래만 하였다. 이성중은 미처 차자를 올리기도 전에 특명으로 충청 감사로 나가게 되었고, 이해수는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으며 공은 뒤이어서 실패하여 강계(江界)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영상 이산해가 송강과 우계를 유언비어로 헐뜯어 온 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상은 항상 별감으로 하여금 왕래하는 빈객(賓客)들을 살피도록 하였다. 내가 그때 공을 방문하였고 또한 우계를 만났는데 별감이 임금께 이 사실을 말하였다. 유성룡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나를 호조 좌랑에 첫째로 의망(擬望)하였고 그후 또다시 의망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김장생(金長生)은 음관(蔭官)이니 낭관(郞官)이 될 수 없다.” 하였다. 그런데 그 후의 정사(政事)에서 이경욱(李慶郁)을 문음(門蔭)으로서 호조 낭관에 의망하자 곧 낙점(落點)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산해를 찾아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이산해가 걱정과 수심과 답답함으로 머지않아 죽을상이었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에게 ‘얼굴이 왜 그 모양입니까?’라고 물으니, 이산해가 답하기를, ‘나는 장차 죽을 것입니다. 계함(季涵 정철(鄭澈))은 그렇지 않은데 한 어른이 기어이 나를 죽이려고 하니, 나는 그에게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이산해는 ‘나는 여기에 있어도 바깥에서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는 이산해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정여립을 김제 군수로 의망한 적이 있었는데 우계가 송강에게 상의하여 이를 논죄하려고 하였다. 이산해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죄를 모면할 계책을 도모할 즈음에 때마침 태자를 세우려는 의논이 있었다. 이산해는 이를 계기로 송강과 우계를 모함할 계책을 세우려고 그 부자가 밤낮으로 모의하였고, 김공량(金公諒)에게 아첨을 다하여 섬기면서 생각지도 못할 말로써 연분을 이용해서 헐뜯어 상의 귀를 현혹하였다. 또한 구봉을 통하여 자기가 벌써 그 일을 알고 있음을 말하여 그로 하여금 우계와 송강에게 통보하여 그들이 그만두기를 바랐었다. 그가 말한 ‘한 어른’이란 바로 우계이다.

상은 이산해의 참소를 듣고부터 공을 몹시 의심한 나머지 화변(禍變)이 조석에 닥칠까 염려하여 포도대장 신립(申砬)으로 하여금 관군(官軍)을 거느리고서 신성군(信城君)의 집에 숙직하게 하였다. 그 기미를 안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에 연소한 선비로서 서인(西人)으로 지목받아 온 심희수(沈喜壽) 등과 같은 사람은 공과 함께 연좌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앞다투어 공의 잘못을 말하여 화를 모면하려고 생각하였고 또한 명망 있는 관료들에게 급급하니, 그 계책이 가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성문준(成文濬) 같은 사람은 그 후에 우계와의 교유를 끊고자 이이첨(李爾瞻)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돌아가신 부친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정철과 함께 일하였겠습니까.” 하였으며, 또한 조차석(曺次石)과 합천 군수(陜川郡守) 김호수(金虎秀)의 행차(行次) -임인년(1602, 선조35)- 로 인하여 다시 정인홍(鄭仁弘)을 통해서 우계와 송강이 친하지 않았다는 실상을 밝혔다. 김호수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내암(萊菴) -정인홍- 이 우계와 의혹이 풀려 그의 잘못을 깊이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후일 내가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崔永慶)의 행장을 살펴보니, 근거 없는 흉악한 말을 조작하여 아울러 송강, 우계, 윤해원(尹海原)까지 날조하여 꾸짖음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가 말한 의혹이 풀렸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성문준은 부친을 위해 정인홍에게 애걸하면서 공과 함께 일하지 않았던 것과 또한 서로 친하지 않았다는 실상을 밝혔고, 그 당시 행해진 모든 일들을 모조리 공에게 잘못을 돌리어 화를 면하고자 하였으나, 그 계책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황신(黃愼)과 성문준이 이 화근의 발단이 오로지 우계가 이산해를 논죄하려는 데에서 연유한 것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엉성하다 말할 만한데, 서인 쪽의 연소한 무리들이 혹 저들과 함께 공의 잘못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어 그들의 뜻에 영합하고자 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믿기 어렵고 세상 살아가는 길이 위태롭기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니 두려울 뿐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살아 있는 이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였는데, 만일 송강과 우계가 다시 살아난다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

공은 위리안치 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고 날마다 《대학(大學)》을 외면서 그 소주(小註)를 모아 가시로 둘러친 담의 큰 나무에 써 놓고 완색(玩索)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 연간에 최영경 집안의 문서를 수색하다가 ‘전주 이씨 뿌리를 흔드는 유발승[仙李根搖有髮僧]’이란 시가 발견되었다. 이에 상이 국청(鞫廳)으로 내려 보내어 이를 추문(推問)토록 하자, 공이 계달(啓達)하기를, “최영경은 시를 짓지 못합니다. 이 시는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에게 구전(口傳)되어 온 지 오래이니 반드시 최영경이 지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여, 공이 최영경의 구명(救命)을 한두 차례 한 것이 아니었다. 최영경의 원정(原情)에, “정여립과 한 번도 서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최영경의 문서 속에 정여립의 편지가 있었다. 상의 교지(敎旨)에, “하늘 그물이 크고 커서 엉성하지만 죄를 짓고는 벗어나지 못한다.” 등의 말씀이 있자, 공은 회계(回啓)하기를, “최영경의 원정은 모년(某年)부터 한 번도 서신을 통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년 전의 서신이기에 성상을 속인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최영경의 문서 가운데 또한 ‘양산(梁山)에서 보내온 청어(靑魚) 80편(編), 함안(咸安)에서 보내온 70편,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가 보내온 500편’이 언급되어 있었다. 상이 그 유래를 묻자, 최영경은 아뢰기를, “양산은 함안의 작은 지명이니, 모두 함안에 사는 노비들이 보내온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함안은 군수(郡守) 권용중(權用中)이 보낸 것이며 양산 또한 군수가 보낸 것인데 최영경이 임금에게 아뢴 말은 다른 말로 꾸민 것이니 지극히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지만, 역옥(逆獄)의 일에 관계되지 않은 까닭에 다시는 사실을 규명하지 않았다. 공은 일마다 최영경을 위해 구명하고 해명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여러 해 전에 신응구(申應榘)가 말하기를, “최 사축(崔司畜 최영경)의 기상이 깨끗해서 사양하고 받는 것이 분명하니, 아무리 우계(牛溪)라 하더라도 따라갈 수 없다.” 하였다. 그런데 이 문서를 살펴보면 만호가 보내온 청어 500편과 함안, 양산에서 보내온 것들은 모두 관물(官物)인데도 이처럼 많은 것을 가로챘다. 그가 사양하고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 어디에 있는가. 신응구가 높이 받들어 존경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송강이 위관(委官)에서 체직되자 유성룡이 이를 대신하였다. 이발(李潑)의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잡아다 중형으로 국문하여 80세 노부인은 결국 장형(杖刑)으로 죽었다. 그 후에 이양원(李陽元), 최흥원(崔興源) 또한 추관(推官)이 되어 이발의 어린 아들 명철(命鐵)을 국문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10세가 채 되지 않았었다. 상이 “즉사(卽死)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형(刑)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면서 꾸짖자, 이양원 등은 두려워하여 나졸로 하여금 어린아이의 목을 부러뜨려 죽이도록 하였다. 그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목격하고서 이 사실을 말하였다. 동인(東人)들이 역옥의 추관이 마음대로 법 적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유성룡과 이양원 등 또한 그 노부인과 어린 아들을 어찌 살려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결국 구해 주지 못한 것은 사세(事勢)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발과 최영경의 죽음을 모두 공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은 어찌 편벽된 것이 아니겠는가.

구봉(龜峯)이 이발(李潑)의 무리들에게 질시를 당하여 장차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세상에 용신(容身)할 수 없도록 하는 바람에 구봉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공이 광주(光州)에 있을 때 그를 불러 머물게 하니, 사람들은 그 대의(大義)에 감복하였다. 공이 재상으로 들어가자 헐뜯는 자들이 또 진언(進言)하기를, “송익필이 정철의 집에 머물면서 유생으로 하여금 재상을 해치도록 꾀하였고 장차 조헌(趙憲)으로 하여금 또다시 태자를 세우라는 상소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진노하여 특명으로 잡아다 국문토록 하여 여러 차례 형을 받고서야 방면되었다. 이 역시 이산해 부자가 꾸민 일로써 모두가 공과 우계와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모함하고자 한 때문이다. 만일 사악한 참소가 없었다면 상이 어떻게 송익필이 공의 집에 머문지를 알 수 있었겠는가. 구봉을 위해서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강의 집은 반드시 멀리 피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서로 누가 될 것이다.” 하였지만 구봉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고 공 또한 만나 보기를 청하여 혐의를 두지 않았으니, 이는 더더욱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부분이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공은 이미 파면되었지만 임금의 노여움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홍여순(洪汝諄)이 대사간이 되어 죄를 더하고자 전한(典翰) 우성전(禹性傳)을 찾아가 의논하려고 하니, 우성전은 기피하여 만나 주지 않았다. 또다시 부제학(副提學) 김수(金睟)를 보고서 이를 의논하니, 김수가 말하기를, “대신을 파면한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치게 중한 것인데 어째서 구태여 다시 그에게 죄를 더하려고 하십니까.” 하였다. 홍여순은 곧바로 이를 상달(上達)하여 특명으로 김수를 경상 감사로 나가게 하였으니, 이는 김수가 태자를 세우라는 차자(箚子)로써 이미 상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우성전 역시 공의 당인(黨人)이라 하여 죄를 입었다. 김수와 우성전은 공과 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참소를 자행하는 이산해 등의 간악한 죄상(罪狀)을 알고서 그들과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종신토록 등용되지 못하였다.

역적 정여립이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미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독서로써 명망을 얻었다. 그리고 율곡을 당대의 대유학자라 생각하여 율곡의 문도들에게 심지어는 “이미 성인의 지위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이 귀양 갔을 때에는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도깨비 같은 놈들은 이미 죄를 받고 죽었으나 거간(巨姦) -유성룡을 지칭함- 은 아직도 시론(時論)을 장악하고서 화(禍)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마음을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의 화는 오늘보다도 더 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이 죽자 동인의 세력이 매우 커진 것을 보고 또한 이발(李潑)의 말을 듣고서 그들에게 아첨하여 경연(經筵)에서 율곡과 공과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심하게 욕하니, 상이 그의 말을 미워하여 몹시 배척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그가 자기에게 붙은 것을 이롭게 생각하였고 또한 당파를 심고자 그를 끌어들여 부추기고 권장하면서 자주 상 앞에서 칭찬하여 심지어는 산야(山野)에 묻혀 사는 소박하고 정직한 선비라고까지 인정하였다.
후일 율곡의 조카 이경진(李景震)이 율곡에게 보낸 정여립의 편지를 상소와 함께 올리면서 이로 인하여 정여립이 이랬다저랬다 번복한 간악스런 형상을 아뢰자, 상이 시신(侍臣)들에게 묻기를, “정여립의 편지를 본 사람이 있는가?” 하니, 교리(校理) 이덕형(李德馨)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벗 이귀(李貴)가 보고서 저에게 보여 줬던 까닭에 볼 수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邢恕)이다.” 하고서 배척하여 멀리하였다.
그의 역모가 드러나게 되자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유이현(柳而見 유성룡(柳成龍))이 산야에 묻혀 사는 소박하고 정직한 선비라고 보았는데 지금은 어떤가?” 하였다. 유성룡은 이 말에 큰 원한을 품게 되었고 또한 그의 성명이 죄인의 문서에서 나오자 죄를 입을까 아주 두려워한 나머지 곧 상소를 올려 논변하기를, “신이 평소 정여립을 미워하여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신의 벗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을 멀리하여 청망(淸望)에 올리지 않음으로써 논박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경중에게 관작을 추증하도록 명하였고 그 당시 대관(臺官)들을 조사하여 정인홍(鄭仁弘), 박광옥(朴光玉)의 직첩을 삭탈하였다. 정인홍은 이로 인해서 공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으로 깊이 의심하였고 또한 유성룡의 상소에 원한을 품고서 ‘정철과 유성룡이 기어이 나를 죽이고자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죽은 후에 무덤 속에 묻힌 시체에까지 화(禍)를 끼치고자 하였고, 유성룡 또한 결국은 그 당인들에게 배척당하게 되었다. -정인홍 역시 일찍이 상소에서 유성룡을 ‘흉악한 사람’이라고 배척하였다.

동서의 당이 나누어진 다음 율곡이 화평(和平)과 보합(保合)의 논의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발, 김응남(金應南), 정인홍 등이 마음대로 배척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생각지도 못할 악명(惡名)을 서인에게 더하여 극형에 몰아세우려고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우리들은 따를 수 없다.” 하였고, 우성전 역시 유성룡과 일치되어 이발 등과 의견이 달랐다. 동인 가운데에서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호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우성전의 집은 남쪽에, 이발의 집은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파직을 당하여 안동(安東)에 있을 때 첨지(僉知) 한교(韓嶠)에게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지난날 율곡이 말했던 “저들은 공신이 되려고 한다.”는 말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이 이미 방면되었다는 조보(朝報)와 기성(杞城) 유홍(兪泓), 오성(鰲城) 이자상(李子常 이항복(李恒福)) 등 여러 재상들의 축하하는 편지가 모두 강계(江界) 귀양지에 도착하였으나 강계 부사 홍세공(洪世恭)은 여전히 굳게 구금한 채 방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이산해 등의 뜻을 받들어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임진년에 선조대왕이 피난하는 길에 박천(博川)에 머물다가 왜적이 패강(浿江)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서 정신없이 어가를 옮겨 의주(義州)로 떠났는데, 사관(史官) 박정현(朴鼎賢), 임취정(任就正), 김선여(金善餘), 조존세(趙存世) 등이 사초(史草)를 불사르고 도망가자, 공은 강력히 그들을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이 공을 더욱 심하게 원망하였다.

임진년에 공은 정주(定州)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구사맹(具思孟), 구성(具宬)이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김빈(金嬪)이 술과 안주를 보내오자 구씨 부자가 이를 공에게 사양하니, 공이 벌떡 일어나 떠나면서 말하기를, “이는 대신이 먹을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특명으로 양호 체찰사(兩湖體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아무리 동인으로서 공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도 공이 맺고 끊기를 엄정하게 하는 데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정주에 머물 때, 공이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공은 나와 함께 일하면서 나를 생각지도 못할 곳으로 빠뜨려 놓고서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한 사람으로서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저 역시 공이 서운해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저를 너무 심하게 의심한다고 한 까닭에 감히 묻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공은 어찌하여 죽였습니까?” 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공이었다면 그들의 죽음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공이 “나라면 구했을 것입니다.” 하자, 유성룡이 말하기를, “그처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오늘날 연소한 무리들로서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죽인 것을 모두 공에게 죄를 돌리고 있는데, 모르고서 이처럼 말한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어떤 사람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히려 시론(時論)에 영합하여 부화뇌동한 자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음험(陰險)하니 가소롭고도 두렵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동인들이 공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해서 죽였다고 생각하여 장차 죄안(罪案)을 만들려고 할 적에 정엽(鄭曄)은 수찬(修撰)으로서 다른 의견을 내세워 따르지 않았고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에서도 정엽의 의견을 따른 이가 많았다. 윤방(尹昉) -응교(應敎)-, 신흠(申欽) -집의(執義)-, 이경함(李慶涵) -장령(掌令)-, 신경진(辛慶晉), 이시언(李時彦) -사간(司諫)-, 박동열(朴東說), 박동선(朴東善) -정언(正言)-, 조수익(趙守翼) -지평(持平)-, 이시발(李時發) -정언-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의견을 세워 버티다가 체직되어 뿔뿔이 외직(外職)으로 전보(轉補)되었다. 그해 겨울 신응구가 함열(咸悅) 원님으로 상경하는 길에 정산(定山) 임지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상 김응남(金應南)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불렀는데, 그를 찾아가면 이번에 최영경을 모함해서 죽인 죄를 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사(三司)에서 다른 의견을 세운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로 귀결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내가 “나는 진즉 이 의논이 결국 하나로 귀결되지 못할 줄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 봄, 김수(金睟)가 호조 판서로서 양호(兩湖)로 갈 적에 나는 정랑(正郞)으로 동행하였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기축년(1589, 선조22)에 나의 아내에게 사람들이 정철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 하였다. 내가 “무얼 가지고 그처럼 말하십니까?” 하고 묻자, 그가 말하기를, “기회를 틈타 들어오니, 이로써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역모가 처음 일어났을 때, 송강이 숙배(肅拜)를 하고자 저를 불러 의논하였는데, 저 역시 사람들의 말이 있을까 염려하여 강력히 저지하기를, ‘지금 숙배하는 것은 그 발자취가 기회를 편승한 데에 관련되니 몹시 옳지 않습니다.’ 하자, 송강이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은 혐의를 피하려는 것이다. 내가 중신으로서 역적이 임금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변란을 관망(觀望)하며 나가지 않는다면 신하로서의 의리에 어떻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김수가 곧 오해를 풀고서 말하기를, “송강의 말이 옳고 옳은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처지에 있었다면 나 역시 반드시 숙배하였을 것이다. 송강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김수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축년에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나에게 ‘정철이 나와 그대를 죽이려고 하여 자주 깜짝깜짝 놀랍니다.’라고 말을 전해서 나는 정철이 무엇 때문에 나까지 죽이려고 하는가 의심한 나머지 정철을 찾아가 그의 말과 얼굴빛을 살펴보고 다시 그가 하는 일을 살펴보니 전혀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곧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도는 나와 더불어 마음을 함께하여 송강을 모함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계가 전관(銓官)을 논죄하려고 했다는 말은 바로 이희삼(李希參)이 전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김수에게 말하기를, “이성중(李誠中)이 알고 지낸 별감(別監)을 공은 아십니까?” 하니, 그가 알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경인년에 그 별감이 성상의 편지를 가지고 이산해의 집을 왕래했던 일을 공은 들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는 듣지 못하였다. 다만 이성중이 부제학으로 있을 때 태자를 세우는 일로써 차자(箚子)의 정본(正本)을 모두 써 놓았으나 미처 상달(上達)하기도 전에 방백(方伯)으로 나갔기 때문에 내가 그를 대신해서 마침내 그 차자를 올렸다.”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어느 날 송강을 찾아가니, 하인이 분발(分撥)을 올리자 송강이 훑어보고서 저에게 보여 주었는데, 사헌부(司憲府)의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의금부가 엄히 다스리지 않고서 최영경으로 하여금 자진(自盡)하도록 하였으니, 색낭청(色郞廳)을 파직하소서.’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옥사가 지연되면 혹시라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을 것인데, 오늘날의 처사 또한 이와 같으니 한탄스럽습니다.’ 하자, 송강이 곧바로 대사헌 윤두수(尹斗壽)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이런 일을 어째서 나와 상의하지 않고 가볍게 발설하였습니까?’ 하고서, 이어서 그 편지를 저에게 보여 주고서 윤두수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윤두수가 답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겠소.’ 하였습니다.” 하니, 김수가 이 말을 경청하였다.
그후 임인년(1602, 선조35)에 당인(黨人)이 최영경의 일로써 우계를 모함, 날조하여 추죄(追罪)하려고 할 때, 윤의립(尹義立)이 아주 준엄하게 논계(論啓)하였다. 김수는 윤의립을 보고서 비난하여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을 통하여 정철이 윤두수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대해 들었다. 최영경의 일은 정철도 오히려 관련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성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어찌 이처럼 잘못하는가.” 하였는데, 윤의립이 심종직(沈宗直)을 보고서 말하기를, “김 판서(金判書 김수를 지칭함)가 김장생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나는 모르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당시 서현기(徐玄紀) -성(渻)- 가 도승지로서 강첨(姜籤)과 함께 입직(入直)하였는데, 홍경신(洪慶臣)이 강첨을 찾아와 정철과 윤두수 두 공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일을 말해 주었다. 홍경신이 떠나간 뒤에 강첨은 또다시 서현기에게 말을 전하였다. 서현기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윤가회(尹可晦) -이름은 방(昉)으로 윤두수의 장자이다.- 가 반드시 공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정철과 윤두수 두 공은 모두 나와 절친하며 또한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니, 서현기가 말하기를, “그렇긴 하지만 윤가회 등은 그 계사(啓辭)를 숨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계사는 구성(具宬)이 발론(發論)한 것인데 윤두수는 장관(長官)으로서 따라 동참한 것이다.

무술년(1598, 선조31)에 유성룡이 북인(北人)들에게 배척당하여 심지어는 한탁주(韓侂冑)와 사미원(史彌遠)에 비유되어 마땅히 고가(藁街)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또한 “전원(田園)이 온 나라에 널려 있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계함(季涵 정철(鄭澈))을 시기하고 질시하였지만 오히려 감히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비방을 더하지 못했는데, 나는 계함만 못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그 당시 김수가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삼사(三司)가 일제히 일어나 유성룡을 깊이 치죄(治罪)하는 것은 일찍이 송강과 함께 태자를 세우자는 의논을 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지난날 송강을 치죄했던 것과 매한가지이다.” 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유대정(兪大禎)이 신경숙(申敬叔 신흠(申欽))에게 말하기를, “저는 이홍로(李弘老)와 두터운 교분이 있었습니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제가 한림(翰林)이 되었을 적에 이홍로는 좌랑(佐郞)으로서 상중에 있었습니다. 그가 저를 보자고 하기에 찾아가 보았더니, 이홍로가 말하기를, ‘제가 정철을 잡으려고 합니다.’ 하기에, 제가 ‘무엇으로 잡으려고 하는가?’ 하니, 이홍로가 말하기를, ‘잡을 만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있었을 때, 김공량(金公諒)이 역(驛)에 말을 들여 놓자 제가 면포(綿布) 12동(同)을 주었더니 상께서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하고서, 이어서 벽 위에 걸어 놓은 은대(銀帶)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상께서 내린 은사(恩賜)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정 재상을 잡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홍로가 말하기를, ‘또 잡을 만한 일이 있으니, 여기에 어찰(御札)이 있습니다.’ 하면서, 책갑(冊匣)을 열어 젖히면서 어찰을 보여 주려고 하기에 제가 손을 저으며 저지하여 말하기를, ‘꺼내지 마라, 꺼내지 마라.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할지라도 그대는 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홍로는 또한 ‘아계(鵝溪 이산해)가 태자를 세우려고 청한 뜻은 신성군(信城君)에 있었으며, 나랏일은 우리들이 하기에 다른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그 후에 이홍로는 그의 생각대로 안덕인(安德仁), 이원장(李元長), 이진(李瑱), 윤탕(尹宕) -초명(初名)은 홍(宖)이다.-, 이성경(李晟慶) 등을 꼬드겨 정 재상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으며 마음속으로 이놈과 절교하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6품관에 승진하여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나아갈 적에 이홍로는 이미 상복을 벗고 동대문 밖으로 나와 전송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술잔을 돌릴 적에 이홍로가 술잔을 주기에 저는 부채를 휘둘러 그 술잔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이홍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진즉 교분을 끊은 것을 그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유대정의 이 말은 이홍로가 권세를 부리던 날에 있었던 것이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내가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있을 때, 당시 김우옹(金宇顒)이 두 차례나 찾아와 율곡 선생의 일을 말하였다. 내가 그에게 묻기를, “공은 율곡, 우계와 모두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나는 율곡에 있어서는 지금도 지난날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우계는 어떠합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우계는 의주(義州)에서 만났는데 말끝마다 계함(季涵 정철)을 비호하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이 송강을 비난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계함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이발과 최영경을 죽인 일을 공은 모르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발의 이름이 처음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을 때, 송강이 계사(啓辭)를 올려 구명(救命)하여 정배(定配)되었으나, 그후 역적의 공초에 자주 그의 이름이 나와 구명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송강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을 관여하였겠습니까. 최영경도 시종 구명을 해 주었는데 어떻게 죽였다고 말하겠습니까. 대개 역옥(逆獄)이란 큰일이니 추관(推官)이 어떻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나는 성주(星州)에 있었기 때문에 북쪽 변방으로 정배시켜 이발을 풀어 주려고 했던 일을 몰랐다. 공은 계함에게 있어서 사부(師傅)도 아니고 부형도 아니니, 그를 위해 구제하려고 하지 말라. 만세(萬世)의 공론(公論)이 두렵다. 나는, 최영경과 이발 두 사람은 계함이 죽였다고 생각하여 나의 뜻을 이미 정하였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의 뜻에 정한 것이 어찌 참으로 옳은 일이겠습니까. 만세의 공론을 공 역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공의 벗은 어째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죽였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이른바 나의 벗이란 유성룡을 가리키는가? 내가 말한 성룡이 맞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기축옥사에 죽을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어쩌다 죽은 자가 있었으니, 어느 누가 송강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계함을 유성룡과 어떻게 비교하여 똑같이 보는가?” 하기에, 나는 “처리한 일이 옳다면 모두 옳다 말해야 되고 그르다면 똑같이 그르다 말해야 할 것입니다. 유 재상은 공의 친한 벗이라는 이유로 느슨하게 치죄(治罪)하고 송강은 공이 미워한다는 이유로 심하게 치죄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내가 계함에게 무슨 미워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상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집안과 혼인을 정할 때 하교하기를, “김제남(金悌男)을 서인(西人)으로 지목하지만, 정철에게는 후생(後生)이 되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 보면 공이 죽은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상의 의심과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또한 김제남이 혹시 공과 같은 당인가를 의심한 것이다.

병오년(1606, 선조39) -정미년(1607, 선조40)인 것 같다.- 에 황사숙(黃思叔) -신(愼)- 이 부여(扶餘)에 있다가 연산(連山)으로 나를 찾아왔기에 내가 말하기를, “송강의 실패는 공에게 연유한 것인데 공 또한 어째서 많은 사람의 말을 따라 똑같이 송강을 헐뜯는가?” 하니, 황사숙이 말하기를, “송강의 실패가 어찌 저에게 연유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산해를 탄핵하여 논한 까닭에 이산해가 심복을 통해서 참소와 이간질을 하게 하고자, 수많은 불령(不逞)한 무리로 하여금 거짓으로 꾸미고 날조하여 남김없이 반박하고 공격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사리에 닿지 않는 참소와 이간질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고서 정철이 최영경을 사주해서 죽였다는 말에 가탁하여 죄안(罪案)을 단정짓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위관(委官)에서 체직된 후에도 옥사(獄事)에 죽은 사람들이 역시 모두 송강에게 죄를 돌렸으니, 그들의 계책은 매우 가소로운 것이다. 최영경의 옥사에 대해서 송강은 여러 차례 계(啓)를 올려 풀어 주려고 하였으니 ‘그를 다시 국문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본디 송강이 알았던 것이 아니다. 원한을 품고서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저 무리들 역시 최영경의 죽음이 실로 송강에게 연유하지 않았음을 어찌 몰랐겠는가. 요컨대 사람을 함정으로 빠뜨리고자 한 것이다. 그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한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간혹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유성룡과 같은 사람들도 성상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해서 감히 그 뜻을 어기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치죄하여,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휩쓸려서 마치 참으로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여기게 하였다. 우리들 역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고서 송강이 반드시 패배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에, 마음속으로 ‘만일 시배(時輩)들에게 결탁하여 의논한 바를 바꾸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앞다투어 송강의 잘못을 찾아내어 따라서 화답하였다. 선비들의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는 공이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동요되어 똑같이 비난한 것이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니, 황사숙이 말하기를, “송강의 실패가 어찌 저에게서만 연유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겨울, 나는 회양 부사(淮陽府使)로서 미처 임금께 사은숙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벗 심종직(沈宗直)이 먼저 강서(江西) 임지(任地)로 부임하러 가면서 정토사(淨土寺)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정시회(鄭時晦 정엽(鄭曄))가 나더러 함께 찾아가서 작별을 하자고 하기에 밤길에 찾아갔더니, 그 좌중에는 김창일(金昌一), 심종도(沈宗道), 심종탐(沈宗耽), 심종민(沈宗敏), 심종립(沈宗立)이 있었고 또 모르는 사람 몇몇이 있었는데, 매우 뒤숭숭하여 조용하지 못하였다. 김창일이 정시회에게 말하기를, “공의 말한 바가 어째서 지난날과 같지 않은가?” 하니, 정시회가 웃으면서 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어른의 말씀을 듣고 바꾼 것입니다.” 하였다. 김창일이 나를 향하여 그 사실을 듣고자 하기에, 나는 처음에는 먼 길을 와 피곤하다는 말로써 사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마땅히 말해야 할 일이니 설령 사람들의 시비를 들을지라도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송강의 패배는 오로지 태자를 세우려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고서, 이를 계기로 내가 전일에 들었던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서 말하기를, “별감이 성상의 편지를 가지고 왕래했던 일을 사눌(士訥 심종민)이 자세히 알고 있다.” 하니, 심종민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 별감의 이름은 바로 김희수(金希壽)입니다. 이 일은 내가 그 당시 곧바로 들은 것입니다.” 하였다. 심종도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유성룡이 태자를 세우려는 그 의논은 잘한 것입니까, 잘못한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부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니, 심종도는 다시 한마디 말도 없었으며 김창일 역시 다른 말이 없었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니 나의 말을 진실하다고 여겨서 크게 낙심하는 듯하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우리 집안이 화(禍)를 당하였을 때, 김창일이 자주 찾아와 간곡한 마음으로 위로해 주었고 또한 최명룡(崔命龍)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제는 희원(希元 김장생(金長生))과 친하게 믿는 벗이 되었다.” 하였다. 김창일은 이미 세상의 변을 겪었으니, 그의 소견 또한 전일과는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조비경(趙飛卿) -익(翼)- 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있을 당시 유대정(兪大禎)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있었다. 조비경에게 말하기를, “이산해 등이 김빈(金嬪)에게 참소하기를, ‘정철이 모든 관료를 거느리고서 김빈을 폐위시키고 빈이 낳은 왕자를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처음에는 믿지 않고서 ‘정철이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 하였는데 뒤이어 또 참소하기를, ‘이 뒤에 반드시 태자를 세우자고 청할 것이며 곧 이 일을 거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공이 그의 말대로 태자를 세우자는 의논을 하니, 상은 더욱 그 참소를 믿게 되어 기어이 정철을 제거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하였다.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은 이산해의 사위이다. 정승 이항복(李恒福)에게 말하기를, “김공량(金公諒)과 결탁하여 대궐에 참소를 자행한 것은 이경전(李慶全)이 한 짓입니다. 나의 장인이 어떻게 이경전과 함께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항상 이경전을 멀리하고 이산해를 위해 변명하였다. 그러나 이경전은 이덕형을 시기하고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이산해 역시 멀리하였다.
이산해가 신립(申砬)과 사귀면서 문을 걸어닫고 손님을 피한 채 주야로 서로 마주하여 신성군(信城君)을 태자로 세우자는 감언이설로 꼬드겼다. 신성군의 부인은 곧 신립의 딸이라 신립은 그 술수에 빠져 들었다. 또 이산해는 신립과 결탁하고자 그 유모를 불러다가 지극히 후대하였고 음식과 이바지를 끊임없이 날라댔다. 신립의 아우 신업(申礏)이 일찍이 이산해의 행위를 비루하게 여겨 그 무리 사이에서 말한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여러 부마(駙馬)들이 김빈(金嬪)을 위하여 잔치를 벌이다가 달성위(達城尉)가 어떤 집안의 복수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김빈이 말하기를, “복수에 관한 일은 말하지도 말라. 나는 지금까지도 복수를 하지 못했다.” 하였다. 이로 보면 김빈은 끝까지 참소한 말이 거짓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로부터 소인들이 참소하고 이간질할 적에 못하는 짓이 없어서 아무리 명철한 임금으로서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술수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상은 김빈이 낳은 왕자와 옹주들을 반드시 서성(徐渻), 구사맹(具思孟), 윤두수(尹斗壽),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의 자녀와 혼인을 시켰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서인으로 지목받은 자들이다. 성상의 뜻으로는 훗날 공의 당인들이 아무리 살해하려고 해도 이 여러 신하들에게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구사맹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윤두수와 혼인을 하려고 하는 것은 곧 한 고조(漢高祖)가 항백(項伯)과 혼인하기를 약속한 경우와 같다.” 하였다. 상이 참소를 믿고서 공을 의심한 바가 이와 같았으나 공이 끝내 임종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성상의 덕이 너그럽고 인자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해년(1611, 광해군3)에 교리(校理) 이경직(李景稷)이 찾아와 말하였다. 그의 부친이 판서 서성과 참판 정협(鄭協)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벌였는데, 정협이 송강과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을 원망하여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자, 서 판서가 꾸짖기를, “공은 잘못한 것이다. 정공과 홍공은 그대 집안에 큰 은덕이 있는데 어째서 그들을 원망하는가. 그 당시 그대 집안에서 한 일이 옳았던가. 그대 동생 정률(鄭慄)이 어떻게 해서 죽음에 이르렀는가.” 하자, 정협이 벌떡 일어나 절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억울함을 돌릴 곳이 없어 그랬던 것입니다.” 하였다.
기축년 역변(逆變 정여립 모반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 정협의 부친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으로서 추국청(推鞫廳)에 있다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고변(告變)한 자 두서너 사람을 참수하면 이 일이 없어질 것이다.” 하니,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상소하여 이 일을 말하자 상이 추관(推官)들에게 물으니, 김귀영(金貴榮)은 왼쪽 귀가 먹어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 하였고, 이산해는 엇비슷한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정언신은 상소하여 스스로 정여립과 친하지 않다는 사정을 밝혔고, 또 한 번도 편지를 통하지 않았다 하니, 상이 진노하여 이에 정언신과 정여립이 주고받은 편지를 내려 주면서 말하기를, “지난날 삼정승을 인견(引見)했을 때 정언신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면서 정여립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정을 말하였고 또 한 번도 편지를 통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 19장의 편지는 어떤 사람의 편지인가? 내가 눈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그날로 삼사(三司)가 정언신이 임금을 속였다는 이유로 논계(論啓)하여 곧바로 사사(賜死)를 명하였다. 공이 추국청에 말하기를, “정언신이 아무리 식견이 없으나 그는 대신(大臣)의 신분이니 갑자기 사사할 수 없다. 마땅히 형(刑)을 청하여 자복(自服)한 후에 죄를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산해는 처음에 따르지 않았으나 공이 반복하여 말하자 이에 허락하였고 곧 상에게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공이 다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좌우에서 모두 대답이 없었다. 공과 홍공이 알아듣도록 말하자 이산해가 그 말을 따랐고 또 아뢰어 비로소 윤허를 받아서 형벌을 한 차례 받은 후에 또다시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여 이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애당초 정언신의 상소는 실로 정률이 지어 올린 것이었다. 정언신이 임금을 속인 죄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정률은 회한(悔恨)을 품고서 죽었다. 서현기(徐玄紀 서성(徐渻))가 말한 “그대 집안에서 한 일이 옳았던가.”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동인이 서인을 몹시 미워하여 모함하려고 한 유래는 오래되었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송언신(宋言愼)이 전라 순무어사(全羅巡撫御史)로서 나주(羅州)에 이르러 기효증(奇孝曾)에게 말하기를, “당초 서인의 뜻은 흥녕군(興寧君)에게 있었지 금상(今上)에게 있지 않았다.” 하여, 그 말이 지극히 흉악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부터 동인의 의논이 나날이 편벽되고 사악해졌는데, 공은 “심의겸(沈義謙)에게 특별히 큰 잘못이 없는데 기어이 좋지 못한 곳에 두고자 하고 아울러 한쪽의 선비들까지 배척하니, 이는 그 마음 씀씀이가 매우 옳지 못한 것이다.” 하여 그들의 잘못을 심하게 말하였으니, 공이 더욱 미움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발과 정인홍의 무리가 그들의 뜻을 이루고자 심의겸으로 함정을 삼아 근거 없는 흉악한 말들을 조작하여 대궐에 흘려 넣으면서 서인들을 모함하여 상으로 하여금 미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후, 신사년(1581, 선조14)에 정인홍이 장령(掌令)으로서 심의겸을 논죄한 것이다. 그 계(啓)에, “심의겸은 윤두수, 윤근수, 정철 등과 서로 결탁하여 심복을 삼아 형세를 엿보았습니다.” 하였으며, 계미년(1583, 선조16)에 허봉(許篈)이 율곡을 논한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추양(鄒陽)이 말한 ‘한쪽 말만 들으면 간악한 일이 생기고 한 사람만 믿으면 난이 생긴다’는 것과 범수(范睢)가 말한 ‘어진 이를 질투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며 아랫사람을 부리고 윗사람을 가리는 것’인데도 주상께서 깨닫지 못하시니, 그 뜻은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였다. 그 말의 흉악함이 이와 같았다.
그 당시 율곡이 구봉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내가 죄를 입으면 저들은 공신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하자, 구봉이 말하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모습과 발자취가 벌써 드러나 이준경(李浚慶)을 원두(原頭)로 하여 논술한 말 가운데 그 근간이 이미 뚜렷합니다.” 하였다. 그후 을유년(1585, 선조18)에 정언(正言) 송언신(宋言愼) 또한 심의겸을 논죄하면서 그 당파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들어 아뢰기를, “심의겸이 박순(朴淳), 정모(鄭某) -송강(松江)-, 이모(李某) -율곡(栗谷)-, 박점(朴漸), 박응남(朴應男), 선군자(先君子),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신응시(辛應時), 이해수(李海壽) 등과 결탁하였고 성모(成某) -우계(牛溪)- 역시 그들의 농락에 빠졌습니다.……” 하였다. 이발은 대사간으로서 또 추계(追啓)하기를, “홍성민(洪聖民)과 구봉령(具鳳齡) 역시 그들의 당인(黨人)입니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사화(士禍)에 이르러 상이 오히려 공의 당인으로서 혹시라도 귀양살이와 출척(黜斥)에서 빠진 사람이 있을까 염려할 정도였기에 여기에서 벗어난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조정에 방(榜)을 붙이도록 명하기까지 하여 그들을 미워하는 뜻을 보여 주었다. 임진왜란 때 모든 죄인들은 다 석방되었으나 공만은 은혜를 입지 못하여 사면하지 못할 죄인과 다를 바 없어 매우 억울하였다. 상이 서쪽으로 피난 가다가 송경(松京)에 머물렀을 때에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모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상은 마지못해 비로소 방면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공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상은 또다시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신잡(申磼)에게 은밀하게 묻기를, “정철이 중국에 가서 동궁을 세우려 한다고 하던데 그 말이 참으로 사실인가?” 하니, 신잡이 공이 그렇지 않음을 지극히 밝히고 곧바로 공과 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말씀드렸다. 병신년(1596, 선조29)과 정유년(1597, 선조30) 연간에 홍가신(洪可臣)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였는데 구봉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정철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을 적에 친한 사람들을 큰 고을 수령으로 배치해 두어 장차 큰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저들이 아무리 공을 미워하기로서니 어떻게 감히 이처럼 흉악한 말을 더할 수 있는가. 저들의 생사람 잡는 수단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훗날 그들이 한 일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과 기미년(1619, 광해군11) 연간에 최현(崔晛)은 전(前) 정언(正言)으로서 무장(茂長)으로 내려와 살면서 영남을 왕래하였다. 당시 최명룡(崔命龍)과 서로 알고 지냈는데 공의 일을 언급하자, 최현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들은 모두 ‘정철이 만일 최영경의 효행을 말했더라면 그의 죽음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인데 시종 이 사실을 숨겼으니 지극히 간사하다.……’ 하는데, 내 일찍이 사관(史官)이 되어 그 당시 사초(史草)를 찾아 살펴보았더니, 정철은 강력히 그의 효행을 인용하여 여러 차례 말하였다. 영남 사람들의 의논은 매우 편파적인 것으로 상에게 말씀드린 말까지도 숨기는 것은 매우 공정치 못하다. 사람들은 모두 정철을 소인이라 하는데 나는 모르겠다. 반드시 그가 소인이라면 이항복(李恒福), 김상용(金尙容), 김장생(金長生)과 같은 사람들이 어찌 비호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믿을 수 없다.” 하였다.

최현이 또 최명룡에게 말하기를, “정철에 관한 의논은 나의 뜻이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유성룡 역시 사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소인이 하는 짓이란 으레 상의 뜻을 맞추는 것인데 정철은 도리어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소인으로 지목하지만 나는 그가 소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겠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 가운데 편벽된 말에 동요되지 않은 자로서 최현과 유성룡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들 가운데는 간혹 이해(利害) 관계에 동요됨으로써 시론(時論)에 붙어서 시종 이럴까저럴까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믿을 수 없고 의논이란 정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공정한 마음과 밝은 견해를 지닌 자만이 이를 분별할 수 있다.” 하였다.

지난번 성진선(成晉善)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었을 때, 정도가(鄭道可 정구(鄭逑))에게 말하기를, “최영경(崔永慶)이 우계(牛溪)에게 죽었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서인이라 하여 숨기지 말라.” 하니, 답하기를, “성호원(成浩原 성혼(成渾))은 그 당시 구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인데도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그를 죽인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전 한강(寒岡)의 문인 황종해(黃宗海)가 편지로써 나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우계가 수우당(守愚堂 최영경)을 구제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흠을 잡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당론에 가까운 듯하니,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선현이 한 일을 후학으로서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우당이 순수한지 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길적(吉賊 길운절(吉云節))이 아니고 역모한 정상이 없다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계는 한때에 명망이 높아서 그의 말이면 충분히 구제할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구하지 않았다고 말들 합니다. 이로 보면 많은 사람들의 시비를 불러들인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어진 자의 단점을 논할 적에는 마땅히 정자(程子)가 말한 ‘허물이 있는 가운데에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한마디 말로써 이에 해당시켜 보아야 할 것인데, 이 일에 이르러서는 의논이 분분하여 누구의 말을 주장해서 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명확한 의논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어 의혹을 풀 수 있는 터전을 삼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동인(東人)이 우계가 최영경을 구하지 않은 것으로 허물을 삼은 것은 편당의 사심에 연좌되어 마음을 서로 믿지 못한 데 연유할 뿐이다. 송강 또한 모함하여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하물며 직무가 없는 벼슬[散秩]에 있었던 우계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애당초 최영경이 옥에 갇혔을 때 송강이 전후하여 구제하려고 했던 계사(啓辭)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분명히 있는데도, 원한을 가지고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무리들이 상이 불쾌하게 여기는 데에 편승하여 도리어 최영경의 죽음을 가지고 송강을 단정짓는 죄안(罪案)을 삼아서 상의 뜻을 따라 하나의 함정을 만들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문서가 모두 흩어지자 도리어 분명한 계사를 가리켜 거짓이라 하고, 아울러 우계까지 더불어 함정 속으로 빠뜨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모르는 사람들 역시 보고 듣는 데 익숙하여 오직 그들의 말만을 따르니 또한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개 송강이 이산해의 수많은 무리들에게 크게 모함을 당하게 된 것은 앞서 생각지도 못할 김공량(金公諒)의 말로써 대궐 내에 참소가 행해졌고, 또한 최영경의 일을 가탁하여 바깥에 함정을 만들어 놓아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휩쓸려 시비가 어지럽게 된 것이다. 유성룡과 같은 이가 추관(推官)이 되어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구제하지 못한 사례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진즉 위관(委官)을 내놓았던 송강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으로 보아 우계가 무고를 당한 것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또한 우계는 벼슬을 맡아 직책을 담당했던 사람도 아닌데, 송강의 뜻을 같이하는 벗으로서 편지를 보내어 그를 구제하여 풀어 주기를 권유하였던 것이다. 송강의 계사는 실로 확실하게 헤아려서 쓴 것이다. 보내온 편지 내용에 ‘우계의 명망이 매우 높아서 구제하고 풀어 줄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상소 올리지 않았던 것을 비난한 것인가. 우계는 이미 그 일을 맡은 관리가 아니었다. 역모를 다루는 옥사(獄事)란 그 어떤 일인가. 설령 그의 무죄를 분명히 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 직책을 맡지 않은 사람으로서 결말이 나기 이전에 경솔하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계가 편지를 보내어 구제하여 풀어 주자고 한 것을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면 송강의 계사 같은 것은 다시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성룡 등이 추관이 되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어찌 살려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죄없는 80세 노부(老婦)를 구제해 주는 말 한마디가 없어서 결국 장형(杖刑)으로 죽었고, 10세도 채 안 되는 어린아이가 즉사하지 않았다 하여 준엄한 문책의 교지가 있자 곧바로 그 아이의 목을 부러뜨려 죽였다. 김숙부(金肅夫 김우옹(金宇顒))와 정도가(鄭道可)는 이를 허물하지 않고 도리어 우계와 송강에게 허물을 돌리니, 어떻게 이를 공론(公論)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안팎의 사람들이 이산해의 술수에 빠져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슬플 뿐이다. 또한 이발과 백유양(白惟讓)의 죽음은 이산해 및 유성룡과 송강이 함께 추관이 되었으나 구제하지 못한 것인데, 오늘날 오로지 송강에게 죄를 돌리는 것은 어찌 편벽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대체로 인품(人品)이란 군자가 좋아하고 소인이 미워하면 바로 좋은 사람이며, 군자가 미워하고 소인이 좋아하면 그것은 좋지 못한 사람이다. 공의 사람됨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ㆍ퇴계(退溪 이황(李滉))ㆍ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ㆍ사암(思菴 박순(朴淳))ㆍ선군자(先君子 김계휘(金繼輝))ㆍ이토정(李土亭 이지함(李之菡))ㆍ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ㆍ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ㆍ유희춘(柳希春)ㆍ이후백(李後白)ㆍ구봉령(具鳳齡)ㆍ신응시(辛應時)ㆍ홍성민(洪聖民)ㆍ이회수(李晦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산보(李山甫)ㆍ박지화(朴枝華)ㆍ박주(朴洲)와 같은 여러 군자들이 공을 좋아하였고, 정인홍(鄭仁弘)ㆍ이발(李潑)ㆍ정여립(鄭汝立)ㆍ이산해(李山海)ㆍ이이첨(李爾瞻)ㆍ이홍로(李弘老)ㆍ이경전(李慶全)ㆍ한효순(韓孝純)ㆍ허상(許鏛)ㆍ송언신(宋言愼)ㆍ홍여순(洪汝諄)ㆍ허봉(許篈)ㆍ송응개(宋應漑)ㆍ신경희(申慶禧)ㆍ박근원(朴謹元)ㆍ송선(宋瑄)ㆍ윤삼빙(尹三聘)ㆍ심경(沈憬)ㆍ김우성(金佑成)ㆍ임혁(任奕)ㆍ윤탕(尹宕)ㆍ송응형(宋應泂) 등과 같은 사람들이 공을 미워하였다. 이 무리들이 헛된 말을 날조하여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데에 빠뜨려 자기의 공을 삼으려고 도모하였는데, 오늘에 이르러 그들의 마음이 모두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들이 공을 시기하고 미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 공이 군자라는 것은 분별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시세에 따라 영합하여 출세를 도모하는 자들이 설령 천만 명이 있더라도 공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나는 계축년(1613, 광해군5) 이후, 연산(連山) 시골집으로 물러 나와 살면서 정홍명(鄭弘溟)과 함께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정군이 항상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친(先親)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살아서는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비방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사람으로서 오늘날 모두 살아 있는 이가 없어, 장차 평소의 언행이 사라져 전해지지 못하여 세상에 드러날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기록하시어 후세에 증거와 믿음을 남겨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그 말에 감동되어 이에 옛날에 보고 들었던 것을 대충 기록하여 훗날 공의 행장을 쓰는 자가 채택하도록 하는 바이다. 그 가운데 동서 분당(東西分黨)에 관한 시사(時事) 몇 단락은 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으나 당론(黨論)의 시초는 공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빠뜨리는 근본이 되었음을 보여 주고자 한 까닭에 이렇게 함께 기재한 것이다.
신유년(1621, 광해군13) 가을, 광산(光山) 김장생(金長生)은 쓰다.


[주D-001]박소(薄昭) : 한 문제(漢文帝)의 외숙이며, 박희(薄姬)의 남동생이다. 중대부(中大夫)로서 문제(文帝)를 맞이하여 지후(軹侯)에 봉해졌다. 훗날 사신을 죽였는데, 문제는 외숙을 차마 베어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법을 폐지하고 살려 둘 수도 없어, 공경(公卿)과 여러 신하들을 시켜 그 집에 가서 곡(哭)을 하게 하니, 박소가 자살하였다.
[주D-002]수사(收司)의 율(律) : 진(秦)나라 상앙(商鞅)이 만든 법으로 백성들이 서로를 감시하여 고발하게 하고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연좌시키던 법이다.
[주D-003]한 마리의 독수리[一鶚] : 매 수백 마리는 한 마리 독수리만 못하다는 것으로, 빼어나게 강직한 신하를 비유한 말이다. 《漢書 卷51 鄒陽傳》
[주D-004]원정(原情) : 관아에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거나, 또는 그 사람이나 그러한 내용을 적은 글을 말한다.
[주D-005]문사낭청(問事郞廳) : 중죄인을 임금이 직접 심문할 때에 기록과 낭독을 맡은 임시 벼슬이다. 문랑(問郞), 문사랑(問事郞), 문사관(問事官)이라고도 한다.
[주D-006]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邢恕)이다 : 스승을 배반한 간신이라는 뜻이다. 형서는 송(宋)나라 때 인물로 정명도(程明道)를 사사하였으며,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의 문하에 드나들었으나 후일 모두 배반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宋史 卷471 邢恕列傳》
[주D-007]분발(分撥) : 조보(朝報)를 발행하기 전에 각 관아의 하인들이 그 요점을 종이쪽지에 적어서 관원들에게 공람시키는 일을 말한다.
[주D-008]색낭청(色郞廳) : 일정한 일을 나누어 맡은 낭청(郞廳), 즉 담당 낭청을 말한다.
[주D-009]한탁주(韓侂冑) : 남송(南宋)의 권신(權臣)으로 한기(韓琦)의 증손이다. 자기가 추천한 주희(朱熹)와 그 학파를 위학(僞學)으로 몰아 추방함으로써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을 일으켰다. 이후 14년간 정권을 천단하였으며, 1206년 금(金)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문책을 받고 사미원(史彌遠)에게 살해되었다.
[주D-010]사미원(史彌遠) : 한탁주가 금인(金人)과 틈이 생기자 한탁주의 주살(誅殺)을 청하여 그 지위를 대신하였는데, 처음에는 선정을 펼치고자 노력했으나 날이 갈수록 방종과 전횡을 일삼아 당시의 군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주D-011]고가(藁街) : 한(漢)나라 장안성(長安城) 남문 안에 있던 거리의 이름이다. 외국 사신의 관소(館所)가 이곳에 있었는데, 죄인을 참수(斬首)하여 이 거리에 효시(梟示)하였다.
조보감 제35권
 인조조 2
9년(신미, 1631)

○ 1월. 상이 병조 참판 이명준(李命俊)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교하기를,
“명준이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고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도 관심을 두었었는데 불행히 세상을 떴으니 매우 애석한 생각이 든다. 그 도에서 석회 및 묘쓸 군졸을 대주어 그의 충절을 기리게 하도록 하라.”
하고, 곧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하였다.
그 전에 명준이 궁금(宮禁)과 관계된 일을 많이 간하면서 남이 하기 어려운 말들을 했기 때문에 상이 그렇게 하교한 것이다.
○ 2월. 최현(崔晛)을 옥에서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때 옥천(沃川) 사람 조흥빈(趙興賓)이, 변란이 있다고 올리면서 권대진(權大進)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여 그들을 추국했던바 최현이 거기에 연루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몇 해 전 야대 때 최현이 내가 한 일이 좋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계속 강력하게 주장하기에 내 처음에는 꽤 싫증을 느꼈다가 뒤에 와서 그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찌 그 마음을 저버렸겠는가.”
하고, 드디어 석방을 명했던 것이다.
○ 강릉 집경전(集慶殿)이 불에 탔는데 그 전은 태조의 진전(眞殿)이었다. 상이 소복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3일 동안 곡을 하고 종묘에서 위안제를 올렸으며, 강릉에도 관원을 보내 자리를 만들어 두고 역시 위안제를 올렸다. 그리고 선원전(璿源殿)에 있는 영정을 그대로 그려서 새로 지은 전우(殿宇)에다 모셨다.
○ 정사 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 김류(金瑬) 등을 대우하는 잔치를 만상루(萬象樓)에서 베풀었다.
○ 5월. 가물어서 상이 친히 남단(南壇)에서 비를 빌고 해조에 명하여 빈곤한 자를 돌보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고, 현자 능자를 발굴하는 등 백성의 편익이 될 만한 모든 일들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팔도(八道)에 반포하였다.
○ 7월.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서양 화포(西洋火砲)ㆍ염초화(焰硝花)ㆍ천리경(千里鏡)ㆍ자명종(自鳴鐘)ㆍ자목화(紫木花)및 각종 도서(圖書) 등등을 올렸다. 상은, 그 뜻이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한 자급을 특별히 올려주려다가 사간원의 계사로 하여 도로 취소 하고 말았다.
정두원이 먼저 와 장계 올리기를,
“서양(西洋)이라는 나라는 중국과는 9만 리나 떨어진 거리에 있어 3년을 와야 명 나라 서울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약한(陸若漢)은 바로 이마두(利瑪竇) 친구로서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화포(火砲)를 만들어 말썽을 부리던 홍이(紅夷)ㆍ모이(毛夷)를 섬멸하였고 게다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는 더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광동(廣東)에 와서, 화포로 오랑캐 무리를 토벌하자고 청하여 황제는 그를 가상히 여기고 그에게 교관(敎官)을 맡겨 등주(登州)의 군문으로 보냈으며 그를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흠천감(欽天監)에서 역서를 만들면서도 전적으로 약한의 말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약한이 신을 찾아왔는데 나이가 97세라는데도 정신이 깨끗하고 기상이 표연한 게 마치 신선 같았습니다. 신이, 화포 1문을 얻어 우리 나라에 가 바치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즉석에서 허락을 하고 아울러 기타 서적과 기물들을 주기에 그것들을 뒤에다 적습니다.
치력연기(治曆緣起) 1책, 천문략(天文略) 1책, 이마두 천문서(利瑪竇天文書) 1책, 원경설(遠鏡說) 1책, 천리경설(千里鏡說) 1책, 직방외기(職方外記) 1책,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1책, 서양국에서 바친 신위대경소(神威大鏡疏) 1책 그리고 천문도(天文圖) 남북극(南北極) 2폭, 천문(天文) 광수(廣數) 2폭, 만리전도(萬里全圖) 5폭, 홍이포(紅夷砲) 제본(題本) 하나였습니다. 천리경은 천체 관측뿐만 아니라 적진 속의 미세한 물건을 1백 리 밖에서도 관측할 수 있는 물건으로 그 값이 은화 3백~4백 냥이 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일구관(日晷觀) 1대는 시각을 맞추고, 동서남북을 정하고, 해와 달의 운행을 알아보는 데 쓰이며, 자명종은 12시 시간마다 저절로 우는 것이고, 화포는 불심지를 쓰지 않고 화석(火石)으로 쳐서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나라 조총(鳥銃) 두 발을 쏠 시간에 4~5발을 쏠 수 있고 빠르고 잽싸기가 귀신 같으며, 염초화는 바로 염초를 굽는 함토(醎土)이고, 자목화는 바로 목화로서 빛이 붉은 것입니다.”
하였다.
○ 강화부(江華府)에 성을 쌓고 군량을 저장하였다. 하교하기를,
“강화도가 비록 군사 요충지라고 해도 성지(城池)ㆍ병향(兵餉)이 모두 미덥지가 못하다. 재신 중에서 이서(李曙)와 같은 재간과 성의가 있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모든 책임을 맡겨 우선 군량미 10만 석을 비축하게 하고 그리고 읍성(邑城) 및 갑곶성(甲串城)도 다시 쌓도록 하라. 군기시(軍器寺)와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는 장비를 대주어 전쟁에 임했을 때 쓸 수 있도록 하고, 금년 세 명일(名日)에 각 전에 진상하는 토산물들은 호조ㆍ병조로 이송하고 해조에서도 역시 무명베 백 동씩을 출자하여 군량미 비축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며, 강가 4면에다가 각기 큰 창고를 지어 조적(糶糴)에 편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노비와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그 전에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고는 둔전(屯田)을 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곡식 여러 만석을 비축하고 군기도 모두 부족함이 없이 갖추어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 8월.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등이 상차하여 상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말이 매우 절직했는데, 상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답을 내리고 그들 각자에게 구마(廏馬)를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 철산(鐵山)의 운암산(雲巖山)에다 성을 쌓았는데 이는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의 청을 따른 것이고, 운산(雲山)의 용각산(龍角山)에도 쌓았는데 이는 운산 사민(士民)들의 청에 따라 한 것이다.
○ 어사 윤계(尹棨)ㆍ심연(沈演)ㆍ신계영(辛啓榮) 등을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무사 시험을 보이게 하고 차을 두어 상을 내렸다.
○ 경전을 전공한 문신들을 선발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강을 하게 하였다.
○ 고 참판 최립(崔岦)의 문집을 발간하도록 명했다. 교서관이 아뢰기를,
“최립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린 사람으로 근대 문인으로 후세에 전할 만한 자로는 최립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고가 모두 산락하여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없어지고 말게 되겠기에 사람들이 다 애석히 여기고 있고, 조정 신료들은 지금 목재를 구해 활자판을 만들기로 상의 중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쇄하여 책이 완성되면 상께서도 보실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상이 그렇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 10월. 경서(經書) 언해(諺解)를 서북(西北) 두 도에 반질하도록 명했다.








 訒齋先生文集年譜
 [年譜]
訒齋先生年譜 a_067_495a


皇明世宗皇帝嘉靖四十二年 明宗大王十八年 癸亥六月初十日丙辰。 子時 先生生于善山府海平縣之松山第。 在縣南二里○先生之先。全州人也。高祖承旨公以比安縣監。聘海平金氏。仍家焉。
四十三年甲子 先生二歲
四十四年乙丑 先生三歲
四十五年丙寅 先生四歲
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 先生五歲
二年 宣祖大王元年 戊辰 先生六歲
三年己巳 先生七歲
067_495b四年庚午 先生八歲
受業於杜谷高先生 力學不倦。嘗以雨夜明燈命題。先生應聲對曰。燈前堯舜日。窓外戰國風。杜谷先生大奇之。稱以遠到。
五年辛未 先生九歲
八月。丁內艱。 執喪如成人。參贊公尤加愛重曰。吾家其不替矣。
六年壬申 先生十歲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先生十一歲
二年甲戌 先生十二歲
三年乙亥 先生十三歲
肄業於金烏書院 方伯發策。問以性理。先生一揮而篇已就。及課次。先生居首。
067_495c四年丙子 先生十四歲
五年丁丑 先生十五歲
六年戊寅 先生十六歲
七年己卯 先生十七歲
八年庚辰 先生十八歲
九年辛巳 先生十九歲
春。拜鶴峯金先生于臨河。仍請受業。 先生謂從姪眞寶公山立曰。居是邦。事其賢大夫。禮也。鶴峯先生。今之賢大夫。同道而不得見。可愧也。白公見龍適在座曰。汝欲見金某乎。此我同門友也。目今居廬于花山之臨河縣。士子之負笈往從者。皆閉門而拒之。先生曰。奈何。白公曰。第躡我後。先生共白公至臨河。投拜于廬所。敷衽而前曰。蒙學小生。無所依歸。獲拜先生。願承敎誨。鶴峯067_495d先生曰。南州賢士。不爲不多。子苟誠矣。何患無師。哀疚草土。非講學討論之時。先生曰。嚴不敢更請。願在別齋隨子弟學焉。鶴峯先生曰。癡劣輩不可爲益友。齋舍隘陋。難留遠人。奈何。伯氏藥峯先生曰。此人雖少。以是心來。姑留以答其意可也。遂處齋舍。與子弟朝夕侍見數月。益聞所不聞。乃知先生之學踐履克治。鞭辟近裏。問人不問其才而問其行。勸人不先其文而先其實。嘗謂先生曰。資質旣美。前程又遠。子勉哉。先生對曰。質鈍才短。恐朽木之難雕也。鶴峯先生曰。人患立志不誠。何患才不足乎。有才不免爲小人。無才不妨爲君子。在所學之爲己爲人耳。又曰。善必積而後成。有一善自足。則是驕其善也。惡雖小而可懼。有一惡自恕。則是長其惡也。又曰。涵養克治之功不力。而欲一蹴以到者。學者之通患也。比如養苗者慇懃培植。成熟然後可以供粢盛。去草者朝暮鋤治。翦除根條。然後不得害我嘉禾。忘其田而不耘。與助之長而揠苗者其心雖異。而爲害則一也。又曰。毋自欺三字。須終身佩服爲善。去惡一有不誠。則皆自欺也。曰。善惡何以實見得。曰。義利公私之分。不可不嚴。毫忽之微。遠於千里。在學而明之耳。曰。學則何先。曰。067_496a善哉問。學不在章句文詞之間。只向日用事物上求之。所謂事上學也。其本在於主忠信先孝悌。而其要只在收放心。自灑掃應對。至修齊治平。其節目次第工夫先後。如示諸掌。在乎循序漸進。深玩實體而已。七月。聘夫人義城金氏。 府使復一女。鶴峯先生姪女。時夫人從內舅草澗權公文海于公州任所。
十年壬午 先生二十歲
哭伯氏學生公
十一年癸未 先生二十一歲
十二年甲申 先生二十二歲
十三年乙酉 先生二十三歲
八月。子山輝生。
067_496b十四年丙戌 先生二十四歲
十五年丁亥 先生二十五歲
二月。哭夫人金氏。○秋。赴榮川試發解。○十二月。讀書于桐華寺。 寺在公山。時草澗權公莅大丘府。先生往拜。仍留棲。
十六年戊子 先生二十六歲
三月。中生員一等第二人。 先生居第一。考官以爲鄕人。置第二。聘昌寧曹氏。 年月無可據。而今按草澗權公日記。語及參贊公襄禮。以爲初卜於己丑冬。以內室遘癘。不克葬云。內室。指曹夫人而言也。據此。聘禮在先生丁憂前。故第附于此。
十七年己丑 先生二十七歲
六月。丁參贊公憂。
067_496c十八年庚寅 先生二十八歲
三月四日。行參贊公襄禮。 以癘退行故也○旅軒張先生銘其墓。
十九年辛卯 先生二十九歲
二十年壬辰 先生三十歲
春。被金吾郞薦。 西厓柳先生時在相位。抵書于吏曹參議曰。金吾郞有闕云。崔生晛。政合薦擬。可一言於判相云云。而書中無年月可考。未知薦在何時。然先生筮仕在癸巳。恐是薦在亂前。未及擧行。而始擬於翌年爾。夏。島夷入寇。連陷三都。大駕播遷龍灣。先生與一鄕同志倡起義旅。推盧公景任爲義兵將。朴公遂一爲副將。先生爲掌書。 有鄕兵約束文及通開寧義兵文八月。避亂寓義城申姨兄仡家。○與兵使朴晉書。請067_496d先討豐山賊。○九月。上右巡察鶴峯先生書。論禦敵。○十月。爲善山鄕兵。呈左巡察韓孝純書。乞軍器。○十二月。與韓巡察書。論軍機。○哭曹夫人
二十一年癸巳 先生三十一歲
正月。在金谷。上鶴峯先生書。論軍機。○聘夫人載寧李氏。 設紙榜告由 三月。除軍資監參奉。不就。○四月。哭鶴峯先生。 有祭文 自義城轉寓寧海。
二十二年甲午 先生三十二歲
正月。呈韓巡察書。請設善山屯田。 是時先生在上枝。與金錫良同呈。
二月。還海平故里。祭先考妣墓。○琴生異聞錄成 此乃067_497a先生寓言。而發揮鄕賢事蹟者也。作於辛卯。失於亂中。甲午。因健齋朴公得本草。乃更輯成。蒼石李公跋。
二十三年乙未 先生三十三歲
著友愛箴 時在寧海。有人兄弟爭訟大鬩。病中書此示之。其人戚然心動。歸而相責。遂止其訟。
二十四年丙申 先生三十四歲
正月。上都體察使完平李相公九目書。 書見本集。李公答書有曰。處野憂國。陳書屢百言。極可奬嘆。二月。著論山城形勢郡縣合幷之宜。○四月。浴平海溫泉。 調理于白巖寺。時久旱。太守尹悅求文於先生以祭。翌日大雨。
二十五年丁酉 先生三十五歲
正月。與體府從事官金雲川涌書。論山城設柵便民之策。○自寧海還海平見諸族。訪朴健齋遂一及張旅軒。067_497b因論避亂之策。○二月。奠梧洞先妣墓。因向靑松。○訪朴大菴惺于大穴。因登周王山。歷覽形勝。○來寓寧海東面內甲谷。 從事農畝。日以爲常。十月。哭朴健齋。 有祭文 改葬先妣李氏于上林。○移寓眞寶論谷。
二十六年戊戌 先生三十六歲
二月。除健元陵參奉。肅命。 西厓先生送人勞問 拜東岡金先生于旅邸。○擬入王子師傅望。 按日記。金參議昌遠言政事時。上問有學識否。人物何如。對曰。李德馨爲判書時所薦。故擬望矣。八月。南還。上九條疏。○九月。除典牲署參奉。不就。○十一月。觀望洋亭。訪忘憂堂郭公寓居。
067_497c二十七年己亥 先生三十七歲
正月。送別忘憂堂。 聞郭公挈家還鄕。要路相敍。
二十八年庚子 先生三十八歲
正月。與郭兵使再祐書。論禦敵。○四月。改題廟主。 兵亂中遺失廟主。至是還故里。改題有祝文。
二十九年辛丑 先生三十九歲
三十年壬寅 先生四十歲
三十一年癸卯 先生四十一歲
四月。以朝命撰輯亂中雜錄。 時完平李公以亂後事蹟撰輯事。陳于榻前。道伯因朝令差出左右道都廳及列邑有司。先生爲右道都廳。宋進士遠器爲左道都廳。
067_497d三十二年甲辰 先生四十二歲
四月。哭東岡金先生。 先生與旅軒張先生約遊伽倻山。入哭東岡先生。轉拜寒岡鄭先生。五月。以撰輯事。通告道內。○六月。哭從姪山立。○上伸辨晦齋李先生疏。
三十三年乙巳 先生四十三歲
酬詩諷鄭仁弘。 先生始與仁弘相從。見其名譽日盛。作此以諷之。詩曰。世事升沈古到今。春榮秋索理相尋。靑山獨立雲來往。莫把浮名攪此心。○按先生答仁弘丁未書。有曰。三四年來。賤跡絶不近門屛。蓋自甲辰乙巳年間。斷絶尋問。而此詩有規諷戒切之意。則已於是時。見其心術之微。而仍與之漸相疏絶也。此詩之作。不出兩年。兹附于此。
三十四年丙午 先生四十四歲
067_498a七月。中增廣,東堂,鄕解 三場。居首 九月。中文科丙科第四人。
三十五年丁未 先生四十五歲
二月。以翰苑指揮。取才于議政府 講左傳 。三月。薦授藝文館檢閱。○四月。署經入直。○內賜生薑一封。感恩作詩。 詩曰。黃金芽嫩犀角長。去穢通神孔所嘗。謾嚼天香薰入骨。顧何才德荷龍光。答書鄭仁弘辨斥誣賢事。 先生嘗與人語及南冥先生。而仁弘聞之。以爲詆毀南冥。先自抵書。張皇辭說。侵逼退溪先生。故先生據理辨斥。而極言各尊所聞之意以答之。七月。上疏南還。 時首相柳永慶當國用事。先生入史院。直書時事。有一臺官言于首相。欲擊去之。首相曰。雖欲攻之。史草宣泄之罪。誰使當之。言者遂止。又有一名官言于吏判崔天健。亦如之。崔曰。此人與我有同年相識之分。自吾入東銓。同在藥房。而未嘗私相求見。與人言。直擧過失。其心之公正可知。新進067_498b之人見聞未廣。褒貶之際。未盡其實則或有之。至於黨南而攻北。必無是理。銓郞成俊耇亦語其儕類曰。吾輩之薦此人。乃公論。非有私於彼也。彼之直書不諱。是亦公道也。且公等誤矣。若以直書而去史官。則何處盡得曲筆之史官乎。自是一隊紛紜者少止。然其猜嫌未釋也。先生不欲苟容。卽呈辭棄歸。八月旣望。會張旅軒泛舟于鯉埋淵。○往崇巖修史○有旨催促還仕。 還家祗受 九月。修葺松岡書亭。○又上桃李寺修史○十月。又有旨促還。 還家祗受 撰修杜谷先生遺集。○十二月。內賜椒丹木新曆三物。 在家祗受
三十六年戊申 先生四十六歲
正月。遞檢閱。 以不趁還朝論遞 二月初一日。宣祖大王昇遐。赴哭闕下。○光海卽位。除藝文館待敎。○三月。067_498c拜侍講院說書。 自四月初五日至五月二十五日。連入書筵。有講義。五月。除司諫院正言。○作九知銘○八月。以冬至使書狀官赴京。○九月初八日壬辰。到義州。以銀禁變通事封啓。○癸巳。渡鴨江。○十月十六日庚午。到山海關。 有詩二律 甲戌。過首陽山。謁夷齊廟。 有感詠二律曰。孤竹千年廟。荒城古渡濱。天長名不朽。地老像猶新。大曜輝黃道。淸霜映碧旻。誰能繪日月。鐫刻莫頻頻。一律載原集。癸未。入玉河館。○十一月初四日丁亥。詣闕行朝見禮。○己亥。詣闕。隨參冬至賀禮。○十二月十九日壬申。詣闕祗受冬至頒賞。 衣一表裏。靑絹二段。紅絹二段。黃紗二段。纁紗二段。戊寅。受勑旨辭朝。
067_498d三十七年 光海元年 己酉 先生四十七歲
正月十八日辛丑。留玉河館。謁文廟。○癸卯。皇帝特賜銀子,大學衍義,昭代典則。是日發行向通川。○二月初一日癸丑。到永平。望哭大行大王初朞。○戊辰。登十三山。 有詩一律 辛巳。到三流河。 有詩一律 三月二十日辛丑。復命。旋被拿推。卽蒙宥。 以勑書中權署國事未及改正事有臺論。與上副使同被拿推原情後蒙放。四月。還鄕。○五月。往拜張旅軒于院堂。講周易太極圖說。○又會旅軒于崇巖講易○九月。游金烏山。○十月。拜司諫院正言。在道呈遞。○十二月。自不知巖轉往泗水。拜寒岡先生。論書院入067_499a享事及喪禮諸條。 日記略曰。陪話至夜。見朝報數三條。因問曰。移御新宮。臺諫必至於啓請。何如。先生微哂曰。臺論如是。草野何敢議朝廷事乎。余因稟吾鄕書院事曰。初建冶隱書院于金烏山下。今以地勢不便。移卜洛江之濱。請額之際。瞢然啓達。以金烏賜額書院。爲冶隱刱建。而以佔畢齋,新堂,松堂幷祀。或言冶隱自稱金烏山人。院號金烏無妨。此議如何。先生曰。今旣移設洛濱。號以金烏。未穩。且幷祀三賢。而獨稱冶隱之號。亦未安。聞善山有十賢之號。可得聞耶。對曰。前者四先生外。以忠節稱者有金判書澍,李正言孟專,河參判緯地。以學問稱者有金司藝淑滋,金眞樂堂就成,朴龍巖雲耳。先生曰。多乎哉。善山之忠賢也。余曰。或以爲鄕賢宜幷入書院。或以爲四先生旣入書院。其他鄕賢。宜別立廟。何說爲是。先生曰。旣無聞見之詳。又乏可考之事。吾豈敢議爲。必有行狀碑碣等可記者。願見其書。余曰。從當書進。夜深退宿。翌朝入謁。問喪禮數條。日晩辭出。
三十八年庚戌 先生四十八歲
067_499b正月。赴宣祖大王再朞哭班。○二月。拜司憲府持平。○三月。拜實錄廳兼春秋。○製京畿監司尹昉敎書○四月。製中宮殿賀文。○參試增廣,東堂會試。 取金搢等三十三人 入弘文錄。○五月。以持平參世子冠禮。因上疏極陳輔養講學之方。○十八日。以平安道暗行御史下封書。受命西征。 有關西錄八月。復命。○九月。又拜實錄廳兼春秋。○十月。爲體府從事官。 都體察使李公恒福,副體察使黃愼啓請差下。十二月。遞兼春秋。○差舟師句管司從事官。備邊司啓曰。舟師句管司堂上張晩從事官一員。稱以司郞廳。爲先下送事。入啓蒙允。卽今春節已迫。召集浦邊流民。設屯耕農。且審防汛形止。一日爲急。今方事目磨鍊。刻日下送矣。第念此事非諳委南邊事067_499c情。誠於任事者。蓋難責以成功。而措置號令之際。或不無生弊於列邑。司果崔晛前在嶺南。熟察本道人情物態。且多誠懇。允合是任。方以都體察使從事官。難於遷動。以此意議于都體察使。則答以本局時無緊急公幹。彼此同是國事。先爲下送。似無所妨云。聞崔晛今在善山本家。以此人差下。行文該道。給馬上送。指授應行事宜。不多日內急急發送爲當。敢啓。傳曰。允。
三十九年辛亥 先生四十九歲
正月。入都拜完平相公。稟議舟師事。○二月。疏陳舟師利害。請停不急之役。以省浮費。專力防備事。因辭朝南下。○在洗兵館。與統制使李慶濬論兵事。因出洋中觀水操。至閑山島打圍。○四月。到泗川三歧里。祭先祖開寧公墓。 崔堈諸族人來參 到晉州。與兵使林得義067_499d周覽山川形勢。 鶴峯先生歿于此地。倡義諸人。陷於此城。不勝感慨。吟一絶示兵使。六月。到玉山謁晦齋先生廟。遍尋諸名勝。○八月。重到兵營。議分防事。轉往湖南。入防踏點閱戰船軍器什物。○到玉川書院。謁文敬公廟。○九月。在長興游月出山。 有詩一律 十一月。歷尋威鳳山城。 山在全州。先生旁先祖護軍公龍角曾游賞。有舊蹟故竣事將還歷尋。有感懷一律。除鏡城判官。旋遞仍任本職。以從事官仍留。專管事備局。初啓不允。再啓曰。去九月。朴東亮所啓南方舟師虛疏。宜別遣人。使之巡歷。整勅邊務事。傳曰。南方舟師邊備遣官巡飭事。言于備邊司事傳敎矣。自數年以來。南警稍息。海防諸務。頗似弛廢。議者之憂此久矣。上年秋冬間。本司別爲建請。料理措置。而只緣朝家事勢。不得專意於邊事。軍兵半歸於上番。貢物遽設於沿海。雖欲大段着力於舟師。依舊復設。而其勢末由。然而備邊之重。不可067_500a不另加檢飭。故自本司郞廳崔晛下送。兩南使之往來巡檢。悉心料理矣。崔晛終年在彼。採訪邊情。其所規畫。稍有頭緖。若其實效之成就。當在於明年。故本司之意。欲令崔晛仍爲竣事。而移授鏡城判官之後。其代尙未差出。今欲別遣使命。而若不遵倣崔晛所規畫。則前後號令。或至相背。邊情眩於奉行。有害無益。此甚可慮。文官中極擇有計慮盡心國事之人。急速差出。以爲崔晛之代。下送巡檢。使崔晛未及措置之事。有所完結。似爲宜當。傳曰。崔晛鏡城判官遞差。使之仍察前管之任。復命。
四十年壬子 先生五十歲
二月。又除實錄廳兼春秋。○製進大司諫具義剛致祭文。○三月。以舟師從事官。兼兩南巡撫御史。○稟議舟師事于三公。仍辭朝南征。○五月。到統營。與統制使會操于前洋。 同乘上船。分坐東西。較閱殿最。犒賞而罷。自固城到三067_500b歧里。祭先祖墓。○登順天梨花亭試射。○到靈巖。尋存養樓。 傍親直提學煙村先生德之之遺宅 九月。在扶安。調理察任事有旨。 辭狀回下 浴井亍沈源。○十月。登南原廣寒樓試射。○除弘文館修撰○還到茂朱赤裳山城。審視形勢。○詣闕書啓。仍謝恩復命。 因登對請建實錄閣于赤裳山。仁祖朝。復申前說以建白。其後遂置藏史庫。閏十月。上箚請寢交河遷都事。 五箚始寢十一月。以鳥嶺主屹山城巡審御史。承命拜辭。○到聞慶。與縣監趙稷同審山城形勢。○看審加恩,鳳笙,會溪,舟津等處。 有傷時一絶曰。馬上憂時默念行。無端老淚自縱橫。蚩蚩郵卒焉知我。却訝梨園戀別情。復命。○除弘文館副校理。兼差備邊司鳥銃067_500c廳都廳。○十二月。上箚請勿追錄僞勳。
四十一年癸丑 先生五十一歲
二月。上箚請寢奉慈殿奏請誥命事。 答曰。明有舊例。勿爲煩論。三度呈辭遞○三月。拜侍講院文學。 陳疏請博選山林賢士。輔導東宮。入書筵。講史略五代漢隱帝紀。○三度呈辭遞○四月。拜司諫院正言。○五月。詣闕避嫌。 時李爾瞻慫慂廢主。羅織成獄。以大妃父金悌男爲首逆。以八歲王子永昌大君爲禍本。按律之啓垂發。朝野汹汹。先生以白衣出弔故承旨金時獻發引。因餞鄕友金允安於門外。路逢崇陽府院君金信元。馬上相見。以此引嫌。柳活,朴弘道啓遞。廢主下備忘記曰。當此主辱臣死之日。三司之官。尤當忘身殉國。以扶討逆之義。而前正言崔晛敢生規避之計。故擧微瑣之事。瀆擾於推鞫之日。其情可惡。姑先罷職。以警他人。鄭造,尹訒啓曰。當此067_500d鞫逆之日。知有大論。故着白衣往弔出餞。期得避遞之資。掇拾細瑣之事。至瀆天聽。自稱鄕闇。欲掩其跡。臨事規避之罪。不可不懲。請削奪官職。廢主從之。卽日出寓富平。○七月。南還。○十二月。歷入安東壽洞。拜西厓先生墓。○在金溪撰輯鶴峯先生言行錄。
四十二年甲寅 先生五十二歲
正月。留在金溪。校讐鶴峯先生遺集。○二月。移栽冶隱竹。○三月。與金洗馬潗共往泗水。拜寒岡先生。請撰鶴峯先生行狀。○四月。築堤于松山南坡之下。○十月。約會旅軒于桃李寺論史記。○十一月。校讐冶隱先生行錄及杜谷先生遺集。○八月。覽馬史。釐正067_501a中國地誌山川經緯誤處。○寄詩鄭桐溪輝遠  大靜謫所。 先生自爲小序曰。永昌獄起。輝遠見爾瞻。極言大君幼稚。不與其謀。今若請罪。恐傷慈殿之心。李怫然曰。討逆是何等事。君奈何出此言。輝遠正色爭辨面斥李。李大怒曰。吾知邪論之所自出。時吾與吳翼承日相見。翼承又與輝遠相從。論議皆同。有人言嶺南三人力主全恩。李聞此語。因怒輝遠。將欲移禍於我二人。及輝遠爲弼善。抗疏極言永昌之冤。遂係獄逾年。栫棘海外。余寄書付一短律云云。第二聯曰。擬將所學扶人紀。豈爲虛名觸世罾。
四十三年乙卯 先生五十三歲
正月。往留金陵。轉往茂長尋源。○九月。哭夫人李氏。在尋源聞訃還鄕 十二月。改葬先考妣。 合堋于上林
四十四年丙辰 先生五十四歲
067_501b正月。往留尋源。○九月。還鄕。○與張敬堂興孝,金東籬允安論理氣。 張敬堂請改鶴峯先生行狀草來到。東籬金公亦適來會。仍與先生同宿。論理氣之說。東籬曰。天地之性與氣質之性。各有所主。有主理而言者。有主氣而言者。不可混同說也。譬諸水焉。天地之性。川流之水也。氣質之性。貯器之水也。先生曰。天地氣質之性。不可太分別。天地之性性字。與氣質之性性字。初無分別。但有理氣之別爾。敬堂問東籬曰。高明之見是矣。而取譬之言。頗有可疑。古人云。人生而靜以上。不容說。川流之譬。無乃認命爲性乎。又問先生曰。若子之說。則夫所謂天地之性。就氣質中拈出不雜乎氣質者而爲言否。曰。然。
四十五年丁巳 先生五十五歲
四月。往拜寒岡先生。與李石潭潤雨諸友參訂五先生禮說。○九月。與縣人築石界池。 是池大關一縣生理。故松亭先生蓋067_501c嘗有志而未就。至是。先生呈書巡營。遂築之。後人至今賴之。
四十六年戊午 先生五十六歲
正月。往留金陵。○四月。還鄕。○往拜寒岡先生○十一月。與盧敬菴景任諸友會金烏書院。議定奉安諸規。○一善誌成○往拜寒岡先生。
四十七年己未 先生五十七歲
二月。與金烏山長盧景任宿書院。議定院規。○三月。與主倅金雲川涌,張旅軒會書院。奉安四賢。 書院舊在金烏山下。兵火之後。不免蕩析。地且偏遠。不便於學子往來。故移建于藍山。四月。拜寒岡先生。考訂鶴峯先生行狀。○往拜張旅軒。請參贊公墓067_501d碣。○七月。自靑松椒井還無語坪。○與鄕士友共賞月巖書堂。仍議三仁廟刱建事。 三仁卽籠巖金先生澍,丹溪河先生緯地,耕隱李先生孟專也。先生終始主張是役。宜有記事。而時大司諫李偉卿詆先生以作史謗訕朝廷。將欲拿鞫。遂絶筆不書。故無日記可考。
光宗皇帝泰昌一年庚申 先生五十八歲
正月。哭寒岡先生。 有祭文○許眉叟撰寒岡墓誌。引先生祭文百餘言。以爲結語。
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 先生五十九歲
二年壬戌 先生六十歲
擬上攻李爾瞻疏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先生六十一歲
067_502a三月。仁祖反正。除弘文館修撰。○四月。入都謝恩。陳疏乞遞。上優答。 疏略曰。壬子春。有推戴大君之說。飛語城中。播傳宮禁。人心汹汹。朝夕待發。臣時拜正言。欲言不得。遂引身苟避。竟遭削黜之罪。臣責在言地。職當碎首。而坐見群兇誣殺幼稚大君。而噤無一言。終未免惜一死負先王。爲鄭蘊之罪人。自是杜門絶跡。自分終身於窮谷。幸際龍飛。得列彙征。顧省前罪。忸怩于中。臣何敢不有物議。冒恥靦面。重以負罪之身。玷辱淸朝之名器乎。入直本館。自九月至十月。連入經筵。 講大學衍義首章。先生進曰。德不明。則天理滅私慾勝。而身不能修矣。身不修。則好惡不正。家道日亂。安能親睦九族。古今帝王孰不欲明德新民。而以堯舜不可幾及。安於自畫。所以日向昏蔽而不能明也。願殿下勿以堯之克明峻德爲高遠難行。而顧諟明命。加自明之功。如衣服飮食之不可一日廢。則是亦堯而已矣。爲學最難於終始如一。而人君尤難。殿下監覆轍爲戒。克終其德。無少間斷。則親九族和萬邦不難致矣。因067_502b陳所懷曰。天下自有一定不易之法。非執法者所可低昂。如有罪犯綱常。謀廢國母。投疏之首唱儒生。論啓之臺官。必殺無赦。請殺大君者。當置次律。附托元兇。陷害忠良者次之。陰主其議。名漏疏箚。而久秉銓衡。廣植徒黨者次之。其或本心不然。而怵禍隨波。參於庭請啓事及儒生之被脅參疏者。宜從脅從罔治之律。以次科罪。斷以公議。則何有紛擾淹滯之患乎。○講論語詩三百章。先生進曰。思無邪者誠也。毋不敬者敬也。爲學終始。不出立誠居敬而已。○講周而不比章。先生進曰。君子小人所爲不同。而亦相近似。小人之陷君子也。亦以朋黨目之。漢之黨錮。我朝己卯之禍。可以見矣。若人君以至正之心。大公之道。行之以誠。悠久持循。則偏私之習。自然丕變矣。○講子在川上章。先生進曰。大而天地造化之往來屈伸。小而吾人之死生呼吸。皆流行不息之妙。由人有私慾間之故息也。學者時時省察。不爲私慾間斷。而天理流行。則乃自強不息也。又曰。程子言天德王道其要只在謹獨。所謂天德。卽純亦不已。誠而無私也。純天理而不雜以私。則王道可成也。然其要在於謹獨。能謹於幽獨之地。則誠而無私僞。所以做得王道。067_502c有一毫私僞雜乎其間。謹獨工夫不至也。如何做得王道。聖人觀川流之不息而悟道體之無窮。程子因夫子之言而論王道之至要。誠萬古傳心之要訣也。若非程子。誰知純亦不已之德。蕩蕩平平之道。只繫乎幽獨隱微之能愼也。拜弘文館校理。○五月。陪祭文廟後。以對讀官。參試謁聖文科。 取洪靌等十人 製進祈雨祭文。○參圈弘文錄。 錄全湜等二十人 聯箚論全恩事。○六月。以都元帥從事官拜辭。 傳曰。姑勿退去。因有旨賜酒賜弓一長箭片箭各一油芚一部。七月。到黃州。査點列邑軍兵。○八月。除弘文館應敎。陳辭疏兼請全恩。○十月。竣事。呈病帥府啓遞。○十七日。還朝肅拜。○除成均館司藝○入將薦 上令備邊司薦儒士中有將才者。先生及尹守謙,李溟,李昌庭,李聖求,李敏067_502d求,金時讓,沈光世,鄭基廣等九人被薦。○閏十月。拜司䆃寺正。○十一月。拜議政府舍人。○十二月。拜司憲府執義。俄拜弘文館應敎。轉拜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
四年甲子 先生六十二歲
正月。拜體府從事官。 李相公元翼以都體察使啓請李時發,鄭曄爲副使。先生及金時讓爲從事官。拜知製敎,春秋館編修官。○拜議政府舍人○拜督戰御史。 賊适擧兵叛。上特有是命。授之以劍曰。副元帥以下不力戰者。皆斬之。先生承命馳赴。元帥張晩擁重兵不戰。先生移文責之。晚怒。至猪灘始與交鋒。官軍見敗。晩歸咎先生。上達天聽。先生乃狀啓曰。張晩以其見敗。歸咎臣身。而猪灘之戰。我軍雖敗。物故僅六百人。賊兵逃散者。多至累千。前果累戰。則賊兵自底散亡。而養寇貽患。以致鴟張。元帥烏免其罪。晩大憾067_503a之。及鞍峴大捷。行朝論功。以副元帥李守一爲首。奪張晩職。白衣從軍。先生馳詣行在。上問曰。鞍峴之功。何人爲首。先生對曰。李守一狀啓雖先到。指授方略。皆出於張晩。晩當爲首功也。上從之。鑾輿還宮。特陞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六月。自鄕入都謝恩。疏辭陞秩。○七月。拜兵曹參知。俄拜承政院同副承旨。○啓請還收勿治宮奴之敎。 時有宮隷冒稱慈殿圖書以作挐者。憲府推治之。上下敎政院。以爲非尊敬慈殿之道。命諭憲府。先生封還曰。宮奴犯科。而憲府治之。職也。臣不敢奉旨。頃之。憲府又請治宮奴踵惡者。上愈怒。下旨切責之。先生又封還曰。天子之父殺人。有司按之。況一宮奴乎。臣等前以此獲罪而猶不知止者。寧臣之重得罪於殿下。而不欲殿下之得罪於丘民也。其隨事盡節如此。九月。遞拜副護軍。○十月。拜司諫院大司諫。 先生上箚極論時務。上下批優奬。而勳067_503b臣以箚中論宿衛一事。衆怒朋興。先生避嫌請遞。上意欲調劑。特命遞差。而勳臣猶懷不平。上下敎于筵臣曰。曾雖相善。後見其不是。當絶之。曾雖不知。後見其善處。則當許之。若雖有不善之過。而以爲故舊而庇護之。豈不爲偏黨之獘乎。鄭曄曰。此則聖敎至當矣。且崔晛箚辭似緊。故勳臣不安。其所言差過。自上特命遞差。臣觀其爲人。似是嶺南人之醇厚者。其言亦不至爲大段過擧。而如此處置。而群臣不安。似有妨於國事。故敢達矣。 出政院日記。 拜知製敎。○十一月。拜兵曹參知。○被誣賊招。陳疏自明。 時逆賊金愿伏辜。先生及一時名流。多入誣招。傳曰。竝拿問。崔晛勿問可也。出政院日記。先生雖蒙天日之照臨。而事有不能已者。遂陳疏自明。左贊成金瑬箚論先生甚峻。上下批曰。崔晛不思反省。陳疏自明。猥濫甚矣。然其本心則質直而已。豈有知逆謀而不告之理乎。卿言亦過。勿以情外之說論人之罪可也。 出政院日記。 十二月。呈辭還鄕。
067_503c五年乙丑 先生六十三歲
春。拜刑曹參議。轉拜禮曹參議,大司成,副提學。條陳八務箚。 一曰。明心學以爲出治之本。二曰。謹辭令以順群下之情。三曰。嚴宮掖以絶街巷之議。四曰。重相臣以責治平之效。五曰。器使人以盡一代之才。六曰。戒數遷以存敦樸之風。七曰。植公論以消朋黨之弊。八曰。崇儒學以培風化之原。因進講。陳修明弊政箚。 一官制。二田制。三兵制。又拜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 時詔使將到。上命極選本院提調。先生及李澤堂植,張谿谷維,李白洲明漢。同被是選。
六年丙寅 先生六十四歲
二月。拜承政院右副承旨。俄陞左副。 時有白虹貫日之變。先生聯啓陳勉。○以延慰使。承命向定州。 時以皇子誕生詔使姜曰廣,王夢,067_503d尹越海將到。先生膺是命。道中疾作。控辭蒙遞。六月。還朝。○閏六月。遞職下鄕。○又拜承政院左副承旨。 陳疏乞遞。上允之。特賜藥物。八月。拜江原道觀察使。 時虛位田結。國穀逋欠。爲本道巨弊。先生爲虛實兩册。陳疏請蠲。自上特命蠲減虛結。蕩滌逃故。一道之民。均蒙實惠。八月二十三日。追贈考嘉善大夫兵曹參判。妣東萊鄭氏,德陽奇氏,星山李氏貞夫人。○二十七日。加贈考參判府君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以先生前參振武原從功臣一等故
七年丁卯 先生六十五歲
春。虜入平山。大駕幸江都。承命防守漢江。移檄道內。倡起義旅。 先生聞變。領兵勤王。以朝命防守漢江。又調發精銳。赴海西副元帥067_504a陣下。時都元帥及南兵使領軍來駐淮陽,鐵原間。先生殫心經紀。給餽餉不絶。又爲檄文。曉諭一路。其略曰。義無定處。惟所在致忠之爲義。勇無別人。惟張膽厲氣之爲勇。元沖甲以敢死數十人而能收奇功。郭再祐以同志五十人而屢摧勁寇。丈夫氣節。前後炳朗。此人豈必有百夫之勇哉。不過一斗忠膽耳。諸君子生長禮義之邦。不習軍旅。値此顛沛之日。救死不贍。而惟懷主辱臣死之義。共奮與國同仇之志。倡起義旅。鳩聚義粟。誠有古烈士之風。而于國家有光云云。檄到。人莫不奮勵焉。四月。大駕還都。疏陳禦敵洒恥之策。 其略曰。堂堂我朝受命于天。二百年于玆。惟我殿下計存宗社。念及元元。包羞忍恥。屈從犬羊之約誓。此政君臣上下唾手扼腕。惕然改慮。翻然易轍。同心戮力。共發憤慨。雪會稽千載之恥。洗城下百代之辱。嘗膽瞋目。以圖恢復之秋也。臣竊念夷狄。禽獸也。詐譎反覆。朝和夕叛。已然之情狀。昭載往史。臣固知我殿下以宣,光之明哲。思周,漢之再興。益勵尊周之志。計切攘夷之擧者。未嘗斯須忘也。雖然。凡有作爲。先立大志。志者。萬化之本源。萬事之根柢地。偸067_504b安江左。無意興復者。晉主之昏庸也。甘心和議。忍辱忘親者。宋帝之懦弱也。此皆志不立而安於姑息。越王棲于山上。請爲臣妾。當時似乎怯懦矣。然其沼吳之志。已定於臣妾之日。堅苦刻厲。至於二十年之久。若使越王少惰其志。則種蠡之輩。亦豈能盡其心膂。卒建霸功哉。句越,晉,宋講和一也。而成敗懸殊。其不在兵之強弱。而在立志之強弱可知也。伏願殿下先立大志。堅剛奮發。恢弘志士之氣。振作三軍之勇。則今日之恥。可以一洒矣。爲治之道。先擧大要。紀綱之謂也。我國紀綱之不立。專在於官員多而委任不久。官員多。則莫肯盡心。而惟事塞責。委任不久。則遞易無常。而事無終始。今也一司之中。官員之數。多至七八。坐席不煖。轉授他職。庶績之凝。固無其暇。臣以爲各司只存堂上一員郞廳二員。朝夕治事。勿爲遷動。則權不下移。而紀綱自立矣。苟得其人。一夔足矣。何待乎十羊而九牧乎。至於兩司之多員。所以繩君過糾官耶。意甚盛也。然古無其官。人無不諫。漢置御史。唐有司諫。亦不過一二員。君能從諫。何人非諫官。君苟愎諫。雖設百臺諫而何益。臣愚以爲憲府,諫院。亦存執義,司諫兩員。數年一遞。則亦可以繩愆弼違。067_504c而無避嫌騷擾之弊矣。當今之務。莫急於養兵。而不分兵農。則養之不專。我國兵制。倣三代寓兵於農之意。而時世旣異。制度亦變。結繩不可以治亂。文舞不可以解圍。今玆之變。勢若土崩。堅城巨鎭。觸處糜碎。兩道山河。盡染腥血。此豈徒歸罪於將卒哉。不敎於平素。而用之於倉卒。百戰百敗。固無足怪。爲今之計。先擇武臣之可堪牧民。文臣之可堪領衆者。爲州郡之長。分爲兵農。各專其業。年少勇健者。敎之兵。老鈍孱弱者。歸之農。守令親自簡閱。擇其精銳。日習超距。明其賞罰。以奬其勇敢之氣。蠲其徭賦。以厚其資活之路。申之以約束。則見賊無驚潰之患。結之以恩信。則臨急有捍衛之誠。夫然後使守令各領其軍而赴戰。則恩威素立。將卒相信。如身之使臂。臂之使指。坐作進退。可以如意矣。一片東區九種三韓之時。其兵食豈甚夥哉。而唐宗敗於遼陽。隋煬退於孤城者。蓋以養兵有素故也。今也統三爲一。地非不廣也。民非不衆也。而見賊失魄。畏之如虎。臨急獻策。不過去邠。廟堂籌畫。只是講和。反而思之。心寒肝裂。伏惟殿下隨時變通。亟布兵農之政。則國步庶可以扶持也。養兵之道。必蓄財用。財用之蓄。亦多其方。本067_504d末俱擧。方可足食。今之所謂校生閑良及托屬諸處者甚衆。其餘遊食之徒。不可勝計。各出米布。以養軍士。則此有身有庸之遺法也。雖然。生財之道。不但專恃末節。必先務本。惟在省浮文而崇節儉。罷都監而汰宂官也。浮文之弊。可以亡國。奢侈之害。甚於天災。漢文之惜露臺。衛侯之衣大布。豈徒然哉。誠以人君以身先之。以爲民勸也。今之事勢。無一可恃。而保障之地。尙未堅定。漢都雖曰龍盤虎踞。而決非可守之地。南漢形勢。勝於漢都。而奴賊長技。乃其攻城。背城一戰。是或危道。亦不可定爲萬全之地也。江都形勢。自成天塹。地利之便。無出於此。然以臣愚意。虜必不遠而渝盟。渝盟則必大擧分路而長驅。如粘罕兀朮之謀。則一帶通津。奚足恃乎。如不得已則無如茂朱之赤裳山城。臣曾於巡撫三南。目見其形勢。兵不滿萬。足以必守。臣於其時。請建實錄閣于此者。意有在也。目今自漢以北。皆爲蕩敗之地。自漢以南。尙爲完全之域。居空虛之地。而聚遠方之兵糧則其勢難。據完富之地。而爲保障之計則其勢易。況湖嶺相連。閑山諸島。統營舟師。前後相望。屹爲聲援。若以城守爲危。則臨機應變。恢恢乎有餘地矣。措辦軍067_505a需。送助龍骨山城義兵將鄭鳳壽。 城在平安道。鄭鳳壽與張士俊唱義旅。守孤城。多有摧賊之功。先生慮其勢孤無援。自辦木綿弓矢桶兒火藥鉛丸等物及戰馬一匹。定軍官送助。旋以無朝令。越送他道爲未安。狀啓以聞。○平安監司啓曰。當此纔經大亂物力蕩竭之日。雖有朝廷命令。其勢或有所未及擧行。而今此趙翼,崔晛入送銀參軍器。其數甚優。臣以爲鄭鳳壽守龍骨易。趙翼,崔晛救龍骨難云云。時開城留守趙翼亦送助糧械故云。九月二十六日。巡到橫城縣。 原州牧使洪靌亦隨後同至 二十七日。以試閱事留橫城。 先是。縣居前翊贊李仁居因縣道封疏。上屢加嘉奬。又下別諭。有優給食物之敎。由是先生有相見際接之事。是日朝。仁居使人來曰。方欲上疏而來。仍有求見之意。先生答以明日見之。已而洪靌入見曰。俄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則答曰。將欲倡義討賊。因具道其酬酢之語。時縣監李擢男在座。相與駭笑之際。仁居入來。其所言一如洪靌所傳。先生責喩其事理之不然。仍揮斥而罷。二十067_505b八日。向洪川。 先生將發。與洪,李兩人同見仁居。仁居出示疏草。語意與昨日所言。頗加删略。而有起兵討賊等語。先生嚴辭揮斥之。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矣。先生先起。洪,李繼出。臨別密屬兩人以詗察事機相通之意。中途又送人申飭。及到洪川。又送書申飭。皆以仁居爲慮。而觀勢急通之意也。二十九日。在洪川。封啓上李仁居疏。夜又馳啓仁居起兵狀。勑諸軍進勦。復啓請嚴宿衛備不虞。自橫城報來仁居疏本。其疏曰。國運不幸。屬此艱虞。臣未知天心何所怒於殿下。而有如此之變乎。殿下自賊變以來。躬擐甲冑。不避風雨。與祖宗休養之群臣。豆粥麥飯。臥薪嘗膽。同心同德。而至誠祈天。則可以感鬼神格天地。而況於人乎。以此制敵。何敵不摧。以此圖功。何功不成。殿下中興之本。專在於此也。此之不爲。而內以胡差接待爲事。外而譏察爲謨。其故何歟。此所以天地神人之所共憤也。大槪凶奴者自絶于天。故天下之大賊也。殺其父妻其母。所謂犬戎者此也。二百年禮義之封疆。反爲犬戎067_505c之地。則宗社何依。聖廟何托。被髮左袵。其可忍乎。思之至此。不若早死之爲安。故臣分雖貧賤。性則人也。參以義理。則固難不出。故臣首倡大義。奮然起兵。伏願殿下勿以臣之起兵爲妄。而特賜兵權。曲副討賊之大義焉。請斬主和賣國之姦臣。以雪殿下萬世之恥。然後肅拜西下。臣無任慷慨憂恐之至云云。先生顧謂縣監南瀞曰。疏中無顯然悖逆之語。若還退則近於沮抑。第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遂捧上。狀啓曰。橫城縣監李擢男馳報內。縣居前翊贊李仁居上疏上使事牒呈。疏中所陳起兵一事。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不敢不達。馳啓上送云云。是夜疾甚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弓子三十餘柄。不能呵禁云云。先生始知仁居起兵狀。卽爲馳啓曰。當日臣在洪川縣。試閱百餘名束伍。罷遣後疾甚臥閤矣。戌時量。橫城守官文狀內。縣監以軍兵點閱事。原州馳去後。李仁居子弟一人。從後二三人。到軍器庫。潰門擇弓矢三十餘張。使不得禁止云云。聞來不勝驚駭。馳送營門軍官一人。偵探處置計料矣。臣來時。067_505d行到橫城。仁居來邑內。送人于臣及原牧洪靌處曰。欲爲一上疏。嫌於干謁公門。不敢入見云云。臣答言以送。而洪靌及李擢男先爲往見。來言曰。李也上疏後欲爲率兵二百餘名。乞兵糧于湖西南等處。守令之不從者斬。仍往京城肅拜後。斬誤國姦臣。因爲討賊。俺等明言起兵之無理。而自執己見。不爲回意云。臣大駭曰。有是哉。處士之迂闊也。賊在境上時。不待命令。倡起義兵。猶或可也。今賊兵已撤。無可相戰。又不可以二百之軍投賊巢穴。彼欲何爲。自古請斬佞臣者則有之矣。不待朝廷命令。而徑先起兵。以誅姦爲名者。其名爲逆。賢者而亦爲此言乎。相與駭笑。三人偕往見之。亦以此意反復喩之。仁居曰。然。上疏後當待回下而起兵云。臣以爲彼爲處士之大言。而必無實事。且仍日晩。便卽起出。來到洪川。翌日其疏果至。觀其疏。語亦甚不的。而彼以林下之人。以討賊陳疏。不敢沮抑。卽自捧上。而縣吏馳報如是。近境騷動。彼自謂慷慨所激。不顧事體。而賊不在境。起兵非時。不待朝廷之命。徑先調發。乘其空官。潰出軍器。處事顛倒。有若喪心之人。不可任其所爲。故傳令橫城縣監李擢男,原州牧使洪靌。朝令未下之067_506a前。絶不可借以兵權。嚴守本官。觀其所爲而處之云云。彼乃迂僻之人。不聽人言。不揆事理。實爲起兵。以討賊爲名而上京。則何以處之。朝廷從速處置云云。先生旣已封啓。因念原,橫兩守旣有屢度申勅。終無一番馳報者。已極怪駭。而事迫蒼黃。未暇往復詰問。乃星火傳令于原,橫兩守。使之整軍進勦。又傳令春川府使閔機。使之領兵馳來。洪川之兵則因試閱留待官門。故使縣監更加整飭。且念仁居以討賊爲名而不顧事理。如是妄動。則可遺一言而罷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以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纔送人。洪,李兩人馳通始到。蓋洪靌已先直啓。而不以牒報爲意故也。先生憤激于中。更爲狀啓曰。當初仁居上疏之時。已見其言語無倫。擧措顛倒。莫知其由。狀啓中已陳起兵一事。似非其時。作何處置。今此擧措。尤極悖逆。追捕一事。不可少緩。一邊整勅近官軍兵。左右共進。期於擒滅。一邊作書入送。責以順逆。令速罷兵待罪。以試其所答。自朝廷嚴勑宿衛。以備不虞云云。三十日。留洪川。馳啓仁居就擒狀。 先生方欲進兵合攻之際。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067_506b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三卒徒之外。人皆走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見以來云云。以此具由馳啓。因分囚賊魁妻孥及支黨于橫,原兩獄。○初。先生屬原,橫兩守以詗機急通。非止一再。而仁居叛。先生因縣吏文報而始知之。及仁居擒。又因偵伺軍官而聞之。二守馳通。率皆後時。此不可曉。今附洪啓于下。以備參考。○洪靌狀啓曰。臣本月二十六日。監司臣崔晛出巡北關。臣陪行行到橫城。縣居前翊贊李仁居以監司相見事。已來本縣。二十七日朝。李仁居來到監司處。出言曰。吾欲有一陳疏事云。監司問曰。所欲陳疏者何事乎。曰。朝廷與奴賊相和。吾欲起義兵。由忠淸道得軍器。直向京城。請斬主和姦臣一人頭。掛於旗竿。因爲西下討賊云。監司答曰。然則西下後欲直擣巢穴乎。曰。巢穴則不可去。監司答曰。奴賊已盡撤還。欲擊何賊。仁居不答。須臾辭出。監司以試才事因留。二十八日朝向洪川時。與臣及橫城縣監李擢男約以同往。察其辭色。則仁居出其疏草。其大槪首言與虜不可相和之意。末端言起兵討賊。請斬主和奸臣。又言殿下勿以臣起兵爲067_506c疑。賜臣兵權等語。多有悖慢之語。監司答曰。欲起兵則兵在何處。所得之兵幾許。仁居曰。已募數百餘名云。監司大駭。色變而出。行到里許。送人於臣處曰。吾當留洪川。凡事須與橫城縣監細探馳報云。臣與李擢男密議。使之備細譏察。連續馳報事言說後。臣卽爲還官。傳令將官。聚會軍兵待變矣。當日巳時量。橫城縣監李擢男不意馳進。面言李仁居擅自傳令於本縣將官出身等。聚會軍兵。縣監事出蒼黃。罔知所措。欲與臣面議軍務。只率衙奴與吏房,給唱等。棄其妻子。馳到本州。追後馳到橫城縣戶房金應瑞進告內。李仁居發遣同縣出身高纘,高繼立等。追捕橫城縣監而未及。仁居已爲聚兵於本縣云云。追後橫城縣戶長草報內。李仁居子二人。潰軍器廳。取弓矢云云。李仁居爲逆之狀。益加明白無疑。臣與橫城縣監臣李擢男聚會本州軍兵。一邊進勦。而監司旣已出巡。臣不得已事出蒼黃。從聞見馳啓。追後偵探賊勢。詳細馳啓計料云云。十月。因賓廳啓。就理原情。 賓廳啓曰。伏見原州牧使洪靌狀啓。逆豎仁居已取橫城軍器。射天之志已著。臣等不勝憤憤。急遣宣傳官。探其蹤跡以067_506d來。觀察使崔晛若見此等事狀。則所當具由馳啓。設機措捕。而狀啓之辭。但曰起兵似非其時云。尤爲駭然。請崔晛拿來推問云云。○先生原情。矣身慮事素遲。而過於詳審。每有緩不及事之患。至於討賊。是何等事。而敢有一毫慢忽之心哉。逆魁仁居。素昧平生。而頗有高士之名。聖明亦加優禮。頻下題給食物之敎。矣身依送饌物。原州牧使洪靌聞其貧窮。遺以糧饍。上年冬間。仁居適來原州。致謝于牧使及矣身。始得相見。與之接語。不過迂闊固滯之人也。然爲其林下處士。年近大耋。待以長者之禮。自此仁居間或送人通書矣。九月間。仁居送書于牧使及矣身。書中有憤慨不平之語。洪靌謂矣身曰。仁居書中有前萬古所未有等語。未知爲何事也。矣身曰。我亦怪之。所答略及寒暄而已。此等怪語。不必答也。今年束伍改定後。因備局事目。將爲試閱。而以國舅禮葬。未暇出巡。冬防已迫。軍政可憂。今春變亂之時。以繼糧爲難。矣身欲爲儲糧於伊川近西六七官。一以除嶺東遠輸之弊。一以繼北路將士之供。艱難拮據。別備大小米千餘石。又收拾營儲木匹。將換貿戶曹唐糧及贖罰之徵米竝千餘石。分置近西列邑。而未措其067_507a半。必身親巡歷。然後方可了事。去九月二十六日。強疾作行。與原州牧使洪靌同往橫城。翌朝。仁居送人曰。欲爲一上疏。昨日來此邑內。而嫌於干謁公門。不敢投拜。矣身答以今日有故。明日出行時就見。洪靌見臣謂曰。今朝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將欲倡義討賊。已得軍二百餘人云。矣身曰。賊不在境。此非義兵之時。設使討賊。其以二百軍當之乎。相與一笑。洪靌又言曰。問其軍器軍糧出處。則仁居答以此處兵糧乏少。欲往湖西南。借得兵糧云。矣身曰。此言尤不近理。此時軍器。處處修備。猶患不足。誰得以贏餘借乎。官家軍器。萬無見借之理矣。洪靌曰。彼言我乃爲國討賊。則守令孰敢不從。不從者。雖斬之可也云。矣身與橫城縣監李擢男相顧而言曰。此言尤可駭也。無朝廷命令。而孰肯受制於彼乎。洪靌等相與拍手曰。大大迂闊也。須臾仁居入來。初頭矣身曰。欲爲上疏。未知何事。仁居曰。我耕耘山谷。老而無用。今春胡變之時。人或勸爲義兵。自知無能。欲偸生計也。今聞國家與虜講和。胡差往來云。二百年禮義之邦。將爲左袵之屬。不勝慷慨。兹欲陳疏。倡義討賊。死於戰場。上京肅拜後。請先斬主和奸臣。因往賊路也。067_507b矣身始思其書中云前萬古所未有者此也。謂仁居曰。賊已撤歸。戰于何所。曰。欲斬胡差耳。矣身曰。斬胡差不難。惹出大寇。則其以二百義兵能敵乎。且請斬佞臣者。古亦有之。起兵而誅姦者。亦有之乎。此不過處士之大言。矣身心氣不平。不肯酬酢。仁居出。矣身謂洪,李兩人曰。若不待朝廷命令。徑先起兵。以討賊誅姦爲名。則是無異於淸君側之惡。卽當勦捕。而彼有重名。情跡未露。只以言語問答之辭。捕治以啓。則非但朝廷不信。擧國亦當論之以誣殺處士。此事極難處。當觀其所爲。擧其實狀而治之。翌日。矣身將行。與洪靌,李擢男同往仁居所寓處。問曰。上疏已書乎。仁居自袖中出示疏草曰。無寫疏者。未及書耳。其意蓋欲請得下人之寫疏者也。矣身聽而不聞。三人同見其疏。與昨日所言頗加删略。矣身曰。疏中起兵誅姦等語。大不順理。朝廷萬無許之之理。未許之前。絶不可起兵。反復戒止之。辭與昨日無異。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今日未及寫疏。明當封疏。付送橫城下人矣。矣身行忙先起。洪靌,李擢男追別于籬外。矣身密囑兩人曰。若有可通之事。須卽馳通。兩人曰。已知之矣。半程。送人于兩人。及到洪川。又送067_507c書。皆觀勢急通之意也。矣身到洪川試閱時。仁居之疏至。矣身顧謂縣監南瀞曰。此疏似不當捧。時無顯然悖逆之語。今若不捧而還退。則近於沮抑。欲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矣身遂爲捧上。狀啓中所謂起兵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之語。蓋欲朝廷預知其所爲也。是夜疾甚。心神昏悶。達夜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持弓矢三十餘柄。不能呵禁云。矣身始知仁居起兵之狀。卽爲馳啓。而未見洪,李兩人馳通。只據縣吏之報。猶不敢斷以仁居爲謀逆。而謂或喪心妄作。不知自陷於悖逆之罪。蓋仁居之素所自許。不至於如此之甚故也。且駭且怪。一邊傳令于原州牧使,橫城縣監。使之整頓軍兵。相機進勦。春川之兵。因先文試閱。整待官門。故傳令于府使閔機。使之領來。洪川之兵則昨因試閱。留待本縣。矣身與縣監南瀞更加整飭。矣身又思仁居實爲討賊。不顧事體。如是妄動。則可遺一書而罷散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而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以觀其所答。若遲疑一刻。則謀逆無疑。其時狀啓中。亦陳遺067_507d書之意矣。其書終乃不傳而迴。雜在文書中。想已入內矣。分付移時。洪,李兩人馳通始到。矣身始悔見事不敏。憤激于中。更爲狀啓。又申飭左右軍兵。約以是夜竝進。方欲行兵之際。矣身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十卒徒之外。人皆奔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擊以來。以此具由狀啓。仍留洪川。以待諸賊之盡擒。移送原州。逆魁妻子奴屬。囚于橫城。無有遺漏。然後矣身前進春川。大槪矣身知人不明。不能早知仁居謀逆之狀而先爲捕治。又不能及期領兵親進。掩捕凶賊。而與洪,李兩人密議約束。終始同事。一邊狀啓。一邊整兵設策。傳令左右。刻期進勦之事。非一非再。仁居之聚兵橫城也。李擢男方在原州。矣身方在洪川。橫城距原州四十里。距洪川七十里。賊之動靜。縣人先報原州。轉報於矣身。事機之遲速。狀啓之先後。是固不同。矣身情實。暴白無餘。惟在天日孔昭。幽枉畢燭云云。禁府啓請照律。上下敎特命放釋。 謹按長陵誌狀曰。崔晛被逮於逆獄。鞫廳請刑。王曰。頃年夜對。其時067_508a適有處置未盡之事。此人以入侍之官。力爭不已。予頗苦之。厥後思量。眞是愛予者也。今雖被罪。必不負初心。卽命放釋。蓋崔晛不知李仁居之叛逆。妄稱處士大言之事被罪也。其言忠則不惟取於一時。又能久而識之也如此云云。兩司啓請依律。不允。 上曰。崔晛之事。實爲駭異。難免刑章。眚災肆赦。亦是古人恤刑之道。爾等須體予意。亟停勿煩。二十四日。合啓不允。 上曰。已爲議定。更勿煩瀆。二十六日。合啓不允。上曰。愚戇之人。昧於逆順。以至於此。罪固重矣。其情則不無可恕之端。減死論罪。何傷。爾等須體予意。更勿煩瀆。十一月初二日。朝講。兩司榻前啓。不允。上曰。崔晛之罪。固重矣。故前已言之。但昏昧所致。非故犯之事也。其情可恕也。古人有言曰。眚災肆赦。此亦肆赦之意也。○玉堂臨文。因論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啓曰。凡人皆受天地生物之心以生。故皆有愛人之心。此所謂仁也。至於人君則尤以愛人爲職。故曰爲人君止於仁。天子則天下之人。皆在吾067_508b仁之內。諸侯則一國之人。皆在吾仁之內。盡仁之言。自上所當深體也。上曰。古之人君。於人有犯罪而情在可貰者貰之。其後。其人或有益於國。此亦仁之事乎。答曰。此是聖人好生之德。正是仁也。刑者。聖人之所不得已。善善長而惡惡短。乃聖人之心也。上曰。崔晛之事。眞是眚災也。其人頗有計慮。朝議皆以可用之材擬之。而何故如此處置乎。對曰。臣與晛居相近少相善。知其爲人甚熟。反正以後。與爲同僚甚久。今番處事。直是迷惑。大不類渠平日事。此是死厄將至。天奪其魄。倘非聖明視爲眚災。則渠之所爲。死亦甘心矣。上曰。必以仁居爲隱士耳。對曰。渠性白直。見仁居除官不就。認爲隱士。做錯至此。安有如此可慨之事乎。上曰。以所犯言之。罪果重矣。可以依法。而但其本情實非故犯。情與罪不同。如無可貰之事。何可強拂群情乎。書曰。宥過無大。今須停論可也。
崇禎皇帝元年戊辰 先生六十六歲
正月初八日。合啓不允。 上曰。不允之意。前已盡喩。而如是堅執。至於閱歲067_508c經年。殊爲過矣。凡事有當堅執者。亦有不必堅執者。予非有私意。但以其情不至於死。故不得允從。當此鞫獄多事之時。速爲停止可也。兩司爭執不已。特命流配會寧。○九月。特命放還。道經洛山寺。 有山水屛記
二年己巳 先生六十七歲
春。還鄕。 先生感激天恩。列錄備忘記。書遺戒於其後。傳示子孫。勖以世世圖報之意。
三年庚午 先生六十八歲
冬。被誣逮獄。卽蒙特放。 時無賴賊楊天植謀逆發覺。誣及先生被逮。上曰。崔晛嘗指陳宮闈得失。言甚切直。予甚苦之。厥後思之。眞愛予之言。尋常不忘于懷。如此忠亮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卽令放釋。
四年辛未 先生六十九歲
067_508d五年壬申 先生七十歲
著東國通鑑 春秋以魯國之年編次。而月則用周月。故先生以新羅年號爲主。而其餘高麗,百濟及中國年號則分行書之。
六年癸酉 先生七十一歲
十月。築楓川亭。 亭在草谷東洛江西岸。今有遺址。○旅軒張先生丙子記行云。江之右畔。萬疊層崖。上有亭翼然。亭是何名。晩間其揭也。亭之主誰。默坪崔斯文也。
七年甲戌 先生七十二歲
八年乙亥 先生七十三歲
九年丙子 先生七十四歲
十二月。淸兵猝至。大駕入南漢。與一鄕士友倡義067_509a起兵。
十年丁丑 先生七十五歲
正月三日。整頓軍旅。 一鄕推先生爲大將。金彥陽寧爲副將。李聞慶景節,金公羾,朴參奉晉慶,金參奉翧等三十餘人。皆在陣中。地主給軍七十名,鳥銃數柄以助。四日。發行。 先生有疾。使副將代領先行。追到舍方里。五日。面喩誓衆。行軍宿梧里院。 先生命中軍許申生列立行伍。躬至陣中。喩以一心進退。無敢違令。無敢驚動云云。六日。雨雪留。夜半。地主傳令。來自聞慶。聞雙嶺戰左右兵使敗死之報。七日。行軍至論谷。子山輝追至。 風雪尤緊。先生強疾行軍。轉加添劇。至是氣塞。良久乃蘇。十日。到聞慶杜谷留陣。○十六日。入聞慶縣見地主。因留宿。 先生病勢轉劇。不能管攝軍務。委任於朴參奉晉慶。使之替領。尋聞南漢解圍。遂罷。二月。還寓會溪。送067_509b子山輝。奔問于朝。○三月。哭子山輝。 府使公歸自奔問。道遘痘患。沒于楓川精舍。有哀辭祭文。九月。哭旅軒張先生。 有輓詩祭文
十一年戊寅 先生七十六歲
十二年己卯 先生七十七歲
十三年庚辰 先生七十八歲
五月。寢疾轉谻。遺書戒子孫。 二十五日。先生疾革不能操筆。呼門生曺俊南書。書曰。萬曆己丑六月二十五日。是我先君永諱之辰也。先君不知不肖子之不可以敎。臨沒丁寧敎戒。以爲永世遺書。今我以先君之望於我者。再告於汝等。如是以後。庶不負先君九泉之意。每念及此。悲痛罔極。汝等稍知人子之情。則此非動心處乎。先君臨終時。呼我戒之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此非吾言。乃孔聖之言。汝宜終身服膺也。六月初四日。考終于067_509c金山鳳溪之別墅。 先生屢遭慘慽。不樂家居。移寓已屢年矣。七月二十七日辛丑。上遣禮曹佐郞張應一賜祭。○八月二十七日。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 以子山輝參勳故也 九月。返葬于善山默語坪坤向之原。
我肅宗大王三十三年 丁亥
四月。鄕人立社于松山。奉安位版。 幷享松亭先生
我英宗大王五十二年 丙申
九月。移建松山社于昌林洞。
067_509d訒齋先生年譜終





정조8년 갑진(1784,건륭 49)
10월13일(을미)
  경상도의 진사(進士) 김몽채(金夢彩) 등이 상소하여 증(贈) 판서 최현(崔晛)에게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입게 해 달라고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증 판서 최현은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을 사사(師事)하고 또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으며, 만년에는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도학(道學)을 강마(講磨)하고 서로 도와 가며 학문을 닦았으니, 사문(師門)에서 얻은 것은 본래 연원(淵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의 업적으로 드러난 것도 모두가 체험을 통해서 실천한 것입니다.
선묘(宣廟) 말년으로부터 시작해서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에 이르기까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에는 문학(文學)의 공이 찬란하였고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다하였습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는 온 조정이 감히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하였으나, 최현이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함께 힘껏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그 늠름한 기상을 범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당(凶黨)이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공격하였으므로 삭직(削職)을 당하고 시골에 물러나 살게 되었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시자 맨 먼저 수찬(修撰)으로서 부름에 응하여 경연(經筵)에 출입하며 임금을 성심껏 인도한 공이 크고 많았습니다. 날마다 상소를 올릴 때면 번번이 수용이 되었고, 역적 이괄(李适)의 난리 때에는 명을 받고 독전(督戰)하여 공적이 현저하였습니다. 강원 감사가 되었을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만났는데 다방면으로 책응(策應)하여 도내 전체가 편안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업적의 일부분이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현이 졸하자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곧은 소나무와 꿋꿋한 대나무가 엄동설한을 버티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임금과 신하의 지우(知遇)를 알 수가 있습니다. 최현의 학문은 순수하고 심오하였으며 명절(名節)은 특출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지체하고 있으니, 어찌 사림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태상(太常)에 시호를 의정(議定)하라고 명하여 표장(表章)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청한 일은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주D-001]계축년의 무옥(誣獄) :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獄事)를 가리킨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王位)의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립하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북파는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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