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휘 득수 묘지명

전주최공 문성공 10세손 최득수 [ 崔得壽 ] 묘지명 (14대 방조)

아베베1 2012. 7. 19. 19:21

전주최공 문성공 10세손

후 최득 효자 정려 자료   

 

 

 

최득수 [ 崔得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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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최득수의 묘지명(墓誌銘)

  • 저자

    조익(趙翼)

  • 이명

    : 덕수(德叟)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1 사자(士子)

우리 옛날 집이 어의동(於義洞)에 있었는데, 바로 성안 동쪽이었다. 같은 동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집의 대문이 서로 연달아 있었다. 두 가문의 자손이 그 동에서 가장 많고 한 곳에 모여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문의 어른이나 어린이들이 나이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항상 서로 오가며 살았으므로 그 친밀함이 골육지친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고 난 뒤로 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집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으므로 비록 뒤에 서울로 올라와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에 붙여 살았다. 그러나 서로 만날 경우에는 대뜸 반가워하여 마치 먼 곳에 사는 친척을 만난 것처럼 하였다.

최 처사(崔處士)는 나의 할아버지뻘이었고 그의 아들 3명 중에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나의 숙부뻘이었으며 막내아들 최응형(崔應亨)은 나보다 세 살 적었으므로 나의 어렸을 때 벗이었다.

최 처사가 임진왜란 때 80여 세가 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삭령(朔寧)에 이르러 병이 나 죽었다. 그러자 임시로 산중에다 초빈(草殯)을 해놓고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울부짖으며 곡하다가 왜적이 이르자 혼백(魂帛)을 상자에 넣어 등에 지고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왜적이 수색하다가 그 상자를 보고 기이한 보배가 있는 줄로 알고 최 처사를 해치려고 하다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혼백이 들어 있었다. 왜적도 감동하여 살길을 일러주면서 가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에 이르러 금천(衿川)의 선영에다 반장(返葬)한 다음 묘소 곁에다 상막(喪幕)을 지어놓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전란을 겪고 난 뒤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인과 약탈이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였는데, 경기도가 더욱더 심하였다. 그런데 처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 상막을 지키며 산중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사가 곡읍하며 슬퍼함과 야윈 형상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의 둘째 아들 최응선(崔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성안으로 지고 가 팔아 쌀을 사서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죽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 사람의 자식으로 그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마는 효도를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이때 처사도 아우와 조카들이 있었는데,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독 처사만 그렇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행실이 천성으로 타고났지 애써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숭숭한 난리를 당하여 사생을 기약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독실히 하였으니, 평소에 효도하고 우애한 것은 모두 말할 것조차도 없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서 살았는데, 호남(湖南) 사람들이 그 사실을 써서 감사에게 고하고 감사가 이를 조정에 아뢰니, 포상으로 관직을 주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처사가 양주(楊州)에서 살 때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말하여 조정에 아뢰자 복호(復戶)해 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용산(龍山)에서 살 때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글을 올렸다가 이상의 포상이 모두 예조에 의해 폐기되었다.

처사의 이름은 득수(得壽)이고 자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 아무 월일에 아무 곳에서 세상을 떠나 아무 연월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 묘향(酉坐卯向)의 묏자리에 묻히었는데, 향년 72세였다. 아버지 최언청(崔彥淸)은 봉사(奉事)이고, 할아버지 최호문(崔浩文)은 아무 벼슬이고, 증조 최지성(崔智成)은 현감(縣監)이고, 그의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최덕지(崔德之)는 세조조(世祖朝)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가 여생을 끝마쳤다. 할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배향된 증 우의정(贈右議政)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딸이었으니, 처사의 선행이 실로 그 근본이 있는 것이다. 처사가 청송 심씨(靑松沈氏)에게 장가들었다. 큰아들은 최응성(崔應聖)이고, 둘째 아들 최응선(崔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셋째 아들 최응형(崔應亨)은 지금 소촌 찰방(召村察訪)으로 있다.

나의 기억에 임진년(壬辰年)에 최씨와 우리집 양가(兩家)가 같이 도성을 나와 우리집 동문(東門)의 외택(外宅)에서 자고 그 이튿날 통곡을 하며 이별하였다. 내가 그때 동자의 나이로 집 주변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각자 죽음을 면하여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용산에서 처사를 뵈었는데, 그때 최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처사는 평생 동안 성실하여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면 순수하게 선하여 털끝만큼도 사특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다. 최응성 어른이 나에게 처사의 행적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정중히 승낙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은 세상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도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어찌 무엇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그렇게 한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하며 사모한 것이었도다. 그 또한 어찌 외모로 꾸민 것이겠는가? 그러한 성품을 똑같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이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임금님이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한 것은 그때 잠시에 지나지 않았도다. 이에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초야에서 늙게 하였으니, 공에게 있어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세상을 한탄할 뿐이도다. 오직 하늘은 그렇지 않아 그 보답이 헛되지 않을 것이도다. 그것을 기대할 바는 후손에게 있지 않은가 싶도다.

참고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崔應亨이 瓜滿하여 改差할 것을 청하는 吏曹의 계목


○ 吏曹啓目, 粘連京畿監司狀啓云云。積城縣監崔應亨, 廉謹奉公, 到任未久, 遞易之際, 果爲有弊是白乎矣, 瓜滿改差, 自有金石之典, 狀啓辭緣, 勿施, 何如? 啓限今年仍任。

인조 21년 2월 21일 (을유) 원본84책/탈초본5책 (16/19)
1643년 崇禎(明/毅宗) 16

 

 

崔應亨이 瓜滿하여 改差할 것을 청하는 吏曹의 계목


○ 吏曹啓目, 粘連京畿監司狀啓云云。積城縣監崔應亨, 廉謹奉公, 到任未久, 遞易之際, 果爲有弊是白乎矣, 瓜滿改差, 自有金石之典, 狀啓辭緣, 勿施, 何如? 啓限今年仍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