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휘 득수 묘지명

전주최공 문성공 10세손 효자 휘 득수 공 관련자료

아베베1 2015. 6. 14. 17:23

 

 

 

 

 

 

宣祖 160卷, 36年(1603 癸卯 / 명 만력(萬曆) 31年) 3月 14日(庚午) 2번째기사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全羅監司韓浚謙啓曰: “靈巖居前縣監文益周等二十餘人, 連名來呈曰: ‘郡居士人崔得壽, 故名賢德之六代孫也。 早知義方, 性又至孝, 承順無違, 兄弟之間, 友愛尤篤。 去壬辰, 在京城逢賊變, 奉年耋之母, 避亂朔寧地, 母因病卒, 權厝于山中, 晝夜不離殯側, 首尾一年, 竟免賊鋒, 明年秋, 歸葬衿川地, 啜粥三年, 不出廬外。 癸巳、甲午間, 飢饉太甚, 廬舍之側, 人爭殺食, 而得壽不畏懼, 哭泣之哀, 柴毁之狀, 見者垂涕。 得壽, 本郡人也。 亂後來居, 目見其誠孝之篤, 有足以動人, 故來陳旬宣之下。 請聞于朝。’ 且見兵戈之後, 義烈表著之人, 不爲不著, 而未蒙崇奬之典, 人情咸鬱, 將無以聳動後來。 得壽果如文益周等所陳, 則誠爲可嘉。 請令該曹, 更加詢訪, 爲先旌表。 羅州生員姜渭虎等百餘人來呈, ‘亂後起事人, 如高敬命, 立祠于光州, 趙憲, 竪碑于錦山, 獨于金千鎰, 迄未有表厥之典, 使忠臣之閭, 埋沒無光, 車者不知式, 行者不知敬, 湖南士論, 至今鬱鬱。 亦請聞于朝, 褒其忠績, 表其門閭, 以爲後勸。’ 云。 幷乞令該曹施行。”
【태백산사고본】 92책 160권 13장 A면
【영인본】 24책 457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
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5076)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태백산사고본】 92책 160권 13장 A면
【영인본】 24책 457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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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14일 (경오)
36-03-14[02]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
“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원전】 24 집 45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주D-001]순선(旬宣) : 관찰사를 가리킴.

 

 

 

최응선(崔應善)

[무과] 선조(宣祖) 35년(1602) 임인(壬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32위(48/102)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D5CC751C120B1570X0
여택(汝擇)
생년 경오(庚午) 1570년(선조 3)
합격연령 33세
본관 미상(未詳)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2명
전력 보인(保人)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최득수(崔得壽)
관직 : 학생(學生)
[안항:형]
성명 : 최응성(崔應誠)
성명 : 최응신(崔應信)

[출전]

『만력30년임인년10월22일문[무]과방목(萬曆三十年壬寅年十月二十二日文[武]科榜目)』(충남대학교[고서 史.記錄類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