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휘 득수 묘지명

전주최공 문성공 10세손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4. 7. 11. 07:41


 전주최공 문성공 10세손 휘 득수 묘지명 

 14대 방조이시다   안동판관공 휘 희수의 장형이시다  

  효자 정려를 받은분이 시다 

포저집 제33권  
 묘지명(墓誌銘) 10수(十首)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 의동(義洞)에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도성 안의 동쪽 변두리였다. 같은 동네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가문의 집들이 서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자손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연배끼리 서로 어울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항상 함께 지냈으니, 그 친한 관계가 마치 골육과 같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두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집들이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뒤에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네에 우거(寓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 만나게 되면 마치 멀리 사는 친척을 본 것처럼 반갑게 대하며 기뻐하곤 하였다.
처사(處士)는 나의 조고(祖考) 항렬에 해당되는 분이었다. 처사의 아들 3인 중에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는 나의 제부(諸父) 항렬이었지만, 막내인 응형(應亨)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적었으므로 나와 함께 어린 시절 벗으로 지냈다.
처사가 임진왜란 때에 80여 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노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임시로 산속에 초빈(草殯)을 하고는 밤낮으로 호곡(號哭)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적이 그곳에 이르자 처사가 혼백(魂帛) 상자를 등에 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는데, 적이 그를 찾아내어 붙잡은 뒤에 그 상자를 보고는 기보(奇寶)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처사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열어 보자 바로 혼백이 들어 있었으므로 적도 감동한 나머지 처사에게 활로(活路)를 알려 주고 떠나갔다. 그 이듬해 가을에 금천(衿川)의 선산에 반장(返葬)한 뒤에 묘소 옆에서 여묘(廬墓)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만 마시면서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병화(兵禍)를 당한 뒤끝이라서 백성들이 기아(飢餓)에 시달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기전(畿甸)이 그중에서도 특히 심하였다. 그런데도 처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산속에서 여묘를 하며 떠나지 않았는데, 처사가 애처롭게 곡읍(哭泣)하고 애훼(哀毁)하여 몸이 삭정이처럼 여위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처사의 중자(仲子)인 응선(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등에 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얼마 안 되는 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미음이라도 계속 먹을 수가 있었다.
아, 사람의 자식이라면 그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제대로 효도를 하는 자는 지극히 드물기만 하다. 이때에 처사에게도 아우가 있고 여러 조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선인(善人)이었지만 유독 처사만이 그렇게 하였다. 이를 통해서 처사의 효행이야말로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난리가 일어난 혼란한 와중에 생사를 기필할 수 없었는데도 바로 이처럼 독실하게 행하였던 것이니, 평소의 효성과 우애야 처사에게는 일상적인 행동으로서 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 와서 살자 호남(湖南)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정장(呈狀)을 하니 상이 듣고서 상으로 관직을 내리라고 명하였고, 그 뒤에 양주(楊州)에 와서 살자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정장을 하니 상이 듣고서 복호(復戶)를 명하였으며, 그 뒤에 용산(龍山)에 와서 살자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정장을 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끝내는 예조에 의해서 폐각(廢閣)되고 말았다.
처사의 휘(諱)는 득수(得壽)요 자(字)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에서 세상을 떠나, 그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묻히니 향년 72세였다.
고(考)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이고, 조부 휘 호문(浩文)은 모관(某官)이고, 증조 휘 지성(智成)은 현감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덕지(德之)는 세조(世祖) 때에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조비(祖妣)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일두(一蠹) 선생 여창(汝昌)의 딸이다. 그러고 보면 처사의 선행도 실로 그 근본이 있다고 하겠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장남은 응성(應聖)이고, 다음 응선(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다음 응형(應亨)은 현재 소촌 찰방(召村察訪)이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임진년 당시에 두 집안이 동시에 도성을 빠져나온 뒤에 우리 집안의 동문 밖 저택에서 묵고 나서 그다음 날 통곡하며 이별을 하였다. 그때 내가 동자(童子)의 몸으로 당(堂) 옆에 서서 울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서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그 뒤 다행히 각자 죽지 않고 살아서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처사를 용산에서 뵐 수 있었는데, 이때 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처사는 평생토록 성신(誠信)으로 일관하였고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순선(純善)의 소유자로서 털끝만큼도 사념(邪念)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사가 작고한 지 지금 20여 년이 되는 때에 응성(應聖) 장(丈)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기에 내가 삼가 응낙하고 글을 짓게 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의 소유자는 / 自古至行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법 / 於世絶儔
참으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니 / 誠所不已
어찌 대가를 구하는 것이 있어서랴 / 豈有所求
이것이 자기네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 是何與己
사람들이 자연히 공경하고 흠모하나니 / 人自敬慕
이 역시 어찌 밖에서 빌려 온 것이리오 / 亦豈外假
천성적으로 똑같이 품부받았기 때문이라 / 性惟同賦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 何今之人
유독 이와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 而獨反此
임금님이 정표(旌表)하라 명하셨건만 / 王命旌異
예조가 그만 소홀히 취급한 나머지 / 忽焉而已
우리 처사처럼 선한 분으로 하여금 / 乃使善人
끝내 초야에서 생을 마치게 하였도다 / 終死草野
공에게야 무슨 한스러움이 있으랴만 / 於公何恨
세상일이 참으로 개탄할 만하도다 / 可嗟世也
오직 하늘의 도는 이와 같지 않아서 / 唯天不然
보답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으리니 / 施報無虛
어디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을까 / 其所可期
바로 공의 후손들에게 있으리로다 / 其在後歟

옥담사집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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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으로 이임하는 과천 태수 최공 응형에게 주며, 겸하여 내가 병들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먼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뜻을 보이다 2수[贈果川太守崔公應亨移任積城兼示病不曾相奉仍作遠別之意 二首]

파성에 숙도가 오는 것이 어찌 늦은고 / 巴城叔度來何暮
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지도 다섯 해나 됐어라 / 枳棘鸞栖五載多
매화 핀 누각에 거문고 울려 마음은 자유롭고 / 梅閣琴鳴心不累
꽃 핀 마을에는 개가 졸고 정치는 너그러우리 / 花村犬睡政無苛
담대는 문안 인사에 인색한 게 아니건만 / 澹臺不是慳趨候
사마는 늘 숙환을 앓고 있음을 탄식했어라 / 司馬常嗟抱宿痾
습지를 소제하여 와서 머물게 하려 했거늘 / 將潔習池停皀盖
친분 오랜 동파와 홀연 이별하게 될 줄 어이 알았으랴 / 寧知忽別舊東坡

일개 고을은 큰 재능 펼칠 곳 못 되거늘 / 一縣終非展驥路
무성의 금각에서 몇 해나 세월 보냈던가 / 武城琴閣幾寒暄
삼년 동안 병들어 칩거하느라 찾아뵙지 못했는데 / 三年病蟄違淸眄
오년 동안 은덕을 베풀어주니 지극히 감사하구려 / 五載仁添感至恩
구공을 빌려 고을 더 다스리게 하고 싶어했더니 / 欲借寇公仍舊政
소자의 떠나는 부임 행차에 도리어 놀라노라 / 飜驚蘇子動新旛
노잣돈 주는 산음의 노인을 본받지 못했지만 / 携錢未效山陰叟
멀리 훌륭한 풍모 상상해 길이 잊지 못하리라 / 遙想風流永不諼

[주C-001]적성(積城) :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던 현(縣)이다.
[주C-002]최공 응형 : 최응형(崔應亨). 1581~?,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여회(汝會)이고 서울에 살았다. 1610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다.
[주D-001]파성(巴城)에 …… 늦은고 : 훌륭한 지방관의 부임을 뜻한다. 파성은 적성의 이칭인 듯하다. 후한(後漢) 염범(廉范)은 자가 숙도(叔度)이다. 그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을 때, 화재를 예방하려고 백성들이 밤에 작업하는 것을 못하게 하던 구제(舊制)를 고쳐서 밤에 작업을 하되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도록 엄히 명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기면서 노래하기를 “염숙도(廉叔度)여 어찌 그리 늦게 왔던가. 화재를 우려해 밤일을 금지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일하네. 평소에 저고리가 없었더니, 지금 바지가 다섯일세.[廉叔度來何暮 不禁火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 하였다. 《後漢書 卷61 廉范傳》
[주D-002]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 고을 수령을 맡아 있음을 뜻한다. 후한(後漢) 왕환(王奐)이 “탱자와 가시나무는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니, 백 리쯤 되는 작은 고을이 어찌 큰 현인이 있을 고을이겠는가.[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 하였다. 《後漢書 卷106 仇覽傳》
[주D-003]매화 핀 누각 : 매화 핀 누각은 지방 수령의 관아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하손(何遜)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매일같이 그 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였다. 뒤에 낙양(洛陽)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매화 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記)〉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 하였다.
[주D-004]담대(澹臺)는 …… 아니건만 : 담대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다. 여기서는 개결(介潔)한 성품의 상대방이 자신을 자주 찾아왔음을 뜻한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을 때 공자가 “좋은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자유가 “담대멸명이라는 이가 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절대로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하였다. 《論語 雍也》
[주D-005]사마(司馬)는 …… 탄식했어라 : 자신에게 숙환이 있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자가 장경(長卿)인데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6]습지(習池)를 …… 했거늘 : 원님인 상대방을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게 하려 했다는 뜻이다. 습지(習池)는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습씨(習氏) 집의 연못이란 뜻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간(山簡)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을 때 경치가 좋은 습씨의 못을 고양지(高陽池)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으로 가서 노닐며 흠뻑 취해서 돌아왔다.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은 어디로 가는가? 고양지로 가는 게지. 해 저물녘 말에 거꾸로 실려 돌아오나니 술에 흠뻑 취해서 아무것도 모르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傳》
[주D-007]친분 …… 알았으랴 : 동파(東坡)는 송(宋)나라 문호인 소식(蘇軾)의 호이다. 여기서 동파는 상대방을 가리킨다. 소식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08]무성(武城)의 금각(琴閣) : 훌륭한 지방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제자인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이란 고을의 읍재(邑宰)로 있으면서 현가(絃歌)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흐뭇해 하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했다. 《論語 陽貨》
[주D-009]구공(寇公)을 …… 싶어했더니 :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을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후한(後漢) 때 구순(寇恂)이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도적을 평정했다. 뒤에 영천에서 다시 도적이 일어나자 천자를 따라 출정했을 때 영천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순을 일년 동안 더 영천 태수로 유임시켜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後漢書 卷46 寇恂列傳》
[주D-010]소자(蘇子)의 …… 행차 : 오래 고을을 다스린 지방관의 이임(離任)을 뜻한다. 송(宋)나라 문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11]노잣돈 …… 노인 : 후한(後漢) 유총(劉寵)이 세 번 벼슬을 옮겨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조정에서 그를 대신으로 불러 회계를 떠날 때, 눈썹에 흰 털이 난 대여섯 늙은이가 산음현(山陰縣)의 약야산(若邪山) 골짜기에서 한가로이 나와 각각 백전(百錢) 씩의 돈을 유총에게 보내주었다. 《後漢書 卷106 劉寵列傳》
 인조 21년 계미(1643, 숭정16)
  2월 21일(을유) 맑음
좌목
 21-02-21[15] 경기 감사의 장계는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목
이조의 계목에,
“첨부한 경기 감사의 장계에 운운하였습니다. 적성 현감(積城縣監) 최응형(崔應亨)이 청렴하고 신중하게 공무를 봉행하였는데, 도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교체될 즈음에 진실로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임기가 만료된 뒤에 개차하는 것이 본래 금석지전(金石之典)이니, 장계의 내용은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계하하기를,
“올해까지 잉임하게 하라.”
하였다.
인조 24년 병술(1646, 순치3)
  3월 11일(무오) 맑음
좌목
 24-03-11[12]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김욱(金頊)을 지평으로, 유거(柳椐)를 지평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우부승지로, 최혜길(崔惠吉)을 동지의금부사로, 한흥일(韓興一)을 경기 감사로, 양만용(梁曼容)을 집의로, 최응형(崔應亨)을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삼았다.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5월 11일(계유) 맑음
좌목
 16-05-11[09] 이비의 관원 현황
이비에, 판서 남이공(南以恭)은 나왔고, 참판 김수현(金壽賢)은 나왔고, 행 참의 김반(金槃)은 나왔고, 도승지 이목(李楘)은 나왔다.
신득연(申得淵)을 우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대사간으로, 정시망(鄭時望)을 한성부 서윤으로, 김업(金)을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최응형(崔應亨)을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민여기(閔汝耆)를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으로, 민하(閔賀)를 전적(典籍)으로, 김여옥(金汝鈺)을 사예(司藝)로, 박륵(朴玏)을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