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휘 후랑 완릉군 묘지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아베베1 2012. 8. 7. 22:35

 

 

 

 

 

 

 

 

서계집 제9권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청음집 제13권
 칠언장편(七言長篇)
청문가(靑門歌). 최후량(崔後亮)에게 주다. 병인(幷引)

최생 한경(崔生漢卿)에 대해서 내가 맑으면서도 공손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임오년(1642, 인조 20)에 비로소 만상(灣上)에서 만나서 직접 목도해 보고는 전에 들은 말이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듬해에 내가 재차 북정(北庭)에 붙잡혀 가게 되었는데, 이때 한경(漢卿)과 대상공(大相公)인 지천공(遲川公)이 이미 붙잡혀 와 있은 지 한 해가 넘었다. 그 사이에 또 북관(北館)으로 나갔다가 남관(南館)으로 옮겨졌는데, 그때마다 모두 나와 함께하였다. 한경이 아침저녁으로 침석(枕席)에서 부채질을 하여 주고 음식을 장만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가한 틈을 타 나에게 자주 물었는데, 나란히 앉아서 말을 나누어 보매 쏟아져 나오는 말이 들을 만 하였으며, 가편(佳篇)과 경책(警策)은 왕왕 옛날의 글과 흡사하였다. 이에 내가 더욱더 전에 들은 말을 믿게 되었다. 한경이 눈에 다래끼를 앓았는데 때때로 심해질 때가 있었으므로 대상공이 병든 것을 불쌍히 여겨 가까운 의원(醫員)에게 가 보게 하였다. 한경은 이리저리 서성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이 이미 매어지고 마부가 짐을 다 꾸렸는데도 문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하면서 끝내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내가 여기에서 또 전에 들은 바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음을 기뻐하였다. 아,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한경과 같이 하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중하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지금 다행스럽게도 나와 대상공이 한꺼번에 동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한경이 나에게 이별한 뒤에 볼 말을 써 달라고 청해 왔다. 내가 그 요청을 중하게 여겨 사양하지 않고는 단가(短歌)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

그대의 집 청문 근처 큰길 곁에 있거니와 / 君家靑門大道傍
나의 집은 석실산의 구름 골짝 속에 있네 / 我家石室雲壑裏
청문 석실 양쪽 사이 길은 아니 막혔으나 / 靑門石室路不隔
산림 속은 조시와는 먼 걸 절로 깨닫겠네 / 自覺山林遠朝市
나는 이제 돌아가면 구름 속에 누울 거고 / 我今歸臥故山雲
그댄 정위 향하여 가 아침저녁 문안하리 / 君向庭闈奉晨昏
봄꽃 활짝 피어나고 가을 낙엽 떨어질 때 / 春花爛熳秋葉落
슬프게도 서로 그려 밝은 달을 바라보리 / 惆悵相思共明月

[주D-001]정위(庭闈) : 부모님이 살고 있는 방을 뜻하는데, 전하여 부모님이나 가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청음집 제13권
 설교별집(雪窖別集) 118수(一百十八首) ○ 이하는 갑신년(1644, 인조 24)에 심관(瀋館)에 머무르면서 지은 것이다. ○ 오언절구(五言絶句)
수재(秀才) 최후량(崔後亮)이 간직하고 있는 문징명(文徵明)의 그림에 제하다 5수

문형산(文衡山)은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칭하는데 이름이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평생토록 구차스럽게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으면서 초연히 강호(江湖)에 은둔하여 노년을 보냈다. 출처(出處)와 진퇴(進退)가 이와 같았으니 기예(伎藝)는 이에 여사(餘事)였는바 숭상할 만하다.

말 듣건대 무릉도원 그 속에서도 / 聞道桃源裏
신선들이 오는 봄을 금치 못했다네 / 仙家不禁春
고깃배는 본디 아무 뜻 없었건만 / 漁舟本無意
꽃을 심는 사람들만 분망하였네 / 多事種花人

물 위에는 느린 바람 살랑거리고 / 水風徐嫋嫋
푸른 산은 저편 멀어 흐릿하구나 / 山翠遠依依
강남으로 향하여서 가고 싶은데 / 欲向江南去
외로운 돛 언제 펼쳐 돌아가려나 / 孤帆何日歸

강 남쪽엔 농사짓는 노인네 살고 / 江南有野老
강 북쪽엔 약초 캐는 사람이 사네 / 江北有山人
바라봐도 서로 모습 볼 수 없는데 / 相望不相見
강가에 핀 꽃은 괜히 절로 봄이네 / 江花空自春

가을날 해 쓸쓸하게 넘어가는데 / 秋日蕭蕭晩
강 마을엔 오고 가는 인적 드무네 / 江村人跡稀
맑은 술을 이때 아니 마실 수 없어 / 淸尊不可負
낚싯배가 오길 앉아 기다리누나 / 坐待釣船歸

오래된 길 푸른 이끼 속에 묻혔고 / 古逕靑苔沒
성긴 숲엔 붉은 잎새 흩날리누나 / 疎林紅葉飛
신선 사는 집은 어느 곳에 있는가 / 仙家何處在
백운 속에 삽짝 굳게 닫혀 있다네 / 深鎖白雲扉

[주C-001]수재(秀才) …… 제하다 : 최후량(崔後亮 : 1616~1693)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정수재(靜修齋)인데, 최혜길(崔惠吉)의 아들로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대신의 아들들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잡혀갔다가 1645년에 최명길이 풀려날 때 함께 귀국하였다. 저서로는 《정수재집》이 있다. 문징명(文徵明)은 명(明)나라 사람으로 별호가 형산(衡山)인데 부모가 돌아간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날마다 한묵(翰墨)으로 소일하였다. 평생 동안 외간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시(城市)에 드나들지 않았으며, 권귀(權貴)한 사람들이 그의 서화(書畵)를 바라면 절대로 주지 않았으나, 민간의 소민(小民)들이 과일과 떡을 가져와서 서화를 얻으려 하면 흔쾌하게 붓을 휘둘러 그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