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휘 후랑 완릉군 묘지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아베베1 2015. 1. 19.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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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약천집 제17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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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명(神道碑銘)
영의정 문충(文忠) 최공(崔公) 신도비명

 


저 옛날 인조가 중흥할 당시 여러 신하들 중에 충성은 일신을 잊을 수 있고 재주는 만사를 운용할 수 있고 지혜는 일을 밝게 알 수 있고 용맹은 기미를 결단할 수 있으며, 치욕을 참고 위험을 무릅써서 끝내 생사와 훼예(毁譽)에 마음을 동요하지 않아서 종묘사직을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 백성을 미란(糜爛)에 이르지 않게 한 분은 실로 지천(遲川) 최 상국(崔相國)이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공이 처한 것을 보고 그 효험을 살펴보면 비록 하나하나 법도에 맞았으나 그 일을 따져 보면 모두 여러 사람과 대립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 공을 엄폐할 수 없으나 훼방 또한 그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괴로운 심정과 혈성(血誠)으로 오직 군주를 위하고 딴마음이 없어서 여론에 구애되지 않고 필연적인 계책을 믿은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기꺼이 자기 한몸으로 온 세상의 비방과 힐책을 받으면서도 확고하여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생과 장자(長者)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이 있어 그 말씀이 차츰차츰 나오며, 공보다 뒤에 태어난 학자와 사대부로서 공을 말하는 자들이 있어 그 의논이 점점 공평해져 일혜(壹惠)의 표창을 내릴 적에 조정에서 이의가 없음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그 실제가 있으면 끝내 반드시 스스로 밝혀진다는 것이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휘가 명길(鳴吉)이고 자가 자겸(子謙)이며 계통이 전주(全州)이니,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들어오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서로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수준(秀俊)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가 만옹(晩翁)이니,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는바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이 공의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공은 전주 유씨(全州柳氏)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셨는데, 공이 바로 둘째이시다.
공은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 19)에 출생하였다. 을사년에 생원시 1등과 진사시 8등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으며, 기유년 한원(翰苑 예문관)에 천거되었으나 질병으로 강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광해군이 군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오래도록 낭서(郞署)에 머물렀으며 사건에 걸려 체포되고 삭탈관직되어 쫓겨났다.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종묘사직이 기울게 되자 논의를 주창한 여러 공들과 은밀히 큰 계획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계해년(1623) 봄에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거사할 날짜를 정하였는데, 그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였다.
인조가 처음 정사를 베풀 적에 공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옮겼으며 참의로 승진되고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참판 겸 비국 제조(參判兼備局提調)에 제수되었다.
갑자년 서쪽 지방의 장수가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자, 공을 총독 부사(摠督副使)로 임명하여 원수(元帥)의 군대에 달려가게 하였는데, 안산(鞍山)의 전투에 계획을 많이 도왔으며 부제학에 제수되고 대사헌으로 옮겼다.
병인년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복(服)을 강등하고 양자를 세운 잘못을 논하였고, 또 장례는 사(士)의 예(禮)로 하고 제사는 제후(諸侯)의 예로 하는 것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며, 별묘(別廟)를 세우고 상이 직접 제사를 주장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서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묘년 청 나라 군대가 크게 침입하고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다. 공은 “이미 강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게 대처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손한 말로 적의 예봉을 늦출 것을 청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상을 뵙기를 요구하자, 공은 또 상께 아뢰기를 “전란이 일어나서 사신이 그 사이에 있으니, 뜻을 굽혀 한번 접견하소서.”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언로에서는 공이 화친을 주장했다 하여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추고(推考)만 하라고 명하였다.
계운궁의 담제(禫祭) 뒤에 장차 사묘(私廟)에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공이 예전의 의논을 다시 주장하니, 옥당에서 크게 배척하였다. 공은 외직을 청하여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경기 백성들이 크게 힘입고는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체직되고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병조로 옮기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신미년 상이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고집하여 간쟁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먼저 명 나라 조정에 아뢰어 결정하려 하니, 대신 이하가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상이 특별히 공을 부제학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별묘를 세워서 모시자는 공의 의론이 조정의 의논에 비하여 뛰어났기 때문에 상이 공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여 조정의 의논을 꺾고 또 이끌어다가 자신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은 마침내 차자를 올려서 추숭하는 일은 예에 근거할 만한 조항이 없고 조정의 의논이 또 통일되지 않았으니, 먼저 명 나라에 알려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임신년 예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추숭하라는 의논이 또 예조로 내려왔다. 공이 예전의 소견을 고집하니, 상이 엄하게 책망하였다. 공이 청한 것은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 있었고, 낮추어서 강복(降服)하는 것과 더 높여서 추숭하는 것은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고 끝에는 상의 뜻에 거슬렸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계유년 양관(兩館) 대제학과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을해년 체직되고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병자년 체직되고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다.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청 나라 사람들이 참람하게 황제라 칭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에서 의리에 근거하여 배척하고 끊으니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곧바로 가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병란의 단서가 빚어졌다.” 하고는 미리 전투하고 수비할 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속히 사신을 보내어서 적의 실정을 정탐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또 말하기를 “국가의 대사는 모름지기 심복인 대신과 서로 의논해야 하니, 승지와 내관이 모두 참여하여 들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 척화(斥和)하는 일이었으나 공은 홀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들어오면 경연의 신하가 서로 비방하고 나가면 대관(臺官)들이 서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강력히 말씀하여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으로써 증명하고 조정의 지나간 자취를 참작하였는데, 그 글이 수만 자가 넘었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청 나라 군주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선봉 부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며칠 만에 서쪽 교외에 도달하였다. 상이 강도(江都)로 행차하려 하였는데 겨우 숭례문에 이르자 오랑캐 기병이 이미 길을 막았다. 상이 숭례문의 문루에 납시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일이 급박하게 되었으니, 신이 청컨대 달려가 오랑캐 장수를 맞이해서 맹약을 저버림을 따지겠습니다. 오랑캐가 만약 듣지 않는다면 신이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신을 접견하여 말한다면 행여 다소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그 틈을 타서 대가를 돌려 동쪽으로 향해서 급히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소서.” 하자,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상은 금위군(禁衛軍) 20명을 떼어 주었는데, 도성문을 나가자마자 모두 새와 짐승처럼 흩어져 버렸다. 공이 말을 달려 사현(沙峴)에 이르러서 오랑캐 장수를 만나 출병함을 힐책하자, 오랑캐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중에서 결단하라고 청하였다. 공은 일부러 말을 끌어서 해가 기울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오랑캐의 말을 행조(行朝)에 알리게 하였다.
다음 날 해가 저물도록 보고가 오지 않자 오랑캐들은 공이 자기들을 속였다 하여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결행하지는 못했다. 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복명하자, 상은 공의 손을 잡고 오열하니, 공 또한 울면서 감히 성상을 우러러 뵙지 못하였다. 오랑캐는 남한산성에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화친을 배척하는 의논이 더욱 준엄하였다. 이 때문에 묘당(廟堂)에서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어 결단하지 못하였다. 공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일이 있을 뿐인데, 전쟁을 하자니 힘이 미치지 못하고 화친을 하자니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한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모두 어육(魚肉)이 된다면 장차 종묘사직을 어느 곳에 두겠는가.” 하였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더욱 급박하여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상(沮喪)되어 화의(和議)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화친하는 글을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는데, 공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맞추며 말하기를 “글을 찢는 자도 없어서는 안 되고 글을 주워 맞추는 자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하였다.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하였다.
정축년 4월 우의정으로 승진하니, 이때 눈앞에 가득히 보이는 것은 불탄 재뿐이어서 모든 일이 허술하였다. 공은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위로하여 권면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정사를 미봉(彌縫)해서 내외가 다소 진정되었다. 가을에 좌상으로 승진하였다. 무인년 영상으로 승진하였다. 처음 청 나라 사람들과 맹약을 맺을 적에 공은 이미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는 데에는 원병(援兵)을 보내어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오랑캐들이 과연 와서 원병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자, 공은 직접 심양(瀋陽)으로 달려가서 예전에 한 말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들이 또다시 와서 원병을 요청하고 꾸짖는 말로 위협하자, 공이 말하기를 “원병을 보내는 것과 하성(下城)은 별개의 일이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따를 수 없다. 우리나라 대신 중에 한두 명은 이 일 때문에 죽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다.” 하고는 다시 심양으로 달려가서 자기 몸으로 감당할 것을 청하니, 상은 표범 갖옷 한 벌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한 다음 물건을 풍부히 주어 보내셨다. 이번 행차에 공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염할 도구를 챙겨 가지고 갔다. 공이 심양에 이르러 항거하고 굽히지 않자 청 나라 임금은 의롭게 여겨 풀어 주었다.
기묘년 상이 오랫동안 병환을 앓았는데, 무고의 일이 일어나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과 관련이 되었다. 상은 밀지(密旨)를 내려 공으로 하여금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으로 내려오자 또다시 간쟁하여 다만 별궁에 옮겨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이 옥사가 끝내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공을 괘씸하게 여겨서 특별히 절사(節使)에 임명하였다. 공이 용만(龍灣)에 이르러서 들으니, 상이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에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사용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관(臺官)들이 공을 논박하지 않고 다른 일을 언급함을 책망하신 것이었다. 공은 사행을 멈추고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며, 병이 또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부사(副使)로 하여금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경진년 체직되었으며 사건에 걸려 다시 파직되었다가 임오년 다시 들어와 정승이 되었다. 하성(下城)하던 초기에 공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뜻을 굽혔다는 내용으로 명 나라 도독 진홍범(陳弘範)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할 것을 바랐는데, 그 자문이 중간에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갔다 돌아올 수 있는 자를 찾고자 하였는데, 마침 우리나라의 독보(獨步)라는 승려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있다가 일을 정탐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왔다. 공은 그에게 한 통의 자문을 부쳐서 군문(軍門)에 도착하게 하고 평안도 병사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배를 마련하여 들여보내게 하였다.
신사년 가을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당시에 공은 이미 정승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으나 답서를 초하여 보내었다. 청 나라 사람들은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멀리 바라보고는 우리나라가 명 나라와 내통하는가 의심하여 와서 힐책하였는데, 공이 만금(萬金)을 써서 일을 무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한 다음 독보가 왕래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미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마침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가 중국 선박과 몰래 장사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청 나라 장수는 심양에 인질로 있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위협하여 봉성(鳳城)으로 데려왔으며 이계를 잡아다가 문초(問招)하였다. 이계는 우리 나라의 은밀한 일을 청 나라에 고자질하고 살려 주기를 바라서 공이 독보를 보낸 사실을 말하니, 청 나라 장수가 와서 대질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일이 역신(逆臣 홍승주)의 입에서 나왔고 딴 증거가 없으니,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낫겠다.”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엿보아 알고 있으니, 또 물증이 반드시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 숨겼다가 종말에 탄로되면 일이 반드시 전전(輾轉)하여 군부(君父)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단지 나와 임경업 두 사람의 목숨으로 이 화를 막는 것이 낫다.” 하였다. 상은 공을 위로하고 백금(百金)과 초피(貂皮) 갖옷을 하사하여 보내었다. 공이 봉성에 이르러 치대하기를 “선박을 마련하여 승려를 보낸 것은 오직 내가 임경업과 함께 하였으니, 이미 군주의 명령이 아니다. 조정의 신하 또한 여기에 관여한 자가 없다.” 하였다. 청 나라 장수가 대질(對質)한 내용을 심양으로 보내자 청 나라 군주가 공에게 항쇄(項鎖)와 족쇄(足鎖)를 채워 잡아오게 해서 북관(北館)에 유치(幽置)하니, 북관은 사형수의 감옥이었다.
계미년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겼는데, 이때 청음(淸陰) 김공과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가 앞뒤로 붙잡혀 와서 한 관사에 함께 있었다. 심양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두 각로(閣老 정승)와 한 상서(尙書)가 모두 명 나라 조정을 위해서 붙잡혀 왔으니, 동방의 절의가 존경할 만하다.” 하였다.
을유년 청 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 나라의 도성인 연경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돌려보내니, 공 또한 김 청음, 이 상공과 함께 돌아와 시골에 물러나 있었다. 공은 어영청 제조(御營廳提調)로 부름을 받았다.
병술년 폐빈(廢嬪)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공은 은혜를 온전히 하여 살려 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해년(1647, 인조 25) 5월 공이 집에서 별세하니, 상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고 5일 동안 소찬(素饌)을 드셨다. 상과 세자는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 때까지 호상(護喪)하게 하였다. 부의(賻儀)와 수의(襚衣)를 내리고 조문하고 제사하여 애도하고 휼전을 베푼 것이 상례(常例)를 넘었으며,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 대율리(大栗里)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전배(前配)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진 만(晩)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인(嶙)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또한 함께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장씨 부인이 아들이 없으므로 공은 종자(從子) 후량(後亮)을 양자로 세웠는데, 나중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풍속은 양자를 세운 뒤에 자식을 낳으면 파양(罷養)하고 친자식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미 양자를 삼아서 부자를 정했으니, 본래 자연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바꿔서는 안 된다.” 하고는 조정에 청하여 후량에게 후사를 맡기니, 세상에 예를 아는 자들이 거룩하게 여겼으며 인하여 조정의 법령으로 만들었다. 후량은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다. 장남 석진(錫晉)은 현감이고 차남 석정(錫鼎)은 참판이고 차남 석항(錫恒)은 지평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士人)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후상은 홍문관 응교인데 석정을 양자로 삼았다.
공은 신묘한 기지(機智)가 안으로 밝고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 비록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큰 의논에 처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서 일찍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 사람들의 말에 의지가 저상되고 빼앗기는 일이 없었다.
젊었을 적부터 성리서(性理書)에 잠심(潛心)하여 안으로는 기운을 기르고 밖으로는 문장을 통달하게 하였다. 개연(慨然)히 당세를 바로잡을 뜻이 있었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상공의 문하에 유학하자, 모두 원대한 기국(器局)이라고 허여하였다.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귀(李貴)) 세 상공과 일찍부터 친밀한 교분을 맺으니, 세상에서는 사우(四友)라고 지목하였다. 몸이 중흥(中興)할 때를 만나서 중요한 직임을 맡았는데, 매양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폐단이 있는 정사를 바로잡아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주와 재상들의 뜻이 이미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공은 또 예송(禮訟)에 시달리고 화의(和議)에 부딪쳐 한 세상과 서로 합하지 않으니, 마치 둥근 구멍과 네모진 자루가 어긋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끝내 그 뜻과 사업을 다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의논은 일이 모두 경사(經史)에 근거한 것이고 공의 억설(臆說)이 아니니, 자연 추숭(追崇)과는 관여됨이 없다. 그리고 약한 나라를 보전하려고 노력한 계책은 또한 피아(彼我)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고 사세를 분명히 본 것에서 연유하였으니, 요컨대 종묘사직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한 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단지 명 나라의 가정(嘉靖)과 송 나라의 정강(靖康)을 천고의 지극한 경계로 삼아서 마침내 똑같은 죄과로 보고 함께 비판하고자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배(大拜)에 이르러서는 군주의 마음과 국권의 의탁이 오직 공에게 달려 있었으니, 패망을 구원하고 기울어진 것을 안정시킨 공로와 몸을 위태롭게 하여 군주를 받든 충절은 진실로 정론(定論)이 있었다. 그러나 지위가 지극히 높고 임무가 막중하니, 책임과 중망이 더욱 모였다. 이 때문에 준항(浚恒)의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 공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공에게 찾아가서 번번이 공의 잘못을 말하여 혹은 대여섯 가지의 일을 들기까지 하였는데, 공이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 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유공 백증(兪公伯曾)은 공이 방문해 오자 매우 상기되어 노려보고 초(草)한 상소문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공을 논박하려 하니,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고치겠다.” 하며 온화한 기색이 가득하여 끝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나갔다고 한다. 아,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도록 허여한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정승의 직무를 수행할 때 남보다 크게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나는 공에게 감히 실수가 없지 않음을 한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과오를 듣기 좋아하였음을 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공은 문장에 있어 천부적으로 밝게 깨달았는데, 반드시 논리를 위주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주의(奏議)하는 글에 있어서는 더더욱 붓끝에 혀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저술한 시문(詩文) 19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연양(延陽) 이 상공(李相公)이 공을 가장 잘 안다고 이름이 났는데, 이 상공은 말씀하기를 “지천(遲川)의 사업 중에 큰 것을 든다면 첫째는 반정(反正)을 하여 광복(匡復)하는 사업을 도운 것이요, 둘째는 예(禮)를 의논하여 부자의 윤리를 밝힌 것이요, 셋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달려가서 적의 예봉을 늦춘 것이요, 넷째는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을 주장해서 종묘사직을 보전한 것이요, 다섯째는 두 번이나 호랑이의 입에 들어가서 원병을 보내라는 오랑캐의 요청을 강력히 거절하여 목숨을 바쳐 변치 않은 것이요, 여섯째는 명 나라 조정에 소식을 알리고 끝내 위기를 감당하여 죽음으로써 자처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상공 이경여(李敬輿)의 말에 “굴자(屈子)의 충성은 충성이 과한 경우였는데 지천의 충성도 충성이 과한 경우이다.”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을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다. 금상 7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나는 먼 시골의 후진으로 미처 공의 문하에서 놀지 못하였으나 공의 장자(長子)와 실로 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감히 뽑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성조가 용흥하실 적에 / 聖祖龍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일어났으니 / 群鱗並躍
누가 그 힘을 다하여 / 孰竭其力
국가 위해 몸을 바쳤는가 / 以身殉國
이때 마침 최공이 / 際會崔公
실로 계책을 도와 / 實贊王猷
기강을 떨쳐서 / 欲振綱維
국가를 편안히 하려고 하였네 / 以圖綢繆
군주의 신임과 지위를 얻으니 / 得君得位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으나 / 宜若可爲
일이 평탄하기 어려움은 / 事之難平
예로부터 한탄한 바라오 / 從古所噫
국내와 국외에 연고가 많아 / 外內多故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니 / 朝論攜貳
십 수년 동안 / 十數年間
안정한 바가 없었네 / 靡所底止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所疑
공은 스스로 믿고 / 公則自信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 人之所避
공은 스스로 분발하였네 / 公則自奮
기꺼이 한 몸으로 / 甘以其身
비방을 감수했다오 / 爲衆所訶
원함은 충성이었으니 / 所欲者忠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는가 / 遑恤其他
남문에서 계책을 결정하여 / 南門決策
용감하게 적의 예봉을 막았고 / 勇遏賊鋒
북관으로 잡혀가니 / 北館被縶
조종의 의리 컸네 / 義大朝宗
오 나라에 화친을 이룸에 / 行成于吳
범려(范蠡)가 스스로 벌이 내릴 줄 알았고
/ 蠡自知罰
감히 연 나라를 도모하지 않았으니 / 不敢謀燕
악의(樂毅)의 마음 질정할 수 있네
/ 毅心可質
공의 처음과 끝은 / 公之始終
마른 고기 씹어 해독이 많았으나 / 噬腊多毒
끝내 허물이 없음은 / 其底无咎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네 / 唯志之確
저 옛날 혼란했을 적에는 / 昔在草昧
용안을 알지 못했는데 / 未識龍顔
혹자는 먼저 찾아뵙기를 권했으나 / 人勸先謁
공은 못 들은 척했다오 / 公若不聞
공이 병환이 위독해지자 / 及公寢疾
내관을 보내고 의원을 보낼 적에 / 內遣醫問
도성 문이 밤에 닫히자 / 都門夜閉
신표(信標)를 가지고 문을 열었네 / 啓之以信
분수를 삼감이 엄하고 / 謹分之嚴
은혜를 가함이 특별하시니 / 加恩之特
훌륭한 군주와 신하 보려면 / 欲觀君臣
이것을 가지고 헤아릴 수 있네 / 此可以度
국가의 안위가 공에게 달려 있으니 / 安危休戚
살아 있으면 영화롭게 여기고 죽으면 슬퍼하였네 / 存沒哀榮
공업(功業)과 문장은 / 勳業文章
그 이름 영원히 전하리라 / 不朽之名
아름다운 이 언덕에 / 樂哉斯丘
비석이 높이 솟아 있네 / 有石穹然
여기에 좋은 시를 새겨서 / 銘于好詩
영원한 후세에 보이노라 / 以示永年


 

[주D-001]일혜(壹惠)의 표창 : 일혜는 한 가지 선(善)으로 고인의 특별한 공로를 기려 시호를 내림을 이른다.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하였는바, 이는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려우므로 가장 큰 것을 요약하였음을 이른다. 이 때문에 시호를 절혜(節惠)라고도 칭한다.
[주D-002]그날 …… 청명하였다 : 거사하는 날 날씨가 맑음은 하늘이 도왔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군대를 풀어 상 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하는 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도다.〔肆伐大商 會朝淸明〕” 하였다.
[주D-003]서쪽 …… 반란하자 : 평안 병사로 영변(寧邊)에 있던 이괄(李适)이 반란한 사건을 가리킨다.
[주D-004]계운궁(啓運宮) :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궁호(宮號)이다.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정원군(定遠君)에게 시집가서 인조(仁祖)를 낳았는데,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계운궁이라 하였으며,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追封)되고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주D-005]성하지맹(城下之盟) :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으로,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주D-006]북관(北館) : 북쪽 관사란 뜻으로, 청 나라의 본거지인 심양(瀋陽)의 관사를 이른다.
[주D-007]명 나라의 …… 정강(靖康) : 가정은 명 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가정 17년 세종의 생부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추존하여 예종헌황제(睿宗獻皇帝)라 하였으며, 정강은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로 송 나라는 이때 금(金) 나라의 침공을 받고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인조의 생부 추존과 청 나라에게 항복한 두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8]준항(浚恒)의 말 : 준항은 아랫사람이 평상적인 것보다 깊게 요구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원망함을 이른다. 《주역》 항괘(恒卦) 초육(初六)에 “평상시보다 깊게 요구한다. 바르더라도 흉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初六 浚恒 貞凶 无攸利〕” 하였다.
[주D-009]굴자(屈子) :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이름은 평(平)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지극하였으나 회왕(懷王)과 양왕(襄王)이 간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소원히 하자, 《이소경(離騷經)》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으며, 마침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주D-010]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 : 마천은 사마천(司馬遷)의 약칭이며 풍수는 풍당(馮唐)의 아들로 사마천과 매우 친하였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주D-011]성조(聖祖)가 용흥(龍興) : 성조는 인조(仁祖)를 가리키며 용흥은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제왕의 등극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2]조종(朝宗)의 의리 : 조종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바, 모든 속국이 천자국을 우러러 섬기는 의리를 말한 것이다.
[주D-013]오(吳) 나라에 …… 알았고 : 범려(范蠡)는 월(越) 나라의 명재상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자, 범려는 월왕을 위하여 굴욕적인 맹약을 하니, 월 나라에서 그를 비판하는 자가 많았다.
[주D-014]연(燕) 나라를 …… 있네 : 악의(樂毅)는 전국(戰國) 시대 연 나라 소왕(昭王)에게 대장군(大將軍)으로 등용되어 제(齊) 나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서 70여 개 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이룩하였다. 소왕이 죽고 태자인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악의를 의심하여 직위를 박탈하였다. 악의는 할 수 없이 조(趙)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조 나라에서는 악의를 등용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려 하였으나 끝내 신의를 지켜 따르지 않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주D-015]마른 …… 많았으나 :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해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러우나 허물이 없다.〔六三 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 하였는바, 남의 구설수를 들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신도비명(神道碑銘)
영의정 문충(文忠) 최공(崔公) 신도비명

 


저 옛날 인조가 중흥할 당시 여러 신하들 중에 충성은 일신을 잊을 수 있고 재주는 만사를 운용할 수 있고 지혜는 일을 밝게 알 수 있고 용맹은 기미를 결단할 수 있으며, 치욕을 참고 위험을 무릅써서 끝내 생사와 훼예(毁譽)에 마음을 동요하지 않아서 종묘사직을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 백성을 미란(糜爛)에 이르지 않게 한 분은 실로 지천(遲川) 최 상국(崔相國)이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공이 처한 것을 보고 그 효험을 살펴보면 비록 하나하나 법도에 맞았으나 그 일을 따져 보면 모두 여러 사람과 대립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 공을 엄폐할 수 없으나 훼방 또한 그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괴로운 심정과 혈성(血誠)으로 오직 군주를 위하고 딴마음이 없어서 여론에 구애되지 않고 필연적인 계책을 믿은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기꺼이 자기 한몸으로 온 세상의 비방과 힐책을 받으면서도 확고하여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생과 장자(長者)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이 있어 그 말씀이 차츰차츰 나오며, 공보다 뒤에 태어난 학자와 사대부로서 공을 말하는 자들이 있어 그 의논이 점점 공평해져 일혜(壹惠)의 표창을 내릴 적에 조정에서 이의가 없음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그 실제가 있으면 끝내 반드시 스스로 밝혀진다는 것이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휘가 명길(鳴吉)이고 자가 자겸(子謙)이며 계통이 전주(全州)이니,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들어오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서로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수준(秀俊)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가 만옹(晩翁)이니,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는바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이 공의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공은 전주 유씨(全州柳氏)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셨는데, 공이 바로 둘째이시다.
공은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 19)에 출생하였다. 을사년에 생원시 1등과 진사시 8등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으며, 기유년 한원(翰苑 예문관)에 천거되었으나 질병으로 강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광해군이 군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오래도록 낭서(郞署)에 머물렀으며 사건에 걸려 체포되고 삭탈관직되어 쫓겨났다.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종묘사직이 기울게 되자 논의를 주창한 여러 공들과 은밀히 큰 계획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계해년(1623) 봄에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거사할 날짜를 정하였는데, 그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였다.
인조가 처음 정사를 베풀 적에 공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옮겼으며 참의로 승진되고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참판 겸 비국 제조(參判兼備局提調)에 제수되었다.
갑자년 서쪽 지방의 장수가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자, 공을 총독 부사(摠督副使)로 임명하여 원수(元帥)의 군대에 달려가게 하였는데, 안산(鞍山)의 전투에 계획을 많이 도왔으며 부제학에 제수되고 대사헌으로 옮겼다.
병인년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복(服)을 강등하고 양자를 세운 잘못을 논하였고, 또 장례는 사(士)의 예(禮)로 하고 제사는 제후(諸侯)의 예로 하는 것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며, 별묘(別廟)를 세우고 상이 직접 제사를 주장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서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묘년 청 나라 군대가 크게 침입하고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다. 공은 “이미 강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게 대처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손한 말로 적의 예봉을 늦출 것을 청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상을 뵙기를 요구하자, 공은 또 상께 아뢰기를 “전란이 일어나서 사신이 그 사이에 있으니, 뜻을 굽혀 한번 접견하소서.”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언로에서는 공이 화친을 주장했다 하여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추고(推考)만 하라고 명하였다.
계운궁의 담제(禫祭) 뒤에 장차 사묘(私廟)에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공이 예전의 의논을 다시 주장하니, 옥당에서 크게 배척하였다. 공은 외직을 청하여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경기 백성들이 크게 힘입고는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체직되고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병조로 옮기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신미년 상이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고집하여 간쟁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먼저 명 나라 조정에 아뢰어 결정하려 하니, 대신 이하가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상이 특별히 공을 부제학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별묘를 세워서 모시자는 공의 의론이 조정의 의논에 비하여 뛰어났기 때문에 상이 공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여 조정의 의논을 꺾고 또 이끌어다가 자신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은 마침내 차자를 올려서 추숭하는 일은 예에 근거할 만한 조항이 없고 조정의 의논이 또 통일되지 않았으니, 먼저 명 나라에 알려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임신년 예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추숭하라는 의논이 또 예조로 내려왔다. 공이 예전의 소견을 고집하니, 상이 엄하게 책망하였다. 공이 청한 것은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 있었고, 낮추어서 강복(降服)하는 것과 더 높여서 추숭하는 것은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고 끝에는 상의 뜻에 거슬렸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계유년 양관(兩館) 대제학과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을해년 체직되고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병자년 체직되고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다.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청 나라 사람들이 참람하게 황제라 칭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에서 의리에 근거하여 배척하고 끊으니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곧바로 가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병란의 단서가 빚어졌다.” 하고는 미리 전투하고 수비할 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속히 사신을 보내어서 적의 실정을 정탐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또 말하기를 “국가의 대사는 모름지기 심복인 대신과 서로 의논해야 하니, 승지와 내관이 모두 참여하여 들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 척화(斥和)하는 일이었으나 공은 홀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들어오면 경연의 신하가 서로 비방하고 나가면 대관(臺官)들이 서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강력히 말씀하여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으로써 증명하고 조정의 지나간 자취를 참작하였는데, 그 글이 수만 자가 넘었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청 나라 군주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선봉 부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며칠 만에 서쪽 교외에 도달하였다. 상이 강도(江都)로 행차하려 하였는데 겨우 숭례문에 이르자 오랑캐 기병이 이미 길을 막았다. 상이 숭례문의 문루에 납시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일이 급박하게 되었으니, 신이 청컨대 달려가 오랑캐 장수를 맞이해서 맹약을 저버림을 따지겠습니다. 오랑캐가 만약 듣지 않는다면 신이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신을 접견하여 말한다면 행여 다소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그 틈을 타서 대가를 돌려 동쪽으로 향해서 급히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소서.” 하자,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상은 금위군(禁衛軍) 20명을 떼어 주었는데, 도성문을 나가자마자 모두 새와 짐승처럼 흩어져 버렸다. 공이 말을 달려 사현(沙峴)에 이르러서 오랑캐 장수를 만나 출병함을 힐책하자, 오랑캐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중에서 결단하라고 청하였다. 공은 일부러 말을 끌어서 해가 기울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오랑캐의 말을 행조(行朝)에 알리게 하였다.
다음 날 해가 저물도록 보고가 오지 않자 오랑캐들은 공이 자기들을 속였다 하여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결행하지는 못했다. 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복명하자, 상은 공의 손을 잡고 오열하니, 공 또한 울면서 감히 성상을 우러러 뵙지 못하였다. 오랑캐는 남한산성에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화친을 배척하는 의논이 더욱 준엄하였다. 이 때문에 묘당(廟堂)에서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어 결단하지 못하였다. 공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일이 있을 뿐인데, 전쟁을 하자니 힘이 미치지 못하고 화친을 하자니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한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모두 어육(魚肉)이 된다면 장차 종묘사직을 어느 곳에 두겠는가.” 하였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더욱 급박하여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상(沮喪)되어 화의(和議)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화친하는 글을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는데, 공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맞추며 말하기를 “글을 찢는 자도 없어서는 안 되고 글을 주워 맞추는 자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하였다.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하였다.
정축년 4월 우의정으로 승진하니, 이때 눈앞에 가득히 보이는 것은 불탄 재뿐이어서 모든 일이 허술하였다. 공은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위로하여 권면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정사를 미봉(彌縫)해서 내외가 다소 진정되었다. 가을에 좌상으로 승진하였다. 무인년 영상으로 승진하였다. 처음 청 나라 사람들과 맹약을 맺을 적에 공은 이미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는 데에는 원병(援兵)을 보내어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오랑캐들이 과연 와서 원병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자, 공은 직접 심양(瀋陽)으로 달려가서 예전에 한 말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들이 또다시 와서 원병을 요청하고 꾸짖는 말로 위협하자, 공이 말하기를 “원병을 보내는 것과 하성(下城)은 별개의 일이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따를 수 없다. 우리나라 대신 중에 한두 명은 이 일 때문에 죽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다.” 하고는 다시 심양으로 달려가서 자기 몸으로 감당할 것을 청하니, 상은 표범 갖옷 한 벌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한 다음 물건을 풍부히 주어 보내셨다. 이번 행차에 공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염할 도구를 챙겨 가지고 갔다. 공이 심양에 이르러 항거하고 굽히지 않자 청 나라 임금은 의롭게 여겨 풀어 주었다.
기묘년 상이 오랫동안 병환을 앓았는데, 무고의 일이 일어나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과 관련이 되었다. 상은 밀지(密旨)를 내려 공으로 하여금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으로 내려오자 또다시 간쟁하여 다만 별궁에 옮겨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이 옥사가 끝내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공을 괘씸하게 여겨서 특별히 절사(節使)에 임명하였다. 공이 용만(龍灣)에 이르러서 들으니, 상이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에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사용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관(臺官)들이 공을 논박하지 않고 다른 일을 언급함을 책망하신 것이었다. 공은 사행을 멈추고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며, 병이 또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부사(副使)로 하여금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경진년 체직되었으며 사건에 걸려 다시 파직되었다가 임오년 다시 들어와 정승이 되었다. 하성(下城)하던 초기에 공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뜻을 굽혔다는 내용으로 명 나라 도독 진홍범(陳弘範)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할 것을 바랐는데, 그 자문이 중간에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갔다 돌아올 수 있는 자를 찾고자 하였는데, 마침 우리나라의 독보(獨步)라는 승려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있다가 일을 정탐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왔다. 공은 그에게 한 통의 자문을 부쳐서 군문(軍門)에 도착하게 하고 평안도 병사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배를 마련하여 들여보내게 하였다.
신사년 가을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당시에 공은 이미 정승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으나 답서를 초하여 보내었다. 청 나라 사람들은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멀리 바라보고는 우리나라가 명 나라와 내통하는가 의심하여 와서 힐책하였는데, 공이 만금(萬金)을 써서 일을 무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한 다음 독보가 왕래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미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마침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가 중국 선박과 몰래 장사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청 나라 장수는 심양에 인질로 있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위협하여 봉성(鳳城)으로 데려왔으며 이계를 잡아다가 문초(問招)하였다. 이계는 우리 나라의 은밀한 일을 청 나라에 고자질하고 살려 주기를 바라서 공이 독보를 보낸 사실을 말하니, 청 나라 장수가 와서 대질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일이 역신(逆臣 홍승주)의 입에서 나왔고 딴 증거가 없으니,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낫겠다.”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엿보아 알고 있으니, 또 물증이 반드시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 숨겼다가 종말에 탄로되면 일이 반드시 전전(輾轉)하여 군부(君父)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단지 나와 임경업 두 사람의 목숨으로 이 화를 막는 것이 낫다.” 하였다. 상은 공을 위로하고 백금(百金)과 초피(貂皮) 갖옷을 하사하여 보내었다. 공이 봉성에 이르러 치대하기를 “선박을 마련하여 승려를 보낸 것은 오직 내가 임경업과 함께 하였으니, 이미 군주의 명령이 아니다. 조정의 신하 또한 여기에 관여한 자가 없다.” 하였다. 청 나라 장수가 대질(對質)한 내용을 심양으로 보내자 청 나라 군주가 공에게 항쇄(項鎖)와 족쇄(足鎖)를 채워 잡아오게 해서 북관(北館)에 유치(幽置)하니, 북관은 사형수의 감옥이었다.
계미년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겼는데, 이때 청음(淸陰) 김공과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가 앞뒤로 붙잡혀 와서 한 관사에 함께 있었다. 심양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두 각로(閣老 정승)와 한 상서(尙書)가 모두 명 나라 조정을 위해서 붙잡혀 왔으니, 동방의 절의가 존경할 만하다.” 하였다.
을유년 청 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 나라의 도성인 연경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돌려보내니, 공 또한 김 청음, 이 상공과 함께 돌아와 시골에 물러나 있었다. 공은 어영청 제조(御營廳提調)로 부름을 받았다.
병술년 폐빈(廢嬪)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공은 은혜를 온전히 하여 살려 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해년(1647, 인조 25) 5월 공이 집에서 별세하니, 상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고 5일 동안 소찬(素饌)을 드셨다. 상과 세자는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 때까지 호상(護喪)하게 하였다. 부의(賻儀)와 수의(襚衣)를 내리고 조문하고 제사하여 애도하고 휼전을 베푼 것이 상례(常例)를 넘었으며,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 대율리(大栗里)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전배(前配)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진 만(晩)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인(嶙)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또한 함께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장씨 부인이 아들이 없으므로 공은 종자(從子) 후량(後亮)을 양자로 세웠는데, 나중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풍속은 양자를 세운 뒤에 자식을 낳으면 파양(罷養)하고 친자식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미 양자를 삼아서 부자를 정했으니, 본래 자연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바꿔서는 안 된다.” 하고는 조정에 청하여 후량에게 후사를 맡기니, 세상에 예를 아는 자들이 거룩하게 여겼으며 인하여 조정의 법령으로 만들었다. 후량은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다. 장남 석진(錫晉)은 현감이고 차남 석정(錫鼎)은 참판이고 차남 석항(錫恒)은 지평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士人)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후상은 홍문관 응교인데 석정을 양자로 삼았다.
공은 신묘한 기지(機智)가 안으로 밝고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 비록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큰 의논에 처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서 일찍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 사람들의 말에 의지가 저상되고 빼앗기는 일이 없었다.
젊었을 적부터 성리서(性理書)에 잠심(潛心)하여 안으로는 기운을 기르고 밖으로는 문장을 통달하게 하였다. 개연(慨然)히 당세를 바로잡을 뜻이 있었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상공의 문하에 유학하자, 모두 원대한 기국(器局)이라고 허여하였다.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귀(李貴)) 세 상공과 일찍부터 친밀한 교분을 맺으니, 세상에서는 사우(四友)라고 지목하였다. 몸이 중흥(中興)할 때를 만나서 중요한 직임을 맡았는데, 매양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폐단이 있는 정사를 바로잡아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주와 재상들의 뜻이 이미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공은 또 예송(禮訟)에 시달리고 화의(和議)에 부딪쳐 한 세상과 서로 합하지 않으니, 마치 둥근 구멍과 네모진 자루가 어긋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끝내 그 뜻과 사업을 다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의논은 일이 모두 경사(經史)에 근거한 것이고 공의 억설(臆說)이 아니니, 자연 추숭(追崇)과는 관여됨이 없다. 그리고 약한 나라를 보전하려고 노력한 계책은 또한 피아(彼我)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고 사세를 분명히 본 것에서 연유하였으니, 요컨대 종묘사직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한 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단지 명 나라의 가정(嘉靖)과 송 나라의 정강(靖康)을 천고의 지극한 경계로 삼아서 마침내 똑같은 죄과로 보고 함께 비판하고자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배(大拜)에 이르러서는 군주의 마음과 국권의 의탁이 오직 공에게 달려 있었으니, 패망을 구원하고 기울어진 것을 안정시킨 공로와 몸을 위태롭게 하여 군주를 받든 충절은 진실로 정론(定論)이 있었다. 그러나 지위가 지극히 높고 임무가 막중하니, 책임과 중망이 더욱 모였다. 이 때문에 준항(浚恒)의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 공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공에게 찾아가서 번번이 공의 잘못을 말하여 혹은 대여섯 가지의 일을 들기까지 하였는데, 공이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 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유공 백증(兪公伯曾)은 공이 방문해 오자 매우 상기되어 노려보고 초(草)한 상소문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공을 논박하려 하니,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고치겠다.” 하며 온화한 기색이 가득하여 끝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나갔다고 한다. 아,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도록 허여한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정승의 직무를 수행할 때 남보다 크게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나는 공에게 감히 실수가 없지 않음을 한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과오를 듣기 좋아하였음을 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공은 문장에 있어 천부적으로 밝게 깨달았는데, 반드시 논리를 위주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주의(奏議)하는 글에 있어서는 더더욱 붓끝에 혀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저술한 시문(詩文) 19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연양(延陽) 이 상공(李相公)이 공을 가장 잘 안다고 이름이 났는데, 이 상공은 말씀하기를 “지천(遲川)의 사업 중에 큰 것을 든다면 첫째는 반정(反正)을 하여 광복(匡復)하는 사업을 도운 것이요, 둘째는 예(禮)를 의논하여 부자의 윤리를 밝힌 것이요, 셋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달려가서 적의 예봉을 늦춘 것이요, 넷째는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을 주장해서 종묘사직을 보전한 것이요, 다섯째는 두 번이나 호랑이의 입에 들어가서 원병을 보내라는 오랑캐의 요청을 강력히 거절하여 목숨을 바쳐 변치 않은 것이요, 여섯째는 명 나라 조정에 소식을 알리고 끝내 위기를 감당하여 죽음으로써 자처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상공 이경여(李敬輿)의 말에 “굴자(屈子)의 충성은 충성이 과한 경우였는데 지천의 충성도 충성이 과한 경우이다.”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을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다. 금상 7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나는 먼 시골의 후진으로 미처 공의 문하에서 놀지 못하였으나 공의 장자(長子)와 실로 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감히 뽑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성조가 용흥하실 적에 / 聖祖龍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일어났으니 / 群鱗並躍
누가 그 힘을 다하여 / 孰竭其力
국가 위해 몸을 바쳤는가 / 以身殉國
이때 마침 최공이 / 際會崔公
실로 계책을 도와 / 實贊王猷
기강을 떨쳐서 / 欲振綱維
국가를 편안히 하려고 하였네 / 以圖綢繆
군주의 신임과 지위를 얻으니 / 得君得位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으나 / 宜若可爲
일이 평탄하기 어려움은 / 事之難平
예로부터 한탄한 바라오 / 從古所噫
국내와 국외에 연고가 많아 / 外內多故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니 / 朝論攜貳
십 수년 동안 / 十數年間
안정한 바가 없었네 / 靡所底止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所疑
공은 스스로 믿고 / 公則自信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 人之所避
공은 스스로 분발하였네 / 公則自奮
기꺼이 한 몸으로 / 甘以其身
비방을 감수했다오 / 爲衆所訶
원함은 충성이었으니 / 所欲者忠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는가 / 遑恤其他
남문에서 계책을 결정하여 / 南門決策
용감하게 적의 예봉을 막았고 / 勇遏賊鋒
북관으로 잡혀가니 / 北館被縶
조종의 의리 컸네 / 義大朝宗
오 나라에 화친을 이룸에 / 行成于吳
범려(范蠡)가 스스로 벌이 내릴 줄 알았고
/ 蠡自知罰
감히 연 나라를 도모하지 않았으니 / 不敢謀燕
악의(樂毅)의 마음 질정할 수 있네
/ 毅心可質
공의 처음과 끝은 / 公之始終
마른 고기 씹어 해독이 많았으나 / 噬腊多毒
끝내 허물이 없음은 / 其底无咎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네 / 唯志之確
저 옛날 혼란했을 적에는 / 昔在草昧
용안을 알지 못했는데 / 未識龍顔
혹자는 먼저 찾아뵙기를 권했으나 / 人勸先謁
공은 못 들은 척했다오 / 公若不聞
공이 병환이 위독해지자 / 及公寢疾
내관을 보내고 의원을 보낼 적에 / 內遣醫問
도성 문이 밤에 닫히자 / 都門夜閉
신표(信標)를 가지고 문을 열었네 / 啓之以信
분수를 삼감이 엄하고 / 謹分之嚴
은혜를 가함이 특별하시니 / 加恩之特
훌륭한 군주와 신하 보려면 / 欲觀君臣
이것을 가지고 헤아릴 수 있네 / 此可以度
국가의 안위가 공에게 달려 있으니 / 安危休戚
살아 있으면 영화롭게 여기고 죽으면 슬퍼하였네 / 存沒哀榮
공업(功業)과 문장은 / 勳業文章
그 이름 영원히 전하리라 / 不朽之名
아름다운 이 언덕에 / 樂哉斯丘
비석이 높이 솟아 있네 / 有石穹然
여기에 좋은 시를 새겨서 / 銘于好詩
영원한 후세에 보이노라 / 以示永年


 

[주D-001]일혜(壹惠)의 표창 : 일혜는 한 가지 선(善)으로 고인의 특별한 공로를 기려 시호를 내림을 이른다.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하였는바, 이는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려우므로 가장 큰 것을 요약하였음을 이른다. 이 때문에 시호를 절혜(節惠)라고도 칭한다.
[주D-002]그날 …… 청명하였다 : 거사하는 날 날씨가 맑음은 하늘이 도왔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군대를 풀어 상 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하는 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도다.〔肆伐大商 會朝淸明〕” 하였다.
[주D-003]서쪽 …… 반란하자 : 평안 병사로 영변(寧邊)에 있던 이괄(李适)이 반란한 사건을 가리킨다.
[주D-004]계운궁(啓運宮) :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궁호(宮號)이다.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정원군(定遠君)에게 시집가서 인조(仁祖)를 낳았는데,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계운궁이라 하였으며,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追封)되고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주D-005]성하지맹(城下之盟) :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으로,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주D-006]북관(北館) : 북쪽 관사란 뜻으로, 청 나라의 본거지인 심양(瀋陽)의 관사를 이른다.
[주D-007]명 나라의 …… 정강(靖康) : 가정은 명 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가정 17년 세종의 생부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추존하여 예종헌황제(睿宗獻皇帝)라 하였으며, 정강은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로 송 나라는 이때 금(金) 나라의 침공을 받고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인조의 생부 추존과 청 나라에게 항복한 두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8]준항(浚恒)의 말 : 준항은 아랫사람이 평상적인 것보다 깊게 요구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원망함을 이른다. 《주역》 항괘(恒卦) 초육(初六)에 “평상시보다 깊게 요구한다. 바르더라도 흉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初六 浚恒 貞凶 无攸利〕” 하였다.
[주D-009]굴자(屈子) :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이름은 평(平)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지극하였으나 회왕(懷王)과 양왕(襄王)이 간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소원히 하자, 《이소경(離騷經)》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으며, 마침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주D-010]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 : 마천은 사마천(司馬遷)의 약칭이며 풍수는 풍당(馮唐)의 아들로 사마천과 매우 친하였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주D-011]성조(聖祖)가 용흥(龍興) : 성조는 인조(仁祖)를 가리키며 용흥은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제왕의 등극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2]조종(朝宗)의 의리 : 조종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바, 모든 속국이 천자국을 우러러 섬기는 의리를 말한 것이다.
[주D-013]오(吳) 나라에 …… 알았고 : 범려(范蠡)는 월(越) 나라의 명재상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자, 범려는 월왕을 위하여 굴욕적인 맹약을 하니, 월 나라에서 그를 비판하는 자가 많았다.
[주D-014]연(燕) 나라를 …… 있네 : 악의(樂毅)는 전국(戰國) 시대 연 나라 소왕(昭王)에게 대장군(大將軍)으로 등용되어 제(齊) 나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서 70여 개 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이룩하였다. 소왕이 죽고 태자인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악의를 의심하여 직위를 박탈하였다. 악의는 할 수 없이 조(趙)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조 나라에서는 악의를 등용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려 하였으나 끝내 신의를 지켜 따르지 않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주D-015]마른 …… 많았으나 :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해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러우나 허물이 없다.〔六三 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 하였는바, 남의 구설수를 들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