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전주최문의자랑 지천 최명길 방조

영의정 문충(文忠) 최공(崔公) 신도비명 지천 선생

아베베1 2012. 8. 17. 09:21

 

 

 이미지사진은  도봉산 병풍바위의 모습

 

약천집 제17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영의정 문충(文忠) 최공(崔公) 신도비명


저 옛날 인조가 중흥할 당시 여러 신하들 중에 충성은 일신을 잊을 수 있고 재주는 만사를 운용할 수 있고 지혜는 일을 밝게 알 수 있고 용맹은 기미를 결단할 수 있으며, 치욕을 참고 위험을 무릅써서 끝내 생사와 훼예(毁譽)에 마음을 동요하지 않아서 종묘사직을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 백성을 미란(糜爛)에 이르지 않게 한 분은 실로 지천(遲川) 최 상국(崔相國)이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공이 처한 것을 보고 그 효험을 살펴보면 비록 하나하나 법도에 맞았으나 그 일을 따져 보면 모두 여러 사람과 대립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 공을 엄폐할 수 없으나 훼방 또한 그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괴로운 심정과 혈성(血誠)으로 오직 군주를 위하고 딴마음이 없어서 여론에 구애되지 않고 필연적인 계책을 믿은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기꺼이 자기 한몸으로 온 세상의 비방과 힐책을 받으면서도 확고하여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생과 장자(長者)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이 있어 그 말씀이 차츰차츰 나오며, 공보다 뒤에 태어난 학자와 사대부로서 공을 말하는 자들이 있어 그 의논이 점점 공평해져 일혜(壹惠)의 표창을 내릴 적에 조정에서 이의가 없음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그 실제가 있으면 끝내 반드시 스스로 밝혀진다는 것이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휘가 명길(鳴吉)이고 자가 자겸(子謙)이며 계통이 전주(全州)이니,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들어오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서로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수준(秀俊)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가 만옹(晩翁)이니,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는바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이 공의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공은 전주 유씨(全州柳氏)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셨는데, 공이 바로 둘째이시다.
공은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 19)에 출생하였다. 을사년에 생원시 1등과 진사시 8등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으며, 기유년 한원(翰苑 예문관)에 천거되었으나 질병으로 강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광해군이 군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오래도록 낭서(郞署)에 머물렀으며 사건에 걸려 체포되고 삭탈관직되어 쫓겨났다.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종묘사직이 기울게 되자 논의를 주창한 여러 공들과 은밀히 큰 계획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계해년(1623) 봄에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거사할 날짜를 정하였는데, 그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였다.
인조가 처음 정사를 베풀 적에 공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옮겼으며 참의로 승진되고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참판 겸 비국 제조(參判兼備局提調)에 제수되었다.
갑자년 서쪽 지방의 장수가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자, 공을 총독 부사(摠督副使)로 임명하여 원수(元帥)의 군대에 달려가게 하였는데, 안산(鞍山)의 전투에 계획을 많이 도왔으며 부제학에 제수되고 대사헌으로 옮겼다.
병인년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복(服)을 강등하고 양자를 세운 잘못을 논하였고, 또 장례는 사(士)의 예(禮)로 하고 제사는 제후(諸侯)의 예로 하는 것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며, 별묘(別廟)를 세우고 상이 직접 제사를 주장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서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묘년 청 나라 군대가 크게 침입하고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다. 공은 “이미 강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게 대처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손한 말로 적의 예봉을 늦출 것을 청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상을 뵙기를 요구하자, 공은 또 상께 아뢰기를 “전란이 일어나서 사신이 그 사이에 있으니, 뜻을 굽혀 한번 접견하소서.”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언로에서는 공이 화친을 주장했다 하여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추고(推考)만 하라고 명하였다.
계운궁의 담제(禫祭) 뒤에 장차 사묘(私廟)에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공이 예전의 의논을 다시 주장하니, 옥당에서 크게 배척하였다. 공은 외직을 청하여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경기 백성들이 크게 힘입고는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체직되고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병조로 옮기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신미년 상이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고집하여 간쟁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먼저 명 나라 조정에 아뢰어 결정하려 하니, 대신 이하가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상이 특별히 공을 부제학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별묘를 세워서 모시자는 공의 의론이 조정의 의논에 비하여 뛰어났기 때문에 상이 공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여 조정의 의논을 꺾고 또 이끌어다가 자신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은 마침내 차자를 올려서 추숭하는 일은 예에 근거할 만한 조항이 없고 조정의 의논이 또 통일되지 않았으니, 먼저 명 나라에 알려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임신년 예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추숭하라는 의논이 또 예조로 내려왔다. 공이 예전의 소견을 고집하니, 상이 엄하게 책망하였다. 공이 청한 것은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 있었고, 낮추어서 강복(降服)하는 것과 더 높여서 추숭하는 것은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의논과 어긋나고 끝에는 상의 뜻에 거슬렸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계유년 양관(兩館) 대제학과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을해년 체직되고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병자년 체직되고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다.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청 나라 사람들이 참람하게 황제라 칭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에서 의리에 근거하여 배척하고 끊으니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곧바로 가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병란의 단서가 빚어졌다.” 하고는 미리 전투하고 수비할 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속히 사신을 보내어서 적의 실정을 정탐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또 말하기를 “국가의 대사는 모름지기 심복인 대신과 서로 의논해야 하니, 승지와 내관이 모두 참여하여 들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 척화(斥和)하는 일이었으나 공은 홀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들어오면 경연의 신하가 서로 비방하고 나가면 대관(臺官)들이 서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강력히 말씀하여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으로써 증명하고 조정의 지나간 자취를 참작하였는데, 그 글이 수만 자가 넘었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청 나라 군주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선봉 부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며칠 만에 서쪽 교외에 도달하였다. 상이 강도(江都)로 행차하려 하였는데 겨우 숭례문에 이르자 오랑캐 기병이 이미 길을 막았다. 상이 숭례문의 문루에 납시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일이 급박하게 되었으니, 신이 청컨대 달려가 오랑캐 장수를 맞이해서 맹약을 저버림을 따지겠습니다. 오랑캐가 만약 듣지 않는다면 신이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신을 접견하여 말한다면 행여 다소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그 틈을 타서 대가를 돌려 동쪽으로 향해서 급히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소서.” 하자,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상은 금위군(禁衛軍) 20명을 떼어 주었는데, 도성문을 나가자마자 모두 새와 짐승처럼 흩어져 버렸다. 공이 말을 달려 사현(沙峴)에 이르러서 오랑캐 장수를 만나 출병함을 힐책하자, 오랑캐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중에서 결단하라고 청하였다. 공은 일부러 말을 끌어서 해가 기울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오랑캐의 말을 행조(行朝)에 알리게 하였다.
다음 날 해가 저물도록 보고가 오지 않자 오랑캐들은 공이 자기들을 속였다 하여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결행하지는 못했다. 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복명하자, 상은 공의 손을 잡고 오열하니, 공 또한 울면서 감히 성상을 우러러 뵙지 못하였다. 오랑캐는 남한산성에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화친을 배척하는 의논이 더욱 준엄하였다. 이 때문에 묘당(廟堂)에서는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어 결단하지 못하였다. 공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화친과 전쟁 두 가지 일이 있을 뿐인데, 전쟁을 하자니 힘이 미치지 못하고 화친을 하자니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한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모두 어육(魚肉)이 된다면 장차 종묘사직을 어느 곳에 두겠는가.” 하였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더욱 급박하여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상(沮喪)되어 화의(和議)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화친하는 글을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는데, 공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맞추며 말하기를 “글을 찢는 자도 없어서는 안 되고 글을 주워 맞추는 자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하였다.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하였다.
정축년 4월 우의정으로 승진하니, 이때 눈앞에 가득히 보이는 것은 불탄 재뿐이어서 모든 일이 허술하였다. 공은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위로하여 권면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정사를 미봉(彌縫)해서 내외가 다소 진정되었다. 가을에 좌상으로 승진하였다. 무인년 영상으로 승진하였다. 처음 청 나라 사람들과 맹약을 맺을 적에 공은 이미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는 데에는 원병(援兵)을 보내어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오랑캐들이 과연 와서 원병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자, 공은 직접 심양(瀋陽)으로 달려가서 예전에 한 말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들이 또다시 와서 원병을 요청하고 꾸짖는 말로 위협하자, 공이 말하기를 “원병을 보내는 것과 하성(下城)은 별개의 일이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따를 수 없다. 우리나라 대신 중에 한두 명은 이 일 때문에 죽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다.” 하고는 다시 심양으로 달려가서 자기 몸으로 감당할 것을 청하니, 상은 표범 갖옷 한 벌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한 다음 물건을 풍부히 주어 보내셨다. 이번 행차에 공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염할 도구를 챙겨 가지고 갔다. 공이 심양에 이르러 항거하고 굽히지 않자 청 나라 임금은 의롭게 여겨 풀어 주었다.
기묘년 상이 오랫동안 병환을 앓았는데, 무고의 일이 일어나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과 관련이 되었다. 상은 밀지(密旨)를 내려 공으로 하여금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으로 내려오자 또다시 간쟁하여 다만 별궁에 옮겨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이 옥사가 끝내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공을 괘씸하게 여겨서 특별히 절사(節使)에 임명하였다. 공이 용만(龍灣)에 이르러서 들으니, 상이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에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사용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관(臺官)들이 공을 논박하지 않고 다른 일을 언급함을 책망하신 것이었다. 공은 사행을 멈추고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며, 병이 또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부사(副使)로 하여금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경진년 체직되었으며 사건에 걸려 다시 파직되었다가 임오년 다시 들어와 정승이 되었다. 하성(下城)하던 초기에 공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뜻을 굽혔다는 내용으로 명 나라 도독 진홍범(陳弘範)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할 것을 바랐는데, 그 자문이 중간에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갔다 돌아올 수 있는 자를 찾고자 하였는데, 마침 우리나라의 독보(獨步)라는 승려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있다가 일을 정탐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왔다. 공은 그에게 한 통의 자문을 부쳐서 군문(軍門)에 도착하게 하고 평안도 병사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배를 마련하여 들여보내게 하였다.
신사년 가을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당시에 공은 이미 정승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으나 답서를 초하여 보내었다. 청 나라 사람들은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멀리 바라보고는 우리나라가 명 나라와 내통하는가 의심하여 와서 힐책하였는데, 공이 만금(萬金)을 써서 일을 무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한 다음 독보가 왕래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미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마침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가 중국 선박과 몰래 장사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청 나라 장수는 심양에 인질로 있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위협하여 봉성(鳳城)으로 데려왔으며 이계를 잡아다가 문초(問招)하였다. 이계는 우리 나라의 은밀한 일을 청 나라에 고자질하고 살려 주기를 바라서 공이 독보를 보낸 사실을 말하니, 청 나라 장수가 와서 대질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일이 역신(逆臣 홍승주)의 입에서 나왔고 딴 증거가 없으니,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낫겠다.”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바다에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엿보아 알고 있으니, 또 물증이 반드시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 숨겼다가 종말에 탄로되면 일이 반드시 전전(輾轉)하여 군부(君父)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단지 나와 임경업 두 사람의 목숨으로 이 화를 막는 것이 낫다.” 하였다. 상은 공을 위로하고 백금(百金)과 초피(貂皮) 갖옷을 하사하여 보내었다. 공이 봉성에 이르러 치대하기를 “선박을 마련하여 승려를 보낸 것은 오직 내가 임경업과 함께 하였으니, 이미 군주의 명령이 아니다. 조정의 신하 또한 여기에 관여한 자가 없다.” 하였다. 청 나라 장수가 대질(對質)한 내용을 심양으로 보내자 청 나라 군주가 공에게 항쇄(項鎖)와 족쇄(足鎖)를 채워 잡아오게 해서 북관(北館)에 유치(幽置)하니, 북관은 사형수의 감옥이었다.
계미년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겼는데, 이때 청음(淸陰) 김공과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가 앞뒤로 붙잡혀 와서 한 관사에 함께 있었다. 심양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두 각로(閣老 정승)와 한 상서(尙書)가 모두 명 나라 조정을 위해서 붙잡혀 왔으니, 동방의 절의가 존경할 만하다.” 하였다.
을유년 청 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 나라의 도성인 연경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돌려보내니, 공 또한 김 청음, 이 상공과 함께 돌아와 시골에 물러나 있었다. 공은 어영청 제조(御營廳提調)로 부름을 받았다.
병술년 폐빈(廢嬪)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공은 은혜를 온전히 하여 살려 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해년(1647, 인조 25) 5월 공이 집에서 별세하니, 상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고 5일 동안 소찬(素饌)을 드셨다. 상과 세자는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 때까지 호상(護喪)하게 하였다. 부의(賻儀)와 수의(襚衣)를 내리고 조문하고 제사하여 애도하고 휼전을 베푼 것이 상례(常例)를 넘었으며,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 대율리(大栗里)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전배(前配)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진 만(晩)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인(嶙)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또한 함께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장씨 부인이 아들이 없으므로 공은 종자(從子) 후량(後亮)을 양자로 세웠는데, 나중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풍속은 양자를 세운 뒤에 자식을 낳으면 파양(罷養)하고 친자식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미 양자를 삼아서 부자를 정했으니, 본래 자연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바꿔서는 안 된다.” 하고는 조정에 청하여 후량에게 후사를 맡기니, 세상에 예를 아는 자들이 거룩하게 여겼으며 인하여 조정의 법령으로 만들었다. 후량은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다. 장남 석진(錫晉)은 현감이고 차남 석정(錫鼎)은 참판이고 차남 석항(錫恒)은 지평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士人)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후상은 홍문관 응교인데 석정을 양자로 삼았다.
공은 신묘한 기지(機智)가 안으로 밝고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 비록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큰 의논에 처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서 일찍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 사람들의 말에 의지가 저상되고 빼앗기는 일이 없었다.
젊었을 적부터 성리서(性理書)에 잠심(潛心)하여 안으로는 기운을 기르고 밖으로는 문장을 통달하게 하였다. 개연(慨然)히 당세를 바로잡을 뜻이 있었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상공의 문하에 유학하자, 모두 원대한 기국(器局)이라고 허여하였다.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귀(李貴)) 세 상공과 일찍부터 친밀한 교분을 맺으니, 세상에서는 사우(四友)라고 지목하였다. 몸이 중흥(中興)할 때를 만나서 중요한 직임을 맡았는데, 매양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폐단이 있는 정사를 바로잡아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주와 재상들의 뜻이 이미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공은 또 예송(禮訟)에 시달리고 화의(和議)에 부딪쳐 한 세상과 서로 합하지 않으니, 마치 둥근 구멍과 네모진 자루가 어긋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끝내 그 뜻과 사업을 다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의논은 일이 모두 경사(經史)에 근거한 것이고 공의 억설(臆說)이 아니니, 자연 추숭(追崇)과는 관여됨이 없다. 그리고 약한 나라를 보전하려고 노력한 계책은 또한 피아(彼我)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고 사세를 분명히 본 것에서 연유하였으니, 요컨대 종묘사직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한 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단지 명 나라의 가정(嘉靖)과 송 나라의 정강(靖康)을 천고의 지극한 경계로 삼아서 마침내 똑같은 죄과로 보고 함께 비판하고자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배(大拜)에 이르러서는 군주의 마음과 국권의 의탁이 오직 공에게 달려 있었으니, 패망을 구원하고 기울어진 것을 안정시킨 공로와 몸을 위태롭게 하여 군주를 받든 충절은 진실로 정론(定論)이 있었다. 그러나 지위가 지극히 높고 임무가 막중하니, 책임과 중망이 더욱 모였다. 이 때문에 준항(浚恒)의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 공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공에게 찾아가서 번번이 공의 잘못을 말하여 혹은 대여섯 가지의 일을 들기까지 하였는데, 공이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 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유공 백증(兪公伯曾)은 공이 방문해 오자 매우 상기되어 노려보고 초(草)한 상소문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공을 논박하려 하니,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고치겠다.” 하며 온화한 기색이 가득하여 끝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나갔다고 한다. 아,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도록 허여한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정승의 직무를 수행할 때 남보다 크게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나는 공에게 감히 실수가 없지 않음을 한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과오를 듣기 좋아하였음을 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공은 문장에 있어 천부적으로 밝게 깨달았는데, 반드시 논리를 위주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주의(奏議)하는 글에 있어서는 더더욱 붓끝에 혀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저술한 시문(詩文) 19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연양(延陽) 이 상공(李相公)이 공을 가장 잘 안다고 이름이 났는데, 이 상공은 말씀하기를 “지천(遲川)의 사업 중에 큰 것을 든다면 첫째는 반정(反正)을 하여 광복(匡復)하는 사업을 도운 것이요, 둘째는 예(禮)를 의논하여 부자의 윤리를 밝힌 것이요, 셋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달려가서 적의 예봉을 늦춘 것이요, 넷째는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을 주장해서 종묘사직을 보전한 것이요, 다섯째는 두 번이나 호랑이의 입에 들어가서 원병을 보내라는 오랑캐의 요청을 강력히 거절하여 목숨을 바쳐 변치 않은 것이요, 여섯째는 명 나라 조정에 소식을 알리고 끝내 위기를 감당하여 죽음으로써 자처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상공 이경여(李敬輿)의 말에 “굴자(屈子)의 충성은 충성이 과한 경우였는데 지천의 충성도 충성이 과한 경우이다.”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을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다. 금상 7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나는 먼 시골의 후진으로 미처 공의 문하에서 놀지 못하였으나 공의 장자(長子)와 실로 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감히 뽑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성조가 용흥하실 적에 / 聖祖龍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일어났으니 / 群鱗並躍
누가 그 힘을 다하여 / 孰竭其力
국가 위해 몸을 바쳤는가 / 以身殉國
이때 마침 최공이 / 際會崔公
실로 계책을 도와 / 實贊王猷
기강을 떨쳐서 / 欲振綱維
국가를 편안히 하려고 하였네 / 以圖綢繆
군주의 신임과 지위를 얻으니 / 得君得位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으나 / 宜若可爲
일이 평탄하기 어려움은 / 事之難平
예로부터 한탄한 바라오 / 從古所噫
국내와 국외에 연고가 많아 / 外內多故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니 / 朝論攜貳
십 수년 동안 / 十數年間
안정한 바가 없었네 / 靡所底止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所疑
공은 스스로 믿고 / 公則自信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 人之所避
공은 스스로 분발하였네 / 公則自奮
기꺼이 한 몸으로 / 甘以其身
비방을 감수했다오 / 爲衆所訶
원함은 충성이었으니 / 所欲者忠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는가 / 遑恤其他
남문에서 계책을 결정하여 / 南門決策
용감하게 적의 예봉을 막았고 / 勇遏賊鋒
북관으로 잡혀가니 / 北館被縶
조종의 의리 컸네 / 義大朝宗
오 나라에 화친을 이룸에 / 行成于吳
범려(范蠡)가 스스로 벌이 내릴 줄 알았고
/ 蠡自知罰
감히 연 나라를 도모하지 않았으니 / 不敢謀燕
악의(樂毅)의 마음 질정할 수 있네
/ 毅心可質
공의 처음과 끝은 / 公之始終
마른 고기 씹어 해독이 많았으나 / 噬腊多毒
끝내 허물이 없음은 / 其底无咎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네 / 唯志之確
저 옛날 혼란했을 적에는 / 昔在草昧
용안을 알지 못했는데 / 未識龍顔
혹자는 먼저 찾아뵙기를 권했으나 / 人勸先謁
공은 못 들은 척했다오 / 公若不聞
공이 병환이 위독해지자 / 及公寢疾
내관을 보내고 의원을 보낼 적에 / 內遣醫問
도성 문이 밤에 닫히자 / 都門夜閉
신표(信標)를 가지고 문을 열었네 / 啓之以信
분수를 삼감이 엄하고 / 謹分之嚴
은혜를 가함이 특별하시니 / 加恩之特
훌륭한 군주와 신하 보려면 / 欲觀君臣
이것을 가지고 헤아릴 수 있네 / 此可以度
국가의 안위가 공에게 달려 있으니 / 安危休戚
살아 있으면 영화롭게 여기고 죽으면 슬퍼하였네 / 存沒哀榮
공업(功業)과 문장은 / 勳業文章
그 이름 영원히 전하리라 / 不朽之名
아름다운 이 언덕에 / 樂哉斯丘
비석이 높이 솟아 있네 / 有石穹然
여기에 좋은 시를 새겨서 / 銘于好詩
영원한 후세에 보이노라 / 以示永年

 


 

[주D-001]일혜(壹惠)의 표창 : 일혜는 한 가지 선(善)으로 고인의 특별한 공로를 기려 시호를 내림을 이른다.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하였는바, 이는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려우므로 가장 큰 것을 요약하였음을 이른다. 이 때문에 시호를 절혜(節惠)라고도 칭한다.
[주D-002]그날 …… 청명하였다 : 거사하는 날 날씨가 맑음은 하늘이 도왔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군대를 풀어 상 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하는 날 아침 날씨가 청명하도다.〔肆伐大商 會朝淸明〕” 하였다.
[주D-003]서쪽 …… 반란하자 : 평안 병사로 영변(寧邊)에 있던 이괄(李适)이 반란한 사건을 가리킨다.
[주D-004]계운궁(啓運宮) :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궁호(宮號)이다.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정원군(定遠君)에게 시집가서 인조(仁祖)를 낳았는데,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계운궁이라 하였으며,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追封)되고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주D-005]성하지맹(城下之盟) :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으로,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주D-006]북관(北館) : 북쪽 관사란 뜻으로, 청 나라의 본거지인 심양(瀋陽)의 관사를 이른다.
[주D-007]명 나라의 …… 정강(靖康) : 가정은 명 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가정 17년 세종의 생부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을 추존하여 예종헌황제(睿宗獻皇帝)라 하였으며, 정강은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로 송 나라는 이때 금(金) 나라의 침공을 받고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인조의 생부 추존과 청 나라에게 항복한 두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8]준항(浚恒)의 말 : 준항은 아랫사람이 평상적인 것보다 깊게 요구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원망함을 이른다. 《주역》 항괘(恒卦) 초육(初六)에 “평상시보다 깊게 요구한다. 바르더라도 흉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初六 浚恒 貞凶 无攸利〕” 하였다.
[주D-009]굴자(屈子) :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이름은 평(平)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지극하였으나 회왕(懷王)과 양왕(襄王)이 간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소원히 하자, 《이소경(離騷經)》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으며, 마침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주D-010]마천(馬遷)과 풍수(馮遂)의 우의 : 마천은 사마천(司馬遷)의 약칭이며 풍수는 풍당(馮唐)의 아들로 사마천과 매우 친하였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주D-011]성조(聖祖)가 용흥(龍興) : 성조는 인조(仁祖)를 가리키며 용흥은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제왕의 등극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2]조종(朝宗)의 의리 : 조종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바, 모든 속국이 천자국을 우러러 섬기는 의리를 말한 것이다.
[주D-013]오(吳) 나라에 …… 알았고 : 범려(范蠡)는 월(越) 나라의 명재상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자, 범려는 월왕을 위하여 굴욕적인 맹약을 하니, 월 나라에서 그를 비판하는 자가 많았다.
[주D-014]연(燕) 나라를 …… 있네 : 악의(樂毅)는 전국(戰國) 시대 연 나라 소왕(昭王)에게 대장군(大將軍)으로 등용되어 제(齊) 나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서 70여 개 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이룩하였다. 소왕이 죽고 태자인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악의를 의심하여 직위를 박탈하였다. 악의는 할 수 없이 조(趙)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조 나라에서는 악의를 등용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려 하였으나 끝내 신의를 지켜 따르지 않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주D-015]마른 …… 많았으나 :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해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러우나 허물이 없다.〔六三 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 하였는바, 남의 구설수를 들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