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전주최문의자랑 지천 최명길 방조

지천집(遲川集)》 서

아베베1 2013. 5. 26. 20:28

 

 
서계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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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9수(九首)
《지천집(遲川集)》

《좌전(左傳)》에 “가장 훌륭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사공(事功)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문장(文章)을 남기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본말(本末)을 논한 말이다. 덕이 근본이요 사공과 문장이 말단이니, 넉넉한 덕이 진실로 몸에 있으면 이를 베푸매 사업(事業)과 공렬(功烈)이 되고, 이를 드러내매 언어와 문장이 된다. 그 성취한 사공을 상고하고 그 드러난 문장을 관찰하면 그 사람에게 갖추어진 근본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니, 또 뉘라서 이를 숨길 수 있겠는가.
일찍이 생각건대, 최 문충공(崔文忠公)이 세상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세 가지이다. 제공(諸公)들과 책모(策謀)를 결정하여 혼암한 임금을 몰아내고 명성(明聖)한 군주를 도와서 천지 사이에 인륜을 밝혔으니, 이것이 문충공의 첫 번째 공이다.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에, 여러 장로(長老)들이 그 누구도 털끝만큼이라도 문란(紊亂)시켜서는 안 되는 소목(昭穆)의 차서와 털끝만큼이라도 간단(間斷)시켜서는 안 되는 본말의 계통을 잘 알지 못한 채, 마침내 유사한 주변의 설을 끌어들여 증거로 삼았는데, 온 세상이 그들의 주장에 휩쓸려 다시 그 오류를 살피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홀로 뭇사람들의 비방을 받으며 여러 의논의 잘잘못을 가리니, 그 논의가 매우 상세하고 그 말이 매우 분명하여 아무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친(尊親)의 분수가 크게 안정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문충공의 두 번째 공이다.
청국(淸國)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은 누군들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제공들은 한가하게 앉아서 공허한 말만 하고 아무도 시세(時勢)를 보고 진퇴할 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병(敵兵)이 성하(城下)에 닥치고 나서야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때에는 비록 평소 전섭(專聶)같은 결단을 자부하고, 늘 신포(信布) 같은 용맹을 자부하던 자들도 안색이 바뀌고 기운을 잃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 들어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에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복심(腹心)이 되는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에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社稷)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生民)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동토(東土)의 사람들이 그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그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주의(奏議)는 곡진하고 명백 직절하여 육선공(陸宣公)에 손색이 없다. 잠깐 사이에 충만한 기운을 움직였으니, 그 빼어나고 과감한 기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장은 어찌 근대에 드물다뿐이겠는가.
전배(前輩)들은 문장에 있어 모두 계곡(谿谷)을 추중(推重)하고, 공 또한 평소에 한 수 양보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나만은 계곡이 너무 문장을 꾸민 점이 없지 않아 외려 흉중에서 우러나와 넉넉한 여운이 있는 공의 문장만 못하다고 여긴다. 온축된 밝은 식견이 언어에 나타난 것은 남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시 또한 고절(高絶)하여 세상에서 시 잘 짓기를 자부하는 자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로써 말해 보면 앞에서 말한, 그 사업과 문장을 관찰하면 그 사람에게 보존된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충공에 있어서 어떠한가.
문충공의 시문(詩文) 몇 권이 ‘《지천집(遲川集)》’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니, 아, 이 문집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아니하여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들이 여기에서 찾는다면 공의 면모를 한둘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주C-001]지천집(遲川集) : 조선 중기의 문신 최명길(崔鳴吉)의 시문집이다.
[주D-001]가장 …… 것이다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숙손표(叔孫豹)의 말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같은 성인(聖人)을 이르고, 사공을 세운다는 것은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한 우(禹) 임금과 같은 분을 이르고, 문장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글과 말을 남긴 사일(史佚)과 장문중(臧文仲) 같은 사람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D-002]최 문충공(崔文忠公) : 문충공은 최명길(崔鳴吉 : 1586 〜 1647)의 시호이다. 자는 자겸(子謙)이요, 호는 지천(遲川)ㆍ창랑(滄浪)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완성군(完成君)에 봉해졌고, 1627년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啓運宮)의 신주(神主)를 흥경원(興慶園)에 합부(合祔)하는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며,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주D-003]전섭(專聶) :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광(光)을 위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고기 뱃속에 숨겨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한 전저(專諸)와, 전국 시대 엄중자(嚴仲子)를 위해 연(燕)나라 재상 협루(俠累)를 암살하고 자결한 섭정(聶政)의 병칭으로, 고대의 대표적인 자객들이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주D-004]신포(信布) : 신포는 한(漢)나라의 명장인 한신(韓信)과 영포(英布)를 가리킨다.
[주D-005]육선공(陸宣公) :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육지(陸贄)를 말한다. 자는 경여(敬輿)이고, 선공(宣公)은 시호이다. 《당서(唐書)》 권157에 “천자에게 올리는 주의(奏議)를 짓는 데 능란한 재능이 있다.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란 책이 있으니, 사정을 곡진하게 말하고 일의 기미에 적중하였다” 하였다.
[주D-006]계곡(谿谷) :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 : 1587 〜 1638)의 호이다.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