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 유사

전주최공 문성공 최덕지 등의 사우에 사액을 줄것을 청하는 문헌위 등의 상소문

아베베1 2012. 11. 25. 10:39

 

 

> 수사관
修史官
正憲大夫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
嘉善大夫中樞院副使 同知春秋館事臣金銚
嘉善大夫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世子左副賓客臣李先齊
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 知製敎 經筵侍講官兼春秋館編修官臣鄭昌孫
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 知製敎 世子左輔德兼 春秋館編修官臣辛碩祖
通政大夫司諫院左司諫大夫 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臣崔恒
果毅將軍虎賁侍衛司上護軍兼知兵曹事 春秋館編修官臣盧叔仝
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 知製敎 世子左弼善兼春秋館記注官臣李石亨
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 知製敎 世子右輔德兼春秋館記注官 知承文院事臣申叔舟
中訓大夫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臣崔德之
奉正大夫直集賢殿知製敎 世子右弼善兼春秋館記注官臣魚孝瞻
奉列大夫直集賢殿知製敎 世子右弼善兼左中護 春秋館記注官臣金禮蒙
奉列大夫成均司藝 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臣金淳
通德郞集賢殿校理 知製敎 世子右文學兼春秋館記注官臣梁誠之
通善郞集賢殿校理 知製敎 經筵副檢討官兼春秋館記注官臣李芮
奉直郞守史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臣金之慶
奉直郞守成均直講兼春秋館記注官臣金閏福
承議郞守集賢殿副校理 知製敎 世子右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李宜堪
承議郞集賢殿修撰 知製敎 經筵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尹起畎
承議郞成均注簿兼春秋館記事官臣金命中
進勇校尉行右軍攝副司直兼承文院副校理 春秋館記事官臣趙瑾
宣敎郞守成均注簿兼中部儒學敎授官 春秋館記官臣洪禹治
宣敎郞守承文院副校理兼春秋館記事官臣芮承錫
宣敎郞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尹子雲
宣敎郞司贍注簿兼春秋館記事官臣李孝長
宣務郞守成均注簿兼西部儒學敎授官 春秋館記事官臣李仁全
宣務郞行藝文奉敎兼春秋館記事官臣柳子文
務功郞藝文奉敎兼春秋館記事官臣金孝宇
通仕郞藝文待敎兼春秋館記事官臣金勇
通仕郞行藝文檢閱兼春秋館記事官臣韓瑞鳳
通仕郞行藝文檢閱兼春秋館記事官臣吳伯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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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
慶尙道   咸陽

名宦 新羅 令忠 憲德王十四年態川都督 憲昌反脅武珍 完山等州爲己屬完山長吏 崔雄與令忠遁走至京告之王卽拜令忠 速含郡太守位級食 원주 崔致遠 致遠寄海印曾希朗詩下題防虜太監天嶺郡太守遏崔致遠新增 顯廟朝庚戌享于栢淵書院 원주 本朝宋希璟 李次若 崇仁之子 원주 蔡倫 崔德之 曹尙治 鄭從韶 俱知郡 원주 舊增金宗直 邑人追慕爲立生祠新增 顯廟朝庚戌享于栢淵書院 원주 曹偉新增崔漢侯 勸農興學治化大行邑人進慕立碑官至大司諫 원주 趙宗道 丁酉倭亂收義兵入黃石山城死之 肅廟朝享于安陰黃巖忠烈祠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지도서
全羅道
靈巖
壇廟 社稷壇 在郡西門外 원주 文廟 在鄕校 원주 城隍祠 在郡南門外 원주 厲壇 在郡北城外 원주 鹿洞書院 在郡南三里直提學 崔德之俎豆所康熙己巳孫忠成配享甲戌領議政 金壽恒并享辛卯其子昌協配享 肅廟朝癸巳 賜額 원주 忠節祠 在郡南六十里 贈參判 鄭運俎豆所壬辰鄕人立祠 肅廟朝辛酉 賜額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지도서
全羅道
靈巖
人物 高麗 崔知夢 初名聦博涉經史又精於卜筮太祖聞其名使占夢得吉兆曰必將統御三韓太祖喜改名知夢官至 太師謚敏休配享景宗廟庭焉 원주 本朝崔德之 號烟村本全州人登文科官至藝文館直提學 文廟朝見機告老而退六臣及一時明公皆作詩送之高其明哲鄕人營立書院 賜額鹿洞 원주 崔忠成 德之之孫天資超越見識高明受業於金宏弼讀聖賢書不掇晝夜南秋江所著師友錄極稱美之配享鹿洞書院 원주 崔吉男 德之之後 宣廟丁酉倭亂再逞國儲磬竭吉男以義穀輸納於南原兵賴無飢朝廷褒其功 除典牲

<하권0739-2>

主簿 원주 鄭運 河東人自少慷慨有大志登武科累典郡縣以忠貞報國四字銘釰自誓壬辰亂與統制使 李舜臣擊賊大敗之忽然中丸而死賊相賀曰鄭將軍死餘無足畏朝廷嘉其忠節 贈職旌閭鄕人立祠 賜額忠節 원주 朴成乾 號五恨登文科官至縣監棄官還鄕行義篤至動脩規度鄕人立祠享之 원주 朴權 成乾子登文科爲正言燕山時上疏極諫謫吉州 中廟反正赦還田里矣未及進用而卒 贈大司諫與五恨同享焉 원주 金完 克祧子生而白氣滿室經日乃散甲子适變以防禦使與都元帥 張晩合兵大破之賊爲其下所殺遂錄功封鶴城君官至兵使 贈兵曹判書謚襄武 원주 金宇天 克桃子性至孝五歲從舅氏官泣不食曰來時母親絶粒以此不忍食以義州判官甲子适變與其兄完破逆适錄振武勳 원주 金汝水 完之子武科壯元宰慶興胡人立石於厚春頌德官至兵使封海城君致仕而卒 上致祭 贈戶判 원주 金世器 汝水之子兒時李相國浣見之曰虎父有虎子登武科 上嘗試材上苑中連中三矢承 命角藝應機

<하권0739-3>

如神 上特加優獎仍拜咸鏡南兵使封鶴林君 원주 愼喜男 通禮 後庚曾孫號瀯溪進士登文科累經銀臺官至監司而卒 宣廟朝遣史官致祭 원주 愼天翊 喜男曾孫號素隱中進士登文科累經銀臺歷吏曹參議大司成副提學當光海亂政退去永保癸亥改 玉後始入淸選見勳臣脩私棄官歸鄕屢徵不就至禮曹參判而卒文章振一世 顯廟朝致祭焉 원주 愼海翊 喜男曾孫號湖山登文科名振一世當光海政亂無意進仕以佐郞卒時人皆惜之遺文與素隱集同附 원주 白光勳 號玉峯以文章名筆隆動一世白衣從事儐僚配享于李靑蓮書院 원주 白振南 光勳子號松湖文章筆法名於一國亦以白衣被選人皆稱之 원주 朴繼元 密陽人壬辰亂以前部將從都元帥 權慄多有忠義勳勞錄原從功一等 원주 崔慶昌 號孤竹進士登文科官至正言天姿豪爽素履淸潔配享于靑蓮書院 원주 曺行立 昌寧人魁偉方毅出入於文元公 金長生之門與文敬公 集友善嘗日吾親舊中只有曺百源在耳被篤歷四邑皆有聲績做呂氏鄕約

<하권0739-4>

洞人立祠享之 원주 徐希信 利川人進士登文科官至府使當光海時作功名弊屣詞歸臥江山天性孝友文章富瞻嘗作神明舍記膾炙京鄕轉入闕內世稱高節 원주 愼汝誼 通禮 後庚之後中生員以行義薦參奉不就丙子亂與弟汝源 汝訥廣募義旅多聚義穀將覲 王師行數日聞和成罷歸後 朝廷嘉其忠義錄用其子昤 除授禁府都事 원주 梁達泗 爲人慷慨膂力過人登武科以縣監丁憂還鄕嘉靖乙卯倭寇大至列邑奔潰賊兵猖撅達泗痛河北之無義士自念服麻從戎雖非孝禮不可以賊遺君遂召募丁壯指授方略又聚花郞盛服綵繡俱張百戱賊見而喜之皆往觀之建泗覘其無備率衆奮擊花郞輩亦翼而擊之城中亦皷噪從之五六萬賊徒屠戮殆盡倭徒不勝忿怒并力追之達泗佯敗而走誘引於無水淤泥處倭果追之盡陷於泥中達泗盡斬之南方以寧達泗以喪人恥詣元帥獻功復歸廬次而終至今嗟惜 원주 全夢星 勇力絶倫登武科官至縣監丁酉倭亂與弟夢辰及金德洽糾合義旅挺身獨戰殺死者甚衆賊復進夢星倚樹射

<하권0740-1>

賊應絃而倒弟夢辰忽中丸而死夢星少不動容終始力戰矢且盡乃呼曰爲國死敵人臣之責遂死於亂鋒中 肅廟朝道臣褒 啓 贈兵曹參議 원주 閔恂 舍人德鳳之子剛毅果敢壬辰亂 大駕播遷龍灣 御供之絶恂與奇孝曾諸人收聚糧饌器皿運納于 行在 朝家嘉其忠 除監察 원주 李繼鄭 登武科官至忠淸水使値壬辰亂戰亡事載勳錄 원주 李有吉 判書 後白之孫登武科以永柔縣令戰亡於壬辰亂 肅廟朝 贈兵曹參判 원주 朴泰初 羅州人監司 東說曾孫以學行薦 聞于朝拜佐郞不就號敬齋 원주 崔漑 全州人少尹得之之後事親至孝壬辰亂崔慶會以檄召之同入晉州夙夜籌畫不離主將之傍一日告于主將曰賊勢猖獗死日無餘請歸覲老父永訣而歸主將嘉其忠孝許之及期還主將益嘉重之及城陷與主將同死事 聞復其家其子興孝 興悌志切復讐服闋後收集義旅丁酉斬獲之功居多忠武公 李舜臣褒 啓兄弟皆授軍資監參奉 원주 孝子文益行 天性純孝力行恭儉李後白以孝廉屢薦 聞于朝

<하권0740-2>

益行不樂曰事親人子之當然而李公以此薦我寧不愧心遂不復見李公後 贈官工曹參議 원주 徐鑰 察訪 希恕子武科事親至孝負薪溫涼父病嘗糞以占輕重嘗爲西帥 柳琳所僻爲裨將自離庭後不食肉不聽樂琳一日開宴樂鑰獨不參琳問之對曰離親之日老病旣劇再見無期從征雖是爲國之事飮樂非其所安淚隨言落琳歎曰吾儕徐鑰之罪人卽日命還 肅廟朝道臣 啓聞 贈戶曹正郞 원주 高麗烈女崔氏 晉州戶長 鄭滿妻也詳載晉州烈女下 원주 金氏 中郞將 趙安鼎妻也年十七父卒十八夫沒十九母沒皆廬墓三年哀毁不掇不事生業事 聞旌閭 원주 本朝金氏 士人尹惟誠妻其夫病篤期刎其頸家人覺而救之未幾夫死截髮爲誓誓以從死晝夜伏柩前哭不絶聲及葬期已迫暗爲一書告訣父母託其孤抽力自刎救之已無及矣萬曆四十一年事 聞旌閭 원주 李氏 學生崔尙斗妻夫死常居柩傍哭不輟聲及葬時役入壙中舅極力扶出其後潛入魂房自縊而死 顯廟朝辛亥事 聞旌閭 원주 李氏 竹山

<하권0740-3>

安世雄妻也嫁才六朔夫得奇疾晝夜禱天願以身代未幾夫死哀毁哭擗自縊而死 肅廟朝事 聞旌閭 원주 劉召史 林者斤老味妻夫死親自歛襲引鎌自死今 上癸酉事 聞旌閭 원주 李氏 吳錫之妻成婚六朔夫死赴水溺死其婢元尙亦從溺死事 聞旌閭 원주 李氏 丁夢說妻其夫病死仍臥屍側俟昏飮藥而死今 上丙子事 聞旌閭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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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
補遺篇 (全羅道)
完山誌
塚墓 乾止山 諺傳 司空公墓在此 英宗命掘土驗其瑩 堿而無所得遂掘去傍近民塚置監官山直定標禁養方伯守臣恪謹守護以存 崇奉之禮焉 원주 三韓國大夫人崔氏 全州柳氏鼻祖贈掌令 柳濕妻也 원주 墓 在府東城外標石里 원주 懷安大君 芳幹墓 在府東十里龍進面法史山西麓 원주 政堂文學 李文挺墓

<하권1027-2>

在府西南三十里伊南面 續龍洞 원주 大提學 崔瀁墓 在府東五十里所陽面 大勝洞 원주 完城君 李伯由墓 在府西二十里伊東面馬田里 원주 直提學 崔德之墓 在府東二十里所陽面周德里 원주 參判 李瓊仝墓 在府西南三十里伊南續龍洞 원주 監司 崔弘僴墓 在府西南五十里伊東面笁山 원주 召募使 李廷鸞墓 在府南三十里仇耳洞 面長波洞 원주 湖城君柱墓 在府北十里許草谷面乾止山 원주 監司 宋英耉墓 在府北四十里紆東面塔里 원주 司諫 李興浡墓 在府西南二十里雨林谷面三山 원주 獻納 李起浡墓 在府北二十里助村面嶶山 원주 監司 蘇斗山墓 在府北二十里紆東面山亭里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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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康熙(淸/聖祖) 51년
숙종 38년 11월 19일 (무술) 원본474책/탈초본25책 (27/30)

 

 

 

 

 

 


崔德之 등의 祠宇에 賜額해 줄 것을 청하는 文獻緯 등의 상소


○ 幼學文獻緯等疏曰, 伏以, 尊賢建祠, 士林衛道之至意, 揭虔宣額, 國家尙德之盛典。是以尊之斯有祠, 祠之斯有額, 下必申其懇, 上輒准其請者, 實次第當行之事也。惟我國家, 崇儒重道, 褒德尙賢, 聲敎所曁, 文四行缺然, 此固出於高山景仰之誠, 同得於秉彝好德之天, 而亦莫非國家風厲振作之效, 有以致之也。苟有可尊之賢而不尊, 祠可請之額而不請而賁之, 則不但爲多士之羞, 其爲有慊於聖朝倡導之化者, 豈淺淺哉? 此臣等所以敢陳。故直提學崔德之及其孫忠成, 故領議政臣金壽恒及其子判書臣昌協, 立祠尊祀之大略, 以祈宣賜恩額之典者也。夫四臣事績本末, 固非如臣等晩出蒙士, 所可揄揚其萬一, 而略敍鄕邦之所傳誦, 平昔之所覩記, 以備裁察, 伏願殿下, 少垂省納焉。蓋聞崔德之, 當我世宗時, 歷踐翰苑三司, 而後以南原府使, 退居本邑, 取孟子在心養性之訓, 以名其所居之書樓, 留心正學, 杜門不出。及文宗卽位, 召拜直提學, 奬以純實, 且將貿用, 而上書乞骸, 長往不返。噫, 發軔榮途, 卿相在前, 而芥視富貴, 賁趾丘園, 其高風淸節, 足以立懦廉頑, 而玩書樓三字之扁, 可知其存養之工, 觀聖祖一言之褒, 可得其純實之資, 則其所立之高, 所存之正, 實有遠過於人, 而足爲後來之師範也。抑臣等於此(臣等於此), 又有所感焉。德之之退歸, 在於文廟, 一時名賢, 送行惜去, 見於篇什者甚多, 而六臣之詩若文, 竝在其中, 稱慕企羡之意, 溢於言外, 則德之之於六臣, 可謂合志同方, 而其後國家多故, 六臣者終不免焉, 然則德之之退, 有若見幾知微者然, 此豈常人所可及者, 而至今聞風者, 尙且咨嗟想像, 有所興起, 則其樹立之卓, 有補於世敎, 亦豈下於當日自靖之諸臣哉? 此尤聖朝之所宜亟加褒闡, 不可少緩者也。至如其孫忠成, 受學於四行缺着工向裹四字缺書, 循環誦讀, 微辭奧旨數字缺融解, 而尤用力於朱子全書, 體驗躬行, 以爲一生受用之資。雖以微臣等之蒙陋, 未能窺測其所造之至於何極, 而以其見於外者言之, 平居儼然, 終日矜莊, 而接人應物, 渾是一團和氣, 聽其辭氣, 覿其德容, 莫不心醉而起敬。以故士林歸仰, 望若山斗, 此固遠邇之所同然, 而薰腴所被, 在臣等爲尤深且切, 使窮鄕僻邑之人, 得知學問之根基, 爲人之規範者, 實壽恒之賜也。若乃昌協, 早襲庭訓, 躬服儒行, 亦嘗隨壽恒, 往來于玆邑, 臣等亦嘗得其爲人, 而景服之有素矣。蓋其仕於朝也, 經筵啓沃, 發揮心學, 章奏勤懇, 講明治體者, 莫非學問中流出, 而及其屛處之後, 尤以斯道爲己任, 囂囂畎畝, 矻矻墳典, 潛心於格致誠正之學, 着力於操存涵養之功。刻厲奮發, 眞知力踐, 參訂論辨, 提示幽眇之旨, 造詣成就, 幾臻高明之域。雖其苦心靡改, 確節難拔, 終未得羽儀朝端, 翊贊儒化, 使一世之人, 咸被其澤, 而其有補於世敎, 作範於後學, 則雖謂之儒門之大宗師, 不爲過矣。是以一邑多士, 興敬於想像傾慕之餘, 感發於耳目濡染之地, 協力建祠, 以祀德之於前, 而且以配焉。齊聲倡義, 竝享壽恒於後, 而又以昌協配焉。以伸一方景仰崇奉之意, 而第以遐遠樸愚, 尙未能請額于朝, 使前賢妥靈之所, 不得列於邦家之祀典, 而聖朝右文之化, 不得宣於海嶠之下邑, 此實臣等之罪也。玆敢重繭於百舍之外, 齊籲於九重之下。伏乞聖明, 數字缺察四臣者之德邃學, 淸芬遺韻, 合爲士林以下缺。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태종 19권, 10년(1410 경인 / 명 영락(永樂) 8년) 6월 25일(경신) 1번째기사   지의정부사 황희를 보내 원단에 비를 빌게 하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황희(黃喜)를 보내어 원단(圓壇)에 비를 빌게 하였다. 황희가 원단에 이르러 향(香)과 축(祝)을 점고(點考)하여 보니, 호천상제(昊天上帝)의 제문(祭文)만 있고 오제(五帝)의 제문(祭文)은 없었다. 황희가 사람을 달려 보내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여러 대언(代言)을 꾸짖기를,
“어찌하여 불경(不敬)하기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는가? 이와 같은 군신(君臣)의 재덕(才德)으로 또 직사(職事)를 공경하고 조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응험(應驗)을 받겠는가? 역삭 교서 정자(役朔校書正字) 최덕지(崔德之)가 그 직사를 삼가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삼관(三館)에 내쳐야 하겠으나, 남의 전정(前程)을 폐하고 싶지는 않다. 만일 하옥(下獄)하게 하면 3일이 지나면 으레 석방하여야 하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고, 조금 뒤에 말하기를,
“제사 일[祀事]이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 아직 놓아두라.”
하였다.

 

 

○庚申/遣知議政府事黃喜, 禱雨于圓壇。 至圓壇, 點視香祝, 只有昊天上帝祭文, 而闕五帝祭文。 馳遣人以啓, 上怒, 責諸代言曰: “何不敬, 至於若是歟? 以如此君臣才德, 又不敬謹職事, 其蒙天應乎? 役朔校書正字崔德之, 不謹其職, 宜黜諸三館, 然不欲廢人前程。 若令下獄, 過三日例當放, 將何以處之?” 旣而曰: “祀事未過, 今姑釋之。”

 

 

세종 30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2월 10일(을해) 2번째기사  지함양군사 최덕지와 임강·안음·비안 현감 박지생·김명양·권후 등을 인견하다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최덕지(崔德之)·임강(臨江) 현감 박지생(朴枝生)·안음(安陰) 현감 김명양(金明諹)·비안(比安) 현감 권후(權厚)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이전에는 다만 2품 이상인 수령만을 접견하였으나, 내가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시골의 먼 곳을 내가 친히 가서 다스리지 못하고 어진 관리를 선택하여 나의 근심을 나누어 주어 보내는 것이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않다. 그런 까닭에 2품 이하의 수령도 또한 친히 보고 보내도록 하였다. 금년은 여름은 가물고 겨울은 더워서, 명년의 농사가 어떨지 알 수 없다. 이제 들으니, 각도 군(郡)·읍(邑)에 식량이 떨어진 백성이 꽤 많다고 한다.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라. 옛날에는 백성에게 예의 염치(禮義廉恥)를 가르쳤으나, 지금은 의식(衣食)이 부족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禮義)를 다스리겠느냐. 의식이 넉넉하면 백성들이 예의를 알게 되어, 형벌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기르는 일에 힘쓰라.”
하였다.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1월 25일(병진) 1번째기사
지김제군사
최덕지가 진주를 바치니 내구마 1필을 내리다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최덕지(崔德之)가 진주 1매(枚)를 바치니,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문종 10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10월 29일(갑오) 2번째기사
예문관 직제학
최덕지가 사직하고 물러나다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최덕지(崔德之)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 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에는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서는 자가 많은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전주부(全州府)
윤(尹) 1인, 판관(判官) 1인, 교수관(敎授官) 1인.
본래 백제완산(完山)이었는데,【일명 비사벌(比斯伐)5101) 또는 비자화(比自火)5102) 라 한다. 】위덕왕(威德王) 원년 을해에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승성(承聖) 4년.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가, 11년이 지나서 을유에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6년. 】주(州)가 폐지되었고, 의자왕(義慈王) 22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사람들이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백제를 멸하자, 그 땅이 모두 신라에 들어갔으며,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당나라 측천(則天) 수공(垂拱) 원년. 】다시 완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 】전주로 고쳤다. 효공왕(孝恭王) 3년 경신에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3년. 】견훤(甄萱)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에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 】친히 백제를 쳐서 이기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 경자에천복(天福) 5년.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成宗) 12년 계사에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4년.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고쳤고, 15년 병신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전주 순의 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고쳤고, 13년 임술에송나라 진종(眞宗) 건흥(乾興) 원년.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5년. 】완산부(完山府)로 승격하니, 이씨(李氏)의 본관인 까닭이다. 태종(太宗) 3년 계사에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전주부(全州府)로 고쳤다. 별호를 승화(承化)·완산(莞山)고려 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정한 것이다. 】혹은 견성(甄城)이라고 한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고속현(古屬縣)이 4이니,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두이현(豆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杜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으며, 이성현(利城縣)은 본래 백제내리아현(乃利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이성(利城)으로 고쳐서 김제(金堤)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옥야현(沃野縣)은 본래 백제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옥야(沃野)로 고쳐서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6년 병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우주현(紆州縣)은 본래 백제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우주(紆州)로 고쳐서 금마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다. 향(鄕)이 2이니, 경명(景明)【일명 영명(榮明)이라 한다. 】·제견(堤見)이요, 소(所)가 2이니, 두모촌(豆毛村)·양량(陽良)이다.태종(太宗) 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윤향(尹向)이 아뢰어서 도(都) 안의 현(縣)·향(鄕)·소(所)·부곡(部曲)들을 모두 본고을에 합쳤다. 지금 고속현(古屬縣)을 적는 것은 뒷날에 참고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대천(大川)은 신창진(新倉津)이다.【주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금구(金溝)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46리이다. 태조 강헌 대왕 진전(太宗康憲大王眞殿)【성 안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
호수는 1천 5백 65호요, 인구는 5천 8백 2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7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8백 26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3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4이니, 양(梁)주계(朱溪)에서 왔다. 】·장(張)결성(結城)에서 왔다. 】·김(金) 2【하나는 모평(牟平)에서 왔고 하나는 온 곳을 모르는데,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이다. 이성(伊城)의 성은 5이니, 조(趙)·배(裴)·장(張)·구(仇)·염(廉)이요, 이성(利城)의 성은 5이니, 이(李)·백(白)·정(鄭)·손(孫)·진(陳)이요, 옥야의 성은 4이니, 장(張)·염(廉)·양(梁)·구(仇)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다. 우주(紆州)의 성은 5이니, 박(朴)·이(李)·정(鄭)·황(黃)·최(崔)요, 경명(景明)의 성은 4이니, 김(金)·임(林)·배(裵)·인(印)이요, 두모촌(豆毛村)의 성은 3이니, 책(冊)·최(崔)·이(李)요, 양량(陽良)의 성은 4이니, 백(白)·나(羅)·강(康)·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예부 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이니,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민간 풍속이 장사[儇利]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1만 8천 6백 6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麻]·목화·감·배[梨]·왕대[簜]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이리가죽·잘[山水獺皮]·종이【표전(表箋)·주본(奏本)·부본(副本)·자문(咨文)·서계(書契) 등의 종이 및 표지(表紙)·도련지(擣鍊紙)·백주지(白奏紙)·유둔(油芚)·세화(歲畫)·안지(眼紙)인데, 도(道) 안에 오직 이 고을과 남원(南原)의 것의 품질이 좋다. 】·모시·무늬있는 자리[有文席]·족제비털[黃毛]·칠(漆)·꿀·대추·석류·새앙[薑]【읍(邑)의 사람들이 업(業)으로 삼는다. 】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말오줌나무[蒴藋]·궁궁이[芎藭]·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苓)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의 남쪽 장파곤동(長波昆洞)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다.【부의 서쪽 우림곡(雨林谷)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천 2백 88보(步)이다. 】고덕산 석성(高德山石成)【둘레가 1천 4백 13보이며, 성안에 샘이 7이 있고, 또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3이니, 반석(半石)·삼례(蔘禮)·앵곡(鷪谷)이요, 요해(要害)가 1이니, 상관동(上館洞) 여현(礪峴)이다.【주(州) 남쪽에서 임실(任實)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큰 방죽[大堤]이 3이니, 상시제(上屎堤)·하시제(下屎堤)·공덕제(孔德堤)이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5이니, 진산(珍山)·금산(錦山)·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요, 현(縣)이 11이니, 금구(金溝)·만경(萬頃)·임피(臨陂)·옥구(沃溝)·함열(咸悅)·용안(龍安)·부안(扶安)·정읍(井邑)·태인(泰仁)·고산(高山)·여산(礪山)이다.
【영인본】 5책 655면
【태백산사고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