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5세 휘 덕지 연촌공 왕조실록

전주최공 문성공 19대조고 연촌공 관련 자료

아베베1 2012. 12. 2. 11:16

 

 
청장관전서 제59권
 앙엽기 6(盎葉記六)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지제교 어유귀(魚有龜) 지음

계사년 6월 병자삭 12일 정해에 국왕은 신 예조 정랑 길경조(吉景祖)를 보내어 고 직제학(直提學) 최덕지(崔德之),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고 사인(士人) 최충성(崔忠成),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 네 신하의 영전에 하유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도학이며 절행은 / 道學節行
세상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일 / 世所矜式
어질고 덕 있는 자 향사하라는 / 祀賢饗德
이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다네 / 邦有典則

강직하고 올곧은 학문을 지녀 / 侃侃直學
명망과 내실 모두 성대했는데 / 望實俱赫
영릉이라 세종 때 마침 만나서 / 遭際英陵
만리 전도 앞길이 창창하다가 / 進途方闢
고을 수령 인끈을 던져 버리고 / 一投州紱
월출산 산기슭에 편히 누워서 / 高臥月出
문 닫고 성현 글을 익혔었는데 / 杜門講學
무엇보다 맹자의 말씀 궁리해 / 玩賾鄒說
존양이란 편액을 걸어 붙이고 / 堂扁存養
힘쓰기를 깊고도 정밀히 하자 / 用功微密
문종께서 마침내 가상히 여겨 / 文廟乃嘉
조정이라 대궐로 불러와서는 / 召致內閣
순결하고 진실함 치하하시어 / 賞其純實
은총이며 예우가 두터웠건만 / 恩顧優渥
상소로 물러감을 자청하고서 / 尺疏乞骸
처음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 復遂初服
심산계곡 속에서 생을 마치니 / 終身邱壑
무너진 세상 풍속 감화되었네 / 風勵頹俗

그 뒤에 가정교훈 영향을 받아 / 庭訓所漸
태어난 손자 또한 어질었나니 / 有孫亦賢
스승의 문하에서 덕성 기르고 / 薰德師門
어린 나이 묘령에 도에 뜻 두어 / 志道妙年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 독실해 / 識高行篤
마침내 가문 전통 계승하였네 / 遹紹家傳

어허, 나의 어질고 유능한 보좌 / 繄我良佐
이 나라의 귀감이 분명했거니 / 邦國蓍龜
충직하고 순수한 절조에다가 / 忠純其操
씩씩하고 공손한 자질을 지녀 / 莊穆其資
이름난 조부에게 직접 배우고 / 親炙名祖
큰 스승 문하에서 갈고닦은 뒤 / 切磋大老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걸 행해 / 尊聞行知
평소에 지닌 포부 크게 펼쳤네 / 大展抱負
세상의 도덕 풍속 책임지고서 / 身任世道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들며 / 抑陰扶陽
한 절개로 세 조정 섬기는 동안 / 一節三朝
도덕 업적 한층 더 빛이 났었네 / 德業彌章
의정부 들어온 게 네 번이었고 / 四入中書
남쪽에 귀양 간 게 두 번이거니 / 再遷南裔
오로지 우리 경의 진퇴에 따라 / 惟卿進退
시운의 길흉 성쇠 점칠 수 있어 / 占時否泰
무진 기사 그 당시 생각노라면 / 永言龍蛇
슬픔이며 후회를 어이 가누랴 / 曷勝悼悔
저기 저 영암 땅을 돌아다보면 / 睠彼朗山
충성스러운 경의 넋 서린 곳으로 / 是卿湘沅
내 남쪽 선비들을 계도했는데 / 迪我南士
남긴 교훈 아직도 그대로 있어 / 餘敎斯存
학문을 강습하던 생각 일어나 / 淇竹興思
세상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네 / 沒世不諼

그리고 또 상서는 지혜 출중해 / 嶷嶷尙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밟아 / 趾美先躅
시례의 가업 전통 계승하였고 / 業承詩禮
재덕의 도량 인품 가슴에 품어 / 器鞰珪璧
경연에서 왕도정치 토론을 하고 / 經幄討論
바른말로 임금을 인도하다가 / 昌言啓沃
불행히도 중도에 변고를 만나 / 中罹變故
황량한 골짝으로 은둔하였네 / 遯于荒谷
성현 학문 부단히 스스로 닦아 / 俛焉自修
일심으로 도리를 탐구하였고 / 一心求道
주자 연원 거슬러 올라가서는 / 探溯紫陽
빗장 열고 심오한 이치 더듬어 / 叩抽鍵奧
진정으로 알았고 실천했기에 / 眞知實踐
조예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자 / 造詣益精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生
기풍이며 영향이 두루 미치어 / 光塵所曁
선비들 너나없이 흠모하였네 / 衿紳均慕

앞 시대와 뒤 시대 현인 네 사람 / 前後四賢
이 고장에 자취를 남기었는데 / 跡留斯土
조부와 손자 서로 대를 이었고 / 祖孫相望
부자가 아름다움 함께 하였네 / 父子並美
선비들이 다 함께 상의한 끝에 / 多士協謀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 주면서 / 立廟以祀
오른쪽 위치에다 배향을 하되 / 齊享于右
차례대로 줄지어 봉안하였네 / 列配其次
아름다운 편액을 이에 내리어 / 玆宣華額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는데 / 俾聳瞻聆
백록동 서원 이름 서로 같아서 / 名叶鹿洞
천년을 사이 두고 함께 빛나네 / 輝映千齡
제관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니 / 遣官致酹
희생도 살 오르고 술맛도 좋다 / 牲酒肥香
영령들이여 부디 강림을 하여 / 靈其來格
아무쪼록 이 술잔 받아 들게나 / 庶歆此觴


 

[주C-001]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 녹동서원은 1630년(인조8)에 전라도 영암(靈巖)에 세웠는데, 1713년(숙종39)에 사액하면서 고유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덕지와 함께 배향된 성종 때의 학자 최충성 및 농암의 부친 김수항, 농암 등의 순으로 열거하며 공덕을 기렸다.

 

 

 

면암선생문집 제20권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송자대전 제173권
 묘갈명(墓碣銘)
도순변사(都巡邊使) 증(贈) 영의정(領議政)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신공(申公) 묘갈명 병서(幷序)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도순변사(都巡邊使) 신공 립(申公砬)이 김공 여물(金公汝岉)과 함께 왕명으로 적을 방어하다가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상하 모두가 공을 간성(干城)처럼 믿었다가 그 패보가 이르자 상은 곧 서울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공이 북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를 정벌하여 그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므로 이름이 오랑캐 사이에 떨쳤던바, 이때 와서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와 곧바로 중국을 침범할 양으로 무리가 6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너나없이 안일에 젖어 있었는데, 오직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만이 적이 틀림없이 침범해 올 것을 미리 알고 왜적 방어책을 올렸으나 그때는 모두 미치광이로 지목하고 말았었다. 일이 다급해지자 당시 재상이 공을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난색을 보이며 이르기를,
“그는 나를 호위하는 신하인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를 보낸단 말인가.”
하였다. 계속하여 청하자 상이 공을 불러 물으니 공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 제도(諸道)의 군대를 모집하였으나 모두 이르지 않으므로 부득이 도하(都下)의 무사(武士)들과 한유(閒遊)하던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삼의사(三醫司)까지 끼일 정도였다. 무고(武庫)에서 병기를 꺼내고 또 조신(朝臣)들에게 각기 전마(戰馬)를 내어 주도록 명하였다. 때마침 김공(金公)이 사건으로 옥(獄)에 갇히게 되어 공이 갈 것을 자청하였다. 공이 출발할 즈음 상이 인견(引見)하시고 손수 상방보검(尙方寶劍)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이하 모든 사람들을 이 상방검(尙方劍)으로 다스리라.”
하고, 또 다니면서 군대를 모으게 하였다. 공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겨우 몇 천 명뿐이었는데,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도망쳐 왔으므로 공이 처음에는 그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리려다가 그를 아끼는 뜻에서 그만두고 계책을 물었더니, 이일은 말하기를,
“적병과 아군의 숫자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니 물러가 서울을 지키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꾸짖기를,
“그대가 감히 우리 군대까지 동요시킬 셈인가. 앞으로 공을 세워 지난 잘못을 씻으라.”
하고는, 그로 하여금 선봉(先鋒)을 맡게 하였다. 그때 김공은 먼저 새재[鳥嶺]를 점거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공은 적들이 이미 재 밑까지 왔으리라 생각되어 말하기를,
“재까지 가기 전에 적과 마주치면 사태가 급할 뿐만 아니라 현재 아군은 모두 백도(白徒)이고 더구나 평소 훈련을 한 처지도 아니므로, 사지(死地)에다 몰아넣지 않고서는 힘을 다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달천(達川)을 한계로 배수진을 쳤다. 이는 평지에서 기마병으로 격돌하는 것이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무찌르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적은 이미 세재를 넘어 산과 들을 휩쓸면서 포성(砲聲)은 지축을 울렸고 번쩍이는 칼날은 햇빛이 무색할 정도였다. 공은 군중을 지휘하여 진격을 명하고서 두 번씩이나 직접 적진 돌파를 시도했으나 적진은 강하여 깨지지 않았고, 적이 먼저 포위망을 펴 아군의 오른편을 차단하고는 마치 산이 짓누르듯이 동서에서 협공해 왔다. 이에 공은 발길을 돌려 탄금대(彈琴臺)로 돌아와 김공에게 말하기를,
“남아답게 죽을 뿐,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는 일이요.”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김공 역시,
“나도 공의 뒤를 따르겠소.”
하고, 김공이 쓴 장계(狀啓)를 휘하(麾下)를 불러 부탁하고는 그 길로 달려가 둘이 함께 적진에 육박하여 10여 명의 적을 무찌른 다음 서로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공은 평산인(平山人)으로 자는 입지(立之)인데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장절공은 고려 태조(太祖)에게 마치 한 고조(漢高祖)에 대한 기신(紀信)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숭의전(崇義殿)에 배식(配食)되고 있다. 5대조 개(槩)는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상신(相臣)으로 시호가 문희(文僖)이고, 고조 자준(自準)은 관찰사(觀察使)이며, 증조 말평(末平)은 전첨(典籤)으로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조부 상(鏛)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아버지 화국(華國)은 생원(生員)인데 영의정 평주부원군(領議政平洲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첨정(僉正) 회정(懷貞)의 딸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공을 낳았다. 나이 22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한 후 선전관 겸 비변랑(宣傳官兼備邊郞)에서 출발하여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ㆍ경력(經歷)을 거쳐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그때 양공 응정(梁公應鼎)이 목사(牧使)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공은 대기(大器)인데 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공은 그때부터 책을 끼고 그에게 가 배우면서 그를 스승으로 대하였고, 양공은 이러한 공을 더욱 기특히 여겼다. 그로부터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나라에서는 북변(北邊)을 근심하게 되어 공이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을 연거푸 지키다가 마침내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그때 본부(本府)에 예속되어 있는 번방 호족들이 공의 위신(威信)에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러자 호족(胡族)의 추장 이탕개(尼湯介)가 율보리(栗甫里)의 호족 수만 명과 함께 반기를 들고 일어나 제진(諸鎭)을 침략하므로 제장(諸將)이 차례로 패배하였다. 공이 곧 군대를 이끌고 응원에 나섰는데, 공이 가는 곳이면 적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놀라 도망하였다. 또 한번은 강을 건너가 바로 그들 여막(廬幕)을 소탕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자기 딸을 앞세워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딸은 인물이 절색이었다. 공은 곧 그 딸의 목을 베게 하고 이르기를,
“이런 미인을 남겨 두면 뒤에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다.”
하였다. 그때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절도사(節度使)로서 공의 용기와 지략에 감탄하여 첩보를 올리니 나라에서 공을 북병사(北兵使)로 승진시켜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고, 얼마 후에는 끝내 이탕개를 잡아 목을 베었다. 공이 북쪽에 너무 오래 있어 체직(遞職)하고 돌아와 편모(偏母)를 찾아뵐 것을 상소하였다. 상은 체직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관직을 띤 채로 귀령(歸寧)하게 하고, 상이 친히 교외까지 나가 공을 맞이하였으며, 전포(戰袍)에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는 위로하면서 입고 있던 어의(御衣)를 벗어 입게 하였다. 돌아갈 때에도 상(上)이 교외까지 나가 보내면서 많은 물건을 내렸다.
상이 일찍이 ‘경(卿)은 자녀(子女)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고 혼인을 약속했는데, 후에 공의 맏딸이 신성군 후(信城君珝)의 부인이 되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에 이배(移拜)되었다가 들어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는데, 환조(還朝)하던 날 도하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면서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판윤으로 있으면서 다른 사무까지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언젠가는 공에게 본병(本兵)을 맡기려고 했던 때문이다. 다음해가 바로 만력(萬曆) 20년인 임진년(1592, 선조25)이었는데, 이해 4월 28일 공은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공은 모습이 단정 근엄하고 희노(喜怒)를 표정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보통 때는 정연하고 단아(端雅)하며 조심스러워 마치 공부하는 학도 같았다. 그러나 진(陣)에 나가 적과 마주치면 좌우의 가까운 사람도 무서워 떨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감히 넘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하를 은혜로 대하여 맛있는 것은 남을 주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었으며, 병든 자는 반드시 직접 가서 위문하였다. 그래서 사졸들이 모두 그의 부하 되기를 즐겨하여 휼륭한 옛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었다. 대체로 장절공(壯節公) 시절부터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어 오다가 공의 형제 때 와서 더욱 번성하였다.
공의 중형(仲兄) 급(礏)이 제생(諸生)으로서 일찍이 율곡 이 선생을 위하여 글월을 올려 억울함을 신원하고 이어 군소(群小)들의 붕참(朋讒)을 배격하였는데, 상이 비답(批答) 내리기를,
“네 말이 곧구나. 네 아우 입(砬)은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변성(邊城)을 지키므로 오랑캐들이 감히 접근을 못하였는데, 너는 또 항소(抗疏)로써 간사한 무리들을 배격하는구나. 어떻게 한 집에서 이렇듯 충(忠)과 의(義)가 함께 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다.
그후 공의 아우 할(硈)도 병사(兵使)로 임진(臨津)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급은 그때 음사(蔭仕)로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어머니가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지자 급도 뒤따라 투신하였다. 한집안의 충효(忠孝)가 높고 높다 하겠다.
공은 언제나 신의(信義)와 풍절(風節)로써 자신을 지켜 이청강(李淸江)이 북사(北事) 때문에 법에 걸려 귀양 가 죽을 때도 공은 그것을 억울하게 여겨 그의 억울한 정상을 드러내었고,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그 사실을 가시(歌詩)로 읊기까지 하였다. 언젠가 공이 상국 정언신(鄭彦信)의 관하(管下)가 된 일이 있었는데 급기야 정 상국이 정여립(鄭汝立)의 옥(獄)에 연루되어 장류(杖流)되었다. 남들은 감히 그의 집을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공만은 자주 그 집에 가 정중하게 그의 부인을 위안하였고, 또 송강 정철이 신성군(信城君) 모자(母子)를 죽이려고 한다는 간신(奸臣)의 모함 때문에 상에게 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하루는 상이 공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공은 아뢰기를,
“신이 1백 명의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그를 참소(讒訴)하여 죽이려는 짓에 불과합니다. 정철이 비록 도량은 편협(偏狹)하지만 신이 그의 심사(心事)를 볼 때 참으로 진실한 군자(君子)입니다.”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그 때문에 언제나 공을 가리켜 따라 갈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공의 전부인 이씨(李氏)는 아들이 없었고, 계비 최씨(崔氏)는 무인(武人) 필신(弼臣)의 딸인데, 고(故) 만록공(晩鹿公)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으로 마음가짐이 인자하였다.
홀로 되어 성남(城南) 옛집에 살면서 아비 없는 자식들을 교양하였다. 상이 항상 돌보아 주면서 심지어 아침저녁 어선(御膳)까지 내려 보냈다. 아들은 경진(景禛)ㆍ경유(景裕)ㆍ경인(景禋)이 있고, 딸은 둘인데 맏이는 곧 신성군 부인이요, 끝은 이대엽(李大燁)에게 시집갔다. 경진이 뒤에 김공 여물(金公汝岉)의 아들 유(瑬)와 함께 정사(靖社)를 협모(協謨)하여 인조대왕(仁祖大王)을 추대함으로써 위대한 중흥(中興)의 업적을 남기고 마침내 영의정(領議政)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으며, 공에게도 그와 질(秩)이 같은 관작이 추증되었다. 두 아우들도 정사에 참여했던 공로로 둘째는 동평군(東平君), 끝은 동성군(東城君)이 되었다.
경진의 아들 준(埈)도 정사에 참여한 공로로 평흥군(平興君)에 봉하여지고 벼슬은 판서(判書)였다. 해(垓)는 도정(都正)이고, 딸은 각각 별제(別提) 유우엽(柳于曄)과 진사(進士) 박천구(朴天球)에게 시집갔다. 경유의 아들 담(墰)은 판관(判官)이고, 딸은 감사(監司) 이석달(李碩達)에게 시집갔다. 경인은 해(垓)를 계자(繼子)로 맞아들였고, 딸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정(正)인 이경과(李慶果)에게 시집갔으며, 신성군(信城君)의 계자는 평운군 구(平雲君俅)이고, 딸은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에게 시집갔다. 공이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막으러 갈 때에 함께 가고자 하는 자가 두 명 있었는데 당시 재상이 평소 공을 좋아하지 않아 그것을 막았다. 그때 공이 말하기를,
“지금이 상공(相公)께서 사이가 좋고 나쁜 것을 따질 때입니까. 옛날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의 심부름에 쫓겨 함께 가야 할 사람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났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말하는 자들은 형가를 소탈(疏脫)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한 자 여덟 치밖에 안 되는 비수(匕首) 한 자루로 어떻게 호랑(虎狼) 같은 진(秦) 나라를 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그때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수천 명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수십만에 달하는 기세 당당한 사나운 적과 갑자기 마주쳤던 것이다. 옛날 맹자(孟子)가 비록 진(秦)ㆍ초(楚)의 강적을 매로 종아리 칠 수도 있다는 말을 하였지만, 또 적은 수로는 많은 수를 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장수와 재상이 뜻이 서로 맞지 않은 상태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일은 예부터 있지 않았다. 공이 설사 달천(達川)에서의 패배가 없었더라도 이순신(李舜臣)ㆍ김덕령(金德齡)이 당했던 화를 끝까지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인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육도 기정을 번갈아 쓰는 것이야 / 六韜奇正之相隨用
오랑캐나 왜적이 다를 게 무엇인가 / 豈異於胡與夷也
한가닥 절의는 전패 중에도 변함없어 / 一節顚沛而無貳
끝내 뜻과 직분을 빼앗기지 않았네 / 終不奪其志與帥也
큰 비가 서 있는 무덤이여 / 大石之塋
옷과 신이 묻혀 있는 곳이라네 / 衣履所藏
우뚝 솟은 남한의 뒤 / 南漢峙後兮
곁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네 / 江水在傍
천추만세토록 / 千秋萬世兮
그 분한 가시지 않으리 / 憤恨俱長
자손들 번창하고 훌륭함이여 / 後承昌大兮
그 여경 영원하리 / 餘慶無疆


 

[주D-001]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 즉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를 말한다.
[주D-002]한 고조(漢高祖)에 …… 기신(紀信) : 왕의 위기를 대신하여 죽은 일이다. 한 고조가 항우(項羽)에게 형양(滎陽)에서 포위되었을 때 기신이 고조로 위장하고 초군(楚軍)에 투항한 틈을 타서 고조가 그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포위당해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申崇謙)이 김낙(金樂) 등과 역전(力戰)하여 전사함으로써 왕건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한 일과 같다는 말이다.
[주D-003]숭의전(崇義殿) : 조선 때 고려 태조(太祖)와 7왕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 태조(太祖)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미산면(眉山面)에다 사당을 세우고 고려 태조와 그 밖의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ㆍ성종ㆍ목종ㆍ현종의 7왕을 모셨다.
[주D-004]북사(北事) : 1583년 이제신(李濟臣)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을 때 호족(胡族)의 추장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慶源)ㆍ아산(阿山)ㆍ안원(安原) 등지를 함락하였던 일을 말한다. 그때 그 패전으로 이제신은 파직되어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주D-005]형가(刑軻) : 옛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제(齊) 나라 사람. 연(燕) 태자(太子) 단(丹)의 심부름으로 비수(匕首)를 끼고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죽이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속함(速含)ㆍ함성(含城)ㆍ천령(天嶺)ㆍ허주(許州)ㆍ함양(含陽)
【성씨】 본군 여(呂)ㆍ오ㆍ박ㆍ서ㆍ조(曺), 이 속성(續姓)이다. 마천(馬淺) 조(조(曺)).
【풍속】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灆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㵢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灆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 뇌계(㵢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 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성곽】 읍성 고을 관아가 옛날에는 군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홍무 경신년에 청사(廳舍)가 왜구에게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백 35척이고 나각(羅閣)이 2백 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 사근산성(沙斤山城) 군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 북쪽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7백 96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이 셋이다. 경신년에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성을 지키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 당한 뒤에 폐해 버리고, 수리하지 않았다가, 성종조에 다시 수축하였다.
【누정】 학사루(學士樓)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으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게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제운루(齊雲樓)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천순(天順) 신사년 4월에, 임금께서 신의 선대가 일찍이 관작을 추증 받았으나, 여러 해를 변방에 있었으므로, 아직 선영에 배례도 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휴가를 내리고, 호남 선영에 분황(焚黃)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에 도착하니, 함양 원으로 있는 종형 자교(子橋) 혜옹(惠翁)도 와서, 수일 동안 환담하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함양성에 문이 있고 문에는 누가 있는데, 무너진 지 여러 해여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 고을을 맡아서 한 해를 넘기고 나니 정사가 간단해서 여가가 많다. 고을에 대사(臺榭)와 누관이 없어 왕인(王人 사신 따위)을 위로하고 답답함을 풀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고, 이에 민중과 의논하여 문루(門樓)를 온통 새롭게 하였는데, 처마와 칸살을 넓직하게, 대마루와 서까래를 가지런하게, 단청을 빛나게 한 다음에 그만 두었다. 공사를 마치자, 상국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공(黃公 황수신)이 마침 와서 감사 성안(成安) 김공(金公)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이 두 분이 첫째로 시 두 편을 지었고, 여러 따르던 자들도 모두 화답하여 현판하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고을이 두류산 기슭에 있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과 천 리에 구름과 안개의 변화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누에 오르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올라서 그 시설한 것과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분의 작품을 보고 대강이나마 안 다음이라야 기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수일 후에 형님이 또 편지를 보내, 남원공 이하 여러분의 시 수십 편을 보게 하고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방금 여행하느라 피로했고, 또 더위에 병든 중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 여러분의 시를 한바탕 읽고 읊조리는 동안에, 오랜 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상쾌하여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감탄하기를, ‘형님과는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함께 글을 읽었고, 일찍이 그 옛 사람을 경모하는 진실함을 보았을 뿐,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고을 원이 되어, 정사하는 데에 어짊과 용서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너그러움과 위엄을 함께 이루게 하였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남들이 옛날 정사와 같음이 있다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진정과 순박한 것으로 된 것이다. 또 능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재간이 있는 자도 능히 하지 못한 것을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할 만하다. 누를 읊조린 시만으로도 남의 병을 천리 밖에서 능히 낫게 하였는데, 하물며 몸소 그 누에 올라서 관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만약 형님을 따라 한 번 누에 오르게 된다면, 마땅히 형님을 위해 극히 넓힐 것이요, 우선은 이것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빗발은 점점 걷히는 듯 하건만, 은은한 우레 소리는 아직도 누를 울린다. 구름이 골에 돌아드니 발이 어둡고, 바람이 못 위에 살랑거리니 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골개골, 황새 그림자 속에 벼가 윤기나네.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바라보니, 천길 봉우리는 용이 솟았는 듯하여라.” 하였다.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구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 망악루(望岳樓) 성 남쪽 문루이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 김종직의 시에, “작년에 내 발자취 저 멧부리를 더럽혀,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이 또 다시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하였다.
청향당(淸香堂)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학교】 향교 군 북쪽에 있으며 소소당(昭昭堂)이 있다.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瀶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 승(丞)이 1명이다.
○ 신우(辛禑) 6년에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3도를 침략하였다. 상주(尙州) 부고(府庫)를 불태우고,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쯤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가 죽고, 군사도 5백 명이나 죽어서 냇물이 다 붉었다. 그리하여 지금 혈계(血溪)라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의 군세는 더욱 성하여, 군 성을 무찌르고 남원을 향해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 이첨의 시에,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 하였다. ○ 역 남쪽에 제법 넓게 트인 정자가 있다. 이숙번(李淑蕃)의 시에, “객의 귀 밑에 눈서리 더하여도, 흐르는 세월은 조금도 멈추지 않네. 윤음(綸音)이 금궐(金闕)에서 내려오니, 옛 벗들 우정(郵亭)에서 전송한다. 시내와 산은 집을 둘러 훌륭하고, 소나무는 구름을 스칠 듯 푸르도다. 임금의 은혜를 갚기는 어려우니, 어찌 반드시 궁궐에 가야 하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가는 길 우리 고향과 가까워, 더욱 기쁘다. 말 머리가 내일에는 산음을 지나리. 사람들은 왕인(王人)이라 보지만, 재간 없는 취한 한림인 줄 어찌 알리오.”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丞)은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

광혜원(廣惠院) 성 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다락집이 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 이항무(李恒茂)의 시에, “총총히 겨를 없어 누에 못 오르다가, 이날에야 올라보니 눈이 잠깐 트인다.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구름이 아득하고, 남으로 지리산 쳐다 보니 눈만 높이 쌓였네. 2년 동안 녹 먹으며 무슨 일 했나. 천리 밖 고을을 맡았으나 재주 없는 것 부끄러워라. 어찌하면 호탕하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송백(松栢)이나 잘 가꾸워 볼까.”하였다. 사근원(沙斤院) 사근역 동쪽에 있다. 도현원(桃峴院) 도현(桃峴) 밑에 있다. 덕신원(德信院)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사근교(沙斤橋) 사근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군 남쪽 엄천리에 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성모는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한다.” 하였다. 성왕사 군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冢)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인물】 고려 박충좌(朴忠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본조 박자안(朴子安)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여칭(呂稱) 벼슬이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자안의 아들이다. 태조조에 자안이 경상ㆍ전라도 도안무사가 되어서 항복한 왜인을 응접하다가, 군사 기밀을 잘못 누설하여 죄가 참형에 해당하였다. 조정에서 베어 죽이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저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비밀에 붙이고 선포하지 않았다. 박실이 듣고 곧 태종의 사저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아비 목숨을 살려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께서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서, 곧 자안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계청하였다. 태조께서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얼마 뒤에 중추원 녹사 심귀수(沈龜壽)에게 힘껏 빨리 달려가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귀수가 반 넘어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명령서를 대신 보냈다. 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감형관은 이미 자안의 낯을 칠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도 갖추고 있었다. 역리는 멀리 들판에서 갓을 휘둘렀다. 감형관이 바라보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자안은 죽지 않게 되었다. 박실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비 구한 것을 어질게 여겨서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다. 직위가 총제에 이르렀다. 오응(吳凝)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증』 여자신(呂自新) 무과에 올랐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소탈하며 곧았다. 여운철(呂允哲) 자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청렴 결백한 것이 그 아비와 같았다.
【우거】 본조 유호인 과거에 올랐고 시를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효자】 본조 박안행(朴安行) 효행이 있어서 정려되었다. 박유효(朴由孝) 아버지의 무덤에 시묘하는 때를 당하여, 어미 병이 위독하였다. 변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에 합장하고 6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열녀】 고려 송씨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에게 잡혔다. 왜적이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본조 김씨 이양(李陽)의 아내이다. 양이 자식도 없이 죽으니, 사직 여자근(呂自勤)이 장가들고자 하였다. 김씨는 지아비의 무덤에 달려가서 사흘 밤을 풀 속에서 잤다. 그 뒤에 박용덕(朴龍德)이란 자가 또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씨는 응하지 아니하고 목매어 죽었다. 성종 3년에 고을 원을 시켜 그 무덤에 제사하고 정문하였다.
【제영】 함양소현난산심(咸陽小縣亂山深) 이색(李穡)의 시에, “함양 작은 현은 많은 산이 깊고,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네.” 하였다. 함양구물단청산(咸陽舊物但靑山)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함양 옛 물건은 청산뿐이니, 몇 차례 흥망 겪으며 한 고을에 딸렸던가.” 하였다. 천극두류기반공(天極頭流倚半空)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하늘 끝 두류산은 반공에 기댔고, 호남을 한 번 채운(彩雲) 속에 바라보네. 시험삼아 누 위에서 난간에 기대보니, 천고에 푸른 얼굴 두루두루 같아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안의(安義)에 예속시켰다가 이어 나누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정조 12년에 군으로 강등시켰다.
【정지】 읍성 영조 5년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5척이며 동ㆍ서ㆍ남 3문이 있다. 천왕봉고성(天王峯古城)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하며, 의탄(義呑)의 소재지에서 5ㆍ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고, 안에는 창고 터가 있다. 안치고성(鞍峙古城) 석축의 터가 있다.
【교량】 사근교(沙斤橋) 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남쪽으로 5리이다.
【창고】 읍창ㆍ북창(北倉) 북쪽으로 30리이다. 사창(仕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역창(驛倉) 사근에 있다.
【사원】 남계서원(濫溪書院) 명종 임자년에 세우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문묘 편에 보라. 정온(鄭薀) 광주(廣州) 편에 보라. 강익(姜翼) 자는 중보(仲甫), 호는 개암(介庵),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 당주서원(溏洲書院) 선조 신사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노진(盧禛)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이며, 풍천(豐川)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방면】 읍내 끝이 5리이며, 일명 원수면(元水面)이라고도 한다. 관변(官邊)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지내(池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근(沙斤)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열음계(列音界)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휴지(休知)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엄천(嚴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천(馬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백 리이다. 죽곡(竹谷)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광복(廣福)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전(柏田)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병곡(甁谷)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유등포(柳等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도북(道北)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북천(北川)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덕곡(上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하덕곡(下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백토(柏吐)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모수(毛首)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현내(縣內)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상동(西上洞) 처음이 5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서하동(西下洞)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 공안(功安) 부곡은 동남쪽으로 15리, 마천소(馬川所)는 지금 면이 되었으며, 의탄소(義呑所)는 남쪽으로 30리이다.


 

[주D-001]분황(焚黃) :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그 관직이 상당히 높아지면, 그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의 3대에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추증할 때에 관직을 기재한 사령장은 누런 종이에 쓴다. 그 종이를 분묘 앞에서 불사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분황(焚黃)이라 한다.
[주D-002]인천(人天) : 사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치와 천리(天理)에 관한 것을 합하여서 인천(人天)이라 한 것이다.
[주D-003]아간(牙簡)과 경고(瓊膏) : 아간(牙簡)은 관청 문서라는 말이요, 경고(瓊膏)는 고량진미(膏梁珍味)라는 말이다.
[주D-004]한습(寒拾) : 당(唐) 나라 중엽 시대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ㆍ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이다. 그들은 기행(奇行)으로 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
[주D-005]금당(金堂)과 옥실(玉室) : 여기에 금당 옥실이라 함은 부처 있는 곳을 미화시켜서 한 말이다.
[주D-006]난파(鑾坡) : 난파는 한림학사가 공무 보는 곳을 말함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있는 곳을 난파라고 하였다.
[주D-007]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가 각각 나서 가지만이 서로 얽힌 것을 연리지라 한다. 옛날 전국 시대 송 나라 강왕(康王)이 한빙(韓凭)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도 자살하였으므로 어느 산기슭에 묻었더니, 두 무덤에서 각기 나무 하나씩이 나서 가지가 서로 얽히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사목(相思木)이라 하여 이들의 사랑을 가련하게 여겼다.
[주D-008]화산기(華山畿)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에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상여가, 그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때에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관을 열어 주오.” 하였더니, 관이 열리므로 그 여자가 그 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가 놀래어 아무리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였다. 그것을 노래한 곡조가 화산기(華山畿)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풍속】 생민이 후박하다. 박초(朴礎)의 시에,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 하였다.
【성씨】 본군 김(金)ㆍ한(韓)ㆍ송(宋)ㆍ이(李)ㆍ황(黃)ㆍ임(林)ㆍ구(仇). 흑석(黑石) 이ㆍ구ㆍ김.
【산천】 건자산(乾子山)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도순산(都順山) 속칭 시다산(施茶山)이라 하는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당산(唐山)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밤이 산출되는데 1년에 세 번 열린다. 그러나 딴 곳에 옮겨 심으면 나지 않는다. 용화산(龍華山)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장군봉(將軍峯) 용화산 남쪽에 있다.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기름 몇 십 말을 담을 수가 있어 속칭 등잔암(燈盞巖)이라 한다. 춘포(春浦)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왕궁정(王宮井)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이다.”라고 한다.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상시연(上矢淵)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붕어[鯽魚]ㆍ생강[薑].
【누정】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송을개(宋乙開)의 기문에,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칭왕(稱王)한 땅이다. 산천은 그 옛날과 같고 탑과 묘(廟)가 완연하니,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웅장한 풍도가 장열하였음을 짐작할 만하도다. 국조(國朝)에 와서 병자년에 무진(茂珍) 노상군(盧相君)이 이 고을을 지켰는데, 처음으로 누각을 객관 동쪽에 세웠다. 오랜 세월에 기울고 헐었는데, 무진년 봄에 밀양(密陽) 손후(孫侯)가 군수로 와서, 노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 새로 단장을 하였다. 단청(丹靑)을 칠하고 2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생각하니, 어진 수령 손후여, 관에서 이 역사를 하는데 백성이 모르고, 위에서 가진 마음 아래에서 서로 도와, 재력이 관청에서 나오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배부르며, 역사는 대중이 하지 않고도 공사가 완성되니, 이 도리를 미루어 모든 일을 펴 나가면, 무슨 일인들 인(仁)에 어긋나리요.”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원】 흑석원(黑石院) 흑석 부곡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石塔)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창 밖 청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근심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구나. 가을 바람이 날로 두건과 지팡이에 불어오니,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볼까 하노라.” 하였다. 사자암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사원사(上院寺)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여단(厲壇) 모두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금마산(金馬山)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견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臧王)께서 실도(失道)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흑석부곡(黑石部曲)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석장동(石檣洞)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기슭에 고사(古寺)의 유지(遺址)가 있고, 돌 돛대가 높이 세워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된다. 속칭 그 마을을 석장동이라 한다. 전대(前代)에 주와 현에 혹 동(銅)이나 돌로 돛대의 모양을 만들어, 지기(地氣)를 누른 것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교원(蛇橋院) 군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고 없다.
【명환】 본조 진의귀(陳義貴) 정치를 잘하여 명망이 있었다. 노귀상(盧龜祥)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이 있었다. 최덕지(崔德之)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일처리는 자상하고 분명하였다.
【인물】 고려 이주(李湊)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학사승지까지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살림을 몰랐으니, 집안에는 저축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행검(李行儉) 이주의 아들인데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법랑(典法郞) 벼슬을 지냈으며 정화원주(貞和院主)가 평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 평민이 고소를 하니, 동료가 권세가의 압력을 받고 법을 굽히려 하였지만 이행검이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마침 병에 걸려 휴가중이었는데 동료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일을 처결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니 날카로운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형부(刑部)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형부의 관리들은 모두 폭사하거나 병사하였는데 유독 이행검만이 무고하였다. 벼슬은 국자전주(國子典酒)까지 지냈다. 이공수(李公遂) 이행검의 손자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서 과시(科試)에 수석으로 뽑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원 나라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웠는데, 이공수가 사신으로 원 나라에 들어가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태조(太祖)의 원묘(原廟 정묘(正廟) 이외에 다시 세운 묘)에 배알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다시 복위하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받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별장을 덕수현(德水縣)에 마련하고 자칭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하였고, 공민왕묘(恭愍王廟)에 배향되었다.
【유우】 본조 권근(權近) 귀양살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열녀】 본조 구씨(仇氏) 조민(曹敏)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조씨 가문에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다시 개가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편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고 의복을 늘어놓고 밤마다 애통하였으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告)하였고, 시식(時食)을 반드시 바쳤다. 채소와 국을 먹지 아니하였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으며, 소복(素服)으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成宗) 2년에 임금에게 알려져 쌀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오씨(吳氏) 지삼근(池三近)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3년간 묘막 생활을 하였는데, 직접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슬피 곡(哭)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제영】 기랑자복경무성(箕郞雌伏竟無成) 성임(成任)의 시에, “기랑(箕郞)은 움츠리고 끝내 성취 없었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병합함은 이치에 분명한 일. 당시 휘하의 장사 생각해보니, 그 몇 사람이 고개 돌려 서경(西京)을 생각했으랴.” 하였다. 상마사야춘(桑麻四野春) 권근(權近)의 시에, 전쟁을 하던 곳 천년 뒤 오늘, 사방에는 뽕과 삼이 봄을 맞았네.” 하였다. 마한문물구성공(馬韓文物久成空)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완부(完府)의 판도가 통일이 되니, 마한의 문물이 오래토록 공허하네.” 하였다. 백년무어련금마(百年無語憐金馬)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호(南湖)는 희고 흰데, 익산(益山)은 푸르구나. 지난 일은 희미한 한 자리의 꿈.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에는 고목이 공적하고, 기준(箕準)의 옛 궁터엔 석양이 비꼈구나. 백년이나 말이 없으니 가련하다 금마(金馬)여, 만고에 다정(多情)하여 석양(石羊)을 기억하네. 백발되어 원유(遠遊)하니 강개가 많고, 등림(登臨)하니 신상(神傷)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 칭했다.
【방면】 군내(郡內) 동쪽으로 끝이 3리이다. 제석(帝釋)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춘포(春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두촌(豆村)ㆍ두천(豆川)ㆍ지석(支石) 모두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제(蛇梯)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율촌(栗村)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구문천(九文川)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미륵(彌勒)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 흑석부곡(黑石部曲) 남쪽으로 15리이다.
【교량】 상한교(上漢橋)ㆍ하한교(下漢橋) 모두 남천(南川)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면천교(綿川橋) 서쪽으로 함열(咸悅)과 통하는 길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게[蟹]ㆍ뱅어[白魚]ㆍ삼률(三栗).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김제군(金堤郡)



동으로 금구현(金溝縣)경계까지 14리, 남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경계까지 26리, 만경현(萬頃縣)경계까지 13리, 북으로 만경현(萬頃縣) 경계까지 18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는 현령을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에 본현 출신인 명(明) 나라 환자(宦者) 한첩목아(韓帖木兒)의 요청으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벽골(碧骨).
【성씨】 본군 김(金)ㆍ장(張)ㆍ조(趙)ㆍ염(廉)ㆍ구(仇), 최(崔)ㆍ이(李)ㆍ조(趙)ㆍ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평고(平皐) 이(李)ㆍ곽(郭)ㆍ온(溫)ㆍ오(吳)ㆍ문(文)ㆍ여(呂), 김 속성(續姓)이다. 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마천(馬川) 윤(尹). 재남(才南) 이(李). 명랑(鳴良) 구(仇). 제견(堤見) 구(仇).
【풍속】 인심이 순후하고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
【산천】 명량산(鳴良山) 명량향(鳴良鄕)에 있는데, 고봉(孤峯)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른다. 승가산(僧伽山) 군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오적죽산(吾赤竹山)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대평(大坪) 속칭 김제(金提) 만경평(萬頃坪)이라 한다. 동쪽은 전주(全州), 남쪽은 태인(泰仁), 북쪽은 신창진(新倉津), 서쪽은 동진(東津)과 접해 있다. 회연(廻淵) 군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옛날 병영(兵營) 터가 있다. 장신포(長信浦) 회연(廻淵) 서쪽 5리에 있다. 신창진(新倉津) 마천소(馬川所)에 있다. 전주부(全州府) 편에 보인다. 동진(東津)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부안현(扶安縣) 편에 자세하다. 대제(大湜)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3천 34자이다. 내소제지(乃所梯池)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마름ㆍ가시연[芡]ㆍ연(蓮)ㆍ붕어[鯽魚]ㆍ모시[苧]ㆍ순채[蓴].
【누정】 문명루(文明樓) 바로 군의 남문루(南門樓). 『신증』 자민루(字民樓)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재역(內才驛) 군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동원(東院)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불우】 흥복사(興福寺) 승가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고적】 평고 폐현(平皐廢縣)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인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키었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명량현(鳴良縣)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제견향(堤見鄕)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윤회(尹淮)의 지지(地志) 및 전라도 관풍안(觀風案)에는 전주(全州)ㆍ태인(泰仁)ㆍ임피(臨陂)도 또한 제견향에 실려 있으니, 생각건대, 벽골제(碧骨堤)에 가까운 땅은 다 제견(堤見)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상고할 바가 없다. 마천소(馬川所)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재남소(才南所)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벽골제(碧骨堤)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金構縣) 무악산(毋岳山)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무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인현(泰仁縣)의 상두산(象頭山)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같이 만나 고부군(古阜郡)의 눌제수(訥堤水)와 동진(東津)에서 합치고,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 고려 시대에 와서 다시 수축하였다가 후에 폐지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어 다시 중수하도록 하였는데 또한 지금은 폐지하였다. ○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 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봄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 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 군(君)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 군(君)과 지김제군사(知金提郡事) 김방(金倣) 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하였다.

용두동(龍頭洞)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조간(趙簡)이 살던 곳이다. 전하는 말에, “조간은 태어나면서 양쪽 어깨에 용의 비늘이 있었는데 바로 벽골제의 용정(龍精)이라고 하였다. 그가 군의 낮은 관리가 되었는데 하루는 괴수(槐樹) 나무에 올라갔더니, 읍재(邑宰)가 낮잠을 자다 꿈에 나무 위에 쌍룡이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뒤 사람을 시켜 사실을 알아본 뒤에, 즉시 공부를 시켜 후에 과거시험에 1등으로 급제하게 되었는데, 그가 살던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한 것이다.” 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장원(壯元)이 난 고을을 우연히 향하니, 옛집 추녀 앞에 석양이 비꼈네. 매번 과장(科場)에서 군용(群龍)이 다투지만, 남다른 재명(才名) 뭇 새 중에 일악(一鶚)이네. 세상을 싫다 하던 공은 일찍 하늘로 돌아갔는데, 이웃에 자리잡은 나는 황정(黃精 약재)을 다듬고자 하네. 지령(地靈)에서 인걸 난다는 말을 믿을 만하구나, 공경(公卿)이 연이어 나는 것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전약충(全若衷)ㆍ최유종(崔有悰) 모두 정치의 명망이 있었다. 김륜(金崙) 청렴하고 간소하며 정치의 명성이 있었다. 김미(金楣) 법을 지키고 공사를 받들었다. 성종 갑진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인물】 고려 조간(趙簡) 어려서 한 사람이 시 구절을 읊기를, “벼루 위 검은 구름은 휘필(揮筆)한 뒤.”라 하니, 즉석에서 받기를, “뜰 앞의 붉은 비는 떨어진 꽃 시절.”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해에 임금이 시(詩)와 부(賦)로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할 때 또한 1등을 하였다. 황패(黃牌)를 하사하였고 여러번 관직을 옮겨 보궐(補闕) 벼슬을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기거경력(起居經歷) 벼슬을 주었다. 벼슬이 밀직부사찬성사(密直副使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우거】 고려 박의중(朴宜中) 자는 자허(子虛), 초명(初名)은 실(實)인데, 밀양(密陽) 사람이다. 공민왕 때에 장원에 뽑히고, 신우(辛禑) 때에 여러 번 옮겨 벼슬이 대사성 밀직제학(大司成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니,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청구하거늘, 의중이 자루 입구를 기울여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고 예부(禮部)에 알리니, 천자가 인견하고 예를 더하여 대접하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원평장원사(元平章院使)의 윗자리에 앉도록 하고 그의 요청을 허락하여 주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배수되었다. 박의중은 천품이 명민하고 학문이 독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강개하며 편할 때나 험난할 때나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고, 문장은 정심(精深)하고 전아(典雅)하였다. 본조 정곤(鄭坤)ㆍ노숭(盧崇), 안지(安止)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로 마을 농막에 퇴거하였다. 호는 고은(皐隱)이다. 『신증』 【열녀】 본조 동질금(同叱今) 향리(鄕吏) 이당(李堂)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생존할 때와 같이 올렸다. 금상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씨(朴氏) 윤사임(尹師任)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소복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처음과 다름없이 애통하였다. 금상 22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마비(馬非) 서치명(徐致明)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20여 년 동안 상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상식을 폐하지 아니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요곽하화최효우(繞郭荷花摧曉雨) 이발(李發)의 시에,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하고,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하였다. 수락어하국(水落魚鰕國) 김극기의 시에, “수위(水位)가 낮아지니 고기와 새우의 나라요, 산이 고요하니 호랑이와 들소의 고을이로다.” 하였다. 일로요련해(一路遙連海) 옛 사람의 시에,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이어있고, 천가(千家)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이다. 모촌(母村)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월산(月山)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입천(立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부량(扶梁)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정(大井)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개토(介吐)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홍산(洪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대촌(代村)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반산(半山)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식포(食浦)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목연(木淵)ㆍ마천(馬川)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본래는 마천이었다. 연산(延山)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공동(公洞)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회포(廻浦)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금굴(金堀) 위와 같다. ○ 명량향(鳴良鄕)은 서쪽으로 20리, 제견향(堤見鄕)은 남쪽으로 1리, 재남소(才南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창(倉)이 2곳이 있다. 읍내에 있다. 두창(杜倉) 동쪽으로 20리이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2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서쪽으로 25리, 부안(扶安) 경계의 큰 길이다. 신창진(新倉津) 북쪽으로 20리이며, 전주(全州) 땅과 통한다.
【교량】 재남교(才南橋) 동쪽으로 30리이며, 삼례(參禮)로 가는 길이다. 화교(禾橋) 서북쪽으로 15리이며 만경(萬頃) 큰 길과 통한다. 포교(浦橋) 남쪽으로 15리이다.
【토산】 게[蟹].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영암군(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 【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石花]ㆍ새우[蝦]ㆍ낙지[絡締]ㆍ전복[鰒]ㆍ붕어[鯽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숭어[秀魚]ㆍ게[蟹]ㆍ감태(甘苔)ㆍ김ㆍ우무[牛毛]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가사리(加士里)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표고[香蕈]ㆍ생강.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 봉수(葛頭山烽燧)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부곡(懷義部曲)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부곡(深井部曲)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부곡(貴仁部曲)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부곡(松井部曲)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유광식(柳光植)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 고려 최지몽(崔知夢)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시(郡始)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위와 같다. 서시(西始)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부곡(貴仁部曲)은 남쪽으로 90리이고, 송정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왕대[篁竹]ㆍ화살대[箭竹]ㆍ감ㆍ유자ㆍ옻[漆]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D-001]오정(五丁)이……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D-002]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D-004]양을 잃고……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5]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D-006]저 소림……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D-007]흔들리는……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8]나뭇가지에……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D-009]응당……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全羅道)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동쪽은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순천부 경계까지 67리, 곡성현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순창군 경계까지 37리, 옥과현 경계까지 62리,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까지는 6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중에는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시대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뒤에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 조서하여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그 땅을 합병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에는 소경(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여전히 소경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부(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대방으로 삼았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켰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곡부곡(楡谷部曲) 부의 남쪽 69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인데 신라 때에 구례(求禮)라 개명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기에 남원에 내속시켰고, 인종 21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래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는데, 현재 주상 5년에 현의 백성 중에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조작하고 무리들을 끌어모아 반역을 꾀하였다가 복주(伏誅)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현(縣)을 폐하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다시 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하나 담양(潭陽). 군 하나 순창(淳昌). 현 아홉 임실(任實)ㆍ무주(茂朱)ㆍ곡성(谷城)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옥과(玉果)ㆍ운봉(雲峯)ㆍ창평(昌平)ㆍ장수(長水).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대방(帶方)ㆍ고룡(古龍)ㆍ용성(龍城).
【성씨】 본부 양(梁)ㆍ정(鄭)ㆍ진(晉)ㆍ양(楊)ㆍ견(甄)ㆍ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황(黃)ㆍ염(廉)ㆍ배(裵)ㆍ류(柳), 고(高)ㆍ전(全)ㆍ임(林)ㆍ안(安)ㆍ지(池)ㆍ이(李)ㆍ송(宋)ㆍ조(曺)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거령(居寧) 백(白)ㆍ황(黃)ㆍ한(韓)ㆍ이(李)ㆍ장(張). 유곡(楡谷)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진(陳), 박(朴) 속성(續姓)이다. 황(黃) 의창(義昌). 서(徐)ㆍ양(梁) 모두 내성(來姓)이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속성(續姓)이다.
【풍속】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납다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나워서 반역과 속임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하였다. 향음(鄕飮)과 사례(射禮)를 행한다 이 고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용담이나 율림(栗林)에 모여 향음과 사례를 행한다.
【형승】 동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中津)을 띠었다 《부지(府志)》에, “동쪽에는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사람과 물산이 많아 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남방에 있어 오른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방이다 이규보의 송(頌)에, “대방(帶方)은 오래된 고을이니, 남방의 오른팔이다.” 하였다. 옥야백리천부지지(沃野百里天府之地)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기(廣寒樓記)〉에, “남원(南原)은 옛 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기름진 들판이 백 리에 뻗쳐 있으니 실로 천연의 부고이다.” 하였다.
【산천】 백공산(百工山)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지리산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 시의 ‘방장 삼한 외(方丈三韓外)’의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을 둘러싼 고을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咸陽)이요, 동남쪽은 진주(晉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의 천왕봉(天王峯)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기슭에 혹 구름끼고 비가 오며 천둥치고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몰려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하는 이야기에 태을(太乙 북극신(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거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巖萬壑)에 물방울이 뿌리도다. 골짜기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마땅히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보련산(寶連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교룡산(蛟龍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북쪽에는 밀덕봉(密德峯)과 복덕봉(福德峯)이 하늘을 받치고 높이 솟아 있다. 장법산(長法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견수산(犬首山)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오산(鼇山) 유곡(楡谷) 남쪽 15리에 있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빈 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전하는 말에, 중 도선(道詵)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 봉성산(鳳城山) 유곡(楡谷) 서쪽 1리에 있다. 숙성현(宿星峴) 부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비홍현(飛鴻峴)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율림(栗林) 광한루(廣寒樓)의 남쪽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일말(一抹)의 가을빛이 나무 끝에 닿아서, 담황색(淡黃色)과 천록색(淺綠色)이 가만히 서로 떠오르네. 바람이 금위(金蝟)에 불어오니 규란(虯卵)이 터져 나오고, 아이들은 짝지어 좋은 놀이 하도다.” 하였다. 동장수(東帳藪)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물 유유히 흐르고 모래 사장 길게 뻗친 곳에 버들 그림자가 깔렸는데 사는 사람들 모두 그윽한 거처를 얻었구나. 꽃은 지고 방초는 무성하여 봄이 저물었는데, 천고의 풍류는 회계산(會稽山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접했구나.” 하였다. 창활수(昌活藪)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바람에 나부끼는 표기[風帘 주막(酒幕)을 표시하는 기(旗)]는 희미하게 무성한 수풀과 격해 있고, 허물어진 역원(驛院)은 황량한데 깊은 산 속에 한 줄기 오솔길. 해는 지고 소와 양은 먼 길을 돌아오는데 반륜(半輪)같은 저녁해가 푸른 산봉우리에 걸려있네.” 하였다. 순자진(鶉子津) 진안현(鎭安縣) 중대산(中臺山)과 태인현(泰仁縣) 운주산(雲住山)의 물리 합쳐 흘러, 부의 서남쪽 40리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었는데 곡성현(谷城縣)에 들어가서는 압록진(鴨綠津)이 된다. 원천(源川) 원천부곡(源川部曲)에 있다. 지리산에서 근원하여 부의 동쪽 선원사(禪院寺) 앞에 이르러서 요천(蓼川)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간다. 두가천(豆可川) 부의 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자진의 하류가 된다. 본조(本朝)의 마천목(馬天牧)이 물을 막아 어량(魚梁)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본부(本府)에서 이것을 고쳤다. 대모천(大母泉)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한 구멍 맑고 맑은 돌 밑의 샘이 대모(大母)라 이름 전하기 몇 천 년인고. 자손[雲仍]이 다 변하고 남은 은택만 머무르니, 젖 같은 샘물이 6월 여름 날씨에 맑고도 달더라.” 하였다. 거령천(居寧川) 거령현(居寧縣)의 개현(介縣)에서 나와서 오수역(獒樹驛)동남에 이르러 임실현의 평당원천(坪堂院川)과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요천(蓼川) 부의 동남쪽 1리에 있는데 시내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와 같으므로 우암(牛巖)이라 한다. ○ 강희맹의 시에, “한 줄기 긴 시내가 고진(古津)에 접했으니, 바람이 압록(鴨綠)을 흔들어 고기비늘 같은 물결을 이루었네. 외로운 배가 여뀌꽃 언덕에 숨었다 비쳤다 하니, 그림 속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축천(丑川) 축(丑)은 혹 축(畜)으로도 쓴다. 부의 동북방에 시냇물이 들이치므로 마을을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따라서 쇠로 소를 만들어 기세를 누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축천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는 지금도 남아있다. 연탄(淵灘) 부의 서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창군 저탄(猪灘)의 하류로서 순자진(鶉子津)으로 들어간다. 구연(九淵) 유곡(楡谷)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연못 위에는 천척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있어 병풍처럼 보인다. 압록진(鴨綠津) 유곡에서 29리, 곡성현(谷城縣)의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유곡 남쪽 12리, 순천부(順天府)의 경계상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유곡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의 경계에 있으니 바로 잔수진 하류에 해당한다. 광양현(光陽縣) 부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신증』 용연(龍淵)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수원(水源)은 지리산에서 나온다.
【토산】 꿀ㆍ호두ㆍ오미자ㆍ감ㆍ닥종이ㆍ생강ㆍ표고버섯ㆍ송이ㆍ석류ㆍ석이버섯ㆍ치자ㆍ죽전ㆍ잣ㆍ산무애뱀[白花蛇]ㆍ복령ㆍ지황(地黃)ㆍ영양각ㆍ은어[銀口魚]ㆍ게.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8천 1백 99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과 샘이 71개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5천 7백 17자, 높이 10자,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작은 시내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강희맹의 시에, “교룡산성이 백운 간에 솟았으니, 한 줄기 길이 겨우 꾸불꾸불 통하였네. 마치 이 한 고을의 절험(絶險)을 자랑하는 듯, 위급한 시절이면 여기 의지하여 오랑캐를 막아 내도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고을이 호남 산수간(山水間)에 자리하니, 산성은 우뚝 솟고 길은 꾸불꾸불, 대방(帶方)은 스스로 웅장한 번지(藩地)를 이루었으니, 팔방의 오랑캐를 공액(控扼)하고 제압하네.” 하였다.
【누정】 광한루(廣寒樓) 황수신(黃守身)의 기문에, “부의 남쪽 2리쯤 되는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하며 넓게 트여 있는데 거기에 작은 누각이 있으니, 그 이름이 광통루(廣通樓)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니 갑인년에 부사 민공(閔恭)이 다시 새 누각을 세웠고, 정사년에 유지례(柳之禮)가 이어 단청을 더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인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아, 호남의 경치 좋은 곳으로 우리 고을보다 나은 곳이 없고, 내 고장 경치 좋은 곳 중에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남방의 이름난 광한루에 6월에 올라오니 가을처럼 서늘하네. 달그림자 홀연히 비치니 하늘이 가깝고, 붉은 난간 굽은 곳에 견우성이 지나가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방장산(方丈山) 앞에 백척누각, 푸른 산머리에 붉은 사다리가 높이 걸렸네. 물은 들판에 연하여 이내와 햇빛이 섞였고, 구름 걷힌 먼 산봉우리엔 비 기운이 걷히었네. 물가에 임하니 천상에 앉은 듯, 바람 앞에 서니 달 가운데서 노는 듯, 인간에 절로 달세계[淸虛府]가 있는데, 하필 구구하게 세상 밖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상쾌한 기운이 물가 누각에 스며드니, 요천(蓼川) 머리에 광한(廣寒)의 선경(仙境)이 펼쳐지도다. 남쪽 언덕에 바람이 일어나니 더위가 멀어졌고, 서산에 주렴 걷히니 저녁 비가 그쳤네. 달은 때마침 맑은 밤에 둥근데, 은하수 다리에서 누가 옛 사람을 이어서 놀꼬. 하늘빛은 상하에 명경처럼 밝으니, 몸이 청허부(淸虛府)에 바로 드달리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저녁에 풍류 잡히고 그림같은 누각에 오르니, 옥봉(玉峯)으로 지는 해가 성 머리에 걸렸구나. 시정(詩情)이 바다처럼 일렁거리니 봄이 정함이 없고, 검기(劍氣)가 하늘에 떠서 밤에도 걷히지를 아니하네. 눈처럼 춤추니 패옥을 던지며 가고, 물결을 도리어 밟고 가니 구슬을 희롱하며 노는도다. 인간에 또한 청허부가 있으니, 좋은 놀이를 세상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연국루(戀國樓) 객관(客館)의 서쪽에 있는데 일명 죽루(竹樓)라고도 한다. ○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뚫은 푸른 대가 요란하게 비녀을 뽑은 듯, 홀연히 높은 루에 올라 바로 아래를 굽어봤네. 우로(雨露)가 비록 처음에 죽순을 무성케 하였으나, 얼음과 서리도 끝내 요림(瑤林)을 욕되게 하지 못하였네. 깊숙한 뿌리가 돌을 피하는 모양이 푸른 용이 숨은 듯하고, 맑은 피리소리는 바람을 맞아 푸른 봉황이 우는 듯하도다. 어떻게 하면 장안의 고관들이 그대처럼 굳은 절개에 곧은 마음 가질 수 있을까.” 하였다. ○ 윤향(尹向)의 시에, “한가한 날 백 자나 되는 누각에 오르니, 누각 지은 사람은 정오두(鄭遨頭)라네. 산은 지리산(智異山)에 연하여 천봉(千峯)이 빼어나고 물은 태량(苔梁)에서 합하여 한 줄기로 흐르도다. 주포(周浦)에는 구름이 비꼈으매 석양이 밝고, 교잠(蛟岑)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니 가을 기운 움직였네. 어디에서 부는 장적(長笛) 소리인가, 홀로 난간에 기대니 천리만리로 뻗친 근심일세.” 하였다.
축천정(丑川亭) 축천(丑川)의 서쪽 언덕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벼랑에 의지한 절벽 그림 병풍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높은 누각 있으니 돌로 축대를 만들었네. 만고(萬古) 세월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칠 줄을 모르고, 백 년 산색(山色)은 우뚝하게 둔덕이 되었네. 쇠로 만든 소는 소울음 소리내며 어느 날이나 일어날까, 황학(黃鶴)을 탄 손님 오늘 아침에 올 듯하구나. 여기가 대방(帶方)의 아름다운 곳인데, 풍류 제영(題詠)함에 재주없음이 부끄럽네.” 하였다. 봉서루(鳳棲樓) 유곡(楡谷)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운 것인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김작(金綽)의 기문에 이르기를, “고을의 지세가 나르는 봉황의 형국이라 이것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아래 봉서루, 바람이 서늘하여 여름도 가을인 양하여라.” 하였다. 사영루(四詠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이문병(李文炳)과 판관 이적(李績)이 세웠다. 휼민관(恤民舘) 즉 객관을 말한다. 부사 이문병과 판관 이적이 세웠다. 『신증』 허침의 시에, “은혜를 펴니 곳곳이 봄과 같다 세 사람의 연이어 꽃다운 이름 후세에 빼어났네. 성상의 은혜 감격하여 일신을 능히 보국(報國)하였고, 희끗희끗 양쪽 귀밑털 나니, 백성을 위해 근심함일세. 큰 고을 뛰어난 정사 대개 백성을 중히 여기니, 호협한 풍속이 점차 순화되어 가네. 나라를 요리할 수완이니 닭을 잡는 사람 노릇 오래하지 마소.” 하였다. 봉서헌(鳳棲軒) 유곡부곡(楡谷部曲)에 있다. 현감 최지성(崔智成)이 세웠다. 『신증』 월인헌(月印軒) 광한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부 치소(治所)의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오수역(獒樹驛)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 본도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속역(屬驛)은 11개소로서 창활(昌活)ㆍ동도(東道)ㆍ응령(應嶺)ㆍ인월(引月)ㆍ잔수(潺水)ㆍ지신(知申)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덕양(德陽)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 등이 있다. ○ 찰방 한 사람이 임명된다. ○ 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깬 뒤에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 “낮에 오원(烏原)을 출발하여 오수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가로운 사슴은 깊은 풀숲에 잠들고, 깊은 숲 속에 사는 새도 얕은 도랑에서 목욕하네. 산은 그림 같은 풍경 눈에 담뿍 보여주고, 바람이 부니 가을 바람 옷깃에 살랑거리네. 다시금 대방 땅을 밟으니 하늘은 나에게 마음껏 경치를 즐기라고 하는구나.” 하였다.
동도역(東道驛)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嶺驛)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 창활수(昌活藪)의 남쪽에 있다. 잔수역(潺水驛)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안신원(安信院)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호산원(虎山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비홍원(飛鴻院) 비홍현(飛鴻峴) 아래에 있다. 서림원(西林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순자원(鶉子院)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다. 다시천원(多時川院)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운제원(雲梯院)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천원(遷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축천원(丑川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홍화원(弘化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율두천원(栗頭川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원천원(源川院) 원천의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잔수진의 언덕에 있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부의 서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분류(奔流) 흐르는 강 양쪽 언덕에 긴 다리가 걸려있고, 수면에는 침침(沈沈)하게 그림자 흔들리네. 천 자나 되는 무지개 다리는 허리와 등이 넓으니, 느릿느릿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네.” 하였다.
【불우】 만복사(萬福寺)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불전(佛典)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 ○ 강희맹의 시에,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하였다. 선원사(禪院寺) 백공산(百工山)에 있다. 파근사(波根寺) 지리산에 있다. 용천사(龍泉寺) 교룡산(蛟龍山)에 있다. 승련사(勝蓮寺) 만행산(萬行山)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남원부의 산수가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컫는 바이다. 중들이 그 사이에 절을 지어 대개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였는데 승련사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강호문(康好文)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주지인 대선사(大禪寺) 각운(覺雲)이 글로써 그 시말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좋은 산수에 대해서는 매양 가서 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그곳에 내 이름을 걸어 두는 것이 실로 내 소원이었으며, 각운선사의 훌륭함은 내 또한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터이라, 기꺼이 서술한다.
절은 부중(府中)에서 동북편으로 30리 거리에 있고,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였는데 어느 때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혜국사(弘慧國師)이며 휘(諱)를 중긍(中亘)이라 하는 분이 원당(願堂)에 있다가 늙어서 물러나와 이곳에 살았는데,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증축하여 확장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죽고나서 대선사 졸암(拙菴), 이름을 연온(衍昷)이라 하는 분이 조계(曹溪)의 장로로서 홍혜(弘慧)의 문도들에게 추앙을 받으니 모두 계권(契券)을 만들어 주며 졸암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졸암이 곧 설계하고 비용을 헤아리고, 시주를 모으는 것은 종한(宗閑)이라는 분이 주관하였다. 그 편액을 승련사(勝蓮寺)라 고치고 공사는 을축년에 시작하여 신축년 봄에 마쳤다. 불전(佛殿)ㆍ승무(僧廡)ㆍ선당(膳堂)ㆍ선실(禪室)ㆍ객실(客室)ㆍ곳간ㆍ부엌 등 칸수를 계산하면 모두 1백 11칸이며, 불전 기구와 일상의 도구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다 졸암의 바랑에서 나온 것과 종한의 힘으로 인하여 이룩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상(像)을 불전 중앙에 모셨는데, 이는 졸암이 전적으로 마련한 것이요, 대장경을 새겨서 전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은 고을 사람이 다같이 낸 시주로 한 것이다. 노비 몇 명을 희사하였으니 이는 바로 졸암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무술년 가을에 그가 죽게 될 적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법통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각운선사에게 절 살림을 부탁하였다. 바깥 담이 아직 없어서 각운선사가 쌓으니 계묘년 여름에 절의 공사가 끝이 났다. 내 생각에 불도들은 그 거처를 분수에 넘치게 할 뿐 아니라, 그 후계자에게 전해 줄 것을 도모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금강(金剛)과 승련(勝蓮) 두 이름의 뜻이 어떤 것은 장중하고 어떤 것은 가벼우니 반드시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리는도다. 그러나 졸암이 기어이 그 현판을 고친 것은 승련사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1대가 되고 다시 전하여 2대가 되어서 백천 대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심원하다고 하겠다. 그가 각운선사에게 전한 것은 친족관계와 법통으로 하였으니 또한 혐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각운선사가 사람을 얻어 전함을 또한 그 스승과 같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 전해질수록 그 뜻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백천 대를 지나서 승련사(勝蓮寺)의 경내가 가시밭이 되지 않으면 족하고 친족으로 대를 잇든 법통으로 대를 잇든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졸암의 성은 유(柳)씨요,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증손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정(靖)의 동복동생으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존비(李尊庇) 공의 외손이다. 학수사선(學首四選)에 참여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였으며 명산에 두루 주석하여 불도의 명성이 높았다. 각운선사는 졸암의 조카로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고상하며 필법이 일세에 절묘하니, 사람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 스승보다 낫다는 뜻)이라.’ 하였다.” 한다.
개량사(開良寺) 견수산(犬首山)에 있는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연관사(煙觀寺) 지리산에 있다. 보현사(寶賢寺) 마행산(馬行山)에 있다. 용담사(龍潭寺) 장벌산(長伐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여의주 물고 있는 용공(龍公)이 잠들어 돌아오지 아니하니, 음침한 집문은 잠긴 지 오래로다. 못가 절에서 독경 소리 오래전에 폐하니, 오직 물결에 석대(石臺)만이 비추누나.” 하였다. 화엄사(華嚴寺)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지리산에 있다. 고려의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비(玄覺禪師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 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덕음당사(德陰堂祠) 덕성향(德城鄕)에 있다.
【고적】 거령폐현(居寧廢縣) 거(居) 자는 거(巨)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인데 신라 때에 청웅현(靑雄縣)이라 고치고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영성(寧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즉 지금 부의 치소(治所)이니 둘레가 몇 리나 되는데 옛 터가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마른 우물이 황량하게 저녁 연기에 잠겼고, 유공(劉公)의 사업은 이야기로 전해오네. 대당(大唐)이 먼 나라 포용할 계책은 구상하지 않고, 부질없이 고성(孤城)을 쌓아 뒷날의 웃음거리 되었네.” 하였다. 유곡성(楡谷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6백 81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이 9개소,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 정전유기(井田遺基) 당 나라 유인궤가 자사 겸 도독(刺史兼都督)으로 읍내에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있다. 금안부곡(金岸部曲)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원천부곡(源川部曲)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산동부곡(山東部曲)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고정부곡(古丁部曲)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성향(德城鄕)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도지향(道知鄕) 부의 서남쪽 5리, 속칭 돈다산(敦多山)이라 부른다. 수도향(守道鄕) 부의 동쪽 5리, 지금은 말이지(末伊旨)라고 부른다. 남안향(南安鄕) 부의 남쪽 2리, 지금은 야정지(野井池)라고 부른다. 경도향(京徒鄕) 부의 북쪽 60리, 지금은 백야곡(白也谷)이라 부른다. 보유향(寶有鄕)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거리향(居利鄕) 거령현(居寧縣)의 동남쪽, 지금은 성여이(城餘伊)라고 부른다. 백파향(白波鄕)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아인향(牙仁鄕)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미아향(未牙鄕)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성화점소(省火帖所) 부의 남쪽 50리. 두가소(豆加所) 부의 남쪽 60리. 웅음소(熊陰所) 부의 남쪽 50리. 용봉소(龍鳳所) 부의 동쪽 20리. 신내동소(申內洞所) 부의 남쪽 17리. 기오천소(岐於淺所) 부의 남쪽 30리. 양천소(陽川所) 부의 남쪽 8리. 금성소(金城所) 부의 동쪽 15리. 석주진(石柱鎭) 유곡(楡谷) 동쪽 15리, 남북쪽에 모두 큰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 큰 강이 흐른다. 고려 말기에 진(鎭)을 설치하고 왜적을 막았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혹은 사도(沙圖)라고도 하는데, 유곡 동쪽 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유곡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유곡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유곡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 신라 김흔(金昕) 헌덕왕(憲德王)이 사람을 당(唐) 나라에 보내려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김흔을 천거하였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후예로 정신이 빼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뽑힐 만하였다. 드디어 입조(入朝)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던바, 세밑에 돌아오니 왕은 그가 사신의 직책을 잘 수행했다 하여 남원 태수(南原太守)를 제수하였다. 윤흥(允興) 신라인 귀금(貴金)은 옥보고(玉寶高)의 가야금을 전수받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나오지 않았다. 신라의 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윤흥에게 이르기를, “방편을 써서 그 금술을 터득하게 하라.” 하고, 곧 남원 공사(南原公事)에 임명하였다. 윤흥이 도임하여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두 사람을 산 중에 보내 배우도록 하여 귀금은 가르쳐 주긴 하였으나 깊은 묘리(妙理)는 전해 주지 않았다. 윤흥이 그 부인과 함께 찾아가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딴 이유가 없고 선생의 재주를 세상에 전하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감추시고 전해 주지 않으니 내가 무엇으로 복명하겠습니까.” 하고, 윤흥은 술을 받들고 부인은 잔을 잡고 무릎 꿇어 예를 드리니, 귀금이 그제야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해 주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충혜왕(忠惠王) 때 지부사(知府事)로 새로이 제용재(濟用財)를 두어 비용으로 지출하고 횡령하는 것이 없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대략 이르기를, “국자 학유(國子學諭) 양이시(楊以時) 군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여 말이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에 새기지 않아도 남아있겠지만,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渧用財)는 쉽게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폐단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하므로,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양군(楊君)의 말을 따라 그 일을 상고하여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바치지 못하면, 대충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는, 밀린 세금을 거둬모아 베 약간을 얻었고, 또 안렴사(安廉使)에게 아뢰니, 가상히 여겨 무명을 내서 보조하였고, 또 노비문제로 다투어 관아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한 명당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지현에서 급할 때에는 네 사람이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자는 받지 않으며, 부의 아전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 중에 있으나 손님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접대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우리 사또가 그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다시 이보다 더 하리오 라고 말하고, 또 재(財)를 설치할 의향으로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우리 사또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여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니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법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거둬들이어 본전은 두고 이자를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에서 72석을 거둬들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에 백성들에게 횡포하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에서는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손해를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한다.
윤위(尹威) 신종(神宗) 때의 사업(司業)으로 염찰사(廉察使)가 되어 오니, 한 지방이 경외 하였다. 부의 경내에 도적이 있어 무리들을 불러모아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윤위가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가 화복(禍福)을 들어 타이르니, 적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명령에 복종하였다. 이에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니 경내가 편안해졌다. 이세화(李世華) 태수로서 그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 정국검(鄭國儉)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서 행춘(行春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며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일)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게 되었는데 송림(松林)이 있는 좌우 벽 위에 중 정사(正思)가 한 절구를 크게 써놓기를, “고불(古佛) 바위 앞을 흐르는 물이 슬피 울고 다시 오열한다. 아마도 인간세계에 내려와 영영 운산(雲山)과 헤어지게 된 것을 슬퍼하는가.” 하였다. 다음날 노유(老儒) 양적중(梁積中)과 말을 나란히 타고 찾아가서 산수의 벗을 맺었다. 뒤에 매양 인물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정사를 중 가운데 용이라고 칭찬하였다. 주열(朱悅) 고종(高宗) 때 판관(判官)이었다. 본조 김희(金熙) 부사로서 백성 보살피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송사를 물흐르듯 처결하니, 부사로 있는 몇 해 동안에 한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순직하니, 읍인들이 매년 기일이면 잊지 않고 제사를 올린다. 최덕지(崔德之)ㆍ이효공(李孝恭) 둘 다 부사로 있었다. 『신증』 정회(鄭淮) 부사로서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폈다. 안구(安覯) 부사.
【인물】 고려 이능간(李凌幹) 거령(居寧) 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그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다 따로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있을 때 왕이 토번(吐蕃) 땅에 귀양을 갔는데 능간이 금품을 품고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왕께 드리도록 하였으므로 왕과 종신(從臣)이 곤란을 면하였다. 왕이 승하하자 관을 모시고 귀국하는데 울부짖으며 멀리서 오느라고 애썼고 고생스러운 일을 끝까지 다하였다. 원 나라에서 본국을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능간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 의논이 결국 중지되도록 하였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지냈다. 양서린(梁瑞麟) 부의 아전이다.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부사 이종(李悰)이 난을 피하여 가다가 말이 넘어졌는데, 서린이 자기가 탄 말을 바꾸어 타게 하고 자기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 이 일이 알려져서 뒤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양성지(梁誠之)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고, 남원군(南原君)에 봉작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양순석(梁順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고, 효행이 있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아들 지형(止衡)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까지 지냈다.
【우거】 본조 유규(柳規) 유언(柳漹) 이하 몇 대가 여기서 살았는데 다 현달(顯達)하였다.
【효자】 고려 양천룡(梁天龍)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묘막에서 6년을 지냈다. 이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손순흥(孫順興) 성종(成宗) 9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례(求禮) 사람 손순흥은 그 어머니가 죽자 화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 묘지에 찾아가 공양[饗]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으니, 벼슬을 주어서 효도를 표창하려 하노라.” 하였다. 본조 유익경(柳益涇)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 이 일이 왕께 보고 되니 동부 녹사(東部錄事)에 배수하였다. 조한(趙漢) 구례현(求禮縣)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흐느껴 울기를 3년, 채소 반찬에 물만 마시고 동구 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임옥산(林玉山)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어머니의 병에 똥을 맛보아 살아날지를 가늠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하였고, 3년상을 지낸 뒤에도 조석 삭망을 폐하지 아니했다. 그 일이 성종(成宗) 때에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우고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였다.
【열녀】 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구례현의 여자이다.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으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고려 이씨(李氏) 생원 양중수(梁仲粹)의 처다. 왜적이 범하려 하였으나 이씨가 항거하여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웠다. 본조 김씨(金氏) 호장(戶長) 양전(梁田)의 처이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자 피눈물을 삼년간이나 흘렸다. 부모가 그의 의지를 꺾고자 했으나 김씨는 따르지 않고, 소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친히 삭망 제사를 행하다가 죽었다. 강씨(姜氏) 최자강(崔自江)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강씨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7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웠다. 임씨(林氏) 구례현 사람으로 왕정(王淨)의 처이다. 왕정이 병이 나자, 극진히 치료하고 다짐하기를, “만일 꺼려하지 아니한다면 나는 꼭 여묘(廬墓)하리라.” 하더니, 왕정이 죽은 뒤 임씨는 71세에 장례와 제례를 가례대로 하고, 여묘를 3년동안 하면서 늘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손들을 데리고 친히 무덤에 올랐는데 90세가 되어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제영】 낙잔홍엽노청산(落殘紅葉露靑山) 김극기의 시에, “습하고 더운 남방에 유람하매 더위에 시달리더니, 홀연 서풍을 만나니 얼굴빛이 즉시 펴지네. 바람에 흰 연기 일어나서 푸른 들을 감싸고, 단풍잎 모두 지니 청산이 드러났네.” 하였다. 탐상풍연폐식면(貪賞風煙廢食眠) 앞사람의 시에, “흥에 겨워 눈이 머리에 가득한[盈 백발(白髮)] 것도 모르고, 풍광에 취하여 먹고 자는 일조차 잊었네. 도연명(陶淵明) 살던 골목의 버들은 여름빛이 푸른 장막에 짙었고, 육씨(陸氏) 못 속의 연은 홍방(紅房 연꽃)이 가을에 벌어지네. 미친 듯이 부르는 노래에 어찌 장단을 분간하며, 한껏 마시는 술에 어찌 청주와 탁주를 분간하리오. 멀리 바라보매 끝간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물빛과 산그림자가 멀리 하늘과 닿았네.” 하였다. 봉강요접견훤국(封疆遙接甄萱國)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경계는 멀리 견훤국에 접하였고, 풍월(風月)은 방장산(方丈山)과 이어졌네.” 하였다. 지령인걸천년색(地靈人傑千年色) 권진(權軫)의 시에, “땅이 영험하고 인물이 걸출한 천년의 고을이요,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만고(萬古)의 산이로다.” 하였다. 준령동분삼도경(峻嶺東分三道境)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준령은 동으로 세 도의 경계를 나누고, 서울은 북으로 몇 주의 산으로 막혀 있는가.” 하였다. 용성원수추운외(龍城遠岫秋雲外) 안숭효(安崇孝)의 시에,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멀리 보이는 멧부리 가을 구름 밖에 보이고, 만복사(萬福寺)의 맑은 종소리 저녁노을 사이에서 울리도다.”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김극기(金克己)의 〈구례현(求禮縣)〉 시에, “저녁비 부슬부슬 홀연 서늘한 기운을 보내고, 시내 빛과 산 색은 점점 창망(滄茫)하여라. 강남(江南)의 빼어난 경치 실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십 리에 향기롭네.” 하였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백분화(白賁華)의 〈구례현〉시에, “아침에 백계산(白鷄山) 아래 길을 떠나서 저녁에 찬수역(鑽燧驛) 동편 마을에 머무네. 작은 시내 조그만 나룻배는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자 외로운 마을은 어둠에 싸였구나. 절벽 위에 흩어진 구름은 은궐(銀闕 백은으로 지은 궁성의 문)이 솟아나는 듯, 먼 산에 타는 불은 장대한 화성(火城)이로다. 밤 깊어 곤한 잠자리 꿈을 깨니 벽을 등지고 희미한 등불이 침상 위를 비추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잔수(潺水)의 잘못이다. 숭악춘한설만산(嵩岳春寒雪滿山)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환해(宦海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니 가는 곳마다 어렵다가, 남쪽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네. 창에 밤이 고요한데 바람은 대를 울리고, 숭악(崇岳)은 봄에도 차가워 눈이 산에 가득하네. 나그네 몸은 푸른 산 속에 노닐고, 어버이 생각하는 꿈 흰구름 사이에 둘렀네. 괴로운 인생 벼슬에 얽매여 물외(物外)에 한가로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조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종(英宗) 15년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켰다가 26년 다시 승격시켰으며, 헌종(憲宗) 10년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철종(哲宗) 4년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통한(通漢) 읍 안이다. 장흥(長興) 처음이 1리이고, 끝이 3리이다. 만복(萬福) 서쪽으로 처음이 2리이고, 끝이 5리이다. 백파(白波)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주촌(朱村) 동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산동(內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외산동(外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소의(所義) 동쪽이 처음으로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중방(中方) 위와 같다. 흑성(黑城)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주포(周浦)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송내(松內) 위와 같다. 수지(水旨)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두동(豆洞) 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대곡(大谷) 두동(豆洞)에서와 같다. 초랑(草郞)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원천(源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기지(機池)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생오대(生烏代) 초랑(草郞)에서와 같다. 자성(者省)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언(伊彦)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적과(迪果)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절(高節) 위와 같다. 고달(古達)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덕고개(德古介)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돌고개(乭古介) 위와 같다. 지사(只沙)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말천(末川)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갈치(葛峙)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현(普賢)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시라산(時羅山)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동(山東)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둔덕(屯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영계(靈溪)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사동(蛇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성남(城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오지(吾枝)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견소곡(見所谷) 서쪽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아산(阿山)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왕지전(王之田)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매안(梅岸)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진전(內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외진전(外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상번암(上磻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이고, 끝이 1백 리이다. 하번암(下蟠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서봉(棲鳳)ㆍ백암(白巖).
【창고】 읍창(邑倉)ㆍ지혜창(紙惠倉)ㆍ진휼창(賑恤倉)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동창(東倉)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40리에 있다. 구남창(舊南倉) 40리에 있다. 신남창(新南倉) 40리에 있다. 구북창(舊北倉) 30리에 있다. 신북창(新北倉) 40리에 있다. 산창(山倉)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
【진도】 순자진(鶉子津) 일명 중진(中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30리이고, 곡성 대로(谷城大路)로 통한다. 적성진(赤城津) 서쪽으로 30리이고, 순창 대로(淳昌大路)로 통한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서쪽으로 5리이다. 용두정교(龍頭亭橋) 서쪽으로 10리이다. 양수정교(兩水亭橋) 남쪽으로 5리이다. 갈어구교(乫魚口橋) 동쪽으로 10리이다. 금천교(金川橋) 동쪽으로 50리이다. 율천교(栗川橋) 북쪽으로 30리이다. 월천교(月川橋) 남쪽으로 30리이다. 오작교(烏鵲橋)ㆍ승차교(乘槎橋) 모두 광한루(廣寒樓) 앞에 있다.
【토산】 밤ㆍ옻ㆍ차, 매 두 종인데, 지리산에서 난다.
【누정】 용두정(龍頭亭) 서쪽으로 10리에 있고, 기암(奇巖)이 촉립(矗立)한 모양이 마치 용머리와 같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서문(西門) 밖에 있으며, 선조 기해년에 총병(摠兵) 유건(劉健)이 세웠고, 정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관우(關羽) 경도(京都)의 동묘를 보라. 이신방(李新芳) 총부중군(摠府中軍)이다. 장표(蔣表) 총부천총(摠府千摠)이다. 모승선(毛承先) 총부천부(摠府千夫)이다. 위 세 사람은 정유 왜란(丁酉倭亂) 때에 나가 싸워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병신년에 세 장수를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사원】 영천서원(寧川書院) 광해군 기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안처순(安處順)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思齊)이고, 순흥(順興) 사람이다. 벼슬은 봉상 판관(奉常判官)이다. 정환(丁煥) 자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이며, 창원(昌原) 사람이다. 벼슬은 경상 도사(慶尙都事)이다. 정황(丁熿)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游軒)이며, 정환(丁煥)의 아우이다. 명종 경신년에 귀양가서 죽었고, 벼슬은 사인(舍人)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대유(李大甹)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이다. ○ 노봉서원(露峯書院)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축년에 현액을 내렸다. 김인후(金麟厚) 문묘(文廟)를 보라. 홍순복(洪順福) 자는 자유(子裕) 호는 고암(顧庵)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중종 경진년에 사화를 입었다. 최상중(崔尙重)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이며, 삭녕(朔寧)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증직되었다. 오정길(吳廷吉) 자는 형보(亨甫), 호는 해서(海西)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교서 정자(敎書正字)이다. 최온(崔薀)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최상중의 아들이다. 벼슬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최휘지(崔徽之)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이며, 최온의 조카이다.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충렬사(忠烈詞) 광해군 임자년에 세웠으며 효종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이복남(李福南) 우계(羽溪) 사람으로 벼슬은 전라 병사(全羅兵使)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기원(鄭期遠)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양원(楊元)의 접반사로 난군(亂軍)한테 죽임을 당하였으며, 벼슬은 우부승지(右副承旨)인데 좌찬성 내성군(左贊成萊城君)으로 증직되었다. 신호(申浩) 자는 언원(彦源)이며 평산(平山) 사람이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증직되고 시호는 무장(武莊)이다. 이덕회(李德恢) 자는 경렬(景烈)이며, 용인(龍仁) 사람이다. 벼슬은 본부판관(本府判官)이며, 형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이원춘(李元春) 벼슬은 구례 현감이며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오흥업(吳興業) 군향유사(軍餉有司)였다. 이상의 사람들은 선조 정유년에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 민충사(愍忠詞) 효종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황진(黃進) 진주(晉州)를 보라. 고득재(高得齎) 무과(武科)의 의병장(義兵將)이며, 선조 계사년에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평창 군수(平昌郡守)이며,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내렸다. 안영(安瑛) 광주(光州)를 보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全羅道)
장수현(長水縣)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50리, 남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32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32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47리, 서울로부터는 6백 68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인데 신라 시대에는 고택(高澤)이라 하여 장계군(長溪郡)에 속하였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장계(長溪)를 겸임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현으로 하고, 장계 감무(監務)를 겸하도록 하였고, 태종(太宗) 14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장계현(長溪縣)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백해군(伯海郡), 해(海)는 혹 이(伊)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에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뒤에 장수현(長水縣)에 속하였고, 별호를 장세(長世)라고 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우평(雨坪)ㆍ장천(長川)ㆍ고택(高澤).
【성씨】 본현 이(李)ㆍ오(吳)ㆍ정(井)ㆍ고(高), 임(林)ㆍ설(薛)ㆍ조(趙)ㆍ황(黃) 모두 속성(續姓)이다. 장계(長溪) 백(白)ㆍ배(裵)ㆍ유(柳)ㆍ오(吳)ㆍ현(玄), 김(金) 속성(續姓)이다. 양악(陽岳) 이(李)ㆍ최(崔). 이방(梨方) 배(裵). 복흥(福興). 임(林)ㆍ예(芮)ㆍ조(趙)ㆍ이(李)ㆍ염(廉)ㆍ경(景)ㆍ호(扈).
【산천】 영취산(靈鷲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덕유산(德裕山)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성적산(聖迹山) 일명 성수(聖壽), 현의 서남방 15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장계현(長溪縣)에 있다. 육십현(六十峴) 현의 북쪽 40리,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의 경계에 있다. 신라 시대로부터 요해지(要害地)로서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름이 되었다. 수분현(水分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한 줄기는 남원(南原)으로 향하고 한 줄기는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南川)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호천(狐川) 현의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남천(南川)과 백화산의 물이 합류하여 호천(狐川)이 되고, 북으로 흘러 용담현(龍潭縣) 경계로 흘러간다.
【토산】 오미자ㆍ인삼ㆍ지치[紫草]ㆍ석이버섯ㆍ꿀ㆍ감.
【누정】 연사루(戀思樓) 객관(客舘)의 남쪽에 있다. 성화(成化) 갑오년에 현감 김수강(金壽康)이 세운 것인데, 연궐사친(戀闕思親 임금을 그리워하고 어버이를 사모함)의 뜻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왕중선(王仲宣 왕찬(王粲)의 자)이 세상을 근심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여 홀로 읊조리며 먼 곳을 생각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네, 또 보지 못했는가 적회영(狄懷英 적인걸(狄仁傑)의 자)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나 돌아갈 길 없어 구름을 바라보며 먼 고을에 머물러 있음을 한탄하였다네. 인생이 벼슬길에 나가는 일이 실로 그릇된 것이니 충과 효를 겸전하기 끝내 어려운 일이로세. 그대는 지방관에 임명받고 나오니 부모와 임금생각 새 근심이 얽혔도다. 장안의 임금 계신 곳을 보니 오운(五雲)이 잔뜩 끼었고 부모 계신 이향(異鄕) 옛 동산이 아련히 생각난다. 일편단심(一片丹心) 본시 지녔으니,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누각(樓閣)이 이루워지니 우뚝 솟아 두우성(斗牛星)에 닿고 눈은 천리에 극(極)했는데 몸만 헛되이 머물렀네. 일신을 직무에 바쳐 왕의 덕화를 이어 받드니, 백성을 대하기 자식과 같고, 아전을 대하기 원수처럼 하였네. 임금과 어버이에 보은하고 또 무엇을 구하겠느냐. 연사(戀思)란 이름을 따라 뜻을 강구하면 어찌 연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고, 명(名)과 실(實)이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하네, 나 또한 인끈을 풀고 잠시 한가로움을 얻었도다. 가을 서리 봄이슬, 광음은 빨리도 가누나. 우연히 남방을 원유(遠遊)하였는데 두류(頭流)의 뛰어난 경개를 다 볼 수가 없고나. 누 앞의 꽃과 대는 봄의 부드러움을 희롱하고, 누아래 긴 시내는 맑기가 기름같네, 그대와 서로 술을 나누지 못하여 유감이라. 소나무와 계수나무의 가을을 기다려 다시 오겠네.” 하였다. 『신증』 응벽정(凝碧亭) 객관(客官)의 남쪽에 있는데, 그 아래에 연못[蓮塘]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원유】 득방원(得方院)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수분원(水分院)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덕안원(德安院)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홍복원(洪福院)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양선원(陽善院) 현의 북쪽 62리에 있다. 석북원(席北院)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불우】 운점사(雲岾寺)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중수하였으니 승(僧) 원효(元曉)의 도량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萬香岾)이 있는데 원효와 의상(義湘)이 이곳에서 강법(講法)하였다. 이상한 향기가 풍겨 붙인 이름이다. 본조 세종(世宗)조에 중 성주(省珠)가 다시 중수하였다. 석천사(釋天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름머리에 절간은 높은 산봉우리를 차지하였는데, 비탈을 오르고 낭떠러지를 올라 찾아왔네. 바위의 대[竹]는 바람에 기대어 푸른 옥을 두드리고, 시내 소나무는 달과 어울려 황금빛을 부시네[碎]. 향로 연기 뿜어 엉키어 안개가 되고, 용(龍) 바릿대는 침을 흘려 흩어져서 임우(霖雨)가 되었네. 한밤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니, 돌 끝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손끝의 거문고인양 울리네.” 하였다. 정토사(淨土寺)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장안사(長安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팔공암(八功庵)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의상(義湘)이 중건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의 서북 4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장수(古長水) 지금의 치소 서쪽 7리에 있다. 양악소(陽岳所)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이방소(梨方所)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천잠소(天蠶所)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복흥소(福興所)ㆍ성적산성(聖迹山城) 석축으로 주위는 9백 70자, 높이 10자, 지금은 반이나 무너져 있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황육(黃陸) 둘 다 청렴하고 간결하게 정치를 잘 했다.
【인물】 고려 이임간(李林幹)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장천군(長天君)에 봉함.
본조 황희(黃喜) 초명(初名)은 수로(壽老) 후에 희(喜)로 고쳤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이다. 고려 신창(辛昌) 때에 급제하여 본조에 와서 네 임금을 섬기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연로 걸퇴하여 나이 90에 죽었다. 의정부에 24년 근무 중 조종에서 이룩한 법도를 준수하고 분잡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 처리는 이치에 따르고, 규모가 원대하므로, 세종(世宗)이 아끼고 의지하기를 더욱 중히하여 비록 중궐 내부의 비밀이라 하여도 반드시 그를 불러서 상의하고, 한마디로 결정을 하되 물러나서는 상과 의논한 일을 한번도 말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논자(論者)들이 칭하기를, “우리 조정에 어진 재상으로는 틀림없이 공이 제일이니 훈업과 덕량이 북송(北宋)의 왕문정(王文正 왕증(王曾))과 한충헌(韓忠獻 한기(韓琦))에 비할 만하다.” 하였다. 시호는 익성(翼成), 세종(世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황치신(黃致身) 황희(黃喜)의 아들. 태종(太宗)이 그의 뜻과 학문을 듣고 동(董)이라 이름을 주고, 공안부 부승(恭安府副丞) 벼슬을 주었다. 뒤에 그 이름이 형제들의 이름과 맞지 않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고 88세에 죽으니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그 아들이 효도로 섬겼고 벼슬은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냈다. 황수신(黃守身) 치신의 동생. 세조조의 좌익 공신(佐翼功臣)이요,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열성(烈成).
『신증』 본조 양근(梁根) 나이 13살에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장영손(張永孫)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묘 3년에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제찬(祭饌)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하며 상식을 올렸다. 그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김경손(金敬孫)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빌려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기를 예의 정도를 넘었다. 어머니가 8년 동안 병을 앓는데 약을 다리면 먼저 맛을 보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쑤어 먹으며 묘막에서 지냈는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니 그때 나이가 70여 세였다. 금상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서리 맞은 누런 잎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산 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맞은 누런 잎사귀는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다. 벼와 삼은 여름맞아 갈고 심도다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벼와 삼을 여름 만나 갈고 심는데, 초목은 가을도 되기 전에 이미 처량하도다.” 하였다. 『신증』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하도다 허침(許琛)의 시에, “벼슬길에 노는 심서(心緖) 반이나 꺾이었는데, 지난 일을 생각하니 망연히 꿈이 희미하도다. 비단 휘장에는 금비취(金翡翠)를 수놓지 못한 것 한스럽고 술통에는 옥동서(玉東西)를 자주 가늠질 하네.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澹澹)하고, 이슬은 꽃에 맺혀 새벽이 차갑다. 오봉(鰲峯)의 청릉피(淸綾皮)는 잘 있느냐, 몇 번이나 바람결에 옛 보금자리를 생각하였던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장계(長溪)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백해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에 벽명군(壁溟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이니 고택(高澤)ㆍ진안(鎭安)이며, 전주에 예속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장계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에 남원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장수를 겸임토록 했다. 본조에서는 태조 원년에 나누어서 장수현(長水縣)에 내속(來屬)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끝이 10리이다. 신남(身南)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신서(身西)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신북(身北)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수내(水內) 본읍에서 끝이 15리이다. 임현내(任縣內)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임남(任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임북(任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며, 우삼면(右三面)은 장택(長澤)의 고현(古縣)이다.
양악소(陽岳所)는 북쪽으로 60리이고, 천잠소(天蠶所)는 북쪽으로 15리이다. ○ 이방소(梨方所)는 북쪽으로 30리, 복흥소(福興所)는 서쪽으로 2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성수산(聖壽山)에 있으며, 둘레가 9백 70척이다. 식천고성(食川古城)ㆍ침치 고성(砧峙古城).
【창고】 읍창(邑倉) 읍내에 있다. 서창(西倉) 본읍에서 30리인 신서면(身西面)에 있다. 계창(溪倉) 본읍에서 30리인 임현(任縣) 안에 있다. 북창(北倉) 본읍에서 20리인 신북면(身北面)에 있다.
【교량】 비전교(碑前橋) 서남쪽으로 1리에 있다. 송탄교(松灘橋)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원월장(院越牆) 남쪽으로 4리에 있다. 홍복교(洪福橋)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완경교(翫景橋)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대평교(大坪橋)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닥종이ㆍ뽕.
【누정】 응벽정(凝碧亭) 읍내(邑內)에 있다. 청심정(淸心亭)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황보인(皇甫 仁) 《세종조 상신록》
김종서(金宗瑞) 《문종조 상신록》
정분(鄭苯) 《상신록》
이양(李穰)
이양은, 종실 사람이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고, 세종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어서 정일품(正一品)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조극관(趙克寬)ㆍ조수량(趙遂良)ㆍ조번(趙藩)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楊州)인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에 오르고, 세종조에 경상 감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향교동(鄕校洞) 네거리에서 죽었는데, 적몰하고 연좌되었다가 예종(睿宗)조에 해금되었다.조수량은 극관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에 문과에 오르고 계유년에 평안 감사가 되어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난을 만나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다 《해동야언》에는 고성(固城)으로 귀양갔다 하였다 가 조금 뒤에 사사되었다.
조번은 극관의 종제인데, 계유년에 같이 화를 입었다.
번의 아우 이(籬)가 진사로서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었고, 김시습(金時習)ㆍ서거정(徐居正)과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다. 성종조에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상은 양주 조씨의 족보


민신(閔伸)


민신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조에 병조 판서가 되고 곧이어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뒤에 보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임신에 세조가 연경에 갈 때에 신을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민신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계유년에 정수충(鄭守忠)이 세조께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용(瑢)에게 붙었으니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황보인(皇甫麟)의 무리를 베는 시기에 이르러 신이 마침 현릉(顯陵)에 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삼군 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역사하는 장소에서 베었다. 신의 아들 보창(甫昌)ㆍ보해(甫諧) 등 다섯 사람도 모두 죽었다.


허후(許詡)


허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니, 영상 문경공(文敬公) 조(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에 문과에 오르고, 병진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더불어 문종의 고명을 받았는데, 계유년에 좌참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 공의 가문은 충효를 대대로 가풍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여의고 상주 노릇함에 극히 애통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기쁘게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조 20여 년 동안에 몸을 조심하고 입을 삼가 지켰다. 《추강집 본전》
○ 처음에, 허후가 승지에 올랐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아버지 허조는 홀로 근심하는 안색을 띠고 밤새 자지 않았다. 혹자가 물으니, 조가 말하기를, “천도로 보면 무엇이든지 차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인데, 내가 세상에 공덕도 없이 관품이 신하로서는 최고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자식도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다. 《추강집》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안평대군 용은,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이요,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계유년에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 공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와 문에 더욱 능하였으며,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좋은 경치를 찾아서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십이경시(十二景詩)〉를 짓고, 또 〈사십팔영〉을 지었으며, 밤에 등불을 켜 달고 얘기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배를 띄우기도 하며,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며,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는데,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으며, 바둑알에 도금(鍍金)도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을 짜게 해서 진서(眞書)ㆍ초서ㆍ행서를 휘갈겨 써서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 하는 처사가 모두 이와 같았다. 《용재총화》
○ 성간(成侃)이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사람을 시켜 청하니, 간이 가보고 시부로 화답하였다. 공경히 대접하여 보내고 후일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간의 어머니가 간에게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근신하며 다른 일이 없어야 하니, 어찌 사람을 모아 패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겠는가.그 실패할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는 함께 사귀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두세 번 성간을 불렀으나, 끝내 왕래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공이 실패하여 죽었으니, 간의 집안 사람이 모친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은 용재의 중형이다.
○ 안평의 필법이 뛰어나고 갸륵하며 재기가 가장 우수하여, 조자앙(趙子昻) 맹부(孟頫)와 서로 견주어야 마땅한데, 공은 조자앙의 필법만을 본받았기 때문에, 속스러운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안평이 귀공자로서 처음으로 이 필법을 주창하여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때문에 그 뒤 역대의 어필(御筆)이 우연히 모두 이 필법을 써서,드디어 나라 습속이 되었다. 근년까지 온 세상이 이 필법에 쏠려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과 자앙을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청지(淸之 안평(安平))가 왕우군의 필획으로 조자앙의 서체를 썼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원교필결(圓嶠筆訣)》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 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람과 아들 헌(憲) 등과 함께 모두 죽었다. 숙종 때에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려 주고, 영조 무인(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였다. 문장이 온화하고 맑으며 필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추강집본전》
○ 공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성심이 있어 명 나라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는 정침(正寢)에서 자지 않고 항상 지게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답하기를,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있어, 천하가 당황하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치재일기(耻齋日記)》 ○ 《무인기문(戊寅記聞)》에는 이것을 하위지의 말이라 하였고, 혹은 두 공이 다 행하였다 한다.
○ 집현전의 문학하는 선비에 신숙주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ㆍ정인지 등이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가 경학ㆍ문장ㆍ필법에서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용재총화》
○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서 부중(府中)에서 잔치하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풍악 소리 구슬프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레라 / 萬事如今摠不知
풍이 솔솔 불고 버들가지 푸르른데 /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핀 밝은 봄날 길고 기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이 이룬 대업은 금궤에 있는 책을 찾아 놓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도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 / 不樂何爲長不樂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그 시를 부중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礩)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 공이 처형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을 난신(亂臣)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 때 사람(김종서 등을 말함)과 같지 않다.” 하였다.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효를 저질러 이런 화를 당하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 하였다. 《추강집》
○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박 동지(同知) 충후(忠後)가 그 자손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 《노릉지(魯陵誌)》
○ 부인 이씨(李氏)는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 공이 그 사위 이공린(李公麟) 평안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요,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아버지이다. 을 맞던 날에 공청에서 물러 나와 묻기를, “납폐하였는가?”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납폐는 하였지만 폐백을 대광주리에 담았으니, 이것이 무슨 무례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취한 것이 이 때문이요” 하였다. 《병자록》 ○ 공린이 무과를 하였는데, 장인에게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다가 성종조에 서용되어 현령이 되었고 연산조(燕山朝)에 또 아들 원에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청주에 물러나서 살았다.
○ 공이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번드는데, 세종이 친히 나와서 잔에 술을 부어 돌렸다. 공이 취하여 엎어져서 고꾸라지매, 세종이 비단 남빛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 죽은 뒤에 공의 자손이 이 옷만을 여러 대 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옷과 신주를 함께 땅에 묻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보니, 신주는 완전하나 옷은 썩었다고 한다. 《병자록(丙子錄)》
○ 공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에 들었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명부에서 빼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고, 선조 초년에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밭을 주려 하매,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마는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 공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에 처음으로 녹용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제수 받았다. 일찍이 계창이 공의 기제사날 꿈에 여섯 사람이 사당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곧 여섯 분의 제사를 지냈다. 박숭장(朴崇章)이 기록한 것에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 훈공이 있어서 군을 봉한 조상은 의례 시조가 되어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선생의 사업은 어찌 봉군뿐이겠는가’ 하며, ‘영원히 조천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정식(定式)삼았다.” 하였다.
○ 대대로 회덕(懷德)에 살다가, 뒤에 전의(全義)로 옮겼는데, 지금도 박동(朴洞)에 유지(遺址)가 있다. 《노릉지(魯陵誌)》


박중림(朴仲林)


박중림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에 뽑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박팽년과 같이 죽었다. 과보(科譜)에는 계유년에 죽었다 하였다.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두니, 공이 문장과 덕행이 있다는 이유로 뽑히었다.
○ 병자에 박팽년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이 죽었다. 처형에 임하여 여러 아들이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니, 효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니라.”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성승(成勝)


성승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성삼문과 같이 죽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 을해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에 공이 도총부에서 번들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 하고, 곧 말을 몰아 돌아왔는데 딴 방에 누워서 집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사람을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병자년에 성삼문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여,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공과 유응부와 박정(朴崝)이 운검(雲劒)이 되었는데, 이 날 전내(대궐안)가 좁으므로, 운검을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전교가 내렸으니,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공이 명회 등을 치려 하매 성삼문이 말렸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 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 장녕(張寧)이 시강(侍講) 예겸(倪謙) 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 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엄찬(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이개(李塏)


이개는, 자는 백고(伯高) 또는 청보(淸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색(穡)의 증손이요, 종선(種善)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 병진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 중시(重試)에 뽑혀 직제학까지 지내다가 병자년(1456)에 죽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요,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 시와 문이 맑고 절묘하여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대단히 친밀하여 출입하므로, 개가 경계하였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매,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바보스럽게 여겼더니, 과연 비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였다. 《동각잡기》
○ 몸이 여위고 가냘퍼서 옷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신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추강집》
○ 단가를 짓기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가마귀눈비마자희난듯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向 一片丹心이야 變줄이잇시랴]” 하였다.
○ 공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박사 성 간(成侃)과 집현전에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옥당에 봄은 따뜻하고 날은 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졸며 남창에 의지하여 백치(白痴)를 기른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두어 마리 새의 소리는 낮 꿈을 놀래게 하고 / 啼鳥數聲驚午夢
살구꽃의 아리따운 웃음은, 새 시에 들어온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였다. 성간이 차운(次韻)하기를,

어린 제비와 우는 비둘기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鳴鳩晝刻遲
봄이 찬 연못에는 버들이 어리석은 것 같구나 / 春寒太液柳如癡
집현전에서 졸음을 파하매, 바쁜 일이 없어서 / 鑾坡睡罷無餘事
때로 종이를 펼치고 작은 시를 쓴다 / 時展蠻牋寫小詩

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이 일찍이 그 형 성임(成任)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백고(李伯高)가 용이 되었다. 내가 붙들고 날아서 강을 건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하였더니, 용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뿔만 굳게 잡으라’하였다.”고 하였다. 임(任)이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 명망이 높고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자네가 그 뿔을 붙잡았으니, 반드시 중시 장원에 뽑힐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공이 죽임을 당하고 간도 또한 병으로 죽었다. 《용재총화》 ○ 총화에는 모두 공을 백고로 일컬었는데, 상촌집(象村集)에 끌어서(引用) 변명하기를, “백고는 청보의 또 하나의 자(字)인가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하건대, 《노릉지(魯陵誌)》에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청보라 하지 않고 백고라고 하였으니, 상촌이 《추강집》을 보지 못하고 이런 논란을 한 것이 아닌가.


하위지(河緯地)


하위지는,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자원하였고, 병자년(1456)에 예조참판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말을 함에 버릴 것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禮)에 밝아,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도 한번도 통행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항상 집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서 강의하여, 보정(補正)한 사항이 많았다. 《추강집》
○ 천순(天順)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 공이 일찍이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몽진(蒙塵)한 것은 천하가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지만, 어찌 황제의 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매양 바깥 사랑에 거처하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으니, 능히 충의로 순국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공에게 도롱이를 빌렸는데, 공이 시로 답하기를,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이 임하여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주는 것이 아마도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우(煙雨)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하였는데, 대개 시사(時事)를 슬퍼함이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매, 공이 조복(朝服)을 다 팔아버리고, 전 사간(前司諫)으로 선산(善山)으로 퇴거하였다. 세조가 임금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을해에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교서를 내리어 간곡히 불렀다. 공이 부름에 응하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녹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을해 이후의 녹은 따로 한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추강집》
남 추강(南秋江)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승지로 승정원에 있을 때에 《노산조일기(魯山朝日記)》를 보았는데, 계유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편찬되자, 공에게 편찬에 참가한 공로로 상을 주었더니, 극력 사양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추강집》에 보인다.집의로 직제학이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휴가를 신청하여, 영산(靈山) 온천에 목욕한다고 하고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해 10월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자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번 하위지가 면대를 청하였을 때에 김종서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 위지를 다시 불러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이에 드디어 좌사간에 임명하자, 공이 상소하였다. 추강이 기록하기를, “계유10월에 공이 조복을 팔고 전 사간으로 선산에 퇴거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불러서 나아가니, 예조 참판을 제수하고 심히 총애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선산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그가 벼슬에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듯 하다.아마도 공이 상소한 뒤에 얼마 안되어 조정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때에는 노산이 아직 왕위에 있었던 듯 하다. 《서애집》
○ 단종 즉위 초에 공이 병을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가 있는 중 김종서 등이 피살되매,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부르므로 나와 예조 참판이 된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여헌집(旅軒集)》 〈묘갈(墓碣)〉
○ 세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공이 형신을 받을 때에 비밀히 달래기를, “네가 만일 음모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면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공이 웃고 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 중에 공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동각잡기》
○ 공은 선산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는데, 어렸을 때에 작은 서재를 짓고 형제와 더불어 문을 닫고 글을 읽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묘가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는데, 부인 김씨와 합장(合葬)하였다. 〈묘갈(墓碣)〉
○ 공의 처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가 그 아들들을 잡으러 왔다. 공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호(琥)요, 차자는 박(珀)이었다. 《동학사 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는 연(璉)ㆍ반(班)이라 기록되었다. 박은 나이 이십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도사에게 말하기를,“원컨대,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어머니에게 고할 말이 있소”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매, 박이 문안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께 고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하여야 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천한 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의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드디어 재배하고 나와서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과연 공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유성원(柳誠源)


유성원은, 자는 태초(太初)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요,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아들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사예(司藝)로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여러 번 명 나라에 청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송 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다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송사》의 어느 전(傳)에 들었을까?” 하였다. 여러 사람은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야 한다.” 하였다.한두 사람이 반박하기를, “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오활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무리에 넣을 수는 없고,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더니,공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나왔는데, 과연 〈열전〉에 있었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탄식하고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어쩌면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이었는고[那將周餘月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뒤에 《강목》을 얻어 오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내치고 당을 높였는지라, 익재가 매우 자부하였는데, 아무개를 감히 익재에게 견줄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제군의 항복을 받을 만은 하다.” 하였다. 《필원잡기》 《명신록》
○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기사 경오년 간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고 새끼가 모두 희었으며, 계유년에는 나무가 홀연히 다 말랐으므로, 공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화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더니, 공이 패하고 조금 뒤에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필원잡기》


유응부(兪應孚)


유응부는, 본관이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랐고,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莊)하고 날래며 활쏘기를 잘하며, 능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병자년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으나,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 농장에 왕래할 때, 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추강집》
○ 공이 일찍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서 시를 짓되,

장군이 절(節)을 가지고 와서 국경을 진정시키니 / 將軍持節縝夷蠻
변방에 티끌이 없어지고 군사들이 조는도다 / 塞外塵淸士卒眠
해 긴 낮 빈 뜰에서 무엇을 구경하는가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 백 마리 누 앞에 앉았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다. 가히 그 기상을 알 수 있다. 《추강집》 《명신록(名臣錄)》
○ 일찍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에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주먹을 자랑하며 말하기를, “한명회와 권람을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긴 창과 큰 칼이 필요 없다.” 하였다.
《동각잡기》 《추강집》
○ 공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 양식이 떨어졌었다. 죽던 날에 그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그 가산을 몰수하는데, 방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동각잡기》 《추강집》
태사씨(太史氏)가 말하기를, “누군들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군들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받들 때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의 절개를 세웠다. 충분(忠憤)이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가을 서리 보다 늠름하여,백세 후에 신하된 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충절은 천금(千金)이요, 한 몸을 터럭같이 여겨서 몸을 죽여 인을 이루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였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의 삼인(三仁)과 동국의 육신(六臣)이 행적은 다르나, 도는 같은지라, 이 또한 장하구나.’ 하였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위에 나가서는 덕이 우순(虞舜)을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세조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 무왕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어도, 한 광무(漢光武)의 공이 손상되지 않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이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졌도다. 공경히 조사를 지어 가로되,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 厲氣初濟
뭇 구멍이 막혔도다 / 衆窺爲塞
서리와 눈이 희게 덮였는데 / 霜雪皎皎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도다 /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 有臣之首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 有頭可截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 他人之粟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孤竹)의 맑은 바람이요 / 孤竹淸風
시상(柴桑)의 밝은 달이로다 / 柴桑明月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가 한 움큼이로다 / 寃血一掬

하였다. 《추강집》 《육신전》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이씨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성씨의 묘라 하고,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십여보 사이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어떤 중이 육신의 시체를 져다가 묻었는데 그 중은 김시습(金時習)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의 두 묘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성씨 부자의 묘인데,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 한다. ○ 일설에는 육신 묘가 다섯 무덤만 있고 하나는 없다 하는데, 하위지의 묘가 선산부 서쪽에 부인의 묘와 같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張顯光)의 기록에 보였으니, 하공은 시골에 반장(返葬)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허봉(許篈)이 말하기를, “부인을 씨(氏)라고 일컫는데, 지금 다섯 묘가 한 곳에 늘어 있으니, 부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반드시 관직을 일컫는데, 지금 씨(氏)라고만 일컬었으니, 당시의 의사가 오신(五臣)을 여기에 묻어 놓고는 감히 드러내어 새기지 못하고, 이렇게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지봉(芝峰)이 세 묘만을 일컬어 말하기를, “성삼문ㆍ박팽년ㆍ유응부의 묘가 틀림없다.”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어떤 사람이 가보니, 비석은 그대로 있는데,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장릉(章陵)을 발인(發靷)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孝宗)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崇古)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지봉유설》 《미수기언》 《노릉지》 《장릉지》 ○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갈(碣)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영남 일선부(一善府)에 하씨의 묘가 있고, 유씨(柳氏)만은 장사지낸 곳이 없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는 외손이 있는데 전하기를, “성씨 묘라는 것은 그 한 몸의 한 부분을 묻은 것이다.”고 하였다. 《기언》 ○ 숭고는 곧 박팽년의 칠대손이다.
○ 성종조에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종직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일 변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장릉지》
○ 인종조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가 박팽년 등을 마음으로는 가상히 여기나, 위태롭게 의심하는 시기에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찍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당대에는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이 말씀을 하여서 자손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동각잡기》 《노릉지》
○ 선조 병자에 박계현(朴啓賢)이 경연(經筵)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의 충성을 논하여 말하기를, “《육신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저술한 것인데, 전하께서 취하여 보시면, 그 자세한 사항을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 놀랍고 분하여 이르기를, “지금 소위 《육신전》이라는 것을 보니, 극히 해괴하여 춥지 않아도 소름이 끼친다.옛적에 우리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여, 하늘이 주고 백성이 귀의하였는데, 예부터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끝을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하고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이 자는 아조(我朝)의 죄인이다.옛적에 최호(崔浩)가 국사를 폭로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반드시 엄하게 국문하여 치죄할 것이다. 저 육신이 충신이라면, 왜 선위를 받던 날에 쾌히 죽어서 인신의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리하지 못했다면, 왜 도망하여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지 못하였는가. 이미 세조를 신하로서 섬겨놓고 또 임금을 해치기를 몰래 도모하는 것은 옛날 예양(豫讓)이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육신이란 자들이 우리 조정에 무릎을 꿇고서 자객의 음모를 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다가 일이 실패한 뒤에 의사로 자처하였니, 마음이나 행동에서 낭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헛되게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이름을 없애는 것이 덕으로 갚는 것만 못하다.’ 하는데,성삼문 등의 마음이 잠시라도 그 임금[단종]에게 있지 않음이 없으면서 일부러 세조의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장차 다른 날에 성공을 기약하였다. 어찌 못난 사람들처럼 스스로 개천에 목매어 죽어서 아는 이가 없게 하리오 했다면 이는 옳지 못한 처사이다. 만일 성공하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원수에게 신하 노릇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백이ㆍ숙제(伯夷叔齊)와 삼인(三仁)이 반드시 꾀하여 주 나라에 신하 노릇하면서 은(殷)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무리가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의 옳지 못함을 드러내어 의논한다. 이 글은 오늘날 신자(臣子)가 볼 것이 못되니, 내가 모두 거둬다가 불사르려 한다.만일, 이 책에 있는 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중히 다스리려 한다.” 하였다. 삼공이 답하기를, “이 책이 민간에도 드물고 연대가 오래되어 없어졌는데 만일 수색하는 거조를 내린다면, 반드시 큰 소란만 일어나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성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선조가 이에 감동하여 깨달아서 그만 두었다. 《석담일기》 《장릉지》
삼가 상고하건대, 육신은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말할 바가 아니요, 《춘추(春秋)》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기는 것도 또한 고금을 통한 의리라.” 하였거늘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아닌 의논을 내 놓아 주상께서 잘못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모신 신하들 중에, 김종직이 성종께 대답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뢴 자가 없었다. 《동각잡기》 《노릉지》
○ 효종 3년 임진년(1652)에 태학생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정몽주(鄭夢周)의 무리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박팽년ㆍ성삼문 등에게는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명 나라 문황(文皇)이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서도, 마침내 말하기를, ‘자녕이 있으면 짐이 마땅히 쓰겠다.’ 하였고, 만력(萬曆) 초에 이르러 혁제(革除)할 때에 죄를 진 여러 신하들의 분묘에 유사(有司)를 시켜 제사지내고, 후손들을 후하게 구하고 등용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는데, 우리 선조 대왕께서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여 교서를 내리어 육신의 후손을 등용하였으니, 전에 없는 넓은 은전(恩典)이 신종(神宗)과 일치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그들의 사당과 분묘에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 대왕의 뜻을 확장시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듣건대, 성삼문의 홍주(洪州) 옛 집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니, 만일 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表)한 것같이 하시면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준수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장릉지》
○ 효종(孝宗) 8년 정유년(1657)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명 나라의 방효유는 실상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라, 수년이 못되어 그 문집을 간행하고 전사(專祠)를 지어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무리는 실로 방효유의 짝입니다.일찍이 성삼문은 연산(連山)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 모두 유현(儒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두 사람을 함께 향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전사에 비교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감히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명 나라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허락하여 주시어 한 지방사람들의 소원에 맞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효종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육신유고(六臣遺稿)》 《장릉지》
○ 숙종(肅宗) 5년 기미년(1679)에 노량에 행차하여 군사를 사열할 때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강 건너편에 성삼문 등 육신의 묘가 있는데, 지금 듣건대, 그 무덤이 모두 무너져서 평토가 되었다 합니다. 세조조에 역률(逆律)로 논하였지마는, 일찍이 선조조에 신하가 각각 제 임금을 위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였으나,이번에 가까운 곳에 행차하신 때를 계기로 만일 그들의 무덤을 봉식(封植)하는 특전을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도리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숙종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자손을 등용하는 처사가 있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그 무덤을 봉식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숙종 6년 경인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육신 및 황보인, 김종서의 원통함을 논하여 말하기를, “저 여러 신하들은 천명이 이미 구주(舊主 단종 (端宗))에게 끊어지고 운명이 이미 진인(眞人)에게로 돌아간 것을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어 죽음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각각 제 임금을 위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세조께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절을 만나 그들을 베었지마는 실로 그들의 지조를 가상하게 여겼으므로, 당시에 말씀하시기를, ‘삼문 등은 오늘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기를, ‘나는 둔(屯)한 때를 만났고 너는 태(泰)한 때를 만났으니, 일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다.만일 나의 한 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네모진 물건을 끼우는 것이다.’ 하였고, 세조가 병환이 있으실 때를 당하여, 예종이 정무에 참여하여 결재하는데, 첫째로 명하여 계유 병자에 죄를 입은 사람에 연좌된 이백여 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니, 이러한 은전이 이미 세조가 계신 때에 행해졌습니다. 선조의 유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선왕께서 심히 칭찬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라 하셨으니, 열성조의 남겨주신 뜻을 이어서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는 것은 전하께서 선대의 뜻을 계술(繼述)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숙종이 답하기를, “육신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성조에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분묘를 봉식하거나 선비들이 존묘(尊墓)하는 것만 금지하지 않을 뿐이요, 이 밖에 따로 은전을 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국조보감》
○ 숙종 7년 신유년(1681)에 과천(果川) 유림이 통문(通文)을 내어 관학(館學)에 고하고, 노량강 남쪽 언덕에 육신의 사원(祠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구월에 상량하는데,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상량문을 짓고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다. ○ 《장릉지》
○ 숙종 17년 신미 9월에, 능에 거둥할 때에 노량진을 건너다가 육신 묘를 보고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육신묘가 비록 예로부터 전설은 있으나, 아직도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팽년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숭고(崇古)가 표석을 고쳐 세워서,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할 뿐이요, 감히 분명히 조상의 분묘라고 말하지 못하여, 한 번도 제사를 무덤 앞에서 행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 이제 갑자기 행하면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노량 가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서 치제하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목창명(睦昌明)은 말하기를, “육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된 일이 없으니, 나라에서 치제한다면, 제문에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절의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지금까지 복관을 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덕원이 아뢰기를, “방효유 등 여러 사람들은 두어 대 후에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같이 관대하지 못하여,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특별히 명하시면, 무엇이 불가 하오리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내 뜻은 다만 그 절의를 가장(嘉獎)하고자 하는 것이니,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그 사우도 사액(賜額)하고, 치제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일을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허락하였다. ‘체제는 아직 천천히 하라.’ 하였다.《장릉지》
○ 이에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이 곧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숭장(崇獎)의 은전을 속히 베풀지 못하게 한 것을 공박하고, 이어서 복관(復官)ㆍ사액ㆍ치제를 빨리 거행하여 육신을 포숭(褒崇)하고 격려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분부하겠다.” 하였다.
숙종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에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 일로써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허목이 답하기를, “매우 불가하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정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좌상 목래선(睦來善)은 아뢰기를,“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한 바가 있는 것 같고, 선배의 의논도 또한 여러 갈래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고,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은 아뢰기를, “그 자손을 등용하고 사우(祠宇) 세우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육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으니, 복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실상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하였고, 병판 민종도(閔宗道)는 아뢰기를,“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 다르니, 오늘날 만일 포창의 거조가 있으면, 사방이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흠앙하여 마지않을 터인데, 어찌 시비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형판 윤이제(尹以濟)는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을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판 유명현(柳命賢)은 아뢰기를, “육신의 일은 사람마다 그들의 지조를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전하의 행차가 지나시는 즈음에 이미 느끼신 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 치제하시옵소서.” 하였고, 부제학 권해(權瑎)는 아뢰기를, “육신의 충절은 만고에 빛나는데, 세조가 말씀하시기를 당세의 난신이라고 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포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포창하는 은전이 전하의 마음으로써 결정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일입니다.” 하였고,교리 이동표(李東標)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신중한 의논은 육신의 절의를 높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뜻은 있습니다. 세조께서 난신으로 베고는 충의로 포창하였더라면 어찌 천고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와는 조금 다르나, 전하께서 그 절의를 포창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지금 자기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포창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왕가의 일은 선조(先朝)에 득죄한 자도 후에 추장(追獎)하는 일이 많은데, 오늘 전하의 말씀은 매우 훌륭하니, 신하들이 받들어 거행하는 데에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모든 신하들의 갑논을박이 각각 견해가 있어, 그러할 것이나 방효유의 빛나는 충절을 이미 성조가 인정하였고, 그 뒤에 시호를 준 것이 또한 관대한 은전에서 나왔으며, 세조께서 그들에 대하여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은,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춘추에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제왕가의 일은 필부와 다르므로, 다만 그 절의를 포창하고 후인을 격려하고자 함이니, 오늘의 이 일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또 제문의 문자에 꺼리고 구애받음이 있다는 논의에 대하여는 지금 포창하려는 것은 오직 절의를 가상히 여기는 데 있으니,제문을 지을 때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도리에 신중해야 하며 용이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예랑(禮郞)을 시켜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 진사 민언심(閔彦諶)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급히 쾌한 결단을 내리시어 거듭 치제ㆍ복관ㆍ사액의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숙종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본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으나, 다만 도리(道理)에 신중하게 해야 하기에 널리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였다.
○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 지방에 있는 유신 의 논의의 대략에, “세조가 천명과 인심에 핍박되어 부득이 단종에게서 전위를 받았는데, 저 육신들이 자기가 섬기던 임금[端宗]에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절개를 지켜 항거하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주의 한통(韓通)ㆍ명의 경청(景淸)ㆍ고려의 정몽주와 같습니다. 대개 백이가 무왕을 그르게 여겼지만 공자가 가로되, ‘백이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으니, 백이를 칭송한 까닭으로 해서 무왕에게 해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한통이 주(周)에 충성을 바쳐 죽었는데, 송 태조가 후하게 추증하였고, 경청과 정몽주가 섬기던 임금에게 절개를 다하였는데, 명 나라 선종(宣宗)과 우리 태종이 복관도 명하고,포증(褒贈)도 명하였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하여 후세 신하의 충의를 권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조가 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이 실상 송 태조가 한통을 추증한 뜻과 같고, 또 은미한 뜻을 후세 자손에게 보인 것이니, 지금 이 일은 실로 선왕의 뜻을 잘 이어 받들어 실행하는 것입니다.또 어찌 털끝만한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어름어름 선대의 일을 숨기려고 하면 도리어 세조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한 거사에 누가 되고, 선조의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12월에 특명으로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민절사(愍節祠)라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 또 명하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벼슬을 회복하고 연산(連山)에 있는 성씨의 밭과 노비를 도로 내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가가 먼저 힘쓸 것은 절의을 숭장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신하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또한 절의에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옛적 제왕들이 절의를 지키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고 포창을 한 이유이다. 생각건대, 저 육신들은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리요마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충절이 수백 년 후에도 늠름하게 떨쳐져서 명 나라의 방효유ㆍ경청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침 선릉(先陵)에 행차하는 일이 있어 연(輦)이 육신묘 옆을 지나다가 내 마음에 더욱 느낀 바가 있었음에서랴. 슬프다,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내가 포창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절의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세조의 말씀에 뜻이 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세조의 남겨준 뜻을 계승하고 세조의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있으랴. 성삼문 등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치제하여 백대의 풍성(風聲)을 세우라.” 하였다. 《장릉지》
우승지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육신 중에 박팽년만이 혈족이 있어서 나라에서 써 주었고, 성삼문은 자손이 없고 외손만 있었는데, 연전에 서울 인왕산에서 우연히 매장된 신주를 얻었다 합니다. 지방에 유락(流落)한 외손이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오니, 만일 그곳의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찾아 아뢰게 하여, 써 주시면 더욱 전하의 거룩한 덕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지》
○ 장릉(莊陵)을 능으로 봉한 뒤에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장계(狀啓)하기를, “지난 을축 연간에 육신의 사당을 단종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옛 사당 남쪽에 창설하였는데 감사 홍만종(洪萬鍾)ㆍ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ㆍ군수 조이한(趙爾翰)이 상의하여 창건하고 엄흥도(嚴興道)를 배향하였다.보통 규정으로 말하면 능침(陵寢)과 화소(火巢) 안에 신하의 사당을 둘 수 없지마는, 능의 멀리 지방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육신들이 능침을 모시고 호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만일 능에 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육신의 사당을 헐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동시에 제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볼 때에 영상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사당은 분묘와 다르니, 능의 화소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촉한(蜀漢) 무후(武侯 제갈량)의 사당이 소열(昭烈)황제의 사당 근처에 있으므로, 두보(杜甫)의 시에 ‘군신(君臣) 일체로 제사를 같이한다.[一體君臣祭祀同]’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을 그대로 능 안에 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상운이 아뢰기를, “소열황제의 사당은 촉한 때에는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요, 뒷사람이 창설한 것 같으니, 오늘 이 일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또 봄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육신의 제사를 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최석정이 아뢰기를, “단종은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영녕전(永寧殿)에 올려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공신이 없었는데, 육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능에 모시어 호위하게 하는 것은 이승이나 저승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사당을 화소 밖에 옮겨 세운다면 섭섭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경(經)과 권(權)이 있어서, 반드시 전례(前例)에 구애될 것이 없으니, 사당을 그대로 두어서 옮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정자각에서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조천(祧遷)된 능에는 한식 차례 외에 없는데, 육신의 사당에는 춘추의 제향이 있을 것이니,이것도 또한 장애가 됩니다.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叅贊) 서종태(徐宗泰)ㆍ이조 참판 이인환(李寅煥)ㆍ부제학 조상우(趙相愚)ㆍ우부승지 김우항(金宇杭)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육신은 다른 신하와 처지가 다르니, 사당을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운다는 것은 옳은 줄로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공신을 능에 모신 예가 있고, 이번에 사릉(思陵) 근처에 정씨(鄭氏) 분묘도 파서 옮기지 않기로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에도 그런 예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사당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그 뒤에 화소 밖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寧越) 호장(戶長)인데, 숙종 조에 공조 참의를 증직하고 영조 무인에 종이품을 증직하고, 뒤에 공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 선조 을유년(1685)에 군수 김늑이 흥도의 종손(宗孫)인 정병(正兵) 한례(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조야기문》
○ 숙종 무인년(1698) 겨울 주강(晝講) 때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엄흥도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근래에 들으니, 그 7대손 신무(信武) 형제가 청주 땅에 살고, 그 밖의 족속도 많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본 뒤에 처분을 내려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최석정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기를, “엄호장이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의를 붙든 것에 감탄하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지금 후손의 등용에 대하여 어찌 인색하게 돌아보지 않을 뜻이 있으리오. 다만 엄신무가 말하기를, ‘그 아비 생존시에 송상(宋相) 시열(時烈)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그 선조 호장의 사적을 기술하여 주기를 청하니, 송상이 허락하고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축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천봉(遷奉)할 때에 송상이 화양동에서 능 아래로 가는데, 그 아비가 따라 갔다.’ 한다. 내가 장릉에 있을 때에 육신 사당에서 기문(記文) 현판을 보았는데, 곧 송상이 지은 것으로서, 그 글에 이르기를, ‘무신 년간에 내가 경연에서 호장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뜻을 아뢰고 그 뒤에 여러 곳으로 알아보았으나,찾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이 글은 을축년에 지은 것이어서 엄신무의 아비가 송상을 따라다녔다는 계축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되거늘,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영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장이 늙어 죽은 뒤에 자손이 없으므로 영월에 있는 분묘를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문종의 부마(駙馬)이다.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에 봉해졌다. 시호는 헌민공(獻愍公)이다.
○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이요, 본관은 연일(延日)이니, 포은 정몽주의 손자요, 이조 참의 종성(宗誠)의 아들이다. 벼슬이 감찰ㆍ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윤정(允貞)이니, 주부이고, 다음은 윤화(允和)요, 끝은 윤관(允寬)이다. 윤화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올랐는데, 창방(唱榜)할 때에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공이 슬퍼하여 마침내 홧병을 얻었다. 병자의 변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월정만필》


권절(權節) 중귀(重貴)의 아들 엄(嚴)이 고려의 집의(執義)로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을 권(權)으로 회복하였다. 백 세(百歲)를 살았는데, 집에 있은 지 50 년에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는 단조(端操)요,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 엄(嚴)의 손자요, 밀직사(密直司) 왕중귀(王重貴)의 증손이다. 고려말의 정승 왕후(王煦)는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아들이요, 아홉 봉군[九封君]중의 하나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왕씨로 주었다.아들 중귀(重貴)가 밀직사로 공민왕 때에 화를 입었다. 중귀의 아들 숙(肅)ㆍ엄(嚴)이 이씨 조선에 들어와 성을 권으로 회복하였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병자 이후에는 미친 병을 칭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 어려서 기이한 상모(相貌)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 남이(南怡)와 한 때에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세종조에 과거에 올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여 그 그릇을 성취시키겠다.” 하여 특별히 사복 직장(司僕直長)을 제수하였다가 이어서 집현전 교리를 시켰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친밀히 하며 은밀히 대사를 귀띔하였다.공이 귀먹은 체 하며 응하지 않고, 드디어 자취를 감출 생각으로 미친 병을 칭탁하고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는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그 재주와 그릇을 아끼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충청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은 뒤에 교리(校理)라는 관직명을 묘비에 썼다. 《지봉유설》 《후촌만록》
○ 처신할 방법을 그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과 상의하여 몸가짐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검속을 하지 않고 정신병 든 사람같이 하며 그 몸을 마쳤다. 《율곡집(栗谷集)》 〈율정난고서(栗亭亂稿序)〉
○ 단종에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공과 원호(元昊)의 무리가 생육신이 된다. 일찍이 남의 집의 묵은 편지첩을 보니 공의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가 멀리 세상을 떠나버리니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후촌만록》
○ 공이 어렸을 때, 친척의 집안 여종이 와서 공의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느라고 중문 옆에 섰는데, 공이 지나다가 기둥을 들고 여종의 치마폭을 그 밑에 넣었으나 여종은 알지 못하였다. 갈 때에야 알고 울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의 누이가 역시 엄청나게 힘이 세어 기둥을 들고 꺼내주었다. 권씨 옛 집에 맷돌 한 쌍이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전하기를, 공이 평일에 들고 치던 것이라 한다. 《후촌만록》
○ 공이 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중을 만났는데, 일부러 와서 힘자랑을 하였다. 공이 절에 있는 사기그릇을 모으게 하니 열 죽이나 되었다. 중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퉁겨서 깨뜨리게 하였다. 두 죽까지 깨뜨리고 나서는 중이 손톱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공이 이어서 잠깐 사이에 여덟 죽을 다 깼는데 그 손톱 자국이 사기 그릇 죽마다 모양이 달랐다.어떤 것은 열 개의 눈썹같이 되고 어떤 것은 열 개의 화판(花瓣)같이 되었는데, 예리한 칼로 오린 것 같았다.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 하였다. 《후촌만록》. 방언에 그릇 열 개를 한 죽이라 한다.
○ 숙종 임오에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육신 사당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갑신에 경기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에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조 판서의 증직과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영조 임자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즉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ㆍ원호(元昊)ㆍ권절(權節)ㆍ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정보(鄭保)ㆍ성담수(成聃壽)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더니 삼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命後)가 친히 보고 아주 자세히 전하였다.


원호(元昊)


원호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관란(觀瀾)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숙종조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무인에 최석정의 아룀으로 인함.
○ 단종 초기에 공이,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니, 공이 영월 서쪽에 나가 집을 짓고 관란(觀瀾)이라는 호를 짓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읊조리기도 하고, 문을 닫고 책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단종 있는 쪽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정축에 단종이 승하한 뒤에, 3년상을 입고 복이 끝나매 다시 원주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문밖으로 나오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촌인 판서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하인들을 대동하지 않고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으나, 굳건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으로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으로 머리 두니, 장릉(莊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명곡집 묘비(明谷集墓碑)〉
○ 친지들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많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접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따르는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공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하니 관찰사였다. 곧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 관찰이 무안하고 섭섭하여 돌아갔다. 관부(官府)와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마쳤다. 묘는 남송에 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공의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조(睿宗朝)에 사관으로 화를 입으니, 공이 평생의 저술과 소장을 다 태워버렸다. 또 그 자제를 경계하되, “다시는 글을 읽어서 명리를 구하지 말라.” 하였다. 〈묘비〉 ○ 숙강의 일은 예종조에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은 지금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지금의 방효유(方孝孺)ㆍ연자녕(練子寧)이요,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ㆍ무항(霧巷 공의 사는 곳)은 육신보다도 오히려 기상이 높다.” 하였다. 〈묘비〉


최덕지(崔德之)


최덕지는 호는 연촌우수(煙村迂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태종 을유(乙酉)에 문과에 올랐으며,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영암(靈岩)의 영보(永保)에 퇴거하여 그 서실(書室)을 존양(存養)이라 편액하였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 직제학을 제수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가서 나이 72세에 죽었다.
○ 계유년(1453)간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물러간 것은 참으로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가 견줄 데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명신록》


기건(奇虔)


기건은, 호는 청파(靑坡)이며, 본관은 행주(行州)이다.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제수받아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요,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학업이 정민하고 순수하였다. 집이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웠다. 《월사집(月沙集)》 〈기대헌비(奇大憲碑)〉
○ 공은 단종조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세 번이나 공을 집으로 찾았는데, 공이 청맹(靑盲)으로 칭탁하였다. 세조가 바늘을 가지고 찌를 것처럼 하여 시험하니, 공이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조는 마침내 공을 등용치 못하였고 공도 화를 면하였다. 〈묘비〉
○ 이씨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지평에 뽑혔으니, 공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높은 이름이 일세의 중망을 받은 것이 어떠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이미 몸을 바치고서, 시국이 어지럽고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는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고,병을 핑계로 자취를 감추어 천년(天年)을 마침으로써 끝내 절개를 변치 않았으니, 명예도 또한 보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으로 임을 섬기고 선도(善道)로 명철보신한 것’이아닌가. 〈묘비〉
○ 옛날에는 부인이 출입할 때, 머리쓰개가 없었는데, 공이 그것을 속칭으로 소위 너울[羅兀]이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궁녀가 밖에 나갈 때에 쓴다 처음 만들어 바치니 지금도 쓴다.
○ 연안(延安)에 붕어가 나는 큰못이 있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관에서 붕어를 징수하거나 개인적으로 붕어를 요청하는 폐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사람들이 그 연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였다. 공이 부사가 되어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 하였다. 드디어 끊고 먹지 않으며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필원잡기》 〈묘비〉
○ 공은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용재총화》
○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禶)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월사집(月沙集)》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경은(耕隱)이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판(兵判)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심지가 먼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밑에 살았다. 세종 정미에 문과에 뽑혔고, 한림(翰林)ㆍ정언(正言)을 거쳐 외임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갑술년간에 나라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선산 강정리(綱正里)에 살면서, 귀먹고 청맹이 되었다고 칭탁하여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은지 30여 년이었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궐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집이 가난하여 앉을 돗자리가 없었고, 먹을 때에 수저가 없었으나 태연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손이 많았으며 자녀가 아홉 사람 출입하는 데는 탈것이 없어서 걸어 다녔다. 사실이 《청백전》에 실렸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 김숙자(金叔滋)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귄 친구가 되었는데, 만년에는 병을 칭탁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김종직(金宗直)이 들어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였고,간혹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한집안의 처자라도 청맹이 거짓으로 칭탁한 줄 알지 못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부인 김씨와 함께 모두 나이 90세 죽었다. 《일선지(一善志)》 《해동잡록(海東雜錄)》 ○부제학 이준(李埈)의 일선지(一善志) 발문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조변륭(曺變隆)


조변륭은, 본관은 창녕이니, 단고(丹皐) 상치의 아들이다. 세종 갑자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 상치가 영남에 돌아가 숨던 때에 그의 아들인 변륭은 어버이가 영남에 있으므로 벼슬에 종사할 형편이 못되어 드디어 같이 돌아갔다. 뒤에 발탁되어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자손에게 유언하여 노릉조(魯陵朝) 부지괴원정자(副知槐院正字)라 묘석에 표하고 참의(叅議)직함은 쓰지 말라 하였다.


조려(趙旅)


조려는, 자는 주옹(主翁)이며, 호는 어계(漁溪)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니, 계유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종직의 방하(榜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단종이 내쫓긴 뒤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고을 서쪽 원북동(院北洞)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공이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다. 〈본전(本傳)〉 《성창랑집(成滄浪集)》 ○ 《어계집(漁溪集)》이 한 권을 후손 영호(榮祜)가 안음(安陰) 군수로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 낙동(洛東)에 돌아와서 낚시질로 몸을 마치었으니,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 깊이 스스로를 숨겨서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지은 그 시의 대략에,

머리 돌려 눈을 드니 강산은 저물었고 /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생각 또한 아득하다 / 地闊天張思渺茫
만고풍류 두목지(杜牧之)는 취미수(翠微峀)에 올랐는데 / 杜牧旣上翠微峀
국화 따는 도연명(陶淵明)은 술 오기만 기다림을 / 陶潛悵望白衣郞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근은 뵐 수 없어 절로 마음 슬프네 / 勛華不見心自傷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도다 /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 소냐 / 懷佳人兮不能忘

○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 속에 싸서 두고 그 빛을 감추고 초목과 같이 썩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후인이 측량할 수 없다. 만일 서산(西山)의 백이ㆍ숙제가 당시에 났더라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 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을 것이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지은 〈비문〉
○ 공이 일찍이 백이산(伯夷山) 밑에 살았는데, 숙종 기묘에 단종이 복위된 뒤에, 영남 선비 신만원(辛萬元) 등이 공의 절개와 행실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산 밑에 사당 서산서원(西山書院)이다. 을 세웠는데, 공과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성담수ㆍ남효온을 향사하였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자는 이수(耳壽)이며, 호는 문두(文斗)이다. 본관은 창녕이니,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다.
○ 아버지 희가 성삼문에 연좌되어 폐고(廢錮 벼슬길을 막는 것)되었는데, 공은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으로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물러가 살면서 한 번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 그 때 죄인의 자제는 의례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去就)를 보는데 머리를 숙이고 취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공이 높은 가문의 자제로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촌사람들이 보기를 농사꾼같이 하였다. 그 조카 몽정(夢井 교리 담년(聃年)의 아들)이 경기 감사로 순시하던 차, 그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았으나, 고을 사람이 그의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색하여 알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니, 초가집이 엉성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요,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는데, 공이 손을 저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우계집(牛溪集)》


윤혜(尹譓)


윤혜는,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관찰사 임(臨)의 손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다.
○ 단종이 내쫓기니, 공이 예조 좌랑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 임종시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 공의 숙부 지정(之定)이 딸이 있어 권완(權完)에게 출가하였는데, 완의 딸이 단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완이 형을 받아 죽으니, 공이 밤에 신을 벗고 한강가로 도망하였으며, 이어서 가족을 끌고 호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본전(本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자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성(日省)이요,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인데,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이다.
○ 숙종조에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사인(士人) 김시습이 중이 되어 세상에서 도망하였는데, 그 문장과 절행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뒤의 명현(名賢)들이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증직하고 치제하면 절의를 격려하는 도리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특별히 증직하라.” 하니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공이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알았다. 일가 할아버지[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말은 늦게 하나 정신은 민첩하여 글에 대하면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 세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桃紅柳錄三月暮]”는 것과,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珠貫靑針松葉露]”는 것 등이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누런 구름이 쪼각쪼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허 정승 조(稠)가 찾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자(老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다.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 하매, 허정승이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 바 신동이다.” 하였다. 세종이 듣고 명하여 승정원으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이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하매, 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에 뒤집는도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하였다. 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앉아서, 시를 짓게 한 것이 많았다. 이창이 벽에 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매, 곧 대답하기를,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혹은 그 아버지 일성(日省)을 불러서 전교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고자 하나, 남이 들으면 해괴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고 길러,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공이 그 끝을 모두 이어서 끌고 나갔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한 나라에 진동하여 ‘다섯 살’이라고 불렀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금의 포장을 받고서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단종 을해에 바야흐로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중이 되어 절에 의탁하였다. 《율곡집(栗谷集)》 《명신록(名臣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발(映發)하며, 간솔(簡率)하고 경직(勁直)하였다. 시사를 슬퍼하고, 세속에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시속을 따라 처세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故都)에 유람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온갖 서적에 빠짐없이 통달하여 사람이 거론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곧장 말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상하고 강개한 마음을 풀 데가 없어서, 세상 풍운ㆍ천석ㆍ화과(花果)ㆍ조수ㆍ인사의 시비ㆍ득실과 귀천ㆍ사생으로부터 성명ㆍ이기ㆍ음양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문장에 붙였기 때문에 그 글이 물이 솟구치고 산이 일어나듯 하며,산이 온갖 물상을 간직하듯이, 바다가 모든 생물을 감추듯이, 신(神)처럼 부르고 귀(鬼)처럼 화답함이 번갈아 나타나고, 단계별로 나와서 성률과 격조에 그리 유념하지 않아도 생각과 운치가 높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도리에 정밀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적으나,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여 자연스럽게 해득함이 있어서 의논이 유가(儒家)의 종지를 잃지 않았고,선교(禪敎)ㆍ도교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병폐의 근원을 연구하였으며, 선어(禪語)를 하기를 좋아하여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늙은 중으로서 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자라도 감히 대항하여 변론할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 났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마음은 유(儒)이면서 행적은 불(佛)이었는데,세상 사람들이 해괴히 여길까 하여 짐짓 미친 태도를 취하여 실상을 숨기려 한 것이다. 선비가 글을 배우고자 찾아오면 나무나 돌로 때리거나 활을 쏘려 하면서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산전을 개척하기를 좋아하여 귀한 집 자제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적었다.
○ 수락정사(水落精舍)에 들어가 살면서 도를 닦았다. 유생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법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또한 말하여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한 세상을 조롱하였다. 비록 불가에 들어가 세상을 피하였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거리에 자나다가 눈으로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한참 동안 박힌 듯이 서 있기도 하고,간혹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 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서로 다투어 기와조각과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아다녔다. 《명신록》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세조가 내전(內殿)에 중을 불러들여 법회(法會)를 벌였을 때, 공도 또한 뽑혀서 참여하였는데, 홀연 이른 새벽에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뒤를 밟으니,일부러 거리의 거름구덩이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거느리고 다니는 상좌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音調))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매양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상좌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번 읊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성품이 술을 즐기어 취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세종 대왕을 뵈올 수가 없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며 지성껏 섬겼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이 대사를 받든 지가 오래나, 아직도 한번 설법을 들려주지 아니하니 대사의 청정(淸淨)하신 법안(法眼)을 마침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저희들이 방향을 잘 알지 못하니, 금 집게로 눈에 가린 것을 벗겨 주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크게 법연(法筵)을 열라.” 하고, 공이 가사(袈裟)를 갖춰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가득 모여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듣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모르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었다.공이 또 말하기를, “소 먹일 꼴을 가져 오라.” 하여 소 엉덩이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사람의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담에 말하기를 소 뒤에 꼴이라 한다. 여러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책《금오신화(金鰲神話)》을 저술하여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후세에 반드시 설잠(雪岑)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책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평소의 심회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었다. 시집(詩集)에 미자(薇字)ㆍ궐자(蕨字)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에 비가 내린 뒤에 시냇물이 불어서 넘쳐 흐르는 때를 만나면 종이를 썰어 100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르게 하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물살이 급한 곳을 택해 앉아서 읊조렸다.율시(律詩)나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고,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시가 거의 100여 수나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서 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며 그 부분을 깎아버렸다. 어떤 때는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종일 들여다 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심은 벼가 심히 무성하여 이삭이 탐스러워 볼 만한데도, 술이 취한 때에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에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기를 좋아하였는데, 외우고 나면 반드시 울었다. 제목(除目)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대관이 된 자가 혹시라도 인망이 없으면 반드시 울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슨 죄를 졌는가.” 하였다. 《장릉지》
○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대궐에 들어가느라고 사람을벽제(辟除)하고 있는데, 공이 헤진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띠고 패랭이를 쓰고 거리에서 거정을 만났다. 비켜서지 않고 머리를 제치고 쳐다보며 부르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 이 평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고 대답하며 초헌(招軒)을 멈추고 얘기하니, 온 거리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때에 조정 벼슬아치 중에 공에게 모욕을 당한 자가 있어서 서거정을 보고 조정에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만 두게 그만 두게, 미친 사람을 상관할 것 있나. 지금 이 사람을 죄 주면 후세에 반드시 자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네” 하였다. 《명신록》
○ 지관사(知館事) 김수온(金守溫)이,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본 일을 논함”이라는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 보였다. 유생 한 사람이 삼각산에 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호 가 장난을 좋아하도다. 이것이 논제(論題)에 합당한가.”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런 제목을 못 낼 것이다.” 하고 붓을 달려 한 편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게.” 하였다.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읽다가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묻기를,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절에 있는고” 하였으니, 그를 알아봄이 이와 같았다. 그 논(論)에 대략 말하기를 “양혜왕은 본시 제후(諸侯)로서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가히 볼 것이 아니라.” 하였다. 《율곡집》 《명신록》
○ 도성에 들어오면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찾아오면 공이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일 뒤에 서거정이 매양 다시 찾아와 보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신숙주가 소시에 친한 친구로서, 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을 시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눕게 한 뒤에 가마에 태워 신숙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깨어 속은 줄 알고 놀라 일어나서 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열경이 어째서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였다. 공이 입을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그 뒤에는 종적을 더욱 비밀히 하였다.
○ 엄자릉(嚴子陵)의 조어도(釣魚圖)에 시를 지어 쓰기를,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위에서 연파(烟波) 낚는 저 늙은이 / 桐江江上釣煙波
생계는 소연(蕭然)하여, 도롱이 하나뿐이로다 / 生計蕭然一箇蓑
한(漢) 나라 천문대에 객성(客星) 아니 비쳤던들 / 漢殿若無星象動
깨끗한 몸 천추 뒤에 누명은 없을 것을 / 千秋定不婁名侯

하였다. 《노릉지》 ○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숙주가 태공(太公)ㆍ자릉(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시를 지어서 조롱하였다.” 하고 《후정쇄어(候鯖瑣語)》에는 태공의 조어도 시는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 하였으므로 서거정의 아래에 기록되었다.
○ 어떤 사람이 김수온이 좌정하고 일을 전하매, 공이 말하기를, “괴애(乖崖)가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좌화(坐化)하는 것이 예(禮)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만 귀히 여기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조우(祖雨)라는 중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 중이 어떤 종실(宗室)의 집에 이르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여 짐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가 노(盧)에게 수학하였다 하니 그게 사람 축에 드는 자인가, 만일 여기 오면 내가 꼭 죽이겠다.” 하였다.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툭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공이 감히 정승에게 공공연히 욕을 하니 나를 죽이고 싶거든 죽여 보라.” 하였다. 공이 조우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 하니,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싸움을 뜯어 말려서 조우가 간신히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 뒤에 조우가 공을 수락산(水落山)에서 만났는데 공이 반가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찾아 왔는가?” 하고 밥을 지어먹게 하였다.밥이 들어와서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할 때, 숟갈을 입에 이르려 할 때마다 공이 미리 발로써 땅 위의 먼지를 밥숟가락에 묻혀서 한 술도 떠먹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노모(盧某)에게 수학하였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
○ 학조(學祖)는 공의 일가로서 중이 된 자인데, 공에게 승복하지 않고 매양 더불어 항거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동행하는데, 그 때에 날이 비로소 갰는데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파내서 깊은 웅덩이가 생긴 곳에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한번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려 하는데,네가 나를 따를 테냐?” 하고, 곧 둘이 흙탕물에 들어가서 철벅거리다가 나왔다. 공은 몸과 의복에 한 군데에도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다 젖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나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월정만필》
○ 신축 연간에 공이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나이 43세 글을 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펴신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첫머리요, 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옵거늘, 어리석은 불효자가 가계를 이어받고도 이단(異端 불교)에 미혹타가 늦게 서야 후회하노라.[帝敷五敎 有親居先 罪列三千 不孝爲大 愚騃小子 似續本支 沈滯異端 末路方悔]” 하고,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전처럼 하다가 얼마 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이 되었다. 《명신록》 《추강냉화》
○ 임인 이후에 세상이 장차 쇠락할 것을 알고 여염간에 버린 사람으로 처신하며 날마다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에 관련된 문제로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말하기를, “너 그만 두어라.” 하였다. 정이 못 들은 체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위태롭게 여겨서 예전에 교유(交遊)하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공이 혼자 거리의 불량한 자들과 같이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 늘 바보처럼 웃었다. 뒤에 혹은 설악산(雪岳山)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春川)산에도 살기도 하여 출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천 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ㆍ홍유손(洪裕孫) 자는 자용(子容)ㆍ안응세(安應世) 자는 자정(子挺)ㆍ남효온(南孝溫)이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그의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가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다시 홀연히 그 사람에게 반환을 청구하니, 그 사람이 주려하지 않았다. 공이 송정(訟庭)에 나가 대면하여 떠들썩하게 다투는데 무식한 장돌뱅이들 같았다. 마침내 승소하여 문서가 완성되니 품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개천 속에 던졌다.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무시함이 이와 같았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공이 풍악(楓岳)에 놀러가려 하는데 전날에 여러 명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서로 대하여 담소하다가 홀연 몸을 창 바깥 두어 길 되는 곳으로 떨어뜨려 매우 다치고 숨도 못 쉬니 여러 손님들이 분주히 구환하여 깨어났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하니 공은,“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를 기다리기나 하게. 내가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손이 같이 다락원으로 가보니 공은 먼저 와 있었는데 조금도 떨어져 다친 기색이 없었다. 효온이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하여 환술(幻術)로 우리들을 공갈하고 속이는가.” 하였다.
○ 계축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나이 59세였다.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3년만에 사람들이 열어보니 얼굴이 산 것 같았다. 이분은 부처라 하면서 마침내 화장(火葬)을 하고, 그를 위하여 부도(浮圖)를 세웠다. 《명신록)》
○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화상 두 본을 그리고, 스스로 찬(讚)을 짓기를, “네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네 말이 혹은 심(心) 매우 어리석으니, 너를 산골짝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다.[爾形至藐 爾言(一作心)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다. 《율곡집》 《미수기언(眉叟記言)》
○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 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세우고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저술한 시가 수만여 편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간혹 표절하여 자기가 지은 것으로 삼았다. 《사우행록》
○ 《사방지(四方志)》 1600, 《기산기지(紀山紀志)》 2백이 있고, 시권(詩卷)이 있는데 이자(李耔)가 그 글을 읽고 말하기를, “행색은 불가요, 행실은 유가라.” 하였다. 《미수기언》
○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사이에서 노닐기 좋아하였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 “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苓)과 백출(白朮)을 캐고, 일만(一萬)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중유(仲由)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일천(一千) 산에 눈이 쌓일 때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율곡집》
○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함의 다름이 있어서 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의리(義理)로 말한 것이다. 김시습 같은 이는 글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얻었으니 문자(文字)에도 생지(生知)가 있는 것이다.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는 것이 은미한 뜻은 숭상할 만 하나,꼭 명교(名敎)를 포기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처신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그리하였는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어 후세에 김시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하고 윤기(倫紀)를 붙든 것이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어서 그 풍도를 듣고 나약한 사람도 태도를 확립할 수가 있었으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할 것이다. 《율곡집》
○ 명 나라의 천연(天淵)이란 사람은 원 나라 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원 나라가 망하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은 내복(來復), 자는 견심(見心)이라 하였다. 수염은 깎지 않고 길렀다. 고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앤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뒤에 시를 지었는데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머금고 있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조의 매월당도 중이 되어서 수염을 기르고 말하기를, “머리를 깍은 것은 당세를 피한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복의 기상을 사모함이 있어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부합한 것인가. 두 공의 절개가 대강같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계곡만필(溪谷漫筆)》
○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였다.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상한 사람이다. 색은(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 사람인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그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하다.” 하였다.


 

[주D-001]주의 …… 있었는고 :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여주(女主)가 되어 당 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주(周)라 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에 당 나라가 다시 회복되었다.그러므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무후의 집권시대에는 주의 연호를 썼는데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으면서 주의 연호를 빼고 대신 당의 연호를 썼다.
[주D-002]삼인(三仁) : 《논어》에 말하기를, “은 나라에 세 인인(仁人)이 있는데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은 나라의 충신이다.
[주D-003]엄자릉(嚴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주D-004]고죽(孤竹) :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임.
[주D-005]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동리.
[주D-006]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호.
[주D-007]예양(豫讓) : 전국(戰國)시대 진(秦) 나라의 예양이 그의 주군인 지백(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생을 겪으므로 그의 친구가 권하기를, “조양자 곁에 붙어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노려 암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한 즉 그는 답하기를,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쉬울 줄 알지만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되어서 두 마음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8]구언(求言) : 나라에 위급한 일이나 재변이 있을 때에 정치에 관한 좋은 의견을 해줄 것을 국중(國中)에 널리 구하는 것.
[주D-009]방효유(方孝孺)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왕위를 빼앗을 때 죽은 충신.
[주D-010]혁제(革除) : 명 나라 성조가 건문제를 제거한 것을 혁제(革除)라 함.
[주D-011]계유ㆍ병자 : 계유년(癸酉年)은 김종서가 죽은 해이고 병자(丙子)는 성삼문(成三問)이 죽은 때이다.
[주D-012]춘추에 …… 의리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지극히 엄하나 친(親)을 위하여 어버이에 관련된 나쁜 사실을 숨긴다 하였다.
[주D-013]한통(韓通) : 송 태조(宋太祖)가 임금이 되는 날에 후주(後主)의 신하 한통(韓通)이 대항하다가 죽었다.
[주D-014]경(經)과 권(權) : 경(經)은 정상적인 도리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한 도리를 말한다.
[주D-015]사릉(思陵) : 단종(端宗) 왕비 송씨의 능.
[주D-016]정려(旌閭) :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
[주D-017]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 두견새는 임금이 죽은 혼이므로 존숭(尊崇) 한다는 말을 썼다.
[주D-018]기산(箕山)ㆍ영수(潁水) : 옛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의 영화를 마다하고 숨어 살던 곳.
[주D-019]국화 따는 …… 기다림을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국화를 따고 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술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주D-020]《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源)이 임금에게 쫒겨나서 애국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를 지었다. 이소는 장편의 운문(韻文)으로서 중국 사부(辭賦)의 조(祖)가 되었다.
[주D-021]미자(薇字)ㆍ궐자(蕨字) : 미(微)자ㆍ궐(蕨)자를 많이 쓴 것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은 것을 의미한 것임.
[주D-022]제목(除目) : 관리(官吏) 임명(任命)의 명부.
[주D-023]벽제(辟除) : 재상이 출입할 때에 앞에 잡인이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
[주D-024]역책(易簀) : 죽을 때에 임하여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꾼다는 말.
[주D-025]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 자로(子路)가 죽을 때에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26]중유(仲由)의 무명 옷 :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인데 무명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있다.
[주D-027]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 진(晋) 나라 명사인 왕공(王恭)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 속에 걸어다니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ㆍ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ㆍ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오봉서원(五峯書院) 가정 병진년에 세웠다. : 공자 화상(孔子畫像)
송담서원(松潭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향현사우(鄕賢祠宇) 순정 갑신년에 세웠다. : 최치원(崔致遠)ㆍ최응현(崔應賢) 호는 수헌(睡軒), 대사헌을 지냈다.ㆍ박수량(朴遂良) 기묘록에 들어 있다.ㆍ최운우(崔雲遇) 호는 도경(蹈景), 횡성(橫城) 현감을 지냈다.ㆍ최수(崔洙)ㆍ박공달(朴公達)ㆍ최수성(崔壽峸)
□□영당 정해년에 세웠다. : 오명준(吳命峻)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 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도천서원(陶川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허후(許厚)
칠봉서원(七峯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원천석(元天錫)ㆍ원호(元昊)ㆍ정종영(鄭宗榮)ㆍ한백겸(韓百謙) 호는 구암(久庵)
광암향현사(廣巖鄕賢祠) : 정시한(丁時翰) 벼슬은 진선(進善)이다.
□□영당(□□影堂) 병인년에 전교(傳敎)를 내려 세웠다. :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이정형(李廷馨)ㆍ조경(趙絅)
도포서원(道浦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신숭겸(申崇謙)ㆍ신흠(申欽)ㆍ김경직(金敬直) 호는 우정(憂亭),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운곡영당(雲谷影堂) 갑신년에 세웠다. : 김수증(金壽增) 호는 곡운(谷雲), 참판을 지냈다.ㆍ김창흡(金昌翕)
울진(蔚珍) 귀암서원(龜巖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김시습(金時習)
고산서원(孤山書院) 기미년에 세웠다. : 임유후(任有後) 호는 만휴(萬休), 병조 참판을 지냈다.ㆍ오도일(吳道一) 호는 서파(西坡),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본 고을 수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향현사(鄕賢祠) 임자년에 세웠다. : 남사고(南師古)ㆍ주경안(朱景顔) 효자(孝子)이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몽양재(蒙養齋) 숙종 임진년에 비로소 향사하였다. : 전이석(田爾錫) 효자(孝子)ㆍ주필대(朱必大) 생원(生員)
귀장서당(龜藏書堂) : 전구원(田九畹) 생원
삼척(三陟) 부동사우(府東祠宇) 만력 기묘년에 세웠다. : 김효원(金孝元) 호는 성암(省庵)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세필(李世弼)
통천(通川) 휴산사우(休山祠宇) 기사년에 세웠다. 경덕사(景德祠) : 정구(鄭逑) 상렬사(尙烈祠)ㆍ최윤덕(崔潤德)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황응청(黃應淸)ㆍ황여일(黃汝一) 호는 해월(海月), 공조 참의를 지냈다.
향현사(鄕賢祠) 강희(康熙) 신해년에 세웠다. : 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명고리사(明皐里社) : 김담(金譚) 호는 탁계(卓溪)ㆍ장효갑(張孝甲) 호는 동명(東溟), 벼슬은 첨추(僉樞)이다.ㆍ장온(張薀) 호는 매헌(梅軒), 효자(孝子)이다.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숙종 을축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민충소사(愍忠小祠)ㆍ엄흥도(嚴興道)
평창(平昌) 둔계사우(遯溪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곽세익(郭世翼) 호는 둔계(遯溪),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이천(伊川) 부서사우(府西祠宇) 을해년에 세웠다. : 박태보(朴泰輔)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
고성(高城) □□사(□□祠) 경오년에 세웠다. : 조지겸(趙持謙)


황해도(黃海道)

송화(松禾)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안악(安岳) 취봉서원(鷲峯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숭정(崇禎)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황주(黃州) 백록동서원(白麓洞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고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은율(殷栗) 율곡서원(栗谷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숙종 신묘년에 옮겨 세웠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충효사우(忠孝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박훈(朴薰) 호는 장련(長連)이며 현감을 지냈다.
김천(金川) 도산서원(道山書院) 숙종 임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제현(李齊賢)ㆍ이종학(李種學)ㆍ조석윤(趙錫胤)
민충사(愍忠祠) 갑술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중로(李重老) 좌방어사(左防禦使)이다.ㆍ이성부(李聖符) 우방어사(右防禦使)이다.ㆍ박영신(朴榮臣) 풍천 부사(豐川府使)ㆍ이사주(李師朱) 이천 부사(伊川府使)ㆍ윤정준(尹廷俊) 옹진 현령(瓮津縣令)ㆍ권호원(權浩源) 훈국초관(訓局哨官)ㆍ장면(張緬) 훈국초관ㆍ방흡(方潝) 방어군관(防禦軍官).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조에 상세하다.
평산(平山) 동양서원(東陽書院) 숭정 임오년에 세웠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이색(李穡)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고려 때 세웠는데 임진ㆍ정유년의 병화로 불에 탄 것을 병자년에 중건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고려 때 사람으로 시호는 무공공(武恭公)이며, 철상(鐵像)이 있다.ㆍ유금필(庾黔弼) 고려 때 사람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며, 철상이 있다.
재령(載寧) 경현서원(景賢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
수안(遂安) 용계서원(龍溪書院) 현종조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한(漢) 나라 관녕(管寧)ㆍ이연송(李連松)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ㆍ강백년(姜栢年)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경신년에 사액하다. : 주자(朱子)ㆍ최충(崔冲)ㆍ김굉필(金宏弼)ㆍ성혼(成渾)ㆍ이이(李珥)ㆍ박세채(朴世采)
현충사(顯忠祠) 숭정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이정암(李廷馣)ㆍ신각(申恪)ㆍ송덕윤(宋德潤) 첨사(僉使)ㆍ장응기(張應祺) 군수(郡守)ㆍ김대정(金大鼎) 부사(府使)ㆍ조광정(趙光庭) 생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해주(海州)에 살았다.
문화(文化) 봉강서원(鳳崗書院) 갑신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정계사원(程溪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유관(柳寬) 세종 때의 정승이다.
충효사(忠孝祠) 신묘년에 세웠다. : 유언겸(兪彦謙) 효자(孝子)ㆍ홍진(洪禛) 현령을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신천(信川) 정원서원(正院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고, 현종 신해년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해주(海州) 소현서원(紹賢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청성묘(淸聖廟)는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문헌서원(文憲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최충(崔冲)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고려 태사(太師)이다.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진다.ㆍ최유선(崔惟善) 충(冲)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며, 추향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문헌서원 곁에 따로 세웠다. : 최영유(崔永裕)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고려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 해주 목사로서 인신(印神)을 못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인(通引)과 통인의 개도 따라 죽었다.
장련(長連) 봉양서원(鳳陽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동서양사(東西兩祠)가 있는데 선조의 어필(御筆)로써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조헌(趙憲)ㆍ박세채(朴世采) 이상은 서사(西祠) 4위ㆍ안당(安瑭)ㆍ신응시(辛應時)ㆍ오억령(吳億齡)ㆍ김덕함(金德諴) 이상은 향현동사(鄕賢東祠) 4위
봉산(鳳山) 문정서원(文井書院)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계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강석기(姜碩期)
충렬사(忠烈祠)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김만수(金萬壽) 공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ㆍ강찬(姜燦)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천수(金千壽)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백수(金百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구수(金九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광협(金光鋏)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옹(李蓊) 울진(蔚珍) 현감을 지냈다. 모두 임진 의병이다.
서흥(瑞興) 화곡서원(花谷書院) 병술년에 세웠다. : 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ㆍ김귤(金橘) 호는 검재(儉齋),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미년에 세웠다. : 유응부(兪應孚)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ㆍ유빈(柳蘋)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백현(白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ㆍ정린(鄭麟) 본 고을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토산(兔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연(長淵)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기축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ㆍ이이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 청천서원(淸川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ㆍ김덕함(金德諴)
충민사(忠愍祠) 신유년에 세웠고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남이흥(南以興) 병사(兵使)ㆍ김준(金浚) 본 고을의 목사이다.ㆍ이상안(李尙安) 강계(江界)ㆍ김상의(金尙毅) 귀성(龜城)ㆍ박명룡(朴命龍) 벼슬은 우후(虞侯)이다.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장돈(張暾) 죽천(竹川)ㆍ김양언(金良彦) 태천(泰川)ㆍ송덕영(宋德榮) 맹산(孟山)ㆍ김언수(金彦壽)ㆍ한덕문(韓德文)ㆍ송도남(宋圖南) 영유(永柔)ㆍ윤혜(尹惠) 박천(博川)ㆍ함응수(咸應秀)ㆍ양진국(楊晉國)ㆍ임충서(林忠恕) 이들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하였다.
강서(江西) 학동서원(鶴洞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반(金泮)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숙종 신해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조호익(曺好益)ㆍ김육(金堉)
자산(慈山) 의열사(義烈祠) 신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최춘명(崔春命) 벼슬은 고려조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ㆍ홍명구(洪命耈)ㆍ최경후(崔景候) 본 고을 부사이다.ㆍ김지저(金之佇) 판관
□생사(□生祠) 갑신년에 세웠다. : 이세재(李世載) 감사ㆍ정석빈(鄭碩賓) 부사ㆍ김의만(金義萬)ㆍ조익징(趙益徵) 부사
철산(鐵山) 쌍충사(雙忠祠)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원정(李元禎) 고려 때 철주(鐵州) 방어사(防禦使).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서 몽고난때 입절(立節)하였다.ㆍ이희적(李希勣) 판관으로 함께 죽었다.
충무사(忠武祠)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 : 정봉수(鄭鳳壽)ㆍ김여기(金礪器)ㆍ정인수(鄭麟壽)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을미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정주(定州) 봉명서원(鳳鳴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신안서원(新安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畵像)
순안(順安) 성산서원(星山書院) 숭정 정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한우신(韓禹臣) 호는 정안(靜安), 추향되었다. 벼슬은 내자정(內資正)이다.
강계(江界)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숭정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ㆍ정구(鄭逑)ㆍ박대덕(朴大德) 호는 합강(合江)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의(鄭顗) 고려조의 중랑장(中郞將)이다.ㆍ최춘명(崔椿命) 고려조의 추밀부사(樞密副使)다.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 기해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평양(平壤) 충무사(忠武祠)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김양언(金良彦)
충정서원(忠正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홍명구(洪命耈)
무열사(武烈祠) 제사조(諸祠條)에 상세하다.
용곡서원(龍谷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선우협(鮮于浹)
인현서원(仁賢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기자수용(箕子睟容)
벽동(碧潼)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귀성(龜城) 정공사우(旌功祠宇) 계미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서(朴犀) 고려조의 병사(兵使)이다. 침공한 몽고병을 방어한 공으로 정원 대도호(定遠大都護)에 승진했다.ㆍ김경손(金慶孫) 분도장군(分道將軍)이다.
영변(寧邊) 약봉서원(藥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선천(宣川) 주자서원(朱子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 벼슬은 문형(文衡)이다.ㆍ박태보(朴泰輔)
충민사(忠愍祠) : 임경업(林慶業)
삼충사(三忠祠) 고려 목종 때에 거란(契丹)과 싸워 전사하였다. : 양규(楊規) 벽상공신(壁上功臣)이며, 서북도순검사(西北都巡檢使)이다.ㆍ김숙흥(金叔興) 벽상공신이며, 서북도지사(西北都指使)이다.ㆍ유백부(庾伯符) 통주부서(通州府署)
삭주(朔州) 금창서원(金昌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김익호(金翼虎) 호는 만학재(晩學齋), 효행과 우애가 있고 학문이 깊었다.
곽산(郭山) □□서원 인조 기축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ㆍ홍경우(洪儆禹) 호는 월포(月浦), 벼슬은 봉상첨정(奉常僉正)이다.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 무술년에 세웠다. : 선우협(鮮于浹)ㆍ김익호(金翼虎)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 정해년에 세웠다. : 최명길(崔鳴吉)
의주(義州) 읍내사우(邑內祠宇) 숙종 16년 경오에 세웠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국상(國相)ㆍ김상헌(金尙憲)
백마산성사우(白馬山城祠宇) 숙종 35년 을축에 세웠다. : 강감찬(姜邯贊)ㆍ임경업(林慶業)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제사(諸祠)에 들어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 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01]장수(藏修) :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라고 칭하였다.
[주D-002]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중국에서 시초의 서원인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하였다.
[주D-003]지명이 비록 같으나 :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살았던 중국의 운곡을 따라 주자의 서원을 세웠었다.
[주D-004]태산(泰山)에 …… 하겠는가 : 노(魯) 나라의 진산(鎭山)인 태산에 노 나라의 임금이 아니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인데, 권신(權臣)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므로 공자가 태산의 산신(山神)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절현사(節顯祠) : 현절사(顯節祠)의 오기인듯 하다.

 

 청장관전서 제59권
 앙엽기 6(盎葉記六)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

 해동역사 제43권
 예문지(藝文志) 2 ○ 경적(經籍) 2
우리나라 서목(書目) 2 사(史), 자(子), 집(集)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사기》 50권은 고려의 김부식이 찬한 것으로,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기록하였으며, 다음으로 백제를 기록하였는데, 기(紀)와 표(表)가 있다. 《옥해(玉海)》
○ 순희(淳煕) 원년(1174, 명종4) 5월 29일에 명주(明州)의 진사 심문(沈忞)이 해동(海東)의 《삼국사기》 50권을 올리자, 금폐(錦幣) 1백을 하사하고 책은 비각(祕閣)으로 넘겨주었다. 《상동》
○ 《삼국사기》 50권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다른 내용이 있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삼국사기》 제13권부터 22권까지는 고구려본기인데, 우리 일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조잡하고 소략함이 심하다. 《상동》
살펴보건대, 《삼국사기》는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의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 공신(輸忠征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태보 복야 상서 겸 예부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太保僕射尙書兼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으로 치사(致仕)한 신하 김부식이 선지(宣旨)를 받들어서 찬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르기를, “인종 23년(1145) 12월 임술에 김부식이 그가 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사기를 올렸다.” 하였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르기를, “전조(前朝)의 문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수하였는데, 방언(方言)이나 이어(俚語)가 뒤섞여 있고, 잘한 정사나 좋은 계책은 드물게 전하였으며, 필삭(筆削)한 것이나 범례(凡例)를 정한 것이 아주 합당치는 않다. 이는 대개 그 당시 전적(典籍)이 대부분 없어졌으므로 박식하였던 김 시중(金侍中)으로서도 상고할 길이 없어 간간이 올바르지 못한 고기(古記)의 설을 취하여 소략하게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고득상(高得相)의 《삼국통력(三國通曆)》

○ 해동의 《삼국통력》 12권은 고려의 고득상이 찬한 것으로, 중국 역대의 정삭(正朔) 아래에 기록하였다. 《옥해》
○ 해동의 《삼국통력》은 10권이다. 《통지(通志)》 예문지(藝文志)

해동의 《삼국통록(三國通錄)》

○ 해동의 《삼국통록》은 이름이 빠졌다. 《수초당서목(遂草堂書目)》
살펴보건대, 《삼국통록》과 《삼국통력》은 혹 같은 책인데 이름을 달리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사》의 뒤에 쓴 발문’에,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합계 139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나라 사람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정인지 등 32인이 편찬하였다. 명나라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 8월에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이를 간행해서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 체제와 범례를 보니 조리가 있어 어지럽지 않은바, 왕씨 고려 한 시대를 징험할 수 있는 문헌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악지(樂志)의 가사(歌辭)는 대부분 송나라 유릉(裕陵)이 하사한 대성부(大晟府)의 악보(樂譜)이며, 여복지(輿服志)의 경우에는 ‘몽고(蒙古)에는 머리를 정수리까지 깎아 그 모양을 네모지게 하고 그 중간 부분의 머리카락은 남겨 두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개체(開剃)라고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충렬왕 4년(1278) 2월에는 온 경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상국(上國)의 의복을 입게 하고 개체를 하게 하였으며, 16년(1290) 9월에는 백관들이 비로소 삿갓을 쓰고 조알(朝謁)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런 것들은 《원사(元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경신년(1320, 충숙왕7)에 임금이 사막으로 도망쳐 달아난 뒤의 일과 같은 경우는, 원나라 군신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간혹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경술 4월에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란 시호를 올렸는바,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군사를 데리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10년(1377, 우왕3) 정사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도착해서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또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기년(紀年)을 통고하였는데, 신우(辛禑)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게 하였다. 서로 전해 자리에 선 지 11년 만에 죽으니 북원에서 시호를 내려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은 명나라의 전적에서는 모두 숨기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인데, 《고려사》에 의지하여 그 사적들이 약간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니 후대에 세대를 논하고 연호를 기록하는 자들이 마땅히 이어받을 바이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정난군신(靖難君臣)들이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을 개수(改修)한 것은 방효유(方孝孺)로 인해서였는데, 방효유의 아버지인 방극근(方克勤)은 순리(循吏)였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관(黃觀)과 경청(景淸)이 《서전회선(書傳會選)》을 찬수하면서는 그 이름을 삭제하고 또 ‘방 선생(方先生)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였다.’고 거짓으로 썼다.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를 보면,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려고 도모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방원은 오히려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줄 줄 알았으며, 정인지 등도 역시 그 사실을 직서(直書)하였다. 이것은 하국(下國)의 사관(史官)이 양사기(楊士奇) 등의 무리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것이니, 탄식할 만하다. 《상동》
○ 《고려사》는 2권이다. -편수(編修) 왕여조(汪如藻)의 가장본(家藏本)이다.- 구본(舊本)에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大司成) 정인지가 왕명을 받들어 찬수하였다고 제(題)하였다. 《명실록(明實錄)》을 상고해 보니,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에 고려의 사신 정인지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이 책을 조정에 올렸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이었다. 주이존(朱彝尊)의 《폭서정집》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제발(題跋)에, ‘체제와 범례가 볼만하고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다.’ 하였다. 지금 이 본은 세가(世家) 한 권과 후비열전(后妃列傳) 한 권만이 겨우 남아 있으니, 이는 대개 우연히 보존되었다가 잔결(殘缺)된 것으로, 완전한 책이 아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태 2년 8월, 즉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원년 신미에 전(牋)을 올렸는데, 32왕의 세가(世家)가 46권이고, 12항목의 지(志)가 39권으로 천문(天文), 역(曆),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禮), 악(樂), 여복(輿服), 선거(選擧), 백관(百官), 식화(食貨), 병(兵), 형법(刑法)이며, 연표(年表)가 2권이고, 열전(列傳)이 50권으로 후비(后妃)ㆍ종실(宗室)ㆍ공주(公主)의 열전이 있고 그다음에 명신(名臣) 열전이 있고 그 아래에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 및 방기(方伎), 환자(宦者), 혹리(酷吏), 폐행(嬖幸), 간신(姦臣), 반역(叛逆) 등의 열전이 있으며, 목록(目錄)이 2권으로, 총 합계 139권이다.
찬수한 사관(史官)은 32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인지(鄭麟趾),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조(金銚)ㆍ이선제(李先齊), 겸 춘추관 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정창손(鄭昌孫)ㆍ신석조(辛碩祖)ㆍ최항(崔恒)ㆍ노숙동(盧叔仝),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이석형(李石亨)ㆍ신숙주(申叔舟)ㆍ최덕지(崔德之)ㆍ어효첨(魚孝瞻)ㆍ김예몽(金禮蒙)ㆍ김순(金淳)ㆍ양성지(梁誠之)ㆍ이예(李芮)ㆍ김지경(金之慶)ㆍ김윤복(金潤福),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이극감(李克堪)ㆍ윤기견(尹起畎)ㆍ박원정(朴元貞)ㆍ김명중(金命中)ㆍ조근(趙瑾)ㆍ홍우치(洪禹治)ㆍ예승석(芮承錫)ㆍ윤자운(尹子雲)ㆍ이효장(李孝長)ㆍ이인전(李仁全)ㆍ유자문(柳子文)ㆍ김효우(金孝宇)ㆍ김용(金勇)ㆍ한서봉(韓瑞鳳)ㆍ오창백(吳昌伯)이다. 단종(端宗) 2년(1454)에 처음으로 간행해서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또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찬수한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이 있다. 이것은 바로 태조조에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편년체(編年體)의 방식으로 편찬하였다가 태종조에 와서 다시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교정한 것인데, 정인지가 올린 전문(箋文)에서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사서(史書)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 고려의 정가신이 세자를 따라서 원나라에 갔을 때, 자단전(紫檀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시를 읊게 하였다. 정가신은 동국에 있으면서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정가신열전을 보면, 정가신의 자(字)는 헌지(獻之)이고 나주인(羅州人)이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또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 20년(1371) 4월 계유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 민지가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하였는데, 7권으로 되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의 자는 용연(龍涎)이고 여흥인(驪興人)인데,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찬한 《천추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다. 그 뒤에 권보(權溥)와 함께 교정하여 완성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한 다음 올렸다. 경호대왕(景虎大王)부터 원왕(元王)에 이르기까지를 7권으로 나누어 만들고 세계도(世系圖)와 함께 올렸다.

고려의 《편년강목(編年綱目)》

○ 민지가 또 본국의 《편년강목》 42권을 편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책을 얻어볼 수가 없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가 또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였는데, 위로는 국조(國祖)인 문덕대왕(文德大王)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였으며, 책은 총 42권인데, 소목(昭穆)에 대한 논은 《편년절요》와 다르다. 또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를 보면, 4월 경자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가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여 올렸다. 또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를 보면, 2년(1346) 10월에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이곡(李穀), 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년강목》을 증수해서 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고려의 《고금록(古今錄)》

○ 고려에서 기록한 《고금록》에, “대요(大遼)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비로소 역법(曆法)을 고치고 정삭(正朔)을 반포하였다.” 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고려사》 박인량열전(朴寅亮列傳)을 보면, 박인량은 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사(文詞)가 고상하고 아름다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에 올리는 고주(告奏)와 표장(表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일찍이 《고금록》 10권을 찬하여 비부(祕府)에 보관하였다. 또 세가를 보면, 충렬왕 10년(1284) 6월 병자에 감수국사(監修國史) 원부(元傅), 허공(許珙), 한강(韓康) -나의 선조인 문혜공(文惠公)이다.- 등으로 하여금 《고금록》을 찬하게 하였는데, 10월에 이르러서 책을 완성하였으며, 공민왕 6년(1357) 윤8월 을사에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고문록(古文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요사(遼史)》에서 칭한 바는 바로 박인량이 찬한 책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 외국의 서책으로는 오직 고려에서 저술한 것만이 가끔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정인지의 《고려사》,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부터 《동국통감》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 등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고증할 수가 있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동국통감》 56권은 조선의 서거정 등이 찬수한 것으로, 삼한(三韓)의 시종(始終)을 기술한 책인바, 그 사이에는 가끔 일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드러내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근대(近代)의 일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까지 기록하였으면서 상대(上代)의 일에 대해서는 큰일도 대부분 빠뜨린 것이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살펴보건대, 《동국통감》 57권은 성화(成化) 21년(1485), 우리 성종대왕 16년 을사 7월 26일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달성군(達城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서거정 등이 교지를 받들어서 찬한 다음 전문(箋文)을 올려 진헌하였다. 이 책을 찬집(撰輯)한 여러 신하는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행 호군(行護軍) 정효항(鄭孝恒), 참의 손비장(孫比長), 행 호군 이숙감(李淑瑊), 전 도사(都事) 김화(金澕), 교리(校理) 이승녕(李承寧), 사의(司議) 표연말(表沿沫), 전적(典籍) 최보(崔溥), 박사(博士) 유인홍(柳仁洪) 등 10인인데, 이극돈이 서문을 짓고 서명하기를, “순성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겸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兼同知義禁府事世子右副賓客) 신(臣) 이극돈은 삼가 서(序)합니다.”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 《조선사략》은 12권이다. 이 책을 찬한 사람의 성명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년체(編年體)의 체제를 모방하여 조선 제국(諸國)의 흥폐(興廢)의 시말을 기록하고 사신(史臣)의 사론(史論)을 붙였다. 첫 권에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및 삼국이 처음 선 것을 기록하였으며, 2권에서 4권까지는 신라(新羅)를 기록하였고, 5권에서 12권까지는 고려(高麗)를 기록하였는데, 기년(紀年)은 요(堯) 임금 무진년부터 시작하였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조선사략》은 6권이다. -절강(浙江)의 포사공(鮑士恭)의 가장본(家藏本)이다.- 일명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며, 찬한 사람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다.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그 나라의 치란과 흥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단군(檀君)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공양왕 왕요(王瑤)에서 끝났다. 신라의 박씨(朴氏) 이전은 소략하고 고려 왕씨(王氏) 이후는 모두 편년체로 기재하였는데, 사적(事蹟)이 자못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을 태조(太祖), 태종(太宗)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그 신하들의 말이다. 또 간간이 사신의 사론과 역년도(歷年圖) 등을 붙였다.
대개 정인지의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를 모방하였고, 이 책은 편년체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가 유포되어 있다. 전증(錢曾)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를 보면, 왕씨(王氏)의 유신(遺臣)인 정몽주(鄭夢周) 등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없애지 않은 것을 가지고 양사(良史)라고 하였다. 지금 일을 서술한 것이 자세한가 소략한가를 보니, 비록 체요(體要)에 잘 부합되지는 않으나, 유문(遺聞)을 모아 편집한 것이 자못 잘 갖추어져 있는바, 일을 열거한 외국의 전(傳)을 보는 자들이 역시 이를 보고 참고할 수가 있다.
책 끝에는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쓴 조기미(趙琦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거기에 “풍중영(馮仲纓)의 집에서 빌려다가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바, 대개 왜(倭)가 조선을 함락하여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원할 때 얻은 본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동국사략》은 두 가지 본이 있다. 한 본은 태종 3년(1403) 계미에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하륜(河崙), 이첨(李詹)과 같이 수찬(修撰)하여 올리게 한 것이고, 한 본은 세조 때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찬한 것이다.

《대요사적(大遼事蹟)》

○ 고려에서 올린 《대요사적》에는 여러 왕들의 책문(冊文)이 실려 있으며, 월삭(月朔)이 자못 보이므로 인하여 첨부해서 기입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대요사적》은 바로 고려에서 찬하여 요나라에 올린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 4년(1343) 3월 임오에 원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 실덕(實德)을 파견하여 송(宋), 요(遼), 금(金) 세 나라의 사적(事蹟)을 찾아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책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주이존의 ‘《해동제국기》 발문’에,
“속국(屬國)들 가운데에는 오직 고려만이 역사책이 있어 《동국통감》, 《동국사략》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안남국(安南國) 사람들의 지략(志略)이 있으며, 일본의 《동감(東鑑)》과 같은 책들은 방언으로 써서 뜻을 알 수가 없다.
전에 망우(亡友) 종광한(鍾廣漢)이 《역대건원고(歷代建元考)》를 찬하면서 백성들이 처음 생긴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기록하였는데, 밖으로는 먼 외국까지 기록하였으며, 참호(僭號)까지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동감》을 구하고서는 기쁨이 극에 달해 기록으로 남겨 드러내었다.
그러나 《동감》은 단지 그 나라 87년간의 일만을 기록하였을 뿐, 오히려 중간에 빠진 것이 많았다. 내가 뒤늦게 조선 사람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얻었는데, 비록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일본의 군장(君長)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고 연호를 정한 것에 대해 주(周)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에 이것을 취해 종광한이 남긴 책을 보충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국토 넓이와 8도(道) 66주(州)가 마치 눈앞에 쌀을 모아 놓은 것과 같고 산천이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바, 장홍(張洪)이나 설준(薛俊), 후계고(候繼高), 이언공(李言恭), 정약증(鄭若曾) 등이 서술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일목요연하였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汎翁)이고 조선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는데,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 12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恭)이 《일본고(日本考)》를 찬하여 그 나라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토속(土俗)을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그러나 국왕들이 대를 전한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못한바, 이 편들을 합하여 《해동제국기》와 비교해 보면, 신숙주가 요체를 얻은 것만 못하다. 《상동》
○ 신숙주가 성화 7년 12월에 국가의 명을 받아 《해동제국기》를 찬하였는데, 책을 완성하고는 서문을 지어 일본의 대서(代序)와 8도, 66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명나라 성화 7년 신묘 겨울에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동해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나, 그 가운데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은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 남쪽에까지 이르며,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하여 있는바, 그 지세가 몹시 깁니다. 그 초창기에는 곳곳에서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이루고 있었는데, 주(周)나라 평왕(平王) 48년(기원전 772)에 그의 시조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여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이 각자 점령하고 통치하였으니, 마치 중국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같아 그다지 심하게 통속(統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창칼을 잘 쓰고 배를 모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그들을 제대로 잘 무마한다면 예의를 차려 조빙(朝聘)할 것이고,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면 함부로 노략질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협야는 협야존신무천황(狹野尊神武天皇)이다. 뒤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洲)를 차지하였으므로 다시 호를 올려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이라고 하였다. 기록한 전후 일본도(日本圖)는 잘못되어 참모습을 잃었으며, 그 외군(外郡)과 마을, 섬의 이름은 대부분 틀리게 전해졌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제국기》는 성화 신묘년, 즉 우리 성종 2년에 해동의 제국이 조빙하러 왕래한 예전 일과 관소(館所)나 음식 및 접대하는 규례를 찬수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나라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계(世系)의 시말과 풍속이 숭상하는 바에서부터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절목 등을 대충 서술하여 이를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해동제국기》에 이르기를, ‘도로는 일본의 이수(里數)를 썼는데, 그들의 1리는 우리나라의 10리에 준한다.’ 하였다.”고 인용하였다.

백제(百濟)의 지리서(地理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의 중 관륵(觀勒)이 와서 지리서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구려(高句麗)의 봉역도(封域圖)

○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 영류왕11)에 고구려의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바쳤다.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지리도(地里圖)

○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성종4) 7월 신축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고려의 지리도를 바쳤다. 《요사(遼史)》

조선의 《팔도지도(八道地圖)》

○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보낸 편지에 ‘제포(薺浦)에 머물러 있는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도주에게 보내니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 하였는데, 내가 조선의 《팔도지도》를 구해서 조사해 보니, 제포는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칭일본전》

《조선지(朝鮮志)》

○ 《조선지》 2권은 조선의 소 찬성(蘇贊成)이 편찬하였다. 가정(嘉靖) 연간에 시독(侍讀) 화찰(華察)이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 나라에서 찬성에게 명하여 이 책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나라 안의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권의 끝에는 조자(跳咨)의 발문이 있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살펴보건대, 소 찬성은 바로 소세양(蘇世讓)이다.
○ 《조선지》는 2권이다. -절강(浙江) 범무주(范懋柱)의 집에 있는 천일각(天一閣) 소장본(所藏本)이다.- 찬한 자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책 속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책이다.
권의 앞머리에 강역(疆域)의 연혁(沿革)을 대략 서술하였으나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 아래에 6항목의 대강(大綱)을 나누어 경(經)으로 삼았는데, 경도(京都), 풍속(風俗), 고도(古都), 고적(古迹), 산천(山川), 누대(樓臺)이다. 소속된 8도(道)를 위(緯)로 삼았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 서남쪽을 충청(忠淸), 동남쪽을 경상(慶尙), 남쪽을 전라(全羅), 서쪽을 황해(黃海), 동쪽을 강원(江源) -살펴보건대, 마땅히 강원(江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을 평안(平安), 동북쪽을 함경(咸鏡)이라 하였다.
모두가 중국의 지지(地志)와 대략 같은데, 오직 경도(京都)에는 궁전(宮殿)과 조서(曹署)만 기재하고 성시(城市), 풍속(風俗)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그 나라의 전제(典制)를 기록하였는데, 고사(故事)와 뒤섞어서 한 편을 만들었다. 또 여러 도에는 모두 사지팔도(四至八到)가 없으며, 고적에는 대부분 신기하고 괴이한 일이 뒤섞여 있어서 자못 소설(小說)과 같은바, 체례(體例)에 있어서는 모두 흡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유문(遺聞)과 쇄사(鎖事)가 있어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 가끔씩 들어 있어서 고증하는 참고 자료로 삼기에 충분하다. 서술한 것 역시 고상하고 깨끗하여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통서(統緖)가 없는 여러 주군(州郡)들의 여도(輿圖)와 비교해 볼 적에는 오히려 낫다.
송(宋)나라 왕운(王雲)이 일찍이 《계림지(鷄林志)》를 찬하였으나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산천(山川)과 고적(古跡)에 대해서는 역시 소략하다. 이 책은 그 나라 사람이 서술한 데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사실 그대로를 서술하였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
○ 《조선국지(朝鮮國志)》 -범무주의 천일각 소장본이다.- 는 찬한 사람의 성명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오직 경도(京都), 풍속(風俗), 산천(山川), 고도(古都), 고적(古跡) 다섯 부문만 남아 있다. 그 내용 중에 ‘우리 강헌왕[我康獻王]’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조선 사람이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인용하면서 ‘대명(大明)’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왕씨(王氏)의 여러 왕들을 칭하면서 고려 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중엽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 다음 조선(朝鮮)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뒤에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조선지》와 《조선국지》는 같은 책이며, 지금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낙랑(樂浪)의 《설령(挈令)》

○ 낙랑의 《설령》에는 직(織) 자를 쓰면서 실사변[糸]에 식(式)을 붙여 썼다. 신(臣) 현(鉉) 등이 말하기를, “《설령》은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다.” 하였다. 《설문(說文)》

최항(崔恒)의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경국대전》은 조선의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 등 9인이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 사자조(寫字條)에, ‘왜학(倭學)《이로파(伊路波)》, 《소식(消息)》, 《서격(書格)》, 《노걸대(老乞大)》, 《동자교(童子敎)》, 《잡어(雜語)》, 《본초(本草)》, 《의론(議論)》, 《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정훈왕래(庭訓往來)》, 《응영기(應永記)》, 《잡필(雜筆)》, 《부사(富士)》로 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이로파》, 《소식》 이하는 대부분 국속(國俗)에 관한 비천한 책이고, 호어(胡語)에 관한 책인 《노걸대》가 뒤섞여 있어서 애석하게도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에 관한 여러 책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극증(李克增)의 《대전속록(大典續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대전속록》은 조선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 등 8인이 함께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의 대사객조(待使客條)에 왜인을 접대하는 규례가 있고, 제5권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왜인들이 가지고 오는 잡물(雜物)을 포소(浦所)에서 몰래 무역한 사람 및 그 실상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통사(通事)는 《경국대전》의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의거하여 논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경국대전》은 세조조에 편찬하도록 명하여 성종 2년(1471) 신묘에 이르러서 완성하였고, 《대전속록》은 성종 24년(1493) 계축에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에는 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으며, 정조(正祖) 갑인년(1794, 정조18)에 이르러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어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 크게 갖추어졌다.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이 편찬하였다.” 하였다. 《상동》

신용개(申用漑)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남곤(南袞)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정덕(正德) 9년(1514, 중종9)에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신용개 등이 찬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정덕 9년은 바로 중종 9년 갑술인데, 신용개가 남곤 등과 함께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봉사어록(奉使語錄)》

○ 고려 김부식의 《봉사어록》은 1권이다. 《송사(宋史)》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徵毖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징비록》은 조선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이 지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상은 사류(史類)이다.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 《고려사》를 보면, 권근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입학도설》을 지었다. 《경의고(經義考)》

고려의 《박학기(博學記)》

○ 주(周)나라 세종(世宗) 때 수부랑(水部郞) 한언경(韓彦卿)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한언경이 《박학기》라는 책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3백여 가지의 일을 베꼈는데, 지금 천부(天部) 가운데에서 7가지 일을 초록(抄錄)하였는바, ‘하늘을 가려 걷기에 장애가 되는 것[迷空步障] -안개[霧]를 가리킨다.-, 두려운 가루[威屑] -서리[霜]를 가리킨다.-, 물이 맺힌 것[敎水] -이슬[露]을 가리킨다.-, 얼음의 아들[冰子] -우박[雹]을 가리킨다.-, 공기의 어미[氣母] -무지개[虹]를 가리킨다.-, 금가루를 뿌린 것[屑金] -별[星]을 가리킨다.-, 가을 하늘의 큰 노인[秋明大老] -은하수[天河]를 가리킨다.-’이다. 《청이록(淸異錄)》

김시습(金時習)의 《유금오록(游金鰲錄)》과 《관동일록(關東日錄)》

○ 조선의 《매월당시권(梅月堂詩卷)》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 안에는 《유금오록》과 《관동일록》이 있는데, 대부분 신라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단종조 사람이다.

백제의 천문서(天文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에서 승려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서를 보내자, 대반촌주(大伴村主) 고총(高聰)으로 하여금 천문(天文)을 배우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사(高麗師)의 《성요서(星曜書)》

○ 《성요서》는 고려의 국사(國師)가 찬한 것인데, 국사에게서 얻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고려일력(高麗日曆)》

○ 수술가류(數術家類)에는 《고려일력》 1권이 있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 한계희(韓繼禧)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다.- 가 지은 《중간신응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 6년(1475)에 예조에 명하여 의교(醫敎)를 엄하게 하는 데 관해 신칙하고 침구전문법(鍼灸專門法)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술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자질이 밝고 민첩한 자를 뽑아 제자로 삼아, 권장하고 격려하는 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의 승려 양심(良心)이란 자가 《신응경(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겸하여 일본의 신의(神醫)인 화개씨(和介氏)단파씨(丹波氏)의 종기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팔혈법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신응경》은 전수된 것이 멀리 근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논한 절량보사법(折量補瀉法)은 모두 옛날 현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혈(穴)을 취한 것도 대부분 옛사람이 미진하였던 부분을 계발한 것들이며, 혈을 드러낸 것은 모두 요체를 뽑아내어 많은 효험을 얻은 것들입니다. 글은 간략하면서도 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바, 사람들이 책을 펼쳐 보면 잠깐 사이에 증세와 혈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팔혈법을 《신응경》 끝에 붙여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하였으며,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의료(醫療)의 처방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하거나 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약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자못 많은바, 대개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 모두 중국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아닌 탓에 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하더라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모두 진짜와 가짜, 묵은 것과 새것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아랫사람들이나 먼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시 두루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침과 뜸의 처방은 재물을 허비하면서 멀리까지 가서 구하는 수고나 채집하여 말리고 조제하는 어려움이 없이 침 한 방 뜸 한 번에 모든 처방이 다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손바닥 사이에서 운용하고 담소하는 사이에 판별되어 빈부귀천이나 원근 완급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험을 보는 것이 항상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공용(功用)의 신묘함을 다 말할 수조차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용렬한 의원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모욕하면서 쓰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淫祀)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런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전문(專門)을 설치하고 과정(課程)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먼 외방에서 와서 바친 것이 진기하여 완상할 만한 이상한 물품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신묘한 처방이었는바, 이를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 바쳐 백성들을 아끼고 만물을 사랑하는 성상의 성대한 덕에 부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성화(成化) 10년(1474, 성종5) 11월 21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신(臣) 한모(韓某)는 삼가 서합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9년(1473, 성종4)은 일본의 후토어문원(後土御門院) 문명(文明) 5년인데, 이때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통(畠山義統)이 신농국(信濃國) 사람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양심은 중이면서 의원인 자이다. 화개씨(和介氏)는 화기씨(和氣氏)로, 화기시우(和氣時雨)와 단파강뢰(丹波康賴)가 모두 의술로 이름을 드날렸으며,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의술이 더욱더 정밀해졌다. 대개 삼장지방(三藏之方)이나 팔처구법(八處灸法)은 모두 신대(神代) 때부터 전해져 온 법이다.” 하였다. 《상동》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동의보감》은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찬한 책이다.
살펴보건대, 조선의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허씨(許氏)는 또 세족(世族)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허봉(許篈)과 허성(許筬), 허균(許筠) 삼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의 누이동생 경번(景樊)은 재주와 명성이 오빠들보다 위로, 중국 북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출한 집안이다.
동의(東醫)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의 의술이란 뜻에서 동의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이동원(李東垣)이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라는 이름으로 강주(江州)와 제주(淛州)에서 행세하였고, 주단계(朱丹溪)가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라는 이름으로 관중(關中)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지금 양평군은 궁벽한 번방에 살면서도 능히 책을 지어 중국에서 행하니, 전하기에 족한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보감(寶鑑)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햇빛이 뚫고 나오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몸 안이 속속들이 다 보이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면 환하게 빛이 비치는 것이 거울과 같게 해서이다. 옛날에 나익지(羅益之)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어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을 삼으면서 과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가만히 논해 보건대, 사람은 오장(五臟)이 있고 병은 칠정(七情)에 그친다. 그 사이에는 품부받은 것에는 치우치고 온전한 차이가 있고, 감염된 정도에는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며, 증세에는 통하고 막힌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짚어 보면 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의 삼부(三部)가 있는바, 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밭이랑을 가르는 것과 같아 뛰어넘을 수가 없으며, 횃불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황(大黃)이 체한 것을 내리게 한다는 것만 알고 속을 차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한 기력을 보한다는 것만 알고 독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면 구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치료하고, 이미 병이 생긴 이후에는 치료하지 않는 법으로, 병이 이미 발생한 뒤에야 비로소 치료한다면 이는 의술에 있어서 하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든 이후에도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니 어찌 치료될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이익을 생각하는 자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처음 의술에 종사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의술을 배우기까지 한다. 그러니 《대역(大易)》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괘남쪽 사람들의 항심(恒心)이 없으면 의원도 될 수가 없다는 경계는 일찌감치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가리어진 것을 제거해 준 것이다.
편작(扁鵲)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 병통이고, 의원들의 병통은 병을 치료하는 방도가 부족한 것이 병통이다.” 하였다. 그러나 헌기(軒岐) 이래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나와서 지금까지 저술한 의서(醫書)가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 안에 쌓으면 마룻대까지 닿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의서가 적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술에는 효험이 있는 것과 효험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 어찌 옛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술이 정밀하지 않으면 말이 상세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 빠져 들면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니, 이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뜻을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동의보감》을 보니 앞부분은 내경편(內景篇)으로 병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다음은 외형편(外形篇)으로 몸의 겉에 생기는 병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그다음은 잡병편(雜病篇)으로 증세에 대한 처방을 설명하였고, 끝 부분은 탕구편(湯灸篇)으로 처방을 설명하였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천원옥책(天元玉冊)》에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종인데, 대부분이 우리 중국의 의서이며 동방에서 찬한 의서는 3종에 불과할 뿐이다.
허준은 옛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의술을 따르면서 능히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밝혔는바, 둘 사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천하에 따스한 햇볕을 퍼뜨렸다. 책을 완성하고는 대궐에 바쳤는데, 도리어 책이 비각(祕閣)에 보관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구해 볼 수가 없었다.
전 차사(醝使)인 산좌(山左) 사람 왕공(王公)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월(粵) 지방에 와서는 의원들이 잘못 처방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도성에 가서 초록(抄錄)해 오게 하였는데, 미처 간행하기도 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순덕(順德)의 명경과(明經科) 출신인 좌한문(左翰文)은 내가 총각 때부터 사귄 사람인데, 《동의보감》을 간행해서 널리 퍼뜨릴 생각을 품고서 3백여 민(緡)을 쓰면서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그 마음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고, 그 일은 음(陰)과 양(陽)을 조섭(調燮)하는 일이다. 천하의 보배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니, 좌한문은 대단히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판각을 다 마치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책 끝에다가 쓴다. 원임(原任)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인 반우(番禺)의 능어(凌魚)는 찬한다. 《동의보감 서문》
살펴보건대, 《동의보감》은 선묘조(宣廟朝) 때 허준에게 명해서 찬집(撰輯)한 것으로, 모두 25권인데, 내경(內景) 4편, 외경(外景) 4편, 잡병(雜病) 11편, 탕액(湯液) 3편, 침구(鍼灸) 1편, 목록(目錄) 2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비기(祕記)

○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못 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擧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기는 바로 진(秦)나라의 녹도(錄圖)나 한나라의 부참(符讖)과 같은 것이다.

이상은 자류(子類)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사륙문(四六文)》과 《계원필경(桂苑筆畊)》

○ 최치원은 고려(高麗)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고변(高騈)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군하였다. 《사륙문》 1권을 저술하였으며,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 최치원은 《사륙문》 1권이 있으며, 당(唐)나라 사람이다.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는바, 당나라 최치원의 표전(表牋)과 격문(檄文)이다.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살펴보건대,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며, 신라 사람이다. 나이 12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 경문왕14) 갑오에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고변의 행영(行營)에서 종사(從事)하면서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대개 《당서》가 송나라 때 만들어졌으므로 신라를 고려라고 한 것이다.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삼한시귀감》 상권과 하권은 석간(石澗) 조현흘(趙玄仡)이 정선(精選)하고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비점(批點)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살펴보건대, 조현흘은 마땅히 조운흘로 되어야 한다. 인물전(人物傳)에 상세히 나온다.

《서상잡영(西上雜咏)》

○ 고려의 시 3권이 있다. 조씨(晁氏)가 말하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에서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 고호(高號), 강수평(康壽平), 이수(李穗)를 보내어 조공하게 하였는데, 상원일(上元日)에 동쪽 궁궐에서 잔치를 하였다. 신종(神宗)이 어제시(御製詩)를 관반(館伴)인 필중행(畢仲行)에게 하사하자, 필중행과 이들 5인 및 양부(兩府)의 신하들이 모두 화답하여 올렸다. 그 뒤에 사인(使人) 김제(金稊), 박인량(朴寅亮), 배□(裵□), 이강손(李絳孫), 노류(盧柳), 김화진(金化珍) 등이 도중에서 70여 편을 창화(唱和)하여 스스로 편찬한 다음 《서상잡영》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강손이 서문을 지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설손(偰遜)의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 설손은 회골(回鶻)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역임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었다.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가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으며, 《근사재일고》를 지었다. 《명시종(明詩綜)》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

○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이고 고려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해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포은집》이 있다. 《상동》 ○ 이 이하의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관향 및 사실은 인물전에 상세히 나온다.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포은집》은 정몽주가 지은 것이다. 정몽주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권채(權採)의 《포은집》 서문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동쪽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포은봉사고(圃隱奉使藁)》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홍무(洪武) 정사년(1377, 우왕3)에 우리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가 《포은봉사고》를 지었는데, 좋은 작품이 많다. 또 《포은집》이 있는데, 보지는 못하였다.” 하였다. 《상동》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 이색의 자는 영숙(頴叔)이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 해에 원나라에 가서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2갑(甲)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한산 백(韓山伯)에 봉해졌다. 《목은집》이 있다. 《명시종》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 이숭인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도은집》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에 이르기를, “《도은집》에는 황명(皇明)의 문화전 대학사(文華殿大學士) 장부(張溥)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고손지(高巽志)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하였다.

허금(許錦)의 《야당집(野堂集)》

○ 조선의 허종(許琮)의 증조부인 허금은 자가 재중(在中)이며, 《야당집》이 있는데,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 두 사람의 서문이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惕若齋集)》

○ 김구용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제수되었다. 《척약재집》이 있다. 《명시종》

최해(崔瀣)의 《동문선(東文選)》

○ 고려는 문교(文敎)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뛰어났는바,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계림인(鷄林人) 언명보(彦明父) 최해(崔瀣)가 원나라 이전의 시를 뽑아서 기록하고 이름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볼만한 책일 것인데, 애석하게도 구해 볼 길이 없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최해는 자가 언명(彦明)이고 호가 졸재(拙齋)이며 계림 사람이다. 9세 때 능히 시를 지었고, 고려 충렬왕 계묘년(1303, 충렬왕29)에 박리(朴理)의 방(榜)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원나라 조정의 신유년(1321, 충숙왕8) 제과(製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벼슬이 오르거나 깎이는 것으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일찍이 우리나라 명현들이 지은 시를 뽑아 모은 다음 제목을 《동인지문》이라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동문선》은 130권이고 목록이 상, 중, 하 3권이다. 대개 탈간(脫簡)이 많은데, 목록 상권과 하권을 검색해 보면 제8권에 윤소종(尹紹宗)의 ‘이 상국이 왜구를 대파하고 군대의 위세를 떨치면서 환도한 것을 축하하다.[賀李相國大破倭寇振旅還都]’라는 시와 신숙주(申叔舟)의 ‘일본의 승려 수린의 시축에 제하다.[題日本僧壽藺詩軸]’라는 칠언 고시(七言古詩)가 있고, 제18권에 권근(權近)의 ‘일본의 승려 대유가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다.[送日本釋大有還國]’라는 시와 최항(崔恒)의 ‘일본의 사에게 제하다.[題日本師]’라는 칠언 배율(七言排律)이 있고, 제88권에 이숭인(李崇仁)의 ‘정달가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와 서문[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 및 ‘일본의 천우상인이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日本天祐上人還國序]’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빠져 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권근(權近)의 《응제집(應制集)》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 권 수재(權秀才)의 《응제집》 발문’에,
“고려의 수재 권근은 자가 사숙(思叔)이고 별호(別號)는 양촌(陽村)이다. 홍무 연간에 남경(南京)에 왔었는데, 고황제(高皇帝)께서 예의로써 접대하고 옷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시를 읊게 하였다. 그러자 양촌은 먼저 본국 흥폐의 전말과 사신으로 오면서 지나온 곳에 대해 읊었으며, 다음으로 본국 이합(離合)의 형세와 산하(山河)의 경치, 인국(隣國)의 정세에 대해 읊고, 겸하여 동인(東人)들이 감화를 받은 뜻에 대해 서술하였다. 시를 다 읊고 나자 정화(精華)가 환히 빛나고 소리가 쟁쟁하였다.
황제가 보고서는 칭탄하면서 인하여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경청(景淸), 대덕이(戴德彝), 장신(張信) 등에게 명하여 함께 남시루(南市樓), 북시루(北市樓), 내빈루(來賓樓), 중역루(重譯樓), 학명루(鶴鳴樓), 취선루(醉仙樓) 등을 유람하게 하였다. 황제가 또 3편의 어제시(御製詩)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홍무 병자년(1396, 태조5)의 일이었다.
건문(建文) 4년(1402, 태종2) 봄에 조선의 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이 지신사(知申事) 박석(朴錫)으로 하여금 의정부에 내려 판각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인 그 나라 사람 이첨(李詹)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림사관 병부주사(翰林史官兵部主事)인 금릉(金陵) 사람 단목효사(端木孝思)가 나란히 서문을 지었으며, 회남(淮南) 사람 육옹(陸顒)과 반이(番易) 사람 축맹헌(祝孟獻)이 그 뒤에다가 제시(題詩)하였다. 황제가 양촌에게 주루(酒樓)를 유람하도록 한 사실은 실록(實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응제집》을 보니, 천순(天順) 원년(1457, 세조3)에 조선에서 간행한 본이었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권근의 《응제집(應制集)》에 공경히 제하다.
황제의 어제시와 권근의 응제시는 합하여 한 질인데, 선배들이 제하거나 찬한 것이 상세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구나 황제가 지은 어제시는 고금을 내리비추고 우주에 아득한 데이겠는가. 권근의 시어(詩語)도 역시 부드럽고 순하여 문체(文體)를 얻었는바, 읽어 보면 기뻐할 만하여 나라에서 소중히 보관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홍무(洪武) 시대에서 지금까지는 세차(世次)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조선의 시가 과연 모두 권근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시경》 삼백편(三百篇)이 나온 이후로 시는 당나라 때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다. 양백겸(楊伯謙)의 저술에서는 이 시기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초당(初唐)의 음(音)은 오히려 풍부하였으며, 성당(盛唐) 때에는 침착하였고, 만당(晩唐)의 유향(遺響)은 점차 유창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는 모두 당시의 정치가 감응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군국(郡國)과 향리(鄕里)에서 숭상하고 좋아하는 바가 서로 달라 마침내 처음의 뜻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대하였던 주(周)나라 이후에도 정위(鄭衛)의 음악은 끝내 변하지 못하였고, 오초(吳楚)의 시(詩)는 저술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자께서 거룩한 자질로 거룩하신 분들의 뒤를 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는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점점 물들어서 처음의 뜻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오래되고 치도가 이루어졌으니 필시 더욱더 나아진 점이 있을 것이다. 성음(聲音)의 도는 정치의 도와 서로 통하는 법으로,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니, 그 처음을 높이고 그 끝을 아름답게 하면 아마도 제후의 법도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에 그 시를 장엄하게 외운 다음 다시 시를 지어 뒤를 잇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은하수에 해와 별이 드리워짐에 / 雲漢垂日星
반짝반짝 저 하늘에 달려 있구나 / 煌煌麗穹昊
하수와 낙수에서 도서 나오매 / 河圖與洛書
천년토록 지극한 도 이어받았네 / 千載承至道
삼가고 삼가는 동국의 신하 / 斤斤東國臣
마음과 시 조서와 들어맞았네 / 心聲契敷詔
잘 간직해 잊지 않길 맹서했으니 / 什襲矢弗諼
두 나라가 영원토록 잘 지내리라 / 邦土永爲好
누려온 세월 이미 오래됐으니 / 歷年亦已久
풍아가 날마다 묘해질 걸세 / 風雅日臻妙
내 어찌 알았으랴 지역 다른데 / 焉知地尙殊
처음 뜻이 작아지지 아니했을 줄 / 初意弗微眇
옛날에는 도타움을 숭상했는데 / 古則貴敦柔
중간에는 시끄러움 많아졌다네 / 中更多叫噪
그 어찌 시어에만 그러하리오 / 豈惟詞語間
정치에도 요체가 되는 거라네 / 政治實樞要
나의 걸음 날마다 나라 지나매 / 我行日逾邁
풍속 보고 심오함을 내 알았다네 / 觀風知蘊奧
충정은 대대로 더욱 도탑고 / 忠貞世彌篤
문헌은 계속해서 이어나가리 / 文獻須繼紹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할 적에 / 歸當告天子
시 올려서 덕화 더욱 펴게 하리라 / 陳詩補聲敎
마음속에 무언가를 얻은 듯하여 / 充然如有得
머리를 조아리며 예 올리누나 / 稽首三舞蹈
《장영(張寧)의 봉사록(奉使錄)》

살펴보건대, 《양촌집》을 보면, 홍무 29년 병자 7월 19일에 표문(表文)을 찬출한 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9월 11일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칙명을 내려 문연각(文淵閣)에 머물러 있게 하고 3일 동안 유관(游觀)하도록 명하였으며, 잔치를 하사하고는 명제(命題)하여 시 24편을 읊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하였다. 그다음 해 3월에 칙서를 받들고서 귀국하였다.
양촌이 직접 쓴 《응제집》 발문은 다음과 같다.
“홍무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지은 자를 징소(徵召)하였는데, 신(臣) 근(近)이 표문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던 까닭으로 우리 임금에게 고하고 명나라 조정에 달려갔다. 그러자 황제는 죄를 용서하여 불문에 붙이고는 은혜로운 명을 내려 문연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열을 따르게 하고, 광록시(光祿寺)에서 음식을 하사하고 내부(內府)에서 옷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3일 동안 유가(游街)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명제(命題)하여 시 몇 수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해 주었다. 이는 천광(天光)이 내리비추어 미물(微物)을 꾸며 준 것으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은총이다.
나는 그때 또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와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유삼오는 연치와 덕망이 모두 높았으므로 내가 태산 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그리고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彝) 등 제공(諸公)들은 모두 난새나 봉황처럼 영준하여 궁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나를 해외(海外)의 소생(小生)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예로써 대우하여 따뜻한 얼굴로 대해 주었다. 이에 나는 매양 공손하게 옷자락을 걷어잡고 나아가 수업하면서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가 다르고 또 통역할 사람조차 없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갑자기 칙지(勅旨)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추억해 보니, 꿈속에서 천상에 올라갔다가 깨고 보니 진토(塵土)에 있는 것만 같이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께서 내려 주신 어제시가 책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으니, 마땅히 열 겹으로 잘 싸서 고이 간직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토록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홍무 30년(1397, 태조6) 정축 3월 상순에 양촌 권근은 본국에 와서 쓴다.”

신숙주(申叔舟)의 《범옹집(汎翁集)》

○ 신숙주의 자는 범옹이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공이 있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범옹집》이 있다. 《명시종》
○ 신숙주가 지은 시집(詩集) 20권은 그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가 편찬하였으며, 영도(寧都) 사람 상서(尙書) 동월(董越)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정통(正統) 10년(1445, 세종27)에 주사(主事) 황찬(黃瓚)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범옹이 당(堂)의 현판을 써 주기를 요청하자, 황찬이 마침내 희현당(希賢堂)이라고 당호를 써 주고, 이어 《희현당시집(希賢堂詩集)》의 서문을 지어 주었다.

강씨(姜氏)의 《진산세고(晉山世稿)》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진산세고》 4권은 조선의 하관(夏官) 강 상공(姜相公)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 삼대가 지은 것을 편찬한 것인데, 편찬한 시기는 명나라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이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를 보면, 《진산세고》는 본조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강회백의 아들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의 아들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삼대의 세고(世稿)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북정고(北征藁)》

○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이고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는데, 저술한 것으로는 《북정고》가 있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북정고》는 천순(天順) 경진년(1460, 세조6)에 서거정이 왕명으로 들어와 조근(朝覲)할 적에 지은 것이다. 주사(主事) 기순(祁順)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 조선의 《매월당시(梅月堂詩)》 2권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에 이르기를, “십 년 동안 유락하여 신도를 바라봤네.[十年流落 瞻望神都]”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능은 어찌하여 끝내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며, 오원은 어찌하여 오나라에서 죽음 면하기를 기약하였나.[李陵豈欲終投虜 伍員何期免死吳]” 하였으며, 또 “□□□□대군이 서울에 잡아두려고 하기에 산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면서 지었다.” 하였다. 《열조시집》

허기(許愭)의 《매헌집(梅軒集)》

○ 조선 사람 허종(許琮)의 할아버지인 허기는 자가 원덕(原德)이고, 관직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으며, 《매헌집》이 있다. 《정지거시화》

허종(許琮)의 《상우당시집(尙友堂詩集)》

○ 허종의 자는 종경(宗卿)이고 안흥(安興) 사람이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참정부 의정(參政府議政)에 이르렀다. 《상우당시집》이 있다. 《명시종》

허씨(許氏)의 《양천세고(陽川世藁)》

○ 허흡(許洽)과 그의 동생 허항(許沆)이 모두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선대(先代)의 시를 모아서 《양천세고》라고 이름하였다. 허항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형제가 모두 국정(國政)을 잡았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를 보면, 《양천세고》는 바로 야당(野堂) 허금(許錦), 허금의 아들인 매수(梅叟) 허기(許愭), 허기의 손자인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 허종의 동생인 이헌(頤軒) 허침(許琛), 허종의 종질인 문병(文炳) 허반(許磐) 등 4대, 5인이 지은 것이며,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서문을 짓고는 소노(蕭盧)라고 지목하였다.

이희보(李希輔)의 《안분당집(安分堂集)》

○ 이희보의 자는 화종(和宗)이고,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집》이 있다. 《명시종》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시집(淸心堂詩集)》

○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다. 처음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다가 호조 판서로 옮겼으며,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청심당시집》이 있다. 《상동》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집(慕齋集)》

○ 김안국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이며, 형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모재집》이 있다. 《상동》

신광한(申光漢)의 《기재집(企齋集)》

○ 신광한의 자는 한지(漢之)이고,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기재집》이 있다. 《상동》

서경덕(徐敬德)의 《화담집(花潭集)》

○ 서경덕은 조선의 생원(生員)이며, 《화담집》이 있다. 《상동》
○ 《서화담집(徐花潭集)》은 2권이다. -절강 순무(浙江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本)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의 생원 서경덕이 찬하였다. 서경덕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강마하여 56세 때 그 나라의 제학(提學) 김안국(金安國)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극력 사양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는 화담(花潭)에 거처하면서 인하여 화담으로 호를 삼았다.
이 문집은 잡문(雜文)과 잡시(雜詩)가 모두 2권이다. 그 글 가운데 원이기(原理氣) 1편의 끝에는 부기(附記)가 있는데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으며,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 1편의 끝에도 역시 부기가 있는데, 거기에 ‘이상 4편은 모두 선생께서 병이 위독할 때 지은 것이다’ 하였으며, 시 가운데 ‘신기재의 운을 차운하다[次申企齋韻]’ 1수에는 원작(原作)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기재(企齋)가 선생께 준 시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는 대개 문인(門人)들이 편집한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은 한결같이 송유(宋儒)를 조종으로 삼았는데, 특히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자(邵子)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다. 문집 가운데 잡저(雜著)에서는 모두 이 두 책의 종지(宗旨)를 발휘하였다. ‘심 교수를 전송하는 서[送沈敎授序]’에는 전체가 소자의 학문이며, ‘상제를 논한 소[論喪制疏]’와 ‘박지화에게 답한 편지[答朴枝華書]’ 역시 자못 예제(禮制)에 대해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으니, 대개 정학(正學)에 힘쓴 동국의 선비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억지로 말하면 격양집파(擊壤集派)라고 하겠으나, 또한 그 나라의 방언(方言)이 뒤섞여 있으며, ‘가을이 다 지나고 계절 바뀌자, 낙엽 져서 천지가 삐쩍 말랐네.[窮秋盛節換 木落天地瘦]’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체가 교도(郊島)와 근사하나,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나머지 무현금명(無絃琴銘)의
거문고의 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 不用其弦
그 현을 타는 것을 쓰는 거라네 / 用其弦弦
음률 밖에 울리는 궁상 소리를 / 律外宮商
내가 그 참모습을 깨달았도다 / 吾得其天
소리로써 즐기는 것이 아니라 / 非樂之以音
음악의 소리를 즐기는 거고 / 樂其音音
귀로다가 소리 듣는 것이 아니라 / 非聽之以耳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거라네 / 聽之以心
음악 듣기 잘 하였던 저 종자기는 / 彼哉子期
어찌하여 내 거문고 소리 안 듣나 / 盍耳吾琴
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은 소황(蘇黃)의 뜻을 얻었으나,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합치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문사(文士)들 가운데 음영(吟詠)으로 상국(上國)에 알려지고, 우뚝하게 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을 전하여 향리에서 가르친 것은 서경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역시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은 비록 격이 낮지만 특별히 표목(標目)을 보존하여 그 사람을 드러내는 바이다. 《사고전서총목》

유근(柳根)의 《서경집(西坰集)》

○ 유근의 자는 회부(晦夫)이고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자호(自號)는 은병거사(隱屛居士)이다. 《서경집》이 있다. 《명시종》

이호민(李好閔)의 《오봉서소집(五峯書巢集)》

○ 이호민의 자는 효언(孝彦)이고 과거에서 탐화(探花)를 차지하였으며, 추상(樞相)을 지냈다. 《오봉서소집》이 있다. 《상동》

허균(許筠)의 《백월거사집(白月居士集)》

○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허봉(許篈)의 동생이다. 형과 더불어 모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자호는 백월거사이다. 문집이 있다. 《상동》

이달(李達)의 《손곡집(蓀谷集)》

○ 《손곡시집(蓀谷詩集)》은 6권인데, 지은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억석행을 읊어 정랑 신설에게 주다[憶昔行贈申正郞渫]’라는 시(詩)로 보아 만력(萬曆) 연간에 조선의 배신(陪臣)이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속국(屬國)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뒤에 이 시를 지어 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계(天啓) 연간에 총병(摠兵) 모문룡(毛文龍)이 피도(皮島)를 지키고 있을 적에 그에게 동국의 도적(圖籍)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이 문집을 구하여 보내왔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이달의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열조시집》에 손곡의 시 36수를 실으면서도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죽타(竹坨) 주이존(朱彝尊)의 《명시종(明詩綜)》에서는 이미 이달의 시 1수가 실려 있고, 또 손곡의 시 5수가 실려 있는데도 말하기를, ‘그 이름이 상세하지 않다’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시를 기록함에 있어서 소루하기가 이와 같은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최전(崔澱)의 《양포집(楊浦集)》

○ 최전의 자는 언침(彦沈)이고, 해주(海州) 사람이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양포집》이 있다. 《명시종》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

○ 정사룡의 자는 운경(雲卿)이고, 정진(鼎津) 사람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음초당집》이 있다. 《상동》

김안로(金安老)의 《명허헌집(明虛軒集)》

○ 김안로의 자는 이숙(頤叔)이고,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다. 《명허헌집》이 있다. 《상동》

김상헌(金尙憲)의 《조천록(朝天錄)》

○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조천록》이 있다. 《어양시화(漁洋詩話)》

이숙원(李淑媛)의 《옥봉집(玉峯集)》

○ 이숙원은 자호(自號)가 옥봉주인(玉峯主人)이며, 승지학사(承旨學士) 조원(趙瑗)의 첩이다. 문집이 있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조원은 호가 운강(雲江)이고, 시는 만당(晩唐) 시대의 것과 비슷하다. 소실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의 후예로, 호가 옥봉이며, 시 32편이 있는데 11편이 《열조시집》에 기록되었다.

허씨(許氏) 누이동생의 《난설헌집(蘭雪軒集)》

○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며, 그의 오빠는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상동》
살펴보건대,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과 한림(翰林) 양유년(梁有年)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둘 다 《난설헌집》의 소인(小引)을 지었는데, 그 글이 본 문집에 실려 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동인시화》 상권과 하권은 조선의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이 저술한 것이다. 《이칭일본전》

《황화집(皇華集)》

○ 《황화집》 30권 -내부(內府) 소장본(所藏本)이다.- 은 명나라 때 사신들이 창화(唱和)한 작품을 조선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천순(天順) 원년, 2년, 3년, 4년, 8년, 성화(成化) 12년, 굉치(宏治) 원년, 5년, 정덕(正德) 16년, 가정(嘉靖) 16년에 지은 시만 수록되어 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겨우 10년에만 그치지 않는바,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해지는 본(本)이 모두 같으니, 혹 사신들이 모두 시에 능하지는 못하여 이 《황화집》을 만든 자가 이에 그친 것인가? 《사고전서총목》
○ 진감(陳鑑)의 자는 즙희(緝煕)이며, 개주위(蓋州衛) 사람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한림 학사가 되었다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을 때 편찬한 《황화집》이 사람들에게 칭해진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살펴보건대, 진감은 천순 원년(1457, 세조3)에 고윤(高閏)과 함께 사신으로 나왔다.
○ 정지(靜之) 장영(張寧)은 해령(海寧) 사람이며, 호가 방주(方洲)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을 적에 조선 사람들이 존중하였는데, 그가 지은 글을 모아 판각하여 《황화집》을 만들었다. 《서호지여(西湖志餘)》
살펴보건대, 장영은 천순 4년(1460, 세조6)에 사신으로 나와 《황화집》을 지었는데, 우리나라의 최항(崔恒)이 서문을 썼다.
○ 조선의 병조 판서 어세겸(魚世謙)이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황화집》의 서문을 지었으며, 성현(成俔)의 시 4수를 기록하였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홍치 원년에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 지은 《황화집》이다.
○ 《황화집》은 2권이고, 《속집(續集)》은 1권이다. -안휘 순무(安徽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이다.-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가 정덕(正德) 16년(1521)에 세종(世宗)이 즉위한 데 대한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번신(藩臣)과 날마다 창화(唱和)하였는데, 조선의 국왕이 특별히 서국(書局)에 명하여 이 《황화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황화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嘉靖) 원년(1522, 중종17)에 의정부 좌의정 남곤(南袞)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며, 두 사신이 국경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 의정부 우의정 이행(李荇) 등과 창화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황화속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 원년에 쓴 이행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오직 당고가 국왕과 이별하면서 준 율시(律詩) 2편과 의정부 영의정 김전(金詮) 이하가 화답한 시만 실려 있다.
상고해 보건대, 당고가 사신으로 간 사실은 《명사(明史)》 본기(本紀) 및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종실록(世宗實錄)》에만 그 일이 8월 을사조에 실려 있다. 남곤이 쓴 이 책의 서문에 이르기를, “12월 을유에 왕경(王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명을 받든 때부터 거의 5개월이나 지난 뒤이다. 또 남곤이 쓴 《황화집》 서문에는 이르기를, “처음 서울에 들어온 때부터 국경을 나갈 때까지 겨우 30일 남짓하였는데, 기행(紀行)의 작품이라든지 높은 데 올라가 읊은 시가 약간 편이 있다.” 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황화집》 가운데 처음에 국경에 들어가서 지은 것으로는 당고의 ‘영훈루에 올라서[登迎薰樓]’라는 시가 있는데, 그 표(標)에 이르기를, “동지(冬至)로부터 10일 뒤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1월 14일이 동지였으니, 이 시를 지은 날짜는 24일이다. 그리고 국경을 나갈 때 지은 시로는 당고의 ‘안산에 이르러 번경(藩京)의 여러 군자들에게 회포를 부치다.[至鞍山寄懷藩京諸君子]’라는 시가 있는데, 표에 이르기를, “납월(臘月) 신축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2월 기묘일이 초하루이니, 신축일은 바로 이달 23일이다. 그러니 서문에서 창화한 것이 30일 남짓하였다고 이른 것과 서로 딱 맞아떨어진다. 《사고전서총목》
○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32)에 수찬으로 있던 명치(鳴治) 공용경(龔用卿)과 자순(子醇) 오희맹(吳希孟)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자 조선국왕이 배신(陪臣) 10인을 파견해 잔치를 벌이게 하였는데, 모두 시편(詩篇)을 지어 화답하여 동국의 일대 성사가 되었다. 이 《황화집》은 김안로(金安老)가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황화집》의 발문’에,
“본조의 시종신(侍從臣)들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면 으레 《황화집》을 짓는데, 이 《황화집》은 가정 18년(1539, 중종34) 기해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태호(泰號)와 황조(皇祖)와 황고(皇考)의 성호(聖號)를 올린 데 대해 조서를 반포할 적에 석산(錫山) 사람 수찬 화찰(華察)이 가서 조서를 반포하고 유시할 때 지은 것이다. 동국은 문체(文體)가 평탄하고 직설적이어서 사림(詞林)의 제공들이 격조를 폄하하기를 아끼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뜻을 붙인다. 그러므로 화려한 말을 쓰는 경우가 아주 적다. 배신(陪臣)들이 시를 지을 때에는 매번 두 글자를 가지고 일곱 글자의 뜻을 함축하는데, ‘나라[國] 안에 창[戈]이 없으니 한 사람이 앉아 있네.[國內無戈坐一人]’라는 시구와 같은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동파체(東坡體)라고 하는 것인데, 제공들은 이 시에 대해 수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학집(有學集)》
○ 가정 23년(1544, 중종39)에 태감(太監) 곽방(郭)과 화정(華亭) 사람인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중관(中官)이 함께 가 도중에서 수창한 작품이 없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올 적에 시를 봉해서 관반(館伴)에게 주고는 서로 더불어서 화답하였다. 그러자 이를 간행해서 《황화집》 1권을 만들었는데, 정사룡(鄭士龍)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가정 25년(1546, 명종1)에 행인 왕학(王鶴)이 책립(冊立)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조선 사람들이 《황화집》을 판각하였다. 그러자 국왕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후서(後序)를 짓게 하였다. 《열조시집》
○ 문목공(文穆公) 허국(許國)은 자가 유정(維楨)이다. 융경(隆慶)으로 개원(改元)한 뒤에 한림 검토(翰林檢討)에 제수되어 조서를 받들고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사신의 행차가 지나는 곳마다 경치를 감상하고 풍속을 살폈으며, 간간이 기술한 것이 있는데, 《황화집》의 ‘조기자(弔箕子)’라든지 ‘알단군(謁檀君)’ 같은 여러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고 있다. 《복숙산방집(復宿山房集)》

이상은 집류(集類)이다.


 

[주D-001]유릉(裕陵)이 …… 악보(樂譜)이며 :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한 것은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인바, 유릉(裕陵)은 영우릉(永祐陵)의 잘못인 듯하다.
[주D-00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의 서쪽, 찰합이(察哈爾)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03]화림(和林) : 수원성(綏遠省)에 있는 지명으로,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주D-004]10년 …… 행하였으나 : 이때 북원(北元)에서 두개달(豆个達)을 파견하여 경효대왕(敬孝大王) 즉 공민왕을 제사하자, 비로소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주D-005]방효유(方孝孺) : 원문에는 ‘方孝儒’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서전회선(書傳會選) : 명나라 태조가 채침(蔡沈)의 《서전》에 나오는 상위(象緯)의 운동과 주자(朱子)의 《시전(詩傳)》에 나오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는 천하의 유신들을 모아 정정하게 하여 만든 책이다.《明史 卷141 方孝孺列傳》
[주D-007]정몽주(鄭夢周)가 …… 알았으며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몽주유화증관역명(夢周猶和贈官易名)’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폭서정집》 권44에 의거하여 ‘몽주도이성계불극 위방원소살 방원유지증관역명(夢周圖李成桂不克 爲芳遠所殺 芳遠猶知贈官易名)’으로 바로잡았다.
[주D-008]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 원문에는 ‘忠肅王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09]이성계(李成桂) …… 말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其稱太祖太宗乃其臣子之事’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권14에 의거하여 ‘其稱李成桂李芳遠爲太祖太宗乃其臣子之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봉역도(封域圖) : 봉역(封域)은 제후가 분봉(分封)받은 지역이다. 봉역도는 제후국의 지도를 말하는데, 이를 바치는 것은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주D-011]지리도(地里圖) : 원문에는 ‘地理國’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12]조자(跳咨) : 인명인 듯한데,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주D-013]사지팔도(四至八到) : 사지는 동, 서, 남, 북을 말하고, 팔도는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을 말하는데, 옛날의 지리도서(地理圖書)에서는 이를 가지고 주현(州縣)의 방위나 거리를 표시하였다.
[주D-014]왜학(倭學) : 조선 시대 때 사역원(司譯院)에 딸린 일본어를 전문으로 학습하던 곳이다.
[주D-015]이로파(伊路波) : 일본어 학습의 기초가 되는 서적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하지 않고 지은 시인데, 한글로 발음이 표기되어 있다. 성종 23년(1492)에 간행한 본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6]소식(消息) : 일본의 서간문(書簡文)을 모은 책으로 보이며, 현재 일본에 있는 소식류(消息類)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가마꾸라막부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7]서격(書格) : 현존하지 않는 책으로, 내용을 알 수가 없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8]노걸대(老乞大) : 몽어학(蒙語學)의 학습서로,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내용은 중국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고려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 이외에 몽고어와 왜어로도 번역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9]동자교(童子敎) : 일본인의 초학(初學) 교과서로 14, 5세기경에 널리 읽혔으며, 그 내용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오언시(五言詩)로 읊고 그 오른쪽에 일본음으로 풀어쓴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0]잡어(雜語) : 현존하지 않는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1]본초(本草) : 송나라의 당신미(唐愼微)가 편찬한 의서(醫書)로, 여기서 말하는 《본초》는 일역본(日譯本)으로 보인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2]의론(議論) : 원문에는 ‘譏論’으로 되어 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의론》은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3]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 일본 어학 서적의 일종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4]정훈왕래(庭訓往來) : 14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일본어 초등 교과서로, 그 내용은 일본 무사들이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서간문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5]응영기(應永記) :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전기 사이의 전쟁터에서 쓰인 서간문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6]잡필(雜筆) : 중급 무사(中級武士)들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사항을 광범위하게 서술한 경구(警句)나 단문(短文) 등을 불규칙하게 배열해 놓은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7]부사(富士) : 부사평야(富士平野)의 사냥터에서 띄운 5통의 편지로 되어 있으며, 15세기 후기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8]갑인년(1794, 정조18) : 《대전통편》은 정조 8년(1784)에 편찬을 시작하여 정조 10년(1786)에 완성하였는바,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9]화개씨(和介氏) : 화기씨(和氣氏)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화기광세(和氣廣世) 때부터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그 의술이 화기정설(和氣貞說) 등으로 전해졌다.
[주D-030]단파씨(丹波氏) : 화기씨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로, 단파강뢰(丹波康賴) 등이 배출되었다.
[주D-031]단파강뢰(丹波康賴) :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912년에서 995년까지 살았으며, 《의심방(醫心方)》을 저술하였다.
[주D-032]경번(景樊) :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별호(別號)이다.
[주D-033]이동원(李東垣) : 동원은 금(金)나라 이고(李杲)의 호이다. 이고는 《주역》과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 《난실비장(蘭室祕藏)》 등을 저술하였다.
[주D-034]주단계(朱丹溪) : 단계는 원나라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의 호이다. 주진형은 의술에 아주 뛰어났으며, 《국방발휘(局方發揮)》, 《단계심서(丹溪心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D-035]칠정(七情) : 한의학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喜), 노(怒), 출(怵),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을 말하는데, 희가 지나치면 심장을, 노가 지나치면 간을, 사가 지나치면 비장을, 비가 지나치면 폐를, 공이 지나치면 신장을 손상시키며, 걱정을 오래하면 기가 막히고, 갑자기 놀라면 기가 위축된다고 한다.
[주D-036]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 : 부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맥으로 양맥(陽脈)에 속하며, 침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는 맥으로, 음맥(陰脈)에 속한다.
[주D-037]대황(大黃) : 1.5m가량 자라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북부 고산지대에서 나며, 성질이 차서 뿌리를 대소변이 불통하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쓴다.
[주D-038]부자(附子) : 바곳의 구근(球根)으로, 성질이 열(熱)하고 양기(陽氣)를 돋우므로 체온이 부족하여 생기는 모든 병에 쓴다.
[주D-039]대역(大易)의 …… 점괘 : 《대역》은 《주역(周易)》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예기치 않았던 병이다. 약을 쓰지 말라. 기쁨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40]남쪽 …… 경계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사람들의 말에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가 없다.’고 하니, 이는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주D-041]헌기(軒岐) :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그의 신하인 기백(岐伯)의 병칭이다. 황제가 기백으로 하여금 초목(草木)을 맛보면서 약초를 가려내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므로, 중국 의학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진다.
[주D-042]월(粵) : 고대에 월(粵) 종족이 살던 지방으로, 중국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3]반우(番禺)의 능어(凌魚) : 반우는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현의 이름이고, 능어는 청나라 사람으로, 자가 서파(西波)이고 《운재집(耘齋集)》을 저술하였다.
[주D-044]고려(高麗) : 여기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주D-045]서상잡영(西上雜咏) : 원문에는 ‘西上新咏’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46]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 : 원문에는 ‘恭定王’으로만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주D-047]실록(實錄) : 원문에는 ‘寶錄’으로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48]양백겸(楊伯謙) : 백겸은 명나라 양외(楊巍)의 자이다. 양외는 시를 잘 지었으며, 만력 연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존가시고(存家詩稿)》가 있다.
[주D-049]정위(鄭衛)의 음악 :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민간 음악으로, 난세(亂世)의 음악인데,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주D-050]하수(河水)와 …… 나오매 : 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도(圖)를 등에 업고 나왔으며,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다섯 점으로 된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주D-051]斤斤 : 원문에는 ‘斥斥’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52]강 상공(姜相公) : 강희안(姜希顔)을 가리킨다.
[주D-053]격양집파(擊壤集派) : 《격양집》은 송나라 소옹(邵雍)이 찬한 책이다. 시풍(詩風)은 백거이(白居易)에 근원을 두었는데, 대개 논리를 근본으로 삼고 수식을 말단으로 삼았는바, 억지로 교묘하게 읊는 것을 배격하였다.
[주D-054]교도(郊島) : 당나라의 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말한다.
[주D-055]궁상(宮商) : 궁은 슬픈 소리이고 상은 쇳소리와 같은 소리인데, 합하여 음률(音律)을 말한다.
[주D-056]종자기(鍾子期) : 옛날에 음악을 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列子 湯問》
[주D-057]소황(蘇黃) : 송나라 때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58]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학설로, 송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주D-059]주 장원(朱壯元) :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주지번은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왔다.
[주D-060]굉치(宏治) : 홍치(弘治)를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이 청나라 고종 때 편찬되었는데, 고종의 이름이 홍력(弘曆)인바, 황제의 이름을 휘하여 굉치로 쓴 것인 듯하다.
[주D-061]명을 …… 뒤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趾奉命幾五月也’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총목》 권39에 의거하여 ‘距奉命幾五月也’로 바로잡았다.

 해동역사 제43권
 예문지(藝文志) 2 ○ 경적(經籍) 2
우리나라 서목(書目) 2 사(史), 자(子), 집(集)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사기》 50권은 고려의 김부식이 찬한 것으로,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기록하였으며, 다음으로 백제를 기록하였는데, 기(紀)와 표(表)가 있다. 《옥해(玉海)》
○ 순희(淳煕) 원년(1174, 명종4) 5월 29일에 명주(明州)의 진사 심문(沈忞)이 해동(海東)의 《삼국사기》 50권을 올리자, 금폐(錦幣) 1백을 하사하고 책은 비각(祕閣)으로 넘겨주었다. 《상동》
○ 《삼국사기》 50권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다른 내용이 있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삼국사기》 제13권부터 22권까지는 고구려본기인데, 우리 일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조잡하고 소략함이 심하다. 《상동》
살펴보건대, 《삼국사기》는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의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 공신(輸忠征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태보 복야 상서 겸 예부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太保僕射尙書兼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으로 치사(致仕)한 신하 김부식이 선지(宣旨)를 받들어서 찬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르기를, “인종 23년(1145) 12월 임술에 김부식이 그가 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사기를 올렸다.” 하였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르기를, “전조(前朝)의 문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수하였는데, 방언(方言)이나 이어(俚語)가 뒤섞여 있고, 잘한 정사나 좋은 계책은 드물게 전하였으며, 필삭(筆削)한 것이나 범례(凡例)를 정한 것이 아주 합당치는 않다. 이는 대개 그 당시 전적(典籍)이 대부분 없어졌으므로 박식하였던 김 시중(金侍中)으로서도 상고할 길이 없어 간간이 올바르지 못한 고기(古記)의 설을 취하여 소략하게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고득상(高得相)의 《삼국통력(三國通曆)》

○ 해동의 《삼국통력》 12권은 고려의 고득상이 찬한 것으로, 중국 역대의 정삭(正朔) 아래에 기록하였다. 《옥해》
○ 해동의 《삼국통력》은 10권이다. 《통지(通志)》 예문지(藝文志)

해동의 《삼국통록(三國通錄)》

○ 해동의 《삼국통록》은 이름이 빠졌다. 《수초당서목(遂草堂書目)》
살펴보건대, 《삼국통록》과 《삼국통력》은 혹 같은 책인데 이름을 달리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사》의 뒤에 쓴 발문’에,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합계 139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나라 사람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정인지 등 32인이 편찬하였다. 명나라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 8월에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이를 간행해서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 체제와 범례를 보니 조리가 있어 어지럽지 않은바, 왕씨 고려 한 시대를 징험할 수 있는 문헌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악지(樂志)의 가사(歌辭)는 대부분 송나라 유릉(裕陵)이 하사한 대성부(大晟府)의 악보(樂譜)이며, 여복지(輿服志)의 경우에는 ‘몽고(蒙古)에는 머리를 정수리까지 깎아 그 모양을 네모지게 하고 그 중간 부분의 머리카락은 남겨 두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개체(開剃)라고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충렬왕 4년(1278) 2월에는 온 경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상국(上國)의 의복을 입게 하고 개체를 하게 하였으며, 16년(1290) 9월에는 백관들이 비로소 삿갓을 쓰고 조알(朝謁)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런 것들은 《원사(元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경신년(1320, 충숙왕7)에 임금이 사막으로 도망쳐 달아난 뒤의 일과 같은 경우는, 원나라 군신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간혹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경술 4월에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란 시호를 올렸는바,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군사를 데리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10년(1377, 우왕3) 정사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도착해서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또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기년(紀年)을 통고하였는데, 신우(辛禑)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게 하였다. 서로 전해 자리에 선 지 11년 만에 죽으니 북원에서 시호를 내려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은 명나라의 전적에서는 모두 숨기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인데, 《고려사》에 의지하여 그 사적들이 약간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니 후대에 세대를 논하고 연호를 기록하는 자들이 마땅히 이어받을 바이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정난군신(靖難君臣)들이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을 개수(改修)한 것은 방효유(方孝孺)로 인해서였는데, 방효유의 아버지인 방극근(方克勤)은 순리(循吏)였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관(黃觀)과 경청(景淸)이 《서전회선(書傳會選)》을 찬수하면서는 그 이름을 삭제하고 또 ‘방 선생(方先生)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였다.’고 거짓으로 썼다.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를 보면,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려고 도모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방원은 오히려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줄 줄 알았으며, 정인지 등도 역시 그 사실을 직서(直書)하였다. 이것은 하국(下國)의 사관(史官)이 양사기(楊士奇) 등의 무리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것이니, 탄식할 만하다. 《상동》
○ 《고려사》는 2권이다. -편수(編修) 왕여조(汪如藻)의 가장본(家藏本)이다.- 구본(舊本)에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大司成) 정인지가 왕명을 받들어 찬수하였다고 제(題)하였다. 《명실록(明實錄)》을 상고해 보니,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에 고려의 사신 정인지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이 책을 조정에 올렸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이었다. 주이존(朱彝尊)의 《폭서정집》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제발(題跋)에, ‘체제와 범례가 볼만하고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다.’ 하였다. 지금 이 본은 세가(世家) 한 권과 후비열전(后妃列傳) 한 권만이 겨우 남아 있으니, 이는 대개 우연히 보존되었다가 잔결(殘缺)된 것으로, 완전한 책이 아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태 2년 8월, 즉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원년 신미에 전(牋)을 올렸는데, 32왕의 세가(世家)가 46권이고, 12항목의 지(志)가 39권으로 천문(天文), 역(曆),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禮), 악(樂), 여복(輿服), 선거(選擧), 백관(百官), 식화(食貨), 병(兵), 형법(刑法)이며, 연표(年表)가 2권이고, 열전(列傳)이 50권으로 후비(后妃)ㆍ종실(宗室)ㆍ공주(公主)의 열전이 있고 그다음에 명신(名臣) 열전이 있고 그 아래에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 및 방기(方伎), 환자(宦者), 혹리(酷吏), 폐행(嬖幸), 간신(姦臣), 반역(叛逆) 등의 열전이 있으며, 목록(目錄)이 2권으로, 총 합계 139권이다.
찬수한 사관(史官)은 32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인지(鄭麟趾),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조(金銚)ㆍ이선제(李先齊), 겸 춘추관 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정창손(鄭昌孫)ㆍ신석조(辛碩祖)ㆍ최항(崔恒)ㆍ노숙동(盧叔仝),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이석형(李石亨)ㆍ신숙주(申叔舟)ㆍ최덕지(崔德之)ㆍ어효첨(魚孝瞻)ㆍ김예몽(金禮蒙)ㆍ김순(金淳)ㆍ양성지(梁誠之)ㆍ이예(李芮)ㆍ김지경(金之慶)ㆍ김윤복(金潤福),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이극감(李克堪)ㆍ윤기견(尹起畎)ㆍ박원정(朴元貞)ㆍ김명중(金命中)ㆍ조근(趙瑾)ㆍ홍우치(洪禹治)ㆍ예승석(芮承錫)ㆍ윤자운(尹子雲)ㆍ이효장(李孝長)ㆍ이인전(李仁全)ㆍ유자문(柳子文)ㆍ김효우(金孝宇)ㆍ김용(金勇)ㆍ한서봉(韓瑞鳳)ㆍ오창백(吳昌伯)이다. 단종(端宗) 2년(1454)에 처음으로 간행해서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또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찬수한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이 있다. 이것은 바로 태조조에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편년체(編年體)의 방식으로 편찬하였다가 태종조에 와서 다시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교정한 것인데, 정인지가 올린 전문(箋文)에서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사서(史書)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 고려의 정가신이 세자를 따라서 원나라에 갔을 때, 자단전(紫檀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시를 읊게 하였다. 정가신은 동국에 있으면서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정가신열전을 보면, 정가신의 자(字)는 헌지(獻之)이고 나주인(羅州人)이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또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 20년(1371) 4월 계유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 민지가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하였는데, 7권으로 되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의 자는 용연(龍涎)이고 여흥인(驪興人)인데,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찬한 《천추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다. 그 뒤에 권보(權溥)와 함께 교정하여 완성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한 다음 올렸다. 경호대왕(景虎大王)부터 원왕(元王)에 이르기까지를 7권으로 나누어 만들고 세계도(世系圖)와 함께 올렸다.

고려의 《편년강목(編年綱目)》

○ 민지가 또 본국의 《편년강목》 42권을 편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책을 얻어볼 수가 없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가 또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였는데, 위로는 국조(國祖)인 문덕대왕(文德大王)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였으며, 책은 총 42권인데, 소목(昭穆)에 대한 논은 《편년절요》와 다르다. 또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를 보면, 4월 경자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가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여 올렸다. 또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를 보면, 2년(1346) 10월에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이곡(李穀), 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년강목》을 증수해서 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고려의 《고금록(古今錄)》

○ 고려에서 기록한 《고금록》에, “대요(大遼)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비로소 역법(曆法)을 고치고 정삭(正朔)을 반포하였다.” 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고려사》 박인량열전(朴寅亮列傳)을 보면, 박인량은 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사(文詞)가 고상하고 아름다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에 올리는 고주(告奏)와 표장(表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일찍이 《고금록》 10권을 찬하여 비부(祕府)에 보관하였다. 또 세가를 보면, 충렬왕 10년(1284) 6월 병자에 감수국사(監修國史) 원부(元傅), 허공(許珙), 한강(韓康) -나의 선조인 문혜공(文惠公)이다.- 등으로 하여금 《고금록》을 찬하게 하였는데, 10월에 이르러서 책을 완성하였으며, 공민왕 6년(1357) 윤8월 을사에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고문록(古文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요사(遼史)》에서 칭한 바는 바로 박인량이 찬한 책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 외국의 서책으로는 오직 고려에서 저술한 것만이 가끔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정인지의 《고려사》,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부터 《동국통감》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 등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고증할 수가 있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동국통감》 56권은 조선의 서거정 등이 찬수한 것으로, 삼한(三韓)의 시종(始終)을 기술한 책인바, 그 사이에는 가끔 일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드러내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근대(近代)의 일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까지 기록하였으면서 상대(上代)의 일에 대해서는 큰일도 대부분 빠뜨린 것이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살펴보건대, 《동국통감》 57권은 성화(成化) 21년(1485), 우리 성종대왕 16년 을사 7월 26일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달성군(達城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서거정 등이 교지를 받들어서 찬한 다음 전문(箋文)을 올려 진헌하였다. 이 책을 찬집(撰輯)한 여러 신하는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행 호군(行護軍) 정효항(鄭孝恒), 참의 손비장(孫比長), 행 호군 이숙감(李淑瑊), 전 도사(都事) 김화(金澕), 교리(校理) 이승녕(李承寧), 사의(司議) 표연말(表沿沫), 전적(典籍) 최보(崔溥), 박사(博士) 유인홍(柳仁洪) 등 10인인데, 이극돈이 서문을 짓고 서명하기를, “순성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겸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兼同知義禁府事世子右副賓客) 신(臣) 이극돈은 삼가 서(序)합니다.”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 《조선사략》은 12권이다. 이 책을 찬한 사람의 성명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년체(編年體)의 체제를 모방하여 조선 제국(諸國)의 흥폐(興廢)의 시말을 기록하고 사신(史臣)의 사론(史論)을 붙였다. 첫 권에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및 삼국이 처음 선 것을 기록하였으며, 2권에서 4권까지는 신라(新羅)를 기록하였고, 5권에서 12권까지는 고려(高麗)를 기록하였는데, 기년(紀年)은 요(堯) 임금 무진년부터 시작하였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조선사략》은 6권이다. -절강(浙江)의 포사공(鮑士恭)의 가장본(家藏本)이다.- 일명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며, 찬한 사람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다.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그 나라의 치란과 흥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단군(檀君)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공양왕 왕요(王瑤)에서 끝났다. 신라의 박씨(朴氏) 이전은 소략하고 고려 왕씨(王氏) 이후는 모두 편년체로 기재하였는데, 사적(事蹟)이 자못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을 태조(太祖), 태종(太宗)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그 신하들의 말이다. 또 간간이 사신의 사론과 역년도(歷年圖) 등을 붙였다.
대개 정인지의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를 모방하였고, 이 책은 편년체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가 유포되어 있다. 전증(錢曾)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를 보면, 왕씨(王氏)의 유신(遺臣)인 정몽주(鄭夢周) 등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없애지 않은 것을 가지고 양사(良史)라고 하였다. 지금 일을 서술한 것이 자세한가 소략한가를 보니, 비록 체요(體要)에 잘 부합되지는 않으나, 유문(遺聞)을 모아 편집한 것이 자못 잘 갖추어져 있는바, 일을 열거한 외국의 전(傳)을 보는 자들이 역시 이를 보고 참고할 수가 있다.
책 끝에는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쓴 조기미(趙琦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거기에 “풍중영(馮仲纓)의 집에서 빌려다가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바, 대개 왜(倭)가 조선을 함락하여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원할 때 얻은 본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동국사략》은 두 가지 본이 있다. 한 본은 태종 3년(1403) 계미에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하륜(河崙), 이첨(李詹)과 같이 수찬(修撰)하여 올리게 한 것이고, 한 본은 세조 때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찬한 것이다.

《대요사적(大遼事蹟)》

○ 고려에서 올린 《대요사적》에는 여러 왕들의 책문(冊文)이 실려 있으며, 월삭(月朔)이 자못 보이므로 인하여 첨부해서 기입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대요사적》은 바로 고려에서 찬하여 요나라에 올린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 4년(1343) 3월 임오에 원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 실덕(實德)을 파견하여 송(宋), 요(遼), 금(金) 세 나라의 사적(事蹟)을 찾아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책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주이존의 ‘《해동제국기》 발문’에,
“속국(屬國)들 가운데에는 오직 고려만이 역사책이 있어 《동국통감》, 《동국사략》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안남국(安南國) 사람들의 지략(志略)이 있으며, 일본의 《동감(東鑑)》과 같은 책들은 방언으로 써서 뜻을 알 수가 없다.
전에 망우(亡友) 종광한(鍾廣漢)이 《역대건원고(歷代建元考)》를 찬하면서 백성들이 처음 생긴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기록하였는데, 밖으로는 먼 외국까지 기록하였으며, 참호(僭號)까지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동감》을 구하고서는 기쁨이 극에 달해 기록으로 남겨 드러내었다.
그러나 《동감》은 단지 그 나라 87년간의 일만을 기록하였을 뿐, 오히려 중간에 빠진 것이 많았다. 내가 뒤늦게 조선 사람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얻었는데, 비록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일본의 군장(君長)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고 연호를 정한 것에 대해 주(周)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에 이것을 취해 종광한이 남긴 책을 보충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국토 넓이와 8도(道) 66주(州)가 마치 눈앞에 쌀을 모아 놓은 것과 같고 산천이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바, 장홍(張洪)이나 설준(薛俊), 후계고(候繼高), 이언공(李言恭), 정약증(鄭若曾) 등이 서술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일목요연하였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汎翁)이고 조선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는데,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 12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恭)이 《일본고(日本考)》를 찬하여 그 나라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토속(土俗)을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그러나 국왕들이 대를 전한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못한바, 이 편들을 합하여 《해동제국기》와 비교해 보면, 신숙주가 요체를 얻은 것만 못하다. 《상동》
○ 신숙주가 성화 7년 12월에 국가의 명을 받아 《해동제국기》를 찬하였는데, 책을 완성하고는 서문을 지어 일본의 대서(代序)와 8도, 66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명나라 성화 7년 신묘 겨울에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동해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나, 그 가운데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은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 남쪽에까지 이르며,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하여 있는바, 그 지세가 몹시 깁니다. 그 초창기에는 곳곳에서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이루고 있었는데, 주(周)나라 평왕(平王) 48년(기원전 772)에 그의 시조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여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이 각자 점령하고 통치하였으니, 마치 중국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같아 그다지 심하게 통속(統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창칼을 잘 쓰고 배를 모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그들을 제대로 잘 무마한다면 예의를 차려 조빙(朝聘)할 것이고,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면 함부로 노략질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협야는 협야존신무천황(狹野尊神武天皇)이다. 뒤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洲)를 차지하였으므로 다시 호를 올려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이라고 하였다. 기록한 전후 일본도(日本圖)는 잘못되어 참모습을 잃었으며, 그 외군(外郡)과 마을, 섬의 이름은 대부분 틀리게 전해졌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제국기》는 성화 신묘년, 즉 우리 성종 2년에 해동의 제국이 조빙하러 왕래한 예전 일과 관소(館所)나 음식 및 접대하는 규례를 찬수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나라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계(世系)의 시말과 풍속이 숭상하는 바에서부터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절목 등을 대충 서술하여 이를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해동제국기》에 이르기를, ‘도로는 일본의 이수(里數)를 썼는데, 그들의 1리는 우리나라의 10리에 준한다.’ 하였다.”고 인용하였다.

백제(百濟)의 지리서(地理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의 중 관륵(觀勒)이 와서 지리서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구려(高句麗)의 봉역도(封域圖)

○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 영류왕11)에 고구려의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바쳤다.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지리도(地里圖)

○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성종4) 7월 신축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고려의 지리도를 바쳤다. 《요사(遼史)》

조선의 《팔도지도(八道地圖)》

○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보낸 편지에 ‘제포(薺浦)에 머물러 있는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도주에게 보내니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 하였는데, 내가 조선의 《팔도지도》를 구해서 조사해 보니, 제포는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칭일본전》

《조선지(朝鮮志)》

○ 《조선지》 2권은 조선의 소 찬성(蘇贊成)이 편찬하였다. 가정(嘉靖) 연간에 시독(侍讀) 화찰(華察)이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 나라에서 찬성에게 명하여 이 책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나라 안의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권의 끝에는 조자(跳咨)의 발문이 있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살펴보건대, 소 찬성은 바로 소세양(蘇世讓)이다.
○ 《조선지》는 2권이다. -절강(浙江) 범무주(范懋柱)의 집에 있는 천일각(天一閣) 소장본(所藏本)이다.- 찬한 자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책 속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책이다.
권의 앞머리에 강역(疆域)의 연혁(沿革)을 대략 서술하였으나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 아래에 6항목의 대강(大綱)을 나누어 경(經)으로 삼았는데, 경도(京都), 풍속(風俗), 고도(古都), 고적(古迹), 산천(山川), 누대(樓臺)이다. 소속된 8도(道)를 위(緯)로 삼았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 서남쪽을 충청(忠淸), 동남쪽을 경상(慶尙), 남쪽을 전라(全羅), 서쪽을 황해(黃海), 동쪽을 강원(江源) -살펴보건대, 마땅히 강원(江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을 평안(平安), 동북쪽을 함경(咸鏡)이라 하였다.
모두가 중국의 지지(地志)와 대략 같은데, 오직 경도(京都)에는 궁전(宮殿)과 조서(曹署)만 기재하고 성시(城市), 풍속(風俗)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그 나라의 전제(典制)를 기록하였는데, 고사(故事)와 뒤섞어서 한 편을 만들었다. 또 여러 도에는 모두 사지팔도(四至八到)가 없으며, 고적에는 대부분 신기하고 괴이한 일이 뒤섞여 있어서 자못 소설(小說)과 같은바, 체례(體例)에 있어서는 모두 흡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유문(遺聞)과 쇄사(鎖事)가 있어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 가끔씩 들어 있어서 고증하는 참고 자료로 삼기에 충분하다. 서술한 것 역시 고상하고 깨끗하여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통서(統緖)가 없는 여러 주군(州郡)들의 여도(輿圖)와 비교해 볼 적에는 오히려 낫다.
송(宋)나라 왕운(王雲)이 일찍이 《계림지(鷄林志)》를 찬하였으나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산천(山川)과 고적(古跡)에 대해서는 역시 소략하다. 이 책은 그 나라 사람이 서술한 데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사실 그대로를 서술하였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
○ 《조선국지(朝鮮國志)》 -범무주의 천일각 소장본이다.- 는 찬한 사람의 성명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오직 경도(京都), 풍속(風俗), 산천(山川), 고도(古都), 고적(古跡) 다섯 부문만 남아 있다. 그 내용 중에 ‘우리 강헌왕[我康獻王]’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조선 사람이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인용하면서 ‘대명(大明)’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왕씨(王氏)의 여러 왕들을 칭하면서 고려 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중엽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 다음 조선(朝鮮)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뒤에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조선지》와 《조선국지》는 같은 책이며, 지금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낙랑(樂浪)의 《설령(挈令)》

○ 낙랑의 《설령》에는 직(織) 자를 쓰면서 실사변[糸]에 식(式)을 붙여 썼다. 신(臣) 현(鉉) 등이 말하기를, “《설령》은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다.” 하였다. 《설문(說文)》

최항(崔恒)의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경국대전》은 조선의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 등 9인이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 사자조(寫字條)에, ‘왜학(倭學)《이로파(伊路波)》, 《소식(消息)》, 《서격(書格)》, 《노걸대(老乞大)》, 《동자교(童子敎)》, 《잡어(雜語)》, 《본초(本草)》, 《의론(議論)》, 《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정훈왕래(庭訓往來)》, 《응영기(應永記)》, 《잡필(雜筆)》, 《부사(富士)》로 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이로파》, 《소식》 이하는 대부분 국속(國俗)에 관한 비천한 책이고, 호어(胡語)에 관한 책인 《노걸대》가 뒤섞여 있어서 애석하게도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에 관한 여러 책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극증(李克增)의 《대전속록(大典續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대전속록》은 조선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 등 8인이 함께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의 대사객조(待使客條)에 왜인을 접대하는 규례가 있고, 제5권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왜인들이 가지고 오는 잡물(雜物)을 포소(浦所)에서 몰래 무역한 사람 및 그 실상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통사(通事)는 《경국대전》의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의거하여 논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경국대전》은 세조조에 편찬하도록 명하여 성종 2년(1471) 신묘에 이르러서 완성하였고, 《대전속록》은 성종 24년(1493) 계축에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에는 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으며, 정조(正祖) 갑인년(1794, 정조18)에 이르러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어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 크게 갖추어졌다.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이 편찬하였다.” 하였다. 《상동》

신용개(申用漑)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남곤(南袞)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정덕(正德) 9년(1514, 중종9)에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신용개 등이 찬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정덕 9년은 바로 중종 9년 갑술인데, 신용개가 남곤 등과 함께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봉사어록(奉使語錄)》

○ 고려 김부식의 《봉사어록》은 1권이다. 《송사(宋史)》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徵毖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징비록》은 조선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이 지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상은 사류(史類)이다.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 《고려사》를 보면, 권근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입학도설》을 지었다. 《경의고(經義考)》

고려의 《박학기(博學記)》

○ 주(周)나라 세종(世宗) 때 수부랑(水部郞) 한언경(韓彦卿)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한언경이 《박학기》라는 책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3백여 가지의 일을 베꼈는데, 지금 천부(天部) 가운데에서 7가지 일을 초록(抄錄)하였는바, ‘하늘을 가려 걷기에 장애가 되는 것[迷空步障] -안개[霧]를 가리킨다.-, 두려운 가루[威屑] -서리[霜]를 가리킨다.-, 물이 맺힌 것[敎水] -이슬[露]을 가리킨다.-, 얼음의 아들[冰子] -우박[雹]을 가리킨다.-, 공기의 어미[氣母] -무지개[虹]를 가리킨다.-, 금가루를 뿌린 것[屑金] -별[星]을 가리킨다.-, 가을 하늘의 큰 노인[秋明大老] -은하수[天河]를 가리킨다.-’이다. 《청이록(淸異錄)》

김시습(金時習)의 《유금오록(游金鰲錄)》과 《관동일록(關東日錄)》

○ 조선의 《매월당시권(梅月堂詩卷)》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 안에는 《유금오록》과 《관동일록》이 있는데, 대부분 신라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단종조 사람이다.

백제의 천문서(天文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에서 승려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서를 보내자, 대반촌주(大伴村主) 고총(高聰)으로 하여금 천문(天文)을 배우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사(高麗師)의 《성요서(星曜書)》

○ 《성요서》는 고려의 국사(國師)가 찬한 것인데, 국사에게서 얻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고려일력(高麗日曆)》

○ 수술가류(數術家類)에는 《고려일력》 1권이 있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 한계희(韓繼禧)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다.- 가 지은 《중간신응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 6년(1475)에 예조에 명하여 의교(醫敎)를 엄하게 하는 데 관해 신칙하고 침구전문법(鍼灸專門法)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술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자질이 밝고 민첩한 자를 뽑아 제자로 삼아, 권장하고 격려하는 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의 승려 양심(良心)이란 자가 《신응경(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겸하여 일본의 신의(神醫)인 화개씨(和介氏)단파씨(丹波氏)의 종기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팔혈법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신응경》은 전수된 것이 멀리 근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논한 절량보사법(折量補瀉法)은 모두 옛날 현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혈(穴)을 취한 것도 대부분 옛사람이 미진하였던 부분을 계발한 것들이며, 혈을 드러낸 것은 모두 요체를 뽑아내어 많은 효험을 얻은 것들입니다. 글은 간략하면서도 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바, 사람들이 책을 펼쳐 보면 잠깐 사이에 증세와 혈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팔혈법을 《신응경》 끝에 붙여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하였으며,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의료(醫療)의 처방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하거나 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약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자못 많은바, 대개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 모두 중국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아닌 탓에 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하더라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모두 진짜와 가짜, 묵은 것과 새것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아랫사람들이나 먼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시 두루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침과 뜸의 처방은 재물을 허비하면서 멀리까지 가서 구하는 수고나 채집하여 말리고 조제하는 어려움이 없이 침 한 방 뜸 한 번에 모든 처방이 다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손바닥 사이에서 운용하고 담소하는 사이에 판별되어 빈부귀천이나 원근 완급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험을 보는 것이 항상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공용(功用)의 신묘함을 다 말할 수조차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용렬한 의원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모욕하면서 쓰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淫祀)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런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전문(專門)을 설치하고 과정(課程)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먼 외방에서 와서 바친 것이 진기하여 완상할 만한 이상한 물품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신묘한 처방이었는바, 이를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 바쳐 백성들을 아끼고 만물을 사랑하는 성상의 성대한 덕에 부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성화(成化) 10년(1474, 성종5) 11월 21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신(臣) 한모(韓某)는 삼가 서합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9년(1473, 성종4)은 일본의 후토어문원(後土御門院) 문명(文明) 5년인데, 이때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통(畠山義統)이 신농국(信濃國) 사람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양심은 중이면서 의원인 자이다. 화개씨(和介氏)는 화기씨(和氣氏)로, 화기시우(和氣時雨)와 단파강뢰(丹波康賴)가 모두 의술로 이름을 드날렸으며,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의술이 더욱더 정밀해졌다. 대개 삼장지방(三藏之方)이나 팔처구법(八處灸法)은 모두 신대(神代) 때부터 전해져 온 법이다.” 하였다. 《상동》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동의보감》은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찬한 책이다.
살펴보건대, 조선의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허씨(許氏)는 또 세족(世族)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허봉(許篈)과 허성(許筬), 허균(許筠) 삼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의 누이동생 경번(景樊)은 재주와 명성이 오빠들보다 위로, 중국 북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출한 집안이다.
동의(東醫)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의 의술이란 뜻에서 동의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이동원(李東垣)이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라는 이름으로 강주(江州)와 제주(淛州)에서 행세하였고, 주단계(朱丹溪)가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라는 이름으로 관중(關中)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지금 양평군은 궁벽한 번방에 살면서도 능히 책을 지어 중국에서 행하니, 전하기에 족한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보감(寶鑑)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햇빛이 뚫고 나오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몸 안이 속속들이 다 보이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면 환하게 빛이 비치는 것이 거울과 같게 해서이다. 옛날에 나익지(羅益之)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어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을 삼으면서 과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가만히 논해 보건대, 사람은 오장(五臟)이 있고 병은 칠정(七情)에 그친다. 그 사이에는 품부받은 것에는 치우치고 온전한 차이가 있고, 감염된 정도에는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며, 증세에는 통하고 막힌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짚어 보면 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의 삼부(三部)가 있는바, 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밭이랑을 가르는 것과 같아 뛰어넘을 수가 없으며, 횃불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황(大黃)이 체한 것을 내리게 한다는 것만 알고 속을 차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한 기력을 보한다는 것만 알고 독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면 구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치료하고, 이미 병이 생긴 이후에는 치료하지 않는 법으로, 병이 이미 발생한 뒤에야 비로소 치료한다면 이는 의술에 있어서 하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든 이후에도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니 어찌 치료될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이익을 생각하는 자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처음 의술에 종사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의술을 배우기까지 한다. 그러니 《대역(大易)》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괘남쪽 사람들의 항심(恒心)이 없으면 의원도 될 수가 없다는 경계는 일찌감치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가리어진 것을 제거해 준 것이다.
편작(扁鵲)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 병통이고, 의원들의 병통은 병을 치료하는 방도가 부족한 것이 병통이다.” 하였다. 그러나 헌기(軒岐) 이래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나와서 지금까지 저술한 의서(醫書)가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 안에 쌓으면 마룻대까지 닿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의서가 적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술에는 효험이 있는 것과 효험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 어찌 옛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술이 정밀하지 않으면 말이 상세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 빠져 들면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니, 이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뜻을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동의보감》을 보니 앞부분은 내경편(內景篇)으로 병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다음은 외형편(外形篇)으로 몸의 겉에 생기는 병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그다음은 잡병편(雜病篇)으로 증세에 대한 처방을 설명하였고, 끝 부분은 탕구편(湯灸篇)으로 처방을 설명하였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천원옥책(天元玉冊)》에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종인데, 대부분이 우리 중국의 의서이며 동방에서 찬한 의서는 3종에 불과할 뿐이다.
허준은 옛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의술을 따르면서 능히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밝혔는바, 둘 사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천하에 따스한 햇볕을 퍼뜨렸다. 책을 완성하고는 대궐에 바쳤는데, 도리어 책이 비각(祕閣)에 보관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구해 볼 수가 없었다.
전 차사(醝使)인 산좌(山左) 사람 왕공(王公)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월(粵) 지방에 와서는 의원들이 잘못 처방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도성에 가서 초록(抄錄)해 오게 하였는데, 미처 간행하기도 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순덕(順德)의 명경과(明經科) 출신인 좌한문(左翰文)은 내가 총각 때부터 사귄 사람인데, 《동의보감》을 간행해서 널리 퍼뜨릴 생각을 품고서 3백여 민(緡)을 쓰면서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그 마음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고, 그 일은 음(陰)과 양(陽)을 조섭(調燮)하는 일이다. 천하의 보배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니, 좌한문은 대단히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판각을 다 마치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책 끝에다가 쓴다. 원임(原任)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인 반우(番禺)의 능어(凌魚)는 찬한다. 《동의보감 서문》
살펴보건대, 《동의보감》은 선묘조(宣廟朝) 때 허준에게 명해서 찬집(撰輯)한 것으로, 모두 25권인데, 내경(內景) 4편, 외경(外景) 4편, 잡병(雜病) 11편, 탕액(湯液) 3편, 침구(鍼灸) 1편, 목록(目錄) 2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비기(祕記)

○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못 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擧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기는 바로 진(秦)나라의 녹도(錄圖)나 한나라의 부참(符讖)과 같은 것이다.

이상은 자류(子類)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사륙문(四六文)》과 《계원필경(桂苑筆畊)》

○ 최치원은 고려(高麗)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고변(高騈)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군하였다. 《사륙문》 1권을 저술하였으며,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 최치원은 《사륙문》 1권이 있으며, 당(唐)나라 사람이다.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는바, 당나라 최치원의 표전(表牋)과 격문(檄文)이다.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살펴보건대,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며, 신라 사람이다. 나이 12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 경문왕14) 갑오에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고변의 행영(行營)에서 종사(從事)하면서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대개 《당서》가 송나라 때 만들어졌으므로 신라를 고려라고 한 것이다.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삼한시귀감》 상권과 하권은 석간(石澗) 조현흘(趙玄仡)이 정선(精選)하고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비점(批點)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살펴보건대, 조현흘은 마땅히 조운흘로 되어야 한다. 인물전(人物傳)에 상세히 나온다.

《서상잡영(西上雜咏)》

○ 고려의 시 3권이 있다. 조씨(晁氏)가 말하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에서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 고호(高號), 강수평(康壽平), 이수(李穗)를 보내어 조공하게 하였는데, 상원일(上元日)에 동쪽 궁궐에서 잔치를 하였다. 신종(神宗)이 어제시(御製詩)를 관반(館伴)인 필중행(畢仲行)에게 하사하자, 필중행과 이들 5인 및 양부(兩府)의 신하들이 모두 화답하여 올렸다. 그 뒤에 사인(使人) 김제(金稊), 박인량(朴寅亮), 배□(裵□), 이강손(李絳孫), 노류(盧柳), 김화진(金化珍) 등이 도중에서 70여 편을 창화(唱和)하여 스스로 편찬한 다음 《서상잡영》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강손이 서문을 지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설손(偰遜)의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 설손은 회골(回鶻)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역임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었다.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가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으며, 《근사재일고》를 지었다. 《명시종(明詩綜)》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

○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이고 고려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해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포은집》이 있다. 《상동》 ○ 이 이하의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관향 및 사실은 인물전에 상세히 나온다.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포은집》은 정몽주가 지은 것이다. 정몽주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권채(權採)의 《포은집》 서문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동쪽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포은봉사고(圃隱奉使藁)》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홍무(洪武) 정사년(1377, 우왕3)에 우리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가 《포은봉사고》를 지었는데, 좋은 작품이 많다. 또 《포은집》이 있는데, 보지는 못하였다.” 하였다. 《상동》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 이색의 자는 영숙(頴叔)이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 해에 원나라에 가서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2갑(甲)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한산 백(韓山伯)에 봉해졌다. 《목은집》이 있다. 《명시종》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 이숭인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도은집》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에 이르기를, “《도은집》에는 황명(皇明)의 문화전 대학사(文華殿大學士) 장부(張溥)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고손지(高巽志)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하였다.

허금(許錦)의 《야당집(野堂集)》

○ 조선의 허종(許琮)의 증조부인 허금은 자가 재중(在中)이며, 《야당집》이 있는데,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 두 사람의 서문이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惕若齋集)》

○ 김구용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제수되었다. 《척약재집》이 있다. 《명시종》

최해(崔瀣)의 《동문선(東文選)》

○ 고려는 문교(文敎)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뛰어났는바,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계림인(鷄林人) 언명보(彦明父) 최해(崔瀣)가 원나라 이전의 시를 뽑아서 기록하고 이름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볼만한 책일 것인데, 애석하게도 구해 볼 길이 없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최해는 자가 언명(彦明)이고 호가 졸재(拙齋)이며 계림 사람이다. 9세 때 능히 시를 지었고, 고려 충렬왕 계묘년(1303, 충렬왕29)에 박리(朴理)의 방(榜)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원나라 조정의 신유년(1321, 충숙왕8) 제과(製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벼슬이 오르거나 깎이는 것으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일찍이 우리나라 명현들이 지은 시를 뽑아 모은 다음 제목을 《동인지문》이라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동문선》은 130권이고 목록이 상, 중, 하 3권이다. 대개 탈간(脫簡)이 많은데, 목록 상권과 하권을 검색해 보면 제8권에 윤소종(尹紹宗)의 ‘이 상국이 왜구를 대파하고 군대의 위세를 떨치면서 환도한 것을 축하하다.[賀李相國大破倭寇振旅還都]’라는 시와 신숙주(申叔舟)의 ‘일본의 승려 수린의 시축에 제하다.[題日本僧壽藺詩軸]’라는 칠언 고시(七言古詩)가 있고, 제18권에 권근(權近)의 ‘일본의 승려 대유가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다.[送日本釋大有還國]’라는 시와 최항(崔恒)의 ‘일본의 사에게 제하다.[題日本師]’라는 칠언 배율(七言排律)이 있고, 제88권에 이숭인(李崇仁)의 ‘정달가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와 서문[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 및 ‘일본의 천우상인이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日本天祐上人還國序]’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빠져 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권근(權近)의 《응제집(應制集)》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 권 수재(權秀才)의 《응제집》 발문’에,
“고려의 수재 권근은 자가 사숙(思叔)이고 별호(別號)는 양촌(陽村)이다. 홍무 연간에 남경(南京)에 왔었는데, 고황제(高皇帝)께서 예의로써 접대하고 옷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시를 읊게 하였다. 그러자 양촌은 먼저 본국 흥폐의 전말과 사신으로 오면서 지나온 곳에 대해 읊었으며, 다음으로 본국 이합(離合)의 형세와 산하(山河)의 경치, 인국(隣國)의 정세에 대해 읊고, 겸하여 동인(東人)들이 감화를 받은 뜻에 대해 서술하였다. 시를 다 읊고 나자 정화(精華)가 환히 빛나고 소리가 쟁쟁하였다.
황제가 보고서는 칭탄하면서 인하여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경청(景淸), 대덕이(戴德彝), 장신(張信) 등에게 명하여 함께 남시루(南市樓), 북시루(北市樓), 내빈루(來賓樓), 중역루(重譯樓), 학명루(鶴鳴樓), 취선루(醉仙樓) 등을 유람하게 하였다. 황제가 또 3편의 어제시(御製詩)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홍무 병자년(1396, 태조5)의 일이었다.
건문(建文) 4년(1402, 태종2) 봄에 조선의 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이 지신사(知申事) 박석(朴錫)으로 하여금 의정부에 내려 판각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인 그 나라 사람 이첨(李詹)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림사관 병부주사(翰林史官兵部主事)인 금릉(金陵) 사람 단목효사(端木孝思)가 나란히 서문을 지었으며, 회남(淮南) 사람 육옹(陸顒)과 반이(番易) 사람 축맹헌(祝孟獻)이 그 뒤에다가 제시(題詩)하였다. 황제가 양촌에게 주루(酒樓)를 유람하도록 한 사실은 실록(實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응제집》을 보니, 천순(天順) 원년(1457, 세조3)에 조선에서 간행한 본이었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권근의 《응제집(應制集)》에 공경히 제하다.
황제의 어제시와 권근의 응제시는 합하여 한 질인데, 선배들이 제하거나 찬한 것이 상세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구나 황제가 지은 어제시는 고금을 내리비추고 우주에 아득한 데이겠는가. 권근의 시어(詩語)도 역시 부드럽고 순하여 문체(文體)를 얻었는바, 읽어 보면 기뻐할 만하여 나라에서 소중히 보관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홍무(洪武) 시대에서 지금까지는 세차(世次)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조선의 시가 과연 모두 권근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시경》 삼백편(三百篇)이 나온 이후로 시는 당나라 때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다. 양백겸(楊伯謙)의 저술에서는 이 시기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초당(初唐)의 음(音)은 오히려 풍부하였으며, 성당(盛唐) 때에는 침착하였고, 만당(晩唐)의 유향(遺響)은 점차 유창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는 모두 당시의 정치가 감응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군국(郡國)과 향리(鄕里)에서 숭상하고 좋아하는 바가 서로 달라 마침내 처음의 뜻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대하였던 주(周)나라 이후에도 정위(鄭衛)의 음악은 끝내 변하지 못하였고, 오초(吳楚)의 시(詩)는 저술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자께서 거룩한 자질로 거룩하신 분들의 뒤를 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는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점점 물들어서 처음의 뜻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오래되고 치도가 이루어졌으니 필시 더욱더 나아진 점이 있을 것이다. 성음(聲音)의 도는 정치의 도와 서로 통하는 법으로,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니, 그 처음을 높이고 그 끝을 아름답게 하면 아마도 제후의 법도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에 그 시를 장엄하게 외운 다음 다시 시를 지어 뒤를 잇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은하수에 해와 별이 드리워짐에 / 雲漢垂日星
반짝반짝 저 하늘에 달려 있구나 / 煌煌麗穹昊
하수와 낙수에서 도서 나오매 / 河圖與洛書
천년토록 지극한 도 이어받았네 / 千載承至道
삼가고 삼가는 동국의 신하 / 斤斤東國臣
마음과 시 조서와 들어맞았네 / 心聲契敷詔
잘 간직해 잊지 않길 맹서했으니 / 什襲矢弗諼
두 나라가 영원토록 잘 지내리라 / 邦土永爲好
누려온 세월 이미 오래됐으니 / 歷年亦已久
풍아가 날마다 묘해질 걸세 / 風雅日臻妙
내 어찌 알았으랴 지역 다른데 / 焉知地尙殊
처음 뜻이 작아지지 아니했을 줄 / 初意弗微眇
옛날에는 도타움을 숭상했는데 / 古則貴敦柔
중간에는 시끄러움 많아졌다네 / 中更多叫噪
그 어찌 시어에만 그러하리오 / 豈惟詞語間
정치에도 요체가 되는 거라네 / 政治實樞要
나의 걸음 날마다 나라 지나매 / 我行日逾邁
풍속 보고 심오함을 내 알았다네 / 觀風知蘊奧
충정은 대대로 더욱 도탑고 / 忠貞世彌篤
문헌은 계속해서 이어나가리 / 文獻須繼紹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할 적에 / 歸當告天子
시 올려서 덕화 더욱 펴게 하리라 / 陳詩補聲敎
마음속에 무언가를 얻은 듯하여 / 充然如有得
머리를 조아리며 예 올리누나 / 稽首三舞蹈
《장영(張寧)의 봉사록(奉使錄)》

살펴보건대, 《양촌집》을 보면, 홍무 29년 병자 7월 19일에 표문(表文)을 찬출한 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9월 11일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칙명을 내려 문연각(文淵閣)에 머물러 있게 하고 3일 동안 유관(游觀)하도록 명하였으며, 잔치를 하사하고는 명제(命題)하여 시 24편을 읊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하였다. 그다음 해 3월에 칙서를 받들고서 귀국하였다.
양촌이 직접 쓴 《응제집》 발문은 다음과 같다.
“홍무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지은 자를 징소(徵召)하였는데, 신(臣) 근(近)이 표문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던 까닭으로 우리 임금에게 고하고 명나라 조정에 달려갔다. 그러자 황제는 죄를 용서하여 불문에 붙이고는 은혜로운 명을 내려 문연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열을 따르게 하고, 광록시(光祿寺)에서 음식을 하사하고 내부(內府)에서 옷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3일 동안 유가(游街)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명제(命題)하여 시 몇 수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해 주었다. 이는 천광(天光)이 내리비추어 미물(微物)을 꾸며 준 것으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은총이다.
나는 그때 또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와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유삼오는 연치와 덕망이 모두 높았으므로 내가 태산 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그리고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彝) 등 제공(諸公)들은 모두 난새나 봉황처럼 영준하여 궁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나를 해외(海外)의 소생(小生)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예로써 대우하여 따뜻한 얼굴로 대해 주었다. 이에 나는 매양 공손하게 옷자락을 걷어잡고 나아가 수업하면서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가 다르고 또 통역할 사람조차 없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갑자기 칙지(勅旨)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추억해 보니, 꿈속에서 천상에 올라갔다가 깨고 보니 진토(塵土)에 있는 것만 같이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께서 내려 주신 어제시가 책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으니, 마땅히 열 겹으로 잘 싸서 고이 간직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토록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홍무 30년(1397, 태조6) 정축 3월 상순에 양촌 권근은 본국에 와서 쓴다.”

신숙주(申叔舟)의 《범옹집(汎翁集)》

○ 신숙주의 자는 범옹이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공이 있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범옹집》이 있다. 《명시종》
○ 신숙주가 지은 시집(詩集) 20권은 그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가 편찬하였으며, 영도(寧都) 사람 상서(尙書) 동월(董越)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정통(正統) 10년(1445, 세종27)에 주사(主事) 황찬(黃瓚)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범옹이 당(堂)의 현판을 써 주기를 요청하자, 황찬이 마침내 희현당(希賢堂)이라고 당호를 써 주고, 이어 《희현당시집(希賢堂詩集)》의 서문을 지어 주었다.

강씨(姜氏)의 《진산세고(晉山世稿)》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진산세고》 4권은 조선의 하관(夏官) 강 상공(姜相公)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 삼대가 지은 것을 편찬한 것인데, 편찬한 시기는 명나라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이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를 보면, 《진산세고》는 본조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강회백의 아들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의 아들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삼대의 세고(世稿)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북정고(北征藁)》

○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이고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는데, 저술한 것으로는 《북정고》가 있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북정고》는 천순(天順) 경진년(1460, 세조6)에 서거정이 왕명으로 들어와 조근(朝覲)할 적에 지은 것이다. 주사(主事) 기순(祁順)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 조선의 《매월당시(梅月堂詩)》 2권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에 이르기를, “십 년 동안 유락하여 신도를 바라봤네.[十年流落 瞻望神都]”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능은 어찌하여 끝내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며, 오원은 어찌하여 오나라에서 죽음 면하기를 기약하였나.[李陵豈欲終投虜 伍員何期免死吳]” 하였으며, 또 “□□□□대군이 서울에 잡아두려고 하기에 산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면서 지었다.” 하였다. 《열조시집》

허기(許愭)의 《매헌집(梅軒集)》

○ 조선 사람 허종(許琮)의 할아버지인 허기는 자가 원덕(原德)이고, 관직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으며, 《매헌집》이 있다. 《정지거시화》

허종(許琮)의 《상우당시집(尙友堂詩集)》

○ 허종의 자는 종경(宗卿)이고 안흥(安興) 사람이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참정부 의정(參政府議政)에 이르렀다. 《상우당시집》이 있다. 《명시종》

허씨(許氏)의 《양천세고(陽川世藁)》

○ 허흡(許洽)과 그의 동생 허항(許沆)이 모두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선대(先代)의 시를 모아서 《양천세고》라고 이름하였다. 허항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형제가 모두 국정(國政)을 잡았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를 보면, 《양천세고》는 바로 야당(野堂) 허금(許錦), 허금의 아들인 매수(梅叟) 허기(許愭), 허기의 손자인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 허종의 동생인 이헌(頤軒) 허침(許琛), 허종의 종질인 문병(文炳) 허반(許磐) 등 4대, 5인이 지은 것이며,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서문을 짓고는 소노(蕭盧)라고 지목하였다.

이희보(李希輔)의 《안분당집(安分堂集)》

○ 이희보의 자는 화종(和宗)이고,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집》이 있다. 《명시종》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시집(淸心堂詩集)》

○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다. 처음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다가 호조 판서로 옮겼으며,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청심당시집》이 있다. 《상동》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집(慕齋集)》

○ 김안국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이며, 형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모재집》이 있다. 《상동》

신광한(申光漢)의 《기재집(企齋集)》

○ 신광한의 자는 한지(漢之)이고,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기재집》이 있다. 《상동》

서경덕(徐敬德)의 《화담집(花潭集)》

○ 서경덕은 조선의 생원(生員)이며, 《화담집》이 있다. 《상동》
○ 《서화담집(徐花潭集)》은 2권이다. -절강 순무(浙江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本)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의 생원 서경덕이 찬하였다. 서경덕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강마하여 56세 때 그 나라의 제학(提學) 김안국(金安國)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극력 사양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는 화담(花潭)에 거처하면서 인하여 화담으로 호를 삼았다.
이 문집은 잡문(雜文)과 잡시(雜詩)가 모두 2권이다. 그 글 가운데 원이기(原理氣) 1편의 끝에는 부기(附記)가 있는데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으며,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 1편의 끝에도 역시 부기가 있는데, 거기에 ‘이상 4편은 모두 선생께서 병이 위독할 때 지은 것이다’ 하였으며, 시 가운데 ‘신기재의 운을 차운하다[次申企齋韻]’ 1수에는 원작(原作)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기재(企齋)가 선생께 준 시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는 대개 문인(門人)들이 편집한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은 한결같이 송유(宋儒)를 조종으로 삼았는데, 특히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자(邵子)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다. 문집 가운데 잡저(雜著)에서는 모두 이 두 책의 종지(宗旨)를 발휘하였다. ‘심 교수를 전송하는 서[送沈敎授序]’에는 전체가 소자의 학문이며, ‘상제를 논한 소[論喪制疏]’와 ‘박지화에게 답한 편지[答朴枝華書]’ 역시 자못 예제(禮制)에 대해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으니, 대개 정학(正學)에 힘쓴 동국의 선비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억지로 말하면 격양집파(擊壤集派)라고 하겠으나, 또한 그 나라의 방언(方言)이 뒤섞여 있으며, ‘가을이 다 지나고 계절 바뀌자, 낙엽 져서 천지가 삐쩍 말랐네.[窮秋盛節換 木落天地瘦]’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체가 교도(郊島)와 근사하나,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나머지 무현금명(無絃琴銘)의
거문고의 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 不用其弦
그 현을 타는 것을 쓰는 거라네 / 用其弦弦
음률 밖에 울리는 궁상 소리를 / 律外宮商
내가 그 참모습을 깨달았도다 / 吾得其天
소리로써 즐기는 것이 아니라 / 非樂之以音
음악의 소리를 즐기는 거고 / 樂其音音
귀로다가 소리 듣는 것이 아니라 / 非聽之以耳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거라네 / 聽之以心
음악 듣기 잘 하였던 저 종자기는 / 彼哉子期
어찌하여 내 거문고 소리 안 듣나 / 盍耳吾琴
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은 소황(蘇黃)의 뜻을 얻었으나,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합치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문사(文士)들 가운데 음영(吟詠)으로 상국(上國)에 알려지고, 우뚝하게 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을 전하여 향리에서 가르친 것은 서경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역시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은 비록 격이 낮지만 특별히 표목(標目)을 보존하여 그 사람을 드러내는 바이다. 《사고전서총목》

유근(柳根)의 《서경집(西坰集)》

○ 유근의 자는 회부(晦夫)이고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자호(自號)는 은병거사(隱屛居士)이다. 《서경집》이 있다. 《명시종》

이호민(李好閔)의 《오봉서소집(五峯書巢集)》

○ 이호민의 자는 효언(孝彦)이고 과거에서 탐화(探花)를 차지하였으며, 추상(樞相)을 지냈다. 《오봉서소집》이 있다. 《상동》

허균(許筠)의 《백월거사집(白月居士集)》

○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허봉(許篈)의 동생이다. 형과 더불어 모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자호는 백월거사이다. 문집이 있다. 《상동》

이달(李達)의 《손곡집(蓀谷集)》

○ 《손곡시집(蓀谷詩集)》은 6권인데, 지은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억석행을 읊어 정랑 신설에게 주다[憶昔行贈申正郞渫]’라는 시(詩)로 보아 만력(萬曆) 연간에 조선의 배신(陪臣)이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속국(屬國)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뒤에 이 시를 지어 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계(天啓) 연간에 총병(摠兵) 모문룡(毛文龍)이 피도(皮島)를 지키고 있을 적에 그에게 동국의 도적(圖籍)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이 문집을 구하여 보내왔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이달의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열조시집》에 손곡의 시 36수를 실으면서도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죽타(竹坨) 주이존(朱彝尊)의 《명시종(明詩綜)》에서는 이미 이달의 시 1수가 실려 있고, 또 손곡의 시 5수가 실려 있는데도 말하기를, ‘그 이름이 상세하지 않다’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시를 기록함에 있어서 소루하기가 이와 같은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최전(崔澱)의 《양포집(楊浦集)》

○ 최전의 자는 언침(彦沈)이고, 해주(海州) 사람이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양포집》이 있다. 《명시종》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

○ 정사룡의 자는 운경(雲卿)이고, 정진(鼎津) 사람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음초당집》이 있다. 《상동》

김안로(金安老)의 《명허헌집(明虛軒集)》

○ 김안로의 자는 이숙(頤叔)이고,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다. 《명허헌집》이 있다. 《상동》

김상헌(金尙憲)의 《조천록(朝天錄)》

○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조천록》이 있다. 《어양시화(漁洋詩話)》

이숙원(李淑媛)의 《옥봉집(玉峯集)》

○ 이숙원은 자호(自號)가 옥봉주인(玉峯主人)이며, 승지학사(承旨學士) 조원(趙瑗)의 첩이다. 문집이 있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조원은 호가 운강(雲江)이고, 시는 만당(晩唐) 시대의 것과 비슷하다. 소실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의 후예로, 호가 옥봉이며, 시 32편이 있는데 11편이 《열조시집》에 기록되었다.

허씨(許氏) 누이동생의 《난설헌집(蘭雪軒集)》

○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며, 그의 오빠는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상동》
살펴보건대,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과 한림(翰林) 양유년(梁有年)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둘 다 《난설헌집》의 소인(小引)을 지었는데, 그 글이 본 문집에 실려 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동인시화》 상권과 하권은 조선의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이 저술한 것이다. 《이칭일본전》

《황화집(皇華集)》

○ 《황화집》 30권 -내부(內府) 소장본(所藏本)이다.- 은 명나라 때 사신들이 창화(唱和)한 작품을 조선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천순(天順) 원년, 2년, 3년, 4년, 8년, 성화(成化) 12년, 굉치(宏治) 원년, 5년, 정덕(正德) 16년, 가정(嘉靖) 16년에 지은 시만 수록되어 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겨우 10년에만 그치지 않는바,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해지는 본(本)이 모두 같으니, 혹 사신들이 모두 시에 능하지는 못하여 이 《황화집》을 만든 자가 이에 그친 것인가? 《사고전서총목》
○ 진감(陳鑑)의 자는 즙희(緝煕)이며, 개주위(蓋州衛) 사람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한림 학사가 되었다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을 때 편찬한 《황화집》이 사람들에게 칭해진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살펴보건대, 진감은 천순 원년(1457, 세조3)에 고윤(高閏)과 함께 사신으로 나왔다.
○ 정지(靜之) 장영(張寧)은 해령(海寧) 사람이며, 호가 방주(方洲)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을 적에 조선 사람들이 존중하였는데, 그가 지은 글을 모아 판각하여 《황화집》을 만들었다. 《서호지여(西湖志餘)》
살펴보건대, 장영은 천순 4년(1460, 세조6)에 사신으로 나와 《황화집》을 지었는데, 우리나라의 최항(崔恒)이 서문을 썼다.
○ 조선의 병조 판서 어세겸(魚世謙)이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황화집》의 서문을 지었으며, 성현(成俔)의 시 4수를 기록하였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홍치 원년에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 지은 《황화집》이다.
○ 《황화집》은 2권이고, 《속집(續集)》은 1권이다. -안휘 순무(安徽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이다.-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가 정덕(正德) 16년(1521)에 세종(世宗)이 즉위한 데 대한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번신(藩臣)과 날마다 창화(唱和)하였는데, 조선의 국왕이 특별히 서국(書局)에 명하여 이 《황화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황화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嘉靖) 원년(1522, 중종17)에 의정부 좌의정 남곤(南袞)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며, 두 사신이 국경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 의정부 우의정 이행(李荇) 등과 창화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황화속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 원년에 쓴 이행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오직 당고가 국왕과 이별하면서 준 율시(律詩) 2편과 의정부 영의정 김전(金詮) 이하가 화답한 시만 실려 있다.
상고해 보건대, 당고가 사신으로 간 사실은 《명사(明史)》 본기(本紀) 및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종실록(世宗實錄)》에만 그 일이 8월 을사조에 실려 있다. 남곤이 쓴 이 책의 서문에 이르기를, “12월 을유에 왕경(王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명을 받든 때부터 거의 5개월이나 지난 뒤이다. 또 남곤이 쓴 《황화집》 서문에는 이르기를, “처음 서울에 들어온 때부터 국경을 나갈 때까지 겨우 30일 남짓하였는데, 기행(紀行)의 작품이라든지 높은 데 올라가 읊은 시가 약간 편이 있다.” 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황화집》 가운데 처음에 국경에 들어가서 지은 것으로는 당고의 ‘영훈루에 올라서[登迎薰樓]’라는 시가 있는데, 그 표(標)에 이르기를, “동지(冬至)로부터 10일 뒤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1월 14일이 동지였으니, 이 시를 지은 날짜는 24일이다. 그리고 국경을 나갈 때 지은 시로는 당고의 ‘안산에 이르러 번경(藩京)의 여러 군자들에게 회포를 부치다.[至鞍山寄懷藩京諸君子]’라는 시가 있는데, 표에 이르기를, “납월(臘月) 신축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2월 기묘일이 초하루이니, 신축일은 바로 이달 23일이다. 그러니 서문에서 창화한 것이 30일 남짓하였다고 이른 것과 서로 딱 맞아떨어진다. 《사고전서총목》
○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32)에 수찬으로 있던 명치(鳴治) 공용경(龔用卿)과 자순(子醇) 오희맹(吳希孟)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자 조선국왕이 배신(陪臣) 10인을 파견해 잔치를 벌이게 하였는데, 모두 시편(詩篇)을 지어 화답하여 동국의 일대 성사가 되었다. 이 《황화집》은 김안로(金安老)가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황화집》의 발문’에,
“본조의 시종신(侍從臣)들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면 으레 《황화집》을 짓는데, 이 《황화집》은 가정 18년(1539, 중종34) 기해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태호(泰號)와 황조(皇祖)와 황고(皇考)의 성호(聖號)를 올린 데 대해 조서를 반포할 적에 석산(錫山) 사람 수찬 화찰(華察)이 가서 조서를 반포하고 유시할 때 지은 것이다. 동국은 문체(文體)가 평탄하고 직설적이어서 사림(詞林)의 제공들이 격조를 폄하하기를 아끼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뜻을 붙인다. 그러므로 화려한 말을 쓰는 경우가 아주 적다. 배신(陪臣)들이 시를 지을 때에는 매번 두 글자를 가지고 일곱 글자의 뜻을 함축하는데, ‘나라[國] 안에 창[戈]이 없으니 한 사람이 앉아 있네.[國內無戈坐一人]’라는 시구와 같은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동파체(東坡體)라고 하는 것인데, 제공들은 이 시에 대해 수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학집(有學集)》
○ 가정 23년(1544, 중종39)에 태감(太監) 곽방(郭)과 화정(華亭) 사람인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중관(中官)이 함께 가 도중에서 수창한 작품이 없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올 적에 시를 봉해서 관반(館伴)에게 주고는 서로 더불어서 화답하였다. 그러자 이를 간행해서 《황화집》 1권을 만들었는데, 정사룡(鄭士龍)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가정 25년(1546, 명종1)에 행인 왕학(王鶴)이 책립(冊立)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조선 사람들이 《황화집》을 판각하였다. 그러자 국왕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후서(後序)를 짓게 하였다. 《열조시집》
○ 문목공(文穆公) 허국(許國)은 자가 유정(維楨)이다. 융경(隆慶)으로 개원(改元)한 뒤에 한림 검토(翰林檢討)에 제수되어 조서를 받들고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사신의 행차가 지나는 곳마다 경치를 감상하고 풍속을 살폈으며, 간간이 기술한 것이 있는데, 《황화집》의 ‘조기자(弔箕子)’라든지 ‘알단군(謁檀君)’ 같은 여러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고 있다. 《복숙산방집(復宿山房集)》

이상은 집류(集類)이다.


 

[주D-001]유릉(裕陵)이 …… 악보(樂譜)이며 :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한 것은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인바, 유릉(裕陵)은 영우릉(永祐陵)의 잘못인 듯하다.
[주D-00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의 서쪽, 찰합이(察哈爾)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03]화림(和林) : 수원성(綏遠省)에 있는 지명으로,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주D-004]10년 …… 행하였으나 : 이때 북원(北元)에서 두개달(豆个達)을 파견하여 경효대왕(敬孝大王) 즉 공민왕을 제사하자, 비로소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주D-005]방효유(方孝孺) : 원문에는 ‘方孝儒’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서전회선(書傳會選) : 명나라 태조가 채침(蔡沈)의 《서전》에 나오는 상위(象緯)의 운동과 주자(朱子)의 《시전(詩傳)》에 나오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는 천하의 유신들을 모아 정정하게 하여 만든 책이다.《明史 卷141 方孝孺列傳》
[주D-007]정몽주(鄭夢周)가 …… 알았으며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몽주유화증관역명(夢周猶和贈官易名)’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폭서정집》 권44에 의거하여 ‘몽주도이성계불극 위방원소살 방원유지증관역명(夢周圖李成桂不克 爲芳遠所殺 芳遠猶知贈官易名)’으로 바로잡았다.
[주D-008]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 원문에는 ‘忠肅王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09]이성계(李成桂) …… 말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其稱太祖太宗乃其臣子之事’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권14에 의거하여 ‘其稱李成桂李芳遠爲太祖太宗乃其臣子之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봉역도(封域圖) : 봉역(封域)은 제후가 분봉(分封)받은 지역이다. 봉역도는 제후국의 지도를 말하는데, 이를 바치는 것은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주D-011]지리도(地里圖) : 원문에는 ‘地理國’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12]조자(跳咨) : 인명인 듯한데,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주D-013]사지팔도(四至八到) : 사지는 동, 서, 남, 북을 말하고, 팔도는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을 말하는데, 옛날의 지리도서(地理圖書)에서는 이를 가지고 주현(州縣)의 방위나 거리를 표시하였다.
[주D-014]왜학(倭學) : 조선 시대 때 사역원(司譯院)에 딸린 일본어를 전문으로 학습하던 곳이다.
[주D-015]이로파(伊路波) : 일본어 학습의 기초가 되는 서적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하지 않고 지은 시인데, 한글로 발음이 표기되어 있다. 성종 23년(1492)에 간행한 본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6]소식(消息) : 일본의 서간문(書簡文)을 모은 책으로 보이며, 현재 일본에 있는 소식류(消息類)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가마꾸라막부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7]서격(書格) : 현존하지 않는 책으로, 내용을 알 수가 없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8]노걸대(老乞大) : 몽어학(蒙語學)의 학습서로,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내용은 중국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고려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 이외에 몽고어와 왜어로도 번역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9]동자교(童子敎) : 일본인의 초학(初學) 교과서로 14, 5세기경에 널리 읽혔으며, 그 내용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오언시(五言詩)로 읊고 그 오른쪽에 일본음으로 풀어쓴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0]잡어(雜語) : 현존하지 않는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1]본초(本草) : 송나라의 당신미(唐愼微)가 편찬한 의서(醫書)로, 여기서 말하는 《본초》는 일역본(日譯本)으로 보인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2]의론(議論) : 원문에는 ‘譏論’으로 되어 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의론》은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3]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 일본 어학 서적의 일종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4]정훈왕래(庭訓往來) : 14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일본어 초등 교과서로, 그 내용은 일본 무사들이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서간문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5]응영기(應永記) :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전기 사이의 전쟁터에서 쓰인 서간문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6]잡필(雜筆) : 중급 무사(中級武士)들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사항을 광범위하게 서술한 경구(警句)나 단문(短文) 등을 불규칙하게 배열해 놓은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7]부사(富士) : 부사평야(富士平野)의 사냥터에서 띄운 5통의 편지로 되어 있으며, 15세기 후기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8]갑인년(1794, 정조18) : 《대전통편》은 정조 8년(1784)에 편찬을 시작하여 정조 10년(1786)에 완성하였는바,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9]화개씨(和介氏) : 화기씨(和氣氏)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화기광세(和氣廣世) 때부터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그 의술이 화기정설(和氣貞說) 등으로 전해졌다.
[주D-030]단파씨(丹波氏) : 화기씨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로, 단파강뢰(丹波康賴) 등이 배출되었다.
[주D-031]단파강뢰(丹波康賴) :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912년에서 995년까지 살았으며, 《의심방(醫心方)》을 저술하였다.
[주D-032]경번(景樊) :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별호(別號)이다.
[주D-033]이동원(李東垣) : 동원은 금(金)나라 이고(李杲)의 호이다. 이고는 《주역》과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 《난실비장(蘭室祕藏)》 등을 저술하였다.
[주D-034]주단계(朱丹溪) : 단계는 원나라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의 호이다. 주진형은 의술에 아주 뛰어났으며, 《국방발휘(局方發揮)》, 《단계심서(丹溪心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D-035]칠정(七情) : 한의학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喜), 노(怒), 출(怵),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을 말하는데, 희가 지나치면 심장을, 노가 지나치면 간을, 사가 지나치면 비장을, 비가 지나치면 폐를, 공이 지나치면 신장을 손상시키며, 걱정을 오래하면 기가 막히고, 갑자기 놀라면 기가 위축된다고 한다.
[주D-036]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 : 부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맥으로 양맥(陽脈)에 속하며, 침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는 맥으로, 음맥(陰脈)에 속한다.
[주D-037]대황(大黃) : 1.5m가량 자라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북부 고산지대에서 나며, 성질이 차서 뿌리를 대소변이 불통하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쓴다.
[주D-038]부자(附子) : 바곳의 구근(球根)으로, 성질이 열(熱)하고 양기(陽氣)를 돋우므로 체온이 부족하여 생기는 모든 병에 쓴다.
[주D-039]대역(大易)의 …… 점괘 : 《대역》은 《주역(周易)》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예기치 않았던 병이다. 약을 쓰지 말라. 기쁨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40]남쪽 …… 경계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사람들의 말에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가 없다.’고 하니, 이는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주D-041]헌기(軒岐) :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그의 신하인 기백(岐伯)의 병칭이다. 황제가 기백으로 하여금 초목(草木)을 맛보면서 약초를 가려내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므로, 중국 의학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진다.
[주D-042]월(粵) : 고대에 월(粵) 종족이 살던 지방으로, 중국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3]반우(番禺)의 능어(凌魚) : 반우는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현의 이름이고, 능어는 청나라 사람으로, 자가 서파(西波)이고 《운재집(耘齋集)》을 저술하였다.
[주D-044]고려(高麗) : 여기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주D-045]서상잡영(西上雜咏) : 원문에는 ‘西上新咏’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46]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 : 원문에는 ‘恭定王’으로만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주D-047]실록(實錄) : 원문에는 ‘寶錄’으로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48]양백겸(楊伯謙) : 백겸은 명나라 양외(楊巍)의 자이다. 양외는 시를 잘 지었으며, 만력 연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존가시고(存家詩稿)》가 있다.
[주D-049]정위(鄭衛)의 음악 :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민간 음악으로, 난세(亂世)의 음악인데,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주D-050]하수(河水)와 …… 나오매 : 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도(圖)를 등에 업고 나왔으며,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다섯 점으로 된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주D-051]斤斤 : 원문에는 ‘斥斥’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52]강 상공(姜相公) : 강희안(姜希顔)을 가리킨다.
[주D-053]격양집파(擊壤集派) : 《격양집》은 송나라 소옹(邵雍)이 찬한 책이다. 시풍(詩風)은 백거이(白居易)에 근원을 두었는데, 대개 논리를 근본으로 삼고 수식을 말단으로 삼았는바, 억지로 교묘하게 읊는 것을 배격하였다.
[주D-054]교도(郊島) : 당나라의 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말한다.
[주D-055]궁상(宮商) : 궁은 슬픈 소리이고 상은 쇳소리와 같은 소리인데, 합하여 음률(音律)을 말한다.
[주D-056]종자기(鍾子期) : 옛날에 음악을 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列子 湯問》
[주D-057]소황(蘇黃) : 송나라 때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58]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학설로, 송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주D-059]주 장원(朱壯元) :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주지번은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왔다.
[주D-060]굉치(宏治) : 홍치(弘治)를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이 청나라 고종 때 편찬되었는데, 고종의 이름이 홍력(弘曆)인바, 황제의 이름을 휘하여 굉치로 쓴 것인 듯하다.
[주D-061]명을 …… 뒤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趾奉命幾五月也’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총목》 권39에 의거하여 ‘距奉命幾五月也’로 바로잡았다.

 

 

최덕지(崔德之)



○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스스로 존양당(存養堂)이라고 호했다. 우리 태종(太宗) 때 급제하고,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치적을 남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고, 시에 이름이 높았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암(靈岩)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때의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시를 지어 주기를
고향으로 돌아감은 은둔한 계책이 아닐 것이니 / 歸田非隱計
출처는 정히 이같이 하느니 / 出處正如斯
한주는 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종은 규공을 중히 여겼다오 / 唐宗重戣孔
강산은 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 / 猿鳥亦相知
종히 의리를 온전히 할 수 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이는 나의 스승인 것을 / 如公我所師
하였다. 〈본록(本錄)〉
○ 익산(益山) 수령이 되어 몸을 처신함이 검약(儉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세하고 밝게 하였다. 《명환록(名宦錄)》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성삼문(成三問)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자는 근보(謹甫)이고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스스로 〈독서암(讀書庵)〉이라 호하였다. 세종[英廟]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 3품 이하의 문관만이 응시하는 문과의 재시험)에 장원(壯元)으로 뽑혀 언제나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뫼셔 계옥(啓沃 임금을 깨우치고 돕는 것)한 점이 많았다. 세조[光廟]가 왕위을 물려받자 성삼문이 예방승지(禮房承旨)가 되어 국새(國璽)를 받들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박팽년(朴彭年) 등과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그의 부친 성승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성근보(成勤甫)는 찬란하고 호방(豪放)하였으나 시(詩)는 잘하지 못하였다. 용재총화
세종 임술년 여름에 망한 원(元) 나라 잔당들이 우리 나라에 글을 보냈으나 변방을 지키던 장수가 그 사신을 거절하고 입국시키지 않았다. 임금께서 친히 이변(李邊)을 보내어 이 일을 중국 조정에 알리니 성삼문이 서장관(書狀官 비서격)으로 수행하였다. 을축년 봄에 임금께서 성운(聲韻)을 크게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마침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학문이 있는데 요양(遼陽)으로 귀양왔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申叔舟)에게 가서 교정(校正) 받아 오라 명령하였는데, 성(成)선생 역시 함께 갔다. 그 해 가을 박연(朴堧)이 천자(天子)의 생일을 축하하러 북경(北京)에 가는데 신선생ㆍ성선생이 또 〈요양으로〉 갔다. 먼저 세 번째 갈 적에는 여러 선생이 모두 시를 지어 주었으나 뒤에 두 번째는 간혹 신선생과 합하여 지어 준 적이 있었다. 신선생이 요양(遼陽)에서 창화(唱和 남이 보낸 글에 맞추어 짓는 것)한 것이 몇 편 있었는데, 성선생이 이것을 모아 책 한 권을 만들어 노경(老境)에 한가하게 읽으려고 〈독서암한완(讀書庵閒玩)〉이라 이름하고 김수온(金守溫)이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붙였다. 본서(本序)
○ 임금이 내린 옷은 버리고 초야(草野)의 편복을 입었고 임금이 내린 역말은 두고 흰 채찍과 푸른 나귀를 탔다. 〈성삼문설원기(成三問雪冤記)〉
수찬 성삼문이 일찍이 어가를 호위하여 희우정(喜雨亭)에 가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라 강에 나가 달을 완상(玩賞)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세자인 문종(文宗)이 환관들에게 시를 구하려 귤(橘) 한 쟁반을 주었다. 귤이 없어지자 시가 나타나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영광으로 생각하고 각자 시를 지어 올렸다. 그 장면을 그려서 오래 전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신숙주가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의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였다. 본집(本集)
○ 병자년의 변고에 성삼문이 대궐 마당에 끌려 나갔을 때 신숙주를 보고 말하기를, “처음 그대와 집현전에 같이 있었을 때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집현전에 나와 산보를 즐기시면서 여러 학사들을 보고, ‘내가 죽은 뒤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애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 혼자 잊어버렸느냐?” 하였다. 다시 문초할 때 임금이 신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강희안(姜希顔)이 공술(拱述)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으니 임금이 묻기를, “강희안과 함께 모의하였느냐?”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정말 알지 못하오. 나으리[進賜]가 명사(名士)를 다 죽이니 이 사람은 남겨두었다 쓰는 것이 옳으리다. 정말 훌륭한 선비요.” 하여, 강희안이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하였다. 성삼문에게 형틀을 씌워 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임금이 친히 심문하기를, “너희들의 이번 일은 무슨 일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 지르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는 거요. 천하에 어찌 자기 임금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내 마음은 나라가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하여 묻는 거요?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뺏앗아갔소. 나는 남의 신하가 되어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거요. 나으리가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 주(周) 나라 성왕(成王)의 숙부로 어린 성왕을 끝까지 보좌했다)을 자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하니, 세조가 발을 구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위를 물려받을 때는 무엇 때문에 말리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나를 배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내가 처음 금지시킬 수 없었던 것은 형세상 그리하였소. 나는 기왕에 나아가서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을 알고 물러나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을 알았으나 헛되이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 때문에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 일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는 신(臣)이라 하지도 않고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너를 병방 승지에서 예방 승지로 바꾼 것은 그 일을 잘하라고 한 것인데, 말은 상왕(上王)을 복위시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上王)이 계시는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할 수 있소. 나는 사실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만약 믿어지지 않으면 나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계산해 보시구려. 나으리의 말씀은 모두 허망된 것으로 쓸데가 없소.” 하니,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를 시켜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찌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팔이 끊어져도 굴복하지 않고, 천천히,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구려.” 하고, 안색을 변하지 않으면서 쇠가 식자 말하기를, “다시 달구어 오너라.” 하니 또 팔을 끊었다. 부친 성승(成勝)과 동생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함께 죽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우리 세종(世宗)께서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그 나라의 음으로 된 글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 나라의 말을 적는데 우리 나라만 글이 없으며, 우리 나라의 음운(音韻)이 비록 중국과는 다르나 아(牙)ㆍ설(舌)ㆍ순(脣)ㆍ치(齒)ㆍ후(喉)ㆍ인(咽) 등 음과 음의 청탁ㆍ고저는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없다. 언문(諺文) 자모(子母) 28자를 짓고, 궁중에 국(局)을 설치하여 성삼문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시켜 수정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의 황찬(黃瓚)이 요동(遼東)에 귀양와 있어서 삼가 신숙주를 시켜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음운(音韻)을 질문하게 하였는데 무려 13번을 내왕하였다.동상
○ 문종이 동궁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이 잠든 뒤면 간혹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와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당시 성삼문 등은 숙직할 때에 밤이라도 감히 의관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鶴駕]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옷을 벗고 누으려다가 갑자기 문밖에 신발소리가 나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라고 부르면서 오니, 놀라 당황하여 얼떨결에 절할 정도였으니, 학문에 대한 근면과 신비를 좋아하던 마음은 천고에 드문 일이었다. 《용천담적기》
성삼문이 형벌을 받으러 수레를 타고 갈 때 그 집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삼문이 꾸부려 마시고 곧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임금이 내린 밥 먹고 임금이 주신 옷 입으며 / 食君之食衣君衣
예부터 먹은 마음 평생에 어김없기 바랐노라 / 素志平生願莫違
마음은 충과 효가 있을 뿐 / 心上但知忠與孝
현릉(문종의 묘)의 송백이 꿈에 아련하여라 / 顯陵松柏夢依依
하였다. 〈본전(本傳)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안색이 변하자, 공(公)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약 변고가 있으면 신은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낯빛이 평온해졌다. 《석담유사(石潭遺事)》

팔준도명(八駿圖銘) 병인(幷引) 동문선에서 나옴


혹독한 추위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오고, 급한 여울 아래에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기 마련이니 평화와 혼란이 서로 이어 내려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옛날 고려가 성하지 못하여 천명이 이미 가버렸으니 위에서 허물어지고 아래에서 쇠하여져 시랑(豺狼)을 풀어 놓아 길목에 앉아 있게 하고 문관과 무관이 안일하고 향락만을 일삼아 전쟁이 교외(郊外)에서 일어나게 되니 어리석은 백성은 도탄에 신음하게 되었다.
천하를 잃어버리니 조계박압지대업(操鷄搏鴨之大業)도 마침내 없어질 것이고 우(禹) 임금이 없었던들 백성들은 물고기가 되었을 것이니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책임은 뉘에게 돌아갈 것인가. 오로지 우리 태조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천년의 기회에 맞추어 상성(上聖)의 자질을 타고 났으니 실로 하늘이 낳은 덕이요, 신과 함께 모의하셨네. 한 번 크게 노하여 사악한 중을 몰아내니 사직(社稷)은 빈터가 되지 않았으며 만전(萬全)의 계획을 내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니 종묘(宗廟)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나하추[納哈出]를 쫓고 올랄(兀剌 두만강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 태산(泰山)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같이 쉬웠고 지리산(智異山)에서 싸우고 운봉(雲峯)에서 승리하니, 질풍(疾風)이 어찌 떨어진 잎사귀 하나 쓸기 어려우랴. 토동(兎洞)에 말 안장을 푸니 해로운 기운은 바다 밖에 사라지고 압록강에서 고삐를 돌리니 대의(大義)는 해와 별보다 빛났어라. 수십 회 전장에 출입하며 한 고조(漢高祖)처럼 상처를 만지시기 몇 번이며, 천만 리를 달리시니 촉 나라 선주(先主 유비(劉備))같이 넓적다리의 살이 빠졌어라. 남쪽을 치면 북쪽에서 원망하며 대국은 두려워하고 소국은 그리워하여 가는 곳마다 서로 경하하니 정말 그 공훈 크게 이루었도다. 5백 년 만에 성인(聖人)이 나시니 칠덕(七德)은 이미 5백 년을 가름하였고 삼천의 암말[牝]인 신물(神物)이 나왔으니 한결같은 마음은 삼천여 명이 맞았어라[允協於三千]. 달리는 발굽은 법도에 맞고 부드러운 마음은 사람을 순하게 하네. 마음은 간절히 진영에 돌아가고 싶고 지혜는 익숙하여 잃었던 길로 도로 찿네. 오늘의 액운은 노력으로 풀 수 있고 내 채찍 가리키는 곳 어디고 건너가네. 생사를 서로 의탁함이 가볍지 않으니 문무의 공이 더욱 드러나네. 수레 소리 장대한 모양은 주 나라 원마(騵馬)와 가지런하고, 말이 크고 살찐 모양은 어찌 노(魯) 나라 수말에 뒤지겠는가. 태을(太乙)이 정기를 모았으니 하늘의 보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고 구오(九五)의 때를 얻으니 곤(坤)의 정(貞)에 부합하여 하늘같이 끝없어라. 활과 화살을 활집에 거둬들이고 신음하는 소리를 노래 소리로 변하게 하였으며, 산과 물길로 남만(南蠻)에 통하고 북쪽 풍속이 관대(冠帶)를 쓰게 되었다. 만세의 도덕정치[垂衣]를 열었으니 하늘의 아름다움이 진실로 오늘에 이르렀고, 삼한(三韓)을 안정시켜 베개를 높이 베게 하니 임금의 덕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네. 이것은 비록 신무하심으로 사방을 정벌한 위엄도 크지마는 또한 준마(駿馬)들의 신통한 재주로 내달리는 효력을 얻은 덕도 있는 것이니 미물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할 것인가. 모두가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삼가 생각하면,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늘의 총명을 법받으시고 조상의 밝은 뜻을 이으셨네. 크게 어려운 일을 물려받아 뒤를 이어 어긋남이 없도록 생각하시고, 즉위하여 예교(禮敎)를 베풀고 차례를 계승하여 길이 잊지 않을 것을 생각하시며, 우러러 밭 이루고 집 터닦아 나라의 기초를 세우던 노고를 생각하사 매번 국을 대하고 담장을 볼 때마다 선조를 간절히 추모하셨네. 제왕의 업을 일으키는 것은 한 사람이 성공시키기 어려운 일이며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만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공신을 책봉하여 대려(帶礪)의 맹세가 단단하였고 동물에까지 미치는 개유(蓋帷)의 은총이 또한 융성하셨다. 그러므로 여러 공신은 이미 운대(雲臺)에 화상을 그렸으나 팔준(八駿)은 아직도 소릉(昭陵 종묘 다음 가는 묘)에 진열한 것이 없었다. 드디어 윤음을 내리어 그림을 그리게 하니 호두(虎頭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 같은 화가가 윗도리를 벗어젖히고 그리기 시작함에 용함(龍頷 용의 턱)이 몰려 바다에서 나왔도다. 줄줄이 붉은 피 같은 땀 흘린 공로 완연하고 화살이 흰 살에 박혔으니 전쟁 치른 늠름한 모습이라. 화가의 손에 따라 죽은 뼈도 살릴 수 있고 눈으로 보면 썩은 고삐[朽索]를 경계할 것이니 여러 자손들이 한가한 때에 이 팔준도(八駿圖)를 보면 부귀는 말 위에서 얻은 것을 알 것이다. 겹 방석 위에 앉게 되면 바람에 빗질하고 비에 목욕하던 시절을 상상하게 될 것이며 여덟 가지 진미를 대하더라도 콩죽과 보리 밥 먹던 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방탕하게 노는 것이 잠명(箴銘)함에 비유되고 산천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라고 여기리니, 대동팔준(大東八駿)의 그림 한 폭이 마땅히 《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七月 주 나라 건국을 노래한 시)편과 가지런한 것을 알 것이니, 아름답도다! 나는 새도 발꿈치가 변하고 튀어나오는 쥐가 수레를 망칠 수 있는 법이니, 주 목왕(周穆王)이 서왕모(西王母 곤륜산에 살았다는 신선으로 주의 목왕(穆王)이 선도(仙桃) 세 개를 얻었다 함)와 술 마실 때에 수레바퀴 자국은 온 누리에 가득하였고, 한(漢) 나라가 이사성(貳師城)을 포위하였을 때 나르는 수레가 지역 밖에 이르렀다. 말[馬]이 많다고 믿었으나 진(晉) 나라는 위험을 면할 수 없으며 말이 4천 필 되어도 제(齊) 나라는 일컬어지지 않았으니, 혹은 뜻을 잃어 덕을 더럽혔고 혹은 백성을 괴롭혀서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제왕의 법을 황폐하게 하여 뒷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아! 당(唐) 나라에 충성하고 수(隋) 나라에 간사한 것은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쓰면 호랑이가 되고 쓰지 않으면 쥐가 되가 되는 미물을 어찌 탓하리! 후일 왕께서 이 그림을 보시고 황조(皇祖)를 법도로 삼아 계승하실 것을 생각하시고 몇몇 그릇된 임금을 경계삼아 하루 이틀만이 아니라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 조선 만대의 복이도다. 신은 들으니 “선조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며,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크나큰 교훈이다.” 합니다. 선조에 착한 일이 있었어도 이것을 모르면 현명하지 못하고, 알고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공경하심이 선조를 높이시고 은혜 베푸시는 것이 미물에 미치시어 선조께서 일컬은 바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한 일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오늘날 사모하고 염려하는 회포가 한없이 아름다우며 또 한없이 근심하여 후손들이 지켜갈 법규로 삼으시며 효도와 공경이 아울러 융성하고 현명하시고 인자하심이 두루 갖추어지셨으니, 가송(歌頌)을 지을 때가 바로 이때이기에 찬양하는 말씀을 어찌 않을 수 있겠나이까. 그러나 신의 기술은 마치 금(黔) 땅의 나귀같이 짧고 한문은 노(魯) 자와 어(魚) 자를 구별할 수 없으니 연대(燕臺 연(燕) 나라 소왕(昭王)이 대(臺)를 짓고 현인(賢人)을 구하였다)에서 현명한 사람을 구하는데, 천리를 달려갈 재주가 없으면서 들어온 것이 부끄러우며 한 나라 궁문에서 조서를 기다리는데 잘못 일고지가(一顧之價 백락(伯樂)이 한 번 돌아보면 말 값이 올랐다)를 더하여 벼슬을 얻었으나 어리석고 둔하여 비록 멀리 갈 자격은 없으나 닭의 울음과 개의 짖음으로 그 능력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물며 성스러운 공을 널리 펴는 것이 당연한 직분이기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받들어 효성을 기술하여 기린(麒麟)의 덕을 만분지일이라도 노래하여 크나큰 아름다움을 미래에 전파하려 하나이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올리나이다.

외나무 횡운골(橫雲鶻)


횡운골이여 길들었고 건장하니 / 橫雲鶻閑且佶
만리의 피땀이이요 천금의 뼈로다 / 萬里血千金骨
소나기 같이 다리를 넘어 사라지듯 / 驟徒略彴滅若沒
높이 든 네 발굽은 한 번도 헛디딤 없어라 / 超據四足無一蹶
우리 태조 비바람 속에 고생하던 때 / 我祖辛勤沐以櫛
위험한 고비는 몇 번이나 같이하였던가 / 乘危幾時同倉卒
우리의 터전을 크게 닦아 오늘이 있으니 / 基我丕丕有今日
횡운골이여! 그 공 제일이로세 / 橫雲鶻功第一

유린청(游麟靑)


유린청이여 몸이 봉우리같이 우뚝 솟았으니 / 游麟靑體峯生
순하면서 굳세니 동의 영기로세 / 地之類銅之英
어진 상서 들춰내어 임금을 받들었고 / 振之仁瑞聖明
나이 들수록 기예도 성숙하네 / 齒歷延長藝老成
사방으로 간악한 무리들을 짓밟아 나라가 편안하네 / 四踣艱頑邦以寧
31년 그 영기를 빛내고 / 三十一祀耀厥靈
죽어서 돌구유 남아 있어 큰 이름을 떨치니 / 死有石槽留雄名
유린청이여! 그 덕 어찌 다 말하리 / 游麟靑德馬稱

추풍조(追風鳥)


추풍조여 오랑캐 땅에서 들어오니 / 追風鳥來自胡
나라의 보배요 천하에 둘이 없네 / 域中寶天下無
소리 타고 해를 좇아 허공에 오르니 / 乘聲逐日騰半虛
단번에 임금 은총 입었구나 / 一見特荷乾心紆
험난한 곳을 사람과 드나들어 / 入險濟難與人俱
신무를 도와 나라를 평정했네 / 替揚神武淸坤隅
소릉(당 태종)의 백제공과 비슷하니 / 昭陵白帝功爲徒
추풍조여! 하도복희 시대에 용마(龍馬)가 하도(河圖)를 지고 나왔다 함)에 응해 나았구나 / 追風鳥生應圖

발전자(發電赭)


발전자여! 용이냐 말이냐 / 發電赭龍邪馬
기예의 용무함 짝할 이 적으리라 / 藝之武匹也寡
제 그림자 돌아보며 머리 들어 한 번 우니 / 顧影長嗚脰一騀
기북(말의 산지)의 만필 말이 모두 아래로세 / 冀北萬匹材盡下
치달리면 법에 맞아 조금도 어김없어 / 馳驤合規無偏頗
채찍 한 번 휘둘러 사직을 안정시켰네 / 一鞭攸指定稷社
대동 천년이 길이 편안하리니 / 大東億載長帖妥
발전자여! 참으로 훌륭한 말이로다 / 發電赭吁駉者

용등자(龍騰紫)


용등자여! 천마의 새끼로다 / 龍騰紫天馬子
번개 같은 눈동자에 통 같은 귀로세 / 散電睛揷筩耳
달 가운데 영기를 받고 황하의 기운 모아서 / 稟靈月窟河聚氣
우리에게 진룡을 선사하니 변화가 귀신 같네 / 貺我眞龍化若鬼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생사를 의탁하여 / 久矣臨陣托生死
너긋하게 진흙 천지를 거부하지 않았네 / 容與一世泥淖地
공로는 적로가 단수(형주(荊州)에 있는 시내인데 유비(劉備)가 적로를 타고 액을 면했던 곳)를 뛰어 넘은 것과 같으니 / 功符的盧躍檀水
용등자여! 만년을 빛나리 / 龍騰紫光萬祀

응상백(凝霜白)


응상백이여 힘만 칭찬할 것이 아니로다 / 凝霜白匪稱力
크기도 크고 굳세고 슬기롭네 / 大有顒剛且淑
압록강 물 출렁이며 기슭은 천 길인데 / 鴨水湯湯岸千尺
흰 화살 날아가며 붉은 활 번쩍인다 / 白羽昕晣晣彤弓赫
밤을 비치는 광경이 휘영청 밝은데 / 照夜光景輝相燭
나부끼는 깃발이 발굽을 따라가네 / 央央義斾隨踠之
한 번 삼한을 돌아 백성의 뼈에 살을 부쳐 주었으니 / 一回三韓骨而肉
응상백이여! 싫어함이 없었어라 / 凝霜白而無斁

사자황(獅子黃)


사자황이여 가는 길 막을 이 없네 / 獅子黃行無疆
승상은 현명하고 장군은 강하였다 / 丞相明將軍强
하늘이 한 번 불어 기운 모아 상서를 내어 주어 / 天一翕聚呈厥祥
용의 새끼가 바다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네 / 龍媒闖然海之央
두류산(지리산) 바위마다 도적 기세 창궐한데 / 頭流岩岩賊氣張
한 번 뛰어 무용을 뽐낼 적에 칼 빛이 뒤따랐네 / 一超奮武隨劍光
적의 머리 산같이 베어 바치니 / 坐見獻級如崇岡
사자황이여 정말 훌륭하여라 / 獅子黃思斯戚

유현표(維玄豹)


유현표여 으르렁 소리 내며 사납다 / 維玄豹闞以虣
오래 적수 없었으니 뉘에게 비교하리 / 久無敵誰與
방성의 정기 모여 잠저에 비치더니 / 房星摛精潛邸耀
드디어 뛰어난 말이 태어났다 / 胚胎逸蹄殊踸踔
토동에 안장 푸니 신기한 공을 세웠으며 / 解鞍兎洞輸奇効
섬 오랑캐는 백 척 배가 한 척도 못 돌렸네 / 島夷百艘無回櫂
단청으로 그린 화상도 늠름하니 / 畫上丹靑凜惟肖
유현표의 위풍이 당당하여라 / 維玄豹之蹻蹻

차원부의 원한을 씻어준 응제 두 수[車原頫雪寃詩應製二首]


원 위에 거센 바람에 사기가 기우는데 / 原上風顚舍杞傾
반암에 맑은 물을 누가 보호하는고 / 半岩誰護舊雙淸
두어 굽이 물에는 오로지 두 여울물 있어서 / 數灣唯有二灘水
한결같이 네 악한을 소리치며 꾸짖는다 / 一樣喧訶四孼生
공이 스스로 주(註)하기를, “원(原)이란 송원(松原)과 마원(麻原) 두 재[嶺]를 말하며 우봉(牛峯)과 송경(松京 개성)의 경계에 있다. 차원부(車原頫)는 공리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하륜(河崙)이 악한 일 할 기미를 알고 평산(平山)으로 갔다. 사기(舍杞)는 차원부(車原頫)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정(恭定 태종(太宗))께서 마침내 차원부가 무고히 살해당한 것을 알고 노하여 하륜을 꾸짖기를, ‘나의 기(杞)와 재(榟 모두가 좋은 목재)가 이제 다 쓰러졌다.’ 하였다. 반암(半岩)이란 반산풍월(半山風月)로 매화(梅花)라는 뜻이며, 차원부가 있던 평산(平山) 수운암(水雲岩)의 동구(洞口)를 말한다. 차원부가 그곳에 살 적에 몇 그루의 매화를 바위가에 심어놓고 천 포기의 국화를 못 위에 심었다. 그래서 스스로 매화의 뜻을 취하여 그 골짜기에 사람은 없고 다만 매화와 국화의 두 가지 청신함만 있는 것을 길게 한탄한 것이다. 두 여울물이라는 것은 수운동(水雲洞)이 동북면(東北面)에 있는 것을 말하며, 네 악한[四孼生]이란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하륜(河崙)ㆍ함부림(咸傅霖)을 가리킨다.” 하였다.
봄산을 향하여 우는 자규에게 묻노니 / 哭向春山問子規
그 사람 무슨 일로 이 지경이 되었는가 / 幽人何事至於斯
어찌 알리, 어젯밤 용루의 나비 날아와 / 那知昨夜龍樓蝶
운암동 바둑판을 장난으로 휘저은 일을 / 飛戲雲岩洞局棊
공이 스스로 주(註)하기를, “자규에게 묻는다는 것은 시인의 뜻이다. 그 사람[幽人]이란 차원부(車原頫)를 두고 한 말이고 용루의 나비란 태조께서 꿈에 차원부를 보았다는 뜻이다. 날아와 운암동의 바둑판을 희롱하였다는 것은 나비가 날아와 차원부의 바둑 두는 것을 휘저어 희롱하였다는 뜻이다. 차원부는 본시 처사로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바위 골짜기에다 집을 짓고 서너 명의 형들과 더불어 도[天眞]를 닦고 있었다. 태조가 나라의 근본인 중대사를 의논하려 하였으나 미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아쉬워할 적에 갑자기 꿈을 꾸고 깨달은 점이 있었다. 과거에 위화도 회군을 의논하였을 적에 다섯 번의 칙서(勅書)를 내려 한 달에 사흘은 방문해 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자(庶子)가 적자(嫡子)를 싫어하는 태자들의 난이 일어나게 되어 네 형(兄)과 함께 주살되고 말았으니 이때의 사실을 누가 감히 명백하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또 중병이 있어서 마음과 정신이 어지러워 실수가 많아 평상시의 일을 기억하려 하나 잊어버리고 보답하지 않았다. 그 많은 은총에 보답 하나 못하였으니 신이 만 번 죽어도 죄를 용서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차원부가 원을 풀게 되었으니 어찌 시운의 성쇠에 따른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오로지 성상께서 선대의 유의(遺意)를 이어서 살펴보신 결과인 것이다.” 하였다.

동자습서(童子習序)


동방에 있는 우리 나라는 해외에 있기 때문에 말이 중국과 달라 통역을 하여야만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대 임금부터 대국을 지극하게 섬겨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관장하게 하고, 사역원을 두어 통역을 관장하게 하여, 각기 그 본업에 전념하며 오래도록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니 그 생각이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자의 음을 배우는 사람들이 계속 전해 내려와 이어받는 지 오래되어 잘못되고 틀린 것이 점점 많아져서 종(縱)으로는 사성(四聲)의 빠르고 느린 것이 문란하고, 횡(橫)으로는 7음(七音 순(脣)ㆍ설(舌)ㆍ치(齒)ㆍ아(牙)ㆍ후(喉)ㆍ반설(半舌)ㆍ반치(半齒))의 청탁을 잃게 되었는데, 또 중국의 학자들이 옆에서 바로잡아 주는 일도 없기 때문에 비록 노숙한 학자나 익숙한 역관이라도 일평생 그대로 따라가 마침내 고루하게 되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文宗)께서 이것을 걱정하시고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소리는 이것으로 적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여 중국의 음(音)을 바로잡고 또 그것으로 《동자습(童子習)》을 직해(直解)하니 번역한 뜻이 평탄하고 부드럽게 되어, 중국말을 배우는 입문서가 되었다. 지금 부승지 신숙주(申叔舟)ㆍ겸승문원교리(兼承文院校理) 조변안(曹變安)ㆍ행예조좌랑(行禮曹佐郞)ㆍ김증(金曾)ㆍ행사정(行司正) 손수산(孫壽山) 등에게 명하여 정음(正音)으로 한자의 뜻을 옮기도록 하여 글자마다 밑에 가늘게 쓰게 하였으며 또 방언을 써서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 이어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ㆍ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등에게 명하여 이 일을 감독하도록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하(金何)ㆍ경창부윤(慶昌府尹) 이변(李邊) 등을 시켜 의심스러운 것을 증명하게 하여 마침내 이두 책의 음과 뜻이 명확히 드러나서 마치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였다. 통탄스러운 일은 책이 겨우 이루어지자마자 활과 칼을 계속하여 버리신 것이다. 세종ㆍ문종이 승하한 것 삼가 금상전하(今上殿下 단종)께서 즉위하신 초에 선왕(先王)의 뜻을 추모하여 급히 책을 간행하도록 하시고, 또 신 삼문(三門)도 교열에 참가하여 서문을 쓰라고 명하셨다.
신이 생각하건대, 사방의 말이 비록 남북이 서로 다르지만 말의 소리가 아(牙)ㆍ설(舌)ㆍ순(脣)ㆍ치(齒)ㆍ후(喉)에서 나는 것은 남과 북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알면 말의 소리가 어려울 것은 없다. 우리 동방에서 나라가 생긴 지 몇 천 몇 백 년을 지나 사람들은 날마다 말을 쓰고 있으나 우리에게 7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7음마저 모르는데 하물며 청탁과 경중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한어(漢語)가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책이 번역되어 칠음(七音)과 사성(四聲)이 입만 벌리면 자연히 분별되고 종으로 횡으로 서로 정연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옆에서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무슨 걱정될 것인가. 학자가 먼저 정음 몇 자만 배우고 다음에 이 책을 읽어 열흘 동안이면 한어를 통할 수 있으며 운학(韻學)도 명백하여져서 대국을 섬기는 일은 이로써 다 될 것이다. 두 성인(聖人 세종ㆍ문종)이 제작하신 오묘하심은 백대에 높이 뛰어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은 하늘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잘 보호하는지극한 계획이 아님이 없으니 우리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잘 이으시고 잘 실행하시는 아름다움도 또한 지극하도다.

최 주부가 봉양하려 귀향함을 전송하는 시의 서문[送崔主簿歸養詩序]


나의 벗 최지보(崔智甫)는 근실하고 정성스러운 사람이다. 나와 서로 알게 된 것은 계축년 봄부터의 일로, 그 당시에는 최후(崔侯 지보(智甫))의 부친이 서울의 저택에 있어서, 최후가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효성이 지극하여 맛있는 음식을 잘 받들면서도 언제나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같이 생각하였다. 내가 때로 왕래하며 이것을 목격하고 정말 최후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때부터 교제가 더욱 두터워졌다. 지금 그 아버지는 양지(陽智)의 촌가(村家)에 가 계시는데, 내가 최후에게, “왜 모시고 와서 봉양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더니, 최후는 슬픈 듯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가 거기 계시는 것이 그 마음이 편하시기 때문이니, 내가 그것을 어기지 못한다.” 하고, 곧 조정에 고하여 그 직위를 떠나서 처자를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전 예문관 직제학 최선생이 먼저 사운시(四韻詩)를 지어서 그의 가는 것을 노래하니 내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공경하면서 서문을 써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여러 성스러운 임금께서 서로 이어서 효도로 다스렸기 때문에 대부(大夫)나 사(士)의 어버이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버이의 나이 많아지면 돌아가 봉양하겠다는 뜻을 들어주어 어버이된 사람들로 하여금 봉양을 받게 하고, 자식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 효심을 다하게 하니, 임금께서 늙은이를 늙은이답게 대접하여 효도를 진작시킨 것은 그 은혜가 지극하도다. 다만 자식된 사람이 공경하게 그 덕의(德義)를 이어 받들고 내 마음의 정성과 공경을 일으켜 돌아가 봉양하는가 안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보니, 사대부 중에 높은 관을 쓰고 홀(笏)을 단정하게 하고 천천히 걷고 느릿느릿 행동하는 것이 마치 아무 근심없이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어버이를 사별하여 발을 구르며 통탄하며 비로소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아아! 어버이가 집에 계실 때 돌아가 봉양하여야 하는 것을 누가 하지 못하게 금하여서 하지 않았으며 누가 가지 못하게 말려서 가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치고, 돌아가 봉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며 돌아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일인 줄 누가 모르리오. 그러나 금지하지 않는 데도 하지 않으며, 말리지 않는 데도 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마음으로 흠모하는 것이 이 벼슬에 있기 때문이다. 자식된 사람이 이 벼슬을 흠모하지 않는다면, 현명하고 효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崔侯)의 가는 것을 따를 수 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최후의 가는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이 이처럼 공경하도록 하겠는가.” 하였다.

팔가시선서(八家詩選序)


내가 하루는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지은 《당송팔가시선(唐宋八家詩選)》을 얻어 와서 향을 피우고 옷을 단정히 하고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는 삼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시체(詩體)는 고금의 변함이 있으나 학자들이 다 같이 배워서 만세에 바꿀 수 없는 것이 네 가지 체(體)가 있으니 아송(雅頌)ㆍ소사(騷些)ㆍ고시(古詩)ㆍ율시(律詩)가 그것이다. 소위 아송이란 것은 성인의 손에서 나와 만세의 교훈을 세운 것이며, 소사(騷些)는 곧 주자(朱子)가 주해한 초사(楚辭)이며, 고시는 곧 유리(劉履)의 선시(選詩)로 세상의 학자들은 또 그 계통을 알고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율시(律詩)에 있어서는 그것을 뽑은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며, 모두 푸른 것을 뽑아 흰 것에 배합하는 식으로 부드러운 살과 연한 뼈만 찾는 것을 숭상하고 있으니 훌륭한 군자로서는 탐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선집을 보니 팔가(八家) 이외 다른 사람들의 작품은 모두 싣지 않았다. 선택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정밀하고 엄정하여 일반적인 것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멀고 작자 또한 많은데 지금 단지 팔가(八家)의 시에만 그쳤으며, 팔가 가운데서도 몇 수만을 고르는데 그쳤으니 어떤 사람들은 넓게 취하지 못한 것을 의심할지 모른다. 대체로 좋은 옥을 산출하는 곳이 곤륜산(崑崙山)만이 아닌데, 천하에 옥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곤륜산을 제일로 삼기 때문에 곤륜산이 천하에서 옥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것이다. 곤륜산 옆에 있는 사람들은 까치를 잡는 데도 옥돌을 사용하니 옥이 정말 많은 것이다. 그러나 옥을 캐서 갖는 것은 반드시 그 빛깔이 온아하고 윤택하며 옥결이 치밀하고 부드러워 밤[栗] 같으며 그것을 두드리면 소리가 맑고 길게 여운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니, 옥을 선택하는데 오묘한 점이 있다. 군자가 취하는 것 또한 이것과 같은 것이다. 시를 지은 것이 정말 성정(性情)에서 출발하여 풍속과 교화에 관한 것이 아니며 선과 악이 사람을 징계하고 권고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취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아아! 시는 주 나라에 와서 극성하였으나 성인이 교화를 위하여 선택한 것은 단지 3백 11편이면 충분하였고, 굴원(屈原)ㆍ송옥(宋玉)ㆍ소무(蘇武)ㆍ이릉(李陵) 이후로 시와 부(賦)를 짓는 것이 주(周) 나라의 배가 되었어도 주자와 유씨(劉氏)가 교록(校錄)한 것이 또 많지 않았으니 시가 어찌 많다고 좋은 것이겠는가.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아! 만세(萬世)의 장벽(墻壁)을 뚫어서 학자들로 하여금 밝은 길로 인도한 것은 부자(夫子 공자)가 시를 산삭하신 공이다. 초사와 시선을 만든 것도 모두 아송(雅頌)을 도와서 성교(聖敎)에 큰 공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선집(選集)은 명현(名賢)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모아서 시학(詩學)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지금 사람과 장래 사람들로 하여금 시와 소(騷)의 여운을 알게 하여 느껴서 분발하고 경계하여 징계된다면 이 역시 성현의 뜻인 것이다.” 하였다. 삼문(三問)이 직접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글을 썼다.

두보의 시운을 써서 신범옹 신숙주 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申 泛翁 申叔舟]


삼한 서북땅은 의주인데 / 三韓西北是義州
긴 강이 만고토록 성 아래 흐르누나 / 長江萬古城下流
청춘에 이곳을 지나는 것 벌써 두 번인데 / 靑春過此己云再
다음 세 번째는 가을에 갈 것 같다 / 第三行色如在秋
그대 이 걸음이 응당 잦을 것이니 / 君之此行應頻頻
이 걸음 잦은 것을 그대 근심말지어다 / 此行頻頻君莫愁
하루아침의 근심이 어찌 군자의 근심이리오 / 一朝患豈君子患
종신의 근심이 장부의 근심이라 / 終身憂是丈夫憂
입으로는 주공 공자의 말을 하며 손에는 시서를 놓지 않고 / 口談周孔手詩書
행차에는 살찐 말이 있고 추위에 가벼운 갖옷이라 / 行有肥馬寒輕裘
마음가짐 그대는 쇠같이 굳건하니 / 操心君可堅似鐵
일을 만나면 그대는 갈쿠리같이 굽지 말라 / 遇事君休曲如鉤
곤궁하여도 마음을 편히하여 천명을 즐길 것이요 / 窮也慰慰樂天命
나아가면 마음 넉넉하여 나라의 정사를 펼 것이다 / 達則優優敷國政
독선과 겸선은 궁과 달을 따르시니 / 獨善兼善隨窮達
군자의 한결같은 덕이 어찌 성하지 않는가 / 君子一德豈不盛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치다 [附泛翁次韻]


그대의 재주와 명성 중국 천지 흔들어서 / 吾子才名動神州
중화인도 벌써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아네 / 華人已識非凡流
시상과 글씨는 대적할 이 없고 / 詩腸筆陣莫如敵
인품은 노성하였으나 연세는 젊었어라 / 器宇雖老富春秋
사방을 경영할 장한 뜻 어릴 적부터 품고 있으니 / 桑弧壯志自齠齕
가슴에 어찌 이별의 슬픔 있을 건가 / 胸中肯遣生離愁
객창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은 적 없으니 / 客窓卷帙手不釋
요순 같은 군신 되려 항상 근심을 품네 / 堯舜君臣常懷憂
청운의 발걸음 하늘 길 트여 있고 / 靑雲步武天路遠
전해오는 가업을 계속하여 이어오네 / 家業人道傳箕裘
음운을 탐구함이 뉘 가장 앞섰던가 / 探音究韻誰最先
먼 것도 따오고 깊은 것도 찾아낸다 / 遠亦摘之深亦鉤
스스로 궁과 달은 운명이 있다고 말하니 / 自言窮達天有命
궁하면 자신을 지키고, 달하면 정치하네 / 窮來自守達聞政
원하노니 이제부터 그대 더욱 노력하여 / 願子從今更努力
공업을 청사에 크게 적게 하라 / 功業書之靑史盛

범옹이 두보의 시운을 써서 지은 시에 차운한 시[次泛翁用工部韻]


나그네 혼이 어찌 어둑한 듯 녹아날까 / 客魂那用黯然銷
모이고 흩어지는 구름 바람에 떠간다 / 聚散雲在風中漂
좌중에 오랑캐 장사치 돈을 자랑하며 / 座上商胡弄緡錢
나를 꼬이고 나에게 오만 부리며 말에 교만함이 많구나 / 財我傲我言多驕
그 중에도 한 둘은 문자를 알아 / 中有一二識文字
나를 좋아하여 술 사들고 찾아온다 / 愛我携酒來相要
창자 채울 것으로는 싣고 온 쌀이 있고 / 撑腸只有駄來米
땔나무도 좋아서 객중에 걱정 없다 / 薪桂客中難蘇樵
험하고 평탄한 것 만남을 따라 자리 정하면서 / 險夷隨遇爲之所
자유스럽게 휘파람 길게 불며 여사에 누웠구나 / 偃蹇長嘯臥逆旅
10년 한학 무슨 소용된단 말인가 / 十年漢學知何用
지금에야 겨우 한두 마디 얻었노라 / 今來只得二三語
고향에 돌아갈 제는 은ㆍ근 두 글자 변별하리니 / 還鄕應辨銀根二
형제와 붕우들이 허락하여 주리라 / 弟兄朋友許相許
아서라 천운이 이와 같으니 / 已哉天運苟如此
술 더 내고 안주 들자 / 且添罇酒添魚煑

두보의 시운 써서 범옹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泛翁]


산 것은 뜬 구름 같고 죽으면 그만인데 / 生也如浮死也休
인생 백년을 어찌하여 오래 오래 근심하리 / 百年何必長愁憂
요동의 여관에는 아무런 할 일 없어 / 遼東館裏一事無
며칠을 술 주전자와 서로 머뭇거리누나 / 數日罇酒相淹留
인생이 이쯤 되면 저절로 즐거우니 / 人生如此自有樂
무엇하러 방외(세상밖)의 단구(신선)를 구할건가 / 不用方外求丹丘
마른 웅어 거친 밥이 내 허기 채워주는데 / 脩鱅蔬糲飽我飢
항차 도서가 있어 맑고 아담한 것 제공하네 / 況有圖書供淸幽
하늘과 땅은 넓고 이 몸은 작은 것이 / 乾坤納納此身小
마치 아홉 소에 한 털이라 / 正如一毛傳九牛
귀한 것도 운명이요 천한 것도 운명이니 / 貴也命也賤也命
귀하다는 것 반드시 왕후로 봉함을 받는 것 아니리라 / 所貴未必封王侯
옛 성현과 통달한 선비 지금 어디 있나 / 古來賢達今何處
긴 노래 한 곡조에 마음만 유유하다 / 長歌一曲心悠悠
간 곳마다 주인이 날 취하게 하니 / 在在主人能醉我
누가 나그네 설움 알겠는가 / 誰知客裏悲貂裘
요순 같은 군신 내 힘으로 안 되는 것 / 堯舜君民非我力
빛나는 좋은 선비들 왕국에 가득 찼다 / 藹藹吉士多王國
내 몸 춥지 않고 배마저 안 고프니 / 吾身不寒腹不飢
성대의 포난이 이만하면 만족하지 / 聖代飽煖亦自得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록하다[附泛翁次韻]


인생 만사 쉬는 것만 못하나니 / 人生萬事莫如休
세상의 무슨 일이 근심 없을쏘냐 / 世間何事無愁憂
광음은 흘러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고 / 光陰倏忽東流水
태양은 어찌 날 위하여 머물겠는가 / 白日爲我寧淹留
나이는 삼십인데 살쩍은 반백이요 / 年來三十鬂毛班
단약(신선이 되는 약)을 찾으려도 단구를 찾을 길 없네 / 還丹無處尋丹丘
객중에 찌푸린 눈썹 누구와 펴볼꺼나 / 客中雙眉誰與伸
다행히 하산(성(成)씨의 본관)이 있어 그윽한 정 읊어보네 / 幸有夏山吟淸幽
거칠고 졸렬한 내 재주로 기이한 칼날과 맞서보니 / 欲將荒拙當奇鋒
천균(1균은 30근)같이 무거워서 아홉 소를 돌리는 듯 / 千鈞撞回九牛
하산의 재주 본시 대적할 이 없어서 / 夏山才調木無敵
천 수의 시를 지어 왕후라도 경멸하네 / 詩成千首輕王侯
여사로 시를 지어 심오하게 달통하였는데 / 餘事聲韻通幾微
부끄럽다 내 재주 거칠어서 부질없이 이렁저렁 / 愧余魯莽空悠悠
다만 술잔 있어 즐거울 수 있으니 / 只有杯樽可爲樂
요양의 봄 술을 돈피[제일 좋은 모피(毛皮)] 갖옷으로 바꾼다 / 遼陽春酒捐貂裘
명성이 중화에 떨치는 것 어찌 나의 힘이겠는가 / 名動中華豈我力
예의의 우리 나라에 힘입었네 / 禮義每賴吾王國
태평 세월 떳떳하여 남과 북이 따로 없어 / 太平有常無南北
객창에서 너와 함께 여전히 만족하려 하네 / 客裏與爾還自得

삼가 유별시에 차운하여 중국 사신 내한 예겸을 전송하다[敬次留別韻奉送 天使倪內翰


서로 만난 그날로 마음을 알아 즐겁고 / 相知卽日喜心知
이별 뒤에 서로 생각하는 것 얼마만한 세월인고 / 別後相思問幾時
학령(요동의 산)에 구름 차서 섣달 눈 쌓였는데 / 鶴嶺雲寒仍臘雪
압록강 푸른 파도 벌써 봄 자취로다 / 鴨江波綠已春姿
비단 주머니는 단지 해노(종)의 줍는 것 없을 뿐 / 錦囊只乏奚奴拾
말 술은 원래 번쾌(한 고조(漢高祖)의 신하)의 사양이 아니라 / 斗酒元非奱噌辭
천리 길 그대 보내는 오늘의 마음 / 千里送君今日意
남포(이별하는 곳을 말함)에 한 잔술로 차마 못 헤어지네 / 一杯南浦忍分離

내한 예겸의 시를 부록하다[附倪內翰韻]


해상에서 서로 만나 즉석에서 친구 되어 / 海上相逢卽故知
한가한 담소에 매양 시간 가는 줄 몰랐어라 / 燕閑談笑每移時
같은 마음은 금난계를 맺었고 / 同心好結金蘭契
서로 시를 읊으니 옥수같은 자질이 어여쁘다 / 共吟偏憐玉樹姿
감히 양웅이 글자 많이 안다 하겠는가(자신을 비유한 말) / 敢謂楊雄多識字
본래부터 자우(춘추시대 정(鄭) 나라 사람)가 수사 잘하는 줄 알았어라(상대방을 찬양하는 말) / 雅信子羽善修辭
강가에는 이별의 정 견딜 길이 없어 / 不堪別袂臨江渚
동풍에 말을 멈추어 이별을 원망한다 / 勤馬東風怨別離

최 제학 덕지 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 德之 還鄕]


전원에 돌아감이 은둔의 계교 아니로세 / 歸田非隱計
나오고 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 出處政如斯
한 나라 임금께선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 나라 조정에선 공규를 중시했네 / 唐朝重孔戣
강산이 그를 기다리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도 또한 알아주네 / 猿鳥亦相知
처음에서 끝까지 의리를 다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사람 바로 나의 스승일세 / 如公我所師
최덕지(崔德之)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여 누차 고을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을 쌓았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로 이름이 났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영암(靈巖)에서 늙으려 하니, 당시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희현당 책에 제(題)하기를,
이윤(伊尹 탕(湯) 임금을 도와 상(商) 나라를 세운 어진 신하)의 자임하는 것과 안회(공자의 수제자)의 현명함으로 / 尹之任回也賢
혹은 즐겁게 요순의 도를 즐기고 / 或囂然而樂堯舜
혹은 길게 한숨 쉬며 높고 굳은 경지를 탄식하였다 / 或喟然而歎高堅
이 같은 행동하면 역시 이 사람이 되거늘 / 有爲亦若是
내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하리 / 余何獨不然
하였다.

범옹이 두보의 시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지맥은 요동 경계에 이어졌고 / 地脉連遼境
강 흐름은 바다 어구에 접하였다 / 江流接海門
고기잡이와 나무꾼은 언제나 곳곳에 모여 있고 / 漁樵常頓頓
꽃과 버들은 동산을 이뤘구나 / 花柳自園園
이슬이 무거우니 붉은 꽃은 언덕에 기대었고 / 露重江欹岸
불타고 남은 곳은 푸른 풀이 무성하다 / 燒殘綠遍原
봄빛이 멀리 바라보게 하니 / 春光供遠矚
산에 나무는 점점 번성해 가는구나 / 山木漸成繁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의주는 큰 진으로 / 義州爲鉅鎭
나라 서문의 자물쇠 같아라 / 鎖鑰國西門
혹독한 추위에 봉화 오르지 않고 / 極寒無烽燧
농촌은 밭과 동산 안고 있네 / 村居按圃園
백성이 편안하여 밤에 문을 열어놓고 / 民安開夜戶
보리는 피어나서 봄의 언덕 컴컴하네 / 麥秀暗春原
나그네의 감상은 시절 따라 일어나니 / 客子感時物
꽃은 시들면서 녹음이 짙어간다 / 紅殘綠漸繁

범옹이 두보 추청(秋晴) 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秋晴韻]


꽃에 눌려진 물은 거울 같고 / 花壓水爲鏡
가는 풀을 바람이 빗질하네 / 草纖風作梳
맑은 흥취 시절따라 일고 / 淸興因時得
그윽한 수심 술로써 제거한다 / 幽愁用酒除
삼춘은 나그네 길에 남아 있고 / 三春殘客路
한 달 지났어도 집의 편지 아직 없네 / 一月隔家書
시구마다 선생이 걸출하여 / 句句先生傑
읊을 제마다 못 따름을 부끄러워하네 / 吟吟愧不如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 [附泛翁元韻]


객창에 도리어 일이 많아 / 客裏還多事
머리는 게을러서 한 달에 한 번 빗네 / 頭慵一月梳
산빛은 창문으로 들어오고 / 山光侵戶牖
풀빛은 뜰 위로 올라오네 / 草色上庭除
근심에 드는 술잔 이제사 익어가고 / 慣把澆愁酒
멀리 보내는 편지에 시름을 담아보네 / 憂緘寄遠沓
타향이 강 북쪽 이곳이니 / 他鄕江北是
내일은 또 어떠할꼬 / 明日更何如

범옹이 두보 중소(中宵)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中宵韻]


지금 사람 옛날의 도를 버려 / 今人棄古道
귀하고 천한 것 가리어서 친하고 소원하구나 / 貴賤作親踈
몸은 세상에 기생하는 것임을 알았으며 / 已識身如寄
이름은 또 헛된 것을 이제사 알았도다 / 從知名又虛
성밖은 요양 길이요 / 城外遼陽路
쟁반에는 패수의 생선일세 / 盤中浿水魚
창자를 채울 것이 무엇이 있나 / 撑腸何所有
가득 쌓인 다섯 수레의 책이네 / 磊落五車書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의주진 1천 집에 / 義州鎭千戶
말도 타고 소도 잘 쓴다 / 騎馬能射疏
풍월은 읊는 중에 지치고 / 風月吟中困
강산은 눈 아래에 비었구나 / 江山眼底虛
단지 잔에 술 있는 것 알 뿐이요 / 但知杯有酒
먹는데 생선 없는 것 탄식 않노라 / 不歎食無魚
끝내는 활과 칼을 쓰게 되니 / 畢竟趨弓劍
지금까지 글을 읽은 것이 잘못이네 / 從來誤讀書

범옹이 두보 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여관 생활 한가하여 담소함이 말숙하나 / 旅館乘閑笑語淸
오래 묵게 되니 의주성이 싫증나네 / 留連猶厭義州城 /
꽃 지니 봄 가는 것이 언제나 애석하고 / 花殘每惜春光老
구름 일어나니 나그네 시름 금할 길 없다 / 雲起難禁客恨生
돌아갈 길은 산이 깊어 궁벽한 곳으로 다니고 / 去路山深從地僻
돌아갈 날 임박하니 하늘 맑기 소원일세 / 歸心日迫願天晴
동서남북 다니면서 무엇을 하는가 / 東西南北何爲者
뜬 세상 뜬 인생이라 이름도 소용없네 / 已識浮生不用名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긴 압록강 객창에도 맑았는데 / 鴨綠長江客裏淸
나팔 소리 비장하게 변방의 성을 흔들도다 / 角聲悲壯撼邊城
취중에 그윽한 흥은 춘삼월에 저물었고 / 醉中幽興三春暮
보이는 곳 높은 구름 만리에 솟아난다 / 眼底高雲萬里生
오늘은 채찍 들고 곧장 가지마는 / 今日一鞭直去住
내일 아침은 여덟째 역에서 맑고 흐림 기다린다 / 明朝八站候陰晴
재주 없어서 스스로 헛되이 늙은 것만을 한탄하며 / 才疎自恨年空老
요동을 향하여 이름 말하기도 부끄러워하노라 / 羞向遼東說姓名

두보 시운을 써서 범옹과 자후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泛翁子厚]


요양으로 돌아갈 길 바라보니 아득한데 / 遼陽歸路望中遙
가는 말에 채찍 치며 성스러운 조정 기원한다 / 策馬行行願聖朝
흐르는 물결이 번쩍이는데 짧은 젓대 불고 / 流水波飜吹短篴
먼 하늘에 처절한 저 소리는 구슬픈 퉁소로다 / 遠天聲切動悲簫
다행히 이 시대 세상이 통일됨을 만났으니 / 幸逢今日車同軌
고려 사람 부질없이 다리 놓은 것 웃었노라 / 閑笑麗人浪作橋
이곳은 삼한의 서북 끝 / 此是三韓西北極
백성들 나무하며 희희낙락 즐거워함을 기쁘게 여긴다 / 喜看糄戶樂蘇樵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록하다[附泛翁次韻]


굽이진 압록강 하늘같이 아득하고 / 鴨江縈紆天與遙
동쪽 향하고 백 번 꺾여 바다로 향하는 듯하여라 / 向東百折若宗朝
봄바람 한가한 정취 방초에 둘려 있고 / 春風閑趣回芳草
먼 나그네 시름을 퉁소에 의지한다 / 遠客歸心寄短簫
오늘은 외로운 배 계수나무 삿대 저어가고 / 今日孤舟遙桂棹
초봄에는 한 죽장으로 얼음 다리 밟았었네 / 初春一篳踏氷橋
장하도다, 천연적으로 참호되어 동북을 나눴는데 / 壯哉天塹分東北
강가의 마을 노래 소리는 해 저문 나무꾼일레 / 江上村歌日暮樵

범옹이 서울 제공들의 송별시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京洛諸公送行韻]


나의 학문이 그대처럼 정밀치 못함이 부끄러운데 / 慙余學未似君精
요양의 만리 길을 서로 같이 동행하네 / 同作遼陽萬里行
침대 위에서 오랑캐 장사치 우리와 무릎 같이하고 / 榻上賈胡連我膝
하늘 끝 나그네 인정을 애석해 하네 / 天涯遠客惜人情
꿈속에서 가는 고향 참으로 가는 것 못 되고 / 夢中鄕國非眞到
봄 지난 동산 숲은 푸르기만 하구나 / 春後園林只是靑
시구마다 짓는 것이 모두 백설이라 / 句句吟成皆白雪
화답하려 하니 내 어찌 수심을 면할쏘냐 / 和來能免百愁生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치ㆍ설ㆍ아ㆍ순의 음이 아직 정밀치 못한데 / 齒舌牙唇尙未精
중원에 쓸데없이 질문하러 가는구나 / 中原虛作問奇行
삼경에 새 달은 고향 꿈꾸게 하고 / 三更新月生鄕夢
한 침대 훈훈한 바람 나그네 마음 움직이네 / 一榻薰風動客情
먼지 이는 요동 하늘 아득히 멀었고 / 塵起遼天迷遠大
구름 걷힌 골령엔 푸른빛이 드러난다 / 雲收骨嶺露餘靑
소매 안의 여러 공의 지은 시 때때로 내어 보며 / 袖中時見諸公子
되는 대로 읊어보니 이별 시름 솟아난다 / 信口吟來別恨生

범옹이 두보의 시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이 몸은 붙어 사는 것 같을 뿐 / 此身如寄耳
운명이라면 스스로 편안할 것을 / 若命當自安
마음이 이미 이러하니 / 寸心已如此
생사를 그 뉘가 어렵게 하리오 / 生死誰避難
인생에 누가 근심 없으리 / 人生孰無憂
근심은 술만이 풀 수 있네 / 憂來酒可寬
예림에 이미 말 달렸고 / 藝林曾掉鞅
학해에서 이미 파도도 보았노라 / 學海嘗觀瀾
농사짓지 않아도 아내 배곯지 않고 / 不耕妻不飢
누에치지 않아도 아이 춥지 않네 / 不蚕兒不寒
평생의 뜻 사방에 있으니 / 平生志弧矢
가는 곳마다 술상 있구나 / 到處有杯盤
다만 팽택(도연명)같이 취하기 바랄 뿐 / 但成彭澤醉
어찌 문원의 마른 것 걱정하리 / 肯患文園乾
술 깨어 비로소 눈뜨니 / 酒醒始張目
노복(奴僕)이 밥먹기 권하네 / 僕夫勸飯飡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국사가 나라 일을 견고하게 아니할 수 없는데 / 王事固靡鹽
소신이 어찌 편안할 것 생각하리 / 小臣敢懷安
작은 몸을 이미 맡겼으니 / 日已委微質
눈앞에 험하고 어려운 것 없다 / 眼前無險難
고향집은 동남쪽으로 멀고 / 故業東南遠
요동 하늘은 서북으로 넓혀 있다 / 遼天西北寬
속음의 정ㆍ변도 모르면서 / 俗音昧正變
재주 생각 않고 거센 파도 돌리려 하네 / 不量回驚瀾
사람만 만나면 빈번히 물었어도 / 逢人煩問訊
흉내 내려니 이빨만 차가워진다 / 欲效牙齒寒
덮어두고 말하지 말자 / 置之不必道
다시 술잔이나 대할 것을 / 且復臨杯盤
옷은 취하면 젖고 / 衣裳醉時濕
목구멍은 깨면 마르는 것 / 咽喉醒後乾
멀리 유람하니 쉬 감상이 일어나네 / 遠遊易感人
언제 풍찬(야숙(野宿)하는 것)을 그칠 건가 / 何日休風飡


[주D-001]조계박압지대업(操鷄搏鴨之大業) : 계림(鷄林) 즉 신라를 얻고 압록강까지를 정복하여 삼한을 통일했다는 말
[주D-002]한결같은 마음을 …… 맞았어라[允協於三千] : 주왕(紂王) 수(受)는 신하가 매우 많았으나 마음이 각기 다르고, 무왕(武王)은 신하가 단 3천 명이었지만 오로지 한마음이었다는 뜻임. 《서경 태서(泰誓)에 나오는 말임》
[주D-003]구오(九五)의 때를 얻으니 :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말이 있는데 천자가 등극하는 것을 말한다.《易 乾卦》
[주D-004]임금의 덕이 …… 있는가 : 해가 뜨면 심고 날이 지면 쉬고, 우물은 파서 마시고 밭은 갈아 먹는데, 제왕이 우리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격양가〉의 구절로 태평성대를 말함.
[주D-005]매번 국을 …… 추모 : 요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국을 대하여도 요임금이 보이고 담을 대하여도 요임금이 보였다는 고사.
[주D-006]대려(帶礪)의 맹세 : 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주며 맹서하기를, “황하의 물이 띠처럼 줄고, 태산이 숫돌만큼 낮아지도록 나라를 영구히 보존하여 먼 후손까지 이르게 한다.” 하였다.
[주D-007]개유(蓋帷) : 떨어진 휘장을 버리지 않는 것은 말을 싸서 묻기 위함이요, 떨어진 수레 덮개를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싸서 묻어 주기 위한 것이다. 《禮記 檀弓》에 나오는 말임.
[주D-008]썩은 고삐[朽索] : ‘내가 만백성을 대하니 썩은 고삐로 여섯 말[馬]을 모는 듯 두려움을 느끼니 사람 위에 앉은 사람이 어찌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나오는 구절.
[주D-009]방성(房星) : 28수(宿)중의 하나인데 세상의 말을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주D-010]하늘을 두려워 …… 보호하는 :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을 낙천(樂天)하는 것이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畏天] 것이다. 낙천하는 삶은 천하를 보호하며,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맹자》에 나옴.
[주D-011]3백 11편 : 《시경》에 모여 있는 시가 모두 3백 5편으로 여기서는 시를 가리킴.
[주D-012]사방을 경영할 장한 뜻 : 고대 중국에서 남자를 낳으면 뽕나무활과 쑥대살로 천지(天地) 사방을 쏘아서 성공을 기원하였다고 함. 남자가 큰 뜻을 품고 웅비(雄飛)하여 성공하라는 뜻.
[주D-013]금난계(金蘭契) :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금도 끊을 수 있고, 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냄새가 마치 난초같이 향기롭다 한다.
[주D-014]소광(疏廣) : 한(漢) 나라 난릉(蘭陵) 사람으로 자는 중옹(仲翁), 〈춘추전(春秋傳)〉에 밝았다. 선제(宣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다음에 태자태부(太子太夫)가 되어 5년 뒤에 늙어서 사퇴하였다. 선제와 태자가 많은 물건을 주었으나 모두 친우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람이 현명하고 재물이 많으면 그 뜻을 손상시키고, 어리석은데 재물이 많으면 잘못을 더욱 많이 저지르게 된다.”하고, 자손들에게 재물을 남겨 주지 않았다.
[주D-015]공규(孔戣) : 당(唐) 나라 목종(穆宗) 때 사람으로 자는 군엄(君嚴)이며 벼슬은 예부상서를 지냈다. 한유(韓愈)가 소(疏)하기를, “조정에 공규(孔戣)와 같은 사람이 불과 2,3명밖에 없다.”고 칭찬한 사람이다.
[주D-016]시구마다 …… 백설(白雪)이라 : 예전 초(楚) 나라 서울 영(郢)에서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르는데 처음에는 보통 유행가인 하리(下里) 파인(巴人) 같은 것을 불렀더니, 같이 합창하여 부르는 자가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노래를 부르니 따라서 합창하는 자 10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최고의 노래를 부를 적에는 따라 부르는 자가 아주 없었다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 초기 왕권과 문물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명신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와 <문종실록>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방촌(尨村)이고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말에 벼슬에 나가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태조가 개국한 후에 세자 우정자가 되고 태종 때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태종의 신임을 받아 민무구, 민무질 등을 제거하였고, 47살에 참지의정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의정부사와 대사헌을 거쳐 다음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병으로 위급해 지니 태종이 어의를 명해 치료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게 하였다. 이후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평안도 도순문사로 나갔고, 다시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세자의 폐위와 함께 서인이 되어 교하로 폄출되었다가 남원으로 옮겨졌다. 세종 즉위 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강원도의 기근을 구휼한 공으로 판우군 도총제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성과 대사헌을 겸했다.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87살(세종31년)에 치사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세종의 치세를 도왔다. 그는 생김새가 크고 총명하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무거우며 기쁨과 슬픔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일을 처리함이 정대하고 대체를 보존하여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활은 검소하였고 예법은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성품이 너무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란다는 비난이 있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그의 시조로 사시가(四時歌) 4수가 전한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뒤 뫼에 엄긴 약을 언제 캐려 하느니.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중(細雨中)에 호미 메고

 산전(山田)을 흩매다가 녹음(綠陰)에 누웠으니

 목동(牧童)이 우양(牛羊)을 몰아다가 잠든 나를 깨와다.


 모두 4수의 시조를 두 수씩 묶어서 살펴보자. 첫 수는 봄이 되어 일을 재촉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도 여름에 쉬지만 말고 김을 매라는 내용이다. 작중화자인 농부가 봄여름에 바삐 농사짓는 생활을 읊은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봄이 되면 농촌에 할 일이 많다고 했고, 중장에서 그물도 손질하고 밭도 갈아야 하는 바쁜 형편을 말했으며, 종장에서 그나마 뒷산의 약초 깨기는 손이 모자라서 걱정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봄이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민의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 수의 초장은 여름날 비 내릴 때에도 김을 매어야 하는 나날을 말했고, 중장에는 가난한 농민이 비탈 밭을 매다가 잠깐 그늘에서 쉬는 것을 그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여유도 아깝기 때문에 목동이 소와 염소를 모는 소리에 깨어나서 다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봄여름의 바쁜 농촌 풍경을 표현하였다. 시인은 왜 이렇게 농민의 빠쁜 일상을 부각시키고 있는가. 그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권장하는 뜻에서다.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법을 개량한 만큼, 농본정책으로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려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인 그가 이렇게 농민을 독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조(大棗)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뫼에는 새 다 긏고 들에는 갈 이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저 늙은이

 낚대에 맛이 깊도다 눈 깊은 줄 아는가.


 가을과 겨울을 읊은 두 수는 봄여름을 읊은 두 수와는 달리 여유롭고 한가하다. 원래 농촌이 봄여름에 바쁘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풍요롭고 한가해지기 때문이다. 첫 수의 초장은 대추가 붉게 익고 밤알이 떨어지는 풍요로운 풍경이고, 중장도 벼를 수확한 논바닥에 여름내 살찐 게를 제시하여 가을의 넉넉한 농촌을 묘사했다. 그러니 종장에서 술을 걸러 마시고 봄여름에 농사짓느라 힘들었던 노고를 취흥으로 달래본다는 것이다. 둘째 수의 초장에는 차가운 겨울이 와서 인적도 그치고 새들도 날지 않는다고 하고, 중장에서 오직 외로운 어옹(漁翁)만이 물위에 배를 띄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낚시하는 전원생활의 깊은 맛을 즐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강설(江雪)’ “천산의 새는 그치고 온갖 길에 사람 자취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늙은이는 눈 내리는 강 위에서 홀로 낚시질 하네.”(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라는 시와 아주 비슷해서 그것을 번안한 것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사시가(四時歌)’ 4수는 농경시대에 봄이 되면 싹이 터 자라나고 여름이면 성장하여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 맺어 수확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해 두고 한가로움을 즐기는 사철의 순환하는 이치에 맞추어 시를 펼쳐놓은 것이다. 비록 번안한 것이 있긴 하지만 농본 국가의 기본 원리를 시조로 펼친 시인의 도량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하위지(河緯地, 1387-145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세종, 세조실록>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의하면, 세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교리를 지냈고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상정하는 데 참여했다. 문종 때에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물러갔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받은 녹봉은 먹지 않고 저장해 두었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였으며 공손하고 예에 밝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객산문경(客散門扃)하고 풍미월락(風微月落)할 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시구(詩句)를 흩부르니

 아마도 산인득의(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이 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시절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문을 닫아걸고 홀로 술과 시를 즐기는 야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에는 손님이 돌아가자 문을 닫아걸고 바람은 고요한데 달빛은 비친다고 하여 은둔하는 선비의 그윽하고 조용한 환경을 제시하였다. 비록 한시구에 토를 단 느낌이지만 한시 절구의 간결하지만 그윽한 여운이 시조에 스며들고 있기도 하다. 중장은 시인의 행동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술독을 열고 취흥에 젖어 시를 읊조리는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린 단종을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살피듯 하겠다던 수양대군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대신들을 죽이자, 그 무도함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을 떠난 산인(山人)의 득의로운 경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야인으로 살지 못했고 다시 벼슬길에 불려나왔으며, 단종 복위를 위해 젊은 선비들과 뜻을 같이했다가 발각되어 죽게 되었다. 이 작품은 정치적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에 잠깐 고요하게 살려했던 시인의 심정이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최덕지(崔德之, 1384-1455)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이다. <국조인물고>와 <연려실기술>에 보면, 호는 연촌우수(烟村迂叟)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함양, 김제 등의 군수를 지내고 남원부사가 되었다가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으로 물러나 당호(堂號)를 존양(存養)이라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을 삼았으나 이듬해 늙었다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비들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였다며 그의 지혜와 학문과 절개를 칭송했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이 시는 아마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영암으로 물러가 존양(存養)이라 당호를 짓고 전원에서 생활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존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현실을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장에는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속의 생활을 말했고,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고 했다. 종장에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렇게 전원에 사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문종이 불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왕은 병약하고 세자는 어렸으며, 여러 대군은 강건하여 정국이 소용돌이칠 것을 예견하고 68살의 나이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피비린내나는 왕위찬탈에 연루되지 않고 몸과 이름을 보전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강호(江湖)의 생활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와 관련됨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최덕지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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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년
  • 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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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최덕지(1384-1455)
 
1384(우왕 10)∼1455(세조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ㆍ존양(存養). 용봉(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인(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담(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ㆍ남원부사 등 여러 주ㆍ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산당집(山堂集)』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최덕지영정및유지초본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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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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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초상화 원본 및 그 유지본.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초상화 원본 및 그 유지본. 비단 바탕에 설채(設彩). 세로 74㎝, 가로 53㎝. 보물 제594호.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전주 최씨 문중(門中) 소장. ≪연촌유사 烟村遺事≫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다 한다.
그 중 1본은 생시진상(生時眞像)으로서 존양루(存養樓) 옛터 근방 영당(影堂)에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2본 중 1본은 녹동서원(鹿洞書院)에, 1본은 주암사(舟巖祠)에 봉안하였다 한다. 현재는 원본·이모본(移模本) 및 유지본(油紙本)이 전라남도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 중 원본·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본의 작품상 특색을 살펴보면, 우선 화폭은 가운데에서 연결된 연폭(連幅)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연폭 형식은 대부분이 3폭이다. 그래서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폭(中幅)이 가장 크며, 양옆으로 두개의 소폭이 결봉되는 방식인 데 비하여 이 최덕지상의 연폭 형식은 특이하다. 인물의 복장으로 인하여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 : 패랭이)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덕지가 생존하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한 형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입제(笠制)는 곧 발립(鈸笠)의 형태이며, 포제(袍制)는 일색복(一色服)으로서 고려 말로부터 전승되어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의 선비의 한거(閒居)하는 모습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에 나타난 안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화상은 만년기의 상이다. 안면 및 옷주름 처리에서 모두 사실에 비중을 둔 핍진(逼眞)에의 기도가 엿보인다. 발립은 반투명으로 속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으며,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다. 눈썹은 담묵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을 한 올 한 올 방향이 밑으로 숙여지게 표시하였다. 숱 많은 눈썹의 성격이 살아 있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실제 눈에서 느낄 수 있는 생기 찬 명상적 눈빛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화사적 흥미를 끄는 것은 비화법(鼻畫法)이다. 최덕지라는 인물의 코 형태는 주먹코이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8, 9분면의 취세에도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화상은 코 처리에서 사상에 바탕을 둔 시각적 진실을 보여 준다.
안면 처리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른바 법령(法令 :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및 뺨에 고심세(高深勢 : 높고 낮은 형세)가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부위에는 안색보다 짙은 갈색으로 음영 처리가 되어 있고, 원공(귀의 圓文) 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이 개채(改彩)를 의심하게 한다.
≪연촌유사≫에 의하여 이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개장의 필요가 있었던 듯 ≪연촌유사≫에는 ‘화상개장찬문(畫像改粧贊文)’이 수록되어 있다.
1610년(광해군 2년) 4월에 개장하여 덕진교(德津橋)로 옮긴 것이 1635년(인조 13년) 2월이라 하니, 그간의 시일이 오래 경과한 사유가 분명하지 않으나 개장 후 종손가에 환안한 것은 확인된다. 따라서 개장 때 개채가 가능하다. 이 개채로 인하여 원본이 손상되기보다 오히려 취(趣)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은 안면 및 시선은 좌안7분면이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으로 많이 돌이켜져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그 시각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그것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면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되어 있다. 또한 발 부분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손이 나와 있는 점이 그 뒤의 조선시대의 초상화와는 다른 특색을 보인다. 역시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연장임을 말해 준다.
최덕지상을 그린 화사(畫師)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지자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천익(愼天翊)의 화상찬이 말해 주듯이 이미 당대에도 그 우수함이 널리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초상화가 희귀한 시점에서 그 상용 형식·복색·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초상 예술의 본령이 사형(寫形)을 넘어 사심(寫心)이 있음을 대변해 주는 가작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 烟村遺事
  • 韓國의 肖像畵(趙善美, 悅話堂, 1983)
  • 朝鮮王朝時代의 肖像硏究(趙善美, 弘益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0.11.)
 
[관련시청각]
  •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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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자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최정(崔挺)의 시문집.
1956년 최정의 11세손 최규철(崔圭喆)·최규안(崔圭顔)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최병심(崔秉心)과 9세손 최근후(崔根厚)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신응조(申應朝)의 발문이 있다.
1책. 석인본.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시 37수, 서(書) 1편, 잡저 3편, 사(辭) 1편, 찬(贊) 2편, 명 3편, 서(序) 1편, 기 4편, 발 1편, 설(說) 1편, 지(誌) 1편, 사적(事蹟) 1편, 제문 4편, 부록으로 만사·제문·행장·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침울하고 강개한 심정과 우국충정의 뜻을 담은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문지천상공북행유감(聞遲川相公北行有感)」에는 최명길(崔鳴吉)이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잡혀갔을 때의 음울한 심사가 묘사되어 있다. 「감흥용첨정운(感興用僉鄭韻)」 5수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정효성(鄭孝成) 부자가 절의를 지키다 죽어간 일들을 소재로 하여 비통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이밖에 「증정효직(贈鄭孝直)」은 친구와 이별하는 슬픔을 표현한 애조의 시이며, 「칠십구영(七十九詠)」은 매화·대나무·연꽃·국화 등 무려 79종의 화초를 소재로 각각 칠언율시로 서정을 노래한 장편의 영물시(詠物詩)로, 저자의 시적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서(書)의 「상명부이공서(上明府李公書)」에서는 79종의 화초를 수집해 기른 동기와 「칠십구영」의 시를 지은 경위를 적었다.
사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전원생활로 여생을 보내겠다는 의경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 서(序) 1편은 통판(通判) 심중수(沈仲秀)를 떠나보내며 지은 송서(送序)이며, 기 4편은 대개 정(亭)·대(臺)의 건립 경위를 쓴 것이다. 지의 「연촌집지(烟村集誌)」와 사적의 「연촌출처사적(烟村出處事蹟)」은 모두 저자의 선조인 최덕지(崔德之)에 관한 것이다.

 

 

西浦先生集卷之六
 [西浦日錄]
貢院唱和詩序 b_006_148c



006_148d上卽位之元年。置別頭塲一於禮曹。以領議政河演,禮曹參判朴彭年,副提學辛碩祖爲考試。執義申叔舟,校理成三問,修撰徐居正爲參試。一於成均舘。以吏曹參判李思哲,崔德之,修撰柳誠源,正郞姜希孟,掌令河緯地爲參試。一於漢城府以禮曹判書金禮蒙,修撰李石亨,持平李塏爲參試。是日也。宿雨初晴。天氣淸和。有司承命。賚酒果來頒。堂前有池數畒。有柳數株。花卉芳菲。正良辰也。相與拜飮于池上。而相公乘興。遂成一律。諸公屬和。彭年爲序曰。
竊觀自古取人之䂓非一。而科目爲最盛。將相大臣。皆由此出。歷代相傳。皆以科目爲重。今上初登寶位。首設大科。其亦可謂急先務矣。而况得英才君子之樂也。今觀多士雲合。006_149a欣欣藹藹。此皆我世宗大王三十年敎育之恩也。相公五朝元老。年德俱高。餘事詞翰。亦一時斯文所仰。今此之作。其亦樂此樂歟。彭年獲睹盛事。不敢以文拙辭。玆以爲之序。景泰二年三月日。嘉善大夫。禮曹參判兼世子左賓客。經筵參贊官朴彭年。序。

昨夜池塘雨。春風爛熳晴。且看花欲盡。更覺酒須傾。語燕差池掠。嬌鶯睍睕鳴。不才參盛會。詩復偶然成。晉陽河演
池荷初出水。烟柳媚春晴。雅興三盃後。新詩一座傾。溟鯤饒變化。岡鳳已飛鳴。德業崇廊廟。文章屬老成。完山李思哲
角藝來多士。春圍値晩晴。排行頻目聒。辨色各心傾。桂苑爭三捷。齊庭孰一鳴。相公藻鑑在。且莫嘆無成。高靈申叔舟
006_149b試院三春暮。微風宿雨晴。綠垂池柳細。紅濕岸花傾。列相功名大。諸儒文學鳴。門前種桃李。更賀看蹊成。昌寧成三問
門看桃李映。崗聽鳳凰鳴。鷲山辛碩祖
會見林烏借。多慚仗馬鳴。晉陽河緯地
晩柳迎風惡。寒塘得雨鳴。達城徐居正
鴈門傳箭急。鸞列佩珂鳴。南原崔德之
風雲一代會。雨露九宵傾。延城李石亨
南宮開試席。多士卜陰晴。晉山姜希孟
請看桃與李。紅白自天成。文城柳誠源

余追錄於三十載之後。餘不得記焉。有感懷。仍成一律。書諸紙尾。詩曰。
006_149c試院當年會。羣英揔美譽。文星燦奎璧。華藻綴瓊琚。舊事浮雲外。遺篇劫火餘。時無張伯始。誰復誦亡書。



 

 

老村集卷之二
 疏箚
陳情乞歸養疏 a_206_047b



206_047c伏以臣之情理。聖鑑曾已俯照矣。今臣抑情供仕。已踰一朔。而所以不敢輒煩告暇者。自以從前暇歸。每不能趁時還朝。帶職在鄕。動淹歲時。其孤恩負罪。至于今年春夏而極矣。以是悚懼。不敢更爲受暇榮還之計。而唯是私衷之蘊結。不可不一番傾盡於孝理之下。茲敢披瀝肝血。齋沐越宿而後上聞。惟聖慈之哀矜焉。臣聞父母生之。續莫大焉。君親臨之。厚莫重焉。君臣之義。父子之恩。天下之大倫。而不可以偏廢者也。然而人莫不欲事君。亦莫不欲事親。而二者或有時乎不可並行。則其處義之道亦有時。而206_047d相爲輕重焉。身爲王臣。遭國艱難。則於是時也。孝爲輕而忠爲重。古之忠臣。有捐親赴君。以全其節者。其所以先於君。非所以後其親也。際時聖明。才俊滿朝。而家有父母。奉養無人。則於是時也。吾身之去就。無所損於國家。私情可得以自盡焉。古之孝子。有謝官乞身。以卒其養者。其所以厚其親。非所以薄於君也。其或前之所遭。而欲全孝子之道。則身負遺君之名。而孝非所謂孝也。後之所處。而欲盡王臣之節。則自陷忘親之罪。而忠非所謂忠也。執是以論臣。則臣之今日仕止之義。亦可知矣。父母之年。已望八耋。恒嬰206_048a篤疾。懔然牀席。則其憂危之情。保養之道。誠非一刻遠遊之日。而名叨近密。職忝緊要。一身兼銜。常綰數處官守之重。簡書之嚴。又非一日退臥之身。如此而不仕不止。乍進乍退。上則壞朝綱慢君命。非一日也。下則曠親養虧子職。非一事也。先王定制。父母年七十。則一子許令歸養。其參酌人情。敦尙禮敎之意。於戲至矣。臣之今日。宜止而不宜仕。豈不灼然甚明乎。若曰。家舊在京。本非鄕人。不如將率入京。共樂君恩之爲兩便於公私云爾。則臣亦非無此心。而臣之父少抱奇病。自廢鄕曲。今於垂死之年。萬無尺寸轉206_048b動之勢。擧世之所共知也。若曰經幄之臣。納仕還鄕。古無其例云爾。則雖以臣之寡聞。亦得以一二數之。文宗朝直提學崔德之。以年老致仕時。未七十矣。世宗朝副提學曹尙治。以盈滿致仕時。三子新登科矣。此兩臣者。無必退之義。而先王皆許之者。欲以不枉人志也。况如臣之情理無一分可仕之勢者乎。世宗朝魚變甲。以集賢學士。爲親老移病。歸昌寧。上惜之而不復強之。變甲歸家作詩。有曰。若余豈避功名者。只爲慈親不遠遊。臣每誦此語。不覺涕淚之交襟。中心之所欲道而不能者。古人已寫出矣。其後206_048c明宣之際。如金麟厚,李某諸人。皆以經幄才學之臣。乞身於壯年。若此類甚多。臣不暇悉援也。惟望聖慈哀憐而裁幸焉。抑臣又有一說。極知僭冒無所逃罪。而情隘勢極。輒敢附陳之。今若使臣得蒙聖恩。永謝朝列。歸守親舍。耕田負薪。以終父母之天年。則誠臣之所大願。而如或不然。謂臣情雖可矜。年少新進。筋力尙強。不可全許閑逸。亦願解其近籍。假之家鄕一郡縣。責以字牧之事。兼便省養之路。則臣雖無狀。庶幾盡心愛民。不使殿下之赤子。飢餓以塡丘壑。而分其廩俸。以供父母菽水之資。此亦兩報206_048d君親之一道也。伏乞天地父母。鑑臣血懇。下臣此疏於該曹。上稽國典。旁照往例。亟準臣所請。以彰聖朝敦孝之治。千萬祈懇。


 

 

樊巖先生集卷之四十三
 諡狀
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通訓大夫集賢殿校理具公諡狀 a_236_285b



236_285c公諱人文。字章叔。姓具氏。高麗判司宰監事賢佐之子也。判事公仕于麗。及我太祖受命。歸隱海美之鳳生山中。臨歿。手書高麗某官具某之墓。俾表阡。飭曰葬我勿出此山。配淑人金氏。高麗判三司事藺之女。以永樂己丑。生公于鳳生山下。公胚胎前光。蔚然克肖。嘗與崔太虛恒,朴醉琴彭年。爲道義交。一世咸推重焉。世宗丙午生員。辛酉。式文科。時。上思欲興至治。初置集賢殿。妙簡一代文學才彦。公首膺之。出入經幄。裨益弘多。文宗嘗夜召集賢臣宣醞。236_285d時適寒甚。命賜貂衾。侍寢殿側。恩榮世所罕有也。乙亥光廟受禪。公與成公三問議出處。成公曰。吾欲從仕。公曰。吾當自廢。未幾忤旨。出補寶城郡。遂投紱歸隱於鳳生塋下。托以靑盲。足不出戶外。語家人曰。時淸我眼方開。一日。成公自洪州訪公。夜聯衾。成公倚醉寫一句詩。詩曰。誓將心裏鐵鑄得袖中椎。公沈吟不答。成公曰。怖死耶。公曰。天象人事。吾仰觀俯察者熟矣。一死不足恤。終若無益於事。貽禍吾君。得不爲不忠之鬼乎。成公遽曰。吾醉矣。及六臣事發。公仰天歎曰。求仁得仁。亦何尤乎。自是托疾愈堅。236_286a屨及庭際者尠矣。時稱浴溫。或可以已疾。獨携小奚僮出。經月乃返。顔貌悴甚。戚戚有不可掩者。家人默揣其往覲越中。公終不自言。此權節崔德之諸公所記載者云爾。端廟賓天。公入山痛哭。不復問戶外事。天順壬午六月十六日考終。享年五十四。後人名其所居曰杜門洞。公於是不愧爲判事公子也。嗚呼。公之事。公所不欲言也。後之人雖欲爲公言。亦有所不敢言者。五世孫大司憲義剛。恐愈久而愈泯也。私錄以傳之後裔曰。公自廢十年。有目而以無目自處。戶庭行步。亦必以相。躬冒危機。必覲舊主於防236_286b衛之中。其量時處躬之明智。成公諸賢。亦有不及者。嗚呼之言也。實天下之公議也。大憲公。可以免知而不言者之爲不仁也。聖上十五年辛亥春。謁顯隆園。駕過六臣祠。惻然興懷。親製文遣官致祭。尋命閣臣。錄進莊陵諸臣忠節之散逸者。適有廷臣陳章。請以其先祖配侑六臣者。上並擧同時殉節十一人。仍及公名曰。如生六臣之姓名塗人耳目者。俱合配侑。而欲從謹嚴之體。一例屬難愼之科。相臣蔡濟恭奏言立慬諸臣之褒尙顯榮。亦云無憾。而具人文危忠苦節。無遜於死事諸臣。向日廷臣䟽批。特236_286c擧其名。榮莫大焉。但不得蒙貤贈之典。恐不無向隅之歎矣。於是上特贈公吏曹判書兩館大提學。哀榮之典備矣。奚特爲具氏一門榮而已。斯可以樹百代風聲。猗歟盛哉。公綾州人也。鼻祖存裕。高麗壁上三韓三重大匡。子民瞻。同平章事。子珚。文科判官。子宜文。魁少尹。寔四世祖也。曾祖核總制。祖瑞珍知寧州事。公娶永同金氏。禮賓少尹諒之女也。生一男一女。男孝勤縣監。婿呂孝輔郡守。孝勤二男二女。男喜縣監。弼別坐。婿甄陽副正縉。宋雍。曾玄以下不盡錄。公之美行懿蹟。固不止此。而奉公祀者五世孫興門。236_286d壬辰之亂。殉身以全親。家藏蕩燬。文獻莫徵。十一世孫承旨壽國。據權崔兩公所記載。攷大憲公所私錄。述家狀一本。藏諸箱簏。及贈秩命下。十三世孫前參議修溫。與宗孫修仁。踵濟恭門。乞易名之狀。濟恭以相臣奏於上者。竊念臨時奮發。殺身以成仁。沒世沈晦。泯跡以全節。其道雖殊。其心則一也。觀公所與成公問答者。其有不愾然太息汪然涕下者乎。謹採輯如右。奉以獻太常氏。


 

 

 靑莊館全書卷之五十九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盎葉記[六]
國朝名臣言行錄 a_259_048d



宋成明。撰國朝名臣言行錄。未刊行。今錄其目。○前集卷之一。趙浚。松堂。南在。龜亭。沈德符。成石磷。獨谷。閔霽。漁隱。趙仁沃。○卷之二。河崙。浩亭。權近。陽村。趙英茂。柳廷顯。韓尙敬。信齋。朴訔。釣隱。李原。容軒。柳觀。夏亭。李稷。亨齋。李來。咸傳霖。蘭溪。○卷之三。黃喜。厖村。孟思誠。趙涓。卞季良。春亭。許稠。趙末生。杜谷。韓尙德。李孟畇。李從茂。崔潤德。○卷之四。盧閈。申槩。寅齋。河演。敬齋。權弘。尹祥。朴安信。尹淮。南智。許誠。朴堧。魚變甲。鄭陟。整菴。安止。臯隱。金鉤。金泮。松亭。金末。鄭259_049a甲孫。崔致雲。○卷之五。鄭麟趾。學易齋。韓確。金叔滋。李孟專。李邊。奇處。姜碩德。玩易齋。辛碩祖。淵氷堂。柳義孫。權採。梅軒。南秀文。鄭昌孫。李季甸。魚孝瞻。具致寬。黃守身。懦夫。崔恒。太虗亭。朴元亨。晩節堂。○卷之六。申叔舟。保閑齋。權擥。韓明澮。尹子雲。樂閒亭。李石亨。樗軒。金守溫。乖崖。梁誠之。訥齋。李芮。姜希顔。仁齋。洪逸童。麻川。○卷之七。徐居正。四桂亭。姜希孟。私淑齋。林守謙。葛谷。成任。安齋。李克培。韓繼禧。洪應。盧思愼。李約東。李坡。成侃。孫舜孝。勿齋。尹孝孫。魚有沼。○卷之八。許琮。尙友堂。魚世謙。魚世恭。鄭蘭宗。虗白堂 李從生。李德良。成俔。慵齋。柳洵。老圃。李陸。靑坡。許琛。盧公弼。菊逸。259_049b安琛。蔡壽。李蓀。權景祐。金난001顔樂堂。兪好仁。㵢溪。○卷之九。金壽童。宋軼。金應箕。李諿。朴元宗。柳順汀。成希顔。鄭光弼。申用漑。仁樂堂。○卷之十。任由謙。成世純。趙元紀。成夢井。李思鈞。訥軒。李賢輔。聾巖。朴祥。訥齋。禹孟善。許硡。李耔。陰厓。洪彦弼。默齋。權撥。成世昌。遯齋。任樞。○卷之十一。申光漢。企齋。蘓世讓。陽谷。沈連源。保菴。尙震。泛虗亭。丁玉亨。任權。安玹。張彦良。沈光彦。鈍菴。曹光遠。吳謙。李潤慶。○卷之十二。李浚慶。東臯 洪暹。忍齋。權轍。任虎臣。趙彦秀。趙士秀。松岡。閔箕。觀物齋。李鐸。沈逢源。曉囱。李澤。南致勤。張弼武。○後集卷之一。白仁傑。休菴 鄭惟吉。林塘。盧守愼。蘓齋。鄭宗259_049c榮。恒齋。李俊民。新菴。○卷之二。朴淳。思菴。金繼輝。黃岡。朴應男。退菴。李後白。靑蓮。鄭琢。藥圃。鄭芝衍。南峯。○卷之三。黃廷彧。芝川。具思孟。八谷。尹斗壽。梧陰。尹根壽。月汀。辛應時。白麓。具鳳齡。柏潭。李山海。鵝溪。○卷之四。鄭澈。松江。洪聖民。拙翁。李海壽。藥圃。裵三益。臨淵。金命元。酒隱。李濟臣。淸江。邊協。○卷之五。柳成龍。西厓。李山甫。鳴谷。李廷馣。月川。○卷之六。金誠一。鶴峯。權慄。李舜臣。○卷之七。李元翼。梧里。鄭崑壽。柏谷。沈喜壽。一松。柳根。西埛。尹祁。艮輔。韓應寅。洪履祥。慕堂。○卷之八。李德馨。漢陰。李恒福。白沙。張雲翼。吳億齡。晩翠。李好閔。五峯。朴東賢。活塘。羅級。○卷之九。韓浚謙。柳川。具宬。艸塘。徐渻。藥峰。李睟光。芝峯。鄭曄。259_049d守夢。鄭經世。愚伏。○卷之十。申欽。象村。黃愼。秋浦。吳允謙。楸灘。○卷之十一。金尙容。仙源。李廷龜。月沙。朴東亮。梧囱。○卷之十二。金瑬。北渚。李貴。默齋。○卷之十三。洪瑞鳳。鶴谷。申景禃。李曙。具仁垕。柳浦。張晩。李時發。柳珩。鄭忠信。○卷之十四。金尙憲。淸陰。鄭蘊。桐溪。尹煌。八松。李安訥。東岳。○卷之十五。崔鳴吉。遲川。張維。谿谷。○卷之十六。趙翼。浦渚。金時讓。荷潭。李景稷。石門。○卷之十七。李敬輿。白江。李楘。松郊。○卷之十八。任叔英。踈菴。閔應亨。兪伯曾。翠軒。姜碩期。月塘。申翊聖。樂全堂。李明漢。白洲。金堉。潛谷。○外集卷之一。金宏弼。寒暄。鄭汝昌。一蠧。鄭鵬。新堂。朴英。松堂。柳藕。西峯。金安國。慕齋。○卷之二。趙光祖 靜菴。259_050a金正國。思齋。趙晟。養心堂。趙昱。葆眞菴。○卷之三。李彦迪。晦齋。蔡世英。任眞。朴紹。冶川。成運。大谷。洪仁祐。耻齋。○卷之四。李滉。退溪。成守琛。聽松。○卷之五。徐敬德。花潭。柳希春。眉岩。李恒。一齋。成悌元。東洲。李仲虎。履素齋。奇大升。高峯。○卷之六。曹植。南冥。張顯光。旅軒。金長生。沙溪。○卷之七。宋寅。頤菴。徐起。孤靑。李至男。永膺。金謹恭。惕菴。鄭之耘。秋巒。閔純。杏村。韓脩。石峯。朴民獻。瑟僩齋。南彦經。東岡。朴枝華。守菴。○卷之八。金宇顒。東岡。吳健。德溪。崔永慶。守愚堂。○卷之九。金麟厚。河西。曹好益。芝山。黃俊良。錦溪。○卷之十。趙憲。重峯。鄭逑。寒岡。○卷之十一。趙穆。月川。李楨。龜巖。南致利。賁趾。權好文。柯岩。權春蘭。晦谷。朴浻。鼎山。宋翼弼。259_050b龜峯。○卷之十二。李珥。栗谷。○卷之十三。成渾。牛溪。○別集卷之一。金宗瑞。節齋。朴淳。鄭苯。成三問。朴彭年。河緯地。李塏。柳誠源。兪應孚。金時習。東峯。權節。栗亭。趙旅。漁溪。○卷之二。金宗直。佔畢齋。曹偉。海溪。崔溥。錦南。金馹孫。濯纓。李宗準。慵軒。茂豊副正揔。西湖主人。朴漢柱。迂拙子。李繼孟。墨巖。李穆。任煕載。勿岩。許磐。卷之三。尹弼商。洪貴達。涵虗堂。成俊。表沿沫。灆溪。趙之瑞。鄭誠謹。朱溪正深源。醒狂。鄭希良。虗菴。金千齡。朴誾。挹翠軒。權達手。桐溪。李黿。再思堂。○卷之四。安瑭。金淨。仲菴。金湜。韓忠。松齋。奇遵。服齋。○卷之五。李長坤。琴軒。柳雲。金絿。自菴。朴世熹。道源齋。朴薰。江叟。李延慶。灘叟。鄭浣。金大259_050c有。三足堂。慶世仁。敬齋。○卷之六。柳灌。松菴。柳仁淑。靜叟。宋麟壽。圭菴。朴光佑。蓽齋。鄭希登。宋希圭。李霖。羅湜。長吟亭。李若氷。樽巖。李瀣。林亨秀。錦湖。林億齡。石川。丁璜。游軒。李湛。靜存齋。閔起文。櫟菴。金鸞祥。金䃴。尹潔。醉夫。○卷之七。高敬命。霽峯。宋象賢。泉谷。金千난002。李廷鸞。趙宗道。大笑軒。金汝岉。劉克良。黃進。元豪。○卷之八。朴晉。郭再祐。忘憂堂。金德齡。鄭文孚。農圃。金時敏。鄭湛。李大源。○卷之九。金德涵。醒翁。鄭弘翼。休翁。龜川君晬。錦山君誠胤。鄭澤雷。趙溭。立齋。○卷之十。金應河。南以興。李重老。金浚。金良彦。李希建。○卷之十一。洪命耉。崔震立。林慶業。李尙吉。沈誢。李時稷。259_050d竹囱。尹棨。洪翼漢。花浦。尹集。吳達濟。○續集一卷。崔德之烟村。南孝溫。秋江。崔壽峸。猿亭。北囱。李夢奎。天休。楊士彦。蓬萊。李之菡。土亭。李義健。峒隱。成允諧。板谷。成輅。石田。文緯。茅溪。崔命龍。石溪。安邦俊。牛山。


[난-001]訴 :
[난-002]鑑 :

 

 

 
西浦先生集卷之六
 [西浦日錄]
師友錄 b_006_147a


習靜先生。姓閔諱純字敬初。居高陽杏村。少受學于徐花潭先生門下。篤志力行。孝友出於天性。閭里化之。宣廟初年。以孝行薦。爲孝陵參奉。又以學行俱備。超授典牲主簿。除兔山縣監。未久超拜司憲府持平。時仁順王后昇遐。禮官依國朝五禮儀卒哭後烏紗帽角帶權服之制。先生上章。請遵宋孝宗白帽終三年之制。上從之。士類相慶以爲古制可漸復也。出爲龍006_147b岡縣令。復除淸風郡守。未久。以司憲府掌令召還。數月辭歸。後授通禮院右通禮。歸舊業。家計蕭然。不以爲念。學徒坌集。未甞以師道自處。隨分問答。誠心誘掖。惓惓不已。歲丙寅。余與同志。往拜其門。受大學中庸及或問諸篇。問進學之要。先生曰。昔於花潭。聞主靜之說。試於靜處做工夫。則心安體舒。讀書義理通透。易得成誦。人能主靜。則聦明開發。外物不入。自然之理也。先生之學。發端於花潭。而其所自得者甚多。其於德性上得力最多。又未嘗不以讀書窮理。爲進學之地。嗚呼。以先生明體適用之學。不得有爲於斯世。及門之士。亦不能闡發其微旨。至於泯泯無傳。深可惜哉。
惕菴金公謹恭。系出寒微。受學於履素齋。篤志力學。丙寅歲。薦006_147c爲童蒙訓導。余往受業焉。觀其持身莊敬。未嘗少懈。敎誨之際。嚴重誠恪。令人惕然。其向學之心。操身之節。無少間斷。一時學者。皆莫能及焉。不幸早世。深可惜哉。
牛溪成公渾。字浩源。世居坡山。隱德不仕。屢徵不就。晩年徵以宰輔職。承召上來。不久還山。自以多病不能俯仰於世。杜門養病。不求聞達。與栗谷爲道義交。講學之外。不及世務。知世之不可與有爲。日思鞱晦。屛㞐林泉。齋志以沒。惜哉。歲丙子。余往訪焉。待之以世交。問爲學之方。則以朱子行公奏箚示之曰。此箚非徒人君爲法。學者所當存心者也。爲學次第。盡在於此矣。又問爲學之要。答曰。守靜爲要。宋有杜五郞者。不出門三十年。督郵往訪之。指庭前桑樹曰。此木初種時。因納凉一出徘徊矣。無006_147d求於世。世不我求。何責之有。督郵嘆息而去。此雖老氏之流。其主一之功。可以爲法矣。
洪可臣。字興道。篤志向學。持身莊敬。嘗受學於習靜先生之門。先生亟穪之。初以門蔭除職。出爲扶餘縣監。愛民興學。有古人風。入爲憲官。守法不撓。物議多之。後以功封寧原君。轉至刑曹判書。獄訟號爲治平。年至致仕而卒。
慕堂洪履祥。字君瑞。爲人端重謹愼。自少好學不倦。孜孜向善。受學於習靜先生之門。先生稱其穎悟。己卯。擢壯元。屢登華要。入侍經幄。裨益弘多。及爲都憲。多想望其風采。官至二品而卒。
李元揚。字淸叔。自少向學。虛懷好善。受學於習靜門下。後以申雪。爲宗廟直長。少有家患。心恙素重。晩年轉劇。投井而卒。
006_148a李晟。字景明。早歲志學。孜孜向善。聞習靜先生在杏州。與同志之友。徒步往拜之。受業問學。多所警發。後入上庠。壬辰歲。避亂於坡山。父子遇害。至於絶祀。悲哉。
具光源。字德容。爲人醇謹。篤志向學。受業於習靜先生之門。後入上庠。除文昭殿參奉。未久早沒。
李渭賓。字大老。爲人倜儻不凡。刻意向學。受業於習靜先生之門。生於綺紈之中。而好善惡惡。出於天性。人多奇之。以非罪。謫於關西。死於謫所。人皆寃之。
成輅。字仲任。爲人好善。牛溪屢稱其節操。年五十。固窮不仕。卜居西湖之上以終焉。
武節辛公諱有定。卽余外家七代祖也。在太宗朝。忠淸公直。006_148b爲上所眷。其時新設六鎭。授公慶源府使。攝卿以往。上臨軒召對曰。卿屢勤于外。不敢告勞。厥有成績。予篤不忘。復命卿以此職。往欽哉。以寬予北顧之憂。公對曰。臣無他技。只有赤心。唯恐性急獲戾于人。上笑曰。卿雖性急。曾無過擧。惟簡在予。何恤人言。公不獲辭乃行。滿朝皆贈別詩。陽村權近。公之外舅。作序贈之。其文載於東文選中。有夷狄喜人怒獸。仁難綏而義難服之語。爲世膾炙。獨谷成石磷。首題律詩。文筆俱妙。其詩曰。
遺愛存西鄙。威聲振北扉。軍無甘苦畢。將得古今稀。精悍人誰敵。淸忠衆所歸。吾衰無所用。外餙愧儒衣。
又有鄭以吾,李行,卞季良,河演,河崙,成石▦,魚變甲,權遇,邊006_148c處厚等。贈詩百餘篇。裒成一軸。爲一家寶藏矣。失於壬辰兵燹中。深可惜哉。
文宗卽位元年。別設大擧取人。以領議政河演,禮曹判書金禮蒙,吏曹參判李思哲,禮曹參判朴彭年,副提學辛碩祖,司憲執義申叔舟,掌令河緯地,校理成三問,修撰徐居正,持平李塏,修撰柳誠源,正郞姜希孟,李石亨,崔德之,梁誠之等。爲試官。分三所開塲之日。遣中使宣醞。河演首題賦詩。屬諸公同和。文筆俱妙。當時黼黻之美。非徒贊揚於一代。翰墨之妙。亦可輝映於後世。此軸在於副提學辛公家。傳至於余家。壬辰兵火見失。惜哉。

 
素隱先生遺稿一
 [文]
烟村畫像贊 崔德之。文宗朝以直提學。退老靈巖永保。 b_025_202a


有皎必汚。旣盈則昃。濟剛以柔。在巽而决。煕煕遺像。肅然可慄。燭照於微。履危猶安。進退能全。從古所難。卓乎高躅。孰匹其美。如吾不信。考之國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