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5세 휘 덕지 연촌공 왕조실록

題煙村遺蹟後 癸亥閏六月八日

아베베1 2014. 1. 26. 09:11

 

 

 

 

 題跋
題煙村遺蹟後 癸亥閏六月八日

 

 



完山崔邦彥美伯以大人察訪公之命。請跋先祖煙村生遺蹟。世采謹卒業曰。夫士有至德範世。而民或知其賢。不知其所以爲賢。苟推其極而言之。如我夫子論泰伯事亦其一也。先生仕至直提學。乃於文宗二年乞退而歸。未幾國家多故。人皆橫罹。而先生已去。所築存養樓本在場圃中。其詩只道當時居閒祝聖之趣而已。未嘗及於命名正義。將使百世之下聞其風者。想像咨嗟。不知其心胸面目爲何許人。眞所謂知其賢不知其所以賢者矣。然而尙論140_402a之士往往以高節正學歸之於先生。久而不已者。必有其故也。蓋竊思之。國家禮樂人文。莫盛於英顯之際。先生年未七十。乃懇請致仕。程朱之學。猶不大顯於時。而先生輒得以存養揭號。則其後所値雖或否泰相乘。酬酢萬變。而先生素履固浩而自在也。然則爲此說者。固已有聞於聖人微顯闡幽之意。而摠其歸趣。雖謂之至德範世亦可矣。不識美伯以爲何如也。察訪公名世榮。是爲跋。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六十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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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題跋
跋山堂集十二月一日 a_140_405c

山堂書客崔公者。諱忠成字弼卿。完山府人。煙村先生德之之孫。寒暄堂先生金公之門人也。公生當成140_405d化弘治之際。家于湖南之光州。天性高潔無累。唯以讀書山堂爲樂。窮晝夜不舍。故以自號焉。少已學爲文章。諸子百氏靡不染指。下筆輒數百千言。汪洋自肆。並事博士家業。及從金先生於漢師。始聞爲學大要。與李勣,尹信齊名。遂究心於性情理氣之蘊。尤以明人倫闢異端爲主。一時士友爭推之。佔畢齋金先生嘗巡按湖南。公上書極言佛巫之弊。請亟屛絶。佔畢先生待之加禮。公旣久游山堂。凡國內三角,白岳,天磨,聖居,瑞石,頭流諸名山。皆徒步跋涉。其跡幾遍。或再三至焉。以此得風病。至辛亥歲。益劇尋卒。年三140_406a十有四。惜哉。秋江南處士孝溫與公善。後著師友名行錄。乃以公名殿焉。靈巖士子又配公于所謂存養祠。卽煙村先生專享之所也。余嘗聞公遺藁尙存。介人求見。旣而公之後孫某因同宗邦彥氏。請釐其編而跋其尾。況今兵燹之餘。惟公師弟佔畢,寒暄間事。幾於掃地盡矣。隻字片言。益可貴重。玆敢不辭而書之如右云

 

 산당집(山堂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山堂集
판심제  山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66年刊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4.7(㎝)
어미  上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4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
 저자
성명  최충성(崔忠成)
생년  1458년(세조 4)
몰년  1491년(성종 22)
 弼卿
 山堂
본관  全州
특기사항  金宏弼의 문인. 南孝溫 등과 교유
 가계도
 崔德之
 直提學
 崔
 司勇
 密陽朴氏
 
 崔大成
 
 崔忠成
 
 全義李氏
 參議 李若水의 女
 崔演文
 萬戶
 女
 
 薛俊
 忠順衛

기사전거 : 家狀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1 羅州에서 태어나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8 형을 따라 漢陽을 여행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26 月出山을 유람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27 長湍의 湧巖山을 유람하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28 한양의 三角山ㆍ白嶽山, 송도의 天磨山ㆍ聖居山을 유람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9 瑞石山을 유람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30 頭流山을 유람하다. 도중에 金鍵과 함께 南孝溫을 방문하여 「小學」ㆍ「近思錄」을 講論하다. ○ 점필재 金宗直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글을 올려 佛巫의 폐단을 물리칠 것을 청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1 봄, 方丈山을 유람하다. ○ 金宏弼의 부친상을 조문하러 嶺南에 가다. ○ 여름, 完山ㆍ玉川 등지를 유람하다. ○ 가을, 雪山을 유람하다. ○ 8월, 昌平監試에 응시하다. ○ 9월, 金堤文場에 응시하다. ○ 겨울, 金鍵 등과 더불어 月出山 精廬에서 講學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32 겨울, 鳳城에서 中風으로 병석에 눕다. 〈蒸室記〉, 〈警慮焚刻記〉를 짓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33 전라도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약을 구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34 3월 24일, 졸하다. 羅州 可芝洞 선산에 묻히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 2월, 士林이 祖 崔烟村이 享祀되어 있는 存養祠에 배향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후손 崔秀華가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朴世采에게 校勘을 받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存養祠에 제관을 보내 致祭하고 ‘鹿洞書院’으로 賜額하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 9대손 崔爀이 2권 1책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순조 28 1828 무자 道光 8 - 후손 崔鍾翼이 家狀을 짓다.
고종 1 1864 갑자 同治 3 - 宋來熙가 行狀을 짓다.
고종 3 1866 병인 同治 5 - 후손 崔秉潤 등이 문집을 增補하여 간행하다.

기사전거 : 家狀ㆍ行狀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후손 崔邦彥이 소장하고 있던 草稿를 朴世采에게 校勘하여 1685년 원집 2권 1책으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간행되지 못하고 稿本으로 남아 있던 것을 1805년에 9대손 崔爀이 宋煥箕의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 후 후손 崔秉潤 등이 그의 부친이 轉寫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에 부록을 덧붙여 別集ㆍ附錄 합 3권 1책을 편차하고 1866년 원집과 함께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6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2권ㆍ別集 1권ㆍ附錄 2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雜著는 〈續原人〉ㆍ〈讀小學文〉 외에 「小學」에 관한 글 3편, 〈讀進學解〉ㆍ〈正名論〉ㆍ〈天堂地獄辨〉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小學」에 관한 글이 많은 것은 저자가 金宏弼의 제자로 「小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正名論〉은 군신과 부자의 名分을 바르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는 것이 중요함을 논하였으며, 〈藥戒〉는 병자가 藥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中心으로 국가 다스리는 것을 身體를 調理하는 데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권2의 書는 〈上佔畢齋先生書〉와 〈上湖南方伯求藥書〉로, 전자는 1487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점필재에게 佛巫의 폐해를 물리칠 것을 청하는 상서이며, 후자는 1490년 中風을 앓을 때 전라도 관찰사에게 약을 구하기 위해 올린 글이다. 記는 〈蒸室記〉와 〈警慮焚刻記〉로 中風을 치유하려고 힘쓰던 때의 기록이다. 傳은 〈山堂書客傳〉으로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에 지은 自傳的인 글이다. 그 밖에 〈擬送張舍人歸江東序〉ㆍ〈擬齊王田橫墓誌〉ㆍ〈擬褚遂良諫立武氏爲后疏〉는 모두 擬作으로 義理ㆍ三綱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권미에는 1491년 盧伯玉이 쓴 〈上山堂書〉가 부록되어 있고, 1685년에 쓴 朴世采의 識가 있다.
권3은 別集으로 招宦遊子文, 雜說, 慶會樓記, 送韓侍郞謫湖州序, 題明道先生墓碑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招宦遊子文은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뒤에 지은 것으로 富貴에 집착하지 않고 江湖에서 自適하는 생활을 권하는 내용이다. 雜說은 두 편인데, 하나는 養材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仁을 통한 成材에 관한 글로 그 긴요함을 잘 나타낸 글이다.
권4는 附錄으로 家狀(후손 崔鍾翼 撰), 行狀(宋來熙 撰), 墓表(宋穉圭 撰)와 저자가 享祀된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 등을 모은 것이다. 그중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은 配享通文, 祝文, 金昌協과 宋相琦 등의 請賜額疏, 1713년 延額時 賜祭文과 후손 崔鍾翼이 이 事蹟 뒤에 썼던 글 등을 모은 것인데, 金昌協 등의 請賜額疏와 墓表 등은 편집상태 및 版型으로 보아 1866년 重刊시에 追刻한 것으로 보인다.
권5는 附錄으로 擅勝樓題詠과 저자의 손자 崔彥潾의 詩, 증손 崔福男의 行狀 2편(崔尙重ㆍ尹濟弘 撰)ㆍ墓表(李肇源 撰)를 모은 것이다. 그중 擅勝樓題詠은 저자의 아들인 崔演文의 別墅에 대해 읊은 金麟厚와 林億齡의 詩를 收錄한 것이다. 끝에 1866년에 쓴 후손 崔秉潤의 附錄後識가 있다.

필자 : 鄭弼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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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太極圖陰靜陽動位置說 壬申六月十一日 a_142_45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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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曰水陰盛故居右。火陽盛故居左。又問陰盛何以居右。陽盛何以居左。曰左右但以陰陽之分耳。
陽村權氏曰周圖陽儀居左。陰儀居右。我爲主而對圖。則我在北而圖在南。故左爲東而陽儀居之。右爲西而陰儀居之。陰陽方位。各得其正。
退溪李氏曰 以下天命啚說 彼圖書率以陰陽消長爲主。而以陽爲重則由北而始於下固然也。至於太極142_459d圖則異於是。原理氣而發化機。示上天命物之道。故始於上而究於下。其所以然者。天之位固在於上。而降衷之命。不可由下而上故也。又曰太極圖旣以命物爲主。則其圖之上面。是乃上帝降衷之最初源頭。而爲品彙根柢之極致。與河洛等圖以消長爲主者。自不同也。然則其圖之體。只是豎起當中。直看下來。非偏以南方爲主也。又曰 答金而精書太極圖主言命物之道。在左陽右陰之交運。而無系於南北上下之如何。所以如是分方位可也。
按易諸圖河洛及先後天方位。則皆左陽右陰。八卦142_460a至六十四卦次序。則皆左陰右陽。此圖本位乃爲左陰右陽。與伏羲八卦次序相同。宜若可以有證而無疑矣。然易諸圖皆由下而上。圖與人又皆主北而觀之。獨此圖由上而下。陰靜陽動之位置。雖與八卦次序之舊無異。而朱子所論水火左右者。遂以陰爲右以陽爲左。不用其法。若求其義之通則似當曰圖在南而人在北。略如權氏之說。而其所謂陰陽左右。率皆主人而言。雖復如李氏之說爲之豎起當中。直看下來。陰陽左右。亦無所異於彼者。然太極陰陽。其爲天道。與易正同。恐無以人爲主之理。蓋以朱子陰右142_460b陽左之說推之似是。今之所以爲太極陰陽五行之序者。只是天道自上直下來。使人對看之義。要當如此。與易諸圖自下直上之義。不同而已。其實今所見者乃爲圖之從背。而其所不見處。乃是圖之前面。尤當對看者也。然後此圖左陽右陰前南後北之方位。與天地河洛之定位。脗合無疑。決非權氏所謂我爲主而對圖則我在南而圖在北。故左爲東而右爲西之說也。第不敢質言。幸觀者於此而更加證正。是大望焉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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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易八卦次序方位陰陽不同說 六月十二日 a_142_460b


142_460c周易八卦次序方位。宜無不同。以考之本經。其陰陽左右。自相矛盾。若以次序言之。伏羲八卦次序之圖。其右陽左陰之位。與下方位圖及河圖洛書各異。此乃章氏所謂太極中分爲兩儀。右爲陽左爲陰。兩儀中分爲四象。右皆陽左皆陰。四象中分爲八卦。陽皆右陰皆左。亦如之橫觀。自乾至坤。皆先陽後陰。一分爲八。自坤至乾。皆先陰後陽。八合爲一。由是中分爲六十四卦。陰陽左右先後皆如之者是也。至其下八卦方位之圖。乃因說卦數往知來之文。遂成乾南坤北。離東坎西。震東北兌東南。巽西南艮西北之位。始142_460d與河圖洛書方位合。而與八卦次序本圖不合。此乃胡氏所謂八卦方位圓圖。不過以前八卦橫圖。揭陽儀中乾兌離震居東,南。揭陰儀中巽坎艮坤居西北。圖旣成後。乾南坤北。離東坎西。以四正卦居四方之正位。震東北巽西南。艮西北兌東南。以二反卦居四隅不正之位者是也。右陽左陰。乃八卦生出之序。乾南坤北離東坎西。乃八卦運行之序。生者卦畫之成。而行者卦氣之運。所以前後不同。學者亦不可不識其槩。故略著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