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중종 9)∼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견숙(見叔). 호는 송정(松亭). 자경(自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지(水智)이고, 아버지는 이한(以漢)이며, 어머니는 문이신(文以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다. 박영(朴英)·이황(李滉)에게 글을 배웠으며, 박운(朴雲)·김취문(金就文) 등과 더불어 교분이 두터웠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고, 지평·의주목사·병조참지·공조참의·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 후 충청도관찰사·나주목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77년(선조 10) 전라도관찰사로서 뇌물을 강요한 죄로 한때 삭탈관직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도량이 크고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데 여유가 있었다고 하며 여러 번 큰 고을을 맡아 다스렸고 세번이나 방백(方伯)이 되어 치적을 남겼다.
또 관직에 있으면서도 학문을 잊지 않았으며 스스로 끊임없이 면학에 소홀할까 책하였다 한다. 그의 재주와 뜻은 매우 굳고 강직하여 이황도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겼으며, 당시의 사람들도 장상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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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지(崔水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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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
1563(명종 18)∼1640(인조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이준(以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운(致雲)이고, 아버지는 심(深)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희좌(熙佐)의 딸이다.
정구(鄭逑)·고응척(高應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그 공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은자대학연의소대전 銀字大學衍義昭代典≫을 받았고, 1612년(광해군 4) 실록청 겸 춘추관에 들어가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예부종사관을 거쳐 형조참의·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27년 횡성사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숙종 때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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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룡(崔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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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룡(崔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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