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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과거 시험에 합격한 우리나라 사람들

아베베1 2013. 7. 28. 08:41

 

 

 

임하필기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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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중국 과거 시험에 합격한 우리나라 사람들


당(唐) 장경(長慶 목종(穆宗)의 연호) 원년(821)에는 신라의 김운경(金雲卿)ㆍ함통중(咸通中)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ㆍ김문울(金文蔚)ㆍ이동경복(李同景福)ㆍ최승우(崔承祐)ㆍ최언휘(崔彦撝)ㆍ최광윤(崔光允)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이고, 발해의 고원고(高元固)ㆍ오소도(烏炤度)ㆍ오광찬(烏光贊)ㆍ사극찬(沙亟贊)이다. 송조(宋朝)에 과거 합격자 명단의 말미를 차지한 사람으로는 고려의 김행성(金行成)ㆍ강전(康戩)ㆍ최한(崔罕)ㆍ왕빈(王彬)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조석(趙奭)ㆍ김서(金瑞)ㆍ강취정(康就正)이다. 연우(延祐 원(元) 인종(仁宗)의 연호) 5년(1318)에 안진(安震), 지치(至治 원 영종(英宗)의 연호) 원년(1321)에 최해(崔瀣), 태정(泰定 원 진종(晉宗)의 연호) 원년(1324)에 안축(安軸), 원통(元統 원 순제(順帝)의 연호) 원년(1333)에 이곡(李穀), 지정(至正 순제의 연호) 6년(1346)에 안보(安輔), 지정 7년(1347)에 윤안지(尹安之), 지정 9년(1349)에 이인복(李仁復), 지정 13년(1353)에 이색(李穡)ㆍ김승언(金升彦) 등 아홉 사람이 있고, 명(明)나라 과거에 합격한 자는 김도(金濤) 한 사람이다.

 

임하필기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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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중국의 과거 제도


명나라의 과거 제도는 초장(初場)에 7편(篇)으로 시험하는데 모두 오경(五經)과 사서(四書)의 대의(大義)이고, 중장(中場)에는 논(論), 표(表), 판어(判語)로 시험하며, 말장(末場)에는 오책(五策)으로 시험한다. 응시한 선비들은 항상 짧은 시험 시간에 쫓기느라 솜씨를 부릴 수 없어서 정문(程文 과거의 일정한 형식에 맞는 문장)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겨우 열에 하나 정도이다. 시험 답안집[試錄]의 글이 대부분 감독관의 손에서 나오는 까닭은 장차 학자들의 모범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가정(嘉靖) 연간에 예부(禮部)가 비준을 받아 시험관들로 하여금 응시자들의 본문(本文)을 기록하고 불필요하게 시험관 스스로 짓지 않도록 하였다. 뒤에 상서(尙書) 하언(夏言)이 말하기를, “시험 답안집의 문리가 도리에 맞지 않고 체제가 뒤섞여 엉망인데, 처음 배우는 선비들에게 다투어 그 법을 본받게 하고 있습니다.” 하니, 이에 시험 감독관으로 하여금 옛 관례대로 응시자들의 시험 답안을 가지고 거듭 손질을 가하게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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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서잡고 2(編書雜稿二)
송사전(宋史筌) 고려열전(高麗列傳)

고려왕 소(昭)의 자(字)는 일화(日華)이니 건(建)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명태후(神明太后) 유씨(劉氏)이다. 건의 자는 약천(若天)이니 신라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 아버지 융(隆)은 금성 태수(金城太守)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이다. 당(唐)의 건부(建符 희종(僖宗)의 연호) 4년(877)에 건이 태어났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기우(氣宇)와 도량(度量)이 크고 깊었다. 그 무렵 신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많은 도적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궁예(弓裔)가 철원(鐵圓)에 웅거하여 국호(國號)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건이 궁예에게 벼슬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궁예가 시기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므로 양(梁) 정명(貞明 후량(後粱) 말제(末帝)의 연호) 4년(918, 고려 태조 1)에 기병장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건을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궁예가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였다가 부양(斧壤)의 백성에게 시해(弑害)당하였다.
건이 즉위하여 개성(開城)을 수도로 삼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후진(後晉) 천복(天福 고조(高祖)의 연호) 계묘년(943, 고려 태조 26)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67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26년 만이었다.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 하였으며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무(武)가 위에 오르니 무의 자(字)는 승건(承乾)으로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원년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34세이고 위에 있은 지 2년이었다. 묘호를 혜종(惠宗), 시호를 의공대왕(義恭大王)이라 하고 순릉(順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요(堯)가 위에 오르니, 요의 자는 의천(義天)이다. 건우(乾祐 후한(後漢) 은제(隱帝)의 연호) 2년(949, 고려 정종 4)에 왕위를 아우 소(昭)에게 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27세이고 위에 있은 지 4년 만이었다. 묘호를 정종(定宗), 시호를 문명대왕(文明大王)이라 하고 안릉(安陵)에 장시지냈다.
아우 소(昭)가 위에 올랐다. 건륭(乾隆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3년(962, 고려 광종 13)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 등을 송(宋)에 보내어 조공을 바치게 하니, 황제가 식읍 7천 호를 더하여 주고 추성순화보의공신(推誠順化保義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건덕(乾德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원년(963, 광종 14)에 황제가 시찬(時贊)을 보내어 칙명(勅命)으로 봉작(封爵)하였는데 해로에서 풍랑을 만나 빠져 죽은 사람이 모두 90명이었으며, 시찬이 혼자 살아났으므로 소가 후하게 대우하면서 위로하였다.
건덕 3년에 대승내봉령(大承內奉令) 왕노(王輅)를 보내 조공바치게 하니, 황제가 왕노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임명하였다.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5년(972, 광종 23)에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 등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게 하니, 식읍을 더하여 주고 서희를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부사(副使)인 내봉경(內奉卿) 최업(崔業)은 검교사농경(檢校司農耕), 판관(判官)인 광평시랑(廣評侍郞) 강예(康禮)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녹사(錄事)인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은 검교상서금부랑중(檢校尙書金部郞中)으로 임명하였다. 소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1세였으며 재위 26년이며 묘호(廟號)는 광종(光宗), 시호를 대성대왕(大成大王)이라 하고 헌릉(憲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주(伷)가 위에 오르니 주의 자는 장민(長民)이며 어머니는 태목왕후(太穆王后)이니 태조의 장녀(長女)로 외성(外姓)을 따른 황보(皇甫)씨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원년(976, 고려 경종 1)에 황제가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와 사농시 승(司農寺丞) 서소문(徐昭文)을 보내어 주를 책봉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태부(檢校太傅)를 삼아 현도주 제군사(玄菟州諸軍事)와 현도주도독 대순군사(玄菟州都督大順軍使)를 통솔하게 하고, 식읍 3천 호를 더하여 주었다.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게 하였으며 김행성(金行成)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켰다.

2년, 아들 원보(元輔)를 보내어 좋은 말과 병기(兵器)를 바쳤다.

3년, 황제가 태자중윤(太子中允) 장계(張洎)와 저작랑(著作郞) 구중정(丘中正)을 보내어 빙문하였다.

4년, 황제가 합문지후(閤門祗候) 왕선(王僎)을 보내어 주를 책봉하여 시중을 삼고 식읍을 더하여 주었다.

6년, 주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27세였으며 위에 있은 지 6년 만이었다. 묘호를 경종(景宗), 시호를 헌화대왕(獻和大王)이라 하고 영릉(榮陵)에 장사지냈다.
종제(從弟) 치(治)가 위에 오르니 치의 자는 온고(溫古)인데, 아버지는 대종(戴宗)이라 추시(追諡)한 욱(旭)이며 어머니는 추존하여 선의왕후(宣義王后)라 하였는데 태조의 딸로 외성(外姓)을 따른 유씨(柳氏)이다.

7년, 시랑(侍郞) 김욱(金昱)을 보내어 왕위 계승한 것을 알렸다.

8년, 황제가 광록소경(光祿少卿) 이거원(李巨源)과 장작소감(將作少監) 공유(孔維)를 보내어 치를 책봉하고 식읍을 더해 주었다.

옹희(雍熙 태종의 연호) 원년(984, 고려 성종 3), 한수령(韓遂齡)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년, 황제가 태상경(太常卿) 왕저(王著)와 비서감(秘書監) 여문중(呂文仲)을 보내어 치에게 책봉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장차 거란을 정벌하려 하였는데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서로 인접하고 있어 늘 침략을 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조서를 내려 효유하고 군사를 내어 협공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을 정벌할 때 고려의 국경(國境)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여진은 고려가 화(禍)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인해 송 나라에 말을 바치고 ‘고려가 거란과 함께 서로 지원할 것을 결성하여 협박하고 약탈한다.’고 무고(誣告)하였었다. 한수령이 조공을 바치러 들어갔을 때, 황제가, 여진이 올린 목계(木契)를 꺼내 보이면서 본국(고려를 말한다)에 돌아가서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치가 그 내용을 보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다가 국화가 이르자 신하를 시켜서 국화에게 말하기를 “지난해에 여진에서 와서 알리기를 ‘거란이 군대를 일으켜 우리들의 국경을 침입하였다.’ 하였는데, 본국이 여진과 이웃이기는 하나 그들의 진실과 허위를 본디부터 알고 있던 바 그들은 탐내고 속임이 많으므로 믿을 수가 없어 즉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거란이 과연 침략하여 여진을 격파하여 죽이고 노획하여 간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뒤 여진이 본국에게 매하(梅河) 나루의 요새를 막고 성을 쌓아 방비하라고 권하므로 그 일을 주관하여 공사를 일으키려 하는데 뜻밖에 여진이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나 그들이 해마다 송(宋) 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때문에 감히 원수를 갚지 않았는데, 어찌 도리어 무고하여 황제를 속일 줄 알았겠습니까? 본국은 해마다 정삭(正朔)을 받고 직공(職貢)을 거른 적이 없는데 감히 두 마음을 품고 외국과 교통하겠습니까? 요사이도 여진에서 도망쳐 온 무리들을 불쌍하게 여겨 구휼하였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벼슬까지 시킨 사람도 아직까지 10여 명이 있으니 그들을 경사(京師)에 소환하여 어전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니, 국화가 허락하고 그 사실을 전부 기록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최한(崔罕)과 왕빈(王彬)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켰다.

3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였다.

단공(端拱 송 태종의 연호) 원년(988, 성종 7), 황제가 예부 시랑(禮部侍郞) 여단(呂端)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여우지(呂祐之)를 보내어 치를 책봉하고 식읍을 더하여 주었다.

2년, 시랑 한인경(韓藺卿)과 병부 낭중(兵部郎中) 위덕유(魏德柔)를 보내와 조공을 바치니, 황제가 두 사람을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였다.

순화(淳化 송 태종의 연호) 원년(990, 성종 9), 황제가 광록경(光祿卿) 시성무(柴成務)와 태상소경(太常少卿) 조화성(趙化成)을 보내어 치(治)에게 책봉을 더하여 주었다. 성무 등이 도착하니 나라 풍속에 음양(陰陽)과 귀신의 일을 내세워 조정(송 나라를 이름)의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좋은 날을 골라서 조칙을 받는다 하였다. 성무가 객사에서 묵은 지 한 달이 넘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를 “서(書)에 ‘초하룻날에는 육갑(六甲)의 길일(吉日)을 가리지 않는다.’ 하였고, 예(禮)에 ‘중동(仲冬)에는 단 일양(一陽)의 좋은 때만 취한다.’고 기재하였으니 혹시라도 조칙을 지체시킴이 없이 공손하게 극진한 성의를 나타낸다면 용절(龍節 부인(符印))이 빛이 나 칙명을 욕되게 하는 책임을 면할 것이다.” 하니, 치가 그 편지를 보고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 사례하고 이튿날에 나아가 칙명을 받고, 병관시랑(兵官侍郞) 한언공(韓彦恭)을 보내어 사은(謝恩)하였다.

2년, 언공이 귀국할 적에 황제가 대장경(大藏經)을 하사하였는데 치가 그것을 내전에 맞아 들여놓고 중을 불러 읽게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백사유(白思柔)를 보내어 사은하였다.

3년, 황제가 광록경 유식(劉式)과 비서소감 진정(陳靖)을 보내어 치에게 책봉을 더하였으며, 인해서 조칙(詔勅)을 내려 군리(軍吏)와 기로(耆老)를 위문하였다. 정 등이 동모(東牟)로부터 해구(海口)에 나아가서 고려의 사공을 얻어 배를 타고 지강도(芝岡島)에서 옹진구(甕津口)까지 해로로 도착하였으며 육지에 올라 해주(海州)까지 1백 6십 리, 거기서 염주(鹽州 황해도 연안)까지 1백 리, 거기서 백주(白州 황함도 백천)까지 40리였는데 거기서 40리를 더 가서 수도에 도착하였더니, 치가 성밖까지 나와 환영하고 제후의 예를 다하였다. 정 등을 70여 일 동안 머물러 있게 하였고 정이 귀국할 적에는 표문(表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에 앞서 황제가 주군(州郡)에서 선발된 준수한 사람에게 친히 시험을 보였는데 고려(高麗) 빈공진사(賓貢進士)인 왕빈(王彬)과 최한(崔罕)도 시험에 합격하자,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仕郞守秘書省校書郞)에 임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므로, 정 등이 귀국할 때 치가 표문을 올려 아울러 사례하였다.
백사유(白思柔)가 입조(入朝)할 때 공목리(孔目吏) 장인전(張仁詮)이 글을 올려 시사에 관한 것을 진술하였더니 사유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다 하므로, 인전이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황제가 정 등에게 명하여 인전을 데리고 가게 하고 또 조서를 내려 인전의 죄를 풀어 주게 하였다. 그리고 또 치가 글을 올려 목판본 구경서(九經書)를 하사하여 유교(儒敎)를 튼튼하게 하는 데 쓰도록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정 등이 복명(復命)할 때 치가 그의 신하 원증연(元證衍)을 보내어 전송하게 하였는데, 안향포(安香浦)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져 가져 간 물품을 빠뜨렸으므로 등주(登州)에 조칙을 내려 증연에게 증명서를 발급하여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이어 치에게 옷감과 은그릇을 하사하였다.

5년, 원욱(元郁)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하고 거란이 국경을 침범하는 사실을 하소연하니, 황제가 북쪽 변방이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았으므로 군대를 경솔하게 동원할 수 없다 하고 조칙만 내려 위무(慰撫)하였다. 이때부터 거란의 명령을 받았으며 조공이 중단되었다.

지도(至道 송 태종의 연호) 2년(996, 성종 15),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치를 책봉하였다.

3년, 치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38세이고 위에 있은 지 16년 만이었다. 묘호를 성종(成宗), 시호를 문의대왕(文懿大王)이라 하고 강릉(康陵)에 장사지냈다.
조카 송(誦)이 위에 오르니, 송의 자는 효신(孝伸)인데 주(伷)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헌애태후(獻哀太后)이니 대종(戴宗) 욱(旭)의 딸로서 외성을 따른 황보씨(皇甫氏)이다.

함평(咸平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2년(999, 고려 목종 2), 이부 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황제가 인소를 불러보며, 인소가 고려 사람들이 황제의 교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에 얽매여 제지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진술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돌려보냈다.

6년, 호부 낭중(戶部郎中) 이선고(李宣古)를 보내어 사은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의 연호) 2년(1009, 목종 12)에 송이 서경도순검(西京都巡檢) 강조(康兆)에게 시해되니 향년이 30세이고 위에 있은 지 12년 만이었다.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를 선양대왕(宣讓大王)이라 하고 공릉(恭陵)에 장사지냈다.
종제(從弟) 순(詢)이 위에 오르니, 순의 자는 안세(安世)인데 추시한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효숙태후(孝肅太后)인데 대종 욱의 딸로서 외성을 따른 황보씨이다.

3년, 행영도통사(行營道統使) 강조 등에게 군대 30만을 인솔하게 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도록 파견하더니, 거란주(契丹主)가 직접 보병과 기마병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여 강조 등을 통주(通州)에서 사로잡고 서경을 공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진격하니 순은 나주(羅州)로 도망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개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가자 순이 개성으로 돌아왔다.

6년, 여진이 거란 군대를 인도하여 곧 압록강을 건너려 하니, 대장군(大將軍) 김승위(金承渭) 등이 공격하여 물리쳤다.

7년,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충심으로 붙좇기를 요청하였다. 징고가 귀국할 적에 순에게 조서 7통과 의대(衣帶)ㆍ은채(銀綵)ㆍ안륵마(鞍勒馬)를 함께 하사하였다.

8년,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 관사(館舍)를 설치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하였다. 민관 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거란이 여러 해 동안 침략하여 왔음을 보고하였는데, 원의 말과 행동이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연회(宴會)를 베풀어 줄 적마다 자기가 사례하는 표문을 지어 올렸는데 그 문장이 잘 다듬어졌으므로 송 나라에서 그를 귀빈으로 대우하였다. 그가 귀국할 때 순(詢)에게 조서와 습의(襲衣)ㆍ기물(器物)ㆍ비단ㆍ안장ㆍ말 그리고 경사(經史)ㆍ책력ㆍ성혜방(聖惠方)을 하사하였더니, 원이 국조(國朝)의 등과기(登科記)를 베껴서 돌아가겠다고 요청하므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원년(1017, 고려 현종 8), 형부 시랑(刑部侍郞) 서눌(徐訥)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2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10만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여 오므로 강감찬(姜邯贊) 등을 보내어 패배시켰다.

3년, 등주에서 고려 진봉사(進奉使) 예빈경(禮賓卿) 최원신(崔元信)이 진왕수(秦王水) 입구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조공바칠 물품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므로 조서를 내려 내신(內臣)을 파견하여 위로하게 하였으면 원신이 들어가 뵐 적에 특별히 의복과 빛깔이 고운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명주(明州)와 등주에서 여러 번 고려의 항해하는 선박이 풍랑에 표류하여 국경에 이르는 사례가 있다고 말하므로 조칙을 내려 그들이 도착하는 곳마다 위문하게 하고 바다를 건너갈 동안의 식량을 지급하게 하여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4년, 김맹(金猛)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5년, 예부 시랑(禮部侍郞) 한조(韓祚)를 보내어 사은하였다.

천성(天聖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8년(1030, 현종 21), 민관 시랑 원영(元穎) 등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그 뒤로는 단절되어 중국과 교통하지 못하였다.

9년, 순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0세이고 위에 있은 지 22년 만이었다. 묘호를 현종(顯宗), 시호를 원문대왕(元文大王)이라 하고 선릉(宣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흠(欽)이 위에 오르니, 흠의 자는 원량(元良)이며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이다.

경우(景祐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34, 고려 덕종 3) 흠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19세이고 위에 있은 지 3년 만이었다. 묘호를 덕종(德宗), 시호를 경강대왕(敬康大王)이라 하고 숙릉(肅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형(亨)이 위에 오르니, 형의 자는 신소(申炤)였다.
경력(慶曆 송 인종의 연호) 6년(1046, 고려 정종 12), 형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 29세이고 위에 있은 지 12년 만이었다. 묘호를 정종(靖宗), 시호를 용혜대왕(容惠大王)이라 하고 주릉(周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휘(徽)가 위에 오르니, 휘의 자는 촉유(燭幽)요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이다.

가우(嘉祐 송 인종의 연호) 3년(1058, 고려 문종 12), 휘가 탐라(眈羅)와 영암(靈巖)에서 재목을 벌채하여 큰 선박을 만들어 장차 송 나라와 통상하려 하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가 북조(北朝 거란을 말함)와 수호(修好)를 맺었으므로 변방에 급한 변고가 없고 백성들이 생업을 즐겁게 여기니 지금의 상태대로 하는 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가장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禮樂)을 일으켜 실행한 지 벌써 오래고, 장삿배가 끊임없이 왕래하여 진귀한 보물들이 날마다 이르고 있으므로 중국에 대하여 사실상 의뢰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영영 국교를 끊을 것이 아니라면 송 나라와 사신을 통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원년(1068, 문종 22), 송 나라의 황신(黃愼)이 고려에 가서 휘를 보고 말하기를 “황제가 강회양절 형호남북로 제치발운사(江淮兩浙荊湖南北路制置發運使) 나증(羅拯)을 불러 이르기를 ‘고려는 옛날부터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었으며 조종(祖宗) 때부터 우리를 정성스럽게 섬겼는데 그 뒤에 이르러 막혀 단절된 지 오래였다. 지금 들으니 그 나라의 왕이 훌륭하다 하니 사람을 보내어 그를 타일러 볼 만하다.’ 하자, 나증이 주청(奏請)하여 신(愼) 등을 보내와서 황제의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휘가 기뻐하면서 관사(館舍)를 정하여 주고 대우를 아주 후하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예빈성(禮賓省)에 시켜서 나증에게 이첩(移牒)하기를 “본조(本朝 송 나라를 말함) 상인 황신 등이 운사(運使)라 자칭하면서 밀지를 받들고 와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니 고려가 동쪽 한 구석에 위치하여 멀리 중국을 사모하였으며 조상 때부터 내려오면서 험한 길을 통해 서로 유대를 이어가기 바라던 터였는데 조그마한 평양이 요 나라에 가까워 달라붙으면 화목한 이웃이 되고, 틈이 생기면 굳센 적이 되어 오래도록 그들의 속박에 곤궁함을 겪었기 때문에 그들과 사이가 나빠짐을 고집할 수 없어 황제에게 술직(述職)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여러 번 좋은 길조를 점쳐 중국에 성주(聖主)가 통치하고 있음을 아름답게 여겼으나 공연히 태양(황제를 말함)이 멀게만 느껴져 장안의 옛길을 잃어버린 것같이 여겼더니 중국의 교화가 끝없이 멀리 미쳐 도량이 넓고 포용함이 커서 산이 조그마한 티끌도 버리지 않고 바다가 작은 시냇물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삼가 교통할 길을 찾아 빨리 장안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제 공문서를 황신 등이 귀국하는 데 부쳐 보내오니 회보를 기다려 예의를 갖춰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휘가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언젠가 꿈에 중국에 갔었다.” 하여 시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3년, 증이 조정에서 모의하는 이들도 고려와 수호를 체결하여 거란을 칠 만하다는 것을 아뢰니, 황제가 증을 명하여 고려에 물품 제공을 후하게 하라고 유시하므로, 증이 다시 신(愼) 등을 보내왔다.

4년, 민관 시랑 김제(金悌) 등을 보내어 등주를 경유하여 조공을 바치니 조서를 내려 하국(夏國 서하(西夏)를 말함) 사신과 같이 대우하게 하였다.

5년, 송 나라에서 의관(醫官) 왕유(王愉)와 서선(徐先)을 보내왔다.

6년,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을 파견하여 사은하게 하고 인해서 말하기를 “전에는 고려 사람들이 송 나라에 왕래할 때에 모두 등주를 경유하였었는데 지금부터는 멀리 거란을 피하기 위해 길을 바꿔 명주를 경유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군(郡)ㆍ현(縣)의 길가에 설치한 임시 휴게소가 기준이 없어 백성들이 소요하므로 조서를 내려 규칙을 세우게 하고 나누어 주는 비용은 모두 관청에서 지급토록 하였으며, 또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들이 몰래 왕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휘(徽)가 문후차 이부(二府)에 보낸 것이 아주 많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시장을 열어서 교역하도록 하여 힘써 상품을 팔게 하고, 합사로 짠 비단을 주어 답례하게 하였더니, 다시 표문을 올려 의약과 화소(畫塑) 기술자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나증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에 갈 사람을 모집하게 하였다. 황제가 고려의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는 줄 알고 조서를 내릴 적마다 꼭 사장(詞章)에 능한 자를 선발케 하였으며 지은 것 중에서도 잘된 것을 채택토록 하였다.

7년, 황제가 양주(揚州)의 의원조교(醫員助敎) 마세안(馬世安) 등 8명을 보내왔다.

9년, 공부 시랑(工部侍郞) 최사량(崔思諒)을 보내어 사은하게 하였더니, 황제가 중귀인(中貴人 내시)에게 명하여 도정역(都亭驛 군ㆍ현에 설치한 나그네 휴게소)의 예(例)를 모방하여 관사를 수리하도록 하고 대우를 아주 후하게 하라고 하였다.

원풍(元豐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원년(1078, 문종 32), 휘가 성절(聖節 천자 탄생일)에 축수(祝壽)하는 재(齋)를 동림(東林)ㆍ대운(大雲) 두 전에서 베풀었다. 명주의 교련사(敎練使) 고윤공(顧允恭)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와서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통신한다는 뜻을 알리니, 휘가 말하기를 “송 나라에서 외국에 사신보내는 것을 어찌 기대하였으랴? 모든 관원들은 각자 맡은 직무를 잘 이행하여 접대하는 일에 실수가 없게 하라. 부지런히 하고 조심하여 능력을 나타내는 자는 계급을 초월하여 발탁할 것이며 게으르고 졸렬하여 잘못이 있는 자는 별도로 논하여 벼슬을 낮추고 관직에서 쫓아낼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 등을 보내어 빙문케 하고 두 척의 군함을 명주에서 만들어 신주(神舟)라 명명(命名)하고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동으로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러 순천관(順天舘)으로 들어가자 휘가 태자를 보내어 관사에 나아가 도 등을 안내케 하여 회경전(會慶殿)에 도착하니, 휘가 마침 병이 들어 좌우의 부축을 받고 나와서 조칙을 받았다. 도 등이 돌아갈 때 휘 자신이 풍비(風痺)가 있음을 진술하면서 의관(醫官)과 약제를 요청하고 도 등에게 금은ㆍ미곡ㆍ잡물을 무수히 주었더니 배에 다 싣지 못하여 그들이 기증받은 물건을 은과 바꿔달라 요청하므로 휘가 들어 주었다.
도와 목의 성품이 탐내고 인색하여 날마다 공궤받은 찬(饌)을 절감하여 값을 따져 은과 바꾸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북송(北宋)의 시랑(侍郞) 여단(呂端)이 사신으로 왔다가 간 뒤로 중국 사신을 못 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이제 사신이 왔음을 듣고 고상한 인격을 우러러볼까 하였더니 그들의 하는 짓이 이와 같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2년, 황제가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왕순봉(王舜封)과 한림의관(翰林醫官) 형조(邢慥) 등을 보내어 1백 종류의 약재를 하사하였다.

3년, 호부 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과 예부 시랑(禮部侍郞) 박인량(朴寅亮)을 보내어 사은하였다. 홍 등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히게 되어 조공바칠 토산물의 절반 가량을 잃어버렸으므로 홍 등이 표문을 올려 자신들의 죄상을 기록하여 보고하니,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안심시켰으며 황제가 의관(醫官) 마세안을 보내왔다.

4년, 예부 상서 최사제(崔思齊)와 이부 시랑 이자위(李子威)를 보내어 사은하였다.

6년, 휘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65세이고 위에 있은 지 37년 만이었다.
묘호를 문종(文宗), 시호를 인효대왕(仁孝大王)이라 하고 경릉(景陵)에 장사지냈다.
휘가 정치를 함에 인(仁)과 서(恕)를 숭상하여 동이(東夷) 중에 훌륭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옛 풍속을 그대로 따라 왕녀(王女)들을 신민(臣民)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꼭 형제 종족(宗族)에게 시집가게 하였으며, 귀신(貴臣)들도 그와 같이 하므로 둘째 아들 운(運)이 간하기를 “벌써부터 중국과 교통하였으니 예(禮)로써 옛날 관습을 변혁시킴이 마땅합니다.” 하자, 휘가 노하여 그를 외지로 내쫓았다. 송 나라에 부고(訃告)하니 송에서는 사람을 명주에 보내어 한 달 동안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아들 훈(勳)이 위에 오르니, 훈의 자(字)는 의공(義恭)이요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훈이 위에 오른 지 겨우 4개월 만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37세였다. 묘호를 순종(順宗), 시호를 선혜대왕(宣惠大王)이라 하고 성릉(成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운(運)이 위에 오르니 자는 계천(繼天)이다.

7년, 황제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양경략(楊景畧)과 예빈사(禮賓使) 왕순봉(王舜封)을 제전사(祭奠使)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勰)과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 송구(宋球)를 조위사(弔慰使)로 파견하였다. 경략이 이지의(李之儀)를 불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으려 하니, 황제가 지가 문장에 밝지 못하다 하여 명을 내려 학문을 넓게 알아 막힘이 없고 타고난 기품이 단정하고 준수한 자를 뽑아 중서(中書)에 불러 문장을 시험케 한 뒤에야 파견하게 하였다.

8년, 황제가 세상을 마치므로 호부 상서(戶部尙書) 김상기(金上琦)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최사문(崔思文)을 보내어 조위(吊慰)하게 하고 공부 상서 임개(林槩)와 병부 시랑 이자인(李資仁)은 등극(登極)을 축하하게 하였으며, 형법(刑法)에 관한 서적과 《태평어람(太平御覽)》ㆍ《개보통례(開寶通禮)》ㆍ《문원영화(文苑英華)》를 사올 것을 청했는데 《문원영화》1책만 하사하였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4년(1089, 고려 선종 6), 왕자 의천(義天)이 중 수개(壽介)를 시켜 항주(杭州)에 가서 죽은 중 정원(淨源)을 제사지내게 하고 인해서 말하기를 “국모가 저에게 두 개의 금탑(金塔)을 지니게 하여 양궁(兩宮)이 오래 사시게 축원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였는데, 주(州)의 장관 소식(蘇軾)이 아뢰니 그런 것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5년, 호부 상서 이자의(李資義)와 예부 시랑 위계정(魏繼廷)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6년, 자의 등이 귀국하여 “송 나라 황제가 고려 서적에 좋은 판본이 많다는 것을 듣고 관반(館伴)에게 명하여 구하려고 하는 서적의 목록을 적어 주면서 ‘책 권수가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베껴서라도 부쳐 보내라.’ 하였다.”

7년, 황종각(黃宗殼)을 보내어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게 하고 서적 구매를 요청하였더니 예부 상서 소식이 다섯 가지 해로운 점을 증거로 인용하여 요청을 거절케 하였으나, 끝내 《책부원구(冊府元龜)》를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소성(紹聖 송 철종의 연호) 원년(1094, 고려 선종 11), 운(運)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6세이고 위에 있은 지 11년 만이었다. 묘호를 선종(宣宗), 시호를 사효대왕(思孝大王)이라 하고 인릉(仁陵)에 장사지냈다. 운은 인자하고 현명하여 글을 좋아하고 내행(內行)을 삼가고 구비하였으며 장사치들이 책을 사가지고 올 적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분향한 다음에 책을 대하였다.
아들 욱(昱)이 위에 오르니 욱의 어머니는 사숙왕후(思肅王后) 이씨이다.
욱이 어릴 적부터 병약(病弱)하여 왕위를 숙부(叔父) 계림공(鷄林公) 옹(顒)에게 전하고 4년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14세이고 위에 있은 지 1년 만이었다. 묘호를 헌종(獻宗), 시호를 공상대왕(恭殤大王)이라 하고 은릉(隱陵)에 장사지냈다. 옹의 자는 천상(天常)이니 휘(徽)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원부(元符 송 철종의 연호) 원년(1098, 고려 숙종 3), 윤관(尹瓘)ㆍ조규(趙珪)를 보내어 왕위 계승을 보고하였다.

7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므로 상서(尙書) 임의(任懿)와 시랑 백가신(白可臣)을 조위사(吊慰使)로, 상서 왕하(王嘏)와 시랑 오연총(吳延寵)을 등극하례사(登㥛賀禮使)로 보냈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원년(1101, 숙종 6), 임의 등이 귀국할 때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하사하였고 왕하 등이 귀국할 적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 권을 하사하였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2년(1103, 고려 숙종 8), 황제가 호부 시랑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을 보내어 의대(衣帶)ㆍ필단(匹段)ㆍ금옥기(金玉器)ㆍ궁시(弓矢)ㆍ안마(鞍馬) 등을 하사하였다.
옹이 황제의 탄신일에 태자(太子)를 명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재(齋)를 베풀게 하였다.

3년, 추밀원사(樞密院使) 최홍사(崔弘嗣)와 비서감(秘書監) 정문(鄭文)을 보내어 사은하였다.

4년, 옹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5세이고 위에 있은 지 10년 만이었다.
묘호를 숙종(肅宗), 시호를 명효대왕(明孝大王)이라 하고 영릉(英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우(俁)가 위에 오르니 우의 자는 세민(世民)이요, 어머니는 명의왕후(明懿王后) 유씨(柳氏)이다.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07, 고려 예종 2)에 윤관 등을 파견하여 여진(女眞)을 크게 깨뜨리고 국경을 정하였다.

2년, 호부 시랑 왕유(王維)를 고주사(告奏使)로 보내고, 형부 상서 김상우(金商祐)와 예부 시랑 한교여(韓皦如)를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4년, 황제가 병부 상서 왕양(王襄)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장방창(張邦昌)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우가 조서를 받자, 양 등이 비밀유지(秘密諭旨)를 전하면서 말하기를 “황제는 아주 총명하셔서 만리 밖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은총(恩寵)을 더하려 하였으나, 왕이 벌써 북조(北朝 거란을 말함)의 책명(冊命)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다시 책봉하지 않고 조서만 내리는데 이미 ‘권(權)’ 자를 뺀 것은 곧 왕을 총애하여 권왕(權王)이 아닌 진왕(眞王)의 예로써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조서는 바로 황제의 친필이니 북조에서는 필연코 이와 같이 신분에 따른 예우(禮遇)는 없었을 것입니다. 양 등이 와서 보건대 왕이 조서를 받음이 매우 공손하니 뒷날 돌아가 아뢴다면 황제가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왕은 더욱 참된 마음으로 독실하게 공경하여 성은에 보답하소서.” 하였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1, 예종 6),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연(金緣)과 소부감(小府監) 임유문(任有文)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3년,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안직숭(安稷崇)을 송 나라에 보내면서 명주(明州)에 공문을 보내기를 “김연 등이 돌아올 때 관반(館伴)인 장내한(張內翰)이 황제의 유시(諭示)라면서 내년에 인사(禋祀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것)가 있으니, 국왕에게 거듭 말하여 사신을 보내와 조회하라 하였었는데 갑자기 모후(母后)가 훙서(薨逝)하여 금년에 미처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조회(照會) 시행을 요청합니다.” 하였다.

4년, 안직숭이 돌아올 때 황제가 악기(樂器)를 하사하였으므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왕자지(王字之)와 호부 낭중(戶部郎中) 문공언(文公彦)을 보내어 하국(夏國) 사신보다 지위를 높게 하고 인반 압반관(引伴押伴官)을 고쳐서 접송관반(接送館伴)으로 삼았다.

5년, 이부 상서(吏部尙書) 왕자지(王字之)와 호부 시랑 문 공미(文公美)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이어서 진사(進士) 김단(金端)ㆍ견유저(甄惟底)ㆍ조석(趙奭)ㆍ강취정(康就正)ㆍ 권적(權適) 등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켰다.

6년, 금주(金主) 아골타(鴉骨打)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하였다. 왕자지 등이 귀국할 적에 황제가 대성악(大晟樂)을 하사하였으므로 이자량(李資諒)과 이영(李永)을 보내어 사은하였다.

7년, 이자량이 김단ㆍ조석ㆍ권적과 함께 귀국할 때 황제가 친히 책문(策問)으로 단 등을 집영전(集英殿)에서 시험하여 상사(上舍) 급제를 시키고 특별히 화관(華貫 의류)을 주었으며, 우(俁)에게는 황제가 어제(御製) 친찰(親札)과 조서를 내렸다. 강취정과 견유저가 송 나라에서 사망하였다. 우가 천장각(天章閣)을 건립하여 황제가 하사한 친제조서(親製詔書)와 어필서화(御筆書畫)를 간직토록 하였다.

중화(重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8, 예종 13), 황제가 합문지후(閤門祗候) 조의(曹誼)와 의관(醫官) 양종립(楊宗立) 등 7인을 보내 주므로 정영(鄭永)과 이지미(李之美)를 보내어 사은하였다.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2년(1120, 예종 15), 황제가 승신랑(承信郞) 허입(許立)과 진무교위(進武校尉) 임대용(林大容) 등을 보내왔다.

4년, 우(俁)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4세이고 위에 있은 지 17년 만이었다. 묘호를 예종(睿宗), 시호를 문효대왕(文孝大王)이라 하고 유릉(裕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해(楷)가 위에 오르니 해의 자는 인표(仁表)요,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이다.

5년, 황제가 예부 시랑 노윤적(路允迪)과 중서사인 부묵경(傅墨卿)을 조위사(吊慰使)로 보냈는데 윤적 등이 해에게 타이르기를 “조서와 제문(祭文)은 모두 황제께서 친히 지으시고 쓰신 것으로 은혜와 예가 매우 다르고 이제 요(遼) 나라 명령도 벌써 끊어졌으니 송 나라에 명을 청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해가 말하기를 “책명(冊命)은 천자가 제후(諸侯)를 포상(褒賞)하는 큰 의식인데 방금 부모의 상사도 마치지 않고서 서둘러 큰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의리상 미안한 것입니다.” 하였다.

6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이자덕(李資德)과 어사중승(御史中丞) 김부철(金富轍)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7년, 금 나라가 요 나라를 멸망시켰다. 우(俁)가 위에 있을 때 송 나라에 의원(醫員)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더니 조서를 내려 두 의원을 가게 하였는데 해(楷)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조정에서 앞으로 요 나라를 공벌하려 한다고 하는데 요는 형제의 나라이니 그대로 둔다면 변방을 막는 것이 되겠지만 여진은 호랑(虎狼)과 같기 때문에 교통함이 옳지 않게 여겨지니, 두 의원은 귀국하거든 천자께 보고하여 일찍부터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는데, 의원이 귀국하여 그 말대로 아뢰었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국공(朝鮮國公) 이자겸(李資謙)이 군대를 일으켜 왕궁(王宮)을 침범하였다. 정응문(鄭應文) 등을 금 나라에 보내어 신하의 나라라 칭하게 하였으며 이자겸을 외지로 유배시켰다.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원년(1126, 고려 인종 4), 황제가 합문지후 후장(侯章)ㆍ귀중부(歸中孚)를 보내어 금 나라를 토벌하도록 명령하니, 해는 나라가 쇠퇴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리고 추밀원 부사 김부식(金富軾)과 형부 시랑 이주연(李周衍)을 등극하례사로 보냈더니, 그들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자,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가 쇠약하고 피폐한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정화(政和) 때부터 사신이 해마다 왔으므로 회남(淮南)과 절강성(浙江省)에서는 그것을 수고롭게 여겼고 또 저들이 틀림없이 금 나라를 섬길 것이니 어떻게 우리 송 나라의 허(虛)와 실(實)을 엿보지 않는다고 보장하겠습니까? 마땅히 금지시켜 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하니, 이에 조서를 내려 명주에다 관사를 정하여 유숙하게 하면서 폐백과 예물을 바치게 하므로 그 이듬해가 되어서야 귀국하였다.
휘(徽)로부터 내려오면서 송과 사신을 교통하기는 하였으나 거란의 봉책을 받았으며 해마다 거란에 조공을 바친 것이 여섯 차례나 되었는데도 빼앗아가는 것을 그치지 않고 늘 말하기를 “고려는 우리의 노예인데 왜 남조(南朝)를 후하게 대우하느냐?” 하고, 또 송 나라에 조공바치는 것을 힐책(詰責)하므로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답하기를 “중국에는 여섯 달에 한 번 조회를 하고 귀국에는 1년에 여섯 차례 조공을 바쳤다.” 하니, 거란이 깨달았으므로 그제야 횡포를 면하게 되었다.

건염(建炎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2년(1128, 인종 6), 절동로 마보군 도총관(浙東路馬步軍都摠管) 양응성(楊應誠)이 아뢰기를 “고려를 경유하여 여진에 닿는 것이 노정(路程)으로 보아 굉장한 지름길이 되니,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연운(燕雲)에 있는 이성(二聖 송 휘종(宋徽宗)과 송 흠종(宋欽宗))을 맞이하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하자 응성을 가칭 형부 상서로 삼아 부사(副使) 한연(韓衍)과 서장관(書狀官) 맹건(孟建)을 함께 보내려 하니, 절동(浙東)의 장수 적여문(翟汝文)이 아뢰기를 “만약 고려에서 금(金) 나라 사람이 해로(海路)를 물어 대국을 엿보기를 청하리라는 이유로 거절한다면 무슨 말로써 대답할 것입니까? 보내지 마옵소서.” 하였다. 그러나 응성(應誠)은 그 말을 듣고도 항주(杭州)를 경유하여 해로를 통해 고려에 가서 해(楷)에게 조서를 내리면서 목적한 대로 타이르매 해가 난처한 빛을 보이더니, 문하 시랑(門下侍郞) 부일(傅佾)을 시켜 시켜 관사에 보내어 적여문이 말한 것과 같이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여진은 옛적에 고려의 신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신하로 섬기게 되었으니 강하고 약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다시 중서시랑(中書侍郞) 최홍재(崔洪宰)와 지추밀원(知樞密院) 김부식을 관사에 보내어 말하기를 “이성(二聖)이 지금 연운(燕雲)에 계시는데 대조(大朝)에서는 어찌 군사를 훈련하여 싸우지 않습니까?” 하고 끝내 조서를 받지 않으므로 응성 등이 표문을 받지 않고 전례대로 주기만 하고 돌아갔었는데, 황제는 해가 송 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처사라 하여 매우 노여워하였다. 그러자 상서우승(尙書右丞) 주승비(朱勝非)가 말하기를 “고려가 금 나라와는 인접하여 있고 송 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해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뻔한 사실이고 또 지나간 때에는 그들을 지나치게 후대하다가 이제 와서 그들의 보답에 대하여 책망하려 하십니까?” 하자 황제가 노여움을 풀었다. 예부 시랑 윤언이(尹彦頤)가 표문을 가지고 가서 사죄(謝罪)하였더니, 이성(二聖)이 아직 연운에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연회는 마련하였으나 음악은 사용치 못하게 하고 장막을 전문(殿門) 밖에 설치하여 객성관(客省官) 오득홍(吳得興)에게 접대하기를 명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중서사인 장징(張徵)을 압반관(押伴官)으로 삼았다.

3년, 황제가 보좌하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이 내신(內臣)과 궁녀 각 2명을 고려 사신 오는 편에 딸려 보냈다고 하니 내가 듣고 희비(喜悲)가 엇갈렸었다.” 하자, 여이호(呂頤浩)가 아뢰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금 나라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려는 감히 그렇게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가 송 나라의 허실을 엿보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자, 이에 진무교위(進武校尉) 왕정충(王正忠)을 보내어 해(楷)에게 조서를 내려 타이르기를 “만약 사신이 마침 올 적에 유사(有司)들이 주의하지 못하는 사태가 있을까 두려우니 변방의 경비가 완화되기를 기다려 마땅히 사절 보낼 시기를 문의하여 진(晉) 나라 사신의 사관(舍館)을 헐고 수레를 들여놓던 것과 같은 후회는 없어야 될 것이며, 한(漢) 나라의 관문을 닫고 예물을 사절하던 옛날의 본을 사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소흥(紹興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원년(1131, 인종 9), 고려가 조공을 바치려 하였더니 예부 시랑 유약(柳約)이 말하기를 “사명산(四明山 절강성(浙江省)의 근현(鄞縣))에서 패전한 나머지 황폐하고 쇠약해져 행여나 군대를 일으킬 마음을 둘까 두려우니 의당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2년,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최유청(崔惟淸)과 합문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황제가 후전(後殿)에 나아가 그들을 불러서 접견하고 유청과 기에게 금띠를 하사하였다.

3년, 한유충(韓惟忠)과 이지저(李之氐)를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더니, 홍주(洪州) 해상(海上)에서 풍랑을 만나 송 나라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5년, 중 묘청(妙淸)과 유참(柳旵)ㆍ조광(趙匡)이 서경(西京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키므로 김부식(金富軾)을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황제가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보내어 해(楷)에게 유시하기를 “근자에 들으니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그들을 사로잡기 어렵다면 10만의 군대를 보내어 돕고자 한다.” 하였으나 해가 글을 올려 사양하고 문승미(文承美)와 노현용(盧顯庸)을 송 나라에 보냈더니, 그들에게 공문서를 주어 명주(明州)로 가게 하였다.

6년, 김부식이 서경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를 명주로 보냈더니 은과 명주를 하사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는데 그것은 금 나라를 위하여 이간할까 두려워서였다.

16년, 해가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38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묘호를 인종(仁宗), 시호를 효공대왕(孝恭大王)이라 하고 장릉(長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현(晛)이 위에 오르니 현의 자는 일승(日升)이요, 어머니는 공예왕후(恭睿王后) 임씨이다.
18년 초, 이심(李深)ㆍ지지용(智之用)이 송 나라 사람 장철(張喆)과 공모하여 심이 성명을 고쳐 동방흔(東方昕)이라 하면서 송 나라 태사(太師) 진회(秦檜)에게 편지를 통하기를 “만약 금 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게 길을 빌려달라 하고 우리가 안에서 호응한다면 고려를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지용(之用)이 그 글과 지도를 송 나라 상인편으로 바쳤었는데, 이때에 와서 송 나라 도강(都綱) 임대유(林大有)가 그 편지를 가지고 와서 알려주므로 철ㆍ심과 지용을 국문하였다. 심과 지용은 옥중에서 죽고 철은 처형되었다.

융흥(隆興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연호) 원년(1163, 고려 의종 17) 도강(都綱) 서덕영(徐德榮)이 와서 황제의 밀지를 전하였다.

2년, 차내전숭반(借內殿崇班) 조동희(趙冬曦)ㆍ차우시금(借右侍禁) 박광통(朴光通)을 보내어 유기(鍮器)와 동기(銅器)를 바치고 서덕영이 온 사실을 보고하였다.

건도(乾道) 6년(1170, 고려 예종 24), 정중부(鄭仲夫)가 현(晛)을 폐위시켰다가 얼마 뒤 시해하였는데 향년이 47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묘호를 의종(毅宗), 시호를 장효대왕(莊孝大王)이라 하고 희릉(禧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호(皓)가 위에 오르니, 호의 자는 지단(之旦)이다.

순희(淳熙 송 효종의 연호) 원년(1174, 고려 명종 4),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를 토벌하려 하므로 윤인첨(尹鱗瞻)을 보내어 격퇴시켰다.

3년, 서경을 평정하였다.

경원(慶元 남송 영종(寧宗)의 연호) 3년(1197, 명종 27), 최충헌(崔忠獻)이 호를 폐위시켰는데 얼마 뒤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2세이고 위에 있은 지 27년 만이었다. 묘호를 명종(明宗), 시호를 광효대왕(光孝大王)이라 하고 지릉(智陵)에 장사지냈다. 아우 탁(晫)이 위에 오르니 탁의 자는 지화(至華)이다.

4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상인들이 동전(銅錢)을 소지하고 고려에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그것은 외교 관례를 끊으려는 것이었다.

가태(嘉泰 남송 영종의 연호) 4년(1204, 고려 신종 7), 탁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61세이고 위에 있은 지 7년 만이었다. 묘호를 신종(神宗), 시호를 정효대왕(靖孝大王)이라 하고 양릉(陽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영(韺)이 위에 오르니 영의 자는 불피(不陂)요, 어머니는 정선왕후(靖宣王后)이니 종실(宗室)인 온(溫)의 딸로써 외성(外姓)을 따른 김씨였다.

가정(嘉定 남송 영종의 연호) 4년(1211, 고려 회종 7), 최충헌이 영을 폐위시켰는데 얼마 뒤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7세이고 위에 있은 지 7년 만이었다. 묘호를 희종(熙宗), 시호를 성효대왕(成孝大王)이라 하고 석릉(碩陵)에 장사지냈다. 종제 오(祦)가 위에 오르니, 오의 자는 대화(大華)인데 호(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정왕후(義靜王后)이니 종실(宗室)인 온(溫)의 딸로써 외성을 따른 김씨이다.

6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62세이고 위에 있은 지 2년 만이었다. 묘호를 강종(康宗), 시호를 원효대왕(元孝大王)이라 하고 후릉(厚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철(㬚)이 위에 오르니 철의 자는 대명(大明)이요, 어머니는 원덕왕후(元德王后)이니 종실 감(瑊)의 딸로 외성을 따른 유씨(柳氏)이다.

9년, 거란의 김산(金山)ㆍ김시(金始) 등이 침략하여 오므로 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방어하였다.

14년, 몽고(蒙古)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다.

소정(紹定 남송(南宋) 이종(理宗)의 연호) 4년(1231, 고려 고종 18), 몽고가 침략하여 왔다.

5년, 수도를 강화(江華)로 옮겼다.

개경(開慶 남송 이종의 연호) 원년(1259, 고종 46), 철(㬚)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68세이고, 위에 있은 지 46년 만이었다. 묘호를 고종(高宗), 시호를 안효대왕(安孝大王)이라 하고 홍릉(弘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식(植)이 위에 오르니, 식의 자는 일신(日新)이고 어머니는 안혜왕후(安惠王后)인데 영(韺)의 딸로 외성을 따른 유씨(柳氏)이다.

함순(咸淳 남송(南宋) 도종(度宗)의 연호) 5년(1269, 고려 원종 10), 식이 임연(林衍)에게 폐위되었으나 얼마 있다가 복위되었으며, 몽고에 조회하였다.

6년, 전 수도인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10년, 식이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6세이고 위에 있은 지 15년 만이었다. 묘호를 원종(元宗), 시호를 순효대왕(順孝大王)이라 하고 소릉(韶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심(諶)이 위에 오르니,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상흥(祥興 남송(南宋) 위왕(衛王)의 연호) 2년(1279, 고려 충렬왕 5), 송 나라가 망하였다. 원(元) 나라 홀필렬(忽必烈)이 망한 송 나라의 보기(寶器)ㆍ봉병(鳳甁)ㆍ옥적(玉笛) 등 90종의 물품을 심에게 하사하니 심이 즉위한 지 5년째였다.

김행성(金行成)이 빈공(貧貢)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의 연호) 3년(978, 고려 경종 3)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전중승치(殿中丞治)의 벼슬을 역임(歷任)하고 표문을 올려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행성이 조정에 처음 벼슬하여서는 고려에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부모가 해주(海州)에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사모하여 부모의 화상을 그려 정침(正寢)에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섬기는 도리를 행하며 음식을 올렸다. 순화(淳化 송 태종의 연호) 초기에 안주(安州)의 통판(通判)이 되었다가 병이 들었는데 주(州)의 장관인 이범(李範)이 위문(慰問)을 하자 행성이 울면서 말하기를 “행성은 외국 사람으로 송 나라 조정의 관원이 되어 군정(郡政)을 보좌하다가 병으로 곧 죽게 되어 황제의 은혜를 보답치 못하니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하였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종민(宗敏)과 종눌(宗訥)로 모두 어렸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다른 친척에게 의지할 데가 없어서 언제나 아무데나 내버려졌었다. 얼마 아니되어 행성이 죽었는데 그의 처가 개가(改嫁)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신을 삼아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범(範)이 그 사실을 아뢰자 조서를 내려 종민을 태묘재랑(太廟齋郞)에 임명하고 안주(安州) 에 명령을 내려 매월 그의 집에 돈 세 꿰미와 쌀 50말을 지급케 하고 장리(長吏)에게 해마다 사시(四時)로 문후케 하였다.
강전(康戩)의 자(字)는 휴우(休祐)이니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윤(允)인데 고려에 있었으며 3세(世)로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전이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 무렵 홀승성(紇升城)에서 거란과 교전(交戰)하였는데 전이 윤을 따라 목엽산(木葉山) 아래서 전투를 하다가 연달아 두 개의 화살을 맞고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 거란에게 함락되어 묵두령(墨斗嶺 광인령(廣仁領))에서 은둔(隱遁) 생활을 하면서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렀다가 샛길로 고려에 돌아왔는데, 그때에 아버지인 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개보(開寶 송 태종의 연호) 중에 전이 빈공(賓貢)을 따라 국학(國學)에서 공부하여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대리평사(大理評事)와 상향현(湘鄕縣)의 지방 장관이 되었으며, 두 차례 관직을 옮겨 저작랑(著作郞)과 강음군(江陰軍)의 지방 장관이 되었다가 강주(江州)의 지방 장관으로 이동되었는데, 관리로 있을 적에 늘 청렴결백하여 근본을 힘쓴다는 소문이 나더니, 태상박사(太常博士)로 관직이 이동되었다.
소이간(蘇易簡)이 한림(翰林)으로 있으면서 전을 관리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칭찬을 하므로 그를 명하여 광남서로 전운부사(廣南西路轉運副使)로 임명하고 비어대(緋魚帒)를 하사하였으며, 운전정사(運轉正使)로 승진되고 탁지원 외랑(度支員外郞)과 호부 판관(戶部判官)으로 관직이 이동되었다. 그리고 외직(外職)으로 나아가서는 협(峽)ㆍ월(越) 두주(州)의 지방 장관이 되어 연달아 조서로 포상을 받았으며, 경서 전운사(京西轉運使)가 되어서는 공부 낭중(工部郞中)을 더하여 주고 금인(金印)과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표문을 올려 많은 의견을 아뢰었으며 성의를 다하여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다가 경덕(景德 송 진종의 연호) 3년(1006, 고려 목종 9)에 죽었다.
황제가 그의 아들 희령(希齡)을 태상시 봉례랑(太常寺奉禮郞)으로 임명하고 녹봉(祿俸)을 주어 상사(喪事)를 치르게 하였다.
고려는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천 3백 리이고 남쪽에서 북쪽까지는 3천 리인데 압록강(鴨綠江)을 의뢰하여 견고함을 이루었다. 동쪽은 바닷물이 깨끗하여 깊이 열 길 정도는 내려다볼 수 있고, 동남쪽은 명주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곳의 바닷물은 모두 시퍼렇다. 왕은 개성부(開城府)에서 기거하였으며 큰 산을 의지하여 궁실(宮室)을 설치하였는데 그 산 이름을 신숭(神崇)이라 하였다. 백성들은 모두 초가(草家)에서 살았으며 기와로 덮은 집은 열 집 중 겨우 두 집 정도였다. 4경(京)ㆍ8목(牧)ㆍ15부(府)ㆍ1백 29군(郡)ㆍ3백 34현(縣)ㆍ29진(鎭)이 있었는데, 추운 지방으로 산이 많으며 토질은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자라기에 알맞고, 옷감으로는 명주가 적고 삼과 모시가 많았다.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교(敎)ㆍ선(宣)이라고 하였으며 신하와 백성들이 왕을 호칭하기를 성상(聖上), 후비(后妃)를 궁주(宮主)라고 하였는데 백관(百官)의 명칭은 중국과 유사하였다. 선비들은 종족(宗族)의 명망(名望)을 가지고 서로 뽐내었는데 유(柳)ㆍ최(崔)ㆍ김(金)ㆍ이(李)의 4성(姓)을 귀족으로 여겼다.
매년 12월 초하루에 왕이 자문소전(紫門小殿)에 앉아서 백관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국자감(國子監)과 사문학(四門學)을 두었는데 추천된 응시자를 3등(等)으로 분류하였으니 왕성(王城)에서 천거된 응시자는 토공(土貢), 군읍(郡邑)에서 추천된 응시자는 향공(鄕貢), 외국인으로 추천된 응시자는 빈공(賓貢)이라 하였다. 해를 걸러서 소속된 곳에서 시험을 보였으며 태학에서 재차 시험을 보인 뒤에 왕이 직접 시(詩)ㆍ부(賦)ㆍ논(論)의 세 가지 제목으로 시험을 보였는데 그것을 염전중시(簾前重試)라 하였다.
당시의 선비들이 성률(聲律)을 숭상하였으므로 통경(通經 경학에 정통함)한 사람들이 적었다. 16세 이상이 되면 군대에 충원되었는데 6군(軍)과 3위(衛)에 소속된 자는 늘 관아(官衙)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3년마다 서북 변방을 경비할 군사를 선발하여 반년마다 교체하게 하고 유사시에는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끝나면 농업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쌀과 베로 교역(交易)을 하였으며 구리가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녹여 동전(銅錢)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후에 처음으로 쇠를 불릴 줄 알아 해동통보(海東通寶)ㆍ해동중보(海東重寶)ㆍ삼한통보(三韓通寶) 세 가지 종류의 돈을 만들었다.
병기(兵器)는 거칠고 간단하여 강한 쇠뇌와 큰 도끼는 없었다. 불교를 높이고 숭상하여 왕의 아들이나 동생들도 중이 되었으며, 매년 10월 보름에 왕이 크게 불교의 의식을 일으켰는데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 하여 예의(禮儀)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 1월 7일은 풍속으로 왕모(王母 서왕모(西王母)를 말함)의 상(像)을 만들어 그것을 머리에 이게 하였으며 상사일(上巳日 삼월 삼짇날)에는 푸른색으로 떡에 물들였다. 그리고 왕성(王城)에 절이 70군데 있었으나 도관(道觀)은 없었다.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 중엽에 조정(朝廷)에서 도사(道士)를 보내었더니 그제야 복원원(福源院)을 설립하여 우류(羽流 신선의 도를 닦는 사람) 10여 명을 두었다.
남자들은 두건을 썼으며 관리들의 제복은 당 나라의 복장과 같았고 부인들은 상고머리를 땋아 어깨 위로 드리우고 남은 머리는 풀어뜨려 진홍색의 얇은 명주로 묶고 비녀를 꽂았다. 치마는 여러 겹으로 둘렀는데 겹이 많은 것을 좋게 여겼다. 그리고 음악은 격이 매우 낮아 금(金)ㆍ석(石)의 음률은 없었으며 대성악(大晟樂 송 나라 휘종(徽宗) 때 만든 아악(雅樂)) 을 얻고서는 2부(部)로 나누었는데, 왼편은 당악(唐樂)으로 중국의 음(音)이요 오른편은 향악(鄕樂)으로 예부터 전해오는 풍습이었다.
당상에서 좌석을 마련하였을 때는 반드시 신을 벗고 올라가며 웃어른을 뵐 때는 무릎으로 기어가서 꿇어앉았다.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죽이는 것을 미워하였으며 형벌도 끔찍하고 비참한 것은 없었으나, 단 극악무도한 행위와 부모에게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명주(明州)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 만에 대해(大海)로 들어가며 다시 5일 만에는 흑산도(黑山島)에 닿으니 고려의 국경에 진입한 것이다. 흑산도에서 도서(島嶼)를 경과하여 7일 만이면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는데 강물이 양쪽 산 사이에서 흘러내리므로 그 흐름이 매우 세찬데 급수문(急水門)이란 데가 가장 험한 곳이다. 거기서 3일 만이면 물가에 닿는데 그곳에는 벽란정(碧瀾亭)이란 관사가 있다. 이곳을 경유하여 육지에 올라 험한 산골을 40 여리 가면 고려의 수도이다.

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동방 풍속은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나 상국(上國)에 복종하여 부속되었고, 문명하였으나 중국을 모방하고 본떴으니 부루(夫婁 해부루(解夫婁)를 말함)가 도산(塗山)에 회합한 것과 기자(箕子)가 성주(成周 주 나라를 말함)에 조회한 것이 빛나게도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한(漢) 나라 때 일어나 당(唐)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극한 성의로 대국을 섬겼으니 인유(仁柔)와 문명(文明)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으며 또 고려가 계승하여 일어났는데 마침 중국에서는 송 나라가 일어났다.
대성왕(大成王 광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조회하고 빙문하는 예와 봉책(封冊)하는 의식이 해마다 달마다 증가하였으니 고려가 심복(心腹)한 것과 송 나라가 어루만져 달랜 것이 성(盛)하였다고 할 만한데 응성(應誠)이 길을 빌려달라 한 것은 적을 헤아림이 너무 오활한 것이었으며, 영종(寧宗)이 통신을 단절시킨 것은 사람을 대우함에 있어서 너무나 야박한 것이니, 어떻게 그토록 끝맺음을 잘하지 못하였던가? 인유함이 지나쳐서 스스로 굳게 서지 못하고 오랑캐 섬기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며, 문명이 폐단이 되어 무력이 굳세지 못하여 순조롭게 자조하는 방법이 없었으니, 이것도 고려의 실책이라 하겠다.”

[주D-001]정삭(正朔) : 정월과 초하루란 말인데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역서(曆書)를 받는 것을 말한다.
[주D-002]《책부원구(冊府元龜)》 : 송 진종(宋眞宗) 때에 양억(楊億) 등을 시켜 편찬한 책인데 1천 권에 1천 1백 4문(門)으로 분류된 백과사전격의 책을 말한다.
[주D-003]진(晉) 나라 …… 후회 :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진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가져간 예물을 사관(舍館) 밖에 두게 되었으므로, 사관의 담을 헐고 수레를 들여놓았던 것을 말한다.《左傳 襄公31年》
[주D-004]국자감(國子監) : 고려 때 교육 기관으로 성종 11년(992)에 국학(國學)을 개편한 것인데 국자학(國子學)ㆍ태학(太學)ㆍ사문학(四門學)과 율학(律學)ㆍ서학(書學)ㆍ산학(算學) 등 전문학과가 있었고, 국자사업(國子司業)ㆍ국자박사ㆍ태학박사ㆍ사문박사ㆍ조교(助敎) 등이 교수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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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임진 11년(992), 송 순화 3년ㆍ거란 통화 10년


○ 봄 정월에 교하기를, “학문을 많이 쌓지 않으면 선(善)을 알 수 없으며, 현인을 임용하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서상(序庠 지방의 교육 기관)을 열어 유술(儒術)을 깊이 숭상하고, 지방에는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에게 공부를 권장하며, 문예를 경쟁하는 장소를 열고, 경서를 연구하는 업을 넓혔으나, 그런데도 포부가 있는 뛰어난 선비를 아직 얻지 못했으니, 현인을 가로막고 재능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어찌 알리오.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모두 대궐에 나와 자천(自薦)함을 들어 주리라." 하였다.
○ 여름 5월에 교하기를,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고, 그 덕행과 재능은 성명 밑에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 6월에 송이 광록경(光祿卿) 유식(劉式)과 비서소감(祕書少監) 진정(陳靖)을 보내와 왕을 검교태사 식읍 1천호 식실봉 4백호(檢校太師食邑一千戶食實封四百戶)로 더 책봉하고, 다른 것은 모두 예전대로 하였다. 이전에 백사유(白思柔)가 송에 갔을 때, 공목리(孔目吏) 장인전(張仁詮)이 송(宋) 나라의 조정에 상서하여 편의(便宜)를 진달하였는데, 사유는 인전이 국가의 비밀을 누설한 것이라고 하여, 인전이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황제가 진정 등에게 명하여 인전을 데리고 돌아가게 하고, 또 왕에게 조하여 인전의 죄를 풀어 주게 하였다. 왕이 표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소인은 이익에 마음이 기우니, 어찌 분수를 넘은 데 대한 죄를 받으리라고 생각하였으리까. 성주(聖主)께서 너그러이 은혜를 내리시어 가엾이 여기시는 명을 멀리까지 내리시니, 장인전은 이미 조지(詔旨)에 따라 죄를 방면하였습니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욱(郁)을 사수현(泗水縣 경남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다. 욱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 집이 경종(景宗)의 비(妃) 황보씨(皇甫氏)의 사제(私第)와 서로 가까웠다. 경종이 훙하자, 비가 사제에 나와 거처하였는데, 일찍이 곡령(鵠嶺)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나라 안에 넘쳐 흘러 모두 은빛 바다를 이루는 꿈을 꾸고는 점을 쳐 보니, “아들을 낳으니, 그가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하므로 비가,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랴." 하였었다. 후에 욱이 마침내 비와 관계하여 아기를 배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니, 마침내 비는 대종(戴宗 성종의 아버지 욱(旭)을 추존한 묘호)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비가 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할 때 왕이 빨리 가서 물어 보도록 하여 그 까닭을 알아 보니, 욱이 난륜(亂倫)의 죄를 범했다 하므로 그를 귀양보내었다. 비는 자기집으로 돌아와 겨우 문에 이르자마자 산기(産氣)가 있어, 문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고는 죽었다. 왕이 보모(保姆)를 가려서 그 아이를 길렀는데, 아이가 2살이 되었을 때 왕이 불러 보니 보모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가 왕을 쳐다보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무릎 위에 올라와서 옷깃을 움켜잡고 또다시, '아버지' 하고 부르자, 왕이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구나." 하고, 이에 사수현(泗水縣)으로 보내어 욱에게 돌려 주니, 이 아이가 곧 순(詢 현종(顯宗))이다.
○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이 송의 빈공과(賓貢科)에 올라 비서랑(祕書郞)의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 9월에 등주(登州)에서 길이가 일곱 치나 되는 벼 이삭과 길이가 한자 네치나 되는 기장 이삭이 나타났다. 신하들이 경하하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겨울 11월에 주ㆍ부ㆍ군ㆍ현과 관(關)ㆍ역(驛)ㆍ강(江)ㆍ포(浦)의 이름을 고쳤다.
○ 12월에 태묘(大廟)가 완성(完成)되자, 조정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소목(昭穆)의 위차(位次)와 체합(禘祫)의 의절(儀節)을 의논해 정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 교하여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전장(田莊)을 내려 주었다.
○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 합제(祫祭)를 지내었다.


 

[주D-001]소목(昭穆) : 종묘의 제도에, 태조는 정중(正中)에 모시고, 그 왼쪽에 있는 신위를 소(昭), 오른쪽에 있는 신위를 목(穆)이라 한다.
[주D-002]체합(禘祫) : 체(褅)는 시조의 제사이며, 합(袷)은 합제(袷祭)를 말한 것인데, 3년에 한번 합제하고 5년에 한 번 체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