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퇴계 이황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아베베1 2013. 7. 4. 19:23

 

 

 

 

퇴계 이황선생의 선고 묘갈명

 

 

고봉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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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융경(隆慶) 3년(1569, 선조2) 여름에 퇴계 선생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글에 “나의 선부군(先府君)께서는 선형(先兄)의 벼슬이 높아짐으로 인하여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당시에 이미 묘 앞에 한 비갈(碑碣)을 세우고 관향(貫鄕)과 세계(世系)를 대략 새겨 넣었는데, 돌이 이지러지고 망가져서 다시 세우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그 후 나로 인하여 여러 번 가증(加贈)을 받았으니 나 자신에 있어서는 실로 외람되어 감당할 수가 없으나, 이미 사양하여도 되지 못하여 절하고 받았다. 그리하여 또 마침내 선부군의 추증하는 예전을 받았으니, 묘도에 쓰는 것은 지금 추증한 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 이전에 새긴 것은 사실(事實)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또 명문(銘文)도 없다. 내 엎드려 생각건대 선인께서는 훌륭한 뜻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쓰이지 못하였고 이름이 사첩(史牒)에 오르지 못했으니, 만일 다만 이대로 인몰(湮沒)된다면 이것은 더더욱 자식 된 마음에 무한한 서글픔이 될 것이다. 그대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숨겨진 행적을 발양하여 후세에 보여 주기를 원한다. 이에 내가 엮은 행장 하나를 절하고 올리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선생의 편지를 받고 부끄러워 글을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나를 가르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기지 않고 다행히 선대의 명문을 맡기시니, 의리상 진실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선고(先考)는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兼判義禁府事) 이공(李公)으로 휘는 식(埴)이요, 자는 기지(器之)이며,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5대조인 석(碩)이 비로소 고을의 아전으로서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뒤에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고조의 휘는 자수(子修)로 고려 말기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해서 훌륭한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왜구를 피하여 안동(安東)에 거주하였다. 증조 운후(云侯)는 중훈대부(中訓大夫)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정(禎)으로 비분강개하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세종 때에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인 이만주(李滿住)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영변(寧邊)에 큰 진(鎭)을 창설해서 형세를 제압하려 하였는데, 공을 판관으로 뽑아 부사(府使) 조비형(曺備衡)을 보좌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매사를 감독하고 다스리기를 합당하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관작 2계급을 하사받았으며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별세하였는데, 그 후 여러 번 추증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선고의 휘는 계양(繼陽)으로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1)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예안현(禮安縣)의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였다. 일찍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뜻을 즐기며 오로지 아들을 가르치고 책을 읽는 데 종사하였다. 여러 번 추증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선비(先妣)는 영양 김씨(英陽金氏)로 부사직(副司直) 김유용(金有庸)의 따님인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천순(天順) 계미년(1463, 세조9) 9월 1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뜻을 독실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공부에 전력하여 마치 목마를 때에 물을 찾듯이, 굶주릴 때에 밥을 찾듯이 하였다. 문소 김씨(聞韶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인 예조 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집에는 서적이 매우 많았는데 장모인 공인(恭人) 남씨(南氏)는 일찍이 여러 아들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한하던 중 공이 학문을 좋아함을 기뻐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서적은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요 공적인 기물이라 반드시 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니, 우리 여러 아이들은 이것을 소유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모두 공에게 넘겨주었다. 공은 이로 인하여 크게 옛것을 상고하는 데 힘을 쓰게 되어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연구하고 찾아보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업이 이루어지자 아우 우(堣)와 더불어 모두 당시 학자들에게 추앙받게 되었는데, 공은 특히 박학다식으로 알려졌다. 우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일찍이 아들을 훈계하기를 “나는 책에 대해서 밥을 먹을 때에도 함께 보고 잠을 잘 때에도 함께 꿈을 꾸며 앉을 때에도 같이 앉고 길을 걸을 때에도 함께 가지고 다녀서 일찍이 잠시라도 내 마음에 잊은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끝내 이처럼 세월을 허송한다면 어찌 성취할 가망이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성품이 높아 세상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못하였고, 문장을 짓되 또 과거 공부의 형식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거를 볼 때마다 낙방하다가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비로소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거처하는 집 남쪽 가에 한 언덕이 있었으니, 바로 영지산(靈芝山) 뒤쪽 기슭으로 두 시냇물이 합류하는데, 구름과 산이 아득하여 머무를 만하였다. 공은 이곳을 가리키면서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면 마땅히 이곳에다가 집을 짓고 생도를 모아 가르칠 것이니, 또한 내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다음 해인 임술년(1502) 6월 13일에 병에 걸려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은 겨우 40세였다. 집 뒤의 용두산(龍頭山) 남쪽 기슭 수곡(樹谷)에 있는 선영 곁에 안장하였다. 부인 김씨는 2남 1녀를 낳았고, 또 계실(繼室) 춘천 박씨(春川朴氏)는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으로 5남을 낳았는데,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장남은 잠(潛)으로 충순위(忠順衛)이고, 둘째는 하(河)로 예천 훈도(醴泉訓導)이며, 셋째는 서린(瑞麟)으로 관례(冠禮)도 하기 전에 요절하였다. 넷째는 의(漪)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다섯째는 해(瀣)로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일찍이 대사헌이 되어 이기(李芑)가 재상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논하다가 뒤에 다른 일로 이기에게 모함을 받아 고문을 받고 유배되는 도중에 별세하였다. 다음은 징(澄)으로 제원 찰방(濟原察訪)이요, 막내는 바로 퇴계 선생이다. 딸은 신담(辛聃)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16인이니, 인(寅), 완(完), 굉(宏), 성(宬), 선(宣), 헌(憲), 재(宰), 복(宓), 영(甯), 교(㝯), 치(寘), 혜(寭), 주(宙), 건(騫), 준(寯), 채(寀)이다. 손녀는 12인이다. 외손은 남자가 1인, 여자가 1인이며, 내외 증손은 남자가 75인이다. 자손의 번성함이 세상에 드문 일이니, 남은 경사가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공이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을 부지런히 연구한 것은 옛사람에게 뒤짐이 없을 것인데, 억제되어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찍 별세하여 끝내 한 세상에 조금도 시행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깊이 슬퍼하고 길이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남은 경사가 모여 이와 같이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어찌 숨겨진 덕의 보답으로 이루어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이 공에게 누리게 한 복은 박하지 않고 후하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거듭 생각건대 퇴계 선생의 편지에 “나는 팔자가 기구하고 하늘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태어난 지 한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여러 고아들이 사리를 분별하게 된 이래로는 점점 선인(先人)의 세대와 멀어져 당시의 친구 분들이 다 이미 별세하여 물어볼 곳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모든 언행과 사실이 대부분 유실되고 기술되지 못했다.” 하였고, 또 가장(家狀)에 “선군은 평소에 여러 번 탄식하기를 ‘우리 여러 아들 중에 내 뜻을 따라 내 학업을 계승하는 자가 있으면 내 비록 이 일을 끝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한이 없다.’ 하셨다. 선군이 별세하였을 때 백형(伯兄)은 겨우 장가들었고, 나머지 고아들은 모두 어려서 장차 문호를 유지하고 선업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는데, 선비께서는 과부로 40여 년 동안 사시며 온갖 고난을 겪고 자식들을 길러 제때에 혼인을 시켰으며, 더욱이 재정을 마련해 주어 멀고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도록 뒷받침해 주셔서 반드시 학업을 성취하여 의로운 길로 들어가게 하고자 하셨다. 숙부인 참판공께서는 또 양육하고 가르치기를 자기 자식과 같이 하셔서 세상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 후 여러 아들들은 가훈을 받들어 따랐으나 지하에 계신 부모님의 기대를 완전히 위로하고 부응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 불초한 나로 말하면 선비의 식감(識鑑)으로 어리석고 막혀서 세상에 행세하기 어려움을 깊이 걱정하시고 작은 벼슬로 그칠 줄을 알라고 경계하셨는데, 나는 허명(虛名)에 몰려 전전해서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나의 본의가 아닌바 그 유훈을 실추함이 심하다. 다만 선인의 뜻과 행실을 한 가지도 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나의 불효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에 감히 세계와 행실을 엮어서 당세의 군자에게 글을 받아 묘도를 빛내어서 망극한 애통을 펴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아, 선생의 말씀을 세 번 반복해 보니 그 뜻이 또한 애처롭다. 나는 이에 대해서 또 감회가 있다. 선생은 선친의 뜻을 추념하고 선비의 가르침에 깊이 복종하여 출사하신 이래로 여러 번 퇴각하시고는, 깊이 지방에 잠복해 있으면서 강학을 힘써서 그 문장과 가르친 말씀을 학자들이 모두 전하고 외고 있으며 한 세상 사람들이 또한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선공(先公)의 지업(志業)과 선부인의 식감이 그 실마리를 크게 열어서 자손들의 마음을 인도함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이다.
또 공은 비록 당시에 일을 하지는 못했으나 후대에 영화롭고 표창됨이 또한 지극하니, 공은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후세 사람으로서 퇴계 선생의 도를 추모하면서 그 소유래(所由來)를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공의 덕을 징험할 수가 있어서 덕을 많이 쌓아 개발한 공로 때문이요, 애당초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의 뜻과 행실은 장차 전해지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찌 쉽게 속인(俗人)과 말하겠는가. 아, 슬프다. 이어 명문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망망한 천지의 조화는 / 茫茫元化
줄기와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고 / 苞幹相幷
흡벽(翕闢)이 공중에 가득하여 / 翕闢滿虛
만물이 태어나네 / 物由以生
태어날 때의 본성은 / 生之有性
사람이 똑같이 받았으나 / 人所均受
명은 만나는 환경에 따라 어그러져 / 命與遇舛
장수도 하고 요절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네 / 脩夭好醜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나심은 / 嗟公生世
만나기는 어려웠고 지나기는 쉬웠네 / 値難過易
하늘은 어찌하여 큰 재주를 주시고도 / 胡畀之大
조금도 시험해 보지 못하게 하였나 / 而不少試
도는 굽혀졌다가 충만해지고 / 道詘而充
수는 가득하면 한계에 도달하네 / 數盈而局
중도에 서거하니 / 半塗以逝
쓸쓸하고 막혀 있네 / 寂寥鬱塞
독실하게 후손을 열어 놓아 / 篤啓嗣續
가문의 법도를 세웠네 / 惠于閫則
크게 유서를 발하여 / 濬發遺緖
문(文)의 극을 잡았으니 / 秉文之極
그 문은 무엇인가 / 其文伊何
실로 하늘에서 나왔네 / 實出於天
하늘이 공을 탄생시킴은 / 天之降公
또한 뜻이 있어서이니 / 其有意然
이미 현부를 열었고 / 旣闢玄符
또 그 후손을 번성하게 하였네 / 又昌厥後
훌륭한 자손이 많이 나와 / 詵詵毓慶
선조의 덕을 잘 계승하네 / 克以克有
용두산 남쪽에 신도비를 세우고 / 龍頭南麓
돌에 아름다운 사실을 기재하니 / 琢石載美
혁혁한 큰 업적은 / 光光大業
분명히 유래가 있어라 / 的有出自
덕을 상고하여 천리를 미루니 / 考德推天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는가 / 神豈敢誣
후세에 알리노니 / 用詔來者
내 말은 아첨한 것이 아니라네 / 匪我言諛


 

[주D-001]흡벽(翕闢) : 음흡양벽(陰翕陽闢)의 준말로, 음은 닫히고 양은 열려서 이 음양의 조화로 말미암아 우주의 만물이 생성된다는 역리(易理)에 근거한 말이다.
[주D-002]현부(玄符) : 현(玄)은 검정색으로 《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의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天玄而地黃〕”는 말에 근거하여 하늘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며, 부(符)는 상서로운 조짐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