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사계 김장생

사계 김 선생 신도비명(沙溪金先生神道碑銘) 병서

아베베1 2013. 9. 24. 13:36

 

계곡선생집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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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8수(首)
사계 김 선생 신도비명(沙溪金先生神道碑銘) 병서


김씨는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그 계보가 멀리 신라(新羅) 때로부터 유래한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을 알고 광산으로 나와 은둔하였는데 이로부터 자손들이 이곳을 관적(貫籍)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高麗) 때에는 김씨 가문에서 무려 8대에 걸쳐 계속 평장사(平章事)가 배출되었으므로 그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저명한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휘(諱) 국광(國光)은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공신에 책훈되는 동시에 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는데, 이분이 휘 극뉵(克忸)을 낳았으니 바로 선생의 고조로서 관직이 대시간에 이르렀다. 증조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를 증직받았고, 조부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부친 휘 계휘(繼輝)는 박학한 데다 재질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공보(公輔 공경(公卿))가 되리라 기대했는데 관직을 대사헌으로 마쳤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받았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우참찬 영(瑛)의 딸로서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 3)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묵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버릇없이 장난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 제서(諸書)를 배우면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며 몸에 익히곤 하였는데, 이를 보고 대헌공(大憲公)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학문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이 없다.”
하였다. 장성해서는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의(道義)의 요체(要體)에 대해서 빠짐없이 듣게 되었는데, 율곡 역시 공을 매우 중하게 대하였다.
대헌공이 관서(關西) 지방의 관찰사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관서는 평소 번화한 곳으로 일컬어지던 곳으로서 놀러 온 손님들이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가무와 여색(女色)을 즐기는 것으로 일을 삼곤 하였다. 선생이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러 올 때마다 사람들을 따라 주선하곤 하였는데, 겉으로는 특별하게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몸가짐을 확고하게 단속하며 한번도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만력(萬曆) 무인년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뛰어난 인사를 선발할 때, 성경(聖經)에 침잠하고 고훈(古訓)을 독신(篤信)한다고 선생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한참 있다가 대헌공이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는데 선생이 수행하려 하자, 이조가 사관(祠官)의 직책은 비워 둘 수 없다 하여 돈녕부 참봉으로 바꿔서 임명해 주었다. 왕복으로 수천만 리나 되는 그 도정(途程)에서 선생이 부친을 모시고 근실하게 복무한 행동이야말로 그지없이 효성스럽고 지극한 것이었다. 다시 재행(才行)이 탁월한 인사로 선발되면서 승서(陞敍)의 명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헌공의 상(喪)을 당하게 되었다. 여묘(廬墓) 생활을 하며 상제(喪制)를 다 마친 뒤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조금 뒤에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되었으니, 이는 전에 내린 승서의 명을 적용한 것이었는데, 곧이어 그 직책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누차 활인서(活人署)와 사포서(司圃署)의 별제(別提) 및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가 규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승진한 다음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외방에 나갔다.
이듬해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는 상황에서 융사(戎事)가 한창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그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이 접응하고 무마하는 일을 각각 온당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일도 제대로 거행되면서 백성의 생활도 안정이 되었는데, 이때 방백이 포상을 상신하면서 ‘가식 없이 정성을 쏟으면서 백성을 번거롭히지 않는 정사를 행하였다.’고 일컬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해면되어 돌아와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중국 군대가 남정(南征)하는 동안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하다가 일이 끝나자 조정에 돌아왔는데, 곧이어 무슨 일로 그만두고 해서(海西)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막 겪은 때라서 학업을 닦을 경황이 없는 때였는데, 선생은 날마다 문생(門生) 자제들과 중단 없이 강송(講誦)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누차 단양 군수(丹陽郡守),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호조 정랑, 양근 군수(楊根郡守),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또 군자감 첨정을 제수하자 마지못해 나가 사은(謝恩)하였으며 그 뒤 안성 군수(安城郡守)의 임명을 받았다.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주역구결(周易口訣)》을 교정할 때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으나 신병 때문에 실제로 직무를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행사하면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선생이 서울에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마침내 연산(連山) 시골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임명되자 이에 숙배하고 3년 동안 있다가 파직되어 돌아오기도 하였다.
광해(光海) 초년에 익위(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뒤이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의논하는 이들이 그 지역은 북관(北關)의 요로(要路)에 해당되는 만큼 무인(武人)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철원부(鐵原府)로 바꿔 임명되었다.
계축년에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선생의 서제(庶弟)인 모(某)와 모가 고발을 당해 고문을 받다가 죽은 뒤를 이어 육시(戮屍)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대역죄(大逆罪)로 논했으므로 선생의 가문 전체가 연좌(緣坐)될 운명이라서 친척들이 공포에 떨며 화(禍)를 완화시킬 방도를 꾀하기도 하였으나 선생만은 평온한 모습으로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을 받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 요행히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런데 마침 법관(法官)이 율(律)을 적용하는 원칙상 연좌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대신의 의논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일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처음에 광해가 직접 나서서 죄수들을 국문(鞫問)하며 상변(上變)한 사람에게 묻기를,
“김모(金某)도 이 일과 관련이 있는가?”
하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김모는 현자(賢者)입니다. 그래서 모 등이 모의를 하면서도 그가 알까 두려워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뒤에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했을 때에도 광해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정협의 대답 역시 동일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시골에 돌아와서는 은거하며 문을 닫아걸고 외부 인사들과 일체 접촉하지 않는 가운데 오직 경훈(經訓)에 침잠하여 완미(玩味)하면서 자적(自適)한 생활을 보내었다.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하교하기를,
“김장생으로 말하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이름을 익히 들었다. 즉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라.”
하였는데, 선생이 이에 상소하여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그 기회에 여러 원훈(元勳)들에게 글을 보내 임금의 덕을 보도(輔導)할 것과 백성을 안정시키고 형벌을 완화할 것과 인재를 거두어들이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방책에 대해서 극력 말하는 한편, 제공(諸公) 또한 청렴하고 근신하는 자세로 자기 몸을 단속하여 정국(靖國) 3장(三將)의 오류를 답습하지 말라고 경계시키니, 여러 원훈들이 글을 받아 보고 탄복하였으며 마침내 상에게까지 이 일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선생의 사직소가 들어오자 상이 비지(批旨)를 내려 온유하게 유시(諭示)하면서 마여(馬轝)를 타고 올라오도록 허락하였고, 뒤이어 또 하교하여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니,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조정에 나온 다음 또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를 거행하려 하자 조정 신하들이 모두가 축하하며 환영하는 논조로 의논을 올렸다. 예조 판서인 이공 정귀(李公廷龜)와 부제학인 정공 경세(鄭公經世)를 위시하여 여러 대신들의 군의(群議)를 종합해 보면 ‘상이 친손(親孫)으로 조(祖)의 계통을 잇고 있으니, 이는 방계(旁系) 지손(支孫)이 인후(人後)로 된 것과는 경우가 같지 않다. 일단 선묘(宣廟)에 대해서 고(考)라고 하지 않는 이상 사친(私親)에 대해서도 고(考)가 두분 있게 되는 혐의가 없으니, 사친을 고(考)로 칭하고 상 자신은 자(子)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예법 가운데 계통을 잇는 것보다 더 엄중한 것은 없으니,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게 되었다 할지라도 모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춘추전(春秋傳)》에서 노(魯) 나라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은 부자지간과 같다고 하였고,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는데도 사황손(史皇孫)을 높여 황고(皇考)라고 칭하자 선유(先儒)가 이를 비난했던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선조의 뒤를 이으신 만큼 사친에 대해서 다시 고(考)라고 칭해서는 안 되니, 의당 정자(程子)의 설에 따라 숙질(叔姪)의 관계로 재정립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조정의 의논이 이미 확정된 상태라서 선생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았다. 뒷날 선생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지없이 위로하며 유시하자 선생이 배사(拜謝)를 하고 인하여 품속에서 주차(奏箚)를 꺼내어 제왕의 학문의 도에 관해서 논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뒤이어 체직되어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다. 그 뒤 연신(筵臣)의 건의에 따라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관직을 설치하여 선생을 머무르게 하면서 다사(多士)를 잘 가르쳐 인도하는 동시에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강석(講席)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문의(文義) 이외에 일에 따라 바로잡고 권장하곤 하였으므로 원자가 선생을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겼다.
선생이 상을 알현할 때마다 번번이 질병을 이유로 물러갈 것을 청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상이 억지로 머물러 있게 하다가 뒤에도 계속 청하여 마지않자 상이 이르기를,
“돌아가도 좋다만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말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선생이 하직하던 날 술을 하사하며 위로해 보냈는데, 이때 원자(元子)도 직접 나와서 간절하게 말을 하며 시골에 오래 있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선생이 고향에 돌아간 뒤 상소하여 사은(謝恩)하고 아울러 백성이 당하는 고달픈 일들을 진달드리니 상이 또 위로하며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상이 공산(公山 공주(公州))에 행행(幸行)하자 선생이 길에서 대가(大駕)를 영접하였다. 이윽고 적이 평정되어 도성으로 돌아갈 때에 상이 이르기를,
“이 길로 입경(入京)해서 원자를 교도(敎導)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선생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는데 3번이나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말미를 청해 향리로 돌아간 다음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면서 13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였다.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헌부에서 내노(內奴)를 구속하고 그 죄를 다스렸는데 일이 자전(慈殿)과 관련되자 상이 엄한 분부를 내려 헌부를 꾸짖었다. 이에 정원이 상의 분부를 도로 봉환(封還)하자 상이 이번에는 정원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사직소를 올리는 기회에 그 일을 진달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범한 전하의 잘못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는 하나 종국에는 필시 사(私) 때문에 공(公)을 멸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소명(召命)을 내리자 선생이 이에 응하여 나아가서 사은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김장생이 일단 올라온 만큼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는 동시에 원자를 시강(侍講)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보익(輔益)하는 점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르면서 이내 강학관(講學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왕세자를 책립(冊立)함에 이르러 선생의 품계를 가선대부로 올리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뒤이어 또 말미를 청해 시골로 돌아가서 누차 소를 올리며 해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계운별궁(啓運別宮 인조(仁祖)의 생모.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기 전의 궁호(宮號))의 상(喪)에 선생이 상경하여 조위(弔慰)하며 열흘쯤 머물러 있다가 청고(請告)한 다음 앞질러 향리로 돌아갔다. 이때 정원이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할 것을 계청하여 그렇게 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다.
이에 앞서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대례(大禮)를 논하였는데, 그 주장이 선생의 뜻과는 상반되었을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추존(追尊)해야 한다는 의논을 개진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속으로 그르게 여긴 나머지 조정에 몸담고 있는 친구에게 글을 지어 보내 통렬하게 변척(辨斥)을 가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원훈(元勳) 중에 박씨의 설을 옹호하는 자가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선생 역시 옛날의 견해를 고쳤다고 잘못 일컫자, 선생이 또 소장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였다.
오랑캐가 침입하여 기보(圻輔)에까지 육박해 오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면서 세자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분부를 내려 선생을 호소사(號召使)로 삼았는데, 선생이 이에 병을 무릅쓰고 명을 받들어 군병을 불러 모으고 군량을 마련한 뒤 직접 분조에 나아가 상알(上謁)하였다.
어느 날 밤 적이 이미 임진(臨津)을 건넜다고 잘못 소문이 전파되자 분조의 제신(諸臣)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동궁(東宮)을 모시고 영남 지방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는 옳은 계책이 못 된다고 극력 말하면서 대비책을 세울 것을 청하며 이해 관계를 설명하자 세자가 수긍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잘못된 소문 역시 진상이 알려져 자연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서 선생이 곧바로 분조를 떠나 강도(江都)로 급히 달려가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가려고 하는 때였다. 상이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하자, 선생이 그 기회에 아뢰기를,
“적의 형세가 조금 완화되었는데, 신은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직하고 물러갔으면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강화(講和)하는 일이 물론 임기응변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척화론(斥和論) 역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언자(言者)들이 혹시라도 척화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견책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 국가에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기꺼이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하였다.
선생이 강도에서 돌아와서는 해직된 상태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2번이나 사직하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상이 선생을 사모하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과 장현광(張顯光) 모두 숙덕(宿德)인데, 서울에 오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와서도 금방 돌아가 버리곤 하니, 이는 나의 정성이 천박하고 예우를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이다.”
하고, 즉시 하교하여 마여(馬轝)를 타고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수비(手批)를 내려 이르기를,
“경은 나라의 대로(大老)로서 그 덕행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 서울에 와서 머물러 있어 주기만 하더라도 사부(士夫)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계옥(啓沃)시켜 주는 유익함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으니, 경은 다시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선생의 나이가 이미 83세에 이르러,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아 정력이 모두 쇠진된 상태였으므로 잇따라 소장을 올리면서 더욱 사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때마침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베풀어졌으므로 규례에 따라 선생의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랐다.
이듬해 신미년 8월 3일에 선생이 병으로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의 뜻을 표하며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고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자 역시 강(講)을 중단하고 소선(素膳)을 들면서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내가 학문에 어두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김공이 가르쳐 깨닫게 해 준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궁관(宮官)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상이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역부(役夫)를 내주어 묘역(墓域)을 경영케 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복(服)을 입은 자가 수십 백 인이요, 장례를 거행할 무렵 원근(遠近)의 지역에서 찾아와 모인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 서쪽 새로 마련한 묘역에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휘(諱)는 장생(長生)이요, 자(字)는 희원(希元)인데, 학자들은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천품이 돈후(敦厚)하고 화수(和粹)하여 자연스럽게 도(道)에 가까웠는데, 매우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둔 위에 또 대현(大賢)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전일하고 확고했으며 공력을 들이는 것이 치밀하고 독실하였다. 그리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상호 조화되는 가운데 공부가 발전하였는데,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70, 80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져 밝고 화평한 기운이 그대로 밖에 드러났다. 그래서 선생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불문하고 성덕군자(成德君子)를 논할 때면 사람들이 으레 선생을 첫손가락에 꼽곤 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으므로 왕부(王父 조부)인 찬성공(贊成公)이 데려다 길렀다. 그 뒤 찬성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 선생이 해서(海西)에 있다가 홀연히 슬픈 심정이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면서 마구 눈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며칠 있다가 부음(訃音)을 받았다.
그리고 임진년 난리 때 맏아들 은(檃)이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적을 만나서 해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에도 선생이 문득 알아차리고 종일토록 비통해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먼저 알게 되는 하나의 징험으로 여겼다.
선생은 스승의 은혜와 친구간의 의리에 대해서 더욱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 송 귀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참혹한 화를 당하여 원수를 피해서 탈출했으나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선생이 집에 모시고 근실하게 봉양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정 상공(鄭相公)이 일단 죄명(罪名)을 얻은 뒤 당화(黨禍)가 더욱 심각해지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더러 부화뇌동하여 비난하면서 시의(時議)에 빌붙곤 하였으나, 선생만은 그의 심적(心迹)을 분명하게 해명해 주면서 사방에서 헐뜯는 말이 일어나도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 세계는 본디 율곡(栗谷)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소급해 올라가면 고정(考亭 주희(朱熹))에 그 근본적인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근대(近代)의 유선(儒先)들이 논한 바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이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에 대해서는 그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을 일체 율곡의 설에 입각하여 절충(折衷)하였는데, 정밀하게 분석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터득한 바가 또한 많았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가장 많은 공력을 쏟았는데, 그 고증(攷證)이 정밀하고 해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변례(變禮)를 당하거나 의심스러운 예문(禮文)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선생을 찾아와 질정(質正)을 받곤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국가의 전례(典禮)를 논할 때에 미쳐서는 선생 홀로 중설(衆說)을 배격하면서 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 제공(諸公)과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는데, 어리석은 내가 볼 때에도 부당한 요소가 없지 않아 누차 의문점을 진달드리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처음의 견해를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끝내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선생은 평생 저술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독서하면서 얻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차록(箚錄)해 두었을 따름이다. 현재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書), 소(疏), 잡록(雜錄) 약간 편(篇)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集覽)》 3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이 세상에서 읽혀지고 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첨추(僉樞) 대건(大乾)의 딸로서 현숙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는데 선생보다 45년 앞서 36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연산현(連山縣) 선영의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선생의 장례를 행할 때 옮겨 부장하였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은(檃)은 바로 임진년에 해를 당한 사람이고, 다음 집(集)은 사헌부 지평이고, 다음 반(槃)은 홍문관 전한이다. 장녀는 감찰 서경율(徐景霱)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군수 한덕급(韓德及)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 소생의 아들이 여섯 있는데, 영(榮)은 생원이고, 경(檠)은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이름이 고(杲), 구(榘), 규(槼), 비(棐)이며, 그 밖에 딸이 둘 있다.
지평은 측실의 아들인 익형(益炯), 익련(益煉)과 딸 2인을 두었다. 전한은 6남을 두었는데, 익렬(益烈)은 별제(別提)이고, 익희(益煕)는 예문관 검열이고, 익겸(益兼)은 학생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딸이 넷 있다. 서경율은 2녀를 두었고, 한덕급은 3남 4녀를 두었다. 그 밖에 내외손과 증손들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그릇이 큼직하고 뜻이 굳세어야 멀리 이를 수 있고 / 弘毅致遠
질박하고 어눌(語訥)함이 인의 속성에 가깝다는 / 木訥近仁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하나니 / 聖訓炳然
공문(孔門) 사과의 반열 속에 / 四科之列
노둔한 증삼(曾參) 끼이지 못했어도 / 曾魯不與
끝내는 공부자(孔夫子)의 뒤를 이었도다 / 卒得孔傳
아 우리 선생 / 於惟先生
묵직하고 순후한 기질을 품부받고 / 質重氣醇
학문 향한 전일한 뜻 확고했는데 / 確乎靜專
일찍부터 대유(大儒) 스승 모시고 / 早師眞儒
깊이 빠져 들어 마음속에 간직하며 / 潛心服膺
일거수 일투족 법도에 맞게 행하였네 / 矩方規圓
세상 학자들 / 世之學者
알맹이 없이 치달리면서 / 憑虛騖遠
겉모양만 번드르르 꾸미곤 하나 / 華色外宣
우리 선생 이와 달라 / 先生異是
점진적으로 조금씩 나아가면서 / 寸積銖累
먼저 하고 뒤에 할 것 염두에 두셨도다 / 知所後先
중용의 덕 품고 사물의 이치 통달하여 / 黃中通理
온몸에 밝은 기운 넘쳐흐르며 / 美暢四支
완전한 덕기(德器) 혼연히 이루셨는데 / 渾然德全
만년에 성상의 지우(知遇)를 받아 / 晚際聖明
융숭한 예우에 직질(職秩)도 높아지며 / 禮隆秩躋
기탄없이 정사를 의논하곤 했었지요 / 都兪廈旃
나라의 원로로서 / 國有大老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사시며 / 旣壽且康
백발 머리에 붉은 얼굴빛 / 渥顔華顚
사림이 온통 우러러보며 / 士林瞻卬
마치 태산(太山)이요 / 若山有岱
북두(北斗)처럼 여겨 왔어라 / 魁衡在天
서산에 해 기울 무렵 / 日昃之離
대들보 홀연히 부러졌는데 / 梁木忽摧
애도하는 가운데 영예 또한 극진했네 / 哀榮備焉
봉긋이 솟은 저 언덕 / 宰如者丘
빗돌에 명 새겨서 / 刻銘豐碑
만년토록 전해지게 하려 하노라 / 用眎萬年


 

[주D-001]정국(靖國) …… 오류 : 정국 3장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策勳)된 뒤 차례로 정승을 역임한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을 말한다. 세 사람 모두 중흥의 원훈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면서도 세상에 남을 만한 공적은 하나도 세우지 못한 채 자만심에 꽉 차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들의 정욕만 채우다 생을 마쳤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相臣》
[주D-002]춘추전(春秋傳)에서 …… 하였고 : 《춘추전》은 송(宋) 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저술로, 주자학자들에게 존숭되어 《좌전(左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 4전(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노 나라 민공이 재위 2년 만에 애강(哀姜)의 동생인 경보(慶父)에게 시해되자, 민공의 아우인 희공이 진(陳)에서 돌아와 그 뒤를 이었다. 《史記 卷33》
[주D-003]한 선제(漢宣帝)가 …… 것이었습니다 : 한 무제(漢武帝)의 장자(長子)인 여태자(戾太子) 거(據)가 무고(誣告)로 인해 자살하자 무제의 소자(少子)인 소제(昭帝)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선제(宣帝)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의 아들인 만큼 소제와는 항렬상 조손(祖孫)의 관계가 있긴 하나, 제왕의 계통으로 보면 부자지간의 의리가 있는 이상 사친(私親)인 사황손을 고(考)라고 칭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선유는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漢書 卷63, 卷67, 卷68》
[주D-004]그릇이 …… 있고 :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선비는 그릇이 큼직하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나니,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하였다.
[주D-005]질박하고 …… 가깝다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에 가깝다.[剛毅木訥 近仁]” 하였다.
[주D-006]공문(孔門) …… 반열 : 덕행(德行)ㆍ언어(言語)ㆍ정사(政事)ㆍ문학(文學)을 말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덕행은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이요, 언어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이요, 정사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요, 문학은 자유(子游)ㆍ자하(子夏)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