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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고(皇考)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가장(家狀)

아베베1 2013. 12. 2. 14:12

 

 
신독재전서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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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황고(皇考)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가장(家狀)

선군자(先君子)는 휘가 장생(長生)이고 자가 희원(希元)인데 학자들이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고 불렀으며 본관이 광주(光州)이다.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우리나라의 명족(各族)인데, 이는 그 파계(派系)가 신라(新羅)에서 시작하여 일천 년을 넘게 내려오면서 점점 더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신라 말기에 왕자(王子) 휘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스스로 서민이 되어 광주로 피해 왔으므로, 그 자손들이 그대로 살면서 광주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크게 두드러진 성씨가 되었으니, 8대(代)가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이 때문에 그 고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부터 자손이 서로 뒤를 이어 대대로 대관(大官)이 나왔다.
조선조에 와서는 도관찰사(都觀察使) 휘 약채(若采)라는 분이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이분이 휘 문(問)을 낳았는데, 휘 문은 약관 시절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어 관직도 검열(檢閱)에 그쳤는데 그 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받았다. 좌찬성의 배위(配位) 허씨(許氏)는 대사헌(大司憲) 허응(許應)의 딸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받았고 또 절행(節行)으로 정려(旌閭)까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세(世) 건너 태어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두 가지의 공훈을 책봉받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바로 선군자의 5대조이시다. 고조는 휘가 극뉴(克忸)로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증 예조참판(贈禮曹參判)을 추증받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증조는 휘가 종윤(宗胤)인데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추증받았으며, 조부는 휘가 호(鎬)인데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고위(考位)는 휘가 계휘(繼輝)인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다. 판서공은 총명하고 박문달식하여 경사(經史)에 훤히 통하였고 경세 제민의 재주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사암(思庵) 박순(朴淳)이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같은 명현들이 모두 중요한 인재로 여기면서 즐거이 벗 삼을 정도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조정에서 늘 말하기를, ‘진짜 재상(宰相) 감을 구하려면 김 아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까지 했으나, 불행히도 미처 그 역량을 다 펴 보이지 못하고 세상을 일찍 떠나 조야(朝野)의 사람들 모두가 지금까지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비위(妣位)는 정부인(貞夫人) 신씨(申氏)인데, 평산(平山)의 이름난 성씨로서 고려조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휘 숭겸(崇謙)의 후손이며,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내고 시호가 이간(夷簡)인 휘 영(瑛)의 딸이다. 그 조부는 휘가 세경(世卿)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는데, 행 사직서영(行社稷署令)을 지냈고, 증조는 휘가 자계(自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받았는데 행 전생서주부(行典牲署主簿)를 지냈으며, 고조는 휘가 효(曉)인데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지냈고 강직하다고 세상에 이름났다. 그리고 외조(外祖)는 학생 우석규(禹錫圭)인데 관향이 단양(丹陽)이다.
선군께서는 가정(嘉靖) 무신년(1548) 7월 8일 신시(申時)에 서울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부터 몸가짐이 장중하여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장난질도 하지 않아 식자들은 이미 덕기(德器)가 될 인물임을 알았다. 11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마침 왕부(王父)가 관직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있을 때여서 왕대부(王大父) 찬성공(贊成公)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부형(父兄)들이 그의 고단한 처지를 가엾게 여긴 나머지 차마 밖에 내보내어 공부시키지를 못했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서는 본인 스스로 분발하여 곧바로 바른길을 찾았으며, 속세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는데, 마치 맛있는 고기를 즐기듯이 진심으로 좋아하였다. 그때 이후로 학업이 점점 늘어가자 왕부가 기뻐하시면서 “우리 아이가 이미 학문을 할 줄 아니 내 이제는 걱정이 없다.”고 하셨다. 장성해서는 율곡 선생(栗谷先生)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자주 해서(海西)에 가 그 문하에 머물면서 옛날에 배웠던 내용을 음미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내용을 익히기도 하면서 주로 내면적인 자기 완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도학(道學)에 관한 요체를 자세히 들었으며 또 예학(禮學)에 대해서 더욱더 깊이 연구하여 어느 것 하나 빠뜨린 것 없이 크고 작은 모든 예절에 관하여 다 알고 있었으므로, 율곡 선생도 늘 우리 선군에게 큰 비중을 두시고 기대 또한 컸다. 그때 왕부께서 관서(關西)를 맡아 나가 계셨는데, 우리 선군께서도 문안하기 위해 그곳에 가 머무르신 때가 많았다. 관서 하면 원래 번화한 지방으로서 대소 유랑객들이 날마다 놀고 즐기기를 일삼는 곳이지만, 선군께서는 겉으로는 아무런 단계를 두지 않은 듯이 남들 따라 노는 시늉을 하기도 했지만 지조만은 정제되고 엄숙하여 끝까지 성색(聲色)이라곤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사우(師友)들이 ‘누구도 따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이를 골라 등용할 때, 선군은 ‘성경에 조예가 깊고 옛 교훈을 돈독히 믿는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천목(薦目)으로 추천되어 처음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제수받았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신사년(1581)에는 왕부(王父)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재랑(齋郞)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 하여 이조(吏曹)에서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서로 바꾸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그리하여 일만 리가 넘는 먼 길을 왕복하면서 왕부 곁을 지키고 봉양하여 곁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 감탄할 정도로 효성을 다했다. 심지어 아침저녁 식사 때면 반드시 곁에 앉아서 몇 수저나 드시는가를 마음속으로 세어서 건강 상태를 가늠했다. 임오년(1582)에는 또 재행(才行)이 남다르다 하여 승서(陞叙)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그해 여름에 왕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상례를 마쳤다. 갑신년(1584)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제수받았다가 얼마 후 병으로 그만두었으며, 조금 있다가 또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되었는데, 그것은 전번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병술년(1586)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는데, 그동안에도 활인서(活人署)와 사포서(司圃署) 두 서(署)의 별제(別提),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 등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지만 모두 병 때문에 사양했다. 무자년(1588)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경인년(1590) 겨울에 임기가 만료되어 조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올랐다. 신묘년(1591) 봄에는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 인자하고도 간솔한 정치를 하면서 지친 백성들에게 소생의 길을 터 주고 모든 폐단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다.
이듬해 임진년(1592)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나라 전역이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왕은 서쪽으로 길을 떠났고 큰길은 다 막혔는가 하면, 삼남(三南)에서는 오고 가는 군대 왕래가 그칠 사이가 없었으며 중앙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떠도는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때 선군께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작전에 호응함으로써 위로는 국가의 기무에 오차를 낸 일이 없었고 아래로도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으므로, 고을 전체의 백성들이 우리 선군을 모두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 감대(感戴)했음은 물론이고 방백(方伯)도 ‘거짓 없이 지성으로 대하면서 백성들을 번거롭지 않게 다스린다.’고 아뢰어 포상을 받기도 했다. 병신년(1596) 여름 기한을 마치고 연산(連山)으로 돌아와 있다가 그해 겨울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임명 되었고, 정유년(1597) 여름에는 중국 군대에 지원하기 위해 호남에서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에 관여했다. 조정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무슨 일로 인하여 파면되어 해서(海西)에 가 우거하였다. 그때는 너무 어수선하였으므로 모두들 학업이라고는 전폐한 상태였지만, 선군께서는 날로 그곳의 자제 및 학도들과 함께 간책(簡冊)에 종사하면서 계속 읽고 외우고 하였는데, 번번이 끼니가 떨어져도 그저 태연하였다. 얼마 후 다시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
무술년(1598) 여름에는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政)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임명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으며, 가을에는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발령받았는데,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언관(言官)의 지적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기해년(1599) 봄에는 양근 군수(楊根郡守)와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불응하였다. 곧이어 또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자 거듭 사양하기가 미안해서 억지로 나아갔다. 가을에는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임명되었는데, 큰 난리 뒤라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재정이 바닥났으므로 마을마다 쓸쓸하기 그지없었고 백성들도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이에 선군께서 나서서 피로에 지친 백성들을 돌보고 불필요한 비용들을 절감한 결과 몇 해 안 가 고을이 점점 복구되었다.
신축년(1601) 겨울에는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에 선발되었는데, 부름을 받고 들어가서는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달증(疸證)을 앓고 있어서 나아가 일하지 못했다. 임인년(1602) 봄에는 역적 정인홍(鄭仁弘)이 국가의 법령을 손아귀에 쥐고 불 같은 기세를 부리는 바람에 전후의 사류(士流)들이 그에게 해침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선군께서도 서울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곧바로 연산으로 내려와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면서 병을 치료하였다. 계묘년(1603) 여름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어 을사년(1605) 겨울에야 그만두고 돌아왔고, 기유년(1609) 여름에는 익위(翊衛)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가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부임했는데, 경술년(1610) 겨울에 조정의 공론이 ‘회양은 북관(北關)의 들머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곳은 무관에게 맡기고 방어사(防禦使)까지 겸임하게 해서 지시하기에 편하도록 해야 한다.’고 아뢰는 바람에 철원(鐵原)으로 바뀌었다.
광해군 계축년(1613)에 와서 역적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맞추어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죽이려 했으나 적당한 방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소인 박응서(朴應犀) 무리들이 무뢰배들과 결탁한 다음 행상(行商)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하다가 일이 들통나서 체포된 일이 있었는데, 이이첨이 이를 기화로 자신의 심복 몇 사람과 함께 박응서를 사주하여 역옥(逆獄)을 꾸미고는 대군을 걸고 넘어지게 한 나머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터지게 되었다. 이때 선군의 서제(庶弟)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선(金平孫) 이 박응서 무리들과 서로 알고 지내던 터라서 역시 그 사건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는데, 그들의 속셈은 이 기회에 우리 선군과 지금의 우상(右相) 김공 상용(金公尙容)까지 그 함정에 끌어넣으려는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서제(庶弟)들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모두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죽어갔지만, 끝내 추형(追刑)까지 당하게 되어 온 집안이 모두 그 사건에 연좌되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대명(待命)하는 상태였다. 이에 아는 이들은 모두 위태함을 느끼고 무서워 떨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어떤 사람은 화를 모면할 방법을 꾀해 보기도 하였지만, 선군께서는 태연히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고, 화복(禍福)도 미리 정해진 것이어서 요행수로 면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지금 상황이 사람의 힘으로 해 볼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고 하셨다. 그때 마침 어느 법관(法官) 한 사람이 연좌는 법례(法例)가 아니라고 앞장서서 주장한 데다가 또 대신들의 헌의(獻議)도 있고 해서 사건이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처음 옥사가 터졌을 때 광해군이 직접 박응서에게, 김 아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박응서가 대답하기를, “김 아무는 어진이라서, 저희들이 모사를 할 때 오히려 그가 알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하였다. 그 후 정협(鄭浹)이 또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그 당시의 명재(名宰)들을 걸고 넘어지는 바람에 감옥이 만원이었는데, 이번에도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물은 것처럼 정협에게 물었으나 그도 역시 ‘그런 일은 없다.’고 극구 부인하였으므로 우리 선군은 다행히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관로(官路)가 막히어 환난(患難)에 처하는 자세로 지냈으니, 시골에서 문을 닫은 채 살면서 외인들과는 편지 내왕 등의 접촉을 전혀 하지 않았던 반면 좌우에는 경서(經書)를 두고 매일 열심히 읽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계해년(1623)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초기에 상이 ‘김장생(金長生)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왔노라.’고 하면서 즉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고 소명(召命)을 내렸는데, 선군께서는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 그 일에 앞장섰던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 여러 공에게 장서(長書)를 보내 격려했는데, 그 대략은,
“생각 밖에 그대들의 손에 의해 경천 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가 세워졌습니다. 이야말로 이미 땅에 떨어진 인간 윤리를 바로 세우고 거의 망해가는 국가를 다시 붙잡은 일로서, 옛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세상에 드문 의거(義擧)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무릇 일이란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선후책(善後策)이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뒤에 말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그 의거가 나라를 위해 도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귀 공명을 위해 한 짓이다.’고 할 것이니,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서경》에도 이르기를, ‘끝없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였듯이, 오늘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니 적이 걱정이 됩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임금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그 임금을 어떻게 보도(輔導)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새 임금은 나이도 한창이고 바탕도 또한 옥과 같으니, 지금이야말로 흥쇠(興衰)와 형준(亨屯)이 결정되는 고비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그 앞에서 할 말을 다 하고 동정(動靜) 하나하나도 반드시 옳은 길로 인도함으로써 삼대(三代)의 이상 정치가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옛말에도 ‘어려서 습관을 잘 들이면 마치 천성(天性)처럼 자연스럽게 된다.’고 했고, 《서경》에도 ‘끝이 좋으려면 시작부터 삼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했다. 또 이르기를,
“지금의 형세는 마치 거꾸로 매달린 사람을 풀어놓아주는 것과 같고, 또 배고프고 목마른 자는 웬만하면 잘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일은 옛사람의 절반밖에 안 되어도 효과는 틀림없이 곱이나 될 것이다.’ 한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그럭저럭 임시 변통만 하면서 백성들을 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그렇게도 바라던 백성들의 여망이 틀림없이 꺾이고 말 것입니다. 난리 이후로 백성들을 병들게 한 정책과 과외(科外)의 세금 등을 모두 없애거나 감해 주어야 할 것이고, 공안(貢案)도 개정해서 되도록 간략하게 마련하여 방납(防納)의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해 준다면 그들의 형편이 조금 풀리지 않겠습니까.”
하기도 하였다. 또 이르기를,
“역적들이 나라를 맡고 나자 그 무리들이 번성하여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의 죄를 따져보면 법으로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그러나 옥사를 결정하는 데는 차등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경중과 대소를 구별하는 오형(五刑)과 오류(五流)의 법이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언제나 공평한 마음가짐으로 형벌의 잣대를 신중히 재야 할 것이고, 혹시라도 마음이 유쾌한 틈을 타서 함부로 휘두르는 폐단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오왕(五王)이 화의 불씨를 남긴 일은 후세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군자(君子)의 말이 아닙니다. 왕자(王者)가 법을 적용할 때는 오직 그 죄와 정상을 살펴볼 뿐이지 그 밖에 무슨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까.”
했는가 하면, 또 이르기를,
“오늘날 당장 필요로 하는 일은 먼저 조정부터 바로잡고 인재를 널리 수용하며, 편사(偏私)를 없애고 공도(公道)를 활짝 여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따질 것 없이 어진이면 등용해야 하고 길고 짧음을 재어 보아 적합한 인물이면 써야 할 것입니다. 백료(百僚)들이 서로 조심하고 협력해서 전철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태평성대가 되도록 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그 밖에 외척이나 정청(廷請)의 무리들은, 그중에 쓸 만한 인물이 물론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우선적으로 등용함으로써 임금으로 하여금 사사로운 마음을 두게 하여 사방의 백성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경》에도, ‘관직은 어질고 재능 있는 자에게만 맡겨야 한다.’고 하였고, 또 ‘여러 관직은 가까운 자라고 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으니, 그야말로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이끗을 좋아하여 독차지한 일들 가운데 입에 올릴 만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에서도 전선(銓選), 과거(科擧), 형옥(刑獄) 등은 사안(事案)의 가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돈을 얼마나 바치느냐만 따져 처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고달픔을 겪었던 것이 사실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르게 시작하는 초기에는 우선 임금이 검약(儉約)으로 솔선 수범하여 신하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고, 염치(廉恥)를 숭상하여 나쁜 풍습을 완전히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도 청백과 근신을 지켜 조정의 모든 사람들은 격려해야 할 것이요, 정국공신(靖國功臣) 삼대장(三大將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을 이름)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공사(公私)가 다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제공들이 이 서신을 받고는 너무 기뻐서 주상에게까지 올렸고, 당시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모두들 격언(格言)이라고 하였다.
급기야 사직 상소가 들어가자, 상은 체직을 허락하지 않고 친절한 유지를 내려 타이르기를, “그대는 늙고 병이 많으니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오.” 하였다. 선군께서 그 명을 받고는 황공하고 감격하여 병을 돌보지 않고 길을 떠났는데, 올라오는 도중에 또, “빨리 올라와 애타게 기다리는 내 마음을 위로해 주구려.” 하는 성지(聖旨)를 받았다. 마침내 서울에 들어와 글월을 올려 체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이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선조(宣祖)의 아들이자 인조(仁祖)의 생부(生父))의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를 올리려 하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副提學) 정경세(鄭經世)가 삼공(三公)들과 논의한 끝에, ‘주상은 친손자로서 선조(宣祖)의 뒤를 이은 것이므로, 자기 본생친(本生親)에 관하여는 고(考)가 둘인 혐의가 없으니 축문에다 고(考)라고 쓰고 자(子)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선군께서 즉시 상소하기를,
“예(禮)에, 남의 후계자가 되면 그가 바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경우는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고(叔父)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희공(僖公)을 태묘(太廟)에 올렸다.’고 쓴 것을 보면, 공자(孔子)가 잘못된 것을 꼬집은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전(四傳)의 뜻은 모두 ‘희공이 비록 민공(閔公)의 형이지만 그 뒤를 이었으므로, 민공을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것은 이은 자가 뒤가 되고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잇고서 자기를 낳은 아버지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했는데, 그에 대해 범씨(范氏)는, ‘선제가 소제에게는 손자가 되므로 자기 아버지를 황고(皇考)라고 칭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론은 끝내 옳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소종(小宗)이 대종(大宗)의 종통과 합해진다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 정자(程子)는 그 일을 두고 ‘매우 윤리를 어지럽혔으며 이만저만 예의에 벗어난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선제가 손자의 항렬로서 소제의 뒤를 이어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면, 자기의 사친(私親)을 올려 할아버지의 항렬에 이을 수는 분명히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는 대원군에 대해 ‘고(考)’라고 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선조(宣祖)의 뒤를 이어 대통을 이어받으셨는데, 성상의 사친을 또 선조의 아래에 끼워 넣어 위로 조선(祖先)과 계통이 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른바 ‘소종을 대종의 종통에다 합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사친을 ‘고(考)’로 칭하는 것은 대통을 이어받은 입장에서 너무나 의(義)를 해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정해졌다고 한다면 복(服)도 반드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을 이어받고서도 자기의 사친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관(禮官)은 정자(程子)가 말한 뜻을 잘 모른 채 ‘고(考)’라고 칭하면서 또 ‘황(皇)’ 자를 덧붙였습니다. 명위(名位)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정자가 그것을 예의에 벗어났다고 한 것이지 ‘고(考)’ 자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황(皇)이라는 글자는 바로 크다는 뜻으로서 별 의미가 없는 글자입니다. 정자의 뜻은 다만 방친(旁親)에게는 고(考)라는 글자를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송(宋)의 유학자들도 복왕(濮王)에 관한 논의에서 역시 고(考) 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구양수(歐陽脩) 등과 다투었는데, 그 후 정자의 말이 나와 그것이 천만세를 두고 확실한 정론(定論)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별스러운 의견을 내놓아 성시(聖時)의 대례(大禮)에 미진한 점이 있게 하는 것입니까.
예관은 또 그렇게 하면 고위(考位)가 없는 것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원래 제왕(帝王)의 집안은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고 형이 아우의 뒤를 잇더라도, 거기에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성립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서 고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관은 그것을 모르고서 자꾸 틀린 말만 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적이 의혹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정자가 말한 대로 숙부라 칭하고 조카라고 칭하는 것이 명분상으로나 의리상으로나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후 입시(入侍)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내가 여저(閭邸)에 있을 때, 학문이 대단히 높고 숙덕(宿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보기를 늘 원했소. 올라온 후 즉시 서로 만나 보아야 했지만 마침 나라에 제사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했으니, 자못 당초에 지성으로 기다리던 결의가 아니었소.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나 보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하였다. 선군께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어 아뢰기를,
“사묘(私廟)에 제사 모시는 일에 대해서는 소신(小臣)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일이 아닌 줄은 물론 아오나, 헌직(憲職)에 있는 몸이어서 망녕되이 시비(是非)를 논하게 되고 보니 너무나도 외람되고 참람된 일이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이렇게 뵙게는 되었으나, 이가 다 빠지고 귀까지 먹었으므로 부주(敷奏)하는 과정에 혹시라도 의사 소통이 잘 안 될까 염려되어 미리 이렇게 하나 적어 보았습니다.”
하고, 그것을 품 안에서 꺼내 올렸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제일 중요한 것으로는 학문(學問)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학문하는 방법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성현들이 하신 말씀을 토론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정미한 의리(義理)를 찾아 내어서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마치 깨끗한 물처럼 티없이 맑으면서도 항상 깨어 있게 하고, 급기야 일이 생겨 생각을 해야 할 때면 공(公)과 사(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면밀히 구분하여 사와 인욕이면 있는 힘을 다해 극복하고 공과 천리라면 확충할 수 있는 데까지 확충함으로써 일상 생활 전체가 올바른 천리가 아님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이 말씀한 ‘마음을 순정(純精)히 하여 한결같이 지킨다.[惟精惟一]’는 것이고, 공자(孔子)가 말씀한 ‘자신의 사욕(私欲)을 이기고 예(禮)로 되돌아간다.[克己復禮]’는 것이며, 자사(子思)가 말씀한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간다.[戒懼謹獨]’는 것이고, 맹자(孟子)가 말씀한 ‘방심을 거두어들이고, 사단을 확충하라.[收放心 擴充四端]’고 한 것이고, 주자(周子)가 말씀한 ‘성은 작위(作爲)함이 없고 기미(幾微)에는 선악이 있다.[誠無爲 幾善惡]’는 것입니다. 이렇듯 천고의 성현들이 서로 전수해온 지결(旨訣)이 다 그 범주 안에 있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생각 하나하나에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매여 있으니, 그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한 것이었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다. 이어 상이 이르기를,
“전번의 상소 내용은 매우 좋기는 했으나 일이 이미 정해진 뒤여서 그대로 따르지 못했으니, 미안한 생각 그지없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선군을 곧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6월에는 연신(筵臣)의 아룀에 따라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을 특별히 개설하여 선군께 맡기고는 유생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원자(元子)까지 보양하도록 하였는데, 굳이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의 사부(師傅)들은 모두가 명망 있고 노성(老成)한 학자들이었는데 선군께서는 숙유(宿儒)의 신분으로 그 강석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자에게 진강할 때마다 문의(文義)만 논설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도(輔導)에 큰 관심을 두고 그때 그때 잠규(箴規)를 올렸으므로, 원자도 깊이 존경하며 심복하였다.
뒤에 경연에 들어가서, ‘늙고 병든 몸으로 직임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정을 역설하고, 이어 “비상(非常)한 일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데 신은 결코 그러한 인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상이 답하기를, “요즘 선비들의 풍습은 옛날과 다르므로, 반드시 장자(長者)가 그 일을 맡아야만 많은 선비들이 보고 느끼지 않겠소.” 하였다. 8월에 또 입시해서 아뢰기를, “나이가 많아 병들고 귀먹은 신이 물러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골로 돌아가 죽었으면 합니다.” 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가 그로부터 얼마 후 다시 되풀이하여 청하자, 상이 비답하기를, “그렇다면 가서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잘 다녀오구려.” 하였다. 하직하던 날 대궐 안에서는 술을 내려 위로하는 뜻을 보였고, 원자 역시 직접 대하여 간곡한 말로 오래 체류하지 말 것을 바랐었다. 선군께서는 선산의 성묘를 마치고 소를 올려 사은(謝恩)하였는데, 그 소장에 내려오는 길에 연로에서 본 흉년의 상황과 그 밖의 크고 작은 민막(民瘼)을 조목조목 겸하여 아뢰었다. 그러자 상은 그것을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고, 이어 ‘되도록 빨리 올라와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고 유시하였다. 선군은 그 성은에 감격하면서도 근력이 미치지 못했기에 올라가는 대신 규잠(規箴)의 뜻이 담긴 짧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서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장자(張子)가 이르기를,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으라.’ 했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도 일상 생활에서 행동할 때 마음의 명령을 듣고 거기에서 옳고 그름을 살펴서 움직인다면, 비록 꼭 맞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들어맞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이르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야 없지만, 그러나 한평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짓을 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도 이 점에 관심을 두시고 호령 하나 정사 하나도 모두 마음에 돌이켜 살펴보아 한 점 거리낌이 없게 하시고 어두운 밤 홀로 계실 때라도 마치 제사를 모시듯이 경건한 자세를 지니시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만 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이 헤아릴 수 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했는데, 상은 이 말을 받아들였다.
갑자년(1624)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기를 들고 관서(關西)에서 곧바로 서울을 향하여 오자 상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선군께서는 상을 공주(公州)에서 맞아 뵈었다. 급기야 역적이 처단되고 환도(還都)하게 되었을 때 상이 ‘이 길로 서울로 가서 원자를 가르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으므로, 선군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대가를 따라 서울로 와서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되었다. 얼마 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발탁되어 세 번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해 5월에는 휴가를 받아 시골로 돌아왔으며, 6월에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소회를 다 말했다. 그 내용은 대략에,
“신은 너무나 깊은 은총을 받았는데도 털끝만큼의 보탬도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몸은 전야(田野)에 있지만 마음과 넋은 모두 전하에게로 달려간 나머지 대궐을 우러러볼 때 무엇인가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해집니다. 이에 삼가 다음의 13개 사항을 조목별로 전달함으로써 전폐(殿陛)에서 직접 아뢰는 일에 대신할까 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대본(大本)을 세우실 것, 두 번째 구업(舊業)을 회복하실 것, 세 번째 홍범(洪範)을 높이 받드실 것, 네 번째 《소학(小學)》을 강론하실 것, 다섯 번째 성효(聖孝)를 다하실 것, 여섯 번째 사전(祀典)을 경건히 모실 것, 일곱 번째 구족(九族)을 가까이하실 것, 여덟 번째 군신(群臣)들을 몸처럼 여기실 것, 아홉 번째 정무(政務)를 친히 처리하실 것, 열 번째 민폐(民弊)를 제거하실 것, 열한 번째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실 것, 열두 번째 군정(軍政)을 잘 닦으실 것, 열세 번째 금위(禁衛)를 엄히 단속하실 것 등입니다.”
라고 한 것이었는데, 답하기를,
“이 13개 조항을 보니, 참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들이다. 내 이것들을 가슴에 새겨 하나하나 실천하는 데 노력하리라.”
하였다.
9월에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제수되었다. 그때 사헌부가 말썽부린 내노(內奴)를 잡아가두고 죄를 다스리는 중이었는데, 그에 대해 엄중한 교지를 내리고 정원(政院)은 그 교지를 다시 봉환(封還)하였으므로 결국 추고(推考)하라는 명령을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선군께서는 사직소(辭職疏)에 그 사실을 언급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르기를,
“왕의 말이 한번 떨어지면 중외(中外)가 다 놀라는 법입니다. 폐조(廢朝 광해군(光海君)) 때 인심을 잃은 일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내노로 인한 폐단이 절반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헌부가 나서서 그들을 단속하고 다스린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에 와서는 위에 명성(明聖)하신 전하가 계시기 때문에 아래에 법을 제대로 집행하는 담당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담당자에게 책망을 가하시다니요. 그것이 물론 자전(慈殿)의 전교를 받들기 위해 하신 일임은 신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전의 전교를 설사 금방은 되돌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일 때문에 정원이나 법관(法官)을 힐책해서도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승지(承旨)가 복역(覆逆) 같은 것은 할 수 없고 다만 주상의 뜻대로 받들어 따르기만 하면 그뿐이라고 한다면, 사알(司謁) 하나로 족하지 무엇 때문에 꼭 승지를 둘 것입니까. 그리고 대간(臺諫)도 아무런 규정(糾正)하는 일 없이 오직 입 다물고 있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라면, 단지 울지 못하는 의장마(儀仗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장차 법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두 가지 사항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비록 별것 아닌 듯하지만, 그 병의 뿌리를 캐보면 모두가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문제라 하여 소홀히 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 결국 정사로 나타나고, 그리고 그 정사가 일을 해치게 되어 사가 공을 멸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니, 그 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밀하게 살피실 것이며, 만약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이 끼어 있다면 아주 단호하게 절단하시어 다시는 돋아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렸다.
10월에 또 부름을 받고 사은의 뜻으로 직임에 나아갔는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김 아무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누차 부름을 받고 힘겹게 올라왔는데, 본직(本職)은 한가하여 새벽이나 밤늦도록 할 일이 없으므로 규정 외에 수시로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소서. 그리고 전번에는 원자의 요속(僚屬)으로 재가하셨지만 지금은 이미 그 작질(爵秩)이 승진되었으니, 조례를 무시하고 강석에 참여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로 하여금 서연(書筵)서 참강(參講)하게 한다면 경전의 글뜻을 풀이하는 외에 규계(規戒)를 하는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호칭을 바꾸어 참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나 역시 수시로 접견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요즘 경연을 여는 일이 드물어서 지금까지 지연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고, 호칭을 강학관(講學官)으로 고쳤다.
을축년(1625) 2월 왕세자의 책봉 때는 품계를 가선대부로 승진시켜주는 은총이 베풀어졌는데, 그동안 바친 교도(敎導)의 공로를 생각해서였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고 말미를 받아 시골로 돌아갔는데, 떠나면서 소를 올리기를,
“신이 지금 한번 서울을 떠나면 영원히 전하를 다시 뵈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고 성덕(聖德)을 더욱 높이소서. 마음은 한쪽에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이 정대하게 가지시고 일처리는 확고한 단안을 내려서 하시되 우유부단함이 없어야 합니다. 인재의 등용은 허위에 현혹되지 마시고 실지 그대로 취하셔야 하며, 대인 관계는 진실한 마음이 제일이므로 겉치레 같은 것을 일삼지 마셔야 합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마시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선비를 홀대하지 마셔야 하며, 받아들이는 일은 되도록 넓게 하시고 채택하시는 일은 되도록 정밀하게 하소서. 선입견을 내세워 공론을 막지 마시고, 일반적인 규약에 얽매여 사기(事機)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큰 뜻을 분발하시어 최고의 치세(治世)를 이루신다면, 이 신은 비록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더라도 다시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크게 칭찬하고 이어 이르기를,
“내 마음이 너무 섭섭하오. 하직하지 말고 돌아가도록 하되 성묘를 빨리 마치고 즉시 다시 올라오도록 하구려.”
하였다. 선군께서는 고향으로 내려온 후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소를 올려 체직을 청했지만,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다.
병인년(1626) 봄에 계운궁(啓運宮 인조(仁祖)의 어머니인 인헌황후(仁獻王后))이 돌아가셨으므로 다시 상경하여 진위(進慰)하고 10여 일 머물다가 돌아갈 뜻을 고하였다. 그러자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김 아무가 오늘 내려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를 당할 만한 숙덕(宿德)이 없습니다. 그가 산속에 있더라도 당연히 불러들여야 하는데, 올라왔다가 금방 돌아간다니, 덕 있는 이와 어진이를 지성으로 좋아하시는 성상으로서 그가 가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일 같습니다.”
하였고,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못 가게 붙잡도록 명했으나, 이미 떠난 뒤였다. 선군께서는 집에 도착한 즉시 다시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사죄(謝罪)하였는데, 그 끝에다 이르기를,
“슬픈 생각을 되도록 억제하시고 정해진 의식을 따르실 것이며, 또 신료(臣僚)들을 자주 접견하여 정문(情文)을 강구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그 절차나 의식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처음 상소에 대강 소견을 개진한 바 있었으므로 슬픔 속에 계시는 지금의 상황에서 감히 다시 번거롭게 말씀드릴 수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것은 그때 전하의 복제(服制)를 논하면서, 혹자는 ‘당연히 3년이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자최 장기(齊衰杖朞)가 옳다.’고도 하고, 또 혹자는 ‘부장기(不杖朞) 복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여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의논이 분분했다가 결국 자최 장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선군께서는 그에 대해 고례(古禮)에서 찾아보아도 근거가 없는 일이라 하여 진정소의 끝에 그렇게 언급한 것이다.
그 전에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상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아버지로 모셔야 하고, 또 이러한 뜻에서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하며 백관(百官)들도 일년복을 따라 입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의 무리인 이의길(李義吉) 등이 오로지 추숭(追崇)할 것만을 주장하는 소를 잇따라 올렸다. 선군께서는, 이는 고금을 통한 변례(變禮)로서 자칫 착오가 있는 날이면 틀림없이 후세에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 여겼고, 그리하여 경전(經傳)을 두루 참고하고 되풀이하여 연구한 끝에 조정에 있는 아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었는데, 편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의례(儀禮)》와 《의례도(儀禮圖)》를 보면 그 뜻이, ‘정통(正統)을 이을 아들이 일찍 죽었거나 혹은 몹쓸 병으로 인하여 뒤를 이을 수 없을 때는, 그의 아들이 자기 할아버지나 증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고,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해 당연히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씨(鄭氏)의 주(註)에, ‘사위(嗣位)한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했고, 가씨(賈氏)의 소(疏)에도 이르기를, ‘자기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당연한 후계자인데도 몹쓸 병으로 인하여 후계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후계자가 된 경우라면, 이는 자기 증조(曾祖)에게서 대통을 받은 것이 된다.’ 하였다. 마치 명(明)의 건문제(建文帝)가 태조(太祖)의 뒤를 이었을 때 혹 자기 아버지가 살아있으면서도 병으로 인하여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가 건문제가 즉위한 후에 죽었더라면 그를 위해 삼년상을 치른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당연히 정통을 이어갈 사람과 곁가지에서 입계(入繼)한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니, 대원군(大院君)의 경우는 ‘당연히 후계자가 될 신분이지만 병 때문에 후계자가 되지 못한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것이고, 성상도 역시 ‘자신이 당연한 후계자 신분으로서 그 대통을 증조에게서 물려받은 사람’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경(經)에서 한 말은 ‘당연히 대통을 이어갈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서, 지금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런데 박지계가 상소문에다 그 조항을 인용하여 도리어 대원군을 위해 참최를 입어야 한다는 증거로 삼고 있으니, 그것은 그 예경의 근본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따라서 그가 상소문에서 말한, ‘달의 빛을 가리켜 해의 빛이다.’라고 한 비유는 바로 자기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또 박지계의 상소에, ‘자식으로서는 아버지의 귀천(貴賤)을 따라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예경의 뜻은 아버지의 귀천을 따라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대통을 계승할 신분과 곁가지에서 들어온 신분과는 그 자체가 다른 것으로, 그에 관한 예제(禮制)도 사세(事勢)도 자별하여 자기로서 어떻게 더하고 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의례》와 《가례(家禮)》에 의하면, ‘방계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자는 본생 부모를 위해 자최 기년(齊衰朞年)의 복을 입는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적용해야 할 근거이다.
박지계는 또 상소문에서 《근사록(近思錄)》에 있는 ‘천자(天子)는 나라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종통(宗統)을 빼앗는다.’고 하는 설을 들어 대원군을 위해 입묘(立廟)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고 한 말은, 예컨대 한(漢)의 소하(蕭河)와 조참(曹參) 같은 사람이 비록 적자가 아니지만 제후가 된 이상 적자의 종통을 빼앗아 자기에게로 옮겨 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통전(通典)》의 탈종의(奪宗議)를 보면, ‘제후가 종통을 빼앗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사(士)인데 장자가 아닌 아들이 제후가 되면 장자의 종적(宗嫡)을 빼앗아 자기가 그 제사를 맡는 것이다.’라는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것도 임금이 자기 사친을 위해 입묘(立廟)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선묘(宣廟)가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지금의 주상을 세손(世孫)으로 삼으셨다면, 주상께서 선묘의 후계자인가, 아니면 대원군의 후계자인가? 박지계와 이의길은 또 ‘손자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공자(孔子)가 ‘위(衛)의 첩(輒)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지 않고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일’에 대하여 논한 말을 인용하며 자기들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증자의 말씀은 ‘위 나라 임금 첩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그 점을 지적하여 죄준 것’이므로 단순히 그 말씀만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로 볼 수는 없다.
옛날 상(商) 나라 탕(湯)의 손자인 태갑(太甲)과 주(周) 나라 평왕(平王)의 손자인 환왕(桓王)이 다 할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 아버지를 추숭(追崇)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한 소제(漢昭帝)의 종손(從孫)인 선제(宣帝)도 자기 아버지 사황손(史皇孫)을 황고(皇考)라고만 칭했을 뿐 묘(廟)에다 모시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정자(程子)와 범조우(范祖禹)와 호신(胡伸)이 인간의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배척하였고, 주자(朱子)는 그것을 《강목(綱目)》에 쓰기까지 하였다. 만약 혹자의 말대로라면 선제가 소제를 아버지로 여긴 일 역시 위(衛)의 첩(輒)이 했던 일과 같은 것으로서, 정자와 주자의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 간문제(晉簡文帝)는 조부(祖父)의 신분으로 종손(從孫)의 뒤를 이었고, 제(齊)의 울림왕(鬱林王)은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원위(元魏)의 고양왕(高陽王)도 역시 손자로서 할아버지 뒤를 이었는데, 비록 자기 아버지를 황제(皇帝)로 높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묘(廟)에 모시지는 않았다. 수(隋)의 공제(恭帝)와 금(金)의 장종(章宗)은 역시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당(唐)의 선종(宣宗)은 숙부로서 조카의 뒤를 이었는데, 모두 자기 아버지를 황제로 높이기는 했지만 역시 묘에 모시지는 않았다. 또 명(明)의 세종(世宗)은 장식(張璁)과 계악(桂萼)의 말에 현혹되어 자기의 생부를 흥헌제(興獻帝)라고 높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묘에다 모시지는 않았다. 유독 건문(建文)만이 맏손자로서 태조(太祖)의 뒤를 잇고는 자기의 아버지 의문태자(懿文太子)를 추숭하여 흥종(興宗)이라 하고 묘에 모시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의례》의 ‘맏손자는 자기 조부 또는 아버지를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3년 입는다.’고 한 설에 의하면 잘못이 아닌 것이다.
상(商)과 주(周) 이후로 손자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더구나 조부가 손자의 뒤를 잇거나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은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물론 소목(昭穆)이 도치되고 윤서(倫序)가 착란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 경우가 사대부(士大夫)와는 달라서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체로 나가서 남의 양자가 되는 것과 들어와서 대통을 잇는 것은 그 사안이 비록 다르지만 자기 사친(私親)을 돌볼 수 없는 점에서는 같다. 아버지와 자식의 천륜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입계(入繼)의 뜻도 또한 지극히 엄하기 때문에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의례》에 ‘임금 어머니가 정부인이 아니면 신하들은 복(服)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백관(百官)들이 복을 따라 입을 이치가 어찌 있겠는가. 그리고 《의례도》도 양복(楊復)이 《의례》를 배우면서 황면재(黃勉齋)와 상의해서 만든 것으로서 가씨(賈氏)의 소(疏)와 뜻이 다르지 않으니, 후학들로서는 당연히 존중하고 믿어야 할 책이다.”
이에 대해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선군께 수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왔는데, 그 내용의 주된 뜻은 ‘주상(主上)은 보통 다른 사람이 양자 간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과, ‘자기 본생의 어버이를 위해서는 삼년상을 입어야 옳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군께서 답서를 쓰시면서 한 조목 한 조목씩 들어 논변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월사(月沙)와 우복(愚伏)이 삼년복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처음에는 실수를 했지만 뒤에는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공(公)은 기필코 그들보다 한 층을 더 보태어 삼년상을 주장하시니, 혹시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고금의 공론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까. 영공(令公)의 차자 내에, ‘정경세(鄭經世)가 끝까지 고(考)라고 칭해야 옳다고 했는데, 남의 양자가 되어 자기 생부를 고라고 칭한 경우가 어느 경전에 나와 있으며, 또 고라고 칭하면서 삼년복을 강복(降服)하는 경우는 어느 경전에 나와 있다는 말인가. 앞서 고라고 칭한 것이 옳다면 지금 와서 강복한다는 것이 틀린 일이고, 지금의 강복이 옳은 일이라면 앞서 주장했던 고라고 칭해야 옳다고 한 말이 틀린 말이니, 둘 중의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하셨는데, 그게 옳은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로 월사와 우복을 책망하신다면 옳겠지만, 도리어 그걸 가지고 나를 책망하려 드니 너무나도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까. 적이 생각해 보면 진 원제(晉元帝)의 아들 간문제(簡文帝)가 종손(從孫)의 뒤를 이었는데, 지금 그대의 생각대로라면 틀림없이 원제(元帝)를 고(考)로 칭해야 한다고 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자기에게 자리를 물려준 임금을 황종손(皇從孫)이라고 칭하고 자기 자신을 효조부(孝祖父)라고 해야 합니까? 당(唐)의 선종(宣宗)과 무종(武宗) 사이도 역시 그렇지요. 조부나 숙부라는 말은 항렬이 높다는 얘기이고 손자나 조카라는 말은 항렬이 낮다는 표시인데, 자기에게는 높은 항렬의 말을 쓰고 선제(先帝)에게는 낮은 호칭의 말을 쓸 것입니까. 내 생각에는 별도의 칭호를 만들되 《두씨통전(杜氏通典)》대로 자기의 자칭은 ‘사황제 신 아무[嗣皇帝臣某]’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황제(先皇帝)에 대해서도 역시 별다른 칭호가 있어야 할 것 같으나, 그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없으니 감히 억설(臆說)을 만들어 낼 수 없을 뿐이외다. 월사(月沙)의 주대(奏對)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면서도 부자의 명분은 없다.’고 한 말이 바로 그 말이지요.
조상우(趙相禹)의 견해는 그것이 비록 호 문정공(胡文定公)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한 말이지만 역시 온당치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렬이 높은 조부나 숙부가 손자나 조카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칭해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이상의 말은 모두 나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춘추(春秋)》의 사전(四傳) 및 《통전(通典)》에 있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바로 이 논의를 판가름하는 큰 관건이므로, 여기에 소견이 일치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부록춘추(附錄春秋)》에 보면, 고항(高閌)이 이르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계승하는 것이 정상적인 예(禮)이다. 그런데 형제 사이에서 전수하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이다. 이미 나라를 물려주었다면, 전해 받은 자가 비록 아들이 아니더라도 역시 아들인 셈이고, 전해 준 자가 비록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역시 아버지인 셈이다. 그러나 한 혜제(漢惠帝)와 한 문제(漢文帝)도 형제 사이에 서로 전수한 경우인데, 그 당시의 공론이 문제를 고조(高祖)의 뒤를 이은 임금으로 추숭했기 때문에 직접 고조에게서 천하를 전수받은 혜제는 도리어 소목(昭穆)의 서열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또 광무제(光武帝) 때도 당연히 평제(平帝)의 뒤를 이어야 했지만, 세차(世次) 때문에 원제(元帝)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모두 경(經)을 등지고 예(禮)를 어긴 일들로서, 후세에 전할 수 없는 사례들이다. 임금으로서 형제를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후사가 된 사람의 앞의 임금에 대한 관계는 신자(臣子)와 똑같다. 그러나 뒤를 이어 주어야 할 자가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이어 주지 않는다거나, 나라를 전수받은 임금이 살아 있는 앞의 임금에 대해 신자(臣子)로 자처하다가 앞의 임금이 죽으면 다시 형제 사이로 친다거나,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은 자기가 차지하고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예의는 부끄럽게 여겨서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국가의 전수를 중히 여기는 뜻이 되겠는가.’ 했는데, 나는 고씨의 이 말을 상세히 음미해 보고서 과연 소목(昭穆)이라는 것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있는 주(周)의 대협도(大祫圖)에 의하면, 의왕(懿王)의 아우 효왕(孝王)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의왕은 소(昭)가 되어 있고 효왕은 목(穆)이 되어 있습니다. 또 주자가 정해 놓은 송조 협제도(宋朝祫祭圖)에도 태조(太祖)가 목이 되어 있고 태종(太宗)이 소가 되어 있으며, 흠종(欽宗)은 목이 되어 있고 고종(高宗)은 소로 되어 있습니다. 다 형제 사이인데도 소와 목을 달리하고 있는 점에 대해 늘 의심하던 터였는데, 급기야 《춘추》 사전의 ‘민공(閔公)과 희공(僖公), 소공(昭公)과 정공(定公)이 계통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고 있다’는 설과 앞서 한 말이 모두 주자의 의도와 같은 것임을 보고 나서야 과연 선유(先儒)들의 말씀은 앞분이 하신 말이나 뒷분이 하신 말이나 다 같은 것이어서 우리로서는 좀 더 자세하게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명 나라 양정화(楊廷和)는 세종(世宗)은 무종(武宗)과 형제의 항렬이라 하여 무종을 제쳐 두고 위로 숙부인 효종(孝宗)의 뒤를 이은 것으로 했는데, 세종과 무종이 비록 형제 사이이기는 해도 이미 계통을 이어 부자 관계가 성립된 이상 그 사이를 끊어 버린대서야 될 일입니까. 지금 고씨의 말을 따라 보자면 그것은 한(漢) 나라에서 혜제(惠帝)를 제쳐 두고 문제(文帝)를 추숭하여 고조의 후계자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양공(楊公)이 왜 예가(禮家)의 말을 깊이 강구해 보지 않고 그리했는지 적이 한스럽습니다.
영공(令公)은 차자에서 또, ‘신이 한 말은 마디마디 다 고증을 거쳐 한 말이고, 양정화 말은 단 한 글자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상(聖上)이 선묘(宣廟)에 대해 비록 친손자이기는 해도, 이미 곁가지의 혈족으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이상 벌써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성립된 것이고, 본생 부모는 바로 사친(私親)이 되는데, 이는 의리상으로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왜 그것이 꼭 그러한지 아느냐 하면, 《의례》에 ‘맏손자는 자기 조부 혹은 증조의 뒤를 이었으면 자기 조부 혹은 아버지를 위해 참최복을 3년 입는다.’ 했고, 그 나머지의 여러 손자들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는 이들은 ‘여러 손자들은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 ‘성상은 맏손자이니 서열에 따라 뒤를 이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정자와 주자의 정론과 다른 유자들의 주장에는 모두 분명한 근거가 있거니와, ‘대통을 이은 그 자체가 중대하고, 사친을 높이 받드는 것은 틀린 일’이라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지금 와서 왜 그 말을 버리고 별도의 다른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어찌해서 마디마디 다 고증을 거쳐 한 말이라고 하셨습니까?
지난번에 보니, 공께서 ‘주상 스스로 삼년상으로 정하고, 또 직접 상주(喪主)가 되어 아침저녁 궤전(饋奠)도 맡아야 한다.’고 하면서 위군(衛君)이 계씨(季氏)에게 조문 갔을 때, 노군(魯君)이 상주 노릇을 했던 일을 증거로 드셨는데, 예경(禮經)의 본뜻은 노(魯)와 위(衛)의 임금은 서로 대등한 신분이기 때문에 위군이 계씨에게 조문 갔을 때 노군이 상주가 된 것은 바로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만약 유구(琉球) 같은 이웃 나라의 임금이 능원대군(綾原大君 인조의 동생)을 조상하기 위해 온다면 성상께서 당연히 손님을 접대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공게서 인용하신 고례(古禮) 중에는 당면한 사실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혹시 다른 데서 든 증거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영공의 차자에, ‘친제(親祭)를 할 경우 축문을 쓰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능원대군을 이미 효자(孝子)라고 썼는데 또 전하를 아들이라고 쓴다면 명분이 문란해질 것은 사실이지요. ‘고(考)로 칭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고, 고로 칭하면 하나하나가 다 불편하다.’고 한 말은 바로 지금 조정이 처해 있는 난처한 일에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임해군(臨海君)은 아들이 없고, 광해군(光海君)는 종묘사직의 죄인이고, 대원군(大院君)은 세 번째이니, 그렇다면 성상이 적통(適統)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종래 해 오던 말로서 애석하게도 하지 않을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 군(君) 중에서 의안군(義安君)과 신성군(信城君)은 일찍 죽었고 대원군은 서열상으로 다섯 번째인데, 의안군은 능원군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른바 적통이라는 것이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성상께서 지손(支孫)으로서 선묘의 대통을 이었으니, 명분도 바르고 순리에도 맞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구차하게 끌어다 붙인 논리를 내세워 세상을 속이고 후세를 속이는 것입니까.
박지계는 또 말하기를, ‘대원군이 만약 거의(擧義)한 초기에 생존해 있었더라면 성상께서 틀림없이 자리를 양보했을 것이므로, 지금 유명(幽明)이 다르다 하여 차이를 두어서는 아니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孔子) 같은 이도 지위를 얻지 못했던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후세에 와서 그를 아무리 존경한다 해도 감히 요순(堯舜)의 자리에 앉힐 수 없으니,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周公)은 대성인으로서 섭정(攝政)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후세의 논자들이 노(魯) 나라에서 천자의 예악(禮樂)을 쓰고 있는 것을 참람하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명분과 자리는 거짓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의길(李義吉)도 그의 상소문에서, ‘대원군이 만약 세상에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임금의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는 봉양하고 죽으면 제사 지내는 일이 다를 바 없는데, 종묘(宗廟)에 모시는 데 대해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느냐.’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터놓고 추숭(追崇)을 주장한 논의입니다. 자기의 사친(私親)을 추숭한 일이 역대로 혹 있기는 했어도 그 공(公)과 사(私), 득(得)과 실(失)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병인년(1626) 겨울에 선군께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차자 내용에 관해 글월을 올려 약간 변론한 일이 있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과 이귀(李貴)는 예론(禮論)에 관한 한 원래 서로 같지가 않습니다. 지난번 이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신을 찾아보고 논변을 하기에, 신이 그때 신의 견해를 대략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차자 내용을 보니, 신이 했던 말 중에서 위아래는 다 떼어버리고 중간에 있었던 한 토막의 가설(假說)만을 들고 거기에다 자기 소견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신이 비록 몸이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다 해도 어찌 감히 다른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정묘년(1627) 봄 오랑캐 놈들이 승승장구로 평산(平山)을 육박하여 왔으므로 대가가 강화도로 이주하려고 하면서 선군을 호소사(號召使)로 삼아 동지들을 규합하여 적의 칼날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선군께서는 감히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곧바로 이웃 고을로 나가 병력과 군량을 모집한 다음 배로 행재소까지 운반하였으며, 전주(全州)에서 동궁(東宮)을 호위하면서 양호(兩湖)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적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너왔다는 헛소문이 나돌자 동궁은 행장을 꾸려 영해(嶺海) 방면으로 옮겨 가려고 했고, 사람들의 마음도 들떠서 눈에 띄게 궤산(潰散)되는 기미가 보였다. 그리하여 선군께서는 당시 여러 책임자들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지금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고는 다만 양호(兩湖)의 땅 한 조각뿐인데, 지금 갑자기 이곳을 떠난다면 양호마저도 우리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형세를 보아가며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난리가 닥치기도 전에 먼저 궤산해 버리면, 그것은 바로 적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했다. 이어 세자와의 대면을 청하여 자세히 말하자 세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얼마 후 안정을 되찾았다. 그해 3월 약간의 사자(士子)들과 강화도에서 근왕(勤王)하고 있었는데, 화의가 이루어져 적들이 물러가려고 했다. 그때 상이 선군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 늙고 병든 몸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당해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으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오.”
하였다. 이에 선군께서 사례(謝禮)하고 이어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이제 조금 누그러졌으므로, 직명(職名)을 풀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군이 아직도 국경에 있으니, 직명을 띤 채로 돌아갔다가 만일 또 급한 일이 생기게 되면 끝까지 마음을 다해 주구려.”
하였다. 선군이 또 아뢰기를,
“지금 비록 종묘사직과 민생을 위하여 화의(和議)를 했으나, 그동안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사람들에 대하여도 너그럽게 포용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물론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혹자는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오.”
하여, 선군이 대답하기를,
“언자(言者)를 꺾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종전부터 언자들 가운데 혹 파척(罷斥)을 당한 자도 있고 혹은 지방으로 보직되어 간 자도 있었는데, 그리되면 그 후에는 누가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지난번에 모집했던 병력과 군량을 적절하게 처리한 다음 직명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몇 해 지내셨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 9월에는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하는 소명(召命)이 내렸으나, 두 번이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상이 경연 석상에서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은 다 숙덕(宿德)이 있는 인물들인데, 서울에 잘 오려 하지 않고 비록 왔다 하더라도 금방 돌아가 버리니, 이것은 나의 성의가 부족하고 예우를 제대로 못한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이리로 오게 하고 오래 머물게 하겠는가?”
하니, 우상(右相)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나이가 비록 많지만 원래 서울에서 생장한 사람이니, 상께서 만약 통상의 격식으로만 대하지 마시고 정성을 다해 예우를 하신다면 그를 오게 하기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즉석에서 온지(溫旨)를 내리고 또 가마를 타고 오도록 명했다. 그러나 선군께서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경은 국가의 대로(大老)로서 덕행(德行)이 남들보다 월등하니, 지금 만약 올라와 서울에 있게 된다면 사대부들에게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나를 일깨워 주는 도움도 있을 것이다. 내 지금 곁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으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
하면서, 소명을 계속 내렸으며 그 내용 또한 간절하였다. 그러나 선군께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도 막바지에 가 있고 정력도 쇠모한 터에 은권(恩眷)에만 연연하여 거취(去就)를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라 여기고, 은퇴를 비는 소장을 연속으로 올렸다.
경오년(1630)에 선군께서 83세가 되셨는데, 이때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 이듬해인 신미년(1631) 5월 이후로 약간의 풍습(風濕)을 앓았으나 침식(寢食)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문도 계속 강론하셨는데, 8월 초에 와서 증세가 갑자기 위중해져 결국 3일 저녁에 여러 자식들을 내버려 둔 채 떠나고 말았다. 발버둥치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는데, 길러 주신 은혜는 참으로 하늘처럼 끝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향년은 84세였는데, 부음이 들리자 상께서는 놀라 슬퍼하시고 관원을 보내 제(祭)를 올리게 했으며 부의(賻儀)도 보통의 경우보다 더 많이 하였다. 그리고 왕세자는 며칠 동안 폐강(廢講)을 한 채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사적으로 요속(僚屬)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이 소자(小子)의 몽학(蒙學)이 잘 진척되지 않을 때, 김 동지(金同知)가 가르쳐 주었던 그 은혜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하면서,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했다. 그 밖에 조정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슬퍼하면서 서로 조상하였으며, 문인(門人)으로 건질(巾絰)을 착용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복을 입은 사람도 수십 수백 명에 달했다. 참찬(參贊) 장유(張維)는 경연 석상에서 건의하기를, ‘김장생의 숙덕(宿德)에 대해서는 작위를 더 추증하고 장례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상이 본도(本道)에 명해 묘를 쓰는 데 역군(役軍)을 내주게 하였다. 그리고 장례 때는 원근의 많은 선비들과 방백(方伯) 및 읍재(邑宰),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서 지내는 진신(搢紳)들이 모두 와서 전(奠)을 올리고 부의를 하였으며 상엿줄을 잡고 장례를 도왔는데, 그 숫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그해 10월 19일 오시(午時)에 진잠현(鎭岑縣) 성북리(城北里)의 해좌 사향(亥坐巳向)으로 된 언덕에 장례를 모셨는데, 그 자리는 선산(先山)에 적당한 곳이 없었으므로 새로 잡은 곳이었다.
불초한 이 자식들은 아는 것이 없어 선군의 훌륭한 덕에 관해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적이 생각건대, 선군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돈후(敦厚)하셨고 효성과 우애도 하늘로부터 타고나셨다. 화락하고 평이한 기상과 강직하고 확실한 신조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도(道)에 가까웠는데, 게다가 일찍부터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고 남다른 구도(求道)의 뜻을 지니고 계셨다. 급기야 사우(師友)들과 서로 강론하면서부터는 성리서(性理書)에 심취하여 오로지 마음을 그곳에 쏟으면서 두고두고 할 사업으로 삼았다. 언제나 독서할 때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서 한 문장마다 구절의 뜻을 풀어 보고 한 글자마다 그 의미를 찾았다. 그러다가 어딘가 잘 안 풀리는 곳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였으되 거의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날마다 보시는 책은 《중용》ㆍ《대학》ㆍ《심경(心經)》, 그리고 염락(濂洛)의 여러 책들이었는데, 그것들을 돌아 가며 익숙하도록 읽으셨거니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열심이셨으니, 한밤중에야 잠자리에 드셨고 잠만 깨시면 암송하셨다. 또한 심한 병을 앓지 않는 한 지극히 춥거나 대단히 더운 날씨거나 잠시 동안이나 곤란한 형편에서도, 해이해지는 기색이 없었으며 그만두시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학문을 좋아하시고 도(道)를 즐기셨는데,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예설(禮說)은 종잡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누구나 다 배우기 어려운 학문으로 치고 있지만, 선군께서는 번거로움을 견뎌 가면서 하나하나를 실을 풀듯 찾아내고 좌우로 고증도 하였는데,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이해하여 마음으로 그 이치를 통달했으며, 한 번 보고 한 번 들은 것이면 전혀 잊은 적이 없었다.
경전(經傳)의 주석(註釋)에도 옳고 그른 것이 뒤섞여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그것들을 모두 차분한 마음으로 풀어 보고 털끝만한 것까지도 정밀히 연구하였으니, 겉과 속을 다 알아내고 뿌리와 곁가지를 다 파악하여 가슴속에 티끌만한 의심도 없도록 하였다.
학문을 하는 데는 늘 차례를 뛰어넘는 공부를 경계하셨거니와, 《소학(小學)》을 제일의 발판으로 삼아 탐독하고 존신(尊信)하여 일생의 준칙(準則)으로 삼으셨다.
알기 위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했고 그 이치를 터득하고는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경(敬)으로 일관하셨다. 공부하는 순서는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표본으로 삼았으되, 다른 길에 현혹된 일이 없었고 소성(小成)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족한 듯이 애써 스스로를 독려하였으며, 혹시라도 잃어버릴 듯이 서두르면서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늘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성인(聖人)의 마음은 밝은 거울이나 잠잠한 물과 같다. 따라서 그것은 어느 물건도 그 상태를 어지럽힐 수 없을 정도로 순일(純一)하고 텅 비어 고요하므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대중들의 마음은 허다히 흔들리고 내달리기 때문에 고요할 때가 적고 움직이는 때가 많다. 따라서 그것은 우선 그 본체(本體)를 세워 두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 쓰임을 살펴봐야만 비로소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선군께서는 안팎으로 수양을 쌓고 경(敬)과 의(義)를 다 지키면서 어느 한쪽도 폐하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공부를 각기 다했기 때문에, 마음속은 항상 고요하고 깊어 뿌리가 든든했고 사물을 대하면 망녕됨이 없이 진실하였다. 겸양하고 공순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견해가 명철하며, 덕성(德性)이 굳고 일정하였으므로, 비록 갖가지 궁액(窮阨)을 다 당하고 여러 가지 변고를 두루 겪으면서도 끝내 그것들 때문에 자신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행동과 일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자면, 걸음걸이 하나에도 일정한 법도가 있었고 일상의 기거(起居)에도 역시 절도가 있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띠를 두르고는 가묘(家廟)를 배알하였으며, 서실로 가 조용히 책상을 대하되 성현의 글이 아닌 것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문인 제자들과는 해가 지도록 강론하면서 그저 마냥 즐거워 하며 걱정을 잊으셨다. 혼자 한가로이 있을 때도 엄숙하기가 마치 큰 손님을 대하고 있는 듯했으며, 야비한 말을 한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고, 태만한 기운이라고는 몸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기뻐하거나 성난 표정을 한집안 식구들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어버이가 계실 때는 좌우로 봉양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했고, 어린이를 돌봄에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골고루 베풀었으며, 가정에는 엄격한 법도가 있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말이 없었다. 상을 당하면 슬픔을 다했고 제사 때면 정성을 다했으며, 무슨 일에나 신중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챙겨야 할 것을 챙기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기사년(1569)에 찬성공(贊成公)의 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선군께서는 해서(海西)에 계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고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더니 그로부터 며칠 안 가서 부음이 왔다. 임진년(1592)에 형 은(櫽)이 적에게 화를 당했을 때도 역시 종일 슬픈 생각이 들어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뒤에 들으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바로 무슨 일을 예감할 수 있는 지극한 정성을 지녔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부(諸父)를 어버이 섬기듯 했고, 제매(弟妹) 사이의 우애도 시종 돈독했으며, 재물을 나누어도 자신은 적게 갖고 상대에게 많이 주었다. 두 서제(庶弟)가 비명에 죽은 것을 10년을 하루같이 마음 아파하였는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말과 얼굴빛에는 물론 꿈결에까지 그 슬픈 빛이 나타났으므로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일상 생활의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이 다 예절에 맞았고, 난처한 변례(變禮) 같은 것도 경의(經義)와 절충하여 모든 의문에 시원스레 대답했으므로 묻는 사람들이 다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성신(誠信)을 위주로 했고, 종족(宗族) 사이에는 사랑을 다 바쳤으며, 향당(鄕黨)에서는 공경을 다하였다. 길사와 흉사에 인정과 예절을 다하였으므로 신분에 관계없이 그 어느 누구로부터 환심을 사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일의 시비를 가지고 사람의 잘잘못을 논할 때면 엄정함을 지켜 사리에 맞게 결정을 내렸으며, 조금도 시속의 경박한 의론에 동요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류(土流)들은 모두 존경하고 믿고 따랐으나, 반면 시속을 따라 왔다 갔다 하는 무리들 중에는 꺼리는 자도 많았다.
사우(師友) 사이의 의리도 또한 각별하였다. 송귀봉(宋龜峯)은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는데, 선군께서 주선하고 끝까지 돌보아 주어 그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집에서 지내게 하였다. 금상(今上) 초기에는 동문의 친구들과 소를 올려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의 유고(遺孤)들도 친자식과 다름없이 보살폈다. 또 정송강(鄭松江)이 사감을 품은 무리들의 모함에 빠져 그를 헐뜯는 말들이 세상에 들끓었으므로 화기(禍機)를 예측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또 간당(姦黨)이라고 지목하고 하나의 큰 함정을 만들어서 온 세상이 거의 같은 목소리로 그를 배척했으므로 평소 서로 알고 지내던 자들마저도 틈만 있으면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하여 조정 사이에서도 그의 성명(姓名)을 말하기조차 싫어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선군께서는 항상 그의 충직(忠直)을 사모하여 남의 손가락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이 무고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밝혀 냈으며, 그 후 등대(登對)해서는 그가 화를 당하게 된 까닭을 낱낱이 아뢰고 그의 관작(官爵)을 원래대로 회복해 줄 것을 청하였다. 율곡 선생의 상사(喪事) 때는 선군께서도 역시 상중에 계셨지만 멀리 그곳까지 가서 상사에 임하고 의리로 복(服)을 입었으니,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그 복을 입고 곡하였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재계하며 소식(素食)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늙어서까지도 그리하셨고, 귀봉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리하셨다.
후진들을 대하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열성을 보였으며 독서할 때는 반드시 그 내용을 파악하도록 조용히 음미하여 득실(得失)을 증험하게 했고,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피로한 기색도 없이 되풀이하여 깨우쳐 주셨다. 그리고 상대의 물음이 절실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도록 간곡하게 타이르기도 하였다. 공부하는 요체는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하고 실천에 힘쓰는 것이었으며, 배우는 사람의 자품에 맞추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도하였다. 배우는 이의 학문하는 태도가 독실하면 마치 당신이 그러한 것처럼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고, 상대를 인정할 때는 그 사람의 나이와 지위도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관직 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지위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오직 마음을 다해 봉직했는데, 중년에는 대부분 주현(州縣)의 수령으로 머무는 바람에 포부를 펼쳐 볼 힘이 없었다. 계해년(1623)의 반정(反正) 이후에도 조정에 계신 날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끝내 속에 쌓여 있는 재주를 다 펴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알고서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말을 했다 하면 다 사리에 맞아서, 그때그때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물러앉은 뒤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평상시 하신 말씀 중에는 정미한 의리(義理)를 변석해 놓으신 것들이 꽤나 많다. 지금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항상 이르시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둥글둥글 뭉쳐있는 것이다. 그런데 권양촌(權陽村)이 ‘이(理)와 기(氣)가 두 군데서 나온다.’고 나누어 놓은 것이나 퇴계 선생이 ‘사단 칠정(四端七情)은 호발(互發)하는 것이다.’고 한 것은 다 그 둘을 갈라 놓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서, 통투(通透)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율곡 선생이 말씀하신 ‘발동한 것은 기(氣)이고, 발동하게 만든 것은 이(理)이다. 그것이 만약 이합(離合)이 있다면, 그것은 동정(動靜)에 끝이 있고 음양(陰陽)에 시작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태극(太極)이고 기는 음양(陰陽)인데, 지금 태극과 음양이 상호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따라서 태극과 음양이 상호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면 이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고 한 것도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라는 주장이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하였다.
물격(物格)과 지지(知至)를 논한 데서는 말씀하기를, “물격은 바로 물리(物理)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지식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것은 지지이지 물격이 아니다. 물격과 지지는 다만 한 가지 일일뿐이지만, 사물의 이치로 말했을 때 그것을 물격이라고 하고, 내 마음으로 말했을 때 그것을 지지라고 하는 것이니, 그것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세상의 일종 설화에는 ‘주자(朱子)가 「물리의 최고 경지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내 마음이 거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물(物)을 격(格)하면 물이 격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손님을 초청하니까 손님이 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말한 뜻과는 다르다. 주자의 말은 ‘물격이란 사물의 이치가 제각기 더할 나위 없는 최극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으로서, 사물의 이치가 이미 그 극에 도달했으면 내가 아는 것 역시 나의 조예 여하에 따라 그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상대와 나는 이치가 하나여서, 저것을 알면 바로 이것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원래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이 내 마음속으로 다시 올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 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계구는 동(動)과 정(靜)을 겸해서 한 말이고, 신독은 동(動)의 일변을 두고 한 말이다. 가령 집주(集註)에,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한 말은 동(動)과 정(靜)에 관계 없이 늘 경외해야 한다는 뜻이고, ‘비록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감히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은 남이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그 경외하는 마음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거기의 ‘항상’, ‘비록’, ‘역시’라는 말들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항상 계구해야 한다.’고 한 말이 동과 정에 관계 없이 늘 계구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더욱 삼가야 한다.’고 한 말은 동(動)의 초기에 더더욱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기상(旣常)’과 ‘우가(尤加)’ 등의 글자들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것이 주자의 본지(本旨)이고 또 《중용(中庸)》의 뜻에도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호계수(胡季隨)가 물은, ‘계구(戒懼)와 성찰(省察)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에 분속시켜 놓은 것이다.’와 같은 것은 주자가 초년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서 실로 집주(集註)의 뜻과는 내용이 다르다. 그런데 학자들이 그 호씨의 설에 구애되어 집주의 뜻을 살펴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혹자는 또 《혹문(或問)》 중의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그 이전에 더더욱 계신하고 공구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그 몇 마디를 들어 ‘계구는 오로지 정(靜)에 속해 있는 것’이라는 말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혹문》에서는 중(中)과 화(和)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정(靜)을 위주로 하여 말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신독(愼獨)’이라고 했으면 그 ‘삼간다[愼]’는 글자는 피차 다를 바가 없는 글자이니, 이른바 ‘계구’라는 것도 동과 정을 겸해서 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논하면서는 나씨(羅氏)의 성정(性情)의 설을 배척했고, 심성정의(心性情意)에 관해 논하면서는 호씨(胡氏)가 두 갈래로 말한 잘못을 논변하면서 오직 주자의 것을 옳다고 했다.
학문의 연원(淵源)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정포은(鄭圃隱)이 고려 말기에 거의 끊어져 가는 학문을 창도하였고, 조선조에 와서 김한훤당(金寒暄堂)이 그 뒤를 이었지만, 확실한 말이 없어 도학이 그리 밝지 못했다. 그 뒤 문정공(文正公) 조정암(趙靜庵)이 성명(誠明)의 학문으로 최고의 정치를 구현할 책임을 지고 조정에서 모든 제도를 다시 만든 결과 그야말로 볼 만했는데, 비록 중간에 참화를 당해서 사림(士林)들의 가슴에 영원히 슬픔을 남겨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긴 여운은 후인들의 모범이 되어 백세(百世)토록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그 후로도 어쩌다가 한두 명의 선각자가 나와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 문순공(李文純公)은 여러 현인들이 연구하던 나머지를 이어받아 사문(斯文)의 진흥을 자기 책임으로 삼았는데, 경훈(經訓)에 정통했고 의리(義理)를 밝혔으며, 자신의 겸양의 덕을 지키고 뒤에 오는 후학들을 깨우쳐 주었으니, 그 공로야말로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고 순수하며, 찌꺼기 하나 없이 맑으며, 참으로 알고 참으로 실천함으로써 종지(宗旨)를 얻어 내어 말과 행동에 모두 하자가 없고 베풀어놓은 사업도 모두 시의(時宜)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출처(出處)가 다 올바르고 진퇴(進退)가 다 의리를 좇았으며 몸소 계왕 개래(繼往開來)의 책임을 몸에 지고 도맥(道脈)을 바로 세운 이로는 우리 율곡 선생 한 분뿐이시다.”
하였다.
선군께서 의리의 뿌리를 밝히시고, 선철(先哲)들의 득실을 따지고, 도학을 논하면서 취사(取舍)를 선택하신 것은 대략 이상과 같았다.
평소 저술(著述)을 일삼지는 않았으나 강독(講讀)하는 여가에 그때그때 기록해 두신 것들 중에는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 《근사록석의(近恩錄釋疑)》 1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그리고 서(書), 소(疏), 잡록(雜錄) 약간 편이 있다. 이 밖에 신의경(申義慶)의 《가례집람(家禮集覽)》에 주석을 가한 3권이 집에 있고, 또 신공(申公)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대해 보태고 빼고 한 1책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비(先妣)는 조씨(曺氏)로 창녕(昌寧)의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니, 영흥 판관(永興判官)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받은 휘 구서(九叙)의 현손녀이시고, 우찬성을 지내고 창녕군에 봉해졌으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받은 휘 계상(繼商)의 증손녀이시며,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졌으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받은 휘 광원(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휘 대건(大乾)의 딸이다. 외조부는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윤관(尹瓘)으로 무송(茂松)의 큰 성씨이다.
선비께서는 가정(嘉靖) 신해년(1551)에 태어나 나이 16세 때 선군에게로 시집오셨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남편을 받드는 데 도리를 어김이 없었고, 시부모의 봉양에서부터 동서들과 화합하거나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다 환심을 샀다. 20년 동안 얼굴빛 한 번 변한 일 없이 지내셨는데, 만력(萬曆) 병술년(1586) 4월 25일에 겨우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그해 6월 어느 날 연산현(連山縣) 우두리(牛頭里)의 선산 곁에 장례 지냈다가, 숭정(崇禎) 임신년(1632) 4월 18일에 선군의 묘에다 부장하였다. 선비께서는 생전에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가 돌아가신 지 40년 후인 을축년(1625)에야 정부인(貞夫人)이 추봉되었다.
선비께서는 3남 3녀를 두셨다. 아들 중 맏이인 김은(金櫽)은 일찍 죽었고 다음인 나 김집(金集)은 지평(持平)이고, 다음 김반(金槃)은 전한(典翰)이다. 딸들 중 맏이는 감찰(監察) 서경율(徐景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군수 한덕급(韓德及)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6남 2녀를 두었다. 그 아들들 중 맏이는 김영(金榮)으로 생원(生員)이고, 다음 김경(金檠)은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김고(金杲), 김구(金榘), 김규(金槼), 김비(金棐)이다. 딸들 중 맏이는 이유(李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명진(李名鎭)에게 시집갔다.
나 김집은 정실의 자녀가 없고, 측실의 자식으로 김익형(金益炯)과 생원인 김익련(金益煉), 그리고 생원 김태립(金泰立)에게 시집간 맏딸과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간 둘째딸이 있다. 김반의 아들 김익렬(金益烈)은 별제(別提)이고, 김익희(金益煕)는 검열(檢閱)이며, 김익겸(金益兼)은 지금 학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명성이 있다. 나머지 세 아들들은 어리다. 딸들은 군수 이호(李滈), 군수 이후원(李厚源), 진사(進士) 장차주(張次周), 그리고 이해관(李海寬)에게 각각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서경율의 딸은 사과(司果) 신경(愼暻)과 성숙(成璹)에게 시집갔다. 한덕급의 아들 한수원(韓壽遠)은 진사이고, 그 다음은 한지원(韓智遠)이며, 그 다음은 어리다. 딸들 중 맏이는 이여홍(李汝洪)에게, 다음은 김민성(金敏成)에게, 다음은 이시정(李時挺)에게 각각 시집갔다. 김영은 아들이 넷인데 맏이는 김익황(金益熀)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며, 사위는 신미(申渼)이다. 김경은 아들이 둘인데 맏이는 김익습(金益熠)이고, 다음은 어리다. 김고는 1남 2녀를, 김구는 2남을, 김규는 1녀를 각각 두었는데, 다 어리다. 이유의 딸은 이분(李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이명진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김익형은 1남 2녀, 김익련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김태립은 3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김정원(金鼎元)이고, 다음은 김정창(金鼎昌)이며, 그 다음은 어리다. 그의 두 딸도 다 어리다. 정광원의 1남 3녀도 다 어리다. 김익희는 1남 1녀를, 김익겸은 1남을 각각 두었는데, 다 어리다. 이호는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이인석(李仁碩)이고, 다음은 어리며, 그의 딸 하나도 어리다. 이후원은 4남을, 장차주는 2남 2녀를 각각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경은 1녀를, 성숙은 6녀를, 한수원은 3남 2녀를 각각 두었는데, 모두 다 어리다.
불초고(不肖孤) 김집(金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이 가장(家狀)을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