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고운 최치원

고운 최치원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10. 7. 02:37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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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승〔家乘〕

선생의 부친은 휘(諱)가 견일(肩逸)이다.

신라 헌안왕(憲安王) 1년(857) 정축 - 당 선종(唐宣宗) 대중(大中) 11년 - 에 선생이 태어났다.

경문왕(景文王) 8년(868) 무자 -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9년 - 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14년(874) 갑오 -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 - 에 과거 -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하였다. - 에 급제하였다. 선주(宣州) 표수현 위(漂水縣尉) - 다른 판본에는 율수현 위(溧水縣尉)로 되어 있다. - 에 조용(調用)되었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의 종사순관(從事巡官)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10년(884) 갑진 - 당 희종 중화(中和) 4년 - 8월에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는데, 바닷가에서 순풍을 기다리느라 엄체(淹滯)하여 겨울을 넘겼다.

11년(885) 을사 - 당 희종 광계(光啓) 1년 - 3월에 비로소 본국에 도착하였다. - 연장(年狀)에 이르기를 “무협 중봉의 해에 미천한 몸으로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동토에 금의환향했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라고 하였다. - 왕이 계속 머무르게 하면서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12년(886) 병오 - 당 희종 광계 2년 - 7월에 헌강왕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을 시기하는 자들이 조정에 많았으므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7년(894) 갑인 - 당 소종(唐昭宗) 건녕(乾寧) 1년 - 에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가 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길에 도적이 많아서 가지 못하였다. 2월에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스스로 난세를 만난 것을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자적하며 오직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11년(1020) 경신 - 송 진종(宋眞宗) 천희(天禧) 4년 - 에 내사령(內史令)을 추증(追贈)하고, 선성(先聖)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회재(李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14년(1023) 계해 - 송 인종(宋仁宗) 천성(天聖) 1년 -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국조(國朝) 명종(明宗) 7년(1552) 임자 - 명 숙종(明肅宗) 가정(嘉靖) 3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바로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과 적서를 따지지 말고 먼 변방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대대로 군역의 부담을 지우지 말라.”

16년(1561) 신유 - 명 숙종 가정 40년 - 에 서원(書院)을 경주(慶州) 서악(西岳)에 세웠다. 다음은 《동경지(東京志)》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윤(府尹) 구암(龜巖) 이공 정(李公楨)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에게 품신(稟申)하여 계해년(1563)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퇴계 선생이 서원을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명명하였다. 강당은 시습(時習)이라 하고, 동재(東齋)는 진수(進修)라 하였으며, 서재(西齋)는 성경(誠敬)이라 하고, 동쪽 하재(下齋)는 절차(切磋)라 하고, 서쪽 하재는 조설(澡雪)이라 하였으며, 앞의 누각은 영귀(詠歸)라 하고, 문은 도동(道東)이라 하였다. 그리고 누각 난간 사이에 선생의 필적을 걸어 놓았는데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 버렸고, 위판은 산골짜기로 옮겨 보관하였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33)에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옛터에 초사(草舍)를 짓고 위판을 다시 봉안하였다. 임인년(1602)에 이시언(李時彦)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였으나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최기(崔沂)가 부윤으로 있을 때에 강당과 재사(齋舍)와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중건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여우길(呂祐吉)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부중(府中)의 유자(儒者)인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자, 서악서원(西岳書院)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扁額)은 원진해(元振海)의 필적이다. 병술년(1646)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와 개국공(開國公 김유신(金庾信))과 문창공(文昌公)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구암 이공 정의 〈서악정사(西岳精舍)〉 시는 다음과 같다.
우가의 몇 마디 말 전해진 그 이후로 / 虞家數語相傳後
만고토록 사문이 백일처럼 환해졌네 / 萬古斯文白日明
마음으로 계합하여 곧장 대답한 증삼(曾參)이요 / 一唯參乎心默契
도가 형통하여 거듭 어질다 한 안회(顔回)였네 / 再賢回也道重亨
광풍이라 동락의 종용한 뜻이라면 / 光風東洛從容意
추월이라 서림의 감개한 정이랄까 / 秋月西林感慨情
벗을 모아 공부할 곳이 지금 있으니 / 會友琢磨今有地
이 당의 이름을 정녕 저버리지 말기를 / 丁寧無負此堂名
퇴계 선생이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기자가 교화한 우리 동방 예부터 좋은 나라 / 箕敎吾東曾善國
문치(文治)의 교화가 빛날 천운이 지금 돌아왔소 / 至今天步屬文明
성인의 인재 양성도 터전이 있어야 하고말고 / 多材聖作非無本
사람이 도를 행해야지 어찌 저절로 형통할까 / 至道人行詎自亨
책 속의 보물 찾는 일 적막해졌으니 / 寥落塵篇尋寶訣
호걸들 상정을 벗어나 분발해야겠지 / 奮興豪傑出常情
선산의 경내에 멋지게 열린 선비들의 집 / 儒宮好闢仙山境
늙은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네 / 老我增思實趁名
그리고 팔계(八溪) 정종영(鄭宗榮)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은나라 기자 때부터 펼쳐진 대동의 문교 / 大東文敎自箕殷
신라 시대에 명현들이 성대하게 일어났네 / 羅代名賢濟濟群
흥망을 백번 겪은 뒤에 남은 산하요 / 興亡百變餘山海
치란의 천년 세월 속에 뒤섞인 취훈이라 / 治亂千秋混臭薰
정별하여 끝내는 바르게 표시하게 되었나니 / 旌別終歸人正表
지휘해 선비가 운집함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 指麾重見士如雲
장수를 서산 아래에 의탁할 만한데 / 藏修可託西山下
추로에 이론이 왜 그렇게 분분했던가 / 鄒魯曾多外議紛
김학봉(金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서악정사를 참배하며 제생(諸生)에게 보여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서악정사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었는데 / 西岳精舍舊聞名
원객이 만리 여정에서 지금 막 돌아왔네 / 遠客初回萬里程
구옹이 서원을 세운 뜻을 누가 알리오 / 誰識龜翁開院意
계림의 잎사귀들 모두 바람소리 내는걸
/ 雞林葉葉盡風聲

선조(宣祖) 6년(1573) 계유 - 명 신종(明神宗) 만력(萬曆) 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文昌侯)는 도덕과 문장으로 우리 동방에서 제일가는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비록 미천한 서얼이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광해(光海) 을묘년(1615)에 태인(泰仁) 무성(武城)에 서원을 세웠다. 태인에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본군(本郡)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이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닭 잡던 당일부터 퍼지기 시작한 맑은 향기 / 割雞當日播淸芬
가시나무 위의 봉황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오 / 枳棘棲鸞衆所云
천년 전 읊던 혼을 어디에서 찾을거나 / 千載吟魂何處覓
일만 송이 연꽃 속에 일만 개의 고운 / 芙蕖萬柄萬孤雲

인조(仁祖) 4년(1626) 병인 - 명 장종(明章宗) 천계(天啓) 6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후예에 대해서는 비록 지서(支庶)와 천얼(賤孼)이라고 하더라도 군정(軍丁)의 일을 시키지 말라.”

현종(顯宗) 11년(1670) 경술 - 청 성조(淸聖祖) 강희(康煕) 9년 - 에 함양(咸陽) 백연(柏淵)에 서원을 세웠다.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 - 청 성조 강희 35년 - 에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사액(賜額)하였다.

영조(英祖) 31년(1755) 을해 -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20년 - 에 대구(大丘) 해안현(解顔縣)에 계림사(桂林祠)를 세우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 지금은 구회당(九會堂) 뒤에 옮겨 세웠다. -

정조(正祖) 20년(1796) 병진 - 청 인종(淸仁宗) 가경(嘉慶) 원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자손은 비록 지서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그리고 태강(汰講)의 예에 포함시키지 말라.”
○ 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열성조(列聖朝)의 분부를 받은 대로 과연 제대로 준행(遵行)하고 있는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여 거행하게 하고, 이를 범하는 수령이 있으면 역시 드러나는 대로 심리하여 처단하라.”
- 이상은 모두 가승(家乘)에 나오는 내용이다. -

[주D-001]무협 중봉(巫峽重峯)의 …… 금의환향했다 : 고운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28세에 귀국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02]종사(從祀) : 대본에는 ‘從師’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4 〈현종세가1〉에 의거하여 ‘師’를 ‘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최 문창(崔文昌)은 …… 하겠습니까 : 한국문집총간 27집에 수록된 주세붕(周世鵬)의 《무릉잡고(武陵雜稿)》 권5 〈상이회재(上李晦齋)〉에 나온다.
[주D-004]명 숙종(明肅宗) : 묘호(廟號)는 세종(世宗)이다. 숙종은 시호(諡號)이다.
[주D-005]우가(虞家)의 …… 말 :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16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6]마음으로 …… 증삼(曾參)이요 : 고운이 유가(儒家)의 도를 전수받았다는 뜻의 표현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네, 그렇습니다.〔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주D-007]도가 …… 안회(顔回)였네 : 공자가 제자 안회의 안빈낙도 생활에 대해서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한결같이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찬탄하면서 두 번이나 어질다고 칭찬한 말이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주D-008]광풍(光風)이라 …… 뜻이라면 : 송유(宋儒)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소싯적에 주돈이(周敦頤)를 공경하여 그에게 찾아가서 배운 것처럼 자신도 고운을 스승으로 받들고서 배우고 싶다는 뜻이다. 광풍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인데,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이요 갠 달과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는 말이 나온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요, 무숙은 그의 자이다. 동락(東洛)은 동도(東都) 낙양(洛陽)이라는 뜻으로, 낙양 출신인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킨다.
[주D-009]추월(秋月)이라 …… 정이랄까 : 주희(朱熹)가 이통(李侗)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통의 인품을 “빙호추월처럼 투명하여 흠이 하나도 없다.〔如氷壺秋月 瑩徹無瑕〕”라고 평한 말이 《송사(宋史)》 권428 〈도학열전(道學列傳) 이통(李侗)〉에 나온다. 이통은 세상에서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일컬어졌는데, 40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정좌(靜坐)하여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주희가 고종(高宗) 소흥(紹興) 경진년(1160) 겨울에 여산(廬山) 서림원(西林院)의 유가 상인(惟可上人)의 방에 우거하면서, 조석으로 왕래하며 연평에게 수업받은 사실이 《회암집(晦菴集)》 권2 〈제서림가사달관헌 재제(題西林可師達觀軒再題)〉의 병서(幷序)에 나온다.
[주D-010]벗을 …… 있으니 : 참고로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배양한다.〔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주D-011]치란(治亂)의 …… 취훈(臭薰)이라 : 역사적으로 고운에 대해서 불교에 아첨했다면서 부정적으로 비평하기도 하고,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요 문학의 창도자라고 찬미하는 등 엇갈린 평가가 있어 왔다는 말이다. 취훈은 악취와 향기라는 뜻이다.
[주D-012]정별(旌別)하여 …… 되었나니 : 《서경》 〈필명(畢命)〉에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표창하고 구별하여 그 집과 마을을 표시한다.〔旌別淑慝 表厥宅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장수(藏修) : 《예기》 〈학기(學記)〉에 나오는 말로, 학습에 전심하는 것을 뜻한다.
[주D-014]추로(鄒魯)에 …… 분분했던가 : 서악정사를 건립할 당시에 비판하는 말이 많았던 것을 가리킨다.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3에 〈이강이가 서악정사를 새로 설치하고 시를 지어 부쳐 왔기에 차운하여 두 수를 짓다〔李剛而新置西岳精舍 有詩見寄 次韻二首〕〉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첫 번째 시의 자주(自註)에 “강이가 이 일을 경영하면서 비방을 많이 들었다.〔剛而因此營作 多得謗〕”라는 말이 나온다. 위에 소개한 퇴계의 시는 두 번째 시이다. 강이는 이정(李楨)의 자이다. 추로는 맹자와 공자의 고향으로, 문교(文敎)가 흥성한 지역을 가리키는데, 동방예의지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주D-015]구옹이 …… 내는걸 : 처음에는 고운의 서원을 세우는 뜻을 모르고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보면 서악정사 덕분에 유생들이 교화를 받아서 훌륭한 인재로 양성되고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구옹은 구암(龜巖) 이정(李楨)을 가리킨다.
[주D-016]닭 잡던 당일 : 고운이 태인 군수(泰仁郡守)로 재직하던 때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雞焉用牛刀〕”라고 농담으로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陽貨》
[주D-017]가시나무 …… 말했다오 : 고운과 같은 현자가 작은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구람(仇覽)을 주부(主簿)로 임명하려다가 그의 그릇이 워낙 큰 것을 보고서 “가시나무는 봉황이 깃들 곳이 못 된다. 100리의 지역이 어떻게 대현이 밟을 땅이리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탄식하고는 한 달 치 월급을 구람의 태학(太學) 학자금으로 내준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仇覽》
[주D-018]인조(仁祖) …… 6년 : 대본에는 ‘仁祖四年丙寅 明章宗天啓四年’으로 되어 있는데, 병인년(1626)은 천계 6년이므로 고쳐 번역하였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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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승람〔輿地勝覽〕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가야산(伽倻山) 서쪽에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는데, 최치원의 서암(書巖)과 기각(碁閣)이 있다.

제시석(題詩石):해인사 동네를 세상에서는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부른다. 동네 입구에 무릉교(武陵橋)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절을 따라 5, 6리쯤 가면 최치원의 제시석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일러 치원대(致遠臺)라고 한다.

독서당(讀書堂):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발만 숲 속에 남겨 놓았을 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인사의 승려가 그날을 택해 명복을 빌고, 그의 영정을 그려서 독서당에 두었다고 한다. 독서당의 옛터는 해인사 서쪽에 있다.

창원(昌原)
월영대(月影臺):회원현(會原縣)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최치원이 노닐었던 곳이다. 석각(石刻)이 있으나 마멸되고 부서졌다.

함양(咸陽)
명환(名宦):최치원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 희랑(希朗)에게 부친 시 아래에 적기를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防虜太監 天嶺郡太守 遏粲 崔致遠)”이라고 하였다.

서산(瑞山)
명환:최치원
진성왕(眞聖王) 때에 이곳의 태수로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태인(泰仁)
명환:최치원
최치원이 중국에서 공부하며 얻은 것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동방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의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용납받지 못하자 마침내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상서장(上書莊)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진성왕 8년(894)에 선생이 상서(上書)하여 시무(時務) 10여 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글을 작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 건물을 세워 수호하고 있다.
이종상(李鍾祥)의 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막부에 노닐 적에도 생각났을 상서장 / 西遊高幕憶書莊
막막히 동방에 돌아와서 뜻이 더욱 깊었으리 / 漠漠東還意更長
한번 가야산 들어간 뒤로 소식은 들리지 않고 / 一入伽倻消息遠
뜬구름 지는 해만 고도에 오늘도 바쁘구나 / 浮雲落照古都忙

독서당(讀書堂)
경주(慶州)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다. 선생이 글을 읽었던 곳으로,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예전의 초석(礎石) 위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학업을 닦았다.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월영대(月影臺) 달그림자가 바다를 비추는 넓이가 97억 3만 8천여 자가 넘는다고 한다.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 / 碧波浩渺石崔嵬
그중에 봉래 학사님 노닐던 누대 있네 / 中有蓬萊學士臺
단 옆에 소나무 늙어 가고 잡초만 무성한데 / 松老壇邊荒草合
하늘 끝 구름 나직하니 조각배 떠오는 듯 / 雲低天末片帆來
백년의 문아 뒤에 나온 새로운 시구요 / 百年文雅新詩句
만리의 강산 위에 한 잔의 술이로세 / 萬里江山一酒桮
돌아보면 계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 回首雞林人不見
달빛만 공연히 해문을 비치며 배회하네 / 月華空照海門廻
채홍철(蔡洪哲)의 시는 다음과 같다.
문장의 풍조가 갈수록 험난해지는 지금 / 文章氣習轉崔嵬
문득 최후 생각에 누대에 한번 올랐소 / 忽憶崔侯一上臺
황학 따라 떠나지 않은 바람과 달이요 / 風月不隨黃鶴去
백구를 좇아 몰려오는 연무와 물결이라 / 煙波相逐白鷗來
비 갠 뒤의 산색은 난간에 짙게 드리우고 / 雨晴山色濃低檻
봄 지난 뒤의 송화는 술잔에 마구 떨어지네 / 春盡松花亂入桮
더구나 진토를 격해 금심이 있으니 / 更有琴心隔塵土
다른 때 비구름 데리고 돌아오리라 / 佗時好與雨雲廻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진성왕(眞聖王) 때에 최치원이 있었다. 처음에 당 희종(唐僖宗)을 섬기다가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그곳을 떠나 귀국하였는데, 신라도 정치가 쇠퇴하였으므로 마침내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았으니, 이로 인해서 ‘닭을 잡고 오리를 잡는다〔操雞搏鴨〕’는 말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 옆 해상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고운대에 늙은 감나무가 있는데,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智異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뜰에 오래된 괴목(槐木)이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얽혀 있으므로, 그 절의 승려가 다리로 이용하는데, 이 나무도 바로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 동구(洞口)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문처럼 서서 대치하고 있는데, 선생이 손수 ‘쌍계석문(雙溪石門)’ - 동쪽 바위에 쌍계라고 새기고, 서쪽 바위에 석문이라고 새겼다. - 이라고 썼다 한다. 또 선생이 지은 비(碑)가 있고, 사찰 안에 영신암(靈神庵)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쌍계사 안에서 고운을 생각하나니 / 雙溪寺裏憶孤雲
당시의 일 분분해서 들을 수가 없네 / 時事紛紛不可聞
동해로 돌아와서도 다시 방랑의 길 / 東海歸來還浪迹
야학이 닭들 속에 뒤섞여 있겠는가 / 祇緣野鶴在雞群
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성(丹城)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강직하고 고아(古雅)한데, 최고운의 수적(手迹)이라고 세상에서 전한다.
석문(石門)에서 1리쯤 가면 귀룡(龜龍)의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액(碑額)에 전자(篆字)로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전 서국 도순관 승무랑 시어사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분부를 받들어 짓다. 광계 3년(887, 진성여왕1)에 세우다.〔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光啓三年建〕’라고 적혀 있다.
광계(光啓)는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이다. 갑자를 따지면 지금 어언 600여 년이 지났으니, 역시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인물의 존망과 대운의 흥폐가 무궁히 이어지는 속에 이 무심한 비석만이 홀로 없어지지 않고 서 있으니, 탄식을 한번 발할 만도 하다.
내가 비갈(碑碣)을 본 것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연간에 세워졌으니 광계보다 앞선다고 할 것이요, 오대사(五臺寺) 수정(水精)의 기문(記文)은 권적(權適)이 지었으니 그 또한 일세의 문사(文士)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 감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고운의 수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데다가 고운이 산수 간에 소요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금회(襟懷)가 백세(百世) 뒤에까지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까이 시봉하며 따름으로써 고운으로 하여금 고독하게 불교를 배우는 자들과 지내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령 고운이 오늘날에 태어났더라면 또한 반드시 큰일을 할 만한 지위에 거하면서 나라를 빛낼 문장 실력을 발휘하여 태평의 시대를 장식했을 것이요, 나 또한 그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끼 낀 비석만 매만지고 있으니, 그 감회가 어떻다고 하겠는가.
사찰 북쪽에 고운이 올랐다는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는데, 지금 거승(居僧)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대를 일으킬 예정이라고 한다.”

청량산(淸凉山)
안동부(安東府) 재산현(才山縣) 서쪽에 있다. 치원봉(致遠峯)과 치원암(致遠庵)이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운이 대당(大唐)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격문을 지은 뒤로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동방의 문장의 시조가 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명(大名)을 등에 지고 동방으로 돌아오자 동방의 사람들은 마치 신선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평생 돌아다니며 노닌 물 하나 바위 하나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컬어 마지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고운이 참으로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며 배격하였더라면, 5백 년 사직의 고려가 꼭 그와 같이 혹독하게 불교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혈(風穴)은 극일암(克一庵) - 극일암(極一庵)으로 된 판본도 있다. - 뒤에 있다. 풍혈의 입구에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판이 동굴 안에 있어서 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치원암에 들러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는데, 그 물이 단애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나와 돌 웅덩이에 가득 차 있었으며, 투명하기가 명경과 같고 차갑기가 빙설과 같았다.
그 암자에 들어가 보고 그 누대에 올라가 보니 고운에 대한 감회가 더더욱 사무쳤다. 아, 당시에 임금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였더라면, 계림(雞林)의 잎이 꼭 그렇게 느닷없이 누렇게 변하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은 시운에 맞게 은둔하여 그 이름이 일월과 빛을 다투게 되었지만, 동도(東都 경주(慶州))의 여러 왕릉은 논밭이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그의 시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금탑봉 앞 치원대에 올라서니 / 金塔峯前致遠臺
열한 개 절 문 열린 것이 멀리 보이네 / 遙看十一寺門開
석양 속의 높고 낮은 푸른 절벽이여 / 高低翠壁斜陽裏
누가 용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고 / 誰倩龍眠圖畫來
또 〈감최고운(感崔孤雲)〉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 갔다가 불우해서 다시 동방으로 / 西行不遇復東行
끝내 산에서 굶은 한을 그 누가 풀겠는가 / 竟餓空山恨孰平
무열왕릉 속에선 황금 발우가 나오고 / 武烈陵中金椀出
가야산 위에는 달 바퀴가 환히 빛나네 / 伽倻嶺上月輪明
또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산봉우리는 다투어 김생의 필법을 드러내고 / 衆峯爭露金生法
외로운 달엔 지금도 치원의 마음이 걸려 있네 / 孤月猶懸致遠心
사흘 묵은 산속에서 사람을 볼 수 없어 / 三宿山中人不見
천추의 누대 위에 홀로 옷깃을 적시노라 / 千秋臺上獨霑襟

학사루(學士樓)
함양(咸陽)의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선생이 태수(太守)로 재직할 때 올라가 감상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뒤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대도 옮겨 지으면서 그대로 학사루라고 일컬었다. 또 손수 심은 나무숲이 10여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시 〈학사루운(學士樓韻)〉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별천지 / 山水縈廻別一天
이곳에 누대 있어 신선이 노니는 듯 / 樓居此地怳遊仙
촌에 이어진 대숲의 서늘한 기운 자리에 스며들고 / 村連碧篠涼侵席
연무 자욱한 긴 숲의 그림자 연석에 잠기누나 / 煙暝長林影蘸筵
점필의 풍류도 벌써 백년의 해를 넘기고 / 佔畢風流年過百
고운의 묵은 자취 천년이 되어 가는구나 / 孤雲陳迹歲垂千
인간 세상 부앙하며 공연히 배회하였나니 / 人間俯仰空延佇
난간에 기대어 읊조리던 소년 시절 생각나네 / 嘯詠欄楯憶少年

임경대(臨鏡臺)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한다. 양산(梁山) 황산강(黃山江) 절벽 위에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청룡대(靑龍臺)
김해(金海)에 있다. 선생이 손수 쓴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왼쪽 옆에 선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해운대(海雲臺)
동래(東萊)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산의 절벽이 마치 누에머리처럼 바닷속에 들어가 있다. 선생이 일찍이 누대를 쌓았는데,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시 〈등해운대(登海雲臺)〉는 다음과 같다.
대 아래는 가없어서 바로 넓은 바다인데 / 臺下無涯是大洋
유선 한번 떠나가매 학은 아니 날아오네 / 儒仙一去鶴茫茫
구만리 치고 날아갈 날개 생길 듯 / 搏搖九萬欲生羽
술잔 가득 부어 고금을 씻노매라 / 滌蕩古今呼滿觴
눈 들어 조각구름 보면 대마도도 들어오고 / 目極片雲看馬島
마음이 나는 곳 어디냐 하면 바로 부상이라네 / 心飛何處是扶桑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이니 / 玆遊奇絶平生冠
소매 가득 하늘 바람 불어온들 대수리오 / 滿袖天風吹不妨

가야산(伽倻山)
합천(陜川) 야로현(冶罏縣)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선생이 일찍이 가족을 데리고 여기에 은거하였는데, 지금도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치인촌(治仁村)이라고 고쳐 불렀다. -
점필재(佔畢齋)가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제시석(題詩石) - 선생의 시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시석이라고 칭한다. - 에 다음과 같이 제(題)하였다.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 淸詩光焰射蒼巒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 墨漬餘痕闕泐間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 말을 할 뿐 / 世上但云尸解去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 那知馬鬣在空山
또 해인사(海印寺) 현판의 시에 화운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고운은 시운을 알고 은둔했나니 / 孤雲嘉遯客
태양처럼 대명이 밝게 전한다오 / 白日大名聞
갓과 신발은 매미가 허물 벗듯 / 巾屨同蟬蛻
풍채와 의표는 학의 무리 속에 / 風標混鶴群
속절없이 긁히고 깎인 바둑판이요 / 棋盤空剝落
반으로 갈라진 제시석이라 / 詩石半刳分
소요하던 땅을 가만가만 밟노라니 / 細履徜徉地
추모의 생각만이 절로 간절하구나 / 追懷祇自勤
주신재(周愼齋)의 시 〈가야즉사(伽倻卽事)〉는 다음과 같다.
연하를 밟을 목적으로 나막신 신고 오니 / 爲躡煙霞理屐來
단풍 진 산비탈 구월 경치 정말 아름답고녀 / 楓崖九月正佳哉
비통함 머금은 반일 동안의 애장사요 / 含悽半日哀莊寺
눈물을 흩뿌린 천년 세월의 치원대라 / 灑淚千秋致遠臺
만사에 무심한데 어찌 풍악 좋아할까 / 萬事無心寧喜竽
백년 인생에 술 있으면 입을 적실 뿐 / 百年有酒卽銜桮
갓끈 씻고 노년을 보내고픈 홍류동에서 / 濯纓終老紅流洞
붓을 드니 포사의 재주 아님이 부끄러워 / 泚筆慙非鮑謝才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넓고 평평한 바위에 이름을 지어 깊이 파 놓은 그 글자의 획이 완연하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은 모두 그가 이름 지은 것들인데,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마멸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유람을 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할 만하다. 또 최고운이 지은 절구(絶句) 한 수가 폭포의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매년 장마에 물이 넘쳐 광란하듯 씻겨 내려가는 바람에 온통 닳아 없어져서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한동안 만져 보다가 겨우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를 분별할 수가 있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인사(海印寺)는 신라의 고찰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다. 남쪽의 바위 절벽은 신라 최 학사(崔學士)가 은거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천석(川石) 사이에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대(吟風臺),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 회선암(會仙巖) 등이 있으며, 동구를 나서면 무릉교(武陵橋)와 칠성대(七星臺)가 있는데, 모두 학사의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놓았다.”

학사대(學士臺)
해인사 서쪽에 있다. 그 옆에 100자나 되는 늙은 회(檜)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3장(丈)을 넘었다. 이 나무를 고운이 손수 심었기 때문에 여기에 누대를 세우고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대는 아직도 우뚝 서 있다.

농산정(籠山亭)
홍류동(紅流洞)에 있다.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온통 감싸게 하였다.〔故敎流水盡籠山〕”라는 고운의 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 정자 뒤로 몇 걸음 떨어져서 고운의 영당(影堂)이 있다. 그리고 현재 정자 앞에 비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월류봉(月留峯)
가야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나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온 곳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청량사(淸涼寺)가 있는데, 고운이 노닐었던 곳이다.

무릉십이곡(武陵十二曲)
가야산 입구에 있다. 무릉교(武陵橋)에서 치원리(致遠里)까지 10여 리에 걸쳐 흰 돌이 깔린 맑은 내가 붉은 절벽과 푸른 골짜기를 뚫고 지나가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고운이 각 구비마다 품평을 하며 제목을 붙였고 좌우의 봉우리와 골짜기에도 모두 품평을 하며 이름을 붙였다. 신유한(申維翰)이 선생을 사모하여 경운재(景雲齋)를 세우고 시도 지었다.

벽송정(碧松亭)

고령현(高靈縣) 서쪽 30리 지점인 평림(平林) 안에 있었는데, 고운이 노닐며 휴식을 취한 곳이다. - 지금은 수해(水害)로 무너져서 산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


 

[주D-001]상서장(上書莊) : 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2]이종상(李鍾祥) : 1799~1870.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정헌(定軒), 경주 출신이다. 서양 학문이 국내에 번지자 이를 근심하고 이 사설(邪說)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66년(고종3)에 미국의 배 셔먼호가 침범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경주진 소모장(慶州鎭召募將)이 되어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정헌문집(定軒文集)》이 있다.
[주D-003]독서당(讀書堂) : 고운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당은 여기에서 말한 경주 낭산(狼山)에 있는 것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도 있다.
[주D-004]황학(黃鶴) : 옛날 선인(仙人)인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내려온 곳에 황학루(黃鶴樓)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이를 소재로 읊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 〈등황학루(登黃鶴樓)〉에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토록 부질없이 떠 있도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05]금심(琴心) : 가야금 연주를 통해서 애모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금심으로 유혹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6]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 :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記言)》 권28하 〈월영대기(月影臺記)〉를 말하는데, 현재 판본의 〈월영대기〉에는 이 글의 끝부분에 나오는 감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없다.
[주D-007]닭을 …… 잡는다 :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한다는 뜻이다. 저잣거리에서 이인(異人)이 고경(古鏡)을 팔고 있기에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구입해서 보니 그 거울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先操雞後搏鴨〕”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계림을 장악한 뒤에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힌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사략(朝鮮史略)》 권4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875 〈고려경문(高麗鏡文)〉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8]단속사(斷俗寺) ……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진주목(晉州牧) 불우(佛宇) 단속사〉에 “신라 병부 영(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다.”라고 하였고, 오대사(五臺寺) 조에 “수정사(水精寺)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권적의 기문(記文)을 실었다. 권적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의 아들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두 차례나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길창군에 봉해졌다. 원화(元和)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이다.
[주D-009]용면(龍眠) : 송대(宋代)의 저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별호(別號)인 용면거사(龍眠居士)의 준말이다.
[주D-010]점필의 풍류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고운의 유적을 찾아와서 시를 읊고 노닐었던 것을 말한다.
[주D-011]이 …… 최고이니 :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남만(南蠻)에 와서 죽을 뻔했어도 나는 원망하지 않아,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였으니까.〔九死南荒吾不恨 茲游奇絶冠平生〕”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43 六月二十日夜渡海》
[주D-012]애장사(哀莊寺) :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를 가리킨다.
[주D-013]포사(鮑謝) : 남조 송(宋)의 시인인 포조(鮑照)와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주D-014]신유한(申維翰)이 …… 지었다 : 신유한(1681~1752)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며, 고령(高靈) 출신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詩)와 사(詞)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200집에 수록된 《청천집(靑泉集)》 권2에는 〈경운재게(景雲齋偈)〉, 〈경운재가(景雲齋歌)〉, 〈제경운재(題景雲齋)〉 등의 시가 실려 있다.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 자직(趙使君子直 조상우(趙相愚))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에서 재직할 적에 신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어사대(御史臺))를 밟고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뛰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기만 끄집어내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만 매자진(梅子眞)처럼 동묵(銅墨)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연문(羨門)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탁세를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미상불 두 번 세 번 탄식하면서 그의 뜻을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곤 했을 것이니, 계속 감개(感慨)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미상불 그곳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련다. 그리고 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


 

[주C-001]조지겸(趙持謙)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주D-001]일소(逸少)의 고사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주D-002]풍악(楓岳) 아래 고을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D-003]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주D-004]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주D-005]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06]연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주D-007]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주D-008]난정(蘭亭)의 …… 것이다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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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祠院〕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
진주(晉州) 남악서원(南岳書院)
합천(陜川) 학사당(學士堂) - 영당(影堂) -
대구(大邱) 계림사(桂林祠) - 영당(影堂) -
함양(咸陽) 백연사(柏淵祠)
하동(河東) 영당(影堂)
창원(昌原) 영당(影堂)
서산(瑞山) 부성사(富城祠) - 영당(影堂) -
한산(韓山) 도충사(道忠祠)
청도(淸道) 영당(影堂)
울진(蔚珍) 영당(影堂)
영평(永平) 영당(影堂)
포천(抱川) 영당(影堂)


 

 

 

 고운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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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진감 화상 비명 병서〔眞監和尙碑銘 竝序


대저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른 차이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방 출신의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할 수도 있고 유교를 공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배를 띄우고 거듭 통역을 바꿔 가면서 유학을 해야 한다. 목숨은 조각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주(寶洲)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니 먼저 어려운 일을 겪어야만 뒤에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험준한 곤륜산(崑崙山)을 꺼리지 않고 옥을 캐는 사람이나 여룡(驪龍)이 서린 심연(深淵)을 사양하지 않고 구슬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혜거(慧炬)를 얻으면 오승(五乘)의 광채와 융화되고, 유교의 가효(嘉肴)를 얻으면 육경(六經)의 진미를 만끽하게 되어, 1천 가문이 다투어 선에 들어오게 하고〔千門入善〕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一國興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 중에는 신독(身毒)궐리(闕里)에서 설하는 가르침이 흐름도 다르고 체제도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한 모퉁이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시험 삼아 논해 보겠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하나의 글자 때문에 한 문장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문장 때문에 전체의 의미를 해쳐서도 안 된다.〔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라고 하였다. 또 《예기(禮記)》에서도 “말의 뜻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상황에 따라서 각기 해당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논을 지어 “석가여래(釋迦如來)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라고 하였고, 심약(沈約)은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심법(心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일컬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月指〕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坐忘〕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멀리 오르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로 비유를 취해서 말한들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겠는가.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반인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하여 널리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또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요,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에서 벼슬하는 집안이었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었는데, 그때 뜻을 굽혀 고구려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성당(聖唐)의 시대에 와서 옛날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이 판도로 들어올 적에, 지금의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은 창원(昌元)이라고 하는데, 재가 중에 출가인의 행동을 보였다. 모친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니 범승(梵僧)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阿㜷〕의 아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잉태하였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울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찍부터 언성(言聲)을 내지 않는 상서로운 싹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피우는가 하면 꽃을 꺾어 헌화하곤 하였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 그림자가 옮겨 가도록 꼼짝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사의 선본(善本)은 원래 백천겁(劫) 이전부터 길러진 것으로서 사람들이 발돋움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머리를 땋은 아동 때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절실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고, 또 천시(天時)를 훔칠 만한 조그마한 땅도 없어서 구복(口腹)의 봉양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는데, 손은 수고롭게 그물을 짜지 않았어도 마음은 물고기 잡는 일을 이미 잘 알아서 철숙(啜菽)의 봉양을 넉넉히 하며 채란(采蘭)의 노래에 걸맞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흙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 봉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애오라지 힘닿는 대로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희미(希微)의 경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뒤웅박〔匏瓜〕처럼 젊은 나이에 그냥 한 곳에만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804, 애장왕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겠다고 청하여 서쪽으로 가는 배에 발을 붙인 뒤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길도 평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비의 배를 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넌 뒤에 피안(彼岸)에 도착하고 나서 국사(國使)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니, 여기에서 작별할까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와서 신감 대사(神鑑大師)를 찾아보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올렸는데, 절이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생에서 아쉽게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다시 만나니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에 얼른 인계(印戒)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불이 마른 쑥으로 타 들어가고 물이 저습(低濕)한 곳으로 번져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승도(僧徒)들은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聖人)을 여기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하였다.
선사는 형모(形貌)가 검었으므로,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며 말없이 처하는 것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니, 어찌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邑中之黔〕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만 비교될 뿐이었겠는가. 길이 적자(赤頿)청안(靑眼)과 더불어 색상(色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원화(元和) 5년(810, 헌덕왕2)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이는 성선(聖善)의 예전의 꿈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구슬처럼 맑게 한 뒤에 다시 배움의 바다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마치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을 능가하였다. 마음은 지수(止水)와 같이 맑았지만 행적은 조각구름과 같이 떠돌았다.
본국의 승려인 도의(道義)가 선사보다 먼저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는데, 해후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適願〕, 이는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불지견(佛知見)을 증득하고는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만 길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송실(松實)을 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3년이요, 그 뒤에 다시 자각(紫閣)으로 나와 번화한 교통의 요지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布施)하며 바쁘게 왕래한 것이 또 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행(苦行)의 수행을 일단 마친 뒤에, 다른 지방에 만행(萬行)을 하는 일도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를 터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몸의 근본인 고향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태화(太和) 4년(830, 흥덕왕5)에 귀국하니, 대각(大覺) 상승(上乘)의 빛이 우리 인역(仁域)을 환히 비췄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봉필(鳳筆)을 날려 영접하여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상인(上人)이 잇따라 이르러서 두 분의 보살(菩薩)이 되셨도다. 예전에 흑의(黑衣)의 인걸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납의(衲衣)의 영걸을 보게 되었도다. 미천(彌天)의 자애와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며 의지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雞林)의 경내를 가지고 길상(吉祥)의 집을 이룩하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露嶽) 장백사(長柏寺)에 석장(錫杖)을 머물렀는데, 의원의 집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사원이 비록 널찍하긴 하였지만, 물정(物情)이 스스로 비좁게 여겼으므로,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 지리산(智異山)으로 갔다. 그때 몇 마리의 오도(於菟)가 포효하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향하는 것이 유기(兪騎)와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따르는 자들이 겁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이것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영산(靈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적에 맹수가 앞길을 인도한 결과 깊이 산혈(山穴) 속으로 들어가서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을 보게 된 일과 사적(事跡)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니, 저 축담유(竺曇猷)가 꾸벅꾸벅 조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서 송경(誦經)하는 소리를 잘 듣게 한 일만 전적으로 승사(僧史)에서 미담으로 꼽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화개곡(花開谷)의 고(故)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난야(蘭若)의 옛터에 당우(堂宇)를 수축하니, 엄연히 조물(造物)이 이루어 놓은 것만 같았다.
개성(開成) 3년(838, 민애왕1)에 민애대왕(愍哀大王)이 갑작스럽게 보위에 오르고 나서 깊이 부처의 자비에 의탁할 목적으로 새서(璽書)를 내리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을 보내며 특별히 발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발원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을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닫는 점이 있었다. 선사가 색(色)과 공(空) 두 가지를 초월하고 정(定)과 혜(慧)에 모두 원만하다 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이 ‘소(昭)’ 자는 성조(聖朝)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와 함께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사적(寺籍)을 편입시키고 경읍(京邑)으로 올라오도록 징소(徵召)하였는데, 왕복하는 사신의 말고삐가 길에서 교차하였지만, 선사는 산악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에 승조(僧稠)가 원위(元魏)의 세 차례 초빙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大道)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在山行道 不爽大通〕”라고 하였는데, 깊은 산속에 거하며 고상한 뜻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달라도 그 지취(志趣)를 서로 같이 한다고 하겠다. 여러 해를 머무는 동안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벼와 삼대처럼 대열을 이루어 거의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이한 지역을 두루 물색하다가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전망이 트이고 상쾌하기가 으뜸이었으므로 이곳에 선찰(禪刹)을 경영하였다. 뒤로는 노을 진 산봉우리를 기대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굽어보았다. 시계(視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악이요, 귀뿌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와 날리는 여울물 소리이다.
여기에 또 봄에는 냇물에 꽃잎이 떠서 흘러가고,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이 길에 드리우고, 가을에는 골짜기에 달빛이 부서지고, 겨울에는 산마루에 흰 눈이 뒤덮인다. 이처럼 사시에 따라 모습을 뒤바꾸고 만상(萬象)이 빛을 교차하는 가운데, 100가지 자연의 피리 소리가 조화롭게 연주되고 1천 개의 바윗돌이 빼어난 자태를 경쟁한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에서 노닐었던 자들도 여기에 와서는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원공(遠公)의 동림(東林)을 바다 밖으로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蓮花世界)야 범인의 상상으로 추측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호리병 속〔壺中〕에 별도로 천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
하였다. 대나무 홈통을 시렁처럼 이어 물을 끌어 와서 섬돌 주위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사원의 현판을 삼았다.
선종(禪宗)에서의 법통을 손꼽아 세어 보면, 선사는 바로 조계(曹溪 혜능(慧能))의 현손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六祖 혜능)의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분 바른 벽에 채색을 하여 널리 중생을 유도(誘導)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이는 경(經)에서 말한 바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까닭에, 현란하게 채색하여 여러 가지 상들을 그린 것이다.〔爲說衆生故 綺錯繪衆像〕”라고 한 것이다.
대중(大中) 4년(850, 문성왕12) 1월 9일 아침에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하니, 내가 이제 가려 한다. 일심(一心)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塔)을 세워서 육신을 보존하려 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서 행적을 기록하려 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끝내자 앉은 자세로 입멸하였다. 세속의 나이로 77세요, 승려의 나이로 41세였다. 이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일어나고, 범과 늑대가 슬피 울부짖었으며, 삼나무와 잣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紫色)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귀로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도 시중(侍中) 저상(褚翔)이 사문(沙門)을 청해 모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복을 빌었을 때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거룩하게 말 없는 가운데 감응한 것에 어찌 속임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道)에 뜻을 둔 자들은 말을 전해 조문하였고,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들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해하며 애도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영함(靈函 관곽(棺槨))과 유수(幽隧 묘혈(墓穴))를 사전에 준비해 두게 하였던바, 제자 법량(法諒) 등이 호곡하며 선사의 시신을 받들어 하루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 묘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현귀한 자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대접하는 음식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문인이 배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하기라도 하면, 선사가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서 찾아왔을 것이니, 거친 밥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이 대하였다. 매번 왕인(王人 사신)이 역마(驛馬)를 타고 왕명을 전하러 와서 법력(法力)을 멀리서 기원할 때면 말하기를,
“왕토(王土)에 거하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마음을 기울여 호념(護念)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뭐하러 꼭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이 몸에게 멀리 와서 왕명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역마가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실로 안쓰럽기만 합니다.”
하였다.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질화로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도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경건히 할 따름이다.”
하였으며, 또 중국차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지피며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달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하였다. 진성(眞性)을 보지하고, 속정(俗情)을 멀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선사는 본디 범패(梵唄)를 잘하였다. 그 음성은 마치 금옥(金玉)이 울리는 것 같았는데, 측조(側調)로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고도 애잔하여 제천(諸天)의 신들을 환희하게 할 정도여서 길이 먼 곳까지 유전(流傳)될 만한 것이었다. 이를 배우는 자들이 당우(堂宇)에 가득하였는데, 선사는 싫증을 내지 않고 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동국(東國)에서 어산(魚山 범패)의 묘음(妙音)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는 것〔掩鼻〕처럼 하면서 옥천(玉泉 진감 선사)의 여향(餘響)을 본받고 있으니,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조정 때였는데, 상이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긴 나머지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가 선사의 유계(遺戒) 내용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문인들이 능곡(陵谷)을 염려하여 선사의 법도를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하게 할 방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내공봉(內供奉) 일길한(一吉干)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낭(嵩文臺郞) 정순일(鄭詢一)이 쇠를 자를 정도로 마음을 같이하여 선사의 행적을 비석에 새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지화(至化)를 드넓히고 진종(眞宗)을 흠앙하는 뜻에서 진감 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리는 한편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누리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해는 양곡(暘谷)에서 떠서 으슥한 곳을 비추지 않는 때가 없고, 바닷가 해안에 뿌리박은 향초는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더더욱 향기를 발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선사가 명(銘)을 짓지도 말고 탑(塔)을 세우지도 말라고 유계(遺戒)를 내렸는데, 서하(西河)의 문도(門徒)에 내려와서 선대(先代)의 뜻을 확고하게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는 임금에게 억지로 청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이 자진해서 그렇게 해 준 것인가. 그저 흰 옥의 흠이 되기에 알맞은 일이라고 하겠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이렇게 비난한다면 그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도〔不近名〕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대개 선정(禪定)의 힘에 의한 결과로 받는 보답이다. 재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爲可爲於可爲之時〕 그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북이의 등에 비석을 올려놓기도 전에 용이 승천하듯 헌강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今上 정강왕(定康王))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부촉한 그 뜻에 잘 부응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였다.
이웃 산의 초제(招提 사찰)에 또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이 서로 겹쳐서 사람들이 듣고 의혹하였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취하려면 의당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했으므로, 사원의 앞과 뒤의 경관(景觀)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문간에 두 개의 시내가 임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이 사원의 제호(題號)를 내려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상이 하신(下臣)에게 거듭 명하기를,
“선사는 행실로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니 그대가 명(銘)을 짓도록 하라.”
하기에, 치원(致遠)이 배수(拜手)하고 아뢰기를,
“예, 잘 알겠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물러 나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중국에서 명성을 낚으며 장구(章句) 사이에서 살지고 기름진 작품들을 저작(咀嚼)하였을 뿐, 구준(衢罇)에 대해서는 만끽하며 취해 보지 못한 채, 오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진흙탕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구나 불법(佛法)은 문자를 떠난 것으로서 언어를 구사해 볼 여지가 전혀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뭐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북쪽으로 수레를 몰면서 남쪽에 있는 초(楚)나라의 영(郢)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외호(外護)와 문인의 대원(大願)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눈을 분명하게 밝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과감하게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두 가지 일을 한 몸에 떠맡고서 있는 힘껏 다섯 가지 기능을 한번 모방해 보기로 하였다. 돌에 신이 붙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부끄럽고 두렵기는 하지만, 도(道)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서투른 솜씨지만 필봉(筆鋒)을 숨기는 일을 신이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앞서 언급한 뜻을 거듭 펼쳐서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 杜口禪那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 歸心佛陀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 根熟菩薩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 弘之靡他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 猛探虎窟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 遠泛鯨波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 去傳祕印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 來化斯羅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 尋幽選勝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 卜築巖磴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 水月澄懷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 雲泉奇興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 山與性寂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 谷與梵應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 觸境無碍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 息機是證
도로써 다섯 조정 협찬을 하고 / 道贊五朝
위엄으로 뭇 요괴를 꺾으면서 / 威摧衆妖
묵묵히 자비의 그늘 드리웠을 뿐 / 默垂慈蔭
임금님의 초빙은 한사코 거절하였다오 / 顯拒嘉招
바다야 원래 표탕하는 법이지만 / 海自飄蕩
산이야 언제 동요한 적 있었으리 / 山何動搖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하지 않고 / 無思無慮
깎거나 새겨 꾸미지도 않았다오 / 匪斲匪雕
먹는 것도 두 가지 음식이 없었고 / 食不兼味
입는 것도 꼭 구비하지 않았으며 / 服不必備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 風雨如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오
/ 始終一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벋어 나는데 / 慧柯方秀
불법의 동량이 느닷없이 쓰러지니 / 法棟俄墜
동천(洞天)의 골짜기는 처량해지고 / 洞壑凄涼
연하(煙霞)의 등라(藤蘿)는 초췌해졌도다 / 煙蘿憔悴
사람은 없어도 도는 그대로 / 人亡道存
가신 님 끝내 잊을 수 없어 / 終不可諼
상사가 위에 탄원서를 올리니 / 上士陳願
임금님이 은총을 베풀었다네 / 大君流恩
해외에 불법의 등불 전하며 / 燈傳海裔
운근 위에 우뚝 솟은 탑이여 / 塔聳雲根
천인의 옷자락에 반석이 다 닳도록 / 天衣拂石
산사(山寺)에 영원히 빛나리로다 / 永耀松門


 

[주B-001]비(碑) :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주C-001]진감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여룡(驪龍)이 …… 사람 : 여룡 즉 흑룡(黑龍)이 잠들어 있을 때 잡아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턱 아래의 구슬을 훔쳐 온 사람의 이야기가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나온다.
[주D-002]오승(五乘) :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통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인승(人乘), 십선(十善) 및 사선(四禪) 팔정(八定)을 통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천승(天乘), 사제 법문(四諦法門)을 통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하는 성문승(聲聞乘), 십이인연(十二因緣) 법문을 통하여 벽지불과(辟支佛果)를 얻게 하는 연각승(緣覺乘), 육도(六度) 법문을 통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보살승(菩薩乘)을 가리킨다. 오연(五衍)이라고도 한다.
[주D-003]1천 …… 하고 : 당(唐)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 〈가훈귀심편(家訓歸心篇)〉에 “불교는 1만 행동을 공으로 돌리고 1천 가문이 선에 들어오게 한다. 그 변재와 지혜로 말하면 어찌 단지 칠경이나 백씨의 박학함 정도로 그치겠는가. 요순이나 주공과 공자 그리고 노장 등도 미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萬行歸空 千門入善 辯才智慧 豈徒七經百氏之博哉 明非堯舜周孔老莊所及也〕”라는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4]온 …… 일으키게 : 《대학장구》 전 9장에 “임금의 집안이 인을 행하면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임금의 집안이 사양을 하면 온 나라가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신독(身毒) : 천축(天竺)과 같은 말로, 인도(印度)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불교의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열전(西域列傳) 천축(天竺)〉에 “천축국은 신독이라고도 하는데, 월지에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으며, 풍속은 월지와 같다.〔天竺國 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俗與月氏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궐리(闕里)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고리(故里)인데, 여기서는 유교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7]시를 …… 된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8]말의 …… 있다 : 《예기》 〈제의(祭義)〉에 나온다.
[주D-009]석가여래(釋迦如來)와 …… 때문이다 :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5편 중 네 번째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의 대목에 나오는 글인데, 《고승전(高僧傳)》 권6 〈석혜원전(釋慧遠傳)〉에 수록되어 있다. 고운이 내용을 생략하거나 덧붙인 부분이 있지만 대의는 큰 차이가 없다.
[주D-010]공자는 …… 다했다 : 심약(沈約)은 남조 양(梁)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이 내용은 그의 〈내전 서(內典序)〉에 나오는데,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9에 수록되어 있다.
[주D-011]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응당 달을 보아야 할 텐데, 손가락만을 쳐다보고는 그것이 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에서 문자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말고 실상(實相)을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는 비유이다. 《楞嚴經 卷2》
[주D-012]앉아서 잊는 경지 : 좌망(坐忘)은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로,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道)와 합일된 정신의 경지를 뜻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D-013]나는 …… 하던가 :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주D-014]정명(淨名)이 …… 대하고 : 정명은 인도(印度)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장자(長者)로서 석존(釋尊)의 속제자(俗弟子)였다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가리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유마거사를 찾아와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유마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維摩經 入不二法門品》
[주D-015]선서(善逝)가 …… 것 : 선서는 부처의 10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했을 때에,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육조 대사(六祖大師)의 《법보단경(法寶壇經)》 〈서문〉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에 나온다.
[주D-016]천시(天時)를 …… 없어서 : 농사지어 수확할 토지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훔쳐서〔盜天地之時利〕 농사짓고 살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주D-017]철숙(啜菽)의 봉양 : 콩죽을 쑤어 먹는다는 말로, 빈한한 집에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집이 가난해 어버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면 그것이 곧 효도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주D-018]채란(采蘭) : 진(晉)나라 속석(束晰)의 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D-019]희미(希微)의 경지 : 소리와 형체가 없는 도(道)의 세계를 말한다. 《노자(老子)》 14장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희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미라 한다.〔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0]내가 …… 되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오체투지(五體投地) : 두 무릎과 두 팔과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불교 예법의 하나로, 접족작례(接足作禮)ㆍ두면예족(頭面禮足)이라고도 한다.
[주D-022]불이 …… 같았다 : 상호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 물은 축축한 곳으로 번져 가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타들어 간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동방의 성인(聖人)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석안함전(釋安含傳)〉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하면,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0)에 태어났는데, 이해에 동방의 성인인 안홍 법사가 서역의 두 삼장과 중국의 승려 2인과 함께 당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崔致遠所撰義相傳云 相眞平建福四十二年受生 是年東方聖人安弘法師與西國二三藏 漢僧二人至自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칠도인(漆道人) : 동진(東晉)의 고승(高僧) 도안(道安)의 별칭이다.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권2 〈전량(前涼) 석도안(釋道安)〉에 “나이 11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을 사사하였다. 글을 읽으면 하루에 만언을 기억하였으며, 재변으로 맞설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총명하였으나 모습은 추하였으므로, 당시에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고 말하였다.〔年十一出家師事佛圖澄 讀書日記萬言 才辯無敵 性聰而貌醜 時語曰漆道人驚四隣〕”라는 말이 나온다. 또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도안은 모습이 총민하고 피부 색깔이 검었으며 담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왼쪽 팔에 사방 1치쯤 도장 형태의 살점이 돋아났으므로 세상에서 인수보살이라고 불렀다.〔安貌銳而姿黑 喜談論 故諺曰 漆道人驚四隣 左臂有肉 方寸隆起如印 世號印手菩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5]도읍 …… 사람 : 춘추 시대 송(宋)나라 공자 한(罕)을 가리킨다. 송나라 황국보(皇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어 임금인 평공(平公)을 위해 누대를 지었는데, 그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공자 한이 추수가 끝난 뒤에 공사할 것을 청했지만 평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을 하는 자들이 “택문 가의 얼굴 흰 사람은 실로 우리의 이 공사를 일으켰고,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은 실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네.〔澤門之晳 實興我役 邑中之黔 實慰我心〕”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나온다.
[주D-026]적자(赤頿) : 진(晉)나라의 고승 불태야사(佛馱耶舍)를 가리킨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26 〈십팔현전(十八賢傳) 불태야사〉에 “스님은 수염이 붉고 비바사론을 잘 해석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사람들이 붉은 수염의 논주라고 불렀다.〔師頿赤 善解毘婆沙論 時人號赤頿論主〕”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청안(靑眼) : 푸른 눈이라는 뜻으로, 보통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28]성선(聖善) : 모친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개풍(凱風)〉의 “어머님은 성스럽고 선하신데, 우리 중에는 괜찮은 자식이 없도다.〔母氏聖善 我無令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29]해후하여 …… 풀었으니 : 《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우연히 서로 만나, 평소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30]서남쪽에서 …… 것 : 《주역(周易)》 〈곤괘(坤卦) 괘사(卦辭)〉에 “서남쪽으로 가면 벗을 얻고, 동북쪽으로 가면 벗을 잃는다.〔西南得朋 東北喪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1]불지견(佛知見)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주D-032]지관(止觀) : 망상을 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에서 특히 강조한다.
[주D-033]흑의(黑衣)의 인걸 :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제무제(齊武帝)〉에 “장간사의 현창에게 조칙을 내려 법헌과 함께 승주가 되게 한 뒤에, 강남과 강북의 일을 나누어 맡게 하니, 당시에 이들을 흑의의 두 인걸이라고 불렀다.〔勅長干寺玄暢同法獻爲僧主 分任江南北事 時號黑衣二傑〕”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미천(彌天) : 하늘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진(晉)나라 고승 도안(道安)의 별명인데, 여기서는 진감 선사를 비유하였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고사 습착치가 도안을 찾아와서 자칭 사해 습착치라고 말하자, 도안이 미천 석도안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명답변이라고 하였다.〔高士習鑿齒詣安 自稱四海習鑿齒 安答曰 彌天釋道安 時以爲名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의원의 …… 것 :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라.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오도(於菟) : 호랑이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4년에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곡이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라 한다.〔楚人謂乳穀 謂虎於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유기(兪騎) : 유아기(兪兒騎)의 준말로, 제왕의 대가(大駕)가 행차할 때 의장대(儀仗隊)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호위 기마병을 말한다. 유아는 발걸음이 날래어 잘 달리는 등산(登山) 귀신 이름이다.
[주D-038]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 일 :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 〈선무외전(善無畏傳)〉에 나온다.
[주D-039]축담유(竺曇猷)가 …… 일 : 맹호(猛虎) 수십 마리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경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유독 한 마리가 졸고 있자 여의장(如意杖)으로 머리를 두드려 깨워 질책하였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1 〈축담유전(竺曇猷傳)〉에 나온다.
[주D-040]난야(蘭若) : 범어(梵語) araṇy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한 승려의 한적한 수행처, 즉 사원을 뜻한다.
[주D-041]개성(開成) …… 나서 : 민애왕 김명(金明)이 희강왕(僖康王)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말하는데, 그도 1년 뒤에 김양(金陽) 등에게 살해되는 운명을 맞는다.
[주D-042]산에서 …… 청한다 :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6 〈승조전(僧稠傳)〉에 “북위(北魏) 효명제가 일찍이 그의 훌륭한 덕에 감화되어 전후에 걸쳐 세 차례나 초빙하였으나, 승조가 사양하면서 ‘어느 하늘 아래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라고 하니, 황제가 마침내 허락하고는 산으로 공양을 보내었다.〔魏孝明帝夙承令德 前後三召 乃辭云 普天之下莫非王土 乞在山行道不爽大通 帝遂許焉 乃就山送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원공(遠公)의 동림(東林) :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세운 동림사(東林寺)를 말하는데, 주변의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주D-044]연화세계(蓮花世界) :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D-045]호리병 …… 이야기 :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새로 세운 쌍계사(雙溪寺)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주D-046]중생의 …… 것이다 : 《능가경(楞伽經)》 권1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의 게(偈)에 나온다.
[주D-047]양사(梁史)에도 …… 있는데 : 《양서(梁書)》 권41 〈저상열전(褚翔列傳)〉에 “저상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중이 되었을 때에 모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사문을 청해 복을 빌었다. 그러자 한밤중에 홀연히 문밖에 기이한 빛이 보이고, 또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녘에 병이 마침내 나았다.〔翔少有孝性 爲侍中時 母疾篤 請沙門祈福 中夜忽見戶外有異光 又聞空中彈指 及曉疾遂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8]측조(側調) : 고악(古樂) 삼조(三調) 중의 하나이다. 송(宋)나라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溪漫志)》 권5에 “대체로 옛 음악은 성률의 높고 낮음에 따라 셋으로 나눈다. 청조와 평조와 측조가 그것인데, 이를 삼조라고 한다.〔蓋古樂取聲律高下合爲三 曰淸調平調側調 此之謂三調〕”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9]코를 막는 것 : 타인의 기예를 부러워하여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콧병을 앓아서 마치 낙양(洛陽) 서생(書生)의 성조(聲調)처럼 굵고 탁한 코 먹은 소리를 잘 내었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이 음성을 좋아하여 모방하려고 해도 잘 안 되자 ‘손으로 코를 막고 읊조렸다.〔手掩鼻而吟〕’라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주D-050]능곡(陵谷) :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쇠를 …… 같이하여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2]양곡(暘谷) : 전설 속의 해 뜨는 곳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서하(西河)의 문도(門徒) : 선사의 제자의 제자를 가리킨다. 서하는 노년에 물러나 서하 지역에서 거처하며 교수했던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사의 제자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54]이름이 …… 하였는데도 :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爲善 无近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5]해야 …… 함으로써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면 좋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하면 좋지 않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56]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헌강왕과 정강왕은 형과 아우 사이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의 “맏형은 질나발을 불고 둘째 형은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7]구준(衢罇) : 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성인(聖人)의 도를 가리킨다. 《회남자》 〈무칭훈(繆稱訓)〉의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置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8]다섯 가지 기능 : 보잘것없는 재능이라는 뜻의 겸사이다. 《순자》 〈권학(勸學)〉에 “교룡은 발이 없어도 잘도 나는데, 땅강아지는 다섯 가지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궁하기만 하다.〔螣蛇無足而飛 梧鼠五技而窮〕”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날 수는 있어도 지붕 위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는 있어도 꼭대기까지는 가지 못하며, 헤엄을 치기는 해도 골짜기를 건너가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는 있어도 몸을 가리지는 못하며, 달릴 수는 있어도 사람보다 먼저 가지는 못하니, 이것을 다섯 가지 기능〔五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59]돌에 …… 일이라서 : 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오는데, 그 내용 중에 “돌이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어서 말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아니면 백성들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石不能言 或馮焉 不然民聽濫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0]도(道)라는 …… 것이니 : 《노자》 25장에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1]어떤 …… 않고 : 《장자》 〈지북유(知北遊)〉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히 머물게 된다. 어떤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비바람 …… 한결같았다오 : 《시경》 〈풍우(風雨)〉는 난세에도 절조(節操)를 변하지 않는 군자를 그리워하는 시인데, 그중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3]운근(雲根) : 산 위의 바위를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주D-064]천인(天人)의 …… 닳도록 :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리 되는 반석(磐石)을 천인이 100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고, 8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중겁(中劫), 80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祇劫) 즉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 〈불모품(佛母品)〉에 나온다. 그 반석은 겁석(劫石)이라고 칭한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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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지증 화상 비명 병서〔智證和尙碑銘 竝序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오상(五常)의 방위를 나눌 때 동방(動方)에 배속된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 삼교(三敎)의 이름을 세울 때 정역(淨域)에 출현한 것을 불(佛)이라고 한다. 인심(仁心)은 불(佛)이요, 불목(佛目)은 인(仁)인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욱이(郁夷)의 유순한 성원(性源)을 이끌어 가위(迦衛)의 자비로운 교해(敎海)에 이르게 하는 것은 돌을 물에 던지고〔石投水〕 모래 더미 위에 물을 뿌려 주는 것〔雨聚沙〕과 같은 일이다. 더군다나 동방의 제후로서 외방을 지키는 자로 우리보다 큰 나라가 없으며, 지령(地靈)이 이미 살리기 좋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속 또한 서로 양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희희(煕煕)한 태평의 봄날이요, 은은(隱隱)한 상고(上古)의 교화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또 모든 성씨(姓氏)가 석가(釋迦)의 종족에 참여하는 가운데 존귀한 임금님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기까지 하였으며, 언어 또한 범어(梵語)의 소리를 답습해서 혀를 굴리는 소리에 다라(多羅)의 문자가 많았다. 이는 바로 하늘이 분명히 서토(西土)를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군자의 고장에 법왕(法王)의 도(道)가 스며드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깊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노(魯)나라에서 별이 떨어진 것〔隕星〕을 기록하고 한(漢)나라에서 일륜(日輪)을 두른 일〔佩日〕을 징험한 때로부터 상적(像跡)은 백천(百川)이 달빛을 머금은 듯하고 법음(法音)은 만뢰(萬籟)가 바람에 부르짖는 듯하여, 혹은 훌륭한 가르침을 비단에 적어 넣기도 하고 혹은 아름다운 자취를 빗돌에 새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낙양(洛陽) 시내를 범람하고 진(秦)나라 궁전을 비추었던 사적(事跡)이 일월(日月)이 걸린 것처럼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삼척(三尺)의 입오색(五色)의 붓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사이에 문사(文辭)를 엮고 후대에 언설(言說)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국관국(以國觀國)의 관점에 입각하여 어느 지역에서 건너왔고 어느 지역으로 옮겨 갔는지를 고찰해 보건대, 불교의 바람이 사막과 산맥을 거쳐 중국에 전해지고 나서 비로소 그 물결이 바다 모퉁이 동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옛날 동방에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있을 당시에, 백제(百濟)에 소도(蘇塗)의 제의(祭儀)가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을 제사하던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서진(西晉)의 담시(曇始)가 처음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왔는데, 이는 섭마등(攝摩騰)이 동한(東漢)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또 고구려의 아도(阿度)가 우리 신라(新羅)에 건너왔는데, 이는 강승회(康僧會)가 남쪽 오(吳)나라에 간 것과 같았다. 이때는 바로 양(梁)나라 보살제(菩薩帝)가 동태사(同泰寺)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되는 해요, 우리 법흥왕(法興王)이 율령(律令)을 제정한 뒤로 8년이 되는 해이다. 그즈음에는 역시 해안(海岸)에 여락(與樂)의 뿌리가 내렸음은 물론이요, 일향(日鄕)에 증장(增長)의 보배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착한 소원이 받아들여지고 땅에서는 수승(殊勝)한 인연이 솟아났다. 그런 가운데 중귀(中貴)가 불교에 몸을 바치고 상선(上仙)이 머리를 깎는가 하면, 비구(比丘)가 서쪽으로 배우러 가고 나한(羅漢)이 동쪽으로 와서 노닐었다.
그러한 까닭에 혼돈이 제대로 개벽되고 사바세계가 두루 교화되는 가운데, 산천의 승경을 가려서 토목(土木)의 기공(奇功)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좌선할 집을 꾸미고 수행의 길을 밝히니, 신심(信心)이 샘처럼 솟아나고 혜력(慧力)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그리하여 실제로 표저(漂杵)의 재앙을 없애고 건고(鞬櫜)의 경사가 있게 한 결과 옛날의 조그마한 세 나라가 지금은 장하게도 한집안이 되었다. 지금은 사원이 구름처럼 배치되어 빈 땅이 없을 정도이고, 쇠북 소리가 우레처럼 진동하여 제천(諸天) 가까이 퍼져 나가니, 앞으로도 점차 여유 있게 교화될 것이요 싫증 냄이 없이 심오하게 탐구할 것이다.
이 땅에 불교가 흥기한 것을 살펴보건대, 비바사(毘婆娑)가 먼저 이르자 사군(四君)이 사제(四諦)의 바퀴를 치달렸고, 마하연(摩訶衍)이 뒤에 오자 일국(一國)이 일승(一乘)의 거울을 비추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경의(經義)에 밝은 용들이 구름처럼 뛰어오르고 계율(戒律)에 철저한 범들이 바람처럼 휘날리면서, 학해(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의 가엽(柯葉)이 무성하게 우거진 가운데, 도인(道人)은 모두 무외(無外)의 경지에 융합하였고 유정(有情 속인)이 혹 중도(中道)의 길을 밟기도 하였다. 어쩌면 지수(止水)처럼 잔물결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고산(高山)처럼 아침 햇살을 맨 먼저 받은 걸출한 자도 대개는 있었을 법하나, 세상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승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당(西堂)의 오묘한 경지를 접하고는 지혜의 빛이 지장(智藏 서당)과 비등해져서 돌아온 뒤에 처음으로 선종(禪宗)의 현묘한 계합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나 교종(敎宗)의 사람들은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혀서 남쪽의 목적지 대신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비호하였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부하면서 남명(南冥)을 향해 높이 날아가는 대붕(大鵬)을 비난하였으며, 이미 교종의 말을 외우는 일에 도취해서 선종을 다투어 마어(魔語)라고 비웃었다. 이 때문에 처마 아래에 빛을 숨기고 선경(仙境) 속에 자취를 감춘 채 동해(東海)의 동쪽인 서울로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北山)의 북쪽인 심산유곡으로 은둔하였으니, 이 어찌 대역(大易)에서 말한 근심이 없다〔無悶〕고 한 사람이요, 《중용(中庸)》에서 말한 후회하지 않는다〔不悔〕고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솔이 빼어나듯 선정(禪定)의 숲에서 향기가 배어 나오자, 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듯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을 가득 채웠으며, 매가 변화하듯 사람들이 개과천선하여 그 골짜기에서 나왔으니, 도(道)는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때가 된 뒤에 행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광대한 선왕(先王)의 공업을 이어받고 선강태자(宣康太子)가 감국(監國)과 무군(撫軍)의 일을 맡게 됨에 미쳐서는 병든 부위를 도려내어 국가를 치료하고 선(善)을 즐겨하여 집안을 살지게 하였다. 그때 홍척 대사(洪陟大師)가 서당(西堂)에게 가서 마음을 증득(證得)하고 남악(南岳)으로 돌아와서 발을 쉬고 있으니, 임금이 순풍(順風)의 요청을 개진하고 태자가 개무(開霧)의 기약을 경하하였다. 현교(顯敎)는 명시(明示)하고 밀교(密敎)는 비전(秘傳)하는바, 아침에는 범부였어도 저녁에는 성인이 되게 함에 교계(敎界)가 울연(蔚然)히 변한 것은 아니지만,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이 발연히 흥기하였다.
그의 종취(宗趣)를 시험 삼아 엿보아 비교해 보건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였다. 고요히 있을 때에는 산처럼 서 있고 움직일 때에는 골짜기처럼 응하였으며,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동방 사람들의 마음속 경지가 신령스러워졌는데, 정리(靜利)로 바다 밖의 이 땅을 이롭게 하면서도 이롭게 한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이후에도 조각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불법을 구하며 도에 융합한 자들이 나왔다. 그러한 걸출한 선배 고승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런 이들이 많았다. 혹은 명검(名劍)이 연진(延津)에서 변화하듯 하고, 혹은 진주(珍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오듯 하였는데, 거벽(巨擘)이 된 이들을 손가락으로 꼽으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 그대로 머문 자들로는 정중(靜衆)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을 들 수 있는데 선보(禪譜)에 나온 익주(益州)의 김(金)과 진주(鎭州)의 김(金)이란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동방으로 귀환한 자들로는 앞에서 소개한 북산(北山)의 의(義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척(陟 홍척(洪陟))을 비롯해서 그 뒤에 나온 태안(太安)의 철(徹 혜철(慧徹))과 국사(國師)인 혜목(慧目)의 육(育 현육(玄育))과 지력(智力)의 문(聞)과 쌍계(雙溪)의 조(照 혜조(惠照))와 신흥(新興)의 언(彦 충언(沖彦))과 용암(涌巖)의 체(體)와 진구(珍丘)의 휴(休 각휴(覺休))와 쌍봉(雙峯)의 운(雲 혜운(惠雲))과 고산(孤山)의 일(日 품일(品日))과 양조(兩朝)의 국사(國師)인 성주(聖住)의 염(染 무염(無染))과 보리(菩提)의 종(宗 광종(廣宗)) 등이다.
이들은 덕이 깊어서 중생의 어버이가 되고 도가 높아서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온다고 한 격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이 세상에 교화가 미쳤고 큰 비석에 업적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동기들도 훌륭하고 제자들도 번창해서 선정(禪定)의 숲이 계림(雞林)에서 빼어나게 돋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물결이 접수(鰈水 동해)로 안온히 흐르게 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문을 나서거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대도(大道)를 보고,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상보(上寶)를 얻은 분이 있다. 그는 고요히 망념을 잠재우고 담담하게 세간의 재미를 모두 잊었다. 그리하여 굳이 이르려 하지 않아도 피안(彼岸)에 이르렀고, 굳이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도 차안(此岸)이 다스려졌다. 그러니 칠현(七賢)의 어느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십주(十住)로는 그 위치를 정하기가 어렵다.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현계산(賢溪山)의 지증 대사(智證大師)이시다.
그는 대성(大成)할 초기에는 범체(梵體) 대덕(大德)에게서 몽매함을 계발받았고, 경의 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품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상달(上達)해서는 엄군(嚴君 부친)이라 할 혜은(慧隱)에게서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였고, 영자(令子 아들)라 할 양부(揚孚)에게 묵계(默契)를 전수하였다.
대사의 법계(法系)를 보면, 당(唐)나라의 4조(祖)가 5세(世)의 부조(父祖)로서, 그 법맥이 해외의 동방에 전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흐름을 따라 헤아려 보면, 쌍봉(雙峯 4조의 별칭)의 아들이 법랑(法朗)이요, 손자가 신행(愼行)이요, 증손이 준범(遵範)이요, 현손이 혜은(慧隱)이요, 그다음 내손이 바로 대사이다.
법랑 대사(法朗大師)는 대의(大醫 4조의 시호(諡號))의 대증(大證)을 통과하였다. 중서(中書)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비명(碑銘)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원방(遠方)의 기사(奇士)요 이역(異域)의 고인(高人)인 그가 험도(嶮道)를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온 사람이 우리 법랑 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이라서 다시 은밀한 곳에 숨겨 놓았는데, 비장(秘藏)한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오직 신행 대사뿐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운세가 이롭지 못하여 도가 형통하지 못하자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숙종황제(肅宗皇帝)가 은총을 내려 시를 하사하기를, “용아(龍兒)가 뗏목도 없이 바다를 건넜고, 봉자(鳳子)가 달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하늘에 올랐네.”라고 하자, 신행 대사가 산조(山鳥)와 해룡(海龍)의 두 구절을 가지고 답하였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동방으로 돌아와 3대(代)를 전하여 우리 지증 대사에 이르렀으니, 필만(畢萬)의 후손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말이 이에 증험되었다.
대사의 속세의 인연을 상고해 보건대, 왕도(王都) 사람으로 김씨(金氏) 성의 자손인데, 호는 도헌(道憲)이요, 자는 지선(智詵)이다. 부친은 찬괴(贊瓌)이고, 모친은 이씨(伊氏)이다. 장경(長慶) 갑진년(824, 헌덕왕16)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中和) 임인년(882, 헌강왕8)에 세상을 떠났으니, 승려 생활 43년에 향년이 59세였다.
그의 생김새를 보면, 신장이 7자가 넘었고 얼굴은 1자쯤 되었으며, 풍채가 호걸스럽고 언어가 호방하였으니,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威而不猛〕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잉태로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자취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신출귀몰하듯 해서 붓으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제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할 여섯 가지의 기이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게 할 여섯 가지의 정대한 조리(操履)를 간추려서 각각 나누어 드러내 보려 한다.
처음에 모친이 꿈을 꾸니, 한 거인(巨人)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옛날 승견불(勝見佛)의 말세에 승려가 되었는데, 성을 잘 냈으므로 오래도록 용(龍)의 과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업보가 끝나서 법손(法孫)이 될 예정이기 때문에 묘한 인연에 의탁하여 자비의 교화를 넓히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 꿈을 꾸고는 임신하여 거의 400일이 지난 관불일(灌佛日) 아침에 탄생하였다. 이는 망정(蟒亭)의 일과 증험되고 상실(象室)의 꿈과 부합되는 것으로서 가죽을 차고 다니는 자로 하여금 더욱 경계하게 하고, 가사(袈裟)를 착용한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닦게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함이 그 첫째이다.
태어난 지 며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았으며 젖을 짜서 먹이면 울면서 토하려고 하였다. 그때 홀연히 도인(道人)이 문 앞을 지나가다가 충고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게 하려면 훈채(葷菜)와 비린 고기를 참고서 끊어야 한다.”
하였으므로, 모친이 그대로 따르니 마침내 아무 탈이 없었다. 그리하여 젖 먹이는 자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게 하고 고기를 먹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 숙습(宿習)의 기이함이 그 둘째이다.
9세에 부친을 여의고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몸이 상하였다. 이에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승려가 가련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허깨비 같은 몸은 사라지기 쉽고, 장한 뜻은 성취하기 어렵다. 옛날 부처가 부모의 은혜를 갚을 적에 큰 방편을 사용한 일이 있으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깨달은 점이 있어서 호곡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모친에게 아뢰어 불도에 귀의하겠다고 청하니, 모친이 그가 어린 것을 애처롭게 여기고 또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가 왕성(王城)을 몰래 빠져나간 옛일을 귀로 듣고는 도망쳐서 부석산(浮石山)으로 가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가슴이 뛰며 마음이 불안해져서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이윽고 의려(倚閭)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급히 귀성하자 병도 따라서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완효서(阮孝緖)의 고사에 견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사가 병에 전염되었는데 의원에게 보여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고, 여러 곳에 점을 쳐 보아도 누구나 말하기를,
“큰 신령인 부처 아래에다 이름을 두어야 좋을 것이다.”
하였다. 모친이 예전의 태몽을 떠올리고는 시험 삼아 방포(方袍 가사(袈裟))를 몸 위에 덮어 주고 울면서 맹세하여 말하기를,
“이 병이 낫기만 한다면 부처님의 자식으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틀 밤을 자고 나자 병이 실제로 깨끗이 나았다. 이렇게 하여 위로는 염려하는 모친을 깨닫게 하고 끝내는 평소의 뜻을 이룸으로써, 지독(舐犢)하는 자로 하여금 애정을 끊게 하고, 음사(飮蛇)한 자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감(孝感)의 기이함이 그 셋째이다.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어 비로소 계단(戒壇)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반짝이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탐색하여 하나의 구슬을 얻었으니, 이것이 어찌 의식적으로 구해서 된 것〔有心而求〕이겠는가. 발이 없어도 저절로 이른 것〔無脛而至〕이니, 이는 참으로 《육도경(六度經)》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배고파 울부짖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누워 있는 자로 하여금 깨어날 수 있게 하였으니, 여심(勵心)의 기이함이 그 넷째이다.
하안거(夏安居)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즈음에 밤에 꿈을 꾸니 변길보살(遍吉菩薩)이 이마를 어루만지며 귀에 대고 간절히 말하기를,
“고행(苦行)을 행하기 어렵겠지만, 행하면 반드시 이룰 것이다.”
하였는데, 꿈을 깨고는 송연(悚然)해져서 아무 말 없이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나 솜옷을 입지 않았고, 실로 기워야 할 때에도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의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신발도 가죽으로 된 것은 신지 않았다. 그러니 더군다나 깃털 부채나 털 담요와 같은 물건들을 사용했겠는가. 이렇게 해서 솜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눈이 번쩍 뜨이게 하고 비단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얼굴이 달아오르게 하였으니, 율신(律身)의 기이함이 그 다섯째이다.
젊은 시절부터 노성(老成)한 덕이 다분하였으며 게다가 또 계주(戒珠)가 빛났기 때문에 후생(後生)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큰 병통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억지로 혜택을 베풀려고 하면 혜택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모범이 되지 못하는 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바다에 떠 있는 지푸라기와 같아서 자기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림자를 쫓아다니다가 으레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행태는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다가 나무하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쳐야 하는 법〔先覺覺後覺〕인데, 어찌하여 꼭 빈껍데기인 몸을 아끼려 하시는가.”
하기에, 그에게 응대하려고 하였으나 벌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달은 점이 있어서 가르침을 청하러 오는 자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雞藍山) 수석사(水石寺)에 사람들이 대숲처럼 빽빽이 들어차게 되었다. 그런데 또 얼마 뒤에는 다른 곳에 터를 잡아 건축을 하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책의 글자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살 곳을 경영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재점검하게 하였으니, 수훈(垂訓)의 기이함이 그 여섯째이다.
증(贈) 태사(太師) 경문대왕(景文大王)은 마음속으로 정교(鼎敎)를 융회(融會)한 분으로서, 법륜(法輪)을 굴리는 대사를 무척 만나고 싶어 하였다. 멀리서 대사를 깊이 사모하며 자기에게 나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한을 부쳐 보내기를,
이윤(伊尹)은 걸림 없이 나아와 자신을 보여 주었는데, 송섬(宋纖)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교를 불교에 견준다면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먼 곳으로 가는 종교라고 할 것입니다. 도성 주변의 산중에도 좋은 곳이 꽤나 있어서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 고를 수 있을 것이니, 봉황의 자태를 드러내는 일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리고 근시(近侍) 중에서 적임자를 엄선하여 곡릉(鵠陵 원성왕(元聖王))의 후손인 김입언(金立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일단 왕의 분부를 전하고 나서는 대사에 대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하려면 조용한 곳을 놔두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 하라는 분부야말로 저를 위해서 제대로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디 도중(塗中)에 편안히 거하도록 허락해 주시고, 문상(汶上)에 있는 일이 없게끔 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듣고는 더욱 진중(珍重)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대사의 성예(聲譽)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날아가고, 대중은 말이 없어도 변화하여 일신되었다.
함통(咸通) 5년(864, 경문왕4) 겨울에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이라고 칭하면서 당래불(當來佛 미륵불(彌勒佛))에게 귀의하고는 대사를 공경하여 천상에서 하계에 강생한 분이라고 일컬으며 상공(上供)을 후하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읍사(邑司) 관할의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에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가 많다면서 대사에게 그곳의 원학(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그 문도(門徒)에게 고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인의 계곡〔賢溪〕이니, 그 땅이 바보의 골짜기〔愚谷〕와는 다르다. 그리고 사원의 이름이 안락(安樂)이니, 승려가 주지(住持)할 곳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요청한 대로 그곳에 옮겨 거주하니 주변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산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더욱 고요해지게 하고, 땅을 택하는 자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하게 하였으니, 행장(行藏)의 정대함이 그 첫째이다.
어느 날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고(故) 한찬(韓粲) 김공 억훈(金公嶷勳)은 나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공의 은혜를 불상(佛像)으로 보답하려 한다.”
하고는, 장륙(丈六 1장(丈) 6척(尺))의 불상을 현금(玄金 철(鐵))으로 주조하고 그 위에 황금을 입혀서 사원을 진호(鎭護)하고 저승길을 인도하는 데에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자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도 신속히 호응하게 하였으니, 지보(知報)의 정대함이 그 둘째이다.
함통 8년(867, 경문왕7) 정해(丁亥)에 단월(檀越 불교 신도)인 옹주(翁主)가 여금(茹金) 등을 시켜 가람의 토지와 노비 문서를 건네주며 승려의 전사(傳舍)로 삼게 하고 영원히 바뀌는 일이 없게 하였다. 대사가 이 일을 계기로 생각하기를, ‘왕녀도 법희(法喜)에 이바지하고자 해서 이와 같이 희사(喜捨)하였는데, 불손(佛孫)이 선열(禪悅)을 맛보면서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집안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당(親黨)도 모두 죽고 없으니, 길 가는 행인의 손에 떨어지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문(佛門)의 제자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건부(乾符) 6년(879, 헌강왕5)에 장(莊) 12구(區) 전(田) 500결(結)을 희사하여 사원에 소속되게 하였다. 누가 밥주머니라고 기롱하였던가. 죽 먹는 일을 솥에다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천(民天)이 있게 된 덕분에 불토(佛土)를 기약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토지라고 하더라도 왕의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왕손인 한찬(韓粲) 김계종(金繼宗)과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팔원(金八元)과 김함희(金咸煕) 및 정법사 대통(政法司大統) 석현량(釋玄亮)에게 질의하였던 것인데, 구고(九皐)의 학 울음소리가 천리 밖에까지 울려 퍼지자, 증(贈) 태부(太傅)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윤허하고는, 그해 9월에 남천군 통승(南川郡統僧) 훈필(訓弼)로 하여금 별서(別墅)를 표시하고 정장(正場)을 구획하게 하였다. 이는 밖으로는 군신(君臣)이 땅을 보태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천상에 태어나도록 이바지한 것으로서, 속명(續命)한 자로 하여금 인(仁)에 감격하게 하고, 상가(賞歌)한 자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으니, 단사(檀捨 단월로서 희사한 것)의 정대함이 그 셋째이다.
간혜지(乾慧地)에 머물고 있는 심충(沈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사가 정혜(定慧)의 칼날을 놀리는 것이 여유작작하고, 건곤(乾坤 천문 지리)의 감식안이 투철하며, 뜻은 담란(曇蘭 동진(東晉)의 승려)처럼 확고하고, 학술은 안름(安廩 남조 진(陳)의 승려)처럼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는, 대사를 찾아와 극진한 예를 표하고 나서 아뢰기를,
“제자의 사용하지 않는 땅이 희양산(曦陽山) 중턱에 있는데 봉암(鳳巖)과 용곡(龍谷)의 형세를 지니고 있어서 그 절경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부디 그곳에 선궁(禪宮)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대사가 차분히 대답하기를,
“내가 몸을 나눌 수가 없으니, 그 땅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으나, 그의 요청이 워낙 간절한 데다가 무장한 기병이 선도하러 달려 나오는 산령(山靈)의 기이한 현상이 있었으므로, 석장(錫杖)을 짚고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을 더듬어 올라가 지세를 살폈다.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친 것을 보니, 봉황이 날개를 치며 구름 위로 솟구치는 형상이요, 물이 띠처럼 백겹으로 에워싼 것을 보니, 규룡(虯龍)이 허리를 바위에 걸치고 똬리를 튼 형상이었다. 대사가 이를 보고는 놀라워하는 한편으로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땅을 얻게 된 것이야말로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곳에 승려가 살지 않는다면 필시 도적의 소굴이 되고 말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을 방비할 기초를 다지면서 기와지붕을 올린 네 기둥을 세워 주위를 진압하고, 2구(軀)의 쇠 불상을 주조하여 사원을 호위하게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881, 헌강왕7)에 왕이 전(前) 안륜사(安輪寺)의 승통(僧統) 준공(俊恭)과 숙정대(肅正臺)의 사(史)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강역을 표시하여 정하게 하는 한편 사원의 편액(扁額)을 내려 봉암(鳳巖)이라고 하였다. 대사가 그곳에 가서 교화를 펼친 몇 년 사이에 산속의 백성 가운데 도적이 된 자가 처음에는 감히 법륜(法輪)에 거역하다가 끝내는 뽕나무 오디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선정(禪定)의 고요한 물을 깊이 떠서 마군(魔軍)의 산에 미리 물을 댄 큰 힘 덕분이 아니겠는가. 팔을 끊은 자로 하여금 그 의리를 표시하게 하고,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치려 한 자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개발(開發)의 정대함이 그 넷째이다.
태부(太傅) 대왕(大王 헌강왕)이 중화(中華)의 풍속으로 폐풍(弊風)을 일소하고 지혜의 바다로 마른 땅을 적시면서 평소부터 영육(靈育)의 이름을 흠모하고 법심(法深)의 강론을 듣고자 갈망하였다. 이에 계족산(雞足山)에 마음을 기울여 조서(詔書)를 보내 초빙하며 이르기를,
“밖으로 소연(小緣)을 돌보다 보니 일념(一念) 사이에 삼제(三際 한 해)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안으로 대혜(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부디 한번 왕림해 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조서에서 언급한 “이 세상 어디서나 좋은 인연을 맺고 어느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라는 말에 감동되어, 가슴속에 옥을 품고서〔懷玉〕 산에서 나오니, 수많은 거마(車馬)가 길에 나와 대사를 영접하였다. 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틀 밤을 편안히 석장(錫杖)을 머물게 하고는 월지궁(月池宮)으로 인도한 뒤에 마음이란 것에 대해서 대사에게 물어보았다. 이때는 바야흐로 가느다란 등라(藤蘿) 덩굴에도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궁정의 온실(溫室)의 나무에 바야흐로 밤이 깃들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황금빛 파장의 달그림자가 옥빛 연못의 한복판에 엄연히 드리워져 있었는데, 대사가 달그림자를 굽어보다가 고개를 들고 고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의 의혹이 해소되면서 흔연(欣然)히 계합하여 말하기를,
“금선(金仙 부처)이 꽃을 들어 보이며 후세에 전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풍류가 진정 이것과 일치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배하며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궁궐을 나설 즈음에 왕이 충직한 신하로 하여금 왕의 뜻을 전하게 하면서 조금만 더 머물러 있어 주기를 청하자 대사가 답하기를,
우대우(牛戴牛)라고 말을 합니다만 값어치는 별로 나가지 않습니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러 준다면〔以鳥養鳥〕 그 은혜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작별을 고하려고 하니, 만약 굽히게 한다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운어(韻語)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끌어당겨도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학(支鶴)인데, 나는 조구(趙鷗)가 아니로구나.”
하고는, 십계(十戒)를 받은 제자인 선교성 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를 호송해서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토끼를 기다리는 자로 하여금 그루터기를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자로 하여금 그물 짜는 것을 배우게 하였으니, 출처(出處)의 정대함이 그 다섯째이다.
대사는 세상을 여행할 적에 멀거나 가까운 곳이나 평탄하거나 험한 곳을 막론하고 모두 걸어 다녔을 뿐 도보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말이나 소의 신세를 진 적이 한번도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산으로 돌아갈 무렵에 얼음과 눈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을 방해하자 왕이 종려나무로 제작한 보여(步轝)를 하사하여 타고 가게 하였다. 그러자 대사가 사자에게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쩌면 정대춘(井大春)이 말한 사람이 끄는 수레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돌아보면 영준(英俊)한 인물도 꼭 타야 할 물건이 아닌데, 하물며 머리를 깎은 승려의 경우이겠는가. 그러나 왕명이 일단 내려진 이상에는, 이를 받아들여서 고통을 구제할 도구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 때문에 안락사(安樂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석장(錫杖)을 짚고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된 뒤에야 비로소 그 보여를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알고서 근심하는 자로 하여금 공(空)의 도리를 요달(了達)하게 하고, 어진 이를 어진 이로 알고서 미련을 두는 자로 하여금 그 집착에서 떠나게 하였으니, 용사(用捨)의 정대함이 그 여섯째이다.
겨울의 마지막 달 기망(旣望)에서 이틀이 지난 날에 가부좌를 하고 대화를 나눌 즈음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사는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 별은 하늘 위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하루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서 울부짖으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물이 오열하는 듯하였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부러뜨리니 그 색깔은 곡수(鵠樹)와도 흡사하였다. 외물의 감응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으니 사람의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헤아릴 수 있다. 이틀 밤을 묵고 나서 현계산(賢溪山)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 희양산(曦陽山)으로 옮겨 장례를 행하였다.
태부(太傅) 왕(王 헌강왕)이 의원을 급히 보내 문병하게 하고, 역마(驛馬)를 내려보내 재(齋)를 올리게 하였으니, 공정하게 정사를 행하느라 겨를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대사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제자인 건공향 영(建功鄕令) 김입언(金立言)으로 하여금 여러 제자들을 위문하게 하고, 지증 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이와 함께 비석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대사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문인(門人)인 성견(性蠲), 민휴(敏休), 양부(楊孚), 계휘(繼徽) 등이 모두 문재를 발휘하여 대사의 과거 행적을 간추려서 위에 바쳤다.
을사년(885, 헌강왕11)에 이르러 백성 가운데 유도(儒道)를 매개로 하여 제향(帝鄕)에 가서 급제자의 명단에 이름이 오르고 시어사(侍御史)의 직함을 띤 최치원이라는 자가 한후(漢后 당 희종(唐僖宗))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회왕(淮王 고변(高騈))의 예물을 지참하고서 귀국하였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오는 상서에 견주기에는 부끄럽다고 하더라도 학(鶴)이 돌아온 것과는 자못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상이 충직한 신하이면서 불교 신자인 도죽양(陶竹陽)에게 명하여 문인이 작성한 대사의 행장을 전해 주게 하고, 수교(手敎)를 내려 이르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방의 성사(聖師)가 서방 정토로 떠나서 슬펐는데, 수의(繡衣)를 걸친 중국의 조사(詔使)가 동방으로 돌아와서 매우 기쁘다. 불후하게 할 일이 이제 인연이 닿아서 이르렀으니, 아낌없이 외손(外孫)의 글을 지어 대사의 자비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이 동전(東箭)과 같은 훌륭한 재질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남관(南冠)을 쓰고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바야흐로 운부(運斧)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느닷없이 호궁(號弓)의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또 나라에서는 불서(佛書)를 중히 여기고 집안에서는 승사(僧史)를 간직하고 있는 터에 불법(佛法)의 비갈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선종(禪宗)의 비석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절묘하다는 작품을 두루 열람하고 나머지 빠뜨린 글들을 시험 삼아 찾아보아도 무거무래(無去無來)의 언설을 다투어 쏟아 내어 말〔斗〕로 헤아릴 정도요, 불생불멸의 담론을 걸핏하면 논하여 수레에 실을 정도가 되었을 뿐 노사(魯史 춘추(春秋))의 신의(新意)는 전혀 없이 간혹 주공(周公)의 구장(舊章)을 쓰고 있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도가 멀기만 하다는 것을 더욱 징험하였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신이 늦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애체(靉 靆)라는 글자에 대한 전생의 인연을 누가 고해 주겠는가. 소요(逍遙)에서 강의한 진결(眞訣)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매양 손을 다칠까 걱정만 하였을 뿐 주먹을 펴는 숙연(宿緣)이 있음을 깨닫지는 못하였다. 때를 탄식하노니 이슬이 가고 서리가 내려 수심 어린 귀밑머리가 어느새 쓸쓸해지고, 도를 얘기하려니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워 겨우 몽당붓을 잡고서 머뭇거릴 따름이다. 장차 한만(汗漫)의 유람을 함께 즐길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공동(崆峒)의 아름다운 행적을 서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인(門人) 영상(英爽)이 와서 수신(受辛)을 재촉했지만 금구(金口)의 고사를 떠올리며 철석같은 마음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러나 뼈를 깎는 것을 참는 것보다도 더 인내하였지만, 요구하는 것은 몸에 새기는 것보다도 더 심하였다. 그리하여 등불 아래 그림자와 더불어 8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반복하여 되뇌이면서 언어를 다듬었다. 여섯 가지 기이함〔六異〕과 여섯 가지 정대함〔六是〕으로 글을 지은 것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어 남은 용기를 팔 정도로 자신이 있다. 그 이유는 실로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동을 취하면 육도(六度)를 포괄하고 가만히 있으면 육통(六通)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짓는 일이 꽃의 꿀을 채취하는 것과 같아서 그 글의 초고를 없애 버리고 쉽사리 마무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에는 잡목이 송백(松柏) 속에 함께 뒤섞인 것처럼 되었는가 하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는 것처럼 되어 부끄럽기만 하다. 자취가 난전(蘭殿)에서 노닌 것을 뒤따랐으니, 누가 월지(月池)에서의 대면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백량(柏梁)의 작품을 본받아 게(偈)를 지으면서 해 뜨는 고장의 고상한 이야기로 널리 전해지기를 나름대로 기대해 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 麟聖依仁乃據德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 鹿仙知白能守黑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 二敎徒稱天下式
석가(釋迦)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 螺髻眞人難确力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 十萬里外鏡西域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 一千年後燭東國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 鷄林地在鼇山側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 仙儒自古多奇特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 可憐羲仲不曠職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 更迎佛日辨空色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 敎門從此分階墄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 / 言路因之理溝洫
몸은 토굴에 의지해도 마음은 쉬기 어려운 법 / 身依兎窟心難息
발이 양기를 밟으니 눈이 또 현혹될 수밖에 / 足躡羊岐眼還惑
불법의 바다로 순항할지 그 누가 헤아리랴 / 法海安流眞叵測
마음과 눈으로 통해야만 진극을 안으리라 / 心傳眼訣苞眞極
증득 속의 증득은 상망의 얻음과 비슷하고 / 得之得類象罔得
침묵 속의 침묵은 한선의 침묵과 다르다오 / 默之默異寒蟬默
북산의 도의(道義)와 남악의 홍척(洪陟)이여 / 北山義與南岳陟
홍곡의 날개 드리우고 대붕의 날개 펼쳤도다 / 垂鵠翅與展鵬翼
해외에서 제때에 돌아와서 도를 한껏 떨쳤나니 / 海外時來道難抑
멀리 뻗는 선의 물줄기 막힘이 없었어라 / 遠派禪河無擁塞
삼대 밭 속의 쑥은 절로 곧게 자라는 법 / 蓬托麻中能自直
구슬이 옷 속에 있는데 옆 사람에게 빌리리오 / 珠探衣內休傍貣
담연하여라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 湛若賢溪善知識
육이(六異)와 육시(六是)의 인연이 허식이 아니도다 / 十二因緣非虛飾
무엇하러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을 것이며 / 何用攀絚兼拊杙
무엇하러 붓끝을 빨며 먹물을 먹일 것인가 / 何用砥筆及含墨
남들은 혹 멀리 유학하여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 彼或遠學來匍匐
나는 가만히 앉아 마적을 항복받을 수 있었다오 / 我能靜坐降魔賊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 것이요 / 莫把意樹誤栽植
정욕의 밭을 잘못 가꿔 거두지 말 것이다 / 莫把情田枉稼穡
항하(恒河)의 모래에 만억을 논하지 말 것이요 / 莫把恒沙論萬億
외로운 구름에 남북을 정하지 말 것이다 / 莫把孤雲定南北
덕의 향기는 사방 멀리 치자꽃처럼 번져 가고 / 德馨四遠聞薝蔔
지혜의 교화는 일방의 사직을 안정시켰도다 / 慧化一方安社稷
천화를 직접 받들면서 누더기 옷자락 휘날렸고 / 面奉天花飄縷栻
수월에 마음을 비유하며 선풍(禪風)을 드날렸어라 / 心憑水月呈禪栻
부잣집 이을 후계자 누가 가시밭길에 들어서랴 / 家嗣佳錦誰入棘
유자(儒者)의 눈먼 지팡이로 더듬는 것이 부끄럽네 / 腐儒玄杖慙擿埴
자취가 보당에 빛나니 그 이름 새길 만한데 / 跡耀寶幢名可勒
재주는 금송에 뒤져서 글을 짜내기 어렵도다 / 才輸錦頌文難織
선열에 굶주려서 실컷 맛보고 싶은 이는 / 囂腹欲飫禪悅食
이 산중에 와서 전각을 한번 볼지어다 / 來向山中看篆刻

[주C-001]지증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曦暘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오상(五常)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말한다.
[주D-002]동방(動方) : 만물이 생동하는 방위라는 뜻으로, 동방(東方)과 같은 말이다.
[주D-003]삼교(三敎) :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를 말한다.
[주D-004]욱이(郁夷) : 우이(嵎夷)와 같은 말로, 해 뜨는 동방을 가리킨다.
[주D-005]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이다. 석가(釋迦)가 태어난 곳으로, 불교를 뜻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돌을 …… 일이다 : 서로 의기투합해서 매우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터득하고 나서 군웅(群雄)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뿌리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以水投石 莫之受〕,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를 하자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모두 받아들여졌다〔以石投水 莫之逆〕는 이야기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나온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六本)〉에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해 주면 모래 더미 위에 물을 뿌려 주는 것처럼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런 사람이 아닐 때에는 귀머거리를 모아 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得其人 如聚沙而雨之 非其人 如會聾而鼓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희희(煕煕)한 태평의 봄날이요 : 《노자》 20장에 “사람들 마냥 즐거워하며,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煕煕 如享太牢 如春登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모든 …… 가운데 : 대본에는 이 부분이 ‘性參釋種’으로 되어 있으나, 탑본(榻本)에 따라 ‘性’을 ‘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존귀한 …… 하였으며 : 예컨대 진흥왕(眞興王)의 경우가 그러한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效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라고 하였다.
[주D-010]다라(多羅) : 범어(梵語) pattra의 음역인 패다라(貝多羅)의 준말로, 불경을 서사(書寫)한 나무 잎사귀를 말한다. 패엽(貝葉)이라고도 한다.
[주D-011]바다가 …… 것이니 : 대본에는 ‘海印東流’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따라 ‘印’을 ‘引’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서토(西土) 즉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다시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말이다.
[주D-012]노(魯)나라에서 …… 기록하고 : 부처의 탄생을 비유한 표현이다.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1에 “노나라 《춘추》에 의하면, 장공 7년 여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한밤중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보면 그때가 바로 여래가 왕궁에서 탄생한 때와 일치한다.〔魯春秋 莊公七年夏四月辛卯夜 恒星不見 夜中星隕如雨 案此即是如來誕生王宮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한(漢)나라에서 …… 때 : 후한 명제(後漢明帝)가 부처의 꿈을 꾸고 나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때라는 말이다. 명제가 밤에 신장이 6장(丈)이나 되는 금인(金人)이 목덜미에 일륜을 두르고 공중을 날아오는〔項佩日輪飛空而至〕 꿈을 꾼 뒤에, 서방에 불(佛)이라는 신(神)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천축(天竺)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를 수입하고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4에 나온다.
[주D-014]낙양(洛陽) 시내를 범람하고 : 대본에는 ‘濫觴洛宅’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觴’을 삭제하였다. 주 소왕(周昭王) 때 궁전과 대지가 진동하고 강하(江河)와 연못과 우물의 물이 범람하자 왕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으니, 그가 “대성인이 서방에서 태어났는데,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중국에 들어올 것이다.〔有大聖人生於西方 一千年外聲敎及此〕”라고 답변했다는 기록이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4에 나온다.
[주D-015]진(秦)나라 궁전을 비추었던 : 대본에는 ‘懸鏡秦宮’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懸’을 삭제하였다. 전거는 미상(未詳)이다.
[주D-016]삼척(三尺)의 입 : 언변이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의 “삼척의 입을 가지고 싶다.〔願有喙三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7]오색(五色)의 붓 : 문재(文才)가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의 문학가 강엄(江淹)이 만년에 곽박(郭璞)에게 오색필(五色筆)을 돌려주는 꿈을 꾸고 나서는 문재가 감퇴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주D-018]이국관국(以國觀國) :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살핀다는 뜻으로, 한 나라의 종교 등 총체적인 문화 현상을 가지고 그 나라의 전반적인 수준을 가늠한다는 말인데, 《노자(老子)》 54장에 나온다.
[주D-019]감천궁(甘泉宮)에서 …… 같았다 : 한 무제(漢武帝) 때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 즉 불상을 노획해 오자, 이를 감천궁에 안치하고 분향하며 섬겼던 일을 말한다. 《魏書 卷114 釋老志》
[주D-020]양(梁)나라 …… 해요 : 528년에 해당한다. 보살제(菩薩帝)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던 남조 양(梁)의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양서(梁書)》 권3 〈무제본기 하(武帝本紀下)〉에 “대통 1년(527) 3월 신미일에 대가(大駕)가 동태사에 거둥하여 사신하는 의식을 행하고 갑술일에 환궁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大通元年 三月辛未 輿駕幸同泰寺捨身 甲戌還宮 赦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1]중귀(中貴)가 …… 하면 :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와 진흥왕(眞興王)의 삭발 출가를 가리킨다. 중귀는 궁중의 귀인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근신이라는 말이다. 상선(上仙)은 천상의 신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임금을 가리킨다.
[주D-022]표저(漂杵) : 격렬하게 싸우는 전쟁을 뜻하는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목야(牧野)에서 전투할 적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주D-023]건고(鞬櫜) : 활을 활집에 넣고 화살을 화살통에 넣는다는 뜻으로, 병기(兵器)를 쓰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주D-024]비바사(毘婆娑)가 …… 비추었다 : 소승불교가 먼저 전해지고, 그다음에 대승불교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비바사는 주해서(註解書)의 이름인 범어(梵語) vibhāṣa의 음역으로, 광해(廣解) 혹은 광설(廣說) 등으로 의역되는데, 부파불교(部派佛敎) 중 소승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의 논서(論書)를 집대성했다고 일컬어지는 《구사론(俱舍論)》의 별칭으로 흔히 쓰인다. 사군(四君)은 한사군(漢四郡)의 준말로, 동방이라는 말과 같다. 마하연(摩訶衍)은 범어 mahāyāna의 음역인 마하연나(摩訶衍那)의 준말로, 대승의 교법(敎法)을 가리킨다. 일승(一乘)은 삼승(三乘)과 같은 방편법(方便法)이 아니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그대로 밝힌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最高) 구경(究竟)의 불법이라는 말인데, 불승(佛乘), 혹은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주D-025]무외(無外) : 《장자》 〈천하(天下)〉에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대일이라고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6]장경(長慶) :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까지이다.
[주D-027]대역(大易)에서 …… 아니겠는가 : 《주역》 〈건괘(乾卦)〉의 잠룡(潛龍)에 대해 공자(孔子)가 〈건괘 문언(文言)〉에서 설명하면서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 즐거우면 행하고 걱정되면 떠난다. 그의 뜻이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또 《중용장구》 제11장에 “군자는 중용의 도를 따를 뿐, 세상에서 숨어 살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8]겨울 …… 빼어나듯 : 도잠(陶潛)의 〈사시(四時)〉에 나오는 “동령수고송(東嶺秀孤松)”이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29]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듯 :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든다. 양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의 행동에도 누린내 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백성들이 좋아하여 모여드는 것이다.〔蟻慕羊肉 羊肉羶也 舜有羶行 百姓悅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0]매가 변화하듯 : 《예기》 〈월령(月令)〉에, 중춘(仲春)의 달에는 “매가 변화하여 비둘기가 된다.〔鷹化爲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1]순풍(順風)의 요청 :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순풍은 순하풍(順下風)을 줄인 말이다. 《장자》 〈재유(在宥)〉에, 광성자(廣成子)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누워 있을 때, 황제(黃帝)가 “발치로부터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順下風 膝行而進 再拜稽首而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2]개무(開霧)의 기약 : 안개가 걷히면 내려오는 기약이라는 뜻으로, 산중에서 세상에 내려와 교화를 펴는 것을 말한다.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안개가 짙게 끼어 있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도 자신의 아름다운 털 무늬를 보전하기 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를 변용한 것이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주D-033]명검(名劍)이 …… 하고 : 검이 용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중국에서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종적을 감춘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라는 암수의 두 보검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죽고 나서 두 보검이 절로 연평진(延平津)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두 마리 용으로 바뀐 채 유유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拾遺記 卷10》
[주D-034]진주(珍珠)가 …… 하였는데 : 신라로 귀환한 것을 말한다. 합포(合浦)의 바닷속에서 진주가 많이 나오더니, 어느 태수(太守)가 탐욕을 부리자 점차 교지군(交阯郡)으로 진주가 옮겨 갔는데, 후한(後漢)의 맹상(孟嘗)이 합포에 부임하여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펼치자, 진주가 다시 예전처럼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嘗》
[주D-035]이름에서 …… 쫓아온다 : 후한(後漢)의 법진(法眞)이 네 차례에 걸친 황제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리자, 친구인 곽정(郭正)이 “법진의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만나 보기 어렵다.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오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이를 만하다.〔法眞名可得聞 身難得而見 逃名而名我隨 避名而名我追 可謂百世之師矣〕”라고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法眞列傳》
[주D-036]문을 …… 보고 : 지증 대사(智證大師)가 중국에 건너가지 않고도 신라에서 혼자 도를 깨쳤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47장의 “문을 나서지 않고서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천도를 볼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37]칠현(七賢) : 소승(小乘)인 구사종(俱舍宗)에서 칠성(七聖)에 상대하여 칭하는 수행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오정심위(五停心位)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ㆍ난법위(煖法位)ㆍ정법위(頂法位)ㆍ인법위(忍法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등으로 되어 있다.
[주D-038]십주(十住) : 《화엄경(華嚴經)》에서 보살(菩薩)의 수행 단계를 모두 52계위(階位)로 나누는데, 그중 11계위에서 20계위까지를 십주(十住)라고 한다. 그 52계위의 수행의 경지를 따질 때, 이미 큰 지혜를 발해서 범부의 성품을 떠난 십지보살(十地菩薩)을 십성(十聖)이라 하고, 어느 정도 비슷하게 알기는 하나 아직 범부의 성품을 떠나지 못한 채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행인을 삼현(三賢)이라고 한다. 십주의 내용은 《구역 화엄경(舊譯華嚴經)》 권8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에 소개되어 있다.
[주D-039]4조(祖) : 중국 선종의 4조인 도신(道信)을 말한다. 3조 승찬(僧璨)의 법맥을 이어 5조 홍인(弘忍)에게 전하였다. 파두산(破頭山)에 30여 년 머물렀는데, 나중에 쌍봉산(雙峰山)이라고 개칭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쌍봉 도신(雙峰道信)이라고 불렀다. 동산(東山) 황매사(黃梅寺)에 탑을 세웠는데, 제자인 홍인이 그곳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므로, 도신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초조(初祖)로 일컫는다. 당 대종(唐代宗)이 대의 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탑명(塔銘)은 자운(慈雲)이다. 《續高僧傳 卷26》 《佛祖統紀 卷29》
[주D-040]중서(中書) …… 비명(碑銘) : 도신(道信)에 대한 비명을 말한다. 수(隋)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歷代法寶記)》 〈도신(道信)〉 맨 마지막에 “중서령 두정륜이 비문을 지었다.〔中書令杜正倫撰碑文〕”라는 말이 나온다. 두정륜(杜正倫)은 당 고종(唐高宗) 현경(顯慶) 2년(657)에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주D-041]필만(畢萬)의 …… 증험되었다 : 지증 대사(智證大師) 때에 와서 4조(祖) 도신(道信)의 선풍(禪風)이 신라에서 크게 진작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필만이 진 헌공(晉獻公)을 섬기면서 큰 공을 세워 위(魏)에 봉해지자, 진나라 장복대부(掌卜大夫) 곽언(郭偃)이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畢萬之後必大〕”라고 예언한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閔公1年》 필만의 후손인 위씨(魏氏)는 나중에 한씨(韓氏), 조씨(趙氏)와 함께 진나라를 3분하여 제후(諸侯)가 되고 급기야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국세를 크게 떨쳤다.
[주D-042]위엄이 …… 사람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고, 공손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승견불(勝見佛) : 과거 칠불(過去七佛) 중의 제1불(第一佛)로, 승관불(勝觀佛)이라고도 한다. 범어(梵語) Vipaśyin을 음역한 비바시불(毘婆尸佛)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주D-044]관불일(灌佛日) : 석가(釋迦)가 탄생한 4월 8일을 말한다. 석가가 탄생할 때 제석천(帝釋天)과 용왕(龍王)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여, 불탄일(佛誕日)이 되면 불상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관불회(灌佛會)라고 하며 욕불(浴佛)이라고도 한다.
[주D-045]망정(蟒亭)의 일 : 후한(後漢) 안세고(安世高)가 전생(前生)에 함께 수도하다가 성을 잘 내어 공정(䢼亭) 묘(廟)의 거대한 이무기〔大蟒〕 신(神)이 된 자를 위해 제도(濟度)하며 동사(東寺)를 지어 사람으로 환생시켰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神僧傳 卷1 安世高傳》 지증 대사가 전생에 용이었다는 이야기와 결부시킨 것이다.
[주D-046]상실(象室)의 꿈 :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꿈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이 상아가 여섯 개인 흰 코끼리〔六牙白象〕를 타고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석가를 잉태했다는 꿈 이야기를 말한다. 《佛本行經 卷1 降胎品》
[주D-047]가죽을 …… 자 : 화를 잘 내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완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활줄을 차고 다녔고, 전국 시대 서문표(西門豹)는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녔다〔佩韋〕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觀行》
[주D-048]의려(倚閭) :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모친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見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齊策6》
[주D-049]완효서(阮孝緖) : 남조 양 무제(梁武帝) 때의 효자이다. 종산(鍾山)에서 공부하던 중에 괜히 가슴이 뛰어서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병들어 있었는데, 모친의 병에 산삼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사슴의 인도로 산삼을 발견하여 모친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주D-050]지독(舐犢)하는 자 : 송아지를 핥아 주는 자라는 뜻으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버이를 뜻하는 말이다. 양표(楊彪)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曹操)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뒤에 조조가 양표에게 왜 그토록 야위었느냐고 묻자, 양표가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애정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서 그렇다.〔猶懷老牛舐犢之愛〕”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楊彪》
[주D-051]음사(飮蛇)한 자 : 뱀 그림자가 비친 술을 마신 자라는 뜻으로, 공연히 오해하여 의심하는 사람을 말한다. 진(晉)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적에 그 친구가 술잔 속에 비친 활 그림자를 뱀으로 오인하고는 마음속으로 의심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병이 절로 나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3 樂廣列傳》
[주D-052]의식적으로 …… 것 :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無心)한 상망(象罔)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주D-053]발이 …… 것 : 한(漢)나라 공융(孔融)의 〈논성효장서(論誠孝章書)〉에 “주옥은 발이 없어도 저절로 오니, 이는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자는 발이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珠玉無脛而自至 以人好之也 況賢者之有足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4]변길보살(遍吉菩薩) : 불교 4대 보살의 하나로, 자비의 화신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칭이다.
[주D-055]먼저 …… 법인데 : 이윤(伊尹)이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부름을 받고 나아갈 적에 자신의 포부를 토로하면서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낼 적에 먼저 안 사람이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자가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끔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들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이 도를 가지고 이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니, 내가 깨우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하겠는가.〔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주D-056]정교(鼎敎) : 유(儒)ㆍ불(佛)ㆍ도(道) 삼교(三敎)를 가리킨다.
[주D-057]이윤(伊尹) :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재상(宰相)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백성이 아니랴.’ 하면서 치세에도 나아갔고 난세에도 나아갔다.〔伊尹曰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8]송섬(宋纖) : 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주천 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岌)이 예의를 갖추어 방문했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자, 마급이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볼 수 없고, 덕은 우러를 수 있어도 모습은 볼 수 없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야 선생이 사람 중의 용이라는 것을 알겠다.〔名可聞而身不可見 德可仰而形不可睹 吾而今而後知先生人中之龍也〕”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宋纖》
[주D-059]도중(塗中) : 진흙탕 속이라는 뜻으로, 지금 거처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초왕(楚王)이 장자(莊子)를 재상으로 초빙하자, 장자가 “나는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가련다.〔吾將曳尾於塗中〕”라면서 거절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秋水》
[주D-060]문상(汶上) : 문수(汶水) 물가라는 뜻으로, 장차 망명할 장소를 가리킨다. 계씨(季氏)가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閔子騫)을 비(費) 땅의 수령으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이 “다시 한번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필시 노(魯)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의 문수 물가에 있게 될 것이다.〔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雍也》
[주D-061]읍사(邑司) : 당나라 때 공주(公主)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정부 기구이다. 《舊唐書 卷42 職官志 1》
[주D-062]바보의 골짜기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부로(父老)가 소를 길렀는데 소가 송아지를 낳자 그 송아지를 팔아서 망아지를 사 왔다. 그러자 젊은 사람이 소는 망아지를 낳지 못한다면서 마침내 그 망아지를 데리고 갔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그를 우공(愚公)이라고 부르고 그가 살던 골짜기를 우공의 골짜기 즉 우곡(愚谷)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 〈정리(政理)〉에 나온다.
[주D-063]누가 밥주머니라고 기롱하였던가 : 후한(後漢)의 예형(禰衡)이 “순욱 정도는 그래도 억지로 데리고 얘기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인형과 같아서 사람과 모습은 비슷해도 사람의 정기가 없으니, 모두 술독이나 밥주머니일 뿐이다.〔荀彧猶强可與語 過此以往 皆木梗泥偶 似人而無人氣 皆酒甕飯囊耳〕”라고 조롱한 고사가 있다. 《抱朴子 彈禰》
[주D-064]죽 …… 것이다 : 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이 솥에 미음을 끓이고 죽을 끓여 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墻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주D-065]민천(民天) :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 즉 식량이 되는 곡식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9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66]구고(九皐)의 …… 퍼지자 : 지증 대사가 희사하려는 일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는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니, 그 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들리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7]속명(續命)한 자 : 목숨을 이은 자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은 백성을 가리킨다. 남조 제(齊)의 유선명(劉善明)이 청주(靑州)에 기근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어 향리의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자 백성들의 그의 집의 밭을 속명전(續命田)이라고 불렀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南齊書 卷28 劉善明列傳》
[주D-068]상가(賞歌)한 자 : 가인(歌人)에게 지나치게 후한 상을 내린 자라는 뜻으로, 재물을 함부로 헛되게 쓰는 사람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열후(烈侯)가 음악을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아끼는 가인 두 사람에게 각각 1만 묘(畝)의 전지(田地)를 내리려 하다가 상국(相國) 공중련(公仲連)에게 저지당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주D-069]간혜지(乾慧地) : 보살(菩薩)의 53수행(修行) 계위(階位) 중 십지(十地)의 제1지에 속하는 지위로서, 초발심(初發心)한 보살을 가리키는데, 지혜는 있어도 선정(禪定)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견정지(見淨地)라고도 한다.
[주D-070]정혜(定慧) : 불가(佛家)에서는 탐진치(貪嗔癡)의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계는 계율, 정은 선정,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를 뜻한다.
[주D-071]뽕나무 …… 되었으니 : 대사의 감화를 받고 귀의했다는 말이다. 《시경》 〈반수(泮水)〉에 “저 부엉이 퍼덕거리며 날아와서, 반궁(泮宮) 숲 속에 모여 앉도다. 우리 뽕나무 오디를 먹고, 나에게 좋은 소리를 안겨 주도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懷我好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2]팔을 끊은 자 : 마음속 깊이 스승에게 귀의한 제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심충(沈忠)을 가리킨다. 중국 선종(禪宗)의 2조(祖)가 된 혜가(慧可)가 처음에 소림사(少林寺)로 달마(達磨)를 찾아가서 밤새도록 눈이 쌓인 뜰에 공손히 서서 도를 구했으나 달마는 면벽만을 한 채 한마디 말도 건네지를 않았는데, 이에 혜가가 계도(戒刀)로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 그 팔을 바치자 달마가 비로소 입실을 허락했다는 설중단비(雪中斷臂)의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주D-073]용미도(龍尾道)를 …… 자 : 반역을 도모한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산중의 도적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때 반란을 일으켰던 안녹산(安祿山)이 함원전(含元殿) 앞의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치려다가 그만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74]영육(靈育) : 북위(北魏)의 승려 현고(玄高)의 본명이다.
[주D-075]법심(法深) : 동진(東晉)의 승려 축잠(竺潛)의 자이다.
[주D-076]계족산(雞足山) : 부처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의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대사가 주석(住錫)하고 있는 희양산(曦陽山)을 가리킨다.
[주D-077]가슴속에 옥을 품고서 : 《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8]우대우(牛戴牛) : 소가 소 한 마리의 값이 나가는 귀한 쇠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말로, 대사에 대한 세상의 높은 평가를 비유한 말이다. 《주례》 〈고공기(考工記) 궁인(弓人)〉에 “쇠뿔의 길이가 2자 5치이고, 세 가지 색깔이 제대로 갖추어졌으면, 이를 우대우라고 한다.〔角長二尺有五寸 三色不失理 謂之牛戴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9]새를 …… 것입니다 : 산승(山僧)은 산으로 돌아가서 살게 하는 것이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말이다. 원거(爰居)라는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대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넓은 고원에서 노닐게 해야 한다.〔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라고 비평한 내용이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주D-080]등후(鄧侯) : 진나라 등유(鄧攸)를 가리킨다. 오군 태수(吳郡太守)로 선정을 베풀다가 떠날 즈음에 백성들이 그의 배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자 한밤중에 조각배를 타고 몰래 떠났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둥둥 울리는 5경(更)의 북소리여, 닭 울음소리에 하늘이 밝아 오네. 등후는 끌어당겨도 머무르지 않고, 사령은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네.〔紞如打五鼓 鷄鳴天欲曙 鄧侯拖不留 謝令推不去〕”라고 했다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주D-081]지학(支鶴) : 지둔(支遁)의 학이라는 뜻으로,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승전(高僧傳)》 권4 〈지둔전(支遁傳)〉에 “학을 선물한 자가 있었다. 지둔이 학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귀와 눈을 위한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날려 보내었다.〔有餉鶴者 遁謂鶴曰 爾冲天之物 寧爲耳目之翫乎 遂放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2]조구(趙鷗) : 조나라의 갈매기라는 뜻으로, 고승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임금을 비유하는 말이다. 천축(天竺)의 명승(名僧)인 불도징(佛圖澄)이 후조(後趙)의 황제인 석호(石虎)와 어울려 노닌다는 말을 듣고는, 지도림(支道林)이 “징공이 석호를 바닷가에서 어부와 함께 노니는 갈매기로 삼았구나.〔澄以石虎爲海鷗鳥〕”라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주D-083]토끼를 …… 하고 :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주D-084]물고기를 …… 하였으니 :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연못을 내려다보며 물고기만 탐내기보다는, 뒤로 물러나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나을 것이다.〔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라는 속담이 인용되어 있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D-085]정대춘(井大春)이 …… 수레 : 대춘은 후한(後漢) 초의 은사(隱士)인 정단(井丹)의 자이다. 신양후(信陽侯) 음취(陰就)가 연(輦)을 타고 가려 할 적에, 정단이 웃으면서 “내가 듣건대 옛날 걸왕이 사람에게 수레를 끌게 했다던데, 어쩌면 이런 경우도 해당되지 않겠는가.〔吾聞桀駕人車 豈此耶〕”라고 하니, 좌중의 얼굴색이 모두 변하였는데, 결국 음취도 그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어서 연을 타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음취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황후인 음여화(陰麗華)의 동생이요, 명제(明帝)의 외삼촌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井丹》
[주D-086]호계(虎溪)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이 거처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시냇물 이름이다.
[주D-087]곡수(鵠樹) : 석가(釋迦)가 입멸할 때 흰색으로 변했다는 사라쌍수(沙羅雙樹)를 가리키는데,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주D-088]학(鶴)이 돌아온 것 :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1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搜神後記 卷1》
[주D-089]외손(外孫)의 글 :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라는 글자가 된다.
[주D-090]신이 …… 다행이었는데 : 고운이 우수한 인재는 못 되지만 그래도 당나라에 가서 인정을 받고 돌아오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의 겸사이다. 동전(東箭)은 동남죽전(東南竹箭)의 준말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아》 〈석지(釋地)〉의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회계의 죽전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춘추 시대 초(楚)나라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진(晉)나라에 잡혀가서도 고국을 잊지 못한 나머지 초나라 모자인 남관(南冠)을 쓰고서 초나라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끝내는 그곳에서 군자라는 호평을 받고 석방되어 돌아왔던 고사가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 나온다.
[주D-091]바야흐로 …… 말았다 : 그동안 쌓아 온 실력을 조정에서 마음껏 발휘해 보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알아주던 헌강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운부(運斧)는 도끼를 휘두른다는 뜻으로, 탁월한 재질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楚)나라 장석(匠石)이 상대방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얇게 발라 놓고는 도끼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 그 흙만 떼어 내고 상대방은 다치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莊子 徐无鬼》 호궁(號弓)은 활을 안고 호곡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가리킨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92]돌이 …… 알았고 : 비석이 말할 수 있었다면 불평을 토로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돌은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으면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石不能言 或馮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3]애체(靉 靆)라는 …… 주겠는가 : 《법화경(法華經)》을 암송하는 사미(沙彌)가 애체라는 두 글자를 항상 잊어버리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전생에 암송하던 《법화경》의 책자 중에 애체라는 두 글자가 좀이 슬어서 안 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권6 〈송지(誦持)〉의 실명(失名)한 석모(釋某)의 전에 나온다.
[주D-094]소요(逍遙)에서 …… 없었다 : 지증 대사가 헌강왕 앞에서 설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소요는 장안(長安)의 소요원(逍遙園)을 가리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5 〈석승민전(釋僧旻傳)〉에 “축도생이 장안에 들어오자 후진(後秦)의 임금인 요흥이 소요원에서 접견하고는 도융의 의리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게 하였는데, 왕복하며 반복해서 말한 것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중 모두가 그의 풍신을 보고는 그의 영걸스러움에 심복하였다.〔竺道生入長安 姚興於逍遙園見之 使難道融義 往復百翻言無不切 衆皆覩其風神 服其英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5]매양 …… 못하였다 : 고운이 지증 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솜씨가 서툴러서 멋진 글을 짓지 못할까 망설이기만 했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74장에 “뛰어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다면, 손을 다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라는 말이 나온다. 또 어떤 장자(長者)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주먹을 펴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천축(天竺)의 24조(祖)인 사자 존자(師子尊者)를 찾아와서 하소연하자, 존자가 찬찬히 살펴보다가 “내 구슬을 돌려다오.”라고 말하니, 그 아들이 주먹을 펴고 구슬을 돌려주었는데, 이는 존자가 전생에 승려의 신분으로 서해(西海) 용왕재(龍王齋)에 참석했을 때 동자에게 맡겨 둔 구슬이었다는 이야기가 《연등회요(聯燈會要)》 권2 〈이십사조사자존자(二十四祖師子尊者)〉에 나온다.
[주D-096]한만(汗漫)의 유람 : 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진(秦)나라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선인(仙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해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淮南子 道應訓》
[주D-097]공동(崆峒) : 황제(黃帝)가 스승으로 섬겼다는 공동산(崆峒山)의 광성자(廣成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증 대사를 의미한다.
[주D-098]수신(受辛) : 사(辭)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099]금구(金口) : 금인(金人)의 입이라는 말로, 신중하게 발언하는 것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태묘(太廟)에 갔을 적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三緘其口〕 금인을 보았는데, 그 등 뒤에 새긴 명문(銘文)을 보니 “옛날에 말조심을 하던 사람이다. 경계하여 많은 말을 하지 말지어다. 말이 많으면 실패가 또한 많으니라.〔古之愼言人也 戒之哉 無多言 多言多敗〕”라고 써 있더라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觀周》
[주D-100]남은 …… 있다 :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101]육마(六魔) : 육경(六境)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가리킨다.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육근(六根)을 오염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데, 육적(六賊) 혹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주D-102]육폐(六蔽) : 청정심(淸淨心)을 은폐하며 육도(六度)를 방해하는 6종의 악심(惡心)으로, 간탐심(慳貪心), 파계심(破戒心), 진에심(瞋恚心), 해태심(懈怠心), 산란심(散亂心), 우치심(愚癡心)을 가리킨다.
[주D-103]육도(六度) : 생사의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로 되어 있다.
[주D-104]육통(六通) : 부처와 보살이 정혜(定慧)의 힘에 의해 시현하는 6종의 무애자재(無礙自在)한 묘용(妙用)으로, 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하는데,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으로 되어 있다.
[주D-105]겨와 …… 하다 : 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颺之 糠秕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淘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排調》
[주D-106]자취가 …… 않겠는가 : 역대의 제왕이 고승들과 궁전에서 만나 불법(佛法)에 대해서 문답을 나눈 것처럼 헌강왕이 지증 대사를 월지궁(月池宮)으로 인도하여 마음에 대해서 질의하고 답변을 들은 것 또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난전(蘭殿)은 제왕의 화려한 궁전을 뜻하는 말이다.
[주D-107]백량(柏梁)의 …… 지으면서 : 이른바 백량체(柏梁體)로 명(銘)을 지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세우고 그 위에서 신하들과 연음(宴飮)을 하며 구(句)마다 압운(押韻)을 하는 칠언시(七言詩)를 읊었다. 그래서 각 구에 압운을 한 칠언시를 후대에 백량체라고 부르게 되었다. 《三輔黃圖 卷5 臺榭》
[주D-108]공자(孔子)는 …… 의거하였으며 : 《논어》 〈술이(述而)〉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어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109]노자(老子)는 …… 지켰다네 : 《노자》 28장에 “수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0]오산(鼇山) : 자라가 등 위에 받치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해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주D-111]희중(羲仲) : 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서 봄 농사를 관장한 요(堯)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라의 임금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2]토굴(兎窟) : 토끼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세 개의 굴을 뚫어 놓는다는 교토 삼굴(狡兎三窟)의 준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주D-113]양기(羊岐) : 양을 찾으러 나갔다가 만난 갈림길이라는 말이다.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說符》
[주D-114]상망(象罔) : 무심(無心)을 뜻한다.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한 상망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주D-115]한선(寒蟬) : 추운 가을날 울지 못하는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주D-116]삼대 …… 법 : 《순자》 〈권학(勸學)〉에 “꾸불꾸불 자라는 쑥도 삼대 밭 속에서 크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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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대숭복사 비명 병서〔大嵩福寺碑銘 竝序

내가 듣건대, 왕자(王者)는 부조(父祖)가 쌓은 덕업을 기반으로 해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크게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고 예교(禮敎)는 효(孝)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즉 인에 입각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확대 적용하고, 효에 입각하여 어버이를 높이는 전범을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홍범(洪範)을 통해서 무편(無偏)의 자세를 본받고, 주(周)나라의 시편(詩篇)을 통해서 불궤(不匱)의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 조상의 덕을 닦으면서〔聿修〕 비패(秕稗)의 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제사를 올리면서〔克祀〕 빈번(蘋蘩)의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악한 은혜가 만백성에게 골고루 적셔지고, 덕의 향기〔德馨〕가 드높이 하늘에까지 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해 주고 죄인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부처가 대미(大迷)의 지경에서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것 아님이 없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조상을 하늘과 짝 지우며 상제(上帝)에 배향하는 것은 불교가 상락(常樂)의 세계에서 존령(尊靈)을 받드는 것 아님이 없다. 이를 통해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 부처의 입)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태평(太平) 승지(勝地)로 말하면, 성품은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발육하고 생장시키는 데에 적합하다. 산림에 정묵(靜默)의 승도(僧徒)가 많아 인(仁)으로 벗을 모으고, 강해가 조종(朝宗)의 형세와 일치하듯 선(善)을 따름이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기풍을 드날리고 범왕(梵王)의 불도(佛道)에 젖어 드는 것이 마치 도장에 인주를 찍는 것과 같고 거푸집 안에 쇠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신(君臣)이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심지어는 국성(國城)에까지 원하는 대로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니 섬부주(贍部洲)의 해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사다(都史多)의 천상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신묘한 일 중에서도 신묘한 이 일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금성(金城)의 남쪽에 있는 일출봉(日出峯) 기슭에 숭복(嵩福)이라는 이름의 가람(伽藍)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람은 선조(先朝 경문왕(景文王))가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원릉(園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건한 것이다. 고사(古寺)가 세워진 유래를 상고하고 신찰(新刹)이 완공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원구(元舅 큰 외숙)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外祖)로서, 고귀한 공자(公子)의 신분이면서도 실로 참다운 고인(古人)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겼던 것처럼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그럴 듯하게 세우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서경(西境)을 함께 기약했던 것처럼 그 건물을 희사하여 상전(像殿)과 경대(經臺)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년에 풍악을 울리던 피리와 가야금이 오늘날에는 사찰의 쇠북과 경쇠가 되었으니,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바뀐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 사원 주변의 경관 중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곡사(鵠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앙〔鴦〕처럼 짝하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하여금 성가(聲價)를 드높이게 하고, 거위〔鵝〕처럼 날개를 펼친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빛을 더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저 바라월(波羅越)의 형태를 표방한 사원이나 굴린차(崛恡遮)의 이름을 기념한 사원이 어찌 천리를 나는 고니의 비유를 취하고 쌍림(雙林)으로 바꿔서 이름을 새로 지은 이 사원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곳의 지세가 위세 면에서 취두(鷲頭)보다 낮고 지덕(地德) 면에서 용이(龍耳)처럼 높은 만큼, 금계(金界)로 획정하기보다는 옥전(玉田)을 조성하는 것이 적당한 것이었다.
정원(貞元) 무인년(798, 원성왕14) 겨울에 이르러 왕 자신을 장사 지낼 일에 대해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인산(因山)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장지를 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원이 자리한 터를 지목하여 장차 왕릉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유씨(游氏)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구택을 모두 차마 허물 수 없다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금지(金地 사원)의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수달다(須達多)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장지로 삼는다면 땅은 복될지라도 하늘은 허물할 것이니 서로 보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정사(政事)를 담당한 자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범묘(梵廟 사원)의 경우는 어디에 있든 반드시 화합하게 되어 있는 만큼, 어디로 가든 간에 맞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는 터도 복된 도량으로 전환하여, 백억겁토록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수(靈隧 묘지)의 경우는 아래로 지맥을 살피고 위로 천심을 헤아려서, 반드시 구원(九原) 속에 사상(四象)을 포섭함으로써 천만대토록 그 여경(餘慶)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불법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상(相)이 없으나 장례는 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거하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이다. 단지 청오(靑烏)가 좋다고 간주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어찌 백마(白馬)를 슬피 울게 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이 인사(仁祠)의 내력을 살펴보건대, 본디 척리(戚里)에 속해 있었던 것인 만큼, 낮은 척리에서 높은 왕실로 나아가고 옛 절 대신 새 왕릉을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하여 왕릉이 해역(海域)의 웅장함을 차지하게 하고, 사원이 운천(雲泉)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한다면, 우리 왕실의 복산(福山)이 높이 솟을 것은 물론이요, 저 후문(侯門 척리)의 덕해(德海)도 편안히 흐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知無不爲〕 가운데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各得其所〕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나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중도에 그만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의당 거북점과 시초점〔龜筮〕 모두 사람의 뜻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용(龍)과 제천(諸天)의 신이 환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精舍 사원)를 옮기고 현궁(玄宮 왕릉)을 조성하는 두 가지 공사에 인부를 동원하고 백공(百工)에게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감우(紺宇 사원)를 개창(改創)할 때에는 인연이 있는 대중이 서로 이끌고 와서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마치 5리(里)의 안개를 피우는 술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저잣거리를 이룬 것이나 한때 설산(雪山)의 법회에 대중이 화열하며 모여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와와 재목을 거두고 경전과 불상을 봉대(奉戴)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번갈아 수수(授受)하며 경쟁적으로 정성을 바쳤으므로, 역부(役夫)가 반걸음도 옮기기 전에 석자(釋子)가 편히 거할 곳이 벌써 이루어졌다.
구원(九原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비록 왕토(王土)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공전(公田 국가 소유의 토지)이 아니었으므로, 왕릉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으로 매입하여 구롱(丘隴) 200여 결(結)을 보태었으며, 그 대가로 도합 2천 점(苫)의 도곡(稻穀)을 보상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전(畿甸)의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소나무를 분담해서 주위에 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쓸쓸히 자꾸만 들려오는 슬픈 바람 소리는 봉황처럼 춤추고 난새처럼 노래했던 옛 생각이 솟구치게 하였고, 어둠에 묻혔다가 밝은 해를 본 묘역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위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건대, 땅은 하구(瑕丘)와 달라도 경계는 양곡(暘谷)과 접하였고,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곡림(穀林)의 상서로운 기운이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수놓은 듯한 봉우리들은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회(朝會)를 하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 선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실로 교산(喬山)의 빼어남을 간직하고, 필맥(畢陌)의 기이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금지(金枝 왕족)가 계림(雞林)에서 더욱 무성해질 것이요, 옥파(玉派 종실)가 접수(鰈水)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사우(寺宇)를 옮길 적에 땅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점이 있었으나, 아직 화성(化城)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가까스로 잡목을 베어 내어 강만(岡巒)을 구분하고 띠풀을 엮어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겨우 7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숨 가쁘게 아홉 조정이나 거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누차 전복될 위기를 맞았을 뿐 어엿하게 꾸며 볼 여유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을 맞게 되어서 천세(千歲)의 보배로운 운세를 흠 없이 누리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은 홍저(虹渚)가 빛을 떨치듯 오잠(鼇岑)에 자취를 드리웠다. 처음에 옥록(玉鹿)에서 명성을 날리며 특별히 풍류(風流)를 진작시키더니, 이윽고 금초(金貂)의 지위에서 관원들을 총괄하며 나라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용전(龍田)의 지위를 차지하고 덕(德)을 심었으며, 봉소(鳳沼)에 거하면서 마음을 계옥(啓沃)하였다.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인자(仁者)로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였고, 정사를 꾀할 적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인도하였다. 팔병(八柄)의 막중한 권한을 모두 행사하여 사유(四維)가 실추된 것을 바로잡아 두서 있게 하였다. 어려운 일들을 차례로 겪었지만 행하는 일마다 이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국(杞國)의 근심이 닥쳐와 보위가 비게 되면서 산악이 흔들렸는데, 사슴의 뒤를 좇는 들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마귀 떼가 동산에 모여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이야말로 현명하고 온순한 데다 노성하고 인자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에 대저(代邸)에서 입신하고 나서 자문(慈門 불문(佛門))에 뜻을 기울이며 선조(先祖)에게 수치를 끼칠까 염려하여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숭창(嵩唱)에게 청하여 범거(梵居 사원)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부처에게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선조의 덕업을 선양하려는 성의를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 라고 한 것이나,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른다.〔上帝時歆 下民祗協〕” 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이 신불(神佛)의 보우를 받고 선의의 행동을 사람들이 잘 따르게 된 결과, 경(卿)과 사(士)와 대부(大夫)의 뜻이 수귀(守龜)의 뜻과 합치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국(東國)을 혁혁히 빛내면서 임금으로 임하고 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선왕(先王)이 훙거(薨去)한 사실을 알리고 금상(今上)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하였다.
마침내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5)에 천자가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를 정사(正使)로 삼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에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금어대(金魚袋)를 채우고 머리에 해치관(獬豸冠)을 씌워 부사(副使)로 삼은 뒤에 왕인(王人)인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조명(詔命)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빛나게 선왕의 뒤를 이어받고 나서 성유(聲猷)를 제대로 봉행함으로써 잘 계승하였다는 이름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왕위에 추대한 지극히 공정한 거조에 참으로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의 국왕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검교태위 겸 지절충영해군사(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지난날에 선대왕이 제(齊)나라를 변화시키며 빼어난 면모를 드러내고,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향기를 드날리지 않았더라면, 천자가 어떻게 이처럼 봉필(鳳筆)을 날려 해외의 제후(諸侯)를 총애하고 용정(龍旌)을 내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임시로 수행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또한 영광스럽게 천자의 은택에 젖었고 보면, 반드시 영구(靈丘 왕릉)에 나아가 친히 참배해야 하겠기에, 천승(千乘) 제후의 행차를 준비하게 하였으나, 그것이 어찌 십가(十家)의 재산만 소모할 뿐이었겠는가. 이에 마침내 태제(太弟)인 상국(相國)에게 명하여 청묘(淸廟)의 제사에 치제(致齊)하게 하고 현경(玄扃 왕릉)에 대신 참알(參謁)하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계림(雞林)의 번성함이여, 그리고 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코끼리가 밭 갈던 일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요, 시대가 평화로우니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태제의 행렬이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흰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하며 말하기를,
“고귀한 개제(介弟 태제)의 이번 행차로 성제(聖帝)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도가 이루어졌다. 예의 있는 우리의 풍속이 넉넉하게 여유가 있어서, 마침내 바다 물결이 가라앉게 하고, 변방에 전쟁의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천리(天吏)가 고르게 하고, 땅의 곡식이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니 뒤를 이어서 연우(蓮宇 사원)를 중수하고 백성(柏城 왕릉)을 돌볼 적기가 바로 지금이니, 지금 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의 효성이 크게 사무쳐서 생각과 꿈이 일치된 결과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을 꿈속에서 뵙게 되었는데, 성조대왕이 선대왕을 어루만지며 고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다.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돌보려고 하는데 조심하고 공경히 할 것이요, 서둘러서 경영하려고 하지 말지어다. 부처의 덕과 나의 힘이 너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진정 중도를 잡고 행한다면 하늘의 복록을 끝까지 길이 누리리라.”
하였다. 이윽고 청랑한 물시계 소리에 맞춰 옥침(玉枕)에서 잠이 깨어 일어나니, 십훈(十煇)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구령(九齡)의 해몽과 일치하는 듯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속히 명하여 법회를 경건히 거행하도록 하였다. 화엄(華嚴)의 대덕(大德)인 석결언(釋決言)이 당사(當寺)에서 유지(有旨)를 받들고 5일 동안 강경(講經)을 하였으니, 효성을 펴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선대왕이 하교하기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不愛其親〕에 대해서는 경(經)에서도 경계한 바이다.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無念爾祖〕’라고 한 시(詩)의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는 이때에 과인이 사원을 중수하려고 하자 꿈속에서까지 감응이 이루어지게 하니 마음이 떨리고 두렵기만 하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三年不蜚〕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단 하루라도 반드시 손질할 것〔一日必葺〕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백관(百官)의 어른과 어사(御史)는 이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혔다〔賣兒貼婦〕는 기롱은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혹시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니, 행해야 할 일은 진헌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을 그대들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애틋한 소원이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여 선조의 혼령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참으로 임금님이 뜻을 먼저 정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여론이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원이 이루어지면 구족(九族)에게도 많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특출한 인재들을 발탁하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출중한 승려들을 뽑았으며, 종실의 세 명의 유능한 신하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석문(釋門)의 두 명의 걸출한 승려인 현량(賢諒)과 신해(神解), 찬도(贊導)하는 승려인 숭창(嵩唱)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임금이 단월(檀越 시주)이 되고 국가의 저명한 인물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므로, 역량 면에서 여유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늘리려고 하는 터에, 새것을 옛것과 뒤섞이게 하는 것이 어찌 온당하겠는가마는, 단계(檀溪)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해칠 염려도 없지 않기에 옛 재목을 간추려 모아서 높이 다진 대지(垈地)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 웅장한 규모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진흙을 이기고 쇳물을 부으며 다투어 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구름 같은 사닥다리를 타고서 수(倕)의 재목을 아슬아슬하게 가설(架設)하고, 서리처럼 하얀 흙벽을 노(獿)의 백악(白堊)에 향을 버무려서 발랐다. 바위산의 기슭을 깎아 내어 담장을 돋우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문 앞이 트이게 하였다. 거친 섬돌은 쇠 장식 계단으로 바꾸었고, 낮은 곁채는 아로새긴 회랑(回廊)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겹으로 된 불전(佛殿)은 용(龍)처럼 서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사나(盧舍那)를 주불(主佛)로 봉안하였고, 층으로 된 누각은 봉(鳳)처럼 우뚝 섰는데 그 위에 수다라(修多羅 경(經))를 이름으로 하였다. 고래등 같은 동량을 높이 설치하였고, 난새를 새긴 난간을 마주 보게 하였다. 화려한 반자에는 꽃들이 모여 차례로 줄지어 있고, 수놓은 두공(枓栱)에는 가지가 옹위하듯 서로 맞물려 있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하여 눈길을 돌리면 누구나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영정(影幀)을 모신 별실(別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연방(蓮房)과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아침마다 밥을 짓는 공양간과 같은 곳이 있었다. 여기에 또 새기고 다듬는 데에 솜씨를 다하고 색칠을 하는 데에 정밀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 골짜기와 함께 맑은 기운이 우러나오고 안개 노을과 어울려 서로 찬란하게 빛났다. 옥으로 된 찰간(刹竿)에는 봉래도(蓬萊島)를 비추는 달이 걸려서 두 송이 서리 머금은 흰 연꽃이 피어나고, 쇠로 된 풍경(風磬)에는 솔 우거진 시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쳐서 어느 때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변의 승경(勝景)을 돌아보더라도 먼 변방에서 경치가 걸출한 곳이었다. 좌측의 산봉우리는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우측의 원습(原隰)은 용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다. 앞을 굽어보면 메기 형상의 산이 검푸르게 줄 지어 서 있고, 뒤를 돌아보면 봉새 같은 언덕이 갈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면 가파르면서 기이하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삽상하면서 아름다우니, 낙랑(樂浪 신라)의 선경(仙境)은 참으로 낙방(樂邦)이요, 초월(初月)의 명산은 바로 초지(初地)라고 이를 만하다.
잘 건설하여 주도면밀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근실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인방(仁方 동방)을 크게 감싸 줄 것이요, 임금의 보수(寶壽)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사방의 경내로 삼고, 500년을 헤아려서 한 해의 봄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사냥한 표범의 꼬리를 매달아 세우며 바야흐로 기뻐할 이때에, 형산(荊山)의 용에 걸터앉아 떨어뜨린 수염을 안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연소한 나이인데도 높은 덕을 지녔고 뛰어난 체격에 맑은 정신을 소유하였다.〔神淸遠體〕 침문(寢門)에서 내수(內豎)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익실(翼室)에서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는 일〔宅宗〕을 준행(遵行)하였다. 등 문공(滕文公)이 예법을 극진히 하여 거상(居喪)을 한 것처럼 끝까지 극기를 잘 하였고, 초 장왕(楚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닦은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군다나 또 천성적으로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고 지혜의 이슬에 몸을 적시면서 선조를 높이는 의리를 드날리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성의를 분발하였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화(中和) 을사년(885, 헌강왕11) 가을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이어받아 길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는 일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다. 선조(先朝)에서 세운 곡사(鵠寺)는 이름을 바꿔서 대숭복사(大嵩福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수지(受持)하는 개사(開士)와 기강을 확립하는 정리(淨吏)가 전지(田地)를 가지고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체 봉은사(奉恩寺)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도록 하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産物)을 전운(轉運)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별도로 두 명의 숙덕(宿德)을 뽑아 입적시켜 상주하게 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게 하라. 그러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저승 세계까지 보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요, 큰 인연을 지은 김원량으로서도 반드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鉢盂)에는 향적반(香積飯)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중생을 창도하는 것은 육시 예배(六時禮拜)를 하며 옥경(玉磬)이 울리듯 할 것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수지(修持)하는 것은 만겁(萬劫)토록 하늘의 별이 세상을 비추듯 할 것이다. 위대하도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바 “근심이 없는 분은 문왕일 것이다. 부친이 시작한 일을 아들이 이어받았으니.〔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禮)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은 기물(器物)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라고. 선조(先朝)에서 처음 사원을 세울 적에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당시에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을 지어 한번 일컬으면, 과인이나 그대나 모두 효성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명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떠돌다가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치긴 하였지만, 우구(虞丘)의 비통함을 길이 안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 누리고 있을 뿐이기에, 명을 받들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슬피 오열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건대, 내가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 유씨 자규(柳氏子珪)가 동국(東國)의 일을 기록한 내용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술된 정사에 관한 조목이 왕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국사(國史)를 읽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적(事迹)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중국 사신 호공 귀후(胡公歸厚)가 복명할 적에 풍요(風謠)를 많이 채록하고는 당시의 재상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나 이후로 산서(山西) 출신은 해동(海東)에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계림(雞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은데, 동국(東國)의 왕이 그 경치를 도장으로 찍어내듯이 시로 지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요행히 운어(韻語)를 엮는 법을 예전에 배운 덕분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답을 하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겼다. 이는 열조(烈祖)가 사술(四術)로 터전을 닦고 선왕(先王)이 육경(六經)으로 풍속을 교화시켰기 때문이니, 이 어찌 이궐(貽厥)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동방의 문물이 빛나게 할 수 있었고 보면, 나의 명(銘)에도 부끄러운 말〔愧辭〕이 없게 될 것이요, 나의 붓에도 남은 용기〔餘勇〕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하늘을 대롱 구멍으로 엿보고 바다를 바가지로 퍼서 재면서 평범한 말로 엮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홀연히 영원한 한탄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뒤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선왕의 숫돌에 계속 칼을 갈고 훈지(塤篪)를 불며 가락을 맞추는 시대를 만났다. 일단 큰 왕업을 이어 지키게 된 뒤에는 장차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이루려고 하면서 임금 자리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없이 그 문물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멀리 태양 같은 형님의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서산에 지는 해 그림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 같은 누이에게 높이 의지하여 동해의 빛이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 전하는 오누이 간에 왕위를 이어 왕가의 계보가 확실한 가운데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주를 품었다〔懷神珠〕고 하는 것이요, 채석을 구웠다〔鍊彩石〕고 하는 것이다.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우(寶雨)》의 금언(金言)에서 분명히 수기(授記)함을 얻고, 《대운(大雲)》의 옥게(玉偈)와 완전히 부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또 문고(文考 부친인 경문왕)가 부처의 집을 낙성하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유리(琉璃)와 같은 불세계(佛世界)를 높였으면서도 아직 완염(琬琰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짓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재주가 없는 나에게 거듭 명하여 졸렬한 붓끝을 놀리게 하였다. 내가 비록 못이 먹물로 검게 변한 고사에는 부끄럽고, 서까래와 같은 붓의 꿈을 꾼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장융(張融)이 이왕(二王)의 필법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은 일에 나름대로 견주면서, 조조(曹操)가 어쩌다가 풀 수 있었던 8자(字)의 찬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설사 세상을 불태운 재가 못을 메우고, 먼지가 휘날려 바다를 뒤덮을지라도 본지(本枝 왕실의 후예)는 번성하여 약목(若木)과 가지런히 번영을 길이 누릴 것이요, 이 풍석(豐石)은 높다랗게 옥초(沃焦)를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고서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주C-001]대숭복사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로 되어 있다.
[주D-001]무편(無偏) : 편벽됨이 없는 정사를 뜻한다.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넓게 펼쳐진다.〔無偏無黨 王道蕩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불궤(不匱)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조상의 덕을 닦으면서 :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비패(秕稗) : 쭉정이와 피라는 뜻으로, 가식적이고 미흡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0년에 “야외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궁중의 기물을 모두 갖춘다면 이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만약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벼 곡식 대신에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이 된다.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처럼 되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면 나쁜 이름이 돌아올 것이다.〔饗而旣具 是棄禮也 若其不具 用秕稗也 用秕稗君辱 棄禮名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제사를 올리면서 :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빈번(蘋蘩) :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진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 빈번과 온조(薀藻)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덕의 …… 것이다 :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더위 …… 주고 : 주 무왕(周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며 왼손으로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해 주니, 천하 사람들이 그 덕에 귀의했다는 말이 《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나온다.
[주D-009]죄인을 …… 것 : 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주D-010]마음속으로 …… 없다 : 대본에는 ‘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饗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고운집》에는 ‘豈若’이 ‘莫非’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莫非’가 합당하겠기에, ‘豈若’을 ‘莫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 :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온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주D-012]삼보(三寶) :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이다. 불보는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주D-013]옥호(玉毫) : 여래(如來) 32상(相)의 하나로, 미간에 있다는 백옥과 같은 흰 털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대광명(大光明)을 발산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춘다고 한다. 백호(白毫)라고도 한다.
[주D-014]조종(朝宗) : 제후와 백관이 제왕(帝王)을 찾아가서 조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육도(六度) :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주D-016]섬부주(贍部洲) : 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長阿含經 卷18 閻浮提洲品》
[주D-017]도사다(都史多) : 범어(梵語) Tuṣita의 음역으로, 보통 도솔천(兜率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불교의 이른바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넷째 층에 있는 하늘로,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내원에서 미래불(未來佛)로 이 땅에 하생(下生)하려고 준비하면서 천신(天神)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주D-018]금성(金城) : 신라의 도성을 말한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21년(기원전3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쌓았던 토성이다.
[주D-019]파진찬(波珍飡) : 신라 17관등(官等) 중 넷째 등급으로, 진골(眞骨)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진간(波珍干) 혹은 해간(海干)이라고도 하였다.
[주D-020]사안(謝安)이 …… 것 : 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기녀(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21]혜원(慧遠)이 …… 것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과 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를 비롯하여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를 맺은 고사가 있다. 서경(西境)은 서방 정토를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22]바라월(波羅越) : 비둘기〔鴿〕를 뜻하는 천축(天竺)의 말로, 여기서는 바라월사(波羅越寺) 즉 합사(鴿寺)를 가리킨다. 달친(達嚫)이라는 나라에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僧伽藍)이 있는데, 이는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든 5층의 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1층부터 각각 코끼리ㆍ사자ㆍ말ㆍ소ㆍ비둘기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맨 위층의 형태를 취해서 바라월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법현고승전(法顯高僧傳)》 권1에 나온다.
[주D-023]굴린차(崛恡遮) :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있었다는 굴우차(堀忧遮)라는 사원으로, 기러기 절〔雁寺〕이라는 뜻이다. 어떤 비구(比丘)가 파계하여 남해(南海)의 기러기로 태어났는데, 몸집이 3장(丈)이나 되고 사람 말을 하며 끊임없이 《화엄경(華嚴經)》을 외웠다. 남자 불교 신도 한 사람이 보물을 캐러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래섬에 올라갔다가 그 기러기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기러기를 위해 사원을 지어 주기로 하고 기러기 등에 타고서 목적을 달성한 뒤에 약속대로 안사(雁寺)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경조(京兆) 숭복사(崇福寺) 승(僧) 사문(沙門) 법장(法藏)이 편집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4 〈풍송(諷誦) 7 중천축일조삼장(中天竺日照三藏)〉에 나온다.
[주D-024]쌍림(雙林)으로 …… 지은 : 김원량(金元良)이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라는 사찰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남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 선혜대사(善慧大士)가 저택을 희사하여 절강(浙江) 의오현(義烏縣) 운횡산(雲橫山) 아래에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사원 경내에 쌍도수(雙檮樹)가 있는 것을 계기로 쌍림사(雙林寺)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이 사원은 뒤에 이름이 보림사(寶林寺)로 바뀌었다. 《續高僧傳 卷25 慧雲傳》 《景德傳燈錄 卷27 善慧大士》
[주D-025]취두(鷲頭) : 여래(如來)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취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梵語)를 음역한 것이다.
[주D-026]용이(龍耳) : 감여가(堪輿家)가 풍수지리(風水地理) 면에서 명당으로 꼽는 장지 중의 하나이다.
[주D-027]금계(金界)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 혹은 금전(金田)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28]옥전(玉田) : 왕릉(王陵)을 뜻한다. 고대 제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썼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D-029]인산(因山) : 보통 왕과 왕비 등의 장례식으로 국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의 형세를 그대로 활용해서 능을 만들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30]유씨(游氏)의 …… 놔두었으므로 : 정(鄭)나라 간공(簡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에 유씨(游氏)의 사당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그 사당을 헐지 말고 피해서 길을 내도록 지시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 나온다. 또 한 무제(漢武帝) 말기에 노 공왕(魯恭王)이 자기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헐다가 갑자기 종경(鐘磬)과 금슬(琴瑟)의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사를 중지하고는 그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 수십 종의 고문 경전(古文經傳)을 발굴했던 고사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주D-031]수달다(須達多) : 석가(釋迦)에게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서 희사한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장자(長者) 이름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도 한다. 그가 석가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를 건립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大唐西域記 卷6》 여기서는 김원량(金元良)을 가리킨다.
[주D-032]단지 …… 것이겠는가 : 풍수지리 면에서 명당이기 때문에 왕릉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지,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사원을 없애려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외국의 국왕이 사원을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초제사(招提寺)가 아직 헐리지 않았을 때, 밤에 백마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프게 우는 것〔夜有一白馬 繞塔悲鳴〕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회개하며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에 나온다. 청오(靑烏)는 《금낭(錦囊)》과 함께 대표적인 풍수지리서로 꼽히는 책 이름인데, 지관(地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033]알고서 …… 되는 : “국가의 이익이 될 일을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이다.〔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9년에 나온다.
[주D-034]각각 …… 된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옷소매 …… 않고 :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마치 장막처럼 이어져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5리(里)의 …… 것 : 후한(後漢)의 장해(張楷)가 5리의 지역에 안개가 자욱이 끼게 하는 술법을 잘 구사하였으므로,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홍농산(弘農山)으로 모여들어 저잣거리를 이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주D-037]왕토(王土) : 왕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경》 〈북산(北山)〉의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어둠에 …… 하였다 : 왕릉 주위의 형세를 묘사한 것이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한(漢)나라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밝은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또 제갈량(諸葛亮)이 오(吳)나라 도읍인 건강(建康)에 와서 산천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종산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이 거할 곳이다.〔鍾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 吳都形勢》
[주D-039]하구(瑕丘) :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가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산책하다가 죽으면 묻히고 싶다고 한 언덕 이름이다. 《禮記 檀弓上》
[주D-040]양곡(暘谷) : 해 뜨는 곳이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1]기수(祇樹) :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구입하여 정사(精舍)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주D-042]곡림(穀林) : 요(堯) 임금을 매장한 곳으로, 제왕의 능을 뜻한다.
[주D-043]교산(喬山) : 황제(黃帝)의 장지(葬地)이다.
[주D-044]필맥(畢陌) :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묻힌 곳이다.
[주D-045]접수(鰈水) : 가자미〔比目魚〕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해(東海) 즉 동방을 가리킨다. 《이아》 〈석지(釋地)〉에 “동방에 가자미가 있는데, 짝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접이라고 한다.〔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사우(寺宇)를 …… 못하였다 : 땅에서 탑이 불쑥 솟아나온 것처럼 사원을 이전하는 공사가 일단 쉽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사원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그때 부처 앞에 높이 500유순, 가로세로 250유순 되는 칠보로 장식된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서 있었다.〔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住在空中〕”라는 말이 나온다. 화성(化城)은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47]아홉 조정 :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시작해서 47대 헌안왕(憲安王)에 이르는 9대에 걸친 조정을 말한다.
[주D-048]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 : 경문왕이 사원을 중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삼리는 세 가지 이익이라는 말로, 경문왕의 즉위와 관련된 고사이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자 김응렴(金膺廉), 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장녀(長女)보다 소녀(少女)가 아름다웠으나, 장녀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三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장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 憲安王》
[주D-049]선대왕(先大王)은 …… 드리웠다 : 경문왕의 출생을 묘사한 말이다. 홍저(虹渚)는 상고시대의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여절(女節)이 무지개〔虹〕처럼 별빛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宋書 卷27 符瑞志上》 오잠(鼇岑)은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주D-050]옥록(玉鹿)에서 …… 진작시키더니 : 옥록은 검을 뜻하는 옥록로(玉鹿盧)의 준말로, 검술 등 무예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면서 풍류도(風流道)를 떨쳐 일으켰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난랑비(鸞郞碑)〉의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금초(金貂)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주D-052]용전(龍田) :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밭에 출현한 용이라는 뜻으로, 이미 덕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현인(賢人)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출현한 용이 밭에 있으니, 임금님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봉소(鳳沼) : 비원(秘苑)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중서성(中書省) 즉 조정을 가리킨다. 봉황지(鳳凰池)라고도 한다.
[주D-054]계옥(啓沃) :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내려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說命上》
[주D-055]팔병(八柄) : 군신(群臣)을 어거하는 작(爵), 녹(祿), 여(予), 치(置), 생(生), 탈(奪), 폐(廢), 주(誅) 등의 여덟 가지 권한을 말하는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太宰)〉에 그 설명이 나온다.
[주D-056]사유(四維) :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주D-057]기국(杞國)의 근심 : 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天地崩墮〕 자기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국우천(杞國憂天)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보통은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붕(天崩)의 근심 즉 임금이 죽는 우환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58]사슴의 …… 하였다 :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팽형(烹刑)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해이해짐에, 진나라 이외의 산동 지역이 크게 소란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좇았는데,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 빠른 자가 먼저 사슴을 잡게 되었다.〔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는 등의 말로 화를 모면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왕의 지위를 뜻한다.
[주D-059]대저(代邸) : 제왕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거하던 곳을 뜻하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거처를 대저라고 칭하였는데,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여씨(呂氏)들을 소탕하고 소제(少帝)를 폐한 뒤에 대왕을 대저에서 영입하여 황제로 추대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漢書 卷4 文帝紀》
[주D-060]화락한 …… 않구나 : 《시경》 〈한록(旱麓)〉에 나온다.
[주D-061]상제가 …… 따른다 :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르기에 그대를 상공으로 세워 이 동하를 다스리게 하노라.〔上帝時歆 下民祗協 庸建爾于上公 尹茲東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수귀(守龜) : 임금이 점복(占卜)에 쓰는 귀갑(龜甲), 혹은 점치는 사람〔卜人〕을 뜻한다.
[주D-063]제(齊)나라를 …… 않았더라면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64]어찌 …… 뿐이었겠는가 : 왕이 한번 행차하는 데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백금은 중등 생활을 하는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한다.〔百金 中人十家之産也〕”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 찬(贊)〉에 나온다.
[주D-065]태제(太弟)인 상국(相國) : 원주(原註)에 “뒤에 혜성대왕의 존귀한 시호로 추봉되었다.〔追奉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주D-066]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 형제간의 우애가 돋보인다는 말이다. 영원은 《시경》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67]코끼리가 …… 일 : 성군(聖君)의 치세를 뜻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코끼리가 감화를 받아서 그를 위해 밭을 갈고, 우왕(禹王)이 회계(會稽)에 묻히자 새가 그를 위해 김매 주었다는 상경조운(象耕鳥耘)의 전설이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4 〈서허(書虛)〉에 나온다.
[주D-068]소가 헐떡거리는 것 : 한(漢)나라의 재상인 병길(丙吉)이, 길에서 싸워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일은 묻지를 않고, 소가 혀를 빼 물고서 헐떡이는 것〔牛喘吐舌〕을 보고는, 음양(陰陽)의 조화가 깨어진 나머지 계절의 기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한서(漢書)》 권74 〈병길전(丙吉傳)〉에 보인다.
[주D-069]천리(天吏) : 사계절을 가리킨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사시는 하늘의 관리요, 일월은 하늘의 사신이다.〔四時者 天之吏也 日月者 天之使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십훈(十煇)으로 …… 듯하였다 : 굳이 점을 쳐 보지 않아도 원성왕이 꿈속에서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는 말이다. 십훈은 열 가지의 다양한 햇무리 모양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 모양을 보고 인사(人事)의 길흉을 점쳤다. 구령(九齡)은 주 무왕(周武王)의 꿈 이야기이다. 무왕이 꿈속에서 상제로부터 아홉 개의 치아〔九齡〕를 받았다는 말을 부친인 문왕(文王)이 듣고서, 치아는 연령과 관계된 만큼 9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해몽하고는, 자기의 100세 수명에서 3년을 무왕에게 주어 93세까지 살게 하고 자신은 97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71]자기 …… 것 : 《효경》 〈성치장(聖治章)〉에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라고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2]너의 …… 않느냐 :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3]3년 …… 있다 : 그동안 사원의 중수와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시간을 아껴서 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진 채 정사를 행하지 않자, 오거(伍擧)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는 무슨 새인가.〔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라고 하니, 장왕이 “3년 동안 날지 않았어도 한번 날면 하늘에 솟구칠 것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았어도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0 楚世家》 또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3년에 “숙손은 관소에 머무는 시간이 단 하루만 되더라도 그 담장이나 지붕을 손질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게 하였다.〔叔孫所館者 雖一日必葺其牆屋 去之如始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4]아이를 …… 잡혔다 : 남조 송 명제(宋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화려하게 세우고는 큰 공덕을 지었다고 자랑하자, 우원(虞愿)이 옆에 있다가 “폐하가 이 사원을 세운 것은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힌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응당 슬피 울며 애통하게 여길 것이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을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하겠는가.〔陛下起此寺 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罪高佛圖 有何功德〕”라고 반박한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虞愿》
[주D-075]건례선문(建禮仙門) : 한(漢)나라 궁궐에 건례문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여 조정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문은 궁궐의 문을 가리킨다.
[주D-076]소현정서(昭玄精署) : 승도(僧徒)를 총괄했던 소현시(昭玄寺)라는 관아를 말한다.
[주D-077]단계(檀溪)의 숙원 : 사원을 중수하려는 소망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고승 도안(道安)이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1년(373)에 양양(襄陽)에서 제일가는 단계사(檀溪寺)를 세우고, 다시 양주 자사(梁州刺史) 양홍충(洋弘忠)으로부터 구리 1만 근을 시주 받아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한 뒤에, 이제는 숙원을 이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단계사는 금덕사(金德寺)라고도 한다. 《高僧傳 卷5 釋道安傳》
[주D-078]내원(㮈苑)의 전공(前功) : 김원량(金元良)이 예전에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세운 공덕을 말한다. 내원은 내녀(㮈女)의 동산이라는 말인데, 범어 āmra의 의역으로, 암몰라원(菴沒羅園)으로 음역된다. 내수(㮈樹)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내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뒤에 마갈다국(摩竭陀國)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비가 되었으며, 양의(良醫) 기바(耆婆)를 낳았다고 한다. 그 동산은 중인도(中印度) 폐사리(吠舍釐 Vaiśālī) 성 부근에 있었으며, 내녀가 불타에게 바치자 불타가 이곳에서 《유마경(維摩經)》을 설했다고 한다. 김원량이 신라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고운이 왕비인 내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出曜經 卷3》 《四分律 卷39》
[주D-079]수(倕) : 수(垂)라고도 한다. 순(舜) 임금의 대신(大臣)으로 공공(共工)이 되어 백공(百工)의 일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80]노(獿) : 고대의 유명한 미장이 이름이다.
[주D-081]초지(初地) :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菩薩)의 십지(十地) 중 첫째 단계로, 일명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주D-082]500년을 …… 하였는데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은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3]번산(樊山)에서 …… 이때에 : 그 당시야말로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행렬의 맨 마지막 수레에는 표범 꼬리를 매달아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의 번산(樊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기에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더니, 그 노파가 “어째서 표범 꼬리를 수레에 매달아 세우지 않느냐.〔何不豎豹尾〕”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欽定淵鑑類函 卷429 豹 1》 번산은 원산(袁山)이라고도 한다.
[주D-084]형산(荊山)의 …… 하였겠는가 : 뜻밖에도 경문왕이 세상을 떠나는 변고를 당하여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85]뛰어난 …… 소유하였다 : 참고로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체격은 뛰어난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086]침문(寢門)에서 …… 것 : 경문왕(景文王)이 죽은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매일 세 번씩 침문에 가서 부왕인 왕계(王季)의 안부를 내수(內豎)에게 묻고는 편안하시다는 답변을 들으면 기뻐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87]익실(翼室)에서 …… 일 :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었을 때, “남문 밖에 가서 태자 소(釗)를 마중하여, 왕실의 옆방인 익실로 맞아들인 뒤에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는 말이 《서경》 〈고명(顧命)〉에 나온다.
[주D-088]등 문공(滕文公)이 …… 것 : 부왕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나자 맹자(孟子)에게 물어서 거상(居喪)을 극진히 한 일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89]초 장왕(楚莊王)이 …… 것 : 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정사를 행하여 마침내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를 말한다.
[주D-090]향적반(香積飯) : 중향국(衆香國)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먹는 음식을 말한다. 향적여래가 이 향적반을 화보살(化菩薩)에게 발우 가득 담아 주고, 화보살이 다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에게 가득 담아 주어, 비야리성(毗耶離城)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그 향기가 두루 퍼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온다. 그래서 보통 승려의 음식을 향적반 혹은 향반(香飯)이라고 하고, 사찰의 주방(廚房)을 향적이라고 한다.
[주D-091]근심이 …… 이어받았으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8장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주D-092]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2년 병오년(886), 즉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을 가리킨다. 당의 연호 중에 경력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3]명(銘)은 …… 마음이다 :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솥에 명을 새기는데, 명은 기물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낸다. 선조에게는 모두 미덕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만, 명의 의리는 미덕만 칭하고 잘못은 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니, 오직 현자만이 할 수가 있다.〔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 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주D-094]월계(月桂)의 …… 하였지만 :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힌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95]우구(虞丘)의 비통함 :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우구는 고어(皐魚) 혹은 구오자(丘吾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6]계로(季路)의 헛된 영화 : 계로는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의 자이다.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에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 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100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영화일 뿐이요,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7]산서(山西) 출신 : 무인(武人)을 말한다.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속어(俗語)가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에 보인다.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라고도 한다.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주D-098]사술(四術) :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주D-099]육경(六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주D-100]이궐(貽厥) :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1]나의 …… 것이요 : 비명을 모두 진실되게 지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곽태(郭太)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부끄러운 느낌을 가졌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유도(有道)는 곽태의 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102]나의 …… 것이다 : 손에 쥔 붓끝에서도 힘이 넘쳐 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103]하늘을 …… 재면서 :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104]달이 …… 무너져 : 헌강왕(憲康王)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105]훈지(塤篪)를 …… 만났다 :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이 형과 아우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6]멀리 …… 되었다 : 정강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형과 누이를 각각 태양과 달에 비유하였다.
[주D-107]달 …… 하였다 :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오빠인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말한다.
[주D-108]신주를 품었다 : 진성여왕이 성군(聖君)이 될 거룩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광박물지(廣博物志)》 권10 〈부의 중(斧扆中)〉에 “순(舜) 임금이 석추를 쥐고 신주를 품었다.〔虞舜握石椎 懷神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석추를 쥐었다는 것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도를 안다는 말이고, 신주를 품었다는 것은 성성(聖性)을 소유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109]채석을 구웠다 : 신라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힘썼다는 말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110]보우(寶雨)의 …… 것이다 : 성스러운 자질과 훌륭한 품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여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우》는 당(唐)나라 때 달마유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불경 이름으로,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고도 하는데, 동방의 월광천자(月光天子)가 장차 지나국(支那國)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開元釋敎錄 卷9》 《대운(大雲)》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만들어진 불경 이름이다. 승려 10인이 《대운경》을 만들어 바치면서 그녀가 하늘의 명을 받아 여제(女帝)가 되었다고 찬양하자, 그 불경을 천하에 반포하고 제주(諸州)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하도록 명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6 則天武后本紀》
[주D-111]못이 …… 고사 : 후한(後漢)의 초성(草聖) 장지(張芝)와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못가에서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해서 못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112]서까래와 …… 일 : 진(晉)나라 왕순(王珣)의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처럼 큰 붓〔大筆如椽〕을 건네주자, 꿈을 깨고 나서는 “내가 솜씨를 크게 발휘할 일이 있을 모양이다.〔當有大手筆事〕”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황제가 죽어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 등을 모두 왕순이 도맡아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王珣》
[주D-113]장융(張融)이 …… 일 : 남조 제(齊)의 장융이 초서에 능하여 항상 자부를 하였는데, 언젠가 황제가 “경의 글씨는 자못 골력이 있긴 하나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卿書殊有骨力 但恨無二王法〕”라고 하니, “신에게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오라, 이왕에게 신의 필법이 없는 것이 또한 유감입니다.〔非恨臣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라고 답변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이왕은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가리킨다.
[주D-114]조조(曹操)가 …… 8자(字) : 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115]세상을 …… 메우고 : 불교의 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주D-116]먼지가 …… 뒤덮을지라도 :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주D-117]약목(若木) : 고대 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서방의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큰 나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상(扶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물론 부상의 뜻으로 쓰였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주D-118]옥초(沃焦) : 전설 속의 큰 산 이름으로, 동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주D-119]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0]우이(嵎夷) : 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열렬한 …… 차지했도다 : 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
[주D-122]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23]상포(桑浦) :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주D-124]보덕(報德)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
[주D-125]흥국(興國) : 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
[주D-126]용수(龍首) : 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127]나의 …… 민망하나 : 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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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대숭복사 비명 병서〔大嵩福寺碑銘 竝序


내가 듣건대, 왕자(王者)는 부조(父祖)가 쌓은 덕업을 기반으로 해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크게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고 예교(禮敎)는 효(孝)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즉 인에 입각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확대 적용하고, 효에 입각하여 어버이를 높이는 전범을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홍범(洪範)을 통해서 무편(無偏)의 자세를 본받고, 주(周)나라의 시편(詩篇)을 통해서 불궤(不匱)의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 조상의 덕을 닦으면서〔聿修〕 비패(秕稗)의 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제사를 올리면서〔克祀〕 빈번(蘋蘩)의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악한 은혜가 만백성에게 골고루 적셔지고, 덕의 향기〔德馨〕가 드높이 하늘에까지 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해 주고 죄인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부처가 대미(大迷)의 지경에서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것 아님이 없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조상을 하늘과 짝 지우며 상제(上帝)에 배향하는 것은 불교가 상락(常樂)의 세계에서 존령(尊靈)을 받드는 것 아님이 없다. 이를 통해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 부처의 입)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태평(太平) 승지(勝地)로 말하면, 성품은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발육하고 생장시키는 데에 적합하다. 산림에 정묵(靜默)의 승도(僧徒)가 많아 인(仁)으로 벗을 모으고, 강해가 조종(朝宗)의 형세와 일치하듯 선(善)을 따름이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기풍을 드날리고 범왕(梵王)의 불도(佛道)에 젖어 드는 것이 마치 도장에 인주를 찍는 것과 같고 거푸집 안에 쇠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신(君臣)이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심지어는 국성(國城)에까지 원하는 대로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니 섬부주(贍部洲)의 해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사다(都史多)의 천상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신묘한 일 중에서도 신묘한 이 일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금성(金城)의 남쪽에 있는 일출봉(日出峯) 기슭에 숭복(嵩福)이라는 이름의 가람(伽藍)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람은 선조(先朝 경문왕(景文王))가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원릉(園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건한 것이다. 고사(古寺)가 세워진 유래를 상고하고 신찰(新刹)이 완공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원구(元舅 큰 외숙)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外祖)로서, 고귀한 공자(公子)의 신분이면서도 실로 참다운 고인(古人)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겼던 것처럼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그럴 듯하게 세우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서경(西境)을 함께 기약했던 것처럼 그 건물을 희사하여 상전(像殿)과 경대(經臺)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년에 풍악을 울리던 피리와 가야금이 오늘날에는 사찰의 쇠북과 경쇠가 되었으니,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바뀐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 사원 주변의 경관 중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곡사(鵠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앙〔鴦〕처럼 짝하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하여금 성가(聲價)를 드높이게 하고, 거위〔鵝〕처럼 날개를 펼친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빛을 더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저 바라월(波羅越)의 형태를 표방한 사원이나 굴린차(崛恡遮)의 이름을 기념한 사원이 어찌 천리를 나는 고니의 비유를 취하고 쌍림(雙林)으로 바꿔서 이름을 새로 지은 이 사원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곳의 지세가 위세 면에서 취두(鷲頭)보다 낮고 지덕(地德) 면에서 용이(龍耳)처럼 높은 만큼, 금계(金界)로 획정하기보다는 옥전(玉田)을 조성하는 것이 적당한 것이었다.
정원(貞元) 무인년(798, 원성왕14) 겨울에 이르러 왕 자신을 장사 지낼 일에 대해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인산(因山)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장지를 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원이 자리한 터를 지목하여 장차 왕릉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유씨(游氏)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구택을 모두 차마 허물 수 없다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금지(金地 사원)의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수달다(須達多)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장지로 삼는다면 땅은 복될지라도 하늘은 허물할 것이니 서로 보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정사(政事)를 담당한 자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범묘(梵廟 사원)의 경우는 어디에 있든 반드시 화합하게 되어 있는 만큼, 어디로 가든 간에 맞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는 터도 복된 도량으로 전환하여, 백억겁토록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수(靈隧 묘지)의 경우는 아래로 지맥을 살피고 위로 천심을 헤아려서, 반드시 구원(九原) 속에 사상(四象)을 포섭함으로써 천만대토록 그 여경(餘慶)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불법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상(相)이 없으나 장례는 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거하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이다. 단지 청오(靑烏)가 좋다고 간주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어찌 백마(白馬)를 슬피 울게 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이 인사(仁祠)의 내력을 살펴보건대, 본디 척리(戚里)에 속해 있었던 것인 만큼, 낮은 척리에서 높은 왕실로 나아가고 옛 절 대신 새 왕릉을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하여 왕릉이 해역(海域)의 웅장함을 차지하게 하고, 사원이 운천(雲泉)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한다면, 우리 왕실의 복산(福山)이 높이 솟을 것은 물론이요, 저 후문(侯門 척리)의 덕해(德海)도 편안히 흐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知無不爲〕 가운데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各得其所〕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나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중도에 그만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의당 거북점과 시초점〔龜筮〕 모두 사람의 뜻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용(龍)과 제천(諸天)의 신이 환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精舍 사원)를 옮기고 현궁(玄宮 왕릉)을 조성하는 두 가지 공사에 인부를 동원하고 백공(百工)에게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감우(紺宇 사원)를 개창(改創)할 때에는 인연이 있는 대중이 서로 이끌고 와서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마치 5리(里)의 안개를 피우는 술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저잣거리를 이룬 것이나 한때 설산(雪山)의 법회에 대중이 화열하며 모여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와와 재목을 거두고 경전과 불상을 봉대(奉戴)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번갈아 수수(授受)하며 경쟁적으로 정성을 바쳤으므로, 역부(役夫)가 반걸음도 옮기기 전에 석자(釋子)가 편히 거할 곳이 벌써 이루어졌다.
구원(九原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비록 왕토(王土)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공전(公田 국가 소유의 토지)이 아니었으므로, 왕릉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으로 매입하여 구롱(丘隴) 200여 결(結)을 보태었으며, 그 대가로 도합 2천 점(苫)의 도곡(稻穀)을 보상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전(畿甸)의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소나무를 분담해서 주위에 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쓸쓸히 자꾸만 들려오는 슬픈 바람 소리는 봉황처럼 춤추고 난새처럼 노래했던 옛 생각이 솟구치게 하였고, 어둠에 묻혔다가 밝은 해를 본 묘역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위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건대, 땅은 하구(瑕丘)와 달라도 경계는 양곡(暘谷)과 접하였고,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곡림(穀林)의 상서로운 기운이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수놓은 듯한 봉우리들은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회(朝會)를 하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 선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실로 교산(喬山)의 빼어남을 간직하고, 필맥(畢陌)의 기이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금지(金枝 왕족)가 계림(雞林)에서 더욱 무성해질 것이요, 옥파(玉派 종실)가 접수(鰈水)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사우(寺宇)를 옮길 적에 땅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점이 있었으나, 아직 화성(化城)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가까스로 잡목을 베어 내어 강만(岡巒)을 구분하고 띠풀을 엮어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겨우 7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숨 가쁘게 아홉 조정이나 거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누차 전복될 위기를 맞았을 뿐 어엿하게 꾸며 볼 여유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을 맞게 되어서 천세(千歲)의 보배로운 운세를 흠 없이 누리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은 홍저(虹渚)가 빛을 떨치듯 오잠(鼇岑)에 자취를 드리웠다. 처음에 옥록(玉鹿)에서 명성을 날리며 특별히 풍류(風流)를 진작시키더니, 이윽고 금초(金貂)의 지위에서 관원들을 총괄하며 나라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용전(龍田)의 지위를 차지하고 덕(德)을 심었으며, 봉소(鳳沼)에 거하면서 마음을 계옥(啓沃)하였다.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인자(仁者)로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였고, 정사를 꾀할 적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인도하였다. 팔병(八柄)의 막중한 권한을 모두 행사하여 사유(四維)가 실추된 것을 바로잡아 두서 있게 하였다. 어려운 일들을 차례로 겪었지만 행하는 일마다 이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국(杞國)의 근심이 닥쳐와 보위가 비게 되면서 산악이 흔들렸는데, 사슴의 뒤를 좇는 들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마귀 떼가 동산에 모여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이야말로 현명하고 온순한 데다 노성하고 인자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에 대저(代邸)에서 입신하고 나서 자문(慈門 불문(佛門))에 뜻을 기울이며 선조(先祖)에게 수치를 끼칠까 염려하여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숭창(嵩唱)에게 청하여 범거(梵居 사원)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부처에게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선조의 덕업을 선양하려는 성의를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 라고 한 것이나,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른다.〔上帝時歆 下民祗協〕” 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이 신불(神佛)의 보우를 받고 선의의 행동을 사람들이 잘 따르게 된 결과, 경(卿)과 사(士)와 대부(大夫)의 뜻이 수귀(守龜)의 뜻과 합치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국(東國)을 혁혁히 빛내면서 임금으로 임하고 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선왕(先王)이 훙거(薨去)한 사실을 알리고 금상(今上)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하였다.
마침내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5)에 천자가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를 정사(正使)로 삼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에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금어대(金魚袋)를 채우고 머리에 해치관(獬豸冠)을 씌워 부사(副使)로 삼은 뒤에 왕인(王人)인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조명(詔命)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빛나게 선왕의 뒤를 이어받고 나서 성유(聲猷)를 제대로 봉행함으로써 잘 계승하였다는 이름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왕위에 추대한 지극히 공정한 거조에 참으로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의 국왕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검교태위 겸 지절충영해군사(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지난날에 선대왕이 제(齊)나라를 변화시키며 빼어난 면모를 드러내고,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향기를 드날리지 않았더라면, 천자가 어떻게 이처럼 봉필(鳳筆)을 날려 해외의 제후(諸侯)를 총애하고 용정(龍旌)을 내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임시로 수행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또한 영광스럽게 천자의 은택에 젖었고 보면, 반드시 영구(靈丘 왕릉)에 나아가 친히 참배해야 하겠기에, 천승(千乘) 제후의 행차를 준비하게 하였으나, 그것이 어찌 십가(十家)의 재산만 소모할 뿐이었겠는가. 이에 마침내 태제(太弟)인 상국(相國)에게 명하여 청묘(淸廟)의 제사에 치제(致齊)하게 하고 현경(玄扃 왕릉)에 대신 참알(參謁)하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계림(雞林)의 번성함이여, 그리고 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코끼리가 밭 갈던 일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요, 시대가 평화로우니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태제의 행렬이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흰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하며 말하기를,
“고귀한 개제(介弟 태제)의 이번 행차로 성제(聖帝)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도가 이루어졌다. 예의 있는 우리의 풍속이 넉넉하게 여유가 있어서, 마침내 바다 물결이 가라앉게 하고, 변방에 전쟁의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천리(天吏)가 고르게 하고, 땅의 곡식이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니 뒤를 이어서 연우(蓮宇 사원)를 중수하고 백성(柏城 왕릉)을 돌볼 적기가 바로 지금이니, 지금 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의 효성이 크게 사무쳐서 생각과 꿈이 일치된 결과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을 꿈속에서 뵙게 되었는데, 성조대왕이 선대왕을 어루만지며 고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다.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돌보려고 하는데 조심하고 공경히 할 것이요, 서둘러서 경영하려고 하지 말지어다. 부처의 덕과 나의 힘이 너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진정 중도를 잡고 행한다면 하늘의 복록을 끝까지 길이 누리리라.”
하였다. 이윽고 청랑한 물시계 소리에 맞춰 옥침(玉枕)에서 잠이 깨어 일어나니, 십훈(十煇)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구령(九齡)의 해몽과 일치하는 듯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속히 명하여 법회를 경건히 거행하도록 하였다. 화엄(華嚴)의 대덕(大德)인 석결언(釋決言)이 당사(當寺)에서 유지(有旨)를 받들고 5일 동안 강경(講經)을 하였으니, 효성을 펴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선대왕이 하교하기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不愛其親〕에 대해서는 경(經)에서도 경계한 바이다.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無念爾祖〕’라고 한 시(詩)의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는 이때에 과인이 사원을 중수하려고 하자 꿈속에서까지 감응이 이루어지게 하니 마음이 떨리고 두렵기만 하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三年不蜚〕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단 하루라도 반드시 손질할 것〔一日必葺〕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백관(百官)의 어른과 어사(御史)는 이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혔다〔賣兒貼婦〕는 기롱은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혹시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니, 행해야 할 일은 진헌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을 그대들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애틋한 소원이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여 선조의 혼령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참으로 임금님이 뜻을 먼저 정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여론이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원이 이루어지면 구족(九族)에게도 많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특출한 인재들을 발탁하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출중한 승려들을 뽑았으며, 종실의 세 명의 유능한 신하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석문(釋門)의 두 명의 걸출한 승려인 현량(賢諒)과 신해(神解), 찬도(贊導)하는 승려인 숭창(嵩唱)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임금이 단월(檀越 시주)이 되고 국가의 저명한 인물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므로, 역량 면에서 여유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늘리려고 하는 터에, 새것을 옛것과 뒤섞이게 하는 것이 어찌 온당하겠는가마는, 단계(檀溪)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해칠 염려도 없지 않기에 옛 재목을 간추려 모아서 높이 다진 대지(垈地)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 웅장한 규모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진흙을 이기고 쇳물을 부으며 다투어 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구름 같은 사닥다리를 타고서 수(倕)의 재목을 아슬아슬하게 가설(架設)하고, 서리처럼 하얀 흙벽을 노(獿)의 백악(白堊)에 향을 버무려서 발랐다. 바위산의 기슭을 깎아 내어 담장을 돋우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문 앞이 트이게 하였다. 거친 섬돌은 쇠 장식 계단으로 바꾸었고, 낮은 곁채는 아로새긴 회랑(回廊)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겹으로 된 불전(佛殿)은 용(龍)처럼 서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사나(盧舍那)를 주불(主佛)로 봉안하였고, 층으로 된 누각은 봉(鳳)처럼 우뚝 섰는데 그 위에 수다라(修多羅 경(經))를 이름으로 하였다. 고래등 같은 동량을 높이 설치하였고, 난새를 새긴 난간을 마주 보게 하였다. 화려한 반자에는 꽃들이 모여 차례로 줄지어 있고, 수놓은 두공(枓栱)에는 가지가 옹위하듯 서로 맞물려 있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하여 눈길을 돌리면 누구나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영정(影幀)을 모신 별실(別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연방(蓮房)과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아침마다 밥을 짓는 공양간과 같은 곳이 있었다. 여기에 또 새기고 다듬는 데에 솜씨를 다하고 색칠을 하는 데에 정밀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 골짜기와 함께 맑은 기운이 우러나오고 안개 노을과 어울려 서로 찬란하게 빛났다. 옥으로 된 찰간(刹竿)에는 봉래도(蓬萊島)를 비추는 달이 걸려서 두 송이 서리 머금은 흰 연꽃이 피어나고, 쇠로 된 풍경(風磬)에는 솔 우거진 시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쳐서 어느 때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변의 승경(勝景)을 돌아보더라도 먼 변방에서 경치가 걸출한 곳이었다. 좌측의 산봉우리는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우측의 원습(原隰)은 용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다. 앞을 굽어보면 메기 형상의 산이 검푸르게 줄 지어 서 있고, 뒤를 돌아보면 봉새 같은 언덕이 갈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면 가파르면서 기이하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삽상하면서 아름다우니, 낙랑(樂浪 신라)의 선경(仙境)은 참으로 낙방(樂邦)이요, 초월(初月)의 명산은 바로 초지(初地)라고 이를 만하다.
잘 건설하여 주도면밀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근실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인방(仁方 동방)을 크게 감싸 줄 것이요, 임금의 보수(寶壽)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사방의 경내로 삼고, 500년을 헤아려서 한 해의 봄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사냥한 표범의 꼬리를 매달아 세우며 바야흐로 기뻐할 이때에, 형산(荊山)의 용에 걸터앉아 떨어뜨린 수염을 안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연소한 나이인데도 높은 덕을 지녔고 뛰어난 체격에 맑은 정신을 소유하였다.〔神淸遠體〕 침문(寢門)에서 내수(內豎)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익실(翼室)에서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는 일〔宅宗〕을 준행(遵行)하였다. 등 문공(滕文公)이 예법을 극진히 하여 거상(居喪)을 한 것처럼 끝까지 극기를 잘 하였고, 초 장왕(楚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닦은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군다나 또 천성적으로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고 지혜의 이슬에 몸을 적시면서 선조를 높이는 의리를 드날리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성의를 분발하였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화(中和) 을사년(885, 헌강왕11) 가을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이어받아 길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는 일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다. 선조(先朝)에서 세운 곡사(鵠寺)는 이름을 바꿔서 대숭복사(大嵩福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수지(受持)하는 개사(開士)와 기강을 확립하는 정리(淨吏)가 전지(田地)를 가지고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체 봉은사(奉恩寺)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도록 하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産物)을 전운(轉運)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별도로 두 명의 숙덕(宿德)을 뽑아 입적시켜 상주하게 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게 하라. 그러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저승 세계까지 보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요, 큰 인연을 지은 김원량으로서도 반드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鉢盂)에는 향적반(香積飯)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중생을 창도하는 것은 육시 예배(六時禮拜)를 하며 옥경(玉磬)이 울리듯 할 것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수지(修持)하는 것은 만겁(萬劫)토록 하늘의 별이 세상을 비추듯 할 것이다. 위대하도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바 “근심이 없는 분은 문왕일 것이다. 부친이 시작한 일을 아들이 이어받았으니.〔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禮)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은 기물(器物)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라고. 선조(先朝)에서 처음 사원을 세울 적에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당시에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을 지어 한번 일컬으면, 과인이나 그대나 모두 효성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명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떠돌다가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치긴 하였지만, 우구(虞丘)의 비통함을 길이 안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 누리고 있을 뿐이기에, 명을 받들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슬피 오열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건대, 내가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 유씨 자규(柳氏子珪)가 동국(東國)의 일을 기록한 내용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술된 정사에 관한 조목이 왕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국사(國史)를 읽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적(事迹)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중국 사신 호공 귀후(胡公歸厚)가 복명할 적에 풍요(風謠)를 많이 채록하고는 당시의 재상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나 이후로 산서(山西) 출신은 해동(海東)에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계림(雞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은데, 동국(東國)의 왕이 그 경치를 도장으로 찍어내듯이 시로 지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요행히 운어(韻語)를 엮는 법을 예전에 배운 덕분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답을 하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겼다. 이는 열조(烈祖)가 사술(四術)로 터전을 닦고 선왕(先王)이 육경(六經)으로 풍속을 교화시켰기 때문이니, 이 어찌 이궐(貽厥)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동방의 문물이 빛나게 할 수 있었고 보면, 나의 명(銘)에도 부끄러운 말〔愧辭〕이 없게 될 것이요, 나의 붓에도 남은 용기〔餘勇〕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하늘을 대롱 구멍으로 엿보고 바다를 바가지로 퍼서 재면서 평범한 말로 엮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홀연히 영원한 한탄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뒤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선왕의 숫돌에 계속 칼을 갈고 훈지(塤篪)를 불며 가락을 맞추는 시대를 만났다. 일단 큰 왕업을 이어 지키게 된 뒤에는 장차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이루려고 하면서 임금 자리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없이 그 문물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멀리 태양 같은 형님의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서산에 지는 해 그림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 같은 누이에게 높이 의지하여 동해의 빛이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 전하는 오누이 간에 왕위를 이어 왕가의 계보가 확실한 가운데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주를 품었다〔懷神珠〕고 하는 것이요, 채석을 구웠다〔鍊彩石〕고 하는 것이다.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우(寶雨)》의 금언(金言)에서 분명히 수기(授記)함을 얻고, 《대운(大雲)》의 옥게(玉偈)와 완전히 부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또 문고(文考 부친인 경문왕)가 부처의 집을 낙성하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유리(琉璃)와 같은 불세계(佛世界)를 높였으면서도 아직 완염(琬琰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짓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재주가 없는 나에게 거듭 명하여 졸렬한 붓끝을 놀리게 하였다. 내가 비록 못이 먹물로 검게 변한 고사에는 부끄럽고, 서까래와 같은 붓의 꿈을 꾼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장융(張融)이 이왕(二王)의 필법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은 일에 나름대로 견주면서, 조조(曹操)가 어쩌다가 풀 수 있었던 8자(字)의 찬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설사 세상을 불태운 재가 못을 메우고, 먼지가 휘날려 바다를 뒤덮을지라도 본지(本枝 왕실의 후예)는 번성하여 약목(若木)과 가지런히 번영을 길이 누릴 것이요, 이 풍석(豐石)은 높다랗게 옥초(沃焦)를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고서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주C-001]대숭복사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로 되어 있다.
[주D-001]무편(無偏) : 편벽됨이 없는 정사를 뜻한다.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넓게 펼쳐진다.〔無偏無黨 王道蕩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불궤(不匱)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조상의 덕을 닦으면서 :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비패(秕稗) : 쭉정이와 피라는 뜻으로, 가식적이고 미흡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0년에 “야외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궁중의 기물을 모두 갖춘다면 이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만약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벼 곡식 대신에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이 된다.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처럼 되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면 나쁜 이름이 돌아올 것이다.〔饗而旣具 是棄禮也 若其不具 用秕稗也 用秕稗君辱 棄禮名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제사를 올리면서 :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빈번(蘋蘩) :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진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 빈번과 온조(薀藻)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덕의 …… 것이다 :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더위 …… 주고 : 주 무왕(周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며 왼손으로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해 주니, 천하 사람들이 그 덕에 귀의했다는 말이 《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나온다.
[주D-009]죄인을 …… 것 : 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주D-010]마음속으로 …… 없다 : 대본에는 ‘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饗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고운집》에는 ‘豈若’이 ‘莫非’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莫非’가 합당하겠기에, ‘豈若’을 ‘莫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 :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온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주D-012]삼보(三寶) :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이다. 불보는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주D-013]옥호(玉毫) : 여래(如來) 32상(相)의 하나로, 미간에 있다는 백옥과 같은 흰 털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대광명(大光明)을 발산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춘다고 한다. 백호(白毫)라고도 한다.
[주D-014]조종(朝宗) : 제후와 백관이 제왕(帝王)을 찾아가서 조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육도(六度) :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주D-016]섬부주(贍部洲) : 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長阿含經 卷18 閻浮提洲品》
[주D-017]도사다(都史多) : 범어(梵語) Tuṣita의 음역으로, 보통 도솔천(兜率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불교의 이른바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넷째 층에 있는 하늘로,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내원에서 미래불(未來佛)로 이 땅에 하생(下生)하려고 준비하면서 천신(天神)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주D-018]금성(金城) : 신라의 도성을 말한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21년(기원전3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쌓았던 토성이다.
[주D-019]파진찬(波珍飡) : 신라 17관등(官等) 중 넷째 등급으로, 진골(眞骨)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진간(波珍干) 혹은 해간(海干)이라고도 하였다.
[주D-020]사안(謝安)이 …… 것 : 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기녀(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21]혜원(慧遠)이 …… 것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과 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를 비롯하여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를 맺은 고사가 있다. 서경(西境)은 서방 정토를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22]바라월(波羅越) : 비둘기〔鴿〕를 뜻하는 천축(天竺)의 말로, 여기서는 바라월사(波羅越寺) 즉 합사(鴿寺)를 가리킨다. 달친(達嚫)이라는 나라에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僧伽藍)이 있는데, 이는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든 5층의 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1층부터 각각 코끼리ㆍ사자ㆍ말ㆍ소ㆍ비둘기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맨 위층의 형태를 취해서 바라월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법현고승전(法顯高僧傳)》 권1에 나온다.
[주D-023]굴린차(崛恡遮) :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있었다는 굴우차(堀忧遮)라는 사원으로, 기러기 절〔雁寺〕이라는 뜻이다. 어떤 비구(比丘)가 파계하여 남해(南海)의 기러기로 태어났는데, 몸집이 3장(丈)이나 되고 사람 말을 하며 끊임없이 《화엄경(華嚴經)》을 외웠다. 남자 불교 신도 한 사람이 보물을 캐러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래섬에 올라갔다가 그 기러기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기러기를 위해 사원을 지어 주기로 하고 기러기 등에 타고서 목적을 달성한 뒤에 약속대로 안사(雁寺)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경조(京兆) 숭복사(崇福寺) 승(僧) 사문(沙門) 법장(法藏)이 편집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4 〈풍송(諷誦) 7 중천축일조삼장(中天竺日照三藏)〉에 나온다.
[주D-024]쌍림(雙林)으로 …… 지은 : 김원량(金元良)이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라는 사찰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남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 선혜대사(善慧大士)가 저택을 희사하여 절강(浙江) 의오현(義烏縣) 운횡산(雲橫山) 아래에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사원 경내에 쌍도수(雙檮樹)가 있는 것을 계기로 쌍림사(雙林寺)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이 사원은 뒤에 이름이 보림사(寶林寺)로 바뀌었다. 《續高僧傳 卷25 慧雲傳》 《景德傳燈錄 卷27 善慧大士》
[주D-025]취두(鷲頭) : 여래(如來)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취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梵語)를 음역한 것이다.
[주D-026]용이(龍耳) : 감여가(堪輿家)가 풍수지리(風水地理) 면에서 명당으로 꼽는 장지 중의 하나이다.
[주D-027]금계(金界)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 혹은 금전(金田)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28]옥전(玉田) : 왕릉(王陵)을 뜻한다. 고대 제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썼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D-029]인산(因山) : 보통 왕과 왕비 등의 장례식으로 국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의 형세를 그대로 활용해서 능을 만들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30]유씨(游氏)의 …… 놔두었으므로 : 정(鄭)나라 간공(簡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에 유씨(游氏)의 사당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그 사당을 헐지 말고 피해서 길을 내도록 지시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 나온다. 또 한 무제(漢武帝) 말기에 노 공왕(魯恭王)이 자기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헐다가 갑자기 종경(鐘磬)과 금슬(琴瑟)의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사를 중지하고는 그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 수십 종의 고문 경전(古文經傳)을 발굴했던 고사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주D-031]수달다(須達多) : 석가(釋迦)에게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서 희사한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장자(長者) 이름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도 한다. 그가 석가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를 건립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大唐西域記 卷6》 여기서는 김원량(金元良)을 가리킨다.
[주D-032]단지 …… 것이겠는가 : 풍수지리 면에서 명당이기 때문에 왕릉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지,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사원을 없애려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외국의 국왕이 사원을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초제사(招提寺)가 아직 헐리지 않았을 때, 밤에 백마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프게 우는 것〔夜有一白馬 繞塔悲鳴〕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회개하며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에 나온다. 청오(靑烏)는 《금낭(錦囊)》과 함께 대표적인 풍수지리서로 꼽히는 책 이름인데, 지관(地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033]알고서 …… 되는 : “국가의 이익이 될 일을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이다.〔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9년에 나온다.
[주D-034]각각 …… 된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옷소매 …… 않고 :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마치 장막처럼 이어져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5리(里)의 …… 것 : 후한(後漢)의 장해(張楷)가 5리의 지역에 안개가 자욱이 끼게 하는 술법을 잘 구사하였으므로,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홍농산(弘農山)으로 모여들어 저잣거리를 이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주D-037]왕토(王土) : 왕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경》 〈북산(北山)〉의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어둠에 …… 하였다 : 왕릉 주위의 형세를 묘사한 것이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한(漢)나라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밝은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또 제갈량(諸葛亮)이 오(吳)나라 도읍인 건강(建康)에 와서 산천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종산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이 거할 곳이다.〔鍾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 吳都形勢》
[주D-039]하구(瑕丘) :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가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산책하다가 죽으면 묻히고 싶다고 한 언덕 이름이다. 《禮記 檀弓上》
[주D-040]양곡(暘谷) : 해 뜨는 곳이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1]기수(祇樹) :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구입하여 정사(精舍)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주D-042]곡림(穀林) : 요(堯) 임금을 매장한 곳으로, 제왕의 능을 뜻한다.
[주D-043]교산(喬山) : 황제(黃帝)의 장지(葬地)이다.
[주D-044]필맥(畢陌) :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묻힌 곳이다.
[주D-045]접수(鰈水) : 가자미〔比目魚〕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해(東海) 즉 동방을 가리킨다. 《이아》 〈석지(釋地)〉에 “동방에 가자미가 있는데, 짝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접이라고 한다.〔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사우(寺宇)를 …… 못하였다 : 땅에서 탑이 불쑥 솟아나온 것처럼 사원을 이전하는 공사가 일단 쉽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사원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그때 부처 앞에 높이 500유순, 가로세로 250유순 되는 칠보로 장식된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서 있었다.〔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住在空中〕”라는 말이 나온다. 화성(化城)은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47]아홉 조정 :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시작해서 47대 헌안왕(憲安王)에 이르는 9대에 걸친 조정을 말한다.
[주D-048]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 : 경문왕이 사원을 중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삼리는 세 가지 이익이라는 말로, 경문왕의 즉위와 관련된 고사이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자 김응렴(金膺廉), 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장녀(長女)보다 소녀(少女)가 아름다웠으나, 장녀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三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장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 憲安王》
[주D-049]선대왕(先大王)은 …… 드리웠다 : 경문왕의 출생을 묘사한 말이다. 홍저(虹渚)는 상고시대의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여절(女節)이 무지개〔虹〕처럼 별빛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宋書 卷27 符瑞志上》 오잠(鼇岑)은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주D-050]옥록(玉鹿)에서 …… 진작시키더니 : 옥록은 검을 뜻하는 옥록로(玉鹿盧)의 준말로, 검술 등 무예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면서 풍류도(風流道)를 떨쳐 일으켰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난랑비(鸞郞碑)〉의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금초(金貂)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주D-052]용전(龍田) :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밭에 출현한 용이라는 뜻으로, 이미 덕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현인(賢人)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출현한 용이 밭에 있으니, 임금님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봉소(鳳沼) : 비원(秘苑)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중서성(中書省) 즉 조정을 가리킨다. 봉황지(鳳凰池)라고도 한다.
[주D-054]계옥(啓沃) :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내려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說命上》
[주D-055]팔병(八柄) : 군신(群臣)을 어거하는 작(爵), 녹(祿), 여(予), 치(置), 생(生), 탈(奪), 폐(廢), 주(誅) 등의 여덟 가지 권한을 말하는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太宰)〉에 그 설명이 나온다.
[주D-056]사유(四維) :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주D-057]기국(杞國)의 근심 : 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天地崩墮〕 자기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국우천(杞國憂天)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보통은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붕(天崩)의 근심 즉 임금이 죽는 우환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58]사슴의 …… 하였다 :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팽형(烹刑)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해이해짐에, 진나라 이외의 산동 지역이 크게 소란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좇았는데,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 빠른 자가 먼저 사슴을 잡게 되었다.〔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는 등의 말로 화를 모면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왕의 지위를 뜻한다.
[주D-059]대저(代邸) : 제왕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거하던 곳을 뜻하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거처를 대저라고 칭하였는데,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여씨(呂氏)들을 소탕하고 소제(少帝)를 폐한 뒤에 대왕을 대저에서 영입하여 황제로 추대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漢書 卷4 文帝紀》
[주D-060]화락한 …… 않구나 : 《시경》 〈한록(旱麓)〉에 나온다.
[주D-061]상제가 …… 따른다 :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르기에 그대를 상공으로 세워 이 동하를 다스리게 하노라.〔上帝時歆 下民祗協 庸建爾于上公 尹茲東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수귀(守龜) : 임금이 점복(占卜)에 쓰는 귀갑(龜甲), 혹은 점치는 사람〔卜人〕을 뜻한다.
[주D-063]제(齊)나라를 …… 않았더라면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64]어찌 …… 뿐이었겠는가 : 왕이 한번 행차하는 데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백금은 중등 생활을 하는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한다.〔百金 中人十家之産也〕”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 찬(贊)〉에 나온다.
[주D-065]태제(太弟)인 상국(相國) : 원주(原註)에 “뒤에 혜성대왕의 존귀한 시호로 추봉되었다.〔追奉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주D-066]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 형제간의 우애가 돋보인다는 말이다. 영원은 《시경》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67]코끼리가 …… 일 : 성군(聖君)의 치세를 뜻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코끼리가 감화를 받아서 그를 위해 밭을 갈고, 우왕(禹王)이 회계(會稽)에 묻히자 새가 그를 위해 김매 주었다는 상경조운(象耕鳥耘)의 전설이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4 〈서허(書虛)〉에 나온다.
[주D-068]소가 헐떡거리는 것 : 한(漢)나라의 재상인 병길(丙吉)이, 길에서 싸워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일은 묻지를 않고, 소가 혀를 빼 물고서 헐떡이는 것〔牛喘吐舌〕을 보고는, 음양(陰陽)의 조화가 깨어진 나머지 계절의 기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한서(漢書)》 권74 〈병길전(丙吉傳)〉에 보인다.
[주D-069]천리(天吏) : 사계절을 가리킨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사시는 하늘의 관리요, 일월은 하늘의 사신이다.〔四時者 天之吏也 日月者 天之使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십훈(十煇)으로 …… 듯하였다 : 굳이 점을 쳐 보지 않아도 원성왕이 꿈속에서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는 말이다. 십훈은 열 가지의 다양한 햇무리 모양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 모양을 보고 인사(人事)의 길흉을 점쳤다. 구령(九齡)은 주 무왕(周武王)의 꿈 이야기이다. 무왕이 꿈속에서 상제로부터 아홉 개의 치아〔九齡〕를 받았다는 말을 부친인 문왕(文王)이 듣고서, 치아는 연령과 관계된 만큼 9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해몽하고는, 자기의 100세 수명에서 3년을 무왕에게 주어 93세까지 살게 하고 자신은 97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71]자기 …… 것 : 《효경》 〈성치장(聖治章)〉에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라고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2]너의 …… 않느냐 :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3]3년 …… 있다 : 그동안 사원의 중수와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시간을 아껴서 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진 채 정사를 행하지 않자, 오거(伍擧)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는 무슨 새인가.〔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라고 하니, 장왕이 “3년 동안 날지 않았어도 한번 날면 하늘에 솟구칠 것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았어도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0 楚世家》 또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3년에 “숙손은 관소에 머무는 시간이 단 하루만 되더라도 그 담장이나 지붕을 손질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게 하였다.〔叔孫所館者 雖一日必葺其牆屋 去之如始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4]아이를 …… 잡혔다 : 남조 송 명제(宋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화려하게 세우고는 큰 공덕을 지었다고 자랑하자, 우원(虞愿)이 옆에 있다가 “폐하가 이 사원을 세운 것은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힌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응당 슬피 울며 애통하게 여길 것이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을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하겠는가.〔陛下起此寺 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罪高佛圖 有何功德〕”라고 반박한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虞愿》
[주D-075]건례선문(建禮仙門) : 한(漢)나라 궁궐에 건례문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여 조정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문은 궁궐의 문을 가리킨다.
[주D-076]소현정서(昭玄精署) : 승도(僧徒)를 총괄했던 소현시(昭玄寺)라는 관아를 말한다.
[주D-077]단계(檀溪)의 숙원 : 사원을 중수하려는 소망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고승 도안(道安)이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1년(373)에 양양(襄陽)에서 제일가는 단계사(檀溪寺)를 세우고, 다시 양주 자사(梁州刺史) 양홍충(洋弘忠)으로부터 구리 1만 근을 시주 받아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한 뒤에, 이제는 숙원을 이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단계사는 금덕사(金德寺)라고도 한다. 《高僧傳 卷5 釋道安傳》
[주D-078]내원(㮈苑)의 전공(前功) : 김원량(金元良)이 예전에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세운 공덕을 말한다. 내원은 내녀(㮈女)의 동산이라는 말인데, 범어 āmra의 의역으로, 암몰라원(菴沒羅園)으로 음역된다. 내수(㮈樹)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내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뒤에 마갈다국(摩竭陀國)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비가 되었으며, 양의(良醫) 기바(耆婆)를 낳았다고 한다. 그 동산은 중인도(中印度) 폐사리(吠舍釐 Vaiśālī) 성 부근에 있었으며, 내녀가 불타에게 바치자 불타가 이곳에서 《유마경(維摩經)》을 설했다고 한다. 김원량이 신라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고운이 왕비인 내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出曜經 卷3》 《四分律 卷39》
[주D-079]수(倕) : 수(垂)라고도 한다. 순(舜) 임금의 대신(大臣)으로 공공(共工)이 되어 백공(百工)의 일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80]노(獿) : 고대의 유명한 미장이 이름이다.
[주D-081]초지(初地) :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菩薩)의 십지(十地) 중 첫째 단계로, 일명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주D-082]500년을 …… 하였는데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은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3]번산(樊山)에서 …… 이때에 : 그 당시야말로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행렬의 맨 마지막 수레에는 표범 꼬리를 매달아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의 번산(樊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기에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더니, 그 노파가 “어째서 표범 꼬리를 수레에 매달아 세우지 않느냐.〔何不豎豹尾〕”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欽定淵鑑類函 卷429 豹 1》 번산은 원산(袁山)이라고도 한다.
[주D-084]형산(荊山)의 …… 하였겠는가 : 뜻밖에도 경문왕이 세상을 떠나는 변고를 당하여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85]뛰어난 …… 소유하였다 : 참고로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체격은 뛰어난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086]침문(寢門)에서 …… 것 : 경문왕(景文王)이 죽은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매일 세 번씩 침문에 가서 부왕인 왕계(王季)의 안부를 내수(內豎)에게 묻고는 편안하시다는 답변을 들으면 기뻐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87]익실(翼室)에서 …… 일 :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었을 때, “남문 밖에 가서 태자 소(釗)를 마중하여, 왕실의 옆방인 익실로 맞아들인 뒤에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는 말이 《서경》 〈고명(顧命)〉에 나온다.
[주D-088]등 문공(滕文公)이 …… 것 : 부왕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나자 맹자(孟子)에게 물어서 거상(居喪)을 극진히 한 일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89]초 장왕(楚莊王)이 …… 것 : 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정사를 행하여 마침내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를 말한다.
[주D-090]향적반(香積飯) : 중향국(衆香國)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먹는 음식을 말한다. 향적여래가 이 향적반을 화보살(化菩薩)에게 발우 가득 담아 주고, 화보살이 다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에게 가득 담아 주어, 비야리성(毗耶離城)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그 향기가 두루 퍼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온다. 그래서 보통 승려의 음식을 향적반 혹은 향반(香飯)이라고 하고, 사찰의 주방(廚房)을 향적이라고 한다.
[주D-091]근심이 …… 이어받았으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8장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주D-092]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2년 병오년(886), 즉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을 가리킨다. 당의 연호 중에 경력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3]명(銘)은 …… 마음이다 :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솥에 명을 새기는데, 명은 기물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낸다. 선조에게는 모두 미덕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만, 명의 의리는 미덕만 칭하고 잘못은 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니, 오직 현자만이 할 수가 있다.〔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 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주D-094]월계(月桂)의 …… 하였지만 :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힌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95]우구(虞丘)의 비통함 :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우구는 고어(皐魚) 혹은 구오자(丘吾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6]계로(季路)의 헛된 영화 : 계로는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의 자이다.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에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 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100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영화일 뿐이요,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7]산서(山西) 출신 : 무인(武人)을 말한다.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속어(俗語)가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에 보인다.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라고도 한다.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주D-098]사술(四術) :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주D-099]육경(六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주D-100]이궐(貽厥) :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1]나의 …… 것이요 : 비명을 모두 진실되게 지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곽태(郭太)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부끄러운 느낌을 가졌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유도(有道)는 곽태의 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102]나의 …… 것이다 : 손에 쥔 붓끝에서도 힘이 넘쳐 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103]하늘을 …… 재면서 :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104]달이 …… 무너져 : 헌강왕(憲康王)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105]훈지(塤篪)를 …… 만났다 :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이 형과 아우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6]멀리 …… 되었다 : 정강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형과 누이를 각각 태양과 달에 비유하였다.
[주D-107]달 …… 하였다 :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오빠인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말한다.
[주D-108]신주를 품었다 : 진성여왕이 성군(聖君)이 될 거룩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광박물지(廣博物志)》 권10 〈부의 중(斧扆中)〉에 “순(舜) 임금이 석추를 쥐고 신주를 품었다.〔虞舜握石椎 懷神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석추를 쥐었다는 것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도를 안다는 말이고, 신주를 품었다는 것은 성성(聖性)을 소유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109]채석을 구웠다 : 신라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힘썼다는 말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110]보우(寶雨)의 …… 것이다 : 성스러운 자질과 훌륭한 품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여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우》는 당(唐)나라 때 달마유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불경 이름으로,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고도 하는데, 동방의 월광천자(月光天子)가 장차 지나국(支那國)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開元釋敎錄 卷9》 《대운(大雲)》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만들어진 불경 이름이다. 승려 10인이 《대운경》을 만들어 바치면서 그녀가 하늘의 명을 받아 여제(女帝)가 되었다고 찬양하자, 그 불경을 천하에 반포하고 제주(諸州)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하도록 명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6 則天武后本紀》
[주D-111]못이 …… 고사 : 후한(後漢)의 초성(草聖) 장지(張芝)와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못가에서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해서 못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112]서까래와 …… 일 : 진(晉)나라 왕순(王珣)의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처럼 큰 붓〔大筆如椽〕을 건네주자, 꿈을 깨고 나서는 “내가 솜씨를 크게 발휘할 일이 있을 모양이다.〔當有大手筆事〕”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황제가 죽어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 등을 모두 왕순이 도맡아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王珣》
[주D-113]장융(張融)이 …… 일 : 남조 제(齊)의 장융이 초서에 능하여 항상 자부를 하였는데, 언젠가 황제가 “경의 글씨는 자못 골력이 있긴 하나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卿書殊有骨力 但恨無二王法〕”라고 하니, “신에게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오라, 이왕에게 신의 필법이 없는 것이 또한 유감입니다.〔非恨臣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라고 답변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이왕은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가리킨다.
[주D-114]조조(曹操)가 …… 8자(字) : 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115]세상을 …… 메우고 : 불교의 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주D-116]먼지가 …… 뒤덮을지라도 :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주D-117]약목(若木) : 고대 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서방의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큰 나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상(扶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물론 부상의 뜻으로 쓰였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주D-118]옥초(沃焦) : 전설 속의 큰 산 이름으로, 동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주D-119]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0]우이(嵎夷) : 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열렬한 …… 차지했도다 : 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
[주D-122]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23]상포(桑浦) :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주D-124]보덕(報德)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
[주D-125]흥국(興國) : 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
[주D-126]용수(龍首) : 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127]나의 …… 민망하나 : 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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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공을 종사순관(從事巡官)에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하고 고격(告檄)하는 글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공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나이 28세 때에 희종이 공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詔書)를 지닌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 태수로 있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면서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나라에 간 적이 있다.
진성왕 8년(894)에 공이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에 임명하였다.
공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나 모두 어렵고 험한 운세를 만나서 걸핏하면 낭패를 당하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신세를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山林) 아래나 강해(江海)의 주변에서 소요하고 자적하며, 대사(臺榭)를 짓고 송죽(松竹)을 심는가 하면 서사(書史)를 벗 삼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는데, 예컨대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와 합포(合浦)의 월영대(月影臺) 같은 곳은 모두 공이 노닐던 곳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마음 편히 노닐면서 노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라고 기재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인(高麗人)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상국(上國)에 이름을 떨친 것이 이와 같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주C-001]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말한다. 본 《고운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을 전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전재하지는 않고, 간간이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 불교도와 친분을 나눈 내용, 고려의 태조를 은밀히 도왔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격황소문(檄黃巢文)〉의 내용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서 따다가 보충해 넣었다. 또한 문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수정한 부분도 종종 보인다. 《삼국사기》의 열전 부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병도(李丙燾)의 《국역 삼국사기》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주(譯註)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주D-001]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주D-002]부친 : 고운의 아버지는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김순행(金純行)과 나의 아버지 최견일이 일찍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3]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 : 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현(溧陽縣)이고, 위(尉)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4]고변(高騈) : 당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중국 섬서성 유주인(幽州人)이다.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친구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황소의 난을 진압할 때 진격을 늦추자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병권을 빼앗겼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3쪽》 또 ‘騈’의 음은 ‘변’과 ‘병’ 두 가지인데, 이병도는 ‘변’으로 읽었고, 북한본ㆍ이재호본ㆍ신호열본에서는 ‘병’으로 읽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서도 ‘병’으로 읽었다.
[주D-005]그중 …… 떨어졌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이다.
[주D-006]태산군(太山郡) :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이다.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 일대로 보았으나(《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83, 676쪽》)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5쪽》
[주D-007]부성군(富城郡) : 신라 웅주(熊州)에 속한 군의 하나로, 현재의 서산시(瑞山市)이다. 고려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이 관호를 없앴다가 충렬왕 때 서산으로 고쳤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3쪽》
[주D-008]진성왕 ……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D-009]강주(剛州)의 빙산(氷山) : 강주는 지금의 영주(榮州)로, 고려 성종 때 영주에 강주 단련사(剛州團練使)를 두었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이다. 의성은 당시에 영주 소관 하에 있었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주D-010]그리고 …… 마쳤다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보면,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與母兄浮屠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편자가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주D-011]나은(羅隱) : 833~909. 자는 소간(昭諫), 자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당시에 시명(詩名)을 천하에 진동시키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기풍(譏諷)이 많은 까닭으로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舊五代史 卷24 梁書 羅隱列傳》
[주D-012]고운(顧雲) : 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와 《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주D-013]내 …… 자라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주D-014]고려인(高麗人) : 신라인(新羅人)의 오기(誤記)이다.
[주D-015]고려 …… 내렸다 : 《고려사》 권4 〈현종세가(顯宗世家) 1〉에 의하면, 현종(顯宗) 11년(1020) 8월에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그 동시에 선성(先聖)의 묘정(廟廷)에 종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종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