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12세 휘 탁

전주최공 문성공 12세손 12대조고 증 도승지 행 영광군수 휘 탁 묘표

아베베1 2015. 2. 22. 17:11

 

 

宋子大全卷一百九十六
  
 墓表
靈光郡守崔公墓表 
 


 

余從兄野隱公時榮骯髒自守。獨與崔公琢字士精相友。每官餘。必兀然相對。終日不忍捨。野隱公嘗曰。士精以其人地。俯仰名途。何官不做。而乃自信不疑。不降其志。其不爲人所知者以此。而亦當有以此而知之者矣。其後公跡益畸。困於朱墨米鹽。蹭蹬以沒其世。而野隱公殉節而死。嗚呼。世人終不知公。而知公者其惟君子人乎。語曰。不見其人。但見其友。斯實語也。公全州人。上祖文成公阿仕高麗。官至侍中。本114_390c朝。有德之以淸名直道。當權擥,韓明澮時。見幾退老。曾祖彥淸官奉事。有賢行。累世同爨。祖希壽歷典七邑。爲安東判官。見長官年少。不肯折腰而歸。世稱其高。考應夏縣監。有長者風。沙溪老先生稱之。妣尹氏。司直慶祐女。公弱不好弄。長通經史。年二十。中生員。光海昏亂。謝場屋。不與進取。與儕流疏論李爾瞻奸邪。仍閉門不出者十餘年。仁廟卽位。闡文科。同榜有忌疾者。以故阻槐院選。歷成均館學諭博士。兼奉常寺奉事。或爲假注書。陞刑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出爲黃澗縣監。朝紳惜其去。公曰。夷險不擇。臣職114_390d也。公年四十時。縣監公已沒。公奉母夫人之官。一心奉公。不阿上官。竟遭遞罷。後由刑曹正郞。除麟蹄縣監。以親癠未上而遞。竟遭大故。公時已向衰。而執制不懈。服闋。歷典籍,戶曹佐郞。又出監保寧縣。杖殺土豪之爲民害者。坐是罷歸。然當路服其剛果。直拜兵曹正郞。蓋將引置淸選。而又有惎間者阻之。靈光物衆務劇。素稱巖邑。公又被差遣。未幾謝病歸。以已事追論。謫居春川。數月而放還。壬辰正月二日卒。春秋六十六。公事親孝謹。婢使之侍母夫人者。待之加厚。祭祀主於蠲潔。儉身而易足。家人大小常勤力而自114_391a給。故無所苟於人。視世之奔走營利。若將浼焉。令人蔡氏。宣敎郞忠益之女。古玉鄭公碏之外孫。自幼喜閱圖史。古玉愛而敎育之曰。恨汝不爲男子也。古玉沒。令人蔬食三年。終奉饋奠。及行。甚執婦道。尤謹於追遠之禮。薦享之時。益自整潔。蘋蘩少缺。則終日不樂。每晨起盥櫛。念過仁宗大王行狀。値其諱辰。必涕下焉。豈有所感於心者耶。仁祖,孝廟昇遐。久而不肉。子孫以年老強之。則曰。女子獨非臣子耶。晩年手寫女誡之俚翻者。屬之子孫。永爲家訓。年七十八。而終於崇禎乙巳。祔葬楊州養正里。男世榮以蔭114_391b入仕。次生員世章。有才無年。孫男邦彥,邦藎,邦顯。女爲宋彝錫,許玶妻者長房出。邦儁,邦式。女爲李重郁,金遇華妻者次房出。曾孫摠若干。余從野隱公。識公蓋久。丙丁亂後。余入黃澗之深谷。日夕相從。道語世變而慷慨歔欷。一日指壁上所書曰。此仙源相國取義時語。其語曰。日暮江頭。臣力無何。公泣下不已曰。人臣義當如此。目今天地翻覆。倫常夷滅。吾輩無以自立於人世矣。因及野隱公曰。當時見其守己而已知其有養也。噫。公與野隱公。眞曠世之知己也哉。至今四十年。世道益下。相國祠堂。薦以虜朔。而其人大114_391c爲一時之重。使公而在。復以爲如何也。九原不可作。嗚呼欷矣。邦彥有文行。以親命來謁余銘。銘曰。彼趨而我止兮。故己後而人先。跡雖困而心則亨兮。斯其所以賢乎。

 

 

 

 

 

나의 종형 야은공() 송시영()은 꼿꼿함을 지키며, 오직 최탁()공 자() 사정()과 사귀었다. 매양 관무()의 여가에는 단정히 앉아 상대하며 종일 차마 떠나지 못했다. 야은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정은 그 재능과 품격ㆍ문벌()로 보아 명예 있는 지위를 넘보았다면 무슨 벼슬인들 해내지 못할까만 스스로 믿고 의심치 않으며 그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알아주는 바가 되지 않았음은 이러해서였으나 또한 이러함으로 해서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그 후 공의 행적은 더욱 기구하여 퇴고()와 첨삭()에 고심하며 어정거리다가 세상을 마쳤으며 야은공은 순절()하여 사망하였다. 아, 세상 사람은 끝내 공을 모르고 있으나 공을 아는 자는 오직 군자인()일 뿐이다. 어()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다만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는 실제의 말이다.

공은 전주() 사람이다. 상조() 문성공() 최아()가 고려()에 벼슬하여 관작이 시중()에 이르렀다. 본조()의 최덕지()는 맑은 명성과 곧은 도로써 권람()ㆍ한명회() 때를 맞이하여 낌새를 보고 늙음을 들어 물러났고, 증조 최언청()은 벼슬이 봉사()요 어진 행실이 있었으며 여러 대가 한 집에 살았다. 조부 최희수()는 내리 일곱 고을을 맡았고 안동 판관()이 되어 관장()이 나이 적음을 보고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여 돌아갔는데 세상에서 고고()하다 하였다. 아버지 최응화()는 현감()을 지냈는데, 장자()의 기풍이 있다고 사계() 노선생()이 칭찬하였다. 어머니 윤씨()는 사직() 윤경우()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사()에 통달하였다. 나이 20세에 생원()에 입격하였는데, 광해군() 때 혼란하자 과장()을 사절하여 나아가려 아니하였고 동료들과 상소하여 이이첨()의 간사함을 논하였다. 이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인묘()가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방()에 꺼리는 자가 있어 그 연유로 승문원()의 선발을 저지하였고 성균관() 학유()ㆍ박사()를 지내면서 봉상시 봉사()를 겸하였다. 혹 가주서()가 되었다가 형조 좌랑()에 승진하였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다가 외직에 나가 황간 현감()이 되자, 조정의 관원들이 떠남을 애석히 여겼는데, 공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음은 신하의 직분이다.” 하였다.

공의 나이 40세 때에 현감공()이 몰하였다. 공은 모부인()을 받들고 고을로 나아가 한 마음으로 봉공()하였으나, 상관에 아첨하지 않다가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 형조 정랑을 거쳐 인제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해 체직되었고 마침내 상()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때 늙기 시작하였으나 복제()의 수행에 게으름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전적()ㆍ호조 좌랑을 거쳐 또 나가 보령 현감()이 되었는데, 백성을 해하는 토호()를 형벌로 매를 쳐 죽였다가 이로 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당로자()가 그 굳세고 과감함에 감복하여 곧바로 병조 정랑에 직배()하니, 대체로 청선()에 두려는 것이었으나 또 시기하는 자가 저지하였다. 영광()은 사람이 많고 업무가 많았으나 본래 암읍(, 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또 이에 차출되어 보내졌으나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으며, 지난 일의 죄가 논해져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두어 달만에 풀리어 돌아왔다.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 정월 2일 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모부인을 모시게 한 종에게는 더 두터이 대우하였으며, 제사는 정결을 주로 하였다. 검소한 몸가짐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가족들은 크고 작은 일에 늘 부지런하고 힘을 다하여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므로 남에게 구차스러운 일이 없었고 세상의 영리에 내닫는 자를 보면 자신이 더럽혀 질 것처럼 하였다.

영인() 채씨()는 선교랑() 채충익()의 딸이요, 고옥() 정작()공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도서()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고옥이 사랑하여 교육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이다.” 하였다. 고옥이 몰(歿)하자 영인은 3년을 소식()하며 끝까지 전()을 올렸고 출가하게 되자 극히 부도()를 행하였으며, 제사에 더욱 삼갔고 시향() 때에 더욱 정결히 하여 제물()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매양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인조 대왕()의 행장()을 읽었고, 그 기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니 어찌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지 않고서이겠는가? 인조ㆍ효묘()가 승하하자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연로함을 들어 강권하면 말하기를, “여자는 유독 신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였다. 만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여계()≫를 손수 써 자손에게 주어 길이 가훈()으로 삼게 하였다. 나이 78세에 졸()하니 숭정() 을사년(, 1665년 현종 6년)이었고, 양주() 양정리()에 부장()하였다.

아들 최세영()은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갔고, 다음 생원() 최세장()은 재능이 있었으나 나이가 짧았다. 손자에 최방언()ㆍ최방신()ㆍ최방현()과 딸로 송이석()ㆍ허평()의 처가 된 이는 맏이가 낳았고, 최방준()ㆍ최방식()과 딸로 이중욱()ㆍ김우화()의 처가 된 이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모두 약간이다.

내가 야은공()을 따랐으므로 공을 안 지 오래이다. 병자년ㆍ정축년의 난 뒤에 나는 황간()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밤낮으로 붙쫓으며 세상의 변화를 말하고 의분()에 북받쳐 탄식하였는데, 하루는 벽에 쓴 글을 가리키며, “이는 선원(, 김상용()의 호) 상국()이 의()를 택할 때의 말이다.” 하였다. 그 내용에 ‘날 저문 강 입구에 신의 힘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되어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인신()의 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현재 천지는 뒤집혀 윤상()이 없어졌다. 우리들은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다.” 하였다. 이어 야은공에게 미쳐 말하기를, “당시에 자신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수양()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아, 공과 야은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지기()라 하겠다. 지금 40년이 지나 세상의 도의는 더욱 추락하여 상국의 사당()에 오랑캐의 연호로 제를 올리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크게 한 때의 존중하는 바 되었으니, 공이 있었더라면 다시 무어라 하겠는가? 구원()은 일으킬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최방언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데 어버이 명으로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저들은 빨리 달리는데 나는 중지하였으니, 그러므로 자신은 뒤에 있고 남은 앞섰네. 행적은 비록 곤궁하였으나 마음은 형통하였으니, 이점이 바로 현명함이라네.

[네이버 지식백과] 최탁 [崔琢]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주최공 문성공 증 도승지 행 영광군수  12대조고 조고님은

   야은 선생과 친분이 있으신분이다

  우암 선생의 종형되시는 분으로 묘표를 지은신 내용을 발췌하였다

   구봉 송익필 선생   

   사계선생을  문인으로 (우암 ,사정 야은 선생이 인연이 된듯하다)

 

   은진인과의 연관관계과 오랜 친분으로 이루어 진듯하다

   사정공과  야은 송시영 선생과 인연으로

   증가선대부 행 사헌부감찰공  휘 세영  사위를 은진인 송이석님을 사위로 받아드리고,

   양정제공 미백 휘 방언 조고님이 

  우암선생의 문화생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알수가 있는 부분이다     

   

   

 

 

 

 

 

원본글 출처

송시영의 묘갈명()
저자 송시열()
본관 은진()
이명 : 야은()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63 노난시 입절 정토인() 피구인부()

 

야은공()의 장례를 치른 뒤에 신재() 문경공() 김집()이 그의 묘지명()을 썼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 송기륭()이 장차 묘소에 표석()을 세우려고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아! 공의 대절()이 태양처럼 명백하니, 사실의 기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쓰지 않을 수 없다. 삼가 살펴보니, 송씨()의 관향은 은진()인데, 그 시조는 여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조() 때 판사() 송대원()이란 분이 있었고 그 뒤 집단() 송명의()란 분은 명망과 덕행이 정 포은(, 정몽주()) 제현들과 동등하였다. 고조 송세량()은 참봉()으로 참판() 벼슬에 추증()되었고 증조 송귀수()는 봉사()로 참판() 벼슬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효도와 우애가 뛰어나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 하얀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지었던 이상한 일이 있었고, 아우 규암() 문충공() 송인수() 및 매제 동주() 성제원()과 같이 집에서 학문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곳이 ‘삼현려()’라는 호칭이 있었다. 할아버지 도사() 송응기()는 판서()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좌랑() 송방조()는 참의() 벼슬을 추증받았는데, 호는 습정()이다. 습정공이 청렴과 정도로 일세의 감복을 받았으나 폐주() 광해군() 때에 소인배들의 미움을 받은 바람에 하위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일생을 끝마쳤다. 어머니 정씨()는 감정() 정곡()의 딸인데, 만력() 무자년(, 1588년 선조 21년) 12월 2일에 공이 태어났다.

습정공이 살아 있을 때 공의 뜻을 안 사람들이 이미 감복하였고 장가를 들자 제사를 예절에 따라 받들고 편친()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하고 고장의 친척들과 의리가 있었다. 인조() 초기에 고장 사람들이 공의 여러 가지 행실을 감사()에게 추천하였다.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가 침범하자 공이 동지들을 모아 임금을 위해 싸우려고 하였다. 사계() 김 선생(, 김장생())이 공의 공로와 덕행을 추천하였다. 무진년(, 1628년 인조 6년)에 사재감 참봉()에 임명되어 봉사()ㆍ직장()을 거쳐 상의원 주부(簿)로 승진하였다가 사복시 주부(簿)로 전직하였다. 자신의 검속을 매우 엄하게 하니, 부임하는 곳마다 간사한 서리들이 움츠러들었다. 병자년(, 1636년 인조 14년)에 변방의 경보가 갑자기 이르자 공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따라 강도()로 들어갔다. 이듬해 정축년(, 1637년 인조 15년) 정월 22일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를 포위하니, 공이 동료인 죽창() 이시직()과 의논하여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여 나라에 공헌해야 한다는 의리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내 자결()하였는데, 때는 이달 23일이었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영동현() 서쪽 투숙동(宿)으로 반장()하였다.

부인 이씨()는 옛날 유명한 재상 이탁()의 증손으로 지평()에 추증()된 이여(勵)의 딸이다. 공이 죽자 슬퍼하다가 심하게 야위어 그해 10월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곁에 묻히었다. 큰아들은 바로 송기륭()이고 그 다음 2남은 모두 일찍 죽었다. 큰딸은 이석형()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이덕우()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송원석()ㆍ송광석()ㆍ송윤석()이다. 주상이 정문()을 세워 줄 것을 명하고 예관()을 보내어 조문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에게는 승정원 좌승지()의 벼슬을 추증하고 공의 아들에게는 참봉() 벼슬을 주었다. 강도의 백성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김 선원(, 김상용())ㆍ이 충숙(, 이상길()) 이하 8명을 제사지내면서 공의 신주도 몇 번째 자리에 모셨는데, 조정에서 충렬사()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또 회덕() 영동()에 사당을 건립하여 공의 신주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아! 공은 당시에 지위가 낮았고 또 오랑캐가 성안을 소탕하지 않았으므로 살려고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조그만 일신()으로 제공()들보다 앞서 의리를 취하여 천고의 강상()을 부식하였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비록 일월()과 빛을 다툰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한 줄만 알고 그렇게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공이 젊어서부터 습정공에게 가르침을 받아 의리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았기 때문에 가정 안의 행실이 매우 반듯하였는데, 고인 중에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어떻게 이를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나와 당내()의 지친으로 30년간 섬겨 오면서 보았는데, 공의 언행()은 모두 다 기록할 만하였으나 또한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또 군더더기를 덧붙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산악()처럼 드높고 일월()처럼 찬란하니, 오직 이 언덕을 천추토록 우러러보리로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영 [宋時榮]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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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

    송이석(宋彝錫) :

  1641~1694. 자는 군서(君叙)이다. 고조는 송응기(宋應期)이고, 증조는 송방조(宋邦祚)이며,

   조는 송시형(宋時瑩), 부는 송기선(宋基善)이다.   송방조와 송시열의 부친 송갑조가 형제간이므로 송시열에게는 재종손(再從孫)이 된다.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