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送崔直提學 德之

19대 조고 연촌공 휘 덕지 관련 자료

아베베1 2015. 11. 8. 16:21

 

 

 

 

       이미지 사진은 북한산 인수봉 정상부이다  

 

 

명철보신의 선비, 최덕지

'청산이 적요한데…'

 

 

 

                                            신 웅 순 (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중부대 교수)

 

   최덕지는 본관은 전주, 자는 가구이며 호는 연촌ㆍ존양이다. 아버지는 전주 완산구 교동에 한벽당(寒碧堂)을

  조성한 최담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삼사의 벼슬을 역임했다.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 제문을 준비 못해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김제군수ㆍ남원부사가 되었다가 물러난 후 영암의 영보촌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존양이라는 당호를 사용,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 남원의 주암서원, 영암의 녹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이다.

   그는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했다. 당시엔 이런 경우가 드믈었다.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청산이 적요한데 미록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를 잊을로다

벽파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겨워 하노라.

 

   청산이 고요한데 사슴과 고라니가 벗이로다. 약초에 맛을 들이니 세상의 맛을 잊겠구나. 푸른 물결로 낚싯대를 둘러메고 고기 잡는 흥취를 누르기가 어려워라.

   이 시조는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영암으로 물러가 존양이라는 당호를 짓고 생활하던 때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사를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문종이 즉위하며 그를 불렀다. 잠시 성균관 사예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으로 봉직하였는데, 늙음을 이유로 사직장을 올리고 귀향했다.

   문종 원년(1451) 겨울, 환송식은 성대했다. 하연ㆍ김종서ㆍ정인지ㆍ안지ㆍ이선제 등이 직접 참석하였거나 전별시를 보냈다. 특히 하위지ㆍ이개와 같은 젊은 학사들의 아쉬움이 매우 컸다.

   특히 성삼문은 "시종일관 의리를 다하신 선생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로세"라 했다. 유성원은 "어여쁜 사람아, 어디로 가시는가? 한 해 저물어 눈보라 휘날리지 않는가!"로 시작하는 장편시를 올리기도 했다.

   신숙주도 빠지지 않았다. 다섯 수를 연거푸 적으면서 "급류에 용퇴한 사람이 얼마나 되던고?" 하다가 부친을 회고하며 울컥하였다.

   "선친과는 일찍이 상투 틀면서부터 노니셨는데, 지금 한 분은 아니 계시고 한 분은 떠나가신다니 두 줄기 눈물이 주룩주룩."

   박팽년이 갈무리하였다. "지금 선생의 귀향에 즈음하여 왜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칭송하는가? 인심을 감동시키는 중망이 조정에 있지 않고 전리(田里)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인심이 조정을 떠나겠는가라고 물었다.

   때는 바야흐로 문종은 병이 이미 깊고 세자는 어리며, 수양대군이 은근히 위세를 드러내던 참이었다.(「조선일보」,'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최덕지' 2011.05.16)

   사실 그는 정국이 소용돌이 칠 것을 예견하고 나이를 핑계 삼아 영암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에 연루되지 않고 몸과 이름을 보전할 수 있었다. 명철보신의 지혜로운 분이었다.

 

『월간서예』(서예문화원,2012.3),158-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