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예절/언행록 (2)

강론하여 분변함

아베베1 2010. 2. 18. 23:30

언행록 2
 유편(類編)
강론하여 분변함


선생은, 학자와 더불어 강론하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면,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지 않고, 반드시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하였다. 그래서 비록 장구(章句)에 대한 비속한 선비의 말이라도 유의하여 듣고 마음을 비워 이해하였으며, 또 거듭거듭 참고하고 고쳐서 끝내 바른 곳으로 귀결된 뒤에야 그만두었다. 변론할 때에는 기운이 부드럽고 말은 온화하며, 이치가 밝고 뜻이 올바라서, 비록 여러 가지 의견이 다투어 일어나더라도 조금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천천히 한마디로 조리를 따져 해석하였다. 그러나 꼭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 않고,
“내 소견은 이러한데 어떠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남과 변론할 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자기의 의견이 혹시 미흡하지나 않은가 하여 자기의 선입견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남과 자기 소견을 구별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이리저리 따지되, 의리에 비추어 보고 옛 책을 참고하였다. 자기 말이 이치에 맞으나 이의가 있으면, 다시 변론해서 기어이 상대의 의혹을 풀어 주었고, 자기의 전일 소견에 혹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자기의 견해를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복종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줄 모르는 것이 학자의 큰 병폐이다. 천하의 의리란 한량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혹 무엇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하찮고 쉬운 말이라도 한동안 생각한 뒤에 대답을 했으며, 그 즉시 대답한 적이 없었다. -김성일-
남과 논변할 때,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대번에
“옳지 않다.”
하지 않고, 다만
“아마 의리상으로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할 뿐이었다. -우성전-
병인년(1566, 명종21) 봄에 성일(誠一)이 계남(溪南)의 서재에 있을 때 유지(有旨)로 임금의 부름을 받으셨다. 선생이 이르기를,
“너는 돌아가거라. 내가 지금 병으로 사양하고 있으면서 어찌 감히 남에게 강론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성일-
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 선생의 제자)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리군서(性理群書)》의 주에 잘못된 곳이 많이 있어서 선생에게 고쳐 주시기를 청했는데, 선생은 여가가 없다고 겸양해서 말씀하셨다.”
하였다. -김성일-
어느 날 ‘홍범(洪範)’과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런 것은 모름지기 고요한 중에 마음을 가라앉혀서 보아야 겨우 그 뜻을 알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이 《논어》를 강의하다가 이덕홍에게 가르치시기를,
“사상채(謝上蔡)가 서죽 목림장(西竹木林場) 감독으로 있을 때, 주진(朱震) 자발(子發)이 태학(太學)으로부터 그 아우 자권(子權)과 함께 가서 뵈었다. 자리를 정해 앉은 뒤 자발이 나아가 ‘선생을 뵈옵고자 한 지가 오래이온데, 막상 와서 뵈오니 무엇을 여쭈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말씀으로 가르치려 하십니까?’ 하였다. 사(謝) 선생이 이르기를,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만났으니 《논어》를 강하리라.’ 했다. 자발이 혼자 생각하기를, ‘해가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 강론을 친히 들을 수 있을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반주가 다섯 순배 돌 때까지 그저 다른 이야기만 하다가, 차를 다 마신 뒤에 수염을 나부끼면서 이르기를, ‘《논어》 1부(部)를 들어 보라.’ 하고는 먼저 ‘공자(孔子)가, 상복을 입은 자나 관(冠)을 쓰고 의복을 갖춘 자나 장님을 보면, 비록 젊더라도 반드시 일어나고,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종종걸음을 걸으셨다. 또 소경인 악사(樂師) 면(冕)이 찾아 뵈올 때에 섬돌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뜰이다」하고, 자리에 오면 「자리다」하였으며, 다 앉고나면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다.」라고 하셨다. 자장(子張)이 묻기를, 「악사와 더불어 말하는 도리가 이렇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이 진실로 악사를 돕는 도리이다.」하였다. 대개 성인의 도는 미현(微顯)도 없으며, 내외(內外)도 없고 집 안을 청소하고 어른 말씀에 응대하며 예절에 따라 진퇴하는 일상적인 일로부터, 위로는 하늘의 도까지 통달하여서 근본과 끝을 하나로 꿰는 것이다. 《논어》 1부를 다만 이렇게 볼 뿐이다. 이상은 상채(上蔡)의 말이다.’ 하였다. 이제 모름지기 이렇게 읽은 뒤에라야 비로소 《논어》의 뜻을 알고, 성인의 도(道)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이 가르침을 받들어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더욱 가르침을 청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향당편(鄕黨篇)은 다 위의 2장(章)과 같은 류이다. 성인의 길은 밝고 밝아서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니, 오직 이 책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모두 마땅히 이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논어》에 사문(師門)의 언행이나 제자들의 문답은 다 기록하지 못하여 《가어(家語)》나 《예기》에 여기저기 보이는데 그 말이 때때로 서로 다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사문의 말이나 행동은 한 사람이 다 듣고 볼 수 없는 것이요, 제자의 문답도 또한 그러하다. 당시의 기록이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 어떻게 그것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가어》는 후세 사람이 지어내 당대의 것이라고 칭탁한 듯하고, 《예기》 역시 한유(漢儒)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서로 차이가 없기를 바랄 것인가.”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이것은 선생이 조카 이교(李㝯)의 물음에 대하여 풀이한 것이다.-
‘늙은이를 편안히 한다.[老者安之]’는 주(註)에, 정자(程子)가 말굴레와 말고삐로 비유한 의미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말 머리의 형상은 스스로 굴레나 고삐를 받을 만한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 모양을 따라 굴레나 고삐를 만들어 씌우고 몰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늙은이는 스스로 편하게 모셔야 될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그 이치를 따라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고, 젊은이는 스스로 품어 주어야 될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성인이 그 이치를 따라 품어 준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해서 《논어》와 《중용》의 주된 의미가 서로 다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중용》은 덕을 닦고 도를 이룸을 논하여, 마음을 보전함을 주로 하기 때문에 ‘온고(溫故)’에 중점을 두었고, 《논어》는 스승을 삼을 만한 것을 논하여, 도(道)를 아는 것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지신(知新)’에다 중점을 두었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삼가(三家 맹손ㆍ숙손ㆍ계손씨)가 옹(雍 천자의 묘정에 쓰는 노래)으로 제사를 물릴 때, 남용(南容)이 그 제사에 참예하면서도 왜 간(諫)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남용이 간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설사 간해서 말리지 못하더라도 그 제사에 참예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부형을 섬기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자기로써 물(物)에 미치는 것[以己及物]과 자기로 미루어 물(物)에 미치는 것[推己及物]이 어째서 인(仁)과 서(恕)의 구별이 됩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자기에게 본래 있는 것으로써 저절로 물에 미치기 때문에 인이 되는 것이요,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남에게 미치고자 하기 때문에 서(恕)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학문에 뜻을 두는 것과 도에 뜻을 두는 것과 인에 뜻 두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어렵고 어느 것이 쉬우며, 어느 것이 얕고 어느 것이 깊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나, 도에 뜻을 둔다는 것은 벌써 따를 바를 이미 선택한 것이요, 인에 뜻을 둔다는 것은 더 한층 친절한 것이다. 대개는 이와 같지만, 그러나 또한 그 사람의 공부하는 노력이 미치느냐 미치지 못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꼭 정해 놓고 어느 것은 어렵고 어느 것은 쉬우며, 어느 것은 깊고 어느 것은 얕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공자가 어떤 때는 ‘인에 뜻을 둔다.’라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도에 뜻을 두고 인에 의지한다.’라고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느 말이든 각각 모두 타당한 바가 있는 것이니, 어떻게 저기서 ‘인에 뜻을 둔다.’라고 말하였다 해서 여기서 다시 ‘도에 뜻을 둔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자꾸 되풀이하면 한없이 의심이 생길 것이니, 언제나 시원스럽게 탁 트여 깨닫게 되는 경지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임금으로 세워야 합니까, 세우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주자는, 이천(伊川)이 숙제를 세우고자 한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했다. 마땅히 백이를 세워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또 스스로 말하기를, ‘두 사람을 세우는 것은 모두 편안치 않지만, 정리(正理)로 논한다면 백이가 좀 낫다.’ 하였으니, 이것은 주자도 역시 백이를 세우는 것을 꼭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딱 잘라서 누구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는가. 다만 두 사람이 양보한 것을 잘했다고 할 뿐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네 가지를 끊는다[絶四]는 그 넷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해로우며, 어찌해서 《대학》 성의장(誠意章)의 일을 《논어》 사물장(四勿章)과 합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네 가지는 순환하여 서로 처음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이므로, 해로우면 모두가 해로운 것이니, 어찌 하나만 가리켜 가장 해롭다 하겠는가. 합쳐서 고찰하라고 한 것은, 성의장의 일은, 그 뜻에서 일어날 때 이를 끊을 수 있으면, 그 뜻을 참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네 가지를 끊으면 자기를 이김이 되는 것이니, 자기를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네 가지를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장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음미하면 그 뜻이 모두 정밀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회(回)가 ‘어떻게 감히 죽겠습니까.’ 하였는데, 공자가 살아 계신다면 비록 곤욕을 당하더라도 안회(顔回)는 죽을수 없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공자가 살아 계셨다면 죽었을 리가 없다. 다만 살아서 죽음을 면하는 것과 위태함을 보고 목숨을 바친다는 것에 있어서, 또한 마땅히 그 삶[生]과 의리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하여 결정해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공자가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만일 저 광(匡) 땅의 사람들이 폭력과 모욕을 가하여 기어이 굴복시켜 그들의 난폭에 따르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삶을 탐내어 구차스럽게 죽기를 면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부(富)가 교육보다 앞선다고도 하고 믿음이 먹는 일보다 중하다고도 함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부가 교육보다 앞선다는 것은 평시에 있어서 부와 교육의 선후관계를 말한 것이요, 믿음이 먹는 일보다 중하다는 것은 변란을 당하여 이에 대처하는 순서의 완급을 말한 것이다. 대개 부가 없으면 교육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부가 앞선다 했고, 믿음이 없으면 백성이 서지 않기 때문에 먹는 일을 버린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뜻이 있구나, 경쇠를 침이여.’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경쇠 소리를 듣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느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공자가 경쇠를 치면서도 천하를 잊어버리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이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그 마음을 알았으니, 어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다.’라고 한 것도, 천하를 잊지 않는다는 그 점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만약 경쇠 소리에 원망의 뜻이 있었다면 어떻게 공자가 될 것이며, 만일 원망이 없는데 이 사람이 원망이 있다고 들었다면 그는 일개 망녕된 사람일 뿐이니, 무엇 때문에 그 말을 적어 뒷세상에 전했겠느냐.”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을 때에 양식이 끊어졌었다는 일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 여러 나라에서는 유사(游士)를 대접하는 도가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나그네를 대접하는 차림이 있었으며, 경대부도 또한 외국의 나그네를 돌보아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허다한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가고 머물기를 뜻대로 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자기가 공급하고 자기가 운반해야 했을 터이니, 어떻게 계속 댈 수가 있었겠는가. 한(漢)나라 때의 조서(詔書)에 ‘공자가 일개 필부로서 능히 3천 제자를 길렀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자(朱子)는 이것을 망녕된 말이라 했으니, 이로써도 알 수 있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또 예를 모르면 설 수 없다고 하였으니, 믿음과 예 중 어느 것이 중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때에 임하여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지킬 때는 믿음이 중하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가 중한 것이다. 믿음과 예는 중히 여기는 것이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서게 되는 까닭도 또한 다른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것은, 백성이 세상에서 서지 못하여 나라도 또한 설 수 없음을 말한 것이요, 예를 모르면 설 수 없다는 것은 이목(耳目)과 수족(手足)을 둘 곳이 없어서 몸이 설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근세에 와서 《중용》의 첫머리 세 구절을 체용(體用)ㆍ중화(中和)ㆍ비은(費隱)과 지(智)ㆍ인(仁)ㆍ용(勇)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이 세 구절을 《대학》의 강령에 나누어 배정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 몇 학설을 지금 사람들은 모두 삼가 지켜서 다른 말이 없다. 그러나 성(性)을 체(體)ㆍ중(中)ㆍ은(隱)으로 삼고, 도(道)를 용(用)ㆍ화(和)ㆍ비(費)로 삼고, 교(敎)를 또한 용과 비로 삼는다면 그렇다 하겠다. 그러나 지ㆍ인ㆍ용은 덕행의 이름인데, 어떻게 억지로 여기에다 끌어 붙일 수 있겠는가. 성은 그 심(心)을 단속할 줄 모르고, 인(仁)은 수행(修行)에 속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인을 성에다 짝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자는 ‘솔(率)이란 것은 사람이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물(物)이 제각기 자연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智)는 지(知)에 속하는 것으로, 곧 중용의 일을 가린 것이니, 그렇다면 지를 도에 짝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그리고 교(敎)를 지(智)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것이 물(物)을 이루는 지(智)와 가깝기는 하지만, 그것(지(智))은 자기를 이루는 인[成己之仁]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 뜻과는 같지 않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의 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뜻이 아닌데, 또 어떻게 쉬지 않는 것[不息]에 용(勇)이라는 뜻이 있다 하겠는가. 또 이 세 가지를 《대학》의 세 강령에 짝하는 것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성(性)을 명덕(明德)으로 삼는 것은 비록 근사하기는 하나, 성(性)이란 사람이나 물(物)이 받은 바 다 같이 근본이 되는 그윽한 이치요, 명덕은 사람이 얻은 바 신령하고 밝은 것을 포함한 이름을 가리킨 것이니, 이치는 비록 본래부터 같지마는 이름을 얻은 경위로 보면 조금 다른 바가 없지 않다. ‘성을 따른다.[率性]’라는 것은 덕을 밝히는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요, ‘도를 닦는 교[修道之敎]’라는 것도 또한 새롭게 하는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성(性)ㆍ도(道)ㆍ교(敎)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모두 일반적인 의리의 이름이니, ‘지선(至善)에 그친다.’라든가, 그 ‘극(極)한 것으로 쓰이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과는 그 뜻이 또한 같지 않은 것이다.
또 존양(存養)을 인(仁)으로 삼고, 성찰(省察)을 지(智)로 삼고, 세 가지에 대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용(勇)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옳다. 그러나 자사(子思)의 본뜻은 여기에 있어서 세 가지 달덕(達德)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개 의리는 같은 한 근원의 것이므로, 만일 그 어렴풋하게 근사한 것을 가지고 서로 합쳐서 하나라고 말한다면, 어느 것이 합치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말을 세운 본뜻과 글 뜻의 취지는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어서, 터럭만큼의 미세함에도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억지로 다른 것을 맞추어 같은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꼬치꼬치 캐면 캘수록 더욱 어긋나서, 도리어 큰 뜻을 잃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첫머리의 세 구절을 하늘의 도리로 삼고,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을 사람의 도리로 삼는데, 여기에 있어서 하늘의 도리와 사람의 도리를 나누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중용석의(中庸釋義)-
심(心)ㆍ의(意)ㆍ지(志)의 세 가지를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논하는 것이 모두 성기고 거칠어 합당하지 않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원래 한 가지 일을 주로 하여 발한 것임은 사실이나,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자세히 익히고 음미해 보면, 이 네 가지는 서로 바뀌어 용(用)이 되는 것이다. 만정순(萬正淳)이 이른바, ‘네 가지 덕은 서로 떠난 적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차례차례로 층층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람이 혼자 말없이 연구해 아는 데 달려 있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라건대, 비언(棐彥 이국필(李國弼)의 자)은 거친 소견으로 바삐 주장만을 세워서 버티어 가려고 하지 말고, 우선 《성리대전》이나 정주(程朱) 여러 선생의 심(心)ㆍ의(意)ㆍ지(志)와 인ㆍ의ㆍ예ㆍ지에 대한 이론에 대해 잡념을 버리고 익히고, 몸소 정밀하게 체득하라.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참됨이 쌓이고 이치가 풀리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가령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심신이 아득하여, 취한 것도 같고 진흙 속에 빠진 것도 같아서, 옳고 그른 것이 한데 뒤섞입니다. 만일 있는 대로 힘을 써서 간절히 생각하면, 비록 혹 될 수도 있으나 마음은 도리어 걱정스럽고 불안하니, 이래서는 실로 스스로 얻은 것이 못 됩니다. 그럴 때는 그만 한쪽에 던져 두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너무 급박하게 생각해서 기어코 얻으려고 하면 병통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무진년(1568, 선조1) 10월 4일에 임금을 모시고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글에 임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맹자가 성인의 덕을 칭찬하기를, ‘그가 지나간 곳마다 사람들이 교화되고, 그가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신묘하다.’ 하였습니다. 성인의 덕은 그가 거치는 곳을 따라서 교화되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속에 보전하여 주장삼는 것은 곧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 장에 조씨(晁氏)의 주(註)가 있다. 조씨는 맹자를 비방한 사람인데, 지식은 부족하나 그 말은 취할 만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범인(凡人)이 본성을 받아 태어날 때 분수(分數)가 부족하면, 비록 통하는 곳도 있지만 또한 막히는 곳도 있는 것입니다. 조씨로 말하자면 문장(文章)을 한 선비이고 성현의 학문은 모르기 때문에, 그가 맹자(孟子)를 비방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논한 것 중에 옳은 것은 주자가 취해서 책에 실었으니, 이것은 사람 때문에 그 말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소식(蘇軾)은 극력 정자(程子)를 비방하였고, 그 심술(心術)에 바르지 못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곧 이단이라고 배척하였지만, 그 말 중에 옳은 것은 곧 집주(集註)에 취해 넣었으니, 대현(大賢)의 마음이 공평정대함은, 그 사람을 배척한다 하여 그 말 중에 좋은 것까지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씨의 말을 취한 것은 바로 소씨의 말을 취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였다. -김성일-
륭(隆)이 묻기를,
“‘태극성정지묘(太極性情之妙)’에 어찌하여 ‘묘(妙)’라고 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묘(妙) 자는, 지극히 묘해서 형용하기 어렵고 이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성(性)에도 이치가 있고 정(情)에도 또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태극성정지묘’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미발(未發)은 성이요, 이발(已發)은 정입니까?”
하니, 이르기를,
“물에 비유한다면 괴어 있는 것은 성(性)이 되고, 흐르는 것은 정(情)이 된다. 괴어 있는 물이 나가서 흘러가고, 흘러간 것이 자연히 괴게 되니, 괴인 물과 흐르는 물이 어찌 둘이겠는가.”
하였다. -김륭(金隆)-
《통서(通書)》 ‘성지복(誠之復)’의 주(註)에 ‘자기에 간직한다.[藏於己]’는 뜻을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건도(乾道)의 변화는 하늘을 주(主)로 해서 말한 것이니, 곧 ‘잇는 것이 선(善)이다.’라고 한 그것이요, ‘제각기 성명(性命)을 바로잡는다.’라는 것은 물(物)을 주로 해서 말한 것이니, 곧 ‘이루는 것이 성(性)이다.’라고 한 그것이다. 하늘이 물(物)에 주는 것을 주로 하여 말하기 때문에 물(物)이라 하고, 물이 하늘에서 받는 것을 주로 해서 말하기 때문에 ‘기(己)’라고 한 것이니, 기(己)는 곧 위에서 말한 바, ‘물이 두 물(物)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김륭-
묻기를,
“《통서》에 ‘소인(小人)은 날마다 걱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소인은 스스로 속이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 우(憂) 자는 평생을 걱정한다는 우 자가 아니다. 소인은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쳐서 무엇이든 만족하게 여겨 자만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근심이다. ‘우’ 자를 ‘충연자득(充然自得)’이라는 글자와 비교해 보면, 그 뜻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괴롭다.[心勞]’라든가 ‘날마다 쾌활하지 못하다.[日拙]’ 등의 말과 같은 따위이다.”
하였다. -김륭-
묻기를,
“《통서》에 ‘본성대로 하고 편안히 하는 것을 성인(聖人)이라 한다.[性焉安焉之謂聖]’라고 하고, 그 해석에 ‘성(性)이란 것은 홀로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라고 하니,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천성은 본래부터 사람이 다 같이 얻은 바이지만, 오직 성인은 맑고 밝으며 완전히 갖추어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으니, 그것이 곧 하늘에서 홀로 얻었다는 것이다.”
하였다. -김륭-
선생이 이르기를,
“의(意)라는 것은 사사로운 지혜가 가만히 행하여 일을 계획하면서 오락가락하는 그것이요, 지(志)라는 것은 한 길로 바르게 가는 그것이요, 여(慮)라는 것은 대동(對同)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라고 한 회암(晦庵)의 이 세 학설은 가장 좋은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貳)를 이(二)로 하지 말고, 삼(參)을 삼(三)으로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二)와 이(貳), 삼(參)과 삼(三)은 뜻이 어떻게 다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二)와 삼(三)은 이루어진 수요, 이(貳)와 삼(參)은 그 수를 이루어 주는 이름이다. 《주역》에는 ‘삼천양지(參天兩地)’라고 했고, 《예기》에는 ‘이좌이립(離坐離立)해서 삼(參)에 가지 말라.’라고 했고, 《논어》에는 ‘이과(貳過)를 하지 말라.’라고 했으니, 이 삼(參)과 이(貳)도 또한 이 뜻이다.”
하였다. -김성일-
이덕홍이 〈관서(觀書)〉란 시 한 수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반묘방당일감개(半畝方塘一鑑開)’는 마음 전체가 말갛게 비고 밝은 그 기상을 말한 것이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는 고요하면서도 사물에 감응하여 남김없이 물마다 다 비춘다는 뜻이다. ‘문거나득청여허(問渠那得淸如許)’는 어떻게 이렇게 맑은 본체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말한 것이요,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주D-001]네 …… 끊는다 : 《논어》에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는데, 급[意]함이 없고 필(必)함이 없으니, 고(固)함이 없고 아(我)가 없다.” 하였다. 《논어》에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가르치기를,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거든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거든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 하였다. 물(勿) 자가 넷이다.
[주D-002]유사(游士) :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주를 만나 포부를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3]세 구절 :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ㆍ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ㆍ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이다.
[주D-004]세 가지 달덕(達德) : 지(智), 인(仁), 용(勇)을 말한다.
[주D-005]만정순(萬正淳) : 정순(正淳)은 송나라 때의 학자 만인걸(萬人傑)의 자이다. 처음에 육구령(陸九齡)에게 배우다가 육구연(陸九淵)에게 종유하였으며, 나중에 주희를 만난 뒤 다시 주자학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