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예절/언행록 (2)

퇴계 이황 언행록 차기 제자 목록(言行錄箚記諸子目錄 (펌)

아베베1 2010. 7. 24. 20:23

 

 

   퇴계 이황 선생님의 추모서원인 덕곡서원 경남 의령군 의령읍 덕곡리 입구에 위치한다

    퇴계선생님은 처가가 의령군 가례면이시고 암각화 嘉禮洞天 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당시 의령현감이던

   함안인 조종도의 주도로 건립된 서원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서원 이다

   퇴계 선생님은 본관인 (진성 진보) 이씨이시고 칠곡면 도산(陶山)의 지명이  안동의 도산서원과의 연관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는   추론 등이 전해오기도 한다 .        

 

언행록 차기 제자 목록

)


조목(趙穆) 자(字)는 사경(士敬), 호(號)는 월천(月川), 횡성인(橫城人), 예안(禮安)에 살다.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耻齋), 남양인(南陽人), 한성(漢城)에 살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 나주인(羅州人), 회덕(懷德)에 살다.
구봉령(具鳳齡)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栢潭), 능주인(綾州人), 안동(安東)에 살다.
김부륜(金富倫) 자는 순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광주인(光州人), 예안에 살다.
권호문(權好文)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岩), 안동인, 안동에 살다.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 동래인(東萊人), 안동에 살다.
김명일(金明一) 자는 언순(彥純), 호는 운암(雲巖), 의성인(義城人), 안동에 살다.
문위세(文緯世) 자는 숙장(叔章), 호는 풍암(楓庵), 남평인(南平人), 장흥(長興)에 살다.
이이(李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공(文成公), 덕수인(德水人), 한성에 살다.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의성인(義城人), 안동에 살다.
유운룡(柳雲龍)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巖), 풍산인(豐山人), 안동에 살다.
김우옹(金宇顒)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시호는 문정공(文貞公), 의성인, 성주(星州)에 살다.
오운(吳澐) 자는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牑), 고창인(高敞人), 영천(榮川)에 살다.
이덕홍(李德弘)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영천인(永川人), 예안에 살다.
이안도(李安道) 자는 봉원(逢原), 호는 몽재(蒙齋), 선생의 손자이다.
우성전(禹性傳)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 단양인(丹陽人), 한성에 살다.
정구(鄭逑)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공(文穆公), 청주인(淸州人), 성주에 살다.
정사성(鄭士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헌(芝軒), 청주인(淸州人), 안동에 살다.
김수(金睟)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공(昭懿公), 안동인, 한성에 살다.
조진(趙振) 자는 기백(起伯), 한양인(漢陽人), 한성에 살다.
김륭(金隆)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庵), 함창인(咸昌人), 영천에 살다.
유희춘(柳希春)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인(□□人), 해남(海南)에 살다.
이국필(李國弼) 자는 비언(棐彥), □□인(□□人), 한성에 살다.
구사맹(具思孟)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시호는 문의공(文懿公), 능주인(綾州人), □□에 살다.
〈가서(家書)〉 선생이 자제를 훈계한 글이다. 이 이하는 따로 문목(問目)을 세우기가 어려워, 우선 여기 실어 보인다.
《당후일기(堂后日記)》 정원(政院)의 주서(注書)들이 번갈아 입시하여 등대(登對)했을 때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천사(天使)에게 회답한 편지 선생이 명(明)의 사신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에게 대답한 글이다.
《논어강록(論語講錄)》 선생이 지으신 《사서석의(四書釋義)》에서 나왔다.
〈중용석의(中庸釋義)〉 선생이 지으신 《사서석의》에서 나왔다.

언행록 1
 유편(類編)
학문(學問)


선생은 12세 때에 그의 숙부 송재(松齋) 선생 이름은 우(堣), 자는 명중(明仲) 에게 《논어》를 배웠다. 하루는 《논어》 가운데 이덕홍(李德弘)의 기록에는 자장편(子張篇)이라 되어 있다. 이(理) 자에 대해 묻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 하였다. 송재 선생은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 뜻을 아는구나.”
하였다. -이안도(李安道)-
선생께서,
“숙부 송재공은 학문을 권면하는 데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집주(集註)》까지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이 없었으나 그래도 칭찬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힘이다.”
하였다. -김성일(金誠一)-
선생께서 젊었을 때 우연히 연곡(燕谷) 온계(溫溪)에 가까운 마을 이름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연곡에는 조그마한 못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았다. 선생께서 시를 지었는데,
고운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 露草夭夭繞水涯
고요한 맑은 못에는 티끌도 없네 /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야 제맘대로이나 / 雲飛鳥過元相管
단지 때때로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려워라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이것은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데 혹시 인욕(人欲)이 낄까 두려워한 것이다. 김성일도 이 시를 기록하면서 “이것은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와 그 뜻이 같다.”라고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선생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19세 때에 처음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全)》 첫 권과 끝 권을 얻어 읽어 보았더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하여, 읽고 생각하기를 오래하니,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어서 비로소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듯하였다.”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선생이 일찍이,
“내가 젊었을 때 이 학문에 뜻을 두어,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마침내 고질병을 얻어서 마침내 병들어 못쓰게 된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몸을 살피고 체험하여, 마음이 방종하여 빗나가지 않게 하면 될 것이다. 굳이 나처럼 하여 병까지 나게 할 필요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일찍이,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의 뜻을 깨우쳐 줄 만한 스승이나 벗이 없어서, 장장 수십 년 동안이나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헛되게 심사만 낭비하면서 탐구를 그만두지 않고 때로는 눕지도 않고 고요히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다가 마침내 심병(心病)을 얻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참된 스승이나 벗을 만나, 미로(迷路)에서 길을 지시받았더라면, 어찌 심력(心力)을 헛되이 써서 늙도록 아무 소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이것은 겸손한 말이지만 그의 학문이 스승과 벗의 힘을 입지 않고 초연히 혼자서 터득한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김성일-
일찍이 선생이 학자들에게,
“내가 젊어서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중간에 심병을 얻어 거의 공부를 폐하다시피 했다. 만년에 다시 깨달아 이 큰일을 마치려고 해 보았지만, 혈기는 이미 쇠하여졌고, 뜻과 생각은 이미 힘써 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였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遊學)하였다. 그때는 처음으로 기묘사화를 겪은 때이라, 사람들은 모두 도학(道學)을 꺼리고 날마다 실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만은 홀로 점잖게 몸을 가져서 동정(動靜)이나 언행이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선생이 사귀는 이는 오직 인후(麟厚) 김하서(金河西 자는 후지(厚之)) 한 사람뿐이었다.
선생이 일찍이 상사(上舍) 황씨(黃氏)를 찾아가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보았는데, 그 주석은 모두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어록(語錄)이어서 다른 이는 보고 구두점(句讀點)조차 떼지 못했다. 선생은 그것을 가지고 여러 달을 들어앉아서 침잠하여 반복한 결과 저절로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모르는 곳이 있더라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미루어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들춰내어 마음을 비우고 반복하여 음미하다 보면 끝내는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이덕홍-
선생은,
“나는 《심경(心經)》을 얻고나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처럼 믿었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내가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공부를 한 학문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현명한 스승이나 벗을 만나 어렵고 의혹되는 것을 질문하고 토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대해서 확실한 소견을 가지지 못하였고,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갑자기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더욱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 감히 그 문장(門墻)의 깊고 그윽한 곳이야 엿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선생은,
“내 비록 늙고 아는 것이 없지만, 다만 젊어서부터 성현의 말씀을 독실히 믿어, 남들의 평가나 영욕(榮辱)에 구애되지 않았고, 또한 색다른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괴상하게 보이게 하지도 않았다. 만일 학문을 하는 자가 남의 평가나 영욕을 두려워한다면 홀로 설 수가 없을 것이요, 또 안으로 공부한 것은 없이 색다른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괴상하게 보이게 한다면, 또한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확고하고 굳세어야 비로소 그에 근거하여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경(敬)과 의(義)를 양쪽에 끼고 지(知)와 행(行)을 아울러 추진하며, 안팎이 하나 같고 본말(本末)을 겸비하여 큰 근원을 훤히 보고 큰 근본을 굳게 세웠으니, 만일 그 지극한 정도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東方)에 한 사람뿐일 것이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연세가 점점 많아지고 병은 깊어 갔지만, 학문을 진전시키는 데에 더욱 힘쓰고, 도(道)를 지키기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엄숙하고 공경하며 본성을 배양하는 공부는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일수록 더욱 엄격히 하였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을 쓰고 옷을 입고는 온종일 책을 보거나, 혹은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항상 그 마음 살피기를 해가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김성일-
신유년(1561, 명종16) 겨울에 선생은 도산(陶山) 완락재(玩樂齋)에서 거처하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어떤 글을 한 차례 엄숙하게 외웠는데, 자세히 들어 봤더니, 《심경부주(心經附註)》였다. -김성일-
“잠언(箴言)이나 경구(警句)를 써서 자리 옆에 걸어 두고, 항상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옛날 사람은 대야나 식기, 책상이나 지팡이에 모두 명(銘)이 있었다. 그러나 다만 마음에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실제가 없다면, 잠언을 써 벽에 가득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문을 하려면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처럼 ‘낮에는 하는 일이 있고, 밤에는 터득하는 바가 있으며,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눈 깜짝이는 사이에도 보존하는 바가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배양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과 같이 한다면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여서 방일(放逸)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굳이 자리 옆에 써 걸어 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주자(朱子)는 항상 학자들에게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 힘쓰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이하고 명백한 곳이란 곧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과 같이 날마다 보통 하는 일을 말한 것입니까?”
하고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그렇다. 공자(孔子)가 번지(樊遲)에게 이르기를, ‘거처할 때는 공손히 하고, 일을 할 때는 공경히 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충실하게 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평이하고 명백한 곳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학자가 도(道)로 들어가는 문을 알고자 한다면, 《주자대전》 가운데서 찾으면 쉽게 힘쓸 곳을 찾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은 《심경(心經)》을 가장 사랑하여, 정황돈(程篁墩)의 글에다 후론(後論)을 붙이면서 허노재(許魯齋)의 신명(神明)부모의 비유도 인용하였다. 따라서 서산(西山) 이후로는 오직 선생만이 이 책의 의미를 깊이 알았다 할 것이요, 서산의 입장에서도 후세의 자운(子雲)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구(鄭逑)는 또 서사원(徐思遠)에게 답한 편지에서, “《심경질의(心經質疑)》는 처음에 선생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때의 제자가 개인적으로 기록해서 세상에 전파된 것이므로, 필시 조금도 미진한 부분이 없이 형연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글머리에 옮겨 적어 엄연히 올린다면 선생의 본의가 아닐까 두렵다.” 하였다. -정구-


[주D-001]집주(集註) : 《논어집주(論語集註)》는 주희(朱熹)가 《논어》를 주석한 것인데, 여러 사람의 해석을 모은 것이므로 집주라 한다.
[주D-002]문장(門墻) :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나의 문(門)과 담[墻]은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들여다 볼 수 있지마는, 부자(夫子 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하였다.《論語 子張》
[주D-003]정황돈(程篁墩) :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이다. 육구연(陸九淵)의 학파로, 이름은 민정(敏政)이고 황돈은 호이다.
[주D-004]허노재(許魯齋)의 …… 비유 : 노재는 원나라 때 학자인 허형(許衡)의 호이다. 허노재(許魯齋)가 《소학(小學)》을, “신명처럼 부모처럼 받든다.[信之如神明 奉之如父母]”라 하였다.
[주D-005]서산(西山) :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덕수(眞德秀)를 말하며, 성현들의 심론(心論)을 모아 《심경(心經)》을 지었다.
[주D-006]자운(子雲) :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인 양웅(揚雄)을 말한다. 공자의 《논어》를 본떠 《법언(法言)》을 지었고 《주역》을 본떠 《태현경(太玄經)》을 저술(著述)하였다. 혹자가 보고 말하기를, “자네가 힘들여 저술하여도 후에 볼 사람이 없고, 장독이나 덮을 것이다.” 하자, 양웅은 답하기를,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또 있을 것일세.” 하였으니, 곧 후세에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7]서사원(徐思遠) : 호는 미락재(彌樂齋)ㆍ낙재(樂齋)이고, 정구의 문인이다.


 

 

  퇴계 이황선생님의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