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예절/언행록 (2)

퇴계 이황 선생의 가정생활 검약(儉約), 조상섬김, 가훈(家訓)

아베베1 2010. 2. 18. 23:35

유편(類編)
가정생활 검약(儉約) 을 붙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뜻에 순종해서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하는 바가 높고 깨끗해서 세상과 합하지 않는 것을 살피고, 일찍이 말하기를,
“너의 벼슬은 주(州)나 현(縣)이 마땅하니 높은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궁하게 살았는데, 선생이 과거를 본 것도 사실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마침 장인의 죄로 말미암아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생은 항상 〈육아(蓼莪)〉〈풍수(風樹)〉의 슬픔을 품고 있어서, 제자들의 이야기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 미치면 반드시 슬퍼하면서 자기를 죄인이라 일컬었다. -김성일-
벼슬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했으나, 김안로의 방해로 마침내 한 고을도 얻지 못했으니, 평생에 원통한 일이었다. -이안도-
선생은 생일날 아침을 만날 때면 자제들이 술잔 올리는 것을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에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차마 이것을 받겠느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다섯째 형인 찰방공 이름은 징(澄) 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자제들과 제자들이 그것을 빙자하여 간단히 술상을 차리면, 또한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김부륜-
가법은 매우 엄하고 집안은 화목하였다.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구차한 일가들을 구원하는 데 그 힘을 다했다. -정유일-
집안사람에게는 엄숙함으로써 다스리고 사랑으로써 기르며, 하인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지고 위엄으로써 제어하며, 안팎과 위아래의 의복과 음식은 제각기 그 분에 맞도록 하였고, 자제들과 아이ㆍ어른을 가르치고 경계함은 제각기 그 자질에 따라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에는 본처를 박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부간의 정의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서로 도로써 대하여 부부의 예를 잃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였다. -김부륜-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아비와 자식 간에 밥솥이 달리한다는 것은 본래부터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나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거처할 곳이 없으니, 부득이한 형편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옛날 사람은 아비와 자식 간에 비록 재물은 달리하지 않으나 한곳에서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동궁이니 서궁이니 남궁이니 북궁이니 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곳에 살면서 재물을 달리하는 것보다는, 따로 살면서도 오히려 한 살림살이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집안 편지-
종들을 함부로 꾸짖는 일을 보지 못했으니, 만일 그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가만히 타이르기를,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하고는, 말이나 기색을 변한 일이 없었다. -우성전-
묻기를,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다만 내 성의를 다해서 상대를 감동하게 해야만 비로소 의리가 상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성의가 미덥지 않고 한갓 말로만 바로 꾸짖으면, 대개는 그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형제간에 이이(怡怡 서로 온화하고 화기가 있는 모양)하라.’ 했으니, 진실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혹시 찰방공이 집으로 찾아오면 문밖까지 나가 맞아들이면서 한자리에 차례를 따라 앉으며 부드럽고 조심하는 모양이 밖으로 풍기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기게 하였다. -김성일-
찰방공이 문에 들어올 적에는 항상 선생에게 사양하였다. 선생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굽히고 서서 말하기를,
“어찌 황송하게 이처럼 하십니까.”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사람은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드나들 때에는 부축해 드리고, 거처에서 봉양하는 데는 자제의 도리를 다했는데, 이제 나는 오직 형님 한 분 계시는데 자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선생의 다섯 형 중에서 잠(潜)ㆍ하(河)ㆍ의()ㆍ대헌공(大憲公) 해(瀣)는 세상을 떠나고, 오직 찰방공만이 있었기 때문에 형님 한 분이라고 한 것이다. -김성일-
선생의 넷째 형인 대헌공(大憲公)이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데, 성을 나서자 세상을 떠났다. 성전(性傳)의 생가(生家) 아버지가 금오랑(金吾郞)으로서 대헌공을 호위하고 간 일이 있었다.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선생이 성전의 생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성주(城主 성전의 생가 아버지)에게 진작 감사드릴 일이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이 때까지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하고, 곧 흐느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갓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였다.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의 이름은 언겸(彥謙)이다. 경술년(1550)에 금부 도사가 되어 대헌공을 귀양지로 압송하다가, 공의 장(杖) 맞은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중도에서 멈추고 좀 쉬면서 회복하게 하였다. 아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몇 번이나 간했으나 듣지 않아서, 거의 간사한 무리들의 해를 입을 뻔하였다. 그런데 마침 대헌공이 세상을 떠나 그 화를 면했는데, 그때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이었으며, 선생의 조상의 무덤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성주라 일컬은 것이다. -우성전-
묻기를,
“처형(妻兄)이 과부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고, 또 따로 살 집이 없으면 한집에서 살아도 좋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은 의리상 편치 않은 일인 듯하다. 요새 사람들은 비록 처형이나 처제(妻弟)를 지친(至親)이라 해서 내외 구별이 없지만, 옛날에 구양공(歐陽公)은 설가(薛家)에 두 번 장가들었고, 여동래(呂東萊)는 한무구(韓無咎)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옛날의 예법이 이러했으니, 지금도 지친으로 대접하여 한집에서 산다는 것이 어찌 혐의를 분별하는 도리이겠는가. 만일 의탁할 곳이 없으면, 다만 집을 지어 살게 하고 생활을 돌봐 주어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고, 이어서 또 이르기를,
“만일 또 혐의를 받을 만한 일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구양공이 의탁할 곳이 없는 친척의 딸을 거두어 길렀다. 자라서 시집을 보냈는데 또 과부가 되었으므로 다시 한집에 데려다 먹여주었다. 그러자 공을 꺼리는 일가가 공을 ‘규방(閨房)을 다스리지 못했다.’라고 했고, 식자들도 모두 의심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밝힌 뒤에야 비로소 혐의를 벗게 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혐의를 분별하지 못한 잘못인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세수할 때는 도기(陶器)를 썼고, 앉는 데는 부들자리를 썼다. 베옷을 입고 실띠를 맸으며 짚신을 신고 대지팡이를 짚어서 담박하였다. 계상(溪上) 집은 겨우 십여가(十餘架)로서, 심한 추위나 더위나 비에 남들은 견딜 수 없었지만,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영천 군수 허시(許時)가 한번은 지나다가 선생을 뵙고는,
“이렇게 비좁고 누추한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니, 선생은 천천히 말하기를,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곤란한 것을 모릅니다.”
하였다. -김성일-
검약(儉約)
농사나 누에 치는 잔일에도 때를 놓친 적이 없으며, 수입을 따져 지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집은 본래 가난해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고, 온 집안은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이덕홍-
이덕홍의 조부(祖父)가 살던 천사(川沙)의 집은 사랑이 한 칸이라 손님을 대접하기도 어려웠다. 지붕은 띠로 이었고, 광헌(廣軒)은 널빤지였다. 선생은 매양 이것을 볼 때마다 그 검소함에 탄복하여, 한서암(寒栖菴)과 암서헌(巖栖軒)은 모두 그것을 본받은 것이었고, 옛집도 또한 이와 같았으니, 그 순박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함이 이와 같았다. 암서헌의 추녀를 요새 와서 기와로 바꾸었지만, 이는 선생의 본의가 아니었다 한다. 이덕홍의 조부 이현우(李賢佑)는 농암(聾巖)의 아우로서 천사(川沙)에 살았다. 선생의 시에 “그윽한 천사에 이장(李丈)이 산다.”라고 하였다. -이덕홍-
완락재(玩樂齋)를 새로 짓고는, 선생이 이덕홍을 보고 이르기를,
“내가 생각한 것은 본래 나지막한 집이었는데, 내가 분암(墳庵)에 들어가 재올리는 동안에 목수가 제 마음대로 이렇게 높고 크게 지어서, 마음이 몹시 부끄럽고 한(恨)스럽다.”
하였다. 서재는 높이가 8척, 넓이도 8척이었다. -이덕홍-
암서헌의 양면에 서가(書架)를 만들었는데, 유독 서쪽 면만 반쪽을 막고 그 가운데를 비워두었다. 묻기를,
“이처럼 하신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여기는 내가 기거하고 잠잘 곳이다. 성인의 교훈을 뒤에 두고 등지고 앉는 것이 편안치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했을 뿐이다.”
하였다. -금난수(琴蘭秀)-
신사년(1521, 중종16)에 부인 허씨(許氏)를 맞이하였다. 부인의 집은 자못 넉넉하였다. 선생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여가에 가끔 오가고 했었는데, 항상 여윈 말을 타고 다녔다. 부인의 집에는 비록 살진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탄 적이 없었다. -이안도-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초헌(軺軒)을 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시하러 대궐에 들어가는 때에는,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어 타기는 하였으나, 초헌을 탄 적은 없었다. -우성전-
부인 허씨의 논밭이 영천군(榮川郡)에 자못 많이 있었다. 계상(溪上)에는 겨우 변변하지 못한 밭 몇 마지기가 있을 뿐이었으나, 끝내 부인의 전장(田莊)에 가서 살지는 않았다. -김성일-


[주D-001]육아(蓼莪) : 《시경(詩經)》에 육아편(蓼莪篇)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詩)다.
[주D-002]풍수(風樹) : 공자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객지에서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끊이지 않고, 자식이 보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아니하였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다.
[주D-003]설가(薛家)에 …… 장가들었고 :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첫 부인 설씨(薛氏)가 죽은 뒤에, 다시 처제(妻弟)에게 장가들었다.

 

조상 섬김


절사(節祀)나 시향(時享)에는, 아무리 춥고 더운 때라도 병이 없는 한 반드시 친히 독(櫝 신주의 함)을 받들고 가고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혹시 한 철에만 나는 물건이나 색다른 음식을 얻으면 말리거나 혹은 절여 두었다가, 절사나 시향 때 제사상에 올렸다. 대개 선생은 지자(支子 장남 이외의 아들)이므로 가묘에 천헌례(薦獻禮)를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같이 한 것이다. -김성일-
선생은 새로운 식물(食物)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宗家)에 보내어 사당에 올리게 하였고, 만일 보낼 수 없으면 집에 간직해 두었다가 제사 지낼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다만 지방만 붙이고 축문은 읽지 않으며, 또 메나 탕은 차리지 않고 오직 떡이나 국수만으로써 제사 지냈다. 이덕홍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사는 곳이 가묘에서 멀어 뜻대로 제사를 돕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다고 감히 제사를 주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주자의 문하에도 지자(支子)로서 타처에 사는 자가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하였다. -이덕홍-
형의 손자인 종도(宗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덕홍이 내게 새로 난 송이버섯 5개를 부쳐 왔기 때문에 보낸다. 다만 이 물건만을 사당에 올리기는 불편할 것이니, 물에 담그거나 말리거나 해서 잘 간직해 두었다가, 뒷날 다른 물건을 올릴 때에 함께 올리든지, 제사 지낼 때에 제물로 써도 또한 좋을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선생은 속절(俗節)의 묘제(墓祭)는 예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역시 세속에 따라 묘에 가기는 하되, 일찍이 가묘에 제사 지낸 일은 없었다. 그것은 주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속절에 대한 뜻이 그래서였다. -김성일-
선생은 간혹 기제(忌祭)를 재궁(齋宮)에서 모시는 일이 있었다. 어떤 이가 그것이 예인지 묻자, 선생이 이르기를,
“사당에서 제사하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종가에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재궁은 묘소와 같은 것이므로 불사(佛寺) 따위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손들이 여기에 모여 제사하는 것도 무방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제사를 마치고 상을 걷은 뒤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를 향하여 앉아 있었다. -이덕홍-
제사에 쓸 술을 빚을 때는 반드시 깨끗한 곳을 가려서 하였고, 과실이나 마른고기가 제사를 위해 간직된 것이면 감히 다른 용도에 쓰지 않았다. -이덕홍-
선생이 서울에 있을 때 제사가 있어 술을 빚거나 하면, 따뜻한 방이 없어 술독을 침실에 두었는데,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대소변은 반드시 밖에서 보았다. 이 한 가지는 선생에게는 실로 조그마한 일이다. 그러나 군자는 털끝만큼도 함부로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므로 여기에 적는다. 본주(本註)이다. -우성전-
기일(忌日)에는 술상을 차리거나 고기를 받지 않았고,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사랑에서 엄숙히 지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손 대접도 또한 그러했다. 하루는 손이 왔는데, 술상을 차리다가 그 사람에게 제사가 있음을 알고는, 술상을 치우고 오직 차만 내어 대접하였다. 이웃 부청(府廳)에서 노루 고기를 보내왔는데, 마침 그날이 제삿날이었기 때문에 곧 돌려보냈다. -김성일-
그 아들 준(寯)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신주(神主) 부인 권씨(權氏)의 신주인데, 그때는 아직 두 해가 못되었다. 를 아직은 온계리(溫溪里) 집의 바깥 방에 두고자 한다. 그리고 그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내가 이미 한 고을을 맡고 있으니, 권도에 따라 선생은 지자(支子)이기 때문에 권도에 따른다고 함. 몇 자 빠짐 선인(先人)을 제사 지낸다면 너의 두 어미도 또한 마땅히 함께 제사 지내야 될 것이다. 그래서 두 신주를 모두 군재(郡齋 군(郡)의 수령(守令)이 거처하는 집)에 안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다시 생각하고 물어서 할 일이지 함부로 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집안 편지-
선생의 가묘는 온계리에 있었다. 종가(宗家)가 자식이 없으므로 형의 아들 진사 완(完)이 당연히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어야 할 것이나, 그는 이미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살림을 거두어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선생이 중한 의리로써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자, 완이 드디어 그 아들 종도(宗道)를 시켜 돌아가 살면서 종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선생이 기쁘게 생각하여 재물을 내어 집안 살림을 돌봐 주었는데, 그들을 돌보고 사랑함이 끝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종가가 퇴락해져서 종도가 수리하고자 했으나, 집이 가난하고 재목이 없었다. 선생이 선산의 나무를 베어 쓰게 했더니, 어떤 사람이 선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을 사사로이 쓴다면 의당 옳지 못한 일이지만, 선산의 나무를 베어서 선조의 묘궁(廟宮)을 지어 선조의 제사를 받든다면, 이것은 대를 이어가는데 중요한 것이니 옳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그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고산(孤山) 선생의 전모(前母) 김 부인 산소가 있는 곳 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박 봉사(朴奉事)를 만나 이제 처음으로 알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록 불을 껐다고 하나 산소의 영역이 온전한지 알 수 없구나. 설령 다행히 면했다 하더라도 그 주봉(主峯) 근처가 면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자식으로서 급히 가보지 않고 멀리서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온 나라가 가뭄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관리로서 외방으로 나가는 것을 금할지 모르겠다만,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므로 마땅히 말미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무진년(1568, 선조1) 12월 25일 대정(大政) 때 나라에서 조선(祖先)을 추증하였다. 처음에 선생이 1품에 오른 지 1년이 되어도 추은(追恩)하지 않으므로, 그 자제들이 청하기를,
“왜 추은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니, 선생이 답하기를,
“내가 헛된 이름으로써 외람되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감히 다시 추은을 청하겠느냐. 하물며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한 고을 현감 이상을 하지 말라.’라고 경계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이제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추은까지 하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위가 숭정대부에 올랐는데도 추증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 같다.”
하였기 때문에, 이에 비로소 추은한 것이다. -이안도-

[주D-001]천헌례(薦獻禮) : 일정한 제사를 지내는 외에, 철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어물을 가묘(家廟)에 드리는 것이다.
가훈(家訓)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책 읽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이냐. 서울에 있으나 시골에 있으나 오직 어떻게 뜻을 세우느냐에 있을 뿐이다. 모름지기 충분히 힘써서 매일 부지런히 공부하여, 할 일 없이 세월만 헛되게 보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본래부터 공부에 뜻이 독실하지 못하다. 만일 집에 있으면서 그저 일없이 세월만 보내면 더욱 공부를 폐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빨리 조카 완(完)이나 혹 독실한 뜻을 가진 친구와 더불어 책을 짊어지고 절에 올라가서 한겨울 동안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빨라 한번 가면 따르기 어려운 것이니, 천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말라,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혼자서 궤전(饋奠)을 받들고 학업을 닦으며 살림도 돌아보아야 하니, 마음이 흔들리고 흩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형편에 따라 순리대로 처리하고 본래의 뜻을 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세상의 속된 일에 얽매여 공부할 뜻을 그만둔다면, 마침내는 시골의 쓸데없는 사람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당시에 준이 권 부인의 심상(心喪)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궤전을 받든다고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의령(宜寧)의 일을 만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오직 너만 불의(不義)에 빠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내 수치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옳고 그른 것을 자세히 헤아려서 마땅함을 따르고 이치를 좇아서 공손한 태도로 처리하되, 그 물건 버리기를 초개(草芥)같이 하여서 자제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은 일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가는 도중에서나, 또 거기 가서도 몸가짐과 일처리를 날마다 조심하고 삼가서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히 하지 말라. 문공(文公)의 〈훈자첩(訓子帖)〉의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잊지 않으면 큰 잘못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평소에도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니, 하물며 상주의 몸으로서이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전재(殿齋 참봉이 거처하는 집) 그때 준이 집경전(集慶殿)의 참봉이었다. 에서 일이 없거든,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것이 진실로 좋은 공부다. 회암(晦庵)의 책은 그냥 베끼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또한 모름지기 깊이 새겨서 궁구해야 할 것이니라. 혹 모르는 곳이 있으면 표를 해 두었다가 남에게 물어보거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들으니, 몽아(蒙兒) 안도의 어릴 때의 이름이 아몽(阿蒙) 는 아직도 집 안에 박혀 있다는구나. 《예기》에 이르기를, ‘남자는 열 살이 되면 나가서 바깥의 스승에게 배우고 바깥에서 거처한다.’ 하였는데 이제 이 아이는 이미 열서너 살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바깥에 나가지 않아서 되겠느냐. 또 들으니, 무당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데, 이것은 우리의 가법(家法)을 매우 해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 때부터 전혀 그것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 나도 늘 그것을 금해서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옛 어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뿐이 아니라, 가법은 깰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 이 뜻을 모르고 경솔히 고쳐서 될 일이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요즘 오 찰방(吳察訪 오언의(吳彦毅))이, 그 아들 수영(守盈)이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호사스러운 치장에만 힘쓴다고 여겨, 크게 노하여 꾸짖어 금하였고, 수영의 종이돈을 가지고 와서 물건을 사려다가 사지 못하고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대개 오형(吳兄)의 이런 뜻은 아주 좋은 것으로,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엄하지 못해서 너로 하여금 세속의 외면적인 일만 좇아 익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너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무릇 선비는 마땅히 풍채가 소박하고 문장을 일삼으며 담담하게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여가에 생업에 종사한다면 해로울 것이 없겠지만, 문장을 하는 것이나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살림살이나 옷치레하는 말단적인 일에만 파묻힌다면, 이것은 곧 시골의 속인(俗人)들이나 할 짓이지, 어찌 유자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살림살이 등의 일도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아비인 나도, 평생 그 일을 비록 서툴게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전혀 하지 않을 수야 있었겠느냐. 다만 안으로는 문장을 오로지하면서 밖으로 혹시 살림살이를 해 가면 사풍(士風)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문장을 완전히 저버리고 살림살이에만 정신을 팔면, 이것은 농부의 일이며 시골 속인(俗人)들이 할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말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이 학력(學力)은 없으면서도 큰 허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그 자질이 그다지 잡박(雜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 타고난 성품이 잡박한 데다 또 고치고 바로잡는 공부도 하지 않고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 허물이 쌓이고 쌓여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많아질 것이다. 나는 요새 네가 의리에 대해 그다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너의 자질이 너무 편벽된 특징이므로 네가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때문에 미리 경계하는 것이지, 네가 큰 허물에 빠져서 꾸짖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번수(樊須)가 성인의 문하에서 지낼 적에, 자신의 기질이 편벽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허물을 고치고 의혹을 분별하는 법을 물었으니, 이것은 잘 배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너는 부디 내 말이 너무 조급하다고 의아해하지 말고, 옛사람이 내실 있게 공부한 것을 생각한다면 내 뜻을 아는 것일 뿐 아니라 너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을까마는, 허물을 능히 고칠 줄 안다면 그것은 곧 대선(大善)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가난과 궁핍은 선비의 다반사인데, 어찌 마음에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너의 아비도 평생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을 받은 일이 많았다. 오직 꿋꿋이 참고 순리로 처세(處世)하여 자신을 수양하면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의탁할 곳이 없어 더부살이를 하고 있어 군색한 모양이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나면 여러 날을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러나 너 자신을 위해 스스로 처신해야 할 길은, 그럴수록 더욱 괴로움을 참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 분수를 따라 천명을 기다릴 뿐이요, 갑자기 비탄하거나 원망하다가 잘못을 저질러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그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유모로 부릴 여종이 3, 4개월밖에 안 되는 어린애를 버리고 서울로 올라온다고 하니, 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근사록》에 이런 일에 대해 논하기를,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을 살리는 짓은 아주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제 이 일도 꼭 그와 같은 것이니 어찌 하겠느냐. 서울 집에도 반드시 유모로 부릴 종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5, 6개월 동안만 각자 서로 기르고 지내다가 8, 9개월이 되었을 때 올려보낸다면, 이 아이도 죽물로써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목숨이 다 사는 것이니, 아주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꼭 보내고자 하거든, 차라리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서 두 아이를 함께 기르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바로 내버려 두게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할 일이요, 또 지극히 온당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미리 알리는 것이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김근공(金謹恭)은 학식이 정밀하고 상세하니 필시 훌륭한 선비일 것이다. 진작 찾아보았는지 모르겠구나. 반중(泮中 성균관 근처에 있는 동네)에서 지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너에게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항상 겸손하고 삼가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말라. 그리고 몸가짐을 굳게 가져서 나태하지도 거만하지도 말며,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경계하고 경계할지니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모든 일에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인데, 이제 네가 이정(而精)에게 보낸 편지를 보건대, 큰 글자로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부디 조심하여 거칠고 경망한 태도를 좋아하지 말라.”
하였다. -집안 편지-
형의 손자 종도(宗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너는 궁핍하게 살며 어려움이 많아 학업에 전념할 수 없으니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것도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니,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더욱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비록 집 안에 있더라도 실없는 일을 버리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어찌 모든 것에 살림을 핑계하여 공부를 전폐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형의 손자 선도(善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른바 학업은 너의 뜻이 독실한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뜻만 독실하다면 어찌 학업이 진보하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냐. 그러나 독실하지 못하면 때때로 이러한 탄식을 한다 한들, 쓸데없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효경》과 《소학》 따위를 먼저 가르쳤고 글 뜻을 대강 알게 된 뒤에는 사서(四書)를 읽혔다. 이렇게 차례를 따랐으며 단계를 뛰어넘은 적이 없었다. 혹시 자손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과히 꾸짖지 않고 거듭 타이르고 훈계해서, 스스로 느껴서 깨닫게 하였다. 종들에게도 노하여 꾸짖은 적이 없었고, 가정 안팎이 화목하고 즐거워하여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함을 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절로 잘 다스려졌다. -김성일-

[주D-001]번수(樊須) : 춘추 시대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지(子遲), 노둔(魯鈍) 하였으나 배우기를 좋아하여 스승이나 친구들에게 반복하여 질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인물 논평

선생은 《상서(尙書)》를 강하다가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을 읽을 때마다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주자의 제자로 도를 전한사람으로서 면재(勉齋 황간(黃榦))를 제일로 치지만, 《집전》으로 본다면 구봉(九峯 채침)이 마땅히 제일이 될 것이다. 면재의 저술은 많이 보지 못해서 그 말한 바와 본 바가 어떤지 모르지만, 어찌 이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최응룡(崔應龍) 자는 현숙(見叔) 이 묻기를,
“형서(邢恕)는 스승 문하에서 죄를 입었는데, 그래도 그 제자로 꼽혔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뒷세상의 학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화숙(和叔)은 두 정자를 따른 지가 아주 오래었으나, 간사한 생각 하나 때문에 문득 제멋대로 하는 소인이 되고 말았으니, 학자로서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였다. -김성일(金誠一)-
허노재(許魯齋 허형(許衡))의 출처(出處)를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구경산(丘瓊山 구준(丘濬))의 무리들은 다 원나라를 섬긴 그의 잘못을 비방하지만, 그때는 오랑캐가 아직도 중화(中華)의 주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나 백성들의 도리, 또 규칙ㆍ법칙과 문물이 거의 끊어져 없어질 형국이었으니, 하늘이 노재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노재가 만일 혼자만 착하게 세상을 잊고 일생을 마쳤다면, 하늘의 이치는 누가 밝혔을 것이며, 백성의 도리는 누가 바루었을 것인가. 천하는 마침내 오랑캐로 변하여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노재가 세상에 나온 것은 의리에 해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현이 다시 나온다면, 그 의견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허노재의 묘비에 왜 그 벼슬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평소에 벼슬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만일 벼슬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누가 권해서 억지로 벼슬하게 했겠습니까. 이것은 필시 그가 중화의 문화로써 오랑캐들을 변혁시키려 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요즈음 선비들은 대개 자기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옛날 어진 이들을 논하려 하니 나는 모르겠다. 젊은이들은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ㆍ허노재ㆍ오임천(吳臨川 오징(吳澄))ㆍ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ㆍ길야은(吉冶隱 길재(吉再)) 같은 이들을 품평하여 모두 그르다고 말하니, 대개 서산이 동궁(東宮)에게 빈사(賓師 빈객으로 대우 받는 학자)로 있었는데, 그것이 어찌 제왕(濟王)의 신하란 말인가. 이런 일은 나는 잘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구사맹(具思孟)이 사호(四皓)가 태자를 보좌하였던 것을 논한 글을 지어서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비평하기를,
“잡고 놓으며 열고 닫는 데 있어서 눈이 높으면 손도 높다. 그러나 다만 이 일에 있어서는 매우 난처한 점이 있었다. 이미 지난 일로 말한다면, 여치(呂雉)는 진실로 한실(漢室)의 적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큰 죄악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고조(高祖)가 아직 오지 않은 화를 어찌 미리 알아내어 적(嫡)을 폐하고 서(庶)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이미 여의(如意)를 세웠으니, 장차 여치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었겠는가.그를 그대로 두면 둘 다를 온전하게 할 도리가 없고, 폐하든지 혹은 죽이든지 하자면, 이 죄목에 해당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고조가 바꾸려 하여도 마침내 바꾸지 못한 까닭이다. 오직 사호의 힘만으로서 그 뜻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장량(張良)ㆍ진평(陳平) 등 여러 사람들의 걱정일 뿐이었고, 자지옹(紫芝翁)이 눈썹을 치뜨고 소매를 흔들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점에 경솔했기 때문에 마침내 두목(杜牧)의 비방을 받았으니,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글에서 사호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 해서 태자를 바꾸려고 한 것을 잘 생각한 일이라고 한다면, 타당할 것 같지 않다.”
하였다. 구사맹(具思孟) 《팔곡집(八谷集)》에 보인다.
묻기를,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이 사직을 중히 여겼다면, 비록 군사를 돌이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표(表)를 올려 답하고 조서를 받들지 않음으로써 사직을 붙들었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명령을 듣고 군사를 돌이켰더라도 오히려 왕차옹(王次翁)의 간악한 무고를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끝내 군사를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이것은 반역이다. 그러고도 어찌 금로(金盧)에게 죄를 물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의 〈숙매계관(宿梅溪館)〉이라는 시를 읽고, 내심 호담암(胡澹菴)의 일을 괴상히 여겼더니, 《주자어류》에 기록하기를, ‘이미손(李彌遜) 자는 사지(似之) 도 좋은 선배였다. 이(李)가 호(胡)에게 말하기를, 「인생이 일마다 칭찬받을 수 없고, 다만 한두 가지의 좋은 일을 하면 좋다.」라고 하였다. 호(胡)가 뒷날에 이름과 절개를 잃어버린 것도 이 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였고, 그 문단의 위에서는, ‘호방형(胡邦衡)은 유식하다는 칭찬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참고로 하면, 방형의 만년에 혹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어찌 좌두(莝豆)의 욕을 당하는 데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안도(李安道)-
묻기를,
“전조(前朝 고려) 왕씨의 뒤를 이어 일어선 사람은 신씨(辛氏)인데, 정포은 선생은 그를 섬기고 버리지 않았으니, 뒤에 비록 공이 있었다 한들 어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비록 신씨였으나, 왕씨(王氏)의 종사는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은이 여전히 섬긴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진(秦)나라의 여씨(呂氏)나, 진(晉)의 우씨(牛氏)와 같은 것이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도 왕도(王導)의 무리를 배척하여 말하지 않았다. 포은은 진실로 이 뜻을 얻었다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기준(奇遵)이 이색(李穡)을 가리켜 부처에게 아첨하는 요망한 영웅이라 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해도 그로서는 반드시 안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선생께서 풍기에서 도백에게 올린 글에, 정길(鄭吉)ㆍ우 좨주(禹祭酒 우탁(禹倬))ㆍ김점필(金佔畢 김종직(金宗直)) 등 여러 사람을 아울러 논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과연 큰 잘못이다. 점필은 결국 문장하는 선비일 뿐이다.”
하였다. 묻기를,
“이 태조께서 이색을 만나볼 때, 이색은 흰 옷으로서 길게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높은 절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진실로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태조의 포용(包容)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禹性傳)-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 이학(理學)은 정포은을 조종으로 삼고, 김한훤(金寒喧 김굉필(金宏弼))ㆍ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을 우두머리로 삼는다. 다만 이 세 선생의 저술을 구할 수가 없어서 지금은 그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요즘 《회재집(晦齋集)》을 보았는데, 그 학문의 바름과 그 터득함의 깊이가 거의 근세의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였다. -우성전-
융경(隆慶) 원년 정묘(1567, 선조1) 가을에, 조사(詔使)로서 한림원(翰林院) 검토(檢討)인 신안(新安) 허국(許國)과 병과(兵科) 급사중(給事中)인 홍도(洪都)ㆍ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와서 묻기를,
“동방에도 공자의 심학과 기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물었을 때, 선생은 고려의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와 본조(本朝)의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윤상(尹祥)ㆍ이언적(李彥迪)ㆍ서경덕(徐敬德) 등을 적어 보이고 또 글로써 답하기를,
“우리 동방에 기자가 오고부터 구주(九疇)로써 교화를 베풀고 팔조(八條)로써 다스려 어진 이의 교화가 스스로 신명에 응하였으니, 선비로서 심학을 알고 주수를 밝힐 수 있는 이름 난 이가 반드시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4군(郡)이니, 2부(府)니, 3국(國)이니 하며 서로 갈라져 다투고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문적(文籍)이 흩어져 없어져서 도를 전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앞 사람의 성명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신라가 3국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고려의 5백 년 동안에는 세상의 도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문화의 풍조가 차츰 열려 중원(中原)으로 유학하는 선비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서 경학이 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어지러움이 바뀌어 다스림이 되고, 중화를 사모하여 오랑캐가 변하였으니, 《시(詩)》와 《서(書)》의 덕택과 예의의 풍속은 기자의 구주에서 끼친 풍속을 점점 회복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을 현재 문헌의 나라, 군자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시대의 선비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침내 언어와 문장에 있었던 것이니, 고려 말년에 이르러 정자와 주자의 글이 조금씩 동방으로 들어오자 우탁과 정몽주 같은 이가 성리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본조에 이르러서는 중국 조정에서 나누어 주는 사서, 《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얻어 본조에서도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고, 또 사서삼경을 환히 아는 사람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로서 외우고 익히는 것이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혹 습속에 젖어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여 저술도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였으며, 혹은 뜻만 크고 일에는 거칠어서 이용할 줄도 모르고 비판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혹 걸출하게 뛰어나 특별한 주장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붓을 내서 성현의 학문에 힘쓰는 이도 간간이 있었으나, 그리 많이 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한 몇몇 사람은 모두 이전의 사람이요,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몇 사람도 천 년 뒤에 태어나서 궁벽한 바닷가에 있으므로 성현의 문하에서 직접 지식의 가르침과 인격의 단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심학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여기에 힘쓴다면, 어찌 심학을 하는 무리가 될 수 없겠습니까.
저 기자의 〈홍범(洪範)〉이나 주자ㆍ채원정(蔡元定)의 학설은 의리를 남김없이 밝혔으니 그것을 배워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수학에 있어서는 구봉(九峯)의 〈내편도설(內篇圖說)〉이 지금도 있고, 원락자(苑洛子)가 발명한 것 또한 있지만 우리 동방에서는 아직 그것을 훤히 아는 사람이 있다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근세에 이순(李純)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그 학설에 통한다 하면서 책을 지어 주해까지 내었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과연 잘못된 곳이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조목의 집에 간직된 선생의 글씨
선생이 말하기를,
“김점필(金佔畢)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종신토록 했던 일은 다만 화려한 사장(詞章)에 있었으니,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 저술도 없고, 또 문헌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조예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이제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 정자와 주자를 제사하면서 한훤을 거기에 배향(配享)한다고 하지만, ‘배(配)’ 자의 뜻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문선(文宣 공자)의 사당에는 오직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만을 배향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문십철(孔門十哲)의 서열에 든 사람이라도 다 사당 안에 종사(從祀)한다고 일컬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큰 현인도 오히려 문묘의 동쪽과 서쪽에 모셔 놓고 종사한다고 일컫는다. 이로써 본다면, ‘배(配)’ 자와 ‘종(從)’ 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훤의 학문이 비록 문묘에 들기에 부끄럽지 않으나 다만 ‘종사’라 일컬을 것이요, ‘배향’이라고는 일컫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훤의 학문이 실천하는 데 돈독했다고는 하나, 도에 있어서 묻고 배우는 공부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조정암(趙靜庵)은 타고난 자질이 비록 아름다웠으나, 학문에 충실하지 못하여 시행한 것에 지나침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일에 패하고 말았다. 만일 학문에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뒤에 세상에 나가서 세상일을 담당하였더라면, 그 이룬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요순 때의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이 아무리 군자의 뜻이라 하더라도,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실정(失政)도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암은 이미 실패할 줄 알고 자못 스스로 억제하였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잘못이라 하여 창을 거꾸로 해서 치고자 하였으니, 정암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중종을 뵈올 때의 정암을 유심히 본 일이 있는데, 그 걸음걸이가 마치 날개를 편 듯하고 위의(威儀)가 본받을 만하였다. 한 번 보자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조원기(趙元紀)ㆍ조광림(趙廣臨)은 다 선한 사람이니, 정암의 가학의 근본도 우연이 아니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도학을 한 선비가 없지 않으나 문헌에서 찾아볼 길이 없으니, 그 조예의 깊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우 좨주(禹祭酒)ㆍ정포은(鄭圃隱)은 시대가 멀고, 한훤(寒暄)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같은 여러 선비들은 전해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지만, 또 찾을 수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말하면, 근대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인데 그 학문이 매우 바르다. 그가 지은 문장을 보면, 모두 가슴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이치가 밝고 의리가 발라 바로 그대로 하늘이 만든 것이니, 조예가 깊지 않고서야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조원기는 정암의 숙부요, 조광림은 정암의 종형이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정암의 행장을 지을 때 그 타고난 자질의 높은 곳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하였으나, 그 학력을 말한 곳은 비교적 적었다. 회재의 행장을 지을 때에는, 그 학력의 깊은 곳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하였으나, 그 타고난 자질을 말한 곳은 비교적 소홀했다.”
하였다. -우성전-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의론을 보면 ‘기(氣)’를 논한 것은 지극히 정밀해 마지않으나, 이(理)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를 주장하는 데 너무 치우치기도 하고, 혹은 기를 이로 알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방에는 이보다 앞서 책을 지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기를 밝힘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처음이다. 다만 그가 말할 때에 자부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보면, 아마 그가 터득한 경지가 깊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화담이 일찍이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을 지어, 박희정(朴希正 민헌(民獻))ㆍ허태휘(許太輝 엽(曄)) 등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 이론은 말이 비록 졸렬하기는 하지만, 그 본 바는 천명의 성인도 다 전하지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후학들에게 전할 만하다. 성리서(性理書) 끝에 붙여, 원근의 화(華)ㆍ이(夷)들로 하여금 동방에 학자가 났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너무 풍을 치는 병통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매우 중히 여겼으니, 어떤 사람이 공부하러 송도(松都)에 갈 때 선생이 그에게 시를 주었는데,
서로(徐老)는 이제 학을 타고 떠났으니 / 徐老今爲鶴背身
깊고 밝게 남은 자취 쓸쓸하여라 / 藏修遺迹揔成陳
어느 누가 화담원(花潭院)을 지었네마는 / 何人爲築花潭院
그 마음 이어 전해 줄 이 몇 사람인고 / 心緖相傳有幾人
하니, 그를 그리워함이 이러하였다. -김성일-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지었는데, 뒷사람이 그를 서원의 사당에 모시고자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서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여론이 들끓어 마침내 그대로 되지 못하였다. 이 일도 시비가 정해진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사당을 세워 자기를 거기에 배향하면, 그 마음이 편할 것인가.”
하였다. 대개 주(周)는 이기(李芑)의 문하에 발을 들여놓아, 그의 몸가짐에 크게 낭패한 일이 있었으니, 선생의 이 말은 실로 은근한 뜻을 가진 것이다. ○ 정유일의 기록에, “주신재(周愼齋)는 문장에 능하고, 효제(孝悌)에 독실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즐기며, 평생을 맑은 절개로써 스스로 믿어서, 비록 귀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맑고 검소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그가 경연에 있을 때에는 일을 따라 넌지시 깨우쳐 주고 비평해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강직하지 못하여 여러 번 권세 가진 자들에게 농간을 당하여 언제나 절개를 잃었다는 비방을 면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병이 많았으나 물러나지 아니하므로 선생이 물러나기를 권하였으나, 좇지 않아서 고을 여론이 매우 애석히 여겼다.” 하였다. -정유일-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고 상소할 때 시사(時事)를 논하였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대왕대비도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전교하기를,
“조식의 상소를 보니, 불공한 말이 많으므로 큰 죄를 주려고 하였으나, 명색이 은사(隱士)이기 때문에 일단 불문에 부쳐 다스리지 않겠다.”
하였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가 죄를 얻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선생은 이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남명은 비록 이학(理學)으로써 자부하고 있지만, 그는 다만 일개의 기이한 선비일 뿐이다. 그의 의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이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남명의 소(疏)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개 소장(疏章)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이 정도를 지나쳐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였다. -정유일-
계축년(1553, 명종8) 7월에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선생이 조건중(曺楗仲)의 답서를 내게 보여 주셨다. 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을 여러 해 동안 존경하고 사모하며, 학문이 나아가고 덕이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더니, 이제 이 글을 보니 감정적인 말이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꿋꿋하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하나, 학문에 있어서 그처럼 공부를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일에 진취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인우(洪仁祐)-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홍응길(洪應吉)은 독실히 믿고 힘써 행하는 선비이다. 늘 수레를 타고 찾아와서 의리를 강론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갔다. 마음으로 그 사람됨에 감복하여 내심 유익한 친구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응길은 부친상을 만나 너무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서, 나이 겨우 40에 죽었다. 그 집이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그 상사를 도왔다. 한번은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 마음이 항상 착한 데 있어서 외물에 휘둘리지 않았으니, 이제는 그러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그 학문에는 차이가 없지 않았는데, 그는 대개 수학(數學)에는 정통했으나, 이학(理學)에는 정통하지 못하였고, 또한 기를 이로 아는 병통이 있었다. 그러나 독실히 믿고 힘써 행하는 것과 깨끗한 수양이나 꼿꼿한 절개에 있어서는, 그런 사람을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면서 오래도록 애석해하였다. -정유일-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만년에 식견이 매우 정밀하고, 의리를 논하는데 쉽고도 분명하였기 때문에 선생은 못내 칭찬하였다. -정유일-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정이(鄭靜而)는 타고난 바탕과 성질이 매우 높고 식견이 또한 뛰어났지만, 그 근본 학문에 있어서는 차근차근히 생각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사람에게 글을 보내기를,
“정이는 소홀한 곳은 너무 소홀하여서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좋은 점은 매우 좋아서 우리들이 하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 말을 명언이라 하였다. -정유일-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확고하고, 아무개는 예리하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소자가 공경하는 분들이지만, 그 확고함은 고루함에 가깝고, 그 예리함은 건방진 데 가깝습니다.”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정사성(鄭士誠)-
선생이 말하기를,
“김사순(金士純)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정밀하여 내 눈에는 아직 그에게 견줄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네가 만일 그와 종유(從遊)하면 필시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 -정사성-
선생은 제자들과 이야기하다가, 그 말이 김지산(金芝山)ㆍ유이현(柳而見)ㆍ이굉중(李宏仲)에 미치자 말하기를,
“김은 바탕이 아름답고 행실이 독실하며, 유는 타고난 재주가 매우 높고, 이는 착실하나 재주가 좀 모자란다.”
하였다. -정사성-
선생이 송사를 좋아하는 요즈음 세상의 폐단을 말하고, 노사신(盧士信)의 일을 들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쉽게 구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와 송사를 일으켰다가 자기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알자, 곧 노사신에게 애걸하기를,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원래 한 될 것이 없지마는, 우리 집에는 생계를 꾸려갈 만한 사람이 없으니, 나는 지금부터 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은 그 말을 듣고 ‘내 어찌 그대가 그처럼 딱한 줄을 알았겠는가.’ 하고 곧 중단하고 다시 송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하였다. -김명일(金明一)-
그 아들 준에게 준 편지에,
“올 때에 청송(靑松)을 지나오게 되느냐? 청송 부사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 는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너는 모름지기 조심해서 찾아뵈어라. 지나는 곳마다 모두 삼가야 하겠지만 이 부(府)는 더욱 조심하라.”
하였다. -집안 편지-

[주D-001]집전(集傳) :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여 해설한 《서경주해(書經註解)》를 가리킨 것이다.
[주D-002]좌두(莝豆) : 송나라 호방형(胡邦衡)의 호는 담암(澹菴)인데, 간신(姦臣) 진회(秦檜)를 탄핵하고 금(金)나라와 강화(講和)하지 말자고 곧은 글을 올리다가 멀리 귀양 갔다. 뒤에 귀양이 풀려서 돌아오는 중로에, 남의 집에서 술을 먹다가 여천(黎倩)이란 여자와 관계를 하여, ‘말먹이는 여물[莝豆]’을 먹는 욕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주D-003]한림원(翰林院) : 당(唐)나라 때에 시작된 관청으로 제고(制誥)를 맡은 자가 있는 곳, 즉 학문과 문사(文辭)를 맡은 문사들이 있는 곳이다.
[주D-004]주수(疇數) : 기자(箕子)가 말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수법(數法)을 말한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 조선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중국 사신이 이렇게 물은 것이다.
[주D-005]공문십철(孔門十哲) :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주D-006]창을 …… 치고자 : 정암(靜菴)의 당파 중에서 과격한 사람들이 도리어 정암을 과감(果敢)하지 못하고 이럭저럭한다고 공격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것을, 다른 소인을 치려던 창을 거꾸로 쥐고 한 집안사람을 치려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바른 학문을 숭상함

[주D-001]사현(四賢) :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을 말한다.
바른 학문을 숭상함

선생은 이단(異端)을 마치 음탕한 소리나 아름다운 여자 얼굴과 같이 여겨서, 그것을 엄하게 끊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불경을 보고 사특하고 속이는 내용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는데, 마치 물을 건너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 얕고 깊은 것을 시험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을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다만 성현의 글을 읽어서 다 알게 되고 믿게 되어야 하고, 이단의 글 같은 것은 전연 몰라도 상관없다.”
하였다. -김성일-
《이학통론》을 찬술하여, 주자로부터 원(元)ㆍ명(明)에 이르기까지 도학(道學)을 한 선비들의 언행에 대해 여러 책에 흩어져 있는 것을 빠짐없이 다 모으고, 또 육씨의 지파에 대해서도 기록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학자들은 모두 불교에 기미를 띠고 있다.”
하였다. 그래서 《백사시교(白沙詩敎)》에 발문(跋文)을 쓰고 《양명전습록(陽明傳習錄)》을 밝혀서 그것을 물리쳤다. ○ 조목(趙穆)이 말하기를, “백사와 양명은 그 말이 모두 정(程)ㆍ주(朱) 도문의 기상과 같지 않다. 선생이 힘써 분별함이 없었다면,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덕홍이 묻기를,
“지금 세상에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말하기를,
“기고봉(奇高峰)ㆍ이구암(李龜巖) 이름은 정(楨), 자는 강이(剛而) 같은 이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두텁고 무거워 인(仁)에 가깝다. 그리고 앞 사람의 지나간 자리를 따라서 지키니 필시 길을 잘못 들어 딴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들의 소견이 아직도 큰 강령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으니, 그것이 아쉽다. 대개 세상에는 자기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공부하는 사람이 없는데, 남명은 장자(莊子)의 학을 주창하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는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의견을 지키니, 아주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고봉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갈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육상산의 학문이 다만 중국에서만 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목표로 삼아, 육상산을 높여 받드는 학자를 보면, 반드시 깊이 배척하고 통렬히 거절하였다. 그래서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곤지기(困知記)〉 명나라 선비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이 지음 를 너무 지나치게 높여 받드는 것을 보고, 선생이 말하기를,
“정암의 학문은 스스로 이단을 피한다고 하지만, 겉으로는 배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돕고 왼쪽으로 덮어 주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는 막으니, 실로 정자와 주자의 죄인이다.”
하였다. 그래서 소재와 힘껏 싸워 끝내 옳지 않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만은 선생과 뜻이 맞아서 〈곤지기발〉을 지어 그 학문을 배척하였다. 선생이 그 글을 보고 말하기를,
“이 이론은 아주 명쾌하다. 참으로 쉽지 않은데……참으로 쉽지 않은데…….”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명의 소견은 실로 장주(莊周)와 같다.”
하였다. 임훈(林薰) 호는 갈천(葛川) 이 선생에게 와서 말하기를,
“남명이 그 제자들을 시켜 음부(淫婦)의 집을 헐어 치우게 하였으니,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홀로 고사리를 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정유일-
일찍이 말하기를,
“화담의 문인들은 그 스승을 치켜 세우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심지어는 횡거(橫渠 장재(張載))에게까지 비교하기도 한다. 만일 그 저술이 없었다면, 참고할 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화담은 그 저술에 병통 없는 말이 하나도 없으니, 그 인간과 학문을 이로도 알 수 있다.”
하였다. -우성전-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종사(從祀)하는 전례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저 최고운(崔孤雲) 같은 이는 문장만 숭상하고 또 부처에게 몹시 아첨했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불소(佛䟽)〉 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하면서 통렬해 끊어버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 지내니 어찌 선성(先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현(四賢)은 비록 공덕이 있다 하나, 문묘(文廟)에 종사하기까지 하는 것은 가볍게 의논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당시에 관학생들이 상소하여 종사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끝내 옳게 여기지 않았다. -김성일-
선생은 의리(義理)를 풀이하여 말할 때에 명백하고 적확하여, 심오하거나 모호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정유일-
선생이 말하기를,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현들은 오직 이치를 귀히 여기고, 운수를 귀히 여기지 않았으니, 오직 이치로써 하여야 할 일은 힘을 다해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일 한갓 운수만 믿을 뿐이라면 화와 복이 오는 것을 모두 운수에만 맡겨 두어 착한 일을 하려는 마음은 없어질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무당이나 점치는 일이나 기도하는 일은 일체 엄금해서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이덕홍-
일찍이 말하기를,
“황명(皇明 중국 명나라)의 학자들은 대체로 모두 불교의 기미를 가지고 있는데, 오직 설 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은 참으로 성현의 근본 뜻을 얻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청의 평생 공부는 오로지 경(敬) 자에 있었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젊었을 때 청량산(淸凉山)에 노닐다가 〈백운암기(白雲菴記)〉를 지었는데, 그 절의 중이 그것을 새겨서 암자의 벽에 붙여 두었다. 선생은 만년에야 그 말을 듣고 곧 떼어버리라고 하였다. 또 산승이 와서 시를 청하면 비록 거절은 하지 않았지만 다만 자연의 경치만 적어 주고 한 자도 불교에 대한 것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만년에는 그런 작품마저 적었다. -김성일-
묻기를,
“한 번 생각한 일을 마음에서 잊을 수가 없어 묵혀 두는 병통이 있는데, 그저 잊을 수만 있으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다. 다만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잊는 것과 비슷하여 잘못 들어가는 곳이 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떻게 하면 잘못 들어가는 병통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능히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공부에 얻는 것이 있으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교문(敎文)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때에 중외(中外)에 내린 교문(敎文)]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어진 이를 낳는 것은 우연이 아니니, 실로 천지의 운수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의 덕이 떳떳하여 제사해야 하는 데 의심이 없다면, 마땅히 높여서 보답하는 전례의 거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널리 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하여 의지할 곳이 있게 하노라. 생각하면, 우리 동방은 외지고 먼 지역이라 정학(正學)의 종지(宗旨)가 전해지는 것이 드물었다. 그러다가 기자가 홍범구주로 교화를 펴서 비로소 예의의 도리는 알았지마는, 신라 시대에 이름을 드날린 이들은 시문(詩文)에 치우치는 누추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고려 말년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에 겨우 포은 한 사람을 볼 뿐이다.
널리 생각하건대, 조종이 빛나고 태평한 시절에는 다 문명이 떨쳐 일어나는 운수였는데, 저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같은 이가 나와서,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의 여러 학자들이 전한 것을 참으로 얻었도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에 있어서 그 법은 하나이니, 참소하고 아첨하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을 누가 시켜서 끼어들게 하였던가. 궁하고 통하는 것은 시운이 있어서, 비록 한때에 굴욕을 당하였으나, 옳고 그름은 저절로 정해지는 법이니, 어찌 백 년을 기다려야만 안다고 하겠는가.
그중에서도 이황은 두 임금의 지우를 입어 오직 그 뜻은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니, 저술하여 가르침을 드리운 것이 실로 이 해동의 주자요, 그른 것을 바로잡고 법을 만든 것은 하남(河南)의 정씨(程氏)에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다 함께 작위를 높여주고 시호를 주기는 하였으나 미처 제사 드리는 의식은 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덕(正德) 원년(1506, 중종1)에 비로소 유신들의 청이 있었고, 선왕의 즉위 초부터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리는 글을 여러 번 보았으나, 오직 그 일을 가볍게 시행하기 어려워 그러했을 뿐,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지극하지 못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왕위를 이어 그들과 때를 같이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지금도 그 모범은 남아 있으나, 저승에서 돌아오지 못함을 어찌하겠는가. 이 종사하고 향사하면서 백세의 스승이 되기를 바라노라. 이에 40년 동안을 몹시 바라는 백성들의 정에 보답하고, 천만세 태평의 공업을 열고자 하노라. 이는 대개 이만큼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것은 어찌 하늘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이제 금년 9월 4일에, 증 의정부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증 의정부 영의정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증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증 의정부 영의정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증 의정부 영의정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등의 다섯 신하를 문묘의 동서무(東西廡)에 종사(從祀)하노라.
아아, 온 백성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고 새로운 기상을 일으키노니, 이 나라의 사대부와 어진 이들로서 누군들 높이어 벗할 마음이 없겠는가. 이 땅의 재주 가진 젊은이들에게 길이 본보기의 터전을 남겨 주노라. 이에 글로써 보이노니, 마땅히 다 이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정문헌공실기》-

[문묘에 종사할 때에 가묘 제사(家廟祭祀)에 내린 교문]

왕은 이르노라. 아아, 우리나라는 비록 외지고 작으나, 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도는 의탁할 곳이 있도다. 옛날 은나라 기자[殷父師] 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 내려와, 신라 때의 문예와 고려 말년의 끼친 풍교는 아름답게 빛나 볼만하였으나, 바른 계통이 이어온 것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이후로는 이어 가는 사람이 몇이 없었다.
그러한데 오직 그대는 덕기(德器)가 순수하고 도량이 넓고 깊어서, 7, 8세 때부터 이미 도를 맡아 행할 뜻이 있었다. 그래서 주자[紫陽]의 글에 마음을 기울였으니, 평생의 얻은 힘은 실로 여기 있었다. 하는 일에는 정성스럽고 밝으며 바깥 사물에는 생각이 없었으며, 근본과 기초가 이미 서니 절조와 실천은 더욱 독실하였고, 미묘한 이치를 환히 깨달아 빛나는 빛을 쏟아 내었으니, 멀리로는 공자[洙泗]의 근본을 궁구하고, 가까이는 정[洛]ㆍ주[閩]의 파(派)에 닿았도다. 그래서 우뚝이 세상의 참 선비가 되니, 사림은 비로소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고, 조야(朝野)가 의지하여 태산같이 기대었노라.
옛날 선왕의 초년에 부르시는 명령에 응하여 서울로 올라와 경연에서 세 번 대하였는데, 그 정성되고 간절한 바른말은 일세(一世)를 바로잡아 되돌려, 맑고 밝은 다스림을 거의 기대할 만하였도다. 《성학십도》의 법은 앞 성인의 오묘한 뜻을 드러내었고 여섯 조목의 상소는 나라를 경영하는 지극한 요점을 밝게 내세웠으니, 참으로 사문(斯文)의 종장이요, 국가의 시귀(蓍龜)였다.
이에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으니 실로 끝없는 걱정이 있어, 그대의 도덕을 생각하건마는 그대의 모습은 이미 아득하구나. 그대와 같은 때에 살지 못한 것을 슬퍼하나니, 오직 자나 깨나 생각만 간절하노라.
슬프다, 그대는 이미 일어날 수 없거니와 선후왕의 우대[際會]를 생각하여 그대를 태묘(太廟)에 모시고 제향하노라. 요즘 대관들은 규례를 말하고, 선비들은 소(疏)를 올려, 다시 그대를 높이고 표창해야 한다는 청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한 가지로 떳떳한 도리를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거니와, 그대가 끼친 정신과 남긴 공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지니, 그대의 깊고 정밀한 학문에 대한 조예가 우뚝이 우리 동방에 길이 스승이 될 만하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옛날 송나라 이종(理宗)은 성리학을 사모하여 다른 시대의 어진 이인 주(周 염계)ㆍ정(程 명도 이천)ㆍ주(朱 )ㆍ장(張 횡거) 같은 이를 다 존경하고 높이어 문묘에 아울러 종사하고 제사하니, 이에 선비의 의논이 하나로 돌아가고 도의 계통이 더욱 밝아졌으니, 진실로 남송(南宋)으로 건너간 뒤의 성스러운 일이었다. 그대의 얻은바 도의 공부는 진실로 주ㆍ정ㆍ주ㆍ장을 근본 하였는데, 내가 그대를 높이는 일이 송의 이종(理宗)에게 뒤진 것은 아닐까 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이에 좋은 날 깨끗이 예를 다하여 그대를 문묘[泮廟]에 종사하고, 김 굉필ㆍ정 여창ㆍ조 광조ㆍ이 언적 의 4현을 아울러 올려서 이 세상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고, 도의 바른 명백을 드러내었으니, 그 어느 일이 이보다 크겠는가. 그래서 여기 예관을 보내어 그대의 가묘에서 제사하게 하고, 아울러 그 까닭을 유시하노니, 경은 공경할지어다. 아아, 덕이 있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공에 대한 보답으로 내리는 전례를 누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로다. 도를 밝히고 뒤의 학자를 인도하여 만대에 우러러봄이 더욱 새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종묘(宗廟)에 배향(配享)할 때에 가묘 제사에 내린 교문]

왕은 이르노라. 삼년상을 마쳤으니, 바야흐로 승부(升祔 문묘에 종향하는 것)의 예를 닦고 덕이 백세를 내렸으니 마땅히 종향(從享)의 의식을 행하노라. 이에 판(版)을 받드는 관리를 보내어 영혼을 인도하는 제전을 드리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정밀한 생각과 참된 실천으로 오묘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지난 성현을 이어 뒤에 오는 사람에게 학문의 길을 열었으니, 평생에 힘쓴 것을 볼 수 있으며,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났으니, 옛사람의 처신에 부끄럽지 않도다. 성대히 백대의 유종(儒宗)이 되어, 드디어 사방의 사표(師表)가 되었도다.
일찍이 중종의 사랑을 받았고, 나아가 인종[孝陵]의 알아줌을 입었으며, 더욱이 선왕 때에는 남다른 대접을 받아 경연에 들어가 모시니 경연관을 맡아 책임이 무거운 데다 이공(貳公)으로 발탁되었으니, 진실로 어진 인재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도다. 처음으로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 서니 국시는 안정되고 임금의 덕은 높아졌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한번 고향으로 돌아가니, 우리의 도는 밝아지고 선비들의 습관은 바로잡혔도다.
도의 계통으로 말하면 진실로 해동의 주자요, 일의 공으로 말하면 나라의 여러 선비들보다 위였다. 40년 동안 선비들이 올리는 글은 매양 문묘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500년 만에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는 때라 먼저 종묘에 종사되었다. 어진 이를 대우함에 어찌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를 따질 것인가. 정성을 표시하노니 장차 그 흠향하는 것을 보리로다. 종묘의 신주에 신이 의지하게 하고 문묘의 사당에 짝하여 앉게 하도다.
아아, 주자 시대와 같은 법도와 강산의 맑은 정기와 같은 풍도를 뒷사람은 태산같이 우러러보며 같은 때에 살지 못한 것을 한탄하노라. 선왕의 종묘에 모시어 제사하나니, 영원히 전해질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기 글로써 밝히노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하노라.

[주D-001]삼대(三代) :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를 통칭한 말로 옛 성인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말한다.
[주D-002]이공(貳公)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공(三公)의 다음에 가는 벼슬을 이공이라고 하는데, 당시 퇴계가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제문(祭文) [이정(李楨)]

이정(李楨)

아아, 우리 선생이여, 타고난 총명은 빼어나고 상서로운 복이 모이어 뛰어난 재주를 길렀도다. 순수한 성품을 간직하여 맑은 한 기운을 모았고, 마음속은 시원하게 트이어 옥(玉)같이 깨끗하고 얼음같이 맑으며, 기운과 도량을 갖추어 봄날같이 온화하고 가을날같이 엄숙하도다. 행실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하였고 학문은 정일(精一)한 것을 구하니, 사물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으며, 글귀마다 끝까지 연구하고 글자마다 핵심을 탐구하여 진실된 노력이 오래 쌓이고 정의(精義)는 입신의 경지에 들도다. 해와 달의 차고 이지러짐과 음양(陰陽)의 굽히고 폄과 물 뿌리고 쓸고 하는 사소한 일에도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지극하였고, 아래로는 쉬운 공부로부터 위로는 심법(心法)에까지 통달하도다. 체와 용의 드러나고 그윽함과 정(精)과 조(粗)의 근본과 말단을 얼음 풀리듯 확실히 깨치고 통하고 꿰어 환히 알았도다.
제문(祭文) [이이(李珥)]

이이(李珥)

시귀(蓍龜)를 이미 잃고 부모는 이미 돌아갔도다. 용과 호랑이는 이에 죽고 큰 별은 빛을 숨겼도다. 곤의(袞衣 왕의 정복(正服))는 빛나고 아름답건만, 누가 그 터진 곳을 기우며, 어린 애가 걱정스럽건만 누가 그 허물을 구원할꼬. 변괴가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누가 그 막을 도리를 마련하며, 어두운 밤이 길고 긴데 누가 있어 가을볕을 쬐어줄꼬.
아아, 공(公)이 나실 때 천지간의 정기가 공에게 모였도다. 부드럽고 따스하기가 옥과 같아서 그 얼굴은 순박하였고, 그 뜻은 밝은 해를 꿰뚫으며, 행실은 가을 물처럼 조촐하였도다. 착함을 즐기고 옳음을 좋아하니, 남과 나의 구별이 없었도다. 머리를 굽혀 하학(下學)에 힘쓰니, 깊이 생각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며, 실 끝을 헤치고 털 끝을 가르니, 그윽하고 깊은 것을 환하게 보았도다. 여러 가지 말이 제각기 달라서 굵고 가는 것이 쓰임이 다르니, 그것을 절충하여 하나로 모으되 자양(紫陽 주자)을 그 스승으로 삼았도다.
급한 흐름에서 용감하게 물러나 같은 유(類)에서 뛰어나고, 무리에서 떨어져 산림에서 도를 지키니 부하고 귀함은 뜬구름 같도다.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드러나고, 아름다운 이름이 하늘에 사무쳤도다. 임금은 겸허하게 가르침을 기다렸고, 총애의 부르심은 잇달아 이르렀도다. 그윽한 거처는 여덟 폭 그림으로 그리어져, 대궐 안 문짝에 높이 달았도다. 새 임금 들어서 곁자리에 모시기를 목마르듯 하였도다.
상서로운 봉황이 와서 위의를 드러내니, 경연에 아름다운 빛이 났도다. 《성학십도》로 임금에게 아뢰니, 숨은 것을 파내고 감춘 것을 드러냈도다. 여럿의 칭찬이 높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고, 물러나서는 더욱 낮추었도다. 석 장 글로써 대궐을 하직하고, 크고 넓은 기상으로 즐거이 돌아가니, 그 나아가고 물러남은 나라의 안위에 연관이 있도다.
조용한 시골에 묻혀 있으니, 찾아와서 공경히 스승으로 모시는 학생들이 있도다. 미묘한 이치를 밝게 드러내니 임금의 덕이 길이 새로웠도다. 나아가 백성들에게 혜택을 못 미쳤으되, 물러나 뒷사람을 이끌어 주었도다. 소자(小子)가 공부할 길을 잃어 흐리멍덩하게 나아갈 길을 모를 때에, 사나운 말은 함부로 뛰어 달리고 가시밭길은 거친데, 수레를 돌려 바른길로 고친 것은 진실로 공의 깨우침에 힘입었도다. 처음은 있었으나 끝을 맺지 못하여, 지금껏 갈피를 못 잡음을 슬퍼하도다. 혼자 생각에 스승을 쫓아가 업을 마치기를 바랐었더니, 하늘이 붙들어 주지 않아 철인이 갑자기 쓰러졌도다.
제문(祭文) [유운룡(柳雲龍)]

유운룡(柳雲龍)

거룩한 계획이 크고 넓으니, 왼쪽에 그림이요 오른쪽에 책이로다. 우러러 생각하고 굽어 읽으니, 학문이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 갈수록 바르고 확실함이 나타나고, 넉넉히 평범하고 진실한 데로 들어가 차례를 따라 나아가니,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도다.
학식을 넓히고 심성을 닦는 공부는, 경황이 없는 때에도 쉬지 않고 급한 때[顚沛]에도 끊어지지 않아, 천지신명을 엄숙히 대하니, 언제나 눈을 떠서 어둡지 않았도다. 향불 사르고 단정히 앉아 생각을 맑게 하고 정신을 모으면, 마음을 채찍질하여 언제나 깨어 있어 오직 날마다 새롭고 새롭도다.
동(動)과 정(靜)을 비추어 살피고 겉과 속이 환하게 통하며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나아가니, 마치 새에 날개가 돋친 듯하도다. 은밀한 것은 모두 궁리해 내고, 드러난 것은 모두 연구해 알아내며, 두루 알아서 자세히 설명하니, 촛불처럼 환하고 점처럼 맞았도다.
몸을 낮추어 사물에 응하고, 검약함으로써 처신하며, 마음을 비워 의에 복종하고, 굳셈으로써 욕심을 막았도다. 악한 것을 보면 나쁜 냄새를 맡은 듯하고, 착한 것을 들으면 얼굴빛을 고쳤도다. 인륜(人倫)의 아름다움과 일용(日用)의 떳떳함은 작은 것도 없고 큰 것도 없이 두루 그 이치에 마땅하도다.
힘쓰고 힘써 부지런하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도다. 저울눈을 쌓고 한 치를 쌓으며, 해를 거듭하고 달을 세면서, 그 소양이 깊어짐에 이르렀으니, 펴서 넓힘을 더욱 크게 이루었도다. 그것을 온몸에 실천할 때에 얼굴빛과 말소리에 나타났으니, 겸공(謙恭)하고 돈후(敦厚)하며, 충담(沖淡)하고 간결(簡潔)하며, 화락하고 평이하며, 자상하고 인자하였도다.
봄날처럼 곱게 비치고 가을날처럼 맑게 쬐도다. 손길 맞잡고 천천히 걸으면 학이 춤추듯, 난(鸞)새가 나는 듯하고, 의젓이 나는 것을 그치고 한가히 쉬면, 그곳은 산 언덕이요, 매화가 향기로운 곳이로다. 다가가면 따스하고 바라보면 엄숙하도다.
있어도 없는 듯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본받을 수 있으며, 높아도 낮은 듯하여 보는 사람은 지위를 잊었도다. 어리석고 현명함을 가리지 않고 물음이 있으면 이내 알려 주되, 친절하고 자세하게 다 가르쳐 주시니 미친 사람이나 교만한 선비나 사나운 이나, 한번 그 집을 바라만 봐도 스스로 기가 눌려 공손해져서, 제각기 그 마음에 가득 찬 더러움이 얼음이 풀리듯 녹고 말았도다.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있으니 악한 사람은 스스로 신칙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으니 착한 사람은 본을 받았도다.
제문(祭文) [남치리(南致利)]

남치리(南致利)

생각하건대, 우리 선생은 기운이 광악(光岳)의 영기를 모았고, 바탕이 금옥처럼 순수하도다. 천 년의 실마리를 이어 동방의 학문을 열었도다. 앉은 자리에는 봄바람이 불고, 가슴속에는 가을달이 비치도다. 일찍이 고향으로 물러가니, 마음은 도와 함께했도다. 어질면 반드시 신명의 보우가 있으므로 오랜 수명(壽命)을 누리리라 생각하였더니 어찌 불유구(不踰矩)에 그칠 줄을 생각이나 했습니까.

[주D-001]어찌 …… 했습니까 : 더 오래 사시리라 생각했는데 70세에 돌아가시어 몹시 안타깝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70세를 ‘불유구(不踰矩)’라고 표현한 것이다.
제문(祭文) [김수(金睟)]

김수(金睟)

산림에 해가 길어, 학문을 강한 공이 깊도다. 왼쪽은 그림이요 오른쪽은 잠(箴)인데, 오직 날로 공경하고 공경하였도다. 경(敬)을 지키고 이치를 연구하는 이 두 가지 중에 아무 데도 치우치지 않았도다. 깊이 생각하고 힘써 행하기를 해가 다하도록 마지아니하였도다. 학문의 지경이 이미 깊으니, 밟고 선 곳이 우뚝 높아서 푸른 하늘의 밝은 해이고, 태산의 높은 봉우리였다. 거룩한 시대의 참 선비요 온 백성의 선각자로서, 포백(布帛) 같은 글은 숙속(菽粟) 같은 맛이 있었으며, 여사(餘事)로 마음으로 쓴 글씨 또한 진위(晉魏)를 뛰어넘었도다. 아아, 선생은 세상에 드물게 빼어나서, 깊이 기르고 두텁게 쌓아 펴놓으니 크게 이루었도다. 소문을 듣고 의를 사모하여 찾는 사람이 멀리서 오니, 맞이하기는 화(和)로써 하고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이끌고 타이르고 가르쳐서 먼저 근본을 세우게 하고, 차례가 있어 순서대로 나아가게 하여, 어둡고 어리석음을 열어 주었도다. 맑고 깊으며 크고 넓으니 사람을 응대함에 끝이 없었도다.

[주D-001]포백(布帛) …… 있었으며 : 퇴계의 문장은 일상생활에 긴요한 옷감이나 곡식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뜻이다. 《송사(宋史)》 〈정이전(程頤傳)〉에 “그 말의 뜻은 마치 무명과 비단, 콩과 좁쌀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진위(晉魏)를 뛰어넘었도다 :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위나라의 위부인(衛夫人)이나 장지(張芝) 등의 서법보다 뛰어나다는 뜻으로 마음이 깃든 필체의 훌륭함을 칭송하여 한 말이다.
제문(祭文) [유근(柳根)]

유근(柳根)

아아, 선생은 실로 하늘이 낳은 큰 덕(德)이로다. 선천적으로 타고남이 이미 달랐는데, 채우고 비움이 모자람이 없었도다. 본래 온화하고 공손한 데다 겸손한 뜻을 더욱 더했고, 기운은 실로 영특하고 민첩한데, 더욱 자기를 비울 줄을 알았도다. 밝음[明]과 정성[誠]이 같이 나아가고, 공경[敬]과 의리[義]를 함께 세웠도다.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아서, 솔개는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천리의 조화를 밝게 알았도다. 사물에 나아가서 끝까지 연구하니, 소의 털이요 누에의 실이었도다. 처음과 끝이 어지럽지 않고, 크나 작으나 빠뜨리지 않았도다. 바탕은 깊고 행실은 갖추었으며, 사업은 넓고 기초는 높았도다. 마침내 크게 이루게 되니 접촉하는 바는 다 통하였도다.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고 순수하며, 자세하고 치밀하되 화락하고 너그러웠도다. 의를 들으면 따를 줄 알아서 홀로 편안해하지 않았도다. 늦어서야 내 살 곳을 비로소 얻었으니, 물은 감싸 안아 돌고 산은 둘러 있었다. 스승의 법은 높고 엄하며, 신령스런 흉금은 깨끗하고 시원했도다. 시대를 걱정하는 간절한 정성과 도를 즐기는 참된 마음을 아울러 행하여 걸림이 없되, 제각기 그 법에 그치었도다.
제문(祭文) [이덕홍(李德弘)]

이덕홍(李德弘)

공손히 생각하노니, 우리 선생은 순수한 자질과 화순(和順)한 덕으로 정주(程朱)의 도학에 공맹(孔孟)의 심법을 지니고 밝힘[明]과 정성[誠]을 아울러 힘쓰고 정(情)과 성(性)을 함께 기르니, 겉과 속은 서로 이어지고 움직임과 그침은 모두 바르도다. 즐거울 때 나아가 행하고 걱정될 때 떠나 물러서니, 경우에 따라 다 편안하였도다. 구슬은 물속에 감추어졌고, 옥은 산에 묻히었도다. 염계(濂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이요, 연평(延平)의 빙호추월(氷壺秋月)이라, 아득히 끊어진 그 실 끝을 생각하지 않고도 스스로 얻었도다. 한 나라의 시귀(蓍龜)이며 이 학문의 태산과 북두(北斗)였도다. 일대의 종장(宗匠)이 되고 백세의 존경할 분이로다. 그 문하를 바라보고 달려오니, 많은 선비들이 모였도다. 예로써 그들을 나아오게 하고 차례대로 그들을 면려하였다. 월란(月瀾)에 계시던 그 어느 날, 한밤에 혼자 일어났을 때, 마침 덕홍이 곁에 있다가 경(敬) 자의 뜻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의관을 정제하는 것이다.” 또 “생각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니, 어떤 일이나 그렇게 하면 성현이 될 수 있다.” 하였도다. 선생은 사랑해 주심이 어버이 같았는데, 나는 자식같이 섬기는 예를 다하지 못하였도다. 나의 정성은 타작마당 하나 다지는 것도 안 되니, 그 죄가 천지에 끝이 없어라. 시내에 봄이 돌아와 모든 풀들이 때를 얻었는데, 산 매화는 슬픔을 토하고 시내 버들은 시름을 머금었도다.

[주D-001]광풍제월(光風霽月) : 황산곡(黃山谷)이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칭찬하여, 광풍제월과 같다 하였는데, 광풍은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면 풀잎이 바람에 흔들려서 햇빛에 빛나기 때문에 일컫는 것이고, 제월은 비 갠 뒤로 새로 나오는 달을 말한 것이다.
[주D-002]빙호추월(氷壺秋月) : 빙호는 옥병에 들어 있는 얼음[玉壺氷]이고 추월은 가을 달을 말하는데,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을 나타낸다.
사제문 추보(賜祭文追補)

계축년(1733, 영조9) 지금 임금 9년 12월 17일 갑자에, 국왕은 신하 홍문관 부수찬 정형복(鄭亨復)을 보내어, 증 영의정 문순공 이황의 영전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아아, 우리 여러 임금이 독실히 가르쳐 사람을 깨우치니, 빛나고 빛나는 선비들이 크게 사문을 밝혔도다. 동남에서 도를 강하여, 이름 난 어진 이가 많았으니, 우뚝이 솟은 김(金 김굉필)과 정(鄭 정여창)에 문원(文元 이언적)이 또한 거기 있었고, 나라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우러러보는 바 되어 그 도를 집대성한 이가 그대였도다.
아아, 그대의 성덕(盛德)이여, 금같이 단련되고 옥같이 순수하였도다. 덕을 쌓고 모아 끝까지 나아가니 고요하고 두텁기가 대지와 같아서 온갖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니, 공부로 말하면 백배 천배일러라, 세상에서 초연(超然)하여 벼슬을 버리니, 영화와 부귀에 뜻이 없었도다. 두 조정이 간절히 초빙하였으니, 세상을 건지는 일에 크게 보좌하였도다. 성현의 끼친 경전 혼자서 안고, 시골로 돌아가 도를 지키며, 그 가운데서 조용히 거슬러 찾아들어 근원을 만나니, 주자[紫陽]의 모든 글을 더욱 갈고 닦았다. 아득한 천년 옛 성현을 정신으로 만났으니, 뒷사람에 혜택을 줄 뿐 아니라, 바로 소왕(素王 공자)의 소신(素臣 좌구명)이로다. 사단칠정의 뜻 깊은 이론과 진 진백사ㆍ왕 왕양명 의 어긋난 학설을 깊이 생각하고 끝까지 따져서, 털끝만큼도 의문을 남기지 않았도다. 지극한 정성을 몸에다 돌려, 거동하는 가운데도 바르고 원만하며, 순수한 것이 속에 쌓이니, 겉으로 드러나는 빛이 빛나도다. 자유롭게 거닐며 산수를 즐기니 지혜와 인(仁)을 갖추었으며, 한가로이 목욕하고 시를 읊으니 동자(童子)ㆍ관자(冠者)는 차례가 있었도다. 때맞춘 비처럼 교화를 펴니, 공을 베풀어 끝이 없었도다. 사람은 갔으나 도는 있나니, 하늘 가운데 해와 볕이로다.
내 옛 법[典刑]을 간절히 생각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도다. 그 《십도》의 요긴한 법과 그 여섯 조목의 올린 글을, 마음에 새겨 두고 못 만남을 슬퍼하도다. 끼친 가르침 오히려 여기에 있어서 우리 백성들을 깨우쳤으니, 추(鄒)와 노(魯) 옛 나라의 남긴 교화가 두터워라. 마을 사람들은 효도하고 공경하며, 서당마다 글 읽고 거문고라. 어른을 공경하고 의를 좋아하며, 예속(禮俗)을 따라 차례가 있으니, 아이들은 어른과 스승을 알고 집집마다 옛 책을 읽는도다. 인심이 인후(仁厚)한 동네가 아름답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었으나, 한 모퉁이 착한 교화 200년을 뻗쳤도다. 진실로 경의 지극한 덕이 살에 배고 골수에 사무쳐, 흘러간 덕택이 멀고 깊지 않았다면, 어찌 이토록 이르겠는가.
멀리 유풍(遺風)과 공렬(功烈)을 추모하니 나의 흠모함을 더하며, 저 어진 이의 사당을 둘러보고는 그대를 생각하여 배회하고 있노라. 무이산(武夷山)의 구곡(九曲) 시내요, 소요부(邵堯夫)의 백원(百原) 언덕이요, 하늘의 구름과 흐르는 물, 그 신비로운 운치가 여기 있도다. 옛집 암서헌(岩栖軒)은 남은 그대로 책상과 벼루는 옮기지 않았나니 시원하고도 맑은 모습을 경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보는 듯하다. 그림을 그려 오라는 명령은 옛일을 따랐고, 향을 바쳐 예를 펴니 나의 가까운 신하에게 시키도다. 봄가을 공자 사당에 깨끗한 제사 없지 않겠지만, 이제 여기 맑은 술잔으로 특히 내 정성을 표하노니, 경은 돌아보아 응감(應感)하고 인도하기 더욱 힘써서, 길이 사람의 풍속을 세워, 고금[古上]에 걸쳐 다함이 없게 하라. 홍문관 교리 오원행(吳瑗行) ○ 한림(翰林) 김한철(金漢喆)이 태백산에 쇄사(曬史)하러 가던 길에, 상덕사(尙德祠)를 찾아보고 복명하는 날 아뢴 바가 있었기 때문에 특히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주D-001]하늘의 …… 물 : 도학자의 깊은 정신 세계에서 우러나온 시적인 운치를 의미한다. 하늘의 구름[天雲]과 흐르는 물[活水]은 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나온 말인데, 그 시에 “반이랑의 네모난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지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속에 배회하네. 이 못을 어이하여 이렇게 맑은가, 원두에서 활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謂有源頭活水來]”라고 하였다.
[주D-002]쇄사(曬史) : 국가에서 실록(實錄)을 편찬하면 여러 벌을 만들어서, 서울에 두는 것 외에 묘향산(妙香山)ㆍ태백산(太白山) 등의 높고 그윽한 곳에 한 벌씩 보관하는데, 3년 만에 한 번씩 관리를 보내어서 책을 내어 햇빛을 쬐는 것을 말한다.





[주D-001]사현(四賢) :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