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명현록/전주최씨 무과편

임진왜란 선무이등공신 (의숙공 증 병조판서) 관련기사 (펌)

아베베1 2010. 7. 16. 15:26
최강(崔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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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견(汝堅)
소계(蘇溪)
시호 의숙(義肅)
생졸년 1559 (명종 14) - 1614 (광해군 6)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항일/국방 / 무신 / 무신
과거 및 취재

[상세내용]

최강(崔堈)에 대하여
1559년(명종 14)∼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견(汝堅), 호는 소계(蘇溪). 운철(云哲)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균(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1605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형 균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쌍충록  

壬辰倭亂 때 義兵將인 崔均(1537~1616)·崔堈(1559~1614) 형제의 글을 모아 엮은 문집. 崔均의 후손 祥甲이 1823년(純祖 23) 편집, 道山書院에서 간행했다. 蘇湖 崔均의 字는 汝平, 본관은 全州.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생 堈과 함께 義兵을 일으키고 風雲將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周易·천문·지리에 통달했다. 固城·泗川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守門將에 인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丁酉再亂때도 동생과 함께 무공을 세워 通政大夫에 올랐고 1605년에는 濟州道 앞바다에 출몰하는 倭寇를 火攻으로 무찔렀다. 1624년 李适의 亂 때도 戰功을 세웠다. 만년에 嘉善大夫에 승진. 吏曹判書에 追贈, 固城의 道山祠에 祭享, 謚號는 義敏. 蘇溪 崔堈의 字는 汝堅, 본관은 全州, 1585년 武科에 합격,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均과 함께 固城에서 義兵을 일으켜 晋州·鎭海 등지에서 공을 세워 五衛都摠府 經歷이 되고 1605년 加里浦僉節制使에 승진, 火攻法으로 倭敵을 무찔러 順天府使에 올랐다. 1606년 慶尙左道水軍節度使, 五衛都摠府副摠管, 光海君때 忠淸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의 혼란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퇴했다. 그뒤 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兵曹判書에 追贈, 固城의 道山祠에 祭享, 諡號는 義肅. 책 첫머리에 柳尋春의 序가 있다. {권1}:世系(1世~20世), 詩 9수(次姜白川相思詞·亂定後歸故庄 등), 書 9편(答姜白川·與姜松窩 등), 實記(蘇湖公實記 ·蘇溪公實記). {권2}:龍蛇倡義事蹟·濟州勝戰事蹟·遺事(蘇湖公遺事·蘇溪公遺事)·補遺(本縣邑誌·趙公慶男山西雜錄·徐藥峯濱答姜白川書 ·李忠武公舜臣與姜白川書·察訪公答姜松窩書) 등. {권3}:敎加里浦僉使崔堈書·行狀·狀後識·碣銘·姜松窩贈蘇湖公詩·輓詞·道山祠奉安文·常享祝文. {권4}:祠宇上樑文·道內士林呈營請褒狀·本邑士林呈繡衣金學淳請褒狀·請贈時道內士林上言·本孫請贈上言·啓目 ·禮曹下本道關草·敎旨 등.<龍蛇倡義事蹟>은 倭寇가 釜山을 침입, 僉使 鄭撥과 東萊府使 宋象賢이 戰死하는 장면으로 부터 崔堈이 崔均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倭寇와 싸우는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1597년 日本이 재차 침입(丁酉再亂)할때 義兵을 다시 일으켜 적을 무찌른 내용도 들어 있다. <濟州勝戰事蹟>은 崔堈이 加里浦僉節制使로 있던 1605년 濟州 앞바다에 침입해온 日本海賊을 형 均과 함께 火攻法을 써서 무찌른 내용이다. 이때 均의 나이는 70이었다. <李忠武公與姜白川書>는 崔均·崔堈 형제의 義兵이 남쪽바다에 있는 倭兵을 무찌른 것을 기뻐해서 보낸 글이다. 壬亂 및 義兵史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純祖實錄   雙忠錄

贈兵曹判書崔堈諡號望


義肅[주:見義能忠曰義正己攝下曰肅]    武肅[주:折衝禦侮曰武正己攝下曰肅]    貞敏[주:淸白自守曰貞應事有功曰敏]


선조 191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9월 24일(을미) 4번째기사
병조에서 최강 등 무신에게 상전을 베풀 것을 건의하다

 

좌부승지 최염(崔濂)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최강(崔堈) 이하 5인은 모두 품계가 높은 무신으로서 직사를 밝게 다스리고 주사(舟師)의 모범이 되어 매우 가상하니, 항상 해진(海陣)에 두어 급변에 대비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습니다. 송덕일(宋德馹) 이하 7인은 모두 직사에 근실하여 현저한 공적을 남겼으니, 상전(賞典)을 베풀어 격려의 소지를 삼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라 아랫사람으로서 감히 마음대로 천단할 일이 아니니, 성상께서 재량하여 시행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최강 등만을 항상 해진에 둘 것이 아니라 그중 우수한 자도 곤임(閫任)으로 발탁하라. 이것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타당한 일이며 권장하는 데에도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송덕일 등도 각각 그 재능에 따라 변장(邊將)으로 승직시키기도 하고 변지의 수령으로 옮겨 제수하기도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이 해진(海陣)에 순도(巡到)하여 주사(舟師)를 점검하였는데, 임치 첨사(臨淄僉使) 송덕일(宋德馹), 어란 만호(於蘭萬戶) 임영립(林英立),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경신(宋敬臣), 천성 만호(天城萬戶) 김시약(金時若)은 주즙(舟楫)과 기계(器械)가 모두 극히 정교하고 담략과 재능 또한 모두 볼만한 것이 있었다. 당포 만호(唐浦萬戶) 이희삼(李希參), 적량 만호(赤梁萬戶) 한극인(韓克訒),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노홍(魯鴻)은 주사(舟師)를 익히 알고 직사에 근실하였다.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최강(崔堈), 발포 만호(鉢浦萬戶) 김성옥(金成玉), 방답 첨사(防踏僉使) 조계종(趙繼宗), 가덕 첨사(加德僉使) 박광춘(朴光春),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섬(李暹)은 병선(兵船)과 전기(戰機)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주사의 모범이 되었다. 이에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논상(論賞)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병조의 이 아룀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5책 122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영남(嶺南) 의병(義兵)

전 훈련 봉사(訓鍊奉事) 권응수(權應銖)는 신녕(新寧)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혹 영천(永川)이라고도 한다.
응수는 처음에 수영 군관으로서 자제(아우 응전(應銓)과 이온수(李蘊秀) 등)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을 죽였으며, 또한 요로에 복병해 놓았다가 뒤떨어진 적군을 죽이기도 하였다. 여러 장정을 모아서 적을 맞아 정면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뒤에서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두려워하여 피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습격을 받았으나 그의 말이 강건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초유사(김성일(金誠一))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 9월에 영천에 있던 적군이 봉고어사(封庫御史)라고 자칭하면서 신녕을 향하여 오는데, 안동(安東) 의병장 권응수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珹)ㆍ신해(申海) 등과 함께 박연(朴淵)에서 만나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영천 백성들이 그 고을에 주둔하고서 웅거한 적군을 무찌르려고 응수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왔으므로 응수 등이 함께 진군하여 추평(楸坪)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니, 적들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는데도 군사들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응수는 담략과 용맹이 있어 곧장 군사 몇 사람을 베어 죽이고 뛰쳐 나가 군사들의 앞장을 섰다.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적군은 관사로 도망갔다. 바람을 따라서 불을 지르니 거의 다 타죽고 혹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수백여 명을 죽였으므로 시체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기재(寄齋)》에는, “응수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한 사람당 섶 한 묶음씩을 들고서 밤에 영천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안동 이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해 갔으므로 좌도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 병사 박진(朴晉)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절충조방장(折衝助防將)으로 발탁되었다.”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 응수는,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갑신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으며, 선무 공신 2등으로 두 번째이다. 에 녹훈되어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고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迎日)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龍宮)ㆍ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정세아는 영천 사람으로 진사였는데 그때 나이가 67세였다. 적군이 영천을 점거하니, 세아가 좌수 유서(柳瑞)ㆍ생원 조희익(曺希益) 등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적군을 잡아 죽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성을 보전한 승리는 모두 세아 등의 의병을 먼저 일으킨 힘이었다. 《순영록(巡營錄)》
○ 세아는, 자는 화숙(和淑)이고 호는 호수(湖叟)며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격파하고 그 공로로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임명되었다. 뒤에 여러 차례 증직되어 병조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공의 아들은 의번(宜藩)인데, 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주(慶州) 전투에서 세아가 포위되니 의번이 두 번이나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군에게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뒤에 정려(旌閭)되었다.
○ 조성은,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그의 형 조경(曺瓊)과 함께 공산(公山)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여 여러 번 이겼다. 공으로 군자 판관에 임명되었고, 갑오년에 무과를 주어 벼슬이 절제사에 이르렀다.
○ 신해는 하양(河陽) 사람이다. 훈련 봉사(訓鍊奉事)로서 군사를 모집하여 적군을 토벌하였다.
○ 본관이 함안(咸安)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는, 전 직장 이로(李魯) 등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왜변의 소식을 듣고 즉시 본도로 돌아가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동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 의리상 적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이때에 이르러서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통문에 “죽음이 비록 싫기는 하지만 천지에 적들이 그물처럼 둘러싸서 도망가 살 곳이 없으니, 비록 살기를 도모하여 개ㆍ돼지처럼 치욕을 참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의리에 죽을지언정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인(仁)을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 뒤 정유년에 종도가 황석산성(黃石山城) 전투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 문구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월록》
○ 이로의 통문에, “백척이 되는 나무가 이미 뽑혔어도 한 치의 뿌리에서 생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며,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완성되려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큰 공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다.
○ 유종개(柳宗价)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상 좌도의 산골 10여 고을은 전란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간혹 강개한 뜻을 가진 선비가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적군을 토벌할 것을 타일렀으나, 백성들은 조석으로 편히 지내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군사를 일으키자는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였다. 종개는 개연히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고을의 군사 수백 명을 모아서 산중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군이 횡행하여 못된 짓을 하다가 광비촌(廣比村)을 지나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령(掌令) 윤흠신(尹欽信)ㆍ윤흠도(尹欽道)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였다.적군의 선봉이 변장을 하고 몰래 다니는데도 척후병이 이를 알지 못하여 복병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개 등이 갑작스럽게 적군을 만나 용감하게 싸우고 후퇴하지 않다가 힘이 다 떨어지고 구원군이 없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적군이 드디어 불지르고 노략질하고서 갔다.
○ 유종개의 자는 계유(季裕)이며,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 정자(校書正字)가 되었다.
○ 예안(禮安) 사람 전 한림 김해(金垓)가 의병을 일으켰다.
종개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의병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초유사가 격문을 띄워서 국은을 잊었음을 책망하고 의병에 나갈 것을 격려하였으며,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 또한 통문을 들렸다. 이에 영천(榮川)ㆍ풍기(豐基) 선비들과 전 한림 김해ㆍ생원 금응훈(琴應勳)ㆍ진사 임흘(任屹)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잇달아 일어나니 군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김해의 통제를 받았다. 김해는 본래 인망(人望)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일월록》
○ 좌도의 의병이 일직현(一直縣)에 모여서 맹약할 때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김면(金沔)이 본도의 대장이 되었음을 듣고 의병 문서를 강을 건너 김면에게 보내었다. 김면이 열람하여 보니, 모두 유생들로 부대가 편성되었으므로, “이것들이야말로 참된 의병이다.” 하였다. 계사년에 김해는 명 나라 군사를 따라서 경주에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수찬에 증직되었다. 《일월록》
○ 박정완(朴廷琬)이 군사를 모집하여 김면을 따라갔는데, 재산을 털어서 군량을 공급하였고 활과 화살도 직접 마련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상당히 공을 세웠다. 김면이 무계(茂溪)에서 승전한 것은 정완의 힘이 컸는데도 공에는 참여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순영록》
○ 삼가(三嘉) 사람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의 형제와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 권양(權瀁),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순영록》
○ 금산(金山) 사람 박사 여대로(呂大老)와 권응성(權應星)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는데, 응성이 임시로 대장이 되어서 김면과 지례(知禮)ㆍ금산의 적군을 협공하였다. 그 뒤에 적군의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순영록》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지르고 도망갔다. 《순영록》
○ 경주 사람 김호(金虎)가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였다. 초유사가 김호를 도대장(都大將)으로,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를 소모장(召募將)으로, 진사 최신린(崔臣隣)을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직책을 맡기니, 김호 등이 더욱 용기를 분발하였다. 8월 2일에 적군 기병 5백여 명이 언양(彦陽)에서 노곡(奴谷)을 향하여 오자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였는데, 호는 창에 찔리고서도 더욱 힘써 싸웠다. 적군이 본주(本州)의 큰 진으로 도망가자 추격하여 5십여 명을 죽였다. 전후의 경주 승전에서 그보다 앞 선 자는 없었다.
○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은 어려서 글을 익히고 늦게서야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담략이 있었다. 무사들의 출세를 구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성품이 또 강직하여 자신의 의사를 굽혀서 남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들이 비록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신임을 얻었고, 전투에 임해서는 자신이 앞장을 섰다.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명망은 같았으나 군사를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보다 나았다. 또 진주성 함락조 아래에도 적혀 있다.
○ 상주 사람 진사 김각(金覺)과 장자 이준(李埈)은 의병을 일으키려고 격문을 보냈다.
○ 예안 사람 진사 이숙량(李叔樑) 등은 격문을 지어서 여러 고을에 전하고 효유하였다.
○ 인동(仁同) 향병장(鄕兵將) 장사진(張士珍)은 날래고 용맹하며 담략이 있어서 마음을 단단히 가지고 힘써 적군을 토벌하였고,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분발하였다. 별장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데, 하루는 적군 수백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사진은 용사 수십 명만을 거느리고 뛰쳐나가 맞아 싸워 먼저 비단 옷에 은 투구를 쓴 놈을 쏘아서 그의 머리를 베어 창에 매다니 적군들은 울부짖으며 도망갔다. 사진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10일 뒤에 적은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다시 와서는 먼저 기병 십여 명을 거느리고서 싸움을 걸어 오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활을 쏘아대니 적들이 시윗 소리에 따라서 거꾸러졌다. 이에 드디어 날쌘 기세로 추격하여 죽이자 갑자기 적군의 복병이 나타났으나 사진은 오히려 크게 호통치며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해도 저물었는데, 적군 한 놈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사진의 한 팔을 쳐서 끊어 버렸다. 한쪽 팔만으로도 용기를 떨치며 공격하여 마지 아니하더니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듣고 통정(通政)ㆍ수사(水使)를 증직하였다.
○ 사진은 군위(軍威) 향교 유생이었다. 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적군은 그를 두려워하여 장장군이라고 부르며 그가 맡은 구역에는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 배덕문(裵德文)과 배설(裵楔)이 의병을 일으켰다.
○ 배덕문은, 자는 숙회(叔晦)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명종 계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 배설은 덕문의 아들이다.
○ 성주《선생안(先生案)》에 제말(諸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성(固城) 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해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는 앞을 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郭再祐)와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죽어서 공명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한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충전하여 수염이 모두 위로 뻗친 것이 흡사 빳빳한 고슴도치 털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한다. 《약천집(藥泉集)》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호남(湖南) 의병


의병장 고경명은 이미 죽었고, 김천일은 경기 좌의병(左義兵) 진중으로 갔다.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모으고, 전 부사 화순(和順) 사람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7월 26일에 깃발과 북을 광주(光州)에 세우고 골(鶻)자로 신표를 삼았다. 전라우도에서 군사를 거두어 남원으로 향하면서 격문을 지어 돌리고 효유하였다.
○ 10월에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사방으로 나뉘어서 약탈하였다. 경회가 군사를 단성(丹城)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적군이 갑자기 닥치니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서 무너졌다.
○ 11월에 통정에 오르고, 계사년 2월에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7월에 보성(寶城) 사람 임계영(任啓英)은 동지 여러 사람과 함께 격문을 전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향토를 지킬 계획으로 본국을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거쳐 그 역시 남원으로 향해 갔는데, 가는 도중에 군사 천여 명이 얻었다. 좌의병장(左義兵長)이라고 일컬으면서 호(虎)자로 신표를 삼았다. 처음 인장에는 호랑이를 그렸으나 뒤에는 호자를 썼다.
○ 남원 사람 전 참봉 변사정(邊士貞)은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수십일 안에 2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이라고 불렀다. 진주 전투에 부장 이잠(李潛)을 파견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 남원의 백성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향병(鄕兵)이라 부르면서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순천 무사인 강희열(姜希悅)은 처음에는 고경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금산(錦山)에서 패하자 울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불러모아 전진하였다.
○ 해남 사람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 사람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과 태인(泰仁) 사람 민여운(閔汝雲)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갔는데, 모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해남의 임시 장군 성천기(成天祇)는 뇌진군(雷震軍)이라고 써서 신표를 삼고 국가의 일에 힘을 다 하였다.
○ 임피 사람 진사 채겸진(蔡謙進)ㆍ이이남(李以南)이 의병을 일으켰다.
○ 계사년 8월에 전라 우의병(全羅右義兵)과 복수병(復讐兵) 선비들이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전 제독관 화순 사람 최경장(崔慶長)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고 계의(繼義)라고 써서 신표를 삼았다. 경장은 경회의 아우이다.
○ 11월에 계의군(繼義軍)을 해체시키고 그 군량을 초승군(超乘軍 김덕룡(金德龍)의 군대를 칭하는 것으로 초승(超乘)은 말을 훌쩍 뛰어서 탄다는 뜻이다.)에 귀속하게 하였다.
○ 적군이 지례(知禮)로부터 호남을 침범할 때에 알수 없는 5, 백 명의 사람들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이라고 자칭하면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쏘아 죽였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호서(湖西) 의병


○ 이산겸(李山謙)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서자이다.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다.
○ 한산(韓山) 사람 전 참의 신담(申湛)이 의병을 일으켰다.
○ 호서(湖西) 노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서 조대곤(曺大坤)을 부장으로 삼고, 건의(健義)자 기를 세워서 징표를 삼았다. 대곤이 전에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당하고, 김수(金晬)를 따라서 임금이 있는 행조(行朝)로 가려는 것을 수경이 말려서 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정(朝廷)에서 건의군의 장수를 팔도 의병 도대장(八道義兵都大將)으로 삼고 인장과 어도(御刀)를 하사하였다.
○ 충주(忠州) 사람 충의위 조웅(趙雄) 《조야첨재》에는 웅(熊)이라 하였다. 은 용감하여 말 위에 서서 달리며 창을 휘두르기를 잘하였다. 군사 5백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죽였다. 하루는 조웅이 짙게 낀 안개를 이용하여 행군하려는데, 적군이 무방비 상태에 그의 후면을 엄습하였다. 조웅은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탄환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서 적군에게 잡혔다. 그의 손ㆍ발을 잘랐는데도 입으로 꾸짖기를 마지 않다가 드디어는 사지가 찢겨졌다.
○ 선비 박춘무(朴春茂)와 충주 선비 조덕공(趙德恭), 청주 무사 이봉(李逢)은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은 호서에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경기(京畿) 의병


경기 전 정(正) 정숙하(鄭叔夏), 수원 사람 최흘(崔屹), 선비 이산휘(李山輝), 전 목사 남언경(南彦經), 선비 김탁(金琢), 전 정랑 유대진(兪大進), 충의 이질(李軼), 선비 왕옥(王玉)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다.
○ 전 사간 우성전(禹性傳)이 강화ㆍ인천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세가 매우 성하였으며 의(義)자를 군호(軍號)로 삼았다. 조정에서 대사성으로 벼슬을 올려 주고 적군을 토벌할 것을 권면하였으나 열 한달이 되어도 성전 등은 잘 싸운다는 소문이 전혀 없었다. 임금이 그를 불러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게 하였으나, 성전은 병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성전은 군사를 거느려 자신만 호위하며 형세를 관망하면서 오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담소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천일은 고립된 군사로 해볼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성전은 본래 중병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터인데 어찌 관망만 하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원균(元均)의 아우인 진사 원정(元挺)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부사 김적(金績)이 삭녕(朔寧)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기를 청한 상소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전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을 장수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 성혼이 세자의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가려 할 때, 세자는 그에게 김적의 군진에 가보기를 명하였다.
○ 고양(高陽) 진사 이로(李魯) 혹 영남 전 직장이라고도 되었다. 가 의병을 일으켰다.
○ 이산휘(李山輝)는 기지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군을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하루는 서울에 있던 적군이 노략질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중 적군 네 명이 정토사(淨土寺)에 왔다. 산휘는 중들과 약속하고 그들에게 나가서 맞아들이게 하니, 네 명의 왜놈들이 즐거워하였다.법당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밥을 지어서 대접하는데 늙은 중 한 사람이 그들과 마주 앉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물을 찾으니 중들은 불을 지펴 물을 매우 뜨겁게 끓여 네 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물을 가득히 떠가지고 왔다. 왜놈들이 각각 밥주발을 가지고 위로 쳐다 보면서 물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중들이 급히 놈들의 낯에 끓는 물을 끼얹자 놈들이 모두 땅에 거꾸러지므로 중들이 나무 방망이로 쳐 죽였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긴 하지만 그의 임기응변이 이와 같았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해서(海西) 의병


황주(黃州) 사람 황하수(黃河水), 윤담(尹聃)과 봉산(鳳山) 사람 김만수(金萬銖)가 의병을 일으켰다.
○ 해주(海州) 사람 생원 조광정(趙光庭) 자는 응순(應順) 이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크게 승리하였다.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모셔졌다.
○ 봉산(鳳山) 무사 김만수(金萬壽)가 그의 아우 천수(千壽)ㆍ구수(九壽)ㆍ백수(百壽)와 진사 최섭(崔涉)ㆍ이옹(李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서울로 가는데, 백수는 유극량(劉克良)과 함께 파주(坡州) 전투에서 죽었다. 이때 본 고을에 원이 없으므로 순찰사 이일(李鎰)이 만수를 군수로 삼았는데, 임금이 의병장을 삼도록 명하였다. 그 아들 광협(光鋏)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모두 참판에 증직되었다. 《봉산 충령사지(鳳山忠烈祠誌)》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관서(關西) 의병


중화(中和) 사람 김진수(金進壽)ㆍ임중량(林仲良)과 평양(平壤) 선비 양덕록(梁德祿)ㆍ양의직(楊懿直)ㆍ이덕암(李德巖)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강동(江東)에서 귀양살이 하던 조호익(曺好益)이 평양으로 불리어 오자 금부도사 직을 주어 소모관(召募官)에 제수하였는데, 미처 군사를 모집하기도 전에 임금의 행차가 이미 평양을 떠났고, 강 여울을 지키던 장수도 무너져 흩어졌다. 호익이 다시 행재소로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유성룡을 만났는데, 왕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성룡이 말하기를, “국록을 먹는 신하의 충성이 도리어 초야에 묻힌 신하의 충성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호익에게, “임금께 충성하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자네는 도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수복할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호익이 즉시 달려 돌아와서 문도들과 정성을 다하여 부르짖으며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매월 초하루 또한 동지(冬至)라고도 한다. 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니 온 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중화(中和)와 상원(祥原) 사이에 진을 치고 뒤떨어진 적군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많아서 군사들이 기세가 가장 강하였다.
○ 호익은, 자는 사우(士友)이며, 호는 지산(芝山)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을사년에 태어나서 벼슬은 목사까지 지냈다.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가 65세였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호익이 창원(昌原)에 살면서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 왕래하였는데,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을해년에 경상 도사 최황(崔滉)이 군적(軍籍)을 가지고 창원에 와서, “군적의 검사와 감독하는 임무는 마땅히 온 고을에서 명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하면서 공을 지명하였다. 공은 상복을 아직 벗지 아니하였으며, 병이 또 중해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최황이 크게 성내어 일 없는 장정 50명을 들여보낼 것을 독촉하였다. 공은 집의 종들을 모두 내었으나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고을원 이하의 사람들이, “비천한 임무를 이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다투어 말하니, 최황은 더욱 더 성을 내어 형장을 치기까지 하였고, 또 토호(土豪)라고 장계를 올려서 평안도 강동(江東)으로 귀양가게 하였으니 강동은 창원과 2천여 리의 거리에 있었다. 그에게 와서 위문하는 자가 있으면, “운명이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을 하고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관서(關西) 사람들은 옛날부터 학문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의 품도를 듣고는 원근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들므로 학규(學規)를 정하여 가르치니, 성대하게 서하(西河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의 기풍이 있었다.무자년에 공이 말미를 받아 선영에 성묘하러 갈 때에 서울을 지나게 되었다. 최황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악수하면서, “들으니, 자네가 강동에 귀양가 산 이래로 나를 원망하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하니 참으로 명(命)을 아는 군자로다. 나는 자네를 모함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재앙을 혹독하게 받게 될까 두렵네.”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조호익은 신의 그릇되고 망녕된 아룀으로 오랫동안 귀양 중에 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고 빨리 불러서 그를 임용하소서.”라 아뢰었으나 죄의 사면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는 귀양살이 한 지가 벌써 17년이 되었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갈 때에 유성룡이 다시 그의 억울함을 아뢰어서 특별히 석방되었다.이어 금부 도사로 임명하고 소모관으로 삼으면서, “들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관서에 있어서 그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가 많다 하니, 그대는 군사를 모집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그 문인 윤근(尹瑾)ㆍ박대덕(朴大德) 등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서 군세가 가장 강하였다. 이때 중화 사람 임중량(林仲良)도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는데, 적군은 허수아비 둘을 만들고서 그 위에 칼을 대면서, “네가 조 아무개냐, 네가 임중령이냐” 하였으니 적군이 그들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다.성주(星州)ㆍ안주(安州)ㆍ성천(成川) 등의 고을 원을 지냈으며 기유년에 죽었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천(永川) 유생들이 그가 임시로 살던 집 옆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명신록》
○ 호익은 제사 지내는 데에 더욱 삼가해서 제사에 소용되는 모든 기물을 별도의 장소에 간직하고 집안 사람들과 집사들에게는 모두 제삿날 전에 미리 목욕하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난 뒤에야 그릇을 씻고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으며, 껍질이 있는 과실은 그 껍질을 벗긴 뒤에 물로 깨끗이 씻고, 우물 물도 미리 깨끗이 치우고서 다른 사람은 길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초장도 별도의 그릇에 만들어 두어 보통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모두 후생들의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명신록》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名僧)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御製詩)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이고 또 사명산인(泗溟山人)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任)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道)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고 사시(私諡)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6월 8일(병진) 2번째기사
예조에서 이현·이경법·남수일 등의 효행·군공 등에 대하여 상을 줄 것을 청하다


예조에서 여러 도의 유생들이 올린 글로 인하여 도의 조사를 거친 뒤에, 지평(砥平) 사인(士人) 이현(李玹), 포천(抱川) 학생(學生) 이경법(李敬灋), 청주(淸州) 학생 조성빈(趙星彬), 평산(平山)의 고(故) 동지(同知) 채영창(蔡永昌), 강릉(江陵) 사인 김철휘(金喆徽)에 대해서는 효행(孝行)으로, 황간(黃澗)의 고(故) 현령(縣令) 남수일(南守一), 고성(固城)의 고(故) 동지 최균(崔均)과 그의 아우 고(故) 부총관(副摠管) 최강(崔堈)에 대해서는 임진 왜란에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갑자년3683) 에 세운 군공(軍功)으로 모두 증직(贈職)할 것과, 파주(坡州) 학생 이연희(李演羲)의 아내 최씨(崔氏), 연일(延日)의 공생(貢生) 정일극(鄭一極)의 아내 박성(朴姓), 청주의 양인 권한손(權汗孫)의 아내 장성(張姓), 태인(泰仁)의 사인 김재흠(金載欽)의 아내 나씨(羅氏), 제주(濟州)의 유생 전형원(田衡元)의 아내 양씨(梁氏), 유생 오융복(吳隆復)의 아내 김씨, 아전 손처권(孫處權)의 아내 박성(朴姓), 대정(大靜) 유생 김창은(金昌銀)의 아내 김씨(金氏)에 대해서는 열행(烈行)으로, 공주(公州)의 증(贈) 좌랑(佐郞) 김응려(金應礪), 삼척(三陟)의 고(故) 숭정(崇政) 이상호(李尙虎), 김제(金堤)의 사인 홍수벽(洪壽璧), 제주(濟州)의 목자(牧子) 고윤문(高允文)에 대해서는 효행으로, 순천(順天)의 고(故) 첨사(僉使) 김대인(金大仁)은 임진년에 세운 절개로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줄 것과, 함양(咸陽)의 유학(幼學) 조성윤(曹聖允), 자산(慈山)의 백성 이오(李烏), 금산(錦山)의 백성 명관덕(明觀德), 고부(古阜)의 출신(出身) 김윤상(金胤祥)과 그의 아들 진사 김기섭(金基聶), 제주(濟州)의 양인 임성언(林成彦), 정의(旌義) 장교(將校) 현윤경(玄胤慶)에 대해서는 효행으로 모두 복호(復戶)해 줄 것을 청하니,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