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명현록/전주최씨 무과편

청허당대사 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아베베1 2010. 7. 29. 09:27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병서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로 나의 집을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여조(麗朝)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 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해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촉(咐囑)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는지를 내가 장차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 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 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던 것이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그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 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未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임)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唯政)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그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의 심인(心印) / 諸佛之心      조사가 전하였고 / 祖師傳之
조사의 의발(衣鉢) / 祖師之傳      청허가 받들었네 / 淸虛延之
청허의 경지 / 淸虛之學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 得乎天全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 一絲不罣
연못 속의 물고기라 / 如魚在淵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 半偈徹聞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 嘿契聖心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 宸翰寵賁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 光動叢林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 遘難奮義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 贊我中興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 錫號國一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 莫之與京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 殺活自由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 隱見無累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 世出世間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 兩盡能事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 緣盡而逝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 譬彼薪火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 茫茫三界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 誰渠誰我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 幻化雖滅
곡두 아닌 당체(當體)는 원래가 여여(如如)한 법 / 非幻自如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 名山石龕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 永閟玄珠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 睠玆靈區
실로 깨달음의 도량(道場)이라 할 만한데 / 實惟覺場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 鑱珉紀蹟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 昭眎無疆


[주D-001]삼몽음(三夢吟)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의 꿈 이야기 손에게 말을 하고, 손의 꿈 이야기 주인에게 말을 하네. 지금 꿈 얘기 하는 두 사람 역시, 사실은 꿈속의 사람이라오.[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D-002]꼭 …… 일이다 : 《장자(莊子)》 재유(在宥) 끝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다른 …… 지핌이라 :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장작불 다 타들어 가도 불씨는 영원히 꺼질 줄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고 하였다.
谿谷先生集卷之十三
 碑銘 九首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幷序 a_092_215b


西山淸虛師滅後二十有八年。法嗣葆眞,彥機,海眼,雙仡等。將樹石于妙香,楓岳。月沙李相公爲銘之。旣而又相與謀曰。吾師靈骨之藏雖在是。迺其發跡得法。實自南方。而伽倻海印。又嘗所駐錫之地。不可以無識也。於是海眼爲之狀。雙仡將命踵門而請余文。其言曰。臨濟十八傳而爲石屋,淸珙。麗朝國師太古,普愚。實得石屋之傳。自是又六傳092_215c而至吾師。蓋如來正法眼藏。東而復東。六十餘世而屬之吾師。其源流之遠如此。請以是銘焉。余曰。而師之道。吾固未暇學也。授受之實。吾將何所徵而言之。仡又進曰。世出世法。外內不相反。自昔空門耆宿。鮮有寘力王事者。吾師以窮衲子。一言而受知聖祖。蒙宸翰之寵。及倭難之作。卒能奮義聚衆。協助天討。克贊恢復之烈。名聞華夷。夫吾師之心。何嘗有所作也。隨緣應迹。功用卓然。心寘乎空有。而事光乎忠義。敢藉是以固請。余曰善。遂諾而發其狀。師法名休靜。字玄應。淸虛堂其號092_215d也。亦稱西山。俗姓崔氏。其先自完山。坐法徙安州。父世昌。箕子殿參奉。母金氏。娠師有異夢。生三歲。忽有老叟來曰。委訪少沙門耳。遂提兒呪數聲。摩其頂曰。宜名以雲鶴。言訖出門。不知所之。兒時嬉戲。必以佛事。稍長。風神穎秀。出語驚人。爲州牧所愛。稱以奇童。十歲。喪怙恃。伶仃無所依。州牧携至京。就學于泮齋。屢試輒屈。鬱鬱不得意。遂南游入頭流。窮巖洞之勝。徧閱內典。忽有出世之志。辭訣同伴有詩云。汲水歸來忽回首。靑山無數白雲中。遂投崇仁長老落髮。從一禪和尙受戒。時嘉靖庚092_216a子。師年二十一歲矣。尋參靈觀大師得印可。後因游行村落。聞午鷄。忽然有省歎曰。寧作一生癡獃漢。不欲做鉛槧阿師。拈筆題落葉曰。髮白心未白。古人曾漏洩。今聽一聲鷄。丈夫能事畢。自是雲遊關東諸名山。偶入京師。赴禪科中選。陞至禪敎兩宗判事。無何。拂衣入楓嶽。作三夢吟。一禪師臨滅留讖云。單衣有債。木人爭靑。不是無脛。來自南溟。會師自某所至。爲禱舍利。靈應赫然。師雖藏踪晦彩。而道譽益隆。虛憍我慢之徒。望風心醉。爭就北面。己丑逆獄起。爲妖僧所誣被逮。對獄明暢。宣092_216b廟素聞其名。卽命釋之。引見。賜御製一絶及御畫墨竹障子。師立進詩謝恩。上益稱賞厚賚還山。壬辰之難。宣廟西幸。師出山詣行在上謁。上曰。國有大難。山人其能自安乎。師揮涕對願效死。上嘉之。命授八道禪敎都摠攝。師分命諸上足。糾聚義徒。於是唯政起關東。處英起湖南。與權公慄合兵。鏖賊于幸州。師自率門徒千五百人。隨天兵進克平壤。天朝經略宋應昌,提督李如松及三協摠兵以下諸將佐。聞師名。爭送帖致敬。或贈詩稱美。辭禮甚虔。京城旣復。上將旋軫。師率092_216c徒數百。扈駕還都。請於上曰。臣老且死。願以兵事屬弟子唯政等。乞骸骨歸。上嘉其志許之。因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師旣歸妙香。翛然一閑道人耳。甲辰正月二十三日。將示寂于圓寂庵。是日肩輿衝雪。遍訪近山諸庵。拜佛說法。還方丈。頮盥興威儀。焚香佛前。取筆自題畫像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又寄書訣唯政,處英二門人訖。趺坐就化。世壽八十五。禪臘六十五。異香滿室。累日乃歇。闍維得靈骨一片,舍利三粒。就普賢安心寺。092_216d建窣堵波。唯政,自休等又捧頂骨一片來楓岳。得舍利數顆。窆于楡岾寺之北岡。師少從靈觀得法。而宗風之振。近代無比。弟子千餘人。知名者七十餘。其能領袖後學。爲一方宗主者。不下四五人。可謂盛矣。晩節通脫自在。皮相之流。式疑其越戒。識者不以爲病焉。所著禪家龜鑑,禪敎釋,雲水壇,三家一指各一卷。淸虛堂集八卷。行于叢林。詩偈爽朗多警語。筆跡疏勁有致云。狀之所述如是。其亦備矣。噫。師之幻身。旣已化爲灰塵矣。其非幻者。未嘗隨而變滅。一片之石。數紙之文。何足爲師不朽092_217a計。雖然。尊其道則不忍泯其迹。而欲永其傳于來世。此固其徒用心之勤。亦世敎之所宜許也。莊周有言曰。莫足爲也而不可不爲。其是之謂歟。遂銘之。其詞曰。
諸佛之心。祖師傳之。祖師之傳。淸虛延之。淸虛之學。得乎天全。一絲不罣。如魚在淵。半偈徹聞。嘿契聖心。宸翰寵賁。光動叢林。遘難奮義。贊我中興。錫號國一。莫之與京。殺活自由。隱見無累。世出世間。兩盡能事。緣盡而逝。譬彼薪火。茫茫三界。誰渠誰我。幻化雖滅。非幻自如。名山石龕。永閟玄珠。眷茲092_217b靈區。實惟覺場。鑱珉紀蹟。昭眎無疆
 
西山大師碑銘」
有明朝鮮國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 登階尊者西山淸虛休靜大師碑銘幷序」
嘉善大夫戶曹參判李雨臣 撰」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尹得和 書」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曺命敎 篆」 粤在萬曆壬辰島夷犯京 宣廟西幸西山大師休靜率其弟子惟政等倡義募兵樹中興大功 宣廟嘉其功命立表忠祠于嶺南之密陽並腏休靜惟政所以褒忠獎義也逮我 當宁十四」
年戊午以相臣之請有給復守護之命師之法裔南鵬改創祠于密之靈鷲山三綱洞奉二師遺像名其堂曰弘濟涉千里走京師訪余而屬文曰吾法祖西山之碑是文忠公月沙先生之文」 也厥后師之法派四世碑文皆出於公之門列樹於金剛之白華菴中儒釋之交至於四世者斯儘古之所無公乃文忠公之嫡孫今將竪石于師之祀記師功烈來請于公者意非偶然公於斯」文惡可辭乎於戱余嘗讀先生之文知師之爲禪門中奇傑人而先生之文至今爀爀然照人耳目逾久而逾光則其於不朽師也奚待余言然余於鵬之言竊有所感于心不揆僭妄沘筆爲文曰」 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又稱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父世昌箕子殿叅奉母金氏有異夢生師於庚辰三月三歲燈夕有一老翁來撫其頂曰此兒名以雲鶴仍忽」
不見幼與羣兒遊輒以佛事爲戱而及長風骨秀異頓悟禪法受經于靈觀大師鬀度于崇仁長老三十中禪科選至禪敎兩宗判事己而解其印入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觀其發於辭者可稔其韜光匿影妙契於禪宗也己丑之獄爲妖僧無業誣」引被逮供辭明剴宣廟卽命釋之取覽詩稿賜御畵墨竹命賦詩卽進絶句宣廟又賜御製而賞賚甚厚仍許還山壬辰之亂師仗劒赴行在宣廟敎曰世難至此爾爲出力弘濟耶師泣」   而拜 命曰臣統率緇徒悉赴軍前殫效忠赤宣廟命爲八路十六道摠攝師分部沙門惟政領七百義僧起關東處英率一千起湖南師自率門徒及所募僧一千五百會于順安與天兵或」 先或後助援聲勢進戰于牧丹峯斬醎甚夥天兵乘勝擊之賊遂空城宵遁師乃迎鑾還都李都督如松送帖嘉獎曰爲國討賊誠忠貫日不勝敬仰又題詩贈之諸將莫不欽贊於是師請」
曰臣老不足當事軍旅之務屬之惟政處英卽還舊棲以守本分臣之願也宣廟嘉其志許之仍賜號曰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會弟子於妙香圓寂」 菴開道場說曇法題自家影幀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書訖脩然坐化時年八十五法臘六十五異香滿室所著文稿行于世師爲人法顔魁梧慧智聰悟在家事親至孝入山淸」淨守法而忠君衛國之誠亦根天性遇患難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而至于國難倡起義旅羽翼王師收復三京氛祲載靖便卽納印飄然一衲遂返舊寺身雲心月復照於金沙淨界倬倬英」
風有足以䟪頽俗而立懦頑求諸往牒無與匹休明之廣孝齊之秉忠名雖義釋志在功利心跡不明亦奚足論也嗚呼當今之世開僧聞釋抱奇俊之才而淪於異敎甘自棄於虛無寂滅之中」者凡幾人哉苟能當宗社岌嶪之時不縶其法而自勵大義倬然所樹立如師之爲則其有補於邦國將如何而又何以異敎少之哉師之示寂于今數百載而朝廷之特軫表異之典者亦所以」
樹風聲而激人心也南鵬勉乎哉師之文章造詣傳鉢法派詳載文忠公所撰碑文中故只叙其生卒出處始終倡義靖亂顚末如右銘曰 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娿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金鎞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縲絏詩達天庭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鑾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扃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叮嚀 人間榮辱幻如」夢醒 舍珠靈骨寶塔崢嶸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軆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一片貞珉万代留芳」
相位 領議政淸沙金公在魯 左議政藏密宋公寅明 右議政海村趙公顯命」
判位 吏曹判書 趙公尙絅 戶曹判書 尹公陽來 禮曹判書 尹公淳 兵曹判書 朴公文秀 刑曹判書 金公始炯 工曹判書 朴公師洙 漢城判尹 閔公應洙」
本道 觀察使 李公箕鎭 觀察使 趙公明謙 觀察使 鄭公益河 觀察使 沈公聖希 觀察使 金公尙星」
本府 府使任公守迪 府使尹公愗敎 府使李公玄輔」
士林 生員孫碩寬 學生朴世矩 幼學李宜龍 學生申命胤 生員曺夏瑋 幼學成德周 幼學申應岳」
宗匠 淸運 若垣 雷震 杜惠 萬薰 定慧 宣定 秀眼 軆淨 宏活 璽封 日暎 海源 最栢」
有司 鶴林 禧有 信惠 淸印 明學」   禪匠 一宗 震機 朗聰 眞淨 快善」
行有司 惠文 廣惠 崔萬昌 金麗昌」 守禦 宋時聖 金昌獜 姜後尙 丁就道 黃海澄 嚴世得」
禮曹 嚴漢鵬 高世瑜 文重郁」        本司 道內都摠攝海淑 北漢都摠攝性能 南漢都摠攝文旭 前摠攝翠眼 前僧統最日 海能」
本府 權漢章 金龍孫 金有享」        本營 中軍瑞胤 中軍垣梅」
本道前公員 贊和 能玉 世照 順基 時載文」
事判公員 前摠攝竺詮 義玄 垣珠」
僧孫 一行 快印 處澄 處華 秀玄 一還 崇遠」
本境內 慶州鎭 彩遠 義根 大邱鎭 順海 學輝 尙州鎭 寬機 性輝 最演 安東鎭 晋州鎭 哲雄 摠日 金海鎭 玄哲 淸眼 湖南僧統 楚文 星州鎭 宗益 錦日 善山鎭 太英 彦聰 東萊鎭 管晶 眞悟 漆谷鎭」
幹善 靈印 智性 覺信 貴悅 熙哲 根悟 一燁 雙洽 歸淑 旣澄 印遠 善印 孟洽 碩眼 信嚴 裕卞 萬善 碩岑 坐石 太性 朗伯 世弘 楚印 淸現 俊卞 快淑 日珠 碩天 湫鴈 曳運」
本院 僧統最心 和尙呂華 書記敏漢 海寬」禪傳齋 圓俊 允言 致和 希性」 敎傳齋 尙玄 希律 順華 處俊 世弘 了岑」
神丹 金得海芳憲 姜淡沙里 徐戒昌 基主崔俊種 杜有元」剞劂 歸允 國行 宏悅 管淸 吳漢伯 張瑞權 道淳 怡惠 世鵬 管海 漢楚」
浮石 碑石都監前摠攝楚玧 物財都監前僧統裕察 典供物財都監 處寬 行有司兼都書記善文 監役國坦 裕洽 鶴益」
典穀 演性 建祠 南鵬 有司 漢琦 宗正 大愚 主管演初書」
齋任」

서산대사비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서산(西山) 청허당(淸虛堂) 휴정대사(休靜大師) 비명(碑銘) - 병서(幷序)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우신(李雨臣)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윤득화(尹得和)는 글씨를 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을 하다.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의 오랑캐들이 도성(都城)을 침범하자 선묘(宣廟)는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그의 제자 유정(惟政) 등을 거느리고 창의(倡義)해 승병(僧兵)을 모집하고 국세(國勢)를 중흥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에 선조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여 여겨 영남(嶺南) 밀양(密陽)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휴정과 유정을 함께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충의(忠義)에 대해 표창(表彰)하고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14년째인 무오년(영조 14, 1738년)에 상신(相臣)의 청으로 인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전답(田畓)을 주어 수호(守護)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대사의 법통(法統)을 이어 받은 남붕(南鵬)이 밀양의 영취산(靈鷲山) 삼강동(三綱洞)에 사우(祠宇)를 고쳐 새로 짓고는 두 대사가 남겨진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한 뒤 그 당호(堂號)를 ‘홍제(弘濟)’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천 리(里)되는 길을 헤치고 도성으로 달려와 나를 방문하여 글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법조(法祖) 서산 대사의 비문(碑文)은 문충공(文忠公) 월사선생(月沙先生)의 글입니다. 그 뒤 대사의 법파(法派) 4대(代)의 비문은 모두 공의 문중(門中)에서 나와 금강산(金剛山)의 백화암(百和菴) 안에 세워졌습니다. 유불(儒彿)의 교류가 4대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공은 바로 문충공의 적손(嫡孫)으로서, 지금 대사의 사당(祠堂)에 비석을 세워 대사의 공렬(功烈)을 제사하기 위해 공에게 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공이 이 비문을 짓는 일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월사 선생의 글을 읽고서 대사가 선문(禪門)에서 걸출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밝게 빛나 사람의 귀와 눈으로 전해져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빛이 나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대사의 공로에 대해 어찌 내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남붕의 말을 듣고 가만히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어서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일임을 헤아리지 않고 붓을 적셔 비문을 지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라 하고 또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린다. 속세(俗世)의 성씨(姓氏)는 완산(完山)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현윤(縣尹)을 지낸 김우(金禹)이고,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기이한 꿈을 꾸고 경진년(중종 15, 1520년) 3월에 대사를 낳았다. 3세였던 사월 초파일 저녁에 어떤 늙은이 하나가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하라.”하고는, 바로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를 않았다.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에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일로써 놀이를 삼았다. 장성하여서는 풍채와 골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빼어났고 선법(禪法)을 깨달아 알았다. 영각 대사(靈覺大師)에게서 불경(佛經)을 배웠고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及第)한 뒤에 벼슬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다.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어 말하기를,
“주인은 나그네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네.
지금 두 꿈 서로 이야기하는 나그네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이라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로봉(香爐峯)에 올라가 지은 시(詩)에서 말하기를,
“만국(萬國)의 도성(都城)은 개미집 같고   천가(千家)의 호걸(豪傑)은 초파리와 같도다.
창문 밖 밝은 달은 나의 베개 비추는데       끝없는 솔바람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하네.”  라고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빛을 감추고 종적(蹤迹)을 숨진 채 선종에 대해 오묘하게 깨달았음을 익히 알 수가 있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의 옥사(獄事)에서 요승(妖僧) 무업(無業)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투옥(投獄)되었는데,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즉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지은 시를 가져다 보고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下賜)하고는 시를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가 그 자리에서 절구(絶句)를 지어 바치니 선조도 또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고는 매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이어서 산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 대사는 무장(武裝)을 하고 선조가 피난(避難)을 가 있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선조가 하교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가 필요한 힘을 내어 어지러운 세상을 크게 구제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말씀에 절을 하고 말하기를, “신(臣)은 승도(僧徒)를 통솔하여 군부(軍府)로 급히 달려가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팔로십육도총섭(八路十六道摠攝)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사문(沙門)을 나누어 유정은 700명의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게 하였고, 처영(處英)은 1,000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기병하게 하였으며, 대사는 스스로 문도(門徒)와 모집한 승려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모여 명(明) 나라의 군사와 함께 혹은 선봉(先鋒)에 서기도 하고 혹은 후방에서 서기도 하면서 지원하여 위세(威勢)를 떨쳤다.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베어 죽인 왜적(倭賊)들이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승기(勝機)를 틈타 왜적을 치니 적들이 마침내 성(城)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대사는 바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독(都孚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첩문(帖文)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충성심이 해를 꿰뚫으니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라고 하고, 또 시를 지어 주니 우리나라로 원정(遠征) 온 중국의 장수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이에 대사가 청하기를, “신은 늙었으므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군대의 사무는 유정과 처영에게 부탁하고서 곧바로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臣)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시고, 이어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갑진년(선조 37, 1604년) 정월,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 제자를 모아 놓고 도량(道場)을 둘러본 뒤 설법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影幀)에다가 시를 지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쓰기를 마친 뒤, 초연하게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85세요, 법랍(法臘)은 65세였다. 그때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저술한 문집(文集)은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대사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얼굴은 헌걸찼으며 지혜는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집에 있었을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입산(入山)해서는나쁜 짓으로 지은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깨끗함으로 불법(佛法)을 지켰다. 그리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성도 타고난 본성(本性)이었다. 무업에게 무고를 당하는 환란을 만났지만 감옥에 갇혀있는 가운데에서도 선조의 알아주는 은덕(恩德)을 입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의 군대를 도와 삼경(三京)을 수복(收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초연히 승복(僧服)을 입고 마침내 예전에 지내던 절로 돌아왔다. 대사의 몸과 마음은 구름과 달처럼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으며, 다시 선정(禪定)을 닦아 진실무착(眞實無着)하여 번뇌(煩惱)의 굴레를 벗어난 정토(淨土)를 관조(觀照)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풍도(風度)는 무너진 풍속을 깨트리고 나약한 자와 완악한 자를 세우기에 충분하였으니, 지난 시대에서 찾아보아도 더불어 대사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를 밝혀서 효도를 넓히고 이를 가지런히 하여 충성을 구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의승(義僧)이었으나 뜻은 공리(功利)에 있었다. 그러니 마음과 자취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지금 세상에 모든 승려를 통틀어보아도 기이하고 준걸(俊傑)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교에 몸담고서 기꺼이 허무적멸(虛無寂滅) 속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는 자가 무릇 몇 사람이겠는가? 만약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위급한 상황을 당하여서 불교의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대의(大義)에 힘써서 우뚝하게 대사가 했던 것처럼 공로를 수립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장차 어떠하겠으며, 또 이교라고해서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사가 입적한 지 이제 수백 년이 되어 조정(朝廷)이 특별히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은 풍교(風敎)를 수립하고 인심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남붕은 힘쓸지어다.
대사의 문장(文章), 학문의 경지(境地), 의발(衣鉢)의 전수(傳授), 법파(法派)는 문충공이 지은 비문 안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생졸(生卒)과 출처(出處)의 시종(始終), 의병을 일으켜서 난리를 평정한 전말(顚末)에 대해서만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명(銘)한다.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받아   남과 달리 모습 빼어났네.
신선 할미 꿈에서 점지(點指)하고   신비한 노인 이름을 지어주었네.
아리따운 몸에 잉태(孕胎)하였으나  가(佛家)의 영명(英明)한 성품 지녔네.
정신은 빼어나고 기운은 맑으며      기골(氣骨)이 준수(俊秀)하였네.
금 빗(金篦)으로 광명(光明)을 내고  옥 털이개(玉拂)로 신령(神靈)을 모았네.
나라(那羅)의 도리를 깨달았고       사생(死生)의 이치를 느끼었네.
마침내 법석(法席)에 오르니      마니주(摩尼珠)가 중생(衆生)을 비추었네.
뜻밖에 감옥에 갇혔으나  대사의 시(詩) 성상(聖上)께 진달(進達)되었네.
성상께서 손수 그린 그림 내려주는 은전을 입으니 영광이 천추(千秋)에 빛나네.  입으로는 불경(佛經)을 외우지만
뜻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있었네.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미치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네.  단(壇)에 올라가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니  병사들 구름처럼 모였네. 명나라의 군대 도와저 더러운 왜적을 소탕하였네.   용기를 북돋아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우리 수도(首都)로 돌아왔네.
충의(忠義)가 해처럼 빛나니  중국과 오랑캐 모두 놀랐네.  공(功)을 이룬 뒤 벼슬을 버리고  구름 낀 산사(山寺)로 돌아왔네.
담운(曇雲)은 바리(鉢)에서 생기고  법월(法月)은 병 속에 있네.  삼몽사(三夢詞) 지어 읊은 옛날의 게송(偈頌) 또한 오래도록 빛날 만하네.  인간 세상의 영화(榮華)와 치욕(恥辱)은 꿈같은 환상이라는 것 알았네 . 사리(舍利) 구슬 신령하고  부도(浮屠) 탑 우뚝 솟아있네.  아주 오랜 법맥(法脈) 광명(光明) 사라지지 않았네. 영취산에 사당 세워  충정(忠貞)을 드러내었네. 일체 같이 제사하니 스승과 제자 함께 흠양하네.  공(功)은 공신각(功臣閣)에 기록되고  도(道)는 불당(佛堂)에서 존숭되었네. 한 조각 곧은 돌에 만대(萬代)토록 아름다운 이름 남기리라.
상위(相位)
영의정(領議政) 청사(淸沙) 김공재노(金公在魯), 좌의정(左議政) 장밀(藏密) 송공인명(宋公寅明), 우의정(右議政) 해촌(海村) 조공현명(趙公顯命)
판위(判位) 이조판서(吏曹判書) 조공상경(趙公尙絅), 호조판서(戶曹判書) 윤공양래(尹公陽來), 예조판서(禮曹判書) 윤공순(尹公淳), 병조판서(兵曹判書) 박공문수(朴公文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공시형(金公始炯), 공조판서(工曹判書) 박공사수(朴公師洙), 한성판윤(漢城判尹) 민공응수(閔公應洙)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이공기진(李公箕鎭), 관찰사 조공명겸(趙公明謙), 관찰사 정공익하(鄭公益河), 관찰사 심공성희(沈公聖希), 관찰사 김공상성(金公尙星)  본부(本府)  부사(府使) 임공수적(任公 守迪), 부사 윤공무교(尹公愗敎), 부사 이공현보(李公玄輔)

사림(士林)
생원(生員) 손석관(孫碩寬), 학생(學生) 박세구(朴世矩), 유학(幼學) 이의룡(李宜龍), 학생 신명윤(申命胤), 생원 조하위(曺夏瑋), 유학 성덕주(成德周), 유학 신응악(申應岳)   종장(宗匠)  청운(淸運), 약원(若垣), 뇌진(雷震), 두혜(杜惠), 만훈(萬薰), 정혜(定慧), 선정(宣定), 수안(秀眼), 체정(軆淨), 굉활(宏活), 새봉(璽封), 일영(日暎), 해원(海源), 최백(最栢)

유사(有司)
학림(鶴林), 희유(禧有), 신혜(信惠), 청인(淸印), 명학(明學) 선장(禪匠)          일종(一宗), 진기(震機), 낭총(朗聰), 진정(眞淨), 쾌선(快善)
행유사(行有司)   혜문(惠文), 광혜(廣惠), 최만창(崔萬昌), 김여창(金麗昌)     수어(守禦)          송시성(宋時聖), 김창린(金昌獜), 강후상(姜後尙), 정취도(丁就道), 황해징(黃海澄), 엄세득(嚴世得)
예조(禮曹)           엄한붕(嚴漢鵬), 고세유(高世瑜), 문중욱(文重郁)
본사(本司)          도내 도총섭(道內都摠攝) 해숙(海淑), 북한 도총섭(北漢都摠攝) 성능(性能), 남한 도총섭(南漢都摠攝) 문욱(文旭), 전(前) 총섭(摠攝) 취안(翠眼), 전 승통(僧統) 최일(最日) · 해능(海能)
본부(本府)         권한장(權漢章), 김용손(金龍孫), 김유형(金有享)
본영(本營)          중군(中軍) 서윤(瑞胤), 중군 원매(垣梅)
본도(本道) 전(前) 공원(公員)
찬화(贊和), 능옥(能玉), 세조(世照), 순기(順基), 시재문(時載文) 사판 공원(事判公員)   전 총섭 축전(竺詮), 의현(義玄), 원주(垣珠)
승손(僧孫)               일행(一行), 쾌인(快印), 허징(處澄), 처화(處華), 수현(秀玄), 일환(一還), 숭원(崇遠)
본경내(本境內)
경주진(慶州鎭) 채원(彩遠) · 의근(義根), 대구진(大邱鎭) 순해(順海) · 학휘(學輝), 상주진(尙州鎭) 관기(寬機) · 성휘(性輝) · 최연(最演), 안동진(安東鎭), 진주진(晋州鎭) 철웅(哲雄) · 총일(摠日), 김해진(金海鎭) 현철(玄哲) · 청안(淸眼), 호남승통(湖南僧統) 초문(楚文), 성주진(星州鎭) 종익(宗益) · 금일(錦日), 선산진(善山鎭) 태영(太英) · 언총(彦聰), 동래진(東萊鎭) 관정(管晶) · 진오(眞悟), 칠곡진(漆谷鎭) 간선(幹善)
영인(靈印), 지성(智性), 각신(覺信), 귀열(貴悅), 희철(熙哲), 근오(根悟), 일엽(一燁), 쌍흡(雙洽), 귀숙(歸淑), 기징(旣澄), 인원(印遠), 선인(善印), 맹흡(孟洽), 석안(碩眼), 신엄(信嚴), 유변(裕卞), 만선(萬善), 석잠(碩岑), 좌석(坐石), 태성(太性), 낭백(朗伯), 세홍(世弘), 초인(楚印), 청현(淸現), 준변(俊卞), 쾌숙(快淑), 일주(日珠), 석천(碩天), 추안(湫鴈), 예운(曳運)

본원(本院)
승통(僧統) 최심(最心) · 화상(和尙) · 여화(呂華), 서기(書記) 민한(敏漢) · 해관(海寬), 선전재(禪傳齋) 원준(圓俊) · 윤언(允言) · 치화(致和) · 희성(希性), 교전재(敎傳齋) 상현(尙玄) · 희율(希律) · 순화(順華) · 처준(處俊) · 세홍(世弘) · 요금(了岑)
신단(神丹)
김득해(金得海), 방헌(芳憲), 강담사리(姜淡沙里), 서계창(徐戒昌), 기주(基主) 최준종(崔俊種), 두유원(杜有元)
기궐(剞劂)
귀윤(歸允), 국행(國行), 굉열(宏悅), 관청(管淸), 오한백(吳漢伯), 장서권(張瑞權), 도순(道淳), 이혜(怡惠), 세붕(世鵬), 관해(管海), 한초(漢楚)
부석(浮石)
비석도감(碑石都監) 전 총섭 초윤(楚玧), 물재도감(物財都監) 전 승통 유찰(裕察), 전공물재도감(典供物財都監) 처관(處寬), 행 유사 겸 도서기(行有司兼都書記) 선문(善文), 감후(監後) 국원(國垣) · 유흡(裕洽) · 학익(鶴益), 전곡(典穀) 연성(演性), 건사(建祠) 남붕(南鵬), 유사(有司) 기(琦), 종정(宗正) 대우(大愚), 주관(主管) 연초서(演初書)
재임(齋任)
 
西山大師


西山大師者完山人也俗姓崔氏父昌世爲箕子廟叅   奉師誕三歲而有老人謂其父曰吾訪少沙門耳遂以

兩手擧兒呪數聲撫其頂曰以雲鶴字此兒因忽不見  以故名曰雲鶴嘗與群兒遊輒立石爲佛聚沙爲塔及
長風骨英秀力學靡懈事其親至孝十歲而父母歿就  學於泮宮鬱鬱不得意南遊智異山遂悟禪旨聽法於
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  禪敎判兩宗事忽喟然歎曰吾出家之志豈在於斯乎
卽解綬歸楓岳及壬辰之役國王西幸龍灣乃仗劍    道謁王曰世難極矣爾可弘濟耶遂泣而拜命命爲
八道十六宗都總攝諭方岳禮遇之當是時雪英起於  關東處英起於湖南師募緇徒一千五百合關東湖南

僧軍五千人與提督李如松戰倭于牧丹峰斬獲甚多  倭宵遁師以勇士百人迎駕還都曰臣年八十精已
耗矣請以戎事屬臣之徒惟政處英歸老西山惟政者  雪英也王嘉其志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
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二十有三日會比  丘於竗香山之圓寂菴爇香講法取影本書其背曰八
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遂趺坐而逝年八十 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二十餘日而始歇師法號 休 靜 名其堂曰淸虛嘗登香爐峰題詩曰萬國都城如垤  蟻千家豪傑若醢鷄師雖韜光不耀于世而問道者日

衆李提督嘗以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 聞王事急總攝下山巓李如松亦稱細玩尊書足覘所
養予以紅柬東征文武諸公又以爲國討賊忠誠貫日 不勝珍謝各以銀五兩靑布一段謹助義饗曰勅使行
人司行人薛藩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 倭軍務加一品服兵部右侍郞宋應昌贊畵兵部員外
劉黃裳兵部主事袁黃寬奠督陣葉邦榮叅贊軍機事 同知鄭文彬知縣趙汝梅經理戶部主事艾維新欽差
布政司都御史韓取善遼東都司張三畏經歷鄧璠欽 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中

軍都督府都督寧夏伯兼太子少傳李如松中協守副  總兵都督楊元左協守副總兵李如柏右協守副總兵
都指揮張世爵原任都司李鎭中都司吳夢豹遊擊 張 接 遊擊李文昇督陣遊擊徐輝義州衛叅將李如梅叅
將駱尙志統領宣府東路副總兵楊紹先提督標下中軍叅將方時春統領宣府副總兵任自强銃領宣府遊
擊周弘謨統領大同營遊擊高策統領大同營遊擊谷
燧遊擊王承恩統領標下親丁遊擊李寧眞定遊擊 趙 文明 保定遊擊梁心陜西遊擊高徹山西遊擊施朝卿
叅將陳邦哲經略標下遊擊錢世禎密雲標營都司 方 時輝 建昌車營都司王問防海南兵遊擊吳惟忠叅將
胡澤遊擊王守寬遵化左營叅將李芳春原任叅將 張 應种 叅將郭夢徵叅將蘇國賦叅遊佟養中叅遊 胡鸞 寬 奠副總兵佟養正副總兵祖承訓副總兵査大受原   任副總兵孫守廉副總兵王維貞副總兵王有翼副總
兵吳希漢經歷孫論經略委官通判王君榮旗鼓中軍  王承恩中軍王汝禎答應官李起明經略沈思賢遊擊
張奇功遊擊葛逢夏遊擊沈惟敬遊擊戚金遊擊 王友 迪 監督都司樓大有遊擊戴胡弁叅遊李郁叅遊 李如 梧 叅遊趙之牧叅將周易拜其見重於中國人有如此

今上甲寅命建遺像之堂以宸章銘之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명종조에 선종(禪宗), 교종(敎宗) 두 종의 승과를 개설하고 보우가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이 선과에 장원을 하고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이 교과에 장원을 하였다. 보우가 뽑은 인물이 이와 같으니, 그도 범속한 중은 아니다. 보우는 허응당(虛應堂)이라 자칭하였는데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죽었고 두 종의 승과도 폐지되었다.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幷序 a_070_237c


余不識釋家津筏。故平生不喜談釋。非故有意於排釋也。顧以文字竊虛聲。主盟騷壇三十餘年矣。釋子之逐名求詩者日踵門。如遇開僧韻釋。輒欣然應之。亦非故有意於耽釋也。余年尙少。已聞休靜師之名。其詩多傳誦人間。恒願一見而不可得。松雲惟正。卽師之傳法沙門也。其渡日本也。數訪我於京城。我之赴燕山也。贈詩於淸川江上。亹亹說師。窮日夜不倦。是時師之亡。已數070_237d年矣。緬挹淸芬。時往來于懷。一日公退獨坐。聞有三僧拱立於外。呼使之前。乃師之弟子葆眞,彥機,仡也。出示笈中書云。是淸虛堂遺稿。仍叉手而拜曰。吾師道業。有足傳後。而雲山深寂。恐久益泯泯。敢以門徒所記載者爲狀。宿齋緘封。千里來獻。願得相公一言。鑱之于石。以不朽吾師。余曰。爾師之道。以無爲有。以虛爲實。不待存而存。不待滅而滅。誰得而朽。誰得而不朽。吾夫子曰。道不同。不相爲謀。於師之道。吾何言哉。三僧起而對曰。道本不同。非敢苟同。然有同而異者。異而同者。伽葉正傳。獨闡宗風者。是固同而異者矣。居家爲孝。出世爲忠。070_238a豈非異而同者乎。唯相公之異其異而同其同者焉。吾師常慕相公之風。蓋有默契而冥感者。願相公之終惠也。僕僕跽拜。經歲不去。余嘉其誠而嘆曰。釋敎之專心所事。乃如是夫。按狀。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以多在香山。故又號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得罪燕山朝。謫居安陵。遂爲安州人。父世昌。鄕擧爲箕子殿參奉。不就。詩酒自娛。母金氏。老無子。一日夢一婆來曰。胚胎丈夫子。故爲娿㜷來賀云。明年庚辰三月。果誕師。三歲。父於燈夕醉臥。有老翁來謂曰。委訪少沙門耳。遂以兩手擧兒㕨數聲。摩其頂曰。以雲鶴070_238b名此兒。言訖出門。莫知所之。以故小字稱雲鶴。與群兒遊戲。或立石爲佛。或聚沙成塔。稍長。風神英秀。力學不懈。事親至孝。主倅愛之。九歲母亡。十歲父歿。伶仃無所依。主倅携至京。就學於泮齋。鬱鬱不適意。與同學數人。南遊智異山。窮覽形勝。探賾諸經。每愴早失怙恃。益感死生之義。忽得禪家頓悟法。遂聽法於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七八年間。遍踏名山。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至禪敎兩宗判事。一日歎曰。吾出家本意。豈在此乎。卽解綬。以一筇還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鑪峯作詩曰。070_238c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自此韜光鏟彩。不出山門。問道者日益衆。己丑之獄。妖僧無業。誣引師被逮。供辭明剴。宣廟知其冤。立釋之。徵詩稿覽之。嘉歎。御畫墨竹賜之。命賦詩以進。師卽進絶句。宣廟亦賜御製一絶。賞賚甚厚。慰遣還山。壬辰。大駕西幸龍灣。師卽仗劍進謁。宣廟敎曰。世亂如此。爾可弘濟耶。師泣而拜命。請曰。國內緇徒之老病不任行伍者。臣令在地焚修。以祈神助。其餘臣皆統率。悉赴軍前。以效忠赤。宣廟義之。命爲八道十六宗都摠攝。諭方岳禮遇之。於是。松雲率七百070_238d餘僧起關東。處英率一千餘僧起湖南。師率門徒及自募僧一千五百。合五千餘名。會于順安法興寺。與天兵爲後先。以助聲勢。戰牧丹峯。斬獲甚多。天兵遂克平壤。復松都。京城賊宵遁。師以勇士百人。迎大駕還京都。天朝提督李如松。送帖嘉奬。有爲國討賊。忠誠貫日。不勝敬仰之語。又題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聞王事急。摠攝下山巓。諸將官爭先送帖贈遺。賊退。師啓曰。臣年垂八十。筋力盡矣。請以軍事屬於弟子惟政及處英。臣願納摠攝印。還香山舊棲。宣廟嘉其志憫其老。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070_239a樹敎普濟登階尊者。自是義益高名益重道益尊。往來於頭流,楓岳,妙香諸山。弟子千餘人。出世者七十餘人。甲辰正月二十三日。會弟子於妙香圓寂菴。焚香說法。取自家影幀。書于其背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作書付松雲,處英訖。趺坐而逝。年八十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三七日後始歇。弟子圓峻,印英等闍維奉靈骨一片。舍利三枚。樹浮圖於普賢安心寺。又一片。弟子惟政,自休等奉來蓬山。得神珠數枚。窆石於崳岾之北。吾東方太古和尙。入中國霞霧山。嗣石屋而傳之幻庵。幻庵傳之龜谷。龜谷傳之正心。正心傳之智嚴。070_239b智嚴傳之靈觀。靈觀傳之西山。此實臨濟之正派。而惟西山獨得其宗云。所著禪家龜鑑,禪敎釋雲水壇各一卷。淸虛堂集八卷行于世。噫。師之道。余雖未詳其淺深。師之稿。余旣玩繹而卒業矣。觀乎詩。足以知師自得之趣。觀乎文。足以知師造詣之高。雖其語或不雅馴。言言皆活。句句飛動。有似古劍出匣。霜風颯然。往往酷似開元大曆。渠家惠休,道林不論也。況也遇患難不失其守。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徵稿命製之榮。御筆詩畫之錫。誠前古所未有之殊眷。而逮乎國難。糾義旅助天兵。收復三都。迎還大駕。便納賜印。拂衣還山。其出處070_239c之節。無愧古人。夫士生斯世。孰不欲遇知於時君。立功名以自顯。然而抱才不售。沒世無聞者何恨。今以山中一緇衣。乃能名達九重。聲施後世。孰謂禪門能辦此功業歟。銘如是。不愧吾筆歟。其銘曰。
金天之西。薩水之濱。淑氣亭毒。乃降眞人。仚婆抱送。釋老提携。天開寶光。帝借金鎞。靈符妙契。秀骨超凡。蚌珠出海。龍鏡發函。失怙無依。千里負笈。淹貫諸家。卓然自立。乃超覺路。遂登法席。祖月重輝。群昏一廓。餘事詩聲。上徹楓宸。殊恩異渥。榮耀千春。身雖岩穴。忠不忘君。遇難一呼。義旅如雲。協助天戈。憑仗靈祐。驅除腥穢。福我070_239d寰宇。出而濟世。名動華夷。入而修定。法闡宗師。在掌靈珠。虛明自玩。倘來榮辱。如夢一幻。瞻彼妙香。與夫金剛。寔唯淨界。宜我法王。來往諸天。百靈護持。乘化返眞。去又何之。功紀人間。道在山中。一片貞珉。萬古英風。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樂全堂集卷之六
 
淸虛堂集序 a_093_248a


余早叨貴近。跡不出闤闠。而山人衲子往往逐臭而至。未嘗不引與之談。問其所宗師。輒曰西山。西山亡數十載。不接其影響者。咸誦其有道。難之不能名其093_248b道。而亦輒曰西山吾東方之大宗師也。余心異之。一日其徒葆眞,彥機謁余以西山遺稿。乞一言弁其簡端。夫釋氏之道。以寂滅爲宗。簡易爲律。集其遺文。序而傳之。其跡太著。無乃爲西山之累乎。有其質斯有。其文。有其實斯有其名。質文名實存。而跡不得不著所謂積於中發於外也。集而序而傳之者。何累於西山也。稿中有三夢錄。蓋以生滅爲夢也。其所著卽夢中之語。集而序而傳之者。亦終歸於夢幻爾。余從夢中論其跡者。庸非夢中夢耶。若西山者。不待生而存。不隨死而亡。西山有知余之斯言。無亦當其意否。是093_248c爲序。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 서(序)
청허당집 서(淸虛堂集序)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삼한(三韓)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佛門)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교장(敎藏)이나 율장(律藏)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묘(塔廟)를 존숭(尊崇)하고 과보(果報)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켰을 뿐이었다.
염화(拈花)의 밀지(密旨)와 면벽(面壁 달마(達摩)가 9년 동안 벽을 향하여 참선한 고사)의 미의(微意)는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사(師)는 아무 전(傳)을 받고 아무 조사(祖師)는 아무 법(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門徒)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碑)를 세우고 커다란 종(鍾)을 만들어 공렬(功烈)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전(寶殿)과 연궁(蓮宮)이 총림(叢林 사찰(寺刹)을 이름)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道峯) 영소 국사(靈炤國師)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法眼 일체의 법을 환히 비춰 보는 눈)ㆍ영명(永明 영원히 밝은 불법)의 전수를 받고, 송(宋) 나라 건륭(建隆 태조의 연호)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풍(佛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여 말법(末法)을 구제함으로써, 조사(祖師 달마(達摩)를 말함)가 서쪽에서 온 뜻이.비로소 선양(宣揚)되고, 동토(東土)에 가사(袈裟)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臨濟 교종(敎宗) 이름)ㆍ조동(曹洞 교종이름)의 종풍(宗風)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禪宗)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사(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장 신범(道藏神範)에게 전수되어 청량(淸涼)의 도국(道國), 용문(龍門)의 천은(天隱), 평산(平山)의 회해(懷瀣)ㆍ현감(玄鑑)ㆍ각조(覺照), 두류(頭流)의 신수(信修) 등 6세(世)를 거쳐 보제 나옹(普濟懶翁)을 얻었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널리 찾아 두루 통[圓通]하고 즉시 체득[卽詣]하여 울연(蔚然)히 선림(禪林)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 받은 이는 남봉 수능(南峯修能)이 적사(嫡嗣)가 되었고, 정심 등계(正心登階)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道)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淸虛老師)를 수위(首位)로 일컫고 있다
사의 휘(諱)는 휴정(休靜), 고향은 안서(安西 해주(海州)의 옛이름)로 소시에 유가(儒家)의 글을 익혀 이미 대의(大義)를 통하였고 사장(辭章)에도 능하여 과거(科擧)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頭流山)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誓願)을 발(發)하여 부용(芙蓉)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팔교(八敎)를 통(通)하고 삼관(三觀)을 통하였으며, 도(道)는 기미(機微)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達摩)ㆍ노능(盧能 혜능(慧能)의 속명)의 맥락을 접하고, 심ㆍ성(心性)을 설(說)하는 묘(妙)는 남양(南陽 남양의 혜충(慧忠)을 말함)ㆍ영가(永嘉 영가의 원각(元覺)을 이름)ㆍ백장(百丈)ㆍ남천(南泉)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혜일(慧日)이 거듭 밝고 지등(智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삼사(三舍 1사(舍)는 30리)나 물러설 것이며, 진ㆍ정(眞正)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소위 하등(下等)사람은 도(道)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사는 대법(大法)을 간직하고 명산(名山)에 두루 머무른 법랍(法臘)이 이미 70년이나 된다. 은고(銀鼓)를 보방(寶坊)에서 울리고 금륜(金輪)을 향지(香地)에서 굴려 군미(群迷 중생의 미혹)를 다 깨뜨리고 현불(玄拂 승도(僧徒)를 지휘하는 봉(棒))을 혼자 세워, 도봉(道峯)ㆍ보제(普濟)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교(敎)ㆍ율(律)에 구구하여 과(果)ㆍ보(報)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由旬)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금언(金言 부처의 말)이 장차 부결(剖決)되려고 옥첩(王氎)이 갑자기 재(灰 청허(淸虛)의 죽음을 뜻함)로 화(化)하여, 기수(祇樹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이름)에 그늘[陰]이 없어지고 자항(慈航 자비의 배로 제도중생을 뜻함)에 노[櫂]를 잃었으니, 인ㆍ천(人天)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정공(鍾峯政公 정공은 유정(惟政)을 높인 말)은 사(師)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興起)한 이이다. 지당(智幢)이 이미 꺾이고 계보(戒寶)가 오랫동안 사장(死藏)된 것을 염려하여, 그 유문(遺文)을 주워 모아 영모(永慕)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정공(政公) 또한 가고 말았다. 열반(涅槃)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門人)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사부(師父)의 유문(遺文)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地下)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居士 허균(許筠)을 이름)는 우리 교(敎)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惠球)가 나를 찾아와서 그 망사(亡師)의 말을 전하고 서(序)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집우(執友 뜻을 같이한 벗)와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書札)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客舍)에서 노사(老師)를 만나 직접 묘체(妙諦)를 듣고 봉심(蓬心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死後)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儒家)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模寫)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사부가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先代)의 세의(世誼)를 감념(感念)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법(師法)의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釋迦)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를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舌]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遺文)의 현묘(玄妙)하고 탈쇄(脫灑)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기원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4) 맹춘(孟春)에 양천(陽川) 비야거사(毗耶居士) 허단보(許端甫)는 쓴다.


 

[주D-001]염화(拈花) :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준말. 석가(釋迦)가 연화(蓮花)를 따서 제자에게 보였는데,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는 자가 없고 다만 가섭(迦葉)이 미소(微笑)하였으므로, 석가가 그에게 불교(佛敎)의 진리(眞理)를 전수한 고사. 전하여 불교의 진리를 말함.
[주D-002]말법(末法) : 불교의 용어로 삼시(三時)의 하나. 부처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교법(敎法)이 쇠퇴해진 시기. 삼시는 즉 정법(正法) 5백 년, 상법(像法) 1천 년. 말법 1만 년을 합칭한 말인데,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음.
[주D-003]정법안장(正法眼藏) : 청정법안(淸淨法眼)과 같은 말로서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교외별전(敎外別傳 :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의 심인(心印)으로 삼음.
[주D-004]팔교(八敎) :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하는 화의사교(化儀四敎)인 돈교(頓敎)ㆍ점교(漸敎)ㆍ비밀교(秘密敎)ㆍ부정교(不定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인 장교(藏敎)ㆍ통교(通敎)ㆍ별교(別敎)ㆍ원교(圓敎)를 합칭한 말.
[주D-005]삼관(三觀) : 관법(觀法)의 내용을 3종으로 나누는 것. 즉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한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을 말함. 이 밖에 화엄종(華嚴宗)ㆍ율종(律宗) 등 각 종에 각기 다른 삼관이 있음.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 서(序)
사명집 서(四溟集序)


지난 병술년 여름에 내가 중형(仲兄)을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아래 배[舟]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중[衲子]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揖)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종봉(鍾峯) 유정사(惟政師)였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선모(羨慕)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梅堂)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 시(詩)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고(淸高)하였다. 중형이 절찬을 되풀이하면서, 당(唐) 나라 아홉 고승(高僧)의 것과 동렬(同列)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연소하여 그 묘처(妙處)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내심 간직하여 쉬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중형이 별세하자, 사(師)가 오대산(五臺山)에서 내조(來弔)하여 슬피 곡(哭)하고 또 만시(輓詩)를 지었는데, 그 사구(詞句)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ㆍ사(生死)의 즈음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사(師)의 수도(修道)가 아직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자(俗子)들의 비ㆍ환(悲歡)을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겨울에 병란(兵亂)을 피하여 명주(溟州)에 있다가, 사(師)가 의도(義徒)를 규합하여 국난(國難)을 막을 때, 그 사부(師父)를 대신하여 도중(徒衆)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마군(魔軍)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였었다.
그 후에 사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적(賊)의 진영을 찾아가 왜인(倭人)을 효유하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나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심신(心神)만 피로하다.
병신년(1596, 선조29) 겨울에 내가 괴원(槐院 승문원의 별칭)에 있을 때, 공사(公事)로 인하여 영상(領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호)를 찾아 뵈었는데, 사가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客舍)로 돌아와 당시의 시무(時務)를 담론(談論)하였는데, 강개(慷慨)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利害)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義俠)의 풍도가 있고, 안장[鞍]에 기대어 좌우(左右)를 돌아보면서 요기(妖氣)를 쓸어 버리려는 의지는 또 확삭(矍鑠 늙어서도 장건(壯健)한 모습)한 노장(老將)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경중(敬重)해 하면서 ‘그의 시문(詩文)은 여사(餘事)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佛門)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계묘년(1603, 선조36) 가을에 사가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上院寺)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감호서(鑑湖墅)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내전(內典)을 가져 장심(壯心)을 달래던 터라 불가(佛家)의 명심 견성설(明心見性說)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삼아 논난해 보았더니, 사가 모두 회통(會通)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曹溪 조계산의 혜능(慧能))ㆍ황매(黃梅 황매산의 홍인(弘忍))의 가법(家法)을 체득하였다. 진종(眞宗 진정한 교종(敎宗))의 적사(嫡嗣)와 염화(拈花)의 밀전(密傳)을 통투(通透)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一端)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묘체(妙諦)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사가 도성(都城)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 9월에 사가 입적(入寂)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永訣)하였다. 나는 현상(玄賞 사명(四溟)의 풍도)이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사가 중형(仲兄)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사를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情)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門徒) 혜구(惠球)가 사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사부(師父)가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公)의 중씨(仲氏)에게 보관되어 있다가 병화(兵火)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泰山)에 비해 호망(毫芒 미세한 털끝과 까끄라기)과 같은 격차입니다. 우리가 사부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編成), 간행(刊行)에 붙여 우리 사부의 문(文)의 고하(高下)와 도(道)의 천심(淺深)을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추앙을 하지 않을 이는 공(公)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사의 글에 서(序)를 쓰겠는가. 사의 시가 이미 사림(詞林)에 널리 추앙되었고, 사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사의 도(道)가 이미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모사(模寫)가 있어야만 그 추중(推重)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사와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始終)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감념(感念)하는 회포를 붙인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 맹춘(孟春)에 교산(蛟山) 허단보(許端甫)는 서(序)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