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崔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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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
호남(湖南) 의병 |
의병장 고경명은 이미 죽었고, 김천일은 경기 좌의병(左義兵) 진중으로 갔다.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모으고, 전 부사 화순(和順) 사람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7월 26일에 깃발과 북을 광주(光州)에 세우고 골(鶻)자로 신표를 삼았다. 전라우도에서 군사를 거두어 남원으로 향하면서 격문을 지어 돌리고 효유하였다.
○ 10월에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사방으로 나뉘어서 약탈하였다. 경회가 군사를 단성(丹城)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적군이 갑자기 닥치니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서 무너졌다.
○ 11월에 통정에 오르고, 계사년 2월에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7월에 보성(寶城) 사람 임계영(任啓英)은 동지 여러 사람과 함께 격문을 전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향토를 지킬 계획으로 본국을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거쳐 그 역시 남원으로 향해 갔는데, 가는 도중에 군사 천여 명이 얻었다. 좌의병장(左義兵長)이라고 일컬으면서 호(虎)자로 신표를 삼았다. 처음 인장에는 호랑이를 그렸으나 뒤에는 호자를 썼다.
○ 남원 사람 전 참봉 변사정(邊士貞)은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수십일 안에 2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이라고 불렀다. 진주 전투에 부장 이잠(李潛)을 파견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 남원의 백성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향병(鄕兵)이라 부르면서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순천 무사인 강희열(姜希悅)은 처음에는 고경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금산(錦山)에서 패하자 울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불러모아 전진하였다.
○ 해남 사람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 사람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과 태인(泰仁) 사람 민여운(閔汝雲)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갔는데, 모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해남의 임시 장군 성천기(成天祇)는 뇌진군(雷震軍)이라고 써서 신표를 삼고 국가의 일에 힘을 다 하였다.
○ 임피 사람 진사 채겸진(蔡謙進)ㆍ이이남(李以南)이 의병을 일으켰다.
○ 계사년 8월에 전라 우의병(全羅右義兵)과 복수병(復讐兵) 선비들이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전 제독관 화순 사람 최경장(崔慶長)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고 계의(繼義)라고 써서 신표를 삼았다. 경장은 경회의 아우이다.
○ 11월에 계의군(繼義軍)을 해체시키고 그 군량을 초승군(超乘軍 김덕룡(金德龍)의 군대를 칭하는 것으로 초승(超乘)은 말을 훌쩍 뛰어서 탄다는 뜻이다.)에 귀속하게 하였다.
○ 적군이 지례(知禮)로부터 호남을 침범할 때에 알수 없는 5, 백 명의 사람들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이라고 자칭하면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쏘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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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
호서(湖西) 의병 |
○ 이산겸(李山謙)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서자이다.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다.
○ 한산(韓山) 사람 전 참의 신담(申湛)이 의병을 일으켰다.
○ 호서(湖西) 노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서 조대곤(曺大坤)을 부장으로 삼고, 건의(健義)자 기를 세워서 징표를 삼았다. 대곤이 전에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당하고, 김수(金晬)를 따라서 임금이 있는 행조(行朝)로 가려는 것을 수경이 말려서 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정(朝廷)에서 건의군의 장수를 팔도 의병 도대장(八道義兵都大將)으로 삼고 인장과 어도(御刀)를 하사하였다.
○ 충주(忠州) 사람 충의위 조웅(趙雄) 《조야첨재》에는 웅(熊)이라 하였다. 은 용감하여 말 위에 서서 달리며 창을 휘두르기를 잘하였다. 군사 5백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죽였다. 하루는 조웅이 짙게 낀 안개를 이용하여 행군하려는데, 적군이 무방비 상태에 그의 후면을 엄습하였다. 조웅은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탄환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서 적군에게 잡혔다. 그의 손ㆍ발을 잘랐는데도 입으로 꾸짖기를 마지 않다가 드디어는 사지가 찢겨졌다.
○ 선비 박춘무(朴春茂)와 충주 선비 조덕공(趙德恭), 청주 무사 이봉(李逢)은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은 호서에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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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京畿) 의병 |
경기 전 정(正) 정숙하(鄭叔夏), 수원 사람 최흘(崔屹), 선비 이산휘(李山輝), 전 목사 남언경(南彦經), 선비 김탁(金琢), 전 정랑 유대진(兪大進), 충의 이질(李軼), 선비 왕옥(王玉)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다.
○ 전 사간 우성전(禹性傳)이 강화ㆍ인천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세가 매우 성하였으며 의(義)자를 군호(軍號)로 삼았다. 조정에서 대사성으로 벼슬을 올려 주고 적군을 토벌할 것을 권면하였으나 열 한달이 되어도 성전 등은 잘 싸운다는 소문이 전혀 없었다. 임금이 그를 불러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게 하였으나, 성전은 병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성전은 군사를 거느려 자신만 호위하며 형세를 관망하면서 오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담소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천일은 고립된 군사로 해볼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성전은 본래 중병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터인데 어찌 관망만 하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원균(元均)의 아우인 진사 원정(元挺)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부사 김적(金績)이 삭녕(朔寧)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기를 청한 상소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전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을 장수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 성혼이 세자의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가려 할 때, 세자는 그에게 김적의 군진에 가보기를 명하였다.
○ 고양(高陽) 진사 이로(李魯) 혹 영남 전 직장이라고도 되었다. 가 의병을 일으켰다.
○ 이산휘(李山輝)는 기지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군을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하루는 서울에 있던 적군이 노략질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중 적군 네 명이 정토사(淨土寺)에 왔다. 산휘는 중들과 약속하고 그들에게 나가서 맞아들이게 하니, 네 명의 왜놈들이 즐거워하였다.법당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밥을 지어서 대접하는데 늙은 중 한 사람이 그들과 마주 앉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물을 찾으니 중들은 불을 지펴 물을 매우 뜨겁게 끓여 네 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물을 가득히 떠가지고 왔다. 왜놈들이 각각 밥주발을 가지고 위로 쳐다 보면서 물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중들이 급히 놈들의 낯에 끓는 물을 끼얹자 놈들이 모두 땅에 거꾸러지므로 중들이 나무 방망이로 쳐 죽였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긴 하지만 그의 임기응변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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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海西) 의병 |
황주(黃州) 사람 황하수(黃河水), 윤담(尹聃)과 봉산(鳳山) 사람 김만수(金萬銖)가 의병을 일으켰다.
○ 해주(海州) 사람 생원 조광정(趙光庭) 자는 응순(應順) 이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크게 승리하였다.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모셔졌다.
○ 봉산(鳳山) 무사 김만수(金萬壽)가 그의 아우 천수(千壽)ㆍ구수(九壽)ㆍ백수(百壽)와 진사 최섭(崔涉)ㆍ이옹(李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서울로 가는데, 백수는 유극량(劉克良)과 함께 파주(坡州) 전투에서 죽었다. 이때 본 고을에 원이 없으므로 순찰사 이일(李鎰)이 만수를 군수로 삼았는데, 임금이 의병장을 삼도록 명하였다. 그 아들 광협(光鋏)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모두 참판에 증직되었다. 《봉산 충령사지(鳳山忠烈祠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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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關西) 의병 |
중화(中和) 사람 김진수(金進壽)ㆍ임중량(林仲良)과 평양(平壤) 선비 양덕록(梁德祿)ㆍ양의직(楊懿直)ㆍ이덕암(李德巖)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강동(江東)에서 귀양살이 하던 조호익(曺好益)이 평양으로 불리어 오자 금부도사 직을 주어 소모관(召募官)에 제수하였는데, 미처 군사를 모집하기도 전에 임금의 행차가 이미 평양을 떠났고, 강 여울을 지키던 장수도 무너져 흩어졌다. 호익이 다시 행재소로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유성룡을 만났는데, 왕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성룡이 말하기를, “국록을 먹는 신하의 충성이 도리어 초야에 묻힌 신하의 충성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호익에게, “임금께 충성하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자네는 도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수복할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호익이 즉시 달려 돌아와서 문도들과 정성을 다하여 부르짖으며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매월 초하루 또한 동지(冬至)라고도 한다. 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니 온 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중화(中和)와 상원(祥原) 사이에 진을 치고 뒤떨어진 적군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많아서 군사들이 기세가 가장 강하였다.
○ 호익은, 자는 사우(士友)이며, 호는 지산(芝山)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을사년에 태어나서 벼슬은 목사까지 지냈다.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가 65세였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호익이 창원(昌原)에 살면서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 왕래하였는데,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을해년에 경상 도사 최황(崔滉)이 군적(軍籍)을 가지고 창원에 와서, “군적의 검사와 감독하는 임무는 마땅히 온 고을에서 명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하면서 공을 지명하였다. 공은 상복을 아직 벗지 아니하였으며, 병이 또 중해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최황이 크게 성내어 일 없는 장정 50명을 들여보낼 것을 독촉하였다. 공은 집의 종들을 모두 내었으나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고을원 이하의 사람들이, “비천한 임무를 이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다투어 말하니, 최황은 더욱 더 성을 내어 형장을 치기까지 하였고, 또 토호(土豪)라고 장계를 올려서 평안도 강동(江東)으로 귀양가게 하였으니 강동은 창원과 2천여 리의 거리에 있었다. 그에게 와서 위문하는 자가 있으면, “운명이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을 하고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관서(關西) 사람들은 옛날부터 학문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의 품도를 듣고는 원근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들므로 학규(學規)를 정하여 가르치니, 성대하게 서하(西河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의 기풍이 있었다.무자년에 공이 말미를 받아 선영에 성묘하러 갈 때에 서울을 지나게 되었다. 최황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악수하면서, “들으니, 자네가 강동에 귀양가 산 이래로 나를 원망하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하니 참으로 명(命)을 아는 군자로다. 나는 자네를 모함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재앙을 혹독하게 받게 될까 두렵네.”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조호익은 신의 그릇되고 망녕된 아룀으로 오랫동안 귀양 중에 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고 빨리 불러서 그를 임용하소서.”라 아뢰었으나 죄의 사면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는 귀양살이 한 지가 벌써 17년이 되었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갈 때에 유성룡이 다시 그의 억울함을 아뢰어서 특별히 석방되었다.이어 금부 도사로 임명하고 소모관으로 삼으면서, “들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관서에 있어서 그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가 많다 하니, 그대는 군사를 모집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그 문인 윤근(尹瑾)ㆍ박대덕(朴大德) 등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서 군세가 가장 강하였다. 이때 중화 사람 임중량(林仲良)도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는데, 적군은 허수아비 둘을 만들고서 그 위에 칼을 대면서, “네가 조 아무개냐, 네가 임중령이냐” 하였으니 적군이 그들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다.성주(星州)ㆍ안주(安州)ㆍ성천(成川) 등의 고을 원을 지냈으며 기유년에 죽었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천(永川) 유생들이 그가 임시로 살던 집 옆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명신록》
○ 호익은 제사 지내는 데에 더욱 삼가해서 제사에 소용되는 모든 기물을 별도의 장소에 간직하고 집안 사람들과 집사들에게는 모두 제삿날 전에 미리 목욕하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난 뒤에야 그릇을 씻고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으며, 껍질이 있는 과실은 그 껍질을 벗긴 뒤에 물로 깨끗이 씻고, 우물 물도 미리 깨끗이 치우고서 다른 사람은 길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초장도 별도의 그릇에 만들어 두어 보통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모두 후생들의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명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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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名僧)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御製詩)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이고 또 사명산인(泗溟山人)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任)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道)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고 사시(私諡)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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