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관련자료/삼각산 고자료

삼각산관련 고자료

아베베1 2011. 3. 16. 11:09
가정집 제14권
 고시(古詩)
한양(漢陽) 정 참군(鄭參軍)을 보내며

가을바람에 정원의 나무 우수수 낙엽 지고 / 西風庭樹鳴摵摵
유인의 시름 깊어 긴 밤 잠 못 이루는 때 / 長夜幽人正愁絶
춤춘 황계 소리 듣고 이불 끼고서 잠이 들면 / 舞破荒鷄擁褐眠
해가 높이 뜨도록 문밖엔 오는 수레도 없다네 / 日高門外無來轍
오늘은 문 두드리는 손이 있어서 기뻤나니 / 今朝剝啄喜有客
바로 마음의 친구가 고별하러 온 것일세 / 乃是心親來告別
백년 인생에 즐거운 때는 적은 반면에 / 人生百歲少歡樂
태반이 시름인 것은 애착에 매인 탓이라 / 大半離愁緣愛結
동교에 술을 싣고 가니 황엽이 즐비한데 / 載酒東郊黃葉稠
한잔 술 못다 해서 노래 먼저 끝나누나 / 一杯未盡歌先闋
그대 돌아가는 길은 바로 한양관 / 歸途政指漢陽關
삼각산 봉우리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 / 三峯入眼明如刮
예로부터 일컬어 오는 양주의 경물은 / 楊州景物古所稱
내가 익히 다녔으니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지 / 我慣經由能細說
남한강 풍우 속의 어지러운 고깃배 등불 하며 / 南江風雨亂魚火
북한산 연하 속의 선명한 불찰 풍경 등등 / 北嶺煙霞明佛刹
다만 유감은 거민이 물고기 꼬리 붉어지듯 하여 / 所恨居民魚尾赤
마을은 쓸쓸해지고 생계는 어려워진 것 / 籬落蕭條生事拙
그대 돌아가 병들어 지친 백성들을 어루만져 / 君歸摩撫已痌癏
그대의 한 경내부터 먼저 소생시키시라 / 要令一境先再活
연래의 세상일 차마 들을 수가 없어 / 年來世事不堪聞
남쪽으로 떠날 뜻 나도 이미 굳혔으니 / 我亦南游意已決
삿대로 건널 만큼 봄물이 불어날 때쯤엔 / 待得半篙春水生
한강에 편주 띄우고서 뱃전을 두드리리라 / 扁舟一扣漢江枻

[주D-001]춤춘 황계(荒鷄) 소리 :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이 친구인 유곤(劉琨)과 함께 한 이불 속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황계 소리를 듣고는 발로 유곤을 차서 깨우며 “이 소리는 악성(惡聲)이 아니다.” 하며 함께 춤을 춘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世說新語 賞譽》 황계는 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통례였다.
[주D-002]다만……하여 : 백성들의 생활이 곤고함을 말한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여분(汝墳)〉에 “방어 꼬리 붉어지고, 왕실은 불타는 듯.〔魴魚赬尾 王室如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방어(魴魚)는 힘이 약하고 비늘이 가늘다. 물고기는 피곤해지면 꼬리가 붉어진다. 방어 꼬리가 원래 흰데 지금 붉어졌다면 힘을 많이 써서 매우 피곤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鬢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慵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鶗鴂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旄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晚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趁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簟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怊悵停雲別後思
자금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邴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旄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黯)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경세유표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5



염철고 하(鹽鐵考下)
당나라 개원(開元) 원년, 하중윤(河中尹) 강사도(姜師度)는 안읍 염지(安邑鹽池)가 점점 마르자 개척해서 물길을 터놓았다. 그리하여 염둔(鹽屯)을 설치했는데, 공사간에 그 이익을 크게 받았다. 좌습유(左拾遺) 유동(劉彤)이 해내 염ㆍ철의 이(利)를 조사하길 청하므로 그 말을 좇았다.

동(彤)이 표(表)를 올려서, “신이 들으니 한 효무제(漢孝武帝)가 정사를 하면서, 구마(廐馬)가 20만이고 후궁이 수만 명이었다 합니다. 밖으로 오랑캐를 정벌하고 안으로 궁실을 지어서 허비한 것이 실상 지금의 백배나 심했습니다. 그러나 옛적에는 허비가 많아도 재화에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용도도 적으면서 재물이 부족함은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옛적에는 재물을 산택(山澤)에서 취했는데, 지금은 가난한 백성에게만 취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산택에서 취하면 국가에 이(利)가 많으면서 사람들은 농사로 돌아오고, 가난한 백성에게서 취하면 국가의 이가 박하면서 사람들은 그 업(業)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법을 만들어서 산해(山海)에 대한 벼슬이 있었고, 우(虞)ㆍ형(衡)이라는 직(職)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경하게 하고 중하게 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금(禁)하고 헤치는(發) 데에 시기가 있으니, 첫째로 농사에 전력하고, 둘째로 나라가 넉넉해지니, 사람을 구제하는 좋은 일입니다. 무릇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들고, 광물을 채굴해서 돈을 만들며,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는 자는 풍족한 무리이며, 추워도 입을 것이 없고 굶주려도 먹을 것이 없으며 품을 팔아 스스로 살아가는 자는 곤궁한 무리입니다.
능히 산해의 많은 이를 거두어 풍족한 자가 차지하던 것을 빼앗으며, 조렴(調斂)과 중요(重徭)를 감면해서 곤궁한 사람을 도와줄 것 같으면, 이른바 여유 있는 것을 줄여서 부족한 데에 보탠다는 것이니, 어찌 제왕의 도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 염ㆍ철ㆍ목재 등을 관리하는 관원에게 조서하여, 각각 그 이를 거두어서 백성에게 돌린다면 두어 해가 못 되어 부고(府庫)가 여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너그럽게 진대(賑貸)하는 영을 내려서 궁독(窮獨)한 사람의 요역을 감면하시면, 군생(群生)에게 혜택이 될 것이며 황복(荒服)도 편케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재신(宰臣)에게 그 가부를 논의하도록 했더니, 모두 “염ㆍ철의 이가 국가 재정에 매우 유익하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강사도에게 해내 염ㆍ철에 대한 과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유동의 말은 소통(疏通)해서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금령을 제정하는 당초에는 “요역을 경하게 한다.” 하고, 이를 누리는 날에 식언하게 되면 취렴(聚斂)으로 끝날 뿐이니, 내가 염려하는 바는 바로 이 점이다.
생각건대, 목재도 큰 재물이니, 동철(銅鐵)과 더불어 여금(厲禁)을 같게 함이 마땅한데, 유동의 표(表)에 목재를 아울러 거론했음도 이치에 합당하다. 《통고(通考)》에, “당나라 때에 염지(鹽池)가 18, 염정(鹽井)이 640개였는데, 모두 탁지(度支)에 예속되었다. 포주(蒲州) 안읍(安邑) 해현(海縣)에 염지 5개가 있었는데 총괄해서 양지(兩池)라 하며, 해마나 소금 1만 곡을 생산해서 경사(京師)에 진공하였다. 염주(鹽州) 오원(五原)에도 오지(烏池)ㆍ백지(白池)와 와지(瓦池)ㆍ세항지(細項池)가 있었고, 영주(靈州)에는 온천지(溫泉池)ㆍ양정지(兩井池)ㆍ장미지(長尾池)ㆍ오천지(五泉池)ㆍ홍도지(紅桃池)ㆍ회락지(回樂池)ㆍ홍정지(弘靜池)가 있었으며, 회주(會州)에는 하지(河池)가 있었는데, 3주(州)는 모두 쌀을 바쳐서 소금에 대신하였다.
안비 도호부(安比都護府)에는 호락지(胡落池)가 있어 해마다 소금 1만 4천 곡을 생산해서 진무군(振武軍)과 천덕군(天德軍)에 공급하였다. 검주(黔州)에는 염정 41개가 있었고 성주(成州)와 수주(嶲州)에는 염정이 각각 하나였다. 과덕(果德)ㆍ낭주(閬州)ㆍ개봉(開封)ㆍ통주(通州)에는 염정이 120개인데 삼산 남서원(三山南西院)에서 관할하고, 공주(邛州)ㆍ미주(眉州)ㆍ가흥(嘉興)에는 염정이 13개 있는데 검남 서천원(劍南西川院)에서 관할했으며, 재주(梓州)ㆍ수령(遂寧)ㆍ면주(綿州)ㆍ합천(合川)ㆍ창릉(昌陵)ㆍ유주(渝州)ㆍ노주(瀘州)ㆍ자천(資川)ㆍ영창(榮昌)ㆍ능천(陵川)ㆍ간양(簡陽)에는 염정 460개가 있었는데 검남 동천원(東川院)에서 관할해서, 모두 달마다 할당량을 독려하였다.
유주(幽州) 대동(大同) 횡야군(橫野軍)에는 염둔(鹽屯)이 있고 둔마다 역정(役丁)과 병정이 있어, 해마다 소금 2천 800곡을 생산했으며, 적을 때에도 1천 500곡이었다. 바닷가 고을에는 해마다 조(租)를 면제하고 그것으로 소금 2만 곡을 생산해서 사농(司農)에게 바쳤다. 청주(靑州)ㆍ초주(楚州)ㆍ창주(滄州)ㆍ해주(海州)ㆍ체주(棣州)ㆍ항주(杭州)ㆍ소주(蘇州) 등은 소금 값으로 가벼운 물건을 사서 또한 사농에게 바쳤다.” 하였다.
천보(天寶 : 당 현종의 연호, 742~755)ㆍ지덕(至德) 연간에는 소금 1두에 10전이었는데, 건원(乾元 : 당 숙종의 연호, 758~759) 초기에는 염철사(鹽鐵使) 제오기(第五琦)가 처음으로 염법(鹽法)을 변경하여 천하 소금을 다 독점하고, 1두에 시가로 100전(錢)을 보태서, 110전으로 하였다.
살피건대, 중국에는 염지와 염정이 이와 같이 많은데, 어찌해서 우리나라에만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바다와 먼 곳은 혹 1천 리나 떨어진 곳[廢四郡]이 있고, 혹 400~500리 되는 곳도 있다. 생각건대 염천(鹽泉)이 있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능히 못을 파거나 우물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이다.

대종(代宗) 말년에 유안(劉晏)이 천하 재부(財賦)를 관장해서, 강주(江州)와 염남(嶺南) 사이에 상평염법(常平鹽法)을 세웠다.

유안은 전적으로 소금을 독점하는 법을 써서 군국(軍國)의 재정에 충당시켰다. 당시에 허(許)ㆍ여(汝)ㆍ정(鄭)ㆍ등(鄧) 여러 주(州)의 서쪽 지방은 모두 하동(河東)에서 생산되는 지염(池鹽)을 먹었는데, 탁지(度支)에서 주관하였고, 변(汴)ㆍ위(渭)ㆍ당(唐)ㆍ채(蔡) 여러 주의 동쪽 지방은 모두 해염(海鹽)을 먹었는데, 안(晏)이 주관하였다. 유안은 관원이 많으면 백성을 시끄럽게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소금이 나는 고장에만 염관을 두어 염호(鹽戶)가 만든 소금을 가져다 상인에게 팔아 그것이 가는 대로 두었고, 나머지 주(州)ㆍ현(縣)에는 관원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강주ㆍ영남 사이의 소금 생산지와 거리가 먼 곳은, 관염(官鹽)을 운반해서, 저곳에 저장했다가 혹 장사가 오지 않아서 소금이 귀해지면 값을 낮춰서 팔았는데, 이를 상평염(常平鹽)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관에 이익이 되면서 백성에게 소금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시초에는 강회(江淮) 소금의 이가 40만 꿰미에 불과했으나 대력(大曆 : 唐 代宗의 연호. 766~779) 말년에는 600만 꿰미나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이 풍족했고, 백성도 곤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동(河東)에는 소금의 이(利)가 80만 꿰미에 불과하면서 값은 해염보다 비쌌다.
구준은 “천지간에 생산되는 물건은 이 두어 가지뿐이다. 인력에는 한정이 있는데, 용도는 끝이 없으니 조호(竈戶 : 소금 달이는 집)를 벗겨내고 상인에게 손해보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소금의 이를 이와 같이 많이 얻었겠는가? 이러한 때에 백성에게 부과할 세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소금 한가지에만 의지해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유안이 비록 이재(理財)에 능했다 하나, 나라를 이롭게 함이 이익이 되는 줄만 알았고, 백성을 이롭게 함이 크게 이익이 되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관(官)에서 소금을 생산해서 관에서 판다면 상평(常平)이라 할 수 없다. 반드시 백성이 사사로 생산하고 팔도록 허가하는데, 소금이 흔하면 값을 보태서 사들이고, 소금이 귀하면 싼값으로 풀어야 비로소 상평이라 할 수 있으니, 염정(鹽政)은 상평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한(漢)ㆍ당(唐) 시대에 재정을 맡은 신하는 착한 자가 없었다. 오직 유안이 위로는 국가 재정을 돕고 아래로는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였으니 이재에 능한 자라 할 만하다.
천하의 물(物)은 진실로 이 수(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지간에 정한 이치는, 임금은 마땅히 부(富)해야 하며, 백성은 마땅히 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성왕이 법도를 세우면서 무릇 천하 부귀의 권한은 위에서 잡게 하고, 온 백성에게는 덕(德)을 내렸던 것이다. 홍범(洪範 : 《서경》의 편명)에, “임금이 그 극(極 : 표준)을 세우고, 5복(福)을 거두어서 널리 그 백성에게 준다.”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전지는 모두 왕의 전지이며 천하의 재물은 모두 왕의 재물이며, 천하의 산림ㆍ천택은 모두 왕의 산림ㆍ천택이었다.
무릇 그런 다음에 왕이 그 전지와 재물을 그 백성들에게 널리 나누어주며 왕이 그 산림ㆍ천택에서 나오는 것을 그 백성들에게 널리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 옛 선왕의 뜻이었다. 왕과 백성 사이를 막는 사람이 있어서, 그 징렴(徵斂)하는 권한을 훔치고 그 널리 나누어주는 은덕을 막는다면, 임금이 능히 극을 세우지 못하며 백성도 능히 고르게 받지 못한다.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거두고 호상(豪商)과 교활한 관리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주례(周禮)》 9부(府)의 직과 관시(關市)ㆍ전사(廛肆)의 관원도 그 큰 뜻은 모두 거두고(斂) 주는(錫) 두 글자에 있었다. 위에서 그 부(富)를 가지고 아래에서 그것을 고르게 받는 것이 곧 왕자가 하늘을 본떠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이다. 후세에 재물을 다스리는 신하는 오직 복을 거둘 줄만 알고, 복을 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오직 상평염법이 능히 아래를 고르게 하고 위를 부하게 해서, 선왕의 뜻과 대략 합치했으므로 재물을 얻은 것은 비록 많았으나 백성이 원망하지 않았다. 구경산(丘瓊山 : 경산은 구준의 자)은 그 재물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고, 한결같이 백성에게서 뜯어 내는 것을 정사라고 몰아붙였으니 그 또한 잘못이다.

헌종(憲宗) 때에 회서(淮西)를 토벌했는데, 탁지사(度支使) 황보 박(皇甫鎛)이 검남(劍南) 동서(東西) 양천(兩川)과 산남(山南) 서도(西道)의 염세를 증가해서 군용(軍用)에 공급하였다.

정원(貞元) 연간에, 양지(兩池)에 소금 1석을 남모르게 달인 자는 죽였다. 원화(元和) 연간에 와서는 사형을 감해서 천덕(天德 : 당대의 중국 서북 변방) 다섯 성에 귀양보냈는데, 박(鎛)이 당초와 같이 사형하기를 논주(論奏)했다. 두(斗) 이상은 등에다 곤장을 치는 동시에 수레와 나귀를 몰수하고, 1두 이상의 도둑 소금을 잡은 자에게는 1천 전을 상으로 주었다. 그리하여 주ㆍ현(州縣) 단보(團保)에서 서로 살핌이 정원시대에 비해 더욱 혹심해졌다.
생각건대,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기를 그치지 않으면, 드디어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니, 소금을 독점함은 불가하다.

목종(穆宗) 때에 장평숙(張平叔)이 소금을 독점하는 법의 폐단을 논의하고 관에서 소금을 직접 팔기를 청했으나, 병부시랑(兵部侍郞) 한유(韓愈)가 조목조목 따지면서 불가하다 하여 드디어 시행되지 않았다.
그때에 봉천(奉天) 노지(鹵池)에서 수백(水柏 : 나무 이름)이 나는데, 수백의 재(灰) 1곡이면 소금 12근을 얻을 수 있으니, 소금 버캐보다 이익이 곱절이었다.
문종(文宗) 때에 수백(水柏)의 재 1두 채취한 것을 소금 1근과 비교해서 죄를 논하였다.

생각건대, 5계(季) 때에 소금에 부과하던 것은 예전과 같았다. 관에서 판매하는 것에 잠염(蠶鹽 : 고치를 적시는 데 쓰는 것)ㆍ잠염(蠶鹽 : 고치를 적시는 데 쓰는 것) 식염(食鹽) ㆍ대염(大鹽)ㆍ냉염(冷鹽)ㆍ난염(欒鹽)이 있었고, 또 청염(靑鹽)ㆍ백염(白鹽)ㆍ맥염(陌鹽) 따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또 과염(顆鹽)은 괴염(塊鹽)이고, 말염(末鹽)은 산염(散鹽)이다.

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 宋 太宗의 연호, 976~983) 2년에, 조서하여 염법(鹽法)을 너그럽게 하였다. 마구 들어와서 소금 버캐를 달인 것이 200근 이상에 이른 자와 주관하는 관리가 훔쳐 판 것이 100근 이상에 이른 자, 잠염(蠶鹽)을 성시(城市)에 들여온 것이 500근 이상인 자는 아울러 대궐 앞에서 안면에 자자(刺字)하였다.

개보(開寶) 7년 3사(司)에 조서하여 여러 주의 소금과 누룩값에 세금을 매긴 것을 비교해서 전최(殿最)를 행하였다.

5대(代) 때에 염법이 너무 엄격하여 건륭(建隆 : 송 태조의 연호, 960~962) 초년에 너그럽게 하였다. 그러나 무역한 소금이 10근에 이르거나, 소금 버캐를 달인 것이 3근에 이른 자도 또한 사형을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너그럽게 한 것이다.
살피건대, 《주례》에, 산택(山澤)에 여금(厲禁)이 있어, 나무를 훔친 자는 형벌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그 시기가 아닌 때에 함부로 채취한 자나 위에서 명령이 없었는데 마구 들어간 자에게 가벼운 벌이 있을 뿐이었다. 백성의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이 그 법을 어겼다 하여 죽이는 것은, 어진 사람의 정사가 아니니, 3대(代) 때에는 비록 걸(桀)ㆍ주(紂)라도 이런 법은 없었다.
생각건대, 전최라는 것은 당(唐)ㆍ우(虞) 때에 고적(考績)이라 일컫던 것으로 곧 왕자가 하늘을 본떠서, 사람을 다스리는 큰 권한이었다. 자목(字牧)하는 직은 고찰할 만한 것이 많은데, 소금과 누룩 과세의 많고 적음을 비교해서 잘하고 잘못한 것으로 구별했음은 제요(帝堯)의 전장과 다르니, 아아! 슬프다. 《통고(通考)》에, “소금 버캐를 달여서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대저 소감 버캐가 있는 흙이 혹 두텁기도 혹은 엷기도 한데, 엷으면 이가 적어서 당호(鐺戶)가 파산해도 그 구실을 충당하지 못했다. 지화(至和 : 宋 仁宗의 연호, 1054~1055) 초기에 한기(韓琦)는, 당호를 개설한 지 만 3년이 되어서 지력이 다하면 다른 호(戶)를 지적해서 대체해주기를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했다.” 하였다.
또 “촉(蜀) 지방에는 우물 물을 조려서 소금을 만드는데, 우물 물의 근원이 혹 많아지기도 줄어들기도 하는데, 책과(責課)를 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였다.
또 “해주(海州)ㆍ양주(梁州) 동쪽에 큰 염지(鹽池)가 있어 100여 리나 뻗쳤고 해마다 억만 전을 얻었다. 원부(元符) 원년 장마에 못이 무너졌는데 이때에 와서 복구하기를 의논하였다. 4년 만에 완성해서, 무릇 2천 400여 휴(畦)를 개발하여, 백관이 모두 하례하였다.” 하였다.
혹자(或者)는 “해지(解池)에 한 자 깊이로 물을 대어서 뙤약볕에 쪼이고 남풍(南風)에 쏘이면 잠깐 동안에 소금이 되어서 그 이가 컸다. 액수를 늘리고자 해서 적당한 바람과 햇볕을 기다리지 않고 물을 많이 대었다가 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은 맛이 써서 사람의 입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황해도 지방에 땅이 갑자기 꺼져서 길은 못이 된 곳이 있는데,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고 그 맛은 쓰고 매우 고약하다. 이것은 모두 염정(鹽井) 지역이건만 조사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심괄(沈括)의 《필담(筆談)》에, “해주 염택(解州鹽澤)은 사방이 120리이다 오랜 장마에 사방 산의 물이 모두 못에 쏟아져들어와도 일찍이 넘치지 않았고, 큰 가뭄에도 일찍이 마르지 않았다. 간수(滷) 빛이 새빨갛고 판천(版泉)의 하류에 있는데 민간에서는 치우(蚩尤)의 피라 부른다. 오직 중간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감천(甘泉)이며, 이 물을 발견한 다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북쪽에 요소수(堯梢水)가 있는데, 무함하(巫咸河)라 이르기도 한다. 매우 짠 물이며, 감천을 섞지 않으면 소금이 되지 않고, 무함수를 넣으면 소금이 다시 엉기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이 무함하(無鹹河)라 부르면서 염택(鹽澤)에 해가 되므로 큰 둑을 쌓아 막아서 도둑을 방비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했다. 그 이치를 궁구하면 무함은 탁(濁)한 물인데 간수 속에 들어가면 해감이 간수 결에 가라앉아서 소금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소금은 여러 가지 품질이 있는데, 전사(前史)에 기재된 것으로 오랑캐 나라에도 10여 종이 있고, 중국에서 나는 것만도 수십 종은 된다. 지금 쓰는 것도 공사간을 통틀어서 네 가지이니, 말염ㆍ과염ㆍ정염(井鹽)ㆍ애염(厓鹽)이 이것이다. 오직 섬서로(陝西路)의 과염(顆鹽)에 일정한 과세가 있어 해마다 230만 꿰미를 징수하며, 그 나머지는 많아졌다가 적어졌다가 해서 일정하지 않으나, 1년 수입이 대략 2천여 만 꿰미이다.” 하였다.
또 “무릇 100리 길을 육로로 운반하면 1근에 4전이고 배로 운반하면 1근에 1전인데, 이로써 율(率)을 삼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염지(鹽池)도 반드시 땅속으로 바닷물과 서로 통한 것이므로 장마가 져도 넘치지 않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여조겸(呂祖謙)은 “소금의 종류가 매우 많다. 바다에서 나고 우물에서 나고 못에서도 나는데, 이 세 가지 외에도 나는 곳이 더 있다. 하북(河北)에는 노지(鹵地 : 소금이 나는 땅)가 있는데 이것은 땅에서 나는 것이고, 영강군(永康軍)에서는 소금이 벼랑에서 나는데 이것은 산에서 나는 것이며, 또 돌에서 나는 것, 나무에서 나는 것이 있어,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하였다.
또 “남방의 소금은 전적으로 바다에서 생산되고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남방 소금을 관리하는 데에 올바른 사람만 얻으면 그 해가 적지만, 오직 북방 해지 소금은 글안(契丹)과 서하(西夏) 소금이 서로 끼여들어서 해지 소금의 이(利)를 빼앗는다. 대체로 해지 소금 맛이 서하 소금 맛보다 못하므로 연변(沿邊)에는 은밀히 두 나라 소금을 파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휘종(徽宗) 초기에 빗물이 예사가 아니었는데 주위의 해자가 깊지 않았고 지키는 자가 잘 감시하지 않아서 외수(外水)가 섞여들었다. 빗물이 예사가 아니고 외수가 넘쳐서 해지(解池)에 흘러드니, 다시는 소금이 되지 않았다. 그 후에 요역(徭役)을 크게 일으켜서 외수를 퍼낸 다음부터 차차 복구되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외수라는 것은 이른바 무함수(巫咸水)였다.

희령(熙寧 : 宋 神宗의 연호, 1068~1077) 8년, 장돈(章惇)이 상언(上言)하여 “섬서(陝西) 소금은 독점하면서 하북(河北)에는 홀로 독점하지 않는데, 이것은 조종(祖宗)의 한때 잘못된 은택이니, 사신을 보내서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했으나, 문언박(文彦博)이 불편함을 논해서 예전대로 하도록 조서하였다
원풍(元豊 : 송 신종의 연호, 1078~1085) 3년에 조서하여 하북 소금도 독점하였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하북 소금 독점하는 법을 철폐하였다
소성(紹聖 : 宋 哲宗의 연호, 1094~1097) 초기에 하북 소금을 다시 독점하였다.

여조겸은 “하북 소금은 독점할 수 없다. 정염(井鹽)ㆍ지염(池鹽)은 독점할 수 있고, 바다 소금도 달여야 하는데, 가마를 만드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 또한 독점할 수가 있다. 오직 하북 소금만은 노지(鹵地)에서 나는 것이어서 그 지역이 매우 넓으므로, 염정(鹽井)이나 염지(鹽池)와 같이 담장 또는 해자로 막아서 지킬 수가 없다. 또 잠깐 달이면 문득 소금이 되어서, 바다 소금처럼 달이기를 기다려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금령을 범하기가 가장 쉬웠으므로 장돈 때부터 하북 소금도 금단해서 독점했던 것이나 정강(靖康) 말년에 와서는 도적이 더욱 많아졌다.” 하였다.
생각건대, 한차례 전진했다가 한차례 후퇴하고, 한차례 독점했다가 한차례 복구했는데, 붕당 때문에 미치는 화가 이와 같았다. 송나라 법은 또 상인에게 변새(邊塞)에 곡식을 바치고, 강회(江淮)에서 소금을 받아 산매(散賣)하도록 허가하고, 수십 고을에 운반하는 비용을 감해주면서 그 명목을 중염(中鹽)이라 했는데, 선유(先儒)는 이것을 좋은 법이라 일렀다. 또 이른바 초염(鈔鹽)이라는 법이 있었는데 상인에게 경사(京師)에서 초전(鈔錢 : 지폐 또는 어음)을 받고 소금을 관창(官倉)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채경(蔡京)이 백성을 속여서 염법을 여러번 변경하니 초전이 쓸데없게 되어서 상인이 손해를 보고 도둑이 날로 일어났다. 다 쇠란한 때의 법이어서 이제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명(明)나라 제도는 천하의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에 전운사(轉運使) 6명과 그리고 제거사(提擧使) 7명을 두었다. 해마다 염과(鹽課 : 소금에 대한 세)에 일정한 액수가 있었고, 소금을 유통시키는 데에도 각각 맡은 지방이 있어, 그 경계를 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1인(引 : 소금 무게의 한 단위)에 300근을 한 부대로 하며, 모(耗) 5근이 포함되었다.
《대명률(大明律)》에 “무릇 사염죄(私鹽罪)를 범한 자는 장(杖) 100대를 쳐서 도형(徒刑) 3년으로 하며, 체포에 항거한 자는 참하고, 소금ㆍ재물ㆍ수레ㆍ배는 아울러 관에서 몰수한다.” 하였다.
모든 염장(鹽場) 조정(竈丁)으로 있는 사람은 일정한 액수의 소금을 제급(除給)하는데, 이 밖에 가외 소금을 가지고 염장에서 나간 것과 개인이 달인 소금을 매매한 자는 사염법과 똑같이 처벌한다.” 하였다.
“무릇 사염을 사서 먹는 자는 장 100대를 때린다.” 하였다.

생각건대, 임금으로서 소금 달이기를 처음 시작한 자는 오왕(吳王) 비(濞)였고 잇달아 좇은 자는 상홍양(桑弘羊)이었으며, 관중(管仲)은 원통한 자였다(뜻은 앞에 말했다). 염법이 생긴 이래로 오직 유안의 상평염법이 가장 좋았고, 나머지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광야고(卝冶考)
우공(禹貢)에 “양주(揚州)에는 그 공(貢)이 오직 금(金) 3품(品)이고, 형주(荊州)에도 그 공이 오직 금 3품이며, 양주(梁州)에 그 공은 구 옥(璆)ㆍ철(鐵)ㆍ 은ㆍ누(鏤 : 철강)이다.” 하였다.
매색(梅賾)은 “3품은 금ㆍ은ㆍ동(銅)이다.” 하였다.

채침(蔡沈)은 “철은 유철(柔鐵)이고 누는 강철인데 조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금ㆍ은은 모두 귀중한 물품이니, 백성에게 부과해서 징수할 수 없고 반드시 그 지역 제후에게 원래부터 관채(官採)가 있어서 그 공(貢)에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관 횡인(地官卝人)은 “금ㆍ옥ㆍ주석(錫)ㆍ석(石)이 생산되는 곳을 관장하면서 여금(厲禁)해서 지킨다. 가끔 채취하고자 할 것 같으면 그곳을 물색하여 도(圖)를 만들어주고, 그 금령(禁令)의 시행을 순찰한다.” 하였다.

정현은, “횡이라는 말은 광(礦)을 가리키는데, 금ㆍ옥이 기물(器物)이 되지 않은 것을 광이라 한다.” 하였다.
주석(錫)은 백철(鈏)이다.
나는, “가끔 채취한다.”는 것은 관에서 채굴하는 것이니, 평시에는 여금해서 지키다가 관에서 채굴할 때를 당하면 그 있고 없는 지역을 분변하여(그곳을 물색한다) 도(圖)를 그려서 일 맡은 자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정현의 주에는 그곳을 물색한다는 것은 그 땅이 소금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 했으나,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생각건대, 금ㆍ은ㆍ동ㆍ철은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니 옛적 성왕이 백성에게 사사로 채굴하는 것을 허가할 리가 없다. 이제 이 경서(經書)를 상고하니 관에서 지키면 관에서 채굴했던 것이 분명하다.

추관 직금(職金)에는 “금ㆍ옥ㆍ주석ㆍ돌ㆍ단청(丹靑)에 대한 모든 계령(戒令)을 관장해서, 들여오는 정(征)을 받는다. 그 물건의 좋고 나쁨과 그 수량을 구별해서 기록한 다음 봉인(璽)하여, 그 금ㆍ주석은 무기를 만드는 부(府)에 들이고, 옥ㆍ돌과 단청은 수장(守藏)하는 부에 들이는데, 그 요(要)를 들인다.” 하였다.
또 “사(士)의 금벌(金罰)과 화벌(貨罰)을 받아서, 사병(司兵)에 들이는 일을 관장한다.” 하였다.

정현은, “청(靑)은 공청(空靑)이다.” 하였다. 또 “갈(楬)은 표지(表識)하는 것이고, 새(璽)는 인(印)을 찍는 것이며, 수장하는 부는 옥부(玉府)와 내부(內府)이다.” 하였다. 정중(鄭衆)은, “들어오는 정(征)을 받는다는 것은 조세를 받는 것이다.” 하였다. 정현은, “요(要)란 범수(凡數 : 槪數)인데 태부(太府)에 들이는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산택(山澤)에 우씨(虞氏)와 형씨(衡氏)를 두는 법은, 생산된 보물을 옥부(玉府)에 들이고, 그 나머지를 만민에게 갈라주면서, 이에 세금이 있었는데, 직금(職金)은 그 들여오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화식전(貨殖傳 : 《사기》의 편명)에, “산서(山西)에는 옥ㆍ돌이 많고 강남에는 금ㆍ주석ㆍ연(連 : 鉛을 제련하지 않은 것)이 산출되며, 단사(丹砂ㆍ대모(瑇瑁)ㆍ주기(珠璣)ㆍ동(銅)ㆍ철은 산출되는 산이 천리 사이에 가끔 바둑돌처럼 벌여 있다.” 하였다.
또 “파촉(巴蜀)에는 단사ㆍ주석ㆍ동ㆍ철이 많고, 예장(豫章)에는 황금이 산출되며, 장사(長沙)에는 연(連)과 주석이 산출된다.” 하였다.
또 “촉(蜀) 지방의 탁씨(卓氏)는 철야(鐵冶)로 부자가 되었고, 완(宛) 지방 공씨(孔氏)는 철야를 업(業)으로 했으며, 조(曹) 지방 병씨(邴氏)는 철야로써 발신(拔身)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관자(管子)》ㆍ《한서(漢書)》에서 《당사》ㆍ《송사》에 이르기까지 그 철야에 대한 말이 모두 염세(鹽稅)와 서로 섞여 있는데, 그에 대한 의논을 위에 적었다.

동한(東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1년에 소호(漅湖)에서 황금이 산출되어, 여강 태수(盧江太守)가 가져다 바쳤다.

소식(蘇軾)의 구지필기(仇池筆記)에, “왕망(王莽) 때 성 안에 황금이 60만 근이었고, 진평(陳平)은 4만 근으로써 초(楚)를 이간시켰다. 동탁(董卓)의 미오(郿塢)에도 금이 많았으며, 그 나머지 30~50만 근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근세에는 금을 근(斤)으로 계산하지 못하며, 비록 임금이라도 남에게 백금(百金)을 주지 못하였으니 어찌해서 예전에 많던 것이 지금은 적어졌는가? 산을 파고 모래를 헤쳐서 그냥 넘기는 날이 없이 캐건만, 금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보화가 변해짐이 자못 의심스러운데, 알 수는 없지만 산택으로 다시 돌아간 것인가?” 하였다.
살피건대, 당(唐)ㆍ송(宋) 이래로 번국(蕃國)의 배가 중국을 왕래하자 황금이 모두 서남 해국(海國)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3대(代) 이후로 채광하는 일이 드디어 없어졌으니, 황금의 없어짐을 괴이쩍게 여길 것도 없다. 고염무(顧炎武)는, “황금은 불전(佛殿)과 불상에 많이 들어갔다.” 했는데 이것도 또한 그럴듯하다(宋 太宗이 秘閣 校理 杜鎬에게, “西漢 시대에는 賜與하는 데에 모두 황금을 썼는데, 근세에는 황금이 구하기 어려운 재물이 된 것은 왜인가?” 하니, 호가 대답하기를, “그 때에는 佛事가 성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금 값이 매우 헐했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 무제(漢武帝)가 황금을 녹여서 인지 요제(麟趾褭蹏)의 형상을 만들었으나, 채광한 것은 아니었다. 섭몽득(葉夢得)은, “한나라 때에 신하에게 사여하는 황금은 매양 100근, 200근이었고, 적어도 30근이었다.” 하였으며, “연왕(燕王) 유택(劉澤)은 비록 제후였으나 전생(田生)에게 하사한 금이 또한 200근이었다.” 하였고, “초(楚)의 양효왕(梁孝王)이 죽은 후에 금 40여 만 근이 있었다.” 하였으니 대개 화폐는 가볍고 쌀은 흔하며, 금은 많았던 것이었다.
마단림은,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은 한(漢)나라 때보다 많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채취하는 것과 관부(官府)에서 징렴(徵斂)하는 것을 사서(史書)에 일찍이 말하지 않았으나, 생각건대 반드시 후세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은 천지간에 숨겨진 보물로서, 홀로 독점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한나라 법에 백성으로서 사사로 돈을 만든 자는 왼쪽 발을 베었고, 박사(博士)가 군국(郡國)에 교조(矯詔)를 내려 백성으로서 농기구를 만든 자는 죄가 사형에 이르도록 하였다. 철관(鐵官)이 무릇 40고을이었는데, 철이 나지 않는 곳에는 또 소철관(小鐵官)을 두어서 천하에 깔렸으나 홀로 금에 대한 금령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철은 지극히 흔한 것인데도 이를 독점해서 세밀하게 분석하고, 금은 지극히 귀한 것인데도 진흙같이 써버렸다. 그런즉 나라에서 이(利)를 추구할 때에는 금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식전(貨殖傳)에 촉의 탁씨, 산동의 정(程)씨와 정(鄭)씨, 완(宛)의 공씨, 조의 병(邴)씨를 기재하고, 두드러진 부자라 일컬었으나 모두 철야를 독점한 이(利)를 말했을 뿐이고, 금을 갈무리했다는 일은 듣지 못했다. 그런즉 호강(豪强)한 집이 부자가 되는 것은 금을 연유하지 않아서, 상하 간에 숭상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대개 옛 사람이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유풍(遺風)이었다.” 하겠다.
생각건대, 옛적에는 주(珠)ㆍ옥(玉)이 상폐(上幣)이고 황금이 중폐였으니 금이 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공(禹貢)에 3품의 공물이 있고, 《주례(周禮)》에는 횡인(卝人)의 여금(厲禁)이 있었다. 선왕 적에는 실지에 힘써서 재물이 생산되도록 했는데, 패자(覇者)가 섞여나온 이래로 재물을 생산할 줄은 모르고 오직 박민(剝民)만을 힘썼다. 그런데 마단림은 도리어 한나라 습속을 고풍(古風)이라 했으니 잘못도 심하다.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연창(延昌) 3년에 장안(長安) 여산(驪山)에 은광(銀鑛)이 있는데 두 섬에 은 7냥을 얻었음을 유사(有司)가 아뢰었다. 그해 가을에는 항주(恒州)에서 상언(上言)하기를, “백등산(白登山)에 은광이 있는데 여덟 섬에 은 7냥, 주석 300근을 얻었는데 빛깔이 깨끗하고 희어서 상품(上品)보다 더 좋다.” 하였다. 조서하여 아울러 은관(銀官)을 배치해서 항상 채취하고 주조하도록 하였다.

한중(漢中)에 옛적에는 금호(金戶) 1천여 호가 있어, 항상 한수(漢水)에서 사금(沙金)을 채취하여 연말에 바쳤는데, 그 후 임회(臨淮) 왕욱(王彧)이 양주 자사(梁州刺史)로 있을 때, 상주하여 폐지시켰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위 명제 때에 곤명국(昆明國)에서 피한조(辟寒鳥)를 바쳤다. 이 새는 항상 금가루를 토하는데 좁쌀 같았다.” 하였다.
촉도부(蜀都賦)에는, “금 모래, 은 자갈이 영창(永昌)으로 쏟아져드는데, 물에서 나는 금이 마치 겨(糠)가 모래 속에 있는 것 같다.” 하였다.
《남사(南史)》 이맥전(夷貊傳)에, “임읍국(林邑國)에 금산(金山)에 있는데 돌이 모두 붉은색이고, 그 속에서 금이 난다. 금은 밤에 나며 날아오르는 모양이 반딧불 같았다.” 하였다.
마단림은, “이것은 모두 사금(沙金)으로 역사에 전한 것이다. 옛적에는 먼 지방 오랑캐 나라에서 산출되었으나 지금은 동남 지방에도 곳곳에서 난다.” 하였다.
생각건대, 형주ㆍ양주가 어찌 먼 지방 오랑캐인가? 마단림의 말은 생각지 않고 한 잘못된 말이다.

당나라 때에 금ㆍ은ㆍ철ㆍ주석을 제련하는 곳이 186군데가 있었다. 섬서에 있는 선주(宣州)ㆍ윤주(潤州)ㆍ요주(饒州)ㆍ구주(衢州)ㆍ신주(信州)의 5개 주(州)에 은야(銀冶)가 58, 동야(銅冶)가 96, 철광이 5, 주석광(錫鑛)이 2, 연광(鉛鑛)이 4이고 분주(汾州)의 번산(礬山)이 7이었다.

정관(貞觀) 초에 시어사(侍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상언하기를, “선주ㆍ요주 2주의 은을 대대적으로 채굴한다면 해마다 수백만 꿰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짐에게 부족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다만 백성을 이롭게 할 만한 아름다운 말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경은 일찍이 한 현인도 천거하지 않았고 한 불초(不肖)한 사람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오로지 은세(銀稅)에 대한 이만 말하니, 나를 환(桓)ㆍ영(靈) 같은 임금이 되도록 기대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고, 이에 만기를 물리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생각건대, 임금이 그 신하를 물리치거나 승진시키는 데에는 그 사람의 공죄(功罪)를 살펴봄이 마땅하다. 만기의 말이 무슨 죄를 범했길래 이와 같이 물리친단 말인가? 요순(堯舜)이 형주ㆍ양주의 공(貢)을 받았고, 우탕(禹湯)도 역산(歷山)ㆍ장산(莊山)의 금을 채굴했는데 어찌 반드시 환ㆍ영과 같겠는가? 죄 없는 신하를 갑자기 물리쳐서 재물을 멀리했다는 명성을 낚았으니, 이것은 한때 덤벙거리며 농락하던 권도였는데, 후세의 용렬한 임금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그가 한 일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 술책에 빠지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丘瓊山은 태종의 이 말을 백세 제왕의 스승으로 삼고, 후세 임금이 이를 말한 신하에게 상준 것을 태종이 죄인으로 삼았으나, 그의 시비한 것이 반드시 이치에 맞는 말은 아니다).

인덕(麟德 : 唐 高宗의 연호, 664~665) 2년, 협산(峽山)의 동야(銅冶) 48곳을 폐지하였다.
개원(開元) 15년에 처음으로 이양현(伊陽縣) 오중산(五重山)의 은광ㆍ석광(錫鑛)에 세를 매겼다.
천보(天寶) 5년, 이임보(李林甫)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 화산(華山)에 금광이 있었는데. 임보가 화산은 임금의 본명(本命 : 출생한 해의 干支) 방위이고, 왕기(王氣)가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결국 채굴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왕기와 본명이라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후세에 간사한 말이 백성을 의혹에 빠뜨려서, 비록 1천 리를 내리뻗은 산맥이라도 감히 범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산택의 이(利)가 개발되지 못한 것이다.

덕종(德宗) 원화(元和) 시대에 천하의 은광 중에 폐지된 곳이 40곳이었다. 채굴한 것은 은 1만 2천 냥, 동 26만 6천 근, 철 207만 근, 주석 5만 근이고, 연(鉛)은 일정하지 않았다.
2년에 은의 채굴을 금단해서 1냥 이상 채굴한 자는 태형 20에 처하였다. 그리고 본계(本界) 주ㆍ현(州縣)의 관리를 체직시키고 절급(節級 : 당ㆍ송 시대에 설치했던 軍吏)도 죄를 매겼다.
선종(宣宗) 때에는 은야(銀冶) 2, 철광17곳을 증설하였다. 천하에 해마다 은 2만 5천 냥, 철 53만 2천 근을 율(率)로 하였다.

살피건대, 문종(文宗) 때에 다시 산택의 이를 주ㆍ현에 돌렸는데, 주ㆍ현에서 많이 차지하고 세납(歲納)을 매우 적게 하므로 그 후에 다시 복구했다.

송나라가 일어나자 금ㆍ은ㆍ동철ㆍ연ㆍ석 따위 재화를 모두 장(場)을 개설하고 풀무를 설치하며, 무관(務官)을 두어 감독했다.

금광 5처(處 : 商州ㆍ歙州 등), 은광 3감(監 : 桂陽ㆍ鳳州 등)이 있었고, 또 51장(場 : 賢豐ㆍ馬茨 등)ㆍ3무(務 : 雍州ㆍ隴州 등)가 있었고, 동광이 35장[饒州ㆍ英州 등]ㆍ1무[梓州]가 있었고, 철광이 4감[大通ㆍ萊撫 등]이 있었으며, 또 12야(冶 : 凌雲ㆍ赤谷 등)ㆍ20무[晉磁ㆍ鳳灃 등]ㆍ25장[丁溪ㆍ聖水 등]이 있었다. 연광(鉛鑛)이 36장[韶州ㆍ衢州등]이 있었고, 주석광(朱錫鑛)이 9장(虔州ㆍ南康 등), 수은광(水銀鑛) 4장[秦州ㆍ鳳州등], 주사광(朱砂鑛) 3장[商州ㆍ宜州 등]이 있었다.
생각건대, 소금을 독점하는 것은 백성의 이를 빼앗고 백성의 먹을 것을 방해하는 것이니 독점해서는 안 된다. 오직 금ㆍ은ㆍ동철은 반드시 관에서 채굴함이 마땅하며, 백성에게 허가함은 불가하다.
태조(太祖) 개보(開寶) 3년, 계양감(桂陽監)에서 해마다 바치는 은의 3분의 1을 줄였다.
태종(太宗) 때에 유사가 “봉주(鳳州)에 동광(銅鑛)이 나고, 정주(定州)에 은광이 나니 관원 두기를 청합니다.”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도(至道 : 송 태종의 연호, 995~977) 말년에 천하에 해마나 부과하던 은이 14만 5천여냥, 동이 412만 2천여 근, 철이 574만 8천여 근, 납이 79만 3천여 근, 주석이 26만 9천여 근이었는데, 천희(天禧 : 宋 眞宗의 연호, 1017~1021) 말년에는 금이 1만 4천여 냥, 은이 88만 3천여 냥, 동이 267만 5천여 근, 철이 629만 3천여 근, 납이 44만 7천여 근, 주석이 29만 1천여 근, 수은이 2천여 근, 주사(朱砂)가 5천여 근이었다. 그런데 금ㆍ은 갱(坑)과 풀무에는 정세(丁稅)를 면제하고 무역하는 외에는 세전(稅錢)을 부과했다. 값을 잘라서 바치고 서로 무역하도록 하니 모두 소득이 있었다.
금ㆍ은ㆍ동철ㆍ납ㆍ주석을 제련하는 풀무를 설치한 곳이 총 271곳이었다. 금 풀무가 11곳, 은 풀무 84, 동 풀무 46, 철 풀무 77, 납 풀무 30, 주석 풀무 16, 단사(丹砂) 풀무 2, 수은 풀무 5곳이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서 주관하도록 했다.

인종(仁宗)ㆍ영종(英宗) 때에는 여러 개의 풀무를 혹 증가시키기도 혹 감소시키기도 했는데, 세입이 이 때문에 많아지기도 적어지기도 했다.
신종(神宗) 희령(熙寧) 원년, 천하에 조서하여 보화갱(寶貨坑)과 풀무를 개발하지 않는 한편 세과(歲課) 부담하던 것을 견면(蠲免)하였다. 8년, 조서하여 갱과 풀무간에 가까운 방ㆍ곽ㆍ향ㆍ촌(坊郭鄕村)에서 채굴하고 제련하는 사람은 아울러 서로 보(保)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보(保) 내 및 갱과 풀무에 범법하는 자가 있는데도 알면서 규찰하지 않거나 혹 도둑을 숨겨주고 고발하지 않은 자는 보갑법(保甲法)과 똑같이 논죄하였다.

생각건대, 채광하는 지역에는 본디 간사한 도둑이 많으니, 서로 보호하는 법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로는 여러 도[路]의 광갱(鑛坑)과 제련하는 풀무를 혹 신설하기도 혹 폐지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고종(高宗) 건염(建炎) 7년, 공부(工部)에서 “희령(熙寧) 때 법에 의해 백성을 불러서, 금ㆍ은광을 채굴하는데 자재를 스스로 갖추어서 제련하도록 한 다음, 10분을 율(率)로 해서, 관에서 2분을 징수하고 그 8분은 갱호(坑戶)가 제 편리한 대로 매매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생각건대, 금ㆍ은ㆍ동철은 반드시 관에서 채굴함이 마땅하며,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폐쇄하는 편이 낫다. 백성에게 사사로 채굴하도록 허가하면 간사한 도둑이 서로 모여서 도둑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반드시 허가해서는 안된다.

명나라 때의 갱과 풀무의 이(利)는 전대에 비해서 10분의 1~2도 되지 못했다. 간혹 있더라도 채굴하는 대로 다 없어져버렸다. 절강(浙江)의 온주(溫州)ㆍ처주(處州)와 민중(閩中)의 건주(建州)ㆍ복주(福州)에 장(場)을 개설하고 관청을 설치하여 내신(內臣)을 시켜서 지키고 헌신(憲臣)을 파견해서 감독했으나, 소득이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

구준은, “송나라 때에 갱야(坑冶)가 매우 많았고, 원(元)나라 때 광갱도 오늘날에 비해 열두 배나 많았는데 왜 그럴까? 대개 천지간에 생산되는 물(物)로서 끝없이 생산되는 것은 곡식과 상ㆍ마(桑麻) 따위이고, 그 땅과 함께 생긴 것은 금ㆍ은ㆍ동철 등이다. 옛적 성왕이 백성에게 받는 부(賦)로서 미속지정(米粟之征)과 포루지정(布縷之征)은 있었지만, 이른바 금은동철지정(金銀銅鐵之征)이라는 것은 없었다. 산택에서 생산되는 것은 땅과 함께 생긴 것이므로 취하면 다함이 있어서 잇달아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산림에는 초목이 있고 토석(土石)이 있는데 그 가운데 초목은 다 채취해도 잇달아서 자라나므로 비록 날마다 취하고 해마다 취해도 다함이 없지만, 무릇 산간의 토석은 파버리면 깊숙하게 웅덩이가 되고 가져다버리면 비어서 흔적이 남는 것은 왜일까? 그 형상이 일정한 까닭이다. 이러므로 갱야에서 나오는 이가 전대에는 많았으나 후대에 와서 줄어들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어짐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생각건대, 3대의 법은 금ㆍ은ㆍ동철을 관에서 채굴해서 관에서 제련했고 백성이 사사로 하지는 못했으므로 부세(賦稅)를 징수하지 않았다. 백성이 만약 사사로 채굴했다면 반드시 세가 있었을 것이다. 또 5금(金)과 8석(石)은 모두 흙의 정기가 일ㆍ월ㆍ성신의 기운을 받아서 응결된 것이며, 또한 잇달아 생성(生成)해서 다함이 없는 것이다. 경산(瓊山)은 송나라 사람이 수백년 동안 채굴해서 그 자원이 드디어 고갈되었다고 하였으나, 천지가 물(物)을 생성하는 이치는 호호광대(浩浩廣大)한 것인데 그의 지식은 어찌 그리 천소(淺小)한가? 그러나 초목이 해마다 무성해지는 것과는 진실로 같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날로 금ㆍ은을 채굴해서 중국 비단과 바꾸는 것은 크게 불가하다.

송나라 개보(開寶) 5년, 조서하여 영남도(嶺南道) 미천도(媚川都)에 채주(採珠)를 혁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창(劉鋹)이 해문진(海門鎭)에서 군사를 모집하면서 능히 구슬을 찾아내는 자 2천 명을 미천도(媚川都)라 불렀다. 무릇 구슬을 캐는 자는 반드시 몸에다 새끼로 돌을 매어서 자맥질을 하는데, 자맥질을 깊이 하는 자는 그 깊이가 500척(尺)이나 되었고 빠져 죽는 자도 매우 많았다. 그후 영남도를 평정하자 미천도를 폐지했고, 이어서 백성이 채취하는 것도 금지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에서 다시 채취했다. 용주(容州) 바닷가에도 구슬이 산출되었는데, 관에서 관리를 두어서 관장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부터 구슬 100근을 공(貢) 받았고, 7년에는 50근을 공 받았는데 직경이 1촌 되는 것이 셋이나 있었다. 8년에는 1천 610근을 공 받았는데, 모두 주장(珠場)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살피건대, 우공(禹貢)에 회이(淮夷)는 빈주(蠙珠)를 조공하고, 형주(荊州)에서는 기조(璣組)를 조공해서, 여러 나라에 세과(歲課)가 있었다. 그러므로 천자는 일정한 공물을 징수해서 면류(冕旒)를 장식하고 반함(飯含)에 제공했으니 또한 선왕이 취하던 바였다. 그러나 이것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니 법으로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당(唐)나라는 진주(晉州)에 평양원(平陽院)을 설치해서 반석(礬石)의 이(利)를 거두었다.
문종(文宗) 개성(開成) 3년에 혁파하였다.
5대(代) 이래로 무(務)를 창설하여 관리를 두었다.
송(宋)나라 때에 백반(白礬)은 분주(汾州) 영석현(靈石縣)에서 산출되고, 녹반(綠礬)은 지주(池州) 동릉현(銅陵縣)에서 산출되었다. 각각 관청을 설치하고 확호(鑊戶)를 영솔하여 달이고(煮) 만들어서, 관시(官市)에 납입하였다.
지도(至道) 연간에 백반의 세과(歲課)가 97만 6천 근이고, 녹반의 세과가 40만 5천여 근이었는데 매매한 돈이 17만여 관(貫)이었다.
진종(眞宗) 말년에 백반은 20만 1천여 근이 증가되고, 녹반은 2만 3천여 근이 증가되었다.
송나라 법에 반석(礬石) 3근을 사사로 달였거나, 관청의 반석 10근을 훔친 자는 기시(棄市)하였다.
희령(熙寧) 이후에는 반석에 대한 법을 조금 변경해서 1년에 150만근을 부과하였다.

진부량(陳傅良)이 이르기를,“송 태조가 반석 달이는 것을 금지한 것은 글안[契丹]ㆍ 북한(北漢) 때문에 실시한 법이었고, 그후 소금과 술을 독점한 것도 모두 본의가 아니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반석을 독점한 것은 법 중에 가장 나쁜 것이었다. 진실로 반석을 독점할 참이면 무릇 웅황(雄黃)ㆍ유황(硫黃)ㆍ석고(石膏)ㆍ적석(赤石)ㆍ활석(滑石) 등도 모두 독점할 것이지 하필 반석만을 한단 말인가? 그 종류를 늘려나가려면 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송 신종(宋神宗) 희령(熙寧) 원년에 석탄에 대한 세는 받지 말도록 조서하였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연간에 관에서 석탄을 팔면서 20여 장(場)을 증설해서 팔았다.

살피건대, 지금 중국에는 풀무간과 온돌[煖炕]에 전적으로 석탄을 사용한다. 반드시 세액(稅額)이 있을 터이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삼각산(三角山) 서쪽 기슭에 석탄이 많으니, 중국 석탄 두어 조각을 수입해서 빛깔과 광맥(鑛脈)을 분변한 다음, 관에서 채굴한다면 국가재정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재목고(材木考)
당 덕종(唐德宗) 때에 비로소 호부 시랑(戶部侍郞) 조찬(趙贊)의 말을 채택해서, 천하 대나무에 10분의 1세를 받았다.

살피건대, 목재에 부(賦)를 매긴 것은 위인(委人) 조에 보이는데(地官의 관속임) 위인이란 우인(虞人 : 單襄公은

 

계곡선생집 제9권
 제문(祭文) 42수(首)
삼각산과 백악산과 목멱산에 기도를 올린 글[三角白岳木覓祈禱文]


한양 수도에서 각자의 덕 발휘하며 / 藩都配德
신령스런 그 힘 빛나고 빛나기에 / 赫赫厥靈
나라에 큰 재앙 일어날 때면 / 國有大災
온갖 제물 아끼지 않아 왔지요 / 靡愛斯牲
자성전하 환후 위독하시어 / 慈聖疾篤
서울과 지방 모두 황급해하니 / 中外遑遑
원컨대 음덕(陰德)을 내려 주시어 / 願賜陰騭
속히 건강 되찾게 하여 주소서 / 亟躋平康


계곡선생집 제30권
 칠언율(七言律) 1백 60수(首)
벽제 가는 도중에 지은 시 두 수[碧蹄途中 二首]


비 끝에 먼지 없는 깨끗한 도로 / 雨餘官路淨無塵
날리는 일산 나푼나푼 사람 잘도 따라오네 / 飛蓋翩翩解趁人
비끼는 해 희미하게 말 머리를 비춰주고 / 斜日曈曨臨馬首
울근불근 구름덩이 물고기 비늘 이루었네 / 亂雲騰蹙作魚鱗
어렵고 힘든 시대 바로잡을 계책 없어 / 艱危未效匡時略
어떻게 보국(報國)할까 졸렬한 몸 부끄럽네 / 薄劣眞慙報主身
수롱 땅 시 읊었던 옛날 일 떠올리며 / 垂隴陳詩希往躅
국빈(國賓) 접대할 일 이리저리 궁리하네 / 擬將何物享嘉賓

나랏일 마음에 걸려 얼음물만 마셔댈 뿐 / 王事關心只飮氷
찌는 듯한 무더위 고생스럽다 사양하랴 / 敢辭辛苦觸炎蒸
둘러쳐진 내와 언덕 삼각산에 연해 있고 / 川原繚繞聯三角
울창한 풀과 나무 두 능을 감쌌어라 / 草樹蒼茫擁二陵
들 물 댄 모판의 싹 구름처럼 애애(靉靉)하고 / 野水浸秧雲掩苒
수확하는 보리밭 물결처럼 출렁이네 / 村田割麥浪崩騰
조랑말 저물녘에 산모퉁이 투숙하니 / 羸驂薄晚投山崦
객점에 고기는 없고 파리떼만 윙윙대네 / 傳舍無魚但有蠅


 

[주D-001]수롱 땅 …… 옛날 일 : 춘추 시대 정(鄭) 나라가 막강한 진(晉) 나라의 실력자 조맹(趙孟)을 맞이하였을 때, 그의 요구에 따라 정 나라 공자(公子)들이 각각 시 한 편씩을 읊고 평가를 받았던 일을 말한다. 《春秋左傳 襄公 27年》
[주D-002]국빈(國賓) : 중국의 사신들을 가리킨다.
[주D-003]나라의 …… 뿐 : 사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애가 탄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중국에서 온 조사(詔使)의 영접사로서 계곡이 차출된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내가 오늘 아침에 사신의 명을 받고서 저녁에 얼음물을 찾기 시작했다.[今吾朝受命而夕飮氷]” 하였다.

 

계곡선생집 제30권
 칠언율(七言律) 1백 60수(首)
정사의 등한강정 운에 차하다[次正使登漢江亭韻]


감청색 반사되는 화려한 복장 / 華裾相映翠如葱
온화한 그 풍모에 술 취한 듯 반하였네 / 心醉仙標醞藉中
높다란 누각 가에 배 띄워 유람하고 / 已傍危亭開畫鷁
다시금 주악 소리 물 속의 용 일으켰네 / 更憑橫吹起潛龍
술잔 앞에 삼산의 빛 손에 잡힐 듯 / 樽前欲攬三山色
난간 저쪽 만리풍 불어오는 듯 / 檻外堪招萬里風
멋진 표현 기다리는 기막힌 이 경치 / 佳境會須煩藻飾
백 년토록 전해질 시 명공의 손에 맡기외다 / 百年煙景屬明公


[주D-001]삼산(三山) : 삼각산(三角山)을 빗대어 옛날 이백(李白)이 노닐던 금릉(金陵)의 봉황대(鳳凰臺)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 시적 표현이다. 이백의 등금릉봉황대시(登金陵鳳凰臺詩)에 “三山半落靑天外 一水中分白鷺洲”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주D-002]만리풍(萬里風) : 남조(南朝) 송(宋) 종각(宗愨)이 소년 시절에 그의 포부를 말하면서 “장풍을 타고서 만 리의 물결을 깨부수고 싶다.[願乘長風破萬里浪]”고 한 고사가 있다. 《宋書 卷76》

 

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鬢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慵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鶗鴂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旄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晚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趁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簟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怊悵停雲別後思
자금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邴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旄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黯)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20권
 충렬왕 2(忠烈王二)
을유 11년(1285), 원 지원 22년


○ 봄 정월에 충청도 안집사(安集使) 이영주(李英柱)가 충주의 관비(官婢) 중에서 얼굴이 잘 생긴 사람 5명을 선출하여 바쳤다. 영주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사나운데, 충주 백성 정향(丁香)이 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혹독하게 형벌을 가하며 관청에 바치기를 독촉하니, 향이 그가 가진 것을 다 내고도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은 30여 근을 빌려서 바쳤다.
○ 동녕부 천호(東寧府千戶) 최탄(崔坦)이 와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을유일에 왕이 공주ㆍ세자와 함께 평주의 온정(溫井)에서 사냥했는데, 음식을 마련하는 비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권문 귀가에서 백성의 토지를 침노해 빼앗고 세력에 붙어 부역을 면하는 간사한 백성이 많았으니, 모든 징발과 취렴에 평민들이 괴로워하였다.
○ 정유일에 왕이 평주에서 돌아왔다.
○ 2월에 정전에서 제주 다루가치에게 향연을 베풀고 영영관(伶官)인 지후(祗候) 김대직(金大直)에게 서대(犀帶) 한 개를 하사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악관은 최고가 7품으로 제한되었는데, 사랑받는 신하 이정(李貞)이 왕에게 간하여 이를 하사한 것이다.
○ 계축일에 지진이 있었다.
○ 재신과 추신들이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하였다.
○ 충청도 안렴사 이천유(李千裕)가 백성을 동원하여 사사로이 집지을 재목을 벌채하니, 감찰사에서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 3월에 상약 시의(尙藥侍醫) 설경성(薛景成)을 원 나라에 보냈는데, 전에 원 나라에서 양의(良醫)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 여름 4월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한 문창유(文昌裕)가 졸하였다.
○ 5월에 근시 별감(近侍別監) 김용검(金龍劍)을 귀양보냈다. 이때 이덕손(李德孫)이 경상도 왕지사용별감(慶尙道王旨使用別監)이 되어 백성의 고혈(膏血)을 받아 착취하고 계급을 뛰어넘어 위위윤(衛尉尹)이 되었다. 용검이 시를 지어 역(驛)의 벽에 붙여서 비난하니, 덕손이 왕에게 고하여 귀양보낸 것이다.
○ 왕이 금교(金郊)에서 사냥하였다.
○ 6월에 장군 이병(李㻂) 등 28명을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쳤다.
○ 가을 7월에 김흔(金忻)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으로 제수하고 삼주호두패(三珠虎頭牌)를 차게 하였다.
○ 장군 원경(元卿)과 환자(宦者)인 낭장 최세연(崔世延)을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쳤다. 세연은 일찍이 그 아내가 사납고 질투하는데 화가 나서 스스로 거세한 자이다.
○ 지밀직사사 우준충(禹濬沖)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 문하평장사로 치사한 황보기(皇甫琦)가 졸하였다.
○ 8월에 왕이 꿈에 선조들이 망월대(望月臺)에서 노는 것을 보고, 명하여 대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 내시인 상장군 김자정(金子廷)을 동경 부사(東京副使)로 삼았다. 공주가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동경은 왕의 외가였다고 하는데 그러합니까." 하니, 왕이 "그렇다."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노예 출신이 고을의 원이 될 수 있습니까. 남반(南班) 출신으로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에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하니, 왕이, “원묘(元廟) 때부터다." 하였다. 공주가 "왕은 참으로 원왕(元王)의 아들입니다." 하니, 왕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왕이 음률(音律)에 뜻을 두어 일찍이 내시를 시켜 악공(樂工)들과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공주가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고하기를, “음악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마침내 이를 파하였다.
○ 9월 갑신일에 왕이 공주와 함께 남경(南京)에 거둥하였다.
○ 겨울 10월에 광평공(廣平公) 혜(譓)가 졸하니, 왕이 그의 재물을 몰수하여 궁중으로 들였다.
○ 무신일에 왕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이때 아직 벼를 거두지 않았는데, 왕을 따르는 말들이 모두 짓밟으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안렴사 최백흥(崔伯興)과 남경 부사(南京副使) 엄수안(嚴守安)이 재물을 모질게 거둬들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매우 풍성하고 사치스러웠다. 그리고 수안이 왕을 권하여 삼각산 문수굴(文殊窟)에 행차하게 하였는데, 길을 새로 닦기 위하여 백성을 괴롭히니 지방이 소란하였다. 왕은 수안이 능력이 있다 하여 3품 관직을 주었다.
○ 김주정을 충청 전라 경상도 계점도지휘사(忠淸全羅慶尙道計點都指揮使)로 삼고, 계점사와 별감을 각 도에 나누어 보냈다.
○ 곽인(郭麟)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동지공거 좌승지 최수황(崔守璜)이 부처 섬기기를 매우 독실히 하여 치하하러 온 손님에게 잔치를 베푸는 데에도 간단하게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고기없이 소찬을 차렸다. 왕지별감 임정기(林貞杞)가 백미 한배 [舟]를 선사하니, 수황이 말하기를, “나는 왕이 하사하는 것도 받지 않았는데, 하물며 백성의 고혈을 받겠느냐." 하면서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정기는 부끄럽고 노여운 나머지 곧 쌀 실은 배를 권문 귀가 집에 뇌물로 주고 즉시 수황을 대신하여 승지가 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 11월 1일 기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 을유일에 평주 온천에 거둥하였다.
○ 원 나라에서 동녕부(東寧府)가 수안(遂安)과 곡주(谷州)를 가지고 다툰다 하여 단사관(斷事官) 소독해(蘇獨海)를 보내와 시찰하게 하였는데, 겸하여 동정할 배 만드는 일을 독려하였다. 독해가 수안과 곡주를 가서 보고 마침내 그 지역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 경인일에 왕이 온천에서 돌아왔다.
○ 12월에 대장군 고천백(高天伯)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원 나라의 중서성에서 사람을 보내어 배 만드는 것을 독려하였다.
○ 동지밀직사사 송분(宋玢)을 경상도 조선도지휘사(慶尙道造船都指揮使)로 삼고, 또 사신을 각 도에 보내어 배 만들고 군량 모으는 일을 독려하였다.
○ 동녕부의 천호 한신(韓愼)ㆍ최탄(崔坦) 현효철(玄孝哲)이 천호 계문비(桂文庇)의 관하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무고하기를, “이 무리들이 재상 염승익(廉承益)과 함께 모의하여 우리들을 죽이려 하였다."고 하여, 요동 선위사(遼東宣慰使)와 안찰부(按察府)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위사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국문(鞫問)하고, 원 나라의 추밀원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요동도의 안찰사ㆍ첨사(簽事) 등과 함께 와서 신문하자, 왕이 김주정ㆍ조인규ㆍ유비(柳庇)를 보내어 원 나라의 사신과 함께 승익을 데리고 동녕부에 가서 변명하니, 한신 등이 무고한 죄에 대해 처벌받았다.
○ 원 나라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어 군량 10만 석을 조달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 봄 2월에 상평창(常平倉)을 양경(兩京 개경(開京) 서경(西京))과 12목에 설치하였다.
○ 3월에 교하기를, “천자는 7묘(廟)를 세우고, 제후는 5묘를 세워 공로가 있는 이는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이라 하며, 왼편에 모시는 이는 소(昭)라 하고 오른편에 모시는 이는 목(穆)이라 한다. 대효(大孝)는 신명을 감동시키고, 지극한 덕은 천지를 움직인다. 이에 지난해부터 새로 비궁(閟宮 종묘)을 지어 건물이 이미 완성되어 차례에 따라 증상(烝嘗)을 올리게 되었다. 은(殷)은 12군(君)을 6대(代)로 하였고, 당(唐)은 10제(帝)를 9실(室)로 하였다. 《진서(晉書)》에 이른바,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는 것은 임시변통이다.' 하였으니, 마땅히 신주(神主)를 위하여 실(室)을 세우는 것이요, 실을 가지고 신주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형제가 한 항렬임은 예문(禮文)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 혜종대왕(惠宗大王)은 세대가 같음을 논한다면 반열에 들지 못함에 있어서랴. 마땅히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 네 임금을 같이 한 묘(廟)에 모셔 태묘에 합사(合祀)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여름 5월에 서북계(西北界)의 여진이 보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노할 것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여진이 우리를 속인다.' 하여 방어를 하지 않았다.
○ 가을 8월에 이유현(李維賢) 등 10명과 명경 3명, 명법(明法)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여진이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다." 하니, 비로소 일이 급함을 알고 여러 도의 군마제정사(軍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내었다.
○ 겨울 10월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양(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삼아,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
○ 윤달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 평남 안주(安州))로 나아가 머무르다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 평북 구성(龜城))을 쳐서 우리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顔) 등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니, 소손녕이 성명(聲明)하기를,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서희가 글을 보고는 돌아와서 상황이 화친할 수 있겠다고 아뢰니, 왕이 감찰사헌(監察司憲) 이몽진(李蒙戩)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소손녕이 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80만의 군사가 다다르리라. 만약 강(江 대동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君臣)이 빨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침노한 이유를 물으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우리가 공손히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시행한다. 만약 화친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는데, 어떤 이는, “임금께서 서울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이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땅을 떼어 주자는 의논을 따르려고 하여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대로 쌀을 가져가게 하였는데 아직도 남은 것이 많자, 왕은 적군에게 이용될까 염려하여 대동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서희가 아뢰기를,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싸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요, 다만 능히 틈을 보아 움직이는 데 있을 뿐인데 어찌 대번에 쌀을 버리도록 하십니까. 하물며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이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 헛되이 강물 속에 버리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이를 중지시켰다. 서희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ㆍ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이니, 욕심 많은 저들이 한없이 요구한다면 그대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 대번에 가벼이 토지를 적국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 '천리 산하를 어린아이보다 가볍게 여기니, 두 조정의 관검이 초주를 원망하네.[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한(蜀漢)의 대신이 되어 위(魏)에 토지를 바치도록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 것을 이른 것입니다. 가벼이 토지를 떼어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先王)께서 행하시던 연등(燃燈)ㆍ팔관(八關)ㆍ선랑(仙郞) 등의 일을 다시 행하고 외국의 다른 법을 쓰지 않아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옳게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신명께 고한 뒤에 전쟁을 하든지 화친을 하든지 주상께서 이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이때 왕이 중국의 풍속을 즐겨 본받았는데,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이지백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손녕은 이몽진이 돌아온 후에 오래도록 회보(回報)가 없자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는데,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소손녕과 싸워 이겼다. 소손녕이 감히 다시 전진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와 항복하기를 재촉하자, 왕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거란의 진영에 보내었는데, 소손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을 군문 앞에 보내어 면대하게 하라." 하였다. 장영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누가 능히 거란의 진영에 가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하니 신하들 중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홀로 아뢰기를,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강가에 나가 전송하면서 손을 잡고 위로해 보내었다.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대등한 예를 차리고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侵蝕)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대국(大國 거란)이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데 말씨가 강개하니,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거란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에서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합시다." 하였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에 7일 동안 머무르다가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서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곧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들어가서 거란의 임금을 보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주D-001]증상(烝嘗) : 상(嘗)은 추제(秋祭)이며 증(烝)은 동제(冬祭)인데, 종묘의 제사를 통칭한 것이다.
[주D-002]차함(借銜) : 옛날에 외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사신의 관직이 낮으면 임시로 높은 직함을 빌려서 보내는데, 이것을 차함(借銜)이라 한다.

국조보감 제10권
 세조조 1
1년(병자, 1456)


○ 1월. 상이 창덕궁에 나아가 상왕에게 풍정연(豐呈宴)을 올렸다. 충순당(忠順堂)에 거둥하여 내금위 겸사복에게 활쏘기를 명하였다. 승지 이휘(李徽)에게 명하기를,
“내가 지난날 군문(軍門)에 있던 때에는 안팎이 한결같았는데, 지금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단지 환시와 함께 지낼 뿐이어서 보고 듣는 것에 가리워짐이 많다. 지금부터 종친 1명 및 겸사복, 병조의 관리가 돌아가며 직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군사는 사정전(思政殿) 행랑에서 직숙하고, 병조 당상과 도진무(都鎭撫)는 근정전(勤政殿) 동쪽 행랑에서 직숙하였다.
○ 상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중전이 궁전 벽에다 세화(歲畫) 대신 사민도(四民圖)를 붙여두고자 하는 것을 내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중전이, ‘먹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고 입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니, 붙여두고 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마침내 붙였다.”
하니, 승지들이 대답하기를,
“농상(農桑)은 왕도 정치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국모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니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하였다.
○ 봄철의 강무(講武)를 중지하였는데, 지난해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상이 사정전에 거둥하여 상참(常參)을 거행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직제학 양성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신들을 융숭히 대하시어 번번히 술자리를 마련해서 함께 즐기시니, 이는 실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은 과음으로 인해 성상께서 병이 나지나 않으실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면서 양성지의 관작을 한 계급 올려주라고 명하였다.
○ 관찰사 유규(柳規)에게 작은 잘못이 있다 하여 대신(臺臣)이 그의 예방 아전을 신문하였다. 상이 분사헌부 집의 강진(姜晉)에게 이르기를,
“관찰사는 한 지방을 통제하는 직책을 맡은 자인만큼 작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가벼이 논핵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아전을 대신 신문하다니, 이것이 어찌 내가 지역을 나누어 파견한 본래의 뜻이겠는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
하였다.
○ 한겨울이나 삼복 더위를 제외하고는 날마다 경연을 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경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경연은 훌륭한 사대부(士大夫)를 만나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곳으로, 강독만 하기 위해서 여는 것이 아니다. 근래에 경영관 중에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으니, 나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말이 적절하지 않더라도 내가 죄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상림원(上林苑)은 노비가 적지도 않고 전원(田園)이 좁지도 않은데, 관리가 태만히 굴며 마음을 쏟지 않아 천신(薦新)과 진상(進上)에 쓰는 과일을 모두 민간에서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5년을 목표로 나무를 심어 배양한다면 자라서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완전히 자라지 않았을 때에는 천신과 객사(客使)의 접대 등 부득이한 경우 어쩔 수 없이 민간에서 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나 한 몸을 봉양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민간에서 취해올 필요가 없다.”
하였다.
○ 주문사(奏聞使) 신숙주 등이, 요청했던 일을 비준받아 복명(復命)하니, 상이 평상에서 내려와 만났다. 그리고는 술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옛날에 경과 함께 만릿길을 동행하고 또 두 차례 함께 맹약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큰 일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 내원(內苑)의 뽕나무를 여러 관청에 나누어 주어 담장 아래나 밭두둑에 심게 하고, 만약 마음을 기울여 배양하지 않아 말라 죽게 만드는 경우에는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 2월. 상이 근정전에 거둥하여 선비들에게 직접 책문(策問)하였는데, 이르기를,
“덕이 없는 내가 큰 사업을 이어받은 이후로 맡은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밤낮없이 정신을 가다듬어 왔거니와,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널리 자문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정사의 큰 것을 들어 말해 보겠다. 현재(賢才)는 널리 구하여 다 써야 마땅하겠지만, 소원한 신하와 숨은 인재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신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고 전조(銓曹)로 하여금 의망하게 하고 보거법(保擧法)까지 두었는데도 현우(賢愚)가 섞여 있으니, 현재를 구하는 길이 넓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덕이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이 모두 나와 초야에 남아 있는 인재가 없겠는가?
관직은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지 인원이 많은 것과는 상관이 없는 법이다. 옛날에는 천하의 많은 인재를 가지고도 730명의 관원만 두었는데, 한 나라밖에 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관원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쓸데없는 관원을 모두 태거시킨다면 인재의 선택도 빈틈이 없게 될 것이다. 태거시키려면 어떤 것을 태거시켜야 하겠는가?
성곽은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 연변 고을은 성곽의 수축을 대충 마쳤으나 내지(內地)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떻게 하면 성곽을 반드시 정비하면서도 백성들이 곤궁한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 세 가지는 그대 대부들이 평소 강구하여 밝힌 내용일 것이고 새로운 정치를 하면서 듣고자 하는 바이니, 숨김없이 다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사를 시취하였다.
○ 3월. 기로소(耆老所) 신하들에게 보제원(普濟院)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고 술과 음악을 하사하였다. 상이 다시 승지 박원형(朴元亨)에게 이르기를,
“기구 대신(耆舊大臣)들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연회를 베푸는 때에 별도의 하사가 있어야 하겠다.”
하고, 사복시에서 사냥한 짐승을 하사하였다. 그리고는 박원형을 시켜 가서 하유하게 하였는데, 기로회(耆老會)에 승지를 보내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 영의정 정인지가 강도(强盜)가 들끓고 있다며 아뢰기를,
“의금부, 한성부, 형조 및 외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옛날의 항통법(缿筩法)을 모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익명으로 고발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강도짓이나 도둑질을 하여 사형에 해당되는 자는 세 번 심리하지 말고 즉시 사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발하는 문이 한번 열리면 원망을 품고 거짓된 내용으로 남몰래 화란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잇달아 일어날 것이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또 세 번 심리하는 법은 살려줄 길을 찾으려는 것이고, 때를 기다리는 법은 천시(天時)를 따르는 것으로, 모두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의 아름다운 뜻이다. 당(唐) 나라 때에 반드시 다섯 번 심리하였던 것을 본조에서는 줄여서 세 번으로 하였는데, 첫 번째 심리는 늘 조심하고 신중히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로 가면 점차 대충대충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예를 아껴 양을 남겨두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가벼이 그 수를 줄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가 아뢰기를,
“과거(科擧)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한 이후로 거자(擧子)들이 대부분 경학(經學)에 뜻을 두게 되었으니, 집현전과 삼관(三館)의 유신(儒臣)도 이로써 고무시키고 독려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가지 책만 파고들면 학문이 넓지 못하게 된다. 내가 세종조에 명을 받아 여러 경사(經史)를 편집하느라고 두루 섭렵하였으며, 율려(律呂)와 풍수(風水)에 관한 서적까지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은 실로 강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주역》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정밀하고 은미한데, 상하 두 경(經)은 실로 공부하기가 쉽지만 도설(圖說)과 계사(繫辭)는 더욱 빈틈이 없고 오묘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책의 이치를 이미 분명히 터득하였다면 이른바, ‘바다를 본 자에게는 물이 되기 어렵다.’는 격이어서 군서(群書)는 공부하지 않고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주역》을 권면할 방도를 집현전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아뢰게 하라.”
하였다.
○ 문무과(文武科) 급제자 임원준(任元濬), 어유소(魚有沼) 등의 은영연(恩榮宴)을 의정부에 베풀어주고,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선온하게 하였다.
○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 3.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동악(東嶽)으로,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嶽)으로,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嶽)으로,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嶽)으로 삼고 그 밖의 악진(岳鎭), 해독(海瀆),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사전(祀典)을 고쳐 정하는 일, 4. 본조의 음악 이외에 일본과 여진의 음악을 다시 설치하여 태평 성대를 빛내는 일, 5. 관례(冠禮)를 행하여 선왕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 6. 상하의 복색을 정하여 국가의 풍속을 이룩하는 일, 7. 여자 복색의 장의(長衣)를 금지하여 남녀의 의복 제도를 구별하는 일, 8. 우리 동방의 전대(前代) 군신(君臣)을 동교(東郊)에서 합제(合祭)하는 일, 9. 전대의 능묘(陵墓)에 수호군을 적절히 두고 이들의 요역을 면제해주어 나무꾼을 금지시키게 하는 일, 10. 쌍기(雙冀), 최충(崔冲), 이제현(李齊賢),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을 성묘(聖廟)에 배향하는일, 11. 당(唐) 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당을 세우는 일, 12. 고려의 문익점(文益漸)은 처음으로 목화씨를 얻어오고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포술(火砲術)을 배워왔으니 그들의 고향에다 사당을 세우고 그 후손을 녹용하는 일, 13. 문과(文科)에 경서 이외에 《좌전》,《통감》,《송원절요》,《삼국사》,《고려사》 등 사서(史書)를 강하는 일, 14. 자제(子弟)를 중국에 보내어 입학시키는 일, 15. 기인(其人)이 나누어 번(番)드는 법을 혁파하고 제사(諸)司)의 외방 노비로 대신케 하는 일, 16. 외방의 분대법(分臺法)을 혁파하고 고핵(考劾)을 관찰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는 일, 17. 각 진영에 현위(縣尉)를 두어 병무(兵務)에만 뜻을 두게 하는 일, 18. 고려 때의 좌보(左輔), 우보(右輔), 전보(前輔), 후보(後輔)의 예를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로, 수원(水原)을 전보로, 광주(廣州)를 좌보로, 원평(原平)을 우보로 삼아 서울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일, 19. 여러 도의 고을에 설치한 익진(翼鎭) 중에서 요해처가 아닌 곳은 없애거나 남겨두기를 상황에 맞추어 하는 일 등이었다.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연소한 문신(文臣) 및 벼슬아치의 자제를 선발하여 한어(漢語)를 익히게 하였는데, 예조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 상이 경회루에 나아가 활쏘기를 관람하고, 집현전 관원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강하게 하였다. 종친부 제조 정창손(鄭昌孫)에게 이르기를,
“앵무새가 말을 할 줄 알지만 나는 새에 지나지 않고, 성성이가 말을 할 줄 알지만 달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제각기 맡은 일을 하고 제 힘으로 노력하여 먹고 살 줄 아는데, 종친은 부귀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이러한 이치를 모른다. 경이 이미 종친부의 제조가 되었으니 항상 타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집현전 관원에게 이르기를,
“실질적인 학문이 근본이다. 국가에 사장(詞章)이 긴요하게 쓰여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로써 사람을 뽑지만, 스스로 힘쓰는 도리로 볼 때 실질적인 학문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사서 오경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 책을 택하여 읽도록 하라. 내가 수시로 직접 시강(試講)하겠다.”
하였다.
○ 4월, 서연관이, 잠실(蠶室)을 동궁에다 둔 관계로 회강(會講)하는 날 장소가 좁아 불편하다고 하면서 옮기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누에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다 둔 것이다. 또 《예기(禮記)》에 부인이 누에치고 고치를 켠다는 글이 있으니, 본래 중궁과 세자빈으로 하여금 여자의 일을 직접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반고명면복 조사(頒誥命冕服詔使) 윤봉(尹鳳) 등이 이르렀다. 상이 모화관에서 맞이하고 근정문으로 돌아와 교지를 반포하였다. 이르기를,
“덕이 없는 내가 막중한 부탁을 받게 되었으므로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며 감히 조금이라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경태(景泰) 7년 4월 20일에 황제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어 특별히 고명과 면복 및 왕비의 고명과 관복(冠服)을 하사하셨으니, 이렇게 큰 경사에 때맞추어 특별한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다. 아, 하늘에서 명을 내림에 총애하고 하사하는 영광을 흠뻑 누리게 되어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므로 관대하게 용서하는 은전을 베푸는 바이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상왕과 함께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명 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5월. 날씨가 가물었다. 명산 대천(名山大川) 및 사전(祀典) 이외의 영험이 있는 곳에 비를 빌었으며,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해골을 묻어주고, 도랑을 정비하고, 밭이랑을 깨끗이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오륜(五倫) 중에서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자(父子) 관계이다. 지금 늙은 부모를 두고 양계(兩界)로 이주(移住)되는 자가 있는데, 한번 고향을 떠난 후로 끝내 자신의 부모를 봉양할 수 없으니, 그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국가에서 이미 친로시정법(親老侍丁法)을 두었으면서 유독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백성만 구휼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변방으로 이주된 사람에게 나이 70이 넘은 부모가 있을 경우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도록 허락한 바 있다. 그러나 혼자서만 돌아가 봉양하게 되면 처자가 의지할 곳이 없고, 가족을 이끌고 돌아가 봉양하게 되면 봉양을 마친 후에 슬퍼하고 원망하는 것이 전과 다름없을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또 이는 옛날부터 있었던 법이 아니고 세종대왕께서 한때 임시방편으로 제정한 법이다. 늙은 부모가 있는 자가 돌아가 봉양을 마친 후에는 다시 변방으로 이주시키지 않고자 하니, 의정부로 하여금 논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팔도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대개 농사는 되도록이면 제때에 파종을 해야 하거니와, 김맬 때를 놓쳐버리면 끝내 쓸모가 없게 되고, 비록 김을 매고자 하더라도 먹을 것이 넉넉치 못하면 사람이 힘을 쓸 수가 없다. 경들은 나의 뜻을 체득하여 농사짓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신자 등에게 요역을 덜어 주고 먹을 양식을 주어서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또 밀과 보리는 농민들의 식량으로 가장 절실한 것인데, 여러 고을이 꿔주었던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여 매번 수확도 하기 전에 숫자를 조사하여 장부에 적어두므로 백성들이 마음대로 먹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경들은 옛날에 집착하지 말고 때에 맞추어 적절히 조처하고 곡진히 안배함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전 절제사 유응부(兪應孚) 등이 상왕(上王)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논죄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양성지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켕기는 일이 있는 듯하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 누군들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성지는 나를 따른 지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구치관(具致寬)으로 하여금 양성지를 불러 위로하고 타이르게 하니, 양성지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강희안(姜希顔), 이계전(李季甸) 등도 연루되었는데, 사간 권기(權技) 등이 국문하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나치게 파고들어 잘못을 찾아내려 든다면 대체(大體)에 손상이 갈 것이다.”
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 명하기를,
“집현전을 없애고 소장된 서적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라.”
하였다.
○ 삼남(三南)의 관찰사, 절제사(節制使), 처치사(處置使)에게 하유하기를,
“근래에 태평한 날이 이어지자 수륙(水陸)의 장수가 병사를 조련하는 데 힘을 쓰지 않고 수비 태새를 갖추는 데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 만약 하루아침에 외침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위험스런 사태에 적절히 대비할 수 있겠는가.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적이 침략하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내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믿으라.’ 하였다. 내가 장차 순찰차를 보내어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살필 것이니, 경들은 더욱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어 국가의 위령(威靈)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건춘문(建春門)에 벼락이 쳤다. 교지를 내려 자신에게로 책임을 돌리고 구언(求言)하였다.
○ 북쪽 변방의 연대(煙臺)에서 후망(候望)하는 사람을 방문하고 논상할 것을 명하였다.
○ 7월. 역대(歷代) 시조(始祖)의 위판(位版)을 고쳐 정하였다.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 ‘후조선시조기자지위(後朝鮮始祖箕子之位)', ‘고구려시조동명왕지위(高句麗始祖東明王之位)'로 모두 ‘지위(之位)'라는 두 글자를 더하였다.
○ 영의정 정인지가 상소하기를,
“진(秦) 나라 때 시서(詩書)를 불태운 이후로 성인(聖人)의 도가 밝지 못하다가, 송(宋) 나라의 여러 유학자들이 경적(經籍)의 뜻을 드러내어 밝힘으로 해서 성인의 도가 중천의 해처럼 밝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은 건국 이후로 경사(經史)를 숭상하고 성현(聖賢)을 스승으로 삼아 가법(家法)이 매우 훌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읽지 않은 책이 없어 고금을 꿰뚫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여유 있고 진득한 다스림이 이미 보고 듣는 사이에 드러났으니, 이 어찌 우연히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한 마음을 잡느냐 놓아버리냐 하는 기미는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사를 열람하여 매사를 자신에게 절실한 것으로 여기시고, 호령을 내고 명령을 시행하는 때에도 반드시 경사를 바탕삼으소서.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안정되고 자원이 넉넉해져서 화기(和氣)가 저절로 모여들어 재앙이나 변란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시무(時務)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경사에 실려 있는 것이 모두 시무입니다.”
하니, 상이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내 비록 한때의 폐단 때문에 집현전을 없애기는 하였지만, 내가 항상 보는 것은 경사이고, 항상 생각하는 것은 백성들의 일이며, 항상 경외하는 것은 천지신명이다. 다만 덕이 미치지 못하고 재주가 닿지 않고 지혜가 두루 하지 못하는 바가 있기에 항상 우려와 고뇌를 품고 있었는데, 경의 말이 나의 생각과 깊이 일치하니, 경탄하고 감복하는 바이다.”
하였다.
○ 상이 연희궁(衍禧宮)에서 농사짓는 것을 살펴보았다. 모화관에 이르러 열병(閱兵)하고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환궁하여 군사들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 지금부터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다가 복명(復命)한 자 및 수령, 만호(萬戶), 찰방(察訪), 일로 인하여 상경한 자를 전부 인견하는 것으로 규례를 삼으라고 명하였다.
○ 70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병이 깊은 상태이거나 폐질에 걸린 사람에게도 사는 곳으로 먹을 것을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죄수를 세 차례 심리하는 법을 여러 차례 거듭 밝혔건만 관리들이 여전히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혹은 사고로 인하여, 혹은 옥안(獄案)의 증거가 불명확하다는 핑계로 시일을 끌고 있으며, 또 정상이 애매하여 끝내 사건이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법조문에 구애되어 즉시 풀어 보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수령관(首領官)을 보내어 시일을 끌어온 죄수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하되, 애매하거나 억울한 자 및 태(笞) 이하의 죄수는 모두 풀어준 후에 내용을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경주(慶州) 등 10여 개 고을의 금년 전세(田稅) 중에서 반을 면제하고 공부(貢賦)와 잡역(雜役)을 전부 감면해 주었는데,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 좌승지 한명회(韓明澮)를 파견하여 서흥(瑞興)과 의주(義州)에서 명 나라 사신을 선위(宣慰)하고, 아울러 사목(事目)을 주어 민간의 폐단을 살피게 하였다. 상이 하유하기를,
“경은 나와 마음을 함께하고 덕(德)을 함께하여 한 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특별히 경에게 안찰을 명하는 바이니, 경의 귀와 눈은 곧 나의 귀와 눈이다.”
하고 초구(貂裘) 한 벌을 하사하였다. - 사목은 다음과 같다. 1. 수령의 탐오. 2. 부역(賦役)의 불균등. 3. 세곡(稅穀)을 거둘 때 곡면(斛面)을 수북하게 해서 많이 거두는 것. 4. 법을 어기면서 형벌을 남용하는 것. 5. 사람을 가두어 둔 채 심리를 지체하는 것. 6. 군민(軍民)의 실정과 바람. 7. 혁파해야 할 적체되어온 큰 폐단. 8. 흉악한 품관(品官)과 향리(鄕吏). 9. 역로(驛路)의 폐단. 10. 절령(岊嶺)과 극성(棘城)에 방어를 위해 성을 쌓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 11. 무재(武才)가 탁월한 사람. 12. 명목도 없이 마구 거두어 들이는 것. 13. 방수(防戍)의 허술함. -
○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이 상소하기를,
“정치를 하는 방도는 옛 법도를 따라 지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높은 식견과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도 모든 일을 시행할 때마다 옛 전거를 따랐기 때문에 헌장(憲章)과 법도(法度)가 해와 별처럼 환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조선의 영원한 전칙(典則)입니다. 천도(天道)처럼 굳건하고 중단함이 없으셔서 늘 편전에 납시어 상참(常參)을 받고는 그대로 정사를 보고 치도(治道)를 강론하셨으니, 실로 만세 자손의 아름다운 모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세종대왕의 고사를 그대로 따르시어 매일, 혹은 하루 간격으로 정사를 보소서.”
하니, 상이 친필로 온화한 내용의 비답을 써 내리고, 다음날 즉시 정사를 보았다.
○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갔다. 사관 김이용(金利用)에게 이르기를,
“나의 잘못에 대해 사관도 말하라.”
하자, 대답하기를,
“규간(規諫)은 소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조석문(曺錫文)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석문이 대답하기를,
“위로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군주의 잘못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사관이 실언하였다.”
하였다. 이어 술로 벌을 주라고 명하고 나서 이르기를,
“나의 잘잘못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바이니 숨겨서는 안 된다. 사관은 사실대로 상세히 기록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강무(講武)할 때에 반드시 2명의 사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한 사람이 연고가 있을 경우 상세히 기록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지도 되도록이면 기록하도록 하라.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사문(紀事文)은 중국에 미치지 못하니, 사실과 틀리지만 않으면 되지 문장의 수준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 9월.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에서 구급약을 만들어 팔아 백성들이 요사(夭死)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楊汀)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새로 즉위하고 나자 야인(野人)들이 앞다투어 와서 조현(朝見)하려 하는 데, 막으면 그들의 의탁을 막는 것이 되고 다 보내면 역로(驛路)에 폐단이 생기게 된다. 경이 경중(輕重)을 따져 추장(酋長)을 택하고 노복의 수를 줄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정인지 등에게 이르기를,
“어진 사람을 진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 재상의 직책이다. 경은 신숙주만큼 현량(賢良)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인재를 얻기 어려운 것에 대해 논하기를,
“덕이 재주보다 나은 자는 정말 드물지만, 재주가 덕보다 나은 자는 써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쓰면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된다.”
하였다. 또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수성하는 임금은 부귀한 곳에서 생장하여 안일하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두려워하고 분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후세의 군주는 이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10월. 대명전(大明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기로(耆老)가 모두 220명이었다. 전 낭장(郞將) 김자해(金自海)에게 술을 부어주도록 명하고,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자해는 고려조의 사람인데 지금 여기에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름답고 민첩한 은 나라 선비가 주 나라 서울에서 제사를 돕는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한껏 즐기고 자리를 파하였다.
○ 명 나라 사신의 연향(宴享) 이외에는 유밀과(油蜜果)를 금지하는 법령을 거듭 밝힐 것을 명하였다.
○ 승지 등을 불러 정사를 보고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주서 정은(鄭垠)에게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연회나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시중을 들게 되면 명하지 않더라도 들어와 참석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르기를,
“유자(儒者)가 귀한 것은 그들이 ‘치국 평천하'의 도리를 알기 때문이니, 만약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다면 유자를 놔두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이 한번이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 직급이 높은 무신을 보고, ‘네가 반열은 내 위에 있지만 어떻게 나처럼 총애를 누리겠는가.’라고 한다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근래에 집현전의 유사(儒士)들이 너무나 교만한 마음을 가졌기에 내가 명하여 혁파하였는데, 지나친 듯한 점은 있지만 그 또한 교만함을 바로잡아 심하다 싶을 만큼 곧게 하려는 뜻이다. 너희들은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 호조에 하교하기를,
“위의 봉양이 지나치게 후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공억(供億)을 계속 대기가 어려워지는데, 그러다 보면 생업을 꾸려나가지 못하여 마침내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고, 도둑맞은 자도 파산하여 고생고생 하다가 또한 도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이는 윗사람이 백성들을 몰아 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봉양을 후하게 하는 폐단이 백성을 없애는 데까지 이르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즉위한 이후로 검약을 숭상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 상정소(詳定所)를 설치하여 용도(用度)를 마감하게 하였는데, 유사가 위에 속하는 일은 지나치게 검소하게 할 수 없고 대신(大臣)의 공억도 함부로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뜻을 미루어 본다면, 내게는 한 곡(斛)의 밥과 한 항아리의 술을 써야 할 뿐이다. 호조가 속히 상정소와 함께 의논해서 궐내로부터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경비에 대해 빠뜨리지 말고 규정을 정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이 전세(田稅), 공부(貢賦), 군역(軍役) 이외에는 전혀 간여하는 바가 없이 생업에 전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팔도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우리나라가 땅덩어리는 작은데 고을은 많아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내가 경기 지방의 몇 개 군을 병합하자, 아전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좋아하였다. 내가 백성들의 뜻을 따라 작은 고을을 병합하고자 하니, 경은 이러한 내 뜻을 알아서 병합할 만한 고을과 분할할 지역을 일체 헤아려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사목(事目)은 다음과 같다.
1. 본 고을과 응당 병합할 땅에 있어서 거주하는 백성이 관곡(官穀)을 출납하고 사송(詞訟)을 위해 왕래하는 거리의 원근을 따져보아야 한다.
2. 병합한 후에, 사객(使客)이 왕래할 때에 사방의 이웃 고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반드시 묶어야 할 땅이라면 지공하는 폐단이 있을지의 여부를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3. 병합은 반드시 두 고을이어야 할 것은 없고 세 고을, 혹은 네 고을을 하나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토지가 고르고 가지런하여 경계가 들쭉날쭉하는 일이 자연 없어질 것이지만, 그러나 부득이 다른 고을에 병합되는 땅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4. 본읍과 병합할 고을 백성, 아전, 관노비, 호구 수, 산천과 구역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 팔도의 군민(軍民)에게 하유하기를,
“나는 너희들의 부모된 입장에서 너희가 관리들의 침탈 때문에 수난을 겪는 것을 안타까워해왔다. 모든 차역(差役)에 있어 부유하고 강한 자를 면제해주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침탈하는 경우, 진상하는 공물(貢物)이나 일반적으로 부과하는 물건을 배로 늘려서 분담시켜 나머지를 마구 취하는 경우, 제멋대로 백성들을 불러모아 토목 공사를 벌여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 일시적인 노여움 때문에 사람을 형틀에 묶고 옥에 가두어 놓아 목숨을 잃게 만들기도 하고 가동(家童)을 가두어 놓은 채 걸핏하면 열흘 내지 한 달을 경과하여 가산을 탕진하게 하는 경우, 반동(反同) - 잡물(雜物)이나 포화(布貨)를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세속에서 모두 반동이라고 한다. - 이라고 하면서 혹독한 아전을 사방의 촌락으로 보내어 일체 징수하는 경우, 장사치와 연결하여 공물을 방납하는 경우, 둔전(屯田)을 널리 차지하고는 백성을 부려 농사짓고 수확하는 경우, 몰래 장인(匠人)을 불러모아 놀이개를 대량으로 만들어 이웃 고을에 선물로 주는 경우, 백성들의 고택(膏澤)을 짜서 공공연히 뇌물로 바치는 경우, 관아의 물건을 제것으로 여겨 체직할 때가 되면 남아 있는 것이 없는가 하면 신관(新官)이 또 와서 백성을 독책하여 마련하게 하는 경우, 사객(使客)을 접대하기 위해 닭, 과일, 파, 마늘로부터 하찮은 바가지나 항아리 따위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경우, 사객에게 명예를 구하고자 민폐를 생각하지 않고 비단, 쌀, 콩에 이르기까지 연폐(宴幣)라고 하면서 대동한 기생에게 사사로이 주는 경우, 교활한 아전이 농간을 부려 멋대로 침탈을 하는 데도 금하지 못하는 경우는 모두 너희들을 괴롭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명을 내려 공세(貢稅)와 일정한 요역 및 교지를 받아 행이(行移)한 것 이외에 백성들을 소란시키는 일을 일체 금지하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도록 하라. 그리하여 병농(兵農)에 전적으로 뜻을 쏟아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부양하면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라. 적을 방어하고 군대를 사열하는 일은 너희가 피해서는 안 될 것이니, 각자 자신의 임무로 여기도록 하라. 만약 수령이 침탈하거나 포학한 정치를 하거든 곧바로 내게 와서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관찰사는 지금 하교한 내용을 고을의 문에다 써 붙여서 어리석은 사내와 아낙네들도 다 알게 하라.”
하였다.
○ 12월. 밤중에 날씨가 매우 추워지자 병조에 명하여 여러 군문(軍門)의 숙직 군사들에게 거적을 적절히 지급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제40권
 현종조 2
8년(정미, 1667)


○ 1월.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상은 면류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에 납시고, 왕세자는 칠장관(七章冠)ㆍ공정책(空頂幘)ㆍ적말(赤襪)ㆍ적석(赤舃) 차림으로 예를 거행하였는데 태도와 모습이 의젓하기가 성인(成人)과 같았고 일거일동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때 왕세자의 나이 겨우 7세였으므로 뜰을 메워 선 신료들 모두가 목을 늘이고 지켜보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3일 후 상은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 2월. 성균관 유생들이 무슨 일로 하여 문묘(文廟)의 신문(神門)에서 하직인사를 고하고는 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관관(館官)이 그 사실을 예조에 보고했는데, 예조가 전례를 상고한바 유생들이 관을 비우고 나가게 되면 그날 맨 먼저 예관(禮官)을 보내고 다음으로 승지를 보내 유생들을 타일러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예조의 당상관들 모두가 유고였으므로, 상이 지관사(知館事) 김수항(金壽恒)과 대사성(大司成) 조복양(趙復陽)에게 명해 함께 성묘(聖廟)에서 숙직하게 하고 유생들을 들어오도록 타이르는 일을 지관사가 대행하도록 했다.
○ 4월.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 온천에 행행하면서 본도에 명해 모든 공상(供上)을 다 적당히 줄이도록 했으며, 나이 80 이상인 자에게는 가자(加資)와 함께 옷가지와 먹을 것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그리고 상평창 곡식을 풀어 길가 떠돌이들을 진구하고 온양(溫陽)ㆍ천안(天安)ㆍ직산(稷山) 3개 읍의 조세를 매 결당 2말씩 견감해 주게 했으며, 행차 때 역사를 했던 고을은 1말씩을 견감해 주도록 했다.
○ 판중추부사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기를,
“백성을 교화시키고 미풍양속을 만드는 길은 무엇보다도 존성(尊聖)이 최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왕들이 순수할 때면 다 성묘(聖廟)에다 제를 올렸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성종대왕이 영릉(英陵) 행행 때 여주(驪州)에다 대가를 멈추시고 관원을 보내 향교(鄕校)에 제를 올렸는데, 그 일이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0가구의 읍에도 반드시 충신(忠信)은 있다고 했는데 행조(行朝) 가까이에 있는 고을에도 쓸 만한 인재가 왜 없겠습니까. 두 전조(銓曹)로 하여금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하게 하시면 그 역시 사기를 앙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여, 상이 중신을 보내 태뢰(太牢)로 온양 향교에 제를 올리게 하고, 조이중(趙爾重)ㆍ신인립(愼仁立)ㆍ박효상(朴孝相)ㆍ권회(權誨) 이상 4인에게 직을 제수했는데, 이 넷은 다 본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윤4월. 가뭄으로 인해 관원을 보내 도내의 명산 대천에 가 비를 빌게 하고, 또 재신(宰臣)을 보내 우사단(雩祀壇)과 삼각산(三角山)ㆍ목멱산(木覓山) 및 한강에 가 빌게 했으며, 또 중신을 보내 종묘ㆍ사직 그리고 북교(北郊)에 가 빌게 했다. 그리고 도내의 죄수들을 소결하고, 사족(士族)으로서 나이 30이 지나도록 빈한해서 시집 장가 못 간 자들을 관에서 물자를 대주어 성혼을 시키고, 노비들 신공도 지정해서 징수할 길이 없는 것들은 그 일체를 탕감했다.
○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천에서 돌아와 피전(避殿)ㆍ감선(減膳)ㆍ철악(撤樂)ㆍ구언(求言)을 하고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소결했다. 한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 관동ㆍ관서의 유랑민들이 서울까지 떠돌아와 굶주리고 병든 자가 수천 명에 달했는데,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을 동서 활인서(活人署)에다 나누어 수용하고 식량을 대주면서 구료(求療)에 임하도록 명했다.
○ 5월. 경창(京倉)의 대두(大豆) 1천 5백 석과 전미(田米) 5백 석을 흥원창(興元倉)으로 옮겨다가 관동의 기민들을 진구했다.
○ 7월. 강화도 군량미 5백 석을 기민 진구에 쓰도록 명했다.
○ 강계부(江界府)의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서원 이름을 계몽(啓蒙), 경성부(鏡城府)의 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사당 이름을 창렬(彰烈)로 내렸다. 두 고을의 사민(士民)들 청을 따른 것이었다.
○ 강화도 군향곡 5백 석을 기민 진구에 대주었다.
○ 8월. 흉년으로 인하여 경기 도내 전지 조세를 전액 면제하고 대동미도 매 결당 1말 6되씩만 징수하여 관수(官需)에 이용하고 나머지는 기민 먹이는 데 보태도록 명했다.
○ 10월. 고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의 모친이 죽었는데, 상사에 필요한 것들을 대주고, 선왕조에서 하사했던 늠록(廩祿)을 앞으로 3년까지 그대로 주도록 했고,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 처상에도 상사에 필요한 것들을 대주도록 명했다.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11월.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도록 했다.
○ 경덕궁(慶德宮) 곁에다 집상전(集祥殿)을 건립하도록 명했다. 그때 상이 자의(慈懿)ㆍ인선(仁宣) 두 대비를 모시면서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자의대비가 거처하는 만수전(萬壽殿) 동편에다 따로 전각 하나를 건립하고 이름을 집상이라 하여 그곳을 인선대비 거소로 삼았으니, 마치 한(漢) 나라 때의 장락궁(長樂宮)과 장신궁(長信宮) 같은 제도를 본뜬 것이다.
○ 12월.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말하기를,
“영남의 유청군(有廳軍 낙강군(落講軍) 즉 보충대)들이 한 몸으로 세 가지 역을 하고 있어 그들 괴로움과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충훈부(忠勳府)의 충의(忠義)에 부정하게 소속된 자 및 군적에 입적되지 않은 자가 많게는 1천여 명이나 되고 있는데 그들은 당연히 여정(餘丁)이므로 해마다 그들 일인당 베 2필씩을 징수하여 유청군 한 몫을 그들이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는 금군(禁軍)의 보인(保人)으로 지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그대로 윤허했던 것이다.
○ 고 충신 안홍국(安弘國)에게 관작을 추증하라고 명했다. 홍국은 임진왜란 당시 보성 군수(寶城郡守)로서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중군(中軍)이 되어 안골포(安骨浦)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배 한 척의 군대로 수많은 적선을 격파하고 끝내 탄환에 맞아 죽은 사람으로 그의 충의(忠義)와 위대한 절개를 말하자면 이순신과 같은 자였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홍국의 아들 종술(宗述)이 상소하여 그 실상을 아뢰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하였던 것이다.

국조보감 제42권
 숙종조 2
4년(무오, 1678)


○ 1월. 대신과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새해 벽두라 하여 잠규(箴規)의 말을 올리고 나서 또 아뢰기를,
“임금이 반드시 강명 온건한 덕을 갖추고 상대에게 위복(威福)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신하들이 두려워할 바를 알아 스스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대신이라도 죄가 있으면 용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표정을 바꾸면서 좋게 받아들였다.
○ 예조가, 상의 병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하여 조종조에서 했던 대로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올릴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내 병이 오랜 기간을 끌어서 자전께 걱정을 끼쳐드린 것도 너무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게다가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는다면 더더욱 미안한 일이니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했었다.
○ 윤3월. 교리(校理) 최석정(崔錫鼎)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고 이어 아뢰기를,
“전하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얼마 안 되면서 대신을 멀리 귀양보내는 등 형극의 길을 여는 것을 대수롭잖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 몇 해 동안에 할 말을 하다가 파출당한 신하가 끊이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서 벌을 받은 자도 한두 명이 아니니 그렇고서야 인심이 어떻게 흩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사기인들 어떻게 풀이 안 죽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자들이 송시열(宋時烈)을 두고 임금을 폄박했다고 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두고는 골육을 이간질했다고들 하는데 임금과 신하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을 신하로서 임금을 폄박했다면 그것이 과연 인정으로 보아 통하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시열 같은 자는 산 속의 일개 한사(寒士)에 불과한 자로서 세상에 없는 효종을 만나 대현(大賢)을 대우하는 예의로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이요 신하였지만 정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같았으니 그 은덕을 갚고 싶은 성의야말로 틀림없이 보통사람들보다는 1만 배나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그러한 죄를 씌워 놓았으니 천하에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수항으로 말하더라도 그는 바로 선왕조의 고명(顧命)의 신하였습니다. 그가 올린 봉사 내용을 보면 말 하나하나가 다 적절한 말들로써 일을 그르친 제신들의 잘못을 깊이 있게 따지고, 사리에 어긋난 윤휴(尹鑴)의 말을 가차없이 반박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라 걱정하고 임금 사랑하는 적심(赤心)이 훤히 보이는 말들이었는데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지 않으시고 대뜸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는가 하면 좌우에 있던 신하들마저 아당을 치고 죄가 되도록 짜맞추고 하여 그의 외로운 충성심은 전달이 안 되고 엉뚱하게 죄의 그물에만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번 무더운 변방으로 귀양간 후로 지금 몇 해가 지났으니 천애에서 궁궐을 그리워하고 있을 그의 짝 그림자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전하의 하늘과 같은 자애로움으로도 그에 대한 불쌍한 생각이 어찌 없겠습니까.
시열이 안치(安置)된 지도 지금으로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장기(瘴氣) 어린 바닷가 귀양살이에 병까지 걸렸으니 백발의 그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죽어 성명께서 어진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지게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전하께서는 다 죽어 가는 그 목숨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로 하여금 하늘의 태양을 다시 보고 자기 고향에 와 죽을 수 있도록 조처를 내리시어 효종의 그날의 마음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김수항에 있어서는 사실 하늘과 같은 사랑으로 그를 풀어주도록 성지를 내리고서도 마음이 또 변하여 도로 거두시라는 청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좌우로 하여금 성상의 마음을 쉽게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지나친 행위와 정치의 잘잘못을 숨김없이 모두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직분이 아니겠는가.”
했다.
○ 4월. 옥당관(玉堂官)을 소대하여 강론하고 파한 후 대신과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했는데 가뭄으로 인해 중신ㆍ근시를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삼각산ㆍ목멱산ㆍ한강 등지로 보내 비를 빌도록 했다.
○ 5월. 하교하기를,
“아, 덕이 없는 내가 자리를 더럽힌 이래로 가뭄과 장마가 없는 해가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이 이렇게 심한 때는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지 백성들이야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아,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백성이 아니면 나라가 될 수 없고, 먹는 것이 아니면 백성을 보존할 길이 없는 것인데 봄부터 여름까지 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밀ㆍ보리가 누렇게 뜨고 들 어디에도 푸른 빛이 없으며 시냇물도 늪지대도 다 바닥이 났다. 봄철에 씨앗을 제대로 못 뿌렸으니 가을이 온들 무슨 수확을 바라겠는가마는 지금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씨가 남아나지 못할 것인데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산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이 여름에 우박과 얼음 덩어리가 계속 쏟아지고 있으니 이는 전고에 드문 일로서 내 얼마나 가슴이 타고 걱정이 되겠는가.
내 오늘부터 정전을 피하고 더욱더 경외(敬畏)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니 그대 대소 군신들도 각자 서로 조심하고 공경하여 나랏일을 함께 해나감으로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밖의 감선(減膳)ㆍ철악(撤樂)ㆍ금주(禁酒) 등도 해조로 하여금 즉시 실시하도록 하라.”
했다.
○ 대신과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했다. 그때 상이 친히 종묘에 가 비를 빌려고 했는데 허적(許積)ㆍ권대운(權大運) 등이, 현재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고 객사(客使)도 곧 올 것이라고 하여 그만둘 것을 굳이 청하였고 다른 신하들도 계속해서 말하자, 상이 그제서야 허락했다. 허적이 또, 금년에는 보리 대여곡을 절반만 징수하고, 현재 민간에 산재해 있는 전년도 전세 대동미도 2년에 나누어 받아들임으로써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며, 호서 진휼에 썼던 곡식 1천 5백 석도 모두 탕감하도록 할 것을 청하자, 다 그대로 따랐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내수사는 그 자체가 왕자무사(王者無私)의 정신에 어긋난 관서인데 요즘에는 또 제 상전을 배반한 노비들이 매우 많이 투속(投屬)하고 있어 송사를 했다 하면 반드시 지고, 졌다 하면 또 반드시 죄로 다스리기 때문에 투속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억울하게 당한 자는 호소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유학(幼學) 정후망(鄭后望)의 종은 양처(良妻) 소생인데도 그가 내비(內婢)의 소생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밝힐 만한 증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조가 그의 제청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고 내줘야 하겠다는 뜻으로 아뢰었던바 상께서는 종전 그대로 두도록 재가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신이 그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곡직이 한눈에 훤한데 뜻밖에도 성명의 세상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종전대로 두라고 하신 명령을 취소하소서.”
했는데, 윤허하지 않고 있다가 그 후 허적 등이 연석에서 아뢰자 그제서야 윤허했다.
○ 하교하기를,
“아, 올해만큼 참혹한 가뭄은 전고에 없는 가뭄으로 재이를 멎게 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하늘이 마음을 돌리지 않아 비올 생각은 까마득하기만 하다. 아마도 백성들이 고루 혜택을 받지 못해, 아래서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위에서는 하늘이 노여워하여 이러한 한재를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밤낮 두려움에 싸여 있어도 그 까닭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아, 민생들이 괴롭고 아픈 곳이야 이루 다 들 수가 없겠으나 그 중에서도 어린애들을 수로 쳐서 채워 넣고, 죽고 없는 자에게 베를 할당하여 징수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 매우 민망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두 국(局)과 병조로 하여금 어린애들은 나이가 찬 후에 수로 치도록 하고, 죽고 없는 자에게 베를 징수하는 따위는 하루속히 사실을 조사해서 달리 변통을 취함으로써 민생들의 폐단을 단 1분이라도 덜어 주도록 하라.”
했다.
○ 6월. 전교하기를,
“아,, 심한 한재가 어느 해라고 없었으랴만 그래도 지금같이 극심한 때는 없었는데 그 까닭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오로지 과인의 덕이 부족해서 위로 하늘의 성낸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달이 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전답은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백곡은 다 말라서 추수에 대한 희망은 전혀 없고 백성들 목숨이 달랑달랑하게 된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장이 바싹 타서 어찌해야 될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 몸을 희생 대신 바치고 직접 기도하는 일을 일각도 늦출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날을 따로 잡을 것 없이 즉시 거행하도록 하게 하고 기도 장소는 종전대로 종묘로 하도록 하라.”
했다.
○ 예조가, 절기가 입추(立秋)가 되었으니 이제 다시 정전(正殿)으로 거소를 옮기고, 상선(常膳)도 그대로 드시고 또 북을 치게 하는 일들도 전례대로 하도록 해야 한다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비는 내릴 생각도 않고 농사 일이 말이 아닌데 다시 정전으로 옮겨가고 상선을 도로 들고 한다면 마음에 너무 미안한 일이니 비가 내릴 동안까지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라.”
했다.
○ 7월. 경상도에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 죽였다는 장계를 받고 전교하기를,
“물려 죽은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니 참으로 불쌍한 노릇이다. 본도에서 모든 휼전(恤典)을 각별히 거행하도록 하고 여러 가지로 덫을 놓아 꼭 잡고야 말도록 엄한 분부를 내리라.”
했다.
○ 8월. 대신과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말하기를,
“자전 탄일(誕日)에 흉년이라 하여 하례를 올리지 못했으니 대전 탄일이라고 그날만 하례를 올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여, 상이 그만두라고 명했다.
○ 10월. 관서지방에서 재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고을은 쌀과 콩 조세분을 전액 감면하고 신역(身役)에 한해서는 절반을 감하도록 했으며, 그 다음가는 여덟 고을은 쌀 절반을, 관동지방의 가장 심한 고을은 쌀 3두(斗)를 감하도록 명했다.
○ 날씨가 추워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에게 공석(空石)을 나누어 주도록 명했다.
○ 대신과 비변사 제신들을 인견했다.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와 부사직(副司直) 이원정(李元禎)이 강화도를 순시하고 돌아와 지도(地圖)와 함께 서계(書啓)를 올리고 아울러 돈대를 쌓기로 정한 49곳도 지정해서 올렸는데, 서계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종(高宗) 24년에 강화도에 외성(外城)을 쌓았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그 부중(府中)의 늙은이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지금 바닷가 동쪽ㆍ북쪽ㆍ서쪽 3면에 빙 둘러쳐진 토성이 있는데 그것이 마니산(摩尼山)ㆍ길상산(吉祥山)과 연결되어 있고, 뒤에는 또 돌을 쌓아 주첩(周堞)을 만들었는데 그 역시 그것을 본떠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순시하면서 가 보았더니 과연 그렇게 되어 있었고, 또 그곳 백성들 말이, 돈대를 쌓은 후에는 꼭 흙으로 더 완전하게 쌓아서 성밑을 두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번에 갈 때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신에게 갯벌을 이용하여 성을 쌓아 보라고 하기에 신이 그의 말대로 군교(軍校) 한 사람을 시켜 인부를 동원해서 갯가 얼마간의 땅에다 흙을 파서 성처럼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조수가 밀려와도 그 쌓아 놓은 것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그러한 식으로 고려 때 쌓았던 곳을 다시 수축하면 편리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으면서 익히 들은 바로는 문수산(文殊山)이 강화도로서는 대봉(對峯)이고 규산(窺山)이라고 하기에 김포(金浦)로 가면서 바라보았더니 그 산이 서북쪽에서는 다른 여러 산들보다 우뚝 솟아 있었지만 통진(通進)에 와서는 산이 현(縣)의 서북쪽으로 5~6리(里)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산꼭대기 10여 걸음 못 미쳐서 북으로 내리뻗은 조금 평평한 산등성이가 하나 있었는데 강화도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의자에 앉아서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모양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대봉이 아니라 곧바로 압도하고 있는 것이고, 엿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터놓고 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그것을 다 묶어서 한 구역으로 만들지 않았다가 뒤에 적들의 손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강화도 사람들은 모두가 밥을 대하여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 보면 전일 문수산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던 의논들이 역시 허튼 계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현재 큰 역사가 시작되고 있어 한꺼번에 다 하기는 어려우므로 우선은 일할 줄 아는 승려들을 모집해서 샘물이 있는 산을 찾아 거기에 절 하나를 짓고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 있으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방법도 익히고 기계들도 간수하게 하다가 앞으로 1~2년 더 지나서 재력이 조금 축적되면 그때 가서 꼭 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봉도(長峯島)와 자연도(紫燕島)는 바다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문처럼 남쪽 뱃길의 인후(咽喉)가 되고 있고, 매음도[煤音]는 교동(喬桐)과의 거리가 몇 리(里)밖에 안 되어 강화도 사람들과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정도일 뿐만 아니라 섬 면적이 매우 넓기도 해서 소금을 굽고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또 비록 말을 먹이고 있어도 진(鎭)을 하나 두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장봉도는 토질이 매우 비옥해서 사람들이 다 들어가 살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 배 몇십 척이 정박할 만한 포곡(浦曲)도 있어 그곳 역시 보(堡)를 하나 둘 만했습니다. 그리고 동검도(東儉島)는 물만 나가면 강화도와 바로 육지가 연결되고 있어 매우 요해지이므로 어디보다도 먼저 별장(別將) 하나를 둬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월곶진(月串鎭)은 바로 연미정(燕尾亭)으로써 중종조 명장(名將) 황형(黃衡)의 터였던 것입니다. 국가에서 거기에다 진을 설치하고 나서 그 대가를 주려고 하자 황형의 후손인 고 대사성(大司成) 황호(黃㦿)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황호의 아들 황익(黃益)이 매우 가난하게 지내고 있다니 그에게 지금 그 묵어 있는 언전(堰田)을 그 대가만큼 떼어준다면 거저 빼앗았다는 말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돈대를 두기로 정한 곳도 두서너 곳은 혹 인가가 있기도 하고 혹은 백성들 밭이 있기도 한데 신이 지금 연미정 대가를 먼저 주자고 청한 것은 역시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예산 정장(亭障)에 많은 숲을 세워 두었던 것은 그 나무들이 크게 자라면 자연적으로 성채 구실을 하고 이리 저리 뻗은 가지는 적의 돌진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아군이 몸을 엄폐하고 적을 쏘기에도 편리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곳이면 땔나무도 또한 중요한 몫이 되기 때문에 나무 심는 정책에 힘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도끼가 들락거리다 보면 사실 나무 자라기가 어려워 그곳도 마니산 하나를 빼놓고는 거의 모두가 벌거숭이였습니다. 완도(莞島)ㆍ변산(邊山) 등지의 소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경작하지 않고 놀고 있는 땅을 골라 여기저기 많이 심어두면 몇십 년 안 지나서 틀림없이 울창한 숲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은 이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차례로 시행하도록 했다.
○ 11월. 상이 사헌부 출근 기록부에 출근해서 사무를 본 날짜가 이틀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는 그 허다한 추고 문제와 대조 처리 문제들이 틀림없이 많이 적체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정원에 명하여 그 일을 단속하도록 했다.
○ 상이 친히 표제(表題)를 내어 승지(承旨)ㆍ사관(史官)ㆍ옥당(玉堂), 그리고 병조의 입직한 낭관(郎官)들에게 글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고 대제학으로 하여금 평점을 매기게 한 뒤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었다.
○ 각 도의 차사원(差使員)을 인견하고 그곳의 병폐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물었다.
○ 하직을 고하는 수령들을 인견하고 격려와 함께 타일러서 보냈다.
○ 그 전에 태조(太祖)에서 선조(宣祖)까지의 어제(御題)를 한 권의 책으로 모아 간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조 판서 오시수(吳始壽)가 인조(仁祖) 이후의 어제들을 모아 또 책으로 낼 것을 청하여, 상이 허락했다.
○ 12월. 황해도 관찰사 권수(權脩)가 상소하여 관방(關防)의 이해에 관해 논하고 이어 도경(圖經)을 올렸다. 상소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신이 도내에 있는 산성(山城)들을 죽 둘러보았는데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 재령(載寧)의 장수산(長壽山), 서흥(瑞興)의 대현(大峴) 같은 곳의 산성들은 바위가 험준하고 바닥이 좁으면서 또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어 옛 사람들이 이른바 병란이나 피할 산언덕이지 결코 적의 공격에 대항할 만한 든든한 요해지는 못 되었습니다. 그 중 정방산성(正方山城)만은 오른쪽으로는 동선(洞仙) 잿마루와 연결되고 왼편으로는 극성(棘城)으로 통하는 길과 연결되고 있어 가장 지세가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서(關西)를 경유해서 본도로 통하는 길이 여섯 갈래로 나 있는데 동성 잿마루 길이 직통 길이고 남으로는 극성이 있고, 북으로는 자비령(慈悲嶺)ㆍ판적원(板籍院)ㆍ색장(塞墻)ㆍ한남(寒南) 등의 좁은 관문들이 있어 군대를 따로따로 주둔시켜 막고 지키게 해야지 그렇지 않고 정방산성 한 곳만 지키다가는 달려오는 적병들에 대해 손 쓸 길이 없게 되어 병자ㆍ정축년의 전철을 밟고야 말게 되어 있습니다.
동선 잿마루는 비록 높거나 깊거나 겹겹으로 막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골이 좁고 경사가 심해서 기병이건 보병이건 줄지어 갈 수는 없게 되어 있으므로 정병 몇천 명만 그 속에다 배치해 두면 제아무리 10만 군대라도 맥을 못 쓸 자리인 만큼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곳이었습니다. 과연 그 목만 지킨다면 적이 감히 전진을 못하고 반드시 방향을 극성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방산은 길게 뻗은 산기슭이 평평하면서 남으로 달려가 해창(海倉)에 닿아 있고 포구 가에는 또 약 5리(里)쯤 길고 넓게 펼쳐 있어 옛 분들이 성을 쌓고 지키던 곳이었습니다. 또 황주(黃州)에서 동북으로 몇십 리쯤 가다 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는데 하나는 이어연(鯉漁淵)에서 자비령을 넘어 서흥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판적원을 경유하여 곧장 수안(遂安)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자비령은 지금 초목이 우거지고 큰 바위들이 많아 인마가 통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 부대만 가서 지켜도 적은 넘을 수가 없게 되어 있고, 판적원은 길목이 약간 넓고 또 길을 막고 서 있는 재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보루를 쌓고 목책을 세워 좁은 목을 지키고 있어야지만 적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사람 하나 없는 산골길 몇십 리를 가다가 견고한 성을 만나게 되면 감히 거기에 오래 머무르면서 성을 쳐들어오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색장은 삼등(三登)ㆍ상원(祥原)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양쪽 낭떠러지 사이로 골이 깊고 바위가 험하여 30리 정도는 바윗굴 속을 통과해야 하므로 지키기는 쉬워도 통과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고, 한남은 양덕(陽德) 지역에 있는데 가파르기 이를 데 없어 약한 병사 몇백 명만 지키고 있어도 가령 등애(鄧艾)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군대를 쉽게 통과시키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는 설한령(薛罕嶺)을 넘어야만 함경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상 여섯 관애(關隘) 중에서 군사 요충지로는 동선 잿마루가 그래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지형이 험준하기는 한데 지금 사세로서는 적이 쉽게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인공으로 더 어떻게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므로 그곳에다 많은 수목을 길러 그 수목들이 울창하게 되면 거기에다 군사 매복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수목들을 베어 길을 차단하는 데 쓸 수도 있을 것이기에 신이 이미 황주(黃州)ㆍ봉산(鳳山) 두 고을로 하여금 산지기를 별도로 두어 화벌(火伐)을 엄금하고 수목이 점점 무성하게 자라도록 하게 하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비령은 형세가 험준하기는 해도 나 있는 길이 첩경이어서 그곳 역시 버려둘 곳은 아니고 판적원 다음으로 군대도 주둔시킬 만하고, 목책도 설치할 만한 곳이었으며, 색장ㆍ한남 같은 곳은 돌 한 덩이 흙 한 줌 더 보태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든든한 곳이었습니다.
다만 극성에 있어서는 지대가 막힌 데가 없이 평평하고 면적도 넓어서 지키기가 어렵게 보였습니다. 거기에다는 반드시 성을 높이 쌓고 참호도 깊게 파 우리로서는 믿을 만한 단단한 준비를 해두고 적들로서는 범하기 어렵게 보이도록 중험(重險)한 설비를 해두어야지만 적들이 등 뒤로 돌아서 나타날 염려가 없을 듯했습니다. 관서(關西)는 길이 너무 많이 나 있어 적들이 어느 쪽에서나 올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관방의 요충 면에서는 본도만 못하고 금천(金川) 청석곡(靑石谷)이 비록 천험(天險)이라고는 해도 북으로 가든지 동으로 가든지 일단 토산(兎山)까지만 들어가면 큰 길 작은 길이 수도 없이 많아 다 지키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관방 요로를 지켜서 오는 적을 막자면 동선 그 일대만큼 중요한 곳이 없고, 방수에 많은 힘을 들여야 하기로는 극성 그 길이 가장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신이 또 들은 말인데, 옛날 성터가 해방(海防)에서 시작하여 극성을 경유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북으로 북으로 강변(江邊)까지 와서 그쳤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도 성가퀴가 군데군데 남아 있어 그 지방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는데 그 성이 어느 시대에 쌓아진 것인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옛 사람들도 국가를 위해 그렇게까지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은 그 상소문을 비변사에 내렸다. 그 후 대신들이, 우선 그 방면에 밝은 장교를 보내 그곳 지형을 살펴보도록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평안도 강계(江界)의 평남둔(平南屯), 운산(雲山)의 위곡(委曲)ㆍ성동(城洞) 두 둔, 양덕(陽德)의 차유(車踰)ㆍ사현(四峴) 두 둔, 의주(義州)의 양하둔(楊下屯), 용천(龍川)의 미곶둔(彌串屯), 선천(宣川)의 청강둔(淸江屯), 철산(撤山)의 장자둔(長者屯) 등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을 두었는데 감사 김덕원(金德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농암집 제29권
 제문(祭文)
기설제문(祈雪祭文)


아 밝은 신명이 / 於赫明神
나라 명맥 도와주니 / 有國所賴
수한 때면 기도하여 / 水旱禱祀
은택을 구한다네 / 輒徼嘉惠
나는 신을 섬긴 뒤로 / 自予事神
지은 죄가 실로 많아 / 實多罪戾
밤낮으로 가슴 죄며 / 夙夜怵惕
낭패 올까 두려웠네 / 懼及顚沛
헌데 겨울 따뜻하여 / 惟茲冬煖
내년 농사 걱정이니 / 憂在嗣歲
싸락눈도 아니 내려 / 霰雪極無
명충 피해 예견되네 / 螟䘌爲害
아, 우리 밀과 보리 / 嗟我來牟
농사가 망쳐져서 / 將受其敗
백성 하나 안 남으면 / 民靡孑遺
나라 꼴이 어이 될꼬 / 邦幾何蹶
근심이 참으로 커 / 憂心孔殷
규벽(圭璧)도 아끼지 않았으니 / 圭璧靡愛
상서론 눈 퍼붓기를 / 一霈瑞霙
신명을 놓아두고 뉘에게 비오리까 / 非神誰丐
위는 사직단에 기원한 것이다.

못난 이 몸 소자가 / 眇予小子
종묘 제사 이어받고 / 嗣守宗禋
지닌 덕이 부족하여 / 惟德之否
하늘에 죄 지으니 / 獲罪于天
재앙이 계속되어 / 災荒洊臻
국운이 끊길 지경 / 國命將顚
올해 흉년 들었어도 / 今歲失登
내년 농사 바랐건만 / 尙冀來年
하늘이 아니 도와 / 曾是不弔
겨울마저 이상 기후 / 冬候又愆
얼음 얼 절기인데 / 節届氷壯
따스하기 봄 날씨라 / 氣若春暄
안개 늘상 자욱해도 / 氛霧恒泄
눈 한 점 안 내리니 / 點雪猶慳
황충 떼에 보리 죽을까 / 蝗繁麥死
근심으로 애가 타네 / 怛焉心煎
종묘 뜰 오르내리는 / 於昭列祖
밝으신 조상 신령 / 陟降有神
부디 나라 도우시어 / 蘄垂冥祐
궁한 백성 살리소서 / 活此窮民
위는 종묘에 기원한 것이다.

엄숙하신 음의 신령 / 肅肅陰靈
임계방(壬癸方)에 머물면서 / 宅于壬癸
한겨울과 화합하여 / 厥協盛冬
감수운(坎水運)을 관장하니 / 以司坎水
시절에 맞는 기후 / 時焉靜翕
신령이 이뤄준 것 / 實資發遂
헌데 이번 겨울 일은 / 乃茲寒冱
양기가 간여하여 / 陽干其事
음기를 데워서 안개를 뿜어내니 / 蒸陰泄霧
기후가 한결같이 따뜻하게 풀어져서 / 氣專縱弛
눈은 아니 내려오고 / 雪則不降
비만 대신 뿌리누나 / 惟雨之以
덕이 없고 정사 잘못 / 德愆政乖
내 허물을 압니다만 / 予固知咎
기근 들어 백성 죽으면 / 歲饑民死
신령인들 좋으리까 / 神亦何利
희생과 술 올리면서 달려와 비는 것은 / 牲酒走禱
나를 위한 일 아니니 / 匪以自爲
신이여 삼백 상서 / 三白之祥
부디 내려 주옵소서 / 庶拜神賜
위는 북교(北郊)에 기원한 것이다.

하늘이 화를 내려 / 天禍我東
해마다 기근 드니 / 饑饉歲臻
허물은 내 것인데 / 咎則在我
백성이 고통 받네 / 殃顧及民
떠돌다 굶어 죽은 저들 시체 보노라면 / 相彼流莩
나는야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인데 / 予欲無身
하늘이 아니 도와 / 曾是不弔
재해가 이어지네 / 災害相因
겨울이 봄인 양 날씨가 따스하여 / 麥不見雪
보리가 눈 구경을 단 한 번도 못 하는데 / 冬疑於春
하소연할 곳 없어 / 哀籲靡從
근심만이 클 뿐이네 / 憂心孔殷
우뚝한 국망이여 / 巍然國望
신령님만 믿사오니 / 所恃惟神
부디 은택 내리시어 / 庶降冥貺
이 사람들 살리소서 / 以活斯人
위는 삼각산(三角山)에 기원한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 / 哀我東民
큰 기근을 거듭 당해 / 洊罹大饑
굶어 죽기 직전인데 / 溝壑在前
구제할 방도 없네 / 予莫拯之
오직 하나 밀과 보리 자라나길 기대하며 / 惟指二麥
남은 백성 구제하자 마음을 먹었더니 / 以救孑遺
오호라 이 겨울은 / 乃茲冬月
가뭄이 더욱 심해 / 暵乾益彌
눈이 아니 내리니 / 雪不下地
보리 모두 시들겠네 / 麥將擧萎
슬피 울며 먹여주길 기다리는 목숨들 / 呱呱待哺
죽을 일만 남았구려 무엇에 의지하리 / 竟死何資
백악산 신령이여 / 惟嶽有神
이들이 가련커든 / 尙或憐茲
속히 은택 베푸시어 / 亟霈玄澤
땅을 적셔 주옵소서 / 以膏以滋
위는 백악산(白嶽山)에 기원한 것이다.

이 산 밑에 있는 도성 / 國於山下
조석으로 대하는데 / 朝夕几案
수목이 울창하고 구름이 피어나서 / 薈蔚之隮
가뭄이 들 적에도 촉촉히 적셔줬네 / 卽潤槁暵
다른 산 어찌 없으랴만 / 豈無羣望
가장 가까이 의지하여 / 依仰最近
재앙이 올 적마다 / 凡有災患
치성을 드렸다네 / 輒控忱款
더구나 이 큰 기근 / 矧茲大饑
국운 끊길 지경인데 / 國命幾斷
내년 근심 조짐이네 / 嗣歲之憂
겨울 가뭄 들었으니 / 又兆冬旱
보리농사 흉작되면 / 麥苟失登
백성 죽음 면하리까 / 民死曷逭
부디 구름 일으키사 / 三白之賜
삼백 상서 내리소서 / 尙賴膚寸
위는 목멱산(木覓山)에 기원한 것이다.

넘실넘실 맑은 한강 / 瀰瀰淸漢
나라의 금대인데 / 爲國襟帶
전답에 스며들어 / 滋液滲漉
은택 크게 끼치시니 / 厥施斯沛
나라에서 제사하고 / 禮秩祀典
백성들이 귀의커늘 / 民歸神惠
이 몸은 부덕하여 / 顧予不德
후회할 일 자초했네 / 自速咎悔
겨울에 눈 안 오면 / 一冬無雪
밀과 보리 망치는 법 / 來牟盡敗
계속되는 기근을 구제하지 못하면은 / 洊饑靡救
나라의 명맥도 끊기고 말 것이라 / 大命將蹶
신명께 고하면서 / 控于明神
희생을 바치나니 / 我牲靡愛
은택 조금 내리시면 / 一勺之澤
만백성이 소생하리 / 萬姓是賴
위는 한강에 기원한 것이다.

거룩하신 하늘이 / 於穆玄天
만물을 화육할 제 / 化育萬彙
누가 직무 맡아보나 / 孰任厥職
중대한 것 네 가지네 / 其大有四
움직이고 뒤흔들고 / 鼓舞動盪
습기 주고 적셔 주고 / 蒸潤霑被
작용은 다르지만 공효는 똑같아서 / 異用同功
만물이 그 덕분에 생겨나고 완성되네 / 以資生遂
이번 겨울 가뭄은 / 惟茲冬旱
신령께도 수치이니 / 神與有愧
내 탓 아니라 하지 마시고 / 罔曰非我
백성들을 동정하소 / 哀此民類
입김 불고 습기 모아 / 呼噓翕集
각기 직사 도모하여 / 各圖其事
상서로운 눈을 빚어 / 以釀瑞雪
정갈한 제사에 답하소서 / 以答蠲饎
위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 기원한 것이다.

울창한 산천들이 / 鬱彼山川
온 나라에 얼기설기 / 經緯邦域
강은 깊고 산은 높아 / 流深峙高
구름 피고 땅 적시네 / 出雲施澤
그 공효 미치는 곳 / 功利所及
무얼 아니 기르랴만 / 于何不育
덕정을 못 베풀자 / 德政之諐
신도 복을 아끼시어 / 神顧惜福
엄동설한 겨울철에 / 冱陰之月
눈이 아니 내려오니 / 雪不可得
백성들이 재앙 당해 / 民罹其菑
골짜기를 메울 지경 / 將胥塡壑
희생과 술 마련하여 온 산천에 기도하며 / 牲酒徧禱
다급한 이 사정을 고하여 올리나니 / 告此崩迫
어찌 감히 많은 것을 구하고자 하리까 / 豈敢多求
오직 하나 보리농사 구원하여 주소서 / 尙救此麥
위는 국내(國內)의 산천에 기원한 것이다.

내가 왕위 오른 뒤로 / 自予卽阼
해마다 흉년 들더니 / 歲比大侵
금년에는 혹독하기 / 其在今年
신임년보다 더하여 / 酷于辛壬
집집마다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으니 / 室如磬懸
백성들이 굶어 죽어 시체가 널릴 지경 / 民將尸枕
하늘이 이제 그만 화를 거두나 싶었더니 / 謂天悔禍
이 겨울은 재앙이 한층 더 심해져서 / 而又益甚
중동에다 그믐인데 / 仲冬且晦
다순 날이 훨씬 많네 / 恒燠少凜
눈 안 오면 보리 흉작 / 無雪無麥
너무나도 참혹할 터 / 亦孔之憯
백성 오직 신령께 의지하고 있사오니 / 民所庇依
신 아니면 그 어디에 하소연하오리까 / 非神曷諗
한바탕 눈 부디 내려 / 毋惜一霈
풍년 들게 하옵소서 / 以賜豐稔
위는 성황(城隍)에게 기원한 것이다.

아, 밝은 양의 신이 / 於昭陽神
만물 태동 맡아서 / 職司啓發
천지조화 새 출발을 도와서 일으키어 / 贊始大專
자연의 온갖 만물 푸른 싹을 피워내네 / 榮施羣物
비록 계절 겨울이라 음기가 가득해도 / 雖在陰閉
그 속에 생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 生意靡閼
가뭄 이리 들었으니 / 惟此乾旱
이는 바로 신의 과실 / 亦神之闕
보리 말라 다 죽으면 / 麥枯將盡
백성들도 죽어갈 터 / 民死自必
저기 저 어린 아기 / 如彼赤子
젖줄 끊긴 신세리라 / 乳哺是絶
신령께서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시리까 / 神胡忍此
차라리 이내 몸이 벌을 달게 받으리다 / 予寧受罰
부디 제사 흠향하고 / 尙歆禋祀
눈을 한번 내리소서 / 報以一雪
위는 구망씨(句芒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밝으신 신령께선 / 有赫明靈
왕성한 덕을 지녀 / 其德恢台
전답 곡식 성숙하고 / 登成甫田
온갖 초목 무성하네 / 百昌咸熙
헌데 내가 즉위하자 / 乃予忝位
하늘이 포학하여 / 逢天疾威
해마다 기근 들어 / 仍歲洊饑
백성 종자 끊길 판에 / 民靡孑遺
올겨울도 따뜻하여 / 方冬恒燠
싸락눈도 볼 수 없네 / 霰雪愆期
지금 춥지 아니하면 / 今失翕聚
내년 농사 뻔할 텐데 / 來者可知
만물을 길러주는 왕성한 능력을 / 生養之功
신께서는 어디에 베풀려 합니까 / 神顧安施
부디 지금 한 자 깊이 / 一霈盈尺
눈을 펑펑 쏟으소서 / 尙及此時
위는 축융씨(祝融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넓고 너른 대지여 / 坤輿磅礴
그 덕이 성대하여 만물을 실어 주고 / 德盛持載
하늘 작용 받들어서 / 順承天施
공능이 넓고 크네 / 功化弘大
자라나는 만물을 / 衆萬幷生
모두 품어 기르면서 / 函育靡外
어이 재앙 내리시어 / 胡寧降災
나라를 아니 돕나 / 國靡攸賴
겨울 눈이 아니 내려 / 冬雪不降
보리 싹 죄다 병드니 / 麥苗盡瘁
애달픈 궁한 백성 / 哀此窮民
누구에게 목숨 비나 / 命于何丐
인자하신 신령이여 / 惟神孔仁
어여삐 여기시어 / 尙冀見愛
한 자 깊이 흰 눈을 / 盈尺之貺
펑펑 한번 쏟으소서 / 秪在一霈
위는 후토씨(后土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기운 맑은 가을을 / 沆碭西灝
신령께서 주관하여 / 神實司令
천지 기운 한데 모아 / 一氣揫斂
온갖 열매 영그는데 / 萬寶成性
어이 은혜 아니 펴서 / 胡寧不惠
우리 백성 힘겹게 하나 / 爲我民病
홍수와 심한 가뭄 / 極備極無
한 해 안에 연이었네 / 一歲以倂
그래도 보리 익길 / 尙蘄麥熟
주림 참고 바랐건만 / 忍飢引領
이 겨울 기후 보니 / 視茲冬候
그 또한 가망 없네 / 又將無幸
지금 한 번 눈 내리면 / 及今一雪
남은 목숨 구할지니 / 庶救餘命
신령이여 동정하여 / 神其哀之
간곡한 청 들어주소 / 無孤至請
위는 욕수씨(蓐收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밝으신 신령께서 / 仰惟明神
우리 농사 주관하니 / 實主我稼
백곡(百穀)이 자라는 것 / 百嘉之生
모두 그 조화의 힘 / 咸資其化
신이 혹여 잘못하면 / 神或失職
백성들이 주리는데 / 民則受餓
애처롭다 겨울철에 찾아든 이 가뭄이 / 哀此冬旱
봄 여름 가뭄보다 한층 더 심하구나 / 殆甚春夏
음기가 풀리어서 / 陰氣解弛
눈이 제때 아니 오니 / 雪不時下
싹 텄던 보리들이 / 有茁者麥
들판에서 말라 죽네 / 枯死于野
백성 양식 걱정되어 / 念及民食
밤낮으로 안절부절 / 不遑夙夜
신령이여 은택 내려 / 神其降澤
나의 죄를 사하소서 / 我罪是赦
위는 후직씨(后稷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거룩하신 현제께서 / 於穆玄帝
북방에 위치하니 / 宅于坎位
겨울이라 이 절기는 / 凡是冬令
모두 신이 부린 조화 / 皆神之自
춥게 하고 눈 내림은 / 爲寒爲雪
모두 신의 책임인데 / 孰非其事
어이 직무 수행 못해 / 云胡失職
기강을 실추했나 / 綱紀墮弛
따스하기 봄날 같아 / 暄燠若春
싸락눈도 안 내리니 / 霰雪不摯
한숨 어린 이 기도를 / 吁嗟之禱
뭇 신령께 올렸으나 / 雖徧群示
겨울 위엄 떨치는 일 / 自奮玄威
오직 신께 바라나니 / 匪神誰冀
부디 이 점 살피시어 / 尙鑑在茲
우리 백성 위하여 은택을 내리소서 / 爲我民賜
위는 현명씨(玄冥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주C-001]기설제문(祈雪祭文) : 작자의 나이 35세 때인 1685년(숙종11) 11월에 왕명에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주D-001]규벽(圭璧)도 아끼지 않았으니 : 규벽은 흉년이 들었을 때 신(神)에게 예(禮)로 바치는 옥(玉)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지금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늘이 환란을 내리사 기근이 거듭 이르기에, 신에게 제사를 거행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여 규벽을 이미 모두 올렸는데도, 어찌하여 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십니까.’ 하였다.[王曰於乎 何辜今之人 天降喪亂 饑饉薦臻 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 하였다.
[주D-002]삼백(三白) 상서 : 동지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술일(戌日)을 납일(臘日)이라고 하는데, 납일 전에 세 번 눈이 내리는 것을 삼백이라고 한다. 이때 내리는 눈이 보리농사에 가장 좋기 때문에 상서라고 한 것이다.
[주D-003]국망(國望) : 삼각산의 백운대(白雲臺)와 만경봉(萬景峯)에 대한 이칭이다.
[주D-004]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 서울 남쪽 교외의 청파역(靑坡驛) 근방에 있었던 제단으로,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풍운뇌우의 신좌(神座)를 가리킨다. 다음 문장에 나오는 국내 산천의 신좌는 왼쪽에, 그 다음 문장에 나오는 성황의 신좌는 오른쪽에 있었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주D-005]신임년 : 신유년(1681, 숙종7)과 임술년(1682)을 말한다.
[주D-006]구망씨(句芒氏) : 오행(五行) 중에 목(木)의 운(運)을 맡은 신(神)으로, 봄을 관장한다.
[주D-007]축융씨(祝融氏) : 오행 중에 화(火)의 운을 맡은 신으로, 여름을 관장한다.
[주D-008]후토씨(后土氏) : 오행 중에 토(土)의 운을 맡은 신으로, 토지를 관장한다.
[주D-009]욕수씨(蓐收氏) : 오행 중에 금(金)의 운을 맡은 신으로, 가을을 관장한다.
[주D-010]후직씨(后稷氏) : 순(舜) 임금 때에 후직 벼슬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기(棄)를 말하는데, 뒤에 곡식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졌다.
[주D-011]현명씨(玄冥氏) : 오행 중에 수(水)의 운을 맡은 신으로, 겨울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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