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시조 온조왕(溫祚王)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기원전 18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백제 [註 001] 의 시조 온조왕 (溫祚王) [譯註 001] 은 그 아버지는 추모 (鄒牟) [譯註 002] 인데 혹은 주몽 (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 (北扶餘) [註 002] 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 (卒本扶餘) [註 003] 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 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譯註 003]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 이 왕위를 이었다.
[ 주몽 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 (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 (溫祚)라 하였다 [註 004]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 이 북부여 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 와 온조 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 (烏干)· 마려 (馬黎) [譯註 004]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 (漢山) [註 005] 에 이르러 부아악 (負兒嶽) [譯註 005] 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 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 (漢水) [譯註 006] 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 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 (彌鄒忽) [註 006] 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 는 강 남쪽위례성(慰禮城) [譯註 007] 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 (十濟)라 하였다. [譯註 008] 이때가 전한 (前漢) 성제 (成帝) [譯註 009] 홍가(鴻嘉) [譯註 010]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 는 미추홀 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 (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 에 귀부(歸附)하였다. [註 007]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譯註 011] 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 (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譯註 012] 부여(扶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註 008]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비류왕(沸流王) [註 009] 은 그 아버지는우태(優台) [註 010] 로 북부여왕(北夫餘王)해부루(解夫婁) [譯註 013] 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소서노(召西奴) [註 011] 로졸본(卒本) 사람연타발(延陀勃) [註 012] 의 딸이었다. 처음에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비류라 하였고, 둘째는온조라 하였다. [譯註 014] 우태가 죽자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주몽이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전한(前漢) [譯註 015] 건소(建昭) [譯註 016]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주몽이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 [譯註 017] 에게서 낳은 아들유류(孺留) [譯註 018] 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비류가 동생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 [註 013] 와 대수(帶水) [註 014] 를 건너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북사(北史)≫ [譯註 019] 와≪수서(隋書)≫ [譯註 020] 에는 모두 [註 015] “동명 [註 016] 의 후손 중에 구이(仇台) [註 017]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대방(帶方) 옛 땅 [註 018] 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요동태수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이(仇台)에게 시집보냈고, [譯註 021] 그들은 마침내 동이 [譯註 022] 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註 001 온조가 세운 나라이다. 최초의 국호는 十濟였으나 뒤에 백제로 바꾸었다. 그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南夫餘로 고쳤으나 곧 백제로 환원되었다. ≪帝王韻紀≫ 권下에는 ‘後王或號南夫餘 或稱鷹準’이라 하여 사비로 천도한 이후의 국호를 鷹準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사의 경우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에는 마한을 구성한 78국의 하나로서 伯濟國이 나오고, ≪송서≫ 이후에는 백제로 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를 구다라(クダラ)로 훈독하고 있다. 백제라는 국호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百姓樂從’說과 ‘百家濟海’說이 있다. 鷹準은 ≪삼국유사≫ 권3 흥법편 皇龍寺九層塔條에 나오는 鷹遊와 연결된다. 응준이란 국호는 백제의 부여系 지배세력과는 관계짓기가 힘들며 백제가 마한 등의 지역을 영유하면서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매’ 관련 문화를 포용하게 됨으로써 국호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조법종, 「백제 별칭 응비고」, ≪한국사연구≫ 66, 1989).註 002 예맥족이 북만주 일대에 세운 국가로 기원전 2세기부터 494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중심지 일대에는 부여성(扶餘城)이 위치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 흑룡강성의 장춘(長春)·농안(農安) 일대(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 1982, 75쪽), 아륵초객(阿勒楚喀) 일대( 池內宏, 「扶餘考」, ≪滿鮮史硏究≫上世篇Ⅰ, 吉川弘文館, 1951 , 1951, 452∼454쪽)로 보고 있다. 부여와 북부여는 동일한 집단이며,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북부여로 불렀다. 그 반면에 동부여는 부여의 피란민들이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국가로 보고 있다( 노태돈,「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 」, ≪국사관논총≫ 1989 | 박경철,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백산학보≫, 1992, 40쪽 ).註 003 부여족의 일파가 졸본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광개토대왕릉의 비문 에는 “북부여 출신이며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 의 딸 소생인 추모왕(鄒牟王) 이 천명에 의하여 남쪽으로 순행 중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에 도읍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서(魏書)≫고구려 열전 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며 그들 선조가 주몽(朱蒙)이라고 하였고, 부여에 서 박해를 받은 그가 동남쪽으로 도피 중 큰 강을 건너게 되고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잡게 되어 이곳을 고구려라고 호칭하였다”라고 하였다. 홀본이나 흘승골성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서는 “졸본”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추정된다( 北方史地叢書, 1989, 「 唐代東 北已發現的高句麗城址 」, ≪東北歷史地理≫第2권, 黑龍江人民出版社 ).註 004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東明第三子 一云第二子”로 나온다. ≪삼국유사≫에서 제3자라고 한 것은 주몽의 전처의 소생인 孺留(瑠璃)까지를 넣어서 계산한 것이다.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든 비류중심의 건국설화에서든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과 온조를 시조를 하는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후 이 연맹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를 시조형제설화라고 할 수 있다. 시조형제설화의 예로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慶尙道 高靈縣 建置沿革條에 고령의 대가야의 시조인 惱窒朱日과 김해의 금관가야의 시조인 惱窒靑裔가 천신 夷毗訶之와 가야산신 正見母主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62∼63쪽 참조).註 005 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강 북안설(北漢山說)과 한강 남안설(南漢山說)로 대별된다. 백제의 최초의 도읍지를 한강 이북으로 본다면 온조왕조에 보이는 한산은 북한산에 비정할 수 있다( 정약용, ≪아방강역고≫3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1976, 491∼497쪽).註 006 현재의 인천을 말하며, ≪고려사≫지리지 양광도 인주(仁州) 조 에 의하면 “인주는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으로 혹은 미추홀이다”라고 되어 있다. 미추홀에 근거지를 둔 비류집단이 남긴 유적으로 인천의 문학산성 , 관교동 토성지(土城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인천-소래, 인천-시흥 고속도로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 1990, 28쪽).註 007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가 위례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서 소국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는 것은 위례세력이 미추홀세력을 병합한 것을 말한다.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 본 기사에서는 온조왕 즉위년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온조왕대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초창기이므로 인천지역까지를 병합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의미하며, 또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초기에는 비류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반영해 준다는 사실에서 방증된다. 그러므로 본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시조대에 소급·부회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례세력이 미추홀세력을 병합한 시기는 2세기 말의 초고왕대로 추정된다. 이는 백제왕계상에서 볼 때 초고왕대에 부여씨를 칭하고 그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66∼77쪽).註 008 백제 왕실의 성씨는 백제본기의 여러 곳에 부여씨라고 되어 있다. 또한 근래에 발견된 의자왕 의 아들 부여융(扶餘隆) 의 묘지명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1 기이편 남부여·전백제 조에는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온 연유로 해씨(解氏)를 성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한편 백제의 왕성(王姓)은 부여씨와 해씨 외에 고이왕과 관련 있는 우씨(優氏)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와 같이 복수의 왕실이 교립(交立)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왕권은 온조왕계의 해씨(解氏), 고이왕 계의 우씨(優氏), 비류왕 혹은 근초고왕 이후는 부여씨가 장악하였다고 한다( 문안식,「 백제의 시조전승에 반영된 왕실교대와 성장과정 추론 」, ≪동국사학≫40, 2004).註 009 백제를 건국한 사람은 온조 외에 비류 , 구이(仇台) , 도모(都慕) 가 국내외의 사서(史書)에 전해지고 있다. 비류설은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세주(細註)에 기록되어 있는데, 비류 집단은 김포·강화·서산 등의 토광묘 축조 세력과 연결되었으며, 온조 집단은 한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영한 계통으로 이해한다( 권오영, 「 초기백제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 」, ≪한국사론≫15 , 1986, 88~89쪽). 또한 비류계와 온조계가 연맹체를 형성한 가운데 처음에는 비류 집단, 초고왕 때부터는 온조 집단이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 1988, 76~77쪽). 이와는 달리 고이계를 온조-초고계와 분리시켜 백제국(伯濟國)의 서북방에 위치한 소국 출신으로≪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김기섭, 「 한성시대 백제의 왕계에 대하여 」, ≪한국사연구≫83 , 1993).註 010 해부루 의 서손(庶孫)으로 졸본 사람 연타발 의 딸이었던 소서노 와 결혼하여 비류 와 온조 를 출생하였다. 우태 의 실체에 대해 ≪주서(周書)≫권49 열전 백제전 에 나오는 구이(仇台) 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 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 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 존장자를 의미하는 관명(官名)이 인명화(人名化)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관명인 우태(于台)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 김철준, 「고구려·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 1975) 등이 있다.註 011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 의 친부는 북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인 해부루 의 후손 우태(優台) 였고, 모친은 연타발(延陀勃) 의 딸이었던 소서노 였다. 그런데 소서노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압록강 중류의 지역 집단인 ‘나(那)’ 또는 ‘노(奴)’의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59~360쪽)註 012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지역 연맹체의 수장(首長)으로 혹은 졸본부여의 국왕으로 보고 있다(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490쪽). 註 013 浿河·浿江이라고도 하였다. 패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에 대해서는 淸川江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眞番郡考」, ≪한국고대사연구≫에 재수록, 박영사, 1976), 鴨綠江으로 보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 浿水考), 요서지방의 大凌河로 보는 견해(이지린, ≪고조선연구≫, 1963) 등이 있다. 한편 삼국시대의 패수는 ≪고려사≫ 권58 志12 지리3 黃州牧 平州條의 ≪平州本高句麗大谷郡(一云多知忽)…又號東陽 有猪淺(一云浿江)≫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猪灘…高麗史云 猪川 一云浿江…按百濟始祖十三年 自慰禮城 移都漢山下 定疆域 北至浿河…若平壤浿河 則在高句麗都城傍 豈得爲百濟之境 所謂浿河 疑則此水≫라 한 기사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으로서 현재의 예성강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55쪽).註 014 온조 집단은 고구려를 떠나 패수와 대수라는 두 강을 건너서 내려 왔다. 패수를 임진강, 대수를 한강으로 각각 비정하여 서해안 항로를 타고 남하했거나 평안도 지역을 관통하여 한강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70∼471쪽).註 015 부여의 시조로도 나오고(≪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의 시조로도 나오고(≪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 백제의 시조로도 나오는 인물. 이처럼 동명이 부여·고구려·백제의 시조로 나오고 있는 것은 동명이 夫餘族의 族祖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사회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註 016 백제의 시조를 온조 나 비류 로 보는≪삼국사기≫ 기록과는 달리 ≪주서(周書)≫ 와 ≪수서(隋書)≫ 등 중국의 역사책에는 구이(仇台) 라는 별도의 인물이 보인다. 구이의 실체에 대해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비류의 생부로 전하는 優台 의 音轉이라는 견해( 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 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 1976), 온조의 형으로 전해지는 비류로 보는 견해(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 1982, 41~45쪽), 근초고왕 ( 김재붕, 「백제구대고 」, ≪조선학보≫78 , 1976), 부여신 河伯女 ( 왕민신, 「백제시조‘仇台’고 」, ≪백제연구≫1, 충남대 백제연구소 , 1986) 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이를 고이왕 의 별칭(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476쪽)으로 보는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구이와 고이왕의 상관성에 대하여 음운상의 유사점을 통한 연구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註 017 대방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대방군은 후한말 중국의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康이 204년경에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을 그 치소로 하였다. 이는 沙里院驛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라는 銘文이 새겨진 塼이 발견된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72쪽).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이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355쪽).註 018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는 것은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부여조에 “扶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强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라 한 것에서 보듯이 부여의 경우에도 보인다. 그런데 公孫度는 2세기말 3세기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원 전후한 시기의 백제 시조와 생존한 시기가 다르다. 이 기사는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편찬자가 백제의 구태를 부여의 尉仇台로 誤認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472∼473쪽).譯註 001 백제를 건국한 사람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溫祚) 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자는 온조 외에도 비류(沸流) , 구이(仇台) , 도모(都慕) 가 국내외의 사서(史書)에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시조가 온조라는 주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본문과 ≪삼국유사≫ 남부여전백조(南夫餘前百濟) 조에 전하며, 비류설은 백제본기 온조왕 조의 세주(細註)에 기록되었다. 그 반면에 도모설은 ≪속일본기(續日本記)≫ 등 일본의 사서에만 전하고, 구이설은 ≪주서(周書)≫ 와 ≪수서(隋書)≫의 백제전 등 중국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상기의 사료를 종합해 보면 백제의 시조 전승은 하나의 계통이 아니라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를 건국한 시조가 한 사람이 아니고, 다수라는 점은 선뜻 수긍하기 어려우며, 백제만의 경우가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도 해당된다.譯註 002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다른 이름이다. 추모란 표기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온다.譯註 003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 細註로 간략히 나온다. 주몽이 졸본부여의 둘째 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동해 와서 졸본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공존하다가 이를 흡수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譯註 004 오간 과 마려 는 온조 를 수행하고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 데 보필한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譯註 005 부아악은 삼각산 의 제일봉인 인수봉의 옛날 이름으로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바위가 붙어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그러한 이름을 얻었다.譯註 006 한강의 다른 이름이며, 광개토왕릉비 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 20년조에는 욱리하(郁里河)라고 하였다.譯註 007 위례성은 해당 사료가 부족하고 관련 유적과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각산 동쪽 기슭, 세검정 일대, 경기도 고양, 서울 강북, 북한산성 , 중랑천 일대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위례성은 ‘위례’가 ‘우리(柵)’를 뜻하는 말의 어원에서 기원( 정약용, 「아방강역고-위례고-」, ≪여유당전서≫6집3책 )한 것으로 볼 때 다른 성읍국가의 중심지와 큰 차이가 없다. 위례성은 자연 구릉을 최대한 활용한 상태에서 목책(木柵)을 세우고 일부를 흙으로 쌓은 상태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위례성의 위치를 증명할 수 있는 고고 유적이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譯註 008 백제의 국호인 ‘십제(十濟)’와 ‘백제(百濟)’는 한자어의 뜻 그대로 나루터를 가리킨다. 십제란 열 개의 포구를, 백제란 백 개의 포구를 각각 장악하고 있을 무렵의 국호에 어울린 것으로 보고 있다.譯註 009 중국 전한(前漢) 제11대 황제(재위:기원전 32∼기원전 7년). 서기전 14년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황제권이 약화되고 외척이 권력을 잡았다.譯註 010 전한(前漢) 성제(成帝) 때의 연호로 기원전 20∼기원전 17년까지이다.譯註 011 백제라는 국호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본 기사에는 ≪百姓樂從≫으로 나오나 ≪수서(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百家濟海 因號百濟”라 하여 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데서 백제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을 전해주고 있다. 이 두 기사는 모두 국호에 대한 후대의 덧붙여진 해석이라 할 수 있다.譯註 012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出自가 부여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比肩하려는 의식의 소산이 아닐까 한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 “臣與高句麗源出扶餘”라 한 기사(≪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 및 ≪위서(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이 동일 계통이라는 것은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4년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위덕왕)이 고구려 장수와 對戰하기 전에 “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扞率 年二十九矣”라 한 기사에 의해서도 입증된다.譯註 013 동부여를 건국한 인물로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 의 아들(≪삼국유사≫권1 기이편 북부여) 혹은 단군 과 서하 하백녀(西河 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삼국유사≫권1 기이편 고구려)이 있다. 북부여의 국왕이었던 해부루는 천제의 계시를 받은 재상 아란불(阿蘭弗) 의 권유에 의해 동해 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전해진다(≪삼국유사≫권1 기이편 북부여).譯註 014 온조 를 주몽 의 아들로 전하는 내용은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백제를 건국한 시조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제적(擬制的) 부자관계의 설정에 불과하다. 온조의 친부는 북부여 왕이었던 해부루 의 서손(庶孫) 우태(優台) 였고, 모친은 연타발(延陀勃) 의 딸이었던 소서노 였다. 온조는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과는 달리 졸본 지역에 선주한 집단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譯註 015 기원전 202년부터 220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이다. 고조 유방이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세웠는데, 왕망의 찬탈 기간을 계기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뉘며, 위(魏)에게 멸망하였다.譯註 016 전한(前漢)의 제10대 황제 원제(元帝)의 연호로 기원전 38∼기원전 34년까지이다.譯註 017 주몽 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으로 제2대 유리왕 을 낳았다.譯註 018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으로≪삼국사기≫에는 유리(琉璃)·유리(類利)로 표기되었고, ≪삼국유사≫권1 왕력편에는 유리(琉璃)·누리(累利)라고 기록하였다.譯註 019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로, 기전체(紀傳體)로 북위(北魏), 서위(西魏), 동위(東魏), 북주(北周), 북제(北齊), 수(隋) 등 남북조시대 북조(北朝)의 여섯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중국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譯註 020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636년(태종 10)에 장손무기(長孫無忌)·위징(魏徵) 등이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이 중에서 ‘지’ 부분은 남조(南朝)의 양(梁)·진(陳), 북조(北朝)의 북제(北齊)·북주(北周) 및 수(隋) 등 5대(代)의 사실을 기록한 별개의 서책을 후에 편입시켜 놓았다.譯註 021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異民族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 중국 正史에서 사방의 이민족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으로 부른 것은 ≪삼국지≫부터이다. 동이의 뜻에 대해서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로 나온다. 한편 東夷의 ‘夷’字를 ‘大弓’의 合字로 보아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東夷라고 한 주장도 있다. 夷에는 9種이 있는데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라고 한다(≪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 참조).譯註 022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본문에 보이는 시조 溫祚설, 둘째는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의 細注에 보이는 시조 沸流설, 셋째는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조에 보이는 시조 優台설, 넷째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수서(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시조 仇台설, 다섯째는 ≪삼국사기≫ 권32 제사조 및 ≪續日本紀≫ 권40 延曆 9년 추7월조에 보이는 태조 東明=都慕설이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69∼473쪽). 백제본기에서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撰者는 ≪삼국사기≫ 권32 제사 百濟祀禮條에서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라 하여 시조 동명설을 취신하고 여타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주제분류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색인어<이름> 온조왕, 추모, 주몽, 주몽, 주몽, 주몽, 비류, 온조, 주몽, 비류, 온조, 오간, 마려, 비류, 비류, 온조, 성제, 비류 <지명> 한산, 부아악, 한수, 미추홀, 미추홀, 위례, 위례 <국명> 북부여, 졸본부여, 부여, 부여, 북부여, 십제, 전한, 부여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개인정보보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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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蓋婁王
五年春二月 북한산성을 쌓다 (132년 2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五年春二月築 北漢山城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개루왕(蓋婁王)
五年春二月 북한산성을 쌓다 (132년 2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5년 봄 2월에 북한산성 ( 北漢山城 ) [註 001] 을 쌓았다.
註 001 경기도 광주시 신도읍 북한리에 위치한다. 후대에 근초고왕이 일시적으로 도읍을 옮긴 한산은 북한산으로 보기도 한다(田中俊明, 「 百濟漢城時代における王都の變遷 」, ≪朝鮮古代硏究≫1, 1999, 31쪽).주제분류정치>군사>군사시설>성
三國史記 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근초고왕(近肖古王)
二十六年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다 (371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도읍을 한산 (漢山) [註 001] 으로 옮겼다. [註 002]
註 001 근초고왕이 일시적으로 도읍을 옮긴 한산은 북한산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삼국유사≫근초고왕조 에 ‘이도북한산(移都北漢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한층 높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하기 위한 북진책의 일환으로 개루왕 5년(132)에 축조한 북한산성 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도학, 「백제한성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 , ≪한국상고사학보≫9 , 1992, 32쪽).註 002 본 기사의 한산은 南漢山을 가리킨다. 평지인 漢城에서 연접한 산성으로 옮긴 것인데, 이는 아마 고구려의 來侵에 대비하여 일시적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75쪽). 그러나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南扶餘·前百濟조에는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원년(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라 하고 있고, 王曆篇에도 “第十三近肖古王…辛未 移都北漢山”이라 하여 北漢城=北漢山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다르다. 그러나 한산으로의 移都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한강 이북의 북한산성 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은 취신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원문의 “王引軍退 移都漢山”을 “王引軍 退移都漢山”으로 끊어 읽고 이를 “왕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 한산으로 물러났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한국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 1976). 이 해석대로라면 근초고왕은 도읍을 옮기지 않은 것으로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근초고왕이 비록 일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오고 있으므로 이러한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주제분류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지명> 한산
三國史記 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蓋鹵王
十五年秋十月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다 (469년 10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冬十月葺雙峴城設大柵於 青木嶺 分 北漢山城 士卒戍之
주제분류정치>군사>군사시설>성
정치>군사>군사시설>군사기지색인어<지명> 青木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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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거칠부(居柒夫)
고구려 10군을 점령하다 (551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성암본 보물 제722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진흥대왕] 12년 신미(辛未, 551)에 왕이 거칠부 및 대각찬(大角湌) [註 001] 구진 (仇珍), 각찬(角湌) 비태 (比台), 잡찬(迊湌) [譯註 001] 탐지 (耽知), [註 002] 잡찬 비서 (非西), 파진찬(波珍湌) 노부 (奴夫), 파진찬 서력부 (西力夫), 대아찬(大阿湌) 비차부 (比次夫), [註 003] 아찬(阿湌) 미진부 (未珍夫) 등 여덟 장군 [註 004] 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 (平壤) [註 005] 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바깥, 고현 (高峴) [註 006]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譯註 002]
註 001 대각간(大角干)의 별칭이다. 각찬(角湌)은 각간(角干)과 같이 1등급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신라 16관등 위에 설치된 비상위(非常位)의 관등이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694쪽). 註 002 신라 진흥왕대(眞興王代)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에 나오는 ‘豆弥智 佊珍干支’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93, 1979, 13쪽). 신라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출전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고구려 10군을 점령하였고, 동왕 15년(554)에 이찬(伊湌)으로서 관산성(管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694쪽). 註 003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 의 ‘阿干 比次夫’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 탁부(啄部)출신이다. 관등은 대아찬(大阿湌)에 이르렀다.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땅 10개 군을 탈취하였다.단양적성비에 그의 관등이 아찬으로 나오고 있는 점에서 신라의 죽령 이북 진출은 진흥왕 12년 이전에 이루고 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694쪽). 註 004 거칠부 를 따라 진흥왕 12년(551)에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을 점령한 장군들이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 에 보이고 있는 장군은 탐지, 비차부 뿐이고 다른 장군의 명칭은 이곳에만 보이고 있다. 이들 중 단양적성비 에서 확인되는 인물에는 노부(奴夫 , 비문에는 內礼夫智), 비차부(比次夫) , 서력부(西力夫) , 비문에는 西夫叱智)의 세 사람 뿐이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694쪽). 註 005 여기서의 평양은 이른바 남평양(南平壤), 곧 북한산성 이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 644쪽). 註 006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확실한 지명은 알 수 없다. 고현은 철원 북쪽의 황해도 곡산(谷山)에 있는 고개로 확인되어 혹 이곳이 아닐까 한다( ≪海東地圖≫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1995 , 82쪽). 고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42 곡산군(谷山郡) 산천조(山川條) 에 나오는 고달산(高達山)으로 생각되며, 이 산은 군 동쪽 오십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철령(鐵嶺)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 644쪽). 죽령 이북의 10군을 생각할 때 철령은 적절하지 않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694~695쪽). 譯註 001 신라시대의 3관등이다. 잡판(迊判)·소판(蘇判)이라고도 한다.譯註 002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 에도 보인다. 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이름> 거칠부,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거칠부 <지명> 평양, 죽령, 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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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左議政 徐宗泰 등이 입시하여 束伍軍에게 지급할 保와 北漢山城 築城에 필요한 경비 조달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7년
월일 숙종 37년(1711) 3월 28일
이번 3월 28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전라도 순무사 권상유(權尙游)의 장계에서 속오군(束伍軍)의 보(保)를 원군(元軍)에게 주는 것을 얼마로 할지 그 숫자를 품정할 바가 있다고 하여 본사에서 속오군의 보는 거개가 사천(私賤)으로 본래의 신역(身役)이 있으니 보미(保米)는 5두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복계하여 분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오군에게 보를 주는 일은 비록 통보한 지 이미 수년이 되었다 하나 일이 지장이 많아 외방에서는 전연 일제히 거행되지 않아서 결말이 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유독 본도에서만 지레 원호(元戶)에서 독책하여 받는 일이 있다면 이렇듯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때를 당하여 필시 편파적으로 괴로움을 당한다고 호원(呼冤)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일이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먼저 순무사에게 관문을 보내서 각읍에 알려 우선 받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재가하여 내린 일을 미처 여쭙지 못하고 분부하였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앙달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진달한 바는 타당하다."
하였다. 우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이번에 축성할 물력은 의당 군문(軍門)에서 가져다가 써야 하겠는데 훈국(訓局)은 피폐하였으나 금위영과 어영청은 물력이 다소 넉넉한 편이니 참작해서 가져다가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좌참찬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민진후(閔鎭厚)가 아뢴 바 3군문으로 하여금 똑같이 쌓게 하자고 한 것은 물력을 아울러 내게 하자는 뜻에서 나온 듯한데 묘당에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으니 분명하게 결정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만 감독하며 쌓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성을 쌓는 일은 비록 주관당상(主管堂上)이 있다 하더라도 재력의 출처와 역군을 동원하는 일 등은 주관하는 신하로 하여금 묘당에 취의(就議)한 뒤에 품달하고 거행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는 옳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비록 3군문에 나누어 주어 감독하면서 쌓으라고 하더라도 재력은 조정에서 별도로 조성하여 지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떼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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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대왕 행장(行狀)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시니, 바로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19888)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왕(王)을 낳으셨다.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 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묘께서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께서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이 현묘께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跪拜)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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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曰:
國王姓李氏, 諱焞, 字明普, 顯宗大王之嫡嗣, 孝宗大王之孫。 母明聖王后金氏, 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佑明之女也。 孝廟嘗夢見明聖王后寢室, 有物覆以衾, 開視乃龍也。 孝廟覺而喜甚曰: “此得元孫之佳兆也。” 預命小字龍祥待之。 果以崇禎紀元之三十四年辛丑八月十五日辛酉, 生王于慶德宮之會祥殿。 五歲時, 明聖王后有産病, 王每跪進粥飮, 憂形於色, 后强進曰: “汝勸何可不從乎?” 所養雀雛死, 令瘞之。 內局取牛酪, 而其犢悲鳴, 王聞而憐之, 不進酪。 其仁孝之性, 自幼如此。 顯廟奇愛之, 特簡朝臣, 以宋時烈、宋浚吉、金佐明、金壽恒等爲元子輔養官。 顯廟引見浚吉, 命內侍召王出, 王向浚吉再拜。 浚吉拜賀於上曰: “元子揖讓拜跪, 鑿鑿中度, 若非天成, 何以如此? 宗社臣民之福也。” 丁未正月, 冊封爲王世子。 己酉正月, 隨駕展謁太廟, 八月行入學禮, 奠謁先聖。 仍就博士請業, 禮容莊肅, 講音弘亮, 環庭而觀聽者, 莫不聳動欣悅。 庚戌三月, 行冠禮, 辛亥四月, 行嘉禮。 王妃金氏, 光城府院君萬基女也。 時, 王方在沖年, 頻接宮僚, 講劘孜孜, 文理大達, 睿德日就, 待賓師恩禮備至。 贊善宋浚吉卒逝, 下令曰: “予心悲悼, 誠難自定。 仍念前日慇勤敎誨, 不覺聲咽。” 於是遣宮官弔祭。 甲寅顯廟違豫, 王夙夜憂灼, 衣不解帶, 及大漸, 分遣大臣、重臣, 虔禱于宗社、山川。 八月十八日己酉, 顯廟昇遐, 王恤宅宗, 水醬不進, 攀號擗踊, 侍者不忍仰視。 禮官進嗣位節目, 還下曰: “天崩罔極之中, 又聞此語, 五內如割, 有不能自定矣。” 近臣三司, 累請不許, 大臣率百僚庭籲, 三請而後始許。 二十三日甲寅, 王步出廬次, 號哭不絶, 淚下如雨。 詣殯殿受大寶, 且哭且拜。 因步自延英門, 至仁政門階上, 久立不就御座。 承旨、禮官趨詣勸進, 王不從, 號泣而已。 諸大臣合辭懇請, 王陞座而哭, 流淚被面。 滿庭臣僚, 擧皆嗚咽流涕, 衛卒、吏隷, 亦莫不抆淚。 禮罷, 步還廬次, 號哭之聲, 徹於外, 每對臣僚之初見者, 輒哭。 從容謂大臣曰: “予以沖年, 莅玆大位, 不知事理之如何, 凡諸政令, 恐或妄謬。 惟願大臣, 善爲導迪。” 王嗣服以來, 夙夜祗懼, 一以敬天勤民爲務, 尙方之貿易於燕市者, 特命停罷。 後因臺臣言, 又罷太僕之市馬。 新陵石役甚鉅, 王承慈敎, 移用寧陵舊石, 以省民力。 時, 仁宣王后喪, 未及練祥, 禮官啓議王代服之禮, 王從大臣議, 卒哭後, 因朝奠受服。 蓋用古人未葬象生之意也。 王深軫凶歲民生之困瘁, 減尤甚邑軍布之半, 辛亥以前還上之指徵無處及咸鏡道壬子以上之未捧者, 幷令蕩減。 十二月壬寅, 葬顯宗大王於崇陵。 發靷時, 王祗送于敦化門外, 返虞迎哭于郊外。 乙卯, 仁宣王后練祭後, 從大臣議, 敬思殿朔望陪祭時, 臣僚以卽今所着白袍ㆍ帽ㆍ帶, 行禮。 夏旱, 王親禱于社稷。 秋, 展謁山陵。 王以爲: “生民休戚, 係於守令。” 守令之辭朝, 必引見, 詢問治民之道, 且勿令善事要譽。 或察其不稱者遞之, 敎曰: “守牧不得其人, 則銓曹重被誤擬之罪, 曾已嚴飭, 而奉行漸弛, 不能擇差。 近來方伯之啓罷, 臺閣之規劾, 比比有之, 別爲申明之意, 果安在哉? 銓官推考警飭。” 敎曰: “昔唐太宗曰: ‘今日吾生日。 世俗皆以爲樂, 在朕翻成感傷, 何可宴樂?’ 子路嘗負米百里之外, 及父母歿, 常思負米之日。 今予方在哀疚之中, 豈可晏然仍封誕日方物、物膳, 若平日乎? 其除之。” 嘗命工作舟水圖, 親製文題其上, 揭諸座隅, 以自警。 一日出示輔臣曰: “君猶舟也, 臣猶水也。 水靜而後舟安, 臣賢而後君安。 卿等宜體此畫之意, 以盡輔弼之責可也。” 下諭於諸道方伯曰: “予之爲民一念, 寤寐不弛。 每一飯輒思粒粒辛苦, 一衣輒思紡績之勞。 年來飢饉, 八道皆然, 而畿甸、兩西、嶺西ㆍ北尤急。 必須預爲料理, 然後哀我黔蒼, 庶免塡壑之患矣。” 十行天札, 辭意惻怛, 中外聞之, 莫不感泣。 以淫虹貫日, 下敎責躬, 勑勵群工, 廣求直言。 丙辰, 分遣繡衣, 廉察守宰臧否。 因儐使狀, 察一縣吏不治, 而濫授褒賞, 遂罪御史。 開城府失火, 延燒五百餘家, 特令賙賑。 八月行顯廟大祥, 越八日丁丑, 展謁山陵。 十月行禫祭, 十二月親行大政于便殿。 丁巳幸太學, 謁先聖, 還次春塘臺, 試取文武。 以彗孛之災, 求直言, 命大臣諸宰, 會賓廳, 書進弭災之策。 憫時久旱, 親禱社壇, 避正殿減常膳, 撤樂禁酒。 重修永禧殿, 行酌獻禮。 戊午, 王違豫, 閱月乃瘳。 禮官請告廟陳賀, 王以爲: “予疾彌留, 貽憂於慈聖, 心深惶悚, 豈可安心於稱慶之擧耶?” 大臣力請始許, 而猶令外方, 只進賀箋, 不獻方物。
夏旱, 王曰: “自予忝位以來, 旱澇相連, 至於今日而極矣。 兩麥焦枯, 四野無靑, 雹雷氷塊之變, 繼出於夏月, 靜思厥咎, 其實在予, 夙夜憂懼, 食息靡寧。 自今日避正殿, 益加敬畏, 咨爾大小臣工, 各盡寅協, 少答天譴”, 仍命減膳撤樂禁酒。 又命兩局、兵曹, 兒弱充定乃物故徵布之類, 明査變通。 躬禱于宗廟, 復下敎求言曰: “今玆旱魃, 振古所無。 無乃政令、施措, 不合天心歟? 銓曹用人, 不循公道歟? 獄訟不公歟? 宮禁侈美歟? 言路杜塞, 字牧不恤歟? 賂賄公行, 善事者衆歟? 寡昧之得失, 生民之困苦, 其各悉陳無隱。” 己未, 仁祖朝功臣妻在京者, 令戶曹給月廩, 在鄕者, 令本道給之。 敎曰: “錢是一國通貨, 民亦樂用, 不可不繼鑄, 以責成效, 而銅鐵非國中所産, 停役之日多。 今下銅鐵百斤, 以爲補鑄之資。” 發僧徒, 築墩于江都, 敎曰: “江都, 國之保障, 設墩出於陰雨之備。 第方春飢餓之民, 雖無調發赴役之事, 不無侵攘妨農之患, 予甚愍然。 今遣近侍, 宣布軫恤之意, 賜今年田租。 且近萬僧徒, 遠來作役, 其以米石三升分給, 若有橫拏, 貽弊村閭者, 繩以軍律。” 敎曰: “臺諫, 人主之耳目, 不可一日暫曠, 而近日臺諫, 或以推考引避, 或除授未久, 而旋又尋單, 朝除夕遞, 甚非古例也。 今後非實病, 勿捧辭單, 亦依祖宗故事, 兩司互爲勘推。 朝官父母年老, 賜食物, 而獨於宗戚、儀賓, 無推恩之典, 年七十以上, 衣資食物, 一體優給。” 又敎曰: “近來擊錚之紛紜, 必由於方伯、守令, 牽於私情, 拘於形勢, 知非誤決之致也。 如此則民安得不冤乎? 至於秋曹詞訟之積滯, 莫甚於今日。 或牽掣私意, 遷就歲月, 趁不回啓, 良可寒心。 自今毋踵前習, 復有不遵法令者, 論以重罪。” 秋, 王出御露梁大閱, 命修江上成三問等六臣墓。 凶人有湞, 藏名投書于築墩, 所語極叵測, 購捕伏誅, 株連者施法有差。 宗室焜、熀兄弟, 名入凶書, 勉從群議, 安置濟州, 而厚給廩料、衣資, 定給使役。 憐其幼年, 兄弟相離, 送置一處, 母妻許令隨往, 遣醫救護, 縣官以次給馬饋食。 後, 命量移, 甲子, 因慈懿王大妃周甲頒赦, 特命放宥。 王以儒敎廢弛, 復設慶尙、全羅兩道, 四界首、提督官, 親臨春塘臺, 觀武材, 兼行文臣庭試。 敎曰: “百官祿俸, 所當依舊例, 加給錢文, 而錢今不足, 勢將難繼。 六品以上所減祿俸, 先爲充給。” 十月雷電, 敎曰: “雷電之變, 出於純陰之月, 靜言思咎, 寧欲溘然。 予當益加警惕, 而大小臣工, 革去伐異之習, 懋盡寅協之道, 少答天譴。” 遣御史于濟州, 試取若于人。 王曰: “予今講洪範書, 箕子傳道於武王, 以敍彝倫, 及其受封于東, 大明敎化, 禮樂文物, 燦然可述。 使我東國, 至今冠帶, 克明五常, 以得小中華之稱者, 箕子之力也。 其令主文之臣, 別構祭文, 遣都承旨, 致祭于箕子廟。” 仍命承旨曰: “別遣承旨, 重其事也, 卿須致敬行祀, 廟宇墳瑩, 如有頹圯, 一一書啓, 以爲修葺之地, 子孫中可合錄用者, 亦爲訪問。” 承旨白: “檀君、東明王廟, 亦在其處, 自世宗朝, 春秋降香祝, 似當一體行祭。” 王曰: “先祭箕子廟後, 亦爲擇日致祭。” 庚申, 敎曰: “祖宗朝廟庭, 大臣配享, 無代無之。 先王廟庭, 獨無大臣, 先王在天之靈, 想必缺然。 予豈敢一日安於心乎? 世宗朝, 太宗爲太上王, 欲以南誾、趙浚、趙仁沃配享太祖廟庭, 群議以爲: ‘誾, 國家子孫萬世之讎。’ 遂拔之, 後因太宗下敎, 終爲追配, 高麗始祖廟四臣, 亦爲追配。 其時引唐太宗古事爲言。 此事雖無古例, 可以義起, 而旣有先朝已行之成典, 且有唐朝古事之明證, 其令賓廳, 圈點以入。” 於是, 賓廳以領議政鄭太和圈點。 初, 群臣以太和及判中樞府事趙絅、兵曹判書金佐明, 議定配享, 後因臺啓, 拔去太和, 至是追配。 後又因臺啓, 拔去絅。 敎曰: “災異荐臻, 艱虞溢目, 訛言沸謄, 危疑多端。 輦轂親兵之將, 不可不以國之至親位高者畀之。 光城府院君金萬基, 卽除訓鍊大將, 使之卽日受符察任, 又以申汝哲除摠戎使。” 又敎曰: “廉頗、藺相如, 戰國之士, 而猶爲先國家急後私讎。 寡人之群臣, 先私黨而後國家, 公道淪喪, 私意大行。 注擬之間, 專用一邊之人, 權勢偏重, 驕恣日甚, 決不可倒授太阿, 使主勢孤立於上, 黨與益熾於下。
吏曹判書李元禎, 姑先削奪官爵, 門外黜送。” 討諸逆, 錄保社功。 王嗣服之初, 群壬竊柄, 謀危王室, 建請親耕、親蠶。 蓋親蠶, 則當備嬪御, 故欲進挺昌女, 以動搖長秋。 旣涓吉將行, 天大雷雨, 以風壇墠帳幄, 震盪破裂, 王震恐事遂寢。 逆宗楨、柟、㮒兄弟, 俱蒙孝顯兩朝眷愛, 出入宮禁, 無限度, 漸益驕淫。 及至顯廟大喪之初, 柟又以代奠官, 居宿殯殿, 睥睨兩宮間, 覬覦非望, 而諸舅、昆弟、賓客, 布列朝廷, 爲之羽翼。 積之孽子堅, 驕橫自恣, 久蓄異志, 及其奸騙事發, 大疑懼, 父子謀益急, 圖授體察使, 以統戎務, 締交赫然, 擅設私兵。 遂與群不逞之徒, 日夜謀議, 禍迫朝夕。 王深幾默運, 先奪兵柄, 而一二肺腑之臣, 察其嚬呻, 賊不敢發。 於是, 元老上變告柟、堅, 承款, 堅伏誅。 王特推敦宗之義, 賜柟磬甸, 而卽命歛葬。 積、赫然, 次第就戮。 又因李元成追告, 凶孽有網漏, 挺昌、晩悅、元老伏法。 策勳賜金錫冑、金萬基等, 保社功臣號。 金壽恒白王曰: “宋浚吉久在書筵之列, 至誠輔導, 疏論積之爲人, 至引李泌論盧杞事爲喩。 及今積之罪惡彰著, 其言果驗。 浚吉雖緣媒孽者構斥, 終被追削, 聖心今旣開悟, 當追復其爵, 賜祭以慰。” 從之。 初儐臣始壽因通官虛喝, 增益口語, 語犯先朝。 明聖王后聞之痛衋, 命首相往詰, 通官語言所出, 儐臣憑依幻惑之端, 畢露。 旣又國舅金佑明, 疏論楨、㮒與宮人交亂狀, 凶黨急求對, 至欲究問反坐。 明聖王后召大臣於簾前, 敎諭激切, 有司始勘楨、㮒罪, 而必欲動搖東朝, 以售奸計。 鑴乃以照管慈聖動靜之語, 頌言於筵中, 國人莫不痛惋。 至是王罪始壽、鑴, 竝賜死。 蕩滌江都、南漢辛亥以上還上未捧。 筵臣白曰: “宣廟朝先正臣李珥所撰進《聖學輯要》, 本於《大學》, 約於《衍義》, 而巨細精粗, 無不備盡, 宣廟大加稱賞。 若於召對之際, 有時講論, 又於燕閒之中, 尋常玩索, 則功效豈淺淺乎?” 王曰: “先朝時, 本館所進《大學衍義》, 予嘗病其卷帙浩大, 難於披閱。 今聞《聖學輯要》, 誠爲切實云, 其卽寫入。” 引見大臣、原任二品以上、三司長官。 王曰: “夜見書雲觀草記, 有星入於太微西垣外, 而似有尾迹, 甚可畏也。 故爲召卿等, 欲聞弭災之道。” 夜分乃罷。 仍敎曰: “予以否德, 叨承丕基, 政令、施措, 弗協天心, 仁愛之天, 降此災沴。 夙宵警惕, 若恫在身。 承旨代予草敎, 廣求直言, 大小群工, 克盡乃職, 少答天譴。” 十月二十六日辛亥, 中宮昇遐, 謚曰仁敬。 王曰: “國家不幸, 兇逆遽生。 當其氣焰滔天之日, 或有助成形勢者, 或有附麗邪論者。 此類旣已逬諸四裔, 明示癉惡之典, 此外餘人之不能自拔於頹波, 亦何足深誅乎? 今輕重有別, 處分已定。 陽舒陰慘, 春生秋殺, 人主代天理物之大柄也。 當此災異沓臻, 人才眇然之日, 其卽隨輕重收敍。”
辛酉, 敎曰: “方伯, 所以承流宣化者也。 綱紀一道, 摠察郡邑, 爲任顧不重歟? 雖有良法美政, 不知所以奉行, 則朝家之澤不行, 雖有循吏、汚官, 不能審其黜陟, 則考績之政隳矣。 目今諸道方伯, 非不愼簡, 而至於有才望威重, 能盡其職者, 鮮矣, 予甚慨然。 其令備局, 毋論資級、履歷, 及曾有罪累, 另加抄薦、儲養, 以盡委任岳牧之意。” 命立高麗忠臣鄭夢周、斥和三臣吳達濟ㆍ尹集ㆍ洪翼漢祠, 錄子孫。 鰥、寡、孤、獨無依之類, 減其烟役, 年八十者, 賜食物, 各樣身布, 依舊制以五升三十五尺定式。 領府事宋時烈陳箚退歸, 遣重臣, 傳諭於所住處。 二月丙午, 葬仁敬王后于翼陵, 高陽郡春收米, 特命減除。 夏旱疏決。 王曰: “情罪俱重者, 不可輕議, 而罪重情輕者, 必用曠蕩之典, 然後可以解幽冤而回天怒矣。 雖然, 不問輕重, 混同放釋, 則僥倖之徒, 不無希望之心, 必須參酌情犯, 量宜善處。” 行永昭殿酌獻禮。 五月二日, 冊閔氏爲王妃, 驪陽府院君維重女也。 時久旱, 王禱雨于社壇, 命召大臣、卿宰、三司, 詢問弭災之策, 下敎責躬, 廣求直言, 勑勵群工。 弘文館論中宮之喪, 不可無練, 令大臣、儒賢博議。 王曰: “領府事宋時烈議中, 廢却不行, 殊非愛禮存羊之說是也。 夫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禫, 古今不易之制也。 今若諉以無變除之節, 不行練祭, 則情禮缺然。 雖已除服, 不可全廢三年之義, 練禫節目, 趁卽磨錬擧行。” 練日遂親臨魂殿, 行酌獻禮。 王曰: “近因國家多事, 又値年凶, 未得展謁園陵, 今已五載, 予心缺然。 今欲展謁敬陵, 仍詣新陵, 以敍悲懷, 道路橋梁, 切勿大段修治。 亦勿植炬, 留都軍兵, 勿令徵發, 圻輔以上番御營軍宿衛。” 夜對講畢, 王謂講官曰: “夜對非但爲夜氣靜寂, 講論有味。 一堂杯酒之間, 藹然有家人、父子之義, 故曾在孝廟朝, 數賜夜對, 侑酒以歡。 爾等今各安意隨量飮酒。” 幸太學, 謁先聖, 行酌獻禮。 還臨春塘臺, 試取文武。 王曰: “近來學校之政廢弛。 須修明然後, 可以正士習而淑人心也。 其令大司成, 取先正臣李珥所著《學校模範》, 參以今日應行者, 講定擧行。” 時, 禁中有留置佛經之事。 右議政閔鼎重白上曰: “自上, 必不留意異敎, 而外人想或致疑, 宜卽出給。” 王曰: “唯, 予欲出給雅矣。” 筵臣白曰: “君上處崇高之位, 豈能盡知民事之艱難乎? 兵曹判書李䎘家, 有一古畫屛, 而繪畫我國民間四時農功, 頗詳悉。 宜令弘文館, 摹畫以入, 以備睿覽矣。” 王曰: “予嘗作《豳風》畫屛以觀矣, 今聞此屛, 畫我國農功, 尤可觀省。 使之入內, 觀覽後移摹可也。” 壬戌, 白虹貫日, 王謂輔臣曰: “國家不幸, 天災荐疊, 而今者虹變又如此, 食息靡寧, 罔知攸濟。” 仍令諸臣, 各陳弭災之策。 時, 群臣多言, 白骨、隣族、兒弱徵布之弊, 請行戶布, 議久不決, 令大臣、備堂、三司會議。 王曰: “卽今身役之偏重, 最爲痼弊。 均役救弊, 固莫如戶布之法, 而節目未定, 聽聞先駭, 民情騷擾, 朝議紛紜。 雖有良法、美政, 勢不可斷然行之。 今姑停止, 以爲鎭浮議定民心之地, 徐觀年事, 從容更議。” 大臣陳白, 今歲凶荒, 畿湖尤甚。 畿甸已減大同矣, 今若許減湖西, 則該廳需用匱乏, 此不可不慮。 王曰: “若慮經費, 而全不蠲減, 則殊非恤民之意, 尤甚、之次邑, 同減一斗。” 平壤民家失火, 延燒三百四十餘家, 特賜米五百餘石, 分賑之, 減其身役。 久旱得雨, 御題以喜雨詩, 命承旨、玉堂製進。 親臨春塘臺觀武才, 遣御史于南漢試才。 群臣以變通軍制, 前後陳達, 王以爲: “卽今形勢, 有難猝然大變。” 乃以別隊、精抄合設, 而爲禁衛營。 蓋用兵曹判書金錫冑議也。 命修正文廟祀典。 於是, 將從享中壽長侯公伯寮、蘭陵伯荀况、岐陽伯賈逵、扶風伯馬融、司空王肅、司徒杜預、任城伯何休、偃師伯王弼、臨川伯吳澄黜享, 文登侯申棖、淄川侯申黨, 以疊享去黨, 建寧伯胡安國、華陽伯張栻、蒲城伯眞德秀、崇安伯蔡沉, 以失序, 改定位置, 以宋朝將樂伯楊時、文質公羅從彦、文靖公李侗、文肅公黃幹, 本朝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 新從享于聖廡。 李珥、成渾從祀之請, 自仁廟朝乙亥始, 而先朝戊申年間, 館學儒生, 復有宋朝三賢竝配之議, 以至今日, 章甫累籲, 王命禮官, 竝陞配。 又因金錫冑議, 議于大臣、儒臣, 一依明制, 刪黜釐改。
備局引見時, 右議政金錫冑曰: “昔在庚寅年間, 朝廷募人, 送咨于登州軍門, 其後明朝, 亦送人來泊宣川, 仍與交易, 而船人徐姓者, 終始往來通信, 淸人査問時, 其人被酷刑, 終無一言而死, 國家幸得無事, 不可無褒賞之典。” 王曰: “賤人無識, 而乃能爲國捐生, 其忠可嘉。 子孫可用者錄用, 如有屬役者免役。” 仁祖朝, 南漢扈從軍兵年七十以上加資者給料, 彗星見幾, 兩月乃滅。 先是, 王曰: “古人云: ‘不以天下儉其親。’ 近因連歲凶荒, 豐呈盛禮, 尙未擧行, 予心缺然。 當復如何? 非不知今年穡事, 亦未登熟, 而及此國家粗安之日, 上奉兩慈殿, 趁歲首上壽獻祝, 此豈豐亨豫大而然哉? 職由於人子愛日之至情也。 豐呈節目, 斯速磨鍊。” 至是敎曰: “進宴節目, 因慈敎, 務從簡約, 而卽今上天示警, 災異如此, 其停止。” 臨筵敎曰: “今年風災, 振古所無。 考見《日記》, 乙亥、辛卯之風災, 實旣往之明驗。 其應之必如前日, 雖未可知, 目今可憂之端, 不一而足。 脫有緩急, 糧餉最急, 江都、南漢儲蓄枵然, 甚可慮也。 聞戶曹所儲之木, 厥數頗優, 以此轉貿作米, 或別樣措置之意, 言于大臣。” 又京畿大同米、三南月課米合萬石, 命輸送江都。 訓局砲保木、工曹匠布, 亦令作米輸送。 江原道進上人蔘, 特令減半。 金煥上變, 璽、瑛等伏法。 方其設鞫之日, 金重夏及全翊戴, 以柳命堅、秀胤等事, 密言于御營大將益動, 益勳啓達。 逮鞫問, 事多虛妄, 重夏、翊戴減死, 流三千里。 因知事李端夏陳白, 減除各陵忌祭所用綵花。 分遣御史于三南及北路, 兼察賑政。 以冬雷, 下敎責躬曰: “政令施措, 漸不克終歟? 言路不闢, 讜言不聞歟? 實惠未究, 下民困窮歟? 奢侈成風, 糜費孔多歟? 用舍不公, 私意橫流歟? 紀綱頹弛, 百隷怠職歟? 獄訟多滯, 冤鬱莫伸歟? 廣求直言, 無或有隱。 大小臣僚, 精白一心, 恪勤乃職, 割斷一己之私, 少答天譴。” 又令大臣、六卿、三司長官, 薦進人才, 特下內司胡椒、丹木、白礬、虎皮等物, 以補賑資。 內局減靑大竹, 內農圃減加出馬, 停訓局、軍器寺月課及內弓房造弓之役。 減酒房酒米, 頒賜耳掩、貂皮, 亦令減半。 敎曰: “予嘗讀韓文中《何蕃傳》, 又見宋之陳東、歐陽澈事蹟, 千載之下, 不覺使人起敬。 凡國家之所以廩養士子者, 豈徒使之作文干祿而已哉? 予意以爲, 此三人, 別立小祠於成均館之旁, 使諸生, 有所觀感。 令禮官, 問于大臣、儒臣擧行。” 癸亥展謁太廟。 王以爲: “自前宗廟永寧殿展謁時, 行拜於階下而退, 情甚缺然。” 於是, 拜禮畢, 仍詣殿內奉審。 備局引見時, 大臣以新年勉戒之意, 陳達, 王曰: “戒誨切至, 可不體念? 但君臣之間, 貴在情志之相孚。 近來外則獄訟不平, 內則論議相激。 《書》曰: ‘同寅協恭, 和衷哉!’ 今日入侍諸臣, 克去私意, 共思寅協之道, 予亦有望矣。” 夏久旱, 敎曰: “旱魃之慘, 愈往愈酷。 數日之內, 若不得霑潤之澤, 則將未免赤地千里, 而民無孑遺。 興言及此, 寧欲自焚, 以答天譴。 予當以身代犧, 親禱于太廟, 引咎、責躬之意, 別爲措辭, 添入於祭文中。” 又敎曰: “陪祭執事官以下, 須體予意, 沐浴其身, 洗濯其衣, 處恭齋宿, 無或飮酒吸烟。” 又曰: “闕內外, 各處汚穢之物, 各別修掃。” 遂禱雨于太廟。 又曉諭民庶曰: “予以否德, 所爲多不善, 以致天降之災。 水旱、風霜, 害爾禾穀, 使我無辜之民, 阽於溝壑。 念之至此, 予心如割, 誠無顔面, 以臨于爾等之上也。 惟望爾等, 忍飢寒保妻子, 毋或流離。 予方削衣減食, 以爲求活爾等之計, 勿以予言爲不信也。 嗚呼! 爾等非予之赤子乎? 父母雖或貧不能養其子, 寧有其子棄父母而去者乎? 且或有迫於飢餒而爲盜者, 亦豈本心哉? 實由於予不能制爾等之産, 旣無恒心, 又無素敎, 使至於此, 此予所以日夜腐心流涕者也。 自乃祖乃父, 蒙我祖宗之厚澤, 保其田里, 安生樂業者, 三百年于玆矣。 今雖困急, 其何忍捨予而流散乎? 亦安可萠不善之心, 以自陷於危險之地哉? 且念卿大夫忠義之心, 自與凡民不同, 爾各勸諭隣里, 毋或流散, 毋或竊盜, 自給之餘, 如有相資之勢, 與之相分, 毋爲獨生之計。 《西銘》有曰: ‘民吾同胞, 物吾與也。’ 仁人之心, 其於物, 尙有相愛之心。 況於同胞者乎? 予不能自保其民, 而發此哀痛之辭, 尙宜哀予而動念也。” 又宣諭于諸道監司、守令曰: “咨爾方伯, 毋或安坐, 巡歷列邑, 與其守宰, 面議荒政, 見吏民, 曉諭朝家勤恤之意, 使不至於怨恨而流散。 予見朱子爲浙東救荒使也, 其門人所記云: ‘公鉤訪民隱, 晝夜不倦, 至廢寢食, 窮山深谷, 靡所不到。 每出必乘輕車, 屛徒御, 一身所需, 自齎而行, 部內不知其所在。 官吏夙夜戒飭, 常若使者壓境, 以此所活萬萬。
其後入見, 孝宗迎慰曰: 「浙東勤勞, 朕所知之。」’ 此豈非今日之所當法者乎? 至若兵ㆍ水使、守令、僉ㆍ萬戶、察訪, 亦各有所屬兵民, 各以民飢己飢, 民死己死爲心, 則豈無相救之道耶?” 十一月, 王經痘患。 敎曰: “今玆所患, 不日差瘳, 實賴天地祖宗之默佑也。 不可無非常慰悅之擧。 況此凍節, 罪囚之久滯牢獄, 不可不念。 京外死囚以下, 竝皆放釋。” 其後, 王曰: “夫赦者, 小人之幸。 古人以愼無赦, 陳戒其君。 世降俗末, 人心薄惡之日, 尤不可輕施無前曠蕩之典, 以啓奸人僥倖之心, 而頃於大病纔瘳之日, 徒知慰悅之爲急, 罔念後弊無窮, 率爾混放, 追悔莫及。 今雖不可還囚推覈, 而若或因一時特敎, 以爲日後援例應行之資, 則其弊有不可勝言。 切勿援例事, 永爲定式。” 敎曰: “予惟亡國喪身之禍, 固非一道, 而求之古今, 罔不由於沈湎于酒, 顚覆厥德。 是以, 惟我祖宗深憂遠慮, 丁寧曉諭, 而近日大小臣僚, 惟事崇飮, 上而置國事于度外, 下而貽父兄之憂戚, 寧不寒心? 矧今天怒民怨之日, 君臣上下, 早夜孜孜, 猶懼不濟, 其敢縱酒廢事乎? 咨爾臣工, 克體此意, 戒爾崇飮, 恪勤乃職, 弘濟時艱。” 十二月五日, 王大妃昇遐, 謚曰明聖。 甲子四月, 祔葬明聖王后于崇陵, 命減楊州大同米二斗。 痘患時, 巫女入闕祈禱, 因戶曹參判朴世采疏論。 令攸司案治, 施刑不服。 王曰: “孟子曰: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巫女入宮中禱祝, 誠極不敬, 雖斃桁楊, 小無所惜, 而蠢愚無知之物, 若自以爲祈人疾病而死云爾, 亦涉不好。 減死絶島定配。” 四月三日, 王大妃發引。 王祗送于敦化門外, 返虞時, 祗迎于興仁門外。 敎曰: “今歲乃慈懿王大妃周甲也。 曾欲別設 豐呈, 以表慶加矣, 顧予罹此荼毒, 莫伸愛日之情, 喜懼竝至, 予懷曷極? 以閭閻家言之, 若逢如此之慶, 雖在哀疚中, 必有別樣慰悅之擧。 今於慈懿殿誕日, 自內將有設供之事, 宮中侍御人, 亦皆有頒賜之典, 進上物件, 比常年加進, 頒赦亦卽擧行。” 因奉朝賀宋時烈議, 不行陳賀。 左參贊李端夏投進宣廟朝寶鑑五冊, 優批嘉尙, 仍賜廐馬。 以旱災, 命招大臣、二品以上、三司, 訪問弭災之策。 敎曰: “比來士習日益浮薄, 厥咎專在於父兄。 家無嚴父兄, 朝無賢師儒, 無以養其才。 他日立身, 將焉用哉? 自今以後, 大司成, 必以有文學, 凝重寡默者擇差, 丕變士習。” 乙丑, 特下內司米、綿布, 以補賑資, 命抄淸白吏。 又命掄擇蔭官中可合閫任者、武臣堂上, 依孝廟朝故事, 開講時, 使之輪回入侍。 王謂群臣曰: “獄者, 天下之大命。 《書》曰: ‘欽哉欽哉, 惟刑之恤哉!’ 《論語》, 亦曰: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奏讞之際, 可不詳愼? 予觀漢宣帝, 勿治子匿父母, 妻匿夫, 孫匿大父母之訟。 此誠前代之美意也。 且考法律, 亦有謀叛反逆外, 子孫、妻妾、奴婢告父母家長者處絞之文, 而近觀外方刑獄文案, 事不至重大, 而或使子孫, 證其父母、祖父母, 妻妾證其家長, 殊甚無謂。 不可不申飭, 但父子俱犯、妻妾同惡者, 不可不一體推治。 且外方滯獄, 至有累經年歲者。 若其疑獄難決者, 監司卽爲啓聞, 以請裁處, 如其不然, 則須速處決事, 申飭各道。” 敎曰: “《天元玉曆書》, 於天地、日月、風雲、星辰之災祥, 無不備載。 雖與觀象玩占有異, 有年代遠近之異, 不可不一體備置於雲臺。 今下一件, 或貿來或繕寫藏置。” 因(元)〔亢〕旱, 放出宮人二十五人。 時, 自夏徂秋, 旱乾彌酷, 連次祈雨。 王曰: “日昨祭文中, 罪已責躬之語, 極其草略, 欲爲還給改製, 慮或受香之差晩, 循例啓下, 心甚不安。 今觀三角祭文, 略及責躬之語, 而全無懇迫哀籲之意, 改製以入。” 下敎責躬, 疏決罪囚, 親禱于社壇。 王曰: “釋衰權着, 代犧祈禱, 實出於不得已之擧, 而誠意淺薄, 天心莫回, 亢陽愈甚, 田野濯濯。 夙夜遑遑, 若恫在己。 不可以纔行親禱, 有所等待”, 遣大臣、重臣, 祈禱于南郊及諸山川, 祭文令主文之臣製進, 而罪己責躬之意, 各別添入。 又曰: “今玆之旱, 振古所無。 若過數日不雨, 則穀之餘存者, 將盡棄之, 予用焦憂, 罔知攸濟。 求言之敎, 已過三旬, 而尙今寂然。 進言不用, 則君上之過, 而求之不言者, 責在群下。 然此莫非予狹於翕受之量而然也。 玉堂居論思之地, 旣無匡救之言, 兩司亦無一言, 豈予不足與有爲而然歟? 予甚慙歎。 愍忠壇及戰亡, 庚、辛餓死人等處, 遣官賜祭, 閉門、遷市等事, 亦卽擧行。” 臺臣陳白: “外間傳言, 禁中新得數箇怪石、斲石擎之云。 當此艱虞之日, 留心細玩, 甚非所望於聖明也。” 王曰: “此言不無過實, 而古語曰: ‘有則改之, 無則加勉。’ 可不體念焉?” 敎曰: “今觀隷院單子, 有接訟三年不決者。 怠慢之習, 不可不懲, 堂郞推考。 諸司官員之卯仕酉罷, 載在法典, 啓下公事之三日覆啓, 亦有受敎, 而百隷怠職, 不察緩急, 率多遲滯, 竝申飭。” 八月展謁崇陵。 顔色之戚, 哭泣之哀, 群臣觀者, 莫不感歎。 十二月, 親行明聖王后大祥祭。
丙寅二月, 親行禫祭。 三月幸太學, 行酌獻禮, 將試士, 擧子蹂躪而死者六七人。 王驚悼, 退試於春塘臺。 筵臣陳白宮禁之不嚴, 王曰: “常加申飭, 而內言之出外, 近來益甚, 誠可寒心。 別立科條, 如有無端出入, 傳播內言者, 與筵說宣泄之罪同科。” 四月進豐呈于慈懿大妃殿。 王曰: “謹行上壽之禮, 子孫咸萃, 終夜侍宴, 稱觴慶壽, 和氣融融, 此實稀覯之擧。 曷堪歡忭? 至尊周甲, 慶莫大焉, 奉上徽號, 有不可已。” 乃於五月, 上尊號曰康仁。 王聞戊午深河戰亡人李愛卿子, 年今八十三, 孝行卓異, 特命旌閭。 八月, 白虹貫日, 敎曰: “非常之災, 疊見層出, 憂懼兢惕, 彌日不弛。 雖在常年, 節用而後, 可以愛民。 況此凶歲, 尤宜節損。 湖南朔膳, 限明秋除減, 三名日進上, 亦爲停除。 餘丁收布停罷, 帖價米蕩滌, 依辛亥例裁減御供。 送鹽五百石于濟州, 以補賑資。” 丁卯, 因大臣之請, 聖廟從享諸賢子孫, 竝皆錄用, 俾世襲冠冕, 以爲定式。 從師儒之言, 連山、藍浦兩邑稅米, 經亂後歸地部者, 復送之養賢庫。 設別科於西路。 親臨法殿, 行諸宗殿講。 展謁康陵, 還次射壇, 觀軍容, 賜五大將廐馬, 施賞軍兵。 萬壽殿災, 行宗廟、永寧殿慰安祭。 敎曰: “萬壽殿回祿之災, 實前史罕有之變。 靜思厥咎, 亶由於予才淺德薄, 政令施措, 大不協於天心, 致此非常之災。 未央之災, 書于漢史。 古語曰: ‘奢侈之害, 甚於天災。’ 興言及此, 一倍危澟。 宜自政府, 廣求直言, 以匡不逮, 大小臣僚, 寅協恪勤, 少答天譴。” 展謁長陵。 初, 術士言長陵宅兆不利, 王以爲: “山陵遷動, 事極重大, 必欲奉審定之。” 至是敎曰: “五十年陵寢, 不可以些少疵欠, 只信風水之說, 輕易遷動矣。” 其後議遂寢。 特減高陽、坡州今年稅太。 王曰: “自古嗣王紀元, 必以卽位之明年爲始。 歷觀古史皆然, 而今此殿試策題中, 以十四年于玆爲言, 故改點以下矣。” 夜對饋講官酒曰: “此酒唯量飮不辭, 而酒之爲害, 予備知之矣。 有父母者, 貽父母憂, 且不利於其身, 有害於職務, 不可不痛戒也。” 遂下一絶, 以示戒勑之意, 命諸臣和進。 親行大政。 王曰: “國家治亂, 係於得人之賢否, 進退之權, 在於銓曹。 治平無事之時, 循常注擬, 猶當勉勵。 況今國事多艱, 而君臣一堂, 情意流通之日乎? 必思所以祛私意恢公道, 褒節義崇德行, 擧廉吏疏滯鬱, 以爲聳動振作之方。 考閱官案, 隨窠擬入, 隨擬點下, 則一政官足矣。 何必親政爲哉?” 政罷宣醞。 除減京畿、公洪、江襄、黃海、咸鏡五道稅太之半, 諸道春收米, 分災實, 蠲減有差。 戊辰正月上日, 王出御仁政殿, 受群臣朝賀後, 又御仁政門, 行朝參。 命改定三司禁亂徵贖之制, 西路城池頹廢處, 隨毁隨補。 禁漏軍, 於闕門閉後, 踰墻入來, 兵曹請依法, 斷以一罪, 王曰: “迷劣軍士, 不必深治, 從重決棍。” 政院以法爭之, 王曰: “法雖如此, 情有可恕”, 不從。 王將展謁寧陵, 右議政李䎘上箚, 以荒年擾民, 且多癘疫, 請退行。 王曰: “昔東漢明帝, 當謁園陵, 夜夢先帝太后, 如平日歡, 悲不能寐, 案曆涓吉, 卽率群臣上陵。 予嘗夢謁于孝廟, 孝廟握手歡喜, 玉音丁寧。 覺來涕泗交頣, 追慕倍切, 實難自抑。 求之神道, 不遠人情。 至情所在, 天必矜恕, 則彼至愚而神之民, 豈不知此行之出於萬不獲已也?” 遂幸寧陵。 次廣州山城行宮, 王曰: “仁祖丙子(住)〔駐〕蹕之地, 今適來見, 不勝感愴。” 蠲減楊、廣、驪、利四邑春大同米, 驪州境內年七十以上者, 題給食物。 致祭于溫王廟, 永昌大君、明善ㆍ明惠ㆍ明安ㆍ淑靜四公主、驪陽ㆍ光城兩國舅、完豐府院君李曙墓, 又命賜祭于雙樹、險川戰亡將士及辛亥餓死人埋處。 王過雙樹嶺, 停駕問曰: “此是戰場乎? 閔栐、許完等, 千里勤王, 戰歿於此。 今過此地, 尤用慘惻。 兩人子孫錄用。” 御西將臺, 愴然久之, 命收用戰亡人申誠立、有功人徐欣男子孫。 圍城時官屬生存者, 食物題給, 未加資者, 特命加資。 太祖大王(晬)〔睟〕容, 奉自全州, 到江上, 王出迎于津頭。 奉安于資政殿, 行酌獻禮。 摹寫新本成, 奉安于永禧殿。 量減所經各邑春大同, 民田之割入於沿路, 各邑之支供於廚傳者, 以耗穀償之。 慈懿大妃證候危篤, 遣大臣、重臣, 祈禱于廟社及諸山川, 干係逆獄、綱常外, 死囚竝命放釋。
八月二十六日, 慈懿大妃昇遐, 謚曰莊烈, 徽號曰貞肅溫惠, 殿號曰孝思, 陵號曰徽陵。 有術士投疏, 請求雙乳竝結之穴, 或占一岡上下之地, 移奉長陵, 以爲兩陵同局之計, 王曰: “親審斷定, 今不可輕議。” 後以臺啓, 罪其人。 祥原人上疏, 備陳宮家折受之弊, 卽命罷之。 昭儀張氏母乘屋轎, 出入闕中, 臺官焚其轎, 推治其奴。 王以其出入有命, 不爲論啓而擅刑, 令內司罪禁吏、所由。 諸臣多爭之, 王曰: “當初刑訊, 蓋出於一時過擧, 而今聞二人, 皆至殞命。 到今追悔, 實爲矜惻。 恤典擧行。” 後又答憲臣之疏曰: “七情之中, 易發而難制者, 唯怒爲甚。 予之病痛, 每在這裏。 向日之事, 亦不忍一時之忿, 致此無前過擧。 玆實涵養之功, 有所未盡而然也。 反躬慙悔。 竊自以爲: ‘呂伯恭一匹夫也, 而忽覺於聖訓, 乃能變化氣質。 彼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矣。 必須加意於本源之地, 克致存養之功, 然後庶可以祛粗暴之病, 而無頻復之悔。’ 以此自擎于心, 寧有外示悔端而內懷慍怒, 以示人不廣哉?” 十二月十五日, 慈懿大妃發靷, 十六日返虞, 王哭送迎于東郊。 己巳正月, 命定元子位號。 元子, 昭儀張氏出也。 封張氏爲禧嬪。 王以爲: “科擧, 士子出身初程, 而近來科後, 每有人言。” 令招試官於政院, 飭之以公正取人。 敎曰: “今者春風解凍, 土脈初動, 勸農(振)〔賑〕貸之意, 下諭於諸道監司。” 五月, 仁顯王后退處私第, 命陞禧嬪張氏爲王妃。 因旱疏決。 庚午, 瑞興縣癘疫熾盛, 王親製祭文, 遣禮官致祭于本縣社壇及境內名山。 六月, 以冕服出御仁政殿, 冊封王世子。 十月, 莊烈王后祔廟。 蕩減三南及京畿各衙門戊辰以上致敗拯米六千餘石。 夜對講訖, 命宣醞, 手書四韻詩, 以示諸臣曰: “天地茫無垠, 眇然有一身。 秉彝本自善, 物誘乃亡眞。 操舍毫釐判, 聖狂俄頃臻。 閉邪莫若敬, 克己日維新。” 仍使諸臣和進。 辛未, 右議政金德遠, 以前所聞於宦寺者, 陳達內司事, 而語關先朝。 王曰: “古人云: ‘當用宦官、宮妾不知名者。’ 內外朝, 自古隔絶, 固不當相與酬酢, 而評論先朝, 以此說又爲陳達, 極爲無據。 金德遠罷職。” 仍命內侍府刊去其宦官名, 竝削其子壻之籍。 以御題策泮儒, 一榜竝賜及第。 展謁貞陵, 歷入武安王廟, 擧手揖。 仍命卜日致祭, 東南廟毁傷處, 趁卽修補。 又敎曰: “今玆歷入, 實出於曠世相感之意, 而亦所以激勸武士也。 咨爾諸將, 須體此意, 益礪忠義, 捍衛王室。” (住)〔駐〕驛射壇觀兵後, 又幸慕華館觀武才。 慶尙監司李聃命, 以麥穗有二三岐或四五岐, 爲嘉瑞封進, 命還送。 蕩減三南被災邑戶曹稅太一萬二百餘石、米九千五百六十餘石、惠廳米三萬四千五百六十餘石, 三南移轉賙賑穀十萬餘石。 親製千字文序, 使世子, 以此進講。 時, 發各營門軍卒, 築墩江都。 遣中使宣諭曰: “爾等身操版鍤, 勞苦實多。 予之矜念, 奚但宋帝之軫念西征將士而已? 玆諭予意。” 仍加錫賚又賜御酒六十甁曰: “縱不能徧及, 蓋亦投醪飮河之義也。” 又命守臣, 軍卒如有不遵將令, 作挐村閭者, 繩以軍法。 幸太學, 謁先聖。 仍試士, 誨諭諸生曰: “設庠序、學校, 以養四方之士者, 蓋欲其講劘正學, 擇善修身, 本乎人倫, 明乎物理也, 豈徒作文干祿而已哉? 昔顓孫學干祿, 子曰: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誠能學之博、擇之精、守之約, 則祿不干而自至矣。 竊觀比來, 士習不古, 經明行修, 曉達治體者少, 而尙文詞趨祿利者, 滔滔皆是, 此豈祖宗興學作人之本意哉? 在昔安定胡公, 爲蘇、湖敎授, 孜孜雅勑, 其弟子之辭氣異於常人。 矧今濟濟多士, 密邇尺五, 上下情志, 藹然流通, 誘掖激勵, 寧不在玆? 敬聽予訓, 服膺勿失。” 壬申, 敎飭群工, 訪民隱、勸農桑、勉學業。 又敎曰: “昔西旅貢獒, 君奭作書告戒武王。 今者筵臣, 以却異物, 昭儉德縷縷陳達, 予嘉其誠, 而可其奏矣。 今下銀鼠皮御裘, 令尙方焚之。” 謂筵臣曰: “趙宋, 仁厚立國, 而猶不貸贓吏。 我國贓法不嚴, 故人不畏法, 民受其害, 豈不寒心? 司馬氏先門地後才藝, 實非擇人之道, 而今世亦然, 專以門閥取人, 是以有遺才之歎也。” 又謂講官曰: “孔、孟、程、朱皆諱名, 而獨於曾子, 不諱可乎? 竝諱之。” 夏旱, 幸南郊禱雨。 王曰: “昔在太宗朝, 命畫前代可法之事于壁上, 成宗命採歷代可法可戒者, 圖畫屛障, 令詞臣製詩以進。
蓋欲其朝夕觀覽, 以備勸懲, 豈非子孫之所可法乎? 予欲於前代善可爲法者, 取帝堯之任賢圖治, 帝舜之作歌勑命, 夏禹之揭器求言, 商湯之桑林禱雨, 中宗之德滅祥桑, 周文之澤及枯骨, 武王之丹書受戒, 宣王之感諫勤政, 摹作八幅屛。 又於惡可爲戒者, 取太康之遊畋失德, 漢成之市里微行, 哀帝之嬖侫戮賢, 靈帝之西邸鬻爵, 晋武之羊車遊宴, 唐玄之歛財侈奢, 懿宗之怒流諫臣, 宋徽之任用奸賊, 亦作八幅屛, 置之左右, 以資省察。 令主文之臣, 各製律詩, 弁于首以進。” 又曰: “在昔夏禹之世, 黎民皞皞, 而猶以不若唐、虞, 痛自刻責, 至於下車泣辜。 予於此, 未嘗不三復欽歎。 今也世降俗末, 民習乖敗, 愛親忠君, 慢不知爲何事, 悖倫亂常, 日加月增, 不圖湖西, 又有殺子之變。 噫! 父子慈愛, 天賦之常性。 渠雖蚩蚩, 亦必不至於汨喪, 而爲此至不忍之事, 此豈無所致而然哉? 藐予小子, 曾不知以德禮導之, 但欲以法制刑罰, 苟冀其遠罪, 使民不自愛而輕犯法。 駸駸然日趨於綱常斁敗, 國隨危亡, 寡昧之自責痛心, 奚但大禹之泣辜哉? 然念祖宗之深仁厚澤, 浹人肥膚, 凡我黎氓, 孰不興感? 咨爾大小民庶, 體予十行絲綸, 亶出至誠, 感發善心, 各自激勵, 毋負予敎諭之意。” 又敎曰: “今年懷襄之慘, 振古所無。 諸道渰死者, 幾至六百人之多, 其驚慘孰甚於此? 雖例下恤典之命, 而不可無別樣施惠。 死者有身役未捧之類, 竝蕩減。” 又敎曰: “雪後寒威斗緊, 念彼宮城外宿衛軍卒, 何以堪耐? 入直之士, 自內已饋酒食, 內外何殊? 其令內資, 饋以溫酒, 司宰賜以乾殽。” 癸酉, 幸穆陵, 仍詣健元陵展謁。 以手札曉諭父老, 仍命有司, 畿邑春收米, 待秋退捧, 楊州丁卯條還上未收者, 特爲蕩減。 又命賑廳, 戶給小米一斗, 命醫司擇送曉解藥理者, 救療湖西癘疫人。 展謁厚陵, 住蹕松都, 遣官致祭于高麗太祖陵。 鄭夢周、徐敬德書院, 竝命致祭, 竪碑于敬德宮穆淸殿。 親臨滿月? 掁, 設文武科, 兼試武才。 命承旨, 曉諭父老, 新舊還上未捧及以勑需出債於各衙門者蕩減之。 出惠廳米一千石, 分給所經各邑。 王曰: “親臨故都, 千載一時。 玆下御製詩三首, 依世宗朝故事, 令入侍右相爲記, 備載顚末, 鏤板揭諸南門樓。” 築文殊山城。 甲戌, 展謁獻陵, 命承旨, 招集父老, 問民間疾苦, 庚、辛兩年還上之未捧者, 特令蕩減。 出御春塘臺觀武才。 時, 奸壬擅弄, 誘脅兇徒, 大起誣獄, 日夜鍜鍊, 魚肉搢紳之禍, 迫在呼吸。 王察其奸狀, 特下備忘, 主謀大臣黯及參鞫禁府堂上, 竝絶島安置。 遂奪訓鍊大將李義徵兵符, 以申汝哲代之。 敎曰: “追惟己巳之事, 不覺忸怩于中。 莫察悃愊, 誤疑良佐, 遂至恩禮衰, 而幽鬱莫伸。 予嘗中夜平心徐究, 怳然覺悟, 大加悔恨, 寤寐輾轉, 積有年所矣。 今玆渙發綸音, 重正壼位, 寔出於復天理之公, 而賴宗社之默祐也。” 遂於六月一日, 復行中宮冊禮。 告太廟受賀, 大赦中外。 又敎曰: “邦運回泰, 中壼復位, 民無二王, 古今通義。 其收張氏王后印綬, 仍賜禧嬪舊爵, 以爲世子不廢定省之禮。” 又曰: “予惟君臣猶父子, 何語可隱耶? 嗚呼! 曾母之賢, 不免投杼。 從古所難處, 莫難於父子之間, 所易動者, 亦莫易於父子之間。 當初建儲之日, 緯漢之疏猝起, 又有有疾始冊等說。 予於前史, 略已閱覽, 非不知伺間恐動之手段, 每出於此等處, 而予病恒在粗暴, 向時處分之過中, 職由於此。 嘗於燕閒之際, 平心徐察而自道曰: ‘今日建儲, 宗社之大計也, 今日臣子, 世祿之舊臣也。 如非悖理之人, 孰敢有一毫他意哉?’ 然則緯漢之凶計, 無乃得售, 而諸臣之本心, 無乃未暴耶? 以此常自悔恨, 神明所知也。 又竊觀彼輩之所爲, 罔非循私蔑公反道悖倫之事, 決不可與共國事。 今者天誘其衷, 其欺誣君父, 魚肉搢紳之計, 透露無餘。 當此之時, 若以顚倒爲念, 不思所以廓淸, 則是過而不改也。 爲今日懲前毖後之道, 正宜豁斷私意, 痛祛疑阻, 開心見誠, 開不諱之門, 納忠讜之論。 自今維新, 期致太平, 國家之福也。 咨爾群工, 敬而聽之。” 又命己巳死諫者吳斗寅、朴泰輔等, 贈官旌閭, 後命立祠江上, 誅竄其時煽禍干名義者有差。 其後, 又敎曰: “自今著爲邦制, 勿以嬪御登后妃。” 幸永昭殿, 行酌獻禮, 復享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于文廟。 京畿儒生疏請復享兩賢臣, 事下禮曹, 請詢問大臣。 王曰: “兩賢臣道學, 予非不知, 初爲醜正之徒所欺蔽, 至於黜享, 常悔恨”, 卽命擧行。 因左議政朴世采建議, 依大誥作敎文, 以破朋黨之意, 曉諭中外。 幸太學謁先聖, 仍試士。 掌令金灝疏請亟毁東垣之閣, 此卽行幸泮宮時, 自內登臨觀瞻之所也。 優批嘉尙, 仍賜皐比以褒之。
乙亥, 展拜于德興大院君廟。 王曰: “展拜私廟, 感愴曷已? 奉祀人加一資, 其長子除職。” 敎曰: “予嘗讀《宋史》, 至岳武穆事, 不覺曠世相感。 其令合享於永柔縣諸葛武侯廟, 以樹百代風聲。” 夏旱, 親詣南郊禱雨, 下敎責躬。 減御供省浮費, 使八道道臣, 着力賙賑, 曉諭民間。 又下內司米、布、鹿皮、丹木、白礬及銀子一千兩于賑廳。 咸興有所謂本宮, 卽太祖潛邸, 而奉安翼祖以下四大王位版。 永興亦然, 蓋倣漢原廟之制也。 神德王后追祔己久, 而於二宮, 皆未遑焉。 王因筵臣陳白, 亟命擧行, 親製祭文以送, 以本官本殿參奉, 差定祭官, 罷別監次知祭祀之例。 丙子, 下敎于八道監司曰: “今年卽丙子也。 追惟往歲, 念我民事, 殆有甚焉。 干戈搶攘之時, 猶有避禍全躬之地, 今則八路大侵, 赤子阽於危亡, 無處求生。 監司、守令, 須體予意, 另加賙賑。 如有憑藉財利, 立視民死者, 予則孥戮, 斷不饒貸。 至於治盜, 則勿爲專尙機捕, 必先勞來安集。 且農者, 天下之本, 申飭列邑, 禁民逐末, 服田力穡, 俾得有秋。” 幸社壇, 行祈穀祭。 妖賊弘渤與群不逞, 潛謀埋置凶穢於世子外家墓所, 偸取兵曹判書申汝哲家奴號牌, 墜之其傍, 使墓奴拾來, 而急嗾五章, 上章告之。 命設鞫究問, 端緖微露, 未及鉤覈, 領議政南九萬、左議政柳尙運, 與參鞫諸臣, 請對陳達, 竝放送。 三司力爭, 更命設鞫, 罪人斯得, 諸賊伏法。 展謁昌陵, 仍詣順懷世子墓。 歷入仁祖潛邸時別墅, 命置碑閣守直人。 展謁永禧殿, 行酌獻禮, 世子從之。 展謁太廟, 創行古禮。 中宮、世子嬪隨行, 行廟見禮。 江都守臣疏陳, 明年正月二十二日, 卽淸人陷城之日也。 命賜祭于忠烈祠, 除地設壇於城外, 竝祭國殤及士民之死於兵者。 丁丑, 王謂吏判曰: “生民休戚, 係於守令。 漢時治郡第一, 輒增秩擢用。 我國奬用循吏之道, 不及於古, 或有善賑超資之類, 而亦不如古昔。 卿須留意於擇人, 使有實效。” 下敎責躬, 宣諭於道臣及監賑御史曰: “須日夜講究, 便宜從事, 苟涉變通者, 卽馳奏。 西土、北關, 饑饉非常, 或者別有罪關綱常, 而掩置, 身抱至冤而莫伸歟, 另加咨訪, 竝與民瘼以聞。” 又敎曰: “當春而勸農田, 著于《禮記》, 務本而禁民逐未, 載之《漢史》。 迺今八路荐飢, 萬姓阽危, 窮春振貸, 國不可已, 而勸農最爲急務。 申飭列邑, 以勸農勤否, 施之殿最。” 夏旱, 幸社壇祈雨。 敎曰: “天降喪亂, 飢饉荐臻。 赤子仳離, 道殣相望, 傷心慘目, 有不忍言。 噫! 今者父而殺子, 倫常斁矣, 人而食人, 人理滅矣。 赤子化爲龍蛇, 處處嘯聚, 是豈本性之惡耶? 予不能盡懷保之道, 致有此境界。 夙夜憂歎, 無樂南面。 今也大地焦赤, 萬姓啜泣。 代犧桑林, 誠切自焚, 而誠未格天, 視天夢夢, 今日國事, 可謂遑遑矣。 昔當壬辰板蕩之餘, 餓殍日積, 宣祖至有先死不可得之敎。 今日小子之心, 卽先祖當日之心也。 自今日避正殿, 益加寅畏, 其自政府, 廣求直言。 嗚呼! 今日朝論, 渙散極矣。 各立門戶, 傾軋成習, 聞人微過, 如得奇貨, 枝節層生, 反覆沈痼, 和靖無期。 心腹先潰, 其國不亂者, 未之有也。 君臣一堂, 戒誨諄諄, 而一向泄泄, 甘爲亡國之大夫, 是何道理耶? 《易》之《坎》曰: ‘習坎有孚。 維心亨行有尙。’ 遭如此險艱之辰, 其心不誠, 尙何望出險而致亨乎? 咨爾臣僚, 明聽予訓, 精白乃心, 毋曰: ‘旱災是適然’, 毋曰: ‘黨論不可破’, 式克欽承, 少答天譴。” 自社壇還宮時, 駐輦金吾前路, 疏決罪囚。 罪囚進伏駕前, 王見其蹣跚顚仆之狀, 惻然曰: “天之生民, 厥初何殊, 而今皆爲鬼形, 慘矣。 夏禹之泣辜, 誠信然矣。” 又曰: “昔我宣祖値癸、甲兩年之凶荒, 出御供米, 以賑飢民。 今亦參酌除出御供米, 以補栗島饋飢之資。” 親製文賜祭于關西死人。 以虹變, 下敎責躬。 命復林慶業官, 賜祭。 戊寅, 親書文會書院扁額以下。 下敎責躬, 宣諭諸道, 使之振貸勸農。 又敎曰: “國家不幸, 東西標榜, 爾來百年, 輾轉沈痼, 可勝歎哉? 我國褊小, 門閥是尙, 用人之路已狹, 而一進一退, 半國之人, 又多滯鬱, 何以爲國? 推考其源, 實予不能以大公至正, 建極于上, 有以致之。 予責予躬, 心焉慙忸。 方今陽春載回, 和氣藹然, 與時俱新, 寧不在今? 惟爾諸臣, 澡心易慮, 毋如前日之爲, 用勉共濟之圖。” 又曰: “人主, 爲民父母, 民飢猶己之飢。 矧今餓殍日積於市, 而莫之救, 曷堪痛傷? 其令賑廳, 特加濟恤, 更飭諸部, 着實埋胔, 以示予惻怛之意。” 遣監賑御史于湖西。 幸太學謁先聖。 還次春塘臺, 試取文武, 遣大臣致祭癘壇。 端宗追復題主時 王將親臨, 副提學趙相愚, 以癘疫熾盛, 請寢親幸, 王特罷其職, 答政院覆逆曰: “予之所守, 自信達理, 而無識之言, 出於論思, 警責之擧, 不是異事。”
又答玉堂箚曰: “古人有癘氣大熾, 死亡相繼, 獨留不去者, 父老至以癘氣之不能相染異之。 不能相染者, 以其至誠也。 況人主以千乘之尊, 當國家莫大莫重之禮, 懾於癘氣, 不敢出一步地, 而乃曰: ‘追遠之誠雖切, 而無可奈何云, 則是不如匹夫之所守也。 相愚反效兒女子所爲, 不諒追遠之至誠。 達理君子, 從容觀之, 必不以予言爲不是也。” 己卯, 敎曰: “邦運不幸, 四年大殺, 萬死餘喘, 又罹無前之虐癘。 始自西陲, 遍及八路, 里無完戶, 百不一瘳。 民靡〔不〕孑遺, 國將焉依? 是用憂遑, 食息靡寧。 虔誠祈禳, 神不我顧, 靈應逾邈。 罪實在予, 赤子何辜? 嗚呼! 鑾輅迎春, 和氣藹然, 草木昆蟲, 咸囿雨露, 而環東土億萬生靈, 獨阽於危亡, 爲民父母, 當作何懷? 內而京兆, 外而按道之臣, 另加勑諭, 給藥救療, 收屍埋瘞, 分遣近臣, 設壇賜祭, 以示憫惻, 少慰煩冤。” 大臣有以文宗朝直提學元昊服端宗喪, 不就除命, 忠義與六臣無異, 聞, 特命旌閭。 又白金時習節義, 今之伯夷, 卽命贈職賜祭。 親臨淑明公主第問疾, 及喪哭臨。 命金應河、李舜臣子孫之立朝者, 差送守令, 不廢其祀。 命復顯德王后父權專官爵。 夏旱, 幸社壇祈雨, 下敎責躬, 勑勵群工, 減膳撤樂。 庚辰, 出御春塘臺, 觀武才, 試取文武。 冬以雷變, 命召大臣、二品以上、三司, 各陳弭災之道。 諸道初不落種者, 特減大同, 兩西無大同處, 依大同例量減。 命建啓聖廟於明倫堂之旁。 辛巳, 書下夷齊廟扁額曰淸聖, 仍敎曰: “特以御筆賜額, 聊寓千載起敬之意。” 夏旱, 幸社壇祈雨, 敎曰: “昔漢明帝, 以楚獄多濫, 夜起彷徨, 親臨洛陽獄, 多所決遣。 卽今金吾時囚甚多, 幽鬱之氣, 豈不下干天和乎? 當此憫旱之時, 宜有非常之擧。” 遂輦過金吾, 親臨錄囚。 下敎責躬求言, 避正殿減常膳。 八月十四日, 王妃昇遐于昌慶宮之景春殿, 謚曰仁顯, 陵號曰明陵, 殿號曰敬寧。 臺臣請罪議藥諸醫, 王曰: “古人云: ‘死生有命。’ 人之壽夭, 莫不在天, 況帝王之尊乎? 今欲專咎於諸醫, 豈理也哉? 昔唐之懿宗, 以公主之不起, 多殺醫人, 皇明馬皇后臨崩, 以勿妄殺告戒。 二者孰是孰非? 予嘗以此, 言于內殿, 深服予言矣。” 不從。 親鞫巫蠱獄, 諸賊伏法。 逆宗杭謀害國母之形已具, 特命(罄)〔磬〕甸, 又令歛葬。 敎曰: “今予爲宗社爲世子, 爲此不得已之擧。 予豈樂爲哉? 禧嬪張氏, 使之自盡。 噫! 世子之情事, 予豈不念, 諸臣之爲春宮惓惓之誠, 亦豈不知哉? 思之又思, 思之熟矣, 事已至此, 捨此處分, 無他道理矣。 玆以予意, 諭諸左右。” 壬午, 幸太學, 謁先聖, 試取文武。 十月三日, 冊金氏爲王妃, 慶恩府院君柱臣女也。 癸未, 敎曰: “漢之文帝, 當海內寧謐, 每下詔令, 輒軫元元。 矧今八路民生, 才經餓癘, 尙未蘇息, 而身役侵困。 方春發育, 哀我無辜之民, 獨阽於危亡, 爲民父母, 當復如何? 農者, 天下之本, 凶歲勸農, 尤宜着力。 攸司體予至意, 毋或玩愒。 仍念君之於民, 猶父之於子, 子有沈痼之疾, 爲其父者, 安有立視其死, 而不爲之急救乎? 目今生民之弊, 莫如良役, 而一日二日, 徒事遷就, 不思濟民於水火之中, 予實慨然也。 趁玆新春, 須速變通。” 又敎曰: “安不忘危, 有備無患, 爲國之急務。 目今災異疊見, 而都城咫尺, 虎豹恣行。 虎者, 兵象也。 其令將兵之臣, 亟講陰雨之備。” 幸慕華館, 餞勑使, 歷臨武安王廟, 謂侍臣曰: “武安之精忠大節, 平昔深慕, 而送勑之後, 遺廟入望, 今來瞻揖, 曠懷尤切。” 遣官致祭于宣武祠。 命設釐正廳, 差出堂、郞, 使管良役變通, 敎曰: “可急者急之, 緩者緩之, 緩急各有次第。 事或太急, 則不無生弊, 着念不懈, 漸次以治, 則自然就緖矣。” 蕩條己卯未收身布及各司奴婢一萬一千餘口逃故貢布。 親行大政。 甲申, 下敎勸農振貸。 又勑釐正廳諸臣, 毋如前日之悠泛。 命減每歲二月闕內鋪庭松葉。 王曰: “當初欲築北城, 而論議携貳, 訖今未定, 恬憘度日, 誠甚泄泄。 大計不可不速定。 若爲善修都城, 則宗社在此, 人民在此, 百姓各爲其父母妻子, 必盡力死守, 且無藉寇之患, 定計修築可也。 江都、南漢, 俱是保障之地, 終不可棄也。 南漢則連爲繕修, 江都則土城之築, 意有所在, 而今年才築, 明年旋潰, 功力難繼, 莫如堅築內城之爲愈也。” 謝恩使自燕還, 以海賊張飛虎事聞, 王曰: “以古事觀之, 先建年號者, 其勢不長。 此賊先建年號, 知其不能久也。” 夏旱, 格于太廟禱雨, 世子行亞獻禮。 下敎責躬求言, 勑勵群工。 減膳、撤樂、禁酒。 親幸禱雨於先農壇。 蕩滌己卯未收身布一百八十七同、米二千五百餘石、錢一千五百餘貫。 守宰犯贓之類, 錄送兩銓, 勿除外職。 親製祭文, 遣近臣祈雨于漢江及楮子島。 親臨春塘臺, 試取文武。
乙酉春, 大雪。 敎曰: “自古災異之作, 皆由於人事之失, 而莫非上天仁愛之心也。 遇災而不知自省, 則禍亂隨之, 可不懼哉? 廼者正當季春之月, 陽氣發泄, 句萠盡達, 而大雪彌日, 天氣寒澟。 春行冬令, 其應不佳。 夙夜憂懼, 若涉春氷。 反躬修省之不暇, 而第念目今切急之憂, 莫大於朝論之渙裂。 前後勑勵, 出於至誠, 而積痼之病, 救藥未易, 予甚憫焉。 上下雷同, 非國家之福, 則非以此望之於群工也。 論事之際, 各執公心, 可否相濟, 而痛祛傾軋之習, 則朝著和靖矣。 咨爾臣僚, 務盡寅協, 少答天譴。” 幸太學, 謁先聖, 試取文武。 詣敬寧殿, 行酌獻禮。 丙戌, 分遣監賑御史于北關、嶺東, 特減嶺東九郡大同布。 命漢城府, 埋瘞前後餓死人骸骨暴露者。 八月, 王出御法殿, 世子奉觴獻壽, 宗親、文武侍宴終日。 前歲, 群臣以王卽位三十年, 請上徽號, 進宴陳賀, 王謙揖不許。 章甫疏請, 至下言志之章曰: “否德承丕基, 于今卄九稔。 歲連痒稼穡, 民屢奪餬飪。 國事維其棘, 天災日又甚。 休提稱慶說, 但自夙宵懍。” 世子三上章陳請, 猶不從。 大臣累請不已, 只許陳賀、進宴, 而務從簡約, 外宴勿用女樂, 永爲定式。 卜日未及行, 因風災, 特命停止, 至是行禮。 敎曰: “今玆進宴, 予豈樂爲哉? 春宮之三疏, 公卿之懇請, 終難牢拒故也, 而事近豫大, 只增愧慄。 宴禮已過, 宜有推恩之道。 士族八十、常漢九十以上加資, 婦女賜米肉。 耆老諸臣二品以上, 別賜衣資米肉, 三品以下賜米肉。” 戊寅以前, 未捧還上, 幷蕩減 , 聚會都下常漢耆老八十以上數百人于寬敞處, 令禮官, 具聲樂饋酒肉。 丁亥, 出臨春塘臺觀武才, 仍庭試文臣。 時, 麻疹大熾, 死亡甚衆。 敎曰: “曾在戊、己, 有全家俱歿者, 恤典擧行之事。 鰥寡孤獨無依之類, 今亦抄出施恤。” 命建高麗忠臣鄭夢周影堂, 賜祭。 王曰: “曾予因一喜怒, 妄殺奉憲之吏, 懺悔靡及。 渠雖微賤, 人命至重, 所奉者法也, 而駢首殞命, 尙今惻然。 其妻孥優給米布。” 仍勑中外官吏, 毋敢以喜怒濫刑殺人。 臨講筵, 謂臣曰: “鄭良霄窟室, 爲長夜之飮, 卒喪其身。 酒之禍自古然矣。 文王誥敎小子、有正、有事, 無彝酒越, 庶國飮惟祀, 德將無醉。 雖飮而思此古訓, 知所爲戒, 則豈有酒之害哉? 有官守者崇飮, 則抛棄職務, 甚者父母禁之而不止, 至於喪身, 可不戒哉?” 戊子, 王謂侍臣曰: “革弊之論, 非不好也, 而以釐正廳觀之, 大抵變通極難。 事之利害, 必須的見, 然後方可變通。 若日日改革, 急急求治, 則無益而弊又滋甚。 自古不善變通而不煩碎者, 未之有也。” 又敎曰: “生民休戚, 係於守令, 不可不愼擇也。 昔唐宣宗, 以李行言之名, 帖於殿柱。 予嘗作一帖子, 名曰代柱帖, 別錄褒貶守令, 時時考閱, 而第不無落漏者。 其令銓曹, 純褒守令, 抄擇書入。” 以三南癘疫熾蔓, 命送藥物救療。 夏旱, 親禱于太廟, 減膳撤樂。 敎曰: “惟予之病, 嘗自點檢曰, 喜怒不中也, 言路不闢也, 施措乖宜也, 實惠未究也。 宜自政府, 廣求直言。” 駕幸南郊祈雨。 親製文遣近侍致祭于雙嶺戰亡處。 敎曰: “關東人蔘之弊, 言之已久, 每欲變通而未果。 昔宋仁宗, 夜思燒羊, 忍飢不食, 況民弊之大者乎? 其令內局裁減。” 因白虹貫日之變, 下敎責躬, 勑勵群工, 申飭陰雨之備。 己丑, 幸太學, 謁先聖, 試取文武。 筵臣白曰: “黃一皓事, 擧世只知其爲冤死, 不知其爲死節。 頃年黃玧之喪, 自上以死節人之子, 喪葬需題給爲敎。 聖鑑高出凡人, 所見萬萬矣。” 王曰: “事係尊周, 終被慘禍, 特爲贈職、贈謚。” 敎曰: “箕子封於東方, 敷陳八條之敎, 遺化不泯於數千載之下。 曾遣近侍, 致祭其祠, 而歲月已久。 又遣承旨致祭, 另加守護。” 又曰: “平壤收復後, 宣廟問李如松前後勝敗之異, 答曰: ‘先來北方諸將, 專用防胡戰法, 故取敗, 後來者能用戚將軍禦倭法, 故得以全勝。’ 宣廟購得其書, 使軍門錬習, 而今觀之, 無活法矣。 不可無商量變通者。 其令將兵之臣, 講究活法。” 庚寅, 下敎勸農賑饑。 先是, 王違豫累月, 平復, 群臣屢請稱慶之擧, 王固讓, 久而後勉從。 四月二十五日, 出臨崇政殿, 世子進酌, 宗親文武列侍, 以次獻壽。 幸臨春塘臺觀武才, 試取文武。 江原道量田畢, 命減嶺西收米每結二斗。 筵臣或以人才眇然爲言, 王曰: “人才之爲難, 豈以末世而無才耶? 自古創業之君, 皆用勝國之人才, 以至成功, 何代無才? 只坐於不知而不用耳。” 辛卯, 下敎勸農, 賑饑。 王令入侍諸臣, 各陳北漢築城便否, 諸議不一。 王曰: “謀之雖多, 決之欲獨。 都城咫尺, 有此天險之地, 若不及今修築, 更待何時? 前以水泉爲慮, 今聞水泉亦足”, 決爲築城。 以冬雷, 下敎責躬, 勑勵群工。 又敎曰: “方今痼弊, 莫如良役, 故特軫民隱, 才令變通, 而一面充補闕額, 一面侵徵隣族, 決非王政之所忍爲。 辛卯以上軍兵奴婢之逃亡者, 徵布竝爲蕩減。”
壬辰, 下敎勸農, 特減畿甸災邑春收米每三斗。 夏旱, 下敎責躬曰: “予之心, 切於愛民, 而民不被其澤。 克己之功, 有所未盡, 虛受之量, 有所不弘。 非不欲振紀綱, 而頹靡之患彌甚, 非不欲務實功, 而虛僞之習尙多, 皆予之失也。 避正殿益篤對越之誠, 宜自政府, 廣求直言, 以補不逮。” 又曰: “居六卿之首者, 果能用捨公而是非明, 則官得其人, 朝著和靖。 方岳之臣, 黜陟幽明, 一出公心, 節鎭之帥, 若常對壘, 毋敢怠忽, 則庶不負朝家委寄之重矣。” 又曰: “孝婦抱冤, 三年枯旱, 燕臣慟哭, 五月飛霜。 若有至冤未伸者, 中外之官, 詳察以聞。 至於斷獄聽訟, 勿以强弱爲立落, 一循曲直, 則小民庶無冤矣。 且近來士大夫風習不美, 廉隅太勝, (關)〔瘝〕曠日甚。 在昔壬、癸兵亂之後, 灰燼滿目, 士大夫不敢告勞, 咸萃輦轂, 奔走率職, 今之士大夫, 異於是, 予實慨然也。” 癸巳, 下敎勸農、賑饑。 以卽位四十年, 告廟陳賀, 頒敎頒赦。 大臣及文武二品以上會賓廳啓, 略曰: “殿下嗣服以來, 聖德洪業, 其宜揄揚大稱者, 誠不可(縷)〔縷〕指殫擧。 若端宗復位, 聖孝益光, 坤位重正, 日月貞明。 追神宗罔極之恩, 體孝廟至痛之敎, 築壇享祀, 大義關於天下, 風聲動於一國。 惟我宣祖大王, 實有至德洪功, 群臣仰請尊號, 始讓終受。 夫豈不可, 而聖祖苟然受之乎? 臣等所望於殿下者, 亦惟在於率聖祖攸行, 非敢爲豫大之說, 累聖上執謙之德也。” 王曰: “歲饑民困, 夙夜憂懼。 雖有祖宗已行之例, 非涼德所敢望。 決難允從。” 於是, 大臣屢啓懇請, 又率百僚庭籲, 世子上疏請從群臣之議, 兩王子率諸宗疏請, 王後乃勉從。 群臣議上尊號曰: “顯義光倫睿聖英烈。 敎曰: “因御藥所用生牛黃, 數日之內, 屠宰數百首之多。 雖是畜物, 心用惻然。 屠宰限五日, 姑停。” 秋, 出臨春塘臺試武才。 正言洪啓迪疏論禁掖中有歌呼之聲, 有乖於放鄭聲之訓矣。” 王曰: “若非諫臣之言, 此等怪駭之擧, 何以知之? 聚會歌呼者, 査出痛懲, 丘史之出入闕庭者, 一倂嚴禁。” 仍賜啓迪豹皮以褒之。 遣監賑御史于湖南。 敎曰: “內帑銀子一千兩, 下送湖西, 八百兩下送畿營以補賑資。 江都米萬石, 移送湖南, 沿海穀萬石, 移送濟州。” 因冬雷下敎, 責躬求言。 甲午, 敎曰: “賑政、勸農, 正當此時申飭, 而疾病如此, 不得親自別諭, 政院措辭下諭於諸道監司、留守及監賑御史。” 時, 聖候久在違豫中, 藥院進江鴨, 王曰: “《禮記》月令, 無覆巢, 無取麛卵, 古聖人取生育之意也。 當此春和萬物生育之時, 不忍傷害。 治病自有他道, 何必取此? 勿復進入。” 再招濟州貢人於差備門外, 詳問賑政民瘼。 聞其癘疫熾盛, 下送藥物救療。 陞配宋朝周、張、兩程、邵、朱六賢於聖殿, 頒敎。 九月十九日, 受群臣進宴。 乙未, 下敎勸農賑饑。 命大臣, 與禁府、刑曹堂上, 會議賓廳, 稟旨裁決滯囚。 敎曰: “珍島一郡, 十年凶荒, 孑遺之民, 無以支保。 無乃海外殘氓, 或有抱冤莫伸, 上干天和而然耶? 其令道臣, 搜訪以聞。” 丙申, 遣監賑御史于濟州。 王曰: “量田已久, 經界不正。 孟子曰: ‘王政必自經界始。’ 必待八路年豐, 一時爲之, 則了無其期, 斯速擧行。” 親製文, 賜祭于濟州餓死人。 敎曰: “《禮記》月令, 掩骼埋胔, 蓋以所愛於生者, 推及其死者也。 況耽羅一域之民, 前後餓死者, 至於累千, 其不能收屍, 暴骨於野者必多。 念之不覺惻然。 其令守臣, 埋瘞以聞。” 旱災, 下敎責躬, 訓勑群工, 下銀子二千兩于畿營, 以補賑資。 王曰: “啓覆之不行, 于今三年。 或罪犯至重, 法未施而徑斃, 或情有可恕, 而一向淹滯。 昨年爲此之慮, 必欲行之, 而因予症情有加, 未果行。 今年則決欲行之。” 遂於九月啓覆, 其令待季冬行刑。 丁酉, 下敎於諸道監司, 勸農修堰曰: “病裏一念, 都在於民。 言非騰口, 亶出心腹。” 時, 王累年違豫, 眼眚脚痺等症最苦。 將浴溫, 下諭於湖西守臣, 訪求民瘼, 使之狀聞於行在。 三月, 行幸溫泉, 圻、湖兩道年八十以上, 勿論士族、常漢, 竝命加資, 引見監司及差員、守令, 訪問民隱。 遣官致祭于宋時烈、李貴、金集、洪翼漢、尹集墓。 立尹集祠, 錄用子孫。 令賑廳堂上, 再聚流丐於浦邊, 分給乾糧, 回鑾後命道臣, 定差員繼給失所流丐。 特減湖西丙申條大同米, 每結二斗。 以文元公金長生從祀文廟。 敎曰: “近來闕內有賣酒者。 事極驚駭。 令攸司, 考律科罪。” 王臨御四紀, 躬親萬機, 夙夜孜孜, 不遑暇食。 及過中身, 疾疹連綿, 越在乙酉, 欲傳禪于春宮。
春宮上疏固讓, 宗親、大臣、文武百官, 下至坊民耆老, 莫不奔走兢爭, 遂寢成命。 至是敎曰: “五載沈痼之餘, 目疾添重, 視物益昏, 酬應漸難, 國事可虞。 依國朝及唐時故事, 其令世子聽政。” 世子陳章力辭, 答曰: “積年沈淹, 眼患又劇, 事務遲滯, 病裏憂深, 命爾代勞。 玆乃國朝故事。 爾何讓焉? 嗚呼! 付託至重, 爾責至大, 夙夜寅畏, 罔敢或怠。 敬怠之分, 興喪斯別, 可不懼哉, 可不愼哉? 《書》曰: ‘念終始典于學。’ 爾宜勉旃。” 答再疏曰: ‘昨日批旨訓戒之言, 爾其式克欽承, 毋庸更辭。 且近日事, 處分正而是非明, 可以不惑於百世也。 事關斯文, 顧不重歟? 故言之, 予志汝遵, 莫之或撓。” 先是, 奉朝賀宋時烈, 以兩朝禮遇之儒賢, 王待之以賓師, 其門徒尹拯, 附麗賊鑴, 久欲崖異於時烈。 及時烈撰拯父宣擧墓文, 所揄揚不副其望, 拯因此懷憾, 恣意修却。 又作擬書於時烈, 臚列罪狀。 於是, 儒林磔裂, 朝論橫潰, 半一世靡然, 以拯之背師, 爲當然道理。 王亦未燭其事實, 嘗下父師輕重之敎, 逮丙申墓文擬書, 得徹乙覽, 始察其憑藉構捏之狀, 遂敎曰: “父師輕重之說, 曾已下敎矣, 一自擬書、墓文詳覽之後, 予深究義理, 是非大定, 可以有辭於後世矣。 爲我子孫者, 須遵此意, 堅持勿撓可也。” 至是, 又於批旨中, 敎諭春宮, 反復丁寧之訓, 日星昭揭, 以貽萬世燕翼之謀。 絲綸一播, 士林莫不聳賀。 王又手書華陽、興巖兩院額號以揭之, 遣官賜祭。 敎曰: “人主尊賢, 出於至誠, 則庶幾正士趨, 而熄邪說。 予意豈偶然哉?” 華陽, 卽時烈俎豆所, 興巖, 卽宋浚吉俎豆所也。 戊戌, 遣監賑御史于平安道。 王曰: “以姜鳳瑞擊錚, 有議大臣之敎, 而予於平日, 以姜獄事, 心常惻然。 《易》曰: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臨昌君, 以昭顯血孫, 其子孫之蕃衍, 可比於唐之汾陽, 福善之理, 果爲昭昭矣。 及閱李明漢文集, 至姜碩期諡狀, 知其爲賢宰相。 且於慶德宮高處, 望見昭顯廟, 愴其神道之孤單。 感此三件事, 遂成三絶。 昨年首相以復官事陳達, 心有所趑趄, 不能盡言, 只許復官, 蓋碩期之被禍, 只綠其女之故也。 昔在乙未年間, 筵臣李端相極言金弘郁之冤, 孝廟噓唏歎息, 而事係先朝, 不敢容議爲敎。 其後終復弘郁之官, 聖祖之微意, 可知。 獻議諸大臣, 知此意可也。” 又使二品以上、三司, 會議大臣, 諸臣莫不稱冤。 王曰: “予志先定, 公議大同, 伸理之典, 亟令擧行。” 於是, 復昭顯世子嬪位號, 封其墓。 姜碩期、金弘郁賜祭贈職, 錄用子孫。 敎曰: “予疾沈淹, 親臨啓覆, 其勢末由, 年年滯獄, 庾死而已。 啓覆亦在刑人之中, 不可無變通之道。 大辟處斷之際, 有難自斷, 則世子自當面稟。 自今以後, 凡係刑人公事, 一體入達于東宮。” 親製文賜祭于城隍及癘壇。 己亥, 用太祖朝故事, 以聖算六十, 入耆老所。 內局提調李頣命白曰: “太祖大王享年踰七十, 近古所無, 六十入耆所。 雖無可據, 故相臣沈喜壽、金堉所撰序文及《璿源譜略》, 竝記其事, 且本所西樓題名處, 設紗籠奉安, 必有所聞而然矣。 今此李楫之書請, 旣據故事, 而王世子喜懼之情, 不可不念。” 王曰: “予本來多病, 五十不能自期矣。 旣踰五十, 則常念太祖六十入耆所。 予若年至, 而題名於聖祖之下, 則亦盛事也。 今世子以此屢請, 予念其喜懼之情, 玆已許之矣。” 於是, 建靈壽閣于耆所, 奉安御牒。 四月, 王出御景賢堂, 宴耆老諸臣, 賜銀盃。 又賜樂, 耆老諸臣, 退宴於耆司。 敎曰: “觀武才, 或間二三年, 或四五年爲之, 故例也, 緣予積年沈痼, 未得設行, 今至十年。 其令命官代行, 以示慰悅之意。” 九月, 王出御景賢堂, 受群臣進宴。 分遣均田使於三南, 親哭臨于延齡君喪次。 庚子, 以聖算六十, 陳賀頒敎, 六月, 聖候添重, 世子再遣大臣、重臣, 禱祈于宗社、山川。 八日辰時, 王大棄群臣于慶德宮之隆福殿, 春秋六十。 是日, 京城旄倪、輿儓, 趨奔闕下, 如哭父母, 至於深山窮谷, 亦莫不奔走號泣。 中宮下敎于院相曰: “大行大王平日盛德, 朝紳非不知之, 而猶有所未能悉者。 酬應庶務, 屢廢寢食, 敬事上天, 遇災恐懼。 四時之候, 或不調, 雨雪之節, 若失時, 凡有害於農, 則輒憂形於色, 日之陰晴, 風之從來, 雖夜必使女侍察之。 民憂國事, 念念不忘, 夙夜憂勤, 終始如一日。 多年積傷, 致損聖壽。 至於喪葬諸具, 軫念經費, 曾有措置。 凡百祭器, 以此所下銀子造成, 而又此三千七百金, 大行大王所以預備賑資者也, 今下地部, 以補國葬之費。 襲歛衣襨, 亦自內備用, 如有不足, 該曹只待書示者入之, 務遵平日恤民省約之至意。”
襲斂之時, 大臣、禮官、政院、三司入侍, 禮也。 王英明特達, 寬弘勤儉, 誠孝之篤, 出於天性, 自在視膳之日, 克盡怡愉之道。 及至嗣服, 以千乘之尊, 躬曾、閔之行, 奉事慈懿、明聖兩東朝, 承歡晨夕, 和氣藹然。 每歲親享太廟, 春秋必展拜園陵, 遍盡諸陵, 而或至再三焉。 惟我國家, 聖神繼承, 豐功盛烈, 巍然煥然, 觀德之廟、崇報之儀, 庶幾畢擧, 而王惟猶未也。 推廣孝思, 以爲威化回軍, 尊周之義, 不可不明, 字數不齊, 諸廟之禮, 不宜異同。 於是, 加上太祖、太宗謚號, 仁祖成中興之業, 孝宗明春秋之義, 尊爲世室。 端宗大王禪位之後, 數百年, 國人莫不冤鬱, 列聖有所未遑, 王斷自淵衷, 亟擧縟儀, 宗禮有秩, 神人胥悅。 別立中廟愼妃廟祭之。 王好學尙文, 崇儒重道。 淸讌之間, 手不釋卷, 經傳、史書、諸子百家, 以及東方文集, 無不涉獵, 凡一經覽, 平生不忘。 日三開筵, 孜孜不怠, 雖至暮年, 頻接講官, 臨文析理, 見解明透。 嘗論《心經》心之動靜曰: “出沒無常, 易發難制者, 莫如心, 故有動中有靜, 靜中有動之說。” 論《易》納約之說曰: “此則大臣當艱險之時, 不得已而可用此道, 若治平之世, 由間道結於君, 則不可。” 論《大有》之九四曰: “剛柔得中, 然後明而燭之, 健而決之。 如或徒柔而不嚴, 徒嚴而不柔, 則何以能保其有衆乎?” 論六五曰: “太柔則人心易弛, 故必用威如, 而《中庸》所稱發强剛毅, 足以有執者, 威如之謂也。” 又論歷代事曰: “漢成帝旣令方進自殺, 而又使厚葬, 應天之道, 豈如此乎? 宋景有善言, 熒惑徙一度。 人君之言, 當如是也。” 又曰: “予見前史, 實不知小人而用之者, 固有之, 或知小人而用之者, 亦有之, 蓋由於私意之不祛也。” 又曰: “君臣父子皆有可諫之道。扶蘇見焚坑, 而何可不諫? 幸而用其言, 無此禍矣, 豈扶蘇之過也? 或以爲過者非矣。” 又曰: “蓋蘇文雖惡, 太宗命將伐之, 猶可也。 若不親征, 雖無功, 亦未爲大失也。 玄宗殺三子納子婦, 此由於太宗之閨門不正也。” 王臨御四十有六年, 夙夜兢, 一以敬天勤民爲務。 對越之誠, 上格于天, 如傷之仁, 下孚於民。 國無南北之警, 封內乂安, 民囿覆燾之澤, 安生樂業, 而王以漢、唐富庶之治爲陋, 慨然有意於三代之盛, 措諸事爲者, 莫不修齊中出來。 《關雎》、《麟趾》之化, 旣洽於家邦, 而周官制度, 粲然復明。 禮樂文物, 增光列祖, 而洪圖大業, 以啓後嗣無疆之休。 此正一邦臣庶, 百世不忘者也。 神州陸沈, 日月晦暝, 而一脈義理, 不昧於左海之域。 若稽我仁祖大王, 抱《匪風》、《下泉》之痛, 遺高皇白登之恥, 越我孝宗大王, 奮發大志, 將大有爲, 至痛在心之敎, 可泣鬼神。 除兇刷恥之志, 皎如日星, 而天定靡期, 弓劍遽遺, 志士之痛, 至今如一日, 而《春秋》大義之亘古今不可滅者, 寢遠而寢微, 王大爲是懼, 奮然以一身擔荷, 乃於甲申重回之日, 追傷皇都淪覆之事, 設壇禁中, 遙祭毅宗皇帝。 將事之時, 怵惕、慘怛, 眞若親見天地之崩裂。 王以爲壬辰再造之恩, 萬世不可忘, 設壇于宮城北淨處, 命之曰大報, 歲以大牢, 祀神宗皇帝, 親製志感詩竝序, 令諸臣和進。 嘗曰: “苟非神宗皇帝動天下之兵以求之, 則惟我邦家, 其何以得有今日乎? 皇朝之速亡, 未必不由於東征, 而顧我國, 國小力弱, 旣不能復讎雪恥, 弘光南渡之後, 亦漠然不知其存亡, 每念至此, 未嘗不慨恨也。” 又曰: “神宗皇帝賜宣祖大王蟒龍衣, 至今藏置宮中, 有時披見, 不勝悽感。 大明之於我國, 恩猶一家, 而拘於强弱之勢, 今乃服事於彼, 天下豈有如此可痛之事?” 又嘗因論諸葛亮事, 王曰: “諸葛非不知恢復之難, 而盡其心而已。 神宗皇帝生死肉骨之恩, 寧忍忘之, 而丙子至今六十年, 人心懈怠, 漸不如初, 以是慨然矣。” 命刊行《大明集禮》, 親製序文, 漢人之流寓者廩其身, 收用其子孫。 又得皇朝成化年間所賜印跡於槐院故紙中, 王曰: “嗣位之日, 每用淸國寶, 心尙未安。 今皇朝賜本篆畫如昨, 以此摹刻作金寶, 藏置以用之。” 蓋王追仁、孝兩祖之意, 終身眷眷, 有不忍頃刻忘諸, 而又欲使後世子孫, 受此寶而嗣位, 以毋忘皇朝罔極之恩, 其至誠惻怛之意, 可質神明, 而永有辭於後世矣。
自漢文短喪以來, 臣爲君服衰之制, 廢而不行。 厥後數千載間, 非不有好禮之君, 而因循謬制, 終莫之變。 王下詢群臣曰: “《五禮儀》《凶禮》中, 烏帽、黑帶之制, 因閔純之議, 旣已釐正, 而團領衣、布裹帽, 未有變改古制, 有所未盡。 復古制可乎? 大臣、儒臣, 以朱子君臣服對。 王曰: “玆事自有朱子定論, 本無可疑。 斷然行之可也。” 大喪之日, 群臣奉遺敎, 受衰如古禮, 視事用布帽衣, 一洗千古之謬, 永爲後世之法, 此尤王之高明果斷, 逈出三代者也。 豈漢、唐之間, 所稱明君哲辟, 所可髣髴哉? 宋儒程頤有言曰: “夫子賢於堯、舜者, 語事功也。 堯、舜治天下, 夫子又推其道, 以垂萬世。 堯、舜之道, 非得夫子, 則亦何所據哉?” 嗚呼! 喪制, 人之大倫, 而三代之制, 千載廢墜, 至今日乃復行之, 使後之王者, 有所據而取法。 由是論之, 雖謂之賢於三代, 可也。” 群臣上尊謚曰: “章文憲武敬明元孝”, 廟號曰: “肅宗。” 是年十月二十一日甲寅, 葬于明陵甲坐庚向之原。 始, 仁顯王后之葬也, 王命曲墻不偏築, 丁字閣亦當中, 以倣長陵虛右之制, 蓋預憂民力之再勞也。 王世子嗣位四歲薨, 是爲景宗大王。 淑嬪崔氏誕一男, 卽我嗣王殿下。 中宮殿下, 徐氏, 達城府院君宗悌女也。 䄙嬪朴氏生延齡君昍, 早卒。 景宗娶靑恩府院君沈浩女, 後娶咸原府院君魚有龜女, 皆無嗣。 於皇上帝, 眷顧斯民, 降監下土, 茫茫九州, 腥膻百年, 而箕封一域, 八條之敎未衰。 當五百有興之期, 篤生聖人, 錫之以聰明、睿智之資, 濟之以剛毅、果斷之用, 使王成就從欲之治, 則將見挽回世道, 軼古昔先王之業, 而不畀先王必得之壽, 俾斯世不得躋大成之域者, 抑天無奈於氣數之屈伸而然耶? 此正天下萬世無窮之痛也。 然其建皇極之正, 明人倫之晦, 大經、大法, 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 而深仁厚澤, 滲漉在人者, 將千萬歲而彌彰, 嗚呼盛哉!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卷之六十五終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1책 110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자료소개 서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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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摠戎使 金重器 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을 巡審한 결과를 陳達하고 山城 축성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7년
월일 숙종 37년(1711) 2월 9일
이번 2월 초5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부사직 이우항(李宇恒)이 북한산성을 둘러보고 왔으니 각기 소견을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각각 소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북한의 형세는 전후로 대신과 제신이 벌써 모두 진달하였으나 다만 논의한 사람들이 더러는 수구(水口)가 낮고 평탄하다고 하기도 하고 더러는 만일 위급이 있으면 도민(都民)이 다 들어가야 하는데 내부가 좁아 수용하기 어렵다고도 하며 더러는 우물이 몹시 부족하다고도 하였는데 신이 이미 4일을 머물면서 두루 살펴보았으니 상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우물의 경우는 처음 도착한 날 절 중에게 물어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크게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모두 30여 군데이고 간수(澗水)도 15군데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가서 보니 중이 말한 곳은 현재 모두 마르지 않았고 여타의 우물도 많았습니다. 폐정(廢井)에 있어서는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으나 노승(老僧)들은 또 땅만 파면 어디든지 물이 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겠으나 대체로 물만은 넉넉합니다. 둘레도 30리는 되니 도성에 비하여 10리만이 모자라고 그 속에는 난석(亂石)이 무더기를 이룬 곳이 많이 있는데 아무리 에누리를 한다 해도 족히 도성의 반절은 쌓겠습니다. 신이 본 바로는 도민을 다 들어가게 해도 부족할 것이 없을 듯한데도 전후의 소견이 다 다른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쳐다보니 구렁은 깊고 좌우로는 태산이 벽처럼 섰는데 석각(石角)이 높다라 거접(居接)할만한 곳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반쯤 더 들어가니 차츰 넓어지고 정작 사방을 둘러보니 비로소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대(中臺)부터 이하는 더욱 넓고 그 중에서도 큰 골짜기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곳도 많이 있었는데 두루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도민을 포용할 만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창고를 지을 만한 곳은 10여칸 또는 수십 칸 가량은 간간이 있었으나 많지는 않은 듯하였고 또 평탄하게 터를 다듬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 사람이 살았던 곳인 것 같았습니다. 다만 수구가 낮고 평탄하며 한미산(漢尾山)이 대봉(對峰)이 되어 있어 혹자는 이것으로 흠을 잡기도 하나 좌우 두 봉이 깎아지르듯 섰고 길 한 가닥만 겨우 통해 있는데 뾰족한 돌 높은 바위가 군병이 지키는 듯 하고 있으니 돌덩이만 굴려서 공격하더라도 적은 필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한미산의 거리를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7리라고 하였으나 신이 보기에는 5리쯤 되어 보였는데 대포는 혹 도달한다 하더라도 위력은 필시 줄어들 터이므로 사람이 조금만 피하여 깊이 들어가면 피해는 없겠습니다. 신이 본 산성 자리도 많으나 이 산처럼 험고한 곳은 있지를 않았습니다. 남한산성으로만 말하더라도 사실 오랑캐들이 발붙일 곳이 있었으나 이곳은 그러한 걱정이 없습니다. 앞으로 조정의 정책(定策)이 어찌 될지 미리 알 수는 없으나 각처의 산성은 모두 흠이 없지 않으니 만일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주필(駐蹕)할 곳은 여기보다 나을 데가 없겠습니다. 다만 이 성을 쌓게 된다면 군향(軍餉)은 다른 성보다 몇 갑절 더 있어야만 운용할 수 있겠고 축조공사에 있어서는 돌을 끌어다가 쌓기만 하면 되고 그다지 높게 쌓지 않아도 족히 방어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이우항(李宇恒)도 아뢰기를
"우물은 과연 김중기(金重器)가 진달한대로 부족할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이 산의 동, 남, 북 3면은 극히 험절하여 가히 얻기 어려운 천험이라 하겠으나 더러는 내부가 좁다고 말하고 있는데 처음 들어가면 과연 너무 좁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골짜기로 들어서면 몸을 숨길 곳이 가장 많고 수구는 주산(主山)이 높기 때문에 낮고 평평한 것 같지만 실은 그리 낮지 않으며 한미산이 누르는 듯한 형세가 있다 하더라도 대포는 아마 넘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넘어온다 하더라도 우리인들 어찌 방비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다만 군향을 실어 들이는 일만은 평지와 비교할 바가 아니고 성내는 돌 길이 좁고 위험하며 한강(漢江)까지는 20리나 된다고 하니 이 점이 어려울 듯합니다. 축성 공사는 간간이 반절만 쌓아도 체성(體城)이 이루어질 곳도 있고 여장(女墻)을 쌓아야 할 곳도 있으나 공사는 대단하게 힘을 드릴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중흥사(中興寺)의 터가 그다지 넓지 않아 종사(宗社)를 옮겨 올 경우 협착(狹窄)한 염려를 면할 수 없겠고 용암사(龍巖寺)의 터도 넓지 않으며 또 많은 돌이 중첩하여 골짜기를 메우고 있으니 마군(馬軍)은 용납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김중기(金重器)는 아뢰기를
"산성은 본래 마군을 사용할 곳이 못됩니다. 도성으로 말하더라도 적이 밖에 있어 성문을 한번 닫으면 총융, 어영 양청은 밖에 배치하여야 하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훈련, 금위, 어영의 3군문은 호가(扈駕)하기 위하여 성내로 들어와야 하는데 3군문의 마군과 조정 사대부 및 장교가 타는 것까지 합하면 수천 필에 가까울 것이니 어디에서 풀을 구해다가 먹이겠습니까? 평안하고 일없을 때에 의당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아뢰기를
"평시에 마군이 없어 기를 일이 없었다면 모르거니와 기왕 마군이 있는 바에 완급에 다달아 어떻게 바로 버리고 가겠습니까? 이 역시 미리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판윤 이언강(李彦綱)에게 이르기를
"경도 전에 가서 살펴보았으니 소견대로 말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외방의 산성을 신이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형세로 말하면 이 성 같은 곳이 없습니다. 남한(南漢)과 철옹(鐵甕)같은 곳은 극히 험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이 성을 육박할 염려가 있으나 이곳만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수구(水口)는 다소 낮고 평평한 것 같으나 양변에 모두 깎아 세운 듯한 준봉(峻峰)이 있고 그 사이가 넓지는 않으나 족히 방수할 수 있습니다. 한미령(漢尾嶺)에서 대포가 혹 바깥쪽의 낮고 가까운 곳에서 넘어온다 하겠으나 필시 깊숙한 곳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병통으로 여길 것은 없습니다. 신 등이 가서 보았을 때에는 마침 우물이 얼고 말랐었으나 지금 들으니 우물이 매우 많다고 하니 이 역시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또 혹 좁다고 말을 하나 성 터의 둘레 30리 내에서 동쪽과 서, 북문 안은 지세가 약간 평탄하니 족히 군영과 창고를 지을 수 있겠고 이 밖에도 긴 골짜기가 처처에 있으니 협착하여 수용 못할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도성의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이 있으니 후일 불행하게도 나라에서 병란을 피할 일이 있어 임금님을 안전한 땅으로 모시게 된다면 계책이 여기보다 더 나은 데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군량은 반드시 조적(糶糴)이 있어야만 영구히 비치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일이 난처합니다. 혹 한 절반을 성 밖의 평지에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예조판서 이돈(李墪)은 아뢰기를
"이곳이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수문은 남한산성의 남문에 비하여 오히려 평탄한 것 같으니 우마(牛馬)도 다닐 수 있겠습니다."
하니,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수문은 지금 바위와 돌이 쌓였으니 통행할 수 없을 듯하나 북문은 약간 낮으니 우마도 다닐 수 있겠고 남문으로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아뢰기를
"옛 동문 곁에 작은 골짜기가 있어 조계(曹溪)로 넘어가는 길인데 그곳에 사는 중의 말로는 가벼운 짐만 실으면 우마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신은 수년 전에 빨리 북한산에 성을 쌓아 후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고 판서 이인엽(李寅燁)과 호조판서 김우항(金宇杭)에 대하여 사사로 수작한 말이 있었고 또 작년 첫 겨울에는 서둘러서 성을 쌓자는 뜻으로 사직 상소에서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그 후에 성상께서는 원대한 계려(計慮)임을 깊이 살피시고 특별히 비망기를 내리셨는데 한소열(漢昭烈)이 차마 백성을 버리지 못한 일을 인용하시기까지 하시면서 북한산으로 대계(大計)를 삼으셨습니다. 대체로 성상의 뜻은 일후에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될까 특별히 염려하여 이러한 하교가 계셨던 것이니 성 안에 가득한 도민(都民)들이 뉘라서 우리 전하의 성덕을 흠앙하지 않았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제신은 의당 성상의 뜻을 받들어 한번 살펴본 뒤에는 곧바로 요리하여 성을 쌓았어야 했는데 정작 그러지 않았습니다. 4대신 3대장 및 제재(諸宰)가 모두 이미 차례로 가서 형세를 살펴보았으면 족히 결정지을 만도 한데 이제 이미 4삭(朔)이 지나도록 완결짓지 못하고 끝내는 이우항(李宇恒)에게 또 다시 살펴보게 하니 비단 사체만 크게 손상시킨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국사는 사실 답답하고 갑갑합니다. 북한의 터가 극히 험함은 신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제신들이 이미 목격하고 상세히 진달한 바이고 또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도 도성의 지척(咫尺)에 이러한 천험(天險)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버려 둔 것이 참으로 가석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성 터의 형세를 알 만합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말고 빨리 성을 쌓는 일입니다. 만일 조정 의논이 일치한 뒤에 일을 시작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길가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이루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큰일을 이루는 길은 빨리 결정하는 것이 소중한 만큼 오직 성상께서 스스로 판단하여 하실 따름입니다. 지금 논자들은 역량(役糧)과 역군을 걱정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도하(都下)의 민호(民戶)가 자그만치 몇 만여 호인데 대호(大戶)는 각각 3명을 내고 중호(中戶)는 각각 2명을 내며 소호(小戶)는 각각 1명만 내게 하고 식량을 싸 가지고 와서 3일씩만 부역하게 한다면 오늘날 성 쌓는 것은 사실 도민들의 지극한 소원인데 뉘라서 즐겨 자식이 부모의 일에 달려오듯 하지 않겠습니까? 그 중에서 지극히 가난한 백성에게는 식량을 주면서 사역시켜도 불가할 것은 없겠으나 나라에서 요(料)를 주는 것은 공장(工匠)에 국한하여야 합니다. 작년에 고 판서 이인엽(李寅燁)의 말을 들으니 성을 쌓기 위하여 쌀 1만 석을 따로 진휼청에다 비치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요를 주면 족히 써 나갈 수 있겠으나 그래도 부족하면 신의 형 배하(配夏)가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서 한원(漢院)에 성을 쌓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역량이 전연 나올 곳이 없자 이인엽(李寅燁)과 상의하여 진휼청에서 약간의 쌀과 돈을 빌어 본전을 세워 두고 이자만으로 쌀 1,700여 석과 돈 5,000냥으로 한원에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이제 한원에는 일을 시작할 기약이 없으니 이것을 먼저 이 성을 쌓는 데에 전용한다면 이 역시 일조가 되겠습니다. 신이 판윤 이언강과 총융사 김중기의 말을 들으니 성 터가 극험하여 인력을 들여서 쌓을 곳은 매우 적어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경영하고 요리한 바가 있을 것이므로 이 두 사람에게 맡겨 감독하여 성을 쌓게 한다면 몇 달 안에 완공할 수 있을 것이나 이러한 중대한 일은 반드시 대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으니 이번 역시 대신 중 한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일 성상의 쾌단에 힘입어 금탕(金湯) 같은 땅에 성을 쌓게 된다면 실로 국가의 심원(深遠)한 계책이 된 것이고 만일 사변이 생긴다 하더라도 국가에서는 서울을 버릴 걱정이 없을 것이며 도하의 사민(士民)들도 모두 부모와 처자를 이끌고 한 성에 같이 들게 되면 죽음으로써 굳게 지키지 않는 이 없어 모두가 정병(精兵), 예졸(銳卒)이 될 것이니 어찌 외구(外寇)의 충돌을 걱정할 것이며 어찌 수성(守城)의 튼튼치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북한을 주필의 처소로 삼고 한 두 명 대장으로 하여금 도성까지 아울러 지키게 한다면 도성도 실수(失守)할 염려가 없을 것이고 남한산성과 성세(聲勢)를 서로 통하면 족히 기각(藪角)의 형세를 이룰 것이니 어찌 만전의 계책이라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는 중설(衆說)에 끌리지 마시고 신충(宸衷 : 임금의 마음 )으로 판단하여 대계를 천연됨이 없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상신(相臣), 장신(將臣)이 다 나가서 살펴본 뒤에 김중기(金重器), 이우항(李宇恒)이 최후로 나갔기 때문에 외론은 혹 조정에서 두 사람이 살펴보기를 기다려 축성 여부를 결정하려는 것으로 여겨 사체에도 온당치 못하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이 두 신하는 장임(將任)을 맡은 사람으로 당초에 우연히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가서 보게 하였고 또 다시 우물을 살펴보게 하려던 것이었지 애초에 이 두 사람의 말로써 판단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뢴바 오직 예단(睿斷)에 매였다는 말은 역시 의견이 있는 바이나 북한산성의 일은 전후로 제신의 진달이 자상하였을 뿐더러 성상께서도 필시 벌써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신 바가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신 등이 성원이 되지 않은 채 입시하여 본병(本兵 : 병조의 뜻 )의 제재들이 입시하지 못하였으니 후일에 원임의 모든 대신과 재신(宰臣)을 함께 불러 다시 상세히 물어서 단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모사(謀事)는 비록 여럿이 하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 싶다. 시임, 원임, 대신과 비국의 제재 및 장신(將臣)은 이미 모두 가 보았으니 다시 상찰할 일이 없겠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왕공(往公)은 설험(設險)하여 나라를 지킨다.'하였고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백성과 함께 지킨다.'하였으며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에 뽕나무 껍질을 벗겨서 둥지를 엮는다.'고 하였다. 이번 이 북한은 바로 온조(溫祚)의 옛 도읍지로 실로 천험이라 하겠는데 도성의 지척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는데도 지금에 수축하지 않는다면 또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도성을 지키자고 청한 뜻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둘레가 넓어서 결국은 지킬 수 없을 터이니 이번에 북한에 성을 쌓고자 한 것은 백성과 함께 지키자는 뜻이다. 전일에는 오직 우물을 걱정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우물도 많다고 하니 험고하기도 그처럼 얻기 어렵고 우물도 이처럼 많다하니 매우 흡족한 셈이다. 만일 널리 물어서 결정하려면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결단코 성을 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중대한 만큼 원임 대신과 본병(本兵)의 신하가 입시할 때를 기다려 다시 하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임들은 이미 가 보았으니 구태여 후일을 다시 기다릴 것이 없겠다. 대계가 한번 정해지면 물력의 다소는 헤아릴 것이 없으나 듣자니 돌은 모두 가까운 곳에 있고 물력도 많이 들지 않는다 한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쌓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듯하나 행궁(行宮)과 대소의 공해(公廨) 등을 영건하자면 아무리 간략하게 제도만 갖춘다 하더라도 축성 공사에 비하면 그 일이 더욱 어려운데 어찌 이 수년 내에 조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위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뢴바 민호에 따라 부역을 내세워 식량을 짊어지고 3일씩 사역시킨다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곤궁한 도민에게 축성의 일이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별도의 응역을 부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호(大戶)의 백성에게 하루의 부역을 시킨다면 혹 모르거니와 민호를 헤아려서 여러 날을 부역시킴에 이르러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이곳은 바로 백성과 함께 지킬 땅인데 어떻게 백성으로 하여금 쌓게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나라에서 만일 급하지도 않는 일을 일으켜서 백성을 사역시키고 수고롭게 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조정 명령에 못 견디어 부득이 부역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필시 원망하고 한탄할 것이나 이곳은 군신 상하가 조만간 의탁할 곳인 만큼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원망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중기(金重器)는 아뢰기를
"도민이 3만여 호이니 하루씩만 부역하면 남은 일은 필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참판 조태로(趙泰老)는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일을 일으키려면 시초에 잘해야 한다.[作事謀始]'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자세히 살피고 계획을 세워야만 중도에 걷어치우는 일이 없습니다. 신도 연전에 북한에 가보니 험조(險阻)하기로는 족히 의지할 만하였으나 다만 남한(南漢)과는 다릅니다. 남한은 밖으로는 험하고 안으로는 평탄하기 때문에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나 이곳은 그렇지 않고 안으로 경사가 심하여 대응하고 성첩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형세이고 또 궁궐, 창고 및 백관과 군졸이 풍우를 피할 시설이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데 배설(排設)할 곳이 없을 듯하였습니다. 축성 공사에 있어서는 돌이 많아 일을 덜 것 같기는 하나 안쪽도 몹시 험준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돌을 위로 운반하기가 어렵겠으니 논자들이 쌓기가 쉽다고 말한 뜻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의당 사람의 능력과 앞으로의 사세를 헤아려 본 연후에라야 시작할 수 있겠는데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일을 결정한 뒤에 혹은 논란이 있고 혹은 폐단이 있어 시작만 했다가 결말이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신이 사석에서 승지 한배주(韓配周)와 판윤 이언강(李彦綱)과 더불어 서로 토의한 지 오래이나 난처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논자는 더러 북한에 성이 쌓아지면 도성도 지켜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도성이 기왕 넓어서 지킬 수 없다 한다면 더구나 북한에 들어가 지키게 된 뒤에 무슨 병력으로 두 곳을 아울러 지키겠습니까? 또 북한에 축성한 뒤에는 군향과 병기를 모두 미리 비치하여야만 들어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 들인 것은 많아도 결국은 빈 성과 다름이 없이 됩니다. 지형은 비록 험하고 좁아 바위에 가교(架橋)를 놓고 골짜기를 파고 하여 지나갈 수는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군향입니다. 지금 나라에는 3년의 비축이 없으니 군량을 조달하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만일 강도(江都)와 남한의 곡식을 이곳으로 옮기고자 한다면 이는 마치 동쪽 벽을 헐어서 서쪽 벽을 때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 군병으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수어청 총융청의 예와 같이 미리 군문을 창설해 두어야만 급할 때에 들어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군향도 비축하지 않고 군병도 정하지 않는다면 비록 이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쓰임이 되겠습니까? 고봉(孤峯) 절정(絶頂)에 살아가기가 무척 어려우므로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도록 해도 필시 도산(逃散)할 것이니 한번 쌓은 뒤에는 수보(修補)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군향은 반드시 조적(糶糴)이 있어야만 오래도록 비치할 수 있는데 이곳은 조적에 몹시 폐단이 많습니다. 또 강도와 남한에는 모두 수장(守將)이 있는데 이곳은 관원을 배치하여 지키게 할 곳도 못되어 다만 승군(僧軍)으로 살면서 지키게 할 수 밖에 없으므로 한갓 빈 성만 쌓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퇴락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어찌 난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조태로(趙泰老)가 말한 바는 비록 자상한 듯하오나 전연 귀착한 것이 없습니다. 외방의 성첩은 세월이 오래 된 뒤에는 처음에 수축할 때와 같을 수 없겠으나 북한에 한번 쌓은 뒤에는 이토록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범사(凡事)를 착실하게 거행할 텐데 어찌 후일 공성(空城)이 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김중기의 말을 들으니 그가 거느린 군병만도 2만 명이니 성을 지킬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김중기(金重器)가 지금 입시하고 있으니 하문하신다면 반드시 면유(面諛)하지 않고 사실대로 진달할 것입니다. 몇 달 전에 호판 김우항(金宇恒)을 만났더니 그의 말이 5일씩 백성을 부역시켜도 필시 원망함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신은 그 수를 줄여서 3일로 앙달하였습니다."
하니,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패초를 받고 정원에 당도하니 한배주가 이 일로 신에게 묻길래 신이 별 생각없이 대답하기를 '오직 조정에서 단정하기에 매였을 뿐이지 물력이야 어찌 많이 들겠느냐?'하였는데 이제 이 말을 진지하게 대답한 말로 증거를 삼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부교리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이 일은 국가의 대계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도 황공하나마 앙달하겠습니다. 조태로의 말은 극히 의견이 있는 말이고 또 자못 상세합니다. 군량이 있어야만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아무리 금성(金城) 탕지(湯池)라 하더라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백관과 군병 및 성첩을 지킨 사민의 수효가 필시 몇 만이 못 되지는 않을 것이니 국가에서 어떻게 식량을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식량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밖에서 실어 들여야 하는데 남한도 기왕에 고절(孤絶 : 외따로 떨어짐 )을 흠으로 여겼으나 이곳의 고절도 남한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 서, 남 3면은 모두 넓은 들판이나 진치고 주둔할 만한 곳이 있으니 적이 대군으로 3면에 분둔(分屯)하고 간간이 유격대를 내 보내서 왕래하며 초략(抄掠)하면 양도(糧道)도 끊기고 원병(援兵)도 막힐 것이니 적병이 성을 공략함을 기다릴 것도 없이 형세가 저절로 위태로워집니다. 이로 보면 사실 안전한 땅이 아니고 또 한번 북한에 들어가면 도성까지 아울러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되지 않을 일입니다. 만일 불행하게도 도성을 실수(失守)하여 적병이 점거한다면 북한 같은 외롭고 위태로운 지역으로 어떻게 도민을 다 수용하겠으며 또 어떻게 오래도록 외딴 성을 지키겠습니까? 또 안쪽은 다소 평탄해야만 왕래하며 접응하기가 쉬운데 이곳은 안쪽도 절험(絶險)하다 하니 적이 만일 성을 범하여 창졸간에 경보를 알리면 군병을 조발하여 구원할 즈음 적은 벌써 성첩에 오르게 될 터이니 아군은 위를 쳐다보고 공격하는 어려움이 있고 적병은 건령(建瓴 : 쉽다는 표현 )의 형세가 있으므로 아무리 지세를 들어 말한다하더라도 그 험조(險阻)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한배주(韓配周)는 아뢰기를
"적이 어찌 발붙일 곳이 있겠습니까? 전연 형세를 모르는 말입니다."
하고, 이언강(李彦綱)은 아뢰기를
"조태로(趙泰老)가 이른바 일을 일으키려면 시초에 잘 작량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성은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의 서계 중에도 명을 받들고 가서 살펴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 보면 축성의 논의는 조종조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일로 말하더라도 작년 겨울 이후로 대신, 장신 및 제신이 모두 이미 가서 보고 형세를 소상히 아뢰었으니 시초에 작량하는 도리는 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고 식량의 일에 있어서는 원래 성을 쌓은 뒤의 일이나 우리나라가 아무리 피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곡식 10만석이야 판출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조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겠으니 모름지기 사람을 가려서 위임하여 잘 조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러한 의론은 참으로 갑갑하다. 무릇 도성은 너무나 넓어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후로 유생과 무신의 청을 내가 모두 불허하였던 것이다. 강도(江都)는 해구(海寇) 때문에 얼음이 풀릴 때에는 믿을 만한 곳이 못되고 남한은 나루를 건너는 것이 곤란하다고 하는데 이곳은 도성에서 아주 가까우니 도성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만일 꼭 여러 의논이 합치하기를 기다려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성취할 날이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너희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자면 적은 이미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하는 따위일 것이다. 쌓기로 결정한 뒤에는 설사 미진한 조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들어가 지킬 수 있을 것이나 지금 만일 1년이고 2년이고 결정한 곳이 없다 한다면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군향 같은 일은 절목상의 일에 불과하고 또 먼 곳과는 다름이 있으니 헤아려서 조치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다는 하교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국가의 대사이기 때문에 제신들이 소견을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꼭 같겠습니까? 구차하게 뇌동(雷同)하지 않고 서로 옳다 그르다 하는 말이 있었던 것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언제 제신들이 각기 소견을 말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는가? 다만 의론이 정해졌을 때는 적이 이미 강을 건너는 일이 있을까 저어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여러 의논은 혹 성이 이루어진 뒤에는 곡물의 조적이 불편하리라고 말하고 있으나 신의 생각은 곡물을 실어 들이기가 참으로 불편하기는 하나 군향곡을 구태여 다 성 안으로 실어들일 것이 아니라 수구(水口)나 성 아래에 창고를 설치하고 경강(京江)에 조운(漕運)한 곡물을 항상 거개 그곳에 저치하게 하고 거기에서 내고들이고 하면서 써 나간다면 20여 리의 거리가 어찌 몹시 멀다 하겠습니까? 판부사 이유(李濡)의 차자에서 창고를 탕춘대(蕩春臺)에 짓자고 말하였는데 역시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병자년 (인조 14년(1636)) 처럼 며칠 사이에 도성을 육박한 적변(賊變)이 어찌 다시 있겠습니까? 아무리 몇 만 석의 곡물이라 하더라도 지척의 거리에서 달포 사이에 어찌 성 안으로 실어들이지 못하겠습니까? 북경(北京)의 조운도 통주(通州)까지만 도착하니 도성까지는 30여 리이고 여조(麗朝)의 후서강(後西江)도 도성까지는 30리였으니 오늘날의 역량이 크게 미치지 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대세(大勢)가 성을 쌓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면 한, 두 가지 불편한 사단은 저절로 조용히 헤아려서 처리하면서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군향은 길이 험하고 성 안으로 운반하기 어렵다면 산성의 문 밖에 창고를 짓고 필요할 때에 가져다 써도 무방합니다. 옛날에도 두 진영이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40~50리를 용도(甬道)를 쌓아 곡물을 운반하였는데 만일 완급이 있다 해도 성 아래에 실어다 놓은 곡물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本百濟熊川文周王自北漢山城徙都之至聖王移南 扶餘唐高宗遣蘓定方與新羅金庾信攻滅百濟置熊 津都督府留兵鎭之唐師旣去新羅盡有其地神文王 改爲熊川州置都督景德王改熊州高麗太祖二十三 年改今名成宗二年置牧十四年置節度使稱按節軍 屬河南道顯宗三年廢節度使九年降知州使忠惠王 後二年以元朝平章闊闊赤妻敬和翁主外鄕陞爲牧 本朝 世祖朝置鎭今判官 |
기사제목 山城을 쌓는 일에 대한 地官들의 의견을 보고하는 觀象監 官員의 啓
왕 재위년도 숙종 29년 월일 숙종 29년(1703) 6월 10일
관상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성을 쌓을 때 주맥(主脈)에 이해가 있는 지의 여부를 관상감 제조로 하여금 물어서 거행토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 여러 지관(地官)들을 모아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더니 동지(同知) 신경윤(愼景尹)은 말하기를 '신이 본 방서(方書)에는 인가나 묘지에 있어 국내(局內)를 뚫고 파서, 이로 인해 길하게 되는 곳도 있고 불리하게 되는 곳도 있는데 이것은 방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려오는 산맥이 웅장하면 혈(穴) 위에 허광(虛壙)을 파서 기운을 부드럽게 하는데 이것은 주산(主山)의 강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국도(國都)의 내룡(來龍 : 산맥을 말함 )에 성을 쌓는 이해에 있어서는 별로 소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려오는 산세가 웅장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니 그 껍질 위에 토석을 더 쌓는 것은 무방할 것 같습니다. 현재를 두고 말한다면 국가의 도성이 지극히 가까이 내려온 산맥을 가로 걸치는 것은 역대의 왕업(王業)에 손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같이 쌓는 성이 어찌 내외의 분별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한다면 신이 남의 묘지를 보니, 흙을 물에 개어 견고하게 쌓아 만든 모래와 무덤이 훗날 이장할 때는 굳게 돌같이 되어 파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지금 모래와 흙으로 산맥을 덮어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성을 쌓는다면 이는 산맥을 북돋우는 것과 같으니 산 기운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어리석은 소견으로서 상의 재량에 도움 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천군(錦川君) 지(榰)는 말하기를 '연전 봄에 능소자리를 가릴 때 예조에서는 신이 풍수지리에 소매(素昧)함을 알지 못하고 함께 가자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명령이 내린 뒤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그대로 따라갔으나 조금의 도움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뜻밖에 경연에서의 천거를 입어 명을 받은 이래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의 억견(臆見)으로서 어찌 풍수지리의 이해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기질이 약하고 다리가 떨려 그 산에 올라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산의 형세가 어떠한지를 모르니, 전해 들은 말에만 근거하여 판국 밖의 소견을 망령스레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감히 의논을 드리지 못하고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전 현감 최두명(崔斗明)은 말하기를 '신이 방서를 조금 읽었으나 겨우 조백(糟粨)을 알 뿐이며, 성곽에 있어서는 원래 논한 곳이 없어 그 사이의 이해관계는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두고 헤아려보면 이번 성을 쌓을 때 산을 파고 언덕을 깎는 일이 없다면 이는 곳 집안의 담장을 쌓는 것이니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축할 때에 파고 뚫는 곳이 많게 되면 내려오는 산맥에 해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활인서 별제 남세욱(南世郁)과 전 판관 이위(李煒) 등은 말하기를 '그윽이 방서를 상고해 보면 대체로 무덤이나 가택을 논한 것이며 성지(城池)에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무덤이나 가택에 대한 말도 대체로 산맥과 혈의 손상을 꺼리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말하기를 「무덤이나 가택의 자리가 결정되면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뒷쪽의 산과 지나가는 산맥은 파 뚫는 것을 꺼린다.」라고 하였는데, 이같은 학설은 한둘 뿐만이 아닙니다. 이번의 성 쌓는 것에도 산맥을 범하는 곳이 많을 것인데 이에 비겨 본다면 손상되는 바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아득하고 오묘한 이치를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전정(前正) 한두익(韓斗翼)은 말하기를 '지면에 일어난 모든 산은 대소를 막론하고 그 기운이 흥하고 쇠함이 뒷 산맥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뒷 산맥을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며 옛날 사람들이 국도의 산기슭을 아꼈던 것은 이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성 쌓을 때 대단하게 파고 뚫는 일이 없다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지리학 훈도 김두성(金斗星)은 말하기를 '산세가 보현봉(普賢峯)에서 굴러와 백악(白岳)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국도의 뒷산 정맥(正脈)입니다. 방서 중에는 성 쌓는데 대한 가부의 의논은 없고 다만 무덤과 가택의 일만 논하였습니다. 대체로 말하기를 「무덤과 가택이 결정된 뒤에는 범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또 「내려오는 산맥은 망령스레 파 뚫는 것을 꺼린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뒷 산맥과 지나가는 산맥은 파 뚫는 것을 꺼린다.」라고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래된 묘에 망령스레 파 뚫는 것을 가장 꺼린다는 경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사집의 무덤이나 가택의 내려오는 산맥도 뚫고 깨치는 것을 꺼린다고 하였으니 국도에 내려오는 산맥을 파 뚫는다는 것은 아마 방서의 꺼리는 말을 범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어둡고 지식없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하고 시비를 논할 수는 없으며 다만 방서에 실린 말을 모방하고 진달하여 임금의 취사선택에 대비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사용 박종검(朴宗儉)은 말하기를 '경성으로 내려온 산맥이란 곧 삼각산(三角山) 아래의 석가령(釋迦嶺) 동쪽 기슭입니다. 이번에 쌓을 성의 기지는 석가령에 해당되니 내려오는 산맥이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지맥을 손상한다는 말에 있어서는 꼭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성첩을 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결같이 성터란 내려오는 산맥이나 들어오는 산머리를 누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몇길의 구덩이를 파고 시내를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한다면 지맥을 손상시키는 이치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지 아니하여 성터를 파고 다시 흙을 채워 성을 쌓는 데에 불과하며 집과 영문을 만드는 것은 한결같이 척추의 산맥을 피하고 반드시 좌우의 산골짜기와 두 옆구리에 짓는 것이니 내려오는 산맥에 손상되지 않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봉 박태우(朴泰宇)는 말하기를 '북한산이란 곧 도성으로 내려오는 산맥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성을 쌓을 때 산맥이 손상될 것이라고 한 말은 소견이 없지 않으며, 방서에도 말하기를 「집을 지은 뒤에 파거나 쌓는 것을 크게 꺼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실로 온당치 못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 도읍을 건설할 때에 산을 파고 돌을 깨는 등의 일이 있은 듯하니 이로써 논한다면 뒷 산맥이 손상될 것이라는 말이 옳은 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한 길이 넘게 판다면 그 해로움이 없지 않겠지만 두서너 자를 파는 것은 조금도 꺼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호군 이신정(李藎廷)은 말하기를 '옛날부터 국도나 고을에서 주산(主山)의 뒷 산맥에 성을 쌓았다가 손해를 당한 일이 있다는 것은 옛 방서에서 증명할 만한 글이 없습니다. 다만 풍수지리가들은 주맥(主脈)을 중요시하고 손상하거나 누르는 것을 아주 꺼립니다. 이번에 쌓을 성은 산을 파고 산줄기를 끊는 등의 대단한 일은 없을 것이나, 척추를 파는 것은 산맥을 손상함에 가깝고 토석을 쌓는 것은 기운을 누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서 논한다면 온당치 못한 일인 듯하오나 어리석고 얕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억측(臆測)으로 단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지관들의 말이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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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象監官員, 以提調意, 啓曰, 築城時, 主脈有利害與否, 使本監提調, 問議擧行事, 命下矣, 今日會諸地官, 使之各陳所見, 則同知愼景尹, 以爲臣所見方書, 只是人家葬地, 而局內穿鑿, 有因而致吉者, 有因而不利者, 此則以方位言之也, 來脈雄剛則穴上開虛, 壙以柔氣, 此則以主山剛弱而言之也, 至於國都來龍上, 設築利害, 則別無所見, 而其來勢雄偉, 則可知皮殼上土石加築, 似無所妨, 以卽今言之, 國家都城, 橫跨至近之來脈, 而無損於歷代之洪業, 則等是築城, 豈以爲內爲外而有別乎, 若以此爲過慮, 則臣見人葬地, 以沙土和水堅築作壙者, 日後穿移之際, 完固成石, 鑿開甚難, 今若以沙土, 蓋覆於來脈爲址, 而築城於其上, 則便同培補龍脈, 而不害於眞氣, 敢以抑見, 仰裨裁擇, 錦川君臣榰, 以爲頃年春擇山之時, 禮曹不識臣之未窺堪輿之糟粕, 至有偕往之請, 命下之後, 義不敢辭, 因以隨參而小無所補矣, 不意今者, 又被筵中之啓達, 承命以來, 罔知攸措, 以臣臆見, 何能知堪輿之利害哉, 且臣贊弱脚軟, 曾未登陟, 旣不知其形勢之如何, 則固不可只憑傳聞之言, 妄陳局外之見矣, 玆不敢獻議, 惶恐待罪, 前縣監崔斗明, 以爲臣粗依方書, 僅解糟粕, 至於城郭, 元無論處, 其間利害, 實難據曉, 而揆諸人事, 今此築城之時, 若無鑿巖削丘之事, 則便是自家墻籬, 似無所妨, 而若其修築之際, 或多穿鑿之處, 則似不無來龍有害之弊矣, 活人別提臣南世郁, 前判官臣李煒等, 以爲竊考方書, 則蓋論塚宅之事, 而不及城地, 其言塚宅, 則大抵以傷龍破穴爲忌, 故曰, 塚宅已定, 不可作犯, 又曰, 後龍過脈忌穿鑿, 此等說不止一再, 而今此築城之地, 多犯龍脈, 則比類反隅, 似不無所傷, 第意茫渺之理, 愚迷之見, 何敢取斷焉, 前正韓斗翼, 以爲凡地之能作, 毋論大小, 其氣之衰旺, 係於後龍, 則後龍之不可驚動也決矣, 古人惜以國隅者蓋以此也, 雖然今此築城, 若無大段穿鑿之擧, 則似或無妨矣, 地理學訓導金斗星, 以爲山自普賢峯, 軸轉爲白岳, 乃國都之後龍正脈也, 方書中無築可否之議, 只論塚宅之事, 多有曰, 塚宅已定之後, 不可作犯, 又曰, 來龍竊忌妄穿鑿, 又曰, 後龍過脈, 忌穿鑿, 解之者曰, 此則葬其已久, 切忌忘 (妄) 有築鑿之戒也云, 穿破私家塚宅之來龍, 亦云有忌, 則穿鑿國都之來 (脈脫) , 或恐有犯於方書所忌之語, 而夢無知識, 實無以出意見論是非, 只以方書所載之語, 比倣仰達, 以備酌處取舍焉, 副司勇臣朴宗儉, 以爲京都來脈, 卽三角山下釋迦嶺東麓, 今此築城基址, 當爲釋迦嶺, 則可謂來脈, 而至於損傷地脈之說, 必無其理, 信乎此說, 則自古及今, 豈有城牒之事乎, 一應城址, 無非壓設於來脈入首也, 如或穿坎數丈, 成川過水, 則似不無破傷地脈之理, 而此則有所不然, 不過開拆城址, 還爲補土築城, 而造家設營, 一避脊脈, 必於左右山谷兩脅, 則似非傷, 破於來脈矣, 參奉臣朴泰宇, 以爲北漢地, 卽都城, 來脈之地也, 今此築城之際, 破傷, 龍脈云者, 不無所見, 而方書有曰, 造家之後, 大忌鑿築, 以此觀之則果有所未安, 而當初建都之時, 似有鑿山破石之事, 以此論之, 則破傷後脈之說, 未知其是, 大抵丈餘掘鑿, 則亦不無其害, 而數三尺許, 則小無拘忌之事矣, 副護軍臣李藎廷, 以爲自古國都及州府之築城於主岡後脈, 而有所傷害者, 元無古方可證之文, 而但堪輿家最重主脈, 切忌傷破與鎭壓, 今此築城, 雖無大段塹山斷岡, 開脊或近傷脈, 積土累石, 恐涉壓氣, 以此論之, 似爲未安, 而愚淺之見, 何敢臆斷云, 諸地官之言如此,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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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山城으로 방어하는 것에 문제가 있으므로 정예의 突騎를 선발하여 步賊을 막을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
왕 재위년도 숙종 36년
월일 庚寅十一月初九日
司啓辭, 今十月二十六日, 以洪福·北漢兩處中築城當否, 在外大臣處, 遣備局郞廳問議以來事, 命下矣, 卽遣本司郞廳問議, 則奉朝賀南, 以爲伏念臣從前負罪之外, 又有新罪, 方此跼蹐中路, 以竢譴罰, 誠不敢以大臣自處, 預論國事之得失, 然從前旣以在囚在謫, 亦對詢問, 仰塵於聖聰, 則今臣前後負犯, 雖與在囚在謫者同, 何敢不悉陳愚見, 以竢聖明之裁擇乎, 今此北咨之來, 人心無不驚懼, 以爲海賊必將朝暮來犯, 未然之事, 實難逆賭, 而內顧國事, 百無可恃, 人之驚懼, 固所當然, 但念所謂海賊, 若是有大計遠圖者, 則必犯中國腹心之境, 必不以若干船隻, 剽掠於遼瀋沿邊, 此似是出沒海島之劫盜耳, 若然則亦必不近捨吳越靑齊財寶所蓄之處, 而遠搶外國凋弊之地, 誠不知必有是事, 設或有之, 乘船泛海之賊, 其數必無多, 我國沿海諸道, 若選精勇騎射之士, 或使自備私馬, 或給牧場官馬, 優給喂養之芻穀, 以待明年三四月春和賊動之時, 則於其間, 士可及練習, 馬可及肥健, 海外遠來下陸剽掠之賊, 其衆雖或至於千萬, 以突騎數三百, 亦足以衝擊而摧破之, 不必遠論前事, 今以咨文中海賊之見衂於金州者見之, 亦可知其勢之有必然矣, 然則今所當急講者, 宜在抄選精銳之突騎, 以當越海下陸之步賊, 而伏聞朝廷, 先以都城之守不守, 北漢·洪福新城之築不築, 爭論未已云, 臣誠恐其大有失於緩急之計也, 且都城事, 臣於丁亥秋承命在江郊時, 備局堂上以廟堂意來問, 臣已悉陳其難守之狀矣, 至於北漢·洪福, 則臣未知險固形便之果何如, 而朝家若欲爲十年後計, 從容講究, 且擇朝臣中可主其事者, 如南漢城之委任李曙, 則久遠之後, 或可爲得力之地, 卽今海賊之憂, 若曰無其事, 則無所事城守, 若曰有其事, 則似在於明春, 而今乃議築, 未築之城, 其何能及事乎, 且念我國兵力, 雖極凋弊, 紀律雖極解弛, 以堂堂萬乘之國, 聞遼瀋間過去之剽賊, 國中先自驚擾, 殆有土崩瓦解之勢, 此誠不可使聞於天下後世, 以卽今鎭安民心之道, 言之, 築城守城之計, 姑且徐徐議定, 專以選將練兵, 防守於沿海之處, 使賊不得侵軼於近京之地, 似是今日所當急先講究, 而措置者也, 曾在甲子年間湖南海邊之人, 自言漂到鄭錦舍所在處, 持其書來上送廟堂, 其書有與日本連和我國, 同擊淸人之語, 朝廷雖知其書之虛僞, 亦不能無慮, 下詢禦寇之策於諸臣, 臣於其時, 初拜相職, 故以爲此書雖詐諼不足信, 然朝家若欲因此爲陰雨之備, 則乘船下陸之賊, 其擊之也, 當用馬兵, 而我國馬兵之可用者, 都監馬隊之外, 外方元無選擇練習之兵, 咸鏡道地邊, 胡人多服習於騎射, 馬能馳突於險道, 且人與馬皆能累日不食, 不至困疲, 實非內地之可比, 請選北道三百名, 使北兵使將之, 又選南道三百名, 使監司及南兵使分將之, 其選擇之規, 合品官儒生出身閑良行伍軍兵公私賤人, 只取其有勇力能騎射者, 以爲緩急之用事, 啓稟得請, 講定節目, 啓下廟堂, 分付本道擧行, 而號其軍曰親騎衛矣, 聞當初則所選頗精銳可用, 卽今則頹弊疲殘, 大不及初選時云, 然其規制貌樣, 亦必猶有存者, 更命本道監兵使, 汰其老殘, 更募健壯, 充其舊額, 以爲隨時徵用之地, 則必有其效, 平安監兵使處, 亦命依親騎衛節目, 抄選練養, 亦必爲應卒之用, 至於黃海道, 則已有御營廳之馬兵, 禁衛營之別驍衛, 而其曾前選擇與練習, 未知果可用於急難與否, 更令本軍門及黃海監兵營通議, 急時講定, 或因舊選, 或加新擇, 而亦令監兵使, 分將於本道, 而合用於受敵之處, 其爲得力, 必勝於卽今海邊舟師及陸地束伍之生疎孱弊易致奔潰者矣, 雖然將領, 亦必得其人, 然後可以爲用, 令本道預擇自中之可能統率其下者, 分領之, 使將卒預相習熟, 乃可以如臂之使指矣, 然若以明春寇至爲慮, 則亦必於此歲之前, 分付措置於諸道, 庶幾可及, 如或遲延稽緩, 焂過數月之後, 則亦恐過時而無及矣, 古語曰, 諸候有道, 守在四封, 今當海外之小醜, 不能擊退於海岸, 又不能遮截於關防, 使之侵淫瀰滿於內地, 驅略我民, 增益其衆, 至於圍都城圍山城, 則一城之外, 盡爲賊有, 國勢已傾矣, 人心已離矣, 設令城池極其堅固, 兵糧極其優足, 亦必無自全之理, 海賊之必來, 誠不可知, 而若爲此慮, 將以築城與守城, 應之則臣秪見其爲危, 而不見其爲得也, 領中樞府事尹以爲, 玆者備局郞廳, 因聖敎, 以洪福·北漢兩處中築城當否, 來問於臣, 竊伏惟念議者, 以北漢築城, 爲保守都城之地, 此則甚不然矣, 欲守都城, 則北漢不可築, 若築北漢, 則都城不可守也, 臣於少時, 亦嘗登覽其地, 雖未能周觀城址, 其山勢則槪可領略矣, 山高谷深, 平土絶少, 人民入接, 必不容都民四五分之一, 而人情以駐蹕之所, 爲可生之地, 奔波爭入, 勢不可遏, 旣入而不能容, 則抑將區別驅出耶, 況其不得入而散去者, 其向國怨恚之心, 當復如何, 此係大失人心之端, 人心一去, 其何以復爲國乎, 且念都城旣空, 爲賊焚蕩, 則北漢軍民, 目見其狀, 心膽崩潰, 莫可鎭定, 終能保守而無失乎, 北漢之築, 決知其不可矣, 洪福則臣所未見, 不敢妄爲是非, 而觀諸臣所達之言, 其形便之好憑此可知矣, 第臣於近日之事, 有所料量於心者, 竊謂固守都城, 爲上計, 移鞸南漢, 爲中計, 別營他所, 爲下計, 請守都城之議, 大小同然, 而自上輒皆牢拒不納, 臣以無益之言, 不宜塵瀆天聽, 而旣有所懷, 隱默不發, 甚非忠君憂國之義, 願陳淺見, 一備乙覽焉, 都城之闊大難守云者, 慮其無兵可守也, 聖上, 誠能以君臣上下同守社稷之意, 明白曉諭, 堅定聖志, 莫之撓改, 則彼去無所之, 難得生路之民, 孰不悅服信從, 效死不去乎, 自守其家之兵, 少不下六七萬人, 若移他所則此兵何從而可得乎, 臣多觀外方城子所築之得, 如都城者鮮矣, 若論都城形勢, 則南北便是山城, 西城亦有據高臨下之勢, 只有東城低平處, 不過數百步之間耳, 以滿城兵民之力, 寧有不能守之理乎, 無已則江都南漢, 以擬水陸之寇者, 祖宗宿規當守, 而不當違也, 南漢雖不無些少疪病, 十萬雄兵, 久圍而不能拔, 則其固亦足恃也, 捨累朝經營之南漢, 取新創空疎之洪福, 其於得失果何如也, 此論城守之計, 卽有備無患之道, 不得不爾, 而今之所憂海寇, 臣愚以爲不必深慮矣, 夫出沒海中之寇, 乘便搶掠於沿邊, 容或有之, 而登陸略地, 謀欲傾人之國, 理勢之所必無也, 在我備豫之策, 但當申飭海防, 保嗇民力, 靜以鎭之, 逸以待之而已, 伏望聖明, 切勿以此過勞聖心, 惟以撫摩飢民, 俾勿流散爲第一急務, 則國家幸甚, 行判中樞府事李以爲臣之情迹, 固不敢自同於諸大臣, 與論國家大計, 況臣嘗不揆疎愚妄贊都城之議, 卒被大僇, 其僨誤國事, 無復餘地, 臣常自罪之不暇, 何敢復有所容喙於城池之說哉, 且此洪福·北漢兩處形勢, 皆非臣所曾目見, 則其於便否, 有難懸斷而億對, 然, 聖上慮在備患, 至問及於在野之賤臣, 則其在臣子之義, 亦何得自存嫌阻, 不爲盡其誠悃乎, 自有西報以來, 中外危動, 若將爲朝夕必至之患, 臣之愚意, 竊以爲過也, 海中出沒之盜, 以船爲窟, 志在搶掠財穀, 旣得其慾, 則輒復逃竄於島嶼之間, 彼中沿海, 此患時有時無, 非獨今日爲然也, 設或延及於我境, 此豈有深入之計乎, 使我國稍有戎備, 則一邊帥邊吏, 足以禦之, 以此至議乘輿避兵之所, 則誠不可使聞於外國也, 至於設險爲固, 以擬緩急, 則非必有盜然後可議也, 我國素不爲根本之計, 一遇賊則輒擧其蓄積而與之, 賊反爲主, 我乃爲客, 此必敗之形也, 今以都城難守, 欲擇於傍近險固, 別設一城, 以爲表裏之勢, 北漢似勝於洪福, 臣嘗聞其地勢, 內外俱險, 不如南漢之內平, 然此是濟祖所創築, 而其後移都過百年, 則亦豈不足爲一時駐蹕之所乎, 但此亦須有經紀都城之計, 然後庶可兩全, 不然而欲但恃此爲固, 則四山險阻, 當與賊共之, 其爲孤危之勢, 恐未必有愈於南漢矣, 抑臣之所憂, 不在城池之不足, 而在於民志之不固, 若民志定, 則隨其水陸之所宜, 江都南漢, 豈不足以禦賊, 若民志不定, 則鐵壁金城, 皆虛設也, 卽今外寇未至, 而域內騷然, 如鳥駭魚驚, 若或一隅有警報, 則土崩瓦解, 必然之勢也, 臣願聖上凝定睿慮, 勿以海賊爲深憂, 先以綏輯疲氓爲急務, 除其疾苦, 省其煩擾, 使各有安土親上之心, 戒飭邊臣, 以嚴陰雨之備, 則賊雖至, 不足以爲患, 此臣區區之至望也, 行判中樞府事尹以爲, 頃者聖旨特下, 諭召在外大臣, 而微臣亦忝其後, 兢惶之衷, 至今未定, 卽於意外備局郞廳, 又以收議事下來, 臣以草莽賤分, 決不敢當大臣之名, 則誠不敢輒預朝廷末議, 而以尙係朝籍之, 故每蒙循例猥及, 臣誠惶恐, 罔知所處, 況此洪福·北漢築城當否之議, 臣於兩處形勢, 皆未曾一見, 縱使一見, 亦有何見識, 而旣未目覩, 尤何敢懸度妄論, 以對下詢, 殘喘垂死, 觸事荒昧, 虛辱朝命, 罪又萬死, 唯願亟蒙聖恩, 特命削去於原任之列, 得以還其賤分, 瞑目待盡而已, 無任伏地戰慄之至云矣, 敢啓, 答曰, 知道, 奉朝賀所論儘好, 而抄選精銳之突騎, 以當越海下陸之步賊云者, 正合予意, 不可不急講擧行, 爲先斯速議處。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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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山城으로 방어하는 것에 문제가 있으므로 정예의 突騎를 선발하여 步賊을 막을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
왕 재위년도 숙종 36년
월일 숙종 36년(1710) 11월 9일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난달 26일, 홍복(洪福)과 북한(北漢) 두 곳 가운데 성을 쌓아야 하는지 여부를 외방에 있는 대신에게 비변사 낭청을 보내어 문의하여 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곧 본사 낭청을 보내어 문의하니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은 아뢰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전에 죄를 진 외에 또 새로운 죄가 있어 현재 중로(中路)에서 몸을 굽히고 벌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감히 대신으로 자처(自處)하고 국사(國事)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참여하여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수금(囚禁)되거나 배소(配所)에 있더라도 하문에 답하여 성총(聖聰)에 들리게 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신은 앞뒤 범한 바는 비록 수금이나 배소에 있는 경우와 같으나 어찌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모두 아뢰어 성명(聖明)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북쪽의 자문(咨文)이 옴에 있어 인심은 모두 놀라워하고 두려워하여 해적(海賊)이 곧 침범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을 실은 거슬러 보기는 어려우나 안으로 나라 일을 돌아보면 전혀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두려워함은 실로 당연한 바입니다. 다만 생각컨대 이른바 해적이 만약 대계(大計)와 원도(遠圖)가 있는 자라면 반드시 중국의 복심(腹心) 지역을 침범할 것이요, 굳이 약간의 선척(船隻)으로 요동(遼東)·심양(瀋陽)의 연변을 노략질하진 않을 것이니, 이는 아마도 섬에 출몰하면서 겁탈하는 도둑인 듯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가까이에 있는 오(吳)·월(越)·청(靑)·제(齊) 등 재보(財寶)가 비축되어 있는 곳을 버리고 멀리 나라 밖 가난한 곳을 침범함은 사실 반드시 이러한 일이 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배를 타고 바다에 뜬 도둑은 그 수가 반드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연해(沿海)의 모든 도에서 만약 정예하고 용맹하며 말달리고 쏠 수 있는 병사를 선발하여 혹은 사마(私馬)를 갖추게 하거나 혹은 목장의 관마(官馬)를 지급하고 충분한 말 먹이를 주어서 명년 3~4월 화창한 봄철에 적병(賊兵)의 발동(發動)을 기다리면 그 사이에 병사는 조련이 되고 말은 살찌고 건장해 질 것이니, 바다 밖 멀리 와서 뭍에 올라 노략질하는 도둑은 그 무리가 비록 천만(千萬)이 된다 하더라도 돌기(突騎) 2~3백으로 족히 공격하여 격파할 수 있습니다. 굳이 멀리 과거의 일을 논할 것이 없이 지금 자문에 해적이 금주(金州)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그러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땅히 급히 강구해야 할 것은 정예한 돌기(突騎)를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뭍에 올라 온 보적(步賊)을 막는 데에 있습니다. 들은즉 조정에서 먼저 도성(都城)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와 북한(北漢)과 홍복(洪福)에 새 성을 쌓느냐 쌓지 않느냐에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신은 진실로 위급에 대한 대책에 크게 실책(失策)이 되지 않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또 도성의 일은 신이 정해년 가을에 명을 받들고 근교(近郊)에 있을 때에 비변사의 당상이 묘당의 뜻으로 와서 문의함에 있어 신은 이미 그 지키기 어려운 상황임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북한과 홍복에 있어서는 신은 험고(險固)와 형편이 과연 어떠한지는 모르나 조정에서 만약 10년 뒤 계획을 삼으려 한다면 조용히 강구하고, 또 조신(朝臣) 가운데에서 그 일을 주관할 만한 사람을 선정하되 남한산성을 이서(李曙)에게 위임한 것처럼 하면 오랜 뒤에는 힘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해적의 걱정은 만약 그 일이 없다면 성을 지키는 데에 일삼을 것이 없고, 만약 일이 있다면 내년 봄에 있을 듯 한데, 지금 성 쌓는 것을 논의하니, 쌓지 않은 성이 어찌 일에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컨대 우리나라 병력이 비록 지극히 허약하고 기율은 매우 해이되었으니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요동(遼東)·심양(瀋陽) 사이를 지나가는 노략질 하는 도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이 먼저 놀라워하고 소요스러워서 마치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있으니, 이는 실로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듣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현재의 민심을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말씀하면 성을 쌓고 성을 지키는 계획은 우선 천천히 논의 결정하고, 오로지 장령(將領)을 선출하고 사병을 조련하여 연해(沿海) 여러 곳을 지켜 적으로 하여금 서울 가까운 곳을 침범치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급히 먼저 강구하여 조치할 일인 듯 싶습니다. 일찍이 갑자년간에 호남의 해변 사람이 정금사(鄭錦舍)가 있는 곳에 표류하여 가서 그 글을 가져왔다고 말하며 묘당에 올려 보냈습니다. 그 글에 「일본과 우리나라와 연합(聯合)하여 같이 청인(請人)을 치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그 글이 허위임을 알았으나 역시 걱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도둑을 막을 방법을 여러 신하에게 하문하실 때에 신은 그 당시 처음 상직(相職)에 임명되니 이르기를, 「이 글은 비록 허위이니, 믿을 것은 못되나 조정에서 이 일로 인하여 외침(外侵)에 대한 대비를 하려 한다면 배를 타고 뭍에 오른 도둑은 그 공격에 있어서 마병(馬兵)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마병으로서 사용할 만한 것은 훈련도감의 마대(馬隊) 외에 외방에는 원래 선발하여 연습시킨 병사가 없고, 함경도는 땅이 호인(胡人)에 가까워서 기사(騎謝)에 익숙하여 말은 능히 험한 길을 달리고 또 사람과 말이 모두 여러 날 먹지 않아도 피곤해 하지 않으니 실로 내지(內地)에 비길 일이 아닙니다. 북도(北道)에서 3백명을 선발하여 북병사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또 남도(南道)에서 3백명을 선발하여 감사 및 남병사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게 하되 그 선발하는 규정에 있어서는 품관(品官)·유생(儒生)·출신(出身)·한량(閑良)·행오군병(行伍軍兵)·공사천인(公私賤人)을 합하여 용력(勇力)이 있고 기사(騎謝)에 능한 자만을 취하여 위급에 대비(待備)할 것을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절목(節目)을 심의 결정하여 묘당에 계하하였고 본도에 분부하여 거행하였으며 그 군병을 친기위(親騎衛)라 이름하였습니다. 들은즉 당초에는 선발된 바가 꽤 정예하여 쓰일 만 하였으나 현재에는 퇴폐(頹廢)하고 잔약하여 처음 선발할 때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합니다. 그러나 그 제도와 모양은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니, 다시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명하여 그 노쇠(老衰)한 자를 도태시키고 건장한 자를 다시 모집하여 그 옛 액수를 보충하고 수시로 징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평안 감사와 병사에게도 역시 친기위 절목에 의하여 선발하여 조련시키도록 명하면 역시 급박한 사태에 대응하는 도리가 될 수 있습니다. 황해도에 있어서는 어영청의 마병과 금위영의 별효위(別驍衛)가 있으나 과거에 선발하고 조련한 것이 과연 급박한 사태에 사용할 수 있을런지 그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본 군문 및 황해도 감·병영(監兵營)으로 하여금 협의하여 서둘러 결정하게 하고, 혹은 옛날 선발한 대로 두든지 혹은 새로이 더 선발하되 역시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본도에서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적이 침입할 곳에 보아서 사용하면 그 힘이 되는 바가 현재 해변의 주사(舟師 : 해군 ) 및 육지의 속오(束伍)가 생소하고 잔약하여 쉽사리 뭉그러지는 것보다 낫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장령(將領)도 반드시 그 적임자를 얻어야만 사용할 수 있으니 본도로 하여금 그 가운데에서 능히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을 미리 선발하고 나누어 거느리게 하여 장령과 병졸로 하여금 미리 얼굴을 익히게 하면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이 도둑이 침범할 것을 우려한다면 역시 이 해 안에 분부하여 여러 도에 조치하면 거의 미칠 수 있고, 만약 지연시키고 게으르게 하여 두어 달이 언뜻 지나면 시기가 지나 미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제후(諸侯)에게는 도리가 있으니 사방을 지키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다 밖 작은 도둑을 해안(海岸)에서 격퇴하지 못하고, 또 관방(關防)에서 차단하지 못하여, 내지(內地)로 가득히 침범하여 우리 백성에게 노략질을 가하고 그 무리를 증강하여 도성을 포위하고 산성(山城)을 포위하기에 이른다면 한 성(城) 밖은 모두가 적의 소유가 될 것이니, 나라의 형세는 이미 기울었고 인심은 이미 떠났습니다. 설령 성지(城地)가 지극히 견고하고 군량이 매우 풍족하더라도 역시 안전(安全)이 될 리 없습니다. 해적이 침입할는지는 실로 알 수 없으나 만약 이것을 걱정하여 성을 쌓고 성을 지키는 것으로 대응한다면 신은 다만 그 위험만이 보이고 잘한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하였고,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아뢰기를, '방금 비변사 낭청이 성교(聖敎)로 인하여 홍복(洪福)과 북한(北漢) 두 곳 가운데 성을 쌓아야 하는지 여부를 신에게 물었습니다. 그윽히 생각컨대, 논의하는 자들은 「북한에 성을 쌓는 것이 도성(都城)을 보호하여 지키는 것이다.」하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성을 지키려면 북한을 쌓아서는 안 되고, 북한을 쌓는다면 도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신이 소시에 일찍이 그곳을 올라가 보았습니다. 비록 성터를 두루 살피진 못하였으나 그 산세는 대강을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으며 평평한 땅은 아주 적으니, 백성들이 입주(入住)함에 있어 반드시 도민(都民) 4~5분의 1도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정은 주필(駐蹕)하는 곳을 살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떼지어 들어오면 막을 수 없는 형편이요, 들어갔다가 수용하지 못하면 또 구별하여 내쫓겠습니까? 더구나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져 간 자는 나라에 향하여 원망하고 분하게 여기는 마음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크게 의심을 잃는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심이 한 번 떠나면 그 어찌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또 생각하면 도성이 이미 비어 적에게 분탕(焚蕩)이 된 경우 북한의 군민(軍民)이 그 상황을 눈으로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진정시킬 수가 없을 것이니, 마침내 보호하고 지켜서 실패(失敗)함이 없겠습니까? 북한에 성을 쌓는다는 것은 결코 그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홍복의 경우 신이 보지 않았으므로 감히 망녕되이 가부를 논할 수 없으나 여러 신하가 아뢴 바의 말로 본다면 그 형편이 좋음은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요즘의 문제에 마음속으로 헤아린 바가 있습니다. 그윽히 생각할 때에 도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상계(上計)요, 남한산성에 주필(駐蹕)하는 것이 중계(中計)이며, 별달리 다른 곳을 경영(經營)하는 것이 하계(下計)라고 여겼습니다. 도성을 지키자는 논의는 대소가 같으나 위에서 곧 모두 굳게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신이 무익(無益)한 말로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함은 옳지 않으나 생각한 바가 있음에도 숨기고 말하지 않는다면 충군 우국(忠君憂國)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원컨대 얕은 소견을 아뢰어 어람(御覽)에 대비하려 합니다. 도성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는 말은 지킬 만한 병졸이 없음을 우려해서입니다. 성상께서 진실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같이 사직(社稷)을 지켜야겠다는 뜻을 명백히 효유하고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저 가려고 하나 갈 곳이 없고 산실을 얻기도 어려운 백성이 그 누구라 열복(悅服)하여 믿고 따라서 목숨을 걸고 떠나지 않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그 가정을 지키는 군병은 적어도 6~7만에 밑돌지 않을 것이니, 만약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이러한 군병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신이 외방의 성(城)을 많이 보았지마는 그 쌓은 바가 도성과 같이 잘 쌓은 곳을 적었습니다. 도성의 형세를 논한다면 남북은 곧 산성이요, 서쪽 성도 높은 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세이며, 다만 동쪽 성의 낮고 평평한 곳은 수백 보(步) 거리에 불과합니다. 성에 가득한 병민(兵民)의 힘으로 어찌 능히 지키지 못할 리야 있겠습니까? 아니면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수륙(水陸)의 도둑을 대비(對備)하기 위한 것으로서 조종(祖宗)의 오랜 규례를 지켜야 하고, 어겨서는 옳지 않습니다. 남한산성은 비록 사소한 흠이 없지는 않으나 10만의 웅장한 병사가 오래 포위하였으나 능히 깨치지 못하였으니, 그 견고함은 역시 믿을만 합니다. 여러 조정에서 경영한 남한산성을 버리고 새로이 창설하는 공소(空疎)한 홍복을 취함은 그 득실(得失)에 있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어서 논한 성을 지키자는 계획은 곧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도리에 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려하는 해구(海寇)는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굳이 깊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바다에 출몰하는 도둑이 편의에 따라 연변에서 노략질함은 있을 수 있는 일로서 뭍에 올라 땅을 빼앗고 남의 나라를 쓰러뜨리려고 꾀함은 사리와 형편으로 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리 대비하는 방법은 다만 마땅히 해상방위를 신칙하고 민력(民力)을 보호해 아껴서 조용히 진정(鎭定)하고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절대로 이 일로 하여 성심(聖心)을 과로하게 마시고 오직 굶주린 백성을 무마하여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제1의 급무로 삼으시면 국가에는 다행이겠습니다.'하였으며, 행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은 아뢰기를, '신의 심정은 진실로 감히 여러 대신과 같이 국가의 대계(大計)에 끼여 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은 일찍이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않고 망녕되이 도성(都城)에 관한 논의에 찬종하다가 마침내 큰 죄를 입었으며 국사를 여지없이 그르쳤으니, 신은 늘 스스로의 죄를 생각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찌 감히 성지(城池) 문제에 다시 용훼(容喙)하겠습니까? 또 이 홍복(洪福)·북한(北漢) 두 곳의 형세를 모두 신이 직접 본 바가 없으므로 그 편의 여부에 대하여 단정하여 억측(臆測)으로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뜻이 우려에 대한 대비에 있어 초야(草野)에 있는 천신(賤臣)에게까지 물으시니, 신자(臣子)의 분의에 있어 어찌 혐의만을 내세워 그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쪽의 보고가 있으면서부터 서울과 지방이 경동(驚動)하여 곧 닥쳐올 근심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의 어리석은 뜻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다에 출몰하는 도둑은 배를 소굴(巢窟)로 삼고, 재곡(財穀)을 노략질 하는 데에 뜻이 있어 이미 그 욕심을 채우면 곧 도로 도서(島嶼) 사이로 달아납니다. 저들 연해(沿海)의 이 근심은 수시(隨時)로 들랑거리니, 유독 오늘날만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설령 우리 경내에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깊이 쳐들어 올 계획이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약간의 무비(武備)가 갖추어 있다면 하나의 변수(邊帥)와 변리(邊吏)로도 족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승여(乘輿)가 병화(兵火)를 피할 곳까지 논의함은 진실로 외국에 알게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험조(險阻)를 설치하고 굳게 지켜 급박한 사태를 대비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도둑이 있은 뒤에야 논의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 근본의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한 번 적병(賊兵)을 만나면 버리고 달아나 그 비축한 것을 내어 주므로 적이 도리어 주인이 되고 우리는 곧 객이 되니, 이는 필패(必敗)의 형세입니다. 지금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가까이 험고(險固)한 곳을 가려서 따로 한 성을 설치하여 표리(表裏)의 형세로 삼으려 한다면 북한이 홍복보다는 나을 듯 싶습니다. 신이 일찍이 들은즉 그 지세(地勢)는 내외가 모두 험하여 안이 평탄한 남한산성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곳 백제(百濟) 시조가 처음으로 쌓은 곳으로서 그후 도읍(都邑)을 옮겨 백년을 지냈으니 어찌 한 때 주필(駐蹕)하는 곳으로 부족하겠습니까? 다만 이곳도 반드시 도성을 경영할 계획이 있어야만 양전(兩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다만 이 험고만을 믿으려 한다면 사면(四面)의 산의 험조(險阻)는 마땅히 적과 같이할 것이니, 그 외롭고 위험한 형세는 굳이 남한산성(南漢山城)보다 낫지 못할 것입니다. 또 신이 걱정이 되는 바는 성지(城池)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 굳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만약 민심이 굳게 정하여졌다면 그 수륙(水陸)의 편의에 따라 강도(江都)와 남한산성이 어찌 적을 막는 데에 부족하겠습니까? 그러나 민심이 정하여 지지 않은 경우 철벽(鐵壁)과 금성(金城)일지라도 모두 헛된 시설입니다. 지금 외구(外寇)는 오지 않았음에도 역내(域內)는 소연하여 마치 새가 놀라고 물고기가 놀란 것과 같으니, 만약 한 모퉁이에서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 토붕와해(土崩瓦解)가 됨은 필연의 형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예려(睿慮)를 확정하여 해적을 깊이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피폐한 백성을 편히 모으는 것을 급무로 삼아 그 고통을 제거하고 번거로움을 덜어서 각각 안주(安住)하고 윗 사람을 친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며, 변신(邊臣)에게 신칙하여 외침(外侵)에 대한 대비를 엄격히 하면 적이 비록 오더라도 족히 걱정이 될 것이 없으니, 이는 신의 구구(區區)한 소망입니다.'하였고, 행판중추부사 윤증(尹拯)은 아뢰기를, '지난번 성지(聖旨)를 특별히 내려서 지방에 있는 대신들을 부르셨으며 미미한 신도 외람되이 그 뒤를 이으니 황공한 마음을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에 비변사 낭청이 또 논의를 모으는 일로 내려왔습니다. 신은 시골의 미천한 신분(身分)으로서 결코 감히 대신이란 이름을 감당할 수 없으며 실로 감히 조정의 말의(末義)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조관(朝官) 명부에 매여 있음으로 인하여 늘 예에 따라 물음을 외람되이 입으니, 신은 실로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홍복(洪福)과 북한(北漢)에 성을 쌓는 것이 타당하냐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신이 두 곳의 형세를 모두 한 번도 보지 못하였고, 비록 한 번 보았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견식(見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더욱 어찌 감히 억측된 망론(妄論)으로 하문에 답하겠습니까? 곧 죽게 된 몸으로 일마다 정신이 혼모(昏耗)한데 헛되이 조정의 명령만을 욕되게 하니, 죄 또한 만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속히 성은(聖恩)을 입어 특명으로 원임(原任)의 자리에서 삭제되어 천한 신분으로 돌아가 눈을 감고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땅에 엎드려 그지 없이 송구해 합니다.'라고 하였음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봉조하가 논한 바가 아주 좋다. 정예의 돌기(突騎)를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뭍에 오른 보적(步賊)을 막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나의 뜻에 맞는다. 서둘러 강구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서둘러 논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左議政 徐宗泰 등이 입시하여 北漢과 洪福에 축성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6년
월일 庚寅十二月初七日
今十二月初一日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徐所啓, 北漢築城事, 有問議于在外大臣後, 稟定之敎矣, 收議來到已久, 而上候連在靜攝之中, 臣等久未入侍, 且非臣等一二淺見所可了當, 必與原任大臣及備局諸堂上入侍商議, 然後可以定奪, 故尙未陳白矣, 今日臣等不得備員入侍, 不可容易議定, 而淹延至此, 下敎何如, 上曰, 大臣諸臣, 各陳所見, 徐曰, 工曹判書金錫衍, 往審築城基址, 先使陳達宜矣, 韓城君李基夏曰, 臣於頃日兩處看審後, 以引對時圖形竝進之意, 仰達于書啓中, 故今方持入矣, 上曰, 進前達之, 基夏乃持圖進曰, 此乃洪福地圖也, 工曹判書金錫衍曰, 此爲洪福之圖, 而臣承命往審洪福·北漢兩處之後, 上候連在靜攝之中, 故久未入侍, 今承下詢, 敢以略陳矣, 洪福四面山勢高峻, 實是天作之地, 而東北有大野, 西南只連古靈道峯兩山, 今若以南漢之孤絶爲欠, 則此處亦無勝於南漢矣, 上曰, 周廻幾何耶, 錫衍曰, 周廻則曾聞閔鎭厚之言, 南漢三十五里云, 而洪福則二十一里餘矣, 險阻不比尋常, 棄之可惜, 以臣淺見, 徐徐營築, 先以楊牧移入其處, 似好矣, 基夏曰, 形勢則自作天險, 可合築城, 而可用之石, 近處無之, 數三年內, 成就未易, 若從容議定, 使楊牧移入, 以爲護衛王城之地, 則似好矣, 上曰, 閔鎭厚, 亦以基址之狹窄爲言矣, 基夏曰, 此則北漢圖形也, 因以指點曰, 此自洪福而落爲道峯, 自道峯而入爲北漢, 白雲普賢諸峯, 四面壁立, 雖飛鳥不能直上, 形勢則實天險之地, 而但狹隘, 恐難容衆矣, 上曰, 與南漢何如, 基夏曰, 險阻則非南漢之比矣上曰, 頃聞閔鎭厚所達, 若竝築此外洞, 則雖畿內之民, 可以容入云, 周廻幾何耶, 基夏曰, 若包入外洞而築之, 可以容衆, 而畿內之民, 則似難盡入矣, 徐曰, 包築內外, 則不爲小矣, 此山四面, 皆懸崖絶壁, 此洞雖不甚相遠, 而高下懸殊, 形勢似不爲一城矣, 錫衍曰, 臣往見其形勢, 果是絶險之地, 臣雖無見識, 意以爲決不可棄之地矣, 適見故相臣李德馨書啓, 則以爲都城至近之地, 有如此形勢, 而棄置可惜, 德馨卽宣廟朝名臣, 身經患亂, 而其言如此, 尤可信矣, 蓋欲守都城, 則北漢不可不築, 欲棄都城, 則不可專賴於北漢矣, 基夏曰, 都城爲根本之地, 先築都城爲堅守之計, 此則從容完築, 與都城爲表裏相應之地, 則似爲好矣, 而輕棄都城, 以北漢爲駐蹕之所, 未知其可也, 上曰, 他堂上所見何如, 徐曰, 備局諸堂上之意, 臣等未及詳知, 而吏曹判書崔錫恒·參判尹德駿, 皆以未知其十分便當爲言矣, 石議政金曰, 刑曹判書李彦綱之意, 則不可不築云矣, 徐曰, 奉朝賀南以姑徐爲言, 領府事尹以爲不可築矣, 國家所倚任大臣之言, 雖如此, 然聖上先定大計, 廷臣亦多有當築之論, 則不可以諸議之參差, 有所遲難, 從容措置, 期於必築好矣, 且堅守都城之請, 是爲經常之論, 若御駕移動, 根本一搖, 則其憂有不可言, 豈欲以守都城, 爲非是也, 然被寇有輕重緩急之異, 若遇寇賊勢大, 如淸人之長驅, 數日而薄城, 南倭之七年留屯而蹂躪, 則將如之何, 淸人前皇朝盛時, 穿入長城, 南倭尤善於攻城矣, 京都山川形勢勝險固足恃, 雖云南北殆如山城, 而終是與山城不同, 旬月則可以守之, 而若賊勢彌大, 時月益久, 則當百道攻城之時, 以我兵力形勢, 可保其應變而無憂乎, 臣歷觀中原諸城, 其堅固高厚, 無不皆然, 我都城貌樣, 其不及遠矣, 奉御駕守此無難之單城, 思度其畢境, 則何可謂萬全而無危道, 思之自覺懍然, 都民之請守都城, 雖云衆心成城, 市巷之民, 不慣戰守, 如其勢竭, 則何望其終始得力, 議者以爲都中守堞民丁可得七八萬云, 而變難之際, 散亡居多, 亦何能收得許多, 一如計一戶所料耶, 古稱東人, 善於守城, 此謂守山城也, 山城則雖勢大之寇, 可使我困, 而終必無以陷入, 故臣以若當大敵, 御駕駐蹕山城, 爲有全安之道矣, 北漢雖內狹爲病, 而險固則極矣, 今若仍舊築城於京都, 若內城之制, 而輸入財貨倉穀, 臨時御駕, 觀勢移蹕入守, 則旣不全棄都城, 而亦可免於危道, 判府事李箚辭, 大約爲好矣, 然則兵力分而京城益不可守云者, 事勢必然矣, 京城畢竟不可保, 委之於寇賊, 而扼於背後, 必致危困難支, 而第南漢相爲掎角, 勤王之師四集, 則賊以孤軍, 豈能久留也, 蓋北漢之計, 非爲海寇, 大計旣定, 則當經度營築形勢及容入物力, 從容講究, 而興役, 恐不必汲汲於時月間矣, 原任大臣獻議, 以爲決不可築云, 臣則本無識慮, 而所懷如此, 聖問之下, 不敢不盡矣, 金曰, 都城宗社人民之所在, 固不可棄去, 守城之言大意則是, 而以地形觀之, 多有虛疎之處, 聖上亦以闊大爲慮, 誠如下敎, 故曾前議築之時, 臣則以難守之意, 與人酬酢矣, 今此北漢, 雖有諸議之參差, 第觀形勢, 則似爲便好, 洪福規模窄狹, 而功役浩大, 北漢則非但便近於都城, 所築之處, 不多, 比築洪福, 亦多省費, 據險設築, 爲他日依歸之所, 則似爲得力矣, 上曰, 備堂兩人, 以次達之, 同知中樞府事金鎭圭曰, 臣本空疎, 不曉事務, 雖於尋常職事, 亦非可堪, 而乃以罪累之餘, 與聞軍國重事, 其爲惶愧, 有不可言, 而適値邊事有虞, 不敢固辭, 今又承牌, 黽勉入侍, 然其於城役利害, 何敢容議, 而旣承下詢, 亦何敢不陳愚見, 今此築城之議, 蓋始於九月北咨來後, 其時臣不入侍, 雖未得參聽筵說, 傳聞大臣之發此議者, 亦非專爲目前避兵之計, 然聞海警而議築城, 彼士民之聽聞者, 謂朝家之計在退避, 無足怪也, 是以中外人心, 驚撓莫定矣, 北咨所謂海寇, 未知輕重緩急之如何, 而設令不幸而寇至, 惟當防禦於邊境, 豈可先議退避之所乎, 且禦敵之道, 當先以鎭定人心爲務, 人心旣撓, 則雖有保障, 何以守之, 爲今之計, 先宜鎭定人心, 仍以飭勵帥臣, 申嚴邊備, 毋令賊兵及於內地, 至於保障之地, 則自祖宗朝所經營者, 已有兩處, 此雖或有訾議, 而有難遽爾論斷其爲不可恃, 洪福·北漢, 臣皆未嘗看審, 固未詳形便之孰優, 而聞其險阻, 則皆至矣, 然築城之役, 非累年則難以完畢, 今雖忙急講定, 有非目前所可完役, 而爲依歸之用, 則與其因此而益增人心騷搖, 毋寧從容講定之爲得矣, 且雖以必築之計而論之, 亦當商量事力而爲之, 以畿內彈丸之地, 而已有保障兩所, 其所以費國家財力者多矣, 今若又設一所, 則以近年飢荒之連仍, 國儲之匱竭, 其勢必難支當, 如欲築新城, 則亦宜舍置前所經營者一處, 以紓國力, 頃年有北郊城議, 而臣以玉堂長官入侍, 亦陳此意, 近聞九月筵席, 閔鎭厚擧臣前言仰達矣, 區區愚見, 豈異於前, 且近日諸臣疏章, 請守都城者甚多, 此蓋爲都民情願之如此故也, 彼民情未必專出爲國之誠, 亦多由保全父母妻子之計而然, 自古謀國之道, 未嘗有違拂人情, 而能成其事者, 洪福則距京城稍間, 而北漢甚密邇, 其勢譬如古所謂子母城, 而聞其內甚狹, 決難盡容都民, 若都城士民, 陷沒於賊, 則北漢豈能獨保乎, 前頭如必欲以北漢爲依歸, 則京城亦不可委棄也, 江華留守閔鎭遠曰, 小臣有何所見耶, 第自幼少時聞之, 則國家以南漢江華爲保障, 有陸賊則入江都, 有水賊則入南漢, 長老所傳如此, 而近來論議多端, 其中堅守都城之議, 則雖未知臨亂利害之果如何, 而義理則正當矣, 頃伏見聖敎, 以必當盡率入保爲敎, 臣民聞此孰不感歎, 今若以必守都城爲定計, 而以北漢爲臨急退保之所, 則誠好矣, 但必先措置守城之具, 然後徐議築城云者, 金鎭圭所達是矣, 鎭圭曰, 王公設險, 築斯鑿斯, 著於經傳, 東人又長於守城, 其在陰雨之備, 經營保障之所, 臣亦非以爲決不可, 而蓋爲今鎭定之道, 不當先議此事, 且經紀大事之初, 不盡審量, 則鮮不爲有始無終之歸, 雖以大興文殊見之, 當初築城時耗費許多財力, 未久棄置爲空城, 今宜以前事爲戒, 必須十分審量形勢與事力, 從容講定而後, 庶可免後弊也, 且於備邊之策, 此議亦不無可以商量者, 頃日備忘中, 不以賊虜遺君父之敎, 固至當而然, 爲邊帥者, 朝家專意禦邊而策勵之, 則彼當盡心力擔當, 而朝家意在退避, 而姑令備邊, 則人情難保其不解體, 臣故欲望朝家之姑徐此議, 專意邊事耳, 上曰, 此則都城咫尺之地, 與遠處有異, 今玆議築, 實是與民同入之意, 旣築之後, 似無空棄之慮矣, 此乃國之大事, 三司亦陳所見, 司諫柳述曰, 大臣諸臣, 旣皆陳達, 別無陳白之事, 而以壬丙觀之, 保障之地, 皆不得力, 今築北漢, 則雖有事變, 都民無奔避之慮, 實爲便好, 故臣待罪掌令, 時略陳形便, 今無所達矣, 副應敎李世最曰, 若築北漢, 而兼守都城, 以爲猗角之勢則好矣, 今者筵臣, 或有以築北漢, 則都城難守爲慮, 此言似然, 旣築北漢之後, 都城終不能守, 則亦非善策, 量度形勢而審處之宜矣, 持平呂光周曰, 守在四境之意, 諸臣旣已奏達, 臣亦已略陳矣, 然保障, 亦何可廢乎, 臣意以北漢之築爲好矣, 臣待罪全州判官時, 聞全州故事, 全州卽後百濟立國之地, 而五里許有南固山城, 敵至則入據山城, 敵退則下居都城, 如是保國, 殆四十年, 强敵不能陷, 至今以智略稱之, 若築北漢則殆近於後百濟之南固山城矣, 金曰, 沿邊果能防遏, 不得深入, 則豈不爲善, 而以我國兵力, 有不可恃, 豈可緩據險設築之道乎, 上曰, 今此北漢之議築, 適値北咨出來之後, 有同烏飛梨落, 人或意其爲海寇計, 而予意則據險設築, 爲將來深遠之慮, 非但爲海寇之計矣, 且沿邊防守, 實爲根本, 如使邊境固守, 不以賊遺君父, 則此爲上策, 而如或失守, 則將何以處之耶, 都城宗社所在, 堅守之議, 誠是而周廻闊大, 不爲堅固, 欲守之議, 非萬全之道也, 且壬辰西狩, 只以皇朝爲恃, 而以今思之, 龍灣播遷時事實, 多有罔極者, 況以今之人心, 尤不離都遠去之勢, 亦無可恃以往之處, 今此北漢距都城咫尺, 糧餉器械, 雖不別爲措置, 都城所在, 可以輸去, 且雖以狹窄爲慮, 閔鎭厚所達, 外洞今若竝築, 則足以容入都民, 終爲棄置, 實爲可惜, 成就似好矣, 予意則如此矣, 徐曰, 閔鎭厚可容畿民之說似過, 而都城之民, 或可幾盡容入矣, 上曰, 左右相曾已往見耶, 金曰, 小臣少時, 往棲中興寺, 經過一冬, 而山中形勢, 未得遍覽矣, 徐曰, 臣於近間見之, 而不能與人相議, 只見形基矣, 金曰, 自前朝家講究保障之地, 而尙未得一處詳看形勢, 講究設置似宜矣, 上曰, 今此北漢, 決不可棄, 而此非冬前可爲之事, 亦不可如作舍道傍之爲, 大臣及大將一人, 更爲往見, 可築不可築處, 商確議定可也, 錫衍曰, 卽今雪塞氷冱, 無路可行, 勢當待春往審矣, 上曰, 唯。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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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左議政 徐宗泰 등이 입시하여 北漢과 洪福에 축성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6년
월일 숙종 36년(1710) 12월 7일
이번 초1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북한산(北漢山)의 성 쌓는 문제에 대하여, '지방에 있는 대신에게 문의하여 여쭈어 결정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거둔 논의가 도착한 지는 이미 오래이나 임금께서 연이어 조리하고 계시므로 신 등은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하였으며, 또 신 등 한두 사람의 얕은 소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오, 반드시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비국의 여러 당상이 입시하여 상의해야만 결정할 수 있으므로 아직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신 등은 성원(成員)하여 입시하지 못하였으므로 쉽사리 논의하여 결정할 수 없어 이와 같이 지연 되었으니, 하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는 각각 그 소견을 아뢰라."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공조판서 김석연(金錫衍)이 성을 쌓을 터를 가서 살폈으니 먼저 아뢰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한성군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두 곳을 살펴 본 뒤에, 인대(引對) 때에 지도(地圖)를 아울러서 올릴 것을 서계(書啓)에 아뢴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앞으로 나와 아뢰라."
하니, 이기하(李基夏)가 곧 지도를 갖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는 곧 홍복(洪福)의 지도입니다."
하였다. 공조판서 김석연(金錫衍)이 아뢰기를
"이는 홍복의 지도로서 신이 명을 받들어 홍복과 북한 두 곳을 가서 살펴 본 뒤에, 상후가 연이어 조리하고 계시므로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하문(下問)하심을 받들어 감히 대강을 아뢰겠습니다. 홍복은 사면의 산세(山勢)가 높고 준험하여 실로 천작(天作)의 땅입니다. 동북쪽에는 큰 들이 있고, 서남쪽에는 다만 고령(古靈)과 도봉(道峰) 두 산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외롭고 뚝 떨어진 것을 흠으로 여긴다면 이곳도 남한산성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위가 얼마인가?"
하니, 김석연(金錫衍)이 아뢰기를
"주위는 일찍이 민진후(閔鎭厚)의 말을 들은즉 남한산성은 35리라 하였는데, 홍복은 21리 쯤 됩니다. 험조(險阻)는 심상한 데에 비길 수 없어 버리기에는 아깝습니다. 신의 얕은 소견에는 천천히 쌓도록 하고 먼저 양주(楊州) 고을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하였고,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형세는 천험(天險)을 우루어 성을 쌓기에 적합하나 사용할만한 돌이 근처에 없으니, 2~3년 안에 완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용히 논의하여 결정하고 양주 고을을 그곳으로 옮겨 왕성(王城)을 호위하게 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민진후(閔鎭厚)도 또한 터가 좁음을 지적하였다."
하였다.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이것은 북한의 지도입니다."
하고, 이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뢰기를
"이는 홍복에서 떨어져 도봉(道峰)이 되었으며 도봉에서 들어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이 되었습니다. 백운대(白雲臺)와 보현봉(普賢峰) 등 여러 봉우리가 사면에 절벽처럼 서 있어 비록 날으는 새일지라도 곧바로 올라갈 수 없으니, 형세는 실로 천험의 곳입니다. 다만 좁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가 어려울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과는 어떠한가?"
하니,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험조(險阻)는 남한산성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민진후(閔鎭厚)가 아뢴 바를 들은즉 이 외동(外洞)을 아울러서 쌓으면 비록 경기(京畿) 안 백성일지라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위가 얼마인가?"
하니,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외동을 포함하여 쌓으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나 경기 안 백성이 모두 들어가기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안팎을 포함하여 쌓으면 작지는 않습니다. 이 산 사면은 모두가 깎아지른 절벽으로서 이 마을은 비록 그다지 멀지 않으나 높낮이가 현격히 달라서 형세가 한 성이 되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하였고, 김석연(金錫衍)이 아뢰기를
"신이 가서 그 형세를 본즉 과연 절험(絶險)한 곳이니, 신은 비록 식견이 없으나 속으로 결코 버려서는 안 될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침 고 상신(故相臣) 이덕형(李德馨)의 서계(書啓)를 본즉, '도성의 아주 가까운 곳에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 버려둠은 아까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덕형은 곧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으로서 몸소 난리를 겪었으며 그 말이 이러하니 더욱 믿을 만합니다. 대체로 도성을 지키려 한다면 북한은 쌓지 않을 수 없고, 도성을 버리려고 한다면 오로지 북한만을 기대어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도성은 근본이 되는 지역이니, 먼저 도성을 쌓아 굳게 지킬 계획을 하고 북한은 서서히 쌓아서 도성과 안팎이 서로 응원하도록 하면 좋을 듯 하나 가벼이 도성을 버리고 북한을 주필(駐蹕)하는 곳으로 삼음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당상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비국 여러 당상의 뜻을 신 등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이조판서 최석항(崔錫恒)과 참판 윤덕준(尹德駿)은 모두 '아주 타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아뢰기를
"형조판서 이언강(李彦綱)의 뜻은 '쌓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서종태(徐宗泰)는 아뢰기를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은 '우선 보류하자.'고 말하였고, 영부사 윤지완(尹趾完)은 '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의지하고 신임하는 대신의 말은 비록 이러하나 성상께서 먼저 대계(大計)를 정하시면 정신(廷臣)들도 쌓아야 한다는 논의가 많이 있으니 모든 논의가 들쑥날쑥 한다 하여 주저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조용히 조치하여 반드시 쌓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도성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요청은 곧 불변의 논리입니다. 만약 어가(御駕)가 도성을 떠나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그 걱정은 말할 수 없이 될 것이니, 어찌 도성을 지키려 하는 것을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외적(外敵)의 침략을 받을 경우에 경중·완급의 차이가 있어 만약 적의 세력이 커서 마치 청인(淸人)이 계속 밀고 올라온 지 수일에 도성을 육박하고, 남왜(南倭)가 7년을 머무르면서 유린한다면 어찌할 것입니까? 청인은 전 황조(皇朝)의 강성한 때에도 장성(長城)을 뚫고 들어왔으며, 남왜는 성의 공격을 더욱 잘합니다. 경도(京都)의 산천 형세는 험고(險固)하여 믿을 만하고 비록 남북이 거의 산성(山城)과 같다고는 하나 결국 산성과는 달라서 열흘이나 한 달은 지킬 수 있으나 적세(賊勢)가 더욱 커지고 시일이 오래 끌어 갖가지로 성을 공략하는 때를 맞이하면 우리의 병력과 형세로서 그 변화에 응하여 걱정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중국의 여러 성을 두루 본즉 그 견고하고 높고 두터움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 도성의 모양은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어가(御駕)를 받들고 이 응원(應援)이 없는 단성(單城)을 지킴에 있어 그 결과를 생각할 때에 어찌 만전(萬全)하여 위험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 때에 도성 백성들이 도성을 지키자고 요청함은 비록 중심(衆心)이 성을 이룬다고는 하나 도성의 백성들은 전수(戰守)에 익지 않아 형세가 다하면 어찌 끝까지 힘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은 아뢰기를, '도성 안 성을 지킬 민정(民丁)으로 6~7만은 구할 수 있다.'라고 하나 변란이 있을 경우 대부분 흩어지고 도망칠 것이니, 어찌 능히 가호(家戶)마다 생각했던 바와 같이 많이 모을 수 있겠습니까? 옛부터 동인(東人)은 성을 잘 지킨다고 하는데, 이는 산성을 지킴을 말한 것입니다. 산성은 비록 세력이 큰 적군이 우리에게 고통스럽게는 할지라도 마침내 함몰(陷沒)하고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만약에 대적을 맞이하는 경우 어가가 산성에 주필(駐蹕)하면 안전한 방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비록 안이 좁은 것이 병이나, 험고(險固)는 제일입니다. 지금 예전대로 경도(京都)에 성을 쌓되 내성(內城)의 제도와 같이 하고 재화(財貨)와 창곡(倉穀)을 실어들이고, 때에 임하여 어가(御駕)는 정세를 보아가며 옮겨 들어가 지키면 도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아니요, 위험한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판부사 이이명(李頤命)의 차자(箚子)에, '대략은 좋으나 그렇게 하면 병력(兵力)이 나뉘어서 경성(京城)은 더욱 지킬 수 없다.'라고 한 말은 일의 형세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경성을 결국 확보하지 못하여 적에게 내어주고 배후(背後)에서 조이면 위험하여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남한(南漢)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근왕(勤王)의 병사가 사방에서 모이면 적은 외로운 군병으로서 어찌 능히 오래 머물겠습니까? 대체로 북한의 계획은 해구(海寇)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계(大計)가 결정이 되었으면 마땅히 계획하여 쌓도록 하되 형편 및 들어갈 물력을 조용히 강구하여 역사를 시작하고, 굳이 짧은 기간 안에 서둘러서 할 것은 없습니다. 원임 대신이 올린 논의에, '결코 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본래 아는 것이 없으나 생각한 바가 이러하고 성상께서 하문하시므로 감히 모두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도성은 종사(宗社)와 인민이 있는 곳으로서 진정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도성을 지키자는 말은 대의(大意)는 옳으나 지형으로 본다면 허술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성상께서도 넓고 큼을 염려하셨으니 사실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성 쌓는 일을 논의할 때에 신은 지키기 어려운 뜻으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금 이 북한은 비록 모든 논의가 제 각각이나 형세를 살펴보면 편의할 듯 싶습니다. 홍복(洪福)은 규모는 좁으나 공사가 크고, 북한은 비단 도성에 아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쌓아야 할 곳도 적어 홍복에 비하여 많은 경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험조(驗阻)를 이용하여 성을 쌓아 앞날 의귀(依歸)하는 곳으로 삼는다면 힘이 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국 당상 양인은 차례로 아뢰라."
하였다. 동지중추부사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짜임새가 없고 사무에 밝지 못하여 비록 일반적인 일에도 감당하지 못하여 죄에 연루된 나머지 군국(軍國)의 무거운 일에 참여하게 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황공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마침 변경에 걱정이 있을 때를 맞이하여 감히 사면할 수도 없었으며, 지금 또 패초(牌招)를 받들어 어쩔 수 없이 입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성 쌓는 역사의 이해(利害)에 어찌 감히 논의드리겠습니까마는 이미 하문을 받들었으니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성을 쌓자는 논의는 대체로 지난 9월에 북쪽의 자문(咨文)이 오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신은 입시하지 않아 비록 경연(經筵)에서의 말들을 듣지는 못하였으나 전해 들은즉 대신이 이 논의를 발설한 것은 오로지 목전의 피병(避兵)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경보(警報)를 듣고 성 쌓는 일을 논의하였으므로 저 사민(士民)들이 이를 듣고 '조정의 계획은 물러나 피하는 데에 있다.'고 하는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으니, 이러므로 서울과 지방의 인심은 놀랍게도 안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북쪽의 자문에 이른바 해구(海寇)는 경중과 완급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불행하여 도둑들이 온다 하더라도 마땅히 변경에서 방어할 것이니, 어찌 먼저 물러나 피할 곳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마땅히 먼저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에 힘 써야 합니다. 인심이 흔들리면 비록 보장(保障)이 있더라도 어찌 지키겠습니까? 지금 해야 할 일은 먼저 인심을 진정시키고 이어 수신(帥臣)에게 신칙하여 변경의 방비(防備)를 강화하여 적병이 내지(內地)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보장지역에 있어서는 조종조부터 경영한 바가 두 곳이 있습니다. 이에는 비록 단점의 논의가 있기는 하나 갑자기 믿을 수 없다고 논단(論斷)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홍복과 북한은 신이 모두 살펴본 일이 없어 실로 형편이 어느 것이 나은 지 자세하지 않으나 들은즉 그 험조(險阻)함이 모두 극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을 쌓는 역사는 여러 해가 아니면 완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비록 서둘러 논의, 결정한다 하더라도 목전에서 역사를 마쳐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일로 인하여 인심이 더욱 소요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 비록 반드시 쌓아야 할 일로 논하더라도 마땅히 사정과 재력을 헤아려서 해야 합니다. 경기(京畿) 안 조그만 지역(地域)에 두 곳의 보장(保障)이 있어 국가의 재력을 소비한 것도 많습니다. 지금 만약 또 한 곳을 설치한다면 근년에 계속된 기근(饑饉)으로 나라의 비축(備蓄)은 바닥을 드러났으니, 그 형편은 유지해 가기 어렵습니다. 새 성을 쌓으려 한다면 마땅히 앞서 경영한 것의 한 곳을 버려두어야 국력(國力)을 늦출 수 있습니다. 근년에 북교(北郊)에 성을 쌓아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을 때에 신은 옥당(玉堂)의 장관으로서 입시하여 역시 이러한 뜻으로 아뢴 바 있었습니다. 요즘 들은즉 지난 9월 경연의 자리에서 민진후(閔鎭厚)가 신의 앞서의 말을 들어서 아뢰었다 합니다. 시덥잖은 어리석은 소견이 어찌 전과 다르겠습니까? 또 근일 여러 신하가 상소로 도성을 지키자고 요청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이는 대체로 도성 백성의 정원(情願)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저 민정(民情)은 반드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만이 나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와 처자를 보전하려는 꾀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경영하는 도리는 인정(人情)을 어기고 그 일을 이룬 경우가 없습니다. 홍복은 경성에서 약간 거리가 있으나 북한의 경우 매우 가까우니 그 형세는 옛말에 이른바 자모성(子母城)에 비유할 만합니다. 그러나 들은즉 그 안이 매우 좁아 결코 도성 백성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만약 도성의 사민(士民)이 적에게 함몰(陷沒)이 된 경우 북한을 어찌 홀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북한을 의귀(依歸)하는 곳으로 삼으려 한다면 경성도 버려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였고,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은 아뢰기를
"소신이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들은즉 국가에서 남한(南漢)과 강화(江華)를 보장으로 삼아 뭍 도둑이 있으면 강화로 들어가고, 물 도둑이 있는 경우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장로(長老)의 전하는 바가 이러하나 근래의 논의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도성을 굳게 지키자는 논의는 비록 난에 임하여 그 이해가 과연 어떠한지는 모르나 의리에 있어서는 정당합니다. 지난번에 하교하신 것을 보면, '마땅히 모두 거느리고 들어가 보호(保護)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신민이 이를 들을 때에 누구라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도성은 반드시 지키기로 계획을 정하고, 북한은 급박한 사태에 임하여 물러나 보전하는 곳으로 삼는다면 진정 좋습니다. 다만, '반드시 먼저 성을 지킬 기구(機具)를 조치한 뒤에 천천히 성 쌓을 것을 논의해야 한다.'는 김진규(金鎭圭)의 아룀은 옳습니다."
하였다.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왕공(王公)이 험준한 곳을 택하여 성을 쌓고 호(濠)를 판다.'함은 경전(經傳)에 나와 있습니다. 동인(東人)은 또 성을 지키는 데에 특장(特長)이 있으니, 외침(外侵)의 대비에 있어 보장(保障)할 곳을 경영함을 신도 결코 불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정시킬 방법은 먼저 이 일을 논의해서는 옳지 않고, 또 큰일을 경영할 때에 자세히 살피고 헤아리지 않으면 시작은 있고 끝이 없는 데에 돌아가지 않기가 드문 것입니다. 비록 대흥산성(大興山城)과 문수산성(文殊山城)의 경우를 들어서 보더라도 당초 성을 쌓을 때에는 많은 재력을 소비하였으나 오래잖아 버려두어 빈 성이 되었으니, 지금 마땅히 과거의 일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반드시 형세와 일과 재력을 헤아려서 조용히 논의, 결정해야만 뒤에 따를 폐단에서 벗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변경의 방비책(防備策)에 있어 이 논의는 역시 헤아릴 만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적에게 군부(君父)를 유기하지 말라.'는 하교는 실로 지당합니다. 그러나 변경의 수신(帥臣)이 된 자는 조정에서 변경의 방비에 전념하여 격려하면 그는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담당하겠지만, 조정에서 뜻이 물러나 피하는 데에 있어 짐짓 변경을 방비하도록 한다면 인정(人情)은 태만해 지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그러므로 조정에서 우선 이 논의는 유보(留保)하고 변경의 일에 전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도성과 아주 가까운 곳이므로 먼 곳과 다르다. 지금 성을 쌓자는 논의는 실로 백성들과 같이 들어가자는 뜻이니, 쌓은 뒤에는 헛되이 버릴 염려는 없을 듯 하다. 이는 곧 나라의 일이니 삼사(三司)에서도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사간 유술(柳述)이 아뢰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가 이미 모두 아뢰었으니 별로 아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병자년의 일로 보면 보장(保障)으로 되어 있는 곳이 모두 힘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북한에 성을 쌓으면 비록 사변(事變)이 있더라도 도성 백성이 달아나 피할 우려가 없으니 실로 편의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외람되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대략 형편을 아뢰었으므로 지금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부응고 이세최(李世最)는 아뢰기를
"만약 북한에 성을 쌓고 겸하여 도성을 지켜 기각지세(掎角地勢)로 삼으면 좋습니다. 지금 연신(筵臣)들은 북한에 성을 쌓으면 도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염려하는 자도 있는데, 이 말이 그럴 듯 합니다. 북한에 성을 쌓은 뒤에 마침내 도성을 지킬 수 없다면 역시 좋은 대책이 아니니, 형세를 헤아려서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며, 지평 여광주(呂光周)는 아뢰기를
"나라의 사경(四境)을 지키자는 뜻으로 여러 신하가 이미 아뢰었고 신도 이미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보장(保障)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북한에 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신이 외람되이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 때에 전주의 고사(故事)를 들은즉 전주는 곧 후백제(後百濟)가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5리쯤에 남고산성(南固山城)이 있어 적이 나타나면 산성으로 들어가고 적이 물어가는 경우 도성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를 보호(保護)하기 거의 40년이었는데, 강한 적이 능히 함몰(陷沒)시키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 지략(智略)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북한에 만약 성을 쌓으면 후백제의 남고산성의 경우에 거의 비슷합니다."
하였고,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연변(沿邊)에서 과연 방어하여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 병력으로는 믿을 수가 없으니 어찌 험조(險阻)를 이용하여 성 쌓는 일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이 북한에 성을 쌓자는 논의가 마침 북쪽의 자문(咨文)이 나온 뒤의 일이라, 오비이락(烏飛梨落)의 경우와 같아 사람들은 해구(海寇)를 상대로 한 계획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뜻은 험조를 이용하여 성을 쌓음은 앞으로 깊고 먼 생각을 위해서요, 비단 해구만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또 연변의 방수(防守)는 실로 근본이 되니, 변경을 굳게 지켜 적에게 군부(君父)를 유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이는 상책(上策)이다. 그러나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찌 대처할 것인가? 도성은 종사(宗社)가 계신 곳이다. 굳게 지키자는 논의는 진정 옳으나 주위가 넓고 크고 견고하지 못하니, 지키려는 논의는 만전(萬全)의 방법이 아니다. 또 임진년의 서수(西狩 : 의주파천(義州播遷) )에 다만 황조(皇朝)만을 믿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용만(龍灣)의 파천 때에 망극한 일이 실로 많았었다. 더구나 지금의 인심은 더욱 도성을 떠나 멀리 갈 형세가 아니며, 믿고 갈만한 곳도 없다. 지금 이 북한은 도성에서 아주 가까워서 식량과 기계를 비록 별도로 조치하지 않더라도 도성에 있는 것을 실어갈 수가 있다. 또 비록 좁다고 염려하나 민진후(閔鎭厚)가 아뢴 외동(外洞)을 지금 아울러서 쌓는다면 족히 도성 백성을 수용할 수 있으니, 끝내 버려둠은 실로 애석한 일이다. 성취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하니, 나의 뜻은 이러하다."
하니,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경기(京畿) 백성을 수용할 만하다는 민진후(閔鎭厚)의 말은 지나친 듯 하나 도성의 백성은 거의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과 우상은 가서 보았는가?"
하니, 김창집(金昌集)은 아뢰기를
"소신은 소시에 중흥사(中興寺)에 가서 머물면서 한 해 겨울을 지냈으나 산 안의 형세는 두루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고,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신은 요즈음 보았으나 사람들과 상의하지 못하고 다만 형세와 터만을 보았습니다."
하였으며,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과거 조정에서 보장의 땅을 강구하였으나, 아직 한 곳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세를 자세히 살펴서 강구하여 설치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이 북한은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이는 겨울 전에 할 만한 일이 아니요, 역시 길가에 집을 짓 듯 하여서는 안 된다. 대신 및 대장 1인이 다시 가서 보아 쌓거나 쌓지 않을 것을 상의하여 논의, 결정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김석연(金錫衍)이 아뢰기를
"지금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어 갈만한 길이 없으니, 봄에나 가서 살펴야 할 형편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기사제목 | 摠戎使 金重器 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을 巡審한 결과를 陳達하고 山城 축성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함 |
왕 재위년도 | 숙종 37년 |
월일 | 辛卯二月初九日 |
今二月初五日,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徐所啓, 摠戎使金重器·副司直李宇恒, 旣觀北漢山城而來, 使之各陳所見何如, 上曰, 各陳所見, 金重器曰, 北漢形便, 前後大臣及諸臣, 皆已陳達, 而但議者, 或以爲水口低平, 或以爲脫有緩急則都民當盡入, 而內狹難容, 或以爲水泉, 亦甚不足, 而臣旣留四日遍見, 請詳細陳達, 井泉則初到之日, 問諸寺僧, 一一書錄, 大旱不竭之井, 凡三十餘處, 而溪澗, 亦十五處云矣, 臣親往見之, 則寺僧所言之處, 皆方不枯, 其他井泉亦多矣, 至於廢井, 則不知其數, 老僧輩又言, 鑿地則無不出水, 雖不可盡信, 而大約水泉, 則饒足矣, 周回亦可三十里, 比都城不及者十里也, 其中多有亂石成堆之處, 雖計除, 足爲都城之半, 臣之所見, 則雖使都民盡入, 似不爲不足, 而前後所見之皆異有所以然矣, 臣初入洞中, 仰見則溪壑深邃, 左右泰山壁立, 石角嵯峨, 似無容接之地矣, 半以後則稍爲開豁, 及其遍視周回之後, 則始覺其廣矣, 自中臺而下, 則尤爲寬闊, 其中大洞, 則能容許多人處亦多有之, 遍審之後, 方知其可容都民矣, 倉庫可作處, 則十餘間數十間許, 間間有之, 而似不多矣, 且有平治基址之處, 此則似是古者人居也, 但水口低平, 漢尾山爲對峯, 或者以是爲欠, 而左右兩峯削立, 只通一條路, 而峻石巉巖, 若有兵守, 則雖以石塊轉撃, 賊必不得入矣, 漢尾山遠近, 問于居人, 則以爲七里, 而臣意, 則似爲五里許矣, 大砲雖或越來, 而砲力必緩, 人若少避深入則固無害矣, 臣之所見山城處亦多, 而未有如此山之險阻也, 雖以南漢言之, 固有方賊接足之處, 而此處則實無此慮, 前頭朝家定計, 雖未敢預知, 而諸處山城, 皆不能無欠, 脫有不幸, 則駐蹕之所, 恐無過於此也, 但若築是城, 則軍餉, 倍蓰於他城然後, 可以接濟, 而至於築役, 則不過引其石而完築耳, 雖不大段高築, 亦足以防守矣, 李宇恒曰, 泉井果如金重器所達, 似無不足之慮矣, 此山東南北三面極其絶險, 可謂難得之險, 而或者, 雖以內狹爲言, 初入時則果似太挾, 而入其洞壑則藏身處最多, 水口則以主山高峻之故, 雖似低平, 而實則亦不甚低, 漢尾山, 雖有壓臨之勢, 大砲未必越來矣, 設令越來, 自我亦豈無備禦之道乎, 但輸入軍餉一款, 不比平地, 城內石路危狹, 距水邊爲二十里云, 此似難矣, 築役, 則間間有半築體城或築女墻處, 功役, 固不至大段用力矣, 但中興寺基不甚廣闊, 宗社移入則似不免狹窄之患, 龍巖寺甚 基 , 亦不廣闊, 且衆石層疊, 塡滿溪壑, 馬軍似難容矣, 金重器曰, 山城, 元非用馬軍之處也, 雖以都城言之, 賊在於外, 而城門一閉, 則摠戎守禦兩廳, 則當用於外, 固不足論, 而訓鍊禁衛御營三軍門, 則當扈駕入城矣, 三軍門馬軍竝與朝士將校之所騎, 則將近數千, 何處取草而喂飼乎, 平居無事時, 宜有變通之道矣, 李宇恒曰, 平時無馬軍調養之事則已, 旣有馬軍則臨急亦何可直爲棄去乎, 此亦預思而定計宜矣, 上謂判尹李彦綱曰, 卿亦曾往審, 宜陳所見, 李彦綱曰, 外方山城, 臣雖不能多見, 若言其形便則無如此城矣, 南漢鐵甕等處, 則雖曰絶險, 猶有寇賊薄城之慮, 而此處, 小無可慮, 水口稍似低平, 兩邊, 俱有削立峻峯, 其間不至闊遠, 足可防守, 漢尾嶺大砲, 雖或越來於外邊淺近處, 而必不及於深處, 亦不可以是爲病, 臣等往見之時, 適當水泉凍涸, 今聞水泉甚多, 此亦無慮, 又或以挾窄爲言, 而城甚 基 周回三十里內, 東邊及西北門內, 地勢稍平衍, 足作軍營及庫舍, 此外長谷處處有之, 似無狹隘難容之患, 都城至近之處, 有此天險, 他日國家不幸, 有避兵之患, 奉君父於萬全之地, 計無踰於此矣, 但糧餉則必有糶糴然後, 可以永久儲置, 此一款, 極似難處, 或可以一半置諸城外平地耶, 禮曹判書李墪曰, 此地雖險水門, 比南漢南門則反似平易, 牛馬亦可行矣, 金重器曰, 水門則卽今巖石堆積, 似不可通路, 而北門稍低, 可行牛馬, 南門亦可出矣, 李宇恒曰, 古東門邊有小谷踰越曹溪之路, 居僧以爲若載輕卜, 則牛馬亦可行云矣, 同副承旨韓配周曰, 臣於數年前以急築北漢, 以備日後之意, 對故判書李寅燁及戶曹判書金宇杭, 有私相酬酢之語而又於昨年冬初, 以急時築城之意, 略及於辭疏中矣, 厥后聖明, 深軫經遠之慮, 特下備忘, 至引漢昭烈不忍棄民之事, 以北漢爲大計, 蓋聖意, 特慮日後之民魚肉之患, 有此下敎, 滿城都民, 孰不欽仰我殿下聖德哉, 在廷諸臣, 固宜奉承聖意, 一番看審之後, 卽當料理築城, 而今則不然, 四大臣三大將及諸宰, 皆已次第往審形址, 則足以決定, 而今已四朔, 猶不能完定, 末乃以李宇恒又復看審, 非但大傷事體, 今日國事實爲泄泄沓沓, 北漢基址之絶險, 不待臣言, 諸臣亦已目擊而詳達, 且故相臣李德馨, 亦以爲都城咫尺之地, 有此天險, 而尙今棄置, 誠爲可惜, 以此觀之, 城址形便, 從可知矣, 今日急務固當不容他議, 急時築城, 若待朝議之歸一然後, 方可始役, 則有同作舍道傍, 無時可成, 大凡做大事之道, 貴在速決, 惟在聖上之自斷爲之而已, 今之言者, 以役糧及役軍爲慮, 而此則固不足爲憂矣, 都下民戶, 多至於累萬餘戶, 大戶則各出三名, 中戶則各出二名, 小戶則只出一名, 使之自裹糧三日赴役, 則今日築斯, 實是都民之至願, 孰不樂赴而子來耶, 其中至殘貧民則給糧使役, 亦無不可, 而自朝家給料者, 不過工匠而已, 昨年聞故判書李寅燁之言, 則爲其築城米一萬石, 別爲儲置于賑廳云, 以此給料, 足以需用, 而猶且不足則臣之兄配夏, 昨年爲忠淸監司時, 朝家有漢院築城之命, 而役糧全無出處, 故與李寅燁相議, 貸得賑廳若干米錢, 卽爲立本, 而出其餘利米一千七百餘石錢五千兩, 以爲築城漢院之地矣, 今則漢院, 了無始役之期, 以此先爲取用於此城之築, 則亦爲一助矣, 臣聞判尹李彦綱及摠戎使金重器之言, 則城址絶險, 用人力築斯處甚少, 不過三分之一云, 此兩人必有經營料度于心者, 付諸此兩人, 使之監董築城, 則數月之內, 可以完畢而此等重事必使大臣主之然後, 亦可以成其事, 亦令大臣中一人主管似好矣, 若賴聖算之快斷, 築斯金湯之地, 則實爲國家深遠之謀, 而脫有事變, 國家可無去邠之憂, 都下士民, 亦皆携其父母妻子, 同入一城, 則莫不以死固守, 皆爲精兵銳卒, 何患外寇之衝突, 何慮守城之不固耶, 以北漢爲駐蹕之所, 使一二大將, 兼守都城, 則都城亦無失守慮, 而與南漢, 聲勢相倚, 足成掎角之形, 豈非萬全之計耶, 惟聖明, 不謀於衆, 斷自宸衷, 無使大計遷就, 不勝幸甚, 徐曰, 相臣將臣皆往審後, 金重器·李宇恒最多出去, 故外議或以爲朝家將待末後二人之往審, 而決其築城與否, 有非事體所宜云, 此有所不然矣, 此兩臣, 以將任之人, 當初偶未同往, 故朝家使之往見, 且欲更審水泉而已, 初非欲以此兩臣之言而判斷矣, 韓配周所達惟在睿斷之說, 亦有意見然北城事, 前後諸臣所達旣詳, 仰惟聖上, 必已有經度於睿念矣, 而今日則臣等不得備員入侍, 中兵諸宰, 亦未入侍, 待後日竝招原任諸大臣及諸宰, 更加審問後斷定宜矣, 上曰, 謀之雖多決之欲獨, 時任原任大臣·備局諸宰及將臣旣皆往見, 更無詳察之事矣, 易云, 王公設險以守其國, 孟子云, 鑿斯池也築斯城也與斯民守之, 詩云, 迨天之未陰雨, 撤彼桑土, 今此北漢, 乃溫祚舊都, 而實爲天險, 都城咫尺, 有此天險之地, 若不及今修築, 則又待何時乎, 請守都城之意非不好矣, 而第周回闊大, 終不可守, 今此欲城北漢者, 是與民同守之意也, 前日則惟以水泉爲慮矣, 今聞水泉亦多云, 險阻, 旣如彼難得矣, 水泉, 又如是甚足矣, 若待廣聚而決定, 則事難成矣, 決爲築城可也, 徐曰, 此事重大待原任大臣中兵之臣入侍時, 更爲下敎, 何如, 上曰, 原任, 旣已往見, 不必更待後日矣, 大計已定則物力多少, 固不必計, 而聞石子皆在近處, 物力, 亦不多入云矣, 徐曰, 築役則似不至甚難, 而行宮及大小公廨等營建, 雖當略具規制, 比諸築役, 其功尤難, 豈是數年內可辦之事, 必有委畀之人然後, 乃可爲也, 韓配周所達, 以民戶出役, 裹糧三日赴役事, 決不可爲矣, 都民困窮, 城事雖重, 有難責以別役, 若大戶之民, 使之一日赴役, 猶可, 至於計其民戶, 累日赴役, 則不可爲矣, 李彦綱曰, 此乃與斯民同守之地也, 豈不可使斯民築之乎, 國家如以不急之興作, 勞民役衆, 則民雖迫於朝令, 不得不赴役, 而其心必怨咨, 此則係是君臣上下早晩依歸之所, 雖至愚之民, 必無怨矣, 金重器曰, 都民, 乃三萬餘戶, 一日赴役則所餘之役, 必不多矣, 刑曹參判趙泰老曰, 古語云作事謀始, 必須詳審定計然後, 可無中撤之憂矣, 臣亦年前往見北漢則險阻足憑, 而但與南漢有異, 南漢則外險內平故守易敗難, 而此處則不然, 內多傾側, 接應守牒, 其勢亦不易, 且如宮闕倉庫及百官軍卒避風雨之處, 皆不可無而似無排置之所, 若其築役則石子甚多, 雖似省功, 而內甚峻險, 故在下之石運上極難, 議者之謂其易築者, 臣不之信也, 當量其人力及前頭事勢然後, 可以經始, 而我國事, 旣定之後, 或有浮議, 或有弊端, 多有作始而無終者, 臣私與承旨韓配周及判尹臣李彦綱, 相難者久, 而多有難處之事矣, 議者, 或以爲北漢旣築, 則都城亦可守, 夫都城旣以闊大, 爲不可守, 則況入守北漢之餘, 以何兵力, 乃能竝守兩處乎, 且北漢旣築之後, 軍餉及戎器, 預皆備置然後, 可以入守矣, 不然則用力多而終爲空城矣, 地形, 雖曰險狹, 架巖鑿谷, 或可以經過, 而其中最難者軍餉也, 今者, 國無三年之蓄, 糧餉, 實未易措辦, 若欲以江都南漢之穀, 移入于此, 則有同毁東壁而補西壁矣, 雖以軍兵言之, 必如守禦摠戎廳之例, 預置軍門然後, 可以臨急入守, 今若不儲軍餉, 不定軍兵, 則雖築是城, 將焉用哉, 孤峯絶頂, 生理甚艱, 募民入居, 亦必逃散, 一築之後, 修葺無人, 軍餉則必有糶糴然後, 可以久遠儲置, 而此處則糶糴亦甚有弊矣, 且江都南漢皆有守將, 而此處則非設官守備之地, 只以僧軍居守, 則徒築虛城, 將不免頹圮, 此豈非難處事乎, 韓配周曰, 趙泰老之所言, 雖似周詳, 全無着落矣, 外方之城則歲月旣久之後, 不能如初修築, 至於北漢一築之後, 則在此至近之地, 凡事着念擧行, 何患後日之爲空城耶, 臣頃聞金重器之言則, 渠之所將兵亦二萬, 亦可以守城云, 今金重器方入侍, 下詢則必不面謾而直陳矣, 數月前, 見戶判金宇杭則以爲五日役民, 民必無怨, 而臣則減其數, 以三日仰達矣, 金重器曰, 臣日昨受牌, 來到政院則韓配周以是事問臣, 臣偶然酬答曰, 惟在朝家之斷定而已, 物力則何必多入云矣, 今以此言爲證, 着實陳達誠爲未安矣, 副校理洪致中曰, 此係國家大計, 故臣亦惶恐敢達, 趙泰老之言, 極有意見, 亦頗詳盡矣, 有糧餉然後, 可以守城, 雖金城湯池, 無食則不可守也, 百官軍兵及守牒士民, 其數必不下累萬, 國家將何以供給乎, 若有糧絶之患, 則必須自外運入, 而南漢, 旣以孤絶爲欠, 則此處孤絶, 亦無異於南漢矣, 東西南三面, 皆有廣野留陣之處, 賊以大陣, 分屯三面, 間出遊騎, 往來抄掠, 則糧道絶矣, 援兵亦阻矣, 不待賊兵薄城, 而其勢自危, 以此觀之, 固非萬全之地, 且旣入北漢, 則竝守都城, 決知其難矣, 若不幸都城失守, 賊兵入據, 則以北漢孤危之地, 何能盡容都民乎, 亦何以久守孤城乎, 且內地稍平然後, 易於往來接應, 而此處則內亦絶險云, 賊若犯城, 倉卒報警, 則調兵往救之際, 賊已登堞矣, 我軍有仰攻之難, 賊兵有建瓴之勢, 雖以地形言之, 其險不足恃矣, 韓配周曰, 賊豈有可接之處乎, 全不知形便之言也, 李彦綱曰, 趙泰老所謂作事謀始之言, 固是也, 而此城則故相臣李德馨書啓中, 有承命往審之語, 以此觀之築城之議, 蓋自祖宗朝有之矣, 雖以今番事言之, 自前冬以後, 大臣將臣及諸臣, 皆已往見, 備陳形便謀始之道不可謂不盡也, 至如糧餉一款, 自是築城後事, 我國雖疲, 豈不能辦出十萬石穀乎, 但糶糴之道甚艱, 必須擇人委畀, 善爲措置, 可也, 上曰, 如此之議, 誠爲泄泄也, 夫都城闊大難守, 故前後儒生武臣之請, 予皆不許矣, 江都則海寇及氷凘時非可恃之地, 南漢則以渡津爲難, 此則距都城至近, 無異都城, 故欲與民入守, 而人之所見, 如人面之不同, 若必待諸議俱同然後作事, 則無可成之日, 眞所謂待汝議論定時, 虜已渡江者也, 定築之後, 設有未盡措置者, 猶可入守矣, 今若一年二年無一定處, 則將何往乎, 軍餉等事, 不過節目間事, 且與遠地有異, 商量措置似不難矣, 徐曰, 人之所見如人面不同之下敎, 誠然矣, 爲國家大事, 故諸臣不敢不畢陳其見, 人之意見何能必同, 無所苟同, 互有是非之言者, 此未必非朝廷之美事也, 上曰, 予亦何嘗以諸臣之各陳所見爲非乎, 只恐有議論定時虜已渡江之患也, 徐曰, 諸議或以城成後, 穀物糶糴爲不便而臣意, 則穀物運入城, 爲不便, 然餉穀不必盡爲輸入城中, 水口城底, 設置倉舍, 漕運京江穀物, 常使幾皆儲置於此, 自此而出入支用, 則二十餘里之地, 豈至甚遠乎, 判府事李箚辭, 以築倉於蕩春臺爲言, 亦似便好矣, 如丙子數日薄都城之寇變, 豈復有之, 雖累萬石之穀, 旬月之間咫尺之地, 豈不可運入城裏乎, 北京漕運到通州, 距都爲三十餘里, 麗朝後西江, 距都爲三十里, 雖今日事力大有所不及, 大體如以築城爲重, 則一二不便之端, 自可從容商度, 處之而支過矣, 配周曰, 軍餉路險, 難運於城內, 則倉舍作於山城門外, 臨時取用, 無妨, 古者兩陣相對之時, 雖四五十里, 築甬道運糧, 脫有緩急, 運入城下之穀, 有何難哉, 上曰, 然矣。 |
기사제목 摠戎使 金重器 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을 巡審한 결과를 陳達하고 山城 축성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7년
월일 숙종 37년(1711) 2월 9일
이번 2월 초5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부사직 이우항(李宇恒)이 북한산성을 둘러보고 왔으니 각기 소견을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각각 소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북한의 형세는 전후로 대신과 제신이 벌써 모두 진달하였으나 다만 논의한 사람들이 더러는 수구(水口)가 낮고 평탄하다고 하기도 하고 더러는 만일 위급이 있으면 도민(都民)이 다 들어가야 하는데 내부가 좁아 수용하기 어렵다고도 하며 더러는 우물이 몹시 부족하다고도 하였는데 신이 이미 4일을 머물면서 두루 살펴보았으니 상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우물의 경우는 처음 도착한 날 절 중에게 물어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크게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모두 30여 군데이고 간수(澗水)도 15군데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가서 보니 중이 말한 곳은 현재 모두 마르지 않았고 여타의 우물도 많았습니다. 폐정(廢井)에 있어서는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으나 노승(老僧)들은 또 땅만 파면 어디든지 물이 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겠으나 대체로 물만은 넉넉합니다. 둘레도 30리는 되니 도성에 비하여 10리만이 모자라고 그 속에는 난석(亂石)이 무더기를 이룬 곳이 많이 있는데 아무리 에누리를 한다 해도 족히 도성의 반절은 쌓겠습니다. 신이 본 바로는 도민을 다 들어가게 해도 부족할 것이 없을 듯한데도 전후의 소견이 다 다른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쳐다보니 구렁은 깊고 좌우로는 태산이 벽처럼 섰는데 석각(石角)이 높다라 거접(居接)할만한 곳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반쯤 더 들어가니 차츰 넓어지고 정작 사방을 둘러보니 비로소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대(中臺)부터 이하는 더욱 넓고 그 중에서도 큰 골짜기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곳도 많이 있었는데 두루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도민을 포용할 만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창고를 지을 만한 곳은 10여칸 또는 수십 칸 가량은 간간이 있었으나 많지는 않은 듯하였고 또 평탄하게 터를 다듬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 사람이 살았던 곳인 것 같았습니다. 다만 수구가 낮고 평탄하며 한미산(漢尾山)이 대봉(對峰)이 되어 있어 혹자는 이것으로 흠을 잡기도 하나 좌우 두 봉이 깎아지르듯 섰고 길 한 가닥만 겨우 통해 있는데 뾰족한 돌 높은 바위가 군병이 지키는 듯 하고 있으니 돌덩이만 굴려서 공격하더라도 적은 필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한미산의 거리를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7리라고 하였으나 신이 보기에는 5리쯤 되어 보였는데 대포는 혹 도달한다 하더라도 위력은 필시 줄어들 터이므로 사람이 조금만 피하여 깊이 들어가면 피해는 없겠습니다. 신이 본 산성 자리도 많으나 이 산처럼 험고한 곳은 있지를 않았습니다. 남한산성으로만 말하더라도 사실 오랑캐들이 발붙일 곳이 있었으나 이곳은 그러한 걱정이 없습니다. 앞으로 조정의 정책(定策)이 어찌 될지 미리 알 수는 없으나 각처의 산성은 모두 흠이 없지 않으니 만일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주필(駐蹕)할 곳은 여기보다 나을 데가 없겠습니다. 다만 이 성을 쌓게 된다면 군향(軍餉)은 다른 성보다 몇 갑절 더 있어야만 운용할 수 있겠고 축조공사에 있어서는 돌을 끌어다가 쌓기만 하면 되고 그다지 높게 쌓지 않아도 족히 방어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이우항(李宇恒)도 아뢰기를
"우물은 과연 김중기(金重器)가 진달한대로 부족할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이 산의 동, 남, 북 3면은 극히 험절하여 가히 얻기 어려운 천험이라 하겠으나 더러는 내부가 좁다고 말하고 있는데 처음 들어가면 과연 너무 좁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골짜기로 들어서면 몸을 숨길 곳이 가장 많고 수구는 주산(主山)이 높기 때문에 낮고 평평한 것 같지만 실은 그리 낮지 않으며 한미산이 누르는 듯한 형세가 있다 하더라도 대포는 아마 넘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넘어온다 하더라도 우리인들 어찌 방비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다만 군향을 실어 들이는 일만은 평지와 비교할 바가 아니고 성내는 돌 길이 좁고 위험하며 한강(漢江)까지는 20리나 된다고 하니 이 점이 어려울 듯합니다. 축성 공사는 간간이 반절만 쌓아도 체성(體城)이 이루어질 곳도 있고 여장(女墻)을 쌓아야 할 곳도 있으나 공사는 대단하게 힘을 드릴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중흥사(中興寺)의 터가 그다지 넓지 않아 종사(宗社)를 옮겨 올 경우 협착(狹窄)한 염려를 면할 수 없겠고 용암사(龍巖寺)의 터도 넓지 않으며 또 많은 돌이 중첩하여 골짜기를 메우고 있으니 마군(馬軍)은 용납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김중기(金重器)는 아뢰기를
"산성은 본래 마군을 사용할 곳이 못됩니다. 도성으로 말하더라도 적이 밖에 있어 성문을 한번 닫으면 총융, 어영 양청은 밖에 배치하여야 하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훈련, 금위, 어영의 3군문은 호가(扈駕)하기 위하여 성내로 들어와야 하는데 3군문의 마군과 조정 사대부 및 장교가 타는 것까지 합하면 수천 필에 가까울 것이니 어디에서 풀을 구해다가 먹이겠습니까? 평안하고 일없을 때에 의당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아뢰기를
"평시에 마군이 없어 기를 일이 없었다면 모르거니와 기왕 마군이 있는 바에 완급에 다달아 어떻게 바로 버리고 가겠습니까? 이 역시 미리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판윤 이언강(李彦綱)에게 이르기를
"경도 전에 가서 살펴보았으니 소견대로 말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외방의 산성을 신이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형세로 말하면 이 성 같은 곳이 없습니다. 남한(南漢)과 철옹(鐵甕)같은 곳은 극히 험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이 성을 육박할 염려가 있으나 이곳만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수구(水口)는 다소 낮고 평평한 것 같으나 양변에 모두 깎아 세운 듯한 준봉(峻峰)이 있고 그 사이가 넓지는 않으나 족히 방수할 수 있습니다. 한미령(漢尾嶺)에서 대포가 혹 바깥쪽의 낮고 가까운 곳에서 넘어온다 하겠으나 필시 깊숙한 곳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병통으로 여길 것은 없습니다. 신 등이 가서 보았을 때에는 마침 우물이 얼고 말랐었으나 지금 들으니 우물이 매우 많다고 하니 이 역시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또 혹 좁다고 말을 하나 성 터의 둘레 30리 내에서 동쪽과 서, 북문 안은 지세가 약간 평탄하니 족히 군영과 창고를 지을 수 있겠고 이 밖에도 긴 골짜기가 처처에 있으니 협착하여 수용 못할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도성의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이 있으니 후일 불행하게도 나라에서 병란을 피할 일이 있어 임금님을 안전한 땅으로 모시게 된다면 계책이 여기보다 더 나은 데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군량은 반드시 조적(糶糴)이 있어야만 영구히 비치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일이 난처합니다. 혹 한 절반을 성 밖의 평지에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예조판서 이돈(李墪)은 아뢰기를
"이곳이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수문은 남한산성의 남문에 비하여 오히려 평탄한 것 같으니 우마(牛馬)도 다닐 수 있겠습니다."
하니,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수문은 지금 바위와 돌이 쌓였으니 통행할 수 없을 듯하나 북문은 약간 낮으니 우마도 다닐 수 있겠고 남문으로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아뢰기를
"옛 동문 곁에 작은 골짜기가 있어 조계(曹溪)로 넘어가는 길인데 그곳에 사는 중의 말로는 가벼운 짐만 실으면 우마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신은 수년 전에 빨리 북한산에 성을 쌓아 후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고 판서 이인엽(李寅燁)과 호조판서 김우항(金宇杭)에 대하여 사사로 수작한 말이 있었고 또 작년 첫 겨울에는 서둘러서 성을 쌓자는 뜻으로 사직 상소에서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그 후에 성상께서는 원대한 계려(計慮)임을 깊이 살피시고 특별히 비망기를 내리셨는데 한소열(漢昭烈)이 차마 백성을 버리지 못한 일을 인용하시기까지 하시면서 북한산으로 대계(大計)를 삼으셨습니다. 대체로 성상의 뜻은 일후에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될까 특별히 염려하여 이러한 하교가 계셨던 것이니 성 안에 가득한 도민(都民)들이 뉘라서 우리 전하의 성덕을 흠앙하지 않았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제신은 의당 성상의 뜻을 받들어 한번 살펴본 뒤에는 곧바로 요리하여 성을 쌓았어야 했는데 정작 그러지 않았습니다. 4대신 3대장 및 제재(諸宰)가 모두 이미 차례로 가서 형세를 살펴보았으면 족히 결정지을 만도 한데 이제 이미 4삭(朔)이 지나도록 완결짓지 못하고 끝내는 이우항(李宇恒)에게 또 다시 살펴보게 하니 비단 사체만 크게 손상시킨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국사는 사실 답답하고 갑갑합니다. 북한의 터가 극히 험함은 신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제신들이 이미 목격하고 상세히 진달한 바이고 또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도 도성의 지척(咫尺)에 이러한 천험(天險)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버려 둔 것이 참으로 가석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성 터의 형세를 알 만합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말고 빨리 성을 쌓는 일입니다. 만일 조정 의논이 일치한 뒤에 일을 시작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길가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이루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큰일을 이루는 길은 빨리 결정하는 것이 소중한 만큼 오직 성상께서 스스로 판단하여 하실 따름입니다. 지금 논자들은 역량(役糧)과 역군을 걱정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도하(都下)의 민호(民戶)가 자그만치 몇 만여 호인데 대호(大戶)는 각각 3명을 내고 중호(中戶)는 각각 2명을 내며 소호(小戶)는 각각 1명만 내게 하고 식량을 싸 가지고 와서 3일씩만 부역하게 한다면 오늘날 성 쌓는 것은 사실 도민들의 지극한 소원인데 뉘라서 즐겨 자식이 부모의 일에 달려오듯 하지 않겠습니까? 그 중에서 지극히 가난한 백성에게는 식량을 주면서 사역시켜도 불가할 것은 없겠으나 나라에서 요(料)를 주는 것은 공장(工匠)에 국한하여야 합니다. 작년에 고 판서 이인엽(李寅燁)의 말을 들으니 성을 쌓기 위하여 쌀 1만 석을 따로 진휼청에다 비치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요를 주면 족히 써 나갈 수 있겠으나 그래도 부족하면 신의 형 배하(配夏)가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서 한원(漢院)에 성을 쌓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역량이 전연 나올 곳이 없자 이인엽(李寅燁)과 상의하여 진휼청에서 약간의 쌀과 돈을 빌어 본전을 세워 두고 이자만으로 쌀 1,700여 석과 돈 5,000냥으로 한원에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이제 한원에는 일을 시작할 기약이 없으니 이것을 먼저 이 성을 쌓는 데에 전용한다면 이 역시 일조가 되겠습니다. 신이 판윤 이언강과 총융사 김중기의 말을 들으니 성 터가 극험하여 인력을 들여서 쌓을 곳은 매우 적어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경영하고 요리한 바가 있을 것이므로 이 두 사람에게 맡겨 감독하여 성을 쌓게 한다면 몇 달 안에 완공할 수 있을 것이나 이러한 중대한 일은 반드시 대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으니 이번 역시 대신 중 한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일 성상의 쾌단에 힘입어 금탕(金湯) 같은 땅에 성을 쌓게 된다면 실로 국가의 심원(深遠)한 계책이 된 것이고 만일 사변이 생긴다 하더라도 국가에서는 서울을 버릴 걱정이 없을 것이며 도하의 사민(士民)들도 모두 부모와 처자를 이끌고 한 성에 같이 들게 되면 죽음으로써 굳게 지키지 않는 이 없어 모두가 정병(精兵), 예졸(銳卒)이 될 것이니 어찌 외구(外寇)의 충돌을 걱정할 것이며 어찌 수성(守城)의 튼튼치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북한을 주필의 처소로 삼고 한 두 명 대장으로 하여금 도성까지 아울러 지키게 한다면 도성도 실수(失守)할 염려가 없을 것이고 남한산성과 성세(聲勢)를 서로 통하면 족히 기각(藪角)의 형세를 이룰 것이니 어찌 만전의 계책이라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는 중설(衆說)에 끌리지 마시고 신충(宸衷 : 임금의 마음 )으로 판단하여 대계를 천연됨이 없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상신(相臣), 장신(將臣)이 다 나가서 살펴본 뒤에 김중기(金重器), 이우항(李宇恒)이 최후로 나갔기 때문에 외론은 혹 조정에서 두 사람이 살펴보기를 기다려 축성 여부를 결정하려는 것으로 여겨 사체에도 온당치 못하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이 두 신하는 장임(將任)을 맡은 사람으로 당초에 우연히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가서 보게 하였고 또 다시 우물을 살펴보게 하려던 것이었지 애초에 이 두 사람의 말로써 판단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뢴바 오직 예단(睿斷)에 매였다는 말은 역시 의견이 있는 바이나 북한산성의 일은 전후로 제신의 진달이 자상하였을 뿐더러 성상께서도 필시 벌써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신 바가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신 등이 성원이 되지 않은 채 입시하여 본병(本兵 : 병조의 뜻 )의 제재들이 입시하지 못하였으니 후일에 원임의 모든 대신과 재신(宰臣)을 함께 불러 다시 상세히 물어서 단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모사(謀事)는 비록 여럿이 하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 싶다. 시임, 원임, 대신과 비국의 제재 및 장신(將臣)은 이미 모두 가 보았으니 다시 상찰할 일이 없겠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왕공(往公)은 설험(設險)하여 나라를 지킨다.'하였고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백성과 함께 지킨다.'하였으며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에 뽕나무 껍질을 벗겨서 둥지를 엮는다.'고 하였다. 이번 이 북한은 바로 온조(溫祚)의 옛 도읍지로 실로 천험이라 하겠는데 도성의 지척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는데도 지금에 수축하지 않는다면 또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도성을 지키자고 청한 뜻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둘레가 넓어서 결국은 지킬 수 없을 터이니 이번에 북한에 성을 쌓고자 한 것은 백성과 함께 지키자는 뜻이다. 전일에는 오직 우물을 걱정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우물도 많다고 하니 험고하기도 그처럼 얻기 어렵고 우물도 이처럼 많다하니 매우 흡족한 셈이다. 만일 널리 물어서 결정하려면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결단코 성을 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중대한 만큼 원임 대신과 본병(本兵)의 신하가 입시할 때를 기다려 다시 하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임들은 이미 가 보았으니 구태여 후일을 다시 기다릴 것이 없겠다. 대계가 한번 정해지면 물력의 다소는 헤아릴 것이 없으나 듣자니 돌은 모두 가까운 곳에 있고 물력도 많이 들지 않는다 한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쌓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듯하나 행궁(行宮)과 대소의 공해(公廨) 등을 영건하자면 아무리 간략하게 제도만 갖춘다 하더라도 축성 공사에 비하면 그 일이 더욱 어려운데 어찌 이 수년 내에 조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위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뢴바 민호에 따라 부역을 내세워 식량을 짊어지고 3일씩 사역시킨다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곤궁한 도민에게 축성의 일이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별도의 응역을 부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호(大戶)의 백성에게 하루의 부역을 시킨다면 혹 모르거니와 민호를 헤아려서 여러 날을 부역시킴에 이르러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이곳은 바로 백성과 함께 지킬 땅인데 어떻게 백성으로 하여금 쌓게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나라에서 만일 급하지도 않는 일을 일으켜서 백성을 사역시키고 수고롭게 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조정 명령에 못 견디어 부득이 부역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필시 원망하고 한탄할 것이나 이곳은 군신 상하가 조만간 의탁할 곳인 만큼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원망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중기(金重器)는 아뢰기를
"도민이 3만여 호이니 하루씩만 부역하면 남은 일은 필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참판 조태로(趙泰老)는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일을 일으키려면 시초에 잘해야 한다.[作事謀始]'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자세히 살피고 계획을 세워야만 중도에 걷어치우는 일이 없습니다. 신도 연전에 북한에 가보니 험조(險阻)하기로는 족히 의지할 만하였으나 다만 남한(南漢)과는 다릅니다. 남한은 밖으로는 험하고 안으로는 평탄하기 때문에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나 이곳은 그렇지 않고 안으로 경사가 심하여 대응하고 성첩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형세이고 또 궁궐, 창고 및 백관과 군졸이 풍우를 피할 시설이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데 배설(排設)할 곳이 없을 듯하였습니다. 축성 공사에 있어서는 돌이 많아 일을 덜 것 같기는 하나 안쪽도 몹시 험준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돌을 위로 운반하기가 어렵겠으니 논자들이 쌓기가 쉽다고 말한 뜻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의당 사람의 능력과 앞으로의 사세를 헤아려 본 연후에라야 시작할 수 있겠는데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일을 결정한 뒤에 혹은 논란이 있고 혹은 폐단이 있어 시작만 했다가 결말이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신이 사석에서 승지 한배주(韓配周)와 판윤 이언강(李彦綱)과 더불어 서로 토의한 지 오래이나 난처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논자는 더러 북한에 성이 쌓아지면 도성도 지켜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도성이 기왕 넓어서 지킬 수 없다 한다면 더구나 북한에 들어가 지키게 된 뒤에 무슨 병력으로 두 곳을 아울러 지키겠습니까? 또 북한에 축성한 뒤에는 군향과 병기를 모두 미리 비치하여야만 들어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 들인 것은 많아도 결국은 빈 성과 다름이 없이 됩니다. 지형은 비록 험하고 좁아 바위에 가교(架橋)를 놓고 골짜기를 파고 하여 지나갈 수는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군향입니다. 지금 나라에는 3년의 비축이 없으니 군량을 조달하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만일 강도(江都)와 남한의 곡식을 이곳으로 옮기고자 한다면 이는 마치 동쪽 벽을 헐어서 서쪽 벽을 때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 군병으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수어청 총융청의 예와 같이 미리 군문을 창설해 두어야만 급할 때에 들어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군향도 비축하지 않고 군병도 정하지 않는다면 비록 이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쓰임이 되겠습니까? 고봉(孤峯) 절정(絶頂)에 살아가기가 무척 어려우므로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도록 해도 필시 도산(逃散)할 것이니 한번 쌓은 뒤에는 수보(修補)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군향은 반드시 조적(糶糴)이 있어야만 오래도록 비치할 수 있는데 이곳은 조적에 몹시 폐단이 많습니다. 또 강도와 남한에는 모두 수장(守將)이 있는데 이곳은 관원을 배치하여 지키게 할 곳도 못되어 다만 승군(僧軍)으로 살면서 지키게 할 수 밖에 없으므로 한갓 빈 성만 쌓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퇴락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어찌 난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조태로(趙泰老)가 말한 바는 비록 자상한 듯하오나 전연 귀착한 것이 없습니다. 외방의 성첩은 세월이 오래 된 뒤에는 처음에 수축할 때와 같을 수 없겠으나 북한에 한번 쌓은 뒤에는 이토록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범사(凡事)를 착실하게 거행할 텐데 어찌 후일 공성(空城)이 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김중기의 말을 들으니 그가 거느린 군병만도 2만 명이니 성을 지킬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김중기(金重器)가 지금 입시하고 있으니 하문하신다면 반드시 면유(面諛)하지 않고 사실대로 진달할 것입니다. 몇 달 전에 호판 김우항(金宇恒)을 만났더니 그의 말이 5일씩 백성을 부역시켜도 필시 원망함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신은 그 수를 줄여서 3일로 앙달하였습니다."
하니, 김중기(金重器)가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패초를 받고 정원에 당도하니 한배주가 이 일로 신에게 묻길래 신이 별 생각없이 대답하기를 '오직 조정에서 단정하기에 매였을 뿐이지 물력이야 어찌 많이 들겠느냐?'하였는데 이제 이 말을 진지하게 대답한 말로 증거를 삼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부교리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이 일은 국가의 대계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도 황공하나마 앙달하겠습니다. 조태로의 말은 극히 의견이 있는 말이고 또 자못 상세합니다. 군량이 있어야만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아무리 금성(金城) 탕지(湯池)라 하더라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백관과 군병 및 성첩을 지킨 사민의 수효가 필시 몇 만이 못 되지는 않을 것이니 국가에서 어떻게 식량을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식량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밖에서 실어 들여야 하는데 남한도 기왕에 고절(孤絶 : 외따로 떨어짐 )을 흠으로 여겼으나 이곳의 고절도 남한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 서, 남 3면은 모두 넓은 들판이나 진치고 주둔할 만한 곳이 있으니 적이 대군으로 3면에 분둔(分屯)하고 간간이 유격대를 내 보내서 왕래하며 초략(抄掠)하면 양도(糧道)도 끊기고 원병(援兵)도 막힐 것이니 적병이 성을 공략함을 기다릴 것도 없이 형세가 저절로 위태로워집니다. 이로 보면 사실 안전한 땅이 아니고 또 한번 북한에 들어가면 도성까지 아울러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되지 않을 일입니다. 만일 불행하게도 도성을 실수(失守)하여 적병이 점거한다면 북한 같은 외롭고 위태로운 지역으로 어떻게 도민을 다 수용하겠으며 또 어떻게 오래도록 외딴 성을 지키겠습니까? 또 안쪽은 다소 평탄해야만 왕래하며 접응하기가 쉬운데 이곳은 안쪽도 절험(絶險)하다 하니 적이 만일 성을 범하여 창졸간에 경보를 알리면 군병을 조발하여 구원할 즈음 적은 벌써 성첩에 오르게 될 터이니 아군은 위를 쳐다보고 공격하는 어려움이 있고 적병은 건령(建瓴 : 쉽다는 표현 )의 형세가 있으므로 아무리 지세를 들어 말한다하더라도 그 험조(險阻)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한배주(韓配周)는 아뢰기를
"적이 어찌 발붙일 곳이 있겠습니까? 전연 형세를 모르는 말입니다."
하고, 이언강(李彦綱)은 아뢰기를
"조태로(趙泰老)가 이른바 일을 일으키려면 시초에 잘 작량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성은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의 서계 중에도 명을 받들고 가서 살펴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 보면 축성의 논의는 조종조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일로 말하더라도 작년 겨울 이후로 대신, 장신 및 제신이 모두 이미 가서 보고 형세를 소상히 아뢰었으니 시초에 작량하는 도리는 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고 식량의 일에 있어서는 원래 성을 쌓은 뒤의 일이나 우리나라가 아무리 피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곡식 10만석이야 판출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조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겠으니 모름지기 사람을 가려서 위임하여 잘 조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러한 의론은 참으로 갑갑하다. 무릇 도성은 너무나 넓어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후로 유생과 무신의 청을 내가 모두 불허하였던 것이다. 강도(江都)는 해구(海寇) 때문에 얼음이 풀릴 때에는 믿을 만한 곳이 못되고 남한은 나루를 건너는 것이 곤란하다고 하는데 이곳은 도성에서 아주 가까우니 도성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만일 꼭 여러 의논이 합치하기를 기다려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성취할 날이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너희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자면 적은 이미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하는 따위일 것이다. 쌓기로 결정한 뒤에는 설사 미진한 조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들어가 지킬 수 있을 것이나 지금 만일 1년이고 2년이고 결정한 곳이 없다 한다면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군향 같은 일은 절목상의 일에 불과하고 또 먼 곳과는 다름이 있으니 헤아려서 조치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다는 하교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국가의 대사이기 때문에 제신들이 소견을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꼭 같겠습니까? 구차하게 뇌동(雷同)하지 않고 서로 옳다 그르다 하는 말이 있었던 것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언제 제신들이 각기 소견을 말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는가? 다만 의론이 정해졌을 때는 적이 이미 강을 건너는 일이 있을까 저어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여러 의논은 혹 성이 이루어진 뒤에는 곡물의 조적이 불편하리라고 말하고 있으나 신의 생각은 곡물을 실어 들이기가 참으로 불편하기는 하나 군향곡을 구태여 다 성 안으로 실어들일 것이 아니라 수구(水口)나 성 아래에 창고를 설치하고 경강(京江)에 조운(漕運)한 곡물을 항상 거개 그곳에 저치하게 하고 거기에서 내고들이고 하면서 써 나간다면 20여 리의 거리가 어찌 몹시 멀다 하겠습니까? 판부사 이유(李濡)의 차자에서 창고를 탕춘대(蕩春臺)에 짓자고 말하였는데 역시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병자년 (인조 14년(1636)) 처럼 며칠 사이에 도성을 육박한 적변(賊變)이 어찌 다시 있겠습니까? 아무리 몇 만 석의 곡물이라 하더라도 지척의 거리에서 달포 사이에 어찌 성 안으로 실어들이지 못하겠습니까? 북경(北京)의 조운도 통주(通州)까지만 도착하니 도성까지는 30여 리이고 여조(麗朝)의 후서강(後西江)도 도성까지는 30리였으니 오늘날의 역량이 크게 미치지 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대세(大勢)가 성을 쌓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면 한, 두 가지 불편한 사단은 저절로 조용히 헤아려서 처리하면서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배주(韓配周)가 아뢰기를
"군향은 길이 험하고 성 안으로 운반하기 어렵다면 산성의 문 밖에 창고를 짓고 필요할 때에 가져다 써도 무방합니다. 옛날에도 두 진영이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40~50리를 용도(甬道)를 쌓아 곡물을 운반하였는데 만일 완급이 있다 해도 성 아래에 실어다 놓은 곡물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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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知事 李基夏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의 水口에
虹霓를 쌓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8년
월일 숙종 38년(1712) 3월 6일
지난 초4일의 비변사 당상이 청대하여 인견, 입시하였을 때에, 지사 이기하(李基夏)가 아뢰기를
"지난번 약방(藥房)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의 아룀으로 인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구(水口)에 홍예(虹霓)를 쌓는 것이 옳으냐의 여부를 신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여 품처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봄이 된 뒤에 신은 마땅히 곧 가서 보아야 하나 연이은 병고(病故)로 인하여 아직도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의 형세는 신이 이미 여러 차례 가서 두루 살펴보아 지금에야 대강을 짐작하여 알 수 있습니다. 수구에 돌을 쌓은 것이 꽤 견고하고 안은 잡석(雜石)으로 채워서 작은 물은 잡석 사이로 흘러내릴 수 있고 큰 물의 경우 성 위로 넘어 아래로 쏟치니, 혹 큰 장마로 급류를 맞이하는 때에는 붕괴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좌우의 암석(巖石)이 높다랗게 대치(對峙)해 있고 두 암석 사이에 또 하나의 거대한 암석이 있으니, 그 위에 널리 홍예를 쌓으면 형세는 더욱 견고하나 이미 중성(重城)을 쌓은 뒤에는 홍예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긴요하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은 먼저 중성을 쌓고 또 금년 여름의 홍수를 치른 뒤에 그 형편을 보아가며 천천히 다시 논의하는 것이 옳을 듯 싶기에 감히 이에 아룁니다."
하였고, 병조판서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홍예의 역사는 지극히 크고, 또 방금 중성을 쌓고 있으므로 수구는 더욱 만전(萬全)하니, 굳이 다시 홍예를 쌓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이기하가 아뢰기를
"도감(都監)에는 본래 물력이 없어 신은 여러가지로 꿰어 맞추고 있습니다. 성랑(城廊)·고사(庫舍) 등 역사를 지금 곧 시작해야 하는데, 앞으로 홍예를 쌓게 된다면 조가에서 요포(料布)를 획급해야만 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선 앞일을 보아가며 다시 논의,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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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事 李基夏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의 水口에 虹霓를 쌓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8년
월일 壬辰三月初六日
今三月初四日, 備局堂上請對引見入侍時, 知事李基夏所啓, 頃因藥房都提調李所啓, 北漢水口虹霓當否, 有令臣看審稟定之命, 開春之後, 臣當卽爲往見, 而連因病故, 尙今遷就矣, 第此城形勢, 臣旣累往備審, 今可領略, 水口石築, 頗爲堅完, 內以雜石塡塞, 小水則可從雜石間流出, 而大水則當越城上而注下, 或値大潦急流, 則不無崩潰之慮, 左右巖石對峙斗高, 兩巖之間又有一大巖, 若從其上, 廣設虹霓, 則形勢尤當壯固, 而旣築重城之後, 則虹霓有無, 不甚關緊, 臣意則先築重城, 且輕 (經) 今夏潦水後, 觀其形勢, 徐徐更議, 似爲得宜, 敢此仰達, 兵曹判書崔錫恒曰, 虹霓之役, 極其浩大, 且今方營築重城, 則水口尤爲萬全, 不必更築虹霓矣, 基夏曰, 都監本無物力, 臣多般拮据, 城廊庫舍等役, 今方營始, 而前頭若築虹霓, 則自朝家, 必須劃給料布而後, 可以爲之矣, 上曰, 姑觀前頭, 更爲議定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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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都提調 李頤命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의 食水문제의 해결과 重城 증축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8년
월일 숙종 38년(1712) 4월 19일
이달 18일 약방에서 뜸을 뜨는 데에 입시하였을 때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의 형편을 위에서 이미 직접 보셨습니다. 행궁(行宮)의 입대(入對) 때에 하교를 들으면, 성의(聖意)의 소재를 대략 알겠으나, 성의에 과연 전혀 흠이 없어 급박한 사태에 마침내 힘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시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남한산성(南漢山城)과는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한산성은 밖은 험하고 안은 평탄한데, 이 성의 경우 안팎이 모두 험하다. 천험(天險)으로 말한다면 남한산성보다 낫지마는 흠이 되는 것은 다만 식수(食水)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흡족(洽足)한 곳을 어찌 쉽게 얻겠는가? 도성 지척에 이와 같은 천험이 있고, 또 물을 건널 폐단이 없으니 이점이 가장 편의하다. 쌓는 공사가 대강 끝났으니, 이 뒤의 일들을 반드시 유의해야 조치하여 영원히 버리지 않는 곳으로 삼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대체로 성루(城壘)를 쌓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쌓은 뒤에 그 속을 채워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습니다. 이 성의 밖이 험한 것은 사실 쉽게 얻지 못하나, 다만 안이 험한 것도 하나의 흠입니다. 신이 쌓기 전에 다른 대신과 명을 받들고 가서 살핀 일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물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 쌓는 일을 결정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특별히 김중기(金重器)와 이우항(李宇恒) 등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는데, 돌아와서는 물이 부족하지 않다고 아뢰어 마침내 쌓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들으니 지난 여름 성을 쌓을 때에, 약간 가물으니 역군(役軍) 들이 늘 물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였고, 또 지난 겨울에 그 수원(水源)이 모두 굳게 얼어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데리고 있는 장교(將校)를 내어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이른바 샘을 판 곳은 모두 구덩이가 얕아 얼어서 하나의 얼음덩이가 되었고, 얼음 밑에는 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봄이 된 뒤에는 수맥(水脈)이 다시 생겨 물이 많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나 모래로 스며들어 쉽사리 마르고, 얕은 우물에는 수원이 없어 많이 긷는 경우 곧 마릅니다. 만약 들어가 보수(保守)할 때에 여름 가뭄이나 겨울에 얼음이 얼 때를 맞이하는 경우, 식량은 비록 많으나 실로 유지해 나가기 어려우니, 어찌 소륵성(疏勒城)註 001) 에서 말똥을 짜 먹듯이하여 마침내 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가난한 나라에서 거대한 재력을 투입하여 겨우 성을 이루었으므로 버릴 수 없는 형편이나, 수원이 끝내 부족한 경우 이는 쓸모 없는 성입니다. 각 군문에서 현재 영사(營舍)와 창고를 짓고 있는데, 신의 생각은 우선 그 공사를 보류하고, 먼저 물을 저장하는 것으로 한 큰 일을 삼아 지세를 살펴 냇가 남은 땅에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거나 샘을 깊이 팔 것이며, 동쪽 성밖 산곡(山谷)에도 곳곳에 물을 저장하여 겨울과 가뭄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뒤에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성으로 될 것입니다."
하니, 제조 조태구(趙泰耉)가 아뢰기를
"신도 왕래하며 공사를 독려하였으므로 형세를 자세히 보았는데, 물은 사실 부족합니다. 봄·여름에 비가 내릴 때에는 물이 많으나, 가을·겨울에 얼음이 언 뒤에는 물이 마르는 것이 예입니다. 이곳은 물이 없는 곳은 아니나 모두가 돌산으로서 토심(土深)이 얕기 때문입니다. 깊이 파기가 매우 어렵고 또 산세(山勢)가 오똑하니 높고, 서북쪽은 허하여서 바람을 받아 겨울에 얼음이 어는 것은 매우 깊고 두꺼워 늦봄이 되어도 풀리지 않습니다. 신이 지난 3월 20일 경에 행궁의 좌우익랑(左右翼廊)의 건축문제로 나간 바 있었는데, 기초를 놓을 곳을 판 것이 거의 한 길이나 되었으나 그 밑에는 오히려 굳게 얼었으니 겨울 추위의 혹독함은 이러합니다. 수원이 쉽게 마르는 것은 형편이 그러해서 입니다. 여름에 바위 사이로 마구 흐르는 물은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수원이 없으니 금방 마르게 됩니다. 지금 비록 못을 파고 물을 저장한다 하더라도 겨울 추위를 맞을 때마다 얼음이 얼게되면 물이 마르니 이점 염려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터 사실 물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빈말이 아니었구나. 대신이 보고한 바에 의하여 분부하여 착실히 물을 저장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중성(重城)을 증축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난번의 친행(親幸) 때에 판부사가 아뢴 바 및 소신이 아뢴 바의 두 곳 가운데 한 곳을 상의하여 결정하고 쌓으라고 하교하셨고, 거행조건에도 내었습니다. 이유가 아뢴 곳은 대체로 증봉(甑峯) 및 영취봉(靈鷲峰)의 이름을 들었고, 신이 당초에 아뢴 바는 곧 중간의 옛 성터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다른 듯 하였으나 다시 군문 장교에게 물으니, '중성의 옛터는 실은 이유가 아뢴 영취봉과 증봉이 중간에 합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두 곳이 아니요, 곧 한 곳이니, 지금 상의하여 개정할 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런가? 이곳으로 결정하여 쌓으라고 분부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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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륵성(疏勒城) : 후한(後漢) 명제(明帝)때에 경공(耿恭)이 소륵성에서 흉노(匈奴)에게 포위를 당하여 흉노가 성에 흐르는 물길[水道]를 끊어 버려 성중(城中)에 물이 말라 버리자 사졸들이 말똥을 짜서 먹어가며 항전(抗戰)하였는데 구원병이 와서 흉노가 물러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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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左議政 李頤命 등이 입시하여 蕩春臺 築城정지와 北漢山城의 軍糧 비축 등에 대해 논의함
왕 재위년도 숙종 39년
월일 숙종 39년(1713) 4월 23일
이달 20일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차대(次對) 때에 중신(重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대신과 장신(將臣)이 같이 가서 살펴본 뒤에 다시 여쭐 것을 결정하였으나 물러 나간 뒤에 여러 대신과 상의 하니 모두 '북한(北漢)·도성(都城)·탕춘대 3성(城)을 우리 나라 병력으로 아울러서 지킬 수 없습니다. 아울러서 지킬 수 없다면 또 탕춘대에 성을 쌓아서는 옳지 않으며 성을 쌓지 않는다면 수문(水門)이나 성문(城門)도 매우 긴요치 않으니 비록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더라도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 지방의 산성(山城)에 평소 곡물을 출납할 때에 인마(人馬)의 왕래가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창고를 성문 밖에 설치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만약 성 밖에 평창(平倉)을 설치하고 성 안에 모두 실어들이지 못한 곡물을 이에 비축하면 편의 할 듯 싶습니다. 또 창고를 설치하려면 길 닦는 일을 굳이 정지할 것이 없습니다. 성터는 여러 신하가 모두 익히 본 곳이므로 비록 다시 살피지 않더라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또 성을 쌓음은 옳지 않으나 다만 창고터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면 대신과 장신이 같이 가서 살펴봄은 역시 중대한 듯 싶습니다.'하고, 영상(領相)도 말하기를, '성 쌓는 일은 본래 지금 할 일이 아니며, 또 여러 논의들이 이러하다면 수문은 우선 정지할 수 있으나 창고는 역사를 정지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탕춘대의 형세는 여러 신하가 모두 이미 익히 보았으니 지금 다시 살필 일은 없으나 여러 대신의 논의가 이러하다면 수문과 성문을 그만 정지하고, 창고를 설치함과 길을 닦는 일은 정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처음에, 동쪽과 서쪽의 강창(江倉)을 모두 탕춘대에 들이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는 조치가 중대하므로 다시 우선 보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산성 근처에 따로 한 창고를 설치하고 성 안으로 모두 실어들이지 못한 곡물을 이곳에 비축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당초에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문수(文殊) 한 마을은 안팎이 험난하여 동구(洞口)의 석문(石門)과 같은 곳을 막으면 역시 하나의 작은 성이 만들어져 사람들을 나누어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옳습니다. 소신의 생각도, 문수동(文殊洞)에 창고를 설치하고 곡물을 비축하면 북한산성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난(亂)에 임하여 실어들이기가 먼 곳보다 쉬웁니다. 지금 다시 산성 근처에 곡물을 운반하기가 조금 편리한 곳이 마치 문수동처럼 생긴데를 가려서 창고를 설치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또 들으니 선혜청에서 배로 실어온 뒤에 금년 곡물을 모두 창고 안에 저장 하지 못하여 노적(露積)할 폐단이 있게 되어 강상(江上) 또는 도성(都城) 안에 창고를 더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더 설치할 일이 있다면 조지서(造紙署) 근처에 창고를 설치하게 하여 공물(貢物)을 나누어 지급하게 함도 불가할 것이 없으며, 평시에 공물 값을 받고 바치는 일에 편하고 난에 임하여 산성이 강창(江倉)보다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주관당상(主管堂上)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강창을 옮기려 하였다. 성 밖 근처에 창고를 설치한다함은 진정 의견이 있으니 다시 형편을 살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조판서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북한산성 문제에 지난번에 아뢴 것은, 대체로 생각한 바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여러 대신이 상의하여 여쭈므로 신이 다시 말을 들여서는 옳지 않으나 남은 생각을 모두 아뢰겠습니다. 대체로 산성의 군량은 성 안으로 들여다 두어야만 난에 임하여 잃지 않습니다. 만약 성 밖에 둔다면 혼란한 때에 어찌 실어 들일 수 있겠습니까? 북한산성의 군량으로서 수를 정한지 이미 오래이나 아직도 수를 채워서 실어들이지 못한 것은 곧 평창(平倉)에 나누어 두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과연 난에 임하여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선혜청에서 비축한 것을 또 옮겨 들이면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 비록 길을 닦더라도 많은 양곡을 결코 군문(軍門)의 수레로 모두 실어올 수 없고, 반드시 말을 세내야 하니 그 태가(馱價)는 경창(京倉)의 경우에 비하여 마땅히 곱이나 더할 것입니다. 국가의 경비는 점점 전만 못한데 지출할 것은 점점 이와 같이 넓어지니, 이점도 염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창고를 설치하면 따라서 길을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창고는 설치하지 않고 미리 길부터 닦으니 신의 생각은 길을 닦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너무 미리 하는 듯해서 입니다. 지금 길을 닦는다해도 한 번 장마를 치르면 앞서의 공력(功力)은 반드시 모두 버리게 됩니다."
하고, 이이명은 아뢰기를
"길 닦는 역사는 거의 3분의 2나 초과하였습니다. 지금 만약에 중지한다면 도리어 앞서의 공력을 버리는 것입니다. 뒤에 장마의 피해가 있으면 무너진 데에 따라 보수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혜청의 일은 다시 주관 당상으로 하여금 앞으로 있을 등대(登對) 때에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진규가 아뢰기를
"평창(平倉) 문제의 일을 맡은 신하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으나 대체로 성 안으로 실어들여야만 급박한 사태에 사용할 수 있으니, 반드시 성 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성 밖에는 남은 수를 옮겨 실어들이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성 안에 실어들여야만 나중에 의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성안으로 실어들인 뒤에는 반드시 묵[陳]는 폐단이 있어 개색(改色)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곡물을 출납(出納)할 때에 인마(人馬)의 왕래가 매우 어렵습니다. 평창의 설치는 대체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고, 김진규는 아뢰기를
"백관(百官)의 녹(祿)과 군자(軍資)의 급료와 선혜청의 공물(貢物)은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북한산성의 길은 비록 강창(江倉)보다 약간 멀긴 하나, 이를 받아 먹는 사람은 가난한 백성에게 곡물을 출납하는 경우와 달라 스스로 받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나누어 지급한 것을 새 곡물로 대신하여 북한산성에 실어다 바친다면 역시 어떠한 방법으로든 실어들일 수 있습니다. 계획을 세운 자가 조용히 상의하여 결정하면 어찌 편의에 따라 마련할 방법이 없겠으며, 또 출납이 어렵다 하여 평창(平倉)에 나누어 둔단 말입니까?"
하니, 이이명이 아뢰기를
"이 역시 장애(障礙)가 있습니다. 곡물의 출납은 백성이 받아가고 도로 바치므로, 관(官)에서 옮기는 폐단은 없습니다. 녹(祿)과 공물 등을 모두 나누어 준 뒤에 새 곡물을 실어 들임은 매우 어렵습니다. 요즘 들으니 선혜청에서 겨우 수천석을 실어들이는데 역시 구차스런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예조판서 김우항(金宇抗)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이 이미 품정하였으니 사실 사람마다 간섭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이에 분개하게 여기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산성(山城)을 쌓아 생각지 않은 일에 대비한다면 양곡을 실어들이는 일은 하루가 급합니다. 실어들인 양곡의 수를 정한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나 아직도 그 반을 실어들이지 못하였고, 민폐(民弊)를 발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대계(大計)를 결정하고 백성들과 지키려면 자잘한 폐단을 어찌 모두 돌볼 수 있겠습니까? 소신이 일찍이 전라도의 입암(笠巖)과 위봉(威鳳) 두 산성을 보니 길이 험하고 또 언덕과 골짜기가 많아 창곡(倉穀)을 방출할 때에 소속 고을에서 그 거리의 원근에 따라 모곡(耗穀)에서 5승 또는 1두를 감하고 1백리 밖은 모곡 전부를 감해 주는데, 지방의 출납은 이와 같이 합니다. 신이 작년에 대신(大臣) 왕자(王子) 외에는 상하를 막론하고 환자[還上]를 나누어 주어 개색(改色)註 001)하여 바치게 할 것을 선혜청 당상에게 말을 전하니, 선혜청 당상은 거두고 흩을 때에 소모(消耗)됨을 우려하여 난색(難色)을 보였습니다. 대체로 곡물의 출납에 어려운 것은 곧 실어들이는 일이 걱정입니다. 작년에는 장단(長湍)·파주(坡州)·양주(楊州) 등에 보리 흉년이 심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북한산성의 곡물을 방출하도록 말하니, 이를 모두 받아 먹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출납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 안에 들여 두어야만 급박한 사태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성 밖에 두었다가 적이 먼저 차지한다면 도둑에게 양식을 쌓아 주는 것입니다. 김진규의 아룀이 옳습니다. 문수(文殊)골은 신이 그 지형을 자세히 알지 못하나 대체로 한 창고를 별도로 설치하면 역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아뢰기를
"만약 성 안에 모두 실어들인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 안에 설치한 창고는 10만석의 곡물을 수용하긴 어렵습니다. 또 높은 곳에서 조적(糶糴)하기도 매우 폐단이 있습니다. 시골 백성에게는 1백리 밖에서 곡물을 실어다가 바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도성(都城)의 민심은 교만스러워 조적을 좋아하지 않고, 모두 '그 조적에 차라리 말[馬]을 내어 실어서 바치려 한다' 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결정한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말을 내기가 어려우면 차라리 태가(馱價)를 내고 실어들이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신(臺臣)도 이와 같이 상소한 것입니다. 당초 조적을 논의할 때에 신은 아뢰기를 '백성들은 비록 받기를 원하나 가을에 가서 여러 만석의 곡물을 도성 백성들에게 내어놓으라 하면 또 거자(擧子 : 과거(科擧)를 보는 선비 )가 구름처럼 모일 때를 맞이 하여 도성 백성들은 반드시 굶주리게 될 것이므로 이점이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앞서의 결정에 의하여 도성 백성으로 하여금 말을 내어 실어들이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듯 싶습니 다. 또 평창에 실어들인 곡물은 해마다 태가를 소비해야 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상(領相)에게 아뢰기를 '해마다 말삯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백천석(數百千石)을 한꺼번에 소비하여 수레를 만들고 소[牛]를 사서 받기를 원하는 거부(車夫)에게 내어주어 관(官)에서 옮길 때에는 식량을 지급하여 실어들이고, 관에서 옮기는 일이 없는 때에는 사사로이 사용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영상이 '일이 곤란하여 시작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곡물을 옮기는 문제는 앞서의 결정에 의하여 서둘러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진규가 아뢰기를
"이미 결정한 뒤에 감히 번거롭게 아룀은 극히 황공하오나 김우항의 말이 옳습니다. 보장(保障)에 관한 대계(大計)를 결정한 뒤에는 비록 자잘한 폐단이 있은들 어찌 이로 인하여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고향(故鄕)은 광주(廣州) 땅입니다. 이곳에서 남한산성까지는 80리인데 중간에 고개를 넘고 길은 매우 험합니다. 그 가까운 곳의 백성들은 모두 봄에 환자[還上]를 꾸어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데에 감히 그 노고(勞苦)를 꺼리지 않습니다. 지금 조가에서 단연 시행하면 도성의 백성들도 어찌 거행치 않겠습니까? 또 고양(高陽)·양주(楊州) 등 고을의 백성들은 봄의 곤궁한 때를 맞이하여 모곡(耗穀)을 감면하고 나누어 지급하면 역시 반드시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대체로 양곡을 실어다 바침은 산성에 중점(重點)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이명은 아뢰기를
"일을 담당한 사람이 역시 성 안으로 모두 들이는 것이 의심이 없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사정이 모두 들여다 둘 수 없습니다. 지금 다만 산성에 중점을 두고, 남은 수를 평창(平倉)에 내어다 두는 것이 무방할 듯 싶습니다. 대체를 결정한 뒤에 이러한 절목(節目)들은 곧 일을 맡은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성 안의 창고에는 될수록 많이 실어들이고, 나머지 수는 평창에 두는 것이 좋을 듯 싶으며 산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지금 강창(江倉)이 옮겨들어가지 않으면 조지서(造紙署)는 굳이 옮길 것이 없습니다. 종이 만드는 역(役)도 가볍지 않습니다. 교린(交隣) 사대문서(事大文書)에 사용할 종이를 떠내므로 역시 곳곳에서 할 수 없습니다. 조지서를 옮기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지서는 옮기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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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색(改色) : 같은 소용의 물건에서 뜻에 맞는 것으로 바꿈.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北漢山城의 築役에서 부족한 石手를 忠淸道 등에 分定하여 속히 올려 보내도록 關文을 보내 분부하겠다는 禁衛營의 계
○ 禁衛營啓曰, 臣錫恒於昨日, 出往役所, 看審形止, 則各處將校等, 盡心董役, 粗成頭緖, 而其中石手, 數甚不足, 且外方上送之類, 皆是拙手, 若無加數助役之擧, 則完役未易。遠道則雖難遍及, 如忠淸·黃海數日程, 及江華·京畿等地, 加數分定, 斯速上送事, 發關分付之意, 敢啓。答曰, 知道
金宇杭 등이 입시하여 北漢山城에 건립할 行宮의 기지에 대해 논의함
○ 又所啓, 小臣頃往北漢, 看審城基, 則初入水門之際, 甚爲窄迫, 而過重興寺, 以西內外俱險, 以東山勢平夷, 而外面眞是天險也。城內雖狹, 周回亦廣, 可以容衆, 而泉脈似無不足之患。但築城之後, 必先措置軍餉, 然後可以守城, 此誠廟堂之次第經紀事也。金重器言于臣曰, 以山勢觀之, 重興寺基址甚好, 若營建行宮, 則無出于此, 而第曾有沙汰之患, 不免頹壓寺宇, 雖欲營建行宮於此, 沙汰甚爲可慮云。臣亦看審其形勢, 則重興寺後, 有峯峻急, 西邊一麓, 昨年大雨, 沙汰頹壓於寺舍, 東邊一麓, 又有沙汰之處, 以此見之, 峯下當中, 營建行宮, 最爲可慮矣。重器於他處, 得可建殿宇之基, 臣與之同往看審, 則傍有古寺基址, 一山中最廣闊處也。若捨重興, 則無過於此, 臣與重器之意, 欲與此斷定, 而事體亦重, 非臣等之所可擅便, 不可無更爲詳審之道, 而亦令觀象監地師, 看審宜當, 故敢達。都提調李□□曰, 此山形勢, 臣亦往見, 論以風水, 雖未知其如何, 而重興寺基址爲當中, 百濟亦建行宮于此, 捨之可惜。但沙汰可畏, 則當有變通, 行宮營建亦重, 宜令任事諸臣更審, 且令地師, 相基他處, 宜矣。上曰, 前定之處可慮, 則以他處改定, 而地師看審事, 依所達爲之。以上備局謄錄
北漢山城의 行宮基址를 看審하러 나가는 金重器의 命召 등을 어떻게 할지 묻는 韓配周의 계
○ 韓配周啓曰, 摠戎使金重器, 以北漢山城行宮基址看審事, 今方出去, 其所佩右邊捕盜大將命召, 及大將牌傳令牌, 何以爲之? 敢稟。傳曰, 仍佩往來。
北漢山城의 行宮基址를 看審하러 나가는 金重器의 命召 등을 어떻게 할지 묻는 韓配周의 계
○ 韓配周啓曰, 摠戎使金重器, 以北漢山城行宮基址看審事, 今方出去, 其所佩右邊捕盜大將命召, 及大將牌傳令牌, 何以爲之? 敢稟。傳曰, 仍佩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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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제목 | 북한지 2 본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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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1745년(영조 21)에 편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에 관한 지지(地誌). 간행연대 미상.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을 때 승려 성능(聖能, ?~?)이 산성기사(山城記事)를 편집하여 제명(題名)을 (북한지(北漢誌))라고 붙여 간행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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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치영의 관제는 총섭(總攝) 1명,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승군(僧軍) 372명으로 편성되었다. 치영의 군기고(軍器庫)인 승창(僧倉)에는 조총·대포·화약·활과 화살 등 각종 무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